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3대 박물관으로 손꼽히는 러시아 예르미타시박물관의 소장품 전시인 ‘예르미타시박물관展, 겨울 궁전에서 온 프랑스 미술’(이하 예르미타시박물관展)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4월 25일까지 전시된다. 러시아 박물관에서 왔다고 해서 러시아 작품을 생각했다가는 오산이다. 17,18세기 러시아 여제 예카테리나 2세가 프랑스에서 수집한 회화와 더불어 20세기 초 러시아 기업가들이 사서 모은 인상주의 회화, 조각, 소묘 작품 등 80여개 작품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다.
이번 전시는 1991년 이후 26년 만에 성사됐다. 당시 예르미타시박물관의 ‘스키타이 황금’ 특별전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렸고 2010년 교환전시로 ‘솔숲에 부는 바람, 한국미술 오천년’ 특별전이 예르미타시박물관에서 개최되었다. 이번 예르미타시박물관展은 두 곳 간의 두 번째 협력전시다. 2016년 예르미타시박물관에서 열린 ‘불꽃에서 피어나다-한국도자명품전’에 대한 교환전시로 추진됐기 때문이다.
니콜라 푸생에서 앙리 루소까지, 프랑스 미술의 거장들이 한 자리에
예르미타시박물관은 300만 여점의 소장품을 전시하고 있는 세계 규모의 박물관이며, 유럽미술 전시가 특히 유명하다. 그중에서도 17세기에서 20세기 초까지의 프랑스 미술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예르미타시박물관의 기초를 세운 예카테리나 2세와 로마노프 왕조 시대의 황제들과 귀족, 러시아 기업가들이 열정적으로 프랑스 미술품을 수집한 결과다. 예르미타시박물관은 프랑스를 제외한 다른 나라들 중 세계에서 가장 많은 프랑스 미술을 보유한 박물관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는 예르미타시박물관 본관의 일부이자 로마노프 왕조시대의 황궁이던 겨울궁전에전시돼있는 프랑스 미술을 중심으로 구성했다. 총 4부로 구성 됐는데 제1부인 ‘고전주의, 위대한 세기의 미술’은 니콜라 푸생, 클로드 로랭 등 프랑스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화가들의 작품을 통해 프랑스 미술이 독자적 화풍을 형성하고 유럽미술의 흐름을 주도하기 시작한 17세기의 프랑스 미술을 소개한다. 제2부인‘로코코와 계몽의 시대’에서는 18세기로 접어들어 남녀 간의 사랑과 유희 장면을 즐겨 그렸던 로코코 화가들의 작품과 계몽주의 사상의 확산에 따라 새로운 감각으로 제작된 풍속화, 풍경화를 만날 수 있다.
프랑스 미술은 19세기로 접어들어 큰 변화를 맞이한다.
전시의 3부인 ‘혁명과 낭만주의 시대의 미술’은 나폴레옹의 통치와 일련의 혁명을 겪으며 프랑스 미술계에 일어났던 여러 변화를 소개한다. 신고전주의의 대표적 화가 장오귀스트도미니크 앵그르의 영웅적 초상화를 비롯하여 문학이나 신화, 동방의 문물에서 영감을 얻었던 낭만주의 화가들의 작품이 선보이며, 사실주의 화가 귀스타브 쿠르베와 카미유 코로, 외젠 부댕과 같이 야외 사생으로 인상주의를 예고했던 화가들도 눈길을 끈다.
전시의 마지막인 ‘인상주의와 그 이후’는 고전적인 예술 양식과 결별한 인상주의와 후기인상주의를 조명한다. 클로드 모네, 폴 세잔, 모리스 드니, 앙리 마티스, 앙리 루소 등 인상주의 이후 근대 거장들의 작품은 20세기 미술로 이어지는 흐름을 보여준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작품 중에서는 예카테리나 2세의 소장품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계몽 군주가 되고자 노력했던 예카테리나 2세는 프랑스 철학자 드니 디드로를 비롯한 동시대 저명인사들과 친분을 유지하며 유럽 각지에서 미술품을 사 모았다. 그녀의 미술품 수집에 대한 열정은 동시대 귀족들에게도 이어졌다. 18세기 말 이후 많은 프랑스 화가들의 작품들이 러시아의 공공건물과 상류층 저택을 장식했다. 이러한 개인 소장품들이 20세기 초에 국유화되면서, 오늘날 예르미타시박물관은 다채로운 프랑스 미술 소장품을 보유할 수 있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예카테리나 2세를 비롯하여 프랑스 미술을 사랑했던 수집가도 함께 소개하고 있다. 예르미타시박물관展을 통해 러시아와 프랑스의 문화적 맥락을 보다 깊게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관람정보
기간 ∼4월15일까지
장소 국립중앙박물관
관람료 성인 6천원 / 중, 고등, 대학생 5500원
전시문의 1688-0361
위치 지하철 4호선, 경의중앙선 이촌역 2번 출구에서 버스 400번·502번 타고 국립중앙박물관 하차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우리나라 최초로 도마 종목에서 은메달의 주인공이 탄생했다. 바로 자신의 이름을 딴 신기술 여1, 여2를 개발해 한국 기계체조를 이끌어온 여홍철(呂洪哲·47). 그는 세상에 한국 기계체조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체조를 안 했으면 조폭이 됐을지도 몰라요.”
1994년 세계체조선수권대회 도마 3위, 1994년 히로시마아시안게임 도마 1위, 1996년 세계체조선수권대회 도마 2위,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체조 도마 2위, 1998년 방콕아시안게임 도마 1위 등 세계 무대에서 메달을 휩쓴 여홍철은 말한다. 그의 인생에 가장 큰 행운을 가져다준 것은 ‘체조’였다고.
그의 체조 사랑은 우연한 만남으로부터 시작됐다. 야구가 좋아서 야구부에 지원했지만, 하필 그해에 야구부가 없어졌다. 마침 그때 눈에 띈 게 체조부였다.
“초등학교 때 무협 영화에 빠져 있었거든요. 그땐 날아다니고 재주 부리는 체조가 너무 멋있어 보였어요. ‘아 이건 내꺼다!’ 당장 체조부에 들어갔죠. 솔직하게 말하면 계속할 생각은 없었어요. 근데 감독님이 찾아오셔서 ‘체조 계속하자, 운동하면 대학도 장학생으로 갈 수 있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을 수 있다’면서 좋은 점만 얘기하시니깐… 거기에 완전히 혹해서 계속하게 된 거죠.(웃음)”
항상 따라다니던 부상
기계체조는 선수들의 안전을 위해 금지된 기술이 있을 만큼 위험 종목 중 하나로 꼽힌다. 특히 머리로 떨어지거나 잘못 착지할 경우 큰 부상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여홍철 또한 부상을 피해갈 순 없었다. 하필 국제대회를 앞두고 벌어지는 사고는 태극마크를 단 그의 발목을 수차례 잡았다. 그는 그동안의 부상이 생각나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처음으로 선수촌에 들어갔는데 평행봉 연습을 하다가 손가락이 골절됐어요. 선수촌에 들어간 지 한 달 만에 짐 싸서 나왔죠. 아마 제가 단기간 퇴촌 기록 보유자일 거예요.(웃음)”
1990년 베이징아시안게임 땐 경기 두 달을 앞두고 다쳐서 또다시 퇴촌했다.
“철봉에 부딪쳐서 오른쪽 귀가 거의 떨어져나갔어요. 그때는 정말 아쉬웠죠. 어느 때보다 욕심이 났거든요. 가장 끔찍했던 사건은 목 부위가 찢어졌을 때예요. 당시 부분 마취가 불가능한 시절이라 마취도 안 하고 80바늘을 꿰맸는데 아직도 바늘이 살을 뚫고 지나가는 느낌이 생생해요.”
외상은 치료하면 되므로 그나마 다행이었다. 정말로 큰 위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 부상, 바로 골수염이었다. 운동을 계속하면 팔을 절단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진단을 받고 그는 2년 6개월간의 공백기를 가졌다. 하늘이 그의 간절함을 알았던 걸까. 다행히 녹아내리던 뼈가 단단히 굳기 시작했고 여홍철은 고민할 여지도 없이 다시 체조선수의 길을 선택했다. 그는 이런 시련들이 자신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줬다고 말한다.
“솔직히 연습하다가 다치면 몇 개월 동안은 그 기술은 쳐다도 안 봐요. 아예 빼버리고 연습하죠. 사실 좀 겁났거든요.(웃음)”
메달 색을 바꾼 통한의 ‘세 발자국’
운동선수라면 모두가 꿈꾸는 무대인 올림픽. 여홍철은 더 이상의 퇴촌은 없다고 다짐하며 선수촌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1992년, 그에게는 첫 올림픽인 바르셀로나올림픽에 출전하게 된다. 비록 결승엔 들지 못했지만 출전만으로도 큰 의미가 됐다.
“그동안 부상을 워낙 많이 겪어서 그런지 올림픽에 나갈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벅차고 행복했어요. 우선 관중 수부터 어마어마하게 차이가 났죠. 우리나라에서는 비인기 종목이다 보니 대회가 있어도 경기장이 텅 비어 있거든요. 많은 사람 앞에서 기술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게 너무 행복하고 즐거웠어요. 그땐 메달을 따야겠다는 생각보다는 내가 가지고 있는 기술을 실수하지 않고 보여주고 경기를 잘 마치는 것을 첫 번째 목표로 했죠.”
그로부터 4년 뒤인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에서 러시아의 알렉세이 네모프를 저지할 가장 유력한 금메달 후보 선수로 꼽혔다. 더불어 한국체조 첫 금메달 유력 후보로도 거론됐다. 아니나 다를까, 도마 1차 시기에서 완벽한 연기를 펼치며 9.837점을 받았다. 이제 큰 실수만 하지 않으면 금메달은 떼놓은 당상이었다. 2차 시기를 앞둔 그의 모습에선 자신감이 넘쳤다. 하얀 탄산마그네슘을 손에 묻히고 최고 속력으로 내달렸다. 힘차게 구름판을 밟고 그의 이름을 딴 신기술 ‘여2(두 손을 정면으로 짚고 공중에서 몸을 펴 두 바퀴 반을 비트는 동작)’를 선보였지만, 착지에서 치명적인 실수를 하고 말았다.
“착지 불안으로 세 발을 뒷걸음질했죠. 내려오는데 순간 눈물이 쏟아지더라고요. 그동안 힘들게 연습하고 훈련했던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데… ‘아 4년을 더 기다려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모든 게 한순간에 무너지는 듯한 느낌이었어요. 그때의 개인적인 아쉬움은 말로 설명 못하죠.”
그가 착지 불안으로 휘청거리는 순간 경기장에 있던 관중들도 아쉽다는 듯 탄식을 뱉었다. 경기 결과는 알렉세이 네모프와 0.031점 차이로 은메달. 그는 경기 직후 인터뷰에서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연신 되뇌며 눈물을 보였다. 관중들도 그의 모습을 보며 안타까워했다.
“아쉽기는 했지만, 그때의 실수에 대해선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해요. 당시 1점은 1등에서 40등까지를 갈라놓을 수 있는 점수였어요. 만약 그때 세 발 뒷걸음이 아니라 뒹굴었다면 메달권에도 못 들어갔을 거예요. 저는 그나마 운 좋게 거기서 그쳤기 때문에 은메달을 딸 수 있었던 거죠. 그 부분에 대해선 아직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에게 가장 아쉬웠던 경기를 묻자 의외로 2000년 시드니올림픽을 꼽았다.
“그 당시 제가 도마 세계 랭킹 1위였어요. 이번에는 꼭 금메달을 따겠다 다짐하고 출전했는데 웬걸 규칙이 바뀌었더라고요. 원래 두 번씩 기술을 펼쳐야 하는데 한 번만 하면 되는 거로요. 그건 다시 말하면 잘 못하는 선수라도 운 좋게 착지를 잘하면 결승에 올라가고, 실력이 좋아도 실수를 하게 되면 떨어트리겠다는 것이었어요. 바뀐 규칙으로 시드니올림픽 때 세계 랭킹 상위권 선수들이 거의 결승에 올라가지 못했어요. 대신 쉬운 기술로 착지에 성공한 하위권 선수들이 결승에 올라가는 바람에 논란이 많았죠. 결국, 이후엔 다시 원래대로 두 번 연기하는 거로 바뀌었어요. 그때 생각했죠. ‘아, 금메달은 신이 주는 선물이구나’ 하고요.”
체조는 상대가 아닌 자신과의 싸움
스포츠 경기를 보다 보면 상대의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소리를 지른다거나 불필요한 행동으로 도발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혹시 체조도 안 보이는 공간에서 선수들끼리 기 싸움을 할까?
“신경전이요? 그런 건 전혀 없었어요. 어차피 개인마다 기술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자신의 기술만 완벽하게 펼치고 오면 되거든요. 오히려 낯익은 선수들이 있으면 선수대기실에서 인사도 하고 서로 몸 장난도 하면서 긴장을 풀곤 했죠.”
여홍철은 체조는 상대와 하는 싸움이 아닌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말한다. 특히 수백 번, 수천 번씩 반복되는 훈련이야말로 가장 혹독한 자기와의 싸움이라고 강조한다.
“똑같은 기술을 연습할 때 그 지루함을 이겨내는 게 가장 힘들었어요. 중간에 포기하면 완성도가 떨어지는 거고 이겨내면 내 기술이 되는 거고. 기술을 완벽하게 소화하려면 1~2년? 길게는 3~4년이 걸릴 수도 있어요. 이 기간에 완벽히 습득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요. 한 가지 기술을 완벽하게 하기 위해선 무한 반복이 필수였죠. 유연성 훈련은 어릴 때만 고통스러웠지 대표팀 되고 나서는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아 물론 지금 하라고 하면 절대 못합니다.(웃음)”
우리나라 체조 역사상 전대미문의 영웅이었던 여홍철. 기술에서만큼은 최고의 기량을 선보인 그는 비록 올림픽에선 금메달과 인연이 없었지만 후회는 없다고 말한다. 아직까지도 그의 이름을 딴 여1, 여2 기술은 국제대회에서 회자되고 있다.
“나이로 따지면 거의 끝 무렵까지 국가대표를 했기 때문에 큰 미련은 없어요. 이젠 제 체조 DNA를 물려받아 체조선수의 길을 가고 있는 딸을 지지해주는 게 새로운 목표입니다. 얼마나 힘든 운동인지 알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큰 버팀목이 되어주고 싶어요.”
왜 그랬을까? 세상일은 알 수가 없는 일이어서 언제 나에게 돌발적인 사건이 생길지는 아무도 모른다.
한평생 도덕적이고 아름답게만 살 수도 있겠지만 벼락처럼 닥치는 사랑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여 큰 비극을 맞는 일도 있을 수 있다.
안나 카레니나, 불꽃처럼 다가온 사랑을 피하지 않고 맞았지만, 결국 비극의 파멸을 맞는 아름다운 여자 이야기가 화려하고 멋진 무대에서 뮤지컬로 펼쳐졌다.
이제 서서히 봄에 자리를 내어주는 듯 매서웠던 추위가 점차 사라지고 있다.
겯기에도 좋은 기온이어서 남부터미널 전철에서 내려 필자는 버스를 타지 않고 천천히 걸어서 예술의 전당에 갔다.
예술의 전당은 항상 좋은 작품으로 넘쳐나고 있어 전면의 포스터들이 필자의 시선을 끌어 당긴다.
저 포스터 중에는 오늘 감상할 뮤지컬 안나 카레니나 외에 담 주에 볼 예정인 리처드 3세도 걸려 있어 기쁨의 미소가 떠오른다.
일요일 오후 2시, 공연 보기에 최적의 시간이어선지 공연장엔 사람들이 꽉 찼다.
솔직히 말하면 필자는 안나 카레니나가 싫다.
어지간히 보수적인 필자의 입장에서 훌륭한 남편과 귀여운 어린 아들까지 있는 여자가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남편과 아이를 버리고 사랑만을 좇아 가정을 떠난다는 게 용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젊었을 때 톨스토이 원작인 이 작품을 영화로 책으로 만나고 필자는 충격을 받고 분개하기까지 했다.
특히 어린 아들을 그렇게 사랑한다면서도 떠났을 때 꼭 벌을 받아야 한다고 느꼈으며 결말에 기차에 뛰어들어 자살을 택했을 때 정의는 살아있다고 위안받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이만큼 세월이 흐르니 그녀에 대한 느낌은 물론 벌을 받아야 하기는 하지만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한 번뿐인 인생에서 모든 것을 다 바쳐 사랑에 빠져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되며 대리만족을 해 본다.
그러면서 연륜이 사람을 좀 유하게 만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실소한다.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인사가 있은 후 웅장한 음악이 울려 퍼지며 열린 무대는 화려했다.
러시아의 스케이트 광장이 배경으로 배우들이 스케이트를 타며 노래하는데 진짜 스케이트는 아니고 롤러스케이트지만 추운 나라의 즐기는 모습을 잘 표현했다.
시대는 19세기 러시아 상류사회이다.
키티라는 명문 가문의 아가씨는 브론스키 백작을 사모한다.
자신에게 프러포즈할 것을 믿었는데 무도회장에 나타난 브론스키는 이미 다른 여성을 보고 있다.
바로 특별하게 아름다운 모습의 유부녀 안나 카레니나이다.
안나 카레니나는 러시아 정치가의 아내로 나이가 20년 차이 나는 남편과 8살의 아들과 평온하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지만, 무료함을 느끼고 있다.
이때 그녀 앞에 나타난 매력적인 브론스키와 불같은 사랑에 빠지고 가정을 버리면서 둘만의 도피를 한다.
남편 카레닌은 그녀를 용서하고 받아들이려 하지만 자신들만의 사랑이 중요했던 안나는 거부한다.
그러는 사이 고향에는 그들의 불륜이 알려지며 비난받게 된다.
고향에 돌아와 브론스키의 만류도 뿌리치고 안나는 사람들의 무시와 질타를 느끼면서도 무도회장에 한껏 치장하고 나간다.
뮤지컬 내내 멋진 음악과 춤이 흥겨웠지만, 비도덕적인 안나를 향한 여인들의 날 선 군무는 참으로 인상 깊었다.
절도있는 모션으로 나란히 줄을 서서 안나를 향해 손가락질하는 장면은 어쩌면 필자의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부도덕한 자에게 내려지는 형벌 같다고 생각되어 마음을 시원하게 했다.
남편 몰래 집에 들어와 잠자는 아들을 안을 때 가슴이 아팠고 눈물이 났으며 거기쯤에서 멈췄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세상 사람들의 비난과 조롱을 견디지 못하고 브론스키와 처음 만났던 기차역에서 달려오는 기차에 몸을 던지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이 난다.
원하는 사랑을 얻었지만, 세상의 질서에 반하는 일은 불행일 뿐이라는 교훈이 될 수도 있는 이야기에 가슴이 서늘하다.
주인공뿐 아니라 무대를 가득 채웠던 많은 뮤지컬 배우들이 모두 멋져 보이는 공연이었다.
아름다운 모습의 안나가 자꾸만 머릿속을 맴돈다. 좀 불쌍하다는 생각으로...
북한 핵 개발을 소재로 한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1993)로 밀리언셀러에 이름을 올린 김진명(金辰明·60). 그 후 ‘한반도’, ‘제3의 시나리오’, ‘킹 메이커’, ‘사드’ 등을 펴내며 한국의 정치·외교·안보 문제에 촉각을 내세웠던 그가 이번엔 ‘미중전쟁’으로 돌아왔다. 출간과 동시에 베스트셀러에 올랐지만, 묵직한 주제인 만큼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고. 그는 정말 두려운 건 북핵도, 트럼프의 불가측성도, 중국의 경제 보복도 아닌, 분명한 태도를 취하지 않고 눈치만 살피는 우리의 모습이라 강조하며 용기와 결단 없이 해결할 수 있는 난제는 없다고 이야기한다.
KAL 007기 피격사건을 다룬 소설 ‘예언’ 이후 5개월 만에 ‘미중전쟁’이 나왔다. 1·2권으로 나뉘어 총 600페이지에 달하는 장편을 발 빠르게 내놓은 데에는 김진명 작가의 급급한 마음이 담겨 있었다. 게다가 ‘미중전쟁’이라는 단도직입적인 제목까지 달고, 그가 독자들에게 서둘러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일까?
“미국은 원산 앞바다까지 가공할 위력의 B-1B 전략폭격기를 들이대고 북한은 워싱턴까지 날아가는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발사하는 상황입니다. 게다가 북핵을 둘러싸고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의 이해관계가 실타래처럼 얽혀 있는데도 우리는 그저 눈치만 보고 있어요. 분명한 입장 없이 그들의 비위만 맞추다가는 구한말 때와 다름없는 상황이 벌어질 거라 예상해요. 그럼 현재의 문제를 어떻게 타개할 것이냐, 이에 대한 솔루션을 하루빨리 이야기하려고 급히 쓰게 됐어요. ‘미중전쟁’이라는 제목은 단순히 남북의 문제만이 아니라 시야를 더 넓히자는 뜻에서 붙인 거고요.”
나라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하려고 소설을 썼다는 김진명의 말에 작가로서의 남다른 사명감이 느껴졌다. 소설가이지만 작품에 대한 문학적 해석보다는 정치적 견해를 표명하는 그의 모습이 대중에겐 더욱 익숙할 것이다. 혹시 그런 자신의 이미지로 인해 작품활동에 불편함은 없는지 묻자 “전혀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해외에서는 나라의 정치학을 세우거나 정책을 마련할 때 톰 클랜시 같은 전문 작가들의 작품을 참고하잖아요. 그만큼 글로써 사회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작가는 어떤 전문가나 정치인보다 더 해박하고, 예지력이 있어야 해요. 웬만한 식견 가지고는 어림없죠. 그런데 한국 사회는 소설의 영역을 너무 좁혀놨고, 작가들은 그 좁은 세계에 갇혀 있어요. 작가는 자기만의 영역을 벗어나 사회 문제에 대해 방향성을 제시할 정도의 세계관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한국에는 그런 작가가 얼마 없기 때문에 내가 좀 특별하고 이상해 보이는 거죠.”
허용된 거짓이 요구하는 소명
김진명의 소설 속 캐릭터는 대부분 실존 인물이며 실명을 그대로 사용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 한 가지 특징은 그가 창조한 주인공은 대개 비범하고 전지전능한 인물이라는 것. ‘미중전쟁’의 주인공 김인철 역시 세계은행 법무팀 조사요원으로 문재인, 블라디미르 푸틴, 시진핑 등 국가 정상들과의 접촉이 가능할 정도로 특출한 면모를 지녔다. 때론 비현실적인 인물 설정에 대해 비평하는 독자들이 있는데, 그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덧붙였다.
“작품마다 주인공이 한결같이 천재적이고 전지전능하다는 것에 불만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죠. 그러나 소설 속에서 그들은 세계 최고 권력자를 상대로 아주 내밀한 비밀과 약점을 캐내는데 그걸 보통 사람이 해낸다면 더 비현실적이지 않을까요? 사실 내가 쓰는 소설은 일반 소설과 다르게 주인공이 큰 의미는 없어요. 주인공은 숨겨져 있는 무서운 비밀을 밝히는 한 도구일 뿐이지, 그의 내면이나 감정에 의해 어떤 일이 벌어지지는 않거든요.”
소설 속 주인공들은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동시에 김 작가의 주장을 대변하는 역할을 한다. 혹시 소설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자기 생각을 펼치고 싶지 않은지 묻자 그는 “소설이 가장 편하다”고 대답했다.
“사회에서는 사람들의 이해가 부딪치기 때문에 법으로 엄격히 규제를 하죠. 조금만 이상하면 정보보호법이나 명예훼손에 걸려 법의 영역을 뚫고 진실을 파헤치는 건 굉장히 어려워요. 그러니 대중은 민감하고 중요한 정보에 접촉할 방법이 없죠. 언론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지만, 진실을 드러내려 하면 그들 내부에서 굉장히 겁을 내고, 역시 법으로 제재를 받을 테니 알맹이는 감춰진다고 봐요. 그런데 소설은 거짓말을 허용하잖아요. 단순한 사실의 나열로는 결코 알 수 없는 진실을 드러낼 수 있죠. 물론 거짓말을 허용하는 대신 소설가에게는 그만큼 소명의식이 요구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방식으로 이야기하잖아요. 나는 작가이고, 그런 측면에서 허구를 통해 진실을 끌어내는 인류 최고의 장치는 소설이라고 생각해요.”
고구려 정신의 회복이 필요한 때
‘미중전쟁’의 또 다른 주인공 최이지는 북핵 문제, 중소기업 인재난 등에 대해 잡지에 글을 쓰고 대통령에게 제언하는 등 김진명의 생각을 일목요연하게 전달하는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이번 소설을 통해 북핵 문제 외에도 한국 경제난, 미래 먹거리, 인구절벽 등의 고민을 공유하고 싶었다고 한다. 아울러 한국 사회의 큰 문제 중 하나로 경제 지표는 좋은 데 반해 그 돈이 소수에게 몰리는 현상을 꼽았다. 대기업이나 부자들이 돈을 내놓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 이에 관해 중장년층의 인식 전환도 필요한 시점이라 역설했다.
“우리 세대는 학교에서 저축을 장려했어요. 어렸을 때 배운 사고에서 멈춰 돈을 쌓아두고 쓸 줄 모르죠. 그게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 굉장히 장애가 돼요. 자본주의는 수요만 있으면 잘 돌아가는데 이 수요를 막고 있는 거죠. 저축으로 부자가 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부동산 투기예요. 나눠야 할 자본을 나만 잘살자고 쥐고 있으면 젊은이들은 어떡해요. 취직이 안 되면 장사나 사업을 해야 하는데 비싼 땅값에 임대료에 집도 마련 못하니 결혼, 육아는 엄두를 못 내죠. 우리 세대는 노력해서 벌은 거고 애들은 노력을 안 해서 못 벌었다는 인식도 문제예요. 과거야 한창 경제가 성장할 때니까 가능했죠. 현 상황을 인식하고 젊은이들 처지에서 생각해봤으면 해요. 얘들아, 안심하고 결혼해서 애 낳아라, 우리가 키워주마, 이런 마음의 유대가 없으면 아무리 지원금을 쏟아 부어도 우리에게 오는 인구절벽을 피할 수 없다고 봐요.”
김진명은 세대뿐만 아니라 친미와 친중, 보수와 진보 등 한국 사회 면면이 다 갈라져 있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다. 무엇보다 우리 사회를 대표할 가치관이 없다는 것에 답답한 심정을 토로하며 그는 고구려 정신을 강조했다.
“옳다 그르다는 종이 한 장 차이라고 생각해요. 옳고 그름은 시시각각 바뀌기 때문에 자기가 맞다고 끝까지 주장하는 사람은 한심한 거예요. 예를 들어 택시가 교통질서를 흐린다는 이유로 택시 정류장을 만든다고 합시다. 그것도 좋은 생각이지만, 한편으로는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편히 탈 수 있는 택시의 장점이 사라지는 거잖아요. 이런 간단한 문제에도 입장이 나뉘고, 정반대 의견도 다 일리가 있는데, 하물며 나라의 정책이나 외교, 안보 문제는 얼마나 생각이 많이 갈리겠어요. 우리 사회는 나는 옳다, 너는 틀리다, 반대를 위한 반대가 너무 많아요. 고구려는 아무리 파가 갈려서 죽기 살기로 싸우다가도 외적이 침입하면 완전히 대동단결했거든요. 고구려 700년 역사가 가능했던 이유죠. 그런 점에서 우리 사회가 고구려 정신을 회복하길 바랍니다.”
집에만 있지 말고 밖으로 나가보자! 지루함을 날려줄 이달의 문화행사를 소개한다.
리차드 3세
일정 2월 6일~3월 4일 장소 예술의전당 CJ 토월극장 출연 황정민, 정웅인, 김여진 등
셰익스피어의 작품 중 수작으로 꼽히는 ‘리차드 3세’는 인간의 비틀린 욕망이 얼마나 큰 비극을 초래하는지를 보여준다.
10년 만에 연극무대로 복귀한 배우 황정민이 영국판 수양대군으로 불리는 피의 군주 ‘리차드 3세’로 변신해 주목받았다. 몰입도 있는 연기를 위해 황정민을 필두로 김여진, 정웅인, 박지연 등 주연배우를 원 캐스트로 구성한 점도 눈에 띈다.
3월의 눈
일정 2월 7일~3월 11일 장소 명동예술극장 출연 오현경, 오영수, 손숙, 정영숙 등
손자를 위해 평생을 일구어온 삶의 터전이자 마지막 재산인 집을 팔고 떠날 준비를 하는 ‘장오’와 그의 아내 ‘이순’. 3월의 눈 내리는 어느 날 ‘장오’는 집을 떠난다.
올해로 8주년을 맞이한 ‘3월의 눈’은 한국 연극의 산증인인 오현경과 손숙, 오영수와 정영숙이 팀을 이루어 무대에 오른다. 내릴 때는 아름답지만, 한순간 사라지는 3월의 눈과 같은 인생 이야기를 진솔하고 담담하게 그려냈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대회
일정 2월 9~25일 장소 강원도 평창, 정선, 강릉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30년 만에 한국에서 열리는 두 번째 올림픽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열리는 동계올림픽으로 강원도 평창에서 개막한다.
2월 9일 오후 8시 평창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펼쳐지는 개막식을 시작으로 25일까지 17일간 설상 7종목, 빙상 5종목, 슬라이딩 3종목 총 15종목 102경기를 놓고 금빛 사냥을 펼친다. 개·폐막식을 비롯한 모든 경기 장면은 TV 중계로 볼 수 있다.
지구: 놀라운 하루
개봉 2월 15일 장르 다큐멘터리, 가족 감독 리처드 데일, 리신 판, 피터 웨버
영국 방송사 BBC가 제작한 초대형 자연 다큐멘터리 프로젝트. 24시간 동안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는 신비한 자연과 생명의 기적을 카메라에 담았다.
닥터 지바고
일정 2월 27일~5월 7일 장소 샤롯데씨어터 출연 류정한, 박은태, 조정은, 전미도 등
20세기 러시아 혁명의 순간 운명적인 사랑을 노래한 뮤지컬 ‘닥터 지바고’가 6년 만에 한국 관객을 찾는다.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아간 의사이자 시인인 ‘유리 지바고’ 역으로 배우 류정한, 박은태가, 그와의 운명적인 사랑의 주인공인 ‘라라’ 역으로 배우 조정은, 전미도가 출연한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개봉 2월 28일 장르 판타지, 드라마 감독 히로키 류이치 출연 야마다 료스케, 무라카미 니지로, 칸이치로 등
30여 년 동안 비어 있던 가게에 숨어든 좀도둑 3인조. 32년 전에 쓰인 편지에 장난삼아 보낸 답장이 과거와 현재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깨닫는데…. 일본 인기 추리소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 영화로 재탄생했다.
우리가 김구 선생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임시정부 주석을 역임하였고 경교장에서 안두희에게 암살당한 것 정도의 단편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해방 후 귀국했으나 이승만 정권과 뜻이 안 맞아 역사적으로 묻힌 부분도 많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에 치우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김구 선생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 해줬다. 그러나 영화 제목만으로는 ‘대장 김창수’라 하여 민란의 대장 정도로 알고 봤다. 영화의 끝 부분에 가서야 김창수가 나중에 개명하여 김구 선생이라는 것을 밝힌다. 그제야 영화가 다소 밋밋했던 것들이 이해된다.
김구 선생은 1876년에 황해도에서 태어났다. 이 영화의 배경은 1896년이니 김구 선생이 20살 때부터 시작된다. 명성 황후를 시해한 일본인을 맨 손으로 때려죽이고 체포된다. 인천 감옥소에 수감된 동안 남 다른 행동은 더 힘든 나날이었다. 국모의 원수를 갚았는데 죄가 되지 않는다고 버틴 것이다. 결국 친일 내각의 재판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는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입장이지만, 글을 배운 것이 있어 거기서 간수들에게 인정받는다. 여러 가지 행정 민원도 처리해주고 하여 같은 죄수들에게도 글을 가르치는 특혜를 누린다. ‘쇼생크 탈출’의 앤디 듀프레인을 떠 올리게 한다. 당시 문맹률이 높아 계몽이 중요했던 모양이다. 소설 ‘상록수’ 등에서 국민 계몽 부분이 자주 나오는 것도 그런 맥락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사형수이기 때문에 결국 사형 집행 날짜가 잡힌다. 떳떳하게 죽으라며 어머니가 보낸 하얀 한복으로 갈아입고 사형장에 선다. 그러나 그때 고종 황제가 사형 집행을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죄수들이 집단으로 황실에 사면 요청한 것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 장면에서는 사형 직전에 살아난 러시아 문호 토스토예프스키를 떠올리게 한다.
다시 살아났으나 사형수만 면했을 뿐이지 감옥소 신세는 마찬가지이다. 경인 철도 공사에 투입되어 더 혹독한 노동에 시달린다. 김창수는 탈옥을 결심하고 결국 탈옥에 성공한다. 한편으로는 감옥소장이 경인 철도 공사에 죄수들을 투입해 임금을 가로 챈 것을 보여주는 장부를 황실에 보내 감옥소장의 비리를 고발한다. 이 부분도 쇼생크 탈출과 비슷하다. 영화는 여기까지만 나온다. 그 뒤는 나레이션으로 김창수가 김구 선생이며 한일합방 후 상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 정부 주석이 되었고 해방 후 귀국했다가 암살당한 것까지 설명해 준다. 차라리 상해 임시정부 시절을 포함하여 귀국 후 암살당한 것까지 시나리오를 연결했으면 역사 영화로서 더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었을 것 같다.
당시 일본이 거의 전권을 휘두르던 시절이라 황실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대세가 기울었으니 고관들의 생각도 일본에 나라 팔아먹을 궁리만 할 때이다. 감옥소장도 비리를 저지르고도 일본인들의 배경을 믿고 오히려 큰 소리를 친다. 백성들이라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갈 것인지 알고 있어야 했는데 철 따라 농사나 짓는 농민이 대부분이었다. 거기에 문맹률이 높으니 글부터 깨우치는 국민 계몽이 필요한 때였던 것 같다.
이원태 감독 작품으로 김창수 역에 조진웅, 감옥소장 역에 송승헌이 나온다. 김구 선생 영화라 해서 평점이 8.7로 높은 편이다. 그러나 영화적 요소는 다소 미흡한 편이다.
집에만 있지 말고 밖으로 나가보자! 지루함을 날려줄 이달의 문화행사를 소개한다.
빛나는 시작, 눈부신 기억 ‘라이프 사진전’
일정 1월 1일~4월 8일 장소 부산문화회관
미국의 사진 저널, ‘라이프’ 지에 실렸던 사진들 중 시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기억될 가치가 있는 사진작품 130여 점을 전시한다. 무하마드 알리, 마더 테레사, 존 레논, 찰리 채플린 등 시대를 상징하는 이들의 삶을 오리지널 필름으로 엿볼 수 있다. 한국과 관련된 사진도 눈에 띈다. 1960년대 미국에 진출했던 국내 최초 걸그룹 김시스터즈, 대한민국 정부수립 국민 축하식 날의 풍경 등도 관람 포인트다.
카라마조프
일정 1월 3~14일 장소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출연 이정수, 조태일, 김히어라 등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뮤지컬로 재탄생했다. 러시아어로 ‘검은 얼룩’이라는 뜻을 지닌 이 작품은 친부 살인사건을 둘러싼 아버지와 아들들에 관한 법정 추리극이다. JTBC 예능프로그램 ‘팬텀싱어2’에서 뛰어난 가창력으로 주목을 받은 이정수와 예그린뮤지컬어워드 신인상의 주인공 김히어라가 출연한다.
안나 카레니나
일정 1월 10일~2월 25일 장소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출연 옥주현, 정선아, 이지훈 등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풍속도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며 당시의 사랑과 결혼, 가족 문제 등 인류 보편의 문제들을 깊이 있게 다룬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 클래식, 록, 팝, 크로스오버 등 40여 곡의 음악과 무대 전체를 아우르는 LED 스크린 영상으로 19세기의 러시아를 구현했다. 한국에서 초연을 선보이는 이번 뮤지컬은 러시아의 유명 뮤지컬 프로덕션인 ‘모스크바 오페레타 시어터’의 세 번째 작품이다.
스타박’스 다방
개봉 1월 11일 장르 드라마 감독 이상우 출연 백성현, 이상아, 서신애 등
‘제17회 전주국제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았다. 바리스타의 꿈을 품고 강원도 삼척으로 내려가 카페를 차리는 한 남자의 이야기다.
그것만이 내 세상
개봉 1월 17일 장르 코미디 감독 최성현 출연 이병헌, 윤여정, 박정민 등
주먹만 믿고 살아온 한물간 전직 복서 조하와 엄마만 믿고 살아온 서번트증후군 동생 진태. 살아온 곳도, 잘하는 일도, 좋아하는 것도 다른 두 형제가 난생처음 만나 펼치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그동안 센 캐릭터를 연기해왔던 이병헌이 조하 역을 맡아 진중한 이미지를 벗고 코믹함을 연기해 기대를 모은다.
인제빙어축제
기간 1월 27일~2월 4일 장소 강원도 인제군 남면 빙어호 일원
1997년 제1회를 시작으로 올해 22주년을 맞았다. 천혜의 자연 속에서 빙어를 잡으며 겨울철 소양강 최상류로 찾아드는 빙어 떼의 귀환을 볼 수 있다. 빙어열쇠고리 만들기, 텀블러 만들기 등의 체험활동과 전국얼음축구대회, 빙어마당 등 다양한 행사가 진행된다.
눈보라 속으로 뛰어들어야 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닦아야만 했으니까. 희망이 보이는가 싶더니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망연자실 고개를 떨어뜨렸지만 초석이 다져졌고 단단한 징검다리가 놓였다. 노력은, 꿈은, 그렇게 현실이 됐다. 한 달여 남은 2018 평창동계올림픽은 ‘삼수(三修) 만에 이뤄낸 쾌거’라고 말한다. 세 번의 도전 동안 수많은 사람의 헌신과 노력, 열정이 없었다면 지금의 올림픽 또한 없을 것이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위해 발 벗고 나섰던 노장을 기억해냈다. 前 강원도국제스포츠지원단장이자 現 아라웰다잉연구회 회장인 박종흔(朴鍾昕·69) 씨. 꿈이 이뤄진 지금,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평창동계올림픽의 백전노장을 만나다
강원도 동해시 천곡동에 있는 한 사무실에서 박종흔 씨를 만났다. 이미 10년도 더 된 올림픽 유치와 관련한 이야기를 들으러 왔다는 기자의 말에 해드릴 대단한 얘기가 없다며 멋쩍게 웃는다. 박종흔 씨는 올림픽 관련 업적 외에도 공직자로서 명망 높고 존경받던 인물. 지금도 지역사회에 공헌하는 삶을 살고 있다.
2009년 강원도청 지방부이사관으로 공직을 내려놓기 전까지 지방과 중앙정부 요직을 비롯해 2014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업무까지 두루 섭렵한 박종흔 씨는 나랏일(?) 전문가였다. 현역 시절 인생을 걸고 몰두했던 일은 단연 ‘올림픽’이었다. 평창동계올림픽 재수 시절인 2004년부터 2007년까지 머릿속에는 오로지 올림픽 유치 생각밖에 없었다.
“2004년도에 국무총리실에서 재난관리과장을 하고 있다가 강원도로 내려와서 받은 첫 보직이 ‘강원도 국제 스포츠위원회 홍보부장’이었어요. 첫 번째 동계올림픽 유치에 실패하고 난 뒤에도 강원도가 재도전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올림픽 유치에 관한 업무를 하는 조직을 유지해야 했습니다.”
국제스포츠위원회가 구성되자마자 올림픽 유치를 위한 준비를 틈틈이 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올림픽 유치 신청 뒤 후보 도시가 되기까지 각 도시 간 보이지 않는 경쟁은 치열하다. 홍보 담당자로서 어깨가 당연히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경쟁 도시와 비교해 최대한 좋은 인상과 올림픽 정신에 입각한 행동을 부각시키고자 했다.
평창동계올림픽을 밝힌 ‘드림프로그램’
국제스포츠위원회 홍보부장을 하면서 단연 보람되고 뿌듯했던 것이 드림프로그램이었다. 올림픽 유치활동을 하는 중 가장 정열적으로 힘을 다하고 관심을 가졌던 프로젝트였다.
“가장 보람 있게 생각하고 있고, 성과가 이번 올림픽에 직접적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드림프로그램입니다. 제가 오기 전부터 기획된 것이었어요. 눈이 내리지 않고 얼음이 얼지 않는 나라의 청소년을 강원도로 초정해 동계스포츠를 체험할 수 있게 해주는 프로그램이었죠. 스노보드도 타고 스키도 가르쳐주고 스케이팅도 가르쳐줬습니다.”
한편으로는 IOC 위원에게 한 표를 호소하겠다는 전략도 깔려 있었다.
“아프리카 지역은 동계올림픽에 전혀 관심이 없기 때문에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동기를 주고 싶었습니다. 드림프로그램에 왔던 참가자들을 통해 우리의 뜻을 알리려고 노력했습니다.”
물론 2014년 동계올림픽 유치에는 실패했지만 끊임없이 이어진 드림프로그램은 이번 평창올림픽에서 열매를 거두었다. 2009년 드림프로그램에 참가했던 말레이시아 피겨스케이트 선수 줄리안 지 지에 이(21)는 말레이시아 동계스포츠 선수로는 사상 처음으로 동계올림픽 출전 기회를 얻었다. 박종흔 씨가 한창 활동하던 2005년 참가했던 남아프리가공화국의 전 피겨스케이팅 국가대표 타마라 제이콥스는 2월 초 성화 봉송 주자로 뛸 예정이다. 동계스포츠를 널리 알리고 올림픽정신을 실현한 소중한 프로그램이 시간이 지나 빛을 발하고 있다.
“그땐 정말 용평스키장에서 살았습니다. 드림프로그램에 참여한 아이들과 같이 지내고요. 인솔해온 지도자들에게는 당신네 나라로 돌아가면 평창이 올림픽을 유치할 수 있도록 IOC 위원들에게 말해 달라고 막후활동을 했습니다. 제가 돌아다니면서 다 한 거죠. 지금 생각해도 드림프로그램은 정말 잘된 프로그램입니다.”
겨울 스포츠의 장, 평창으로 오세요!
강원도청에서 홍보부장 업무를 보다가 국제부장직을 맡아 서울로 근무지를 옮겼다. 이번에는 평창이 동계스포츠 경기를 할 수 있는 곳이라는 인상을 전 세계에 심어주는 일이 관건이었다.
“예를 들어서 스노보드 세계 챔피언십 대회를 한다고 하면, 다음 대회를 우리가 유치해오는 것이었어요. 프레젠테이션도 많이 했고 또 큰 대회도 여러 번 강원도에서 유치했습니다. 동계올림픽에는 국제스키연맹, 스케이팅연맹, 바이애슬론 등이 쭉 있잖아요. 산하 연맹들이요. 거기서 다 호응을 또 해줘야 합니다. 대회를 유치하려고 많이 다녔고 유치도 꽤 했어요.”
국제부장에 이어 올림픽 업무를 총괄하는 국제스포츠지원단장이 되면서 밤낮 없이 일에 매달렸다. 홍보부장 때 용평스키장이 집이었다면 이후에는 전 세계가 올림픽 유치를 위한 영업장이었다. 세계를 돌며 평창에 한 표를 호소했고 열정을 쏟았다. 유리하고 좋은 결과를 기대하면서 열심히 뛰었다.
2014년 동계올림픽 개최지 선정을 앞두고 러시아의 소치와 대한민국의 평창이 근소한 차이로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때 개최지 결정은 남아메리카의 과테말라에서 이뤄졌다.
“우리나라는 전세기 한 대로 날아갔는데 러시아는 초대형 화물기 7대를 가지고 날아왔어요. 시내 곳곳에다가 공연장 만들고 엄청난 오일 머니를 갖다 부은 거죠.”
뭔가 전세가 밀리는 기운이었지만 우리 측도 표결이 있기 전까지 최선을 다해 발로 뛰고 평창을 알렸다.
“권양숙 여사님이 마침 저희를 도와주셨습니다. 드림프로그램에 참여했던 과테말라의 어린이들을 만나서 미팅도 하고 애써주셨죠. 나름대로 전략을 세웠습니다만 소치를 감당할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4표 차이로 2014년 동계올림픽 개최지를 러시아 소치에 내주고 말았다. 2007년 7월 3일. 뼈아픈 그날이었다.
“평창은 벌써 2차 도전이었고 유치를 확신했었습니다. 일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더 이상 올림픽 업무를 보기가 싫어지더라고요.(웃음)”
쏟았던 정열에 비해서 얻은 게 없었다. 박탈감이 없었다면 세 번째 도전 때도 뭔가 할 수 있지 않았을까 물었다.
“만약 있었으면 조직위원회에서 활동을 했겠죠. 그런데 한 3년 그렇게 하고 나니까 올림픽은 조금…. 다른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요. 정년을 2년 남긴 상황이었거든요. 좀 더 유능하고 젊은 친구들이 새롭게 유치 업무를 맡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올림픽 유치가 물거품으로 돌아간 뒤 박종흔 씨는 올림픽 업무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며 강원도지사였던 김진선 전 지사에게 학교로 보내달라고 청했다. 이후 주문진에 있는 강원도립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2009년 정년퇴직했다. 못다 이룬 평창의 꿈은 후배들에게 넘겨주었고, 올해 마침내 결실의 그날을 맞게된 것이다. 후배들이 선배님으로서 박종흔 씨를 좀 챙기고 있는지 물었다.
“안 그래도 후배한테 우스갯소리로 나를 잊은 게 아니냐며 중요한 행사가 있으면 나를 기억하라고 했더니 알았다 하더라고요.(웃음)”
후배들에 대한 고마움도 잊지 않았다. 그들이 동계올림픽의 꿈을 실현시켰기에 자신의 노고가 헛되지 않았음을 알기 때문이다.
“올림픽 유치 과정 속에서 상당 기간 근무한 것에 새삼 보람을 느낍니다. 이게 끝내 무산됐더라면 우리의 노력도 물밑으로 가라앉았을 거예요. 우리가 못 이룬 일을 후배들이 이뤄낸 것은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죠. 제 나름대로 훗날 기여할 일이 있다면 물론 당연히 해야겠죠.”
박종흔 씨는 지금도 눈이 내리면 ‘이 눈은 설상경기에 좋을 눈이구나, 아니구나’를 생각한다. 오랜 시간 올림픽과 함께했던 삶이 여전히 몸에도 생각에도 배어 있다.
나랏일 전문가, 웰다잉 전문가 되다
평창동계올림픽을 일궈낸 백전노장은 지금 그럼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의 제2인생도 궁금했다. 최근 한창 화제가 되고 있는 ‘웰다잉’에 관한 일을 하고 있다. 마침 기자와 마주한 곳은 현재 회장으로 활동 중인 아라웰다잉연구회의 공간이었다. 은퇴 뒤 인생에 대해 고민하다 인생을 잘 마무리하는 것, 즉 ‘웰다잉’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과거에는 퇴직 공무원이 길가에서 쓰레기를 줍거나 산불 감시, 교통질서 캠페인 같은 단순노동으로 봉사를 했습니다. 물론 그런 것도 필요하죠. 저는 30~40년 공직에 있었던 노하우를 접목해서 전문 재능을 기부하는 것도 상당한 의미가 있다 생각했습니다. 퇴직 무렵 웰다잉에 대한 인식이 조심스럽게 사회에 퍼져나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박종흔 씨는 2013년 웰다잉 전문가로 거듭났다. 그때 당시 *각당복지재단이 강원도의 동해가정법률상담소를 포함, 다섯 군데를 선정해 웰다잉교육전문지도강사양성교육을 실시했다. 이때 16주 교육을 이수한 뒤 웰다잉 지도강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현재는 비영리 민간단체인 아라웰다잉연구회를 만들어 자체적으로 웰다잉 전문가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경로당과 노인복지원을 찾아다니면서 무료로 강의도 하고 봉사도 한다. 예전에는 아름다운 인생 마무리에 관해 주로 다뤘지만 최근에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에 관해 집중적으로 교육하고 있다.
혹시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있으신가 물었다. 또 봉사 이야기를 꺼낸다. 평생 공직생활에 국민들 염원을 담아 발에 땀나도록 뛰어온 사람이 지치지도 않나보다.
“퇴직 전부터 악기로 봉사하고 싶어서 한 10년 색소폰을 배워뒀습니다. 그래서 심심치 않게 어르신들을 위해 연주하고 있습니다.”
남을 돕는 것도 좋지만 지금껏 헌신하며 살아온 자신과 더불어 가족과 행복한 인생을 많이 즐기시길 바란다. 2월, 평창 밤하늘에 2018 평창동계올림픽 개막을 알리는 폭죽이 터지면 손자에게 꼭 말하시라.
“저게 다 할아버지 덕분이었다”고 말이다.
*각당복지재단 1986년 설립된 각당복지재단은 인류애 정신에 입각해 삶과 죽음의 의미를 되새기고 죽음준비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또한 말기환자를 보살피는 호스피스 운동 등을 전개하고 있다.
가난하고 배가 고파서 글을 쓰는 일의 힘겨움을 아는 사람, 대하소설 의 작가 김주영은 요즘 경상북도 청송에서 살고 있다. 의 성공은 그를 베스트셀러 작가로 자리매김하게 만들어줬지만, 사회적 성공과 별개로 그의 삶은 비로소 아수라장에서 빠져나와 느릿하게 흘러가는 듯 보였다. 덤덤하고 무심하게 작품과 인생에 대해 말하는 그의 모습에서 대한민국의 외로운 아버지들이 떠오른 것은 우연일까? 고독을 곱씹으며 살아가는 이 땅의 모든 남자들을 대변하는 듯한 김주영의 묵직한 목소리와 이야기에 취하는 동안 어느새 석양이 지고 있었다.
19세기 말 조선시대 끝자락을 살았던 보부상들을 철저하게 조사한 자료들을 통해 생생한 필체로 그려낸 대하소설 의 작가 김주영은 1939년생으로, 올해 일흔아홉 살이다. 등단한 지 벌써 47년, 대한민국 문단에서 원로 중의 원로 작가이지만 소설가로서 그의 영혼은 얼마 전 새로운 장편소설 을 내놓을 정도로 여전히 살아 있다.
문학의 가치를 돌아보다
“30대에는 하룻밤에 단편 하나를 써냈는데, 은 1년이 넘어도 끝이 안 나는 거예요. 글도 옛날처럼 열정적으로 안 써지고, 물론 다른 일들도 해야 해서 더 안 써지기도 하겠지만 ‘내가 나이를 먹었구나’ 싶었습니다.”
인터뷰를 진행하던 도중 영인문학관에서 열리는 강연회 때문에 전화가 왔다. 그는 “꼭 일을 하려고 하면 이렇게 전화가 온다”며 증거를 보여주듯 말했다. 나이 들어가는 시간은 스스로가 더 실감하게 된다. 그도 그런 모양이다. 하지만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그는 시원시원한 인상이었다.
“을 쓰면서 문학이 가지는 가치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됐어요. 문학이 밥을 사준다든지, 집을 사준다든지, 취직을 시켜준다든지 하지는 않죠. 그럼 문학에 뭐가 있나? 바로 삶의 의미와 지표를 알려줍니다. 그리고 위로를 주죠.”
삶에 대한 위로가 답이다
김 작가는 푸시킨의 유명한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를 예로 들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말라!
우울한 나날을 견디면
믿으라, 기쁨의 날이 올 테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적이고, 지나가는 것이니
그리고 지나가는 것은 훗날
소중하게 되리라
“내가 알기로 이 시는 잡지나 신문에 발표한 게 아니고, 당시 진보적인 성향이어서 유배를 여러 번 가야 했던 푸시킨이 농장에서 일하는 처녀에게 화장지에 적어준 시예요. 그 처녀가 얼마나 힘들게 살고 있었겠습니까. 푸시킨은 그녀의 입장에서 생각하며 이 시를 쓴 거죠. 푸시킨이 죽은 지 170년이 넘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시는 러시아 국민들의 가슴에 새겨져 있죠. 그 정도로 영구적인 감동을 주는 시입니다. 문학이 지향해야 할 지표란 바로 이런 게 아닌가 싶어서, 을 쓰면서도 계속 이 시를 생각했어요.”
에는 한 남자가 나온다. 그는 교육도 못 받았고 키도 작으며 ‘사회에서 물먹고, 집에 들어와도 먹을 게 없어서 물을 먹어야 하는’, 세인의 눈으로 보면 실패한 인생이다. 하지만 굉장히 긍정적인 사람이다. 키가 작으니 ‘상관에게 까여도 쓰러지지 않는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낙천적이다.
그러고 보니 김 작가의 글에는 항상 상처투성이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그의 대표작 에도 조선시대의 천민이었던 보부상이 주인공이었다.
“지금까지는 사회적 약자들을 전면에 내세워 사회를 풍자하는 작품들을 썼죠. 그러나 은 안 그래요. 이 작품에 나오는 주인공은 약자이기는 하지만 자신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인물이에요.”
체질과 맞지 않는 일 하면 사람만 우스워져
김 작가는 얼마 전 한 보수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문재인 정부에 대해 노골적으로 비판을 해 화제가 됐다. 그러나 그는 SNS를 하지 않아 자신의 말이 인터넷에서 소란이 됐는지도 몰랐고 그랬다 해도 관심 없다는 표정이었다. 항간에는 정계에서 러브콜을 했다는 풍문도 있었다.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이름도 널리 알려져 있고 소설들마다 민중이 자주 등장하니 어찌 보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풍문에 대한 진실을 듣고 싶었다.
“정치적으로 뭘 해보겠냐고 제안받은 적은 없고, 옆에 있는 분들이 한번 해보지 않겠냐고 말한 적은 있죠. 그런데 나는 떠밀려서 하는 걸 싫어해요. 난 거기에 맞지 않다 이거지. 내 체질과 맞지 않는 일에 계속 집적거리면 사람만 우스워져요.”
그는 소위 말하는 ‘외로운 늑대’였다. 그의 기질과 삶이 그로 하여금 그런 사람이 되게끔 만들었다.
“책이 잘 팔리든 안 팔리든 끝까지 책을 쓸 수 있도록 내 안의 열정과 스스로 분발할 수 있는 에너지를 찾으며 살고 있어요. 나를 부추겨줄 수 있는 힘이나 사람은 별로 없지 싶어요. 내 안에서 내가 찾아내야죠. 나를 응원해주는 사람들도 있지만 결국 내가 감당해야 할 일이에요. 어려서부터 혼자 살아왔기에 나 스스로 얻어내야 한다는 생각이 많아요.”
문학을 하게 된 이유, 어머니
김 작가는 가족이 자신의 삶에 미친 힘이 너무 미미하다고 고백했다. 지독한 가난과 결손가정이라는 콤플렉스에 사로잡힌 채 어렸을 때부터 혼자 결정하고 혼자 감당해야 했던 그의 삶은 고통스러웠지만 스스로를 지지하고 믿도록 해줬다. 그러나 그런 그도 어머니를 떠올리면 아쉬움과 죄송한 마음을 감추기 힘든 듯했다.
“굉장히 팔자가 험한 분이었죠. 결혼을 두 번 하셨고 가난에 쪼들렸고 자식들에게 애먹고…. 그런 어머니에 대한 슬픔이 있어요. 어머니가 꽤 오래 사셨는데, 얼마 전에 아흔여섯 살로 돌아가셨어요. 나 때문에 고생했고, 재혼도 나 때문에 하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가난 속에서 나를 키워야 했으니까요.”
그는 지금은 어머니를 이해하지만 어렸을 때는 이해하지 못했다. 가슴 아팠던 어린 시절의 경험은 그로 하여금 소설을 쓰게 만든 이유들 중 하나가 됐다.
“어머니가 나로 하여금 소설을 쓰게 만들었죠.”
오랜 시간이 걸려 열등감을 극복하고 마침내 어머니의 삶과 마주할 수 있게 된 그는 어머니에게 바치는 소설 를 썼다. 나이 일흔 살이 넘어서야 가능했던, 참회의 글이었다.
나이를 먹으니 포기하는 법을 알게 되더라
“내가 나이를 먹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죠. 사람 이름이나 책 제목이 잘 기억 안 날 때 그렇고. 옛날에는 술을 많이 먹어도 괜찮았는데 지금은 소주 한 병 반 마시면 취하고 헛소리도 나오고. 헛소리 주제요? 같이 술 마시는 상대방에 대한 욕이죠(웃음). 그런데 욕을 했는데 기억이 안 나는 거예요. 그리고 빨리 걷지 못하는 것도 그렇고.”
그러나 나이를 먹으니 좋은 것도 있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포기하는 법을 알게 된 것이 좋단다.
“젊었을 때는 포기해야 될 것과 안 될 것을 구분 못하고 다 이룰 수 있다고 착각했죠. 나이를 먹으니 건드리면 안 되는 게 보여요. 예를 들어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 좋은 옷을 입어야겠다’와 같은 욕구들. 그런 과욕은 필요 없어요. 많은 친구도 필요 없어요.”
어렸을 때 가난하게 자랐기에 외로웠고, 그래서 친구가 많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요즘은 될 수 있으면 고민을 안 하려고 해요. 스트레스가 쌓이면 병이 옵니다. 그래서 바보가 되고 싶어요. 생각을 많이 하고 싶지 않아요. 소설 쓰는 일 외에는.”
아버지로서, 가정에 대해선 할 말이 없어
가급적 간단하게,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며 살고 싶다고 덤덤하게 말하는 김 작가의 모습에는 그 스스로 말한 포기의 정서가 배어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할 것이다. 가장 친한 벗들은 다 죽고 홀로 남아 세상을 감내해야 하는 사람이 된 그가 세상을 버틸 수 있는 것은 어린 시절부터 고독에 단련된 사람이어서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하고 묵묵히 그 선택을 따라가는 그의 모습에서 우리네 고독한 아버지들의 모습이 겹쳐졌다.
“제 자식들에게 아버지로서는 무심했죠. 자식 일에 간섭을 전혀 안 했고. 그러다 보니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독립적으로 컸지. 내가 그런 식으로 자라서인지 가정적이지 않았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논다든지 여행을 간다든지 하는 일은 없었죠. 한때는 세 곳의 신문 연재를 동시에 해야 했어요. 그런 사람이 어떻게 가정적일 수 있나요? 가정에 대해선 할 말이 없습니다.”
글이 곧 내 존재 자체
김 작가는 예전에 연애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간간이 밝혔다.
“그래서 에서 창녀를 등장시켰는데, 연애소설은 안 되더라고요(웃음).”
이번 소설을 계기로 그는 다시 글을 쓴다면 위로를 주제로 한 작품을 써보고 싶단다.
“독자, 평론가, 동료 문인 들 사이에서 내 평가는 이미 끝났어요. 좋은 작가로 보든, 형편없는 작가로 보든 간에 훌륭한 젊은 작가가 많기 때문에 이젠 관심을 못 받습니다(웃음). 도 이제 4쇄 정도 나갔다고 하더라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작가라는 직업은 그를 가장 그답게 만들어주는 도구다. 고독 속에서도 그를 지탱시켜주는 최후의 지렛대는 거기에 있었다.
“글을 쓰는 행위야말로 내가 존재하는 이유예요. 다시 태어나도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남은 생은 바보 같은 사람 이야기를 쓰고 싶고 그러다 ‘저 사람 바보야’라는 말을 들으면 좋겠어요.”
석양을 뒤로 하고 청송 객주문학관 관사로 뒷짐 지고 들어가는 그의 모습이 바보 같아 보여 아팠다.
국립발레단장을 맡고 변방의 한국 발레를 르네상스 시대로 이끈 최태지의 업적과 지금의 아름다운 모습이 중첩되어 한량 이봉규는 살짝 주눅이 들었다. 한국의 대표 발레리나 최태지와 올해 마지막 데이트를 했다.
1959년생이라는 것이 믿겨지지 않는 가녀린 몸매와 청초하면서 귀족같이 우아한 최태지와 마주하니까 오드리 헵번의 조용하고 아름다운 카리스마가 연상된다. 이봉규의 눈에 포착된 최태지의 기품에 한량도 살짝 주눅이 들었을까? 라운지에서 만나자마자 “왜 그렇게 젊어 보여요?”라고 따져 물었다. 그녀는 “모자라게 살아서 그럴까요?”라며 웃음으로 내쳐버린다. 시작부터 의문의 1패를 당한 꼴이다. 아름다운 외모뿐만 아니라 내공의 깊이까지 느껴진다. 어설픈 한량이 차분하게 분석해보면 아마 평생 발레를 해서 세포조직도 건강하고 정신적으로도 좋은 에너지를 한껏 받아 아직도 아름다운 젊음을 유지하는 것 같다.
정작 본인은 “발레리나 현역 활동에서 은퇴한 후에도 레슨하면서 항상 거울을 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거울 앞에서 젊은 무용수들과 같이 있으면 긴장하기 때문에 자기관리를 자연스럽게 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살이 퍼지게 놔둘 수가 없다는 것. 그녀의 성공은 어쩌면 이 같은 승부근성 때문일 것이다. 내일모레면 육십을 바라보는 나이다. 거울 앞에 선 전성기의 젊은 무용수들을 보며 경쟁심이 우러러 나온다니 부럽기 그지없다.
20년 전에 미국 워싱턴 D.C.에서 발레리나 문훈숙을 인터뷰한 적이 있는데 그때도 뭔지 모를 압박감을 느꼈다. 육십이 되어 최태지와 마주앉으니까 그때보다 몇 배 더 한 발레리나의 기품에 눌리는 것이 감지된다. 국립발레단을 12년간 이끌며 아시아 최고의 발레단으로 성장시킨,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발레리나 출신의 최태지 단장의 업적과 아름답게 나이 먹은 모습이 중첩되어 그럴 것이다. 그녀는 최근 광주시립발레단장에 임명되어 화제가 되고 있다.
‘최태지’ 이름만으로도 발레단이 주목받다
국립발레단장을 역임했던 그녀인지라 관계자들은 조심스럽게 국립발레단과 유니버설발레단으로 양분되는 한국 발레 무대가 광주시립발레단을 포함하는 3강 체제가 될 것임을 전망하기도 한다.
최태지라는 이름만으로 광주시립발레단은 일약 중앙의 두 발레단과 비교 대상으로 언급되기 시작했다는 것. 이로써 최태지·문훈숙·강수진으로 이어지는 세 스타 발레리나 출신 단장들의 대결은 현재진행형이다.
최태지는 1959년 일본 교토에서 태어나 가이타니 발레학교, 프랑스 프랑게티 발레 아카데미, 미국 조프리 발레 스쿨 등에서 발레를 전공했고, 한국인 최초로 로잔국제발레콩쿠르와 모스크바국제발레콩쿠르 심사위원에 위촉되었다. 그야말로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발레를 발전시킨 산 증인이다.
하지만 발레의 명성만큼 그녀의 인생은 화려하지 않았다. 첫 번째 남편과 이혼하고 두 번째 남편과는 사별한 아픔을 간직한 채 살고 있다. 지금은 성장한 두 딸과 함께 주말이면 서울에서 살고 주중에는 혼자 광주의 한 오피스텔에서 지낸다. 실례를 무릅쓰고 어려운 질문을 던졌다. “이혼과 사별 중에 어느 것이 더 아프냐?”고 물으니, 그녀는 “눈물도 안 나올 정도로 사별이 슬펐다”고 대답한다. 발레를 하지 않았으면 견디지 못했을지도 모른다고 부연한다. 사별한 지 5년 정도 되었기에 지금은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물었다.
발레 인생도 굴곡이 많았다. 결혼 후 발레를 그만두려고 80kg까지 일부러 살을 찌웠다. 그런데 뉴욕에서 첫 아이를 낳고 산후우울증에 시달리면서 치료를 위해, 그리고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해 발레학원에 등록했다.
국립발레단의 수석 무용수 출신이 뉴욕이라고는 하지만 허름한 대중 발레학원에 수강생으로 등록할 정도로 절실했다.
그렇게 다시 시작한 발레 생활 3~4개월 만에 몸도 마음도 가벼워졌다.
그 후 곧바로 한국에 들어와 국립발레단에 다시 복귀했다. 아이를 낳고 활동한 국내 최초의 발레리나가 되었다. 둘째 아이를 낳고 체중이 또 80kg으로 늘었다. 다시 발레를 시작했다. 발레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그만두면 어느새 또 발레를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발레는 내 운명!”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그녀의 인생은 프랑스어로 세라비(C'est la Vie, 영어로 That is Life) 같다. 중학교 시절 일본에서 한창 발레 연습에 몰두해 있을 때 그녀를 지도했던 선생은 “‘발레의 하느님’이 너를 붙잡으면 평생 도망칠 수 없을 거야!”라고 말했다.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그 말이 생각났다고 고백한다. 그 선생은 일본에서 최초로 ‘백조의 호수’를 공연한 발레리나다.
국립발레단장을 그만두고 4년 남짓 그냥 아줌마로 편하게 살며 나름대로 행복한 삶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광주발레단장을 맡은 것도 아마 ‘발레의 하느님’이 아직도 그녀를 꽉 붙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도 공연을 위해 새로운 무대에서 새로운 무대 의상을 입고 공연을 하는 무용수들과 함께 땀을 흘릴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할 따름이고 들뜬다. ‘발레의 하나님’이 그녀를 선택해서 붙잡은 것이 아니라 최태지가 발레의 하느님을 먼저 꼭 붙잡고 놓지 않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막내딸을 한국의 대표 발레리나로 키우고 싶었던 부모님
1970년대 중반 일본에 살 때 어머님과 부산에 있는 할아버지 산소에 갔는데 당시만 해도 한국은 일본에 비해 열악한 환경이었다. 어린 최태지는 상당히 놀랐다고 한다. 그 때문에 오빠들도 “한국에 가서 잘 적응하고 살 수 있을까?” 걱정하며 한국행을 만류했지만 대한민국 국립발레단 무용수가 꿈인 어린 최태지를 막을 수는 없었다. 일본 이름인 ‘오타니 야스에(おたに やすえ)’로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란 최태지가 대한민국 최고의 발레리나가 된 것은 부모님의 강한 의지와 희생 덕분이다.
일본 사회에서 재일교포로 심한 차별을 견디며 살아온 부모님은 무용에 탁월한 소질을 발휘하던 막내딸만큼은 한국의 대표 발레리나로 키우고 싶었다. 아버님은 항상 어린 막내딸에게 “일본에서 왜놈들에게 머리 조아리며 돈을 벌고 있지만 너는 그렇게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겠다”고 울면서 다짐했다. 그래서 일부러 민단이 운영하는 교포 학교에 보내지 않고 일본 학교에서 공부시킨 뒤 프랑스로 발레 유학을 보냈다. 경제 사정이 좋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후 일본 무용계에서 프리마 발레리나로 활약하다 1983년 의 객원 주역으로 초청되면서 국립발레단과 인연을 맺었다.
1987년 국립발레단 프리마 발레리나로 특채되면서 고국에서의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됐다. 에서 오데트, 에서 키트리, 에서 에스메랄다, 에서 사탕 요정, 에서 메도라 등 많은 작품에서 출중한 공연으로 발레 팬들의 박수를 받았다. 국립발레단 지도위원을 거쳐 1996년에는 국립발레단장을 맡아 변방의 한국 발레에 르네상스 시대를 열어준 주인공이다. 특히 그녀가 국립발레단장 시절 ‘해설이 있는 발레’와 ‘찾아가는 발레’를 시작할 때만 해도 지나친 대중화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지금은 정말 잘한 일이었다고 자타가 공인한다.
발레학교를 만드는 게 꿈
발레리나로서 이 같은 성공은 부모님의 의지와 희생 덕분이지만 막내딸의 강한 독립심이 스스로 이룩한 면도 크다고 볼 수 있다. 오빠들은 나약해서 부모님에게 의지하는 습성이 강했지만 막내딸 최태지는 어릴 때부터 독립심이 강했고 부모의 기대와 사랑도 각별했다. 오빠들은 사업의 어려움으로 부침을 겪으며 재산을 탕진했지만 막내딸인 그녀는 탄탄대로를 달렸다.
부모덕을 본 최태지는 자식 복까지 터졌다. 두 딸들의 사진을 보여주는데 역시 핏줄은 못 속인다. 엄마처럼 얼굴도 예쁘고 승부욕도 강해 잘 자랐다. 첫째(리나·30)는 러시아 보리스 에이프만 발레단의 솔리스트로 활동하다 귀국해 지금은 예고와 대학에서 강의하면서 한양대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중이다. 둘째(세나·28)도 발레를 배우다가 엄마와 언니가 너무 힘들어 보여 뉴욕대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현재 서울대 외교학 석사과정에 있다.
발레리나로서 모든 걸 누린 그녀에게 앞으로의 꿈을 물어봤더니 발레학교를 만드는 것이란다.
“창작발레도 많이 만들어야 하지만 발레학교가 꼭 필요하다. 한국에서 너무 놀란 것은 사교육비가 비싸 발레를 배울 수 있는 사람이 한정돼 있다는 사실이었다. 10세부터 18세까지 다닐 수 있는 학교가 있어야 한다. 세계적으로 봐도 발레단보다 국립발레학교가 먼저 생긴다. 한국은 거꾸로다. 기숙사가 있는 학교에서 일반 교육과 발레 교육을 받으며 중·고교 과정을 거친 뒤 전문 발레단에 입단하거나 대학에도 갈 수 있는 그런 학교가 필요하다.”
그녀의 꿈이 우리 사회의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