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독특한 전시가 열렸다. 인테리어 디자이너이자 패션 아이콘인 아이리스 아펠(Iris Apfel)의 옷장을 소재로 한 전시였다. 당시 아펠의 나이는 83세였다. 그녀의 옷장에는 1960년대의 파리 패션을 대표하는 주요 의상은 물론, 터키의 전통시장을 돌아다니며 사 모은 다양한 색감의 의상과 티베트 지역의 보석이 가득했다. 세상을 향한 한 사람의 태도와 가치관이 녹아 있는 저장고가 인간의 옷장임을 보여주는 전시였다. 그녀의 옷장(Wardrobe)은 이후 수많은 패션 브랜드의 컬렉션에 큰 영향을 미쳤다. 2006년 랄프 로렌의 홈 컬렉션은 아펠의 직물 컬렉션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되었고, 메이크업 전문 브랜드 M·A·C은 2012년 그녀가 주로 사용하는 컬러를 이용해 색조 제품을 내놓았다. 현재 아펠은 97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뜨겁게 패션계를 매혹하고 있다. 최근 시니어 모델이 매체를 장악하는 비율은 더욱 높아졌다. 시니어 패션 블로거와 스타일리스트들이 연일 패션쇼의 앞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노년의 백발이 성성한 모델들이 패션을 비롯한 트렌드에 민감한 산업의 핵으로 등장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멋 내기 딱 좋은 나이
패션 역사에서 젊은 여성 모델이 등장한 것은 1960년대다. 그 이전만 해도 파리의 오트 쿠튀르의 디자이너들은 젊은 모델을 고집하지 않았다. 발렌시아가도 기혼의 중년 여성을 주로 기용했고, 이브 생 로랑도 다르지 않았다. 명품 브랜드일수록 ‘나이’라는 요소보다 영원한 여성성과 인간의 아름다움에 더 가치를 부여했다. 하지만 1960년대, 청년문화의 등장과 함께 젊은이들은 기성세대를 공격하며 자신의 미감을 자신 있게 드러냈다. 부모들에게 물려받은 풍족한 경제력도 원인이었다. 당시 소비의 주요 계층은 청년이었다. 이후 패션계는 젊음의 활력과 아름다움을 미의 원천으로 둔갑시켰고, 소비재 산업도 이에 호응했다. 그러나 역사는 돌고 도는 법. 인터넷을 통해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나이대의 예법과 문화, 가치관을 쉽게 접하면서 ‘자신의 나이’에 대해 생각하던 기존의 틀을 깨기 시작했다. 다양한 삶의 경험과 사회적 성숙을 이룬 세대가 패션시장 전면의 소비자로 등장하면서 노년 세대의 스타일, 시니어 시크(Senior Chic)에 대한 열망도 한층 커가고 있다. 앞에서 언급했던 아이리스 아펠은 뉴스 인터뷰에서 “늙어간다는 거, 그게 확 드러나는 게 언제일까요? 그건 옷을 젊어 보이게 입으려고 혈안이 될 때예요”라고 말했다. 노년은 그 자체로 찬미의 대상이다. 노년을 상징하는 주름은 생의 훈장과 같은 것이라며 더 이상 생물학적 시계에 갇히기를 거부하며 자신을 아름답게 꾸미는 이들이 늘고 있다. “내 나이가 어때서,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인데”라는 노래 가사는 노년의 어르신들이 더 이상 아픈 몸을 구석구석 눌러가며 푸념조로 부르는 노래가 아니다. 미국의 패션 매거진 ‘얼루어(Allure)’는 더 이상 안티에이징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겠다고 독자들에게 약속했다. “안티에이징이란 단어가 노화(aging)를 무의식중에 우리가 싸워내야 하는 삶의 조건처럼 만든다”는 이유였다. 우리는 노년을 다루는 언어부터 성찰할 필요가 있다. 언어부터 노년을 부끄럽게 만들면, 그 언어를 쓰며 우리는 자연스레 노년에 대해 부정적 인상을 갖게 된다. 노년은 우리 스스로 의미를 복원하고, 창조하는 시기여야 한다.
‘시니어 시크’를 위한 원칙
패션은 노년의 정의를 새롭게 내리고 있다. 옷과 메이크업, 헤어스타일과 같은 우리의 외양을 창조하는 도구는 살아온 생의 서사를 쓰는 장치다. 노년은 자신이 살아온 삶의 과정과 결과물을 숙성된 시선으로 바라보며 의미를 추출할 수 있는 시기다. 노년의 패션 스타일링은 젊은 날의 방식과 다른 신중함과 관점이 요구된다. 달라야 한다. 무엇보다 내적인 자신감이 밖으로 표출돼야 한다. 옷태라는 단어에서 태(態)란 한자가 ‘내 마음이 막힘이 없는 상태’를 뜻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변화하는 신체의 약점을 감추기 위해 지나치게 넉넉한 실루엣의 옷을 입는 일도 피해야 한다. 시니어가 가장 많이 하는 실수 중 하나다. 패션은 노년의 몸을 ‘못나고 늘어진 어떤 상태’로 규정하지 않는다. 우리 스스로가 자기검열을 통해 그 늪에 빠질 뿐이다. 패션의 매혹은 감춤이 아닌, 여전히 아름다운 신체의 부분으로 타인의 시선을 모으는 데서 나온다. 항상 피팅이 된 옷을 골라야 한다. 당신이 축적해온 선별력 있는 눈을 옷을 고르는 데 써야 한다. 우아함의 어원이 ‘심혈을 기울여서 선택한다’는 단어에서 왔다는 것을 기억하자. 지금 당장 옷장에서 오래된 옷들을 버리고, 가장 단순한 선과 중성색(화이트, 블랙, 베이지)으로 된 기본 품목으로만 채운다. 이러한 원칙부터 끈덕지게 지켜보자. 참조할 수 있는 모델이 있냐고 묻는 분이 많다. SNS를 켜고 ‘#AGELESS’라는 표제어를 넣어보라. 멋진 노년을 함께하자며 자신의 스타일을 공유하는 수많은 이가 당신을 기다린다. 그들을 보며 외치게 될지도 모르겠다. “멋 내기 딱 좋은 나이!”라고.
“당신이 조깅 바지를 입는다면, 삶의 통제를 완전히 잃은 것과 다름없다.”
올백 포니테일, 진한 선글라스 그리고 거침없는 발언까지. 존재만으로 브랜드가 되었던 칼 라거펠트(Karl Lagerfeld)가 향년 85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2010년 문화적 공적이 있는 사람에게 대통령이 직접 수여하는 프랑스 최고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은 세계적인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에겐 ‘패션계의 거장’, ‘패션의 황제’라는 수식어가 항상 뒤따랐다.
그가 패션계에 본격적으로 입문한 것은 1954년 국제양모사무국(International Wool Association) 콘테스트에 출전해 코트 부문 1등을 수상하면서부터다. 이후 피에르 발망, 장 바투를 거쳐 1964년 끌로에의 수석 디자이너로 경력을 쌓았다.
무엇보다 ‘칼 라거펠트’ 하면 샤넬을 빼놓을 수 없다. 1982년 샤넬에 공식 영입된 그는 1983년 샤넬 오뜨꾸띄르(고급 맞춤옷) 데뷔 무대를 성공적으로 이끌며 “죽은 샤넬을 환생시켰다”는 호평을 받았다. 당시 독일인, 기성복 디자이너라는 그의 경력이 논란이 되기도 했지만, 오히려 이러한 편견을 뒤집는 계기로 만들었다. 그는 한물간 브랜드라는 평가를 받았던 샤넬의 기존 아이템에 대중적인 문화 요소를 결합해 젊은 층의 팬을 확보하며 다시 한번 샤넬의 부흥을 이끌었다.
지난 1월 22일 파리에서 열린 샤넬 패션쇼 피날레에 그가 나타나지 않자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건강 악화설, 은퇴설 등 그가 샤넬을 맡은 35년 동안 피날레에 서지 않았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더욱 이슈가 됐다. 그로부터 4주 후 그는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췌장암. 샤넬은 SNS를 통해 “1983년 이후 샤넬 패션하우스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칼 라커펠트의 서거를 발표하게 된 것은 깊은 슬픔으로 다가온다”며 그의 사망 소식을 전했다. 이 소식을 접한 유명 패션계 인사들도 애도의 뜻을 표했다.
“왜 일을 그만두어야 하나? 어차피 내가 죽을 때 모두 끝날 것을.”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샤넬(Chanel), 펜디(Fendi), 칼 라거펠트 등 유명 브랜드를 지휘했다. 건강이 악화된 최근까지도 오는 3월에 열릴 여성복 패션쇼를 준비할 만큼 일에 대한 열정은 누구보다 많았다. 한평생 패션에 몸 받치며 트렌디한 패션을 보여준 그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몸소 보여줬다.
또 다른 느낌의 에너지였다. 붓이 물 안에서 살랑, 찰랑. 물 묻은 붓이 물감을 만나면 생각에 잠긴다. 종이에 색 스밀 곳을 물색한다. 한 번, 두 번 종이 위에 붓이 오가면 색과 색이 만나고 교차한다. 파고, 풀고. 수백, 수천 번 고민의 흔적에 마침표를 찍으면 삶의 향기 드리운 수채화 한 점이 생명을 얻는다. 수채화 그리는 일상을 살아가는 김재열 교수의 제자 모임 ‘수연회’를 찾아갔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온몸으로 느끼고 각자의 시선으로 색감 물들이는 이들에게는 잔잔한 어울림과 따뜻함이 있었다.
수채화를 그리는 모임 ‘수연회’
“2004년쯤 수채화교실의 인터넷 카페를 만들려고 보니 대표할 이름이 없는 거예요. 마침 그때 KBS2 드라마 ‘겨울연가’ 인기가 일본에서 대단했어요. 일본에 있는 친구가 드라마 촬영 장소를 그려서 책을 만들자고 해서 강원도 일대를 돌아다니며 그림을 그릴 때였습니다. 그래서 ‘수채화연가’라고 이름을 지었고 지금의 수연회가 됐습니다. ‘수채화를 사랑하는 모임’. 자연스럽게 예쁜 이름이 지어졌습니다.”
지난 9월 말 인천학생교육문화회관 가온갤러리에서 열린 ‘2018 한·일 수연회 아카데미전’에서 밝은 얼굴의 김재열 교수를 만났다. 홍익대학교에서 건축미술을 전공하고 1980년대 이름을 날렸던 주식회사 보루네오가구 임원으로 정년퇴임한 김재열 교수. 현재 홍익대학교 문화예술 평생교육원을 비롯해 다양한 예술교육 현장에서 제자를 양성하고 있다. 제자들이 그림 그리는 것에만 멈추지 않는다. 그들의 솜씨를 세상에 알리고 보여주기 위해 매년 이렇게 전시회를 열고 있다. 32년 전 업무차 만났던 일본인 친구 우에노 히로시(上野 博) 첼시아트아카데미 대표는 평생을 함께하는 그림 친구로 꾸준히 교류 중이다. 전시장 안에는 김재열 교수와 제자 45명, 우에노 대표와 제자 18명의 연합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한·일 양국 두 스승과 제자들의 교류 전시회는 올해로 7회째로 수채화 총 64점이 전시됐다. 내년에는 일본에서 한·일 연합 전시를 할 예정이다. ‘나의 즐거움’이라는 주제로 치러진 이번 전시회에서는 양국 제자들이 살아가는 방식과 일상을 엿볼 수 있었다.
달리던 도시인, 느린 삶에 눈뜨다
수연회에 모인 사람들은 직업군도 나이도 다양하다. 30대부터 80대까지 전·현직 교사, 퇴직 공직자, 주부, 작가, 제빵 경영인 등이 수채화를 그리기 위해 모였다.
“선긋기부터 시작합니다. 그림을 잘 모르던 사람도 함께 그리다 보면 실력이 늘어요. 퇴직한 분들도 오십니다. 그림 한 번 그려본 적 없는 분도 있고요. 다들 용기내서 들어오십니다.”
그렇다면 어떤 매력이 있어서 수채화 속에서 이들은 낭만을 즐기는 것일까?
“수채화가 다시 사람들 마음속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여행을 하더라도 관광지에서 사진만 찍고 끝내지 않아요. 느리게 여행하고 대상을 천천히 봅니다. 사진이 아니라 그림으로 남겨오면 더 좋잖아요. 그게 바로 ‘어반스케치(urban sketch)’, 즉 스케치 활동을 하며 도시기행을 하는 것이죠.”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인생을 담는 작업이기에 시니어들에게 더 없이 다 필요하다고 김재열 교수는 말했다.
“시니어가 ‘고희연’ 같은 잔치 대신 전시회를 열었으면 합니다. 작년에 파킨슨병으로 더는 그림을 못 그리는 회원 한 분이 금혼식과 함께 전시회를 했어요. 도록을 만들면서 옛 사진도 넣어 만들었더니 좋아하더군요. 특히 전시회 도록은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저도 장담 못해요. 언제 아플지 모르잖아요. 그림과 기록은 남잖아요. 잔치 대신 전시회! 이런 캠페인을 벌이고 싶은 게 제 마음입니다.”
화실에서 만난 수연회 사람들
김재열 교수의 화실에서는 매주 금요일에 5명의 제자들이 모여 그림을 그린다. 전시회에서 그림 관람을 하고 방문한 화실에는 수연회원 4명이 모여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전시장에 인상적인 바게트 그림을 출품한 제과점 사장 조화익 씨, 아이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는 박진주 씨, 극작가 진윤영 씨, 13년째 김재열 교수를 사사하고 있다는 주부 이경자 씨가 넓은 테이블에 앉아 그림을 그렸다.
올해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지 3년째라는 조화익 씨는 서울 인사동과 안국동 근처에서 20년 넘게 제과점을 하면서 화가들을 많이 만났다고 한다. 그분들이 그림을 그려주면 받기도 했는데 그때 그림을 그리겠다는 꿈을 조금씩 키워왔다. 마음속에 떨어져 있던 겨자씨가 어느새 자라 나무가 된 것이다.
“젊었을 때부터 그림에 관심이 있었지만 제과제빵 기술자로 일하느라 그림 그릴 시간이 없었습니다. 올해 제가 일흔여덟 살인데 지금이 내 인생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가장 적당한 시기인 것 같아요.”
박진주(37) 씨는 홈스쿨로 아이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면서 필라테스 사업을 하고 있다. ‘세월의 향기’라는 작품으로 2017 인천미술대전에서 특선을 한 박진주씨는 마무리가 있어서 수채화가 매력적이라고 했다.
“유화는 계속 덧칠할 수 있어서 끊임없이 수정할 수 있어요. 끝이 없죠. 그런데 수채화는 끝이 있어요. 상쾌하고 맑아서 좋아요. 색감도 좋고요. ‘세월의 향기’라는 작품을 1년 8개월 동안 그렸어요. 그림을 그리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그냥 덮고 가고 그랬는데 결국 해낸 거죠. 동기부여가 됐어요. 처음에는 이게 뭐냐 했는데 정말 열심히 그림을 팠어요. 수채화를 파고 푼다는 말로 표현하는데 저는 풀지는 못하고 파기만 합니다. 교수님은 물로 물감 농도 조절해서 풀면서 그리시는데 저는 아직 멀었죠.”
이경자 씨는 20년 동안 그림을 그렸고 지금까지 상도 많이 받았다. 5년 정도 소묘를 하다가 수채화를 배우기 위해 김재열 교수를 만났다. 이창포를 그리기 위해 밑그림을 그리고 있던 그녀는 마침 화실에 쌓아두었던 그림을 정리하다가 그림 한 점을 꺼내 보여줬다
“10년 넘게 묵혀놓았던 그림이에요. 2007년도 세계평화미술대전에서 특선을 받은 건데 제목은 ‘역주’입니다. 그때는 역동적인 그림만 그렸어요.”
꽃그림만 그릴 줄 알았는데 다양한 모델을 찾기 위해 이것저것 많이 찾아본다는 이경자 씨.
“SNS에 가수 손담비가 동묘구제시장에서 옷을 사 입고 포즈를 취한 걸 봤는데 멋지더라고요. 드로잉하면 되겠다 싶어서 팔로잉하고 사진 캡처도 했습니다.”
진윤영 씨는 수채화를 그린 지 2년 됐다. 가끔 호랑이나 사자 그림을 그려 SNS에 올렸는데 사납거나 용맹스러워 보이지 않아 그림도 주인을 닮는구나 생각했다고. 그는 지인이 그려 달라던 강아지 두 마리 그림을 보여줬다. 맹수가 아니라 그런지 둥글둥글 귀여운 강아지 모습을 꽤 잘 그렸다.
“교수님이 제 연극작품을 좋아해서 때마다 많은 분을 모시고 공연을 보러 오셨어요. 그림에 관심이 있다 했더니 화실로 당장 오라고 하셨어요. 처음부터 무조건 그렸습니다. 아직 부족하지만 그림 그리는 시간이 좋습니다.”
mini interview
운명 같은 그림, 제자들과 나눕니다 수연회 지도교수 김재열
재능에 칭찬을 더한 삶을 살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방학숙제로 냈던 그림이 교실 뒤에 붙은 게 계기였죠.”
형이랑 같이 그려 방학숙제로 냈던 그림이 우수작에 뽑혔다. 그때부터 그림에 관심을 갖게 된 김 교수는 입소문이 날 정도로 미술 영재로 성장했다. 중학교 시절에는 미화부장을 줄곧 맡았다고 했다. 경상북도 의성 출신인 김재열 교수는 산업인재 육성에 힘을 기울이던 시절 대구공업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공고라 대학 진학이 멀어지나 싶었는데 때마침 미술반이 생겼다. 고교시절에도 경북 도내에 미술과 관련한 상은 다 휩쓸었다. 그림이 좋았지만 예술을 하면 어렵게 살게 될 것이라는 주위 사람들의 우려도 있었다.
“그때 홍익대학교 건축미술과가 있다며 한 선배가 얘기해줬어요. 그림에 디자인도 배울 수 있다면서요.”
홍대에서 열렸던 미술 실기대회 입선 경력도 있고 그림에 자신 있었던 김 교수는 무리없이 미대 명문인 홍익대학교에 입학했다.
“건축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즐겁게 생활했습니다. ROTC 장교로 군에 있을 때도요. 사단 내에서 크리스마스트리 대회에서 1등을 해서 휴가도 나가고 진급도 빨랐죠. 군 제대 후에 보루네오가구에 입사하면서 인천과 인연을 맺었습니다. 대규모 가구공장이 인천에 있었거든요.”
그리고 이때 평생의 그림 친구인 우에노 씨를 만났다.
첫 만남부터 평생 친구를 알아보다
“우에노 선생이 우리 가구공장에 견학을 왔어요. 1986년, 32년 전에요. 우에노 씨는 공장장이면서 디자이너였습니다. 저는 회사의 디자인개발 소장이었고요. 그때 제가 불고기 쌈밥을 좋아해서 식당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한국의 쌈 먹는 방법을 설명해줬습니다. 만났던 첫날 언젠가 함께 미술 전시를 하자고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16년 만에 그 약속을 서로 지켰죠.”
그림 공부를 하고 싶었던 우에노 씨는 51세에 회사를 관두고 다음해 영국 첼시로 유학을 떠났다.
“우에노 씨가 영국에서 유학할 때 저도 그를 만나기 위해 영국에 갔습니다. 그때 같이 도시를 다니면서 스케치도 하고 말이죠. 1년 3개월 유학생활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간 우에노 씨는 책도 내고 수채화를 가르치는 미술 아카데미를 개원했습니다. 저는 아직 회사에서 일할 때였습니다. 저도 정년퇴임하고 나서 그림을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화실도 만들고 본격적으로 교류하고 말이지요. 우리는 서로에게 꼭 필요한 멘토입니다.”
드로잉북과 함께 떠나는 여행
취재를 마칠 즈음 꼭 보여줄 게 있다면서 노트를 꺼내 들고 방에서 나왔다. 여행하면서 그린 그림과 비행기 티켓, 글귀 등이 담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드로잉북이었다.
“기내에서 와인을 자주 사 마시는데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입니다. 먹고 자고 관광만 할 것이 아니라 제대로 느낌은 담았으면 합니다.”
그는 기내 사무장이 준 감사편지도 잊지 않고 드로잉북에 붙여놓았다. 더 보고 싶어 방으로 따라 들어가니 크고 작은 드로잉북이 한가득이다. 언제까지 이렇게 제자들과 함께하실 생각이냐고 물었다.
“즐거우니까 싫어질 때까지? 죽을 때까지 붓 들고 있으면 행복할 것 같습니다.”
※ 라이프@이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소개하고 싶은 동창회, 동호회 등이 있다면 bravo@etoday.co.kr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어딘가 처박아뒀던 먼지 쌓인 앨범 속 장면이 총천연색 화장을 하고 거리를 활보하는 것만 같다. 통바지에 브랜드 이름이 크게 새겨진 티셔츠를 입은 풋풋한 젊은이들. 어린 시절의 추억을 자극하는 먹거리가 편의점 한편에 자리 잡았다. 돌고 돈다는 유행은 조금씩 변화된 모습으로 다시 돌아와 그 시대를 대변해왔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다. 어릴 적 유행과 흡사하지만 뭔가 새롭다. ‘복고(復古)’라는 말 대신 ‘레트로(retro·복고)’란 용어로 바꿔 부른 지도 오래다. 친숙한 듯 아닌 듯 우리 시대 레트로 열풍. 뭔가 달라진 옷[衣], 먹거리[食] 그리고 생활공간 [宙]에 관한 이야기를 좀 해보려 한다.
패션계는 한마디로 힙트로·뉴트로·영트로
“맨 처음 옷을 이렇게 입을 때 복고 패션이라기보다는 유행하는 와이드 팬츠(통바지)나 데님재킷 정도를 따라서 사서 입는 정도였어요. 그런데 제가 요즘 입는 옷을 아빠가 보시더니 본인이 어릴 때 입었던 옷이랑 똑같다고 예전에 입으셨던 것을 주셨어요. 진짜 요즘 유행하는 거랑 너무 비슷해요. 그런데 1990년대 패션이랑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요! 예전에는 통나무처럼 바지가 컸다면, 지금은 슬림하고 길어 보이게 입는 추세랄까요?”
은평문화재단에서 시민연극 연습이 한창인 한규열(21) 군은 요즘 스타일대로 깔맞춤(?)을 하고 다닌다. 통이 살짝 큰 바지에 넉넉한 사이즈의 티셔츠를 즐겨 입는다. 바지는 허리춤까지 올려 단정하게 허리띠를 두르고 티셔츠는 바지 안에 넣어 입는다. 가끔은 티셔츠 앞부분만 바지 안에 넣은 뒤 살짝 옷을 밖으로 잡아당겨 느낌을 살린다. 말해놓고 보니 1990년대에 즐기던 스타일 아닌가. 1990년대를 살았던 이들이 보기에 그저 신기한 젊은이 패션이 아닐 수 없다. 예전과 엇비슷한 모습에 웃음이 나지만 정작 선뜻 선택하지는 않는다.
패션계야말로 작년 초부터 시작된 레트로의 인기가 상승하고 있는 분야다. 특히 1990년대 유행했던 패션이 1980년대에서 2000년 초반 사이에 출생한 ‘밀레니얼 세대’ 혹은 1995년 이후 태어난 ‘Z세대’에게 사랑받고 있다. 부모 세대가 20대에 향유했던 패션을 지금의 스타일로 새롭게 해석하고 활용하는 움직임이 사회 전반적으로 나타나다 보니 레트로 패션을 의미하는 다양한 신조어도 탄생했다. 개성 있고 신선함을 표현하는 신조어 ‘힙하다’의 ‘힙(hip)’과 레트로(retro)를 결합한 단어 ‘힙트로’, 젊은이(young)를 붙여 ‘영트로’, 새롭다(new)를 더해 ‘뉴트로’라 부른다. 지루한 ‘복고 패션’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새로운 세대가 추억의 아카이브에서 찾아낸 유레카가 이 시대 레트로 열풍이다.
코듀로이, 체크 그리고 호피
폐기처분한 줄 알았더니 전설의 코듀로이가 레트로 바람을 타고 돌아왔다. 일명 ‘골덴’으로 불리는 코듀로이가 포근한 느낌과 함께 내구성이 뛰어나 최고의 한파가 예고된 올겨울 제몫을 할 것으로 보인다. 코듀로이는 물론 벨벳과 스웨이드, 트위드(두꺼운 실로 직조해 무게감이 느껴지는 원단), 플란넬(부드럽고 가벼운 모직원단) 등 편안한 캐주얼 분위기에 어울리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원단도 이번 겨울을 대표하는 소재다. LF의 김현진, 김은정 디자인 실장은 남녀 인기 색상과 관련해 “뚜렷한 구분 없이 밤색과 빨강, 노랑 계열이 될 것”으로 전망했다. 특히 강렬하고 도발적인 빨간색 계통을 의외의 인기 색상으로 꼽았다. 남성의 경우 붉은 계열에 벨트가 있는 트렌치코트처럼 레드로 포인트를 준 스타일이 인기를 끌 전망이다. 여성의 경우 레트로 여파로 ‘웨스턴 스타일’이 뜰 것으로 내다봤다. 미국 서부 개척시대 카우보이 복장이라 생각하면 되는데 1980년대에도 큰 인기였다. 술 장식 조끼, 부츠컷 청바지 등이 대표 아이템으로 사랑받을 전망이다. 올겨울 남성 패션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 바로 체크무늬다. 체크는 유행이라는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늘 인기가 있지만 이번 시즌은 상황이 조금 다르다. 클래식한 느낌의 체크부터 다채로운 컬러가 섞인 개성 있는 체크까지 다양하다. 패션 포인트로 체크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옷 전체를 체크로 맞춘 슈트 패션도 곧 거리에서 볼 수 있을 예정.
여성 패션은 더욱더 과감하고 재미있는 무늬가 거리를 수놓을 전망이다. 특히 호피무늬의 인기가 눈에 띈다. 인터넷 쇼핑몰 ‘11번가’ 분석에 따르면 호피 패션이 올 하반기 패션 트렌드를 대표하는 패턴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최근 11번가 사이트 내 ‘호피’ 아이템 검색 횟수는 무려 15배 이상 급증했다. 11번가 하원지 MD는 “예전에는 다소 과한 패션으로 여겨졌던 호피무늬 패션이 요즘에는 한층 밝은 색상의 패턴이나 실크, 시폰 소재에 더해지면서 색다른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며 “호피무늬는 스카프나 가방, 구두 등 한 가지 아이템만으로도 강렬한 포인트를 줄 수 있어 남녀 모두에게 인기”라고 말했다.
레트로를 입다
숏패딩과 빅로고 재등판
평창동계올림픽 영향으로 발목에서 머리끝까지 온몸을 감싸는 롱패딩이 지난겨울 유행했다면 이번 시즌에는 허리에서 마무리되는 짧은 점퍼가 대세다. 아웃도어 브랜드 ‘밀레’의 ‘레트로 두두느 다운 다운재킷’이 옛 인기 상품 소환 패션 중 하나다. 1980년 프랑스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던 다운재킷 ‘듀벳’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새롭게 제작한 의상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중반까지 덕다운 점퍼가 바람을 일으키면서 강렬한 색감의 짧은 기장의 점퍼가 사랑을 받았다. 1990년대 후반에는 스톰, 겟유스트, 닉스, 잠뱅이 등 데님 브랜드가 성장하면서 세련된 느낌의 무채색 구스다운 점퍼가 젊은이들 사이에서 인기였다. 그러다가 1990년대가 끝나갈 무렵 퇴물 취급받고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던 구스다운 점퍼가 20년 만에 젊은 감각으로 재해석되어 숏패딩으로 돌아왔다.
이와 함께 대놓고 “나는 누구요!”라고 말하듯 브랜드 이름이 제품에 크게 박힌 이른바 빅로고 패션도 레트로 바람을 타고 있다. 브랜드 이름을 옷이나 가방, 모자 등에 크게 새기거나 예전에 비해 사이즈가 적당히 작아진 것이 특징이다. 1990년대 젊은이들 사이에서 사랑받았던 스포츠 브랜드 휠라(FILA)도 옛 느낌을 살려 빅로고 패션을 선보였다. 뿐만 아니다. 굳이 빅로고를 새기지 않아도 될 것 같은 명품 브랜드도 빅로고 패션 대열에 합류해 레트로 열풍에 동참하고 있다.
개성 있고 신선함을 표현하는 신조어 ‘힙하다’의 ‘힙(hip)’과 레트로(retro)를 결합한 단어 ‘힙트로’, 젊은이(young)를 붙여 ‘영트로’, 새롭다(new)를 더해 ‘뉴트로’라 부른다. 지루한 ‘복고 패션’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새로운 세대가 추억의 아카이브에서 찾아낸 유레카가 이 시대 레트로 열풍이다.
레트로를 먹다
곁에 있었지만 레트로였다!
패션을 넘어 옛 먹거리에 대한 향수 또한 레트로 열풍으로 번졌다. 인기의 일등공신은 단연
2년 전 방영했던 드라마 ‘응답하라 1988’(tvN)이다. 시청자들은 매회 쏟아진 음료, 초콜릿, 과자 등을 보면서 옛 감성을 느끼고 맛에 대한 기억도 제대로 자극받았다. 드라마 방영 당시 ‘저거 한번 다시 먹어보고 싶다’ 했던 것들이 실제로 상품 출시로 이어져 레트로 호황을 반짝 누린 바 있다. 추억 속 먹거리가 슈퍼와 편의점에 등장한 것도 그 무렵이다. 1974년 첫 출시돼 지금까지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는 빙그레의 ‘바나나맛우유’가 드라마 인기와 함께 ‘1988에디션’으로 등장했다. 추억의 빙그레 로고와 서체가 부착된 것만으로도 너도나도 열광했다. 인기에 구애받지 않던 스테디셀러인 바나나맛우유가 다시 사랑을 받고 회자된 계기였다.
갈배사이다 그리고 따봉!
해태htd의 ‘갈아만든 배(이하 갈배)’의 경우 숙취 해소 효과가 입증되면서 눈에 띄는 레트로 전략 상품이 됐다. ‘갈배’가 숙취에 좋다는 입소문은 오래전부터 있어왔는데 2015년 ‘호주연방과학산업연구기구(CSIRO)’ 실험을 통해 ‘갈배’가 두통 완화에 효과가 있음을 밝혀냈다. ‘갈배’는 작년 말 숙취해소제로 등장하는가 하면, 올 3월에는 탄산이 추가된 ‘갈배 사이다’로 재탄생했다. 진일보하는 레트로 상품의 전형이 1996년 등장한 ‘갈아만든 배’라 할 수 있다.
롯데칠성음료 사상 최고로 인정받는 광고가 있다. 오렌지를 따는 브라질 농장에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따봉(Esta bom)’이라 말하면 주위 사람들이 흥에 겨워 춤을 추던 ‘델몬트 오렌지 주스’ 광고다. 델몬트라는 이름보다 따봉이 강렬했던 나머지 1989년 따봉주스가 출시되기도 했다. CU편의점에 등장한 롯데의 ‘따봉 제주감귤’이다. 복고 느낌에 친근감이 더해져 자꾸 손이 가는 음료다. CU 상품기획 관계자는 “복고가 촌스러움에서 벗어나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 잡으면서 1980~90년대 감성을 즐기는 젊은 세대와 어릴 적 향수에 젖어 있는 40~50대 모두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다”고 말했다. 이외에도 10월에 종영한 인기 드라마 ‘미스터선샤인’(tvN)에 등장한 ‘불란셔 제빵소’의 빵은 파리바게트 PPL 상품으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아울러 ‘#불란셔제빵’과 관련한 ㅍ단순 검색만 SNS상에서 4000건이 훨씬 넘었다.
레트로를 살다
옛날옛적풍 요즘 냉장고
1980년대 안방에 모셨던 190ℓ 냉장고를 1990년대에 500ℓ 냉장고로 바꿨을 때 진짜 크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900ℓ 양문형 냉장고도 부족하다. 전자레인지 또한 오븐기능을 비롯해 눌러야 할 버튼이 너무 많다. 갈수록 대형화되고 복잡해지는 가전제품 시장에도 레트로 바람이 불고 있다. 대우전자가 선보인 레트로 디자인 ‘더 클래식’ 시리즈의 냉장고와 전자레인지는 가전제품의 초기 모습을 현대적으로 해석했다.
특히 1인 가구의 증가와 욜로, 미니멀리즘을 삶의 주제로 받아들이는 세대에게 ‘가치소비’에 대한 의미를 전해주고 있다. 작지만 고급스러움은 유지하고 유행에도 뒤지지 않는 스타일로 틈새시장에서 주목받는 상품으로 떠오른 것이다. 더 클래식 시리즈는 120ℓ, 80ℓ급 소형 인테리어 냉장고다. 크림화이트, 민트그린 두 가지 색상으로 라운드형 도어와 프레임을 통해 ‘레트로’ 느낌을 살렸다. 동급 대비 약 30% 비싼 가격에도 독보적 디자인으로 올해 월평균 판매량 1500대 이상을 유지하며 레트로의 인기를 증명했다. 전자레인지 또한 크림화이트 색상에 은색 손잡이와 조그 다이얼, 라운드형 디스플레이로 소비자의 마음을 녹였다. 레트로를 표방한 ‘더 클래식’ 시리즈 대우전자 관계자는 “경기불황에도 자기만족과 개념 소비를 원하는 이들이 급증하면서 레트로 디자인 미니 가전들이 인기”라며 “레트로 디자인에 프리미엄 기능을 추가한 제품개발을 주도해나갈 계획”이라고 했다.
시대보다 옛 감성 공유
큰 가구에서부터 작은 소품 하나까지 매일 사용하는 리빙 제품들은 질리지 않고 오래 쓸 수 있어야 하고 실용성까지 겸비해야 하기에 꽤 까다로운 선택 과정을 거치게 된다. ‘앤티크’란 이름으로 레트로 감성은 꾸준히 이어졌지만 매번 대세 상품은 아니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가구점에는 도시적인 느낌의 가죽소파 등이 즐비했다. 최근에는 레트로 인기 덕에 따뜻한 감성의 패브릭과 나뭇결이 적절히 살아 조화된 가구가 소비자의 선택을 받고 있다. 창고에 쌓여 찾기 힘들었던 레트로 가구가 자주 눈에 띄는 걸 보면 유행은 유행이다. 인테리어 전문 브랜드 ‘까사미아’의 쇼핑몰 사이트도 요 몇 년 사이 좀 더 따뜻하고 여유로운 감성의 리빙 상품으로 대체됐다. 아늑하고 따뜻한 느낌의 헤링본 패턴을 이용한 침대 시트와 카펫 등이 눈에 띄는데 이는 오래전부터 북유럽 등지에서 전해져온 스타일이다. 나라마다 복고 스타일이 다르지만 유독 가구나 인테리어에서 북유럽 혹은 스칸디나비아의 오래된 스타일이 레트로 기본이 됐다.
이는 나무가 많은 북유럽 일대에서 유명 가구 디자이너가 등장해 다양한 스타일을 양산했기 때문이다. 한국에도 양질의 원목이 수입되고 있어 적당한 가격에 레트로 감성을 즐길 수 있다. 레트로 가구 하면 ‘북유럽 스타일’을 떠올리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꼭 이 스타일만이 레트로라 할 수는 없다. 만약 한국의 레트로 가구가 인기였다면 고가의 자개장, 저가의 비키니장, 실용적인 철제가구, 1980년대에 인기를 끌었던 등나무 가구가 등장해야 한다. 하지만 이번 레트로 유행에서 있어 가구만큼은 20년 전의 한국 스타일이 소환되지 않았다. 패션이나 음료, 가전 등에서 이전 세대 제품들이 다시 불려나오는 것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다. 까사미아 개발 팀장은 “골동품 느낌보다는 앤티크하면서도 세련된 감각을 잃지 않는 디자인이 사랑받고 있다”고 말했다.
레트로 놀이가 쉬웠어요!
옷만큼이나 패션에 민감한 주방식기도 레트로 열풍이다. 물방울무늬와 나뭇가지 형태의 접시 등 1980년대 후반 우리네 식탁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디자인이 다시 등장했다. 까사미아는 스페인 그라나다 알람브라 궁전의 웅장함과 섬세한 패턴을 담아낸 ‘알함브라 양식기’ 6종을 내놓았다. 제품별로 화이트, 진한 남색, 연한 하늘색이 고급스러운 무늬와 함께 어우러진 것이 특징이다. 중고시장도 부쩍 바쁜 눈치다. 각 가정 찬장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을 법한 디자인의 컵과 식기 등이 중고시장에서 인기다. SNS상에는 ‘할머니 찬장에서 찾은 컵’이라며 사진이 올라오기도 한다.
김용섭 ‘날카로운 상상력 연구소’ 소장은 레트로의 식을 줄 모르는 인기에 대해, 앞에서도 언급했듯 “핵심 축에는 20대 밀레니얼 세대가 있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디지털 시대에 태어난 이들은 처음부터 경험치에 대한 소비욕구가 굉장히 커서 흔하고 비싼 물건보다 희소한 물건을 갈망했다. 기업도 업계 불황 혹은 새로운 답을 찾지 못할 때 증명된 과거에서 해답을 찾기 위해 레트로를 활용해왔는데 잠재적 소비층인 밀레니얼 세대 소비욕구와 맞물려 레트로 감성을 자극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작년 초, 2기 동년기자 발단식에 범상치 않은 여인이 나타났다. 망사와 레이스로 된 코사지를 머리에 올려 쓰고, 화려하게 빛나는 공단 드레스를 입고 나타난 박애란 동년기자였다. 상냥한 어투로 자신을 핑크레이디라고 소개하던 그녀는 어느새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 없어서는 안 되는 대표 인물로 자리매김하는 중. 최근에는 ‘브라보 마이 라이프’ 영상 제작에도 참여하며 그 누구보다 활발히 동년기자 활동을 넓혀가고 있는 그녀다. 잘 영근 숙녀의 삶 속에는 어떤 우여곡절이 숨어 있을까?
동년기자 리포터 가능할까요?
박애란 동년기자에게 자주 가는 장소가 어디냐고 물으니 서울 강남에 있는 서초문화원이라고 했다. 현재 이곳에서 모델워킹 수업과 시창작 수업을 듣고 있다고. 대부분 시간을 주로 강남 일대에서 보내는데 1분 1초도 아깝지 않게 살뜰히 모아 사용하고 있다.
“2012년부터 다니기 시작했어요. 평택에서 컴퓨터 선생님으로 교사생활 33년 하고 나서 서울로 이사왔습니다. 이곳에서 수필창작, 영어회화, 시낭송, 왈츠를 등록해 열심히 다녔어요. 패션학원도 등록해서 다녔어요.”
어렸을 때 꿈 중 하나가 교사였는데 이것은 벌써 이뤘고, 다른 하나는 패션디자이너라고 했다. 교사직을 맡고 있을 때도 꿈을 이루기 위해 평택과 서울을 오가며 패션 특강을 들었다고. 한국폴리텍대학교에서 패션디자인 야간과정을 6개월 정도 밟기도 했다. 순간마다 패션의 길로 접어들까 고민한 적도 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대신 패션 공부했던 경험을 실생활에서 활용하고 있다. 박애란 동년기자가 입고 두르고 가지고 다니는 것 대부분이 스스로 리폼한 제품이다.
“어렸을 때 바느질을 좋아했어요. 내 옷은 내가 리폼하고요. 이 가방도 다섯 번도 넘게 끈 부분을 갈았어요. 레이스를 손바느질로 덧대고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나만의 명품가방을 만든 거지요.”
퇴직하고 난 이후에 더욱더 열심히 사는 박애란 동년기자다.
“생각을 바꿔야 해요. 퇴직 전은 전반생, 그 후는 여생이 아니라 후반생. 전반생은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살았다면 후반생에는 의무감에서 벗어나도 괜찮아요.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살면 돼요. 그래서 후반생은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며 사는 거죠. 내가 또 몸치이기는 한데 왈츠도 배우고 탱고 동호회도 나가고 있어요. 발레도 하고요. 이 나이에 몸이 잘 늘어나겠어요? 왜 내가 내 돈 들이면서 이 고생하나 하다가도 우아한 발레 음악 들으면 엄청 행복해집니다.(웃음)”
인터뷰 바로 전날에는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서 제작하는 영상 프로그램 촬영을 다른 동년기자들과 마친 상태였다. 이후 의학 관련 영상에서는 리포터로도 활약했다. 검증된 끼와 재능으로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간판 리포터(?)로 벌써부터 점쳐졌던 인물이 박애란 동년기자였다.
“아무래도 시작이다 보니 어떤 사명감 같은 것이 생기더라고요. 안 그래도 ‘브라보 마이 라이프’도 영상을 시도할 만한데?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마침 시작하더라고요. 동년기자들이 대단한 내공을 가진 시니어잖아요. 내 생각이 그대로 옮겨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 대한 애정은 이뿐만이 아니다.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품격 있는 시니어라면 반드시 봐야 하는 잡지가 ‘브라보 마이 라이프’!”라며 홍보 멘트를 꼭 날린다. 우리 잡지에 처음 자신의 기사가 실렸을 때는 너무 좋아서 기절할 것 같았다고 회상했다. 생각해보니 당시 기자 앞에서도 본인 기사가 실린 잡지를 열어보고는 방방 뛰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웃는 얼굴에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슬프고 착한 아이, 애란을 만나다
“내 패션이 다른 사람들하고 다르지? 왜 이런지 물어봐주실래요?”
한껏 하늘을 날 것처럼 깃털 같은 얘기를 이어가다가 갑자기 기자에게 질문했다. 별 얘기 아니려니 하고 원하는 질문을 던졌다. 뜻밖의 소재로 이야기가 바뀌었다.
“옷을 이렇게 입게 된 건 언니 때문이었어요. 어린 시절 아빠가 언니만 사랑해줬어요. 언니가 아버지를 닮았거든요. 한번은 언니랑 싸우는데 아빠가 싸우지 말라고 우리를 다그치다 저랑 언니를 톱자루로 엉덩이를 한 대씩 때렸어요. 정말 너무너무 아팠어. 그때 든 생각은 ‘언니도 아프게 때렸을까?’ 였어요. 나도 사랑받고 싶었어요.”
이때의 기억은 말 그대로 트라우마(외상후스트레스장애)로 남아 있었다. 똑같이 때렸을 거란 기자의 말에 “아니, 아닌 거 같아요”라고 맞받아쳤다.
“어느 날 언니가 책을 산다며 아버지한테 용돈을 달라고 했어요. 저한테도 ‘돈이 필요하지 않냐?’고 아버지가 물었어요. 그런데 저는 ‘됐어요. 그동안 제가 모아놓은 돈으로 사면 돼요’라고 했어요. 누가 착한 아이야?”
이 말에 기자는 “아버지가 속으로 많이 상처를 받았을 거 같다”고 답했다. 이에 박애란 동년기자는 그게 왜 상처냐고 되물었다. 아이 입장에서는 ‘돈 잘 모은 행동’을 칭찬받고 싶었겠지만, 아버지 입장에서 ‘용돈을 주겠다’는 말이 일종의 사과였고 화해의 사인이지 않았을까. 박애란 동년기자의 말에 따르면, 아버지는 혀를 끌끌 차며 “너는 도대체 애다운 맛이 없다”며 나무랐다. 화해의 손을 놓아버린 고집 세고 질 줄 모르는 애어른으로 아버지는 받아들였을 수도 있다. 그때 박애란 동년기자가 아버지한테 “저도 책이 사고 싶어요, 돈 주세요”라고 했으면 어땠을까. 아버지는 분명 화해를 표했던 것이라고 꼭 박애란 동년기자에게 얘기하고 싶다. 어린 시절 언니를 편애하던 아버지 이야기가 끝나고 나니 초등학교 시절 너무 예뻐서 한 치도 따라잡을 수 없었던 두 친구 이야기로 흘렀다. 외모 콤플렉스에 관한 이야기였다. 선생님께 예쁘게 보이기 위해 길에서 주웠던 군번줄을 목걸이처럼 목에 걸고 학교에 갔던 웃지 못할 이야기도 들려줬다. 아버지에게 거부당한 사랑은 선생님에 대한 과도한 기대와 사랑으로 표출됐다. 이쁨받기 위해 고운 옷을 골라 입었고, 모자 쓰기를 좋아했다. 말을 하는 내내 박애란 동년기자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아직도 그렇게 서러운 걸까. 밝은 웃음 뒤에 철저하게 감추고 있었던 상처받은 어린 박애란이 바로 눈 앞에서 울고 있었다.
그나마 박애란 동년기자 인생에서 다행인 것은 어린 시절의 아픔을 서둔야학에서 대신 치유받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서둔야학은 박애란 동년기자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들어간 야학으로 서울대학교 농대 재학생들이 주축이던 곳이다. 작년 말에는 서둔야학당터에서 ‘서둔야학 홈커밍데이’ 행사를 열었는데 본지가 찾아가 탐방 취재를 하기도 했다. 선생님 모두 착한 아이로서 박애란 동년기자를 인정해주었고 예뻐해줬다. 훗날 박애란 동년기자의 교사 꿈을 이루게 해준 놀라운 곳도 바로 서둔야학이다.
박애란 동년기자가 울컥할 때 주문처럼 되뇌는 마법과도 같은 말이 있다.
“울면 안 돼, 짜장면은 돼!”
세상의 모든 낭만적이고, 슬프고,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순간에 박애란 동년기자는 이렇게 말한다고 했다. 아픔을 덮어주는 이불과도 같은 말. 이제는 좀 따뜻한 마음으로 사그라지고 아물고 용서할 수는 없을까.
백설공주처럼 예쁘게 안녕
“큰일날 뻔했어. 이 좋은 세상 못 보고 이생을 하직할 뻔했잖아.(웃음)”
상황 불문 눈물, 콧물 짜며 소녀감성 폭발하는 박애란 동년기자. 세상을 비관하고 꽃다운 나이에 자살을 시도했던 일화도 꽤 오랜 시간 털어났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야학에서 공부를 하고 나니 막상 갈 곳이 없었다. 결국 선택한 곳은 대한방직이었다.
“나는 책을 좋아하고 책에 빠져 있는데 현실은 공장이잖아요. 숨이 턱턱 막혔어요. 내 방에 공주들 사진을 붙여놓으면 아버지는 그런 것을 벽에 붙이면 귀신 나온다며 떼어버리라고 그러셨고요.”
이러다 평생 여공으로 살 것 같았다. 그러느니 죽자. 수면제가 가장 깨끗하게 죽을 수 있는 방법이라는 말을 듣고 수면제를 사다 모았다. 사랑으로 감싸준 서둔야학 선생님들에게 선물하기 위해 헝겊으로 꽃을 만들었다. 죽음 초읽기에 들어갔다.
“1968년도 5월 15일에 야학당에 가서 스승의 날 꽃이라며 선생님들 가슴에 달아드렸어요. 정말 눈물을 꾹 참고요. 내 나이 열여덟 살이었어요.”
죽을 때 죽더라도 예쁘게 죽겠다는 생각에 하늘색 브라우스에 스커트를 입고 꽃이 달린 모자를 쓰고 입 안에 수면제를 털어넣었다. 천운이었을까, 일어나보니 하늘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막 우시더라고요. 그래도 아버지가 고와보이지 않았어요. 제가 초등학교 때 맞았던 사건 이후로 아버지한테 사랑받기를 포기했어요. 무엇보다 아버지는 가족들 앞에 무력했습니다. 그땐 절망이었습니다.”
기운을 차리고 야학당으로 가서 그곳에 계신 대학생 선생님들에게 자신의 자살소동과 관련한 얘기를 했다고.
“그때 번뜩 정신을 차렸어요. 선생님이 제 얘기를 듣고 놀라기도 했어요. 선생님 하시는 말씀이 ‘누가 너 죽은 모습을 보고 아! 아름답다’ 하겠냐고. 백설공주를 본 왕자는 아름답다고 외쳤는데. 암튼 그때 제 생각에 꽃이 달린 모자를 쓰고 죽으려 했던 것이 너무 낭만적이었던 것이죠. 그런데 반전은 죽었으면 큰일날 뻔했어. 지금 사는 게 너무 재밌거든. 요즘 생각하면 죽기 정말 아까워요.”
여직공, 여교사 되다
“되게 힘들게 살긴 했네요. 고비, 고비. 길고긴 고비. 내가 산전, 수전, 지하전, 공중전까지 다 겪은 사람이에요. 처음에는 수원에서 딸기를 땄어요. 그다음에 버스회사 사환을 했어. 방직공장에 들어갔어요.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에 일반직으로 이십대 때 근무했어요. 그다음에는 타자학원 강사로도 일했고요. 그리고 결국 스물아홉 살에 중등교사자격시험에 합격했어요. 이후에 공립학교 임용고시에 붙어서 선생님으로 33년 살았잖아요. 교사자격증을 손에 쥐었을 때 눈물이 강물이 되도록 울었어요. 시험에 합격하고 나서 말씀드렸는데 엄마가 너무 좋아하시는 거예요.”
서울대학교 농대에서 일할 당시 선생님이 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농대 학장은 유독 박애란 동년기자에게 “우리 여 선생님 오셨네”라고 하셨다.
“일반직 여직원이 80명이 넘는데 저한테만요. 내가 주장하고 싶은 건 꿈은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제가 학교와 선생님을 좋아했어요. 제게 학교로 가는 길을 만들어준 것이라고 생각해요.”
트라우마를 조금씩 치유하고 어릴 적 자신과 타협하며 매일 조금씩 나아가며 살아가는 박애란 동년기자는 화려하게 보이는 일은 물론이고 매일 공부하며 사는 하루가 행복하다고 했다. 현재는 문화원에서 다양한 공부를 하는 것 이외에도 방송통신대학교에서 미디어영상학과를 전공하고 있다. 지금까지 농학과, 국어국문학과, 가정학과와 문화교양학과에 이어 미디어영상학과까지 5번째 입학이다.
“우리 집 TV는 방송대 채널에 고정돼 있어요. 예능프로그램은 볼 생각해본 적 없고 클래식 음악 채널이나 다큐채널을 틀어놓아요. 지금이 내 인생의 황금기인 거 같아요.”
압구정 날라리는 폼생폼사?
인터뷰도 하기 전에 이런 제목이 어떨까 하고 물어온 박애란 동년기자. 저 느낌이 본인 캐릭터라고 밝게 웃는다.
글쎄 눈물의 근원과 굴곡진 인생 얘기를 듣고 나니 그녀가 가볍게 폼생폼사로 살아간다는 느낌은 없다. 오히려 마감할 뻔했던 삶을 치유하고 보듬으며 매일을 기똥차게 열심히 사는 시니어, 내면에서 흐르는 진정한 멋을 가진 여인으로 느껴졌다. 앞으로 더 깊고 고운 아름다움으로 ‘브라보 마이 라이프’를 빛내는 동년기자로 함께해 주시길 부탁드린다.
브라보 3기 동년기자 릴레이 인터뷰를 본지 에디터가 진행합니다.
“박술녀 한복을 입지 않으면 한국에서 가장 핫한 셀럽이 아니다.”
이 말을 들었을 때 아무리 수긍을 못하는 사람이라도 어느 정도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만큼 현재 한복을 대표하는 이미지로서, 대체하기 어려운 박술녀가 있다. 지난 30여 년 동안 일궈온 박술녀 한복의 성공담은 끊임없는 노력과 끈기, 불굴의 의지로 요약할 수 있다.
비에 젖은 사람은 비가 두렵지 않은 법, 피하지 않고 정면돌파하는 사람. 한복 너머로 보이는 그녀만의 삶을 바라보는 시간을 가졌다.
박술녀는 한복이다. 박술녀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그리고 지나간 그녀 삶의 궤적을 돌아봤을 때, 박술녀가 한복 그 자체와 동의어가 된다는 사실을 부정하기가 어렵다. 그만큼 매체에서 접하는 박술녀는 한복을 대표하는 아이콘으로서 강인하고 다부지게 다듬어진 인상을 갖고 있다.
카리스마 뒤에 자리한 소담함
그러나 박술녀를 직접 만났을 때, 그녀에게서 받은 인상은 소담스럽고 여성스럽다는 것이었다. 의외였다. 카리스마적인 이미지와 달리 그녀의 목소리와 대화를 이끌어가는 흐름에는 푸근한 여인네 같은 따뜻함이 담겨 있었다. 생각해보면 우리네 한복이라는 것도 그렇게 포근하고 따스한 것 아니던가. 그녀의 옷들이 보여주는 화려함에 그녀의 인간적인 모습은 가려져 있었던 것 아닐까. 그녀가 가진 장인으로서의 프로페셔널함도 그런 ‘비단’에 휘감겨 있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떤 사람에게 이 한복이 참 잘 어울리겠다 싶었는데 막상 입어보니 안 어울릴 때가 있죠. 그럼 다시 만들어요. 나는 한복 만드는 일이 직업이지만 그 사람에게 한복 입는 일은 평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거니까요. 양심 팔아 돈을 벌 수는 없죠.”
소신 없이 일하는 것은 싫다
박술녀의 한복이 인기 있는 이유는 뭘까? 그녀가 만든 한복은 입기 전보다 입었을 때 사람을 더 빛나게 한다는 평이 있다. 그리고 박술녀라는 이름이 사람들에게 좋은 운을 주는 게 있다고 한다.
“박술녀라는 이름에 술자가 들어가 있어 술술 풀린다는 거예요.(웃음) 요즘 젊은 아이돌들이 그러더라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많이 노력했다.
“지난 30여 년간 정말 쉬지 않고 일했어요. 요즘도 마찬가지고.”
박술녀에게서 한복을 받은 사람은 셀 수 없을 정도. 그녀의 한복을 입고 찍은 유명인 사진만 해도 모아놓은 게 몇 박스나 된다. 오죽하면 대한민국 셀러브리티들은 박술녀 갤러리에 자신의 사진이 꽂혀 있지 않으면 인정 못 받는다는 생각을 할 정도다.
그녀가 그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한복을 만든 것은 어떤 홀림 때문이 아니었을까. 다소 늦은 나이인 20대 후반에 한복을 만들기로 결심하고 이리자 선생의 제자로 들어간 후 꾸준하게 달려온 수십 년의 시간들이 한복에 대한 그녀의 애착을 자연스레 설명해준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가슴 없이, 소신 없이 일하는 게 가장 싫다고 말한다. 확실히 그녀가 일하는 것을 보면 자신이 한 말을 잘 지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완벽주의 성격이 더러는 그녀를 고단하게 했던 걸까. 그녀는 한탄하듯 말했다.
“가슴이 동하지 않는 일은 못하니까 병이죠.”
갑상선암 투병 중에도 비단 생각만 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하지 않는다는 박술녀는 그 노력과 결실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일에는 여전히 쑥맥이다. 그녀의 삶이 오로지 한복의 가치에만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어디를 갔더니 누군가 어떤 사람을 가리키면서 ‘저기 저 유명한 사람이 곧 결혼한대. 말 좀 붙여봐. 잘해봐’ 하더라고요. 그런데 못하겠어요. 그 사람이 내 한복을 좋아해야 그런 말도 할 수 있는 거죠. 그래서 부자도 노력이구나 싶어요.”
그녀는 몇 해 전 갑상선암 진단을 받고 큰 고초를 겪었다. 그런 고통 속에서도 그녀는 한복에 들어갈 비단 생각만 했다고 한다. 그 와중에도 어깨에 짊어진 짐의 무게를 끊임없이 자각했다는 의미다. 그래서 자신의 업에 대한 목소리에는 자연스럽게 자부심이 서려 있었다.
“그 일을 내가 하기 싫으면 안 합니다. 그리고 내 한복을 구색으로 입으려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가시밭길을 거쳐야 도달할 수 있는 꽃길
박술녀는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가 지켜온 기준과 법도가 있기 때문이다. 다부진 장인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자부심과 그 기준을 충족시키고자 노력했던 시간이 그것들이다. 그런데 박술녀라는 이름이 유명세를 타면서 그녀의 기준을 무시하고 무례하게 접근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한복에 대한 그녀의 철학에는 관심조차 없으면서 그저 말로만 치고 들어오는 사람들이다. 그녀는 기자에게 그런 밑도 끝도 없는 사람들에 대한 고충을 살짝 얘기하며 한숨을 쉬었다. 유명인이 되면서 으레 겪어야 하는 일이라 여겼지만, 예의가 너무 아니다 싶은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사람에 대한 신뢰감이 있어야지”라고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그간의 맘고생이 느껴졌다. 문득 그녀가 외롭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 나눈 대화 중 “군중 속의 고독이죠”라는 그녀의 말이 한동안 머릿속을 떠돌았다.
요즘 즐거움 중 하나는 라디오 듣기다. 운동을 마친 후 집으로 돌아오면서 김재원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KBS라디오 ‘문화공감’을 듣는 게 하루의 마무리라고 할 정도다. 그 방송을 들어보니 영화, 음악, 문학 등 문화 전반의 이슈부터 최신 트렌드까지 깊이 있게 다루는 프로그램이었다. 그러고 보니 인터뷰 중 들려왔던 그녀의 핸드폰 벨소리가 요즘 한창 젊은이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카밀라 카베요의 ‘Havana’였다. 전통을 올곧이 추구하면서도 현재의 문화 동향을 놓치지 않는 그녀의 예민함이 느껴졌다.
직접 만든 어머니 수의
“나이 먹으니 매사가 감사뿐입니다. 문자하는 것조차도 감사하고 사업이 잘되는 것도 고맙고 건강을 되찾아서 감사하고 모든 게 감사하죠.”
그동안 한복 하나로 세상을 건너는 옹골찬 비법으로 살아왔고 모든 것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박술녀이지만 요즘은 약간 심경의 변화가 있는 모양이다. 한복만을 위해 살아온 그녀가 여행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가까운 나라로 여행을 가볼까 해요. 제 삶에 대한 후회는 없는데 다른 데도 눈 좀 돌려볼 걸 하는 생각이 드네요.(웃음)”
그렇게 마음의 변화가 일어난 것은 아마 그녀의 삶에 크고 작은 일들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사랑했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일도 그중 하나이리라.
“어머니가 좋아하던 음식이 젓갈, 깡치젓이었어요. 그게 너무 그리웠는데 아는 분께서 갖다 줘서 먹을 수 있었어요. 그걸 먹으면서 사흘을 울었네요.”
어머니를 향한 그녀의 사랑은 유별나다. 우리 옷을 알려온 외길 인생 30여 년, 한복 디자이너 박술녀라는 사람을 만들어주고 지금까지 버티게 해준 사람이 바로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그녀에게 항상 “하고 싶은 일도 한 우물을 깊게 파야 물이 나온다”고 말했고, 그 말은 이제 그녀의 입버릇이 되었다. 그래서 그녀가 평생 한복을 만들어 입히면서 가장 보람을 느낀 사람은 어머니였다.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것처럼 즐거운 게 또 있을까요. 우리 어머니는 무슨 일이건 억지로는 하지 말고 하고 싶은 일은 기어이 해내면서 살라고 하셨어요. 어머니께 뭘 해줄까 고민하다 어머니 팔순 잔치 때 가족 모두가 모여 가족사진을 찍었어요. 그때 식구 모두 제가 만든 한복을 입고 사진을 찍었죠. 그리고 어머니가 관에 들어갈 때 입었던 수의도 제가 만들었어요.”
이룰 수 있는 꿈을 꿨다
박술녀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어떻게 기억되길 원할까?
“한복이 잊히지 않도록 혼신을 다한 사람? 그런데 큰 욕심은 없어요. 한복을 제대로 입고자 하는 이들에게 잘 알렸다 정도면 되겠죠. 미련 없이 죽을 건데 뭘.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을 만큼 열심히 했으니까요.”
그녀는 가끔 ‘삶이 뭐지? 아무것도 아닌데 왜 집착을 할까?’ 하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한단다. 그런 감상이 들 나이가 됐기도 하고, 그렇게 질문할 수 있을 정도로 치열한 삶을 살기도 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보고 겪었다.
“내가 이루지 못할 꿈을 꿨다면 한복으로 성공하지 못했을 거예요. 죽을 때도 혼자 죽는 거니까 혼자 삶을 이끌어가자는 생각이었죠.(웃음)”
그러나 그녀가 그런 생각에 생활을 포기할 사람 같지는 않다. 박술녀는 ‘내일 세상이 망하더라도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을 사람’에 가깝다. 그러한 법칙을 지키는 의지에서 비롯된 후회 없는 마음이야말로 그녀가 삶과 죽음을 직시할 수 있는 힘일 것이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에게 한복 입히고파
박술녀의 삶은 한복과 동의어로서 여전히 생동하고 있다. 곧 추석 특집으로 방영될 KBS ‘퀴즈 온 코리아’에 출연하는 21개국 출연자들에게 한복을 선물하기로 했다. 외국에 한국의 미를 알린다는 목적에서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유독 한복을 입히고 싶은 사람이 있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에요. 전 세계 남자들을 통틀어서 오바마가 한복을 입으면 가장 멋있을 것 같아요. 그 고매한 인격과 반듯함, 대통령직에서 내려와서도 마음을 비우고 휩쓸리지 않는 모습이 마음에 들어요. 한복도 그렇게 변함없이 한결같은 뭉툭함이 있어요.”
영어만 할 줄 안다면 오바마 대통령에게 한복을 지어주고 싶다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역시 박술녀답다 싶었다. 처음 한복 일을 시작했을 때부터 변함없는 마음과 열정을 보니 박술녀 한복 시대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 같다.
지구 끝이라니 생각만 해도 멀고 먼 땅으로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라는 말도 있듯이 막상 가보면 그리 멀기만 한 곳도 아니다. 남극 바로위 남아메리카의 칠레와 아르헨티나에 걸친 일부지역을 칭하는 파타고니아라는 명칭은 등산복 브랜드로 더 많이 알려져 있지만, 마젤란과 그의 원정대가 거인족이라고 묘사했던 원주민들을 가리키는 파타곤(patagón)이라는 말에서 비롯됐다. 남반구에 위치하여 우리와 계절이 정반대인 이곳은 연중 기온이 낮아 11월에서 3월이 여행적기이며, 이때 간다 하더라도 사람을 지구 밖으로 날려버릴 기세로 불어대는 토레스 델파이네의 바람을 피할 방법은 없다. 자연은 냉혹하여 불평을 허락하지 않는다던가? 절대적 힘 앞에서 작은 불평 따위는 내동댕이쳐버리게 되는 곳이 파타고니아가 주는 힐링의 힘이다. 그러니 이곳에서라면 바람을 피하기보다는 바람을 기꺼이 마주하는 쪽으로 마음을 먹는 쪽이 낫다. 사람은 40m/s를 넘으면 날아갈 수도 있다는데, 이곳은 최대 풍속이 60m/s를 넘는 일도 많아서 영국 탐험가 에릭 시프턴(Eric Shipton)은 '폭풍우의 대지'라 불렀다는 곳. 그렇다면 우린 왜 이렇게 혹독한 곳에 가려하는 것일까?
나만의 이야기를 쓰기 위한 결행
1989년 1월, 48세로 요절한 브루스 채트윈은 의 기자로 일하던 어느 날, 93세의 디자이너 아일린 그레이를 인터뷰하러 갔다가 그녀가 그린 파타고니아 지도를 보고 깊은 감동을 받는다. 아일란은 자신은 이미 늙어 갈 수 없다며 브루스 채트윈이 대신 그곳에 가줄 것을 부탁했다. 얼마 후 브루스는 다니던 신문사에 ‘파타고니아로 떠남’이라는 짤막한 한 을 남긴 채 지구 반대편 파타고니아로 사라져 버렸다. 그가 쓴 책 의 서문에는 이렇게 쓰였다.
“제가 늘 저지르겠다고 협박했던 일을 드디어 결행했습니다. 오늘밤엔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떠납니다. 거기에 살면서 저 자신만을 위한 이야기를 쓰려고 합니다.”
문명의 이기는 거리감각을 바꿔놓았다
우린 이제 단 두 시간에 비행기로 목적지에 갈수도 있고, 수 십 시간을 버스를 달려 육로를 통해 목적지에 닿을 수도 있다. 효율성과 비효율성사이에서. 속도와 비속도 사이에서. 빠름과 느림 사이에서. 우린 어느 쪽이든 선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비행기로 단 두시간만에 갈 수 있는 길을 버스로 온종일 달려서 간다. 느린 것에 익숙하지 않은 탓에 30시간의 버스여행이 쉽지 않다. 그래도 칠레와 아르헨티나를 가로지르는 파타고니아 땅만은 꼭 육로로 달려보고 싶었다.
그래야 지도로서가 아니라 온몸으로 이 땅덩어리가 얼마나 거대한지 알 수 있을 테니까. 30시간을 달려도 피곤함보다는 오랜 상상이 실현되는 기쁨에 잠을 이룰 수 없어 창밖의 변화를 지켜본다. 그 길이만큼이나 버라이어티한 땅덩어리. 사막에서 툰드라로, 와이너리가 펼쳐진 녹색의 땅으로, 그리고 바다와 산맥, 파타고니아 빙하에 이르기까지.
이름 모를 도시에 사람들이 내리고 타고, 내리고 또 타고 손님을 끝없이 바꾸며 TUR 버스는 달려간다. 일직선으로 뻗은 도로. 직진으로 난 길. 고속도로 휴게소엔 먹을게 별로 없고, 떡복이와 오뎅, 우동 생각이 간절하지만 그저 커피한잔과 웨하스 과자로 허기를 달랜다. 간간이 노점상이 차에 오르기도 하는데 먹을게 없기는 마찬가지다. 파타고니아만 하더라도 대한민국의 다섯배 크기. 우리나라 북쪽끝에서 남쪽 끝까지 달려봐야 고작 5시간인 곳에 살던 나는 그저 한도시에서 옆 도시로 가는데 30시간이 걸리는 이 나라에 와서야 우리나라 땅덩어리가 얼마나 작은지를 실감한다.
파타고니아의 비경을 잇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루트 40!
이곳에 오면 마음을 방해하거나 어지럽게 하는 것이 하나도 없는 땅. 오로지 자신의 마음만을 명징하게 들여다 볼 수 있는 거울같은 자연을 마주할 수 있다. 왜곡되지 않은 정직한 선.
가다가 얽히거나 꼬임이 없이 그저 올곧게 이어지는 선을 보며 굽혀진 마음을 조금은 펼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이 없어 무엇이 더 아름답다는 것이 왠지 모를 슬픔을 자아내지만 땅보다 더 큰 면적으로 다가오는 광활한 하늘은 늘 빌딩에 가려져 그 모양을 알 수 없었던 구름의 존재를 각인시켜준다.
토레스델파이네국립공원과 페리토모레노 빙하!
파타고니아를 대표하는 곳을 꼽는다면 칠레의 토레스델파이네 국립공원과 아르헨티나의 페리토모레노를 비롯한 약 50개의 빙하국립공원이다. 3개의 화강암 봉우리를 비롯해 해발 2천5백미터의 설봉들이 하늘을 찌를 듯 서있는 토레스델파이네는 남미 최고의 풍광으로 눈이 닿는 곳마다 광고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하다. 봉우리를 지나 길고긴 잿빛 모래를 한참을 걸어가서야 만난 그레이 빙하(Grey glacier)는 이름처럼 짙은 회색빛을 띠고 있다. 거대한 빙하를 마주보며 다가가는 길, 어디선가 우루루쾅쾅 땅이 갈라지는 듯한 들리더니 바로 눈앞에서 거대한 빙하 한조각이 떨어져 내린다. 지구의 한끝이 닳아 없어지는 듯 가슴속이 철렁해져 온다.
아르헨티나 빙하 국립공원의 북쪽 입구라 할 수 있는 엘찰텐에서는 모든 등반가들의 꿈이라 일컬어지는 피츠로이산(3,405미터)을 등반할 수도 있다. 모레노빙하의 관문이라할 수 있는 엘칼라파테 마을은 가장 번화한 곳으로 오랜만에 쇼핑도 하고, 레스토랑에서 아르헨티나산 말벡 와인한잔에 스테이크의 호사를 누리며 쌓인 피로를 씻어보는 것도 좋다. 30킬로미터 길이에 5킬로미터의 폭, 60미터 높이의 얼음덩어리 펠리토모레노 빙하는 남극과 북극을 제외하고 인간이 접근할 수 있는 빙하 중 가장 아름다운 빙하로 꼽힌다. 아이젠을 착용하고 수천년된 빙하위에서 빙하조각을 넣은 위스키한잔을 마셔보자! 그 감동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빙하를 보는 또 다른 방법중 하나는 배를 타고 돌아보는 것으로 웁살라(Upsala)빙하크루즈는 세계최대의 빙하와 수많은 빙산을 크루즈로 돌아볼 수 있다. 빙하라고 하면 무척 추울 것 같지만 맑은 날씨엔 후드티 하나만으로 충분할만큼 그곳 여름의 날씨는 그리 춥진 않다.
파타고니아엔 크고 작은 빙하가 50개 이상이 있으며, 남극과 그랜란드 다음으로 양이 많다. 안데스 산맥에 내리는 많은 비가 빙하를 만드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온난빙하에 속하는 이 지역의 빙하는 빠르게 순환하는 것이 특징인데, 여름과 겨울의 이동 속도는 다르지만, 연간 평균 100m에서 200m 사이의 속도로 움직여서 육안으로도 빙하의 움직임을 관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빙하크루즈나 트레킹 중에 천둥 같은 소리와 함께 찾아오는 빙하붕괴현상을 목도할 가능성이 높은 곳이기도 있다.
지구 최남단마을, 우수아이아(Ushuaia)
파타고니아 여행은 칠레와 아르헨티나의 국경을 몇 번씩 오가는 여행이다. 아르헨티나의 엘찰텐, 엘칼라파테, 모레노빙하를 만나고 칠레의 토레스델파이네국립공원을 왔다가 다시 아르헨티나의 땅끝 마을을 향해 달려간다. 12시간 버스를 타고 국경을 넘고, 마젤란 해협을 웅장한 크기의 배, 파타고니아호를 타고 건넜다. 심한 바람엔 장사 없는 듯 그 큰 배도 휘청대고 약간의 배 멀미도 났다. 말 그대로 산 넘고 바다건너서 도착한 우수아이아. 우수에 찬 듯 보이던 그 곳. 사람들이 왜 이곳을 지구의 끝. 핀 델 문도(FIN DEL MUNDO)라 했는지 몸으로 와 닿는다. 남극을 제외하고 인간이 모여 사는 최남단 마을인 우수아이아는 거대한 아메리카 대륙의 가장 아래쪽에 설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항구마을이다. 먼옛날 대항해시대엔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건너가는 많은 배들이 대자연의 재앙 앞에 침몰했다고 전해지는 곳. 마젤란 해협을 바라보며 경사진 언덕에 자리 잡은 이 마을은 1년 내내 세상의 끝을 느끼고 싶어 하는 여행자들로 붐빈다. 남극으로부터 불과 1000km 떨어진 곳. 핀델문도(땅끝)박물관에는 찰스다윈이 비글 해협을 항해할 때의 항해일지와 작품들도 전시되어 있으며, 이곳까지 온 수고로움을 치하해주듯 여권에 스탬프도 찍어주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특별한 엽서를 보낼 수 있는 파란 우체통도 마련되어 있다. 장거리버스와 배 멀미로 지쳐있던 나는 한글로 주소를 써서 우체통에 넣어버리고 말았는데, 오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그 엽서를 친구가 받았단다. 대한민국 만세라는 문자가 왔다. 정말 대한민국 만세다.
Travel tip
◆가는 법: 파타고니아를 여행하는 방법은 항공으로 편하게 가는 방법(란항공(http://www.lan.com)과 버스를 타고 육로나 배로 이동하는 방법이 있다. 시간과 체력을 절약하고자 한다면 항공이 좋겠지만 남미의 어마어마한 대지의 맛을 제대로 즐기고 싶다면 2층침대 버스가 의외로 편리하므로 육로이동도 고려해볼만 하다.
◆꼭 방문해야할 주요도시 및 장소: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엘칼라파데. 엘찰텐, 피츠로이, 페리토모레노빙하, 마젤란해협. 우수아이아, 핀델문도박물관. 칠레 산티아고, 토레스델파이네국립공원.
◆여행적기 및 기온: 파타고니아는 우리와 정반대로 우리가 겨울일때가 그곳의 여름이다. 2월에 방문하면 그곳의 여름에 해당하지만 빙하라고 해서 생각한만큼 춥진 않고 18도 정도의 기온이지만 바람이 부는 토레스델파이네는 파카가 필요할만큼 춥기 때문에 사계절 옷이 다 필요하다.
얼마 전 연트럴파크 길 걷기에 참여했다. 연트럴파크라는 도로명은 미국 뉴욕 맨해튼에 있는 센트럴파크와 연남동을 합성해 지어졌다고 한다. 2011~2016년에 걸쳐 완공된 전체 6.3km의 옛 경의선 숲길 중 가장 긴 연남동 길이다. 약 두 시간에 걸쳐 경의선 숲길을 지나고 홍제천을 따라 걷다가 월드컵 평화공원까지 걸었다. 1905년 첫개통 했다는 옛 경의선은 현재는 공항철도 및 복합 전철로 건설되면서 한국철도시설공단이 철길 상부를 50년간 무상 임대하여 공원으로 조성하였다. 공원길 주변으로 카페나 편의, 위락시설은 좋은데 경관 훼손이나 고성방가 등의 소음을 규제할 원칙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최근 떠오르는 길이 또 하나 있다. 1970년에 만들어진 서울역 고가도로가 바로 그 길이다. 1971년도에 숙명여대에 입학했으니 통학버스 안에서 익숙하게 보아왔던 길이기도 하다. 1024m의 이 길은 2015년에 철거됐는데, 지난해 5월 ‘서울로 7017’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7017’은 1970년에서 2017년의 시점을 의미하고 ‘서울로’는 서울로 향하는 사람의 길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서울로 7017’은 뉴욕시 맨해튼에 있는 센트럴파크 인근 하이라인공원 길을 벤치마킹한 것이라고 알려졌는데, 총괄 디자인 기획을 한 세계적인 건축·조경 디자이너 비니 마스(Winy Mass, 네덜란드)는 오히려 하이라인 공원길과의 차별성을 많이 강조했다고 한다. 뉴욕과 서울의 도시 환경을 비교할 때 차별성을 갖는 것이 더 자연스럽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하이라인 공원길은 1934년에 맨해튼 중심부 20개의 블록을 가로지르며 운행되던 2.33km의 고가 화물 노선이었으나 철도 업이 쇠락한 1980년, 철로도 완전히 중단되어 20여 년간 방치되어 있었다. 뉴욕시 도시재생사업의 일환으로 ‘하이라인 친구들’이라는 시민단체와 하이라인공원길 건설 프로젝트를 기획하여 2009년 완공했다. 아름다운 식물과 벤치 등 디테일한 디자인으로 조성된 길은 허드슨강의 풍광을 배경으로 마천루를 비롯한 뉴욕의 건축사를 살펴보는 교육의 장 역할을 하고 있다.
참고로 뉴욕 맨해튼의 도시 설계자 로버트 모지스는 “뉴욕 도시 중심부에 큰 공원을 설계하지 않는다면 5년 후에는 같은 크기의 정신병원을 지어야 할 것”이라 당부한 바 있다. 그 공원이 바로 우리가 익히 아는 ‘센트럴 파크’인 것이다. ‘연트럴파크’와 ‘서울로 7017’도 오랫동안 훼손, 오염되지 않고 시민의 아름다운 휴식처로 남아 주기를 바란다.
카랑카랑한 목소리에서부터 이 사람은 싫고 좋은 게 분명할 것이며 그 점을 드러내는 데 거리낌이 없으리라는 인상을 준다. TV 밖 현실 속에서 만난 배우 박정수의 첫인상은 어떤 단호함 혹은 자신만의 세계가 확고한 이가 주는 강인함이었다. 얼마 전 드라마 ‘데릴남편 오작두’를 끝낸 그녀는 마침 인터뷰를 한 날 미국으로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대학생 시절 청춘스타로 화려한 데뷔, 긴 휴식, 복귀, 그리고 이제는 안정된 중견 배우로 그 이미지를 각인시킨 그녀를 만나 연기자로서의 삶, 묵직한 여정에 대해 물어봤다.
“요즘은 드라마 끝나면 일해야겠다는 생각만 들어요. 젊은 시절에는 드라마 끝나면 어디로 놀러 가야지, 쉬어야지 했는데 이제는 하도 쉬어서 일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안 들어요.”
드라마가 끝나면 다음 일을 생각한다는 배우 박정수의 말은 바로 그녀가 워커홀릭이라는 짐작을 하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워커홀릭인 그녀가 지금 미국을 거쳐 캐나다 로키산맥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원래 즐겁게 여행하는 걸 좋아하지만 매우 힘들 때도 여행을 떠난다고 말했다. 뭔가 이상했다. 그녀는 지금 일을 준비해야 할 때인 것 같은데 여행을 준비하고 있으니…. 말하자면 그녀가 힘들다는 의미 같았다.
정상에 도착하기 전, 날이 저물다
그녀의 대학 시절 전공은 경영학과였다. 입학은 제약학과로 했다. 그리고 정작 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과목은 미술이었다. 지금도 가방과 구두를 유독 좋아하는 그녀는 미술을 계속했다면 패션 디자이너가 됐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녀가 선택한 삶의 지점들이 여러 갈래인 이유는 가족 때문이다. 교육자 집안의 아버지는 딸이 미술을 하는 걸 반대했고 그녀는 현실과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대학교 재학 시절 탤런트 시험을 봤는데 합격을 하면서 신데렐라 같은 연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화려한 연예계는 그녀에게 보람보다는 환멸을 더 줬던 것 같다. 탁월한 미모의 연예계 총아였던 그녀가 갑작스러운 은퇴를 결심했기 때문이다.
“내 뜻과는 달리 연기자 생활을 시작해서, 남들보다 빨리 자리를 잡았어요. 그런데 주인공 몇 번 하다가 이 생활이 싫어서 시집을 갔죠. 그러다 15년 후 서른아홉 살에 다시 밑바닥에서부터 연기를 시작했어요.”
불혹을 앞두고 복귀한 연예계에서 밑바닥이라 할 수 있는 엑스트라 연기까지 하면서, 그녀는 악착같이 돈을 벌었다. 혼자서 딸 둘을 제대로 키워야 한다는 의무감이 힘이 됐을 것이다. 그렇게 수십 년을 살았다. 그리고 예순여섯의 나이, 지금 그녀는 기자에게 연기자 생활을 하면서 느꼈던 회의에 대해 말하고 있다.
“산을 올라가고 있는 중인데… 그런데 정상에 도착하기 전에 날이 저물었어요. 다시 내려와야 하는 거야. 그래서 길을 잃은 거예요. 지금 내 마음이 딱 그래. 딜레마죠. 이걸 계속해야 해? 이 길을 가야 할까? 너무 힘드니까 고민이 돼요.”
또 다른 자신 마주하기
그녀는 자신이 이런 고민에 빠졌다는 사실이 당혹스러워 보였다. 재작년까지는 이런 고민을 해본 적이 없다고도 말했다. 연기자의 길은 당연히 자신의 길이라 확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진실하면 무조건 통한다는 생각으로 살아왔어요. 그런데 작년에 나이 든 것을 처음 느꼈죠. 나이를 먹으니 도태되는구나 하고 현실을 직시하게 됐어요. 그리고 나를 돌아봤어요. 너무 행운아였더라고. 정말 운이 좋았던 거죠. 그런데 그 운이 다한 거예요. 운이 다했는데, 이걸 밀고 나갈 힘이 있을까? 몸은 늙었고 늙다 보니 마음도 작아지고 겁이 나더라고요.”
물론 그렇다고 그녀가 은퇴 선언을 하겠다는 건 아니다. 외려 정반대로, 그녀는 연기 외의 다른 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일을 언제까지, 어디까지 감수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이 여전히 둥둥 떠다니며 그녀를 괴롭혔다. 말하자면 그녀의 딜레마는 자신의 업에 대한 확신과 함께, 그 업의 한계를 잔인하게 체감하면서 시작된 듯했다.
애초에 기자는 적절한 시점에 그녀에게 ‘행복하냐’고 물어보려 했는데, 이런 상황에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질문이 되어버렸다. 잠시 동안 그녀가 겪은 삶의 굴곡을 생각해봤다. 그녀는 정상에 올라갔다가 길이 안 보여서 내려왔고, 다시 길을 올라가다가 또 길을 잃은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는 지금의 박정수는, 어쩌면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또 다른 자신을 마주한 상황이 아닐까?
바닥을 치고 올라오기 위해 더 가라앉다
“저는 제 아집이 너무 셌기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생각해요. 운 좋게 이 자리까지 왔지만 좀 더 열린 마음이었으면 오늘보다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내가 그런 걸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독선이 강했지, 실패가 없었으니까. 뒤를 돌아볼 시간이 전혀 없었던 거예요.”
그녀의 자기고백은 그녀가 하고 있는 고민의 깊이를 느끼게 해줬다. 동시에 그녀가 그렇게까지 자신을 진단할 수 있을 정도로 강인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해줬다. 모든 편견을 다 내려놓고 자신을 알아챈 그녀는 자신이 늪에 빠져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그 늪은 고민에 대한 해답을 줄 수 있는 늪이기도 했다.
“늪은 허우적거리면 더 빠져들어가죠. 그러니까 내가 어디까지 빠질 수 있는지를 확인한 다음, 바닥을 치고 나오는 게 좋겠다 싶어요. 끝까지 제가 감당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더 깊숙하게 자신을 침잠시켜 답을 구하겠다는 다짐은 자아에 대한 자신감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브라운관 너머에서 살아가는 여자 박정수가 더 궁금해졌다.
절제하는 배우가 갖게 된 연륜
“누군가 제게 그렇게 말한 적이 있어요. 너는 사막에 떨어지면 전갈을 씹어먹고서라도 살아남을 사람이라고.(웃음)”
그 말처럼, 겉으로 보이는 박정수는 독하다. 너무 이른 나이에 경험한 연예계, 그리고 홀로 키워야 했던 두 딸.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내기에는 생활인으로서 책임져야 할 것들이 많았다. 그 책임감은 그녀의 연기에도 영향을 미쳤다.
“저는 연기를 해도 어디까지는 가는데 선을 넘지는 않아요. 그런데 이건 배우로선 나쁜 점이에요. 배우라면 갖고 있지 말아야 할 감수성을 갖고 있는 거니까요. 미쳐야 미친다지만 미치도록 미치지는 않는 거죠. 감정을 절제하기 위해 다 내보내지 못하고 늘 참아요. 그게 아버지 영향이 크지 않았나 싶어요. 아버지도 교육자, 외할아버지도 교육자인 집안이었으니까요.”
그녀가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려 하고 이성적으로 행동하려 하는 것은 교육자 집안에서 자랐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늘 합리적인 선택을 하려 했다. 그런데 사실 이런 행동과 성격은 연기자보다는 CEO에 더 어울리는 자질이다.
“그래서 배우로 성공 못했나봐.(웃음) 기획을 너무 잘한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거든요. 그러다가도 ‘박정수, 네가 하는 거나 잘해’ 그렇게 스스로 말하죠.”
그렇게 ‘하는 거나 잘한’ 박정수가 얻은 것은 연기 연륜이다. 선을 넘지 않으면서도 남들이 보기에는 선을 넘은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능력. 젊었을 때는 상황을 너무 객관적으로 보며 몰입하지 못하는 감정이 단점이었지만 지금은 큰 걸림돌이 아닌 이유다.
너무 하고 싶은 영화
나이 들어서도 잃고 싶지 않은 것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그녀의 대답은 간단했다.
“내 자존감, 그리고 총명함이에요. 옛날에는 스마트하다는 말 참 많이 들었는데… 나이 들어가면서 총기를 많이 잃었죠.”
그녀 삶의 낙은 여행과 여행에 관한 독서, 그리고 영화 감상이다.
“여행은 머리와 몸을 싹 비워줘요. 그곳의 문화에 젖어서 사는 거죠. 연기자로서도 도움이 돼요. 제가 워낙 새로운 곳의 새로운 문화를 접하는 걸 좋아하는데… 아마 호기심이 많아서겠죠.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은 없어요. 사람을 만나기 싫은 것은 사람에게 치여서, 부대끼는 게 싫어서 그런 것이지, 누구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좋아해요.”
그러고 보니 인터뷰를 하면서 그녀가 영화를 너무 좋아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넌지시 영화에 출연하고 싶은 생각은 없냐고 물었다.
“정말 하고 싶죠. 그런데 예전에 영화계를 모르던 시절에 개런티를 많이 받고 출연한 적이 있어요. 당시엔 그 개런티가 파격적이었나봐요. 그때는 내가 인기가 좀 있었던 때니까. 그런데 그다음부터 영화계에서 ‘박정수는 비싼 배우’로 낙인을 찍었어요. 그리고 영화계는 사단이 형성되어 있어 늘 같이 하던 사람만 세트업되더라고요. 이게 굉장히 큰 장벽이구나, 진작에 하자고 할 때 할걸 너무 배짱을 부렸나 했죠.(웃음)”
시니어 감정을 표현하는 연기 하고파
그녀에게는 아직 여자로서의 정체성을 지키고 있을 때 해보고자 하는 연기 욕심이 있다.
“요즘은 과거에 비해 나이 드신 분들이 감정을 교환하는 게 복잡해졌을거예요. 사랑과 미움 등의 감정도 이제는 심플하지 않잖아요? 그런 부분을 잘 살려낸 영화나 드라마가 있다면 해보고 싶어요.”
그녀의 말은 시간과 함께 시대를 자신의 연기 속에 녹여내고 싶은 여배우들 모두의 소망이기도 하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TV 속에 나오는 나이 든 여자를 단순하게 ‘어머니’의 이미지로만 보고 싶어 했다. 그러나 우리 삶에서 만나는 나이 든 여자는 모두 ‘어머니’로만 존재할까.
그녀가 새삼 여성스럽게 느껴진 건 이 지점에서였다. 다소 거침없어 보이는 면모는 삶의 부침을 겪다 보니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그녀만의 방어기제가 아닐까.
마음의 평정을 찾은 사람이 멋있다
다시 그녀가 겪고 있는 딜레마로 얘기가 돌아왔다. 삶의 좌표를 안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박정수는 그걸 알기 때문에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내면과 대화를 하고 있었다. ‘결국 뭐든지 내가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말을 듣자 그녀가 강인한 사람이지만 외로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우로서는 만족스러운데… 극복해야죠. 사실 이런 딜레마는 배우가 아니라 다른 누구도 겪는 거니까요. 그걸 딛고 일어서지 못하면 패배자가 되는 건데, 어떻게든 딛고 일어서야죠. 다만 얼마만큼 시간이 걸릴지, 어떻게 해야 할지가 문제죠.”
그녀는 나이 들어서도 멋있는 사람의 기준으로 ‘마음의 평정’을 꼽았다. 그렇다면 현재 마음이 평온하지 않은 그녀는 자신의 기준에서 멋있는 사람일 수가 없기에, 어떻게든 답을 찾아내려 할 것이다. 그 순간 그녀에게 준비된 질문 중 폐기될 뻔한 질문을 꺼낼 수 있었다. ‘10년 후의 박정수는 어떤 사람일지’에 대한 물음이었다.
“질문이 너무 슬프게 만드네.(웃음) 이걸 다시 뛰어넘고 더 행복해질 수도 있고…. 저도 모르죠. 모르겠지만, 좌절하고만 있을 것 같지는 않아요.”
마지막 대답은 그 어떤 말보다 그녀다웠다. 모든 것을 잃더라도 자신만은 절대 잃지 않을 것이라는 단호한 다짐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녀가 찾아낼 길이 어떤 모습이든, 그것은 자신이 선택하고 납득한 길일 것이다. 배우 박정수의 새로운 길을 믿고 지켜볼 가치가 있는 이유다.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그녀의 핸드폰 너머로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그녀는 슬럼프에 빠진 배우의 모습에서 바삭한 미소의 여자로 변신했다. 역시 ‘배우 박정수답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그녀의 표정에는 스스럼없고 당당한, 그렇지만 자존감을 잃지 않으려는 자기애가 스며들듯 젖어 있었다.
“자신을 비운 자리에 상대를 받아들이듯 서로 다른 나무가 한 몸이 되어야 비로소 하나의 가구가 완성됩니다.” 50여 년 ‘외길 인생’에 값하는 사유의 언어로 ‘전통 짜맞춤’을 설명하는 소병진(蘇秉辰·68) 씨. 1960년대 중반, 가난 때문에 학교 공부도 포기한 그는 열다섯 살에 가구공방에 들어가 ‘농방쟁이’ 목수의 삶을 시작했다. 이후 맥이 끊긴 조선시대의 가구 전주장을 재현해내고 대한민국 가구제작 명장 1호, 국가무형문화재 제55호 소목장 보유자가 됐다. 한 치의 오차도 허락하지 않았던, 작업대 위의 시간들이 가져다준 당연한 결과였다.
전북 완주에서 작품활동을 하며 제자들을 가르치는 그는 마침 서울에 올라와 있었다. 6월 4일까지 열렸던 2018한옥박람회에서 ‘전통예술과 현대미술의 만남’을 주제로 자신의 작품을 선보이기 위해서였다. 인터뷰가 잡힌 날,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약속 시간을 조금만 미뤄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그의 작품과 제자들이 출품한 가구를 관람하고 전시장을 몇 바퀴 돌고 난 뒤에야 그가 나타났다. 사실은 오랜만에 만난 지인들과 늦게까지 술을 마시느라 늦잠을 잤다고 털어놨을 때 아직 건강한 그의 시절이 반가웠다. “좀 더 일찍 국가무형문화재가 되었더라면 제자들을 많이 길러냈을 텐데…” 하고 아쉬워했지만 그는 여전히 필드에서 펄펄 날고 있는 선수처럼 보였다. 고희(古稀)를 바라보는 나이도 믿기지 않았다.
“평생 나무와 함께해서 건강한 거 같아요. 가구를 만들다 보면 스트레스와 잡념이 사라지거든요. 못을 사용하지 않고 목재끼리 서로 끼워 맞추는 게 짜맞춤인데 이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뇌를 써야 하니까 치매 예방에 좋지, 온몸을 움직여야 하니 운동을 따로 할 필요가 없지, 시간도 잘 가지, 정서적으로도 좋지, 성취감도 있지,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어요. 미래학자 피터 드러커도 ‘전통문화는 미래산업의 최후 승부처’라고 했잖아요. 곧 시니어에게 짜맞춤이 최고의 직업이 되지 않을까 전망해봅니다.”
실제로 완주에 있는 그의 교육관에는 퇴직자들이 꽤 온다. 대부분 취미로 배우지만 제2직업으로 삼는 사람도 있다. 물론 후계자의 길을 걷기 위해 청년들도 문을 두드리기는 하지만 1년 정도 지나면 버티지 못하고 나간다. 경제적 이유 때문이다. 그는 전통문화의 부가가치를 내다보고 적극 지원하는 일본에 비해 우리나라의 현실은 매우 열악하다면서 안타까워했다.
“전통 짜맞춤 기법은 총 45가지인데 지금은 5가지밖에 안 가르쳐요. 돈 내고 그걸 다 배우려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죠. 교육생들에게 손 연마(수공구 연마)만 시키면 지루해합니다. 빨리 물건 하나 만들어보고 싶은 거예요. 6개월이면 사방탁자 정도는 만들 수 있어요. 하지만 흉내 내는 것밖에 안 돼요. 기술자가 되려면 눈을 감고도 나무를 다룰 수 있어야 하고, 이음매를 딱딱 때려보는 것만으로도 짜맞춤이 제대로 되었는지 감각적으로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세대가 가구를 배울 때는 청소와 심부름 등 온갖 잡일을 해가면서 스승 밑에서 10년 이상 공을 들여야 겨우 인정을 받았어요. 그러나 요즘 같은 세상에 그렇게 공부할 젊은이들이 과연 있을까요. 정부가 전통문화를 짊어질 이수자들에게 지원을 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가난 때문에 배우기 시작한 소목장 기술
‘농방쟁이’. 과거에는 가구 만드는 사람을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그가 소목장이 된 인연은 5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전매청에 다니던 아버지가 직업을 잃으면서 가세가 급격히 기울자 열다섯 살 소년은 일찍 철이 들어버렸다. 젓갈장사 등을 하며 7남매 뒷바라지하는 어머니를 보며 무슨 기술이든 배워 빨리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중학교를 중퇴한 채 8촌 형을 따라 들어간 곳이 ‘전주 중앙가구’ 목공부 소목반. 그곳에서 운명처럼 전통 소목 기술자 이해민 명장을 만나 사사한다. 어린 소병진은 하나를 가르쳐주면 둘을 알 정도로 눈썰미가 남달랐다. 남들은 10년 넘게 배우는 기술을 2년 반 만에 통달했다. 이 똘똘한 소년을 주변에서 그냥 놔둘 리 없었다. 어느날 그의 솜씨를 눈여겨보던 유명 목수 유춘봉 씨가 자기 집으로 오라 했다.
“유춘봉 선생님은 서울에서 일하던 최고 기술자였지요. 전주 중앙가구에서 디자인 개발을 위해 모셔왔는데 그렇게 인연이 된 거죠. 내게 넓고 새로운 세계를 보여준 은인입니다. 음료수 한 박스 사 들고 갔더니 ‘자네 인사성도 좋고 성실하고 솜씨도 참 좋네. 여기 놔두기 아까워서 하는 말인데 돈 벌고 싶은가, 기술 배우고 싶은가? 내가 만약 동일가구 보내주면 갈랑가?’ 하고 물으시더군요. 깜짝 놀랐죠. 동일가구는 아무나 들어가는 회사가 아니었거든요.”
더 큰 기술을 배우고 싶었던 그는 유춘봉 씨가 써준 편지를 들고 서울로 올라갔다. 과연 소문대로 시스템이 잘 갖춰진 회사였다. 그는 일본으로 가구를 납품하는 수출반에서 일하게 됐다. 최고급 가구를 제작하는 곳이었다. 그동안 어디서도 보지 못한 수려한 디자인의 가구들을 보며 그는 가슴이 뛰었다. 함께 일할 사람들은 모두 머리가 희끗희끗했다.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장인들이었다. 이때 배운 기술, 특히 디자이너를 귀찮게 따라다니면서 배운 디자인 기술은 그가 조선시대 가구 전주장을 복원해낼 때 큰 도움이 되었다.
‘전주장’을 대표하는 브랜드가 되다
“전주장을 처음 본 것은 동일가구에서 일할 때였어요. 휴일이면 인사동엘 자주 나갔는데 어느 날 골동품 가게에 있는 물건이 눈에 확 들어왔어요. 자그마하면서도 기품이 느껴지는 가구였어요. ‘전주태극이층장’이라는 이름표가 붙어 있길래 직원에게 물어보니 조선시대에 전주 지방에서 부잣집 마님들이 쓰던 가구라는 거예요. ‘우리 고향에서 조상들이 쓰던 가구라고?’ 귀가 번쩍 뜨였죠.”
그때부터 전주장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언젠가는 꼭 한 번 만들어보리라 마음먹고 월급을 타면 죽은 느티나무와 먹감나무를 사서 고향집에 쌓아 뒀고 전주장이 있는 곳이라면 전국 어디든 달려갔다. 박물관이나 개인이 소장한 가구를 통해 형태와 장석문양도 꼼꼼히 기록했다. 그것으로도 성에 안 차면 어렵게 구한 전주장을 분해해서 제작 기법을 하나하나 분석했다. 그러기를 20여 년 그는 마침내 전통가구 전주장의 원형을 재현해내는 데 성공했다.
“전주장 앞면에 들어가는 문양과 장석 하나까지 정통 그대로 살려냈어요. 장석은 너무 번쩍거리지 않도록 처리했고, 가구 보존을 위해 마무리는 동백기름으로 칠했지요. 전주장은 지방에서만 쓰이던 가구가 아니에요. 한때는 하사품으로 이용될 만큼 명성이 있었던, 조선시대 가구의 백미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사명감을 갖고 내가 알고 있는 기술을 모두 쏟아 부었어요. 2004년 전승공예대전에 ‘전주버선장’을 출품해 대통령상을 받았을 때 ‘내가 결국 해냈구나’ 하며 자부심을 느꼈지요.”
그 후 소병진은 ‘전주장’을 대표하는 브랜드가 됐다. 2014년에는 마침내 대한민국 중요무형문화재 제55호 소목장 보유자로 선정이 됐다. 한눈팔지 않고 최선을 다한 세월이 가져다준 보상이었다. 한때 부도를 맞아 ‘그만 살자, 격포에 가서 죽어버리자’ 하고 바위 위로 올라갔다가 어린 아들이 눈에 밟혀 다시 돌아왔던 날들은 이제 추억이 됐다. 그는 자신의 기술이 3대를 잇는 기술이라고 했다. 스승의 선대 기술까지 배웠으므로 100년의 기술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살아 있을 때 전주장 기술을 보존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 일환으로 최근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소목장(전주장) 등재를 위한 노력을 다방면으로 하고 있다.
좋은 나무만 보면 아직도 설레는 사람
짜맞춤 가구에 사용되는 목재는 주로 오동나무, 느티나무, 먹감나무 등으로 보통 100년 이상 된 나무들이 쓰인다고 한다. 그는 지금도 좋은 나무만 보면 탐이 나고 설렌다고 말한다.
“나무를 들여오면 눈과 비바람과 햇볕을 맞히고 건조 과정을 거쳐 가구를 만들기까지 20여 년이 걸려요. 지금 내 나이가 곧 70인데 20년 뒤면 90입니다. ‘내가 이 나무를 사용할 수 있을까? 미쳤지! 그만 사야지’ 하면서도 좋은 나무만 보면 ‘얼마여?’ 하고 물어요. 이게 바로 정신 같아요. 여기 쟁여놓은 나무들, 누가 10억 준다 해도 안 팔아요.(웃음)”
그의 교육관에는 귀한 목재들이 가득하다. 스승은 제자를 위해 나무를 구하고 제자는 그 나무를 쓰며 스승을 생각할 것이다. 그렇게 서로에게 가는 마음의 길은 비움과 받아들임을 반복하며 상대를 꽉 안은 채 열릴 것이다. 순환의 사랑이 100년의 기술만큼 오래도록 이어지길 그가 기대하고 있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