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 좋지 아니한가. 무표정하지도 소란하게 호탕하지도 않은, 빙그레 웃는 남도의 섬. 섬은 그렇게 여행자를 맞는다. 뭍과 다르게 섬을 달리다 보면 바다가 있고, 조금 더 달리면 물 빠진 뻘이 나타나고, 저 건너편으로는 또 다른 작은 섬이 오도카니 물속에 잠겨 있다. 바닷바람에 실려오는 비릿한 갯내음이 벌써부터 가슴을 뛰게 한다.
해신(海神) 장보고를 가장 먼저 떠올리게 하는 섬, 완도. 통일신라시대 이 땅의 해상로를 통해 국제무역을 주도했던 장보고의 이야기는 드라마 ‘해신’이 아니어도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역사 이야기다. 이 섬에서 장보고 찾기는 도무지 어려울 게 없다. 그러다 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이른바 ‘장며들기’에 빠져드는 곳이 완도다.
장보고 해상무역의 흔적들, 완도 청해진 유적지
장보고의 활동 근거지 청해진 유적지가 있는 장도를 가려면 완도 동쪽의 장좌리 앞바다로 가야 한다. 한때는 마을에서 하루 두 차례의 썰물 때만 걸어 들어갈 수 있었지만 지금은 장도 목교가 놓여 있어서 출입이 자유롭다. 특히 바다에 물이 빠졌을 때 갯벌에 나타나는 ‘목책’은 중요한 역사적 흔적이다.
목책은 청해진 방비를 위해 굵은 통나무를 섬 둘레에 박아놓은 것으로, 지금도 1000여 개의 흔적을 볼 수 있다. 무심히 바닥을 들여다보면 잘 알 수 없는데, 찾기 쉽게 깃발을 꽂아놓은 친절함. 물 빠진 갯벌에선 살아서 꿈틀거리는 갯고동을 흔하게 볼 수 있다. 부디 오염되지 않은 천연의 땅으로 오래오래 유지되기를.
청해진 유적지 쪽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6m 깊이의 우물을 지나게 된다. 바닷속 지하수를 길어 올려 청해진 군단의 식수원으로 이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위쪽으로 올라가면 청해진 터였던 곳의 전진기지와 초소 역할을 했던 모습도 남아 있어서 그 시절을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다. 이 지역에 청해진을 설치한 장보고는 신라, 일본, 당나라 3국의 해상무역권을 장악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한적한 분위기의 바다 풍경과 역사적 사실에 다가가는 의미 있는 시간이다. 무엇보다도 자연 속의 완도를 피부로 느낀다.
장보고 대사의 해상 활동과 일대기, 장보고기념관
청해진 옛 터에 해상왕 장보고의 일대기를 전시와 영상으로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기념관이 설립돼 바다를 향한 모습이 고즈넉하다. 상설전시관과 중앙홀 전시관이 있어 장보고 대사의 흔적을 만날 수 있으며, 체험형 입체 관람 시스템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역사적인 현장이나 유적지, 기록물 전시장을 ‘아이들과 함께 가보면 좋은 곳’이라고 소개하는 걸 자주 보게 된다. 남녀노소 누구라도 보고 배우고 즐길 이 모든 것들이 그저 ‘교육적’이어서 아이들에게 보여주면 좋은 곳이라고만 하니 이 말이 당키나 한가.
죽청리 쪽으로 가면 장보고 동상이 우뚝 서 있는 장보고 어린이놀이공원이 있다. 장보고라는 역사적 테마로 감성과 호기심을 유발하는 교육의 장이기도 하다. 거대한 동상 아래로 장보고의 유년기부터 활동기의 기록이 전시된 전시관이 있으니 꼼꼼히 살펴보는 것도 뜻깊다. 완도는 장보고의 발자취를 따라 여행하는 묘미를 빠뜨릴 수 없는 곳이다.
완도의 랜드마크, 완도타워
당일 여행에는 완도타워가 더욱 필요하다. 높은 타워에 올라 완도를 한꺼번에 바라볼 수 있으니, 이럴 땐 슬기로운 여행법이다. 완만한 속도의 모노레일을 타고 올라가노라면 양옆의 산책로와 다도해 일출공원을 한꺼번에 즐길 수 있다.
높이 오를수록 완도의 면면이 속속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바로 앞바다에 보이는 동그랗고 예쁜 섬은 천연기념물 28호인 ‘주도’로 상록수림이 빽빽하다. 녹음이 싱그러운 숲과 선명한 빛깔의 꽃들, 바다를 둘러싼 완도를 바라보면서 타워에 다다른다.
타워까지 이르는 길목에 자리한 중앙광장의 장미터널이 환영하듯 화사하다. 산책하는 걸음으로 언덕배기를 오르면서 고개를 돌려보면 야트막한 완도 시내의 풍경이 아기자기하다. 이어서 가슴이 탁 트이는 전망대. 360도 파노라마로 구성되어 한 바퀴 돌면 완도의 풍경을 한눈에 다 담을 수 있다. 크고 작은 섬과 다리들, 멀리 영암의 월출산, 전복 양식장, 봉수대가 눈앞에 있다. 야간에는 환상적인 조명 레이저쇼가 진행되고, 날씨에 따라 제주도가 보인다는 높이다.
타워 주변엔 현장 수업 중인 아이들이 재잘대며 선생님을 따라다니고 있었다. 땀 뻘뻘 흘리며 아이들을 인솔하면서 완도 역사를 가르치는 젊은 선생님의 열정에 몇 번씩 바라보게 된다. 선생님도 멋지고 아이들도 그저 예쁘다.
여름 한낮, 덥다. 완도에서 맛볼 수 있는 비파주스가 있다. 연한 주황색의 비파는 아열대 과일로 완도의 특산물이다. ‘비파나무 한 그루 있으면 아픈 사람이 없다’라는 옛말이 있듯이 건강에 좋은 과일이라고 한다. 살구 비슷한 모양에 복숭아와 감의 중간인 듯 부드러운 맛이다. 짚라인 탑승장 옆의 완도타워 매점에서 얼음 가득 넣고 만든 비파주스 한 잔으로 시원하게 갈증을 날리고~.
깊은 숲의 기운, 완도수목원
전남 유일의 난대림 수목원이다. 수목원이 다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주변을 둘러싼 산을 포함해서 상왕봉 아래 조성된 수목원이 어마어마한 규모인 걸 비로소 알고 놀랄 수밖에. 2000ha의 광활한 면적. 거의 축구장 2000개 넓이라고 하니 입이 떡 벌어진다. 동식물과 상록활엽수로는 세계 최대 집단 자생지다.
완도수목원은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아름다운 공존상’을 수상한 숲이기도 하다. 산책 삼아 걷기 좋은 깨끔길은 ‘동네 앞의 나지막한 산’이라는 전라도 사투리다. 푸르름으로 울창해서 피톤치드 속에 갇힌 듯하다. 빼어난 풍치의 수목원 안에는 산림전시관, 열대·아열대 온실, 동백숲, 관찰로, 수생식물원, 전망대, 야영장, 농구장 등이 갖추어져 있어서 돌아보기만 해도 시간이 한참 걸린다.
난대림 산길을 몇 군데 걸으며 둘러보고 산림전시관을 돌아보았는데, 당일 나들이다 보니 아주 조금 맛만 본 셈이다. 엄청난 넓이, 한나절로는 어림없다. 하루나 이틀쯤 피톤치드 가득한 숲의 기운을 받으며 느릿하게 ‘숲멍’도 하면서 푹 쉬는 여유를 갖는다면 실로 멋진 힐링이 될 듯하다.
완도의 맛, 전복거리
섬을 떠나기 전 들렀다 가야 할 곳이 있다. 완도 하면 무엇보다 전복 아니던가. 바다의 산삼이라고 불릴 정도로 맛과 영양의 최고 식품. 전복거리를 걸으며 수산물과 건어물을 구경하다 구입하기도 하고, 수협 수산시장의 살아 있는 삶의 현장도 느끼는 시간이다. 김이나 전복 등 수산물을 현장에서 구입한 후 가족이 있는 집으로 즉시 택배송을 하는 모습도 눈에 띈다. 코로나19의 여파인지 거리도 한산하고 수산물시장도 북적이지 않았다. 어서 빨리 소란스럽고 붐비는 파시를 이룬다면 좋으련만.
때가 되면 기분 좋게 허기를 채워야 한다. 완도에선 당연히 신선한 생선구이 밥상이다. 푸짐하게 생선을 구워와 직원이 두툼한 살점까지 발라주고 간다. 입안에서 느껴지는 생선의 신선도가 확실히 다르다. 된장에 해초류를 넣고 끓인 갯국의 시원한 맛도 독특하다. 또한 전복 특산지 완도답게 전복 하나가 통째로 고스란히 들어간 전복빵이 있다. 장보고빵이라고도 한다.
빙그레 웃는 섬 완도의 푸른 여름
빙그레 웃는 섬답게 걷다 보면 빙그레식당, 빙그레공원, 빙그레마트, 빙그레… 이런 상호들이 흔하다. 절로 빙그레 미소 짓게 하는 섬. 당일로 가볍게 다녀왔지만, 여유 있게 며칠 정도 완도의 푸르고 느린 풍경 속에서 자연을 벗 삼아 유유자적 지낼 수 있다면 더없이 충만한 휴식이 될 것이다. 하루 코스로도 버겁지 않았던 스마일의 섬 완도. 그 섬은 지금 푸름에 잔뜩 물들어 있다.
이젠 섬도 당일치기다
전국이 일일생활권이라는 말은 이제 구닥다리 옛말처럼 들릴 만도 하다. 그런데도 섬 여행은 좀 예외가 아닐까 생각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단 하루쯤이라도 뚝 떨어진 섬으로 떠나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면 망설일 이유 없다. 한반도 남서쪽 끝자락에서 빙그레 웃음 짓고 있는 청정한 섬, 완도. 당일 도전도 어렵지 않다.
KTX가 바쁜 현대인의 시간을 단축시켜준 것이 여행뿐일까 싶지만, 어쨌든 우리에게 여유 있는 시간을 제공했고 어디든 훌쩍 나서볼 수 있게 해주었다. 용산역에서 이른 아침 KTX 첫차를 타면 광주역(편의에 따라 목포나 나주역도 가능)에 두 시간 남짓이면 도착한다. 이어서 버스나 각자의 기동성을 이용해 완도로 곧장 이동하면 된다.
나이 들어 방향을 바꾸기는 쉽지 않다. 인생이란 농구선수 마이클 조던이 방향을 바꾸면서 점프슛을 터뜨리듯 그렇게 쓱싹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다. 살아온 관성과 습성을 쉽게 버릴 수 있던가.
이 길이 내 길이거니 믿고서 지나온 날들에 대한 애착은 또 어떻고? 더구나 노년에 이르러선 방향 전환이 더 어렵다. 그런데 반백 년을 패션 디자이너로 살아온 최복호(73)는 항로 변경에 성공했다. 화가로 변신했으니까.
최복호는 알아주는 이도, 알아보는 이도 많은 패션 디자이너였다. 대구를 본거지로 왕성한 활약을 했으며, 해외에서 거둔 성과도 많았다. 단청이나 탱화 같은 전통 문양에 모던한 미감을 결합한 패션 디자인으로 서양인들의 호평을 받기도 했다. 해외 여러 나라에 수십 개의 매장을 두었고.
이랬던 그가 패션과 결별했다. 정확하게는 은퇴다. 아들에게 사업체를 물려주고 뒤로 나앉은 것이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거치는 여정이다. 사업이 아무리 아깝더라도 죽을 때까지 붙잡고 살 수는 없으니 늘그막에 결국은 퇴장한다. 문제는 은퇴 이후다. 손에서 일을 놓자마자 예상보다 가혹한 권태가 따개비처럼 들러붙기 십상이다. 어쩌나?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궁리를 해봐도 별 답이 없다. 은퇴와 함께 모든 욕심을 내려놓고 살 생각을 하지만 실상은 딴판이다. 고매한 법정스님처럼 무소유를 숭상하는 노후 생활로 마음의 자유를 누리고 싶지만 언감생심이다. 격투기 링 같은 속세에 가담해 악착스레 살아오는 와중에 덕지덕지 붙은 욕망이라는 놈에겐 은퇴가 없다. 이렇게 되면 괴리에 괴로워진다. 허무감이 밀려든다. 영탄할 수밖에 없다. 아아, 마른 멸치 대가리처럼 따분한 노년이여!
최복호는 따분한 인생의 하오를 경험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머리는 기민하게 돌아가고, 오만 가지 인생의 맛을 섭렵한 내공의 보유자이기도 한 그는 은퇴 전에 충분히 숙고해 현실성 있는 대안을 발굴했다. 그게 그림이다.
“나이 들어서는 한결 확실한 타임 스케줄을 가지고 사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가장 잘할 수 있는 일, 재미있는 일을 찾아 계획적으로 진척시키는 게 지혜롭지 않겠는가. 난 오래전부터 품었던 화가의 꿈을 실현하는 일에 인생 2막을 사용하기로 했다. 사실 그림은 내게 친근한 장르다. 패션 역시 크게 보면 미술의 한 분야니까. 옷을 디자인하고 그림을 그려 천에 프린트하는 일을 평생 해왔으니까. 옷에다 그렸던 그림을 이제 캔버스로 옮긴 셈이다.”
과거와 다른 삶 속으로
패션 디자인의 요체는 선, 형태, 색채를 예술적으로 표현하는 데 있다. 디자이너로 산 세월의 길이만큼 최복호가 축적한 예술적 경험의 질량은 풍성하다. 패션계 입문 초기부터 그는 패션을 미술의 한 장르로 보고 패션쇼에 행위예술을 접목했다. 1973년에 펼친 첫 패션쇼 ‘의처증 환자의 작품 D’만 하더라도 대단히 도발적인 퍼포먼스였다. 19세기 유럽의 정조대를 소재로 차용한 이 쇼를 통해 그는 현대의 뒤틀린 성 모럴을 야유했다. 환경 문제를 다룬 ‘고발 의상’과 ‘공해 오염 분해기’ 역시 강렬한 메시지를 담은 퍼포먼스였다. 최복호의 성향과 미술적 재능을 짐작할 만하다. 그러고 보면 화가로의 변신은 자연스러운 이행이다. 비즈니스이자 종합예술에 가까운 패션 디자인의 복합 성분 중에서 미술만을 떼어 몰입하고 있다는 점에선 드디어 정곡을 파기 시작했다고 봐도 되겠다.
최복호는 지난 3월, 대구 대백플라자갤러리에서 ‘패션, 회화, 그리고 사유의 확장’이라는 타이틀로 첫 개인전을 펼쳤다. 회화와 그래픽 디자인 등 100여 점의 작품을 선보인 이 전시회는 성황을 이루었다. 1000여 명의 관객이 몰려왔고, 평도 좋았다. 이것으로 화가 동네에 거주할 수 있는 시민권을 발부받은 셈인데, 인생의 황혼에 활짝 열린 새벽에 그는 억누를 수 없는 희열을 맛보았을지도 모른다.
“패션도 미술도 내게는 ‘색(色)으로 꾸는 꿈’의 세계다. 색이란 무엇인가? 그건 암호요, 유혹이요, 영혼이라고 나는 정의한다. 인생의 핵심이 색의 꿈에 다 들어 있다는 얘기다. 미술의 길로 접어들어 기쁘다.”
해야 할 일 없는 노후도 즐거울 수 있다. 일이 주는 억압에서 해방되니까. 무위도식이 아닌 무위자연 같은 걸 추구할 수도 있고.
“나이 들면 귀도 잘 안 들리고, 이도 흔들린다. 이렇게 되면 일상이 구차해지기 쉽다. 즐길 수 있는 일이 없으면 더욱 난처해진다. 잡념에서 벗어나 그림을 그리다 보니 정신세계가 맑아지더라.”
그림 작업이 힘들진 않나? 방울방울 피를 뿜듯이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하는 게 미술인데.
“개인전에 필요한 작품 준비를 위해 작업실에 파묻혀 살며 화가들의 심적 고통을 실감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잘 그려지지 않을 때도 많았다. 그러나 여유로운 마음으로 그린다. 그림에 큰 욕심을 부릴 이유가 있겠나? 남들이야 어떻게 보든 우선은 내가 나를 만족시킬 수 있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그렸다.”
심심파적으로, 취미로 대충 그렸다는 얘기로 들리지만 이게 겸사(謙辭)다. 그림을 보면 그가 꽤나 빠른 공을 던진 신참 투수임을 알 수 있다. 물건이 나타났다! 뭐 이런 건 아니지만 웬만한 그림쟁이는 저리 가라다. 거침없이 갈긴 붓질의 능란함, 강렬하고 화려한 채색의 조화로운 구사, 화면에 난무하는 리듬감, 상상력을 증대시키는 추상적 형상의 오묘함 등 들여다볼 게 많은 작품들을 생산했다. 작심하고 틀어박혀 몰두한 결과물인 걸 알 만하다. 어설픈 그림놀음으로는 남들의 눈총만 받기 십상이다. 망신살이 뻗칠 수도 있다. 이걸 모를 리 없어 올인했나 보다.
“딴엔 절박한 심정으로 그렸다. 근래 두어 해 동안 시련이 많았거든. 코로나19 여파에 따른 사업상의 침체로 괴로웠던 거다. 이성적으로 극복해야 했다. 그림은 그 방편이었지. 그리면서 인생을 돌아봤고, 그리면서 반성도 많이 했다. 과거와는 전혀 다른 삶으로 나를 데려가야 할 필연을 느꼈다.”
코로나19로 모두 위기를 경험하고 있지만 인생을 성찰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언젠가 말 한 마리가 연구소 마당으로 걸어 들어왔더라. 이상하고 당혹스러운 상황이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뭐라 설명하긴 어려우나, 나의 자아를 돌보라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방문한 놈일 거라는 생각이 들더라고. 코로나19 역시 내게 마찬가지 의미를 전하는 전령이라고 생각한다. 삶의 패러다임을 바꾸라 독촉하는 거라고 보는 것이지. 이런 정황과 생각을 그림으로 그려 전시회에 걸었는데, 말과 내가 등장하는 이 작품에 대해 듣기 좋은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많더라고. 좋다, 당신의 대표작으로 손색없다! 그런 얘기도 들었고.”
전에 선생은 자연주의자의 오케스트라 정신을 얘기했었다. 물소리, 바람 소리, 새소리 어우러진 자연의 하모니를 삶에 끌어들여 남들과 소통하는 삶이 최고라고. 그래서인가 그림에도 자연이 자주 등장하네?
“모든 예술의 원천적 영감은 자연에서 얻는 게 아닐까? 다행히도 나는 늘 자연 풍경을 바라보며 산다. 자연 속에 사는 것들을 소재로 삼은 그림을 즐겨 그렸다. 자연을 화폭에 끌어들여 내면의 투박하고 질박한 본질을 표출하고 싶어서였지. 차기 전시회에서는 전혀 다른 소재와 작풍(作風)을 보여주고 싶다. 동어반복은 창의적이지 않으니까.”
“인생은 어차피 허무한 거잖아?”
최복호는 대구에 산다. 그러나 잠자는 시간 외의 대부분은 청도로 달려와 작업실에 눌러앉는다. 청도의 외진 산골에 있는 ‘최복호 패션문화연구소 펀앤락’(Fun & 樂)으로 출근한다. 그렇게 살아온 게 13년째. 이 연구소는 그의 아지트이자 다중에게 개방된 복합문화공간이다. 갖가지 소공연과 전시회를 숱하게 펼쳤다. 소주 서너 병쯤은 가볍게 쓰러뜨리는 애주가인 그의 사교장이기도 하다. 개그맨 전유성이 청도에 머물던 때엔 죽이 맞아 대작이 잦았다. 술 취해 이리 비틀 저리 휘청하는 꼴을 눈 뜨고 못 봐주는 성격이지만 무리 지어 노니는 걸 풍류 삼아 즐겼다. 그러나 요즘은 변했단다. 주로 혼자 논다. 벼랑을 움켜쥐고 홀로 선 소나무처럼 뭔가 뿌리부터 단단해진 모양이다.
“그림과 논다. 이건 혼자서도 가능하다. 그림이 아니더라도 노인은 혼자서도 잘 놀 줄 알아야 한다. 혼자일 때 창조적인 생활의 방법을 발견할 수 있다. 패거리 지어 산에 다니고, 골프 치고, 술 마시고, 이건 시간을 ‘때우는’ 것에 불과한 게 아닐까?”
타성에서 벗어나자는 뜻?
“우리 나이쯤 되면 어둠 뒤에 오는 빛 같은 거, 공평한 신에 관한 외경 같은 거, 이런 걸 생각해봐야 한다. 그래야 긍정심이 커진다. 인생은 어차피 허무한 거잖아? 고통을 피할 길이 없다고. 하지만 긍정적인 마음을 가질 경우엔 허무도 고통도 두려움 없이 받아넘길 수 있다. 자제력과 인내심도 긍정 마인드에서 강화될 테고.”
이미 100세 시대가 도래했지만 생명과학은 120세까지도 살게 해주겠다고 선전한다. 오래 사는 게 기분 나쁠 건 없지만 나이 들수록 긍정심보다 이기심이 커지기도 해 문제다. 더 진부해지고 더 까다로워지는 ‘꼰대’도 많다.
“내 경우엔 분노의 감정을 조절하기가 참 어려웠다. 바닥엔 항상 분노가 깔려 있었거든. 그래서 페이스북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이 아니고 내가 나를 보기 위한 글이었다. 글이라는 거울에 나를 비춰본 것이지. 그 효과는 컸다. 분노 조절이 가능해졌으니까. 글쓰기는 실로 자기발견을 할 수 있는 유력한 방편이다. 그림도 마찬가지다.”
페이스북 팔로어가 5000여 명이라지? 사이버 공간에서 좋은 글쓰기가 가능하던가? 글은 자기발견의 수단이기도 하지만 위장의 도구로 사용될 수도 있지 않나?
“폐단이 없지 않지만 이성적으로 접근하면 무리가 없다. 원초적인 감정 배설을 피해나가면 된다. 그러는 사이 감정이 순화되는 거고. 내 경우엔 그랬다.”
어찌된 일인지 세상이 재미없는 쪽으로 돌아가는 것 같다. 살면 살수록 재미가 있어야 하는데 느는 건 고통뿐이니 환장할 일이라고 투덜거리는 사람들이 많다.
“내가 왜 혼자 놀며 그림을 그리겠나? 좀 재미있게 살고 싶어서다. 일단은 내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수밖에 없는 거다. 이제 우린 딴짓을 좀 하며 제2의 인생을 사는 게 좋겠다. 창의적으로. 고통?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라는 게 있던가? 신은 그런 것은 주지 않더라. 암이라든가, 죽음이라든가, 그런 건 운명으로 받으면 되는 거고. 난 독실한 크리스천이다.”
그가 점심을 차려낸다. 연구소 텃밭에서 기른 채소 일색의 찬에 식욕이 들끓는다. 정갈한 식물 밥상이 숫제 그림이다.
대한민국 올림픽 축구 대표팀이 지난 22일 뉴질랜드와 조별예선 1차전에서 0:1로 패했다. 전문가들은 선수단이 전체적으로 호흡이 맞지 않았고, 와일드카드로 데려온 대표팀 간판 공격수 황의조에게 패스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해서라도 패인을 찾았다.
경기가 끝난 뒤 작은 논란도 있었다. 미드필더 이동경이 상대팀 선수 크리스 우드의 악수를 거부하면서 경기에서도 지고 미성숙한 매너를 보여줬다고 비판받았다. 승자에 대한 존중을 표하지 않는 것은 올림픽 정신에 어긋난다는 이유에서다.
그런데 시니어들은 최근 올림픽 축구 경기에서 과거 올림픽과 같은 재미를 느끼기 어렵다고 말한다. 한국에서 열린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기억하는 시니어들일수록 더 이런 지적을 많이 한다. 왜 이렇게 느끼는 걸까.
이번 올림픽 참가 선수들이 앳돼 보인다. 대회 첫 경기에서 긴장하고 있는 모습은 물론이고, 상대팀의 거친 몸싸움에 경기가 끝나고도 분을 못 이기는 모습도 보였다.
실제로 지금 올림픽 축구에 출전하고 있는 선수들은 서울 올림픽 출전 당시 선수들보다 나이가 어리다. 1988년 당시에는 30세 골키퍼 조병득이 있었고, 최강희와 최윤겸 등 20대 중후반 선수들이 많았다. 국내 선수뿐 아니다. 브라질의 베베투, 서독의 위르겐 클린스만 같은 20대 중반의 스타플레이어들이 즐비했다.
하지만 현재 올림픽 축구 대표팀은 23세 이하 선수들로만 선수단을 구성할 수 있다. 예외적으로 ‘와일드카드’ 제도라고 해서 24세 이상 선수 3명을 쓸 수 있다. 한국 대표팀은 와일드카드로 부른 황의조, 권창훈, 박지수를 제외하면 모두 만 23세 이하 선수들로 구성돼 있다. 다른 종목에는 없는 나이 제한이 왜 유독 축구에만 있을까.
올림픽 남자 축구 종목에 나이 제한이 처음 생긴 건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이다. 여자 축구는 23세 이상이어도 참가할 수 있다. 축구전문 미디어 풋볼리스트의 류청 취재팀장은 이에 대해 “국제축구연맹(FIFA)과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오랜 다툼 때문”이라고 말한다. IOC는 206개 나라 올림픽위원회가 소속된 세계적인 기구다. 스포츠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FIFA의 위상은 IOC를 뛰어넘는다. FIFA 회원국은 211개로 IOC보다 많다.
FIFA가 4년마다 개최하는 월드컵은 단일 스포츠 대회로는 가장 규모가 크고 인기가 많다. 농구, 럭비, 아이스하키 등 다른 스포츠 종목에서 ‘월드컵’이라는 명칭으로 대회를 열지만 흔히 월드컵이라고 하면 축구를 떠올린다. 그만큼 FIFA가 개최하는 월드컵의 위상이 더 높다.
그런데 올림픽 축구에서 연령 제한 없이 모든 프로선수들이 참가하게 되면 FIFA 월드컵과 별 차이 없는 또 다른 대회가 만들어진다. 월드컵으로 막대한 수익을 내는 FIFA로서는 달갑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FIFA는 나이 제한 카드를 빼들었다. IOC로서는 불쾌한 일이었지만 FIFA의 입김을 무시할 수 없었다. 실제로 FIFA는 지속적으로 올림픽을 견제해왔다. FIFA는 프로 선수들도 본격적으로 올림픽에 참가할 수 있었던 1984년 LA 올림픽, 1988년 서울 올림픽에도 월드컵 경험이 없는 선수만 올림픽에 참가할 수 있도록 제한했다. 그래도 면면은 화려했다.
하지만 23세 이하 선수들로만 올림픽에 나갈 수 있게 되자, 올림픽은 설익은 유망주들의 대회가 됐다. 스타플레이어가 없어 대회 수준은 낮아졌고 흥행도 부진했다. 그러자 IOC는 전체 참가 선수 중 3명은 나이와 상관 없이 포함할 수 있도록 하자고 FIFA에 제안했다. 이렇게 해서 나온 타협안이 바로 와일드카드 제도다. 와일드카드라는 용어는 한국에서만 쓰고 해외에서는 ‘오버에이지(Overage)’라고 부른다.
결국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부터 24세 이상 선수 3명이 함께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됐다. 의무적으로 써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은 올림픽 메달을 따면 군 면제 혜택이 있어 황선홍과 하석주, 유상철 등 와일드카드로 성인 대표팀 주축 선수들을 투입했다. 가장 최근 2016년 리우 올림픽에서는 손흥민과 장현수, 석현준이 와일드카드로 대회에 참여했다.
비록 불의의 1패를 떠안았지만 한국 올림픽 축구 대표팀은 메달을 노리고 올림픽에 참가했다. 한국 대표팀은 25일 루마니아전, 28일 온두라스전을 치른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적용된 수도권의 사회적 거리두기 4단계가 8월 8일까지 2주 연장된다. 이에 따라 식당과 카페 등 다중이용시설은 요밤 10시까지 영업이 제한되고, 사적모임은 오후 6시 이후 2인까지로 제한된다.
전해철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 2차장은 23일 회의를 시작하며 “4차 유행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수도권 지역에 적용 중인 사회적 거리두기 4단계와 오후 6시 이후 3인 이상 사적모임 금지를 앞으로 2주간 연장한다”고 밝혔다.
중대본은 신규확진자가 2주 내내 네 자리 수를 넘을 정도로 3차 유행 때보다 확산세가 거세, 수도권 거리두기 4단계 연장이 불가피하다고 설명했다.
23일 0시 기준으로 신규 코로나19 확진자가 1630명 발생하며 4차 유행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누적 확진자는 18만5733명이다.
전해철 2차장은 “3차 유행 시 일평균 확진자 수가 660명 수준이었는데 지금은 1410명으로 규모가 2배 이상”이라며 “3차 유행과 비교해 지인·동료를 통한 감염 비중이 23.9%에서 41.0%로 두 배 가깝게 늘었다”고 우려했다.
이어 “수도권은 거리두기 4단계 시행 전보다 일평균 확진자 수가 200명가량 늘었고 비수도권도 증가 추세"라며 "감염 확산을 막으려면 사적모임과 이동을 줄일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수도권에서 사회적 거리두기가 4단계가 이어지면서 사적 모임도 크게 제한된다. 사적 모임 인원은 4명까지만 가능하고, 오후 6시가 넘으면 2명으로 제한된다.
이번 주까지 야구와 풋살, 농구 같은 사적 스포츠 경기에 대해서 사적모임 금지 기준을 적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음주부터는 일정 인원이 필요한 스포츠 경기에도 사적모임 금지 기준을 적용해 평상시에는 4명까지, 오후 6시 이후에는 2명만 모일 수 있다.
집회와 행사도 1인 시위를 제외하고 모두 금지된다. 결혼식과 장례식은 이번 주까지 친족만 참석할 수 있었는데, 다음주부터는 친족 관계없이 49명까지 참석할 수 있다. 다음주부터 결혼식에 친구나 동료, 지인을 부를 수 있다.
식당과 카페는 밤 10시까지 이용할 수 있으며, 이후에는 포장과 배달만 가능하다. 학원과 영화관, 공연장, 독서실과 스터디 카페, 놀이공원, 워터파크, 오락실과 멀티방, 상점·마트·백화점, PC방, 콜라텍이나 무도장, 노래연습장, 목용장업, 실내체육시설도 밤 10시까지만 운영할 수 있다.
유흥시설 중 클럽과 주점, 헌팅포차 같은 시설은 영업이 금지된다. 백화점을 포함한 대형유통매장에 출입명부를 의무화하지 않고 있는데, 대형유통매장에 출입명부 관리 의무화를 적극 검토한다.
또 종교시설은 비대면으로 운영하고, 종교시설에서 모임이나 식사, 숙박은 금지된다.
기업이나 기관의 필수 경영 활동에 해당하는 행사는 허용하되, 다음주부터 숙박은 금지한다. 워크숍이나 간담회를 하더라도 숙박은 할 수 없다.
시니어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 이벤트는 단연 올림픽이다. 올림픽은 1896년부터 열린 전 세계 최대 규모의 종합 스포츠 축제다. 올림픽 여러 종목의 선수 중에는 올림픽 하나만을 위해 4년 동안 준비해 대회에 참가하는 선수들이 있다. 그만큼 깊은 역사와 이야기를 자랑하는 지구촌 대형 이벤트다.
하지만 최근에는 월드컵과 급격히 커진 e스포츠에 밀려 스포츠 이벤트로서 중요도가 점점 떨어지는 추세다. 여기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까지 겹쳐 개최 자체가 불투명했던 시기도 보냈다.
올림픽 위상이 예전 같지 않다. 하지만 1988년 서울올림픽을 경험한 시니어들에게 올림픽은 최고의 스포츠 제전이기도 하다. 이에 시니어들은 이번 도쿄 올림픽에 남다른 기대를 갖고 있을 것이다. 브라보는 올림픽을 즐길 시니어들을 위해 이번 올림픽이 기존 올림픽과 어떻게 다른지, 한국 대표팀 관전 포인트에 무엇이 있는지 정리했다.
도쿄 올림픽, 무엇이 다른가?
2020 도쿄 올림픽은 2021년 7월 23일부터 8월 8일까지 진행된다. 지난해 여름에 개최될 예정이었지만 코로나19로 인해 올해 여름으로 연기됐다. 대회 명칭은 그대로 사용한다.
사상 첫 무관중 올림픽이다. 당초 일본인과 일본 거주자에 한해 관중을 받으려고 했지만 일본 내 코로나19 확산이 심각해지면서 논란이 커졌다. 결국 IOC와 합의해 일본인 관중도 입장하지 않는 걸로 결정했다. 1896년 그리스 아테네에서 제1회 근대 올림픽이 열린 이래 125년 역사상 최초다. 다만 상대적으로 코로나19 확산이 덜한 미야기현과 시즈오카현, 이바라키현 경기장에는 일부 관중 입장을 허용한다.
러시아 대표팀은 올림픽 참가가 금지됐다. 러시아 체육계 선수들이 금지약물을 복용하고 국가적으로 도핑테스트 샘플을 은폐하는 등 파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스포츠중재재판소가 2020년 12월 러시아의 도핑 샘플 조작을 인정했고, 러시아는 2년 동안 국가 자격으로 국제스포츠대회 참가가 제한됐다.
하지만 러시아 국적 선수가 올림픽에는 참여한다. 파견된 335명 선수들은 ‘러시아’라는 국가명 대신 ‘러시아올림픽위원회(ROC)’라는 이름을 달고 뛴다. 메달을 따도 시상대에는 국기 대신 오륜기가 올라온다. 국가는 러시아 작곡가 차이콥스키의 피아노협주곡 제1번으로 대체한다.
경기 종목에도 변화가 많다. 레슬링과 야구가 다시 정식 종목이 됐다. 여성 선수 참여율을 높이기 위해 양궁과 수영, 탁구 등에서 혼성 종목이 대거 늘어났다. 사격에서는 진종오 선수의 주 종목인 50m 권총을 비롯한 3개 남자 종목이 폐지되고, 3개 혼성 종목이 신설됐다.
농구는 세부종목으로 남자 3대3 농구, 여자 3대3 농구가 추가됐다. 사이클은 남녀 BMX 프리스타일, 트랙 남녀 매디슨 종목이 추가됐다. 펜싱은 세부종목인 플뢰레, 사브르, 에페 중 남녀 단체전이 1개씩 번갈아가며 제외돼 총 10개 종목만 배정되던 관행이 있었다. 이번에는 관행이 깨지면서 12개 종목 모두 올림픽 세부종목으로 확정됐다.
야구 종목 부활, 한국야구도 부활할까
2008년 베이징에서 한국 야구 대표팀은 영광의 시간을 보냈다. 류현진, 김광현, 이대호, 이승엽 등 황금세대가 김경문 감독 지도로 9전 전승이라는 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획득했다.
이후 야구 종목은 올림픽 정식 종목에서 빠졌다. 2020 도쿄 올림픽에 한해 일본의 국기인 야구가 정식 종목에 포함됐다. 이런 이유로 한국 대표팀은 이번 대회에서 디펜딩 챔피언이다. 야구선수들은 다시 올림픽 무대를 밟을 좋은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국내 야구 상황은 좋지 않다. 10번째 구단까지 출범해 양적 성장은 이뤘지만 코로나 19여파와 e스포츠에 익숙한 젊은 팬의 선호가 떨어지며 야구 인기가 예전 같지 않은 상태다.
설상가상으로 대표팀에 뽑혔던 일부 선수가 방역수칙을 위반해 확진자가 발생하면서 리그가 중단되는 초유의 사태까지 발생했다. 대표팀이 좋은 성적을 거둬, 돌아선 야구팬들의 마음을 잡아야 하는 상황이다.
2024 파리 올림픽부터는 야구가 올림픽 종목에서 빠진다. 이번에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면 야구선수들이 다시 올림픽 무대를 밟을 수 없을지 모른다. 베이징 황금 세대의 일원이었던 강민호, 오승환 등 베테랑들에 이정후, 강백호, 원태인 같은 새로운 세대가 수혈됐다. 영광의 세대와 영광의 순간을 보고 자란 세대가 다시 한번 김경문 감독과 함께 베이징의 감동을 재현할지가 주목된다.
사격의 전설 진종오, 새로운 도전
대한민국 사격의 전설 진종오는 한국뿐 아니라 올림픽을 통틀어 사격 역사에서 최고 선수다. 올림픽 개인 사격에서 금메달 4개를 가지고 있는 유일한 선수다. 이런 진종오가 이번 올림픽에서 큰 변화를 맞았다.
2020 도쿄 올림픽에서는 지난 2014년 IOC가 발표했던 ‘어젠다 2020’에 따라 남자 종목과 여자 종목의 메달 숫자를 맞췄다. 원래 사격은 남자 종목 9개, 여자 종목 6개였다. 하지만 어젠다 2020이 내건 ‘여성 참가 비율을 50%’ 방침에 따라 진종오의 주 종목인 50m 권총을 폐지됐다. 또 다른 남자 종목인 50m 소총 복사, 더블트랩까지 총 3개 남자 종목이 폐지됐다. 대신 10m 공기권총, 10m 공기소총, 트랩에서 3개의 혼성 종목이 신설됐다.
진종오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부터 13년 동안 50m 권총에서 챔피언 자리를 지켰다. 많은 선수가 그와 실력을 겨루었지만 2012 런던 올림픽에서도, 2016 리우 올림픽에서도 금메달은 진종오의 몫이었다. 올림픽 3연속 금메달이라는 업적을 세우는 동안 2012 런던 올림픽에서는 주 종목이 아닌 10m 공기 권총 종목에서도 금메달을 추가했다.
4개의 금메달과 2개의 은메달. 진종오는 총 6개의 올림픽 메달을 따 ‘신궁’ 김수녕과 함께 한국 올림픽 역사에서 가장 많은 메달을 보유하고 있는 선수이기도 하다.
발자취 자체가 곧 역사인 진종오가 이번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면 사격 역사에 또 다른 기록이 세워진다. 사격의 전설 진종오의 10m 공기권총 남자 개인전은 7월 24일, 10m 공기권총 혼성 단체전은 27일에 열린다.
한편 올림픽 중계는 KBS, MBC, SBS 채널에서 볼 수 있다. 3사 모두 개폐회식과 일부 종목을 4K UHD로 생중계한다고 밝혔다. 특히 KBS는 특설 홈페이지를 통해 TV로 중계되지 않는 종목도 생중계한다. 네이버와 웨이브, 아프리카TV와 LG 유플러스 모바일 TV를 통해 온라인으로도 올림픽 중계를 볼 수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시니어들에게 게임이 중요한 문화 활동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특히 50세 이상 게임 이용자인 ‘그레이 게이머(Grey Gamer)’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한국인터넷기업협회와 연세대학교 게임문화연구센터가 공동 발표한 ‘포스트 코로나 시대, 게임 가치의 재발견’ 보고서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 게임 문화에서 새롭게 주목해야 할 집단 중 하나로 그레이 게이머를 꼽았다.
보통 게임은 아이들이나 젊은 세대의 전유물처럼 인식됐다. 그런데 2021년을 기점으로 10대와 20대 시절에 오락실 게임을 즐기기 시작한 1960년대생과 1970년대생들이 50대와 60대에 진입하면서 게임 분야에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어가고 있다.
글로벌 시장 조사기관 퓨처소스 컨설팅은 코로나19 이후 그레이 게이머들의 게임 참여율이 점점 상승하고 있다고 밝혔다. ‘게임은 유익하지 않다’는 사회적 인식에 억눌렸던 호기심과 욕망이 게임 콘텐츠와 IT기술의 발달, 코로나19까지 맞물리며 수요가 증가하고 있다.
경제력이 뒷받침 되는 액티브시니어들은 게임 아이템에 현금을 지불하는 ’현질’도 서슴지 않는다. 예를 들어 플레이스토어 상위 링크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리니지’는 1998년 처음 출시돼 최근 4년간 리니지M. 리니지2M, 리니지2 레볼루션 등이 모바일로 연이어 출시될 정도로 20년 넘게 꾸준히 사랑 받고 있다. 그 이유는 프리시니어인 40대와 액티브시니어인 50대의 높은 참여도와 구매력이라고 업계 관계자들은 분석했다. 실제로 앱 분석 서비스 기업인 와이즈앱의 데이터를 살펴보면 리니지2M의 이용자 가운데 56.1%는 40대 이상이다.
이처럼 MZ세대보다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액티브시니어’가 게임 시장에서 ‘큰 손’으로 거듭나고 있다. 그래서인지 업계에서는 이들을 겨냥한 레트로풍 게임을 기획해 출시하는 분위기다.
자신들의 취미를 위해 투자를 아끼지 않는 액티브시니어들은 어떤 게임을 즐기고 있을까?
절반 이상의 시니어가 게임을 즐긴다
임팩트피플스가 발표한 ‘신중년 소비&라이프스타일 트렌드 탐구 보고서’에서 현재 디지털 게임을 즐기고 있는 50세 이상 액티브시니어는 응답자 전체의 55%였다.
현재 즐기는 디지털 게임이 있는 시니어만을 대상으로 이용 기기를 질문한 결과, 스마트폰을 이용하고 있다는 시니어가 76%로 나타났다. 액티브시니어 다수가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즐기고 있다는 얘기다.
또 시니어들은 하루 평균 1시간 정도 게임을 즐기는 것으로 나타났다. 통계를 살펴보면 1시간 이용이 47%, 1-2시간 이용이 27%, 30분 미만 이용이 17%, 3시간 이상 이용이 9%였다.
시니어가 사랑한 ‘애니팡’
시니어들은 정해진 규칙 내에서 같은 그림을 맞추거나, 주어진 조건을 완료하는 단순한 게임을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테트리스 같이 변수가 적어 기본적인 조작 방법만 익히면 쉽게 즐길 수 있는 퍼즐 게임이 50.6%, 고스톱·포커가 44.5%로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가장 인기있는 게임은 ‘애니팡’이었다. 애니팡은 60초의 제한시간 동안 7종류의 동물(원숭이, 고양이, 돼지, 쥐, 토끼, 강아지, 병아리) 블록의 위치를 바꿔 같은 동물을 3마리 이상 일렬로 배열하면 득점하는 게임이다. 27.4%의 시니어가 이 게임을 즐기며 1위를 차지했다. 설문 대상자들은 “간단한 규칙으로 쉽게 할 수 있어서 좋다”, “심심할 때 잠깐씩 하면 재미있다” 같은 의견을 내놓았다.
애니팡 다음으로 ‘피망맞고’ 10.9%, ‘리니지’ 8.8%, ‘한게임’ 8.0%, ‘프렌즈팝’ 4.7%가 뒤를 이었다.
게임 입문 경로로는 지인 소개가 39.7%, 자녀 소개가 39%로 나타나 주변으로부터 게임을 처음 추천받는 사례가 많았다.
無경험자도 한번쯤 게임을 해보고 싶다고 답해
게임을 하지 않는 시니어 중 63%는 스마트폰에서도 가능한 디지털 게임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으며, 즐기지 않는 이유로는 ‘유튜브 등 다른 콘텐츠 소비가 더 재미있어서’가 52.2%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또 ‘앱을 설치하는 등 방법을 몰라서’가 20.1%로 애플리케이션의 접근성을 높인다면 게임을 시도할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된다.
게임을 하지 않고 있지만, 해보고 싶다고 응답한 비율은 87.2%였다. 이들이 하고 싶은 게임으로는 고스톱·포커가 34.8%로 가장 높았다. 다음으로 33.5%가 승마와 농구, 야구, 레이싱 등을 즐길 수 있는 캐주얼게임에 관심을 보였다.
1990년대 농구대잔치는 한국 농구의 최전성기였다. 당시 뛰어난 실력과 준수한 외모로 유명했던 이상민, 문경은, 서장훈 등은 ‘오빠부대’로 불리는 팬덤을 구축했다. 이들이 소속된 연세대를 농구대잔치의 전설로 만든 이가 바로 감독 최희암(67)이다. 명감독으로 이름을 떨치던 그는 2009년 인천 전자랜드 감독을 끝으로 코트를 떠났다. 이후 경영인으로 변신하여 현재 고려용접봉 부회장으로 재직 중이다. 그를 만나 농구인의 삶과 철학, 그리고 경영인으로서의 변신에 관해 얘기를 나눴다.
농구대잔치 흥행의 중심에는 연세대가 있었다. 최희암 감독은 17년간 연세대 감독으로 팀을 이끌며 대학팀 최초로 우승컵을 거머쥐는 기록을 세웠으며, 세 차례의 우승을 통해 감독으로서의 실력을 증명했다. KBL 출범 이후 프로팀과 대학팀을 오가며 감독 생활을 이어오다 2009년 돌연 은퇴하고 경영인으로 변신했다.
“2009년 당시 전자랜드와의 재계약이 불발되면서 은퇴 이후의 삶을 고민했어요. 농구 코트를 떠나기로 했지만, 아쉬움이 컸죠. 그래서 대학에서 농구를 가르치거나 농구와 관련된 자문을 하려고 맘먹고 있던 시기였어요. 그때 고려용접봉으로부터 제의가 왔어요. 뜻밖의 제의라서 놀랐죠. 선배들과 아내와 상의했는데, 다들 ‘OK’ 사인을 주더군요. 아내는 감독과 같은 자영업자가 아니라 안정적으로 월급을 받는 정규직이 된다고 좋아했어요. 저도 인생 2막으로 다른 길을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어요.”
그의 영입을 적극적으로 추천한 이가 바로 홍민철 고려용접봉 회장이었다.
“나중에 전해 듣기로는 홍민철 회장이 저의 열정적인 모습을 높이 평가하셨다고 해요. 전자랜드 감독 시절, 홍 회장과 그의 동생인 홍봉철 전자랜드 구단주와 함께 우연히 저녁 식사를 몇 번 같이한 적이 있어요. 당시 저는 숙소에서 출퇴근했기 때문에, 집에 안 가고 식사를 마친 후 숙소로 갔어요. 감독 할 때 출퇴근 시간이 아까워서 늘 숙소 생활을 했거든요. 그 시간을 아껴서 전술을 한 번 더 짜거나, 선수들 훈련을 1분이라도 더 시키고 싶었어요. 저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이런 태도를 좋게 봐주신 것이 아닐까요?(웃음)”
반복과 숙달 그리고 다롄
오랫동안 한 분야에서 일하다 다른 분야로 전환한다는 것.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농구인이 아니라 경영인으로 첫걸음을 내딛는 순간 어떤 심정이었을까?
“농구인 출신은 적응력이 빨라요. 우리는 코트에서 점프도 하고, 뛰기도 하고, 구기 종목처럼 볼도 다루고, 필요하면 몸싸움도 해야 해요. 그래서 훈련할 때 다양하게 연습하고, 숙달될 때까지 반복하죠. 반복과 숙달이 몸에 뱄어요. 경영도 마찬가지예요. 업무를 파악하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만, 일단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숙달되면 잘할 수 있다고 믿었어요. 현대건설 다닐 때도 6개월은 업무를 집에 가지고 가서 했는데, 이후에는 2시간이면 다 끝냈어요.(웃음) 어렵겠지만 ‘한번 해보자’ 이런 맘으로 시작했어요.”
경영인으로서의 첫 무대는 국내가 아니라 중국이었다. 고려용접봉에서 첫 부임지는 바로 중국 다롄이었다. 중국 다롄의 법인장으로 가게 된 것이다. 한국이 아닌 중국에서의 생활은 분명 쉽지 않았을 터.
“일단 젊을 때 회사 생활을 잠깐 해봤기 때문에 경영이 낯선 분야는 아니었어요. 다만 능력상 잘할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이 있었죠. 게다가 해외라서 소통이 쉽지 않잖아요. 첨엔 걱정을 좀 했는데, 나중에 지나고 보니 결과적으로 오히려 다행이었어요. 경영도 처음이고 언어의 벽도 있었기 때문에 큰 흐름만 제시하고, 이외의 세세한 사항은 현지 직원들을 믿고 전적으로 맡겼죠. 만약 한국에서 일을 시작했다면, 발의 위치조차 하나하나 지시했던 농구 감독 때처럼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 썼을 거예요. 경영자로서 나무가 아니라 숲을 보는 힘을 그때 많이 길렀어요.”
몇 줄의 이력으로 사람의 모든 것을 쉽게 판단할 수는 없지만, 무시할 수는 없는 법. 운동선수 출신이라는 경력은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비경영인 출신이 취임했을 때 내부의 반응이 궁금했다.
“일단 얼굴을 아니까 기본적으로 호의적이었어요. 내부 직원이나 외부에서 사람을 만날 때 쉽게 다가갈 수 있었어요. 농구가 좋은 대화거리가 됐죠. 중국에 있을 때는 경쟁회사 임직원 중에 저를 좋게 봐주셨던 분이 참고할 수 있는 경영 노하우 같은 것을 은연중에 공유해줬는데, 그런 걸 통해 많이 배웠어요. 배운 걸 회사에 적용하면 다들 ‘운동선수가 어떻게 그런 걸 생각하지?’ 하는 반응을 보이더군요. 또한 실수해도 많이 용인해줬어요. 운동을 오래 해서 잘 몰라서 그렇다고 하면서요. 또한 홍 회장을 포함한 임원진이 코치를 많이 해주셨어요.”
임시대행으로 시작한 17년
사실 그는 선수로서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쟁쟁한 선수들 사이에서 살아남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20대 후반에 은퇴를 결심했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은퇴 후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기도 했다.
“농구 선수로서 아쉬움은 있었지만, 내 길이 아니라 판단하고 재빨리 다른 길로 나섰어요. 현대건설 다닐 때는 이라크로 파견근무도 나갔어요. 하지만 당시 이라크 현장이 워낙 위험해서, 한국으로 돌아와 안정적인 중학교 체육교사를 준비했어요. 그러다 우연히 정기 연고전을 앞두고 연세대 감독대행을 맡아달라고 하는 거예요. 사실 직장 다닐 때 방학마다 어시스턴트 코치로 후배들을 종종 가르치고 있었거든요. 그냥 잠깐만 맡아야지 했는데, 무려 17년이나 할 줄은 몰랐어요.(웃음)”
당시 연세대 선수들은 그를 ‘두 얼굴의 사나이’로 불렀다. 혹독한 훈련을 하기로 유명한데, 이와 달리 실전에서는 부드럽게 선수를 대했다.
“여자배구의 전설이라 불리는 이창호, 전호관 감독으로부터 감명을 받았어요. 훈련할 때는 선수들한테 엄청 혹독한데, 경기장에서는 아무 말씀도 안 하셨대요. 경기장에서 선수들한테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감독은 평소에 훈련을 덜 시킨 거라고. 그때부터 저도 경기장에선 최대한 부드럽게 대했지만, 훈련은 정말 혹독하게 했어요. 더러 도망가는 애들도 생길 만큼요. 물론 혹독하게 대하지만 마음이 쓰이는 부분도 있었죠. 저마다 버틸 수 있는 역량이나 성격이 다르잖아요. 잘 따라오지 못해 힘들어하는 애들을 보면 맘이 아팠죠.”
혹독한 훈련 덕분이었을까? 그는 농구대잔치 시절 연세대 감독으로 우승을 세 번이나 했다. 감독으로서 바라본 우승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비결은 없지만, 원리는 있어요. 농구는 철저한 팀 게임이에요. 감독이 욕심 부린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한 선수만 기량이 탁월하다고 되는 것도 아니죠. 물론 재목이 좋은 선수를 데려오는 것도 중요하죠. 다만 재목이 훌륭한 친구들이 서로 잘 조화를 이루면서 게임을 치러야 이길 수 있어요. 결국 코트에서 넣어야 할 골대는 하나고, 이기는 팀도 하나죠. 코트에 들어서면 최선을 다해야 이길 수 있어요.”
*②편으로 내용이 이어집니다.
1990년대 농구대잔치는 한국 농구의 최전성기였다. 당시 뛰어난 실력과 준수한 외모로 유명했던 이상민, 문경은, 서장훈 등은 ‘오빠부대’로 불리는 팬덤을 구축했다. 이들이 소속된 연세대를 농구대잔치의 전설로 만든 이가 바로 감독 최희암(67)이다. 명감독으로 이름을 떨치던 그는 2009년 인천 전자랜드 감독을 끝으로 코트를 떠났다. 이후 경영인으로 변신하여 현재 고려용접봉 부회장으로 재직 중이다. 그를 만나 농구인의 삶과 철학, 그리고 경영인으로서의 변신에 관해 얘기를 나눴다.
*①편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스카우트와 면접의 차이
그의 말처럼 재목을 고르는 일, 즉 스카우트는 농구에서 중요하다. 팀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으므로. 스카우트할 때는 정성을 다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운도 따라줘야 한다.
“스카우트를 매번 성공하진 못해요. 사실 상민이도 우리 라이벌인 고려대로 갈 뻔했어요. 거기가 조건이 더 좋았거든요. 상민이 아버지도 고려대를 권했는데, 상민이가 고려대를 가면 농구를 그만둔다고 선언한 거예요. 그때 큰누나가 상민이 아버지에게 ‘돈은 아빠가 벌어야지. 왜 상민이한테 그래!’ 하면서 한 방 먹였다더군요. 나중에 상민이 아버지로부터 전해 들은 내용이에요. 우린 포기했었는데, 큰누나 덕분에 상민이가 연세대에서 뛸 수 있었죠. 한마디로 운이 좋았어요.”
덧붙여 재목을 고르는 방법을 콘크리트에 비유했다.
“강한 콘크리트를 만들려면 큰 자갈뿐만 아니라 그 사이를 메우는 작은 자갈도 필요해요. 유망주가 아니더라도 성실하고 인성이 괜찮으면 일단 눈여겨봤어요. 10가지를 모두 잘할 수는 없지만, 2~3가지 정도 본인이 잘하는 게 있으면 데려와서 장점을 더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줬어요. 농구는 팀 단위 게임이기 때문에 단체 생활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친구라면 데려오려고 했죠. 실력이 좋아도 통제할 수 없으면 난감하거든요.”
그렇다면 경영인으로서 스카우트는 어떨까? 신입사원 면접 때 어떤 걸 주안점으로 두는지 물어봤는데 의외의 고충을 들었다.
“면접이 참 쉽지 않아요. 농구는 스카우트할 때 정말 오랫동안 살펴봐요. 초중고 시절부터 선수가 참여하는 훈련이나 연습경기를 자주 보고, 실제로 만나 대화도 하면서 오랫동안 검증해요. 일종의 데이터를 모으는 거죠. 반면 면접은 몇 분 만에 사람을 판단해야 하잖아요. 그 자리에 온 이들은 모두 일할 의욕도 있고, 스펙도 어느 정도 비슷해요. 다만 그 스펙이 모두 진짜 실력에서 비롯된 것인지, 우리 회사와 정말로 적합한 인재인지 면접장에서 파악하기가 어려워요. 그래서 직원을 뽑을 때 신중을 많이 기하죠.”
분업 농구와 경영의 길
농구 감독 시절 그의 장기였던 ‘분업 농구’는 고스란히 경영에도 반영됐다.
“분업 농구의 핵심은 ‘네가 잘하는 것을 해라’였어요. 가드는 가드 역할을, 센터는 센터 역할을 하는 거죠. 다만 포지션과 상관없이 잘하는 게 있으면 하라고 했어요. 예를 들어 센터인데 3점 슛을 잘 쏜다고 하면 그걸 하라고 했어요. 반면 팀의 승리에 방해가 되는 자기만족을 위한 플레이는 금지했어요. 경영도 비슷해요. 저는 직원들한테 ‘유능한 감독이 돼라’고 해요. 이승엽, 양준혁이 있는데 감독이 필드에서 뛰는 건 웃기잖아요. 자신의 권한과 능력으로 힘들면 윗사람에게 보고하라고 해요. 잘할 수 있는 사람한테 일을 맡길 줄 아는 상황 판단력이 중요해요. 분업 농구의 경영 버전인 셈이죠.”
끝으로 좋은 리더십과 앞으로의 계획에 관해 물었다.
“결국 경청과 소통이에요. 농구 감독 시절엔 팀이 이기는 데만 신경 쓰느라 다른 걸 못 보니 코치들이 내게 다른 의견을 제시할 수 있도록 했어요. 그래야 시야가 넓어지거든요. 또한 코치들이 선수의 컨디션이나 심리 상태를 모두 알 수 있도록 하고, 다 같이 정보를 공유할 수 있도록 했어요. 경영도 마찬가지예요. 저는 회의를 할 때 직원들부터 먼저 말하라고 해요. 제 의견은 나중에 말하죠. 제가 먼저 말하면 다양한 관점을 듣기 어려워요. 현장에서 일어나는 상황이나 정보에 귀 기울이고, 애로사항이 있으면 언제든지 해결해주려고 해요. 언제든 스스럼없이 제게 말할 수 있도록 권위를 내려놓고 직원들에게 다가가려고 노력하죠. 앞으로 미국이나 유럽 쪽에서 회사가 확장성을 갖출 수 있도록 더 힘써야 할 것 같아요. 코로나19로 힘든 상황이지만, 한 팀이 되어 한마음 한뜻으로 지혜롭게 헤쳐나갔으면 좋겠어요.”
그가 농구에 빠진 이유는 ‘단계마다 맛보는 성취욕’ 때문이었다. 코트 청소부터 시작해, 드리블, 백보드 슛, 3점 슛까지 각 단계에서 목표를 성취하는 것이 재미있어서 농구에 입문했다. 특히 각도에 따라 달라지는 백보드 슛이 들어갈 때마다 통쾌했다고. 선수부터 시작해 감독, 그리고 경영인이 되기까지, 가장 큰 원동력은 바로 ‘농구’였다. 그는 “농구는 나의 뿌리”라고 말했다. 뿌리 없는 열매가 없는 것처럼, 농구 시절부터 다져온 경험의 깊이가 그를 지금의 자리까지 오르게 했다.
농구는 그에게 끈기를 가르쳤다. 그 끈기는 그에게 새로운 2막을 열게 했다. 선수로서는 빛나지 못했지만 감독으로서는 농구의 역사를 새로 썼고, 그 농구는 인생 2막을 경영인으로 시작하게 도와줬다. 이 모든 것은 돌처럼 단단한 끈기와 열정이 빛을 발휘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마치 희암(熙岩)이란 이름의 뜻처럼. 나무는 타버리면 재가 되지만, 돌은 충격에 깨질 뿐 사라지지 않는 법이다. 인생의 전반전은 백보드 슛으로 시작했지만, 인생의 후반전은 3점 슛을 쏘며 마무리하길 바라며 마친다.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하는 어른들일수록 웰다잉, 웰엔딩을 철저히 준비한다. 여생의 마무리와 졸업식을 아름답고 멋지게 맞이하고 싶은 바람을 갖고 있어서다. 하지만 몸이 예전 같지 않은 어르신들은 마음처럼 준비가 쉽지 않다.
전문가들은 죽음을 잘 준비할수록 삶을 더 잘 살 수 있게 되고,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해서는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고 준비할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 6월호에서는 커버스토리로 건강하게 사는 것만큼 중요한 아름다운 인생 졸업식인 웰엔딩에 필요한 장례 문화부터 ‘생전 정리’를 통해 남겨진 가족의 회한을 줄이는 방법, 사랑하는 남편이나 아내의 부재를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지 등에 대해서 살펴봤다. 또 원혜영 웰다잉문화운동 대표로부터 현 시점에서 웰다잉의 의미와 필요성, 실천 방법도 들을 수 있다.
42년 동안 푹 익힌 진심을 말하는 방송인이자 대표적인 베이비붐 세대인 시니어 임백천을 표지와 기사로 만날 수 있다. 장수 MC로 유명하지만 그 비결을 ‘살아남으려는 노력’ 덕분이라고 말하는 그는 편안한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치열함을 내면에 담고 있었다.
가보고 싶은 귀농귀촌 우수 지자체에서는 ‘살아보니 더 좋은 곳이자 내 마음의 고향인 고창’을 이야기한다. 조상의 얼이 담긴 성곽과 고즈넉한 멋이 흐르는 선운사 등 문화유적과 수박, 풍천장어, 복분자 등 각양각색의 먹거리가 넘친다. 고창은 대한민국 최초로 2013년 5월 행정구역 전체가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됐을 정도로 청정한 자연환경과 다양한 생태계의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생활 속 법률 상식에서는 ‘안전한 상속 솔루션, 신탁’을 소개한다. 전통적으로 유언을 통해 상속이 이뤄지는데, 유언은 재산을 둘러싼 가족 간 분쟁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 같은 분쟁을 없앨 수 있는 금융회사가 재산을 관리하는 신탁이 최근 새로운 상속 트렌드로 떠오르고 있다.
6월의 단상에서는 산처럼 물처럼 살다가 바람처럼 떠나는 것을 이상으로 여긴 사대부들이 산행 뒤에 남긴 560편에 달하는 ‘유산기’(遊山記)를 통해 조선의 산행 방법을 담았다. 산행으로 풍류를 즐기고, 됨됨이도 길렀던 조선 선비들의 모습, 특히 퇴계 이황이 산을 사랑한 방식도 만날 수 있다.
1980~90년대 포크밴드 ‘동물원’의 멤버로 활약했던 가수겸 정신의학과 의사인 김창기가 음악과 삶에 관한 얘기를 들려주는 송어게인에서는 최고의 듀오 ‘사이먼과 가펑클’의 ‘So Long, Frank Lloyd Wright’ 노래를 통해 슬픔과 따뜻함이 공존하는 감정을 재발견할 수 있다.
이달의 구독에서는 ‘터치’ 한 번으로 받아보는 맞춤형 화장품을 만날 수 있다. 각종 기능을 보완하는 화장품을 써봐도 나아질 기미가 없는 피부. 이런 시니어의 고민에 대한 해답으로 나온 것이 ‘비싸고 좋은 화장품’이 아닌 ‘맞춤형 화장품’이다.
이 외에도 브라보 마이 라이프 6월호는 트로트 가수 이금수의 우리들의 화양연화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연세대 농구 감독으로 1990년대 농구 붐의 주역이었다가 사업가로 변신한 고려용접봉 부회장 최희암, 시인 안도현의 고백을 담은 명사와 함께하는 북人북, 떠오르는 부동산 투자 방법인 리츠를 다룬 은퇴 후 리츠 해볼까?, 숟가락만 들 힘만 있어도 그렇구나라고 하는 재미있는 性인문학, 3대 어깨 질환의 증상과 치료법을 제대로 소개한 시니어 헬스+ 같이 시니어들을 위한 재밌고 알찬 내용으로 독자들을 찾아간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 6월호는 전국 서점과 인터넷에서 구매할 수 있다.
까르르 웃는 소리, 뭐라 외치는 높고 맑은 아이들 목소리가 저 아래 공원에서 들려온다. 그 소리가 창문을 열게 한다. 미세먼지 때문에 잘 열지 않는 창을 목을 빼고 내려다본다. 아이들이 마주 앉아 그네도 타고, 잔뜩 매달려 빙글빙글 빨리빨리 돌아가고도 있다. 겁이 나는데, 아니 걱정이 되는데 아이들은 겁도 없이 타기도 하고 내리기도 하며 잘도 돌아간다.
우리 아파트는 가족공원을 안고 있어서 좋다. 오명가명 아이들 노는 모습, 젊은 부부가 아이들 노는 걸 바라보는 모습을 보는 게 참으로 좋다.
우리 손자 두 녀석은 이제 이 공원에 오지 않는다. 4,5학년 때 브라질에서 한국으로 온 형제, 이젠 고등학생이 된 것이다. 농구나 축구를 하러 친구들과 더 큰 공원으로 가거나 혼자 방에서 게임을 한다. 우리 집에 와서도 꾸뻑 인사 후 그냥 그대로 게임에 빠진다. 가끔 옆에 앉아 아이의 휴대폰을 조심조심 들여다본다. 옛날 전차에서 신문을 읽을라치면 옆 사람이 종종 같이 읽으려 하는 듯해 무척 싫었던 기억이 나서다. 할 수 있으면 배우고 싶기도 하고 도대체 어떤 것이길래 정신없나 들여다보지만 노상 총을 들고 달려가는 전쟁터, 금방 돌아앉고 만다.
너덧 살 때 우리 집에만 오면 틀림없이 “하니1), 우리 꼭꼭 숨어라 하자!” 눈 반짝이던 녀석들, 고작 거실에 방 둘, 샤워실이 있는 화장실, 부엌 지나 뒤로 가면 빨래터, 작은 식모방이 있고 작은 화장실이 하나 더 있어서 숨을 곳은 뻔한데 두 녀석은 숨바꼭질하자 했다.
내가 벽에다 얼굴을 박고 “하나 두우울 세에에엣 네에에에엣 다아서어어엇…” 하는 동안 옷장 안, 침대 아래, 커튼 뒤, 식탁 아래, 의자 뒤, 둘이 엉겨 붙어 같이 숨느라 바쁘다. 아무리 그래도 하니는 어디 숨었는지 금방 안다. 한 번도 숨기 놀이 같이한 적 없는 하지도 애들이 잘 숨나 열심히 본다. 소파 옆에 잘 숨도록 슬쩍 가려줄 줄도 안다.
하니, 이윽고 “간다!” 외친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알뚤도 꼭꼭 알란도 꼭꼭” 노래도 한다. 그러고는 괜히 엉뚱한 곳으로 가서 “어! 여기 아니네! 어디 숨었지? 방귀도 뀌지 말고 웃지도 말고 꼭꼭 숨어라” 한다. 침대 밑에 납작 엎드린 두 녀석, 들킬지도 모른다는 긴장감에 숨 멈추고 있을 때 하니는 일부러 저 뒤 빨래터로 가서 큰 소리로 “아이고! 없잖아?” 했었지.
다시 내려다보니 군인들 서너 명이 씩씩하게 걸어간다. 외출 나온 모양이다. 유쾌하게 웃더니 갑자기 놀이기구로 간다. 애들 틈에 끼어 빙빙 돌아간다. 군인인 걸 잊은 듯! 입대 전 학생으로 돌아간 듯! 문득 우리 손자들 같아서 재미있고 반갑다.
“여보!” 할아버지를 부른다. 우리 내외는 군인들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말없이 내려다본다. 할아버지도 안다. 왜 불렀는지. 우리 두 아이들, 몇 년 후 군인이 될 것이고, 휴가 나와 하니 하지를 찾아와 “충성!” 하며 경례를 붙일 것이다. 여드름이 사라진 얼굴은 거무튀튀 건강한 색깔이고, 어깨는 반듯해져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진짜 사나이가 된 아이들이 눈물겹도록 대견하고 또 대견할 것이다.
창문을 닫고 돌아선다. 미세먼지가 생각난 것이다. 잠시 그 군인들은 어디로 갔을까 생각해본다. 어디든 다섯 명이 넘으면 안 된다는 걸 알 테지? 이게 노파심이다. 어린애들과 섞여 빙빙 회전놀이기구를 즐긴 기분으로 이 친구 저 친구 다 모이라 하고 만나러 가는 건 아니겠지?
나는 오랜 팬데믹으로 인해 졸업식도 없이 고등학생이 되어버린 아이들이 너무도 측은하다. 내가 중학교 졸업하던 날, 우리 식구는 아버지 따라 중국집에 짜장면 먹으러 갔었지. 행복이란 별게 아니었지. 아, 그래. 그 짜장면! 얼마나 맛있었던가!
그리고 기대에 차서 고등학교에 간 첫날, 담임선생님을 뵙고, 새 친구들을 만나고, 자리를 정하고, 새 교과서를 받아올 때, 난 아주 다른 느낌을 받았었지. 어른의 세계로 한 발짝 들어선 기분 아니었던가? 집에 와선 스스로와 한 굳은 약속도 써 붙이고, 책상 정리도 새로 했었지. 그렇게 새날을 향해야 한다는 나는 현실을 모르는 구시대 노인일까?
그도 그럴 것이 비대면이라는 놀라운 수업으로 백석의 시, 충담사의 찬기파랑가, 서경별곡 그리고 훈민정음해례본, 아관파천을 배운다니 기가 막혔기 때문이다. 나는 아이가 프린트한 것을 보고는 그 난해한 콘텐츠에 그만 놀라버렸다. 우리 아이들이 이 엄청난 한자어 낱말들을 과연 알까? 선생님은 잘 설명해주셨을까? 이 역시 노파심이리라.
얘들아, 사실 신라 향가나 고려 속요 모른다고 무슨 일이 있는 것 아니야. 그렇지만 책 읽은 얘기, 영화 본 얘기, 어젯밤 꾼 꿈 이야기를 나눌 친구는 만나야지. 멀리 있어도 옛날 그 어느 날에 공부하자고 한 약속을 잊지 않고 있는 친구, 그런 친구를 나도 고등학교 때 만났단다. 아, 그러니까 얘야, 너와 내가 한 약속이 또 생각나는구나.
알뚤, 네가 5학년 때였지? 할머니와 나눈 약속, 빨간 차!
“너네 빨간 차, 참 예쁘다. 이 담에 이런 차 할머니한테 사줄래?” 내가 말했더니 넌 얼른 그러겠다고 했어. 그 이후 가끔 묻곤 했지. 넌 그때마다 빨간 차 하니한테 사주겠다고 했어.
나는 이제 그 약속을 더 묻지 않는다. 고등학생이 된 네가 지금도 기억할 것을 알아서다. 대학생에서 군인으로, 사회인으로 성장해, 나를 앞세우고 빨간 차 보러 가는 날을 상상해본다. 그것만으로도 행복하다. 그게 언제일까는 군더더기.
언제가 아니면 어떠니. 넌 약속을 했고, 코로나 괴물은 도무지 사라질 줄 모르는데. 그리고 빨간 차는 내 마음속 주차장에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으면 됐잖니.
1) 큰 손자가 아기 때 할머니를 ‘하니’라고 불렀다. 아기는 ‘할머니’라 말한 것이지만 어른들 귀에는 ‘하니’로 들렸다. 할아버지도 ‘하지’라고 불렀다.
안경자·이찬재 41만 명의 인스타그램 팔로어를 보유한 시니어 인플루언서 부부로, SNS에 손주 사랑을 담은 글과 그림을 올려 화제를 모았다. 그림 에세이 ‘돌아보니 삶은 아름다웠더라’를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