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ML 칼럼] 이념에 대하여

기사입력 2015-06-02 08:42 기사수정 2015-06-02 08:42

임철순의 브라보 마이 라이프

“머리는 차갑게 가슴은 뜨겁게”라는 말을 흔히 합니다. 동의보감에서 이른바 두한족열(頭寒足熱), “머리는 차게 발은 뜨겁게 하라”고 한 건강의 원리와 비슷한 말입니다. 아기를 재울 때에도 머리는 서늘하게, 가슴과 배는 따뜻하게 해주는 게 육아의 상식입니다.

그러나 ‘머리와 가슴’은 ‘머리와 발’보다 상징하는 바가 더 많고 큽니다. 머리가 지혜·지식·두뇌·슬기·판단, 이런 말과 관계된다면 가슴은 열정·용기 사랑 ·양육 ·포옹, 이런 말로 연결됩니다.

무엇이든 알기 쉽게 둘로 나누는 사람들의 말투를 빌리면 머리는 파란색, 가슴은 빨간색일 것입니다. 머리는 햄릿형·아침형 인간, 가슴은 돈키호테형·저녁형 인간으로 연결된다고 볼 수도 있겠지요. ‘지와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독일 작가 헤르만 헤세의 에도 이성적인 나르치스와 감성적인 골드문트가 대비됩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을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관찰하고 판단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무리이며 그럴 경우 문제점과 부작용이 발생하기 마련입니다. 이 세상에는 완벽하게 선한 사람도, 전적으로 악한 사람도 없습니다. 좌우, 동서, 상하, 고저, 장단, 남북, 남녀, 음양, 전후, 장유(長幼), 고금(古今), 귀천(貴賤)과 같은 말은 분별과 조화를 위해서 있는 것이지 대립과 쟁투를 부추기려고 만든 게 아닙니다.

분별이란 참 좋은 말입니다. 서로 다른 일이나 사물을 구별하여 가르는 게 첫 번째 풀이이지만, 세상일에 대한 바른 판단이나 생각, 어떤 일에 대해 배려하고 마련하는 것이라는 뜻이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분별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에 섣불리 휩쓸리지 않습니다. 논어 위령공(衛靈公) 편에는 “군자는 긍지를 갖되 싸우지 않고, 군중과 함께하되 무리를 짓지 않는다(君子矜而不爭 群而不黨)”는 공자의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을 주희(朱熹)는 “자긍심을 가진 군자는 남에게 굴복하지 않되 싸우려 들지 않고, 군중과 함께 어울리되 편협된 무리를 지어 개인의 영리를 구하지 않는다”고 해석했습니다. 또 논어 위정(爲政) 편에서는 “군자는 두루 친하되 결탁하지 않지만(君子周而不比) 소인은 결탁하되 두루 친하지 못한다(小人比而不周)”고 했습니다.

가장 결정적인 말은 자로(子路) 편에 나오는 “군자는 남들과 조화롭게 지내지만 동화되지 않고(君子和而不同) 소인은 동화되지만 조화롭게 지내지 못한다(小人同而不和)”는 말입니다. 군이부당(群而不黨)·주이불비(周而不比)·화이부동(和而不同)이 바로 분별과 조화를 강조한 동양의 성어입니다.

김상협 전 고려대 총장이 1970년에 취임사를 통해 제시한 것은 ‘지성과 아울러 야성, 동양과 아울러 서양, 현대와 아울러 원시, 주체성과 아울러 국제성, 한국과 아울러 세계, 치밀한 계산과 아울러 우직한 의리’ 등이었습니다. 이런 이원공간을 대승적 견지에서 자유자재로 왕복할 수 있는 새로운 슈퍼네이션(Supernation)을 만들어 나가자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말들과 너무도 다르게 여러 가지로 갈라져 있습니다. 남북, 동서, 좌우, 계층, 연령, 성별 등 이런 분별의 요소들이 갈등과 대립의 요소로만 작용하고 있습니다. 통합·소통·화해는 이를 수 없는 이상이며 선거공약집에나 들어 있는 문자로 보일 뿐입니다.

영화 ‘변호인’의 내용을 모두 사실로 믿고 새삼스럽게 노무현 전 대통령을 존경하고 숭배하는 사람들, 영화 ‘국제시장’이 나오자 이를 소재로 젊은이들을 가르치고 훈계하려 드는 세대 간에는 간극과 균열이 너무도 큽니다. 보수 대 진보의 진영논리와 쟁투는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머리만 있고 가슴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아니, 머리로만 생각하고 가슴으로 받아들이지 않거나 머리에만 있고 가슴에는 없는 것들을 두 군데에 다 있는 것처럼 과장하고 확대, 재생산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머리에 있는 것들은 가슴에 있는 것으로 조절해야 하며 가슴에 있는 것들은 머리에 있는 것으로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젊어서 사회주의자가 아닌 사람은 가슴이 없는 것이고 늙어서도 사회주의자인 사람은 머리가 없는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젊음은 혁명과 개조를 꿈꾸고 추진하는 도전과 개척의 시기이지만 늙음은 경험과 경륜의 힘을 통해 생의 완성과 사회의 성숙을 지향하는 시기입니다. 젊은이들이 문제의식이 없고 나이든 노인들이 지혜가 없다면 개인과 사회의 불행일 것입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세상에서 가장 먼 길은 머리에서 가슴”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 데 70년이 걸렸다”고 고백했습니다. 김 추기경의 명언입니다. 김 추기경은 “머리와 입으로 하는 사랑에는 향기가 없다”는 말도 했습니다.

이렇게 머리와 가슴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6월이 특수한 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6월은 남북의 달, 이념의 달, 호국보훈의 달입니다. 6월 6일 현충일,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6·15 남북 공동선언, 그리고 벌써 65년을 맞은 비극의 6·25전쟁에다 한국 민주화의 역사에 큰 분수령이 된 6·10민주화항쟁과 6·29선언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6월은 정치와 이념으로 들끓는 시기입니다. 구호와 시위로 거리가 넘칩니다.

그러나 정치나 이념보다 끝내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이며 현장입니다. 최근 논쟁 중에서 흥미로웠던 것은 생계형 성매매 허용 논란이었는데, 집창촌 해체에 앞장섰던 김강자 전 서울 종암경찰서장이 허용을 주장했습니다. 집창촌 해체 과정에서 성매매 여성들의 적나라한 현장을 알게 돼 생각이 바뀐 것입니다.

나는 대학에 다니는 동안 민족이념연구회라는 서클 회원으로 활동한 바 있습니다. 4학년이 됐을 때 신입생들이 ‘민족이념’이 뭐냐, 뭐가 우리 민족의 이념이냐고 자꾸 물었습니다. 대답이 궁한 나머지 “거꾸로 가자. 먼저 ‘회’가 뭔지, 어떻게 하면 모임이 잘 될는지 생각해 보자. 서로 잘 어울리는 게 중요하다. 그 다음에 연구를 하고 대화와 토론을 하는 방법을 익히자. 그런 다음 민족이념에 대해 본격적으로 검토하자.”

이렇게 ‘거룩하게’ 말했던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비슷한 취지로 의견을 밝혔습니다. 다시 그 상황이라 해도 그렇게 말해줄 것 같습니다. ‘회’라는 현장, ‘연구’라는 현장을 먼저 알려 하는 게 필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현장이며 그곳에서 머리와 가슴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인간에 대해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입니다. 이념이나 결론이 어디에서 어떻게 도출됐으며 얼마나 현장과 깊이 연동되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인간이 배제된 이념은 다만 재앙일 뿐입니다. ‘인간의 얼굴을 한 이념’을 강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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