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케줄이 빡빡하다고 했다. 아침 시간에는 요양원 봉사에 오후에는 영화 수업을 듣는다고 했다. 바쁜 일정 쪼개서 만난 이 사람. 발그레한 볼에서 빛이 난다. 태어나면서부터 웃으며 나왔을 것 같은 표정. 미련 없이 용서하고 비우는 삶을 살아가다 보니 그 누구에게도 남부끄럽지 않은 환한 미소의 주인공이 됐다. 발 딛고 서 있는 모든 곳이 꿈의 무대. 시니어 마술사 겸 영화인 조용서(趙鏞瑞·92) 씨를 만나 90대 소년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봤다.
“오전 11시에 복음병원에서 6월 생일인 분들의 생일잔치가 있었어요. 거기에 20명가량이 모였는데 그 앞에서 제가 마술을 했습니다. 끝나고 나서는 서울노인복지센터 영화교실에서 영화 만들기 수업을 들었어요. 서울노인영화제에 출품할 영화 막바지 작업을 해야 해서 요즘 좀 정신이 없습니다.”
만나자마자 요즘 왜 바쁜지 설명하는 조용서 씨다. 배낭에는 뭣이 그렇게도 많이 들었는지 무거워 보였다. 영화 제작에 마술 공연도 하기 때문에 가방은 가벼워질 날이 없을 듯싶다. 2008년부터 지금까지 총 7편의 영화를 제작했다. 각종 영화제에서 입선해 실력을 인정받은 시니어 영화감독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유튜브 채널을 개설해 손수 영상물을 만들어 올리고 있다. 촬영에 대본에 내레이션도 직접 한다.
“서울노인영화제, DMZ국제다큐영화제 등에서 시니어 감독으로 네 차례 입선했습니다. ‘어르신 통역사들’이라는 작품은 작년에 대한극장에서 상영했어요.”
이번 영화 ‘긴 세월 살았다네’는 조용서 씨와 아내가 주인공이다. 단편 다큐멘터리 작품으로 기자와의 인터뷰가 끝난 이후 영화제 출품을 마쳤다고 전해들었다.
“작업을 해보니 러닝타임이 5분 40초더라고요. 90세 노년의 생활은 이렇다 하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10월에 영화제가 있는데 입선이 되면 상영할 겁니다.”
조용서 씨가 만든 영상은 담담하고 담백한 게 매력이다. 노년의 시각으로 바라본 자신과 주위 동료가 배우이자 주인공. 이 시대 시니어의 모습을 담아내고자 한다. 그러면서 가장 존경하는 분이 방송인 송해 선생이라고 했다.
“저보다 한 살 위인 송해 선생이 건강하게 전국을 누비는 모습이 참 훌륭해 보입니다. 저에게 많은 소재와 영감을 주십니다. 나이가 많아도 뭐든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주시는 삶의 지표 같은 분입니다. 사람은 누구든 나이를 먹고 머리도 하얗게 변해요. 한 치 앞을 모르는 인생이잖아요. 제가 팔십이 넘어 영화를 만들게 될줄 알았을까요? 몰랐습니다.”
2008년부터 영화 수업을 받고, 영화 제작을 하고, 다수의 수상 경력이 있어서일까? 봉준호 감독 부럽지 않은 포스가 느껴졌다.
반짝이는 관객들의 눈이 좋다
영화와 엇비슷한 시절에 입문한 것이 바로 마술이다. 현재 조용서 씨는 고양시 실버인력뱅크의 ‘꿈전파 문화공연단’ 마술팀 소속으로 매주 틈새 없이 복지관, 병원, 어린이 도서관 등을 돌며 공연을 펼친다.
“영화를 먼저 배우기 시작했는데 마침 고양시 실버인력뱅크에서 마술 교육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배웠습니다. 붓글씨나 노래교실도 있었는데 마술 수업을 보자마자 좋았어요. 운명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나 할까. 제가 할 수 있는 마술은 200여 가지 됩니다. 손에 완벽하게 익어서 공연할 수 있는 마술은 30개 정도 되고요.”
조용서 씨의 마술 도구는 큰 공연장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이 주를 이룬다. 많게는 200~300명 정도의 관객까지 아우를 수 있는 마술을 주로 구현한다고.
“손재주가 있어야 한다는데 저는 없어요. 그래서 동작도 크고 화려해 보이는 마술이 좋아요. 제가 좋아하는 마술은 분위기에 따라서 다른데 부채 마술이랑 인형 비둘기가 나오는 마술입니다. 스펀지나 꽃을 사용하는 마술도 있고요. 특별히 잘하는 건 우산과 꽃을 이용한 마술입니다.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는 신기해 보이겠죠?”
애로사항이 있다면 한 번 본 사람은 두 번은 보지 않으려 한다는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대에 서는 이유는 관객들의 눈 때문이라고 했다.
“저를 바라보는 눈빛이 정말 반짝반짝 빛나요. 어린아이들이 손뼉 치는 거 보면 희망을 주는 것 같아 기분이 너무 좋아요. 그리고 저는 무대를 사랑합니다. 사람들이 저를 봐주는 게 행복해요. 자부심도 갖게 되고 말이죠.”
92세 시니어가 하는 말이 소년 감수성 저리 가라다. 사실 조용서 씨는 꽤나 매스컴을 탄 인물이다. 장수 관련 방송 다큐멘터리와 시니어가 등장하는 프로그램에 자주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고 보니 피부가 굉장히 건강해 보인다. 꼭 물어볼 질문이 생겼다. 장수 비결 말이다.
“저는 90대의 모범생으로 살고 있다고 봅니다. 바쁘게 살아요. 그게 장수하는 비결일 수도 있겠습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오래 살기만 하면 뭐하겠어요. 사회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노인 일자리를 통해서 시니어나 어린이들 앞에서 공연하고 박수 받는 시간들이 기쁘고 즐거워요.”
90년 인생 철학을 묻다
장수의 관문인 구십 문턱을 넘어 건강하게 살고 있는 시니어에게 꼭 물어보고 싶었던 것이 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남에게 안 해봤던 옛이야기 혹은 꼭 한 번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있을까 하고 말이다. 쉼 없이 이야기를 펼치며 한껏 들떠 있던 그의 들숨날숨이 순간 잔잔해졌다. 그리고 정적이… 잠시 동안의 정적이 이어졌다.
“그저 하루하루 마음 편하게 살고 있다는 게 고마울 따름이죠. 그게 복이고요. 아프지 않게 우리 부부가 더 오래오래 살았으면 합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또 한숨 돌리더니 옛일이 파란만장했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진다고 말했다.
“저는 우리나라의 제1차 경제 부흥을 일으켰던 세대에 속합니다. 서독 간호사, 광부들 아시죠? 그 시절 사람이에요. ‘국제시장’이라는 영화 있었잖아요. 제 삶도 주인공과 비슷해요. 베트남전쟁 때도 사우디아라비아에 가서도 항만하역 근로자로 긴 시간 땀 흘려 일했습니다. 그때 그 시절을 살았던 사람들 이제 몇 안 남았을 거예요. 그러니까 나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입니까.”
백전백패의 인생을 살았다고 했다. 가족에게도 미안한 마음을 가진 적이 많았다고 했다.
“일곱 번 넘어지고 여덟 번 다시 일어나서 오늘이 있는 거 같습니다. 욕심 부리지 않고, 근심걱정 다 내려놓고 오늘 하루 즐겁게 행복하게사는 것이 지금 제 인생 최대의 바람입니다.”
이후에도 나긋하게 살아온 얘기를 하는 얼굴에 잔잔한 평화가 보였다. 본인 스스로를 연예인이라고 했던 초반의 긴장감이 없어서 더욱더 평온한 시간이 흘렀다. 앞으로도 그 미소 잊지 말고 마술가로 영화감독으로 건강하게 살아가시기를….
고령운전자로 인한 교통사고는 고령화를 겪고 있는 사회가 갖는 공통적인 문제 중 하나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어서 일부 지자체는 운전면허증을 반납하는 고령자를 대상으로 교통비 지급 등 인센티브 제도까지 마련했다. 일본 역시 마찬가지다. 지난 4월 도쿄에서는 88세 운전자가 몰던 승용차에 치어 모자가 사망했고, 6월에는 81세 운전자가 차량 5대를 들이받아 사망자까지 나온 사고가 있었다. 연이은 사고에 일본 사회 각계각층에서는 대안을 내놓느라 여념이 없다.
고령운전자 사고 치매 관련성 커
일본 경시청 자료에 따르면, 2017년 발생한 교통사고 중 사망사고 건수는 75세 미만 면허소지자의 경우 10만 명당 3.7건에 불과했지만, 75세 이상은 7.7건으로 2배가 넘었다. 사망사고를 낸 75세 이상 운전자 중 385명을 검사한 결과 절반에 가까운 49%가 치매가 의심되거나 인지장애를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본 경시청은 이 자료를 통해 인지장애가 교통사고와 인과관계가 있어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에 반해 75세 이상 면허소지자 수는 매년 증가해 2007년 283만 명에서 2017년엔 540만 명으로 증가했다. 물론 고령자의 사고 건수 역시 매년 증가하는 상황. 2007년에 8.2%였던 전체 사망사고 중 75세 이상 운전자의 사고 비중이 2017년에는 12.9%까지 높아졌다.
고령운전자로 인한 사회적 문제가 커지자 일본 정부는 지난 6월 정부 차원의 대책 마련에 나섰다. 가장 먼저 대두된 것은 감속 페달로 착각해 가속 페달을 밟았을 때 급가속을 방지하는 장치 등 안전장치를 갖춘 차량 소유자에게만 면허를 발급하는 제도 등을 논의 중이다. 또 앞 차량이나 보행자를 감지하면 자동으로 속도를 줄여주는 장비 탑재 의무화도 검토하고 있다.
자동차 제조사도 문제 해결에 나서
고령운전자 문제 해결을 위해 자동차 제조업체도 나섰다. 도요타자동차의 자회사 중 하나인 다이하쓰(ダイハツ)공업은 지난 4월 25일부터 지역 밀착 프로젝트 일환으로 고령운전자를 위한 사업을 펼치고 있다.
‘몇 살이든 이동의 자유가 있는 생활’을 목표로 진행되는 이 사업은 건강 안전 운전 강좌의 형태로 일본 전역 37개 판매점, 57개 지역에서 진행되고 있다.
이 사업을 위한 고령운전자 교육은 일본자동차연맹(JAF)이 맡고 있다. 교육 대상은 신체기능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50세 이상의 운전자다. 이 교육을 통해 고령운전자는 스스로의 운전습관을 되돌아보고 안전운전에 대한 경각심을 강화하고 있다. 교육은 시각기능과 인지능력을 점검하는 과정과 전문가의 운전 강습, 고령자의 면허갱신과 관련한 정보 등으로 이뤄진다.
운전졸업식 아시나요?
고령운전자의 면허증 반납을 유도하기 위한 방안으로 일본에선 ‘운전졸업식’이란 단어도 등장했다. 동일본 고속도로(NEXCO東日本)는 고속도로 역주행 사고의 과반수 이상(66%)이 65세가 넘은 고령운전자에게서 발생한다는 점에 착안해 운전자뿐만 아니라 가족에게도 안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역주행 방지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동일본 고속도로는 지난 2월 이 캠페인을 위한 단편 웹 영화 ‘아버지와 어머니의 졸업여행 ~ The Last Long Drive’를 공개했다. 영화에선 ‘운전졸업식’이 등장해 화제를 모았다. 이 영화는 면허증 반납을 놓고 딸과 논쟁을 벌이던 78세 아버지가 마지막 운전을 기념하기 위해 졸업여행을 떠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여행 과정에서 아버지는 운전의 어려움과 가족의 걱정을 새삼 깨닫게 되고, 가족이 준비한 작은 졸업식에 감동받는다.
동일본 고속도로는 웹 영화 공개와 함께 고령운전자 대상 설문조사, 역주행 방지를 위한 3대 점검 방법 등 다양한 방식을 통해 고령자로 인한 고속도로 사고 예방에 나서고 있다.
재즈’ 하면 대개 분위기 좋은 바에서 와인을 곁들이며 듣는 모습을 떠올린다. 황덕호(黃德湖·54) 재즈평론가는 이러한 선입견이 ‘재즈는 어려운 음악’이라는 편견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그는 “재즈는 화려한 레스토랑의 만찬보다 시장 골목 외진 식당에서 그날그날의 재료로 말아주는 즉석 국밥에 가깝다”고 설명했다. 개성 있는 연주자들이 즉흥으로 이루는 재즈 앙상블의 매력을 비유한 것이다. 또 애써 격식 갖춘 공간을 찾지 말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황덕호 역시 오랜 시간 자신의 다락방에서 재즈를 즐겼다. 그리고 그보다 더 오래전, 훌륭한 재즈들이 다락방에서 탄생했다.
올해 3월 이사하기 전까지, 황덕호는 다락방이 딸린 후암동 빌라에서 8년여 동안 재즈를 듣고 글을 썼다. 그곳에서 집필한 마지막 책이 바로 ‘다락방 재즈’다. 이제는 예전처럼 다락방은 없지만 어디서든 재즈를 통해 다락방의 감성을 얻는 그다.
“영어로 하면 ‘로프트 재즈’(loft jazz)인데 실제 1970년대부터 쓰인 용어입니다. 당시 뉴욕 맨해튼의 작은 다락방 작업실들에서 실험적인 재즈가 많이 만들어졌거든요. 제가 썼던 다락방과는 다소 의미가 다르지만, 번듯한 환경이 아니더라도 어디서든 들꽃처럼 피어나는 재즈의 특성과 맞닿는 부분이 있죠.”
독자가 책을 어떻게 읽길 바라는지 묻자 그는 “틈틈이 가볍게 읽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재즈 이야기를 낯설고 어렵게 여길 수도 있는 이들을 염두에 둔 답변이었다.
“줄곧 재즈 입문자의 눈높이로 글을 써왔어요. 대중적이거나 애호가가 많은 음악이 아니니까요. 그런데 이번엔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고 책을 냈어요. 때문에 어떤 글은 일반인이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진지하게 볼 책은 전혀 아니고요. 짤막짤막한 단편 모음이니까 순서에 상관없이 제목 보시고 읽고 싶은 글 위주로 읽으시면 돼요. 독자가 ‘재즈가 들을 만한 음악인가보네? 재미있네?’ 정도의 호감을 갖는다면 더 바랄 게 없습니다.”
자신의 책처럼 쉽게 다가가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는 평소 “음악은 대충 듣는 것”이라 말해왔다. 집안일이나 식사를 하며 즐겨도 만족감을 준다는 데 그 이유가 있었다. 역설적으로 그 음악을 알려면 제대로 집중해 듣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덧붙였다.
“극장에서 다른 일 하지 않고 조용히 영화나 공연을 보는 것처럼, 음악도 30분이든 1시간이든 몰입해서 들어야 비로소 그 실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전까지는 좋아할 수는 있어도 잘 알지는 못하거든요. 가령 우리가 누군가를 두고 ‘그 사람 괜찮아’라고 하는 것과 ‘그 사람 잘 알아’라고 하는 게 다르듯 말이죠. 사람을 알아가려면 많은 얘기를 주고받으며 깊이 헤아려야 하는 것처럼, 음악도 제대로 알려면 많이 듣고 집중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익숙하고도 낯선 최고의 앙상블
그는 책에서 “진정한 재즈 팬이란 방금 탄생한 싱싱한 즉흥연주의 맛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라 일컬었다. 대화를 하면서 상대의 말투와 성격을 파악하듯, 즉흥연주를 통해 연주자의 개성과 매력을 느낄 수 있다는 것. 특히 즉흥연주 앙상블은 연주자 간의 익숙하면서도 낯선 호흡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재즈에서 앙상블은 지휘자가 정교하게 이끄는 합주와는 다릅니다. 모든 음이 기록된 악보에 맞춰 연주하는 것으로 완성도를 따지는 음악이 아니니까요. 재즈 뮤지션들은 악보에 쓰이지 않은 여백을 조화롭게 즉흥적으로 채워나가죠. 솔로에서는 연주자 개인의 개성을 보여줘야 하지만, 앙상블에서는 서로의 개성이 얼마나 어우러지느냐가 관건입니다. 뛰어난 재즈 뮤지션들은 상대의 연주에 귀 기울이고 그에 맞게 자신의 개성을 노련하게 드러내죠. 혼자만 돋보이려고 하다 보면 음악은 무너지고 말아요. 즉 상호 존중이 필요하죠.”
물론 지나친 배려 때문에 각자의 개성까지 잃어버리면 재즈의 맛은 떨어지게 마련이다. 그렇다고 무한대로 개성을 표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연주하는 곡의 화성, 박자 등 지켜야 할 최소한의 것들은 존재한다. 그는 느슨한 틀 안에서 적절히 개성을 발휘하는 것은 숙련된 연주자만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재즈 연주자들의 전성기는 대개 마흔이 넘어 옵니다. 어느 분야이든 자기 스타일을 완성하려면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하니까요. 젊은 시절엔 연주 테크닉만으로도 주목을 받지만, 나이 들어서도 같은 방식을 고수한다면 그건 퇴보라 할 수 있죠. 훌륭한 뮤지션들은 다른 연주자와 상호 작용하는 능력을 키우는 동시에 자신의 개성을 더 견고하게 만듭니다. 재즈 대가들을 보면 오히려 육체적인 힘은 떨어지지만 한 음을 눌러도 자기만의 세계를 딱 펼쳐내죠. 음악만 듣고도 누구의 연주인지 단번에 알아차릴 만큼이요.”
재즈의 즐거움은 재즈 그 자체
슬플 때 위로를 주는 음악이 있는가 하면, 즐거울 때 흥을 더해주는 음악도 있다. 또 젊어서는 별로였던 음악이 나이 들어 좋아지기도 한다. 이렇듯 감상은 자신의 기분이나 처지에 따라 달라진다. 그렇다면 재즈는 어떤 감정과 세대에 어울리는 음악일까?
“사실 재즈는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는 감정하고는 무관해요. 사람들은 음악을 통해 기분을 전환하고, 그 감정에 빠져들곤 하죠. 그러나 재즈는 음악 그 자체의 논리가 더 중요합니다. 애호가들이 재즈를 통해 느끼는 즐거움은 순전히 음악적인 교감에서 오는 거예요. 애초에 뮤지션들을 위한 음악으로 만들어져 발전했기 때문에 대중음악의 기능과는 거리가 멀죠. 재즈 뮤지션들은 자신이나 청중의 감정을 대변하기보다는 연주 자체의 재미를 전달하는 게 목적이거든요. 기쁘거나 슬프라고 들려주는 건 아니라는 얘기죠. 오히려 그런 점에서 어느 때고 평생 들을 수 있는 음악이 아닐까 싶어요.”
그래서일까? 20여 년을 재즈에 푹 빠져 살면서도 여전히 재즈에 관한 일을 할 때가 가장 즐겁다는 황덕호다. 30대에 시작한 KBS 라디오 ‘재즈수첩’ 진행도 어느덧 올해 20주년을 맞이했다. 재즈 프로그램이 거의 사라진 요즘, 매주 주말 단 2시간이라도 재즈를 들려줄 수 있어 다행이란다. 물론 그의 갈증을 해소하기에는 부족하지만 그나마 재즈 팬들에겐 가뭄 속 단비 같은 시간이다.
“만약 어느 채널에서 록 프로그램이 하나만 있는데, 일주일에 딱 2시간만 진행된다고 쳐봅시다. 그러면 비틀스와 롤링스톤스의 음악을 빠트릴 수 있을까요? 재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대표적인 곡들을 위주로 선곡하고 있습니다. 가급적 주어진 시간 안에 재즈의 명작들을 알려야겠다는 마음이 크죠. 물론 그런 기준으로 음악을 골라도 소스는 무궁무진해요. 시간이 부족해서 그렇지, 아직도 광산에는 금이 가득합니다.(웃음)”
어린 시절 어머니 손에 이끌려 집 근처에 있던 금천교시장(현 세종마을 음식문화 거리)을 다니면서 맡았던 음식의 향기는 지금도 나의 후각에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어쩌면 나의 음식 취향은 그 때 이미 결정되었는지 모른다. 간장떡볶이, 오징어 튀김, 감자를 으깨 만든 크로켓(고로케) 등등. 근처에 갈 일이 있으면 일부러 들러서 추억의 냄새를 맡곤 한다. 지금은 현대화되어 옛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지만, 후각 속에 간직된 기억은 어느덧 과거를 소환한다.
전통시장은 후각뿐 아니라 시청각적 즐거움도 함께 선사한다. 다양한 상품들이 무질서한 듯하지만, 사고 싶은 잠재적 욕구를 끌어내는 귀신같은 장사꾼 감각으로 진열되어 있다. 사려는 물건을 쪽지에 적어가고도 항상 유혹을 이기지 못해 무거운 장바구니를 끌고 돌아오는 어리석음을 반복하는 이유다. 그러나 장사꾼의 호객 소리마저 치어리더의 박수처럼 나의 과잉 선택에 갈채를 보내는 듯해 가책 없이 마음 뿌듯하게 돌아오곤 한다.
지금 사는 곳 부근에도 시장이 하나 있다. 다른 한적한 길도 있지만, 집으로 돌아올 때는 일부러 북적거리는 시장 한복판을 거쳐 온다. 늘 보는 주인장, 늘 듣는 장단, 늘 비슷비슷한 상품들, 특별히 달라진 것이 없는데도 다양한 시각적 자극이 주는 감흥이 쏠쏠하기 때문이다. 한 200m 되는 시장통을 걷다 보면 마치 재미있는 단편집 한 권을 읽은 듯 삶의 다채로움이 주는 매력에 빠진다. 나이 들어가면서 모든 게 그저 그렇고 삭막해져 가는 삶에서 시장은 나를 깨우는 매력을 지니고 있다.
늙어갈수록 주변 공간은 ‘단조롭게’ 바뀐다. 갈 곳도 줄어들고 만나는 사람도 준다. 복잡한 곳에 갈 일은 더더욱 줄어든다. 게다가 눈에 들어오는 대부분이 낯이 익고 새로운 것이 없으니 호기심도 사라진다. 전통시장은 어쩌면 이런 노년의 삶에 새로운 자극을 주는 다시없는 장소가 아닐까 싶다.
시장은 늘 같은 것 같아도 매일 다르다. 가격이 달라지고 고객들 취향이 미세하게 바뀐다. 장사꾼들의 표정도 매일 다르다. 시장은 하루 하루 생명력을 갖고 약동한다. 그 변화를 눈치 채면 늘 흥미롭고 가슴이 뛴다.
출출하네! 오늘은 허리 굽은 할머니가 구수한 냄새를 풍기며 유혹하는 바지락칼국수 한 그릇 먹고 가야겠다.
1997년 촉발된 IMF 외환위기로 기업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내가 다니던 회사도 경영난을 극복하지 못해 1999년 결국 문을 닫아야 했다. 봉급이 유일한 수입원이었던 월급쟁이로서 충격이 켰다. 아내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여러 차례 아내와 상의한 끝에 집 주변에서 초중고생을 대상으로 한 보습학원을 열기로 했다. 나는 전문적인 일을 하고 싶었기 때문에 학원 운영을 아내에게 맡기고 다른 일을 찾아봤다. 내게 적합한 일은 무엇일까. 고민이 시작되었다. 기업들이 강점(strength), 약점(weakness), 기회(opportunity), 위협(threat) 요인을 토대로 마케팅 전략을 수립하는 기법인 SWOT 분석을 통해 제2인생을 설계해보기로 했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뒤 건설업체에서 10년, 무역회사에서 10여 년간 근무하면서 해외 관련 부서 일을 했던 나는 영어 회화력이 그나마 내가 가진 ‘강점’이라 생각했다. 또 학원을 창업하면서 여유 자금을 사용해버려 더 이상의 투자 자금이 없다는 것이 ‘약점’이었다. 내 능력만을 필요로 하는 일을 해야 했다. 그래서 찾아낸 일이 영어 통번역이었다.
먼저 번역 관련 책을 읽으며 실력을 쌓았다. 얼마 후 여러 번역 회사와 접촉을 해, 한 업체와 프리랜서로 일하기로 계약을 했다. 3년 정도 기술 관련 문서를 번역하면서 경험이 늘어나자 더 높은 목표가 생겼다. 기왕이면 단순 문서가 아닌 한 권의 책을 번역하고 싶어졌다. 출판 번역은 뛰어난 전문성을 필요로 할 뿐 아니라 책 표지에 번역자의 이름도 들어가서 도전 욕구를 자극했다. 바로 인터넷 검색을 해봤다. 여러 번역 회사가 눈에 띄었고, 그중 한 번역 회사에서 수습생을 모집했다. 전화를 해보니, 교육을 받고 능력을 인정받으면 바로 책 번역을 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즉시 지원했다.
그때가 2004년, 54세의 나이였다. 아내가 학원 일을 도맡아 했으므로 수습 번역가로서 공부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는 충분했다. 이것이 내게 주어진 ‘기회’라 생각했다. ‘위협’ 요인은 경쟁자로서 같이 공부하는 동료들이었다. 동료들이 나보다 실력이 뛰어나면 번역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것이었다. 그래서 번역 노하우를 담은 책들을 찾아 읽으며 더 열심히 공부했다. 동료들과는 매주 두 차례 만났다. 각자 동일한 내용을 번역해와 서로 비교하면서 토론을 했고 최종적으로 활동 중인 번역가로부터 모범 답안을 받았다. 다들 빨리 일하고 싶어 했지만 강사나 사장으로부터 먼저 능력을 인정받아야 기회가 주어졌다.
훌륭한 번역가가 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첫째, 뛰어난 외국어 실력을 갖춰야 한다. 둘째, 완벽한 우리말 구사 능력이 있어야 한다. 우리말 구사 능력은 외국어 실력보다 더 중요했다. 결과물이 한국어이기 때문이다. 셋째, 번역하고자 하는 분야의 전문성이 있어야 한다. 전문 분야의 책은 그 분야와 관련한 독자들이 읽는다. 번역가가 전문성이 없다면 그 내용을 정확하게 해석할 방법이 없다. 넷째, 검색 능력이 뛰어나야 한다. 외국 서적들이 국내에 소개될 때 새로운 용어나 정보들을 포함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터넷 등 다양한 소스를 통한 정보검색 방법을 익혀야 한다. 다섯째, 체력이 강해야 한다. 장시간 의자에 앉아 번역을 하다 보면 허리디스크로 고생할 수도 있으므로 항상 건강을 챙겨야 한다.
내가 처음 번역한 책은 2005년 조선일보사에서 출판된 ‘마이크로소프트 재창조’다. 그 후로는 주식 관련 책을 주로 번역했다. 주식투자로 부자가 된 워런 버핏에 관한 책을 포함해 2012년까지 총 13권을 번역하면서 전문번역사의 길을 걸었다. 경제·경영서를 번역하게 된 것은 사장의 권유 때문이었다. 내가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다는 이유였다. 덕분(?)에 주식 관련 공부를 하느라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지금은 무역회사에서 일하던 경험을 되살려 한국무역협회 소속 통번역 전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사람들은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살아간다. 그동안의 삶을 되돌아보면 분명 자신만의 ‘강점’과 ‘기회’를 발견할 수 있다. 잘 알지도 못하는 분야로 뛰어들면 실패할 확률도 많고, 성공하더라도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 한다. 인생에는 세 번의 기회가 온다는 말이 있다. 기회가 주어지면 놓치지 말아야 한다. 전문번역가가 되기까지의 기록이 비록 나의 단편적인 경험에 불과하지만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의 제2인생 설계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처음에는 “무슨 추모공연이냐” 반문하며 차갑게 돌아섰다. 공간예술을 하던 이를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추모한다는 말인가. 의미 없다며 외면하려던 찰나 불현듯 생각났다. “선배님이 이 연극에서 연기 참 잘했지.” 좋은 작품을 한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평소 성격답게 세상과 쿨(?)하게 안녕하고 떠난 그녀를 대신해 무대에 오르기로 했다. 조명이 켜진다.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나긋하게 깔리던 닥터 리빙스턴 역의 윤소정, 아니 배우 오지혜(吳芝惠·50)가 빛을 따라 걸어간다.
“안녕, 무대에 계신 엄마.”
왜 우리 엄마를 추모하시려는 거죠?
10월 5일 동양예술극장에서 막이 오르는 연극 ‘신의 아그네스’의 닥터 리빙스턴 역에 배우 오지혜가 낙점됐다. 작년 6월 향년 72세 나이로 작고한 윤소정 배우 추모 헌정공연의 의미가 있는 이번 공연에서 27년 차 중견배우인 오지혜가 윤소정의 역할을 맡았다.
자신의 또 다른 직업을 ‘엄마아빠 딸’이라고 우스갯소리로 말하는 배우 오지혜. 우리나라 대표 배우 오현경과 윤소정의 딸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했던 영화감독 윤봉춘의 외손녀, 1960~70년대 한국 영화 중흥기를 이끌었던 시나리오 작가 윤삼륙의 외조카로 3대째 가업을 잇고 있다.
“조금 의아했어요. 나야 엄마를 누군가가 기억해주는 것이 고맙기는 한데 왜죠? 하루 정도의 추모제는 이해하겠는데 추모공연이라잖아요. 좀 미적거렸더니 이번 ‘신의 아그네스’를 기획하신 신연욱 대표님이 제가 안 해도 작품을 무대에 올리겠다 하더라고요.”
작년 6월 갑작스레 패혈증 증세를 보이다 일주일 만에 세상을 떠난 배우 윤소정. 오지혜의 말을 빌리면, 영화 필름 빨리 돌리기하듯 허망하게 세상과 이별을 고했다. 생사라는 것이 인간의 의지로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지만 예쁘고 멋진, 아름다운 모습만을 남기고 떠난 배우가 오지혜의 어머니 윤소정이다. 그런데 이건 좀 아니었다. ‘故 윤소정 선생 추모 헌정공연’이라는 부제가 붙었는데 배우인 딸이 출연을 안 한다? 게다가 닥터 리빙스턴 역할을 하기에 그녀 나이가 적역이었다.
“머리에 그림을 좀 그려봤어요. 제가 공연 보러 갈 거 아니에요. ‘잘 봤어요, 수고하세요’ 하고 자리 뜨는 모습? 이건 좀 아니지? 딱히 바쁜 일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하기로 했죠. 결론을 말하면 우리 연극인들이 윤소정 선배님을 그리워하며 ‘그 사람이 참 잘했었던 작품이지’라고 하면서 좋은 작품을 하나 올린다! 그게 이번 공연의 주제랄까요?(웃음)”
닥터 리빙스턴을 연기하면서 애써 윤소정을 소환해낼 생각은 없다. 무엇보다 현재 입장에서 닥터 리빙스턴을 읽어보니 너무나 자신에게 잘 어울리는 배역이었다.
“엄마가 리빙스턴 역할을 워낙 잘해서 그렇지 이미지는 제가 더 맞아요. 내가 더 박사스러워. 그리고 여기 캐릭터 딱 나예요. 옳은 거, 그른 거 엄청 막 따지고 드는 게 말이죠. 작품 연습을 하다가 연출가가 저한테 하는 말이 ‘딱히 연기하실 거 없이 무대에 오르시면 되겠네요’ 그러더라고요.”
그래도 문득 자신의 입을 통해 엄마 윤소정의 목소리가 언뜻 나온다고 했다.
“공연의 해석이 예전과 다르긴 해도 어떤 면에서는 조금씩 겹쳐지는 부분이 있을 거예요. 제가 비극 연기할 때 엄마의 모습이 보인다는 얘기를 듣곤 했거든요. 실제로 연습할 때 엄마 연기했던 것이 생각나잖아요. 살짝 소름이 돋았어요.”
아그네스를 꿈꾸던 소녀, 성장통을 겪다
“‘신의 아그네스’를 처음 접한 게 중학교 2학년 때였어요.”
1983년 ‘신의 아그네스’ 초연 당시 오지혜가 살던 아파트 지하 마을회관에서 공연 연습을 했다. 학교 갔다 집에 오면 연습실로 가서 책상 밑에 쭈그리고 앉아 배우들이 연기하는 모습을 구경했다.
“아그네스를 연기하던 (윤)석화 언니가 그때 스물일곱 살이었어요. 아그네스가 최면에 걸려서 아이 낳는 장면이 있어요. 어린 나이에 너무 민망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고요. 그러면서 아그네스 역할이 내심 좋았어요.”
‘신의 아그네스’는 어린 오지혜에게 꿈의 무대였다. 중앙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졸업 당시 연기로 주목받았기 때문에 내심 아그네스 역할을 기대했다. 그런데 대학 동기인 신애라가 아그네스 역을 맡았다. 마음속에 상처가 났다.
“안 예쁜 여배우 설움을 평생 받아서.(웃음) 제가 데뷔했을 때 엄마가 세상물정 모른다면서 여배우는 향후 100년은 무조건 예뻐야 한다고 하셨어요. 병원에 갔더니 당시 턱 성형비가 400만 원이었어요. 엄마한테 원판 불변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면서 대신 그 돈 주시면 유럽여행 다녀오겠다고 했어요. ‘지혜 씨 연기는 잘하는데, 좀…’ 이런 얘기를 제가 살면서 얼마나 많이 들었겠어요? 한참 후 나이 좀 먹어서 고현정 씨 컴백 드라마였던 ‘봄날’(SBS)에서 재즈 가수로 나왔어요. 별로 연락도 없던 언니가 전화를 하더니 ‘텔레비전에 사람 얼굴이 나오니까 너무 좋더라(웃음)’ 하는 거예요. 나이 육십 된 여배우도 얼굴에 손대잖아요. 죽어라고 버텼더니 이제는 선생님 소리 들으면서 늙어가는 것 같아요. 어영부영하다 보니 벌써 오십이 넘었네. 아그네스는 아니지만 리빙스턴 역도 하고 말이죠.”
미안하단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신의 아그네스’는 아기를 낳은 뒤 잔인하게 살해한 20대 초반의 수녀 아그네스, 그녀의 정신분석을 위해 수녀원으로 온 닥터 리빙스턴과 원장 수녀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연극이다. 1979년 미국의 존 피엘마이어가 쓴 이 작품은 종교적 관점의 기적과 구원에 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다. 이번 공연에서는 기적이라는 주제를 현 사회와 좀 더 연결시켜 바라보고자 했다.
“제가 먼저 발제했지만 연출가도 공감했던 부분이에요. 이 시대의 기적은 학대받던 아이가 세상으로 나와서 상처를 치유하고, 정상적인 관계를 맺고 스스로 행복을 찾아가는 사람으로 커가는 거라고 봐요. 국가와 사회, 가정과 학교가, 시스템이 상처받은 아이를 구원하는 게 기적인 거죠.”
어른들로부터 제대로 된 도움 한 번 받지 못하고 해맑은 얼굴만 남기고 세상을 떠난 아이들이 결국 우리 시대가 낳은 아그네스라고 했다. 초기 연극이 양심과 신, 신앙, 기적에 관한 이야기라면 2018년에 보여주고자 하는 아그네스에는 아동학대와 기성 간의 부조화, 아이들을 구하지 못한 죄스러움을 담았다.
“세월호 사고가 났을 때 많이 힘들었습니다. 연극배우로서도 회의가 왔고요. 시인인 제 친구는 몇날 며칠 고민해 시를 들고 광장에 나가 자신의 시를 시민들에게 읽어주더라고요. 위안을 주는 예술. 그런데 저는 몇날 며칠 대사를 외우고 무대에 서왔지만 사회적인 역할과 동떨어져 있었어요. 배 안에 타고 있던 아이들이 내 딸보다 한두 살 많았어요. 유가족이 거의 다 제 또래였기 때문에, 안 그래도 배우들은 남의 감정에 빨리 이입이 되는 편이잖아요. 죽을 것 같았어요. 언젠가 미안함을 전하고 싶었는데 마침 ‘신의 아그네스’가 저한테 온 거죠.”
열심히 안 뛰면 내 것은 없다
‘신의 아그네스’ 연습으로 한창 바쁜 요즘. 오지혜만의 닥터 리빙스턴을 만들어가고 무르익은 연기자로서 도리를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라다니는 것이 하나 있다. 소위 부모님의 후광을 받고 태어난 사람으로만 보는 날선 시선이다. 나이 먹을 만큼 먹었고 이제 그만할 때쯤 됐는데 유독 오지혜에게만은 가혹해 보인다.
“엄마를 추모하기 위해서 이번 연극을 하는 거잖아요. 누군가 저에게 ‘역할을 유산으로 받았네?’ 하더군요. 데뷔하고 지금까지 들어온 얘기지만요. 아! 내가 정말 무지하게 열심히 안 하면 안 되겠구나. 인생을 몰라서 너무 아이 같다는 생각이 콤플렉스였어요. 그래서 20대 때 배낭 메고 미친 듯이 여행 다녔어요. 큰 자산이었죠. 정말 최고의 선생은 여행이에요. 나중에 여행 책도 써볼까 해요.”
천생 배우인 부모님 밑에서 자란 것 때문에 받은 편견 외에 남들에게 모나게 보인 이유가 있다. 때때로 회자된 오지혜의 소신발언이 문제됐다. 그녀는 이 시대의 약자를 위해 사회 참여를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하다고 느꼈다. 지난 몇 년간 그녀의 사이다 발언에 미디어들이 예민하게 반응하던 때가 있었다. 아버지 오현경은 앞에는 나서지 말라고 했다. 어머니 윤소정은 달랐다.
“어렸을 때도 아빠는 혹시 데모하면 저더러 뒤에 서라고 하셨어요. 엄마는 ‘우리 아버지 故 윤봉춘 감독님께서 말씀하시길 예술가로서 동시대 사람들에게 동시대의 문제를 제시하고 슬픔을 공유시키지 않는 것은 예술가가 아니라고 했다. 지혜 이야기가 맞다’ 하셨어요. 외국은 연예인이나 사회 지도층이 나서서 행동하면 지지하고 응원하는데 우리는 그렇지 않더라고요.”
그녀는 지난 두 정권에서 블랙리스트 문건에 이름이 올랐다. 꽤 오래 라디오 DJ를 했는데 하루아침에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제가 말하는 게 불편하다고 개편도 아닌데 잘렸어요. 처음에는 그런가보다 했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어요. 심한데? 장난이 아닌데? 할 정도로요.”
10년을 블랙리스트에 오른 연예인으로 낙인 찍혀 있다 보니 덕분에 책에 파묻혀 사는 시간이 많았다. 매일이 여행이고 산책이었다. SNS에 글을 쓰고 일상을 정리하는 시간을 지속했다.
이 세상에 없는 엄마에게
“우리 엄마 정말 열심히 일했어요. 제가 그렇게 묶여 있는 동안 저도 도와주셨어요. 여섯 살 때부터 무대에 섰는데 끝까지 한 번도 쉰 적 없이 말이죠. 평생 소녀 가장으로 살았던 게 지겨웠나봐요. 뭐가 급한지 제 책 나오는 거도 못 보고 가버리셨네요. 엄마가 책을 정말 기다렸어요. 원래 계획대로라면 5월에 나오는 거였는데 늦어졌어요.”
장례를 치르고 난 두 달 후 “딸? 책 언제 나와?” 하고 엄마가 그렇게 기다리던 에세이 ‘날씨맑음-오늘도 여행 같은 하루’가 출판됐다. 지금까지 SNS에 적었던 글들을 모아 만든 책. 책 표지를 열고 본문을 채 읽기도 전에 ‘이제는 이 세상에 없는 엄마에게’라는 문구 때문에 눈물부터 쏟아냈다. 어디 나가서 쥐어박히고 다니는 딸이었지만 엄마한테는 크나큰 자랑이었다.
“훗날 글 쓰고 살고 싶은데 어쩌다 수필집이 나왔어요. 다음에는 소설도 쓰고 싶고 아직 아무한테도 안 보여줬는데 단편소설도 쓰고 있어요.”
인터뷰를 마치면서 어머니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된 소감을 물었다.
“엄마는 ‘이런 감정으로 대사를 쳤구나’ 혹은 ‘나랑 해석이 다르네’ 하는 부분도 있어요. 연기에 맞고 틀린 건 없잖아요. 보면서 엄마의 해석이 또는 제 해석이 마음에 드는 사람들이 있는 거겠죠. 참 의미 있고 재미있어요. 특히 부모와 같은 직업인에 무대 위에 서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감정이잖아요. 이런 자산을 가지고 태어난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신께 감사드립니다.”
연일 일자리 정책에 대한 뉴스가 쏟아진다. ‘58년 개띠’로 대표되는 ‘700만 베이비붐 세대’까지 은퇴 후 유입되면서 취업 시장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경쟁이 심해졌다는 것은 당사자들에겐 더욱 일자리가 필요해졌다는 뜻.
정년 후 20~30년 사회생활을 해야 하는 시니어 입장에선 단 한 번의 실패도 극복하기 어렵기에, 제2직업에 대한 선택과 도전이 매우 중요한 일이 됐다. 그렇다면 어떻게 준비하고 선택하는 게 좋을까? 중장년 일자리와 관련해 대표적 전문가로 손꼽히는 김대중(金大重·51) 노사발전재단 중장년일자리본부 본부장을 만나 물었다.
김대중 본부장은 퇴직자나 재직자의 전직(轉職)지원 분야에서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는, 국내에서 몇 안 되는 전문가 중 한 명이다. 많은 정부부처에서 운영 중인 공공부문 전직지원 프로그램은 대부분 그가 개발한 모델을 원형으로 만들어졌다. 그런 그가 중장년일자리사업 총괄 본부장으로 돌아왔다. 순환보직으로 4년 만의 귀환이다.
수요 늘었지만 기관 규모는 제자리
과거와 변화가 느껴지느냐는 질문에 김 본부장은 “시장이 확대된 것을 실감한다”고 말했다.
“중장년 일자리 지원 사업에 나선 기관이나 지자체도 많이 늘었죠. 하지만 그 이상으로 중장년 일자리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서비스의 성격이 개인별 맞춤 서비스보다는 단체를 대상으로 한 획일적인 교육이나 취업 알선에 국한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워요.”
일자리 정책 하면 우리는 흔히 두 가지를 떠올린다. 바로 교육훈련과 취업 정보다. 구직경쟁에서 이길 수 있도록 기술을 알려주고, 교육훈련을 마치면 갈 만한 일자리를 알려주는 방식. 하지만 김 본부장은 이런 단편적인 접근은 전직자들이 재취업 일자리에서 1년 버티기도 힘들게 한다고 단언한다.
“지금 40대 이상의 중장년들은 적성과 무관하게 전공을 선택하고, 전공과 무관하게 직장을 고른 사람이 많아요. 다시 말하면 내가 뭘 하고 싶은지, 잘할 수 있는 게 뭔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라는 뜻입니다. 젊을 땐 학습능력도 있고, 시행착오를 이겨낼 힘도 있으니까 버틸 수 있지만, 중장년이 되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방황할 수 있는 1~2년의 여유도 없어요. 개개인에게 맞지도 않는 교육과 알선은 오히려 인생 후반부 역시 그분들을 그릇된 길로 안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맞춤형 서비스가 중요합니다.”
내가 원하는 일 뭔지 알아야
그래서 그가 최근 심혈을 기울인 일이 9월 11일 진행된 ‘신중년 인생3모작 박람회’다. 단순히 구직정보만 나열해 즉흥적인 취업을 유도하기보다는 중장년들이 재취업과 재취업 후의 인생 설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안내하는 역할을 하고 싶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중장년 입장에선 자신이 원하는 일자리의 조건들이 정해져 있어요. 본인 진로에 대한 계획 없이 근무 지역이나 급여 등의 조건만 챙기면 전직에 실패하게 돼요. 또 엉뚱한 교육을 받느라 시간만 낭비하기도 하죠. 이런 시행착오를 조금이라도 줄이고 싶었습니다.”
그가 중장년 일자리와 관련해 주목하는 것 중 하나는 바로 구인의 주체인 기업이다. 중장년 구직자들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바꿔주고 싶다는 것.
“나이가 많으면 열정이 없다, 급여 수준이 높다, 고집이 세다는 선입견이 커요. 기업들이 중장년을 고용하지 않으려는 이유죠. 사실은 그렇지 않은 분들이 훨씬 많은데 말입니다. 이러한 선입견을 깨기 위해 임원 대상 간담회나 채용 담당자를 대상으로 한 설명회 등을 늘려나가고 싶습니다.”
중장년이 청년 일자리를 침범한다는 인식도 개선해야 할 부분. 그는 “중장년은 자식(청년) 보살피고 고령의 부모를 모셔야 하는 가정의 기둥이기 때문에 조건 없는 희생을 요구해선 안 된다”고 강조하면서, “되레 전통적으로 중장년이 해왔던 일자리에 청년들이 진출하는 것이 가정까지도 해체시킬 수 있는 더 큰 문제라고 본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인생의 2모작, 3모작을 원하는 중장년들은 어떻게 대비하면 좋을까?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뭔지 파악하는 것이 첫 번째”라고 강조한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게 되면 열의가 생겨 스스로 공부하고 자기계발에 나서기도 합니다. 또 조건보다는 일에 초점을 맞춰 접근하면 구직자가 능동적으로 행동하게 됩니다. 하고 싶은 일이 뭔지 모르더라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많은 구직자가 그러니까요. 전국에 있는 저희 노사발전재단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에는 이런 분들을 위한 전문 컨설턴트들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분들과 상담하다 보면 진짜 내가 원하는 제2직업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귀농·귀촌을 결심하기 전, 원하는 마을을 미리 둘러보게 될 것이다. 이왕 방문을 계획했다면 휴가를 겸해 마을의 명소와 맛집도 두루 즐기고, 다양한 농촌 체험도 맛보기로 해보자. 마을의 자연과 전통문화를 활용해 체험과 휴양 공간을 제공하는 ‘농촌체험휴양마을’에서라면 가능하다. 지 단편적인 사례를 통해 귀촌·귀농의 성패 요인을 살펴보고자 한다.
사진 제공 및 도움말 웰촌
◇ 전북 고창군
‘구시포 해수욕장’은 해변이 넓고 완만해 아이부터 노인까지 안전하게 즐기기 좋은 피서지다. 이곳에서 차로 5분 남짓 거리의 ‘상하농원’은 이국적인 풍광과 더불어 다양한 체험을 즐길 수 있어 인기가 높다. 최근 tvN 드라마 ‘도깨비’의 촬영지로 알려지며 주목받고 있는 ‘고창 학원농장’은 한여름이면 해바라기가 만개해 절경을 이룬다. ‘미당시문학관’, ‘선운사’, ‘고창 고인돌유적지’ 역시 역사와 문화를 동시에 즐길 수 있는 고창 여행 필수 코스 중 하나다.
체험 포인트>> 상하농원 상하농원에는 우유 제조공장 견학을 비롯해 머핀 만들기, 아이스크림 만들기 등 다양한 먹거리 체험 프로그램이 있다. 또 올해 7월부터 ‘파머스빌리지’를 열어 운영 중이다. 농원 식당과 테라스 룸, 패밀리 룸 등 숙박 공간도 마련돼 있으니 여행 일정에 참고하자.
◇ 경북 예천군
‘삼강주막마을’에서는 두부, 묵, 배추전 등과 곁들여 먹는 막걸리 한 상을 저렴한 가격에 맛볼 수 있다. 내성천이 휘감아 돌아나가는 ‘회룡포마을’은 육지 속 섬처럼 독특한 모습이다. 인근 ‘예천진호국제양궁장’은 예약을 통해 무료로 양궁체험 기회를 제공한다. ‘출렁다리마을’은 시골 인심 가득한 밥도 먹고, 다양한 농산물 수확 체험까지 즐기기 제격이다. 여행을 끝내기 아쉽다면, 마을에서 차로 15~20분 거리에 있는 ‘문경주조’에서 오미자막걸리 한잔 어떨까?
체험 포인트>> 삼강주막마을 500년 수령의 회화나무가 지키고 있는 삼강주막마을에서는 떡메치기, 팥죽 끓이기, 양반 자전거 타기, 양반 과거길 체험 등을 경험할 수 있다. 하루 묵어갈 계획이라면 황토찜질을 겸하는 황토방과 한옥 스타일의 민박, 체험관에서 숙박도 가능하다.
◇ 경남 하동군
화개천 계곡을 따라 4.2km 이어지는 ‘서산대사길’은 실제 서산대사가 걸었던 길이다. 걷다 보면 그 끝자락에 ‘지리산역사관’이 보인다. 지리산 반달가슴곰이 사는 마을로 유명해진 ‘의신마을’에서는 계절마다 다양한 야생화가 지천으로 피어난다. 이곳에서 하루 묵은 뒤 다음 날에는 ‘화개장터’로 향하자. 끝으로 ‘박경리문학관’과 소설 ‘토지’의 배경인 ‘최참판댁’에 들러 수시로 열리는 문화행사에도 참여해보자.
체험 포인트>> 의신마을(베어빌리지) 멸종위기종인 반달가슴곰을 만나는 탐방 해설과 야생화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지리산 청정 지역에서 나는 산약초, 산나물 등을 직접 채취해볼 수 있다. 베어빌리지와 도서관, 놀이터, 캠핑장 등도 이용 가능해 손주와 함께라면 더욱 유익하다.
◇ 경기도 파주시
임진강과 감악산이 둘러싼 ‘산머루마을’은 계절에 따라 산나물 캐기, 요리체험, 문화답사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이곳에서 1979년부터 머루 재배를 시작한 ‘산머루농원’에서는 머루 관련 체험뿐만 아니라 와인숙성터널 관람 및 머루와인 시음까지 즐길 수 있다. 파주 일대에서 가장 높은 감악산(675m)에는 국내에서 최장 길이의 출렁다리가 있다. 높이 45m, 길이 150m에 이르는 출렁다리를 건너다 보면 운계폭포가 보이고, 그 끝자락에 법륜사가 나온다.
체험 포인트>> 산머루농원 ‘산머루 와이너리 투어’, ‘머루 수확 체험’, ‘나만의 와인’을 비롯해 ‘패키지체험’(머루 초콜릿, 머루 잼, 머루 비누 만들기, 와이너리 투어 및 시음)을 예약제로 운영한다. 와인을 즐기는 어른부터 달콤한 초콜릿을 좋아하는 아이까지 두루두루 유익하다.
◇ 충남 금산군
‘대둔산 자연휴양림’은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러시아 대통령이 다녀가며 잘 알려졌다. 편백 숙소, 피톤치드 치유의 방을 비롯해 집라인과 글램핑장 등 레저 시설도 마련돼 있다. 휴양림 산책을 마친 뒤에는 ‘금산인삼약령시장’에 들러보자. 전국 인삼 생산량의 80%가 거래되는 곳으로, 각종 인삼류와 약초를 20~50% 할인한다. ‘조팝꽃피는마을’은 그 이름처럼 조팝꽃 자생 군락지가 유명하다. 대표 특산물 인삼과 각종 농산물 체험 프로그램이 있다.
체험 포인트>> 조팝꽃피는마을 희망센터캠핑장, 농촌인성학교 등을 운영하고, 여름에는 들깨 모종, 깻잎 따기, 매현천 물고기 잡이 등 다양한 체험을 즐길 수 있다. 볏짚 공예, 풍등 날리기 등 전통문화체험과 인삼 수확체험, 인삼콩 두부 만들기 등 인삼을 활용한 프로그램도 인기다.
◇ 강원도 횡성군
‘풍수원성당’은 빨간 벽돌과 뾰족한 종탑이 어우러진 클래식한 분위기가 인상적이다. 영화 속 한 장면 같은 풍수원성당을 둘러본 후에는 ‘오마이갤러리’에 방문해 명화를 감상해보자. 트릭아트, 3D 입체 명화 등을 즐길 수 있다. 맛집과 체험을 모두 겸비한 오음산캠프는 산골 부녀회가 직접 나선 농가 맛집 ‘오음산 산야초밥상’과 농촌체험학교 ‘꿈꾸는풍뎅이’를 운영한다. 농촌의 계절 음식과 문화를 경험한다는 점에서 귀농·귀촌을 염두에 둔 중장년층이 즐겨 찾는다.
체험 포인트>> 오음산캠프 오음산 산야초밥상은 계절에 따라 각기 다른 밥상을 즐길 수 있다. 해바라기 씨가 들어간 도토리묵과 매일 아침 만드는 손두부를 등 시골건강밥상을 내놓는다. 꿈꾸는풍뎅이 학교에서는 향토절기문화교육, 친환경 제품 만들기, 숲속교실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365일 즐기는 농촌체험관광 포털 ‘웰촌’
'웰촌' 웹사이트에서는 전국 농촌체험휴양마을이 등록돼 각종 정보 및 서비스를 살펴볼 수 있다. 특정마을 소개 및 체험 프로그램, 숙박·캠핑, 음식·특산물 등은 물론 인근 관광지와 맛집까지 소개한다. 사이트 내 추천 여행코스와 네티즌 여행코스를 참고하면 일정을 잡는 데 수월할 것이다. 나만의 색다른 여행코스를 만드는 서비스와 농촌여행 스탬프 투어 등 이벤트 소식도 제공한다.
귀촌 관련 인터뷰 글을 연재하며 다수의 귀촌·귀농인들을 만나봤다. 어떤 이들은 만족을 표했다. 어떤 이들은 고난을 주로 토로했다. 만족을 표한 이들 역시 정착에 이르기까지의 시련 술회하기를 생략하는 법 없었으니, 귀촌·귀농이란 대체로 일련의 애환과 동행하는 장정임을 알 만했다. 과연 시골생활의 활보는 어떻게 해야 가능할까? 조용하고 강인한 고라니처럼 시골살이를 힘차게 구가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책이 필요할까? 두 가지 단편적인 사례를 통해 귀촌·귀농의 성패 요인을 살펴보고자 한다.
적성에 맞춘 귀촌의 이상적인 삶
외진 산간 숲속으로 귀촌을 해 서점을 운영하는 A 씨 부부. 산속에서 서점을? 이는 웬 만용이란 말인가. 그러나 서점은 순항하고 있다. 찻집과 게스트하우스를 함께 운영해 안정적인 살림을 꾸려나간다. 갖가지 콘서트나 문화 행사를 펼쳐 지역의 명소로 부상했다. 시발은 미미하고 궁색했다. 부부가 손수 지은 작은 흙집에 살며 활로를 모색하느라 어지간히도 진을 뺏던 것 같다. 그러다 서점에 착안한 건 썩 자연스럽고 현명한 판단이었다. A 씨는 원래 출판업자였다. 서울에서 출판사를 운영했던 그가 귀촌을 한 건 마음이 줄기차게 시골로 흘러갔기 때문이었다지. 산골의 자연 속에서 살며 다가올 노후를 대비하고 싶었던 것. 도시에서 시골로 삶터를 바꾼다는 건 상류의 물고기가 물살을 따라 유유히 하류로 내려가는 것과는 다르다. 시행착오와 우왕좌왕이 잦게 마련이다. 도시에서 몸에 익힌 삶의 과욕과 과속을 적절히 털어내기 쉽지 않아서다. 하지만 A 씨의 포부는 옹골차게 실현됐다.
A 씨의 비결은 무엇일까? 우선 그는 자신의 적성에 맞춰 노후의 이상적인 삶을 설계했다. 일찍부터 자연주의자를 자처해온 그는 산골의 공기와 풍정을 숨 쉬고 사는 게 옳다고 보았다. 자연 속에서 자아를 부양하며 사는 게 한 번뿐인 아까운 삶을 흥미진진한 쪽으로 밀어붙일 수 있는 길이라는 걸 알아차렸던 것 같다. 육신은 물론 영혼을 위해서도 자신의 적성, 취향, 지향에 맞는 시골살이를 선택하는 게 온당하다 판단했던 거다.
귀촌 희망자여, 당신의 적성부터 면밀히 점검하시라! 나는 그렇게 권유하고 싶다. 때로 어처구니없는 바보짓을 태연히 자행하는 게 인간이지만, 자신의 적성 진단을 소홀히 한 채 자연과 더불어 살며 ‘느림의 미학’을 추구하겠다는 식의 환상을 가지고 귀촌을 후다닥 결행하는 일처럼 위험한 우행도 드물다. 등산을 좋아하거나, 숲을 흔드는 물소리 새소리에 심취하는 버릇이 있다고 내 적성이 시골생활에 부합하리라 속단해선 안 된다. 짧으면 한두 달, 길어야 두어 해 사이에 질리기 쉬운 게 자연이다. 자연은 놀이터가 아니라 생활의 장이다. A 씨의 활보는 무심한 자연 환경에 도대체 권태를 느끼질 못하도록 민감하게 작동하는 적성의 힘에서 추동되었다.
아내와의 의기투합도 A 씨의 귀촌 순항을 돋운 저력이다. 귀촌 문제를 놓고 부부간에 대번에 죽이 맞을 확률은 낮다. 대체로 남정네들이 먼저, “가자, 시골로!” 그렇게 선창을 하며 나서는 수가 많지만, 웬걸, 영특한 종족인 아내들은 십중팔구 반기를 들게 마련이다. 그녀들은 모기에 뜯기고 뱀에 시달리기나 할 뿐, 자칫 따분하고 외로워질 가능성이 있는 시골살이에 환상적으로 입문할 일이 아님을 이미 눈치 채고 있는 것이다. 이 경우엔 신사도를 발휘해 아내의 의사를 존중해주는 게 좋다. 나는 억지로 아내를 끌고 시골로 들어갔다가 4년 만에 이혼을 하고 털레털레 도시로 귀환한 부상병의 사연을 듣고 깊은 슬픔에 빠진 적이 있다. 그럴싸한 집요한 세뇌로 아내의 생각을 바꿔놓을 자신이 없다면 귀촌의 꿈을 차생에서 실현하는 게 낫다.
A 씨는 시골에서 남은 평생 즐기며 일할 수 있는 종목을 찾아냈다는 점에서도 귀감이다. 산중 서점 사업이라는 기발하고도 진취적인 업종은 그에게 두 가지 만족을 선사한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경제상의 안정을 가져다줬다는 점. 물적 궁핍이 곧 불행과 직결되는 건 아니지만 꽤나 성가시고 불편하다. A 씨도 넉넉할 게 없었기에 남몰래 전전긍긍이 많았으리. 하지만 해결했다. 다른 한 가지 만족 요인은,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가장 좋아하는 일을, 노후까지 지속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는 데 있다. 비축 자금이 많거나, 연금이 다달이 척척 들어오는 사람들의 경우에도, 귀촌생활에 생기를 부여하기 위해선 즐거이 몰두할 수 있는 일 하나를 갖는 게 필수다.
마을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한 불찰
이제 사뭇 다른 사례를 볼까. 공직 은퇴자인 B 씨. 그는 60대 중반쯤 도시에서의 지루한 일상을 견디다 못해 후미진 시골로 들어갔다. 평소 동경했던 멋진 정원을 가꾸며 한적하게 노닐고 싶어서였다. 그는 너른 터를 사들여 큼직한 집을 지었다. 그리고 정원 가꾸기에 온갖 공을 들였다. 신명이 실린 쾌조의 나날들이 이어졌지만 2년여가 지나 상황이 급변했다. 다양한 수목과 화초로 채운 너른 마당은 어느 사이 가혹한 근로의 공간으로 바뀌었으니 땅의 임자는 그가 아니라 풀들이었던 것. 강철 같은 기세로 들고 일어서는 풀과의 전쟁에 그는 지쳐 나동그라졌다. 어깨, 허리, 무릎, 팔, 어느 하나 성한 게 없는 자신의 참상에 그는 울상을 지었다. 사교성 결여로 원주민들과 거의 단절된 생활을 하는 사이에 누적된 고독감마저 하늘에 뻗친 걸 비로소 절감하고 거듭 울상을 지은 것도 그즈음이었다.
게다가 도시에선 그토록 명랑했던 아내가 우울증에 걸려 약을 먹기 시작했다. 더욱 끔찍한 소동은 이웃 원주민이 휘몰아왔다. 마을의 몇몇 삐딱이 가운데 하나였던 그 원주민은 고지식하고 딱딱한 스타일인 B 씨네 집 길목을 제 땅이라며 철조망으로 막아버렸다. 땅을 고가에 팔아먹자는 흉계였다. B 씨는 결국 헐값에 집을 처분하고 도시로 돌아갔다.
B 씨는 신중함을 결여한 채 충동구매와도 같은 귀촌을 했던 게 아니었을까. 그 무엇에 앞서 그는 마을의 분위기를 미리 파악했어야 했다. 시골이라고 인심이 퍼덕퍼덕 살아 있는 것만은 아니다. 그는 운수 사납게도 텃세 심하기로 소문난 마을로 귀촌을 했다는 걸 뒤늦게야 깨달았다. 끝내 깨닫지 못한 자충수도 있다. 원주민들이 B 씨에게 불편한 존재였듯이, 오불관언으로 일관한 B 씨 역시 원주민들에겐 수상하고 불편한 이방인으로 행세했을 뿐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원주민과의 융화라는 문제에 대부분의 귀촌·귀농인들은 심혈을 기울인다. 그러고서도 수월치 않아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고민하기도 한다. 어이하나? 마을 일에 적극적인 참여자는 되지 못할망정 냉소적 방관자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마을 전체를 내 집으로, 마을 사람 전원을 내 가족으로 생각하는 태도를 취한다면 복이 돌아올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귀촌생활이란 수신(修身)의 기회이기도 하다. 명랑사회 건설에 이바지하는 길이겠고.
영화 이야기를 하는 TV 프로그램을 보는 중이었다. 때마침 얼마 전 삼총사 친구와 보고 온 영화 ‘버닝’을 소개했다. ‘버닝’은 예고편도 몇 번 보았고 칸 영화제에서 수상작으로 꼽힌다는 이야기도 들어서 큰 기대를 했던 작품이다.
내가 영화를 고르는 기준은 좋아하는 배우의 출연 여부이다. 믿고 보는 감독이나 배우가 있다는 말이다. '버닝'은 이창동 감독의 작품으로 제71회 칸영화제에 경쟁부문에 초청됐다. 발표 직전까지 유력 수상작이었다는데 예상과 달리 상을 받지 못해 아쉬웠다.
주연을 맡은 배우 유아인은 선량한 얼굴로 역할에 따라 팔색조처럼 변신하는 연기력을 가졌다. JTBC 드라마 '밀회'(2014)에서 청순하지만 은밀한 느낌으로 연상녀와의 사랑을 거침없이 연기해 마음을 설레게 했다. 영화 ‘베테랑’(2015)에서는 재벌 2세가 갑질하는 비열한 연기를 무섭도록 잘 표현했다. 극 중 인물에 따라 놀라운 변신을 해온 유아인이 '버닝'에서는 또 어떤 매력으로 관객을 사로잡을지 궁금했다.
'버닝(burning)'의 뜻은 그저 ‘불탄다’라는 뜻으로만 알았는데, 사전적 의미로는 ‘열정적으로, 열렬히, 엄청나게 빠져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영화 '버닝'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 '헛간을 태우다'가 원작이다. 주연으로 유아인과 신인 전종서, 그리고 할리우드에서 활약 중인 스티브 연이 나온다. 스티브 연은 매끈한 외모로 미스터리한 역을 잘 연기했다.
아르바이트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종수(유아인)는 작가 지망생이다. 어느 날 우연히 길에서 어릴 적 동네 친구 해미(전종서)를 만나고 자연스럽게 그녀를 좋아하게 된다. 해미는 종수에게 여행을 떠난다며 키우던 고양이에게 밥을 주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종수가 해미의 집에 갈 때마다 고양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미스터리한 분위기만 감돈다.
해미가 돌아오는 날 낡은 트럭을 타고 공항으로 마중 나간 종수는 그녀와 함께 있는 벤(스티븐 연)을 만난다. 보기만 해도 부유함이 흐르는 그는 하는 일 없이도 방배동 저택에 살며 우아한 생활에 고급 외제차를 탄다. 종수의 구질구질한 환경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해미는 종수와의 만남에 항상 벤을 동행한다. 그때마다 종수가 느꼈을 감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힘들게 사는 자신에 비해 아무 일 안 하고도 여유로운 벤이 껄끄러웠을 것이다. 더욱 힘든 건 자신이 좋아하는 해미를 보며 하품을 하는 등 시큰둥해하는 벤의 태도다. 그 후 해미가 연락이 되지 않자 종수는 벤을 의심하게 되고, 결국 되돌릴 수 없는 일을 저지르고 만다.
영화는 뚜렷한 결말을 드러내지 않고 모호하게 막을 내린다. 진실이 드러나지 않아, 그 뒷이야기를 상상해야 하는 고통이 따랐다. 함께 영화를 본 세 사람 사이에서도 결말을 둘러싼 의견이 분분했다. 진실을 알 수 없어 다소 찜찜했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우리 사회 젊은이의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이른바 금수저와 흙수저의 현실이 떠올라 마음이 아팠다. 열린 결말은 아쉽지만, 보는 동안만큼은 참 재미있게 몰입할 수 있었던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