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엄마의 이름은 김정숙. 고향은 평북 선천군 선천면 일신동. 이십대 중반에 남편 신하철을 만나 신식 결혼식을 올렸다. 슬하에 아들 하나, 딸 셋을 두었다. 가족과 떨어져 혼자 이남에서 살아왔어도 늘 꿋꿋했다. 서슬 퍼런 군사정권 시절 38년 야당투쟁을 했고 민주화의 대부로 국회의원직을 지냈던 남편이 서울대총학생회장을 숨겼다가 잡혀 고문 받고 시달릴 때도 경찰들에게 고함을 팍팍 지를 정도로 용감했다. 연약했지만 단단했다.’ 어머니가 숨을 거두셨을 때, 시인 신현림 (申鉉林·54)과 자매는 약소하나마 장례식장에 어머니의 일대기를 걸었다. 수많은 영웅의 인생이 전기로 남듯, 자신에게 영웅과 다름없던 어머니의 인생을 글로 써내고 싶었다. 그녀에게 어머니는 어떤 영웅보다 위대했고, 존경스러운 존재였다.
엄마와의 추억이 깃든 남문시장
딸아이와 함께 시장을 갈 때면, 어린 사 남매를 데리고 장을 보러 다니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아련히 떠오른다. 시골 약사로 생계를 유지했던 어머니는 때때로 아이들의 손을 맞잡고 인근 대도시 수원으로 약제를 떼러 가셨다. 그 시절 신현림 작가의 고향인 의왕에는 큰 시장도 없었고 마땅히 서점도 옷가게도 없었기 때문에, 어머니와 장을 보러 가는 날은 소풍과도 같았다.
“엄마랑 수원 남문시장을 누볐던 기억이 참 사랑스럽게 남아 있어요. 같이 가면 옷이나 학용품을 꼭 하나씩은 사주셨는데 그게 무척 신났고, 길가에 앉아 엄마와 함께 먹던 순대, 떡볶이, 번데기도 참 맛있었어요. 가끔씩 좋은 영화를 보면서 군고구마와 오징어를 부스럭거리며 먹던 기억도 애틋해요. 단골로 자장면을 먹으러 갔던 ‘강서면옥’도 떠오르네요. 지금 다시 엄마와 손을 잡고 강서면옥에 들러 자장면 곱빼기를 먹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녀는 엄마에게 시장이란 ‘내 가족에게 가장 좋은 걸 입히고 먹이고 싶은 욕망, 바로 사랑이 투영된 신성한 공간’이라고 말한다.
딸아, 외로울 때면 시를 읽으렴
그렇게 시장에 가는 날엔 어머니와 서점에 들르곤 했다. 여고생 시절, 어머니가 사준 ‘세계시인선집’은 그녀에게 뚜렷한 기억으로 남았다. 소설처럼 긴 글은 부담스러웠던 입시생 초기, 짧은 시만큼은 마음 편히 읽을 수 있었고 따스한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이런 인터뷰를 할 때나 책장에 쌓인 시집들을 보면 엄마랑 서점에 갔던 기억이 떠올라요. 우리 동네엔 서점이 없어서 수원을 가면 꼭 그 동네 서점을 들렀어요. ‘세계시인선집’같은 시 모음집을 사주셨는데 그때 읽은 시들이 저를 시인으로 이끈 거 같아요. 엄마를 사랑하면서도 대들고 마음 아프게 한 적이 많은데, 그런 괴롭고 불안한 마음을 달래준 게 바로 시였죠. 그렇게 책을 통해 마음의 평안을 찾고, 지혜롭게 성장할 수 있었어요. 엄마는 분명 책 읽기의 소중함을 알고 제가 책을 가까이하길 바라셨던 것 같아요.”
어머니의 바람대로 그녀는 시를 통해 자신을 다스릴 수 있었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밝힐 수 있었다. 그런 어머니의 사랑을 담아 그녀는 4년 전 이라는 시집을 엮어내 장기 베스트셀러로 인기를 끌고 있다. 어머니는 책 읽기뿐만 아니라 아이들이 공부하는 모습을 강조하셨고, 교육열 또한 높으셨다.
“엄마는 의대를 2년간 다니기도 하셨지만, 앞을 내다볼 줄 알고 의식이 깨어있는 신여성이셨어요. 사실 저는 대학 진학을 안 하려 했는데, 그때 엄마가 이런 말씀을 하셨죠. ‘네가 대학을 안 가면 형제간에 학벌 차이로 의가 상하고, 차이 나는 사람이 외로워지게 된다. 그러니 대학을 가거라.’ 그때 어머니께서 그런 말씀을 안 하셨다면, 어쩌면 정말 그런 외로움에 휩싸였을지도 몰라요. 정말 지혜로우신 분이셨어요.”
중년의 엄마 그리고 중년의 딸
어머니가 떠난 뒤, 영영 만날 수 없는 엄마에 대한 그리움과 아픔을 시로 썼다. 그 마음은 그녀의 시 ‘엄마의 유언, 너도 사랑을 누려라’에서 짙게 우러난다. 엄마로서 작가로서 자신의 길을 나아가던 그녀는 중년 이후 어머니와 점점 닮아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됐다.
“예전에는 엄마와 안 닮아서 힘든 적도 있었는데, 요즘에는 엄마를 닮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요. 내가 나이가 들수록 중년의 엄마 모습과 점점 닮아가는 것 같아요.”
닮아가는 것은 외모뿐만이 아니었다. 엄마의 생활, 엄마의 삶을 이해할수록 그 마음까지 점점 닮아가고 있었다.
“엄마가 돼봐야 엄마를 알게 된다죠. 내가 자식을 키우니까 엄마 생각이 매일 나요. 딸이 속 썩일 때면 ‘우리 엄마는 나 때문에 얼마나 혈압이 올랐을까? 엄마도 힘들고 가슴 아팠을 텐데’하고 엄마의 마음을 헤아리게 돼요. 딸이 행복을 주고 웃음을 줄 때면 ‘나도 우리 엄마에게 그런 딸이었을까’하는 생각도 하고요.”
닮아버린 취미, 닮아버린 마음
“또 한 가지 닮은 점이 우리 모녀가 영화를 참 좋아한다는 거예요. 전에 TV에서 이 할 때면 큰소리로 엄마를 부르곤 했는데, 한번은 가 하고 있었어요. 여느 때처럼 엄마를 불렀는데 엄마가 ‘비비안리랑 로버트 테일러가 나오는 영화구나’라고 말씀하셨죠. 새삼 엄마 입에서 영화배우 이름이 줄줄 나오는 것이 신기했어요. 생각해보면 옛날 우리 집 다락방에는 엄마가 모아둔 영화 팸플릿들이 가득했어요. 가끔 수원 중앙극장에 가서 엄마와 영화를 보기도 했는데 그게 엄마에겐 해방구였고, 창이었죠. ”
하지만 그런 일상도 아주 옛날 일이고, 집안이 기울어 어머니가 가장이 되신 뒤로는 좋아하던 취미도 다 잊고 사셔야 했다. 그렇게 영화를 볼 시간도 없이 나이 드신 어머니의 모습도 지금 그녀의 삶에 묻어나고 있었다.
“엄마와 영화 이야기도 자주 나눴는데 그럴 때면 엄마의 눈은 더욱 또렷하게 빛났어요. 그렇게 엄마 덕분에 나도 영화광이 되었죠. 사춘기 때는 영화배우 사진으로 방에 도배할 정도였는데, 요즘은 저도 영화 볼 시간 내기가 참 어려워요. 혼자 딸을 키우며 비디오로 보는 영화로 마음을 달래던 때를 생각해보면, 그 옛날 엄마도 우리를 키우며 나와 같은 마음이었겠구나 싶어요.”
엄마의 몸은 한때 나의 몸이었다
“엄마가 쓰러지시기 전 딸아이와 함께 동네 목욕탕에 갔던 적이 있어요. 탕을 가득 메운 수증기 속에서 엄마의 야윈 몸을 보니 너무 안쓰럽고 슬펐어요. 예쁜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유난히 힘이 좋았던 엄마가 혈압 때문에 몸을 움직이고 숨쉬기도 곤란해 하시던 모습에 가슴이 아팠죠. 그렇게 ‘작별의 시간이 멀지 않았구나’하는 슬픔과 두려움 속에서 함께한 목욕탕에서의 그날도 이제는 아껴먹던 빵처럼 소중한 추억이 됐어요.”
그때서야 그녀는 ‘엄마의 몸은 한때 나의 몸이었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열 달 동안 어머니 뱃속에서 한 몸처럼 지내왔다는 것을. 그리곤 엄마의 몸에서 태어난 행운에 더 없이 감사할 수 있었다.
“고향에 엄마 가게 있던 자리가 없어졌어요. 엄마와의 보물 같은 추억이 가득했던 공간이었는데, 그게 없어지니 가슴 먹먹하더라고요. 엄마의 가게처럼 늘 그 자리에 있을 것만 같았던 소중한 것들이 사라질 때도, 늘 당연하게만 생각했던 엄마의 존재도, 우리의 유한한 삶 속에서 함께할 시간이 길지 않다는 것을 조금 더 일찍 깨달았다면 좋았을 텐데... 지금이라도 엄마를 뵐 수만 있다면 엄마의 몸을 따뜻하게 어루만지며 그 외로움과 슬픔을 하나하나 헤아려드리고 싶어요.”
1)“내가 물어볼 테니 알아맞혀 봐. ‘뚝에치’가 뭐어게? ‘깐에짝’은?”
2)한 신입 사원에게 부장이 “우리 어머니 수연에 와 달라”고 말했다. 무슨 뜻인지 몰라 망신을 당한 그는 무식을 만회하려고 에티켓 사전을 뒤진 끝에 ‘망구’라는 말을 찾아냈다. 그가 “자당 어른께서 망구가 되신 걸 축하드립니다.”라고 하자 부장은 불같이 화를 냈다. “뭐? 우리 어머니가 할망구라구?”
3)“안여돼 같으면서 에바 그만 떨고 김천 가자. 그런데 문상도 버카충 되니?”
1)은 1960년대의 수수께끼다. 답은 ‘말뚝에 까치’, ‘뒷간에 볼기짝’이다. 반세기 전만 해도 이런 문답이나 언어의 희롱은 재미있는 놀이이자 장난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수수께끼나 스무고개라는 말은 거의 사어가 됐다.
‘수연’과 ‘망구’를 아시나요
2)는 소설가 이창동(문화부장관 역임)의 콩트 의 내용이다. 수연(壽宴)은 생일잔치, 망구(望九)는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 그러니까 81세다. 같은 세대인데도 한자어를 몰라서 빚어진 불통 사례다.
3)은 요즘 아이들이 즐겨 쓰는 말을 의도적으로 짜깁기한 문장이다. 어른들을 위해 ‘번역’하면 “안경 쓴 돼지같이 생겼으면서 보기 흉한 애교 그만 떨고 김밥천국이나 가자. 그런데 문화상품권도 버스카드 충전 되니?”라는 뜻이다. 에바는 오버(Over)의 변형이다.
세 가지 사례는 우리의 어문생활이 통시적으로 얼마나 급변해왔으며 공시적으로는 단절과 괴리가 얼마나 심한지 보여준다. 1945년 광복 이후 70년간 다른 모든 분야와 마찬가지로 어문생활도 상전벽해(桑田碧海)의 변화를 겪었다. 능곡지변(陵谷之變) 고안심곡(高岸深谷) 천선지전(天旋地轉)의 이 달라짐은 참으로 격세지감(隔世之感) 금석지감(今昔之感)을 일으킨다. 그런데 이런 변화에 긍정적이지 못한 게 많은 것이 문제다. 언어의 민주화는 언어의 자유화를 넘어 언어의 천박화를 촉진했다.
한글문화연대가 한국사회여론연구소에 의뢰해 2013년 12월에 실시한 말문화 관련 국민인식조사에 따르면, 최근 우리 사회의 말 사용 문화에 대해 ‘문제가 있다’는 응답이 92.6%(매우 문제가 많다 33.9%+문제가 있는 편 58.7%)로 압도적이었다. ‘문제가 없다’는 응답은 7.4%(전혀 문제가 없다 1.1%+별 문제가 없는 편 6.3%)에 그쳤다.
이런 상황에 이르게 된 70년간의 변화와 과제를 정리한다. 일제 잔재와 외래어 남용, 경음화 추세의 가속, 단축어 신조어의 유행, 욕설과 공격성 심화, 유행어 은어의 변천, 남과 북의 언어 괴리, 이 여섯 가지를 중심으로 논의해 본다,
청산 안된 일제 잔재와 끝없는 외래어 남용
어문학자들의 연구를 종합하면 우리의 어문생활은 국어 건설기(1894년 갑오개혁~1970년 국어순화정책), 국어 순화기(1970~1980년대 중반), 국어 관리기(1980년대 중반 이후)로 분류할 수 있다. 국어 건설기의 특징은 1)일제 강점기에 조선어를 제대로 세우려는 투쟁 2)새 나라 건설과 이에 따른 한국어 정비 노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학술 출판 과학기술 같은 모든 분야에서 일본말이 지금도 그대로 쓰이고 그런 말을 많이 알아야 그 분야에 정통한 전문가로 치부되곤 한다. 일제가 남겨 놓은 일본식 땅이름의 유래를 잘 모르는 채 버스 안내판이나 도로 표지판, 행정관서나 시설물에 그 이름을 쓰는 경우도 많다. 일일이 예를 들지 않는다.
해방 이후 미국의 영향이 커진 데다 세계화가 급속도로 진행됨에 따라 영어가 득세하면서 이제는 영어를 많이 써야 유식해 보이게 됐다. 한자와 한문 사용은 줄어들었지만 그 자리를 로마자와 영어가 차지했다. 한글전용과 한자교육 문제의 갈등과 대립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현안이다.
‘쏘주’ ‘쐬주’ ‘도꾜’...경음화 추세의 가속
1960년대의 영화나 방송을 보면 북한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만큼 발음이 연하고 순하고 말이 느려서 요즘 감각으로는 촌스러워 보인다.
그러나 지금은 말이 빠르고 급하다. 특히 경음이 많아졌다. 소주→쏘주, 쐬주가 대표적인 사례다. 소주가 달다 해서 쏘주가 달다는 뜻의 ‘쏘달’이라는 상품이 나왔을 정도다. 숙맥은 콩인지 보리인지 구별하지 못하는 바보라는 뜻인데, 거의 모든 사람들이 쑥맥이라고 발음한다.
우리는 일어를 표기할 때 ㅊ ㅋ ㅌ ㅍ 등 격음 위주로 하고 있다. 東京의 표기는 경음인 도꾜가 아니라 도쿄다. 하지만 이를 납득하지 않거나 거부하는 사람들이 많다. 세계적으로 잘 발달된 우리나라의 욕은 가속되는 경음화 경향을 잘 알게 해 준다.
‘해품달’ ‘쏠까말’ ‘슈키라’... 단축어 신조어의 유행
요즘 젊은 세대는 긴 말을 참지 못한다. 긴 것은 석 자 이내로 줄이고 석 자인 것도 두 글자로 줄여 버린다. ‘인터넷강의’는 ‘인강’, ‘해를 품은 달’은 ‘해품달’, ‘넝쿨째 굴러온 당신’은 ‘넝굴당’, ‘별에서 온 그대’는 ‘별 그대’다. 일본인들이 축소 지향의 민족이라면 우리는 단축 지향의 국민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인터넷에 떠 있는 ‘어른들이 모르는 신조어’라는 자료(출전 불명)에 의하면 어른들이 가장 못 알아듣는 말은 쏠까말, 정줄놓, 흠좀무, 이뭐병 순이다. 차례로 풀이하면 솔직히 까놓고 말한다, 정신줄을 놓았다, 흠, 이게 만약 사실이라면 좀 무섭군, 이건 뭐 병신도 아니고, 이런 뜻이다. 그런 식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이런 말을 하는 아이들은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 ‘듣보잡’(듣도 보도 못한 잡놈)일 수 있다.
최근 인터넷 검색어에서 상위에 올랐던 ‘슈키라’를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슈퍼 주니어의 키스 더 라디오’라는 라디오 프로그램 이름인데, 이렇게 풀어서 알려 줘도 슈퍼 주니어가 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으니 유행어와 소통은 역시 어려운 문제다.
아이들은 ‘쩐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신기하다 멋지다 내가 졌다, 이런 뜻의 감탄사 대용어다. 좋을 때나 나쁠 때나 두루 쓰이는 단어다. 어느 지공거사(65세 이상인 지하철 공짜 이용자)에게 뜻을 물었더니 ‘소금에 절여 둔 음식 너무 오래 잘못 보관하면 풍기는 냄새와 맛?’ 이렇게 답이 왔다.
욕설과 공격성 심화... 도 넘은 인터넷 막말
오늘날 한국인의 언어생활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문제점은 공격성 폭력성이다. 1) 익명성에 숨어 자행하는 인터넷 언어폭력의 증대 2) 거의 모든 문장에서 뜻도 모르고 추임새처럼 뱉어대는 욕설 3) 막말과 비속어로 시청률 경쟁을 일삼는 방송 언어의 악순환 4) 정치권이든 일반인이든 정치적 견해차에 따라 마구 쏟아내는 극단적 공격 언어, 이런 것들이 문제다.
요즘 아이들은 욕 없이는 말을 하지 못할 정도가 됐다. 몇 년 전 버스 안에서 대화를 하면서 한마디도 욕을 하지 않은 중학생들을 본 할머니가 그 학생들을 표창하라고 학교에 알린 일이 있을 정도다.
문화체육관광부가 2013년 10월 15세 이상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2013년 언어생활에 대한 설문조사 보고서’를 보자. 청소년들의 일상적인 욕설이나 비속어 사용에 대해 89.4%가 ‘언어폭력으로 사회문제다’라는 데 동의했다. 중복 답변을 허용한 이 문항에서 사회문제라는 생각은 ‘또래 간의 친근감 표현(57.2%)’,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것(40.4%)’이라는 답변보다 훨씬 비율이 높았다.
말로 하는 욕설도 문제이지만 인터넷을 비롯한 SNS상에서 댓글을 쓰면서 마구 내갈기는 구어체 욕도 걷잡을 수 없을 정도다. 일상의 대화보다 더 심각한 게 인터넷 막말이다. 일정한 이슈가 생길 경우 자신의 성향과 기호에 맞지 않으면 무조건 욕설을 동반한 비난을 하기 일쑤이고 ‘신상 털기’를 통해 개인정보 유출과 명예훼손, 인권침해. 인격살인을 서슴지 않는 폭력성이 사회 전반에 광범하게 퍼져 있다.
유행어 은어, 민주화 정보화 이후 일반인 주도
해방 이후 한국사회의 유행어는 근대화→산업화→민주화→정보화의 단계별로 다양하게 변해왔다. 초기에는 각종 정보를 선점하는 오피니언 리더, 특히 정치권의 언어가 언중을 지배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초대 대통령 이승만), “민생고부터 해결하자.”(점심 먹자는 뜻/1961년 5·16 군사쿠데타 ‘혁명공약’에서 따온 말),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김영삼 전 대통령), “이 사람 믿어 주세요.”(노태우 전 대통령) 이런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러나 민주화 정보화시대로 접어들면서 유행어의 중심은 정치권이나 오피니언 리더에서 일반대중으로 바뀌었다. 국어 환경의 변화를 주도하고 정책의 변화를 끌어내는 힘이 국가로부터 언중으로 넘어온 것과 비례해서 유행어의 중심도 이동하게 됐다. 산업화와 대중사회의 출현, 정보통신혁명 등 사회 구조와 개인 삶의 변화는 그에 걸맞은 새로운 언어와 유행어를 생성하게 만든다.
특히 방송 프로그램의 영향력은 막강하다. 1970년대 이후 ‘웃으면 복이 와요’를 비롯한 코미디 프로그램이 유행어를 양산해 냈다. ‘김 수한무 거북이와 두루미 삼천갑자 동방삭 칙칙 카포 싸리싸리센타 워리워리 세브리카 므두셀라 구름이 허리케인에 담벼락 서생원의 고양이 바둑이는 돌돌이’를 기억하시는지? 구봉서와 배삼룡이 만들어 낸 이 긴 이름은 몇 년 전 탤런트 현빈이 ‘시크릿 가든’이라는 TV드라마에서 읊어댐으로써 40년 만에 다시 유행하는 기현상을 보였다. 개그콘서트를 비롯한 개그 프로그램이 유행어를 만들고, 그 반대로 이미 유행 중인 유행어가 개그 프로그램에 등장함으로써 더 확산되는 시대다.
남과 북의 언어 괴리... 여자 대 녀자
스위스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1857∼1913)는 “같은 말은 공통된 민족성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민족 통일을 이루려면 무엇보다 말과 글이 통일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남한과 북한은 지난 70년 동안 서로 다른 정치 체제 속에서 각자 국어정책을 추진하다 보니 이제는 말과 글이 통하지 않는 게 많아졌다.
북쪽이 어려운 일제 한자말을 쉬운 토박이말로 많이 다듬은 것과 달리, 남쪽은 일어나 한자어를 그대로 쓰고 영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백열전구 대 전등알, 소프라노 대 녀성고음, 산맥 대 산줄기, 코너 킥 대 구석차기, 이런 식으로 표현이 서로 다르다.
이 사례에서 볼 수 있듯 남측은 두음법칙을 지켜 한자어 소리를 자리에 따라 다르게 적지만 북측에선 항상 한 가지로 적는다. 노인 대 로인, 여자 대 녀자, 선열(先烈) 대 선렬, 이렇게 엇갈린다. 북한에서는 하나의 개념으로 묶을 수 있는 단어를 붙여 쓰며 의존명사와 보조용언도 대개 붙인다. ‘무엇때문에’, ‘우리들전체’, ‘울듯말듯하다’ 등을 그런 예로 들 수 있다.
이렇게 차이가 커지자 남북 학자들은 1995년 중국 옌볜(延邊)에서 처음 학술회의를 연 이후 남북 정보통신 용어 통일, 우리말 살리기, 자판배치 공동안, 우리 글자 배열순서와 부호계 공동안 등을 만들었다.
가장 중요하고도 어려운 것은 겨레말 큰사전 편찬 활동이다. 2005년 남북공동편찬사업회가 결성돼 추진해왔으나 당초 발간 목표 2013년은 벌써 지났다. 통일부는 1월 29일 제270차 남북교류협력추진협의회를 열어 이 편찬사업에 32억여 원의 남북협력기금을 무상 지원키로 했다.
어문생활의 성숙과 발전...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한국어는 사용 인구 8000만 명에 이르는 세계 13위권의 언어다. 많은 언어가 이미 지구상에서 사라졌고 앞으로도 소멸될 것으로 전망되지만, 한국어는 이제 생존 자체를 고민할 게 아니라 성숙과 발전을 지향해야 할 단계다.
언어의 변천은 시류에 따른 것이고 누가 강제로 유도할 수 있는 게 아니지만 시민사회를 성숙시키려는 시도와 마찬가지로 바람직한 방향을 향해 지속적으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특히 우리 어문생활에 독버섯처럼 번진 공격성을 약화시키고 순화시켜야 한다.
어떻게 할 것인가. 그 답은 우리말 속에 들어 있다. ‘말이 씨가 된다.’ ‘가루는 칠수록 고와지고 말은 할수록 거칠어진다.’ 그러니 남을 공격하는 막말과 욕설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 그 피해가 돌아온다는 점을 알게 해야 한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그리고 우리말은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하지 않던가.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고 하고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하지 않나.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데, 말조심을 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말에 관한 말이 이렇게 풍부한 민족이 있던가. ‘말로써 말 많으니 말 말을까 하노라’라는 시조까지 있다.
어문단체는 물론 정부와 지자체, 각급 학교 교원, 신문과 방송의 언론 종사자들이 다 노력해야 할 일이다. 특히 유행을 좇아 어법에도 맞지 않고 어원도 불분명한 조어를 무분별하고 천박하게 양산해 내는 정부 부처와 공공기관들의 어문파괴 행위부터 없어져야 한다.
광복 70년 분단 70년, 2015년은 기념비적인 해다. 감격과 환호 속에 태어난 해방둥이들이 칠순을 맞기까지 우리는 고난과 격동의 세월을 살아왔다. 한국의 70년은 외국의 170년, 아니 그 이상의 시기와 맞먹을지 모른다. 이 길고 험난했던 세월 동안 한국 사회와 문화는 어떻게 달라져 오늘에 이르렀으며 무엇이 시대의 화두였나. 앞으로 8월호까지 부문별로 나누어 7회 특집을 마련한다. 그 첫 순서는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가 분석하는 세대론이다.
광복 70주년을 맞이해 우리 사회의 선 자리와 갈 길에 대해 자연 생각해보게 된다. 광복은 우리에게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빼앗긴 주권의 회복이자 새로운 국민국가 건설의 출발점이었다.
'산업화→민주화→정보화의 이행'
하지만 우리를 기다린 것은 격동의 현대사였다. 미군정이 시작되고, 좌·우익의 갈등과 대립은 격화됐다. 냉전의 그늘이 짙어진 가운데 1948년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이 선포됐다.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분단은 더욱 고착화됐다. 참으로 험난한 나라 세우기 과정이었다. 주권을 회복하고 독립국가를 성취했으되 통일은 미완의 과제로 남겨진 셈이었다.
나라 세우기에 부여된 두 과제는 산업화와 민주화였다. 세계시간 속에서 뒤처졌던 만큼 그것은 ‘추격산업화’와 ‘추격민주화’로 진행되었다. 추격산업화는 성장을 위해 모든 것을 거는 전략으로 나타났다. ‘선(先)성장 후(後)분배’ 논리야말로 추격산업화의 요체였다. 성장은 가파르게 이뤄지고 경제적 삶은 빠르게 향상됐다. 하지만 추격산업화의 정당성은 그 과정 안에서 고갈되기 시작했다. 1972년 10월유신은 민주주의의 절차적 정당성을 부정함으로써 군사권위주의의 등장을 가져왔다.
추격산업화의 기억은 너무나도 선명해서 여전히 논란을 안고 있다. 대중의 다수는 향수를 갖고 있는 반면, 지식사회에서는 거부 경향이 두드러진다. 왜일까. 아마도 그것은 역사의 본질 가운데 하나인 ‘과거와 현재의 대화’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대중들이 현재의 곤궁(困窮)으로 인해 과거를 그리워해 왔다면, 지식사회는 산업화와 민주화의 병행발전을 지지해온 것으로 보인다. 추격민주화는 추격산업화 안에서 배태됐다. 군부권위주의는 민주화를 일시적으로 지체시켰지만 역사는 이미 새로운 길로 들어섰다. 추격민주화를 주도한 주체는 사회운동이었다. 분출하는 사회운동들은 민주주의 제도를 요구하고 또 만들어냄으로써 서구민주주의를 단숨에 추격하고자 했다.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을 통해 본격화된 ‘사회운동에 의한 민주화’는 대내적인 민주화와 대외적인 자주화를 추구했다.
하지만 추격민주화에도 그늘은 존재했다. 정치민주화는 이뤄졌지만 ‘거리의 민주주의’가 ‘제도의 민주주의’로 쉽게 전화되지 못했다. 경제민주화와 사회민주화 역시 미완의 과제였다. 지역주의가 강화되고 사회 양극화가 심화돼 온 것은 민주화 과정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 민주화 과정이 잘못된 게 아니라 추격산업화의 조건에서 민주화를 성취하는 게 그만큼 어려웠다고 볼 수 있다.
추격민주화에 이어 새롭게 등장한 게 정보사회였다. 정보기술이 단순한 도구적 차원을 넘어서 우리 삶과 사회를 근본적으로 재편하는 정보사회는 경제·정치·문화에 큰 영향을 미쳐 왔다. 정보기술과 연관된 산업은 경제의 중추를 이뤘고, 새롭게 등장한 온라인 공론장은 정치적 의사결정의 한 중심을 형성했다. 그리고 정보사회의 도래가 가져온 가상문화는 일상생활은 물론 문화 생산 및 소비양식을 크게 바꾸어놓았다.
세계화의 충격과 한 쌍을 이루는 정보사회의 도래는 양면적인 특성을 보여 왔다. 한편에서 정보사회는 개인적·사회적 삶을 풍부하게 만들어 왔다. 특히 스마트폰의 대중적 보급은 정주(定住)사회를 넘어서 유비쿼터스로 상징되는 유목사회의 도래를 현실화해 왔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정보사회는 정보기술의 발전에 따른 일자리 감소, 정보 불평등, 인권 침해 등 새로운 사회문제들을 낳아 오기도 했다.
산업화세대와 민주화세대의 갈등
광복 70년의 이러한 ‘압축적 발전’에 대응하는 개념이 세대다. 세대가 갖는 사전적 의미는 어린아이가 성장하여 부모 일을 계승할 때까지의 대략 30년 정도의 기간을 말한다. 일반적인 용법으로는 같은 시대에 살면서 공통의 의식을 가지는 비슷한 연령층의 사람 전체를 의미한다.
후자의 의미를 특히 주목해 보면, 우리 사회에서는 앞서 말한 산업화시대, 민주화시대, 정보시대에 각기 대응하는 ‘산업화세대’, ‘민주화세대’, ‘정보화세대’가 존재한다. 2015년 현재를 기준으로 보면, 50대 중반 이상이 산업화세대라면, 30대 중반에서 50대 초반까지는 민주화세대이며, 10대에서 30대 초반까지는 정보화세대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세 세대 가운데 뚜렷한 대비를 보인 것은 산업화세대와 민주화세대다. 산업화세대가 농업사회에서 공업사회로의 전환을 이끈 1960~70년대 산업화에 상당한 자부심을 보여왔다면, 민주화세대는 1980년대 중반 이후 학생운동·시민운동·노동운동을 통해 진행된 민주화에 드높은 자부심을 드러냈다. ‘산업화 30년, 민주화 30년’의 추격산업화와 추격민주화가 비서구사회의 모범적인 사례였던 만큼 이러한 자부심들은 그 나름대로 근거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두 세대 사이에는 긴장이 존재했다. 경제적 빈곤에서 벗어나려 했던 산업화세대와 말의 자유 및 인권의 증진을 모색하려 했던 민주화세대 사이의 가치의 긴장 및 충돌은 우리 사회 변동의 또 다른 특징을 이뤄왔다. 우리 사회 세대갈등의 주축을 이뤄온 ‘6070세대 대 3040세대’ 간의 갈등은 ‘산업화세대 대 민주화세대’ 간의 갈등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두 세대 간의 갈등이 가장 예각적으로 나타나는 영역은 정치다. 우리 정치의 가장 중요한 분수령을 이루는 대통령선거의 경우 언제부턴가 세대갈등은 지역갈등과 함께 선거의 향방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변수였다. 예를 들어, 2003년 노무현 정부의 등장은 민주화세대의 절대적인 지지에 힘입었으며, 2013년 박근혜 정부의 등장은 산업화세대의 지지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흥미로운 세대는 5060세대와 3040세대의 사이에 놓인 50대다. 이들은 1970년대 후반과 80년대 초반에 대학을 다닌 이들인데, 산업화세대와 민주화세대의 특징을 아울러 갖고 있는 세대이기도 하다. 현재 50대는 베이비붐 세대이자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을 적극 지지했던 이들이다. 이들 다수는 2002년 대선에서 진보적인 노무현 후보에게 표를 던졌지만, 2012년 대선에서는 보수적인 박근혜 후보에게 더 많은 지지를 보냈다.
사회학적으로 보면 우리 사회의 50대는 ‘이중적 불안’ 속에 놓여 있다. 하나가 미국의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Richard Sennett)이 말한 직장으로부터의 ‘퇴출의 공포’라면, 다른 하나는 고령화에 따른 ‘노후생활의 공포’다. 이러한 불안의 일상화는 50대 다수로 하여금 ‘산업화세력 대 민주화세력’이라는 정치적 구도보다는 어느 세력이 더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했는가의 정책적 구도를 중시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내가 50대를 주목하는 까닭은 이 세대가 갖는 역할 때문이다. 그들의 역사적 경험과 개인적 생애를 돌아볼 때 50대는 6070세대와 3040세대 사이의 ‘낀 세대’이지만, 동시에 두 세대를 이을 수 있는 ‘가교 세대’이기도 하다. 바로 이런 가교 세대로서의 특징은 이 세대로 하여금 산업화세대와 민주화세대 간의 갈등을 적극적으로 중재할 수 있는 역할을 기대하게 한다.
정보화 ‘트라우마세대’에 주목을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우리 사회에서는 산업화세대와 민주화세대를 이은 새로운 세대의 등장이 진행돼 왔다. 정보화세대라 명명할 수 있는 이 세대가 갖는 특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세계화의 충격과 정보사회의 도래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세대라는 점이다. 이들은 대체로 이념보다는 탈이념을 선호하고, 이성 못지않게 욕망을 중시하며, 무엇보다 정보혁명에 익숙한 세대다.
다른 하나는 1997년 외환위기로부터 직접적 영향을 받음으로써 물질적 가치와 탈물질적(post-materialist) 가치가 혼재하는 세대라는 점이다. 어느 나라이건 거시적으로 보면 물질적 가치에서 탈물질적 가치로의 변동이 이뤄져 왔고, 우리 사회의 경우 1990년대 초반에 등장한 ‘신세대’는 탈물질적 가치의 기수라 할만 했다.
하지만 자아실현을 중시하는 신세대의 탈물질적 가치는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좌절됐다. 외환위기 이후 사회 양극화가 강화되고, 특히 청년실업이 본격화되면서 정보화세대는 경제적 상황으로부터 영향 받은 물질적 가치와 정보사회의 도래로부터 영향 받은 탈물질적 가치를 동시에 갖고 있었다.
정보화세대는, 이 시대를 규정짓는 ‘정보화’라는 말과는 달리, 개인적 생애에서 그렇게 행복한 세대는 아니다. 이들을 나는 ‘트라우마세대’라고 명명한 적이 있는데, 트라우마세대란 초·중·고교 시절에 외환위기를 맞아 부모의 실직 또는 부도를 직·간접으로 경험하고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로 인해 가중된 청년실업에 다시 대면해 있는 세대를 지칭한다. 이들을 트라우마세대라고 명명한 이유는 외환위기로 인한 개인적 경험의 기억이 이후 이들의 의식과 행동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는 데 있다.
정보화세대인 트라우마세대에게는 민주화세대의 양대 축을 이뤄온 386세대, 신세대와 비교할 때 특히 두 가지 점이 주목된다. 첫째, 386세대의 상징이 민주화와 학생운동에, 신세대의 상징이 ‘네 멋대로 하라’의 자유주의적 문화에 있었다면, 트라우마세대의 상징은 세계화가 강제하는 무한경쟁과 청년실업에서 찾을 수 있다. 트라우마세대의 등장은 우리 사회가 민주화 시대를 넘어서 이제 정보시대와 세계화시대의 한가운데 놓여 있음을 증거한다.
둘째, 세대 내 양극화도 주목을 요하는 현상이다. 일반적으로 세대라 하면 사회·문화적 동질성이 강조되지만, 정보화세대의 경우 세대 내 동질성과 이질성이 공존한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물질적 가치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진 것이 동질성이라면, 세계화가 강제하는 무한경쟁은 이 세대를 승자 그룹과 패자 그룹으로 분화시키는 양극화를 낳아 오면서 세대 내 이질성을 강화시켜 온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세대 내 분화 및 양극화는 현실 속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유창한 영어, 경영 컨설턴트, 상층 문화 등이 승자 그룹의 아이콘들이라면, 어눌한 영어, 비정규직 노동자, B급 문화 등은 패자 그룹의 아이콘들이다. 앞선 산업화세대, 민주화세대와 달리 세대 내 동질성과 이질성이 뚜렷한 정보화세대는 탈이념적 성격이 두드러져 다른 세대와의 정치적 긴장이 그렇게 높지 않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해와 공감의 세대공존을 향하여
어느 나라든 세대 간의 긴장과 갈등이 존재한다. 그 까닭은 세대에 따라 가치와 이익이 다르고, 또 일정한 연령 차이에 따른 사고와 정서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세대긴장과 세대갈등을 해소하는 것은 어느 사회이건 매우 중요한 사회·문화적 과제다. 그렇다면 이런 세대갈등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계층갈등이나 지역갈등과 비교해서 세대갈등이 갖는 특징은 그 갈등의 양상이 예각적이지 않다는 데 있다. 비록 서로 다른 세대라 하더라도 모두 가족의 구성원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경제적 이익의 충돌이 격렬한 형태로 나타나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연령에 따른 가치의 차이가 가져오는 긴장과 충돌은 매우 분명한 형태로 존재하며, 이는 결국 세대간 소통을 가로막아 세대단절을 강화시켜왔다.
세대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러한 특성을 주목해야 한다. 어느 세대건 자신에게 소중한 가치가 존재하는 법이다. 산업화가 가져온 물질적 풍요, 민주화가 제공한 인권의 신장, 정보사회가 요구하는 자유로운 세계시민 등은 모두 소중한 가치들이다. 이러한 가치들을 다원적 관점에서 승인하고 수용하는 것이 바로 세대갈등 해소와 세대공존의 출발점을 이룬다.
어떤 세대든 그늘이 존재한다, 특히 정보화세대는 앞선 세대들이 경험하지 못한 청년실업이라는 현실의 벽 앞에서 좌절을 경험하는 세대다. 서로 다른 세대가 경험한 시대와 그들이 놓인 상황을 이해하고 공감하게 된다면 세대간 소통은 활발해지고, 이는 결과적으로 우리 사회에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로서의 활력을 불어넣어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글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연세대 사회학과 및 동 대학원 졸, 독일 빌레펠트대 사회학박사, 미국 UCLA 방문연구원 역임.
현재 한국정치사회학회 부회장, 좋은정책포럼 공동대표.
주요 저서 : , 등
정진홍(鄭鎭弘·78) 아산나눔재단 이사장은 중·고교에 다닐 때 어른이 되기 전에 죽어야겠다는 생각만 했고, 죽기 전에 읽고 싶은 책이나 실컷 읽고 싶어서 대학에 들어간 사람이다. 그렇게 어려서부터 죽음을 살아온 사람이 어느덧 78세. 지금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늙음의 의미, 삶과 죽음의 철학을 듣기 위해 아산나눔재단(서울 종로구 계동)을 찾았다. 편의상 대답은 평어체로 기술한다.
글 임철순 미래설계연구원장 fusedtree@etoday.co.kr
녹취·정리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사진 노진환 기자 myfixer@etoday.co.kr
언제 처음 늙었다고 느끼셨나요?
정년을 맞았을 때였다. 어느 날 문득 ‘관악산(서울대)에서 나보다 나이 먹은 사람이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년이라는 게 없었다면 나이를 의식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2003년에 은퇴를 하기 전부터 조금씩 달라지긴 했다. 예전 제자들을 만나면 내가 대부분 C D F학점을 줬다고 한다. 강의 내용을 그대로 쓴 답안지는 게을러 보여서, 좀 튀면 건방져 보여서 F학점을 주곤 했다.
지금은 이런 저런 이유로 A학점을 주려고 한다. 전에는 보지 못했던 다른 면, 장점이 보이기 시작하고부터다. ‘나도 모르게 이렇게 달라졌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 변화의 계기가 정년이더라.
지금 행복하십니까?
행복하다는 표현보다는 굉장히 고맙다는 게 더 맞겠다. 참 많은 사람들에게 고맙다. 살다보니 싫은 사람, 안 만났더라면 하는 사람도 있고 그런 사람들과 안 만날 수 없어 힘든 적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 모든 게 다 고맙다. ‘내가 참 좋은 사람들 속에서 살았구나’ 하고 절절하게 느끼게 된다. 동기, 선·후배, 가족 다 고맙게만 느껴진다. 나를 도와준 사람도 많았고. 그런 이들에게 고마운 감정을 갖는 것, 그것이 행복이라면 행복 아닐까.
모든 게 다 고맙다니 그러면 죽음도 고맙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건가요?
어느 때는 죽음이 기다려질 때가 있다. 굉장히 편하게, 아주 편하게 쉴 수 있을 것 같다. 죽음이 두렵다는 생각은 거의 없다. 그보다는 ‘남아 있는 이들에게 괴로움은 주고 가지 말아야 하는데’라는 염려 정도는 든다. 죽음은 굉장히 그윽한 휴식, 쉼이다. 그래서 기다려진다.
사후에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으신지.
나는 그런 의견과는 조금 다르다. 남겨주고 싶은 것도 없을 뿐더러, 무언가가 남지 않았으면 한다. 이제까지 끼적거린 글이나 남긴 것들도 함께 가면 좋겠다. 내가 살다 간 자리가 텅 비었으면 좋겠고 쉽게 잊히면 좋겠다. 아버지의 부자연스러운 죽음(판사였던 그의 선친은 6·25 와중에 숨졌다.), 자식이 시신도 못 찾은 일, 그런 경험 때문인지 아무것도 안 남기고 가야 자식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편하지 않을까 싶다. 바람대로 잘 될 것 같다.
나이 먹으니 친구들이 자꾸 간다. 죽음은 친구만 데려가는 게 아니라 내 삶의 일부도 함께 떼어간다. 사람이라는 게 기억에서 잊히면 없어지기 마련인데 뭔가 남기려 하거나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까를 생각하는 건 욕심인 듯하다. 그런 생각이 지금의 삶을 더 추스르고 아름답게 할 수 있는 힘이 되긴 할 것이다. 근데 난 그런 생각이 별로 없다. 정말 텅 비었으면 좋겠다. 의식이 있는 죽음을 맞이하는 한 두루 고맙다는 말을 남기는 게 전부가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더욱더 노년의 삶을 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언가를 어떻게 해야겠다, 뭐가 되겠다는 것도 늙기 전의 생각이다. 나는 한강 근처에서 20년 넘게 살았다. 처음엔 한강대교에서 잠수교까지 뛰어 갔다 오곤 했다. 몇 년 지나니 나도 모르게 뛰는 게 안 되더라. 그 뒤로는 건강을 위해 속보를 했는데 언젠가부터 속보도 안 되더라. 지금은 그저 어슬렁거린다. 뛸 적에는 잠수교만 보이고 돌아서면 한강대교만 보이더니 걷기 시작하자 가로수도 보이고 가로등도 보이고 빌딩도 보였다. 이제는 어슬렁거리니 바람소리도 들리고 풀잎소리도 들린다. ‘늙음’이라는 일련의 과정이 내게 다른 세계를 끊임없이 보여주고 있다. 뛰는 것을 잃은 게 아니라 속보를 얻었고, 속보를 잃은 게 아니라 어슬렁거림을 얻었다.
젊었을 적에 분별과 판단으로 얻은 결실을 늙어서는 베풀고 살았으면 좋겠다. 죽음이 있다는 걸 알고 살되 죽음 자리에서 삶을 바라봐야지 삶의 자리에서 죽음을 바라보면 절망스럽다. 죽음 자리에서 삶을 바라보면 어떻게 내 삶을 완성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요즘 젊은이들을 보면 섭섭하거나 기분이 상하거나 그러지 않나요?
고까운 일이 왜 없겠나. 그러나 억지로 생각을 달리할 필요가 있다. 안 좋은 것만 보면 자꾸 그런 것만 보인다. 좋은 것만 보도록 노력해야 한다. 나는 요즘 젊은이들이 참 괜찮다고 생각한다. 정말 우리보다는 100배 낫다. 한 방송사가 그동안 키워 주셔서 감사하다는 메시지를 부모에게 보내는 프로그램을 만든다는 말을 듣고, 왜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잘 자라줘서 참 고맙다”고 하지 못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시대가 그래서 돼지같이 먹고 사는 데만 급급했는데 너희들은 음악도 하고 미술도 하고 배낭 메고 세계여행도 다니며 참 잘 자라줬다고.
서울대에는 자하연이라는 연못이 있다. 1980년대 초만 해도 교수가 지나가면 붙어 앉아 있던 남녀가 떨어지거나 일어섰는데 요즘은 허리를 감싸고 딱 붙어 앉은 채 인사를 한다. 나는 그 모습이 예쁘다. ‘녀석들아 오래오래 행복하거라’ 하고 속으로 기도를 하게 된다. 근데 누군가는 버르장머리 없다고 험한 말을 한다. 젊은이들이 그렇게 행복한 걸 축복을 못해줄 망정 왜 욕을 하는가. 우리 때는 뭐 잘했나?
지금 시대의 노인들은 지혜가 부족해 보이고, 있다 해도 발휘를 못하는 것 같습니다. 노년의 지혜가 다 어디로 간 것일까요?
시대마다 트라우마(정신적 외상)가 있다. 우리의 트라우마는 다음세대의 트라우마와 다르고 그다음 세대와도 다르다. 우리 선배들은 징병, 일제시대 이야기를 주로 하고 우린 6·25 이야기를 한다. 한 제자가 공식적인 자리에서 5·18 광주 민주화항쟁을 기억하지 않는 이들은 한국인이 아니라며 목소리를 높이기에 너의 트라우마를 왜 남에게 강요하느냐고 혼낸 적이 있다. 그러한 한계가 지혜를 막는 벽이 된다.
사람들은 자기 트라우마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데 현 시대는 과거의 시간대보다 변화가 빠르고 시간차도 점점 짧아진다. 기존 세대가 변화를 체감하기 전에 이미 시대는 변해 버린다. 기존 세대가 지혜라고 알고 발언하면 그 다음세대가 적합성을 못 느낀다. 적합성이 없으면 진리가 아니다. 젊은 세대에게 노인을 배우라고 하기 전에 노인들이 그들의 언어를 익혀야 한다. 경험과 지혜를 그들의 언어로 표현해야 젊은이들도 이해할 수 있다. 내 언어로 이야기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지혜 있는 어른이 없어졌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다.
젊은이들과는 어떻게 교류하고 있습니까?
울산대에서 주 1회 ‘종교문화의 이해’ 강의를 하는데, 아이들에게 “행복하니?”라는 질문은 어색해했다. 대신 “재미 있니?”라고 하면 이해한다. 요즘 아이들은 못 먹어서가 아니라 더 맛있는 것을 못 먹어서 불행하다. 사랑을 못해서가 아니라 더 진하게 사랑을 하지 못하는 게 문제다. 이 아이들에겐 그런 게 절박한 문제라는 걸 이해해야 한다. 거기서부터 시작이다. “예전엔 굶어죽고 했는데 지금 그게 문제야?”라고 말하면 안 된다.
통계적으로 보면 우리나라 젊은이 수보다 직장이 더 많다. 실업률이 높다지만 취직할 곳이 없는 게 아니라 더 좋은 직장을 가려 해서 문제인 거다. 그런 것도 우리가 젊은이들의 수준에서 함께 고민해야 하는데, 그런 어른은 거의 없다. 그러니 들을 수 있는 이야기를 해주는 지혜로운 어른이 없다고 하는 거다.
강의방식도 많이 달라졌을 것 같군요.
나는 강의보다는 아이들과 이야기를 하려 한다. 수강생이 75명이나 돼 대화하기가 참 어렵다. 질문을 던지고 원하는 사람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처음엔 눈치를 보던 학생들이 지금은 내가 뭘 물어 볼지도 모르는데 이야기하겠다고 나선다. 어른들이 3분을 못 기다려서 그렇지 그것만 기다리면 아이들은 대화를 한다.
나는 한 학기에 한 번씩 학생들에게 5천원 안팎의 비용을 들여 점심을 준비해 오도록 한다. 조교가 그 음식에 번호를 매긴 다음 제비뽑기를 해서 먹게 한다. ‘점심 바꿔 먹기’는 남을 위해 점심을 마련하는 경험을 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자신을 바라보게 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대충 햄버거나 샌드위치를 사 오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집에서 정성껏 준비해 오는 아이들도 있다. 어떤 아이들은 편지도 쓴다. 나는 이렇게 했는데 누구는 정성을 다했구나, 누구는 성의가 없구나, 말하지 않아도 다 알게 된다.
중간고사 답안지도 임의로 나눠주어 논평을 하게 한다. 그런 다음 이름을 불러 답안지를 주고받고 얼굴을 보게 한다. 다른 학생들의 답안지를 보면 ‘이렇게 잘 하는 아이가 있구나. 그럼 나는?’하고 자신에 대해 알게 된다.
내가 대학 다닐 때 철학교수는 소크라테스의 말이라며 “너 자신을 알라”고 강조했다. 그거 참 마땅찮은 거다. 내가 나 자신을 몰라 죽겠는 아이들에게 너 자신을 알라니. 그보다는 함께 고민해보자 했으면 어땠을까.
그러나 대부분의 노인들은 젊은이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컴퓨터도 좀 하고, 걸 그룹 춤추는 것도 즐길 줄 알고, 랩도 들어야 한다. 싫으면 어쩔 수 없지만 적어도 젊은이들에게 욕은 하지 말아야 한다. 조언을 할 때에도 ‘이래라 저래라’가 아니라 난 이렇게 살아왔노라는 고백의 언어에서 끝나야 한다. 결국 고민하고 결정하는 것은 그들 자신이다. “난 이렇게 살았으니 넌 이렇게 살아라” 이건 아니다. 장차 내가 꿈도 꾸지 못할 세상을 살아갈 아이들에게 내가 무슨 당위를 논할 수 있겠는가. 교육이란, 가르침이란 자신의 삶과 경험을 고백하는 정도이지 그것을 정답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폭력’과 마찬가지다.
어려웠던 성장기를 돌아보면 어떤 기분이신지.
어머니는 많이 배우신 분이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집이 어려워졌을 때 친지들이 많이 도와주셨는데, 어머니는 “남의 도움을 받으면 갚아야 한다. 그러나 집안의 도움을 받으면 갚지 못한다. 니들은 그렇게 자라면 안 된다.”는 신념으로 집안의 도움을 의도적으로 거부하셨다. 그래서 7남매의 맏이인 나는 고아원에서 지내게 됐다. 만 17세 이상은 고아원에서 지원하지 않는다. 중학교 때까지는 고아원에서, 그 이후에는 모자원에서 지냈다. 대학 때는 서울에 계신 당숙의 도움을 받았다. 난 6·25부터 대학 졸업 때까지 홈(Home)이 없었다. 해가 지면 집에 가야 할 것 같은데 갈 집이 없었다. 지금도 석양이 지고 어두워지면 괜히 초조해진다. 집에 가 드러누워 있으면서도 집에 가야 할 것만 같다. 그게 치료받아야 할 트라우마인데, 죽으면 집에 가는 것처럼 편안해지지 않을까 싶다.
정진홍 아산나눔재단 이사장
1937년 충남 공주 출생. 공주중 대전고 서울대 종교학과 졸. 서울대 대학원 석사,
미 유나이티드 신학대학원 석사,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원 박사.
서울대 한림대 이화여대 교수 역임. 현재 아산나눔재단 이사장, 서울대 명예교수,
울산대 철학과 석좌교수,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이사장.
‘58년 개띠’란 말은 아주 오래전부터 유행처럼 쓰였던 말이다. 같은 개띠인 1982년생은 ‘82년생’이라고 할 뿐 ‘개띠’를 강조한 적은 없다. 그러나 1958년생은 다르다. 늘 개띠가 따라붙는다. 왜 유독 58년생의 띠만 유별나게 불렀을까. 1958년생은 어디서나 튄다. 숫자가 많고 삶의 스펙트럼도 워낙 넓다 보니, 어디에 가든 한두 명씩 만나게 되는 게 바로 58년 개띠다. 그래서 우연히 만나서 나이를 물어보면 ‘저도 58년 개띠예요’라고 할 만큼 흔하게 볼 수 있는 세대들끼리의 진한 소속감을 느꼈기 때문 아닐까.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지분을 가진 세대들로서, 세상을 향해 짖는 그들이 가진 감성의 이유를 들여다본다.
어떻게 그들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중간’이 되었는가
“어디를 가나 사람에 치이는 일은 우리들이 태어날 때부터의 숙명이었다”
1958년 생 동갑내기 4인의 삶의 질곡을 그린 은희경의 장편소설 127페이지에 등장하는 이 대사는 58년 개띠가 겪어야 할 이야기들을 압축하여 보여주고 있다. 사람에 치여 살아야 하는 삶, 그것은 그들이 대학교에 입학했던 1977년도 대입 시험이 인구학자들의 예견대로 광복 이후 최다 학생들이 응시해 역대 최고의 경쟁률을 나타냈던 지표로도 증명된다.
모든 제도의 테스트는 58년 개띠부터였다는 말이 있다. 하라면 해야 했다. 콩나물 교실, 본고사가 면제된 첫 ‘뺑뺑이’ 세대, 고교평준화제도, 경쟁자로 가득했던 77학번, 국민교육헌장, 10월 유신, 긴급조치, 교련실기대회, 올드팝, 이소룡, 임예진 등이 58년 개띠들이 겪은 시대를 읽는 문화 코드다.
학교도 회사도 최고 경쟁률
58년들은 본성이 모험보다는 부지런히 일해서 먹고 사는 기질을 갖고 있다. 그래서 근면성과 과정을 중요시하므로 원칙주의자라는 소리는 듣지만, 주변의 신뢰도가 높아 두둑한 성과를 이루게 됐다.
혹자들은 58년을 너무 앞서가지도 보수적이지도 않은 세대라고 했다.
사이먼앤가펑클, 양희은, 김민기의 노래를 듣고 공부하며 10대 시절을 보낸 이들은 자연스럽게 과거 세대의 문화를 유지하는 한편, 과거에 대한 반항으로서 정착된 포크와 블루스 문화를 습득할 수 있었다. 가장 감수성이 강했을 때에 이미 양편의 문화를 접하며 이중적 경험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20대로 들어서면서 더욱 격렬해진 민주화의 열풍은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죽음과 전두환 전 대통령의 취임을 통해 극단적인 양편의 교차를 보여주게 된다. 잠시동안 있었던 민주화에 대한 희망은 금세 꺾이고 20대를 맞이한 58년 개띠들을 벼락처럼 내리친 건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비극이었다. 그 와중에 어떤 이들은 민주화 투사를 선택하여 화염병을 던지고 어떤 이들은 진압군이 되어 거리에서 친구의 머리에 곤봉을 내리쳐야 했다. 58년 개띠의 정치적 허무감, 혹은 조심스러운 중도로서의 포지션은 이때 결정적으로 마련되지 않았을까.
제2의 인생을 마주하게 된 가장 커다란 세력
민주화로 인한 경제 호황이 시작된 90년대는 이들이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던 시기이기도 했다. 수도권 개발, 신도시들이 마련되기 시작했고, 58년 개띠들은 40대로 들어가면서 완연히 사회의 중심이 됐다. 그러나 그들이 중역으로 점프하는 시점에 IMF체제가 닥쳐왔다. 그들의 코앞에 놓여 있던 평생직장의 꿈은 허무하게 무너졌다. 중산층의 중심이 됐어야 할 58년 개띠들은 중산층의 씨를 말리는 가혹한 구조조정 속에서 가족과 함께 죽음과 파멸에몰리거나 가족을 위해 치열하게 살아남아야 했다.
전병헌, 추미애, 정병국, 전하진, 김부겸, 심재철, 이정현, 한선교 등 국회의원들이 있고 주병진, 임백천, 신문선 등 방송인과 홍서범, 남경읍, 장미희, 이동준, 강남길 등 연예인이 있다. 미래에셋 그룹 박현주 회장, 표현명 KT렌탈 사장, 정미홍 J&A 대표이사, 강대석 신한금융투자 사장, 신제윤 금융위원회 위원장, 김주원 한국투자금융지주 사장, 김석중 현대인베스트먼트자산운용 사장, 하태형 현대경제연구원 원장, 김기남 삼성전자 DS부문 반도체총괄 사장 등 기업인이 많은 편이다.
지독한 혼돈의 시대를 거쳐 2015년, 어느덧 58년 개띠들은 사회적 은퇴, 그리고 제2의 인생을 바라볼 시점이 됐다. 살아오는 동안 겪어야 했던 온갖 변화는 그들에게 다양성에 대한 이해를 체화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여전히 많은 인구수는 그들에게 우리나라에서 흔치않은 ‘중도세력’으로서의 분명한 성격을 부여하게 만들었다. 마침내 제2의 인생 앞에 선 이들이 펼쳐 보일 행복한 세상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지난 4월부터 6월까지 진행됐던 지식협동조합 좋은나라의 ‘최고위과정(KALP : KCGG Advanced Leadership Program) : 좋은 몸, 좋은 마음, 좋은 공동체’ 제1기 프로그램의 현장. 강의를 경청하는 30여 명의 수강생들은 자유롭게 의문을 제기하고 강사나 다른 수강생이 이에 대답하거나 새로운 의견을 덧붙이곤 했다. 감성으로 이뤄지는 강의는 딱히 마치는 시간에 구애받지도 않았다. 교육이 끝나면 즐거운 호프 한 잔과 격의 없는 토론 등 애프터가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서로 공감하고 친구가 되어 공부를 한다는 장점이 최고위과정의 특징이라는 걸 증명해주는 장면들이었다.
인생을 관통하는 지혜의 정수 ‘지식협동조합 좋은나라’ 최고위 과정
지식협동조합 좋은나라에서 연 ‘최고위과정’의 1기에서는 조기숙 이화여대 무용학과 교수가 몸공부를 맡고,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 김정섭 성신여대 교수, 신학림 미디어오늘 대표, 최갑수 서울대 서양학과 교수가 마음공부를 맡았으며 홍경준 성균관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김용진 서강대 경영학과 교수, 최영찬 서울대 농업생명학과 교수, 손열 연세대 국제대학원 교수, 유종일 원장이 공동체공부를 맡았다. 그리고 신동원 KAIST 박사와 유홍준 전 문화재정창이 특강을 진행했다. 모두가 각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철저한 전문가들로 구성됐다는 것이 특징.
몸공부, 마음공부, 공동체공부…리더를 위한 고품격 학습의 장
한 명 부르기도 힘든 이와 같은 전문가 인사들을 어떻게 모을 수 있었을까? 그것은 최고위과정을 진행하는 지식협동조합 좋은나라 자체가 가진 전문가적 강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지식협동조합 좋은나라는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 환경 보호와 문화 발전, 평화와 협력 증진을 위한 정책 연구를 목표로 출발한 협동조합이다.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운 관점에서 사회통합을 추구하는 정책 연구기관을 표방하는 지식협동조합 좋은나라는 경제, 과학기술, 교육, 국토환경, 정치행정, 외교통일 등 총 14개 분과로 구성된다. 유종일 한국개발연구원(KDI) 교수가 초대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각계 전문가 100여 명이 조합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상황.
정책 의제를 개발하고 제시하는 사업에 들어가는 적지 않은 시간과 비용을 전문가들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협동조합 형태로 해결한다는 구조를 추구하는 지식협동조합 좋은나라는 그러한 목표를 위해 대부분의 조합원이 대학 및 연구기관의 정책 관련 연구자로 이뤄져 있다. 기존 조합원의 추천을 받아 조합원이 가입되기에 연구 수준을 보장한다는 게 가장 큰 장점. 유종일 원장은 “협동조합이야말로 국가와 시장의 한계를 극복하고 단점을 보완하는 새로운 대안이란 판단이 섰으며 지식협동조합 좋은나라는 ‘지식과 문화의 생산과 공유 및 확산에 참여하는 시민들의 협동조합’으로, 공동체를 위한 종합적인 싱크탱크 기능과 다양한 지식 관련 경제 사업을 수행할 것”이라고 그 취지를 소개했다.
최진석, 허은아, 조영남, 도현명 등 각 분야 최고 전문가들 초빙
지식협동조합 좋은나라는 성공적인 1기 프로그램의 마무리에 힘입어 2기 프로그램을 9월 17일부터 12월 3일까지 매주 수요일 총 12주 동안 진행한다. CEO들이 쉽게 접하기 어려운 정치, 경제, 문화, 예술, 군, 관, 법조계 등의 전문지식을 부담스럽지 않게 접하는 것은 물론 각 분야의 전문가와 기업인들이 각자의 전문 분야를 공유하고, 융합한 지식 정보를 체계적으로 나누는 자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를 위해 강사진 역시 리더 경험을 가진 각 분야의 최고 권위자 위주로 적절히 배분하여 구성했다.
이번 2기의 몸공부 부분에는 조기숙 이화여대 교수, 홍이승권 가톨릭의대 교수가 직접 몸 건강의 개선법을 알려준다. 마음공부 부분은 노자에 대한 신선한 해석으로 유명한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교수와 공자를 통한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북촌학당의 주대환 이사장, 예술과 인문학의 접점을 끊임없이 연구중인 유경희 미술평론가, 한학자인 학성강학연구회의 김종회 이사장이 맡아서 유교에서부터 풍수지리에까지 이르는 다양한 인문학의 영역을 탐색한다.
은밀하고 깊게 격이 다른 연수 선보인다
공동체공부 부분에서는 브랜드 이미지 전문가인 허은아 한국이미지전략연구소장, 김용진 서강대 글로벌서비스경영학과 교수, 공유가치 창출과 사회적 혁신 컨설팅 분야 전문가인 도현명 임팩트스퀘어 대표, 박윤애 서울시 자원봉사협회 센터장이 나와서 공동체 중심으로 변화중인 비즈니스 환경에서의 해법을 제시할 예정이다. 특강 강사로는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와 가수 조영남이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영역에 대한 시선을 엮어준다. 또한 해외 워크숍도 준비되어 일본, 중국 중 하나를 택하여 2박3일 동안 새로운 환경에서의 지식을 체득한다. 교육비 800만 원이라는 고가가 아깝지 않을 정도의 커리큘럼으로 프리미엄 연수의 가치를 지향하고자 하는 구성이 돋보인다.
비싼 돈만 내고 실속은 없는 연수 과정들은 이미 널려 있다. 빠르게 변하는 시장과 날로 치열해지는 경쟁에서 기업인과 개인들이 직면한 여러 문제점들을 분야 전문가들 간의 컨버전스 체험을 통해 실질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받아, 최소한 한가지 이상의 경영 난제들을 해결하게 만든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최고위과정 2기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87년, 한국 정치사를 뒤집어 놓는 6월 항쟁이 있었다. 당시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된 것은 꾸준히 활동을 지속하던 운동권 세력에 동조한 소위 넥타이 부대, 즉 20대~30대 사무직 봉급생활자의 참여였다. 그로부터 27년이 흘렀다. 당시 운동권, 그리고 넥타이부대였었던 2030세대는 2014년 현재 5060세대라고 불리는 기성세대 층이 됐고, 그들의 아들딸은 2030세대가 되어 사회의 한 축을 이루게 됐다. 거대한 시대의 사이클이 한 번 회전한 시점인 것이다.
민주화를 이뤄내고 그 달콤한 결과를 누렸던 현재의 5060세대. 그리고 5060세대가 만들어낸 새로운 토양에서 자라난 현재의 2030세대. 뫼비우스의 띠 같은 관계로 이어져 있는 두 세대가 갖고 있는 서로에 대한 생각은 현재 세대갈등의 진실을 드러내는 단초가 될 수 있다.
시니어 전문 미디어 ‘브라보 마이 라이프’가 오프라인 창간을 기념해 지난 5월 28~30일 2030세대 250명과 5060세대 250명 등 총 500명을 대상으로 ‘세대간 존경에 대한 인식설문조사’를 한 결과, ‘세대간 갈등이 어느정도냐’는 질문에 2030세대(64.3%), 5060세대(72.1%) 모두 심각한 수준이라고 답했다.
이미 부모 세대와 자식 세대의 갈등은 무시할 수가 없는 현실이며 이는 디바이스와 SNS의 발달에 따라 고도의 커뮤니티화가 진행됨에 따라 더욱 첨예화될 가능성이 있다. 각기 서로의 영역에 고립된 세대들 간의 전쟁이 더욱 확대될 수도 있다는 의미다.
2030세대와 5060세대 사이의 온도차는 ‘세대 간 존중’에 대한 조사 결과에서도 나온다. 2030세대에서는 ‘존중한다’가 60.5%, 5060세대는 ‘존중하지 않는다’가 57.6%가 나왔다.
2030세대 10명중 6명만이 5060세대를 존중한다는 셈이다. 일정 수준 이상으로 5060세대에 대한 존중이 이뤄지고 있다고 보는 반면, 5060세대는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고 있는 것이다. 서로간 간극이 사실로 확인되고 있는 셈이다.
5060세대, 한국 사회를 발전시킨 세대이기는 한가?
5060세대의 긍정적 역할에 대해선 2030세대에서도 인정하고 있었다. ‘5060세대가 한국 사회를 발전시키고 이끌어 온 세대인가’라는 설문에서 2030세대는 81.4%가 ‘그렇다’를 택함으로써 아버지 세대의 긍정적 역할에 대해 인정했다. 또 그 ‘역할’은 여전히 지속중인 부분이기도 하다.
2030세대와 5060세대 자신들 모두 5060세대가 각각 78.1%, 73.1%로 ‘은퇴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세대’라는 것에 동의했다. ‘5060세대가 역사적‧사회적 역할이 주어지면 감수할 세대인가’라는 설문에 대해서도 압도적인 ‘그렇다’가 나왔다. 이 부분에서 5060세대는 90.1%가 ‘그렇다’를 선택하여 5060세대의 근본에는 사회적 역할에 대한 강렬한 열망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2030세대와 5060세대가 함께한 위 결과를 종합해보자. 5060세대는 한국사회를 발전시키고 이끌어 왔으며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갖고 있다. 5060세대 자신들 또한 자존감이 높고 사회적으로 마땅히 해야 할 부분이 있으면 하겠다는 열망이 있다. 그런데 지금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세대갈등의 양상들은 대체 무엇 때문에 발생하고 있는 걸까?
스스로 고립되는 세대가 되지 말아야
조사 결과, 5060세대들이 성공을 쫓고 성공을 많이 거두기도 한 ‘성공세대’라는 점에 대해선 2030세대(75.3%)뿐만 아니라 5060세대(67.4%) 자신들도 대체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그런데 소위 산업화 세대의 성공과 비견될 법한 민주화 세대로서의 5060세대의 성공 이력이 갈등을 자극하는 소재가 되고 있다. 예를 들어 일베와 같은 극우 사이트에서 5060세대의 성공은 민주화에 의해 상대적으로 소외된 산업화 세대와 민주화의 혜택이 바닥난 상태에서 살아가게 됐다는 현재의 2030세대를 한편으로 묶어주는 반감으로서 작용하기도 한다.
이를 부채질하는 것은 5060세대 자신들의 경향이다. ‘5060세대는 부모를 책임져야 하지만, 젊은 세대에게는 기대를 하지 않는 샌드위치 세대인가’라는 설문에 압도적으로 ‘그렇다’가 도출된 걸 보면 또 한 번 증명된다. 특히 이 설문에서는 5060세대 자신들이 83.9%의 ‘그렇다’로 2030세대의 69.7%보다 앞서는 수치를 보여줬다. 이는 노동의 부담감에서 탈출하지 못하는 5060세대의 자괴감의 반영이기도 하며, 동시에 자신의 세대를 다른 세대로부터 구분하고 스스로 고립시키는 감정적 동인을 보여주고 있다.
5060세대의 사회적 역할, 이해는 하나 인정 못 받아
세월호 비극은 국가의 존립 근거를 다시 묻게끔 만들었다. ‘죄 없는 사람을 죽이는 잘못 만들어진 시스템’을 표면 위로 드러냈기 때문이다. 과거 삼풍백화점 붕괴, 성수대교 사고 등의 대형 사고들은 부실한 사회를 만든 당시의 기존 세대, 5060세대에게 비난의 화살이 쏟아졌다. 그리고 지금의 젊은 세대들은 책임과 물음을 5060세대에게 묻고 있다. 현 시점에서 5060세대의 역할이 중요해질 수밖에 없는 사회적 이유다.
5060세대는 심지어 10대에게서까지도 일어나고 있는 지금 대한민국에서의 세대 간 간극을 봉합하는 사회적 역할을 할 필요가 있다. 다행히 조사에서 알 수 있듯이, 5060세대는 존경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세대로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인정에 비해 존중이 이뤄지지 않는 것은 바로 소통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조사를 통해 희망도 발견할 수 있었다. 2030세대에게 5060세대는 ‘노인 세대보다는 젊은 세대와 소통을 더 잘할 수 있는 세대’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53.8%), 5060세대 자신들 또한 소통이 가능하리라고 믿고 있었다(73.9%). 소통이 가능하려면 스스로 고립되어서는 안 된다. 지금의 5060세대에게 보다 깊이 있고 적극적인 역할을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이유다.
따스한 봄기운이 완연한 지금, 남도 쪽은 벌써 여기저기 봄 꽃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청마년 시작이 엊그제인데 벌써 3월이다. 식민지배의 과거를 가지고 있는 우리에게 3월은 특별하다. 최근 일본은 과거사에 대한 반성은커녕 군국주의와 우경화가 더욱 심해지고 있다. 또한 역사를 세탁하며 미화하기를 주저하지 않고 있어 봄의 불청객 미세먼지처럼 우리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있다.
삼일절을 앞둔 22일 근현대 우리민족의 수난과 고통으로 상징되고 있는 서대문 형무소를 찾았다. 식민지지배와 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숨결이 살아 흐르는 서대문형무소는 1908년 10월 21일 을사조약이 체결된 이후 일본이 국권 침탈을 시작하면서 일제가 만든 시설로 ‘경성감옥’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졌다.
1923년 5월 5일 서대문형무소로 변경된 후 1945년 해방까지 국권을 되찾고자 노력한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수감되고, 처형되었다. 이곳이 삼일절을 맞아 더욱 의미있게 다가오는 이유는 삼일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을 포함한 3,000명의 애국 시민과 학생들이 한꺼번에 이곳에 수용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유관순열사는 지하 여자 독방에서 악형에 시달린 끝에 순국했다. 해방 이후에는, 1987년까지 민주화운동 관련 인사들이 수감된 서울구치소로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과 아픔을 고스란히 이어 받아, 역설적으로 ‘독립’과 ‘민주’정신을 가장 잘 상징하고 있는 장소이다.
서대문형무소는 20여개의 건물과 구조물로 이루어져 있다. 빨간색 벽돌 건물과 담으로 이루어진 건물로 100여년도 넘은 건물들이지만 오래된 느낌은 들지 않았다. 생각보다 규모가 상당히 넓었고 억울한 독립운동가들의 한이 서려 있어서 인지 다소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다.
형무소 입구에 들어서면 전시관 (보안과청사)과 중앙사가 나타난다. 서대문 형무소의 전시관 1층은 형무소의 정보검색과 형무소의 역사를 볼 수 있다. 전시관 2층은 민족 저항실로 독립운동가들의 수감자료와 함께 사형장 지하 시신 수습실이 전시되어 있다.
사형장 한 가운데 전시된 사형수들의 사진중 유관순 열사의 사진은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지하 전시실은 일제장점기 보안과청사의 지하 취조실로 생존 독립가의 육성 증언을 통해 폭압적인 식민지 통치의 실상을 보고 경험 할 수 있다.
옥사는 11옥사와 12옥사 그리고 여옥사가 각각의 건물로 되어 있다. 11옥사와 12옥사는 독립운동가들과 민주화운동가들이 수감되었던 1920년대 감옥건물 원형이다. 11옥사는 관람객들이 직접 감방 안에 들어가 수감 체험을 할 수 있다. 여 옥사는 유관순열사를 비롯 여성독립운동가들을 수감한 곳으로 1979년 철거 2011년 복원 되었다.
현장 학습을 나온 초등학생 등을 비롯한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형무소를 찾아 관심있게 전시를 지켜보고 있었다. 최근 민족문제연구소, 6월민주항쟁계승사업회, 국민유공자유족회 등 50여개 시민단체는 서대문형무소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위한 시민모임을 발족하고 적극 추진하고 있다.
민주당은 21일 ‘효도하는 민주당’이라는 구호를내걸고 6·4 지방선거를 겨냥한 노년층 표심 공략을 본격화 했다.
25일 연합뉴스에 따르면 김한길 대표는 이날 서울시당 대회의실에서 열린 전국실버위원회 임명장 수여식에서 “민주당이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 중 하나가 어르신을 국가가 책임지고 모셔야 한다는 점”이라면서 “앞으로도 그런 생각을 확장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김 대표는 임명장 수여식과 곧이어 열린 운영위원회 회의에서 △ 소득 하위 70%이상 어르신을 대상으로 기초연금 20만원 지급 △ 4대 중증질환에 대한 국가보장 약속 실천 △ 경로당 점심 급식비 지원 △ ‘노인복지처’ 설립 △ 민주정책연구원 내 ‘실버연구소’ 설치 등 5개 실천 방안을 제시했다.
‘노인’이라는 단어의 부정적 어감을 의식해 옛 전국노인위원회를 전국실버위원회로 개칭한 데 이어 노인문제에 관한 전문적 연구를 위해 다음 주 중 실버연구소를정식 발족하기로 한 것이다.
박광온 대변인은 “민주당은 희생과 헌신으로 민주화와 산업화에 앞장선 어르신을 정당하게 예우하고, 어르신들이 떳떳하게 사회에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있는 기풍을 조성하겠다”고 설명했다.
노년층은 민주당의 취약 계층이라는 점에서 이런 노력이 지방선거에서 지지층 확대에 기여할 것으로 민주당은 기대하고 있다.
김 대표는 “지방선거를 앞두고 전국실버위원회 여러분이 큰 역할을 하실 것으로기대한다”면서 “민주당의 입장을 많은 어르신께 전파하주면 지방선거에 큰 힘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민주당은 한편 정부 경제활성화 정책의 ‘사각지대’로 지적되는 소상공인을 끌어안기 위해 이날 소상공인 정책개발 싱크탱크인 ‘소상공인정책연구소’를 민주정책연구원 산하에 설치하고 전태일 열사의 여동생인 전순옥 의원을 소장으로 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