서울시 종로구 탑골공원 인근은 한때 손꼽히는 노인의 집합소였다. 지금도 전 같지는 않지만, 여전히 많은 노인이 모여들고 있는 곳이다. 이 종로 일대에 나오는 많은 시니어는 어떻게 시간을 보낼까?
지인들에게서 가끔 종로에 가면 만 원으로 하루를 즐길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먼저 이발을 하고 시간에 따라서 영화를 보든지 점심을 먹든지 한다는 것이다. 이야기대로 한번 따라 해보려고 탑골공원에 가 보았다.
탑골공원과 종로2가 파출소 사이 거리 입구에서 낙원상가까지는 200m 남짓 되는데, 이 골목길에만 이발소가 8개나 된다. 살펴보니 이발소마다 보통 의자가 3~4개가 있는데 모두 손님이 앉아 있다. 근처에서 구두를 닦는 분에게 이발을 제일 잘하는 집이 어디냐고 물으니 그 중 규모가 큰 집을 알려준다.
이발소에 들어가 보니 사장을 포함하여 이발사가 5명이나 되고 모두 손님을 맡아 이발이나 염색을 하고 있었다. 여기에 차례를 기다리는 손님만 6명. 이발비는 4000원이고, 염색비는 종류에 따라 5000~1만5000원이다.
이발소를 나와 영화관으로 발길을 돌렸다. 낙원상가 4층 예전 허리우드극장은 서울미래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인데 이 자리에 실버영화관으로 부르는 두 개의 상영관이 있다. 하나는 실버극장, 또 하나는 낭만극장으로 두 곳 모두 1년 내내 동서양의 옛날 영화를 한 달에 7~9편 상영한다. 실버영화관은 2009년에 개관을 했으며 개관 6년만인 2015년에 100만 관객을 돌파했다고 한다.
실버극장은 일본영화 ‘오하루의 일생’ 그리고 낭만극장은 톨스토이 원작 부활을 영화화한 미국영화 ‘부활’을 상영 중이다. ‘부활’ 영화표를 2000원 주고 샀다. 55세 이상은 2000원이고 청소년 5000원, 대학생과 일반은 7000원인데 55세 이상 어르신과 동반하면 2000원이다. 극장 좌석은 300여 석으로 관객은 50여 명쯤인데 거의 다 나이가 꽤 드신 분들이다.
점심을 먹기 위해 영화관 주변과 탑골공원 옆 골목길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린다. 이 일대에는 순댓국, 우거지탕 등을 내놓는 식당이 몇 군데 있는데 대부분 가격은 4000원 내외며 자리는 시니어 손님으로 거의 다 찼다. 영화관 들어가기 전 어느 식당 앞에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걸 봤었는데 2시가 넘은 지금도 몇 사람이 기다리고 있다. 조금 기다리다 들어가 보니 홀이 좁고 테이블도 많지 않았다. 한꺼번에 많은 손님이 들어올 수 없어서 기다릴 수밖에 없는 구조다. 설렁탕을 주문해서 먹었는데 여느 맛집에 절대 뒤지지 않는 맛이다.
영화 한 편 보고 점심 먹는데 3시간 반쯤 걸렸으니 이발까지 했으면 4시간 반 정도는 걸렸을 것이다. 영화비 2000원, 밥값 4000원 그리고 이발비 4000원 모두 만 원으로 하루를 보낸 셈이다. 가히 만 원의 행복이라고 할만하다.
실버영화관은 서울시와 일부 기업체의 후원으로 운영한다고 한다. 아마 후원 없이 입장료 2000원 만으로는 운영이 쉽지 않을 것이다. 시니어들이 2000원으로 영화를 볼 수 있는 곳은 서울에는 낙원상가의 실버극장과 낭만극장을 비롯하여 서대문의 청춘극장, 서초구의 명작극장 등이 있고 안산의 명화극장, 천안의 낭만극장 등이 있다. 다른 도시에서도 지자체에서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지역의 시니어들이 손쉬운 영화 관람으로 동년배들의 소통과 문화향유의 기회를 얻게 되어 만 원의 행복 아니 그 이하로도 행복한 시간을 누릴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오카리나를 배우기로 했다. 나이 들면 악기 하나는 다룰 줄 알아야 한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으나 실행이 쉽지 않았다. 대학 시절 기타는 포크송 정도는 연주할 정도로 배웠으나 부피가 커서 들고 다니기가 불편하다. 오카리나는 부피가 작아 일단 마음에 들었다.
얼마 전 동네에 있는 ‘한국 오카리나 박물관’을 둘러봤다. 그래서인지 오카리나가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그러다가 낙원상가에 갔을 때 오카리나가 눈에 띄어 가격을 물었더니 초급용은 2만 원이라고 했다. 이 역시 구미를 당기게 한 것 같다.
먼저 낙원상가에 가서 초급용 오카리나를 샀다. 플라스틱으로 만든 것인데 자색으로 모양도 예쁘고 무게도 얼마 안 나가서 좋았다. 업주는 장삿속으로 자꾸 비싼 것을 권했지만, 초보 때는 무난한 것이 좋다고 생각해 2만 원짜리로 샀다. 자동차를 처음 운전할 때는 새 차보다는 중고차로 다뤄보는 것이 요령이듯 수준이 좀 나아지면 더 좋은 것을 사면 될 일이다.
제대로 학원에 가서 배우면 좋겠지만, 따로 시간 내기도 어렵고 모임에서 배우기로 했다. 마침 모임 구성원 중에 오카리나를 해본 사람이 몇 명 있어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처음 만져보는 오카리나가 익숙할 리 없다. 양손에 들어오는 사이즈가 작아서 좋기도 했지만, 처음에는 구멍을 보고 연주를 해야 하기 때문에 너무 작다는 느낌도 있었다. 다행히 운지법이 중형 카메라 쥐는 방식과 비슷했다. 왼손가락은 밑에서 올라와 받치고 오른손가락은 위에서 눌러 잡는 방식이다.
오카리나는 막힌 통 속에 구멍이 여러 개 나 있다. 뒤쪽 큰 구멍 세 개 중 밑의 것은 양손 엄지로 항상 막아야 한단다. 앞쪽 오른손가락과 왼손가락을 다 막으면 ‘도’ 음이 난다. 오른쪽부터 새끼손가락을 떼면 ‘레’, 새끼손가락을 뗀 채 약지를 떼면 ‘미’, 중지까지 떼면 ‘파’, 검지까지 떼면 ‘솔’ 음이 난다. 왼손 새끼손가락은 고정으로 구멍을 막고 약지를 떼면 ‘라’, 중지를 떼면 ‘시’, 검지까지 떼면 ‘도’ 음정을 낼 수 있다.
다른 악기처럼 음을 짚는 방식이 아니라 반대로 떼어줘야 하기 때문에 좀 헷갈렸다. 연습을 많이 해야 익숙해질 것 같다. 특히 왼손 약지는 평소 쓸 일이 별로 없어 떼는 것이 순조롭지 않았다. 손가락을 쥐는 방향으로만 많이 움직여왔기 때문이다.
‘도레미파솔라시도’를 반복하며 연습했고 반대로도 해봤다. ‘도미솔’은 기본 연습에 들어간다. 유치원 때 배우는 노래 '똑같아요'가 연습하기 좋은 곡이라 연주를 해봤다. 요즘엔 ‘오 필승 코리아’도 연습하고 있다.
모임에서 일주일에 한 번 한 달 과정으로 ‘등대지기’와 ‘연가’를 단체로 연습하기로 했다. 초급 오카리나로 연주하기 좋은 곡이란다. 아직 악보를 보고 연주할 정도는 아니다. 일단 기본 음계만이라도 편하게 낼 수 있도록 꾸준히 연습할 작정이다.
문제는 연습 장소다. 집에서 연습하면 소음 때문에 당장 주민들이 항의가 들어올 것이다. 산속에 들어가서 하거나 고수부지에나 가야 연습할 수 있는데 엄동설한에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낙원상가는 서울 종로 3가 탑골공원 뒤에 있다. 종로 3가 사거리에서 안국동으로 가는 남북 도로가 낙원 상가를 통과한다. 질주하는 차 소리가 시끄럽고 컴컴해서 사람들이 잘 안 다니는 길이다. 그런데 건물 밑으로 난 횡단보도를 건너면 바로 인사동이다. 나지막한 건물만 있는 인사동에서도 그래도 번듯한 고층 건물들이 있는 동네로 이어진다. 인사동에 자주 다니는 사람들도 이 길을 경계로 탑골공원 쪽은 으슥하고 허름해서 안 간다고 한다. 한옥이 줄지어 있는 익선동도 이 건물을 경계로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원래는 이 자리가 낙원 전통시장이 있던 자리이다. 서울시에서는 종로3가 사거리에서 안국동으로 도로를 내고 싶은데 수많은 시장 상인들의 삶터이니 철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만들어낸 아이디어가 도로도 건물 1층으로 통과하게 내고 시장은 낙원상가를 지어 지하로 몰아넣은 것이다. 그래서 낙원상가 지하는 전통시장에서 파는 생선가게, 정육점, 옷 가게 등 도심 속의 전통시장 모습을 그대로 하고 있다. 지상에 안 보이기 때문에 인근 통인시장처럼 세인의 관심을 못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낙원상가는 나름대로 도시의 명물로 거듭났다. 1960년대에 주상 복합건물로 지어진 건물로 청계천의 세운 상가, 홍제동의 유진상가처럼 그 당시에는 알아주는 대형 건물이었다. 세운 상가처럼 철거 위기까지 처했던 이 건물이 지금은 미래 유산으로 보존되고 있다.
낙원상가 건물은 15층 건물로 6층부터 15층까지는 낙원 아파트이다. 5층이 사무실이고 4층이 옛 허리우드 극장이 있던 자리이다. 지금은 ‘젊은 극장’이라 하여 ‘낭만 극장’과 ‘실버 영화관으로 변모했다, 입장료 3천원으로 고전 영화를 감상할 수 있다. 오전 10시 30분부터 상영하여 마지막 상영이 오후 6시 무렵이다. 그전에는 장안의 화제를 불러일으킨 대형 캬바레도 있었다.
악기상가가 된 것도 흥미롭다. 건립 당시 마침 종로 일대 정비 사업으로 악기 상들을 철거했는데 그때 철거된 가게들이 낙원상가로 모여들었다고 한다. 그 경험으로 서울시가 황학동 풍물시장을 신설동 한 건물로 몰아넣은 것이나, 청계천 공구상들을 장지동 가든 파이브로 유도한 것처럼 비슷한 업종은 한 건물로 몰아넣는 정책을 시행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70년대에는 포크송 시대였다. 젊은이라면 누구나 통기타 하나쯤은 만질 줄 알던 시대라서 기타가 잘 팔렸다고 한다. 지금도 초급용 통기타는 10만 원 선이면 살 수 있다. 고가의 기타들은 몇 벡만 원 한다. 그 당시부터 교회 밴드도 급속도로 성장하여 악기 수요가 많았다. 1980년대는 통금이 해제되고 아시안게임, 88올림픽 특수로 흥청망청하던 시대였다. 인근에 요정이 많아 라이브 밴드의 수요가 폭증했다고 한다. 그 덕분에 악기는 물론 낙원상가는 음악인의 동네로 밴드 공급 역할도 했다고 한다. 90년대에는 노래방이 급속도로 보급되면서 라이브 밴드의 수요가 줄어들고 금융위기까지 덮쳐 낙원상가도 위기에 처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세시봉 열풍, 아이돌 인기 등에 힘입어 다시 복고풍이 불면서 안정적인 위치에 오게 되었다고 한다.
최근 건물을 리모델링하면서 가게들이 환하게 정비되고 화장실도 깨끗해졌다. 주변 탑골 공원 주변은 허름하고 복잡하지만, 악기 상가는 쾌적한 분위기라서 돌아볼 만 하다.
이종태(李鍾台·92) 법무사를 만나기 전 단서는 딱 두 가지였다. 90대 현역 법무사이고 봉사단체인 ‘망월원’의 이사장이라는 것. 90대 현역이라니. 고령의 노인이 여전히 일을 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존경스럽고 놀라운 일 아닌가. 달리 질문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그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보자. 백년 가까운 시간이 그를 움직이게 하는 이유가 있겠지. 이종태 법무사가 입을 여는 순간, 시간 여행이 시작됐다.
뜨거운 7월의 어느 날, 목동 3단지 아파트 상가 건물 이종태 법무사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20년간의 법원 생활을 접고 1979년 법무사로 일을 시작해 서소문, 여의도 사무실을 거쳐 1987년 이곳으로 와 일하고 있다.
우선 우리 잡지에 대한 설명을 해드린 뒤 취재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나 같은 사람 뭐 볼 게 있냐”고 되물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대전 사람인데 왜정(일제강점기) 때 일본 군대에 끌려갔다 와서 광복 직후부터 14년 동안 국어 선생을 했어. 그리고 서울로 와서 법원 생활 20년을 마치고 법무사 생활을 지금까지 하고 있지”라며 92년 인생을 한마디로 설명한다. 잘 짜여진 영화 로그라인(영화 투자를 위해 감독이 한두 마디로 영화를 설명하는 것)만큼이나 정확했다. 이렇게 자신의 인생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이도 드물 것이다.
공부하고 싶던 어린 이종태, 삶이 꼬이다
그의 이야기는 일제강점기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들어가는 시점에서 시작했다.
“당시 충청남도에는 중학교가 대전과 공주에 하나씩 있었어요. 대전에 있는 중학교는 일본 사람이나 총독부 직원의 자식들이 다니는 곳이었고 조선 사람들은 다닐 수 없었어요. 그때 마침 큰 형님의 친구가 일본 도쿄의 메이지 대학교에 다니고 있어서 그분 옆에서 고학(苦學)할 생각으로 일본행을 준비했습니다.”
내선일체라 했지만 조선인들에 대한 차별이 심해 일본으로 가려면 관할 경찰서의 승인을 받은 도항증명서가 필요했다.
“일본의 사립학교 지원서를 만들어서 경찰서에 제출을 했는데 며칠을 계속 미루는 거예요. 얼마 안 있다 도항증명서가 아닌 일본군 지원병 훈련서를 순사들이 가지고 와서는 도장 찍으라고 했습니다. 지금 대동아전쟁이 한창이고 군인이 너무나 부족한데 젊은 사람이 애국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요. 지금은 쓸데없이 공부할 때가 아니다, 천황폐하(일왕)를 위해 싸우라고 했습니다. 당시 저희 아버지가 아주 엄격하셨어요. 세수하실 때 수건 들고 서 있어도 봤고, 아버지 명령을 어긴 적도, 말대꾸를 해본 적도 없었어요. 아버지에게 여쭈어보고 결정하겠다고 했습니다. 순사가 ‘아버지가 일왕보다 더 중요하냐’며 화를 냈습니다. 그리고 지금 지원서를 쓴다고 해도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필기시험과 신체검사를 받아야 한다기에 지원서를 냈습니다.”
1924년 갑자생의 비애, 첫 징병 대상자로 기억되다
결과는 뻔했다. 빵점을 맞기 싫어 필기시험은 한두 개 정도 맞혔다. 이 정도면 안 될 거라 생각했는데 신체검사에 합격했고 결국 징집 대상이 됐다. 그 다음 해인 1941년 6월 14일 육군사관학교 자리에 있던 지원병 훈련소에 입소해 6개월 전투 훈련을 받았다.
“1942년 1월에 용산 제23부대에서 입영통지서가 왔어요. 이제 진짜 전쟁에 나가는 거였죠. 제가 1924년생인데 우리 나이서부터 징병 실시를 했습니다. 나보다 윗사람들은 탄광으로 징용 끌려가 고생했고, 우리 때부터는 징병돼 전투에 나가게 된 거죠.”
이종태 법무사는 자대인 제42사단으로 가기 전 중국 칭타오(靑島)로 가 일본에서 징집된 일본인 훈련병들과 또 한 번 6개월의 전투 훈련을 받았다. 전투에 곧바로 투입될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과 달랐다.
“저는 전투에 한 번도 나가지 않았습니다. 뉴기니에 있는 제42사단에 배치를 받았는데 떠나기 바로 직전 신체검사에서 폐결핵 보균자로 판명이 난 겁니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이후 이 법무사는 중국에서 4개월여 병원 생활 후 히로시마 병원을 거쳐 우쓰노미아(宇都宮) 육군병원에 입원했다.
“사실 당시 폐결핵 환자는 약이 없었어요. 오전, 오후 한 시간만 입원실에 누워 있거나 안정을 취하고 있으면 됐습니다. 그 외 시간은 공부하는 데 썼어요. 특히 우쓰노미아 육군 병원 도서관이 참 좋았어요. 그게 얼마나 좋아요. 어렵고 힘들 때는 소설보고 과학, 철학책을 많이 봐서 스스로 깨쳤습니다. 정식으로 공부한 것은 보통학교 과정이 전부였는데 결과적으로 일본에서 독학을 한 거죠.”
이종태 법무사는 1944년 11월 말 경에 퇴원해 이듬해 광복을 맞았다.
교직생활 14년, 그리고 법원 생활 20년
광복이 되자마자 이 법무사는 교사의 길을 14년 동안 걸었다. 미 군정 당시 초등 공민학교, 고등 공민학교, 호서민중대학의 설립에 동참했다. 또한 학교 경영부서의 책임자로 일을 하면서도 초등 공민학교와 고등 공민학교의 국어 교사로 일했다. 호서중학교, 대전상고에서도 교편을 잡았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 계속해서 벌어졌다. 북한의 남침으로 서울이 함락되면서 미 제24사단장 딘 소장이 부하들과 함께 남하하다 옥천 근처에서 북한군의 포로가 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미군이 대대적으로 대전 시내를 불태웠고 이때 이종태 법무사가 살던 집도 학교도 다 타버렸다.
“학교라도 빨리 복구하고 싶어 돈 있는 사람을 끌어 모았다가 그만 학교를 빼앗겨 버렸습니다. 참 그땐 많이 힘들었어요.”
평생 직업이 된 법무사, 우연히 시작된 봉사
이 일이 있은 뒤 대전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로 갔다. 대법원에서 판사를 하고 있던 장인 덕에 법원에서 임시직으로 일할 수 있었다.
“임시 서기보로 들어갔다가 서기로 일했습니다. 법원에서 오래 일할 생각이 아니었어요. 학교로 돌아가고 싶었죠. 그런데 또 사기를 당하는 바람에 법원에 눌러앉았다 결국 20년을 일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법무사로 37년간 살다보니 90이 넘었네요.”
법무사 일과 동시에 시작한 것이 바로 봉사활동이다. 그의 인생에서 교사와 법무사만큼이나 중요한 일이 바로 사회복지법인 망월원의 이사장직일 것이다. 서울가정법원에서 20년간의 공직생활을 마치고 서소문에 법무사 사무실을 개소하고 일주일도 안 돼 한 일본 여자가 이종태 법무사를 찾아왔다.
“모치즈키 카즈(望月カズ)라는 여자였어요. 전쟁고아들을 거두어 100여 명을 키우고 있던 고마운 사람이었어요. 아이들의 호적 정리가 필요해 도움을 청하러 왔더라고요. 일본 고아 남자 아이 4명을 함경도에서 월남한 분들에게 부탁해 입적을 시켰다고 했습니다. 징병 통지서가 날아와 호적에서 거둬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하더라고요. 그 아이들은 일본 사람으로 호적을 다시 만들어 일본으로 보냈습니다. 그때 도움준 것을 계기로 법률관계 관련해서 내가 돕기로 했어요.”
이후에 모치즈키 여사를 돕는 후원단체가 있다는 것을 알고 법률문제와 관련해 뭐든 무상으로 봉사하기로 했다. 일을 좀 도왔나 싶었는데 1984년 모치즈키 여사는 60세가 채 안 돼 숨을 거뒀다. 10년 후, 일본과 한국에서 모인 후원금으로 세웠던 모치즈키 여사의 유일한 재산인 서울 낙원동 상가 건물을 바탕으로 한국 아이들을 돕자고 법인을 만든 것이 바로 사회복지법인 망월원이다.
“사실 내가 나이가 제일 많아서 이사장을 하고 있는 겁니다. 어려운 사람들을 직접적으로 도와주는 것이 좋습니다. 예전에 봉사상을 탄 적도 있고요.”
오랫동안 운동 마니아로 사시길 바라며…
사실 이종태 법무사는 운동 마니아다. 88세까지는 등산도 잘 다녔다. 작년까지 마라톤 대회에도 나갔다. 어딜 가든 늘 최고령자.
“참 다행인 게 머리숱이 많아요. 검게 염색도 했으니 내 나이보다 훨씬 젊게 보더라고요. 사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수영을 했는데 이제 체력이 떨어지는지 좀 하기 어렵더라고요. 그래도 제 생각에는 온몸이 쑤시고 아픈 데는 수영만한 것이 없어요. 90이 넘으면서 2층 오르내리는 것도 힘들어서 요즘에는 간단히 체조하고 걷는 것 정도만 합니다.”
사실 요즘 이종태 법무사 체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지난해 10월 아내 송광섭(宋光燮)씨와 사별하면서부터다.
“신혼생활 때부터 자식들 키우느라 뭘 잘 해주지도 못했는데, 병이 들고서 얼마 안 돼 떠났어요. 지병을 알고 약 먹고 준비를 했으면 좋았을 텐데요.”
이종태 법무사는 어디를 가든 꼭 버선발로 나와 잘 다녀오라고 손 흔들던 아름다운 사람이었다고 회상했다.
“집 사람은 옛날 조선 시대 여자처럼 살다 갔습니다. 여보, 당신 해본 적도 없고 존댓말도 꼭 극존칭을 썼어요. 나는 그저 예사 높임 정도로 얘기했었고 대드는 일이 없었어요. 그러니까 나도 많이 위해줬죠.”
작년 10월에 떠났기에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이종태 법무사. 꿈에 좀 나왔으면 하는데 도무지 만날 수가 없어 슬프다고 말했다.
“혹시라도 꿈에서라도 만날 기회가 있다면 ‘미안했다, 고생했다’고 말해주고 싶은데 그렇게 안 나타나요.”
요즘 이종태 법무사는 5년만 더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사무장으로 일하는 큰아들이 올해 예순 여섯인데 좀 더 일할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 때문이라고. 인터뷰가 끝나고 사진 촬영을 하는 이종태 법무사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봤다. 주름 사이로, 순탄치 않았던 세월의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지나 숱한 날들을 이긴 그의 이야기. 단순히 한 사람의 인생이 아닌 우리 역사였다.
1960~1970년대를 주름잡았던 영화를 다시 볼 수 있을까.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낙원상가에는 신중년을 위한 비밀장소(?)가 있다. 낙원상가의 건물 외벽. 우아한 자태를 뽐내는 오드리 햅번과 뇌쇄적인 눈빛의 마릴린 먼로가 신중년을 깊은 향수에 젖어들게 만든다. 그들 사진 밑에 누구라도 볼 수 있도록 큼지막하게 쓰여 진 다섯 글자. 바로 ‘실.버.영.화.관’이다.
오드리 햅번과 마릴린 먼로. 그리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의 찰리 채플린. 그들의 눈빛은 시대를 함께 풍미했던 60~70년대 젊은이들을 향한 듯했다.
기타를 어깨에 메고 상가를 활보하는 젊은이, 어머니의 손을 잡고 기타를 사달라고 조르는 초등학생, 기타 피크를 입에 물고 진지한 표정으로 기타 튜닝을 하는 여학생. 이러한 청년들 사이로 백발이 성성한 어르신들이 낙원상가 1층의 엘리베이터 앞에 줄지어 서 있다. 그들의 밝은 표정의 근원이 궁금했던 기자는 그 분들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어르신에게 방해가 될까 싶어 계단을 이용해 올라간 낙원상가 4층. ‘철수와 민수’, ‘꽃잎’, ‘투캅스’의 포스터와 함께 ‘21세기를 여는 젊은 극장’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간판이 눈에 띈다. 이제는 빛이 바래버린 간판에서 실버영화관만의 오묘한 멋을 느낄 수 있었다.
“앞쪽 말고, 중간 쪽 가장자리 세 자리로 줘. 여기 6000원.”
친구 두 명과 함께 영화를 보러 온 조유현(78)씨는 티켓 판매원과 좋은 좌석을 얻기 위해 흥정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2000원씩 세 명이니 총 6000원. 친구들과 1시간 30분 동안 옛 추억을 공유하는 가격치고는 꽤 저렴하다. 1년 전 친구들에게서 실버극장에 대한 얘기를 듣고 난 후 조씨는 1주일에 한 번 정도는 이곳을 꼭 찾는다. 이곳에서 본 영화 중 ‘콰이강의 다리’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는 조씨는 구봉서가 출연한 ‘맹진사댁 경사’를 관람하기 위해 상영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그렇게 나이 들어 보이나? ‘55세 이상 어르신 경로 2000원’이라고 쓰여 있는데 왜 신분증 검사를 안 하는 거야(웃음). 기자 양반 내가 그렇게 할머니 같아?”
자신을 박 여인(64)이라 불러 달라던 박씨는 인터뷰 좀 하자는 기자에게 너스레를 떨었다. 한국영화보다 외국영화를 더 좋아한다는 그는 1월23일 상영한 ‘맹진사댁 경사’에는 사실 기대가 덜하다고 했다. 인사동에서 일하는 동생을 통해 알게 된 실버 영화관. 멀리 경기도 남양주에서 동생 만나러 나올 때면 항상 이곳을 들른다고 했다.
“싸고 좋잖아. 저번에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봤는데, 오드리 햅번을 보니까 옛날 생각나더라고. 애 아빠랑 만났던 때. 그때 같이 봤던 영화까지도 말이야.” 박 여인에게 실버 영화관은 단순히 옛 추억을 회상하는 공간을 넘어, 70년대로 돌아가는 일종의 타임머신 일지도 모른다.
실버 영화관의 인기의 비결은 입소문에 있다. 이곳을 찾는 대부분의 신중년들은 친구나 가족 또는 주위 사람들을 통해 알게 된 것이었다. 서울 청량리에 사는 강입분(63)씨는 3년 전부터 실버 영화관을 찾기 시작했다. 강씨는 실버 영화관에서 일을 했던 친구를 통해 이곳을 알게 됐다고 한다.
그는 “젊은 시절 봤던 영화인데도, 보면 또 새롭고 재미있어요”라며 웃음 지었다. 실버 영화관의 인기는 꼬리에 꼬리를 문다. 강씨가 다른 친구들에게 입소문을 내고, 그 입소문은 또 다른 입소문을 낳는 식이다. 강씨는 "이곳을 알게 된 친구들 모두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 실버 영화관을 찾는다"고 설명했다.
“추억도 추억인데 무엇보다 싸잖아. 2000원이면 영화도 볼 수 있고 얼마나 좋아. 2000원인데 시설도 괜찮고, 깨끗하고 신경 많이 써놨어 이 양반들. 팸플릿에 나와 있는 식당가면 밥도 싸고 말이야. 요즘 사람들 머리도 좋아 어떻게 이런 것을 만들 생각을 했을까나.”
젊은 시절 환자들을 돕던 간병인으로 일해 온 강 씨는 이제는 자신을 위한 삶을 살기로 했다.
“지나고 보니까 남 생각만 하면서 살았지 나를 왜 이렇게 사랑하지 못했는지 몰라. 지금부터라도 즐겁게 살아보려고. 그래서 여기도 자주 오고. 쉬는 날엔 등산도 많이 가. 카바레 이런데도 가볼까 했는데 너무 남세스러워서 못 가겠어. 하하하”
이곳 실버영화관에는 하루 평균 800여명의 신중년이 발걸음을 한다. 실버 영화관의 관계자는 “날씨가 꽤 추워져서 손님이 많이 줄었어요. 아쉽네요. 주말에 오셨으면 더 꽉 찬 모습 보여드릴 수 있는데. 주말에는 1000명 넘게 오시거든요”라고 했다. 이곳은 1개의 관람관 밖에 없다. 총 300석. 그러나 거의 모든 회 매진일 정도로 늦깎이 청춘들의 영화에 대한 열정은 식을 줄 모른다.
관람관 앞에 넉넉한 웃음으로 손님들을 반겨주는 티케팅 아르바이트원의 눈가에는 주름이 깊게 패여 있다. 표를 건네는 한 사람 한 사람과 눈을 맞추며 친절히 좌석을 안내하는 그녀의 서비스는 20,30대 젊은이들의 그것보다 더욱 온화해 보였다.
실버 영화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사람들은 70대 청춘들이다. 하루에 2~3명이 일주일 간 짜인 순서대로 일을 한다. 이렇게 20명이 이곳을 빛내고 있다. 4~5시간 동안 해야 하는 일이지만 힘든 줄 모른다. 또래 친구들이 있고, 일에 대한 열정이 있기 때문이다.
실버 영화관 매표소 유리벽에는 이렇게 써 붙여져 있다.
‘55세 이상 어르신 경로 2000원, 청소년 5000원, 대학생 7000원, 일반 7000원’
매표소 직원에게 물었다. “젊은이들은 많이 찾아오나요?” 매표소 직원은 하루에 한 사람 정도가 할머니나 할아버지 또는 어머니, 아버지를 모시고 온다고 했다. 이곳 실버 영화관은 이런 젊은이들에게 야박하게 굴지 않는다. 그래서 실버 영화관 홈페이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55세 이상은 2000원입니다. 55세 이상과 동반 시 일반인도 2000원에 관람 가능합니다.’
단 돈 2000원의 힘. 2000원의 힘을 믿고 세대를 아우를 수 있는 소통의 창구가 되는 것이 실버 영화관의 궁극적인 지향점이 아닐까. 단 돈 2000원이면 부모님 또는 조부모님과 따뜻한 말 한마디를 나누며 서로의 추억을 공유 할 수 있다. 오늘은 집에 계신 부모님과 낙원동을 찾아보는 것도 좋겠다. 낙원동 실버 영화관외에도 을지로 3가역에 위치한 명보아트홀 실버극장, 서대문역의 청춘극장, 안산 중앙역에 있는 명화극장을 이용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