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뒤에도 허리디스크(요추추간판탈출증) 환자의 비수술 한의통합치료 효과가 유지된다는 연구논문이 최근 최초로 발표돼 화제다. 자생한방병원 척추관절연구소는 7일 자생한방병원의 한의통합치료를 받은 허리디스크 환자들을 10년간 추적 관찰한 결과 통증과 기능 개선 정도가 안정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자생한방병원 이진호 병원장(제1저자) 연구팀은 2006년 11월부터 2007년 4월까지 허리디스크로 자생한방병원에 내원해 추나요법과 침치료, 약침, 한약 처방 등 한의통합치료를 6개월간 받은 환자 가운데 10년 추적관찰에 성공한 65명을 대상으로 연구를 진행했다.
연구팀은 치료로부터 10년째 되는 2018년 2~3월에 이들의 치료 효과를 분석했다. 이를 위해 △요통·하지방사통 시각통증척도(Visual Analog Scale, VAS) △허리 기능장애지수(Oswestry disability index, ODI) △삶의 질 평가척도(SF-36 Health Survey) △MRI 디스크(추간판) 탈출량 측정 등이 평가 지표로 활용됐다. VAS(0~10cm)와 ODI(0~100점)는 모두 숫자가 클수록 통증과 장애가 심함을 나타낸다. SF-36(0~100점) 지표는 신체와 정신영역 총 36개 문항으로 이뤄진 삶의 질 측정도구로 점수가 높을수록 삶의 질이 향상됐음을 뜻한다.
분석결과 10년이 넘어서도 많은 환자들의 치료효과가 유지되고 있음이 확인됐다. 연구팀은 치료효과가 지속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도출된 결과치를 앞서 실시된 한의통합치료 6개월, 1년, 5년 후 효과 측정 연구와 비교 분석했다. 먼저 10년 추적관찰에서 하지방사통 VAS는 치료 전 심한 통증 수준인 7.42가 6개월 후 1점대로 떨어진 후 10년 후까지 0.88로 안정적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요통 VAS에서도 같은 결과가 나타났다. 치료 전 중등도의 통증인 4.39에서 통증이 거의 없는 1.15로 떨어졌다.
ODI 지표에서도 동일한 효과를 보였다. 선행연구에 따르면 치료 전 41.36점으로 다소 심한 기능장애 수준이었던 ODI가 치료 6개월 후 일상생활에서 불편함이 없는 11.84점으로 개선됐다. 연구팀이 이번 연구에서 살펴본 10년 후의 ODI는 11.26점으로 좋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울러 SF-36 지표에서는 치료 전 35.62점이 10년 뒤에는 74.09로 2배 이상 올라 긍정적인 변화가 확인됐다.
또한 이번 연구는 환자의 주관적 증상 측정 외에도 MRI 검사를 통해 10년에 걸쳐 디스크 탈출량과 근육량 변화를 객관적으로 살펴봤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연구에 따르면 치료 전보다 10년에 걸쳐 디스크 탈출량이 점차 줄어들고 허리 근육량은 증가하는 것이 확인됐다. 10년간의 안정적인 호전세의 영향으로 환자들의 한의통합치료에 대한 만족도는 매우 높았다. 연구팀이 10년 시점의 치료 만족도를 조사한 결과 95.83%(62명)가 ‘만족’ 이상의 답변을 보였다. 특히 한의통합치료에 대한 후회 정도를 묻는 설문에 모든 환자들이 ‘후회하지 않는다’고 응답했다.
자생한방병원 이진호 병원장은 “이번 연구는 허리디스크 치료에 있어 한의통합치료 효과를 다각적이고 장기적으로 추적 관찰해 최초로 입증한 점에서 의미가 크다”며 “척추 질환의 근본을 치료하는 비수술 한의통합치료가 앞으로도 디스크 치료법 가운데 효과적인 대안으로 제시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5일간의 설 연휴가 시작된다. 그러나 코로나19 오미크론 대유행으로 고향에 있는 부모님을 찾아뵙기 어려운 상황이다. 부모님이 건강하게 잘 지내는지 걱정되는데 말이다. 이에 아쉬운 대로 영상 통화를 통해 부모님의 건강을 체크해보자. 65세 이상의 고령자가 특히 주의해야 할 질환과 전조 증상에 대해 짚어봤다.
고혈압, 국내 고혈압 인구 절반 이상이 65세 이상
65세 이상 고령자에게 흔하게 나타나는 질환이 바로 고혈압이다. 고혈압은 직접적으로 생명을 위협하기도 하지만, 비록 생명의 위협은 없더라도 삶의 질을 크게 저하시킨다. 전체 뇌혈관 질환의 50%가 고혈압으로 발생하고, 협심증과 심근경색 등 심장병의 30~35%, 신부전의 10~15% 역시 고혈압이 원인이다. 동맥이 딱딱해지는 '동맥경화증'도 마찬가지다.
특히 고혈압은 찬바람이 불고 일교차가 심한, 요즘 같은 겨울철에 더 주의해야 한다. 기온이 떨어지면 열 손실을 막기 위해 혈관이 수축하기 때문이다. 건강한 사람도 기온이 1℃씩 떨어질 때마다 혈압이 0.2~0.3㎜Hg 올라간다. 노인이나 마른 체형에서 특히 주의를 요한다. 노인 혈압 조절 목표는 수축기혈압 140~150mmHg, 이완기혈압 90mmHg를 추천한다.
이동재 가톨릭대학교 인천성모병원 심장혈관내과 교수는 "국내 고혈압 인구의 절반 이상을 65세 이상 고령층이 차지할 정도로 노인 비중이 높다"면서 "침묵의 살인자로 불리는 고혈압의 경우 별다른 증상이 나타나지 않아 알아차리기 쉽지 않은 만큼 평상시 주기적으로 혈압을 확인하고 위험요인을 예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당뇨병, 65세 이상 인구서 환자비율 2배 높아져
고혈압만큼 고령자가 주의해야 할 질환은 당뇨병이다. 당뇨병은 국내에서 6번째로 사망률이 높은 질환이다. 당뇨병이 무서운 이유는 그 자체보다 당뇨병으로 인한 합병증 때문이다. 족부괴사, 망막병증, 당뇨병성 신증, 뇌혈관질환, 관상동맥질환 등 당뇨 합병증은 전신에 나타날 수 있고, 또 한 번 발생하면 돌이키기 힘들고 심지어 죽음까지 이를 수 있다.
당뇨병의 원인은 아직 정확하지는 않지만 유전적인 요인과 비만, 연령, 식생활, 운동부족, 호르몬 분비, 스트레스, 약물 복용 등의 환경적인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65세 이상 인구에서 당뇨병 환자 비율이 2배 정도 높아진다.
김은숙 가톨릭대 인천성모병원 내분비내과 교수는 "우리가 안경을 쓰는 것을 치료라고 말하지 않듯 당뇨병 역시 평생 관리의 개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며 "부모님의 체중이 갑자기 빠진다거나 갈증을 심하고 소변을 참지 못한다면 이미 어느 정도 당뇨병이 진행된 상태일 수 있다"고 말했다.
골다공증, 기침 등 작은 충격에도 골절로 이어져
골다공증은 '소리 없는 뼈도둑'이라는 별칭에서 알 수 있듯 골절 등 합병증이 동반되지 않는 한 쉽게 알아채기 힘들다. 본인이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 척추 압박골절로 키가 줄어든다거나, 허리가 점점 휘고, 허리통증으로 병원을 찾는 경우가 많다. 심할 경우 기침 등 작은 충격에도 골절로 이어지기 쉽다. 여성에서 더 빨리, 많이 나타난다.
골다공증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기적인 검진을 통해 골밀도 검사를 받는 것이 중요하다. 또 균형 잡힌 식단을 통해 우유나 단백질을 적절히 섭취하고 술, 담배는 멀리한다. 운동도 중요하다. 체중 부하가 실리는 운동과 관절에 과도한 무리가 가지 않는 걷기 운동이 좋다.
한제호 인천성모병원 내분비내과 교수는 "부모님들은 골다공증으로 뼈가 약해지고 허리가 굽는 것을 노화에 따른 자연스런 현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며 "골다공증으로 인한 골절은 회복이 불가능한 사례도 있는 만큼 적극적인 진단과 치료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척추관협착증, 하지 통증으로 보행 시 앉았다 일어섰다 반복
나이가 들면 얼굴에 주름이 늘듯 척추와 추간판(디스크)도 퇴행성 변화를 겪게 된다. 척추나 그 주변의 인대가 심한 퇴행성 변화를 겪게 되면 척추신경이 지나는 척추관이 좁아지면서 척추관협착증이 발생한다.
증상은 보행 시 심해지는 다리 통증이다. 협착증 부위에 눌린 신경이 지나가는 엉덩이 아래 하지 통증과 저림, 근력 약화로 보행이 힘들어진다. 이때 허리를 구부리거나 앉으면 통증이 완화되기 때문에 일명 ‘꼬부랑 할머니병’으로 부르기도 한다.
최두용 인천성모병원 뇌병원 척추신경외과 교수는 "척추관협착증의 증상은 서서히 나타나는데 자연적인 현상으로 치부하거나, '곧 치유되겠지'라는 생각으로 병이 상당히 진행된 후에야 병원을 찾는다"며 "부모님의 허리가 굽고 걸음걸이가 이상하다면 질환 초기 병원을 찾아 적절한 치료를 받는 것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무릎 통증․붓기 지속하면 퇴행성관절염 의심
무릎 관절은 평지를 걸을 때 체중의 3~4배, 내리막길에선 체중의 5~6배의 무게를 지탱한다. 노화는 무릎 관절 자체를 약하게 만든다. 무릎 관절을 지탱해 주는 근육과 인대의 탄력성이 줄어들고, 관절연골과 반월연골판의 충격 흡수 기능도 떨어진다. 또 관절액의 윤활 작용도 약화된다.
퇴행성관절염은 주로 다리가 맞닿는 내측 무릎에 통증을 유발한다. 처음에는 걷기, 계단 오르내리기, 양반다리 같은 자세에서 통증이 생기지만 병이 진행되면 자세와 상관없이 지속적인 통증이 발생한다. 휴식이나 수면 시 통증이 심해지고, 아주 심할 경우 일상적인 보행에도 지장이 생길 수 있다.
노동영 인천성모병원 정형외과 교수는 "부모님이 계단을 오르내릴 때 갑자기 심한 통증을 느끼거나, 일상생활에서 지속적으로 무릎 주위가 붓거나 아프다고 호소한다면 퇴행성관절염을 의심하고 전문의의 진료를 받아보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살 부위 뻗치는 통증 1~2주 지속하면 고관절질환 의심
고관절(엉덩이관절)은 넓적다리뼈와 골반뼈가 만나는 곳으로 척추와 더불어 체중을 지탱하는 몸의 기둥 역할을 한다. 항상 체중의 1.5~3배에 해당하는 강한 힘을 견뎌야 한다. 걷기만 해도 4배, 조깅은 5배, 계단 오르내리기는 8배의 하중이 가해진다.
고관절 질환은 반복적인 사용과 노화로 발생하는 일차성 고관절 골관절염이 대표적이다. 골관절염이 생기면 넓적다리뼈와 비구가 모두 망가지고, 어떤 치료를 받더라도 진행을 막을 순 없다.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샅이 시큰거리고, 심하면 가만히 있어도 극심한 통증으로 일상생활에 지장을 초래하고 거동까지 불가능해진다.
전상현 인천성모병원 정형외과 교수는 "샅(사타구니, 두 다리의 사이) 부위나 엉덩이, 허벅지 쪽으로 뻗치는 통증이 1~2주 이상 지속한다면 고관절 질환을 의심할 수 있다"고 했다.
개항 이후 인천의 중심지 역할을 하며 문화와 유행을 선도했던 신포동. 지금은 구도심이 된 이곳 신포동에 30여 년간 자리를 지키며 인천시민의 지친 하루를 위로해주는 LP 카페 ‘흐르는 물’이 있다. 따뜻한 LP 음악 사이로 손님 한명 한명과 담백하면서도 다정한 인사를 나누는 안원섭 대표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한쪽 벽을 가득 채운 LP 음반과 통기타, 오래된 시집들과 빛바랜 사진들. 가게 내부엔 주인장의 취향과 그가 살아온 삶의 자취가 잔뜩 묻어난다. 안원섭 대표는 유랑극단 단원이셨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릴 적부터 자연스레 음악을 접하고 즐겼다. 대학에서는 건축을 전공한 그가 29세의 나이에 LP 카페를 차리게 된 이유다.
예술하는 청년들의 사랑방
음악만큼이나 ‘시’를 좋아했던 안 대표는 학창 시절부터 백일장이나 창작문예대회에서 자주 입상할 정도로 예술에 대한 관심과 재능이 남달랐다. 청년이 되어서는 직접 쓴 시에 통기타로 음을 입혀 노래를 부르고 작은 공연도 열곤 했다.
시공간의 제약 없이 음악과 시를 향유하면서 마음 통하는 사람들과 교류하고 싶은 마음에 1989년 1월, 테이블 여섯 개 들어가는 13평 남짓의 첫 번째 가게를 이곳 신포동에 오픈했다. “지금은 신포동이 구도심이 됐지만, 개항 직후에는 서울보다 신문물이 빨리 들어오고 관공서도 전부 위치했던 핫한 도심이었다”라며 “민감한 시기인 청소년·청년기를 이곳에서 보내면서 음악·패션 등 다양한 문화를 접했다”라고 설명했다.
상호인 ‘흐르는 물’은 정희성 시인의 시 ‘저문 강에 삽을 씻고’의 한 구절에서 따왔다. ‘흐르는 것이 어찌 물뿐이랴’라는 구절은 왠지 모르게 그의 마음을 울렸다. “뒹구는 돌은 이끼가 끼지 않듯이 흐르는 물은 썩지 않거든요. 세상은 흐르는 물과 같아요. 그저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게 법이에요. 노자의 사상 중 ‘상선약수’도 있잖아요. 이게 진리거든요.”
시적인 이름만큼이나 낭만적인 공간이다. 가게 오픈 초기, 음악과 시를 사랑하는 젊은 사장이 운영하는 이 가게에 예술을 사랑하는 인천 지역 청년들이 자주 찾아왔다. 화가, 작가, 음악가, 시인 등 다양한 예술가들의 교류와 활동의 전당이었다. 손님들과 밤새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날도 많았고, 술 한잔에 예술과 삶에 대한 허심탄회한 이야기도 나누며 청춘을 함께했다. 돈 없는 예술가들에게는 외상도 망설임 없이 해줬다. 시인에게는 커피값 대신 시집을, 화가에게는 술값 대신 그림을 받기도 했다. “그때는 그냥 가게에 돈통 하나 놓고 알아서 넣고 가시라고 했어요. 물감 살 돈도 없던 전업 화가 손님한테 어떻게 돈을 받아요. 그냥 ‘나중에 많이 벌면 주세요’ 했죠. 다 내 선배고 후배인데 술 한잔 베푸는 거 어려운 일도 아니에요.” 지금도 예술가들은 이곳을 찾는다. 공짜로 음악과 술을 즐긴 손님들은 이내 미술 작품이나 시집을 들고 다시 찾아온다.
규모가 큰 가게는 아니었지만 예술가들이 찾았던 낭만적인 공간이었던 만큼 차츰 이름을 알렸고, ‘타악기의 대가’ 김대환, ‘들국화’의 조덕환, ‘포크의 전설’ 양병집 등 7080 가요계의 전설적인 음악인들의 공연이 펼쳐지기도 했다. 안 대표는 “이 작은 가게에서 한국 가요계에 한 획을 그은 이들의 공연을 진행할 수 있어 매우 영광스러웠다”며 “특히 존경했던 故 김대환 선생님의 연주를 ‘흐르는 물’에서 들을 수 있었던 건 정말 감사하고 명예로운 일이었다”라고 설명했다.
LP 음반의 따뜻한 감성을 느끼는 곳
‘흐르는 물’에는 외국 팝송, 포크, 블루스, 재즈, 국악 등 다양한 장르의 LP 음악이 흐른다. 매일매일 그날의 분위기, 날씨 등에 따라 어울리는 음악을 재생하고, 손님들의 신청곡에 따라 음악이 바뀌기도 한다. 5000장이 넘는 LP 음반을 보유하고 있는 안 대표는 아쉬움을 토로했다. “내 소원은 만 장을 모으는 거였는데 어렵게 됐죠. 원체 생산되지 않으니까 구매할 수가 없는 거예요.”
재생 목록을 만들어놓으면 연이어 노래가 나오는 음원과 달리 LP 음반은 계속해서 디스크를 갈아줘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실제로 안 대표는 인터뷰 중에도 흐르는 음악에서 관심을 뗄 수 없었다. 노래가 끊임없이 이어지기 위해서는 음악이 끝나기 전에 다음 디스크로 바로 바꿔줘야 하기 때문이다. 음악을 편안하고 깔끔하게 즐길 수 있는 기술이 계속해서 발전하고 있지만 안 대표는 LP 음반을 고집하며 LP 카페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안 대표는 다양한 비유를 통해 LP 음반만의 매력을 설명했다. “요즘 우리는 정화된 생수를 많이 마시지만, 옛날에는 정수기가 없어서 누룽지 먹을 때 나오는 숭늉을 많이 먹었거든요. 그 후에는 보리차를 끓여 먹었고요. CD나 MR은 정화된 생수예요. 그저 깔끔하죠. 하지만 숭늉이나 보리차를 생각해보세요. 가끔 건더기도 나오고 구수하잖아요, 고향 집의 엄마 품처럼. LP는 깔끔한 소리를 내지는 않아도 마음에 따뜻한 울림을 줘요.”
그 따뜻한 울림을 직접 느껴본 시니어 세대는 물론, 최근 ‘뉴트로’의 영향을 받은 젊은 세대도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얻어 이곳을 찾는다. “한번은 20대 청년이 산울림 레코드판을 들고 왔어요. 이 음악 듣고 싶다고. 그래서 내가 ‘예쁘다’라고 했어요. 그 사람의 청춘도 예쁘지만 제대로 경험해보지도 못한 LP 음악을 듣고 싶다고 이곳을 찾아온 행위 자체가요.”
‘백년가게’로 지정된 최초의 카페
전국에 현존하는 LP 카페는 다수 있지만, 한 주인이 30년 넘게 운영한 카페는 ‘흐르는 물’뿐이다. 신포동에서 30년 넘게 자리를 지킨 동네의 터줏대감이지만, 신포동 내에서 자리를 네 번이나 옮겼다. 그럼에도 오랜 시간 동안 색을 잃지 않고 가게를 일궈오니, 젊음을 함께한 단골손님들이 이제는 자식 혹은 제자들을 데리고 찾아온다.
이곳은 음악과 커피·술을 즐길 수 있는 음악 카페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다양한 공연과 행사가 진행되는 복합문화공간이기도 하다. 공연은 물론 출판기념회, 그림 및 사진 전시회 등이 소소하게 열린다. 오랜 역사와 함께 풍부한 문화를 담고 있는 이 공간은 카페로서 전국 최초로 지정된 ‘백년가게’가 되었다. 백년가게는 중소벤처기업부가 100년 이상 존속을 돕고자 지정한 30년 이상 업력의 가게를 말한다.
안 대표는 30년 넘는 긴 시간 동안 가게에서 겪은 수많은 에피소드 중 ‘30주년 기념 콘서트’를 가장 기억에 남는 이벤트로 꼽았다. “30주년 된 해에 8일 동안 릴레이 공연을 했어요. 8일째 되는 공연 마지막 날, 인천시립합창단의 소프라노 백혜숙 선생 팀이 와서 공연을 했는데, 그들이 손님들과 함께 서프라이즈 이벤트를 짠 거예요. 30명의 손님이 장미꽃 한 송이씩 저랑 제 아내한테 나눠줘서 30주년 기념 30송이의 장미꽃을 선물받았어요. 너무 감사했죠. 감정이 벅차올라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 우리 손님들한테 큰절도 했어요.”
손님들의 공간을 지켜주는 ‘소사’
주인장에게 이 공간은 어떤 의미냐는 질문에 안 대표는 “이 가게가 내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다”며 “찾아주시는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과 배려가 있었기 때문에 가게를 30년 넘게 운영할 수 있었다”라고 답했다. 그리고 자신은 그저 이곳을 관리하고 지키는 ‘소사’일 뿐이라고 덧붙였다. “난 그냥 소사예요. 학교에 상주하면서 잡일을 도맡아 하는 관리자를 소사라고 부르잖아요.”
이곳을 찾아주는 이들에게 보답하는 일은 지친 하루 일과를 끝내고 온 손님들이 편히 쉬다 갈 수 있도록 원하는 음악을 틀어주고 음식을 내어드리는 것뿐이다. 실제로 안 대표는 단골손님들의 18번 곡을 알아서 틀어주곤 했다. 그것이 그가 생각하는 자신의 임무이기 때문이다. “정신이 온전하고 사지가 멀쩡하면 언제까지라도 우리 손님들을 위해 음악을 틀고 싶어요.”
날씨가 점점 추워지고 있다. 겨울은 시니어들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계절이다. 건조한 날씨와 실내외 큰 온도 차이, 미세먼지 등이 이어져 감기나 알레르기성 비염이 쉽게 발생하고, 요통·관절염 등 근골격계 질환이 심해지기 때문이다.
또한 겨울철 시니어들을 괴롭히는 것이 바로 빙판길이다. 빙판길은 보행자의 낙상사고 위험이 높아 겨울철 안전사고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된다. 특히 시니어는 균형 감각과 유연성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탓에 다른 연령대보다 낙상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한다.
실제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낙상으로 진료받은 환자는 5만 5107명이다. 80대 이상이 1만 1204명으로 가장 많았고, 70대 1만 112명, 60대 9023명, 50대 7415명 순이었다. 연령대가 높아질수록 낙상 환자가 증가하는 경향을 보인다.
대부분의 낙상은 가벼운 타박상이나 염좌 정도에 그치지만 시니어는 근육량과 골밀도가 낮은 만큼 ‘척추압박골절’과 같은 큰 부상에 주의해야 한다. 척추압박골절은 외부 충격으로 인해 척추가 납작하게 주저앉는 질환을 말한다. 초기에는 통증이 가볍게 느껴지다 점점 심해지며, 허리디스크(요추추간판탈출증)와 달리 마비·저림 등 신경 증세가 없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에 단순 근육통으로 오인하는 경우도 많다. 척추압박골절을 방치하면 허리가 굽는 척추후만증이 나타나거나 척추신경의 손상으로 이어질 수 있으니, 낙상 후 통증이 지속된다면 정확한 진단을 받는 것이 좋다.
낙상 후 간단하게 척추압박골절 자가진단을 해볼 수 있다. 척추를 손으로 눌렀을 때 특정 부위의 통증이 심하다면 척추압박골절일 가능성이 있다. 또한 기침·재채기를 할 때나 음식물을 삼키는 등 사소한 움직임에 통증이 발생하는 경우에도 척추압박골절을 의심할 수 있다.
한방에서는 척추압박골절 치료를 위해 침, 약침, 추나요법 등을 병행해 보존적 치료를 실시한다. 먼저 침 치료를 통해 근육·인대 등의 긴장을 풀고, 한약재의 약효 성분을 추출한 약침을 경혈에 놓아 염증을 가라앉히고 근육과 신경을 강화해 골절 부위의 회복을 촉진시킨다.
이후 골절 부위가 충분히 붙으면 추나요법으로 등과 허리의 긴장을 풀고 척추 배열과 균형을 바로잡는다. 추나요법은 한의사가 직접 자신의 손과 신체 일부분을 이용해 틀어진 뼈와 인대를 밀고 당겨 바르게 교정하는 수기요법이다. 2019년부터 건강보험 급여화가 적용돼 많은 근골격계 환자들이 혜택을 보고 있다.
근골격계 질환은 치료도 중요하지만 예방이 선행돼야 한다. 낙상사고 위험을 줄일 수 있는 안전 습관 3가지를 소개한다.
첫째, 안전하게 걷는 습관을 익혀야 한다. 겨울철에는 쉽게 손이 차가워지기 때문에 주머니에 손을 넣고 보행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양손을 주머니에 넣고 걸으면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었을 때 대처하기 어려워진다. 롱 패딩이나 코트 등 다리를 덮는 긴 외투를 입는 것도 움직임에 제약이 발생해 낙상으로 이어지기 쉽다. 따라서 빙판길을 지날 때는 주머니에서 손을 빼고 아래쪽 단추를 풀어 하체의 움직임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좋다.
또한 뒤로 넘어지는 낙상이 부상 위험도가 훨씬 크기 때문에 상체 무게중심을 앞으로 하고 보폭을 줄여 걷는 습관을 들이도록 하자. 지면과의 발 마찰력을 높이기 위해 구두보다는 운동화 신는 것을 추천한다.
둘째, 낙상을 당하더라도 바로 일어서지 말고 몸 상태부터 살펴야 한다. 낙상 직후 바로 몸을 일으키려다 부상 정도가 심해질 수 있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다친 곳이 없는지 천천히 몸을 살피자. 만약 허리나 엉덩이 통증이 심할 경우에는 척추와 골반 부위에 문제가 생겼을 수도 있으니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좋다.
셋째, 운동을 꾸준히 해야 한다. 낙상 예방을 위해서는 운동을 통한 신체 균형 능력 유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운동 중에서도 적극 추천하는 것이 하체 근력 및 골밀도 향상을 꾀할 수 있는 ‘체중 부하 운동’이다. 체중 부하 운동이란 뼈에 무게가 실릴 정도의 근력 운동을 의미한다. 초심자는 맨손체조나 조깅, 줄넘기 같은 가벼운 운동으로 시작해 강도를 자신에게 맞는 수준으로 늘려나가자. 일주일에 3일 이상, 하루에 20분 이상 꾸준히 진행해야 효과를 볼 수 있다.
시니어 낙상 환자 중에는 낙상으로 인한 부상을 평소 자주 오는 요통 등 퇴행성 질환으로 착각하고 치료를 받지 않다가 증상을 악화시키는 경우가 적지 않다. 사소한 낙상이라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되는 이유다. 2022년 신년을 맞이하는 때에 엉덩방아로 건강을 망칠 수는 없지 않겠는가.
병이라는 불청객은 본인뿐 아니라 주변인의 삶마저 크게 흔든다. 원망, 자책, 후회 등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여 모두가 함께 가라앉아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이를 성숙의 시간으로 여기고, 같은 혼란을 겪는 사람들에게 솔직한 이야기를 전하는 이가 있다. 루게릭병으로 후천적 장애를 갖게 된 아버지의 투병기를 연재하는 웹툰 작가 긍씨(박은선, 31)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매일매일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그려내고 있다.
8년의 유학 생활을 정리한 후 지친 마음을 위로받고자 돌아온 집. 아버지 별씨(박한규, 69)가 지팡이를 짚고 서서 힘겹게 인사를 건넸다. “아빠가, 못 나가서, 미안해. 고생, 했지?” 어눌하고 느릿한 아버지의 음성. 아프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들은 것보다 심각하게 느껴졌다. 8년 만에 만난 별씨는 익숙하지만 가장 낯선 모습이었다.
처음은 손 저림이었다. 점점 반사신경이 둔해졌고, 손의 힘이 갑자기 풀리거나 바지를 갈아입을 때 균형을 잃는 등의 이상 증세를 보였다. 대학병원을 전전한 결과, 이전부터 앓고 있던 목 디스크로 인해 신경이 눌릴 가능성이 있다는 소견을 듣고 디스크 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에도 병세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결국 2017년 끝자락에 ‘근위축성 측색경화증’, 루게릭병을 진단받았다. 통제되지 않는 몸 안에 갇혀버린 별씨 가장과 보호자의 역할을 모두 떠맡은 어머니. 가족들은 현실 부정과 절망을 반복하며 긴 시간을 방황했다.
당연하게 누렸던 일상이 달라진 것은 당연지사. “마트에서 아래층으로 이동하려 무빙워크에 발을 디뎠는데, 이상했어요. 뒤를 돌아보니 아버지는 무빙워크를 타는 대신 뒷사람들에게 사과하며 황급히 몸을 돌리시더라고요. 당황스러운 마음에 몇 번이나 아버지를 불렀는데 말이죠. 살짝 짜증이 난 상태로 왜 말도 없이 사라졌냐고 물으니 ‘무빙워크가 너무 빨라서 발을 얹으면 넘어질 것 같았어’라고 하셨어요. 살면서 단 한 번도 무빙워크가 빠르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사람들의 편의를 위한 수단이 누군가에게는 엄두조차 나지 않는 존재라니. 제가 사려 깊은 시선을 갖추지 못했던 거죠.”
‘아픈 아버지’를 둔 딸을 향한 주변의 시선도 부담스러웠다. “일부 사람들은 지나치게 안타까운 시선을 보내요. 나를 위해 해봄직한 행동들에 제약이 걸리는 기분도 들었어요. 연애나 여행 같은 것들. ‘부모님이 아프신데?’라면서 그걸 사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요. 저에게 슬픔 혹은 분노만 있기를 바라는 것처럼요.”
흔들리는 시기도 있었지만, 긍씨는 자신의 전공을 살려 별씨와의 시간을 차곡차곡 기록하기 시작했다. “우리처럼 혼란을 겪는 사람들에게 공감과 위로가 되면 좋을 것 같았어요. 아버지도 ‘내 이야기가 누군가한테 위로가 될 수 있다면 뜻깊은 게 아니겠느냐’고 하셨죠. 응원을 제일 많이 해주셨어요.”
‘난치병’을 벗 삼아
웹툰을 연재한 지 1년이 지난 지금, 긍씨는 약 5만 명의 독자들과 함께하고 있다. “공감과 응원의 메시지가 많이 와요. 병을 앓고 있거나, 가족이 투병 중인 분들이 제법 있더라고요. 덕분에 씩씩하게 이겨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고 하세요.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면 제 상황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감사하게 생각하는 타이밍이 훨씬 늦게 찾아왔을 것 같아요.”
창작자로서 어느 정도 자리 잡았지만 별씨 눈에는 그저 ‘막둥이’다. 매일 아침 ‘오늘도 은선이의 하루가 희망의 날이 되길 바라며. 아빠 딸로 태어나서 정말 고맙다’와 같은 사랑이 가득 담긴 메시지가 도착한다. “아버지는 당신의 난치병을 친구라 부르시더라고요. 이놈을 벗으로 삼으면 조금은 사뿐해진 마음으로 더 자주 웃을 수 있을 것 같다면서. 그 강인함의 경도를 제가 따라갈 수 있을까요. 저희한테 긍정적으로 씩씩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가는 것이 마지막 목표라고 하세요. 저도 이 상황을 덫에 걸렸다고 생각하기보다 태풍이 불어와도 중심을 잃지 않고 굳건히 버틸 수 있는 닻이 생겼다고 여기기로 했어요. 그리고 아버지께 받은 사랑을 힘껏 돌려줄 수 있는 순간이 왔다고 봐요.”
긍씨는 “가족이나 가까운 지인이 투병 중이라면, 병이 찾아온 건 당신 탓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게 가장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지나간 일을 다시 꺼내서 어떤 게 문제였는지 원인을 찾아봐야 소용없어요. 오히려 당사자는 그 상황에서 스스로 몸을 돌보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힐 수 있거든요. 병은 잘못하지 않아도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으니까요. 또 병이 생겼다고 해서 어제까지 잘 웃던 사람이 오늘부터 계속 울어야 한다는 법은 없어요. 본인의 희로애락을 모두 소중히 여겨야 이 시간을 잘 보낼 수 있죠. 노년에 찾아오는 비극으로 치부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MBC FM 개국 때부터 라디오를 들었던 조정선(62) PD는 37년간 라디오 PD로 활약했다. ‘이종환의 디스크쇼’,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 ‘배철수의 음악캠프’ 등 MBC 대표 라디오 프로그램을 도맡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그는 일터이자 놀이터였던 라디오 부스에서 빠져나와, 지난해 퇴직을 맞이하며 해파랑길 트레킹을 다녀왔다. 신간 ‘퇴직, 일단 걸었습니다’는 그 여정의 기록인 동시에 37년간의 삶이 고스란히 담겼다.
이 책은 그의 단짝이자 고등학교 동창 해정 군과 함께 오른 해파랑길의 여정을 기록한 에세이다. 첫 책의 주제로 ‘음악’이 아니라 ‘여행’을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틈틈이 써왔던 음악에 관한 원고를 바탕으로 음악 에세이를 내려고 했는데, 해파랑길 트레킹을 다녀온 후 출간 계획을 미뤘다. 매일 원고를 쓰던 버릇이 있어서 그런지 여행하는 동안 기록을 하고 싶더라. 보통 아침 여섯시에 시작하면 오후 세시나 네시쯤 하루 일정이 끝난다. 이른 저녁을 먹고 잠들면 새벽 한시나 두시에 깨더라. 옆 친구한테 방해될까 봐 말도 못 하고, 조용히 한 손으로 스마트폰을 꾹꾹 눌러가며 그날의 감상을 SNS에 올렸다. 의외로 반응이 좋았고, 음악 관련 책 대신 이 기록을 먼저 출간하기로 했다.”
은퇴 기념 첫 번째 프로젝트로 ‘해파랑길 트레킹’을 선택했다. 부산에서 고성까지 770km 거리에 달하는 해파랑길을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리셋 버튼을 누르고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다. 과거에 대한 끝내 못 이룬 아쉬움이나 미련을 털어버리고, 앞으로의 길을 위해 마음을 다잡고 싶었다. 원래는 해파랑길이 아니라 산티아고 순례길 코스 중 하나인 프랑스길에 가려고 했다. 사전 교육도 다 받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려고 했지만, 팬데믹이 심해지면서 결국엔 못 갔다. 차선책으로 비슷한 길이의 코스인 해파랑길이 눈에 들어왔다. 갔다 온 친구의 추천도 한몫했다. 차선(次善)으로 택했지만, 돌아오고 나서 보니 오히려 그 선택이 최선(最善)이었던 것 같다.”
나서기 PD의 도전
라디오 PD의 DNA는 사라지지 않는 법. 여행 에세이지만 음악이 빠지지 않았다. 물론 37년간 함께 달려왔던 스태프와 곁에서 지켜봤던 뮤지션에 관한 얘기도 담겼다.
“라디오는 삶의 동반자였다. MBC FM 개국부터 라디오를 듣던 꼬마가 실제로 듣던 그 라디오 부스에서 일했다. 음악과 라디오는 내 삶에서 빠질 수 없는 코드였다. 라디오 PD로 일하면서 잊을 수 없는 일들이 많았지만, 그중 하나를 꼽자면 숨은 명곡의 발견이 아닐까? 라디오 PD는 결국 소리로 말하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가령 김수희의 ‘애모’가 그런 경우다. 본인은 ‘서울 여자’를 더 밀었는데, 난 ‘애모’를 적극적으로 추천했다. 당시 라디오에서 ‘애모’가 소개된 이후 큰 인기를 끌었다. PD로서 참 뿌듯했다.”
그는 ‘PD’라는 역할에 갇히지 않았다. 주로 작가들이 쓰는 원고를 본인이 직접 쓰고, 게스트로 출연하거나 라디오 DJ로도 활동했다.
“끌려다니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일하고 싶었다. DJ에 도전한 것도 그와 비슷한 맥락이다. 하나의 라디오 프로그램이라 할지라도, 나만의 생각과 진심을 오롯이 청취자에게 전달하고 싶었다. 반사체로서 마음을 전달하는 것보다 스스로 발광체가 되어 다가가고 싶었다. 물론 첨엔 대본 읽는 게 서툴렀는데 점점 나아지더라. 게스트로 출연하거나 DJ로 활동하는 나더러 한 후배는 ‘나서기 PD’란 별명을 붙여줬다.(웃음)”
그가 변신을 시도하는 동안 라디오란 매체도 숱한 변화를 겪었다. 한때 문화의 전령사로 통했던 라디오의 영향력은 예전보다 줄었지만, 여전히 매력적인 매체다. 그 사이 ‘배철수의 음악 캠프’는 지난해 30주년을 맞이했다.
“배캠은 일하는 스태프의 노고를 비롯해 배철수 선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가 가진 팝에 대한 전문성과 해박함은 이미 해외 아티스트에게도 정평이 났다. 또한 선배에게 일하는 마음가짐을 많이 배웠다. 매일 2시간 전부터 와서 원고도 읽고, 노래도 직접 들어본다. 프로그램에 지장이 있는 스케줄을 애초에 잡지 않는다. 30년간 꾸준히 그랬다. 배캠이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선배의 성실함과 책임감 덕분인지도 모른다.”
두 번째 꿈은 히트곡 작곡가
37년간 몸담았던 일터를 떠나, 그간의 삶을 돌아보고 정리하기 위해 떠난 해파랑길 트레킹을 마치고 돌아온 지금. 그 전과 무엇이 달라졌을지 궁금했다.
“여행 도중에 가방의 무게를 줄이려고 필요 없는 짐을 택배로 보내는 것이 일이었다. 문득 이제껏 아등바등 살았던 것이 부질없는 욕심처럼 느껴지더라. 또한 좋은 아빠, 좋은 남편, 좋은 상사라는 답안지에 후한 점수를 줄 자신이 없었다. 유명한 소설가는 친절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고 했는데, 모두에게 친절하지 못한 사람으로 기억에 남은 것 같아 못내 아쉽다. 이제는 욕심을 내려놓고 더 베푸는 삶을 지향하고 싶다.”
끝으로 계획하고 있는 두 번째 프로젝트에 관해 물었다.
“라디오는 여백을 채우는 상상력의 상자다. 내 삶도 비슷했다. 라디오 부스란 한정된 공간 안에서 늘 새로운 시도와 방향을 고민했다. 동시에 좋아하는 음악을 실컷 듣고, 재미난 일을 많이 했다. 정말로 행운아였다. 이제는 부스 밖 넓은 세상에서 새롭고 재미난 일을 해보고 싶다. 가령 작곡가로 데뷔해서 히트곡을 만들고 싶다. 두 번째 꿈이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오고, 변주는 밋밋한 반주를 다채롭게 한다. 그의 37년은 알을 깨는 변주였다. 안주하지 않고, 늘 새로운 길로 나섰다. 그는 반경 안에 갇히지 않았다. 주도적인 PD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했다. 나서기 PD란 별명은 그 노력의 결과다. 한 시인은 “길은 걷는 자의 것”이라고 했다. 결국 길은 나서는 자에게 열린다. 또 다른 도전을 앞둔 그의 새로운 여정을 응원하며 마친다.
우리나라의 스마트폰 보급률이 90%를 넘어섰다. 젊은층은 물론 시니어들 사이에서도 스마트폰이 대중화된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 스마트폰이 마냥 유용하고 유익한 것만은 아니다. 과도한 스마트폰 사용이 다양한 질병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스마트폰으로 생기는 질병은 젊은층의 전유물로 여겨졌다. 하지만 최근 50세 이상 중장년층을 포함한 모든 연령대에서 스마트폰으로 인한 질병이 발생하는 추세다.
50세 이상 시니어들이 건강하게 스마트폰을 사용할 수 있도록 시니어가 유의해야 할 스마트폰 사용과 관련한 근골격계 질병과 예방법을 소개한다.
① 방아쇠 수지
‘방아쇠 수지’는 손바닥과 손가락이 연결되는 관절 부위에 통증과 부기가 생기는 질병이다. 손가락을 구부릴 때 힘줄이 마찰을 받아 총의 방아쇠를 당기는 듯한 저항감이 느껴진다고 해서 이름 붙여졌다.
손가락은 우리 몸에서 가장 얇은 부위로 무리가 쉽게 가는 취약한 부위다. 그런데 스마트폰 사용이 늘면서 손가락 사용도 많아졌다. 이것이 엄지를 주로 사용하는 ‘엄지족’들 사이에서 방아쇠수지증이 많이 발병하는 이유다.
특히 방아쇠 수지는 잦은 스마트폰 사용과 더불어 반복적인 가사 활동을 하는 40세 이상 중장년 여성에게서도 많이 발생한다. 실제로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2010년 12만7000명이던 환자가 10년이 지난 2020년에는 23만8000명으로 두 배 가까이 증가했다. 이중 40~50대 여성이 8만2000여명으로 전체에서 34.5%를 차지할 만큼 중장년 여성에게 주의가 필요한 질병이다.
방아쇠 수지는 병세가 진행되면 손이 뻣뻣해지고 손가락 움직임이 제한되며 손등뼈에도 압통이 발생할 수 있다. 대부분 방아쇠 수지 환자는 약물치료와 물리치료, 스트레칭 치료로 좋아진다. 하지만 증상이 심해지면 수술을 받아야 할 수도 있다.
방아쇠 수지를 막을 수 있는 특별한 예방법은 없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손가락 스트레칭을 권장한다. 손바닥을 책상 위에 올려 놓고, 반대편 손으로 아픈 손가락을 잡고 천천히 올려준 후 5초간 머무른다. 이 동작을 5회 반복 시행한 뒤 반대쪽으로 한 번 구부리는 동작을 한다. 다만 엄지 손가락은 스트레칭 방법이 다른데, 엄지를 움켜쥐고 위로 향하도록 하면 된다.
② 손목터널증후군
‘손목터널증후군’은 손목 앞부분의 힘줄과 신경이 지나는 수근관(손목 터널)이 좁아져 신경을 압박하면서 통증과 감각 이상 증세가 발생하는 질병이다. 손목터널증후군 역시 방아쇠 수지와 마찬가지로 40세 이상 중장년 여성에게서 자주 발병한다. 가사 노동과 스마트폰 사용으로 인한 반복적인 손목 사용이 주요 발병 요인이다.
손목터널증후군의 특징적인 증상은 엄지와 검지, 중지를 중심으로 저린 증상이 생기거나 감각이 무뎌지는 것이다. 이를 그냥 방치하면 증상이 심해지면서 손이 타는 듯한 통증으로 이어지거나 감각이 사라지는 지경에 이를 수도 있다.
자생한방병원의 한수빈 한의사는 “우리 몸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부위가 손목”이라며 “양쪽 손등을 마주대고 1분간 유지한 후, 손목통증을 느낀다면 손목터널증후군을 의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통증이 심할 경우 병원에 내원해 진료를 받길 권한다”라며 “심하지 않다면 간단한 스트레칭을 통해 통증을 완화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스트레칭 방법은 한쪽 팔을 정면을 향해 뻗어 반대쪽 손으로 뻗어 있는 손가락을 잡고 몸 안쪽으로 당겨준다. 자세한 스트레칭 방법은 자생한방병원 유튜브 채널에서 확인할 수 있다.
③ 거북목 증후군
C자 모양의 정상적인 목뼈가 잘못된 자세로 인해 일자로 변형되는 ‘거북목 증후군’은 과거엔 장시간 컴퓨터를 사용하는 직장인들에게 주로 발병했다. 하지만 스마트폰이 대중화되면서 모든 연령층에서 발생하고 있다.
특히 시니어들이 거북목 증후군에 더 신경써야 하는 이유는 바로 노안(老眼) 때문이다. 나이가 들면 노안으로 인해 스마트폰 화면 속 글자가 잘 보이지 않아 고개를 푹 숙여서 보는 경우가 많아진다. 실제로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거북목(일자목) 증후군 환자 수가 매년 증가하는 추세다. 특히 50~60대 중장년층 환자 수는 2014년 61만4771명에서 2018년 73만2443명으로 5년새 19.1%나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에이치플러스 양지병원 재활의학과 신덕수 전문의는 “거북목 증후군은 스마트폰을 이용할 때 취하는 잘못된 자세가 가장 큰 원인으로 작용한다”며 “일자목을 제때 치료하지 않고 방치하면 목 디스크로 발전할 수 있는 만큼 평소 생활습관 개선을 통한 관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거북목 증후군 예방 생활습관
1. 스마트폰을 볼 때는 고개를 푹 숙이지 말고, 눈높이보다 약간 낮게 들고 본다.
2. 컴퓨터 모니터는 시선보다 아래에 놓이지 않게 책 등을 쌓아 눈높이를 맞춘다.
3. 장시간 컴퓨터와 스마트폰 사용은 금물! 20~30분 간격으로 목과 주변 근육을 스트레칭하고, 틈틈이 턱을 앞으로 당겨 두 턱을 만드는 습관을 들인다.
4. 베개는 목이 C자 모양을 자연스럽게 유지할 수 있게 하고, 근육에 긴장이 가지 않도록 바닥에서 6~8cm 정도를 유지한다.
5. 엎드린 자세로 노트북이나 스마트폰을 사용하거나 자는 행동은 절대 하지 않는다.
중년이 되면 근골격계의 건강 상태가 급격하게 나빠진다. 이에 따라 허리와 무릎을 건강하게 유지하는데 공을 들이는 시니어들이 많다. 하지만 손과 목뼈에 신경을 쓰는 시니어는 상대적으로 드물다.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다’는 속담처럼 크게 위협적이지 않아 보이는 질병을 무시하고 방치하면 무서운 질병으로 덧날 수 있다. 스마트폰 사용으로 일상 속에서 서서히 건강을 해칠 수 있는 손과 목에도 관심을 갖고, 스트레칭과 바른 자세를 통해 질병을 미리 예방하는 것이 필요하다.
1. 게임
명예퇴직을 하고
오십 넘어 항해사가 된
내 첫 항차의 항해는
갑작스런 출항 통보부터 심상찮았다
출항 후 이내 접어든 좁은 수로에서 세찬 조류에 밀려
세 시간 넘게 좌초의 문턱을 넘나들다가
가까스로 빠져 나와 만난 오후 한 시의 하늘은
이미 어두워지고 있었다
검은 구름 떼가 오래 잠들었던 신전의 주술이 깨어나듯
항로의 앞 쪽에서 거대한 날개를 펼치며 날아올라
사방을 암회색 절벽처럼 막아 놓고
뒤늦게 피어오르는 또 다른 구름은
통곡의 벽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염원의 메모지처럼 보였다
초속 30미터의 바람은 연신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달려들고
물결은 수 미터의 깊고 가파른 협곡을 이루어
낄낄거리며 온 몸으로 부딪혀 왔다
뿌리가 없는 것은 죄다 흔들거렸다
배도 사람도 뿌리가 없기는 마찬가지
옆으로 기울며 높이 솟구쳤다가 급강하하듯 떨어지는 배 안에서
거친 사내들도 두려웠던 것일까
선실에 널브러진 사내도
브릿지에서 키를 잡고 안간힘을 쓰는 사내도
안색이 하얗게 질려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흔들리며 떠밀리며 기우뚱거리는 시간 위에서
그저 방향만 잡을 수 있는 생존속력을 겨우겨우 맞추어 가는
선령 34년의 낡은 엔진이 꺼질세라 노심초사 하며 가는 길을
포세이돈의 분노를 닮은 태풍은
나흘하고도 하루 반나절을 더 따라 다녔고
우리는 그 놈을 악마라 불렀다
엿새 째 되던 날
비로소 악마는 슬그머니 우리의 목숨 줄을 풀어 주었다
우리의 항로를 따라오던 악마의 발걸음은 한낱 유희였는지
일곱 째 날의 고단한 항해에서 비로소 햇빛을 보았다
바다에서도 악마는 게임을 하는가 보다
2. 친구
북위 01도 22분, 동경 172도 56분
태평양 한복판 적도 부근 타라와섬 근처에서
전재작업 한다고 조업선과 배를 붙이다가
조업선 선장으로 있는 친구를 만났다
이거 몇 년 만이고? 묻는
뭐하다가 바다에 나왔노? 묻는
친구 놈은 폭삭 늙어 있었다
나이 오십 넘어 명퇴하고 배 타러 나왔다는 대답 앞에
하긴 우리 나이에 이 짓 아니면 할 게 별로 없지
증권사 댕기던 놈도 배 타러 오고
방송사 댕기던 놈도 배 타러 오는
요지경 세상이네 하며 껄껄 웃는다
친구의 삼십 년 뱃놈 생활은
치통과 통풍과 관절염과 허리디스크로 찾아와
불편한 몸짓 속에 눅눅하게 녹아 있었다
함께 저녁을 먹고 포도주를 머그잔에 담아 마시며
건너 온 세월의 흔적을 더듬는 녀석의 눈빛이 몽롱했다
외국 놈들 속에서 저 혼자 한국인이라고
먹고 살자고 하는 일 중에 밥 챙겨 먹는 일이 제일 힘들다고
제대로 된 한국 음식이 너무 그립다고 너스레를 떨다가
자식놈들은 다 키웠냐고 묻는다
큰 놈은 출가 시켰고 작은 놈은 대학 졸업 앞두고 있다는 말에
지 놈은 자식이 셋이라고
아직도 대학생 고등학생 중학생 줄줄이 사탕이라고
앞으로 십 년은 더 배를 타야 허리가 펴지겠다고
하지만 고기씨가 말라서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다는
걱정이 묻어나는 목소리에 그저 침묵으로 안주를 삼을 뿐
그래도 어딘가에 희망이 있겠지 뭐
혼잣말처럼 건네는 어색한 위로
오십 고개 넘어서도 여전히 희망이라 허허 웃는
친구의 웃음소리가 칼날처럼 가슴에 박혀 드는 것은
누군가의 남편으로, 아버지로
여전히 살아 내야 할 시간들이 아득하기 때문이었을까?
전재작업을 끝내고
배를 떼고 다시 수평선 쪽으로 멀어져 가며 흔들던 친구의 손이
고향언덕 늙은 나무의 옹이가 박힌 마른가지를 닮아 있음에
나도 모르게 울컥 눈물이 솟아올랐다
3. 모천회귀
비릿한 바람이 오래전 기억 속 저편과 이편의 경계를 훑는다
생활은
마젤란해협 동쪽 어디쯤 지친 항해의 고달픔에 대하여, 혹은
누구나 가슴 깊숙이 벼려놓고 있을 날카로운 송곳니 같은 것에 대하여
자욱한 비안개 속에서 속내를 토해내는 열대우림의 나무들 몸짓처럼
사소한 변명들을 더듬고 있다
돌아간다는 것은 언제 풀릴지 모를 고르디우스의 매듭
쉰에서 예순으로 가는 세월의 길목마다
수구초심의 갈망은
봉인된 첫사랑의 흔적처럼
불 꺼진 가로등처럼 숨죽이고 서 있고
한때 애태웠던 사람들이 떠난 자리엔 낯선 얼굴들로 가득하였다
한 오라기 추억의 실타래도 풀어내지 못하는 지상의 불빛들은
굳은 관절처럼 뻣뻣한 가슴으로
물길을 더듬어 돌아가는 자의 내밀한 기쁨을 알지 못하리
이젠 좀 더 유연해야 하리
탁한 해류의 거친 숨결도 맨몸으로 받아내고
심해의 침묵도 은빛 비늘 속에 감출 줄 알아야 하리
옆줄을 따라 몸 깊이 각인된 오래전 산천의 지형도 위엔
지금도 나무들 온몸을 불태우며 만산홍엽의 꽃을 피우고 있을까
언제나 순응하던 해류의 손을 떨치며
푸른 역린(逆鱗)을 꼿꼿이 세울 때
수천 길 해저의 뜨거운 온기를 퍼올려
혈관마다 힘찬 맥박으로 뛰놀게 하는 아름다운 결별
고단했던 한 시절을 향하여 손을 흔들게 하는
내 풍성한 영혼의 자양분이여
낯선 새 길을 열며 가는 이 길은
날마다 소스라쳐 깨는 얕은 잠 위에서 저물고
고단한 지느러미의 궤적을 따라
천산 협곡을 넘어가는
내 아버지 걸어가신 천년 유형의 붉은 길.
* 전재 작업 : 어선과 운반선이 접선하여 어선의 어창에서 운반선 어창으로 어획물을 옮기는 작업.
•수상소감 - 우수상 시 이석재
“늘 삶의 향기가 은은하게 스며 있는 글 쓰고파”
기대하지 않았는데 뜻밖이라 얼떨떨하네요.
50대 초반에 명퇴를 하고난 후 새로운 인생설계를 하고 도전하는 일에 많은 고초를 겪었습니다.
항해사로서의 새출발, 청각장애로 인한 좌절, 새로운 일에 대한 도전과 시행착오, 현재의 직업에 이르기까지 도전과 실패. 그리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것에는 나이가 걸림돌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인 장벽 앞에서 낙심될 때도 있었고, 그런 환경을 극복하고 현재를 살고 있는 나 자신에게 잘하고 있다는 격려를 하고 싶었습니다.
글은 별다른 취미를 가질 수 없는 현실 속에서 낙서를 하는 버릇에서 시작하여 여러 작가분들의 책을 읽고 습작하고 하는 노력을 10년쯤 했던 것 같습니다.
내 삶의 흔적을 언젠가는 책 한 권으로 남기겠다는 생각이 꾸준히 글을 쓰는데 동기부여가 되었네요.
늘 삶의 향기가 은은하게 스며있는 글을 쓰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내 가장 가까운 곳에서 늘 힘을 주는 사람에게 고마움과 사랑을 전합니다.
나직이 숨을 고르고는 붓에 힘을 주었다. 오늘은 왠지 붓끝이 가볍다. 이제 한 획만 쓰면 된다. 나는 호흡을 가다듬고 마지막 획을 길게 내리긋는다. 미세한 흔들림도 없이 붓끝이 전서체의 획을 마무리했다. 나는 황색 부적지에서 붓을 떼고 지긋이 글씨를 바라보았다. 집안에 두 마리의 용이 화목하게 깃들어 있는 모양새다. 마주 보는 획이 기울지 않고 균형을 잘 이루고 있다. 게다가 단아한 글씨와 잡귀를 물리치는 담백한 운필로 금방이라도 집안 가득 화평한 꽃 기운이 생동할 것만 같다. 나는 매우 흡족해하며 붓을 옆에 나란히 놓았다.
보통 부적符籍이라 함은 대개 한 해의 액厄을 피하거나 벽사壁邪와 기복祈福의 민간 신앙을 담고 있는 데서 유래한다. 요즘에는 현대적이며 새로운 글씨체를 통해 무병장수의 삶과 소망을 담긴 부적을 주로 찾는다. 적당한 먹의 농담과 담백한 운필. 그리고 기운 생동한 붓질과 여백 등이 조화롭게 그려진 부적을 높이 쳐 준다. 가게 진열대에 인쇄소에서 찍어낸 부적이 다발로 있지만 단골 손님들은 내가 직접 쓴 부적을 원한다. 내가 직접 써서 파는 것은 한 장에 십만 원 정도를 받는다. 부적은 누가 쓰느냐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이다. 비싼 것은 한 장에 백만 원까지 받는다는 소문도 있다. 그런 경지의 부적은 가로세로 획마다 금석기金石氣가 있으며 글씨는 마치 살아서 움직이는 듯한 생동감과 다양한 서체를 넘나들며 자유로운 조형미까지 갖추고 있다. 실로 대단한 경지라고 아니 할 수 없다. 게다가 그보다 한술 더 뜬 최고 경지에 이른 부적은 완연한 획의 흐름에서 삶의 희로애락이 감지되며 파격적인 데다 변화무쌍하고 괴기스러움까지 느껴질 정도이다.
나는 부적을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쓴다. 부적을 쓰는 날은 보통 손 없는 날을 잡는다. 부적을 쓸 때는 신령한 공력이 배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날은 일찍 일어나 목욕재계를 하고 동쪽을 향하여 정화수를 올린다. 그리고 향을 사른 후 무릎을 꿇고 주문한 손님들의 소망을 염원하며 기도를 올린 뒤 경건하게 붓을 든다.
나는 진열장 겸 책상으로 쓰는 계산대에 앉아 방금 쓴 부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황색종이 위에 마르지 않는 붉은 글씨가 물기로 번들거렸다. 부적지로 사용하는 종이는 홰나무로 만든 괴황지다. 크기는 가로 10센티 세로 15센티 정도다. 붉은 먹물은 흔한 물감이 아니라 경면주사鏡面朱砂라고 하는 특별한 안료이다. 그것의 원료는 붉은색을 띠는 광석에서 채굴한다. 원료를 작은 용기에 넣고 절구공이로 곱게 빻아서 미세한 가루로 만든다. 그리고 부적유符籍油로는 참기름이나 백설탕을 녹인 액체를 가루와 섞으면 부적 특유의 붉은 색깔과 특유의 향을 풍기는데 이것을 경면주사라 한다.
나는 고개를 들고 가게 안을 천천히 둘러봤다. 벽시계는 한겨울의 나른한 오후를 가리키고 있다. 가게 중앙에는 활활 타는 전기난로가 썰렁한 가게 안을 따뜻하게 데워주고 있다. 아담한 공간에는 무속인들에게 필요한 각종 제의 용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맞은편 붙박이 진열장에는 망자들의 넋을 달래줄 영가 옷이 촘촘히 쌓여있고 그 옆에는 무속인들이 굿할 때 쓰는 무신도 대신방울 오방기 장군칼 향로 장구 꽹과리 북 등 무구가 가지런히 놓여 있으며 등 뒤로는 기도할 때 쓰는 등초 무지개초와 목향 금난향 궁연향 등 각종 향과 초가 칸칸마다 들어있다.
다시 고개를 들고 실내에 놓인 간이 탁자 위로 시선을 옮긴다. 그것은 장판을 씌운 자그마한 작업용 탁자다. 무속인들이 필요한 물건들을 골라 탁자에 놓으면 그것들을 큰 보자기로 싸서 묶는 곳이다. 그들이 한 번씩 가게에 들러 굿판에 쓸 제의 용품을 고르면 보통 서너 보따리가 넘을 때도 있다. 흔히 사람들은 무속인, 하면 무당이라 하여 천시하는데 정작 그들의 신심은 대단하다. 그들은 과거 현재 미래를 꿰뚫어 보는 신령님을 섬긴다. 신령님을 무가에서는 보통 몸주라 부르는데, 그들은 몸주와 교감하는 능력을 지닌 영매자靈媒者이기 때문이다.
잠시 창밖으로 눈길을 부렸다. 하늘이 점차 흐려지는가 싶더니 진눈깨비가 풀풀 날리기 시작했다. 저만치서 팔짱을 낀 연인이 까르르 웃으며 정답게 걸어왔다. 세련된 차림에 잘 어울리는 커플이다. 두 사람의 어깨엔 얼음 가루가 묻은 스케이트화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어디 스케이트장에라도 다녀오는 모양이었다. 언뜻 부러운 생각도 들었다.
눈길을 당겨 부적을 봤다. 부적이 거의 다 말라 있었다. 부적을 조심히 집어서 서랍장에 넣었다. 지금은 명절 전이어서 손님이 뜸한 편이다. 설이 지나면 한해의 액땜이나 복을 바라는 부적 주문이 들어오고 굿판도 자주 열릴 것이다. 내가 부적을 쓰게 된 것은 손님들 때문이다. 부적을 찾는 손님마다 직접 손으로 쓴 걸 원하기에 오빠를 통해 부적 쓰는 법을 배웠다. 처음엔 한 장 두 장 팔리던 것이 지금은 소문이 좋게 돌아 단골로 내 부적을 사가는 손님들이 제법 있다. 유리문에 매달린 종소리가 쨍그렁, 하고 울렸다. 출입문 쪽을 보았다. 조금 전에 팔짱을 끼고 다정하게 걸어가던 연인이다. 나는 방긋 웃으며 손님을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언니, 우리가요, 만난 지 꼭 백 일째거든요. 그래서 부적처럼 간직할 수 있는 기념품을 찾는데, 어떤 게 있어요?”
“그러세요? 축하드려요.”
나는 현대적으로 고안된 액세서리 부적 용품이 걸려 있는 매대로 그들을 안내한다. 진열대에는 갖가지 액세서리 부적 용품들이 걸려 있다. 그들은 이것저것 가늠해보다 그중 하나를 고른다.
“언니, 이걸로 할게요.”
그들이 고른 것은 나비 문양의 매듭 핸드폰 줄이다. 날개 사이에 태극 문양이 그려져 있고 그 위에 옴(범어)자가 새겨져 있다. 옴이란 길상의 뜻을 지닌다. 전통 문양인 나비 그림에 상감기법을 적용한 앙증맞은 부적이다.
“나비 문양이네요. 나비는 기쁨과 행복 그리고 아름다움을 상징한대요. 게다가 사이좋은 연인이나 금실 좋은 부부를 상징하기도 하구요.”
“그래요? 그럼 우리가 잘 고른 거네요, 호호.”
풋풋한 연인들이 싱그러운 웃음을 떨어뜨려 놓고 나가자 마음 한곳이 공허해졌다. 나는 콤팩디스크를 켰다. 오카리나의 잔잔한 소리가 가게 안을 흘렀다. 혼자 있을 때면 자주 듣는 음악이다. 나는 눈을 감고 향기로운 소리에 잠겨 들었다. 짙고 푸른 숲이 보이고 맑은 계곡물 소리와 바람 소리. 그리고 가난한 저녁을 먹고 달빛 맑은 산중에서 도란도란 자연과 대화하는 소리. 때로는 별빛 아래에 앉은 외로운 목동의 피리 소리 마냥 멜로디가 귓가에 들려왔다.
주전자에 물을 끓여서 찻잔에 부었다. 계산대에 앉아 한 모금 들이키고 다시 창밖을 내다봤다. 눈발이 제법 굵어져서 분분히 날리고 있었다. 집안일 외엔 다른 일이라곤 전혀 해 본 적 없던 내가 10년 전에 불교용품점을 차리게 된 까닭은 불의의 화재 때문이다. 그 화재로 인해 남편은 세상을 떴다. 남편을 빼앗아간 그 화마의 기억은 여전히 내 기억 속에 악몽으로 자리 잡고 있다. 어쩌면 내 마음 어느 한켠에는 여전히 남편과의 마지막 순간이 스냅사진처럼 뚜렷하게 찍혀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가끔 남편이 내 곁에 존재하는 듯 그의 부재를 인지하지 못하는 환영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남편을 빼앗아가 버린 그 악몽의 기억이 스르르 떠올랐다. 그날도 평소와 다름없는 아침이었다. 자동차 딜러였던 남편은 여느 날처럼 출근 준비를 했다. 새로 다려놓은 하얀 와이셔츠에 내가 생일 선물로 사 준 넥타이를 맸다. 그리고는 셋집 빌라 이 층 계단을 바쁘게 내려갔다. 부지런함이 몸에 밴 남편은 남보다 항상 먼저 출근을 했다. 또한 가장의 책임감 때문인지 주어진 시간을 허투루 보내는 걸 본 적이 없었다. 그런 성실함 때문인지 남편은 동기들보다도 먼저 승진하는 기쁨도 누리기도 했다.
잠시 뒤 남편이 투덜거리며 다시 계단을 올라왔다. 자가용 바퀴가 펑크 났다고 했다. 아무래도 전철역까지는 버스를 타고 가야 할 것 같다고 했다. 날씨가 풀렸다지만 아침저녁으로는 쌀쌀한 날씨여서 나는 남편에게 외투를 한 겹 더 입혀주며 잘 다녀와요, 라고 하며 생긋 웃음을 지어보였다. 잘 다녀와요, 라고. 그리고 아이를 유치원에 등원시킨 후에 청소를 하며 TV를 켜는데, 뉴스 속보가 자막으로 떴다. 오전 9시 경 ㅇㅇ역 전철 내에서 50대 남성이 플라스틱 통에 든 휘발유에 불을 붙인 뒤 객실 내에 던져 차량 내부를 완전히 전소시켰다는 뉴스였다.
뉴스 자막을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ㅇㅇ역은 남편이 종종 전철을 타고 회사에 출근할 때 이용하는 전철역이었다. 나는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는 범인의 방화시간과 남편의 출근 시간을 되짚어보았다. 9시 경이면 남편은 이미 회사에 출근해서 근무를 하고 있을 시간이다. 남편은 보통 회사에 한 시간 정도 일찍 출근하기 때문에 화마를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면서도 한편으로는 남편의 직업상 외근이 잦은 업무여서 조금은 걱정이 되었다. 그의 휴대폰에 전화를 해 보았다. 그런데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음성만 줄곧 들려왔다.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계속 통화 중이더니 겨우 연결이 되었다. 저쪽에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더니 ‘사모님,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김과장님이 9시 경에 ㅇㅇ역 방향으로 외근을 나갔다고 합니다. 저희도 지금 연락이 안 돼...‘ 나는 저쪽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휴대폰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수많은 사상자를 낸 전철 화재는 내 운명을 완전히 뒤바꿔놓았다. 남편의 시신은 화염 속으로 사라져 끝내 찾을 수 없었다. 나는 너무나 큰 충격에 오열과 통곡을 하며 까무러치기를 반복했다. 그날 이후 나는 한동안 빙의 상태로 현실과 비현실 사이를 수없이 오가며 넋을 놓고 살았다. 살아도 산 게 아닌 그저 숨만 쉬고 있을 뿐이었다.
남편은 꿈속이든 현실이든 가릴 것 없이 언제든지 내 앞에 나타났다 사라졌다. 우리가 연애할 때 서로 손을 꼭 부여잡고 마음 졸이며 봤던 이라는 영화가 문득 떠올랐다. 예기치 못한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은 한 남자의 지고지순한 사랑. 사랑하는 남자를 잃고 슬픔에 잠긴 한 여자와 그런 여자를 두고 이승을 떠나지 못한 한 남자의 애틋한 사랑을 그린 감동적인 영화였다. 우린 영화가 끝날 때까지 눈물을 글썽이며 가슴 저릿하게 관람했었다.
그런데 그 영화가 몇 년 후 내 얘기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남편을 잃은 그 도시에서 더 이상 살 수 없었다. 내가 어느 정도 사고의 후유증에서 벗어나고 정신적인 안정을 되찾을 무렵. 친오빠의 도움으로 수원으로 이사한 뒤 ’종로불교사‘라는 가게를 열었다. 친오빠는 오래전부터 이곳에서 불교용품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가게를 연 후로 나는 남편을 가슴 깊이 묻어두고 살아왔다. 행여 힘든 일이 생기면 나 자신이 나약해질까 두려워서 일부러 강해지려고 노력했다.
창밖에는 여전히 하얀 눈이 소복이 내리고 있었다. 가게 앞에 서 있는 남천나무에도 조용히 눈이 쌓여갔다. 붉게 물든 채로 말라버린 남천나무 이파리들은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되어도 떨어지지 않고 나무에 꼭 붙어있다. 나는 시선을 당겨 계산대 끝에 놓인 모래시계를 발견했다. 유리로 된 호리병 모양의 입구가 위아래로 마주 보게 붙어있다. 그 안에는 보라색 모래 알갱이가 들어있다. 모래시계를 거꾸로 세우자 보라색 모래 알갱이가 주르륵 쏟아져 내렸다. 마치 시간이 거꾸로 흐르듯 모래 알갱이들이 시간을 거슬러 쌓인다. 모래시계를 물끄러미 응시하다 보니 남편을 떠나보낸 지 5년쯤 후에 문득 내 앞에 나타난 한 남자가 떠올랐다. 평소 친한 언니의 소개로 알게 된 남자다. 언젠가 그 남자와 애들이랑 커다란 모래시계가 있는 바닷가에 놀러 갔다가 사 온 기념품이다. 피차 서로 미워해서 헤어진 게 아니어서 추억이 깃든 모래시계를 굳이 버리지 않고 남겨두었다.
초혼일 때는 두려움보다는 설렘이 더 크고, 재혼일 경우에는 설렘보다는 두려움이 더 크다,라고 어느 심리학자가 말했던가. 만약 다시 그때로 되돌아간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한 남자를 만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될까. 아니면 아이들의 의견을 따라 지금처럼 혼자의 삶을 선택하게 될까. 지혜롭게 사랑하고 냉정하게 판단하라.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의 행복이다, 라는 명제를 어느 책에선가 읽었지만, 나는 여전히 내 운명에 대해서 확신이 서지 않는다. 운명이라는 것이 정해져 있는 것일까. 아니면 바꾸기 나름일까. 여전히 나는 홀로서기라는 무거운 숙제 앞에 주눅이 들곤 한다.
그 남자는 시를 쓰는 시인이라고 했다. 비록 가진 것은 없지만 은혜 씨를 향한 사랑만큼은 누구보다도 열정적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자신도 몇 년 전 이혼이라는 아픈 상처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수수하고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그의 첫인상에 호감이 갔다. 그 남자가 싫지는 않았다. 아니, 그 남자가 나를 사랑하는 만큼이나 나도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 우리는 결혼을 전제로 종종 만남을 가졌다. 남자가 모 문예공모전에서 상을 받았을 때 나는 누구보다도 기뻐했고 축하를 건넸다. 그날 밤 우리는 수상의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격렬하고도 뜨거운 사랑으로 피날레를 장식했다. 그리고 며칠 후 나는 사랑의 증표로 남자에게 새 자동차를 선물했다. 자동차 키를 받아든 남자는 감격하며 자신은 여태까지 한 번도 자동차를 소유해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서로 사랑한다고 다 결혼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신은 인간에게 그렇게 호락호락 않다는 걸 알았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은 그 남자에게 매우 호의적인 데 반해 유치원에 다니는 아들은 은근히 적의를 품고 있는 듯했다. 아마도 엄마를 너무 사랑해서 어쩌면 낯선 남자에게 엄마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심리가 깔려있는 것 같았다. 그런 심리가 은연중에 나타난 날이 있었다. 한번은 다 같이 어느 공원에 나들이 가는 중이었다. 그날따라 비를 뿌렸는데 자꾸 앞 유리창에 성에가 끼면서 뿌예졌다. 아직 새 차에 적응하지 못한 남자는 어떻게 성에를 제거하는지를 몰라서 무척 당황해했다. 그 와중에 뒷좌석에 탔던 아들이 괜히 심통을 부렸다. 남자는 차량 조작법을 몰라 당황하던 터라 아들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지르며 화풀이를 했다. 그 순간 왠지 모를 불안감이 머리를 스쳤다. 과연 내가 저 남자를 선택한 것이 잘한 일일까, 하는 의문이 문득 들기도 했다.
내가 가끔씩 남자를 만나는 동안 유독 예민해진 아들이 은근히 속을 끓였다. 어느 날은 밥을 먹지도 않고 짜증을 부리는가 하면 예전에 안 하던 심술을 부리기도 했다. 그런 아들이 한편으로는 안 되어서 하루는 잠들기 전 나란히 누워서 대화를 나눴다.
“엄마, 그 아저씨랑 함께 사는 거야?”
“왜? 그러면 안 돼?”
“나, 그 아저씨 싫어. 나는 엄마랑 오래오래 살 거야. 엄마, 그 아저씨랑 살지 마. 알았지?”
나는 가슴이 먹먹해지며 뭔가 설움 같은 게 울컥 치밀어서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엄마는, 아무하고도 안 살아. 우리 아들하고만 살 거야.”
나는 아들을 꼭 껴안아 주었다. 아들은 그제서야 안심이 되는지 내 품에서 쌔근쌔근 잠이 들었다.
그리고 며칠 후 기어코 사단이 나고 말았다. 한날은 잠시 놀러왔던 남자는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 틈에 거실에서 깜박 낮잠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그때 밖에서 들어온 아들이 그걸 보고는 안 그래도 꼴보기 싫었던 터라 마침 잠자고 있던 남자의 머리통을 냅다 발로 밟아버렸다. 남자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 치듯 너무 황당하고 화가났다고 했다. 어찌 생각하면 순수한 아이로서는 지극히 본능적인 행동이었지만, 사랑하는 엄마를 빼앗아가는 남자가 오죽 미웠으면 그랬겠는가, 싶기도 했다. 남자는 어린아이의 돌발적인 행동에 무척이나 당황하기도 하고 실망해서는 그날 이후로 발길도 뜸하다가 자동차를 돌려주는 것으로 관계를 정리했다.
그렇게 그 남자와 사이가 멀어지고 나니 다시 예전처럼 되돌리기는 쉽지가 않았다. 아마도 남자도 자신의 혈육이 아닌 두 아이를 감당하며 어찌 살아갈 수 있을지 고민도 많이 했을 것이다. 그 후로 그 남자와는 가끔씩 안부를 묻는 친구 사이로 남기로 했다. 최근에 그 남자로부터 시집이 배달되었다. 등단 후 출간한 첫 시집이라고 했다. 나는 가만히 그의 시집을 펼쳐들었다.
모래시계의 모래 알갱이들이 거의 다 흘러내릴쯤 유리문에 달린 방울 소리를 짤랑거리며 누군가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고개를 돌려보니 천궁 보살이다. 보살은 올해 쉰 줄로 머리가 벌써 반백이다. 생머리를 뒤로 빗어 넘겨 쪽을 쪘다. 굿이 있는 날이면 가게에는 가끔씩 들렀다. 그는 늘 피곤한 기색으로 입을 꾹 다물고 있다. 가격을 흥정할 때도 고갯짓으로 거의 다 하곤했다. 무슨 사연이 있는지 쉽게 속내를 보인 적이 없다. 어쩔 수 없이 말해야 될 때도 필요한 말이 끝나면 도로 입이 닫힌다. 나는 예의 밝은 표정으로 인사말을 건넸다.
“보살님, 오랜만에 오셨네요.”
“…….”
“차 한 잔 드릴까요?”
보살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탁자에 앉았다. 그날따라 보살은 더욱 초췌하고 피곤해 보였다. 나는 차를 타서 보살에게 건네고 곁에 앉았다. 볼륨을 줄인 오카리나 소리가 가게 안을 잔잔히 흐르고 있다. 보살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를 입에 댔다가 뗐다.
“부적이나 한 장 받을까 하고….”
“부적이라면 보살님도 쓸 수 있지 않아요?”
사실 웬만한 무속인들에게 부적은 필수여서 대개가 다 직접 써서 판다. 그런데 뜬금없이 그저 어깨너머로 배운 내게 부적을 써 달라니. 나는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부적이라면 신통력이 있는 무속인들의 부적을 더 높이 치기 때문이다. 무속인 중에도 세습무인 숙무와 신내림을 받은 강신무가 있는데, 특히 강신무의 부적이 더 영험하다 하여 부르는 게 값이다. 천궁보살도 내 짐작으론 강신무降神巫임에 틀림없다. 일전에 어느 손님이 천궁보살한테 부적을 받은 거라면서 쓴 지 오래된 부적을 보여 준 적이 있었다. 흔히 보는 부적이 아니라 자동 기술된 검은색 글씨였다.
“나, 부적 안 쓰네.”
“아니, 부적을 안 쓰다니요?”
“…….”
“아무렴, 제가 쓴 부적보다야 보살님이 쓴 부적이 훨씬 더 영험하지 않아요.”
“영험은 무슨...우리 집 영감이 엊그제 죽었네. 그래서 저승 가는 길에 마지막으로 부적 보시나 하려고.”
“그렇다면 영감님을 위해서 더욱 부적을 쓰셔야죠.”
“급살 맞을 냥반….”
보살은 퀭하게 들어간 눈언저리를 비비며 물기를 닦았다. 나이에 비해 훨씬 늙어 보인다. 그동안 마음고생도 어지간히 한 것 같아서 측은한 생각마저 들었다. 남편과 살아오면서 미운 정 고운 정이 들었을 보살의 심정을 어느 정도 헤아릴 것 같다. 어쩌면 보살의 마음이 시린 하늘에 떠 있는 조각달처럼 한없이 쓸쓸하리라. 남편이 떠난 이후에 내게 하늘을 바라보는 버릇이 생겼다. 길을 걷다가도 물끄러미 하늘을 바라보면 마치 남편이 손짓하는 듯한 환영. 꿈속을 찾아온 남편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다 눈을 뜨면 문득 혼자란 생각에 하염없이 베개를 적시던 눈물. 내 안에 간직된 남편이라는 슬픈 단어. 신의 시샘을 받은 것일까. 남편은 그렇게 일찍 세상을 떠나려고 내게 많은 사랑을 안겨주었는지도. 부모의 반대에 부딪혀 힘들게 결혼한 만큼 남편은 나를 더욱 아껴주었지. 그런 남편의 따뜻한 품에서 나는 온실 식물처럼 살았다. 쉬는 날이면 나를 데리고 드라이브하는 게 취미인 듯, 바다로 가서 개펄을 파헤치거나 산을 오르기도 했다. 한 번은 산을 오르다 토끼풀이 수북이 우거져 있는 걸 발견하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네잎크로버를 찾기로 했다. 먼저 내가 한 잎을 찾자 남편도 곧이어 찾았다. 그리고는 네잎크로버가 잇따라 발견되었다. 남편이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우리에게 행운이 줄줄이 오려나 보다! 함박웃음을 지으며 행복했던 시간들. 남편은 발견한 네잎크로버를 행운의 부적이라며 책갈피에 소중히 끼워 두었다.
실내를 흐르던 오카리나 멜로디가 다음 곡으로 이어지고 있다. 나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보살을 향해 조심히 입을 열었다.
“영감님이 생전에 보살님한테 잘못한 게 많으신가 보네요?”
“웬수도 그런 웬수가 없지. 불쌍하기도 하고….”
목이 타는 듯 보살은 손에 든 찻잔을 입에 가져가 길게 들이키고 한숨을 내쉬었다. 윤기를 잃은 반백의 머리가 빗질을 자주 하지 않아서 부스스 일어나 있다. 대체 무슨 사연이 있기에 보살이 부적을 쓰지 않을까. 보통 무속인들은 굿이 없을 때는 사주를 봐주거나 부적을 써서 생업을 이어간다. 더러는 식당이나 상점을 하기도 하지만. 보살은 찻잔에서 입을 떼고 헛기침을 한 뒤에 목청을 다듬었다.
“우리 집 냥반이 젊었을 적부터 내 속께나 썩였지. 아들을 하나 낳고 둘째를 가지려는데 어떤 영문인지 들어서지가 않더구먼. 그래서 외아들을 금쪽같이 여기며 키웠네. 그런데 원래 난봉기질이 있던 냥반이 슬슬 바람을 피우더란 말일세. 그래서 바람기를 잡으려고 점쟁이 집에 가서 부부금슬이 좋아지는 애정 부적을 샀네. 부적은 양과 음이 조화를 이루어야 효험이 있잖은가. 그래서 두 장을 받아서는 한 장은 꼭 접어서 영감 바지춤에 몰래 숨겨놓고 또 한 장은 베개 속에 넣었지. 그런데 부적이 효험이 없는지 이 냥반의 바람기는 갈수록 심해지더구먼. 그래서 다음번엔 용한 점쟁이를 찾아가서 비방을 물어봤네. 남편 바람기를 잠재우는 데는 여우자궁 만큼 좋은 부적이 없다는 거야. 그래서 요새 살아있는 여우도 보기 힘든데 어디서 여우자궁을 구하냐니까. 다 구하는 수가 있다며 알려주데. 중국을 드나드는 보따리 상인들이 몰래 사가지고 들어온다는구먼. 그래서 얻기 힘든 여우자궁을 하나 얻지 않았겠나. 그리고는 그것을 내 속옷에 몰래 숨기고 있었지. 그러고 한 며칠 지나니까 아닌 게 아니라 이 냥반의 바람기가 수그러들더란 말일세. 집에도 곧장 들어오고 사업차 출장 간다는 핑계도 줄어들고 말이지. 그게 정말 효험이 있어서 그런 건지 어쩐지는 모르겠지만 암튼 바람기는 없어졌네.”
“아휴, 보살님. 사내들은 젊을 적에 한 번씩 다 바람을 피운다잖아요.”
남편에게도 그와 비슷한 일이 한 번 있었다. 한번은 빨래를 하려고 남편 바지주머니를 뒤지는데 쪽지가 하나 나왔다. 업무적인 메모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아닌 것도 같고. 암튼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나를 혼란스럽게 했던 건 메모 내용이 아니라 글이 적힌 메모지였다. 그것은 일상적인 메모지가 아니고 하트 그림이 그려진 종이였다. 저녁에 퇴근하자 대뜸 당신, 어디 숨겨놓은 여자 있어요? 하고 물었다. 남편은 뜨악한 눈빛을 하다가 이내 웃으며, 당연히 있지. 여기 당신, 하고는 얼버무리는 느낌이었다. 나는 아무래도 남편이 뭔가 숨긴다 싶어 감추고 있던 메모지를 얼굴에 디밀었다. 메모지를 본 남편은 큼큼, 헛기침을 하더니 아, 그거! 하면서 고백을 했다. 며칠 전 출장길에 우연히 결혼 전 사귀었던 여자를 만났다고. 그리고 함께 차를 마시고 헤어질 때 여자가 남편에게 메모지를 건네준 거라고. 나는 남편에게 이딴 메모지를 받지 말라며 못을 박고는 씩씩댔던 기억이 났다.
보살은 눈이 약간 침침한 듯 눈을 한번 비비고는 창밖으로 시선을 일별했다. 어젯밤에 잠을 옳게 못 잤는지 눈동자도 붉게 번져있었다. 찻잔에 남은 차를 마저 입에 붓고는,
“그것뿐이면 말을 안 하지. 이 냥반의 바람기도 좀 잠잠해지고 사업에 열심이다, 싶었는데 덜컥 부도가 나버렸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집 앞으로 열차가 지나다니는데, 철로에서 놀고 있던 외아들이 열차에 치여 죽었어. 부도난 이후로 이 냥반은 도망다니느라 기별도 없고, 외아들은 죽고. 나는 실성하다시피 해서 사는 걸 작파했지. 그러다가 종종 부적을 받으러 드나들던 무당을 찾아가서 죽은 아들 넋이나 달래주려고 굿을 부탁했어. 그리고 굿판이 한창 열리고 연신 비나리를 하는데 천궁에서 온 신령神靈이 그예 턱 하니 내 몸주로 들어와 버렸다네. 그때가 아마 20여 년 전이었지.”
물끄러미 얘기를 듣고 있는 내 마음도 덩달아 숙연해졌다. 늘 입을 닫고 살아가는 보살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다. 게다가 가게에 올 때마다 늘 추레한 옷차림. 영감님의 행방불명과 외동 아들의 불의의 사고. 아마 보살은 죄인의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소중한 자식을 잃고 녹록지 않은 세월을 살아온 저 앙상한 가슴에는 얼마나 깊은 한을 담고 있을까. 부모가 죽으면 산에다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데, 생떼 같은 아들을 잃은 어미의 슬픔을 그 무엇에 비할 수 있겠는가. 살아있는 날이 어쩌면 죽는 일보다 못한 형벌의 삶이리라. 내 삶이란 것도. 남편이 남기고 간 흔적을 매일 마주쳐야 하는 슬픈 날들. 아침이면 눈물로 흥건히 젖어있는 베개를 안고 또 흐느껴야 하는 텅 빈 시간. 남편이 여느 날처럼 일찍 일어나는 습관처럼, 불쑥 화장실에서 나올 것만 같은 착각에 물끄러미 화장실 문을 응시하기도 했다. 다른 남편들은 반찬 타박도 잘한다는데, 어떻게 된 건지 음식솜씨도 별로인 내가 밥상을 차려주면 꾸역꾸역 군소리 없이 잘도 먹었다. 한번은 그 모습이 귀여워서, 그때는 정말 남편이 귀엽게 보여서, 일부러 맵고 짜게 국을 끓였더니 내 입맛이 변했나,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남편이다. 남편과 사내 결혼한 내가 잠깐 직장 생활한 것 말고는 결혼한 이후 줄곧 살림만 했다. 아침에 눈을 뜨고서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다, 남편 출근 준비를 해야 하는데, 하며 문득문득 며칠 전의 아침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침울한 아이들을 달래 학교에 보내 놓고 힘없이 앉아 남편의 체취가 밴 가구들을 만져보다 울컥 슬픔이 복받쳐오기도 했다.
가난한 우리는 소박한 결혼식을 하고 비용을 줄이기 위해 신혼여행을 설악산으로 갔다. 마침 눈이 내려 산길이 하얗게 덮여 있었다. 등산로에 사람들이 아무도 없을 때 나를 덜렁 업고 가면서 내 와이프가 보기보다 무겁네, 하며 놀려댔었지. 엊그제 남편의 쉰 번째 생일날, 생일상에 밥과 미역국을 떠 놓고 그의 부재에 난 또 얼마나 흐느꼈던가. 남편은 결혼하고 십 년간 내 곁에 머무르다 떠났다. 그리고 홀로 견뎌온 십 년의 시간. 그 시간 동안 가끔씩 모든 게 허무하게 다가올 때가 있다. 살아있으면서 이렇듯 무감각하게 세상을 응시하는 지금의 나. 어떤 날은 일이 손에 안 잡혀 매사에 흐느적거리다 하루해를 넘기기도. 그럴 때면 거울을 들고 또 다른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마치 깨진 거울 조각 속에 내 얼굴이 들어 있는 것처럼. 그 안에 조각난 얼굴이 슬픈 눈으로 나를 지그시 건너보았다.
언젠가 남편과 함께 동해 바닷가로 드라이브 갔던 날, 처연한 장면을 봤다. 국도 한복판에 커다란 개 한 마리가 죽어있었다. 차량들이 쌩쌩 달리며 일으키는 바람에 하얀 털이 날리고 있었다. 만지면 아직은 따뜻한 온기가 남아있을 것 같은 들개의 주검. 나는 문득 죽어있는 들개의 몸을 만져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 순간 내 손끝을 타고 끔찍한 소름과 시체의 온기가 동시에 전해져 온 것 같아 몸을 가늘게 떨며 움츠렸다. 사체를 미처 발견하지 못한 차량들이 들개의 몸을 타고 넘어갔다. 그럴 때마다 죽은 들개의 머리가 들썩거렸다. 죽기 전까지도 한 발만 더 뛰면 바퀴에 치여 죽는다는 것을 모른 채 앞으로만 달렸을 미련한 짐승. 어쩌면 내 삶도 길 위에 죽어있는 그 미련한 짐승과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미욱한 존재. 어느 순간 내 앞에 깊은 슬픔이 기다리고 있는 줄도 모른 채 달려오지 않았던가. 남편이 책갈피에 끼워놓은 네잎크로버의 행운이 늘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리라 여기듯. 슬픔과 행복은 야누스의 얼굴처럼 둘이 아님을, 남편을 잃고서야 가슴이 저리도록 와 닿았다. 전철 화재사건 뒤 처참한 내 심정은 길에서 죽은 개의 사체 같았다. 개의 몸뚱이 위로 차바퀴가 수없이 지나다 보면 나중에는 털가죽만 남듯, 남편을 잃고 한동안 방황한 내 삶은 생명을 잃은 털가죽이나 다름없었다. 남편이 바닷가 큰바위에 서서, 우리도 여기 온 기념으로 글을 새겨두자고 했을 때, 나는 다른 사람들이 보면 싫어할 텐데, 하며 말렸다. 그러나 남편은, 옛날 선사시대에 바위에 그렸던 암각화라는 것도 일종의 행운을 비는 부적이래. 그때 사람들도 바위에 그림을 새기며 풍요를 빌었을 거야. 그리고 바위에 새긴 동물마다 상징하는 그들의 소망도 깃들어 있는 거래, 하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마침 색깔이 나는 작은 돌멩이를 찾아서는 글을 새기기 시작했다. 우리 가정에 사랑과 행복이 가득 넘치기를. 현우와 은혜 다녀감. 글을 다 쓰고 난 남편의 환하게 웃는 표정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아이들과 함께 힘든 삶을 살아가야 하는 많은 시간. 어느 순간 남편이 아주 가까운 곳에서 아이들과 나를 지켜보리라는 느낌이 불현듯 들 때도 있다. 언뜻 등 뒤에서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시선. 얼핏 뒤돌아보면 무료한 정물 풍경만이 헛헛한 가슴으로 밀려들던 상실감에 몸을 떨기도. 아이들은 아빠와 함께할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예감이라도 한 듯이 유독 아빠를 잘 따랐다. 퇴근한 남편과 아이들이 한데 어울려 장난을 치거나 할 때면 은근히 질투가 생길 정도였으니까. 짧은 시간 동안 남편은 나와 아이들에게 사랑을 듬뿍 안겨주고 떠난 것 같다. 평생 나누어 줄 사랑을 한꺼번에 다 주고 가려는 것처럼.
시난고난한 삶을 살아 온 보살은 나이에 비해 주름도 많이 잡혀 있었다. 그 모진 세월을 저 보살은 어떻게 견디며 살아왔을까. 보살은 눈언저리로 흘러내린 몇 올의 머리카락을 갈퀴 같은 손으로 쓸어 올리더니,
“그렇게 집안 폭삭 망하고 팔자에도 없는 무당이 되었지. 사는 게 힘들 때는 한 많은 이 세상과 연을 끊으려고 골백번도 마음먹었지. 그래도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났다고, 모진 게 목숨인가 벼. 이를 악물었지. 죽을 때 죽더라도 이 냥반이 집에 돌아오는 것 보고 죽겠다고. 그래서 내가 배운 짓이라고는 푸닥거리밖에 없으니 굿판을 열거나 부적을 쓰면서 연명했네. 시난고난 갖은 고생하며 사는데 한날은 파출소에서 깜깜무소식이던 그 냥반 소식이 들려오더란 말이여. 웬 부랑인이 나를 찾더라고 하면서. 한달음에 가보니 허, 이 냥반이 거지꼴을 하고 쭈그려 앉아있는데, 우리 집 영감이 맞는가 싶더구먼. 가만히 보니 눈도 좀 이상해 보이는 게 정신도 온전치 않더라니. 옛날에 그 번지르르하던 행색은 어디 가고 꼭 비렁뱅이 짝이었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본다. 조금 전까지 사락사락 날리던 눈발이 어느새 멎었다. 그 눈발은 보살의 앙상한 가슴속에서 여전히 날리는 것 같다. 황량한 들판 위로 가뭇없이 날리는 눈보라처럼. 보살의 눈동자가 텅 비어 보인다. 생기라곤 한 가닥도 없어 보이는 그런 눈빛. 예전에 내 눈빛이 그랬었지. 멍한 눈으로 앉아있는 날들이 많았다. 공원에서 낯선 이가 앉았다 간 빈자리도 쓸쓸해 보이는데, 하물며 가장 사랑하는 남편의 빈자리임에랴. 혼자인 시간에 우두커니 창밖을 내다보면 햇빛 쨍쨍한 대낮이 걸려 있고, 눈을 감으면 내 안에는 굵은 눈발이 날렸다. 하루하루가 혼돈과 혼란스러움의 연속이었다.
행여 시장이라도 다녀오다 아는 이를 마주치면 왠지 미워지기도 했다. 얼마 전까지도 저이와 나는 행복의 저울질을 하지 않았던가. 우리 형편과 비슷한 집이나 조금 잘 사는 집의 행복을 저울질하며 그렇게. 혹시 아는 사람이라도 마주 오면 일부러 돌아가기도 하며 내 처지에 대해 원망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 나는 작은 일에도 신경질을 내거나 분노하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한없이 나락으로 추락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전에는 간혹 싱크대 밑에 서식하던 바퀴벌레라도 스멀스멀 기어 다니면 징그러워 비명을 질렀는데, 언젠가부터 아무렇지도 않게 손으로 꾹꾹 눌러 죽이는 내 모습에 스스로도 놀랐다. 남편을 잃은 내 마음은 늘 공허했다. 부적 쓰는 법을 배운 뒤 처음으로 남편의 넋을 위해 붓을 잡던 날. 나는 한 획도 쓰지 못하고 펼쳐진 부적 종이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종이 위에 남편의 얼굴이 어른거려 눈물만 떨어뜨렸다. 나는 붉어진 눈언저리를 닦고 모질게 마음먹었다. 아이들을 위해서 그리고 남편을 위해서 악착같이 한번 살아보리라. 만약 신의 시샘이라면 멋지게 살아서 초라해진 내 삶을 복수하리라고. 그리고는 다시 붓을 잡고 온 기력을 쏟아 부적을 썼다.
나는 고즈넉이 난로를 바라봤다. 여전히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 열기로 가게 안이 따뜻해졌다. 혼자가 된 이후 나는 한동안 불을 끔찍이도 싫어했다. 불을 보면 자꾸만 남편이 떠올랐다. 저 뜨거운 불 속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는 남편의 모습. 그 악몽 같은 환상에 사로잡혀 꿈속에서도 남편은 온몸에 화상을 입은 채 나타나곤 했다. 뜨거운 불길 속에서 남편과 내가, 그리고 단란했던 우리 가정이 송두리째 불길에 휩싸였던 그날의 악몽에 깜짝깜짝 놀라기도 했다.
어느덧 오카리나 소리도 멎어있었다. 보살은 회한이 밀려오는 듯 눈을 잠깐 감았다 떴다. 다시금 눈에서 물기가 나오는지 손등으로 살짝 훔치더니,
“온전치 못한 정신으로 집에 돌아온 냥반이 그래도 핏줄은 보고 싶었는지 아들을 찾더라니. 벌써 저 세상으로 간 아들이 살아올 리는 없고. 아들이 열차에 치여 죽은 걸 알고는 점점 더 정신이 오락가락했지. 그래서 굿판도 열어 푸닥거리도 해보고 부적을 써서 집안 곳곳에 붙여도 봤지만 효험이 없더구먼. 나중에는 병이 깊어져 할 수 없이 병원에 입원을 시켰네. 그런데 며칠 후에 이 냥반이 병원에서 사라져 버렸다네. 다시 찾고 보니 이 양반이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큰 사고를 내지 않았겠나. 그 사고로 온몸에 중화상을 입고 여태까지 식물인간과 다름없이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네. 그러다가 결국 저승사자가 불러서 엊그제 저 세상으로 갔네.”
“참 안 되셨네요. 그런데 영감님이 무슨 사고를 냈는데요?”
“급살 맞을 냥반이 글쎄, 귀신에 홀렸는지 전철 안에다 불을….”
“전철요? 아니, 영감님이 전철에다 불을 냈다구요?”
“…….”
나는 너무 놀라 동공이 저절로 크게 열렸다. 혹시 보살의 말을 잘 못 들었나 싶었다. 그날의 악몽을 잊기 위해 그곳에서 이사를 왔는데, 설마 그 사건의 방화범이 지금 내 앞에 있는 보살의 영감님이라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이런 기막힌 우연이 있을 수 있을까. 내 볼이라도 꼬집어보고 싶었다. 눈앞이 흐릿해지고 가슴이 먹먹해졌다. 머릿속이 실타래처럼 엉키어버린 듯 복잡해졌다. 나는 보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보살의 얼굴이 많이 일그러져 있었다. 죄책감에 시달리는지 입매가 씰룩이고 눈썹이 파르르 떠는 것 같았다.
“그 냥반이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른 뒤로 부적을 끊었네. 천벌을 받아도 시원치 않을 여편네가 무슨 낯으로 부적을 쓰겠나. 죽는 날까지 그저 죄인의 몸으로 살아야지….”
고개를 세우고는 남편의 부적을 떠올렸다. 처음으로 쓴 남편의 부적을 들고 유골이 안치된 납골당으로 갔다. 화재 현장에는 여러 유해가 뒤엉켜있어 그 일부를 유골함에 담아 납골당에 안치했다. 유골함에 부적을 붙이고 돌아오는 길에 여러 무리의 새 떼가 황혼의 서편 하늘가를 나는 게 보였다. 나는 차를 길가에 세워두고 새들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산과 하늘의 경계선이 흐릿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하늘 한편에서는 노을이 스러져 가고, 아래로는 완만한 능선이 아름답게 보일 무렵이었다. 새들은 황혼을 날면서도 서두름 없이 날고 있었다. 뒤 쳐진 새 한 마리가 바삐 무리를 쫓고 있었다. 나는 새들이 서편 하늘로 가뭇없이 사라질 때까지 하늘을 바라보았다. 새들이 사라지고 난 후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슬픈 것 같기도 하고 편안해진 것도 같았다.
천궁 보살이 가게를 나간 뒤 시계를 보니 정오를 막 지나고 있었다. 나는 멍해진 기분으로 줄곧 앉아있다가 창밖으로 다시 눈길을 돌렸다. 멎었던 눈발이 다시 내리고 있었다. 나는 깨끗한 부적지를 꺼내어 조심히 유리판에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복잡한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남편 얼굴이 희미하게 나타났다 사라졌다. 희미하게 웃는 것도 같았다. 나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신 뒤 망자의 부적을 정성껏 써 내려갔다.
•수상소감 - 최우수상 단편소설 박도열
“닐 암스트롱처럼 아무도 밟지 못한 미지의 땅에 소설가로서 첫발자국을 남기고 싶어”
코로나 19로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저에게 뜻밖에 소설 당선이라는 기쁜 소식을 전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제게는 올 한해 최고의 선물이 되겠습니다.
제가 소설에 관심을 가진 지는 오래됐습니다. 하지만 경제적 여건과 생업 때문에 소설 쓰기에 집중적으로 매달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최근 오랫동안 하던 일을 접고 비로소 소설 쓰기에 몰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 소식을 접하고는 응모를 하게 됐습니다.
어릴 적부터 책을 좋아했으며 다방면의 책을 읽었습니다. 이십 대에는 감동적인 소설을 읽고 나면 볼펜으로 필사를 해 보는 등 나름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또한 저의 경험을 토대로 여러 편의 소설 습작을 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시에도 관심이 많아서 초기에는 한동안 시에 매달린 적이 있습니다. 그러다 어느 모임에 종종 참석하게 됐는데, 그곳에서 유명한 소설가를 만나게 됐습니다. 그분이 평소 저의 시를 보셨는지 하루는 시보다는 소설 쪽에 더 어울린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도 어렴풋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분 말씀을 듣고 나서 소설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소설가라면 으레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오래도록 기억되는 작가로 남는 게 가장 큰 소망이겠습니다. 저 또한 그런 생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겠습니다. 더 욕심을 부려본다면 달나라에 첫발을 내디딘 닐 암스트롱처럼 아무도 밟지 못한 미지의 땅에 소설가로서 첫발자국을 남기고 싶습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제게는 아픈 손가락들이 있습니다. 늘 무거운 짐으로 제 가슴에 내려앉아 있습니다. 그 아픈 손가락들과 함께 이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골프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에도 불구하고 갈수록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 넓은 야외에서 적은 인원이 함께 즐길 수 있어 코로나19 ‘청정 지역’이라는 인식이 생겨서다. 광활한 야외 필드뿐만 아니라 지인들끼리 즐길 수 있는 룸 형식의 스크린골프도 인기다.
동시에 골프로 인한 통증을 호소하는 이들도 급증했다. 일반적으로 골프는 다른 스포츠에 비해 몸을 격하게 움직이지 않는 운동처럼 인식돼 부상을 경계하지 않는 편이다. 그러나 무리하게 스윙을 장시간 반복하면 관절과 근육이 손상될 수 있다. 이를 무시하고 방치했다가는 만성 통증으로 진행될 수 있어 주의해야 한다. 이에 골프를 즐기는 중장년층에게 많이 나타날 수 있는 증상 4가지를 꼽아봤다.
1. 어깨 회전근개 파열
회전근개는 어깨와 팔을 연결하는 근육 4개(극상근, 극하근, 견갑하근, 소원근)와 힘줄을 말한다. 어깨 관절이 회전운동을 할 수 있게 하고 안정성을 유지한다. 회전근개 파열은 회전근개 근육이나 힘줄의 퇴행성변화, 어깨 관절과 회전근개 힘줄 사이의 활막 자극이나 염증, 외상이나 무리한 운동 등으로 발생한다. 스포츠 활동이나 외상으로 갑작스럽게 발생할 수 있다.
회전근개 파열은 만성 통증을 유발한다. 대표 증상은 어깨 통증으로 주로 팔을 위로 들어 올리거나 아래로 내릴 때 특정 범위에서 통증이 심해진다. 보통 50대 이상 중장년층에서 주로 발생한다.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증상으로 발병하는 오십견으로 오해받기도 한다.
몸을 바로 세우면 통증이 감소하고 누운 자세에서는 통증이 심해져 통증이 있는 쪽으로 돌아누워 잠을 잘 수 없다. 수면장애를 호소하기도 한다. 이 외에 근력 약화와 어깨 결림, 어깨 관절이 삐걱거리는 소리 같은 증상도 있다. 의심되면 병원을 찾아 제대로 치료받아야 한다.
2. 팔꿈치 통증, 내측상과염
팔꿈치 안쪽 관절에서 발생하는 염증성 질병으로 ‘골프엘보’라고도 한다. 과도하게 운동하면 손과 손목, 팔에 무리를 주는데, 이게 팔꿈치 주변 힘줄에 미세한 파열을 만들어 발생한다. 주먹을 쥐거나 물건을 잡을 때 팔꿈치 안쪽에서 발생하는 통증과 저림이 주요 증상이다.
특히 골밀도가 감소하기 시작하는 중장년층일수록 발생 위험도가 올라간다. 골프엘보를 단순한 근육통으로 여겨 일찍 치료할 수 있는 시기를 놓치면 만성 통증이나 퇴행성 관절염 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 따라서 골프 같은 운동 후나 일상생활에서 팔꿈치 안쪽으로 통증과 저림 증상이 느껴지면 빠르게 병원을 방문해 정확하게 진단을 받아야 한다.
3. 허리와 엉덩이 통증, 장요인대증후군
장요인대증후군은 허리와 엉덩이를 연결하는 장요인대에 염증과 손상이 생겨 동통성 하부요통이 나타나는 질병이다. 장요인대는 우리 몸에서 엉덩이뼈 장골과 허리뼈 요추, 골반을 구성하는 뼈 천추와 천골을 연결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골반이 비틀리는 것을 막고 요추 5번이 불안정하지 않게 잡아준다. 약간 구부러져 있는 모양이어서 손상되기 쉽다.
골프 동작으로 장요인대에 무리가 오고 장기간 긴장 상태가 유지되면 점차 탄력을 잃고 느슨해진다. 약해진 인대가 계속 손상되면서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된다. 이에 주변 조직이 대신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 요추하부와 골반과 고관절에 불안정을 초래한다.
허리띠를 착용하는 위치와 서혜부, 둔부, 사타구니, 회음부에 지속해서 통증이 발생한다. 무거운 것을 들거나 힘을 쓸 때, 골프 스윙을 할 때 통증이 나타난다. 반대쪽으로 몸을 굽히면 통증이 더 심해진다. 방치할 경우 이상근증후군, 천장관절증후군, 퇴행성 허리디스크로 진행될 수 있기 때문에 초기에 바로잡아야 한다.
4. 손가락마디 통증, 방아쇠수지증후군
손가락 관절은 우리가 하루에 가장 많이 사용하는 부위다. 그만큼 잦은 사용으로 염증이나 질병이 생기기 쉽다. 특히 무거운 골프 클럽을 장시간 움켜쥐는 동작만으로도 손가락에 무리가 올 수 있다. 그립 강도와 방법에 차이가 있겠지만 주로 반복 자극에서 기인한다.
방아쇠수지는 손가락 힘줄에 생기는 염증 또는 부기로 손가락을 움직일 때 ‘딸각’하는 소리를 내며 통증을 유발한다. 중지와 약지에서 많이 나타나며, 엄지손가락에서 발병하기도 한다.
골프 선수나 라켓을 사용하는 운동선수에게도 흔하게 나타나는 질병이다. 손가락에서 손바닥으로 이어지는 골두 부분에 잦은 접촉, 마찰로 힘줄이 비대해져서 부종과 통증이 발생하는데 심할 경우 손가락을 펴기가 어려워진다. 아픈 손가락을 손등을 향해 재끼면 통증이 심해지는 것이 특징이다. 증상이 약할 때는 충분하게 휴식을 취하고, 손가락이 굽혀지지 않는 현상이 지속되면 약물이나 주사 치료를 받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