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5일 막을 올리는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 출전하는 남자 축구 대표팀 명단이 지난 6월 27일 발표됐다. 손흥민(토트넘) 등 국외 리그에서 활약하고 있는 선수들을 비롯해 23세 이하 선수 15명과 와일드카드인 24세 이상 선수 3명 등 18명의 선수가 올림픽 무대를 밟게 됐다. 이번 대표팀 선발 과정에서 가장 큰 관심사는 ‘와일드카드 수비수로 누가 뽑히느냐’는 것이었다. 유력한 후보였던 홍정호는 소속 클럽인 분데스리가 아우크스부르크가 차출을 거부해 탈락했고 중국 리그 광저우 푸리에서 뛰고 있는 장현수가 뽑혔다. 신태용 감독의 와일드카드 구상은 2+1(수비수 2+공격수 1)이었으나 결과적으로 1+2(장현수+손흥민 석현준)가 됐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에 열린 올림픽에 축구종목이 있었다면 수비수 김호와 김정남은 나이 제한과 와일드카드 제도에 관계없이 ‘무조건’ 대표 선수로 발탁됐을 것이다. 둘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당대 최고의 수비수였기 때문이다. 수비수 네 명이 일(一)자로 늘어서는 포 백을 쓰고 있는 요즘과 달리 1960~70년대에는 중앙 수비수 두 명이 앞뒤로 자리를 잡은 스토퍼-스위퍼 시스템을 사용했다.
1967년 9월 도쿄에서 열린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 아시아 지역 예선과 1969년 10월 서울에서 벌어진 1970년 멕시코 월드컵 아시아·오세아니아 지역 예선 등 10여 년 동안 수많은 국제 대회에서 김호는 한국 축구의 수비 버팀목이었다. 당시로서는 큰 키인 177cm의 김호가 스토퍼로 상대 공격을 1차로 저지했고 170cm의 비교적 작은 키인 김정남이 스위퍼로 나서 상대 공격을 쓸어냈다. 김호-김정남 콤비는 월드컵이나 올림픽 출전의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오늘날 한국 축구가 누리고 있는 월드컵 4강 등 명성의 발판을 마련했다.
김호의 이력서는 그의 오랜 축구 인생에 견줘 보면 간략하다. 학력은 더욱 그렇다. 부산 동래고등학교 졸업이 그의 최종 학력이다. 물론 동래고는 축구 명문이다. 김호곤(대한축구협회 부회장) 박성화(전 올림픽 대표팀 감독) 최용수(중국 장쑤 쑤닝 감독) 등 우수 선수들이 김호의 뒤를 이었다. 김호의 학력을 내세운 이유는 그가 학연에서 자유롭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그가 축구계에 이러저런 쓴소리를 할 수 있는 배경일 수도 있다.
한국 사회가 학연과 지연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특히 학벌 중심의 사회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하기 힘들다. OO시에서는 OO고를 나오지 않으면 전자 제품 대리점도 하지 못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는가 하면 OO협회는 OO대학 출신들이 잡고 있다는 얘기가 공공연하게 나돈다.
김호는 은퇴한 뒤 국가 대표팀이든 단일팀이든 어느 팀을 맡아도 학연 지연 등과 관련한 뒷이야기가 나온 적이 없다. 1994년 미국 월드컵 때도 그랬다. 김호는 동래고를 졸업한 뒤 1964년 실업팀 제일모직에 입단했다. 제일모직은 뿌리를 따지면 K리그 클래식의 명문 구단인 수원 삼성의 할아버지쯤 된다. 삼성그룹 계열이다. 이 무렵 실업 축구는 군 축구의 대표격이던 방첩대가 해체되면서 제일모직, 대한중석, 금성방직 등이 자웅을 겨루고 있었다. 실업 정상권 팀에 들어갔으니 김호는 요즘으로 치면 특급 고졸 신인이었다.
김호는 은퇴한 뒤 모교인 동래고에서 후배들을 가르쳤다. 김호는 지도자로서도 이력서가 간략하다. 동래고와 한일은행, 울산 현대, 수원 삼성, 대전 시티즌 등 지휘한 팀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특정 팀에서 최소 3년 이상 지휘봉을 잡았다. 믿음을 주는 지도자라는 얘기다.
김호의 고향은 ‘동양의 나폴리’로 불리는 경남 통영이다. 종목을 막론하고 거의 모든 우수 선수들이 그렇듯이 김호도 초등학교 시절 육상 선수로 활약했다. 그런데 어린이 김호가 더 좋아한 운동은 축구였다. 두룡초등학교에서 시작한 축구로 60년 축구 인생을 살게 됐다. 5학년 때 6학년 선배들 틈에 끼어 통영시 초등학교축구대회에서 우승했다고 하니 될성부른 떡잎이었다. 6학년 때는 주장을 맡아서 또 우승했고 김호가 통영중학교에 진학한 뒤 후배들이 3년 연속 우승해 우승기를 영구 보관하게 됐는데 그 우승기가 여전히 모교에 있다고 한다. 통영은 우수한 축구 선수가 많이 나온 고장이니 초등학교부 3연속 우승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무렵 유소년들이 그랬듯이 김호도 라디오로 스포츠 중계방송을 들으면서 축구 선수의 꿈을 키워 나갔다. 김호는 10대 초반에 들었던 라디오 중계방송 내용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한다. 그 무렵 자유중국(오늘날의 대만)이 축구를 잘했다. 일본에서 열린 대회에서 우리나라가 결승에 올랐지만 아쉽게도 자유중국에 2-3으로 졌다. 그때 훌륭한 축구 선수가 돼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단다.
김호가 라디오 중계방송으로 들은 경기는 1958년 도쿄 아시아경기대회 결승전이었다. 1950년대 자유중국에도 밀리던 한국 축구는 뒷날 김호가 국가 대표로 뛰게 됐을 때는, 1972년 뮌헨 올림픽 아시아 지역 예선에서 대만을 8-0으로 이기는 등 눈부신 발전을 이루게 된다.
김호는 통영중학교~동래고를 거치면서 축구 선수로 쑥쑥 성장하게 된다. 그런데 뛰어난 수비수들이 대개 그렇듯이 김호도 학창 시절에는 공격수로 뛰었다. 신세대 축구팬들에게는 낯선 포지션인 센터포워드, 레프트 인사이드 등으로 뛰면서 동래고 시절에는 그 무렵 전국 최강인 서울 동북고를 2-0으로 꺾기도 했다.
김호는 1965년 처음으로 국가 대표팀에 선발됐다. 이때, 이제는 50년 지기가 된 김정남을 만나게 되고 얼마 뒤 수비수로 포지션을 바꾸게 된다. 처음에는 김정남이 레프트백과 하프백을 오갔고 김호는 라이트백이었다. 그때 국가 대표팀 중앙 수비수로는 둘의 선배인 김정석이 있었다. 둘은 1967년 중앙정보부가 만든 ‘양지’에 나란히 입단하면서 김용식 감독(1936년 베를린 올림픽 축구 종목에 유일한 조선인으로 출전)에 의해 중앙 수비수로 기용되기 시작했다. 한국 축구사에 길이 남을 김호-김정남 콤비의 출발이었다.
>>>글 신명철 편집위원, 전 편집국장 smc6404@naver.com
전업주부 사이구사 하쓰코의 열렬 한국 사랑 “아직 배울 것도 많고 보고 싶은 것도 많아요”
인터뷰 이태문 일본 통신원 gounsege@gmail.com
한국 사극 보고 역사책 읽고
“한국 여행안내 책자에 없는 일본의 멋진 곳을 구석구석 안내하고 싶어요.”
똘망똘망, 호기심에 가득 찬 눈을 지닌 사이구사 하쓰코(三枝初子, 1956년생)는 유홍준 교수의 일본편을 꺼내며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물론 일본어 번역판이 아닌 한국에서 구입한 우리말 책으로, 아스카(飛鳥)문화와 교토(京都)유적에 대한 유 교수의 구수한 이야기에 대해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면서 한·일 양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신의 생각도 빠트리지 않고 덧붙였다.
“고대 도래인(渡來人)이 가져온 문화가 일본 각지에 영향을 주었고, 거기서 일본적인 것이 싹트고 자라온 것을 부정할 수 없는데, 갈수록 관심이 적어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
평소 역사를 좋아하는 하쓰코가 한국의 매력에 푹 빠진 것은 흔히 말하는 한류 드라마가 계기가 되었다. 그것도 2009년께부터 봤다는 과 같은 사극이었다. 드라마의 재미에서 시작된 한국 역사에 대한 관심은 일본에서 출판된 한국 역사 관련 서적을 두루 읽게 되었고, 그러다가 한국어가 일본어와 어순이 비슷해 공부해 볼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고 한다.
행동하라 그리고 즐겨라
한글을 외우고 싶어서, 아니 혼자 배우는 독학의 재미보다는 다 같이 공부하는 분위기가 좋아서 그녀는 2011년 12월 동아리를 만들었다.
2012년 첫 한국 여행으로 제주도를 선택한 하쓰코는 한국에 대한 관심이 한국 사랑으로 바뀐 자신을 발견했다. 서슴없이 “도와 드릴까요?” 라고 말을 걸어오는 한국인, 알지도 못하는 어느 아줌마가 “어디 가세요?”라며 요구르트를 건네는 등 일본에서는 사라진 인정(人情), 그 따스함에 흠뻑 빠져들었다.
“정말 신기했죠. 일본인들이 잊고 살았던, 정이 넘치는 한국 사회를 직접 경험해 보니까 더 열심히 공부해 한국 사람과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졌어요.”
그 뒤로 한국어 공부 동아리 사람들과 2012년 가을 서울 인사동, 한국 민속촌, 경기도 수원 화성 등을 돌았으며, 2013년에는 경북 경주, 안동 화회 마을, 부산에서 역사와 문화를 만끽했다. 그리고 2014년에는 혼자서 4박 5일 동안 중부내륙 순환열차를 이용해 강원도를 비롯해 지방을 여행하고 판문점도 찾아 남북 분단의 현실을 직접 목격했다.
2015년에는 친정 아버님의 병환과 별세로 한국에 가지 못했고, 2016년 4월에는 3박 4일의 일정으로 전남 진도와 목포를 돌며 남도의 예술 향기와 맛깔스러운 음식에 흠뻑 취했다.
그녀는 여행 후에 일정과 정보, 유적 설명, 그리고 거기서 만난 사람들 이야기를 꼼꼼하게 정리해 파일로 남겼는데, 그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전업 주부, 결코 평범하지 않다
“5만원권에 등장하는 신사임당 생가에 가고 싶어요”라고 밝히는 하쓰코는 두 아들의 엄마, 직장인 남편의 아내인 평범한 전업 주부다.
지금 사는 아파트가 1층이라 앞에 건물이 보여 답답한 것도 있고 해서, 산책과 트레킹, 특히 경관이 탁 트인 산에 오르는 것을 즐기는 그녀는 15년 전 사진 찍기를 시작해 DSLR 카메라와 300㎜ 렌즈를 배낭에 넣고 한적한 산에 올라 계절마다 표정을 바꾸는 온갖 꽃들을 담고 있다.
물론 등산에 필요한 체력은 스포츠센터를 다니며 단련했지만, 역시 경치가 없어서 금방 질려 버린다며 신선한 공기와 푸른 자연이 있는 세상 속에서 자신의 건강을 유지할 생각이라고.
전업 주부인 그녀가 길지는 않지만 회사를 다닌 적이 있다. 아들이 대학교에 입학해 캠퍼스 생활을 누릴 때, 늦깎이로 컴퓨터와 제작 실무를 배워 후지쓰(富士通)와 가와사키(川崎)시의 재단법인에 각각 2년쯤 근무하면서 홈페이지를 만들었다.
그 경험은 한국어 공부와 한국 여행을 기록하고 정리하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그리고 지난 6월 제195회째 공부 모임을 마친 요코하마(橫浜) 한국어동화 독서회를 꾸려가며 트위터와 페이스북, 그리고 카톡과 라인 등 SNS를 이용해 모임 소식과 정보 공유, 그리고 회원들의 감상문 제출 등 젊은 사람들 못지않은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노후는 나를 위한 욕심쟁이로
액티브 실버, 한마디로 파워 넘치고 활기 찬 인상의 사이구사 하쓰코에게 꿈을 물어 봤다.
“꿈이 아니다. 희망이다. 한국어는 의성어와 의태어가 많아서 그 풍부한 표현이 매력적이라 앞으로도 계속 공부해 유홍준 교수의 문화답사에도 꼭 참가하고 싶다. 그리고, 2020년 도쿄올림픽 때 자원봉사자로 참가해 한국어 안내를 맡을 생각이다. 벌써부터 가슴이 설렌다. 말을 통해 마음이 서로 이어지고, 마음을 통해 사람과 사람이 하나 되는 그 자리에 나 자신이 함께하고 있고, 내가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면 정말 흥분된다.”
아울러 하쓰코는 3년 뒤 남편이 정년 퇴직을 하면, 첫 부임지로 가족이 함께 살았던 센다이(仙台)를 잊을 수 없어서 다시 그곳에서 당시의 생활을 천천히 음미하며 지내고 싶다는 소망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그동안 가족들을 위해 정말 애쓰고 열심히 살아온 남편이랑 크루즈 세계여행도 계획하고 있다고 귀띔해 줬다.
지칠 줄 모르는 호기심과 도전이야말로 다이나믹한 노후를 보내는 그녀의 원동력일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삶에 활력을 심어 준 한국에 대한 깊은 관심과 사랑도 더욱 깊어지고 뜨거워질 것이다.
그런 욕심쟁이는 너무 멋져요. 아름다워요. 파이팅 하쓰코 !
지난 5월 22일 도쿄(東京)에서 막을 내린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여자 배구 세계 예선전에서 한국은 4승 3패로 올림픽행 티켓을 거머쥐었다. 순위는 출전 8개국 가운데 4위였지만 앙숙 일본을 3-1로 이긴 데다 올림픽 출전이 확정된 뒤 열린 경기 패배를 빼면 순위가 더 올라갈 수 있었기에 스포츠 팬들은 23일 개선한 김연경 등 선수들을 열렬하게 환영했다.
이때 이후 “한국 여자 배구가 40년 만에 다시 올림픽 메달에 도전한다”는 기사가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그 기사들에는 ‘나는 작은 새’ 조혜정 관련 내용이 빠지지 않았다. 여자 배구 관련 검색어 수준이었다.
잠시 40년 전으로 시곗바늘을 돌려 본다.
1976년 한국 스포츠의 최대 관심사는 7월 17일부터 8월 1일까지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린 제21회 여름철 올림픽이었다. 4년 전 제20회 뮌헨 대회에서 올림픽 무대에 처음 나선 북한이 사격에서 금메달 1개, 복싱에서 은메달 1개, 여자 배구 등에서 동메달 3개를 딴 반면 한국은 은메달 1개(유도 재일동포 오승립)에 그쳤다. 충격이었다. 한국으로서는 몬트리올 올림픽을 앞두고 북한과의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지상 과제를 안고 있었다.
그 무렵 올림픽 등 국제종합경기대회 선수단 구성 원칙은 ‘소수 정예’였다. 나라의 경제력 때문에 메달을 딸 수 있는 종목만 보낸다는 것이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구성된 한국 선수단은 임원 22명과 선수 50명으로 뮌헨 대회를 약간 웃도는 규모였다. 출전 종목은 남녀 배구와 레슬링, 유도, 복싱, 사격이었다. 사격은 1978년 서울에서 열릴 예정인 세계선수권대회 개최국으로서의 위상을 고려해 뮌헨 대회에 이어 또다시 참가하게 됐다. 결과적으로 메달을 따지 못했지만.
1970년대 한국 스포츠를 관통한 김택수 대한체육회 회장의 ‘선(先) 체력 후(後) 기술’ 방침은 시대 상황으로 보아 당위성이 있었다. 그러나 다소의 진통도 있었다. 몬트리올 올림픽을 불과 두 달여 앞둔 4월 25일 여자 배구 대표팀 주 공격수 박인실이 선수촌에서 이탈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무렵 대한배구협회를 맡은 이낙선 회장은 올림픽 메달을 목표로 후원회를 조직하고 발전 기금을 마련하는 등 적극적인 지원을 했다.
그리고 몬트리올 대회를 앞두고 1964년 도쿄 대회에서 일본 여자 배구를 올림픽 금메달로 이끈 다이마쓰 히로부미(大松博文)를 초빙해 김한수 감독, 전호관 코치와 함께 대표팀을 지도하도록 했다. ‘동양의 마녀’라는 신화를 만든 다이마쓰는 ‘회전 리시브’ 등 혹독한 훈련의 대명사였다. 강훈련이 거듭되는 가운데 선수들의 반발이 있었고 결국 박인실이 무단으로 퇴촌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박인실은 당시로는 174cm의 큰 키에 뛰어난 점프력과 강타를 지닌 간판 공격수였다. 이 사건은 당시 상당한 파문과 논란을 일으켰고 결국 협회는 박인실을 제명했다. 여자 배구로서는 큰 손실이었지만 ‘이 없으면 잇몸으로 버틴’ 여자 배구는 동메달의 값진 성과를 거뒀다.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여자 배구가 동메달로 가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8개국이 출전한 가운데 조별 리그 B조에 속한 한국은 첫 경기에서 이 대회 준우승국인 소련과 접전을 펼친 끝에 1-3으로 졌다. 그러나 이후 쿠바와 동독을 풀세트 접전 끝에 각각 3-2로 물리치고 조 2위로 준결승전에 올랐다. 한국은 조별 리그 A조 1위이자 대회 우승국인 일본에 0-3으로 졌으나 3위 결정전에서 헝가리에 3-1(12-15 15-12 15-10 15-6) 역전승을 거두고 동메달을 거머쥐었다.
한국 스포츠 사상 첫 여자 올림픽 메달리스트의 영예를 안은 선수는 신세대 스포츠 팬들에게도 이름이 꽤 알려져 있는 조혜정과 이순복, 유경화, 유정혜, 정순옥, 마금자, 장혜숙, 이순옥, 박미금, 변경자, 백명선, 윤영내 등 12명이다. 이들 가운데 유경화와 유정혜는 공격력이 있는 세터로 ‘더블 세터’를 이뤄 주 공격수인 조혜정과 함께 메달 획득에 크게 이바지했다.
조혜정은 숭의여고를 졸업해 서울 사람으로 잘못 알고 있는 스포츠 팬들이 적지 않은데 부산이 고향이다. 부산 봉래초등학교 5학년 때 키가 크다는 이유로 배구 선수로 뽑혔다. 그렇지만 부산여중을 졸업한 뒤 키가 작다는 이유로 고교 진학에 어려움을 겪는 등 설움을 받게 된다. 운동선수들 가운데에는 이런 사례가 심심찮게 있는데 이럴 때 대부분의 선수가 하는 말이 있다. “초등학교(중학교) 때 키가 지금 키다.” 그리곤 예외 없이 웃는다.
어렵사리 진학한 숭의여고 졸업을 앞두고 또 키 얘기가 나왔다. “저렇게 작은 애는 실업에서 못 써먹어.” 어렵사리 국세청에 입단했고 전국대회에서 보란 듯이 MVP로 뽑혔다. 아마추어 시절 실업 배구는 국내 최고 무대였다. 그런데 국가대표 선수 선발에서 몇 차례 탈락했다. 이번에는 “키가 작아. 국내용이야”이라는 얘기가 나왔다.
일반 여성으로도 크지 않은 키인 163cm의 조혜정이 어떻게 올림픽 동메달 국가의 주 공격수로 활약할 수 있었을까. 선수 시절 그의 활약상을 기억하는 올드 팬이라면 남자 선수 못지않은 점프력을 첫손가락에 꼽을 것이다. 달려오면서 시도하는 점프의 높이가 60cm나 됐다. 점프력으로 170cm대 공격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다.
올림픽 동메달에 가려 있지만 조혜정은 1974년 세계여자배구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을 3위로 이끌었다. 2016년 현재 세계선수권대회 최고 성적이다. 이에 앞서 한국은 1967년 대회에서도 3위를 했으나 이 대회에는 여자 배구 강국인 소련을 비롯해 동유럽 나라들이 몽땅 빠진 ‘반쪽 대회’였다. 1973년 우루과이에서 열린 제1회 여자 배구 월드컵에서는 MVP로 선정됐다. 한국은 페루를 3-0으로 누르고 3위를 차지했다. 동메달 나라에서 MVP가 나온 것이다. 그의 뛰어난 경기력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조혜정은 몬트리올 올림픽 이듬해인 1977년 이른 나이에 국내에서 은퇴한 뒤 이탈리아에서 2년 동안 선수 겸 코치로 뛰었다. 테니스의 이덕희 등 여자 운동선수의 외국 진출 사례가 손에 꼽을 정도인 시절이었다. 여자 배구 선수로서는 외국 진출 1호로 리우 올림픽 세계 예선에서 맹활약한 김연경(터키 리그)의 대선배다.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뒤 현대건설 여자 배구단 코치 등 지도자 생활을 했다. 그런데 그의 이력에 특별한 내용이 있다. 35세 적지 않은 나이에 수원대학교 체육학과에 입학한 것이다. 야구 팬들이라면 바로 알 수 있는 조창수 전 프로야구 삼성 라이온스 감독대행과 결혼한 뒤였다. 체육 이론을 공부하고 싶었단다.
이런 그의 적극적인 자세는 2010년 GS칼텍스 여자 프로 배구단 사령탑 선임의 배경이 됐다. 한국 프로 스포츠 사상 첫 여성 감독이라는 특별한 기록이 그의 이력에 추가됐다.
조혜정은 부부 스포츠 커플에 두 딸 윤희와 윤지가 프로골퍼이니 이만한 스포츠 가족을 찾기도 어렵다.
>>>글 신명철 편집위원, 전 편집국장 smc6404@naver.com
박세리가 1998년 ‘맨발 투혼’을 발휘한 US 여자 오픈 우승을 비롯해 4승을 올리는 장면을 TV로 보고 골퍼의 꿈을 키운 박세리 키즈들은 2016년 현재 미국 여자 프로골프투어를 휩쓸고 있다.
오는 8월 리우데자네이루 대회에서 112년 만에 올림픽 무대로 돌아오는 골프 종목에서는 세계 랭킹 15위 안에 드는 선수는 한 나라에서 최다 4명까지 출전할 수 있다. 한국은 이변이 없는 한 여자부 4명의 출전이 확실시되고 있고 유력한 금메달 후보국이다. 박세리가 일궈 놓은 성과다.
2010년 밴쿠버 동계 올림픽 피겨스케이팅 여자 싱글 금메달리스트 김연아의 뒤를 잇는 김연아 키즈들은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에서는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겠지만 현재 초등학교 5, 6학년들인 임은수(12, 서울 응봉초) 김예림(12, 군포 양정초) 유영(11, 과천 문원초) 등은 올림픽 메달리스트로 성장할 가능성이 꽤 크다. 이들은 대체로 김연아의 초등학교 시절 기술 수준에 올라 있고 2022년 베이징 동계 올림픽에서 기량을 꽃피울 나이가 된다. 최근에는 이세돌과 인공지능 알파고의 대결로 이세돌 키즈들이 나올 터전이 마련됐다. 그런데 40여년 전에도 ○○○ 키즈가 있었다. 이제 그 ○○○을 찾아서 시간 여행을 떠나 보자.
‘이에리사 키즈’ 붐
1973년 한국 스포츠를 화려하게 장식한 건 여자 탁구였다. 1967년 여자 농구에 이어 한국은 여성을 앞세워 세계 무대에 다시 한 번 ‘스포츠 코리아’를 알렸다.
1973년 제 32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는 4월 5일부터 15일까지 유고슬라비아 사라예보에서 60개국이 출전한 가운데 열렸다. 한국은 김창원 대한탁구협회 회장을 단장으로 총감독 이경호, 남자 코치 김창제, 여자 코치 천영석으로 코칭스태프를 구성했다. 남자 선수로는 홍종현 최승국 김은태 강문수 이상국이, 여자 선수로는 정현숙 이에리사 박미라 나인숙 김순옥이 출전했다.
여자 단체전은 예선 리그를 펼친 뒤 예선 A, B조를 통과한 4개국이 예선 전적을 안고 돌려 붙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B조에 속한 한국은 이에리사와 정현숙을 단식, 이에리사와 박미라를 복식에 기용하는 전략으로 스웨덴, 유고슬라비아, 서독을 잇따라 3-0으로 완파한 뒤 중국과 피할 수 없는 일전을 벌이게 됐다. 한국은 1, 2번 단식에서 이에리사와 정현숙이 중국의 정후아잉과 후유란을 각각 2-1로 꺾으며 기선을 제압했다. 한국은 3번 복식에서 이에리사-박미라 조가 중국의 정후아잉-장리 조에게 0-2로 졌으나 4번 단식에서 이에리사가 이 대회 단식 챔피언인 후유란을 2-0(21-15 21-18)으로 눌러 우승으로 가는 최대 고비를 넘었다.
결승 리그에서 한국은 헝가리와 일본을 각각 3-1로 물리치고 예선 리그를 포함해 8전 전승으로 세계 여자 탁구 정상에 올랐다. 1956년 제23회 도쿄대회에 처음 출전한 이후 17년 만에 거둔 값진 성과였다. 이 대회에서 한국은 여자 단체전 우승 외에 여자 단식에서 박미라가 3위를 차지했다.
여자 탁구가 중국을 누르고 세계 정상에 올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전국 방방곡곡 탁구장은 탁구를 치려는 청소년들로 넘쳐 났다. 글쓴이가 살던 서울 변두리 동네에는 1980년대까지만 해도 가장 목이 좋은 네거리 빌딩 2층에 탁구장이 있었다. 20여년 전까지만 해도 서울 시내 한복판 광화문에 ‘고려탁구장’이 있었는데 점심 시간에는 가볍게 땀을 흘리려는 직장인들로 빈 탁구대가 없었다.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여자 단체전 우승의 주역 ‘이에리사 키즈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에리사가 처음 라켓을 손에 잡은 건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3남 5녀 가운데 일곱째인 이에리사는 일찌감치 뛰어난 탁구 실력을 보였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전국선수권대회 초등부 우승을 차지하더니 충남 홍성여중 1학년 때 참가한 전국종별대회에서도 눈에 띄는 플레이를 펼쳤다. 서울 문영여중 손병수 코치는 이에리사를 눈여겨보고 서울로 전학을 권유했다. 아버지 이승규 씨는 딸의 서울행을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곧 허락했다. 이에리사는 중학교 3학년 때인 1969년, 언니와 오빠가 있는 서울로 전학해 본격적으로 탁구를 시작했다. 언니가 싸다 준 점심, 저녁 도시락을 먹으면서 수업이 끝난 뒤 하루 6시간 강훈련을 한 번도 거르지 않았다.
그해 5월 이에리사는 전국학생종별대회 개인전 우승을 거머쥐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이 그해 11월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제23회 전국남녀종합선수권대회에서 일어났다. 이에리사는 학생부에서 일찌감치 우승하더니 일반부에서도 연승 행진을 이어 갔다. 결승 상대는 베테랑 김인옥(한일은행)이었다. 두 선수는 경기 내내 접전을 펼쳤다. 이에리사는 1-1로 맞선 3세트에서 21-19로 이겨 세트 스코어 2-1로 승리했다. 15세 소녀가 자신보다 7, 8세 많은 선배들을 모두 누르고 종합선수권을 차지하자 탁구계는 발칵 뒤집혔다. 학생부에서 우승한 뒤 바로 다음 날 일반부에서 우승했으니 더욱 그럴 만했다.
탁구 올드 팬들은 기억하겠지만 이에리사의 플레이 스타일은 남자 선수로 보면 한참 후배인 김택수와 비슷했다. 여자 선수라고는 믿기 어려운 강력한 드라이브를 구사했다. 지금이야 드라이브가 일반적이지만 당시 여자 선수가 힘 있는 드라이브를 구사하는 경우는 보기 힘들었다. 이에리사는 드라이브를 앞세운 공격적인 탁구로 국내 무대를 휩쓸었다. 국내 선수권자가 된 이듬해인 1970년 국내 대회 7관왕에 오른 데 이어 국제 무대에서도 맹활약했다. 제10회 아시아탁구선수권대회 주니어부 단식 우승을 차지했고 단체전 우승을 이끌었다. 어느새 이에리사는 한국 여자 탁구의 미래를 상징하게 됐다. 그리고 불과 3년 뒤 이에리사는 한국 여자 탁구를 세계 정상에 올려놓았다. 그의 나이 19세 때였다.
어린 나이에 정상에 오른 뒤 쉽게 무너지는 선수들이 종종 있다. 그러나 이에리사는 세계선수권대회 단체전에서 우승한 뒤에도 국내 최강자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국내 최고 권위의 탁구 대회인 종합선수권대회에서 7연속 우승했다. 이에리사의 7연속 우승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국가대표선수로도 꾸준히 활약했다. 1975년 캘커타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해 단체전 준우승을 이끌었고 1976년에는 서독오픈에서 개인전 우승을 차지했다.
탁구인 이에리사가 위대한 까닭은 1973년 대회 이후 한국 선수가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기까지 14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1987년 제39회 뉴델리 대회에서 양영자-현정화 조가 여자 복식 정상에 오르면서 한국 여자 탁구의 세계선수권대회 금메달 흐름이 이어졌다. 1991년 일본 지바에서 열린 제4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남북 단일팀 ‘코리아’가 여자 단체전에서 우승하기까지는 18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이에리사는 남북 여자 탁구 선수들 모두에게 '우리도 세계 정상에 설 수 있다‘는 희망을 밝힌 대선배였다.
2003년 용인대학교 교수로 임용된 것을 시작으로 2005년 여성 스포츠인으로는 처음으로 태릉선수촌장을 맡았고 2014년에는 역시 한국 여성 체육인으로는 처음으로 아시아경기대회(인천) 선수촌장을 지냈다. 이에리사는 제19대 국회의원까지, 여성 체육인으로서 최초 기록을 여럿 갖고 있다.
탁구, 전국민이 열광한 생활스포츠
탁구만큼 국민들에게 친근한 스포츠가 있을까. 1973년 여자 단체전에서 세계 정상에 오르며 전국적으로 탁구 열풍이 일더니 1986년 서울 아시아경기대회에서는 탁구로 온 나라가 들썩거렸다. 너도나도 탁구장으로 가거나 틈만 나면 드라이브를 하는 폼을 잡기도 했다. 서울 아시아경기대회가 초반의 열기를 뿜고 있던 1986년 9월 24일 서울대 체육관에서는 한국과 중국의 탁구 남자 단체전 결승이 벌어졌다.
한국은 첫 두 단식에서 안재형(뒷날 중국 탁구 선수 자오즈민과 한중 수교 전에 결혼)과 김완이 천신화와 후이준을 나란히 2-0으로 꺾고 앞서 나가기 시작하더니 내처 4-1까지 리드를 이어 갔다. 그러나 6번 단식부터 내리 3게임을 내줘 게임 스코어 4-4로 역전 위기에 몰렸다. 9번 단식에서 후이준과 맞선 안재형은 첫 세트를 듀스 접전 끝에 25-23으로 딴 뒤 세트스코어 2-1로 이겼다. 한국은 4시간 30분이 넘는 대혈투 끝에 세계 최강 중국을 무너뜨렸다. 중국은 1985년 현재 세계선수권대회 남자 단체전에서 3연속 우승을 포함해 통산 10번의 우승을 기록하고 있었다.
여자 단체전에서는 중국을 꺾었지만 남자 단체전에서 중국을 물리치리라고 내다본 이는 거의 없었다. 서울대 체육관은 열광의 도가니였고 숨 막히는 접전 끝에 세계 최강 중국을 꺾는 장면을 TV로 지켜본 국민들은 환호 또 환호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탁구는 세계선수권대회를 연 지 62년 만에 정식 종목으로 채택됐다. 서울 올림픽 여자 복식에서 양영자-현정화 조는 중국의 자오즈민-천징 조를 2-1로 꺾고 올림픽 여자 복식 초대 챔피언이 됐다. 남자 단식에서는 유남규가 김기택을 3-1로 따돌리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다시 한 번 전국적으로 탁구 열풍이 불었다.
>>>글 신명철 편집위원, 전 편집국장 smc6404@naver.com
믿기 어려운 일이겠지만 글쓴이는 초등학교 시절, 두 가지 결심을 했다. 하나는 스포츠 기자가 되는 것, 다른 하나는 특정 대학교에 가는 것이었다. 10살을 갓 넘긴 어린아이가 이런 결심을 하게 된 데에는 물론 그럴만한 까닭이 있었다. 1960년대 중반, 시골 중에 서도 시골인 강원도 신철원군 갈말면 지포리에 있는 신철원초등학교에 다니던 아이는 라디오 중계로 1964년 도쿄 올림픽 복싱 경기 정신조와 사쿠라이(뒷날 스포츠 기자가 된 뒤 당시 자료를 살펴보고 사쿠라이 다카오라는 ‘풀 네임’을 확인했다)의 밴텀급 결승전, 그리고 1964년과 1965년 캐시어스 클레이(뒷날 무하마드 알리로 개명)와 소니 리스턴의 프로 복싱 세계 헤비급 타이틀매치 등을 들었다. 박정희장군배 동남아여자농구대회는 해마다 단골로 듣는 대회였다. 그 무렵 일본의 릿쿄대학교와 야하다제철, 미국의 빅토리농구단 등이 한국에 와 친선경기를 가졌는데 특정 대학교는 연전연승이었다.
일본팀들을 물리칠 때 시골 아이의 가슴은 벅차 올랐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신동파(申東坡)라는 이름을 확실하게 기억하게 됐고 10여년 뒤 특정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 봄에 열린 농구 OB전에서 신동파가 뛰는 경기를 라디오 중계가 아닌, 실제 경기로 보게 된다.
일본팀은 물론 국내 실업팀들을 손쉽게 물리친, 특정 대학교는 연세대이며 당시 멤버는 김영일 방열 김인건 하의건 신동파 등이었다. 1990년대 중반 ‘오빠 부대’를 몰고 다니면서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서장훈 이상민 우지원 문경은 김훈이 2세대 ‘독수리 오형제’라면 이들은 1세대 ‘독수리 오형제’라고 할 수 있고 중심 인물이 신동파였다.
1974년 테헤란 대회 때 중국이 아시안게임에 데뷔하기 전까지 아시아 남자 농구의 절대 강자는 필리핀이었다. 1951년 제1회 뉴델리 대회부터 1962년 자카르타 대회까지 아시안게임에서 4연속 금메달을 차지했고, 1960년 마닐라에서 제1회 대회를 연 아시아남자농구선수권대회에서는 1973년 마닐라 대회까지 7차례 대회에서 4차례나 정상에 올랐다.
이 사이 아시안게임에서는 1966년 방콕 대회에서 이스라엘에,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는 1969년 방콕 대회에서 한국에 밀려 우승하지 못했다. 이스라엘은 1980년대 초반 아시아 지역 스포츠 단체인 AGF(아시아경기연맹)가 쿠웨이트 등 서아시아 나라들이 주도한 OCA(아시아올림픽평의회)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밀려나 이제는 EOC(유럽올림픽위원회)와 UEFA(유럽축구연맹)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아시아 최강의 실력을 자랑하던 필리핀이었기에 1967년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제4회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도 홈 코트의 한국을 83-80으로 꺾는 등 9전 전승으로 우승했다. 절대 강자 필리핀이 1969년 방콕에서 열린 제5회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한국에 86-95로 지고, 일본에도 77-78로 져 3위에 그친 건 필리핀인들에게는 충격이었다.
동아시아의 중국과 서아시아의 이란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최근 아시아 남자 농구 판도에서 그나마 명함을 내밀고 있는 1950~60년대 강자는 필리핀뿐이다. 필리핀은 2013년 마닐라 대회와 2015년 중국 창사(長沙) 대회에서 잇따라 준우승했다. 한국은 두 대회에서 3위와 6위에 머물렀다. 한국은 2002년 부산 대회와 2014년 인천 대회 우승, 2010년 광저우(廣州) 대회 준우승 등 아시안게임에서는 나름대로 선전하고 있다.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의 경우 중국은 아시아 챔피언 자격으로 출전하고 2015년 아시아선수권대회 2위 필리핀은 6월에 열리는 세계 예선에 참가한다.
20세기 초반 미국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필리핀이 농구에서 아시아 절대 강자로 군림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런 필리핀이 1969년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한국에 진 건 충격을 넘어 ‘사건’이었다. 1969년 11월 29일 밤 TV 앞에 모여 있던 필리핀 농구 팬들은 던지는 대로 쏙쏙 들어가는 한국의 한 슈터를 보며 벌린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일부 매체에는 한국-필리핀의 이 경기가 결승전으로 소개돼 있는데 이 대회는 9개 나라가 돌려 붙기를 했기 때문에 결승전이 없고 대회 마지막 날 7승의 한국과 6승1패의 필리핀이 맞붙은 경기여서 결승전이나 다름없었다.
장년 팬들은 아마도 이날 신동파의 슛이 100%의 성공률을 보인 것으로 기억할지 모르겠다. 개인 득점 50점, 한국이 기록한 95점의 절반 이상이 신동파의 손에서 만들어졌다. 신동파는 슛 거리가 꽤 길었기 때문에 그때 3점슛 제도가 있었다면 그의 득점은 70점대 이상이었을 것이고 한국의 팀 득점은 세 자릿수였을 수 있다.
이 경기가 결정적인 계기가 돼 신동파는 1970년대 필리핀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필리핀에서는 어떤 일이 잘되면 ‘sindongpa’, 잘 안되면 ‘no sindongpa’란 말이 있었다는 전설 같은 얘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신동파의 신들린 듯한 슛을 막기 위해 악착같이 수비하던 필리핀 선수 3명이 5반칙으로 물러났다. 경기 막판에는 포워드인 신동파를 센터가 수비하는 진기한 장면이 펼쳐지기도 했다. 골 밑에 있어야 할 센터가 외곽으로 나오니 한국의 공격은 그만큼 수월해질 수밖에.
1960년대 초반 장충체육관을 지을 때 기술 지원을 했을 정도로 당시에는 필리핀이 한국보다 경제 등 모든 면에서 앞서 있었다. 한국은 이 경기를 라디오로 중계했지만 필리핀에서는 TV로 생중계됐다. 대회가 끝난 뒤 필리핀에서는 한국-필리핀 경기가 수십 번이나 재방송됐고 신동파는 필리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스타가 됐다. 신동파의 이름을 상호로 내건 가게들이 줄을 지어 생겼다는, 조금 믿기 어려운 일들이 실제로 벌어졌다.
1970년대 필리핀에서 세계적인 스포츠 스타들의 인기를 조사한 적이 있는데 신동파는 1972년 뮌헨 올림픽 수영 7관왕 마크 스피츠와 프로 복싱 헤비급 세계 챔피언 조지 포먼 등에 압도적인 차이로 1위를 차지했다. 신동파의 소속 팀인 기업은행은 1970년부터 그가 은퇴할 때까지 해마다 필리핀 초청 대회에 출전했다. 그는 8차례의 경기에서 경기당 평균 40점이 넘게 넣었고 최고 54점까지 기록했다.
필리핀 관중은 자국 선수의 파울로 신동파가 쓰러지면 필리핀 벤치를 향해 종이 뭉치와 부채 등을 던졌다. 필리핀에서 신동파의 인기는 절대적이었고 지금까지도 변함없다. 신동파가 PBA(필리핀농구리그) 챔피언 결정전을 관전하러 가면 하프타임에 장내 아나운서가 “우리의 전설이 왔다”라고 소개하고 1만 여 관중은 기립 박수를 친다고 한다.
신동파는 이후 한국 남자 농구 역사에 새로운 일들을 계속 남기게 된다. 한국은 1970년 5월 유고슬라비아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 아시아 챔피언 자격으로 출전해 13개국 가운데 11위를 기록했다. 2016년 현재 한국이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거둔 최고 성적이다. 한국보다 키가 훨씬 큰 캐나다를 조별 리그에서 97-88로 잡았고 순위 결정전에서는 호주를 92-79로 꺾는 등 대회 전체 성적이 4승4패였다. 준우승국인 브라질과 조별 리그에서 겨뤄 77-82로 선전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대회 부문별 기록을 보면 눈길을 사로잡는 대목이 있다. 득점자 순위다. 신동파는 8경기에서 평균 32.6점을 넣어 파나마의 데이비스 페랄타(20.0점), 체코슬로바키아의 지리 지데크(19.3점) 등을 압도적인 차이로 제치고 득점왕에 올랐다. 이 대회에서 슈팅 성공률이 80.4%였다. 이 정도 성공률이면 ‘던지는 대로 들어간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같은 해 12월 방콕에서 벌어진 아시안게임에서 한국은 신동파를 앞세워 조별 리그에서 필리핀을 77-75로 다시 한 번 잡았다. 결승 리그에서 필리핀에 65-70으로 졌으나 전 대회 우승국인 이스라엘을 81-67로 제치고 축구와 함께 동반 금메달을 획득하는 ‘역사’를 완성했다. 이 대회에서 한국과 1승1패를 기록한 필리핀은 자유중국(오늘날의 대만)에 64-75로 지는 등 2승3패로 부진해 5위에 그쳤다. 신동파는 김영기로부터 시작해 이충희 문경은 등으로 이어지는 한국 남자 농구 슈터 계보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도 ‘독수리 5형제’가 있었다?
제국주의 일본이 대한제국을 병탄한 뒤 한반도에서 체육활동은 일정한 한계 안에서 이뤄졌다. 조선총독부는 우리 민족에게 인기가 많은 축구의 대회 개최를 통제하려 하기도 했고 제 2차 세계대전이 본격화된 1940년대 초반에는 조선체육회를 일본인들의 단체인 조선체육협회에 흡수 통합해 스포츠 주권마저 빼앗았다. 또 하나 일제는 조선인 선수들의 국제 대회 출전을 최대한 억제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의 경우 마라톤의 손기정과 남승룡은 워낙 선발전 성적이 좋아 뽑지 않을 수 없었지만 축구의 경우 경성축구단이 1935년 6월 열린 베를린 올림픽 파견 선수 선발전을 겸한 제1회 전일본축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데 이어 그해 10월 벌어진 제8회 메이지신궁경기대회(우리나라의 전국체육대회쯤 되는 대회) 축구 종목 일반부에서도 정상에 올랐지만 정작 올림픽 대표팀에는 한반도에서 김용식 선생, 단 한 명만 뽑았다. 단체 경기의 경우 우승팀을 중심으로 다른 팀의 우수 선수를 보강하는 것이 기본인데도 이런 원칙은 철저히 무시됐다. 김용식 선생은 베를린 올림픽에서 3-2로 이긴 스웨덴과의 1회전, 0-8로 크게 진 이탈리아와의 8강전 등 일본이 치른 두 차례 경기에 모두 선발로 출전, 풀타임을 뛰었다. 일본 축구 관계자들도 김용식 선생의 실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농구는 좀 달랐다. 베를린 올림픽 대표 최종 선발전에서 우승한 연희전문학교(오늘날의 연세대학교)에서 이성구와 장이진, 염은현 등 3명을 선발했다. 농구 엔트리 12명 중 4분의 1이 조선인이었다. 베를린 올림픽 이후 1938년 1월 열린 전일본종합농구선수권대회 결승에서는 보성전문학교(오늘날의 고려대학교)가 연희전문을 43-41로 누르고 우승했다. 일본 농구 관계자들에게는 속이 쓰린 일이었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보성전문은 그해 9월 일본 국내 사정으로 일정을 앞당겨 치른 1939년 대회 결승에서 교토제대를 연장 접전 끝에 64-50으로 누르고 2연속 우승한 데 이어 1940년 1월 대회에서 도쿄 문리대에 58-37 대승을 거두고 전일본종합선수권대회 3연속 우승의 위업을 이뤘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든 종목은 마라톤과 축구만이 아니었다. 농구도 있었다.
>>>글 신명철 편집위원, 전 편집국장 smc6404@naver.com
이태문 동경 통신원 gounsege@gmail.com
2020년 올림픽을 앞둔 도쿄( 東京)는 현재 변신 중이다. 여기저기 재개발이 추진중이며, 올림픽에 맞춰 새 경기장 건설과 거리 조성도 한창이다. 지금도 속속 새로운 명소가 등장해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 가운데 도쿄역 왼쪽에 새로 지은 JP타워는 도쿄중앙우체국과 각종 점포, 레스토랑 등이 가득 들어선 공공시설로 인기를 얻고 있다.
과거·현재·미래의 융합
눈길을 끄는 것은 일본우편주식회사와 도쿄대학 종합연구박물관이 협력해 2013년부터 운영하고 있는 학술종합뮤지엄 인터미디어테크이다. 지상 2층과 3층을 연결해 2996m²의 널찍한 전시 공간과 강의 시설 등을 자랑하는 이곳은 산학협동의 롤모델로서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이곳에서는 도쿄대학이 1877년 개교한 이래 수집해온 각종 학술 표본과 연구 자료 등 ‘학술문화재’로 불리는 귀중한 자료들이 상설 전시중이다. 특별 전시와 기획 행사에서는 최첨단 과학의 성과와 각종 표현 미디어의 독특한 창조물도 선보이고 있다. 일본은 물론 지구촌 구석구석 다양한 장르의 학문 분야를 한자리에서 살필 수 있으며, 과거와 현재, 미래의 색다른 융합도 맛볼 수 있다.
특히 렉처 시어터로 불리는 ‘아카데미아(ACADEMIA)’의 공간에서는 귀중한 영상 및 음성 자료가 학예사의 친절한 설명과 함께 정기적으로 소개돼 많은 마니아층과 일반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2월 26일 오후 6시부터 1시간 가량 열린 그래모폰(Gramophone) 기획 26회차 행사는 재즈의 집대성으로 알토편이 진행됐다. 아카데미아에는 1925~1928년에 만들어진 빅토롤라(Victrola)사의 명품, 캐나다제 크레덴자(Credenza) VV8-30 과 일본의 악기 설계자 히라바야시 이사무(平林勇, 1904~1938)가 1931~1932년경 제작한 독자적인 음성 증폭 시스템이 달린 축음기 등 2대의 축음기가 설치되어 있다.
이날 행사에서는 빅토로라의 크레덴자로 1942년 데카(Decca)사에서 출시된 앨범 ‘알토 섹소로지(Alto Saxology)’에 수록된 지미 도시(Jimmy Dorsey)와 1939년 5월 26일 녹음한 ‘로망스(Romance)’를 비롯해서 도시 형제의 ‘테일스핀(Tailspin)’, 알 쿠퍼(Al Cooper)의 ‘(When I GrowToo Old to Dream’ 등 주옥 같은 재즈 명곡 10곡이 축음기를 통해 당시의 생생한 음을 되살려냈다.
도쿄의 야경과 추억을…
깔끔한 디지털 사운드가 아닌 인간의 육성에 가장 가까운 음역대에서 재현되는 축음기의 아날로그 사운드는 LP판의 굴곡과 함께 숨결처럼 떨리는 잡음 속에서 마치 이야기를 걸듯 귓속으로 다가왔다. 이날 주제인 알토에 걸맞은 색소폰이 이끄는 재즈 리듬이 70여 명의 참가자들로 가득 찬 아카데미아를 부드럽게 감싸안고, 때로는 1930년대 미국 대공황 속 우울한 대도시의 그늘을 묵직하게 그려내기도 했으며, 경쾌한 스윙풍의 재즈로 흥을 돋우기도 했다.
이날 행사는 창밖의 도쿄역 야경과 함께 추억의 한 페이지를 수놓기에 충분한 시간 여행이었으며, 축음기가 지닌 소박한 휴머니즘을 만끽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행사였다. 귀에 거슬리는 LP판의 잡음이 아니라 기억을 긁어 잠자던 감각을 일깨우는 느낌이라고 할까, 따뜻한 인정미마저 느껴지는 색다른 체험이었다.
현역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는 회사원 요시다 쇼타로 씨(62세)는 “대학 시절 재즈에 빠져 친구들과 밴드도 꾸려 연주 활동도 했지만, 직장 생활에 쫓겨 재즈와 거리를 두고 살았다. 재즈의 집대성 시리즈 행사로 모처럼 재즈의 매력에 젖을 수 있어 자주 이곳을 찾는다”며 “여기 설치된 축음기와 소장된 희귀 음반은 웬만한 집 한 채 값을 훨씬 넘을 텐데, 공짜로 매달 좋아하는 재즈와 해후할 수 있어 너무 행복하다”고 밝혔다.
인터미디어테크 전시 공간과 아카데미아의 기획 행사는 모두 입장 무료이다. 일본 도쿄를 출장 혹은 여행으로 찾는 기회가 있다면 한번쯤 JP타워를 방문해 색다른 추억을 만들어 봄직하다.
중·장년 스포츠 팬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쳐 스포츠의 매력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 또는 할아버지 손에 이끌려 동대문운동장(축구장·야구장·테니스장·수영장)이나 효창운동장 그리고 리모델링을 하기 전 장충체육관 등에 가면서 스포츠의 세계로 들어섰을 수도 있고 국제대회에 출전한 우리나라 선수들의 활약상을 라디오 중계방송을 통해 듣게 되면서 스포츠의 매력에 끌렸을 수도 있을 것이다. 또는 다니는 학교에 운동부가 있어 응원에 동원되면서 자신도 모르게 스포츠에 익숙해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글쓴이는 두 번째 사례에 든다.
1960년대 중반, 강원도 신철원군 갈말면 지포리에 있는 신철원국민학교에 다니던 아이는 라디오 중계로 1964년 도쿄 올림픽 복싱 정신조와 사쿠라이(뒷날 스포츠 기자가 된 뒤 당시 자료를 살펴보고 사쿠라이 다카오라는 ‘풀 네임’을 확인했다)의 밴텀급 결승전 경기, 그리고 1964년과 1965년 캐시어스 클레이(뒷날 무하마드 알리로 개명)와 소니 리스턴의 프로복싱 세계 헤비급 타이틀매치 등을 들었다. 그 아이는 물론 글쓴이다.
그런데 중학교 때 이 아이는 이번 호의 주인공인 김영기(金英基) 때문에 또 다른 스포츠의 매력에 빠졌다.
현직 프로농구연맹(KBL) 총재인 김영기는 배재고~고려대를 거쳐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국가대표를 지냈다. 김 총재는 화려한 드리블로 대표되는 뛰어난 개인기로 농구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김 총재는 1965년 은퇴한 뒤 직장 생활 틈틈이 박정희장군배 동남아시아여자농구대회, 미국프로농구(NBA) 등 각종 경기의 해설을 맡아 선수 시절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다. 밀워키 벅스와 같은 NBA 구단 이름이나 오스카 로버트슨, 빌 러셀 등 1960년대 NBA 스타플레이어의 이름을 김 총재의 해설로 알게 됐다.
김 총재는 각종 기록을 근거로 특정 팀 간 승패는 물론 예상 스코어까지 내놓아 농구 팬들의 관심을 끌었다. 요즘 같으면 스포츠 통계 회사에서 컴퓨터로 할 일을 거의 반세기 전에 수작업으로 한 것이다. 특히 1967년 서울에서 열린 제4회 아시아남자농구선수권대회 때는 이 같은 예상이 족집게처럼 들어맞아 농구 팬들의 탄성을 자아냈다.
김 총재의 해설은 그의 선수 시절 경기력만큼이나 뛰어났다. 어린 시절 기억을 떠올리면서 이 일화를 스포츠 기자가 된 뒤 김 총재에게 이야기했더니 김 총재는 “우연히 맞혔을 뿐”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이제는 폐간된, 2000년대 초반 스포츠 팬들에게 인기를 끌었던 ‘스포츠 2.0’은 배재고등학교 시절 김영기를 “179㎝의 키, 가냘픈 체구였지만 리드미컬한 드리블, 요즘 더블 클러치라고 하는 이중 모션과 아마도 한국 농구 사상 처음일, 한 손 슛을 던지는 선수”라고 설명했다.
한국 남자 농구는 1948년 런던 올림픽에 이어 1956년 멜버른 올림픽에 출전했다. 이 대회에 1936년생인 약관의 김영기가 출전했다. 한국 농구의 경기력이 세계 수준에 크게 못 미쳐 출전 15개 나라 가운데 14위에 그쳤지만 우승국 미국의 빌 러셀 같은 뛰어난 선수들의 플레이와 선진적인 전술을 본 것은 뒷날 지도자 김영기에게 큰 공부가 됐다.
김영기는 1964년 도쿄 대회에 두 번째로 올림픽에 출전했다. 당시로는 노장인, 우리나라 나이 29세 때였다. 1960년대 후반, 지도자와 선수로 힘을 모아 한국 남자 농구의 1차 전성기를 이끌게 되는 신동파가 20세로 대표팀의 막내였다. 이 대회에서도 한국은 세계의 벽을 실감했다. 출전 16개국 가운데 꼴찌에 그쳤다. 개최국 일본은 10위에 올랐다. 이 무렵 한국 남자 농구는 1962년 자카르타 아시아경기대회에서 필리핀과 일본에 이어 3위를 하는 등 아시아권에서도 3위 안팎의 실력이었다.
농구인 김영기의 진가는 은퇴 이후 더 빛났다.
김영기는 33세 때인 1969년 11월, 방콕에서 열린 제5회 아시아남자농구선수권대회 국가대표팀 코칭스태프에 합류했다. 보직은 코치였으나 실질적인 사령탑이었고 대표 선수들 가운데 김영일, 김인건, 신동파 등은 선수 생활을 함께한 직계 후배들이었다. 9개 나라가 출전한 이 대회에서 한국은 개최국 태국에만 93-92로 아슬아슬하게 이겼을 뿐 일본과 자유중국(오늘날의 대만) 등을 가볍게 물리친 뒤 실질적 결승전인 필리핀과의 마지막 경기에서 95-86으로 이겨 대회 사상 첫 우승의 기쁨을 누렸다. 필리핀과의 경기에서 신동파가 기록한 50점은 신세대 농구 팬들에게도 화젯거리가 되고 있다.
김영기는 신동파를 슈터로 활용하면서도 그에게만 의존하지 않는 공격 전술과 다양한 수비 전술로 한국 남자 농구를 아시아 정상에 올려놓았다. 그 무렵 다른 종목들도 그랬지만 아시아 정상에 오른 대표팀은 김포국제공항에서 서울시청까지 카퍼레이드를 벌이는 등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1년여 뒤인 1970년 12월, 역시 방콕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경기대회에서 김영기가 이끄는 남자 농구 대표팀은 조별 리그에서 이란을 110-77, 홍콩을 116-51로 연파한 데 이어 필리핀을 79-77로 따돌리고 조 1위로 6개국이 겨루는 결승 리그에 올랐다. 한국은 결승 리그에서 필리핀에 65-70으로 잡혔으나 강호 이스라엘을 81-67로 물리쳐 물고 물리는 혼전 속에 금메달의 영광을 안았다. 서울에서 열기로 돼 있다가 재정 문제로 반납한 이 대회에서는 농구와 축구가 동반 우승하는 쾌거를 이뤄 온 나라가 열광의 도가니가 됐다.
두 대회 사이에 한국 농구사에 오래도록 남을 또 하나의 기록이 수립됐다. 한국은 1970년 5월 유고슬라비아에서 열린 제6회 세계남자농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해 11위를 기록했는데 이 성적은 2015년 현재 최고 순위다. 이 세 차례 대회에 출전한 한국 남자 농구 대표팀의 지휘관이 김영기다.
김영기는 농구인의 범주에만 머물지 않았다. 1982년 대한체육회 이사와 대한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 1983년 대한체육회 부회장을 지내며 체육 행정가로서 활동했고 40대 후반의 나이였던 1984년에는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한국 선수단 총감독을 맡았다. 이 대회에서 고려대학교 후배인 조승연 감독이 이끄는 여자 농구가 중국을 제치고 은메달을 차지했다.
1985년부터 12년 동안 대한농구협회 부회장으로 활동한 김영기는 1997년 KBL 전무이사를 맡아 프로농구 출범에 큰 힘을 보탰다. 이후 KBL 부총재를 거쳐 2002년 11월 KBL 제3대 총재로 추대돼 1년 5개월 동안 프로농구를 이끌었다. 2003년 12월 국내 프로농구 사상 첫 몰수 경기 파문으로 2003~2004년 시즌 뒤인 2004년 4월 사퇴해 10년간 일선에서 물러나 있었으나 지난해 5월 제8대 KBL 총재로 선임되면서 일선으로 돌아왔다. 이는 오랜 기간 농구계 원로로서 쌓아온 신망의 결과다.
그의 또 다른 이력이 있다. 기업은행 지점장과 신용보증기금 전무이사, 신보투자 사장 등 금융인으로서의 경력이다. 선수 시절 그는 미국의 유명 스포츠 전문지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를 탐독했다. 요즘 스포츠계의 화두인 ‘공부하는 운동선수, 운동하는 학생’의 본보기다.
농구에도 ‘거스 히딩크’가 있었다
농구 올드 팬 가운데 남자 농구 대표팀이 서울 용산에 있는 미 제8군 체육관에서 미군과 친선경기를 하는 장면을 TV로 본 적이 있는 이들이 꽤 있을 것이다. 1964년 도쿄 올림픽 참패 이후 한국 남자 농구에 축구의 거스 히딩크 같은 인물이 나타났다. 1965년 국가대표팀 코치를 맡은 미 제8군 소속 찰스 마콘 소위다. 미 제8군 사령부가 대한농구협회에 코치로 추천한 마콘 소위는 미국 대학 농구의 명문 데이비슨 칼리지의 주전 가드 출신이었다. 데이비슨 칼리지는 1964~1965년 시즌을 앞두고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가 전미 대학 랭킹 1위로 꼽을 만큼 1960년대에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농구 본고장의 명문대 출신인 젊은 장교는 열과 성을 다해 한국 남자 농구 대표 선수들의 훈련을 도왔다. 마콘 소위가 1967년 임기를 마치고 한국을 떠나자 그의 자리를 제프 거스플 중위가 이어받았다. 거스플 중위는 페어레이디킨슨대학교에서 선수 생활을 한 농구인이었다.
이들의 노력과 함께 미 제8군은 1968년 1월 남자 농구 대표팀의 미국, 캐나다 원정을 지원했다. 이인표, 신동파, 김무현, 김인건, 유희형, 박한, 최종규, 신현수, 곽현채, 김정훈은 미군이 제공한 군용기를 타고 미국으로 가 본고장 농구를 익혔다. 북미 원정에 코치로 참가한 거스플 중위는 이후 1968년 멕시코 올림픽에 한국 선수단의 일원으로 참가한 뒤 미국으로 돌아갔다. 마콘 소위와 거스플 중위가 떠난 이후 한국은 1969년 방콕에서 열린 제5회 아시아남자농구선수권대회에서 드디어 처음으로 정상에 올랐다.
>>>글 신명철 편집위원, 전 편집국장 smc6404@naver.com
스포츠 올드 팬들에게 우리나라 축구 선수 계보를 살펴보라고 하면 차범근과 함께 빠뜨리지 않고 등장할 인물이 있다. 스포츠 올드 팬들이 거의 공통적으로 이야기할 한국 축구 선수 계보는 일제 강점기 유일하게 올림픽(1936년 베를린 대회)에 출전한 김용식을 첫머리로 ‘아시아의 황금 다리’ 최정민에 이어 이번 호의 주인공인 이회택(李會澤)을 거쳐 차범근 그리고 신세대 팬들에게 익숙한 홍명보, 박지성, 손흥민 등으로 이어질 것이다.
이회택은 1960~1970년대 한국 축구가 세계무대를 향해 나아가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번번이 좌절했던, 가슴 아픈 시대를 대표한다. 월드컵은 물론 올림픽에도 출전하지 못했고 직계 후배인 차범근처럼 국외 리그에도 진출하지 못했다. 한국 축구 암흑기에 활동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의 모든 올드 팬은 그의 이름 석 자를 한국 축구와 함께 떠올린다. 그리고 생각한다. “이회택이 10년만 늦게 태어났더라면, 아니 요즘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물론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1960년대 중반 이후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축구 팬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다시피 한 이회택.
한국 축구 2세대 스트라이커인 이회택은 요즘 기준으로 보면 큰 체격이 아니다. 1972년 6월 펠레가 이끄는 브라질의 명문 클럽 산투스가 내한해 한국 대표팀과 친선경기를 가진 뒤 찍은 사진을 보면 이회택은 대표적인 단신 공격수인 김진국(프로필 165㎝)과 키가 거의 같다. 이 경기에서 산투스가 3-2로 이겼는데 펠레의 통산 1204번째 골이 나왔고 한국은 이회택과 국가 대표가 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차범근이 골을 넣었다.
한국 축구 스타 계보를 잇는 이회택과 차범근은 이 경기 직전인 그해 5월 방콕에서 열린 제 5회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을 준우승으로 이끌었다. 4-1로 이긴 이 대회 예선 B조 크메르(오늘날의 캄보디아)와의 경기에서 이회택과 차범근은 나란히 한 골씩을 기록했다. 그때 기준으로 베테랑인 이회택(26세)과 차범근(19세)의 신구 조화는 축구 팬들의 기대를 한껏 모았다.
동북고 3학년인 1965년 청소년 대표팀에 뽑힌 이회택은 그해 4월 도쿄에서 열린 제 7회 아시아청소년선수권대회에 출전했다. 그러나 한국은 요즘의 시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성적인 예선 1승 3패, 조 꼴찌로 탈락했다. 태국에 0-1, 버마(오늘날의 미얀마)에 0-2, 말레이시아에 0-1로 지고 인도에만 4-1로 이겼다.
국내에서는 초고교급 실력을 자랑하던 이회택은 이듬해인 1966년 제 5회 방콕 아시아경기대회에 대비한 국가 대표팀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그해에 대한축구협회는 대표팀 선발 문제를 놓고 크게 분란이 일었다. 그 무렵 종종 있는 일이었다. 동남아시아 지역 친선 대회인 메르데카배대회에서 4위, 방콕 아시아경기대회에서 예선 탈락의 쓴잔을 마셨다. 방콕 대회에서는 태국에 0-3, 버마에 0-1로 졌으니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 예선에 대비해 세대교체를 하고 꾸린 대표팀이라고 해도 협회는 할 말이 없게 됐고 이회택은 활약할 기회조차 잡지 못했다.
이제 문제의 멕시코시티 올림픽 아시아 지역 예선이다. 이 예선은 1967년 9월, 일본 스포츠의 심장으로 불리는 요요기 국립경기장(1964년 도쿄 올림픽 주 경기장)에서 벌어졌다. 한국은 이회택을 비롯해 골키퍼 이세연과 수비수 김호, 김정남, 김정석, 공격수 정병탁, 김창일 등 패기만만한 멤버들이 1948년 런던 대회 이후 20년 만의 올림픽 출전에 도전장을 던졌다.
한국은 자유중국(오늘날의 대만)을 4-2, 레바논을 2-0, 월남을 3-0으로 물리치고 같은 3승의 일본과 맞붙었다. 사실상의 결승이었다. 일진일퇴의 숨 막히는 접전 끝에 두 나라는 3-3으로 승패를 가리지 못했다. 이 경기에서 이회택은 0-2로 뒤진 후반 3분, 1-2로 따라붙는 추격 골을 넣었고 가마모토 구니시게(釜本邦茂)는 전반 13분과 후반 21분 각각 선제골과 3-2로 달아나는 골을 기록했다. 1946년생인 이회택과 1944년생인 가마모토의 축구 인생이 이 경기에서 갈렸다.
한국은 필리핀, 일본은 월남과 경기를 남겨 놓고 있는 가운데 한국은 골득실차에서 +7로 +21의 일본에 크게 뒤져 있었다. 일본이 필리핀을 15-0이라는 기록적인 스코어로 이겼기 때문이다. 15골 이상으로 이겨야 한다는 부담 속에 한국은 필리핀을 5-0으로 이긴 반면 일본은 월남을 1-0으로 누르고 본선 티켓을 손에 넣었다.
1969년 10월 서울에서 열린 1970년 멕시코 월드컵 아시아-오세아니아 예선에서 이회택은 가마모토 구니시게와 다시 한 번 겨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가마모토 구니시게는 부상 때문에 출전하지 않았고 한국은 1승 2무 1패로 2승 2무의 호주에 밀려 탈락했다.
이회택은 A매치 32골의 기록을 남기고 그라운드를 떠났다. 1960~70년대 한국 축구의 전반적인 경기력이 조금만 더 높았다면 그의 이력은 올림픽과 월드컵 출전 등으로 더욱 화려했을지 모른다.
◇ 신금단 부녀 상봉에 이은 이회택 부자 상봉
이회택은 할머니의 보살핌을 받고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한국전쟁의 와중에 의용군이 돼 북한으로 갔고 어머니는 재가했기 때문이다. 부모의 정을 모르고 자란 그에게 축구는 최고의 친구였고 부자 상봉의 큰 선물까지 안겼다.
이회택은 1989년 10월 싱가포르에서 열린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아시아 지역 최종 예선에서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이탈리아전 1-0 결승 골의 주인공인 북한 박두익 감독으로부터 네살 때 헤어진 아버지의 생존 소식을 확인했다. 이회택은 이 예선을 3승 2무로 통과해 한국의 세 번째 월드컵 출전을 이끌며 지도자로서도 축구사에 한 획을 그었다.
이듬해인 1990년 열린 ‘남북통일축구경기‘에 이회택은 남측 선수단 고문 자격으로 방북해 10월 10일 평양에서 꿈에도 그리던 아버지 이용진씨와 감격적인 상봉을 했다. 1964년 도쿄 올림픽 때 신금준-금단(1960년대 초반 육상 400m·800m 세계 기록 보유자) 부녀 상봉, 1990년 2월 삿포로 동계 아시아경기대회 때 한필성-필화(1964년 인스브루크 동계 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3000m 은메달리스트) 남매 상봉에 이은 스포츠계 남북 핏줄의 만남이었다.
>>>글 신명철 편집위원, 전 편집국장 smc6404@naver.com
인간은 망각의 동물인 동시에 기억의 동물이다. 세월에 쓸려 사라지는 기억이 있는가 하면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기억이 있다. 시간이 지나도 잊을 수 없는 9월의 기억으로 1988년 서울에서 개최된 제24회 하계올림픽, 그리고 올림픽 유치가 확정됐던 1981년 9월 바덴바덴, 올림픽 유치의 주인공 김운용 전 IOC 부위원장을 재조명해본다.
1981년 9월 30일, 자정을 앞둔 늦은 시각, 온 국민이 숨죽이고 TV 앞에 앉았다. 시선은 독일의 작은 도시 바덴바덴을 향했다. 사마란치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이 1988년 올림픽 개최지가 적힌 봉투를 들고 나타났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프랑스어를 알아듣는 국민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사마란치의 입에서 나온 “쎄울(서울)”은 누구라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집집마다 기쁨의 함성이 터져나왔다.
서울올림픽은 대한민국의 9월을 환호의 계절로 만들었다. 당시 대한민국은 가난한 개발도상국이었다.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선 지는 불과 한 세대도 지나지 않았던 때였다. 승리를 예상하기 어려웠던 만큼 기쁨도 컸다. 더욱이 국민들은 상대가 일본이었다는 것이 더욱 기뻤다. 7년 뒤 1988년 9월에는 예정대로 서울올림픽이 전 세계의 전파를 탔다.
세계가 비웃던 유치선언, 세계가 놀란 역전극
서울이 일본 나고야와의 유치경쟁에서 이길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없었다. 1980년대 초만 해도 외국인들의 눈에 대한민국은 여전히 ‘전쟁폐허’ 이미지가 강했다. 더욱이 한국은 앞서 1974년에도 아시안게임을 유치했다가 능력 부족을 이유로 포기한 전력이 있었다. 일본은 이미 1964년 도쿄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러낸 경험이 있었다. 기반시설, 자금력, 국제스포츠계 인맥 모든 면에서 서울은 나고야에 경쟁이 되지 않는 상대로 보였다.
국내의 시각도 올림픽 유치에 부정적이었다. 나고야와 표 대결을 해 봤자 형편없이 져 망신당할 것이란 우려가 팽배했다. 남덕우 당시 국무총리를 비롯한 정부 주요 인사들은 설령 유치에 성공한다 해도 대회를 치러 낼 경제력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는 ‘올림픽 망국론’을 펼쳤다. 국제사회에서 한국이 유치 신청을 철회할 거란 소문이 파다했다. 훗날 서울올림픽 민간추진위원장이었던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은 독일 바덴바덴으로 떠날 때 정부로부터 “창피만 당하지 말아 달라”는 말을 들었다고 전했다.
개최지 선정 당일까지 서울의 승리를 점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외신은 누가 이길지가 아닌, 나고야가 몇 표 차이로 이길지에 초점을 뒀다. 하지만 결과는 52 대 27. 전체 79표 중 52표를 얻은 서울이 나고야를 두 배 가까이로 따돌리고 1988년 제24회 하계올림픽 개최권을 따냈다. 세계가 깜짝 놀란 대이변이었다.
냉전마저 녹여낸, 역사상 가장 성공적 올림픽
1988년 9월 17일 예정대로 서울올림픽의 막이 올랐다. 서울올림픽에는 160개국에서 1만3304명의 선수단(선수 9417명·수행인원 3887명)이 참가해 올림픽 역사상 최다 참가국과 참가인원 기록을 경신했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이 냉전으로 ‘반쪽 대회’가 됐던 것과 대비되는 부분이다. 외신들은 분단국가인 한국에 냉전으로 대립하던 각국이 모인 장면을 보며 ‘냉전종식의 신호탄’이라는 의미를 부여했다.
재정 측면에서도 당초의 우려를 불식했다. 당시는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의 이스라엘 선수단 테러사건으로 보안비용이 폭증했고,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이후 몬트리올시의 파산 등으로 올림픽 유치 회의론이 퍼지던 시기였다. 올림픽조직위원회는 대회에 총 2조3826억 원이 투입돼 2520억 원의 흑자를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당시 상황에서 회계의 오차범위를 다소 고려한다 해도 예상보다 훨씬 더 큰 성공을 거둔 것만은 분명했다.
대회운영 자체도 성공적이었다. 전 국가 차원의 역량을 결집한 결과였다. 개막 전까지만 해도 성공 여부를 반신반의했던 세계 스포츠계는 서울올림픽의 매끄러운 대회 운영을 칭찬했다. 대회기간 총 237개 세부 종목의 경기 중 지연된 경기는 단 6개뿐이었다. 대회에서는 냉전의 양 축이었던 소련과 미국이 나란히 1, 2위를 기록했고 동독이 3위에 올랐다. 한국은 금메달 12개, 은메달 10개, 동메달 11개로 역대 최고성적인 4위를 기록했다.
세계는 서울로, 서울은 세계로… 올림픽 이후 달라진 한국
서울올림픽은 대한민국의 도약에 커다란 시너지를 준 것으로 평가된다. 이를 두고 이홍구 전 국무총리는 “한국인은, 특히 젊은이들은 서울올림픽 이후 왕년의 고질적인 고립주의, 패배의식, 열등감을 털어버렸다”고 표현했다. 김운용 전 IOC부위원장은 “일본의 메이지유신이 일본인에게 신분에 상관없이 성공할 수 있다는 의식을 심어준 것처럼 서울올림픽도 우리 국민에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었다”고 말했다.
경제 측면에서 ‘3저호황(저달러·저유가·저금리)’과 맞물린 올림픽의 성공은 오늘날까지도 한국경제의 근간을 이루는 수출산업에 커다란 호재가 됐다. 올림픽은 ‘코리아’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던 세계 각국에 한국의 발전된 모습을 알렸다. 한국 경제의 국제적 지위가 올라간 것이다. 한국 기업의 공격적인 세계무대 진출이 시작된 시점도 서울올림픽 이후부터다.
전반적인 사회 모습도 대한민국은 올림픽 전후로 딴판이 됐다. 서울에 쏠린 세계의 이목은 민주화를 앞당겼다. 노동계의 요구를 수용해 최저임금법이 제정된 것도 1988년이다. 임금이 높아지자 내수가 급격히 성장했다. ‘마이카 시대’로 대표되는 소비시대가 도래했다. 학교에서는 단계적으로 급식이 시작됐고, 먹거리와 생활용품을 공산품이 채워가기 시작했다. 올림픽을 계기로 마련된 지하철, 아파트, 체육시설 등의 사회간접자본도 한국인의 삶을 바꿨다.
초등학교 시절, 이탈리아는 우리나라와 비슷한 점이 많은 나라라고 담임선생님에게서 배운 기억이 난다. 같은 반도국가이고 두 나라 국민들이 노래를 즐겨 부른다는 등. 그래서 이탈리아는 왠지 가깝게 느껴지는 나라였다. 그런데 1960년대에 이탈리아 사람들은 ‘코리아’라고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깜짝 놀랄 일을 연달아 경험하게 된다.
한국의 김기수는 1966년 6월 25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WBA(세계복싱협회) 주니어 미들급 챔피언인 이탈리아의 지오반니 벤베누티(국내 스포츠 팬들에게는 애칭인 니노로 알려져 있다)에게 도전했다. 벤베누티는 1960년 로마 올림픽 웰터급 금메달리스트로, 복싱 실력은 두말 할 필요도 없는, 당시 세계 동급 최강이었고 외모 또한 준수해 지금으로 치면 ‘꽃미남’이었다. 이탈리아 스포츠 팬, 특히 여성 팬의 우상이었다. 그런 벤베누티가 동양 여행 삼아 나선 타이틀전에서 무명의 복서에게 챔피언벨트를 내줬다. 이탈리아는 경악했다. 벤베누티의 아마추어 전적은 120승 1패이고 김기수에게 진 뒤에는 미들급으로 체급을 올려 세계 프로 복싱 양대 기구인 WBA와 WBC(세계복싱평의회) 챔피언을 지내는 등 이탈리아인들의 사랑을 계속 받기는 했다.
얼마 뒤인 그해 7월 19일 북한은 영국 미들스보로에서 1만8727명의 유료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열린 잉글랜드 월드컵 4조 마지막 경기에서 1934년, 1938년 대회 우승국이자 세계적인 축구 강국 이탈리아를 1-0으로 꺾고 월드컵 역사에 길이 남을 이변을 일으켰다. 월드컵 역사는 이 경기와 1950년 브라질 대회에서 미국이 잉글랜드를 1-0으로 제친 경기를 깜짝 놀랄 경기 가운데 첫 손가락으로 꼽고 있다. 1라운드 탈락의 수모를 당한 이탈리아 선수들은 귀국길에 자국 팬들로부터 토마토 케첩과 잼 세례를 받았다.
한국인 이상으로 스포츠에 열광하는 이탈리아인들에게 충격을 안긴 김기수를 ‘스포츠 인물 열전’ 첫 번째로 꼽은 까닭은 한국전쟁의 혼란기를 이겨 내고 세계 속의 한국으로 나아가려고 몸부림치던 1960년대 중반, 아마추어와 프로를 막론하고 스포츠 팬들은 물론 국민들에게 ‘한국도 세계 최고(챔피언)’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선물했기 때문이다. 한국의 첫 올림픽 챔피언(1976년 몬트리올 대회 레슬링 금메달리스트 양정모)은 이때로부터 10년 뒤에 나온다. 1960년대 후반, 김기수가 뻗는 주먹은 모든 이들에게 고단한 삶을 잠시나마 잊게 했다.
김기수는 1939년 함경남도 북청에서 태어났다. 12세 때인 1·4 후퇴 때 남녘으로 와 전라남도 여수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스포츠를 좋아하는 형에게 자극을 받아 복싱에 입문해 1957년 전국아마추어복싱선수권대회 주니어 웰터급에서 우승했고 곧 이어 서울 성북고로 전학해 을지로 3가에 있는 한국체육관에서 복싱에 전념했다.
그 무렵 성북고는 복싱과 레슬링 등 격투기 종목을 집중적으로 육성해 우수한 선수들을 많이 배출했다.
김기수는 아마추어 시절에도 뛰어난 복서였다. 1957년부터 1960년까지 열린 각종 국내 대회에서 연전연승했다. 그 사이 1958년 도쿄 아시아경기대회 웰터급에서 금메달을 차지했고 1962년 프로로 전향하기 전까지 88전 87승 1패의 놀라운 기록을 남겼다. 유일한 1패가 1960년 로마 올림픽 웰터급 2회전(16강)에서 벤베누티에게 당한 판정패였다. 비록 올림픽 챔피언이 되지는 못했지만 김기수는 아마추어에서도 세계적인 수준의 경기력을 발휘했고 1964년 도쿄 올림픽 은메달리스트 정신조, 1968년 멕시코시티 대회 은메달리스트 지용주 등으로 이어지는 올림픽 복싱 메달리스트들의 징검다리 구실을 했다.
프로에서도 연승 행진을 이어간 김기수는 1962년 12월 일본 원정 두 경기를 포함해 프로 데뷔 네 번째 경기에서 강세철을 판정으로 물리치고 국내 미들급 챔피언이 됐다. 1965년 1월 일본의 가이즈 후미오(海津文雄)를 6회 KO로 누르고 동양 미들급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한 김기수는 여세를 몰아 이듬해 벤베누티와 6년 만에 다시 만나 2-1 판정승을 거두고 한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프로 복싱 세계 챔피언이 됐다. 이 경기는 박정희 대통령이 관중석에서 지켜볼 정도로 전 국민적인 관심사였다. 박 대통령의 결단으로 5만 달러가 넘는 벤베누티의 개런티를 줄 수 있었기에 한국인 첫 세계 챔피언이 나올 수 있었다. 1950년대에는 외환 사정이 더 나빠 축구 대표 선수들이 외상으로 비행기를 타고 국제 대회에 출전해야 하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김기수가 세계 챔피언의 자리에 오르던 날 사진을 보면 챔피언벨트를 허리에 감은 김기수 옆에 있는 이방인이 눈에 띈다. 미국인 트레이너 보비 리처드다. 리처드는 김기수의 세계 타이틀 도전이 확정되자 트레이너로 영입된 인물이다. 일본 프로 복싱계에서 활동하던 리처드는 뒷날의 거스 히딩크 같은 족집게 과외 선생이었다.
김기수는 리처드의 지도를 받으며 타이틀 매치를 준비했고 15라운드 내내 왼손잡이 이점을 살리면서 포인트 위주의 작전을 펼쳐 챔피언이 됐다. 당시 언론에서는 이를 ‘히트 앤드 클린치(Hit and Clinch)’라고 표현했다. 짧은 기간이라도 외국인 지도자가 쓸모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첫 번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1966년 12월 스탠리 해링턴(미국), 1967년 10월 프레디 리틀(미국)을 상대로 타이틀을 방어한 김기수는 1968년 5월 3차 방어전에서 산드라 마징기(이탈리아)에게 판정으로 져 타이틀을 빼앗긴 뒤 그해 11월에는 미나미 히사오(南久雄)에게 판정으로 져 동양 미들급 타이틀도 내놓았다. 1969년 3월 리턴매치에서 미나미에게 판정승을 거두고 타이틀을 되찾았으나 그해 9월 27일 장충체육관에서 은퇴식을 갖고 글러브를 벗었다. 프로 복싱 전적은 49전 45승 2무승부 2패다.
김기수는 은퇴한 뒤 사업가로 활동했다. 그가 서울 충무로에 개업한 챔피언다방은 복싱 올드 팬들에게 잊을 수 없는 명소다. 행복한 은퇴 생활을 하던 김기수는 안타깝게도 한창 나이 58세 때인 1997년 세상을 떠났다. 김기수는 프로 데뷔 초기 일본에서 활동하며 귀화 제의를 받았지만 일언지하에 거절한 일화가 있다.
한국은 김기수의 세계 타이틀 획득이 기폭제가 돼 1970년대 홍수환과 유제두, 1980년대 유명우와 장정구 등 수많은 챔피언을 배출했고 WBA와 WBC에 동시에 세 명의 챔피언을 보유하기도 하는 등 세계적인 프로 복싱 강국으로 성장했다.
세계 챔피언 김기수가 태어나기 훨씬 전, 일제 강점기에 한국인 프로 복싱 세계 랭커가 있었다면 쉽게 믿기 어려울 터. 프로 복싱 한국 최초의 세계 랭커 서정권은 전남 순천 갑부 집안의 4남 3녀 가운데 셋째로 1912년 태어났다. 플라이급과 밴텀급 선수로 일본 무대에서 활약하다 1932년 미국으로 건너가 WBC 밴텀급 6위까지 오르는 등 활약했으나 더 이상의 발전을 하지 못하고 1936년 귀국해 세계 랭커였다는 긍지로 평생을 살다 1984년 타계했다.
서정권은 16세 때 동향의 마라톤 선수 남승룡(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동메달리스트)과 함께 도쿄로 건너가 한국 최초의 올림픽 출전(1932년 로스앤젤레스 대회) 복서인 황을수의 지도를 받았다. 그때 도쿄에 유학하고 있던 서정권의 큰형은 두 소년이 복싱 선수가 되겠다는 것을 우려해 자신이 후원하던 황을수에게 “복싱에 대한 의욕을 단념하도록 혼내 주라”고 부탁했다. 황을수의 강펀치에 이가 흔들거리자 남승룡은 글러브를 놓았으나 서정권은 오기로 버티면서 형과 황을수가 놀랄 만한 투지와 기량을 보였다. 재능이 뛰어나다고 여긴 황을수의 지도를 받으며 복싱에 매진한 서정권은 일본을 석권하고 미국으로 진출하게 된다.
글 신명철 전 스포츠서울 편집국장 smc6404@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