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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름진 손끝으로 피운 인생의 꽃, 김두엽 화가
- 김두엽 할머니의 그림 생활은 여든셋의 어느 날, 달력 뒷장에 무심코 그린 사과 한 알에서 시작됐다. “아따, 엄마 솜씨가 보통이 아닌데!”라는 아들의 칭찬에 춤을 추듯 마음 가는 대로 그렸다. 무심한 남편과의 결혼 생활, 끝없이 이어지는 가난과 싸우며 고생스러운 젊은 시절을 보냈지만 ‘그마저도 추억’이라며 밑천 삼는다. 어느덧 아흔여섯의 화가가 된 그는 오늘도 작은 나무 책상에 앉아 모진 세월을 희망으로 바꾸고 있다. 전라남도 광양시 봉강면. 알록달록 물감 칠해진 시골집에는 늦깎이 예술가, 김두엽 할머니가 살고 있다. 그의 그림은 거실, 부엌, 안방 곳곳을 꿰찼다. 완벽한 직선은 아니지만 꼬불꼬불 섬세하게 이어진 선과 과감한 색 조합은 ‘사람 냄새’를 짙게 풍긴다. 여든셋에 그림을 시작해 올해로 14년 차 화가가 된 그는 현재까지 600여 점을 그려냈다. 그동안 수십 차례 전시회를 열었고, KBS 교양 프로그램 ‘인간극장’, 토크쇼 ‘황금연못’ 등 다양한 방송에 출연했다. 그림 그리기 딱 좋은 나이 김두엽 화가는 매일 아침 8시 반, 아침 식사를 한 뒤 어김없이 그림을 그린다. 한번 앉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영감은 지난날의 기억, 일상에서 본 풍경, 주변에서 들은 이야기 등에서 다양하게 얻는다. 그저 떠오르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손을 움직인다. 택배 일 나간 아들을 기다리며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끄적인 그림이 이토록 인생의 큰 줄기가 될 줄은 예상치 못했으리라. “아들도 화가예요. 그림을 팔기 위해 그리지 말자는 신조를 지녔죠. 그래서 낮에는 택배 일을 하고, 퇴근하면 틈날 때마다 작업실에 있더라고요. 나는 혼자 있으니까 심심하지. 집에 굴러다니는 연필을 주워 가지고 달력 뒷장에 사과를 그렸어요. 아들이 집에 와서 ‘엄마, 이거 누가 그렸어?’ 그래요. 잘한다, 잘한다 해주니까 신이 났지요. ‘내가 진짜 잘 그리나?’ 싶었어요. 그러다가 읍내 나가서 스케치북을 두 개 사왔어요. 이것저것 그려서 벽에 붙여뒀는데 손님이 우리 집에 와서 보고는 잘 그렸다고 하셨어. 그때부터 기분이 좋아서 그리고 또 그리고 그랬지요.” 그가 창작 활동을 본격적으로 이어나간 데는 아들 정현영 화가의 도움이 컸다. 정현영 화가는 추계예술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한 뒤, 대한민국미술대전으로 등단해 다수의 개인전과 기획전에 참여했다. 중견 화가의 눈에도 처음 그려낸 어머니의 사과 그림은 놀랍도록 꼼꼼했다. 배우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계속 그리셨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어 색연필, 물감 등 다양한 색채 도구를 쥐여드렸다. 원색 위주의 과감한 색을 사용하지만 어색하지 않게 어우러졌다. 세월이라는 재료 김두엽 화가는 1928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학교는커녕 공부라는 게 뭔지도 몰랐다. 여성이라는 사실만으로 모든 상황에 제약이 존재하던 시절이었다. 꿈을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해방 다음 해인 1946년 귀국한 뒤 결혼해 아들, 딸을 낳아 길렀다. 너무 가난했던 탓에 그저 굶지 않고 사는 것, 내 가족이 평안한 것, 남편과 다정하게 지냈으면 좋겠다는 것이 꿈이라면 꿈이었다. 애정 없는 결혼 생활은 행복하지 않았고, 생계를 잇기 위한 노동은 계속됐다. 김 화가의 그림은 구김살 하나 없이 화사하고 또렷하다. 모진 시간이었지만 아팠던 과거를 오히려 사랑하고 마음에 품었기 때문일 테다. 시 ‘풀꽃’으로 유명한 나태주 시인은 김두엽 화가의 그림을 보고 영감을 받아 수십 편의 시를 썼고, ‘지금처럼 그렇게’라는 시화집을 펴내기도 했다. 두근거림이 있는 그림이라 이야기하면서 말이다. “원하는 삶을 산 건 아니었어요. 꽃피는 봄날에 사랑하는 사람과 예쁜 원피스를 입고 나들이 가고, 어스름한 저녁 산책하다 들꽃 한 아름 받고 싶었네요. 지금이라도 내 바람을 그림으로 그려볼 수 있어 좋아요. 괴로웠던 기억도 저편으로 날아가거든.” 최근에는 함께 노년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시니어 컬러링북 시리즈’를 출간했다. 김 화가가 70대 중반부터 시작된 수전증을 그림으로 극복한 것처럼, 동년배들도 손의 감각을 되찾는 기쁨을 느꼈으면 해서다. “참 오래 살았어요. 앞날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말이 참이더라고. 나이 먹어서 그림을 매일 그릴 줄 누가 알았겠어. 기력이 없을 때도 있지만 붓을 잡고 있으면 힘이 좀 나는 것 같고 그래요. 느리더라도 천천히, 계속 그려봐야지. 여러분도 다들 힘냈으면 해요.”
- 2023-04-25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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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식과 역사 한번에 즐기는 안성 ‘시간여행’
- 여럿이 우르르 몰려다니는 일이 즐거운 사람들이 있다. 그런 편이 못 되다 보니 가능하면 이럴 땐 피하고 싶기도 하다. 혼자 혹은 동행 한 명쯤과 다니기 좋은 미술관이나 박물관 관람은 어수선함이나 소음으로 피곤한 상황을 피하기 좋다. 혼자서 자기 속도대로 구경하고 한참씩 멈춰 있어도 뭐라 할 이 없으니 말이다. 동행이 있어도 각자 생각의 방향으로 돌아보고 나서 만나면 된다. 이번에 가본 안성의 한국조리박물관도 그렇게 돌아보기 좋은 곳이다. 조리박물관의 메인 전시관과 요리아트스쿨 교육장을 중심으로 주변의 너른 공원과 잘 정돈된 조경, 예쁜 카페와 식당까지 고루 잘 조성된 테마파크형 박물관이다. 서양요리 100년의 역사를 갖춘 한국조리박물관은 국내 최초이면서 세계에서는 프랑스와 미국에 이어 세 번째라고 한다. 전시관은 국내 서양요리 역사, 조리인, 메뉴 레시피, 식문화 조리단체, 조리기구와 도구, 소스와 향신료, 커피·바리스타·와인·베이커리 등 8개 테마로 구성되었다. 공간 구획에 따라 준비된 각종 자료들이 생생한 역사를 전달한다. 찬찬히 돌아보며 만난 도구 하나하나, 맛과 연관된 역사적 사실이나 작은 소스 하나까지 신기하고 흥미로워서 한참씩 들여다보게 된다. 과거와 미래를 잇는 뜻깊은 관람이다. 이를 이루고자 한 걸음씩 심혈을 기울이며 나아간 이들의 진심이 느껴진다. 총 부지 1만 평 정도의 테마파크형 박물관으로, 자연 속에서 관람과 휴식을 함께 할 수 있어서 일석이조다. 이번엔 조용히 혼자 전시장을 돌아보려던 생각을 바꿨다. 키오스크로 입장권을 사서 입장하려는데 안내석에 계시던 분이 말을 건넨다. “해설이 필요하면 말씀하십시오.” 사실 해설을 들으며 볼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괜찮다며 그냥 들어섰다. 그러다가 문득 이곳은 해설사의 안내를 받으면서 제대로 관람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화해설사로 교육받으신 분답게 자신의 소개를 시작으로 친절한 안내와 꼼꼼한 설명으로 전시관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어찌나 성심성의껏 안내를 하시는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다. 연륜이 돋보이는 분이었다. 안내를 마치고 잠깐 이야기를 나누어보았다. “안성시청 소속 문화관광해설사로서 현재 이곳 한국조리박물관에서 파견근무하고 있습니다. 이 지역에서 일하는 문화해설사는 20명 정도인데 우리가 사는 지역을 위한 일이어서 다들 자부심을 가지고 즐겁게 일합니다. 이곳의 문화해설은 팀마다 다르지만 한 번에 한 시간 정도, 경우에 따라 세 시간 한 적도 있어요. 내가 즐거우면 관람객들도 즐겁고, 잘 따르도록 리드하는 능력도 생깁니다. 그런 즐거움이 날마다 여기로 나오게 합니다.” 맡은 일에 자부심이 넘치신다. 청산유수로 설명하는 내용도 귀에 잘 들어오고 구수하기까지 하다. 주어진 일이 즐겁다고 연신 말한다. 유용한 시간으로 하루를 보낸다는 것이 얼마나 값진 일인지 전해진다. “내가 7학년입니다, 하하하. 건강관리만 잘하면 꾸준히 할 수 있는 일이죠. 지금 하는 일이 대가 여부를 떠나서 보람이 큽니다. 문화 관련 일을 접하는 것도, 또 전시관 주변의 자연도 아름다워서 하루하루가 즐겁습니다. 무엇보다 이곳에 오시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고, 내 시간을 가치 있게 만들어나가는 것 또한 행복한 일 아니겠어요?” 은퇴 후의 시간을 이렇게 보람찬 나날 속에 보내는 심혁주 문화관광해설사님의 진심 어린 말이다. 시니어들의 일자리 문제는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초고령화 시대를 사는 시니어에겐 안정된 노후나 취미 생활만으로는 충족되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 노후의 경제활동이나 적극적인 사회활동이 필요하다. 심혁주 문화관광해설사님의 말처럼 일이란 건강한 삶을 위해서도 필요하고, 진취적인 삶이 행복을 유지해준다. 마침 한국조리박물관 초대 관장을 맡은 최수근 관장을 만나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다. 최근 경희대 교수를 은퇴한 최 관장은 여러 호텔 근무 경력도 지닌 식품학 박사로 실무와 이론을 겸비한 분이다. 특히 ‘소스의 대가’로 불리기도 한다. “대학 졸업 후 요리 일을 열심히 하다가 더 공부하기 위해 파리 르코르동블루로 유학을 갔지요. 그때 처음으로 이런 박물관을 세우고 싶다는 꿈을 가졌습니다. 남프랑스 니스에 있는 개인박물관이었어요. 프랑스 요리의 거장 에스코피에 셰프의 기념박물관에서 받은 감동을 오랜 꿈으로 간직해왔는데 이렇게 현실이 되었습니다. 주방 관련 사업을 하는 이향천 대표를 만난 겁니다. 문화와 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인데 아낌없는 지원을 해주셔서 한국 최초의 조리박물관 건립이 이루어졌습니다. 요리 분야 원로들이 귀한 자료들을 많이 주셨고 저 또한 모든 것을 쏟아부었죠. 지금도 콘텐츠 발굴이나 행사 진행을 하고, 자문을 얻으며 공부합니다. 요리에 관해서라면 누구든 언제든 이곳에 찾아오시면 도움이 되어드릴 수 있습니다.” 넓은 공원의 자연과 전시관을 돌아보는 그의 시선에 애정이 듬뿍 묻어난다. 바쁜 와중에도 조리박물관을 향한 뜨거운 마음으로 성의껏 이야기해주셨다. 일정 때문에 급히 이동하면서도 끝까지 예의를 다해 조리박물관의 의미를 전해주시는 마음이 와 닿았다. 한국조리박물관에 가면 근현대 요리와 조리의 방대한 자료를 통한 스토리텔링을 마주하게 된다. 조리계 원로들과 한국 조리명장들이 분야별 자문위원단으로 동참한 귀하고 소중한 것들을 가득 만날 수 있다. 그동안 국내는 물론이고 외국의 유명한 박물관이나 요리학교, 셰프들을 방문하고 벤치마킹하며 진행해온 일이다. 이 모든 것이 주방 제조업계의 이향천 대표와 한국 조리업계의 역사를 보존하고 재조명하려는 최수근 관장의 열정이 힘을 합친 결과로 지금에 이른 것이다. 현재 한국조리박물관 1층 기획전시실에서는 ‘대통령의 밥상’이라는 전시를 하고 있다. 청와대 요리사가 들려주는 대통령의 밥상 이야기와 청와대 요리사로서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접할 수 있다. 전시장에는 대통령의 식기가 역사 순으로 전시되었는데 이 또한 전해지는 일화가 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국빈 만찬에 일본 도자회사의 그릇을 사용해왔다. 이를 본 육영수 여사가 한국 도자기를 주문 생산했고, 그 뒤로 국빈들에게 당당히 우리 그릇을 내놓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다. 요즘은 가히 요리와 먹방의 시대다. 맛있는 요리를 나누고 누군가에게 알리는 것이 근래의 일만은 아니다. 답답한 도심에서 벗어나 자연 속의 전시장을 둘러보고 맛의 역사에 다가가 보는 시간이 알차다. 조리인들의 철학과 발자취를 돌아보며 흥미로운 요리 세계로 빠져볼 만하다. 안성 일죽면에 가면 봄이 오는 길목에서 맛의 원천을 되새기는 시간을 만날 것이다. 주변에 가볼 만한 곳 서일농원 한국조리박물관에서 자동차로 5분 거리에 서일농원이 있다. 볕 잘 드는 곳에 자리 잡은 2000여 개의 장독대에서 우리의 장맛이 익어가는 옛 정서를 만끽해볼 만하다. 연못가를 지나 산책로를 걸으며 차분히 사색에 빠져보아도 좋을 듯하다. 코로나19 이후 닫혔던 문이 비로소 올해는 열린다고 한다. 죽주산성 죽산면 쪽으로 조금만 더 달려보자. 시원하게 죽주산성에 올라 봄바람을 맞아볼 일이다. 삼국시대 신라의 북진 과정에서 축조한 성곽이다. 성벽을 따라 걸으며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고 확실한 기분전환을 할 수 있다.
- 2023-04-21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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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에서 찰나의 깨달음…유병용 사진전 ‘절로 절로 저절로’
- 작가에게 사진은 말 없는 시(詩)다. 아승기겁(阿僧祇劫)에서 찰나지간(刹那之間)을 포착하는 빛의 광시곡이다. 사진작가 유병용이 오는 5월 10일부터 16일까지 서울 종로구 사간동 법련사(송광사 분원) 불일미술관에서 초대전 ‘절로 절로 저절로’를 갖고 사진집을 발행한다. 50여 년 동안 장미, 들꽃, 인물, 도시 풍경 등에 집중했던 유병용 작가는 지난 2017년 ‘사진, 말 없는 시’ 전시 후 6년 만에 초대전을 갖는다. ‘절로 절로 저절로’는 작가가 그동안 찾아갔던 200여 곳의 절 가운데 가슴에 갈무리해 온 절 풍경 100여 점을 통해 절에 머물던 자신의 시간을 들려준다. 유병용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젖은 땅을 열과 정성으로 말리던 사람들, 처연하게 들리던 처마 끝 풍경 소리에 담긴 불자들의 꿈, 결 좋은 바람의 속삭임을 위안의 귓속말로 절절히 풀어놓았다. 이런저런 일로 찾았던 절이 그에게 말을 걸어온 것이다. 감히 만나 뵐 수 없는 큰스님께서 내려 주시는 차를 마시며 귀한 말씀을 듣기도 했고, 속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스님들의 일상을 편하게 접하기도 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카메라에 담은 사진이기 때문일까. 그의 사진을 마주하면 산사에 발을 딛고 있는 듯 편하다. 이번 개인전을 앞두고 석불사 주지 경륜 스님은 “몇 년 전 노스님께서 열반하시어 매주 수요일 청도 운문사, 담양 부용암, 안동 봉서사, 당진 안국사, 세종 광덕사 등 이 절 저 절 다니며 칠칠이를 지낼 때 그 큰 카메라를 매시고 모든 과정을 찍으시고 그날그날로 정리하시더니 49재를 지낸 후 두툼한 기록 사진집을 봉정해 주셨다. 이번 전시 사진을 보고 있노라니 결정적인 순간을 잡아낸 한 장의 사진이 시인이 쓴 시보다 더 많은 말을 하고, 가수가 부르는 노래보다 더 심금을 울려주는 소리를 들려주기도 한다”고 축하했다. 시인 김삼환은 ‘절로 절로 저절로’ 사진전은 “절의 일상, 풍경, 도구, 기원, 생사, 계절 등 절에 관한 모든 것을 한자리에 모았다. 직접 발품을 팔아야만 하는 노력과 예술가적 앵글의 혼이 잘 혼융된 장기간의 결과물임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언어는 보이는 대상 뒤에 숨는다. 각자 적당한 위치에서 자신의 눈으로 작품이 가르키는 대상을 바라보면 된다”고 평했다. 작가는 현재 마포 한강변에 자리하고 있는 300여 년 고찰 석불사 종무실장이며 석불사 주지 경륜 스님의 유발 상좌로 ‘웅산’(雄山)이라는 수계명도 받았다. 1988년 1월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40년간 근무한 은행 은퇴 후에도 사진가로 왕성하게 활동해왔다. 유병용 작가는 오는 5월 10일(수) 오후 6시 개막식 겸 사진집 출판기념회를 하고, 5월 13일(토) 오후 3시에는 작가와의 대화 시간도 갖는다.
- 2023-04-12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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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놀이보다 즐거운 문화 나들이” 4월 문화소식
- ●Exhibition ◇나탈리 카르푸셴코 : 모든 아름다움의 발견 일정 5월 7일까지 장소 그라운드시소 성수 나탈리 카르푸셴코(Natalie Karpushenko)는 카자흐스탄 출신의 사진작가이자 환경운동가다. 해양과 고래 보호에 관한 인플루언서로도 활동하고 있다. 카르푸셴코는 자연, 사람, 동물 등 세상 모든 것에서 아름다움을 포착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카르푸셴코가 세계 각지의 섬과 바다를 누비며 기록한 사진 200여 점을 만날 수 있으며, 6개의 존으로 구성됐다. ‘Intro’ 존에서는 아티스트와 사진전 전반을 소개한다. ‘Ocean Breath’는 작가의 대표 프로젝트명이며, 해당 섹션에서는 대자연과 환경에 대한 직관적인 메시지가 투영된 작품을 볼 수 있다. ‘Angel’ 존에는 ‘물’에 대한 원초적인 형상을 주제로 한 작품, ‘Rising Woman’ 존에는 자연과 여성을 주제로 한 프로젝트 사진이 전시돼 있다. ‘Wild Breath’ 존에 전시된 작품에는 야생 동물과 인간의 교감 순간이 포착돼 있다. ‘Natalie’는 작업 활동 비하인드와 인간 ‘나탈리 카르푸셴코’를 조명한 섹션이다. 그의 작품을 통해 그동안 미처 보지 못했던 본질적인 아름다움을 느껴보자. ◇김윤신 : 더하고 나누며, 하나 일정 5월 7일까지 장소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1984년 아르헨티나로 이주해 활동하고 있는 한국 1세대 여성 조각가 김윤신을 조명하는 첫 국공립미술관 개인전이다. 작품 70여 점을 통해 우주에 대한 철학적 사고를 반영한 김윤신의 작품 세계를 소개한다. 김윤신은 1970년대 후반부터 자신의 작품 세계를 ‘합이합일 분이분일’(合二合一 分二分一)이라는 이름으로 포괄해나갔다. 그는 자신의 조각 작품에 대해 나무에 정신을 더하고(합), 공간을 나누어가며(분), 온전한 하나(예술작품)가 되는 과정이라 말한다. 이번 전시는 김윤신의 ‘합이합일 분이분일’ 철학에 집중해 석판화, 석조각, 목조각, 한국에서의 신작 등 4개 섹션으로 구성된다. ●Stage ◇데스노트 일정 4월 1일 ~ 6월 18일 장소 샤롯데씨어터 연출 김동연 출연 홍광호, 김준수, 고은성, 김성철, 이영미, 장은아, 서경수, 장지후 등 뮤지컬 ‘데스노트’는 지난해 5년 만에 새로운 시즌으로 개막했다. 이전과 달라진 참신한 연출과 무대 미술로 전회 매진을 기록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인기에 힘입어 8개월 만에 앙코르 공연된다. 홍광호, 김준수 등 티켓 파워를 입증한 주연 배우들이 그대로 출연한다. ‘데스노트’는 동명의 일본 만화를 원작으로 한다. 이름을 쓰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데스노트’를 우연히 줍게 된 천재 고등학생 ‘야가미 라이토’와 그에 맞서는 베일에 싸인 명탐정 ‘엘’(L)의 양보할 수 없는 두뇌 싸움을 긴장감 넘치게 그렸다. ◇폭풍의 언덕 일정 4월 23일 ~ 6월 18일 장소 서울 종로구 드림아트센터 2관 연출 성종완 출연 김수로, 강성진, 이정화, 문경초, 김아론, 강혜인 등 영국 여류 작가 에밀리 브론테가 1847년 발표한 소설 ‘폭풍의 언덕’을 원작으로 한 연극이다. 이번 공연은 2021년 초연에 이은 재연이다. 초연 당시 사랑하는 여인을 잃은 남자 ‘히스클리프’의 복수에 관한 이야기가 배우들의 호소력 짙은 연기력과 감각적인 연출에 힘입어 호평을 받았다. 주인공 히스클리프 역에는 문경초, 김아론이 캐스팅됐다. 초연에서 히스클리프로 인상 깊은 모습을 보여줬던 김아론은 더욱 성장한 모습을 보여줄 예정이다. 문경초는 뮤지컬 ‘히드클리프’에서 히드클리프를 연기한 바 있어 기대를 모은다. ◇친정엄마 일정 3월 28일 ~ 6월 4일 장소 대성 디큐브아트센터 연출 김재성 출연 김수미, 정경순, 김서라, 별(김고은), 현쥬니, 신서옥, 김형준, 김도현, 이시강 등 누적 관객 40만 명을 동원한 뮤지컬 ‘친정엄마’는 엄마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힐링극이다. 1950년대 열여덟 말괄량이 봉란은 가슴 설레는 첫사랑을 경험하고, 딸 미영을 낳아 엄마가 된다. 어느덧 성장한 미영이 결혼하자, 봉란은 무식한 자신 때문에 미영이 시댁 눈치를 볼까 봐 전전긍긍한다. 미영은 봉란의 마음을 엄마가 되고서야 깨닫는다는 내용이다. 코로나19로 4년 만에 돌아온 ‘친정엄마’는 이야기와 무대가 업그레이드됐다. 초연부터 출연 중인 김수미를 비롯해 인지도 높은 배우들이 대거 출격해 이목이 집중된다. 본 기사에 소개된 공연을 관람하신 독자분의 생생한 후기를 기다립니다. 채택된 분께는 소정의 상품과 브라보 마이 라이프 잡지를 보내드립니다. shjlife@etoday.co.kr
- 2023-04-07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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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승숙 다시배움 대표, “우울한 중년에게 취미는 감정 방패”
- 인생을 그림에 비유해보자. 전반기는 연필로 밑그림을 그리고, 후반기는 물감으로 채색한다. 색을 칠할 때는 가끔 연필 선을 벗어나도 괜찮다. 선을 넘나들다 보면 때론 밑그림보다 더 아름다워지는 순간도 있으니까. 박승숙 다시배움 대표 또한 과거의 밑그림에 갇히지 않고 의도적 탈선(?)을 즐기는 인물이다. 그의 그림은 하나의 모자이크 조각이 되어 언젠가 동년배와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될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박승숙 대표가 지난해 1월 문을 연 ‘다시배움’은 중장년 세대를 위한 교육기관이다. 홈페이지에 소개된 프로그램 카테고리를 보면 미술, 극, 음악, 무용 등 예술 분야 교육이 이뤄짐을 알 수 있다. 1세대 미술치료사로 활약했던 박 대표의 이력 때문에 자연스러운 행보로 읽힐지 모르지만, 속사정을 들어보면 일종의 모험이다. 이 험난한 여정은 그가 돌연 퇴직을 자처하면서부터 시작됐다. “퇴직을 결심한 건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딸아이의 유학이 계기가 됐어요. 그동안 일 핑계로 엄마 노릇을 잘 못 했는데 그때라도 뒷바라지 좀 해보자 싶었죠. 일하는 내내 ‘시간 없어’, ‘바빠’라는 말을 달고 살았거든요. 그때부턴 돈이 아닌 시간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 외엔 특별한 계획 없이 일을 그만두었습니다.” 하던 일만 계속 하면 무슨 의미? 퇴직 후 박 대표는 시나리오를 쓰거나 랩을 배우는 등 그동안 전혀 경험하지 않은 분야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의욕을 갖고 이런저런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일상을 채워나갔지만, 그 끝엔 알 수 없는 공허함이 맴돌았다. “초반에는 젊은 세대와 함께하는 수업도 많이 나갔는데, 늘 ‘고참’, ‘왕언니’라는 수식어가 붙더라고요. 그런 상황이 몹시 불편했고, 어린 수강생들 눈치도 많이 봤어요. 때론 제 열정이 그들에게 위화감을 주기도 했죠. 존재 자체가 민폐라는 생각이 들고, 이제 변방으로 밀려난 나이가 됐구나 싶더군요. 그러다 결국 중장년 대상 기관들을 찾았는데, 역시나 제가 추구하는 바를 채울 순 없더라고요.” 평생직장을 강조하는 시대 흐름에 발맞춰 중장년 대상 기관들은 일자리 관련 프로그램을 확대하는 추세다. 박 대표도 경험 삼아 보람형 일자리에 참여해본 적이 있다. 취지나 내용은 훌륭했지만, 그에겐 여전히 마뜩잖게 느껴졌다. “몇몇 프로그램은 일종의 스펙 쌓기 식으로 흘러가더라고요. 참여자들도 과정을 음미하기보다 수료증 취득에 만족해하는 모습이었죠. 사실 일부 관리 기관은 성과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없지 않아요. 제 결과물 역시 어딘가 중장년 관련 통계 수치에 머릿수로 더해졌겠죠. 물론 백세시대에 앞으로 50년은 더 일해야 한다는 걸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에요. 근데 한편으론 그게 좀 슬프더라고요. 그동안 돈벌이한다고 그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앞으로도 계속 일할 생각을 하라니 억울한 마음이 드는 거예요. 차라리 좀 덜 먹고 덜 쓰면서 허리띠를 졸라매더라도 다른 생각을 해보고 싶었어요. 어떤 반발심일 수 있지만, 가능한 한 먹고사는 문제와 동떨어진 일을 찾으려 했습니다.” 그렇게 퇴직 후 5년간의 방황 끝에 박 대표가 찾은 건 ‘예술’이었다. 흔히 ‘배고픈 예술가’라는 표현도 쓰이듯, 천부적인 재능이 없다면 당장 생계에 큰 도움을 얻기 힘든 분야다.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인생 후반전에 예술을 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크게 보면 전반전의 키워드 또한 예술이다. 달라진 점은 과거에는 예술을 매개로 ‘치료’를 했다면, 이제는 ‘교육’으로 풀어낸다는 것. 한 사람의 성장과 변화를 돕는다는 측면에서 볼 때 치료와 교육의 목표는 유사하다. 그렇다면 왜 박 대표는 전공인 치료가 아닌 교육을 택한 것일까? “치료는 제게 너무나 능숙하기 때문이에요. 잘하던 걸 계속 잘하는 건 후반생에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았어요. 전자동 전문성이랄까? 노력 없이도 줄줄 떠들 수 있고, 척하면 척 바로 해낼 수 있잖아요. 그럼 저는 계속 한쪽만 쓰는 사람이 되는 거고요. 그 노련함을 버려야 새로운 생각과 고민을 할 수 있겠더라고요. 그래서 퇴직하고 이것저것 배우러 다닐 때도 일부러 초심자거나 무지한 분야만 골라서 간 거예요. 조금이라도 전문성이 발휘될 곳은 피했죠. 덕분에 더 많이 배우고 깨우칠 수 있었고, 그런 과정을 동년배들과 나누고 싶어졌어요. 그렇게 다시배움을 만들게 된 겁니다.” 역사상 가장 긴 중장년을 사는 세대 박 대표가 다시배움을 선보인 이유 중에는 부모의 영향도 있다. 그의 아버지는 단색화의 거장으로 잘 알려진 박서보 화백이다. 92세의 나이에도 꺼지지 않는 창작열을 불태우는 진정한 시대의 예술가다. 어머니 윤명숙 작가는 여든이 넘어 수필집을 펴내는 등 창작 활동으로 예술 뒷심을 발휘 중이다. 부모의 그런 의욕적인 삶의 태도는 박 대표에게 큰 영감을 줬다. “최근 어머니께서 ‘내 존재의 의미는 창작 하나밖에 없다’고 말씀하시더군요. 노년기에 그런 결론을 내리셨다는 점에 깜짝 놀랐어요. 계속해서 글을 쓰려 하시고, 책을 붙들고 계시죠. 아버지께서도 지금 식사가 힘들 정도로 불편하신데도 여전히 붓을 놓지 않으세요. 두 분의모습을 보면 몸은 늙고 불편하지만 예술로 젊고 자유로워지는 부분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창작을 통해 여생을 일궈갈 중장년만의 공간도 필요하리라 여겼죠.” 중년 이후로는 부모와 함께 늙어가는 삶 속에서 더욱 배울 점이 많아졌다는 박 대표다. 한편으론 부모와 자식이 ‘나이 듦’이라는 공통점을 통해 만나는 이 상황이 반갑기도 하단다. 그는 이러한 세대 간 동행이 백세시대가 주는 축복 중 하나라고 말한다. “우리 부모 세대는 그 어느 때보다 긴 노년을 사는 분들이에요. 이미 중장년기는 과거 세대와 크게 다르지 않은 수준에서 지났는데 수명이 계속 늘어가는 상황이니까요. 비슷하게 저와 동년배들은 역사상 처음으로 가장 긴 중장년기를 보내고 있죠. 지금 65세 이상은 노인 등 몇몇 기준이 있지만, 그 또한 점점 뒤로 늦춰지리라 봐요. 그렇게 우리의 중장년기는 더 길어질지도 몰라요.” 그는 어쩌면 지금보다 더 긴 중장년기와 노후를 보내게 될 후배 세대를 위해 더 혹독하게 현재를 깨우치고 알아가고자 한다. 그리고 그런 배움을 동년배들이 함께 해주길 바랐다. “저는 사회적인 사람이라서 이런 사안에 책임을 많이 느껴요. 퇴직 전까지는 그야말로 미친 듯이 일만 했는데, 다행히 그 덕에 노후 생계는 크게 고민하지 않을 정도가 됐어요. 대신 나 같은 사람이 그 외의 다른 고민을 해줘야죠. 근데 중장년들을 보면 그런 생각을 다 각개전투로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더 우왕좌왕하고 있고요. 이럴 때일수록 우리가 머리를 맞대고 생각을 모아야 한다고 봐요.” 박 대표는 중장년 교육기관을 꿈꾸며 ‘또래 만들기’에 주안점을 두기도 했다. 단순히 친목 도모를 위한 건 아니다. 그보다는 동료의식에 가깝다. 때문에 다시배움 프로그램의 과제는 개인보다는 협업 프로젝트 형태로 이뤄진다. “상황적으로 비슷한 고민을 하지만 저마다 다른 삶을 살아온 이들이 동료로 뭉치는 거죠. 저희는 ‘창작 집단’이라고 하는데, 함께 창작물을 만들다 보면 계속 대화하고 시선을 맞춰보는 작업을 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때론 자연스럽게 도전받는 기회가 생기고, 경청하고 수용하며 집단 안에서 자신을 객관화하고 돌아보는 기회도 생기죠. 사실 다시배움의 최종 목표는 공동체 형성인데요. 지금 같은 양극화 시대에 공동체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이웃? 종교? 새로운 사회를 꿈꾼다면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가 필요하다고 느꼈어요. 그러려면 남다른 사고를 해야 하는데, 늘 해오던 일 안에서는 같은 답밖에 안 나오죠. 그런 점에서 예술이라는 낯선 경험은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답을 줄 수 있다고 봐요. 어쩌면 그게 정답에 가까울지도 모르고요.” 우울은 원동력, 취미는 감정 방패 공동체에 대한 로망은 가득하지만, 기대감은 ‘0’에 가깝다고 진단하는 박 대표다. 자신감 결여보다는 현실적인 처지가 그러하다. 코로나19가 극성이던 시기에 다시배움을 열고, 어느덧 1년 차. 박 대표는 “생각만큼 잘 되지는 않고 있다. 실수도 많다. 그래도 후회는 없다”며 솔직한 심경을 들려줬다. 어찌 보면 수순일지도 모른다. 가보지 않은 길은 시행착오가 필요한 법. 그는 자신의 ‘우울증’을 원동력으로 삼고 있다. “세상이 참 우울해요. 너무나 슬퍼요. 그러나 역설적으로 제겐 그 우울함이 힘이 되고 있어요. 이렇게 시행착오를 겪을지언정 무언가를 하지 않는다면 그 우울함을 도저히 견디지 못할 것 같아요. 정확히는 우울을 벗어나기 위한 과정이 원동력으로 작용하는 셈이죠. 그런 무력감을 갖는 분들이 적지 않을 거예요. 그렇다면 좀 움직이셨으면 좋겠어요. 아시다시피 우리에겐 아주 긴 세월이 남았잖아요. 지금 주저앉아 있긴 너무 이릅니다. 더 크게, 더 멀리 바라보고 현재의 고민을 함께 해결해가면 좋겠어요.” 그는 동년배를 일컬어 ‘늙은이’가 아닌 ‘늙는이’라 표현하기도 했다. 앞으로는 계속 늙는 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서글픔도 있지만, 잘 늙어가자는 응원도 담긴 듯했다. 아무렇게나가 아닌 제대로 나이 들고 싶다는 박 대표는 훈련하듯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려 노력한다. 심리치료로 오랜 시간 타인을 상담해온 그이지만 나이 들수록 제어가 잘 되지 않는 감정이 하나 있단다. 바로 ‘서운함’이다. “예전에는 감정의 종류도 굉장히 다양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하나의 카테고리로 뭉뚱그려져서 나타나더라고요. 나중엔 카테고리도 몇 개 안 남게 되는데, 그중 가장 큰 게 ‘서운함’이더군요. 거기엔 슬픔, 분노, 절망 등 웬만한 부정적인 감정이 다 들어가요. 중년 이후로 서운함은 커지고, 예전처럼 감정의 꼬리가 잘 잘라지지도 않더라고요. 정말이지 이러다 나중엔 모든 감정 중에 서운함만 남을 것 같아요.(웃음)” 그런 서운함을 온전히 사라지게 하기는 어렵다는 게 박 대표의 결론이다. 그렇다고 방치해두는 것은 아니다. 조금 뒤로 가려둘 뿐. 그럼 무엇으로 가리느냐. 그는 취미를 전진 배치하는 전략을 세웠다. “이런 감정은 개인 문제라기보다는 노화로 인한 뇌과학의 영역이라고 봐요. 즉 언젠가 누구나 겪는 보편적인 현상이죠. 차이는 대응에 있어요. 제 경우엔 그 서운함을 안고 가지만, 거기에 다른 무언가를 더해 완화하는 쪽이에요. 내가 몰두하고 즐겁고 기분 좋은 무언가를 찾아 계속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거죠. 그런 서운함을 이길 방법은 취미뿐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하는 예술도 그 일환이 될 수 있겠죠. 여전히 많은 분들이 취미나 예술이 돈이 되느냐고 반문하시는데요. 물론 직업으로는 어려울 수 있지만 진로는 된다고 봅니다. 돈을 벌고 안 벌고를 떠나 내가 어디로 가야 할지 알아야만 노후의 밑그림을 그릴 수 있으니까요.”
- 2023-03-28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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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찾아 떠나는 양주의 삶과 예술
- 회암사지를 앞에 두고 잠깐 서 있었다. 천보산 기슭 아래 들판처럼 광활한 면적 위로 겨울이 지나가는 중이다. 조선 시대 최대 규모 사찰이던 회암사가 있던 곳, 회암사 절터에는 군데군데 아직 잔설이 희끗희끗하다. 그늘이 드리운 땅에는 녹지 않은 눈이 제법 하얗다. 여전히 쨍한 찬 기운을 제대로 맛본다. 머릿속이 시원하게 헹구어지는 느낌이다. 치유의 궁궐 회암사지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그 자리를 딛고 있었던가. 그 옛날 건물만 262칸이었다던 조선시대 사찰 회암사가 있었던 회암사지에는 찬 공기를 실은 바람이 가끔씩 지나간다. 당시 승려만도 3000여 명이 이곳에서 수행했다 하니, 지금이어도 엄청난데 그 시절 대찰의 면모를 가히 짐작해볼 만하다.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산 14-1번지 일원, 천보산이 둘러싼 ‘회암사지’ 절터는 역사 속에서 잊혔던 곳이다. 그러다 1997년 이후 지속적인 발굴 조사와 작업 과정에서 사찰의 어마어마한 규모와 위상을 알 수 있는 유적과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절터의 제1권역부터 제2, 제3… 권역의 상세한 안내판이 여기저기 친절하다. 회암사지 사리탑은 물론이고 연못지와 우물지, 화장실 터까지 규모를 상상하고도 남을 만하다. 현재 기단과 주춧돌만 남아 있지만 천보산 아래쪽 계곡을 메워 계단식 석축을 쌓아 건물 구역을 조성한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구역별 건물지도 발견되었다. 회암사지를 둘러보다 보면 거대한 석축과 반듯반듯하게 배치되었을 건축 형상에서 품격이 느껴진다. 당대의 석공들이나 장인들이 이 절에 들인 공력조차 느껴질 정도이니 당시의 면모가 감히 가늠된다. 화암사지 중심에서 벗어나 산기슭 바로 아래에 위치한 회암사지 부도탑,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불탑으로 추정하는데 사리탑(舍利塔)은 대체로 온전하게 남아 있어 귀중한 석조 유물로 전해진다. 특히 조선시대 부도 양식으로 건립된 사리탑 중에서 정교함과 화려한 조각 문양으로 수작이라 평가받고 있다. 또한 규모가 가장 크다는 점에서 주목받는 조형물이다. 사리탑 앞에서 너른 회암사지 방향으로 시선을 두고 서니 멀리 도심의 높은 건물과 아파트가 눈에 들어온다. 거리를 두고 과거와 현재가 마주하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 고려 말에서 조선 초까지 최대의 왕실 사찰이었던 회암사지는 현재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으로 등재되어 있다고 한다. 1만여 평의 회암사지를 한 바퀴만 돌아도 당시의 거대한 규모와 불교 문화의 흔적이 역력하다. 회암사지를 내려오는 길목에 세워진, 회암사를 찾는 태조의 행차 장면 모형에서 이곳의 위상을 또 한 번 느낀다. 문화재 간직한 양주시립회암사지박물관 회암사지에서 발굴·출토된 유물들을 전시 중인 박물관이 입구에 자리 잡고 있다. 양주시립회암사지박물관은 유물 전시 및 교육을 비롯해 쉼터 역할도 하는 등 친화적인 분위기다. 아이들을 데리고 온 듯한 지역민들이 방문자센터에서 여유롭게 쉬고 있다. 대규모 절터 옆의 박물관이 주민들과 친근하게 이어진 모습이 보기 좋다. 박물관 안에서는 옛 복장을 한 아이들이 놀이하듯 교육 중이었다. 이곳에서는 이런 풍경이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지공·나옹·무학의 천년 고찰 회암사(檜岩寺) 회암사지에서 고개를 들어 보면 멀리 회암사 일주문이 보인다. 자동차로 5분쯤 달려 쉽게 다가갈 수 있다. 천보산회암사라는 편액이 걸린 일주문 옆으로 지공선사·나옹선사·무학대사 삼대 화상 수행성지라는 팻말이 조그맣게 세워져 있다. 현재의 회암사는 옛 회암사의 삼대 화상 묘탑(廟塔)을 지키기 위한 작은 암자 터에 세워진 공간이라는 설명도 있다. 삼대 화상의 묘탑과 가람을 수호하고 수행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곳이 바로 회암사다. 왕실의 비호를 받으며 장대했던 대규모 사찰이 폐사되고 초석만 남아 있던 곳이었다. 200년 동안 엄청나게 번성했던 회암사는 그 시절 전국을 다니다가 만나는 승려들에게 어디서 왔냐고 물으면 대부분 회암사에서 왔다고 할 만큼 승려 수가 많았다고 전한다. 이제는 지공·나옹·무학 세 승려의 부도와 비(碑)를 중수하면서 옛터의 오른쪽에 작은 절을 지어 회암사의 절 이름을 계승하고 있다. 사찰이 넓진 않아도 천년의 문화유산이 숨 쉬는 듯 따뜻하고 고색창연하다. 대웅전 마당 옆으로 난 산길을 몇 걸음 옮기면 지공선사의 부도 및 석등, 나옹과 무학의 사리탑이 나란히 앉혀져 있는 언덕이 있다. 비탈진 사찰을 천천히 오르면서 그분들의 수행 향기를 느껴볼 만하다. 현재 회암사에서는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이 진행 중이다. 맑은 자연 속에서 깨달음을 얻는 시간은 진정 힐링일 것이다. 절의 격이 느껴지는 산사에서 마음을 열고 수행자의 일상을 경험하는 전통문화 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해볼 수 있다면 선물 같은 시간이 될 듯하다. 역사·문화 도시 양주에서는 또한 이 지역 출신 예술가들을 위한 기획 프로그램이 다양하다. 권율장군묘역이 있는 권율로를 달리다 보면 두 개의 미술관이 한꺼번에 나타난다.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과 양주시립민복진미술관이 도로를 두고 마주 보고 있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양주시립미술창작스튜디오에서는 예술가들에게 창작 공간을 제공하고 기획 전시도 진행하는 중이다. 화가 장욱진과 조각가 민복진의 예술 속으로 장욱진 화가의 그림 내용은 우선 가족이다. 그리고 나무, 새, 아이 등 일상의 소재들이 그림으로 표현되었다. 그 속에는 자연과 사물이 가지고 있는 근원적 본질이 담겼다. 한국의 근대미술을 대표하는 서양화가 장욱진의 미술관은 조각상이 전시된 공원을 지나서 들어간다. 전시장을 돌다 보면 그림마다 가족이 등장한다. “나는 누구보다 가족을 사랑한다. 그 사랑이 가족을 통해 서로 이해된다는 사실이 다른 이들과 다를 뿐”이라고 했듯이. 이렇듯 전시장의 그림마다 화가의 이야기가 덧붙여지고 영상을 통해 그의 면모를 들여다볼 수 있다. “나는 심플하다”는 화가의 말처럼 자연 속에서 동화적이고 이상적인 내면세계를 보여주는 그림들이다. 특히 미술관 건물은 화가의 그림을 모티브로 설계된 새하얗고 독특한 구성의 건축으로 눈길을 끈다. 2014년 김수근건축상을 받기도 했다. 건너편의 민복진미술관은 입장 티켓 한 장으로 장욱진미술관과 함께 이용할 수 있다. 1층의 기획 전시를 보고 2층으로 올라가면 민복진 조각가의 현대 조각이 가득 차 있다. 햇살이 창을 통해 쏟아져 들어와 조각 작품과 빛의 조화가 환상적이다. 역시 가족과 어머니와 인류에 대한 사랑이 주제다. 돌아오는 길에 장흥면 방향으로 위치한 간이역 일영역을 거쳐서 오는 건 어떨지. 마침 노을이 내리고 있다면 금상첨화다. 폐역이 된 일영역은 영화 ‘엽기적인 그녀’의 촬영지로 알려졌는데, 이제는 BTS의 뮤직비디오 촬영지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스토리텔링에 기반을 둔 아련한 레트로 감성의 폐역을 거쳐 오는 것도 더할 나위 없는 마무리다. 당일 코스로 역사와 문화를 두루 돌아볼 수 있는 경기도 양주의 하루는 풍성하다. 꽃잎이 날리는 봄·가을의 나리공원이나 호수와 산이 어우러진 출렁다리, 양주 별산대 놀이마당, 수목원이나 아트파크의 즐거움을 누릴 계절도 있다. 봄을 앞둔 시절에 역사 속으로 들어가 그림과 조각 작품의 예술에 깊이 빠져보는 것, 참 감사할 따름이다.
- 2023-03-24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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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장과 관리도 진심” 국내 최초 사진 전문 미술관, 뮤지엄한미
- 누구나 ‘폰카’로 사진을 찍는 세상이다. 별다른 스킬과 강박이 없는 채로 스마트폰을 들이대 일상에 널린 사진 소재와 디자인 요소를 포획한다. 사진으로 유희하고 자랑하고 소통한다. 사진으로 이렇게 나를 표현한다. 낡은 빈티지 카메라를 탐닉하는 이들까지 출현했다. 사진은 이제 일부 애호가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대중과 사진의 사이가 이토록 긴밀한 시대가 있었던가. 그러나 국내에 사진 전문 미술관은 뜻밖에도 별로 없다. 서울 삼청동에 있는 ‘뮤지엄한미’가 그래서 반갑다. 삼청공원 들머리 한적한 고샅에 있다. 삼청동에는 미술관이 많다. 경복궁 동남쪽 모서리에 있는 동십자각에서 삼청동까지 걸어보라. 저마다 독특한 외관을 가진 미술관 10여 곳이 눈에 띈다. 갤러리현대, 금호미술관, 아트큐브, 아트선재센터, 국제갤러리 등등…. 미술 작품을 즐기며 한나절 소요하기 좋은 동네다. 미술관들이 펼치는 예술적 레이스로 개성과 정취가 묻어나는 곳이다. 이제 뮤지엄한미가 가세했다. 큰길에서 벗어나 한갓진 느낌을 주는 야트막한 언덕길 옆에 있다. 도회 복판이지만 소음과 소란을 따돌린 입지다. 심지어 고즈넉한 분위기까지 풍겨 첫눈에 호감이 간다. 뮤지엄한미는 송파구 방이동 한미약품 사옥에 있던 한미사진미술관 본관을 삼청동으로 옮기면서 거듭난 미술관이다. 즉 한미사진미술관을 기반으로 재탄생한 뮤지엄이다. 2년여에 걸친 이전 작업을 통해 2022년 12월에 문을 열었다. 2003년에 개관한 한미사진미술관은 한국 최초의 사진 전문 미술관으로 20여 년간 사진 전시는 물론 소장품 수집, 작가 지원 사업, 출판과 교육 사업을 펼쳤다. 학술 연구기관인 한국사진문화연구소와 대중을 대상으로 한 한미사진아카데미를 설치해 사진예술 연구와 보급을 위한 갖가지 콘텐츠를 가동하기도 했다. 사진 전문 미술관이 전무했던 시절에 발군의 역량을 가지고 탕탕 행진했던 셈이다. 뮤지엄한미는 그 20여 년간 축적한 성과와 실력을 돛으로 삼아 더 광활한 사진의 바다로 나아가고자 개관했다. 뮤지엄한미의 건물 외관이 야기하는 인상은 뭐랄까, 허세 없는 말쑥한 패션을 입어 단정하다. 또는 단아하다. 담백하지만 싱겁지 않고, 세련됐지만 요란하지 않다. 따뜻한 손을 조용히 뻗어 사람을 안으로 끌어들이는 기운? 은근한 내향적 기풍이 느껴진다. 건축가 민현식(건축연구소 기오헌 대표)이 설계했다. 그는 파주출판도시 설계, 수원화성역사문화도시 기본계획 등의 작업을 통해 특유의 건축적 이론을 실천한 인물로, 자주 건축적 논쟁의 중심에 선 원로다. 전통 건축의 중요 요소인 마당의 의미를 근간으로 한 ‘비움의 구축’을 키워드로 삼은 설계로 독자적인 건축 언어를 발신해왔다. 로비로 들어서자 공간 한 면의 통유리창으로 햇살이 들이친다. 2층 건물 내부 벽면 곳곳에 유리창을 설치했다. 따라서 곳곳이 밝고 투명하고 유려하다. 창으로 들어오는 건 햇살만이 아니다. 북악산에서 흘러내린 푸른 능선과 능선 갈피에 산재한 집들, 그리고 하늘과 구름까지 따라 들어온다. 이렇게 외부 경관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는 건물이다. 내부 구조는 치레와 꾸밈을 자제했다. 외부 경관에 더 많은 자리를 내주기 위해 살짝 뒤로 물러나 앉은 양 간명한 품새다. 그러나 간명하기만 하다면 허전할 터. 건물 디자인의 백미에 해당하는 공간이 하나 있는데 바로 ‘물의 정원’이다. 건물 복판에 중정 역할을 하는 작은 연못을 조성해 물의 양상과 묵상을 바라볼 수 있게 했다. 잠잠한 수면을 희롱하는 햇살의 동향을 읽을 수 있는 ‘물의 정원’의 이채에 즐겁다. 국내 최초로 저온 수장고 설치 ‘물의 정원’은 이 뮤지엄을 이룬 세 개의 건물을 하나로 엮는 고리 역할도 한다. ‘물의 정원’을 중심으로 규모와 형상이 저마다 다른 공간들이 3차원으로 교직하는 것이다. 관람 동선 구성에서도 민현식의 건축적 의도와 지향이 완연하게 드러난다. 그는 관습적인 순환 동선을 구사하는 대신, 매트릭스 형태를 구성해 동선을 다양화했다. 심지어 다리까지 만들었다. 관객에게 동선의 선택 폭을 넓혀줌으로써 미술관에서의 한때를 한결 즐겁게 누릴 수 있도록 배려한 셈이다. 공간의 용도를 미리 규정하지 않고, 전시 작품에 따라 변용할 수 있는 중성적 공간으로 만든 데에도 설계자의 의도가 숨어 있다. 어떤 작품이 들어오더라도 수용할 수 있도록 공간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난 형국이다. 이모저모 ‘비움’의 은유를 가시적으로 구현했다. 뮤지움한미의 구성원들이 야심과 포부를 가지고 각별히 공들인 공간도 주목할 만하다. 고도의 테크놀로지로 구축한 수장고가 바로 그렇다. 이 미술관의 심장부다. 지난 20여 년간 수집한 2만여 점의 사진 소장품을 안전하게 보존하기 위해 국내 최초로 저온 수장고와 냉장 수장고를 만들었다. 보관 여건이 좋지 않으면 손상되기 쉬운 게 사진이다. 곰팡이가 슬거나 열화(劣化)가 발생한다. 이를 방비하기 위해 완벽한 성능을 갖춘 전문 수장고를 설치했다. 이는 세계적으로 몇 안 되는 고성능 수장고로 꼽힌다. 첨단 항온·항습 시스템이 가동되는 이 수장고에 보관된 사진 소장품들은 500년의 수명을 누릴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 하니 놀랍다. 19세기 귀한 사진도 보관 물론 일반인은 수장고에 출입할 수 없다. 이를 아쉽게 여긴 미술관 측은 수장고 입구에 자그만 전시실로 꾸민 개방 수장고를 만들어 관람객들에게 역사적인 사진 중 일부를 보여준다. 어디서도 만나기 어려운 이 저온 수장고 전시실엔 1929년 이전에 촬영한 사진 작품 12점이 걸려 있다. 모두 진귀한 사진들이다. 카메라를 귀신 붙은 괴물체쯤으로 여겼던 1883년에 국내 최초의 사진관을 차린 사진가 황철이 찍은 1880년대 사진을 비롯해, 대한제국 황실 사진가 김규진이 운영한 천연당 사진 작품, 최초의 여성 사진가로 알려진 경성사진관 이홍경이 찍은 사진 등 희귀한 원본 작품들을 볼 수 있다. 고종황제와 흥선대원군의 초상 사진도 전시돼 흥미롭다. 누렇게 빛바랜, 무상한 세월의 잔영처럼 남은 손바닥 크기의 옛 흑백사진들이 스산하지만 뜻밖에도 평화롭다. 영영 지나간 풍경들, 사라진 사람들의 흔적이 사진으로 남아 한 줌의 온기를 전하는 듯하다. 전시장에선 뮤지엄한미 신축 개관전이 성황리에 펼쳐지고 있다. ‘한국사진사 인사이드 아웃, 1929~1982’전이다. ‘한국 사진이 어떤 제도적 조건과 역사적 문맥 속에서 역사를 일궈왔는지 밝히고자 기획한 전시’란다. 1929년에 열렸던 정해창의 ‘예술사진 전람회’부터, 1982년 덕수궁 석조전에서 있었던 ‘임응식 회고전’까지, 한국 사진사에 한 획을 그은 전람회들을 재조명하는 대형 기획전이다. 관람을 마치고 미술관을 나오는 중에 여운처럼 아른거리는 게 있다. 흑백사진들의 검은빛과 흰빛이다. 단순한 흑백의 조합이 만들어내는 음영과 농담(濃淡)과 여백을 통해 피사체를 부각한 흑백사진의 묵직한 호소력이라니. 컬러로 존재하는 세상을 흑백으로 번역하자, 외려 깊은 맛을 풍기는 게 아닌가. 김선영 뮤지엄한미 학예연구관 “꼼꼼히 감상하는 관람객 많아 놀라워” 뮤지엄한미는 사진을 즐기는 이들이 반색할 만한 공간이다. 흔히 습관처럼 휴대폰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 일상의 오락으로 삼는 풍속을 고려하면, 대중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 수 있는 시대적 환경을 맞이한 뮤지엄이기도 하다. 김선영 학예연구관의 얘기는 이렇다. “사진은 여느 예술 언어에 비해 큰 강점을 지닌 매체다. 가령 회화나 조각과 달리 이미 대중에게 익숙해진 매체이기 때문이다. 요즘은 문자보다 사진 영상을 소통의 도구로 사용할 정도이지 않은가. 사진이 보편적인 시각 언어로 부상한 셈이다. 이런 경향을 포괄해서 사진과 타 매체의 접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보여주는 전시 기획에 주력할 계획이다.” 대중에게 더 다가가겠다는 얘기인가? “우리 뮤지엄의 목표는 20여 년간 축적한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사진예술을 확장하는 데 있다. 이미 한국을 대표하는 사진 전문 미술관으로 자리매김했지만 더 새로운 전시 기획으로 대중에게 다가가고자 한다. 소장품들을 수장고에 유폐하기보다 개방 수장고를 통해 전시하는 이유는, 대중과의 긴밀한 소통을 추구하는 뮤지엄한미의 상징적 장치이기 때문이다.” 2만여 점의 소장품 가운데 가장 진귀한 사진을 꼽는다면? “특정 작품을 꼽기는 어렵다. 소중한 가치를 지닌 진품 원본 사진이 너무 많아서다.” 전시실에 관람객이 많더라. “진지한 관심과 궁금증을 가지고 작품을 꼼꼼히 관람하는 이들이 많다. 놀라울 정도로. 사진에 관한 대중의 친밀도를 반증하는 현상으로 보인다.” 사진 작품을 즐겁게 감상할 수 있는 방법을 일러준다면? “공부가 좀 필요할 것 같다. 이를테면 한국 사진이, 또는 서양 사진이 어떻게 시작해서 어떻게 흘러왔는지, 한국 사진과 서양 사진은 어떤 접점을 갖고 있는지 알려주는 개론서를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그렇게 하면 안목이 생기고, 안목이 생기면 더 흥미로워진다.” 요즘의 사진예술은 추상회화를 연상시킬 정도로 파격적인 경향을 보인다. 따라서 흥미로운 반면 난해하게 느껴지기도 하는데. “융복합이 매우 활발하다. 현대미술이 사진을 차용하기도 하고, 사진작가들이 외연을 확장해 미술을 끌어들이기도 한다. 한편 외연 확장적인 작품이 복잡하고 개념적인 것 같지만, 작가들이 그 레퍼런스를 주로 일상에서 찾아내 작업하기 때문에 어렵다고만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20세기 사진의 거장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 철학 ‘결정적인 순간’의 영향력은 이 시대에도 유효한 것일까? “한 장의 이미지에 많은 것이 응축된 절대적 순간을 집어넣는다는 게 ‘결정적인 순간’의 개념으로, 사진가들에겐 바이블과 같은 규범이었다. 이는 오늘날까지도 유효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이라는 정형화된 틀을 벗어나 훨씬 자유로운 사진들이 이미 1950년대 이후에 출현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사진가가 윌리엄 클라인이다. 뮤지엄한미에서 올 5월 말에 그의 전시회가 열린다.”
- 2023-03-1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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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대급 화려한 대작 쏟아진다” 3월 문화소식
- ●Exhibition ◇WATSON, THE MAESTRO 일정 3월 30일까지 장소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알버트 왓슨은 패션 포트레이트 사진계의 거장으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20인의 사진작가’에 선정됐다. 왓슨은 스티브 잡스, 알프레드 히치콕, 데이비드 보위 등 동시대 아이콘과 작업했다. 1977년부터 2019년까지 100회 이상 패션잡지 ‘보그’ 표지 촬영을 담당했다. ‘킬 빌’, ‘게이샤의 추억’ 등 영화 포스터도 촬영했다. 이번 전시는 왓슨의 1960년대 초기작부터 외부에 최초로 공개하는 2022년 최신작까지 아우른다. 유명 인사의 인물 사진, 풍경과 정물이 있는 개인 작업, 실험적인 사진까지 주요 작품 125점을 만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왓슨이 촬영한 다양한 매거진의 전설적인 커버 이미지와 테스트 샷으로 촬영한 폴라로이드 사진, 밀착 인화지 작업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사진과 영상까지 함께 전시된다. 왓슨은 태어날 때부터 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 장애가 있었지만 카메라의 눈을 빌려 세상의 아름다움을 사진에 담아낸다. 현재도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그는 “사진을 접한 지 60년이 흘렀지만 나는 아직 사진에 열정을 품고 있다”면서 “팔십을 넘어선 지금도 나는 카메라 중독자다”라고 말했다. ◇박기웅 : 48 VILLAINS 일정 4월 11일까지 장소 서울스카이 ‘빌런’(Villain)은 ‘악당’을 뜻한다. ‘48 VILLAINS’는 ‘악역 전문배우’로 이름을 알린 박기웅의 작품 세계 전반을 조명한 전시다. 박기웅은 연기자의 삶을 통해 얻은 감정선을 바탕으로 할리우드 영화 속 빌런 48인을 그렸다. 화려한 색감은 배제하고 흑백 모노톤으로만 집약한 페인팅 작업이 독특하다. 인물의 감정을 섬세하게 드러내며, 관람객이 작품에 투영된 감정선에 더 깊이 따라갈 수 있게 만들었다. 대표작은 영화 ‘다크 나이트’의 조커를 그린 ‘히스 레저 애즈 조커’와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의 알렉스를 표현한 ‘말콤 맥도웰 애즈 알렉스 디라지’ 등이다. ●Stage ◇레드북 일정 3월 14일 ~ 5월 28일 장소 홍익대학교 대학로아트센터 대극장 연출 박소영 출연 옥주현, 박진주, 민경아, 송원근, 신성민, 김성규 등 웰메이드 창작 뮤지컬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레드북’이 2년 만에 다시 개막한다. 이번 시즌은 역대급 배우 라인업으로 기대감이 높다. ‘레드북’은 19세기 런던, 보수적인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숙녀보다는 그저 ‘나’로 살고 싶은 여자 ‘안나’와 오직 ‘신사’로 사는 법밖에 모르는 남자 ‘브라운’이 서로를 통해 이해와 존중의 가치를 배우는 과정을 담았다. 여성이 글을 쓰는 행위가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시기에 비난과 편견을 극복하고 작가로 성장해가는 안나의 모습이 사랑스럽고 유쾌하게 펼쳐진다. ◇오페라의 유령 일정 3월 30일 ~ 6월 18일 장소 부산 드림씨어터 연출 라이너 프리드 출연 조승우, 김주택, 전동석, 손지수, 송은혜, 송원근, 황건하 등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꼽히는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이 13년 만에 한국어 공연으로 돌아온다. 더욱이 조승우, 김주택, 전동석 등 최정상 캐스트로 기대를 모은다. ‘오페라의 유령’은 얼굴을 마스크로 가린 채 오페라 하우스 지하에 숨어 사는 천재 음악가 ‘오페라의 유령’과 프리마돈나 ‘크리스틴’, 그리고 크리스틴을 사랑하는 귀족 청년 ‘라울’의 가면 속 감춰진 러브 스토리를 그린다. 부산 드림씨어터에서 3월 30일 막을 올리며, 7월에 서울 샤롯데씨어터에서 공연한다. ◇파우스트 일정 3월 31일 ~ 4월 29일 장소 LG아트센터 서울 연출 양정웅 출연 유인촌, 박해수, 박은석, 원진아 독일 문학의 거장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60여 년에 걸쳐 쓴 역작 ‘파우스트’를 원작으로 한다. 연극에서는 선악이 공존하는 인물이 악마와 위험한 계약을 맺으며 이야기가 펼쳐진다. 영원한 진리와 욕망 사이에 고민하는 인간 ‘파우스트’와 순간의 쾌락을 주장하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의 대립이 지상과 천상을 넘나들며 그려진다. 유인촌은 파우스트, 박해수는 악마 메피스토 역으로 무대에 오른다. 박은석은 ‘젊은 파우스트’ 역을 맡았다. 연극에 처음 도전하는 원진아는 젊은 파우스트와 사랑에 빠지는 ‘그레첸’을 연기한다. 본 기사에 소개된 공연을 관람하신 독자분의 생생한 후기를 기다립니다. 채택된 분께는 소정의 상품과 브라보 마이 라이프 잡지를 보내드립니다. shjlife@etoday.co.kr
- 2023-03-03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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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외에선 이미 명소 기획력이 다르다
- 생뚱스레 허허벌판에 홀로 있는 음식점이라거나, 거기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을 것 같은 곳에서 뜻밖의 공간을 만난 경험이 있는가? CICA(시카)미술관은 의외의 장소성으로 오히려 도드라진다. 거대한 산업단지 안에 외톨박이 이방인처럼 고독하게 박혀 있으니까. 김포시 양촌읍 학운산업단지 한구석에 있다. 하필 왜 여기에 미술관을? 이런 궁금증, 쉽게 터져 나올 입지다. 그러나 실은 어엿하다. 황무지에 솟은 꽃나무 한 그루에 견주면 과할까? 풍습과 관행을 흔들어 깨우는 게 예술이다. 장소 불문, 제 갈 길 야무지게 가면 된다. 그런데 이 미술관은 겉으로 소탈하지만 안으로 짱짱하다. 건성으로 풀이거니 해도, 알고 보면 꽃이다. CICA미술관에서 맨 처음 만나는 건물 외벽엔 철판을 잘라 만든 조각 작품이 부착돼 있다. 산발한 머리칼이 불꽃처럼 너울거리는 앤디 워홀의 자화상을 그대로 조형한 철 조각이다. 미술관 설립자이자 조각가인 김종호의 작품이다. 앤디 워홀은 현대미술의 아이콘. 도발적인 주제와 발칙한 기법으로 미술의 새 물꼬를 텄다. 이 미술관은 현대미술의 동향과 경향을 보여주는 전시회를 집중적으로 펼친다. 지향이 그렇다. 앤디 워홀의 자화상을 조각한 작품을 초입에 배치한 이유를 알 만하다. 김종호가 이곳에 자리 잡은 건 30여 년 전이다. 조각 작업의 특성상 너른 공간이 필요해 서울을 벗어나 한적한 김포에 작업실을 마련했던 거다. 당시 이 지역의 풍광은 산업단지로 바뀐 지금과 사뭇 달랐다. 논밭이 지천이었고, 하늘과 맞닿은 지평선이 펼쳐져 감흥을 자아냈다. 화가의 작업실로 적격인 장소였다. 지평선 너머로 뜨고 지는 해와 달을 벗 삼아 작업에 매달렸을 테다. 이후 작업실을 개방하는 한편 전시 공간으로 활용하다, 2015년에 미술관 등록을 하면서 CICA미술관을 출항시켰다. 건물을 볼까. 5개 동이 있다. 이채롭게도 모든 건축물이 나지막한 음성을 내는 버릇이 있는 사람처럼 소박하고 수굿하다. 티 내거나 뽐낸 기색이 없다. 치레와 꾸밈을 능사로 하는 여느 미술관 건축과 다른 형상이다. 전시실들이 있는 주 건물은 특히 눈길을 끈다. 김종호의 작업실을 증축한 건물인데 적당히 낡아 오히려 정겹다. 연푸른색을 입혔으나 시간의 횡포로 퇴색한 외벽이 야기하는 서정이라니. 처음엔 말짱했으리라. 말쑥했으리라. 그러나 비와 햇볕, 바람이 세월에 묻어 흐름에 따라 빈티지로 바뀌었다. 그렇다면 저 낡아가는 빛깔과 내향적인 질감은 시간의 지문이다. 이 건물은 김종호가 디자인해 지었다. 손수 연장을 들고 짓거나 고치거나 다듬었다. 그러니 단순한 건축이 아니라 통째 그의 예술이라 할 만하다. 철 조각을 하는 작가라서 건축 오브제를 떡 주무르듯 다루는 솜씨는 이미 몸에 푹 익어 거침이 없었던 모양이다. 2년이라는 긴 시간을 두고 생각을 모으거나 일을 즐기며 천천히 건물을 증축했다. 덕분에 어쩌면 건축적 악곡의 주조음에 해당할 수굿함과 낡음의 미학을 잘 빚어냈다. 수굿함이란 모난 세상과 격하게 접촉할망정 안으로 문을 열어 선선히 수용하는 긍정의 기운이다. 낡음이란 흉한 추락이 아니다. 밀고 당겨온 세월과의 갈등과 투쟁과 서사를 웅변하는 아름다운 훈장이다. 설핏 보자면 허름한 건물이지만 사실은 뜯어보고 눈여겨볼 게 많다. 허심과 무심으로 사람을 데려간다. 전시실 구조에 서린 날것과 즉흥의 이미지 이 미술관은 알아주거나 알아보는 눈이 많은 뮤지엄은 아니다. 내로라하는 공립미술관이나 일부 대형 사립미술관의 당찬 행진에 비하면 그저 소탈한 행보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어떻게 된 영문인지 전시회를 우후죽순 격으로 빈번하게 펼친다. 홈페이지를 보니 2022년에 연 전시회가 자그마치 120여 개에 이르는 게 아닌가? 2023년 1월 현재에도 4개의 전시회가 동시에 벌어지고 있다. 그림을 보러 갔으나 전시회 내용이 빈약해 허탈하게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는 사립미술관이 흔하다. 전시회 하나 기획해서 막을 올리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그러나 이 미술관의 기동성과 기획력은 민첩하고 강렬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김명숙 관장의 얘기는 이렇다. “언제든 작품과 만날 수 있는 미술관을 추구하고 있다. 전시 작가들의 작품은 실험적이고 감각적이다. 현대미술의 새로운 경향을 보여주기 위해 작가 선정에 공을 들이는 것이다. 해외 작가들의 작품전도 매우 활발하다. 사실 우리 미술관은 국내보다 해외에 더 많이 알려져 있다.” CICA미술관은 잦은 전시회로 외연을 확장해왔다. 한편 공모전을 통한 전시 작가 선정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는 점이야말로 이 미술관이 지닌 대찬 자존감의 근거다. 인맥이나 섭외의 기술을 가동해 전람회를 가질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고 한다. 적성과 철학에 맞지 않아서. 그런데 해외에 더 많이 알려졌다? 그럴 만한 근거가 있다. 이 미술관은 초기부터 국내 작가보다 해외 작가 전시회에 치중했다. 지구 위에 범람하는 현대미술의 현상과 사조를 관객에게 여실히 보여주기 위해서다. 회화, 영상, 사진, 설치작업, 디지털아트는 물론, 첨단과학과 접목된 인터랙티브 아트까지 선보였다. 매년 국제행사도 세 차례 펼친다. 뉴욕과 워싱턴DC, 그리고 CICA미술관에서. ‘CICA 뉴미디어아트 국제 컨퍼런스’라는 타이틀을 걸고 국내외 작가와 교수 등이 참여하는 이 행사에선 미술전도 동시에 열린다. 한글과 영문으로 된 현대미술 관련 도서도 줄기차게 출간한다. 한마디로 콘텐츠의 작렬? 크지 않은 미술관의 작은 밥상 다리가 휘어지게 성찬을 차려내는 형국이다. 이 풍성하고 왕성한 활동력으로 해외에 이름을 알린 셈이다. 현재 이 미술관이 작동하는 네트워크엔 세계 각국의 아티스트 5000여 명이 들어와 있다. 이래저래 심상찮다. 한 발짝 앞서간다. 전시실로 들어선다. 4개의 전시실에서 4개의 전시회가 진행 중이다. ‘Portrait 2023’전은 초상(肖像)을 테마로 삼은 전시회다. 매년 동일한 테마로 펼쳐지는 기획전의 2023년분 행사다. ‘Youth #9’전은 17세부터 27세까지 국내외 청년 작가들의 작품을 모은 전시회로, 이 역시 매년 거듭된다. 미술관의 촉수가 신진 작가 발굴에도 뻗쳐 있음을 알 수 있다. 미술관이라 하면 화이트 큐브를 연상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이곳 전시 공간의 구색은 썩 다르다. 외관이 낡음과 수굿함으로 정취를 자아낸다면, 내부의 분위기는 날것과 즉흥의 이미지가 물씬해 흥미롭다. 구조물들의 모습은 투박해서 오히려 편안하다. 천장과 벽과 자투리 틈새에 설치한 채광창에선 위트가 느껴지며, 전시실 상부를 강인한 한 획처럼 가로지른 철골은 자칫 허술해 보일 수 있는 구조물들에게 힘과 생동감을 공급한다. 모든 것은 김종호가 수공업 공정으로 만들었다. 세련미를 추구하는 추세에 맞추려 애쓰지 않았다. 뭐랄까, 마음 가는 대로 디자인했다. 제 장단대로 한바탕 놀았다. 그러니 보는 이도 흥이 날 수밖에. 김명숙 CICA미술관 관장 “왜들 유명 작가만을 좋아하지?” CICA미술관의 규모는 크지 않고 건축물들은 낡아 보인다. 그러나 이 미술관은 해외 작가들을 끌어들인 전시회를 수시로 펼쳐 현대미술의 세계적 동향을 알게 한다. 유명한 작가보다 젊은 작가 위주의 전시회를 추구하는 것도 이 미술관의 지향이자 개성이다. 김명숙 관장의 얘기는 이렇다. “우리는 사립미술관으로서는 비교 사례가 드물 정도로 많은 전시회를 펼쳤다. 이를 두고 조언하는 이들도 있다. 다수의 전시회보다 소수의 비중 높은 작가의 전시회를 하는 게 미술관의 인지도를 높일 수 있을 거라는 얘기였다. 그런데 과연 비중이란 무엇을 말하는 걸까? 비중을 누가 어떻게 측량하나? 그건 우리의 철학과 맞지 않는 얘기였다.” 이미 역량 있는 작가들의 전시회를 지속해왔다는 얘기로 들린다. “모든 전시회를 100% 공모전을 통해 선정한 작가들로 치렀다. 능력이 충분한 작가들의 전시회를 도모해왔다.” CICA미술관 보유 네트워크에 5000여 명의 해외 작가가 속해 있다지? 이 방대한 인적 구축이 어떻게 가능했나? “미술관의 아트디렉터 김리진이 개척한 인적 자산이다. 그는 미국에서 뉴미디어를 공부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교수, 조소 작가로도 활동했다. 유능하고 진취적인 인재로 우리 미술관의 거의 모든 프로젝트를 전담해왔다. 관장인 나는 사실 공식 잡부에 불과하다.(웃음)” 김리진 아트디렉터는 김명숙 관장의 딸. 그리고 김명숙 관장은 CICA미술관 설립자 김종호 조각가의 부인으로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미술에 인생을 실은 가족 3인이 미술관을 운영하고 있는 셈이다. 유럽의 어느 보고서를 보면, 미술관에 온 관람객들이 작품 한 점을 감상하는 데 쓰는 시간이 평균 17초에 불과하더라. 한국의 경우는 어떻다고 보나? “아마 10초도 걸리지 않을 것 같다. 그냥 쓰윽 스쳐가듯 대충 본다. 흔히 미술작품을 어려워한다. 그럴 거 없다. 너무 이해하려 애쓸 일이 아니다. 가령 옷을 살 때 그저 자기가 좋아하는 디자인과 색감을 골라 사듯이, 본인 취향에 맞는 미술품에 관심을 가지다 보면 서서히 안목이 생기게 마련이다. 안목이 생긴 뒤엔 인문학이나 미술사 공부를 하는 게 좋겠다. 그렇게 하면 비로소 미술을 즐길 수 있을 테니까.” 미술품 투자가 대중화되고 있다. 미술 향유 풍토의 확산과 유관하다고 보나? “미술을 즐기기 위한 투자라면 무방하겠지만 완전한 투자 목적은 곤란한 거 아닐까. 투자를 하더라도 우선 안목부터 길러야 한다. 남들이 유명 작가라 하는 걸 그냥 따라가는 행태는 안타깝다.” 과학과 융합된 작품까지 등장하는 게 현대미술이다. 여간한 안목이 아니고선 즐기기가 사실 쉽지 않다. “미술에서 굳이 아름다움만을 찾을 일이 아니다. 현대미술이 보여주는 충격, 공포, 지루함까지를 새로운 감정 경험으로 수용하다 보면 즐길 수 있다. 영상작품 같은 건 좀 오래 봐야 감흥이 올 테고. 흔히 후기인상파의 그림을 애호하지만, 난 현대미술에서 훨씬 더한 재미를 느낀다. 거기엔 뭔가 한 방이 있다. 자극 요소로 새로운 생각을 하게 하는 것이다.”
- 2023-02-26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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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녀노소 좋아할, 키덜트의 천국에 가다
- 취미 앞에선 성별과 나이를 불문하고 누구나 평등하다. 꺾이지 않는 마음만 있다면 즐길 자격은 충분하다. 다 큰 어른이 장난감이나 만화, 게임에 열광하는 게 정 눈치 보인다면, 손주 혹은 아들 손을 잡고 소개된 장소를 방문해봐도 좋겠다. 한우리 서울 서초구 남부터미널 근처에 있는 국제전자센터 9층은 키덜트의 성지다. 게임기, 피규어 등 다양한 상품을 구경할 수 있고 중고 거래도 가능하다. MBC 예능 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에서 심형탁, 지숙이 방문한 후로 더욱 주목받았다. 한우리는 게임기 위주 소매상이다. ‘호객 행위가 없고, 정품만 취급하며, 시장에서 가장 저렴한 가격에 판매’한다고 소문이 나 인기가 높아졌다. 서울 신도림 테크노마트, 노원역 근처, 대구 반월당역 근처에 분점이 있으며, ‘겜우리’라는 온라인 상점도 영업 중이다. 건담베이스 일본 회사 ‘반다이 스피리츠’에서 운영하는 직영 모형점이다. 주력 상품은 건프라(건담 프라모델)이며, 프라모델 조립 관련 공구들도 판매하고 있다. 소매점이나 대형 할인점에 비해 많은 종류의 상품군과 물량을 갖추고 있다. 넓은 매장에 크고 작은 프라모델이 전시돼 있어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각종 피규어나 식품 완구도 취급한다. 서울을 포함해 수원, 고양, 대구, 대전, 부산 등 전국 곳곳에 매장이 있다. 킨키로봇 베어브릭(곰 모양의 블록)을 중심으로 다양한 디자이너 토이와 피규어를 취급하는 브랜드다. 전 세계 예술가들이나 브랜드들의 협업 제품을 엄선해 수입한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과 용산구 한남동에 매장을 두고 있다. 깔끔하고 감각적인 인테리어로 꾸민 매장 내부와 늘어서 있는 다양한 베어브릭들을 보고 있으면 마치 유명 미술관에 온 듯하다. 옥인오락실 옥인오락실은 서촌에서 가장 오래된 오락실인 ‘용오락실’(1988년부터 2011년 5월까지 운영)을 모티브로 그 자리에 2015년 문을 열었다. 10평 정도 좁은 공간엔 고전 게임 오락기 10여 대가 늘어서 있다. 보글보글, 테트리스, 스트리트파이터, 철권 1945, 스노 브라더스 등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추억의 게임을 즐길 수 있다. 레트로 열풍 덕인지 서촌의 대표 데이트 코스로 자리 잡았으며, KBS ‘동백꽃 필 무렵’, tvN ‘쌉니다 천리마마트’를 비롯해 다양한 드라마, 영화, 광고 등이 촬영된 곳이다. 스누피가든 ‘스누피’는 미국의 작가 찰스 슐츠가 1950년부터 신문·잡지에 50년간 연재했던 네 컷짜리 만화 ‘피너츠’(Peanuts)의 주인공이다. 스누피가든은 스누피를 비롯한 ‘피너츠’ 캐릭터들을 주제로 제주에 조성된 2만 5000평 규모의 테마 공원이다. 실내 전시 공간에는 ‘피너츠’를 탄생시킨 찰스 슐츠의 철학, 캐릭터들의 관계 등 다양한 이야기가 소개돼 있다. 야외 정원에는 제주 특유의 자연환경과 희귀식물, ‘피너츠’ 캐릭터들이 조화를 이루어 오랜 시간 거닐기 좋다. 스탬프 투어를 하며 가든을 둘러보면 재미가 배가된다. 스누피가든 지도에 정원 8곳의 도장을 찍는 것이다. 스탬프를 다 모으면 작은 기념품도 받을 수 있다. ‘피너츠’ 친구들의 밝고 솔직한 유머는 아이뿐 아니라 삶에 지친 어른들에게도 뜻밖의 위로가 된다. 스누피가든을 기획한 김우석 에스앤가든 대표는 “스누피가든은 아이, 엄마, 할머니 3대가 함께 즐길 수 있는 공간”이라고 밝혔다.
- 2023-02-21 0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