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주나 점을 믿지는 않지만, 매번 '무난’, ‘평탄’ 같은 단어가 튀어 나온다. 전반적으로 필자 삶을 돌아 볼 때 과연 맞는 말인 것 같다.
인생 전반의 삶
인생의 여러 중대사가 결정되는 1970년대가 필자 20대 나이였다. 그 시기 대학교에 입학하고 군대에 갔다 오고 취직해서 결혼했으니 말이다. 아들딸까지 낳았으니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운이 좋았는지 대학교도 단번에 합격하고 군대도 카투사로 갔다 왔다. 취업도 서로 오라는 데가 많아서 골라서 들어갔으니 요즘 청년들에 비하면 정말 운이 좋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첫 직장에서 아내를 만나고 건설회사인 둘째 직장에서 사우디아라비아, 독일 근무를 하면서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 덕분에 스포츠 장갑을 만들어 수출하는 중소기업에 스카우트 되어 임원으로서 12년간 마음껏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전혀 연고도 없던 회사에 기존 임원들보다 10세 연하인데도 젊은 패기로 승승장구하며 탄탄대로를 걸었다. 입사 6년 만에 단일 바이어에게 거의 의존하던 매출구조를 미국, 유럽, 내수시장으로 확장해 건전한 포트폴리오대로 만들면서 세계 스포츠장갑 1위 업체로 부상시켰다.
1997년 IMF 금융위기는 당시 대표를 맡고 있던 스포츠 브랜드 UMBRO 사업에도 직격탄이었다. 미화로 지급해야 하는 로열티와 수입대금도 막대했지만 국내 시장이 초토화되어 더 이상 사업을 끌고 나갈 수 없었다. 결국 경영책임을 지고 퇴사한 것이 21세기를 두 달 앞둔 1999년 10월이었다. 직장 생활 23년을 마감하게 된 것이다. 나이 49세였다.
묘하게 퇴직 1주일 후 섬유의날 시상식에서모범경영인으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재직 중이었더라면 큰 축하를 받을 수 있는 자리였으나 찜찜하게 퇴직하고 난 처지라서 가족들과 단출하게 자축할 수밖에 없었다. 퇴직했으니 앞으로가 막막했으나 대통령 표창은 큰 용기를 주었다. 뭔가 큰 힘이 될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것이다. 실제로 표창은 위력을 발휘했다. 이탈리아 스포츠 브랜드 KAPPA의 한국 런칭도 그 덕분에 이뤄졌다. KAPPA의 성공 덕분에 JAKO 등 다른 스포츠 브랜드 도입도 수월했다. 비즈니스뿐 만 아니라 각종 서류 심사 때도 떨어져 본 적이 없다.
밀레니엄 시대라는 2000년부터 퇴직 이후의 새 삶이 시작되었다. UMBRO 대표 시절에 여러모로 도와줬던 업자가 동대문 사무실에 나와 소일하라며 권유했다. 그의 사업도 도울 겸 필자 사업으로 스포츠 장갑을 수출하던 시절에 가까웠던 바이어들과 연락하며 지냈다. 주문량이 적은 바이어들은 본사에서도 귀찮아하던 것을 필자가 주문을 대신 처리해줬다. 한 바이어는 당시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의 공식 스폰서가 되면서 대량주문을 해 와서 그때 꽤 짭짤한 수익을 건졌다. 그러나 9.11테러 이후 미국 경기가 급속하게 하락하면서 이 비즈니스도 하락세를 면치 못했다. 중국의 저임금을 활용하여 그나마 주문을 소화했었는데 중국의 인건비가 급속하게 올라 결국 손을 들고 말았다. 여기서 더 비즈니스를 이어가려면 중국보다 임금이 더 저렴한 나라를 찾아다니며 바이어들도 지속적으로 확보해야 했으나 비즈니스는 이쯤에서 접자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 인생도 50 줄인데 돈을 더 벌겠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다 보면 인생을 낭비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 무렵 필자랑 비슷한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이 퇴직 대열에 합류하면서 실패하는 사람도 봤고 건강을 잃고 쓰러지는 사람이 많았다. 건강을 잃으면 모두 잃는 것인데 이럴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번뜻 든 것이다. 그래서 자전거, 등산을 비롯하여 건강을 위한 삶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여러 가지 시도해본 결과 댄스스포츠가 가장 잘 맞는 운동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댄스 이야기
93년 한국에 댄스스포츠가 체계를 갖춰 상륙하자 백화점 문화센터에 등록했었다. 당시만 해도 댄스스포츠를 제대로 알고 가르치는 곳도 드물던 시절이었다. 독일에 주재원으로 근무할 때 어느 와인 촌 홀에서 백발의 할아버지와 고등학생은 되어 보이는 소녀가 같이 춤을 추는 것을 보고 완전히 매료된 충격적인 일이 기억났다. 그 춤을 제대로 배워보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몇 몇 선생을 거치도 갈증이 그치지 않았다.
그러고는 10년 만에 다시 댄스스포츠에 빠져 들었다. 집 근처 올림픽공원 스포츠교실에서 라틴댄스를 가르치는 데 완전히 매료된 것이다. 한번은 5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댄스 경연대회를 했는데 하루 종일 예선부터 뛰어 최종 챔피언으로 등극하는 일이 생겼다. 춤에 대한 재능을 처음으로 확인한 일이다. 다음 해에도 챔피언 자리를 유지했다.
이 정도 했으면 필자도 배우는 입장에서 가르치는 입장이 되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경기대학교 사회교육원의 ‘댄스스포츠 코치아카데미 코스’에 도전했다. 1년 만에 1, 2급 자격증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이때 올림픽공원에서 가르치던 선생이 영국 유학을 권했다. 댄스스포츠의 본고장은 영국이며 거기 가서 공부하고 국제지도자 자격증을 따가지고 오면 우리나라 댄스 역사에 드문 일이 될 거라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영국에 유학할 준비로 개인 레슨을 받으며 국제지도자 자격증 코스를 공부했다. 6개월 공부 후에 영국 런던의 유서 깊은 ‘쌤리댄스스쿨’에 갔다. 지도교사로 'Technique of Latin Dancing' 이라는 책을 낸 라틴댄스 계의 전설 월터 레어드의 비서였으며 현존 최고의 지도자 준 먹머르도 여사를 만났다. 2개월간 새벽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집중적인 댄스 공부와 연습을 하며 결국 ‘국제지도자 자격증(IDTA:International Dancesport Teachers Association)’을 따 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 영국에 가서 이 자격증을 따 온 사람은 몇 몇 댄스 계 원로에 불과했는데 동호인에 불과한 필자가 이 자격증을 들고 들어온 것이다.
개선장군처럼 귀국한 필자 주변에 댄스동호인들이 모여들었다. 그렇게 해서 ‘댄스엔조이’라는 댄스 동호회를 만들었다. 무려 5년 동안 회장을 맡으며 댄스스포츠 동호회를 키웠다. 당시에는 1주일의 거의 절반을 댄스 강습으로 보냈다. 그 과정에 샤리권(권금순)이라는 학원 원장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영국에서 귀국 직후 ‘댄스엔조이-라틴댄스’라는 책을 내려고 ‘댄스스포츠코리아’라는 잡지사에 찾아 갔다가 그 자리에서 편집 기자 자리를 제의받았다. 책도 나왔고 3년 후에는 ‘댄스엔조이-
라틴댄스 실전과 이론’, ‘댄스엔조이 – 모던댄스’, ’댄스엔조이 - 즐거운 댄스 라이프‘ 3권을 동시에 냈다. 그리고 10년 후 낸 ’캉캉의 댄스이야기‘까지 내면서 댄스 칼럼니스트로서 자리를 굳건히 했다. 특히 ‘댄스스포츠코리아' 잡지사의 기자 자리는 필자에게 날개를 달아준 격이 되었다. 세계적으로도 댄스 잡지는 드물지만 국내에서 발행되는 유일한 댄스 잡지라서 권위가 있었다. 국내 댄스 경기 대회나 행사에는 언론사 자격으로 VIP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국내 댄스 계 중요 인사들을 만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취재 과정에서 세계적인 챔피언들을 인터뷰하여 기사화할 수 있었다.
댄스 인생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얘기하자면 장애인들과의 만남을 빼 놓을 수 없다. 원래 장애인들과의 만남은 94년 ‘댄스 동호회’에 나온 시각장애인들을 통해서였다. 몇 사람을 가르치고 있는데 혼자는 힘들다며 도와달라고 하여 갔던 것이다. 자이브를 중심으로 가르쳤는데 시각장애인들도 곧잘 했다. 처음에는 물론 막막했으나 그들도 노력했고 필자도 가르치는 노하우가 생겼다. 그들과 함께 여성의날 행사에 오프닝 무대에서 춤췄는데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참석한 자리였다. 시각장애인의날 행사 때도 함께 오프닝 무대를 자이브로 장식했는데 그때는 당시 영부인 권양숙 여사가 참석했었다. 시각장애인의날 행사 때 객석을 보니 대부분 시각장애인이라 보이지도 않는데 춤을 춰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시큰둥했던 필자가 부끄러웠다. 보이지도 않고 댄스화 갈아 신기도 귀찮으니 운동화 신고 그냥 하자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필자 파트너는 진지하게 임했다. 끝나고 사진을 같이 찍자고 해서 또 한 번 놀랐다. “사진을 찍어 봐야 볼 수가 없는데 왜 찍느냐”고 물었더니 아이들에게 자랑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아이들은 정상적인 시력을 가졌다고 했다. 이들과의 만남은 여기까지였다. 그 당시만 해도 장애인댄스대회가 없어 더 이상 끌고 나가기 어려웠던 탓이다.
또 다시 10년만인 2013년 서울시장애인댄스연맹에 코치 겸 선수로 들어가게 되었다. 장애인댄스스포츠연맹이 정식으로 발족하여 전국적으로 경기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너무 나약해서 안마사 시험에도 떨어졌다는 40대 할머니를 파트너로 하여 선수로 출전했다. 처음엔 왈츠 단일 종목으로 동메달을 겨우 땄는데 스탠더드 5종목을 다 연습하고 나니 금메달까지 딸 수 있었다. 한 대회에 3개 부문까지 출전할 수 있으니 출전만 하면 메달을 수확했다. 이 할머니 파트너가 은퇴하고 나서 만난 파트너 중 최고였다. 나이도 40대라 젊고 체형이 날씬했다. 국내 ‘스타킹’이라는 TV 프로그램에 출연할 정도로 플라멩코 춤에서는 인정받는 사람이었다. 이 파트너 덕분에 국립극장에서 있었던 ‘대한민국 장애인 문화예술 대상’에서 대중무용 댄스스포츠 부문에서 수상을 했다. 장애인 댄스경기 대회는 대개 오전 중에 끝나지만 이 파트너와는 일반인들끼리 겨루는 댄스경기대회에도 출전했다. 2014년 여수에서 벌어진 ‘아마추어선수권대회’에서는 오전에 장애인 부문에서 3경기를 뛰고 오후에 일반인들끼리 겨루는 장년부, 일반부, 아마추어부까지 결승에 올라 나란히 우승, 우승, 준우승하는 쾌거도 이뤘다. 스탠더드 5종목을 뛰려면 대단한 체력이 요구돼 세 부분을 연속해서 출전하는 선수도 처음이라며 화제가 되었다. 이 파트너도 건강상 그만두게 되어 아쉬웠다.
2015년에는 새 파트너를 만나 ‘전국체전’에서 동메달을 따는 쾌거를 이뤘다. 비록 동메달이나 덕분에 서울연맹이 ‘댄스스포츠 전국대항전’에서 간발의 차이로 우승할 수 있었고 전체 장애인종목에서도 만년 단골 우승인 경기 다음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글쓰기
필자에게 글재주가 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이다. 국어시간에 다음 배울 것을 짧게 축약해 오는 ‘짧은 글짓기’에서 늘 선생님의 칭찬을 받았다. 받아쓰기는 늘 만점이었고 국어 성적도 거의 만점을 받았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는 것. 그래서 글쓰기가 좋아졌다. 그 당시만 해도 책은 구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만화를 많이 본 것이 어휘 구사에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5학년 무렵에는 전국적으로 글쓰기 열풍이 불어 학교 내에서는 물론 서울 단위에서도 ‘어린이글짓기대회’가 열렸다. 당시 대회에서 필자는 후배 여학생과 단 둘이 입상하고 돌아와 교내 스피커를 통해 방송도 하고 전체 조회 시간에 교단에 서서 수상작 낭독도 했다. 그 인기 덕분에 전교어린이회장까지 했다.
중학교 때는 문예반 활동을 한 것도 아닌데 당시 ‘학원’이라는 학생 잡지에서 하는 ‘학원문학상’에 응모했더니 수상했다. 당시 학교 정문에 플래카드가 붙기도 했다. 당시 그림도 좋아해서 미술반에 들어갔으나 저녁 식사도 못 한 채 매일 밤 10시까지 버티기가 힘들어 그만 두었다.
대학교에 들어가서 중학교 때 못한 그림 공부에 미련이 남아 사진반에 들어갔다. 그림은 한 장 그리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사진은 셔터만 누르면 되니 적성에 맞았다. 예술사진이니 작품성도 있어야 하고 설명과 제목도 멋지게 달아야 하는데 그림과 글쓰기에 대한 갈증을 한꺼번에 충족시켜주는 것 같아 한동안 사진에 빠져 들었다. ‘전국대학생사진동아리’도 구성해서 활동했다.
사진에 꽂혀 있떤 필작 다시 글에 손을 댄 것은 40대 초반으로 직장에서 자리가 잡혔을 때였다. 젊었을 때부터 외국을 자주 다니면서 느낀 점들을 신문에 독자 투고했는데 인정받았다. 1000여 편의 독자투고 내용을 책으로 3권 냈고 서울 서초구청장으로부터 기록인증서도 받았다.
독자투고는 글이 짧아 하고 싶은 말을 간단명료하게 담아내야 했다. 그러나 글이 길지 않아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2003년 댄스 동아리를 만들면서 이 갈증을 충족할 수 있었다. 당시 인터넷에 댄스 칼럼을 길게 올린 것이다. 이 칼럼은 인기도 높었다. 그 글들을 모아 2004년 영국 유학 후 ‘댄스엔조이’라는 책을 4권 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2007년 ‘유어스테이지’에 시니어 리더로 합격하면서부터였다. 블로거를 모집했는데 당시 필자는 블로그가 뭔지도 몰랐으나 그간 인터넷에 올린 글들 덕분에 합격한 것이다. 그때부터 ‘캉캉의 글모음’이라는 블로그를 만들었다. 이 블로그로 2012년에는 ‘대한민국 100대 블로거상’도 받았다. 필자 블로그는 하루 방문객 1500명 내외이더니 2016년 5월 드디어 누적 방문객 300만 명을 돌파했다.
2010년에는 보건복지부에서 주관한 ‘액티브 시니어 자서전 공모전’에서 우수상으로 2등상을 수상했다. 1등상을 수상한 사람은 필자보다 10세 이상 연배로 전쟁도 직접 겪었고 인생을 모범되게 살아 충분히 자격이 있었다. 그런데 정작 방송, 잡지 등에서는 필자에게 출연 교섭을 많이 해왔다. 춤이 그림이 되기 때문이다.
블로그의 힘은 대단했다. 필자 블로그를 검색한 방송, 잡지 등에서 섭외가 많이 들어 왔다. ‘시니어 파트너즈’에서 지원해준 덕도 많이 봤다. 한국의 모든 공중파에 나갔고 케이블 TV까지 합하면 셀 수도 없을 정도로 출연했다. 한 방송국에서는 휴먼 다큐멘터리를 찍는다며 무려 10일간을 매일 녹화하기도 했다.
블로그는 현재 중요한 일과 중 하나이다. 하루에 글 하나는 꼭 올린다. 글을 쓸 때 가장 마음이 편하고 생각이 정리되어 힐링되는 것 같다. 자꾸 희미해지는 기억력을 붙잡으려면 일상이든 독후감이든 영화 감상문이든 바로 써둬야 한다.
사회 활동
초등학교 때 어린이회장을 한 이래로 감투 복은 있는 모양이다. 대학 시절에 4학년이 관례로 맡던 사진반 회장을 2학년 올라가자마자 맡더니 ‘전국대학생사진동아리’’를 결성하여 회장단을 꾸리기도 했다. 군 생활 때도 동기들과 선배들이 즐비한데도 중대 전체의 선임자 역할을 했다. 그리고 참여하는 곳마다 크고 작은 모임에서 회장을 많이 했다. 리더십도 있는 편이지만 말이 많지 않아 카리스마가 있다고 한다. 틀이 좋다거나 돈이 많거나 말을 잘하는 일반적인 요소는 없으나 중심을 잘 잡고 전체와 미래를 보는 시각이 있다는 평이다.
퇴직 후 삶은 IMF 외환위기로 고통받을 때를 생각해 보면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된 것 같은 해방감을 느꼈다. 직장 생활 때 인적 관계는 퇴직 이후 거짓말처럼 멀어져 갔다. 새로 새로운 세계의 사람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댄스스포츠에 집중한 덕분에 ‘댄스엔조이’라는 동호회를 만들었고 5년간 회장을 맡았다. 동호회를 운영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유어스테이지’에서 공모한 시니어 리더들의 모임에서도 5년째 회장을 하고 있다. 회장 맡은 것을 자랑하려는 게 아니라 회장을 맡은 덕분에 책임감을 가지고 여러 좋은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많다는 것이 좋다. 그런 면에서 ‘브라보 마이라이프’ 기자 활동과 새로 맡은 운영위원회장 자리도 기대가 크다.
요즘은 유난히 발이 넓은 동네 친구 덕분에 ‘한국시니어블로거협회’에 대표로 참여하고 있다. 그 덕분에 ‘KDB 시니어 브리지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동문회 등 거기서 파생되는 여러 모임에도 나가고 있다. 협회 자체의 행사나 프로그램도 많다.
강의도 자주 나간다. 퇴직을 앞둔 우리은행 지점장급 직원들을 대상으로 생산성본부에서 해마다 인생 이모작 강의를 했었다. 200명을 대상으로 하루 8시간 하는 강의이다. 퇴직 후 16년차에 들어섰으니 인생 이모작 선배로서 그간 경험한 퇴직 이후의 삶에 대한 경험을 전해주는 강의이다. 노사발전위원회에서도 공모전 입상을 한 덕분에 비슷한 내용으로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도심권 이모작 센터’’, ‘사회연대은행’ 등에서도 강의를 해오고 있다. 댄스스포츠 강의도 하지만 홀로 살기, 파워 블로거 되기 등 테마도 다양화하고 있다.
필자 스케줄 표를 보면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꽉 차 있다. 동호인들끼리 댄스하는 날, 노래배우러 가는 날, 책 만들러 가는 날, 댄스 동아리 강의 하는 날, 장애인 댄스 교습 및 댄스 선수 연습하는 날이 고정되어 있다. 일요일만 비워두고 있다. 그렇다고 전혀 틈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루는 24시간이고 그런 스케줄은 대부분 저녁 모임이거나 한 나절 정도 걸리기 때문에 나머지 시간에는 다른 스케줄을 소화할 수 있다. 특히 남는 시간은 집 근처에 공유사무실이 있어 글쓰는 데 활용한다.
어떤 면으로 보면 너무 바쁘게 살고 있기 때문에 매력 없는 남자라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여유 있게 차 한 잔 하면서 같이 대화라도 나누고 싶은데 필자처럼 바쁜 사람에게 전화했다가는 바쁘다며 거절당할 게 빤하다는 것이다. 휴먼 다큐멘터리를 찍을 때 가까운 사람들 인터뷰가 있었다. 필자도 동석한 자리이므로 좋은 대답을 기대했는데 그런 말을 들으니 충격적이었다. 그래서 절대 바쁜 척 하지 않기로 했다. 그전에는 댄스 하러 가는 날이면 다른 스케줄은 아예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댄스는 어차피 여기저기서 하고 있고 한두 번 쯤 빠져도 큰 문제 아니니 결석을 택한다. 다른 고정 스케줄도 마찬가지이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가 60대 중반에서 70대 중반이라는 말이 있다. 과연 그런 것 같다. 아직 건강하고 활동력도 있다. 노후 대비 경제력을 걱정할 정도는 아닌 것도 다행이다. 사주에서 보듯 무난하고 평탄하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인생의 정점에서 ‘브라보 액티브 시니어 인생’을 사고 있는 셈이다.
“저 사람은 도대체 어디서 튀어 나왔지?” 영화 에서 본 장광(張鑛·64)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영상을 압도하는 무서운 표정의 배우는 어디서도 보기 드문 악역 전문이 될 거라 믿었다. 첫 영화 이후 4년이 흐른 지금, 장광은 매서운 눈매를 치켜세우거나 혹은 선한 눈을 하며 웃어도 어울리는 자유로운 배우로 사랑받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은퇴할 나이에 혜성같이 나타나 ‘대세 배우’로 살아가는 배우 장광을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글 권지현 9090ji@etoday.co.kr 사진 오병돈 프리랜서(Studio Pic) obdlife@gmail.com
장소협조 전광수 커피하우스 대학로점
배우 장광과 걷는 대학로는 앞으로 나아가기 쉽지 않았다. 그날따라 일일장터가 열린 탓이기도 했지만 내 옆에 걷는 이가 잘나가는 장 배우(?)이기에 인사를 하거나 악수를 청하는 사람들이 꽤 됐다. 나도 모르게 매니저 아니면 경호원이 된 듯 보호본능을 일으키며 주위를 살핀다. 인기 배우와 함께 있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싶다.
인터뷰 장소로 이동하는 동안 우선 시청자로서 제일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어떻게 매번 인기 흥행작에만 유독 얼굴을 비출 수 있는지 말이다. 영화는 물론이고 출연했던 TV드라마를 눈여겨보면 장광은 중년층이 즐겨보는 일일드라마나 주말 드라마에 출연한 적이 없다. 5월 초 막을 내린 tvN , 출연이 예정돼 있는 KBS 퓨전 사극 도 젊은 세대를 겨냥하거나 해당 방송사 주력 시간대 드라마다. 굳이 유행하는 작품만 고르는 걸까?
“아니요. 그런 거 생각 안 해요. 그냥 들어오는 대로 하는 겁니다. 사실 이번에 일일드라마에서도 제의가 있었는데 과 시간이 겹쳐 하지 않기로 했어요. 일부러 고르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은 캐스팅 1순위, 대체불가 배우로 꼽히지만 4년 전만 해도 꿈도 못 꾸던 일이었다. 다른 무명배우들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오디션에 응시하고, 고배 마시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정년퇴직할 나이, 생애 최고의 영화를 만나다
그러다 만난 작품이 바로 영화 다. 이 영화 한 편으로 배우 장광은 인생역전 드라마를 쓰기 시작했다.
“그때 사실 부동산에 투자했다가 사기 당하고 큰 손해를 입어 문제가 아주 심각했습니다. 7~8년 동안 서서히 숨통이 조여 왔어요. 상황이 점점 안 좋아지다 보니 다른 사람들한테 더 이상 도움 받을 수가 없었어요. 기도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는 영화 를 만나는 과정을 신앙인으로서 기도와 말씀 없이는 설명할 수 없다고 말했다. 타 매체 인터뷰에서 자신의 종교 신념을 표현해주지 않은 것에 대한 서운함을 토로했다. 그러면서도 다시 당시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이어나갔다.
“매일 새벽기도에 나갔습니다. 집사람과 기도원이라는 기도원은 다 다녔죠. 그런데 를 만났던 2011년, 40일 동안 하는 새벽기도회에서 목사님이 ‘여러분들에게 앞으로 찾아올 10년, 20년이 생애 최고의 해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라’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현실을 돌이켜보니 그때 내가 우리 나이로 쉰아홉이었습니다. 일반 사람들은 정년퇴직하고 손 놓을 때잖아요. 그런데 앞으로 10년, 20년이라는 비전을 가지라더군요. 현실적으로는 정말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했지만 깊이 와 닿았습니다.”
그리고 40일 기도회가 끝나기 바로 며칠 전에 영화 오디션 소식이 들렸다. 오디션 보게 될 배역을 보자마자 가족 모두 하나님이 보내신 거구나 생각했단다.
“영화 에서 원하는 배역이 50대 후반의 대머리여야 하고 연기는 잘해야 하는데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배우, 겉으로 보기에는 굉장히 선한데 뒤에서 악랄한 짓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의심의 여지없이 하나님이 준비한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장광이 맡은 1인2역의 교장과 행정실장은 교회 장로였다. 같은 종교를 가진 사람으로서 부담됐지만 기도로 받은 역할이라 생각했다. 800명이 지원해 단 한 명, 장광이 선택됐다. 이 배역이 정해지지 않아 6개월 여 난항을 겪다 장광이 합류하면서 바로 영화 촬영이 진행됐다고. 실화를 다룬 영화, 19금 등 흥행을 저해하는 요소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460만(누적 466만2 914명) 관객이 영화관을 찾았다. 실제 도가니 법(장애 여성, 아동 등을 성폭행으로부터 보호하자는 법) 제정에도 큰 영향을 줬다. 사회적으로 파장이 커서일까? 영화를 만든 스태프와 배우에게 난감한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결국 쫑파티를 못했습니다. 사회적으로 이슈가 됐는데 우리는 손님 많이 들었다고 웃고 즐길 수가 없었어요. 그렇게 할 분위기도 아니었죠. 상영 시작하고 한 달 뒤, 전라도 어디 초등학교 폐교에 가서 쫑파티 했습니다(웃음).”
주인공으로 등장한 배우 공유(본명·공지철)도 공유지만 쌍둥이 교장과 행정실장을 연기한 장광이 더욱 더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무엇보다 영화 이후 다양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부드러운 인지도를 쌓아 나갔다.
“하여튼 예능 프로그램은 다 돌았던 거 같아요. 우리집 식구 다 찍고 그러고 나니까 처음 했을 때는 ‘저 얼굴도 보기 싫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거도 싫다. 나쁜 놈, 못된 놈, 더럽게 생겼다’ 이렇게 나오다가 나중에는 ‘귀엽다’ 소리까지 들었습니다.”
천의 얼굴을 가진 배우로 날개를 달다
악역에만 국한되지 않는 전천후 배우로 활약하게 된 첫 번째 작품이 배우 이병헌과 함께 했던 영화 다.
“를 찍을 땐 참 재밌었습니다. 악독한 배역이었다가 ‘내시’를 한다는 게 말입니다. 보통 ‘내시’라고 그러면 가늘고, 마르고, 앵앵거리는 소리를 내는 거만 생각하는데 감독님은 저한테 ‘아주 듬직한 고목나무 같이 끝까지 상감을 보필하는 우직한 내시를 연기해 달라’고 주문했습니다.”
영화 를 연출한 추창민 감독은 장광의 연기를 꼼꼼하게 챙기고 요구했다. 영화 시스템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를 때라 완벽하게 따지고 확인해 주는 추 감독의 도움이 컸다고.
“그때 칭찬 받았던 것이 뭐냐면 감독이 원하는 딱 그만큼만 한다는 거였어요. 차지도 넘치지도 않게 말입니다. 그래서 촬영 과정에서 연기 잘한다는 얘기가 들리더군요.”
작년 8월 개봉했던 영화 에서는 사이비 교주 역할을 맡았다.
“난 그런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것이 재밌습니다. 성우를 할 때도 그랬는데 강한 캐릭터나 만들어내기 어려운 것, 과연 저걸 어떻게 만들까하는 역할을 많이 했어요. 의 스탠스 필드(게리 올드만 분), 의 펭귄맨, 애니메이션 더빙으로는 와 도 해봤고요. 이 성공하지 못하고 완성도도 약해서 아쉽긴 했지만 사이비 교주 역은 아주 재밌었습니다.”
집안에서 나는 60~70점짜리 가장
얼굴이 알려진 이후 단 한 번의 기복도 없이 배우 생활을 하고 있는 장광. 아버지로서 가장으로서 본인의 점수를 물어보니 60~70점은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장광의 부인 전성애, 딸 장윤희, 아들 장영 모두 연예인이다. 서로의 일상이 바쁘지만 돈독한 가족애를 위해 노력하고 살고 있단다.
“각자 스케줄 때문에 여행을 못해요. 그게 좀 아쉽지만 가족 예배를 드릴 때가 있기 때문에 볼 시간도 있고 기도 제목을 얘기하면서 서로의 고민을 나눕니다. 친구 부부들과 함께 만날 때면 우리 부부가 편안하게 말을 많이 한다더라고요. 내 친구들은 자식들 걱정에 속이 썩어들어 가도 말 못할 때가 많다는데 저는 다행이죠.”
내 아들, 미안하다! 사랑한다!
코미디언으로 활동하고 있는 딸 장윤희씨와는 정말 친구처럼 지낸다는 장광. 그런데 아들 장영씨와는 조금은 서먹함을 느낀다고 했다.
“아무래도 남자라서 그런지 밖으로 돌고 그래요. 물론 서로 할 만큼은 하는데 내가 어렸을 때 아들에게 상처를 많이 준 거 같아요. 따지고 보면 잘되게 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그런 거죠. 우리 나이 아버지들이 대부분 다 그렇잖아, 자기는 잘 못했으면서 아이들은 제대로 시키려고 강제적으로 하는 거요.”
어느 날 꼭 날을 잡고 아들에게 사과할 생각이다.
“아이가 어렸을 때 교회 프로그램이던 아버지학교에서 편지를 써서 아들에게 보내고, 안아도 봤는데 풀리지 않더라고요. 스킨십도 하고 사랑한다 말도 해야 한다는데 아버지가 아들한테 그런 말 하는 게 쉽지 않아요. 젊은 사람들은 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나이는 너무 어렵습니다. 꼭 언젠가 아들에게 얘기해 줄 겁니다. 미안하다고요.”
집밥 백선생님? 장광 배우님 어떠신가요?
사실 영화 로 카메라 앞에 서기 전, 성우로 일을 할 때도 줄곧 주인공을 맡아 인정받는 성우로 살아온 장광. 오디오와 비디오의 차이일 뿐이지 사랑을 많이 받고 산 사람이라 스스로 평가한다고. 물론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도 겪었지만 현재를 생각하면 많은 것이 감사하다. 신앙적으로도 를 전후해 하나님을 깊이 만난 것도 인생에서 너무 고마운 부분이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뭔가 배우고 싶다거나, 하고 싶은 것이 있는지 물었다.
“사실 젊었을 때는 탭댄스를 정말 배우고 싶었습니다. 진 켈리가 나왔던 뮤지컬 영화 를 보고 정말 멋지다고 느꼈습니다. 지금은 뭐 따라하는 정도일 거고 제 나이에 맞는 스포츠댄스를 운동 삼아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배우고 싶습니다.”
최근까지 교회 공동체에서 기타를 배워보기도 했는데 정말 매일 미친 듯이 쳐야 늘 것 같아 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또 배우고 싶다는 것이 있었다.
“이제는 요리하는 것을 배워야 할 것 같아요. 요즘 분위기로 남자들도 요리는 좀 해야 할 것 같더라고요.”
혹시 이 글을 tvN 제작진이 읽기를 바라며 시즌3에는 꼭! 장광 배우를 섭외하길 권한다.
‘배우’. 자신의 이름을 걸고 연기하는 사람들에게 배역이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특권이다. 그 어떤 옷을 입는다 해도 충격이지 않게 단지 그의 연기로 몰입하게 만드는 배우가 우리 주위에 얼마나 있을까? 배우 장광이 지금 별처럼 빛나는 이유? 바로 그것! 그것이다.
나는 대한장애인댄스스포츠서울연맹 소속 선수 겸 코치이다. 자원봉사자로서 시각장애인들을 대상으로 댄스스포츠를 가르치고 있다. 시각장애인들은 혼자서는 댄스를 할 수 없기 때문에 나 같은 비장애인이 파트너로 같이 경기대회에 나간다. 올해가 4년째이다.
장애인들은 겨울철 빙판이 위험하기 때문에 겨울 동안에는 훈련을 쉰다. 그리고 대략 4월부터 새로 선수등록을 하고 연습에 들어간다. 그리고 6월부터 대회에 출전한다. 겨울 기간이 길기 때문에 그 사이에 신상의 변화도 생기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매년 4월이면 안무를 새로 짜고 5월부터는 파트너와 만나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
4년 전 처음 만난 파트너는 60대 후반의 시각장애인 할머니였다. 선천적으로 전혀 앞을 못 보는 전맹이었다. 몸매가 호리호리하고 허약해 보였다. 나이를 물어 보니 수줍은 듯 자기 나이를 밝히며 너무 늙지 않았느냐며 미안해했다. 나이도 많지만, 몸이 너무 허약해 다른 시각장애인들처럼 자이브나 차차차 같은 격렬한 라틴댄스는 무리여서 다른 장애인들이 춤출 때 구경만 하는 존재였다. 그래서 내가 택한 것이 왈츠, 탱고 같은 모던 댄스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시각장애인들에게는 공간의 이동이 많지 않은 라틴댄스만 가능하다고 생각하던 때였다. 농구장에서 하는 경기대회에서 플로어 전체를 돌면서 추는 모던댄스는 무리라고 봤던 것이다. 그러나 한 손만 잡고 추는 라틴댄스보다 한손을 서로 손을 맞잡고 다른 한 손을 여성은 남자의 어깨에, 남성은 여성의 등을 잡아주는 모던댄스가 오히려 더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왈츠 교습을 시작했다. 그러나 왈츠에서 그네의 흔들리는 스윙을 설명하기 위해 그네를 타 봤느냐고 물었더니 그네 자체를 모르고 있었고 타본 적도 없다고 했다. 탱고의 동선을 가르치기 위해 게처럼 옆으로 가는 것을 설명하고자 했으나 역시 게를 본 적이 없어서 이해가 안 된다고 했다. 그렇다고 다른 시각장애인처럼 점자를 배운 것도 아니었다. 원래 학교를 전혀 다녀 보지 못한 무학이었기 때문에 점자도 배울 생각도 안 해봤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팔과 다리를 잡아 기본 동작을 가르치고 스텝을 외우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어렵게 시작했으나 다행히 몸이 가벼워서 내가 리드해 나가기 쉬웠다. 스텝을 외우지 못 했어도 내가 힘으로 밀고 나가면 내게 몸을 맡기기 때문에 춤추는 데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성격도 좋았다. 얼마 안 되는 장애연금으로 생활하는 형편이었으나 아침부터 복지회관에 나와 수영, 사물놀이 등 무료 강좌를 열성적으로 배웠다. 간식으로 주는 빵이나 떡, 과자 등으로 끼니를 해결하는 와중에도 받은 먹거리를 가방 안에 넣어 두었다가 내게 줬다. “선생님! 선생님!”하며 따르는 모습도 귀여웠다. 그해 첫 대회는 6월에 열린 춘천 전국대회였다. 해마다 6월에는 장애인 대회가 시작된다. 전국 18개 시도에서 모인 선수들끼리 대회를 벌이는 것이다. 필자는 그와 왈츠로 출전했다. 그런데 당당히 3등을 한 것이다. 메달과 상장을 거머쥔 그는 너무나 감격해 했다. 그렇게 시작해 그해 왈츠와 탱고로 전국대회에 출전하며 상위권의 성적을 냈다. 가을 전국체전에서는 단체전 금메달까지 땄다. 그렇게 필자와 한 해를 보내고 그도 다른 시각장애인들과 함께 고령으로 은퇴했다.
다음해에 만난 파트너는 30대의 젊고 아름다운 시작장애인이었다. 겉보기에도 시각장애인 같지 않았고 아주 가까운 거리는 어렴풋이 볼 수 있는 약시였다. 댄스에 소질이 있어서 가르치는 것을 쉽게 이해했다. 몸매도 예뻐서 같이 춤출 만했다. 장애인대회에서는 처음으로 모던 5종목으로 출전할 정도로 출중했다. 4월에 처음 만나 6월에 창동에서 열린 첫 대회에 나갔다. 다른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장애인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고 오후에 같은 장소에서 열린 일반인대회에도 출전해 역시 좋은 성적을 올렸다. 시각장애인이 일반인대회까지 나간 것도 처음이지만, 좋은 성적까지 거둔 것은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할 만한 사건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오전 장애인대회에서는 시각장애인들이 전맹도 있고 약시도 있으므로 공평을 기하기 위해 안대를 착용한다. 그때는 스텝을 전혀 틀리지 않고 완벽하게 소화했다. 그러나 오후에 일반인대회에 나가게 되자 안대를 벗자 혼란스러운 모양이었다. 방향 감각에 혼란이 왔는지 댄스를 시작하는 코너를 멀쩡하게 잘했던 오전과 달리 반대편에서 해야 한다며 우기기도 했다. 관중들을 의식하면서 스텝을 간혹 틀리기도 했다. 이 파트너와는 그해 장애인대회는 물론 일반인 대회도 나란히 출전하면서 자랑스러운 성적을 만들어 나갔다. 그해 여름, 국립극장에서 있었던 대한민국장애인문화예술대전에 대중 무용부문으로 참가하여 댄스스포츠로 수상한 것이 그와의 마지막 출전이었다. 안타깝게도 안마사로서 주야간으로 몸을 혹사하다 보니 건강을 상한 것이다.
올해도 6월부터 장애인 댄스대회가 시작된다. 지난겨울 동안 역시 서울연맹 소속 선수들의 신상에 변화가 많았다. 주로 청소년부 선수로 활동하던 남자 비장애인 선수들이 군 입대한 사람이 많아 새로 파트너를 짜야 한다. 내 역할이 더 중요해졌다. 어쩌면 단일 파트너가 아닌 종목별로 따로 파트너 역할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다가오는 6월을 위해 지금부터 또 땀을 흘려야 한다.
한때 올림픽 선수가 되고 싶었던 신중년들이 그런 기분을 만끽할 수 있는 경기대회가 미국에서
열린다. 눈요기만 하는 관광보다는 세계 각지에서 온 선수들과 경기를 하면서 우정을 나누고 풍물도 즐기고 싶은 신중년이라면 참가해 볼만한 대회다.
올해로 30회째를 맞이하는 ‘헌츠먼 세계 시니어 경기대회(The Huntsman World Senior Games)’. 미국 서부 유타주 세인트조지(St. George)에서 열리는 이 대회는 시니어 올림픽으로 자리를 잡았다.
‘더 높이, 더 멀리, 더 빨리’보다는 ‘더 건강하게, 더 즐겁게, 더 친밀하게’를 지향하는 것이 올림픽과 다른 점이다. 물론 참가 자격 제한이 있다. 50세 이상이라야 참가가 가능하다. 그 대신 예선전은 없다. 자신의 수준에 맞는 경기에 참가하고 경기하다 보면 메달을 딸 수도 있다. 못 따면 또 어떤가? 연금을 받는 것도 아니니. 올림픽은 참가하는 데 의의가 있지 않은가? 선수로 뛰지 않고 그냥 응원단이나 관람객으로 참가해도 선수와 같은 대접을 받을 수 있다.
딕시주립대학의 한센스타디움에서 개최되는 개막식은 올림픽을 방불케 한다. 세계 20여개 국가와 미국 50개 주에서 온 선수들이 출신 국가와 지역의 특색을 살린 복장과 깃발을 들고 입장을 하면 세인트조지 시민들은 관중석에서 환영의 함성을 지른다. 성화 봉송과 점화, 선수 선서와 매스게임, 그리고 불꽃놀이로 이어지는 화려한 개막식의 분위기에 젖다보면 국가대표선수가 된 느낌이 들게 된다. 부부가 손잡고 함께 개막식에 참석하는 장면은 생각만 해도 흐뭇해진다.
개막식에 이은 연주회에서는 축제 분위기를 더욱 만끽할 수 있다. 지난해 실내 경기장에서 열린 브리티시 인베이션 트리뷰트 밴드와 더 몽키스 밴드의 공연은 압권이었다. 각국의 선수들과 동반자들은 가슴 깊숙이 숨겨 두었던 열정을 마음껏 분출하면서 몸을 흔들고 괴성을 질렀다. 경기 후 열리는 디너와 댄스파티도 잊을 수 없는 행사다. 각국 선수들과 어울려 춤을 추다보면 새로운 추억과 로맨스가 마음깊이 남게 된다.
10월 3일부터 15일까지 2주간 열리는 올해 경기는 모두 29개 종목. 대부분 연령대별(5세 간격)로 나뉘어 경기가 치러진다. 축구, 소프트볼, 배구 등 3개 종목은 팀경기로, 볼링 등 나머지 26개 종목은 개인경기로 진행된다.
팀경기는 팀원을 구성해 함께 등록해야 한다. 개인경기는 개별 등록 후 같이 뛰고 싶은 선수를 등록 리스트에서 선택할 수도 있다. 일정만 맞으면 여러 종목 참가도 가능하다. 한 번 등록한 선수의 번호는 바뀌지 않고 매년 같은 번호가 부여된다. 그래서 다음해 같이 경기를 하고 싶은 선수가 있으면 지정하기도 편리하다.
골프는 사교 경기와 메달 경기 두 그룹으로 나누어져 있어 자신의 수준에 맞는 경기를 택할 수 있다. 메달 경기도 36홀의 연령대별 경기와 18홀의 핸디캡 경기로 나누어 치러진다. 특히 준프로급이 참여하는 연령대별 경기는 내년에 미국에서 열리는 내셔널시니어골프대회 예선전을 겸하고 있어 좋은 성적을 거두면 내셔널골프대회 출전자격도 덤으로 얻을 수도 있다.
유타주 세인트조지시는 선브룩나 딕시 레드힐스와 같은 유명 골프장이 주변에 즐비해 세계의 골프 마니아들이 연중 몰려드는 골프 휴양지다. 건조한 사막성 기후에 붉은 바위산을 끼고 양탄자 같은 잔디가 펼치진 링크코스는 골퍼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도전적인 신중년들은 철인 3종 경기와 산악자전거 경기에서 세계의 베테랑 철인들과 한판 승부를 겨뤄 볼만하다. 강렬한 햇살을 받으며 선인장밖에 없는 황무지에서 진행되는 사이클링, 도로 달리기와 경보는 요즘 붐이 일고 있는 운동. 동우회의 회원들이 함께 참가하면 좋은 추억을 만들 수 있다.
4년마다 열리는 올림픽과는 달리 헌츠먼 시니어대회는 매년 열려 미국, 캐나다는 물론 세계 각지 스포츠 동우회의 연례 모임 장소로도 활용하고 있다.
네바다주 카슨시의 브렌다 블랙햄 여사는 35년 전 고등학교 배구팀 코치로 활약했다. 전국 대회를 휩쓸었던 추억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동고동락했던 학생 선수들이 이제는 의사, 변호사, 교육자 등으로 미국 각지에서 맹활약을 하고 있으나 다 같이 한번 모이기가 쉽지 않았다.
학생들이 지천명(50세)의 나이를 넘긴 2014년, 이 대회에 배구팀으로 함께 참가하면서 소망했던 재회가 이루어졌다. 손발 한 번 맞추어볼 겨를도 없이 바로 경기에 참가했지만 그저 즐거웠고 경기를 거듭할수록 옛날 팀워크가 되살아나면서 더 즐거웠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 10월의 대회기간에도 바쁜 일을 접어놓고 모두 모여 경기를 하면서 재회의 기쁨을 나눌 계획이다.
독일 배구팀은 지난해 금메달의 한을 10년 만에 풀었다. 2006년부터 참가한 독일팀은 2013년에는 세계시니어배구챔피언십을 겸한 이 대회에서 캐나다 팀에 석패해 은메달에 그쳤다. 2년간 실력을 더 갈고 닦아 지난해 우승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올해 있을 독일과 캐나다 팀 간의 리턴매치는 벌써부터 관심을 끌고 있다.
심금을 울리는 러브스토리도 빠질 수 없다. 서울올림픽 때의 안재형과 자오즈민의 열애에 견줄만한 전설 같은 이야기도 전해진다. 전역 군인인 미국의 댄 크레이번스와 러시아의 마리나 안드리바는 2004년 탁구 경기에 출전했다가 사랑에 빠져 결혼을 했고 이제는 복식조로 함께 참가하고 있다. 신중년과 꽃중년이 뒤늦게 소울 메이트로 만나 적대적인 양국의 탁구계를 잇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해피엔딩 스토리다.
중국 청소년들의 자원봉사활동도 화제다. 2010년 미국의 시니어배구팀이 중국 순회 경기를 갔을 때 친절하게 봉사한 중국 청소년들과 인연이 되어 그 후 해마다 중국 청소년 10여명이 이 대회 때 미국에 와서 한 달여간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제법 치열한 경쟁을 통해 선발된 중국 청소년들은 현지 자원봉사를 통해 영어는 물론 국제 매너와 봉사정신을 익히게 된다.
헌츠먼 대회는 각계의 봉사자와 후원이 뒷받침되면서 참가 선수만 1만명이 훌쩍 넘는 국제대회로 성장했지만 출범은 단순했다. 1987년 존 모건 주니어 부부가 ‘운동과 체력단련이 일상이 되면 신중년의 황금기가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각지의 시니어가 함께 하는 대회를 구상하게 됐다.
여기에 홀인원을 5차례나 기록한 만능 스포츠맨이자 건강과학박사인 스티븐 워너 하이너 교수가 가세하고 세인트조지시도 적극 지원에 나서면서 대회를 출범시켰다. 출범 2년 뒤 헌츠먼코퍼레이션의 존 헌츠먼 회장과 부인이 본격적으로 후원하면서 세계적인 대회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이 대회가 성황을 이루는 데는 1시간 이내의 거리에 자이언캐년 국립공원이 있고 브라이스캐니언, 그랜드캐니언, 라스베이거스, 솔트레이크시티 등 많은 관광 자원과 부대시설이 뒷받침하고 있는 점을 빼놓을 수 없다. 문화 행사와 박물관 투어 등 다양한 볼거리와 먹거리가 있고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한 무료 건강검진을 실시하는 등 세심한 서비스도 참가율을 높이는 요인이다.
모건 회장은 메시지를 통해 “봉사자, 후원자, 참가자 및 임직원의 헌신과 노력으로 대회가 놀랍게 발전했다”며 “30주년을 기념해 성대하게 진행될 올 대회에 세계의 신중년들이 적극 동참하여 건강을 증진하고 우정도 돈독히 하자”고 역설했다.
나이 들수록 지식을 뽐내기보다는 지혜(智慧)를 나누고 덕(德)을 베풀었을 때 자연스레 교양이 묻어난다.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지혜와 덕은 하루아침에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닐뿐더러, 교과서나 시험도 없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인생의 큰 숙제와 같다. 해결하는 방법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그동안의 소양과 더불어 끊임없이 공부하며 그 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한 가지 더 있다. 바로 체력(體力)이다. 몸이 건강해야 정신과 마음이 건강한 상태로 오랫동안 인생 공부를 해나갈 수 있겠다. 교양 있는 중·장년의 삶을 위해 ‘지덕체(智德體)’를 향상할 수 있는 배움의 장을 살펴봤다.
◇ Chapter 3.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體 학점 올리기
백화점 문화센터는 주부들이 애용하는 배움의 장이라는 인식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은퇴 이후 배움에 목말라하는 중·장년 남성들이 늘어나면서 ‘Only for Mens, 요섹남 쿠킹 클래스(현대백화점 목동점)’와 같은 강좌가 생겨났고 점차 남자 수강생의 비율도 증가하게 됐다. 나이가 들면서 각자의 시간을 존중하다 보면 오히려 함께 하는 것들이 줄어들게 마련이다. 모든 것을 같이 할 수는 없더라도, 한 가지 정도는 아내와 또는 남편과 배우고 즐겨보는 것 어떨까? 함께 익히며 쌓이는 교양만큼이나 부부 사이의 애정도 차곡차곡 쌓이게 될 것이다.
댄스스포츠를 함께 하는 남편 문숭철(文崇喆· 65)·아내 김영희(金英姬·61)씨
“동아리 활동처럼 즐거운 문화센터는 내 삶의 활력소”
올해로 5년째 빠짐없이 ‘부부 크루즈&파티 댄스’를 수강하고 있는 문숭철·김영희 부부. 분기마다 개설되는 강좌를 모두 들었으니 대학으로 따져도 4년 개근상은 받고도 남는다. 이토록 두 사람이 오랜 시간 한 가지에 전념할 수 있었던 까닭은 ‘함께라서’이다. 부부가 함께해야 하는 수업인 만큼 짝꿍처럼 서로 돕고 이끌어주며 지낸 덕에 배움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을 수 있었다.
김씨는 “남편이 해외지사에서 근무하면서 10여 년을 독일, 러시아 등에서 지냈어요. 외국 생활을 하면서 가장 애로사항을 느낀 것은 언어가 아닌 ‘춤’이었죠.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학부모 모임 등을 하면 꼭 댄스파티 시간이 있었어요. 그 순간만 오면 우리는 어쩔 줄 몰라 했죠. 그래서 춤을 배워보자고 각오를 했는데, 아무래도 남편이 현역에 있을 때는 출장도 잦고 함께 연습할 시간이 부족했어요. 저 역시 아이들 교육에 힘쓰던 시기라 춤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죠”라고 회상했다.
그렇게 늘 마음에만 간직하고 있던 배움에 대한 욕구를 한국에 들어와서야 채워나갈 수 있었다. 해외 생활을 하며 아킬레스건처럼 느꼈던 춤을 극복하고 자연스럽게 즐기기 것이 목표였다. 단기적으로 계획하기보다는 천천히 한 걸음씩 나아가는 방법을 택했다.
문씨는 “춤이 생활화가 안 돼 있었기 때문에 모임이나 파티에 가면 우리는 소외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죠. 그 우아한 세계에 들어설 수 없다는 생각에 자존심도 상했어요. 그런데 춤을 배우고 돌이켜보니 막상 그때 그들이 추던 춤이 별 게 아니더라고요. 거리낌이 없었을 뿐이지, 아주 테크니컬하게 추는 것은 아니었죠. 최근 크루즈 여행을 갔을 때 댄스 콘테스트를 했는데, 우리 부부가 속한 모임에서 우승부터 여러 상을 휩쓸었어요. 자신감이 생겼죠. 하지만 욕심내지는 않아요. 지금 하는 것에서 조금씩 더 배운다는 생각으로 천천히 수준을 올려갈 생각입니다. 급할 필요 없어요. 이게 내 직업은 아니니까요”라며 여유로운 모습을 보였다.
그는 “부부가 배움을 함께 한다는 것은, 핸들이 두 개 달린 자동차를 운전하는 것과 같다”고 표현했다. 실제로 남편이 아내에게 운전을 가르치며 다툼이 생기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배움의 과정에서 서로가 융합하고 화합하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방법대로 익혀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와는 다르게 부부가 함께 춤을 추려면 서로의 스텝을 살피고 배려해야 하나의 동작을 완성할 수 있어 이는 함께 핸들을 잡는 것과 같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움직임이나 표현 등을 서로가 완벽히 공유하고 익혀야만 한 바퀴라도 돌 수 있어요. 한 배를 탔는데 서로 다른 방향으로 노를 저으면 안 되잖아요. 손을 맞잡고 우회전, 좌회전은 물론 그 이상의 동작까지 함께 해내려면 운전보다 더 힘들 수도 있어요. 마음처럼 몸이 움직이지 않을 때는 더욱 힘들죠. 서로를 담금질해가며 하나둘씩 극복해나가면 부부관계도 아주 단단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어요.”
그들은 함께 댄스를 하며 몸 건강은 물론 마음까지 건강해졌다고 이야기했다. 동작에 음악이 흐르면 댄스가 되고, 거기에 표현이 어우러지면 하나의 예술이 된다. 이러한 예술적 활동을 한다는 데에서 오는 만족감도 대단하지만, 단순히 운동하는 것 그 이상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김씨는 “우리도 함께 골프를 치기도 하지만, 일반적인 운동은 같이 가더라도 각자 하는 거잖아요. 그렇게 하면 몸은 건강해지겠지만, 서로 교감하는 부분이 없어 마음이 건강해진다는 느낌은 안 들죠. 손을 잡고 서로의 눈빛을 바라보며 함께 호흡하는 것이 정서적으로도 참 좋다고 생각해요. 또, 스텝을 외우고 익히다 보면 정신건강에도 도움이 되고요”라며 50대 이후 부부들에게 ‘부부 댄스’를 꼭 권하고 싶다고 말했다. “은퇴하고 갑자기 부부가 무언가를 한다는 게 쉽지는 않겠지만, 무엇이든 꼭 해보세요. 언어를 배우거나 하는 것도 좋지만 몸으로 부딪히면서 교감하면 더 좋겠고요. 또 이렇게 문화센터를 다니면 지역 주민들이 동기가 되니까 마치 동아리 활동을 하는 것처럼 색다른 즐거움을 느낄 수 있어요. 오히려 친구들은 자주 보기 힘든데, 우리는 매주 만나니까 더 친근하죠. 그런 기분 좋은 관계가 현재의 삶에는 가장 큰 활력입니다.”
“한때는 꿈이 있었지/가슴에 묻어 왔던 꿈이/사랑은 영원하다고/철없이 믿어 왔던 날들/하지만 그 꿈은 잠시/한순간 사라져 버렸네” ( 삽입곡 ‘I dreamed a dream’)
아내 윤이남(尹二男·70)씨가 첫 소절을 부르자 남편 권영국(權寧國·75)씨가 부드러운 화음을 넣는다. 그들이 부른 노래처럼 부부에게도 한때는 꿈이 있었다. 가수를 꿈꾸었던 소년과 간호사를 꿈꾸었던 소녀, 잠시 사라진 듯했던 그들의 꿈은 ‘뮤지컬 배우’라는 모습으로 다시 나타났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가수를 꿈꾸었던 권씨와는 다르게 음악과는 동떨어진 삶을 살았던 윤씨. 그녀가 음악의 즐거움을 느끼게 된 것은 남편 덕분이었다. 신혼 시절, 어느 날 가야금을 사들고 온 남편은 “당신 가야금 연주하면 정말 아름답겠다. 어머니 환갑 때 연주하면 좋겠다”고 엉뚱한 제안을 했다. 가야금은커녕 악기는 배워볼 생각도 없던 아내는 그 말을 웃어넘겼고, 가야금은 집 한편에 장식품처럼 놓여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윤씨는 ‘한번 해볼까’라는 생각이 들었고, 다년간 연습한 끝에 시어머니의 환갑잔치 날 ‘아리랑’과 ‘도라지’를 연주해냈다.
남편이 그랬듯 아내는 “당신, 내 가야금 연주에 판소리를 하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그렇게 함께 음악의 즐거움을 공유하기 시작해 색소폰, 플루트, 하모니카 등 악기뿐만 아니라 스포츠댄스, 합창, 사물놀이 등 다양한 음악활동을 해오던 그들은 2007년 ‘뮤지컬 배우’라는 꿈을 꾸기 시작한다. 당시 예순을 넘긴 부부였지만 ‘아무리 고되어도 인생의 두 번째 문은 열린다’는 의지로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2008년, 노년의 사랑을 그린 뮤지컬 의 오디션에 부부가 동시에 합격하게 된다. 20명 남짓 뽑는 오디션에 140여 명의 지원자가 몰렸지만,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습한 덕에 그들은 꿈의 무대에 오를 수 있게 됐다.
그들의 꿈을 펼친 뮤지컬 (2008)의 공연이 열렸던 세종문화회관은 남다른 의미가 있는 장소다. 1967년 12월, 당시 시민회관이었던 그곳에서 결혼식을 했고, 결혼 40주년이 되던 해에 그곳에서 뮤지컬 배우로 서게 된 것이다. 꿈을 이룬 이후에도 그들의 일상은 분주하다. 연기활동 외에도 함께 구연동화 자격증을 따서 봉사활동도 다니고, 노인 상담, 인문학 강의, 악기 연주 재능기부도 하는 등 다정히 손을 잡고 행복한 제2인생을 만끽하고 있다.
늘 대화가 끊이지 않는 부부는 잠자리에 들어서도 지난 추억들을 되새기고 노래를 부르느라 새벽을 훌쩍 넘길 때가 많다고 한다. 잦은 대화는 행복했던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한 그들만의 노력이다. 그런 추억을 모아 2014년에는 이라는 부부 자서전도 만들었다. 이후 각자의 자서전을 준비하고 있는 그들은 늘 그렇듯 함께 펴볼 수 있는 아름다운 추억과 꿈을 담아가고 있다.
Q & A
꿈을 이루지 못했던 이유?
(남편) 학창시절부터 노래의 즐거움을 알았고, 무대를 동경해왔죠. 음악은 취미로만 여겼을 뿐, 직업이 되기는 어려웠어요. 직장생활하고 연년생인 삼남매를 정신없이 키우느라 ‘꿈’은 정말 꿈도 못 꾸고 살았죠.
꿈에 다시 도전하게 된 계기?
(남편) 50세가 되던 해, 무엇이든 아내와 같이하자고 마음먹었죠. 그러던 어느 날 ‘충무아트홀 연극 교실’이라는 문구를 발견했죠. 아직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가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뛰더라고요. 그 길로 아내와 연극 교실에 등록했고, 그때부터 뮤지컬 배우가 되기 위한 기초를 다지고, 꿈의 무대에 도전하게 됐어요.
어릴 적 꿈 vs 중년의 꿈?
(아내) 어릴 땐 나이팅게일처럼 간호사가 꿈이었어요. 늘 ‘멘소래담’ 같은 연고를 들고 다니며 다친 아이들에게 발라주곤 했죠. 결혼을 하고 꿈이라는 것은 딱히 없이 지냈는데, 남편과 이런저런 활동을 하며 잠재된 재능을 발견했어요. 그러면서 꿈과 목표가 생겼죠. 중년 이후의 꿈은 남편이 찾아준 것과 마찬가지예요.
꿈을 이루기까지 어려웠던 점?
(아내) 뮤지컬 배우는 노래만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죠. 노래, 연기, 춤, 그리고 다른 배우들과의 호흡까지 신경 써야 하니까요. 대사 암기가 난관 중 하나였어요. ‘연습만이 최선이다’라는 생각으로 언제 어디서든 남편과 대사를 맞추고 안무를 익혔죠.
당신의 꿈은 무슨 색?
(남편) 어떤 꿈이냐에 따라 색깔이 달라지죠. 젊어서 꾸던 진취적인 꿈, 중년에 꾸던 삶의 돌파구 같던 꿈 등. 지금 떠올려보면, 행복했던 꿈도 있고 서글픈 꿈도 있고 그래요. 지금은 무엇보다 건강한 삶을 꿈꾸고 있기 때문에 건강한 빛을 띤 색이라 하고 싶어요.
(아내) 저는 아직도 무지갯빛 꿈을 꿔요. 모든 일이 재밌고, 신나고, 행복하고, 그만큼 알록달록하고 다양한 색깔의 삶을 살고 있죠.
꿈을 이루고 난 뒤 좋은 점?
(남편) 커튼콜. 그 순간의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어요. 무대 위에서 관객의 환호와 박수를 받는 그 광경은 잊지 못해요. 무엇보다 아내와 함께 꿈을 이뤘다는 것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어요. 뮤지컬 배우 부부도 많이 없지만, 우리처럼 노년에 뮤지컬 배우가 된 부부는 거의 없잖아요.
(아내) 꿈을 이룰 수 있었던 건 노년의 삶이 준 선물이죠. 그동안 아이들 키우고 어르신 모시느라 제 삶이 없었잖아요. 그런 시기가 지나고 나니 남편과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졌고, 제 삶을 사는 시간도 많아졌죠.
서로의 손을 꼭 잡고 다니는 중년부부가 얼마나 될까? 여가 시간이 생기면 함께하지 못해 안달이 난 부부는 또 얼마나 될까? 스킨십이 줄어들고, 각자의 취미생활을 즐기는 요즘 부부들에게서는 찾기 힘든 모습이다. 하지만 손을 잡고 함께하는 시간을 애타게 기다리는 이들이 있다. 바로 참댄스 패밀리 부부 동호회 회원들이다. 동반자(同伴者)라는 말이 가장 어울리고, 반려자(伴侶者)가 있어 행복한 그들을 만나봤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참댄스 패밀리의 리더 정기철(정기철 크루즈댄스컴퍼니 대표), 남미경(강남대 겸임교수, 대한 댄스스포츠 경기연맹 강남 연수 원장) 부부에게 동호회의 요모조모에 대해 물어봤다.
부부만을 위한 동호회를 만들게 된 이유
첫 공식 행사는 1999년에 회원들과 함께 새해를 맞아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새벽 2시까지 춤을 췄던 밀레니엄 파티예요. 하지만 그전부터 조금씩 진행해왔죠. 댄스스포츠와 무용을 전공으로 했던 우리 두 사람이 부부가 되고, 댄스스포츠를 알릴 수 있는 부부모임을 생각하게 됐어요. 그때만 해도 댄스스포츠가 많이 보급돼 있지도 않았고, 남녀가 춤을 춘다고 하면 대부분 음성적인 분위기를 떠올리곤 했죠. 아무래도 모르는 사람끼리 손을 잡으면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처음부터 회원은 부부로만 받자고 원칙을 세우게 됐어요. 그땐 이름이 ‘스튜디오 정 댄스’였는데, ‘다른 이름이 더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회원들과 상의한 끝에 ‘참댄스 패밀리’라는 이름을 만들었죠.
참댄스 패밀리 동호회 분위기
동호회 이름에 있는 ‘패밀리’라는 단어처럼 정말 가족처럼 지내요. 40~50대 때 동호회 초창기부터 함께 시작하셔서 60세가 넘도록 오랜 시간 함께 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여러 사람이 모이면 말도 많아지고, 시기도 하는 사람이 생기는데 우리 회원들은 못해도 잘한다고 격려해주고, 서툴러도 예쁘다고 칭찬해주죠.
참댄스 패밀리 회원들의 성향
현재 정기적으로 참여하는 회원들은 130~140명 정도 되고, 거의 대부분 50대 이상이에요. 평균적으로 7~8년 활동하신 분들이고, 병원장 등 의사나 기업 오너분들이 대다수인데, 의외로 의사분들이 춤을 배우거나 색소폰 연주 등을 하면서 취미생활을 중시하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또, 부부가 함께 춤을 배우려면 시간 할애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 좋기 때문에, 오너분들에게는 부담 없는 취미가 될 수 있죠. 무엇보다 함께 춤을 추려면 부부 사이가 좋아야 하거든요. 그렇게 부부 관계가 좋은 사람들끼리 모이다 보니 좋은 바이러스가 퍼져서 늘 화기애애하답니다.
동호회에 가입하려면?
먼저 부부가 함께 오셔야 해요. 이러한 원칙 때문에 ‘참댄스 동호회에 가입하려면 혼인신고서를 내야 한다’는 농담까지 생기기도 했죠. 1차적으로는 저희(정기철, 남미경 부부)가 수업을 하고 있는 현대백화점 문화센터 압구정본점이나 킨텍스점에 있는 부부 댄스스포츠 크루즈·파티댄스 커리큘럼을 이수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점차 연습도 하고, 레슨도 받으시면서 동작을 익히시면 돼요. 문화센터 등에 지출하시는 교육비는 별도고, 동호회에 가입하실 때는 부부당 평생 가입비 5만 원만 내시면 돼요. 소속감을 느끼게 하기 위한 형식적인 차원이죠. 그리고 연회비 역시 부부당 10만 원이에요. 그 외 연중 호텔파티나 크루즈여행, 골프여행 등은 회비에서 일부를 쓰고 나머지는 개인부담으로 즐기는 형태로 운영하고 있어요.
동호회를 즐기려면?
먼저 춤을 익히는 게 중요하겠죠. 자유롭게 몸을 움직이고 동작을 느낄 수 있어야 즐겁거든요. 탱고, 왈츠, 룸바, 차차차 등 댄스스포츠 종목만 10가지가 되는데 그것을 다 익히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 파티에서 분위기를 타려면 한 3~4년 정도는 배우셔야 자신감이 붙어요. 춤도 체력이 돼야 하기 때문에 평소 건강을 유지하시는 것이 중요해요. 무엇보다 부부가 함께 호흡을 맞춰 춤을 춰야 하니까 금실이 좋아야 뭐든 즐겁겠죠?
참댄스 패밀리 동호회의 자부심
해외 결혼식, 크루즈 여행 등을 가봤거나 대사관, 외교관을 지내셨던 분들이 어려워하는 것 중 하나가 서양의 파티문화예요. 서양인들은 즐거운 날이나 모임이 있을 때면 파티를 열고 항상 춤을 추거든요. 그런 문화가 익숙하지 않은 한국인들은 어색해하고 쭈뼛거리게 되죠. 영어를 못해서 언어로 어필하지는 못하더라도 춤을 추며 몸의 대화를 통해 매력을 발산할 수 있거든요. 우리 동호회는 1년에 한 번씩 크루즈 여행을 가는데 멋지게 턱시도와 드레스를 차려입고 밤새도록 춤을 추며 분위기를 즐겨요. 그러면 우리를 구경하는 서양인들도 굉장히 근사하다며 박수를 치고, 서빙하는 직원들도 마치 귀족을 모시듯 대접하곤 하죠. 요즘은 동호회 하면 아웃도어 입고 산으로 가고, 해외여행을 가도 평범하게 즐기다 오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 회원들은 우아하게 치장도 하고 품위 있게 춤도 추고 하니 그런 점에서 자부심과 즐거움을 느끼는 것 같아요.
동호회 회원들이 가장 만족하는 것
호텔 파티를 할 때 시범 댄스를 선보이는 부부가 있는데 주로 결혼 25주년, 30주년 등 결혼기념일이나 환갑, 칠순 생일 등을 기념하는 분들이죠. 그땐 자녀들이나 다른 가족도 함께 초대돼 부부의 춤을 볼 수 있거든요. 그동안 부부가 함께 열심히 연습한 춤을 사랑하는 이들 앞에서 추는 그때의 벅찬 감동은 잊을 수 없다고들 하세요. 그들을 바라보는 가족들도 마찬가지고요. 중년이 되면, 특히 주부들은 큰 목표 없이 살아가게 되는데 동작 하나, 종목 하나를 배우자와 함께 한다는 목표를 멋지게 이뤄냈으니 얼마나 뿌듯하고 행복하겠어요. 그날만큼은 두 사람이 파티의 주인공이나 다름없죠. 회원들은 그렇게 무언가를 배우고, 부부가 함께 꿈을 꾸며, 함께 그 꿈을 이루는 등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일련의 과정들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가장 만족스러워 해요. 또 춤 자체가 운동이잖아요. 드레스를 입고 근사한 포즈를 하려면 몸매관리를 안 할 수 없거든요. 그렇게 부부의 정신적 건강과 외적 건강을 모두 튼튼하게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죠.
참댄스 패밀리의 미래
요즘 100세 시대라고들 하잖아요. 90세에도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차차차를 추는 부부, 백발머리를 하고도 입에는 새빨간 장미를 물고 탱고를 추는 부부를 상상해보곤 해요. 회원들끼리도 “우리 80세가 되면 다 함께 공연할 거예요”라며 즐거워들 하세요.
무엇보다 처음부터 고집스럽게 지켜온 ‘부부’라는 콘셉트 덕분에 건전하고 안정적으로 모임을 유지해 올 수 있었어요. 먼저 배우자를 떠나보내시고 함께 춤을 출 수 없어 외로워하시는 분을 볼 때면 정말 눈물이 나도록 슬프죠. 그렇지만 부부가 함께하는 동호회인 만큼 회원 간에 슬픔을 함께 나누고, 서로를 가족처럼 생각하는 마음이 깊어요. 그런 따뜻한 마음으로 늘 건강하게 동호회가 유지됐으면 좋겠어요.
참댄스 동호회 박중진(69), 김경희(69) 부부 회원 인터뷰
婦)아내 김경희 함께 춤을 추기 시작한 지는 20년 정도 됐어요. 그런데 정말 엊그제 시작한 것처럼 아직도 즐겁고 신나요. 동작 하나를 완벽히 익히는 데 몇 년씩 걸리거든요. 남편과 천천히 하나씩 터득해가면서 하다 보니 정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했죠. 살아가면서 나에게 활력을 줄 수 있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 생긴 셈이에요. 우리는 춤을 출 때 드레스와 턱시도를 입는데, 아무래도 더 근사하고 멋지게 보이려면 몸매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거든요. 그런 부분도 서로 챙겨주고 가꿔주게 되니까 더 아름답고 건강해지는 것 같아요.
夫) 남편 박중진 중년이 되고 우리 부부가 나이가 들어서도 마지막까지 함께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생각했어요. 보통 중년부부들을 보면 함께 하는 것보다는 취미나 여가를 각자 즐기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는 춤을 통해서 공통 관심사가 생기고 함께 즐길 것들이 많아졌죠. 부부 사이가 좋다고 해서 매일 대화만 하고 살 수는 없는데, 같이 몸을 움직이니 운동도 되고 스킨십도 자연스럽게 하니까 더 가까워지는 것 같아요. 부부댄스는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호흡을 맞추고 상대를 배려해야만 원하는 동작들을 해낼 수 있기 때문에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이 더 커지더라고요. 또, 직장에서 찾은 전문성 외에 무언가 내가 자신감 있게 할 수 있는 분야가 생긴 게 좋죠. 한 가지 조언을 드리자면, 조금이라도 더 젊었을 때 시작했으면 해요. 그래야 몸이 더 유연할 때 빨리 습득할 수 있고, 진짜 즐길 수 있는 나이가 됐을 때 자유롭게 춤을 출 수 있으니까요.
“이 더위에 슈트차림하고 나가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 테니, 아마 눈에 확 띌 겁니다.”
30도를 웃도는 폭염.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날씨에 정갈한 슈트차림에 중절모와 나비넥타이로 한껏 멋을 낸 중년신사가 유유히 걸어온다. 시원하게 쭉 뻗은 다리와 꼿꼿한 자세, 힘 있는 걸음걸이는 그야말로 모델포스가 넘친다. 그의 말대로, 아니 그의 말보다 더 확실히 눈에 확 들어온다. 지난 한해 시니어 모델계의 블루칩으로 떠올라 9편의 광고에 출연하며 존재감을 뽐낸 곽용근(76)씨다. 남다른 표현력과 연기력으로 광고뿐만 아니라 가수 이효리와 김완선의 뮤직비디오, 각종 영화와 연극 등에 출연하며 그 누구보다 활기찬 인생2막을 살고 있는 그다. 얼핏 보면 유머러스한 생김새 하나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그런 그도 수년간의 연습과 노력 끝에 지금의 유명세를 탈 수 있었다고. 젊은 모델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자신만의 끼와 열정으로 경쟁하고 있는 그를 만나봤다.
모델 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
“한양대 화공과를 나와서 어엿한 기업의 임원자리 까지 올랐었다. 이후 개인 사업을 시작했다가 실패하고 어디 중소기업이라도 들어가서 일하자 해서 일했는데, 거기도 환갑이 다 돼가니 나가라더라. 그래서 뭐라도 시작하려면 컴맹은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해서 노인복지관을 찾았다가 우연히 모델 수업을 한다는 걸 발견했다. 그때부터 관심을 갖고 준비해서 2004년에 처음 보험 회사 지면광고를 찍게 됐다. 정말 내가 이렇게 살 줄 꿈에도 몰랐는데 말이다.”
현재의 모습이 이르기까지 가장 힘들었던 점
“모델일 자체나 하는 과정에서 힘든 것 보다 이 일을 결정하고 제2의 인생을 설계하는 것이 더 힘들었다. 환갑이 지나서 ‘내가 무얼 할까’, ‘제2의 인생으로 태어나면서 어떻게 태어날까’하고 생각이 많았다. 긴 고민 끝에 ‘이 길로 가야겠다’고 목표를 정한 뒤에는 연극을 처음 시작했다. 당시 또 한 가지 힘들었던 점은 집에서도 반대했다는 거다. 말 안 하고 있다가 방송에 나오면 놀라곤 했다. 처음에는 창피하게 그런 일을 한다고 마누라가 나무라면 ‘그래도 이렇게 살아야 내 인생은 즐겁고 행복해. 행복은 내 마음속에 있지 당신 체면 차린다고 해서 내가 행복해지는 것은 아냐’라고 했지. 자식들도 사돈댁에서 알까봐 부끄러워하고 그랬는데 이제는 많이 나아졌다.”
‘시니어 모델’이라 특별히 신경 쓰는 부분
“나는 내 몸이 자산이다. 내 몸이 망가지면 모델일도 연기도 할 수 없기 때문에 내 몸 가꾸는 일은 게을리할 수 없다. 보통 광고를 찍게 되면 여름 제품을 겨울에 찍는 경우가 많아 추운 날씨에도 얇은 반소매 차림에 촬영을 하고 나면 자칫 감기에 걸리고 드러눕기 십상이다. 나이 든 모델은 평소 체력관리에 더욱 신경 써야 한다.”
‘모델’로서 가장 노력하는 점
“당연히 ‘몸매 관리’다. 매일 피트니스 센터에 가서 운동을 하고 등산, 스포츠댄스도 한다. 나이가 들면 등이 굽고 근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젊은 모델보다 배로 신경 쓰고 노력해야 지금의 몸매와 골격을 유지할 수 있다. 워킹연습도 꾸준히 해야 걸음걸이가 좋아진다. 저기 저 청년보다 내 몸매가 훨씬 낫지 않나?”(웃음)
연기 생활 신조
“두말할 것 없이 ‘감독에게 절대 복종’이다. 광고나 연극은 감독이 그 작품의 완성도를 위해 동선 하나하나를 전부 계산해서 나오기 때문에 내가 끼 부리고 잘난척하면 작품을 망치고 감독의 기분이 나쁠 수 있다. 아무리 젊은 감독이고 나보다 어리더라도 그의 주문대로 하는 것이 좋다. 내 기분이나 상태는 배제해야 한다. 난 그의 주문을 더 정확하고 빠르게 수행하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오디션 or 캐스팅
“요즘은 감독들이 나를 먼저 찾는다. 유머러스한 이미지가 섭외 1순위 요소다. 하지만 현재의 캐릭터로 인정받기까지 7년여간 연극 활동을 해오며 안면 표정을 연습해왔다. 물론 오디션에도 떨어져 봤다. 모델로 등단하기 위해 오디션은 필수다. 모델의 끼가 있나 없나, 해당 작품에 어울리는지 여부 등에 대해 판단하기 위해서다. 그 특성상 오디션에 떨어질 수도 있는 데 이에 연연하거나 낙담하면 안 된다. 누구에게나 짧든 길든 무명시절이 있듯 그 무명시절 속에서도 자신을 가꾸고 준비해야만 좋은 기회가 찾아왔을 때 그 영광을 안을 수 있다. ‘기회는 노력하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라는 말처럼.”
촬영 현장에서 느끼는 고충
“이 나이에 어디 가면 대접받겠지만 촬영장에 가면 보통 100여 명의 스태프가 모두 바삐 움직이기 때문에 나이가 많다 하여 나를 특별히 생각하거나 따로 더 챙겨주는 이는 없다. 오히려 그렇게 어른대접 받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면 안 된다. 모두가 함께하는 작업이니까 참아야 한다. 굳이 꼽자면 숨 가쁘게 돌아가는 촬영장에서 아직은 매니저나 코디 등 보조 인력이 없기 때문에 하나부터 열까지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고충이 있기는 하다.”
가장 희열을 느낄 때
“단편극 중의 단편극이 광고다. 사진 한 장 또는 30초짜리 영상만을 통해 상대방을 웃기고 감동을 준다는 자체가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흡입력 있고 단숨에 감동을 선사하는 데는 모델의 역할이 크다. 때문에 나 역시 다채롭고 깊이 있는 표정연습에 주력한다. 그렇게 내가 연기한 광고를 통해 많은 사람이 웃고 즐거워하고 감동하는 모습을 볼 때가 가장 보람되고 뿌듯하다.”
도전하고 싶은 역할
“내가 정말 해보고 싶었는데 놓친 역할이 있다. 요즘 ‘명량’으로 뜨고 있는 최민식이 연기한 충무공 이순신 역할이다. 그런 역할을 해보고 싶어서 수염도 길러봤는데. 하하하. 전에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출연해 대 역적 역할을 맡은 적 있다. 그런 것도 좋고 왜적장수 역할도 잘 소화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안 해본 연기가 거의 없다. 연극을 통해 기본기와 안면표정, 제스처 등을 연마했기 때문에 어떤 배역을 하게 되도 자신 있다.”
언제까지 모델 일을 할 수 있겠는가
“확정 지을 수는 없지만 내년 1월에 이태리에 갈 거다. 국내에서도 열린 적 있는 세계양복맞춤협회가 주최하는 런웨이가 이태리에서 열리는데 그 무대에 서기로 했다. 여러 나라 사람들도 올거고 젊은 애들도 많이 올 텐데 내가 거기서 좀 뻐기고 와야 하지 않겠나. 매일 워킹연습하고 체력도 키우고 있다. 꼭 그 무대가 아니더라도 나는 내 몸이 따라주는 그 날 까지는 일을 계속 해 나갈 거다. 죽는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다. 그만큼 나는 내 일에 취해있고 지금이 너무 행복하다.”
‘시니어 모델’을 꿈꾸는 이들에게
“무언가를 해야겠다고 다짐하고 열과 성을 다하면 성공하기 마련이지만, 모델일은 그 무엇보다 ‘끼’가 중요하다. 끼가 있어야 연기도 더 개성 있고 자신 있게 할 수 있다. 먼저 자신의 끼를 발견하고 그 끼를 남들에게 표현할 수 있을 때까지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체력관리도 해야 하고 워킹연습, 대사연습, 표정 연습... 연습 또 연습해야 한다. 이 일의 장점은 ‘자유직업’이라는 것이다. 내가 노력한 만큼 더 많은 역할에 도전해 볼 수 있고, 그만큼 더 행복해진다. ‘이 일로 얼마를 벌어야지’라는 생각보다는 어떠한 역할에 대한 도전정신과 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노력한다면 수입은 자연스레 따라오게 된다. 물론 그렇지 않더라도 처음부터 돈이나 캐스팅에 연연해 하지 않는 것이 이 일을 더 즐길 수 있는 방법이다. 무엇보다 긍정적인 자세로 임해라.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갖는 것이 곧 행복을 낳는 거위다.”
“또 하루 멀어져간다. 머물러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또 하루 잊혀져간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중략) 내가 떠나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보내 온 것도 아닌데….”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다. 그러나 예순 즈음에 이 노래는 다시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직장의 퇴직을 준비하며, 자식들이 결혼하며 하나 둘씩 떠나간다. 이 순간 만감이 교차한다. 어떤 이는 씁쓸한 기분이 들 것이고, 어떤 이는 새로운 인연과의 조우에 설레기도 할 것이다. 예순을 즈음한 이들에게 물어봤다. 나를 슬프게 하는 것과 나를 기쁘게 하는 것에 대해.
◇ 파안대소 – 나를 웃게 할 때
△ 김수년 (56ㆍ경기 구리시) - 자녀의 취업
아침에 멋진 양복을 입고, 정갈하게 머리를 다듬고, 코끝을 자극하는 향수를 뿌리고 출근을 하는 아들을 볼 때마다 매우 자랑스럽다. ‘아들 키우기 위해 열심히 살았던 보람이 있었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 바로 저 때다. 누구보다 멋지고 바르게 자라준 자식도 자랑스럽다. 그리고 내 말을 믿고 잘 따라와 줘서 고맙다. 요즘은 아버지께 맛있는 것 사준다고 전화가 오면 머쓱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웃음이 나온다.
△ 장성자 (60ㆍ서울 중랑구) - 손주들의 재롱
요즘은 진짜 손주들 재롱 보는 맛에 산다. 사내놈들 둘만 키우느라 딸 키우는 재미를 몰랐는데, 손녀 둘을 키우면서 그 재미가 무엇인지 알아가고 있다. 사내놈들 키워보니 애교도 없고, 반응도 없어 즐거움을 몰랐다. 두 손녀가 할머니 재미있게 해준다고 애교도 피우고, 땡깡도 피우는 모습이 너무나도 귀엽다. 내가 아닌 며느리만 찾을 때 얄밉다가도 마트에서 손녀들 옷, 장난감 코너를 기웃거리는 나를 보고 있으면 웃기기도 하다. 그런데 뭐 어떡하나. 그 아이들만 보면 웃음이 나고 자꾸만 보고 싶은 것을.
△ 진순자 (57ㆍ경기 남양주시) - 댄스의 즐거움
25년 동안 식당을 운영했다. 아침 일찍 출근해 저녁 늦게 들어가니 휘트니스 클럽가서 운동하는 것 밖에 취미 생활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은퇴를 하고, 내 시간을 많이 갖게 되면서 새로운 것이 하고 싶어졌다. 그 중에 하나가 스포츠댄스를 배우는 것이었는데, 예상했던 것처럼 정말 신난다. 일주일에 두 번 동네주민자치센터에서 열리는 스포츠댄스 시간이 기다려진다. 강사를 따라 이리 흔들고 저리 흔드니 스트레스도 확 사라지는 느낌이다. 남편도 처음에는 이 나이에 무슨 춤이냐며 만류했지만, 이제는 즐기는 나의 모습을 보면서 응원해준다. 이제는 댄스복을 인터넷으로 찾아보고 사는 것도 하나의 낙이 됐다.
△ 양병환 (58ㆍ경기 남양주시) - 첫 수확의 기쁨
3년 전 귀농을 했다. 처음에는 농사가 쉬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정말 큰 오산이었다. 첫 해는 거의 수확물이 나오지 않아 고심을 많이 했다. 역시 농사도 살아있는 생물을 상대로 하는 것이다 보니 그만큼 공이 많이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농사에 대해 더욱 많이 공부했고, 더 많이 땀을 흘렸다. 마침내 지난 해 9월, 첫 결실을 얻었다.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성취감과 뿌듯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첫 작물을 판매 할 때는 ‘내 새끼’를 보내는 심정으로 아쉽기까지 했다.
△ 김택현 (64ㆍ경기 의정부시) - 친구들과의 술 한잔
젊은 시절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고 즐거운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격식없이, 허심탄회하게 즐기는 친구들과의 술자리다. 젊은 시절과 현재의 술자리 화제도 많이 바뀌었다. 이제 와서 처음 생각해 보는 것인데, 젊은 시절 술자리에서 했던 이야기들과 지금 하는 이야기들이 많이 변한 것 같아서 감회가 새롭기도 하다. 젊은 시절 여자 이야기, 자식 이야기를 하던 친구들이 이제는 골프 이야기, 자식 이야기, 어디론가 떠날 여행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세월이 많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은 우정이다. 시간은 흘러도 사람은 흘러가지 않는다.
최근 대기업 임원을 지내다 퇴직한 A씨(56)는 아내와 함께 종종 백화점이나 마트를 찾는다.
소일거리 삼아 주1∼2회 시간을 넉넉히 두고 쇼핑을 하는 편이다. 쇼핑에 많은 지출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필요한 것은 꼭 사고, 이왕 사는 것은 오래 쓸 수 있도록 좋은 것을 사자는 쪽이다. 옷은 눈썰미 있는 아내가 주도하지만 '나이먹은 티' 난다며 젊은 취향에도 상당히 신경을 쓴다.
유통업계는 50ㆍ60대 중장년층이 '큰 손 고객'을 부상하자 이들을 유치하기 위해 다양한 마케팅을 선보이고 있다.
백화점, 편의점 등 오프라인 업체들은 물론 홈쇼핑, 오픈마켓 등 온라인 업체들까지 상품구성과 판매방식에서 50∼60대를 겨냥하고 있다.
백화점 업계는 경기 불황으로 젊은층의 소비는 줄어드는 데 반해 경제력을 갖춘 50대 이상은 상대적으로 덜 영향을 받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롯데백화점은 50∼60대 고객들이 젊은 층이 즐겨입는 스타일을 선호한다는 판단에 따라 중장년 여성을 겨냥한 상품군 '어덜트 컨템포러리'를 신설했다. 또 장년층을 위한 쿠폰북을 별도로 만들 계획이다.
현대백화점은 5월 가정의 달에 패션·스포츠·건강식품 등을 망라한 '액티브 시니어 페어'를 열 예정이다.
신세계백화점도 시니어 건강댄스, 시니어 테라피요가, 가락장구와 경기민요 등 50∼60대를 겨냥한 문화센터 강좌를 진행하고 있다.
편의점의 경우 50∼60대가 부쩍 많이 찾으면서 이들 유치에 적극 나서고 있다.
씨유(CU)는 좌식문화에 익숙한 성향을 반영해 좌식형 테이블을 늘리는 등 '생활 속 쉼터'를 표방하고 있다. 또 노년층을 판매원으로 고용하는 '시니어스태프제'를 통해 50∼60대 눈높이에 맞는 고객서비스를 제공한다.
세븐일레븐은 복고풍 도시락 등 장년층의 향수를 자극하는 제품과 건강기능식품 등 50∼60대 맞춤형 상품을 출시했다.
알뜰폰은 가격이 싸고 조작법이 간단할 뿐 아니라 화면글자도 커서 50대 여성이 많이 찾는다고 편의점 측은 전했다.
GS25는 치아에 부담없는 무른 상품, 성인용기저귀, 영양식 등의 제품을 판매 중이다.
홈쇼핑의 경우도 중장년층 제품 비중을 높이고 있다.
현대홈쇼핑은 염색약, 보청기, 건강보조식품 등의 상품방송을 늘렸으며, 보험상품의 경우 60대 이상 고객들이 직접 가입할 수 있는 건강보험 상품을 확대했다. '장수흙침대'는 렌탈 방식으로 선보일 예정이다.
NS홈쇼핑은 50∼60대가 주로 시청하는 평일 아침 오전 6시에 건강정보와 요리법을 소개하는 '건강한 밥상'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GS샵은 50∼60대를 겨냥한 인터넷 쇼핑몰 '오아후' 운영 중이다. '오십 대부터 시작하는 아름답고 후회 없는 삶을 위한 라이프스타일 쇼핑몰'의 줄임말이다.
인터넷 이용에 익숙지 않은 장년층을 위해 TV홈쇼핑처럼 고객이 원하면 전화로 상품의 상담, 주문 및 결제가 가능하도록 했다. 또 사이트의 글자와 이미지 크기를 키웠다.
인터넷쇼핑몰 옥션은 50∼60대를 위해 건강식품브랜드 전문관을 통해 고려은단, 천호식품 등 인기 브랜드 상품을 싸게 판매하고 있고, G마켓은 중장년층을 위해 식품담당자가 산지를 직접 방문해 선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