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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술의 판도를 바꾸다, 요즘 뜨는 술은?
- 기쁠 땐 흥을 돋워주고, 슬플 땐 조용히 위로가 되어주었던 술. 그렇게 우리는 술과 많은 추억을 함께했다. 변하지 않고 그대로일 줄만 알았던 술이 변신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친구를 맞이하는 기분으로 요즘 대세인 술을 알아보자. 전통주의 개념을 탈피한 막걸리의 등장 “막걸리카노….” 얼마 전부터 편의점에서 심상치 않은 이름의 음료가 보이기 시작했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하나 사서 캔을 따니 은은한 커피 향과 막걸리 특유의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온다. 역시나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막걸리카노’는 먹걸리와 아메리카노를 섞은 신(新)막걸리다. ‘고카페인 함류. 총카페인 함량 103mg’이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우리 전통주도 세련된 디자인에 다양한 맛을 더해 전통주를 찾는 2030세대를 겨냥한 새로운 막걸리를 선보이고 있다. ‘국순당’은 2012년 쌀과 유산균 발효를 통해 만든 ‘아이싱’을 시작으로 바나나, 복숭아, 크림치즈 맛 막걸리인 ‘바나나에 반하나’, ‘피치로 피치올려’, ‘치즈업 치얼업’을, 2017년엔 최초의 커피 막걸리 ‘막걸리카노’를 출시했다. 한편 ‘배상면주가’는 자사 막걸리 전문점인 ‘느린마을양조장’을 운영하며 망고파인, 트로피컬, 블루베리 등 하우스 막걸리를 판매하고 있다. 내 입맛에 맞게! 지금은 수제맥주 전성시대 “여기 판타스틱 페일에일 한 잔이요!” “쇼킹 스타우트 한 잔 주세요.” “원더풀 IPA요.” 서울 성동구에 위치한 ‘어메이징 브루잉 컴퍼니’에 가면 사람들이 독특한 이름을 대며 주문을 한다. 그리고 잠시 후 하얀 거품이 먹음직스럽게 올라온 맥주가 나온다. 그렇다. 그들이 주문한 건 맥주다. 최근 방송과 언론의 주목을 받아 이슈가 된 수제맥주도 있다. 바로 청와대 ‘호프미팅’에 등장했던 세븐브로이 맥주다. 다양한 수입 맥주로 인해 시작된 수제맥주 붐은 국내 수제맥주 시장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여기엔 2014년에 개정된 주세법 시행령이 한몫했다. 또 소규모 맥주 업체들이 자체 매장에서만 팔 수 있었던 규제도 사라져 외부로 유통이 가능해졌다. 덕분에 수제맥주를 주점뿐만 아니라 편의점에서도 쉽게 만날 수 있다. 수제맥주는 대기업이 아닌 개인이나 소규모 양조장에서 자체 개발한 맥주다. 일반 맥주보다 비싸다는 단점이 있지만, 제조자의 개성만큼이나 다양한 맛이 난다는 점이 특징이다. 수제맥주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름 끝에 ‘에일’, ‘스타우트’, ‘IPA’ 등 익숙하지 않은 용어들이 붙는데, 이는 맥주 스타일을 의미한다. 맥주는 물, 홉, 맥아, 효모로 만들어진다. 홉은 맥주의 풍미를 더해주며 맥아는 맥주 특유의 달콤함과 색깔을 좌우한다. 마지막으로 넣는 효모가 맥주를 발효시킬 때 위로 떠오르느냐, 가라앉느냐에 따라 맥주를 크게 ‘라거’와 ‘에일’로 나눈다. 에일 맥주가 진한 향과 맛이 특징이라면 라거 맥주는 톡 쏘는 청량한 맛을 띤다. 에일 맥주 계열에는 쌉싸래한 맛에 풍부한 향이 나는 페일에일, 까맣게 볶은 맥아를 사용한 스타우트, 맥아 대신 밀을 사용해 부드러운 거품과 과일 향이 느껴지는 바이젠 등이 있다. 쌉싸래하고 상큼한 향이 특징인 필스너, 라거판 흑맥주인 둥켈, 풍부한 탄산과 높은 청량감의 페일라거는 라거 맥주에 속한다. 이처럼 수제맥주 뒤에 붙은 말의 의미만 알아도 자신에게 맞는 맥주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소주의 반란. 증류식 소주의 부활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소주(燒酒)를 ‘곡류를 발효시켜 증류한 술’로 정의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마시는 소주의 상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증류식 소주가 아닌 희석식 소주로 표기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증류식 소주는 1965년 정부가 식량정책의 목적으로 곡물로 술을 만들지 못하도록 한 ‘양곡관리법’을 시행하면서 자취를 감추게 됐다. 1988년 올림픽을 계기로 증류주 복원과 전통주 발굴이 시작되었지만 이미 소주의 자리는 주정에 물과 조미료를 섞어 만든 희석식 소주가 꿰차고 난 뒤였다. 이뿐만이 아니다. 1965년 처음 출시된 희석식 소주는 30도였는데 1973년에 ‘소주=25도’의 공식을 깨뜨렸고, 2006년엔 20도의 벽까지 허물어버렸다. 이후 소주의 도수는 점점 낮아졌고 2015년 혜성처럼 등장한 과일소주 ‘처음처럼 순하리’가 열풍을 일으키며 소주 시장의 판도를 뒤흔들었다. 소주에 달콤한 과일 향을 첨가하고 도수를 14도까지 파격적으로 낮춘 전략이 소비자의 입맛을 제대로 잡아버린 것이다. 각 주류 업체들은 순하리를 시작으로 ‘자몽에 이슬’, ‘좋은데이 과일 맛’ 등 소주에 과즙을 있는 힘껏 짜내며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블루베리, 사과, 파인애플, 복숭아, 청포도, 석류 등 지난해 20여 종이 넘던 과일소주의 종류는 점점 늘어났다. 그러나 그 바람이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고 이제 그 자리를 증류식 소주가 넘보고 있다. 국내 증류식 소주 시장은 2005년 출시한 광주요그룹의 ‘화요’와 하이트진로가 2006년 선보인 ‘일품진로’가 10년 가까이 꽉 잡고 있었다. 그러다 지난해 국순당, 롯데주류, 금복주가 각각 ‘려’, ‘대장부’, ‘제왕’을 출시하며 증류식 소주 시장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이들 모두 하나같이 전통 방식으로 빚은 ‘증류식 소주’임을 강조하고 있다. 20도 이상의 높은 알코올 도수를 자랑하는 증류식 소주가 주당들의 입맛을 만족시켜 일명 ‘빨간 두꺼비’, ‘빨간 뚜껑’으로 불리는 참이슬 오리지널(20.1도) 자리를 대신할 수 있을지 기대된다.
- 2017-10-16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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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인의 애인 ‘주모’를 만나다, 부산포 주모 이행자
- 아침 6시 40분 부산행 무궁화호 열차에 몸을 실었다. 덜컹덜컹 몸이 흔들린다. 바깥 풍경은 오랜만에 선명히 잘도 보인다. 세련되지 않지만 뭔가 여유롭고 따뜻한 느낌이랄까? 한국 예술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부산포 주모(酒母) 이행자(李幸子·71)씨를 만나러 가는 길. 옛 추억으로 젖어들기에 앞서 느릿느릿 기차 여행이 새삼 낭만적이다. 한껏 기대에 부풀어 들어간 부산포. 작은 낙서, 그림 하나, 스치는 공기까지 어느 것 하나 특별하지 않은 것이 없다. 부산의 마지막 주모를 만나다 부산 지하철 1호선 중앙역에서 용두산 공원 방향으로 걸어가는 길은 깨끗하고 단정하다. 신식으로 잘 닦인 거리. 오래된 주점을 찾아 두리번거리다 오른쪽으로 난 작은 골목에 釜山浦(부산포)라고 쓰인 간판이 보인다. 이곳에 우리나라 예술인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아온 주모 이행자씨가 있다. 깡마른 체구에 걸걸한 목소리가 매력적인 이행자씨는 중앙동 바로 옆 동광동에서만 42년째 주모로 살고 있다. 혹자는 이행자씨를 부산의 마지막 주모라고 말한다. 남들 다 떠나갈 때 그 자리를 지키고 앉아 옛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주막은 현재 부산포 하나다. 의미를 모르면 동네 흔하디흔한 주막, 조금만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이면 세상 그 어느 것보다 값진 역사와 예술가의 정이 흐르는 곳, 부산포다. 주막의 분위기는 주모가 잡는다 부산의 중앙동과 남포동 일대는 10여 년 전만 해도 부산의 굵직한 화랑들과 함께 인쇄 골목이 형성돼 있어 문인과 화가들이 넘쳐나는 이른바 예술의 거리였다. 지금은 해운대 일대로 예술 관련 사업이 옮겨가 작가들의 발길이 뜸해진 지 오래다. 외딴섬처럼 덩그러니 남겨진 부산포지만 그 안에는 옛 예술가들의 체취와 발자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낙서 하나하나, 벽에 펜으로 휘갈긴 듯 그린 그림 속 인물은 한국 문단과 화단을 주름잡던 일류 작가군단이다. 매일 문지방이 닳도록 부산포를 오간 문화 예술인만 수백은 될 것 같다. 부산포 주모 이행자씨가 이토록 작가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가 뭘까? “내 고집대로 한 거지 뭐. (화장) 진하게 하고 나와서 하하 호호 하는 꼴을 내가 못 봐. 그러니까 손님은 없어. 옛날이야 줄 섰지만. 내 성질이 개떡 같아. 손님들도 내쫓아요. 욕하는 사람, 슬리퍼 신고 오는 사람 다 쫓아내. 슬리퍼는 점심에 밥 먹을 때는 괜찮은데 저녁엔 옛날 어르신들 계시고 이라니까. 분위기도 내가 만들어주는 거지. 그냥 손님들이 만드는 게 아니야. 그래서 뺨때기도 때리고 젊을 때는 말 못해. 마대자루 들고 패지, 물바가지로 퍼붓지. 소문이 났어. 좋게 날 리가 없지.” 베테랑 주모의 애틋한 고객 관리(?)는 바로 어르신들을 제대로 알아보고 보살피는 게 전부였다. 이행자씨가 말하는 그 어르신들이란 1900~1920년생 한국 예술계 전설적 인물이 줄을 잇는다. 독립운동가이자 예술인 먼구름 한형석을 비롯해 오제봉, 김정한, 김종식, 오영재, 천재동, 공초 오상순, 하인두, 시인 구상까지 평생을 살아도 만나 뵙지 못할 귀한 인물들을 주모로서 극진히 맞이했고 술동무로 가시는 날까지 정성을 다해 모셨다. 손님을 가려서 받게 된 것도 문화계 원로 선생님을 모시는 일종의 방법이었다. “손님들이 이상한 행동 하는 꼴을 내가 못 봐. 들어왔는데 뭔가 느낌 이상한 사람이 들어오면 장사 안 한다고 하고, 소주 보여도 소주 없다고 하고. 보면 알지. 매너가 엉망인 사람이 보인다고. 술 먹고 변할 사람들도 보이고.” 그런데 이행자씨에게는 철칙 하나가 있다. 절대 욕은 안 한다. “내는 고함은 지르는데 욕은 하지 않아. 근데 누가 나더러 욕쟁이 할머니래. 와? 내가 욕하는 거 봤나. 내가 욕하면 쫓아내는데. 욕하는 사람이 나는 제일로 혐오스럽다. 나도 욕할 줄 알거든. 그런데 안 할 뿐이야.” 누부야 누부야 그냥 갈 수 없잖아展 이행자씨는 서른 초반이던 1970년대 말 ‘대구집’으로 문을 열었다. ‘골목집’이란 이름을 지나 1994년 지금의 부산포로 주막 간판을 바꿨지만 주모도 그대로 추억도 그대로다. 그렇다고 마냥 행복한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2003년에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몸에 이상신호가 왔다. 일생일대의 위기였다. “믿고 지냈던 사람에게 보증을 서줬다가 건물이고 가게고 순식간에… 30여 년 동안 차곡차곡 쌓아온 것을 한 번에 다 날렸으니 난 어땠겠어.” 며칠씩 잠도 안 자고 하루 종일 담배만 3갑씩 피웠다. “1세대 선생님들은 동동주하고 맥주하고 타서 ‘동맥’이라고 하시면서 섞어 드셨다 아이가. 그게 맛이 괜찮아. 30~40대부터 그렇게 술을 먹었는데 일 터지고 한 달 내내 그렇게 마셨어. 돈이고 뭐고 다 귀찮고. 술도 안 받는데 계속 그렇게 먹었어. 결국 몸이 고장 난 기지.” 안색이 점점 어두워지더니 한 달도 안 돼 치아가 빠지기 시작했다. 위암 초기였다. 그때 이후로 술은 끊었지만 담배는 손에서 떼지 못했다. 그렇게 쓰러진 주모 이행자를 위해 부산 예술인들을 주축으로 대단한 일이 벌어졌다. 판화가 주정이가 주축이 돼 주모 이행자씨를 돕는 특별전을 펼친 것. 그게 바로 ‘누부야 누부야 그냥 갈 수 없잖아展’(2009. 7. 14~8. 31)이었다. “옛날 1세대 어른들을 내가 잘 모셨어. 부산포를 살려야 한다 그라셔서 살려주신 거지. 대학에 있는 분들도 있지만 대부분 전업 작가들이시고. 정말 십시일반 해서 도와주셨어. 부산비엔날레 운영위원장 하시던 이두식 선생님도 돌아가시기 전에 작품을 내주셨고.” 이 전시회를 통해서 3000만원이 훨씬 넘는 자금이 모였다. 그래서 현재의 부산포 자리로 옮겨 명맥을 다시 이어갈 수 있었다. 새로운 곳으로 이전해 다시 활기차게 생활을 하지만 몸은 성한 곳이 없다. 예전에는 일하는 사람을 뒀지만 지금은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다 주모 이행자씨의 손을 거친다. 이렇게 한 것이 6년째. 손가락에는 류마티스가 왔고 복숭아뼈 양쪽에 물이 차 추석쯤 병원에 가 치료를 받을 생각이다. 위암 정기검진을 받아야 할 시기가 지났는데도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나는 지금 병원에 가면 눕혀서 못 나와. 병원 가면 문 닫아야 해. 그래서 안 간다 아이가. 한 1년 넘었어. 병원에서 전화 오면 ‘괜찮소. 나 아직 빨딱거리고 잘 돌아다니거든’ 이런다(웃음)! 약만 먹고 안 간다.” 젊었을 때부터 그렇게 좋아하던 산도 다리가 좋지 않아 갈 수 없다. 지리산이고 설악산이고 선생님들과 많이 오르고 종주도 했다. “그 대신에 용두산 공원은 좀 걸어. 시간 있으면 올라가. 이제 아픈 것도 모르겠어. 이러다 병도 친구 삼아서 함께 같이 있다가 같이 죽자 한다(웃음).” 부산포 주모, 문화계 원로와 어깨를 나란히 “그림 작품 같은 거 잘 보시겠어요?” 이 질문에 피식 웃으면서 짧게 대답한다. “살다 보면 눈에 보이지 뭐. 세월이 40년인데 좀 안 보이겠어?” 문화계 원로에 대한 얘기를 듣다 보니 주막 주모가 아니라 화랑 관장님과의 대화라 해도 믿을 것 같다. 이행자씨도 그런 얘기를 여러 사람에게 들었다. 주모가 아니라고. “많이 배우지. 좋은 얘기를 많이 듣고 해서 가끔 보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입으로만 떠드는 사람들도 보여. 자기 스스로 공부한 것이 아니라… 시인들한테도 이게 시냐? 편지 썼냐? 그런다(웃음).” 문화계 인사는 물론 방송국, 신문사 등 언론인, 대학 총장, 의사 등등이 주모 이행자씨의 고객이자 친구, 모시는 선생님들이었다. “여행도 그런 분들이랑 많이 다녔어. 1993년도에 러시아에 갔었는데 그때만 해도 러시아 가는 게 쉽지 않을 때잖아. 근데도 갔었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발레 을 봤는데 정말 너무 잘 봤어. 진짜 값진 인생 살았다. 돈 주고도 못 사는 삶을 살았어. 결혼? 안 해도 돼. 외로워? 뭣 때문에 외롭노?” 결국 이 특별한 주모는 선생님들의 사랑에 부족함을 느끼지 못했고 일평생 결혼은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나는 안 갔어. 그때 당시만 해도 희귀동물 같은 사람이었어. 드레스를 입고 싶다거나 하는 생각 해본 적이 없어.” 행여나 프러포즈를 해오고 연애하자는 자가 있으면 이행자씨한테 걷어차이기 일쑤였다. “내가 깡패가 됐잖아. 우리 집에 옛날에 왔던 손님들, 어르신들 빼고 내 발로 팔꿈치로 안 차여본 사람이 없다. 어른들 말고는 다 맞았을 거다. 하도 집적거리니까.” 이행자씨는 어떤 누구를 만나는 것보다 매일 찾아오는 어르신과 대화하고 이야기 듣는 그 시간을 기다리고 사랑했다.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대가라는 사람들이랑 대화라도 하려면 내가 얼마나 노력하고 신경 써야겠어. 아닌데도 맞다고 해줘야 하고 달래줘야지. 문인들이 아주 잘 삐진다. 붙어 싸우다 술 먹으면 또 화해하고 그랬다.” 당시에는 거의 가족이었다. 옛날 1세대 어르신들이 한창 부산포에 드나들 때는 젊은 사람들은 들어와 앉을 자리도 없었다. “그 시절에는 흥이 나서 놀다 누군가 지명하면 무조건 노래를 불러야 했어. 근데 절대로 젓가락 숟가락 못 두드리게 했다. 여기는 그냥 막걸리집 아니라고 절대 못하게 했다. 끝나면 박수치고 흥 나면 소리 안 나게 박수쳤지.” 이렇게 부산포 안을 가득 채우는 작가들이 많았지만 지금처럼 정확하게 돈을 받을 수 없을 때였다. 가난한 시절 라면값도 없던 분들이 많았다. “대학교수도 있었지만 작품 활동만 하는 사람들도 있잖아. 그래서 그때부터 감자 주고 우거지 주고 그럼 술 마시고 잡숫고 그냥 가셨다. 어른들이라 외상값 장부도 없었다.” 그냥 술만 팔면 될 텐데 스스로 예술가의 가치를 흠뻑 느꼈기에 정성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다르다고 했잖아. 요즘은 택도 없다(웃음). 주는 만큼 받아야지.” 주막이니까 주모로 불러야지 지금도 주모로 부르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이모로 불리는 건 싫다. 누군가 무심코 그렇게 부르면 “내가 느그 이모도 아닌데 왜 그리 부르노!” 하며 부산 사투리가 강하게 터져 나온다. 주모라고 불리는 게 그럼 왜 좋을까? “옛날에 동동주 팔고 그러던 곳을 주막이라고 했잖아? 어르신들이 있었던 곳. 그러니까 주모지. 원래 여기 세 집이 있었는데 지금은 이거 하나 남았어. 강나루는 시인 마누라가 하는 곳이었는데 거기도 어려울 때 시인들이 시화전도 열어주고 했던 곳이야.” 그렇다고 모두가 주모라고 부를 수 있는 게 아니다. 적어도 부산 사진의 역사라고 불리는 김탁돈(동아대 전 신문방송학과 교수) 정도는 돼야 부를 수 있단다. “내가 올해 일흔두 살이니까 한 10년 더 살면 될까?” 갑작스러웠다. 아직도 젊고 생생한 주모의 입에서 그리움이 느껴졌다. “어른들 참 많이 모셨지. 부산 세관장, TBC 사장, 대학 총장, 회장. 안 온 사람이 없어. 근데 이제 다 돌아가셨다. 나도 선생님들 따라갈 때가 얼마 남지 않았네. 지금도 선생님들 모여서 동맥 한잔씩들 하시겠지?” 부산포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에게 물려주고 싶은데 아직 물색 중이라고 했다. 술 팔고 밥 팔면서 예술을 하는 사람이 이 자리를 지켰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고 정말 부산포를 다 접고 나면 뭘 하고 싶은지 물었다. “옛날에 건물 있을 때는 시골 들어가 살려고 했는데 그건 안 되겠고. 슬슬 산책하고 살 수 있을까 몰라. 성질이 급해서 뭘 할는지. 뭐 일하면서 살겠지.”
- 2017-10-12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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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주는 좋은 술?
- 70년대에 미국에 이민 간 사람은 70년대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도시 건물은 쭉쭉 올라가고 전철은 사통발달 하더라도 생활방식은 아직도 한국은 70년대에 머물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번에 만난 미국 친구를 보면 전형적으로 그런 사람이었다. 한국에 살았었는데 70년대에 미국으로 이민 가 40여 년 간 살고 있다가 이번에 잠시 서울에 온 것이다. 일단 한국에 살고 있는 친구들은 먹고 살기 힘들어 고기도 제대로 못 먹는 줄 안다. 70년대 만 해도 그랬다. 고기는 명절이나 제사 때나 한두 점 먹을 수 있었다. 몇 년 전 일주일간 미국에 갔을 때 친구 집에 가 있었는데 매 식사마다 고기를 과식할 정도로 많이 대접해서 고맙기는 하지만, 고기에 질렸었다. 돈에 대한 개념도 다르다. 미국에서는 여전히 100불은 큰돈이다. 우리 돈으로 10만원 조금 넘는 돈이다. 미국 친구는 미국에서 부동산 사업이 성공해서 큰돈을 갖고 있지만, 여전히 식대 10만원은 큰돈이라고 생각한다. 서울에서 어지간한 음식점에서 몇 명이 모여 같이 식사하고 술을 곁들이면 그 정도 식대는 나온다. 우리가 미국에 여행가서 100불짜리 지폐를 내면 음식점에서도 의아해 한다. 그 정도 금액이면 신용카드를 쓰고 현금 100불짜리를 가지고 다니는 사람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이해가 되는 것이 필자가 대학에 다니던 70년대에는 분식집에서 끓여서 파는 라면이 40원이었다. 그런데 사우디아라비아에 몇 년 나가 있다가 친구들과 경포대에 같이 놀러 갔는데 친구들이 필자에게 가게에 가서 라면을 사오라고 했었다. 가게에 가니 끓이지 않은 라면 그 자체가 400원을 불러 피서지 바가지 관행이라며 오해하고 그냥 돌아 왔었다. 제 값인데 그간 물가가 그만큼 올랐던 것을 몰랐던 것이다. 한국에 살던 친구들이 그러면 라면 값이 얼마 정도일 것 같으냐고 물어 말도 못하고 바보 취급을 받았다. 라면 봉지 겉면에 권장소비자가가 400원으로 되어 있었다. 이번에 미국친구가 일식집에서 같이 식사하는데 생수 담는 페트병에 노란 액체를 담아 와서 내놓는 것이었다. ‘데킬라 골드’라고 200불이 넘는 비싼 술이니 같이 마시자고 했다. 영업집이라 차마 병째로 못 가져 오고 페트병에 담아 왔다고 했다. 그러면서 마시라는데 필자는 막걸리만 마시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이해 못하겠다고 했다. 성의를 무시한다고 화도 내는 것 같았다. 200불 넘는 좋은 술 놔두고 왜 1,200원짜리 싼 술을 고집하느냐는 것이었다. 양주는 좋은 술이고 국산 술, 그것도 막걸리는 돈 없는 사람이나 마시는 싼 술이라는 주장이었다. 막걸리는 마시고 나면 머리도 아프고 냄새도 안 좋고 속도 안 좋다는 것이었다. 반면에 양주는 고급술이니 뒤끝이 깨끗하고 믿을 만 하다고 했다. 그러나 요즘 막걸리는 그렇지 않고 먹을 만 하다고 했으나 미국친구는 입에도 대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반 쯤 마시다 만 막걸리 병을 놓고 나오니 아깝다는 표정이었다.
- 2017-10-08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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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미나라 이종기 대표, 술을 좋아하다 못해 직접 술을 빚다
- 국내 최고의 술 전문가가 마침내 세계와 겨룰 명주를 만들기 위해 선택한 재료는 오미자였다. 패스포트, 썸씽스페셜, 윈저12, 윈저17, 골든 블루… 27년 동안 동양맥주에서 한국 위스키 시장의 거의 모든 술에 관여해, 업계에서 그를 모르면 간첩이라 불릴 만큼 주류 역사의 산 증인이 된 이종기(李鍾基·62) 오미나라 대표. 오랜 세월 한국 술 문화 발전에 기여한 그는 지금 독립군이 된 심정으로 명주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의 술 만드는 흥과 열정, 그리고 잃어버린 술 문화를 되살리고자 하는 고군분투의 이야기. 서울대 농화학과 75학번인 이종기 오미나라 대표를 만나니 대뜸 이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오미자였을까?’ “제가 술로 할 수 있는 재료는 거의 다 해봤어요. 사실대로 말하자면, 우리나라에는 양조용 원료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한국에는 양조를 위한 원료가 없다 충격적인 이야기지만 사실이다. 예를 들어 맥주는 보리가 주원료다. 우리가 먹는 보리는 육조대맥이라 하여 위에서 보면 알맹이가 육각형으로 달려 있다고 한다. 그런데 양조용 보리는 이조대맥이라는 두 줄짜리 보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구분하지 않고 사용한다는 것. 심지어 쌀도 마찬가지다. “쌀로 술을 만들기 좋은 품종이 일본에는 80개가 있고 그중에 유명한 7대 품종이 있어요. 포도도 수천 종 중에서 양조용 품종인 샤르도네, 리슬링 등이 유명하죠. 그런데 우리나라는 전부 생식용이지 양조용 원료가 없어요. 양조학에서 생식용은 아예 양조 대상이 아니에요. 물론 그걸로 만들어도 술이 되긴 되죠. 그런데 명주가 될 가능성은 제로거든요.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나는 쌀을 비롯해서 곡물, 과일, 약재 등으로 술을 만들어봤는데 국제적으로 명주의 가능성이 있는 것은… 그런 기준으로 봤을 때에는 오미자 이외에는 없었던 거죠.” 희석식 소주는 알코올이지 술이 아니다 이 대표가 우리나라 명주를 만들기 위해 원료를 탐색하기 시작한 것은 1993년부터다. 그로부터 5년여 후, 그는 한국산 원료로선 오미자 외에는 기대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오미자를 선택하게 만들었을까? “술은 기본적으로 관능미를 충족시켜야 합니다. 취하는 거야 술이 아니어도 취할 수 있어요. 그냥 에틸알코올만 마셔도 취하긴 하죠. 술의 주성분은 물이에요. 12도 와인이라면 물이 88%입니다. 그런데 알코올과 물 외에 천분의 일 정도 분량에 수백 가지 다른 요소들이 섞여 있는 거죠. 문제는 그 수백 가지 요소들로 인해 술의 색과 향과 맛 등이 결정된다는 겁니다. 그뿐만 아니라 술에는 역사와 문화가 있잖아요? 그 모든 것들을 합친 게 술이죠. 오미자가 그걸 충족해요.” 이 대표에게 있어 술이란 일단 매력이 있어야 한다. 관능미를 충족시키는 매력과 역사 문화적인 스토리가 있어야 진짜 술이란 것이다. 그에게 술은 사회의 공기와 같은 존재다. “그래서 저는 희석식 소주는 알코올이지 술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희석식 소주는 일제가 전쟁을 일으켜서 발악할 때 만든 전쟁 보급품이에요. 워낙 우리가 어렵게 살다 보니 제3공화국 때 서민용 술로 보급된 거지. 그런데 희석식 소주가 우리나라 술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니 술과 농업이 전혀 관련 없게끔 괴리가 생겼어요. 술은 농산물의 꽃이고 농업의 가장 오래된 산업이 양조 산업인데 우리나라는 전혀 그렇지 않아요.” 문화 말살을 위해 일제가 만든 적폐 희석식 소주에 관한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볼 필요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것은 우리 생활에 관계된 얘기다. 당장 오늘 저녁에만도 그 수많은 식당과 테이블 위에서 몇 병씩 비워질 삶에 밀착된 한 부분 아닌가. “1909년에 순종이 주세법을 공포했어요. 물론 일제의 강압에 의해서였죠. 그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는 가가호호든 궁궐이든 술을 만들어 먹었는데 주세법은 그걸 금지시켰어요. 겉으로는 조세를 확보한다는 명분이 있었지만, 속으로는 일제의 문화말살정책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에서 술은 그냥 마시는 게 아니라 문화 그 자체였어요. 아예 향음주례(鄕飮酒禮)라는 법도가 있었는데, 직역하면 마을에서 음주하는 예절이라는 의미죠. 정조가 이것을 책으로 수천 부를 만들어서 배포했어요. 술 문화도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에서였죠.” 이 대표는 향음주례의 절차가 일곱 개로 나뉜다고 설명했다. 술을 권하고 받을 때 세 번 권하고 두 번 사양하라는 것도 거기서 나온 것이다. “그걸 없애니 문화가 말살된 거죠. 우리나라는 사람들이 다짜고짜 취하려고 술을 털어넣는 문화가 아니란 말이에요.” 우리 술이 살아야 우리 농업이 산다 술은 그 지역에서 농사지은 걸 빚어서 먹는 것이었다. 그러나 1938년이 되자 일제가 전선을 중국, 동남아, 하와이까지 넓히면서 보급품이 부족하게 됐다. 그때 일제는 국가총동원령을 내렸다. 국가에 있는 모든 자원을 국가의 필요에 의해 전쟁에 동원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전쟁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식량 못지않게 술입니다. 그런데 식량은 전쟁물자로 다 나간 상황이죠. 그러니 일제가 열대에서 나는 가장 싸구려 타피오카와 당밀을 섞어 알코올을 만들고 거기에 사카린, 조미료를 타서 보급한 게 오늘날 희석식 소주예요. 술을 음미하고 즐기는 게 아니라 정성과 품이 안 들어간 막술로 변질된 것이 거기서부터 시작됐죠.” 술은 문화를, 예법을 논하는 일이다. 이 대표는 그런 술의 본연의 성격이 지금은 일종의 도피제로 바뀌었다고 비판했다. “술을 도피제로 전락시킨 것은 정말 저급한 문화죠. 저는 항상 술을 마실 때는 시를 생각해요. 로마네 콩티가 왜 비쌀까요? 한 병에 오백 내지 이천만원에 달할 정도로. 로마네 콩티나 소주나 취하는 건 똑같은데 말입니다. 로마네 콩티에는 그걸 마시고 싶은 스토리, 문화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물론 생활고에 시달리는 서민들이 스트레스 때문에 가격이 싼 희석식 소주를 마시는 것은 이해됩니다. 그러나 지금의 희석식 소주 시장에서 10%만 괜찮은 술로 대체가 된다면 그 자체가 경제적 파급효과가 있어요. 지역 발전과 관광, 술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일어날 겁니다.” 인삼주 혹평에 자존심 상해 명주를 만들기로 작심 우리나라 농업을 살리려면 우리나라 농산물로 만든 술을 살려야 한다는 것이 이 대표의 물러설 수 없는 지론이었다. “술은 그 나라 문화의 척도라고 얘기됩니다. 자기 고장의 술을 마시고 영감도 얻고 애환도 달래고 해야 하는데 일제의 보급품을 국주처럼 먹는 건 진짜 적폐죠.” 문득 술은 공동체의 삶이 녹아 있는 문화라는 말이 떠올랐다. “맞습니다. 가양주(家釀酒)가 다양한 형태로 발달했어요. 일제가 전쟁 군수용으로 개발한 소주로 한국의 양조 문화와 술 문화가 떨어진 거지요. 우리나라에서 아직 일제 치하에 있는 문화가 술 문화예요. 그런데 우리의 삶이 거기에 있다고 본다면 슬픈 일이죠.” 이 대표는 현재 충주에서 세계술문화박물관을 운영하고 있다. 2005년 5월 1일에 설립하여 올해로 벌써 12년째다. 그는 우리나라 술 문화가 너무 저급하고 전통문화와 지독하게 단절되어 있다는 깨달음에 두 가지를 하려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바로 박물관과 세계 명주를 만드는 일이다. 그리고 그 동기는 199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회사를 다니던 1990년 영국 에든버러의 헤리옷 와트 대학원에서 2년간 양조학을 공부했어요. 담당교수가 세계 각국에서 모인 학생들에게 자기 나라의 대표 술을 갖고 시음회를 열자고 했죠. 저는 막걸리를 가져갈 수는 없어서 인삼주를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담당교수가 다른 술들을 마시면서는 칭찬을 하더니 인삼주를 마시고는 혹평을 쏟아내더군요. ‘한국 사람들은 술과 약도 구분하지 못하냐’고 말이죠. 여기서 저는 프랑스에서 온 학생이 가져온 로제(rose) 샴페인을 마시고 그 빛과 맛, 향이 너무도 환상적이어서 세계에서 인정받는 한국산 명주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하게 됐습니다.” 오미자로 술을 만들기 위한 고군분투 2006년 우연히 경북 문경에 있는 농장을 방문하면서 오미자 열매에 꽂혔다. 그가 닥치는 대로 실험을 한 끝에 고르게 된 오미자는 단맛·신맛·쓴맛·짠맛·매운맛의 복합적인 맛을 내는 재료다. 그 다양한 맛은 오미자의 명주 재료로서의 가능성을 높게 만들었다. 반면 그런 다채로운 맛의 오미자를 발효시켜 술까지 이르게 만드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2007년에 프랑스 연구소를 찾아가서 오미자 발효 여부에 대해 자문을 했습니다. 결론은 오미자는 쓴맛과 매운맛이 강해 천연 방부제 역할을 하기 때문에 발효가 안 된다는 진단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시간이 걸려도 발효가 분명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어요.” 그의 확신은 2008년에 마침내 현실이 됐다. 그래서 바로 오미자 농가가 많은 경북 문경에 JL크래프트 와이너리와 오미나라, 우리술연구소를 설립했다. 현재 JL크래프트의 제품은 네 가지다. 오미자로 만든 스틸 와인, 스파클링 와인, 브랜디, 그리고 사과로 만든 브랜디가 그것이다. “세계 명주라는 기준으로 봤을 때, 지금은 제품은 어느 정도 된 거 같은데 재정이 문제죠. 재정이 취약하니 활동을 할 수가 없어요. 품평회도 열고 해외에서 행사도 할 수 없으니. 그런데 내년 정도면 재정이 상당히 좋아질 것 같아요.” 이 대표는 세계 명주의 기준을 두 가지로 보고 있었다. “첫째는 이 술이 세계의 다른 어떤 술과 비교해도 열등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문화적 철학이 녹아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요즘 그가 자랑하는 술은 오미자 증류주인 ‘고운달’이다. 이미 상당한 마니아가 만들어졌다는 자평이다. 물론 신제품도 준비하고 있었다. “스파클링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아서 그들을 대상으로 신제품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기존의 절반 가격으로 대형 유통과 손잡고 내년 하반기부터 스파클링 와인을 출시할 계획이에요.” 좋은 술은 스토리가 많아 더 맛있다 술을 만드는 명인답게 그는 대단한 술꾼이기도 했다. “스코틀랜드에 유학을 가기 전까지 일 년에 500회는 마셨을 거예요. 거의 매일 마셨던 셈인데, 그것도 하루에 두 번 가까이 마신 거였죠.” 그는 술을 맛있게 마시는 방법으로 술과 함께 먹을 음식을 잘 맞추라고 말했다. 음식과 술의 궁합이 물질적인 측면에서 술을 맛있게 먹는 방법이라면 술이 가진 스토리와 좋은 사람과의 교감은 정신적 측면에서 술을 맛있게 먹는 방법이다. “선물용으로 술을 준비해야 하는 일이 있죠. 우리 저장고에 보면 다양한 술들이 있는데 이 술들은 자기가 오크통을 사고 직접 술을 담가서 숙성을 시키는 거죠. 말하자면 직접 만드는 정성이 담긴 술들입니다. 이런 술이 정말 선물할 가치가 있는 술이 아닐까 싶어요.” 그에게 마지막으로 죽기 전에 꼭 마셔야 할 술 세 가지만 추천해 달라고 했다. “우선 뮌헨 옥토버 페스트에서 나오는 라거 맥주는 정말 맥주가 이렇게 맛있나 놀라게 만듭니다. 그리고 포르투갈에 가면 도루 강이란 곳이 있는데, 강 양쪽에 오랜 역사를 가진 와이너리들이 있어요. 그곳의 음식과 와인은 정말 대단한 맛입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우리나라에서 직접적으로 관여해서 런칭한 술이 윈저부터 패스포트까지 이르고, 간접적으로는 조니워커, 발렌타인 시리즈 등을 탄생시켰죠. 그러니 제가 빚은 ‘고운달’을 마셔보면 다른 술하고 비교가 안 돼요(웃음).”
- 2017-10-08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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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술에 대한 명상, 고전에서 걸러낸 술 이야기
- 말하자면, 그때도 “오빠 믿제, 한잔해?”라는 말이 있었다는 뜻이다. 2천여 년 전, 고구려 건국 전이다. 주인공은 천제의 아들 해모수와 하백(河伯)의 딸 유화 부인이다.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의 기록을 따라간다. 하백에게는 세 딸이 있었다. 유화, 훤화, 위화다. 이들이 강가에서 놀다가 해모수를 만난다. 청춘 남녀가 만났다. 게다가 ‘천제의 아들’과 ‘강물의 신’의 세 딸이다. 잘나가는 집안의 ‘엄친아’다. 스토리가 뻔하다. “유화가 술에 취해 해모수와 통정을 했다”는 거다. 예나 지금이나 ‘술이 웬수’다. 아마 해모수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오빠 믿제?’ 믿을 만했다. 유화 부인은 큰 ‘알’을 낳았고 그 알에서 고구려 시조 주몽(朱蒙)이 태어났다. 주몽은 고구려를 세웠고, 주몽의 아들들이 백제를 세웠다. 무척 ‘생산적인 오빠 믿제?’였던 셈이다. 해모수가 유화 부인을 꼬드길 때 사용한 ‘작업주’는 발효주(醱酵酒)다. 발효주는 자연발생적으로 생긴다. 과일이나 곡물을 자연 상태에 두면 주변의 효모 등과 작용하여 술이 된다. 막걸리, 맥주, 각종 과일주, 곡물주가 모두 발효주다. 막걸리는 우리 민족의 대표적인 발효주다. 누룩을 미지근한 물에 푼다. 쪄서 식힌 고두밥과 누룩 푼 물을 섞어서 술독에 넣는다. 이게 전부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술이 괸다. 거품이 보글보글 나온다. 효모의 작용이다. 이 간단한 과정을 제대로 하는 양조장이 드물다. 장난을 친다. 누룩 대신 얄궂은 일본식 개량 누룩도 사용하고, 정제한 ‘고우지[麴, 국]’도 쓴다.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다. 전통적인 방식이 아니라는 뜻이다. 다양한 술맛이 아니라 일정한 단맛이 난다. 막걸리로 한정하자면, 전북 정읍 태인의 ‘태인양조장’에서 빚는 ‘송명섭막걸리’ 정도가 전통적인 방법으로 술을 내놓는다. 자기 손으로 재배한 밀로 빚은 누룩과 자가 재배 쌀로 막걸리를 빚는다. 제대로 만든 술은 약이다. 한두 잔 가볍게 마시면 약이 된다. 막걸리는 우리 고유의 술이다? 참 섭섭하게도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나라에는 자기들의 발효주가 있다. 곡물, 과일의 종류가 다르고 이름이 다를 뿐이다. 아주 좋은 막걸리는 ‘순료(醇醪)’라고 부른다. 순료는 물을 타지 않은 무회주(無灰酒)다. 진한 술, 즉 농주(濃酒)다. 진국, 전국술이라고도 부른다. 오래전에는 양조장에서 ‘진땡이’라고 불렀다. 진땡이가 사라진 것은 세금 때문이다. 알코올 도수에 따라 세금을 매기고 도수가 높으면 세율이 높다. 주세법상, 8도 이하의 술인 막걸리는 세금이 낮다. 오나라 주유(175~210)는 성격이 호탕하면서도 퍽 괜찮은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오나라 장군 정보는 “주유와 사귀면 마치 순료를 마신 듯, 마침내 스스로 취한 줄을 모른다”고 했다. 여기서 등장하는 순료도 역시 ‘진짜 막걸리’다. 중국에도 막걸리 혹은 막걸리 비슷한, 발효주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막걸리의 장점은 다양성이다. 산촌에서 빚은 것은 ‘산료(山醪)’라 부르고, 거친 것은 ‘박료(薄醪)’라 불렀다. 조선 중기 문신 조임도는 시에서, “산촌 막걸리에 취해 세상사 잊을 수만 있다면/사람 사는 곳 어딘들 도원이 아니랴”라고 했다. 귀한 쌀로 산촌의 거친 막걸리를 빚었을 리 없다. 잡곡으로 빚은 술이니 거칠었을 것이다. 그러나 산료라도 있으면 곧 무릉도원이다. 우리는 거친 것도 귀하게 여겼다. 주막은 조선 후기에 발달한 ‘사설 음식점 겸 숙박업소’다. 밥값, 술값은 받고 잠자리는 무료였다. 봉놋방에 여러 명이 웅크리고 잔 이유다. 술은 주로 막걸리다.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만든 역참제도 아래의 역이나 참, 점과 달리 주막(酒幕)은 주점(酒店) 노릇을 했다. 술 마시는 곳이다. 물론 정부에서는 막았다. 불법이니 세금을 걷을 수도 없었다. 게다가 술을 만들면 반드시 곡물을 허비하게 된다. 막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주막은 꾸준히 발전한다. ‘막(幕)’은 천막이다. 가건물이라는 뜻이다. 이 가건물이 조선 후기에는 제법 모양을 갖추고 세금도 내는 합법적인 공간이 된다. 술은 어떻게 먹어야 할까? 조선 후기 문신 이민서(1633~1688)는 “산으로 놀러 다니는 일과 술 마시는 일은 같은데, 여럿이는 시끄럽고 번잡스러우며 혼자는 무료하다”고 했다. 이민서는, “금강산에 갔을 때 미처 동행이 없어 쓸쓸했는데 다행히 산속에서 사람을 만났으니 마치 순료를 만난 것같이 기쁘다”고 했다. 나이 들어 술 마시는 일은 의 저자 이규경(1788~1863)의 말을 귀담아들을 일이다. 이규경은, ‘나이 든 이의 겨울철 섭생법’으로 ‘새벽에 일어나 순료를 마시고 양지쪽에 앉아 머리를 빗는다’고 했다. 잘 마시는, 좋은 술은 약이다. 소주 마시고 패전? 증류식 소주는 몽골의 원나라가 전했다는 것이 다수설이다. 소수설도 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무(1741~1793)는 송나라 사람 전석의 말을 인용, 섬라주(태국 술)는 소주를 두 차례 내린 술인데 우리나라 환소주와 같다고 했다. 송은 원나라 이전이다. 원나라의 고려 침공 이전에 이미 한반도에 소주가 있었다는 뜻이다. 고려 말, 경상도 원수 김진은 술꾼이었다. 평소 기생, 측근들과 자주 소주를 마셨다. 주변에서는 이들을 ‘소주도(燒酒徒)’라 불렀다. ‘소주 퍼마시는 무리’라는 뜻이다. 막상 왜구가 합포(마산)를 침략하자, 병사들은, “소주도에게 공격하라고 하십시오. 우리는 싸우지 않을 겁니다”라고 했다. 김진은 패전의 책임을 지고 가덕도로 귀양을 떠났다. 소주는 한반도에서 여러 번 대형 사고를 친다. 태종 4년, 조정에서 경상도로 보낸 경차관(敬差官) 김단이 옥주(沃州·지금의 옥천)에서 급작스럽게 죽는다. 사인은 소주 과다 음주였다. 김단은 청주에서 소주를 과하게 마셨고 멀지 않은 옥천에서 사망했다. 태종 17년(1417), 수원부사 박강생과 과천현감 윤돈이 파직된다. 죄목은 ‘소주 과다 음주로 인한 동료 과실치사죄’다. 윤돈이 과천현감을 그만두었을 때 금천현감 김문 등 인근의 고을 관리들이 이별 파티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박강생과 윤돈이 김문에게 소주를 과하게 권했고, 김문은 소주 과다 음주로 사망했다. 태종은 “설마 죽이려고 술을 과하게 권했겠는가? 파직 정도가 적당하다”고 말한다. 세종의 형 양녕대군도 소주 과다 음주에서 빠지지 않았다. 일하는 인부들에게 술을 과하게 권했고 그중 한 명이 과다 음주로 죽었다. 대신들이 양녕대군을 탄핵하지만 세종은 관대하게 대한다. 양녕대군은 죽을 때까지 꾸준히 소주를 마신다. 양녕의 아버지 태종도 술고래였다. 아들 세종 역시 술을 잘 마셨다고 하니 이 집안의 음주 내력도 범상치 않다. 태종의 형 진안대군 이방우도 술꾼이었다. 에는 “진안군이 결국 소주를 마시고 병이 나서 죽었다”고 기록돼 있다. 왜 소주 술꾼들이 쉽게 목숨을 잃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독하다. 자연발생적인 술이 아니라 인공적으로 증류한 독주다. 독주를 지나치게 마시면 목숨이 위태롭다. 간단한 이치다. 위스키, 보드카, 한국 소주, 중국 고량주 모두 증류주다. 물에 섞어 부드럽게 마셔야 하는 이유다.
- 2017-09-30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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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작가 노경식, 언제나 인생은 ‘젊은 연극제’
- 극작가 노경식(盧炅植·79)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다. “어떤 얘기든지 들려주세요.” 극작가란 무언가. 연출가에게는 무한대의 상상력을, 배우에게는 몰입으로 안내하는 지침서를 만들어주어 관객에게 의미를 전달하는 자가 아닌가? 그래서 달리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저 인생 후배로서 한평생 외길만을 걸어온 노장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고 싶었다. 무대 위 모노드라마를 관람하듯 말이다. 자, 그럼 이제 커튼을 열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봐 주시겠습니까? 노경식 희곡집 1권 을 꺼내 들다 인터뷰에 나가기 전 서재에서 책 하나를 찾아냈다. 노경식의 첫 희곡집 이었다. 노경식 작가와도 가까웠던, 지금은 고인이 된 은사에게 2004년 초판을 선물로 받았다. 책을 받고 13년 만에 일종의 필자 사인회를 거행(?)한 것. 196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로 당선된 걸 생각하면 한참 시간이 흘러 희곡집을 발간했다. “내가 책을 늦게 냈거든. 그래도 지금까지 7권이나 나왔어요. 희곡은 한 40편 되는 것 같아. 그중에 5편 정도 빼고는 다 공연을 했습니다.” 전북 남원 출신인 노경식 작가는 경희대학교 경제학과를 거쳐 서울예술대학교의 전신인 드라마센터 연극아카데미에 들어가 동랑 유치진, 여석기 선생으로부터 극작 수업을 받았다. 올해 80의 나이에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한국 리얼리즘의 대표 현역 극작가다. 노경식 작가는 토속적인 색채에서부터 역사, 정치극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작품을 써왔다. 앞서 언급한 1971년 작품 으로 제8회 한국연극영화 예술상(백상예술대상) 희곡상과 연기상 등을 받아 세간의 이목을 받았다. 작년 극작50주년 기념공연 을 비롯해 , , 등은 노경식을 대표하는 역사 시대극이다. “내가 왜 역사나 정치에 관심이 많냐면 경제학과 중에서도 경제사를 전공했기 때문입니다. 조선, 한국 경제 그런 쪽. 그래서 시대극이나 역사적인 소재가 많은 부분을 차지합니다. 독립운동사라든지 임진왜란도 많이 썼고요.” 작가 황순원의 눈에 든 남원 촌놈 처음 노경식의 가능성을 알아본 사람은 경희대 재학 시절 만난 소설 의 작가 황순원이다. 황순원은 노경식이 수강하던 교양국어의 담당 교수였다. “대학교에 입학해서 ‘하와이’란 제목의 수필을 교내 학보사에 투고했어요. 저는 당해본 적 없는데 전라도 출신 선배들이 서울에 올라와 가난 때문에 차별당한 이야기를 쓴 글이었어요. 꽤 길었는데 학보에 실렸더라고요. 그것을 보고 황순원 선생님이 잘 썼다며 칭찬해주셨습니다. 얘기를 들어보니 황 선생님도 동경 유학 시절 비슷한 차별을 당한 적이 있으셨더군요.” 황순원은 학생 노경식을 볼 때마다 “너 수필 잘 쓰더라”며 글쓰기를 부추겼다. 결국 또 한 번 파란의 주인공이 됐다. “우리 학교에는 그때 교내 문학상 제도가 있었어요. 미술, 음악, 시, 소설, 그림…. 1등이 되면 등록금이 면제였습니다. 황순원 선생님 역시 제가 글을 문학상에 내보기를 계속 권하셨습니다. 저는 그냥 희곡이나 한번 써볼까 해서 써냈습니다. 근데 그게 또 1등이 된 겁니다. 희곡을 쓴 건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상을 주는 교수들의 입장이 사실 난감했다. 이전 수상자였던 무역학과 학생이 장학금만 받고 글쓰기를 멈춘 것이다. 경제학과인 노경식 또한 장학금을 받고 글을 쓰지 않으면 주나 마나 한 상황이 되니 심사위원 교수끼리 회의를 열었다. “희곡 심사위원이었던 김진수 선생 옆에 있던 황순원 선생님이 ‘왜? 경제학과야? 노경식?’ 하더니 ‘어, 노경식이 내가 알아. 내가 보증할게’라고 해서 제가 된 겁니다.” 결국 노경식은 빚을 톡톡히 갚은 거다. 대학 시절 희곡으로 장학금을 타는 바람에 지금까지도 열심히 작품 활동을 하는 극작가로 사니 말이다. “ 초연 때 모셨는데 작품이 마음에 드셨나봐요. 내 손을 꼭 잡고 ‘애썼다. 잘 썼다’ 그러시면서 ‘희곡이 소설보다 좋은 거 같아. 관객을 놓고 박수도 받고 야, 희곡 좋은 거 같다’ 나한테 그런 말씀도 하시더라고. 뭘 잘해드린 적도 없는데 참 예뻐해주셨어요. 황순원 선생님이 결혼식 주례도 서주시고 말입니다. 선생님이 서주신 제자가 많이 없을 겁니다.” 현역 작가로서 저력을 과시하다 인터뷰 차 만났던 9월 대학로의 한 카페. 그 어느 때보다 한결 여유로운 얼굴이었다. 지난여름 제2회 늘푸른 연극제를 통해 무대에 올린 연극 가 관객의 뜨거운 호응과 평단의 찬사 속에 막을 내린 것. 공연이 끝나고 원로 연극인들과 함께 기분 좋은 온천 여행을 다녀왔다고 덧붙였다. 늘푸른 연극제에서 노경식 작가가 선택한 는 신의 한수였다. 그와 함께 연극제에 초청된 배우 오현경, 이호재, 연출가 김도훈은 대표작을 내걸고 공연했다. 노경식 작가 또한 대표작인 을 공연할 것이라 대부분 사람들은 예상했다. “는 2005년에 극단 미학에서 초연했던 작품입니다. 기대만큼 결과가 좋지 않았어요. 그런대로 성과가 나면 모르겠는데 미치지 못하니 작가는 한 번 더 해보고 싶은 생각이 있잖아요. 도 마침 생각하고 있었는데 늘푸른 연극제에 선정됐습니다. 나를 선정한 거니까 내가 맘대로 작품을 고를 수 있다기에 를 선택했습니다. 좀 오래전에 써서 개작을 많이 했어요. 이번에는 만족합니다.” 그의 대표작 을 기다린 관객에게는 아쉬운 일이다. 하지만 노경식 작가는 현역 작가로서 과감한 도전에 박수받기를 택했다. 원로 연극인으로서 지금껏 살아온 노고에 대한 격려 대신 말이다. “만족이야. 기분 좋습니다. 이번 연출을 맡은 김성노씨한테 고맙다는 소리를 몇 차례 했어요. 배우들의 연기도 좋았습니다.” 는 일제강점기 친일파의 반민족행위를 처벌하기 위해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제헌국회에 설치했으나 1949년 친일 경찰의 ‘6·6습격사건’을 기점으로 반민특위가 해체되는 과정을 보여준 정치극이다. 여전히 잘 팔리는 극작가 “나는 잘 팔려, 고민 안 해(웃음).” 연극 가 끝나기가 무섭게 노경식 작가는 신작을 내놓았다. 이미 세상에 내놓은 것, 꼭 쓰겠다고 작정한 것 두 가지 작품이 있다. 여전히 잘 팔린다며 너스레를 떠는 모습이 재밌다. 우선 세상에 내놓은 작품은 이라는 제목의 4·19혁명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4·19혁명에 관한 작품이 없어요. 왜 없는 줄 알아요? 4·19혁명이 나고 5·16 군사정변이 났잖아. 그 이야기에 손댔다가 시끄럽고 어쩌고… 몸을 사리는 거지 작가들이. 내가 4·19세대거든. 나라도 본격적으로 4·19 얘기를 써야 되겠다. 내가 겪은 이야기니까. 그래서 마침내 성공을 했어요.” 4·19혁명과 관련해 작가로서의 사명감이 오래전부터 있어왔다는 노경식 작가. 몇 달을 걸려서 자료를 찾고 화보집을 보면서 작품을 썼다. “내가 아는 얘기, 겪었던 일이에요. 그리고 4·19는 영웅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민초의 이야기죠. 구두닦이, 우리 학생, 대학생, 초등학생들도 나왔어요. ‘총 쏘지 마세요’라면서요. 양아치들, 매춘부까지 다 나왔던 민초들이 이뤄낸 역사입니다.” 이번 작품의 주인공은 매춘부라며 깜짝 놀랄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작가의 고향 남원과 관련한 토속적인 얘기를 쓰고 싶단다. “사실 봄꽃이 아니었으면 먼저 쓰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자꾸 뒤로 밀리고 있어요. 늘 생각은 있어요. 우리 집안의 얘기도 관계가 있고요. ‘밤으로의 긴 여로’ 같은 것을 쓰고 싶은데 어찌 될지.” 프리한 80? 행복한 극작가! 노경식 작가와 얘기하는 동안 머리에 맴도는 의문 한 가지가 있었다. 지금까지 만나온 극작가는 대부분 연출과 겸업을 하고 자신만의 극단을 거느리고 있다. “나는 한 번도 극단에 들어가본 적이 없어요. 단원이 돼본 적도 없고. 그냥 늘 자유롭게 조직에 구애받지 않고 연극을 했어요.” 듣고 보니 이유는 간단했다. 노경식 작가가 극작가로 데뷔한 1965년도에는 출판사 편집장을 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드라마센터 동기들이 연극판으로 몸을 옮겼을 때 노경식 작가는 매일 출근을 해야 했다. 대신 누구든 노경식 작가가 쓴 대본을 넘겨주면 공연을 하겠노라고 했다. “국립극단에서도 내 작품을 하겠다고 하니까 극단에 소속될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내 극단을 가져보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다. 다들 잘해주고 공연 잘하는데 굳이 그럴 필요도 못 느꼈다. 무엇보다 스스로 간섭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어떤 작가들은 연출 해석이 잘못되면 언성을 높이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런데 그건 내 스타일이 아니에요. 혹시라도 연습실에 가면 앉았다가 ‘술이나 한잔하자!’ 그러면 땡이고. 술 마시다가 살짝 얘기하면 되지. 화내고 그럴 필요 전혀 없어요. 한 사람 머리보다 두 사람이 낫지 않겠어?“ 연출자도 작가도 창조자이고 작품을 좋게 만들 뜻으로 만났으니 서로의 신뢰가 아주 중요하다고 했다. 대학로 만빵 모임 좌장 납십니다! 경계 없이 만나고 사귄 덕에 주위에 사람들이 넘쳐난다. 그러다 만든 모임이 바로 만빵 모임이다. 노작가가 좌장(?)으로 있는 만빵 모임은 2년째 대학로 바닥을 주름 잡는 원로 연극인 모임으로 자리 잡았다. “두 주에 한 번씩. 매주 목요일 오후 5시. 만원씩 가지고 빈대떡 주점에서 모이다가 ‘만빵 모임’이 된 거예요. 혼자 부담하려면 너무 크니까. 여유 있는 친구들이 가끔 다 내기도 하고 나오면 받고 안 나오면 안 받고 그래요. 우리도 한번 모여보자 해서 만나는데 만빵 모임의 존재를 아는 후배들이 빈대떡 주점에 돈을 맡기고 갈 때도 있더라고요. 만나서 한잔하고 그러면 좋잖아.” 원래는 70세 이상만 모이다가 가끔 후배들도 종종 참여하고 있다. 만나서 막걸리는 기본. 웃고 떠들고 과거를 추억하다 요즘 젊은이들의 연극에 대한 걱정도 한다. “평가라기보다 우리 연극이 좀 시류를 따른다고 해야 하나, 영합한다고 해야 하나. 가볍다고 말하기도 그렇고. 좀 묵직하고 그런 작품들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적어도 만빵 늙은이들은 그렇게 생각해(웃음).” 사실 이런 말을 하고 싶어도 이제 젊은 후배들을 만날 기회가 없는 것이 안타깝다고. 정말 특별한 인연이라 꼭 좀 와주십사 연락하는 사람이 있으면 연극을 보러 가는 정도다. 아무렴 어떤가! 그래도 늘 행복한 웃음을 잃지 않는 노경식 작가는 어딜 가나 인기가 높다. 지금 이 시간 해피 바이러스 내뿜으며 젊음의 거리를 거닐고 있을 노경식 작가에게 인터뷰 중 약속했던 한마디를 남기고자 한다. “고향에 관한 연극 꼭 쓰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젊은연극제란? 전국의 연극영화전공 학생들이 주축이 된 연극제.
- 2017-09-27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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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선(酒仙)들께 드리는 소수자의 변(辯)
- 저는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 정확히 말씀드린다면 안 마시는 것이 아니라 못 먹습니다. 대체로 제 이러한 태도에 대한 반응은 그 까닭이 종교적인 데 있으리라는 짐작으로 채색됩니다. 그래서 때로 저는 뜻밖에도 힘들게 순수를 유지하는 경건한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때로는 그 짐작이 저를 겨냥하는 것을 넘어 제가 속한 종교와 그 교조와 그 종교의 신에 대한 격한 비난을 수반하기도 합니다. 저 때문에 특정한 종교의 2000년 역사와 문화가 한꺼번에 처참하게 모욕을 당합니다. 그런데 어느 편이든 그것이 제 ‘사정’에 대한 정확한 인식은 아닙니다. 제가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은 순전히 생리적인 탓이기 때문입니다. 맥주 한 잔이면 아슬아슬하게 괜찮습니다. 그런데 두 잔을 마셨다가 무척 혼이 난 적이 있습니다. 한창 젊었을 때 일입니다. 손발 끝이 자리자리하고 머리가 이상하게 흔들린다고 생각하면서 서둘러 집에 돌아가 잠자리에 들었는데 새벽에 깨지듯 아픈 두통 때문에 잠이 깼습니다. 그 순간의 괴로움을 어떻게 묘사해야 할는지요. 어쩌면 카프카의 에 나오는 벌레가 된 그레고르 잠자의 아침이 이러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조금은 경멸의 분위기를 담고 꽤 살기 힘들었겠다고 말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어떻게 그 몰골로 이제까지 살아남았느냐고 연민의 정으로 저를 바라보는 친구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술 한 잔도 마시지 못하면서 어찌 감히 인생을 알겠다는 학문의 자리에서 고개를 내밀고 다니느냐고 하는 친구도 있습니다. 정직하게 말씀드린다면 불편한 것도 없지 않았고, 힘든 경우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정작 괴로운 것은 술을 마시고 싶다는 희구를 넘어 마셔야만 한다고 스스로 다짐해본 적이 있는데 몸이 견디지 못해 이를 감행하는 시도조차 하지 못하면서 스스로 느낀 좌절감입니다. 까닭인즉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인류의 아득한 역사, 그것도 종교사를 살펴보면 술이 없는 의례는 없습니다. 그렇게 단언해도 좋을 만큼 술은 ‘종교적’입니다. 무릇 종교라는 문화는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을 삶 속에서 절감하면서 그 한계를 넘어 바로 그 유한성에서 비롯하는 문제를 무한성 속에서 풀려고 하는 꿈을 구체화한 것인데, 그 넘어섬의 가장 직접적인 것이 다름 아닌 지금 여기의 나로부터 벗어나는 일입니다. 엑스터시(ecstasy, 脫自)라고 하죠. 일상에서는 겪지 못하는 황홀경의 경험이라고 서술되기도 합니다. 문제가 사라지는 거니까요. 종교의 가르침은 대체로 초월적인 개념, 신성한 언어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벗어나는 일은 어떤 ‘비일상적인 힘’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종교에 따라 신(神)으로, 기(氣)로, 옴(Om)으로, 우주적인 원리 등으로 제각기 다르게 묘사됩니다. 하지만 결국 ‘신비스러운 힘’에 의한 것임을 표현하고자 한 것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 힘의 간여를 기다리기 이전에 인간은 탈자적인 경험을 초래하는 일을 스스로 마련했다는 사실입니다. 술이 그것입니다. 그 술을 소마(soma)라고 일반화하여 일컫는데, 이는 고대 인도의 베다시대 의례에서 마시던 즙의 이름을 차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성급했는지, 아니면 신의 간여가 너무 더뎠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중요한 것은 탈자의 황홀경을 인간은 술을 통해 스스로 마련하면서 그것이 낳는 ‘더 이상 문제없음의 희열’을 미리 몸으로 경험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에 근거한다면 술 취함은 술을 마시는 사람이 의식을 하든 않든 가히 ‘종교적’ 경험이라고 해야 옳을 것 같습니다. 이런 사실은 최근에는 이른바 ‘화학적 엑스터시(chemical ecstasy, 음주)’와 ‘종교적 엑스터시’가 과연 같을까 다를까 하는 격한 논쟁을 일으키면서 이제는 이 주제가 뇌과학을 중심으로 한 인지과학(cognitive science)의 새로운 과제가 되고 있습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종교학을 공부한다는 주제에 술을 먹어야, 술에 취해봐야겠다는 욕심을 감히 부릴 수밖에 없는데 그것을 끝내 이루지 못했습니다. 술을 먹지 못해 경험한 좌절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술을 못 마시는 소수자의 자리에서 음주문화를 바라보는 ‘재미’도 없지 않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술은 종교적이다’라는 맥락에서 제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술 취함’이 아니라 ‘술에서 깸’입니다. 깸은 황홀경의 파괴이고 문제없음에서 문제있음에로의 회귀임에 틀림없는데 ‘왜 취함에 머물지 않고 깸에로 되돌아오는가?’ 하는 멍청한 질문을 하고 싶은 겁니다. 이른바 주선(酒仙)을 기리는 그 숱한 향기롭고 그윽한 운문(韻文)들이 동서고금을 망라하고 쌓이고 쌓였는데 그 내용인즉 거의 깸에 대한 아쉬움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예 거기 머물면 어떻습니까? 아주 못된 작위적인 질문인 줄 저도 압니다. 그러나 취함을 그대로 유지하려는 아쉬움을 지닌 채 깸의 자리에 돌아와 여전히 취함에서의 경험, 곧 ‘자기를 벗어난 자기’의 정서를 지니고 거기에서 비롯하는 논리와 판단과 결정으로 일상을 구축해 나가는 모습이 저에게는 감히 ‘보인다’고 말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렇게 취함과 깸으로 점철하는 주체들 간에는 그 나름의 독특한 유기적인 관계가 구조화되어 그렇다고 하는 자의식조차 없을지 몰라도 저 같은 소수자의 눈에는 어쩐지 ‘취함의 풍토’에서 온갖 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삶이 누구나 속한 삶의 틀 전체의 아귀를 뒤틀리게 하지는 않는지 염려스러워지는 것입니다. 종교의 문화사를 훑어보면 소마를 마시는 일은 일반적으로 의례에서만 허용됩니다. 그런데 의례는 일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찌 보면 일상을 단절하고 넘어서는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저어해야 할 것은 ‘사건을 일상화’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된 자리에서는 자칫 ‘병든 인식’만이 지어지기 때문입니다. 황홀한 즐거움에 흠을 낼 뜻은 하나도 없습니다. 실은 술 마시는 일이 은근히 부럽습니다. 그러나 동성애자의 인권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술 못하는 소수자에 대한 관심도 가지시면서 이런 발언도 한 번쯤은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그러나 저는 술을 마시지 못한 제 생애를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학교에서 은퇴할 때 다음과 같은 후배의 ‘헌사(獻辭)’를 받은 바 있기 때문입니다. “정 교수가 10여 년 전에 단란주점과 룸살롱이 어떻게 다르냐고 물었을 때 나는 참으로 당황한 가운데 ‘거기에는 수업료가 필요하다’고 대답한 적이 있다. 그 후에도 몇 번 그런 말이 오고갔지만 우리 사이에 아직 수업료가 오간 적은 없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정 선배에게 이렇게 대답하려 한다. ‘이제부터는 수업료도 필요 없다’고. 정 교수는 수업료를 내본 적이 없는 인문학자의 표본으로 남아 있게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저녁 회식자리에서 막걸리 몇 잔에 거나해지면 ‘사랑의 미로’를 그럴 수 없이 달콤하게 부르던 이 헌사를 읽어준 후배 교수는 벌써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닙니다. 진작 수업료를 내고 단란주점이든 룸살롱이든 함께 갔어야 하는데 하는 아쉬움이 새삼 저를 아프게 합니다. 아무래도 소수자는 소수자일 수밖에 없어 소수자인지도 모릅니다. 이른바 주선(酒仙)을 기리는 그 숱한 향기롭고 그윽한 운문(韻文)들이 동서고금을 망라하고 쌓이고 쌓였는데 그 내용인즉 거의 깸에 대한 아쉬움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예 거기 머물면 어떻습니까?
- 2017-09-25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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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일간 추석 연휴 계획 세우기
- 이번 추석 연휴는 장장 10일이다. 추석 당일이야 차례지내고 가족 친척들이 모이니 그런대로 보낸다 치자. 나머지 9일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혼자 아무 것도 할 일 없다는 것처럼 공포스러운 것도 없다. 그래서 미리 일정을 짤 필요가 있다. 연휴가 다가오고 있으면 늘 그래 왔다. 첫째 할 일은, 여름옷을 정리하고 가을 옷으로 준비하는 일이다. 반팔 옷과 얇은 옷들을 잘 세탁하여 내년 여름까지 잘 보관해두는 작업이다. 안 입었던 옷들과 버릴 옷들을 이 참에 가려낸다. 누구한테 줄 옷과 그대로 버릴 옷도 구별해 둔다. 가을 옷은 간절기에 잠깐 입는 옷들이다. 11월말쯤에는 다시 정리하고 겨울옷을 준비해야한다. 가을 옷도 꺼내면서 남 줄 옷과 버릴 옷으로 구분해야한다. 입을 옷은 다림질하여 언제라도 입을 수 있게 해야 한다. 이 작업에 하루는 족히 잡아야 한다. 두 번째 할 일은 책 정리이다. 여름내 본 책과 보려고 꺼내 둔 책 등 양이 엄청나다, 역시 남에게 줄 책과 버릴 책, 그리고 필자가 볼 책들을 우선순위를 정한다. 이럭저럭 하루 일거리이다. 세 번째로, 책 정리하다가 눈에 들어 온 책 중 하나를 골라 집중적으로 완독하는 일도 하루 일거리이다. 마침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니 꼭 읽어야 할 책을 고르는 것이다. 네 번째 할 일은 애창곡을 3곡쯤 마스터하는 것이다. 오래전에 배운 노래인데 잊어먹어서 다시 익혀야 하는 노래, 최근에 배웠으나 아직 내 노래로 만들지 못한 노래를 중점적으로 익히는 작업이다. 마지막으로 노래방에 가서 실습까지 마쳐야 내 노래가 된다. 이 작업도 하루 종일 해야 한다. 다섯 번째로, 당구치는 지인을 물색한다. 보통 때는 저녁시간에 만나다 보니 시간 관계 상 보통 한 판 또는 삼판양승으로 끝냈으나 낮에 만나 한 나절 아예 당구를 신물 나도록 치는 것이다. 끝나고 저녁 식사 겸 막걸리를 마시며 하루를 보내면 된다. 여섯 번째로, 추석연휴에는 볼만한 영화가 여러 편 개봉된다. 하루에 2편~3편을 몰아서 보면 하루가 간다. 기억이 날아가기 전에 감상문도 써야 하니 바쁜 날이다. 일곱 번째, 혼자 등산을 가는 것이다. 해마다 이맘때면 남한산성 성곽일주를 했다. 7시간 걸리는 난코스이다. 아침 식사하고 출발해도 하루 종일 걸린다. 집에 와서는 딴딴해진 종아리를 붙잡고 마사지 하며 하루를 정리한다. 여덟 번째, 다들 떠난 서울 도심에 카메라 들고 나가보는 것이다. 여러 가지 전시회와 볼거리 등이 많다. 아직 서울길도 못 가봤다. 연휴에 서울을 벗어났다가는 교통이 막혀 고생한다. 아홉 번째는 채우지 말고 하루쯤 남겨둔다. 필자처럼 몸이 근질거려 연락해오는 지인이 반드시 있기 마련이다. 그러면 열흘 연휴 계획은 꽉 찬다.
- 2017-09-20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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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강지표 나이에 맞게 바꿔야
- 얼마 전 국민건강보험공단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봄에 받은 생애전환기건강진단결과에 대한 상담이었다. “건강관리를 열심히 하였다.”면서 경계선을 넘나든 두어 가지 건강지표를 지적하였다. 보관하고 있는 지난 몇 년 동안의 국가건강검진결과를 살폈다. 세월이 흘러도 보험공단의 건강목표가 변동되지 않았음을 발견하였다. 학계에서는 건강목표의 개선을 위한 논의가 활발하다. ‘우리의 실정과 많은 차이가 있다’는 소식을 들은 지 오래 되었다. 사회에서는 지표기준을 병원ㆍ의사마다 다르게 적용하는 경우가 많다. 관심이 많은 체질량지수를 비롯하여 혈압ㆍ당뇨ㆍ고지혈증 대사증후군도 건강목표가 변하지 않았다. 젊은 시절에 날씬했던 몸매는 나이가 들면서 풍만해진다. 장년을 지나 노년기에 들면 다시 야위어 간다. ‘만물이 생성ㆍ소멸하는 우주의 이치’다. 힘은 사그라지고 키도 점점 줄어든다. 몸도 가벼워지지만 그 속도가 키의 그것을 따르지 못할 뿐이다. 몸 상태는 나빠지지 않았는데도 결과적으로 체질량지수는 수치상으로는 조금씩 오른 상태다. 국민은 자신의 건강을 지나치게 걱정하게 되는 지점이다. 국가검진을 신뢰하기 위하여 나이에 따라 건강지표를 바꿔야 하는 이유다. 나이가 들면서 누구나 건강 걱정이 앞선다. 날마다 체중계에 오르고 피를 뽑아서 당뇨 체크를 하고 혈압을 잰다. 이제는 심근경색, 뇌졸중 등 돌연사도 혈압과 상관관계가 크지 않다는 연구결과를 접한다. 모두가 생각하고 있는 고정관념은 무너지고 있다. 국가적 차원 연구개발로 돌연사 원인을 찾아야 한다. 변화하는 세상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여야 한다. 최근에는 위암환자에게 한두 잔의 막걸리가 좋다는 소식도 들었다. 암환자에게 금기시 되었던 음주문제다. 필자가 대장암 확진을 받았을 때다. “친구들과 모임에서 술 한 잔도 못한다면 너무 삭막할 것 같다‘고 의사에 말했었다. ”적당한 음주는 괜찮다.“는 답변을 들었다. 귀를 의심할 지경이었다. 막걸리 한사발로 친구들과 교류하면서 얼마 전 암학교 5년을 졸업하였다. 국가검진에서 흡연과 음주는 공공의 감시대상이다. 필자는 20년 전에 금연에 성공하였다. 그후로 담배를 한 개비도 피우지 않지만 지금까지도 과거흡연을 문제로 지적한고 있다. 금연하고 몇 년을 지나야 하는가. 음주를 보자. 알콜 분해 능력에 따라 개인별 음주량 차이가 많다. 맥주 한모금도 못하는 사람이 있고 상당량을 들이켜도 까딱없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평가기준은 같다. 보험공단은 국민건강을 관리하면서 데이터도 많이 축적하였다. 건강지표를 나이에 따라 20ㆍ50ㆍ60대 등 세대별로 세분화하거나 소년ㆍ청년ㆍ장년으로 구분하여 설정할 필요가 있다. 자기 몸에 맞는 목표가 필요하다. 보험공단이 정한 획일적인 목표가 아닌 적어도 나이별 건강지표가 마련되어야 한다. 우리국민은 그 수준을 요구하고 있다. 세계 최고수준의 국민건강복지에 감사한다. 대한국민의 긍지를 갖는 대목이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건강지표 나이에 맞게 바꾸라’고 촉구하면 지나칠까.
- 2017-09-08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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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잔의 커피와 커피 잔의 촉감
- 어느새 커피 중독자가 되어 버렸다. 아침에 집을 나서자마자 편의점에 들러 아메리카노 한 잔을 마셔야 제 정신이 드는 듯하다. 그리고 하루 종일 틈만 나면 커피를 마셔 댄다. 바쁘다 보니 잠이 모자라고, 오후가 되면 잠시 졸릴 기색이 있을 것 같으면 다시 커피를 마신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싸구려 커피가 대부분이다. 대부분 믹스커피를 종이 잔에 마신다. 요즘은 웬만한 음식점에서는 자판기 커피가 있다. 음식을 먹고 나오면서 자판기에서 커피 한잔을 빼 온다. 종이 잔이다. 편의점 커피도 종이 잔이나 얇은 플라스틱 잔이다. 캔에 담긴 커피도 캔 그대로 마신다. 사무실에서는 두툼한 플라스틱 잔을 쓴다. 커피 전문점에 가면 두꺼운 머그잔에 커피를 마신다. 앞 사무실 기원 사장은 우리 오피스텔 쓰레기를 처리해주는 사람이다. 아침마다 쓰레기를 정리하고 보수를 받는다. 종이 종류는 따로 수집해서 고물상에 갖다 판다. 얼굴이 하얗고 쓰레기 정리나 해주는 사람 같지 않아 개인적으로 선물이 들어오면 주기도 하고 먹을 것이 생기면 나눠먹기도 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기원 사장이었던 것이다. 필자가 옥상에 올라가 잠시 바람을 쐬고 있으면 커피를 타다가 테이블에 갖다 둔다. 옛날 다방에서 쓰던 얇은 자기로 만든 커피 잔이다. 후루룩 마시고 씻어서 감사의 표시를 한다. 그런데 입술에 닿는 촉감이 다르다. 종이나 캔에 담긴 커피와 두꺼운 촉감의 머그잔과, 얇은 자기 커피 잔의 느낌이 다른 것이다. 회상해 보면 집에 손님이 오면 얇은 자기로 된 커피 잔에 받침대에 올려 커피를 담아 대접했었다. 커피 한 스푼에 프림 2 스푼 등 나름대로 노하우가 있었다. 그러나 요즘은 사무실에 오는 손님들에게도 종이 잔에 믹스커피를 타서 내놓는다. 종이 잔은 1회용이니 일단 위생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설거지 할 필요도 없다. 편리하니 서로 양해하는 것이다. 세상이 자꾸 편리한 쪽으로 변한 것이다. 그러나 커피 만 중시했지, 커피 마시는 용기에 대해서는 그간 잊고 산 것이다. 입술은 인체에서 그래도 상당히 민감한 부분이다. 입술에 닿는 커피 잔의 촉감은 무시하고 산 셈이다. 소주, 맥주, 양주, 와인, 막걸리 모두 종이 잔에 따라 마시면 제 맛이 안 난다. 소주는 투명한 유리의 소주잔, 맥주도 모양이 날씬한 얇은 맥주잔이면 더 맛있다, 와인도 얄상한 유리로 만든 투명한 와인 잔, 양주도 크리스털 유리로 만든 양주 잔, 막걸리도 텁텁한 알루미늄 막걸리 잔 또는 도기로 만든 막걸리 잔에 마셔야 제 맛이 나는 것이다. 술 종류는 머그잔에 마셔도 마찬가지로 제 맛이 안 난다. 도무지 어울리지도 않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집에서도 습관처럼 물 끓여 믹스 커피 한 봉 뜯어 넣고 종이 잔에 커피를 마셨다. 꽃무늬 있는 얇은 커피 잔은 찬장에 얌전히 모셔둔 지 오래다. 이제는 커피 잔을 꺼내서 써야겠다. 받침대까지 제대로 해서 커피 맛을 음미해야겠다. 설거지가 귀찮지만, 씻는 재미도 있다.
- 2017-09-05 1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