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xhibition
◇요시고 사진전
일정 12월 5일까지 장소 그라운드시소 서촌
코발트빛 바다와 그 위를 헤엄치는 관광객, 알록달록한 파라솔. 전시장에 걸린 사진들은 잊고 있던 어느 여름날의 여행을 떠올리게 한다. 휴양지의 찬란한 순간을 프레임에 담아낸 요시고의 전시가 국내 관객을 찾았다. 요시고는 스페인 출신 포토그래퍼 겸 디자이너로 본명은 호세 하비에르 세라노다. 유명 IT 매거진 ‘와이어드’와 베네통 매거진 ‘컬러스’로 이름을 알렸으며, 현재는 ‘킨포크’, ‘비트라’ 등 글로벌 브랜드로부터 러브콜을 받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지중해부터 마이애미, 두바이, 부다페스트 등 세계 여러 여행지를 기록한 350여 점의 사진을 선보인다. 대칭적 구도와 기하학적 기법 등 작가만의 표현 방식이 두드러지는 ‘건축’ 섹션을 시작으로 미국, 아랍에미리트 등 사막의 풍광을 엿볼 수 있는 ‘다큐멘터리’ 섹션을 거쳐 해변과 바다, 관광객의 모습을 담은 ‘풍경’ 섹션으로 마무리된다. 작가가 작품의 이야기를 직접 들려주는 방식으로 구성해, 세계 곳곳의 여행지를 함께 거니는 듯한 특별한 경험을 선사한다. 방문객이 많고 대기 시간이 길어, 여유롭게 관람하고 싶다면 평일에 방문하는 것이 좋다.
◇윌리엄 웨그만 : 비잉 휴먼
일정 9월 26일까지 장소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제7전시실
개념미술의 선구자 윌리엄 웨그만의 전시가 호주, 뉴질랜드, 스위스, 네덜란드를 거쳐 한국에 상륙했다. 윌리엄 웨그만은 화가의 그림을 기록하는 데 그쳤던 1970년대 미국 사진계의 보수적인 관행을 깨고,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드러내며 사진 예술을 주류로 끌어내는 데 이바지한 예술가다. 특히 그는 자신의 반려견 ‘만 레이’를 의인화해 인간 사회를 풍자하고 내러티브를 시각화하는 사진 작업을 발표했다. 촬영 즉시 인화되는 대형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활용해 후보정 없이 반려견과의 교감만으로 즉석에서 결과물을 만들어낸 것이 특징이다. 이번 전시는 대표작 ‘캐주얼’, ‘키’를 비롯해 희소성 높은 대형 폴라로이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100여 점의 작품을 망라한다. 지금까지 대중에게 선보인 작품 외에 50점 이상이 국내에 처음 공개되며, 디올, 입생로랑, 마크제이콥스 등 글로벌 브랜드와의 협업작도 선보인다. 반려견을 모델로 삼아 독특한 작업 세계를 구축한 윌리엄 웨그만의 이번 전시는 코로나19의 장기화로 지친 현대인에게 웃음을, 반려동물 가구에는 공감대를 형성하는 시간을 선사한다.
● Book
◇나는 치매 의사입니다 (하세가와 가즈오 외 공저·라이팅하우스)
평소와 달리 기억이 흐릿할 때 떠올려보는 질문이 있다. ‘100에서 7을 빼보세요.’ ‘하세가와 척도’의 문항 중 하나로, 치매 여부를 진단할 수 있는 인지 기능 검사법이다. 이 척도를 만든 하세가와 박사는 평생 수천 명의 치매 환자를 돌본 치매 의료계 1인자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치매에 걸렸다. 그의 나이 88세의 일이다.
신뢰받던 의사에서 치료받는 환자가 된 그는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이며, 마지막까지 의사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결심한다.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공개해 치매 연구에 도움을 주기로 한 것이다. 그는 이듬해 치매에 걸린 사실을 공표하고, NHK 방송국과 다큐멘터리를 촬영한다. 이 책은 그 기록의 결과물이다.
50년 넘게 치매를 연구했지만, 그는 환자가 된 후에야 비로소 알게 된 것들이 있다고 말한다. 치매에 걸렸다고 24시간 비정상적인 상태는 아니라는 것. 기억력은 흐릿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 그렇기에 주변인이 치매 환자를 삶에서 배제해선 안 된다고 당부한다. 대신 “나는 치매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가 남긴 2년간의 투병 기록은 가슴 아프고 안타깝다.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병이기에 겁이 나기도 한다. 그러나 책장을 넘길수록 불안은 줄어들고 희망은 커진다. 치매를 절망적인 질환으로 여기는 사회 속에서 “불편하지만 불행하지 않다”고 말하는 그의 단단한 태도 덕분이다. 의사와 환자의 기로에 선 그의 이야기는 치매 환자와 그 가족은 물론, 치매를 두려워하는 모든 이들에게 기억을 잃어도 삶은 계속될 수 있다는 단서와 희망을 보여준다.
◇빨리 은퇴하라 (최승영 저·이은북)
은퇴를 앞둔 이들을 위한 진로탐색서.
단순히 불안한 마음을 잡아주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가치를 객관적으로 분석해 좋아하는 일을 찾을 수 있는 실질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점점 단단해지는 중입니다 (김영미 저·혜윰터)
노화로 우울감을 느끼던 저자가 환갑의 나이에 자전거 라이더가 된 이야기를 담았다. 어릴 적 사고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전국 자전거길을 섭렵한 저자의 도전이 짜릿한 설렘을 선사한다.
◇빅토르 위고와 함께하는 여름 (로라 엘 마키 외 공저·뮤진트리)
프랑스 대문호 빅토르 위고의 인생 철학을 그가 남긴 희대의 명작들로 살펴본다. 평생 민중에 대한 관심을 잃지 않고 정의를 향해 나아갔던 위고의 삶이 시대를 초월한 울림을 전한다.
● Stage
◇엑스칼리버
일정 8월 17일~11월 7일
장소 블루스퀘어 신한카드홀
연출 권은아
출연 김준수, 이지훈, 신영숙, 민영기, 최서연, 이상준 등
EMK뮤지컬컴퍼니의 창작 뮤지컬 ‘엑스칼리버’가 2년 만에 재연을 올린다. ‘엑스칼리버’는 혼란스러운 고대 영국을 지켜낸 영웅 서사 ‘아더왕의 전설’을 재해석한 작품으로, 시골 청년 ‘아더’가 성검 엑스칼리버를 뽑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기사들의 틈에 끼지도 못했던 평범한 인물이 한 나라를 다스리는 왕으로 거듭나기까지의 여정이 벅찬 감동과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서양 신화 속 인물의 이야기인 만큼 국내 관객의 정서를 반영해 초연 당시 서사를 대폭 수정했으며, 아더의 내면적 갈등에 초점을 맞춰 공감대를 이끌어냈다. 이번 공연 또한 초연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는 수정과 보완을 거쳐 더욱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관객과 만날 준비를 하고 있다. 특히 물, 불, 연기를 비롯한 특수 효과와 샤머니즘적인 퍼포먼스, 신비로운 영상 등 다양한 시청각적 장치로 마법과 마술이 공존하던 시대의 배경을 극대화해 몰입감을 더할 예정이다.
◇분장실
일정 8월 7일~9월 12일
장소 대학로 자유극장
연출 신경수
출연 배종옥, 서이숙, 정재은, 황영희 등
일본 현대 연극의 거장 시미즈 쿠니오의 대표작으로, 연극 ‘갈매기’가 공연 중인 어느 극장의 무대 뒤편 분장실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는다. 서로 다른 사연을 지닌 네 여배우가 ‘맥베스’, ‘세 자매’ 등 고전의 명장면을 연기하며 무대를 향한 열정과 삶에 대한 회한을 풀어낸다. 배종옥, 서이숙 등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표현하는 진짜 ‘배우 연기’가 완성도를 더한다.
◇광화문연가
일정 ~9월 5일
장소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연출 이지나
출연 윤도현, 엄기준, 강필석, 차지연, 김호영, 김성규 등
이지나 연출, 고선웅 작가, 김성수 음악감독 등 최고의 제작진이 의기투합해 2017년 처음 선보인 창작 뮤지컬로, 죽음을 눈앞에 둔 ‘명우’가 미스터리한 시간여행 안내자 ‘월하’와 함께 과거로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를 다룬다. 고(故) 이영훈 작곡가의 주옥같은 명곡을 토대로 해 ‘붉은 노을’, ‘옛사랑’, ‘소녀’ 등 1980~90년대를 장악한 음악이 옛 시절의 추억을 깨운다.
나이 들어 방향을 바꾸기는 쉽지 않다. 인생이란 농구선수 마이클 조던이 방향을 바꾸면서 점프슛을 터뜨리듯 그렇게 쓱싹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다. 살아온 관성과 습성을 쉽게 버릴 수 있던가.
이 길이 내 길이거니 믿고서 지나온 날들에 대한 애착은 또 어떻고? 더구나 노년에 이르러선 방향 전환이 더 어렵다. 그런데 반백 년을 패션 디자이너로 살아온 최복호(73)는 항로 변경에 성공했다. 화가로 변신했으니까.
최복호는 알아주는 이도, 알아보는 이도 많은 패션 디자이너였다. 대구를 본거지로 왕성한 활약을 했으며, 해외에서 거둔 성과도 많았다. 단청이나 탱화 같은 전통 문양에 모던한 미감을 결합한 패션 디자인으로 서양인들의 호평을 받기도 했다. 해외 여러 나라에 수십 개의 매장을 두었고.
이랬던 그가 패션과 결별했다. 정확하게는 은퇴다. 아들에게 사업체를 물려주고 뒤로 나앉은 것이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거치는 여정이다. 사업이 아무리 아깝더라도 죽을 때까지 붙잡고 살 수는 없으니 늘그막에 결국은 퇴장한다. 문제는 은퇴 이후다. 손에서 일을 놓자마자 예상보다 가혹한 권태가 따개비처럼 들러붙기 십상이다. 어쩌나?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궁리를 해봐도 별 답이 없다. 은퇴와 함께 모든 욕심을 내려놓고 살 생각을 하지만 실상은 딴판이다. 고매한 법정스님처럼 무소유를 숭상하는 노후 생활로 마음의 자유를 누리고 싶지만 언감생심이다. 격투기 링 같은 속세에 가담해 악착스레 살아오는 와중에 덕지덕지 붙은 욕망이라는 놈에겐 은퇴가 없다. 이렇게 되면 괴리에 괴로워진다. 허무감이 밀려든다. 영탄할 수밖에 없다. 아아, 마른 멸치 대가리처럼 따분한 노년이여!
최복호는 따분한 인생의 하오를 경험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머리는 기민하게 돌아가고, 오만 가지 인생의 맛을 섭렵한 내공의 보유자이기도 한 그는 은퇴 전에 충분히 숙고해 현실성 있는 대안을 발굴했다. 그게 그림이다.
“나이 들어서는 한결 확실한 타임 스케줄을 가지고 사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가장 잘할 수 있는 일, 재미있는 일을 찾아 계획적으로 진척시키는 게 지혜롭지 않겠는가. 난 오래전부터 품었던 화가의 꿈을 실현하는 일에 인생 2막을 사용하기로 했다. 사실 그림은 내게 친근한 장르다. 패션 역시 크게 보면 미술의 한 분야니까. 옷을 디자인하고 그림을 그려 천에 프린트하는 일을 평생 해왔으니까. 옷에다 그렸던 그림을 이제 캔버스로 옮긴 셈이다.”
과거와 다른 삶 속으로
패션 디자인의 요체는 선, 형태, 색채를 예술적으로 표현하는 데 있다. 디자이너로 산 세월의 길이만큼 최복호가 축적한 예술적 경험의 질량은 풍성하다. 패션계 입문 초기부터 그는 패션을 미술의 한 장르로 보고 패션쇼에 행위예술을 접목했다. 1973년에 펼친 첫 패션쇼 ‘의처증 환자의 작품 D’만 하더라도 대단히 도발적인 퍼포먼스였다. 19세기 유럽의 정조대를 소재로 차용한 이 쇼를 통해 그는 현대의 뒤틀린 성 모럴을 야유했다. 환경 문제를 다룬 ‘고발 의상’과 ‘공해 오염 분해기’ 역시 강렬한 메시지를 담은 퍼포먼스였다. 최복호의 성향과 미술적 재능을 짐작할 만하다. 그러고 보면 화가로의 변신은 자연스러운 이행이다. 비즈니스이자 종합예술에 가까운 패션 디자인의 복합 성분 중에서 미술만을 떼어 몰입하고 있다는 점에선 드디어 정곡을 파기 시작했다고 봐도 되겠다.
최복호는 지난 3월, 대구 대백플라자갤러리에서 ‘패션, 회화, 그리고 사유의 확장’이라는 타이틀로 첫 개인전을 펼쳤다. 회화와 그래픽 디자인 등 100여 점의 작품을 선보인 이 전시회는 성황을 이루었다. 1000여 명의 관객이 몰려왔고, 평도 좋았다. 이것으로 화가 동네에 거주할 수 있는 시민권을 발부받은 셈인데, 인생의 황혼에 활짝 열린 새벽에 그는 억누를 수 없는 희열을 맛보았을지도 모른다.
“패션도 미술도 내게는 ‘색(色)으로 꾸는 꿈’의 세계다. 색이란 무엇인가? 그건 암호요, 유혹이요, 영혼이라고 나는 정의한다. 인생의 핵심이 색의 꿈에 다 들어 있다는 얘기다. 미술의 길로 접어들어 기쁘다.”
해야 할 일 없는 노후도 즐거울 수 있다. 일이 주는 억압에서 해방되니까. 무위도식이 아닌 무위자연 같은 걸 추구할 수도 있고.
“나이 들면 귀도 잘 안 들리고, 이도 흔들린다. 이렇게 되면 일상이 구차해지기 쉽다. 즐길 수 있는 일이 없으면 더욱 난처해진다. 잡념에서 벗어나 그림을 그리다 보니 정신세계가 맑아지더라.”
그림 작업이 힘들진 않나? 방울방울 피를 뿜듯이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하는 게 미술인데.
“개인전에 필요한 작품 준비를 위해 작업실에 파묻혀 살며 화가들의 심적 고통을 실감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잘 그려지지 않을 때도 많았다. 그러나 여유로운 마음으로 그린다. 그림에 큰 욕심을 부릴 이유가 있겠나? 남들이야 어떻게 보든 우선은 내가 나를 만족시킬 수 있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그렸다.”
심심파적으로, 취미로 대충 그렸다는 얘기로 들리지만 이게 겸사(謙辭)다. 그림을 보면 그가 꽤나 빠른 공을 던진 신참 투수임을 알 수 있다. 물건이 나타났다! 뭐 이런 건 아니지만 웬만한 그림쟁이는 저리 가라다. 거침없이 갈긴 붓질의 능란함, 강렬하고 화려한 채색의 조화로운 구사, 화면에 난무하는 리듬감, 상상력을 증대시키는 추상적 형상의 오묘함 등 들여다볼 게 많은 작품들을 생산했다. 작심하고 틀어박혀 몰두한 결과물인 걸 알 만하다. 어설픈 그림놀음으로는 남들의 눈총만 받기 십상이다. 망신살이 뻗칠 수도 있다. 이걸 모를 리 없어 올인했나 보다.
“딴엔 절박한 심정으로 그렸다. 근래 두어 해 동안 시련이 많았거든. 코로나19 여파에 따른 사업상의 침체로 괴로웠던 거다. 이성적으로 극복해야 했다. 그림은 그 방편이었지. 그리면서 인생을 돌아봤고, 그리면서 반성도 많이 했다. 과거와는 전혀 다른 삶으로 나를 데려가야 할 필연을 느꼈다.”
코로나19로 모두 위기를 경험하고 있지만 인생을 성찰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언젠가 말 한 마리가 연구소 마당으로 걸어 들어왔더라. 이상하고 당혹스러운 상황이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뭐라 설명하긴 어려우나, 나의 자아를 돌보라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방문한 놈일 거라는 생각이 들더라고. 코로나19 역시 내게 마찬가지 의미를 전하는 전령이라고 생각한다. 삶의 패러다임을 바꾸라 독촉하는 거라고 보는 것이지. 이런 정황과 생각을 그림으로 그려 전시회에 걸었는데, 말과 내가 등장하는 이 작품에 대해 듣기 좋은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많더라고. 좋다, 당신의 대표작으로 손색없다! 그런 얘기도 들었고.”
전에 선생은 자연주의자의 오케스트라 정신을 얘기했었다. 물소리, 바람 소리, 새소리 어우러진 자연의 하모니를 삶에 끌어들여 남들과 소통하는 삶이 최고라고. 그래서인가 그림에도 자연이 자주 등장하네?
“모든 예술의 원천적 영감은 자연에서 얻는 게 아닐까? 다행히도 나는 늘 자연 풍경을 바라보며 산다. 자연 속에 사는 것들을 소재로 삼은 그림을 즐겨 그렸다. 자연을 화폭에 끌어들여 내면의 투박하고 질박한 본질을 표출하고 싶어서였지. 차기 전시회에서는 전혀 다른 소재와 작풍(作風)을 보여주고 싶다. 동어반복은 창의적이지 않으니까.”
“인생은 어차피 허무한 거잖아?”
최복호는 대구에 산다. 그러나 잠자는 시간 외의 대부분은 청도로 달려와 작업실에 눌러앉는다. 청도의 외진 산골에 있는 ‘최복호 패션문화연구소 펀앤락’(Fun & 樂)으로 출근한다. 그렇게 살아온 게 13년째. 이 연구소는 그의 아지트이자 다중에게 개방된 복합문화공간이다. 갖가지 소공연과 전시회를 숱하게 펼쳤다. 소주 서너 병쯤은 가볍게 쓰러뜨리는 애주가인 그의 사교장이기도 하다. 개그맨 전유성이 청도에 머물던 때엔 죽이 맞아 대작이 잦았다. 술 취해 이리 비틀 저리 휘청하는 꼴을 눈 뜨고 못 봐주는 성격이지만 무리 지어 노니는 걸 풍류 삼아 즐겼다. 그러나 요즘은 변했단다. 주로 혼자 논다. 벼랑을 움켜쥐고 홀로 선 소나무처럼 뭔가 뿌리부터 단단해진 모양이다.
“그림과 논다. 이건 혼자서도 가능하다. 그림이 아니더라도 노인은 혼자서도 잘 놀 줄 알아야 한다. 혼자일 때 창조적인 생활의 방법을 발견할 수 있다. 패거리 지어 산에 다니고, 골프 치고, 술 마시고, 이건 시간을 ‘때우는’ 것에 불과한 게 아닐까?”
타성에서 벗어나자는 뜻?
“우리 나이쯤 되면 어둠 뒤에 오는 빛 같은 거, 공평한 신에 관한 외경 같은 거, 이런 걸 생각해봐야 한다. 그래야 긍정심이 커진다. 인생은 어차피 허무한 거잖아? 고통을 피할 길이 없다고. 하지만 긍정적인 마음을 가질 경우엔 허무도 고통도 두려움 없이 받아넘길 수 있다. 자제력과 인내심도 긍정 마인드에서 강화될 테고.”
이미 100세 시대가 도래했지만 생명과학은 120세까지도 살게 해주겠다고 선전한다. 오래 사는 게 기분 나쁠 건 없지만 나이 들수록 긍정심보다 이기심이 커지기도 해 문제다. 더 진부해지고 더 까다로워지는 ‘꼰대’도 많다.
“내 경우엔 분노의 감정을 조절하기가 참 어려웠다. 바닥엔 항상 분노가 깔려 있었거든. 그래서 페이스북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이 아니고 내가 나를 보기 위한 글이었다. 글이라는 거울에 나를 비춰본 것이지. 그 효과는 컸다. 분노 조절이 가능해졌으니까. 글쓰기는 실로 자기발견을 할 수 있는 유력한 방편이다. 그림도 마찬가지다.”
페이스북 팔로어가 5000여 명이라지? 사이버 공간에서 좋은 글쓰기가 가능하던가? 글은 자기발견의 수단이기도 하지만 위장의 도구로 사용될 수도 있지 않나?
“폐단이 없지 않지만 이성적으로 접근하면 무리가 없다. 원초적인 감정 배설을 피해나가면 된다. 그러는 사이 감정이 순화되는 거고. 내 경우엔 그랬다.”
어찌된 일인지 세상이 재미없는 쪽으로 돌아가는 것 같다. 살면 살수록 재미가 있어야 하는데 느는 건 고통뿐이니 환장할 일이라고 투덜거리는 사람들이 많다.
“내가 왜 혼자 놀며 그림을 그리겠나? 좀 재미있게 살고 싶어서다. 일단은 내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수밖에 없는 거다. 이제 우린 딴짓을 좀 하며 제2의 인생을 사는 게 좋겠다. 창의적으로. 고통?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라는 게 있던가? 신은 그런 것은 주지 않더라. 암이라든가, 죽음이라든가, 그런 건 운명으로 받으면 되는 거고. 난 독실한 크리스천이다.”
그가 점심을 차려낸다. 연구소 텃밭에서 기른 채소 일색의 찬에 식욕이 들끓는다. 정갈한 식물 밥상이 숫제 그림이다.
“이대로 죽을 순 없다”. MZ세대의 놀이 공간으로 알려진 유튜브에서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낸 70대 할머니 유튜버 박막례의 이야기다. 그는 손녀딸의 제안으로 유튜브 세계에 처음 발을 디뎠고, 어떤 개그맨도 따라잡지 못할 특유의 웃음 포인트들로 유튜브 시청자를 사로잡고 있다.
70 평생을 파출부와 식당 같은 일만 하며 살았다가 병원에서 치매 위험 진단을 받고, 손녀가 그를 위해 회사를 그만 두고 함께 호주 여행을 한 것이 유튜브 세계에 뛰어드는 계기가 됐다.
유튜브를 통해 인생 역전에 나선 박막례 할머니는 2019년에 구글 본사에 초대를 받아 최고경영자 순다르 피차이와 유튜브 최고경영자 수전 워치츠키를 만났다. 또 미국 대표 패션지 ‘보그’와 인터뷰를 통해 한국을 넘어 전 세계에 이름을 알렸다.
이처럼 유튜브 시장에서 시니어들의 영향력이 점차 커지고 있다. 앱 분석 서비스 와이즈앱에 따르면, 유튜브 애플리케이션 이용자 4명 중 1명은 50대 이상 ‘시니어’인 것으로 나타났다.
일각에서는 이 현상을 유튜브 알고리즘 덕분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영상을 몇 편 시청하고 나면, 별도의 검색 없이도 추천과 맞춤 동영상을 제시하는 기능이 한몫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더 나아가 단순한 콘텐츠 소비뿐 아니라 박막례 할머니처럼 콘텐츠를 직접 생산하는 ‘시니어 크리에이터’들이 우후죽순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 중에서도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주며, 특별한 인생을 만들어가고 있는 ‘K할머니들’이 적지 않다.
이에 브라보 마이 라이프가 현재 인기가 높은 K할머니들의 유튜브 채널을 소개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밀라노 유학생, 패션 유튜버 ‘밀라논나’
50년의 디자이너 경력을 보유한 70대 장명숙 할머니는 패션 유튜버다. '밀라논나' 채널에는 세련된 코디법과 쇼핑 팁, 패션 트렌드, 브랜드에 대한 전문 지식 등을 간단히 소개하는 형식의 영상이 업로드된다. 추가로 ‘논나의 아.지.트’라는 코너를 통해 구독자들의 고민을 듣고, 따뜻한 조언을 건네기도 한다.
또한 새 옷을 사지 않기 위해 체중 관리를 하고, 물려받은 비녀를 브로치로 만든다. 플라스틱 사용을 줄이려 고체 비누 샴푸를 구입하고, 일회용기 뚜껑을 모아뒀다 반찬 그릇의 덮개로 쓰기도 한다. 시니어만이 풍길 수 있는 분위기와 아름다움으로 그는 구독자 81만 명과 소통하고 있다.
먹방계의 숨은 강자 순이 엄마(SUNI MOM), 영원씨(01seeTV)
60만 명의 구독자를 보유하고 있는 먹방 유튜버 순이 엄마는 짜파구리와 연어 국수, 산낙지 등 맛있는 음식 뿐 아니라 ‘배고파서 세제 뿌려서 수세미 먹었어요’, ‘직접 만든 대왕 무지개 쿄호젤리 먹방’ 등 눈길을 사로잡는 영상으로 호기심을 불러 일으킨다.
또 다른 먹방 유튜버 영원씨는 80대 나이에 인생의 새로운 막을 열었다. 동네 친구들과 함께 모여 먹는 파전과 오리 백숙, 닭발 등 시골 분위기를 자아내는 영상뿐 아니라 지구 젤리와 명량핫도그, 쉬림프링, 불량식품 먹방 등 평소 할머니들이 보기 어려운 음식을 직접 찾아 먹으며 재미를 더한다.
우리가 쉽게 떠올리는 전형적인 할머니 요리와 MZ세대가 주목할만한 간식거리, 음식을 적절히 선택해 다양한 먹방 콘텐츠를 보여주고 있다.
우당탕탕 시트콤 인생, 순자엄마
순자엄마는 자신의 시골 생활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고, 거침없는 입담으로 큰 웃음을 자아내는 60대 유튜버다. 그는 가족과의 일상, 몰래카메라, 먹방, ASMR 등 재밌는 콘텐츠를 양산하며 구독자 25만 명과 마주하고 있다.
특히 ‘맛있는 반찬은 다 아들 앞으로만 줬더니 남편 반응’, ‘장어 구워서 남편을 유혹한다면?’ 등 가족 몰래카메라 콘텐츠가 인기다. 순자엄마 유튜브 채널 내 댓글에서는 “이렇게 재밌는 영상은 공중파에서 방송해야한다”, “매번 볼 때마다 웃음 폭탄” 같은 폭발적인 반응이 나오고 있다.
대표 시니어 유튜버 ‘박막례 할머니(Korea Grandma)’
70대 할머니 박막례는 한국의 대표 시니어 유튜버다. 치매 위험 진단을 받은 후 이를 예방하기 위해 시작한 유튜브 채널이 어느덧 구독자 131만 명을 훌쩍 넘어섰다. 인기에 힘입어 유튜브뿐 아니라 에세이 책도 출간했으며, 연예계에서도 주목하는 셀럽이다.
“왜 남한테 장단을 맞추려고 하나. 북치고 장구 치고 하고 싶은 대로 하다보면 그 장단에 맞추고 싶은 사람들이 와서 춤을 추는 거다”, “고난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내가 대비한다고 안 오는 것도 아니다. 고난이 올까봐 쩔쩔 매는 게 제일 바보 같은 거다” 등 솔직담백한 말들로 젊은 세대의 공감을 사고 있다.
대표 영상으로는 ‘막 대충 만드는 비빔국수 레시피’, ‘시장에서 산 천원 립스틱 5천 원어치 리뷰’, ‘내겐 너무 더러운 손녀딸’ 등이 있다.
경북 성주군 대가면에 있는 참외 농장. 푸릇푸릇한 잎사귀 사이엔 샛노란 참외가 가득 숨어 있다. 참외 농사는 한 번 심어 늦겨울부터 늦여름까지 연속 수확이 가능해 어떤 작물보다 안정된 수익을 올릴 수 있어 성주로 내려왔다는 50대 부부. 수확한 참외를 선별하느라 눈코 뜰 새 없는 4월에 부부를 만났다.
30년을 서울에서 살아온 서울 남자, 서울 여자인 곽창신, 박미영 부부는 귀농을 결심한 후 두 아들을 데리고 전국 곳곳을 찾아 헤맸다. 남편 곽창신 씨는 ‘6시 내 고향’, ‘나는 자연인이다’, ‘인간극장’ 등을 시청하며 시골에서의 삶을 동경해왔다고 한다.
다니던 직장에 희망퇴직을 신청하고 약 6개월의 준비 기간에 이들 부부는 곽창신 씨의 고향인 강원도에서 충청도, 경상도까지 귀농할 곳을 찾아 전국을 돌아다녔다. 귀농지를 찾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한겨울에도 수확되는 딸기로 유명세를 얻고 있는 충청도 제천에서 얼음딸기를 생산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제천을 몇 번이나 방문해 그 지역 농부들을 만나고 도움을 요청했지만, 경쟁자가 오는 것을 마땅치 않게 생각하며 마음을 열어주지 않는 농부들에게 결국 두 손 들고 좌절하기도 했다.
귀농귀촌지원센터를 통해 몇 군데 문을 두드린 끝에 마침내 2017년 1월 성주참외로 유명한 경상북도 성주로 귀농, 참외 농사를 짓는 농부가 됐다. 귀농은 2017년이었지만 참외를 첫 수확한 것은 2018년 3월. 첫 실습치고는 큰 착오 없이 성주참외를 수확해 네이버 스마트스토어를 통해 직거래를 시작했다.
남편 곽창신 씨가 주로 참외 농사를 도맡아 하고 있다면 아내 박미영 씨는 농사를 거드는 것은 물론, 직판매를 위한 사이트 및 블로그 운영으로 판매 채널 다양화에 힘쓰고 있다. 서울에서 책 편집 디자이너로 일해왔던 만큼, ‘호호네성주참외’는 참외 농사를 기록하는 것뿐만 아니라 귀농 생활 체험 정리 등 다양한 콘텐츠가 소개된 알짜배기 귀농 블로그로 손꼽히고 있다.
올해 귀농 생활 5년 차. 지난 4년간 겪은 고생을 말로 하자면 밤을 새워도 모자랄 것이라는 부부는 귀농을 결심했던 그 즈음을 떠올리며 헛웃음을 짓는다.
아직 귀농인의 성공 페이지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지는 않지만, 도시에서의 삶을 시골로 모종한 후 조심스럽게 뿌리 내리고 있는 곽창신, 박미영 부부의 귀농 체험을 브라보가 귀알못(귀농귀촌에 관심은 많지만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주제별로 묶어본다.
Q 왜 귀농을 결심했을까요?
A 다니던 직장이 발전소였어요. 하루 24시간 운행되는 곳이라 3교대로 근무하는데 밤 근무가 되면 꼴딱 밤을 새서 일해야 했어요. 아이들 얼굴을 볼 수 없는 생활의 연속이었죠. 같은 공간에서 살고만 있을 뿐이지 아이들과 밥 한 끼 편하게 먹을 수도 없고 학교 생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었어요.
불현듯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싶던 참에 회사에서 희망퇴직 신청을 받는다는 공지가 떴어요. 오랜 고민 끝에 아내에게 귀농하고 싶다는 속마음을 털어놓았죠. 흔히 아내와 함께 온 가족이 귀농하면 반은 성공한 것이란 말이 있어요. 행복하게도 아내의 동의를 얻게 됐고, 이런 점에서 정말 아내에게 감사한 마음이죠.
Q 내려오길 참 잘했다, 이런 생각이 드는 지점은 뭘까요?
A 저희 부부가 자주 이야기하는데… 매일 아침 우리 가족 4명이 같이 밥을 먹어요. 저는 이 시간이 너무 행복하고 좋아요. 참 우습죠? 쉬운 일처럼 보이는 이걸 직장생활 할 때는 할 수가 없었거든요. 저녁에는 같이 텔레비전 보면서 깔깔거리고 웃기도 하고… 소소한 일상이 너무 행복해요. 귀농하면서 예전에 누리지 못했던 일상의 행복을 보상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물론 모든 것을 내가 판단하고 결과에 책임져야 한다는 점도 있지만요.(웃음)
Q 경북 성주로 꼭 집어서 귀농한 이유는?
A 제가 특별한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라, 귀농을 결심한 후 준비하면서 귀농한 선배들의 조언도 듣고 인터넷 강의도 듣고 귀농귀촌지원센터에 등록해 교육도 듣고 상담도 받았죠. 전 전원생활을 즐기며 부업으로 농사를 짓는 귀촌이 아니라, 아직 한참 키워야 하는 어린 두 아들이 있기 때문에 경제적 생활이 가능한 특화작물 쪽으로 열심히 알아봤어요.
이때 참외가 눈에 띄더라고요. 비닐하우스 생산을 하면서 일 년에 수확을 몇 차례 한다고 하니 수익성도 높을 것 같았고요. 참외 하면 성주참외가 특화돼 있는 상태라 경북 성주에 관심을 갖고 지원센터에 상담을 요청했죠. 그렇게 성주를 여러 번 방문해 이야기를 듣다 보니 그간 다른 지역에서 폐쇄적으로 이야기도 잘 안 해줬던 것과 달리 개방적으로 따뜻하게 맞아주시더라고요. 최종적으로 성주로 귀농을 결심하기 전에 아이들까지 데리고 4~5번은 왔던 것 같아요. 농장에서 참외 체험도 해보고요.
Q 귀농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뭘까요?
A 마을 주민들과 잘 어울리려면 제가 먼저 도움이 많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준비하면서 용접도 배우고 기계 수리도 배우고. 그런데 제가 내려와서 정착한 마을이 집성촌이에요. 오랜 시간 동안 거의 친족들이 모여 사는 곳에 불쑥 이방인이 참외 농사 짓겠다고 내려온 것이니 친해지기가 쉽지 않았죠. 그나마 두 아들이 마을에서 뛰놀고 그러는 게 좋아 보였던 마을 주민들도 계셔서 이야기를 나누게 됐지만.
저희는 시골 생활이라고 강아지도 키우고 닭도 키우고 그렇게 시작했는데 마을 주민들은 워낙 그런 생활이 일상이잖아요. 그래서 이제 그런 생활이 지겨워서 닭도 안 키우시고 그러세요. 근데 갑자기 마을에서 새벽에 닭이 울어대니까 좀 뭐라고 하셨죠. 웃픈 이야기죠?
정말 어려웠던 건 참외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땅이 필요한데 땅을 구매하기가 어려웠죠. 현재까지 저희는 땅을 구입하지 못했어요. 이제야 농지 구매를 위해 저금리로 대출해주는 농업인에 선정돼 3억 원을 대출받게 됐어요. 이 자금으로 참외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밭을 알아볼 예정이에요.
물론 밭을 구매하는 게 또 어려움이 있죠. 이런 시골에서의 논이나 밭 거래는 주위의 아는 사람들끼리 알음알음 거래하는 경우가 많아요. 저희가 귀농한 지 이제 5년 차지만 아직도 주민분들에게 이런 거래를 귀동냥 듣기에는 친밀도가 아무래도 떨어지니까… 부동산 중개인을 통해 조금 비싸더라도 구매할 수밖에 없어요. 근데 또 이렇게 조금 비싼 금액으로 거래하면 그 땅에 관심을 갖고 있던 마을 주민이 뭐라 하세요. 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는 거죠. 그래도 어떻게 하겠어요. 열심히 농사지으며 소통하고 관계 맺는 것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죠. 결국 진심을 다해서 대하다 보면 시간이 해결해주겠죠.
Q 거주지를 찾는 것도 쉽지 않을 텐데 어떻게 하였나요?
A 저는 4인 가족이 당장 생활을 해야 하는 상태라 농지보다 거주지를 먼저 장만했어요. 답답한 아파트에서 살다 보니 마당 있는 단독주택에서 아이들이 맘껏 뛰어 놀게 하고 싶었죠. 옆에 밭을 포함해 411평에 건평은 29평 정도 되는 단독주택을 직접 지었습니다. 귀농귀촌지원센터에 가면 농가주택 전용으로 지을 수 있는 기본 평면도까지 업로드돼 있습니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생활의 터전이 되는 농지 확보부터 한 후 주거지를 해결하라고 권하고 싶어요. 요즘에는 주거 공간에 관해서 각 지방자치 정부마다 빈집 프로젝트를 운영하고 있어요. 시골의 빈집을 리모델링해서 1년간 살아보고 귀농을 준비할 수 있게 하는 프로그램이에요.
집주인은 돈을 들이지 않고 집을 리모델링해서 좋고, 귀농을 꿈꾸는 도시인들은 첫 1년을 테스트 기간으로 삼아 적은 월 임대료로 살아볼 수 있어서 좋고, 일석이조죠.
Q 농사일이힘들지는 않았나요?
A 모든 농사는 힘들죠. 농사가 처음이니까 교육이란 교육은 다 참가했어요. 강소농 교육, 농민사관학교, 현장실습, 심화교육… 다 쫓아다녔죠. 아내는 사이버농업인 e비즈니스 교육까지, 2017년과 2018년은 교육의 해였습니다. 그러면서 2018년 3월에 참외 첫 수확을 하게 된 겁니다. 그때까지는 아직 자신이 없어서 공판장에는 출하를 못 했고, 밭에서 키우던 소소한 채소들과 참외까지 네이버 스마트스토어나 가족과 친지, 친구들에게 직판매하는 수준이었습니다. 제 이름으로 공판장에 첫 출하한 게 2018년 4월이었어요.
참외 농사짓는 걸 처음 해본 거잖아요. 모종판에 참외씨 넣고 또 모판에 호박씨 넣고 접목하고 수정시키고, 참외순이 자라면 순 자르기, 참외순과 호박줄기 접붙이기, 자꾸 성장해서 참외 성장을 가로막는 호박잎 떼어주기 등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참외는 열대작물이라 겨울에는 보온성 좋은 부직포로 이불도 덮어줘야 해요. 또 물을 대는 방법이나 비료 쓰는 법 같은 것도 터득해야 해요.
매일 마을 어른들에게 혼도 나면서 배웠어요. 모종을 키워서 본밭에 심어 3개월 정도 되면 수확하는 거죠. 그리고 농부는 부지런해야 한다고 하잖아요. 그 말이 정말 맞아요. 특히 참외는 새벽에 따야 해요. 새벽 시간에 못 따서 기온이 올라갈 때 따면 참외의 아삭한 맛이 덜하고 물러져요. 아침 11시면 경매가 시작되거든요. 그때까지 오늘 출하량을 맞춰야 하니까 성주 분들은 새벽부터 참외 따느라 부지런하게 움직이죠. 저희 같은 경우는 아이들 학교를 보내야 해서 이게 참 힘들었어요. 참외 따랴, 아이들 학교 보내랴.
Q 참외 농사로 매출액이 얼마나 되나요?
A 비닐하우스 1동당 연간 매출액이 1000만 원 정도 나온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물론 농사짓는 사람의 노하우에 따라서 위아래로 20% 정도는 왔다 갔다 하죠. 비닐하우스 10동이 있다면 연간 매출액 1억 정도죠. 그래서 성주에는 억대 농부들이 많아요. 물론 자신 소유의 밭에 비닐하우스 시설을 갖췄을 때 이야기고… 이 시설을 임대해서 하는 저희 같은 경우에는 비용이 더 들어가겠죠. 자가 소유라고 하면 기본 경비를 매출액의 30~40% 잡으면 될 것 같아요. 제일 비중을 많이 차지하는 것이 비료입니다. 땅의 토양을 좋게 해야 상품 가치도 높아지고 당도도 높아지죠. 성주군 농업기술센터에서 미생물을 배양해 토양을 좋게 하는 것들도 지원하고, 토양을 좋게 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씁니다.
무엇보다 성주의 토양이 다른 곳보다 미네랄 함유치가 높다고 해요. 그리고 가야산이 있어서 바람을 막아주고 눈이 잘 안 오고, 다른 곳보다 일조량이 많다는 점 등이 참외 재배에 장점이라고 들었습니다.
Q 성주를 대표하는 귀농인에 선정됐던데 어떤 점이 어필됐을까요?
A (취재에 동행한 성주군 귀농귀촌지원센터의 담당 이태일 계장이 보충 설명을 곁들였다)
박미영 씨의 꾸준한 SNS 활동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단지 농사짓는 것만 올리시는 게 아니라 농촌 생활을 꾸준히 업로드하면서 많은 분들의 관심을 받고 계셨는데, 이게 저희 센터가 할 일을 직접 해주신 거죠.
경험자로서 생생하고 유익하게 말이죠. 어린 자녀와 함께 귀농하셔서 자녀들도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고요. 성주를 대표하는 귀농인에 선정되셔서 저금리로 융자를 받게 됐으니 앞으로 참외 농사를 더 늘리실 수 있을 겁니다.
Q 가장 큰 문제는 농지 확보겠네요?
A 그렇죠. 현지 분들이 귀농인 때문에 땅값 올라간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세요. 근데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농사를 짓기 위해 귀농을 하시는 분들도 있지만, 귀촌을 통해 현지 주민들과 교류하면서 인맥을 쌓고 직거래 등의 포장 판매 부분에서 뭔가 경제활동을 할 수도 있어요. 꼭 농사짓는 것만이 농촌에서의 경제적 활동은 아니라고 봐요.
농사 힘들어요. 어느 정도 연세 들어서 오시는 분은 차라리 현지에서 생산된 참외를 직접 구매해 소포장 판매를 통해 수익 창출을 하는 부분도 고려했으면 해요. 특히 온라인 판매 등 관련 기능이 뛰어나다거나 마케팅 분야에서 일했던 분이라면 판매 채널 다양화에 훨씬 도움이 될 수 있거든요.
Q 귀농 혹은 귀촌을 원하는 분들은 어떻게 도움을 받으면 될까요?
A 일단 귀농귀촌지원센터를 방문해 귀농하고 싶다고 상담을 요청하면 어떻게 해서든 연결해주세요. 그리고 어떤 혜택이 있는지 상세히 설명해주시죠. 요즘은 1년짜리 현장실습 교육도 받을 수 있는데, 센터에서 농사 잘 짓는 멘토를 연결해 멘토멘티 프로젝트에 넣어주기도 합니다.
멘토에게 월 30만~40만 원, 멘티에게는 월 80만 원의 훈련 참가비를 줘요. 하루 8시간 농사를 배우는 거죠. 5개월 정도 배울 수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더 자세한 내용은 지원센터에 상담해보면 알 수 있을 거예요.
Q 귀농귀촌을 원하는 이들이 꼭 알아야 할 것이 있다면 뭘까요?
A 어렵네요, 하나만 꼽기가요. 그런데 제가 살면서 느낀 게 하나 있어요. 서울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결국 농촌 마을도 사람이 모여 사는 거잖아요. 사람과의 관계가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저희가 처음 이사 왔을 때 저희 집에 인터넷 설치가 안 됐어요. 저는 이해할 수가 없었죠. 아니, 저 높은 가야산 꼭대기에서도 인터넷이 되는데 제가 이사한 성주의 읍내 권역에 인터넷을 설치할 수 없다고 하니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죠.
그래서 도시에 살 때처럼 군에 민원 넣고, 심지어 청와대에도 민원 넣었어요. 그런데 공무원은 원칙만 읊으면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어느 날 저희 옆집에 이사 왔는데 이 사람은 그 지역에 인맥이 있던 사람이에요. 이 사람 집에는 그 다음 날 인터넷을 바로 설치해주더라고요.
또 한 가지 꼽자면 요즘 소확행이라는 말을 많이 하잖아요. 정말 귀농은 소확행을 실천하는 거예요. ‘없으면 없는 대로,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그냥 가족끼리 행복하게 살자.’
정신없이 빠르게 변해가는 도시에서 ‘느리지만 차근차근’ 그렇게 인생을 음미하며 살아갈 수는 없잖아요. 귀농해서 비로소 우리 가족은 ‘느리지만 차근차근’ 그렇게 살아가고 있어요.
성주군 귀농인들 연간 수입과 비용
귀농 A 사례(농지 임대의 경우)
선택 작목: 참외, 평균 투자비: 2억 원(주택 구입 포함), 연간 운영비: 3000만 원(1년), 평균 수입: 8000만 원(1년)
귀농 B 사례(농지 구입의 경우)
선택 작목: 참외, 평균 투자비: 5억 원 (농지·주택 구입 포함), 연간 운영비: 1억 원(1년), 평균 수입: 3억 원(1년)
귀농 C 사례(농지 구입의 경우)
선택 작목: 상추, 평균 투자비: 1억 5000만 원, 연간 운영비: 400만 원(1년), 평균 수입: 4500만 원(1년)
● Exhibition
◇맥스 달튼, 영화의 순간들
일정 7월 11일까지 장소 마이아트뮤지엄
자신만의 스타일로 영화, 만화, 음악 등 대중문화의 순간을 재탄생시킨 맥스 달튼의 개인전이 국내 최초로 열린다. 맥스 달튼은 부에노스아이레스 출신의 일러스트레이터이자 그래픽 디자이너로, 주로 1970년대부터 2000년대 영화를 소재로 해 보는 이들의 추억과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대표적으로 웨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아트북 일러스트를 작업했으며, ‘스타워즈’, ‘메트로폴리스’ 등 SF영화를 정교한 스타일로 재해석했다. 이번 전시는 맥스 달튼의 영화 일러스트를 중심으로 포스터, 드로잉, 수채화 등 다양한 작품 220여 점을 살펴본다. 특히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한국 영화 ‘기생충’과 판타지 대작 ‘반지의 제왕’ 포스터 및 미공개 연작 8점, 초안 드로잉 등을 최초로 선보인다. 뿐만 아니라 비틀스, 밥 딜런 등 음악 거장에게 경의를 표하며 그린 LP 표지와 동화책 일러스트 등도 전시해 그의 작품 세계를 다방면으로 조명한다. 특유의 물 빠진 듯한 빈티지 색감과 유머러스한 디테일로 관람객을 매료하는 그의 작품은 영화 속 한 장면을 유영하는 듯 환상적인 경험을 선사한다.
◇Fortune Telling: 운명상담소
일정 7월 11일까지 장소 일민미술관
샤머니즘과 우주론적 세계관을 예술적으로 탐구하는 ‘Fortune Telling: 운명상담소’전이 일민미술관에서 열린다. 운명과 상담소, 두 공간으로 이뤄진 이번 전시는 작가 17명의 작품으로 ‘운명’의 의미를 고찰하고, ‘상담’을 통해 내면을 깨닫는 여정을 마련한다. 1전시실 ‘운명’에서는 베토벤이 악상을 떠올린 숲속을 재현해 운명이 인생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공감각적으로 형상화한다. 빛과 어둠, 사계절, 음양오행 등 운명적 의미를 나타내는 신비로운 상징물이 내부를 가득 채운다. 2전시실 ‘상담소’는 사주포차, 본능미용실 등 작가들이 만든 6개의 이색 상담소를 중심으로 구성된다. 이곳에서 관람객은 사주, 타로, 연금술 등 운명론적인 방식으로 스스로의 운을 시험하고, 자신의 무의식을 들여다본다. 이를 통해 미신이라 여겨지던 우주관을 예술적인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으로 하여금 깊은 내면을 성찰할 수 있게 한다. 이외에도 모바일 앱을 활용한 인터랙티브 게임, 살풀이 굿판, 전자음악 공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돼 보다 입체적으로 전시를 즐길 수 있다.
● Book
◇그러라 그래 (양희은 저·김영사)
데뷔 51년 차에도 한 그루 느티나무처럼 늘 같은 자리에서 세월만큼 깊어진 목소리로 노래하는 가수 양희은의 에세이가 출간되었다. 지나온 삶과 노래, 일상의 소중한 순간을 마치 오랜 친구의 사연을 낭독하듯 따스하고 정감 있게 담았다.
“그러라 그래”, “그럴 수 있어” 어떤 근심도 툭 털어버리는 양희은의 말처럼, 이 책에는 쉽지 않은 인생이라도 정성껏 살아가고 싶게 만드는 애틋한 응원이 들어 있다. 그런 그녀만의 일상을 따라가다 보면 독자 역시 편안한 마음으로 책장을 넘기게 된다.
늘 여유만만하고 단단해 보이는 그녀도 순간마다 흔들렸던 시절이 있었다. 집안의 빚을 갚기 위해 무대에 섰으나 자신을 향한 위협으로부터 보호해줄 사람이 없어 방어기제로 똘똘 뭉쳐 있던 이십대, 난소암으로 석 달 시한부 판정을 받은 서른 살까지, “모진 바람을 맞으며 그냥 서 있었을 뿐”인데 “어느새 세월이 많이 지나간” 인생이었다고 담담히 돌아본다.
“무릎이 ‘나 여기 있다’ 하고 위치를 가르쳐주고” 늘 서서 부르던 노래를 앉아서 시작하게 되었을 때, 그녀는 자신의 일부였던 노래를 언젠가 떠나보내야 할 것을 예감한다. 몸은 자꾸 느려지고, 노년을 준비하는 동갑내기 친구들의 말이 마음에 차곡차곡 쌓인다. 또 치매 어머니를 모시며 ‘엄마가 떠나시면 어쩌나’ 마음 졸이다가도 마음과 달리 틱틱 쏘아대고, 갑작스러운 이별을 맞이하지 않기 위해 후회 없는 헤어짐을 준비한다. 인생 후반기에 접어든 이들이라면 충분히 공감할 내용이다.
몇 십 년을 살아도 어렵고 지난한 것이 인생이지만, 그녀는 그동안의 실패와 어려움에 고마움의 인사를 전한다. 덕분에 “마음의 자리가 넓어졌다”고도 덧붙인다. 인생의 시행착오를 ‘탓’이 아닌 ‘덕’으로 표현하는 그녀의 여유와 넉넉함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파도가 밀려와도 “그러라 그래” 하고 맞설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생긴다.
◇백년 허리 1 : 진단편 (정선근 저·언탱글링)
스테디셀러 ‘백년 허리’의 개정증보판이다. 초판에서 고쳐야 할 부분을 대거 보충했으며, 허리 통증은 진화의 축복이라는 요통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공간의 미래 (유현준 저·을유문화사)
건축가인 저자가 코로나19로 가속화된 각종 공간의 변화를 진단한다. 단순 공간 이야기뿐 아니라 주거 문제부터 국토 균형 발전까지 사회를 위한 거시적인 조망이 담겨 있다.
세계사의 탄생 (데이비드 크리스천 엮·소와당)
케임브리지 세계사 시리즈 한국어판으로, 복잡다단한 세계사의 발전 과정을 한눈에 보여준다. 200여 명의 석학이 저술에 참여해 주제별 다양한 시선으로 역사의 흐름을 살펴볼 수 있다.
● Stage
◇나빌레라
일정 5월 14일~5월 30일 장소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연출 이지나
출연 조형균, 최인형, 강상준, 강인수 등
최근 tvN 드라마로 방영되며 안방극장을 눈물바다로 만들고 있는 ‘나빌레라’가 창작가무극으로 관객을 찾는다. 웹툰을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인생의 끝자락에서 발레리노의 꿈을 품은 70대 ‘덕출’과 현실의 벽 앞에서 방황하는 20대 발레 유망주 ‘채록’이 발레를 매개로 함께 성장해나가는 이야기를 그린다. 점점 희미해지는 덕출의 기억과 위태로운 채록의 삶을 언제 문 닫을지 모르는 발레단의 상황과 연결해 가슴 찡하게 풀어낸다. 창작가무극으로 만나는 ‘나빌레라’는 웹툰 한 컷의 감동과 드라마의 세밀한 감정선을 공연만의 매력인 현장성으로 살려낸다. 특히 독보적인 미장센이 돋보이는 이지나 연출가의 합류로 초연보다 안무 비중이 늘어났으며, 힙합, 재즈, 모던록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활용돼 풍성한 볼거리를 선사한다. 웹툰과 드라마에서는 볼 수 없었던 화려한 무대가 관객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을 예정이다.
◇지붕위의 바이올린
일정 4월 28일~5월 16일 장소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연출 정태영
출연 박성훈, 권명현, KoN, 이혜란, 정은영, 서유진 등
1905년 러시아 유대인 마을, 중매결혼을 중시하는 아버지 ‘테비예’와 주체적으로 사랑을 찾아 나서는 다섯 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오랜 전통 앞에서 구세대와 신세대가 갈등하지만, 마침내 서로를 포용하는 가족의 모습이 감동을 전한다. 결혼을 허락받은 딸의 기쁨과 그런 딸을 떠나보내야 하는 아버지의 애틋한 마음이 아름다운 바이올린 선율로 극대화된다.
◇포미니츠
일정 5월 23일까지 장소 정동극장 연출 박소영
출연 김선경, 김선영, 김환희, 김수하 등
2006년 개봉한 실화 바탕의 독일 영화를 뮤지컬만의 매력으로 재탄생시킨 작품이다. 살인수로 복역 중인 천재 피아니스트 소녀 ‘제니’와 60년 동안 여성 재소자에게 피아노를 가르친 ‘크뤼거’가 피아노를 매개로 만나 각자의 상처를 치유하는 이야기를 그린다. 작품의 제목처럼 제니의 처절한 삶과 아픔을 담은 4분간의 피아노 연주가 강한 여운과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인터넷에 안경을 파는 쇼핑몰도 없던 시절부터 안경 디자인을 시작해 25년간 디자이너로서 묵묵히 길을 걸어온 사람이 있다. 1세대 안경 디자이너로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안경 디자인 회사 ‘디자인 샤우어’를 운영 중인 김종필 대표가 그 주인공이다. 인터넷이 낯선 시대에서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기본이 된 세상으로 변했지만, 같이 일했던 많은 사람들이 하나둘씩 업계를 떠났다. 그가 오랜 시간 버틸 수 있었던 힘은 어디서 출발했을까? 그간의 여정을 들으며 그 원동력에 관해 물어봤다.
어릴 때부터 암기나 받아쓰기는 못해도, 그림을 그리는 데 재주가 있어서 각종 대회에서 상을 휩쓸고 다녔다. 그림 그리는 걸 얼마나 좋아했던지 다빈치의 해부도를 보고 큰 감명을 받고 직접 따라서 매일같이 그렸다고 한다. 디자이너로서 타고난 본능이 이끄는 대로 대학에서도 금속공예 디자인을 전공했다. 우연한 계기로 선택한 첫 직장이 인생의 이정표가 됐다.
“어릴 때부터 안경 디자이너가 꿈은 아니었어요. 다만 조립하고 만드는 걸 좋아했는데, 그런 점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이상하게 안경에 끌렸어요. 당시 렌즈와 테가 조립되는 구조적인 디자인이 제게 매력적이었던 것 같아요. 어쨌든 운 좋게 안경 디자인 공모전에 입상하면서, 자연스럽게 당시 유명했던 ‘서전안경’에서 디자이너로 일하게 됐어요. 그게 시작이었어요.”
직장인으로서 애환은 누구나 있지만, 고정적으로 들어오는 수입과 안정적인 생활은 쉽게 뿌리치기 어렵다. 그는 안정적인 생활을 뒤로하고 어떤 결심으로 독자적인 브랜드를 만든 걸까?
“첨엔 안경 디자인 리뷰 사이트를 만들었어요. 지금으로 치면 블로그라고 할까요? 막 인터넷이 보급되던 시절이라 ‘블로그’라는 개념조차 없던 때였죠. 심지어 안경원 하시던 나이 지긋한 사장님들은 이메일조차 못 쓰셨어요. 그때 전 세계의 독특한 디자인을 가진 안경을 수집하면서 리뷰를 꾸준히 올렸어요. 이 디자인이 왜 좋은지, 브랜드 스토리는 어떤지 스스로 공부도 할 겸 만들었는데, 의외로 반응이 좋았어요.”
기술로 승부
재미로 시작했던 일이 사람들에게 주목받으면서 달라지기 시작했다. 당시 입소문이 퍼지면서 여러 군데로부터 전화를 받았다고 한다. 해외 브랜드 담당자들이 한국 업체에 그의 사이트를 문의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그에게 투자해 사업 기회를 제공하는 사람들까지 생겼다.
“디자인만 하다 보니 세상 물정을 잘 몰랐어요. 기회가 오니 잡아야겠다는 생각이었죠. 지금 같으면 착실하게 준비했을 텐데, 어린 나이에 그냥 저질러보자는 생각으로 사업을 시작했던 것 같아요. 경제관념도 없던 때라 다달이 통장에 꽤 많은 금액이 들어오는 걸 보면서 계속 잘할 수 있을 줄 알았어요.”
하지만 사업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관리가 잘되지 않았고, 명확한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지 못했다. 빚만 지고 돈을 벌지는 못한 채 계속 적자를 메우기에 바빴다.
“안경원을 4개나 운영하고, 내근직과 영업직도 있고, 도매까지 손을 댔는데 잘 안 됐어요. 욕심이 너무 많았던 것 같아요. 직원이 24명이나 있었는데, 바쁘게 살다 보니 직원의 이름을 잘 모를 때도 있었어요. 통장 잔고 0원에서 시작했는데 빚이 13억 원까지 불어나니까 아찔하더군요. 결국 폐업 위기까지 갔고, 밀린 월급을 챙겨주면서 같이 일했던 직원들을 하나둘씩 떠나보냈는데 참 미안했어요.”
빚이 불어나고 직원을 보낼 정도라면 폐업을 신청하고 포기할 수도 있었을 터. 그는 어떻게 다시 재기할 수 있었던 걸까?
“다시 살아야겠다! 이 마음 하나밖에 없었어요. 거래처 가서 부탁도 많이 하고, 욕도 무진장 많이 먹었어요. 빚쟁이들이 몰려와서 빚 독촉에 시달리기도 했어요. 신용불량자가 되기도 했고요. 한 8년을 그렇게 지나왔는데, 어떻게 살아왔는지 잘 모르겠어요. 진짜 앞만 보고 달렸어요. 다른 건 죽어도 할 자신 없고, 이걸로 끝장 본다는 마음이었어요. 그때부터 기술로 승부 본다는 마음가짐으로 임했던 것 같아요. 그 덕분인지는 몰라도 지금은 빚도 많이 줄었고, 신용불량자 상태도 풀렸어요.”
고심이 만든 고집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고 했나? 그가 만든 안경의 매력에 빠진 이들이 하나둘씩 그를 찾아오기 시작한다. 특히 대중에게 얼굴을 자주 비추는 연예인들이 찾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단골손님이 가수 양희은이다.
“저희가 갤러리아백화점에 입점한 적이 있었는데, 마침 양희은 선생님 스타일리스트가 저희 안경을 보고 선생님께 추천을 드린 거예요. 선생님도 안경을 보시고 맘에 들어 하셔서 그때부터 저희 안경을 자주 찾으세요. 이제까지 30개 이상은 구매하신 것 같아요. 황재근 디자이너나 김영하 작가도 저희 안경을 쓰세요. 대체로 보면 창의적인 분야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많이 와요. 그렇지 않은 일반인 분도 종종 오시는데, 그분들도 개성이 강한 편이에요.”
그렇다면 단골손님의 마음을 사로잡은 수제 안경의 독특한 매력은 과연 무엇일까?
“개성적이고 창의적인 분들이 많이 찾다 보니 재미있고 차별화된 걸 좋아하세요. 예를 들어 안경알의 좌우 형태가 다른 안경이 있는데 하나는 둥그렇고 다른 하나는 네모예요. 굉장히 특이한 안경인데 이런 스타일을 선호하시는 분이 꽤 많아요. 테가 탈착되는 방식이라 부러지지 않고 빠져요. 빠지면 다시 끼우면 돼요. 충격을 받아도 잘 부러지지 않는 것이 제가 만드는 수제 안경의 장점 중 하나예요. 오로지 제 손끝에서 나온 하나밖에 없는 안경들이에요.”
수제 안경의 장점은 확실히 특별하다. 오로지 한 사람을 위해서 만드는 안경인 동시에, 한 사람의 손끝에서 탄생한다. 다만 대량 생산과 비교해서 품이 많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가 이런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도 오랫동안 수제 안경을 고수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남들이 다 하는 걸 별로 하고 싶지 않았어요. 똑같은 걸 대량으로 찍어내는 것만이 답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평소에 생각하던 걸 손으로 한번 구현해보고 싶은 욕심도 있었고요. 그리고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죠. 처음엔 공장에 최소 수량을 맡길 자금도 수중에 없었어요. 그렇게 시작했는데 하다 보니 재미있었어요. 사실 손으로 만드는 과정은 중요해요. 머릿속 생각을 구체적인 오브제로 실현하는 동시에, 과정 중에 하나둘씩 문제를 발견하면서 해결책을 스스로 생각해요. 그 과정이 더 좋은 안경을 만드는 밑거름이 된다고 봐요. 손으로 만드는 과정은 일종의 실험이에요. 제 공방은 연구소나 다름없어요.(웃음)”
공장은 쉬지 않고 돌아가지만, 사람은 밥도 먹고 잠도 자야 한다. 손으로 만드는 것은 기계와 비교해서 한계와 단점도 존재한다. 이제껏 수제 안경을 만들면서 힘든 점은 없었을까?
“물론 있죠. 손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게 한계가 있어요. 거칠게 말하면 나올 수 있는 아이디어가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고, 다르게 말하면 그 한계치까지 고심해서 만들어내는 고집인 거죠. 기계나 기술이 부족하면 포기할 줄 알아야 하는데, 제 성격상 그게 잘 안 돼요. 같이 일하는 후배는 왜 사서 고생하냐고 묻지만, 저는 이게 좋아요. 매번 똑같은 걸 만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새롭고 더 좋은 안경을 계속해서 만들고 싶어요. 늘 한계를 실험 중인 거죠. 제 고집이란 게 그래요.(웃음)”
한 뼘이라도 나아지는 삶
안경 디자이너로서, 숱하게 수제 안경을 만들면서 자신만의 기준이 분명히 있을 터. 그가 생각하는 좋은 안경의 기준과 디자이너로서 철학을 물어봤다.
“일단 기능적으로 충실한 것이 기본이죠. 편하지 않고 튼튼하지 않은 안경을 손님에게 드릴 수는 없죠. 덧붙여 수제 안경은 새로움에 대한 도전이에요. 새롭지 않으면 손으로 만들 필요가 없죠. 안경은 오브제에 대한 열정과 창의적인 아이디어, 그리고 오랜 시간을 투자해서 만들어낸 결과물이에요. 완벽한 안경은 없다고 생각해요. 광이 잘 나는 것보다 부족하더라도 계속해서 발전하고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이 좋은 안경과 제대로 된 브랜드의 덕목이라고 생각해요. 시도하지 않으면 발전이 없고, 새로운 시도는 열정에서 출발해요. 저도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어제보다 더 나은 걸 만들려고 매일 다짐해요.”
끝으로 더 나은 걸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그에게 디자이너로서의 계획을 물었다.
“죽을 때까지 조금씩 배우면서 성장하는 것이 삶의 목표예요. 빠르고 크게 성장하는 건 기대하지 않아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전 그렇게 조바심을 내면 많이 힘들었어요. 남들에게 보이는 성공보다는 행복하게 재밌게 보내는 하루가 더 소중해요. 어제보다 조금씩 더 성장하고, 일 년 전보다 한 뼘씩이라도 나아지는 것. 그게 디자이너이자 한 인간으로서 목표예요. 그런 점에서 사업을 운영하는 대표로서 앞으로 사업을 조금 더 가치 있는 방향으로 이끌고 싶어요. 올해는 친환경과 관련된 프로젝트를 한번 해보려고요.”
베테랑 안경 디자이너 김종필 대표가 인터뷰 내내 가장 많이 한 말은 ‘성장’과 ‘차별화’였다. 그의 차별화는 명함에서부터 알 수 있었다. 누구나 다 쓰는 종이 명함이 아니라 비닐로 정성스럽게 포장된 안경닦이 위에 수제 안경 사진과 함께 새겨진 명함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자신을 차별화하는 수단이자 실용성을 더한 명함이었다.
한편 그는 늘 성장하고자 했다. 폐업에 내몰렸을 때 사업가로서의 부족함을 절실히 깨닫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경영·마케팅·브랜딩 책을 400권 이상 독파했다고 한다. 책을 많이 읽은 덕분에 경영인으로서의 판단 기준이나 관점을 많이 익힐 수 있었다고.
이제껏 그는 남들이 흉내 내지 못하는 안경을 만들며 자신만의 사유를 표현했다. 그게 단순히 이상적인 얘기가 아니고, 구체적인 실행과 기본을 충실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서 더욱 빛나 보였다. 아름다움과 동시에 기본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디자인적으로 차별화에 신경 쓰면서 편안함이라는 안경의 실용성을 놓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김종필 대표는 디자이너로서의 오리지널리티를 갖추기 위해서 지난 25년 동안 밤낮없이 고민했고, 그 고민의 결과가 수제 안경이었다. 흔히 나이테라고 부르는 ‘연륜’은 계절의 변화가 뚜렷할수록 더 선명하게 나타난다고 한다. 늘 시도하고 매일 성장하려는 그의 마음이 차곡차곡 쌓여 큰 연륜을 만들고, 후에 품이 넓은 나무로 성장해서 넉넉한 그늘을 사람들에게 드리우는 안경 디자이너가 되기를 바라며 마친다.
지난해 연말부터 올해 초까지 금융기관에서 줄줄이 대규모 희망퇴직이 발생했다. 비대면 금융이 늘어나면서 필요한 영업점의 인원이 줄어든 탓이다. 은퇴한 전문직 종사자들은 근로 의욕이 상당히 높아서, 퇴직 이후에도 쉬지 않고 재취업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이러한 전문직 출신 은퇴자는 창업이나 창직에 관심이 많다.
참고 한국고용정보원, 신사업창업사관학교
적성을 고려한, 창업
박 씨는 대기업에서 30년 가까이 근무한 선박 전문가였다. 선박 기술 서비스 분야에서 임원까지 올랐다. 오랫동안 일한 회사를 떠나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원하는 일을 하고 싶었다. 예전부터 사업에 대한 동경이 있었고, 실제로 적성검사를 하면 사업가 체질로 나왔다. 그래서 잘할 수 있고 자신 있는 분야인 선박 기술 서비스와 선박 엔지니어링 전문기업을 설립했다. 다른 일도 생각했지만, 이제껏 축적한 경험과 전문성은 포기할 수 없는 큰 자산이었다.
실제로 시니어 창업이 늘고 있다. 지난해 중소벤처기업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20년 3분기 창업 기업은 34만여 개로 2019년과 비교해 13.3% 늘어났다. 특히 연령별로 규모를 파악했을 때 60세 이상의 전체 창업은 2019년 같은 기간과 비교해 15.8% 올랐고, 기술창업은 28% 상승했다.
이들이 창업을 선호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은퇴 후 재취업이 쉽지 않고, 창업의 진입 장벽이 그리 높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해 전경련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가 중장년 구직자를 상대로 한 설문조사에서 10명 중 6명 이상은 6개월 이상의 장기 실업 상태에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또한 100년행복연구센터의 자료에 따르면 퇴직자 3명 중 1명은 자영업을 선택했다. 선호하는 이유는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고, 특별한 기술이 없어도 뛰어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실업의 장기화와 손쉬운 접근성이 창업의 주요한 원인이었다.
하지만 창업의 길도 어렵다. 국민의힘 소속 양금희 의원이 중소벤처기업부로부터 제출받은 ‘창업 기업 생존률 현황’ 자료에 따르면, 국내 창업 기업의 5년 차 생존율은 29.2%로 집계됐다. OECD 주요국 창업 기업 5년 생존율 41.7%와 비교하면 상당히 낮은 수준이다. 한편 코로나19도 창업 시장에 영향을 미쳤다. 중장년 취업 컨설팅 관계자는 “창업 문의는 많지만 코로나19로 인해 창업을 미루는 사례가 생기고 있다. 만약 창업을 준비한다면 철저한 대비가 필요하다”라고 밝혔다.
창업을 위해서는 4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창업자, 아이템, 상권, 창업자금이다. 어느 하나도 부족함 없이 유기적으로 작용해야 한다. 창업자의 역량을 스스로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자신에게 어울리는 아이템을 찾아야 한다. 아이템을 찾았다면 적합한 상권을 알아보고, 그 상권에 입점하기 위한 창업자금을 비축해야 한다. 다음은 한국고용정보원의 자료를 바탕으로 예비 창업자를 위한 4계명을 살펴보고, 최근 부상 중인 유망 창업 아이템을 소개한다.
예비 창업자를 위한 4계명
#1 적성이 최우선
창업은 만만치 않다. 남들이 한다고 덩달아 휩쓸려 창업을 시도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우선은 ‘자신이 할 수 있는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할 것인지?’를 명확히 정하는 것이 좋다. 퇴직한 중장년 세대는 성격이나 장단점 같은 본인의 정확한 특성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중장년 취업 컨설팅 관계자는 “평소에 즐기는 취미나 흥미, 그리고 자신이 쌓아온 역량을 종합적으로 분석해서 정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2 유망 아이템은 적합성을 고려
유망 아이템을 정하라고 하면 모두 장사가 잘되는 일을 선택한다. 물론 수익을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창업자와의 적합성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직접 자료 조사도 하고, 발품을 팔면서 자신이 즐길 수 있는 업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황윤정 한국열린사이버대학 디지털비즈니스학과 교수는 “시니어인 만큼 동년배의 니즈와 트렌드를 파악하고,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아이템을 정하는 것이 좋다”고 설명했다.
#3 상권의 분위기와 유동 인구
점포 창업에서 상권은 중요하다. A급 상권에서 시작하고 싶은 마음은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무조건 A급 상권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 A급 상권의 점포는 임대비용도 비싸고 권리금도 장난이 아니다. 상권이 좋다고 해서 모든 상품이 잘 팔린다는 보장은 없다. 상권 내에서도 입지에 따라 등급이 매겨지고, 입지에 맞는 업종이 다 다르다. 황 교수는 “상권의 분위기가 업종과 어울리고, 유동 인구가 많은지 살펴보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4 비용과 매출
이제까지 조금 이상적이었다면 지금은 현실적인 얘기를 할 필요가 있다. 창업에는 반드시 돈이 필요하다. 기본적으로 창업자금은 총투자비용의 70%를 자기 자본으로 가지고 있어야 한다. 자기 자본이란 그 돈이 없어도 당장 사는 데 문제없는 자산을 말한다. 만약 자금이 부족하면 선택한 업종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창업 규모를 줄이는 것이 낫다. 중장년 창업 컨설팅 관계자는 “예상 비용이나 예상 매출액을 꼼꼼히 따져보고, 관련 분야의 비용 지원 제도를 알아보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2021 뜨는 창업 아이템
맞춤형 향기 서비스 ▶ 최근 향초와 디퓨저 같은 향기 산업이 급성장 중이다. 영국 시장 분석 업체 ‘IAL컨설턴트’에 따르면 글로벌 향기 산업 규모는 2022년까지 약 40조 원으로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쾌적한 실내 환경 유지 및 스트레스 해소로 향기 제품이 많이 애용된다.
공유 주방 ▶ 공유 경제를 활용한 공유 주방 사업이 뜨고 있다. 점포 창업을 하는 대신 공유형 주방을 이용해 배달음식만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것이다. 점포 창업보다 초기 비용이 저렴하다. 공유 주방은 4평 정도의 공간에 1000만 원 내외의 보증금과 월 160만 원 정도의 이용료만 지불하면 된다. 배달을 이용하는 1인 가구가 계속 늘어나는 추세라 더욱 주목받고 있다.
창문농장 ▶ 반려식물이 하나의 트렌드로 떠오르면서 창문농장(Windowfarm)이 뜨고 있다. 창문농장은 아파트 거실이나 베란다 창문에 수직으로 설치하는 수경 재배 시스템이다. 계절과 상관없이 친환경 채소를 직접 재배해서 먹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홈가드닝과 플랜테리어에 대한 수요가 많아 앞으로 새로운 먹거리가 될 것이다.
새로운 대안, 창직
A씨는 호텔리어로 20년 동안 일하다 은퇴했다. 은퇴 후 여가를 즐기려고 했지만 상황이 여의치 못했다. 아내의 잔소리와 더불어 계속해서 비는 통장 잔고를 메워야만 했다. 얼떨결에 대리운전을 시작했지만 만만치 않았다. 취객의 난동과 폭언 및 욕설로 괴로운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그러다 우연히 아들의 결혼식에서 신랑 신부 이동 서비스에 영감을 받아 결혼식 당일 웨딩카로 신랑 신부를 이동시켜주는 웨딩쇼퍼 사업을 시작했다. 호텔리어와 대리운전 경험을 발휘해서 창직을 시도한 것이다.
위는 대표적인 창직 사례다. 저성장이 계속되면서 일자리가 충분하지 않다. 이러한 탓에 중장년의 재취업도 쉽지 않다. 음식점, 숙박업, 카페 등 이미 포화 상태인 시장에서는 창업으로 살아남기 힘들다. 이러한 현상과 맞물려 고학력 베이비붐 세대가 재취업 시장에 뛰어들면서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르는 것이 바로 ‘창직’이다. 서울시50플러스재단 관계자는 “생계유지와 함께 일로써 보람을 얻기를 원하는 중장년층이 많아지면서 창직을 원하는 수요가 생기고 있다”라고 밝혔다.
실제로 서울시50플러스재단은 중장년층을 대상으로 원하는 진로 유형을 파악했는데, 창직 추구형이 64.27%로 가장 높았다. 이 유형은 자신의 경력을 활용해 지속해서 경제적 소득을 얻기를 희망했다. 주로 장기 근속한 도시의 화이트칼라 남성 노동자가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다양한 사회관계망을 통해 구직하고 있었으며, 정부의 창업과 자영업 지원 정책을 선호했다.
창직은 쉽게 말해서 새로운 직무를 만드는 일이다. 그 직무를 하기 위한 내용과 지식, 기술 등이 포함된다. 창업의 비즈니스 모델은 주로 제품이나 기술이다. 반면에 창직은 직무를 분석하고 교육 훈련 프로그램을 개발해 인력을 양성하는 것이 목표다. 이렇게 다름에도 불구하고 창업과 창직을 자주 혼동하는데, 이는 창직을 통해 구현되는 방법이 대부분 창업이기 때문이다.
창직을 위해서는 참신성, 수익성, 실현 가능성, 전문성이 필요하다. 이 일은 새로운 직업을 만드는 것인 만큼 참신해야 하고, 새 직업의 직무 수행은 기존의 일과는 확실히 다른 특성을 가져야 한다. ‘직업’이기에 경제적 이득을 취할 수 있어야 하고, 하나의 직업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법적 및 제도적 여건을 살펴야 한다. 창직 관련 전문가는 “창직은 새로운 업을 만드는 일이기에 업으로서 지속할 수 있고, 경제적 소득이 있어야 한다. 윤리적으로나 법적으로도 이상이 없어야 한다”고 말했다. 다음은 창직을 위한 구체적인 방법과 미래에 전망이 밝은 창직 업종을 소개한다.
예비 창직자가 알아두면 좋은 Tip
#1 다방면으로 탐색하자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사회의 전반적인 현상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예를 들면 웰빙에 대한 관심과 주 5일 근무 확산으로 여가 생활이 늘어나면서 다이어트 프로그래머나 파티 플래너가 생겨났다. 또한 빅데이터의 발달로 빅데이터 분석가도 유망한 직업으로 부상했다. 이처럼 새로운 직업을 발굴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정책 변화, 수요자의 욕구, 과학기술의 발전 등 다방면으로 탐색할 필요가 있다.
#2 해외로 눈을 돌려보자
해외 직업 중에 우리나라의 상황을 고려해 적용 가능한 직업을 찾을 수 있다면 새로운 직업을 만들 수 있다. 맥주 주조사나 VJ 같은 직업도 해외에 있던 직업이 우리나라에 도입된 경우다. 다만 각 나라의 문화, 제도, 시장에 따라 현실이 다르기 때문에 직업을 그대로 수용하기는 쉽지 않다. 적용 가능성을 충분히 검토한 뒤 조정해야 한다.
#3 융합을 고려하자
기존 학문, 직업 간의 융합을 통해 새로운 직업을 만들 수 있다. 대표적으로 음악치료사나 미술치료사가 있다. 기존 노동 시장에 전혀 없던 직무보다 기존 직업 간의 결합 또는 융합으로 발생한 직업이 앞으로 더 많아질 것이다. 따라서 직업 간의 결합과 융합 가능성을 찾아보자. 특히 반려동물과 관련된 시장을 주의 깊게 보면 좋다.
#4 분화를 검토하자
새로운 수요에 따라 기존 직업에서 분화되거나 전문화하여 직업이 나타나기도 한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인구가 증가하면서 애견 옷만 전문적으로 만드는 애견 옷 디자이너가 나타났다. 이 직업은 생활수준이 향상되고, 핵가족 및 독신 인구 증가로 애완동물 시장이 성장하면서 패션 디자이너에서 분화된 것이다. 기존의 직업과 사회 전반적인 현상을 살피면서 분화할 수 있는 직업을 눈여겨보자.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창직
로봇 컨설턴트 ▶ 일반 기업의 로봇 사업 도입 및 전환에 대한 컨설팅을 제공하기 위해 콘셉트 디자인, 타당성 연구, 품질 관리 등 다양한 테스트를 실시한다. 고령화와 자동화 추세에 따라 생활 전반에 로봇 사용이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도심 RPG개발자 ▶ 도시를 게임판 삼아 참여자가 직접 역할을 수행하면서 도시의 문화나 역사를 체험하는 일종의 놀이마당을 기획하고 운영한다. 게임을 문화 체험, 도시 체험 등 다양한 영역에 접목하여 사업을 진행할 수도 있다. VR이나 AR 체험이 늘어나면서 유망한 직종으로 뜨고 있다.
스마트팜 전문가 ▶ 시설 원예 및 축산 농가를 대상으로 사물인터넷 등 ICT를 활용해 농가 시설을 현대화하고, 이를 통한 지속적인 성장 및 수익 창출을 지원하기 위해 스마트팜 설계, 구축, 운영 등에 관해 조언한다. 스마트팜은 한국고용정보원이 정한 8대 혁신성장 산업 중 하나다.
지난해 방영된 SBS 드라마 ‘펜트하우스’가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화제가 됐다. 이 드라마는 가상의 공간인 주상복합아파트 ‘헤라팰리스’의 펜트하우스를 둘러싼 갈등과 욕망을 다루고 있다. 그렇다면 실제의 펜트하우스는 어떨까? 어떤 사람이 거주하고, 부동산으로서 어떤 가치가 있는지 한번 살펴보자.
최근 영국의 억만장자이자 가전 브랜드 ‘다이슨’의 창립자 제임스 다이슨 회장은 싱가포르의 펜트하우스를 6200만 싱가포르달러(약 520억 원)에 매각했다. 이 펜트하우스는 싱가포르에서 가장 높은 64층 건물의 꼭대기 3개 층으로 약 1950㎡ 넓이에 4개의 침실과 개인 야외 수영장을 비롯한 카바나, 와인 저장고 등을 갖추고 있다. 이러한 고급 펜트하우스는 한국 자산가들 사이에서도 최근 주목받고 있다.
이는 두 가지 요인이 작용한다. 하나는 고가의 펜트하우스를 구매할 수 있는 ‘부자’가 증가한 덕분이다. KB경영연구소가 발표한 ‘2020 한국 부자 보고서’에 따르면 금융 자산 10억 원 이상을 보유한 한국 부자의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약 25만 명이던 한국의 부자는 5년 사이 약 35만 명으로 10만 명이나 증가했다. 이와 더불어 부동산 자산은 비중이 꾸준히 오르고 있다. 2016년 51.4%였던 부동산 자산의 비중은 2020년 56.6%로 증가했지만, 같은 기간 금융 자산은 43.6%에서 38.6%로 하락했다.
다른 요인은 바로 ‘중대형 면적에 대한 수요’다. 코로나19 영향으로 늘어난 홈루덴스가 부동산 시장에도 영향을 미쳤다. 홈루덴스는 밖에서 활동하지 않고 실내에서 여가활동을 보내는 이들을 일컫는다. 집을 비우던 낮에도 전염병의 여파로 가족끼리 생활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자기만의 공간을 원하는 경우가 생겼고, 이는 중대형 면적에 대한 수요로 이어졌다. 실제로 지난해 전용면적 85㎡ 초과 아파트 청약 경쟁률은 약 270대1에 육박했다. 다른 면적의 경쟁률이 두 자릿수에 그친 것과 비교하면 큰 수치다. 부동산 관계자는 “중대형 아파트 수요가 늘면서 기본적으로 큰 면적을 자랑하는 펜트하우스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고 있는 건 사실이다”라고 밝혔다.
청약 치열…1순위는 사생활 보호
실제로 펜트하우스는 청약에서 소수의 세대만 모집하지만 경쟁률은 치열하다. 흥미로운 건 강남이나 한남동처럼 전통적인 부촌뿐만 아니라 지방에서도 인기가 높다. 지난해 청약 접수를 진행한 세종시 한림풀에버는 가장 높은 청약 경쟁률이 펜트하우스에서 나왔다. 136㎡형으로 두 가구를 뽑는데 686명이 청약에 접수해 경쟁률은 무려 343대1이었다. 속초디오션자이의 전용면적 131㎡ A타입 펜트하우스도 114대1까지 경쟁률이 치솟았다. 당시 355가구 모집(특별공급 제외) 전체 평균 청약 경쟁률은 17대1이었다. 이에 대해 부동산114 관계자는 “펜트하우스가 지방에서 인기가 높은 이유는 서울보다 좋은 조망권이 일정 부분 영향을 미친 것 같다”라고 말했다.
펜트하우스에 거주하는 사람의 면면은 화려하다. 기업인, 국회의원, 연예인 등 유명한 자산가들이 거주한다. 실제로 개그맨 주병진은 SBS 예능 프로그램 ‘미운 우리 새끼’에 등장해 거주하는 상암동 카이저팰리스 펜트하우스를 공개하기도 했다. 부동산 업계에 따르면 김범수 카카오 의장은 그동안 보유하고 있던 로덴하우스 웨스트빌리지 펜트하우스를 판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다면 이들이 펜트하우스를 선호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서울시 고급아파트 주거선택요인 중요도 분석’에 따르면 나인원 한남 입주 대상자를 중심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펜트하우스를 선호하는 이유 1순위는 ‘사생활 보호’였다. 입지 환경에 해당하는 자연환경과 부동산으로서 미래 가치는 각각 2위와 3위를 차지했다. 실제로 부동산 관계자는 “코로나19 이전부터 자산가들은 프라이버시를 중요하게 생각했다”라고 말하며 “고액 자산가일수록 사생활 보호를 위해 타인과의 접촉이 상대적으로 적은 주택을 선호하는 편이다”라고 밝혔다.
인기 있는 럭셔리 펜트하우스
▲ 나인원 한남
전통적인 부촌인 한남동에 자리 잡고 있다. 입지 조건을 보면 남산을 뒤에 두고 한강을 바라보는 배산임수에 해당하는 길지다. 사생활 보호도 철저하다. 층마다 단독 엘리베이터가 있으며, 아파트 주 출입구부터 주차장, 동 출입구, 현관에 이르는 4단계 보안 체계가 작동 중이다. 세계적인 조경 디자이너 사사키 요우지가 조성한 산책로가 있고, 국내 최대 규모의 클럽하우스도 단지 내에 위치한다. 복층과 펜트하우스 가구는 별도의 지정 차고와 전용 창고도 있다.
▲ 아크로 서울 포레스트
성수동에 위치해 한강은 물론 서울숲, 남산을 볼 수 있다. 대림산업은 조망 프리미엄을 더하기 위해 특화설계를 적용했다. 모든 가구에서 서울숲이나 한강 조망이 가능하도록 층별 가구 수를 3가구, 9층 이하는 4가구로 조정하고 T자로 건물을 배치했다. 각 세대 내부에는 창문 중간 프레임을 없앤 아트 프레임과 넓게 펼쳐지는 270도 파노라마 뷰가 적용돼 거실, 주방, 욕실 등 집 안 곳곳에서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서울의 모습을 조망할 수 있다.
▲ 에테르노 청담
스페인 건축 거장 라파엘 모네오가 설계에 참여했으며, 청담동에 위치한다. 모네오는 1996년에 건축계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받은 건축가다. 지하 4층부터 지상 20층까지로 29세대만 거주할 수 있다. 대지 면적에 비해 세대 수가 적기 때문에 희소성이 높고, 올림픽대로와 오솔길공원이 가까워 막힘없는 한강 뷰를 제공한다. 내부 층고가 높아서 공간감과 개방감이 뛰어나다.
포니가 환생한다.
현대자동차는 올해 1분기에 신형 전기차 아이오닉5를 출시할 계획이다. 공개된 이미지에 따르면 아이오닉5는 포니를 닮았다. 콘셉트카 45의 양산형 모델로, 45는 지난 2019년 포니 탄생 45주년을 기념해 만들어졌다. 포니 디자인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개발됐다.
현대차는 글로벌 친환경차 시장을 본격적으로 공략하기 위해 전기차 전용 브랜드 ‘아이오닉’을 론칭했다. 그 첫 모델이 아이오닉5다.
아이오닉5는 준중형 SUV 투싼과 비슷한 크기로 예상되며, 현대자동차그룹의 전기차 전용 플랫폼인 E-GMP(Electric-Global Modular Platform)가 최초로 적용된다. E-GMP는 전기차만을 위해 최적화된 구조로 설계된 신규 플랫폼이다. 차종에 따라 1회 충전으로 최대 500㎞ 이상 주행 가능하며, 800V 충전 시스템을 갖추어 초고속 급속 충전기를 사용하면 18분 이내에 80% 충전할 수 있다.
포니는 현대차 최초의 고유 모델로, 46년 전인 1975년 처음 출시됐다. 포니를 통해 우리나라는 아시아에서 일본에 이어 2번째, 세계에서는 16번째로 고유 모델 자동차를 개발한 국가가 됐다.
포니는 1982년 페이스 리프트 모델인 포니2가 나오기까지 국내에서 20만8000여 대 판매되고 해외로 9만2000여 대 수출됐다. 단일 차종으로는 국내 최초로 30만 대 이상 판매량을 기록했다. 당시만 해도 개도국이었던 한국의 자동차 회사가 해외로 수출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포니는 한국 경제 발전을 선도하는 산업역군의 역할을 톡톡히 하며 자동차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현대차는 포니를 초석으로 발전을 거듭해 세계적인 기업으로 거듭났다.
포니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자동차 디자이너 조르제토 주지아로(Giorgetto Guigiaro)의 작품이다. 자동차 디자이너 구상은 포니의 디자인이 “당시 국제적인 자동차 디자인 트렌드에서도 한 획을 그을 만큼 조형성이 뛰어났다”며, “전체적으로 기하학적 조형 요소가 간결하고 높은 통일성을 가지면서도, 장식적 요소가 배제된 추상성이 높은 디자인이었다”고 평가했다.
현대차는 콘셉트가 45 출시 당시 그 의미를 “현대차 전기차 디자인의 이정표가 될 전동화 플랫폼 기반의 콘셉트카다. 현대차의 시작을 알린 포니 쿠페 콘셉트가 1974년 토리노 모터쇼에서 공개된 후 45년 동안 현대차가 쌓아 온 헤리티지에 대한 존경을 담았다”고 설명하며, “현대차 디자인의 과거, 현재, 미래를 잇는 연결고리로, 현대차의 새로운 시작을 보여줄 것”이라고 밝혔다. 아이오닉5는 이 정신을 이어받아 현대차의 새 시대를 성공적으로 열어갈 핵심 전략 모델로 활약할 전망이다.
현대차는 아이오닉5에 이어 중형 세단 아이오닉6, 대형 SUV 아이오닉7을 차례로 출시할 예정이다. 아이오닉 라인업 확대로 전기차 시장 점유율을 늘린다는 목표다.
갈림길에 섰을 때 사람은 세 가지로 나뉜다. 남들이 지나간 길을 가는 사람, 방향의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서 있는 사람, 남들이 꺼리는 길을 기꺼이 가는 사람. 어느 것이 더 맞고 옳은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우리는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택하는 걸 ‘용기’라 읽고 ‘모험’이라 쓴다. 이번 호에서는 전형적인 길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길을 걷고 있는, 타투이스트 조명신(56)을 만났다.
의사와 타투이스트. 이 두 단어를 보고 처음에는 낯설게 느껴졌다. 수술실처럼 어두운 곳에서 일한다는 것 외에는 딱히 접점이 없어 보였다. 선입견일 수도 있지만, 한쪽은 엘리트에 가깝고, 다른 쪽은 고독한 예술가 같다. 바둑으로 치면 흰 가운을 입은 의사는 백돌이고, 타투를 새기는 타투이스트는 흑돌처럼 보인다. 물론 의미의 경중을 판단할 수는 없다. 다만 이미지의 대조는 확실하다.
이 거리감을 증명하듯 수술복을 입은 채 타투 시술을 하는 그의 모습이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두 번째는 궁금했다. 메스를 들던 의사가 왜 수술복을 입고 몸에 타투를 새기는 걸까? 의사로서 남극에도 다녀오고, 대학원에서 인류학을 전공하며 매머드를 공부한 이유는 뭘까? 특이한 이력에 관한 물음표를 마침표로 바꾸기 위해서 그를 만나 지나온 시간 속 사연을 들어봤다.
성형외과 의사 시절 타투와 관련된 일을 하셨나요?
당시 의사로서 타투 제거 시술을 많이 했다. 진짜 다양한 타투를 많이 지웠다. ‘착하게 살자’, ‘영숙아! 사랑해’와 같이 다소 유치한 문장부터 화려한 꽃이나 화살표가 꽂힌 하트 등을 지웠다. 일종의 낙서라고 보면 된다. 10대 때는 이렇게 하고 다닐 수 있지만, 커서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조금 민망하고 부끄러운 상황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이런 이유로 예전에 했던 타투를 지우는 분이 많았다.
타투이스트가 된 계기가 있었나요?
어느 날 병원에 장미가 그려진 타투를 지우러 온 분이 있었다. 이전까지는 그려진 문양에 큰 관심이 없었는데, 그 장미를 보고는 생각이 달라졌다. 마음에 무척 들어서 시술한 분을 찾아갔다. 그분은 송탄 미군 부대 앞에서 ‘키미’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나를 경계하셔서, 제자가 되는 데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그분 덕분에 타투이스트로서 첫걸음을 잘 뗐다. 당시 타투는 법적으로 의료 행위였으나 전문적으로 하는 의사가 없었다. 나는 성격상 남들이 다 하는 것에는 흥미가 없다. 의사 교육 과정에 타투가 있었다면 안 했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타투 시술을 시작했고, 실력을 더 쌓기 위해 미국에 가서 배우기도 했다.
메스를 들지 않는 의사, 아쉬움은 없나요?
솔직하게 말하면 처음부터 의사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의사가 된 건 순전히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성적은 좋았지만, 가정 형편이 어려웠다. 위에 있는 형과 누나들이 다 재수, 삼수를 해서 대학에 들어갔다. 비슷한 시기에 학교를 다니다 보니, 집에 부담이 컸다. 알다시피 등록금부터 생활비, 월세 등등 들어가는 돈이 많지 않나? 우리 집 형편으론 그게 빠듯했다.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직업을 찾다가 의사를 선택했다. 학력고사 성적도 잘 나와서 의대에 충분히 갈 수 있었다. 다만 경제적 부담 없이 다니고 싶어서 여러 의대를 알아봤는데, 마침 한 대학에서 장학금과 함께 매달 용돈을 지원했다. 그렇게 들어간 의대였지만, 내가 원래 가고 싶었던 길과 달라서 방황했다.
원래의 꿈은 고고학자
가고 싶었던 길은 무엇이었나요?
어릴 때 고고학자나 천문학자가 되고 싶었다. 영화 속 주인공 ‘인디아나 존스’처럼 한곳에 정착하지 않고 떠돌며 별을 관찰하거나 고대의 유물을 발견하고 싶었다. 개인적으로 가치 있는 직업이었지만, 현실적으로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여건이 안 됐다. 하고 싶은 걸 해야 하는 성격이지만, 그때는 잠시 보류했다. 의사가 된 다음에 내가 하고 싶은 걸 하자. 이런 마음으로 잠시 그 꿈들을 내려놓았다.
매머드 연구가 그 연장선일까요?
연구까지는 아니고 매머드와 관련된 공부를 잠깐 했다. 끝내 못 이룬 고고학자의 꿈에 조금이라도 닿기 위해 대학원에서 인류학을 전공했다. 지도 교수님이 사하 공화국으로 매머드 연구를 하러 가자고 제안하셔서 함께 다녀왔다. 사하 공화국에는 냉동 상태로 발견되는 매머드가 많아서 관련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는 곳이다. 의사로서 미생물학을 공부한 적도 있고, 인류학이나 고고학에 관심이 많아서 흔쾌히 다녀왔다. 예전에는 남극에도 잠깐 있었다.
남극에는 어떤 일로 다녀오셨나요?
월동의사로 다녀왔다. 알다시피 남극은 누구에게나 허락된 공간이 아니다. 아무나 갈 수 없다. 의사라고 해서 남극 기지의 월동의사로 무조건 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만큼 특수성이 있어, 남들이 안 하는 걸 좋아하는 나로서는 큰 기회였다. 한 명을 뽑았는데 여덟 명이 지원했다. 정말 간절하게 가고 싶어서, 전략적 승부수를 띄웠다. 그때 관장 부서가 복지부였는데, 복지부 장관에게 내가 가야 하는 이유 7가지를 적어서 편지를 보냈다. 장관 대신 실무자가 편지를 읽고, 나의 적극성을 높이 샀다고 나중에 전해 들었다. 결국 8대 1의 경쟁률을 뚫고 공중보건의 시절 중 1년을 남극에서 보내고 돌아왔다.
의사로서 본분을 잊은 적 없다
주위의 반응은 어땠나요?
어디에서든 환영받지 못했다. 밑에 있는 직원도 와서 만류하고, 동료 의사도 반대하고, 타투이스트도 찾아와서 하지 말라고 했다. 처음에는 동료 의사로부터 질타를 많이 받았다. “왜 그런 걸 하냐”는 식이었다. 홈페이지에는 “이게 그림이냐? 학원이라도 다녀라” 같은 댓글도 달렸다. 아무 맥락 없이 “밤길 조심하세요” 하며 험악한 글을 올리는 사람도 있었다. 심지어 어떤 타투이스트는 직접 찾아와서 자중하라고 협박 아닌 협박을 했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꾸준하게 활동하고 교류하면서 이제는 그들과 사이좋게 잘 지내고 있다.
주로 어떤 타투를 하시나요?
정해진 틀은 없고 고객이 원하는 대로 해준다. 다만 의사이다 보니 메디컬 타투에 신경 쓰고 있다. 의료 문신 혹은 재건 문신이라고 부르는데, 일반적인 타투가 미(美)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 타투는 복원에 목적이 있다. 예를 들어 백반증 환자의 경우 하얗게 된 부위를 타투를 이용해 보통의 살처럼 만들어준다. 의사로서 가진 장점을 최대한 발휘하고 있다. 타투를 하면서 내 신분을 한 번도 망각한 적은 없다.
타투를 하면서 보람을 느낀 적이 있나요?
성형외과를 하면서 3만 건 정도의 쌍꺼풀 시술을 했는데 얼굴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다. 하지만 타투는 시술한 사람의 얼굴이 모두 기억난다. 특히 한 부자(父子)의 사연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유대가 없던 부자였는데, 타투가 하나의 매개체가 됐다. 아버지는 타투를 한다는 아들을 한사코 말리셨는데, 직접 병원에 와서 보시고 생각을 바꾸셨다. 나중에는 등판에 타투를 새기고 가셨다. 마지막 시술을 받고 가시면서 고맙다고 했다. 타투 때문에 평소 대화가 없던 아들과 말문을 열게 됐다고 하시면서. 그 기억이 참 오랫동안 맴돌았다.
타투는 구속할 수 없는 자유
20년 동안 타투를 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인가요?
타투는 늘 새롭다. 코와 쌍커풀은 정형화된 방법으로 시술한다. 하지만 타투 세계에서는 그런것이 없다. 사람마다 옷을 입는 방법이나, 귀걸이를 고르는 취향도 다 다르지 않나? 타투도 마찬가지다. 같은 독수리 도안이라도 취향에 따라서 달라진다. 고객의 요구에 맞춰서 늘 새로운 걸 시도했고, 그러면서 실력이 쌓였고, 재미도 있었다. 이런 새로움이 없었다면 지루해서 이렇게 오랫동안 못했을 것이다. 기본적인 소양을 알려준 건 키미이지만, 실제로 나를 키운 건 고객이다. 늘 배운다는 자세로 임한다. 기자나 포토그래퍼도 그렇지 않나? 나도 똑같다. 타투도 같은 형식 속에서 계속해서 다른 내용을 담는 일이다. 끊임없는 새로움이 내 원동력이다.
삶의 롤모델이 있나요?
앙드레 김 선생님과 반 고흐를 존경한다. 둘 다 전형성에서 벗어난 인물이다. 고흐의 해바라기 작품을 좋아한다. 같은 해바라기이지만 고흐는 전부 다 다르게 표현했다. 안정을 추구하지 않고, 언제나 변화를 추구하는 자세는 나의 가치관과 맞닿아 있다. 앙드레 김 선생님도 마찬가지다. 남성 패션 디자이너가 흔치 않던 시절이었는데, 쉽지 않은 길을 선택했고, 그것도 모자라 패션에 자신만의 가치를 불어넣었다. 남들과 다른 길을 가면서도 자신만의 가치를 찾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 그런 사람은 존경할 수밖에 없다.
목표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큰 목표는 없다. 그냥 타투를 오랫동안 하고 싶다. 지금 하는 걸 잘하고 싶다. 2년째 소방관에게 무료로 타투를 시술해주고 있다. 앞으로는 경찰관과 응급실 의사를 대상으로 진행할 예정이다. 사소하지만 나의 무료 시술이 그들의 노고를 인정하는 일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이 프로젝트를 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9·11 테러와 관련이 있다. 테러가 발생할 당시 태평양 상공을 지나는 비행기에 타고 있었다. 그때의 상황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그 후에 미국 여행 중 만난 분이 인상적이었다. 팔에 영어가 빼곡하게 타투로 새겨져 있었다. 알고 보니 9·11 테러로 희생당한 소방관들의 이름이었다. 미안과 존경의 표시로 말이다. 그분을 만난 이후 나도 나중에 소방관을 위해서 무언가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때의 결심을 이제야 실행하게 됐다.
타투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구속할 수 없는 자유다. 하는 것도, 지우는 것도 본인의 자유다. 독수리를 새기고 싶으면 새기면 된다. 20대에 할지, 나이 들어서 할 것인지는 각자의 판단에 달려 있다. 누구도 구속할 수 없는 자유로운 것이다.
바둑 용어 중에 미생(未生)이란 말이 있다. 몇 년 전 유행한 드라마의 제목과 같다. 미생은 가능성을 품은 순간을 뜻한다. 어떤 수를 두느냐에 따라서 상대를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다. 삶도 마찬가지다. 순간의 선택에 따라 삶의 경로가 달라진다. 하지만 선택의 순간이 왔을 때 헷갈린다. 어느 것이 맞는지 모를 때가 많다. 선택의 결과가 두렵기도 하다. 하지만 진짜 용기는 두렵지 않은 게 아니라 두려움을 알고도 기꺼이 뛰어드는 것이다.
조명신 원장은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선택했다. 비록 그가 선망하던 인디아나 존스처럼 고고학자는 되지 못했지만, 공중보건의 시절 남극 월동 의사에 도전했다. 의사로서 안정적인 길을 갈 수 있었지만, 수술실에서 메스를 드는 대신 몸에 타투를 새겼다. 유년 시절 못다 이룬 꿈에 다가가기 위해 대학원에서 인류학을 전공하며 매머드를 탐구했다. 현재도 타투이스트로서 안주하지 않고, 메디컬 타투를 시술하고 여러 가지 프로젝트도 진행하고 있다. 바둑판 안에 갇힌 돌로 남기를 거부하고 늘 새로운 길을 찾으며 도전하고 있다.
그는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했다. 안락한 안정이 아닌 구속할 수 없는 자유를 좇았다.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철학적이지만 해볼 필요가 있는 질문이다. 그 역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는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는 삶에서 ‘안정’ 대신 ‘모험’으로 답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말년에 소박하게 타투와 관련된 책을 쓰고 싶다는 조명신 원장의 또 다른 모험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