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속 캐릭터를 보고 실제 배우의 성격을 오해할 때가 있다. 배우 최수린(49)은 악한 캐릭터를 주로 맡았던 터라 실제로도 까칠하거나 차가운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실제의 그는 작품 속 모습과, 머릿속 막연한 생각과는 180도 달랐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천성이 선한 사람이었다. 5월 봄날의 햇살을 꼭 닮은 그의 해맑음은 연기로는 나올 수 없는 본연의 것이다.
최수린은 과거 MBC ‘밥줘’, KBS 2TV ‘내사랑 금지옥엽’ 등에서 얄미운 캐릭터를 맡아 연기했고, 근래 작품에서는 주로 못된 시어머니 역할을 소화했다. 최근 작품인 KBS 2TV 일일드라마 ‘태풍의 신부’에서도 그는 비슷한 역할로 등장했다. 최수린은 사실 다양한 역할을 소화한 스펙트럼이 넓은 배우다. MBC 사극 ‘김수로’와 ‘마의’에서는 선한 캐릭터를 연기하기도 했다.
“악녀 연기, 시어머니 연기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저는 그냥 제게 들어온 캐릭터를 최선을 다해서 연기했을 뿐이고, 그 역할들이 연이어 나오거나 대중의 눈에 띄었던 것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지금까지 맡은 역할에 대한 후회나 아쉬움은 없어요. 다만, 늘 제 연기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편견 탈피한 여배우 행보
1995년 SBS 드라마 ‘까치네’로 데뷔한 최수린은 베테랑 배우다. 활동한 지 거의 30년 차가 되어가는 그는 지난해부터 부쩍 시청자의 눈길을 끌고 있다. 제2의 전성기라고 표현해도 무방할 정도다. KBS 2TV 주말드라마 ‘현재는 아름다워’에서 밉상 시누이로 시청자들에게 눈도장을 강렬하게 찍은 후, ‘태풍의 신부’로 기세를 이어갔다.
‘태풍의 신부’는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전성시대에 15%(닐슨코리아, 전국 기준) 내외의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인기를 끌었다. 최수린이 연기한 ‘태풍이 엄마’ 남인순은 미워할 수 없는 악녀였다. 자기 자식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엄마지만, 사랑스럽고 허당 매력이 넘치는 인물이다. 최수린은 스펙트럼 넓은 연기로 남인순을 표현했고, 시청자들에게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남인순을 연기하면서 정말 행복했어요. 배우가 여러 감정선을 보여주는 캐릭터를 만나기란 쉽지 않거든요. 여자로서 질투, 돈과 자식에 대한 집착과 사랑, 미래에 대한 두려움 등 인간이 가진 여러 가지 심리를 골고루 보여줄 수 있어서 좋았어요. 연기를 하면서 몰입도 많이 했고, 즐거웠습니다.”
최수린은 드라마가 방영되는 동안 연기 호평과 함께 ‘젊은 엄마’라는 평도 많이 들었다. 그는 어린 나이부터 ‘어머니’나 ‘시어머니’ 역할을 맡아왔다. 최수린은 “20대와 30대 때 나이에 맞는 젊은 역할을 연기하지 못했다. 30대 때는 이미 40대, 40대 때는 50대 역할을 연기했다”고 말했다.
배우 중에서는 나이대가 높은 캐릭터 또는 누군가의 엄마 역할을 기피하는 사람이 꽤 있다고 알려져 있다. 최수린은 이런 편견을 깨는 반전의 행보를 펼치는 셈이다. 여기에는 그만의 스토리가 있다. 최수린은 1994년 SBS 1기 공채 MC 출신으로 연예계에 발을 디뎠다. 그러다 배우로 전향했는데, 생각만큼 잘 풀리지 않았다. 그는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았고 연기 제안도 거의 없었다. 그게 많이 힘들었다”고 회상했다.
이후 30대가 되면서 최수린은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서른 살에 아들을 낳고 배우로 복귀한 그는 본격적으로 최선을 다해 일하겠다고 마음을 다졌다. 최수린은 “항상 일이 간절했다. 나이대가 안 맞는다는 이유로 연기를 못 한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내가 역할을 선택할 처지도 아니었고, 기회가 오면 놓치지 않았다”고 말했다.
“아이를 낳은 후 30대가 됐고, 젊은 역할을 맡기에는 애매한 상황이 됐어요. 그때 제가 살을 원 상태로 다 빼지 못해서 좀 통통했거든요. 아예 머리도 볶아버렸고, 실제보다 나이가 많은 역할을 맡게 됐죠. 그게 시작이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2009년에 ‘내사랑 금지옥엽’을 만났어요. 다른 제작진분들은 다 반대했는데, 작가님이 저를 추천했다고 하더라고요. 결국 좋은 결과가 나왔고, 저한테도 터닝포인트가 됐죠.”
그렇게 최수린은 실제보다 나이 많은 역할도, 악한 캐릭터도 마다하지 않았다. 항상 최선을 다했고, 죽기 살기로 연기했다. 일을 하면서, 작품이 쌓여가면서 점점 배우라는 직업에 대한 소명의식과 애정도 생겼다.
“예전에는 잘 몰랐는데 요즘 생각해보면 연기는 제가 좋아하는 일이고, 그래서 계속 하는 거예요. 저는 연기를 하면서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 무슨 역을 맡든지 그저 잘 해내고 싶었고, 잘한다는 칭찬의 말을 듣고 싶었어요. 그리고 그 드라마로 인해 다음 드라마가 이어서 들어오기를 바랐죠. 그래서 욕심을 과하게 부릴 때도 있었는데, 그러면 연기가 미워 보이더라고요. 배우는 연기할 때 완급 조절을 잘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명상 통해 온화함 찾아
배우가 되지 않았다면 그는 어떤 일을 했을까. 최수린은 “미술 쪽 일, 뭔가 만드는 일을 하지 않았을까”라는 예상치 못한 답변을 했다. 그리고 “워낙 그림 그리고 만드는 것을 좋아해서 미대 진학을 생각했다. 특히 자개장을 좋아해서 나전장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우리 전통문화예술을 잇는 전수자들이 계속해서 나왔으면 좋겠다”라고 설명을 이었다.
최수린의 이야기를 들으며 언제 진로를 바꾸게 됐는지 궁금했다. 그는 고등학교 3학년 때 처음으로 배우를 생각했다고 털어놓았다. 열 살 많은 친언니이자 배우인 유혜리의 영향도 조금은 있었다. 그러나 정작 유혜리는 동생의 내성적인 성격을 걱정하며 배우 활동을 반대했다고 한다.
“결국 고등학생 때 마음먹은 대로 배우를 하게 됐죠. 저도 처음에는 제 성격이 연예계 활동을 하기에는 맞지 않다고 느꼈어요. 연기를 하면서 내성적인 성격이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한 것 같아요. 저의 모든 것을 보여줘도 부끄럽지 않습니다. 내성적인 사람은 평소에 표현을 많이 하지 않지만 연기라는 기회를 통해서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잖아요. 그러다보니 이제는 내성적인 편은 아닌 것 같아요.(웃음) 연기를 하고 사람들을 많이 만나면서 성격이 중화됐고, 나를 표현하는 방법도 좀 능숙해진 것 같아요.”
얘기를 나누어 보니 최수린의 성격은 내성적이라기보다는 온화하다는 표현이 맞아 보인다. 그의 일상 또한 단조로우면서도 건강하다. “나이가 들수록 체력이 떨어지는 것을 체감한다”는 최수린은 건강관리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꾸준한 운동과 식단을 통해 몸 관리를 하고 있다. 요리를 좋아하는 터라 한식 위주로 건강하게 식사하는 편이다. 마음은 명상을 통해 다스리고 있다.
“만약 누가 저를 기분 나쁘게 하면, 저는 그 사람한테 뭐가 기분 나빴는지 다 말했어요. 그러면 상대방한테 상처를 주게 되니까 결국 제가 스트레스를 받더라고요. 그래서 올해부터는 ‘한마디 더 할 걸 하지 말자’라고 스스로 다짐했어요. 말을 줄인 후 스트레스를 덜 받고 있죠. 그리고 스트레스는 명상을 통해 풀어요. 명상을 한 지는 5년 정도 됐어요. 눈을 감고 내 마음에 있는 더 큰 세상을 보는 게 명상이에요. 저는 매일 하고 있는데,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리얼한 연기하는 배우 되고파
이처럼 평온한 일상과 달리 연기할 때는 많은 에너지를 써야 한다. 소리도 지르고, 울고, 누군가의 뺨을 때려야 할 때도 있다. 최수린은 역할에 워낙 몰입하는지라 감정 소모도 심한 편이라고. 그래서 그는 작품을 마칠 때마다 훌쩍 여행을 다녀온다. 자신이 연기한 캐릭터를 보내주고 온전한 나로 돌아오는 시간이다.
“이번에 ‘태풍의 신부’를 마치고는 헝가리, 체코, 벨기에, 프랑스 등 유럽 여행을 다녀왔어요. 저는 어딘가로 여행을 떠나면 오랜 시간 머무는 편이에요. 관광지도 너무 열심히 돌아다니지 않고 일상을 지켜요. 아침에 일어나서 명상하고 운동하고, 식사도 천천히 하고요. 여행을 통해 내 마음의 중심을 찾는다는 생각이 커요. 여행을 다녀오면 차분하게 마음 정리가 되고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좋더라고요.”
최수린은 꼭 여행이 아니더라도 일상에서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끼려고 한다. 친구나 가족과 대화할 때, 지나가는 행인의 모습 등에서 자연스럽게 발견되는 표정이나 감정이 있다. 그는 그것들을 연기에 투영하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최수린의 배우로서 목표는 ‘리얼(Real)한 연기를 할 수 있는 배우’가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슬플 때, 또 어떤 사람은 즐거운 순간에 기가 막힌 톤이 나오더라고요. 그 예상치 못했던 것들을 발견하는 게 너무 재밌어요. 또 저는 고향이 안성이거든요. 어렸을 때 들었던 사람들의 말투, 느꼈던 정서, 그런 것들을 잊지 않으려고 해요. 실생활에서 연기를 배우는 거죠. 배우는 사람에게 공감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 감정에 공감해야 자연스럽게 연기로 나오는 거죠.”
최수린의 지나온 삶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항상 배움의 자세를 잃지 않는 겸손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높이 평가하지 않으며 세상만사에서 깨달음을 얻는다. 120세 시대이니 앞으로 살아갈 날이 많이 남은 만큼, 최수린도 찬란한 미래를 설계해본다. 늘 발전하는 배우가 되고 싶고, 인간적으로는 버킷리스트를 이루며 가족과 행복하게 살고 싶단다.
“저는 하고 싶은 게 많아요. 스카이다이빙도 해보고 싶고, 어학 공부를 해서 새로운 언어를 마스터하고 싶기도 해요. 50대는 친구들끼리 여행을 많이 다닐 때라고 하던데, 이제 성인이 된 아들하고도 같이 여행을 다니고 싶어요. 함께 같은 걸 보고 느끼면서 배우는 부분이 많을 것 같아요. 꼭 여행이 아니더라도 아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겠다고 생각해요. 여러분도 하고 싶은 것을 하시면서 인생을 즐기면서 사세요.”
서울에 살던 장영수(65, 보은 두드림농원)가 충북 보은군으로 귀농한 건 건강에 이상이 생겼기 때문이다. 물 좋고 산 좋은 시골에 살며 몸은 물론 마음까지 다스리고 싶었다. 그는 광고대행사 직원으로, 또는 개인사업자로 일하며 긴긴 서울 생활을 했다. 과로와 스트레스를 달고 살았다. 폭탄주를 돌리는 술자리도 매우 잦았다지. 마침내 심혈관 질환이 그를 방문했는데, 좁아진 관상동맥을 스텐트 삽입으로 뚫는 시술을 한 뒤 2011년에 귀농했다.
장영수가 사는 마을은 딱히 경관이 빼어나거나 유별한 특징 없이 그저 평범한 농촌이다. 인가와 전답이 고르게 섞여 아늑하다. 그는 이 한적한 농촌에서 여생을 원만하게 누리고 싶었던 것이다. 농사를 통한 건전한 육체노동으로 몸을 북돋우고, 마음엔 여유를 부여해 즐겁게 살고 싶다는 또렷한 목적을 정하고 귀농했다. 부연하자면 농사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 경제적 성과를 거둘 생각은 애초부터 하지 않았다. “돈벌이야 도시에서나 가능하지 시골에서 가당키나 하겠나?” 귀농 이후 시종일관한 그의 기본 관념이 그렇다. 한마디로 쉬엄쉬엄 살고 싶었던 것이며, 귀농은 그러한 삶의 방식에 적격일 뿐 결코 돈을 가져다주는 수단이 아니라는 신념을 고수해왔다.
귀농 초기 개척기에 장영수는 혼자 살았다. 농업 소득이 발생하기까지 한동안 동갑내기 아내는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계속해 가계를 꾸려나갔던 것. 한편 장영수가 선택한 재배 작목은 보은군의 전통 특용작물인 대추. 1800평 규모의 농원을 조성해 600여 주의 대추나무를 심었다. 이 아담한 농장에서 소득이 나오기 시작한 2014년부터 비로소 아내가 서울에서 내려와 합류했다. 순리를 좇아 세운 계획대로 차질 없는 행진이었다. 대추나무 묘목이 성장해 생산물이 나오기까지 3년여 동안 장영수는 또 다른 일거리를 만들어 수입을 올렸다. 이 역시 서울에서 미리 구상한 시나리오에 따른 것이었다.
“원래 내가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했다. 귀농 전엔 소비자 심리와 경영 마케팅을 공부했다. 이게 유용하게 쓰였다. 대학에서 잠시 강의를 했으며, 충북농업기술원이 주관하는 강소농 교육 프로그램에 강사로 참여할 수 있었으니까. 여기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귀농 초기의 필요비용을 충당하기도 했다.”
농사 경험이 없었던 귀농 직후 강소농 강사로 나서는 게 어떻게 가능했지?
“강소농들을 모아놓고 강의를 하는 식의 프로그램은 아니었다. 개별 농가를 방문, 재배 기술이 아닌 경영 마케팅을 가르쳤다. 나에겐 매우 유익한 기회였다. 농촌과 농업, 귀농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었으니까. 농사를 짓는 기본 자세와 흙을 대하는 태도를 배우기도 했다. 음으로 양으로 나의 대추 농사에 큰 도움이 됐다.”
대추를 전공 작목으로 선택한 이유가 있겠지?
“사실 처음 관심을 가진 건 소나무 농원이었다. 강원도로 귀농해 소나무를 기르고 싶어 한동안 적지를 찾아 강원도 곳곳을 돌아다녔다. 그러나 마땅치 않아 고심하던 차에 마침 보은군으로 귀촌한 처형 내외의 권유에 이끌려 이곳으로 귀농한 뒤 대추 농사를 선택했다.”
보은군은 조선 중기부터 대추 주산지로 이름을 날렸다. 현재 1200여 농가가 대추를 재배한다.
귀농인들은 가급적 지역 특산물을 재배하라는 충고를 듣는다. 이점이 많다는 얘기인데 과연 그렇던가?
“장점이 많다. 농사에서 가장 중요한 게 판로 확보인데 특산물의 경우 이 점에서 확실히 유리하다. 이미 꽤 안정된 유통 루트를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편적으로 재배 기술 수준도 높아 도움이 된다. 그러나 초심자에겐 당연하지만 어려움이 많다. 우선 병충해에 관한 대처 능력을 갖추기 어렵더라. 수확 뒤의 전면적인 전지 작업에도 진땀을 쏟아야 한다. 무엇보다 난감한 건 종잡을 수 없는 기상 변동에 속수무책이라는 점이다. 이래저래 자칫 흉작을 볼 수 있다.”
심신 치유에 치중하다
장영수는 작년의 대추 농사에서 최대의 흉작을 기록했다. 날씨 조건이 따라주지 않아서였다. 보은엔 예로부터 ‘삼복에 비가 내리면 보은 아가씨들이 시집을 못 갈까 봐 운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대추알이 영그는 여름철에 가장 필요한 게 햇빛인데, 줄기차게 비가 내리면 성숙이 부실해 거둘 게 적어진다. 장마가 길었던 작년, 그는 평년 대비 50% 남짓 수확했을 뿐이다.
“농사의 관건은 사람의 손길이 얼마나 가느냐에 달려 있다지만, 농작물은 농부의 발소리를 들으며 자란다고 하지만, 요즘은 이게 통하지 않는 것 같다. 기후 변동이 심하기 때문이다. 하늘이 하는 일을 어떻게 인간이 제어하겠나. 이상 기후에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게 상책이지만 대추 전문가도, 대추 연구기관도 이 문제에 관한 대안을 갖고 있지 않다. 물어볼 곳조차 없는 것이다. 따라서 노련한 농부들도 전전긍긍한다. 이는 물론 대추 농사만의 난제는 아니다.”
당신은 보은군 귀농귀촌협의회장을 역임했다. 이 지역 귀농 현실에 누구보다 밝을 테지. 대추를 재배하는 귀농인들의 일반적인 실태는 어떻다고 보나?
“복합영농을 하는 고령층 중심의 원주민 농부들에 비해 귀농인들이 한결 좋은 방식으로 대추 농사를 하는 것 같다. 그러나 농가마다 편차가 크다. 농사를 접고 역귀농을 하는 사례도 가끔 보인다.”
누군가 귀농을 해 대추 농사를 하겠다고 한다면 어떤 조언을 하고 싶나?
“갖가지 난관을 헤쳐나갈 수 있는 굳센 의지가 있는지부터 스스로 점검하라 말하고 싶다. 또 하나. 농사로 큰돈을 벌겠다는 목표를 설정하는 건 위험하다고 조언하고 싶다. 은퇴자들에겐 더욱 버거운 게 농사다. 몸을 부지런히 써야 하는 게 농업이니까. 힘과 패기를 갖춘 젊은이들의 귀농은 비즈니스로서의 가능성이 열려 있다. 그러나 농촌 청년들이 대부분 도시로 빠져나간 현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농촌에서 경제 효과를 거두기 어려운 현실 상황을 냉정하게 직시해야 하는 거다.”
대추 농사 경력이 10년이다.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이제 안정 궤도에 올라섰나?
“겨우 10년 차일 뿐이다. 아직 뭘 잘 안다고 할 수도 없다. 그러나 부부 둘이 감당할 수 있는 소형 농원을 그럭저럭 원만하게 운영하고 있다. 순소득은 연평균 2500만 원가량이다. 이쯤이면 무난하다고 생각한다. 아내와 나는 여행을 좋아하는데, 여행 경비까지 나오는 수익 수준은 아니라 아쉽긴 하지. 하지만 먹고사는 데는 별 지장 없다. 도시보다 생활비가 한결 덜 드는 게 시골이니까.”
다년간 귀농인 취재를 해온 내 경험에 따르면, 귀농 10년이 지나도 안정 기반을 갖추지 못한 채 고심하는 사례가 많았다. 농업이란 왜 이렇게 힘든가? 무엇이 문제라 보는가?
“첫째는 농사로 돈을 벌기엔 구조적 한계가 너무 많다. 과격하게 말하면, 귀농으로 대단한 수준의 수입을 올리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둘째, 흔히 치밀한 준비 없이 대충 귀농하는 경향도 문제다. 가령 중국식당을 하려면 사전에 짜장면을 만들 수 있는 정도의 실력은 갖추고 뛰어들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러나 무작정 식당부터 차려놓고 보자는 식의 귀농이 너무 흔하다. 난 귀농 전에 이러한 상황을 미리 간파하고 아예 돈벌이에 목적을 두지 않았다. 수입은 소박한 수준에 만족하자, 대신 심신 치유에 더 치중한 생활을 하는 걸 지향으로 삼았다.”
됐다! 이쯤에서 만족하며 산다
귀농으로 경제적 성취를 해 삶을 고양하기보다 몸과 마음을 돌보는 데 방점을 찍었다는 얘기다. 농사는 물론 최선을 다했다. 몸을 아끼지 않고 닳도록 썼다. 그러자 피가 잘 돌지 않던 혈관의 형편이 좋아지더라는 게 아닌가. 근면한 노동만이 아니라, 시골에 지천으로 존재하는 햇빛과 바람과 꽃과 새소리 역시 쓰러질 듯 궁지에 몰린 그의 건강을 일으켜 세우는 데 일조했을 것이다.
“귀농 전엔 야트막한 언덕을 걷기조차 어려웠다. 얼굴색이 너무 안 좋다는 소리를 수시로 듣고 살았다. 그러나 귀농 후엔 한라산 정상도 가볍게 오를 수 있을 만큼 호전되더라. 몸 건강이 좋아지면서 마음도 평온해졌다. 사실 도시에 살 때 내 성격은 그리 좋은 게 아니었다. 늘 화를 품고 살았으니까. 그러나 귀농 이후 변하더군, 상당히 느긋한 인간으로.”
마을 원주민들과 좋은 관계를 맺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게 없다는 얘기가 흔하다. 어떤 처신이 필요하다 보나?
“무조건 인사 잘하는 습관을 들이면 된다. 진심을 담아서. 소소한 일에 도움 주는 걸 인색하지 않아야 하고. 그러나 10년을 살았더라도 원주민들에게 귀농인은 여전히 외지인이라는 관념이 남아 있다. 이걸 인정하고, 마을의 기본 질서를 존중하는 게 좋겠다. 그런데 텃세니 불화니 하는 건 대체로 땅 문제에서 발생한다. 토지 경계가 모호한 게 시골인데, 귀농인들은 대뜸 측량부터 하고 자기 땅에 울타리를 친다. 이렇게 되면 싸움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양보와 양해를 통해 해결하는 게 속 편하게 살 수 있는 지름길이다.”
소형 농원의 이상적인 모델을 추구하며 대추 농사를 한층 성장시킬 구상을 가지고 있진 않은가?
“(정색하는 표정을 지으며) 이쯤에서 만족하며 산다. 특별할 것도, 내세울 것도 없는 농원이지만, 그저 평범한 일상을 누릴 수 있는 기반은 마련됐다. 여기에서 무엇을 더 바라랴. 큰 굴곡 없이 무난하게 정착한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다. 게다가 나이 들어 이젠 힘도 좀 딸린다. 아내와 나의 건강을 유지하며 이대로만 살면 행복하겠지. 그런데 어떻게 해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지? 아는 게 있다면 말해달라.(웃음)”
재미있게 살며 하루에 15초만 크게 웃어도 근육은 물론 장기까지 운동이 돼 건강해진다 하더라. 문제는 크게 웃을 일이 별로 없다는 거겠지.(웃음)
“모든 하루를 즐겁게 살고 싶다. 가급적 간소한 생활을 하면서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다면 그게 가장 즐거운 삶이라는 생각으로 귀농했다. 그 목적을 꽤 달성한 셈이다. ‘아, 나도 이렇게 편안하게, 여유롭게 살 수 있다니!’ 속으로 이런 생각을 자주 한다. 자연과 근접해 사는 것만으로도 시골 생활의 가치는 크다는 생각도 하고.”
그의 얘기는 자주 맥락이 끊겨 뒤엉기곤 했다. 하지만 할 말 다 했다. 간추려놓고 보니 애써 최선을 다한 언설이었다 할까? 이게 좋은 여운으로 남는다.
장영수가 주는 귀농 Tip
•사전에 귀농의 목적을 구체적으로 정확하게 설정하자. 그러기 위해선 귀농 교육기관을 통한 학습을 미리 충실하게 해야 한다.
•농토를 임대해 농사를 짓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제약 조건이 많아 시설물 설치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집은 빌려 쓰더라도 농토만은 내 소유여야 유리하다.
•가급적 부부가 함께 귀농하라. 단신 귀농을 할 경우엔 불안정하고 불규칙한 생활을 피할 수 없어 손실이 커진다.
•이왕 귀농할 거라면 한 살이라도 젊은 나이에 귀농하자. 농사는 체력과 순발력이 필요한 직업이다.
•귀농지에 특화된 농작물을 재배하라. 생산품의 마케팅과 유통에 유리하니까.
•반짝하다 사라지기 십상인 유행 작물에 편승하는 건 위험하다.
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될 당신의 중년 사랑을 보듬는다.
남편의 장례식에 그 여자가 왔다. 경황이 없던 터라 옆에 있던 친구가 “혹시 저 여자 아니냐?”며 귀엣말을 해주지 않았다면 알지도 못했을 것이다. 상주에게 인사를 건네기는 고사하고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안개처럼 스며들어 소리 없이 조문을 하고는 그림자처럼 홀연히 자리를 떴으니. 나중에 부의금을 챙길 때도 그 여자 것은 없었다. 철저히 존재를 감춘다는 것이 오히려 그 존재감을 드러냈다고 할지. 다녀간 걸 알고 나니 부의금을 내지 않은 이유가 짐작되면서, 꽁꽁 감춘다고 감춘 것이 티를 낸 꼴이라 피식 웃음이 났다.
남편 장례식에 그 여자의 등장이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지만 딱히 나쁠 것도 없었다. 이제 와서 좋다 나쁘다 할 게 뭔가. 이미 남편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니. 두 여자의 심리적 줄다리기도 남편의 사망으로 맥없이 끝이 나버렸으니. 한쪽 줄은 남편과의 내연 관계인 그 여자가, 다른 쪽 줄은 아내인 내가 잡고 있던 줄다리기.
간호사와 환자로 만나 결혼
위암 판정을 받은 남편은 꼬박 1년을 투병한 후 세상을 떠났다. 47세였다. 평소 소화가 잘 안 되고 속이 더부룩한 증상이 잦아 소화제로 버티다 못해 위내시경 검사를 받았고, 결과는 암이었다. 남편은 크게 충격을 받지는 않은 것 같았다. 암이 상당히 진행된 상태라 치료는 하되 아울러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는 의사의 말에도 “사람은 언젠가 죽게 마련이니까요” 하는 말로 대꾸했을 뿐이었다. 문학청년, 아니 문학장년다운 말이었다고 할지.
감정적 동요를 거의 보이지 않는 그를 보며 ‘이이가 이 정도로 담대한 사람이었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 아니면 도저히 믿기지 않아 실감을 못 하는 건가?’ 하고 놀란 건 되레 나였다. 아니면 본인이 진단받은 병원에서 근무하는 내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의연함을 가장하는 건가 하는 생각조차 들었다.
남편의 암 진단 후에도 나는 계속 일을 해야 했다. 그렇지 않겠나. 현실은 더 힘들어졌으니. 지금 돌이켜보면 야속했던 건 남편이 아니라 오히려 나였던 것 같다. 결혼 전부터 해오던 일을 결혼 후 아이 출산하고 산후조리 때 잠깐 쉬었을 뿐 20년 넘게 해오면서, 막말로 죽을 날 받아놓은 남편이건만 그때조차 옆에 있어 주질 못했으니. 남편을 떠나보낸 지금, 만약 옆에 있어 주느라 생활비에 치료비도 감당하지 못했다면 그나마 1년 투병도 채우지 못했을 수도 있다며 나 자신을 위로하는 것밖에 달리 할 말이 없다.
나는 간호사다. 30대 초반에 일을 시작해 경력 따라 연륜 따라 52세인 지금은 중간급 병원의 수간호사로 근무 중이다. 남편은 나의 환자였다. 우리는 그렇게 만났다. 로맨틱한 설정의 영화나 소설에서처럼 간호사와 환자 관계에서 부부가 된 경우였다. 우리 부부의 결혼 생활은 로맨틱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무난했다고는 말할 수 있다. 그 무난함을 지탱해준 것은 두말할 여지 없이 내가 가지고 오는 일정한 수입이었고. 결혼 후 지금까지 돈을 벌어본 적 없는 남편이 묵묵히 가사와 살림을 꾸려온 것도 우리 결혼의 무난함에 일조했음을 물론 인정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남녀의 전통적 역할을 바꾼, 바깥일하는 아내 집안일하는 남편 구도의 가정이었던 것이다.
다만 남편은 나 말고 다른 여자를 또 하나의 아내처럼 의지하며 지냈고, 나는 그런 두 사람 관계를 묵인한 채 결국 남편의 죽음으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가 정리되는 것을 보아야 했다. 그렇다. 무난했다는 말은 거짓말이고, 처음부터 결코 무난할 수 없었던 결혼 생활이었음을 인정한다. 애초 우리의 결혼은 세 사람으로 시작했던 것이다.
문학폐인 단짝이 내연녀로
그해 추석 명절 연휴 마지막날 갑작스러운 복통으로 밤늦게 병원에 온 30대 후반의 남자. 그날 나는 야간 근무 중이었다. 미혼인 데다 뒤늦게 간호학을 전공한 나이 많은 새내기 간호사였던 나는 명절마다 당직이나 야간 근무에 배정됐다. 가정을 가진 선배 간호사들을 대신해 당연한 양보라고 생각했기에 딱히 불만도 없었다. 명절이라 봤자 갈 곳도 없었기에 더욱.
오빠 집에 갈 수도 있었지만 부모님이 안 계신 친정은 이미 친정이 아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이 연이어 돌아가신 지 2년, 3년 정도밖에 안 되었던 때라 명절에 간다고 해도 눈치나 푸대접을 받지는 않았겠지만, 오빠는 몰라도 별로 반가워하지 않을 올케 앞에 나타나고 싶지 않았다. 교회에 다녔던 우리 집은 차례도 지내지 않았기 때문에 차례 핑계를 대고 찾아갈 명분도 없었다. 세상 아래 피붙이라곤 오빠와 나 남매뿐이었지만, 부모님이 살아 계셨을 때도 그다지 살가운 사이가 아니었으니 부모님이 떠나신 마당에 새삼 가까이 지내지도 않았다.
이래저래 명절 근무는 갈 곳 없는 나를 편하게 해주었다. 연휴에는 환자가 많을 때도 있고 아주 없을 때도 있다. 그야말로 환자 마음. 그해 추석 명절은 환자가 없는 편에 속했다. 밤 11시경 응급처치를 받은 그 남자, 미래의 내 남편은 장염에 걸렸던 것이다. 그는 다음 날 정식으로 치료를 받고 며칠 입원하는 정도로 회복되었는데, 그 며칠 사이에 그와 나는 상당히 가까워져서 1년 만에 결혼을 했다. 내 나이 40을 넘긴 때였다.
내가 남편 내연녀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결혼 후 5년 만이었다. 두 사람은 대학교 때부터 알던 사이. 연인 중 한쪽이 결혼을 하자 둘의 관계를 정리하지 못한 채 결혼하지 않은 여자 쪽이 내연녀로 자리를 옮겨 앉은 것이었다. 내 입장에서 남편은 애인이 있는 남자, 그 관계를 정리하지 않은 채 결혼한 남자였던 것이다. 둘은 왜 결혼하지 않았을까. 이유는 단순했다. 남편의 무능력 탓이었다. 돈 벌 재주가 없었던 사람, 어쩌면 돈 벌 생각이 없었던 사람이니 두 사람은 결혼할 엄두를 내지 못한 채 그렇게 세월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여자 쪽에서도 돈 벌 능력이 없었을 테고.
두 사람은 작가 지망생이었다. 둘 다 대학 문예창작과를 다니던 중에 어느 문학 단체에서 만났다고 했다. 세월이 흘러갔지만 두 사람 모두 글은 써지지 않았고, 그럴수록 서로 간의 연민과 공감대가 깊어갔을 것이다. 고시폐인, 공시폐인 등 폐인증후군 중에서 이른바 ‘문학폐인’이 되어가고 있을 무렵, 경제력 있는 내가 남편 눈에 띄었고 남편은 운 좋게 새로운 돌파구를 찾았던 것이다. 물론 그는 결혼과 동시에 그 여자와의 관계에 종지부를 찍고자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뜻대로 안 됐을 뿐. 나는 병원 일로 정신없다 보니 남편의 정서적 빈자리는 풋풋할 때부터 알고 지내던 그 여자가 메워주었을 것이다.
남편의 죽음으로 관계 정리
만약 남편이 자기 일이 있었다면, 규칙적으로 출퇴근하는 직장이 있었다면 결혼과 함께 그 여자와 멀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편은 그러지 못했다. 마흔 살이 넘으면서는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더욱 커졌고, 그럴수록 그 여자와의 유대는 더 깊어졌을 것이다. 그 여자로선 어차피 결혼 상대가 없을 바에야 남편만큼 편한 사람이 또 있으랴. 내가 번 돈이 그 여자한테로 쏠쏠이 넘어갔을 걸 생각하면 울화가 치밀 때가 있지만 그 또한 다 지나간 일이다.
둘 사이를 알게 된 것은 소설을 쓴답시고 두 사람이 주고받은 인터넷 메시지를 통해서였다. 어느 날 내가 퇴근하기 직전까지 둘이 속닥거리다가 미처 컴퓨터를 끄지 못한 상태에서 들켜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병원에 있는 낮 시간 동안 두 사람은 SNS나 전화로 늘 교류해왔던 것인데, 핑곗거리로도 얼마나 좋은가. 글에 관한 대화 중이었다고. 자기들 스스로도 단지 글 이야기를 하는 거라며 관계를 합리화했을 테고. 돌이켜보면 남편이 그 오랜 세월 묵묵히 살림을 맡아 꾸려준 것도 내가 출근한 사이에 가지는 그 여자와의 밀회 덕이었으리라.
내가 알게 된 이상 두 사람의 관계는 표면적으로는 정리되었다. 다시는 연락하지 않겠다고 했으니까.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내 쪽에서 그 여자를 만나 헤어져달라고 말한 것도 정리에 대한 경고의 몸짓은 되었을 것이라고 스스로 위로하며.
이혼하지 않는 이상 어쩔 것인가. 남편을 믿을 수밖에. 그러나 내 쪽에서 다시는 알려고 하지 않았다는 말이 더 맞다. 그랬다. 나는 묵인을 하기로 했다. 그리고 3년 후 남편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내가 두 사람의 관계를 안 후에도 두 사람이 계속 만났는지, 아니면 관계를 정리했는지 나는 모른다.
남편이 떠난 지금 남편과의 추억을 그 여자와 나눠 가진다고 해서 억울할 것도 없다. 다만 추억의 부피로나 깊이로나 나보다 그 여자의 것이 훨씬 두껍고 깊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나를 쓰라리게 한다. 그의 아내는 내가 아니라 그 여자이고 내 인생은 두 사람을 먹여 살리느라 흘러간 게 아닐까 하는 자학적 망상에 빠져들 때도 있지만, 어쨌든 세 사람의 인연은 이걸로 끝이 나게 됐으니….
✽브라보 마이 러브는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내용입니다.
숨 가쁘게 시간이 흘러간다. 어느덧 겨울의 한가운데 서 있다. 한겨울 차디찬 공기와 그 풍경 속으로 데려다주는 대청호의 새벽을 찾아간다. 자동차로 어두운 새벽길을 두 시간여 달려 쨍한 추위 속에 호수의 새벽 공기를 맞는 일, 신선하다.
엄동설한의 캄캄한 새벽길은 생각처럼 어렵진 않다. 달려갈수록 조금씩 걷혀가는 어둠을 확인하는 일도, 중간에 잠깐 들른 휴게소의 적막함도 어두운 길을 달리는 사람들만의 즐거움이다. 서울이나 수도권 기준으로 두 시간 정도 새벽길을 달리면 시골길 드문드문 몇 채의 농가와 들판이 내다보이고 대청호를 향한 표지판이 보이기 시작한다. 대청호 오백리길 제4구간 출발점인 윗말뫼 주차장은 한적하다.
대청호 오백리길은 총 21개 구간으로 이루어졌다. 이 구간 안에 대전, 청주, 충북 옥천군과 보은군이 경유한다. 그 속에 마을과 산과 들과 강과 호수가 오백리길을 이어준다. 원래는 대덕군과 청원군 사이에 있다고 하여 대청호라 이름 붙였다. 이 지역에 생활 및 공업용수를 공급할 목적으로 1980년 대청댐 완공과 함께 지역 마을 담수화가 시작되면서 생겨난 인공 호수가 대청호다. 이때 수몰 지역은 86개 마을로 4000세대가 넘었고, 주민은 2만 6000여 명이나 되었다. 발전이라는 명분으로 생긴 대청호로 인해 어릴 적 따뜻했던 추억 속 아름다운 시골 마을은 더 이상 찾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렇게 이루어진 대청호는 인공 저수지로는 저수량 기준으로 소양호와 충주호에 이어 국내 세 번째다. 스무 개가 넘는 대청호 오백리길 구간을 편안히 즐기는 방법은 호수 둘레길을 산책하듯 걷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4코스 호반 낭만길은 대청호수를 가까이에 두고 걸을 수 있는 길이다. 습지공원과 자연생태관 등이 걷는 길마다 이어지며, 총길이는 약 12.5㎞이고 5~6시간 정도 걸린다.
물론 지금도 호반길을 걷기 위해 찾아드는 이들에게 큰 불편은 없는 편이다. 그런데 문화체육관광부 주관 ‘2023년 열린관광지 조성 공모사업’에 선정되어 대청호 일대는 장애인, 노약자 등 이동 약자들에게 안전하고 편리한 무장애 관광 환경으로 재탄생할 예정이다. 이제는 이동 약자의 문턱이 더욱 낮아진 대청호 오백리길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정보취약계층이 불편 없이 관련 홈페이지를 이용할 수 있도록 웹 접근성도 개선한다.
취향에 따른 구간별 길을 걷다가 갈대숲이나 호숫가에 멈춰서 조용히 대청호를 즐길 수도 있고, 또는 드라이브만으로도 좋다. 굳이 걷기에만 집중하지 않고 발걸음에 따라 또는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선택해서 일부를 걷거나 쉼을 택하면 된다. 걷는 속도나 그 길을 모두 걸었다는 것에 의미를 둘 일인가. 단 한두 시간을 걸었어도 그저 자연 속에서 음미하는 시간이 의미 있다. 온몸의 세포를 깨우고 다독이는 그 순간만으로도 충만하다.
동이 트기 전 호수에 도착하는 이들에겐 새벽 물안개에 대한 기대가 있다. 하지만 요즘처럼 날씨가 좋은 날은 마냥 맑고 쾌청한 호수를 보게 된다. 일교차가 큰 봄과 가을에 주로 발생하는 물안개가 이날따라 피어오르지 않았다고 글렀구나 생각할 일은 아니다. 새벽의 거대한 호숫가에 서보았는가. 온몸이 떨리고 시리도록 쨍한 상쾌함으로 간단하게 마음의 평안을 던져준다. 이렇게 겨울과 마주한다.
호수 주변에 들면 몇 걸음 옮겼을 뿐인데 공기 맛이 다르다. 건너편의 산과 능선이 호수 안으로 잠겨 흔들림 없는 반영으로 여행자를 맞는다. 호반 둘레길에 깊숙하게 들어가면 질퍽한 습지 위로 풍성한 억새가 숲을 이루었다. 가끔 바스락거리며 무언가 지나가는 소리가 나곤 한다. 생태계가 잘 보전되어 철새가 푸드덕 날고 먹잇감을 찾는 백로의 날갯짓을 보게 된다. 계절에 따라 개구리는 물론이고 메뚜기나 거북도 볼 수 있다. 자연환경이 청정해 구간 안에 자연생태관도 운영한다.
수변탐방로에서 한없이 호수에 취했다가 명상정원 방향으로 향하면 무엇이 기다릴까. 호수와 숲이 함께하는 곳이다 보니 발밑에는 여전히 낙엽이 바스락거린다. 10분여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지만 숲길의 자연스러움에 젖어든다. 호수와 정원 사이 언덕처럼 완만한 등성이에 ‘대청호 오백리길’ 표지판이 보인다. 쉼을 제공하는 벤치와 정자가 호수를 앞두고 나무 아래 고즈넉하다. 이곳에서 호수를 빙 돌아보며 각자 생각에 잠기기도 한다.
명상정원은 물속 고향을 그리워하는 이들에게 건네주는 공간인 듯싶다. 한 번쯤 들러서 간단하게라도 그리움을 풀어보도록 전통 조형물이 조성되어 있다. 옛 마을길의 한옥 담장, 장독대, 널찍한 평상 등으로 그들의 깊은 그리움이 해소될까마는 수몰민들을 위로하는 마음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느 마을 어귀에서 자라던 나무였는지 여전히 우뚝 서 있는 나무는 사진가들의 피사체가 되어 언제까지나 물속에 잠겨 있는 모습이 애잔하다.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는 물속의 작은 섬들이 이루는 반영의 멋과 함께 드라마와 영화 촬영지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명상정원에는 드라마 ‘슬픈 연가’, 영화 ‘역린’, ‘창궐’, ‘7년의 밤’ 등의 촬영지였다는 안내가 줄을 잇는다. 이런 이유 말고도 이곳에 서면 무어라 표현하기 어려운 아련한 마음이 생겨난다. 세상의 흐름 속에서 변화해가는 현장과 그들의 어제와 오늘, 그뿐 아니라 이 모습을 대하는 현재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그렇게 사람들은 힐링의 장소로 이곳을 찾는다. 포토존에서 셔터를 누르고 나무 그네에 앉아 눈앞의 호수를 마냥 누리며 새벽의 호수를 만끽한다.
4구간 호반 낭만길은 계속 이어지는데, 명상공원에서 조붓한 길을 따라 1km쯤 거리에 자연생태공원과 추동 취수탑이 자리 잡고 있다. 상수원 취수구역이다. 가래울 마을과 황새바위와 연꽃마을에 이어진 오리골 제방이 시원하다. 철 지난 논과 밭을 끼고 걷는 길에 몇 가구 안 되는 작은 마을도 지나고, 데크로 연결되는 길도 나온다.
감나무에 넉넉히 남겨둔 까치밥의 푸근함을 올려다보면서 마을 옆 데크를 걷다가 예닐곱 단쯤 되어 보이는 알타리 무더기를 보았다. 필요하신 분은 가져가라는 인심이었다. 이런 인정 넘치는 구경은 여행의 덤이다. 도로 옆으로 나오니 자전거 부대들이 씽씽 달린다. 시골길을 달리는 라이딩족들의 활기찬 질주가 상쾌함을 듬뿍 얹어준다.
대청호 오백리길 4구간을 찾는 이들이 들르는 곳이 또 있다. 3구간 종착지인 윗말뫼의 더리스. 호수를 앞에 두고 탁 트인 풍경이 압도한다. 더리스&테라베오는 슈하스코 브라질 바비큐 전통요리 레스토랑이지만, 사람들은 이곳을 중심으로 펼쳐진 대청호 오백리길 산책로와 호숫가의 전경을 보려고 찾아온다. 더리스 정원 아래로 계단을 내려가면 프라이빗한 장소가 나타난다. 커플 의자에 앉아 마음껏 물멍에 빠져들면 된다. 때가 맞으면 거위 떼가 찾아와 물속에서 노니는 모습도 볼 수 있는 평온한 시간이다. 혹시나 비가 많이 내린 후라면 벤치와 나무가 물속에 잠긴 그림 같은 모습도 만날 수 있다.
추운 겨울날 그리움 속 마을을 찾아 떠난 여행지에서 문득 유년의 시간을 발견한다. 그 길 위에서 기억 저편의 할머니와 내 부모 형제들을 만난 듯 뭉클함도 얻는다. 소박한 자연 속에서 비로소 들여다보는 내면 깊숙이에 위로 한 줌 들여놓았다. 떠돌던 마음은 차분히 잦아들고 한없이 따뜻하다. 세상 소음 따윈 잊고 호숫가를 걷는 내 발밑에서 마른 풀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바람 소리만이 전부였던 하루가 한동안 몇 알의 비타민이 되어줄 것이다.
여행 정보
자동차로 서울 기준 두 시간 정도 소요. 특히 청주에서 출발해 근교 문의문화재단지와 대청호를 함께 둘러보는 코스도 좋다. 전통문화와 호수의 멋을 제대로 느껴볼 만한 곳이다. 대청호 코스 대전역발 시티투어 순환버스가 토·일 주말에 있다.(2시간 반 정도 소요)
책 읽는 사람은 스스로 돌아보고 내면을 다듬는다. 책에 대해 이야기 나눌 좋은 친구가 있다면 성장하기를 멈췄던 삶이 꽃처럼 피어난다. 무겁고 딱딱한 내용의 책이 아니어도 좋다. 누구나 단번에 읽어낼 수 있는 그림책이면 충분하다. 그래서 백화현(63) 작가는 국내 최초 시니어 그림책 전문 출판사 ‘백화만발’(百花晩發)을 만들었다. ‘온갖 꽃이 뒤늦게 활짝 피어난다’는 뜻의 이름에는 각자의 인생을 꽃피웠으면 하는 바람이 담겨 있다.
장소 협조 가원 시니어 도서관
백화현 작가는 30년 넘게 국어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치며 학교 안에서 독서운동을 해왔다. 아이들 저마다의 능력이나 수준을 고려하지 않은 획일적인 교과서와 수업 방식으로 배움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 안타까웠다. 진정한 배움을 위해 필요한 것은 독서라고 판단한 그는 학생과 학부모에게 독서와 도서관 이용을 권했다.
시니어와 독서, 해법은 그림책
2015년 교사를 그만두고 사회로 나와 보니 어른들도 제대로 책을 읽지 않고 있었다. 서점 서가에는 어려운 어휘가 작은 글씨로 빼곡하게 적힌 두꺼운 책이 가득했다. 서점이나 도서관에는 비교적 젊은 어른인 3040대가 많았고, 60대부터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독서를 곧잘 하던 이들도 나이가 들면 호흡이 긴 책을 읽기 어려워하는데, 대다수 책은 시니어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었다. 책을 읽고 싶어도 읽지 못하는 어른들이 있을 수도 있겠다고 처음으로 생각했다.
백화현 작가는 책이 친숙하지 않은 어른들도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을 만들고 싶었다. 그러려면 책에 대한 장벽부터 낮춰야 했다. 독서의 물꼬를 트는 데는 그림책이 효과적이리라 판단했다. 일반 도서에 비해 비교적 내용이 단순하고, 큼직한 삽화가 있어 빠르게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림책을 선택한 이유는 또 있다. 백 작가는 삶의 경험이 다양할수록 진정한 독해가 가능해진다고 믿는다. 삶의 굴곡을 겪은 경험 덕에 몇 장의 그림과 적은 양의 글로도 많은 것을 읽어내고 이해할 수 있어서다.
“그림책은 그림과 글의 매력을 동시에 갖고 있다는 점이 가장 매력적이에요. 그림은 긴 설명을 읽어낼 필요 없이 단번에 사람을 사로잡는 효과가 있고요. 글은 읽으면서 성찰하고 스스로를 치유하게 만드는 힘이 있죠. 그림책의 짧은 이야기에는 함축과 비유가 담기기 때문에 사고력을 키우고 상상의 여지를 만끽할 수 있으니 초심자에게 제격이에요.”
그러나 그림책은 어린이를 위한 책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어른도 읽을 수는 있지만, 아이들 시각이 반영된 이야기에 어른이 이입하며 읽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나마 어른을 위한 몇 안 되는 그림책은 지나치게 함축적이거나 예술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다. 가뜩이나 책이 어려워 읽지 않는 사람에게는 접근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백화현 작가는 기획 아이디어를 적은 종이 한 장 들고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을 찾아갔다. 독서운동을 함께 했던 두 사람은 적자를 감수하더라도 ‘시니어 그림책’만 전문으로 제작하는 출판사가 필요하다는 데에 동의했다. 그렇게 국내 최초 시니어 그림책 출판 브랜드 백화만발이 탄생했다.
“이건 우리 이야기네!”
백화만발의 시니어 그림책은 있는 그대로 시니어들의 삶과 고민을 다룬다. 어린 날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거나, 내면을 들여다보고 성찰할 수 있게 하는 이야기를 모아 각각의 그림책으로 엮어냈다. 80대 노인이나 50대 중년, 경비원이나 전업주부로 한평생 살아온 어머니까지. 최대한 많은 시니어 독자가 공감할 수 있도록 주인공의 상황이나 처지를 다양하게 설정했다.
백화만발 그림책이라면 갖춰야 할 요건이 몇 가지 있다. 70쪽을 넘기지 않아 15분 내외로 읽을 정도의 분량이어야 한다. 7080세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며, 4050세대는 보조인물로 등장한다. 그림에는 지나치게 비유적인 의미를 담지 않고, 어휘는 복잡하거나 어렵지 않으며 쉬워야 한다. 글씨는 12포인트 이상이 이상적이나, 글씨가 커져 그림과 배치하기 어려우면 크기를 조금 줄이는 것으로 타협한다. 또 가방에 쏙 들어가는 크기, 하드커버 표지로 제작했다. 자식 세대인 4050이 먼저 사서 읽고, 부모 세대인 7080에게 선물했으면 해서다.
지금까지 총 아홉 권의 시니어 그림책이 세상 빛을 봤다. 2020년 1월, 1권 ‘할머니의 정원’부터 3권 ‘선물’이 처음 출간됐을 때 그는 옛 동료인 은퇴 교원들에게 ‘직접 읽고 부모님께 권해드리라’고 한 권씩 선물했다. 모두들 “이런 책이 있었냐”, “세상에 시니어를 위한 그림책이 있을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며 ‘이런 책’의 탄생을 반겼다.
각자 이입하는 책은 다르지만 굳이 꼽자면 첫 번째 책 ‘할머니의 정원’이 전반적으로 반응이 좋다. 책에는 자식도 배우자도 떠나고 몸도 성치 않은 채 혼자 살며 괴팍해진 ‘경자 할머니’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경자는 새로운 가사 도우미 민희와 점차 우정을 쌓으며 마음의 벽을 허물고, ‘정원’이라는 꿈을 가꿔나간다.
‘인생 책’이라며 엄지를 치켜세우는 이가 있는가 하면, 감정이 북받친 나머지 마음을 진정하기 위해 책을 다 읽지 못하고 도중에 덮었다는 후기도 들려온다. 전국의 많은 ‘할머니’들은 아마도 경자 할머니와 자신의 삶이 겹쳐 보여 눈시울을 붉혔을 것이다. 마음의 문을 닫았던 할머니가 진정한 우정으로 인해 밝아지는 장면에서 ‘나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느꼈을 테다. ‘5090세대에게 위로와 격려를 보내고 꿈을 드리고자 한다’는 백화만발의 기획 의도가 통한 셈이다.
“판매 실적이 기대에 못 미치는 점은 아쉽지만, 그래서 이미 나온 아홉 권의 그림책이 더 소중해요. 너무 늦지 않게 독자의 관심을 받고 판매돼야 시니어 그림책 시장이 생겨나고 더 좋은 작품이 나올 테니까요. 그러다 보면 시니어들이 ‘함께’ 그림책을 읽고 이야기 나누는 문화가 생겨나겠죠? 시니어들이 자연스럽게 도서관을 찾게 되는 날까지 열심히 독서의 중요성을 알리려고 해요.”
만나서 읽어야 하는 이유
백화현 작가는 시니어들이 ‘모여서’ 책을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시니어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림책이 아닌 다른 종류의 책이어도 상관없다. 독서를 주창하는 궁극적 목표가 사람과의 교류에 있기 때문이다. 그는 책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진실한 교류를 가능케 하는 길 중 하나라고 설명한다. 우리 사회가 맞닥뜨린 ‘초고령사회’라는 과제와도 관련 있다.
“초고령사회 진입이 코앞으로 다가왔는데, 우리 사회는 이에 대한 준비가 놀랍도록 부족해요. 사람은 누구나 나이가 드는데, 노인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고 관심조차 없으니 TV나 유튜브만 보며 외로움을 달래는 노인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죠. 마음에 응어리진 이야기를 풀어내지 않으면 슬프고 실망하고 외로워서 괴팍해져버린 ‘경자 할머니’가 되고 말아요. 그런 분들이 우리 사회의 어른이고, 그 수가 점점 많아진다면 그 사회도 함께 암울해지고 말겠죠.”
책과 사람을 잇는 독서 모임은 그래서 해결책이 될 수 있다. 주체적으로 모인 사람들이 책을 가운데 놓고 그림과 글을 보며 대화를 나눈다. 책을 읽기 위해선 머리를 써야 하고, 제대로 대화하기 위해 제대로 질문해야 하며, 질문을 잘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에게 집중하며 잘 들어야 한다.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교류를 통해 사람은 우정을 쌓고, 혼자서는 볼 수 없었던 희망을 찾게 된다. 경자 할머니의 새 가사 도우미 ‘민희’ 같은 존재가 서로에게 되어주는 것이다.
백화현 작가는 책 읽는 법을 배우고, 독서 모임에 참여하면서 삶에 활력을 되찾는 시니어들을 많이 봐왔다. 그림책 읽는 법을 처음 배운 80대 어르신들이 ‘너무 좋다’며 박수 치던 소리가 아직도 그의 귀에 쟁쟁하다. 배운 대로 그림책을 뜯어보며 눈을 반짝이던 이들은 지금도 자체적으로 모여 다양한 분야의 책을 섭렵하고 있다.
산발적인 움직임이 문화로 정착되려면 아직 필요한 것이 많다. 언제든 가벼운 마음으로 방문해 책에 대한 이야기를 편히 주고받을 수 있는 공간, 혹은 책을 같이 읽고 생산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친구. 여전히 도서관보다 TV, 유튜브를 찾는 것이 현실이지만 희소식도 간간이 들려온다.
“최근에는 경기도 고양시에서 국내 최초 ‘시니어 도서관’을 운영한다는 소식을 접했어요. 독서 문화 정착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시도라, 어떻게 하면 이용자를 늘릴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죠. 더디지만 독서 모임도 생겨나고 있어요. 독서 운동을 함께 했던 시민단체 중 한 곳으로부터 ‘전국에 5만 개의 독서 모임이 운영되고 있다’는 소식을 지난해에 전해 들었죠. 제가 성인을 대상으로 운동을 시작했을 때 잡았던 목표치가 ‘독서 모임 30만 개 만들기’였어요. 한참 못 미치는 수치긴 하지만 대면 모임이 어려운 시기였던 걸 생각하면 의미가 있죠.”
상황이 허락한다면 이야기 그림책을 백 권까지 만들고 싶다. 시니어의 취미, 요즘 문물, 향수를 느낄 만한 전통문화 등 아이디어는 무궁무진하다. 책 ‘어른 그림책 여행’처럼 그림책 세계가 궁금한 어른을 위한 길라잡이나, 4050세대를 위한 ‘심화’ 단계 시니어 그림책도 포함된다. 새해에는 백화현 작가의 바람대로, 바지런히 펴낸 그림책을 펼쳐 새로운 삶을 꽃피우는 이들이 더욱 많아지기를 소망한다.
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될 당신의 중년 사랑을 보듬는다.
요즘 50대 이후 연령에서 옛 애인 찾기가 유행이란 소리는 들었지만 내가 그 대상이 될 줄이야. 내가 그의, 그가 나의 옛 애인이라고? 콧방귀 나올 소리 아닌가. 개 풀 뜯는 소리 작작하라지. 그와 나는 연인이 아니라 약혼한 사이였으니까. 아련하고 쌉싸름한 추억의 대상은 고사하고 악연도 그런 악연이 없었던 사람들끼리 세월 지났다고 관계를 미화해서 뭘 어쩌란 말인가. 그 작자는 도대체 무슨 의도로 이런 시도를 하는가. 폭력적일 만큼 일방적이던 태도가 20년이 지나도 그대로라면 이번에는 내 쪽에서 모지락스럽게 멱살을 틀어쥐고 따져볼 기회가 온 건가? 찾으려고 들면 바로 찾을 수 있으련만 옛 애인 찾기 운운하며 접근해온 것이 장난스럽게 들려 더 불쾌하다. 무엇보다 이제 와서 날 찾아 뭘 어쩔 거라고.
상견례 날의 비극
결혼을 앞두고 양가 부모님을 모시는 상견례 날. 가뜩이나 해 짧은 겨울철, 시간을 저녁으로 잡은 것부터가 불행의 서막이었을까. 그해 겨울은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다. 그날도 오후 4시경부터 내리던 눈이 약속 시간인 7시가 가까워올 무렵에는 제법 쌓이기 시작했다. 게다가 점심에 친구들에게서 축하 술을 몇 잔 받았다는 그가 염려되어, 그의 직장으로 내가 가서 함께 상견례 장소로 가기로 했다. 내 차를 그의 회사 주차장에 세워두고 그의 차로 같이 가면 눈길 운전에도 다소 안심이 될 것 같아서였다.
그날 만약 각자 따로 이동했더라면, 그가 낮술을 마시지 않았더라면, 눈이 오지 않았더라면, 아니 차라리 폭설이 쏟아져서 약속이 취소되었더라면, 다 관두고 애초 그와 내가 만나지 않았더라면…. ‘만약에’ 게임이 다시 시작되었다. 지긋지긋하고 질긴, 죽어야 끝이 날 만약에 게임. 만약에 게임을 다시 시작하게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뜬금없는 연락은 얼마나 잔인한가.
“운전할 수 있겠어? 내가 할까?”
“무슨 소리야, 얼마 안 마셨어. 그리고 지금은 다 깼어. 자기가 구태여 온다고 하길래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어서 그러라고 한 거지, 나 때문에 올 필요는 없었어.”
아닌 게 아니라 그에게서 술 냄새는 거의 맡을 수 없었다. 저녁에 중요한 약속을 앞두고 설마 낮에 퍼마셨을 리는 없잖은가.
퇴근길 차량들이 도로로 서서히 밀려들고 있었다. 그날 나는 마사지도 받고 미용실에도 가느라 오전 근무만 했기 때문에 퇴근 풍경이 낯설고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마치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모습처럼. 그날 이후 실제 상관없는 일이 되어버렸지만. 눈길 안전 운전 당부와 도심 정체 구간을 알리는 라디오 방송 또한 눈발처럼 쏟아졌다.
“똑같은 소리 짜증 나. 웬 호들갑이야. 별로 많이 오지도 않는데.”
거칠게 라디오를 끄더니 반복되는 기상 방송에 대한 반감처럼 그가 액셀러레이터를 세게 밟았다. 순간 충격으로 어찔했다. 술기운이 가시지 않은 탓인가? 적당히 마실 일이지, 다른 날도 아니고 상견례 자리에 나오실 어른들께 경솔하고 무례한 태도 아냐? 신경이 예민해진 나도 슬며시 짜증이 올라왔다. 그러면서도 ‘어차피 눈 내리는 퇴근길과 맞물렸으니 혹여 늦는다고 해도 양해를 구할 수 있으리라, 차라리 함께 이동하는 것이 잘된 일’이라 생각됐다. 둘이 같이 늦으면 양가 중 어느 한쪽이 불쾌할 일도 없을 테니까.
내 기억은 거기서 더 나가지 못한다.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잠시 정신을 잃은 것 같은데 눈을 뜬 곳은 상견례장이 아닌 대형 종합병원. 우리 차가 눈길에 미끄러져 중앙분리대를 들이박았고, 놀라운 것은 사흘이 지나서야 내가 눈을 떴다는 사실이다. 그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3일간 내 인생이 장애자의 길로 방향을 트는 동안 경미한 부상을 입고 응급처치를 받은 그는 곧장 귀가했다는 사실이었다.
나를 불구로 만든 그, 입을 열다
내 두 다리의 감각이 사라지듯이 그렇게 그는 내 인생에서 사라졌고, 20년이 지난 엊그제 옛 애인을 찾겠다며 뜬금없는 연락이 왔으니…. 처음에는 당장 만날 것처럼 굴더니 며칠 후에 이메일을 보내왔다.
“경애 씨, 얼마 만에 불러보는 이름인지요. 그간 어떻게 지냈나요? 요즘 같은 세상에 알려고만 들면, 아니 알려고 하지 않아도 서로의 소식쯤이야 얼마든지 들을 수 있고, 알 수도 있지만 경애 씨에 대해서는 애써 외면하며 살았습니다. 제가 무슨 염치로, 무슨 면목으로 경애 씨 앞에 나타날 수 있었겠습니까.
이제야 실토하지만, 그날 우리의 상견례 날 점심에 친구 녀석들과 술을 마셨던 게 아니었어요. 하필 그날 헤어진 여자가 찾아왔더라고요. 3년 동안 만났던 나를 버리고 다른 남자를 찾아 떠났던 여자였지요. 경애 씨도 그 여자의 존재를 어렴풋이 알고 있었을 테지만, 자세히 묻지 않길래 나도 굳이 이야기할 필요가 없었지요.
나와 헤어지자마자 다른 남자와 결혼한 걸 보면 나를 만나고 있을 때 이미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결혼식을 치르고 신혼여행에서 돌아와선 그 남자, 그러니까 남편과 바로 헤어졌다고 하더라고요. 혼인신고도 하기 전이었다며. 그날 나를 찾아왔을 때는 결별한 지 반년이 흐른 후였지요. 이혼 사유는, 혼인신고도 안 했으니 이혼이랄 것도 없지만, 남편이 지독한 마마보이였다나 봐요.
홀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하루는 남편의 샤워 후 벗은 몸을 시어머니가 버젓이 닦고 있더래요. 남편과 시어머니 두 사람 다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너무나 익숙한 표정으로. 기겁을 하고는 그날로 헤어졌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자기를 다시 받아주면 안 되겠냐고 합디다. 하필 우리의 상견례 날에. 많이 혼란스럽고 번민이 되더군요. 내가 아무 미련이 없었다면 속된 생각으로 ‘날 버리고 가더니 쌤통이다, 고소하다’고 할 수도 있었겠지만, 저는 그때까지도 여전히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었더라고요.
버림받았다는 마음에 그간 친구처럼 지내던 경애 씨와 급격히 가까워지고 서둘러 약혼할 때만 해도 그 사람에게 복수심이 없었다면 거짓말일 거예요. 그런데 막상 혼자 되어 다시 나타나니 내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그쪽으로 향했습니다. 그저 연민인 줄 알았는데 사랑이었던 거죠. 그만큼 저의 미련이 컸던 거겠죠.
그날은 우선 돌려보냈습니다. 저녁에 중요한 약속이 있으니 다음에 다시 연락하겠다는 여운을 남긴 채. 그러고는 정신이 아득하니 혼미해졌지요. 머릿속이 혼란스러우니 겨우 두 잔 마신 맥주의 취기마저 올라왔고, 그렇게 그날 기어이 사고를 내고 말았습니다.”
과거 여자에게로 잠적한 이유
20년 전 그날에 버금가는 충격이 전신에 번졌다. 파혼 후 그의 소식을 애써 외면해왔기에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사고 후 나는 하반신 마비의 불구자가 되었기에 어차피 정상적인 결혼 생활을 할 수 없었으니, 그가 도망가버린 것에 대해서도 혼자 삭여야 했다. 그가 다른 사람과 결혼을 했다 해도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 속내와 사정을 감추고 있었다니! 결국 과거의 여자와 결혼하기 위해 중상을 당한 나를 버린 후 찾아오지 않았다는 건가.
이틀 후 두 번째 메일을 받았다.
“경애 씨, 엊그제 메일을 받고 많이 놀라셨지요? 이래저래 나는 경애 씨에게는 원수 같은 존재겠지요. 경애 씨의 일상을 다시 흔들고 있으니까요. 이미 내다 버린 가증스러운 놈을 쓰레기장에서 다시 집어 든 느낌이겠지요. 이런 파렴치한 나를 나 자신도 용서할 수 없으니 경애 씨의 용서를 구하려는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저는 바로 그 여자에게로 갔습니다. 변명하지 않겠습니다. 경애 씨가 그날 다친 것이 마치 내가 그 사람에게 가도 좋다는 운명의 허락처럼 느껴졌습니다. 장애자가 된 경애 씨와의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을 테고, 무엇보다 나는 그 사람을 더 사랑했으니까요.”
여기까지 읽는데 부아가 치밀었다. 만약 우편 편지로 받았다면 그 자리에서 북북 찢어버렸을 것이다. 이 자식이 도대체 하고 싶은 얘기가 뭐야? 20년 전에도 나를 조롱하더니 또 나를 갖고 노는 저의가 뭐야? 옛 애인 찾기 사이트를 뒤적여 나를 찾아내 기껏 한다는 소리가….
분노로 울렁대는 가슴을 꾹꾹 누르며 메일을 계속 읽어 내려갔다.
“그날의 사고는 전적으로 제 책임임을 통감합니다. 머리를 조아려 무릎 꿇고 용서를 구한 후 경애 씨의 다리가 되어 평생 죗값을 치러도 모자랄 판에 그대로 도망쳐버렸으니 천벌 받을 짓이었지요. 그런데 정말 천벌을 받고 말았습니다. 실은 제 아내가 교통사고를 당해 경애 씨처럼 하반신 마비가 되었습니다. 결혼 후 3년 만에. 그 사실을 말씀드리고자 오늘 메일을 드립니다. 구태여 하지 않아도 되는 얘기지만 왠지 하고 싶었습니다. 이미 알고 있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제 입으로 직접 하는 것이 제게는 중요하니까요. 그래서 저는 지금 아내의 발과 다리가 되어 삽니다. 경애 씨에게 했어야 할 일을 지금의 제 아내에게 하고 있다고 해야겠네요. 어떤가요? 이제 좀 속이 시원하신가요? 복수를, 원수를 갚은 것 같은가요?”
머릿속이 안개로 자욱해졌다. 무슨 이런 장난 같은 일이…. 운명의 장난이라는 말은 정녕 이럴 때 쓰라고 만든 것인가. 그건 그렇고 왜 하필 옛 애인 찾는 온라인 사이트에서 나를 찾았던 걸까.
“경애 씨의 근황을 미리 좀 파악할 수 있을까 해서였어요. 특별히 다른 뜻은 없었어요. 미리 좀 알게 된다면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되레 결례가 되었다는 생각이 뒤늦게 드네요. 이래저래 죄송합니다.” 내 속을 읽은 듯이 메일이 날아들었다.
연달아 받은 세 통의 메일, 이제 내가 답신을 보내야 할 차례인가. 나는 무슨 말을 그에게 할 수 있을까. 지금 내 가슴이 터져 나갈 것 같아요. 누가 좀 알려주세요!
※브라보 마이 러브는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내용입니다.
질투는 나의 힘
-기형도(1989)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시인은 자신이 지나온 모든 시간이 머뭇거림과 탄식과 질투로 가득했다고 고백합니다. 끝없이 타인의 인정과 사랑을 갈구했지만 끝내 한순간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음을 참회합니다. 혹시 질투의 불길 속에서 자신을 태우고 있지는 않습니까? 질투로 아파하는 모든 분과 마음 미장공 아홉 번째 이야기 함께하겠습니다.
아직도 질투에 사로잡힌 당신에게
살림하는 전업주부로 산 세월이 많던 시절, 무릎 나온 바지에 애들 안 입는 낡은 티셔츠 입고 음식물쓰레기 봉투를 든 날 아침, 승강기에 같이 탄 이웃을 나도 모르게 훔쳐보게 됩니다. 옷차림부터 머리 매무새며, 들고 있는 서류가방, 풍기는 향수 냄새까지. 저는 물론 세수도 하지 않은 채입니다. 머리부터 발끝, 아니 구두 끝까지 제대로 갖춰 입은 또래로 보이는 여인. 역한 냄새 나는 쓰레기봉투를 든 나와 예쁜 백을 단정하게 든 그녀.
‘아 저 여자는 무슨 일을 할까? 얼마나 전문적이고 근사한 직종에 있는 걸까? 출근해서는 얼마나 재미 있고 또 의미 있게 하루를 보내고 돌아올까?’
부러움 가득한 시선으로 보던 때도 많았습니다. 시부모님과 같이 살면서 아이들 챙기느라 자신을 가꿀 수 없었던 제 모습이 창피스럽기도 했습니다. 발코니에서 내려다보이는 사람들 모습, TV에 나오는 유명인이나 드라마 속 주인공을 보다가 당신은 시기와 질투, 시샘하는 마음이 올라온 적이 있습니까? 이 감정이 도대체 뭐길래 나를 초라하게 하고 내 신세를 형편없는 것처럼 느껴지게 할까요.
질투의 대상과 거리 : 최소한 사촌은 돼야 배가 아프다
친구가 성공할 때마다
나는 조금씩 죽는다.
-고어 비달, 미국 소설가
영성이 높은 한 수도사가 금식 기도하며 수련 중에 있습니다. 마귀가 아무리 유혹하고 훼방하려 해도 안 통합니다. “그런데 말이야, 오늘 교구 인사에서 당신 동생이 주교가 되었다고 하는데….” 말을 맺기도 전에 “진짜? 말도 안 돼” 하며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셨나요?
질투의 대상은 질투의 거리와도 밀접합니다. 부부나 연인, 형제자매, 친구 사이처럼 그 사람이 나와 얼마나 가까운지가 관건입니다. 거론한 대상이 자신과 너무 동떨어지고 격이 차이가 나면 질투가 거의 생기지 않습니다. 또래일 경우 질투의 불길은 활활 타오릅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말해주듯 사돈의 팔촌이 아니라 나와 가까운 혈연 관계인 사촌이 땅을 샀기 때문에 내 배가 아픈 법입니다. 평생 일면식도 없던 먼 친척이라면 아무런 감정도 일어나지 않기 마련이니까요.
만만할수록 불붙는 질투심
수십조 혹은 수백억 달러를 상속받았다거나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일론 머스크한테 질투를 느끼는 경우는 매우 드물 것입니다. 막연히 부러워하거나 경탄하는 정도에 그칩니다. 그러나 매일 같이 운동하는 이웃이 경매로 작은 아파트 한 채를 샀다거나, 내 옆자리 동료가 주식으로 3000만 원을 벌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상대가 성취한 부와 행복의 크기가 내가 도달할 수 있을 정도로 만만할 때 질투가 솟구칩니다. 또 이미 세상을 떠난 과거의 예술가나 과학자에게 질투가 일어나는 경우는 드뭅니다. 고인(古人)과 경쟁을 하지는 않으니까요. 동시대를 사는, 같은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에게 질투가 한결 커집니다. 질투는 시간적이나 공간적으로 나와 가깝고, 내용이나 크기로도 만만할 때 더 폭발해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질투는 죄가 없다?
질투(嫉妬)라는 글자에서 질(嫉)의 핵심은 계집 녀(女)에 있는 게 아니라 병 질(疾)에 있습니다. 괴로워하고 미워하고 원망하고 증오하고 성급한 마음 때문에 근심하다 결국 나한테 독이 되고 남에게도 독이 되는 것. 이러한 괴로움이 질투에 들어 있는 병이라는 것입니다. 투(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마음에 돌을 던졌으니 병이 들 수밖에요. 말이나 행동, 관계 따위로 손해나 상처를 주고받으면서 병든 상태가 질투입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질투의 신은 누구일까요? 바로 젤로스(Zelos)입니다. 한자 문화권인 동아시아에서는 질투를 칠거지악(七去之惡)의 하나로 꼽을 만큼 여자한테만 덮어씌웠는데, 서양에서 질투를 맡은 젤로스가 남신이라는 점은 흥미롭습니다. 젤로스는 폭력의 신 비아와 권력과 힘의 신 크라토스를 형제로, 승리의 신 니케를 누이로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서양 문화권에서 젤로스는 질투의 개념보다는 경쟁, 열의, 전념 같은 긍정적인 뜻을 더 많이 함축하고 있습니다.
사랑과 질투의 이중주 : 스타 탄생과 몰락 이야기
1937년 ‘스타 탄생’이란 이름으로 처음 영화로 만들어졌고, 2018년 세 번째 리메이크된 ‘스타 이즈 본’(A Star Is Born)은 사랑 영화이자 음악 영화로 알려져 있지만 질투가 주인공 못지않은 역할을 하는 작품입니다.
애리조나 하늘같이 타오르는
그대 눈동자
날 보는 그대 눈길에 불타고 싶어
내 영혼 깊숙이 캘리포니아
황금처럼 묻힌
나도 몰랐던 내 안의 빛을
찾아낸 그대
목이 메고 할 말을 찾지 못해
헤어질 때마다 가슴이 아파
해가 지고 밴드가 연주를 멈출 때
우리 모습 영원히 이대로
기억할 거야
(중략)
그대가 날 바라보면
온 세상이 사라지고
우리 모습 영원히 기억할 거야,
이대로
-OST ‘Always Remember Us This Way’(우리 모습 영원히 이대로 기억해)
중에서
나를 발견해주는 사람을 조심하라
음악에 천부적인 재능을 지녔지만 외모가 걸림돌이 되어 낮에는 웨이트리스로, 밤에는 무명 가수로 무대에 오르던 앨리(레이디 가가 분). 천재 기타리스트이자 컨트리 뮤지션으로 명성을 날리는 슈퍼스타 잭 메인(브래들리 쿠퍼 분). 순회공연 중 우연히 찾은 바에서 노래하는 앨리를 보고 잭은 첫눈에 ‘캘리포니아 황금처럼 영혼 깊숙이 묻힌’, 그녀도 몰랐던 내면의 빛을 발견합니다. 나를 찾아내고, 무대에 세우고, 나를 키워주고 응원하는 사람과 결혼한 그녀. 내 진가를 제대로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 자신이 그토록 꿈꾸던 무대에서 직접 만든 노래를 부를 기회를 주었으니, 두 사람은 이제 사랑밖에 할 일이 없을 줄 알았습니다.
“내가 당신을 망쳤어. 당신이 부끄러워. 안쓰럽고 그래. 당신 더럽게 못생겼어. 얼굴에 자신이 없어서 남한테 잘 보이는 게 더럽게 중요하지.”
전성기에서 갈수록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잭과 달리 앨리는 스타 시스템에 힘입어 대형 토크쇼에 초대되는가 하면, 그래미상 3개 부문 후보로 선정될 정도로 승승장구합니다. 기쁜 소식을 들은 바로 그날, 잭은 술과 마약으로 망가질 대로 망가져서 독설과 폭언을 퍼붓습니다. 심지어 신인상을 받게 되어 시상식에 초대된 날, 앨리가 수상 소감을 말하는 옆에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 소변을 보고 맙니다. 그 뒤 마음을 다잡고 알코올 중독 치료도 하는가 싶더니, 아내 앨리의 대형 해외 투어를 앞두고 목을 매달아 세상을 등집니다. 한 여자를 살렸지만 자신은 살리지 못했던, 그녀를 사랑하는 만큼 자신을 사랑하지 못했던 남자. 앞선 기형도 시인의 독백과 겹쳐집니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죄
질투는 오로지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부정적인 감정 상태로 자신을 방치해 병이 되게 해서는 곤란합니다. 열의, 열정, 전념을 담당하는 젤로스 신을 불러와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꾸면 어떨까요. 제가 처음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게 된 것은 남편의 공이 큽니다. 그 옛날 원고지에 글 쓰던 시절, 시외삼촌의 권유로 타자를 배운 남편을 보면서 마음에 질투의 불씨가 당겨졌습니다. 하지만 질투에 굴복하지 않고 선의의 경쟁과 열정이란 긍정적인 감정으로 바꾸어 저도 당시 ‘한메타자교사’로 컴퓨터와 친해질 수 있었습니다. 물리적으로 매우 가까이에 있는 친밀한 관계에서 생기는 질투를 내 삶의 좋은 에너지로 바꿀 수 있습니다. 가까운 사람이 뭔가를 해내는 것을 지켜보는 건 자신에게 굉장한 자극을 주기 때문입니다.
질투를 놓아주고 나부터 행복해집시다! : 마음의 주인 노릇
질투에 함몰되어 자기 비하와 자학으로 자신을 파괴할 것인지, 그 감정이 나를 옭아매지 않도록 방향을 선회해 자기 발전, 자존, 자족, 건강한 자극으로 동기를 부여할 것인지 그 선택은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내가 선택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주인이 나일 때만 가능합니다. 마음이 괴로울 때마다 그 마음의 주인이 누구인지 질문해보세요. 질투는 남보다 나를 망칩니다. 내 화살로 나를 쏘는 것과 같습니다. 남을 질투할 시간에 나를 더욱 사랑해보면 어떨까요. 남과 견주며 끝없는 고통과 절망의 나락으로 빠지지 말고 나부터 행복해집시다.
남이 찍었다는 별 사진 보다 보면 슬그머니 욕심이 생긴다. ‘나도 맨눈으로 밤하늘 수놓은 별들을 보고 싶다’, 혹은 ‘나도 별 사진 찍고 싶다’… 마음의 소리를 따라 무작정 별 보러 떠나기에는 어디로 가야 할지 정보가 부족하다. 마음만 앞설 당신을 위해, ‘별 볼 일 생길 가이드’를 준비했다.
별 헤는 언덕, 강원도 별마로천문대
천문대의 이름인 별마로는 별+마루(정상)+한자 ‘고요할 로’의 합성어로, 별을 보는 고요한 정상이라는 뜻을 담은 이름이다. 지름 80cm 주 망원경과 여러 대의 보조 망원경으로 달과 행성, 별을 관측할 수 있다. 봉래산 정상 해발 799.8m에 자리하고 있으며, 천문대 주변 활공장의 탁 트인 풍경은 덤이다.
천체투영실에서는 8.3m 규모 돔 스크린에 가상의 별을 투영해 날씨에 구애받지 않고 밤하늘을 감상할 수 있다. 보조관측실의 굴절 망원경과 반사 망원경 등을 이용해 낮에는 태양의 흑점과 홍염을, 밤에는 달과 행성, 별, 성단, 성운 등을 관찰할 수 있다. 천문대 관람 프로그램은 하루에 5회 운영된다. 사전예약제로 운영 중이며, 하절기(4~9월)와 동절기(10~3월)의 관람 시간이 다르다. 하절기 기준 1, 2회에는 태양 관측을, 3~5회에는 천체 관측을 할 수 있다. 별마로천문대에서 별자리 찾는 법, 별자리에 얽힌 로마 신화에 대한 설명을 듣고 나면 별을 바라보는 시야가 한층 넓어질 것이다.
주소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천문대길 397
서울 시민의 망원경, 서울시립천문대
서울 시민들이 날씨에 구애받지 않고 천체를 관측할 수 있는 장소다. 천체투영실, 천체관측실, 천체망원경실습교육장, 천체과학교육실을 갖추고 있다. 천체관측실에 구비된 직경 8m의 돔 안에서 600mm 대형 망원경으로 성운, 성단, 은하, 행성까지 관측할 수 있다. 또한 천체투영실에서는 편안히 누워 직경 18m 돔 스크린에 펼쳐지는 입체 영상을 감상할 수 있는 점도 매력적이다.
주중에는 태양을, 주말에는 계절별 별자리를 관측할 수 있는 ‘도심 속 별빛산책’ 프로그램을 연중 상시 운영한다. 관측이 불가능한 경우를 대비한 계절별 다양한 대체 프로그램이 있다. 대부분의 프로그램이 사전 예약제로 운영되니 서울시립천문대 홈페이지를 참고하도록 하자.
주소 서울시 광진구 구천면로 2
섬진강 위 흐르는 은하수, 곡성섬진강천문대
한국천문연구원에서 국내 순수 기술로 제작한 600mm 리치크레티앙 반사 망원경과 정밀도를 자랑하는 중형 망원경을 보유하고 있다. 2019년 전시 개선사업을 거쳐 VR 자이로스코프, 우주엘리베이터, 4D & VR 융합상영관 등의 최신 체험 장비까지 갖췄다.
매달 운영하는 프로그램은 조금씩 달라진다. 곡성섬진강천문대 홈페이지의 ‘천문대관람’-‘운영프로그램’ 게시판에서 프로그램 일정 및 휴관일을 확인할 수 있다. 관람을 원할 경우 관람 예정 시간보다 일찍 방문해 발권하기를 추천한다. 13시 30분부터 당일에 한해 운영하는 모든 시간대 프로그램을 발권할 수 있다. 매일 14시부터 22시까지 운영하며, 마지막 입장 시간은 21시다. 휴관일은 1월 1일과 설날, 추석, 법정 공휴일 다음 날, 매주 월요일이다. 날씨가 흐리거나 비가 오면 천체 관측 프로그램을 운영하지 않는다.
주소 전남 구례군 구례읍 섬진강로 1234
큰맘 먹고 시작한 한달살기. 정해진 시간에 정신없이 유명한 장소를 훑는 관광이 아닌, 느리고 여유로운 휴식을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늘 부지런히 살아온 이들은 이렇다 할 성과 없이 하루를 빈둥빈둥 보내는 게 영 익숙하지 않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제주 생활이 즐겁고 만족스러울까? 급할 건 없다. 우리에게는 30일이라는 시간이 있으니까!
한달살기는 단순한 여행과는 차이가 있다. 보통 한달살기를 앞둔 사람들은 마음을 비우고 천천히, 한 달 동안 여행지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일상을 경험하기를 원한다. 동네 산책을 하다 말을 트게 된 아주머니에게 사는 이야기를 듣거나, 비를 피하려 우연히 들어간 작은 카페에서 메뉴에 없는 음료를 대접받는 등의 상황 말이다.
그러나 막상 제주 땅에 발을 딛고 나면 얘기가 달라진다. 육지에서는 먹을 수 없는 음식, 할 수 없는 일을 깨알같이 모두 즐기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그러다 보면 가이드북이나 인터넷을 참고해 각종 정보를 샅샅이 뒤지게 되고, 고민과 갈등의 연속에 하루하루가 숙제처럼 느껴지기 십상이다. 이상과는 다른 제주살이에 문득 조바심이 날 수도 있다. 한달살기가 아니라 그저 한 달간의 패키지 여행이 되는 셈이다. 한달살기에 대한 보상 심리를 바라기보다, ‘여행 테마’를 설정하고 제주를 누려보는 건 어떨까.
마음의 자유 선물하는 ‘책방 투어’
전자기기와 영상매체가 발달한 후로는 한 달에 책 한 권 읽기도 버거운 사람들이 늘었다. 독서율이 점점 감소하고 있다는 의미다. 한달살기를 명목으로 멀리했던 책을 다시 가까이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제주에는 소규모 독립 서점, 독특한 색깔을 가진 서점이 많다. 제주만의 지역 감성과 책방지기의 취향이 버무려져 남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책방 특유의 기분 좋은 종이 냄새와 책장 넘기는 소리가 주는 아늑함은 덤이다.
바라나시 책골목_구불구불한 해안선을 따라 형성된 횟집 거리 사이, 빈티지한 간판이 눈에 띈다. 내부로 들어서면 이국적인 향이 후각을 자극하고, 인도 서적과 세계문학 및 인문학 책이 즐비하다. 이곳은 제주 속 인도, ‘바라나시 책골목’이다. 바라나시는 인도 우타르프라데시주에 있는 도시다. 갠지스강 중류에 있는 바라나강과 아시강을 합쳐 붙인 지명으로, ‘신성한 물을 차지한다’는 뜻이 있다. 생애 한 번은 가봐야 할 도시로 꼽히며, 일부 여행객은 인도 여행의 필수 코스로 소개하기도 한다. 제주 바라나시 책골목은 한국에서 인도의 정취를 느끼기 충분한 장소다. 책방과 카페를 함께 운영하고 있어 인도식 밀크티인 ‘차이’나 요구르트 ‘라씨’도 맛볼 수 있다.
만춘서점_야자수를 배경으로 한 아담한 흰 건물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삼각형 구조의 내부로 매력을 더했다. 따뜻한 감성이 묻어나는 책들과 LP, 제주의 감성이 흐르는 소품이 가득하다. ‘만춘서점’ 책방지기는 출판·디자인 업계에서 일하다 서울에서 제주로 이주했다. 그래서인지 육지 사람이 그리는 제주의 장면을 더욱 잘 옮겨놓은 듯하다. 햇살이 들어오는 창가 1인용 테이블에서 책을 읽고, 마당에 놓인 의자에 앉아 쉬어 가기도 좋다.
소심한 책방_오름 다섯 개가 감싸고 있어 유독 고요한 제주의 동쪽 끝 마을, 종달리다. 좁은 골목 안쪽, 돌담 너머에 ‘소심한 책방’이 있다. 이곳은 각각 제주와 서울에 사는 두 사람이 책을 좋아하는 마음을 모아 만든 공간이다. 소설, 에세이, 여행 등 단행본부터 독립 출판물, 제주 특산품, 문구까지 다채롭게 구비했다. 낮에는 햇살이 가득 들어와 책방에 온도를 더해주고, 밤에는 노란 불빛이 다정하게 채워진다. 때로 소소한 전시나 공연이 열리기도 한다. 주변에 들를 곳이 많은 관광 지역이 아닌데도 굳이 찾아가게 되는 이유는 하나만 꼽기 어렵다.
책약방_‘책약방’은 초록 잎과 나무, 낮고 작은 집 사이에 위치한 아주 작은 그림책 전문 서점이다. 주말을 제외하고는 무인으로 운영된다. 사람 대신 책이 지키고, 마을이 지킨다는 독특한 콘셉트를 갖고 있다. 현관 옆에 걸린 작은 의자 위에는 운영자가 추천하는 ‘오늘의 그림책’이 놓여 있다. 비치된 그림 일기장과 100자짜리 작은 원고지에는 이곳을 찾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빼곡히 적혀 있다. 릴레이처럼 이어진 글들을 읽다 보면, 책약방의 진짜 ‘약’이 무엇인지 짐작하게 된다.
걸어서 제주 한 바퀴
올레길은 제주도의 마을길, 해안도로, 숲속 오솔길 등 걷기 좋은 길들을 선정해 개발한 코스다. 2007년 9월 8일 제1코스(시흥초등학교~광치기해변, 총 15km)가 개발된 이래, 2012년 11월 제주해녀박물관~종달바당을 잇는 21코스가 개장하면서 올레길 코스는 제주도를 한 바퀴 빙 두르게 됐다. 현재는 제주도 내에 총 23개 코스가 있으며 우도, 가파도, 최근 확장된 추자도 코스를 포함하면 총 27개다. 각 코스는 길이가 대체로 15km이내이며, 평균 소요 시간은 5~6시간 정도다.
제주도 올레길을 한 코스씩 돌다 보면 도내의 모든 코스를 돌아보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그러나 대중교통이 제대로 마련되지 않은 코스도 있어 차를 갖고 있지 않다면 동선과 숙소 계획을 맞춰 짜야 한다. 식사도 매번 사 먹을 수 없으니 간단하게 준비한다. 또한 올레길은 리본을 매달아 길을 안내하지만 인적이 드문 곳으로 혼자 간다면 주의가 필요하다. 통상 날이 저무는 시간인 오후 6시 이후로는 드문드문 표시한 리본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해 길을 잃기 쉽다.
이런 사소한 단점을 보강한 ‘알파캠프’는 트레킹과 관련해 가이드, 교통, 식사, 숙소, 세탁 서비스 등을 모두 제공한다. 더불어 관광객이 한 달 동안 제주의 모든 올레길과 새로 생긴 하영올레길까지 안전하게 완주할 수 있도록 돕는다. 자신의 컨디션과 상황에 따라 토끼반과 거북이반 중 하나를 골라 트레킹을 즐길 수 있다. 체험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보통 중장년층이다.
프로그램에 참여한 68세 이선이 씨는 산티아고 순례길에 오르려 했다. 그러나 코로나19의 확산으로 하늘길이 막히면서 계획이 틀어졌다. 그 대신 올레길을 걸어볼 생각으로 알파캠프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올레길 코스에 대한 정보도 부족했고, 숙소 예약도 번거로워 고민하던 차였다. 이 씨는 “차로 여행할 때는 그냥 지나치던 것들을 가까이 보며 자연의 소중함을 느꼈다. 그리고 길을 걷다 만난 사람들과 이야기도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서 “제주는 그저 우리나라의 섬 중 하나라고 생각했는데, 점점 정겨운 기분이 든다”고 소감을 밝혔다.
알파캠프에는 제주 올레길 코스를 완주하는 ‘제주올레캠프’ 프로그램 외에도 오름이나 한라산, 4대 휴양림, 숲길 등을 다양하게 걷는 ‘제주여행캠프’, 다이어트 식단을 제공하는 ‘다이어트 캠프’, 오름 전문 캠프인 ‘제주계절캠프’ 등이 있다.
의미 있게, 친환경 한달살기
‘제주도’ 하면 많은 이들이 청정 자연을 떠올린다. 그러나 막상 해변에는 폐그물, 밧줄, 스티로폼, 플라스틱, 페트병, 장대 등 폐어구와 나무토막이 가득하다. 게다가 언제 번식했는지 모를 파래가 수면에 떠 있거나 바위나 모래사장에 널려 있어 볼썽사납다.
제주도는 수용력을 넘어서는 관광객의 유입으로 환경이 위협받고 있다. 실제로 도는 1인당 폐기물 발생량을 전국 평균의 2배 이상, 관광객이 버리는 생활폐기물은 전체 발생량 가운데 40% 이상을 차지하는 것으로 추산했다.
일부 관광객은 제주를 지키기 위해 ‘쓰레기 없는 제주’를 여행 혹은 한달살기 테마로 설정한다. 제주에 있는 동안 최대한 일회용품을 사용하지 않으려 의식적으로 노력하고, 플로깅을 하는 식이다. 플로깅은 간단한 산책이나 조깅을 하며 쓰레기를 줍는 운동으로,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누구나 실천할 수 있다. 혼자서 가고 싶은 장소를 지정해 환경 정화를 하거나, 제주 내 여러 봉사단체에서 진행하는 캠페인과 이벤트에 참여하는 방법이 있다.
나에게 맞는 여행 테마는?
후회 없을 제주도 한달살기를 위해서는 장소 위주로 계획을 짜기보다 나만의 큰 주제나 목표를 정하는 게 좋다. 우선 ‘왜 제주도에 가려고 하는지’를 고민해보자.
1 건강하게 한달살기 ‘하루 한 군데 오름 오르기’, ‘서핑·승마·스쿠버다이빙 등 레포츠 한 종목 배우기’, ‘한 달간 인스턴트식품 끊기’ 등으로 몸을 상쾌하게 만들 수 있다.
2 휴식하며 한달살기 몸과 마음이 많이 지쳐 있다면 ‘매일 한 시간씩 바닷가에서 멍때리기’, ‘동네 반경 5km 안에서 생활해보기’, ‘7시간 이상 수면하기’ 등의 방법을 통해 휴식을 취하는 것도 좋다.
3 습관 개선 한달살기 한 달 동안 ‘전자기기 없이 살기’, ‘부정적인 말 하지 않기’, ‘최소한의 물건으로 살기’ 등을 시도해 나를 괴롭히는 습관을 개선해보는 건 어떨까.
1 바라나시 책골목 2 만춘서점 3 소심한 책방 4 책약방
청와대 연설비서관으로 일하다가 몸이 무너진 순간, 마치 파노라마처럼 빛을 봤다. 의식을 잃었다가 회복했을 때부터 ‘내 삶은 덤’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매일 아침 400만 명에게 편지를 쓰며 꿈 너머 꿈을 꾸자고 이야기하게 된 계기다. 푸른 나무가 우거진 깊은 산속 맑은 옹달샘에서 명상을 전파하고 있는 고도원(70) 아침편지문화재단 이사장을 만났다.
“지금, 멈춰보세요! 들리나요?”
고 이사장의 말에 순간 숨을 참았다. 3초 정도 주변 모든 사물이 멈춘 듯한 느낌을 받았다. 복잡했던 머릿속이 비워지고 마음에 고요함이 깃든다. 그때 마음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소리에는 내가 놓친 것들이 담겨 있다. 영감을 얻는 순간이다.
이유 없는 감사 ‘명상’
고도원 이사장은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연설담당비서관이던 시절, 추천 도서에서 발췌한 구절과 함께 짧은 글을 적어 ‘고도원의 아침편지’라는 이름으로 매일 아침 독자들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그의 글을 받아보는 독자가 100만 명이 넘어가자 2004년에는 아침편지문화재단을 세웠다. 고 이사장의 글을 받아보는 독자는 이제 약 400만 명에 이른다. 2010년에는 명상치유센터 ‘깊은산속 옹달샘’을 열고 힐링 프로그램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요즘에는 템플스테이처럼 옹달샘을 찾아 머무르며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사람들이 늘었다.
“명상은 스스로 성찰하고 사색하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에요. 궁극적인 목표는 이유 없이 감사하는 거죠. 삶에서 우주의 본질 같은 것이랄까요. 명상을 통해 사랑과 감사를 회복하는 거예요.”
명상의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여러 과정을 거친다. 먼저 긴장을 풀고 몸을 이완한다. 이완의 방법으로 주로 사용되는 게 호흡이다. 천천히 걷는 것도, 길게 심호흡하는 것도, 느리게 춤을 추는 것도, 가만히 서 있는 것도 이완의 방법일 수 있다. 몸이 이완됐다면 하나에 몰입한다. 들이마시고 내쉬는 숨, 지금 마시고 있는 차, 어딘가를 향하는 내 걸음, 무엇이든 몰입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우리 삶의 모든 것은 다 명상이 될 수 있어요. 청소할 때, 설거지할 때도 몰입할 수 있죠. 집중은 내가 의지를 가지고 하는 거고, 몰입은 집중한 줄도 모르게 놀이처럼 되는 거예요. 무엇보다 이 과정에 ‘기쁨’이 있어야 하죠.”
몰입을 잘했다면 마지막으로 변화의 단계가 온다. 깨달음을 얻는 시간이다. 마음의 치유가 일어나 몸이 회복되고 기분이 좋아지고 마음이 정화된다. 이 과정을 거치는 동안 나를 성찰하면서 마음의 근육이 단단해진다.
“몸의 근육을 키울 때도 처음에는 1kg을 들었다면 다음에는 2kg, 5kg 무게를 늘려가잖아요. 정신도 그래요. 상처나 외로움을 견뎌내는 연습을 계속하면 마음 근육이 단단해지고 면역력이 생겨요.”
멈춤은 하나의 과정일 뿐
명상을 하려면 일단 멈춰야 한다. 언제, 어디에서 멈출 것인지가 가장 중요하다. 하던 일을 멈추고 이완하고 몰입하려면 자연에 가깝고 조용한 곳이 좋다. 하지만 우리는 시끄럽고 복잡한 도심에 산다.
“거실이나 베란다에 식물을 두어보세요. 정 없으면 그냥 한 공간을 설정해두어도 돼요. 이곳은 내가 잠시 멈추고 쉴 수 있는 공간이라고 정해두는 거죠. 시끄럽거나 빛이 센 곳보다는 조용하고 집중할 수 있는 곳이 좋겠죠. 이런 장소를 찾고 명상을 위한 환경을 설정하는 행위 자체도 즐거울 수 있어요. 예를 들어 차를 마시면서, 이 시간이 주어져 감사하다고 느낀다면 이것도 좋은 멈춤의 장소가 되고 도구가 되는 거죠.”
조용한 장소에 앉아 눈을 감고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려는 순간, 머릿속이 시끄러워지곤 한다. 오늘 해야 할 일이 떠오르거나, 미처 해결하지 못한 걱정들이 몰려온다. 상념(想念)이다. 마음이 시끄러울 때 ‘멈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여러 방법이 있지만, 그중 하나는 종을 치는 거예요. 밥을 먹다가 종을 치면 그대로 멈춰요. 그럼 맛이 느껴질 거예요. 머릿속으로 종을 쳤다고 생각하고, 그 순간 하던 행위를 멈춰보세요. 존재했지만 내가 소란해서 듣지 못했던 소리들이 들릴 겁니다.”
고 이사장은 상념이 생기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상념이 떠오르는 그 순간마저 경험이 된다. 그는 상념을 메모지에 적어서 던져둔다. 머릿속을 비우기 위함이다. 어느 순간 잡념이 사라지는 걸 느낄 때, 그 고요함에서 오는 희열을 얻는다. 멈춤은 나를 비우는 하나의 ‘과정’이다.
외로움을 받아들이는 시대
고 이사장은 코로나19 이후 ‘외로움을 나의 문제로 받아들이는 시대’가 왔다고 표현했다. 코로나19가 발생한 지난 2년은 고 이사장에게도 무척 힘든 시간이었다. 힐링 산업은 대면을 해야만 하는데, 모든 게 멈춰버렸기 때문.
“코로나19가 안겨준 현상 중 하나가 고립감과 외로움이죠. 그런데 사실 이 두 가지는 코로나19를 통해 심화됐을 뿐 이전에도 있던 거예요. 고(故) 이어령 장관이 마지막으로 ‘사실 외로웠다’는 고백을 했어요. 사회적 지위와 성취를 이룬 사람도 느끼는 감정이죠. 영국에는 ‘외로움 장관’이라는 자리도 생겼잖아요. 사회 전반으로 보면 외로움이 심각한 문제가 된 것이고, 개인도 외로움을 남의 문제가 아닌 나의 문제로 받아들이는 시대가 된 거죠.”
2020년 6월 고 이사장은 ‘코로나블루 극복을 위한 대응 전략 세미나’에서 코로나19가 남긴 집단적 상처를 치유할 수 있도록 사회적 생태계를 마련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개인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정부와 민간 차원에서도 이 후유증을 다룰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는 것. 코로나19 이전에도 고 이사장은 ‘사회적 치유’가 중요하다고 생각해 깊은산속 옹달샘에서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세월호 유가족, 소방관 배우자 등을 초청해 휴식과 위로의 시간을 마련했다.
“의료 계통 종사자, 학교 선생님, 공직자, 실업 청년 등 쉼이 필요한 사람들이 코로나19로 인해 더 많아진 거예요. 우리 마음에 어떤 후유증을 남긴 거죠. 우리는 외로움의 강을 건너야 합니다. 내면의 근육을 단단히 할 기회라고 생각하면 좋겠어요. 외로움은 마음의 근육을 강화할 수 있는 좋은 재료예요. 그 과정이 쉽지는 않지만, 지금은 그런 시기라고 봅니다. 그래서 결국은 명상을 다시 강조하게 되네요.(웃음)”
공부하는 중년과 꿈 너머 꿈
머릿속이 소란할 때 내리는 판단과 고요한 상태에서 내리는 판단은 다를 수밖에 없다.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면 이제 용기를 내야 한다. 고 이사장은 중장년층에게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와 ‘자신의 판단과 예지력으로 인생을 전환하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려면 공부가 필요하다. 그는 사람들이 새로운 사회의 흐름을 읽을 수 있도록 가이드 역할을 자처했다. 블록체인 아카데미를 준비하는 이유다.
“중년 이후에는 실패를 만회할 시간이 별로 없죠. 그래서 훨씬 깊은 공부가 필요해요. 공부를 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용기죠. 우리는 사회 흐름을 공부해야 돼요. 블록체인, 가상화폐, 메타버스, AI, ICT(정보통신기술), 새로운 흐름이죠. 이런 공부를 하지 않으면 용기가 없어질 수밖에요. 우크라이나 전쟁은 왜 벌어졌는지, 세상이 어떤 흐름으로 흘러가고 있는지 공부한 것을 토대로 방향 전환을 해야겠죠. 실패하더라도 최소화할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한 거고요. 재수 없으면 100세까지 산다고 하는데, 50세에 시작해도 전혀 늦지 않습니다.”
고 이사장은 중년의 통찰과 혜안이 사회의 유산이 되기를 바란다. ‘꿈 너머 꿈’을 말하는 이유다. ‘꿈 너머 꿈’은 꿈을 설정할 때부터 꿈을 이룬 뒤 무엇을 할지까지 생각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예를 들어 백만장자가 꿈이라면, 내가 백만장자가 되었다고 치고 그 다음에는 무슨 일을 할 것인지 목표를 세우는 것이다.
“자기 성취에서 이타성을 조금 가져보자는 거예요. 나에게도 의미 있고 다른 이에게도 의미 있는 쪽으로 인생 목표를 세워보는 거죠. 그래서 꿈 너머 꿈을 가진 사람은 이루지 않아도 꿈을 향해 가는 과정이 행복하고 위대할 수 있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