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굳이 심각해야 할 이유는 없다. 한 시간 반을 영화에 투자해 얻을 수 있는 것은 적지 않다. 사상이나 이념같이 불필요하게 무거운 지적 허세도 있지만, 우울한 마음을 위로하는 경쾌한 코미디도 있고, 말초 감정을 자극하는 쾌락도 있다. 심지어는 요즘 문화 트렌드에 맞춘 실용적인 영화도 등장한다. 예컨대 여행을 좋아하는 이들을 위한 여행 가이드 영화, 먹는 걸 즐기는 이를 위한 먹방 영화.
모처럼 영화 시사회에 초대되어 남편과 함께 참석했다. 의외로 남편이 순순히 따라나선 데는 주연인 다이안 레인의 힘이 컸다. 어떻게 늙어가나 보자는 핑계로 동행했다. 여행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필자는 보지 않을 이유가 없다. 게다가 파리로 가는 길이라니. 이제는 오래되어 낡은 흑백 사진처럼 빛바랜 에펠탑이나, 샹젤리제 거리의 개선문 정도가 떠오르는 20년 전의 기억을 안고 시사회장에 들어섰다.
왕성한 홍보가 없어 의아했는데 알고 보니 스크린이 몇 안 되는 작은 영화였다. 다만 코폴라 가문의 영화라는 브랜드가 박혀 있어 짝퉁은 아닐 것이라는 믿음은 있었다. 를 만들어 할리우드의 자존심이 된 프랜시스 코폴라 감독 가문의 딸 소피아 코폴라 감독은 이미 상당한 필모그라피를 쓰고 있으나 엘레노어 코폴라 감독은 낯설다. 그녀는 프랜시스 코폴라 아내로 이 작품이 데뷔작이란다.
스토리는 단순하다. 영화 제작자인 남편 마이클(알렉 볼드윈)을 따라 칸에 온 앤(다이안 레인)이 갑작스러운 귀의 통증으로 다음 행선지인 프라하로 떠나지 못하고 남편과 떨어져 마이클의 동료인 프랑스 남자 자크(아르노 비야르)의 안내를 받아 파리로 직접 간다는 자전적 이야기다. 그런데 하루면 도착할 길을 40시간이나 걸려 가게 된 것은 전적으로 대책 없이 낭만적인 프랑스 남자 덕분이다.
대부분의 낭만적 로드무비가 그렇듯이 이 영화도 문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다양한 명승지의 풍광이 있고, 곳곳마다 풍성한 음식이 있으며, 맥락은 없지만 적절한 로맨스가 조미료처럼 들어 있다. 게다가 미국 여자와 프랑스 남자라니! 캐릭터도 이미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창의적이지는 않지만, 이미 익숙하고 우아한 미감의 엔틱 가구처럼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안락의자인 셈이다.
별다른 스토리가 없다 보니 프라하로 떠난 일밖에 모르는 남편은 줄곧 전화에다 대고 “프랑스 남자 조심해!”만 되뇌고 있고, 도덕적인 미국 여자는 “파리로 곧장 가요.”라는 대사만 읊고, 느글느글한 프랑스 남자는 “파리는 어디 안 가요.” 하며 음흉한 미소를 짓는다. 간혹 풀밭에서 피크닉 기분을 내며 세잔의 ‘풀밭 위의 식사’ 장면을 패러디 한다든가 하는 재치는 보이지만, 대체로 익숙한 기시감의 연속이다.
이야기의 빈곤을 느낀 감독이 끼워 넣은 장면들은 맥락이 분명치 않아 조화를 깨뜨린다. 예컨대 우연히 엿들은 전화 통화에서 돈에 쪼들리는 자크의 상황을 드러내는 장면은 그의 허세를 과장하려는 의도겠지만 뜬금없고, 서로 어두웠던 과거를 이야기하며 공감대를 형성한다는 내용은 작위적이다. 아무리 프랑스라 해도 동료의 아내에게 필요 이상으로 들이대는 것은 지나치지 않은가!
그러나 코폴라 사단의 도움 때문인지 영화는 더 이상 일탈 없이 적절하게 마무리된다. 80대에 접어든 엘레노어의 데뷔작치곤 박수를 보낼만하다. 홍보의 필요로 그랬겠지만, 주연급으로 소개된 알렉 볼드윈은 사실 카메오라 해도 할 말 없는 정도로 5분 뒤 화면에서 사라진다. 그러나 그러면 어떠랴 한 시간 반 동안 프랑스 관광과 음식 구경 푸짐하게 했으니 그것으로 되었다.
필자가 화가 케테 콜비츠(Käthe Koll witz, 1867~1945)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지인이 얼마 전 독일 언론 매체에 실린 케테 콜비츠 탄생 150주년과 관련한 칼럼을 보내왔다. ‘반전(反戰) 화가’이자 ‘인권 화가’인 케테 콜비츠의 출생 연도가 1867년에다 생일이 7월 8일이라 적절한 시기에 그녀를 재조명한 것이다.
‘케테 콜비츠’는 작품을 통해 끈질기게 당대의 굶주림, 가난, 탄압, 인권유린, 전쟁을 고발한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녀의 작품들에는 웃음이 없고 무거운 기류가 잔뜩 흐른다. 그녀는 다양한 색채를 거부하고 오직 검은색만 고집했는데 이를 통해 작품의 밑바탕에 흐르는 정신을 읽을 수 있다.
콜비츠는 비교적 여유 있는 집안에서 성장했다. 변호사였던 그녀의 아버지(Schmidt)는 당시 보수파였던 비스마르크 정권의 월급을 받아 가정을 유지하기 싫다며 공무원 되기를 거부할 만큼 진보적인 인물이었다.
이러한 아버지의 영향과 더불어 노벨문학상을 수상(1912)한 당대의 지성인 게르하르트 하웁트만(Gerhart Hauptmann, 1862~1946)과의 개인적인 만남을 통해 사회 비판적 세계관을 갖게 된다. 그녀는 특히 하웁트만이 선보인 무대 작품 에서 큰 충격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둘째 아들 페터가 자원해 나간 전쟁터에서 전사한다. 아들을 잃은 엄마의 마음이 어떠했겠는가! 1924년에 그린 [그림 1]이란 작품은 작가의 반전주의 사상을 대변한다. 콜비츠는 평화주의자의 기수로 두각을 드러내면서 사회 빈곤 문제도 작품에 반영한다. 그러나 1930년대에 나치가 정권을 잡자, 다시 수모와 시련을 겪는다. 나치는 그녀의 작품을 ‘타락한 예술’로 분류하고, 게슈타포는 콜비츠를 체포하려고 조사 협박한다. 콜비츠는 자신을 체포하면 국제적으로 억압 사실을 알리겠다고 저항함으로써 위기를 극복한다. 해외 구명운동도 도움이 됐다. 1941년에는 손자마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사망했다는 비보를 듣는다. 그 무렵 반전 작가로서의 메시지는 더욱 뚜렷해진다.
콜비츠는 세계대전의 암울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을 비롯해 , , , , , , , 등의 작품을 남겼다. 자신이 살던 사회의 아픔을 그림에 담아낸 케테 콜비츠. 탄생 150주년을 맞이해 그녀 작품의 위대한 원천인 모성애를 다시 생각해본다[그림 2].
>>이성낙(李成洛) 현대미술관회 회장
독일 뮌헨의대 졸업(1966), 연세대 의대 피부과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가천의과대학교 총장, 가천의과학대학교 명예총장(현), 한국의약평론가회 회장(현), 간송미술재단 이사(현).
“노후라는 놈은 이미 내 앞에 와 있는데 너무 낯설다. 이게 뭘까! 언제 이런 단어가 만들어진 거지?”
준비 없이 노후를 맞이한 어느 60대의 한탄이다. 누구 못지않게 아내와 자식들을 위해 열심히 살아왔건만 내 앞에 닥친 ‘노후’는 생각보다 심각하다. 재산이 없는 것이 아닌데도 종종 비어 있는 지갑을 보면 불안하기 그지없다. 그렇다고 자식에게 기댈 마음은 추호도 없다. 자식들 형편이 넉넉지 못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노후의 ‘흑자파산’이 문제가 되고 있다. 가계의 흑자파산은 자산을 제법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금흐름이 원활하지 않아 신용불량자가 되는 현상을 말한다. 이는 영업실적과 재무구조가 탄탄해 보이는 기업이라도 자금이 필요한 시기에 융통하지 못하면 부도처리되는 ‘흑자도산’에서 생겨난 말이다. 기업이나 가계나 ‘돈맥경화’에 걸리면 파산을 면하기 어렵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로버트 머튼 교수는 “은퇴 시점에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것은 자산을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은퇴 전 생활수준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조언한 바 있다. 이는 곧 은퇴재무설계의 키워드가 자산 규모에서 안정적인 소득흐름의 확보로 바뀌어야 함을 뜻한다. 그 이유는 뭘까?
소비생활의 안정을 유지해야 한다
은퇴는 삶의 큰 이벤트 중 하나다. 은퇴를 전후해 사람들의 심리적·육체적 상황이 크게 변하는 것은 그만큼 은퇴가 중대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비로소 인생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며 은퇴를 반기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은퇴를 두려워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의 가장 큰 차이는 소득에 있다. 은퇴를 반기는 사람들은 안정적인 소득 기반을 가지고 있는 반면에, 은퇴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소득 기반은 대부분 취약하다.
생애주기 가설에 따르면, 사람들은 생애에 걸쳐 균일한 소비를 유지하기 위해 소득이 많은 시기에 저축을 해 소득이 적은 은퇴 이후를 대비한다. 몸에 배인 소비습관은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는다. 이런 소비의 하방경직성을 무시하고 소비를 급격하게 줄이면 엄청난 스트레스에 직면해 원치 않는 질병을 초래할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론과 달리 나이가 들면서 소비를 급속히 줄이고 있다. 60세 이상 가구의 소비는 2003년 대비 14%나 줄어들었다. 줄어드는 소득에 맞추다 보니 마른 수건을 짜고 있는 셈이다. 60세 이상 고령자의 총소득에서 근로소득을 제외하면 2017년 2인 가구 최저생계비 수준(약 170만원)의 소득만 얻고 있다. 근로를 하지 않으면 생계마저 간당간당해지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마른 수건 짜듯 소비를 줄인다. 은퇴생활이 즐거울 리 없다.
자산을 소득흐름으로 바꿔 세금을 줄이자
“인간에게 피할 수 없는 것 2가지가 있다. 하나는 죽음이고, 또 하나는 세금이다.” 벤자민 프랭클린의 말이다. 태어나면 주민세, 아끼고 모으면 재산세, 열심히 일하면 소득세, 죽으면 상속세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로 세금은 사람의 일생을 따라다닌다. 5070 액티브 시니어들은 자산에 부과되는 세금과 소득흐름에 부과되는 세금의 차이를 잘 활용하고 있는 부자들의 움직임을 눈여겨봐야 한다.
KB금융지주경영연구소의 부자보고서(금융자산 10억원 이상 보유자)에 따르면, 요즘 부자들은 부동산 비중을 줄이고 금융자산 비중을 높이고 있다. 부자들이 금융자산 비중을 늘리는 이유는 뭘까? 가장 큰 이유는 부동산보다 유동화가 쉬운 금융자산을 통해 상속 및 증여세에 대비하고, 나아가 절세 목적으로 보험과 연금의 비중을 늘리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 비해 떨어진 부동산 투자수익률도 대체소득원으로 안정적인 연금소득을 선호하게 만드는 이유로 작용하고 있다. [표1]에서 보는 것처럼 자산에 부과되는 세금보다 소득흐름에 부과되는 세금이 유리하다. 자산을 많이 들고 있다가 세금폭탄 맞느니 자산의 일부를 소득흐름으로 바꿔 절세와 안정적 소득흐름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고 있는 부자들의 발 빠른 대응을 주목하자.
요즘 동네 복지관에서 만나는 노년 커플을 일명 BC(복지관 커플)라고 부른다. 복지관에서 가장 인기 있는 남녀의 조건이 부동산 부자에서 연금 받는 남녀로 바뀌고 있다. 연금소득 비중을 높이는 것은 비단 부자들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뜻이다. 일반 중산층들이 은퇴 이후 한 번쯤 마음 설레는 경험을 하려면 최소한 연금이라는 카드 한 장은 들고 있어야 한다.
죽기 전 자산고갈을 경계해야 한다
잔 칼망! 1997년 122세로 세상을 떠난 프랑스의 세계 최고령자 할머니다. 이 할머니와 관련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1960년대 중반 90세였던 칼망 할머니는 부양해줄 가족이 없어 전 재산인 집 한 채를 47세의 젊은 변호사에게 팔기로 했다. 계약 조건은 할머니가 사망할 때까지 그 집에 거주하면서 매달 2500프랑(약 50만원)을 받는 것이었다. 젊은 변호사는 할머니가 100세까지 산다고 해도 시세보다 싼 가격에 집을 살 수 있다고 판단해 얼른 계약을 맺었다. 그보다 더 일찍 죽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절대 손해 보지 않는 계약이라 여겼다. 그런데 할머니는 100세를 훌쩍 넘어 122세까지 살았다. 변호사는 할머니에게 집값의 두 배가 넘는 90만 프랑(2500프랑×12개월×30년)을 지급해야 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변호사가 할머니보다 2년 먼저 사망했다는 점이다. 결국 변호사는 살아생전 그 집을 소유해보지도 못하고 가족을 대신해 할머니를 부양한 셈이다.
2030년 우리나라는 세계 최장수국으로 등극할 전망이다. 마지드 에자티 박사 팀이 OECD 35개 가맹국의 남녀 평균수명을 예측해 세계적인 의학 전문지 에 기고한 논문에 의하면, 2030년 우리나라 여성의 평균수명은 약 91세로 세계 최초로 90세를 돌파할 것으로 예상된다. 남성의 평균수명은 약 84세로 헝가리에 이어 2위로 올라설 전망이다. 잔 칼망의 이야기가 남의 나라 일로만 여겨지지 않는 이유다. 만약 잔 칼망 할머니가 변호사와 종신계약을 하지 않고 90세에 집을 팔고 그 목돈으로 생활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도 100세 이후에는 극심한 빈곤에 허덕였을 것이며, 세계 최고령자 타이틀을 얻지도 못하지 않았을까.
고령화시대엔 죽기 전에 자산이 고갈되면 큰일이다. 특히 연금제도와 복지제도가 풍요롭지 못한 우리나라의 경우 개인이 보유하고 있는 자산이 그 사람이 죽기 전에 고갈되면 생활의 급추락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러나 잔 칼망 할머니처럼 죽을 때까지 자산에서 소득흐름이 이어질 수 있도록 해놓으면 걱정 끝이다.
칼망 할머니는 부양가족이 없어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며 따지지 말자. 이것저것 따지다간 누가 오래 남느냐는 자산과 수명의 경쟁에서 내가 이기고 마는 불행에 직면할 수 있다.
어느 날 우연히 우리 아파트 북 카페에서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한눈에 크게 공감하는 이유는 내 손으로 직접 집을 짓는 일이었다. 에서 비록 일주일이라는 단어는 의아한 마음이 들었지만, 조용한 시골에서 흙집을 짓고 노년을 맞이하고 싶은 것은 많은 사람들의 바람이기 때문이었다.
필자도 지난 시절, 시계만 들여다보며 정신없이 살아왔다. 앞만 보며 쉴 새 없이 달려왔기에 이제쯤은 쉬엄쉬엄 자연 속에서 호흡하며 살아가고 싶었다. 그야말로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아 번뇌로 가득하고, 고고한 척하며 창백한 지식인만으로 살아가는 것은 풍요 속 빈곤 생활이었다.
저자는 오스트리아에서 어렵사리 철학박사 학위를 따고, 대학에서 강의를 하며 안정되게 살아가던 중 자신의 삶에 대한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지루하게 반복되는 생활 속에서 자기모순, 자기 분열이라는 삶의 위기를 느끼게 되었다고도 한다. 결국 자신에 대한 박사학위를 단호하게 거부하고 자신의 호칭을 바꾸며 홀로 다시 서기에 도전을 한다.
종이 한 장만으로 입증하는 박사 타이틀은 진정한 의미의 박사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저자는 교수라는 직분으로 사는 내내, 이론과 실천, 이상과 현실이 분리되는 허탈한 삶만을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행복을 꿈꾸며 사는 진정한 의미의 살아있는 행복한 삶은 시골로 내려가 자아를 실현하며 이론을 실천에 옮기는 길이었다.
그는 강력하게 말하고 있다. ‘행복한 삶이란? 삶의 세 가지 영역, 몸과 마음이 편안하고 영혼이 기뻐하는 평화로운 상태를 말한다.’ 진실로 기쁨이 넘치는 삶이란 내면에서 울리는 목소리로 사는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몸이 움직이고, 마음이 움직이고, 영혼이 그에 따라 조화롭게 움직이는 것이다. 행복을 꿈꾸는 지은이의 내면 소리가 필자에게도 감동으로 다가왔다.
사람은 살다 보면 자기 분열의 고통으로 괴로울 때가 많이 찾아온다. 정신이 꿈틀대며 살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는 흙집을 지을 때면 더 이상 괴로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단호하고 자신 있게 강조한다.
오로지 흙집을 지을 때만이 몸과 마음이 하나 되어 영혼이 기뻐하며 춤을 춘다고 흥미롭게 서술해간다. 더구나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창조적 성취감으로, 손수 집을 짓고 나면 그 대견스러움으로 자신에 대한 신뢰감도 용솟음을 친다고 했다.
또한, 흙집을 한 채 짓는 것은 자연의 훌륭한 의사를 주치의로 모시는 것과 같으니, 그 집에 사는 것만으로도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 몸에 병도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 어찌 신비로운 일이 아닐까 싶다. 마침내 그는 흙집을 짓는 것이 마치 머리와 손발이 따로 노는 먹물의 세계를 벗어날 수 있는 구원의 방주와도 같다고 대단한 극찬을 했다.
결국 ‘흙집 짓기는 일종의 자기 수행의 도량’이라는 것이다. 참으로 대단한 명언들이다.
저자는 육체노동을 거의 하지 않았고 영혼이 작동하지 않았던 지난날을 과감하게 접었다. 머리로만 살아왔던 기형적인 삶에서 기초를 튼튼히 다시 세우고 삶의 방향을 완전히 전환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오랫동안 살아온 길을 정리하고 하루아침에 생각을 바꾼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속에 요동치는 갈등이 사라지고 평화가 깃들 수만 있다면 그리 못할 것도 없다. 진정한 행복을 꿈꾸며 그 관점에 따른 행동이라는 실천이 있을 때, 드디어 영혼이 함께하는 충만한 기쁨을 맛볼 수가 있다고 하는 것은 충분히 도전해볼 만한 가치가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저자의 대단한 용기와 집념이 참으로 부럽기도 했다.
이 세상은 모든 사람들이 꿈을 꾸며 살아간다. 사람에 따라 꿈도 달라지겠지만 몸과 마음과 영혼이 하나 되어 조화로운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철학적 사고를 넘어 꼭 실천에 옮겨야만 하는 필수과목 행동학 같다는 묘한 생각도 들었다. 저자의 명쾌한 삶에 깊은 공감을 하며, 그것은 필자의 내면에서도 꿈틀대고 있는 분명 살아있는 삶이었다.
언젠가 그날이 오기를 손꼽아 꿈꾸며 두꺼운 책 한 권을 단숨에 읽어 내렸다. 어느 흙집 짓는 철학자 교수가 쏟아내는 명언들은 오랫동안 진한 여운을 남겨왔다. 그것들은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필자의 일상적 생활 속에 깊이 새겨져와, 바쁜 삶 속에 잊고 살았던 꿈들을 모락모락 피어나게 만들었다.
남편과 함께 또닥또닥 흙벽을 발라대고, 훨훨 타오르는 장작불을 지필 수 있는 벽난로를 떠올리며 그날이 오기를 꿈꾸어 본다.
계절과 상관없이 즐겨 먹는 설렁탕은 깍두기가 그 맛을 좌우한다. 여름엔 흘린 땀으로 약해진 몸보신용으로, 겨울엔 언 몸을 녹여주는데 설렁탕만 한 것이 없지 싶다. 마니아들은 깍두기 국물을 설렁탕에 넣어 구수함에 얼큰함을 더하기도 한다.
그런데 하필이면 조직폭력배를 깍두기라 부르기도 한다. 이는 헤어스타일을 네모 반듯하게 자르고 다녀서 그렇기도 하고 깍두기 국물이 피를 연상시켜서 그렇게 부른다고도 한다. 누군가의 빈곤한 상상력이 죄 없는 깍두기를 여지없이 폄하시키고 말았다. 이렇듯 맛있는 김치의 종류가 아니라 조직폭력배를 이르는 별칭으로 쓰이는 것에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깍두기 애호가인 필자로서는 기분이 상하는 일이니까.
하지만 필자가 말하려는 깍두기는 이와 달리, 편을 가를 때 어느 한쪽에 붙여주는 덤과 같은 것이다. 어린 시절에는 늘 이런 깍두기가 있었다. 놀이를 하려고 편을 짤 때 짝수가 아니면, 한사람이 남게 된다. 남은 사람의 위치가 난감해지는 경우에 깍두기는 이편도 되었다가 저편도 되는 만능선수였다. 그렇다고 깍두기가 놀이를 잘 하는 것은 아니다. 뭔가 부족한 아이를 내칠 수는 없고 함께 놀기 위해 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놀고 싶은데 동생을 돌봐야 하는 언니가 데리고 온 어린애나 형보다 실력이 못 미치는 동생들, 어딘가 몸이 불편한 아이들도 깍두기로 끼워주었다.
필자는 전학을 많이 다녔다. 친구를 사귈만하면 다시 전학 가는 바람에 긴 시간 친구를 사귈 수 없었다. 초등학교 6년 동안 네 번 전학을 했다. 그때마다 늘 외롭고 말 없는 아이가 되었다. 학교마다 놀이도 조금씩 달라서 따라 하는데도 시간이 걸렸다. 그럴 때, 아이들은 필자에게 깍두기를 시켜주었다. 깍두기에게는 승리의 기쁨은 함께 누리지만, 패배의 책임은 묻지 않는다는 룰이 있었다. 깍두기의 실수를 인정해주고 너그럽게 대했다. 그래서 걸려도 죽지 않는 불사조처럼 게임 내내 함께 놀 수 있었다. 놀이 규칙은 따르지만 벌칙은 받지 않는, 술래를 피해 숨기는 하지만 잡혀도 술래가 되지 않았다. 아마 요즘 같으면 깍두기 같은 존재는 쉽게 왕따를 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약점을 빌미로 괴롭히기보다 그 약점을 보완해주고 기죽지 않고 동참할 수 있도록 하는 상생의 놀이문화였다.
깍두기를 허용한 아이들은 저도 모르는 사이 배려하는 마음을 키우게 된다. 그 작은 행복감이 씨앗이 되어 더불어 사는 가치를 아는 어른으로 성장하게 되지 않았을까.
얼마 전, 운동회에서 달리기하던 한 초등학생이 넘어졌다. 넘어진 친구를 두고 일등을 하기 위해 앞으로 달리는 대신, 뒤로 달려가 쓰러진 친구를 일으켜 세웠다. 함께 달리던 서너 명의 아이들이 다시 나란히 달리는 모습이 텔레비전 화면에 클로즈업 되었다. 얼굴 가득, 좋은 일을 한 뒤의 뿌듯함이 번지고 있었다.
‘지고도 이겼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 아닐까. 그 모습에서 깍두기였던 지난 시절의 필자를 떠올렸다.
시대가 많이 달라졌다. 그래도 따뜻한 감성과 사랑을 원하는 인간의 욕망은 어미를 기다리는 새끼 새처럼 변함없이 간절하다. 어쩌면 깍두기 정신은 그런 본능에서 싹 튼 배려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요즈음 아이들로 시끄럽던 놀이터는 휑하고 집에서 혼자 논다. 혼 밥, 혼술을 즐기는 문화가 늘어가고 있다. 무엇이 함께보다는 혼자가 즐겁게 하는 걸까? 편안한 것인가?
바로 지금 사람들은 모두가 깍두기이고 싶어 하며 속으로 울고 있는 것은 아닌가 모르겠다. 깍두기 문화가 그리워진다.
“우리의 영혼은 빈곤합니다.” 한 아이가 허공을 향해 내뱉었다. 열 명이 겨우 설 수 있는 작은 무대. 그리고 그것보다 더 보잘것없는 객석과 몇 명 되지 않는 관객. 그러나 이 외침은 초로를 지난 대배우의 가슴을 울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우리가 한 치의 주저함 없이 ‘국민 배우’라 부를 수 있는 최불암(崔佛岩). 교실에 있어야 할 나이의 이 아이들은 쫓기듯 학교를 나와 이 대배우와 인연을 맺었다. 어떤 인연이었을까.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박규민 실장(스튜디오 봄) parkkyumin@gmail.com
그는 이 아이들을 ‘학교 밖 아이들’이라고 정의했다. 성인도 아닌, 그렇다고 학생도 아닌 불안정한 신분 위에 선 아이들. 몇 명이나 되겠나 싶지만, 교육부 자료를 찾아보니 2010년에서 2014년까지 중도에 학교를 그만두는 누적 학생 수는 36만 명에 달한다. 2016년 초 진주시가 발표한 주민등록상 인구 수가 36만 명이었으니, 한 도시 전체 인구가 전국으로 흩어져 방황하고 있는 셈이다.
이 아이들에게 학교와는 다른 방식으로 교육을 지원하고자 하는 다양한 노력들이 펼쳐지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그가 이사장으로 있는 사단법인 제로캠프다. 제로캠프는 문화 중심지 홍대에서 청소년들이 문화예술을 통해 꿈을 키울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고 있는 단체.
“요즘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이 더욱 발전하면서 스승은 필요 없다고 선언해버리는 아이들이 있어요. 학교에서 잠만 자거나 아예 학교 밖으로 나오는 아이들이죠. 제로캠프는 그 아이들이 문화예술을 제대로 배울 수 있도록 가르치고 있어요. 물론 쉽지 않죠. 많은 아이들이 찾아오지만 그중 선별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사장 최불암’과 만난 날은 이렇게 찾아온 아이들이 10주 동안 노래와 춤, 연기, 영화 제작 등의 실무를 교육받고 그 결과를 객석의 관객들에게 선보이는 자리였다. 객석 구석에서 그는 이사장으로, 스승으로 혹은 대선배로 사랑이 가득 담긴 눈길로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가 TV에서 수십 년간 봐왔던 예의 따스한 눈빛으로 말이다.
왜 이렇게 학교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아이들이 늘어나는 걸까. 그는 현재의 사회 시스템이 만들어낸 결과라고 분석한다.
“우리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살고 있잖아요. 욕망을 따르는 체제. 욕망에 얽혀 있는 사회에서 그 욕구를 제대로 해결 못한 채 살아가려 하니까, 자살률도 높고 아이들도 포기하게 되는 것 같아요. 문화예술은 이런 욕구를 해소시키는 좋은 방안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위험 수위에 있는 아이들에게 손을 내밀어 같이 해보자고 제안하고, 재능에 따라 교육을 지원하고 있어요.”
실제로 그는 많은 아이들이 변화하는 모습을 눈으로 확인하고 그 과정에서 보람을 느끼고 있다. 일주일에 한 번 한 시간씩 직접 수업을 진행하는데, 아이들 이름은 기본이고 어떤 아이가 무슨 아르바이트를 하는지, 누구는 무슨 사연이 있는지 다 꿰고 있다. 하지만 그는 무언가 더 해줄 수 없는 한계를 안타까워하고 있다.
“여기서 10명 중 한두 명이라도 제대로(데뷔가) 되어야 하는데, 뽑히는 것이 쉽지 않아요. 소속사라도 있어야 기대라도 할 텐데 말이에요. 그래도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삶의 가치관을 만들어나가려는 노력은 기특하죠. 예술을 통해 자기를 발견하고, 그 과정에서 삶의 아름다움을 깨달을 수 있으니까요. 또 그 깨달음을 표현할 수 있는 창의적 수단을 갖는 것은 무척 의미 있는 일이죠.”
그는 이 아이들의 무대를 어떻게 봤을까? 극중 연출가와 배우가 다투는 장면은 마치 ‘연출가 최불암’이 배우를 다그치다 참지 못해 직접 연기를 하게 된 에피소드를 보는 듯했다. 실제로 ‘청년 최불암’은 연극 연출가로 나섰다가 배우의 노인 연기가 마뜩치 않아 직접 배우로 데뷔하게 됐다.
“어떤 틀에 가두지 않고 자기들만의 세계를 완전히 구현했다고 평가해요. 가식이나 가면을 벗어던지고 자기들의 마음을 읽어주길 바란 것 같습니다. 특히 자기들 꿈이 소극장이라고 이야기한 것을 보면 아마 스스로를 표현할 수 있는 무대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 같아요. 아이들은 시간만 나면 바로 이 극장에 모여 앉아 노래하고, 연습하며 자유롭게 생각한 것을 표현할 수 있는 지점을 찾았어요. 자신이 꿈꾸는 바를 그대로 내놓으려 애쓰는 모습은 일종의 자기의 진상(眞相)을 내놓기 위한 절규일지도 모르겠어요.”
스승이자 대선배로, 그가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어떤 것일까. 한 아이는 무대에서 “배우란 남에게 보여주려고 있는 것”이라고 당차게 소리쳤는데, 혹시 눈앞의 스승에게 대선배에게 전한 말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배우란 사회, 사람의 반향판이에요. 관객이 그 배우를 보면서 자기 자신을 순화시키는 거죠. 중국에서는 희곡에 의해 움직인다는 뜻에서 연기자라고 불렀죠. 우리 조상들은 광대(廣大)라고도 했어요. 넓게 포용한다는, 지금으로 치면 매스미디어의 일종이라 할 수 있어요. 실제로 임금에게 국민의 뜻을 전달하기도 했잖아요. 그런 의미를 안고 성장하면 좋겠어요.”
자신이 꿈꾸는 바를 그대로 내놓으려 애쓰는 모습은 일종의 자기의 진상(眞相)을 내놓기 위한 절규일지도 모르겠어요.
글 배국남 대중문화 평론가(knbae24@hanmail.net)
“유흥업소에 안 간다. 2006년 이후로는 한 번도 안 갔다. 왜냐하면, 4만5000원씩 아이들을 후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돈이면 쓰레기더미 안에 있는 아이들을 도와줄 수 있다. 파리가 눈에 알을 낳아도 쫓을 힘이 없는 아이들이다. 그 아이를 살리면 그 아이가 변해서 사회를 살린다. 내가 번 돈이 이렇게 소중한 일에 쓰인단 걸 목격했기 때문에 큰돈을 그렇게 쓸 수 없게 됐다.” 구호단체 컴패션 홍보대사에서부터 북한 어린이 돕기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걸쳐 부인 신애라와 함께 사랑나눔 실천을 하는 스타 차인표씨의 말이 큰 울림을 준다.
자살률 1위, 노인빈곤율 1위, 사회적 관계 최하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10월 발간한 보고서 이 적시한 한국의 상황이다. 취업난, 양극화 등으로 인해 가족 해체가 급속히 진행되고 부모에게 버려지는 아이들도 급증하고 있다. 어느 때보다 사랑나눔이 절실할 때다. 하지만 후원, 기부, 봉사 등 사랑나눔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대중의 사랑을 받는 연예인 스타들이 선행에 적극적으로 나서 많은 사람을 사랑나눔 실천에 참여시키는 아름다운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연예인 스타들이 사랑나눔 기폭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1981년부터 초록우산어린이재단의 후원회장을 맡아 불우한 어린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3년 전부터는 제로캠프라는 청소년들을 위한 비영리 단체의 이사장직을 맡아 문화 예술을 통한 비행 청소년의 교화에 나서는 등 다양한 사랑나눔 실천을 펼치고 있는 최불암씨와 백혈병 어린이, 위안부 할머니, 네팔과 중국 지진 피해자 등에게 거금을 쾌척하는 등 전방위적 선행을 펼치고 있는 송중기씨 등 많은 연예인 스타가 사랑나눔 실천을 활발하게 하고 있다.
최근 들어 연예인 스타들의 사랑나눔의 양태가 진화하며 선행의 스펙트럼이 넓어지고 있다. 그동안 불우이웃이나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성금 기부나 자선단체의 홍보대사, 방송사의 자선 프로그램 출연 등이 스타 선행의 주류를 이뤘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김혜자·한지민·유재석의 재능기부, 김정은·이영애·문근영·한혜진·박해진의 국내외 빈민지역에 학교, 병원, 도서관, 우물 등 시설 기부, 최불암·정애리·고두심·김제동의 재단을 통한 불우 청소년 지원, 이효리·송혜교·송중기의 위안부 할머니 지원 등 스타들의 사랑나눔의 스펙트럼이 크게 확장됐다.
기부 형태도 불우이웃과 시설에 대한 후원, 청소년과 학교의 장학금 쾌척,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성금기탁 위주에서 벗어나 한지민·송혜교 등 스타들의 책 인세 기부, 이승기·박해진 등 쌀 화환 기부, 최강희의 골수 및 장기기증, 차인표-신애라·정혜영-션 부부의 제3세계 어린이 후원금 지원, 김장훈·하춘화의 행사와 캠프를 통한 기부 등 매우 다양해졌다.
일회성 이벤트에 그쳤던 연예인의 사랑나눔과 선행은 수십 년 동안 지속해서 전개해나가는 모습으로 변모하고 있다. 김혜자·최불암·고두심·하춘화·안성기·정애리·차인표·김장훈·최수종·유재석·션·장나라 등은 10~40년에 이르는 장기적 선행을 펼치고 있다.
사랑나눔을 시스템화하거나 조직화하는 스타들도 많다. 공연 등 수입원이 생기는 이벤트 수입의 일부를 계속 기부하는 김장훈을 비롯해 적지 않은 스타들이 자신의 연예활동 수입의 일정 부분을 떼어 소년 소녀 가장이나 독거노인, 장애인들을 지속해서 돕는 것을 체계화했다. 김원희·김정은 등은 ‘따뜻한 사람들의 모임’을, 최수종·오윤아·김수로 등은 ‘좋은 사회를 위한 100인 이사회’를 만들어 조직적으로 봉사활동과 기부사업을 펼치고 있다.
국내의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이웃을 대상으로 주로 이뤄지던 스타들의 사랑나눔은 아프리카, 동남아 등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다. 안성기·김혜자·정애리·박해진·이영애·송혜교·문근영 등 많은 스타가 세계 각국의 어려운 상황에 있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나누고 있다. 이민호·장동건·이승기·장근석처럼 스타와 팬클럽이 함께 자선활동이나 선행활동에 나서는 행태도 이제는 일상적 풍경이 됐다.
스타들은 왜 사랑나눔에 나서는 걸까. “조그마한 도움이 한 아이의 생명을 살리고 삶을 변화시킨다. 그리고 도움을 받은 아이가 커서 사회와 이웃에 도움을 주는 사람으로 성장한다. 참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이다.”오랫동안 청소년들에게 장학금 기부를 하고 장애인단체 홍보대사 등 다양한 방면에서 사랑나눔을 실천하는 고두심씨의 말이다.
40여 년 동안 불우 아동과 청소년들에게 따뜻한 손을 내밀어온 최불암씨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에 대한 관심과 투자만큼 소중한 일이 없다. 더욱이 힘들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아이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밀면 아이가, 사회가, 국가가 긍정적으로 변한다.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국내에 있는 고아는 물론 굶주림에 허덕이는 아프리카의 아이들까지 몸과 마음으로 포근히 감싸 안는 김혜자씨는 2019년까지 후원금을 미리 내고 이렇게 말했다. “광고를 찍거나 돈이 생기면 후원하는 아이들 것을 떼어놓는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늘 불안하다. 내가 돈이 없어 안 주면 걔네들은 굶으니까. 나야 돈이 없으면 우리 아들이 밥이라도 먹여주겠지만, 그 아이들은 안 되지 않나. 당연한 일이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오랫동안 9억 원에 가까운 돈을 익명으로 기부하고 시골 지역에 청소년을 위한 공부방 등을 지원한 문근영씨는 “제가 기부 등을 하면서 더 행복하고 매우 기쁩니다. 이런저런 상황들, 사연들, 사정들이 있지만 기부할 때 ‘우리 같이 그래도 열심히 살아봐요’라는 그런 메시지 정도는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요”라고 기부 이유를 밝혔다.
루게릭병 환자 돕기에서부터 어린이 재활병원건립 후원까지 다양한 자선사업과 캠페인을 왕성하게 펼쳐 ‘선행천사’라는 별칭을 얻은 션. 그는 사랑나눔 실천 공개에 대해 “일부 사람들이 (사랑 나눔을) 조용히 할 수 있는데 왜 공개하냐고 말한다. 연예인이기에 많은 사람에게 알릴 수 있기 때문이다. 좋은 일을 알려서 그걸 공유하면 더 빨리 이룰 수 있다. 겨울을 나는 데 필요한 연탄이 300만 장인데, 혼자서 기부할 수 없는 양이기 때문에 많은 분에게 알리면 300만 장의 기적을 쉽게 이룰 수 있다”고 설명했다.
영화 ‘죽여주는 여자’는 종로 일대에서 노인들을 상대로 성매매를 하며 근근이 살아가는 소위 ‘박카스 할머니’ 이야기 이다. 노인들 사이에서 ‘죽여주게 잘하는 여자’ 로 소문이 나있는 할머니가 진짜로 여러 가지 이유로 죽고 싶은 노인들을 진짜로 죽여주는 줄거리로 안락사 또는 존엄사에 대한 무거운 화두를 던지는 영화이다.
영화를 보기도 전에 이미 공개된 줄거리만 보고도 마음이 무거워지고 왠지 불편한 진실을 피하고 싶어 보고 싶지가 않았다. 그만큼 우리 시니어들에게는 마치 선전포고 하듯 우리 또는 우리 주변에 곧 닥칠지도 모를 문제이기에 더 불편하고 고통스럽게 다가온 영화였다.
주인공을 맡은 여배우도 연기하기 전에 하고 싶지 않은 마음과 해야 한다는 마음에 많이 망설였다고 한다. 언론 인터뷰에서 여배우는 어렵게 영화를 찍기로 결정하고도 촬영 내내 곤혹스러웠고 영화 완성 후에도 우울감에 헤어나기 힘들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주연 배우의 마음처럼 필자도 보고 싶지 않은 마음과 마치 숙제처럼 봐야 한다는 의무감 사이에서 망설이다 결국 막 내릴 즈음 이 영화관을 찾았다. 그리고 그 배우처럼 영화를 보는 내내 불편했고 보고 난 후에도 몹시 우울했다.
돈은 있지만 병들어 수족을 움직일 수 없는 노인, 가난하고 치매 초기 노인, 그리고 몸도 정신도 건강하고 경제적으로 여유도 있지만 고독 사를 두려워하는 외로운 노인 이렇게 세 명의 노인을 하루하루 몸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는 절대빈곤의 여자가 차례로 죽여준다.
죽여주는 사람도 죽임을 당하는 사람도 다 우리나라 노인문제를 지나칠 정도로 사실적이고 덤덤하게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는 미래에 대해 아무런 희망도 없이 연명만 하고 있는 자신의 삶을 죽음보다 고통스러워하고 품위와 자존심을 지켜주고 싶어 하는 노인들을 통해 안락사(존엄 사)에 대한 논의에 물꼬를 트고 싶어 하는 거 같았다.
그러나 영화가 지나치게 덤덤하게 존엄사로 직진하다 보니 주제전달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감안해서 봐도 심하게 말하면 살인(자살) 방조의 느낌이 강하게 들어 불쾌하기까지 하였다.
힘들고 어렵게 남아 있는 자신의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고 있는 현재 몸이 불편하거나 가난하고 외로운 노인이 삶을 모두 너무 굴욕스럽게 만든다는 잔인함이 느껴지기까지 하였다,
아무리 노후준비를 완벽하게하고 건강관리를 잘한다 한들 절대 병들지 않고, 외롭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예견치 않은 병과 고독은 누구에게나 올 수 있다.
이런 우울한 영화를 피하기보다는 잘 죽는 법에 대하여 생각하고 현명에 맞을 준비를 하게 하는 ‘웰 다잉(well-dying)’에 대하여 생각할 기회를 가져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육체적, 정신적 건강의 통해 건강하고 삶을 유지하며 ‘웰빙(well-being)’ 못지않게 ‘웰 다잉(well-dying)’도 함께 연장선에서 생각을 해야 할 거 같다. 웰빙의 아름다운 완성은 웰다잉이기 때문이다.
물질문명이 넘치는 미국에도 사람의 정서가 도를 넘어 거리를 활보한다. 부자들이 사는 도시 산타모니카 해변에는 여기저기 홈 리스들이 즐비하다. 뿐만 아니라 코리아 타운으로 이어지는 다운타운 윌셔 길가에도 마약과 술병을 거머쥔 거지들이 줄을 잇는다. 문명 선진국의 아이러니였다.
세탁소가 시작되는 6시 30분. 필자는 가게 앞을 청소하기 위해 어김없이 빗자루를 들었다. 밤새 스치고 간 사람들의 흔적을 치우기 위해서다. 문을 열고 나갔을 때 깜짝 놀랐다. 하얀 백발의 할머니가 머리를 풀어헤치고 엎드려 있다. 그녀는 기도하듯 앞으로 엎드려있고 거무죽죽한 더러운 담요를 덮어쓰고 있었다. 주변에는 뺑 돌아 하얀 가루들이 범벅이 되어 뿌려져 있다. 필자는 무섭지만 궁금해서 살 금살 금 다가갔다. 그때, 할머니가 갑자기 꿈틀대서 움찔하며 뒷걸음을 쳤다.
다시 큰 숨을 몰아쉬고 가깝게 앞으로 갔다. 일단은 할머니 때문에 청소할 수가 없고,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였다. 할머니는 담요 속에서 작은 소리로 흥얼거리며 노래를 했다. 무슨 노래인지 듣고 싶어 귀를 쫑긋 세워 기울였다. 영어로 부르는 영어 노래였다. 필자는 도대체 알아들을 수가 없는 원 어민 노래로 수준급이었다. 영어 발음에 목청까지 엄청 좋아 신기했다. 그러나 할머니가 한 번씩 푹석 거리면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러왔다. 더 이상은 곁에 머무르고 싶지 않았다. 마침 남편이 빨리 들어오라고 불러댔다.
할머니는 낮 동안에는 동네 온갖 쓰레기들을 마켓 카트에 가득 모아서 이리저리 끌고 다닌다. 이것저것 무거워진 쓰레기 더미가 마치 귀중한 살림이라도 되는 듯 품고 다니다가, 저녁노을이 서산에 오를 때쯤이면 어김없이 세탁소 앞에 화려한 저녁 살림을 펼쳤다. 어느 날 늦게까지 야간 일을 할 때 알게 된 사실이다. 할머니는 아침이 되면 귀신같이 어디론가 사라지곤 했다. 더 신기한 것은 밤새 뿌려놓은 하얀 가루들의 정체도 함께 사라졌다. 깨끗하게 청소도 되어있다.
유난히 산타모니카 길거리에는 홈 리스(거지)가 많았다. 거대한 미국 땅에도 물질이 넘쳐흘러 풍요로움 속, 빈곤 투성이들이 거리를 헤매며 약에 취해 흐느적댔다. 필자는 그 할머니가 궁금해 다시 밖으로 나왔다. 엎드려 있던 할머니가 온데간데없이 깨끗하게 사라졌다. 그때 머리 위로 헬리콥터 한 대가 윙윙대며 원을 그리고 있다. 또 무슨 일이 터진 것이다. 미국은 조그마한 일이라도 났다 하면 경찰과 헬리콥터가 합동 작전으로 총출동을 하며 난리가 아니었다.
그날 이후로 할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병원으로 실려간 것 같다고 동네 사람들은 말했다. 늘 가게 앞을 노래로 흥얼거리며 지켜주었는데 할머니가 없으니 어딘가 모르게 허전해왔다. 필자는 갑자기 한국에 계시는 친정 엄마 생각이 났다. 필자의 어린 시절, 친정 어머니도 정신 줄을 놓으시고 늘 병원에 계셨다. 아버지를 다른 여자에게 빼앗기고 그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를 못하셨다. 어머니는 마음이 여려서 더 아픔이 크셨던 모양이다. 마치 그 할머니가 필자의 어머니와 겹쳐서 연상이 되며 안타까운 마음에 더욱 궁금해졌다.
두어 달쯤이나 지났을까. 다시 할머니가 가게 앞 그 자리로 다시 찾아온 것이 분명했다. 깨끗하게 청소가 되어있기는 했지만 하얀 가루의 흔적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이웃 가게들을 다니며 그 할머니 소식을 묻기 시작했다. 40년이 된 옆집 이란 마켓에서 그 할머니 얘기를 들을 수가 있었다. 할머니는 옛날에 노래하는 가수였다고 했다. 달러도 수중에 많이 갖고 있는 부자라고도 했다. 어느 날부터 정신을 잃고 집을 나와 싼타모니카 거리에서 20년째라고 했다.
세탁소 앞에서 예쁘게 생긴 할머니가 자리를 잡은 것은 필자가 세탁소 주인이 된 이후부터라고 했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소름이 끼쳐왔다. 그날 이후부터 아무리 냄새가 나도, 리나 할머니를 미워할 수가 없었고, 10여 년 내내 할머니는 필자의 가게 앞을 지켜주었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영문을 모르는 채 소리 소문 없이 또 사라져 버렸다. 어느 누구도 할머니의 행방을 알 수가 없었다.
아침 일찍 가게를 나가 문을 열려고 하니 엄청난 일이 벌어져있다. 가게 전면 두꺼운 유리창이 총탄에 맞아 박살이 나 있었다. 필자 부부도 모르는 밤새 벌어진 대형사건이었다. 밤거리에서 마약에 취한 정신 나간 미국인이 총알을 마구 쏘아대며 스트레스를 뿜어댄 것이다. 기가 막힐 일이 터졌지만 큰 피해 없이 잘 마무리가 되었다. 잠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곳이 또 선진국 미국이었다.
그때, 갑자기 리나 할머니 생각이 또 떠올랐다. 밤마다 가게 앞에서 잠자리를 하며 세탁소를 지켜주었던 그 할머니 덕분에, 무사하게 지내온 지난날이 무척이나 감사했다.
필자는 지난달 6월 23일부터 24일까지 1박 2일 간의 ‘인생나눔교실’ 멘토봉사단 강원권 1차 교육 워크숖을 다녀왔다. 2개월 전 지인의 소개로 사업을 알게 되었고 지원신청서를 접수한 후, 1차 서류 심의와 2차 면접 심의를 거쳐 멘토봉사단 후보로 선발되어 이번 워크숖에 참석하게된 것이다.
인생나눔교실에 대하여 잘 모르시는 분들을 위하여 간단히 소개해 드린다면, 문화체육관광부가 사업 지원 및 운영 총괄을,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멘토 선발과 교육을 담당하며 사업의 전반적인 세부계획을 수립합니다. 전국의 5개 권역(수도권, 강원권, 충청권, 영남권, 호남·제주권)에 있는 지역주관처는 멘토 관리와 활동을 지원하고 멘티 기관에 매칭 해주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튜터는 멘토를 가장 가까이서 지원하는 기획자로 멘토링 프로그램 설계 시 멘토의 경험과 지혜가 멘토링에 잘 스며들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합니다.
5개 권역별로 튜터 5인, 멘토 50인 내외를 선발하여 멘티기관(중학교, 지역아동센터, 보호관찰소, 군부대, 북한이탈청소년대상기관 등 총 250개 그룹)과 연계하여 멘토링 활동을 하게 됩니다.
이 사업을 추진하게 된 동기는 급속히 진행되는 핵가족화와 전통 커뮤니티의 붕괴는 각종 사회문제로 이어져 어려움을 겪는 초보자 세대들이 많아지고 있다. 전통사회에서는 결혼, 육아, 취업, 입대 등의 문제가 그리 큰 어려움의 대상이 되지 않았으나, 현대에는 초보자들에게 커다란 어려움과 문제로 인식되고 있다. 오늘날 우리사회의 이러한 다양한 문제는 국가 발전의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어 이를 해결하기 위한 나눔·소통·배려의 인문정신가치가 구현될 수 있는 사업을 필요로 하고 있는 상황이다.
2014년 시범사업을 시작으로 2015년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된 인생나눔교실은 이와 같은 우리사회의 다양한 문제를 경험하고 극복한 숙련(은퇴)세대와 초보자(새내기)세대 간에 나눔과 배려·소통·공감의 인문정신가치가 체계화 되도록 하는데 주요한 목적이 있다.
그러다 보니 교육내용은 인생나눔교실에 참여하는 핵심주체인 멘토는 숙련세대, 은퇴세대, 노년세대 등으로 지칭되지만, 고령사회로 전개되는 현대사회 흐름 속에서 멘토로 새롭게 인생2막을 열어갈 수 있도록 하고, 사회적 변화에 긍정적인 인식을 확장하고, 다양한 환경과 세대 층으로 구성된 멘티를 보다 폭넓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멘토에 대한 개념적 이해와 소양과 마음가짐을 갖도록 구성되어 있었다.
물질적 성장이 정신적 풍요로 이어지지 못하고 점점 더 마음이 빈곤해지는 현재의 안타까운 현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전 세대가 함께 고민하는 과정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이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은 고령사회로 진입하고 있는 사회변화 속에서 전 세대 모두에게 중요한 물음이 되고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노년(숙련)세대는 삶을 통해 켜켜이 쌓아온 다양한 경험과 지혜를 여러 세대와 소통하고 교감하면서, 인생 선배이자 삶의 길잡이로서의 중요한 역할을 부여받고 있다. 선배세대의 삶속에 녹아 있는 인문적, 정신적 가치를 다른 새내기 세대와 나누고 교류하며 함께 행복해지는 사회를 꿈꾸는 것이다. 인생 나눔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이번 교육을 다녀오며 특히 지금까지의 삶을 좀 더 체계적으로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해졌고, 미천한 필자의 경험과 지혜일지라도 봉사하려는 마음과 열정을 되새기는 좋은 기회였다.
인생선배인 시니어 세대가 삶을 통해 쌓아온 지적, 정신적 자산과 몸소 겪으며 체득한 지혜와 연륜은 훌륭한 가치가 있다. 이를 다른 세대들에게 나누고자 할 때 가뭄에 단비처럼 촉촉이 마음을 적시고 세대를 넘어선 공감을 이끌어 내는 힘을 발휘할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