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홧가루 날리는 5월의 산천(山川)은 풍요롭기 그지없다. 새빨간 덩굴장미가 담장을 타고 굽이굽이 올라가는 모퉁이에서 단발머리 소녀가 손짓하던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5월 중순의 어느 날, 철원평야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한창 모내기 철의 철원평야에는 싱그러움이 내려앉아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평화가 묻어난다. 얼마쯤 달렸을까? 영북면을 지나 넓은 평야 지대와 개활지를 가로질러 달리다 보니 관인으로 접어들면서 한탄강 줄기가 서서히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녹음이 짙은 금학산이 눈앞으로 불쑥 다가온다. 군 시절을 회상하면서 이곳이 40여 년 전, 초산 부대에서 소대장 실습을 하던 곳이라는 것을 상기할 수 있었다. 눈이 부시도록 화려한 초록의 물결을 헤치며 도착한 곳은 한탄강 자락에 있는 민물매운탕집. 요 며칠째 전국적으로 쏟아부은 비로 인해 흙탕물이 된 강물은 강기슭 전체에 범람해 있었고 요란하게 흐르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친구와 강가에 앉아 장어구이와 민물매운탕으로 배를 불리면서 오랜만에 회포를 풀었다. 맥주 한 잔을 반주 삼아 맛있는 점심을 먹은 우리는 “어디로 갈까?”, “여기까지 왔으니 노동 당사를 들러 백마고지로 가면 어떨까?” 하며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노동당사가 나타났다. 노동당사는 철원이 북한 땅이었을 때 북한 조선노동당이 지은 러시아식 건물이다. 다 허물어진 콘크리트 건물은 뒤는 무너지고 앞부분만 겨우 구색을 갖춰놓은 위태로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검게 그을린 시멘트 건물과 대비되는 새파란 잔디밭이 싱그러웠다. 노동 당사에서는 공산당 사무도 보고, 사람들 고문도 했다고 한다. 건물 벽 여기저기에 총탄 흔적이 그때의 사건들을 생생하게 증언해 주는 듯했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해 준 노동당사 건물을 한 바퀴 돌면서 참혹했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다. 공산당원들이 철수하면서 지역의 유지들을 붙잡아 건물 지하에 가두어 놓은 채 학살하고 매몰했는데 이후에 그 유골들이 발견되었다. 밤마다 슬픈 영혼들의 울음소리가 들리기도 했다고 한다.
노동당사 앞에서는 넓은 개활지에 천막을 치고 지역특산품을 진열한 장이 들어서 있었다. 한쪽에서는 무대까지 설치한 채, 두 남녀가 구성지게 색소폰을 불고 있었고 사람들이 쭉 둘러서서 흥겨움에 몸을 흔드는 모습도 보였다.
강원도는 2018년 5월 1일부터 북한과 접경지역을 ‘평화지역’으로 바꾸기로 했다. 4·27 판문점 선언으로 하늘, 땅, 바다 교통망이 열리고 강원도는 남북경협 통일시대 준비에 돌입하면서 정상회담 후속 조치를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남북 관계가 개선되면서 접경지역의 부동산 시장이 들썩이고 있는 가운데 경기 북부인 연천군에 이어 강원도 지역도 활발하게 거래 문의가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민통선 인근 지역의 땅값도 덩달아 들썩이며 지금은 많이 오른 상태라고도 한다.
노동 당사를 견학하고 바로 백마고지 쪽으로 차를 몰았다. 멀리서 보이던 높은 백마고지 기념비가 가까워져 오자 하늘 높이 승천이라도 할 듯이 발을 번쩍 치켜든 백마의 동상이 햇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백마고지전투위령비를 지나 한참을 올라가니 드디어 역사의 현장이 눈에 들어왔다. 아기 벼가 바람에 간들거리는 광활한 평야 건너에 백마고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아군 GP 초소가 보이고 그 너머에 북녘땅도 보였다. 말 없는 백마산 기슭, 백마고지는 해발 395m의 고지로 6·25전쟁 때 국군과 중공군이 이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백마고지 전투는 정전협정을 앞둔 1952년 10월6일부터 열흘 동안 무려 7번이나 고지의 주인이 바뀌는 등 아군과 중공군 간의 치열한 혈전이 벌어졌던 피의 고지전이었다. 28만 발의 포탄으로 15,000명의 사상자를 내면서 10일간의 싸움 끝에 24번 만에야 우리 손에 들어온 격전의 고지 백마산은 깊은 침묵 속에 잠겨있다. 한국군과 중공군은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전략 고지 백마를 탈취하기 위해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전개하였다.
심한 포격으로 산등성이가 허옇게 벗겨져서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백마가 쓰러져 누운듯한 형상을 하였으므로 백마고지라 부르게 되었다. 1951년 7월 정전회담이 시작되어 정전협정이 체결되는 시점의 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삼기로 정한 뒤 한국군과 유엔군은 북한군과 중공군에 맞서 조금이라도 유리한 지역을 차지하기 위하여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백마고지는 중부 전선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철원, 김화, 평강 즉 철의 삼각지대의 하나인 철원평야와 서울을 연결하는 군사적 요충지로서 당시 김종오 소장이 지휘하는 국군 제9사단이 방어하고 있었다. 1952년 10월 6일 중공군은 백마고지 일대에 2000여 발의 포탄을 투하하며 공격을 개시하였는데 열흘간 24차례나 주인이 바뀔 정도로 혈전을 치른 끝에 제9사단이 중공군을 격퇴하고 승리하였다.
어김없이 6월이 오면 이 땅에서 벌어졌던 동족상잔의 전쟁인 6·25 전쟁이 기억난다. 이제는 명분 없는 전쟁의 역사에서 우리 모두 자유로워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아카시아 꽃이 흐드러지게 핀 철원평야를 지나면서 이토록 평화로운 이 강산을 고스란히 후손에게 물려주는 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책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귀갓길을 서둘렀다.
2011년, 신현림(申鉉林·57) 시인은 ‘딸아, 외로울 때는 시를 읽으렴’ 1, 2편을 엮었다. 저마다 인생의 아픔을 이겨내고 있을 이 세상 딸들을 위로하고 응원하기 위함이었다. 그녀 역시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앞날이 캄캄하게 여겨졌던 어린 시절, 지혜를 갈망하며 시를 읽었다. 삶의 경구로 삼을 시구를 모으며 나약한 정신을 탄탄히 다졌고, 긍정적인 시의 리듬은 자연스레 그녀의 몸과 마음에 깃들었다. “시를 사랑하는 사람은 늙어도 늙지 않고, 절망스러울 때도 절망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신현림 시인. 그녀를 아주 오랜만에 다시 만났다.
3년 전,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 어머니를 향한 애틋한 사랑을 들려줬던 신현림 시인. 이번에는 자녀 세대를 위해 새롭게 엮은 시집 ‘딸아, 외로울 때는 시를 읽으렴’(개정판, 이하 ‘딸아’)과 ‘아들아, 외로울 때 시를 읽으렴’(이하 ‘아들아’)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했다. 베스트셀러인 ‘딸아’를 읽은 독자들이 종종 아들을 위한 시집도 엮어 달라고 했는데, 그 바람이 ‘아들아’로 이뤄진 셈.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이전과 같은 인터뷰 장소에서 신 시인을 만났다. 변함없이 호쾌한 특유의 미소에는 그녀의 파란 카디건처럼 청아하고도 따스한 기운이 번졌다. 한쪽 손의 커다란 캐리어가 눈에 띄었다. 어디 여행이라도 가시느냐 물으니 기부할 새 시집들을 배송하고 오는 길이라고. 미혼모의 집, 소년원, 해바라기 센터 등 기부처를 직접 찾아 정리했는데, 40곳이나 된단다.
“요즘 애들이 입시에 관한 것 외에는 책을 잘 안 읽는대요. 물론 이 책들도 곧바로 읽히고 위안이 될 거라 생각하지는 않아요. 공짜로 온 책이니 어디 한구석에 처박아두겠죠. 언젠가 비 오고, 쓸쓸하고, 잠이 안 올 때 불현듯 들춰볼 거예요. 한 장, 두 장 넘기다가 ‘어? 괜찮네?’ 하고 시가 와 닿으면 그때부터 읽는 거죠. 그러다 ‘시가 좋은 거구나’ 알게 되면, 뭔가 쓰고 싶고, 표현하고 싶어져요. 그렇게 한두 줄 일기라도 쓰게 되고요. 글을 쓰는 여유를 찾았다면, 그 자체로도 인생의 중심을 잡는 데 효과가 있죠.”
지혜는 시간과 더불어 온다
괴롭고 슬플 때마다 시를 읽으며 자신을 위로한 신 시인은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나 시는 정신의 양식이며 구원의 등불이었다”는 파블로 네루다의 말을 절감한다. 살다 보면 누구나 좌절을 느끼게 마련. 그녀는 특히 인생의 성장통을 겪는 아이들이 장차 살아가며 버팀목으로 삼을 수 있는 시 한 편을 간직하길 바랐다.
“부모와 친구에게도 말하기 힘들 만큼 절망스러울 때, 자기 마음을 다스릴 시가 있으면 좋아요. 누군가에게 듣는 잔소리가 아닌 글로 보는 시구는 오롯이 나와의 침묵 속에서 읽힙니다. 내 안에서 진정 위로받는 시를 만났을 때의 기쁨은 정말 대단하죠.”
신현림 시인의 인생에 버팀목이 돼준 시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동안 위로받은 여러 작품 중에서 그녀는 시의 경이로움을 처음 느끼게 해준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시 ‘지혜는 시간과 더불어 온다’를 꼽았다. ‘잎은 무성해도 뿌리는 하나/ 거짓 많던 내 젊음의 나날/ 햇빛 속에서 잎과 꽃들을 흔들었지만/ 이제 나는 진실을 찾아 시들어가리’라는 단 네 줄의 시가 소녀의 마음에 큰 울림을 주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지혜는 시간과 더불어 온다’를 읽으면서, 막연하게나마 늙음을 상상했던 것 같아요. 아, 내가 나중에 나이를 먹겠지만, 그래도 지혜를 얻을 수 있겠구나. 늙는다는 건 뭔가를 잃어버리는 게 아니구나. 아주 짧은 시인데도, 긴 여운이 남았었죠. 또 그때부터 시를 사랑하게 됐고요.”
열일곱 소녀는 어느덧 세월이 흘러 쉰일곱이 됐다. 40년 전 읽었던 시 덕분에, 나이 듦이 꼭 두렵지만은 않았다. 시의 제목처럼, 그녀가 나이 듦을 통해 얻은 인생의 지혜는 무엇일까?
“아픔까지 놓아버릴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는 거예요. 젊을 땐 마음에 상처가 생기면 한 일주일을 끙끙 앓잖아요. 나중에 보면 별거 아닌데도 당시엔 너무나 크게 와 닿으니까. 그런데 이제는 사랑하며 살기에도 부족한 시간이잖아요. 괴로운 건 툭툭 내려놓고 집착하지 않으려 하죠.”
그녀는 평소 ‘내가 사람들에게 사랑을 얼마나 줬는가’를 자문하며 주변을 돌아본다. 더불어 “이제는 주는 나이”라고 강조하는 신 시인. ‘주는 나이’는 몇 살이냐고 물으니 숫자보다 명쾌한 대답을 들려줬다.
“‘선생님’ 소리 듣기 시작할 때부터죠.(웃음) 내게도 언젠가부터 여기저기서 선생님, 선생님, 그러더라고요. 이제는 내가 돈도 쓰고, 밥도 사고, 그렇게 사랑을 줘야 할 때가 온 거죠.”
슬픔 없는 앨리스는 없다
신현림 시인을 만나보면 그녀가 시를 아주 열렬히 사랑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시에 대한 애정이 남달라 보인다고 말하자 “아름다우니 사랑할 수밖에 없다”며 눈을 반짝인다.
“시를 사랑한다는 건 아름다움을 사랑한다는 거죠. 아름다움은 규정된 게 아니에요. 또 계산 없이 순전한 마음에서 오는 사랑이 아름답듯, 순전한 영혼의 상태에서 써지는 게 바로 시가 아닐까요? 사랑, 아름다움, 시, 이 모든 게 다 같은 거라고 봐요.”
신 시인의 눈에 가장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존재는 아마 하나뿐인 딸일 것이다. ‘딸아’의 초판본이 나왔을 때만 해도 초등학생이었는데, 이제는 엄마와 입시제도에 관해 논담할 만큼 성숙해졌단다. ‘딸아’ 개정판에는 딸에게 보내는 편지들이 추가됐다. 물론 시집은 세상의 수많은 딸을 위한 것이지만, 아무래도 그녀의 진짜(?) 딸은 감회가 남다르지 않을까. 엄마가 엮은 시집을 읽고 딸이 가장 위안을 얻은 시는 무엇일지 궁금했다.
“맨 처음 시집이 나왔을 때는 어린 나이라서 읽기 어려웠죠. 이제 고등학교 2학년인데, 새로 나온 책도 어제야 줬어요. 딸이 기숙사에서 생활하거든요. 아직은 시집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못해봤네요. 그런데 나도 참 궁금해요. 우리 딸이 어떤 시를 가장 좋아할까? 꼭 물어봐서 알려줄게요.(웃음)”
인터뷰를 마치고 며칠 뒤, 그녀와의 전화 통화에서 그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수많은 작가의 수많은 시 중에서 딸이 꼽은 최고의 작품은 바로 엄마 신현림의 ‘슬픔 없는 앨리스는 없다’였다. ‘매일매일 축제이니/ 우울해하지 마/ (중략)/어디에 있든 태양 장미를 잃지 마/ 너를 응원하는 나를 잊지 마’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 속 ‘너’라는 주체에 대해 딸은 이 세상 어느 독자보다도 가깝게 느꼈을 것이다. 딸을 위해 시를 쓰는 엄마, 엄마의 시를 읽는 딸, 이 뜨겁고 오묘한 감정은 두 사람만이 알고 있을 테다. 그러나 세상 모든 엄마가 시인처럼 자녀를 위해 시를 쓸 수는 없다. 그녀는 좋은 시집을 읽고 대화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조언한다.
“아들딸에게 시집을 한 권 선물해보세요. 재미있는 영화를 함께 보면 그것을 매개로 이야기를 나누잖아요. 시집을 읽고 좋은 시를 공유하며 서로 인생의 덕담을 나눠봤으면 해요. 부모와 아이 모두 영혼이 유익해지는 경험을 하게 될 거예요.”
그녀는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되도록 많은 이가 시를 가까이하길, 또 시처럼 살아가길 바란다. 복잡하고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 속 짧고 명쾌한 깨달음을 주는 장점도 있지만, 시의 연과 연 사이 공간처럼 이따금 쉬어가는 쉼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매몰되기 쉬운 일상에 시로 브레이크를 걸면 잠시나마 삶을 되돌아볼 수 있어요. 내가 제대로 살고 있나? 스스로 묻거나, 잠깐 멈춰 서서 피부에 닿는 바람도 느껴보기도 하고요. 군더더기가 없는 시가 좋은 시라고 생각해요.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삶에서 쓸데없는 걱정과 부정적인 것은 모두 덜어내고 군더더기 없는 인생을 살면 좋겠어요.”
1960~70년대 신민요의 기수로 불리며 가요계의 정상에서 활동했던 가수가 있다.
바로 김부자(金富子·70)다. 그 시절은 어느덧 이미 반세기 전의 얘기이지만, ‘달타령’을 비롯한 그녀의 대표곡들은 지금도 여전히 이곳저곳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놀라운 생명력을 갖고 있다. 이번에 만난 김부자는 과거에 묻힌 가수가 아니라 현재를 개척하는 가수로서의 모습이 더 어울리는 에너지가 있었다. 그녀가 털어놓는 롤러코스터와도 같았던 삶을 뒤돌아보며 젊은 날의 봄을 맞이하듯 김부자와의 즐거운 만남을 가졌다.
12가지 달의 모습을 묘사한 민요풍의 노래 ‘달타령’을 모르는 대한민국 국민은 드물 것이다. 명절이면 어김없이 어디선가 듣게 되는 ‘달타령’은 1972년에 발표된 이래 수많은 가수들의 리메이크와 수많은 인용으로 반세기가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생명력을 가진 국민적 아우라의 노래가 되었다. 그 노래를 부른 가수가 바로 김부자. 1965년에 아마추어 여고생 가수로 가수생활을 시작한 그녀는 자신이 가요계에 들어와서 이렇게 오랫동안 활동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회고했다.
궁핍했던 시대의 위로와 희망, 그 힘겨운 시대를 노래와 함께한 가수 김부자. 반세기를 돌아 지금은 비록 혼자이지만 음악으로 인해 결코 외롭지 않은 삶을 살았다며 이제는 더욱 원숙해진 기량을 펼치며 관객들과 만나고 싶단다.
시간을 잊고 살 정도로 꿈같은 세월 보내다
“동아방송의 ‘가요백일장’에 입상하면서 가수생활을 시작했죠. 그리고 1968년에 ‘팔도 기생’이라는 영화의 주제곡을 통해서 이름이 알려졌어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가수로서의 공연을 했어요.”
올해는 김부자가 프로 가수로서 5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어느새 칠순. 그러나 누가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칠순이라고 할까. 인터뷰 내내 유쾌하게 웃으며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자신의 얘기를 풀어내는 그녀의 모습은 여전히 젊은 에너지로 가득했다.
“꿈같은 세월이었어요. 시간을 잊고 살 정도로.”
‘달러 박스’ 김부자의 시대
트로트, 신민요 등등 전성기 당대 최고의 가수였던 김부자는 장르를 가리지 않고 전통 가요의 세계를 추구했다. 또 한 명의 당대 슈퍼스타였던 김세레나와는 유명한 라이벌 구도를 이뤘다.
“요즘도 사람들이 제가 지나가는 걸 보면 김세레나로 헷갈려 해요.(웃음) 하나도 안 닮았는데! 김세레나와는 친하죠. 조민희, 김세레나, 김아정 등 돼지클럽 모임이 있어요. 돼지해이던 1971년에 클럽을 만들어서 ‘돼지클럽’이라 부르죠.”
그녀는 대략 2000여 곡의 노래를 불렀다. 오아시스레코드에 몸담고 있던 시절, 한 달에 한 번씩 음반 취입을 했다. ‘김부자가 부르면 팔린다’, ‘달러 박스가 왔다’는 소리를 들을 때였다. ‘일자상서’, ‘당신은 철새’, ‘카츄샤’ 등이 연속적으로 성공했고 ‘사랑은 이제 그만’은 발매 3개월 만에 판매량 10만 장을 돌파하기도 했다.
거듭된 성공, 그녀를 사로잡은 오만과 독선
김부자 하면 무조건 히트를 쳤다. 그리고 그런 시절이 오래 이어졌다. 그러나 그 와중에 그녀에게선 이상신호들이 나오고 있었다.
“통금이 12시였고 극장식 캬바레가 성행하던 시절이었죠. ‘하루에 내가 얼마를 불렀지?’ 계산하면 50곡을 부르고 그랬어요. 목이 아프고 잠긴 상태에서 또 나가야 했고…. 이게 즐거운 생활만은 아니고, 뭔가에 매달린 느낌이었죠. 내 삶이 아니고 남을 위해 사는 듯한 기분이었어요.”
분명 스타가 됐다는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그만큼 몸이 힘들었다. 정신적으로 날카로워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주변의 쏟아지는 무조건적인 칭찬 세례들도 그녀의 마음을 둔하게, 그리고 왜곡되게 만든 요인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오만과 독선에 빠지기 시작했다.
“후회되는 일이 많죠. 철모르게 내가 이 세상 최고라고 생각했어요, 주위에서 나를 너무 떠받들어주니까, ‘이 정도면 최고지’라는 자만심이 생겼죠. 그때를 뒤돌아보면 부끄러워요. 그때 남들이 나를 보며 뭐라 했을까….”
김부자는 자신의 오만이 무엇이었는지 구체적으로 얘기하지 않았다. 안개처럼 나타났다 사라져버리는 인기와 대중의 관심에 매달려 살아가는 연예인에게 그런 오만은 어떤 종류의 성장통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김부자는 그러한 성장통을 겪고도 좌초하지 않고 여전히 현역으로 살고 있다. 말하자면 고통의 강을 건넜다는 의미다.
한때 전성기를 누려본 사람으로서 바닥부터 올라가는 것보다 위에서 내려오는 것이 더 절박하고 뼈저린 고통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녀의 내면의 힘은 자신과 마주하기에 충분했다.
믿었던 지인에게 30억 원을 사기당하다
“어찌 보면 인기도 다 헛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그런 사랑이 없었다면 내가 존재하지 않았겠죠. 그때는 사랑을 받는 줄만 알았지 줄 줄 몰랐어요. 이제야 나눠주면서 행복을 느껴요. 몸도 좋아지고 마음도 편해지고 모든 것이 지금 삶이 더 행복해요.”
어떻게 김부자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지금의 삶에 안착할 수 있었을까. 그녀의 인생을 격변하게 만든 커다란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누가 하라고 해서 한 게 아니라 제가 집안의 가장 역할을 했는데, 그걸 20년 가까이 하니 스트레스와 책임감 때문에 너무 힘들었어요. 그때가 1990년대 초반, 1992년이네요. 심적으로 버거울 때였는데, 이혼한 뒤 주위 사람을 잘못 만나 큰돈을 잃었지요. 복구하기 힘들 정도로까지 내려갔어요. 그때 당시 돈 30억 원이면 굉장히 큰 거죠? 지인이라 믿었는데 그게 완전히 잘못된 믿음이었죠.”
처절하게 자기반성의 시간을 갖다
믿었던 사람 때문에 엄청난 돈을 탕진하고 하루아침에 밑바닥으로 내려앉으며 느낀 좌절의 깊이는 그만한 돈의 액수를 경험해보지 않는 한, 이해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지금 기준으로 봐도 엄청난 금액인데 1990년대 초에 30억 원은 그야말로 천문학적 액수였다. 김부자는 하루아침에 엄청난 돈을 탕진했고, 한 달에 이자만 400만~500만 원을 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됐다. 말도 안 나오는 불운과 배신감과 고통에 그녀는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 그녀에게 구원이 내려왔다.
“너무 힘든 시절을 보내다가 교회를 가게 됐어요. 저희 아들과 딸이 먼저 교회에 다니면서 자꾸 교회에 가자고 권유하더라고요. 아이들이 자라면서 바른길을 가야 한다고 생각해 교회에 다니도록 했는데 정작 저는 안 갔거든요. 그런데 아이들이 저를 위해 많이 기도를 했어요. 거기에 감동받아서 교회를 나가게 됐죠. 그리고 신앙을 만나면서 생활이 많이 바뀌었어요. 지난날의 나를 되돌아보게 된 게 그때부터였죠. 살면서 내 딴에는 잘했다, 나름대로 착하게 살았다 싶은 것이 실은 아니었던 거예요.”
꽃이 봄에 저절로 피듯 절망 끝에 부활하다
김부자는 신앙을 갖고, 자기반성을 했다. 그녀의 생활이 달라지기 시작한 건 사건 이후 10여 년이 지난 2000년 즈음부터라고 한다. 그때 모든 문제들이 회복되면서 어려웠던 것도 해결되고 마음의 안정도 되찾게 됐다.
“‘어떻게 이럴 수가’ 할 정도로 생활이 확 달라졌어요. 울면서 기도했던 것을 들어주셨구나 싶었죠.”
그녀의 생활은 이제 안정적이다. 자신이 모든 것을 조절할 수 있고, 철저한 건강관리도 뒷받침되고 있는 삶이다.
“운동은 유산소, 스트레칭, 걷기를 꾸준하게 하고 있어요. 생활에 무리하지 않고 규칙적으로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그게 참 좋고, 거기에 즐거움이 있더라고요.”
약은 전혀 먹지 않고 강화에서 보내주는 홍삼 원액만을 먹고 있다는 그녀는 몸이 쑤시거나 관절에 이상이 있는 부분이 전혀 없다고 말했다. 그 말대로 그녀의 모습에서 활기가 넘쳤다. 마음이 건강해지니 몸도 자연스럽게 건강해진 것이리라. 계속 건강을 유지하고 있는 그녀에게는 할 일이 많았다.
소소한 행복이 가장 소중하다
“사람의 욕망은 끝이 없는 거 같아요. 내 나이에 뭘… 하다가도 이거 정도는 하고 싶다는 게 있죠.”
작년부터 지나온 시간이 새삼스럽게 느껴진다는 김부자는 그동안 꾸준히 쉬지 않고 디너쇼 중심의 공연을 해왔다. 올해는 50주년 공연을 5월로 계획하고 있고 외국 초청 공연도 있다. LA와 뉴욕 쪽에서 연락이 온 상태다. 작사가 겸 작곡가 조운파 선생과도 협의 중이다.
“새로운 음반에는, 지금까지 여러 노래들을 많이 불렀으니 이제는 조금 더 재밌고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노래를 싣고 싶어요. ‘달타령’보다 좀 더 신나면서 현실적인 풍자가 있는 그런 인생 노래를 하고 싶죠. 지금까지는 주로 한복을 입고 불렀는데, 이제는 좀 망가지는(웃음) 노래를 하고 싶어요. 그러나 예전보다 좀 더 진한 정서가 있는 그런 노래를요.”
‘노래란 나를 지켜주는 것이며 나의 생명이고 삶의 모든 것’이라고 말하는 그녀는 삶의 담금질을 통해 더 단단해진 가수다. 그녀는 사람들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 아는 그대로 기억해주면 좋겠다 말한다. 그런데 그 말 뒤에 ‘그러나’라는 단서가 붙었다. ‘그러나’ 아직 그녀는 여전히 펄펄 뛸 수 있는 가수로서의 미래를 꿈꾸고 있다.
“굳이 욕심을 부린다면 그래도 팬들이 사랑해서 여기까지 왔기에 보답하고 싶어요. 지금 나이를 생각하면 그냥 무조건 잘하고 싶죠. 그리고 옛날에 나를 알았던 모든 사람들에게 기회가 있으면 잘해주고 싶어요. ‘잘 보이고 싶다가 아니라 진심으로 잘해주고 싶다’ 그런 생각들이 새록새록 드는 거 보면 내가 나이 들면서 철이 드나 싶기도 하고.(웃음) 나쁜 건 아닌 거 같아요.”
산중에 눈이 내린다. 폭설이다. 천지가 마주 붙어 눈보라에 휘감긴다. 어렵사리 차를 몰아 찾아든 산간 고샅엔 오두막 한 채. 대문도 울도 없다. 사람이 살 만한 최소치의 사이즈를 구현한 이 갸륵한 건물은 원시적이거나 전위적이다. 한눈에 집주인의 의도가 짚이는 집이다. 욕심일랑 산 아래 고이 내려놓고 검박하게 살리라, 그런 내심이 읽힌다. 대한성공회 윤정현 신부(64)의 집이다. 그가 이 산중으로 귀촌한 건 3년 전.
귀촌 초기, 윤 신부는 자그만 중고 컨테이너를 산기슭에 앉혀 거기에 살았다. 그러나 불편이 컸단다. 여름엔 찜통처럼 더웠고, 겨울엔 냉장고처럼 차가워서였다. 그래 용한 꾀를 냈다. 컨테이너 뒷면에 흙벽을 쌓고 지붕을 얹은 두 평 반짜리 골방 하나를 지어 붙였던 것. 말하자면 철제 건조물과 흙집이 한 몸으로 붙은 복합건축이다. 이 흔치 않은 오두막 한 채로 그의 주거는 완성에 도달했다. 더 이상 늘리거나 꾸밀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는 게 아닌가.
집 안으로 들어서자 일종의 절경이 펼쳐진다. 컨테이너 공간은 서재로, 골방은 거실 겸 침실로 쓰는데, 그저 소소한 생활도구들이 놓여 있을 뿐이다. 책과 옷가지들, 다구와 식기, 전기장판과 이불 한 채. 이게 그가 깃들어 사는 집 내부를 이룬 사물의 거의 전부다. 그러니 절경! 단순한 삶을 추구하는 한 사람의 지향과 실천이 완연히 비친다. 자칫 욕망 쪽으로 흘러가는 머리를 쓰는 대신 몸을 주로 써 수행을 닮은 생활을 하자는 게 그의 귀촌 푯대. 쾌활한 언사를 구사하는 이 단구(短軀)의 사제는 흙집을 혼자 지었다. 한 달 여에 걸친 신역으로.
“주변에 널린 돌과 흙을 퍼 나르는 걸로 일에 착수했어요. 비용은 별로 들질 않습디다. 창문과 출입문을 가져오며 고물상에 치른 돈이 36만 원, 장작난로 구입에 30만 원, 시멘트나 각목, 연장, 못을 사는 데 들어간 얼마간의 비용 등, 총 80만 원을 들여 지었어요. 흙집의 탁월한 단열 효과, 그거 참 놀랍더라고요. 초기의 불편이 일거에 해결됐죠. 화장실은 없지만 삽 한 자루 들고 숲으로 들어가면 그만이에요.(웃음) 욕실도 없지만 가끔 읍내 목욕탕엘 가서 때를 벗기죠. 식수는 계곡물을 끌어다 탱크에 받아 쓰고.”
그는 연세대학교 신과대학을 졸업 뒤 성공회대학교 사목신학연구원에서 사제 양성 과정을 밟아 1987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이후 여러 곳의 교회에서 사목활동을 했으며, 영국 버밍엄대학교로 유학을 가 신학박사 학위도 받았다. 귀촌 직전까진 청주 수동교회 관할 사제직을 맡았다. 성공회 사제의 정년은 65세. 그는 정년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귀촌을 위한 휴직을 신청했으며, 이것으로 교회의 일은 사실상 마감되었다. 성공회 사제는 은퇴 뒤 자력으로 여생을 꾸려야 한다. 연금이라는 게 없으며, 거처도 제공되지 않기 때문에. 예순 나이에 접어들 즈음 그의 마음은 자연으로 쏠렸다. 이미 손에 쥔 게 별로 없는 삶이었지만 더욱 소박한 쪽으로 생활을 바꾸고 싶었더란다. 해서, 득달같이 나서 귀촌을 단행했다.
욕심과 노여움과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면 행복하다
“평생 하느님을 섬기며 살고 있지만 제게는 정신의 스승이 한 분 계십니다. 다석(多夕) 류영모 선생(1981년 작고)이죠. 동서고금의 종교와 철학에 능통했던 다석 선생께선 기독교와 불교, 유교와 도교를 조화하고 상호 보완할 수 있는 웅대한 사상체계를 정립했어요. 저는 다석의 혜안을 빌려 서구 신학적 관점이 아닌 동양 신학적 관점으로 성서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었어요. 종교와 종파와 교리를 뛰어넘어, 모든 인류가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시각을 가질 수 있었던 것도 다석 사상을 공부하면서였죠.”
“박사 논문 주제도 다석사상이죠? 다석은 정인보, 이광수와 함께 1940년대 조선의 3대 천재로 통했죠. 오산학교 교장을 지내다 은퇴한 뒤에는 농사를 지으며 제자들을 가르쳤어요. 유 신부님의 귀촌은 다석의 행장에 영향을 받은 선택?”
“삶을 돌아보면 어떤 ‘보이지 않는 손’이 항상 저를 이끌었다는 걸 알겠습디다.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 그 뭔가의 힘 말이죠. 순리나 무위자연의 흐름일 수도 있겠지. 다석 선생의 가르침 역시 길잡이였죠. 선생께선 농사를 자주 권장했어요. 농사짓는 사람이 예수라는 말도 늘 했어요.”
“농사의 정신을, 땅에 땀을 쏟는 노동의 신성한 가치를 말한 거겠죠?”
“그렇죠. 귀촌을 해 몸을 쓰는 노동을 하며 이거 참 좋구나, 하는 느낌을 자주 경험합니다. 우선은 몸이 건강해져요. 정신도 맑아지고, 영성에 대한 각성도 하게 돼요. 현재 닭과 산양을 치고, 소규모의 농사를 짓지만 향후 영성공동체랄까, 자율공동체로 가꿔나갈 참이에요. 이미 집 둘레의 임야 1만 평을 확보해뒀어요. 저의 뜻에 공감한 산주(山主)께서 좋은 가격에 땅을 넘겨준 덕분이죠.”
“자율공동체엔 어떤 사람들이 모이죠?”
“누구나 다! 내 안의 영성을 일깨울 실천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영성공동체의 뜻에 동감하는 사람이라면 종교와 상관없이 누구든 함께 살아가야죠. 공동체 참여자는 이곳의 너른 산림 한 곳에 농막이나 움집을 짓고, 공동 생산을 해 함께 나누는 생활을 하게 될 겁니다.”
브래드 피트가 열연한 영화 ‘티벳에서의 7년’엔 인상적인 장면이 나온다. 극장을 짓기 위해 땅을 파던 인부들이 지렁이가 나오자 공사를 즉각 중단하고 정성스레 지렁이를 안전한 곳으로 옮겨준다.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을 귀하게 여기는 감성이란 아마도 영성적 에너지일 게다. 생명 모두에 깃든 존귀함을 의식하는 자는 이미 자신 안의 영성을 일깨운 존재일 테지. 그러나 때 묻히지 않고 생존할 방법이 있던가. 살길을 찾기 위해 영혼까지 팔아서야 안 되겠지만, 내 안의 영성을 유리그릇처럼 투명하게 닦는 일은 우리네의 관심사 자체가 못된다. 산야에서, 야생에서 담백한 생활을 지속할 경우엔 문제가 달라지나?
“영성생활이란 피안의 세계로 가자는 게 아닙니다. 욕망이 이끄는 대로 사는 일에서 벗어나 평온한 마음의 상태를 유지하자는 것, 상생하자는 것, 개인의 자족만이 아니라 사회변혁까지도 실천하며 살아가자는 것, 그런 걸 위해서는 영성 회복이 필요하다 보는 거예요. 모두들 물신주의에 사로잡혀 무한경쟁을 벌이는 세태에서 과연 사람들은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을까? 빈부 양극화만 날로 심해지는 것을…. 저는 말이죠, 적게 가지고 적게 쓰는 쪽으로 마음을 두는 게 훨씬 현명하다고 봐요. 이기심에서 벗어나 타인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키우는 게 행복과 만나는 가장 빠른 길이라고 봐요. 초목들의 동향과 동물들의 삶을 통해 세상에 적용할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야생이란, 일테면 교실 같은 곳이죠.”
세상의 광기와 아귀다툼이 침범 못할 적막한 산중. 거기에 오두막을 짓고 홀로 들어앉았으니 완전한 고립 속에 있는 것 같지만 그의 희망과 실천은 사방으로 활달하게 열려 있다. 에피쿠로스는 인생의 목적을 쾌락 추구에 두었다. 욕망을 채우는 쾌락이 아니라, 욕망을 비우는, 비워서 마음의 고통을 몰아내는, 마침내 평안과 안락의 상태에 접어들어 단순 담박한 생활을 하는 게 에피쿠로스의 ‘쾌락’이다. 윤 신부가 추진하는 공동체란 어쩌면 ‘에피쿠로스 스쿨’이겠지. 육체와 욕망,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에서 벗어난 삶이 행복을 데려다준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인생은 한바탕의 ‘소풍’
집 밖엔 한파가 맵차지만 골방은 훈훈하다. 난로 속에서 관솔 내음을 솔솔 풍기며 타는 소나무 장작불이 열을 뿜어서다. 창문가엔 벚꽃 잎처럼 분분히 내리는 눈 풍경. 집 뒤편 언덕배기 닭장에선 오골계들이 세찬 눈발을 피하고 있고, 산마루에선 산양들이 전설처럼 눈을 흠뻑 뒤집어쓴 채 양양하게 뛰논다. 윤 신부는 닭들에게서 계란을 얻는다. 산양의 젖을 짜 우유 대용으로 먹는다. 자급자족이 그의 목표다. 산 아래 농부들과 물물교환을 통해 부족한 양식은 보충해나갈 계획이다.
“점차 농사 규모를 키우고, 작목 수효도 늘려나갈 작정이에요. 귀촌 3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해야 할 일들이 많아요. 그간에 터를 다듬고, 연못을 만들어 연(蓮)을 심거나 잉어를 넣어 길러왔어요. 이 산림엔 원래 공동묘지가 있었어요. 그걸 용케도 거의 다 이장시켰죠. 무덤이 많아 산 아래 토착민들조차 무섭다며 아예 접근하길 꺼린 땅이었는데, 보시다시피 이젠 달라졌죠. 수시로 드나들며 찬탄합니다.”
“사제란 세상에 빛을 보태는 존재겠죠. 그런데 말이죠, 성직자들은 늘 옳은 얘기, 반듯한 말만 하지만 정작 실천과는 먼 경우가 많다는 게 중론이에요. 동화작가 고(故) 권정생 선생은 본인이 크리스천이었지만 차라리 이 땅에 기독교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더 나은 사회가 됐을 거라는 얘길 했죠.”
“예수님이 가르친 핵심은 간단합니다. 하느님을 네 몸처럼 섬겨라,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요약하면 그 두 가지예요. 그러나 종교인들의 노력이 부족해요. 수행을 일삼는 수도원에서조차 이기심의 충돌이 잦아요.”
성공회 사제에게 결혼은 금기가 아니다. 윤 신부의 처자는 먼 곳에 따로 산다. 아내는 김포에서 미혼모의 자녀들을 돌보는 쉼터를 운영한다. 아내가 곁에 없으니 주야간에 외기러기처럼 외로울 것 같지만, 서로 자유롭게 선택한 길을 존중하며 지내는 것으로 사랑을 확인한다.
“인생이란 한바탕의 소풍이에요. 소풍을 잘 즐기는 나그네의 짐은 가벼워요. 이전의 편리를 다 버린 귀촌생활의 불편이 사실 한둘이 아니지만, 거꾸로 사는 인생 같지만, 자유로운 나그네로 살기 위해선 세태를 거스를 수밖에 없어요. 세태의 물살에 무기력하게 떠밀린 채 비문명적 야생생활을 누리거나 무소유를 실천하기란 불가능하니까.”
“인생은 육십부터라고들 하죠. 이건 맞는 말일까?”
“중생(重生), 즉 영적으로 새 사람이 될 수 있는 계기나 동기부여가 되는 구호이니 썩 긍정적인 명제가 아닐까.”
“돈이나 욕망을 앞세우지 않고서도 행복을 누릴 방도를 슬슬 찾기 시작하는 게 시니어죠. 무소유까지야 어렵겠고, 각자 주어진 현실 여건을 어떻게 활용하는 게 좋다고 보나요?”
“돈·권력·명예를 나만을 위해 쓰지 않고 남도 덩달아 이로운 쪽으로 사용하는 게 좋겠죠. 돈이란 잘 쓰면 사랑이 되고, 권력을 독점하지 않고 나누면 평화의 초석이 되죠. 명예 역시 정의롭게 사용하면 상생의 힘이 될 테고.”
“당신은 사제예요. 천국은 어떤 곳이죠? 사후엔 무엇이 오죠?”
“마음을 비우고 애착과 집착을 다 놓을 수 있다면 죽음이 두려울 리 없겠죠. 모든 하루를 최고의 날로 산다면, 내일 죽어도 진정 여한이 없을 사람이라면 그는 이미 하느님 나라, 천국을 사는 겁니다. 사후? 그건 잘 모르겠어요. 그 누구도 다녀온 사람이 없으니.”
집착도 후회도 슬픔도 없는 인생이라면 이미 성자이겠지. 그에겐 과거도 미래도 없는 것과 같겠지. 그러나 과욕과 과속으로 어긋나기 쉬운 게 오늘 하루. 눈 쏟아지는 하오의 귀로에 어둠살이 내린다. 삶을 돌아보면 어떤 ‘보이지 않는 손’이 항상 저를 이끌었다는 걸 알겠습디다.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 그 뭔가의 힘 말이죠.
박원식 소설가 >>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사람과 공간이 조화롭게 사는 방법을 연구하는 게 풍수학이다. 그런 면에서 풍수는 집을 살 때뿐만이 아니라 집을 단장할 때도 유용하다. 물론 누군가는 풍수를 ‘미신’이라 할 수도 있고, 또 누군가는 ‘현대적 삶과 맞지 않는 비합리적 이론’이라 할 수도 있지만,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을 상기하면 분명 귀 기울일 내용이 없지 않다.
원래 풍수라는 말의 어원은 ‘장풍득수(藏風得水)’다. ‘바람을 갈무리하고 물을 얻는다’는 의미로 농사짓기 좋은 최적의 터를 찾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좋은 환경이란 시대가 바뀌면서 달라지게 마련이다.
합리적 사고를 중시하는 유럽이나 미국에서도 풍수가 적용된 사례가 많다. 이미 알려진 사례를 보더라도, 홍콩의 47층 건물인 홍콩상하이빌딩을 짓는 데 풍수사가 적극적으로 관여했고,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도 풍수를 고려해 백악관 집무실을 개조했다. 또 축구선수였던 데이비드 베컴 부부도 딸 하퍼의 방을 풍수지리학자에게 보여준 뒤 자문을 해서 꾸몄다. 우리나라도 대기업 총수의 집과 사옥은 처음부터 풍수를 고려해 입지를 선정하고, 그 대지에 맞는 건물을 풍수를 따져 디자인하는 게 일반적이다. 특히 기업가처럼 큰돈을 만지거나 잃을 것이 많은 사람이 풍수에 관심이 많다.
풍수의 적용
풍수학은 수천 년 동안 인간이 쌓아온 경험의 통계자료다. 집의 건축 요소, 가구, 가전제품 등을 자연의 원리와 닮게 배치해 기의 흐름을 순조롭게 만들어줌으로써 편안하고 건강한 생활은 물론, 흔히 운명이라고 부르는 인생의 큰 줄기를 올바르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고 바로잡아주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물론 대지 계획부터 평면 계획까지 풍수를 고려할 수 있다면 가장 좋다. 하지만 우리는 아파트, 오피스텔에 사는 게 일반적이고, 공간이 주어지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따라서 가구나 소품을 바꾸고 그 위치를 바꾸는 식의 풍수가 더 현실적이다. 가령, 예전의 집들은 현관을 열면 바로 욕실이 보이는 구조가 많았다. 그런데 이는 돈이 빠져나가는 구조다. 이럴 때 현관에 중문을 설치해주거나 가벽을 설치해 돌아가는 방식으로 구성을 바꿔줄 수 있는 것이다. 집 안 특정 공간의 컬러를 바꾸거나 벽지 등을 바꾸는 식으로 크게 돈 들이지 않고도 충분히 풍수를 적용할 수 있다.
시작은 ‘비우기’부터
집에 생기를 불어넣으려면 우선 공간에 여력이 있어야 한다. 일단 빈 공간이 있어야 디자인을 할 수 있고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비만인 사람이 근육이 탐스러운 몸을 만들 때 우선 살을 빼야 하는 것과 비슷하다.
풍수나 인테리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비우기’다. 풍수 인테리어의 기본은 쓰지 않는 물건은 버리고, 남아 있는 물건의 정리정돈을 잘하면서 정갈한 상태를 유지하고 채광, 통풍, 환기가 잘되게 하는 것이다. 먼저 집이나 방에 있는 모든 물건을 꺼내 불필요한 물건이나 잘 쓰지 않는 물건을 버리는 것부터 시작하자. 1년 동안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면 과감히 버리자. 그리고 방이든 거실이든 너른 시선으로 한 번 둘러보자. 그런 다음 구입했을 때의 가격을 떠나 왠지 싫거나 불편한 물건이 있는지 체크하자. 그런 물건이 있다면 그것들을 다른 곳으로 옮겨서 문제를 해결할 것인지 아니면 눈에 띄지 않게 버릴 것인지 결정을 해야 한다.
마음의 평안이 기준
돈의 개념으로 판단하지 말고, 마음의 안정과 심리적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생활 공간을 만든다는 데 중점을 두고 생각해야 한다. 버리는 게 익숙해지면 삶은 놀랄 만큼 단순해지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것만으로도 당신은 충분히 집 안의 운수를 끌어올리는 풍수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정리하고 남은 물건들은 사용 빈도, 계절에 맞게 잘 수납하는 것이 중요하다. 수납할 때도 빈틈없이 채우기보다는 조금 여유 있는 공간을 만들어 수납해야 좋은 기운이 통한다.
진정한 ‘집’의 의미
집이라는 공간은 딱 한 가지로 규정할 수 없다. 보편적일 수 없다는 의미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의 자연환경과 기후, 풍토, 토질, 문화와 역사 등이 반영되어 있다. 여기에 자신이 가장 편하게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개성을 입혔을 때 비로소 자신의 집이 만들어진다.
또 집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기준으로 만들어질 수 없고 만들어져서도 안 된다.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오랜 시간을 통해 만들어낸 공간이야말로 ‘집’이고 자신의 공간이 된다.
그러니 집은 순식간에 만들어질 수 없는 것이다. 인테리어 업체에 맡겨서 다른 사람이 사는 집과 비슷하게 몇 주 만에 만들어진 공간에서는 통찰력과 창의력을 기대할 수 없다. 천천히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신의 공간을 만들어갈 때 그곳은 어느새 편안하고 행복한 ‘집’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곁에 있게 될 것이다. 물리적인 공간인 ‘하우스(house)’에서 벗어나 따뜻하고 정감이 있는 자신과 가족의 공간인 ‘홈(home)’을 만들어야 할 때다.
>글 : 박성준 건축가·역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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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대 건축학과를 졸업했으며 집과 건물을 짓는 건축가. 사람과 땅의 기운을 함께 보는 풍수 컨설턴트이면서, 또 한 사람의 생년월일시 기운과 얼굴을 통해 그 사람을 읽어내는 젊은 역술가이기도 하다. 풍수와 인테리어를 접목시킨 풍수 인테리어를 제안하고 있으며, 풍수 이론에만 그치지 않고 실제 기업의 사옥과 주거공간의 콘셉트 디자인 및 설계를 하는 등 풍수에 맞는 공간을 구현하고 있다.
희망찬 새해가 밝았다. 지난날의 은혜에 감사한다. 필자 마음에는 고마운 천사가 있다. 날개 없는 인간의 모습으로 필자에게 왔다. 쌍둥이 손녀·손자가 태어난 뒤 천사를 처음 만났다. 며느리가 산후조리 중, 태어난 지 며칠 안 된 손녀가 고열과 설사에 시달리는 위험한 상황이 발생했다. 신종플루 때문에 노약자와 영유아가 공포에 떨던 때였다. 동네 병원을 거쳐 대학병원에 갔으나 “치료가 어렵다”면서 손사래를 쳤다. 눈앞이 깜깜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아이가 태어난 병원으로 전화를 했다. “신종플루 감염 위험이 있어 보인다, 빨리 데려오라”는 천사의 음성을 들었다. 토요일 오후 병원 응급실. 당직근무 중인 여 의사는 아이 궁둥이에 코를 대고 대변 냄새를 맡았다. 그러더니 “검사 결과를 기다릴 시간이 없다, 경험상 세균 감염으로 보이니 바로 치료를 시작하겠다”고 말했다. 그때 필자는 천사의 모습을 보았다. 검사 결과는 다행스럽게도 신종플루가 아니고 장염이었다. 천사 덕분에 치료 시간을 제대로 확보했다.
다섯 달 뒤 외손자가 태어났을 때 집단 감염을 피하려고 산후조리원 대신 필자 집에서 산후조리를 하게 했다. 녀석이 얼마나 크게 울어대던지 퇴근해서 집에 오면 아내와 딸이 파김치가 되어 있었다. 저녁에는 필자가 아기 돌봄이가 되었다. 가슴에 안고 어깨에 머리를 묻게 하면 거짓말처럼 곧 잠이 들었다. 모두들 그 모습을 보며 “외손자와 궁합이 잘 맞는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녀석은 외가에 오면 지금도 필자를 꼭 안고 잔다. 무럭무럭 자라서 어느새 초등학교 1학년생이다.
얼마 전에는 쌍둥이 손자에게 충치가 생겼다. 오후 일과 중 빈 시간에 짬을 내서 아이와 함께 병원에 갔다. 필자도 마침 사랑니를 뽑고 치료를 받고 있었다. 손자와 의자를 나란히 하고 앉았다. 마취를 해야 한다는 말에 녀석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할아버지가 옆에서 지켜줄 테니 걱정 마라” 하고 안심시켰다. 필자의 치료는 어떻게 하는지 관심도 없이 옆자리 손주 살피기에 바빴다. 치아 갉아내는 소리가 제법 크게 들렸다. 처음 하는 마취로 감각이 무뎌진 입이 이상해서인지 손자 녀석 눈가에 이슬이 비쳤다. 그래도 의사와 간호사가 “씩씩하다”고 칭찬하자 거울을 보고 씩 웃었다.
치료를 마친 손자가 기특해 보였다. “할아버지, 입이 이상해서 방과 후 영어수업 하기 어려워요.” 방과 후 수업에 빠지지 않았던 녀석이 조그만 목소리로 필자의 표정을 살폈다. 할아버지는 눈치가 빨라야 한다. “나도 함께 치료했으니 집에 가서 게임하면서 같이 놀자!” 했더니 얼굴이 확 펴졌다. “엄마! 마취해도 아프지 않았고, 충치는 영구치가 아닌 유치래요.” 집에 오자마자 제 엄마에게 문자를 보내느라 바빴다.
오늘은 무럭무럭 잘 자라준 세 손주들이 천사다.
서정주시인은 말했다.
자신을 키워준 것은 8할이 바람이라고.
나를 키워준 것은 8할이 그리움이었다.
열네살 여름.
태양이 이글대는 아스팔트 포도 위에 부서지던 것은 “레이 찰스”의
‘I can't stop loving you’였고 내 가슴 또한 부서지고 있었다.
사랑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
단테가 베아뜨리체를 피렌체의 한 다리 위에서 만난 것은 그의 나이 아홉 살 때였다.
그 후 단테는 평생 동안 그녀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게 되는데 그의 작품 ‘신곡’은 이런 배경에서 탄생됐다.
야학교의 B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내 나이 열네 살 때였고 이후 그것은 지워버릴 수 없는 화인이 되어 버렸다.
세월이 갈수록 숨이 막히도록 좋아할 수 있는 분은 이 세상에 오직 한 분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때 이후로 어떤 사람도 내 마음을 그 선생님 같이 뿌리째 흔들어놓지는 못했다.
그것은 하얀 도화지 위에 뿌려진 첫 번 째 물감이므로.
나보다 일곱 살이 위인 B선생님은 전체적으로 약간 마르신듯한 호리호리한 체격에 눈매가 깊숙했으며 얼굴형은 군살이 붙지 않고 단아한 모습이어서 마치 그리이스 조각 같은 분이었다.
또한 키가 크신 B선생님은 걸음걸이가 ‘사뿐사뿐’하셨다.
장로님의 맏 아드님이며 독실한 크리스챤인 선생님은 어느 모로나 깍듯한 모범생의 면모를 보이셔서 나쁜 행동 옳지 않은 말은 전혀 하지 않으실 분 같았다.
아니 나쁜 면으로는 아예 생각조차 하지 못하실 분 같았다.
한마디로 그 당시 내 눈에 비친 그분은 완벽한 이상형의 남성상이었다. 우리에게 ‘모짜르트의 자장가’를 가르쳐 주시던 선생님의 진지한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우리가 잘못하면 몇 번이라도 되풀이해서 자상하게 가르쳐 주시던 선생님의 열성. 그것은 제자들에 대한 깊은 애정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리라.
음악을 깊이 사랑하셨으며 노래를 썩 잘 부르셨던 선생님이 좋아하시던 노래는 ‘고향의 폐가’ ‘너와 나의 시간’ 등이다.
우리에게 과학을 가르쳐 주셨던 B선생님이 방학숙제로 모터 만들기를 내주셨을 때, 다른 애들은 만들 엄두도 못 내었지만 나는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하여 재료를 수집하였기에 무사히 모터를 만들 수 있었고 그것을 보신 B선생님의 칭찬을 들으니 그동안 만드느라고 힘들었던 기억은 말끔히 사라지고 가슴이 금 새 기쁨으로 가득해졌었다.
서둔교회를 다니던 B선생님이 그곳에서 성가대를 지휘하실 때 뵙게 되면 너무도 멋지게 보여서 마치 ‘꿈속의 왕자님’ 같았다. 그 진지한 눈빛에, 날렵한 몸짓이라니.
그렇지만 다른 애들은 춤을 추는 것 같다고 ‘킥킥’댔고 나는 그 애들이 너무도 미웠다.
그 애들 중에는 내 초등학교 때부터의 단짝 친구 정재화도 있었는데 그때만큼은 그 애마저도 미웠다
어느 해 방학동안에는 내가 버릇없이 엽서에다 소식을 담아드렸는데(졸필이라서 편지지에 많은 글씨를 쓰기는 너무 부담스러워서) 선생님은 곧바로 답장을 편지로 해 주셨다.
그때 선생님은 ‘고사리 같은 너의 손으로 쓴 편지 잘 받아 보았다’라고 쓰셨는데 의아스러운 것은 아무리 내 손을 앞으로 제쳐보고 뒤로 뒤집어봐도 고사리 같이 작은 손은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엽서를 사용했는데 선생님은 편지로 보내 주신 것이 못내 죄스러우면서도 선생님의 성실성에 머리가 조아려졌다.
이 일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덕목 중 성실성에 후한 점수를 매기는 내게 선생님이 결정적으로 좋아지는 계기가 됐다.
그냥 흠모하였다.
멀리서라도 그분의 모습만 뵙게 되면 반가움에 가슴이 뛰고 너무 좋아서 숨이 막혀왔다. 친구들은 그 선생님이 오신다는 거를 내 모습을 보고 알았다. 친구들과 놀던 중에도 B선생님 모습만 보였다하면 아무 말도 못하고 얼굴이 빨개졌기에. 내 초등학교 동기동창생의 언니가 그 선생님과 데이트 중이라는 말을 듣고는 성실하고도 선한 그 언니가 이유도 없이 미웠다. 선생님이 배구를 하려고 상의를 벗어서 내게 맡기셨을 때는 어찌나 소중하던지 조심스럽게 안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구겨지면 안 되니까.
B선생님이 야학교를 떠나실 때는 내 가슴이 온통 ‘휑’하니 뚫려 버린 듯한 허전함과 세상을 모두 잃어버린 듯한 망실감에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깊은 슬픔에 빠져버렸다.
나의 기쁜 맘 그대에게
바치려 하는 이 한 노래를
들으소서 그대를 위해 지은 노래
............................
쇼팽의 연습곡에 가사를 붙인 '이별의 노래’인데 B선생님이 우리들에게 마지막으로 가르쳐주고 떠나신 곡이다. 내 나이 16세때 일이었고 그후 십여년이 넘어서도 나는 어디서라도 그 연습곡만 들으면 눈물을 흘리곤 했다. 이별의 상처가 쉽게 아물지 않았던 것이다.
야학을 졸업한지 2, 3년의 세월이 지난 후였다.
그날 버스에서 B선생님을 뵌 나는 얼마나 반가웠는지 몰랐다. 선생님은 ROTC마크가 새겨진 서울대학교 교복차림이었다. 너무 좋아서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던 나는 선생님께 조용히 다가가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선생님 저…… 할 말이 있는 데요’
사무치게 그리웠던 선생님의 깊숙한 눈이 나를 응시하며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목소리는 이렇게 물으셨다
‘그래....... 뭔데?’
그리고는 나를 따라 내리셨다.
비가 온 뒤의 연습림은 온통 청신한 초록빛이었다.
갈참나무의 여린 새순은 연초록으로 빛났고 오솔길의 기다란 풀잎에는 물방울이 ‘또르르’ 굴러 내리고 있었다.
흰 구름이 이따금씩 흐르고 있는 파아란 하늘을 쳐다보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궁금해 하시는 선생님 안색을 살피다 나는 어렵게 어렵게 말을 꺼냈다.
‘선생님 저…’
‘있잖아요 ………’
‘저기요……만 몇 번 하다가 그만 꿈이 깨어버렸다.
'선생님을 좋아하고 있어요’ 꼭 한마디 하고 싶었는데 끝내는 그걸 못 해보고 꿈에서 깬 나는 가슴을 주먹으로 치며 스스로를 질책했다.
‘이 바보야 생시에 고백을 못하면 꿈에서라도 해야지’
세익스피어가 말했다.
‘짝사랑처럼 고독한 것은 없다’고
모파상의 단편 ‘사과나무 아래서’와 ‘의자 고치는 여인’에 나오는 가련한 두 여주인공들을 나와 동일시하여 자신이 너무 비참한 신분임을 뼈저리게 느끼곤 했다.
사랑이란 익모초 달인 물을 삼키는 것이다.
그리움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물같이 까딱도 하지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추억
잊어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걸어보던 날이
하루
이틀
사흘
여름 가고
가을 가고
조개 줍는 해녀의 무리 사라진 겨울
이 바다에
……………
청마 유치환시인의 ‘그리움’과 시인 조병화님의 ‘추억’을 몇 번이고 되뇌이며 아픈 가슴을 홀로 달래었다.
좁디좁은 야학교운동장을 천천히 몇 바퀴씩 거닐며.
또 유치환님의 '바위’를 좋아한 이유는 ‘차라리 애증의 갈등을 느낄 수 없는 바위가 되었으면'하는 내 심정을 너무도 잘 표현했기 때문이다.
어느 해 크리스마스를 앞두고서였다.
선생님께 무언가 마음의 선물을 꼭 드리고 싶었던 나는 며칠간을 골똘히 생각해 본 결과 일기장이 가장 적당할 것 같았다.
있는 돈을 다 긁어모아 봤다.
시내의 큰 문방구점을 몇 곳을 전전하여 간신히 마음에 드는 것을 살 수 있었다.
일기장 뒷장에다 ‘난이 드리옵니다’ 라는 짤막한 글을 적는 데도 워낙 졸필이기에 연습장에다 몇 십번을 연습해서야 겨우 적을 수가 있었다. 포장지도 제일 예쁜 것으로 골라서 포장을 했으며 리본으로 꽃모양을 만들어서 붙인 후 서둔 교회에서 성가대를 지휘하고 계신 선생님을 찾아갔다.
교회의 뾰족탑도 전나무 위에도 온통 은세계였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캐롤 송을 열심히 지도하고 계신 선생님의 모습을 뵌 나는 눈이 20cm이상 쌓여 있는 교회 창문 밖에서 언 발을 구르며 무려 2시간 이상을 기다렸다.
나의 뜻밖의 등장에 의아해 하시는 선생님께 ‘선생님 이거요’ 모기소리로 말하며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내밀었다.
순간 깊숙한 눈매에 진지한 표정의 선생님은 다소 당황해 하시다가는 '고맙다' 웃으며 받으셨다.
다시 한번 내게 따뜻한 미소를 보낸 후 발길을 돌리시던 선생님이었다. 춥고 힘든 줄도 모르고 기다리던 그 시간이 행복했고 선물을 전해 드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 가슴은 온통 기쁨으로 출렁거렸으며 발이 땅에 닿나 싶었다.
엄마의 결혼생활을 어려서부터 쭉 지켜봤던 나는 근본적으로 결혼에 대해서 회의감 내지는 환멸감을 가지고 있었다.
B선생님을 남몰래 혼자 애 태우며 10년 이상의 세월을 외곬수로 흠모했으면서도 내 스스로가 ‘결혼’이라는 단어와는 결부시키는 것조차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런다는 것 자체가 불결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내가 스물두세살 때 선생님이 결혼하신다는 소식을 듣고는 너무 가슴이 아팠던 나는 결혼식장에는 차마 가 보지도 못하고서 뜨거운 눈물을 ‘펑펑’ 쏟았다.
눈물이 강물이 되도록 울고 또 울었다.
장선생님이나 진선생님 등 다른 선생님들의 결혼식에는 다 참석을 해서 축하를 해 드렸으면서.
‘선생님, 난이 여기 있는데 어디로 가시옵니까’
그날 일기장에는 이렇게 쓰여졌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라면 어느 누구의 것인들 소중하지 않으랴.
누가 감히 걸인부부의 사랑이, 사랑을 위하여 왕관을 포기한 윈저공의 사랑보다 못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모든 거짓 없는 사랑은 위대하다.
내 짝사랑이 운명적으로 비극인 것은, 나는 그분을 결혼 대상자로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처음서부터 끝까지 단지 동경의 대상이었고, 언제나 먼 하늘의 별님이었다. 그러면서도 그 분이 막상 다른 여자와 결혼했을 때는 천지가 무너진 듯한 절망감으로 목을 놓아 울었으니 이 무슨 모순된 행동이었던가. 그분을 연모하던 내가 무엇보다도 괴로웠던 것은 그분이 내 진심을 하찮게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었다. 내 순정은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소중하고 고결한 것인데도 도덕적으로 전혀 흠이 없는 그분은 선생님으로서의 가슴은 따뜻했지만 여자인 나를 대하는 눈길은 차갑기만 했기에 나는 늘 거기에 상처를 받고는 못 견디게 괴로워했다.
나 스스로에게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보며 스칼렛이 자기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모든 허물을 사랑으로 감싸주는 레트한테는 북풍 같이 차갑고 상처만 주면서 이미 다른 여자의 남편인 애쉴리만 생각하는 것을 너무도 안타까워했다는 점이다. ‘저 여자는 왜 저렇게도 멍청한가’
그러한 내가 현실 속에서는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이미 결혼을 해 버린 B선생님만을 가슴에 담아 두고 연모하느라고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하나 하나 내게서 떠나 보냈다는 사실이다.
야학 시절 친구들은 개성이 너무 강하고 고집불통이며 지독한 외곬수인 나를 스칼렛이라고 했었다. 스칼렛과 성격상 이미지가 흡사하다고. B선생님은 나의 애쉴리였다.
취기가 오른 탓일 수도 있겠지만 나의 피아노 선제공격이 먹혔다. 임수정이 바로 옆에서 노래하고 내가 피아노 반주를 했다. 이슬 같은 여자 임수정과 참이슬을 마주하고 흥이 돋는 밤을 보냈다.
“무작정 당신이 좋아요~ 이대로 옆에 있어주세요~” 이 노래가 TV에서 흘러나올 때 나는 가사 그대로 무작정 임수정이 좋아 죽었었다. 이 노래가 하루에도 몇 번씩 라디오로 흘러나오던 그녀의 전성기 시절 피가 끓는 청년 이봉규는 마치 그녀가 나에게 옆에 있어 달라고 애타게 원하고 있는 줄 착각하고 입을 헤~ 벌리고 넋을 놓은 적이 많았다.
중년이 되어서도 “임수정은 어디서 뭘 하고 지낼까?” 궁금했다. 그러던 중 몇 년 전에 배철수가 진행하는 ‘콘서트 7080’에 오랜만에 나타난 그녀의 모습을 보곤 깜짝 놀랐다. “아니 어쩜 나이를 먹어도 아직도 이슬 같은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을까?” 오늘 임수정을 만나고는 입이 다물어지질 않는다.
조그만 선술집에서 만나자마자 그녀에게 대뜸 물었다. “아직도 이슬 같은 비결이 뭡니까?” 그녀는 그런 소리를 하도 많이 들어서일까? 담담한 표정으로 “‘참이슬’을 많이 먹어서 그래요”라고 받아치며 소주병을 능숙하게 흔들고 딴다. 정확한 주량은 말하지 않았지만 “남들 마실 만큼은 마신다. 어지간해서 잘 취하지 않는다”고 믿기 힘든 말을 던진다. 의아한 반전에 한량 이봉규도 움찔하고 말았다.
이렇게 시작한 술자리가 2차까지 이어지면서 한바탕 무르익어갈 무렵에서야 눈치를 챘다. 술도 약한 편은 아니지만 정신력이 강해서 절대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질 않는다는 걸. 임수정 같은 아름다운 여인이 술자리에서 흐트러지면 늑대들은 아마 제정신 차리기 힘들 것이다. 어려서부터 약간 틈만 보이면 자신에게 남자들이 달려든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기에 본능적으로 자기방어가 몸에 배어 있다. 특히 술자리에서는 더욱 철저하다. 인터뷰하는 나와의 술자리도 매니저인 그녀의 사촌 동생이 옆자리에 딱 붙어서 경호했다. 매니저가 사촌 동생인 점도 아마 철저한 자기관리의 하나일 것으로 짐작된다.
여전히 매력적인 임수정
이자카야에서 소맥 폭탄주로 한껏 흥이 오른 우리는 2차로 피아노가 있는 라운지로 자리를 옮겼다. 젊은 시절 꿈에 그리던 임수정을 바로 앞에 앉혀놓고 나는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취기 때문에 용기를 냈지만 내심 그녀에게 피아노를 치는 나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평소 TV에서 도발적인 톤으로 윽박지르는 이봉규의 거친 표정을 많이 보아왔던 임수정은 놀란 토끼 눈으로 쳐다보면서 나의 노래를 경청했다. 내친김에 그녀를 무대로 불러냈다.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른 탓일 수도 있겠지만 나의 피아노 선제공격이 먹혔다. 그녀가 바로 옆에서 노래하고 내가 피아노 반주를 했다. 네다섯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던 20여 명의 손님들은 환호했다. 나의 손놀림은 평소보다 더 들떴고 힘이 들어갔다.
가슴은 뿌듯했고 온몸의 마디마디는 ‘연인들의 이야기’ 음절에 따라 춤췄다. 노래가 끝난 후 박수가 터져 나오자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멀리 떨어진 바텐의자에서 슬며시 웃으며 박수 치는 내 아내의 모습이 들어왔다. 인터뷰하면서 나는 임수정에게 내 아내를 소개했고 아내는 인터뷰에 방해되지 않도록 저만치 바텐의자에 앉아 관람하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임수정도 무장해제하고 나와 2차까지 상당히 마실 수 있었고 또 노래까지 부른 것이다. 대중가수가 조그만 라운지에서 노래를 한다는 것은 큰 인심을 쓴 것이나 마찬가지. 나에 대한 배려이기도 하고 거기 오신 손님들에게 엄청난 서비스를 제공한 셈이다. 어쨌거나 그날 밤은 황홀한 밤이었다.
그녀는 왜 갑자기 사라진 걸까?
임수정은 여고 재학 중 미인대회에서 포토제닉상을 수상하면서 모델로 먼저 데뷔했다. 모델 활동을 하면서도 그녀는 가수와 배우를 하고 싶은 꿈이 있었다. 그러던 중 작곡가 계동균을 만나면서 그녀의 인생이 달라졌다. 계동균과 작사가 박건호 두 사람은 임수정의 외모와 음색에 딱 어울리게 남성의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노래를 만드는 데 의기투합했다.
1982년 서라벌레코드에서 발매된 앨범의 타이틀곡 ‘연인들의 이야기’ 연주곡이 그해 방영된 KBS2 드라마 ‘아내’의 OST로 삽입되었는데 발칵 뒤집혔다. 드라마에서 이 노래가 흘러나오자 방송국에 이 노래에 대한 전화와 편지 문의가 빗발쳤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남자와 두 명의 여성이 엮어가는 기구한 스토리가 시청자들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데 ‘연인들의 이야기’ OST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앨범은 발매 몇 달 만에 30만 장이 넘는, 당시로서는 기록적인 음반 판매 기록을 세웠다. 뒤돌아보면 미처 준비도 안 된 임수정에게 벼락스타의 자리는 쉽지 않았다. 그녀는 이와 관련해서 “한번은 탤런트 강부자 씨가 슬픈 노래인데 왜 웃으면서 노래를 하느냐고 핀잔을 줄 정도로 준비가 안 됐던 시기였다”고 회상했다.
이제 나이를 먹고 지난 시절을 되돌아보니 부끄럽기도 하지만 그런 시절을 겪고 난 후 임수정은 노래나 삶의 철학이 원숙해졌다. “최근에 강부자 씨를 만났더니 노래가 확 달라졌다고 칭찬을 해줬다”며 자신을 스스로 평가했다.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시절, 왜 갑자기 사라졌는지 그 이유가 궁금했다. 당시에는 별의별 소문이 난무했다. 배우 정윤희와 맞먹는 외모의 소유자이고 한창 인기를 누리던 임수정이 갑자기 사라졌기에 호사가들은 소설을 쓰면서 입방아에 올렸다.
그녀가 사라진 이유는 정작 따로 있었다. 당시 임수정에게 여러 가지 복잡한 상황이 한꺼번에 밀어닥쳐서 젊은 나이에 감당할 수 없었다. 일종의 현실세계로부터의 도피였다. 30만 장의 앨범이 팔려나간 ‘연인들의 이야기’에 이어 1985년 ‘사슴 여인’이란 곡을 내놓았는데 그 가사가 문제가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나는 밤거리에서 사랑을 먹고 사는 사슴 여인”이라는 가사가 직업여성을 뜻한다며 방송사 심의에 걸려 노래가 전파를 탈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무렵 임수정의 유일한 버팀목이었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여기에 레코드사 이적 문제까지 복잡하게 얽힌 것이 결정타였다.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한꺼번에 몰아닥치면서 여린 성격의 임수정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모든 걸 다 던지고 1989년 미국으로 떠났다. 그녀는 자신의 음악성에 대한 비판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에 대해서도 견디기 힘들었다. “너무 비주얼만 강하고 오디오가 약하지 않느냐?”는 말을 감당하기엔 어린 나이였고 마음의 상처가 깊었다. “고생 끝에 정상의 자리에 올라간 분들은 소중하게 그 자리를 지켜내는데 어느 날 갑자기 정상에 올라가다 보니까 소중함을 잘 몰라서 공백기를 갖게 된 것 같아요”라고 그녀는 나이를 먹은 지금 뒤늦게 밝히고 있다.
제2의 전성기를 꿈꾸고 있다
사실 임수정은 뛰어난 가창력의 소유자는 아니었지만 청순한 목소리와 그녀만의 독특한 비브라토(vibrato)는 상당한 음악적 가치가 있었다.
임수정이 가창력이 없다는 비판은 일종의 어깃장이다. 음악에 정석이 어디 있을까? 어떤 목소리와 창법이 노래를 잘하는 것일까? 수치로 계량화된 것도 없고 그저 당시의 유행과 통론에 치우쳐 마음에 안 든다고 비판하는 군중심리의 일종이다.
임수정의 ‘연인들의 이야기’가 대중에게 엄청난 인기를 끌었으니 그녀의 실력을 인정해줘야 한다. 대중이 선택한 음악이고, 대중이 사랑한 가수다. 거기에다 이슬 같은 청초한 외모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임수정의 매력이다. 음악의 선진국이라는 미국과 유럽에서도 가수의 외모는 아주 중요한 자산으로 여긴다. 심지어 스포츠인과 정치인의 외모도 대중의 사랑을 받는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
임수정은 제2의 전성기를 꿈꾸고 있다.
“솔직히 말하면 추억을 무너트리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20대 때 제 모습을 기억하시는 분들에게 실망을 안겨드릴까봐 많이 망설였지만, 팬들이 ‘감성가수’ 하면 ‘임수정’ 하고 바로 인정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제 꿈이에요.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다시 노래를 제대로 해보자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힘이 넘쳤고 예쁜 얼굴은 더 상기되었다.
100세 시대다. 팬들도 나이를 먹고 가수도 함께 나이를 먹는다. 70세에 아직도 전 세계 무대에서 매력을 발산하는 ‘올리비아 뉴튼 존’보다 임수정은 열다섯 살이나 어리다. 그녀의 전성기는 이제부터다.
졸업 이후 처음이다. 성당도 군부대도 있었지 아마? 큰길 맞은편엔 한때 어머니가 다니셨던 신발공장도 있었고. 지하철 역세권으로 탈바꿈한 지 이미 오래전이라니 제대로 찾을 수 있을까? 이젠 사라졌을 옛날 우리 집 흔적이 아직 남아 있다면 대문 앞에서 찻길까지 그 좁다란 골목길을 따라서 아주 오랜만의 등교를 해보리라.
부산 지하철 2호선 문현역 2번 출구를 나오면서 필자의 발걸음이 미세하게 떨렸다. 헛기침 두어 번으로 호흡을 가다듬어본다. 마치 두 계절을 머금은 듯 선선하면서 차가운 바람은 얼굴을 어루만진다. 3분 정도 걸었을까? 믿기지 않는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그래 바로 여기야.”
오랜 기억 속의 동네 골목길이 여태 저리 버티고 있었다니. ‘딱지치기’와 ‘다망구’ 그리고 ‘오징어달구지’를 하던, 또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유행가를 따라 부르느라 항상 시끌벅적했던 바로 그곳. 그 시절의 주인공들은 지금 무얼 하며 하루를 보내고 있을까? 한구석 기억의 방에 쌓아두었던 옛이야기들이 여름날 분수대 물줄기처럼 솟구쳐 오른다. 필자가 살던 옛집은 자취를 감추었지만.
아마 일요일이었을 듯싶다.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나서 문을 열고 나가보니 친구 녀석이 교회를 가자며 손짓했다. 귓속말로 비밀스러운 약속까지 했다. “오늘 교회 같이 가면 저애 소개시켜줄게.” 녀석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긴 머리의 여자아이가 나무 뒤에서 우릴 훔쳐보며 서 있는 게 아닌가.
세월 따라 빛바랜 골목 담벼락엔 여기저기 상처투성이, 그 흔적들 사이로 혹시나 남겨두었을지도 모를 깨알 낙서들을 찾아 이쪽저쪽 두리번거린다. 빠져나오기 싫은 어둠속 터널 같은 골목길을 나서자 바로 큰길에 이른다. 이젠 좌회전을 해야 한다. 대로변 K은행에서 학교까지 죽 이어진 신작로를 따라 제대로 등굣길에 오르는 순간이다. 기억보다는 가깝게 느껴진다. 여긴가? 좌측으로 키다리 소나무가 있었을 자리엔 브랜드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새로이 오픈한 듯싶은 삼거리 국수집 앞에서 잠시 서성거린다. “그래 맞아, 이 부근에 제법 큰 공터가 있었지.” ‘소차’ 자전거 빌려 타는 맛에 해가는 줄 모르던, 뭉쳐서 야구시합하느라 밥도 거르던 그를 기어코 만나고야 만다. 지금은 흑백사진 속에나 있는 유년의 필자를….
퀴즈 하나 내련다. 1970년대 대표 주전부리 중 하나는? 호주머니에 쏙 집어넣고 한 움큼씩 꺼내먹기에 그만이었던 것. 바로 배고픈 하굣길의 파란 봉지 ‘뽀빠이’, 빨간 봉지 ‘자야’다. 오물오물거리며 걸어가던 오르막을 지나자 학교 건물이 성큼 다가선다. 뒷산 황령산과 그 자락을 따라 조밀하게 들어선 집들을 배경으로 드디어 모교가 보인다. 높고 선명한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너무나 깔끔한 외관의 부산 문현초등학교.
정문으로 바로 들어서지 않고 담장 따라 한 바퀴 천천히 돌아본다. 그 시절엔 없었던 색깔 예쁜 유치원과 두 팔 벌려 활짝 반갑게 맞이하는 후문. 때마침 지나가던 어린 후배가 찍어준 인증샷은 오래도록 남을 기념작이다.
그런데 시절이 하수상한 탓이라서 6학년 1반 교실을 둘러볼 수가 없어 두고두고 아쉽다. 책·걸상도 어루만져보고 싶고 게시판 그림들도 들춰보고 싶고 또 손가락으로 분필가루도 찍어보고 싶은데 말이다. 아쉽게 돌아나가던 필자의 눈길을 사로잡은 건 본관 우측 앞에 있는 ‘책 읽는 소녀상’이다. ‘독서는 마음의 양식’이라고 씌어 있는 기단석 위로 다소곳하게 앉아 무려 40여 년 동안이나 책을 읽고 있다. 요즘 말로 ‘심쿵’하게 하는 모습이다.
은근한 매력의 향나무 교정 아래로 내려서니 눈부신 햇살도 도리 없이 비켜가는 얽히고설킨 등나무 벤치. 휘감아 도는 바람결에 기꺼이 온몸을 맡기고선 살며시 눈을 감아본다.
6학년 체육시간, 한판 제대로 붙던 날. 운동장 모래판 씨름장엔 팽팽한 긴장감이 샅바 위를 감돌았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우리 모두는 ‘빵’ 터지고 말았다. 한 친구의 엉덩이, 그것도 하필 그곳에 그만 ‘빵꾸’가 나버렸기 때문이다. 평소 까무잡잡했던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던 녀석.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 혹여 이 글을 보게 된다면 함께 웃어나 보고 좋을 텐데. “야, 원래 구멍 난 바지를 입었던 거냐? 아니면 정말 용쓰려다 그리 된 거냐? 설마 기억조차 못하는 건 아닐 테지?”
잘 그려진 눈금 위로 색깔 선명한 인조 잔디 운동장. 모래먼지 흩날리던 지난날은 찾아볼 수 없는 트랙 주변을 어슬렁거려본다. 소꿉놀이하던 옛날의 모래밭은 오간데 없고 누가 저리 시퍼런 융단을 깔아놓았단 말인가.
그런데 정말 이상하고 말이 안 되는 게 있다. 이리도 무심한 사람이었나? 아니면 기억력이 떨어진 건가? 좀처럼 생각나질 않는다. 겨우 서너 명 정도의 이름만 생각날 뿐이다. 그나마 세월이 흘러 그들과도 연결이 끊겼다. 참 어처구니없는 노릇이다. 헛헛한 걸음으로 정문을 나서면서 다시 사진을 찍어본다. 언제라도 꺼내볼 수 있게 폰 속에 제대로 간직해놓고 싶다. 또 다녀갈 날을 쉽사리 기약하기 어려운 게 우리네 현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나오는데 문득 생각난 곳이 있다. 바로 학교 앞 문방구점. 단 몇 걸음 만에 마주한 그곳은 거의 옛날 그대로의 모습이다. 열린 듯 닫힌 창문을 혹시나 하며 두들겨보는데 잠시 후 인기척이 들려온다. 그분일까? 사실 얼굴도 생각이 나질 않는다. 드르륵 창문이 열리며 맞아주신 분. 그 시절의 주인장이 분명했다. 졸업연도를 밝히니 이내 기억을 더듬으신다. 악수도 청하고 ‘무극노트’도 몇 권 기념으로 산다. 환하게 웃으시며 사진촬영에도 응해주시고 동기들 만나면 안부 전해달라며 사인펜 두 자루를 덤으로 넣어주신다. 마치 고향의 이웃 아저씨를 조우한 기분이다.
어느덧 기울어가는 해. 왠지 자꾸 뒤돌아보게 된다. 누군가 부르는 소리도 없는데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는다. 어디 근처에서 커피 한잔 할 수 있는 카페 없나? 어쩌면 그 긴 머리 소녀가 거기서 커피를 마시고 있을지 모를 일이고.
어디선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의 발원지를 찾으며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20대 초반쯤 아버지가 살고 계시던 사택에 갔을 때의 일이다. 담 너머로 무심코 눈길을 돌리던 필자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나무 막대기로 얼기설기 엮은 짐승우리 같은 곳에 발가벗은 사람이 갇혀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그 사람이 오물을 벽에 칠한다는 치매 환자임을 알게 됐다. 가족은 농사를 지으러 논밭으로 나가야 했기에 환자를 집 안에 둘 수 없었다고 한다. 치매와 관련해 필자가 기억하는 첫 장면이다.
필자의 친구 부부는 둘 다 6·25 전쟁 때 아버지를 잃은 유복자다. 그래서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니를 함께 모신다. 그런데 어느 날 친정어머니가 덜컥 치매에 걸리고 말았다. 그때부터 시어머니는 사돈은 왜 우리 집에서만 사냐고, 다른 자식은 없냐며 타박하기 시작했다. 친구는 아들 옆에 붙어 잔소리를 해대는 시어머니가 서운하고 미워서 저녁이면 친정어머니와 놀이터로 가서 도리도리 짝짜꿍 놀이를 하고 집으로 들어오곤 했다. 그러면 친정어머니는 아이처럼 좋아했다. 그런 어머니를 차마 요양원에 보낼 수는 없었다. 가족들에게도 마음의 병을 주는 게 바로 치매다.
도봉구에서 만난 한 수강생은 자기 어머니가 예쁜 치매에 걸렸다고 말한다. 어머니가 새벽같이 일어나 몸단장을 하고 대문 앞에 의자를 갖다 놓고 앉아서 오가는 사람들에게 아침 인사를 하기 때문이다.
사극치매에 걸린 노인도 있다고 한다. 며느리가 외출 후 집에 들어오면 공손하게 “마마, 어디 다녀오셨습니까?” 하고 공손하게 묻는단다. 화가 나는 일이 있으면 “네 이년! 이실직고하지 못하겠느냐” 하며 며느리를 당황하게 만든다는 사극치매.
한 노인은 돼지고기를 볶아 맛있게 저녁을 먹고는 아들이 퇴근하자 며느리가 밥을 안 줘 배가 고파 죽겠다며 악을 썼다고 한다. 치매는 어느 날 그렇게 시작된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모든 층의 버튼을 누르고 모르는 집 문을 두드리는 일은 예삿일이다.
90세의 한 노인은 자서전을 출판하려고 준비 중이었다. 필자와 대화를 나누다가도 아내가 치매 환자인데 돌봐야 할 시간이라며 서둘러 집으로 갔다. 아내를 요양원에 보내려 했지만 그럴 때마다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당신 곁에 있게 해달라고 애원을 한단다. 자서전이 내일이면 나올 날이었는데 노인이 갑작스럽게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리고 3일 후 그의 아내는 자식들에 의해 요양원으로 보내졌다.
치매로 고생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환갑이 지나고 보니 남의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필자의 지인은 어머니를 요양원에 입원시키려 모시고 갔는데 그곳 직원들을 공손하게 대하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단다. 기억을 잃어가도 생존 본능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모습이다.
84세의 친정어머니는 아직 맑은 정신을 간직하고 계시지만 치매를 떠올리면 불안감이 밀려온다. 사회적 고립감이 치매를 일으킬 수도 있다는 생각에 전화를 자주 드린다. 어머니를 만날 때는 앨범, 빨간 내복, 반짇고리, 어머니께 사다 드린 옷과 목도리, 형제와 찍은 사진을 보여주는 이벤트를 한다.
가족의 사랑만이 치매를 예방하고 진행 속도를 늦출 수 있다. 만약 필자가 치매에 걸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하기도 싫다. 우선 고혈압과 당뇨에서 풀려나야겠다. 그리고 살도 좀 빼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