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5m 높이의 롯데월드타워 등반에 성공한 ‘암벽 여제’ 김자인 선수의 영향으로 몇 년 새 스포츠 클라이밍이 친근한 스포츠로 자리 잡았다. 아찔한 높이의 인공 암벽을 맨손으로 정복하는 스포츠클라이밍 ‘볼더링’ 종목에 정원일(62) 동년기자와 동갑내기 친구 이상민(62) 씨가 함께 도전해봤다.
촬영 협조 V10클라이밍(서울 동대문구 장한로2길 63, 2층)
실내에서 즐기는 스포츠클라이밍
골프, 테니스, 야구 등 옛날에는 야외에서만 즐길 수 있었던 스포츠를 이제는 날씨나 외부 조건 등에 영향받지 않고 실내에서도 배울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산악 등지에서나 볼 수 있었던 클라이밍도 예외는 아니다. 실내 또는 실외에 인공 암벽을 설치해 이용하는 스포츠클라이밍은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2020년 도쿄 하계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되면서 최근 떠오르는 스포츠로 주목받고 있다. 15m 이상 높이의 인공 암벽을 줄을 사용해 오르는 리드 클라이밍, 목표 지점까지 빠르게 올라가야 하는 스피드 클라이밍과는 다르게 볼더링은 특별한 등반 기구 없이 맨손으로 4~5m 높이의 인공 암벽을 올라간다는 점이 특징이다. 볼더링은 넓은 공간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안전장치가 잘 갖춰진 실내 클라이밍장이라면 누구나 쉽게 입문할 수 있다.
정원일 동년기자
‘클라이밍’ 하면 남자들이 터프하게 절벽을 올라가는 이미지만 생각했는데 실제로 실내 클라이밍장에 와보니 젊은이도 많고 여성도 많아 놀랐다. 무엇보다 암벽 등반을 실내에서 안전하게 할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이상민 씨
실내 스포츠가 이용금액이 비싸기 때문에 쉽게 도전할 생각을 못했는데 실내 클라이밍은 일일 이용요금이 2만 원 정도로 저렴한 편이었다. 새로운 운동을 찾는 시니어라면 실내 클라이밍에 도전해봐도 좋을 것 같다.
암벽 오르기 전 준비운동은 필수
대부분의 사람이 운동하기 전 준비운동을 간과하는 경우가 있다. 특히 평소에 운동을 하지 않는 시니어가 무리할 경우 근육이 손상될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예기치 못한 부상을 당할 수 있다. 따라서 운동 시작 전에는 항상 몸을 풀어주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좋다. 스포츠클라이밍은 손과 발로 벽에 부착된 홀드를 이용해 올라가는 근력운동이기 때문에 시작 전 충분한 스트레칭이 필요하다. 송율나 V10클라이밍 강사는 “스포츠클라이밍은 전신운동인 동시에 많은 근력이 필요하다”며 “특히 볼더링은 뛰어내리는 동작이 많기 때문에 무릎에 신경을 많이 써야 한다”고 조언한다. 부상을 예방하기 위해 스포츠 테이프를 사용해도 좋다. 스포츠 테이프는 굳은살을 방지하고 손가락을 보호해준다.
정원일 동년기자
누구나 한 번쯤은 운동 후 근육통으로 고생해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실내 클라이밍장에 들어오자마자 느낀 점은 ‘아, 이거 제대로 몸 안 풀면 다음 날 고생하겠구나’였다. 그냥 덥석 올라갔다가는 다음 날 근육통으로 고생할 수도 있으니 평소에 운동을 잘 하지 않는 시니어는 반드시 준비운동을 할 것을 권한다.
이상민 씨
스트레칭은 거의 몇십 년 만인 것 같다. 옛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뻣뻣해진 몸을 보며 새삼스레 세월이 많이 흘렀음을 느꼈다. 시니어가 클라이밍을 시작하기 전 가장 많이 하는 걱정이 바로 안전과 관련한 문제다. 볼더링을 체험해본 결과 떨어져도 푹신한 매트가 아래에 깔려 있었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손에 잡힐 듯 말듯, 발에 닿을 듯 말듯
클라이밍장을 방문할 땐 운동복과 양말만 준비하면 된다. 암벽에 오를 때 신는 암벽화는 발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고무로 제작되었으며 클라이밍장에서 빌릴 수 있다. 또 손에는 송진 가루를 묻히기도 하는데 초보자에게 필수는 아니다. 볼더링은 벽에 붙어 있는 다양한 홀드 중 같은 색깔의 홀드만을 사용해야 하는 종목으로, 올라갈 수 있는 방법이 무수히 많다는 점이 매력이다. 일일 강습을 신청하면 강사가 홀드 잡는 방법부터 발 옮기는 위치까지 알려주기 때문에 처음 볼더링을 배워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올라가기 전에는 쉽게 보이지만 막상 시작하면 미로처럼 보이는 클라이밍. 방심하는 순간 ‘뚝’ 떨어진다. 초급자 코스에서 충분히 요령과 체력을 기른 후 다음 난이도로 넘어갈 것을 추천한다.
정원일 동년기자
분명 밖에서 볼 땐 쉬워 보였는데 이게 참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떨어지지 않으려 아등바등하다가 결국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을 땐 배가 나온 몸뚱어리를 원망하다가 배시시 웃음이 났다. 실제 절벽이었으면 목숨이 여러 개라도 부족했을 것이다. 그래도 여러 번의 시도 끝에 마지막 지점까지 도달했을 땐 엄청난 성취감이 들었다. 이런 맛에 사람들이 포기하지 않고 계속 시도하는 걸 거다.
이상민 씨
암벽화를 고를 땐 평소보다 10mm 정도 작은 치수의 신발을 신어야 한다는 점이 독특했다. 마치 전족을 신은 것처럼 발가락이 굽어졌는데 이는 암벽을 오를 때 발가락에 충분한 힘이 실려야 하기 때문이란다. 발가락이 조금 불편하다는 점만 빼면 일반 신발보다 미끄럽지 않고 착착 감기는 느낌이 들어 암벽 등반에는 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계 곳곳에 불고 있는 도시화(Urbanization, Citification) 바람은 꺾일 줄 모르고 진화하는 추세가 뚜렷하다. 물론 대형 빌딩이 지닌 물리적 인구 흡입력과 첨단 IT 융합 현상이 도시화를 가속시키는 데 큰 몫을 하고 있지만, 도시 속 대형 빌딩들이 숲을 이루면서 나름대로 뿜어내는 예술성도 배제할 수 없는 원인일 것이다. 그것은 빌딩 건축물을 예술적 감각이 배어 있는 대형 조형물로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계 각지에 널려 있는 건축예술품만을 찾아나서는 전문 관광객 그룹이 얼마나 많은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3년 전에 건축가 중심의 동호인 25명이 독일에서 서울을 찾아오더니, 금년에도 45명이 찾아오겠다는 전갈을 받았다. 서울에 산재한 도시 빌딩이 지닌 조형적 아름다움을 보기 위함이다. 당시 서울을 찾은 독일 건축가들은 한결같이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를 보는 것만으로도 서울을 찾은 보람이 있다고 입을 모았다. 하기야 ‘DDP’는 세계적 건축가 ‘자하 하디드(Zaha Hadid, 1950~2016)’의 마지막 작품이기도 하지만, 세계 각 도시에 산재한 그녀의 작품 중에서도 최우수 작품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평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에피소드가 있다. 2020년 도쿄올림픽조직위원회가 메인스타디움 디자인 공모를 하면서, 건축설계자로 ‘자하 하디드’를 선정했다. 그러나 일본 내 강한 반대 여론에 봉착하고 말았다. 막대한 건축비를 반대한다는 이유를 내걸었지만, 일본 건축계가 자존심이 많이 상해서라는 게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세계적인 건축가 ‘자하 하디드’의 명성을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래서 우리는 세계적인 건축가 ‘자하 하디드’의 생애 마지막 작품인, 대형 조각품 같은 건축물이 서울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에 더욱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가 아끼고 가꿔가야 할 새로운 개념의 문화재가 아닌가 싶어서다.
이성낙 현대미술관회 前 회장
독일 뮌헨의대 졸업(1966), 연세대학교 의대 피부과 교수, 아주대학교 의무부총장, 가천의과대학교 총장, 가천의과학대학교 명예총장(현), 한국의약평론가회 前 회장, 간송미술재단 이사.
당구가 2020년 도쿄올림픽 정식종목에 도전했으나 다른 종목에 밀려났지만, 2024년 파리하계올림픽에서 정식종목 채택에 재도전한다고 한다.
여러 보도에 따르면 당구의 올림픽 정식 종목 채택은 긍정적이라는 것이다. 당구 동호인으로서도 반가운 일이다.
정식 종목 채택은 당구를 보는 사람들의 시각이 달라져 당구의 위상도 높아진다. 당구 치러 간다고 하면 지금은 오락으로 보는 경향이 있으나 앞으로는 운동하러 간다는 말을 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프로 당구 선수들의 위상도 높아질 것이며 당구를 즐기는 동호인들의 자부심도 커질 것이다. 그러면 저변인구는 더 폭넓게 늘어날 것이다.
정식 종목 채택 여부는 세계 몇 나라가 참여할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 당구는 전통적으로 유럽에서 생겨났기 때문에 유럽이 강하다. 유럽 외에는 남미, 이집트, 터키, 베트남, 중국, 일본, 우리나라도 저변 인구가 넓다. 저변 인구 면에서는 자격이 충분하다. IOC위원의 상당수가 유럽 사람들이라는 점도 긍정적으로 보인다.
아시안게임에서는 1998년 방콕 대회부터 2010년 광저우 대회까지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었었다. 2002년 부산 대회 3쿠션 결승에서 황득희 선수가 우승해서 금메달리스트로 남아 있다.
당구는 스누커, 캐롬, 풀(포켓볼)을 3대 큐 스포츠 종목으로 본다. 우리나라 선수들이 강세인 종목은 3쿠션 종목인 캐롬이다. 우리나라 선수들은 작년에 이어 올해 세계팀3쿠션대회에서 우승하는가 하면 김행직 선수는 2017년에 세계 대회에서 연속 2회 우승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들 외에도 세계 대회에서 우승한 선수가 여럿 있고 자라나는 새싹들 중에도 세계정상을 노리는 선수들이 많다. 반면에 스누커와 풀 종목은 우리나라에서는 그리 대중화 되어 있지 않아 앞으로 국가적으로 관심을 기울여야 할 종목이다. 지난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배출한 스켈레톤을 봐도 우리 선수들의 재능으로 볼 때 당구는 훨씬 성공 가능성이 더 높다.
3쿠션이 올림픽 종목에 채택된다면 개인전과 세계팀3쿠션대회처럼 단체전도 기대해 볼 수 있다. 작년에 이어 우리 선수가 연속 우승한 것을 보면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딸 가능성은 높다. 유럽 선수들 플레이를 보면 개인주의 성향이 강하다. 오로지 자신에게 주어진 공을 맞히기 위해서 치는 경향이 많다. 그러나 우리나라 선수들은 한 사람씩 교대로 치는 스카치 방식에서 다음 선수가 치기 좋은 공을 만들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역력히 보인다. 이것이 우리의 강점이다.
댄스스포츠가 2000년 시드니 올림픽게임에 시범 종목으로 채택된 바 있다. 그러나 세계적인 저변인구가 북반구 몇 나라에 국한되어 있고 심판 기준도 애매해서 정식 종목 채택이 어려운 상태이다. 반면에 당구는 심판의 기준이 비교적 명확하다. 판정 시비가 생길 우려가 적다. 필요하다면 비디오 판독으로 더욱 명확한 판정을 볼 수도 있다.
58개띠들이 하면 유행이 된다. 폭발적인 우리 사회 인구증가의 한복판에 자리 잡은 58년생들은 사회 변화와 유행을 주도한, 지금으로 치면 ‘완판남’·‘완판녀’로 부를 수 있는 세대다. 그들의 문화적 파괴력은 굉장했다. 여러 분야 중 특히 여행과 관련한 58개띠들의 문화주도도 눈여겨볼 만하다. 빈궁에서 벗어나 경제성장의 혜택을 보기 시작한 이들은 다양한 여행을 경험해나갔다.
1978년. 58개띠들이 만 스무 살이 되던 해. 당시 8월 17일자 경향신문에는 재미있는 기사가 하나 실린다. ‘바캉스 파장 … ‘고요’ 되찾는 산하, 연인원 5천만 기록’이라는 제하의 기사는 당시 여름휴가를 위해 산과 계곡, 바다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몰렸는지를 증언한다. 재미있는 내용 중 하나는 작년 대비 피서객이 40% 늘었다는 대목이다. 예년보다 높은 기온이 가장 큰 이유였겠지만, 성인이 된 58개띠들이 피서객 증가에 한몫하지 않았을까.
당시에도 제주도는 관광지로 인기가 좋았다. 평소 600석 내외로 운영되던 서울-제주 간 항공편은 피서기간에는 1000석 이상으로 증편돼 관광객을 실어 날랐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탓인지 다음 해인 1979년, 철도청은 고급여행을 원하는 관광객을 위해 새마을호 객차 확충을 서둘러 진행했다.
물론 58개띠들이 여행 보따리를 맘껏 싸기 시작한 원인에 경제성장의 수혜도 빼놓을 수 없다. 1977년은 우리 경제의 상징적인 시기였다. 1인당 GDP가 처음으로 1000달러를 돌파해 1034달러를 기록했고, 수출 역시 최초로 100억 달러를 돌파했다. 배고픔은 점차 잊히고 있었다.
가장 원하는 신혼여행지는 ‘제주도’
그렇다면 58개띠들의 신혼여행은 어땠을까. 통계청이 2011년 발표한 ‘최근 30년간 초혼자료 분석’에 따르면, 1981년의 남성 초혼 연령은 26.4세, 여성은 23세로 나타났다. 이를 바탕으로 유추해보면 58개띠들의 결혼이 이뤄진 시기는 이들이 23세에서 26세를 지낸 1981년에서 1984년 사이라고 봐도 될 것 같다.
1982년 5월 27일자 동아일보에는 당시 젊은이들의 신혼여행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기사가 등장한다. 한국갤럽이 18세 이상의 남녀 1218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가장 많이 다녀온 신혼여행지는 부산(21.6%), 경주(12.6%) 순이었다. 아무래도 비용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제주도는 3위(12.2%)를 기록하는 데 그쳤다. 재미있는 것은 순위에 자리 잡고 있는 ‘서울’의 존재다. 당시 지방 거주민들에게 서울은 충분히 매력 있는 여행지였다. 신혼여행으로 서울을 선택한 이들은 5.4%나 됐다.
가고 싶은 신혼여행지로는 역시 제주도(46.5%)가 가장 많이 꼽혔고, 당시 왕래가 여의치 않았던 외국을 꼽은 이들도 13.1%나 됐다. 3위는 설악산(11.8%)이 꼽혔는데, 다녀온 여행지에서 7위에 불과했던 것에 비하면 높은 수치다. 설악산이 관광지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말. 1978년 진갑을 맞은 박정희 대통령이 선택한 관광지도 개발이 막 시작된 설악산이었다.
해외여행 자유화로 ‘천지개벽’
58개띠가 해외 땅을 밟은 것은 ‘여행’보다 ‘일’이었다. 물론 해외 출장이라고 쉬운 것은 아니었다. 1980년대 고위직 공무원이나 주요 기업의 임원이 해외 출장이라도 나가면 모두 기삿거리가 됐다. 그만큼 해외 방문은 쉽지 않았다. 출장이 목적이어도 회사의 매출 규모가 낮은 기업은 여권을 받기도 어려웠던 시절.
중동에서 일어난 건설 붐은 58개띠들의 해외 구경의 좋은 구실이 됐다. 굳이 따지자면 58년생은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말까지 일었던 중동 붐의 막차를 탄 세대다.
1985년 해외로 나간 한국인은 약 48만 명이었다. 일본과 미국을 방문한 이가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사우디아라비아가 많았다. 지금과는 판이하게 다른 결과다.
서울올림픽 개최 다음 해인 1989년이 되면서 전 국민 해외여행 자유화가 이뤄졌다. 1983년만 하더라도 50세 이상인 사람이 관광예치금을 200만 원 이상 맡겨야 관광여권을 받을 수 있었지만 매년 대상 연령이 낮아지다가 1989년에 완전 자유화가 이뤄졌다.
해외여행 자유화는 우리 사회의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1990년부터 신문 지면에는 ‘배낭여행족’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했고, 즐겨 찾는 신혼여행지는 제주도에서 태국이나 필리핀으로 바뀌었다.
세운상가 외제장사 아시나요?
해외여행 자유화 이전, 해외 출장 근로자들의 부업 중 하나는 바로 소니와 산요로 대표되는 일본 가전제품을 내다 파는 일이었다. 이들이 면세점 등에서 구매해 들여온 카메라, 오디오, 전기밥솥 등은 세운상가 상인들에게 늘 환영받았다.
그러다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가 이뤄지면서 소비자들이 해외에서 직접 물건을 사갖고 들여오는 문화가 확산됐다. 이런 문화의 아이콘으로 ‘코끼리 밥통’이 있다. 일본 조지루시 전기밥솥은 밥맛이 좋다고 입소문을 타면서 고소득층 사이에서 필수품 대접을 받았고, 점차 대중화되어갔다.
매일경제신문은 1992년 광복절 ‘일제선호 불치병인가’란 기사를 통해 당시 상황을 소개했다. 일본 버블경제의 거품이 꺼져가면서 가전제품 상점가가 몰려 있는 아키하바라역 인근 가게들은 불황을 겪고 있지만, 한국 관광객들이 너도나도 밥통 등 가전제품을 사주는 덕에 상권이 유지되고 있다고 기사는 전하고 있다. 최근 중국 관광객 유커들이 백화점에서 한국산 밥통을 사재기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당시 58개띠들의 나이는 34세였다. 김포공항 입국 수속 행렬에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지 않았을까.
당시 신문에 게재된 해외여행 광고를 보면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국가도 일본, 미국, 동남아로 지금과 차이가 나지 않았고, 도쿄 4일 여행상품이 70만 원 선, 필리핀 4일 여행 상품이 48만 원 선으로 가격도 비슷하다. 다만 다른 부분이 있다면 중국 관광의 유무다. 58개띠들이 중국 관광지를 방문할 수 있었던 것은 1994년 중국여행 전면자유화 이후부터다.
[추억 한토막] 대전역 가락국수 맞먹는 앵커리지공항 우동의 추억
경부선과 호남선이 지났던 대전역. 선로가 붐비고, 대기시간이 길었던 탓에 대전역 승강장의 가락국숫집은 승객들이 꼭 들러야 하는 명소가 됐다. 비행기 여행과 관련해서도 대전역 가락국수와 비슷한 추억의 공항이 있다. 다소 엉뚱하게도 미국 알라스카 앵커리지공항이 그곳이다.
대한항공이 1975년 서울-파리 여객노선을 개설한 것을 시작으로 미국과 유럽 노선이 늘기 시작하면서 앵커리지 공항은 상당수 여객기가 들러야 할 경유지였다. 당시 여객기들의 비행거리가 짧았고, 냉전으로 인해 소련 영공을 지날 수 없었기 때문에 필연적인 절차였다. 이런 사정은 일본도 마찬가지. 버블시대 해외 여행객이 폭발적으로 늘었던 일본의 항공사들도 이곳을 들러야 했다.
환승보다는 급유의 목적이 컸기 때문에 앵커리지에서 머무는 시간은 짧지 않았다. 때문에 당시 해외 출장이 잦았던 상사맨들이나 항공사 관계자들은 당시 앵커리지의 추억을 기억한다. 항공사 승무원으로 근무했던 안영희 동년기자는 “한 시간은 있어야 했는데 승객들이 딱히 할 만한 것이 많지 않았어요. 그래서 면세점들이 장사가 잘됐죠”라고 설명한다.
이 공항에서 인기가 가장 높았던 매장은 바로 ‘우동’. 해외 왕래가 잦았던 한국과 일본의 ‘밀리언 마일러’ 사이에선 반드시 거쳐야 할 일종의 성지였다. 일본의 몇몇 사이트에 남아 있는 기록의 편린을 맞춰보면, 앵커리지 우동은 주인이 두 번 바뀌었다고 전해진다. 첫 번째 주인은 미국계 일본인으로 육수 제작과 제면을 직접 하는 정통파여서, 본토 일본인들도 인정할 정도였다고. 가격은 10달러 내외로 비싼 편이었다. 지금도 일본에선 ‘앵커리지 우동’이란 단어는 여행지에서 만나는 수준 높은 우동집을 칭하는 대명사처럼 통용되고 있다.
장사가 잘되자 한 항공사 자회사가 주인을 밀어낸다. 일종의 젠트리피케이션. 물론 우동은 인스턴트로 바뀌었다. 냉전의 종말과 항공기 성능의 향상으로 앵커리지 경유 노선이 줄자 이 우동집은 한국인 사업가에게 넘어간다. 맛도 한국식으로 변했고, 단무지는 별매여서 원성을 사기도 했다.
대한항공에서 정년퇴직한 정용진 기장은 “당시 조종사들 사이에서 앵커리지공항의 우동은 자주 언급될 정도로 유명했어요. 우동과 함께 팔았던 연어 고기도 한국에선 구하기 힘든 물건이어서 인기가 많았죠”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어느 날 저녁, 독일 친구와 자동차로 송파 지역 올림픽대로를 따라 이동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와~우, 와~우” 하며 감탄사를 연발하더니 자동차 속도를 줄이라고 했다. 주변엔 빌딩도 없고 캄캄하기만 했다. 친구는 자동차 앞쪽을 손으로 가리키며 다시금 탄성을 질렀다. 그곳엔 대형 조각 예술품이 마치 깊은 산 한가운데서 환하게 조명을 받은 듯 우뚝 서 있었다. 바로 올림픽공원 입구에 세워진 ‘세계평화의 문(World Peace Gate)’이었다.
1970년대에 해외 생활을 하다 귀국해 ‘삼일빌딩’을 처음 봤을 때의 일이다. 어느 건축가의 작품인지 궁금해 알아보니 건축가 김중업(金重業, 1922~1988)의 것이었다. 일반적 범주를 훨씬 뛰어넘는 특이한 모양의 주한 프랑스 대사관을 설계한 바로 그분. 그런데 그 명성에 비해 ‘프랑스 대사관’에 대한 대중적 평판은 마치 상여(喪輿)를 연상케 한다는 이유로 꽤 부정적이었다. 그래서 필자는 더욱더 선생의 작품세계에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
국내 건축가 1세대에 속하는 선생은 1941년 일본 요코하마공고(橫浜高工) 건축과를 졸업한 후, 1949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조교수로 후학을 양성하다 1952년 프랑스 파리로 옮겨 1956년까지 세계적인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 1887~1965) 연구소에서 일했다. 귀국한 뒤에는 홍익대학교에서 교수생활을 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대학교, 로드아일랜드 건축대학에서 교직을 맡으며 왕성한 건축가로서의 길을 걸었다.
선생의 경력에서 눈여겨볼 것은 바로 ‘르 코르뷔지에’다. 프랑스가 사랑하고, 존경하고, 자랑하는 르 코르뷔지에는 세계적인 건축가로, 그의 손길이 닿은 건축물은 훗날 거의 예외 없이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될 정도였다. 그중 하나가 도쿄의 우에노(上野) 국립서양미술관 건물이다.
그러나 ‘르 코르뷔지에’ 하면 떠오르는 작품은 1955년에 지어 세상을 놀라게 한 프랑스 동부의 롱샹(Ronchamp) 성당이다. 대형 조각 예술품과도 같은 성당 건물은 주한 프랑스 대사관의 밑그림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김중업 선생의 작품에서 스승의 손길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아울러 삼일로 빌딩은 르 코르뷔지에가 건축가로 함께 참여한 뉴욕의 유엔본부 빌딩과 유전인자를 공유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제자 김중업과 스승 르 코르뷔지에의 아름다운 연결 고리라고나 할까.
1986년 아시아 올림픽 대회 개최 즈음에 세워진 ‘세계평화의 문’은 선생의 마지막 작품이다. 동양적이면서도 서양적이고, 서양적이면서도 동양적인 정취가 뿜어 나온다. 세계 평화를 기원하는 ‘門’으로서 자격을 갖추었다고 보고도 남음이 있다.
그렇다. ‘세계평화의 문’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그 예술성과 과감한 크기에서 발산하는 독보적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이런 예술작품이 우리 생활 공간에 있다는 사실이 필자는 자랑스럽고 한편으론 행복하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이 이 작품을 사랑해주길 간절한 마음으로 소망한다. 우리가 귀하게 여기고 사랑해야, 세계인의 사랑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성낙(李成洛) 현대미술관회 前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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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뮌헨의대 졸업(1966), 연세대 의대 피부과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가천의과대학교 총장, 가천의과학대학교 명예총장(현), 한국의약평론가회 前 회장, 간송미술재단 이사.
2017년 5년30일부터 8월15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는 전은 올해 열리는 전시 중 손꼽히는 주요 전시다. 매주 토요일 오후 2시에 하는 필자의 전시 도슨트를 원고로 옮겨, 현장감을 느끼며 작품 감상을 할 수 있도록 정리했다.
글 옥선희 동년기자
국내 최초로 선보이는 프랑스의 까르티에 현대미술재단 소장전은 서울시립미술관과 끼르티에 현대미술 재단의 공동 기획전입니다. 즉 까르티에 재단 작품을 일방적으로 소개하는 게 아니라, 까르티에 측 제안을 받고 2015년부터 전 과정에 서울시립미술관이 참여하여 기획된 전시입니다.
카르티에 현대 미술재단 Fondation Cartier pour l'art contemporain은 까르티에라는 명품 기업 후원으로 출발했지만, 100% 독립된 비영리 재단입니다. 프랑스에서 현대 미술을 지원하는 첫 기업 재단으로 출발했습니다. 설립자이자 현재까지 대표를 맡고 있는 알랭 도미니크 패랭이 프랑스 문화부 의뢰로 만든 기업의 미술 후원 보고서 초안 ‘레오타르법’이 현재 프랑스에서 공식적인 예술 후원법 기초가 되었습니다.
기업 메세나의 혁신적 모델인 재단은 1984년 베르사이유 궁 근처 조각공원에서 다양한 전시와 레지던시 프로그램(작가 지원 프로그램)을 10년 간 운영했다. 젊은 작가 발굴 - 지속적 지원 - 세계적 작가로 키우기/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 페이 다웨이, 후 한루 같은 큐레이터와 비평가 배출/ 학제적(學際的) 접근, 즉 다양한 분야 학자와 예술가의 협업을 꾀했는데요. 전시 디자인을 일러스트레이션 디자이너에게 맡기는 식이 그것입니다. 이번 서울전은 이세영 -논 스탠다드 스튜디오가 전시 디자인을 맡았습니다.
재단이 출범한 1984년은 백남준 작가가 3부작 위성 시리즈 첫 작품 을 선보인 기념비적 해입니다. 은 파리 퐁피두센터에서도 생방송 중계되어, 비서구권 미술, 타자가 서구에서 가시화되는 출발선이 되었습니다. 주목하지 않았던 비 유럽계 작가에게 전시 기회를 주고, 전시를 갖지 못했던 젊은 작가가 방향을 설정하도록 도와온 재단 출범 년도가 1984년이란 점은 그래서 의미심장합니다. 이후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천안문 사태 발생 등으로 젊은 작가의 분출은 가속됩니다.
재단 건물 1994년 몽빠르나스14구 라스파일 대로에 재단 건물을 지어 이전했는데, 프랑스 건축가 장 누벨 Jean Nouvel이 설계한 재단 건물은 인공과 자연이 어우러진 절제미와 아름다움을 자랑합니다. 나무가 무성한 중정을 품은 강화 유리와 메탈로 지어진 사각형 건물로, 1층은 정원으로 완전히 열려 있으며, 천정 높이가 7미터에 이르는 모듈 형식이라, 프로젝션이나 비디오 설치 작업을 위해서는 공간을 어둡게 조정할 수도 있고, 대작 전시도 가능합니다. 유리로 된 구역을 옆으로 밀어 시야를 트이게 만들면, 건물이 정원 쪽으로 열린 경사로에 놓인 거대한 구조물로 변형됩니다. 건물의 유리 표면을 통해 전시 중인 작품을 볼 수 있게 하였고, 반대로 구름이나 도시 공간을 반사시켜 시간대에 따라 건물이 변화하게 만들었습니다.
‹밤까지› 전시의 경우 건물 전체가 검게 덮였고, ‹자연으로 존재하기› 전시 기간에는 완벽하게 투명함을 유지했으며, 이세이 미야케는 건물을 거대한 디스플레이 윈도우로 변화시키기도 했습니다. 인공과 자연과 변환 가능한 건축미를 높이 사 1995년, 이탈리아 거장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에 이어 독일 중견 빔 벤더스가 완성한 옴니버스영화 에서 장 르노의 저택으로 등장했습니다.
1994년 부임한 에르메 샹데스 Herve Chandes 관장이 현재까지 관장 직을 유지하고 있는데요. 긴 재임이 말해주듯 큐레이팅도 직접 하는 문화 권력이자, 외교관이라는 평판을 듣고 있습니다. 관심 있는 작가나 주제를 선택해 작가에게 시각화해달라고해서 독창적인 커미션 작품을 탄생시키고 전시 기획, 최종 소장 결정까지 하는 것이지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도록 시각화해달라고 주문하는 커미션(commission) 방식은 까르티에현대미술재단의 특징입니다. 작품 의뢰에서 완성품까지 3년 정도 기간을 주고 5억원정도를 지원하는 등, 기간과 제작비 구애를 받지 않도록 자유를 주며, 한 번 관계를 맺으면 가족 개념으로 관계를 유지합니다. 즉 경매를 통한 구입이 아닌, 직접 작가 발굴과 작품 의뢰를 통해 수집품을 늘려가고 있습니다.
1년에 다섯 번 정도 큰 전시가 있는데요. 개인전과 기획전을 번갈아 여는 데 디자인, 사진, 회화, 비디오아트, 조각, 설치 , 미디어아트, 패션, 퍼포먼스 등 현대 예술의 창조적 분야와 장르를 아우릅니다.
인문과학, 환경, 생태학, 도시학, 경제, 생태, 이주 등 다양한 사회적 주제를 시 청각화하므로 미술가뿐만 아니라 영화감독, 대중음악가, 도시학자, 생태음향가, 디자이너, 과학자, 사상가, 철학자, 인류학자, 수학자, 사회학자 등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유지합니다. 1층에서 보게 될 작품 처럼, 도시학자의 아이디어를 디자인 건축가 그룹이 시각화하는 식입니다.
30년 간 200회 전시를 열어 전 세계 350여명 작가의 1,500점을 소장하고 있는데요. 작품 소장 기준은 엄격함과 탁월함의 결합/ 풍부한 독창성과 위험 감수 성향 고려/ 평범하고 예견가능하며 상식적인 가치 대신 전 방위적 개방성을 추구합니다. ‘흥미로운 현대 예술 작품으로 전시 이상의 경험을 제공하고 싶다. 세계를 향해 질문 던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전시 작품을 봐주었으면 한다’는 것이 까르티에 현대미술재단 컬렉션 디렉터 그라치아 콰로니 Grazia Quaroni의 전언입니다.
서울 전시작은 사라 지, 론 뮤익, 뫼비우스 등 재단을 대표하는 작품은 물론 국가, 인종, 젠더를 초월하는 공통 관심사를 반영한 사회 현상을 다룬 100점을 골랐습니다. 한국을 위한 특화된 선택 작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장 미셀 알베롤라와 마크 쿠르티에 등이 내한하여 직접 벽면 작업을 했습니다. 아시아 투어 중 서울에서 처음으로 열게 되었고, 내년 초 상하이, 홍콩을 거쳐 도쿄 올림픽에서 마무리 될 예정입니다.
일본 오사카는 새로 카지노 단지를 만들어 연간 6조원의 수입을 올리겠다는 발표를 했다. 대기업들이 도쿄로 본사를 이전하면서 파친코 산업 매출이 부진하고 장래 올림픽과 국제 박람회, 그리고 중국 관광객들을 겨냥한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되면 연간 7만 명의 고용효과까지 생긴다고 했다.
블룸버그 인텔리전스의 자료를 인용한 신문보도에 의하면, 카지노 시장의 규모가 도박의 도시 마카오는 2015년 기준 289억달러, 라스베이거스가 63억달러, 싱가포르가 48억달러, 한국은 24억달러 규모라고 한다.
마카오에도 가봤는데 그야말로 카지노를 빼면 볼 것도 없는 작은 도시였다. 그런데 이곳이 세계 카지노 시장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라스베이거스도 도시 호텔 거의 전체가 카지노 시설을 가지고 있다. 미국은 라스베이거스 말고도 내국인들에게 리노, 아틀랜틱시티 등 카지노 산업을 허용하고 있다.
싱가포르는 카지노 산업을 해금하면서 일약 대성공을 거둔 나라다. 국부로 불리던 리콴유 전 총리가 생전에 절대 불가라고 했던 카지노 산업을 사후에 전격적으로 해금한 것이다. 우리나라 쌍용건설이 지어 화제가 되었던 마리나 베이 호텔 카지노 덕분에 연간 국민 총생산이 15~20% 신장하고 있다니 대단한 성공이다.
미국의 카지노장에 들어갔을 때 노인들이 많아서 놀랐다. 주로 슬롯머신을 즐기고 있었다. 한 번 버튼을 누르거나 바를 당길 대 일렬로 같은 그림이 나오면 돈이 나오는 장치의 기계다. 보통은 25센트(300원) 정도 배팅을 하는데 노인들은 주로 5센트(60원) 기계에 매달려 있었다. 그야말로 큰 돈 안 들이고 소일거리로 즐기고 있었다.
우리나라가 강원랜드를 제외하고는 내국인들의 카지노장 출입을 금지하고 있는 것은 도박 중독을 우려해서다. 그러나 일부 중독자가 생길 수는 있지만 대다수 이용자들은 그렇지 않다. 이미 강원랜드를 수년간 운영해봐서 알 수 있다.
인천에 6성급 크루즈 선이 들어와도 볼 것이 없어 차라리 배 안에 그냥 있겠다는 외국 관광객들이 대부분이라는 보도에, 앉아서 돈 벌 기회를 놓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시니어들의 소일거리라는 면에서 카지노 산업은 육성할 만하다. 미국은 내국인들에게 카지노를 허용했지만 도박 중독자가 넘쳐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왜 금지하는 걸까. 도박 중독을 자제할 줄 모르는 국민으로 본다는 의미다.
슬롯머신은 재미있다. ‘돈 놓고 돈 먹기’라는 데 매력이 있다. 게임 방식이 간단해 누구나 즐길 수 있다. 미국 가서 슬롯머신을 하면 괜찮고 한국에서 하면 안 된다는 것은 이해되지 않는 논리다. 이제는 카지노를 대폭 개방해 외국 관광객들을 유치해야 한다. 도박 산업은 수익률도 높다. 지자체 장들이나 국회의원들이 몸 사리는 바람에 돈 벌 기회를 남의 나라에 다 빼앗기고 있는 것이다.
올해 정유년(丁酉年)은 열두 동물로 나타내는 12지신 중에서 ‘닭[酉]’띠 해가 된다. 예로부터 중국이나 우리나라에는 새해마다 정해진 열두 동물이 윤회하며 한 해를 상징하는 풍습이 있는데 그로부터 기인된 것이다. 용(龍)을 빼고 열한 동물은 인간 주변에 있는 것들이고, 날개 있는 동물로는 닭이 있을 뿐이다.
중국 서진(西晉)의 진수(陳壽 233~297)가 편찬한 에는 ‘한(韓)에는 꼬리가 5척(尺)이나 되는 세미계(細尾鷄)가 있다’고 적혀 있고, 송(宋)의 범엽(范曄 398~445)이 지었다는 에도 ‘마한(馬韓)에 장미계(長尾鷄)가 있는데 꼬리가 다섯 자[尺]나 된다’는 기록이 있다. 또 당(唐)의 위징(魏徵 580~643)이 지은 에 ‘백제에는 닭이 있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에서 토종화된 닭을 키웠다고 여길 수 있다.
육당 최남선(六堂 崔南善 1890~1957)은 ‘닭’의 어원(語源)이 산스크리트어로 해동(海東=우리나라)을 부르던 kukuta[닭] svara[귀함]가 한자로 구구타귀(矩矩吒貴), 계귀(鷄貴)에서 ‘구구, 꼬꼬댁’ 등으로 음전화(音轉化)되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한(漢)의 한영(韓嬰 ?~?)이 지은 에는 닭이 다섯 가지 덕(德)이 있는 덕금(德禽)이라 표현되어 있는데 닭 벼슬의 관(冠)은 문(文), 발 갈퀴는 무(武), 죽을 때까지 용감히 싸우는 모습은 용(勇), 먹을 것을 보고 친구를 부르는 행위는 인(仁), 밤을 지켜 때를 잊지 않고 알리는 것을 신(信)이라 표현해 칭송하였다고 한다.
이런 거창한 칭송이 아니더라도 닭은 새벽을 알려주는 울음만으로도 신령(神靈)한 동물일 수밖에 없었다. 온갖 악귀(惡鬼)들이나 무서운 맹수들이 활개 치던 길고 두려운 어둠을 그 낭랑한 울음소리와 함께 거둬내고, 밝은 새날을 맞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닭은 태양을 불러오는 상서(祥瑞)로운 동물인 것이다.
새해가 돌아오면 집에 벽사(辟邪)의 의미로 호랑이 그림과 더불어 닭 그림을 붙였다. 와 에 실린 김알지(金閼智 65~?)의 탄생 신화도 닭의 울음에서 비롯된다. 당시 신라 4대 왕 석탈해이사금(昔脫解尼師今 ?~80)은 그 닭이 울던 시림(始林)을 계림(鷄林)이라 고쳐 부르고 국호(國號)로 삼았다. 이후 15대 기림왕 10년(307)에 다시 ‘신라’로 바뀔 때까지 계림은 두 세기 이상 국내외에서 통칭되었다.
이만익(李滿益 1938~2012) 화백의 그림 은 여러 ‘닭의 신화’를 모티브로 그린 작품이다. 빛나는 태양과 눈부시게 서기(瑞氣)를 내뿜는 닭 울음의 순간이 가히 백미이다. 간결한 구도와 짙은 색감, 굵은 선이 신화의 한 장면으로 자연스레 이어지고 있다. 닭이 올라앉은 복숭아나무는 꽃이 만개하여 무르익은 봄의 정취도 그만이다. 잘 아는 수집가를 졸라서 입수하게 된 이 그림을 큰아이의 결혼청첩장에 쓰려고 의논하였더니 이 화백도 아주 기뻐하였다. 수집한 미술품으로 가족달력을 만들 때도 온 가족이 손꼽는 작품이다.
이 화백은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 남하하여 서울의 효제초등학교, 경기중·고등학교 시절, 전국의 미술대회를 석권한 빼어난 인재였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을 수석 입학하였고 졸업 후 서울예고 등에서 10여 년의 교직 생활 후 파리로 유학, 빈한한 여건 속에 괴츠아카데미(Goetz Academy)에서 앙리 괴츠(Henri Goetz, 프랑스 화가)에게 사사(師事), 그러나 2년여 후에 뜻한 바 있어 귀국하였다.
이후 그는 “우리는 서양화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큰 오류를 범해, 우리라는 주체를 잃어버린 채 서양의 재료와 방법을 받아들였다. 우리의 미술 교육이 서양 사람이 되도록 그 감성마저 바꾸어놓았다”고 개탄하며 새로운 작품세계를 구축, 우리나라의 신화와 설화를 주제로 한 독특한 그림을 그렸다. “다시는 서쪽으로 눈 돌리지 않았다”고 천명하기도 하였다. 88서울올림픽 개·폐회식의 미술감독을 맡아 세계에 “한국 고유의 문화를 격조 높게 승화시켰다”는 아낌없는 찬사를 받았다.
조각가 엄태정(嚴泰丁 1938~ )은 경북 문경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영국의 세인트 마틴스 미술대학에서 수학했다. 그 후 2004년까지 모교에서 후학을 지도하였다. 그는 재학 시절 스승 우성 김종영(又誠 金鍾瑛 1915~1982)의 첫 철조작품 (1958)을 접하고 “장시간 부식된 철재 판재의 스크랩으로 철재가 지니고 있는 시간성과 사물성을 통해서 교묘한 철재의 공간성과 함께 이 조각 작품에 담겨져 있는 숨겨진 진실이 무엇일까 하는 질문에 많은 시간을 허비했던 기억이 난다”고 그의 책 에 쓰고 있다.
엄 화백은 1972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도쿄(1975), 런던(1980) 등 국내외에서 개인전과 단체전에 출품하였다. 그의 조각 정체성의 시발점은 세계적인 조각가 콘스탄틴 브랑쿠시(Constantin Brancusi 1876~1957)의 금속조각에서 받은 깊은 감동에서 비롯된다. 브랑쿠시는 “조각 본래의 요소는 우의적인 사고, 상징, 성스러움 혹은 물질 속에 숨어 있는 본질의 탐구를 의미하지, 결코 외관을 사실적으로 재생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선언한 사유(思惟)와 명상(冥想)의 구도자(求道者) 같은 조각가였다. 한때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 1840~1917)의 문하에 들까 하다가 “큰 나무 밑에선 작은 나무도 자랄 수 없다”며 독자의 길을 개척한 현대 추상조각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엄 화백은 “브랑쿠시는 세상의 모든 사물의 대상을 주제로 삼고, 그 속에서 본질을 찾아 조각을 이루며, 형이하학(形而下學)의 물질적 한계를 극복하고 초월하여 빛으로, 하늘로, 대지로 형이상학(形而上學)의 예술적 사물이 되어 조각으로 존재하고 있다”면서 브랑쿠시를 ‘넘어야 할 산’이라 하였다.
1997년 현대갤러리, 2009년 성곡미술관 등 엄태정 조각가의 전시장을 찾아다니며 거대한 금속괴(철, 구리, 알루미늄)를 관류(貫流)하는 스케일 큰 그의 예술세계를 느꼈다. 언제나 그의 조각상을 보고 싶으면,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에 시·서·화(詩書畵) 삼절(三絶)의 문인 자하 신위(紫霞 申緯 1769~1847)를 기리는 연못, 자하연(紫霞淵) 앞에 우뚝한 그의 작품
를 찾아간다. 1998년 서울대학교 개교 50주년 기념작인 이 청동 작품은 곧게 뻗은 네 개의 기둥이 공간에서 넓은 나래로 연결되어 사방으로 웅장하고 높은 기운을 내뿜으며, 하늘 높이 비상하고 있다.
그의 소품 조각은 아예 없어서 수집할 길이 없었는데 1998년 10월, 한 옥션에 소품 석 점이 올라왔기에 하도 반가워 이 작품 을 낙찰받았다. 원형의 두툼한 구리판을 열일곱의 크고 작은 세모꼴로 부식시키고 철 기둥에 붙인 이 작품은 원형을 이루며 조응하고 있다. 크고 작은 조각들이 팽팽히 확산과 응집을 이루며 빛을 반사하고 있다. 부식된 자리는 검은 철로 마무리해, 빛의 그늘로 입체감을 주었다. 빛은 밝음이며, 따뜻함이며, 끝없이 밀려오는 환희의 물결이다.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 리뷰어.
글 신명철 스포티비뉴스 편집위원. 전 스포츠서울 편집국장 smc6404@naver.com
한국은 지난 8월 열린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남자 축구 8강전에서 온두라스에 일방적인 공격을 퍼붓고도 0-1로 져 2연속 메달 획득에 실패했다. 한국은 2012년 런던 대회 3위 결정전에서 숙적 일본을 2-0으로 꺾고 꿈에도 그리던 올림픽 축구 메달을 거머쥐었다. 1948년 런던 대회에 처음 출전한 지 64년 만에 이룬 대업이었다. 이때 기쁨이 워낙 컸기 때문인지 올림픽 2회 연속 조별 리그 통과(8강)라는 쉽지 않은 성적을 올렸지만 적지 않은 축구 팬이 한국의 주전 공격수 손흥민을 비롯한 대표 선수들에게 비난을 퍼부었다. 조금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올림픽에 출전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축구 팬들은 행복해 했는데.
8월호에 소개한 김호와 ‘바늘과 실’ 사이인 김정남이 축구 국가대표로 활약하던 1960~70년대 초반에는 축구 선수로 올림픽에 출전하는 게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웠다. 그런 가운데 김정남은 평생의 축구 파트너인 김호보다는 약간의 행운이 있었다. 김정남은 1943년생으로 김호보다 한 살 위다. 이 차이로 김정남은 21살 때인 1964년 도쿄 올림픽에 함흥철(GK) 김정석 차태성(이상 FB) 우상권 차경복(이상 HB) 이이우(FW) 등 선배들과 함께 출전하는, 그 무렵 축구 선수로서는 흔치 않은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1964년 도쿄 올림픽 성적을 살펴보면 그건 꼭 기회이자 행운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바로 알 수 있다. 한국은 아시아 지역 최종 예선에서 월남(남베트남)을 3-0(서울), 2-2(사이공, 오늘날의 호치민) 합계 5-2로 누르고 도쿄행 티켓을 손에 넣었다. 뒤에 대회를 보이콧하지만 북한은 태국을 7-0(5-0 2-0)이란은 인도를 6-1(3-0 3-1)로 제치고 올림픽 출전권을 차지했다. 개최국 일본은 이탈리아가 불참한 D조에서 1승1패를 기록해 조별 리그를 통과했지만 8강전에서 체코슬로바키아에 0-4로 져 탈락했다. 이란은 A조에서 1무 2패를 기록해 8강 진출에 실패했다. 이란은 그나마 멕시코와 1-1로 비겨 승점을 1을 건지기라도 했다.
한국은 C조에서 체코슬로바키아에 1-6, 브라질에 0-4, 아랍공화국연합(이집트+시리아)에 0-10으로 대패했다. 좀 거칠게 말하면, 묵사발이 된 것이다. 이 무렵 한국 축구는 암흑기였다. 이전 출전 올림픽인 1948년 런던 대회는 자유 참가제로 나선 것이고 8강전에서 스웨덴에 0-12로 크게 졌다. 1회전에서 멕시코를 5-3으로 누른 게 그나마 위안이었다.
막내로 도쿄 올림픽에 출전했던 김정남은 그 대회에 어떤 기억을 갖고 있을까. 김정남은 “경기 내용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참패한 게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그의 축구 인생에서 아프고 부끄러운 대목 가운데 하나지만 이를 계기로 더욱 분발하고 발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듬해인 1965년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제 9회 메르데카컵 대회에서 자유중국(오늘날의 대만)과 공동 우승하면서 국가대표 선수들은 조금이나마 자신감을 되찾게 됐다. 아시아 지역 친선 대회이긴 했지만.
김정남은 스포츠계에서 찾아보기가 쉽지 않은 서울 토박이다. 서울 동작구 흑석동에 있는 은로초등학교 6학년 때 골목길에서 축구공과 처음 인연을 맺었다. 그 무렵 운동선수가 되는 일반적인 과정이다. 축구인인 외삼촌의 지도 덕분에 남들보다 축구를 잘했고 서울 보성중학교에 진학한 뒤 축구 선수 출신인 체육 교사의 권유로 본격적으로 축구를 하게 했다. 어머니는 5남 3녀 가운데 장남인 김정남에게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했지만 축구가 재미있어 몰래몰래 공을 찼다. 큰형의 영향으로 쌍둥이 형제인 김강남-김성남이 실력 있는 선수로 활약한 내용은 중·장년 축구 팬이면 누구나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김호 편에서 소개했듯이 김정남은 1960~70년대 한국 최고의 최종 수비수였다. 그러나 선수 생활 초기에 김정남의 포지션은 미드필더였다. 김정남이 다닌 보성고는 축구 실력이 그리 높지 않았다. 그래서 그 무렵 서울에서 동북고와 쌍벽을 이루고 있던 축구 명문 한양공고로 전학했지만 이른바 초고교급 선수들이 즐비한 그곳에서 그가 비집고 들어갈 자리가 있을 리 없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공을 좀 찬다고 하면 가는 곳이 공격수 또는 미드필더다. 김정남은 경기에 나가기 위해 포지션을 수비수로 바꿨고 이 결정이 요즘 유행하는 표현인 ‘신의 한 수’가 됐다. 김정남이 끝까지 미드필더를 고집했다면 한국 축구대표팀 주전 수비수, 월드컵 대표팀 사령탑 김정남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수비수로 자리를 옮긴 김정남은 한양공고 3학년 때인 1962년 국가대표에 처음 뽑혀 메르데카배컵 대회에 출전했다. 요즘은 종목별로 고교 선수들이 심심찮게 국가대표로 선발되지만 그 무렵 고교생이 태극 마크를 다는 건,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려웠다. 김정남의 경기력이 그만큼 뛰어났다는 증거다.
김정남은 고려대에 진학해서 미드필더 포지션을 되찾았다. 그러나 국가대표팀에 들어가면 수비수로 위치가 바뀌었고 한 살 밑이지만 평생의 친구가 되는 김호와 호흡을 맞추기 시작했다. 둘이 함께 출전한 1960년대 중반 최고의 대회가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 아시아 지역 예선이다. 둘에게, 그리고 한국 축구가 땅을 칠 만큼 아쉬움이 남는 대회였다. 김정남 김호 외에 이세연(GK) 서윤찬(HB) 이회택 정병탁(이상FW) 등 신세대 팬들도 알 만한 선수들이 이 예선을 통과하지 못해 올림픽 그라운드를 밟지 못했다. 당시 경기 상황을 복기하면 이들이 가슴에 지니고 있는 올림픽 출전 불발의 한(恨)이 어느 정도일지 대충 짐작할 수 있다.
1965년 9월 24일 도쿄에서 막을 올린 멕시코시티 올림픽 아시아 지역 A조 예선에서 한국은 자유중국을 4-2, 레바논을 2-0, 월남을 3-0으로 물리치고 같은 3승의 일본과 맞붙었다. 일진일퇴의 숨 막히는 접전 끝에 두 나라는 3-3으로 승패를 가르지 못했다. 한국은 필리핀, 일본은 월남과 경기를 남겨 놓고 있는 가운데 한국은 골 득실차에서 +7로 +21의 일본에 크게 뒤져 있었다. 일본이 필리핀을 15-0이라는 기록적인 스코어로 이겼기 때문이다. 15골 이상으로 이겨야 한다는 부담 속에 한국은 필리핀을 5-0으로 이긴 반면 일본은 월남을 1-0으로 누르고 본선 티켓을 손에 넣었다.
한국 축구가 이 예선 결과를 두고두고 아쉬워한 이유는 한국을 아슬아슬하게 따돌리고 본선에 오른 일본이 아시아 나라로는 처음으로 동메달을 땄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태국과 함께 멕시코시티 올림픽 축구 종목에 출전한 일본은 조별 리그 B조에서 나이지리아를 3-1로 꺾고 브라질과 1-1, 스페인과 0-0으로 비겨 조 2위로 8강에 올랐다. 8강전에서 프랑스를 3-1로 잡은 일본은 준결승에서 우승국 헝가리에 0-5로 대패했으나 3위 결정전에서 홈그라운드의 멕시코를 2-0으로 누르고 아시아 나라로는 처음으로 올림픽 축구 메달을 획득했다. 이 대회 득점왕이 중년 이상 축구 팬이라면 잘 알고 있는 가마모토 구니시게다. 공격수 가마모토는 이회택, 수비수 야마구치 요시타다, 가타야마 히로시는 김정남, 김호와 여러 대회에서 마주쳤는데 한국 선수들이 이들보다 조금 더 나은 경기력을 갖고 있었다. 김정남은 메달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올림픽에도 출전했고 지도자로서는 1986년 멕시코 월드컵 감독이라는 영예를 누렸다. 1954년 스위스 대회 이후 32년 만에 출전한 월드컵이었기에 축구인 김정남의 긍지는 더욱 컸다. 김정남은 50년 지기 김호와 함께 존경받는 축구계 선배로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두 질문의 답은 우리 민족 고유의 운동인 씨름과 씨름 선수다.
최근 급격하게 인기가 떨어졌지만 1980~90년대, 장충체육관을 비롯한 전국 곳곳에 있는 체육관은 연중 열리는 민속 씨름 경기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짧은 시간에 불꽃같이 피어오른 민속 씨름 인기의 중심에 ‘만 가지 기술’을 구사한다는 이만기가 있었다.
민속 씨름이라는 이름은 1983년 씨름이 프로화되면서 기존의 아마추어 씨름과 구분하기 위해 만든 명칭이다. 씨름은 모두가 알고 있듯이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 민족이 즐긴 전통의 스포츠다. 전 세계적으로 볼 때 몽골 스페인 스위스 일본 등지에 씨름과 비슷한 운동이 있고 민속 씨름 전성기에는 몽골 스페인 등과 교류하기도 했다.
근대적 스포츠로서 씨름은 일제 강점기인 1910년대에 나타난다. 이 무렵 단성사의 소유주 박승필(朴承弼, 1875~1932)이 조직한 ‘유각권투구락부’에서 회원들에게 씨름과 유도, 복싱을 익히도록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912년 10월 7일 단성사에서 씨름과 유도, 복싱 3개 종목 경기가 열려 점수제에 의해 우열을 가리고 상품을 줬다는 기록도 있다.
야구 농구 배구 등을 보급하며 한국 근대 스포츠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서울YMCA는 민족 스포츠인 씨름을 장려하기 위해 1928년부터 1936년까지 전조선씨름대회를 개최했다. 이 대회의 스타는 김윤근(金潤根)이었다. 1930년대의 이만기인 셈이다. 김윤근은 이 대회를 비롯해 선수 시절 200여 차례 씨름대회에서 황소 200여 마리, 우승기 88개를 차지한 스타플레이어였다. 김윤근은 1945년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난 뒤에는 대한씨름협회 회장을 지냈고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국민방위군 사령관을 맡았으나 방위군 비리와 관련해 사형됐다. 씨름계로서는 큰 인물이었지만 역사에 오점을 남기고 말았다.
1927년 12월 27일 창립한 조선씨름협회는 농구 축구와 함께 일제 강점기에 우리 힘으로 만든 몇 안 되는 경기 단체 가운데 하나다. 그 시기 거의 모든 종목은 조선체육회가 대회를 주관하고 주최했다. 서울YMCA가 전조선씨름대회를 개최한 1년 뒤인 1929년 9월 28일 조선체육회는 휘문고보 운동장에서 조선씨름협회와 공동 주최로 제 1회 전조선씨름대회를 열었다. 경신학교와 휘문고보, 중동학교, 양정고보, 중앙고보, 협성실업, 보성고보, 숭인상업 등 8개 팀이 출전한 단체전 결승에서 경신학교는 보성고보를 접전 끝에 7-6으로 누르고 첫 우승의 영예를 안았다. 개인전 결승에서는 이도남이 최재빈을 물리치고 첫 패권을 차지했다.
조선체육회는 제 16회 전조선종합경기대회를 1935년 10월 22일부터 나흘 동안 경성운동장을 중심으로 열었다. 이 대회는 지난 대회의 육상과 축구, 농구, 야구, 정구 등 5개 종목에 씨름, 유도, 역기(역도), 검도 등 4개 종목을 추가했다. 씨름이 오늘날 전국체육대회의 정식 종목이 된 것이다.
이런 역사 속에 씨름은 우리 민족의 혼을 이어 주는 운동으로 꾸준히 발전했고 프로화된 민속 씨름 직전의 스타플레이어로는 이만기의 직계 선배라고 할 수 있는 김성률 장사를 꼽을 수 있다. 김성률 장사는 1970년대 최고의 씨름 선수였고 운동 능력이 뛰어나 레슬링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1974년 제 55회 대회부터 1976년 제 57회 대회까지 전국체육대회 레슬링 슈퍼헤비급 자유형과 그레코로만형 2관왕을 3년 연속 차지한 것을 비롯해 1983년 제 63회 대회까지 전국체육대회에서 금메달 12개와 은메달 2개, 동메달 3개를 목에 걸었다. 쉽게 믿기 어려운 성적이다. 하형주가 씨름 기술을 응용해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유도 95kg급에서 금메달을 차지한 것은 씨름과 레슬링, 유도로 이어지는 연계성 그리고 씨름 기술의 우수성을 입증한다.
1983년 4월 17일 장충체육관, 약관의 이만기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날이고 장소다. 초등학교 때 씨름을 배운 지 10년 만에 이룬 첫 개인전 우승이자 프로화된 씨름 사상 첫 천하장사 타이틀을 딴 날이고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후 1990년 27세의 나이로 은퇴하기 전까지 천하장사 10번, 한라장사 7번, 백두장사 19번 그리고 11차례의 번외 경기까지 이만기는 길지 않은 선수 생활 동안 47차례 우승의 놀라운 성적을 올렸다. 상금이 아니고 예전처럼 황소를 줬으면 큰 농장을 차려도 됐을 것이다.
초대 천하장사 이만기의 빛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적지 않은 스포츠팬들이 잊고 있지만 1980년대 초반 씨름판에는 내로라하는 장사들이 군웅할거했다. ‘모래판의 신사’ 이준희, ‘인간 기중기’ 이봉걸, ‘털보' 이승삼 그리고 홍현욱, 최욱진 등이 유력한 초대 천하장사 후보들이었다. 지방대회든 전국대회든 우승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이만기는 경력도 그렇고 나이도 어려 우승 후보군에 들 수가 없었다. 그때 이만기는 지방에 있는 대학(경남대학교 2학년)에서 씨름을 하는 무명의 선수였을 뿐이다.
천하장사 경기가 열리기 하루 전인 4월 16일 펼쳐진 한라장사 결승전은 약관의 천하장사 탄생 예고편이었다. 그 무렵 최고 수준의 기술 씨름을 자랑하던 최욱진(경상대학교 3학년)은 이만기를 3-2로 누르고 한라장사 꽃가마에 올랐다. “나는 우승과는 인연이 없는가 보다.” 이만기는 그날 밤 한숨도 자지 못했다. 게다가 체격이 이만기보다 작은 최욱진이 자세를 낮추며 파고드는 바람에 가슴에 약간의 부상까지 있었다.
민속 씨름의 성공적인 출발을 알리는 초대 천하장사 결승전 카드는 절묘하게 이뤄졌다. 키 172cm의 최욱진이 준결승에서 182cm의 홍현욱을 누르고 결승에 올랐다. 한라장사와 천하장사 두 개의 타이틀이 눈앞에 다가왔다. 8강을 목표로 했던 이만기(182cm)는 준결승에서 ‘한 번만 이겨 봤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 수없이 생각했던 이준희(195cm)를 꺾고 결승에 진출했다. 몸무게에 관계없이 겨루는 천하장사 경기에서 기술 씨름의 두 달인이 한 체급 위인 백두급 장사들을 모조리 쓰러뜨리고 결승전 모래판에서 마주 서게 된 것이다.
기술 씨름 달인들의 팽팽한 접전이 이어지는 동안 장충체육관의 열기는 최고조에 이르렀다. 컬러 TV 방송이 시작된 지 2년여가 지난 그때 전국 방방곡곡의 가정에서는 총천연색으로 중계되는 씨름 경기를 보는 이들이 넘쳐 났다. 요즘처럼 시청률 자료가 나왔다면 ‘국민 드라마’의 수치를 가볍게 넘어섰을 것이다.
2-2로 맞선 가운데 이룰 만큼 이룬 이만기로서는 심적 부담이 상대적으로 적었고 최욱진은 한 판만 잡으면 한라장사에 이어 천하장사까지 차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니 상대적으로 심적 부담이 더했을 것이다. 이때 이만기는 평소 연습을 거의 해 보지 않았던 호미걸이를 승부수로 던졌다. 씨름계에서 쓰는 표현인, ‘뽑아 드는’ 들배지기가 이만기의 상징적인 기술이고 이외 밭다리, 잡채기, 뒤집기 등 다양한 기술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이후 7년여 동안 모래판을 평정하게 되는 이만기지만 이날 구사한 호미걸이 기술은 이제 와 생각해도 ‘왜 그때 그 기술을 썼는지 알 수 없다’고 한다. 유도 기술과 비슷한 호미걸이 기술로 이만기는 자신의 선수 생활 첫 개인전 우승이자 천하장사 우승을 이뤘다.
천하장사 이만기하면 떠오르는 첫 번째 이미지가 모래판에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모래를 흩뿌리며 포효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이 장면을 찍은 수많은 사진에는 비밀이 숨어 있다. 이만기는 1980년대 스포츠 전문 사진기자로 활동한 R씨와 매우 친했다. 이만기는 승리 세리머니를 할 때마다 R 기자가 카메라를 들고 있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봇물처럼 터진 프로화의 물결
8월을 스포츠 열기로 뜨겁게 달군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 출전한 한국 선수단 가운데에는 적지 않은 프로 선수들이 있었다. 24세 이상 와일드카드 3명의 선수를 포함한 18명의 남자 축구 대표팀과 여자 배구 대표팀은 전원이 프로 선수였다. 축구는 잉글랜드 독일 포르투갈 오스트리아 중국 일본 등 외국 리그에서 활동하고 있는 선수가 7명이나 됐다.
한국 스포츠로서는 1982년을 아마추어와 프로 양대 축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원년으로 기록할 만하다. 물론 이때 이전에도 프로 종목은 있었다. WBA(세계복싱협회) 주니어 미들급 챔피언 김기수가 대표하는 프로 복싱과 1960~70년대 최고 선수였던 한장상으로 대표되는 골프가 1980년대 이전의 몇 안 되는 프로 종목이었다. 그러나 이들 종목은 개인 종목으로 시장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다.
1982년 단체 종목인 야구가 프로화하면서 국내 스포츠계는 본격적인 프로화 시대를 맞게 됐다. 그리고 이듬해인 1983년 아마추어 팀을 포함한 축구 프로 리그인 슈퍼리그(K리그의 전신)가 출범했다. 민속 경기인 씨름도 같은 해 프로화가 돼 이만기 등 신예의 등장과 함께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굳이 순서를 따지면 1982년 3월 프로 야구, 1983년 4월 민속 씨름, 1983년 5월 프로 축구다. 이들 종목은 앞서기니 뒤서거니 프로화 물결에 합류했다.
잠시 끊겼던 프로화 물결은 1990년대 중반 농구대잔치를 무대로 펼쳐진 대학 농구의 폭발적인 인기에 힘입어 1997년 남자 농구가 프로화되고 이어 여자 농구, 그리고 2000년대 들어서 남녀 배구가 프로화가 되면서 국내 인기 종목 대부분이 프로로 재탄생했다.
프로화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었다. 또 프로화가 되면서 해당 종목의 경기력이 크게 향상돼 축구는 숙원이었던 월드컵 본선 진출을 1986년 멕시코 대회에서 이룰 수 있었고 이후 2014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회까지 8회 연속 월드컵 본선에 나서는 기록을 세웠다. 올림픽에서도 자동 출전한 1988년 서울 대회를 시작으로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대회까지 8회 연속 본선에 올랐다. 이 사이 2012년 런던 대회에서는 동메달을 차지했다.
1992년 바르셀로나 대회 때 뒤늦게 올림픽 정식 종목이 된 야구는 프로화를 기반으로 끌어올린 경기력으로 2000년 시드니 대회 동메달, 2008년 베이징 대회 금메달의 성과를 이뤘다. 한국 야구는 정식 종목 재진입이 확실시되는 2020년 도쿄 올림픽에서 다시 한번 메달에 도전할 만한 경기력을 유지하고 있다.
1980년대 프로화 3총사 가운데 씨름은 2000년대 들어 급격한 인기 하락과 함께 프로 종목으로서 내세울 만한 콘텐츠 없이 암흑기를 겪고 있어 스포츠 팬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글 신명철 편집위원, 전 편집국장 smc6404@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