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50대에 이르러 우리나라에 색체 전문가라는 자격증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자격 시험을 보기 위하여 필자는 50대에 20대 학생들과 함께 강남역에 있는 학원에서 공부를 하였던 적이 있다. 시험을 보기위하여 공부하는 내용은 약간의 조색기능과 시험에 대비하는 기출문제를 다루는 형식이다. 필자가 생각할 때 과연 이 자격증을 가진다고 색을 얼마나 컨트롤 할수 있을까는 자격증 취득 전후 여전히 의문이다.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색을 느끼고 판단하기 때문에 그 상징하는바가 우리에게 의도적으로 주입된 개념의 색이 상당히 많다. 예를 들어 나이가 들수록 붉은색을 선호하게 되는 것은 붉은색이 상징하는 에너지를 이용하여 더 이상 젊지 않다는 콤플렉스를 자신감과 리더십으로 바꿔보자는 심리가 무의식속에 존재한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주황색과 행복의 상관관계, 분홍색과 폭력의 관계, 녹색계열과 건강의 관계, 검정색의 상징등 색체의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하게 되면 모든 디자인을 망라하여 색의 지배를 받지 않는 부분은 거의 없다.
그러나 이런 기본적인 색의 속성을 아는것은 자격증을 취득하였거나 그렇지 않았거나 일반적인 상식이다. 거의 모든 자격시험은 전문성적인 의미로 보면 실제적으로는 이런 상징적인 역할에 지나지 않는다는걸 실무에 부딪혀보면 느껴볼 수 있다.
적용도에 따라 조금은 다르겠지만 색체 계획이나 디자인을 할때는 색이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이미지나 느낌도 중요하지만 개성과 색체의 조화나 흐름을 컨트롤하는 개인 능력에 따라서 파격적이거나 혹은 일반적이지 않은 색체를 선택하여 뛰어난 디자인을 탄생시키는 경우가 더 많다. 특히 디자인의 경우에는 일반적인 이미지를 깨면서도 상대방에게 의도하는바를 전달할수 있는 스토리텔링적이고 고차원적인 감각과 개성이 필요하다.
옆에 어떤 사물과 색을 존재시키는가에 따라 주조색의 표정을 새롭게 만들고 새로운 생명을 창출 할수도 있다. 선호하는 색상은 있지만 일에서 색을 만나면 어떤색이 앞에 나타나도 옆에 무엇을 연결시키던지 주어진 색을 살려내고 생명을 갖게 해주는 것이 색체 전문가의 할 일이다. 실제로 아름답지 않은색은 없다. 색을 콘트롤하거나 기획할수 있는 감각이 어떤 이론보다도 이쪽 관련부분 전문가의 기본적인 자질이다.
그러나 꼭 전문가적인 분야가 아니더라도 일반적으로 색체감각이 발달한 사회는 대부분 선진국에 속해있다. 외국 여행의 경험이 많거나 외국에서 생활을 해본 사람들은 보다 쉽게 비교를 해볼수 있을 것이다. 색은 언어이고 대화이다. 광고 디자인이나 영상 디자인, 싸인 디자인에 있어서는 직접적인 텍스트나 이미지의 전달보다 색체를 통한 간접전달이 큰비중을 차지하고 더 1차적으로 어필하는 경우를 우리는 경험상 많이 보아왔다.
색체작업은 상업적이거나 직업적인 일이 아닌 개인 취미생활에 있어서도 상당히 매력적인 분야일뿐 아니라 개인 삶의 질을 높이는 영역이다.
다양한 색만큼이나 다양한 색깔의 사물들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오늘은 어느 색으로 나를 말해야 하나?
나이가 들면서 친구 사이도 연인만큼이나 복잡하고 다양한 관계 속에서 헤어지고 만나기를 반복한다. 학창 시절부터 만난 오래된 친구부터 사회에서 만났어도 그 누구 못지않게 마음 잘 통하는 친구도 있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좋은 내 친구, 어쩌다 만났는데 단짝이 된 친구 이야기를 들어봤다.
글·사진 권지현 기자 9090ji@etoday.co.kr
365일, 일만 생각하며 앞만 보고 살았던 금융맨이 퇴직 후 친구들의 여행을 돕는 여행 전문가가 됐다. 일명 ‘동창생 여행 전문가’가 된 정강현(丁康鉉 ·69) 회장. 퇴직 후 서울사대부고 동문 카페에 18회 졸업생들의 여행 모임 ‘여유회’를 만들어 친구들과 여행을 다닌 지도 10여 년이 훌쩍 넘었다. 한 달에 한 번은 꼭 어디든지 간다는 정 회장. 그가 추진하는 여행에는 항상 20명 이상은 참석한다. 이 놀라운 출석률은 정 회장의 탄탄한 여행 준비 덕분이다. 1만원 정도의 적은 회비로 친구들에게 이야기가 있고 맛있는 여행을 즐길 수 있게 해준다고. 답사는 기본이고 역사가 있는 여행지를 선정하면 꼼꼼하게 공부하고 챙겨서 여행 해설가로도 변신한다. 지난 7월 7일에는 작년 메르스 때문에 일정을 잡았다 가지 못했던 양수리 세미원과 두물머리를 다녀왔다. 이날 비소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29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 자리에서 내 친구 정강현은 어떤 사람인지 동창생들의 목소리를 들어볼까.
내 친구 정강현은 어떤 친구입니까?
성기정
강현씨는 두말할 것도 없이 멋쟁이예요. 봉사에 앞장서는 사람, 가장 멋진 일을 친구들에게 알려주고 싶어 하는 사람이지요. 강현씨 덕에 우리는 새로운 것을 경험하게 되니까 멋있을 수밖에 없어요. 이번에 온 세미원도 예전에 와봤지만 새롭게 단장한 이후 오늘이 처음입니다. 서오능 이런 곳에 갈 때는 역사 공부를 해 와서 친구들한테 설명해 주거든요. 그리고 무엇보다 친구들하고 다니는 것이 너무 좋습니다.
송남영
동창들이 만나는 것도 다 때가 있습니다. 우리도 30~40대에는 못 만났어요. 각자 바쁘다보니 그랬습니다. 50대에 접어들면서 동문회가 활성화되고. 향수를 찾아간다고나 할까요? 동창회에 간다고 하면 그때 친구들이 좋아요. 강현이가 여유회를 시작하면서 안 가본 데가 없어요. 서울성곽 길, 전주한옥마을 등 뭐 말할 것도 없죠. 그리고 같이 있으면 재미있어요. 정말 늙었는지도 모르겠어요. 다들 너무 애들 같아요. 귀엽다니까요. 50년 전으로 가버리니까 그때 같이 있던 사람들이라 마음이 소년, 소녀가 되는 거죠. 목소리도 깔지 않고 서로 앞에서 폼 잡을 일 없고 너무 편합니다.
유경옥
생긴 건 기본이고 멋지고 근사하고 박학다식하고 멋있는 친구예요. 같은 학교를 졸업해서 동창으로 있는 것이 정말 행운이죠. 진짜 전문성도 갖추고 정서적인 거, 마음을 건드리는 감성 그리고 따뜻함을 갖췄어요. 헌신적으로 모임을 위해서 리드를 잘 하세요. 계획적으로 그야말로 여유 있고 즐겁게요. 오늘 보신 것처럼 우리 상태를 보아 가면서 여행 계획을 짜는데 정말 존경스러워요.
김혜자
정강현은 리더십 강하고, 봉사도 잘하고, 정말 사실이 그래요. 이 나이에 저렇게 땀을 뻘뻘 흘리고 좋지도 않은 길을 가면서 설명도 해주고 말입니다. 보통 노력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죠.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니까 하는 거죠. 강현이는 여행을 할 때 꼭 그곳에 관한 공부를 많이 해오는데 대충 알아서 말하는 게 아니라 충분히 자기 말로 표현하고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줍니다. 여행 가이드 이상으로 저희에게 알려주죠. 한번은 부부동반으로 몽골의 갈매기섬이라는 곳에 갔었어요. 여기는 사람이 혼자 가면 갈매기들이 공격해요. 그런 곳을 혼자 뚫고 갔다 돌아 나올 때 배가 고장이 났는데 기지국이 많이 없어 연락이 안 되는 일도 있었어요. 그렇게 위험한 상황을 겪고도 다음에 또 보면 그런 오지 같은 데를 데리고 가더라고요. 이 친구 아니면 저희가 또 어떻게 그런 곳에 가보겠어요. 그러니까 친구들이 감격해서 잘 따라 다니는 거예요.
서울사대부고 동창 대표 잉꼬 부부 장재숙·하지환 부부
저 친구 정말 좋은 친구입니다. 이 나이에 앞장서서 희생하는 것이 쉽지 않잖아요. 이렇게 여러 사람을 즐겁게 해주는 것이 얼마나 좋아요. 강현이도 나름대로 바쁜 사람이거든요.
희생정신이 있는 겁니다. 이 많은 친구들을 위해 사전 답사하고, 열차 시간까지 챙기는 거 보면 너무 감사하지요. 서울사대부고 동문 중에서도 우리 18회 동창들이 제일 행복하지 않을까요?
1. 가락지를 낀 용의 꿈
필자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 나의 할아버지는 용꿈을 꾸셨단다. 호사다마라 했던가?
그런데 자세히 보니 용의 다리에 가락지가 끼어 있어 그것이 무엇인지 걱정스러웠다고 하셨다. 그 덕택에 필자가 양자로 가서 잘 살 수 있었음에도 할아버지는 당신 손자를 남겨 두는 결심을 하고 나의 사촌 형을 양자로 보내셨다고 한다. 필자는 서울에서 식품사업을 하시던 아버님 슬하의 5남 2녀 중 장남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으나 겨우 걸음마를 하던 다음 해에 바로 6.25 사변으로 인해 어머니는 필자를 들쳐 메고 아버지와 함께 피난길에 올랐는데 기차를 타고 남으로 가던 중 인민군 비행기들의 기총사격에 전 승객이 정신없이 숲 속으로 피신했다가 다시 올라타고 매달려서 가는 행렬이었다고 한다. 그런 와중에 왼쪽 다리를 약간 삐어 낮에는 잘 놀고 밤마다 아프다고 했으나 시골에서는 당시 마땅한 병원도 없었으니 아이의 꾀병이라고 그냥 넘긴 것이 화근이 되어 2~3세 때부터 심한 골수염을 앓게 됐다.
그러나 신이 나를 살리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마침 당시 부산에 전후 서독에서 파견된 서독병원이라는 것이 부산 대신동에 있어 그곳에서 진료를 받고 바로 완쾌 상태로 퇴원하게 되었다. 당시 나이 8살이었는데 병원에서는 통원치료를 하던지 약 1년간 입원을 시키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학교에 갈 나이라 입학을 시키고 통원치료를 결정한 것이 화근이 되어 아직 후유증을 앓고 있어 보행이 불편하다. 어린 나이에 너무 활발하게 놀다 보니 환부가 제대로 치료되지 않고 후유증이 남게 된 것이었다.
2. 학문의 길
초등학교 시절 담임선생에게 통지표의 국어 과목에 ‘수’가 없으니 ‘수’를 좀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말해 국어에 ‘수’를 받을 정도의 수준이었지만 필자는 대체로 우수한 학생 측에 들었다. 그러나 당시 진해에서 일류중학이라는 진해중학교에 응시하여 입학시험을 치르고 나서 혼자 고민에 휩싸이기 시작하였다. ‘과연 합격할 수 있을 것인가’ 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었다. 다행히 우여곡절 끝에 거의 꼴찌 수준으로 겨우 합격하였다.
합격 이후엔 학문에 뜻을 둔 공자와 비슷한 나이 15세에 공부의 즐거움을 깨우치기 시작하였는데 꼴찌 수준의 합격이 필자를 자극했던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1학년 첫 학기부터 상위권의 수준으로 시작했던 필자는 중학 시절 내내 상위권이었다.
고등학교 때도 공부를 잘해 수석으로 졸업했으나 가정 사정이 여의치 못해 대학 진학을 잠시 미루고 닥치는 대로 일해야 했다. 장남인 필자는 4명 동생을 돌보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필자는 일하는 와중에 지방 행정직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마침 동생들이 대학 공부를 시작하고 어느 정도 사회생활에 익숙해질 무렵 지난 7년간 접었던 대학 공부를 시작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1970년 당시 5급을류 지방 공무원 월급은 약 1만 원 정도로 집 월세 충당하는 정도밖에 안 되었기 때문에 사직하고 학원 강의를 하던 시기에 배움의 필요성을 통감하게 된 것이다.
필자는 상대에 진학하여 공부하면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를 축적하는 길이 꿈을 실현하는 첩경임을 생각하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며 학문을 하기 위해서는 대학을 꼭 가야 하는지 대학 생활을 통해서 이를 확인하고 싶다는 강한 집념 때문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7년이 지나서 진학한 대학 4년은 꿈같은 세월이었다. 엄청난 지식을 습득하게 되고 생활 중에 터득한 사업 경험을 이론적으로 정립하는 계기도 되었을 뿐만 아니라 우물 안의 개구리가 세상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전기가 되었던 것 같다. 한국경제의 흐름을 읽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 방향설정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대학 4년은 학문의 즐거움을 알게 된 시기기도 했다. 이런 즐거움으로 수석 졸업할 수 있었지만 한편에선 미래의 진로에 대한 걱정이 생겼다. 그러나 아직도 동생들 학업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학계로 나아가고 싶은 생각이 맘은 접고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 다시 산업전사로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먼 훗날 이론과 실제를 최대한 일치시키는 교수가 될 수 있으리라는 꿈을 안고 현실 속의 길을 찾기로 하여 당시 최고의 보수를 주는 대기업 건설회사에 취업하게 되었다.
3. 중동 건설 현장을 누비면서 아라비아 상인의 숨결을 느끼다.
필자가 취업한 시기에 건설회사는 한참 중동 붐이 일어 대졸 신입사원에게 최고의 월급을 주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당시 중소기업이었던 한국유리(주) 기획실에 동시 합격하였지만 모든 사람이 추천한 건설 회사로 취업하였다. 희망하던 기획실이 아닌 자재부로 인사명령이 났다. 기왕이면 큰 뜻을 펴기 위해 나는 중동근무를 지원하였더니 사우디아라비아 TEP 본부 자재구매 담당으로 명령을 내주었다. 여기서 사우디아라비아 상인들의 상술의 대단함을 깨우쳤고 향후 중동국가와 업무상 협상하는 기술을 배우는 전기가 되었다. 영어가 능통하여 구매업무도 그리 어렵지 않게 진행할 수 있었다. 사우디아라비아 말도 좀 익혔다. 운전 기술도 익히는 기회가 되었다.
1980년대 초 리야드 시내는 상가도 크게 형성되지 않았다. 따라서 건설용 자재를 구매하는 데는 어려움이 많아서 해외에서 구매하여 조달하였으나 급한 자재는 현지에서 조달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공사 팀으로부터 자재 조달 독촉을 받았던 독특한 자재 A가 생각난다. 당시 필요한 자재는 상권이 제대로 형성되어 있지 않아 수소문하여 어느 주택가에서 상호를 달고 있는 공급업자를 찾았다. 급한 김에 대충 가격 협상을 하고 공급을 하고 나서 보니 약 3배나 비싸게 구매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중동국가의 무표정한 협상력 앞에서는 국내 업자는 한순간 실수하면 엄청난 바가지를 쓴다는 사실을 터득하게 되었다.
모든 물건을 생산하지 않고 수입해서 판매하는 까닭에 부르는 것이 값이 되고 모르면 속아 넘어가게 되어 있는 곳이 중동이었다. 이후 상대와 협상 시에 얼굴에 표정을 나타내지 않는 기술을 터득하여 많이 활용하고 있다.
그런대로 사우디아라비아 생활은 재미는 있었지만 33세에 결혼하여 바로 해외근무를 하게 되어 아직 아이가 없는 관계로 회사에서는 연장근무를 요청하였지만 귀국을 결심하였다.
4. 세계 제1의 중공업 회사를 만들어내다
대학 재학 중에 아산학자금을 받아 공부했던 연고로 인하여 귀국 후에 현대중공업(주) 플랜트 사업본부 계약관리부에 근무하게 되었다. 구매부서의 업무도 재미있고 할 만했지만 주위에서 바라보는 의혹의 눈초리는 아주 거북스러웠다. 따라서 수출과 관련된 업무를 하려고 하던 차 현대중공업(주) 계약관리부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당시 서울법대를 졸업하고 현대에서 정주영 회장과 함께 일을 하던 한유동 전무가 담당 중역이었다. 필자가 계약관리부로 가게 된 것도 한 전무의 뜻이었지만 직장 생활을 하면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었다. 당시 계약서의 핵심 사항을 짚어가면서 일을 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기도 하였지만 리더십도 출중하여 회사의 임직원들이 많이 존경하는 그런 분이었던 것 같다.
1981년 만 하더라도 한 달에 한 번 정도 쉴 수 있었고 그 외는 업무에 전념하는 시간이었다. 당시 필자는 혼자 회사에서 제공한 기숙사에서 생활하면서 업무에 전념하였다. 우리는 현대가 이미 국가적인 회사였으므로 현대가 잘되는 길이 우리나라가 잘되는 길이라는 믿음으로 열심히 근무하였다.
계약관리부서는 요즘 PM 부서와 같은 역할을 하는 조직으로 회사의 대표이사로부터 프로젝트에 대한 전반적인 위임을 받아 사장을 대신하여 업무를 수행하는 역할을 한다.
미국, 영국 등 구미 국가를 위시하여 호주, 인도, 중국 등 전 세계적인 프로젝트를 총괄관리하다 보니 각 국가 및 회사의 특성을 파악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해양플랜트 분야의 업무를 수행하면서 선진국의 기업들과 계약과 협상 업무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우리의 업무도 세계화의 수준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회의하면서 영문으로 회의록 (MOM)을 만들고 노트북이 생기면서 회의 시 바로 회의록을 작성하여 상호 서명하는 수준까지 이르니 어떤 계약과 협상 업무도 가능하게 되었다. 단지 기술적으로 좀 미진한 부분은 세계적인 설계회사와 하도급 계약을 하던지 합작회사를 설립하여 경영하는 식으로 보완해 나갔다. 그러는 사이 우리는 어느 사이 우리도 모르게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선박을 만드는 회사로 성장하게 되었고 조선업 세계 1위 회사로 성장해 나아갔다.
초기 단계에 인도 ONGC사로부터 수주한 Win, Wips 공사는 실행률이 85% 정도가 되는 수익이 많이 나는 프로젝트였다. 필자는 개인적으로도 클레임 보험사고 처리 등의 업무에서 600만 달러 이상의 순익을 창출하는 데 기여했다.
해양사업본부는 인도 ONGC사로부터 인정을 받아 약 25년간 매년 지속해서 프로젝트를 수주하여 한때 ONGC사업본부라는 호칭으로 불리기도 하였었다. 이와 관련 인도는 미국, 프랑스, 일본 등에 발주하지 않고 한국의 현대에게 지속적인 발주를 함에 따라 위 기간 약 20억 달러 이상의 예산을 절감하는 성과를 내기도 하였다.
5. 함께하여 행복하다
먼 길을 갈 때는 함께 가라고 했다. 필자는 사랑하는 5남매들과 함께하여 행복했다. 그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필자가 존재할 수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우리 오남매는 어려운 가정 사정으로 집도 절도 없는 상황임에도 함께 노력하여 다 대학을 졸업한 자랑스러운 사람들이다.
필자 집안에 행복을 몰고 온 사람은 어쩌면 나의 아내인 것도 같다. 아내와 결혼하자마자 5남매의 장남인 필자를 도와 얼마 되지 않은 월급을 쪼개 동생들 학업을 지원하고 집안을 평화롭게 이끌어왔다. 회사 야유회 때 부부동반이라 같이 가자고 하였더니 옷이 없어 함께하지 못하겠다고 이야기했는데, 순간 너무나 미안했던 기억이 새삼스럽게 난다.
어려운 상황에서는 아들 둘은 이제 장성하여 결혼하여 독립적인 생활을 하고 있으니 이 또한 큰 행복이라 생각한다. 손자를 보고 손자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으니 이 즐거움 또한 어디에 비길 수가 있을까? 며느리가 수시로 전화로 안부를 물어오는가 하면 손자가 커가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보내 우리 부부를 즐겁게 해주고 있다.
6.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을 찾아서 도전
대기업 30년 중소기업 10년의 직장 생활을 하다 보니 양자의 주요한 차이는 도덕성에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필자가 앞으로 살아가는 방향은 도덕성을 지키면서 살 수 있는 방향이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려 개인사업자 등록을 하여 필자만의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필자가 스스로 도덕성을 허물지 않는 한 누구도 필자에게 도덕에 반하는 일을 시킬 수가 없기 때문이다. 중소기업에서 외자 유치 3500만 달러를 성사시킨 필자는 이를 회사가 갚지 못할 시 처할 수 있는 어려움을 생각하면서 도덕성이 모자란 그런 결정을 했는데 당시 이런 생활을 접기로 했다.
필자는 전문성이 있으면서 혼자서 할 수 있는 국제계약 컨설팅을 하는 일이다. 틈틈이 시간 나는 대로 한양대 및 중앙대나 전문 교육기관, 한국플랜트협회, 건설전문공제조합 등에서 국제계약 관련 강의를 한다. 신문사에서 집필 요청이 있으면 글을 쓰기도 한다.
강의는 대학 졸업 당시 학계로 나가고 싶었던 꿈을 실현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하루에 7시간 강의를 하는 필자를 보고 아내는 철인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강의 자체를 즐기다 보니 강의를 시작하면 나는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필자가 또 하나 사명감을 느끼는 일이 있다. 100세 시대를 맞이하여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제도를 창출하는 일이다. 원래 국가가 앞서서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국가 발전의 새로운 동력으로 삼아야 할 일이나 현재 국가가 해주기를 기다릴 수 없는 실정이다.
서울시에서 실시하는 SBA의 창업 닥터 과정을 이수하면서 청장년들의 창업을 지원하는 창업닥터로서 자격을 취득하고 KDB 시니어브리지 센터 1기 과정 도심권 인생설계 1기과정 등을 수료하면서 많은 뜻을 함께하는 좋은 동지들을 만나게 되었다.
개인적인 꿈도 있다. 할아버지의 이름을 붙여 장학회를 하나 만드는 것이다. 이름하여 가칭 ‘태성(太晟)장학회’ 다. 가난으로 인하여 젊어서 배우지 못하는 후손이 없도록 해두고 싶은 생각으로 오래 동안 머릿속으로 구상하고 있다.
바야흐로 100세 시대다. 시니어들이 건강한 삶을 살면서 국가와 사회를 위해, 또 자기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또 다른 이상 사회를 꿈꿔가는 것은 필자의 또 다른 꿈이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 인생의 최고의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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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신기하다. 피는 못 속인다고 세월이 갈수록 자신을 닮아가고 성장하는 자식을 바라보며 웃고 울기도 한다. 어쩌면 나쁜 것은 그리도 부모를 똑 닮아 가는 걸까? 필자도 아이들을 키우며 자신의 지나온 날을 보는 것 같아 반성과 함께 성숙함이 녹 익어간다.
필자에게는 두 딸이 있다. 예전 같으면 딸 딸이 엄마라 시부모에게는 그리 달갑지 않은 며느리였다. 그러나 지금은 세상이 달라져 딸이 둘이면 금메달이란다. 오히려 아들 아들이면 똥 메달이라는 웃지 못할 이야기가 있다. 아들이 둘에 더구나 큰아들 같은 남편을 키우는 엄마는 등골이 휘어질 텐데, 현실은 그렇다 하니 차라리 돈 메달이라도 목에 걸어 위안을 주고 싶다.
이른 새벽 4시쯤이나 되었나 보다. 화장실로 향하는 길에 환한 불빛이 방문 밑으로 새어 들어온다.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누군가 하고 궁금했지만 일단은 볼일부터 보기로 했다. 두려움에 방문을 살짝 열고 거실 쪽을 바라다본다. 큰딸아이가 식탁에 앉아 무언가 열심히 쓰고 있다. 필자를 닮아 개성 강한 큰딸이 조심스러워 살그머니 문을 닫았다. 영 다시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어쩌다 보니 잠깐 눈을 붙였다. 다시 눈을 떠보니 동이 터오기 시작한다. 큰아이가 궁금해 다시 방문을 살그머니 열었다. 아이가 없다. 궁금한 참에 일단은 살금살금 식탁으로 향한다. 잠도 안 자고 새벽까지 무슨 짓을 한 건지 몰라 필자는 여간 궁금하지 않았다. 다름 아닌 두 통의 편지였다. 한 장은 ‘사랑하는 엄마에게’ 그리고 나머지는 ‘사랑하는 아빠에게’라고 쓰인 예쁜 편지지였다.
순간 손이 떨려왔다. 어떤 내용인지 빨리 보고 싶지만 당장은 참기로 했다. 걸렸다 하면 난리가 나기에 태연하게 물 한 컵을 마시고 방으로 들어왔다. 역시 큰딸이라는 대견스러움에 가슴이 촉촉이 젖어왔다. 작은 딸은 겉모습이 공주처럼 곱고 예쁘지만, 아빠를 많이 닮아 조금은 냉정하고 담담한 성격이다. 본인에게 불필요하고 소소한 것들은 받아들이지 않는 호랑이띠의 호탕한 대범함을 소유했다. 결국 2살 연하 남을 만나, 언니보다 먼저 결혼해서 가정을 이끌어갔다.
반면에 큰딸아이는 겉보기에 키는 작아도 여자 대장감으로 리더십이 강하고 카리스마가 넘쳤으나, 엄마를 닮아 아기자기하고 속마음이 여리며 눈물이 많았다. 지금도 예쁜 인형들을 좋아하고 소박하지만 화려함을 몸에 달고 산다. 어쩌면 그렇게 커갈수록 부모를 닮아가며 단점들은 모두 배워가는지 모르겠다. 필자의 참지 못하는 성격과 남편의 멍청한 순수함은 꼭 빼어서 골고루 갖고 있었다.
큰딸은 잠깐 다니러 온 부모 집을 떠나면서도, 밤새 써 내려간 편지에 관한 아무런 얘기가 없었다. 다시 부모와 헤어져야 하는 아픔이 대화를 단절시킨 것 같았다. 필자도 무어라 말을 건넬 수가 없어 눈치만 보았다. 이상하다는 생각과 편지를 건네주지 않은 것이 영 답답했지만 묻지도 않았다. 아이를 떠나보내고 집에 돌아와 화장대 앞에 앉았다. 가지런히 두 개의 예쁜 봉투가 나란히 놓여 필자의 마음을 파고 들어왔다. 그것은 필자가 자식들에게 늘 하던 방식 그대로 였다.
필자에게, 그리고 아빠에게 큰딸은 깊은 마음을 담고 있었다. 장녀라는 책임감으로 써 내려간 부모를 향한 마음은 그 어느 것보다 귀한 것이었다. 필자가 애써서 혼신의 힘을 다해 키워놓은 대가는 충분히 넘쳐흘렀다. 더구나 정성 어린 선물도 함께 있었다. 빳빳하게 은행에서 갓 구워낸 몇 장의 지폐가 각각 따로 들어있었다. 필자는 마음에 감동을 오래 간직하고자 서랍 밑 깊숙이 보관해 두었다. 딸의 마음 선물은 하늘만큼 땅만큼 진하게 눈물로 고여 왔다. 애써 자식 키운 보람이 있었다.
엊그제 큰딸은 또 해외로 여름휴가를 떠났다. 집안을 난리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고 홀랑 자취를 감췄다. 마지못해, 텅빈 큰아이 방을 치우려 들어가 보니 침대 위에 금빛을 띠우는 예쁜 봉투 하나가 미소를 짓고 있다. 유혹에 걸려들어 내친김에 얼른 열어본다. 백화점 상품권 몇 장이 필자를 기다리며 엄마를 향한 큰딸의 마음이 담겨있었다. 봉투를 두 손에 들고 눈을 감고 소파에 앉았다. 깊어가는 자식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것에 필자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모처럼 남편과 백화점으로 나갔다. 몇 십만 원하는 고가의 옷을 사려니 사치스러움에 선뜻 내키지 않았다. 필자부부는 수영을 좋아하니 마침 세일하는 수영복을 샀다. 꼭 필요한 소소한 물품들을 이것저것 구입했다. 남편은 꼭대기 식당코너로 가서 특별히 근사하고 맛난 것을 먹자고 했다. 큰 딸자식의 따뜻한 마음으로 필자 부부는 또 호강을 했다. 자식의 부모사랑이 포근하게 다가왔다. 결국, 가족이란 살면서 부딪치고 또 상처받지만, 누구보다 먼저 스스로 회복되며 사랑해 가는 것이었다.
집 떠난 큰딸은 며칠 후면 또 돌아온다. 시집 안 간 처녀 의사의 히스테리는 수준급이다. 필자를 닮아 유별난 성격은 가끔씩 집안을 뒤집어엎는다. 그러나 아직은 함께 데리고 살면서 누구를 탓할 것인가. 그 모습은 영락없는 필자의 붕어빵 모습이었고, 나쁜 것은 부모를 꼭 닮아가며 가슴에 못을 박았다. 다만 부모가 그 감당을 하기 위해서는 여유 있고 넉넉한 충전을 필요로 할 뿐이다.
오늘도 제일 영양가 있는 음식과 글쓰기로 필자는 마음에 양식을 쌓으며 부모는 딸자식이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다려본다.
사주나 점을 믿지는 않지만, 매번 '무난’, ‘평탄’ 같은 단어가 튀어 나온다. 전반적으로 필자 삶을 돌아 볼 때 과연 맞는 말인 것 같다.
인생 전반의 삶
인생의 여러 중대사가 결정되는 1970년대가 필자 20대 나이였다. 그 시기 대학교에 입학하고 군대에 갔다 오고 취직해서 결혼했으니 말이다. 아들딸까지 낳았으니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운이 좋았는지 대학교도 단번에 합격하고 군대도 카투사로 갔다 왔다. 취업도 서로 오라는 데가 많아서 골라서 들어갔으니 요즘 청년들에 비하면 정말 운이 좋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첫 직장에서 아내를 만나고 건설회사인 둘째 직장에서 사우디아라비아, 독일 근무를 하면서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 덕분에 스포츠 장갑을 만들어 수출하는 중소기업에 스카우트 되어 임원으로서 12년간 마음껏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전혀 연고도 없던 회사에 기존 임원들보다 10세 연하인데도 젊은 패기로 승승장구하며 탄탄대로를 걸었다. 입사 6년 만에 단일 바이어에게 거의 의존하던 매출구조를 미국, 유럽, 내수시장으로 확장해 건전한 포트폴리오대로 만들면서 세계 스포츠장갑 1위 업체로 부상시켰다.
1997년 IMF 금융위기는 당시 대표를 맡고 있던 스포츠 브랜드 UMBRO 사업에도 직격탄이었다. 미화로 지급해야 하는 로열티와 수입대금도 막대했지만 국내 시장이 초토화되어 더 이상 사업을 끌고 나갈 수 없었다. 결국 경영책임을 지고 퇴사한 것이 21세기를 두 달 앞둔 1999년 10월이었다. 직장 생활 23년을 마감하게 된 것이다. 나이 49세였다.
묘하게 퇴직 1주일 후 섬유의날 시상식에서모범경영인으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재직 중이었더라면 큰 축하를 받을 수 있는 자리였으나 찜찜하게 퇴직하고 난 처지라서 가족들과 단출하게 자축할 수밖에 없었다. 퇴직했으니 앞으로가 막막했으나 대통령 표창은 큰 용기를 주었다. 뭔가 큰 힘이 될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것이다. 실제로 표창은 위력을 발휘했다. 이탈리아 스포츠 브랜드 KAPPA의 한국 런칭도 그 덕분에 이뤄졌다. KAPPA의 성공 덕분에 JAKO 등 다른 스포츠 브랜드 도입도 수월했다. 비즈니스뿐 만 아니라 각종 서류 심사 때도 떨어져 본 적이 없다.
밀레니엄 시대라는 2000년부터 퇴직 이후의 새 삶이 시작되었다. UMBRO 대표 시절에 여러모로 도와줬던 업자가 동대문 사무실에 나와 소일하라며 권유했다. 그의 사업도 도울 겸 필자 사업으로 스포츠 장갑을 수출하던 시절에 가까웠던 바이어들과 연락하며 지냈다. 주문량이 적은 바이어들은 본사에서도 귀찮아하던 것을 필자가 주문을 대신 처리해줬다. 한 바이어는 당시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의 공식 스폰서가 되면서 대량주문을 해 와서 그때 꽤 짭짤한 수익을 건졌다. 그러나 9.11테러 이후 미국 경기가 급속하게 하락하면서 이 비즈니스도 하락세를 면치 못했다. 중국의 저임금을 활용하여 그나마 주문을 소화했었는데 중국의 인건비가 급속하게 올라 결국 손을 들고 말았다. 여기서 더 비즈니스를 이어가려면 중국보다 임금이 더 저렴한 나라를 찾아다니며 바이어들도 지속적으로 확보해야 했으나 비즈니스는 이쯤에서 접자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 인생도 50 줄인데 돈을 더 벌겠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다 보면 인생을 낭비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 무렵 필자랑 비슷한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이 퇴직 대열에 합류하면서 실패하는 사람도 봤고 건강을 잃고 쓰러지는 사람이 많았다. 건강을 잃으면 모두 잃는 것인데 이럴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번뜻 든 것이다. 그래서 자전거, 등산을 비롯하여 건강을 위한 삶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여러 가지 시도해본 결과 댄스스포츠가 가장 잘 맞는 운동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댄스 이야기
93년 한국에 댄스스포츠가 체계를 갖춰 상륙하자 백화점 문화센터에 등록했었다. 당시만 해도 댄스스포츠를 제대로 알고 가르치는 곳도 드물던 시절이었다. 독일에 주재원으로 근무할 때 어느 와인 촌 홀에서 백발의 할아버지와 고등학생은 되어 보이는 소녀가 같이 춤을 추는 것을 보고 완전히 매료된 충격적인 일이 기억났다. 그 춤을 제대로 배워보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몇 몇 선생을 거치도 갈증이 그치지 않았다.
그러고는 10년 만에 다시 댄스스포츠에 빠져 들었다. 집 근처 올림픽공원 스포츠교실에서 라틴댄스를 가르치는 데 완전히 매료된 것이다. 한번은 5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댄스 경연대회를 했는데 하루 종일 예선부터 뛰어 최종 챔피언으로 등극하는 일이 생겼다. 춤에 대한 재능을 처음으로 확인한 일이다. 다음 해에도 챔피언 자리를 유지했다.
이 정도 했으면 필자도 배우는 입장에서 가르치는 입장이 되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경기대학교 사회교육원의 ‘댄스스포츠 코치아카데미 코스’에 도전했다. 1년 만에 1, 2급 자격증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이때 올림픽공원에서 가르치던 선생이 영국 유학을 권했다. 댄스스포츠의 본고장은 영국이며 거기 가서 공부하고 국제지도자 자격증을 따가지고 오면 우리나라 댄스 역사에 드문 일이 될 거라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영국에 유학할 준비로 개인 레슨을 받으며 국제지도자 자격증 코스를 공부했다. 6개월 공부 후에 영국 런던의 유서 깊은 ‘쌤리댄스스쿨’에 갔다. 지도교사로 'Technique of Latin Dancing' 이라는 책을 낸 라틴댄스 계의 전설 월터 레어드의 비서였으며 현존 최고의 지도자 준 먹머르도 여사를 만났다. 2개월간 새벽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집중적인 댄스 공부와 연습을 하며 결국 ‘국제지도자 자격증(IDTA:International Dancesport Teachers Association)’을 따 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 영국에 가서 이 자격증을 따 온 사람은 몇 몇 댄스 계 원로에 불과했는데 동호인에 불과한 필자가 이 자격증을 들고 들어온 것이다.
개선장군처럼 귀국한 필자 주변에 댄스동호인들이 모여들었다. 그렇게 해서 ‘댄스엔조이’라는 댄스 동호회를 만들었다. 무려 5년 동안 회장을 맡으며 댄스스포츠 동호회를 키웠다. 당시에는 1주일의 거의 절반을 댄스 강습으로 보냈다. 그 과정에 샤리권(권금순)이라는 학원 원장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영국에서 귀국 직후 ‘댄스엔조이-라틴댄스’라는 책을 내려고 ‘댄스스포츠코리아’라는 잡지사에 찾아 갔다가 그 자리에서 편집 기자 자리를 제의받았다. 책도 나왔고 3년 후에는 ‘댄스엔조이-
라틴댄스 실전과 이론’, ‘댄스엔조이 – 모던댄스’, ’댄스엔조이 - 즐거운 댄스 라이프‘ 3권을 동시에 냈다. 그리고 10년 후 낸 ’캉캉의 댄스이야기‘까지 내면서 댄스 칼럼니스트로서 자리를 굳건히 했다. 특히 ‘댄스스포츠코리아' 잡지사의 기자 자리는 필자에게 날개를 달아준 격이 되었다. 세계적으로도 댄스 잡지는 드물지만 국내에서 발행되는 유일한 댄스 잡지라서 권위가 있었다. 국내 댄스 경기 대회나 행사에는 언론사 자격으로 VIP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국내 댄스 계 중요 인사들을 만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취재 과정에서 세계적인 챔피언들을 인터뷰하여 기사화할 수 있었다.
댄스 인생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얘기하자면 장애인들과의 만남을 빼 놓을 수 없다. 원래 장애인들과의 만남은 94년 ‘댄스 동호회’에 나온 시각장애인들을 통해서였다. 몇 사람을 가르치고 있는데 혼자는 힘들다며 도와달라고 하여 갔던 것이다. 자이브를 중심으로 가르쳤는데 시각장애인들도 곧잘 했다. 처음에는 물론 막막했으나 그들도 노력했고 필자도 가르치는 노하우가 생겼다. 그들과 함께 여성의날 행사에 오프닝 무대에서 춤췄는데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참석한 자리였다. 시각장애인의날 행사 때도 함께 오프닝 무대를 자이브로 장식했는데 그때는 당시 영부인 권양숙 여사가 참석했었다. 시각장애인의날 행사 때 객석을 보니 대부분 시각장애인이라 보이지도 않는데 춤을 춰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시큰둥했던 필자가 부끄러웠다. 보이지도 않고 댄스화 갈아 신기도 귀찮으니 운동화 신고 그냥 하자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필자 파트너는 진지하게 임했다. 끝나고 사진을 같이 찍자고 해서 또 한 번 놀랐다. “사진을 찍어 봐야 볼 수가 없는데 왜 찍느냐”고 물었더니 아이들에게 자랑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아이들은 정상적인 시력을 가졌다고 했다. 이들과의 만남은 여기까지였다. 그 당시만 해도 장애인댄스대회가 없어 더 이상 끌고 나가기 어려웠던 탓이다.
또 다시 10년만인 2013년 서울시장애인댄스연맹에 코치 겸 선수로 들어가게 되었다. 장애인댄스스포츠연맹이 정식으로 발족하여 전국적으로 경기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너무 나약해서 안마사 시험에도 떨어졌다는 40대 할머니를 파트너로 하여 선수로 출전했다. 처음엔 왈츠 단일 종목으로 동메달을 겨우 땄는데 스탠더드 5종목을 다 연습하고 나니 금메달까지 딸 수 있었다. 한 대회에 3개 부문까지 출전할 수 있으니 출전만 하면 메달을 수확했다. 이 할머니 파트너가 은퇴하고 나서 만난 파트너 중 최고였다. 나이도 40대라 젊고 체형이 날씬했다. 국내 ‘스타킹’이라는 TV 프로그램에 출연할 정도로 플라멩코 춤에서는 인정받는 사람이었다. 이 파트너 덕분에 국립극장에서 있었던 ‘대한민국 장애인 문화예술 대상’에서 대중무용 댄스스포츠 부문에서 수상을 했다. 장애인 댄스경기 대회는 대개 오전 중에 끝나지만 이 파트너와는 일반인들끼리 겨루는 댄스경기대회에도 출전했다. 2014년 여수에서 벌어진 ‘아마추어선수권대회’에서는 오전에 장애인 부문에서 3경기를 뛰고 오후에 일반인들끼리 겨루는 장년부, 일반부, 아마추어부까지 결승에 올라 나란히 우승, 우승, 준우승하는 쾌거도 이뤘다. 스탠더드 5종목을 뛰려면 대단한 체력이 요구돼 세 부분을 연속해서 출전하는 선수도 처음이라며 화제가 되었다. 이 파트너도 건강상 그만두게 되어 아쉬웠다.
2015년에는 새 파트너를 만나 ‘전국체전’에서 동메달을 따는 쾌거를 이뤘다. 비록 동메달이나 덕분에 서울연맹이 ‘댄스스포츠 전국대항전’에서 간발의 차이로 우승할 수 있었고 전체 장애인종목에서도 만년 단골 우승인 경기 다음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글쓰기
필자에게 글재주가 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이다. 국어시간에 다음 배울 것을 짧게 축약해 오는 ‘짧은 글짓기’에서 늘 선생님의 칭찬을 받았다. 받아쓰기는 늘 만점이었고 국어 성적도 거의 만점을 받았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는 것. 그래서 글쓰기가 좋아졌다. 그 당시만 해도 책은 구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만화를 많이 본 것이 어휘 구사에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5학년 무렵에는 전국적으로 글쓰기 열풍이 불어 학교 내에서는 물론 서울 단위에서도 ‘어린이글짓기대회’가 열렸다. 당시 대회에서 필자는 후배 여학생과 단 둘이 입상하고 돌아와 교내 스피커를 통해 방송도 하고 전체 조회 시간에 교단에 서서 수상작 낭독도 했다. 그 인기 덕분에 전교어린이회장까지 했다.
중학교 때는 문예반 활동을 한 것도 아닌데 당시 ‘학원’이라는 학생 잡지에서 하는 ‘학원문학상’에 응모했더니 수상했다. 당시 학교 정문에 플래카드가 붙기도 했다. 당시 그림도 좋아해서 미술반에 들어갔으나 저녁 식사도 못 한 채 매일 밤 10시까지 버티기가 힘들어 그만 두었다.
대학교에 들어가서 중학교 때 못한 그림 공부에 미련이 남아 사진반에 들어갔다. 그림은 한 장 그리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사진은 셔터만 누르면 되니 적성에 맞았다. 예술사진이니 작품성도 있어야 하고 설명과 제목도 멋지게 달아야 하는데 그림과 글쓰기에 대한 갈증을 한꺼번에 충족시켜주는 것 같아 한동안 사진에 빠져 들었다. ‘전국대학생사진동아리’도 구성해서 활동했다.
사진에 꽂혀 있떤 필작 다시 글에 손을 댄 것은 40대 초반으로 직장에서 자리가 잡혔을 때였다. 젊었을 때부터 외국을 자주 다니면서 느낀 점들을 신문에 독자 투고했는데 인정받았다. 1000여 편의 독자투고 내용을 책으로 3권 냈고 서울 서초구청장으로부터 기록인증서도 받았다.
독자투고는 글이 짧아 하고 싶은 말을 간단명료하게 담아내야 했다. 그러나 글이 길지 않아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2003년 댄스 동아리를 만들면서 이 갈증을 충족할 수 있었다. 당시 인터넷에 댄스 칼럼을 길게 올린 것이다. 이 칼럼은 인기도 높었다. 그 글들을 모아 2004년 영국 유학 후 ‘댄스엔조이’라는 책을 4권 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2007년 ‘유어스테이지’에 시니어 리더로 합격하면서부터였다. 블로거를 모집했는데 당시 필자는 블로그가 뭔지도 몰랐으나 그간 인터넷에 올린 글들 덕분에 합격한 것이다. 그때부터 ‘캉캉의 글모음’이라는 블로그를 만들었다. 이 블로그로 2012년에는 ‘대한민국 100대 블로거상’도 받았다. 필자 블로그는 하루 방문객 1500명 내외이더니 2016년 5월 드디어 누적 방문객 300만 명을 돌파했다.
2010년에는 보건복지부에서 주관한 ‘액티브 시니어 자서전 공모전’에서 우수상으로 2등상을 수상했다. 1등상을 수상한 사람은 필자보다 10세 이상 연배로 전쟁도 직접 겪었고 인생을 모범되게 살아 충분히 자격이 있었다. 그런데 정작 방송, 잡지 등에서는 필자에게 출연 교섭을 많이 해왔다. 춤이 그림이 되기 때문이다.
블로그의 힘은 대단했다. 필자 블로그를 검색한 방송, 잡지 등에서 섭외가 많이 들어 왔다. ‘시니어 파트너즈’에서 지원해준 덕도 많이 봤다. 한국의 모든 공중파에 나갔고 케이블 TV까지 합하면 셀 수도 없을 정도로 출연했다. 한 방송국에서는 휴먼 다큐멘터리를 찍는다며 무려 10일간을 매일 녹화하기도 했다.
블로그는 현재 중요한 일과 중 하나이다. 하루에 글 하나는 꼭 올린다. 글을 쓸 때 가장 마음이 편하고 생각이 정리되어 힐링되는 것 같다. 자꾸 희미해지는 기억력을 붙잡으려면 일상이든 독후감이든 영화 감상문이든 바로 써둬야 한다.
사회 활동
초등학교 때 어린이회장을 한 이래로 감투 복은 있는 모양이다. 대학 시절에 4학년이 관례로 맡던 사진반 회장을 2학년 올라가자마자 맡더니 ‘전국대학생사진동아리’’를 결성하여 회장단을 꾸리기도 했다. 군 생활 때도 동기들과 선배들이 즐비한데도 중대 전체의 선임자 역할을 했다. 그리고 참여하는 곳마다 크고 작은 모임에서 회장을 많이 했다. 리더십도 있는 편이지만 말이 많지 않아 카리스마가 있다고 한다. 틀이 좋다거나 돈이 많거나 말을 잘하는 일반적인 요소는 없으나 중심을 잘 잡고 전체와 미래를 보는 시각이 있다는 평이다.
퇴직 후 삶은 IMF 외환위기로 고통받을 때를 생각해 보면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된 것 같은 해방감을 느꼈다. 직장 생활 때 인적 관계는 퇴직 이후 거짓말처럼 멀어져 갔다. 새로 새로운 세계의 사람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댄스스포츠에 집중한 덕분에 ‘댄스엔조이’라는 동호회를 만들었고 5년간 회장을 맡았다. 동호회를 운영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유어스테이지’에서 공모한 시니어 리더들의 모임에서도 5년째 회장을 하고 있다. 회장 맡은 것을 자랑하려는 게 아니라 회장을 맡은 덕분에 책임감을 가지고 여러 좋은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많다는 것이 좋다. 그런 면에서 ‘브라보 마이라이프’ 기자 활동과 새로 맡은 운영위원회장 자리도 기대가 크다.
요즘은 유난히 발이 넓은 동네 친구 덕분에 ‘한국시니어블로거협회’에 대표로 참여하고 있다. 그 덕분에 ‘KDB 시니어 브리지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동문회 등 거기서 파생되는 여러 모임에도 나가고 있다. 협회 자체의 행사나 프로그램도 많다.
강의도 자주 나간다. 퇴직을 앞둔 우리은행 지점장급 직원들을 대상으로 생산성본부에서 해마다 인생 이모작 강의를 했었다. 200명을 대상으로 하루 8시간 하는 강의이다. 퇴직 후 16년차에 들어섰으니 인생 이모작 선배로서 그간 경험한 퇴직 이후의 삶에 대한 경험을 전해주는 강의이다. 노사발전위원회에서도 공모전 입상을 한 덕분에 비슷한 내용으로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도심권 이모작 센터’’, ‘사회연대은행’ 등에서도 강의를 해오고 있다. 댄스스포츠 강의도 하지만 홀로 살기, 파워 블로거 되기 등 테마도 다양화하고 있다.
필자 스케줄 표를 보면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꽉 차 있다. 동호인들끼리 댄스하는 날, 노래배우러 가는 날, 책 만들러 가는 날, 댄스 동아리 강의 하는 날, 장애인 댄스 교습 및 댄스 선수 연습하는 날이 고정되어 있다. 일요일만 비워두고 있다. 그렇다고 전혀 틈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루는 24시간이고 그런 스케줄은 대부분 저녁 모임이거나 한 나절 정도 걸리기 때문에 나머지 시간에는 다른 스케줄을 소화할 수 있다. 특히 남는 시간은 집 근처에 공유사무실이 있어 글쓰는 데 활용한다.
어떤 면으로 보면 너무 바쁘게 살고 있기 때문에 매력 없는 남자라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여유 있게 차 한 잔 하면서 같이 대화라도 나누고 싶은데 필자처럼 바쁜 사람에게 전화했다가는 바쁘다며 거절당할 게 빤하다는 것이다. 휴먼 다큐멘터리를 찍을 때 가까운 사람들 인터뷰가 있었다. 필자도 동석한 자리이므로 좋은 대답을 기대했는데 그런 말을 들으니 충격적이었다. 그래서 절대 바쁜 척 하지 않기로 했다. 그전에는 댄스 하러 가는 날이면 다른 스케줄은 아예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댄스는 어차피 여기저기서 하고 있고 한두 번 쯤 빠져도 큰 문제 아니니 결석을 택한다. 다른 고정 스케줄도 마찬가지이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가 60대 중반에서 70대 중반이라는 말이 있다. 과연 그런 것 같다. 아직 건강하고 활동력도 있다. 노후 대비 경제력을 걱정할 정도는 아닌 것도 다행이다. 사주에서 보듯 무난하고 평탄하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인생의 정점에서 ‘브라보 액티브 시니어 인생’을 사고 있는 셈이다.
중국의 진시황이 불로불사약을 구해오라며 서복에게 동남동녀3천명을 거느리고 가게 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실제로 제주도와 오키나와에는 서복이 다녀간 흔적으로 보이는 것들이 남아 있다. 이 이야기는 인간의 영생, 늙지 않고자 하는 영생을 대표하는 일화로 자주 인용된다. 이런 욕망에 시달리는 이들은 진시황뿐이 아니라 우리 주위에서도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 이들은 제주나 일본이 아닌 성형외과를 찾는다. 그래서 순천향대학교 부천병원 성형외과장 박은수(朴殷秀·48) 교수를 만났다. 글·사진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많죠. 적지 않습니다.”
바삐 수술을 마치고 나온 그에게 다짜고짜 성형외과에 시니어 환자가 많은지 물어봤다. 돌아온 대답은 예상 외였다. 아무래도 대학병원은 개원가의 개인 병원에 비해 사정이 다를까 했는데 그렇지 않다고 했다.
“정확한 통계는 자료를 봐야겠지만, 제 체감으로 시니어 환자의 비중은 한 35% 전후가 아닐까 싶네요. 젊어지거나 아름다워지고 싶어 하는 것은 나이와 무관하게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욕망이니까요. 생각보다 남자 환자도 꽤 됩니다.”
남자도 많다고? 성적 편견인지 몰라도 기본적으로 외모에 관심이 더 많은 것은 여성이 아니던가. 이 의외의 현상에 박은수 교수가 내놓은 답은 이랬다.
“성형외과 학계에서도 주목하고 있는 최근의 현상은 바로 100세 시대로의 진입입니다. 과거만 하더라도 기대수명이 짧기 때문에 노후에 어떤 질환이 나타나더라도 그저 참고 견디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본인들도 앞으로 살아야 할 날들이 많이 남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지요. 남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번째 인생을 살아가려면, 다른 사회활동을 위해서 좋은 인상과 외모가 필요하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는 것 같아요. 그래서 투자에도 과감해질 수 있는 것이고요. 성형에 대한 욕망을 나쁘게만 볼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수명이 길어진 만큼 사회로부터 받는 좋은 인상에 대한 요구 기간이 길어졌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그의 환자 중에 봉사활동 과정에서 더 나은 리더십을 얻기 위해 성형을 선택한 환자도 있었다고 했다. 이러한 변화는 학계에도 영향을 줘, 학계에서는 노화를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라, 일종의 질환으로 보고 접근하려는 움직임이 있다고 했다. 특히 항노화 등 관련 분야에 대한 연구는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다.
박 교수는 늘어나는 시니어들의 성형을 설명할 만한 또 다른 요인으로 시술 방법의 변화와 정보를 꼽았다.
“비침습적(非侵襲的) 시술, 그러니까 째거나 꿰매지 않고 시술하는 다양한 방법들이 등장했기 때문에 큰 각오를 하지 않아도 병원을 찾을 수 있게 됐죠. 또 어르신들 사이에서도 활발하게 정보 교류가 되는 것도 한 몫하고 있습니다.”
특히 시니어들에게는 갈수록 기능적 개선과 성형의 경계가 모호해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예를 들어 눈꺼풀이 처져 느끼는 불편함을 개선하면, 단순히 시야만 편해지는 것이 아니라 외모도 개선되고, 자신감도 생기고, 그 과정에서 삶의 변화가 나타날 수도 있잖아요.”
그럼 시니어의 성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균형이죠. 간혹 젊은 여성들은 본인이 성형을 했다는 흔적을 내보이고 싶어 하는 경우가 있고, 그 이유를 알 것 같긴 해요. 간혹 중년분들도 그런 요구를 하시는 경우가 있는데, 적극적으로 이해를 구하는 편입니다. 중요한 것은 균형을 맞추는 것이에요. 시니어들의 성형은 티를 덜 내면서 인상을 밝게 하는 데 중점을 두는 것이 만족도가 높습니다.”
“야! 여긴 아무렇지도 않다. 거리엔 젊은 연인들 넘쳐나는데 맥주 마시고 난리가 아니다! 비상은 거기만 걸린 거지, 여긴 관심도 없다! 잘 있다 와라!”
늦은 퇴근길 전철 안. 얼마 전 전역한 듯한 젊은이와 아직 복무 중인 현역병의 통화인 듯했다. TV 뉴스에서는 북한의 미사일 발사 소식이 뉴스 앵커의 낭랑한 음성으로 들리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한참 소란을 떨고 라면이나 비상식량도 준비했을 법한데, 이제 이 정도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조용하다. 둔감해진 것일까? 아니면 자신감에서 오는 여유일까?
젊은이들의 통화 내용처럼 전방과 후방의 분위기는 정말 달랐다. 그렇다고 살면서 늘 긴장해야 할 일도 아니다. 하지만 조금은 걱정도 된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치열하게 전투가 벌어졌던 산기슭에는 아직도 이름 모를 병사들의 영혼이 떠돌고 있다. 6월 6일 현충원에서는 호국 영령들을 위로하는 트럼펫 소리가 울려 퍼질 것이다.
더구나 북에서는 지금도 전쟁놀음이 한창이다. 휴전 이후 변한 것이 하나도 없다. 남한은 부와 자유를 누리나 북은 전쟁 준비에 혈안이 돼 여전히 인민들을 동원해 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그래서 가끔은 이 자유스러움을 마냥 만끽해도 괜찮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호국보훈의 달’ 6월이어서 더욱 그렇다.
필자가 군 복무를 한 지가 어언 40년이 되었다. 그런데 그 시절엔 국기 게양식이 있고 하강식이 있었다. 국기가 올라가고 내려가면 모두가 일손을 멈추고 가슴에 손을 얹고 애국가에 맞추어 ‘국기에 대한 맹세’를 읊조리며 경례를 했다. 심지어 극장에서 영화 한 편을 볼 때도 국민의례를 했다. 국기에 대한 맹세를 통해 조금은 국가의 소중함이나 애국에 대해 생각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을 찾아볼 수도 없다. 추억 속에서만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요즘 청소년들에게 국가란 무엇일까? 어느 날 태어나 보니 부와 자유가 넘쳐나는 부자나라였던 것은 아닐까? 힘겹게 목숨 바쳐 이 나라를 지켜낸 분들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군복을 벗은 지 40년이 돼 필자는 군부대를 찾는 기회를 얻게 됐다. 요즘 젊은 군인 중에 힘들어하는 병사들이 있어 선배들에게 한 수 배우고 싶다고 교육 요청을 해와 이에 응한 것이다. 특히 사건 사고가 많은 데다 지휘관은 부하들을 대하는 리더십이, 부하들은 상관, 동료와 함께하는 인성이 부족해 이 부분에 대해 좀 가르쳐 달라고 했다.
오랜만에 부대 안에 들어서서 군복을 입은 병사들을 보니 오래전 군 복무하던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교육이 끝나고 군인들과 기념촬영을 하면서 내가 청소년기에 감명 받았던 모윤숙 시인의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라는 시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나는 죽었노라. 스물다섯 젊은 나이에 대한민국의 아들로 숨을 마치었노라. 질식하는 구름과 원수가 밀어오는 조국의 산맥을 지키다가 드디어 드디어 숨지었노라.'
그러면서 나는 젊은이들의 통화 속에 그 말이 귀가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여긴 아무렇지도 않다.”
‘아무쪼록 그래야지. 그런데 그것은 오래도록 굳건한 국군이 지키고 있기에 가능한 거 아닌가 하네.’
미국에 있을 때 청년층이 모이는 한 단체로부터 리더십에 대한 강의를 요청받았다. 그 모임에는 나 말고도 여러 분야의 강사들이 있었지만 사진가로서 할 수 있는 얘기를 준비해야 했다. 주어진 날이 다가올수록 리더십을 어떻게 사진에 담아낼 것인가 하는 생각으로 초조해졌다. 그러다 청중의 나이 삼십대 젊은 나이에,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을 위해 죽은 한 시골 청년이 떠올랐다. 사람에게 목숨보다 더한 것이 무엇인가? 그렇게 리더로서 예수를 얘기해도 무리가 없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다면 사진으로 어떻게 그의 젊은 리더십을 담아낼 수 있을까?
먼저 예수의 서른셋이라는 꽃다운 나이 때문인지 동백꽃이 얼핏 지나간다. 동백은 한창 화려하게 피어나는 순간, 절정에서 꽃이 상하지 않은 채 아름다운 모양 그대로 떨어진다는 것을 막연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생 최고의 시기에 남을 위해 죽은 리더십.
그렇게 동백을 찍기로 결정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다른 문제가 생겼다. 내가 동백꽃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디에서 볼 수 있는지, 언제 피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겉멋과 제멋에 겨운 무식한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동백은 한국에만 있지 미국과는 어울리지 않는 꽃이라는 선입견도 있었다. 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내가 살고 있는 어바인 근처에 동백이 있는지 알아보았다. 의외로 멀지 않은 곳에 동백 정원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카메라를 챙겨 동백 정원으로 유명한 데스칸소가든이라는 곳으로 차를 몰았다.
정원에 도착해 한 나무 아래 서서 직원에게 동백꽃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가 “당신이 지금 동백나무 아래 있습니다. 그 나무가 바로 동백이에요”라며 웃었다. ‘낫 놓고 기역자’를 물어본 격이었다. ‘아, 이게 동백이구나!’
가까운 쪽에는 하얀 동백꽃이, 멀리 분홍 동백이 있었다. 저마다 키도 다르고, 꽃잎도 은은한 색부터 짙은 색까지 다양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알고, 누구나 보고 있던 동백꽃이 이제야 무지한 내 마음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나무 木에 봄 春을 합친 동백 椿을 제목으로 붙인 소설 의 오페라 버전 와, 동백을 좋아해 언제나 동백을 가슴에 꽂고 다녔다는 , 또 이미자의 한 맺힌 노래 ‘동백 아가씨’, 조용필의 ‘꽃 피는 동백섬’, 매년 동백을 보기 위해 선운사에 간다는 서정주, 그가 피기 전 동백을 미리 보고 가는 길에 만난 윤대녕의 얘기... 이렇게 다양한 동백을 접했음에도 동백을 제대로 만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사진이 아니었다면 동백을 보기 위해 일부러 거기까지 가지도 않았겠지만, 설령 갔다 하더라도 맨눈으로 건성 스쳐 지나쳤을 것이다.
그때까지 동백은 관심을 갖고 본 적이 없으니, 그 아름다움을 잘 담아낼 리 없었다. 수많은 시도 끝에 동백의 아름다움을 보았고 내가 원했던 동백의 이미지를 찾을 수 있었다. 무지한 사진가인 나는 이렇게 사진기를 통해 사물과의 만남을 계기로 하나하나 배우고 바뀐다. 한 장의 사진으로 세상을 바꾸는 타고난 천재 사진가들도 있지만, 나처럼 사진을 찍다 눈이 열리고 귀가 커지면서 내가 바뀐 결과, 나를 둘러싼 세상이 바뀔 수도 있다.
내가 사진을 하면서 그렇게 수지맞은 일이 어디 이 경우뿐이었겠는가? 악기를 잘 다루기 위해 지난한 연습과 반복을 통해 좋은 연주가 가능해지고 이와 함께 논리적 사고와 감성이 풍성해지듯, 사진도 이렇게 나의 인성이 개발되게 하는 힘이 있다.
그렇게 다양한 동백의 품종과 섬세함을 넘어, 지난해에 진 동백꽃과 올해의 낙엽 위에 내려앉은 아직 싱싱한 동백꽃이 내 카메라 뷰 파인더에 잡혔다. 주검 위에 겹쳐진 새로운 죽음의 이미지 속에서 나는 진정한 리더와 희생의 의미를 연결시켜 보았다. 사람들과 세상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죽음을 기꺼이 맞은 젊은 리더의 모습이 형상화되었다. 여기에 더해 인간이 갖고 있는 상상력과 연상력을 발휘한다면 이것이 아이콘으로 발전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꿈보다 해몽이다.
사진에도 길이 있다. 모든 예술처럼 사진에도 사랑에 이르고 진리에 이르는 놀라운 길이 있다. 이렇게 동백꽃도 모르던 내 눈이 열리고 바뀌듯이 누구나 바뀔 수 있을 것이다.
촬영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스치는 동백과 비슷한 꽃과 나무에서 이번에 새로 만난 아름다움이 겹쳐 보여 나는 자꾸 차의 속도를 줄이고 있었다.
시내 주요 호텔의 아침을 밝히는 것은 여행에 들뜬 투숙객도, 약속을 위해 찾은 방문객도 아니다. 바로 조찬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들른 경영인들이다. 이른 새벽, 이름난 호텔 정문에 서 가만히 기다려보면 검은색 고급 승용차들의 행렬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누구보다 시간을 쪼개 쓰는 이들이 회사가 아닌 호텔에서 아침을 시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글·사진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현재 공식적으로 집계되고 있지 않지만, 국내에서 진행 중인 조찬 모임을 업계 관계자들은 200~300개 가량 될 것이라고 추정한다.
주최나 주제에 따라 그 성격도 다양하다. 일반적인 경영자나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강연 이외에도 특정 직군이나 지역을 위한 모임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한국정보산업협회의 CIO포럼은 업계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운영되고 있고, 또 대전경제포럼과 같이 지역별로 진행되는 행사도 있다. 교육기관이 아닌 은행이나 보험사에서 진행하는 경우도 있다.
일반적으로 시중에서 진행되는 포럼의 주요 대상은 경영인이나 임원, 업계 관계자들이 많다. 참가 비용이 적지 않고 연간 회원제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아 기본적으로 경제적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모임이 조찬으로 진행되는 이유는 기본적으로는 ‘시간’이다. 아무래도 오전 일찍 시작되다 보니 하루를 길게 나눠 쓸 수 있고, 직원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이 있다는 것. 조찬 현장에서 만난 한 참석자는 부지런히 자신을 몰아붙이는 알람 같은 장점도 있고, 맛있는 아침식사 역시 매력적인 ‘덤’이라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조찬 모임에 열광하는 경영인들의 모습을 어떻게 평가할까? 강연 참석차 포럼을 찾은 윤석철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는 “경영자들의 이런 적극적인 교육활동은 우리나라의 국가경쟁력 학보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평가합니다. 미국이나 가까운 일본에도 이런 모임은 거의 없으니까요. 이런 모임을 통해 생각의 방향을 조정하고, 정보를 교환하는 과정은 기업인들에게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분석했다.
이런 평가는 외국인의 눈에도 비슷하다. 중국인인 aSSIST 중국 비즈니스 MBA 과정의 황비 교수는 한국의 조찬모임 참석자들의 열의를 높게 평가했다. 그는 “참석자들의 열망이 매우 높고, 특히 중국 비즈니스에 대한 관심도는 대단합니다”라면서, “아침 일찍 일어나 운동을 하는 것처럼, 경영인들에게 조찬 모임은 아침 일찍 마음을 수련하는 과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진행하는 단체가 많다 보니, 포럼 간 경쟁도 치열한 편이다. 때문에 담당자들이 가장 신경쓰는 부분은 콘텐츠와 포럼의 중심을 잡는 주요 인사의 확보다. 콘텐츠가 경쟁력이다 보니 연사 섭외 역시 치열하다. 대표적 조찬 모임 중 하나인 aSSIST 포럼 마케팅팀의 김민지씨는 포럼의 운영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포럼의 주제와 연사는 참석자 분들의 추천과 내·외부 강의 평가자료를 바탕으로 내부 강사 선정위원회에서 논의해 정해지는데, 크게 인문학(40%), 경영통찰(40%), 경제전망(20%) 분야로 나뉩니다. 프로그램 구성과정에서 가장 고려하고 있는 부분은 오피니언 리더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교육의 장을 만드는 데 있습니다. 경영자들이 다양한 주제의 강연을 듣고 이를 통해 각 기업의 창조적 혁신을 이끌어 낼 수 있게 지원하고자 노력 중입니다.”
이들이 제공한 자료에 따르면 포럼 참석자의 95% 정도가 기업의 최고경영자나 임원이고, 일반인은 5% 정도다. 연령별 분포를 보면 60대 이상이 40%정도이고, 40~50대는 55%를 차지하고 있다. 30대 이하의 낮은 연령대는 많지 않다. 참석효과에 대해 포럼에서 만난 경영인들의 평가는 긍정적이다. 외부에서는 교육효과보다는 인맥 형성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더 클 것이라는 시선도 있지만, 내부의 평가는 다르다.
인문학 조찬모임을 1년 넘게 참석중인 박주초 알터 엔터테인먼트 대표는 인문학을 통해 중국 진출에 도움을 얻었다고 했다.
“사업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달라졌습니다. 특히 제가 취해야 할 자세에 대한 철학적 지침을 얻을 수 있어, 시야가 넓어진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동양 철학이나 고전에 대한 공부는 중국에서 비즈니스를 진행하는 데 실질적인 도움이 되기도 했습니다. 작년에 진행했던 공연 역시 단편적이거나 표면적인 과거와 달리 담백하지만 깊은 감동을 준다는 평가를 받았구요. 지혜를 얻는다는 마음가짐으로 참여한다면 기대 이상의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인맥 형성을 통한 비즈니스 진행을 원한다면 조찬 모임보다는 소규모 인원으로 진행되는 최고경영자 과정이 더 적합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또 다른 한 상장사 최고경영자 역시 “우리 정도 나이가 되면 인맥에 대한 갈증은 크게 없습니다. 사람 만나러 간다는 외부에서 보는 시각과는 차이가 있죠”라고 밝히고, “원래 철학에 대한 관심이 많아 나오게 됐고, 다들 비슷한 이유에서 이 자리에 참석했을 것으로 봅니다”라고 설명했다.
경영학을 통해 병원 운영에 도움을 받았다는 의료인도 있다. 채규창 구로이즈치과의원 원장은 “치대에서 경영에 대한 별도의 교육이 없기 때문에 대부분 개원하는 치과의사들은 개업 후 당황해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라고 말하고, “리더십 강좌, 경영 코칭 강좌 등을 통해 병원 운영에 대한 철학과 원칙을 배운 후에 괴롭혔던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습니다”고 밝혔다.
조찬 모임의 또 다른 트렌드 중 하나는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다. 5년 전까지만 해도 경영전략이나 경제동향에 대한 강의가 주로 이뤄졌지만, 최근에는 역사나 철학 강의에서부터 음악 공연까지 구성이 다양해지고 있다. 한국능률협회의 인문학 조찬 모임 ‘수지향(수요일에 만나는 지혜의 향연)’을 담당하고 있는 김혜인 연구원은 동향을 이렇게 분석한다.
“경영의 복잡성이 증대하고 예측하기 어려운 위기가 빈번히 발생하면서, 인문학에 대한 기업의 관심이 증가하며 경영의 새로운 돌파구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글로벌 금융위기와 같이 통계적 분석 기법으로는 예측이 곤란한 위기에 대한 대처 방법으로 인문학적 통찰력이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때문에 저희도 소위 문사철이라 불리던 문학과 사학, 철학뿐만 아니라 뇌과학, 사회학, 음악, 여행, 미술 등 다양한 분야의 대가들로부터의 새로운 인문학을 전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강연을 위해 ‘수지향’을 찾은 유홍준 명지대학교 석좌교수는 “많은 강의 중에 기업인들 앞에서 강의할 때가 가장 편합니다. 강연내용에 의구심을 갖기보다는 얻어가려는 마음이 크기 때문이죠”라고 설명하고, “인문학에 대한 경영자들의 관심이 높아지는 것은 소비자들의 산업적 요구가 다양해지면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닐까 생각합니다”라고 분석했다.
월례 조찬 모임 백강포럼(회장 윤은기)에서 만난 조석준(趙錫俊) 전 기상청장은 포럼 진행뿐만 아니라 리스타트 공부를 하고 있었다. 백강포럼은 이른 아침에 하는 조찬 모임인데 200여 명씩 몰리며 문전성시를 이루는 등 학구열이 어느 모임 보다도 뜨거운 모습이다. 조 전 청장도 자기가 선택한 것을 자기만의 속도로 해나가는 ‘프리스타일’이라는 점에서 자신에게서 출발하는 공부를 한다. 그는 아침 조찬회에서 사회가 요구하는 공부나 지식으로서의 공부가 아니라 삶의 변화를 동반하는 상생의 지표를 찾고 있다.
글 김영순 기자 kys0701@etoday.co.kr 사진 이태인기자 teinny@etoday.co.kr
최근 조 전 청장은 1년 동안 참석한 백강포럼 조찬회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사업의 그림을 그리고 실행에 옮기고 있는 중이다. SNS 소셜미디어 시장에서 ‘메가시너지 아카데미’를 열어 보겠다는 야심찬 생각으로 기획하고 있다.
백강포럼은 일반 포럼이나 조찬회처럼 일방적인 지식 전달이나 단순한 성공담을 전하는 차원의 강의 콘텐츠와는 근본적으로 다르게 진행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몸담아 왔던 디지털과 방송 미디어 그리고 강연 콘텐츠를 융합하기에 충분했다.
조 전 청장이 기획하고 있는 ‘메가시너지 아카데미’는 개인이 갖고 있는 지식과 경험을 체계화시켜 독창적인 콘텐츠로 만들 수 있도록 도와주며, 아울러 융·복합과 협업적 방식으로 개인과 조직의 핵심역량과 가치를 높일 수 있도록 지속적 네트워킹을 지원한다는 방향성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메가시너지 프로강사 과정은 자신의 독창적인 콘텐츠(지식, 경험)을 다듬고 연마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또한 신개념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기법을 전수하여 자신의 콘텐츠를 사회 전반에 확산시킬 수 있는 역량을 길러주고 지원해주는 프로그램을 지향하고 있다.
프리스타일 공부로 얻은 ‘메가시너지 아카데미’
조 전 기상청장이 백강포럼에 참여하기 시작한 건 2013년 발기인대회에서부터였다. 그때부터 백강포럼 사무총장을 맡고 있는 조 전 청장은 2014년 말까지 10여 회의 조찬 모임을 진행했다. 어느 강의나 마찬가지겠지만 양질의 강사를 확보하는 게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저희도 노력했죠. 사실 예전에는 이런 포럼이라고 하면 주로 지식 전달, 그때그때 유행하는 리더십으로 대개 콘텐츠가 이뤄졌어요. 그런데 우리나라가 50년이 넘는 성장의 배경에는 분야별로 많은 발전이 있었던 거죠. 그 내용을 살리는 게 백강포럼의 취지와도 부합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우리 사회 각 분야별로 존재하는 긍정적인 요소를 발견하여 보여주는 거죠. 물론 어두운 측면도 강연을 통해 알려 계층 간 소통을 원활히 하자는 겁니다. 상생과 협력으로 가자는 거죠.”
조 전 청장은 강의는 공급자와 수요자가 함께 있어야 하며 그 둘이 함께 만나 콘텐츠 질을 높여야 한다고 밝혔다. 작년 말에 진행했던 손욱 행복나눔25 운동본부 이사장의 감사 나눔이 실제적인 혁신으로 이어져 성공했던 것도 그런 바탕이 있었다는 설명.
이제 강의는 공급자와 수요자가 상생해야
“과거 지식인 사회에서 주류를 이뤘던 건 호흡이 긴 콘텐츠였는데, 이제는 짧고 핵심적인 정보를 다루는 시대가 됐습니다. 그리고 한국인의 체질이 스피드와 핵심 축약을 선호해요. 사실 그런 기질이 한국의 압축적 발전의 원동력이지 않았나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부분을 보다 구체화하여 정리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는 게 메가시너지 아카데미의 목적입니다.”
세상의 빠른 변화에 대처하는 방식으로 개인이 갖고 있는 경험과 지식을 더 단순명료화하여 브리핑하게 하는 것, 그리고 좋은 내용으로 세상에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다.
“과거에는 세상의 커뮤니케이션 주도가 책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세상은 변화가 빨라서 TV, SNS 등이 더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이제는 CEO가 ‘잘라내는(편집하는)’ 능력이 중요합니다. 과거에는 CEO 밑의 사람들이 신문 스크랩 등을 해서 CEO에게 교육용으로 전달해줬는데 그건 이제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과거에는 어떤 소식이 퍼지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고 대미지(피해)도 오래 걸렸지만 요새는 두 시간만이면 전세계에 모두 퍼지고 데미지도 그만큼 빨리 영향을 주기 때문이죠. 이젠 어떤 조직이든 끊임없는 소통이 중요해진 세상입니다. 뭔가 잘못된 정보가 나왔을 때 ‘그건 아니다’라고 바로 말할 수 있는 게 필요하다는 거죠.”
손 안의 방송사, 세상을 보는 새로운 관점 필요
강연들을 보면 대개 한 시간이나 두 시간 동안 이뤄지곤 했다. 그런데 요새는 나 처럼 15분짜리 강연이 나와서 호응을 얻고 있다.
“의미가 있다고 봐요. 그렇게 강연이 짧아지는 추세가 점점 심플해지는 미디어의 발달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죠. 앞으로는 30, 40분 강의를 두 개쯤 배치하는 것도 기획하고 있습니다. 짧으면서도 임팩트 있는 구성에 더 초점을 맞춘다는 거죠.”
조 전 청장은 이제는 많은 사람들에게 지식이 공유되어 사람들이 일정 수준 이상은 아는 시대가 됐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신선한 강연 콘텐츠가 많지 않다는 고민을 할 수밖에 없다. 조 전 청장이 내용을 함축적으로 전달해주고자 하는 것도 강연만이 아닌 강연 후 토론을 통해 일방적인 강의가 아닌 커뮤니케이션으로 이어지게끔 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비롯되고 있었다.
“방송사에는 시나리오가 있습니다. 조찬회도 방송과 똑같이 그런 군더더기 없는 시나리오가 필요합니다. 일정한 수준의 편집 및 가공이 필요하다는 거죠.”
조 전 청장은 스마트폰이야말로 손 안의 방송사와 똑같다고 분석했다. 지금 시대는 촬영에서부터 송출까지 가능한 기기가 손 안에 들어와 있는 상황이다. 조 전 청장은 아이스버킷 챌린지를 예로 들었다. 루게릭병 치료 홍보를 위해 시작된 아이스버킷 챌린지 캠페인은 일 년에 20억 원 정도이던 모금액을 한두 달만에 그 열 배인 100억 원 가까이 모으게끔 만들었다. 이는 전통적인 미디어가 못해내는 일을 SNS라는 새로운 미디어가 해낼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1980년대 초였다면 KBS와 MBC만 있었어도 통치가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SNS 채널이나 스마트폰이 있어 방송사를 갖고 있는 것과 똑같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콘텐츠를 어떻게 정리하여 활용하느냐에서 판가름날 것입니다.”
그는 “은퇴를 앞두고 있는 신중년들은 스스로 전진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쥐고 있는 한 줌을 지키려 애쓴다. 공부는 이런 통념을 깨고 자신을 바꾸는 과정”이라며 “강의 콘텐츠에 새로운 메커니즘을 구축해보겠다”고 말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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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백강포럼
좋은 강의가 좋은 세상을 만든다
대한민국 백강포럼(회장 윤은기)은 좋은 강의를 통해 계층·세대·이념 간 갈등을 치유하고 우리나라가 성숙한 사회로 나아가는 데 보탬이 되고 있어 타 지식포럼의 귀감이 되고 있다.백강포럼은 사회
각 분야에서 인정을 받아온 100명의 명사들이 강의를 통한 사회 공헌을 실천하기 위해 모였다.백강포럼(100인 강사 포럼)의 구성원은 윤은기 한국협업진흥협회장을 비롯해 관료, 학자, 문화인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참여하고 있다.다양한 계층으로 구성된 100명의 강사는 좋은 강의가 사람을 변화시키고 이 사람들이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기치 아래 강의를 통해 사회공헌을 하고자 한데 뭉친 것이다.
이렇게 탄생한 백강포럼은 봉사정신을 바탕으로 국가 발전에 기여하고, 회원 간 지식 공유하는 지적 커뮤니티를 지향하고 있다.
회원으로 박재갑 전 국립암센터 원장, 김신배 SK그룹 부회장, 홍석우 전 지식경제부 장관, 최광식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손욱 행복나눔125운동본부 이사장, 이희범 전 산자부 장관, 김은기 전 공군참모총장, 서규용 전 농림수산식품부 장관, 안종배 한세대 교수, 권대욱 아코르 앰배서더 호텔 대표, 김혜정 경희대혜정박물관 관장, 김동수 전 공정거래위원회 위원장, 신각수 전 주일 대사, 김재우 한국치협회 회장, 성영신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 이영하 전 레바논 대사, 조현정 비트컴퓨터 회장, 명동성 법무법인 세종 대표변호사, 한미영 세계여성 발명기업인협회장 등 정치·산업·교육·문화예술계 인사들이 다양하게 참여하고 있다.
백강포럼은 봉사 정신을 바탕으로 국가 발전에 기여하고 회원간 지식을 공유하는 지적 커뮤니티를 지향하고 있다. 재능기부 강의 등 다양한 사회 공헌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특히 상업적 모임이 아닌 공익을 추구하는 모임으로 정치적 중립, 극단의 배제, 최소의 비용으로 최고의 가치 창출, 융·복합적 소통 등이 백강포럼의 원칙이다.
서울 강남구 삼성동 서울 컨벤션 도심공항 3층에서 한달에 1회, 오전 7시부터 조찬포럼을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