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필자가 활동하고 있는 서울시 장애인댄스스포츠연맹 소속 선수이다. 앞을 전혀 볼 수 없는 유일한 전맹이다. 앞을 전혀 볼 수 없으니 여기저기 부딪쳐서 늘 얼굴에 상처가 여기저기 생긴다. 다른 선수들은 약시라고 하여 어느 정도의 사물 분간은 한다. 그래서 전맹인 그녀에게는 늘 약시인 동료들이 유난히 더 친근하게 화장실 같이 가기, 옷 갈아 입혀 주기 등 많은 도움을 주었다. 다른 선수들은 혼자서 기초 스텝 연습을 할 수 있으나 그녀는 누군가 늘 잡아줘야 했고, 올 때나 갈 때는 늘 시각장애인 전용 택시를 이용하거나 전철을 이용할 때는 누군가가 전철역까지 나와 줘야 했다. 그런데 그녀가 갑자기 기쁜 소식을 전해 왔다, 눈 수술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흐릿하게나마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뉴스를 찾아보니 이미 인공망막 수술이 성공했다는 기사가 있었다. 전맹은 선천성 전맹보다 대부분 후천성이다. 망막색소변성증이라는 병이 발병하면 카메라 필름에 해당되는 망막이 망가지는 병으로 결국은 실명하게 된다는 것이다.
인공망막 수술은 ‘아르구스2’라 하여 소형 비디오카메라가 장착된 특수 안경을 쓰면 이미지 정보를 전기 신호로 바꿔주는 휴대용 컴퓨터와 외부 코일로 되어 있다고 한다. 수술이 필요한 것은 안구 주변과 망막에 외부 정보를 전달받는 무선 주파수신기, 특수 내장 회로, 시신경을 자극하는 백금 칩 삽입 때문이다. 외부 기계 값도 비싸니 손상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고 한다.
5시간 정도 수술을 받고 5일 정도 요양하면 시력 검사표의 맨 윗 글자는 알아볼 수 있을 정도라니 일상 생활하는데 지장이 없다고 한다. 수술비용은 2억 원 정도 되는데 기업들의 후원금으로 충당된다는 것이다. 이미 이 신기술로 한 사람은 성공했고 그녀가 2호 대상자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이다.
그녀는 3년 전부터 서울연맹에서 왈츠, 비에니즈 왈츠 전문 선수로 활동해 왔다. 왈츠는 느린 박자로 천천히 그리고 우아하게 추는 춤이고, 비에니즈 왈츠는 빠르지만, 단순한 안무로 된 종목이다. 서울 연맹에서 유일한 전맹이기도 하여 다른 선수들은 이 종목과 겹치지 않게 다른 종목으로 활동했다. 흐릿하게라도 아무 것도 안 보이니 차라리 보는 것을 포기해서였을까, 플로어에 들어서면 잔잔한 미소와 함께 왈츠의 선율을 타는 그녀의 모습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해마다 전국체전을 비롯하여 그녀는 출전하는 대회마다 수많은 금메달을 휩쓸었다. 그리고 작년부터 생업을 위하여 아산병원에서 안마사로 일했다. 나이도 50대 중반이니 더 늦었으면 대상에서 제외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한 인연으로 그녀가 대한민국 2호 인공망막 수술의 혜택을 보게 되었는지 모른다. 이런 전맹 환자가 우리나라에만 1만여 명에 달한다는 것이다.
그녀가 앞이 보이게 되면, 많은 것이 달라질 것이다. 우선 혼자서 움직일 수 있고 여기저기 부딪치던 고통은 옛일이 될 것이다. 그간 안 보이기에 필자를 ‘젊은 오빠’라고 불렀었는데 보이게 되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나이든 오빠라서 실망할지도 모른다. 일단 수술이 성공했다는 얘기는 들었다. 희미하게 빛이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나타나면 수많은 얘기 보따리가 풀어질 것이다.
필자가 운영하는 서울시 50플러스 센터의 댄스 교실은 개설한지 1년이 지났다. 댄스스포츠 종목 중에 그간 자이브, 차차차, 룸바를 가르쳤고 이제 차차차 중급 과정에 돌입했다. 그간 거의 빠짐없이 강의를 했고 등록회원 수도 많은 편이다. 그래서 가끔 공연 등 요청이 들어오는데 아직 준비가 덜 되었다며 사양할 수밖에 없었다. 댄스스포츠는 남녀가 한 커플이 되어 추는 춤인데 남자 회원이 귀하기 때문이다. 어쩌다 남자 회원이 오더라도 여성회원이 다수인 분위기에서 적응하기 어려운 모양이다.
그동안은 필자 혼자 여성 회원들을 일일이 잡아주며 춤을 가르쳤다, 그러면 필자도 너무 힘들고 필자가 없으면 여성회원들은 춤을 못 추는 신세가 된다. 어쩌다 남자 회원들을 여성 회원들과 홀드해서 같이 춤을 추라고 하면 제대로 안 된다. 그래서 남자를 “선생님”과 “일반인”으로 구분한다.
초기부터 이런 실정을 알고 여성들을 반분하여 남자 역할, 여자 역할을 하라고 했으나 모두 반대했다. 어디 가서 춤을 추려면 남자랑 춰야하는데 남자 춤을 추면 그런 기회가 와도 춤을 못 춘다는 것이었다. 여자 춤도 제대로 안 되는데 남자 스텝까지 하려면 헷갈려서 안 된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고참들이 스스로 남자 역할을 하고 있었다. 초보자들이 새로 들어오면 그전에는 필자가 따로 가르치려다 보니 고참들이 불만이 많았다. 그래서 학기 중에는 초급자들을 받지 말라는 항의도 있었다. 그러나 기간을 정해 놓고 회원을 받으면 모처럼 마음먹고 온 사람을 놓치는 경우를 자주 봐 왔기 때문에 무조건 받아들였다. 이제는 고참들이 알아서 초급자들을 잡고 춤을 춰주니 한결 수월하다.
원래 댄스 계에는 남자가 귀하다. 여자들은 원래 춤에 대한 유전자를 타고 나기도 하지만, 어릴 때부터 고무줄놀이 등을 하며 리듬과 박자 감을 익힌다. 학창시절에 무용 시간이 있는 학교도 있었다. 그러나 남자들은 어릴 때 놀이부터 학창시절에도 운동장에 축구 공 하나 던져 놓고 그냥 공차고 논 기억 밖에 없으니 춤이 낯설 수밖에 없다. 군대 시절 그 쉬운 4분의 4박자 군가에 발 맞춰 행군하는 것도 제대로 못해 얻어맞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나이 들어 처음 보는 여자들과 붙잡고 춤을 추라니 선뜻 나서지 못하는 것이다. 물론 잘 할 수 없어서 버벅대고 있으면 여자들이 한 마디 한다. 그게 상처가 되어 못 나서게 된다.
지난 6월 서울시장 배 댄스 대회에 가보니 댄스 계에는 남자가 귀하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댄스 대회에 여-여 커플 부분도 생겼다. 파트너를 못 하니 싱글 부문도 생겼다. 마치 파트너와 같이 추는 양 혼자 스텝을 이어나가는 것이다. 싱글 부문에는 여자는 출전선수가 20명인데 남자는 단 한 명이 출전하기도 했다. 그만큼 어린 나이부터 남자가 모자라는 것이다. 이것은 남자들은 댄스가 장래 직업이 되어야하는데 남자가 댄스를 직업으로 하여 살아가기는 어렵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입문을 꺼리는 것이다.
얼마 전 패키지 해외 여행단의 일원으로 여행 중에 댄스 레슨을 한 적이 있다. 호텔이 한적한 시골이고 밖에 나가봐야 볼 것도 없었기 때문에 호텔 강당을 빌려 댄스 레슨 시간을 갖기로 한 것이다. 대부분 부부 동반이라 댄스스포츠가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댄스를 하겠다고 온 사람들은 여자들뿐이었다. 남자들은 춤에 관한한 용기가 없다. 남자들에게 불참 이유를 물어보니 춤도 춤이지만, 어떻게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들과 같이 춤을 출 수 있느냐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고희(古稀)를 향해 가는 지금 나이에 댄스스포츠 현역선수로 경기에 나선다는 것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하나는 남들 앞에서 춤을 추기 때문에 남들을 의식한 생각이다. 또 하나는 남을 의식할 필요 없다는 생각이다.
춤을 춘지 30년이 다 되어 가기 때문에 또래나 후배들은 이미 지도자나 심사관을 하고 있거나 행정을 하는 위치에 있다. 그런데 그들 앞에서 춤을 추고 평가를 받는다는 것이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경력이 좀 되는 여자 파트너가 안 붙는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들은 그들대로 전문가로서의 길을 걸었고 직업으로 춤을 춘 사람들이다. 시간과 돈, 노력이 많이 투자되었다. 필자는 취미이자 운동으로 춤을 춘 것이므로 당연히 격이 다르다. 춤을 배울 때 선생들이 우리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나이가 어리다고 무시한 적은 없었다. 한번 선생은 영원한 선생인 것이다.
누군가가 필자에게 “현역으로 춤출 때가 가장 행복할 때입니다” 라고 부러워했다. 사실 그렇다. 파트너와 붙잡고 연습하고 대회장에 나가 파트너와 긴장을 즐기며 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는 것, 다른 선수들과 경합한다는 것은 큰 즐거움이다.
댄스스포츠를 접한 사람들이 우리나라에도 수백만 명 될 것이다. 그 중에서도 초급, 중급, 상급 과정을 거쳐 대회까지 나간 사람은 극소수이다. 대부분 초급 과정을 마치면 그만 둔다. 그러니 끈질기게 한 우물을 판 것도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대회에 나가려면 어느 정도의 실력도 갖춰야 한다. 특히 모던댄스이든 라틴댄스이든 5종목은 해야 제대로 선수 대접을 받는다. 우리 나이 쯤 되면 대부분 모던댄스로 귀착한다. 왈츠, 탱고, 퀵스텝, 폭스트로트, 비에니즈 왈츠를 단 종목만 춰도 되고 5종목 선수는 다섯 가지 춤을 다 춰야 한다. 필자는 5종목 전문 선수이다.
경기 대회의 성적은 혼자 잘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파트너도 잘 해야 한다. 춤 잘 추는 파트너와 나가면 당연히 결과도 좋다. 그러나 같이 오래 연습한 고정 파트너가 없기 때문에 좋은 성적은 기대하기 어렵다. 성적이 나쁘게 나왔다고 해서 창피할 것도 없다. 성적을 아는 사람은 대회 관계자 및 가까운 사람들 정도이다. 그전에 좋은 파트너를 만났을 때 1등도 해봤고 우승 트로피도 집안 가득하므로 더 이상 욕심 낼 필요도 없다.
한참 댄스 연습을 하고 온몸이 땀으로 목욕을 한 정도가 되어 여럿이 식사를 하러 갔다. 지도자들은 식욕이 왕성한 필자를 부러워했다. 몸을 직접 움직여 운동을 제대로 했으므로 많이 먹을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네들은 운동을 안 했으므로 그렇게 먹으면 배만 나올 것이라며 주저했다. 자기네들은 춤을 직접 추다가 지도자로 돌아서면서 그만 둔지 오래되었고 이름이 나 있어 경기 대회에 나갈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남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덜 유명한 것이 좋은 것이다. 필자는 남을 별로 의식하지 않는다. 성적이 안 좋더라도 경기를 즐기러 나온 것이지 1등을 하기 위해 나간 것은 아니므로 부담이 없다. 현재로서는 70세 정도까지 춤을 즐길 예정이지만, 파트너가 생긴다면 연장할 수도 있다.
피트니스센터의 조명을 사람의 윤곽만 겨우 보일 정도로 어둡게 해놓고 운동하는 것을 ‘어둠 피트니스’라 한단다. 땀에 절은 모습이나 살찐 모습을 남들 앞에 보이지 않아도 된다는 이유로 인기라는 것이다. ‘비어 요가’는 맥주 담은 잔을 요가에 활용하거나, 요가를 시작하기 전에 맥주 한 잔을 하고 시작하면 요가의 어려운 동작도 잘 되고 심신의 긴장도 풀어진다고 한다. 이런 업소가 한국에도 상륙했고 늘어나고 있단다.
이 두 가지는 공통점이 있다. 남을 의식하지 않을 때 심신이 편하다는 것이다. 유난히 남을 의식하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필자는 남을 덜 의식하는 편이지만, 대부분은 남을 지나치게 의식한다는 생각을 하게 될 때가 많다. 어딜 같이 가자고 하면 옷차림 때문에 못 간다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 머리 모양이 헝클어져 못 간다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은 지나치게 멋을 내느라 불편한 구두를 신고 다니거나 지나치게 짧은 치마를 입고 스스로 불편해한다. 정작 남들은 크게 신경 안 쓰는 부분이다.
필자는 이른 새벽 동네 한 바퀴를 돌아보는 습관이 있다. 이제 막 동이 틀 무렵이므로 세수도 안 하고 모자 하나 푹 눌러쓰고 집을 나선다. 밤새 꼼짝 안 하고 잠들었다가 일어났으니 좀 움직여보고 싶기도 하고 그날의 날씨도 체감해본다. 사람들의 왕래가 뜸하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다 해도 그 시간에 움직이는 사람이라면 부지런히 제 갈 길 바쁜 사람들이므로 서로 얼굴 볼 일도 없다. 이때 남을 신경 안 쓰고 산다는 것이 참 편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한번은 필자가 다니는 노래교실에 캔맥주를 사간 적이 있다. 음료수는 누구나 마시는 편이지만, 음료수 대신 맥주를 마시게 한 것이다. 그랬더니 독창을 시키면 다들 손사래를 치던 사람들이 그날은 너도나도 독창을 하겠다고 나서 말려야 했다. 용기가 생겨 목청도 커지고 좋았다는 중론이다. 그러나 노래교실에 다닌다더니 술이나 마시고 다니는 거냐고 오해할 사람이 있을 것 같아 지속하지는 못했다. 차라리 노래방처럼 조명을 어둡게 해주면 독창할 사람이 많아질 것 같은데 문화센터 규정상 그렇게 하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어둠 노래교실’이 어려운 이유다.
댄스스포츠는 밝은 강습실에서 배운다. 도입 때부터 그렇게 시작했다. 음지에서 몰래 배우던 댄스를 그렇게 해놓으니 당당해진 느낌이다. 맥주 한잔 마시고 강습을 해보자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댄스스포츠는 매너 스포츠이므로 자세가 흐트러져서는 안 된다며 반대하는 사람이 많아 그렇게 하지 못했다. 콜라텍이나 카바레는 여전히 어두운 조명 아래서 춤을 춘다. 춤추는 모습을 누가 훤히 보는 것에 대한 부담감 때문일 것이다.
조명과 알코올은 사람의 내적 용기를 움직이는 요소다. 밤을 찬미하는 이유도 그렇다. 낮술보다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술시(戌時)에 술을 마셔야 술맛이 나는 이유다. 평소에 조곤조곤 얘기하던 사람도 술이 좀 들어가면 옆 테이블 사람들 신경 안 쓰고 목소리가 높아진다.
어두운 골목길에 밝은 가로등을 달았더니 범죄율이 뚝 떨어졌다는 보고도 있다. 우리는 낮과 밤이 매일 있고, 술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마실 수 있는 자유로운 나라에 살고 있다. 남을 지나치게 의식하면 삶이 피곤해지고, 너무 풀어지면 상대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 앞으로의 비즈니스에 참고할 만한 내용이다.
그해 전국체전이 끝나면 장애인들은 겨울 동안 댄스 연습을 쉰다. 길이 미끄러워 다니다가 큰 부상을 당할 수 도 있고 다음 대회는 5~6월이나 되어야 열리기 때문이다. 필자는 2015년 가을 전국체전을 끝으로 장애인댄스스포츠에서 손을 떼었다. 2016년에 시각장애인 파트너가 다른 비장애인 파트너를 데리고 왔는데 그나마 중도에 그만두었다. 필자는 마침 바쁜 일들이 있어서 굳이 나서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한 해 쉬게 된 것이다. 마음은 장애인댄스스포츠에서 은퇴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올해 장애인댄스스포츠 서울연맹이 새 진용을 갖췄다. 새 시각장애인들이 들어오고 같이 대회에 출전할 비장애인 선수도 필요했다. 2019년 서울에서 열리는 전국체전에 대한 대비도 해야 했다. 그래서 필자가 시각장애인 코치 및 파트너 선수로 다시 참여하게 된 것이다.
지난 4월부터 새 안무를 연습했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만 시간을 내려고 했는데 막상 하다 보니 하루로는 부족했다. 그래서 일주일에 두 번 또는 세 번 나가는 것으로 횟수를 늘려나갔다. 파트너는 정해지지 않았지만 파트너가 누가 되든 같이 춤을 출 수 있도록 먼저 안무를 익혀야 한다.
대회 하루 전 파트너가 지정되었다. 대부분은 파트너가 일찍 정해져 같이 호흡을 맞추며 연습해야 하는데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필자의 파트너는 라틴댄스 쪽에서 연습하던 장애인이었는데 비장애인 파트너가 없어 모던댄스로 전향했다고 했다. 다시 말하면 모던댄스는 처음 접하는 초보자였다. 30대의 나이에 체격 조건은 그런대로 좋았다. 일단 왈츠 한 종목만 출전하기로 하고 3시간 동안 연습에 들어갔다. 도무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지만 일단 스텝부터 익히게 했다. 다행히 이해가 빨랐다. 기본자세와 풋워크도 가르치기는 했으나 하루아침에 습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드디어 대회 당일, 아침 일찍 경기장으로 갔다. 평소 연습하던 장소와 달라 반드시 경기장에서도 연습을 해봐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유만만하던 파트너가 경기장 플로어에서 당황을 했다. 불안했지만 일단 안무를 까먹지 않고 무사히 경기를 치르는 데 목표를 두었다. 엔트리를 보니 쟁쟁한 비장애인 선수들과 관록 있는 장애인 선수들이 포진해 있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욕심을 냈겠지만 이번에는 백의종군한다는 마음으로 나섰다. 이미 수많은 메달을 땄기 때문에 메달에 대한 욕심이 시들해진 이유도 있었다.
이윽고 출전 순서가 왔다. 파트너가 자세는 잘 유지하지 못했지만 그런대로 안무를 소화했다. 음악도 길어서 경기장 한 바퀴를 다 돌아야 했다. 이번 대회의 수확은 파트너 확정이다. 그리고 9월 전국체전 출전 자격을 얻는 것이다. 이번에는 왈츠로 출전했지만 전국체전에는 *폭스트롯과 퀵스텝으로 승부를 걸 생각이다. 왈츠보다 경쟁이 덜하기도 하고 파트너가 왈츠의 기본기를 익히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 파트너의 적성에도 라이징이 많은 왈츠보다는 진행형인 폭스트롯, 주로 뛰는 스텝이 많은 퀵스텝에 더 맞을 것처럼 보인다. 이번 여름은 전국체전 출전 준비로 땀 좀 뺄 것 같다.
생애 처음 마라톤 대회에 참가해봤다. 10km 부문에 신청했다. 주변에 마라톤 동호인들이 몇 명 있었다. 필자에게도 추천했다. 매주 2차례 걷기운동을 해왔고 댄스 스포츠로 단련된 몸인데 마라톤이라고 해서 어려울 것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심폐 지구력이 좀 걱정되었다. 또 비만은 아니지만 군살이 여기저기 붙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드디어 출발선에 섰다. 대부분 10~20대 젊은이들이 많이 참가했다. 다이어트에 큰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간혹 필자처럼 백발의 시니어들도 보였다. 체형을 보니 이미 마라톤으로 단련된 몸이었다. 출발 신호에 맞춰 달려 나가기 시작했는데 역시 군살들이 덜렁거렸다. 그리고 얼마 후 다리가 그 군살들을 지탱해내야 하는데 허벅지 아래쪽이 뻐근해지면서 고생하고 있다는 느낌이 왔다. 팔도 앞뒤로 흔들어야 하는데 오른쪽 팔 알통에 통증이 왔다.
10km 코스는 여의나루 이벤트 홀을 출발해 염창동 성산대교 밑까지 갔다 오는 거리였다. 여러 번 걸어본 곳이고 지형도 완만한 편이라 초급자들이 도전하기에는 좋았다. 길가에는 해당화가 활짝 피어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간혹 자전거족들이 지나다녀 충돌 위험은 있었다. 달리는 관성이 자전거를 보더라도 즉각 반응하지 못하기 때문에 눈 뜨고도 충돌할 수도 있어 조심했다.
출발은 지인인 페이스메이커와 같이 시작했다. 처음 1km가 힘들었다. 페이스메이커는 필자의 속도가 너무 빠르다고 했다. 페이스메이커가 덕분에 속도 조절을 잘했고 중간에 포기할 수 없다는 체면 같은 것이 작용해 반환점까지는 잘 갔다. 그러나 페이스메이커가 중간 4km 지점에서 포기하는 바람에 필자 혼자 5km 반환점을 돌아오다 보니 긴장이 풀렸다. 달리다가 잠시 빠른 걸음으로 걷기를 몇 차례 했다. 페이스메이커는 걷지 말고 느린 달리기라도 하는 것이 더 낫다고 했으나 그렇게 해서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앞으로 하프 코스, 풀코 스에 도전하게 될 때는 반드시 숙지해야 할 사항이다.
7km 지점을 통과하면서 극심한 피로를 느꼈다. 여기서부터 스퍼트를 내서 남은 힘을 다 써보겠다는 작전을 갖고 달렸으나 역부족이었다. 필자 말고도 걷는 사람들이 많았다. 63빌딩이 멀리 보이는데 평소보다 까마득하게 보였다. 도착 지점은 그 전에 있는 쌍둥이 빌딩 근처인데 코너를 돌기 전까지는 보이지 않아 마지막 스퍼트를 낼 동기를 얻지 못했다. 코너를 돌자마자 도착 지점이 나타났다. 스마트폰에 ‘1시간 11분 21초’라는 문자가 도착했다. 초보자치고는 좋은 기록이라고 했다. 1시간 이내에 들어와야 그런대로 뛰었다는 소리를 듣는단다. 일단 첫 마라톤 도전이고 완주했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았다.
첫 도전이었으므로 반바지와 기능성 상의, 모자 그리고 운동화까지 여러 가지 준비를 했다. 다만 땀 닦는 용도의 손목 밴드를 구하지 못해 스포츠 타월을 손목에 감고 뛴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운동화도 여러 운동화를 신어보고 그중 가장 발이 편한 것을 골라 며칠 신으면서 적응했다. 모자도 산뜻한 것으로 준비했다. 모자 없이 뛸 생각도 했으나 아침시간이라 반환점을 돌아올 때 강렬한 태양광선을 피하려면 필수적이었다.
첫 도전이 성공적이라 앞으로도 마라톤에 적극 참여해볼 생각이다. 체중계에 올라보니 3kg이 빠졌다. 다음 날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이 힘들었다. 페이스메이커와의 차이는 회복속도였다. 페이스메이커는 통증은 없고 오히려 몸이 가뿐하다고 말했다.
이태문 일본 통신원 gounsege@gmail.com
정년퇴직 이후의 삶, 제2의 인생을 어떻게 하면 알차게 즐길 수 있을까? 아마도 누구나 한번쯤 고민하며 그 실마리를 찾으려고 여기저기 기웃거릴 것이다. 하지만 나이 들어 새로운 취미를 만드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의욕과 체력이 따라주는 젊은 시절부터 ‘취미의 씨’를 뿌려두는 게 중요하다. 취미활동을 활발하게 하는 사람들에게 그 비결을 물으면 “젊었을 때 했던 취미생활을 다시 시작했다”고 대답하는 분들이 꽤 된다.
그러나 새로운 취미에 도전하는 걸 방해하는 건 의욕도 체력도 아니고 ‘오래 계속하는 것’이라는 선입견일지도 모르겠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기회이자 타이밍’이니 남은 삶에 지금까지 맛본 적 없는 ‘재미’와 ‘보람’을 선물하는 것이야말로 진짜 자기 삶의 ‘애호가’일 것이다.
일본 시니어들의 취미
일본에서는 고령자가 계속할 수 있는 취미로 주식, 등산, 워킹, 낚시, 독서, 자수, 골프, 볼링, 시쓰기, 체스, 데생, 원예, 역사, 장기, 분재, 서예, 유화, 과자만들기, 수묵화, 시계수집, 게이트볼, 꽃꽂이 등을 꼽는다. 크게 몸을 움직이는 취미, 머리를 쓰는 취미, 손동작이 필요한 취미 등으로 나눌 수 있겠다. 이러한 취미는 운동 부족을 해소해주고, 치매 예방에도 좋다. 또한 같은 취미를 즐기는 사람들과의 교류도 넓혀주고 쓸쓸한 노후의 고독도 피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60대 남녀의 인기 취미 순위
350개 이상의 취미를 소개하는 일본의 ‘취미찾기닷컴’이 조사한 인기 순위를 잠깐 살펴보자. 먼저 60대 남성은 혼자 하는 여행, 사이클링, 오토바이, 재택근무, 사진, 전자공작(PIC), 절과 신사 순례, 주식, 워킹 순으로 조사됐다. 60대 여성의 경우는 혼자 하는 여행, 재택근무, 온천 순례, 절과 신사 순례, 워킹, 자수, 양궁, 등산, 심리학 순으로 인기가 있었다. 참고로 50대 남성의 취미로 사격, 50대 여성의 취미로 소설쓰기, 기타, 퍼즐 맞추기 등이 눈에 띄었다.
내 꿈을 찾아라~ 인생은 60부터
일본의 주쿄(中京) TV는 매주 일요일 아침 5시 45분부터 을 방송하고 있다. ‘아라칸’은 Around Kanreki의 줄임말로 칸레키는 우리말로 환갑을 의미한다. 이 프로그램은 환갑 전후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꿈에 도전해 제2의 인생을 즐길 수 있는 힌트를 제안하고 있다. 이 방송에서 소개된 이색 취미 몇 가지를 소개해보겠다.
2015년 12월 6일 방송에서는 빙상 위의 컬링(curling)이 아닌 날씨와 관계없이 체육관에서 즐길 수 있는 ‘커롤링(curolling)’이 소개됐다. 20여 년 전 나고야에서 시작된 이래 경기 인구 40만 명을 자랑하는 인기 스포츠로 체력보다는 두뇌게임이라는 점에서 ‘마루 위의 체스’라고도 불린다.
2016년 1월 10일에는 미술 취미로 ‘어탁(魚拓)’이 소개됐다. 낚시를 좋아하지 않아도 누구든 즐길 수 있는 ‘어탁’은 기존의 수묵(水墨) 중심이 아니라 색채와 구도 등을 바꿔가며 다양한 느낌을 줄 수 있다. 꼭 물고기가 아니어도 되며 모든 사물의 본을 떠서 작품으로 만드는 ‘탁화(拓畵)’라는 장르가 새롭게 소개됐다.
그다음 주인 1월 17일에는 카우보이 복장으로 차려입고 컨트리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드는 컨트리 댄스가, 3월 13일에는 1960~1970년대에 붐이 일어나 일렉트릭 기타에 빠졌던 세대들이 밴드를 결성해 제2의 청춘을 만끽하는 모습이, 4월 17일에는 실제 동물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매력적인 리얼 양털 퀼트 아트가, 8월 7일에는 다양한 무늬가 특징인 넥타이를 재활용해 가방과 인형 등을 만드는 리폼이 소개됐다. 이 밖에 9월 4일에는 경이로운 종이접기의 세계, 9월 11일에는 걸리버 여행기를 방불케 하는 미니어처의 세계, 10월 9일에는 종이를 오려내 그림을 만드는 ‘키리에(切り絵)’, 10월 23일에는 실제로 사람을 태우고 증기를 뿜으며 달리는 철도 모형 등이 소개됐다. 2017년에 들어와서는 우쿨렐레와 돌하우스(미니어처 장난감 집), 천사의 소리 핸드벨 음악, 볼펜 그림의 세계 등이 전파를 탔다.
이색(異色) 취미보다는 다양한 취미
인구가 많아지고 평균수명이 계속 늘어나면서 취미도 점차 다양해지고 있다. 과거 이색적이라는 이유로 주목을 끌던 취미들은 최근 덕후(마니아, 광)들이 등장하며 주류와 당당하게 어깨를 겨루고 있다. 그만큼 취미를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진 셈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걸 증명하는 것 역시 새로운 취미에 도전해 개척하는 자세일 것이다. 전문가들은 고령자들에게 무리하게 몸을 움직이기보다는 치매 예방 차원에서 손가락과 뇌를 자주 사용할 수 있는 주산, 바둑, 장기, 손글씨, 그림, 색칠하기, 민요, 노래방, 꽃꽂이 등을 권한다. 간단한 요리를 만들게 하거나 본인이 좋아하는 것을 시키는 것도 좋다.
몸 푸는 기분으로 이런 취미는 어떨까?
사단법인 일본 화살불기 레크레이션협회는 폐활량에 자신이 없는 사람은 물론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취미로 화살불기를 권한다. 실제로 전국의 화살불기 교실에는 60~70대 회원들이 많은데 90세가 넘은 고령자도 있다고 설명한다.
또한 수집이 취미인 사람들은 모으는 것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수집한 물건을 이용하는 방향으로 취미활동을 확대해보는 것도 좋겠다. 예를 들어 도자기 수집을 하는 사람이 도예 교실을 다니며 직접 만들어보거나,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이 바리스타 자격증에 도전해 실력을 인정받는 것은 어떨까? 또 인물과 동물, 자연 풍경 등 사진 찍기를 즐기는 사람은 독거노인의 영정사진을 찍어주는 등 자신의 취미와 능력을 사회에 환원하는 재능기부 나눔을 실천해보는 것도 좋다.
이처럼 좀 더 관심을 갖고 주변을 살펴보면, 의외로 쉽게 시작할 수 있는 취미들이 많다. 먼저 발품을 팔아 정보를 찾아보고 자신에게 ‘안성맞춤’인 취미를 선택해보자.
슬슬 발동을 걸어보자
지난 2014년 5월에 구성된 댄스 그룹 ‘TGK48’은 일본 기후 현 다지미 시의 고령자들이 만든 그룹이다. 그룹명은 일본의 인기 여성 아이돌 그룹 AKB48의 이름에서 힌트를 얻어 ‘다지미, 겐키(건강), 고레샤(고령자)’의 머리글자를 따서 지었다.
‘노래하고 춤추고 먹고 마시고’를 기치로 내걸고 2016년 8월 60대 42명, 70대 21명, 80대 1명 등 총 64명(남성은 5명)으로 구성된 ‘TGK48’은 힙합도 소화하는 본격 댄스 그룹으로 공공시설을 빌려 일주일에 한 번씩 두 시간가량 연습을 하며 구슬땀을 흘린다. 최근 춤을 잘 춘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크고 작은 행사와 스포츠 대회에 출연, 그동안 갈고 닦은 실력을 뽐내고 있다. 강사 레슨비 등 연간 100만엔가량의 운영비는 다지미 시로부터 지원받고 있다. 고령자의 의료비와 개호비 등의 삭감과 관련해 길게 내다본 다지미 시의 획기적인 투자라고 할 수 있겠다.
실제로 2016년 3월 16일자 마이니치 신문에 따르면, ‘TGK48’ 멤버 35명의 체력을 측정한 결과 전 항목에 걸쳐 동세대의 일반인들을 훨씬 뛰어넘는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깜빡이는 빛을 보고 도약하는 데 걸리는 ‘전신 반응속도’는 무려 0.3초대로 20대 수준으로 나타났다. 5초간 빠르게 스텝을 밟는 ‘서서 스텝핑’의 평균 횟수도 60대 멤버가 40.1회, 70대 멤버가 37.7회를 기록해 젊은이 못지않은 결과를 보여줬다. 이들의 체력을 측정한 기후대학교 교육학부의 가스가 히카루 교수는 “힙합은 빠른 템포의 음악에 몸의 움직임을 맞추는 춤으로 신경에 좋은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시니어블로거협회 창립 행사에 댄스 공연이 잡혔다. 원래는 필자가 가르친 수강생들이 모두 무대에 오르는 것이 취지인데 수강생들이 바빠 연말 강습에 몇 번 차질이 생기다 보니 모두 참여하기는 어려웠다. 무엇보다 남녀 성비가 안 맞아 무대에 오르기는 무리였다. 그렇다고 그동안 가르친 자이브를 어떤 맺음도 없이 끝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필자라도 무대에 오르기로 한 것이다. 파트너는 수강생 중에 가장 열의가 있는 사람을 택했다. 배운지는 3개월밖에 안 되었으나 공연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단 둘이 나가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연습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공연 시간 2분 30초에 맞춰 몇 가지 휘겨를 더 가르쳤다. 총 열댓 가지 휘겨로 안무를 짜고 순서라도 익힐 겸 연습을 하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인근 콜라텍에라도 가서 연습해보자고 했다.
필자가 댄스스포츠를 오래 했다고 하면 당연히 콜라텍에 여러 번 갔을 것으로 아는 모양이다. 그러나 콜라텍은 주로 사교댄스를 추는 곳이라 춤추러 일부러 간 적은 없다. 댄스스포츠는 바닥이 마루로 되어 있고 농구장 바닥처럼 약간의 마찰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콜라텍은 바닥이 미끄럽다. 음악이 다르니 댄스스포츠 춤을 출 수 없고 장소를 많아 차지하니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다. 그래서 댄스스포츠 춤은 댄스스포츠 파티에서만 췄었다.
처음 간 곳은 종로3가 국일관 콜라텍이었다. 국일관 건물 9층에 사람들이 줄지어 들어갔다.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마치 줄서서 라인댄스를 추듯이 사교춤인 잔발춤을 추고 있었다. 블루스와 지터벅을 번갈아 틀어주는데 지터벅 음악이 나오면 모두 잔발춤을 추고 있었다. 잔발춤은 제자리에서 조금씩 움직이며 추는 춤이다. 우리는 공간을 넓게 쓰는 자이브를 추니까 시선이 곱지 않았다. 대부분 70대 정도로 보였다. 희한하게도 남녀 비율이 맞았다. 입장료 1천원에 그렇게 놀고 즐기면 되는 것이다. 30분을 못 버티고 나왔다. 파트너의 얼굴이 실망에 찬 듯 보였다. 난생 처음 콜라텍이라는데 갔는데 생각했던 것과는 달랐던 모양이다.
그래서 답십리로 갔다. 답십리에서 장한평까지는 우리나라 댄스의 고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댄스 학원, 무도장, 댄스복 매장 등이 밀집해 있는 동네이다. 오페라라는 무도장에 갔다. 한창 동호회 파티 중이었다. 들어갈 수는 있었으나 정식 파티이므로 일단 복장을 갖춰 입지 않아 입장을 포기했다.
다음으로 88무도장으로 갔다. 사교춤 중심의 무도장인데 역시 너무 사람이 많아 입장을 포기했다. 그리 크지 않은 규모이다.
마지막으로 가 본 곳이 제니아 무도장이다. 답십리역 4번 출구에서 장한편역 방향으로 3백미터 가면 도시철도 공사가 있고 그 맞은 편 무학성 캬바레 지하에 있다. 춤추는 사람들이 40대~50대 나이로 비교적 나이가 젊은 편이고 복장도 갖춰 입었다. 음악도 자이브 위주에 차차차, 룸바, 왈츠, 탱고를 췄다. 춤 동작이 커도 뭐라고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30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파트너는 이만하면 다시 찾을 만 하다고 본 모양이다. 필자에게 댄스를 배우는 사람들이 단체로 오자고 제의했다. 낮 12시부터 밤 10시까지인데 평일은 무료입장이란다. 주말은 3천원을 받는다 했다. 연습을 위해서라면 평일 낮에 다시 찾을만한 곳이었다.
필자가 활동하는 한국시니어블로거협회 창립 2주년 행사에서 댄스공연을 하기로 했었다. 필자가 이끌고 있는 댄스스쿨도 공연을 하기로 한 것이다. 일 년 전 도심권 50플러스센터 시절, 같은 무대에서 차차차로 공연을 한 적이 있어 이제는 그런 행사에는 당연히 댄스를 보여줘야 하는 것으로 인식된 모양이다.
그러나, 댄스스포츠는 커플댄스이므로 제약이 많다. 우선 파트너가 있어야 한다. 남녀 성비가 맞아야 커플을 만들 수 있다. 필자 전공인 왈츠, 탱고 같은 모던 댄스는 적어도 호텔 그랜드볼룸 정도의 공간이 있어야 하므로 서울 시청 태평홀 무대로는 어림도 없다. 그래서 그 정도 무대에 맞는 라틴댄스로 이번에는 자이브를 추기로 한 것이다.
체면이라는 것도 있었다. 수강생들을 무대에 올려 보내야지 선생이 직접 무대에 올라간다는 것은 보기에 안 좋다는 의견을 가진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무대에 올라갈 사람이 마땅치 않았다. 빠른 템포의 자이브 동작 열댓 개를 남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소화한다는 것부터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앞으로 몇 년이나 이런 기회를 가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해보니 기회 있을 때 하고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6개월 이상 자이브를 가르쳤는데 적어도 공연에서 보여 줘야 단락이 마감된다는 생각도 들었다.
또 한 가지 문제는 같이 춤을 출 파트너였다. 대상이 될 만한 사람들은 미리 사유를 들어 공연에 못 나간다고 빠졌다. 다행히 춤에 열정을 가진 한 수강생이 있어 공연 얘기를 했더니 일단 수락했다. 그러나 날짜가 다가오자 갈등이 생기는 모양이었다. 몇 차례 못하겠다고 포기 의사를 밝혔다. 춤을 추다가 순서를 까먹는 경우, 동작이 틀리는 경우, 관객 중에 우리보다 춤을 잘 추는 사람이 와서 혹평을 할 경우, 춤 자체에 자신이 떨어져 남들 앞에 서기 이르다는 생각 등이 갈등을 촉발했을 것이다.
이윽고 디데이가 왔다. 좀 일찍 도착해서 무대를 점검해 보니 바닥이 카펫이었다. 마루에서 연습하다가 카펫에서 춤을 추려면 발이 미끄러지지 않아 춤추기가 어렵다. 특히 회전 동작이 많은 여자로서는 더 어렵다. 그러나 하기로 했으니 무대에 올랐다. 다행히 무난하게 잘 했다. 파트너가 몇 가지 동작이 틀렸으나 관객들은 눈치 채지 못했다. 파트너의 순발력 덕분에 안 보이는 것이다. 춤은 대부분 여성을 위한 것이다. 남자는 그 여성을 돋보이게 보조적인 역할을 한다. 파트너는 외모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짧은 머리라 젊어 보이고 체형도 좋은 편이다. 끼도 넘쳐서 동작이 적극적이고 커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신이 나게 만든다.
파트너는 어디선가 빨간 원피스 드레스를 준비해 왔다. 아직은 첫 무대이니 치마 길이가 무릎 아래까지 왔지만, 춤이 익숙해지면 스스로 치마 길이가 짧은 것을 선호하게 될 것이다. 필자는 검정 드레스에 검은 색 모자를 썼다. 벗겨진 이마를 가리려면 모자를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동영상을 보니 그런대로 잘 했다. 사진으로 본 드레스 모양과 콤비도 좋았다. 욕심 같아서는 좀 더 빠른 템포의 음악을 선곡했더라면 좀 더 박진감 있는 춤을 보여줬을 텐데 그 정도로 만족해야 했다.
눈부신 조명 아래 화려한 런웨이 위를 당당하게 워킹하는 모델을 보면 ‘나도 저렇게 폼 나고 멋지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골드스톤 그룹의 대표이자 시니어 모델로 활동 중인 김성훈(56)씨 역시 또래 친구들의 부러운 시선을 느끼곤 한다. 고맙고 즐거운 일이지만, 그만큼 부담도 되고 노력할 것도 많다. 박수갈채를 받는 빛나는 겉모습 이면에 부단히 자신을 채찍질해온 그의 속사정 그리고 패션에 대한 애정을 들어봤다.
, 등 영화 속 영웅들은 평상시 유능한 회사 경영자이지만, 사건·사고가 생기면 슈트를 갈아입고 나타나 악당을 물리친다. 그들의 변신을 한눈에 알아보게 하는 것은 바로 패션. 화려한 망토나 로봇 슈트는 아니지만 김 대표 역시 패션을 통해 일상의 변화를 만끽하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꿈꾸던 모습 중 하나였어요. 회사에서 일하다가 갑자기 망토를 두르고 슈트를 입고 ‘부우웅’ 하고 나가서 악당들과 싸우는 영웅! 우연히 찾아온 시니어 모델의 기회이지만, 그런 판타지를 채우고 있죠. 옷을 갈아입고 무대와 카메라 앞에 섰을 때의 쾌감과 스릴이 정말 대단해요.”
2011년, 평소 준비성이 철저한 그는 다가올 인생 2막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지인을 통해 ‘시니어 모델’에 대해 알게 됐고, 50세의 나이로 시니어 모델계에 입성했다. 여자 모델에 비해 남자 모델의 수가 극히 적은 시니어 모델들 사이에서 패셔너블하고 끼가 충만한 그는 단연 돋보일 수밖에 없었다.
“댄스스포츠를 10년 정도 배웠거든요. 그러다 보니 워킹이 자연스럽고 포즈를 취해도 선이 잘 살더라고요. 그 덕분에 패션쇼에서 메인 모델로 설 기회가 많았죠.”
탐나는 삶, 티 내지 않고 살기
자신의 관심사인 패션을 드러내면서 끼와 매력을 뽐낼 수 있기에 즐겁기도 했지만 우려스러운 점도 없지 않았다. 그의 본업인 회사 경영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선에서 활동해야 했기 때문이다.
“한 회사의 대표로서 긴장하거나 엄격해야 할 때가 있는데 ‘우리 대표는 모델 한다고 일에 소홀하다’는 이야기가 나오면 곤란하잖아요. 직원들에게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여야 하니 내 즐거움만 생각할 수는 없죠. 또 경쟁업체 등에서 그런 부분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볼 수 있으니 사생활에서도 행동에 주의하려 해요.”
회사 대표로서도 조심스러운 모습이지만, 친구들이나 주변 사람들을 위해서도 그는 겸손한 자세를 유지하려 한다. 화려하게 비치는 모델의 특성상 부러움과 시기의 대상이 되기도 하기 때문. 자신의 즐거움을 드러내는 게 다른 이에게는 불편함이나 상처를 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그다.
“처음 한두 번 모델로 설 때는 주변에 자랑도 하곤 했는데, 계속 그러니까 친구들도 반기는 표정이 아니더라고요. 내가 일을 안 하는 것도 아니고, 어엿한 회사 대표인 데다가 모델까지 하니까 그렇지 못한 친구들이 볼 땐 부러울 수도 있고, 약이 오를 수도 있겠죠. 오히려 가까운 사이일수록 이런 모습을 드러내는 게 관계에 도움이 안 되더라고요. 마음은 그게 아니라도 오해받을 수 있기 때문에 최대한 조용히 즐기고 신중하게 행동하려고 합니다.”
이제는 아내까지 그의 인생을 탐낸다고 한다. 처음에는 그의 모델 활동을 우려했던 아내가 자신도 시니어 모델로 무대에 서겠다고 도전장을 내민 것.
“집사람이 저한테 모델 활동 이전이랑 이후 사진을 보여주면서 사람이 참 달라졌다고 하더라고요. 표정이며 분위기가 훨씬 여유롭고 밝아졌다면서요. 특별히 피부 관리를 하거나 머리를 심은 것도 아닌데 내가 봐도 얼굴이 참 좋아졌어요. 그런 변화를 느낀 아내가 올해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리는 무대에 나와 함께 서고 싶다는 거예요. 물론 적극적으로 응원하고 있죠.”
최고의 패션 아이템은 ‘건강한 몸매’
어릴 적부터 패션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던 그의 스트레스 해소 방법은 쇼핑이라고 한다. 시간이 나면 백화점이나 아웃렛에 들러 트렌드를 살피며 스트레스도 풀고 패션 감각을 키운다. 그가 운영하는 회사 중에는 해외 명품 패션 관련 분야도 있어 패션 트렌드에 대한 지식과 안목이 남다르다. 그런 그의 ‘패션 포인트’는 무엇일지 궁금했다.
“포인트를 안 주는 게 포인트입니다. 꾸며보려고 욕심내다가 오히려 촌스럽고 어색해 보일 수 있거든요. 넥타이나 행거칩도 잘 안 하는 편이에요. 포인트는 시계 정도로 하나만 살리고 나머지는 톤을 맞추는 정도로 마무리하죠. 무엇보다 중요한 건 때와 장소에 맞게 연출하는 겁니다. 요즘 중·장년 대부분이 어디서든 등산복을 애용하잖아요. 저마다 개성과 매력이 다른데 등산복이라는 테두리 안에 가두는 것 같아 안타까워요. 산에 갈 때는 등산복을 입더라도 크루즈 여행을 갈 때는 드레스도 입어보고, 고궁 나들이 갈 때는 한복도 입어보고 그렇게 다양한 시도를 해야 자기만의 스타일을 찾는 데 도움이 돼요.”
그가 시도 중인 패션은 영화 의 더블 브레스티드 슈트 스타일이다. 슈트 버튼이 양쪽으로 나란히 있어 허리선이 드러나기 때문에 배와 등의 군살이 없어야 완벽하게 소화할 수 있다.
“제 패션 철학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스타일링에서 가장 중요한 건 완벽한 보디(body)예요. 몸매가 돼야 어떤 옷을 입어도 태가 나고 멋스럽거든요. 그래야 다양한 스타일에 도전할 때 자신감도 붙고 그러면서 나 자신을 좋아하게 되죠. 그러면 삶이 더 즐겁고 행복해져요. 물론 지금 내 몸매가 그런 상태는 아니지만, 오히려 목표가 있고 그것을 성취했을 때의 모습을 상상하면 더 즐거워지곤 해요. 자신만의 롤 모델이나 위시 리스트를 갖는 것도 중요하죠.”
새해부터는 운동과 식단 관리를 통해 꼭 ‘킹스맨 슈트’를 입겠다는 그는 원하는 옷을 입기 위한 노력이지만 육체적·정신적 건강에도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끝으로 그에게 롤 모델은 누구냐고 물었다.
“영화배우 출신인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패셔니스타 닉 우스터 등도 롤 모델이라 할 수 있지만, 뭐니 뭐니 해도 역시 배트맨이 가장 완벽한 제 롤 모델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