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커피 중독자가 되어 버렸다. 아침에 집을 나서자마자 편의점에 들러 아메리카노 한 잔을 마셔야 제 정신이 드는 듯하다. 그리고 하루 종일 틈만 나면 커피를 마셔 댄다. 바쁘다 보니 잠이 모자라고, 오후가 되면 잠시 졸릴 기색이 있을 것 같으면 다시 커피를 마신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싸구려 커피가 대부분이다. 대부분 믹스커피를 종이 잔에 마신다. 요즘은 웬만한 음식점에서는 자판기 커피가 있다. 음식을 먹고 나오면서 자판기에서 커피 한잔을 빼 온다. 종이 잔이다. 편의점 커피도 종이 잔이나 얇은 플라스틱 잔이다. 캔에 담긴 커피도 캔 그대로 마신다. 사무실에서는 두툼한 플라스틱 잔을 쓴다. 커피 전문점에 가면 두꺼운 머그잔에 커피를 마신다.
앞 사무실 기원 사장은 우리 오피스텔 쓰레기를 처리해주는 사람이다. 아침마다 쓰레기를 정리하고 보수를 받는다. 종이 종류는 따로 수집해서 고물상에 갖다 판다. 얼굴이 하얗고 쓰레기 정리나 해주는 사람 같지 않아 개인적으로 선물이 들어오면 주기도 하고 먹을 것이 생기면 나눠먹기도 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기원 사장이었던 것이다. 필자가 옥상에 올라가 잠시 바람을 쐬고 있으면 커피를 타다가 테이블에 갖다 둔다. 옛날 다방에서 쓰던 얇은 자기로 만든 커피 잔이다. 후루룩 마시고 씻어서 감사의 표시를 한다. 그런데 입술에 닿는 촉감이 다르다. 종이나 캔에 담긴 커피와 두꺼운 촉감의 머그잔과, 얇은 자기 커피 잔의 느낌이 다른 것이다.
회상해 보면 집에 손님이 오면 얇은 자기로 된 커피 잔에 받침대에 올려 커피를 담아 대접했었다. 커피 한 스푼에 프림 2 스푼 등 나름대로 노하우가 있었다. 그러나 요즘은 사무실에 오는 손님들에게도 종이 잔에 믹스커피를 타서 내놓는다. 종이 잔은 1회용이니 일단 위생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설거지 할 필요도 없다. 편리하니 서로 양해하는 것이다. 세상이 자꾸 편리한 쪽으로 변한 것이다.
그러나 커피 만 중시했지, 커피 마시는 용기에 대해서는 그간 잊고 산 것이다. 입술은 인체에서 그래도 상당히 민감한 부분이다. 입술에 닿는 커피 잔의 촉감은 무시하고 산 셈이다.
소주, 맥주, 양주, 와인, 막걸리 모두 종이 잔에 따라 마시면 제 맛이 안 난다. 소주는 투명한 유리의 소주잔, 맥주도 모양이 날씬한 얇은 맥주잔이면 더 맛있다, 와인도 얄상한 유리로 만든 투명한 와인 잔, 양주도 크리스털 유리로 만든 양주 잔, 막걸리도 텁텁한 알루미늄 막걸리 잔 또는 도기로 만든 막걸리 잔에 마셔야 제 맛이 나는 것이다. 술 종류는 머그잔에 마셔도 마찬가지로 제 맛이 안 난다. 도무지 어울리지도 않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집에서도 습관처럼 물 끓여 믹스 커피 한 봉 뜯어 넣고 종이 잔에 커피를 마셨다. 꽃무늬 있는 얇은 커피 잔은 찬장에 얌전히 모셔둔 지 오래다. 이제는 커피 잔을 꺼내서 써야겠다. 받침대까지 제대로 해서 커피 맛을 음미해야겠다. 설거지가 귀찮지만, 씻는 재미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