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승장구, 탄탄대로 인생을 사는 이들이 있다. ‘천운을 타고났나?’, ‘사주팔자가 좋은가?’라며 그들의 성공을 진단해보기도 하지만, 뭐든 타고난 운만 가지고 되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만의 비법으로 성공운을 거머쥘 수 있었던 이들의 유형을 살펴봤다.
◇ 운명개척형
일본 최대 소프트웨어 유통회사인 소프트뱅크의 손정의(손 마사요시) 대표는 젊은 시절 자신의 운명을 미리 점쳐놓았다. ‘20대에 이름을 날린다. 30대에 최소한 1000억엔의 군자금을 마련한다. 40대에 사업에 승부를 건다. 50대에 연 1조엔 매출의 사업을 완성한다. 60대에 다음 세대에게 사업을 물려준다.’ 손정의가 20대에 세운 50년 인생계획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스스로도 자신을 천재라 여겼다고 한다. 사업 제휴를 맺는 상황에서도 “나는 천재다”라고 말했을 정도. 일찍이 그는 자신의 잠재성향과 운을 꿰뚫었고, 그 덕분에 막힘없는 성공 가도를 달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이스타항공 회장을 지낸 이상직 전 국회의원은 요즘말로 흙수저 출신이지만, 자신만의 ‘텐배거’ 로드맵을 만들어 금수저 반열에 올랐다. 텐배거(Ten bagger)는 10루타라는 뜻으로 야구가 아닌 금융투자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투자자에게 10배, 1000%의 수익률을 안겨주는 대박 종목을 의미하는데, 이상직은 1998년 텐배거에 도전해 2년 만에 투자원금 1300만원으로 그의 15배에 달하는 2억원의 수익을 올렸다. 이후 그는 텐배거 법칙을 사업뿐만 아니라 인생의 기본 원리에 적용했다. ‘10루타를 쳐라’를 좌우명으로 삼았던 그는 현대증권에서 10루타 종목을 연이어 터뜨렸고, 이스타항공의 대박 신화를 창조해냈다.
◇ 대기만성형
피카소처럼 타고난 천재성 덕분에 명성을 떨친 예술가가 많다. 그러나 근대 회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세잔의 경우는 달랐다.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나 법과 대학을 다녔던 그는 돌연 화가라는 꿈을 꾼다. 이후 세잔은 선천적인 재능이 아닌 고뇌와 노력의 산물로 세계적인 명작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 실제 피카소는 20대 중반에 그린 작품들이 60대에 그린 작품들보다 4배가량 비싸게 팔렸는데, 세잔의 그림은 60대 중반에 그린 것들이 젊은 시절 작품들보다 최대 15배의 가격에도 팔렸다고 한다. 현재 파리 오르세미술관에 전시된 그의 최고 작품들 역시 모두 인생 말기에 그려진 것이다.
20세기 세잔이 대기만성형 예술가라면, 21세기 대기만성형 과학자를 꿈꾸는 이가 있다. 서울중앙지법원장 출신 강봉수 박사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는 어릴 적부터 물리학에 관심이 많아 고등학교도 이과를 택했고, 서울대 원자력학과를 가고 싶어 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권유로 서울대 법대를 지원했고, 이후 40년간 잘나가는 법조인의 길을 걸었다. 그러면서도 과학자의 꿈을 잃지 않았던 그는 퇴직 후 66세에 물리학 공부를 위해 미국 유학을 떠난다. 그 후 7년 만에 머시드 캘리포니아대 대학원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땄다. 당시 그의 나이 73세였다. 하루 15시간씩 공부에 매진한 덕분에 이제는 ‘강봉수 물리학 박사’로 불리며 활발한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 장수형
무병장수를 꿈꾸는 100세 시대,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도 무탈한 인생이라 할 수 있다. 과거 조선시대 왕 중에서 가장 오래 산 왕은 83세까지 살았던 영조다. 영조의 장수비결은 규칙적인 식사습관과 소식(小食)이었다고 한다. 고기와 생선을 멀리하고 보리밥과 채소를 즐겨 먹었던 영조는 감선(減膳: 나라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왕이 수라상의 음식 가짓수를 줄이며 근신하는 것)을 89차례나 했는데, 신하들이 말을 듣지 않을 때는 감선을 넘어 단식까지 감행하며 절대권력을 유지했다고 한다. 이러한 식습관으로 영조는 장수뿐만 아니라 그에 비례하는 수많은 업적을 남길 수 있었다. 영조처럼 식습관을 잘 다스린 덕분에 장수한 역대 대통령 중에는 제4대 대통령인 윤보선이 있다. 그는 94세까지 살았는데, 평생 절주를 하며 콩·보리·팥 등이 섞인 잡곡밥을 즐겨 먹었다고 한다. 1949년 상공부장관 시절 도시락을 들고 다녔던 윤보선의 일화도 유명하다. 도시락은 부인인 공덕귀 여사가 직접 만든 샌드위치와 잡곡밥 등 검소한 식단이었다고. 이런 소박한 식습관은 그가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계속됐고, 그의 삶을 오랫동안 건강하게 해주었다.
◇ 인(人)형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은 남다른 인연 덕분에 승승장구하는 일생을 살았다. 그가 남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6기)에 다니던 시절, 당시 교관으로 있던 박정희 대통령은 수학 실력이 뛰어난 박태준을 눈여겨보게 된다. 성격이나 취향이 비슷했던 두 사람은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를 벗어나 인간적인 정을 쌓게 됐고, 서로 다른 지역에서 근무하게 될 때도 만남을 이어간다. 이후 1963년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됐고, 같은 해 박태준은 소장 진급과 함께 군복을 벗었다. 이듬해 설날 박정희는 박태준을 청와대로 불러 경제개발5개년계획과 관련해 박태준을 대통령 특사로 일본에 보낸다. 특사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친 박태준은 철강과 제철 분야에 매진했고, 강철 1000만 톤 시대를 연 주역으로 우뚝 선다. 이후 국회의원, 국무총리, 포스코 회장, 포스텍 창립자 등 수많은 직함을 얻었지만, 퇴직금 한 푼, 주식 한 주도 갖지 않았을 정도로 청렴한 철강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 별별유형
1) 독서형: 미국의 대부호 빌 게이츠, 워런 버핏, 마크 저커버그는 젊은 시절 도서관에서 읽은 책 덕분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한국의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도 자신의 성공의 8할은 독서에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 외에도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 박원순 서울시장, 윤송이 엔씨소프트 회장, 남재희 전 노동부장관 등도 잘 알려진 독서광이다.
2) 명상형: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 농구선수 마이클 조던과 코비 브라이언트 등은 그동안 여러 매체를 통해 명상의 효과를 언급했다. 포드자동차의 빌 포드 회장도 명상으로 경영위기를 극복한 적이 있다고 밝혔다. 한국 메이저리그의 신화 박찬호 역시 현역 시절 슬럼프가 찾아올 때마다 명상을 통해 마음을 다스렸고 124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울 수 있었다.
3. 산책형: 프랑스의 사상가 장 자크 루소는 “생각의 발로는 ‘발’에서 나온다”고 강조했다. 셰익스피어, 괴테, 칸트, 베토벤, 모차르트 등은 산책이 영감의 원천이라고 말한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은 2011년 여름 49일간의 백두대간 종주를 마치고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당선됐다. 김영삼 전 대통령도 등산을 통해 인재를 모으고 집권했는데, 민주산악회가 대표적인 핵심 조직이다. 김 대통령은 매주 목요일 등산을 즐겼고, 산에 올라 기도를 했다고 한다.
✽참고 도서 , , ,
시니어블로거협회 창립 행사에 댄스 공연이 잡혔다. 원래는 필자가 가르친 수강생들이 모두 무대에 오르는 것이 취지인데 수강생들이 바빠 연말 강습에 몇 번 차질이 생기다 보니 모두 참여하기는 어려웠다. 무엇보다 남녀 성비가 안 맞아 무대에 오르기는 무리였다. 그렇다고 그동안 가르친 자이브를 어떤 맺음도 없이 끝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필자라도 무대에 오르기로 한 것이다. 파트너는 수강생 중에 가장 열의가 있는 사람을 택했다. 배운지는 3개월밖에 안 되었으나 공연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단 둘이 나가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연습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공연 시간 2분 30초에 맞춰 몇 가지 휘겨를 더 가르쳤다. 총 열댓 가지 휘겨로 안무를 짜고 순서라도 익힐 겸 연습을 하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인근 콜라텍에라도 가서 연습해보자고 했다.
필자가 댄스스포츠를 오래 했다고 하면 당연히 콜라텍에 여러 번 갔을 것으로 아는 모양이다. 그러나 콜라텍은 주로 사교댄스를 추는 곳이라 춤추러 일부러 간 적은 없다. 댄스스포츠는 바닥이 마루로 되어 있고 농구장 바닥처럼 약간의 마찰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콜라텍은 바닥이 미끄럽다. 음악이 다르니 댄스스포츠 춤을 출 수 없고 장소를 많아 차지하니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다. 그래서 댄스스포츠 춤은 댄스스포츠 파티에서만 췄었다.
처음 간 곳은 종로3가 국일관 콜라텍이었다. 국일관 건물 9층에 사람들이 줄지어 들어갔다.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마치 줄서서 라인댄스를 추듯이 사교춤인 잔발춤을 추고 있었다. 블루스와 지터벅을 번갈아 틀어주는데 지터벅 음악이 나오면 모두 잔발춤을 추고 있었다. 잔발춤은 제자리에서 조금씩 움직이며 추는 춤이다. 우리는 공간을 넓게 쓰는 자이브를 추니까 시선이 곱지 않았다. 대부분 70대 정도로 보였다. 희한하게도 남녀 비율이 맞았다. 입장료 1천원에 그렇게 놀고 즐기면 되는 것이다. 30분을 못 버티고 나왔다. 파트너의 얼굴이 실망에 찬 듯 보였다. 난생 처음 콜라텍이라는데 갔는데 생각했던 것과는 달랐던 모양이다.
그래서 답십리로 갔다. 답십리에서 장한평까지는 우리나라 댄스의 고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댄스 학원, 무도장, 댄스복 매장 등이 밀집해 있는 동네이다. 오페라라는 무도장에 갔다. 한창 동호회 파티 중이었다. 들어갈 수는 있었으나 정식 파티이므로 일단 복장을 갖춰 입지 않아 입장을 포기했다.
다음으로 88무도장으로 갔다. 사교춤 중심의 무도장인데 역시 너무 사람이 많아 입장을 포기했다. 그리 크지 않은 규모이다.
마지막으로 가 본 곳이 제니아 무도장이다. 답십리역 4번 출구에서 장한편역 방향으로 3백미터 가면 도시철도 공사가 있고 그 맞은 편 무학성 캬바레 지하에 있다. 춤추는 사람들이 40대~50대 나이로 비교적 나이가 젊은 편이고 복장도 갖춰 입었다. 음악도 자이브 위주에 차차차, 룸바, 왈츠, 탱고를 췄다. 춤 동작이 커도 뭐라고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30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파트너는 이만하면 다시 찾을 만 하다고 본 모양이다. 필자에게 댄스를 배우는 사람들이 단체로 오자고 제의했다. 낮 12시부터 밤 10시까지인데 평일은 무료입장이란다. 주말은 3천원을 받는다 했다. 연습을 위해서라면 평일 낮에 다시 찾을만한 곳이었다.
최근 방송된 건강 프로그램에서 동갑내기 여성 탤런트 L과 전직 스타 농구선수 H의 ‘뼈 나이’를 비교한 적이 있다. 골밀도를 주로 비교한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한창 뼈가 건강한 나이에 운동을 많이 한 H는 40대 초반의 나이임에도 20대의 뼈 나이를 가진 것으로 나타난 반면, 같은 나이의 L은 뼈 나이가 60대로 측정되면서 무려 40년 정도의 차이를 보여줬다. L은 거의 골다공증 위험 수준이었다. L은 왜 이렇게 뼈가 급격히 노화된 것일까? 그것은 생각만 해도 마음 아픈 그녀의 병력 때문이다. 한창 나이에 뇌종양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질환을 앓았던 그녀는 후유증 때문에 몸의 절반에 마비가 왔고, 이를 회복시키기 위해 스테로이드 호르몬제를 과다 투여할 수밖에 없었다. 의사는 이 무리한 요법을 쓸 수밖에 없었고 결국 부작용 때문에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했다. 그녀는 끝내 고관절이 괴사되는 아픔까지 겪어야 했다. 인공관절 수술까지 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다. 당시 스테로이드제를 사용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방송활동을 다시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녀처럼 스테로이드제를 쓰는 것은 불가피한 선택인데, 왜 스테로이드제는 그렇게 심각한 부작용을 필연적으로 가져오는 것일까?
스테로이드 호르몬제가 신약으로 처음 선보였을 때 인류는 ‘신이 주신 선물’이라며 그 효과를 극찬했다. 기존의 소염제로는 염증성 질환이나 알레르기 질환에 효과가 신통치 않았기 때문에 단시일 내에 염증과 알레르기를 가라앉히는 스테로이드 효과는 분명 축복이었다. 스테로이드 호르몬제는 항염증, 면역억제, 혈관수축 등의 효과를 가져오는데, 광범위한 질환에 사용된다. 접촉성 피부염, 아토피성 피부염, 지루성 피부염, 건선, 수포성 질환, 자가면역질환 등 다양한 피부질환 치료에 사용된다. 염증이 생길 경우, 혈관을 통해 염증의 원인 물질이 유입되는 것을 차단하는 것이 급선무이기 때문에 혈관을 급격하게 수축시키면서 염증을 가라앉히는 스테로이드의 효과가 필수적인 질병들이 그 대상이다. 심지어 난임을 해결하기 위해 시도하는 시험관 시술에서도 많은 의사가 스테로이드제를 사용한다. 착상 전에 산모의 몸 안에 있을 수 있는 염증을 가라앉히고 면역력을 약간 저하시켜 과도한 면역반응 때문에 착상에 실패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그러다 보니 스테로이드가 불법적인 목적으로 악용되는 일도 빈번하다. 즉 식품에 스테로이드를 섞어 팔면서 효과를 과장하는 것이다. 주로 노인들에게 많이 사용되는 수법인데, 이런 수법으로 연간 10억여 원의 판매 실적을 올리는 떴다방도 많다. 식품이라 부작용도 없고, 먹기만 하면 관절염이고 통증이 싹 낫는다고 광고하면서 심지어 만병통치약처럼 과장하는 일도 많다. 노인들이 많이 모이는 탑골공원 등지에서 관절에 특효약이라면서 지네가루를 담은 캡슐을 팔기도 하는데, 스테로이드가 무차별적으로 함유된 내용물도 많다. 현혹된 구매자들이 주변에 참 좋은 식품이라며 소개하는 일도 많은데, 그 결과는 참혹하다. 면역력이 억제되면서 고혈압, 당뇨병, 백내장, 골다공증 등의 발생이 거꾸로 급습하는 것이다.
사실 스테로이드의 부작용은 이뿐만이 아니다. 외용제로 스테로이드를 자꾸 쓰다 보면 피부가 얇아지고 혈관이 확장되는 것은 다반사다. 근골격계가 현저히 약해지면서 시험관 아기 시술을 여러 번 시도한 주부가 척추 압박골절을 겪은 사례도 있다. 스테로이드 연고를 눈꺼풀이나 눈 주위에 잘못 바를 경우 백내장이나 녹내장을 유발할 수도 있다. 실제로 스테로이드 호르몬이 함유된 안약을 오랫동안 사용하던 청년이 녹내장 발생으로 실명 위험에 처한 사례도 있다.
스테로이드도 금단증상을 일으킨다. 금단증상은 주로 중독성 약물을 복용하다 강제로 끊었을 경우 발생하기 때문에 마약과 관련이 높은 현상이라고 알려져 있다. 영국의 30세 여성은 3세 때부터 아토피성 습진에 걸린 피부치료를 위해 스테로이드제를 사용해왔다. 하지만 2년 전부터 스테로이드제가 더 이상 효과가 없다는 것을 알고 사용을 중단했다. 그러자 피부가 빨갛게 변하면서 생으로 벗겨지는 증상이 나타나 그녀는 커다란 고통에 시달렸다. 이것이 바로 일명 레드스킨 신드롬(Red Skin Syndrome, RSS)으로 알려진 스테로이드 금단증상(Topical Steroid Withdrawal, TSW)이다. 그녀는 벗겨진 피부에 이물질이 침투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하루에도 여러 번 피부 드레싱을 해야 했고, 하루에 거의 20시간 이상을 욕조의 물에 몸을 담그고 피부를 진정시켜야 했다. 결국 그녀는 우울증까지 겪었다. 국부성 스테로이드 중독증이라고도 불리는 이 증세는 오랫동안 스테로이드제를 사용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데, 사용을 중단할 경우 심한 가려움증과 피부가 타는 듯한 통증을 느낀다. 또한 불면증에 시달리는 등 증상도 다양하게 나타난다. 심할 경우 직장과 학교에서의 정상적인 생활도 힘들다.
따라서 장기간의 스테로이드 사용은 결국 심각한 부작용이라는 굴레를 피해갈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스테로이드의 효과와 부작용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야 할까? 환자의 입장에서는 의외로 답이 간단하다. 스테로이드 연고를 바를 때는 가능한 한 얇고 정확하게 바르고, 자신이 스테로이드를 얼마나 오랫동안 사용해왔는지에 대해 처방의사에게 알려줘야 한다. 또 스테로이드 복용을 장기화하지 않도록 하고, 효과가 기대에 못 미쳐도 양을 늘리지 않는 등 기본적인 사항을 지키면 된다. 많은 환자가 스테로이드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없어 부작용 피해에 노출되는 일은 이제 없어져야 한다.
>> 최혁재(崔爀在) 경희의료원 한약물연구소 부소장
경희대 약학대학 객원교수, 한국병원약사회 법제이사, 서울시 약사회 병원약사이사, 대한약물역학위해관리학회 총무이사.
“치과의사가 어떻게 이런 일을 하세요?” 조윤선 문화체육부장관이 그를 보고 던진 첫 질문이었다. 장영준(張永俊·58) 회장은 대한바이애슬론연맹을 대표해 나간 자리에서 받은 그 질문이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아마 조 장관이 아니라 누구라도 비슷한 질문을 했을 것이다. 바이애슬론이라는 비인기 동계스포츠를 대표하는 자리에 치과의사라니. 더군다나 지금은 평창 동계올림픽을 앞둔 중요한 시기. 그는 어떻게 동계스포츠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일까.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오병돈 프리랜서(Studio Pic) obdlife@gmail.com
장영준 회장은 사실 치과의사들 사이에서는 아주 잘 알려진 인물이다. 올해 1월까지만 해도 그는 선거에서 당선된 대한치과의사협회의 부회장이었고, 그 전부터 협회 기획이사와 홍보이사 등을 경험한 회무에 밝은 사람으로 평가받아왔다. 때문에 치과계 돌아가는 사정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장영준이라는 이름 석 자를 모를 리 없다. 그를 치과계에서 유명하게 만든 또 하나의 직함이 있다. 바로 연세대학교 치과대학동문회장이라는 자리. 현재 국내에는 의대보다 훨씬 숫자가 적은 11개의 치과대학이 있고, 그만큼 의과대학에 비해 결속력이 강하다. 한때는 어떤 대학 동문회가 어느 후보를 지지하는지에 따라 협회 회장이 바뀐다는 이야기도 떠돌았다. 이렇게 그는 뼛속까지 치과의사 그 자체다.
벽안의 한국인 서안나와의 인연
다시 그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조윤선 장관의 질문에 장영준 회장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물론 스포츠도 하나의 전문적인 분야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자격이 필요한 분야는 아니잖아요. 단체를 운영한다는 것은 운동과는 별개의 이야기니까요. 치과의사들의 다양한 사회 참여가 필요하다는 생각도 합니다. 치과의사들에 대한 인식이나 위상이 긍정적으로 변화하기 위해서는 여러 분야에서의 활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장영준 회장의 바이애슬론과의 인연은 그리 오래되진 않았다. 올해 4월이 그 시작이었다. 바이애슬론 연맹은 곧 있을 평창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성적 향상을 통해 외국인 선수의 귀화를 야심차게 추진했는데, 그중 한 선수인 러시아 출신의 프롤리나 안나(한국이름 서안나·32)의 후원 요청을 받게 된 것이 계기가 됐다. 바이애슬론의 주 무대가 유럽인 만큼, 활발한 활동을 위해서는 스폰서가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만 해도 바이애슬론은 제게 낯선 스포츠였죠. 그러나 제가 운영하는 의료법인 메디피움 이름으로 후원을 해달라는 선수 에이전시 측의 요청이 있었어요. 올림픽을 앞두고 있는 만큼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고, 또 태극 마크를 달고 뛸 선수를 돕는 일이라 기분 좋게 동의를 했죠.”
후원이 결정된 프롤리나 안나는 2009년 평창 세계선수권대회 스프린트 4위, 계주경기 1위를 차지하고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는 여자 스프린트 7.5km 경기에서 4위를 기록한 세계 정상급 선수다.
이런 그의 응원이 힘이 됐는지, 안나는 한국 바이애슬론 역사상 첫 세계선수권 메달의 주인공이 됐다. 지난 8월 27일 에스토니아 오테페에서 열린 2016 바이애슬론 하계세계선수권대회 여자 스프린트 종목에서 22분 29초 01의 기록으로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다음 날 열린 여자 추발 종목에선 3위로 결승선을 통과해 동메달을 하나 더 따냈다. 평창에서의 금메달을 바라는 이들의 기대에 부응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알린 셈이다.
“안나는 결혼과 함께 잠시 은퇴했던 선수였어요. 그러다 2년 만에 복귀했는데 지난여름의 성과로 주변의 우려를 한 번에 불식시켰어요. 여성 운동선수들은 나이가 들면 남성호르몬 분비가 늘면서 오히려 성적이 더 좋아지는 경우가 있어요. 아마 안나도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후원자에서 진두지휘하는 수장으로
일각에서는 마치 용병을 사 모으듯 외국인 선수를 귀화까지 시켜 좋은 성적을 내는 것이 합당한가라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국가대표를 출전시켜야 하는 바이애슬론연맹 입장에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한다.
바이애슬론의 올림픽 출전권은 국가 순위가 기준이 되는데, 이 순위는 9번의 월드컵과 1번의 세계선수권대회를 통해 결정된다. 그런데 한국의 2015~2016 국가 순위는 25위로 22위까지만 주어지는 자동출전권을 얻기는 어려운 상황. 게다가 남자 대표의 경우 성적이 나빠 세계선수권 출전권조차 확보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결국 2016~2017 시즌에서 출전권을 확보하려면 성적을 낼 선수가 필요했다.
장 회장은 “귀화 선수를 더 확보하려고 추진하고 있는데 쉽진 않다고 들었어요. 여자 선수는 선수층이 얇아 보강이 필요하다고 하고. 이런 좋은 기량을 가진 선수들은 단기적인 성과만 내주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어린 선수들이 기량을 갖추는 데 마중물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우리 안현수 선수가 쇼트트랙 종목의 수준이 낮은 러시아에 가서 금메달도 따고, 러시아 선수들의 기량 향상에 기여한 것처럼, 안나도 바이애슬론 수준이 낮은 한국에서 같은 역할을 하게 되는 셈이죠”라고 말했다.
장 회장은 안나의 후원식이 열리던 날 안나의 성적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다 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리고 후원이 결정되고 얼마 되지 않아 바이애슬론연맹 회장직에 도전하게 됐고 지난 7월 29일 열린 투표에서 제5대 대한바이애슬론연맹 회장에 당선됐다. 가장 강력한 후원자가 된 셈이다. 그 과정을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지난해 3월에 국민체육진흥법이 바뀌고 대한체육회와 국민생활체육회가 통합되면서 새누리당 염동렬 의원이 맡고 있었던 전임 회장자리가 자동으로 공석이 됐어요. 국회의원의 체육단체장 겸직 불가 의견도 있어 새 회장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들었는데 문득 욕심이 나더라고요. 아마 안나를 후원하면서 바이애슬론 매력에 빠진 모양이에요(웃음).”
그런데 문득 궁금해졌다. 이렇게 평창올림픽을 위해 애쓰고 있는 입장에서 일련의 국정농단 사태로 인해 올림픽이 마치 범죄의 온상이라도 된 듯한 지금의 상황에 대한 그의 생각이 말이다. 장 회장은 당연히 성공적 개최가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연맹과 조직위원회가 맡은 역할이 달라 세세하게 알긴 어렵습니다만, 지금의 상황이 안타까운 것은 사실이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평창올림픽은 국가적인 사업이라는 점이에요. 실제로 이번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많은 사람이 애쓰고 있고요. 이미 IOC에서도 실사를 다녀갔고, 경기 준비 진행에 문제가 없다는 의견을 받았어요. 한 차례 세계대회를 치러본 경험도 있고, 경기장도 12월 완공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이제 국민들이 관심을 가져주시는 일만 남았어요. 연맹 예산이 적어 홍보활동에 많은 한계가 있지만 좋은 성적을 내고 성원에 보답하기 위해 계속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응원도 열심히 해주시고, 많이 보러 와주시면 좋겠어요.”
이종결합으로 대중화 앞당길 것
바이애슬론은 국내에선 어쩔 수 없는 비인기 스포츠이지만 유럽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국내의 프로야구나 프로농구에 비견될 만큼의 인기 스포츠 중 하나. 유럽 일부 국가에선 하루 24시간 바이애슬론 경기만 방영하는 방송국이 운영되고 있을 정도. 역대 올림픽 성적을 보면 독일이 가장 강국이고, 그 뒤를 노르웨이와 러시아가 뒤쫓고 있다.
장 회장은 “바이애슬론은 크로스컨트리 스키와 사격이 결합된 경기예요. 선수들은 총을 등에 맨 채로 스키를 타고 일정 거리를 달리다가, 사격장에선 사격을 겨뤄요. 바이애슬론이 인기가 있는 이유로는 두 가지 경기, 그러니까 스키와 사격을 함께 볼 수 있다는 점과 과녁을 맞히지 못하면 페널티가 주어지는 역동성이 꼽히죠. 이 밖에도 꽤 흥미로운 요소가 많아요. 한 가지 경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계주도 있고, 앞 주자를 앞질러야 하는 추적 경기도 있어요. 올림픽에서는 11개의 메달이 걸려 있는 종목이니까 비중도 꽤 높다고 봐야 합니다. 남자 5개, 여자 5개, 혼성 1개의 경기가 진행돼요”라고 설명한다.
장 회장이 바이애슬론연맹을 맡으면서 관심 갖는 것 중 하나는 바이애슬론의 대중화다. 결국 국민들 속으로 들어가 그들이 직접 즐기는 스포츠가 되지 않고서는 인지도와 성적 모두 다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바이애슬론은 생각보다 즐길 수 있는 여지가 많아요. 꼭 스키가 아니더라도 자전거와 같은 다른 종목과 결합할 수도 있고, 사격 역시 호기심을 자극하는 요소가 많죠. 요즘엔 레이저를 이용한 장비들도 있어 일반인들도 쉽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얼마 전에 대중화를 위한 연맹 차원의 행사가 있었는데, 어린아이들의 반응이 대단했어요.”
치과의사들의 다양한 목소리 듣고 싶어
그가 속한 의료법인 메디피아는 치과뿐만 아니라 의료검진센터 등 다양한 과목이 결합된 의료법인이다.
“메디피아를 시작한 시기는 1990년이었어요. 다른 과목 의사들과 의기투합해서 만들었는데, 어려움이 생겨 경매에 넘어가게 된 상황까지 처해 할 수 없이 모든 지분을 제가 인수하게 됐죠. 2000년 1월 1일에 이사장이 됐어요. 경영 정상화가 되면서 2013년에는 판교에 분점도 냈죠. 치과의사가 다른 메디컬 분야의 경영에까지 참여한다는 것이 한계도 있고 공부도 필요하지만, 그 과정에서 조직의 힘과 팀워크 그리고 소통의 중요성을 알게 됐어요.”
그가 최근에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 중 하나는 바로 치과의사를 위한 일종의 사회운동, ‘행복한치과만들기 준비위원회’다. 그는 이 위원회를 통해 철학자 강신주를 초청, 대담을 진행한 적도 있고, 청년이나 여성 치과의사들과의 모임도 진행했다.
“치과의사들에게 ‘우리는 행복한가’라는 화두를 던져보고 싶었죠. 치과의사들이 불행하다고 느낀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 다양한 계층의 치과의사들과 터놓고 이야기해보고 싶었어요. 젊은 치과의사들이나 여성 치과의사들의 생각은 어떤지, 동료로서 선배로서 이야기를 나눠보려고 다양한 시도들을 했습니다.”
이런 모임에서 여러 직함을 갖고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도 그가 놓지 않는 것은 치과의사라는 스스로의 정체성이다. 이제는 직원이 300명인 의료법인의 대표라면 진료를 쉴 법도 한데, 아직도 매주 환자를 대면하고 직접 진료하는 활동을 멈추지 않는다. 이유에 대해 묻자 간단하게 대답한다.
“배운 것이 이것이고, 치과의사니까요.”
오산중고 뒤편 운동장은 필자 세 자매의 아지트였다. 노을빛이 이루 말로 다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황홀하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필자는 서울 변두리의 용산구 보광동에서 태어나 스무 살까지 그곳에서 살았기 때문에 아름답고 행복한 추억들은 모두 다 보광동에 묻어 두게 되었는데, 그 보광동의 중심에 오산중고가 우뚝 서 있다. 오산중고에 오랜 세월 가보지 않아서 지금은 어떻게 변했는지 알 수 없지만 옛날에 필자가 어릴 때는 앞과 뒤에 모두 넓은 운동장이 있었다. 땅이 넓었기 때문에 온 동네의 행사란 행사는 모두 오산중고에서 하였다. 그리고 동네 아이들도 자전거 타기, 야구, 축구, 농구, 배구등 넓은 장소가 필요한 놀이는 모두들 오산중고등 운동장에 가서 했다. 그렇게 평일의 방과 후나 일요일에는 동네사람들의 차지가 되었다. 필자도 오산중고에서 많이 놀았다. 학교 뒤 운동장의 한강 쪽으로 끝자리는 낭떠러지이고, 그 아래는 강변북로, 그리고 그 너머가 한강이다. 그곳에는 아주 크고 오래된 나무가 하나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우리 세 자매의 아지트였다. 우리 형제들은 오산중고등학교 뒤편 운동장에 자주 가서, 그 나무아래에서 놀다오곤 하였다.
어린 시절, 그곳은 참으로 행복한 곳 이었다
큰언니와 필자는 띠 동갑이다. 터울은 많았어도 우리형제들은 어릴 때, 소박하면서도 행복한 시절을 보냈다. 큰언니는 그 때, 대학교 3학년이었고, 작은언니는 중학교 3학년이었으며, 필자는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이렇게 우리 세 자매는 모두 6살 터울이다. 작은언니와 필자 사이에는 3살 터울의 작은오빠가 있는데, 그때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그 시절에는 남자와 여자가 노는 스타일이 달라서 산책은 주로 자매들끼리만 가기 일쑤였다. 큰언니와 작은언니는 노래를 잘한다. 큰언니는 교회 성가대에서 소프라노 파트를 하고 있었고, 작은언니는 학교에서 대표로 뽑혀서 KBS방송국 출연도 한 적이 있을 정도로 노래를 특히, 잘했다. 두 언니들이 노래를 부르면 화음이 잘 맞고, 참 아름다웠다. 필자는 지독한 음치라서 듣기만 하는데도 얼마나 행복했던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정신 줄 놓고 듣곤 했다. 그리고 우리 큰언니는 동화구연을 참 잘했다. 그 당시에 교회에서 주최하는 동화구연대회에 나가서 상도 탔다. 우리는 셋이서 둘러앉아 큰언니가 들려주는 동화를 얼마나 재미있게 듣곤 했던지! 들어도 자꾸만 또 듣고싶고, 또 듣고싶고 그랬다. 그러고 보면 언니들이 재능이 참 많았다. 큰언니의 동화구연이 끝나 갈 때쯤이면, 하늘에는 저녁노을이 물들어 간다. 노을은 시간에 따라 빛이 다 다르다. 밝고 노오란 빛은 찬란하고, 시간이 점차 지나면 점점 붉게 물들어 가는 것이 어찌나 슬프도록 아름답던지! 우리 세 자매는 넋을 잃고 넘어가는 노을빛에 취해 아무 말도 없이 그저 저녁노을만 바라볼 뿐이다. 그 시간은 각자 상상의 날개를 펴는 시간이다. 필자도 저녁노을을 바라보고 있으면, 어린나이에도 동화 한편 뚝딱이다. 그렇게 공상과 환상 속에서 맘껏 날개를 펴고 날아다니는 시간이 한없이 행복했다. 노을이 지고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면 세 자매는 정신을 차려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흰 머리칼이 여기저기 생겨나고, 나이든 지금도 그 시절이 그립다.
지금도 언제 어디서나 저녁노을만 보면 취한다
필자는 집을 살 때 항상 따져 보는 것이 있다. 바로 집의 ‘향’이다. 모두들 남향을 선호하지만, 필자는 앞이 탁 트인 동남향을 선호한다. 앞이 탁 트인 동남향은 그 집에 살고 있는 동안은 밖에 나가지 않아도 편하게, 아름다운 일출과 저녁노을을 맘껏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살고 있는 집도, 집안 창가에 서서 저녁노을을 맘껏 즐길 수 있는 집이다.
지금도 언제 어디서든 저녁노을만 보면 필자는 정신을 못 차린다. 그 아름다움에 취해서 노을빛 속에 들어가 어릴 때와 마찬가지로 상상의 날개를 편 채, 접을 줄을 모른다. 아마 그 속에서 대하 장편소설도 넉근히 쓰고도 남을 것이다. 땅거미가 져야만 비로소 정신이 돌아오니 말이다. 어릴 적 아지트는 오산중고등학교였지만, 스무 살 보광동을 떠난 뒤로는, 언제 어디서든지 찬란한 저녁노을빛이 ‘나만의 아지트’가 되었다.
두 질문의 답은 우리 민족 고유의 운동인 씨름과 씨름 선수다.
최근 급격하게 인기가 떨어졌지만 1980~90년대, 장충체육관을 비롯한 전국 곳곳에 있는 체육관은 연중 열리는 민속 씨름 경기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짧은 시간에 불꽃같이 피어오른 민속 씨름 인기의 중심에 ‘만 가지 기술’을 구사한다는 이만기가 있었다.
민속 씨름이라는 이름은 1983년 씨름이 프로화되면서 기존의 아마추어 씨름과 구분하기 위해 만든 명칭이다. 씨름은 모두가 알고 있듯이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 민족이 즐긴 전통의 스포츠다. 전 세계적으로 볼 때 몽골 스페인 스위스 일본 등지에 씨름과 비슷한 운동이 있고 민속 씨름 전성기에는 몽골 스페인 등과 교류하기도 했다.
근대적 스포츠로서 씨름은 일제 강점기인 1910년대에 나타난다. 이 무렵 단성사의 소유주 박승필(朴承弼, 1875~1932)이 조직한 ‘유각권투구락부’에서 회원들에게 씨름과 유도, 복싱을 익히도록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912년 10월 7일 단성사에서 씨름과 유도, 복싱 3개 종목 경기가 열려 점수제에 의해 우열을 가리고 상품을 줬다는 기록도 있다.
야구 농구 배구 등을 보급하며 한국 근대 스포츠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서울YMCA는 민족 스포츠인 씨름을 장려하기 위해 1928년부터 1936년까지 전조선씨름대회를 개최했다. 이 대회의 스타는 김윤근(金潤根)이었다. 1930년대의 이만기인 셈이다. 김윤근은 이 대회를 비롯해 선수 시절 200여 차례 씨름대회에서 황소 200여 마리, 우승기 88개를 차지한 스타플레이어였다. 김윤근은 1945년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난 뒤에는 대한씨름협회 회장을 지냈고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국민방위군 사령관을 맡았으나 방위군 비리와 관련해 사형됐다. 씨름계로서는 큰 인물이었지만 역사에 오점을 남기고 말았다.
1927년 12월 27일 창립한 조선씨름협회는 농구 축구와 함께 일제 강점기에 우리 힘으로 만든 몇 안 되는 경기 단체 가운데 하나다. 그 시기 거의 모든 종목은 조선체육회가 대회를 주관하고 주최했다. 서울YMCA가 전조선씨름대회를 개최한 1년 뒤인 1929년 9월 28일 조선체육회는 휘문고보 운동장에서 조선씨름협회와 공동 주최로 제 1회 전조선씨름대회를 열었다. 경신학교와 휘문고보, 중동학교, 양정고보, 중앙고보, 협성실업, 보성고보, 숭인상업 등 8개 팀이 출전한 단체전 결승에서 경신학교는 보성고보를 접전 끝에 7-6으로 누르고 첫 우승의 영예를 안았다. 개인전 결승에서는 이도남이 최재빈을 물리치고 첫 패권을 차지했다.
조선체육회는 제 16회 전조선종합경기대회를 1935년 10월 22일부터 나흘 동안 경성운동장을 중심으로 열었다. 이 대회는 지난 대회의 육상과 축구, 농구, 야구, 정구 등 5개 종목에 씨름, 유도, 역기(역도), 검도 등 4개 종목을 추가했다. 씨름이 오늘날 전국체육대회의 정식 종목이 된 것이다.
이런 역사 속에 씨름은 우리 민족의 혼을 이어 주는 운동으로 꾸준히 발전했고 프로화된 민속 씨름 직전의 스타플레이어로는 이만기의 직계 선배라고 할 수 있는 김성률 장사를 꼽을 수 있다. 김성률 장사는 1970년대 최고의 씨름 선수였고 운동 능력이 뛰어나 레슬링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1974년 제 55회 대회부터 1976년 제 57회 대회까지 전국체육대회 레슬링 슈퍼헤비급 자유형과 그레코로만형 2관왕을 3년 연속 차지한 것을 비롯해 1983년 제 63회 대회까지 전국체육대회에서 금메달 12개와 은메달 2개, 동메달 3개를 목에 걸었다. 쉽게 믿기 어려운 성적이다. 하형주가 씨름 기술을 응용해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유도 95kg급에서 금메달을 차지한 것은 씨름과 레슬링, 유도로 이어지는 연계성 그리고 씨름 기술의 우수성을 입증한다.
1983년 4월 17일 장충체육관, 약관의 이만기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날이고 장소다. 초등학교 때 씨름을 배운 지 10년 만에 이룬 첫 개인전 우승이자 프로화된 씨름 사상 첫 천하장사 타이틀을 딴 날이고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후 1990년 27세의 나이로 은퇴하기 전까지 천하장사 10번, 한라장사 7번, 백두장사 19번 그리고 11차례의 번외 경기까지 이만기는 길지 않은 선수 생활 동안 47차례 우승의 놀라운 성적을 올렸다. 상금이 아니고 예전처럼 황소를 줬으면 큰 농장을 차려도 됐을 것이다.
초대 천하장사 이만기의 빛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적지 않은 스포츠팬들이 잊고 있지만 1980년대 초반 씨름판에는 내로라하는 장사들이 군웅할거했다. ‘모래판의 신사’ 이준희, ‘인간 기중기’ 이봉걸, ‘털보' 이승삼 그리고 홍현욱, 최욱진 등이 유력한 초대 천하장사 후보들이었다. 지방대회든 전국대회든 우승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이만기는 경력도 그렇고 나이도 어려 우승 후보군에 들 수가 없었다. 그때 이만기는 지방에 있는 대학(경남대학교 2학년)에서 씨름을 하는 무명의 선수였을 뿐이다.
천하장사 경기가 열리기 하루 전인 4월 16일 펼쳐진 한라장사 결승전은 약관의 천하장사 탄생 예고편이었다. 그 무렵 최고 수준의 기술 씨름을 자랑하던 최욱진(경상대학교 3학년)은 이만기를 3-2로 누르고 한라장사 꽃가마에 올랐다. “나는 우승과는 인연이 없는가 보다.” 이만기는 그날 밤 한숨도 자지 못했다. 게다가 체격이 이만기보다 작은 최욱진이 자세를 낮추며 파고드는 바람에 가슴에 약간의 부상까지 있었다.
민속 씨름의 성공적인 출발을 알리는 초대 천하장사 결승전 카드는 절묘하게 이뤄졌다. 키 172cm의 최욱진이 준결승에서 182cm의 홍현욱을 누르고 결승에 올랐다. 한라장사와 천하장사 두 개의 타이틀이 눈앞에 다가왔다. 8강을 목표로 했던 이만기(182cm)는 준결승에서 ‘한 번만 이겨 봤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 수없이 생각했던 이준희(195cm)를 꺾고 결승에 진출했다. 몸무게에 관계없이 겨루는 천하장사 경기에서 기술 씨름의 두 달인이 한 체급 위인 백두급 장사들을 모조리 쓰러뜨리고 결승전 모래판에서 마주 서게 된 것이다.
기술 씨름 달인들의 팽팽한 접전이 이어지는 동안 장충체육관의 열기는 최고조에 이르렀다. 컬러 TV 방송이 시작된 지 2년여가 지난 그때 전국 방방곡곡의 가정에서는 총천연색으로 중계되는 씨름 경기를 보는 이들이 넘쳐 났다. 요즘처럼 시청률 자료가 나왔다면 ‘국민 드라마’의 수치를 가볍게 넘어섰을 것이다.
2-2로 맞선 가운데 이룰 만큼 이룬 이만기로서는 심적 부담이 상대적으로 적었고 최욱진은 한 판만 잡으면 한라장사에 이어 천하장사까지 차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니 상대적으로 심적 부담이 더했을 것이다. 이때 이만기는 평소 연습을 거의 해 보지 않았던 호미걸이를 승부수로 던졌다. 씨름계에서 쓰는 표현인, ‘뽑아 드는’ 들배지기가 이만기의 상징적인 기술이고 이외 밭다리, 잡채기, 뒤집기 등 다양한 기술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이후 7년여 동안 모래판을 평정하게 되는 이만기지만 이날 구사한 호미걸이 기술은 이제 와 생각해도 ‘왜 그때 그 기술을 썼는지 알 수 없다’고 한다. 유도 기술과 비슷한 호미걸이 기술로 이만기는 자신의 선수 생활 첫 개인전 우승이자 천하장사 우승을 이뤘다.
천하장사 이만기하면 떠오르는 첫 번째 이미지가 모래판에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모래를 흩뿌리며 포효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이 장면을 찍은 수많은 사진에는 비밀이 숨어 있다. 이만기는 1980년대 스포츠 전문 사진기자로 활동한 R씨와 매우 친했다. 이만기는 승리 세리머니를 할 때마다 R 기자가 카메라를 들고 있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봇물처럼 터진 프로화의 물결
8월을 스포츠 열기로 뜨겁게 달군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 출전한 한국 선수단 가운데에는 적지 않은 프로 선수들이 있었다. 24세 이상 와일드카드 3명의 선수를 포함한 18명의 남자 축구 대표팀과 여자 배구 대표팀은 전원이 프로 선수였다. 축구는 잉글랜드 독일 포르투갈 오스트리아 중국 일본 등 외국 리그에서 활동하고 있는 선수가 7명이나 됐다.
한국 스포츠로서는 1982년을 아마추어와 프로 양대 축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원년으로 기록할 만하다. 물론 이때 이전에도 프로 종목은 있었다. WBA(세계복싱협회) 주니어 미들급 챔피언 김기수가 대표하는 프로 복싱과 1960~70년대 최고 선수였던 한장상으로 대표되는 골프가 1980년대 이전의 몇 안 되는 프로 종목이었다. 그러나 이들 종목은 개인 종목으로 시장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다.
1982년 단체 종목인 야구가 프로화하면서 국내 스포츠계는 본격적인 프로화 시대를 맞게 됐다. 그리고 이듬해인 1983년 아마추어 팀을 포함한 축구 프로 리그인 슈퍼리그(K리그의 전신)가 출범했다. 민속 경기인 씨름도 같은 해 프로화가 돼 이만기 등 신예의 등장과 함께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굳이 순서를 따지면 1982년 3월 프로 야구, 1983년 4월 민속 씨름, 1983년 5월 프로 축구다. 이들 종목은 앞서기니 뒤서거니 프로화 물결에 합류했다.
잠시 끊겼던 프로화 물결은 1990년대 중반 농구대잔치를 무대로 펼쳐진 대학 농구의 폭발적인 인기에 힘입어 1997년 남자 농구가 프로화되고 이어 여자 농구, 그리고 2000년대 들어서 남녀 배구가 프로화가 되면서 국내 인기 종목 대부분이 프로로 재탄생했다.
프로화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었다. 또 프로화가 되면서 해당 종목의 경기력이 크게 향상돼 축구는 숙원이었던 월드컵 본선 진출을 1986년 멕시코 대회에서 이룰 수 있었고 이후 2014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회까지 8회 연속 월드컵 본선에 나서는 기록을 세웠다. 올림픽에서도 자동 출전한 1988년 서울 대회를 시작으로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대회까지 8회 연속 본선에 올랐다. 이 사이 2012년 런던 대회에서는 동메달을 차지했다.
1992년 바르셀로나 대회 때 뒤늦게 올림픽 정식 종목이 된 야구는 프로화를 기반으로 끌어올린 경기력으로 2000년 시드니 대회 동메달, 2008년 베이징 대회 금메달의 성과를 이뤘다. 한국 야구는 정식 종목 재진입이 확실시되는 2020년 도쿄 올림픽에서 다시 한번 메달에 도전할 만한 경기력을 유지하고 있다.
1980년대 프로화 3총사 가운데 씨름은 2000년대 들어 급격한 인기 하락과 함께 프로 종목으로서 내세울 만한 콘텐츠 없이 암흑기를 겪고 있어 스포츠 팬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글 신명철 편집위원, 전 편집국장 smc6404@naver.com
경희대한방병원 이재동 척추관절센터장은 비만이 관절염을 유발하는 원인 중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을 파악하고 오랜 기간 연구를 해왔다. 살찐 형태에 따라 상체 비만, 하체 비만, 전신 비만 등 세 가지로 구분해 각 체질에 맞는 다이어트법을 알아보자. 한의학적 관점에서의 체형별 비만관리 핵심을 4회에 걸쳐 게재한다.
1. 중년 다이어트의 중요성 2. 체형별 다이어트 생활습관 3. 체형별 다이어트 식이요법 4. 체형별 다이어트 운동요법
‘뱃살쯤이야’ 혹은 ‘살쪄도 건강하기만 한데’라며 배나 옆구리에 한가득인 살을 업신여기는 사람이 많다. 건강한 비만이란 없다. 비만은 당뇨병, 고혈압, 뇌경색, 천식 등의 질병 발병률은 물론 사망률(20%)도 높인다. 문제가 심각해지기 전부터 운동으로 관리해야 한다.
운동은 건강한 사람이든 병에 걸린 사람이든 누구에게나 중요하다.
특히 관절염 환자는 움직이지 않을 경우 뼈로부터 칼슘이 빠져 나가 골다공증에 걸리기도 하고 근육의 힘이 빠지고 관절의 유연성을 잃어버리게 되므로 운동이 더욱 중요하다.
관절의 경직을 막기 위해 ‘관절의 운동범위’를 매일매일 움직여 주는 것이 중요하며 이것을 유연성운동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매일 하루에 30분 이상의 과격하지 않은 운동을 하고 조깅이나 농구, 심한 에어로빅보다는 자전거 타기, 체조, 수영 등이 적당하다.
전신 비만
전신 비만은 순환기능이 떨어져 대사능력이 약해지면서 전신에 불순물이 쌓이는 체질로, 무엇보다 몸을 많이 움직여 대사능력을 높여 주는 것이 중요하다.
큰 힘 들이지 않으면서 평소에 할 수 있는 운동은 몸통 돌리기 (우리 몸의 70%는 물이기 때문에 몸통 돌리기를 일명 ‘물통 돌리기’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이다.
전신 비만에 좋은 ‘몸통 돌리기 운동’
다리를 붙이고 차렷 자세로 서서 팔은 자연스럽게 내려트린다.
골반을 좌우로 돌려주면 골반 위의 몸통이 좌우로 회전을 하게 된다.
몸통회전을 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내려트린 팔도 원심력에 의해 좌우로 회전하게 된다.
이외에도 러닝머신이나 줄넘기 같은 운동과 함께 1주일에 2시간 정도의 근력운동을 병행해 주는 것이 매우 효과적이며 조깅이나 등산도 좋다. 족욕, 사우나 등으로 순환을 좋게 해 주는 것 역시 도움이 된다.
상체 비만
상체 비만은 비뇨생식기능이 떨어져 기운이 위로 올라가면서 상체는 비대해지고 하체는 가늘어지는 체질이기 때문에 평소 하체운동을 통해 기를 아래로 끌어내려 주는 것이 중요하다.
쉽게 할 수 있는 추천운동은 발뒤꿈치 자극 운동이다.
상체 비만에 좋은 ‘발뒤꿈치 자극 운동’
발을 11자로 놓고 차렷 자세로 서서 발뒤꿈치를 들어 올렸다 내렸다 한다.
번의 방법을 하면서 들어 올린 뒤 공중에서 양쪽 발뒤꿈치를 가볍게 부딪치고 바닥으로 내려 준다.
번의 방법을 하면서 내려올 때 발뒤꿈치를 땅바닥에 쿵하고 부딪치면서 내려도 좋다.
이외에도 명상이나 단전호흡을 통해 기를 아래로 내려 주고 또한 오랜 시간 지구력을 기를 수 있는 운동을 하는 것이 좋다. 하체 단련을 위해 천천히 걷기나 자전거 타기 등도 도움이 된다.
하체 비만
하체 비만은 소화기가 약해 섭취한 음식물이 100% 다 소화되지 않고 복부에 쌓이기 때문에 복부와 하체가 비만해지는 체질로, 추천할 운동은 배꼽 당기기 운동이다
하체비만에 좋은 ‘배꼽 당기기 운동’
자연스럽게 배꼽을 힘껏 등쪽으로 당기면서 숨을 내쉰다.
당긴 배꼽을 풀어 주면서 숨을 들이마신다.
이렇게 배꼽을 당겼다 풀었다 하면서 숨을 내쉬었다 들이마셨다 하면 자연스럽게 복식호흡이 되면서 위장과 복근이 강화되고 복부지방이 연소된다.
하체 비만은 소화기능이 약해 에너지 생성이 잘 되지 않기 때문에 과도한 운동은 오히려 기력을 떨어뜨려 대사능력이 저하될 수 있다. 따라서 조금 빠르게 걷거나 요가, 단전호흡, 스트레칭 등 가벼운 운동이 좋다.
부위별 지방을 줄이기 위한 운동
목운동
얼굴은 정면을 향하고 어깨는 들어 올리지 말고 머리를 앞으로, 뒤로, 오른쪽, 왼쪽으로 굽혀 각각 2~3초 동안 자세를 유지한다. 목이 뻣뻣해지는 증상을 개선하고 앞뒤로의 움직임을 도와주며 흉곽팽창과 어깨의 운동성을 좋게 한다.
어깨운동
깍지를 끼고 기지개를 켜 견갑골을 가운데로 민다. 5초간 힘을 유지한다. 깍지를 끼고 바로 서서 천천히 팔을 들어 올린다. 5초간 힘을 유지했다가 천천히 팔을 내린다. 흉곽의 움직임을 좋게 하고 어깨 뭉침을 덜어 준다.
무릎운동
벽에서 두 걸음 떨어져 서서 손을 벽에 댄다. 한 발을 앞으로 내딛는다. 양쪽 발뒤꿈치를 바닥에 대고 종아리 근육이 펴지는 느낌이 들도록 무릎관절을 곧게 펴고 엉덩이를 벽쪽으로 민다(10초간 유지 후 힘을 뺀다). 무릎관절 주위 근육을 튼튼히 하고 허벅지와 종아리 근육에 힘을 길러줄 수 있다.
발목운동
발가락을 바닥에 대고 발뒤꿈치를 들어 올린다. 힘을 주어 유지한 후 다시 발바닥을 아래로 내린다. 발목관절을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회전하는 것을 반복한다. 발목관절의 유연성을 길러 준다.
이번 리우 올림픽 경기를 보면서 운동경기에서 키가 작은 선수들은 고전하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었다.
태권도에서 가까스로 금메달을 딴 김소희 선수도 상대방이 다리를 반 쯤 접어서 견제하자 들어가서 공격하기가 어려웠다. 상대방보다 아래쪽에 있다 보니 수비하기 급급해서 점수를 지키기 위해 소극적인 경기를 한다고 주의 경고를 여러 차례 받았다. 하마터면 연장에 들어가 금메달을 놓칠 뻔 했다.
사실 필자도 태권도, 유도, 복싱을 배울 때 뼈저리게 느꼈던 사실이다. 똑 같이 동시에 팔 다리를 뻗어도 나보다 팔 다리가 긴 상대방의 팔다리가 먼저 내 몸에 닿는다. 특히 타격을 가하는 운동은 팔다리의 길이가 중요하다.
이번 올림픽 경기에서 펜싱이 그랬다. 팔다리가 짧은 대신 빠른 발놀림으로 상대방을 위협하곤 했다. 그러나 상대방이 발도 빠르다면 당할 재간이 없다.
타격을 가하지 않는 유도도 그렇다. 유도를 할 때에는 상대방의 힘을 역이용해야 하는데 엎어치기 기술을 구사하려면 상대방의 체중이 일단 넘어 와야 그 에너지를 앞쪽으로 쏠리게 하여 업어치기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키가 큰 선수라면 필자가 업어치기를 하려고 상대방을 끌어당겨도 긴 다리가 버티고 있어 상체가 넘어 오지 않는다.
당구를 칠 때도 수구의 위치가 멀리 있으면 키가 작은 사람은 팔이 닿지 않아 불안한 자세에서 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키가 큰 사람은 허리만 간단히 구부려도 되니 자세가 불안하지 않다.
키가 크면 내려다보기 때문에 잘 보인다. 농구에서 바스켓이 위로 보이면 일단 공을 위로 보내서 중력으로 떨어지는 것을 노려야 하지만 키가 커서 바스켓을 내려다 볼 수 있다면 그대로 꽂으면 된다. 배구에서 공격을 할 때에도 키가 크면 상대방 진영이 다 보인다. 스파이크를 하면 내리꽂는 위력이 더 대단해서 수비하기 어렵다.
공을 멀리 보내는 구기 경기도 키가 상관없을 것 같지만, 역시 키가 큰 사람이 유리하다. 야구에서 키가 큰 투수가 내리 꽂는 공이 더 위력적이다. 골프에서도 키가 상관없을 것 같지만 키가 큰 사람은 골프채를 휘두르는 아치가 커서 임팩트 또한 크게 작용한다.
이외에도 키가 큰 사람이 유리한 것은 수없이 많다. 우리 선수들이 키 뿐 아니라 체구까지 큰 서양 선수들과 싸울 때 불리한 조건임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핸드볼 경기를 보다보면 애처롭기까지 하다.
그런데 우리 선수들의 체구도 많이 좋아졌다. 키도 커지고 체구도 커졌다. 배드민턴이나 유도 경기를 봐도 확연하다. 우리 선수들이 상대방 선수들보다 오히려 키가 더 큰 경우도 종종 보인다. 그러나 큰 키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것을 볼 때 답답함을 느낀다. 격투기에서는 오히려 큰 키로 엉거주춤 있다가 주의 경고를 받아 경기에서 지는 모습을 볼 때 더욱 그랬다. 탁구나 배드민턴도 빠청하게 서 있다가 수비 전환이 늦어 점수를 잃는 일도 많았다. 상대방은 키가 작아 큰 키의 우리 선수들을 부러워하는데 전혀 큰 키의 이점을 살리지 못하는 것을 볼 때마다 답답했다는 얘기이다.
밭농사 하려면 여자는 손에 호미를 놓아서는 안된다는 말을 한다. 농사라고 까지 말하기는 그렇지만 은퇴지가 촌이다보니 정원이다 텃밭이다 하여 밭농사 흉내는 내면서 사니까 정말 호미는 늘 지척에 두고 있다. 요즘처럼 더위가 극성일 때는 해뜨기 전 세 시간정도 정원과 집둘레의 잡풀을 제거해야하니 눈만 뜨면 호미를 잡아야 하는 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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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미는 작은 농구이니 비싸지도 않다 정원가꾸기 할 때 유용하게 쓰이는데 비하면 정말 제 값 톡톡히 해 내는 물건이라 늘 싸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 싼 값이라는 생각도 요즘들어 연거푸 세 자루 잃어버리고 나니 싸지도 않다,
처음 새 것일 때는 나무색 그대로인데 일손에도 흙이요 흙을 파고들고 긁고 누르는 작업을 하다보면 보호색의 벌레처럼 흙과 하나가 되어버린다. 일 마친 후에는 호미를 씻어 보관하여도 자루는 여전히 흙색이다. 호미가 풀이 무성한 땅에 누워 있으면 사람의 눈에 들어오기 힘들다. 일을 하다가 보면 웃자란 풀이 있고 웃자란 풀은 호미를 사용하는 것보다 손으로 뿌리째 뽑아버리는 것이 더 깨끗한 작업이 되니까 호미를 옆에 두고 손작업을 하게 되는 데 한 번 호미를 내 손에서 놓았다가 다시 잡으려면 늘 허둥댄다. 내 앉은 자리 반경 1미터 둘레이니 보통은 찾게 되지만 금방은 잃어버리고 못 찾게 되는 경우도 더러 있다. 그 시간에 못 찾더라도 시간을 조금 지체한다든지 다음 날에는 찾게 된다. 그래서 호미는 잃어버림과 찾음의 반복을 되풀이 한다.
은퇴지를 농촌으로 결정하기 전에 먼저 제주도로 은퇴한 언니 집에서 한 달씩 머물곤 했는데 그 때 언니의 텃밭에서 밭일 예비수업을 했다. 언니와 함께 잡풀제거작업을 할 때 언니는 곧잘 호미를 잃어버리고 찾아 헤매었다 때로는 연이틀 사흘을 호미를 잃어버리곤했다.
그러다가 집에 호미가 없어 새 것 사야겠다 할 때면 잃어버린 호미를 계속해서 찾게 되어 호미도 수급을 잘 알아 조절해 준다싶어 고맙기도 했다.
필자는 잃어버리지 않는 호미를 언니는 잘 잃어버려 이상한일이다 했는데 작년부터 필자도 호미 잃어버리기 시작했다. 처음 잃어버렸을 때는 일 하는 곳 주위에서 쉽게 찾아지곤 하여 그러려니 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잃어버리는 빈도도 잦고 찾아지지도 않기 시작한다. 연 사흘 내리로 세 자루의 호미를 잃어버리고 찾지를 못하고 있다. 내가 일한 곳을 아니까 찾아봐야 할 장소가 마냥 넓지도 않다. 사방 4,5미터 안에 있어야하는데 찾을 수가 없다. 한 두 번이면 작은 실수라 하겠지만 연거푸 세 번씩이니 아찔한 생각이 든다.
문득 나는 잘 잃어버리지 않는데 언니는 잘 잃어버리곤 하든 그 때의 언니의 나이를 계산해본다 지금 나보다는 많이 젊었든 것 같다. 작은 건망증, 실수에도 나이든 사람에게 흔하게 오는 치매의 증상이나 아닐까하는 두려운 생각도 든다. 하지만 내 언니도 아직은 정신이 맑으니 그 걱정은 기우다.
이제는 여분의 호미가 없어 호미 대신 낫을 사용하니 불편하다.
유 씨 부인의 조침문이 생각난다. 지척에서 쉽게 구매 할 수 있는 호미도 내 손 때 묻으니 잃어버림이 섭섭한데 그 시절 구매하기도 어려웠고 작은 물건이 손에 착 들어와 완전히 하나의 개체로 움직이며 섬세한 작업을 한 바늘에 정감도 묻었으리라. 여리고 작은 것이 내강하여 휘돌며 춤추며 만든 작품이 아름답기도 했고 생업이었으니 애틋함이 글이 되었겠다.
박세리가 1998년 ‘맨발 투혼’을 발휘한 US 여자 오픈 우승을 비롯해 4승을 올리는 장면을 TV로 보고 골퍼의 꿈을 키운 박세리 키즈들은 2016년 현재 미국 여자 프로골프투어를 휩쓸고 있다.
오는 8월 리우데자네이루 대회에서 112년 만에 올림픽 무대로 돌아오는 골프 종목에서는 세계 랭킹 15위 안에 드는 선수는 한 나라에서 최다 4명까지 출전할 수 있다. 한국은 이변이 없는 한 여자부 4명의 출전이 확실시되고 있고 유력한 금메달 후보국이다. 박세리가 일궈 놓은 성과다.
2010년 밴쿠버 동계 올림픽 피겨스케이팅 여자 싱글 금메달리스트 김연아의 뒤를 잇는 김연아 키즈들은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에서는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겠지만 현재 초등학교 5, 6학년들인 임은수(12, 서울 응봉초) 김예림(12, 군포 양정초) 유영(11, 과천 문원초) 등은 올림픽 메달리스트로 성장할 가능성이 꽤 크다. 이들은 대체로 김연아의 초등학교 시절 기술 수준에 올라 있고 2022년 베이징 동계 올림픽에서 기량을 꽃피울 나이가 된다. 최근에는 이세돌과 인공지능 알파고의 대결로 이세돌 키즈들이 나올 터전이 마련됐다. 그런데 40여년 전에도 ○○○ 키즈가 있었다. 이제 그 ○○○을 찾아서 시간 여행을 떠나 보자.
‘이에리사 키즈’ 붐
1973년 한국 스포츠를 화려하게 장식한 건 여자 탁구였다. 1967년 여자 농구에 이어 한국은 여성을 앞세워 세계 무대에 다시 한 번 ‘스포츠 코리아’를 알렸다.
1973년 제 32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는 4월 5일부터 15일까지 유고슬라비아 사라예보에서 60개국이 출전한 가운데 열렸다. 한국은 김창원 대한탁구협회 회장을 단장으로 총감독 이경호, 남자 코치 김창제, 여자 코치 천영석으로 코칭스태프를 구성했다. 남자 선수로는 홍종현 최승국 김은태 강문수 이상국이, 여자 선수로는 정현숙 이에리사 박미라 나인숙 김순옥이 출전했다.
여자 단체전은 예선 리그를 펼친 뒤 예선 A, B조를 통과한 4개국이 예선 전적을 안고 돌려 붙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B조에 속한 한국은 이에리사와 정현숙을 단식, 이에리사와 박미라를 복식에 기용하는 전략으로 스웨덴, 유고슬라비아, 서독을 잇따라 3-0으로 완파한 뒤 중국과 피할 수 없는 일전을 벌이게 됐다. 한국은 1, 2번 단식에서 이에리사와 정현숙이 중국의 정후아잉과 후유란을 각각 2-1로 꺾으며 기선을 제압했다. 한국은 3번 복식에서 이에리사-박미라 조가 중국의 정후아잉-장리 조에게 0-2로 졌으나 4번 단식에서 이에리사가 이 대회 단식 챔피언인 후유란을 2-0(21-15 21-18)으로 눌러 우승으로 가는 최대 고비를 넘었다.
결승 리그에서 한국은 헝가리와 일본을 각각 3-1로 물리치고 예선 리그를 포함해 8전 전승으로 세계 여자 탁구 정상에 올랐다. 1956년 제23회 도쿄대회에 처음 출전한 이후 17년 만에 거둔 값진 성과였다. 이 대회에서 한국은 여자 단체전 우승 외에 여자 단식에서 박미라가 3위를 차지했다.
여자 탁구가 중국을 누르고 세계 정상에 올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전국 방방곡곡 탁구장은 탁구를 치려는 청소년들로 넘쳐 났다. 글쓴이가 살던 서울 변두리 동네에는 1980년대까지만 해도 가장 목이 좋은 네거리 빌딩 2층에 탁구장이 있었다. 20여년 전까지만 해도 서울 시내 한복판 광화문에 ‘고려탁구장’이 있었는데 점심 시간에는 가볍게 땀을 흘리려는 직장인들로 빈 탁구대가 없었다.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여자 단체전 우승의 주역 ‘이에리사 키즈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에리사가 처음 라켓을 손에 잡은 건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3남 5녀 가운데 일곱째인 이에리사는 일찌감치 뛰어난 탁구 실력을 보였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전국선수권대회 초등부 우승을 차지하더니 충남 홍성여중 1학년 때 참가한 전국종별대회에서도 눈에 띄는 플레이를 펼쳤다. 서울 문영여중 손병수 코치는 이에리사를 눈여겨보고 서울로 전학을 권유했다. 아버지 이승규 씨는 딸의 서울행을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곧 허락했다. 이에리사는 중학교 3학년 때인 1969년, 언니와 오빠가 있는 서울로 전학해 본격적으로 탁구를 시작했다. 언니가 싸다 준 점심, 저녁 도시락을 먹으면서 수업이 끝난 뒤 하루 6시간 강훈련을 한 번도 거르지 않았다.
그해 5월 이에리사는 전국학생종별대회 개인전 우승을 거머쥐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이 그해 11월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제23회 전국남녀종합선수권대회에서 일어났다. 이에리사는 학생부에서 일찌감치 우승하더니 일반부에서도 연승 행진을 이어 갔다. 결승 상대는 베테랑 김인옥(한일은행)이었다. 두 선수는 경기 내내 접전을 펼쳤다. 이에리사는 1-1로 맞선 3세트에서 21-19로 이겨 세트 스코어 2-1로 승리했다. 15세 소녀가 자신보다 7, 8세 많은 선배들을 모두 누르고 종합선수권을 차지하자 탁구계는 발칵 뒤집혔다. 학생부에서 우승한 뒤 바로 다음 날 일반부에서 우승했으니 더욱 그럴 만했다.
탁구 올드 팬들은 기억하겠지만 이에리사의 플레이 스타일은 남자 선수로 보면 한참 후배인 김택수와 비슷했다. 여자 선수라고는 믿기 어려운 강력한 드라이브를 구사했다. 지금이야 드라이브가 일반적이지만 당시 여자 선수가 힘 있는 드라이브를 구사하는 경우는 보기 힘들었다. 이에리사는 드라이브를 앞세운 공격적인 탁구로 국내 무대를 휩쓸었다. 국내 선수권자가 된 이듬해인 1970년 국내 대회 7관왕에 오른 데 이어 국제 무대에서도 맹활약했다. 제10회 아시아탁구선수권대회 주니어부 단식 우승을 차지했고 단체전 우승을 이끌었다. 어느새 이에리사는 한국 여자 탁구의 미래를 상징하게 됐다. 그리고 불과 3년 뒤 이에리사는 한국 여자 탁구를 세계 정상에 올려놓았다. 그의 나이 19세 때였다.
어린 나이에 정상에 오른 뒤 쉽게 무너지는 선수들이 종종 있다. 그러나 이에리사는 세계선수권대회 단체전에서 우승한 뒤에도 국내 최강자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국내 최고 권위의 탁구 대회인 종합선수권대회에서 7연속 우승했다. 이에리사의 7연속 우승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국가대표선수로도 꾸준히 활약했다. 1975년 캘커타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해 단체전 준우승을 이끌었고 1976년에는 서독오픈에서 개인전 우승을 차지했다.
탁구인 이에리사가 위대한 까닭은 1973년 대회 이후 한국 선수가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기까지 14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1987년 제39회 뉴델리 대회에서 양영자-현정화 조가 여자 복식 정상에 오르면서 한국 여자 탁구의 세계선수권대회 금메달 흐름이 이어졌다. 1991년 일본 지바에서 열린 제4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남북 단일팀 ‘코리아’가 여자 단체전에서 우승하기까지는 18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이에리사는 남북 여자 탁구 선수들 모두에게 '우리도 세계 정상에 설 수 있다‘는 희망을 밝힌 대선배였다.
2003년 용인대학교 교수로 임용된 것을 시작으로 2005년 여성 스포츠인으로는 처음으로 태릉선수촌장을 맡았고 2014년에는 역시 한국 여성 체육인으로는 처음으로 아시아경기대회(인천) 선수촌장을 지냈다. 이에리사는 제19대 국회의원까지, 여성 체육인으로서 최초 기록을 여럿 갖고 있다.
탁구, 전국민이 열광한 생활스포츠
탁구만큼 국민들에게 친근한 스포츠가 있을까. 1973년 여자 단체전에서 세계 정상에 오르며 전국적으로 탁구 열풍이 일더니 1986년 서울 아시아경기대회에서는 탁구로 온 나라가 들썩거렸다. 너도나도 탁구장으로 가거나 틈만 나면 드라이브를 하는 폼을 잡기도 했다. 서울 아시아경기대회가 초반의 열기를 뿜고 있던 1986년 9월 24일 서울대 체육관에서는 한국과 중국의 탁구 남자 단체전 결승이 벌어졌다.
한국은 첫 두 단식에서 안재형(뒷날 중국 탁구 선수 자오즈민과 한중 수교 전에 결혼)과 김완이 천신화와 후이준을 나란히 2-0으로 꺾고 앞서 나가기 시작하더니 내처 4-1까지 리드를 이어 갔다. 그러나 6번 단식부터 내리 3게임을 내줘 게임 스코어 4-4로 역전 위기에 몰렸다. 9번 단식에서 후이준과 맞선 안재형은 첫 세트를 듀스 접전 끝에 25-23으로 딴 뒤 세트스코어 2-1로 이겼다. 한국은 4시간 30분이 넘는 대혈투 끝에 세계 최강 중국을 무너뜨렸다. 중국은 1985년 현재 세계선수권대회 남자 단체전에서 3연속 우승을 포함해 통산 10번의 우승을 기록하고 있었다.
여자 단체전에서는 중국을 꺾었지만 남자 단체전에서 중국을 물리치리라고 내다본 이는 거의 없었다. 서울대 체육관은 열광의 도가니였고 숨 막히는 접전 끝에 세계 최강 중국을 꺾는 장면을 TV로 지켜본 국민들은 환호 또 환호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탁구는 세계선수권대회를 연 지 62년 만에 정식 종목으로 채택됐다. 서울 올림픽 여자 복식에서 양영자-현정화 조는 중국의 자오즈민-천징 조를 2-1로 꺾고 올림픽 여자 복식 초대 챔피언이 됐다. 남자 단식에서는 유남규가 김기택을 3-1로 따돌리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다시 한 번 전국적으로 탁구 열풍이 불었다.
>>>글 신명철 편집위원, 전 편집국장 smc6404@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