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감독원 출신이라는 프로필만 봤을 때는 차가운 이미지를 연상했다. 그러나 안용섭(安龍燮·58) 전 금감원 부국장의 인상은 소탈하고 구수했다. 감독기관 특유의 딱딱한 몸가짐이 배어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선입견도 바로 사라졌다. 안 전 부국장은 퇴직 후 금융교육 전문강사로 제2의 꿈을 이뤄가는 중이다. 그의 털털한 모습과 말투가 무척 자유로워 보였다.
“쑥~대머리~ 귀신형용 적막옥방으 찬자리에.”
시내 한복판의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강의 노하우에 대해 설명하던 그가 난데없이 춘향가의 ‘쑥대머리’를 한 곡조 뽑았다.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시작할 때 자주 쓰는 방법 중 하나라고 했다. 이렇게 약간의 흥을 돋우고 나면 금융교육을 낯설게 생각하던 어르신들도 강의 내용에 대한 집중력이 좋아진다고 설명을 이어갔다. 노랫소리를 들은 주변 사람들이 눈길을 돌렸지만 안 전 부국장은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금융강사로 인생 2막, ‘꿈’ 위해 철저한 사전준비
1982년 한국은행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한 그는 은행감독원을 거쳐 지난해 6월까지 금감원에서 일했다. 우리 사회에서 소위 ‘잘나가는’ 직장이다. 하지만 퇴직은 어느 직장이나 공평하게 찾아온다. 더욱이 금감원은 공직자윤리법상 재취업이 제한된다. 안 전 부국장은 나이가 50대에 접어들자 두려워졌다고 했다. 은퇴 후 무슨 일을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던 것은 그때부터였다.
진지하게 개인의 진로를 고민하고 택해본 적이 없었다. 음악을 좋아했지만 법대에 진학하고 사법시험을 준비했다. 생각지 못한 사고로 시험을 포기하고 한국은행에 입사할 때도 진로에 대한 고민보다는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다고 했다. 어떻게 보면 은퇴를 앞둔 50대가 돼서야 처음으로 자신이 원하는 ‘꿈’을 생각해 본 셈이다.
업무 노하우를 살리면서도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했다. 말하는 것을 좋아하니 강의를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목표가 정해지자 준비에 들어갔다. 그는 “단순히 내가 어디 출신이니 하는 것만 가지고 비슷한 바닥을 두드리는 차원은 아니었다. 한국은행과 금감원에서 근무했던 ‘프리미엄’이야 있겠지만 그것에 안주하지 않고 최대한 노력하고 준비했다”고 말했다.
먼저 실제 소비자 입장에서 어려움을 느끼는 부분을 파악하고 싶어 민원업무에 지원했다. 충청도와 강원도에서의 민원업무를 통해 가야 할 길에 대한 확신이 섰다. 퇴직 전 18개월가량은 본부의 금융교육국에서 3개 팀을 두루 돌며 행정업무를 익혔다. 금융교육이 이뤄지는 과정을 익히기 위한 것이었다. 교육 관련 서적을 독파했다. 그가 은퇴준비에 들인 기간만 총 4년가량이다.
강의는 쉽게… ‘금융은 어렵다’는 선입견 깨기
서민, 초·중·고등학생, 다문화가정, 교도소 재소자 등 금융교육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다양하다. 하지만 그가 생각하기에 금융교육 프로그램은 다양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금융 자체를 어렵게 생각했다. 안 전 부국장은 금융교육에도 여러 수요자에 맞춘 ‘커스터마이징(Customizing)’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고민 끝에 나름의 강의 노하우를 만들었다. 그의 유연한 사고방식은 장점이 됐다. 그는 “예술을 좋아하는 집안 내력 덕을 본 것 같다”고 말했다.
그의 금융 강의는 금융과 관계없어 보이는 것들로 시작한다.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연할 때면 연예인 동영상과 함께 “여러분, 연예인 중에 최고의 부자 1, 2, 3위가 누구일까요?”라는 질문을 던진다. 학생들의 눈이 초롱초롱해지면 연예인들의 금융관리 이야기로 넘어간다. 이렇게 하면 다짜고짜 어려운 용어나 숫자를 들이미는 것보다 훨씬 전달력이 높아진다. 소재는 매번 달라진다. 음악도 이용한다. 상황에 맞는 예화를 풍부하게 제시하기 위해 그가 들고 다니는 여러 개의 USB 메모리는 강의에 사용할 동영상, 음악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무엇보다 딱딱한 금융용어는 최대한 쓰지 않으려 노력한다. 소비, 지출, 대출, 상환 등의 한자어는 벌기, 쓰기, 빌리기, 갚기와 같은 우리말로 순화했다. 중요한 개념들에는 음을 붙여 노래로 만들어 쉽게 익힐 수 있도록 만들었다. 안 전 부국장은 “책으로 배우고 시험문제를 풀 수 있는 금융교육이 아닌 ‘생활에 녹아드는 교육’을 지향한다”고 말했다.
그의 노력은 곳곳에서 좋은 평가를 얻고 있는 중이다. 한 민간금융사에서 처음 시작했던 강의가 입소문을 탔다. 한국YWCA연합회, 금융투자협회, 청소년금융교육협의회 등에서 강의 요청이 잇달았다. 최근에는 금감원으로부터 국내 첫 금융교육 강사 인증을 받았고, 국회에서 마련된 금융 관련 포럼에 전문위원으로 참여하는 등 활동범위도 넓혀가는 중이다.
“금융교육 저변 넓히는 전도사 되고 싶어”
그는 금융이 지식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우리나라 학생들의 금융 관련 지식은 통계적으로 높게 나오지만 실제 집에 돌아가서 가계의 대차대조, 손익계산이나 비목별로 관리하는 식으로 연결되는 비율은 낮다고 생각된다”며 “금융교육이라는 것은 행동화, 태도화, 습관화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강의를 시작한 뒤로 꿈의 범위를 넓혀가는 중이다. 사회적으로 금융교육이 확산될 수 있도록 말단의 역할을 하고 싶다는 포부를 갖고 있다. 그는 “미국, 영국, 일본 등 세계 금융 강국은 금융교육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인다”며 “우리나라도 금융이 필수과목이 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며, 금융교육의 저변을 확대하는 전도사 역할을 해보고 싶다”고 했다.
그가 말하는 금융교육이란 흔히 말하는 ‘재테크’와는 다른 ‘공교육’의 개념이다. 국민 전반적으로 금융원리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면 국가경제 전체적으로도 순기능이 많아질 수 있다는 얘기다. “고층건물을 지으려면 기반이 튼튼해야 하듯이 경제에 금융을 고도화하는 작업도 기초가 튼튼해야 가능합니다. 전반적으로 기초적인 이해가 높아졌을 때 응용할 수 있는 조합도 생산적이고 창의적으로 나올 수 있는 거죠.” 꿈을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Q & A
꿈을 이루지 못했던 이유?
어린 시절 꿈은 사법고시를 패스하는 것이었다. 절에 들어가서 고시공부하다가 연탄가스 중독으로 큰 고비를 겪었고, 그래서 예기치 않게 공부를 그만두게 됐다. 더 먼 기억을 더듬어 보면 음악을 해 보고 싶기도 했다. 음악을 좋아하는 집안 내력이 있다.
꿈에 다시 도전하게 된 계기?
다시 사법고시를 보려는 것은 아니니 서로 다르다. 지금의 생활을 계획하게 된 것은 은퇴를 준비하면서였다. 그리고 현재 하고 있는 강사생활을 하면서 꿈을 좀 더 구체화하거나 넓히게 됐다.
어릴 적 꿈 vs 중년의 꿈?
어린 시절 법률가가 되려던 꿈은 법률가로서 각별한 포부가 있다기보다 자연스럽게 갖게 된 것이었다. 출세의 기회가 한정된 그 시절에는 다 그러지 않았나. 나이를 먹은 뒤에는 자신의 커리어를 고려해 좀 더 실현 가능한 꿈을 갖게 되는 것 같다.
꿈을 이루기까지 어려웠던 점?
충분히 고민해서 방향을 선택했고, 충분히 준비를 거쳤다. 그래서인지 아직까지 큰 어려움은 없다. 다만 나이를 먹어갈수록 체력관리가 필요하다는 점은 절감한다. 어려움이라면 앞으로의 건강 아닐까.
당신의 꿈은 무슨 색?
꿈에 색깔을 붙인다면 푸른색을 붙이고 싶다. 푸른색을 활동적이고 에너지가 넘치는 색이다. 꿈이란 동기를 부여하고 활기를 갖게 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
꿈을 이루고 난 뒤 좋은 점?
놀지 않고 머리를 계속 쓸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한다. 은퇴 후에도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며 지낼 수 있다는 것이 좋다
30년 회사생활 후 찾아온 은퇴는 원호남(元鎬男·54) 팀장에게 ‘추락’의 기억이었다. “삶에서 튕겨져 나온 심정이었다”고 했다. 보험설계사에 확신이 서지는 않았다. 하지만 ‘일할 곳’이 필요했다. 현재 원 팀장은 교보생명 시니어클래스(50대 남성 보험설계사 조직) 간판 컨설턴트 가운데 한 명이다. 그는 “설계사 경험을 통해 인간관계에 감사하게 된 점이 가장 보람있는 부분”이라고 말했다. 글 유충현 기자 lamuziq@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광화문 인근에 위치한 교보생명의 시니어클래스 사무실을 찾았다. 빌딩이며 책상이며 회의실과 커피머신까지, 도시의 흔한 사무실 풍경이었다. 다른 점은 업무를 보는 남성들이 모두 여느 회사의 임원급도 넘어 보이는 50~60대라는 점이다. 이곳에서 원 팀장을 만났다. 머리모양과 옷차림이 단정했다. 말투와 몸가짐에서 오랜 기간 회사생활의 내공이 느껴졌다.
“30년간, 뭐, 나쁘지 않은 직장생활 했죠.” 다소 조심스럽게 질문을 시작했지만 그는 생각보다 편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드라마 의 무대였던 ㈜대우(현재의 대우인터내셔널)가 그의 첫 직장이었다. 1985년부터 10년간 일했다. 이후 내셔널호주은행과 스탠다드차타드(SC)은행에서 20년간 근무했고 통합 SC제일은행에서 본부장을 지냈다. 누군가를 만나 명함으로 자신을 설명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던 번듯한 직장이었다.
30년 회사원에게 은퇴란…“일상에서 튕겨나간 느낌”
은행을 나온 것은 2013년 3월, 교보생명에서 설계사를 시작한 것은 같은 해 12월이었다. 7개월간 ‘자연인 원호남’으로 지냈다. 당시 심경을 물었다. 그는 대답 대신 문제를 하나 냈다. “가장의 실직을 가족 외에 제일 먼저 알아차리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정답은 세탁소 아저씨입니다. 양복을 맡기지 않으니까요.” 은퇴 남성에게는 무엇보다 자신을 바라보는 남의 시선이 먼저 신경쓰이는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자유로웠다. 대낮에 밖에 나가 운동을 하거나 등산을 다녀오는 동년배 남성들을 관찰자로서 바라봤다. 그러던 중 그는 문득 ‘아! 이제 보니 내가 저들을 관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저 그룹에 속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는 당시의 마음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명함을 통해 자신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 낯설었다”거나 “휴대폰이 울리지 않더라” 등으로 돌려 말했다.
어둡지 않은 말투였지만 대화 중간에 “은퇴는 추락이잖아요”라든지 “반복적인 일상에서 튕겨나간 느낌인 거죠” 등의 표현을 섞었다. 30년 동안 잘 나가던 회사원으로 갖고 있던 정체성이 흔들렸던 당시의 상황을 그렇게 표현했다. 가장으로서, 남성으로서 그가 느꼈던 상실감을 충분히 짐작해볼 수 있었다.
아내와 딸이 보내준 ‘노란 화살표’…새 길 앞에서 짐을 비우다
교보생명에서 직장경력 20년 이상인 50대 은퇴자를 보험설계사로 모집한다는 광고를 접했다. 은퇴 전의 그였다면 눈길이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보험세일즈의 이미지는 부정적인 고정관념때문에 선뜻 결심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는 자신의 은퇴시점과 교보생명 시니어클래스 출범시기가 맞아 떨어진 것이 우연처럼 느껴지지만은 않았다. 현업에서의 지식과 경험을 살리면 괜찮을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다고 했다.
고민을 거듭하던 그가 마음을 담금질하게 된 계기는 오래전부터 ‘버킷리스트’(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에 담아뒀던 산티아고 순례길 800km 도보여행이었다. 원 팀장은 짐을 줄이기 위해 생필품인 비누조차도 반으로 자르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정말 필요한 생필품만 추린다고 추렸는데도 그걸 또 줄이고 있더군요. 인생도 새로운 길을 떠나기 전에 비우는 게 중요하고도 어렵다는 걸 느꼈습니다”라고 말했다. ‘잘나가던 현업시절’의 기억이 무거운 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려놓을 용기를 갖게 됐다.
여행의 백미는 유명한 ‘노란 화살표’였다. 갈림길마다 순례객들에게 가야 할 방향을 안내하는 산티아고의 명물이다. 그는 “화살표를 보면서 우리 인생에도 이런 화살표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습니다. 도보순례가 힘든 여정이었지만 우리가 사는 인생에 비하면 힘든 일이 아니라는 생각도 하게 됐고요”라고 말했다.
결심을 굳히지 못했던 보험설계사 위촉식 전 날 딸 다은(26)씨가 문자를 보내왔다. ‘아빠, 나 (회사에) 합격했어’. 원씨는 ‘이게 산티아고의 노란 화살표 같았다’라고 회상했다. 아내의 문자도 그의 결심에 큰 응원이 됐다. ‘다은이 아빠가 생각하는 대로 하세요. 뜻대로 되지 않아 아르바이트를 하더라도 우리 두 사람은 충분히 살 수 있어요.’
“지난 삶 건방졌다는 반성…인간관계에 감사하는 법 배워”
종합상사와 은행에서의 경험이 상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은 됐다. 하지만 판이한 업무방식은 바로 적응하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힘든 점은 ‘목적을 갖고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지인을 만나서 보험의 ‘ㅂ’자도 꺼내지 못하고 헤어진 적이 많았죠. 실제로 교보생명에서 일을 시작했다고 하면 얼굴표정이 확 달라지는 지인도 있었고요.”
그 후 2년간 원 팀장에게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시니어클래스 내 가장 높은 실적을 올리는 설계사 중 한 명이다. 올해의 경우 여러 실적부문에서 1위를 기록하는 등 설계사로서 안정적인 실적을 쌓아가고 있다. 이 추세라면 내년에는 보험설계사들의 명예의 전당 격인 MDRT(백만달러 원탁회의) 자격을 얻게 된다.
초창기 느꼈던 두려움은 극복한 걸까. 원 팀장은 “목적을 가진 마음이야 변함없지만 마음가짐이 달라졌다”고 대답했다. “지난 삶이 굉장히 건방졌던 것 같았습니다. 사람들과 제한된 만남에만 머물렀던 거죠. 사람을 만나서 대화하고 그의 걱정거리를 위해 기도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 보험계약이 이뤄진다면 감사한 일인 거죠.”
덧붙여 원 팀장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의 어려움을 메모하는 습관을 갖게 됐다고 했다. 금전적인 문제, 가정문제, 건강문제 등 지인의 어려움을 적은 메모는 그날 그날의 기도문이 된다. 그에게 지금의 일을 시작한 뒤 가장 보람있는 부분을 물었다. 원 팀장은 “인간관계에 감사할 줄 알게 된 점이 보람있습니다. 저 스스로 많이 겸손해졌고, 그런 변화에 감사하고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 원호남 시니어클래스 팀장
1961년생, 광성고, 고려대 경제학과, 서강대 경영대학 MBA, 1985~1995 ㈜대우(현 대우인터내셔널), 1990~1994 대우 홍콩법인, 1995~2002 내쇼날 호주은행(NAB) , 2000~2002 NAB 뉴욕지점 근무, 2002~3013 스탠다드차타드(SG) 은행, 2013~현재 교보생명 시니어클래스 팀장
김창렬(金昌烈·66) 한국자생식물원장은 식물에 관심이 많은 이들에게 유명인이다. 토종 야생식물을 재배해 국내에서 처음으로 사업화했고 토종식물만을 소재로 식물원을 설립해 강원도 평창군의 명소로 만들었다. 그런데 이 식물원이 3년째 문을 닫고 있다. 김 원장은 갑자기 전국일주 마라톤을 했다. 어떻게 된 사연일까. 그를 만나 얘기를 들어 봤다.글 유충현 기자 lamuziq@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참 열정적이고 고집스러운 식물원이 있다. 강원도 평창군 오대산국립공원 입구 산자락에 위치한 한국자생식물원이다. 1999년 6월 국내 1호 사립 식물원으로 문을 열었다. 이곳에는 우리나라에서만 자생하는 야생화와 들풀 약 수천 종이 테마, 계절별로 심겨 있다. 약 5만 평에 달하는 식물원 산책로에서 갖가지 한국 자생식물을 관람하다 보면 우리 식물에 대한 열정이 도처에 묻어난다. 이곳을 만든 김창렬 원장이 일궈온 삶도 식물원처럼 독특한 구석이 있다. 독재에 맞섰던 정치학도 청년은 문득 강원도 산골에 들어와 풀 농사를 지었다. 달리기도 시작했다. 화재로 식물원을 휴관해야 했던 2010년에는 마라톤으로 전국을 일주하기도 했다. 가을이 내리는 평창에서 그를 만나 그의 삶에 대해 들었다. 66세 김 원장의 ‘인생 마라톤’은 여전히 진행형이었다.
뜨거웠던 운동권 청년, 옥살이 후 농사를 택하다
한때는 그도 누구 못지않게 가슴 뜨거운 청춘을 보냈다. 1970년대 대학생활을 했던 그는 소위 ‘운동권’이었다. 어수선한 시국 속에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당해 3년간 감옥살이를 했다. 석방 이후 뚜렷한 길이 보이지 않았다. 회사를 몇 군데 두드려봤지만 꼬리표가 늘 발목을 잡았다.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풀 농사를 짓겠다”며 강원도행을 결심했다. 그는 충청도 출신이지만 고향으로 가고 싶지는 않았다. 새로운 곳에서의 새로운 도전이 필요했다.
김 원장은 “떠밀리거나 도망치듯 농사를 시작한 것이 아니라 내가 결심한 것”이라고 강조했다.“할아버지도 농부였고 아버지도 농부였다.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다들 그렇듯 자식은 농사꾼이 되지 않길 바라셨다. 내가 학교를 무사히 마치고 사회에 나왔다면 전혀 다른 길을 갔겠지. 하지만 이런저런 일을 겪으면서 결국 농사꾼이 되기로 했고, 이왕 농사를 한다면 배추, 무 같은 평범한 작물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하지 않는 것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했던 농사를 그분들과는 다르게 해보고 싶었다.
김 원장의 고민은 ‘돈 되는’ 농사였다. 마침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유치 분위기로 국토공원화 사업이 한창이던 때였다. 외래종 일색의 원예종 보급에 문제의식도 갖고 있었다. “외국 꽃을 들여와서 꾸며 두면 뭐하나. 한국에 오면 한국의 모습을 보러 오는 것 아니냐. 차제에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꽃과 나무 중에서 예쁘고 관광가치가 있는 식물을 대량으로 재배해보면 돈으로 좀 바꿔볼 수 있겠다 싶더라.” 응원해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결심을 밀어붙였다.
설악산 에델바이스로 시작한 소중한 추억
에델바이스(솜다리)의 꽃말은 ‘소중한 추억’이다. 김 원장에게 에델바이스는 특별히 더 소중한 추억이다. 1980년대 설악산에 가면 관광기념품으로 설악산에서 채취한 에델바이스를 액자에 넣어 팔았다. 마침 영화와 대중가요 등에 에델바이스가 소재로 쓰이면서 많은 사랑을 받던 때였다. 장사하는 이들은 설악산의 에델바이스를 캐서 팔고, 당국은 멸종위기종 식물의 훼손을 막으려 하는 숨바꼭질이 계속됐다.
김 원장은 “에델바이스를 사람들이 좋아하니까 산에서 캐오지 말고 대량으로 재배해보는 것은 어떨까 하면서 시작하게 됐다”고 말했다. 설악산 상인들에게 수요조사를 해봤더니 ‘가져올 수 있는 만큼 가져오면 다 사주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에델바이스 씨앗을 채취하느라 여러 번 죽을 고비도 넘겼지만 결과는 성공이었다. 연 20여만 개를 생산해 한 송이에 120원씩 팔았다. 이후 백리향, 구절초 등 다른 야생화까지 재배품종을 넓혔고 현재의 식물원도 일구게 됐다. 꽃말처럼 김 원장에게도 에델바이스가 ‘소중한 추억’이 된 셈이다.
“가장 뿌듯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돈하고 풀하고 바꾼 일이다. 우리나라에서 풀 농사도 하나의 비즈니스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내가 먼저 증명한 것이니까. 거창하게 말하면 고부가가치 농업분야를 새로 만들었다고 할까. 그리고 전국적으로 자생식물에 대한 관심이 일어날 수 있게 했다는 것. 한 분야를 먼저 갔다는 것. 이런 부분에서 지난 삶에 보람을 느낀다.”
불타버린 식물원, 문득 떠난 마라톤 전국일주
식물원이 화마를 입었던 2010년 한글날은 김 원장에게 떠올리기 싫은 날이다. 새벽에 일어나 보니 식물원 전시장 건물이 불에 타고 있었다. 목조로 만든 건물이라 화재에 취약했다. 바로 화재신고를 했지만 건물 전체가 순식간에 잿더미가 됐다. 겨울을 앞두고 있어 공사도 어려웠다. 식물원을 복원하고 보수하려면 긴 시간 문을 닫아야 했다.
망연자실하며 멍해진 머릿속에 문득 떠오른 것이 오래전부터 꿈꿔왔던 전국일주 마라톤이었다. 머릿속에 뭔가 새로운 생각을 채워 넣으려면 일단 머릿속을 비워야 했다. 그러기 위해 마라톤이 필요했다. 김 원장은 “강원도에 터를 잡은 후 매일 오대산을 달리며 생각을 정리해 왔다. 식물원 운영에 대한 좋은 아이디어와 용기가 떠오를 것 같았다”고 말했다.
42.195km 풀코스를 정식으로 완주한 경험도 어느덧 100회를 넘긴 때였다. 몸도 마음도 준비가 됐다. 강원도를 향하던 날처럼 뒤돌아 보지 않고 길을 떠났다.
장장 75일간 무려 1500km를 뛰었다. 식물원에서 출발해 동해안을 거쳐 남해안으로, 남해안에서 서해안으로, 중부와 임진각을 거쳐 다시 영동지역의 출발점까지 매일 평균 20km 이상을 달렸다. 한겨울의 추위, 눈보라와 싸우는 고단한 길이었다. 점점 피로가 누적됐다. 왜 뛰는 걸까. 그는 “오직 그만두지 않기 위해 뛰었다.” 당시 그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 했다.
새 도전, ‘식물원+숙박시설’ 복합 휴양시설 구상
마라톤 애호가들에게는 ‘상심의 언덕(heartbreak hill)’이라는 지명이 꽤 유명하다. 보스톤 마라톤 대회 구간의 결승점 전 10km지점에 있는 언덕코스를 일컫는 말이다. 현재 김 원장의 인생도 바로 이 구간을 지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자생식물원은 2013년부터 현재까지 휴관에 들어간 상태다. 김 원장은 “최근 몇 년간이 강원도를 처음 찾았던 때보다 어렵다”라고 했다.
자생식물원이 어려움을 겪기 시작한 시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식물원’이 대중적인 사랑을 받기 시작한 뒤부터다. 식물원이 가족들의 가벼운 나들이 장소로 각광을 받자 정부기관이나 지방자치단체가 여기저기서 많은 예산을 투입해 대형 식물원을 만들었다. 자생식물원의 관람객도 눈에 띄게 줄었다. 김 원장은 “인구에 비해 식물원이 너무 많아졌다. 몇 곳 없던 식물원이 지금은 전국에 200개가 넘는다. 적자운영을 하느니 새로운 변화를 구상해보자는 생각으로 식물원 문을 닫았다”고 말했다.
아직 뾰족한 답은 얻지 못했다. “전국일주 마라톤을 하면 뭔가 멋진 구상이 틀림없이 떠오를 줄 알았는데, 안 나오더라”. 김 원장이 머쓱한 너털웃음을 지었다. 덤덤한 말투였지만 깊은 고심이 묻어났다. 최근 그는 식물원 부지 일부에 숙박시설을 조성하는 방안을 구상하고 있다. 기자가 식물원을 찾았던 날에도 그는 숙박용 건물에 쓰일 외장재를 까다롭게 선별하고 있었다.
요즘 취미가 있는지 물었다. 김 원장는 “오로지 식물원”이라고 답했다. “초창기처럼 많은 사람들이 찾는 식물원을 만드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20대 정치학도처럼 빛나는 눈빛은 어느덧 고희(古稀)를 앞둔 그가 또 하나의 ‘에델바이스’를 찾길 기대하게 만들었다.
HE IS…
1949년생으로 고려대학교 생명과학대학원에서 공부했다. 1970년대 대통령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짧지 않은 기간 옥살이를 한 후 강원도 평창으로 가서 한국 고유 자생식물 재배를 시작했다. 국내 1호 사립식물원인 한국자생식물원을 만들었으며 사단법인 한국자생식물협회 회장, 계간 발행인, 서식지외보전기관협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 , 등이 있다.
“머리는 차갑게 가슴은 뜨겁게”라는 말을 흔히 합니다. 동의보감에서 이른바 두한족열(頭寒足熱), “머리는 차게 발은 뜨겁게 하라”고 한 건강의 원리와 비슷한 말입니다. 아기를 재울 때에도 머리는 서늘하게, 가슴과 배는 따뜻하게 해주는 게 육아의 상식입니다.
그러나 ‘머리와 가슴’은 ‘머리와 발’보다 상징하는 바가 더 많고 큽니다. 머리가 지혜·지식·두뇌·슬기·판단, 이런 말과 관계된다면 가슴은 열정·용기 사랑 ·양육 ·포옹, 이런 말로 연결됩니다.
무엇이든 알기 쉽게 둘로 나누는 사람들의 말투를 빌리면 머리는 파란색, 가슴은 빨간색일 것입니다. 머리는 햄릿형·아침형 인간, 가슴은 돈키호테형·저녁형 인간으로 연결된다고 볼 수도 있겠지요. ‘지와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독일 작가 헤르만 헤세의 에도 이성적인 나르치스와 감성적인 골드문트가 대비됩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을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관찰하고 판단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무리이며 그럴 경우 문제점과 부작용이 발생하기 마련입니다. 이 세상에는 완벽하게 선한 사람도, 전적으로 악한 사람도 없습니다. 좌우, 동서, 상하, 고저, 장단, 남북, 남녀, 음양, 전후, 장유(長幼), 고금(古今), 귀천(貴賤)과 같은 말은 분별과 조화를 위해서 있는 것이지 대립과 쟁투를 부추기려고 만든 게 아닙니다.
분별이란 참 좋은 말입니다. 서로 다른 일이나 사물을 구별하여 가르는 게 첫 번째 풀이이지만, 세상일에 대한 바른 판단이나 생각, 어떤 일에 대해 배려하고 마련하는 것이라는 뜻이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분별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에 섣불리 휩쓸리지 않습니다. 논어 위령공(衛靈公) 편에는 “군자는 긍지를 갖되 싸우지 않고, 군중과 함께하되 무리를 짓지 않는다(君子矜而不爭 群而不黨)”는 공자의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을 주희(朱熹)는 “자긍심을 가진 군자는 남에게 굴복하지 않되 싸우려 들지 않고, 군중과 함께 어울리되 편협된 무리를 지어 개인의 영리를 구하지 않는다”고 해석했습니다. 또 논어 위정(爲政) 편에서는 “군자는 두루 친하되 결탁하지 않지만(君子周而不比) 소인은 결탁하되 두루 친하지 못한다(小人比而不周)”고 했습니다.
가장 결정적인 말은 자로(子路) 편에 나오는 “군자는 남들과 조화롭게 지내지만 동화되지 않고(君子和而不同) 소인은 동화되지만 조화롭게 지내지 못한다(小人同而不和)”는 말입니다. 군이부당(群而不黨)·주이불비(周而不比)·화이부동(和而不同)이 바로 분별과 조화를 강조한 동양의 성어입니다.
김상협 전 고려대 총장이 1970년에 취임사를 통해 제시한 것은 ‘지성과 아울러 야성, 동양과 아울러 서양, 현대와 아울러 원시, 주체성과 아울러 국제성, 한국과 아울러 세계, 치밀한 계산과 아울러 우직한 의리’ 등이었습니다. 이런 이원공간을 대승적 견지에서 자유자재로 왕복할 수 있는 새로운 슈퍼네이션(Supernation)을 만들어 나가자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말들과 너무도 다르게 여러 가지로 갈라져 있습니다. 남북, 동서, 좌우, 계층, 연령, 성별 등 이런 분별의 요소들이 갈등과 대립의 요소로만 작용하고 있습니다. 통합·소통·화해는 이를 수 없는 이상이며 선거공약집에나 들어 있는 문자로 보일 뿐입니다.
영화 ‘변호인’의 내용을 모두 사실로 믿고 새삼스럽게 노무현 전 대통령을 존경하고 숭배하는 사람들, 영화 ‘국제시장’이 나오자 이를 소재로 젊은이들을 가르치고 훈계하려 드는 세대 간에는 간극과 균열이 너무도 큽니다. 보수 대 진보의 진영논리와 쟁투는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머리만 있고 가슴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아니, 머리로만 생각하고 가슴으로 받아들이지 않거나 머리에만 있고 가슴에는 없는 것들을 두 군데에 다 있는 것처럼 과장하고 확대, 재생산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머리에 있는 것들은 가슴에 있는 것으로 조절해야 하며 가슴에 있는 것들은 머리에 있는 것으로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젊어서 사회주의자가 아닌 사람은 가슴이 없는 것이고 늙어서도 사회주의자인 사람은 머리가 없는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젊음은 혁명과 개조를 꿈꾸고 추진하는 도전과 개척의 시기이지만 늙음은 경험과 경륜의 힘을 통해 생의 완성과 사회의 성숙을 지향하는 시기입니다. 젊은이들이 문제의식이 없고 나이든 노인들이 지혜가 없다면 개인과 사회의 불행일 것입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세상에서 가장 먼 길은 머리에서 가슴”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 데 70년이 걸렸다”고 고백했습니다. 김 추기경의 명언입니다. 김 추기경은 “머리와 입으로 하는 사랑에는 향기가 없다”는 말도 했습니다.
이렇게 머리와 가슴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6월이 특수한 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6월은 남북의 달, 이념의 달, 호국보훈의 달입니다. 6월 6일 현충일,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6·15 남북 공동선언, 그리고 벌써 65년을 맞은 비극의 6·25전쟁에다 한국 민주화의 역사에 큰 분수령이 된 6·10민주화항쟁과 6·29선언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6월은 정치와 이념으로 들끓는 시기입니다. 구호와 시위로 거리가 넘칩니다.
그러나 정치나 이념보다 끝내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이며 현장입니다. 최근 논쟁 중에서 흥미로웠던 것은 생계형 성매매 허용 논란이었는데, 집창촌 해체에 앞장섰던 김강자 전 서울 종암경찰서장이 허용을 주장했습니다. 집창촌 해체 과정에서 성매매 여성들의 적나라한 현장을 알게 돼 생각이 바뀐 것입니다.
나는 대학에 다니는 동안 민족이념연구회라는 서클 회원으로 활동한 바 있습니다. 4학년이 됐을 때 신입생들이 ‘민족이념’이 뭐냐, 뭐가 우리 민족의 이념이냐고 자꾸 물었습니다. 대답이 궁한 나머지 “거꾸로 가자. 먼저 ‘회’가 뭔지, 어떻게 하면 모임이 잘 될는지 생각해 보자. 서로 잘 어울리는 게 중요하다. 그 다음에 연구를 하고 대화와 토론을 하는 방법을 익히자. 그런 다음 민족이념에 대해 본격적으로 검토하자.”
이렇게 ‘거룩하게’ 말했던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비슷한 취지로 의견을 밝혔습니다. 다시 그 상황이라 해도 그렇게 말해줄 것 같습니다. ‘회’라는 현장, ‘연구’라는 현장을 먼저 알려 하는 게 필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현장이며 그곳에서 머리와 가슴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인간에 대해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입니다. 이념이나 결론이 어디에서 어떻게 도출됐으며 얼마나 현장과 깊이 연동되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인간이 배제된 이념은 다만 재앙일 뿐입니다. ‘인간의 얼굴을 한 이념’을 강조합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은 20년 전 꿈꾸던 모습이십니까? 한 청년이 20년 후 여러분 세대가 될 때를 상상합니다. 치열하게 살고 있고, 누구보다 사람 욕심 많은 청년입니다. 이 친구의 20년 스케치. 잘 그리고 있는 것 맞나요?
직원 200명, 새마을 휘트니스 13호점 개점. 서울 동작구 보라매공원 인근에 2개의 피트니스 클럽, 10여 명의 직원으로 시작해 불과 4년 반 만에 일궈낸 성과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NNCompany에서 운영하는 새마을 휘트니스는 지난해 13호점을 돌파해 올해 20호점 개점을 목표로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렇게 새마을 휘트니스를 4년 반 사이 10배 이상의 매출 성과를 이뤄내 피트니스계의 거물로 성장시킨 주인공은 아직 마흔도 되지 않았다. 종합격투기 선수를 연상시키는 강렬한 외모였지만 순수한 눈빛과 바른 말투의 구진완 대표다. 근데 이 젊은이 이러한 성과를 내기까지 고생 참 많이 했나 보다. 억만금을 줘도 10년 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단다. 10년 전 상상했던 모습이 지금 그대로 실현되어서 그렇다면 20년 후의 모습은 어떨까? 자신의 먼 훗날 모습도 꿈꾸는 대로 이뤄질 것이라는 자신감에 꽉 찬 그. 궁금해졌다. 알차게, 착실하게 그리고 패기 있게 20년 후를 스케치하고 있는 구진완을 들여다보도록 하겠다. 잘 살고 있는 것인지 팔짱 느긋하게 끼고 지켜볼 필요가 있다.
◇야무진 꿈
“보라매에서 새마을 휘트니스 1호점과 2호점을 낼 때의 목표가 ‘우리나라 피트니스 업계 1위만 해보자’였습니다. 사실 그때 반신반의했었죠. 그런데 4년 반만에 그것을 이뤄내니 점점 자신감이 붙기 시작하네요. 이전에는 한계를 두고 사업을 했지만, 이제는 한계를 두지 않을 생각입니다. 20년 후 국내 30대 기업의 총수가 되는 것이 제 꿈입니다.”
누군가가 ‘꿈도 야무지다’라며 콧방귀를 뀔 수 있을 만큼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구 대표. 아직 모두 그릴 수 없는 그림이지만, 차근차근 그 그림들을 그려나가고 있다. 남성 전문 헤어숍 ‘더 수컷(The SooCut)’, 온라인 셀렉트숍 ‘픽업(Pigupshop.com)’이 오픈한 것과 올해 론칭을 목표로 하고 있는 스포츠웨어 브랜드 ‘플레이백’은 그 꿈의 첫 발걸음이다. 고작 이것으로 20년 뒤 30번째 줄 안에 설 수 있겠냐는 말에 돌아온 것은 당찬 포부였다. 자신을 소심한 사람이라고 표현한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자신감이 철철 넘쳤다.
“사실 ‘더 수컷’과 ‘픽업’은 새마을 휘트니스를 사랑해 준 고객들을 위한 보상 차원이죠. 저의 최종 목표는 따로 있습니다. 호텔과 리조트가 바로 그것이죠. 그래서 하루에 10시간 넘게 독서에 몰두합니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저렴하고 좋은 서비스의 호텔·리조트를 이용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요. 독서를 하면서 받은 영감들이 결국 경영철학이 되고, 사업을 할 수 있는 자신감으로 재탄생하더라고요.”
◇아낌없이 주는 나무
60대. 몇 년 전까지 구진완 대표에게 그 영롱한 숫자는 상당히 거창한 것처럼 느껴졌다. 엄청난 재력가가 된다면, 인생이나 사업에 실패를 맛본 사람들을 위해 재기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는 곳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업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받은 것들을 돌려줘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이었다. 하지만 구 대표는 언제부턴가 그것이 진정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인가라는 물음표를 던졌다고 한다. 진정 내 행복을 위한 길인 것인가라는 의문 말이다. 또 동생, 친구 같은 직원들과의 스킨십에서 오는 소소한 행복들이 60대가 돼서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느꼈다.
그래서 구 대표가 상상하는 60대 노후 생활은 보다 현실적으로 변하고 있다.아버지가 그려 준 시골 옛 집터 그림과 회사를 경영하며 함께 해온 이들은 그가 상상하는 노후를 구체화시키는 원동력이 됐다.
“몇 년 전에 아버지가 그림을 하나 그려 주셨습니다. 지금은 터밖에 남지 않은 충청도 할머니 집 말입니다. 그곳에 집을 지으면 좋겠다면서 말이죠. 그것을 보는 순간 가슴이 뜨거워졌어요. 제가 꼭 돌아가야만 할 곳 같았거든요. 거기까지는 가지 못할 것 같지만, 20년 후에는 서울 근교에서 생활하고 싶어요. 도시를 벗어나서 말입니다. 실패한 사람들을 위한 곳은 아니지만, 제 주위 사람들의 멘토는 될 수 있도록 말이죠. 저를 크게 키워준 그들이 힘들고 지칠 때,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는 곳에 있어야 되지 않겠어요?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되고 싶어요. 그것이 물질적인 것이 아니더라도, 그때 제가 이룩해 놓은 것들이 정신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걸림돌
그에게 물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수많은 걸림돌이 있을 텐데요, 당신이 생각하는 걸림돌은 무엇이 될 것 같습니까?”
그의 대답은 ‘꾸준한 성과’였다. 그 이유는 모두 동생과 친구로 여기는 직원을 향해 있다. 그가 상상한 20년 후의 ‘멘토’와 ‘30대 기업 총수’는 모두 그들이 만들어 주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동생들이 저를 좋아하지는 않는데, 너무 싫어하지도 않는 것 같아서 그게 너무 좋아요”라고 말하는 구 대표에게서 사람에 대한 욕심이 느껴진다. 동생들이 덩실덩실 춤추면서 일해야 성과가 나기 때문에, 그들이 한바탕 춤 출수 있도록 놀이터를 만들어줘야 한다고 얘기한다. ‘성과’는 그런 면에서 꼭 필요한 것이었다. 금전적인 것보다 구 대표가 펼쳐놓은 미래를 믿고 청춘을 불 싸지르는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다.
“제가 상상한 60대에요? 20년 후에는 동생들(직원)이 없으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제가 그들을 설레게 해줘야 되는데, 손에 잡히는 게 없으면 저를 믿고 따라올 수 있겠어요? 그만한 놀이터를 만들어주고, 신이 나서 일할 수 있게 만들어줘야죠.”
그동안의 성과는 괄목할 만하다. 직원들의 월급이 밀리는 것을 막기 위해 돈을 빌리러 다녔던 초창기 새마을 휘트니스 때와 비교하면 ‘보라매의 기적’이라고 할 만하다. 하지만 구 대표는 긴장의 고삐를 놓지 않고 있다. 그리고 ‘보라매의 기적’의 공을 동생들에게 돌린다.
“저 혼자 여기까지 끌고 온 게 아니잖아요.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요. 20년 후라고 달라질 것 있나요? 꾸준히 보여줘야죠. 저만 믿고 따라주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으니까요. 노후 준비요? 지금 제가 잡고 있는 사람들이죠. 정말 제가 놓아서는 안 될 것들.”
◇현재는 과거의 보상
그는 27세 스쿼시 강사를 할 때부터 이를 악물고 성공을 갈망해 왔다. 새마을 휘트니스를 개업하기 전에 벌였던 두 가지 사업에서도 쓴 맛을 봤다. 몸으로 부딪혔던 그 당시 열정 하나만으로 삶을 감당하기엔 경험이라는 축적된 자산이 너무나도 부족했던 탓이었다. 실패는 피가 되고 살이 됐다. 그러나 다시는 맛보고 싶지 않은 실패였다. 과거를 떠올리며 현재에 서 있는 구 대표가 미래에 대해 상상한다.
“저번에 TV를 보는데 누군가가 그러더군요. 나에게 젊음을 준다면, 억만금이라도 지불하겠다고요. 전 그렇지 않을 거예요. 어떻게 쟁취해 낸 행복인데요. 전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내가 어렵게 얻은 사람들을 다시 놓치기 싫거든요. 저 지금 너무 행복하거든요? 아마 내일은 더 행복할 것이고, 모레는 더 그러겠죠. 20년 후요? 어떨지 상상이 가시죠?”
※다섯 명의 초딩이 행동으로 보여준 것은 그동안 신중년들이 잊고 있었던 것이다. 양보와 나눔. 이 순수한 아이들이 일깨워 준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오히려 순수해서 어른스러워 보였다면 약간 역설적일까?
한 명의 초등학생이 울음을 터뜨린다. 어딘가 몸이 불편해 보이는 이 어린이는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닦아가며 성큼성큼 뛰어간다. 뛰어가는 곳의 끝자락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또 다른 초등학생 4명. 이쯤 되면 4명의 어린이들이 한 명을 괴롭히고 있다고 지레짐작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틀렸다. 한 명의 어린이가 쏟아내고 있는 눈물의 의미는 저 앞에 기다리고 있는 4명의 친구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이었다. 지난해 10월 경기도 용인에 위치한 제일초등학교 운동회에서 벌어진 일이다. 그 주인공은 다섯 명. 이 학교 6학년생의 이야기다.
◇ 이야기의 전말
지난해 말, 대한민국 언론과 SNS를 뜨겁게 달궜던 이 이야기의 전말은 이렇다. 다른 친구들보다 키가 조금 작은 김기국 군은 뼈가 자라지 않는 연골무형성증을 앓고 있다. 이러한 병 때문에 매년 열리는 운동회의 달리기 대회에서 꼴찌를 도맡아왔다. 평소 그 누구보다 활달한 성격이지만 달리기만큼은 자신이 없었던 김군. “운동회는 좋지만 달리기는 싫었어요”라는 그의 말에서 달리기에 대한 부담감이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옆에서 지켜보는 친구들의 마음도 편치만은 않았다. 누구보다 자존심 세고, 활발한 친구가 달리기할 때만큼은 잔뜩 주눅이 들어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같은 반 친구인 이재홍 군이 다른 친구 3명을 모아 발칙한(?) 제안을 한다.
“우리 뛰다가 끝에 즈음해서 기국이랑 같이 손잡고 들어오는 게 어때?”
보통의 초등학생이라면 한 명이라도 싫다고 할 만하건만, 이 친구들은 흔쾌히 그렇게 하자고 한다. 그렇게 열린 운동회 달리기. 탕! 총소리가 울리자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앞으로 치고 나간다. 정신없이 달리다 결승선에 다다를 때 즈음. 주위가 술렁인다. 4명의 아이들이 뛰던 것을 멈추고 김군을 기다리고 있던 것. 어리둥절하던 어른들은 김군의 손을 잡고 결승선에 들어오는 광경에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린다. 한 학부모가 올린 한 장의 사진이 SNS에 퍼지자 이 어린이들에 대한 찬사가 쏟아졌다. 각종 언론매체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기 시작했고, 이들은 일약 스타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은 왜 이렇게 세간의 주목을 받는지 처음에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단지 친구와 함께 가고 싶었을 뿐이었다.
◇ 양보와 나눔, 新중년이 잊고 살았던 것을 일깨워주다
“기다려 준 아이들에게 정말 미안하고 고마웠어요. 운동회에서 달리기를 하면 1등이 욕심이 날 텐데 저 때문에 그 욕심을 버리게 한 것이 미안하고, 저를 끝까지 기다려 준 것은 너무나 고마워요. 그 두 감정이 섞이면서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죠.”
김군이 그 당시 느낀 감정을 회상했다. 인터뷰 내내 장난치고, 떠들고 정신없이 얘기하는 것이 영락없는 초등학교 6학년생들이었지만, 말투와 그 내용에서 자못 의젓함이 묻어났다. 그 말 속에서 기자가 한두 번 생각해 볼 말들이 있었다. 일상에 찌들어 소중함을 몰랐던 것, 잠시 잊고 있는 것. ‘함께 가는 것’에 관한 것이었다. 다른 말로는 ‘상생을 위한 나눔 또는 양보’를 의미하기도 했다.
“달리기 1등하는 거요? 많이 해보니까 별 거 없더라고요. 나만 1등하니까. 괜히 미안해지고요. 친구들이 가끔 시기할 때도 있거든요. 그래서 1등을 함께 나누려고 한 것이에요. 모두에게 좋은 일이잖아요. 저는 양보하는 사람이 된 것이고, 1등을 못해 본 친구도 한 번 느껴보고요. 게다가 함께 1등을 한 친구가 이렇게 고마워해주니 저는 더 좋은 사람이 된 기분이에요.”
이 대답을 듣고 기자의 얼굴은 붉어졌다. 아무렇지도 않게 ‘양보’와 ‘나눔’을 이야기하고 실천하는 이 작은 아이들에게서 어른스러운 모습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 어린 ‘초딩5’에게 우리나라 어른들의 반응이 뜨거웠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어린 시절부터 배우며 자라왔지만 앞만 보며 정신없이 달려오느라 잊고 있었던 미덕들을 일깨워준 것. 또 그것으로 어른들이 해야 할 일을 깨닫게 해준 것에 대한 고마움. 바로 그것 때문이다.
인생2막, 시니어들의 모델 진출이 활성화되고 있다. 광고에서 런웨이까지 시니어 모델들의 역할이 두드러지고 있고 그 수요도 늘어나는 시점이다.
꽃중년들이 일어날 시기가 찾아왔다. 물론 늦지 않았다. 주목해야 할 교육과정과 선발대회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시니어모델의 시작 ‘뉴시니어 라이프’
2007년에 시니어 모델사업을 시작해 교육과정이나 인프라가 상당한 곳이다. 서울시설공단과 함께하는 청계천 패션쇼를 비롯해 독일, 연변 등 해외무대에서도 나름 지명도가 높다. 강남캠프, 일산캠프, 성북캠프 총 3개의 교육장을 운영하고 있으며 3~4년차 수강생들이 많이 포진된 것이 특징이다.
‘행복한 패션기업’이라는 비전을 가지고 구하주 디자이너가 설립한 이곳은 교육, 공연, 모델, 제품 사업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주목할 점은 시니어 관련사업의 연령대를 낮추고자 노력한다는 점이다. 60대 기준에서 50대로, 베이비부머를 위한 콘텐츠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잡은 것.
뉴시니어라이프 구다원 국장은 “통상 시니어나 실버의 구분이 없이 관련 사업들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신중년세대들이 완벽히 적응할 만한 콘텐츠가 부족한 것이 현실”이라며 “편하고 하기 쉬운 부분에 초점을 맞추는 것도 중요하지만 질적인 측면에서 완성도를 높이는 교
육을 만들어 가는 데 주력할 시기”라고 말했다.
또 “우리는 관련 교육기관 중에 가장 역사가 오래된 만큼 모델 인프라나 활동 영역에서 독보적인 성과를 보이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녀는 시니어 모델 전문 프로그램에 대한 자부심이 넘쳤다.
뉴시니어라이프에는 경력 3년차 3인방 모델이 유명하다. 이들은 50대, 60대, 70대로 구성됐으며 나이차와 관계없이 친구처럼 편한 모습을 보였다.
맏언니 이오영(70)씨는 지난 세월 외국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남편이 외교관이었기 때문이다. 남편의 퇴직으로 한국에 다시 정착하게 되면서 느낀 외로움을 모델 워킹을 통해 극복했다고 한다.
“손주들이 좋아해서 너무 즐겁고 행복하다. 모델 워킹을 교육받으며 새로운 삶을 얻는 것 같다”는 그녀의 미소에서 넉넉함이 느껴졌다.
특히 “그동안 관절염으로 고생했는데 자세 교정을 통해 건강해졌다”고 말했다.
평범한 전업주부로 살아온 권혜영(62)씨는 모델수업을 통해 성격이 달라졌다. “그동안 자녀들 뒷바라지하느라 시간적 여유가 없었고 선천적으로 내성적인 성향을 가졌었다”는 그녀는 “모델 워킹을 통해 활기찬 모습으로 바뀌어 놀랍다”고 언급했다.
또 “많은 사람들 앞에서는 무대의 긴장감이 있다”며 “이런 긴장감을 통해 에너지와 용기를 잃지 않아 신난다”라고 말했다.
김경순(54)씨는 3년 전 수강생으로 들어왔지만 이제는 보조강사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체형관리와 건강 관리, 순식간에 찾아오는 갱년기 우울증에 이만한 프로그램은 없다고 생각한다”며 “보조강사로 도움을 줄 수 있어 그 행복은 배가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특히 “큰언니와는 나이차가 많이 나지만 같은 관심사로 친구가 될 수 있다”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그녀는 지난 30여 년간 골프용품 사업에 매진하며 꾸준한 마라톤으로 몸매 관리를 해왔다고 한다.
뉴시니어라이프 패션쇼 교육은 기초, 전문, 워킹클래스 총 3개 파트로 나눠진다.
기초과정은 50세 이상을 대상으로 4개월(주1회 3시간)간 진행되는데 기본교육, 패션쇼 준비, 패션쇼 공연 순으로 진행된다.
수료 후에는 시니어패션쇼 공연활동에 참가 할 수 있다. 전문과정은 기초과정을 이수한 수료자를 대상으로 6주(주1회 5시간)동안 전문모델교육을 받게 된다. 전문과정을 마치면 본격적으로 시니어모델 활동(광고/사진/패션/미디어/이벤트) 및 시니어모델 워킹강사로 활동할 기회가 주어진다.
워킹클래스 역시 기초과정을 이수한 자를 대상으로 매주(주1회 3시간) 수업이 진행되며 준비훈련을 통해 시니어패션쇼에 올라서게 된다.
재충전의 다크호스 ‘강남시니어플라자(시니어모델워킹)’
“강남시니어플라자의 모델 워킹반이 재미있다고 입소문이 나고 있다” 이 한마디를 듣고 찾아가봤다.
교육은 올해 시작돼 기간이 길지는 않지만 열정 가득한 수업이 매력적인 곳이다. 강남권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 시니어들도 주목하고 있어 분기별로 진행되는 수강신청을 빠르게 해야 한다.
수강생들에게 무대의 현장감을 전달하기 위해 강사 채용에 신경을 쓴 흔적도 보인다.
지난 10년간 패션모델로 일했던 모델 워킹반 이나영 강사는 “시니어를 대상으로 하는 모델 워킹수업은 현 시대가 요구하는 여러 측면을 만족시킬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녀는 현재 대학 강단에 서고 차밍스쿨을 운영하고 있지만 시니어 모델 교육에도 남다른 열의를 보였다.
그녀는 “고령화 시대에 접어든 우리나라 시니어들의 건강, 자신감 그리고 열정을 심어주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며 “우선적으로 소통을 통해 새로움 아름다움을 찾는 것에 주안점을 두고 가르치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수강생들의 만족도는 어떠할까.
우선 모델 워킹반 수강생 대표를 맡고 있는 홍의정(66)씨는 “나이가 들면 걸음걸이로 나이를 가늠할 수 있다고 하는데, 저는 여기서 배운 올바른 자세 교정으로 뒷모습은 아직도 아가씨 같다는 말을 자주 듣곤 한다”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모델워킹을 하면서 10년은 젊어 진 것 같다”는 그녀의 말에 생기가 돌았다. 그녀는 젊은 시절부터 워킹이나 모델 활동에 관심이 많았지만 잠시 꿈을 포기하고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지인으로부터 모델 워킹을 배울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수강신청을 한 후 본격적으로 활동에 집중하고 있다.
김쏙니(64)씨는 “40년간 강남에 거주하며 강남시니어들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모델워킹반의
시작과 함께해 개인적으로는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모델 워킹반에서 재충전의 시간을 갖게 돼 행복하다”며 “앞으로도 꾸준한 활동을 통해 긍정적인 자세로 나이도 몸도 늙지 않는 건강관리에 매진하겠다”며 건강과 미모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강윤순(64)씨는 “처음에는 습관이 되지 않아 어색했지만, 수업을 통해 건강한 습관으로 자리
잡게 되어 좋았다”고 소감을 밝혔다. 또 “외부 시니어패션쇼에도 용기내서 참여하니 보람차
고 톱 모델 못지않게 나도 멋진 여성이 된 것 같다”는 말도 했다.
시니어 모델 워킹 클래스는 기초와 프로 2단계로 나눠지는데 각각 6개월씩 주1회 수업이 진행된다.
기초과정의 경우 초반 3개월은 자세교정과 기본 워킹을 중심으로 모델로서 가져야할 태도에 대해 교육받고 후반3개월은T자형무대,원형무대등모델워킹실습을받게된다. 프로과정은기초과정 수강한 자를 대상으로 진행되며 본격적으로 패션쇼에 참가하기 위한 전문적인 교육으로 구성된 상태다.
미즈실버코리아 2014
올해 시니어모델을 위한 유일한 선발대회는 미즈실버코리아뿐이다. 시장이 좁기 때문에 경쟁률도 만만치 않다. 참가대상은 50세 이상 여성이라면 누구나 가능하지만 태생적인 아름다움이나 시간을 거스르는 안티에이징이 관건은 아니다.
주최측은 “자신이 살아온 인생 속에서 묻어나오는 경험과 연륜이 몸에서 절로 발현되는 아름다움을 미의 기준으로 삼았다”고 강조했다. 심사 역시 수상자의 삶의 역사, 건강, 지속 가능한 아름다움, 사회봉사에 가장 큰 방점을 두고 있다.
지난 2002년 전주의 한 복지가가 소외된 노년층의 꿈과 미소를 되찾아주기 위해 만든 순수한 목적의 이벤트성 대회로 시작했지만 사단법인 세종문화원과 서울공연 예술센터가 주최하고 보건복지부와 문화예술계의 후원을 받는 큰 규모의 행사로 변모하게 됐다. 대회수상자들에게는 다양한 대외활동 기회가 주어진다.
우선적으로 수상자들은 한류 ‘뷰티 퀸’으로 데뷔하며 방송 MC와 쇼호스트, 연기 등의 분야로 나갈 수 있다. 시니어 뷰티 리더로서 사회봉사활동과 주부 모델, 미즈 모델, 실버 모델로 활동하며 각 단체 및 업체들과 연관된 평생 교육프로그램에도 지도자로서 발돋움할 수도 있다.
“시니어 모델이 된다는 생각으로 무대에서 연습을 해보니 가슴이 벅찰 정도로 희열이 느껴진다. 이제는 프로 모델로 거듭나고 싶다.”
미즈실버코리아 참가자 김지영 (61)씨는 이 같은 포부를 갖고 있었다.
지난 세월동안 육아용품과 화장품 사업에 인생을 바쳤던 그녀는 이번 선발대회를 통해 제2의 인생을 새롭게 설계하고자 마음먹은 것.
그간 사업적인 영역에서 힘써왔다면 이제부터는 제대로 된 모델로서 성장하고 싶다는 말이다.
“탄탄한 몸매를 가꾸기 위해 틈틈이 피트니스센터를 다녔고 화장품 관련업계에 종사했던 만큼 미를 가꾸는데 남다른 소질이 있죠.”
당당한 그녀의 말투에는 내달 진행될 선발대회의 승패와 관계없이 뚜렷한 목표가 보였다.
김지영 씨는 “우선적으로 시니어 모델로서 TV광고나 지면광고, 또 패션쇼 등에 참여하고 싶다”며 “저를 써주신다면 그에 합당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그녀는 “모델 활동과 함께 제 인생의 장기적인 목표는 우리 시니어들을 위해 운동이나 화장법, 패션 등을 가르치는 강사로서 나아가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글 최재영 시니어기자
불로장생!
그동안 인류는 늙지 않고 오래 사는 ‘불로장생(不老長生)’의 삶을 꿈꿔왔다. 그 꿈이 고령화 사회라는 현실로 우리 앞에 다가왔지만, 그게 마냥 즐겁지만은 않다. 오히려 불안하다. 만물의 영장인 사람은 가보지 않은 미래를 예측하고 이를 참고해 바람직한 미래를 설계해왔다. 이것이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이며, 다가올 고령화 사회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바람직한 미래를 잘 개척한다면 고령화 사회는 축복이 될 수 있지만 그러지 못할 경우, 고령화 사회는 개인과 사회에 저주가 될 수 있다.
인생 60시대와 인생 100세시대의 생활양식과 문화가 같을 수 없기에 라이프스타일의 전면적 변화가 예측된다. 우리가 ‘어떤 사람들이 100세를 사는가’에 대한 의문과 관심을 갖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좋은 유전인자를 갖고 태어난 사람들이 100세를 살 가능성이 가장 높다. 즉 100세인이 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유전적인 요소라 할 수 있다. ‘세살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을 이제는 ‘백세까지 간다’고 바꿔야 할지도 모르겠다.
최근 100세인들에 대한 연구조사에 따르면 스트레스를 덜 받으며, 스스로 스트레스를 해결하는 방법을 갖는 것이 장수하는 데 가장 유리한 요소로 나타났다. 많은 노인들이 만성질환을 앓고, 병원을 들락거리며 살다가 점차 쇠약기로 접어드는 삶을 살고 있지 않은가? 실제 80세 전후로 사망하는 사람들을 보면 의사를 자주 찾아다니고, 여러 가지의 약을 복용하다가, 병원에 입원해 고생을 하다가 일생을 마치곤 한다. 그러나 100세를 사는 사람들은 평소에 특별한 병을 앓지 않고 건강한 일생을 산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은 온갖 고초와 변화를 겪으며 파국의 세월을 거친 우리 베이비붐 세대의 이야기다. 이 책이 우리 세대에게 주는 메시지는 ‘Let it be(렛 잇 비)’다. 제목 그대로 100번째 생일을 맞은 주인공이 난데없이 양로원 창문을 넘어 사라지는 사건으로 소설이 시작된다. 저자는 말년에 고작(?) 양로원에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던 백세노인이 ‘세상을 향해 난 창문’을 넘어 탈주를 감행하면서 벌어진 각양각색의 이야기들을 유쾌하게 풀어낸다. 주인공은 사건 속에서 만난 이들에게 무언의 가르침을 주고, 자신 역시 ‘여전히 난 살아 있다’는 것을 몸소 느낀다.
뚜렷한 이유 없이 양로원을 탈출해 목적지가 없는 여행을 시작하게 된 주인공 알란은 공교롭게 돈이 가득 든 가방을 차지하면서 범죄자들로부터 쫓기는 신세가 된다. 이전까지 알란의 인생은 불행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고 심지어 20대엔 생체실험을 당해 남성의 기능을 상실하고 만다. 열등한 유전자를 없애고 우성 유전자를 퍼트린다는 생각은 서구열강이 식민지 원주민들을 무차별 학살하고, 2차 세계대전 당시 유태인 학살을 저지른 이유이기도 했다. 그런 아픈 역사의 현장에서 알란이 보여주는 모습은 매우 의미 있다.
남자라면 누구나 가장 중요시하는 것을 잃고 말았다. 누가 봐도 불행하다고밖에 할 말이 없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그 과정에서 폭탄공장에서 일하게 된 것을 누구보다 행복하게 여긴다. 그런 그의 삶의 자세는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것을 일깨워 준다. 또한 역사적 인
물들에게 크고 작은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알란의 아버지는 ‘생각이 매우 많은 사람’이었다. 자신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일(무슨 일인지 알면 정말 어이없어 놀랄 만한)에 온 몸을 바쳐 헌신하다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다. 그런 남편을 잃고 힘든 삶을 이어나가다 결국 숨을 거둔 그의 어머니는 ‘난 어떻게 사느냐’고 묻는 아들에게 이러한 유언을 남겼다.
“너희 아버지처럼 생각을 많이 하지 마라. 살다 보면 다 살아지는 거다.” 무척 많이 들어왔던 이야기 아닌가? 한편으로는 허허실실 여기저기 관여하면서 놀라운 업적을 달성한 알란이지만, 그는 정작 자신의 삶은 없었다고 말한다. 세계의 중심에는 알란이 있었지만 알란의중심에는 아무것도 없는 공허함만이 남았던 것이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은 역사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보여준다. 알란은 정말 어머니의 유언처럼 살았다. 학교도 그만두었고, 자신이 재밌는 일(그는 잊을 만 하면 폭발물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다‘나는 그저 폭탄이 너무 좋았을 뿐이야’라고 하면서)을 하면서 이리저리 사건과 시간이 이끄는 대로 끌려 다닌다. 절대 벌어질 일을 계획하거나 고민하지 않는다.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살았는데도 불구하고 결국 그는 산전수전 다 겪은 노인이 되었다. 산전수전의 스케일도 만만치 않다. 알란은 잘 몰랐겠지만 (그가 이중간첩을 할 때 ‘쓰잘데기 없는 정보’를 날라댔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보아 그는 자신 주변의 시대상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음) 그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19, 20세기의 사건들에 대부분 관여하고 있었다.
책에서는 알란이 미국과 소련의 이중 스파이로 활약하던 중 미국CIA와 소련의 KGB 요원들이 목숨을 잃는 장면이 그려진다. 중간에서 그저 쓸데없는 정보를 전달해주었을 뿐인데, 알란은 불행한 일에곧잘 휘말리게 된다. 그러나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순간순간최선을 다하고 인생을 즐길 줄 안다. 그런 그의 모습은 ‘죽은 시인의사회’에서 키팅 선생이 말한 ‘카르페디엠’을 떠올리게 한다. 늘 술과파티를 즐기는 알란의 모습은 ‘인생은 축제’라고 말하는 것 같다. 우리에게는 치열하게만 보이는 삶을 단순하고 자유롭게 산 남자가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상상 이상으로 많은 것을 해냈고, 큰 업적을 남기게 됐다.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삶’이다. 권력자와 석학이 차지하고 주도했던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알란처럼 어떤 특정한 의도 없이 판도를 변화시키는 데 기여하거나 휘말렸던 사람이 있을 것이다.
알란은 돈 가방을 들고 도망(?)치던 도중 아르바이트생 베니를 만나게 된다. 그는 모르는 것이 거의 없는 얕은 잔 지식의 소유자다. 궁금한 것이 너무나도 많고 공부를 하면 또 다른 주제로 넘어가는 등 다소 산만한 그의 지식욕은 폭발물에만 집중해서 살아온 알란과 매우 대조적이다.
알란의 아버지와 베니는 주인공의 생활방식을 극적으로 강조하는 동시에, 어떤 방식의 삶이 더 좋은지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예를 들어 ‘많이 아는 것이 모르는 것보다 행복한가?’, ‘미래에 대해 계획을 세우는 것이 미래를 더 풍요롭게 해 주는가?’, ‘고민이나 문제가 닥쳤을 때 어떻게 해결해 나가는가?’ 등이다. 문득, 그동안의 삶이 죽을 만한 고비를 몇 번이고 넘긴, 몇 십 년 동안의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죽일 테면 빨리 죽여, 나 이미 백 살이야’라며 허를 찌르는 말투와 목숨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는 100세 할아버지는 ‘양로원=감옥’이나 마찬가지였을 터. ‘이제 그만 죽어야지’를 입에 달고 다니던 그가 삶의 연장전을 즐기기로 결심한 순간, 100세 노인 알란의 인생 여정은 ‘너무나 우연적인’ 요소가 많아 반발심을 일으킬 수도 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자! 우리의 인생은 당장 몇 분 후도 예측할 수 없지 않은가?
행복한 100세를 위하여!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은 우리가 ‘불행’으로 분류할 수 있는 것들을 만났을 때 ‘어떤 자세를 취할 것인가’에 대한 고찰을 하게 만든다. 사건사고가 난무하는 현 시대를 사는 나 역시도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도 우리가 살아 있는 게 얼마나 기적인지를 몇 번인가 깨달았다. 새삼스럽게도 ‘지하철 천장이 무너지지 않을까’, ‘열차가 탈선하지 않을까’라는 걱정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현재 베이비붐 세대는 인류사적으로는 평균수명 100세를 사는 고령화 첫 세대이기도 하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산업화의 주역이다. 이들이 고령화사회를 맞이하며 창의적인 생애 설계로 지속 가능한 삶의 모델을 만들어 낸다면 한국사회는 큰 무리 없이 건강한 사회를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경우, 감당할 수 없는 블랙홀에 빠지게 될 것이며, 한국 사회는 온통 회색빛으로 물들 가능성이 높다.
시니어 기자 최재영
최재영 시니어 기자의 성격은 불의를 못 보고 나서기를 좋아하며, 사색을 즐기는 편입니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서는 좋은 음악을 틀고, 사진과 동영상을 보며 환기를 시키고 하루의 일과들을 계획합니다. 통풍이 안 되는 주중동안 힘들었을 그리고 혹시나 물이 부족해 지쳐 있을 식물과 애견, 거북에게 먼저 물과 사료를 주고, 빛이나 통풍 처방이 필요한 아이들은 탄천 나들이를 하기 위해 쪼로록 내놓습니다.
주말 이틀을 지나고 난 월요일 아침엔 손길이 더욱 바빠지는 하루를 맞이하는 IT업에 종사하는 보안전문가입니다. 사람과 사람끼리 친해지듯이 아름답고 소중한 인연을 만들어가고 싶고 어떻게 관리하면 인생을 아름답게 만들어 갈 것인지 등 부모로서 배워야 할 숙제가 남아 있고 환경·성격이 제각각이듯이 그도 맞추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돈은 중요하지 않다. 일자리가 나를 움직인다. 대기업 임원에서 숲 해설가가 된 김용환씨를 만났다. 많은 돈을 받지 않지만, 퇴근하면 다시 출근할 생각에 설렌단다.
두 번째 직장에서 퇴직한 후 약 4년이 흘렀다. CJ 제일제당 상무, 스파클 CEO. 화려했던 시절을 상징하는 명함들은 집안 한구석에 켜켜이 쌓여 있다. 이 명함의 주인공 김용환씨는 이제 화려한 직함이 새겨진 명함 대신 ‘국립수목원 숲 해설가’라고 써진 명함을 내민다.
“회사라는 울타리를 벗어나니 더 큰 세상이 보이더라고요. 그것 중 하나가 숲입니다.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무궁무진한데 그것을 모르고 살았지요. 저는 그것을 많은 사람에게 알려주는 일을 하고 있어요. 이렇게 보람된 일도 하니 그야말로 일이 힐링이지요.”
김씨의 얼굴에는 이제 여유가 넘친다. 어깨를 무겁게 했던 직장생활의 고달픔과 긴장감은 이제 얼굴에 남아 있지 않다. 부드러운 말투와 편안한 미소가 김씨의 현재를 알려줄 뿐이다. 대기업 임원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벼워진 월급봉투는 새로운 일을 하는 데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남에게 도움을 주고, 보람이 있고, 나이가 더 들어서도 할 수 있는 일을 가질 수 있다는 것. 오직 그것만이 김씨를 광릉 숲으로 인도했다.
◇ 재취업 준비 늦을수록 적극적으로
김씨의 퇴직 준비는 오래전부터 이뤄진 게 아니었다. 아니 그럴 여유가 없었다. 사실 그는 오랫동안 몸담아 온 CJ 제일제당에서 퇴직했을 때 새로운 일을 하며 은퇴준비를 하려고 했다. 그가 그렸던 청사진은 전원생활이었다. 산에서 약초도 캐 팔기도 하고, 펜션 사업을 하면서 유유자적하며 살기를 원했다. 그러나 상황이 녹록지 않았다.
당시 그의 나이 49세. 아내와 대학생인 두 아들을 부양하기에 전원생활은 위험부담이 컸다. 때마침 들어온 후배들의 간곡한 청도 거절할 수 없었다. 생수 제조업체 스파클의 경영을 맡아달라는 것.
당분간 휴식을 취하며 미래를 구체적으로 설계하고 싶었지만, 첫 직장 퇴직 후 반년도 안돼 스파클의 CEO로 새 출발을 하게 된다. “49세였던 당시 회사에서 퇴직해서 은퇴준비를 하려고 했어요. 상황이 안 도와주더라고요. 그러면서 은퇴 준비는 자연스럽게 소홀하게 됐죠.” 그 후 8년이 흘렀다. 그가 스파클의 경영을 맡은 사이에 연 매출도 80억원에서 150억원으로 껑충 뛰었다. 물론 더 그 자리에 머무를 수도 있었다. 마흔 끝자락이 었던 나이도 어느새 이순을 바라보고 있었다. 더 이상 미련이 없었다. 기업을 경영한다는 것은 꿈꿔 온 일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때 나이 57세. 그가 생각한 은퇴 준비의 마지노선이었다.
그는 두 번째 퇴직 후에 대한 생각을 가장 많이 한 때가 이때라고 말한다. 이런 생각을 미리 해뒀어야 한다는 조급함 때문이었다. 전원생활과 같은 새로운 것을 찾고 싶었다. 더 이상 공적인 이해관계가 얽혀진 자리는 있고 싶지 않았다. 우연이 아닌 필연이었을까? 휴식을 취하기 위해 아내와 찾은 국립수목원. 그때 김씨는 ‘아! 이거다’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김씨는 숲 해설가와의 첫만남을 이렇게 회상 한다.
“아내와 휴식도 할 겸 국립수목원에 간 적 있어요. 그게 약 4년 전쯤이에요. 70세는 돼 보이는 숲 해설가가 관람객들에게 숲에 대해 설명하는데 무척 감동이었어요. ‘저 나이에도 저렇게 해박한 지식을 전달할 수 있구나’ 하고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숲 해설가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 찾아보게 됐죠.”
의외로 정보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인터넷에는 숲 해설가가 되는 방법과 절차, 교육 기관까지 상세하게 나와 있었다. 산림청 인증 숲 연구소, 숲 해설가 협회, 국민대 숲 해설가 양성 교육과정이 있다는 정보를 접한 김씨는 한달음에 달려가 산림청 인증 숲 해설가 양성 교육에 등록한다. 입문 1개월, 전문가 과정 8개월의 장기간 교육이지만, 이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숲 해설가라는 목표가 9개월간의 교육을 즐겁게 해주는 요소가 되기 충분했기 때문이다.
일주일 2회의 교육에 수강료 총 160만원. 그는 자신의 미래를 위한 투자였기 때문에 전혀 아깝지 않았다고 얘기한다. 그러나 숲 해설가가 되는 길은 의외로 많은 노력을 필요로 했다. 생각보다 많은 분야를 공부해야 하는 것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돈과 시간을 투자하는 것은 전혀 아깝지 않았어요. 하지만 생각보다 많은 분야를 공부하는 것이 조금 힘에 부쳤죠. 원래 책을 읽고 공부하는 것은 좋아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수목, 생태, 교육학, 심리학 등 다양한 분야를 소화하기 힘들었을 것 같아요.”
◇ 숲 해설가
숲 해설가 양성과정 9개월. 국립수목원에서의 실습 30시간. 숲 해설가 자격증을 취득하기까지 꼬박 10개월이 걸렸다. 그러나 자격증을 땄다고 해서 모두가 수목원에서 숲 해설가로 활약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국립수목원에서 일하기 위해 몇 가지 관문을 더 넘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때도 김씨의 철저한 준비가 빛을 발했다.
“숲 해설가 자격증을 취득한 후에도 국립수목원에서 면접과 해설 시험에 합격해야 비로소 숲 해설가로 활약할 수 있었어요. 원고를 쓰고 시연하는 것까지 있었죠. 많은 과정을 거쳐야 하는 만큼 준비를 철저히 했어요. 밤새 원고를 쓰고 연습해 결국 합격하게 됐죠.”
김씨는 어느새 4년차 베테랑 숲 해설가가 됐다. 그 사이 관람객에게 해설할 때 자신의 노하우도 생겼다. 그러나 첫 걸음은 그리 쉽지 않았다. 숲 해설가 교육과정에서 배운 이론과 실전은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배운 것과 실전이 많이 다르더라고요. 그때는 꽤 애를 먹었는데 경험이 늘어나니까 노하우도 생기고 저만의 해설 방식도 생기더라고요.”
그는 이제 숲 해설에 감성을 담으려 한다. 관람객에게 숲과 나무에 대한 지식을 전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거기에서 오는 감성이나 감동을 고스란히 전달하는 것도 숲 해설가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서다. 김씨가 수목원의 숲길을 걸으며 차근차근 숲과 나무에 대한 자신의 감회를 설명한다. 나무에 대한 알짜배기 정보도 담겨 있지만, 그것에 자신의 생각과 철학도 녹아 있다. 설명을 듣지 않았으면 쉽게 지나쳤을 수도 있는 자연의 신비로움. 4년차 숲 해설가답게 그는 그것을 끄집어낸다.
“저기 전나무 숲 보이시죠? 전나무는 더 높게 자라기 위해서 나무 상단의 가지가 자라나면 그 밑에 있는 가지들은 자체적으로 모두 쳐내요. 울창한 숲에서 살아가기 위한 자기만의 생존 방식이죠. 사람도 그런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을 다 가져간다고 좋은 것은 아닌 것 같아요. 포기할 줄도 알아야 더 큰 미래를 도모할 수 있을 겁니다.”
◇ 일이 곧 삶의 엔진이어라
이제는 김씨에게 일 그 자체가 삶의 활력소다. 출근시간보다 한 시간 일찍 나와 숲 속을 거닐고, 숲의 향기를 느끼며 감상에 잠기는 것. 그것이 일이고 일상이자 삶의 낙이 됐다. 일이 곧 삶의 엔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김씨답게 새로운 일에 대한 준비도 수월하게 진행 중이다. 지난 여름 산림 치유 지도사 2급 자격증을 취득한 것. 알코올 중독, 주의력 결핍 장애(ADHD), 게임 중독자, 주부 우울증 대상자 등을 치료하는 데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하고 싶다는 것이다.
“숲 해설가만 4년 했어요. 앞으로 일의 성격을 달리해 새로운 일을 하고 싶어요. 물론 그 일의 중심에는 산림이 있죠. 자연 자체가 제 일이고 삶의 낙인데, 그것으로 다른 사람을 치유할 수 있다면 그것만큼 보람 있는 것이 어디 있겠어요. 그래서 산림 치유 지도사는 제 삶의 새로운 엔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02년에 90억 원으로 프리드라이프(구 현대종합상조)를 울산에 창업한 때부터 대한민국 상조업계에서는 저를 이단아이자 미친 놈으로 취급했어요.”
박헌준 프리드라이프 회장의 기질은 소문대로였다. 특유의 힘 있는 말투에 담긴 내용에는 거침이 없었고 가리는 것도 없었다. 그는 프리드라이프가 다른 상조회사들의 견제 속에서 시작됐다는 걸 분명히 밝히며 그런 고난을 정면돌파하여 선두에 올라섰다는 자부심을 숨기지 않았다. 시작부터 지금까지 상조업계 변화의 중심에 서 있는 프리드라이프의 거친 개척기를 박 회장의 ‘직설’로 들어본다.
“상조회사를 시작하면서 저는 세 가지 문제를 없애겠다고 다짐했어요. 하나는 영남 지역에 머물러 있던 지역 상조회사의 한계, 어둡거나 슬프거나 혐오스럽게 보는 장례 문화에 대한 시선, 부르는 게 값인 횡포 문화.”
영업사원 수당 보장, 불입금 납부기간 확대… 혁신의 시작
그래서 박헌준 프리드라이프 회장은 우선 당시 상조업계가 관행으로 갖고 있던 ‘노잣돈 문화’를 거부했다. 그리고 영업사원을 소모품처럼 써버리는 관행도 뜯어 고쳤다. 고치는 것부터 시작된 회사인 셈이다.
“내가 보험 회사를 다녀 봤으니 알잖아요. 영업사원이 연고판매를 하고 나서 가치가 떨어진다 싶으면 그 사람에게 잔여수당을 안 줘요. 보험회사의 잘못된 관행들만을 상조회사가 흉내 내고 있었어요. 그래서 난 모든 영업사원들이 우리 회사에 와서 한 건을 팔든 열 건을 팔든 회사가 약속한 수당은 끝까지 수령하게 했어요. 단, 안 좋은 행위를 한 경우를 제외하고.”
박 회장은 또한 상조업계의 관행이던 3년~5년이라는 불입금 납부 기간을 10년으로 늘렸다. 그 덕에 고객은 불입금 액수를 반 이상 싸게 낼 수 있게 됐다. 또한 서비스 개념에도 집중하여 초기 상조회사들에 소속된 염사들이 염습만 하며 빠지던 것을 장례지도사로 전환시켜 장례의 처음과 끝을 책임지게끔 만들었다.
상조업계 최초의 홈쇼핑 광고, 터지다
박 회장은 대한민국 장례 문화를 바꾸려면 서울과 경기도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회사 문을 연 3년 후인 2005년도에 여의도에 입성했다.
“서울을 변화시켜야겠는데, 이젠 아날로그가 아니라 디지털 시대였어요.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TV CF를 하자. 그래서 상조업계 최초로 과감하게 CF를 시작했습니다. 그때는 돈이 없어서 제가 스스로 모델이 됐어요.” 당시 프리드라이프의 CF에서 박 회장이 했던 멘트는 “슬픔을 이용해 장사하지 않겠습니다”였다. CF는 성공적이었다. 박 회장은 당시 대한민국 국민들 마음 속에는 핵가족화에 따라 장례를 제대로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있다는 걸 꿰뚫어봤다. 그래서 박 회장의 행보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TV CF 직후 6개월만에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홈쇼핑’을 파고들었다.
“물론 홈쇼핑 측에서는 상조회사 광고라니 자기네 이미지 망친다고 절대 안 한다고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고문으로 계시던 김영일 전 현대백화점 회장님을 통해 계속 접근했어요. 마침내 딱 한 번 해보자고 승낙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한 시간 방송했는데, 대박이 났습니다.”
박 회장은 그때까지만 해도 상조회사들이 자신을 죽일 놈 취급했다고 회고했다. 회사가 망한다는 유언비어는 귀에 못이 박힐 정도였다. 하지만 어느 틈부턴가 상조업계가 프리드라이프의 마케팅 전략을 따라하기 시작했다. 업계의 공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준비 기간까지 치면 우리 회사가 올해로 13년 차예요. 지난 3년 연속 흑자였고, 상조업계의 모든 분야에서 1등을 다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그 숫자는 중요치 않아요. 가장 자랑스러운 건 고객만족도 1위라는 숫자입니다. 대한민국 장례 문화를 바꾸려고 목숨을 걸고 달려온 보람을 느낍니다.”
특별한 사명감을 가진 이들을 위한 환경 만든다
“손해보험회사들이 이 사업에 뛰어들었다 지금은 실패한거나 다름없어요. 그 사람들은 돈을 벌려고 뛰어들었으니 안되는 거예요. 이 일은 정말 목숨을 걸고, 특별한 사명감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대한민국의 죽음 문화를 바로 잡고 세우겠다는 생각이 있는 사람들만 해야 합니다.”
똑똑하고 돈 많은 사람들이 돈을 벌 수 없다고 뛰어들지 않는 일, 그러나 반드시 필요한 일. 박 회장은 그 어려운 일에 스스로 뛰어들어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1000원짜리 지갑, 전집, 레저용품, 카메라, 보험까지…. 35년간 국내 세일즈업계에서 그는 전설로 통했다. 최소한 영업에 있어서 그는 불가능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영업의 달인’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살던 어느 날, 그는 갑자기 바쁘게 산 자신의 삶에 회의가 느껴졌다. 앞으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까 고민하던 그가 선택한 탈출구는 ‘캐나다 이민’. 출국을 준비하던 그는 이민 한달 앞두고 있던 어느 날 친하게 지낸 친구의 모친상 소식을 들었다. 이역만리로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얼굴이나 보자는 생각에 찾은 병원 장례식장은 내부 전체가 지하실 쾌쾌한 냄새로 가득한, 음산함 그 자체였다.
“꼭 이런 환경 속에서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야 하나?”
집으로 돌아온 뒤 며칠을 고민하던 그는 캐나다 이민을 포기하고 가족들에게 새로운 사업 아이템을 소개했다.
“한번 사는 인생, 이별도 아름답게 하는 상조, 장례 사업을 시작하겠다.”
소비자의 진정한 욕구가 무엇인지 상조서비스에 촉이 섰다. 이렇게 시작했던 상조시장에서 그는 이제 슬픔을 이용해 장사하는 회사가 없어지는 그날까지 정직과 함께하겠다고 역설했다.
“소비자들이 프리프라이드를 신뢰해줬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믿음에 어긋나면 안된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에 일본보다 앞선 장례문화를, 더 나아가서는 인류의 장례 문화를 바꾸는 게 제 목표입니다. 현대종합상조에서 프리프라이드로 이름을 바꾼 것도 한국만이 아닌 글로벌을 지향하기 위해서예요. 그건 제 꿈이자 프리드라이프 모든 직원들의 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