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고통을 당하는 종류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잠을 못자는 고통도 대단하다. 여름밤 너무 더운 열대야(熱帶夜)의 고통은 겪어본 사람이라면 그 느낌을 안다. 10여 년 전 재개발을 기다리는 대구의 5층 아파트 최상층 5층에 살 때이다. 다니던 회사에서 독신자용으로 18평짜리를 얻어준 곳이다. 혼자사니 그 정도 크기면 충분했다. 문제는 여름의 열대야다. 열대야는 최저기온이 25도를 넘어서는 밤을 말하는데 아파트 구조가 그렇다보니 여름의 여러 날들을 열대야로 시달려야 했다.
사람이 ‘미치고 팔딱 뛰고 환장하겠다.’는 말이 있는데 열대야의 밤이 꼭 그런 심정이다. 열대야의 밤에는 누워 잠이 들었다가도 안개처럼 아주 느리게 더위의 열기가 몸을 뱀이 휘감듯이 공격해온다. 누어있을 수가 없었다. 벌떡 일어나 반바지에 짧은 티셔츠 하나만 걸치고 슬리퍼를 신고 인근 공원을 어슬렁 거렸는데 열대야의 밤에는 이런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그나마 산책할 숲이 있는 공원이 집 가까이 있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성질 급한 사람은 돗자리를 들고 아예 공원으로 잠자리를 옮긴 사람도 있었다.
평소에 잠을 잘 자는 사람이므로 잠을 잘 자기 위한 특별한 준비과정은 없다 다만 여름철 열대야가 온다는 일기예보가 있으면 대구의 악몽도 되살아나 조심을 한다. 우선 녹차나 커피처럼 카페인이 든 음료수는 먹지 않는다. 음주는 취할 정도로 많이 먹으면 술김에 잠을 잘 잔다 하지만 몇 잔 설 먹어두면 혈액순환이 빨라져 새벽에 잠을 깬다. 새벽에 잠을 깨면 디시 잠을 들기도 어렵지만 잠이 들었다 해도 아침에 일어나면 몸이나 정신이 개운치 못하다. 새벽에 무슨 이유로든 잠이 깨면 다시 잠을 자지 않는 것이 내 잠의 신조다..
마라톤 등 심한 운동도 나쁘다 몸이 너무 피곤하면 식욕도 없어지고 잠 또한 쉽게 들지 못한다. 그러나 10km정도의 달리기나 테니스 두게임 정도는 몸을 기분 좋게 피곤하게 하여 잠이 잘 온다. 보통의 운동은 수면에 도움이 되고 나는 별 개의치 않는다.
열대야는 밤 1시가 지나면 온도가 내려간다. 더워서 잠이 잘 안 오면 인근 공원을 산책하며 대지의 온도가 내려가기를 기다린다. 우리나라 여름철 시원한 바람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분다. 바람이 창문을 통과하여 지나가는 길이다. 집에도 바람이 잘 부는 곳이 있다. 나는 이를 바람통로라고 부른다. 바람통로에 바닥에 까는 요도 없고 이불도 없이 팬티하나만 걸치고 맨바닥에 누워 있으면 거실바닥의 시원한 냉기가 등줄기를 통해 올라온다. 쉽게 잠이 든다.
배를 열어놓고 자면 보통의 사람들은 배탈이 나기 쉽다. 런닝셔츠 정도를 입어 배를 덮어 보호하는 것이 좋다. 나는 소양인이여서 그런지 배탈이 잘 나지 않기 때문에 배를 열어놓고 자도 배탈 걱정은 하지 않는다. 더위에 잠 잘 자는 방법이 사람마다 다르므로 자신의 체질에 맞는 잠 잘 자는 방법을 터득해서 자기만의 노하우로 알고 있으면 좋겠다.
몇 년 전부터 유행하던 여자시리즈 유머스토리에 있던 이야기 중에는 나이 들면 배운 여자 안 배운 여자나 다 똑같고, 얼굴 예쁜 것 안 예쁜 것 상관없고, 돈 있으나 없으나 동일하네 어쩌네 하는 내용이 있었다.
요즘 시니어들에게 비용지급을 하는 모집광고가 참 많다. 시간당 아르바이트 비용 수준의 몇 달간의 기간제,혹은 계약직이라도 지원서 파일을 열어보면 에구머니나 칸칸이 넣으려면 온라인 오프라인으로 엄청난 활동이나 자격증이 이미 있어야 채울 수 있는 경우가 많다. 그것도 이미 나이도 제한하여 모집하는데 스펙이 대단하지 않으면 지원서를 제출조차 하기가 어려운 시대이다.
오랫동안 직장에만 충실했던 은퇴한 시니어 분들과 여러 교육과정을 여러 기관에서 창업과 창직을 원할 경우 특히 SPEC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한다. SPEC은 Specification의 줄임말로 어떤 제품이나 물건의 사양을 뜻한다. 어떤 일을 하고 싶은가 꼭 해야 하고 자신이 있는가.
돌아서라도 가고 싶은 종착역이 있다면 노력해서 나의 스펙을 쌓는 것이다. 그러나 완전 새로이 기본부터 해야 하는 일 보다는 할줄 아는 것 이미 어느 정도 지나온 길을 무시하지 말고 그 위에 스펙을 더하는 것을 권하고 싶다.
인생은 마라톤이다. 우리가 어린 시절부터 시니어가 된 오늘날까지 수많은 시련이 있고, 시험을 치루고 여기까지 오면서 인생 끝날 것 같은 절망도 겪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의 취임사와 마이웨이노래를 부른 프랭크시나트라의 묘비명에 적혀진 내용을 소개해 본다. 두 사람 모두 이런 말을 남겼다.
“ "The Best is Yet to Come."
가장 좋은 것은 오게 될 거라는 내용이다.
환갑만 지나도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고 남은 인생에 열정과 애정이 있다면 나이 드는 나를 인정하고 객관적으로 평가되는 시니어의 자리에 선 자신을 볼 수 있어야 거기부터 시작할 수 있다. 성공적 노화를 위해서는 본인에게 꼭 필요한 부분을 선택하고, 선택 된 부분에 부족한 부분만 보완하면서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능력을 최대화해야하는게 바로 시니어의 스펙 쌓는길이다. 시니어도 스펙을 쌓아야하는 힘든시대의 한가운데 서있는 상태에서 글을 써본다.
필자가 경험한 불면증 대처법에 대하여 기술하고자 한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적정한 근속년수가 되면 승진시험을 통과해야만 간부로 승진 되는 제도에서 근무를 하게 되어 일명 승진고시라 불리울 정도로 직장 내에선 경쟁시험이 치열하였다. 학교 다닐 때도 열심히 공부도 했지만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상황이다. 매년 말이면 초급간부 승진시험이 영어, 실무, 전공, 상식, 논문으로 치러지는데 이 시절만큼 살아오면서 가장 열심히 공부 했다고 자부한다. 시험 준비도 한두 달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1년 내내 명절 때도 고향에 잠깐 머무르고 매일 새벽 두세 시까지 공부하고 다음날 근무에 시달리면서 준비 했는데 시험 후 낙방하여 실의와 실망의 충격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가정, 회사, 동료들로 부터의 시선이 나에겐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은 그 무엇으로 표현 할 수 없다.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사이에 퇴근 후 집에만 가면 잠이 오지 않고 그렇다고 정신이 맑은 것도 아니고 새벽 두세 시에 잠자리에 누우면 잠은 오지 않고 정신만 말똥말똥 점점 맑아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매일 아침 일어나는 시간도 새벽 여섯시면 기상과 동시에 추위와 더위에 상관없이 새벽 달리기로 체력은 꼭 단련시킨다. 새벽운동이 결국 나에게는 단축마라톤을 뛸 수 있는 체력으로 보강 되었지만 찿아온 불면증으로 체력은 점점 더 악화되어 갔고 아내는 간부시험을 포기하고 몸 관리를 잘하라고 말하지만 필자에겐 실패의 자존심 때문에 도저히 중단할 수 없었다.
특히 필자는 병원과 약을 아주 싫어 한다. 아무리 독한 감기가 걸려도 대부분 몸으로 때우고 감기 바이러스 잠복기간이 좀 많은 시간이 걸리는 편이다. 불면증에 시달리면서도 병원과 약국을 일체 사절하고 민간요법을 써보기로 했는데 잠들기 전에 머리 맡에 껍질 벗긴 양파를 두고 자면 수면에 도움이 된다고 하지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주간에 사무실에서 하품과 잠이 쏫아지지만 근무 중 잠을 잘 수도 없고 잠을 자서도 되지 않지만 끝까지 버티기로 오육 개월이 지나 가고 몸은 마르기 시작하고 하늘은 처량하게 노란색으로 물든은 것같이 보였다.
새벽 네시가 되어도 잠이 오지 않아 운동복을 갈아입고 아파트 주위를 내 몸이 지쳐서 쓰러질 때까지 매일 두세 시간씩 달리기를 시작하였고 지처서 집에 들어오면 잠깐이라도 뜬잠이라도 자려고 노력한 끝에 어느 날 드디어 30분간의 깊은 잠을 자기 시작하면서부터 새벽운동의 강도는 시간이 지나가면 갈수록 더욱더 강하게 훈련한 덕분에 수면시간이 길어지기 시작하였고 약 1년이 지나서야 거의 80% 이상 호전되는 증상을 보이면서 모든 일이 서서히 잘 풀리기 시작하였다.
간부시험에도 합격하고 새벽의 강도 높은 달리기 덕분에 마라톤에도 출전하여 우승도하고 체력도 예전과 같은 수준으로 돌아 왔으며 모든 사람들이 철인이라고 부를 정도로 아주강한 체력이 만들어진 것이다. 불면증이 온다면 병원과 약을 찿을 것이 아니라 본인에게 맞는 운동을 찿아서 열심히 하면 체력도 마음도 정신건강도 튼튼하게 하면 모든 병은 사라진다고 확신한다. 시니어 여러분 100세 시대를 대비하여 오늘 당장 운동을 시작하여 건강한 체력을 만들기 바랍니다. 운동이 곧 돈들지 않는 명약 중 명약입니다.
남자들에게 코디란 정말 어렵게 느껴진다. 평상 시에 옷 맵시를 내는 사람이라면 문제 될 게 없다. 그러나 초대라도 받아야 가끔 옷을 갖춰 입는 패션 문외한겐 특히 어렵다.
그래서 필자만의 코디법을 생각한 끝에 평상시 운동을 좋아하니까, 그리고 각종 시합에도 출전하고 있으니까 마라톤 의상에 남다르게 신경을 쓴다. 아내와 같이 쇼핑이라도 가면 필자는 마라톤복을 고르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특히 마라톤 복장을 갖추려면 꽤 많은 비용지출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아내는 불만이 많다. 왜 그렇게 운동복에 많은 투자를 하는 거냐는 거다. 적당하게 갖추어 입으면 되지 않느냐는 것인데 필자 생각은 다르다. 시합에서 선두주자로 꼴인하는 장면에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집중해 있다. 카메라가 터질 때 의상이 엉성하면 난처한 입장이 되고 제대로 갗춰진 의상이라면 금상첨하가 아니겠는가?
필자는 산악자전거 운동도 좋아한다. 그래서 마라톤 복과 함께 산악자전저 복도 춘추, 여름, 겨울 등 계절별로 갖췄다.
필자는 한국전쟁이 나던 해 자식 많은 가난한 농사꾼의 9남매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지금의 풍요로움을 느낄 때마다 돌아가신 부모 생각에 마음 한구석 애잔함이 밀려든다. 한국전쟁 이후 폐허로 변한 농촌에서는 극심한 식량부족에 시달렸다. 할아버지, 할머니를 포함한 13명의 대가족이 한 끼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커다란 가마솥에 밥을 해야 할 만큼 식량이 필요했다. 봄날은 길고 보릿고개는 높았다. 봄에 장리쌀 한 가마니를 빌려오면 가을에 한 가마니 반을 갚아야 했다. 50%의 이자다. 지금의 잣대로 보면 과히 살인적인 이자요, 착취다. 부자는 점점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점점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 사회 구조였다.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한 해만 보릿고개를 넘을 때 장리쌀의 고리에서 벗어나면 되었지만 굶을 수는 없으니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걸 필자가 해보리라 결심을 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진학을 1년만 포기하기로 했다. 1년 동안 돈을 벌어보겠다는 결심을 했는데 어린 필자가 어찌 그런 생각을 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놀랍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주도하는 새마을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나는 시절이었다. 필자 동네도 정부에서 구불구불한 논둑을 똑바로 펴는 경지정리 작업을 시행했다. 지금 말로 하면 공공근로다. 읍사무소 담당 공무원이 나와서 그날 할 일을 지정해주고 저녁 무렵 성과를 측정해서 실적에 따라 밀가루 티켓을 나눠 줬다. 지원자가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최저임금에 버금가는 적은 밀가루 지급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농사일이 다 끝난 겨울에 하는 일이었다. 꽁꽁 얼어붙은 논둑에 한 뼘 정도 들어 올릴 만큼의 범위를 정하고 곡괭이로 논둑에 구명을 낸다. 거기에 쇠로 된 긴 지렛대를 넣고 논둑을 들어 올리면 논둑이 무너져 내렸다. 그 자리에 직선화된 새로운 논둑을 만드는 일이다. 공사가 다 되면 바둑판처럼 반듯한 직선화된 논둑과 논이 만들어진다. 경지면적도 커지고 농토가 반듯해서 농사짓기에도 편하게 된다. 요즘 같으면 포크레인 등 기계로 하겠지만 당시는 순전히 사람의 노동에 의한 작업이었다.
공공근로라는 것이 다 그렇듯 일은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 하루 할당된 일의 양도 5~6시간이면 다 마칠 일이었다. 밀가루를 매일 주는 것이 아니고 며칠에 한 번씩 읍사무소에 가서 받아왔다. 이렇게 받은 밀가루가 10포대 정도 되었다. 필자가 벌어온 밀가루로 수제비도 해먹고 콩가루 넣은 칼국수도 만들어 먹었다. 늙은 호박에 팥을 넣은 호박범벅도 해먹었다. 덕분에 쌀이나 보리를 아낄 수가 있었다. 그해 장리쌀의 고리를 끊고 보릿고개를 넘었다. 이제 빚은 없어졌다. 어머니가 두고두고 필자 공을 인정해주었다.
당시는 다 가난한 시절이었다. 먹어야 사니까 흉년에는 콩죽 한 그릇 하고 논 서 마지기를 바꾼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방직공장에 취직한 나이 어린 소녀들이 봉급 받은 다음 날 우체국에 줄을 서서 고향으로 돈을 보내는 모습도 봤다. 고향 집에 보내기 위해 손에 쥔 그 돈이 달랑 3000원이었던 시절이었다. 그런 돈으로 오빠나 동생들 학교 다니게 하고 살림 밑천인 송아지도 샀다. 이런 돈들이 모여 논, 밭도 사고 고향 집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한 일등공신들이 수두룩하던 시절이었다. 땅값이나 집값이 지금처럼 비싸다면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지만 그 당시는 가능한 일이었다.
필자는 다음 해 공업고등학교 전기과에 진학했다. 적성도 모르고 오직 취업이 잘되고 장학금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공고를 택한 이유라면 이유다. 당시는 공부를 못해서 실업계 고등학교에 가는 것이 아니라 가난과 빠른 취업을 위해 실업계 고등학교에 가는 시절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이 끝나자 동급생들이 하나둘씩 취업되어 학교를 떠났다. 필자도 학교장의 추천을 받아 전매청 연초제조창에서 일할 수 있게 됐다. 담배를 만드는 기계는 이태리 제품인데 요즘처럼 완전자동은 아니나 당시로는 획기적인 자동화 기계다. 학교에서 배운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자동화 설비에 대해 도면 보는 법을 익히고 고장 난 기계들의 점검하고 수리하면서 새로운 기술을 익혔다.
군대에서 기술을 더 배워보려고 육군 발전기술병으로 지원했다. 처음에는 대대 참모부에서 군수품을 담당하는 행정병 보직을 받았다. 그런데 전기 일을 하게 될 운명이었는지 부대 목욕탕 관리 병사가 전기 감전사고로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다. 결국 후임으로 전기를 안다는 이유로 필자가 선발됐다. 목욕탕 관리사병은 보일러를 다룰지 알아야 하지만 필자는 보일러에 대해서는 통 몰랐다. 인근 부대를 다니며 독학으로 보일러의 운전법을 배우고 무난히 목욕탕 관리사병의 임무를 마쳤다. 한 번은 목욕탕에 사성장군인 군사령관이 방문했다. 별 4개를 보는 순간 벌벌 떨었다. 35개월을 마치고 제대한 후 한국전기안전공사에 입사하게 됐다. 27세 때었다.
필자 인생에서 전기안전공사를 빼놓고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이곳에서 결혼도 하고 자식 공부도 시키고 60세 정년퇴직을 했으며 노후생활도 보장받았다. 안전공사 생활 중 가장 기억나는 것은 간부시험에 일찍이 합격한 것이다. 간부는 60세 정년이지만 직원은 58세가 정년이었고 급여에서도 차등이 있어 경쟁이 심했다. 간부시험에 응시하기 위해서는 최소 3년의 근무 경력을 바탕으로 하는 근속연수 점수와 상급자가 매기는 고과점수를 합한 기본점수가 있다, 여기에 필기시험을 쳐서 학과 점수를 보태어 성적순으로 뽑았다. 당락을 좌우하는 것은 역시 필기시험이었다.
필자는 상급자인 주임들을 제치고 간부시험에 입사 3년 만에 합격하였다. 간부로 첫 부임지가 공교롭게도 과거 근무한 적이 있는 사업소였다. 간부로 발령받고 보니 옛날 상사인 주임들이 부하로 바뀌어 있었다. 필자도 마음이 불편했지만 주임들도 필자를 대하기에 곤혹스러웠다. 이런 때일수록 필자의 상급자인 과장이 잘 컨트롤 해 줘야 하는데 상급자인 과장도 주임들과 오래 근무한 정으로 심적으로는 주임들과 더 가까운 편이었다. 공식적인 술자리에는 필자가 참석했지만 주임들과 과장 간의 사적인 술자리에는 필자를 고의로 배제했다. 마음고생이 심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직의 힘으로 간부의 위치를 찾아갔다.
두 번째 사건은 고등학교 후배가 많은 지역에 과장으로 발령이 난 것이다. 필자가 졸업한 공고는 선후배 간 위계질서가 엄격하여 동문회 야유회 때는 장난 비슷하게 선배가 후배 엉덩이를 몽둥이로 때리기도 했다. 나쁜 감정이 실려 있지 않은 매이니까 웃으며 맞았다. 부부동반으로 야유회도 다녔는데 선배들이 후배 벌주는 것을 부인들이 다 보고 있었지만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만큼 고착화된 선후배 간 전통이었다. 그런데 회사 간부인 필자를 때리기는 아무리 선배지만 버거워했다. 필자로 인해 벌씌우거나 매를 드는 것은 차츰 없어졌다. 하지만 선배들을 사적인 장소에서는 더욱 깍듯하게 모셨다. 술을 따를 때도 3년 이상 선배한테는 무릎을 꿇었다.
세 번째 사건은 기술직으로 감사반장이 된 것이다. 감사는 회계감사가 중요한데 기술회사에서는 기술을 아는 사람이 감사반장을 해야 한다는 사장의 경영방침에 의해서 필자가 선택되었다. 부서별 부장급 감사반원을 이끌고 사업소를 순회하며 실무 감사를 했다. 잘못하는 점보다 잘하는 점을 찾아서 타사업소에 전파하는 것에 역점을 두었다. 징계도 했지만 표창도 많이 했다. 올바른 비판력과 판단력이 있다는 말을 들을 때 가장 기분이 좋았다.
네 번째 사건은 전문대학교에서 겸임교수를 맡은 일이다. 기술사 자격을 갖고 있고 현장 경험이 많다는 점을 들어서 대학교에서 섭외가 들어왔는데, 사장이 허락해 교수직을 겸임한 것이다. 전기응용 과목을 맡았는데 전기응용은 조명, 전동력응용, 전기철도, 전기화학 등 폭이 넓은 실무 분야다. 4년간의 겸임교수 시절은 몸은 힘들었지만 보람도 있었다.
다섯 번째 사건은 전기안전 부문에서 필자가 노력한 일들을 정리하여 공적조사로 만들어 경향신문이 주최하고 한국전력공사가 후원하는 에너지대상을 신청한 결과 국민봉사 부문 본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굵직한 상을 받는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부상으로 대만 여행을 보내주고 금 20돈의 황금 열쇠를 받았는데 지금도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다.
세월이 흘러 60세 정년퇴직을 했다. 1남 1녀의 자식도 결혼하여 필자 곁을 떠났다. 비록 나이에 의해 정년퇴직했지만 아직은 신체 건강하여 일자리를 찾았다. 급여는 적지만 필자를 필요로 하는 곳에 다니고 있다. 나이 더 들면 직장에서 완전히 은퇴해야 한다. 그때를 대비해서 취미가 있는 글쓰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글쓰기의 자산은 역시 독서이므로 도서관의 ‘책 읽기 마라톤’에 3년간 참가하여 언제나 1등을 하였다.
귀촌을 위해 도시 근교에 땅도 사두었다. 나이 들어서 버티는 힘은 경제력에서 나온다. 그래서 연금도 부었다. 체력도 중요한데 그런 의미에서 올해 동호인 테니스대회에서 30년 만에 처음으로 우승한 것이 기쁘다. 앞으로 전국테니스대회에 노년부로 참가하려고 한다. 우승하고 못하고가 문제가 아니라 무슨 일을 하든 목표가 있어야 한다.
70세가 넘으면 봉사하는 삶을 살려고 한다. 건강한 노인이 덜 건강한 노인을 돌보는 노노케어에 매진할 것이다. 이것도 공부해야 한다. 사회봉사의 이론을 갖추기 위해 인터넷으로 사이버대학을 수강하여 사회복지사 자격을 취득했다. 말로만 하는 봉사가 아니라 육체가 따라가는 봉사를 위해 발마사지와 경락안마도 배우고 민간자격증도 취득했다, 경험을 얻기 위해 시간 날 때마다 치매센터에 치매전문 자원 봉사자의 일을 하고 있다. 세상살이는 미리 준비해야 한다는 신념을 늘 갖고 있다. 필자의 생애가 아직은 진행 중이지만 돌이켜 보니 준비하며 여기까지 잘 왔다고 자신을 칭찬해 주고 싶다.
42.195km 마라톤 완주만 어림잡아 90회 이상. 100km 거리를 달리는 울트라마라톤만 60회 이상 완주했다. 수영 3.8km, 사이클 180km, 마라톤 풀코스를 하루에 뛰는 철인3종경기 아이언맨 코스는 4번이나 달렸다. 이 정도면 마니아 수준을 넘어 중독이 아닐까 의심하겠지만, 그게 그럴 수가 없다. 상대가 의사, 그것도 격한 운동을 가장 반대할 만한 정형외과 전문의이기 때문이다. 김학윤 원장(金學倫·57)의 이야기다. 글·사진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아이언맨의 단골장소라고 표현하면 요즘 유행하는 초인들이 등장하는 영화가 먼저 떠오르지만, 이 경우에는 조금 다르다. 김학윤 원장은 그의 병원, 김학윤 정형외과는 이제 아이언맨들이 즐겨 찾는 병원이 되어버렸다고 했다.
“극한의 체력을 시험하는 ‘철인’들은 부상이 일상이거든요. 특히 사이클을 타다 부상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죠. 아마 3명 중 2명은 한 번쯤 쇄골이 부러진 경험이 있을 정도니까요. 그만큼 자전거는 장점만큼이나 주의해야 할 부분이 많은 운동이에요.”
김학윤 원장을 만난 가장 큰 이유는 같은 시니어로서, 또 라이딩의 선배로서, 정형외과 전문의로서 가장 정확한 조언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에게 처음 주행을 시작하는 시니어들이 준비해야 할 것을 묻자 단 한마디로 정리했다. 기본 체력이다.
“50대 이상의 시니어들이 라이딩을 포함해 등산이나 수영 등 운동을 취미로 하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기초 체력을 키워야 합니다. 물론 20~30대라면 이런 과정이 불필요하겠지요. 하지만 시니어들은 다릅니다. 적어도 1시간 정도 쉬지 않고 달릴 수 있는 체력은 있어야 합니다. 빠르게 달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아주 천천히 달리는 것도 좋습니다. 걷지 않고 달릴 수 있어야 해요.”
기본적인 체력을 확보하지 않은 상태에서 운동을 하다 보면 몸 곳곳에 무리가 가고, 그것이 부상과 장애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체력이 바탕이 된 상태에서 운동에 접근해야 돌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근력과 순발력을 가질 수 있다고 조언했다. 특히 장경인대는 대표적인 부상 부위 중 하나. 부상을 하면 반드시 운동을 금하고, 2주 동안 충분히 쉬면서 회복이 될 수 있는 부상인지 경과를 지켜보는 것이 좋다고 충고했다. 대부분의 상처는 이 과정에서 회복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반드시 병원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체력이 갖춰지면 운동을 대하는 겸손한 태도가 필요해요. 중간에 힘들다 생각되면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다치면 다 나을 때까지 기다릴 수 있어야 합니다. 좀 더 빠른 속도를 갈망하고, 남을 앞서 나가려고 욕심을 부리면 결국 다치게 됩니다. 내리막이나 코너에서는 미리 감속하고, 남의 시선보다는 안전을 먼저 생각해야 해요. 저도 기록을 조금만 더 앞당기려다 결국 상처를 입고 배운 지혜입니다.”
당당히 ‘철인’들 사이에서 경쟁하는 그이지만, 김학윤 원장도 처음부터 강견하지는 않았다. 아니 강견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일종의 장애가 있었다고 해야 할까. 그는 타고난 평발, 그것도 아주 심한 평발이다. 그래서 학창시절 그에게 달리기는 늘 이길 수 없는 게임이었다. 군대에서도 마찬가지. 군의관 훈련 구보에서는 늘 열외 대상이었다.
“달리기는 못했어도 대학교 시절 산악부 출신이라 등산은 자신 있었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의사 등산모임에서 훨씬 나이 많은 선배에게 뒤처지는 거예요. 비결을 물었더니 마라톤이라더군요. 그래서 바로 시작했죠.”
물론 평발의 고통은 따라 다녔지만, 조금씩 참고 극복하는 법을 익혔다고 했다. 진통제는 입에도 대지 않았다. 그저 견디기 힘들면 쉬고, 힘이 나면 뛰기를 반복했다.
“그래도 조금씩 거리를 늘려가며 나 스스로 향상되는 과정을 즐겼습니다. 수영이나 사이클도 마찬가지예요. 사이클 롤러(실내에서 사이클 연습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장치) 위에 올라 실내에서만 두 달을 연습한 후에 밖에서 주행을 시작했어요. 남들은 자빠링(넘어지는 것) 3번이면 익숙해진다고 하는데, 저는 열 배 이상 넘어졌죠. 그리고 몇 달 후에 미시령까지 180km 투어를 갔어요.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기본을 갖추고 나를 이긴다는 마음으로 운동을 대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
퇴직하고 갑자기 갈 곳이 없어지면 세상을 잘못 산 것처럼 자기비하에 빠져든다. 아내의 눈치도 보이고 아내도 친구들로부터 ‘요즘 너 남편 뭘 해?’ 하는 소리에 답변이 궁해진다. 아파트 경비도 나를 곁눈질로 쳐다보며 ‘이 시간에 이 사람이 왜?’ 하며 고개를 갸우뚱한다. 불러서 함께 놀러 다닐 만만한 친구도 없다. 노인정이나 경로당에 가기는 죽기보다 싫다. 이것이 5,6십 세 퇴직자의 현실이다.
등산이나 낚시로 소일 해보려하지만 주말에 어렵게 시간 내서 가는 것이 취미생활이지 매일 직업처럼 등산이나 낚시 다니는 것은 낭만이 아니다. 어느 산에 가느냐고 물어보는 사람도 없고 아무리 큰 물고기를 잡아도 어디 자랑할 곳도 없다 이내 이런 취미가 시들해진다. 무엇보다 나는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퇴직이라는 형벌로 시베리아 벌판에 혼자 내동댕이쳐진 기분이다. 투명인간처럼 누구도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다는 것이 서러움이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고 대다수 직장 은퇴자들은 직장에서 누구와 더불어 사는 것에 익숙해져 왔다. 어려서는 가족의 관심과 사랑 속에 커왔고 학교, 직장생활도 사람들과 더불어 잘 지내왔다. 그러나 50이 넘어 퇴직의 대열에 휩쓸리면 더 이상 나는 어디가도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가족이 모이는 초대받는 자리에도 어른으로써 반짝 관심만 받다가 이내 손자손녀에게 주인공 자리를 물려줘야한다.
남자들이 가족을 부양하기위해서 곁눈질하지 않고 너무 직장에만 올인 해서 변변한 취미하나 만들지 못한 잘못이다. 이런 변화에 익숙하지 않아 견디기 어렵도록 외로워하고 속으로 눈물을 삼킨다.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세상을 비관하거나 신세 한탄을 하면서 술이나 도박에 빠져들고 외도나 낭비벽으로 심신이 타락의 늪에 빠지는 사람도 있다. 고독이 나를 강하게 키운다는 신념을 갖고 고독에 맞서야 한다. 고독에 당당히 맞서 성공한 사람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야 한다.
퇴직 후 젖은 낙엽처럼 아내에게 딱 달라붙어서 아내의 숨통을 조이지 않기 위해서라도 혼자 무엇을 할 것인가를 키우는 것이 고독력이다. 고독력은 숨 오래참기처럼 가만히 오래 견디는 것이 아니다. 고독력은 혼자 잘 지내는 법이고 연습이 필요하다. 내 친구 한사람은 퇴직 후 자신의 적성은 고려하지 않고 막연히 사진을 찍겠다고 100만원이 훌쩍 넘는 카메라를 사고 동네 사진 강좌도 등록하여 열심히 배웠다. 찍은 사진을 편집도 하여 컴퓨터에 정리하는 실력까지는 도달했다. 하지만 아무도 그 사진을 보자는 사람이 없다. 보여줄 사람도 없고 당연히 평을 해주는 사람도 없다. 시간에 비례하여 열정이 식어버리고 카메라는 먼지만 덮어쓰고 있다. 친구는 사진을 이용하여 뭘 해보겠다는 청사진이 미흡했다.
중학교에서 공부를 잘 하려면 초등학교에서 중학교 생활에 필요한 기초 공부를 잘 해두어야 한다, 필연코 오는 퇴직이나 은퇴 후의 무었을 할 것인가 미리 준비해야한다. 고독력을 키우고 혼자 일하고 노는 법을 터득해야한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과 같이 혼자여서 장점도 있다. 텔레비전을 보면서 공부하면 집중하기 어렵다. 남들과 대화하면서 사색에 빠져들지 못한다. 고독은 우리 자신이 집중해서 열정을 쏟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 수도 있다.
성철스님은 생전에 파계사에서 철조망을 치고 8년의 세월을 장좌불와(長坐不臥) 생활을 했다. 피아니스트는 화려한 무대를 위해 혼자서 수 만 번의 건반을 두드린다. 사진작가 변용도 선생은 4년간 무려 30만장의 사진을 혼자서 찍으면서 사진작가로 우뚝 섰다. 영어를 잘 하려면 수 백 번의 혼자 하는 반복 훈련이 필요하다. 이름난 선수는 남들이 모르는 혼자만의 피눈물 나는 고독한 연습이 있었다. 무엇이든 적성에 맞는 목표를 세우고 지속적으로 한다면 성공의 축배까지는 들지 못한다 하더라도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낼 수는 있다.
새 출발을 하기위한 고독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마인드 컨트롤이 중요하다. 첫째로 나는 법을 준수하고 평범하게 살아온 보통 사람이라는 것을 자신에게 늘 주문한다. 과거 회사 대표를 했고 대학 수석 입학 따위는 다 흘러간 일이다. 흘러간 물은 물레방아를 돌릴 수 없다. 내가 남들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과시하면 할수록 주위에서 멀어질 뿐이고 자신의 지금 처지에 비관만 든다. 두 번째로 나는 건강해서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수명100세 시대에 5,6십대는 이제 겨우 반환점을 돌았을 뿐이다. 현대는 근육질의 노동력이 필요한 시대가 아니다. 아직은 싱싱한 내 육체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어야 한다. 셋째로 내 두뇌는 새로운 것을 받아드릴 여유가 있고 누구와도 대화가 가능한 열린 마음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다. 배우는데 나이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내가 좀 더 노력하면 뒤처질 이유가 없다는 자신감이있어야 한다. 넷째로 나는 남의 시선에 별로 개의치 않고 마이웨이를 외친다. 그렇다하여 남으로 부터 지탄을 받을 일을 할 사람은 아니다. 나는 도덕적으로 깨끗한 사람이다. 원칙대로 양심껏 사는 것이 행복이다.
은퇴 전에 은퇴 후 제2의 인생을 살기위해 자신의 처지와 적성을 잘 알고 무엇을 할 것인가를 빨리 찾아야 한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 열 가지를 적고 가능한 것부터 실천에 옮긴다. 필자는 육체적인 활동이 좋다. 테니스도하고 마라톤도 한다. 일하는 젊은이들과 부딪히는 것이 좋아서 틈틈이 건설현장에서도 일한다. 현장은 언제나 사고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만 여기서 나를 지키기 위한 긴장이 즐겁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을 내가 좋아 한다는 것도 발견했다. 독서마라톤 대회에도 출전하면서 일 년에 200여권의 책을 읽는 것이 즐거움이다. 읽고 느끼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글로서 재탄생을 시킨다.
남편의 밥 때문에 아내의 행동이 자유롭지 못한 것도 싫다. 혼자서 밥하고 빨래해야 할 때는 직접가 하면 된다. 고독이 사람을 강하게 키운다는 신념을 가지면 인생이 더 자유롭고 여유로워 진다. 하루라도 빨리 자신의 적성을 발견하고 고독력으로 즐기며 발전시켜야 노후가 보람된다.
고령화 사회에서 건강한 노인이 덜 건강한 노인을 돌보는 노노케어(老老Care)는 시대적 소명이다. 선진국일수록 보건환경 개선으로 고령화는 필연이며 반면 출산율은 점점 줄어들어든다. 당연히 전체 인구는 고령화와 저 출산이 서로 상쇄되어 별로 줄지 않지만 사회인구는 점점 고령화가 되어간다. 고령화 사회의 노노케어는 젊은이들에게 생산과 후세 교육에 전념토록 할 수 있는 여력을 주고 활동적인 시니어에게 새로운 일자리 창출된다. 필자는 퇴직 후 제2의 인생을 노노케어의 선두에 서겠다는 각오로 이론적인 재무장을 위해 사회복지사 자격을 취득하고 노인운동지도사. 수지침사, 맛사지사 등 다수의 민간자격 시험에 합격하고 지금 치매지원센터에서 치매전문 자원봉사자의 일을 하고 있다.
치매는 고령화 사회에서 환자도 그렇지만 가족도 제일 겁먹는 질환이다. 중풍은 의식이 있는 본인이 괴로운 병이라고 하면 치매는 가족이 고달픈 병이다. 가죽 끈 같은 끈끈한 가족의 유대감이 없으면 한식구라는 관계가 어느 날부터 해체되고 심지어 치매 환자를 죽이기까지 한다. 치매는 병인데도 일반인이 치매에 대해 너무 모르기 때문에 제발 정신 차리라고 환자를 때리기도 한다.
일본에서는 80대의 치매할아버지가 철로를 걷다가 열차에 치여 사망한 사고가 발생했는데 치매할아버지의 법률상 보호자인 할머니에게 열차 지연에 대한 벌금을 부과 하였다. 할머니도 고령인 데다 할아버지의 매 순간을 감시할 수 없었다고 항변하였지만 판사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더욱 의외인 것은 아들에게는 무죄를 선고하며 그 이유로 같이 살지 않는 다는 점을 들었다.
치매환자를 돌보는 봉사자의 한사람으로 치매는 외로워서 생기는 병이라고 감히 말한다. 치매는 영어로 Dementia라고 하고 일본에서는 인지증(認知症)이라고 하지만 한자로는 치매(癡呆)라고 쓴다. 치매 글자는 癡(어리석을 치) 呆 (어리석을 매 )자로 무릎을 탁 칠만큼 치매환자의 상태를 글자의 의미에 잘 담고 있다. 癡 는 병질부 즉 암(癌),병(病)과 같은 병질부를 쓰고 있으며 안에는 의심할 의(疑 )자가 들어있다.
인간관계에서 서로 소통이 없으면 남을 의심 하게 된다. 소통이 없는 치매환자는 의심이 많다. 자기 물건을 자기가 숨겨놓고 숨긴 사실을 잊어버린 채 누가 훔쳐갔다고 남을 의심한다. 심지어는 요양보호로 방문한 요양보호사와 남편과의 관계를 의심하기도 한다.
서로 소통이 원활한 사람은 의심이 있을 이유가 없고 이런 사람은 치매가 없다. 매(呆) 자를 자세히 보면 나무(木)위에 입(口)을 내미는 형상이다. 얼마나 말을 하고 싶었으면 말할 상대를 찾으러 나무위에 올라가서 입을 내밀어 보겠나?
결국 대화 상대를 못 찾고 어리석을 매(呆)자가 되어 치매환자가 된 것이 아닌가하는 연민의 정을 느낀다. 바꾸어 말하면 혼자 외롭게 살면서 말할 사람이 없는 사람이 치매에 잘 걸린다. 사람의 의사소통의 기본이 말인데 말할 상대가 없으면 외로워지는 것은 당연하다. 이렇게 치매 한자를 풀어 의미를 새겨보면서 치매는 외로워서 생기는 병이라는 확신을 갖는다. 치매는 외롭게 혼자 있는 사람들에게 친구하자고 찾아온다. 최근 치매는 노인성 질환이라는 통념과 달리 20∼30대 청년층 치매 환자가 매년 증가하고 있는데 전문가들은 서구화된 식생활과 운동부족, 음주 및 우울증 등을 원인으로 꼽고 있습니다. 필자는 이런 이유 말고도
사람사이의 대화소통에 주목하고 있다. 예전에는 대가족사회며 농경사회여서 가족, 이웃 간 소통은 저절로 이루어 졌다. 나이 들어 노동에 종사 못하고 집에 혼자 남게 된 노인들이 치매에 많이 걸린다. 치매 봉사활동을 하면서 많은 치매 환자분들을 만나보면 대개가 외로운 사람들이다.
현대의 치매 환자의 증가는 점차 대화가 없어지는 가정과 이웃, 현대 사회가 주범이라 생각한다. 1인 세대가 늘어가고 혼자 밥 먹는 사람이 폭발적으로 늘어간다. 사람끼리 모여 있어도 각자 스마트폰으로 카톡으로만 대화한다.
카톡으로 반갑게 대화하던 사람도 실제 만나면 시들해진다. 카페인 중독이라 하여 카톡이나 페이스북 인터넷은 중독에 가깝도록 이용하지만 사람 냄새나는 직접대화는 점점 줄어든다.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서로 키스하는 감질내는 형국이다.
보건 복지부 자료에 의하면 치매로 인한 비용도 2008년 8,625억 원에서 2012년 1조9,234억 원으로 123%나 늘었다. 세부적으로는 의료비(4,826억원→1조1,891억원), 교통비(10억원→23억원), 간병비(3,146억원→6,217억원)와 같은 직접비용이 모두 2배 이상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치매로 인한 사회·경제적 손실이 10년마다 두 배씩 증가하는 것으로 추정돼 2020년에는 18조9000억 원, 2030년에는 38조9000억 원으로 예상한다. 그동안 의료과학의 발전으로 획기적인 치료약이 개발되겠지만 가족이 해체되고 이웃과 고립화되어 혼자 살아가는 외톨이들 에게는 치매는 피하기 어렵다고 본다.
은퇴하기 전에 누구랑 어디서 무엇을 하고 지낼 것인가 고민하기 전에 남들과 어울리는 소통력을 시니어들은 키워야 한다. 부부가 함께 해외여행을 가는 것보다 친구랑 함께 가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난다. 부부가 함께 행동을 하면 좋겠지만 3,4십년을 서로 다른 생활을 바쁘게 해오다가 어느 날 퇴직했다고 젖은 낙엽처럼 딱 붙어서 함께 지내려고 하면 평소 못 보던 단점을 자주 보게 된다. 퇴직 후 부부싸움이 잦아지는 부부를 방송에서도 주제로 다룬다.
평소 이웃사촌이라는 동네친구를 사겨야 한다. 좋은 이웃친구란 나와 경제력이 비슷하고 성격이 잘 맞는 사람이다. 시니어들은 살아온 세월이 있어 나와 잘 맞을지 않을지는 금방 알아낸다. 성격상 잘 맞지 않는 부분을 고치려하거나 한두 가지 좋은 점이 있다고 계속 친구로 지내려는 생각은 더 큰 스트레스를 받는다. 나이 들면 성격은 고치기 어렵다. 빨리 헤어져야 한다. 지금 가입해 있는 스포츠나 취미 동호회가 있다면 목숨 줄처럼 꼭 붙들어야 한다. 나이 들어 새로운 모임에 가입하려고 하면 잘 받아주지도 안을뿐더러 혹 받아준다고 해도 개밥에 도토리처럼 외톨이가 되기 쉽다. 그런 면에서 탁구나, 배드민턴이나 테니스 등 적성에 맞는 스포츠를 좀 젊었을 때 배워두면 좋습니다. 필자는 테니스를 30년이나 함께한 동호회가 있는데 주말이면 함께 늘 운동을 하고 식사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갖는다.
나이 들수록 인문학 공부를 해야 한다. 인문학은 사람과 소통하는 도구요 자산. 필자는 해마다 실시하는 동네 도서관의 독서마라톤 대회에 참가하여 5만 페이지의 책을 읽고 독후감을 제출하면서 상도 받는다. 막연히 하는 것보다 무슨 일이든 목표를 세워서 하면 동기부여가 확실하여 달성하기가 쉽다. 읽은 책의 내용은 자연스럽게 남들과 대화를 할 때 녹아 나온다. 남들과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어울리며 소통하는 여유로움이 치매예방주사다.
인생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던 헌혈 50회를 달성했다. 대한적십자사 총재로부터 금장까지 받았다. 이 소원을 달성하면서 필자를 건강하게 낳아주시고 별 탈 없이 길러주신 부모님께 제일 고마웠다.
물론 다른 사람들은 ‘그까짓 것을 감히 버킷리스트에 올리나’ 하고 콧방귀 뀔지도 모른다. 하지만 선천적으로 적혈구인 헤모글로빈이 적게 생성돼 전혈비중이 낮은(?) 필자에겐 매우 소중한 기록이다.
헌혈하기 위해 ‘헌혈의 집’에 가면 헌혈자의 건강 상태를 체크한다. 주로 체중, 혈압, 헌혈 주기 준수와 위험지역(외국과 국내지역 모두 포함) 방문(숙박) 여부를 확인한다. 수십 개 항목을 봐서 건강하지 않은 사람의 헌혈은 받아주지 않는다.
특히 건강한 피인지 전혈비중을 체크하는데 그 수치가 기준치인 1.052에 미달하면 불합격이다. 그런데 필자는 이 기준치에 미달해 불합격을 많이 받았다. 바쁜 시간을 쪼개어 헌혈하러 가서 못하고 돌아올 때의 그 씁쓸함과 실체 없는 누군가에 대한 분노는 길바닥에 있는 깡통이라고 걷어차야 풀렸다. 가끔은 ‘‘헌혈의 집’ 간호사로부터 나이도 있는데 헌혈보다 잡숫는 식사에 신경을 좀 쓰라는 조언을 들을 때면 얼굴이 붉어졌다. 불합격되면 철분을 보충한다고 시장통에 가서 선지를 듬뿍 넣은 선지 순댓국이나 순대를 사 먹고 병원에 가서 종합 진찰도 받아 철분제도 사 먹어 봤지만 효과는 별로 없었다. 마라톤도 하고 테니스도 하면서 남들보다 체력이 절대 약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평소 필자 혈액의 철분 부족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나의 체질이라고만 믿고 있다.
이렇게 내가 헌혈하는 데 부적합(?)한 몸이기 때문에 헌혈 금장을 받으려고 더 안달했다. 남들처럼 쉽게 쑥쑥 피를 뽑아서 헌혈할 수 있었다면 필자는 결코 헌혈을 버킷리스트에 올리지 않았을 것이다. 헌혈하기 적당한 내 몸을 만들기 위해 적당한 운동(지나치면 헤모글로빈이 감소한다)과 균형 잡힌 식사로 건강한 혈액을 만들기 위해 늘 신경 써왔다. 만년 2등의 설움에서 벗어나 올해 동호인 테니스대회에서 우승한 것도 이런 노력의 결과다.
현대 의료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피는 인공적으로 만들지 못한다. 동물의 피를 사람의 몸에 대신 넣어다가는 큰일이 난다. 천 년을 산다는 거북이나 학의 피도 사람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오직 사람에게는 사람의 피만 필요하다. 피라고 해서 다 같은 피도 아니다. A형도 있고 B형도 있다. 그 혈액형에 따라 줄 수 있는 피가 있고 못 주는 피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피를 만드는 것은 조물주의 영역이다. 헌혈에 집착해왔던 필자 아니면 누구도 이 사실을 인식할 수 없을 것이다.
헌혈 금장을 받고 집에 와서 부모님 산소 쪽으로 큰절했다. 그리고 아내와 자식들 모두가 함께 뭉쳐져 있는 단체 카톡방에 제일 먼저 기쁜 소식을 알렸다. 건강하게 낳아주시고 길러주셔서 부모님께 고맙다는 말을 제일 앞에 올렸다.
카톡을 보고 눈치 빠른 내 자식들의 반응이 온다. 손자, 손녀들이 할아버지가 대단하다고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운 사진을 찍어서 보내온다, 아이들도 아버지처럼 반듯하게 건강관리를 했으면 좋겠다는 염원을 카톡에 올려줬다.
6월이면 한해의 전반부가 마쳐지고 2016년 후반부가 시작되는 시점이다.
올해 환갑인 제 입장에서 이 시점은 제가 살아가는 기간 중에 반드시 의학적인 연구가 이어져 아마도 120세사시는 분이 많이 보여질 그 시대가 될 것이기에 인생의 후반부가 이제 시작되는 나이라고 생각한다.
지금도 노인정어르신들의 분포도를 볼 때 90세 이상은 되어야 어른대접을 받고 청소나 식사당번에서 열외가 된다고 한다. 70대와 80대 분들이 청소도 하고 식사준비도 하여 함께 노인정을 이끌어가고 있는 추세라고 70대 중반도 넘은 분이 동네통장과 부녀회장을 하던 저에게 노인정막내라서 힘들다는 말씀을 들었다.
거창하게 인생후반부를 준비하고 은퇴자여 내게로 오라는 다양한 단체의 교육이나 세미나가 무료 혹은 유료강좌가 이어진다. 시간을 내어 바로 무언가 경제적으로나 명예적으로 갑자기 눈에 보이는 뭔가가 보일 것 이라고 큰 기대하지 말고 꾸준히 서서히 준비를 하시기를 바래본다. 강의를 듣고 하나씩 가능한일부터 실천해가다보면 본인 원래 갖고 있는 직업가진 분들이 취미가 특기가 되고 직업이 되었다고 잡지에 소개되거나 방송에 나온 내용을 보게 되듯이 자신감이 서서히 차오르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의 부모님들께서는 시간으로 물질로 정성으로 부모님을 대하여 챙겨드리고 자녀에게 노후를 맡기신 세대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세대는 생활비는 물론 광고에 나오듯이 부모님의 보일러를 새로 장만해드리는것과 치과 치료 등의 부모님 노후를 우리가 책임졌다면 우리의 노후는 우리 스스로 책임지는 그런 시대가 왔습니다.
난 안 늙을 것 같고 늘패기있고 열정으로 가득 찼다고 하던 그 패기와 열정을 건강이 허락하는 정도에서는 계속 유지하면서 노후를 내가 가진 능력을 살리면서 경제적인 여유나 자녀와의 소통에 도움될 것과 어디서나 컴퓨터가 가능한 스마트폰세대에 아주 뒤떨어지지 않고 인생 후반부를 착실히 구체적으로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한해의 후반부 인생의 후반부를 준비하는 이 때에 라이락꽃 향기에만 취해있을때는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내가 나를 케어할 힘이 있어야하는 사실 엄중한 현실을 알고 걸어가야 합니다.
옛날 봉지쌀을 사먹고 연탄 때던 시대에 비하면 아주 잘사는 나라가 되었지만 우린 아직도 계속 어떤 이유로든 전전긍긍 살아갑니다. 욕심을 내려놓고 인생은 마라톤이기에 마지막까지 함께 뛸 그룹에서 낙오는 되지 말고 속도를 조절하는 힘 있는 아직 열정이 식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 삶으로 감사하게 하루 하루 살아가야할 필요가 있다.
더 이상 자녀가 노후보험인 시대가 아니고 오히려 타먹을 수 없는 보험이 된지 오래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