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 꿈꾸던 소녀 음악PD가 되다
인터뷰 이태문 일본 통신원 gounsege@gmail.com
작은 체구에 단단한 관록을 풍기면서 함박웃음으로 맞이해 준 ㈜콘코르디아(CONCORDIA)의 대표 겸 음악 프로듀서 곤도 유키코(近藤由紀子, 67)는 이시카와현(石川縣) 나나오시(七尾市) 출신.
육군비행학교를 나와 육군항공대 조종사로 태평양 전쟁 때 동남아시아와 인도양에서 전투를 치르고, 오키나와에서 특공대로 소집돼 죽음의 출격을 앞둔 상황에서 1945년 8월 15일 패전을 맞이한 부친, 그리고 평범한 주부였던 모친 사이에서 유키코는 1949년 1월에 태어났다. 바로 이른바 일본의 전후 베이비붐 세대를 뜻하는 단카이(團塊) 세대인 셈이다.
“철들 무렵 늘 영화관에 있었다. 당시 나나오시에는 오락물 혹은 엔터테인먼트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엄마 세대는 전쟁의 아픈 기억과 상처받은 마음을 달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영화였는데, 엄마를 따라 서양 영화를 비롯해 일본 영화 등 모든 장르의 작품을 봤다. 그러다가 혼자서 ‘할머니를 찾으러 왔다’며 영화관에 들어가 작품에 푹 빠져 하루하루를 보냈다. 아울러 영화와 관련된 음악도 열심히 들으면서 막연하게나마 ‘영화감독’이라는 꿈을 키웠다.”
청운의 뜻을 품고 와세다 대학으로
영화감독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더 큰 물에서 헤엄치는 물고기가 되고자 유키코는 도쿄(東京)의 와세다(早稻田) 대학 제1 문학부 영문학과에 입학했다. 지방의 작은 도시에서 막 올라온 소녀의 눈에는 모든 게 신기하고 낯설기만 했다. 이웃사촌처럼 터놓고 지냈던 나나오시의 생활과는 완전히 다른 별세계(別世界)에 크고 작은 문화충격도 받았지만 영화 때문에 싹튼 꿈을 위해 뭐든지 적극적으로 달려들어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노력했다.
“아는 친지도 없고 인맥도 없는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기로 처음부터 하나씩 쌓아 나가야 했다. 신기하게도 주위 분들이 많이 도와 주셨다. 시골에서 올라온 순진한 소녀가 열심히 뭔가를 잡으려고 애쓰는 모습을 예쁘게 봐 준 것 같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TV방송국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됐는데, 학생 신분으로 일본 엔카(演歌)계의 최고봉인 가수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 거물급 여배우 나카무라 타마오(中村玉緖) 등의 도우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직접 옆에서 지켜보면서 영화계에 대한 동경심도 더욱 강해졌지만 한편으로는 남성 중심의 폐쇄적인 영화계 풍토에서는 여성의 입지가 정말 좁다는 현실도 깨닫게 됐다고 한다.
대학 나와 첫 직장은 ‘이와나미 홀’
유키코는 대학 졸업 후 프랑스에서 영화를 배운 다카노 에츠코(高野悅子, 1929년생. 영화운동가, 영화 프로듀서, 방송작가 및 연출가 등)가 운영하는 ‘이와나미(岩波) 홀’에 입사한다. 당시 이와나미 홀은 232석의 작은 극장이었지만,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 감독을 비롯해 유명 사진가 등 당대를 대표하는 문화 예술인들이 드나드는 사랑방 역할도 했다.
“다카노는 ‘마음’과 ‘신념’으로 일했다. 진짜는 언젠가 반드시 세상의 빛을 받으며, 평가받을 것이라는 진지한 자세를 그때 배웠고, 이것이 나의 출발점이 됐다.”
이와나미 홀에서 2년간 근무 후 그녀는 일을 포기한다. 결혼으로 두 아이가 생겼으며, 무엇을 하든 하나에만 집중해 모든 힘을 기울이는 그녀는 망설임 없이 육아를 선택해 엄마의 길을 걷는다.
음악계에 신선한 바람을
두 아이의 엄마로서 아낌없는 사랑으로 육아를 마친 유키코는 49세 때 아티스트 프로듀서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물론 전업주부로서 살림을 꾸리는 틈틈이 시나리오 작가를 공부하고, 드라마 기획서도 쓰는 등 조금씩 준비를 했던 것이다.
그녀는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가코 다카시(加古隆, 1947년생)가 음악을 담당했던 NHK 특별 다큐멘터리 에 감동하여 2000년 스페셜 콘서트를 기획해 도쿄, 오사카(大阪), 가나자와(金澤), 후쿠시마(福島) 등을 돌며 전석 매진의 흥행을 거두었다. 2003년에는 히비야(日比谷) 공원 야외음악당에서 개최한 에도(江戸) 400주년 기념 오프닝 이벤트 등도 꾸미는 등 늦깎이 프로듀서의 열정과 실력이 조금씩 평가받기 시작했다.
“20세기 전쟁 때문에 돌아가신 분들의 레퀴엠으로 콘서트를 열어 21세까지 이어지지 못한 그들의 넋을 제대로 위로하는 진혼곡(鎭魂曲)을 들려주고서 21세기 평화와 생명의 시대로 힘차게 나아가자는 뜻을 담으려고 했다. 기획서를 쓰고 2년 동안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뜻을 함께하는 분들을 모았고 스폰서를 찾으려고 동분서주했다. 그 고생은 이루 말로 표현하기 힘들지만,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의 눈물과 박수로 다시 한번 음악의 힘을 느꼈으며, 큰 보람과 함께 정말 값진 보물을 얻은 기분이었다.”
한국과 인연도 깊어
2015년 1월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을 맞아 양국의 젊은 성악가 2명이 함께 기념 공연을 펼친 바 있다. ‘한국판 폴 포츠’로 불리는 팝페라 가수 휘진(권휘진)과 일본인 테너 가수 고하시 고헤이(古橋鄕平)가 도쿄 지요다구(千代田区)의 기요이(紀尾井) 홀에서 ‘같이 울리는 순간’이라는 주제로 듀엣으로 화합과 희망의 선율을 선보이는 감동적인 무대를 꾸몄다.
물론 곤도 유키코가 기획한 공연이었다. 그녀는 가수 휘진에 앞서 2004년 9월부터 R&B 남성듀오 ‘소리(SoRi)’, 그리고 2007년 솔로로 전향한 가수 케니(홍기현) 등을 일본에 데뷔시키는 등 꾸준히 실력 있는 한국 아티스트를 찾아내 적극 소개해 왔다.
휘진이 동일본 대지진으로 상처 입은 사람들에게 음악의 힘으로 미래를 믿는 마음을 심어주기 위해 피해 지역을 수차례 찾아가 자선 콘서트를 펼쳤듯이 케니도 2007년 9월 미얀마 민주화 시위를 취재하다 총에 맞아 사망한 사진기자 나가이 겐지(長井健司)에게 바치는 곡 ‘눈물-세계 어디선가 이 순간’을 발표해 수익금의 일부를 캄보디아 빈민을 돕고 있는 민간단체 등에 기부했다. 부제 ‘흐르는 눈물을 미래의 아이들 빛으로 바꾸기 위해’가 붙은 이 노래는 곤도 유키코가 직접 노랫말을 썼다.
“전쟁을 모르는 세대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요즘 세계의 움직임이 정치적으로 위험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위기감이 든다. 일본은 수많은 젊은이의 희생 위에 패전을 맞이했고, 그 뒤를 이어 태어난 우리 단카이 세대는 평화 속에 살아올 수 있었던 걸 감사하면서 계속 평화를 지켜가야 하는 사명이 있다. 두 번 다시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걸 알려 미래로 이어가는 징검다리 역할이 바로 내가 할 일이고, 한일관계도 마찬가지로 문화 교류를 통해 서로 뜻을 나누고 마음을 함께하는 자리가 계속 이어져야 한다.”
원점에서 소통을 다시 생각
2003년 54세의 나이로 자신의 뜻을 좀 더 구체화하기 위해 음악·예술 기획사 콘코르디아(CONCORDIA)를 설립한 곤도 유키코는 평화와 소통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음악·예술 문화는 평화의 사절이며, 사람들 마음을 비추는 밝은 빛이라고 믿는다. 앞으로도 살아 꿈틀거리는 생명을 응시하면서 마음에 와 닿는 감동을 고스란히 전달할 수 있도록 노력해 나갈 것이다. 음악과 예술을 통해 국경, 민족, 언어의 벽을 뛰어넘어 상호 소통과 연대감으로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가길 바랄 뿐이다.”
2015년 5월 회사 창업 12주년을 맞이해 프로듀서 이름으로 결혼 전 이름인 후지하시 유키코(藤橋由紀子)를 내걸고 원점에서 다시 활동을 재개할 것을 선언한 그녀는 “신으로부터 목숨을 받아 태어난 이상 죽을 때까지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면서 사는 건 인간의 도리이다. 또한 일하면서 만나는 수많은 인연을 통해 교류를 넓혀가면서 그 만남을 소중히 여길 것이다. 국경을 넘어 서로 돕고 힘을 합치는 것, 바로 이것이 소통이고 문화의 시작이다”며 시종 웃음을 잃지 않았다.
드물디드문 ‘90대 철학 교수’이자 글로써 1960~1970년대 한국 사회를 흔들었던 김형석(金亨錫) 연세대 명예교수는 요즘 활발한 강연과 집필 활동을 통해 그야말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 최근에 100세를 바라보며 만든 책 (덴스토리 펴냄)를 출간한 김 교수는 오랜 세월 동안 겪은 다양한 경험과 깨달음에 대한 자신의 소회를 담담하게 펼쳐놨다. 결코 흔치 않은 100년 동안의 시간을 경험한 노교수의 삶과 지혜를 살펴보자.
한 시절 젊은이들은 1960년대 등과 같은 그의 수필을 읽으면서 밤을 지새웠다. 김 교수의 수필을 읽던 청년들이 어느덧 50, 60대가 됐지만 지금도 그는 왕성한 집필 활동을 하며 세상과 만나고 있다. 연세대 명예교수인 김형석 교수의 이야기다. 시대를 뛰어넘고 있는 김 교수는 최근 출판가에서 가장 ‘묵직한’ 저자다. 90살을 넘어 100살에 가까워진 김 교수지만 작년 한 해 동안 활발한 외부 활동으로 그 이름을 다시금 각인시키더니 와 의 두 저서가 베스트셀러에 오름으로써 스스로 현 시대가 요구하고 있는 작가임을 증명했다. 그런 그가 그동안 강연했던 내용을 묶어 사랑과 희망이 있는 이야기가 담긴 책 를 내놨다.
90대에 다시 맞이한 베스트셀러 작가로서의 즐거움
“를 작년에 내놨습니다. 그리고 과거에 내놨던 와 를 개정하여 다시 출간했죠. 는 워낙 오래된 책이라 처음에는 출간이 어렵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출판사 사장이 직접 찾아와서, 자기 할아버지가 그 책을 꺼내 주면서 꼭 내라고 했다는 거예요.”
김 교수는 사람들이 예수를 객관적으로 알아야 하는데, 교회가 감싸니 예수가 어떤 화두를 가진 사람인지 잘 알려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래서 예수가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찾아보자는 문제의식을 갖고 만든 책이 바로 다. 어떻게 보면 이 책은 시대를 앞선 책이기도 했다.
“과거에 책이 나왔을 때는 호응이 없었는데, 지금 읽히기 시작하니 교회 안 사람이나 밖에 있는 사람이나 호응이 있고 반응이 좋아요. 젊었을 때 써서 지금보다 문장도 좋고. 내가 봐도 훌륭해(웃음).”
김 교수는 백 살이 가까운 지금도 200자 원고지에 친필로 글을 쓴다. 타자기는 안 쓰고 스마트폰도 안 쓴다. 그는 지난 1년 반 동안 조금 무리했다고 말했다.
“이라는 계간지에 1년에 200자 원고지 400장을 쓰는 게 있어요. 그런데 3개월 후에 쓰는 걸 반복하는 것보다는 원고를 미리 써놓는 게 좋겠다 싶어 한꺼번에 쓴 거죠. 그게 좀 무리가 됐어요. 그래서 금년에는 안 써요(웃음). 할 때 하자 싶어서 한 일인데, 그렇게 무리했던 게 나은 거 같아요.”
가족이 떠나니 집이 비고 친구가 떠나니 세상이 비었다
“우리 어머니가 100세에 돌아가셨습니다. 죽음을 담담한 운명으로 받아들이셨어요. 그분은 더 오래 사는 게 걱정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직계 중에 먼저 돌아가신 사람이 없는데 자신이 그보다 늦게 갈까 봐 그랬던 거예요.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기 한 달쯤 전에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하면서 ‘내가 먼저 갈 것 같아서 다행이다. 그런데 나는 가면 되고, 네 처가 가게 되면 집이 빌 텐데 집이 비면 어떡하지?’라고 말씀하시데요. 어머니가 가시고 아내도 가고 그러니 정말 집이 빈 거예요. 외국 여행하고 돌아올 때 오고 싶지 않고 공항에 내려도 ‘빈 집에 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있고 아침에 잠에서 깨면 아무도 없다는 걸 알게 됐죠. 어머니와 아내가 집이었어요.”
를 보면 김 교수의 절친한 친구인 김태길 교수와 안병욱 교수의 이야기가 나온다. 무엇보다 그의 인생에서 소중한 인연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만난 두 친구, 서울대의 김태길 교수, 숭실대 안병욱 교수였다. ‘철학계의 삼총사’로 불렸던 이들은 반세기 동안 사랑이 있는 경쟁을 벌인 ‘축복받은 관계’였다. 도산 안창호 선생과 인촌 김성수 선생 다음으로 자신에게 가장 많은 가르침과 도움을 준 사람은 바로 이 두 친구였다고 그는 고백한다.
80대 중반쯤의 어느 날, 안 교수가 “더 늙기 전에 셋이서 1년에 네 번쯤 만나자”고 제안한다. 김태길 교수의 대답은 거절이었다. 이유는 “우리 셋이 다 80대 중반인데, 누군가 한 사람씩 먼저 떠나가야 할 테고, 그러면 다 보내고 남은 사람은 얼마나 힘들겠느냐”는 것이었다. 결국 이들은 멀리서 마음을 같이하면서 지냈고 김태길 교수는 2009년, 안병욱 교수는 2013년에 세상을 떠났다. 김 교수는 두 친구의 죽음을 겪으며 “집 식구가 떠나니까 집이 텅 빈 거 같은데 친구가 떠나니 세상이 빈 것 같다”고 말했다.
“어머니께서 떠나고 5년쯤 지나고 나니 친구들이 가기 시작하는데 둘이 비슷한 때 가더라고. 세상이 비는 거 같았어요. 남들은 잘 몰라요, 나는 그걸 왜 느끼느냐 하면 친구다운 친구를 가졌기 때문이었죠. 독일의 괴테가 임종할 때 의식이 흐려져서 환상 비슷한 걸 보게 되는데 바람에 종이가 날아가는 걸 보더니 저거 쉴러의 편지인데 날아가는 거 아니냐며 걱정했다고 해요, 야스퍼스는 막스 베버가 세상을 떠나자 한 1년 동안 아무것도 못했다고 하고.”
그는 자신도 ‘이젠 인생 마감을 어떻게 할까를 더 많이 생각한다’며 “죽음을 생각하지만 두렵지는 않다”고 말했다.
“뭔가 남길 수 있는 사람은 감사한 거죠. 내가 있어서 행복한 사람이 있었고, 내가 있어서 인생을 아름답게 산 사람도 있었고, 내가 있어서 즐거움과 고통을 함께 나눈 사람이 있었다면 그게 저한텐 남는 것이지요.”
행복은 인격에서부터 시작
나이 들어서 행복을 맛본다는 건 쉽지 않다. 김 교수는 나이 들어 경험할 수 있는 행복은 주어지는 게 아니라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 철학자 가운데 가장 원로 철학자가 아리스토텔레스거든요. 그가 윤리학을 가장 처음 쓴 사람인데 윤리학에서 하는 말이 ‘행복은 누구나 원한다. 그리고 인격이 최고의 행복이다’라는 말이에요. 내 인격이 행복을 만들어서 줄 수 있고 다른 사람이 행복을 내게 주고 행복이란 그렇게 나눠서 쌓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행복을 만드는 인격을 갖춰야 한다는 주장이죠. 윤리학자가 문제를 제기하고 결론을 내놓은 셈이에요. 그 말이 사실이라면 나이 들면서 행복도 커지는 거죠. 나이 들면서 행복해지는 게 인생인 겁니다.”
인격이 최고의 행복이라면, 그 인격이란 무엇일까? 김 교수는 철학자들이나 윤리학자들은 인격을 두 가지로 나눠서 본다고 설명했다.
“인격이란 나에게 있어서 성실하게 사는 것, 그리고 이웃에 대해선 사랑을 가지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성실과 사랑이에요. 성실한 사람은 항상 노력하고 성장하는 사람입니다. 성실한 사람은 자기를 알기 때문에 겸손합니다. 성실한 사람에게는 진실이 있고, 성실보다 더 귀한 인격은 자신에게 있어선 없다고 보는 사람입니다.”
문제의식을 가짐으로써 철학자가 된다
김 교수의 친구 안병욱 교수는 가장 성실하게 산 사람을 공자로 봤다고 한다. 공자는 성실했기 때문에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살았다는 것이다. 석가나 예수는 공자가 한계로 느낀 걸 종교로 해결하고자 했다. 그래서 예수는 성실에 경건이 더해진 철학을 만들었다는 게 김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성실만 갖고 있으면 종교로 가기 어렵다고 말했다.
“호수에 바람이 불거나 파도가 치면 달그림자가 안 뜹니다. 그런데 조용해지면 달그림자, 별 그림자를 볼 수 있죠. 경건하다는 건 이성이 작용을 멈췄을 때 모든 걸 받아들이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호수가 조용해졌을 때 별 그림자가 뜨는 것 같은 상태죠. 그때 종교가 오게 됩니다.”
김 교수는 철학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거듭 말했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철학이 있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일까?
“아마 이렇게 보면 좋을 거예요.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대구에서 중고등학교 교사로 있는 제자를 만난 적이 있어요. 그가 나 보고 4년 동안 대학을 다니고 공부도 열심히 했는데 학교에서 배운 건 다 잊어버렸다고 했습니다. 나도 그런 현상을 잘 알죠. 인상은 남아 있는데 기억을 못하는 것. 알지만 이상하죠? 난 대학 다닐 때 강의 들었던 것, 읽었던 책을 다 기억하는데. 나는 기억력이 좋은 게 아니라 문제의식이 있었던 겁니다. 강의 듣는 것, 책을 읽는 것 다 문제의식이 그릇이 되어 거기에 담았습니다. 그러니 잊을 수 없게 된 겁니다. 철학이 왜 필요한가에 대한 답이 여기에 있습니다. 일류 대학을 나와서도 문제의식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졸업하면 평범해집니다. 반면 일류 대학이 아니더라도 문제의식을 가지고 살면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즉 철학적 사유를 가진 사람이 지도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평생 동안, 나에게는 두 별이 있었다
김 교수의 아우라는 긍정적이다. 불안한 요인이 섞여 있지 않다. 아흔을 넘어 백세로 가는 이에게 그러한 긍정의 힘은 놀랍고 희귀한 사례다. 그에게도 하지 않으면 후회될 게 있을까?
“93세 때 밤에 자다가 ‘지금까지 살아온 동안을 정리하면 뭐가 될까?’ 싶었어요. 그래서 일어나서 메모를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잤어요. 메모는 세 문장이었습니다. ‘나에게는 두 별이 있었다. 진리를 찾아가는 그리움과 겨레를 위한 마음이었다. 그 짐은 무거웠으나 사랑이 있었기에 행복했다.’ 철학자로서의 나는 진리를 추구했고 사회적으로는 겨레들이 좀 더 잘 살았으면 좋겠다 싶었어요. 우리 시대는 일제강점기, 공산 치하를 겪어야 했으니. 못해서 아쉽겠다는 건 그 두 가지를 위해서 좀 더 일했으면 좋았겠다는 겁니다. 가끔씩 인터뷰를 하면 기자들이 ‘젊었을 때 낭만이 있었느냐, 연애는 했느냐, 연애 결혼했느냐 중매 결혼했느냐 같은 걸 묻는데 속으론 ‘그건 왜 물어봐. 관심 밖이야’라고 말하곤 해요(웃음).”
김 교수는 자신이 고마운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고 말했다. ‘나와 우리를 위해 마음 써줬는데 고마운 사람이다.’
“를 쓰고 나니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거 같아서 홀가분해요. 아쉽냐고요? 그런 건 생각 안 나요. 이 책 한 권만 쓰고 끝나는 게 아니라 또 쓸 거니까.”
지혜가 묻어나오는 그의 저서에는 ‘성실’을 표현해내는 인격이 반짝인다. 그래서 김 교수의 책은 그리울 수밖에 없다.
>> 김형석 교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민주화 운동기를 거쳤고, 도산 안창호 선생의 강연을 듣고 성장했으며 윤동주 시인과 같은 반에서 공부했다. 또 김수환 추기경은 후배로, 인촌 김성수 선생은 멘토로 많은 가르침을 준 사람이라고 고백했다. 60세에 뇌출혈로 쓰러져 20년간 투병 한 아내를 떠나보낸 후 연희동 주택에서 10여 년째 홀로 살고 있다. 4녀 2남의 자녀들에게도 “나를 위해 마음 쓰지 않도록 하고 싶었다”며 고독을 견디기 위해 글을 썼고, 책을 읽고, 강연을 하는 삶이 무르익어가고 있다.
밤새 내리던 비가 개었다. 잠에서 깨어 밖을 보니 하늘은 맑고 해가 중천에 떠 있다. 부모님은 일찍부터 들에 나가셨는지 보이지 않았다. 불현듯 학교에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책 보자기를 들고 학교로 냅다. 동 뛰었다. 동네 입구를 막 빠져나가는데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선범아! 어디 가니?” 논에서 줄을 지어 모내기하던 사람 중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었다. “예, 학교 가요.” “오늘 일요일인데 무슨 학교에 가니?” 그랬다. 오늘이 일요일인데 늦잠을 자다가 보니 깜박 잊고 학교가 늦었다고 생각에 빠른 발걸음을 하고 있었다.
필자는 전북 정읍군 신태인읍 신용리 장교부락에서 4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났지만 농사라야 논 1,200평 정도, 밭이 300평 정도밖에 되지 않은 가난한 집안이었다. 소득이 변변치 않았기 때문에 지금은 웰빙 식품이라고 할 수 있는 시래기밥, 콩나물밥, 무밥, 꽁보리밥 등으로 식사하거나 고구마, 감자 등으로 끼니를 때우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당시 영화에서 통구이 굽는 장면을 보고 고기를 실컷 먹어보았으면 하는 마음을 갖기도 하였다.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 아버지는 서울에서 기반을 잡겠다며 올라갔다. 이후 남겨진 농사는 어머니의 몫이었다. 장남이었던 필자도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농사일을 거들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150여 평 되는 하천가 논은 품을 사지 않고 어머니와 필자가 직접 모내기를 하곤 하였는데, 중학생의 눈으로 보기에 넓기만 하였다. 다리에 행정을 두르고 모를 심는다고 엎드리면 허리가 너무 아팠고, 행정을 두른 다리에 수많은 거머리가 달려드는데 묶은 끈 사이를 파고들었다. 거머리를 때어보면 피가 한 대롱 맺혀 있는데, 이내 피는 종아리를 타고 줄줄 흐른다. 물린 곳은 여간 가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때마다 ‘나는 앞으로 절대 농사는 짓고 살지 않겠다’고 되네 곤했다.
중학교 2학년 때 돌연 서울에 올라간 아버지가 흑석동 성모병원에서 큰 수술을 받으셨다는 연락이 왔다. 아버지는 당시 동작동국립묘지에 다녔던 넷째 숙부 집에서 숙식하면서 고무신 노점상을 하였는데, 장사를 마치고 나면 반겨줄 사람도 없고 해서 강술을 많이 마시다 보니 위가 약해져 복막염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때 병원비가 28만 원(7년 후 공무원에 들어가 받은 첫 월급이 2만 원 수준)이나 되었는데, 필자 집에 그 많은 돈이 있을 리가 없었다.
어머니는 아버지 형제들을 포함하여 마을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돈을 빌리려고 하였으나 누구도 도움을 주는 사람이 없었다. 아버지의 형제는 6남 2녀였고 아버지의 둘째 형님은 80여 마지기(16,000평)나 되는 농사를 지었는데도 고개를 돌렸다. 부득이 어머니는 친정으로 눈을 돌려 4자매 중 가장 친근감이 있는 셋째 이모님 댁을 찾아가 하소연했고, 이모부님으로부터 3푼 이자로 돈을 빌려 병원비를 지급하였다. 그 돈은 필자가 공무원을 하면서까지 갚아야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수명이 너무 짧았다. 아버지는 수술받은 이후 건강을 회복하는 듯했으나 그후 7년여 기간 이름 모를 병으로 고생하시다 1984년 54세의 나이로 저세상으로 갔고, 어머니도 그후 5~6년 동안 당뇨병으로 고생하다 합병증이 악화하여 2000년 67세의 나이로 죽었다.
부모가 모두 신병으로 오랫동안 병석에 있었으나 가진 재산이 없어 치료 하나 제대로 받지 못하고 돌아간 것이 지금도 마음에 걸린다. 그래서 부모 이야기만 나오면 지금도 눈물이 앞을 가린다. 필자는 부모를 잃고 고아 신세가 되었으나 이후 차츰 재정상태가 나아졌다. 그러나 그 이후로도 4남 2녀의 장남으로서 돌아간 부모를 대신하여 동생들을 뒤치다꺼리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그런 처지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대학 같은 건 생각도 못 하고 고된 농사일만 계속했다.
그러나 지난한 고통에 돌파구가 생겼다. 하루는 집에 사촌 형이 찾아와 “공무원시험 보기 위해 응시원서를 접수하러 간다”며 “너 시험 한번 보지 않을래” 하고 물어온 것이었다. 그 소리가 너무 반가워 따라가 함께 원서를 내고 시험을 봤다. 그리고 운 좋게 필자만 합격하고 형은 낙방하였다. 사촌 형은 3년 후 필자가 서울 관악노동사무소에 근무할 때 가리봉동 한일합섬 부근에서 자취하였는데, 그때 함께 생활하며 필자가 수학을 가르쳐준 이후 서울시 공무원에 합격하였다.
공무원으로서 첫 발령은 노동청(현 고용노동부)으로 났다. 시골에 사는 필자로서는 사실 그곳이 무엇을 하는지 몰랐다. 또한 당시 시골에서 동사무소나 우체국에서 근무하려면 돈을 써야 하는데 필자가 공무원시험에 합격하였다는 말에 20만 원을 벌었다느니 50만 원 벌었다느니 하는 소리가 나왔다.
시험에 합격한 이후 어디 가도 자연스럽게 필자의 이야기가 화두에 올랐는데, 우연히 옆에서 필자의 이야기를 들은 처음 보는 노인장 한 사람이 “참 좋은 직장에 취직이 되었네”하고 말하였다. 그 말에 노인장에게 “할아버지 노동청에 대하여 잘 아셔요. 왜 좋은 직장에 들어갔다고 하는 거예요” 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남을 도와주려면 자기 돈을 써서 도와주어야 하는데 그곳에서 봉급을 받으면서 남을 도와줄 수 있는 것 아니냐”고 오히려 반문하였다. 그 말에 감명을 받아 공직 생활을 퇴직할 때까지 이를 새기고 일했다.
노동청에서의 첫 근무지는 부산 동래온천장에 있는 한독직업훈련원(발령일 74년 11월 11일)이었다. 한독직업훈련원은 진학을 못 하는 가난한 학생들에게 정부가 무료 직업훈련을 시키고 취업을 시켜주는 곳이었다. 그런데 같이 근무하던 선배 한 사람이 지방 관서에 근무하다가 훈련원으로 발령을 받은 것에 대하여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나중에 필자가 지 방관서 발령을 받은 이후 그 사정을 알게 되었는데 당시 공직사회는 급여 수준이 낮아서인지 알 수 없으나 금품 수수가 일상화되어 있었다. 그래서 가욋돈이 없는 곳에 발령받으면 좌천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상납하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었다. 가진 재산도 없고, 다른 사람처럼 상납이나 술대접도 잘 못 하고, 배경도 없었던 필자는 공직 생활하는 동안 그만큼 마음고생이 심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고향마저 전라여서 그 고통은 더 컸다.
필자는 한독직업련원에서 일하다 지방 관서로 이동했다. 지방관서에서는 주로 산재보험 징수 및 보상 업무를 담당하였고, 25세가 되던 해부터 대부분 근로감독관으로 근무하였다. 198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노사분규가 많이 발생하였는데, 6.29선언 이후 그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그때 분규는 너무도 거칠어 근로감독관들이 분규 현장에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필자는 경험이나 지식이
짦았음에도 책임감 때문인지, 젊은 혈기 때문인지 분규 사업장을 일일이 돌아다니며 양쪽 이야기를 듣고 완화해보려고 노력하였고 뜻밖에 성과도 많았다.
그때 느꼈던 것은 사용자의 말을 들으면 사용자의 말이 옳고 근로자의 말을 들으면 근로자의 말이 옳다는 것이었다. 분규를 해소하려면 누가 잘못했는지 짚어내고 잘못한 쪽이여금 고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나중에 세상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을 때 이러한 갈등은 노사분규 현장만이 아니라 정치ㆍ경제ㆍ과학ㆍ문화ㆍ예술 등 사회 곳곳에 만연해 있음을 알았다.
필자의 공직 생활은 경제개발과 민주화라는 엄청난 국가적 정치적 변환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국가적으로 보면 78ㆍ87ㆍ97ㆍ2008년 등 10년 터울로 변화했다. 우선 1978년 이후 YH사건, 부마항쟁, 박정희 대통령 서거, 5.18광주민화운동이 연달아 발생하다. 87년에는 6.29선언 이후 공권력 약화에 따라 노사분규가 들불처럼 일어났다. 97년에는 대통령 출마자 세 사람이 각서를 쓰고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고 구조조정을 하는 과정에서 150만~200만 명의 근로자가 실직하는 대량실업사태가 발생하였다. 그 후 2007년이 되면 다시 미국에서 리먼 브러더스 사건이 터지고 그 파장이 세계 경제에 미치면서 한국도 2008년에 또다시 대량실업 사태가 발생하였다. 41년 7개월이라는 근무 기간 9명의 대통령(정부)이 바뀌고, 그때마다 추구하는 노선이 다르고 정책이 달랐을 뿐만 아니라, 사건, 사고가 터질 때마다 여기 맞춰 일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힘든 삶이었다.
공직 생활을 하기 이전부터 느꼈던 아버지 형제를 비롯한 주위 사람들의 상식에 맞지 않는 모습과 공직 생활 동안 직장에서의 편견, 편향, 편애, 편파 등의 모순, 노사관계를 지도할 때 느꼈던 무력감,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과 그 무렵에 읽었던 책 등의 영향으로 필자는 정신세계 공부에 심취하였다. 1984년 무렵부터 서울 시내 큰 서점에서 종교, 사상, 철학, 역사, 역학 등 잡다한 서적을 사 닥치는 대로 읽었고, 다양한 단체를 돌아다니며 견문을 넓혔다. 책을 읽고 명상하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항상 생각한 것은 ‘진리라면 무엇을 공부하든 반드시 일맥상통한 것 즉 보편 당성이 있는 것이 있을 터인데 그것이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었다. 그러던 차 성철 스님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말을 듣고 그 의미를 알기 위해 스님들이 쓴 화두 관련 책을 집중으로 읽고 명상을 거듭하다 성(性)에 대한 의미를 깨닫고 비로소 세상에 대한 모든 의문을 풀어낼 수 있었다.
94년에 그것을 정리하여 ‘진과 사(眞과 邪)’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그러나 ‘세계에는 수많은 석학이 있고 평생 몸을 받친 종교인들도 많은데 필자가 아는 것을 왜 그들은 깨닫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 ‘혹시 허상이나 망상을 본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어 다시 20여 년 동안 깨달은 내용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노사지도에 적용해보고, 한국사회의 다양한 모습을 관찰해보고, 직장 생활에 활용해보고, 각종 고전 등도 다시 읽다. 그 결과 필자의 깨달음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2015년 천성(天性)과 지성(地性)의 원리로써 풀어낸 ‘새로운 경세학을 말하다’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논어 위정편 제4장에 오십유오이지우학(吾十有五而志于學) 삽십이입(三十而立) 사십이불혹(四十而不惑) 오십이지천명(五十而知天命) 육십이이순(六十而耳順) 칠십이종심소욕(七十而從心所欲) 불유구(不踰矩)라고 하였는데 필자도 이순의 나이이다. 황하의 신이 바다를 보고 할 말을 잊는다고 하는데 고용노동부라는 우물을 벗어나 넓은 세계를 알기 위하여 20여 년 전에 했던 방황을 다시 하고 있다.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하기 위하여 태어났는지, 어떻게 살아야 올바로 살아가는지를 모르고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필자의 깨달음을 전하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 경제에서 일자리를 많이 제공하는 분야가 제조업이다. 그런데 최근 조선업의 구조조정 등 제조업에서 이상기류가 감지되고 있다. 이에 인천 새얼문화재단(이사장 지용택)은 지난 8일 인천 연수구 송도동 쉐라톤인천호텔에서 아침포럼으로 '기로에 선 한국의 제조업'이란 주제로 산업연구원 주현 부원장의 강연회를 열었다.
주 부원장은 “한국이 2015년 GDP 규모 세계 11위, 수출 규모 세계 6위, 경상수지 1,075억 달러(약 126조760억 원) 흑자(2016년 980억 달러)고 세계은행(WB) 기업환경평가 세계 4위, 블룸버그 혁신지수 세계 1위, 무디스와 S&P 국가신용등급 각각 Aa2 등급, AA- 등급으로 중국 및 일본보다 높은 점 등은 긍정적”이라고 하였다.
그는 “한국의 제조업 비중은 30.3%로서 중국 28.3%, 독일 22.6%, 일본 19.0%, 미국 12.1%, 영국 10.6%보다 높으나, 3년 연속 이자보상비율이 100% 미만 한계기업 비중이 매년 증가(2002년 4.5%, 2007년 6.9%, 2012년 8.0%, 2014년 11.6%)하고 조선,철강,전기 전자업종의 수익성이 크게 하락하고 있어 구조조정이 불가피하다”고 지적했다.
주 원장은 ““한국 경제를 둘러싼 환경 요인을 보면, 제4차 산업혁명이라 할 수 있는 인공지능, 로봇기술, 3D 프린팅, 사물인터넷 등 다양한 기술이 융합된 스마트 신기술로 노동력 대체와 일자리 양극화 등 고용환경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한다”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전 세계 GDP에서 아시아는 34.0%(동아시아 비중 22.2%)이고, 전 세계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38.2%(동아시아 비중 21.3%)로서 세계 경제 중심이 아시아로 이동 중이고, 특히 중국경제의 비중이 급등세를 보인다”이라고 했다,
특히 그는 ““2030년까지 세계 에너지 수요는 50%, 수자원 수요는 40%, 식량 수요는 35%(US NIC 2012)가 증가할 것으로 전망이나 경제개발의 후유증으로 나타나는 기후변화에 직면하고 있는데 한국은 여기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한국은 저출산 고령화 현상이 급격하게 진행되고 있어 생산가능인구가 2016년을 정점으로 감소한다. 이에 따라 2016년 잠재성장률 생산요소별 기여도(한국경제연구원)는 2016~20년 2.7%(총 요소생산성 1.3, 자본 1.5, 노동 –0.1), 2021~25년 2.3%(총 요소생산성 1.3, 자본 1.3, 노동 –0.3), 2026~30년 2.0%(총 요소생산성 1.3, 자본 1.2, 노동 –0.4)로 전망된다“고 했다.
주 원장은 “그동안 한국은 투입주도형 경제성장 구조로서 1980년대의 경우 풍부한 저임 노동력, 90년대는 설비투자 확대, 2000년대 이후는 연구ㆍ개발(R&D) 투자 확대로 경제가 성장했고, R&D 투자 규모가 2014년 기준 63조7,341억 원으로 세계 4위, GDP 대비 R&D투자 총액은 4.29%로 세계 1위로서 표면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며 “그러나 정치와 정부의 신뢰성(정치인 94위, 정부규제 97위, 정책 투명성 123위 등), 기업경영의 전근대성(기업윤리 95위, 이사회 유효성 120위, 소수 주주 이익보호 95위 등), 노동시장 비효율성(노사협력 132위, 고용 및 해고 관행 115위, 정리해고비용 117위, 조세의 근로유인 효과 99위, 남녀근로자 비율 91위), 금융시장의 미성숙(금융서비스 유용성 99위, 대출 편이성 119위, 금융 건전성 113위) 등 구조적 비효율성이 너무 크다”고 지적했다.
또한 그는 “다변화, 다양화 추세에도 최상 기업집단에 대한 의존성이 크고, 중국기업의 대거 진입 등으로 대기업의 투자수익률이 하락함에 따라 대규모 자본투입을 통한 대량생산에 의한 성장은 한계에 이르렀고, 중소기업⇀중견기업⇀대기업으로 성장이 적체되는 등 기업가 정신의 퇴조현상이 뚜렷하며, 시장에서 상시적 구조 조정 부재와 공공금융기관의 과도한 개입 등으로 인해 역동성도 저하되고 있다" 했다.
그는 끝으로 한국은 지속가능한 성장전략으로 “△노동은 생산가능인구 하락 저지(출산율 제고), 여성 및 고령자 경제활동참가율 제고, 이민정책 등 외국노동자 문제 제고 △자본은 지식재산 생산물 투자확대 △총요소 생산성은 노동생산성 향상, 인적자본 투자 확대, R&D 투자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고 제안했다. 뉴노멀 시대의 산업정책으로는 “내수와 수출의 균형발전, 첨단기술 선도형 전략으로 전환, 기술혁신 친화적 규제시스템 구축, 기후문제 능동적 대처, 제조업의 소프트화, 글로벌 고부가가치 전략 추진, 여성 및 고령자 친화적 산업환경 구축, 경제민주화와 역동성 강화, 사회 전반의 투명성 제고, 기업경영의 선진화, 사회적 대화 촉진, 시장 친화적 산업정책, 새로운 정책 거버넌스 구조 모색 등으로 산업정책 방향 전환””을 주문했다.
역사학자 문강 이이화(文岡 李離和·79). 그의 아버지이자 주역의 대가인 야산 이달(也山 李達: 1889~1958) 선생이 지어준 독특한 이름과 호에는 빛난다[離]는 뜻과 글 봉우리[文岡]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야산 선생은 다섯 아들과 딸에게 8괘 중 부모를 뜻하는 ‘건’과 ‘곤’을 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아버지의 선견지명일까? 문강 선생은 역사 통서 를 집필해 높은 평가를 받았음은 물론이고 한국사의 대중화를 위해 한 줄기 빛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 그가 겪은 대한민국 역사 중 가장 잊지 못할 사건은 1987년 6월에 일어났다. 거리는 마스크를 쓴 시위대와 전투경찰, 짱돌과 최루탄, ‘호헌 철폐, 독재 타도’가 적힌 피켓과 닭장차가 맞서며 아비규환을 이루고 있었다. 6월 항쟁이다. 당시 50세였던 문강은 하루도 쉬지 않고 눈물과 함성으로 젖은 현장에 나가 민족 헌법 쟁취를 외치며 정보를 수집하고 다녔다. 그는 를 보며 그날의 역사 속 그날을 떠올려본다.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6월 항쟁이 일어나기 전해 2월, 이이화 선생(현 역사문제연구소 이사)과 서중석 교수(현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는 ‘근현대사를 중심으로 연구하고 이것을 대중화한다’를 목표로 역사문제연구소를 설립했다. 당시 집중적인 집단 연구에 열성을 다하던 그들에게 6월 항쟁은 가장 생생하고도 의미 있는 사건으로 남았다. 수많은 이의 피와 땀으로 일궈낸 자랑스러운 민주화운동이 정치적 상황과 무지로 인해 훼손되어가는 것이 안타깝다는 문강이다. 그런 의미에서 서 교수는 우리 국민이 현대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2005년 를 출간했다. 문강은 그가 집필하는 동안 응원을 아끼지 않았고, 초판본(2005)에 추천사를 쓰는 등 적극 격려했다.
“해방 이후부터 6월 항쟁까지 사진, 만평, 우표, 지도 등을 곁들여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했어요. 책이 나오자마자 읽어보고, 이건 정말 중요한 책이라고 생각했죠. 현대사에 관한 책을 쓰려면 영어 원서도 보고 해야 하는데, 나는 한자는 능통하지만, 영어는 한계가 있거든요. 이런 책을 써서 대중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은 늘 했는데, 서중석씨가 한다 해서 정말 기뻤어요.”
민주주의를 향한 국민의 절규로 가득했던 6월의 거리
문강은 자신의 책에서 주로 다뤘던 고대사나 삼국시대의 역사도 중요하지만, 우리 현실에 가장 가까운 현대사를 알아야 현재의 어려움에 대처하는 판단력이 생긴다고 역설한다. 특히 6월 항쟁과 같은 민주운동은 자신의 이야기이자, 누군가의 아버지 또는 할아버지의 이야기이며 결국 우리의 이야기라는 것.
“지금도 6월 항쟁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고 뿌듯해요. 매일 시위 현장에 나갔어요. 지나가던 버스에서 울리는 경적 소리, 사람들의 함성, 진동하는 최루탄 냄새까지 생생하게 떠오르죠. 우리 국민 스스로 민주 헌법을 쟁취하고 민주주의 절차를 찾아냈다는 점에서 세계사적으로도 의미 있는 사건이라 생각해요.”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만 해도 역사문제 연구 자료를 발표하거나 강의하는 곳에는 수백 명의 사람이 모였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역사를 알리는 데 앞장서고 있는 문강은 과거에 비해 그런 열기가 부쩍 줄었다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그 시절을 겪은 중·장년도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그 사건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르는 사람이 많아요. 그러니 아이들은 더 모를 수밖에요. 인터넷상에 퍼지는 그릇된 정보나 얕은 지식만 가지고 시위나 데모 등 민주운동을 무조건 부정적으로만 여기기도 하죠. 역사를 정확히 알고 그 배경을 이해해야 현재의 문제에 대해서도 나름의 근거에 의한 판단을 할 수 있는데 말이에요.”
완결 10년, 그리고 다시 10년
이이화 선생 하면 를 빼놓을 수 없다. 1994년부터 10년간 22권으로 펴낸, 그야말로 인생의 역작이라 할 수 있다. 책이 완결되고 약 10년이 흐른 2015년, 그는 개정판을 냈다. 처음 완성하는 데만 10년, 그리고 다시 펴내는 데만 10년이 걸린 셈이다. 여전히 독수리타법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그가 오랜 시간을 투자해가며 개정판을 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처음 책을 낼 때는 우리 민족사·민중사·생활사 등을 어느 한쪽에 편협하지 않고 두루두루 종합적으로 쓰려고 노력했어요. 그런데 완성하고 난 뒤에 새로운 사건들이 일어났죠. 동북공정이나, 일본 위안부 문제 등 더 이야기해야 할 것들이 생겼어요. 우리 아이들도 볼 책인데 그런 내용이 빠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죠.”
그가 한국통사를 쓰고자 결심하고 아들에게 컴퓨터를 배워 1권을 낸 지도 20여 년이 흘렀다. 그동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얼마나 바뀌었을까? 그가 느꼈을 변화가 궁금했다.
“현대에 들어오니 민주운동은 다 사라지고, 오히려 민주운동을 하는 사람은 경제발전에 방해되는 인물로 취급하더라고요. 젊은이들은 ‘종북좌파’니, ‘빨갱이’니 하는 말을 개념 없이 쓰고요. 민주의식이 결여되다 보니 배려나 나눔의 정신도 사라졌죠. 오늘날 이만큼 살만하면 남을 배려할 줄도 알고, 인권을 이해하려는 자세가 필요한데 더 이기적이고 탐욕적으로 변해가는 것 같아요.”
문강은 그런 의식을 지닌 부모세대의 영향이 자식세대에 뻗치는 것을 우려한다.
“요즘 부모들을 보면 영어, 수학 공부는 시키면서 정작 인성교육은 소홀히 하는 것 같아요. 아이를 인간답게 키우기보다는 잘난 사람으로만 만들려 하죠. 자기 자식만 해를 입지 않으면 된다는 이기심에 공동체 생활에서 지켜야 할 교통질서나 예의범절은 뒷전이고요. 예전에는 안 그랬거든요. 남을 생각하고 민족을 위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시위도 활발할 수 있었죠.”
그는 어른세대가 아이들에게 배려하는 마음을 심어주는 것과 더불어 나누고 베푸며 살길 바란다고 말했다.
“6월 항쟁 때 상인들은 거리의 학생들에게 김밥이나 사이다 같은 것을 아낌없이 주었어요. 요즘처럼 자기 이익만 생각한다면 그런 행동을 할 수 없었겠죠. 나는 한국전쟁 유족이나 독립투사 후손을 만나면서 내 개인 소득에 비해 돈을 많이 썼어요. 나야 세 끼 밥 잘 먹고 있고, 병도 없고, 어디 투자하는 것도 아니니 삶의 여유가 그런 쪽으로 흐른 셈이죠. 그게 나눔이라고 생각하거든요. 해외 재벌들을 보세요. 사회에 다 내놓잖아요. 그런 걸 보면 우리 사회는 나눔의 문화가 부족하다고 느껴요.”
어린이 도서관 인기쟁이 ‘역사 할아버지’
그가 역사의 대중화를 위해 그동안 낸 책만 100여 권이다. 개정판이나 공동 저서 등을 포함하면 200여 권에 달한다고 한다. 그중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어린이를 위한 역사책이다. 문강은 “역사는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느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이 쉽고 친근하게 역사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노력한다는 그다.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 표현하려고 애쓰는데 쉽게 되는 건 아니더라고요. 오히려 아는 게 많아도 어린이 책을 쓰는 데는 지장이 생긴다는 것을 느꼈어요. 보여줄 것만 보여주면 되는데, 자꾸 내가 아는 걸 다 드러내려고 하니까 그게 참 어려워요.”
책을 쓰는 것 외에 그가 꾸준히 하는 일 중 하나는 독자와의 만남이다. 요즘도 그가 사는 파주 헤이리 근처 도서관에서 어린이 독자를 만나고 있다고. 문강은 어린이 팬 사이에서 ‘역사 할아버지’로 통한다며 흐뭇한 미소를 보였다.
“얼마 전에도 춘천에 있는 마을도서관에 다녀왔는데 그때 온 부모와 아이들이 인터넷으로 편지도 주고 참 즐거웠어요. 최근 인터넷에 한 군인이 를 10권째 읽었다며 소감을 썼더라고요. 자신이 나중에 사회생활을 할 때도 도움이 될 것 같다면서요. 역사 공부가 다른 게 아니에요. 과거에는 이랬는데 나는 이렇게 살아야겠다. 그런 상상력을 키우고, 삶을 살아가는 지혜를 배우는 과정이죠. 그런 독자를 만날 때면 내가 그동안 헛짓을 한 건 아니라는 생각에 보람을 느껴요.”
나는 안경 대신에 콘택트렌즈를 착용하여 눈이 나쁘단 사실을 한동안 숨겨왔다. 우리 시절엔 여자가 안경을 쓰는 걸 터부시했었으니까. 예를 들어 택시기사도 안경 쓴 여자를 첫손님으로 받으면 온종일 재수가 없단 말을 공공연하게 했다면 요즘 젊은이들은 믿기나 할까? 맞선 보는 자리에 안경을 쓴 색싯감은 일순위로 딱지를 맞았다는 일화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근시의 원인은 아직도 잘 모른다는데, 대개 어두운 데서 책을 읽는다든가 눈에다 너무 가깝게 대고 본다든가 텔레비전 앞에 바투 앉아 시청을 한다든가 등등을 원인으로 꼽는다. 하지만 텔레비전을 바보상자라고 부르며 절대로 사주지 않았던 부모님 덕분에 고등학생이 되기까지 텔레비전은 구경도 못하고 자란 내가 시력이 나빠진 데에는 억울한 사연이 따로 있을 것이다. 그것은 명백히 최루탄 탓이라 믿고 있다.
어릴 적 내가 살던 집은 서울 동대문구 용두동이었는데 몇 정거장만 올라가면 고려대학교와 맞닿았다. 그 당시 대학교 근처에 산다는 건 곧바로 최루탄 세례를 받는다는 말과 같았다. 4·19와 5·16땐 아직 어려 엄마 품에 있었기에 세상이 아름답게만 느껴졌지 그렇게 매운바람이 불어올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철이 들고 나서부터 봄은 최루탄 가스와 함께 시작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신학기가 되면 대학생들은 여지없이 교문 밖으로 뛰어나와 데모를 벌였고 데모를 진압하는 경찰이 최루탄을 투척하면 매캐한 연기가 온 동네를 뒤덮고 말았다. 그 겨자보다도 더 모질게 매운 최루탄 가스 앞에서 우리들은 비극의 주인공처럼 눈물을 질질 흘리며 대학생들을 원망하곤 했다. 특히 아버지를 비롯한 어른들이 혀를 끌끌 차셨다.
“학생들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데모만 하다니…”
친구들과 모래성 쌓기 놀이를 하다가 불발탄이 된 최루탄 조각이 땅속에서 불쑥불쑥 솟아나오면 그게 마치 수류탄이기라도 되는 듯 혼비백산하여 도망치던 날도 많았다. 최루탄 가스가 눈이나 코, 피부로 들어가면 눈물과 콧물이 쏟아지며 심한 통증이 찾아온다. 어떤 땐 구토까지 일으키며, 피부가 온통 뒤집어지기도 했다. 일시적 실명현상까지 일으키는 최루탄 가스 세례를 해마다 받고도 내 시력이 나빠지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하다 할 것이다.
그렇게 매운 환경 속에 성장한 나는 중학생이 되던 해부터 안경잡이로 살아야 하는 운명에 접어들었다. 안경 쓰기의 불편함을 감내하면서 대학생이 되면 절대 데모 따윈 하지 않으리라는 각오를 다졌다.
하지만 1978년에 대학에 입학하고 보니 세상은 정권에 대해 반발하는 국민정서가 정점에 올랐던 그 시기였다. 나라가 흔들바위에 올라앉은 것처럼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다. 이듬해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을 시해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으니 얼마나 흉흉한 시절인지 모른다. 내가 다니던 이화여자대학교 캠퍼스에는 붉은 글씨로 ‘독재 정권 물러나라’라는 대자보가 매일 새롭게 붙었다가 뒤돌아보면 어느새 떼어내고 없어지곤 했다. 교정 곳곳엔 날카로운 눈빛의 아저씨가 손에 워키토키 무전기를 들고 우리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나는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그런 아저씨와 눈이 마주칠까봐 건물 뒤로 먼 길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학생들 사이에선 늘 무언가 새로운 정보가 수군수군 퍼져나갔고 등사기로 민 조잡한 인쇄물이 나돌아 다녔다. 주로 ‘군사 정권을 타도하자’는 내용이었다. 캠퍼스 한곳에서 간헐적으로 데모가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면 여지없이 삽시간에 경찰버스가 밀어닥쳐 마치 닭장을 탈출한 어린 닭을 잡아들이듯 한심하단 표정으로 여학생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 싣고 떠났다.
정말 무서운 광경이었다. 나무 위에 유령처럼 숨어 있었던지 정보부 직원이 어느결에 나타나 군홧발로 잔디밭을 짓밟으며 데모 현장으로 달려가는 모습을 보면서 대학이 지성과 아무 관계없는 치열한 전투 현장처럼 여겨졌다. 그러다가 부마(釜馬)사태가 발발한 1979년 가을 무렵이었다. 학생들은 모두 서울역 앞에 집결하기로 결정했다. 과 대표가 결연한 모습으로 더는 침묵할 수 없으므로 한 곳에 모여 구국의 결의를 다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날이 아마 서울에서 대학생들이 벌인 가장 큰 시위였을 것이다. 진압하는 경찰을 피해 달아나다 붙들려 옷이 찢어지거나 신발을 잃어버린 학생들이 대다수였고, 곤봉으로 얻어맞은 친구들도 많았고, 몇몇 학생은 결국 붙잡혀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그 시절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이런 생각에 잠기곤 한다. ‘그때 만일 나도 친구들을 따라 서울역에 갔었더라면….’
그때 서울역에 가는 대신 나는 도서관으로 향하며 이렇게 자기합리화를 했다. 의과대학에 들어온 이유는 정치에 상관없이 사람을 살리는 의사가 되려는 것인데 일일이 세상 돌아가는 일에 참여하다 보면 언제 공부를 하겠어? 의사란 이념보다는 인간애를 중시하고 또 실천하는 직업이 아닌가? 구태여 내가 아니더라도 다른 대학생들이 세상을 바로잡을 테지…. 하지만 그건 치졸한 변명에 지나지 않았고 사실 나는 겁에 질려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어떤 교육을 받아왔던가? ‘국민교육헌장’을 제대로 못 외우면 손바닥을 대나무 회초리로 맞았고, 국어 시간엔 애국에 대한 표어를 짓고 미술 시간엔 ‘반공 포스터’를 그렸다. 자나 깨나 반공교육을 통해 공산주의를 무슨 괴물이거나 악마로 여기도록 만들었다.
그때 우리에게 가장 무서운 단어는 뭐니뭐니 해도 ‘간첩’이었을 것이다. 강원도에 살던 이승복이란 아이가 무장공비를 향해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라고 저항하다가 본인은 물론 가족들까지 몰살당했다는 뉴스는 섬뜩하기 짝이 없었다. 하필 이승복은 나와 생년월일이 똑같은 1959년 12월 9일생이라서 결코 그 이름을 잊지 못하고 있다.
그뿐인가. 서울 한복판에도 무장공비가 출몰한다는 소식은 우리들 머리 위에 구름처럼 공포를 드리워 놓았다. 공포만큼 인간을 다스리기 편한 도구가 또 있을까? 청와대를 폭파하는 목적으로 남하했다는 간첩 김신조가 체포되었다는 속보가 허공을 날아다녔다. 구름에서 비가 떨어지듯 하늘에서 불안감이 뚝뚝 떨어졌다.
대학생들이 데모를 벌이면 어른들은 그게 모두 북한 공산당의 사주를 받은 거라고 말했다. 그럴 땐 북한 공산당이라고 하지 않고 빨갱이라고 부르게 마련이었다. 그건 지금까지 하나도 변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사실 대학생이 되었다고 하루아침에 세상을 향해 감긴 눈이 떠지는 건 아니다. 일간 신문에 실리는 기사를 액면 그대로 믿었고, 부모님과 학교 선생님의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던 평범한 여학생이 정권의 실체가 무엇인지 어떻게 알아차릴 수 있겠는가? 다른 친구들이 민주화를 외치며 서울역을 향해 뛰어가도 그건 지각없는 부화뇌동일 뿐이라 여겼다. 도서실에 두더지처럼 숨어 있던 나는 스스로 부모님께 걱정을 끼치지 않는 착한 딸이라고 믿었다. 그땐 그랬다. 덕분에 안기부에 끌려가는 일 없이 무사히 대학을 마치고 의사가 된 걸 안도해야 할까?
아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없다. 물론 여러 가지로 평가해야겠지만 확실한 건 만일 내가 다시 대학시절로 돌아가 민주화 운동의 소용돌이 속에 서게 된다면,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면, 그땐 절대로 데모대를 외면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이기적인 시선으로 개인의 안정만 도모하는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얼마 전부터 남미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권력과 억압에 대한 항거가 비단 우리나라에 국한된 역사가 아니란 걸 새삼 알게 되었다. 칠레에는 피노체트 정권하에서 짓밟힌 수많은 목숨이 스러져갔고 아르헨티나의 ‘추악한 전쟁’ 동안에는 불순분자로 낙인 찍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수만 명의 실종자들이 있었다. 과테말라에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미구엘 앙헬 아스투리아스의 는 어쩌면 그렇게 우리나라의 모습과 닮았던지 소름이 끼쳤다. 대통령의 심복이 겪는 불행이 비정한 군부정치의 생리를 잘 드러내고 있었다.
또 로베르토 볼라뇨의 에는 멕시코시티의 대학에서 데모대가 진압 당할 때 화장실에 숨어서 13일을 연명한 우루과이 출신의 여대생 이야기가 나온다. 그건 실화를 가지고 만든 소설이어서 더욱 숨죽이며 읽게 되었다. 그녀는 나중에 ‘멕시코 시(詩)의 어머니’로 추앙받는다는 조금 심오한 내용이다.
또 아리엘 도르프만의 희곡 에는 여죄수에게 가하는 고문의 강도를 연구하며 강간을 저지르는 의사가 등장한다. 그 의사는 성적 고문을 하는 동안 슈베르트의 현악 4중주 ‘죽음과 소녀’를 들려주는 친절함을 베풀었다는데 이 희곡의 공간적 배경은 ‘칠레일 수도 있지만 오랜 독재 기간이 끝난 직후 민주정부가 들어선 경우라면 어느 나라도 무방하다.’라고 설정되어 있는 것만 봐도 독재란 전염병처럼 세상에 널리 퍼졌던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민주화 투쟁을 하던 데모는 비단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인 반향이었던 것이고 그런 데모에 동참하지 않았던 나는 전 세계적으로 비겁한 인물이 된 셈이다.
그런 중에 칠레 태생의 천재적 작가 로베르토 볼라뇨가 어느 수상식에서 이런 말을 했다는 걸 보고 눈이 번쩍 뜨였다. 양질의 글쓰기란 ‘암흑에 머리를 들이밀 줄 알고, 허공에서 뛰어내릴 줄도 알고, 문학이 기본적으로 위험한 일임을 알고 쓰는 글’이라고.
그게 비단 글쓰기에만 해당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즉 암흑에 머리를 들이밀 줄 알고, 허공에서 뛰어내릴 줄도 알고, 기본적으로 인생이란 위험한 것이란 걸 알고 사는 삶이 가치가 있다는 뜻이리라. 그러니까 나는 그동안 모르는 게 너무 많은 채 살아왔던가 보다. 나이가 들면 점점 더 안정과 자기 영달을 추구한다지만 내게 남은 세월엔 지난 부끄러움으로 더는 낯을 붉히지 않게 되길 소망한다.
△ 김애양(金愛洋) 은혜산부인과 원장·수필가
이화여대 의대 졸. 은혜산부인과(서울 강남구 역삼동) 운영. 1998년 수필가로 등단, 수필집 5권 발간. 한국의사수필가협회를 결성해 모임을 주도하고, 해마다 ‘한국 의학도 수필공모전’을 통해 의대 학생들의 인문학적 소양을 함양시키는 노력을 하고 있다.
5·18 유혈진압, 권력형 비리와 부패, 언론통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등에 대항하여 민주화 요구가 심화되자 전두환 정부는 4·13 호헌 조치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야당과 재야단체로 구성된 '민주헌법 쟁취 국민운동 본부'는 1987. 6. 10. 박종철 고문 살인 규탄과 호헌 철폐를 촉구하는 국민대회를 개최하는 등 범국민적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전개해나갔다. 이에 차기 여당 대통령 후보 노태우가 5년 단임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6·29 민주화 선언을 발표하였다. 6.29 선언 후 IMF 구제금융을 받기까지 10년간 노사분규가 극심하였다.
민주화운동과 더불어 산업현장도 심상치 않게 흘러갔다. 6.29선언 보름 전 서울 강북구 소재 S버스회사 간부가 한 근로자를 해고하겠다며 당시 담당 근로감독관이었던 기자에게 찾아왔다.
전두환 대통령 취임식 날 강남구 소재 버스회사에서 노사분규를 주동하다가 해고되었는데, 근무이력을 숨기고 입사하였다가 사회분위기가 뒤숭숭해지자 전력을 공표하며 근로자들을 선동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해고사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해고시기가 좋지 않다. 6개월 전이라면 문제가 없는데 지금 해고하면 섶에 불을 지르는 격이어서 분규가 장기화될 수 있으니, 노동조합 위원장과 사장님 및 간부들에게 나의 이야기를 잘 전하고 오히려 회유하는 방법을 생각해보라”고 당부하였다. 그러나 그 회사는 듣지 않고 그 근로자를 해고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노태우 후보의 6.29 민주화선언이 있었고, 노사분규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그 회사도 해고된 근로자가 주동이 되어 노사분규를 야기하여 6개월가량 버스운행이 중단되었다. 그 과정에서 회사 간부 한명이 답답한 나머지 차량운행을 시도하기 위하여 농성장으로 버스를 진입시키다 근로자를 다치게 하여 구속당하는 사건이 있었고(당시 버스회사는 간부들이 버스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운행이 중단될 경우 거액의 버스 구입비가 잠식됨), 노동조합 위원장도 어용노조로 몰려 물러났다.
미리 대비하지 못하고 문제가 발생해야 일을 한다. 우리 역사를 되돌아보면 매번 좋지 않은 앞날이 예견되는데도 대책 없이 정쟁만 일삼다가 큰 고역을 치르곤 하였다.
임진왜란은 이율곡 선생 등이 왜의 침략을 예견하며 10만 양병설을 제안하였음에도 노론과 소론이 나뉘어 정쟁만 일삼다가 7년간 전국이 유린당하는 치욕을 겪었고, 병자호란 역시 당시 정치권이 청과 전쟁을 해야 한다는 주전파와 화해해야 한다는 주화파가 대비책 없이 다투다 침략을 당해 왕이 남한산성 앞에서 항복하고 공물 공녀를 받치는 치욕을 당했다. 한일합방 역시 쇄국파와 개화파가 대책 없이 대립만하다가 1910년 이후 45년간 일제에 강점당하는 치욕을 겪었다. 그 밖의 6.25 전쟁을 비롯하여 수많은 사건사고 역시 대책 없이 수수방관하다가 발생하였다.
지금 대한민국의 미래는 암담하기 그지없다.
첫째, 저출산과 고령화로 항아리형 인구구조를 이루고 있다. 이것은 노동력과 소비가 줄어 산업활동이 크게 위축됨은 물론, 복지비의 증가로 국가재정이 크게 악화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가계부채는 세계 2~3위이고, 청년실업률은 11%(체감실업률 25%)나 되고,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효 사상도 무너져 우리 사회가 암담하다.
둘째, 건설 금융 전자 화학 통신 조선 자동차 등의 기술력이 선진국에 뒤지고, 중국 인도 등 후발국은 턱 밑까지 쫒아왔을 뿐만 아니라, 이세돌과 알파고 대결이 시사하듯이 자동화 등으로 앞으로 일자리가 많이 사라질 수밖에 없다.
셋째, 북한은 핵실험을 비롯한 미사일 실험을 계속하고, 일본 중국 등 주변 열강 역시 군사력을 강화하고 있는데, 우리는 1조원이 넘는 방산비리가 적발되는 등 모든 곳에 비효율(부패 부조리 편가름 등)이 많다.
넷째, 미래가 불투명함에도 정치는 예나 지금이나 비전하나 제시하는 법 없이 패권경쟁만 일삼고 국민은 단합하지 못하고 이합집산하고 있다.
6월은 나라를 생각하자. 우리는 더 이상 문제가 발생한 후 대안을 만든다고 법석을 떨지 말고 조금 여유가 있는 지금 대안을 만들 것을 권한다. 가령, “미래위원회” 같은 범 기구를 만들어 최소 100년 앞을 내다보며 대한민국 비전을 제시하고 국민과 함께 공유하며 개선해나가야 한다.
“나는 평생 한 번도 갑의 위치에 서본 적이 없어요. 항상 을이었으니까. 그런데 을로 사니까 편안한 거 같습니다.
편하게 살 수 있는데도 굳이 갑이 왜 되냐는 생각이에요.” 아무 망설임 없이 스스로를 을이라 여긴다는 시인, 그러나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한국 시단의 거목. 바로 신경림(申庚林·81)시인이다. 그의 시를 ‘농무’로 처음 접해서였을까? 농부 같고 담백한 인상을 주는 그는 차분하고 소탈한 어조로 자신이 생각하는 삶과 생활, 세상에 대해 풀어냈다. 그가 말하는 꾸밈없는 삶이 주는 행복이란 무엇인지 들어본다.
올해로 등단한 지 60년. 1935년에 태어나 평생을 시인이자 평범한 이들의 벗으로 산 사람. 몇 남지 않은 이 사회의 진정한 원로라고 할 수 있는 신경림 시인을 만나는 데는 반 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기사에서 요란하게 부풀려지는 게 싫다는 거듭된 그의 고사 때문이었다. 마침내 만나게 된 그와 인터뷰를 하는 내내 그의 시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시인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살았을지를 물어봤다.
시인으로밖에 살 수 없었던 인생
“옛날에 몇 번 다른 것을 뭐 해볼 수 있을까 해서 여러 가지 시험해봤어요. 장사도 해보고 시험 공부도 해보고 직장 생활도 해보고. 그런데 내게 맞는 게 없었어. 잘하는 게 없었어요. 그래서 ‘내가 잘하는 건 시 쓰는 일이다’라고 다짐할 수 있었습니다.”
신 시인은 지금도 교사는 해보고 싶다고 말한다. 어렸을 때부터 교사라는 직업을 좋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제로도 학원 선생을 해본 적이 있다고 한다. 영문과 출신이었던 그는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쳤었다.
“굉장히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수업이 한 시간이면 한 시간 오 분을 가르쳤으니까요. 그런데 그렇게 하니 내가 학생들에게 되게 인기가 없는 선생이었어요(웃음).”
신 시인은 자신에게 시인으로서의 재능이 있다는 걸 고등학교를 다닐 때 알았다고 한다.
“고등학교 시절 선생님에게 칭찬받았을 때였습니다. 칭찬이라는 게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게 맞아요. 칭찬을 받으니까 ‘아, 정말 내가 능력이 있는가 보다’ 해서 자신이 생기고, 그러면서 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좋은 시의 조건으로 ‘남을 가르치려고 하지 않는 시와 교훈적이지 않은 시, 이데올로기에 엮이지 않는 시’를 꼽았다. 한마디로 ‘사람을 편하게 하는 시’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시각과는 다른 개성 있는 시, 남이 한 말을 따라하지 않는 시가 좋다고 봐요. 그러면서도 소통이 되는 시여야 하죠.”
타인과의 소통은 오랜 세월을 역사의 부침 속에서 살아온 신 시인의 지론이기도 했다.
“생각이 다른 사람도 이해해주고 해야지 원수가 되면 안 돼요. 나는 나하고 생각이 다른 사람과 얘기하면 재밌거든요? 상대가 엉뚱한 얘기를 하면, ‘어, 내가 생각 못한 거다’ 싶어서 즐겁습니다. 그게 내가 발전할 수 있는 토대가 될 수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자기 생각만 고집하는 사람들은 발전 못해요.”
타인의 생각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일이다.
“쉽지 않죠. 불편할 때도 많지. 그래도 어떨 때는 굉장히 재밌습니다. 우리 사회가 좀 더 좋아지려면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려는 노력, 생각이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려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나라가 시끄럽다는 건 나라가 발전했다는 증거
사실 문학은 요즘 과거에 비해 힘을 많이 잃었다. 본인도 문학을 추구하는 시인으로서 그런 세상의 변화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궁금했다. 그 물음에 대해 신 시인은 한 마디로 “걱정 안 한다”라고 대답했다.
“유신을 겪으면서 문학계의 역할이 커졌습니다. 시대에 앞장 설 수 있는 게 문학밖에 없었기에 그랬어요. 그런데 독재 시절이 끝난 이후로 예술적 문화적으로도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아졌잖아요. 문학도 자기가 할 일을 옆으로 분산시켜야 해서, 준 거죠. 걱정할 게 없어요.”
그는 과거의 전근대적인 사회, 야만적인 사회에서의 문학의 역할은 컸지만 그 사회가 지나가면서 문학의 역할이 줄어든 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설명했다.
“세상 돌아가는 걸 걱정하면 안 돼. 걱정해도 될 것도 아니니까, 그러니 문학은 우리 사회에 대해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우리나라만큼 민주화를 이룩한 나라가 어디 있어요? 민주주의가 제대로 되는 나라는 일본하고 한국밖에 없습니다. 경제 발전도 그렇고, 물론 한국 경제가 지금 위기에 처해 있지만 이만큼 온 나라는 없습니다.”
그는 자신이 학생 시절 절망적이었던 국민 정서에 대해서 얘기했다.
“그때는 너무 가난해서 세계에서 꼴찌에서 몇 번째인 나라였어요. 그래서 ‘이런 한국은 폐기처분해야 된다’는 생각이 사람들에게 많았어요. 민주주의도 못하지, 부패와 독재는 엄청났지. 주민등록증을 하나 떼려고 해도 동사무소 사람에게 담배를 사줘야 했고, 선거 때 되면 자기 표가 자기 표가 아니었어요. ”
신 시인은 요즘 모 방송사 사장이 자기 딸과 해외에 나가서 공금으로 수백만 원짜리 식사와 숙박을 하며 논란이 된 사건을 보면서도, 그런 사건이 밝혀지는 것 자체가 얼마나 좋은 사회냐고 되물었다.
“시끄러우니까 나라가 결딴날 것 같이 얘기하지만, 그렇게 시끄러운 게 나라가 발전한 겁니다. 옛날에는 더 시끄러웠어요.”
시의 영감은 생활 속에서 나온다
오랜 세월이 지나 고향엘 갔더니,
고향집 앞 느티나무가 옛날처럼 커져 있다.
내가 늙고 병들었구나 이내 깨달았지만,
내 눈이 이미 어두워지고 귀가 멀어진 것을,
나는 서러워하지 않았다.
다시 느티나무가 커진 눈에
세상이 너무 아름다웠다.
눈이 어두워지고 귀가 멀어져
오히려 세상의 모든 것이 더 아름다웠다.
-신경림 시인의 ‘다시 느티나무가’ 중에서
신경림 시인의 시집 에 실린 시다. 나이가 들면서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잊었던 아름다움을 자연스럽게 재발견하게 되는 감성을 신 시인답게 소박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 시가 늙어감 자체에 대한 긍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신 시인은 굳이 잘 늙어가는 것에 대해 따로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그냥 사는 거지 뭘 정리를 하고 그래. 죽음이 예고를 해요? 그거 바보짓이에요. 그냥 자연스럽게 내버려두면 됩니다.”
혼자 사는 신 시인의 최근 생활은 등산, 여행, 그리고 영화 감상이다. 그는 요즘은 특히 영화를 많이 봤다며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를 ‘강추’했다. 잔잔하지만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문득 그 영화가 시인의 시 세계와 흡사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 시인은 자신이 임화, 백석, 오장환, 이용악의 시 세계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 모두가 생활 속에서 시상을 뽑아낸 시인들인 것처럼, 신 시인 또한 자신의 시의 영감이 모든 생활 자체에서 나온다고 밝혔다. 그렇지만 여행을 가서 시를 쓰는 것 외의 글은 쓰지 않는다고 한다.
“옛날에는 여행을 갔다 오면 의무적으로 여행기를 썼어요. 그런데 몇 번 쓰니까 한 소리 또 하고 또 하고 하는 것 같아서, 에이…(쓰지 말자).”
아내와 극장에서 영화 한 편 못 본 남편
자신의 삶을 자신답게 산 신 시인이지만, 그렇기에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에게는 항상 지워지지 않는 미안함이 남아 있다. 그는 아내에게 가장 미안한 일로 영화관을 못 간 것을 떠올렸다.
“아내와 함께 영화관을 갔는데, 그때는 영화 시작하기 전에 일어나서 애국가를 부르게 했어요. 그런데 같이 일어나서 애국가를 부르고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남자 배우가 여자 배우 끌어안고 키스하는 장면이 나오는 거야. 그걸 보고 내가 너무 화가 나서 ‘에이 나가자, 더러워서 영화 안 본다’ 하고 아내를 끌고나왔어요.”
1971년 3월 1일부터 정부는 ‘애국가의 올바른 보급과 존엄성, 애국심 고취를 위해’ 애국가를 극장에서 틀었다. 애국가가 나오면 극장에 온 사람들은 기립해야 했다. ‘조국에 대한 충성’이 끝나자마자 나오는 남녀의 흐트러진 애정 신이라니, 정서적인 괴리감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때는 그런 걸 겪기 싫어서 극장을 안 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신 시인도 그중 하나였던 셈이다.
“그러니 아내가 너무 화가 난 거예요. ‘이 미친 놈이 남들 다 보고 앉았는데 혼자 잘난 체를 하네? 다시는 내가 같이 영화관 안 간다’ 그런 거죠. 그래서 내가 70년대, 80년대 영화는 하나도 안 봤어요. 그때만 해도 내가 성질이 더러웠지. 아내에게는 그게 가장 미안해요.”
그는 작년에 일본의 국민 시인 다니카와 슌타로(谷川俊太郞)와 이메일로 주고받은 글을 묶어 를 냈다. 그 전 해인 2014년에 낸 열한 번째 시집 은 10쇄를 찍었다. 새로운 책은 아직 계획에 없다고 한다. 즐겁게 생을 누리며 삶과 시가 함께하는 그의 작업을 보면 독자로서는 기다림이 필요할 듯하다.
“부지런해야 하는데 좀 게을러요. 생각을 하면서도 방에 드러눕고만 있어. 머릿속에 그림을 다 그려놓은 다음엔 ‘에이 뭐 해봤자 마찬가진데’ 하며 귀찮아해서. 다행히 여행하는 건 열심히 하니까 다닐 수 있는 힘이 있을 때까지는 다니려고 해요.”
신 시인은 누워 있을 때가 가장 편하다고 한다. 아무리 누워 있어도 지루하지가 않다는 것이다. 주변의 누가 가장 편하냐는 물음에는 “혼자 있을 때가 가장 편하다”고 밝혔다. 그 말을 듣고 혼자서 하는 사색이라든지 무념무상이라든지 하는 멋진 말을 갖다 붙이려고 하자 그는 절레절레 손사래를 쳤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가만히 있는 거야.”
그의 대표 시인 ‘농무’를 보면 자연스럽게 시골 선비, 한량의 느낌을 받게 된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어떤 가감도 없이 삶의 자연스러움을 받아들이고 체화한 모습. 그것이야말로 평생 자신의 글과 삶을 일치시켰던 신 시인만의 아우라였다.
김 현 (전 KBS 연구실장, 여행연출가)
12년간 출연했던 KBS-TV 여행 프로그램 를 비롯해 여러 라디오 및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부터 매스컴의 인정을 받게 되어, ‘대한민국 부부 배낭여행가 제1호’라는 별칭까지 갖게 되었다. 이때부터 아내와 나는 늘 우리 부부에게 따라 붙는 이 별칭에 누가 되지 않으려고 무척 노력해 왔다. 일단 여행지가 정해지면 주마간산에 그치지 않도록 더 철저하게 준비하고 체계적으로 여행일정을 짰다. 이번에 소개하는 2016년 추천 여행지인 「클린턴 코스 중국여행」 「일본 규슈 기차여행」 「프랑스 프로방스 지방 일주」 「미국 서부 LA~샌프란시스코」 「캐나다 중부 그레이하운드 여행」도 여행 기간의 10배에 해당하는 준비기간과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아내와 내가 역할을 분담하여 치밀하게 준비한 것이다. 물론 유명한 관광지를 둘러보는 것도 나름대로 유익한 여행이 될 수 있으나, 남들과는 조금 차별화된 여행을 가고 싶다면 한 가지 테마를 정해 여행지를 결정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이 중에서도 특히 「클린턴 코스 중국여행」은 코스 제목부터 시작하여 우리 부부가 처음으로 기획한 코스로서, 현재까지 시중에 나와 있지 않은 유일한 코스인 동시에 이곳만 둘러봐도 중국을 알 수 있게끔 핵심만 뽑아놓았기에 나름대로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김현·조동현 부부의 '특별한 부부여행 코스' 첫 번째 - 「클린턴 코스 중국여행」
일반적으로 ‘서양’ 하면 유럽과 미국이 떠오르고, ‘동양’ 하면 역시 중국이 떠오른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이 있긴 해도 크기나 역사·문화·풍광 등으로 보아 중국이 동양의 대표주자임을 부인할 수 없다. 중국은 1년을 여행해도 다 볼 수 없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광대한 영토와 뿌리 깊은 역사, 볼거리가 많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중국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여행하느냐가 중요한데, 아내와 나는 늘 중국 여행을 좀 더 알차고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연구해 왔다. 그러던 차에 마침 중국과 미국의 수교가 이루어졌고, 1998년 미국의 전 대통령 클린턴이 중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이때 중국 정부가 신중하게 고르고 골라서 미국 대통령에게 보여줄 중국을 대표 도시 5개를 선정했다. 이것이 바로 북경 - 서안 - 계림 - 소주 - 상해였다.
우리 부부도 1999년 이 코스를 그대로 밟아서 가보았다. 중국의 역사·문화·환경을 통틀어 핵심만 여행할 수 있는 코스여서 무척 만족했다. 그래서 내가 클린턴의 이름을 따 ‘클린턴 코스 중국여행’이라 명칭을 붙였다. 현재까지 시중에서 상품화된 적이 없는 코스이기도 하다. 물론 그동안 북경이나 상해 등을 비롯해 중국에 여러 번 다녀왔다. 90년 초에는 한국 여행관계자들이 중국의 33번째 성(우리나라로 치면 도)이 된 해남도에 초청받았을 때, 취재 겸 한국 단장 자격으로 5번이나 다녀온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늘 중국을 다 볼 수 없다는 생각에 목말라 있었는데, 이 클린턴 코스로 인해 그 갈증이 말끔히 가신 것이다.
클린턴 코스의 첫 번째 도시는 북경이다. 엄청난 역사를 갖고 있는 만큼 볼거리 또한 굉장하다. 중국 민주화의 상징인 천안문 광장부터 시작하여 1420년~1911년 까지 중국 황제가 거주하던 자금성, 북경의 최대 번화가이자 중국의 명동으로 불리는 왕부정 거리, 세계 최고의 수준을 자랑하는 서커스, 그리고 그 유명한 만리장성과 서태후의 여름 별장인 이화원까지.
두 번째 도시 서안은 중국의 한가운데 위치한 3000년 고도이자, 대표적 중국 문화를 엿볼 수 있다. 19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했는데, 그 발전성과가 눈부시다. 한 농부가 발견한 병마용갱(진시황이 말년에 황릉과 함께 건설한 지하궁전의 일부로 지금까지 발굴 작업이 계속되고 있음)을 비롯하여 유명 서예가들의 필체를 직접 감상할 수 있는 비림, 서안의 인사동으로 불리는 문서거리, 당현종과 양귀비가 사랑을 나눈 로맨스 장소로 유명한 화청지, 중국의 첫 황제인 진시황의 능묘인 진시황릉, 당현종과 양귀비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수상 가무쇼, 서안의 3000년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섬서 역사박물관, 아시아에서 제일 큰 음악분수 쇼를 볼 수 있는 대안탑, 소수민족 회족의 전통양식을 볼 수 있는 회족거리, 서안의 명동이라 불리는 종고루 광장 등은 꼭 보아야 할 것들이다.
세 번째 도시인 계림은 중국을 대표하는 수려한 경치를 자랑한다. “계림의 산수는 천하제일이다(桂林山水甲天下).”라는 명성을 들을 정도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지 중 하나이다. 카르스트 지형에 속하는 계림은 지각변동에 의해서 바다가 솟아오른 것인데, 마치 물속에 산이 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배를 타고 가다 보면 풍광이 너무도 아름다워 꿈속에 온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이다. 이곳에서는 중국 각 민족의 생활풍습과 수공예를 볼 수 있는 세외도화원, 중국과 서양이 만난 이국적인 서가 재래시장, 계림관광의 하이라이트인 장예모 감독의 연출작 공연 계림시내 전경을 볼 수 있는 북파산, 계림 산수갑 천하제일인 이강 유람(관암~양재), 각양각색의 기이한 종유석의 세계인 관암동굴 등이 그 이름값을 톡톡히 한다.
네 번째 도시인 소주는 또 다른 역사의 도시이다. 수양제에 의해 건설된 대운하가 개통되면서 항주와 더불어 ‘천상천당 지하소항(天上天堂 地下蘇杭)’이라고 불릴 정도로 번영하였다. 운하가 무척 아름답고 옛 문화를 잘 간직하고 있다. 중국의 4대 정원이자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졸정원부터 동양의 피사의 탑이라 불리는 호구탑, 그리고 동양의 베니스인 소주운하에서 배를 타고 유유히 소주만의 정취를 느껴보는 것도, 빠질 수 없는 ‘클린턴 코스’만의 매력이다.
마지막 도시인 상해. 상해는 최근 들어 놀라운 번영을 하고 있는 중국의 심장이라 할 수 있다. 중국의 수도 북경이 정치의 중심이자 가장 역사적이고 남성적인 북방의 도시라고 한다면, 상해는 중국 경제의 중심지인 동시에 강남의 풍치와 함께 여성스런 남방의 도시라는 느낌을 준다. 그래서 북경 사람은 상해 사람을 촌놈이라 하고, 상해 사람은 자기들이 최고라고 각각 주장한다고. 원래 늪지대였던 상해는 운하로 연결된 도시이기도 하다.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가 있는 곳으로 우리에게는 뜻 깊은 도시이기도 하다. 경제 중심 도시답게 상해에서 가장 높은 마천루의 상징인 동방명주 타워가 유명하고, 프랑스 조계지였던 신천지, 예원 등의 옛 거리, 그리고 1919년부터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있었던 1932년 까지 사용된 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는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꼭 가보아야 할 곳이다.
김영희(金英姬) 前 대사
우리 동네에는 우물이 세 개 있었다. 동네 한가운데 마을 공동 우물이 있고 방앗간 집과 우리 집에 우물이 있었다. 1949년 한글날 태어난 나는 6·25전쟁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 그런데 우리 집 우물에 던져져 죽을 뻔했다는 얘기는 알고 있다. 농사를 많이 짓고 있는 집에다 큰아들이 국군 장교로 참전 중이어서, 인민군이 우리 가족을 몰살하기 위해 우물의 깊이를 재고 전 가족 이름을 적어갔단다. 옆 동네에서는 이미 우물 속 가족 몰살이 시행되고 있었는데, 인민군이 우리 식구 명단을 작성해간 이틀 후에 미군이 우리 동네에 들어왔단다.
훗날 내 어릴 적 얘기를 전해들은 미국인 내 남편은 한국전쟁에 자기 외삼촌 두 명이 참전했는데, 아마도 우리 동네를 탈환한 미군 중에 자기 삼촌이 포함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리 형제는 아들 여섯, 딸 셋 9남매다. 그중 나는 여덟 번째로 막내딸이다. 나보다 20세 많은 큰오빠는 6·25전쟁에서 생사를 넘으며 수많은 공훈을 세웠고 충무, 화랑 등 많은 무공훈장을 받았다. 특히 전쟁 막바지에 남한의 전력 공급원인 화천댐에 대한 대규모 중공군의 끈질긴 공격을 중대 병력으로 격퇴하여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태극무공훈장’을 수여 받았다. ‘지도를 바꾼 사나이’로 알려진 우리 오빠 김한준 대위가 2012년 사망했을 때, 장군 출신이 아님에도 육군장(陸軍葬)으로 국립현충원에서 장례식이 개최되었다.
세계지도를 보며 넓은 세상을 동경하다
내가 어렸을 때 시골에선 책이 몹시 귀했다. 그러나 나는 오빠, 언니가 많은 덕택에 여러 가지 책을 접할 수 있었다. 손에 잡히는 책은 무엇이든 읽었다. 책에는 모르는 세계, 모르는 나라 사람들에 대한 얘기가 많았다. 그중 특히 내 관심을 끌었던 책은 세계지도였다. 나는 세계지도를 펼쳐놓고 수없이 많은 나라들을 보면서 넓은 세계에 대해 꿈꾸고 상상했다.
넓은 세계에 대한 나의 동경은 장래 외교관이 되겠다는 꿈으로 이어졌다. 당시 나는 외교관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외교관이 되려면 어떠한 조건을 갖추어야 하는지 전혀 몰랐지만, 외교관은 해외에 나가 넓은 세상에서 일하는 직업이라는 것은 막연히 알았다.
내가 전주여고를 졸업할 즈음에 집안 형편은 매우 어려웠다. 교육열이 높으셨던 부모님은 9남매 뒷바라지에 매우 헌신적이셨고, 그동안 오빠, 언니들의 중, 고, 대학 입학으로 논밭은 거의 다 팔려나갔다. 나는 대학 대신 공무원 시험에 응시하기로 했다. 그러나 대학 진학을 마음속에서도 포기한 건 아니었고, 일단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학비를 벌고 야간대학에 진학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1968년 2월 고등학교 졸업 후 나는 5급을(현 9급) 국가공무원 시험과 서울시 지방공무원 시험에 응시했다. 1960년대의 실업률은 하늘을 찔러 매년 공무원 시험 응시율은 상상을 초월했고, 나아가 군대 가산점제도가 있어 여성의 공무원 시험 합격은 가뭄에 콩 나듯 했다.
다행히도 나는 두 곳 모두 합격했는데, 서울시 공무원을 택해 1969년 3월 서울시 중구청에서 말단 공무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이듬해인 1970년 국제대학 야간학부에 입학했지만, 직장과 대학 생활을 병행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나는 구청의 민원실에서 호적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우리나라에 주민등록제도가 도입되는 시기였다.
구청의 민원실에서는 일일이 호적을 보면서 손으로 주민등록 카드를 밤늦게까지 작성하고 있었다. 오후 6시에 시작되는 야간대학 수업에 맞춰 퇴근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동료들의 격려와 눈총 속에서 겨우 1학년은 마쳤으나, 출석 미달로 학점은 엉망이었다.
인생을 바꾼 터닝 포인트
1970년 12월 어느 날, 명동의 백화점에 선물을 사러 갔다가 우연히 고등학교 동창 한 명을 만났다. 그 친구는 독일에 가려고 준비 중이라는 말을 했다. 내 귀와 눈이 번쩍 떴다. ‘해외개발공사’에서 간호보조원(지금은 간호조무사)을 양성하여 독일로 파견하는데, 자신도 그 파견단에 포함되었다는 것이다. 해외개발공사 간호보조원 양성소에서 차기 입학원서를 받고 있는 중이란 말을 듣고,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 자리에서 독일 행을 결심했다. 그것은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내 결정에 모두가 반대했다. 독일에 가서 병원근무 마치고 독일대학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내 말에 모두가 황당해 했다. 안정된 공무원 직장을 버리고 막연한 해외 파견 꿈을 꾸는 나를 ‘정신 나간 사람’으로 취급했다. 독일에 정말 갈 수 있을지, 또 내가 희망하는 대로 병원 근무 후 대학에 입학할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이라며, 나중에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나의 결심은 확고했다. 후회하게 되더라도 해보고 후회하겠다고 했다.
간호보조원 양성소 입학 자격은 ‘중학교 졸업 이상’이었으나, 들어온 여성들의 배경은 천차만별이었다. 고등학교 독일어 교사, 공무원, 은행원, 대학생 등 해외로 나갈 길을 찾던 여성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때는 유학생 외에 여성들이 해외로 나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양성소에서 9개월간 이론을 배우고 병원과 보건소에서 3개월의 실습을 거친 후 간호보조원 자격증 시험에 합격하면 독일로 파견되는 과정이었다.
1972년 8월 27일 초조하고 긴 기다림 끝에 드디어 나는 독일에 도착했다. 새벽의 쾰른 공항은 안개가 자욱하고 추웠다. 공항에는 독일 전 지역의 병원에서 한국 간호요원들을 데리러 온 사람들이 푯말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간호사 4명과 간호보조원 6명이 북독일의 작은 도시 웰첸 시립병원에 배치되었다. 내가 3년간 일해야 할 곳이었다.
나는 남자 정형외과 병동에서 일했는데, 대부분 교통사고를 당하고 오랫동안 침대에 누워 치료를 받아야 하는 거구의 환자들로 병원일은 중노동이었다. 그러나 나는 야간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가장 힘든 근무시간인 오전 근무를 자원했다. 외진 곳에 있는 병원에서 학교에 다니기 위해 자전거를 사서 타는 법을 배우고 밤길을 다녔다. 병원에서 일하는 3년 동안 나는 야간학교에서 독일어, 영어, 불어를 배우며 대학입학 준비를 했다. 한국에도 라디오가 있느냐고 묻는 환자도 있었지만, 우리는 환자들에게 인기 있는 동양에서 온 ‘천사’였다.
30년 만에 이룬 외교관의 꿈
우여곡절 끝에, 1975년 9월 나는 6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쾰른대학교의 예비과정에 입학했다. 드디어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다는 기쁨과, 힘든 육체노동 없이 공부만 하면 된다는 생각에 온 세상을 얻은 기분이었다. 쾰른대학교에서 예비과정을 거쳐 교육학 석사와 철학 박사 학위를 받을 때까지 10년 동안 나는 죽을 각오로 정말 독하게 공부에 매달렸다. 교육학 전공에, 부전공으로 철학, 사회학, 심리학, 인류학을 공부했다.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었다.
1986년 초 나는 박사 학위를 들고 가슴에 큰 희망을 품은 채 한국에 왔다. 학생들의 민주화 요구 시위로 최루탄 가스에 찌들어 있는 여러 대학을 찾아갔지만, 학연 지연이 없는 내게 한국사회는 냉정했다. 그러나 절망은 없다. 위기는 새로운 기회다. 한국에서 실망하고 다시 독일로 간 내게 쾰른대학교에서 강의를 맡겼다. 보수적인 쾰른대학교에서 외국인이 전공과목을 강의한 첫 사례가 되며, 1990년 7월까지 나는 4년 동안 독일 학생들에게 교육철학을 강의했다.
그사이 유럽에는 지각변동이 있었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1990년 5월 한국 외교부는 독일전문가 특별채용 공고를 냈다. 그 공고를 보는 순간 나는 가슴에 화살이 박히는 느낌을 받았다. 그동안 잊고 있던 내 어릴 적 ‘외교관 꿈’이 떠올랐다. 특별채용시험 면접 때 “한국은 나를 낳아 키워주었고, 독일은 내 정신을 살찌게 해준 나라입니다. 두 나라 사이에 가교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라고 했다. 먼 길을 돌아 30년 만에 꿈을 이루었다.
1991년 2월 말 폰 바이체커(R. von Weizsacker) 독일 대통령 국빈 방한 시 통역으로 나는 외교관 업무를 시작했다. 독일 담당관으로 본부와 독일을 오가며 통역한 정상은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과 독일의 라우(J. Rau), 헤어촉(R. Herzog) 대통령이다. 독일 통일 직후 우리나라의 통일 열기는 대단하여 매년 수많은 고위인사들의 독일 방문이 있었고, 자료 작성과 브리핑, 통역은 정무담당인 내 업무였다. 나는 주 독일 대사관에서 1등서기관부터 공사까지 역임한 후, 2005년 9월 주 세르비아-몬테네그로 대사로 임명되어 대한민국 세 번째 여성대사가 되었다.
선진국과 분단 극복의 꿈
현재 내 책상 위엔 커다란 세계지도 책이 놓여 있다. 뉴스에 주요 해외사건이 보도되면 지도를 펴 보고 그 주변 국가들을 살펴보며 머릿속에선 습관처럼 보고서를 쓰고 있다. 매년 지구를 거의 한 바퀴 도는 생활을 하고 있는 지금도 해외를 방문할 때는 항상 그 나라의 지도가 내 가방 속에 들어 있다. 화성에 착륙한 인간의 모습과 지도를 볼 수 없다는 점이 아쉽다.
나는 인생의 절반 이상을 해외에서 살았다. 지금도 매년 여름 3개월은 남편과 함께 베를린에 체류하며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개최되는 철학, 인문학 학회에 참석한다. 겨울 3개월은 보스턴에서 지낸다. 쾰른대학 학생 때 만난 남편은 현재 보스턴에서 철학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세계 여러 곳을 방문하며 변화된 한국의 위상을 실감하지만, 삶의 여유가 있는 사회가 부럽기도 하다. 지난 반세기 우리 세대는 숨 가쁘게 달려왔다. 산업화, 민주화도 이루었다. 그러나 아직도 너무나 국내적인 시각에 머문 편협한 사회현상은 안타깝다. 세상은 넓고 엄청난 속도로 변하고 있다. 그리고 국제사회는 냉혹하다. 나는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되고 분단을 극복하는 꿈을 꾼다. 평생 분단과 함께 살아온 우리 세대와는 달리 다음 세대는 진정한 선진국의 시민이 되어 평화로운 대한민국에서 기차를 타고 베를린, 파리, 런던까지 갈 수 있기를 기원한다.
△ 김영희(金英姬) 외교관
퇴임 후 세계무대에서 얻은 경험을 젊은 세대와 공유하고자 '20대, 세계무대에 너를 세워라'(2010.3.)를 펴냈다. 우석대 초빙교수를 역임했고 전국의 많은 대학에서 특강했다. 언론의 독일통일전문가 토론에도 여러 번 참여했다. 현재 '여성평화외교포럼'(사)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