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주 돌보기가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중요 이슈로 떠오른 지 오래다. 자녀 내외가 맞벌이해야 하는 현실을 살고 있어서다. 경제적 사정이 허락되면 아이 돌봄 전문인을 활용할 수 있지만, 대체로 친정이나 시댁의 부모가 그 일을 대신한다. 또한, 손주 돌봄 자체가 노후 삶에 보람을 주기도 해서다. 남의 손에 맡기느니 힘이 들어도 내리사랑을 베풀기 마련이다. 유아원이나 어린이집에 안전하게 보내고 먹거리를 챙기는 일 등이 기본이다. 정성을 다해 열심히 해도 때로는 마찰이 일기 마련이다. 한눈판 사이에 가구에 부닥쳐 생채기를 내기도 하여 며느리나 딸에게 걱정을 끼치는 경우도 생겨서다. 그러한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손주 돌보기가 중요하지만, 질이 다른 분야도 관심을 갖고 손주를 눈여겨보는 자세가 더 필요하지 싶다. 예를 들면 선천적 재능을 발견해 본다든지 잘못된 버릇을 고쳐주는 일 등에 더 중점을 두어야 하지 않을까? 손주를 돌보는 일의 근본적 주안점은 미래를 위한 손주 양육이기에 질을 높여야 한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 어릴 때 버릇을 제대로 들여줘야 바르게 성장한다. 인성이나 자세를 만들어가는 시점이 유아기라 한다. 유소년 시절에 잘못 길든 버릇은 평생 고치기가 쉽지 않다. 손주를 둘이나 안겨준 큰아들은 젓가락질이 아직도 서툴다. 젓가락을 잡는 방법이 달라 음식을 먹을 때 불편해 보인다. 본인은 버릇되어 아무렇지 않을지라도 주변에서 보기는 어색하기만 하다. 어릴 때 바로 잡아주지 못해서고 성장해서 고치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 필자의 셋째 처제가 고등학교 교사다. 얼마 전에 가족 모임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고등학생 중 많은 학생이 연필이나 볼펜을 제대로 잡지 못한다고 털어놓았다. 서툴게 잡고 필기를 하다 보니 힘이 들어 공부하는 시간을 오래 버티지 못한다고 했다. 어릴 때 손주가 연필을 잡는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아 바른 방법으로 고쳐주어야 한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난 뒤 내년에 초등학교 입학을 앞에 두고 있는 큰 손주가 연필 쥐는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앞의 사진과 같이 잡고 글을 쓰고 있었다. 엄지와 중지 등 세 손가락 사이에 연필을 두고 있었다. 셋째 손가락이 연필을 받쳐주는 형태가 아니어서 글쓰기가 불편해지는 방법이다. 두 번째 사진처럼 고쳐 잡게 하였더니 이내 고쳐 잡았다. 글쓰기도 편해 보였다. 보편적 방법에서 벗어나 미래에 초점을 둔 질을 높인 손주 돌봄이다.
우리 가족은 6·25 전쟁 납북 피해자 가족이다. 저의 시부모님은 일제 강점기 시절 동경 유학 생활 중에 만나서 당시로서는 드문 연애 결혼을 하셨다. 시어머님은 3남 1녀를 낳고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시던 중 6.25 전쟁의 발생으로 시아버님이 납치 되신 것이다.
어머님은 6·25당시 34살의 젊디 젊은 나이에 혼자 되셔서 갖은 고생을 하시면서 자제분들을 대학까지 교육시키셨다. 어머님은 저의 결혼 후 평생 우리랑 함께 사시다가 5년전 95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는데 얼마 전 6·25를 맞아서 정부로부터 를 받고 남편은 많은 감회에 젖었다. 남편은 아버님의 납치 후 직장 생활 초기에는 혹시라도 이북의 아버님과 접촉할까봐 출장 허가도 힘들었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10여년 전, 맞벌이로 직장에 다니던 필자는 어느 날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그 때는 지금처럼 건강 프로그램도 별로 없어 뇌졸중이 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가 회복은 했으나 후유증으로 지금까지도 몸이 불편한 상태이다. 내가 쓰러지자 가정 생활은 즉시 엉망이 되었고 또 남편은 곧 정년 퇴직을 하게 되었다.
서울의 모 방송국에서 30 년 넘게 근무하고 정년 퇴직을 한 남편의 퇴직금은 그 때로서는 많은 금액이었다. 그 때는 퇴직금도 미래가 어떨지 모른다며 매달 지급되는 연금으로 받지 않고 일시불로 받던 시대였다. 그리고 당시엔 은행의 이자도 상당히 높아서 이자로만 살아도 어느 정도 생활을 유지 할 수 있었다. 또 그 때만 해도 장수 시대가 아니라 거의 대부분 은퇴 후의 생활 준비도 하지 않았고 당연히 어떻게 퇴직금을 관리 해야할 줄도 몰랐다. 그 때는 지금 유행하는 ‘은퇴 이후의 재무 설계’ 같은 말은 존재 하지도 않았다.
남편이 할 일을 못 찾아 힘들어 하던 어느 날 필자는 우연히 인터넷에서 찾은 주례 협회에서 직업적 주례사를 모집한다는 걸 보고 남편 몰래 응모를 했다. 남편이 방송국에서 방송 경험이 있으니 주례 정도는 쉽게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또 실제로 주례 경험도 많았기에 충분히 할 수 있을 거라 믿고 남편 대신 응모 서류를 보냈던 것이다. 물론 그런 일을 할 정도로 궁핍하진 않았지만 하루 하루 똑같은 무료한 생활로 시간 보내는 남편에게 봉사하는 마음으로 일을 하면 나름대로 활력을 줄수 있지 않을까 단순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예상대로 합격 통지를 받고 남편에게 기쁜 마음으로 말을 했더니 엄청 화를 내면서 누굴 뭘로 보냐며 자기를 무시 했다고 몇 달 동안 나와 눈도 마주치려고 하지 않았다. 자기가 그런 아르바이트를 하면 남이 자길 얼마나 궁하게 보겠냐며 자긴 앞으로 돈을 버는 일은 절대로 아무 일도 하지 않겠다고 선언을 하는 거였다. 사실은 돈이 문제가 아니라 남편 출근만 하면 하루 종일 온통 내 세상이었는데 갑자기 하루 종일 붙어 있기가 참으로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필자의 단순한 생각이 남편을 화나게 만든 것이었다. 요즘은 하루 종일 함께 있어도 요령이 생겨, 퇴직 초기처럼 싸우지도 않고 서로 각자 시간을 잘 보내고 있는 필자를 보면 대견한 생각이 든다.
지난 달 건국대 새천년관에서 재미있고 유쾌한 토크 콘서트가 열렸다. 주제는 성 평등이었다. 깊이 들어가면 그리 유쾌할 수만은 없는 남녀의 차별 문제도 제기되었다. 그래도 시종일관 분위기가 밝았던 건 사회를 본 최광기 여사 덕인 것 같다. 본인의 이름으로도 큰 웃음을 주었고 태어났을 당시 자매들의 출생신고가 아무렇게나 되었는데 딱 하나 아들을 낳자 그날로 출생신고를 하셨던 아버지를 예로 들며 태어나자마자 차별을 받았다고 고백해 청중을 웃겼다.
딸만 셋이었는데도 지극한 사랑을 주셨던 아버지 덕에 필자는 남녀차별을 전혀 모르고 자랐다. 주변 이야기를 들어보면 과거에는 아들과 딸의 차별이 아주 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밝게 꾸며진 콘서트홀은 왠지 즐거운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기분을 들게 했다. 미국인이지만 이미 대한 미국인이라 불리는 '타일러'가 패널로 나와 특히 기대가 되었다. '타일러'는 요즘 모 방송의 '비정상회담' 원년 멤버로 나오고 '문제적 남자'라는 프로그램에서 대단한 뇌섹남으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친정엄마와 필자는 타일러의 열성팬이다.
최광기 씨의 사회로 여성가족부 정현백 장관과 방송인 타일러, 개그맨 황영진, 좋은 연애연구소 김지윤 소장이 무대에 자리를 잡았다. 먼저 어린 시절의 고정관념이 남녀의 성차별에 큰 영향을 준다는 얘기로 시작했다. 남녀의 역할은 따로 있다는 식으로, 남자아이에게 “남자가 울면 어떡하니?”라고 하고 여자아이에게는 “여자가 칠칠치 못하게”라는 표현을 무의식으로 써왔다는 것이다. 이렇게 무심결에 한 말이 고스란히 아이에게 각인되어 결국 성차별이라는 고정관념이 생겼다는 설명이었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약간의 걱정이 생겼다. 며칠 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세 살짜리 손자가 여섯 살짜리 손녀에게 용감한 포즈를 취하며 "누나는 내가 보호해줄 거야!"라고 했다. 아기가 한 그 말이 너무나 사랑스럽고 귀여워서 마구 칭찬해주며 "그래, 누나는 여자니까 남자가 보호해줘야 해" 했는데 성 평등에 어긋나는 표현이었을까 우려가 됐다. 오랫동안 이어져온 고정관념이 사라지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 평등으로 완성되는 나라다운 나라'의 주제로 진행된 토크쇼는 대한민국 남녀가 바라는 성 평등은 어떤 모습일지, 왜 지금 성 평등을 주장하는지에 대해 담론했다.
20~30세대 2000명에게 다시 태어나 성별을 바꾸고 싶은지 묻는 설문조사에서 남자는 37%, 여자는 무려 49.5%가 그렇다고 했다. 여자가 느끼는 성차별이 더 크다는 의미다. 정현백 장관은 50년 이상 지속되어온 호주제에서의 폐해와 똑똑한 여 제자가 취업할 때 받았던 불이익을 예로 들어 말해줬다. 그러나 새 정부도 여성 장관 기용 30% 공약을 지키는 등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변화의 바람을 잘 받아들이고 있다.
어떤 일을 할 때 남녀의 역할을 정하지 않고 잘할 수 있는 사람이 하면 된다는 해결책도 나왔다. 형광등은 꼭 남자가 갈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키가 좀 더 큰 사람이 하면 된다는 의견에 모두 찬성했다. 김지윤 소장은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역할을 정해야지 성에 따라서 할 일이 정해져서는 안 된다고 조언했다. 맞벌이 부부의 경우도 먼저 귀가한 사람이 식사 준비를 하면 되고 덜 피곤한 사람이 청소를 해야 한다는 의견에 많은 사람이 공감했다.
세계적으로도 성 평등 운동이 많이 일어나고 있는데 UN이 추진하는 연대운동인 ‘He for She’는 성 평등을 위해 함께 노력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시작한 글로벌 캠페인이다. '화이트 리본'은 사라 제시카 파커와 카메론 디아즈 등 유명 할리우드 배우들이 참여해 화제가 되었다. 우리나라에도 45명의 남성이 성 평등을 실천하는 '성 평등 보이즈'라는 모임이 있다.
두 시간의 토크쇼가 마무리되면서 패널들에게 던져진 마지막 질문은 '내가 꿈꾸는 성 평등 대한민국은?'이었다. 정현백 장관은 '소통하고 이해하는 성숙한 민주 사회'라고 했고 김지윤 소장은 '누구나 원한다면 안전하게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는 나라'라 했다. 필자가 좋아하는 대한미국인 타일러는 '아직 멀었다'라고 따끔하게 현실을 꼬집었다.
# “다단계 피라미드에 불과하다. 처음 가입한 사람에게는 고수익을 보장해주지만 가입자가 줄면 파산하는 것과 같다.” 그레고리 맨키프 하버드대 경영대학 교수가 국민연금을 두고 한 말이다. 향후 고령화로 연금 수급자가 증가하면, 머지않아 국민연금 기금이 바닥날 수 있다는 우려는 이 같은 맥락에서 나온다. ‘연금 고갈론’ 외에도 쥐꼬리만 한 연금이 나온다 해서 ‘용돈연금’이라 불리기도 한다.
# 강남아줌마들은 국민연금으로 노후 재테크를 한다? 지난 10월 국회 보건복지위 소속 정춘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국민연금공단으로부터 제출받은 ‘최저보험료를 납부하는 임의 가입자의 배우자 소득수준별 현황’에 따르면 최저보험료를 납부하는 임의 가입자 중 배우자가 월 400만원 이상인 가입자가 4만9382명으로 45.1%에 달했다. 저소득 취약 계층보다 강남아줌마로 불리는 고소득층이 노후 준비 수단으로 국민연금을 선호함을 보여준다.
국민연금은 극과 극의 평가가 잇따른다. 국민연금이 오랫동안 온갖 불신에 휩싸여 있음에도, ‘돈’에 밝은 강남아줌마들이 각별히 선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용돈연금?’ 실제 얼마나 받나
국민연금공단에 따르면 올 8월 기준 국민연금 노령연금 수급자의 월평균 수령액은 36만4600원이다. 국민연금이 ‘용돈연금’이라는 비난을 받는 이유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17년 기준으로 우리나라 국민연금 신규 수급자의 평균 가입기간은 약 17년에 불과하고, 실질 소득대체율은 약 24%에 머물렀다.
국민연금 노령연금은 10년 이상 보험료를 납부해야 연금으로 수령 가능하며, 가입기간이 길수록 연금액이 불어난다. 10~19년 가입자의 월평균 수령액은 39만5840원, 20년 이상 가입자의 월평균 수령액은 89만2190원으로 집계됐다.
기존 60세 이후였던 국민연금의 수급 연령은 2013년부터 4년을 주기로 한 살씩 단계적으로 늦춰지고 있다. 1969년 이후 출생자는 65세부터 수령할 수 있다. 일각에서는 향후 수급 연령이 더 늦춰질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연금액도 1988년 도입 당시 소득 대비 70%를 내걸었지만 현재는 40%로 조정돼 2060년까지 기금이 버틸 수 있도록 연장된 상태다.
국민연금은 국가가 최종적으로 지급을 보장하기 때문에 국가가 망하지 않는 한 지급된다. 현재 국민연금과 같은 공적연금제도를 실시하는 전 세계 170여 개국 중 연금 지급을 중단한 사례는 단 한 곳도 없다.
송승용 희망재무설계 이사는 “고령화에 따라 향후 국민연금의 수령 시기가 늦춰진다거나 소득대체율이 낮춰질 가능성은 있지만, 현재 연금을 받는 어르신 세대는 물론 20~30대 젊은 세대라 해도 평균수명 이상으로 살 경우 낸 돈보다 많이 돌려받을 수 있다”며 “물가 상승에 따라 매년 연금액을 올려줄 뿐 아니라 노후를 위한 최소한의 ‘강제 저축’이 된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국민연금 앞당겨 받으면 손해일까
중소기업 부장인 정인호(50)씨는 은퇴만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정씨는 “50세를 하늘의 뜻을 안다는 ‘지천명(知天命)’이라고 부르는데, 현실에선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벼랑 끝 나이인 것 같다”며 “퇴직하면 국민연금을 받기까지 10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한데 어떻게 버틸지 걱정”이라고 했다.
국내의 경우 평균 은퇴 연령이 여성 직장인은 47.3세, 남성 직장인은 55세다. 대부분의 직장인이 현실적으로 50대 전후로 퇴직한다고 보면 길게는 20년 넘게 무소득 기간을 견뎌야 한다. 그렇다면 국민연금 개시 전에 은퇴해 당장 생활비가 필요하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노령연금 수급시기 5년 전부터 조기노령연금을 신청할 수 있다. 단 이때 소득이 없거나 소득이 국민연금 가입자의 평균소득액(2016년도 기준 약 210만원)보다 낮아야 신청이 가능하다.
유의할 점은 조기노령연금을 신청하면 연금액이 감액된다는 사실이다. 연금 받는 시기를 1년 앞당길 때마다 연금 수령액이 6%씩 줄어든다. 5년 빨리 받으면 30%나 줄어든다. 예를 들어 만 61세부터 노령연금을 월 100만원 받을 수 있는 사람이 5년 앞서 56세부터 연금을 받으면 월 수령액이 70만원으로 줄어드는 셈이다.
그렇다면 조기노령연금 수령은 무조건 손해일까. 국민연금공단에 따르면 조기노령연금 신규 수급자는 2013년 8만4956명에서 지난해 3만6164명으로 크게 감소했다. 100세 시대를 맞아 안정적인 소득 확보가 중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국민연금은 기본적으로 가입자가 죽을 때까지 받는 연금이기 때문에, 수령을 늦췄다가 불행하게 일찍 세상을 떠날 경우에는 오히려 연금을 제대로 받지 못하게 된다. 가입자가 사망했을 때 유족이 받을 수 있는 연금은 가입기간에 따라 기본 연금액의 40~60%(+가족 부양액) 수준이다.
만일 조기노령연금을 받지 않더라도 은퇴로 국민연금 보험료를 내기 어렵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국민연금은 만 60세까지 의무가입이다. 퇴직하면 직장 가입자에서 지역 가입자로 전환되는데, 소득이 없을 때는 납입 유예가 가능하다. 단 향후 받을 연금액은 유예된 기간만큼 줄어든다. 국민연금 예상 연금액은 국민연금공단 홈페이지(www.nps.or.kr)에서 ‘내 연금 알아보기’를 통해 조회할 수 있다.
부부 가입자, 배우자 먼저 사망할 경우
맞벌이를 하다가 은퇴한 김영모(56)씨 부부는 국민연금의 유족연금 논란이 일 때마다 억울한 기분이 든다. 김씨는 “부부가 각자 국민연금 보험료를 20년 이상 냈는데, 예기치 않게 배우자가 일찍 세상을 떠나면 두 사람 몫을 온전히 받을 수 없다는 게 억울한 것 같다”고 말했다.
국민연금은 한 사람에게 2개 이상의 급여 수급권이 생길 경우 하나만 선택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즉 배우자가 사망하면 유족연금이나 본인의 노령연금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를 ‘중복급여의 조정’이라고 한다.
예컨대 국민연금 부부 가입자 중 남편이 먼저 사망했을 경우를 가정해보자. 배우자는 남편이 남긴 유족연금이 본인의 노령연금보다 많을 경우, 유족연금(최대 기본 연금액의 60%+부양가족연금액)만 받을 수 있다. 본인의 노령연금을 계속 지급받겠다고 선택하면, 본인의 노령연금액에 유족연금액의 30%만 추가로 받게 된다.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부부가 함께 생존해서 연금을 받을 때보다 30~40% 감액이 되는 구조다.
이에 반해 공무원연금은 중복급여 조정 대상이 아니다. 유족연금과 노령연금을 동시에 수령할 수 있다. 국민연금 부부 가입자의 반발이 일어나는 까닭이다. 국민연금 부부 수급자는 2010년 10만8674쌍에서 2012년 17만7857쌍, 2014년 21만4456쌍, 2015년 21만5102쌍으로 급증하다가 지난해 25만 쌍을 돌파했다.
18년 전 아내와 이혼하게 되었을 때 아내가 재산분배에 대한 계산서를 내밀었다. 지금 회고해보면, 아내나 필자가 이혼 얘기는 많이 했지만, 실제로 이혼할 생각이 확고했던 것은 아니었다. 졸지에 퇴직을 하게 된 충격으로 필자는 다른 일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잘못해서 이혼 당할 유책 배우자도 아니니 이혼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내가 얼굴만 보면 이혼 얘기를 꺼내 견디기 어려웠다. 이혼 절차를 밟아도 마지막으로 구청 신고를 하지 않으면 별거를 하다가 재결합의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서 아내가 내민 계산서를 제대로 따지지 않고 서명을 했다.
당시 아내가 내민 계산서에는 우리가 가진 재산이, 동산과 부동산 합해서 5억 원 정도로 되어 있었다. 50평짜리 아파트가 2억5000만원 정도였다. 맞벌이를 했으므로 아내가 축적한 비자금이 상당액 있을 것으로 추정되었지만 아내는 가진 동산이 한 푼도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필자의 동산은 퇴직금과 당시 주식시장에 약간의 여윳돈을 넣고 있던 것까지 합해 2억5000만원으로 계산했다. 그러나 깡통계좌가 속출하던 시절이어서 주식시장에 넣어두었던 돈의 잔존 가치는 별로 없었다. 증권회사 직원의 강권으로 대박이 난다는 텔슨전자 주식을 샀다가 얼마 안 되어 상장 폐지되면서 휴지가 되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내의 계산서에는 투자한 원금이 그대로 들어 있었다.
부부가 재산을 반분하면 필자 몫이 2억5000만원인데 아내는 여기서 또 1억원을 떼었다. 왜냐고 물으니 앞으로 있을 아들딸 결혼자금이라는 것이었다. 왜 벌써 떼냐고 물으니 10년 후 아들딸이 결혼할 때 필자가 경제적 여력이 없을 수도 있고 다른 여자와 재혼하면 입장이 달라져 오리발을 내밀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내도 오랜 시간 고민했고 주변에서도 그렇게 충고를 한 모양이었다. 필자는 재결합의 가능성도 열어놓았으므로 다투지 않고 그대로 수락해줬다. 결국 필자에게 남은 돈은 장부가격으로는 1억5000만원이었지만 주식으로 날린 돈 때문에 잔존 가치는 5000만원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돈이면 일단 원룸을 전세로 얻을 돈은 되니까 그대로 수락하고 짐을 씨서 나왔다.
독립을 하고 나서 당장 수입이 없어 막막했다. 그래도 아직 젊고 건강했으므로 믿는 구석이 있었다. 스포츠용품 업체들이 밀집해 있는 동대문 지역에 빌붙어 있다 보면 무슨 수가 생길 것 같았다. 세계적인 스포츠 브랜드 ‘Umbro’ 대표이사를 지냈기 때문에 경력도 있었고 영어가 취약한 업체들이 필자를 필요로 할 거라고 예상했다. 마침 계약 추진 중이던 이탈리아 스포츠 브랜드 ‘Kappa’도 결국 다음 해 성공적으로 따내서 성가를 높이고 있었다. 개인 사업도 바이어 중 하나가 당시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의 메인 스폰서로 선정되면서 매출이 급증해 승승장구했다. 형제간에 끝없는 갈등을 낳게 했던 아버님 유산도 필자가 나서서 해결하고 공평하게 배분받았다. 그렇게 해서 경제적으로 기사회생하고 겨우 노후 대비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10년 후 아들의 결혼 소식을 접했다. 아들은 그동안 엄마와 같이 살았으므로 결혼 준비는 전 아내가 다 했다. 아내는 이혼할 때 떼어줬던 돈으로 오피스텔을 사서 자금을 불렸고 그 돈으로 아들에게 신혼집으로 작은 빌라 전세를 얻어줬다. 그리고 예물이며 결혼식장 계약 등은 전 아내와 아들이 직접 해결했다.
이윽고 아들의 결혼식 날, 아내와 필자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정상적인 부부처럼 나란히 서서 하객들을 맞았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잘 진행되었다. 그날 온 하객들의 80%는 필자가 부른 손님들이었다. 직장생활을 하던 전 아내의 직장 동료들 몇 명과 처가 친척들을 빼고는 거의 필자 손님이었다. 직장은 물론 동창모임, 댄스와 커뮤니티 등 다양한 분야에서 왕성한 사회활동을 한 덕분에 필자의 손님들이 대부분이었던 것이다.
전 아내나 필자 모두 처음 치러본 결혼식이라 잘 몰랐을 수는 있다. 그러나 전 아내가 결혼식이 끝났는데도 하객 명단을 필자에게 안 주고 시치미를 떼는 것이었다. 아내의 직장 동료들이 접수를 봤고 그대로 아내에게 전달되었으므로 필자는 아는 것이 없었다. 하객들이 누가 왔고 축의금으로 얼마를 냈는지 알아야 인사도 하고 추후 관혼상제가 있을 때 갚아야 할 돈이라 반드시 명부가 필요했다. 필자의 주장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아내는 우여곡절 끝에 명부를 건넸다. 필자는 그것을 기초로 결혼식장에 와준 하객들에게 직접 인사 또는 감사의 메시지를 전했다.
그런데 누구 손님인지를 가려 들어온 축의금을 그대로 나눠야 하는데 아내는 한 푼도 못 내놓겠다고 했다. 그동안 아들에게 들어간 양육비며, 사두었던 오피스텔이 안 올라 신혼집 빌라 전세금 마련하느라 힘들었다는 얘기였다. 이혼 초기에는 필자도 상당히 어려웠다. 밥은 안 굶었지만, 여윳돈이 없어 당장 전세금을 올려달라 하면 대책이 없었던 시절이다. 반면, 전 아내는 살던 집도 있었고 직장도 있었으므로 아이들 양육에 큰 문제가 없었다. 아이들이 크면서 아르바이트를 통해 경제적으로 도움도 주고 있었다. 돈 문제로 다투는 것이 아이들 보기에도 안 좋은 것 같아 포기했으나 섭섭한 마음은 금할 길이 없었다.
덕분에 이제는 아내와의 이혼이 엄연한 사실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특히 돈 문제에서는 한 푼의 양보도 없는 전 아내의 냉정한 태도를 보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들이 결혼도 했으니 전 아내를 배척할 필요까지는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게 느슨했던 마음이 냉수 마시고 정신 차린 계기가 된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아들딸 결혼식을 대비해서 미리 돈을 떼어놓아야 한다는 아내의 속셈은 신의 한 수였다. 주변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면 전 아내는 필자를 가능한 한 빈털터리로 내보내면 얼마 안 가 못 버티고 항복하고 다시 들어올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아직 딸이 출가 전이다. 제 말로 결혼은 필수가 아니라니 결혼할 의사가 없는 듯하다. 아빠로서 결혼을 강권하고 싶지도 않다. 스스로 알아서 할 일이다. 더구나 제 힘으로 벌어 이미 그럴듯한 아파트 한 채도 사놓았다. 필자가 18년 전에 남긴 결혼 비용 5000만원을 얼마나 불려놓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더 큰 아파트로 이사 가는 데 보태라고 했다. 그러나 요즘 같은 세상에 재테크에 밝은 똑똑한 딸이나 신의 한 수를 두었던 전 아내가 이 방면에 해박하니 알아서 할 일이다.
최근에 남편 친구 자녀의 청첩장을 받고 우리 부부는 깜짝 놀랐다. 이제 부모님들의 나이가 거의 고희를 넘어서 자녀들의 결혼도 거의 끝나 가나 했는데 아직도 시키지 못한 자녀들이 많은가 보다. 요즘은 하도 결혼 연령이 늦어지니까 작은 결혼이라고 해서 부모님 친구들에겐 알리지도 않고 신랑 신부 친구들만 부르기도 한단다.
우리 젊었을 때는 맞벌이가 흔하지 않아서 남자는 물론 돈 벌이를 원칙으로 하지만 여자는 결혼을 하면 가정을 지키기 위해 당연히 사표를 던지던 시절이라, 여직원의 청첩장이 곧 사표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회사에서 혹시 어느 여직원의 결혼설이 있으면 그 자리를 누가 메꾸나 하는 것이 커다란 관심사였다.
그러나 당시의 외국인 회사는 예외였다. 결혼을 해도 여직원이 능력만 있다면 계속해서 직장에 다닐 수 있어서 그 때에도 외국 회사는 여성들에게 아주 인기가 많았다.
당시 한국에는 일본을 선두로 많은 외국 기업이 한국에 지사를 내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일본어를 비롯한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고급 여성 인력을 많이 필요로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여성들이 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해도 외국인과 실제로 대화해 본 적이 없는 한마디로 교과서 영어라 외국인 지점장들은 맘에 드는 비서를 구할 수가 없었다. 당시에는 ‘해외 여행 자유화’가 되기 전이라 외국 언어 연수는 커녕 지금은 흔해진 외국 여행 한 번 해 본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외국인은 학교 추천으로 비서를 구했는데 일을 시작해 보니 자기 말인 영어를 거의 못 알아 듣고 웃기만 해서 smile secretary 로 불렀다는 소리도 들었다.
당시엔 스마트 폰은 물론 컴퓨터도 없던 시절이라 외국인 비서의 중요한 업무는 보스의 영문 편지를 타자로 치는 일이었다. 우선 보스가 자필로 쓴 편지를 타자로 쳐서 깨끗하게 문서로 만들어야 하는데 보스들이 글씨들 흘려 쓰는 일이 많아서 알아보기가 쉽지 않았다. 얼마 지나면 그건 익숙해진다 하더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오타 하나 없이 편지를 타자로 친다는 건 매우 어려웠다. 치다가 틀리면 다시 치기를 몇 번을 하는 적이 당연히 많았다.. 지금은 워드로 모든 문서를 편집 하니까 편지의 일부를 오리든지 복사하고 고치고 붙여 넣기를 할 수 있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때는 하루 종일 타지를 치다 보면 어깨가 너무 아퍼서 진통제를 먹어야 할 지경이었다.
또 겨우 끝을 냈다고 하더라도 보스의 마음이 바뀌거나 상황이 바꾸면 수정을 못하니까, 처음부터 다시 타자를 쳐야 했다. 그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또 가끔 보스의 말을 잘 못 이해해서 실수를 하는 일도 많았다. 비서 초보자의 경우 보스가 two copy, please 했는데 two coffee 로 알아듣고 커피 두 잔을 가져가는 실제로 발생하곤 했다.
당시로서는 흔하지 않은 외국 생활을 잠깐이나마 하고 돌아온 필자는 그 때 원하는 대로 직장을 구할 수 있었다. 워낙 자리는 많고 영어 회화를 할 수 있는 여성 인력이 없어 대기업. 외국회사. 대사관 같은 곳 중에서 맘에 드는 조건을 골라서 직장을 구할 수 있었다.
요즘 젊은이들이 일자리가 없어 힘든 시간을 보내는 걸 보면 우리가 살았던 젊은 시절이 태평성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 집의 식사 담당은 다른 보통 집과 달리 남편이다. 이유는 필자가 10여년 전 뇌졸중으로 쓰러져서 몸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맞벌이로 직장을 다니던 필자가 10여년 전 어느 날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진 것이다. ‘
필자가 쓰러지던 그 때는 지금처럼 TV 건강 프로그램도 많지 않아서 건강 상식이 풍부하지 않았고, 뇌졸중이 뭔지도 잘 모르는 상태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가 회복은 했으나 후유증으로 지금까지도 몸의 왼쪽이 힘이 없고 불편한 상태이다.
주부인 필자가 쓰러지자 우리 가정 생활은 즉시 여러 가지로 비상 사태가 되었다. 세끼 식사는
물론 각종 세금 납부나 은행 문제 처리에 대하여, 남편이 하나도 모르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필자가 남편의 정년 퇴직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쓰러졌는데, 대학 4학년 때 서울의 mbc 방송국에 아나운서로 입사해 중간에 PD로 전환해서 평생을 일했던 남편은 퇴직하자 마자 필자 대신 집안 일을 책임져야 하는 전업 주부로 직업을 바꾸어야만 했다.
발병 이후로 우리 집엔 하루 세 시간씩 도우미 아줌마가 와서 밑반찬도 해주시고 여러가지 집안 일도 도와 주신다. 신앙심이 매우 깊은 아줌마는 우리를 도우러 오시는 걸 커다란 기쁨으로 여긴다고 한다. 도울 수 있는 체력이 있는 것이 고맙고, 또 남을 도울 수 있으니 기쁘다고 한다.
며칠 전 도우미 아줌마가 못 오는 일요일 아침, 일찍 잠을 깬 남편이 어묵탕을 준비 했나 보다. 어묵 반찬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필자는 아침이라 입 맛이 없어서 맛있게 먹어지지 않는데 남편은 나의 입만 바라보며 맛이 어떠냐고 묻는다. 물론 자기의 요리 솜씨를 자랑하고 싶어서인 걸 안다. 이성으로는 모처럼 남편이 애 쓰고 준비한 음식이니 맛있다고 대답을 해야 하는데 하고 생각하면서도 실제 대답은 ‘그냥 오뎅 맛이네요’로 나오고 말았다.
자기 요리 칭찬을 잔뜩 기대한 남편이 나의 대답을 듣더니 그 동안 쌓였던 나에 대한 불만을 털어 놓으며 본격적으로 화를 내기 시작한다. 요리도 못하는 주제에 입만 기관장 급이라고 하면서….
그 날 하루 내내 우리는 기분이 상해서 세 끼를 침묵 속에서 어렵게 식사를 해야 했다. 화가 많이 난 남편에게 말을 붙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월요일에 도우미 아줌마가 일찍 오셨는데, 오자마자 남편은 아줌마한테 찰싹 붙어서 어제 자기가 한 요리에 대한 신퉁치 못했던 반응을 보고하면서 필자의 배려 없음을 불평한다.
이야기를 듣던 아줌마가 “언니를 (필자보다 10년 쯤 어린 아줌마는 날 언니라고 부른다) 그냥, 내 쫒아 버리시지 그러셨어요” 하며 100% 남편 편을 들어 준다. 물론 필자를 위한 작전인 걸 나는 과거의 경험으로 안다. 남편이 어디로 내쫓을까요? 하고 묻다가 웃음 바가지가 터져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아줌마의 지혜로 우리 집 부부 싸움은 쉽게 끝이 났다. 7년 가까이 우리 집안 일을 돕고 있는 아줌마는 우리 부부의 다툼을 조정하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 그녀의 남편은 우리 동네 교회의 장로 일을 맡고 있는데 그녀 자신도 물론 독실한 신앙인이다. 평소에도 아줌마는 우리 집의 소소한 부부 싸움의 전문 조정관이다.
많은 퇴직 부부가 그렇겠지만 별 일 없으면 하루 종일 집에서 둘이서만 시간을 보내는 우리 부부는 아들의 표현대로 ‘잘 놀다가도’ 말다툼을 자주 한다. 주로 말이 주는 상처로 다툼을 하는데 한번은 나더러 마약쟁이처럼 커피를 마셔댄다고 해서 며칠 동안 말을 안하고 지낸 적도 있었다. 물론 몸이 약한 필자를 위해서 커피를 줄이라고 하는 말인 줄 다 알지만 같은 말이라도 마약쟁이가 뭐란 말인가? 결국 남편의 사과로 다툼은 끝이 나고 말았는데 그 후로 남편이 말을 조심하려고 애를 쓰는 것이 눈에 보인다. 결국 나이들수록 서로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말조심을 해야 한다는 걸 깨달은 사건이었다.
우리 부부의 이런 말다툼이 있을 때마다 외부 사람의 출입이 거의 없는 현재의 우리 상태에서 아줌마의 조정은 필수적이다. 아줌마는 적절하게 양 쪽의 편을 들어주어서 우리의 다툼을 끝나게 한다. 그녀의 그런 모든 능력은 그녀의 깊은 신앙심에서 나온다는 걸 우리 부부는 누구보다도 잘 안다.
≪stick to it≫이란 책은 애경그룹 장영신 회장이 쓴 책이다. 애경그룹은 작은 비누회사에서 시작하여 오늘날 항공, 화학, 유통 등으로 발전했다. ‘stick to it’의 뜻은 ‘분발하다’, ‘힘 내!, 포기하지 마!‘라는 뜻이다.
새 정부가 내각에 여성을 대거 등용시키려는 움직임이 보인다. 왜 여성이 등용되어야 하는지 이 책을 읽어 보면 도움이 된다. 장 회장은 흔히 얘기하는 금수저도 아니다. 집이 가난하여 대학에도 가기 어려웠으나 극적으로 국비 장학생으로 미국에 유학을 갈 수 있었다. 천신만고 노력 끝에 무사히 졸업하고 이제는 도움을 줬던 미국 대학에 도움을 주는 사람이다.
장영신 회장은 1936년생으로 1970년 남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애경그룹의 경영을 맡게 되었다. 그전에 경영자 수업을 받은 적도 없고 대학시절에도 화학을 전공했으므로 경영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다. 집에서 아이나 키우며 살림하던 여자였다. 장회장이 경영 일선에 나설 무렵에는 여성 경영인이 드물 때였다. 철저히 남성 위주의 기득권 세력이 우리나라 경영을 좌지우지할 때였다. 심지어 애경 그룹 내에서도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이 있던 시절이었으므로 여자가 경영 일선에 나선다고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고 한다.
장회장은 개척자 적인 정신으로 여성 경영인의 길을 걸었다. 단순직을 하는 여사원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룹을 통솔하는 그룹 회장의 길을 걸었다. 회사 일에 전혀 아는 것이 없다 보니 몰래 회계학원에 다니면서 회사 일을 배우기도 했다. 회사 내에서는 남자들과 경쟁하고 밖으로는 남자 우위의 사회에서 남자 대 여자로서 싸우며 자신의 길을 걸어가서 성공했다.
가장 힘든 일이 접대 문화였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접대는 술을 따라 다니므로 여자로서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남성 위주이다 보니 술 문화에 적응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반면에 여성 회장이기에 여성다운 발상으로 애경을 성장시키기도 했다. 저자극성 우유비누를 출시한 일이라든지, 화장을 지우는 클렌징으로 화장품 업계에 뛰어 든 일 등은 여성 회장이어서 가능했을 것이다.
장회장은 같은 여성들에게도 여러 가지 충고를 했다. 대체로 여성들은 쉬운 일만 하려고 한다든지, 그러다가 승진 때가 되면 차별한다고 불만을 터뜨리는 일, 책임감 없이 직무에 임하는 자세 등에 대해 고쳐야 할 점으로 지적했다. 혼자 일하려거나 짜증을 부리는 행위 등 남자 사원 다루는 방법 등에 대해서도 좋은 충고를 했다.
요즘은 맞벌이가 당연한 일이고 여성도 남성과 똑 같이 경쟁한다. 결혼 전 입사했다가 적당히 쉬운 일만 하다가 결혼하면서 퇴직하던 시절이 아니다. 다시 복직해서 고위직을 향해 퇴직 때까지 매진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남자에게 지지 말아야 한다. ‘남자처럼 생각하고 여자처럼 일하라’는 말이 와 닿는다. 외국어 하나는 확실히 해두라는 말도 중요하다. 석유파동 때 침몰해가던 회사를 영어 덕분에 정공법으로 미국 회사에 찾아 가 활로를 찾은 일은 영어에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회상한다.
신접살림을 따로 차려 살던 맞벌이 아들 내외가 아기가 태어나자 혼자 사는 시어머니 집으로 들어왔다. 당연히 손자 보는 일은 시어머니 몫이 되었다. 손주가 자라서 아장아장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느 날 한눈판 사이에 손자가 의자에 부딪쳐 작은 멍울이 생겼다. 시어머니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며느리가 퇴근하자 손자가 의자에 부딪쳤던 일을 이야기했다. 그 순간 며느리의 손바닥이 시어머니의 뺨을 후려쳤다. 갑작스럽고 황당한 일에 시어머니는 어이없어하며 꾹 참았다. 화를 속으로 삭이고 있던 시어머니는 밤늦게 아들이 집에 오자 자초지종을 말했다. 그러자 아들은 “어머니가 잘못 했네요!” 했다. 아들의 태도에 어머니는 울화통이 치밀고 말았다. 그 후 어머니는 자기 명의의 집을 아들 내외에게 알리지 않고 팔아버린 뒤 가출했다. 쉽게 상상이 안 되는 이야기이지만 실화다.
조직에서든 가족 간이든 인간관계를 하다 보면 이처럼 화가 나는 상황이 자주 있다. 특히 자존심이 강하고 고집이 늘어나는 시니어들은 화가 더 자주 날 수 있다. 이럴 때 어떻게 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위의 사례에 나오는 시어머니처럼 속으로 참고 견뎌야 할까? 며느리랑 똑같이 공격적으로 대해야 할까? 물론 며느리의 손찌검은 누가 봐도 잘못된 행동이지만 그 사람만의 화를 푸는 방식일 수도 있다. 대화 기법을 가르치는 전문가에 따르면, 화가 났을 때 일반인들에게서 보이는 모습은 크게 3가지란다. 즉 소극적, 공격적, 중립적인 모습이다. 위의 사례에 나오는 시어머니의 태도는 화를 삭이는 소극적인 모습이고 며느리처럼 화를 참지 못하고 감정적으로 반응을 보이는 태도는 공격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다. 두 가지 모습은 다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 없다. 화를 삭이는 동안의 스트레스는 건강을 해칠 우려가 있고 화가 점점 더 치밀어 참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면 공격적인 모습으로 돌변하게 된다. 시어머니가 아들 내외에게 알리지도 않고 집을 팔아버렸듯 말이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쥐는 고양이에게 달려든다. 상황이 악화일로로 치닫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방법은 간단하다. 소극적이지도 않고 공격적이지도 않은 중립적인 태도가 바람직하다. 위의 사례에 나오는 며느리처럼 주먹이 먼저 나가서는 절대 안 된다. 감정을 가라앉히고 말로 표현을 하여 화를 풀고 상대를 이해시켜 좋은 관계를 이어감이 좋다. 전문가들도 그렇게 권유한다. 중립적 대화 방법에는 “자기표현법(I-Message)”이 있다. 우리는 화가 났을 때 “참는 것이 좋다”는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참을 인’ 자 세 번이면 살인도 피한다는 말이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자기표현법은 감정을 꾹꾹 억누르지 말고 표현하라고 가르친다. 물을 끓이는 주전자에 구멍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구멍을 뚫어 압력을 외부로 내보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자기표현법이다. 그렇게 압력을 내보내듯이 표현을 하면 속에서 부글부글 끓던 분노가 가라앉는다.
우리는 대체로 화가 났을 때 상대를 주어로 표현한다. “당신은 왜 그 모양이요? 그래서 아이들이 따르겠어요?” 또는 "당신은 안 그래요?" 대화의 주어가 주로 상대방에 맞춰져 있다. ‘자기표현법’은 대화의 주어를 자신으로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상대방을 공격하거나 감정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감정을 표현하게 되므로 중립적인 태도가 된다. 감정이 극에 달했을 때 사용하는 말들을 생각해보면 대체로 상대방을 주어로 하고 있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여보, 당신은 그 문제를 왜 나와 상의 없이 처리했어요?”를 “여보, 당신이 그 문제를 나와 상의 없이 처리하니 내가 섭섭합니다”로 주어를 바꿔 말해보면 어떨까?
특히 시니어들은 살아오면서 터득한 지혜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될 수 있으면 건드리려고 하지 않고 참으려 한다. 다른 사람에게 불만이나 갈등이 있을 때, 그 내용을 표출하면 불만의 원인은 해결되지 않아도 불만의 90%는 해소된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갈등으로 화가 났을 때 참는 것만이 최선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자. 중립적인 태도로 불만을 표현하고 스트레스를 줄이자. 다만 이때 자기표현법을 사용함으로써 상대방의 감정을 건드리지 않고 대화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바로 브라보 라이프의 길이기도 하다.
오늘은 어버이날이다.
효도를 바라보는 관점에 있어서 부모 세대와 자녀 세대 간 인식 차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 효도를 하여야 하고, 받아야 하는 입장에 선 시니어들은 고민이 깊어간다. 즐거워야 할 가정의 달에 설ㆍ추석 명절 스트레스처럼 ‘가정의 달 스트레스’를 어깨에 짊어진 안타까운 현실이다.
부모들은 자녀들이 오면 반갑고, 가면 시원하다고 한다. 효도를 받는 입장에서는 이처럼 전통적인 혈연ㆍ정서적 의미의 효도를 바라고 있다. 필자는 쌍둥이 손주와 외손자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입이 귀에 붙는다. 옛날 할아버지ㆍ할머니께서 손자들에게 내리 사랑하셨던 것처럼 손주가 있는 자체가 축복이다. 뺨을 비비고 껴안아주면서 따뜻한 체온을 느끼는 것이 행복이다.
효도를 하는 입장인 자녀 세대는 용돈, 비상시 목돈 등 부양료 지급 등을 우선순위로 꼽아 경제ㆍ물질적 지원 의미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 지금의 세태다. 지금은 맞벌이하지 않으면 살기 어려운 형편이다. 숨 가쁜 직장생활과 고달픈 육아 등으로 부모가 원하는 효도의 실천이 쉽지 않다. 시니어 세대처럼 전업주부는 꿈꾸기 어려운 옛 이야기가 되었다. 오히려 시니어는 손주들을 돌보는 일을 즐거운 마음으로 도맡아야 주어야 한다. 이것이 정서적 교감을 하는 좋은 계기가 된다.
자녀 세대가 효도를 바라보는 관점이 변화하는 것을 단순히 물질만능주의로 해석해서 안 되는 것이 현실이다. 빛의 속도로 변하는 세상에 효도의 개념도 변하고 있음을 속히 인식하여야 한다. 자녀들이 부모가 필요할 때 미리 알아서 티 나지 않게 보살펴주는 지혜를 익혀야 한다. 내가 필요하다고 부르거나 찾아가는 일을 삼가야 한다. 그들은 시니어보다 더 어렵게 살고 있다고 이해하여야 한다.
부모로부터 재산을 물려받은 자식이 그 후에는 부모 봉양을 나 몰라라 해서 결국 효도계약서까지 쓰는 게 세간의 화제였다. 효도의 정도에 따라 자식을 차별하여 상속분쟁ㆍ폭탄이 터져 풍비박산한 경우도 종종 보아왔다. 부모와 자식 세대 간 갈등이 계속 늘어나자 국회에서는 불효자방지법이 발의돼 계류 중이다. 아무리 법으로 효도와 부양 의무를 규정하더라도 효도의 총량을 수치적으로 정의할 수는 없다. 부모와 자식이 평상시 대화를 통해 인식의 차를 좁혀 가는 게 가장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