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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원식이 만난 귀촌 사람들] 귀촌은 반드시 부부가 함께해야
- 아산시 광덕산 자락으로 귀촌한 이웅기(66)씨는 시골을 홍보한다. ‘도시에 사는 시니어여, 시골로 가시라!’ 삭막한 회색 건물 숲에서 탈출하라는 얘기. 시골 자연 속에서 인생 후반을 흡족하게 누리라는 전갈. 도시라고 매력이 없으랴. 건강한 삶이 도시에선들 불가하랴. 그렇지 아니한가? 하지만 이씨의 생각은 다르다. 도시보다 수준 높은 게 시골의 여건이란다. 이웅기씨는 죽 도시에서 살았다. 도시에서 남들보다 밀리거나 뒤진 게 없었다. 그는 천안시에 있는 선문대학 사회복지학과 교수였다. 누릴 거 대충 다 누렸을 게다. 응분의 실력으로 도회의 풍속을 기민하게 섭렵했을 게다. 그러나 미련 없이 시골행 열차를 탔다. 행선지를 바꾼 여행자처럼 인생행로를 변경했다. “은퇴 이후에도 흔히들 은퇴하지 않은 것처럼 부대끼며 삽니다. 도시에선 마음의 여유를 갖고 살기 어렵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왜 굳이 답답하게 서울에 눌러 살까. 서울의 그 비싼 아파트를 팔아치우면 얼마든지 시골에 근사한 집을 지을 수 있을 것을. 집 짓고도 여윳돈이 남아도는 것을. 귀촌처럼 안전한 노후대책이 드물다는 생각이에요.” 시골에 구미가 당기면 과감하게 털고 내려오라는 얘기다. 자연을 애호하는 버릇이 있는 사람이라면 귀촌이 자연스럽다는 판단이다. 이웅기씨의 귀촌에 각별한 결단은 필요치 않았다. 시골살이는 오랜 꿈이었기에. 마음은 진즉 앞장서 산골에 가 있었기에. 아내(안경희씨·62) 역시 귀촌 지망생이었기에. 사직을 하고, 아파트를 팔고, 주변인들과 쾌히 작별인사를 하고, 일사천리로 일을 추진했다. 아하, 땅을 사는 과정엔 지체와 곡절이 있었더란다. 살터를 찾는 일은 시장에서 두부를 사는 일과 달라 신중을 기해야 하는 법. 기다렸다는 듯 맨발로 달려 나와 품에 안기는 땅이란 존재하지 않는 법. 한동안 전국을 누볐다. 그는 풍수에 일가견이 있다. 그의 눈은 매섭게 보고 깐깐하게 따지는 눈이다. 발품을 판 만큼 일쑤 눈에 드는 게 있었다. 그러나 계약 단계에서 땅을 거둬들이거나 값을 올려 포기해야 했다지. 인연은 뜻밖에도 천안 인근, 수려한 산촌에서 맺어졌다. 소풍 삼아 찾아간 산골 물가에서였다. 물가의 밝은 둔덕, 초승달 모양새의 땅덩이 1000평을, 그는 쾌재를 부르며 사들였다. 거기에 서둘러 집을 짓고 벽송재(碧松齋)라 당호를 붙였다. 푸른 솔숲에 에둘린 집이구나. 풍광을 보는 눈들은 엇비슷한 모양이다. 산수의 미모를 기차게 추구하는 이들이 이 골짝에 일찌감치 입장했다. 원주민보다 외지인 숫자가 많다. 삼삼한 터 여기저기에 멀끔한 전원주택들이 들어서 있다. 펜션도 많으니 휴가철엔 꽤나 버글거릴 게다. 덩달아 땅값도 뛰었다지. 산촌치고는 화려한(?) 현주소! 그래도 대자연이 압도해 시간조차 나른히 흐르는 것만 같다. 적막으로 채워진 공간은 고즈넉해 참신하다. 사방에서 일어서는 멧부리에선 우뚝한 맛이 난다. 골짜기는 깊숙한 멋을 풍긴다. 지겨운 세속의 난리블루스를 잊기에 족하다. 시골 살더라도 일은 놓지 말아야지 이씨의 집 곳곳엔 장항아리들이 즐비하다. 왜? 그는 된장을 담가 판다. 간장, 고추장, 청국장도 품목으로 삼았다. 산중에서 그저 노닐거나 빈둥거리기란 그의 적성에 맞질 않다. 일이 그의 본분사! 또는 일에서 낙을 찾고, 일로 만족을 구가하는 게 그의 본분사! 그는 날마다 고속도로처럼 분주한 눈치다. 된장 사업은 성업 중이고. “시골에 살더라도 일을 가지는 게 좋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야 생동하니까. 우두커니 먼 산만 바라보며 세월을 흘려버릴 순 없는 일 아니겠어요? 70세까진 뭐든 직업 활동을 하자는 작심으로 일을 찾았어요. 된장 사업이 적격이라 본 건 아내의 손맛을 믿어서였죠. 이게 무모한 판단일 수 있었지만 귀촌 초기에 즉시 일에 뛰어들었고, 열심히 매달렸고, 덕분에 썩 괜찮은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비결이 뭐죠?” “운도 따랐겠지만, 최상의 전통 장류를 생산하겠다는 초심을 견지했어요. 이 산골의 자연 환경, 즉 깨끗한 공기, 맑은 물, 풍부한 일조량도 장류 숙성에 호조건입니다. 순수한 천일염과 죽염을 재료로 장을 만든다는 점도 특장이에요. 방부제, 발효억제제, 조미료 등을 철저히 배제, 최상품 장류 생산에 주력했어요.” “귀촌을 해 장을 담가 파는 사람들이 드물진 않죠. 시골에 살며 택할 수 있는 일거리 중에 비교적 유망한 업종일까요?” “장 담그는 사람들의 80% 정도는 실패합니다. 세상의 일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소수만 성취한다는 것. 부지가 넓어야 하고, 공장 지어야 하고, 항아리 가격 비싸고, 초기 투자부터 부담되는 분야이지요. 그러나 유망한 측면도 있어요. 가령, 초중고 급식 재료로 안전한 전통 장류를 채택하는 추세가 확산될 텐데요, 고품질 장류를 만드는 사람들에겐 두세 배의 매출 확대를 꾀할 수 있는 기회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장류가 아니더라도, 여하튼, 시골에서 오히려 더 나은 일, 더 좋은 찬스를 찾을 수도 있다는 건 분명해요.” 귀촌한 지 어언 10년. 이웅기씨는 이제 노련한 시골생활자. 소일거리 삼아 시작한 된장 사업의 규모는 점진적으로 증가했다. 연간 매출은 2억 원. 내년부터는 아산시에 소재한 모든 중고교에 된장을 공급한다. 그렇게 되면 매출은 두세 배 는다. 그는 지자체가 운영하는 귀촌귀농인 대상의 각종 지원 사업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장류 관련 지원 사업 공모에 응모, 1억 원의 자금을 지원받은 바 있다. 그걸 밑천 삼아 사업을 전개했던 것. 소소하게 시작한 일이 사업화되면서부터 그는 엄청 바빠졌다. 도시에서 우리는 흔히 숨 막히게 바삐 돌아가는 일상에 탄식을 한다. 이씨는 그게 싫어서 귀촌을 했다. 그러나 시골에 와서도 다람쥐처럼 부산히 움직인다. 그러나 그는 기껍다. 삶에 자연이 붙어 있기 때문이겠지. 현실 도피처로 낭만적인 시골생활을 꿈꾸는 사람이 있지만, 어딜 가더라도, 시골에 살더라도, 삶의 끔찍한 증상은 따개비처럼 들러붙는다. 꾸역꾸역, 고독이나 권태가 밀려든다. 어쩌나? 이씨는 내 마음 안에, 내 몸 안에 자연을 담는 게 상책이라 본다. 그는 자연의학에 관한 한 전문가를 자처한다. 마음을 좋게 쓰는 게 좋은 삶 “귀촌 이후 저의 만족, 저의 행복의 대부분은 자연과 함께하는 데에서 비롯하고 있어요. 몸과 마음으로 자연이 들어오고, 그런 와중에서 잃어버렸던 나를 찾는 것, 이게 행복이라 봐요. 그렇게 되면, 비로소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게 됩니다.” “병이 나기 전까진 몸을 기계처럼 부리는 게 사람이죠. 아무거나 맛있는 음식이면 뱃속에 잔뜩 집어넣죠. 자연의학의 요체는 뭐죠?” “몸이 원하는 걸 알아채는 거. 바로 그겁니다. 건강하지 않고선 행복이고 성공이고 다 소용없어요. 건강하긴 위해선 몸이 원하는 걸 섭취해야 해요. 일례로, 입에서 쉰내가 나면 신 음식을, 단내가 나면 단 음식을 먹어줘야 해요. 그 무엇보다 사람의 병은 마음에서 온다는 걸 알아야겠지요. 건강 문제는 결국 마음먹기에 달린 문제예요.” “뭐든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걸 모르는 바보는 없겠죠. 그러나 마음은 날뛰는 망둥이를 닮았어요.” “예컨대, 아파트 위층에서 애들이 뛰는 소리에 분개해 살인까지 하는 경우가 있더군요. 마음을 잘 써 위층 애들이 내 손자라고 생각했다면 어땠을까? 노력을 해야죠. 마음을 좋은 쪽으로 쓰는 게 좋은 삶의 길이니까.” “천사라 부를 수밖에 없는 젊은 사람이 중병에 걸려 사경에 처하기도 해요. 신기하게도 다 죽어가던 사람이 산골에서 풀을 주로 뜯어먹고 건강을 회복하기도 하죠.” “의학적,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지만 현대의학이 못 고치는 병도 자연의학은 고칩니다. 자연식을 통해 기적적 회생을 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공기 좋은 산골에서 오염되지 않은 산야초를 먹게 되면 건강이 좋아질 수밖에 없어요. 몸 아픈 사람들에겐 귀촌귀농이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놈들은 명물이다. 힘이 세다. 산야초 또는 잡초 말이다. 잡초는 그 강한 생명력으로 사람에게 이치를 가르친다. 뛰어난 약성으로 사람을 돕는다. 보잘것없는 잡초야말로 미래 식량의 대안이라 보는 관점도 있다.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실은 보잘 것 많은 잡초. 잡초 밟기를 극구 삼가는 사람이 있다. 남의 얼굴을 구둣발로 밟고 지나는 건 결례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잡초를 극진히 대접하긴 사실 힘들다. 그러나 자연 안에서 모든 생명들은 동등하고 존엄하다는 인식은 갸륵하다. 귀촌 생활은 자연과 생태에 관한 인식의 지평을 확장할 수 있는 기회와의 조우이기도 하다. 자연의 아름다움에 감관을 활짝 열 수 있다면 쓸쓸한 삶을 더 잘 견딜 수 있겠지. 아름다운 건 자연만이 아니다. 여자도 아름답다. 아내도 아름다운 존재다. “대부분의 아내들은 귀촌이나 귀농을 싫어합니다. 불편이 많아서죠. 제 아내는 흔쾌히 동의했어요. 딱히 서로 정서가 비슷해서는 아니고, 묵묵히 남편을 따라준 거죠.” “혹시 독재를 일삼는 남편? 마초?(웃음)” “제가 여성 예찬론잡니다. 남자는 하염없이 나약한 동물이지만 여자는 강해요. 정글에서도 암컷들이 훨씬 강해요. 여자들에겐 별다른 단점이 없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남자보다 여러모로 나아요. 지구력, 지속력, 생명력 등등에서 더 우월하니까. 아내를 통해 그걸 실감해요. 수굿하고 진득한 이 사람은 평생 불만이라는 걸 내비치질 않았어요. 아, 팁 하나! 귀촌은 반드시 아내와 대동해야 합니다. 남편이 먼저 내려와 자리를 잡은 뒤 합류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간 필경엔 실패할 확률이 높아요. 시골생활엔 여자가 할 몫이 너무도 많다는 걸 알아야 한다는 것! 특히나 원주민들과의 융화엔 안식구의 역할이 절대적이지요.” 인터뷰를 마치자마자 부부가 서둘러 된장 작업장으로 들어간다. 교수에서 장류업체 사장으로 변신한 이씨의 어깻죽지에 의기양양이 비친다. 상상력이란 창작의 영역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귀촌에도 상상력이 필요하다. 상상력이 창의를 가져오고, 마침내 만족할 만한 일거리를 찾아내게 한다. 전에 해보지 않았던 일에의 도전은 어쩜 최상의 회춘 전략!
- 2017-10-12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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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희, 동화처럼 아름다웠다
- 2010년 봄, 결혼을 하겠다는 아들의 말에 필자의 마음은 쉬지 않고 어디론가 달려갔다. 아들은 2006년 4월에 전신 3도의 화상을 입었다. 주치의는 심한 열에 달궈진 아들의 몸과 마음이 정상으로 돌아오기 힘들 것이라고 했다. 불길을 온몸으로 품은 듯 아들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을 때가 많았다. 어려서는 말수가 적고 차분했는데 그렇게 조용하던 아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순식간에 불기둥이 치솟는 마음의 병은 착했던 아들을 되돌려주지 않았다. 아들이 그럴수록 필자도 말수가 줄어갔다. 아들의 고통에 어떠한 말도 감히 할 수 없었다. 엄마라도 그 고통은 알 수 없을 거야… 그게 필자의 마음이었다. 조심 또 조심하라고 당부하는 주치의의 말만 되새김질하는 날들이었다. 그런 아들이 어느 날 결혼을 하겠다는 소릴 한 것이다. 꿈에도 생각해본 적 없는 말에 놀라서 아들을 올려다봤다. 환하게 웃는 얼굴이었다. 마치 병이 다 나은 듯 어린아이처럼 밝은 표정이었다. 필자는 덥석 손을 잡으면서 축하한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어깨를 다독여줬다. 그러자 아들은 “잘살게!” 했다. “어떻게 해주면 되지?” 하고 물으니 “엄마, 그동안 제가 너무 속만 썩였지요?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우리가 다 알아서 할게요. 결혼반지는 커플링으로 할 거고 결혼식장은 다 준비되었어요. 청첩장은 300장 정도 만들 거니까 엄마가 필요한 만큼 가져가셔요. 신부 쪽엔 친척이 거의 없어서 제 친구들과 형들만 초청할 거예요.” 집 걱정을 하니 그것도 걱정하지 말란다. 그날은 필자 귀를 의심하면서 눈물만 쏟았다. 필자에게 남은 단 하나의 아들 아닌가! 필자의 친구들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축하해줬다. 그리고 드디어 주례도 없이 아들이 신부에게 직접 노래를 불러주며 아주 색다르고 멋진 결혼식을 했다. 이런 걸 보고 꿈같은 일이라고 하던가? 감동에 젖어 아들 결혼식을 무사히 잘 끝냈다. 주치의는 그래도 마음을 놓지는 말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아들과 며느리는 빈손으로 한 결혼이었지만 아무 불평 없이 딸아이 낳고 행복해하면서 잘 살았다. 그런데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작년 5월에 며느리가 폐암 말기 선고를 받고 그 해 12월에 세상을 떠나버렸다. 세 식구 똘똘 뭉쳐 행복을 만들며 살더니… 아내가 가자 아들은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신은 왜 그렇게 가혹한 걸까. 이제 모든 것들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버린 것 같다. 부모에게 손 안 내밀고 저희들끼리 당당하게 결혼식을 올린 이 멋진 커플을 정말 사랑했는데… 부모의 마음을 넘어 존경하기까지 했는데… 또 얼마나 자랑스러웠는데…. 그러나 동화처럼 아름다웠던 그날의 한강 선상 결혼식은 이제 영화의 한 장면처럼 필자의 가슴에 아프게 못 박혀 있다.
- 2017-09-08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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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한 시간 나이테를 그리다
- 추억은 그리움이고 행복의 고리다. 감감히 멀어져 가는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기억을 되살리는 순간은 더 없는 기쁨이다. 나이가 들어가고 인생의 황혼기에 가까워가면 그 심정은 간절해지기까지 한다. 지나간 날은 고난의 시간이었어도 좋은 날로 기록된다. 그래서인지 사람은 늘 고향을 그리워하게 된다. 고향의 품에 안기면 그냥 여유로워지기 마련이다. 정지용 시인이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 러뇨”라 읊었듯 때로는 달라진 고향 산천에 어리둥절하기도 하다. 그러나 추억은 늘 그대로이다. 고향을 찾은 날은 옛 시절을 떠올리며 추억에 잠기는 즐거움과 잔잔한 행복으로 가득해진다. 필자는 오랜만에 올봄에 고향산천을 찾았다. 지리산 청학동 마을이 있는 청학 계곡이다. 행정상으로는 경상남도 하동군 청암면 일원이다. 지금의 청학동 도인촌에 살던 조부모님은 빨치산을 피해 십여 리 떨어진 아랫마을, ‘대밭 몰(죽동)’로 이주해 살았고 그 마을도 지금은 하동호 댐에 묻혔다. 초등학교 시절에 뛰놀던 동네와 마을 앞을 흐르던 냇물, 설날이면 연 날리던 들녘이 물에 잠겼다. 초등학교 동창들과 밤 새우듯 이야기꽃을 피우다 잠시 눈을 붙였다. 호수에 어리는 아침의 고향 풍경이 보고 싶은 마음에 자는 듯 마는 듯 이르게 눈을 떴다. 어찌 보면 사진을 찍고 싶은 사진작가의 일상적 버릇인 셈이다. 덜 깬 눈을 비비며 카메라를 챙겨 하동호 둘레의 오솔길 자락에 섰다. 태양이 동산을 오르기 전이다. 물안개가 산허리를 옅게 두르고 있다. 산 그림자는 호수에 선명히 드리워져 대칭을 이룬다. 호수로 가지를 뻗은 소나무의 짙은 향내가 코끝에 와닿고 풀잎에 조심스레 앉은 이슬방울이 바짓가랑이를 적신다. 호수를 전망할 수 있는 가장자리에 섰다. 그리고 카메라로 한 폭의 수채화를 그렸다. 청학동이 저 멀리 그려지고 옛 고향 마을이 배치되는 풍경의 구도를 잡았다. 잔잔한 미소의 필자도 하나의 배역이 되었다. 혼자여서 타이머를 활용하여 스마트폰 카메라의 셀카 기능으로 찍었다.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담았다. 필자는 조용히 눈을 감아본다. 추억의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어렴풋이 떠오르고 스쳐 지나간다. 잊혔던 기억이 현장에서 하나둘 살아나고 스르르 행복이 가슴을 흔든다. 호수를 둘러싸고 있는 앞산 건넛산 산자락 숲속에 장끼, 뻐꾸기 울어 에고 산울림 된다. 소년이 되어 “뻐꾹, 뻐꾹~” 흉내 내어본다. 이슬 머금은 여린 풀잎을 꺾어 풀피리 불어보나 예전 같지 않다. 소 풀 먹이던 뒷동산 언덕배기에 밤꽃이 은은한 향기를 흩뿌린다. 호수 가의 대나무 댓잎은 바람결에 서로 부딪히며 고향의 봄을 연주한다. 죽순이 자라는 소리 들리는 듯하다. 옷가지 하나 걸치지 않은 맨몸으로 멱감던 냇가의 조약돌은 물속에 자리해 보이지 않아도 필자는 어느새 고운 돌멩이 하나를 집어 들고 호수를 향해 던진다. 물 위를 튕겨가며 물방개 물결을 만든다. 추억을 둥글게 그렸다 사라진다. 하동호에 묻힌 예전 고향 풍경이 눈에 보이지 않아도 마음속에 뚜렷이 다가온다. 언제 찾아도 좋은 마음의 고향이다. 세월이 쌓이고 인생을 마무리해갈 즈음이면 고향에 돌아가고 싶은 이유인지 모른다. 가끔은 고향의 품에 안겨 지친 다독이며 추억을 되돌려 봄으로써 행복한 시간을 만들 필요도 있지 싶다. 고향의 품에 안겨 커다란 또 한 겹의 행복한 시간 나이테를 그렸다.
- 2017-07-20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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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주님과 기사님?
- 사실 이 이야기를 하기는 무척 조심스럽다. 진정성을 헤아리기보다는 얄팍한 호기심으로 남의 집 창문 들여다보는 일을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기에. 그러나 야학 시절 우리 가족을 가장 살뜰히 사랑해주셨기에 지금도 필자에게 따뜻한 난로가 되어주는, 그러므로 가장 소중한 의미가 담긴 청춘의 빛깔 고운 커튼을 조심스럽게 걷어 올려본다. “얘 네가 뭐 잘난 게 있다고 J선생님께 그렇게 쌀쌀맞게 굴었니?” “선생님이 너한테 얼마나 잘해주셨니? 그것도 모르고….” 요즘 만나는 야학 동급생들은 우연히 화제에 오른 J선생님 얘기를 하다가 필자를 무차별 공격했다. 인간이란 얼마나 오만한 동물인가. 상대방이 조금만 잘해주면 자기 분수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기고만장하지 않는가. 라는 책 제목처럼 필자도 연애감정의 알파와 오메가를 10대인 야학 시절에 이미 다 터득했다. 순수한 선생님으로서 보여준 사랑이었는지, 약간은 감정이 있는 마음이었는지 지금도 아리송하지만 당시 필자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셨던 J선생님께 차갑게 굴었던 기억이 있다. 어쩌면 마음의 상처를 입었을지도 모를 J선생님께 두고두고 죄송할 따름이다. 가난 때문에 다니게 된 야학교였지만 필자는 그 시절 세상의 온갖 아름다움과 선을 만났고 그 감동은 단지 추억으로만 그치지 않고 살아오는 동안 필자를 격려하고 위로하는 힘이 돼줬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 시절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다. 모든 것에 우선한 아름다움이 오염되지 않은 순백의 영혼이다. 그 자체가 큰 감동이라서 사람들을 정화시키는 힘이 있다. 야학 시절 그런 분들을 알았기에 이후 다른 사람들과의 인간관계에서 애를 먹기도 했다. 그렇게 좋으신 분들을 한두 분도 아니고 몇십 분을 알고 있었으니 얼마나 큰 축복이고 행운인가. 달빛이 교교한 어느 10월의 밤이었다. 가을 풀벌레 소리가 들려오고 길섶 댑싸리에 내려앉은 달빛이 아름다운 밤이었다. 코끝에 스치는 바람도 달콤 상큼했다. 그날은 야학 수업이 끝난 뒤 J선생님이 필자를 집까지 데려다주시는 길이었다. 요즘 대학생들은 교복을 입지 않지만 당시 서울대 농대생들은 날이 선선해지면 감색 교복을 입고 다녔다. 그리고 가슴에는 라틴어로 ‘진리는 나의 빛’이라고 새겨진 배지를 달았다. 다들 어려운 때라서 사복 입을 형편이 못 되는 학생들도 많았겠지만 들어가기 힘든 서울대 교복이었으므로 상당한 애착 내지는 긍지도 있었을 듯싶다. 우리 집에 거의 도착할 즈음 J선생님은 교복 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내시더니 필자에게 내미셨다. “애란아 이거 내가 쓰던 건데 너 가져라.” “싫어요.” 그 시절 겨우 연필 아니면 볼펜 정도나 쓸 수 있었던 필자로서는 쉽게 갖기 힘든 필기구였다. 하지만 받지 않았다. 자존심이 상해서였다. “그러지 말고 받아라.” “싫어요.” “제발 받아라.” 싫다는데 계속 받으라고 하자 짜증이 나버린 필자는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싫다니까요.” 몇 번 그렇게 거절하자 J선생님은 그만 땅바닥에 정중히 무릎을 꿇고 그 만년필을 두 손으로 바치시는 것이 아닌가? 그때 만년필 위에 내려앉아 반짝이던 교교한 달빛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세상에! 맙소사!’ 순간 필자는 너무 당황스럽고 황송해서 얼른 두 손으로 만년필을 받았다. 자신이 존경하는 선생님이 그렇게까지 하시는데 제자인 필자가 더 이상은 버틸 재간이 없었다. 선생님과 헤어져 집으로 들어온 뒤에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그 만년필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하얀 달빛이 노니는 마루 끝에 앉아서 선생님의 모습을 자꾸 생각하는 밤이었다. ‘아! 너무나도 낭만적이고 황홀한 밤이었어!’ 그 후 필자는 두고두고 그날 밤 그 장면을 떠올리며 황홀해했다. 17세 때였고 어느덧 3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그날 그 장면이 선명하게 기억된다. 달빛이 찬란히 빛나던 아름다운 젊은 날의 내 소중한 추억이여! 제도권에서 교육을 받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필자의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 무리가 있을 것이다. 자존심만 시퍼렇게 돋아 있는 제자의 속내를 최대한 배려해주신 J선생님. 현실 속에서는 비록 비참한 신분일망정 상상의 세계에서는 언제나 고고한 공주였던 필자의 정신세계를 잘 알고 계셨기에 그날 기꺼이 최초의 기사님(?)이 되어주셨던 것이다. 이런 일은 결코 흔치 않으며, 필자만큼 환상적인 학창 시절을 보낸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많은 추억 속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주인공은 단연 J선생님이다. 이 로맨틱한 멋진 기사님(?)을 숨이 끊어지지 않는 한 어찌 잊을 수 있으랴.
- 2017-06-27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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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땡큐’ 뒤에 끝내 못 부쳤던 말
-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돼서 마음만 동동 구르는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의 문을 두드려주셔요. 이번 호에는 낯선 길에서 아주 사소한 친절을 베풀어준 한 사람에게 미처 하지 못했던 말을 김인숙 소설가께서 이 지면을 통해 해주셨습니다. 김인숙 소설가 기르던 고양이가 죽었습니다. 이런 경우, 무지개다리를 건너갔다는 표현을 쓰기도 하더군요. 다리를 건너든, 강을 건너든, 열다섯 살 소녀도 아니고 이미 오십이 훨씬 넘은 처지에 기르던 것이 세상을 뜬 얘기로부터 이 편지를 시작하는 걸 이해해주십시오. 나이를 들먹이는 건, 이 나이쯤 해서는 기르던 것만 세상을 뜨는 게 아니라 사랑했던, 사랑하는 많은 사람 역시 내 곁을 수시로 떠나기 때문입니다. 가족들, 선배들, 심지어는 후배들까지. 그러니, 이런 나이에 기껏, ‘기르던 것’과의 작별에 대해 당신에게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민망하기도 한 것입니다. 먼저, 오해는 하지 말아주십시오. 꼬박꼬박 기르던 것이라고 말을 하고 있지만, 그 말에 무시하고 하찮아하는 마음을 담고 있는 건 아닙니다. 다만 내가 눈물로 이별했던 사람들과 ‘기르던 것’과는 구분을 하고 싶을 뿐입니다. 이별은 같지만, 사랑도 같지만, 그래도 다른 건 다른 것이고, 달라야 할 것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지금 그 아이, 기르던 것과의 작별에 대해 말하려고 하는 것은 작별의 슬픔과 살고 죽는 것의 어찌할 수 없음에 대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런 이야기는 해서 뭐하겠습니까. 누구나 짐작할 만큼 슬펐다고 그렇게 말하는 걸로 족합니다. 그런데도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잊히지 않는 것 때문입니다. ‘그 아이’가 세상을 뜨기 직전, 먹을 걸 거부하더군요. 죽을 걸 알고 있으니 조용히 굶어죽겠다는 겁니다. 그걸 가만 보고 있을 수가 없어 강제급식이란 걸 시작했습니다. 거부하는 아이를 꽁꽁 싸매 꼼짝도 못하게 하고 주사기로 묽은 죽과 약을 억지로 투여하는 겁니다. 아이는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버티고, 나는 진땀을 뻘뻘 흘리며, 울며, 제발 먹어 먹어, 나를 위해서라도 먹어줘, 그랬습니다. 그때, 그 한숨소리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죽어가는 고양이가 한숨을 쉬더군요. 모든 걸 다 내려놓은 듯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한숨을 쉬더라고요. 이제 그만해. 사람의 말로 말할 수 있었다면 아이의 말은, 아마 그런 것이었을 겁니다. 분명히 그랬을 겁니다. 이런 울적한 이야기 끝에 이제야 인사를 드립니다. 당신은 나를 모르시겠지만요. 나는 언젠가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싶은 일이 생긴다면, 그 누군가가 아주 낯선 사람이기를 바라곤 했었습니다. 사랑하는 누군가에는 내 마음을 다 털어놓고 싶지 않았고, 그게 가능할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둘만이 통하는 말이 다른 말들을 가로막을 것 같았습니다. 내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누군가에게 내 짐을 얹어주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어떤 편지를 쓰더라도, 나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려고 애쓸 거고, 나 자신을 위로하는 말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위로하는 말을 하려고 들 텐데, 그러면서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그런 내 마음을 이미 다 알아차리고 더 마음 아파하고 있다는 걸 알아버릴 테니까요. 그래서, 편지 같은 거, 절대로 안 쓸 거라 생각했고, 그래도 꼭 누군가 들어줄 사람이 필요하다면, 누군가에게 그저 다정한 안부 한마디쯤 문득 건네고 싶어진다면, 그 누군가가 완전히 낯선 사람이기를 바랐던 겁니다. 그래서, 당신. 나는 당신의 이름도 알지 못하고 얼굴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어떤 우연이 당신을 다시 만나게 해준다고 하더라도 당신도 나도 서로를 기억하지 못할 게 틀림없습니다. 물론 나는 당신을 압니다. 당신을 기억할 수밖에 없는 사연도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한테는 너무나 무의미해서 내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조차 모를 게 뻔합니다. 기껏해야 당신은 말하겠지요. 아, 내가 그런 일을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당신은 그런 일을 했습니다. 몇 해 전이었고, 나는 그때 싱가포르 공항에 막 내린 참이었습니다. 싱가포르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섬에서 몇 달을 체류하다가 비자를 연기해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가장 쉬운 방법이 그 섬을 나갔다 돌아오는 일이라고 해서 하루 일정으로 싱가포르에 갔던 겁니다. 그래서 싱가포르에서의 체류시간이란 게 고작 몇 시간밖에는 안 되었습니다. 여유 있게 다시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에 돌아오려면, 싱가포르 시내를 구경할 시간도 안 되었지요. 싱가포르에서 하루나 이틀 자고 돌아오는 일정을 짤 수도 있었을 텐데 왜 그렇게 서둘러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무슨 이유가 있었겠으나 지금은 잊어버렸습니다. 아무튼 고작 두어 시간, 그래도 공항에만 머물러 있을 수는 없어서 내가 짰던 여행 계획이란 게 버스를 타고 시내 한 바퀴를 돌아보는 거였습니다. 공항에서 출발해 공항으로 돌아오는 버스가 있었습니다. 한 시간 반쯤, 버스 안에서 시내를 구경할 수 있겠네요. 당신은 공항에서 일을 하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나는 내가 타려고 하는 버스가 어디에서 출발하는지를 물었습니다. 버스를 타려면 버스비가 필요하다는 것, 그것도 싱가포르 돈이 필요하다는 것, 그러므로 환전을 해야 한다는 것, 이런 복잡한 생각은 당신에게서 버스 타는 곳이 어디인지를 알게 된 후에야 들었습니다. 버스 한 번 타자고 먼 환전소를 찾아가 돈을, 그것도 코인으로 환전해야 할 상황입니다. 난처한 내 표정을 눈치 챈 당신이 내게 먼저 묻습니다. 차비가 필요합니까? 이런 민망한 질문에 쉽게 대답하기는 어렵습니다. 머뭇거리고 있는 동안, 당신은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내게 내밀어줍니다. 그러고는 내가 고맙다는 말을 다 하기도 전에, 그러니까, 땡큐 뒤에 쏘 머치 하기도 전에 당신은 다른 곳으로 가버립니다. 나는 당신이 준 동전을 손에 꽉 쥐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 백원짜리 동전을 손에 꽉 쥐고 문방구나 만화방으로 달려갈 때처럼, 손바닥에 땀이 고입니다. 이쯤 되어서는, 당신은 아마 내게 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게 답니까? 내가 이런 편지를 받아야 하는 이유가? 맞습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당신은 기억도 하지 못하는 어떤 한국 여자의 시간과 수고를 아껴주기 위해 동전 몇 개를 주었다는 이유로 지금 이 편지를 받고 계십니다. 게다가, 내 마음의 이야기까지 들어주어야 할 판입니다. 당신이 바란 일은 결코 아니었겠지요. 당신은 그저, 먼 곳에서 온, 혼자인 여행객이 당신의 나라, 당신의 도시를 잠깐이라도 좋은 마음으로 바라보다 돌아가기를 바랐을 뿐일 텐데요. 그 사소한 친절은 그러나 사소하게 흘러가지 않고 오래 따듯한 마음으로 남습니다. 생의 어떤 고비마다 문득문득 가파른 길에 서 있다고 여길 때마다, 그래서 누군가를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위로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할 때마다, 그러나 누구의 짐도 되고 싶지 않을 때, 나는 내가 오래전에 받았던 당신의 친절을 떠올립니다. 고작 동전 몇 개, 버스 한 번 탈 돈, 그러나 외면하지 않고 베풀어진 친절, 그런 게 정말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나는 당신이 준 동전 덕분에 싱가포르 시내를 구경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편안한 자리에 앉아 한가롭게 시내 한 바퀴를 돕니다. 그날의 햇살, 그날의 적당히 기분 좋던 나른함을 나는 아직도 기억합니다. 고양이를 떠나보내고 돌아오던 길, 나는 내 고양이에 관한 이야기를 누구에게 할 수 있을지 생각했었습니다. 그날 그 시간의 내 마음을 함께해줄 사람이 없었던 건 아닙니다. 어쩌면 아주 많이, 내 생각보다도 훨씬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그럴 겁니다. 그러나 때로는, 아주 낯선 사람의 아주 사소한 친절만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 친절을 동전처럼 손에 꼭 쥐고, 땀을 흘려가며, 잊지 말아야지, 잊지 말아야지, 하고 싶은 겁니다. 적당한 거리의 타인에게 내 이야기를 하고, 그 누군가는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 친절이 내 마음을 녹이는 순간 말입니다. 슬픔이 동전처럼 손안에서 땀으로 흘러내려, 그게 위로라고 여겨지는 순간, 그런 것 말입니다. 그 낯선 사람이 당신이라면, 당신은 내게 ‘이제 그만해’라고 말해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너무 사랑하면, 그런 말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에게서나 그런 말을 들을 수 있을 것 같고, 듣고 싶습니다. 당신의 주머니에 아주 많은 동전이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 어디에서나 몰려드는 많은 여행객들에게 그 동전이 하나씩 하나씩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괜찮다는 마음, 이제 그만해도 된다는 위로, 당신은 의도치 않았을지 모르나, 그 마음을 담고 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러므로 이제 와서, 땡큐 뒤에 끝내 못 부쳤던 말, 쏘 머치를 붙입니다. 감사합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 2017-06-26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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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을 품위 있게 준비하는, 유분자 소망소사이어티 이사장
- 일흔에도 여든에도 아흔에도, 심지어 100세가 되어서도 저세상엔 못 가겠다던 노래가 공전의 히트를 친 적이 있다. 노래는 150세가 되어서야 극락왕생했다며 겨우 끝을 맺는다. 살 수만 있다면 100년 하고도 50년은 더 살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 아닌가. 장수만세를 외치는 100세 시대 시니어들에게 어쩌면 ‘죽음’은 금기어와 같다. 얼마나 ‘사(死)’에 민감하면 건물에도 엘리베이터에도 ‘4’층을 빼어버리기 일쑤인가 말이다. 그런 면에서 유분자 소망소사이어티 이사장(83)은 용감하고 거침이 없다. 1968년 간호사로 도미해 치열한 이민자의 삶을 산 그녀는 은퇴 후 시니어들을 향해 ‘품위 있게 죽자’고 외치고 있다. 그녀는 말한다. 100세 시대, 지금이야말로 죽음에 대해 터놓고 말해야 할 때라고. 일흔에 다시 품은 ‘소망’ 미국 땅에서 이민자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지 50년, 반세기다. 그 세월을 지나는 동안 유분자라는 이름 앞에는 재미 한인 간호사의 대모, 코리아타운의 철의 여인, 한인 여성운동가 1호라는 수많은 수식어가 붙었지만 어느 하나 의도한 바는 없다. 매 순간 절실하게 필요한 일이 있었고 아무도 하지 않았기에 그녀가 했을 뿐이다. 1971년 낯선 타국에서 일하는 간호사들끼리 서로 의지하자는 뜻에서 만든 ‘남가주 한인간호협회’는 지금의 재미간호협회로 발전해 한인 간호사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RN(미국의 국가면허 소지 간호사)이 고소득 전문직으로 이민생활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 직접 한국어 클래스와 예상 문제집을 만들어 한인 여성들의 RN면허 취득을 도왔다. 당시 이 프로그램을 통해 RN자격을 획득한 간호사만 3000명이 넘는다. 1980년대 한인들의 미국 이민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이민 가정에 크고 작은 문제들이 불거지자 가정법률상담소도 만들었다. 가정폭력에 노출된 한인 여성들을 위한 인권운동으로 시작된 가정법률상담소는 현재 미주 한인 사회를 대표하는 비영리단체로 자리 잡았다. 한국의 가족과 친지들을 초청하면서 일으킨 요식업체 ‘비지비(Busy Bee)’도 성공가도를 달렸다. 간호사를 그만두고 그녀가 CEO로 활동하는 동안 ‘비지비’는 캘리포니아에만 14개 지점을 오픈, 탄탄한 프랜차이즈 브랜드로 입지를 굳혔다. 유분자 이사장이 신분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한인들에게 비지비를 통해 영주권을 취득하도록 주선한 일화는 수도 없이 많다. 1997년 조국이 IMF 외환위기로 신음할 때는 한국의 결식아동을 위해 '나라사랑 어머니회’를 만들었다. 이후 ‘어머니회’는 터키, 동티모르, 베트남, 이라크, 북한 등의 불우 어린이를 돕는 글로벌 단체로 성장했다. 실로 철의 여인이라 할 만하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어느덧 그녀의 삶은 미주 한인 이민의 역사가 되어 있었다. “거창한 일을 해보자 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다 그때그때 절실한 일이었어요. 하지만 하다 보니 좌우명 같은 것이 만들어지더라고요. 남이 하기를 기다리지 말고 내가 하자. 내가 할 거면 지금 하자. 지금 한다면 기쁘게 하자. 그러다 보니 은퇴도 좀 늦었어요. 일흔이 되던 해, 이젠 좀 편하게 지내라는 딸의 성화에 못 이겨 일을 놓았는데 저는 하나도 편하지 않더라고요. 할 일이 없다는 것,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오히려 불편했어요. 그리고 그때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뒀던 ‘그 일’을 시작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로 노인들에게 사전의료의향서와 유언장을 쓰게 하는 일이었어요.” 2007년, 소망소사이어티는 그렇게 탄생됐다. 그녀의 나이 일흔에 다시 품은 소망이었다. 그녀가 죽음을 이야기하는 이유 간호사라는 직업 때문에 유분자 이사장은 수많은 죽음을 목격했다. 특히 시니어 전문의료시설인 너싱홈에서 근무할 당시 죽음 앞에서 환자와 가족들이 겪는 여러 가지 모습들을 보면서 깨달았다고 한다. 죽음에는 당하는 죽음과 맞이하는 죽음이 있다는 것을. “당하는 죽음은 본인은 물론 가족까지도 불행하게 만듭니다. 극도의 두려움으로 삶에만 집착하지요. 살려 달라 소리치고 나중엔 의료진과 가족에게 분노와 원망을 퍼부어요. 한 번도 자신의 죽음에 대해 가족들과 이야기한 적이 없으니 죽음 이후에도 가족들은 장례 문제를 두고 갈등과 언쟁을 벌이게 돼요. 반면 맞이하는 죽음은 아름답기 그지없습니다. 마음의 평정을 가지려 애쓰며 가족들에게 사랑과 감사의 뜻을 전해요. 평소 좋아했던 음악을 듣고 자신이 믿는 절대자에게 기도하죠. 마지막 의료행위와 장례에 관한 뜻도 가족들에게 미리 전해 모든 절차가 평화롭게 진행됩니다. 가족들은 온전히 고인을 추모하면서 서로를 위로하는 데 집중할 수 있어요. 이렇듯 준비하는 죽음은 나와 가족 모두를 위한 일이에요.” 사실 다니는 교회를 중심으로 주변의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에게 유언장을 쓰라고 권하고 다닌 지는 꽤 오래됐다. 당시 세상은 온통 웰빙을 부르짖던 시절이다. 온 세상 사람들이 잘 살아보자는데 그녀 홀로 잘 죽는 법을 외치고 다닌 셈이다. 돌아보면 그것이 바로 ‘웰다잉’ 운동이었다. 물론 그때는 그런 단어조차 없었지만. 유언장은 돈 많은 노인들이 유산분배를 할 때나 쓰는 것으로 알았던 한인 노인들은 적지 않게 당황스러워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내민 종이에는 응급상황 시 연명치료는 어디까지 원하는지, 화장과 매장 중 어떤 것이 더 좋은지, 장례식은 어떻게 치르기를 원하며 특별히 원하는 음악이나 글귀가 있는지를 묻는 질문이 있었다. 오래 사시라고 덕담을 해도 모자랄 판에 난데없는 유언장이라니. 재수 없다고 욕도 많이 얻어먹었다고 한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일이 벌어진 것은 그다음부터였다. “유언장을 쓴 분들의 한결같은 고백은 자신의 죽음을 상상하고 난 후의 삶이 묘하게 자유로워지고 더 소중해졌다는 것이었어요. 건강하게 살아야겠다. 더 의미 있게 살아야겠다 등등. 죽음에 대한 인식이 삶에 대한 인식까지 바꾸어놓은 것이죠. 죽음은 삶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삶과 바로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그냥 오래 사는 것이 아니란 말이지요.” 비우고 내려놓음, 그리고 너그러움 여든셋의 그녀는 누구보다 건강하다. 여전히 붉은 립스틱을 멋스럽게 소화하고 적당히 높은 굽의 구두도 문제없다. 요즘같이 화사한 봄날에는 어김없이 연분홍 네일컬러를 바르고 사람들을 만난다. 작은 모임이라도 향 좋은 커피와 샌드위치를 내어놓고 회의 테이블에 모인 한 사람 한 사람을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사람으로 소개한다. 그녀의 삶 어느 한 구석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어 보인다. “웰다잉을 위해 먼저 해야 할 일이 뭔지 아세요? 바로 웰에이징이에요. 나이를 먹어가면서 가장 좋은 것 중 하나는 나에게 또 남에게 너그러워진다는 사실이죠. 고백하건대, 나는 소망소사이어티 일을 시작하기 전까지 그리 너그러운 사람은 아니었어요. 완고했고 많은 사람들이 나를 어려워했지요. 무엇이든 원하는 것, 기대하는 것이 많으면 너그러워지기 힘든 거 같아요. 결국 비우고 내려놓음이 키워드죠.” 10년 전, 소망유언서 쓰기로 시작한 소망소사이어티의 사역은 현재 여러 가지 방향으로 영역을 넓혔다. 건강한 삶을 위한 치매 예방과 삶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호스피스 교육, 장례절차 간소화 운동, 그리고 비우고 내려놓는 삶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장기기증과 시신기증 캠페인이 그것이다. 특히 2009년 UC어바인 의과대학과 진행하고 있는 시신기증 캠페인은 대학병원 측도 놀랄 만한 결과를 가져왔다. 당시 4명에 불과했던 한인 기증자는 현재 869명에 이르고 있다. “가장 높은 차원의 내어줌이죠. 하지만 시신기증을 결정하기까지 저 자신도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아이들을 설득시키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시신기증이 편안하고 행복한가라는 질문에 ‘예스’라고 대답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결정할 수 있는 일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에도 앞장서고 있다. 2010년 아프리카 차드에 첫 우물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아프리카와 중남미에 302개의 우물을 만들었다. 식수가 없어 오염된 물을 마신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유분자 이사장은 직접 원정대를 꾸려 차드까지 날아갔다. 오는 11월에는 네 번째 원정대가 떠난다. LA에서 파리를 거쳐 장장 22시간의 비행 끝에 도착하는 곳, 물론 유분자 이사장도 함께다. 죽음을 준비하는 일은 삶 가운데서 진행되는 것이었다. 소망소사이어티의 슬로건 ‘아름다운 삶, 아름다운 마무리’는 결국 한 연장선에 있었다는 것이 유분자 이사장의 고백이다. 아름다운 삶, 아름다운 마무리 소망소사이어티는 올해 창립 10주년을 맞았다. 일흔의 나이에 그녀가 비영리단체를 만들었을 때 사람들은 그러다 큰일난다는 반응이었다. 여든셋에도 아프리카 차드에 간다고 하니 이번엔 사람들이 한결같은 질문을 한다. 도대체 건강비결이 뭐냐고. “글쎄요. 실제로 걷는 운동 말고는 비결이라고 할 것도 없어요. 잘 먹고 많이 걷습니다. 밥을 많이 사주는 것도 비결이라면 비결일까요? 어떤 분이 멋지게 늙으려면 입은 닫고 지갑을 열라고 하더라고요. 웰에이징이라면 뭐든 잘 따라하는 편입니다(웃음).” 최근 유분자 이사장은 애써 하는 일이 한 가지 있다고 한다. 오래된 전화번호 수첩을 들춰가며 과거 알고 지내던 사람들에게 안부전화를 하는 것이다. “크게 거창한 이유는 없어요. 그저 인사를 나누고 싶더라고요. 낡은 전화번호부에 적힌 이름들을 보면 지나온 시절이 떠올라요. 알게 모르게 내가 섭섭하게 한 사람, 나를 서운하게 했던 사람들이 다 있지요. 누가 시킨 일도 아니고 안 해도 뭐라고 할 사람도 없지만 가능한 한 계속하고 싶어요. 이것도 일종의 비움이에요. 이상하게도 삶이 홀가분해지고 즐거워지는 느낌입니다.” 유분자 이사장은 창립 10주년에 대한 칭찬이 자신에게 집중되는 것에 단호하게 선을 긋는다. 비영리단체인 소망소사이어티를 이끌고 있는 것은 후원자와 자원봉사자, 그리고 함께 ‘아름다운 마무리’를 준비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언젠가 자신이 떠난 후에도 이들에 의해 비움과 내려놓음의 미학이 전해지고 소망소사이어티가 이어질 것이라 믿고 있다. “짧은 여행을 한번 하려 해도 준비를 많이 해야 하잖아요. 준비한 만큼 여행이 안전하고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죠. 헌데 막상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여행, 삶과 작별하는 긴 여행에 대해서는 어떻게 준비는커녕 생각조차 하지 않을 수 있죠?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는데 두려움 때문에 피한다는 게 많이 안타깝습니다.” 그녀가 웃으며 말한다. “저는 장례식이 없을 거예요. 죽으면 바로 대학병원에서 가지고 갈 거니까요. 대신 살아 있을 때 멋진 이별파티를 열면 어떨까 계획하고 있어요. 다들 멋지게 차려입고 말이에요. 그 자리에서 좋아하는 시를 하나 낭송할까 합니다. 저는 평생 간호사로 지냈지만 사실 문학소녀였거든요. 하긴 제가 시낭송을 하면 모두가 놀라긴 할 겁니다. 하하하.” 귀천(歸天)_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어쩌면 우리는 유분자 이사장의 이별파티에서 시 한수를 듣게 될지도 모르겠다. 83세의 유분자 소망소사이어티 이사장, 그녀의 삶 어느 한 구석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어 보인다.
- 2017-06-09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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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늙은 부부도 괜찮다
- 인간이 건강하게 살아가려면 맑고 깨끗한 공기와 물은 기본이고, 건강한 먹거리도 필수다. 하지만 인간답게 살려면 자기 적성에 맞고 나아가 자아실현을 위한 일거리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젊은 사람도 일자리 찾기가 어려운 사회에서 이미 정년을 마친, 시쳇말로 한물간 나이 든 사람에게 좋은 일자리란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렵다. 그것도 집에서 출퇴근이 가능한 직장은 마치 나무 위에서 물고기를 구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남들이 기피하는 변두리 지역 또는 교통이 불편한 지방에서 일자리를 찾게 된다. 채용만 해준다면 동해의 외딴섬 독도도 좋고 최남단 마라도도 얼씨구 절씨구다. 아내와는 자연스럽게 주말부부가 된다. 아내 없이 혼자 지내다 보면 불편한 점이 많다. 첫 번째는 식사 준비와 설거지다. 그동안 해보지 않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대선에 출마한 모 후보는 설거지가 여자 몫이라고 말했다가 여론의 몰매를 맞고 사과까지 했지만 솔직히 말하면 60세가 넘는 나이 든 사람들은 밥하고 빨래하고 설거지하는 것은 당연히 여자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필자도 자랄 때 부모로부터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면 고추(?) 떨어진다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하지만 세상이 바뀌었다. 요리학원에 등록해 몇 가지 뚝딱 반찬 만드는 법을 배웠다. 남자 혼자 해먹는 밥이 오죽하겠냐마는 아내가 준비해준 반찬과 국거리에 적당히 가미해 식사를 해결한다. 시장이 반찬이라는 속담이 있기는 하지만 평소 다져온 건강과 아무거나 잘 먹는 타고난 식성에 금방 해먹는 밥맛이 조화를 이루면 그럭저럭 견딜 만하다. 두 번째는 외로움이다. 말할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은 참 행복할 일이다.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을 독방에 가두는 것만 봐도 외로움은 형벌에 속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혼술, 혼밥이라는 말이 생겨나는 세상이지만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다. 애완동물이라도 곁에 두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이다. 혼자 TV를 보면 재미가 없다. 예전에도 권투나 축구 등 전 국민이 열광하는 스포츠 중계가 있는 날에는 대형 TV가 있는 다방 문 앞에 몇 시에 중계방송이 있으니 오라는 광고 안내문이 나붙었다. 하지만 이제 혼자 있을 때가 점점 많아지는 세상이다. 고독력을 키워야 할 정도다. 혼자 전자책이라도 읽으며 인터넷 바둑을 두기도 한다. 독서와 글쓰기는 외로움을 이길 수 있게 해주는 강력한 무기다. 인간의 능력은 개발할수록 무궁무진하다. 혼자 있을 때 연습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하면 견딜 만하다. 세 번째는 밤새 안녕이다. 직원 중 한 사람이 출근을 하지 않아 숙소로 찾아가 봤더니 죽어 있었다. 자신의 긴급한 상황을 알리려고 전화기 줄을 잡아 끌었던 흔적을 보고 안타까웠다. 옆에 누가 있었다면 살아 있었을 사람이다. 건강 상식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건강검진을 통해 자신의 몸 상태를 알고 있어야 한다. 대사증후군 예방은 기본이고 운동과 섭생에 유의해야 한다.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다. 그럴 수도 있지 하며 마음의 통을 키워야 한다. 네 번째는 방종이다. 혼자 있으면 누구의 간섭을 받지 않는 자유로움은 있다. 하지만 넘치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해 술이나 오락 또는 불륜에 빠지기도 한다. 필자는 지방으로 발령을 받으면서 어학원에 등록했다. 학원이 없는 곳에서도 잘 찾아보면 주민센터와 특별 단체들이 운영하는 프로그램이 많다. 끝없이 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목표가 뚜렷하고 건실한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과 함께하면 샛길로 빠질 틈이 없다. 건강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 혼자 객지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건강관리를 해야 한다. 필자는 테니스를 좋아해서 새벽 테니스를 하면서 일과를 시작한다. 테니스 할 곳을 못 찾으면 헬스클럽에 등록해서 건강을 다진다. 아침 운동으로 땀을 흠뻑 흘린 후 샤워를 하면 기분이 상쾌해진다. 지방의 마라톤 대회에도 참가하는 것도 좋다. 지역의 고적지 탐방도 해볼 만하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이 또한 지나가리라’ 하고 편하게 생각하면 스트레스가 없다. 나이를 먹어도 일거리가 있고 그 일에서 존재의 가치를 느낀다면 주말부부로 지내는 불편함은 걸림돌이 될 수 없다.
- 2017-06-02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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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아니면 언제
- "멀리 이사하게 되었습니다." "그럼 이제 못 와?" “네, 늘 건강하시길 기도할게요. 방구 어르신은 술 즐기실 만큼만 드시구요. 쌕쌕이 어르신 우리 경로당 위해 공원청소 건강 위해서라도 계속해주시구요. 녱녱이 할머니 우는 소리 그만하시고 그동안 맛있는 점심 고마웠어요. 욕쟁이 할머니 언제 다시 와도 그 욕 들려주셔야 해요. 타짜 할머니 고스톱 바닥 쓸어가기 기술 재미있었어요.” "우린 어떡해~" 한사코 섭섭해하시는 투박한 손을 뿌리치고 나오는 필자 마음 역시 무너진다. 화요일: 구룡마을 물품 배분 목요일: 경로당 두 곳 배분 토요일: 배식 및 배급 일주일에 세 번 봉사 다니던 곳에 작별인사차 다니며 같은 말씀 들어 큰 보람을 느꼈다. 나이 들어 어딘가 불편한 일이 생겼을 때 필자도 당당하게 케어받으려면 힘 있을 때 타임뱅크라 생각하고 열심히 모시자 몇 년 기를 쓰고 다녔는데 마음의 적금이 와르르 깨지는 기분이다. 새로운 곳에 정착하며 이제 힘이 딸리니 또 다른 분야에서 머리로 하는 봉사를 하자는 마음으로 지역사회를 위해 재능기부를 생각했다. 현재 숙명여대에서 1인당 수강료 80만원인 ‘리스타트 카운슬러’ 과정을 지역사회에서 무료로 가르치기로 마음먹었다. 5월 17일 관리사무소 회의실, 취지를 설명하니 관리사무소 소장님이 동 대표회의에 상정시켜 모든 대표위원들의 열렬한 동의를 받았고 강의장 문제까지 상정하니 관리사무소 회의실이 비어 있는 낮 시간을 사용하라고 해서 강의장까지 일사천리로 원만하게 해결됐다. 문제는 수강생 모집이었다. 각 동 엘리베이터와 입구에 모집 광고지를 붙였으나 전화 한 통 없는 날이 계속되었다. 아니 이럴 수가. 이 좋은 고급 강의를 그것도 무료로 한다는데 연락이 없다니. 동 대표 사모님들만 오셔도 차고 넘치는데 동 대표님들은 댁에 가셔 한 말씀도 안 하셨단 말인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가 누군지 아는 분들이 없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생각을 달리해 적극적 홍보에 나섰다 그리고 “하늘은 땀을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는 케케묵은 말이 진실이란 걸 알았다. 이 과정은 다모작 시대 누구에게나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므로 이번 한 번으로 끝내지 않고 내년에 2기를 모집하고 해해연년 계속 이어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 또한 보람을 찾는 일 아니겠는가.
- 2017-05-30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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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 나누기, 행복 합하기
- 인간의 심리는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일전에 친구들 모임에서 있었던 일이다. 친구 A는 10여 년 전 남편 사업이 기울어져 그동안 어렵게 살아왔는데 최근 재기에 성공해 친구들이 모두 축하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A의 오랜 친구이며 유독 A의 어려움을 걱정하고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던 친구 B가 마지못해 함께 축하했지만, 표정에는 혼란함이 역력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흔쾌히 축하하지 못하는 마음이 이해되지 않아 이런저런 말을 걸어보다가 한 가지 단서가 감지되었다. 그 마음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아마도 상실감이 아닌가 추측되었다. 어쩌면 그동안 B에게는 A의 불행이 자신의 행복을 확인하게 해주는 수단이었다는 의미다. 그동안 누려왔던 심리적 우월감이 사라지니 잠시 공황 상태에 빠졌던 것일까? 사실 B가 평소 심성이 나쁜 친구가 아니었으니 한순간 동요했다고 해서 그 친구를 매도할 이유는 없다. 어쩌면 우리 모두 그런 심리를 조금씩은 가지고 있지 않은가. 말하자면 팍팍한 삶 속에서 절대적인 행복을 얻기가 쉽지 않으니 타인의 불행에 나를 비교하면서 마음의 위안을 삼는 상대적 행복감 같은 것 말이다. 그런데 그 행복감을 빼앗겼으니 내심 억울(?)하지 않겠는가.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자살률은 높고 행복 순위는 낮은 나라로 유명하다. 자살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행복량이 제로일 때 오는 충동일 텐데 도대체 우리가 이렇게 행복에 쪼들리며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 흔히 하는 말로 가난했던 나라가 급격한 경제발전으로 살림살이가 나아지면서 물질만능에 빠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치열한 사회적 경쟁 때문일까? 어쩌면 우리가 행복을 제로섬 게임으로 보기 때문은 아닐까? 이를테면 ‘행복 총량의 법칙’ 같은 것이 있어 남이 행복하면 내 행복이 줄어드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말이다. 그러니까 물질만능적 사고가 행복을 물질로 측정하게 만들어 행복의 속성을 왜곡해버린 셈이다. 물질은 나눌수록 줄어들지만, 행복은 나눌수록 커진다는 이치를 우리가 망각한 것이다. 사실 쪼들린 생활을 하면서 물질을 나누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는 않다. 션, 정혜영 부부 같은 이는 정말 특별한 사람들이다. 물질을 나누며 살기 어렵다면 까짓것 돈 안 드는 무형의 행복이라도 나누는 것이 현명한 삶 아니겠는가. 정치의 세계에서 권력은 가까운 가족과도 나누지 못한다지만, 권력을 얻는 데 아무 소용도 없는 행복을 나누지 못할 일이 무엇인가. 우리가 무엇이든 나누는 데 인색한 것은 가혹한 가난 속에서 나온 생존본능 때문인지 모른다. 그래서 나누라는 말을 들으면 본능적인 위기감을 느끼는 것이다.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 식으로 말하면 행복을 존재가 아닌 소유로 본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발상을 전환해 나누지 말고 합하면 어떨까. ‘우분투’라는 말이 있다. 아프리카어로 ‘우리가 함께 있기에 내가 있다’라는 뜻인데 보통은 ‘우리의 성공이 나의 성공, 모두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여성 선교사 한 분이 선교지 부족 어린이들에게 달리기 시합을 제안하고 큰 과일 바구니를 1등 상으로 내걸었더니 모든 아이가 손잡고 들어왔단다. 그 이유를 물으니 “우분투!”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아마도 부탄이 행복한 나라 1위인 것도 세상 물정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우분투’를 실천하는 까닭일 터이다. 행복은 나눌수록 커진다. 그러나 합할 때 더 커진다.
- 2017-05-29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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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 든 부모를 사랑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하여
- 브라보마이라이프 동년기자 2기 출범식에서 의례적인 선물처럼 건네받은 책이 바로 기시미 이치로가 쓴 라는 책이다. 바쁜 일상과 맞물려 책은 한동안 거실 한 귀퉁이에 처박혀 버렸고 잊을만한 시간에 ‘독후감’ 이라는 것을 써야 한다는 당부의 말이 떠올라 먼지를 뒤집어 쓰고 책상밑에 팽개쳐 졌던 책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첫장을 넘기면서 격한 공감과 함께 책 속으로 빠져들면서 단숨에 한 권을 통독해 버렸다. 아들러 심리학의 권위자인 기시미 이치로가 ‘나이 든 부모와 어떻게 지낼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직접 자기 삶에서 체득한 심리학적 고찰을 바탕으로 제시했다. 평균 수명이 늘어나며 '나이 든 부모와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화두는 개인을 넘어 사회 문제로 확대되고 있다. 저자인 기시미 이치로는 젊은 나이에 뇌경색을 앓아 재활 중에 죽음을 맞이한 어머니를 목전에서 경험하고 삶의 궤도가 전혀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하는 계기를 맞이한다. 그리고 돌아가신 어머니의 나이를 지나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자신에게 인생이란 어떤 것인지 나이가 들어가는 것은 어떤 것인지 사유(思惟)하는 계기를 경험한다. 부모님 두 분을 병수발 했던 저자이기에 현실에서 직접 맞닥뜨리게 되는 사소한 부분을 언급할 때 크게 공감하게 된다. 별것 아닌 일이지만 우리가 실제로 부딪치게 되는 것은 항상 작고 사소한 것들임을 감안하더라도 경험담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귀를 기울이게 만든다. 저자는 어머니의 병수발과 아버지의 치매로 인해서 ‘나이든 부모’ 와 살며 그들을 이해하는 일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당부한다. 매우 뻔 한 소리 같지만 실제로 해 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조언이라는 것을 조금만 읽어보면 알게 된다. 부모님도 몸이 아파 누군가에게 의지해서 생활하는 것이 처음이고, 그런 부모님을 지켜보며 직, 간접적으로 간호해야 하는 자식들도 처음인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래서일까 고령화 사회로 접어드는 우리 사회에서도 더 이상 병간호에 대한 책임을 가족에게만 지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아픈 사람도 그 사람을 지켜봐야 하는 가족 누구도 죄인이 아니지만 사랑으로 시작한 일이 한 가정을 파탄 내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보게 된다. 결국은 가족이라고는 하나 그것 또한 인간관계이다. 후회를 하지 않게 되게끔 ‘하루하루 이 사람과 사이좋게 생활하자’ 라고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이 존경입니다.(P.104). 병이 든 상태가 가장 낮은 위치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P.117). 자식 눈에 아무것도 안하고 하루를 보내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부모님의 현재가 불행한 것은 아니니까요.(P.127),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일본의 철학자 기요카즈는 그의 저서 『끊을 수 없는 생각』에서 “무언가 하지 않고도 그저 가만히 옆에 있어주는 것이 얼마나 힘이 되는지 우리 사회는 잊고 있다” 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 말에 극히 공감이 가는 것은 나에게 있어 2년 전 10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신 어머님을 떠올리게 된다. 어머님은 90의 중반까지는 비교적 정신적으로 건강 하게 사셨으나 그 이후에는 오락가락하는 정신과 육체적인 피폐로 인해 병원과 요양원 신세를 지게 되셨다. 불완전한 모습의 어머니이지만 살아 계실 때에는 마음의 많은 위안이 되었고 형제, 자매들을 잇는 끈이 되어주셨다. 어머님이 돌아가시자 허탈함에 우울한 감정이 지속되기도 하였거니와 형제, 자매를 이어주던 끈도 끊어지고 말았다. 본문에서 아버지에게 “하루 종일 이렇게 주무시기만 하니 제가 안와도 되겠네요.”라고 하자 아버지는 “그런 게 아니야, 네가 옆에 있으니까 안심하고 잠드는 거야”(P.147),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생산성으로만 가치를 측정하는 이 사회가 낳은 문제이기도 하다. 부모님을 떠올렸을 때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후회’ 다. 언제나 더 상냥하고 친절하게 대해 드려야지 싶다가도 내 기분에 따라 행동은 확연히 달라진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화는 보통 지르고 난 뒤에 후련한 마음이 드는 경우가 있는데 반해, 부모님과의 갈등은 내가 화를 내고 돌아서는 순간부터 후회가 밀려온다는 것이다. 화를 낸 상대는 나지만 속이 후련하기 보다는 “조금만 더 참을걸. 하는 죄책감이 물밀 듯이 밀려온다. 순간적으로 화가 끓어오르더라도 부모님과 사이좋게 지내고 싶다면 가능한 권력 싸움에서 물러나야 한다. 사이가 좋아지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쓸데없이 에너지를 낭비하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을까?(P.173). 누군가와의 관계를 개선하고 싶다면, 상대의 표면적인 말과 행동만 받아들이지 말고 좋은 의도를 발견하도록 노력해야 한다.(P.180). 진지하되 심각해지지 말라 부모님을 간병하는 일은 진지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심각해 질 필요는 없다. 진지한 것과 심각한 것은 다르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부모님을 보살필 때에는 다치지 않도록 온 신경을 집중해서 배려할 필요가 있다. 간병이 힘들다고 미간에 주름잡고 한숨을 쉴 필요는 없다. 그런 심각한 표정을 짓는데 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간병하는 일이 얼마나 큰일인지 부모님이 알아주었으면 하고 바라기 때문이다. 둘째는 다른 형제들이 간병의 고단함을 알아주길 바라기 때문이다. 물론, 간병이 큰일이긴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에 내색할 필요는 없다. 간병이 힘든 일이란 걸 다른 이에게 과시하기 시작하면 간병하는 사람은 진지해 지기 보다는 심각해지고 만다. 여건상 103세에 세상을 뜨신 어머니께서 생전에 계실 때는 나는 한참 사회활동을 하고 있을 때였다. 하루 온종일 두서너 평의 작은방에서 보내셔야 했던 어머니는 가끔씩 전화를 하셨다. 대화 내용은 뻔했다. 어머니의 생각 속에 잠겨 있는 말들을 반복해서 하시곤 했는데, 한창 일처리에 바쁜 상황에서 계속해서 어머니의 얘기를 들어 드릴 수는 없었다. 얼마나 답답하고 아들이 그리웠으면 그랬을까? 하는 생각은 수없이 했으나 현실은 바쁘다는 핑계로 대충 얼버무리고 끊곤 했다. 그 때를 생각하면 뒤늦게 후회가 참 많이 된다. 그 상황에서 어머니의 얘기를 들어드리는 일 말고 더 급한 일이 무엇이었을까? 뒤늦은 반성을 해 보지만 어머니는 이미 안계시니 그립기 짝이 없다. 이제 어머니의 나이를 향해 쏜살같이 흘러가고 있다. 그러니 어차피 사람은 늙어 갈 수밖에 없고 ‘나이 든 부모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 라는 화두는 결국은 나의 문제로 대두 되고 있다. 이 한권의 책을 통해서 나이 든 부모를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사회는 물론 우리 모두가 자각하여야 할 듯하다.
- 2017-05-11 0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