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배국남 대중문화 평론가(knbae24@hanmail.net)
“유흥업소에 안 간다. 2006년 이후로는 한 번도 안 갔다. 왜냐하면, 4만5000원씩 아이들을 후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돈이면 쓰레기더미 안에 있는 아이들을 도와줄 수 있다. 파리가 눈에 알을 낳아도 쫓을 힘이 없는 아이들이다. 그 아이를 살리면 그 아이가 변해서 사회를 살린다. 내가 번 돈이 이렇게 소중한 일에 쓰인단 걸 목격했기 때문에 큰돈을 그렇게 쓸 수 없게 됐다.” 구호단체 컴패션 홍보대사에서부터 북한 어린이 돕기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걸쳐 부인 신애라와 함께 사랑나눔 실천을 하는 스타 차인표씨의 말이 큰 울림을 준다.
자살률 1위, 노인빈곤율 1위, 사회적 관계 최하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10월 발간한 보고서 이 적시한 한국의 상황이다. 취업난, 양극화 등으로 인해 가족 해체가 급속히 진행되고 부모에게 버려지는 아이들도 급증하고 있다. 어느 때보다 사랑나눔이 절실할 때다. 하지만 후원, 기부, 봉사 등 사랑나눔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대중의 사랑을 받는 연예인 스타들이 선행에 적극적으로 나서 많은 사람을 사랑나눔 실천에 참여시키는 아름다운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연예인 스타들이 사랑나눔 기폭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1981년부터 초록우산어린이재단의 후원회장을 맡아 불우한 어린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3년 전부터는 제로캠프라는 청소년들을 위한 비영리 단체의 이사장직을 맡아 문화 예술을 통한 비행 청소년의 교화에 나서는 등 다양한 사랑나눔 실천을 펼치고 있는 최불암씨와 백혈병 어린이, 위안부 할머니, 네팔과 중국 지진 피해자 등에게 거금을 쾌척하는 등 전방위적 선행을 펼치고 있는 송중기씨 등 많은 연예인 스타가 사랑나눔 실천을 활발하게 하고 있다.
최근 들어 연예인 스타들의 사랑나눔의 양태가 진화하며 선행의 스펙트럼이 넓어지고 있다. 그동안 불우이웃이나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성금 기부나 자선단체의 홍보대사, 방송사의 자선 프로그램 출연 등이 스타 선행의 주류를 이뤘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김혜자·한지민·유재석의 재능기부, 김정은·이영애·문근영·한혜진·박해진의 국내외 빈민지역에 학교, 병원, 도서관, 우물 등 시설 기부, 최불암·정애리·고두심·김제동의 재단을 통한 불우 청소년 지원, 이효리·송혜교·송중기의 위안부 할머니 지원 등 스타들의 사랑나눔의 스펙트럼이 크게 확장됐다.
기부 형태도 불우이웃과 시설에 대한 후원, 청소년과 학교의 장학금 쾌척,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성금기탁 위주에서 벗어나 한지민·송혜교 등 스타들의 책 인세 기부, 이승기·박해진 등 쌀 화환 기부, 최강희의 골수 및 장기기증, 차인표-신애라·정혜영-션 부부의 제3세계 어린이 후원금 지원, 김장훈·하춘화의 행사와 캠프를 통한 기부 등 매우 다양해졌다.
일회성 이벤트에 그쳤던 연예인의 사랑나눔과 선행은 수십 년 동안 지속해서 전개해나가는 모습으로 변모하고 있다. 김혜자·최불암·고두심·하춘화·안성기·정애리·차인표·김장훈·최수종·유재석·션·장나라 등은 10~40년에 이르는 장기적 선행을 펼치고 있다.
사랑나눔을 시스템화하거나 조직화하는 스타들도 많다. 공연 등 수입원이 생기는 이벤트 수입의 일부를 계속 기부하는 김장훈을 비롯해 적지 않은 스타들이 자신의 연예활동 수입의 일정 부분을 떼어 소년 소녀 가장이나 독거노인, 장애인들을 지속해서 돕는 것을 체계화했다. 김원희·김정은 등은 ‘따뜻한 사람들의 모임’을, 최수종·오윤아·김수로 등은 ‘좋은 사회를 위한 100인 이사회’를 만들어 조직적으로 봉사활동과 기부사업을 펼치고 있다.
국내의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이웃을 대상으로 주로 이뤄지던 스타들의 사랑나눔은 아프리카, 동남아 등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다. 안성기·김혜자·정애리·박해진·이영애·송혜교·문근영 등 많은 스타가 세계 각국의 어려운 상황에 있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나누고 있다. 이민호·장동건·이승기·장근석처럼 스타와 팬클럽이 함께 자선활동이나 선행활동에 나서는 행태도 이제는 일상적 풍경이 됐다.
스타들은 왜 사랑나눔에 나서는 걸까. “조그마한 도움이 한 아이의 생명을 살리고 삶을 변화시킨다. 그리고 도움을 받은 아이가 커서 사회와 이웃에 도움을 주는 사람으로 성장한다. 참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이다.”오랫동안 청소년들에게 장학금 기부를 하고 장애인단체 홍보대사 등 다양한 방면에서 사랑나눔을 실천하는 고두심씨의 말이다.
40여 년 동안 불우 아동과 청소년들에게 따뜻한 손을 내밀어온 최불암씨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에 대한 관심과 투자만큼 소중한 일이 없다. 더욱이 힘들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아이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밀면 아이가, 사회가, 국가가 긍정적으로 변한다.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국내에 있는 고아는 물론 굶주림에 허덕이는 아프리카의 아이들까지 몸과 마음으로 포근히 감싸 안는 김혜자씨는 2019년까지 후원금을 미리 내고 이렇게 말했다. “광고를 찍거나 돈이 생기면 후원하는 아이들 것을 떼어놓는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늘 불안하다. 내가 돈이 없어 안 주면 걔네들은 굶으니까. 나야 돈이 없으면 우리 아들이 밥이라도 먹여주겠지만, 그 아이들은 안 되지 않나. 당연한 일이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오랫동안 9억 원에 가까운 돈을 익명으로 기부하고 시골 지역에 청소년을 위한 공부방 등을 지원한 문근영씨는 “제가 기부 등을 하면서 더 행복하고 매우 기쁩니다. 이런저런 상황들, 사연들, 사정들이 있지만 기부할 때 ‘우리 같이 그래도 열심히 살아봐요’라는 그런 메시지 정도는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요”라고 기부 이유를 밝혔다.
루게릭병 환자 돕기에서부터 어린이 재활병원건립 후원까지 다양한 자선사업과 캠페인을 왕성하게 펼쳐 ‘선행천사’라는 별칭을 얻은 션. 그는 사랑나눔 실천 공개에 대해 “일부 사람들이 (사랑 나눔을) 조용히 할 수 있는데 왜 공개하냐고 말한다. 연예인이기에 많은 사람에게 알릴 수 있기 때문이다. 좋은 일을 알려서 그걸 공유하면 더 빨리 이룰 수 있다. 겨울을 나는 데 필요한 연탄이 300만 장인데, 혼자서 기부할 수 없는 양이기 때문에 많은 분에게 알리면 300만 장의 기적을 쉽게 이룰 수 있다”고 설명했다.
에 “고지대 사람은 장수하고 저지대 사람은 수명이 짧다”는 말이 나온다. 실제로 세계의 장수 마을은 파키스탄의 훈자 마을, 러시아의 카프카스 지역, 일본 알프스의 나가노 현(長野縣) 같은 고산지대나 일본 오키나와(沖繩), 전북 순창군, 제주도 등 해안가에 있다.
파키스탄의 훈자 마을은 해발 6000m가 넘는 험준한 히말라야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산소량은 16.5%, 습도 50%로 건강에 좋은 조건이다.
러시아의 카프카스 지역은 해발 4000~5000m의 카프카스 산맥으로 이어진 그루지야,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러시아 지역을 말한다.
일본의 나가노현은 일본 지역 중 남자가 가장 장수하는 지방이고, 2000~3000m 고산으로 둘러싸여 ‘일본의 지붕’이라 불린다.
일본의 오키나와 지역은 일본 지역 중 여자가 가장 장수하는 지방이고, 따뜻한 해안가이다.
우리나라는 2003년 서울대 조사에서 해발 200~600m의 산간 지대와 해안가에 장수 마을이 몰려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우리나라의 장수하시는 분들을 조사해 보면 남성 장수자는 강원도 산간 마을에 많고, 여성 장수자는 전남 해안가에 많다. 이탈리아의 사르데냐 섬 역시 장수 마을인데, 평균 해발 700m의 산악 지형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사르데냐의 산악지역인 누오로에서는 100만 명당 244명이 100세 이상이다. 그리고 남성 장수자가 여성 장수자보다 많다. 높은 산골에 가서 하룻밤을 자면 남자들은 새벽 발기가 더 잘 되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남성들에게는 산이 맞고, 여성들에게는 바닷가가 더 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 한의학적으로는 음양의 이치가 바로 적용된다고 할 수 있다.
조깅을 하면 가슴을 움직여 거친 숨을 내쉬는 데 반해, 등산을 하면 아랫배를 움직이며 거친 숨을 내쉬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즉 산을 오르다 보면 산소가 엷어지면서 숨이 가빠지는데, 우리 몸은 이를 보상하기 위해 흉식호흡에서 복식호흡으로 바꾼다. 아랫배가 후끈해지는 복식호흡은 단전호흡이나 단전에 뜸을 뜬 효과를 내서, 머리는 시원하게 하고 아랫배는 뜨겁게 한다. 기본적으로 상열하한(上熱下寒)증을 치료한다.
티베트 수도인 라사로 여행 간 적이 있다. 처음 며칠은 고산 반응으로 머리가 아프고 잠도 제대로 오지 않았다. 차만 타면 멀미와 구토... 그런데 움직이지 않던 아랫배가 며칠 지나면서 저절로 들쑥날쑥 복식호흡을 하게 되었고, 그러면서 고산 반응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다. 이때 위장의 연동운동 또한 활발해지며 소화도 호전되었다.
‘신선 仙’자가 ‘산[山]’에 ‘사람[人]’이 붙어 있는 모양을 한 것은 등산과 고산지대 생활이 복식호흡을 도와서 도 닦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네팔의 셰르파족과 구르카 용병이 고산에서도 뛰어다닐 수 있는 것은 고산에 적응해서 복식호흡이 잘 되어 폐활량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사람이 살기 힘든 척박한 땅에서 고차원 티베트 불교가 융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고산이란 일교차와 바람이 심한 곳이다. 여기서 살아남으려면 사람은 북극곰처럼 피부가 야물고 단단해야 한다. 천지운기에서는 “중국의 서북지방은 지대가 높고 건조한데, 그 곳 사람들은 추워서 병이 들어도 대부분 땀이 없다”고 했다. 고산 지역 사람들은 주로 붓고 뭉치는 병이 생기며, 땀을 내거나 설사시켜서 치료한다.
고산 지역 사람들은 피부가 단단해져서 몸의 근본 구성 요소인 정액[精], 기운[氣], 정신[神], 피[血]가 잘 갈무리되어 장수할 수 있는 것이다.
고산에는 항암 효과가 뛰어난 약초가 많다. 중국 육상선수단 ‘마군단’과 덩샤오핑(鄧小平 1904~1997)이 늘 복용해서 유명해진 동충하초, 티베트의 4대 약재라고 하는 홍경천, 설련화, 남미 고산의 아가리쿠스 등이 있다. 곡기생이라고 하는 우리나라의 겨우살이도 높은 산의 참나무 윗부분에 기생한다. 이들은 산소가 부족한 곳에서 자랐기 때문에 산소를 잘 빨아들이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세포의 산소 결핍증인 암을 치료하는 효과를 나타낸다. 사람 또한 고산에서는 산소를 더 잘 빨아들이도록 변화하기 때문에, 암에 대한 저항력이 커지고 면역력이 높아진다. 등산을 하면 산소 흡취력을 높여줘서 도시 생활에만 익숙해져 약해진 면역력과 저항력을 키워 준다.
해안가도 장수 마을이 많다. 일본 오키나와, 우리나라 전북 순창군과 제주도가 그렇다.
해안가에 자라는 식물들을 보면 짜고 강한 해풍을 맞고 산다. 짠맛은 생명체 속의 물을 빼앗아서 말라죽게 하고, 강한 바람도 생명체 속의 물을 증발시켜 말라죽게 한다. 해안가 식물들은 이런 생태에서 살아남기 위한 전략을 개발했다. 바람을 이기고 물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동백나무처럼 잎 표면이 코팅 처리(큐티클 층)되어 있거나, 수분을 많이 머금기 위해 다육식물로 변하거나, 퉁퉁마디처럼 물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염분을 머금고 있다.
사람도 비슷하게 해풍에 대응한다. 해안가 식물이 물을 빼앗기지 않도록 진화하듯, 해안가 마을 사람들은 정액[精], 기운[氣], 정신[神], 피[血]를 잘 갈무리하도록 진화한다. 그래서 피부가 더 억세지는 것이다.
해조류(미역, 김, 파래, 톳, 다시마)가 물을 정화하는 힘은 인체 내에서는 피를 정화하는 힘으로 나타난다. 해조류는 혈액의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추고, 항산화 물질이 많아 LDL 콜레스테롤은 낮추고, HDL 콜레스테롤은 높이며, 고혈압을 내리고, 미네랄을 공급해 준다. 그리고 식이섬유가 많아 대변을 잘 보게 해서 독소를 배출한다. 그래서 해조류는 심혈관계 질환의 예방과 치료에 좋다. 일본 오키나와와 전남 바닷가, 제주도가 장수 마을로 유명한 것도 해조류의 영향이 크다.
고산과 해안가가 모든 사람에게 좋을 수는 없다. 그렇게 척박한 곳 사람들이 장수한다는 것은 척박한 환경 때문에 약한 사람은 살아남지 못했고, 강한 사람들만 살아남았다는 말이기도 하다.
심장이 약한 사람은 고산에서 적응하기 전에 병이 심해질 수 있고, 피부가 약한 사람은 해안가에 적응하기 전에 해풍과 자외선에 큰 병이 생길 수도 있다. 고산과 해안가가 장수에 좋다는 것은 어느 정도 면역력, 적응력이 있는 사람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예방 주사가 좋지만, 너무 약한 사람에게는 무리이듯이 말이다.
따라서 해발 고도를 완만히 높여 가거나, 해풍이 적당한 곳에서 적응하는 것이 좋다.
>> 최철한(崔哲漢) 본디올대치한의원 원장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졸업.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본초학교실 박사. 생태약초학교 ‘풀과나무’ 교장. 본디올한의원네트워크 약무이사. 저서:
800km 국토종단, 4200km 국내 해안 일주, 24시간 밤새 100km를 걷는 울트라 걷기 등 젊은이에게도 쉽지 않은 도전을 65세가 넘어서 이뤄낸 도보여행가 황안나(본명:황경화(黃慶花)·76)씨. 그녀는 국내뿐만 아니라 산티아고, 네팔, 홍콩, 몽골, 부탄, 동티베트, 베트남, 아이슬란드, 시칠리아 등 50개 국의 길을 밟았다. 지리산 종주도 벌써 여덟 번 했고, 오지여행도 숱하게 다녀왔다. 나이를 두고 우려하는 이들에게 그녀는 말한다. “비록 나이는 적지 않지만 뜨겁게 갈망하는 것이 있고 그것들을 내 두 발로 해낼 수 있으니 이만하면 젊지 않은가?”라고.
황씨는 춘천사범학교를 나와 20세부터 교직 생활을 하다가 정년을 7년 앞두고 제2 인생을 위해 과감하게 퇴직했다. 퇴직 후, 가장 먼저 문제가 된 것은 건강이었다.
건강검진 결과 고지혈증에 악성 빈혈 등 의사가 식단까지 짜줄 정도로 상태가 심각했던 그녀다. 그런 그녀에게 의사는 운동을 권했고, 그때부터 동네 뒷산을 오르거나 헬스장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황씨는 TV 브라운관에 펼쳐진 땅끝마을의 풍경을 보고 눈을 뗄 수 없었다.
“드넓은 양파밭과 청보리순, 붉은 황토가 햇살에 반짝이는 그곳을 ‘한번 걸어보면 좋겠다’는 마음이 생겼어요. 땅끝마을이라는 그 단어도 무척이나 아득하게 느껴졌죠. 그때 마침, 제가 다니던 산악회에서 광주 무등산을 오른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나는 산에서 내려와 터미널로 가서 땅끝마을로 가면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순전히 그 길을 걸어보고 싶은 마음에 걷기를 시작했고, 그 일이 계기가 돼 국토종단과 해안 일주에 도전했죠. 내 모든 시작과 도전은 65세부터였어요.”
장기 도보여행에 필요한 다섯 가지
그녀가 혼자 장기 도보여행을 한다고 했을 때 제일 걱정한 것은 ‘체력’이다. 그리고 체력과 함께 꼭 필요한 것들이 있다고 한다. “젊은 친구들은 체력은 있는데 시간이나 경비가 부족하죠. 나이 든 사람들은 시간과 경비는 있지만 체력이나 용기가 부족하고요. 한 달에서 길게는 몇 개월씩 다니는 장기 여행이기 때문에 가족의 이해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저는 4개월 해안 일주를 하는 데 700만원 정도 들었는데, 보통 할머니가 그만한 돈을 쓰기란 쉽지 않잖아요. 작정하고 준비한 것은 아니지만 퇴직하고 3년 동안 뒷산을 운동 삼아 다닌 덕에 체력도 단련돼 있었죠. 남편에게 내 계획을 이야기하니까 그이는 단순히 ‘해도 된다’ 정도가 아니라 전폭적으로 지원해 주었어요. 그렇게 체력, 시간, 경비, 그리고 가족의 이해까지 모두 해결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용기’더라고요. 용기를 갖는 것이 가장 힘들었어요.”
여러 강연이나 인터뷰에서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는 “왜 혼자 떠나느냐”이다. 그녀는 위에서 말한 다섯 가지를 갖춘 동행자를 찾기 어려울뿐더러, 모두 갖춘 사람이라도 서로의 체력 정도나 관심사가 달라 나만을 위한 자유 여행을 즐기기 어렵다고 말한다.
“누군가와 함께 가면 나는 조금 더 걷고 싶은데 상대에 맞추느라 나아가지 못할 때도 있고, 사진을 찍고 싶은데도 마음대로 멈출 수 없어요. 남편이나 동생들이랑 가면 좋은 숙소에 맛있는 음식들을 먹고 걷기는 뒷전이 되어버려요. 그러면 즐겁고 편안하지만 단순히 관광에 그치고 말죠. 혼자 걸으면 힘들고 외롭고 막막하지만 그 절박함을 안고 걷는 길에서 느끼는 게 참 많아요.”
그녀는 외로움이 몰려올 때면 돌아가신 어머니의 일기장에 남아 있던 문구를 떠올린다.
‘자유로우려면 외로워야 한다!’
생각의 근육을 키우는 ‘나 홀로 도보 여행’
목적지는 정하지만, 목표에 얽매이지는 않는다. 그녀는 꼭 정상을 가겠다는 마음이 아니라, 가다가 힘들면 되돌아오면 된다는 마음으로 길을 나선다. 하고 싶은 걸 그냥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겁고 만족스럽다고.
“남들이 못할 거라고 말린다고 해서 ‘나는 꼭 성공할 테다’ 하는 마음으로 가는 게 아니라 ‘내가 어디까지 가서 못하나 보자’라고 생각해요. 그냥 포기하는 것보다는 내 한계가 어디까지인가 확인해보는 편이 낫잖아요. 망설이고 주저할 시간에 그냥 하는 게 남는 거죠.”
그녀는 길 위에서 잊지 못할 추억도 쌓고, 건강도 챙기고, 친구들도 많이 생겼지만 비워내는 과정을 통해 얻은 것이 많다고 했다.
“정말 잡초처럼 험한 인생을 견디며 살아왔어요. 아마 걷기를 하지 않고 그대로 노년을 맞았다면 마음이 아주 괴로웠을 것 같아요. 지난날의 아픔과 걱정 등을 모두 길 위에서 치유했기 때문에 지금 즐거울 수 있다고 생각해요. 개미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 길을 혼자 걷다 보면 마음도 편해지고, 집착이나 욕심도 다 내려놓게 되죠. 자연히 자기 성찰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다이어트를 할 수 있어요.”
그렇다고 걷는 내내 생각만 하는 것은 아니다. 길 위에서 그녀의 주특기는 바로 ‘멍 때리기’라고. 근심 없이 머리가 텅 빈 상태로 걷다 보면 몸도 마음도 아주 편안해진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놓지 않아야 할 것은 바로 ‘끈기’다.
“도전해서 꼭 이루리라는 욕심은 없지만, 끈기 있게 하려고 노력했어요. 그러다 보니 도전한 것은 대부분 해낼 수 있었죠. 머리가 가자고 하면 몸은 자연히 따라가게 돼 있거든요. 도보여행을 하다보면 소나기를 맞을 때도 있어요. 비에 홀딱 젖고 나면 대개 의욕을 잃거나 힘들어하죠. 그럴 때면 저는 이렇게 외치며 한 발짝 더 내딛죠.”
“젖은 옷이 마를 때까지!”
한류와 케이팝 등의 여파로 문화의 힘을 실감하는 요즘. 30여 년을 문화체육관광부에 몸담았던 신현웅(辛鉉雄·72) 웅진재단 이사장은 세종대왕을 떠올려 보곤 한다. 훈민정음 창제와 더불어, ‘종묘제례악’을 작곡할 만큼 언어와 음악의 힘을 바탕으로 정치를 펼친 세종의 선견지명에 감탄하던 그에게 는 단연 고개를 끄덕이게 할 만한 책이었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웅진재단에서 수학·과학·예술분야 영재들을 위한 장학 사업을 운영하는 신 이사장은 분기마다 3~4권의 책을 직접 골라 지원하고 있다. 도 아이들을 위한 책을 고르면서 접하게 됐는데, 평소 세종대왕의 문화 정치에 관심이 있던 그에게는 더욱 흥미롭게 다가왔다.
“21세기는 문화의 시대라고 하잖아요. 그동안 정치적 성장이나 경제적 기적은 많이 이루어 왔는데 이제는 명실공히 문화 국가를 만들어야 할 때가 온 것 같아요. 세종은 ‘예(禮)와 악(樂)을 갖춘 사람이 덕인(德人)’이라 했는데, 그 정신을 되살려서 나라의 격도 더 높이고 온 국민이 문화와 더불어 화평하게 사는 세상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재미있게 읽었어요.”
책의 저자인 극작가 신봉승은 현 정부 부처의 장 자리에 조선시대 명현들을 대입해 이상적인 정치가의 표상을 제시했다. 대통령에 세종대왕, 국무총리에 오리 이원익, 기획재정부 장관에 퇴계 이황 등 20명이 등장한다. 1998년부터 이듬해까지 문화관광부 차관을 지낸 그에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으로 선정된 연암 박지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박지원은 과거에 낙방하고 스스로 학문을 깨치기 위해 북경과 열하에 가서 직접 그들의 학문과 문화를 접하고 돌아왔죠. 그때 탄생한 것이 바로 고요. 사실 문화라는 것이 그래요. 어떠한 법칙이나 이론으로 국민들을 일부러 계도한다 해서 되는 것이 아니잖아요. 자신의 경험을 통해 눈을 뜨고 그것이 몸에 배서 우러나는 것이죠. 그러한 식견과 유연한 사고방식을 가진 연암을 문화체육부 장관으로 꼽은 걸 보면 저자 역시 문화에 대한 가치관이 잘 갖춰진 분이라 생각해요.”
법으로 다스리지 말고, 예를 가르쳐라
‘법으로 규제하면 피동적인 국민이 되고, 예(禮)를 가르치면 스스로 알아서 행동하는 상식적인 국민이 된다.’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으로 꼽힌 사계 김장생이 남긴 말이다. 신 이사장은 문화도 지식의 차원을 넘어 피부로 접할 수 있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모든 것을 법이나 정책으로 해결하면 한계가 있어요. 하지만 예가 갖춰지면 자연히 사람 도리를 하게 되고, 질서가 생기게 되죠. 그런 과정이 ‘본(本)’이라 할 수 있고 거기에 덧붙여지는 지식이나 법 등을 ‘말(末)’이라 할 수 있어요. 아이를 교육할 때도 예를 가르치는 것이 기본이고, 간혹 나타나는 비행청소년들을 훈계하기 위한 부수적인 방법으로 법을 적용하게 되는 거죠. 이게 거꾸로 되면 사회가 아주 삭막해지고 황폐해져요. 문화도 마찬가지죠. 먼저 음악도 듣고 예술 작품도 보며 문화를 몸에 배게 하려는 노력이 필요해요. 그 뒤에 지식이나 정책 등이 어우러져야 잘 흡수가 되는 거죠. 제가 문화관광부에 있을 때도 깊은 철학과 신념은 없었지만 그런 것에 의미를 두고 하려고 노력했어요.”
신 이사장은 문화란 모든 삶의 양식이라 말한다. 문화적인 삶을 살면 인생이 풍성해지고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것. 나이가 들수록 일상을 단조롭게 느끼는 이들이 많지만, 다양한 문화를 향유하는 사람은 그만큼 할 일이 많아 지루할 틈이 없다고 한다.
“예전에는 음악 한 곡 들으려면 얼마나 어려웠는지 몰라요. 지금은 간단하잖아요. 해외 공연이나 유명 미술품을 만날 기회도 많아졌고, 찾아보면 알뜰하게 문화적 욕구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많아요. 저도 좋은 책을 많이 읽으려 하고, 영화나 공연도 보면서 틈틈이 글도 쓰고 있어요. 특히 발레 공연은 거의 다 볼 정도로 좋아해요.”
‘짜르디 짜르디’ 하지 말고 ‘비스타리 비스타리’
여유가 생기면 해외여행도 어렵지 않으니 얼마든지 여러 나라의 문화를 경험해볼 수 있는 요즘이다. 신 이사장은 다른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고 존중하기 위해서는 그 나라의 언어를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만큼 문화와 언어를 한 몸처럼 생각하는 그는 2008년 다문화가족 음악방송을 개국했다. 타지에서 외롭게 살아가는 다문화가족을 위해 각 나라의 DJ가 모국어로 모국의 음악과 소식, 한국 생활에 필요한 정보 등을 제공한다. 다문화가족 음악방송을 이야기하는 신 이사장의 눈빛에서 문화에 대한 그의 진심어린 애정과 신념이 느껴졌다.
“1970~1980년대에 영국과 사우디아라비아에 문화 공보관으로 있었을 때가 생각나요. 고향 생각에 힘들 때 다른 무엇보다 ‘그리운 금강산’이나 ‘가고파’ 같은 노래를 듣는 게 가슴 찡한 위안이 되던 때였죠. 지금 우리나라에 와 있는 외국인들이 17만 명이 넘어요. 그들을 돕는다고 돈을 얼마나 많이 줄 수 있겠어요. 그럴 수 없다면 그들 나라 노래 한 곡이 더 큰 위로가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시작하게 됐죠. 물론 많이 알려진 것은 아니지만 실제 모국의 언어가 그립고 소통이 간절한 외국인들에게는 희망이고 활력이 되는 존재예요.”
신 이사장은 오래전부터 해외를 방문하게 되면 그곳의 시나 노래를 그 나라 언어로 외워가며 존중을 표하고 있다. 그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외국 시 한 구절을 부탁하자, 그보다는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하나 들려준다고 했다.
“네팔 히말라야산맥 등반대를 가이드하는 현지인을 ‘셸파’라 하는데, 그들 말이 한국 사람은 너무 ‘짜르디 짜르디’ 한다는 거예요. ‘짜르디’는 ‘빨리’라는 뜻인데, 걷다가 중간에 쉬면서 자연도 감상하고 해야 하는데 한국인들은 재촉하기 바쁘대요. 그럴 때면 셸파들은 ‘아직 영혼이 따라오지 못해서 몸이 갈 수가 없다’며 ‘비스타리 비스타리(천천히 천천히)’ 휴식을 즐긴다고 해요. 근데 그것을 보니 지난 수십 년간 앞만 보고 일에만 매진하며 달려온 한국 중·장년들이 생각났어요. 이제는 너무 ‘짜르디 짜르디’ 하지 말고 지난날도 되돌아보면서 철학적인 면에서 자신을 다스려 보기도 하고, 앞으로의 여정도 살펴봤으면 좋겠어요. 영혼이 올 때까지 기다린다는 셸파들의 말처럼 이제는 ‘비스타리 비스타리’ 하면서 영혼을 살찌우는 문화적인 삶을 즐기면 어떨까요?”
아직 ‘우리 것의 가치’를 미처 깨닫지 못했던 시절, 우리 고유의 문화나 전통은 물론 심지어 자연자원까지도 있는 그대로 내세우지 못하고 이미 세계에 널리 알려진 것들을 어떻게든 끌어들여 비교하거나 대비해 소개하곤 했지요. 이때 쓰이던 표현 중의 하나가 바로 ‘한국의 XXX’입니다. 우리 고유의 꽃 이름을 부르는 것도 예외가 아니어서 그냥 산솜다리라고 하면 될 것을 ‘한국의 에델바이스’라고 부르다 보니 지금까지도 아예 진짜 ‘에델바이스’인 것으로 잘못 알고 있거나, 우리의 식물국명을 제대로 모르는 이들이 적지 않다고 탄식하는 소리가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일리 있는 지적이긴 하나, 1960 ~1970년대 전 세계를 강타한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 나오는 노래 이름의 하나가 바로 에델바이스였으니, 우리나라에도 그에 못지않은 고유 식물이 있음을 알리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서 ‘한국의 에델바이스’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게다가 요즘도 청소년 축구 선수인 이승우에 대해 ‘한국의 메시’라는 말을 하는 걸 보면, ‘한국의 XXX’가 열등감이나 무지의 소치라기보다는 그저 하나의 표현 방식이 아닐까 가볍게 넘겨봅니다.
물론 ‘한국의 에델바이스’는 식물명의 차원을 넘어, 산솜다리의 생존 자체에 심대한 위협을 초래했습니다. 수없이 듣고 불렀던 ‘눈처럼 빛나는, 마음속의 꽃’, 바로 그 에델바이스를 말려서 만들었다는 말에 1970년대 설악산으로 수학여행을 온 중고생들이 너나없이 에델바이스 압화 액자에 아끼고 아꼈던 용돈을 기꺼이 상납했으니 얼마나 많은 산솜다리가 그 당시 사라졌을지 짐작이 됩니다. 지금은 소공원이 된 설악동의 여관과 가게마다 산솜다리로 만든 기념품이 즐비했었으니, 1970년대까지만 해도 설악산의 웬만한 능선과 봉우리에서 산솜다리를 무더기로 채취할 수 있었다는 뜻이 되겠지요. 그러다 보니 “자생지가 매우 협소하며, 개체 수도 극소수이다”라는 설명이 현재 산림청에서 운영하는 식물정보 웹사이트에 올라 있는 실정입니다.
암튼 경위야 어찌되었든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된 에델바이스와 우리나라의 산솜다리는 식물분류학상 같은 쌍떡잎식물 초롱꽃목 국화과 솜다리속의 식물인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학명(속명+종소명)이 에델바이스는 레온토포디움 알피눔(Leontopodium alpinum), 산솜다리는 레온토포디움 레이오레피스(Leontopodium leiolepis)로 마지막 종소명에서 달라지는 데서 알 수 있듯, 유사하기는 하지만 엄연히 다른 종의 식물입니다.
“히말라야의 나라 네팔에서…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를 가기 위해 닐기리 산을 에돌아 내려서는 고원 길은 천상 화원이었습니다. … 한국에서는 설악산 깊은 곳에서나 어쩌다 만날 수 있는 산악인의 꽃. 에델바이스는 이곳에선 너무 흔합니다. 아예 꽃밭을 이룰 정도이니까요.” 몇 해 전 유명 산악인 오은선 씨가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등정에 앞서 한·일 간 신문에 보내온 편지의 한 대목입니다. 오씨 역시 에델바이스와 산솜다리를 같은 식물로 착각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에델바이스가 꽃밭을 이룰 정도로 핀다는 말이 오래 기억됩니다.
수많은 인명피해를 낸 지진 참사에도 불구하고 히말라야의 나라 네팔 고산지대에 전 세계 산악인들의 꽃 에델바이스가 눈처럼 환하게 무더기무더기 피어나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고 했던 영국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말처럼 네팔인들에게 작은 위로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Where is it?
현재 국내에 자생하는 솜다리속 식물은 대략 4종. 솜다리와 산솜다리, 한라솜다리, 왜솜다리(사진)가 그 주인공들로, 꽃잎처럼 보이는 5~10장의 포엽이 흰 솜털을 뒤집어쓴 듯 보이는 데서 ‘솜다리’란 공통의 이름이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주로 포엽의 형태와 크기 등의 차이에서 머리 이름이 갈리는데, 식물학적 특성보다 자생지의 차이가 구별 요소로 훨씬 알기 쉽다. 즉 솜다리는 금강산을 비롯해 평안도와 함경도 등 지금의 북한 지역이, 산솜다리는 강원도 설악산이, 한라솜다리는 한라산이, 그리고 왜솜다리는 강원도 고성, 양양, 평창과 충북 단양, 경북 봉화 등이 주 자생지다. 이 중 많은 이들에게 친숙한 산솜다리는 우리나라 모든 산악인의 마음의 고향 설악산 해발 1000m 이상 산등성이 바위 절벽 곳곳에 두루 분포한다. 물론 많은 설악산 등반 코스 중 공룡능선과 서북능선 등의 높고 험준한 암벽에 가장 많이 자생한다.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는 권금성은 물론, 비교적 쉽게 오를 수 있는 흘림골 코스에서도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바위 절벽에 피어 있는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장수대탐방소 ~ 대승령 ~ 안산 능선 곳곳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내가 2003년에 낸 에세이집 를 읽은 많은 독자들이 던지는 질문 가운데 하나. “어떻게 하면 그렇게 모여 살 수 있나요?” 많은 분들은 궁금증을 가집니다. 자녀 네 가족과 우리 내외가 한 지붕 아래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이 신기한가 봅니다. 호기심으로 묻는 분도 있고 부러워하면서 묻는 이도 있습니다. 성질 급한 분은 당장 그 비결을 알려 달라고도 합니다. 나는 이런 급한 질문을 받으면 좀 당황스럽습니다. 달리 당황스러운 것이 아니라 단시간에 단 몇 마디 말로 설명을 드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글 이근후(李根厚·이화여대 명예 교수)
요즈음 우리 사회는 핵가족도 모자라 일인 가정으로 살아가는 인구도 참 많아졌습니다. 교과서적인 가족의 개념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전통적인 사회학 교과서에 실린 가족의 개념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확대가족이란 개념이고 다른 하나는 핵가족이란 개념입니다.
확대가족은 농경사회에서 경험했던 가족구조입니다. 3대가 한 지붕 아래 모여 삽니다. 핵가족이란 산업사회를 겪으면서 생긴 가족형태입니다. 가족 이동이 손쉽도록 기능적인 가족이 부부와 미성년 자녀들로 구성하는 가족형태입니다.
13가족 함께 한 지붕아래 산다
시대가 변하면서 대부분의 가족들은 핵가족 형태를 취합니다. 자녀가 결혼하면 곧바로 분가하여 자신의 핵가족을 이룹니다. 그런데 요즈음 들어서는 이런 고전적인 가족 정의를 설명할 수 없는 가족형태들이 존재합니다.
이런 사회적 추세로 보아 우리 집은 13가족이 한 지붕아래 함께 산다고 하면 당연히 궁금증을 일으킬 것입니다. 요약해서 말씀 드리면 이렇습니다.
우리 부부는 2남2녀를 두었습니다. 그러니 모두 5가구 손자녀 합해 13명입니다. 함께 돈을 모아 빌라 형태의 집을 지었습니다. 내가 그렇게 하자고 한 일은 아닙니다. 자녀들이 모여 그런 발상을 해서 내가 동참한 것입니다. 하향식이 아니라 상향식입니다. 필요에 의해 모였습니다. 1년 여의 의논과 1년 여의 설계를 거쳐 함께 모여 삽니다. 필요에 의해 모였다는 말은 자녀들의 요구와 우리 부부의 사정이 맞았다는 말입니다.
당시 현실적인 요구는 자녀들이 모두 전세를 살고 있어서 자기 소유의 주택을 갖지 못했습니다. 손자녀들이 어렸는데 그 부모들은 모두 직장을 가진 터라 육아에 손이 모자랐습니다. 우리 부부는 은퇴를 하여 상대적으로 시간여유가 있었습니다.
필요에 의해 모인 확대가족
이런 상황에서 모였으니 우리 가족은 필요에 의해 모인 확대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다. 자녀들이 결혼하면서 신혼 6개월을 함께 보냈습니다. 그 이유는 처음부터 분가를 시키면 남남이 될 것 같아서 서로 양해를 하고 6개월의 소통기간에 합의했습니다. 새로 우리 집에 들어오는 며느리나 사위도 우리 부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 부부도 새로 들어오는 식구들의 진면목을 알아야 합니다. 결혼하기 이전 자라던 친가에서 하던 습관대로 행동할 것을 주문했습니다. 우리 부부도 새 식구가 들어오기 이전부터 하던 습관대로 했습니다. 서로 눈에 거슬리는 모습이더라도 그렇게 하자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서로가 서로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 6개월의 학습동거 끝에 분가시켰습니다.
6개월 학습동거 끝의 분가 이후
이런 사정을 거쳐 서로 분가하여 살았는데 아무리 필요에 의한 재집결이긴 하지만 의논해야 할 일들이 많았습니다. 필요에 의한 재집결의 아이디어는 큰며느리가 제안했습니다.
아들 부부가 의논하기를 우리 부부 중 누가 먼저 타계하게 되면 남은 부모를 모시기로 했답니다. 자녀가 넷인데 서로 역할을 나누어 모시면 어떨까라고 형제들 간에 의논을 했답니다. 그렇게 하자면 한 집에 살아야 하지 않을까란 생각으로 이어지고 그 아이디어를 내가 정년퇴임하는 시점을 맞추어 실행에 옮겼던 것입니다.
우리들은 자주 모여 어떻게 하면 필요성을 극대화하면서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을까 많이 의논했습니다. 부부간에 생각을 맞추어 살아가기도 힘든데 이런 대가족이 모여 살자면 의견이 다른 점도 많고 서로 부딪쳐 속상하는 일도 많을 텐데 어떻게 적응할까 많이 의논했습니다.
의논 끝에 찾아 낸 핵심적인 요체는 이렇습니다.
“우리들은 각 가정이 고유한 가치관과 종교관을 갖고 간섭 없이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서로 같음은 나누면서 즐기고 다름은 인정하고 존중합니다.”
서로 독립성을 유지하고 침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함께 모여 사는 동안 우리들은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이 노력을 하기 이전에 우리들이 깊이 생각한 하나는 가족 간의 거리입니다. 함께 한 지붕 아래 살고 있으니 물리적 공간과 거리는 매우 가깝습니다. 가까운 만큼 지켜야 할 약속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서로 간섭하지 않는다는 약속입니다.
정서적 거리도 중요합니다. 너무 가까워도 갈등으로 꼬이고 너무 멀어도 남남입니다. 얼마만한 정서적 거리가 필요할까요.
고슴도치를 생각했습니다. 서로 꽉 껴안으면 상처를 입습니다. 너무 먼 거리에서 바라만 보면 가족정서가 아닙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낱말이 정서적 안전거리 확보입니다. 이런 정서적 안전거리를 확보할 수 있는 기준은 결국 독립성의 유지와 간섭의 배제였습니다.
서로가 지향하는 삶의 가치 인정해
3세대 가운데 우리 부부가 그 약속을 지키기가 제일 힘들었습니다. 자녀가 아무리 나이를 먹고 성가하여 나름 가족을 형성했다고 해도 부모 눈엔 역시 어린아이로 보입니다. 이 위태한 아이(?)로 보는 시각은 머리로는 옳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정서적으로 느끼기에 부족했습니다. 하루아침에 습관이 변할 것은 아니지만 정말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간섭을 하지 않으면 자녀들도 어린이가 아닌 이상 그들이 습득한 방법으로 가족을 이끌어 갈 것입니다.
우리 부부는 늘 이런 문제로 의견이 엇갈릴 때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우리 부부의 노력은 점차 자리를 잡아 갔습니다. 걱정했던 것만큼 우리 부부의 손길이 없어도 잘 지냅니다. 되돌아 보면 기우입니다. 우리 부부의 간섭이 줄어들면 상대적으로 자녀들의 창의성이 넓어집니다.
자녀들도 제가끔 나름의 가치관을 가지고 그들이나 가족들의 인생을 행복하게 살고 싶을 것입니다. 크게 패가망신할 삶이 아니라면 어떤 간섭도 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꼭 부모가 살았던 방법이 전부는 아닐 것입니다.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상호의존적인 삶이 모델입니다. 집 구조상 함께 사는 공동주택이지만 법적으로 각기 소유로 등기되어 있으니 공동경비만 갹출해서 유지보수하면 될 일입니다. 그러니 독립이 보장된 셈입니다.
정서적으로는 서로가 지향하는 삶의 가치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으로 독립성을 유지하도록 노력을 했습니다. 이런 약속을 하고 산 지가 10년이 넘었습니다. 가장 혜택을 받은 층은 당연히 우리 부부입니다. 다음이 손자녀들입니다. 한창 일할 나이의 자녀들은 샌드위치 신세입니다. 위로 부모를 모시랴 아래로 자녀들을 키우랴 눈코 뜰 사이가 없습니다. 우리 부부가 아무리 자녀들의 독립성을 유지시키고 간섭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부모라는 이름의 무게 그 자체 때문에 불편감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
가족공동체 언제까지 유지해야 하나?
이제 손자녀들도 자라 우리 부부의 손길이 미치지 않아도 될 만큼 자랐습니다. 처음 모여 살기로 했을 때 이런 약속도 했습니다. 그러면 이런 형태의 가족 공동체를 언제까지 유지해 나갈 것인가.
손자녀들이 장성하여 결혼을 하게 되면 그때 의논해서 새로운 출발을 하자고. 10년이 지나 보니 그런 시기가 점점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 동안 사회도 많이 변했습니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자녀들이 집에서 꿈을 키우고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자라 사회의 일꾼으로 자랄 것을 소원합니다.” 이 약속은 다섯 가지 약속 가운데 마지막 약속입니다.
이제 손자녀들이 결혼을 하여 새로운 가정을 이룬다면 그들이 함께 살았던 가족공동체 경험을 살려 또 다른 창의적인 삶을 살기를 바란다는 뜻도 담겨 있습니다.
상호 존중하는 독립성과 정서적 안전거리 확보는 미래의 가족들에게도 가치 있는 기준이 될 것을 확신합니다.
이근후 명예교수는
1935년생인 이근후 교수는 이화여대 교수이자 정신과 전문의로 50년간 환자를 돌보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76세의 나이에 고려사이버대학 문화학과를 최고령으로 수석 졸업하면서 화제가 된 인물이다. 30년 넘게 네팔 의료봉사, 40년 넘게 광명보육원 아이들을 돌본 이유도 별 게 없다. 봉사를 하니까 인생이 더 즐거워졌다는 게 전부다. 그는 10년 전 왼쪽 눈의 시력을 완전히 잃고 현재 당뇨, 고혈압, 통풍, 허리 디스크 등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으로 살아가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퇴임 후 사단법인 가족아카데미아를 설립하여 청소년 성 상담, 부모 교육, 노년을 위한 생애 준비 교육 등의 활동을 펼치고 있다. 네 명의 손자 손녀가 그의 인생 후반부를 새롭게 쓰도록 해준다며 가족들의 인연이란 참으로 놀랍다는 걸 나이가 들어갈수록, 세월이 흐를수록 실감한다고 했다.
◇‘청바지’를 즐겨라
얼마 전 친구들 모임에 갔더니 건배사로 '청바지(청춘은 바로 지금부터)'를 외친다. 연배가 비슷한 또래다 보니 자영업 하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일선에서 물러나 있는 상태다. 그러다 보니 그동안 일에 매달려 잃어버린 청춘에 대한 보상 욕구 심리로 ‘청바지’를 부르짖는 것 같다. 사실 그동안은 모두들 일에 매몰돼 요즈음처럼 자유 시간을 만끽하며 지내오지 못한 것 같다.
내 경우도 1975년 직장 생활을 시작해 잠시 공직, 삼성그룹 간부 임원, (주)신라밀레니엄 CEO, 일요시사 회장 등으로 일에 파묻혀 지내다 2013년부터 자유인이 되어 최근에는 매주 2회 문화 강좌 수강, 1~2회 등산 등으로 바쁘게 지내고 있다. 2013년 8월에는 백두산 서파-북파 트레킹을 계획했는데 폭우로 인한 산사태로 서파, 북파 등정 및 지하삼림 트레킹으로 만족하고 아쉬운 마음에 대신 2014년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4130m)를 트레킹하기로 하고 건기에 트레킹이 가능하기 때문에 10월 24일~11월 3일 사이에 친구 3명 등 일행 13명이 H여행사를 통해 카트만두-포카라-푼힐 전망대-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트레킹을 하게 되었다.
◇체력, 고산병, 식사 걱정할 필요 없어
안나푸르나 트레킹 계획을 세운 뒤로 히말라야에서 매일 6~9시간씩 총 80km를 팔일 동안 트레킹해야 하고 4000m 이상 고지를 오르는 데 따른 체력과 고산병 문제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체력은 나름대로 일년 넘게 매주 1~2회 4시간 내외 등산을 했기 때문에 별다른 걱정을 안 했으나 4000m 이상 고산 경험은 처음이라 고민이 돼 출발 전 병원에서 다이막스(이뇨제)와 비아그라를 처방받았다.
고산은 산소가 상대적으로 희박해 뇌에 적정한 산소 공급을 위해 혈류량을 늘려주는 비아그라와 이뇨제 이외 별다른 처방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 트레킹 과정에서 현지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어떤 때는 답답할 정도로 천천히 걷고 끼니마다 제공되는 보리차를 물통에 채워 수시로 마신 결과 처방해 갔던 약은 쓸모없는 것이 되었다. 천천히 걷고 물 많이 마시는 것이 고산병의 약인 셈이다.
또한 20여kg의 짐, 식사 등도 걱정되었으나 여행사의 편의 제공으로 걱정 없이 트레킹만 하면 되었다. 식사는 매 끼니 한식이 제공돼 잘 먹고 영양 섭취에 충분했다. 우리 일행 13명을 위해 트레커 개인 짐과 식자재 등에 포터 15명이 동원되고 식사 준비에 조리팀 5명, 전문 안내인을 비롯한 가이드 3명 등 그야말로 ‘황제 트레킹’(그러나 경비는 300만원 미만)이었다. 일행 중 50대 중반 여성이 있었는데 등산 경험도 적어 항상 맨 꼴찌에 처졌으나 마지막 가이드가 따라붙어 전속 가이드 역할을 해 트레킹을 무사히 마쳤다. 아마도 각자 등산 장구를 메고 침식을 하며 안나푸르나를 트레킹하라면 전문 산악인 이외 아무도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고봉(高峯) 무리, 일출 황금설경(黃金雪景)은 장관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트레킹은 푼힐 전망대를 경유할 경우 닷새 동안 올라가고 사흘 동안 내려오는 긴 여정이다. 카트만두에서 국내선으로 포카라(40여분 탑승)를 거쳐 버스, 지프로 두 시간 이동 후 맛보기 트레킹을 한 뒤 힐레에 도착하면서 롯지 생활과 트레킹이 시작된다.
둘쨋날 일곱 시간 트레킹 끝에 고라파니에 다다른다. 푼힐 전망대 (3210m)를 들르기 위해서다. 이튿날 새벽 네시반 기상해 한 시간에 걸쳐 등산 후 푼힐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히말라야 준봉에 비치는 일출 광경은 장관이었다. 동쪽에서 뜨는 해가 서쪽에 위치한 다울라기리(8172m), 투크체(6920m), 안나푸르나(8091m) 등 고봉들의 꼭대기 만년설을 비출 때 시시각각 눈이 반사돼 황금색으로 변해가는 모습은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광경이다. 이곳은 모든 사람들이 고봉들의 일출 황금설경 장관을 보러 온다. 하산할 때 보니 입장료를 받던 관리인들이 없어졌다. 새벽 등정객 외에는 전망대에 오르는 사람이 별로 없기 때문이란다.
아침 식사 후 트레킹을 시작해 때로는 3000개의 계단을 오르내리고 숲속 길도 지나고 만년설이 녹은 장엄한 물소리의 계곡, 수백 미터 높이의 폭포 등을 지나 츄일레 롯지, 시누와 롯지, 데우랄리 롯지 등에서 머문 후 마침내 트레킹 닷새째 저녁 때 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3700m)를 지나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4130m) 입구에 이르렀다. 불과 몇km 앞에 펼쳐지는 고봉들이 우리를 반기듯 그동안 끼었던 안개가 걷히고 속살을 드러낼 때 일행은 탄성을 질렀다.
전기 사정으로 일찍 잠자리에 든 후 이튿날 새벽 다섯시에 기상해 몇 백 미터 올라가 일출이 비추는 고봉을 보는 것은 또 다른 장관이었다. 푼힐 전망대는 일출시 멀리서 히말라야 황금 고봉을 감상하는 데 비해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는 바로 지척에서 안나푸르나(8091m), 안나푸르나 사우스 피크(7219m), 강가푸르나(7454m), 안나푸르나III(7555m), 네팔 성산(聖山,등정 불허)인 마차푸차레(6997m) 등의 고봉들이 황금빛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가까이서 고개를 들고 지켜보는 게 또 다른 매력이다.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는 분지로 돼 있어 가장 가까이 한 곳에서 여러 고봉을 감상할 수 있는 히말라야 가운데 유일한 곳이라서 많은 트레커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하산하는 길은 발길이 한결 가볍다. 하산이라 해도 사흘 내내 오르락 내리락 해야 돼 몸은 고되지만 마음은 가뿐하다.
등정할 때 하산하는 트레커들의 발걸음이 가벼워 부러워 보였는데 지금 등정하는 사람들의 우리를 바라보는 심정이 비슷해 보였다. 밤부 롯지, 지누단다 롯지 등에서 머문 뒤 사흘 하산 트레킹을 마치게 되었다. 지누단다에서 노천 온천과 저녁 식사 때의 염소 수육 맛이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다.
포카라에서 국내선을 타고 카트만두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창으로 옆을 보니 히말라야의 만년설에 뒤덮여 줄지어선 고봉들이 정겹게 느껴졌다.
◇궁(窮)하면 통(通)한다
카트만두 도착 첫날과 귀국 전날 밤은 카트만두 최고급 오성 호텔로 과거 궁전이었던 소알티 크라운 플라자 호텔에서 머물렀다. 그러나 둘쨋 날부터는 고산지대여서 숙소가 롯지로 열악해 2~4인실에 투숙하고 공동 변소와 샤워장을 사용해야 했다. 공동 샤워장은 일 달러 지불하면 더운 물을 이용할 수 있으나 고산에서는 머리를 감거나 샤워를 해 자칫 열을 빼앗기면 감기나 고산병에 걸리기 쉽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사전 준비했던 물티슈를 활용해 얼굴, 손발 등 온몸을 씻고 심지어 친구에게 물티슈로 등도 닦아달라고 해 매일 '물티슈 사워'를 했다.
그리고 첫날은 면도를 했으나 둘쨋 날부터는 도저히 면도하기 힘들어 수염을 기르기로 하였다. 일주일 기르니 제법 멋있게 자라 주변에서 ‘만화가 이모(某) 씨 같다’면서 계속 기르라고 권유하기도 하였다. 또한 옷도 등산복, 평상복, 속옷 등을 갈아입을 요량으로 많이 준비했으나 초반 하루 이틀 이외 별로 갈아입지 않게 되었다. 귀찮기도 했지만 땀을 흘려도 냄새가 거의 나지 않았고 멋내기도 필요 없었다. 준비해간 체육복은 만사형통이었다.
롯지에 도착해 간편복인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잠잘 때도 보온을 위해 체육복을 입고 침낭에 드는 것이 매일 연속이었다. 그야말로 ‘노숙자’같은 생활이었다.
한 번은 등산 스틱 한 개가 고장나 ‘장애 스틱’이 되어 다소 불편했는데 친구가 맥가이버칼로 등산로 주변에 널려 있는 대나무로 지팡이를 만들어줘 트레킹이 끝날 때까지 ‘대나무 스틱’을 요긴하게 사용하였다.
◇안분지족(安分知足)이 행복의 근원
네팔은 1인당 국민소득이 750달러로 가난한 나라이다. 카트만두 이외 거주 국민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해 트레킹하다 보면 수십 계단의 다랑이 논(주로 벼, 조 농사)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밖에 일부 국민이 트레킹 가이드, 포터, 셰르파(전문 산악인 가이드) 등 관광 관련업에 종사하고 있다. 일반 트레킹 포터들이 일주일 동안 짐을 져나르고 몇 십 달러를 받는다는 얘기를 듣고 눈물이 핑돌았다. 이마저도 고루 나누기 위해 마을별로 할당하고 순번을 정해 고용한다고 한다.
2014년 10월18일 에베레스트 남동루트 쿰부 얼음폭포(5800m) 눈사태로 사망 14명, 실종 3명 사고 당시 셰르파 사망 보상금이 1인당 415달러에 불과해 셰르파 300여명이 파업을 벌인 일도 있다고 한다. 그렇더라도 네팔인들은 대체로 낙천적이다. 40여 kg의 무거운 짐을 이마에 메고 3000 계단을 오르내리느라 힘들겠지만 ‘나마스테(Welcome)’인사하면 웃으면서 ‘나마스테’한다. 저녁 식사 때 포터, 가이드, 조리팀 등 일행은 별도로 식사를 하는데 식사 전, 식사 중, 식사 후 그들 나름의 노래를 부르며 즐긴다.
트레킹하면서 마을을 지날 때 어른, 어린 아이들을 보면 항상 밝게 웃는 낯이고 얼굴이 평화롭다. 카트만두만 해도 거리가 무질서하게 복잡하고 매연이 심해 몇 분만 걸어가도 목구멍이 따가울 정도인데 그래도 네팔인들은 잘도 참고 견디며 산다.
그동안 보도 등에 따르면 가난한 부탄, 네팔 같은 나라 국민들의 행복지수가 상대적으로 높다고 한다.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며 큰 욕심 없이 주변 사람들과 비슷한 처지에서 하루 하루 만족스럽게 사는 것이 비결 아닐까?
노자(老子)는 소우주(小宇宙)와 대우주(大宇宙)를 설파하였다. 대우주는 우주의 생성, 존재, 법칙 등 진리로 인간이 인식하든 안 하든 존재하는 것이고 소우주는 인간 각자 거울 속에 비친 인식으로 소우주는 각자의 지식, 경험, 환경에 따라 다르게 인식한다.
네팔인들은 주변 환경이 열악하고 생활 수준 및 문명 정도가 낮은 데다 전기 및 통신 제약으로 받아들이는 정보에 한계가 있을 뿐더러 개별 수준 차이도 별로 없어 그 정도 생활에서 안분지족(安分知足)하는 것 아닌가 생각해본다. 잠시나마 번뇌에서 벗어나 어떻든 그네들의 참삶의 지혜를 맛보면서 오늘 나에게 주어진 환경과 현실에 감사하며 욕심을 줄이고 남과 더불어 매일 매일 충실하고 즐겁게 살아갈 것을 기약해본다.
오늘 하루가 얼마나 소중한 날인가? 19세기 미국의 유명한 시인이자 철학자인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이 말한 ‘당신이 쓸모없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 누군가가 간절히 원하던 내일이다(Today that you wasted always is tomorrow that the one who died yesterday wanted to have so desperately.)’라는 경구가 새삼 귓전을 때린다.
△ 변종경(65) 일요시사 전 회장은 서울대학교를 졸업(1973)한 뒤 잠시 공직을 거쳐 미국 유학, UCLA 대학원에서 석사 취득(1985) 후 1987년 삼성물산(주) 조사부장, 경영기획부장, 1994년 삼성그룹 비서실 기획 담당 임원(이사,상무,전무), 2004년 삼성 사회공헌위원회 부사장 등 기획 분야에 주로 종사해 '기획통'으로 알려져 있다. 2007년 삼부그룹 계열 ㈜신라밀레니엄 대표이사에 취임해 경영 혁신을 통해 2011년 지식경제부, 중앙일보 주관 '한국을 빛낸 창조 경영인' 대상(혁신 경영 부문)을 수상하였고 2012년 일요시사 회장으로서 언론사 경영에 참여하는 등 경영자로서 경륜을 쌓기도 하였으며 2013년 자유인이 된 뒤 등산, 사진 등 다양한 취미 활동으로 그동안 못 다한 여가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해외 CEO들이 우리나라에 올 때마다 놀라는 장면들이 있다. 바로 아침 7시 부터 강연을 듣고 토론을 하는 게 일종의 문화가 된 한국 경영자들의 모습이다. 단순히 인맥을 쌓는 게 아닌, 800~900여 명의 경영자들이 모여서 열띤 배움을 추구하는 모습은 에릭 슈미트 구글 회장과 같은 세계적 CEO들에게도 인상적인 장면으로 남은 바 있다. 세계미래포럼(이사장 이영탁) 조찬회에서 만난 두 모자(母子)의 모습도 그런 강렬한 아우라가 있었다. 앞 좌석에 앉아 강연에 귀 기울이며 바쁘게 메모를 하는 그 모습이 만들어지기 위해선 어떤 동기가 있는 것일까?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인상이 비범해 보이는, 보통 할머니 같지 않은 느낌. 1960년생인 아들과 함께 세계미래포럼 조찬회에 참석한 1938년 생 이득해 씨는 첫눈에도 보통이 아니라는 인상을 줬다. 그 인상처럼, 그녀는 범상치 않은 삶을 갖고 있었다.
“부산에서 태어나서 대학은 서울에서 나왔어요. 법을 공부했는데, 친구들은 전교 1, 2등 하던 내가 판사나 검사가 안 된 것에 대해 의구심이 많아요. 동생들 키우느라 그랬죠. 그런데 내 자식들은 내가 법 공부 계속했으면 시집도 안 가고 일하다가 정의를 위해 싸우는 투쟁가가 됐을 거라고, 하나님이 도운 거라고 해요.”
자신감, 몰입과 고지식함, 그리고 승부욕. 그녀도 인정하는 자신의 특징이었다.
“어떤 직업을 해도 내 적성에 맞아요. 수학학원, 레스토랑… 한솥도시락은 전국에 200개 체인이 있었는데, 거기서도 1, 2등을 했었죠.”
몰입·강직·승부욕으로 인생을 경영하다
그녀는 현재 광고회사를 경영하고 있다고 한다. 4년 전에 세상을 떠난 남편은 물수건을 단체에 공급하는 사업을 했었다. 말하자면 부부가 함께 경영자였던 셈이다.
“남편 집안이 잘 살았던 건 아니고, 저와 같이 맨땅에 일군 거예요. 애초에 결혼할 때 양쪽 집에서 굉장히 반대가 심했습니다. 우리 집에서는 내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보내기 싫었고, 시댁에서는 내가 예수를 믿는다고 아주 싫어했어요. 좀 내가 키도 작았고…. 이해돼요. 그런데 막상 결혼하니 내가 시어머니한테 잘못한 적 없고 시어머니도 나에게 대놓고 뭐라 하신 적 없어요. 하긴 야단을 쳐도 내가 뭐를 모르니까. 그냥 칠푼이같이 해맑았던 거죠.”
독실한 크리스찬으로서 그녀는 네팔에서 선교사업과 함께 교회를 짓고 있다. 힌두교 쪽에서 작업을 저지해서 힘들지만 내년에 완공될 예정이라고 한다.
“4년 전에는 네팔 아이 세 명을 한국에 데려와서 공부시켰어요. 중학교 아이를 고등학교에 보내고 세 명 다 대학도 보냈어요.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간 아이가 있는데, 걔는 자기 나라 가면대통령도 할 수 있겠죠. 그 아이들을 무섭게 키웠죠. 내 아이처럼. 그래서인지 엄마라고 불러요.”(웃음)
공부는 하면 할수록 자신을 발견하게 만든다
“공부는 할수록 나를 발견하는 일이죠. 공부는 하고 싶은 게 아니고, 해야할 거예요.” 그녀는 앞으로 배우고 싶은 분야로 미래가 들어가는 미래 지향적인 학문이나 건강 관련 분야를 꼽았다. 나이가 80이 다 되어 가는데 공부를 하다보면 피곤하지 않을까?
“피곤해도 공부할 땐 몰라요. 졸면서도 재밌고. 뭐 존 적은 없는데, 내가 피곤해도 새벽부터 내내 공부하니까.”
공부는 그녀의 에너지 넘치는 삶의 동력원이었다. 평생교육, 경영자과정, 일본어, 네팔어, 영어 등등, 그녀의 지적 욕구는 끝이 없어 보였다. 그녀의 그런 기질은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일지도 모른다.
“제 어머니가 동생들이 많아서, 동생을 업고 학교를 갔다고 해요. 가서는 당시에 문도 없던 교실의 밖에서 안을 쳐다보면서 공부하셨다고. 그리고 동네에 간이역이 있는데 거기에 앉아서 사람들이 시계를 보고 ‘몇 시 몇 분이네’ 하면 그걸 보고 시계 보는 법을 익히셨다고 들었습니다. 당시가 일제 때여서 어머니가 일본 사람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다보니까 너무 잘하게 돼서 일본 부대에서 통역을 맡았었어요. 거기에 저를 항상 데리고 다니셨죠. 그때 부대에 가면 먹을 게 많으니까 이것저것 주는데 저는 누가 주는 건 안 먹고 어머니가 손에 쥐어주는 것만 먹었대요. 지금도 좀 그런 성격이 있긴 합니다.
너무 가난하니까 어머니가 올 때 통에 짬밥을 한 동이 이고 오시는데, 그 속엔 먹던 군인들 침도 들어 있고 코도 있었지만 그냥 끓여서 먹었어요. 근데 내가 그걸 먹을 수 있겠어요? 그걸 봤는데…. 못 먹으니까 난 안 먹었고 그래서 키가 안 자란 거 같아요.”
그녀는 자신의 교육비를 한 달에 백만 원을 쓰고 있단다. 많이 들 땐 300만 원도 드는데, 연평균 1200만~1500만 원 가량이라고, 가장 많이 들어가는 게 교육비, 그리고 엔터테인먼트, 문화비, 경조사비 순. 한 달 용돈은 1000만 원 정도라고 한다.
배움에 대한 아낌없는 투자와 후회 없는 삶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는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돌이킬 때, 이런 삶을 살았다면 좋았을 걸, 하고 후회되는 점은 전혀 없다고 단언했다. “꿈을 이루지 못한 아쉬움은 없습니다. 과거로 돌아가라 그러면 싫어요. 지금이 좋다기보다는 그렇게 살아올 자신이 없어요. 너무 힘들게 살아왔고, 그렇게 가난했고, 하지만 그래도 한 번도 부잣집 아이를 부러워했다거나 하진 않았어요. 내 공부하고 내가 하는 것들만 열심히 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녀는 최선을 다하지 말라고 3남2녀 자식들에게 얘기한다고 한다.
“‘차선만 다해라, 최선을 다하면 사람이 간다’라고 아이들에게 말합니다. 최선을 다하라는 말은 누군가에게 부탁하는 말이 돼버리는 거 같아요. 그보다 저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말을 믿거든요. 그걸 위한 차선입니다.”
글 세계음식문화연구원 양향자 이사장
네팔은 중국 티베트 지방과 인도 사이에 위치한 동서로 가느다란 나라로서, 정식명칭은 네팔왕국이다. 열대·온대 기후를 띠고, 히말라야의 산악 민족·티베트인·티베트계 네팔인들이 살고 있으며, 변화가 심한 자연환경과 복잡한 민족·종교(힌두교와 라마교 등)를 가진다. 이와 같이 복잡한 풍토 속에서 힌두교의 영향을 받은 인도 요리와 라마교의 영향을 받은 티베트 요리가 탄생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힌두교를 믿고 있는데, 힌두교도는 소를 신성하게 여기므로 쇠고기를 절대 먹지 않는다. 식사 전 후에는 반드시 손을 씻어야 하고, 음식은 손이나 젓가락으로 먹는데, 왼손은 부정하다고 여겨 사용하지 않는다.
아열대 기후의 연중농사가 가능한 네팔은 일 년 내내 신선한 야채와 과일이 풍성하다. 특히, 네팔 현지음식뿐만 아니라 네와르, 티벳, 중국, 인도의 다양한 현지음식을 맛볼 수 있으며 야크(네팔 또는 티벳에 사는 소의 일종)우유로 만든 네팔 특산 치즈는 품질이 우수하기로 본토 유럽인들이 손꼽고 있다.
◇음식 문화의 특징
네팔의 주식은 쌀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보통 하루에 식사는 2끼로 아침과 저녁에 밥을 먹는다. 하지만 아침을 먹기 전에는 모닝 티(Morning Tea)를 마시고, 점심때는 빵이나 만두 등 여러 가지 반찬에다가 찌우라(Beaten Rice)를 먹는다. 밥과 콩으로 만든 수프, 야채로 만든 반찬 그리고 피클이 나오며, 이것은 네팔말로 달(콩스프), 밧(익힌 밥), 떠러까리(야채반찬)로 구성된다.
이것을 핫(손)이나 쩜자(숟가락)을 이용하여 먹는다. 예전에는 거의 모든 사람이 손으로 밥을 먹었지만 서구의 영향으로 점차 숟가락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달밧은 손으로 먹어야 맛있다. 달밧은 달과 떠러까리 그리고 밥이 잘 비벼져야 제 맛을 내기 때문이다.
아침과 저녁은 잘 먹고 점심은 간단하게 먹으며 계급과 지역에 따라 음식맛과 음식 종류도 약간 다르다. 즉, 열대 지방 사람들은 짜고 맵게 먹지만 추운 지방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달밧은 밥과 야채 그리고 반찬뿐만 아니라 고기반찬도 가끔 같이 먹는다. 고기는 주로 염소고기, 닭고기, 물소고기, 양고기, 돼지고기는 먹지만 소고기는 못 먹는다. 힌두교 국가인 네팔은 헌법의 규정상 소들을 국가적 동물로 신성시하기 때문이다. 만약 소를 잡아먹으면 헌법에 위반되어 큰 벌금이 부과된다. 물론 돼지고기도 이슬람교를 믿는 자들은 못 먹지만 힌두교 사람들 중에 하급 사람들은 먹는다. 또한 승려들은 고기를 못 먹으며, 상급 사람들은 물소고기나 닭고기를 못 먹는다.
◇네팔의 식사 예절
네팔은 인도의 카스트 제도를 가지고 있어 높은 카스트 사람들이 낮은 카스트 사람들하고 같은 테이블에서 밥을 먹지 못한다. 높은 카스트 사람의 집에서 낮은 카스트 사람이 밥을 먹게 된 경우에는 식당 밖에서 먹게 하며, 이 사람이 다 먹고 나서 그릇을 다 깨끗하게 씻어서 갖다 준다. 그런데 그릇을 아무리 깨끗하게 씻어서 돌려줘도 받는 사람이 다시 한 번 씻는다.
이렇듯 네팔에서는 음식을 먹을 때조차 엄격한 예절을 지키는 나라이다. 신분적인 위아래를 나누는 것 외에도 나이에 따라 예의를 갖춘다. 가령 같은 테이블에서 밥을 먹을 경우에 나이가 많은 사람이 먼저 식사를 시작해야 다른 사람들이 식사를 시작할 수 있고, 다 먹고 나서도 순서대로 나이가 많은 사람부터 그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씻는다. 또한 다른 사람의 그릇에 손이 닿으면 안 된다.
◇네팔 음식 즐기기
#달밧타카리(Daal Bhat Tarkari): 국(달), 밥(밧), 커리(타카리)가 함께 나오는 음식이다. 네팔인의 식탁은 항상 이 음식으로 준비된다. 마를 갈아 넣은 국은 맛있다.
#탄두리 (Tanduri): 맵게 절인 고기를 숯불에 천천히 구워 먹는 음식으로 보통은 쌀밥과 함께 먹는다.
#모모: 네팔식 만두로 모양도 맛도 우리나라의 만두와 거의 흡사하다.
#속티와: 밥에 섞어 먹는 음식으로 토마토를 비롯한 여러 가지 야채를 재료로 하는 산지 마을 사람들이 즐겨 먹는 음식이다.
#파룰라: 맵게 절인 물 쇠고기를 숯불에 구워 생강즙을 많이 넣은 양념에 버무려 먹는 음식이다.
#데도: 볶은 옥수수를 넣어 끓이는 죽이다.
◇네팔의 대표적인 추천 요리 - 달밧타카리
커피녹두200g,야채 끓인 물 4C,다진 마늘 2TS,터메릭 1Ts,버터 2TS,머스터드분말 1/3Ts,커리가루 2/3Ts,마른고추(씨뺀 것) 4개,다진 토마토 1개, 다진 양파 1개,소금3/4Ts
1.녹두는 조리질하며 돌을 잘 골라내 씻는다.
2.야채 끓인 물에 녹두, 다진 마늘, 터메릭을 넣고 15분 동안 녹두가 부드러워 지도록 끓인다. 야채 물은 냉장고에서 쓰다 남은 양파, 양배추, 감자, 샐러리 등이 있으면 끓여 건더기를 건져낸 뒤 쓰면 된다.
3.방망이로 익힌 녹두를 찧는다. 알갱이가 씹히도록 하려면 몇 번만 찧고, 크림 상태로 만들려면 입자가 부드러워질 때까지 찧는다.
4.팬을 달궈서 버터를 녹여 머스터드 분말에 커리 가루와 마른 고추를 넣어 볶아 향을 낸다.
5.마른 고추는 건져낸 다음 양파를 연한 갈색이 나도록 볶은 후 토마토를 넣고 볶는다.
6.녹두를 빻은 것에 (5)를 넣고 끓이면서 소금으로 간을 맞춘다.
국내 최초로 개방병동을 시행하고 한국정신치료학회를 설립하는 등 정신과 분야에 큰 족적을 남긴 이근후 이화여대 명예교수의 소탈하고 편안한 얼굴은 맘씨 넒은 이웃집 할아버지 같았다.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긴 후 ‘인생은 덤’이라는 생각으로 산다는 철학을 갖게 된 이 교수는 자기 삶의 능숙한 선장으로서의 노하우를 정리한 책 를 베스트셀러로 올려놨다. 서울 신영동 북한산 자락에 있는 ‘가족아카데미아’에서 이 교수를 만나 노년을 재미있게 보내는 지혜들을 들어봤다.
인터뷰 송광섭 편집장 정리 김영순 기자
노년은 누구에게나 온다.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할 삶의 한 과정이다. 그러나 자연스럽다고 생각해도, 나이가 드는 건 역시 슬픈일이다. 특히 나이듦을 슬프게 만드는 건 외로움이다. 이근후 이화여대 명예교수는 외로움에 대한 사전 대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나이가 들면 이타심을 뛰어 넘는 이기심이 있어야
“노년의 삶을 가장 어렵게 만드는 것이 외로움입니다. 외로움의 대비책은 바로 ‘적응’이죠. 살아남기 위한 욕구가 바로 적응입니다. 부모 자식 간에도 적응이 필요합니다. 가족이란 내가 편하고자 자식을 가르치고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서로 적응해 나가기 위한 몸부림, 즉 ‘합의된 언어’를 만들어서 살아가기 마련이거든요. 그러니 내가 얼마나 잘 살았는지 어떤 인생을 살고 있는지 궁금하면 내가 지금 ‘어떤 언어’를 쓰고 있는지 살펴 봐야 합니다.”
자신이 어떤 말을 사용하고 있는지 돌아보라는 이 교수의 충고는 다가오는 상황에 대해 보다 적극적으로 스스로가 임해야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를 뒷받침하듯, 이 교수는 “나이가 들면 내가 사람을 찾아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살다보면 아무도 나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 시기가 옵니다. 외로움을 없애는 가장 쉬운 방법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도 능력이에요.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터득하고 학습하고 실천하면서 길러집니다. 나이를 먹었다고 다른 사람에게 대접받고 그쪽에서 내게 먼저 다가오기를 바란다면 점점 더 외로워질 뿐입니다.”
그는 ‘자기를 위한 적극성’의 실천으로 이타심을 넘어선 이기심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나이 들수록 외롭지 않으려거든 온전한 자기사랑으로 출발해야 한다. 남의 보살핌 없이 자기 앞가림을 잘하기 위해서 이기심이 필요하다. 결국 남을 불편하게 하지 않는, 그럼으로써 나를 편하게 하는 동시에 나를 사랑하는 길임을…”
존경받으려 애쓰는 건 인위적이고 즐겁지 않은 일
타인에게 사랑받는다는 것은 존경받는 일과 흡사하다. 존경받기 위해서 시니어는 어떻게 해야 할까?
“존경받는 행동을 하면 존경받는 것이고 존경받을 짓을 하지 않았으면 못 받는 겁니다. 존경받자고 어찌 한다는 건 인위적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그리고 인위적인 건 즐겁지 않은 일입니다.”
이 교수는 젊은 후배들을 존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젊은이들은 계속 변화하고 있기에, 자신이 배우기 위해서라도 젊은이에게 자세를 낮춰야 한다는 것이다.
“‘요즘 얘들은…, 내가 젊었을 때는, 너도 늙어봐라, 언제까지 젊은 줄 아냐’ 이런 얘기나 하며 자기 경험과 기억만 옳다고 고집할 일이 아닙니다. 시대가 바뀌었음을 인정해야 해요. ‘젊은 세대가 내 선생이다’라 생각하면 존중하게 됩니다.”
이 교수는 자신이 현직에 있을 때는 제자들의 스승이었지만, 퇴임 후에는 “여러분들이 나의 스승이 되어 많은 정보를 주기 바란다”고 고마움을 전한 적이 있다고 한다. 사람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달라지고 변화한다. 그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자신의 ‘쓸모’를 발견할 줄 아는 것도 나이를 먹는 기술 중의 하나라는 게 이 교수의 지론이었다.
“젊은 세대에게 대접받으려 하기보다는 차라리 아부하는 게 좋습니다. 비굴해지라는 게 아닙니다. 젊은이들 관심사에 동참하고 공감하려 애쓰라는 것입니다.”
자식과 갈등이 없을 리 없어… 연습이 필요
이 교수의 집에는 3대 13명이 한지붕 아래에서 사는 걸로도 유명하다. 21세기에 극히 드문 이 크고 복잡한 대가족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공자가 말했습니다. ‘젊어서는 부모에게 의지하고 늙어서는 자식에게 의지하라.’ 모든 것을 자식에게 내맡기고 기대어 살라는 뜻이 아니라 자식에게 의지하라는 것은 자식을 존중하라는 뜻입니다. 자식이 부모에게서 독립하려고 애를 쓰듯이 부모도 어느 순간부터는 자식에게서 독립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해요. 그래서 우리 가족은 철칙이 있습니다. 상호 불간섭 주의와 독립성 보장입니다.”
노후를 힘들게 하는 원인 중 하나가 자식과의 보이지 않는 감정 싸움이다. 갈등이 없기를 바라는 것은 불가능 자체를 바라는 것이라는 게 이 교수의 생각이었다. 이 교수가 큰 며느리에게 강조한 게 바로 ‘거절하는 법’이었다고 한다. ‘노’라고 말해야 할 때는 솔직하게 ‘노’라고 말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싫어요”보다는 “안돼요”라는 말을 할 수 있도록 연습이 필요했다. 시부모와 며느리는 상하관계가 아니라 인간 대 인간으로 통해야 한다는 게 이 교수의 지론이었다. 그러나 누구나 거절은 불편하다. 그래서 연습이 필요하다는 것. 그는 따라서 효도가 아니라 '효부(孝父)-효모(孝母)'가 필요한 시대라고 말한다. 예전에는 자식 입장에서 부모에게 효도를 하는 것이 강조됐지만 지금은 거꾸로 부모가 자식을 공경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돼야 한다는 얘기다.
이 교수는 손주 녀석들에게는 이메일로 소통한다. 요즘 애들은 벅차다. 시대에 못 따라간다. 현실적인 정보를 알고 대한다면 가정안에서 조부모의 자리는 더욱 단단해진다는 것.
“손자 손녀와 어울리면 최신 문화와 사고방식을 접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어요. 내 어릴 적 생각과 행동 성장 과정, 에피소드, 추억거리, 아픔, 혼난 일 등을 상세히 적어서 메일을 보낸다. 그러다 보면 손주들의 의견과 생각들을 교류하게 되고 함께 마음을 읽어가는 과정에서 공감대가 생깁니다. 4명의 손주들이 답장을 써주면 원고료(?)를 지급해요. 1명당 무려 100만원 씩,,,,이런 나를 멋쟁이라고 외부에서는 보겠지만 나는 살아남기 위해 하는 것이죠.”(하하)
절박한 최선이 아닌 여유로운 차선을 선택하자
“저는 ‘최선’이라는 말이 싫습니다. 최선은 내가 가진 100을 다 쓰라는 겁니다. 그런데 차선이라 해서 적당히 하다가 내키는 대로 그만두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무엇이든 완벽에 매달리기 보다 잘하는 정도에서 즐기고 만족한다는 뜻입니다.”
이 교수는 50년간 환자를 돌보며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 와중에 30년 넘게 네팔에 의료봉사를 하고, 40년 동안이나 광명보육원 아이들을 돌보았다. 또한 76세의 나이에 사이버대학에서 늦깎이로 공부를 하여 문화학과를 최고령 수석으로 졸업해 세간의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 교수는 이렇게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늘 자신의 능력을 30% 가량 아껴 두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1등을 하기 위해 바닥까지 짜내다 보면 옆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풍경의 즐거움도 인생의 다른 가치도 놓치게 되죠. 최고가 되려는 노력을 조금 덜어 내어 여유를 갖고 살면 많은 것을 보고 느끼며 풍요롭게 즐길 수 있습니다. 그걸 잘 조율할 줄 아는 것이 진짜 어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