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의 레이블은 우리의 주민등록증과 비슷한 것이다.
와인의 출생을 비롯한 정체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민등록증을 마음대로 위조하거나 변경할 수 없듯이, 레이블에 기입하는 사항들은 엄격한 법적 규제를 받는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주민등록증의 경우 한 번 기입된 내용에 대해서는 임의로 고치거나 가감을 할 수 없지만, 와인 레이블의 경우는 시음 조건이나 음식 매칭에 관한 내용과 같은 법적 규제를 받지 않는 사항에 대해서는 생산자나 네고시앙들이 임의로 첨가할 수 있다.
레이블은 1760년경 보르도에 최초로 등장했다. 당시는 병목에다 끈으로 묶은 것이었다. 이전 시대에는 레이블도 존재하지 않았지만, 오늘날 보는 것과 같은 병도 없어, 오크통째로 판매를 하든지, 아니면 소비자가 2~3ℓ짜리 작은 나무통을 들고 와 양조장이나 매장에서 와인을 받아갔다. 우리 어린 시절 주전자를 들고 술도가에 가서 막걸리를 사오던 것과 흡사하다. 레이블은 1818년 보르도에서 처음으로 인쇄되었으며, 지금처럼 병에다 직접 붙이는 것도 이와 비슷한 시기에 시작되었다. 그리고 레이블에 반드시 명시해야 하는 법적 의무규정이 실시된 것은 20세기 후반에나 들어서이다.
그렇다면 어떤 내용들이 기입해야 하는 의무규정에 포함되는가? 여기서는 와인 레이블의 원조국이자 그 밖의 모든 와인 생산 국가에서 기본 모델로 받아들인 프랑스 와인의 레이블을 살펴본다. 레이블에 의무적으로 기입해야 하는 항목은 총 8가지다, 그중 하나(납세필증)는 우리에게 익숙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조만간 등급에서 사라질 우등 한정 와인(AOVDQS)에만 적용되니, 7개 조항이라 하는 게 더 현실적이라 하겠다.
▶ 프랑스 와인의 레이블
① 병입한 사람이나 양조장 이름과 주소
② 알코올 도수(%)
③ 양(ml)
④ 와인의 법적등급(AOC, 뱅 드 페이, 테이블 와인)
⑤ 생산국가
⑥ 생산 일련번호(No du Lot)
⑦ 보건과 위생관련 사항(아황산함유 여부나 임신부에 대한 경고 등)
모두가 와인의 내용을 파악하는 데 유용한 정보들이다. 특히 ①은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법적 책임의 소재를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이 밖에도 레이블에는 법적 의무규정이 아닌 다른 많은 내용들이 적혀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가장 흔한 것으로 생산년도(빈티지: 포도수확 년도 기준), 샤토, 도멘느, 크뤼, 세빠주 등의 명칭과 메달 수상 내용 등이다. 모두가 와인의 특성을 가늠할 수 있는 직·간접적인 정보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와인을 구매하기 전에 꼼꼼히 살펴볼 가치가 있다. 사용한 세빠주의 경우는 향, 맛, 산도, 타닌 등 그 와인의 특성을 가늠하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빈티지는 그 해 생산한 와인의 일부 특성과 보관기간 등에 대한 암묵적인 정보를 담고 있다. 샤토, 도멘느, 크뤼 등도 와인에 대해 보다 세부적인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단서가 된다. 예를 들어 보르도보다는 메독이, 메독보다는 뽀이약이, 그리고 뽀이약보다는 샤토 라투르가 보다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와인의 특성과 등급을 일러준다.
그러나 레이블에는 소비자를 현혹하는 내용도 많으니 읽을 때 특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특히 메달의 경우가 그러하다. 올림픽이나 세계대회에서 수상하는 메달과는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와인 경연대회에 출품한 30% 이상의 와인에 메달을 수여하는 것이 관례이므로 파리 와인 경연대회, 마콩 와인 경연대회, 세계 리슬링 경연대회 정도에서 획득한 것이 아니라면 특별한 의미를 둘 필요는 없다. 참고로 와인 경연대회는 그 수도 많고 종류도 많다.
또한 ‘상급의’(supérieur), ‘예약된’(réservé) 등에다 ‘특별한’(spécial)이란 화려한 수식어가 붙기도 하는데, 대부분 상업적 미사여구에 지나지 않으니 무시해도 된다. 자신이 생산한 와인에다 좋지 않은 문구를 붙일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단지 병입에 대한 정보는 주조에서 숙성은 물론 병입까지 동일한 와이너리에서 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와인의 질, 특히 원생산지를 가늠할 수 있는 하나의 기준이 될 수 있다. 그만큼 책임감을 갖고 정성을 들여 만들었다고 해석해도 무방하다. 그 밖에도 와인의 특성, 즉 향과 맛 등에 대한 내용을 하나같이 미사여구로 설명해 놓은 두 번째 레이블을 병 뒷면에 붙이는 것도 최근 들어 유행하고 있는데, 마시기에 적정한 온도나 매칭이 잘되는 음식 그리고 마시기에 적절한 시기 정도를 제외하면 거의 소설이나 다름없다고 보면 된다.
와인에서 레이블은 얼굴이다. 화장을 잔뜩 하고 사람을 현혹하는 것도 있고, 수수한 맨얼굴을 지닌 것도 있다. 최근 들어서는 와인의 레이블에도 일대 혁신이 일어나고 있다. 특히 브랜드 와인이 등장하면서 레이블의 내용은 물론 디자인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원산지를 최우선으로 하는 주로 수수한 레이블을 붙이고 있는 떼루아 와인에 비해, 브랜드 와인은 와인의 특성을 드러내는 독특한 디자인과 화려한 색상으로 소비자의 눈을 사로잡는 데 주력하고 있다. 예를 들어 ‘So Fruity’, ‘부드러우며 꽃 향이 나는’ 등의 문구를 레이블에 눈에 띄게 크게 넣어 소비자로 하여금 와인의 맛이나 향에 대한 선택을 쉽게 하도록 도와준다. 심지어는 팩이나 알루미늄 캔에 담아 판매하는 와인도 등장하고 있으며, 이들 와인은 팩이나 캔 위에 우유나 맥주처럼 화려한 레이블을 직접 인쇄하기도 한다. 미국에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고 있는 부르고뉴의 다이내믹한 네고시앙인 장-클로드 부와세(Jean-Claude Boisset)는 ‘French Rabbit’이란 상표 와인을 다분히 희화적인 디자인을 한 팩에다 담아 판매해서 성공한 경우다. 여성들의 와인 구매가 급증하면서, 당연히 여성들 취향에 맞춘 병이나 레이블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무통-로칠드의 레이블은 그것 자체를 수집하는 사람들이 생길 만큼 하나의 예술 작품이다. 해마다 세계적인 유명 화가의 그림을 레이블에 붙이는 호사를 누리기 때문이다.
레이블은 와인의 얼굴이고 ID다. 그래서 와인의 수만큼이나 다양하고 많다. 소비자의 변화하는 취향에 맞춰 새로운 와인이 탄생하는 것처럼, 새로운 레이블도 탄생한다. 조금 깊이 음미하면서 레이블을 쳐다보면, ‘와인이 가득찬 병 위에서는 비자처럼 희망적이고, 텅 빈 병 위에서는 유공자 기념비에 새겨진 비문처럼 비장’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와인의 레이블은 마시기 전에, 즉 ‘구두시험을 통과하기 전에 치러야 하는 필기시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글 장홍와인누리 대표
성균관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에서 국제관계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프랑스 알자르 소믈리에협회 준회원이며, 등 다수의 저서를 펴냈다.
사회학적 측면에서 살펴본 와인, 인류역사 속 와인의 의미와 파워, 예술 인문학을 통해 본
와인 등에 대해 강의도 진행하고 있다.
공가는 함께 공(共)과 집 가(家)로 ‘비어있던 집에서 함께하는 집으로’ 라는 슬로건을 걸고 사회적 목적을 추구하는 공유주택을 말한다.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집 다오~ 어린 시절 동무들과 놀이터에서 모래밭에 한 손을 묻고 다른 손으로 토닥이다가 살짝 손을 빼면 작은 동굴 같은 공간이 만들어지는 놀이를 했다. 그 놀이를 하면서 우리는 두꺼비에게 헌 집 줄 테니 새집을 달라고 노래를 하며 놀았다. 무슨 연유인지 몰라도 어쨌든 두꺼비는 집과 관련 있는가 보다.
요즘 주거는 아파트가 대세이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층수가 올라가는 아파트는 그 동네의 랜드마크로 많은 사람이 살고 싶고 갖고 싶어 하는 재산이 되었다. 어릴 적 아파트가 개발되기 전 우리나라는 단독주택에 작으나마 마당 딸린 집이 대세였다. 거기에 이 층이나 삼층집이면 부잣집이라고 했다.
요즘은 모두들 편리한 아파트를 선호해 이사를 하거나 결혼한 자녀가 집을 떠나 단독주택에는 노부부만 남기에 그들도 살기 편한 아파트로 주거를 옮기는 가구가 많아졌다고 한다. 그래서 생활하기에 힘든 불편한 변두리 작은 주택은 그만 비어서 방치되는 집이 많이 생겨났다.
관리가 안 되는 집이 늘면서 범죄위험도 늘고 지역공동체에 위협이 되기도 하니 이런 집을 수리해 집이 없는 청년들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빌려주는 ‘두꺼비하우징’ 이라는 사회적 기업이 생겼다. ‘두꺼비하우징’은 LG전자와 LG화학의 지원을 받아 도심 곳곳의 비어서 방치된 주택을 찾아 집주인과 계약을 하고 수리해서 살 곳이 없어 힘든 젊은이들에게 빌려주는 셰어하우스를 만들기로 했다. 도시의 역사를 그대로 담았지만, 지금은 낡아서 아무도 살지 않는 집들에 생기를 불어넣어 춥고 불편했던 집을 아늑하고 따뜻한 공간으로 고쳐 사람이 살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집주인과는 6년간 한 달에 월세로 120만 원을 주기로 계약하고 입주청년들에게서는 시세보다 저렴한 20~30만 원의 임대료를 받아 서로 윈윈하는 방식이다. 필자는 사회적기업을 방문해 그들의 하는 일을 체험해 볼 기회를 가졌다. 은평구의 마당이 딸린 이층집이 막 수리를 끝내고 있었다.
오래 비었던 집이라 손 볼 곳이 많았다는데 지금은 깔끔하고 아늑한 이층 양옥으로 변신했다. 작지만 마당에는 테이블과 의자가 있어 정다웠고 새집 냄새가 나는 현관을 통해 들어가니 깨끗한 거실과 주방, 그리고 일인실, 이인실로 꾸며진 방이 있었다.
이 집은 일 층과 이 층에 모두 9명이 거주하도록 지었다고 한다. 주방과 욕실은 공용이고 전기요금, 가스요금, 수도요금 등 관리비는 공통으로 나누어 낸다. 누군가 에어컨 같은 가전제품은 설치하지 않는지 질문을 던졌다.
두꺼비하우징 대표님은 그 문제는 입주민의 상의가 있어야 할 것이라는 답을 했는데 찬 바람을 싫어하는 사람과의 형평성 때문이라고 했다. 그때 동행하신 사회적기업을 지원하는 LG 직원께서 만약 에어컨을 설치하게 되면 꼭 자사제품을 써달라고 애교스럽게 말을 해서 모두 한바탕 웃었고 회사를 사랑하는 마음이 전해진다며 칭찬도 했다. 이곳의 계약 기간은 기본 6개월 이상이며 담당자와 협의를 통해 계약 기간을 정한다고 한다.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자동 연장되고 이사하고 싶으면 계약종료 1개월 전에 퇴실 의사를 말하면 된다.
필자가 본 은평구의 아담한 이층주택은 모든 시설이 설치되어 있었다. 침대, 책상, 주방시설, 세탁기 등 필요한 건 이미 다 있으므로 이불만 준비해서 입주하면 된다니 형편이 어려운 청년에게 매우 편리하고 좋은 조건이라는 생각이다.
‘두꺼비하우징’은 함께 사는 것의 힘을 알고 마을 만들기를 통해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것을 도우며 주거를 통해 사회를 고민하고 지속 가능한 도시를 만들어가는 도시재생 전문 사회적 기업이다. 이런 사회적 기업을 지원하는 대기업이 더 많이 늘어날수록 우리나라가 안정되고 발전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사회적 기업의 도움을 받아 저렴한 월세로 모여 살게 될 젊은이들을 생각하니 흐뭇하다. 각자의 일을 마치고 들어와 하루의 수고를 위로하며 맥주 한잔으로 우정을 다지는 모습을 상상하니 기분이 좋아지고 그들의 앞날이 환히 빛나기를 응원해 주고 싶다.
(‘두꺼비하우징’의 홈페이지는 www.toadhousing.com이다.)
이 시대에는 ‘재치 코드’가 중요하다. 사람 사이에서건 비즈니스에서건, 공익 캠페인에서건, 댓글 하나에서건, 방송에서건, 재치 코드가 있어야 호감과 각광을 받는다. 비즈니스 마케팅에서나 방송에서나 공익 캠페인에서나 재치 코드의 파워는 점점 커지고 있다. 재치와 위트가 있다는 것, 이건 모든 능력에 플러스 알파로 작용한다.
기본 능력 플러스 재치 코드가 있으면 더 빛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재치 코드가 ‘억지로 유머를 외워서 말해주기’를 뜻하는 건 아니다. 억지로 웃는 유머도 아니다. 억지스러운 유머는 오히려 비호감이다.
재치 감각과 재치는 이제 경쟁력이다. 재치는 지금의 시대 코드가 되었다. 재치는 메시지의 마지막 2%를 채우는 힘이다. 핵심 메시지를 정통으로 날려주는 마지막 2%의 힘이다. 재치로 마지막 2%를 채운다면, 메시지의 설득력에 날개를 달게 된다. 다른 사람의 웃음을 끌어낼 수 있는 사람은 협력과 지지도 쉽게 끌어낸다.
SNS에서 재치와 촌철살인은 이 시대의 키워드가 되었다. 지루한 설교는 이제 먹히지 않는다. 유머 감각을 갖춘 촌철살인이 없이 주목받을 수 없다. 복잡하고 어려운 상황도 재치를 섞은 메시지로 전달하면 부드럽고 친밀감 있게 전달된다. 그리고 재치가 섞인 메시지는 오래 기억에 남는다. 밋밋한 메시지를 생생하게 만드는 것이 재치다. 주제와 관련된 촌철살인의 재치를 던질 때, 그 메시지를 듣는 사람들은 친밀감을 느끼고 속이 시원해진다. 적절한 타이밍에 적절하게 구사하는 재치는 전체 메시지를 기억에 오래 남게 만든다.
예전에 무상급식 서울시 주민투표 찬반 투표율이 25.7%여서 오세훈 시장이 사퇴했다.
이때 당시 홍준표 한나라당 대표가 이를 두고 ‘사실상 승리’라고 언급하자 이후 ‘사실상 ~’ 패러디가 인터넷에서 봇물 터지듯 나왔다. “25.7% 세일이면 사실상 공짜” “에베레스트 25% 올라가면 사실상 정복” “25.7% 투표율이 사실상 승리라면 파리도 사실상 새라고 봐야 한다”.
“앞으로 선거 2등도 ‘사실상 당선’으로, 고득점 대학 불합격자도 ‘사실상 합격’으로, 최종면접에 떨어지면 ‘사실상 취업’이라 부르며 살자” “등록금도 25%만 내면 사실상 완납한 걸로 합시다”등이었다. 사회 이슈에 대한 이런 촌철살인의 비유는 매일 수없이 나온다.
‘재치’의 반대 개념은 뭘까? ‘뻔함’, ‘구태의연함’이 되겠다. 으례하는 말씀, 흔히 듣는 이야기, 이런 것들이 구태의연한 메시지다. 길고 지루하게, 요점이 어디인지 알 수 없도록 써놓은 글이나 말을 접할 때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무슨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하는 것인지, 당사자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을 때가 있다. 유머의 힘은 크다. 연설을 하거나 강연, 프리젠테이션을 할 때 일단 청중을 웃도록 만들면 반은 성공이다.
웃음으로 하나가 된 후에 사람들은 경계심이나 반감을 누그러뜨린다. 같이 ‘하하하’ 웃고 나면 친밀감은 급속도로 증가한다. 미국의 CEO나 정치인들의 강연이나 연설을 들어보면 늘 유머가 등장한다. 유머가 없는 연설은 지루하기 짝이 없고, 유머를 구사할 줄 모르는 CEO나 정치인들은 좋은 평을 듣지 못 한다.
연설에서 유머가 빠지면 김빠진 맥주같이 생각한다. ‘무슨 무슨 시리즈’를 읊으라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맞는 가벼운 조크를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들은 한 CEO의 연설은 이렇게 시작했다. “연설은 여성의 미니 스커트와 같아야 합니다. 적당히 길어서 중요한 주제를 커버해야 하고, 적당히 짧아서 주목을 끌어야지요. (Speeches are like women's mini skirts. It should be long enough to cover the important subject, but short enough to keep it interesting)” 이 말을 들은 청중들은 배꼽을 잡고 웃었고, 그 CEO에 대한 호감도는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여성이 들어도 별로 성차별적인 언사라기보다는 ‘연설’에 대한 가벼운 조크로 받아들여지는 유머였다. 그는 적절하게 짧은 연설로 청중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의 연설이 성공적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한 정치가의 말. 한창 사회적으로 논쟁이 되는 이슈에 대해서 기자가 의견을 물었다. “찬성하십니까? 반대하십니까?” 어떻게든 대답은 해야 하는데, 입장을 밝히기가 곤란했던 이 정치인은 유머를 던졌다. “제 친구들 중 일부는 찬성합니다. 제 친구들 일부는 반대합니다. 저는 제 친구들 편입니다. (Some of my friends are for it. Some of my friends are against it. I'm for my friends.)” 난감한 순간을 유머로 슬쩍 피해 가는 것도 능력이다. 정치인의 권모술수라고 매도하기에는 너무나 귀여운 유머 아닌가.
메시지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힘있는 메시지’이고 다른 하나는 ‘힘없는 메시지’이다. 힘있는 메시지를 듣고 나면 “아, 그렇구나” 하면서 공감하게 된다. 힘없는 메시지는 듣고 나도 무엇을 들었는지 알 수가 없다. 들으나 마나 한 메시지다. 공허하고 추상적인 거대한 단어의 나열은 대부분 힘없는 메시지가 된다.
힘있는 메시지는 단숨에 와 닿는 메시지다. 구구절절 오랫동안 설명할 필요가 없다. 한 문장으로 핵심이 전달된다. 이런 것이 파워 메시지다. 상대방을 설득하는 한 줄의 힘은 여기에서 나온다. 짧은 메시지이지만 그 속에 긴 내용이 들어 있을 수 있다. 길고 복잡한 내용을 한 번에 정리해서 가슴에 쏙 와 닿게 전달하는 것이 파워 메시지의 힘이다. 촌철살인의 재치는 그래서 필요하다.
상품 마케팅이나 정치 캠페인은 다 불특정다수를 설득하는 작업이다. 여론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핵심 메시지가 짧고 명확해야 한다. 상품이나 캠페인이 전달하려는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알려야 한다.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야 한다.
재치 코드를 키우기 위해서 가장 쉽고 좋은 방법, 그것도 아주 쉽고 돈 안 드는 방법은 신문 기사의 제목을 유심히 보는 것이다. 매일 읽는 신문 기사로 훈련이 가능하다. 촌철살인의 재치 코드를 감으로 익히고 싶다면 신문 기사를 읽은 다음에 기사의 제목을 꼭 다시 한 번 보라. 가장 쉽게 재치 코드를 익히는 방법이다.
>> 강미은 교수
숙명여대 미디어학부 교수, 전 미국 클리블랜드 주립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
미국 미시간 대학교 커뮤니케이션 박사, 오하이오 주립대학교 저널리즘 석사.
정열과 환희가 넘치는 섬 필리핀 보라카이 섬을 다녀왔다. 눈부신 햇살, 블루레몬에이드 같은 바다, 먹어도 먹어 도 물리지 않는 망고쥬스. 우리가 꿈꾸는 홀리데이 그 이상을 채워줄 보라카이를 소개해 본다.
필리핀은 총 7,107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진정한 다도해 국가로 인도네시아에 이어 세계에서 2번째로 많은 섬을 자랑한다. 그 중에 800여 개의 섬에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때 묻지 않은 천혜의 자연을 가졌다. 특히에메랄드 빛 바다는 필리핀 바다의 상징이다.
필리핀은 크게 3지역으로 나눈다. 북부지방인 루손에는 수도 마닐라가 있어 경제의 중심지고, 남부지방인 민다나오는 불안한 정치로 쿠데타가 자주 일어나는 곳이며, 중부지방인 비사야스는 휴양의 중심지인 보라카이와 세부 팔라완이 있는 곳이다. 필리핀은 지방마다 다른 언어를 사용하며 영어를 공용어로 쓰고 있다. 보라카이에서는 아클란이라는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보라카이 섬! 말로만 듣던 환상의 섬을 가기 위해 현지 공항에서 내리던 순간 필자는 혼란스러워졌다. 공항이 국의 조그만 기차역만큼이나 협소하고 정리돼 있지 않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입국 차도 허술하면서도 무척이나 까다로왔다. 더구나 면세품에 대한 절차가 쓸데없이 엄격해 걸리기만 하면 폭탄 요금을 맞게 된다. 단단히 한몫 챙기려는 술수가 나의 환상여행 첫인상을 장식하고 말았다.
지저분한 공항을 나서자 숨이 막히도록 뜨거운 바람이 불었다. 마중 나온 현지 가이드를 따라 승용차를 타고 섬으로 향한 1시간 20분 동안 편도 1차선으로 이어지는 시가지는 불안의 연속이었다. 빌딩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양쪽 길가로 늘어서 있는 주민들의 옷은 볼품 없었다.
질서 없이 오가는 오토바이 삼륜차가 여기저기서 울려대는 굉음소리도 전율을 느끼기 충분했다. 정신없이 15분 가량을 혼란 속으로 달리다 보면 어느새 제3의 세상 여행객의 세계로 들어선다. 그곳은 바로 옆 블록 이었다. 호텔 앞에 다 달았을 때는 앞서가는 선진국이었다.
진입로에 펼쳐진 원주민의 고된 삶과 이방인들의 부로 형성된 환상의 세계는 그야 말로 묘한 힐링을 선사해주었다. 투명한 에메랄드빛 바다와 끝이 없이 이어진 백사장, 길게 늘어서 있는 키가 큰 야자수, 문만 열면 쏟아지는 에어콘의 시원함, 설탕가루처럼 달콤하고 부드러운 화이트 비치…. 천국이 따로 없었다.아침에는 멋진 부페조식과 숙소 바로 앞에 펼쳐진 수영장에서,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낮에는 맛사지 천국의 각종의 서비스로, 초저녁엔 붉게 물드는 석양과 함께 하는 신나는 뱃놀이와 스쿠버 다이빙이 이어진다. 하늘과 바다를 모두 내것 처럼 맘껏 소유한다. 그리고 육지의 밤에 펼쳐지는 불타는 젊음의 마당에 앉아 그 유명한 산미구엘 맥주 한 모금은 반복되는 일상을 탈출하기에 아주 충분했다.
길게 이어지는 화이트 비치 해변가 주변에는 각종의 현지 식 먹거리들이 즐비해 있고 감동으로 버글 대는 사람들이 미어 터진다. 지상낙원의 섬에서 맛보는 다양한 요리들, 더구나 우리나라 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먹을 수 있다. 밤의 시작부터 깊어질수록 쿵쿵대는 음악소리, 젊음과 낭만이 출렁대는 심장의 소리들이 특별한 추억으로 낮과 밤의 두 얼굴 되어 총천연색으로 해변을 수놓는다.
특히 맛사지를 좋아하는 필자는 전 일정 내내 각종의 스파 서비스를 받았다. 천차만별의 스파가 화려하게 또는 고풍스럽게 전세계 여행객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열심히 달려온 우리 시니어 들에게는 환상의 보답이었다. 살면서 누구나 여행은 선호한다. 모든 게 만사 귀찮을 때는 여행의 참 맛을 느끼는 것도 인생을 사는 한 방법일 것이다. 다 안정된 다음에 라고 하지만 우리 삶에는 안정이란 영원히 오지 않는다고 한다. 다만 다리 떨리지 않을 때 그저 심장이 떨릴 때 그때, 떠나라고 한다. 더 늦기 전 어느 날에 훌쩍 떠나 보는 것도 용기가 필요할까? 이글거리는 자연 아래 조금 타면 어떠랴. 젊음이 들끓는 곳에서 그들과 함께 잠시라도 동행 하는 것, 어차피 삶의 주어진 시간 속에 무거웠던 몸을 맡기고 맛사지 받으며 둥둥 떠보는 것도 시니어 들의 멋진 일상이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며 모든 일정을 끝내었다.
다시 검은 얼굴로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현지인들의 빈곤함을 거쳐 공항으로 향했다. 세상에는 빈부가 함께 공존한다는 진리를 깨달으며 그 또한 삶의 일부이기에 거부할 수 없는 다른 매력을 느끼며 인천공항에 도착하였다. 새삼 느끼는 천국의 행복 대한민국이 필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그 옛날에 초가집이 아닌 고급스러운 저택 같은 곳, 세계 1위인 우리나라 공항이었다. 새삼 깊은 감사와 안도를 느꼈다. 필자가 한국 사람이라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1982년 출범한 국내 프로 야구 KBO 리그 35번째 시즌이 지난 4월 1일 시작했다. MBC 청룡과 삼미 슈퍼스타즈 같은, 이제는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는 구단을 비롯해 6개 팀으로 닻을 올린 KBO 리그는 올 시즌 10개 구단으로 두 번째 페넌트레이스를 펼친다. 대구삼성라이온즈파크와 고척스카이돔이 새롭게 문을 열면서 올해 프로 야구 관중은 800만 명을 바라본다. KBO 리그는 머지않은 장래에 1000만 관중 시대가 열릴 수도 있는 가파른 인기 상승세를 타고 있다.
1군 진입 4년째인 NC 다이노스가 강력한 우승 후보로 꼽힐 만큼 KBO 리그는 변화무쌍한 판도를 보이고 있다. 야구 팬들로서는 흥미진진한 판세다. 그러나 이런 예상은 어디까지나 예상일 뿐이다. 팀당 144경기, 리그 720경기의 장기 레이스에서는 어떤 일들이 펼쳐질지 누구도 자신 있게 내다볼 수 없다. 1982년 프로 야구 원년, 대부분의 야구 전문가들은 삼성라이온즈를 우승 후보로 꼽았다. 황규봉과 이선희, 이만수 등 가장 많은 아마추어 국가 대표 출신 선수들을 거느리고 있었고, 그런 이유로 1982년 3월 27일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프로 야구 개막전에서 MBC 청룡과 겨룰 수 있었다.
그런데 원년 우승은 많은 전문가들이 중하위권 즉 4위 정도로 예상한 OB 베어스가 차지했다. 미국 프로 야구 마이너리그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박철순의 투구력을 간과한 측면도 있지만 프로 야구 시즌 예상은 많은 변수를 안고 있기에 족집게 같은 결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프로 야구 원년 많은 이들의 예상을 깨고 OB 베어스를 초대 챔피언으로 이끈 김영덕이 이번 호의 주인공이다.
김영덕은 1982년부터 1993년까지 OB 베어스와 삼성 라이온즈, 빙그레 이글스에서 감독으로 활동했기에 어지간한 야구 팬이라면, 나이가 그리 많지 않아도 알 만한 인물이다. 그런데 선수로서의 활약상을 아는 이는 많지 않을 듯하다.
필자는 최근 경기도 분당에서 여든을 막 넘긴 나이로 행복한 노후를 보내고 있는 노(老) 감독을 만났다. “교토에 있는 부모님에게 1, 2년만 (한국에서 야구를)하고 돌아오겠다는 말씀을 드리고 떠난 게 반세기가 훌쩍 지나버렸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노 감독의 얼굴에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인연을 맺은 70여 년의 야구 인생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 사이 그의 이름은 가네히코 나가노리(金彦永德)에서 김영덕(金永德)으로 바뀌었다. 가네히코는 본관인 경남 언양(彦陽)에서 따온 성이고 그의 부모는 경남 합천이 고향이다. 한국에 오기 전에 그가 듣고 배운 우리말은 경상도 사투리였다. 28살의 적지 않은 나이에 한국에 왔을 때 땅 설고 물 설은 환경은 둘째 치고 서울 말씨를 알아듣지 못하는 것도 큰 어려움 가운데 하나였다.
1940년대 거의 모든 일본의 야구 소년들이 그랬듯이 김영덕도 초등학교 때까지는 동네 야구 를 하다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본격적으로 운동을 시작했다. 체격도 좋았고 형이 유도 선수로 명문 메이지대학교에 입학할 정도였으니 집안 내력으로 운동신경도 좋았던 김영덕은 나라현(奈良縣)에 있는 즈시가이세이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56년 난카이(南海) 호크스(소프트뱅크 호크스의 전신)에 입단했다. 어려운 집안 사정 때문에 고졸 신인의 길을 택했다. 그 무렵 일본에서도 맏아들은 어떻게 해서든 대학에 보냈다.
3년간의 2군 생활 끝에 1959년 1군에 올라간 투수 김영덕은 그해 6승6패 평균자책점 3.09의 수준급 성적을 올렸다. 이후 한국행을 결정하기 직전인 1963년까지 4시즌 동안 7승9패 평균자책점 3.57의 기록을 남겼다. 청·장년 야구 팬들과 달리 글쓴이에게 김영덕은 감독보다는 선수로 더 익숙하다. 까까머리 청소년 때,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서울운동장 야구장에서 본 키 큰 투수 김영덕의 기억이 워낙 강렬하기 때문이다.
1959년 재일동포학생야구단의 일원으로 모국 방문 경기를 한 뒤 1960년 귀국해 성공적으로 한국 실업 야구(교통부→기업은행)에 적응한 김성근을 보고 김영덕은 큰 용기를 얻었다. 한국 진출을 결심할 무렵 도에이(東映) 플라이어즈에서 활약하고 있던 백인천이 대한해운공사를 소개했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지인이 제일은행도 소개했다. 이런저런 사연 끝에 대한해운공사에 입단한 김영덕은 말 그대로 펄펄 날았다. 야구 올드 팬들은 스리쿼터 투구 폼에서 뿜어져 나오는 날카로운 슬라이더로 타자들을 손쉽게 처리하는 김영덕을 기억할 것이다.
1964년 시즌 실업 야구는 13개 팀이나 됐다. 전해까지 있었던 춘·추계 리그를 없애고 1~4차 리그로 시즌을 운용해 팀당 48경기, 전체 312경기였으니 1982년 팀당 80경기, 전체 240경기를 치른 프로 야구 원년 시즌보다 전체 경기 수가 많았다. 서울운동장과 육군 야구장(용산), 상업은행 야구장(수유리), 인천 야구장, 대구 야구장 등 전국 5군데 구장에서 5월 11일 개막해 10월 18일까지 107일 동안 경기가 열렸으니 사실상 프로 리그였다.
김영덕은 그해 33경기에 등판해 255이닝을 던져 9자책점만으로 0.32라는 믿을 수 없는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이 부문 타이틀을 차지했다. 그렇게 잘 던졌는데도 그해 다승왕은 김영덕이 아니었다. 24승5패의 신용균이 1위에 올랐고 20승4패의 백수웅, 20승5패의 김성근에 이어 김영덕은 18승5패로 다승 4위였다. 백수웅을 빼고 모두 재일동포였다. 재일동포이긴 하지만 실질적으로 외국인인 이들이 국내 야구 마운드를 장악한 것이다. 이들은 1980년대 초, 중반 ‘빨간 여권’(일본 여권의 표지가 빨간색이어서 나온 말)을 들고 활약한 김일융, 송일수(이상 삼성라이온즈), 장명부, 이영구(삼미슈퍼스타즈), 주동식, 김무종(이상 해태타이거즈) 등 재일동포 2세대의 선배 격이다.
그런데 1964년 실업 야구에서 더 놀라운 기록이 있다. 재일동포인 배수찬이 타율 3할3푼6리로 이 부문 1위를 차지한 가운데 김영덕은 3할로 6위에 올랐고 진원주가 6개로 1위를 차지한 홈런 부문에서는 4개로 재일동포인 김금현과 공동 2위를 기록했다. 1950~60년대 홈런왕 박현식은 3개로 4위였다. 출루율은 4할7푼6리로 3위에 랭크됐다. 김영덕은 요즘 일본 리그 닛폰햄 파이터스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오타니 쇼헤이를 뛰어넘는 투타 겸업 선수였다.
그해 한국 야구사에 길이 남을 두 차례 퍼펙트게임이 펼쳐지는데 9월 23일 고순선이 철도청과의 경기에서, 9월 25일 김영덕이 조흥은행과의 경기에서 각각 대기록을 세웠다.
김영덕은 이후 크라운맥주, 한일은행에서 1969년까지 화려한 선수 생활을 이어 간다. 1967년 시즌에는 팀이 치른 32경기 가운데 무려 25경기에 등판해 17승1패, 승률 9할9푼4리의 놀라운 기록을 수립했다. 그해 54이닝 연속 무실점에 10연승 기록도 세웠고 평균자책점은 0.49였다. 한국 프로 야구에서 0점대 평균자책점은 선동열이 3차례(1986년 0.99, 1987년 0.89, 1993년 0.79) 기록했는데 앞으로 0점대 평균자책점이 나올 가능성은 거의 없다.
1970년 시즌 실업 야구 2차 리그가 끝나고 강대중 감독의 뒤를 이어 한일은행 사령탑에 오른 김영덕은 곧바로 그해 우승 감독이 됐다. 1971년 제9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서는 1차 리그에서 5개국 가운데 4위로 밀린 한국을 2차 리그부터 감독 대행을 맡아 역전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때 받은 체육훈장 청룡장은 인생 최고의 영광으로 간직하고 있다.
1971년 김응룡에게 감독 자리를 넘겨 주고 창구 업무를 보게 된 김영덕은 어려운 한글 받침 때문에 고국에 온 이후 두 번째로 마음고생을 하게 된다. 1977년 장충고등학교 감독으로 야구계로 돌아온 김영덕은 이후 천안 북일고등학교 감독(1977~1981년)을 거쳐 1982년 프로 야구 OB베어스 초대 사령탑을 맡아 한국시리즈 1호 우승 감독의 영예를 누렸다.
그리고 삼성라이온즈 감독(1984~1986년)과 빙그레이글스 감독(1988~1993년)을 지낸 뒤 LG트윈스 2군 감독(1997~1998년)을 끝으로 현역에서 물러났다. 그의 나이 환갑을 조금 넘어서였다.
지난날을 돌아보는 노 감독의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얼마 전 건강검진을 하면서 재 보았더니 키가 3cm 줄었다”는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최근 건강이 조금 좋지 않지만 매일 50분 정도 걷기를 하면서 많이 회복됐다고 했다.
고국이긴 하지만 아무런 연고가 없는 이 땅에서 반세기를 넘게 살아오는 동안 그의 곁에는 해운공사 시절 팀 동료 성기영 전 롯데자이언츠 감독의 소개로 백년가약을 맺은 아내 김해영이 늘 함께했고 이제는 성규 성연 성란 1남 2녀가 낳은 친손주 2명과 외손주 2명이 그의 곁을 든든히 지키고 있다 .
한국 야구의 ‘경계인’ 재일동포선수들
재일동포. 일본에 살고 있는 우리 핏줄을 일컫는, 흔히 쓰이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을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등에서 듣거나 보게 되면 왠지 가슴이 저리다. 직접 경험은 하지 못했지만 일제 강점기 35년 동안 우리 민족이 겪은 아픔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말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글쓴이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1983년 프로 야구 개인상 시상대에 선 장명부(2005년 작고)와 김무종이 떠오르곤 한다. 그해 10월 21일 잠실구장에서 벌어진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해태 타이거즈는 MBC 청룡을 8-1로 꺾고 시리즈 전적 4승1무로 V10의 첫발을 내디뎠다.
장명부는 시즌 30승으로 다승 1위와 함께 투수 부문 베스트 10으로 뽑혀 포수 부문 베스트 10으로 선발된 김무종과 나란히 시상대에 섰다. 당시 기준으로 볼 때 현역 선수로는 적지 않은 나이인 33살과 29살이었던 두 선수는 시상대 위에서 몇 마디 말을 나누더니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일본에서는 ‘조센진’, 한국에서는 ‘반(半) 쪽발이’로 불리며 경계인으로 살아야 하는 재일동포 두 선수는 그 자리에서 복잡다단한 감정이 복받쳤을 것이다.
그때부터 24년 전인 1959년 8월, 까까머리 고교생이 제4회 재일동포학생선수단의 일원으로 서울 땅을 밟았다. 그리고 그 학생은 오직 야구 하나만을 생각하며 이듬해 귀국해 교통부, 기업은행 등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 은퇴한 뒤에는 충암고와 신일고 감독을 맡아 지도자로 이름을 날렸다. 1982년에는 OB베어스 코치로 프로 야구 출범과 함께했다. 그리고 2007년 6월 28일 SK와이번스 감독으로 문학구장에서 롯데자이언츠를 10-2로 물리치고 국내 프로 야구 두 번째로 900승 사령탑이 됐다. 그해와 2008년 한국시리즈 정상에 올랐다. 50여 년 동안 야구 외길 인생을 걸어온 그는 한화이글스 김성근 감독이다.
>>>글 신명철 편집위원, 전 편집국장 smc6404@naver.com
“야! 여긴 아무렇지도 않다. 거리엔 젊은 연인들 넘쳐나는데 맥주 마시고 난리가 아니다! 비상은 거기만 걸린 거지, 여긴 관심도 없다! 잘 있다 와라!”
늦은 퇴근길 전철 안. 얼마 전 전역한 듯한 젊은이와 아직 복무 중인 현역병의 통화인 듯했다. TV 뉴스에서는 북한의 미사일 발사 소식이 뉴스 앵커의 낭랑한 음성으로 들리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한참 소란을 떨고 라면이나 비상식량도 준비했을 법한데, 이제 이 정도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조용하다. 둔감해진 것일까? 아니면 자신감에서 오는 여유일까?
젊은이들의 통화 내용처럼 전방과 후방의 분위기는 정말 달랐다. 그렇다고 살면서 늘 긴장해야 할 일도 아니다. 하지만 조금은 걱정도 된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치열하게 전투가 벌어졌던 산기슭에는 아직도 이름 모를 병사들의 영혼이 떠돌고 있다. 6월 6일 현충원에서는 호국 영령들을 위로하는 트럼펫 소리가 울려 퍼질 것이다.
더구나 북에서는 지금도 전쟁놀음이 한창이다. 휴전 이후 변한 것이 하나도 없다. 남한은 부와 자유를 누리나 북은 전쟁 준비에 혈안이 돼 여전히 인민들을 동원해 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그래서 가끔은 이 자유스러움을 마냥 만끽해도 괜찮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호국보훈의 달’ 6월이어서 더욱 그렇다.
필자가 군 복무를 한 지가 어언 40년이 되었다. 그런데 그 시절엔 국기 게양식이 있고 하강식이 있었다. 국기가 올라가고 내려가면 모두가 일손을 멈추고 가슴에 손을 얹고 애국가에 맞추어 ‘국기에 대한 맹세’를 읊조리며 경례를 했다. 심지어 극장에서 영화 한 편을 볼 때도 국민의례를 했다. 국기에 대한 맹세를 통해 조금은 국가의 소중함이나 애국에 대해 생각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을 찾아볼 수도 없다. 추억 속에서만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요즘 청소년들에게 국가란 무엇일까? 어느 날 태어나 보니 부와 자유가 넘쳐나는 부자나라였던 것은 아닐까? 힘겹게 목숨 바쳐 이 나라를 지켜낸 분들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군복을 벗은 지 40년이 돼 필자는 군부대를 찾는 기회를 얻게 됐다. 요즘 젊은 군인 중에 힘들어하는 병사들이 있어 선배들에게 한 수 배우고 싶다고 교육 요청을 해와 이에 응한 것이다. 특히 사건 사고가 많은 데다 지휘관은 부하들을 대하는 리더십이, 부하들은 상관, 동료와 함께하는 인성이 부족해 이 부분에 대해 좀 가르쳐 달라고 했다.
오랜만에 부대 안에 들어서서 군복을 입은 병사들을 보니 오래전 군 복무하던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교육이 끝나고 군인들과 기념촬영을 하면서 내가 청소년기에 감명 받았던 모윤숙 시인의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라는 시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나는 죽었노라. 스물다섯 젊은 나이에 대한민국의 아들로 숨을 마치었노라. 질식하는 구름과 원수가 밀어오는 조국의 산맥을 지키다가 드디어 드디어 숨지었노라.'
그러면서 나는 젊은이들의 통화 속에 그 말이 귀가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여긴 아무렇지도 않다.”
‘아무쪼록 그래야지. 그런데 그것은 오래도록 굳건한 국군이 지키고 있기에 가능한 거 아닌가 하네.’
뉴욕 맨해튼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볼링그린공원과 월스트리트의 상징인 돌진하는 황소 동상 바로 길 건너에 위치한 뉴욕시립대학교. 아침 10시 무렵이 되자 세련된 차림새의 신중년들이 삼삼오오 즐겁게 대화를 나누며 웅장한 대리석 건물 안으로 느긋하게 들어간다. 주변에 밀집해 있는 글로벌 금융기관의 고위직 인사들처럼 보이지만 평생교육원에 등교하는 학생이자 교수들이다. 배우, 심리학자, 엔지니어, 의사, 교수, 언론인, 관료, 금융전문가, 기업인, 음악가, 미술가 등 전문직업인으로 맹활약을 했던 은퇴자들이다. 틈틈이 일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여유로우면서도 열정적인 은퇴생활을 누리고 있는 신중년들이다.
스스로 가르치며 배우는 평생교육원 ‘퀘스트(Quest)’. 학교명처럼 진리 탐구를 갈망하는 신중년들이 자율적으로 운영하는 배움터이자 아지트다. 취미활동과 문화 탐방 여행과 친밀한 교우관계가 함께 어우러지는 종합 커뮤니티 기능을 하고 있다. 안내서에 나열된 올해 봄 강좌가 얼른 봐도 30개를 넘었다. 고대 그리스, 마음과 뇌, 시 낭송, 클래식 록 앨범, 현대 오페라, 위대한 연극, 현대 단편소설 등 웬만한 대학 강좌보다 수준이 높지만 교수가 따로 없는 것이 특징이다.
여기에서는 ‘교수’와 ‘학생’의 구분이 없고 모두 ‘회원’으로 통한다. 내로라하는 전문가 출신 회원들이 직접 강의를 하고 관심 있는 회원은 강의를 신청해 수강을 하는 자급자족 방식이다. 현역 때는 배우고 싶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부득이 접어야 했던 학업과 취미와 봉사활동으로 호사를 누릴 수 있는 프로그램이 눈에 많이 띈다. 2주에 한 번은 외부 특별 강사를 초빙하여 지적 탐구심을 더 높이곤 한다. 1년 3학기제로 운영되며 가끔 숙제는 있지만 시험이나 출석 점검은 없다. 한 과목만 수강하나 전 과목을 다 수강하나(물리적으로 불가능) 1년 회비는 500달러. 등록금은 물론 없다.
강좌 개설을 포함한 퀘스트 운영의 거의 모든 사항은 협의회와 분과위원회에서 결정된다. 협의회는 회원들 중에서 선출된 임원 7명과 재정담당관 등 4명의 교직원으로 구성되고 2년 임기의 회원 대표가 회의를 주재한다. 산하 4개 위원회는 회원들로만 구성돼 강좌 개설, 교육자재 관리 및 섭외, 회원 관리, 각종 행사 기획 및 일정 조정 등을 나눠 담당하고 있다. 뉴욕시립대학은 장소와 행정적 도움만 줄 뿐이다.
오는 5월이면 개원 21돌을 맞는 퀘스트의 출범 내력을 알고 나면 이런 자율적인 운영 시스템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명성 있는 뉴욕의 은퇴자 교육기관이 은퇴자들의 생각과 입장을 배려하지 않고 입학 절차와 학사 관리를 매우 까다롭게 하면서 등록금까지 높이 책정하자 40명이 함께 탈퇴해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선 것이 1995년.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함께할 수 있는 교육기관을 백방으로 물색하던 차에 뉴욕시립대학과 뜻이 맞아 새로운 터전을 마련할 수 있었다. 자유의 여신상이 바라다보이는 아름다운 배터리파크를 여유롭게 산책할 수 있는 맨해튼 최고의 위치에 자리한 퀘스트는 자율적인 평생교육을 갈망했던 40명의 결단과 노력으로 이루어진 산물이다.
새로운 이념으로 퀘스트의 설립을 기초한 40명 가운데 로버트 하트만 회장을 비롯한 10명은 지금도 퀘스트의 열렬 회원이자 지킴이로 활동하고 있다. 창립 회원인 샌디와 앨 고든 부부는 매년 발간하는 종합 문예지 20주년 기념 특별판 기고문에서 “퀘스트와 함께한 지난 20년은 결코 지루할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우리 은퇴자의 꿈은 따뜻한 햇볕을 쬐고 놀이와 내기나 하면서 소일하는 것이 아니라 열정적이고 모험적인 사람들과 함께 지식을 넓혀 나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캐롤 아브람스, 스텔라 체이스, 베버리 프란쿠스, 에버린과 러셀 굿 부부, 조 나탄 등 다른 창립 회원들도 퀘스트에 대한 자부심과 만족감이 대단하다.
멤버십 위원회의 에바 샤트킨 위원장은 퀘스트를 찾는 방문인을 일일이 안내하는 가이드 역할을 맡고 있다. 설립 때의 초심을 지키기 위해서다. 샤트킨 위원장은 한국인 학생을 수양딸로 맞이해 함께 살며 교육시켰을 정도로 한국과 깊은 인연이 있다. 수양딸은 훌륭히 성장해 지금은 뉴욕대학(NYU)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해외에서도 교직생활을 한 국제적인 영어 교육자인 샤트킨 위원장은 구순을 훨씬 넘겼는데도 거의 매일 배우고 봉사하고 있다. 구순을 넘긴 회원은 보통이고 백세를 넘긴 회원도 지하철로 등교하기도 해 배움이 회춘의 비결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무급으로 봉사하고 있는 마이클 웰르너 원장은 “퀘스트의 평생교육에 참여하고 싶은 은퇴(예정)자가 인터넷이나 전화로 방문신청을 하면 하루 일정으로 강의도 듣고 회원들과 자연스럽게 교류도 하면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도록 한다”고 말했다. 웰르너 원장은 자택을 방문한 귀한 손님을 맞이하듯 시설과 운영방식을 친절하고 상세히 안내했다.
회원들이 가장 신나는 시간은 함께 창작활동을 할 때다. 한때 에미상 후보에까지 올랐던 유명배우인 도미니크 치아네스와 로이 클레어리 회원이 지도하는 연극 시간이면 모두 브로드웨이를 꿈꾸는 배우로 변신한다. 해마다 작품을 무대에 올릴 때면 온 가족과 친지들이 관객으로 참석하면서 흥겨운 잔치판이 벌어지고 회원은 현실에서도 주인공이 된다. 연극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도나 루벤스 회원이 건강 악화로 정기 공연을 놓쳐 몹시 안타까워하자 집을 방문해 즉석 공연을 했던 일화는 어떤 연극보다 더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날씨가 나쁘지 않은 금요일이면 이스트강변 89번가의 콩츠마켓(Conte’s Market)에서 퀘스트 회원들이 연주하는 포크 음악을 감상할 수 있다. 문예지 발간은 소설가와 시인을 꿈꾸었던 회원들이 주도하고 있다.
퀘스트에서는 수학여행과 현장학습이 수시로 있다. 뉴욕현대미술관(MoMA),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익스플로러클럽 등 주변에 즐비한 미술관과 박물관은 언제 들러도 즐겁고 배울 게 많은 현장학습장이다. 나이아가라폭포, 재즈와 ‘욕망의 이름이란 전차’와 프렌치 쿼터의 도시 뉴올리언스와 미국 전통의 여름철 문화교육타운인 이리호 남단의 쇼토쿼(Chautauqua)는 단골 수학여행지다.
여행전문가인 캐롤린 맥과이어 회원은 5월로 다가온 런던 수학여행을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으면서도 8월 수학여행지를 어디로 할지 고심하고 있다. 다채로운 여름축제가 벌어지는 캐나다와 기네스맥주를 즐길 수 있는 아일랜드를 놓고 회원들의 다양한 의견을 듣고 있다. 물론 회원들이 좋다면 두 곳 모두 갈 수도 있다. 여름 내내 여행 다니기를 좋아하는 회원들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회원들은 학창 시절처럼 수학여행을 고대하면서 이야기꽃을 피운다. 수학여행에는 가족도 참가할 수 있어 더 신나고 추억거리도 넘친다.
뉴욕시립대학교와 교육이념에서부터 학사와 재정 관리에 이르기까지 호흡이 척척 맞아 이제는 회원이 230명을 넘어섰다. 평생교육의 새 장을 열고 있다. 요즘 퀘스트에는 성공비결을 배우기 위해 방문하는 해외 귀빈들의 발길이 잦아지고 있다. 평생교육이 국가의 주요 이슈로 부각되면서 묘책과 대안을 찾으려는 것이다. 그저 어울려 배우고 교류하는 커뮤니티일 뿐인데 해외에서까지 관심이 쏟아지니 회원들은 어리둥절하면서도 신이 난다.
지난해 9월에는 태국 총리 부인인 나라폰 찬오차 교수를 단장으로 한 태국 사절단이 방문했고 은퇴를 앞둔 캐나다의 리차드 솔터 변호사는 4년째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어 평생교육에서도 글로벌화가 진행되고 있는 분위기다.
‘놀면서 배우는 것(Play and Learn)’은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만 적용되는 교육이념이 아니다. 배움의 열정은 나이와 무관하고 호기심은 나이가 들수록 커진다는 진리를 퀘스트에서 깨닫게 된다. “배움이 없는 자유는 언제나 위험하고 자유가 없는 배움은 언제나 헛되다(Liberty without learning is always in peril and learning without liberty is always in vain)”라는 케네디 대통령이 미국인들에게 남긴 교훈을 퀘스트가 실천에 옮기고 있다.
앞서 소개한 샹송, 칸초네, 탱고 등은 처음부터 다른 음악들과는 약간은 차별화된 느낌으로 접하게 되었지만 재즈는 어느 틈에 슬그머니 다가온 것 같다. 앞서 영화 이야기에서 소개했던 에는 재즈 코넷 연주자 레드 니콜즈(다니 케이 분), 루이 암스트롱 등이 등장하여 20곡 이상의 재즈 명곡을 연주하였다.
그리고 고등학교, 대학교 때 본 여러 미국영화의 주제가나 배경음악은 물론 뮤직홀에서 듣던 음악 중에도 많은 재즈음악이 있었다. 그러나 재즈라기보다는 다만 듣기 편안하고 감미로운 미국음악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다가 ‘센트루이스 블루스’, ‘테이크 파이브’, ‘테이크 더 에이 트레인’ 유럽의 명곡 ‘고엽’, ‘맥 더 나이프’ 등을 본격적인 재즈로 연주하는 것을 듣고 재즈의 참맛을 알게 되었다. 빌리 할리데이, 엘라 피츠제럴드, 사라 본이나 냇 킹 콜, 프랭크 시나트라, 토니 베넷 등의 보컬재즈도 다른 팝송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재즈는 미국이 독립하기 전 프랑스 등 유럽 여러 나라에 점령당했으며 독립 후에는 흑인 노예시장의 중심지였던 미국 루이지애나 주 뉴올리언스에서 유럽의 다양한 음악과 흑인노예의 애환이 담긴 아프리카의 복잡한 리듬이 합쳐져 만들어진, 즉흥성이 매우 강한 미국음악이다.
그 시작은 19세기 말 행진곡에서 양식을 빌려온 피아노음악인 래그타임(Ragtime)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첫 번째 재즈 뮤지션으로 기록되고 있는 사람은 코넷 연주자인 흑인 찰스 버디 볼든(Charles Buddy Bolden)이다. 1895년 처음 선보인 그의 6인조 밴드는 래그타임을 즉흥양식으로 연주해서 최고의 인기를 누렸고 세기가 바뀔 무렵에는 뉴올리언스의 여러 밴드들이 집단적인 즉흥양식의 연주를 했다.
이러한 연주가 인기를 끌자 흑인들을 멸시하는 백인들조차 이를 모방하였으며 1917년에는 이들의 오리지널 딕시랜드(Dixieland, 미국 남부지방을 지칭함) 재즈밴드가 첫 음반을 내놓기도 했다. 뉴올리언스 시대를 장식한 초기 재즈 뮤지션으로는 1908년부터 활동한 조 킹 올리버(Joe King Oliver)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솔로 대신 집합 즉흥연주 스타일을 창안했고, 루이 암스트롱을 길러냈으며 뮤트(약음기)를 창안해서 연주에 사용하기도 했다. 이러한 음악의 중심이었던 베이진 스트리트에서 1917년 3명의 해군병사가 살해되어 이 거리가 폐쇄되자 올리버는 1919년 연주 무대를 시카고로 옮겼고, 다른 흑인 뮤지션들도 그 뒤를 따랐다.
무대가 시카고로 옮겨진 뒤 이 음악에 재즈(Jazz)란 이름이 붙었다. 올리버가 이끌던 킹 올리버 크리올(Creole, 유럽인과 현지인 또는 흑인 혼혈) 재즈 밴드의 시카고 시대 절정기는 1920년대 초로, 트럼펫의 루이 암스트롱을 비롯하여 다른 연주자들의 즉흥 솔로 연주로 명성을 날렸다. 그는 1927년에는 마피아를 피해 뉴욕으로 옮겨 영화의 소재가 되기도 한 그 유명한 ‘코튼 클럽’에서 활동하면서 재즈의 뉴욕시대를 열었다. 경제공황을 극복한 미국의 사회상을 반영하듯 신나는 댄스음악인 스윙재즈가 1930년대를 휩쓸었다. 밴드의 규모가 커져 소위 빅 밴드(Big Band)시대가 시작되었고 베니 굿맨, 글렌 밀러, 듀크 엘링턴 등이 맹활약을 했다.
2차 대전 중 침체의 길을 걷던 재즈는 전후 기존 재즈의 틀을 완전히 바꾼 비밥(Bebop)이 등장하여 모던재즈의 효시가 되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반발로 쿨(Cool) 재즈, 하드 밥(Hard Bop)에 이어 퓨전(Fusion) 재즈에 이르기까지 재즈는 다른 장르의 음악들과는 달리 매우 다양하게 진화하면서 오늘날까지도 많은 재즈 팬들을 즐겁게 해주고 있다.
1997년 6월, 명지대에서 공과대학장을 맡고 있던 필자는 텍사스 A&M대학과의 자매결연을 위해 미국에 갔다가 틈을 내어 평소에 적어도 한 번은 꼭 가고 싶던 재즈의 본고장 뉴올리언스를 방문하였다. 집사람과 함께 오전에 200여 년 전의 프랑스풍 주택들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는 주택가 등 시내관광을 끝내고 오후에는 말로만 듣던 대망의 프렌치 쿼터로 갔다. 먼저 강가로 가서 강변도로(Riverwalk)를 거닐며 말로만 듣던 미시시피 강의 경치를 구경한 후 그곳에서 멀지 않은 잭슨 스퀘어와 그 앞에 있는 세인트루이스 대성당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프렌치 쿼터의 중심 격인 버본 스트리트로 가보니 길 양쪽에는 크고 작은 재즈 바(Bar)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노상공연을 하는 사람들도 상당수 있었다. 양쪽 길가에서 들려오는 재즈를 만끽하며 거닐다가 ‘Razzberrie Ragtimers’라는 간판이 붙은 한 바가 마음에 끌려 들어가 보았다. 당시만 해도 한국인은 물론, 동양인 관광객이 그리 많지 않을 때라 필자가 집사람과 함께 들어가자 약간은 의아한 듯이 맞아주었다. 시원한 생맥주를 마시며 센트루이스 블루스를 청하자 동양인이 그런 곡도 아느냐는 듯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자리가 모자라 합석했던 한 젊은 미국여자는 열심히 일해 돈이 모이면 이곳에 한 번씩 다녀가는 것이 삶의 가장 큰 즐거움이라고 했다. 저녁 8시에는 전통적 뉴올리언스 재즈를 보존, 발전시키기 위해 설립된 프레저베이션 홀에 가서 45분간에 걸쳐 당대 최고 재즈 뮤지션들이 연주하는 ‘성자들의 행진(When The Saints Go Marching in)’, ‘조지아 온 마이 마인드’, ‘세인트루이스 블루스’ 등 10여 곡의 귀에 익은 금쪽같은 연주를 만끽하였다. 재즈를 이야기하자면 지금은 주로 R&B(리듬 앤 블루스)를 부르지만 본래는 재즈가수로 출발한 고교동창의 딸 서영은 양의 주례를 섰던 일도 잊지 못할 추억이다.
장홍
레드 와인을 즐기는 사람들은 우선 다양하고 현란한 붉은색에 매료된다.
다음으로 코를 잔으로 가져가면 다채로운 향의 정원을 만난다. 그리고 한모금 입에 머금어 혀의 여러 부위로 와인을 굴리면서 단맛, 신맛, 쓴맛 등을 음미하다가 조심스럽게 삼킨다. 그런데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는 이 한 잔의 와인은 수백 종류의 화학성분이 함유된, 그야말로 실험실이다. 포도 속에 함유된 당분이 박테리아와 효모의 작용으로 알코올, 보다 정확히는 에탄올로 전이되는 과정이 발효라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리고 주조와 숙성 과정을 통해 와인은 여러 종류의 산(acids)과 향을 얻게 된다.
이뿐만 아니라 포도 속에는-특히 껍질과 씨 속에는-중요한 몰레큘라(분자)들이 포함돼 있으며, 이들은 알코올에 의해 조금씩 축출돼 와인 속에 녹아든다. 그중에서도 페놀 그룹인 폴리페놀은 최소한 500여 종에 달하며, 각자의 화학적 구조에 따라 소중한 기능을 지니고 있는데 바로 나쁜 콜레스테롤의 형성을 막는 황산화 성분이다. 그리고 이 황산화 성분이 심장 혈관 계통의 질병을 예방한다는 유명한 프렌치 패러독스의 기원이기도 하다. 게다가 알츠하이머와 같은 뇌신경 질환, 비만, 암 등의 예방에도 효력이 있다고 주장하는 연구 결과도 나오고 있다. 물론 논쟁의 여지는 있지만.
두 그룹의 폴리페놀
와인 속에는 크게 두 그룹의 폴리페놀이 함유되어 있다. 플라보노이드(flavonoides)와 비-플라보노이드(non-falvonoides)가 그것이다. 클레르몽-페랑(Clermont-Ferrand) 국립농산물연구소(Inra)의 오귀스탱 스칼베르(Augustin Scalbert) 박사는 여러 음식물에 포함된 폴리페놀의 양을 측정하는 새로운 연구 분야의 개척자다. 그는 450종에 달하는 식재료에 함유된 500가지 폴리페놀에 대한 분석 결과를 내놓았다. 이 연구 결과에 따르면 레드 와인은 화이트나 로제에 비해 10배 이상의 폴리페놀을 함유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폴리페놀 중에서도 플라보노이드 타입의 폴리페놀이 레드 와인에 다량 함유된 것으로 밝혀졌으며, 비-플라보노이드는 소량 검출되었다. 비-플라보노이드 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졌으며, 와인의 핵심적 질병 예방 요소로 지명되었던 레스베라트롤(resveratrol)은 3.42㎎/100㎖ 정도로 지극히 소량이었다.
하지만 현재는 와인에 함유된 폴리페놀 중에서 어떤 것이 진정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다. 런던의 퀸 메리 의대(Queen Mary’s School of Medicine and Dentistry)의 교수인 로저 코더(Roger Corder)는 여러 연구 결과를 증거로 제시하면서 프로시아니딘(procyanidines)이 건강에 핵심적 요소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프로시아니딘은 다른 폴리페놀에 비해 항산화성과 혈관 확장에 있어서 보다 우수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특히 레드 와인에는 프로시아니딘의 함유량이 레스베라트롤보다 거의 1000배나 많다고 한다.
페놀-익스플로러(Phenol-Explorer)에 관한 또 다른 주요 정보도 밝혀지고 있다. 와인을 제외한 다른 알코올 음료(위스키, 럼, 맥주 등)에는 폴리페놀이 거의 함유되지 않은 반면 다른 식재료에는 레드 와인만큼, 혹은 그 이상의 폴리페놀이 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레드 와인에는 100㎖당 107㎎의 폴리페놀이 들어 있는 반면 맥주에는 3.28㎎, 위스키에는 1.25g, 럼에는 고작 0.43㎎이 들어 있을 뿐이다. 같은 와인이라도 로제에는 10㎎, 그리고 화이트와 샹파뉴에는 10.4㎎의 폴리페놀이 함유돼 있다. 그리고 포도주스에는 100㎖당 단지 1㎎만이 들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커피에는 214㎎, 녹차에는 89㎎ 그리고 초콜릿에는 무려 216㎎이나 들어 있다. 단지 폴리페놀 측면에서만 본다면 커피나 초콜릿 한 잔이 보르도나 부르고뉴 와인을 한 잔 하는 것보다 훨씬 효용성이 뛰어나다.
광범위한 역학(epidemiology: 생활양식, 사회 환경 따위가 질병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의학 분야)을 통해 프랑스인들이 폴리페놀을 섭취하는 근원에 대한 연구를 실시한 세르주 에르베르그(Serge Hercberg) 박사에 따르면, 커피가 36.9%로 가장 앞서고, 다음으로 33.6%의 녹차나 다른 차, 그리고 10.4%의 초콜릿이 뒤를 잇는다. 레드 와인은 7.2%로 네 번째에 위치하고 있으며, 과일(6.7%)이 그 다음으로 밝혀졌다. 이쯤 되면 육류를 먹을 때 녹차를 곁들이는 것이 바람직할지도 모를 일이다.
문제는 모든 알코올 음료와 마찬가지로 와인 속에 함유된 에탄올이다. 에탄올은 미세한 몰레큘라로 수용성이고 특히 알코올에 잘 혼합되며, 모든 세포에 침투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술을 마시고 몇 분 내에 뇌를 비롯한 인체의 모든 기관에 퍼져나가며, 섭취한 양에 따라 효과가 다르게 나타난다. 술을 마시면 처음에는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혈압이 오르지만 많이 취하면 반대 현상이 일어난다.
현대 의학은 알코올이 뇌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증명했다. 미국 메릴랜드(Maryland) 주 베데스다(Bethesda) 연구소가 2006년 20명의 자원자를 대상으로 행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극소량의 알코올 섭취도 뇌 속 글루코오스의 신진대사를 감소시킨다고 한다. 매사추세츠(Massachusetts)의 웰즐리 대학(Wellesley College)이 1839명을 대상으로 2008년에 실시한 연구 결과는 우리를 더욱 걱정스럽게 한다. 이에 따르면 알코올 섭취량과 뇌의 크기(volum) 사이에 상관관계가 존재한다. 즉 알코올 섭취량이 많으면 많을수록 뇌의 크기는 반대로 줄어든다는 것이다. 뇌의 일부 지역은 무려 20%나 감소한다고 한다. 그리고 특히 뇌가 성숙 단계에 있는 청소년기에 알코올을 섭취하면 그 악영향은 엄청나다고 한다. 프랑스의 한 국립연구소(Inserm)에 근무하는 미카엘 나실라(Mickael Nassila) 박사에 의하면 청소년이 알코올을 섭취할 경우 성인의 경우보다 뉴런(신경단위)이 2.5배나 많이 죽는다고 한다.
아, 불행한 와인이여! 에탄올을 함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와인은 여느 다른 알코올과 다를 바가 없다. 과다한 알코올 섭취는 암, 간경화는 물론 뇌에도 나쁜 영향을 주는 만병의 근원이다. 게다가 와인의 도수도 최근 들어서 조금씩 높아지는 경향이 있다. 당장이라도 금주법을 다시 시행해야 할지도 모른다. 금주만이 유일한 미덕일지도 모른다.
아, 행복한 와인이여! 다른 알코올 음료에는 없는 다양한, 그리고 다량의 폴리페놀을 함유한 와인이여! 하여 여느 알코올 음료와는 다른 와인이여! 폴리페놀은 그 명칭이 시사하듯 수많은 종류가 있다. 어떤 종류가 어떤 질병의 예방에 유용한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쟁이 계속되고 있지만, 폴리페놀의 항산화 효과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심장 혈관 계통의 질병과 알츠하이머 예방 효과 그리고 심지어는 다이어트에도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 와인!
영원한 형제이자 적인 폴리페놀과 에탄올을 모두 함유한 와인은 분명 두 얼굴을 지닌 야누스의 모습을 하고 있다. 프랑스 샹송의 가사처럼 결국 현명한 사람만이 와인을 제대로 즐길 수 있나 보다.
△ 장 홍
성균관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에서 국제관계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프랑스 알자르 소믈리에협회 준회원이며, 등 다수의 저서를 펴냈다. 사회학적 측면에서 살펴본 와인, 인류역사 속 와인의 의미와 파워, 예술 인문학을 통해 본 와인 등에 대해 강의도 진행하고 있다.
스페인음악은 전형적인 라틴음악이고 넓은 의미에서는 샹송이나 칸초네도 모두 라틴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음악에서 라틴음악이라고 하면 주로 멕시코를 비롯한 라틴 아메리카(중남미)음악을 말한다.
라틴음악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음악에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인디오),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끌려와 아메리카 대륙에 정착한 흑인의 음악이 다양하게 섞여 형성된 음악이다.
그러나 쿠바에서는 원주민이 너무 일찍 멸망했기 때문에 나머지 두 가지 요소만으로 만들어졌다. 룸바 맘보 차차차 볼레로 등의 리듬은 모두 쿠바에서 만들어져 다른 나라들로 퍼져나갔으나 막상 쿠바에는 남아 있지 않다. 삼바는 브라질의 흑인계 리듬이다. 이와 같이 라틴음악에는 스페인음악이 바닥에 깔려 있기 때문에 스페인음악을 좋아하다 보면 라틴음악은 저절로 따라오게 마련이고 곡목도 겹치는 것이 많다.
그러나 (물론 필자 개인의 경우지만) 같은 ‘질투’라는 곡을 스페인음악으로 들으면 울긋불긋한 옷을 입은 정열적인 여자가 칼이라도 뽑아들고 달려들 것 같은 느낌이라면, 라틴음악의 경우 파도에 부서지는 달빛 어린 바닷가에서 가냘픈 여인이 훌쩍훌쩍 울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필자는 △사랑의 역사(Historia De Un Amor), 제비(La Golondrina), 키사스 키사스 키사스 등이 들어 있는 트리오 로스 판초스 △라 쿰파르시타, 달빛 어린 난초(Orchids In The Moonlight), 질투 등이 들어 있는 ‘남미의 허니문’ △맘보 5번, 라 밤바, 엘 콘도 파사, 커피룸바(Moliendo Cafe) 등이 들어 있는 맘보리듬의 창시자 페레츠 프라도 △아마폴라, 씨엘리토 린도(Cielito Lindo), 마리아 엘레나 등이 들어 있는 ‘라틴 칵테일 아우어’라는 판 등 라틴음악 역시 참 많이 들었다.
1982년 7월에 지하철 자료수집차 갔던 첫 번째 파리 방문 때 업무를 마치고 짧은 시간이나마 관광을 할 시간을 마련하였다. 센 강 유람선을 타고 에펠탑을 구경한 후 영화박물관 근처를 지나가는데 어디서 경쾌한 음악이 들려왔다. 가보니 남미에서 온 듯한 2인조가 라틴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다리도 쉴 겸 돌난간에 걸터앉아 음악을 듣고 있자니 몸이 저절로 리듬을 타고 있었다.
그런데 역시 남미에서 온 듯한 한 젊은 여인이 손을 내밀어 춤을 청했고 신 나게 한 곡을 추고 나니 박수소리가 들렸다. 지나가던 관광객들이 둘러서서 구경을 하다 박수를 친 것이다.
1984년 10월에서 11월에 걸친 약 3주간 필자는 브라질 리우 데 자네이루에서 열렸던 제10차 국제도로연맹(IRF) 세계도로회의에 한국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 우리 일행이 묵던 호텔이 있는 코파카바나 해변의 뒷골목에는 수많은 기념품가게와 술집이 있었다. 그중 한 기념품가게에 들렀다가 괜찮은 술집을 물으니 알베르토(Alberto's) 피아노 바(Bar)를 소개해 주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기념품가게 여종업원인 마리 양이 저녁 때는 그 바의 유일한 여종업원이기도 하였다. 아담한 크기에 주인 알베르토의 피아노연주가 일품인 이 바가 마음에 들어 거의 매일 저녁마다 출근을 하다시피 했다. 그 바의 손님들은 대부분 이웃나라인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우루과이, 파라과이 등에서 온 관광객들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한국 사람이 처음이었으나 멀리 동양의 한 작은 나라에서 온 젊은 사람이 자기들 나라의 노래를 너무 많이 아는 것이 신기해서 쉽게 친해졌고, 또 서로 어우러져 돌아가며 같이 춤을 추기도 했다. 사실 당시 필자의 나이는 만 40이었으니 젊다고 하기에는 좀 그런 나이였지만 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젊어 보였는지 절대로 25세 이상으로는 보지 않아 내기를 해서 술도 꽤 많이 얻어마셨다.
하루는 기념품가게 여주인과 마리 양이 아주 괜찮은 극장식 레스토랑이 있으니 가겠다면 자기들이 안내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 일행에게 물어보니 12명 정도가 가겠다고 해서 알베르토에게 양해를 구한 여자들과 함께 레스토랑에 갔다. 실내는 꽤 넓었고 여러 테이블에 손님들이 있었으나 우리 테이블이 가장 많았다.
쇼가 시작되자 사회를 보는 여자가 테이블마다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고 물어보다가 우리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우리말로 “안녕하세요?” 라고 인사를 하면서 그날 밤은 ‘한국의 날’로 무대를 꾸미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중간 중간에 우리 음악에 맞춰 쇼를 진행함으로써 우리를 놀라게 했다.
클라이맥스가 되자 사회자가 무대 위로 올라오라고 우리 테이블에 손짓을 했고, 모두들 일행 중에 가장 젊었던 필자를 밀어내 타의반 자의반으로 무대에 올랐다. 그리고 아름다운 백 댄서들 사이에서 정말 풍만한 반나(半裸)의 두 히로인(heroine)과 평생 잊을 수 없는 즐거운 무대를 가질 수 있었다.
쇼가 끝나자 필자와 함께 춤을 추었던 두 여자가 옷을 갈아입고 우리 테이블에 와 일행과 같이 어울려 맥주를 마셨다. 그때서야 우리들의 의문이 풀릴 수 있었다. 그들은 워커힐 호텔의 극장식 레스토랑에서 6개월간 브라질 댄싱 팀으로 공연을 했고, 귀국 후에는 한국 사람들을 거의 볼 수 없었는데 오래간만에 한국 사람들을 만나 무척 반가웠다는 것이다.
한편 포르투갈의 민속음악인 파두(Fado)도 일부 라틴음악이라고 소개되기도 했다. 파두가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80년에 방영된 차화연 주연의 TV드라마 ‘사랑과 야망’에서 아마리아 호드리게스가 부른 ‘검은 돛배(Barco Negro)’가 주제음악으로 사용된 후부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