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를 살았던 국민이라면 밤 12시에 울리는 사이렌 소리를 기억한다. 24년 전인
1982년 1월 5일, 광복 후 줄곧 갇혀 있었던 대한민국의 밤이 세상에 풀려났다. 밤 12시~새벽 4시의 야간 통행금지(통금)가 해제된 날이다. 전국 도시의 거리에 사람이 오가게 된 것도, 새벽까지 마셔야 직성이 풀리는 한국인의 술자리 습관도 모두 이때 시작됐다. 글 유충현 기자 lamuziq@etoday.co.kr
“네온불이 쓸쓸하게 꺼져가는 삼거리 / 이별 앞에 너와 나는 / 한없이 울었다 / 추억만 남겨놓은 젊은 날의 불장난 / 원점으로 돌아가는 0시처럼”
가수 배호의 노래 ‘0시의 이별’ 가사다. 통금과 함께 불 꺼지는 거리 풍경과 이별할 수밖에 없는 연인들의 안타까운 심정이 나타난다. ‘0시의 이별’에는 금지곡 딱지가 붙었다. 남녀가 0시에 헤어진다면 통행금지 위반인데 가사가 통금위반을 부추긴다는 이유였다고 한다.
밤과 낮의 구분 없이 거의 모든 생활이 가능한 오늘날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이야기지만, 광복 후 37년간 한국인들은 자정부터 새벽 4시까지 집 바깥을 돌아다닐 수 없었다. 미군정 시절 북한의 간첩을 경계한다는 목적으로 도입됐지만, 이후 정부는 ‘범죄예방’ 등의 명목으로 통행금지 조치를 존속시켰다. 전쟁이나 재해 재난이 아닌 상황의 평시통금은 세계적으로도 사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때 그 밤문화…11시 30분 되면 귀가전쟁 시작
자정이 되면 ‘애~앵~’ 사이렌 소리가 울려 펴지고 서대문 로터리에는 철제 바리케이드가 설치됐다. 2인1조로 이뤄진 야경꾼들은 나무로 만든 딱따기를 치며 “통금!” 이라고 길게 소리친다. 단속은 엄혹했다.
김근석 전 경정(1970~80년대 서울 종로구 필동파출소에서 순경으로 근무)은 “귀가전쟁이 시작되면 번화가 입구쪽 차선이 사람으로 빽빽했다. 택시를 잡기 위해 합승은 기본이었고 ‘따블’이나 ‘따따블’ 요금을 부르는 게 일상적이었다”고 회상했다.
국민들의 밤문화는 완전히 달랐다. 혹시라도 통금에 걸리면 보통 곤욕이 아니었다. 일단 파출소에 잡혀갔다가 즉결심판에 넘겨져 벌금을 물었다. 예전 회사들은 별도의 숙직실을 두고 있었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대의 유물이다. 술꾼들은 10시30분 정도가 되면 슬슬 자리에서 일어날 준비를 하거나 술집 문을 닫고 밤새 마시는 선택을 해야 했다.
반대로 통행금지가 오히려 외박의 빌미가 되기도 했다. 일부러 애인과 술을 마시다가 깜빡한 척하고 통금을 넘겨버리는 수법은 당시 젊은 남녀들에게 흔했다. 덕분에 여인숙이나 여관 같은 서민형 숙박업이 높은 수익을 올리던 시기이기도 했다. 남자들은 굳이 섬에 가서 배를 놓친다든가, 두메산골에서 술이 떡이 되어 운전 못 한다고 버티는 등의 영웅담(?)도 심심찮게 회자됐다.
국가는 아주 가끔씩 통행금지를 풀어줬다. 1년에 단 두 번 통행금지가 해제된 날이 있었는데, 크리스마스와 12월31일이었다. 사람들은 이때에만 해방감을 만끽하기 위해 거리로 쏟아져 나왔는데, 이 때문에 젊은이들에게 크리스마스는 성스러운 휴일이 아니라 ‘해방의 날’이었다. 서울 명동과 충무로, 종로 일대가 젊은이들의 해방구였다.
대한민국 밤의 족쇄를 풀어준 88올림픽 유치
대한민국의 밤에 채워진 족쇄를 풀어준 것은 다름아닌 1988년 서울올림픽이었다. 1981년 9월 독일(당시 서독)의 바덴바덴에서 전해진 올림픽 개최지 선정 소식은 한국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통행금지가 있는 상태에서 올림픽을 치를 수는 없었다. 사회에 팽배한 민주화 요구도 어떤 형태로든 숨통을 터 줘야 했다.
1981년 11월 19일 전국경제인연합회관 19층 중국음식점에서 여야 중진 국회의원들의 회동이 있었다. 권정달 민정당 사무총장은 이날 갑자기 통금해제안을 꺼냈다. 이견이 나오지 않아 4분 만에 논의가 끝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두환 당시 대통령은 가급적 이른 시일 안에 통금을 해제하겠다고 밝혔다.
1982년 1월 5일 새벽 4시를 기해 50개시 139개군 지역의 야간 통행금지 조치가 해제됐다. 나라를 되찾은 뒤 처음으로 밤이 국민들에게 돌아왔다. 시민들은 잠을 잊은 채 37년 만에 되찾은 자유를 환호하며 거리를 활보했다. 적지 않은 인원이 새벽 1시에 길거리로 나와 만세를 불렀을 정도였다고 한다. 밤을 되찾은 시민들은 한풀이라도 하듯 거리로 쏟아져 나와 새벽 서울시청 시계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심야극장도 이 시절 생겨났다. 통금이 해제된 지 꼭 한 달 뒤인 2월6일 첫 심야 상영영화인 이 개봉했다. 개봉 첫날 밀려드는 인파에 극장 유리창이 깨졌다는 보도기록물은 처음 맛보는 자유를 만끽하고자 했던 당시의 분위기를 설명해 준다. 심야영화의 흥행몰이는 을 필두로 , 등으로 이어지는 에로영화 전성기를 만들기도 했다.
술문화도 변했다.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는 룸살롱, 단란주점 등 새벽까지 이어지는 한국의 밤문화도 이때 시작됐다고 한다. 이전에는 최대한 급하게 마시던 국민들이 새벽까지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통금 이후 급등한 민간소비, 오일쇼크 극복 원동력
1982년의 통금해제는 국민의식이 자유로워지고 성숙해진 계기로 평가된다. 통금이 해제되면서 범죄율이 높아질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으나 큰 혼란은 없었다. 자정부터 새벽 4시까지 ‘돌려받은 4시간의 자유’는 37년간 계속되어온 억압을 빠르게 지워갔다. 버스와 지하철은 자정 이후까지 연장 운행됐고 택시 영업도 밤새 계속됐다. 철야 영업 간판을 내건 가게들도 속속 등장했다. 통제에 익숙하던 사회에 자율적 질서가 자리를 잡아갔다.
기대 이상의 경제적 효과도 뒤따랐다. 서비스 부문의 고용이 늘고 얼어붙은 기업 마인드와 소비심리가 살아났다. 비행기의 이착륙 시간도 구속에서 풀려나 바이어와 관광객의 입국도 늘었다. 1980년 마이너스 0.2%를 기록한 민간소비 증가율이 1982년 6.9%, 1983년 9.0%로 높아졌다. 우리 경제는 1982년 7.2%, 1983년 10.7%라는 고성장을 기록하며 2차 오일 쇼크 등으로 인한 국제적 경제 침체에서 빠르게 벗어날 수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야간 통행금지 해제 무렵부터 디스코텍과 카바레, 룸살롱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서고 대형 폭력조직이 생겨났으며 퇴폐향락문화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는 주장도 있다. 에너지 사용량이 증가하였고, 유흥업소의 영업시간 연장으로 향락적인 사회 환경이 조성되었으며, 유흥비를 마련하기 위한 청소년 범죄가 발생하여 사회적인 문제로 지적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간 통행금지 해제는 국민의 기본권과 자율성 회복의 상징적인 조치였다.
민주화를 위해 독재정권에 각을 세웠던 그다. 그의 아버지도 그랬고, 그의 아들도 그랬다. ‘3대가 시위 투쟁 집안’이라는 기사까지 났다. 그랬던 그가 20년 넘게 모은 토기 1582점을 국가에 기증했다. 그것도 모자라 그 이후 모았던 토기들도 다섯 차례 더 기부했다. 토기가 부업이라면 청동 수저 수집은 취미 같은 것이었는데 그것마저 모두 내놓았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최영도(崔永道·77) 변호사를 수식하는 단어는 다양하다. 인권변호사로 유명하지만, 1971년 사법파동의 주역으로 찍혀 1973년 유신 때 재임명 탈락 전까지는 법복을 입고 판사로 활동했다. 또 민주화 운동에 앞장선 젊은이들을 위해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다 민변의 창립발기인이자 회장을 맡았고, 참여연대의 공동대표,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까지 맡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해 왔다.
문화예술 분야에서는 클래식 음악에 관한 에세이를 엮은 와 유럽 미술관들을 다룬 등 여러 저서를 내기도 했다.
그의 이름이 더 널리 알려지게 된 사건 중 하나는 2001년 평생 모아온 토기를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일이다. 모두 6차례에 걸쳐 토기 1668점과 청동 수저 51점 등 도합 1719점의 유물을 기증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는 그의 이름으로 된 기증실에 약 60여 점의 토기가 전시되어 있다. 수집 과정과 기증 후의 이야기까지 엮어 이라는 책도 냈다.
토기 박물관 만들자 결심해 수집 시작
그가 유물 수집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73년 해직판사가 돼 변호사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다. 처음엔 백자 연적이나 유병(油甁)과 같은 도자기 소품을 모으다 고미술 시장에서 만난 후배의 권유로 토기에 관심을 갖게 됐다. 가치 있는 토기들을 모아 박물관을 건립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그즈음이다.
“당시만 하더라도 투박한 토기는 청자, 백자 등 다른 유물들에 비해 박물관이나 학계의 관심을 받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외국인들이 사들여 해외로 유출하고 있었죠. 그래서 토기들을 수집해 박물관을 차리고 싶었습니다. 판사복을 벗었으니 평범한 법률가로 남겠다 싶었는데 인생의 목표가 생겼던 것이죠. 아내가 대찬성을 해줘 즐겁게 수집할 수 있었습니다.”
토기는 멀게는 신석기 시대부터 삼국 시대를 거쳐 조선 시대까지 오랜 기간 우리의 삶과 함께했다. 현재는 장례 때 많은 토기를 부장품으로 넣는 것이 유행했던 가야 때 것이 가장 많이 남아 있고, 장묘제도의 변천으로 부장품을 적게 넣어 출토가 적은 고려, 조선 시대 토기가 가장 보기 힘들단다. 그가 기증하기 전까지 국립중앙박물관도 고려, 조선 시대의 토기는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 거의 없었을 정도. 수집가들의 기증문화가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단면을 보여주는 사례다.
물론 이러한 수집은 쉽지 않았다. 포기해야 할 것도 있었다. 라운딩 한 번 나갈 돈이면 저렴한 토기 1~2점은 살 수 있었기 때문에 골프도 끊고, 술도 줄였다. 인사동과 장안평을 샅샅이 뒤지느라 1000원짜리 감자탕으로 끼니를 때울 때도 많았고, 차에서 전투식량으로 요기를 하기도 했다.
유물의 해외 유출을 막기도 했다. 1983년 인사동에서 백제토기 ‘쇠뿔잡이항아리’를 만나 반했지만, 200만 원이라는 비싼 가격에 망설였다. 그러다 평소 눈독을 들이던 프랑스 외교관이 곧 사갈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듣고, 돈을 마련해 갈 테니 항아리를 숨겨 두라고 부탁해 겨우 확보하기도 했다.
감정방법부터 관리방법까지 이론 익혀
초창기부터 박물관 건립을 고려했기 때문에 수집 형태도 남달랐다. 개인적 기호와는 무관하게 시대, 지역, 기형, 문양 등 4가지 기준을 놓고 학술적 가치까지 고려해 수집했다. 학술적 가치가 있다면 싼 것도 모았고, 상품가치가 없을 수 있는 파편도 사들였다.
수집을 위한 연구와 노력 덕분에 토기와 관련한 전문적인 지식도 얻었다. 토기를 감정하는 나름의 7가지 방법을 터득해 진위뿐만 아니라 학술적인 분류까지 할 수 있게 됐다. 예를 들어 토기를 보면 살짝 혀끝을 그릇에 대보는데, 진품인 경우 토기 내부에 다공층이 있어 혀가 잠깐 달라붙는다고. 그때 나는 기분 좋은 곰삭은 냄새는 즐거운 덤이다. 토기를 구입하면 경질토기와 연질토기를 구분해 각각의 특성에 맞게 세척하거나 건조하는 방법도 익혀야 했다.
실제로 그가 기증한 유물 1719점에 대한 초록을 제작할 때, 박물관 측과 유물 분석에 대한 수십 건의 이견이 있었지만 몇 건을 제외하곤 대부분 그의 의견이 받아들여졌다. 2010년 발간된 이 은 그가 제안한 분류법대로 편집됐다.
그렇게 20년 이상 수집이 진행돼 고미술 시장에서 더 이상 사고 싶은 토기를 보기 어렵게 되자, 본격적인 박물관 건립을 추진했지만 현실은 쉽지 않았다.
“서울 인근에 소박하게 아이들이 와서 보고 갈 수 있는 규모의 박물관이 되려면 300억 원 이상 필요하겠더라고요. 제 돈으로는 어림도 없어 대기업이나 정부에 모아놓은 것을 모두 무상 기증할 테니 토기 박물관을 지어 달라고 요청했지만 퇴짜 맞기 일쑤였습니다. 그렇게 끌어안고 고민만 하다가 국립중앙박물관 측에서 여러 차례 요청이 와 기증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기증을 결심하게 된 계기 중 하나는 모아놓은 토기들에 대한 걱정이 너무나 컸던 것도 있다. 혹시 사고라도 당하게 되면 그 토기들이 어떻게 될까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는 해외를 나갈 때, ‘내게 문제가 생기면 토기들을 국·공립 박물관이나 대학 박물관에 무상기증을 하라’는 내용의 유서를 반드시 남겨놨다고 했다. 여행을 할 때마다 유서를 쓰고 찢기를 반복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횡단보도에서 이러다 교통사고라도 당하면 토기들은 어떡하나 하고 똑같은 걱정을 반복하다, 아끼는 것일수록 박물관에서 오래도록 전시돼야 한다는 생각으로 기증 결심이 섰다고.
오래 관리되고 기억되길 원해 기증 선택
기증처가 국립중앙박물관이 된 것은 그전부터 이어오던 인연 때문이다. 1997년 국립중앙박물관 토기 전시회에 44점을 찬조 출품한 것이 계기가 됐다. 그 이후 국립중앙박물관이 지금의 위치인 용산으로 이전을 계획할 때, 기증관 구성을 의욕적으로 추진하면서 최영도 변호사 측에 제안해 기증이 이뤄졌다. 물론 다른 박물관에 비해 뛰어난 국립중앙박물관의 유물 관리, 전시 능력도 매력적이었다. 그는 이 과정을 국립중앙박물관으로부터 “선택받았다”라고 표현했다.
2001년 기증 후에도 그의 토기 수집에 대한 습벽은 쉽게 멎지 않았다. 그만해야지 싶다가도 좋은 유물이 나타났다는 전화에 흔들리기도 했고, 궁금해서 일단 보면 지갑 열기를 멈추지 못했다. 아예 눈을 닫으려고 하면, 상인들이 토기를 들고 사무실로 들이닥쳐 외상으로 맡기고 갔다. 이렇게 토기들이 더 모여 몇 차례 계속 기증하길 반복했다.
한눈에 반한 토기를 만나면 며칠이고 침대에 두고 끌어안고 잘 정도로 사랑이 남달랐던 그다. 때문에 시집보낸 딸처럼 토기들이 눈에 아른거릴 법도 한데, 기증한 지 10년이 넘은 지금도 잘했다 싶단다.
“평생을 바쳐 모은 수집품들이 주인을 잃고 나서 허망하게 시장에서 뿔뿔이 팔려 나가거나, 풍비박산이 나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또 사설 박물관도 후대로 넘어가면 초심이나 전문성을 잃는 사례가 있습니다. 때문에 기증문화의 발전은 문화유산의 보존을 위해 중요합니다. 유물은 국가와 국민의 소유이고, 수집가들은 그것을 잠시 맡아 두는 창고지기일 뿐입니다.”
모든 토기를 기증하고 나서는 기쁨과 해방감을 함께 맛봤다고 말했다.
“무거운 관리 책임에서 벗어났다는 생각에 어깨가 가벼워짐을 느꼈습니다. 수집은 명예인 동시에 속박이라는 것을 느꼈고, 모두 다 기증하고 나니 마음이 가볍고 자유로워졌습니다. 박물관에게 고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쉽게 기증 결정할 수 있게 제도 개선돼야
해외 미술관을 돌며 관찰해 이를 엮어 책까지 발간한 그이기에 기증문화에 대한 의견은 현실적이다. 특히 기증을 하는 것만큼이나 기증을 받는 쪽의 태도 변화도 절실하다고 이야기한다.
“학계나 관련 기관에서는 수집가나 고미술 상인을 낮춰보거나 신뢰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수집은 단순히 돈을 주고 가져오는 것 이상으로 복잡하고 신중한 과정을 거치는데, 직접 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친 만큼 수집품에 대한 지식과 애정 또한 상상 이상입니다. 그런 ‘귀한 자식’을 받아주는 일인 만큼 받는 쪽에서도 애정을 갖고 기증품을 다뤄줬으면 합니다. 전시 과정에서도 기증자에 대한 부각이나 배려가 고려된다면 보람도 느낄 수 있고, 기증에 대한 동기유발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기증자들이 스스로를 박물관의 ‘가족’이라고 생각하고 소속감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해외 미술관이나 박물관의 경우 기증자의 이름이 잘 보이도록 크게 써 놓거나, 아예 액자에 새겨 넣기까지 하는 경우도 있다.
최영도 변호사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의 기증자 대표로 기증 후 몇 년간 추대 받아 활동하기도 했고, 국립현대미술관과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서 기증과 관련한 강연 등의 요청이 와 이런 의견들을 밝힌 적도 있다고 했다.
최영도 변호사는 문화 발전을 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이 절실하다고 조언했다.
“수집가라고 모두 다 엄청난 재산가는 아닙니다. 수집을 위해 평생의 재산을 바치는 경우도 허다한데, 이런 경우 기증 후에는 생계를 걱정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우려가 기증에 장애가 될 수도 있는 것이죠. 때문에 수집가들을 위한 세제 혜택이나 연금제도의 도입 등을 고려해야 합니다. 세제 혜택 제도는 기증품에 대한 평가가 어려워 법까지 만들어 놓고 시행하지 못한다니 답답할 노릇입니다.”
특히 세제 혜택 마련의 걸림돌이 되고 있는 기증품에 대한 가치평가와 관련해선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면 될 일이라고 강조했다.
“관과 학계, 업계, 수집가들로 구성된 공동평가기구를 만들어 기증품의 가치를 정확하게 평가할 수 있게 된다면 세제 혜택뿐만 아니라 기증을 후원할 수 있는 다양한 길이 열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1976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한 노신사가 신문에 난 부음을 보고 빈소가 마련된 우리 집을 찾아왔다. 어머니는 그를 한눈에 알아봤다. 대한민국 초대 공보처장을 지낸 이철원 박사였다. 그는 아버지 생전에 신세를 많이 지었다며 이를 잊지 못하여 찾아왔다고 말하였다. 그제야 나는 아버지가 어릴 때 우리 형제들에게 들려주었던 얘기가 생각났다.
손우현 한림대 국제학부 객원교수
일제 말기에 선친은 종로 2가에서 사업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한 중년 남자가 고장 난 기계가 있으면 수리하겠다고 아버지 회사를 찾아왔다. 그러나 이 남자의 용모는 도저히 이런 일을 할 사람으로는 믿어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차를 한 잔 대접하며 사연을 들어보았다. 그의 이름은 이철원이며 배재학당 재학 중 3·1독립운동에 참가, 옥고를 치른 후 상해와 파리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 컬럼비아대학에서 유학하며 이승만 박사를 돕다 귀국하였다고 하였다. 아버지는 이 이야기를 듣고 곧 그의 후원자가 되었으며 두 사람은 친구가 되었다.
1949년 이철원 박사가 아버지에게 급한 연락을 해왔다. 이승만 대통령이 불러 경무대(현재의 청와대)에 들어가야겠는데 입고 갈 양복이 없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그에게 바로 양복과 모자를 해주었다. 그는 얼마 후 대한민국 초대 공보처장에 임명되었다.
이 박사는 아버지와의 인연을 회고하며 지금은 자신도 은퇴를 하였지만 도와줄 일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얘기하고 떠났다. 어머니는 그 이듬해 형 결혼식의 주례를 이 박사에게 부탁했다. 그 당시 나는 프랑스에 있어 참석하지 못했지만 그때는 유신체제하라 긴 주례사를 못하게 했다는 얘기를 얼마 전 형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아버지의 세대가 있기에 우리 세대가 있다
요즘 나는 이철원 박사의 아들 이준일 교수(전 중앙대 정경대학장)와 우리 둘 다 회원으로 있는 광화문문화포럼에서 매달 만나 선친들의 우정을 회고하며 2대에 걸친 세교(世交)를 이어가고 있다.
선친 이야기로 ‘우리 세대 이야기’를 시작하는 이유는 내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저지른 불효를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기 위해서다. 또 아버지 세대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 세대가 있다는 생각에서다.
인간에게는 운명이란 것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운명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 중에 언제, 어디서 태어나느냐가 중요한 것 같다. 나는 1948년 12월 서울에서 태어났다. 일제 때 태어나지 않아 이등 황국신민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있었고 군대도 대한민국 군대에 가고 나중에는 고위 공무원도 될 수 있었다. 또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만 한살이라 어머니 등에 업혀 고생을 모르고 피난을 갔다 올 수 있었다.
내가 선택한 것은 아니지만 태어난 시기는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또 내가 태어난 해는 대한민국이 수립되던 해이다. 그러니 나의 역사는 곧 대한민국의 역사다. 나는 비록 어린 나이지만 4·19와 5·16을 목격했고 그 후 오랜 권위주의 정부 후에 온 1987년 민주화, 88 서울올림픽, 2002 월드컵 등을 국내외에서 지켜보며 대한민국의 변화된 국제적 위상을 목도했다. 대한민국은 그사이 원조대상국에서 원조공여국이 되었다.
4·19 총성과 시민들의 울부짖음
나는 초등학교 시절 ‘우리의 대통령은 이승만 박사’라는 노래를 부르며 그의 육성 연설을 라디오로 들으며 자라났다. 그런데 6학년 때 수업 도중 내가 다니던 수송국민학교(현재의 종로 구청자리)에서 멀지 않은 세종로에서 총성이 울려 펴졌다. 그로부터 며칠 후 ‘우리의 대통령’ 이승만 박사는 성명을 발표하고 하야했는데, 그의 차량이 떠나는 연도에서는 많은 시민들이 울부짖고 있었다. 그로부터 1년 후 새벽잠이 없던 아버지는 라디오 뉴스를 듣다가 우리 형제들을 깨웠다. 종로 2가에 나가보니 탱크가 지나가고 있었다. 라디오는 “국민들은 안심하라”는 장도영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의 육성 성명을 보도했다.
내가 태어날 때는 우리 집 살림이 비교적 넉넉했는데, 어머니는 나를 병원에서 출산하지 않고 산파를 불러 집에서 낳았다. 지금 생각하면 미개한 것 같지만 그때는 그렇게들 했다. 그리고 아들을 낳았다고 새끼줄에 빨간 고추를 끼워 대문에 걸었다. 지금은 병원에서 출산하고 병원에서 장례를 치르지만 그 시절에는 집에서 해산하고 집에서 초상을 치렀다. 그래서 어느 집에 애경사가 있는 지를 동네 사람들이 다 알았다. 또 집집마다 한자로 된 문패를 걸어 서로 이름을 알고 지냈다. 지금은 같은 아파트 바로 앞집 사람의 성도 모르고 지내는 경우가 허다하다.
내가 태어난 곳은 4대문 안인 종로 2가 YMCA 뒷동네다. 정확히 말하면 나의 생가 주소는 종로구 인사동 245번지인데 어찌 된 일인지 이 주소는 오래전에 없어졌고 건물만 남아 있으나 지금은 개조하여 음식점이 되었다.
내 유년 시절의 종로 2가는 지금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YMCA 자리는 6·25 때 폭격을 맞아 폐허가 되어 있었으며 YMCA 건너편에는 기독교 방송국이 있었다. 종로 1가 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을유문화사 서점이 있었고 안국동방향으로 돌아서는 모퉁이에 화신백화점이 있었다. 1936년 민족자본으로 건설된 지하 1층, 지상 6층의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까지 구비한 이 건물은 규모는 다르지만 뉴욕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같은 장안의 명물(landmark)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화신백화점은 1987년 종로의 도로 확장계획으로 철거되었다.
서울은 오랜 역사를 지닌 도시인데 다른 유서 깊은 외국 도시와는 달리 옛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다. 수려한 자연 경관은 무분별하게 치솟은 고층 건물과 아파트에 가려지고 기념비적인 건물들은 하나 둘 사라졌다. 이런 철거 위주의 도시 계획은 나를 슬프게 만든다. 없어진 옛날 집 주소와 화신백화점을 생각하며 나는 실향민과 같은 심정을 금할 수 없다.
고교 시절인 1966년 나는 뉴욕 헤럴드 트리뷴 주최 세계 청소년토론대회(World Youth Forum)에 한국 대표로 선발되어 미국에 가게 된다. 지금은 조기 유학들을 많이 가지만 그 당시는 고등학생이 미국에 간다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3개월 여간 뉴욕 지역의 미국인 가정에서 민박을 하면서 그 집 아들들과 함께 미국 고등학교에 다니며 한국에 대한 연설도 하고 또 전 세계 39개국에서 온 학생들과의 토론회에도 참석했다. 이때 나는 문화적인 충격을 경험한다. 지금은 서울이 글로벌한 도시가 되었지만 그 당시 한국은 고속도로도 없는 후진국이었다.
박정희 대통령 장례식에 취재기자로 참석
또 그 당시 서울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과의 유일한 통신수단은 편지였다. 전화는 비싸서 보통 사람들은 엄두도 못 내고 항공우편 중에서도 저렴한 봉함엽서(aerogramme)에 깨알같이 적은 편지를 주고받곤 했다. 우리 세대에 가장 크게 발전한 기술을 꼽으라면 나는 통신수단이라고 답할 것이다. 지금은 빛의 속도로 연락을 주고받는 인터넷, SNS, 무료 국제전화까지 가능하지 않은가.
만 28세였던 1977년 나는 코리아헤럴드 파리지사장 겸 특파원으로 부임하게 된다. 뜻밖의 인사 발령이었다. 대개 지사장이나 특파원하면 중견 이상의 기자들이 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생에는 의외와 예외가 있다. 나는 이때 프랑스에 2년간 체류하면서 프랑스 사회와 문화를 체험하며 프랑스와의 운명적인 만남을 시작한다. 그 후 외교관으로서 파리에 두 차례 8년을 더 근무하면서 도합 10년을 프랑스에서 보내게 되며 프랑스 정부 문화훈장도 받고 프랑스에 대한 책도 출간하게 된다.
프랑스 지사장 근무를 마치고 귀국하여 코리아헤럴드의 중앙청과 외무부 출입기자를 겸하고 있던 1979년 10월 26일이었다. 아침 6시가 좀 지나서다. 자고 있는데 중앙청에서 전화가 왔다. 긴급 중대 발표가 있으니 빨리 기자실로 오라는 것이었다. 불길한 예감이 든 나는 부리나케 중앙청으로 향했다.
기자실에서는 기자들이 소문을 주고받으며 웅성거리고 있었다. 이때 평소와는 달리 초췌한 모습의 김성진 문화공보부 장관이 기자들 앞에 나타나 울먹이면서 대통령 시해 사실을 발표했다. 기자들은 우두망찰할 사이도 없이 전화로 송고를 시작했다. 며칠 후 나는 박정희 대통령의 장례식에 취재기자로 참석했다. 고인을 위한 종교 의식에서 평소 박 대통령을 비판하던 김수환 추기경이 하느님께서 이제 고인에게 영원한 안식을 달라고 기도했다. 세월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장면이다.
1980년 5월 광주항쟁이 일어났다. 당시 우리 언론은 이 사실을 보도하지 못해 나는 외신을 통해 사태의 추이를 주시하면서 기자로서 심한 자괴감을 느꼈다. 당시 한국 언론의 정국관련 보도는 마치 암호를 읽는 것과 같았다. 그때와 지금의 우리 언론을 비교하면 실로 격세지감을 느낀다.
김영삼 ‘문민정부’의 대통령 해외공보비서관
1984년 초 연합통신 기자로 있을 때 나는 주 인도네시아 대사관 공보관으로 나가 달라는 공직 제의를 받았다. 외교관 신분으로 해외에 근무하는 기회다. 그 당시 나는 미국 대학원에 입학 허가를 받고 장학금도 거의 확보해 놓은 상태였다. 주저하는 나에게 내가 자문한 선배들은 좋은 기회이니 놓치지 말라고들 권유했다. 사농공상 문화의 잔재 때문일까. 그 당시 해외공보관 중에는 많은 전직 언론인들이 있었다.
그 이후 공무원이 된 나는 자카르타, 파리, 제네바, 오타와 등에서 근무했다. 그리고는 김영삼 ‘문민정부’에서는 대통령 해외공보비서관으로 발탁되어 대통령 해외 순방에 수행하며 세계 여러 지역을 다녔다. 그때는 잘 몰랐으나 지금 생각해 보니 특혜 받은 인생이었다.
나는 대한민국 현대사의 기적을 해외에서 지켜봤다. 1987년 6월 항쟁은 권위주의 정부 방어에 종사하던 나에게는 커다란 감격이었다. 그 이후 나의 공보관 업무는 훨씬 수월해졌다.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 때는 파리에서 서울에 파견되어 외신 홍보 지원을 했다. 올림픽 개막식을 생중계하는 프랑스 TV와의 회견에서 나는 서울올림픽은 한국의 경제 발전과 민주화를 국제 사회가 공인하는 축제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2002년 월드컵 때는 파리에 대사관 공사 겸 문화원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많은 프랑스인들이 한국에 대한 정보를 구하려고 한국문화원을 찾았고 월드컵이 생중계되는 파리 시청 광장에는 교민과 유학생들이 한국 팀을 응원하러 몰려들었다. 우리 가족도 여기에 합류했다.
지난 9월 나는 파리에서 개최된 한불수교 130주년 기념 ‘한불 상호 교류의 해’ 개막행사에 정부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사상 처음으로 한국 색채로 조명된 에펠 탑 앞에서 열광하는 파리 시민들과 우리 교민들을 보면서 남다른 감회를 느꼈다. 공교롭게도 이 개막행사를 한 사요극장은 1948년 12월 12일 제3차 유엔총회가 대한민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하는 결의안를 통과시킨 곳이다.
2007년 이후 나는 한림대에서 외국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국 문화와 역사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다. 나는 이를 공직 시절에 하던 ‘한국 알리기’의 연장으로 생각하며 깊은 사명감을 느낀다. 특히 흐뭇한 것은 이제 한국도 전 세계에서 유학생들이 찾아올 만큼 중요한 나라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 대한민국은 지난 67년간 참 먼 길을 달려왔다. 안으로는 여전히 시끌벅적하나 밖에서는 인정받는 나라가 되었다. 대한민국과 함께 태어난 나는 이 여정에 국내외에서 동행할 수 있었던 것을 큰 축복으로 생각한다.
>> 손우현 (孫又鉉) 한림대 국제학부 객원교수
1948년 서울 출생. 서울고, 한국외대 불어과, 파리 외교전략대학원(CEDS) 졸.
코리아헤럴드 기자, 파리지사장, 연합통신 기자, 주 인도네시아, 프랑스, 제네바,
캐나다 공보관. 대통령 해외공보비서관, 정부간행물제작소장,
주 프랑스 공사 겸 문화원장 역임. 프랑스 예술문화훈장 ‘기사장’ 수훈.
동·서양의 많은 미술가들이 배를 주제로 한 그림들을 즐겨 그리거나 조형물 또는 설치미술로 남겨왔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쳐 있고 강도 많아서 유년기, 성장기, 노년기 중 한때를 바다나 강 곁에서 살아 온 우리들에게 배는 아주 익숙한 풍경이다.
배는 물을 건너는 교통수단일 뿐 아니라 어업을 생계로 하는 이들에게 곧 삶의 터전이었다. 문학을 비롯해 여러 예술 장르로 배에 얽힌 주제는 독자들에게 많은 상상력을 키워 주기도 하고, 질박한 서민 애환에 공감대를 형성해 주기도 했다.
화가들은 마음 속 정서를 점, 선, 면으로 분할한 구도 속에 색채로 표출해 낸다. 그림을 보는 사람들은 시각을 통하여 화가의 깊은 정서에 접근하게 된다. 그 접점이 화가가 의도하는 사유에 근접하든 아니든, 그림을 보고 속뜻을 풀어 가는 과정이 보는 이들에게 때론 안온한 열락을, 혹은 거친 갈등의 아픔을 가져 온다.
그림 속의 배는 늘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만, 언젠가 그 배는 물 위로 흘러갈 것이란 우리들의 인식이 잠재되어 있어, 배는 머무르되 물은 흐르고, 물은 잠시 머무르되 배는 흐른다.
박석호(1919~1994) 화가의 배 그림 ‘고선(古船)’을 처음 보았던 순간의 감흥은 아직도 생생하다. 인사동 어느 화랑의 유리 진열대에 덩그러니 혼자 걸려 있던 거칠게 짙은 청회색의 배 한 척이 두 눈 가득 다가왔다.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꿈을 꾸듯 하염없이 배를 바라보았다. 짙은 납빛 하늘에, 유려한 필선의 흐름이 돛과 배의 몸통을 슬며시 구분 지어서 그렇지, ‘저런 배도 있을까?’ 그렇게 며칠을 유리 밖에서 살피며 그림이 눈에 익을 때까지 천천히 의식을 작품 속에 이입해 보기도 했다. 초겨울 찬비가 내리는 저녁, 그림 중앙 작은 사각의 조타실과 선실 창틈으로 새어 나오는 노란 불빛에 시선이 빨려 들어가면서, 다소의 조급함이 풀리기 시작했다. 거친 마티에르에 여리게 스미고 번져 나오는 그 불빛, 거센 풍파에 깨지고 부서진, 아픈 여정을 이제 막 돌아온 고선(古船)에서, 그래도 내일의 새 항해를 꿈꾸는 화가의 자화상이리라 깨닫는 찰나, 그것은 환희이며 동시에 아픔이었다. 내가 소장하는 첫 번째 배 그림이 되었다.
홍익대학교 미대 1회 졸업생인 박석호는 이미 남관(1911~1990) 선생의 화실에서 미술의 기초 실력을 닦고, 김환기(1913~1974) 선생의 빛나는 제자로 인정받으며, 졸업 후 바로 모교의 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박석호는 1966년 학교의 부조리한 인사에 강하게 저항하다 동료 교수 4명과 함께 주저 없이 강단을 뛰쳐나오게 된다.
신산한 삶 속에서도 산과 들, 사찰, 바닷가로 자유롭게 다니며 민초들의 힘겨운 삶의 현장과 주변의 보잘것없는 스산한 풍경까지 농밀한 화필로, 밀도 높은 작품을 이루어 간다. 1980년대에서 생의 말년까지 십 수 년은 배 그림을 유난히 많이 그렸다. 어시장, 이름 없는 작은 포구에 옹기종기 정박하는 어선, 이제는 배의 기능을 마친 앙상한 용골의 폐선, 비를 머금은 어부의 귀항 등을 유채, 수채, 파스텔의 재료를 광범위하게 사용하여 그렸다. 1994년 운명할 때 화실에 걸려 있던 유작이라 칭하는 ‘한촌(寒村)’을 보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4호 사이즈의 작은 화폭이 수평으로 양분되고 하늘은 온통 노을과 구름으로 뒤덮였다. 먹청빛 짙은 바다 가운데 작은 배 한 척이 무심히 머물러 있다. 두세 번의 거친 붓질만으로도 작은 배는 시선을 확 사로잡는다. 붉은 노을빛이 바다에 어리고, 배 그림자도 파도의 흔들림 없이 잔잔한 바닷물에 번져 있다.
‘이제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대구의 한 화랑에서 다른 화가의 배 그림 ‘새벽어촌’을 구입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배를 접안할 시설조차 마땅치 않은 남도 어느 포구에 작은 어선 위로 두 사람의 어부가 짐(물고기)을 들어 다른 한 사람의 등목에 얹고 있다. 배 위 어부의 등으로 하얗게 서리가 덮였다. 짐을 나르려는 어부는 발목이 젖은 모래에 박히고, 목에서 어깨까지 짐의 무게에 짓눌려, 목과 얼굴은 짐 상자에 녹아 붙어 버렸다. 손에 낀 장갑도 허연 성에에 뻣뻣하다.
어쩌면 평범한 어촌 일상이 보는 이를 잔뜩 긴장시킨다. 신선하게 느끼던 바다의 푸른 빛깔도 한 조각 얼음 되어 가슴에 박힌다. 침도 삼킬 수 없는 그 막막하고 아픈 고단함이 나를 깨운다. 크게 꾸짖는다.
‘너는 게으르지 않은가’
손장섭(1941~)은 전남 완도에서 태어나, 치열하게 한 세대를 살아가는 올연한 거목 같은 화가이다. 우리나라 질곡의 긴 역사를 회화로 펼쳐 왔다. 해방, 남북분단, 민주화의 투쟁에 거침없는 화필로 포효해 왔다. 그러나 언제나 그의 그림 기저에는 우리네 이웃 서민들의 팍팍하고 고단한 삶을 따뜻이 어루만지고 있다. 특히 그가 자라온 어촌의 아낙들과 고깃배의 그림들은 하얀 물감을 덧바르는 특이한 채색으로 경직된 선의 분할이 서정적인 풍경으로 바뀐다.
‘외포리의 저녁’이라는 표제가 붙은 그림은 내가 세 번째 소장한 배 그림인데, 미술품 경매회사의 온라인 경매를 통해 구입한 작품이다. 강화도 외포리 선착장에 머무르고 있는 배를 실경으로 담담히 그린 서경적인 작품이다. 석양의 하늘은 이미 붉은 노을로 질펀하다. 바다 건너 낮은 산들이 띠를 이루며, 모래톱에 배 너덧 척이 머물러 있다. 왼편 가까이 거의 부서진 하나는 배로서의 소임을 다 마친 채, 서서히 해체 되어 가는 폐선으로 보인다.
그런데, 바다에 녹아든 노을의 긴 그림자가 이 배를 포근히 휘감고 있다. 바닷물 가까이 우뚝한 큰 배는 당당한 위용으로 시선을 압도한다. 서너 개의 돛대가 노을을 수직으로 가른다. 뱃머리 돛대 위 푸른 깃발은 바람에 나부낀다. 범상치 않은 구도에, 잔잔하며 거친 붓질이 황혼녘의 포구를 아련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한다. 이 그림을 한 동안 바라보고 있노라면, 인생 초·장·노년이 파노라마처럼 흐르고 있음은 나만의 감성일까?
이 그림의 화가 김태(1931~)는 함경남도 홍원의 해변마을에서 출생하여 월남, 서울대 미대를 졸업, 모교 교수로 정년을 한 사람이다. 비교적 과작(寡作)인 편인 이 화가는 특이한 구도, 과감한 붓터치, 원색의 광휘가 보는 이들을 그윽한 그림의 세계로 이끄는 매력이 있다. 특히 한적한 어촌이나 해변마을의 배가 있는 실경들은 우리에게 고향의 어린 시절 향수를 담뿍 느끼게 한다.
그림을 보고 느끼는 감정은 사람마다 제각각이다. 그렇지만 그림을 제대로 보고 읽기까지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그림이란 표면을 통하여, 화가가 표출하고자 하는 세계에 발을 들여 놓으려는 진지한 자세가, 그 예술혼에 근접하려는 깊은 사색이, 화가의 다른 작품들을 찾아 살피는 과정이, 좋은 그림을 만나고 소장하고, 그 그림을 대할 때 깊은 마음 속 정화를 체험할 수 있다.
달빛이 유리창으로 고여 오는 늦은 저녁, 설거지를 마친 노처와 나란히 배 그림 앞에 앉아, 마른 뱃전을 적시는 바람 사이로 아련히 유년(幼年)의 바다를 떠올리고, 아직도 그 바다를 건너지 못하는 빈 배 위에 흰 세월 너울만 얹고.....
>> 글.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리뷰어
인간은 망각의 동물인 동시에 기억의 동물이다. 세월에 쓸려 사라지는 기억이 있는가 하면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기억이 있다. 시간이 지나도 잊을 수 없는 9월의 기억으로 1988년 서울에서 개최된 제24회 하계올림픽, 그리고 올림픽 유치가 확정됐던 1981년 9월 바덴바덴, 올림픽 유치의 주인공 김운용 전 IOC 부위원장을 재조명해본다.
1981년 9월 30일, 자정을 앞둔 늦은 시각, 온 국민이 숨죽이고 TV 앞에 앉았다. 시선은 독일의 작은 도시 바덴바덴을 향했다. 사마란치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이 1988년 올림픽 개최지가 적힌 봉투를 들고 나타났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프랑스어를 알아듣는 국민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사마란치의 입에서 나온 “쎄울(서울)”은 누구라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집집마다 기쁨의 함성이 터져나왔다.
서울올림픽은 대한민국의 9월을 환호의 계절로 만들었다. 당시 대한민국은 가난한 개발도상국이었다.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선 지는 불과 한 세대도 지나지 않았던 때였다. 승리를 예상하기 어려웠던 만큼 기쁨도 컸다. 더욱이 국민들은 상대가 일본이었다는 것이 더욱 기뻤다. 7년 뒤 1988년 9월에는 예정대로 서울올림픽이 전 세계의 전파를 탔다.
세계가 비웃던 유치선언, 세계가 놀란 역전극
서울이 일본 나고야와의 유치경쟁에서 이길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없었다. 1980년대 초만 해도 외국인들의 눈에 대한민국은 여전히 ‘전쟁폐허’ 이미지가 강했다. 더욱이 한국은 앞서 1974년에도 아시안게임을 유치했다가 능력 부족을 이유로 포기한 전력이 있었다. 일본은 이미 1964년 도쿄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러낸 경험이 있었다. 기반시설, 자금력, 국제스포츠계 인맥 모든 면에서 서울은 나고야에 경쟁이 되지 않는 상대로 보였다.
국내의 시각도 올림픽 유치에 부정적이었다. 나고야와 표 대결을 해 봤자 형편없이 져 망신당할 것이란 우려가 팽배했다. 남덕우 당시 국무총리를 비롯한 정부 주요 인사들은 설령 유치에 성공한다 해도 대회를 치러 낼 경제력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는 ‘올림픽 망국론’을 펼쳤다. 국제사회에서 한국이 유치 신청을 철회할 거란 소문이 파다했다. 훗날 서울올림픽 민간추진위원장이었던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은 독일 바덴바덴으로 떠날 때 정부로부터 “창피만 당하지 말아 달라”는 말을 들었다고 전했다.
개최지 선정 당일까지 서울의 승리를 점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외신은 누가 이길지가 아닌, 나고야가 몇 표 차이로 이길지에 초점을 뒀다. 하지만 결과는 52 대 27. 전체 79표 중 52표를 얻은 서울이 나고야를 두 배 가까이로 따돌리고 1988년 제24회 하계올림픽 개최권을 따냈다. 세계가 깜짝 놀란 대이변이었다.
냉전마저 녹여낸, 역사상 가장 성공적 올림픽
1988년 9월 17일 예정대로 서울올림픽의 막이 올랐다. 서울올림픽에는 160개국에서 1만3304명의 선수단(선수 9417명·수행인원 3887명)이 참가해 올림픽 역사상 최다 참가국과 참가인원 기록을 경신했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이 냉전으로 ‘반쪽 대회’가 됐던 것과 대비되는 부분이다. 외신들은 분단국가인 한국에 냉전으로 대립하던 각국이 모인 장면을 보며 ‘냉전종식의 신호탄’이라는 의미를 부여했다.
재정 측면에서도 당초의 우려를 불식했다. 당시는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의 이스라엘 선수단 테러사건으로 보안비용이 폭증했고,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이후 몬트리올시의 파산 등으로 올림픽 유치 회의론이 퍼지던 시기였다. 올림픽조직위원회는 대회에 총 2조3826억 원이 투입돼 2520억 원의 흑자를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당시 상황에서 회계의 오차범위를 다소 고려한다 해도 예상보다 훨씬 더 큰 성공을 거둔 것만은 분명했다.
대회운영 자체도 성공적이었다. 전 국가 차원의 역량을 결집한 결과였다. 개막 전까지만 해도 성공 여부를 반신반의했던 세계 스포츠계는 서울올림픽의 매끄러운 대회 운영을 칭찬했다. 대회기간 총 237개 세부 종목의 경기 중 지연된 경기는 단 6개뿐이었다. 대회에서는 냉전의 양 축이었던 소련과 미국이 나란히 1, 2위를 기록했고 동독이 3위에 올랐다. 한국은 금메달 12개, 은메달 10개, 동메달 11개로 역대 최고성적인 4위를 기록했다.
세계는 서울로, 서울은 세계로… 올림픽 이후 달라진 한국
서울올림픽은 대한민국의 도약에 커다란 시너지를 준 것으로 평가된다. 이를 두고 이홍구 전 국무총리는 “한국인은, 특히 젊은이들은 서울올림픽 이후 왕년의 고질적인 고립주의, 패배의식, 열등감을 털어버렸다”고 표현했다. 김운용 전 IOC부위원장은 “일본의 메이지유신이 일본인에게 신분에 상관없이 성공할 수 있다는 의식을 심어준 것처럼 서울올림픽도 우리 국민에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었다”고 말했다.
경제 측면에서 ‘3저호황(저달러·저유가·저금리)’과 맞물린 올림픽의 성공은 오늘날까지도 한국경제의 근간을 이루는 수출산업에 커다란 호재가 됐다. 올림픽은 ‘코리아’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던 세계 각국에 한국의 발전된 모습을 알렸다. 한국 경제의 국제적 지위가 올라간 것이다. 한국 기업의 공격적인 세계무대 진출이 시작된 시점도 서울올림픽 이후부터다.
전반적인 사회 모습도 대한민국은 올림픽 전후로 딴판이 됐다. 서울에 쏠린 세계의 이목은 민주화를 앞당겼다. 노동계의 요구를 수용해 최저임금법이 제정된 것도 1988년이다. 임금이 높아지자 내수가 급격히 성장했다. ‘마이카 시대’로 대표되는 소비시대가 도래했다. 학교에서는 단계적으로 급식이 시작됐고, 먹거리와 생활용품을 공산품이 채워가기 시작했다. 올림픽을 계기로 마련된 지하철, 아파트, 체육시설 등의 사회간접자본도 한국인의 삶을 바꿨다.
서강대 기술경영대학원 김동률 교수가 고 권태균 사진작가와 함께 여행하면서 음미한 20곡의 노래와, 각각의 노래가 탄생한 장소에 관한 얘기를 곁들인 음악 여행 에세이다. 두 사람은 노래의 배경이 된 곳을 찾아가 곡이 탄생한 당시 시대 상황과 뒷이야기, 그 시절 청춘들의 낭만과 사랑, 그리고 각각의 노래가 이 땅에 미친 영향 등을 탐색한다. 수록된 노래는 열병처럼 지나온 젊은 날의 사랑과 그리움이 녹아 있는 것들이다. 아득한 낭만을 뒤로하고 세월 속에 야위어가는 추억을 이야기한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를 비롯해, 문득 슬퍼지거나 외로워질 때 돌담길과 함께 회상하게 되는 이문세의 ‘광화문 연가’ 등 가버린 젊음과 옛사랑을 추억하며 묵직한 그리움에 젖게 한다.
INTERVIEW:: 늙은 노래를 위한 찬가를 부르다 의 저자 김동률
‘인생도, 청춘도, 꿈도 노래와 함께 간다. 열아홉 순정은 황혼 속에 슬퍼지고 얄궂은 노래와 함께 세월은 간다. 이 책은 삶의 신산함을 겪은 이 땅의 중년에게 바치는 소박한 헌사다.’ 의 저자 김동률 교수가 쓴 서문의 일부다. 늙은 노래가 많이 불리는 사회가 건강하고 행복하다고 말하는 그를 만나봤다.
을 통해 중·장년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노래를 통해 지금 중·장년층의 곤고했던 지난 시절을 공유하고자 했습니다. 이 책은 ‘산업화와 민주화의 굴곡 속에 험난하고도 신산한 삶을 보낸 중년세대에게 바치는 조그만 헌사’라고 하겠습니다. 386세대는 취업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는 등 산업화의 과실을 누리면서도 민주화의 진통 속에서 고민이 많았죠. 보도블록을 깨 던지면서도 낭만을 꿈꾸었고, 그 과정에서 노래는 그 시절 황폐해진 젊음을 위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곡절 많고 사연 많은 파란만장한 시절의 의미를 담아보고자 했습니다.
소개된 노래 중 그때 그 시절, 그리고 현재까지 가장 큰 위로가 됐던 곡은 무엇인가요?
책에 수록된 모든 노래가 위로가 됩니다. 굳이 골라내자면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사계’, 그리고 송창식의 ‘고래사냥’을 꼽겠습니다.
요즘 대중가요 가사에 비추어 볼 때, 그 시절 노래에는 시처럼 아름답고 깊이 있는 가사가 많죠. 어떤 노래 가사를 가장 좋아하나요?
역시 백설희의 ‘봄날은 간다’(손로원 작사, 박시춘 작곡)가 가장 뛰어나죠. 1,2,3절 모두가 폐부를 찌르는 페이소스가 녹아 있습니다. 생의 근원적인 슬픔을 건드린 이 같은 노랫말은 이전에도 없고 앞으로도 다시 나타나기 어려울 것으로 봅니다. ‘열아홉 시절은 황혼 속에 슬퍼지더라’ 등의 구절은 김소월의 시구를 능가하는 빼어남이 있죠.
신촌은 예나 지금이나 젊음의 거리입니다. 신촌에서 음악과 얽힌 옛 추억이 있는지요.
대학 시절 신촌에서 하숙 생활을 했어요. 요즘 상업적인 홍대입구와는 다르게 그 시절 젊음의 거리였고, 386세대의 풋풋함과 순수함이 담겨 있죠. 당시 신촌 골목에는 락카페가 많았고 인근 여자 대학생과의 미팅 이후 생맥주로 사랑과 꿈을 나누곤 했습니다. 장밋빛 인생, 러쉬, 우드스탁 등의 술집은 386세대에게는 정신의 고향과도 같습니다.
책에 담지 못한 노래 중에서 중년들이 공감하고, 기억할 만한 게 많을 텐데요.
아직 담지 못한 노래가 많습니다. 고 김정호의 빼어난 명곡들, 서정성이 짙은 해바라기의 노래들, 강산에, 김수철, 그리고 7080시대를 풍미했던 히식스, 키 브라더스, 사랑과 평화 등등 그룹사운드들의 노래들도 앞으로 살펴볼 예정입니다.
△ 김동률 서강대 기술경영대학원 교수
경향신문 견습기자로 언론계에 입문하여 10년간 취재기자로 활동했다. 현재 YTN에서 와이드 인터뷰 프로그램 을 진행하고 있다.
“머리는 차갑게 가슴은 뜨겁게”라는 말을 흔히 합니다. 동의보감에서 이른바 두한족열(頭寒足熱), “머리는 차게 발은 뜨겁게 하라”고 한 건강의 원리와 비슷한 말입니다. 아기를 재울 때에도 머리는 서늘하게, 가슴과 배는 따뜻하게 해주는 게 육아의 상식입니다.
그러나 ‘머리와 가슴’은 ‘머리와 발’보다 상징하는 바가 더 많고 큽니다. 머리가 지혜·지식·두뇌·슬기·판단, 이런 말과 관계된다면 가슴은 열정·용기 사랑 ·양육 ·포옹, 이런 말로 연결됩니다.
무엇이든 알기 쉽게 둘로 나누는 사람들의 말투를 빌리면 머리는 파란색, 가슴은 빨간색일 것입니다. 머리는 햄릿형·아침형 인간, 가슴은 돈키호테형·저녁형 인간으로 연결된다고 볼 수도 있겠지요. ‘지와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독일 작가 헤르만 헤세의 에도 이성적인 나르치스와 감성적인 골드문트가 대비됩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을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관찰하고 판단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무리이며 그럴 경우 문제점과 부작용이 발생하기 마련입니다. 이 세상에는 완벽하게 선한 사람도, 전적으로 악한 사람도 없습니다. 좌우, 동서, 상하, 고저, 장단, 남북, 남녀, 음양, 전후, 장유(長幼), 고금(古今), 귀천(貴賤)과 같은 말은 분별과 조화를 위해서 있는 것이지 대립과 쟁투를 부추기려고 만든 게 아닙니다.
분별이란 참 좋은 말입니다. 서로 다른 일이나 사물을 구별하여 가르는 게 첫 번째 풀이이지만, 세상일에 대한 바른 판단이나 생각, 어떤 일에 대해 배려하고 마련하는 것이라는 뜻이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분별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에 섣불리 휩쓸리지 않습니다. 논어 위령공(衛靈公) 편에는 “군자는 긍지를 갖되 싸우지 않고, 군중과 함께하되 무리를 짓지 않는다(君子矜而不爭 群而不黨)”는 공자의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을 주희(朱熹)는 “자긍심을 가진 군자는 남에게 굴복하지 않되 싸우려 들지 않고, 군중과 함께 어울리되 편협된 무리를 지어 개인의 영리를 구하지 않는다”고 해석했습니다. 또 논어 위정(爲政) 편에서는 “군자는 두루 친하되 결탁하지 않지만(君子周而不比) 소인은 결탁하되 두루 친하지 못한다(小人比而不周)”고 했습니다.
가장 결정적인 말은 자로(子路) 편에 나오는 “군자는 남들과 조화롭게 지내지만 동화되지 않고(君子和而不同) 소인은 동화되지만 조화롭게 지내지 못한다(小人同而不和)”는 말입니다. 군이부당(群而不黨)·주이불비(周而不比)·화이부동(和而不同)이 바로 분별과 조화를 강조한 동양의 성어입니다.
김상협 전 고려대 총장이 1970년에 취임사를 통해 제시한 것은 ‘지성과 아울러 야성, 동양과 아울러 서양, 현대와 아울러 원시, 주체성과 아울러 국제성, 한국과 아울러 세계, 치밀한 계산과 아울러 우직한 의리’ 등이었습니다. 이런 이원공간을 대승적 견지에서 자유자재로 왕복할 수 있는 새로운 슈퍼네이션(Supernation)을 만들어 나가자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말들과 너무도 다르게 여러 가지로 갈라져 있습니다. 남북, 동서, 좌우, 계층, 연령, 성별 등 이런 분별의 요소들이 갈등과 대립의 요소로만 작용하고 있습니다. 통합·소통·화해는 이를 수 없는 이상이며 선거공약집에나 들어 있는 문자로 보일 뿐입니다.
영화 ‘변호인’의 내용을 모두 사실로 믿고 새삼스럽게 노무현 전 대통령을 존경하고 숭배하는 사람들, 영화 ‘국제시장’이 나오자 이를 소재로 젊은이들을 가르치고 훈계하려 드는 세대 간에는 간극과 균열이 너무도 큽니다. 보수 대 진보의 진영논리와 쟁투는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머리만 있고 가슴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아니, 머리로만 생각하고 가슴으로 받아들이지 않거나 머리에만 있고 가슴에는 없는 것들을 두 군데에 다 있는 것처럼 과장하고 확대, 재생산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머리에 있는 것들은 가슴에 있는 것으로 조절해야 하며 가슴에 있는 것들은 머리에 있는 것으로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젊어서 사회주의자가 아닌 사람은 가슴이 없는 것이고 늙어서도 사회주의자인 사람은 머리가 없는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젊음은 혁명과 개조를 꿈꾸고 추진하는 도전과 개척의 시기이지만 늙음은 경험과 경륜의 힘을 통해 생의 완성과 사회의 성숙을 지향하는 시기입니다. 젊은이들이 문제의식이 없고 나이든 노인들이 지혜가 없다면 개인과 사회의 불행일 것입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세상에서 가장 먼 길은 머리에서 가슴”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 데 70년이 걸렸다”고 고백했습니다. 김 추기경의 명언입니다. 김 추기경은 “머리와 입으로 하는 사랑에는 향기가 없다”는 말도 했습니다.
이렇게 머리와 가슴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6월이 특수한 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6월은 남북의 달, 이념의 달, 호국보훈의 달입니다. 6월 6일 현충일,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6·15 남북 공동선언, 그리고 벌써 65년을 맞은 비극의 6·25전쟁에다 한국 민주화의 역사에 큰 분수령이 된 6·10민주화항쟁과 6·29선언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6월은 정치와 이념으로 들끓는 시기입니다. 구호와 시위로 거리가 넘칩니다.
그러나 정치나 이념보다 끝내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이며 현장입니다. 최근 논쟁 중에서 흥미로웠던 것은 생계형 성매매 허용 논란이었는데, 집창촌 해체에 앞장섰던 김강자 전 서울 종암경찰서장이 허용을 주장했습니다. 집창촌 해체 과정에서 성매매 여성들의 적나라한 현장을 알게 돼 생각이 바뀐 것입니다.
나는 대학에 다니는 동안 민족이념연구회라는 서클 회원으로 활동한 바 있습니다. 4학년이 됐을 때 신입생들이 ‘민족이념’이 뭐냐, 뭐가 우리 민족의 이념이냐고 자꾸 물었습니다. 대답이 궁한 나머지 “거꾸로 가자. 먼저 ‘회’가 뭔지, 어떻게 하면 모임이 잘 될는지 생각해 보자. 서로 잘 어울리는 게 중요하다. 그 다음에 연구를 하고 대화와 토론을 하는 방법을 익히자. 그런 다음 민족이념에 대해 본격적으로 검토하자.”
이렇게 ‘거룩하게’ 말했던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비슷한 취지로 의견을 밝혔습니다. 다시 그 상황이라 해도 그렇게 말해줄 것 같습니다. ‘회’라는 현장, ‘연구’라는 현장을 먼저 알려 하는 게 필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현장이며 그곳에서 머리와 가슴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인간에 대해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입니다. 이념이나 결론이 어디에서 어떻게 도출됐으며 얼마나 현장과 깊이 연동되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인간이 배제된 이념은 다만 재앙일 뿐입니다. ‘인간의 얼굴을 한 이념’을 강조합니다.
글 유성호 문학평론가·한양대 교수
1945년 8월 15일, 한 사상가의 표현대로 ‘도적처럼’ 찾아온 해방은, 고통스러운 식민지 시대를 살아온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새로운 가능성과 맞닥뜨리게 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우리 근현대사에 가장 중요한 전기를 마련해준 이날은 무엇보다도 그동안 박탈당했던 모국어의 근원적 회복을 가져다주었다. 이때는 일제 강점기에는 간행되지 못했던 이육사, 윤동주, 심훈 등의 유고시집이 간행되었고, 여러 종의 사화집도 잇달아 출간됨으로써 역동적인 문학 출판 시대를 열게 된다.
해방 직후 출간된 박목월, 박두진, 조지훈의 『청록집』과 서정주의 『귀촉도』는 우리 나라의 정상 시편으로 손색이 없는 위상을 보여주었다. 특별히 『청록집』은 자연을 근대시의 주요한 시적 대상으로 아름답게 재현해내면서 우리 말의 가락과 이미지를 높은 예술적 형상 속에서 구현함으로써 이 시대의 가장 화려한 사화집으로 등극되었다. 더불어 김영랑, 김광균, 유치환, 김광섭, 김현승, 신석정, 김상옥, 이호우 등이 우리 서정시의 미적 경지를 우뚝하게 올리는 가편들을 쏟아냈다.
소설 쪽에서는 해방 전후의 현실을 다룬 작품들이 눈에 띄었는데 염상섭, 이태준, 채만식, 김동리, 계용묵, 허준, 황순원 등이 큰 주목을 받았다. 이처럼 당대적 상황 인식으로서의 소설은 8·15가 외세에 의한 불완전한 해방이었으며, 결과적으로 이념 대립과 남북 분단을 낳았다는 점에서 진정한 의미의 민족사적 출발이 되지 못했다는 점을 증언하였다. 그 불충분한 해방이 분단과 전쟁을 곧 야기한 것은 우리가 두루 아는 역사적 사실이다.
순수서정에 뿌리를 내리다
1950년대 벽두에 터진 6·25전쟁은 우리 역사를 근원에서부터 바꾸게 되었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물리적 충격을 주었던 이 전쟁은 이후 우리 문학의 가장 강력한 존재 근거이자 동시에 한계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전쟁과 가난, 반공과 서구 추수라는 공통된 체험을 통해 이 시기의 문학적 주체들은 문학적 아비를 상실한 채 폐허 속을 거닐게 된다. 이때부터 우리 시의 주류 미학은 ‘순수서정’에 뿌리를 내리게 되는데, 특별히 서정주는 독자적인 상상력과 탁월한 시적 의장(意匠)으로 한국 시의 정상으로 우뚝 서게 된다. 공동사화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 (1949)을 펴낸 ‘신시론’ 동인들은 모더니즘 시운동으로 한 시대를 풍미하였다.
이 시기의 소설은 전쟁을 직접 겪은 작가들의 경험적 증언으로 채워졌다. 그들의 작품 세계는 방향 상실과 불안 의식 등에서부터 생활의 고통에 이르기까지 매우 섬세한 심리적, 현실적 리얼리티를 담게 되는데 김동리, 김성한, 이범선, 오유권 등이 그 사례일 것이다. 그리고 전쟁으로 인한 피해 의식의 치유 과정을 그린 손창섭, 서기원, 반전 이념을 담아낸 박영준, 황순원, 선우휘, 오상원 등도 기억할 수 있다. 이밖에도 장용학, 이호철, 임옥인, 박경리, 강신재, 박연희, 오영수 등이 커다란 주목을 받았다. 작가들이 절대 가난과 싸우면서 소중한 기록을 남긴 중요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세 가지 흐름에 불을 지피다
1960년대에 일어난 4·19혁명은 민주주의의 경험과 가치를 인식시키는, 호환할 수 없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 시기의 시문학은 대개 세 가지의 흐름을 형성한다.
하나는 당대의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그에 대한 저항의 저류로서 김수영과 신동엽이 주축을 이루었다. 이들을 통해 우리 시는 4·19혁명이 가져다준 이념적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민주, 민족주의의 상보적 형상화를 경험하게 된다.
그 다음 하나는 인간 내면과 형식 탐구의 흐름으로서 김춘수가 대표적이다. 김춘수의 시는 관념의 배제를 노리면서 존재와 언어의 관계에 대해 천착하는 일관성을 보였다. 마지막 하나는 전봉건, 김종삼, 천상병처럼 전 시대로부터 창작을 꾸준히 이어온 시인들에 의해 구축된 현대적 감각의 세계였다. 김남조, 박재삼, 박용래, 김관식 같은 서정의 흐름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소설 쪽의 대표적 사례는 최인훈의 『광장』이었다. 이 작품은 남과 북의 이념적 대립과 주인공 이명준의 자살로 상징되는 절망, 자유와 평등의 문제를 심각하게 제시하였다. 그런가 하면 분단과 외세의 문제를 정면에서 다룬 남정현의 『분지』는 이 시기 최대 문제작으로 거론되었다. 그리고 분단 문제는 박경리, 이호철 등의 작품에서 심화된 형상을 얻는다. 특유의 감각적 문체로 도시적 삶의 위선을 그린 김승옥의 서사는 ‘감수성의 혁명’이라는 별칭을 받을 정도로 1960년대 문단을 강타하였다. 그만큼 이 시기는 우리 문학의 다양화가 비로소 이루어진 때라고 할 수 있다.
민중적 서정시와 노동현실 소설화
1970년대의 문학적 감각과 상상력은 ‘유신’이라는 정치 체제와 전태일 사건이라는 충격적 사건으로부터 그 형식과 내용이 시작되었다. 이 두 가지 축은 당시의 작가나 시인들로 하여금 권력에 대한 문학적 관심의 본격화를 가져오게 하였다. 시에서는 민중적 서정시가 경제 발전의 불균형과 그에 따른 민중의 피해 과정을 가장 본격적으로 그려냈는데 신경림, 고은, 김지하, 조태일, 정희성, 문병란 등의 시가 주목되었다.
그런가 하면 황동규, 정현종, 마종기, 김광규, 김명인 등이 보여준 음역은 현대 사회의 메커니즘이 주는 소외와 내적 파탄을 증언, 가시화함으로써 한국 시의 수준을 한 단계 올려주었다.
이 시기의 소설은 현실적 삶에 초점을 맞추는 양상이 본격화하였다. 그 대표적 형태가 농촌 공동체의 해체와 근대화에 대한 비판이었고 이문구가 그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노동 현실의 소설화는 황석영, 윤흥길, 조세희 등이 주도하였다.
또 이 시기에 비로소 씌어지는 대하소설 박경리의 『토지』, 권력을 비판한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 분단 문제를 다룬 윤흥길의 『장마』 등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기의 또 하나의 특징은 역사소설이 호응을 얻었다는 점인데, 이는 4·19로 비롯된 역사의식의 성장과 급격한 시대 변동에 따른 역사적 단절감의 회복 욕구가 작용한 결과일 것이다. 또한 1970년대는 대중소설이 폭넓게 출현하였다. 한수산, 최인호, 조선작, 조해일, 박범신 등이 그 구체적 목록이다. 이 시기는 우리 문학의 사회적 상상력이 깊어진 시기로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
‘창작과비평’ 그리고 ‘문학과지성’
1980년대는 광주민주화운동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 안에 구비된 강한 기억과 저항의 힘은, 창작과 비평 모두에서 정치적 상상력의 만개를 가져왔다.
시 부문의 대표적 흐름은 노동시라고 불린 일군의 경향으로서 박노해와 백무산의 활약이 단연 돋보였다. 또한 김남주는 줄기찬 저항성으로 한 시대의 가장 뜨거운 전사 시인이 되었다. 이러한 흐름에 일정한 대타적 영역을 형성한 해체시는 기존의 시문법에 대해 강렬한 도전을 보냈으며, 정치적 전위가 아니라 미학적 전위로 나섰다. 특히 황지우는 언어 실험을 극단까지 밀어붙인 탁월성으로 문학적 성가를 누렸다. 이어 박남철, 김영승, 장정일 등이 더욱 급진적인 실험적 해체시를 양산했다. 또한 정치적 격변의 와중에서도 개인사의 굴곡을 통한 사회 반영 혹은 인간의 존재 탐구에 매진해온 시인들로는 이성복, 최승자, 최승호, 기형도 등이 있었다.
소설 쪽에서는 1980년대를 휩쓴 진보의 열기에서 비켜선 자리에서 문학을 했던 작가들도 있는데 그 대표 격이 이문열이다. 소설 기법의 새로움을 추구한 작가군으로는 이인성, 최수철이 있다. 그리고 기법 실험의 극점을 보여준 서정인의 『달궁』, 역사소설의 기법으로 현실을 우회적으로 그려낸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등도 소재 확대를 가져온 예에 속한다.
광주민주화운동의 충격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보여준 작품들도 많이 창작되었다. 문순태, 임철우, 윤정모, 최윤 등은 그러한 유에 속하였다. 해방 직후의 삶을 통해 역사적 비극의 원천을 형상화한 김원일의 『겨울 골짜기』와 조정래의 『태백산맥』도 이 시기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성취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소시민의 삶을 구체적으로 쓴 소설이나 언어 자체를 탐색하는 소설들도 다수 나왔다. 양귀자의 『원미동 사람들』 등이 그 실례일 것이다. 이 시기는 매체와 작가군이 폭증한 시대로서 대중이라는 개념이 본격화한 때라고 할 수 있다.
여성 작가들의 대활약
1990년대에 들어서는 여성적 감각에 뿌리를 둔 시쓰기 방식이 크게 대두하였다. 그 주자로 우리는 유안진, 천양희, 신달자, 노향림, 김승희, 최문자, 김혜순, 황인숙, 허수경, 정끝별, 나희덕, 박라연 등을 꼽을 수 있다.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생태적 상상력의 시편들이 쏟아진 것도 괄목할 만한 현상이었다. 이시영, 이하석, 고형렬, 고진하 등의 시나 『녹색평론』 같은 근대적 기획에 대해 의혹과 도전을 보내는 패러다임이 이에 중요한 흐름을 이루었다. 이러한 지향은 ‘정신주의’라는 명칭을 부여받는 일군의 시적 경향으로 나아가기도 하였는데 조정권, 최동호 등이 높은 성취를 이루었다.
현실인식에 바탕을 둔 시적 발언은 김정환, 도종환, 박영근, 최두석, 이재무, 안도현 등에 의해 이어졌다. 이른바 ‘몸’의 시학이라고 불리는 일군의 경향은 정진규, 김기택, 채호기, 박주택 등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는 주체, 권력, 이성, 중심의 언어에서 타자, 탈권력, 감성, 주변의 언어가 목소리를 얻어가고 있는 것을 실증하였다.
소설 부문에서는 여성성의 잠재적이고 대안적인 가능성을 문학적 감수성과 결합시켜 풍요로운 형상화가 이루어졌다. 공지영, 오정희, 신경숙, 은희경, 이혜경, 김향숙, 공선옥 등이 주도한 이러한 패러다임은 관용과 너그러움, 희생, 포용성으로 그 정서적 지향을 움직여갔으며, 어떤 것도 절대 구심이 될 수 없다는 융통성 있는 사유를 보여주었다. 박완서의 『아주 오래된 농담』과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이 지나간 시대의 오래된 기억들을 독자 앞에 되불러주었으며, 구효서, 정찬, 성석제, 김영하, 김연수, 한강, 전성태 등도 자기 몫을 충분히 하며 새로운 언어들을 갈무리하였다.
이러한 복합적 흐름을 20세기에 형성했던 우리 문학은 21세기에 들어 더욱 활기찬 모습으로 그 외연과 실질을 확장하고 심화해가고 있다.
시에서는 이른바 ‘미래파’로 상징되는 새로운 시적 경향이 중요한 비평적 대상이 되었고, 소설 쪽에서도 다양한 작가군이 들어와 새로운 창작 지형을 만들어가고 있다. 그야말로 해방 후 70년 동안 우리 문학이 일구어온 역사는, 이렇게 가파른 역사와 삶을 비추어온 별자리처럼 한편으로는 선연하고 한편으로는 흐릿하기만 하다. 하지만 여기 거명된 이름만으로도 충분히 아득하지 않은가?
광복 이후 출판시장은 1950년의 6·25, 1960년의 4·19와 1961년의 5·16, 1972년의 10월 유신, 1980년의 광주민주화운동, 1989년의 현실사회주의의 몰락, 1997년의 IMF 외환위기, 2008년의 글로벌 금융위기 등으로 말미암아 대체로 10년을 주기로 많이 읽히는 책의 유형이 달라진다. 광복 이전이 암흑기였다면 광복 이후 6·25가 터지지 직전까지는 민족문화 재건기로 볼 수 있다. 이후 1950년대는 전후 허무주의, 1960년대는 이데올로기, 1970년대는 산업화, 1980년대는 역사성, 1990년대는 대중출판, 2000년대는 글로벌 출판, 2010년대는 디지로그 출판 시대로 정리할 수 있다.
글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 사진
◇ 광복~1949년 민족문화 재건
“아버지가 들고 온 『조선역사』란 책에 빨려들어 밤새도록 읽고 모자라 수업시간에까지 읽다가 들켰다. 그 바람에 전교생 앞에서 10여분이나 을지문덕이 수나라의 대군을 무찌르는 대목을 소리 높여 읽는 수모를 겪었다. 그 바람에 학생들은 그 책이 동이 나도록 모두 구입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서울대 사학과 교수였던 김성칠(金聖七, 1913∼1951)이 보고 겪은 6·25에 대한 생생한 기록을 담은 『역사 앞에서』(창비)에 실린 신경림 시인의 추천사에 나오는 글이다. 신 시인은 한 칼럼에서 『조선역사』가 “한글을 깨치고서 처음 읽은 책”이라고 말했는데 이 책이 광복 이후 최초의 베스트셀러다.
해방 공간 시기에는 우리 역사와 글, 문학을 펴내고자 하는 욕구와 읽고자 하는 욕구가 넘쳤다. 이런 욕구 때문에 『우리말 큰사전』(한글학회, 1947), 『조선어표준말모음』(조선어학회, 1946) 등의 사전과 학술교과서가 인기를 끌었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베스트셀러로는 『해방 전후』(이태준), 『내가 넘은 삼팔선』(후지와라 데이, 1949), 『나는 자유를 선택하였다』(크리미센코, 1948),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윤동주, 1948), 『목넘이 마을의 개』(황순원), 『렌의 애가』(모윤숙), 『청록집』(조지훈 외) 등이 있다.
◇ 1950년대 전후 허무주의
1950년대를 상징하는 베스트셀러는 정비석의 『자유부인』이다. 한국전쟁으로 한반도의 전체 인구 3000만 명 중 300만 명이 목숨을 잃은 전쟁의 후유증이 적지 않았을 때에 대학교수 부인의 파탄적 행동을 그린 소설이 1년 만에 10만 부가 팔리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자 이 소설이 “문화의 파괴자로 중공군 50만 명에 해당하는 적군”(서울대 법대 황산덕 교수)이라는 공격이 나왔고, 작가는 열띤 논쟁을 벌여야 했다. 『우리말 큰사전』이 여전히 인기를 끄는 가운에 젊은 세대에게 유머감각을 크게 심어준 『얄개전』(조흔파)이 등장했다. 이 시대의 베스트셀러에는 『슬픔은 강물처럼』(최희숙), 『마음의 샘터』(최요안), 『청춘극장』(김래성), 시집 『사랑이 가기 전에』(조병화) 등이 있다.
◇ 1960년대 이데올로기
1960년대를 상징하는 베스트셀러는 최인훈의 『광장』이다. 소설 속 철학도 이명준은 북에 올라가 북한의 정치체제에 가담해보지만 남의 ‘밀실’과 북의 ‘광장’ 어디에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고 방황하다 제3국행을 택한 끝에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이 이야기는 4·19의 성과를 5·16세력에게 빼앗긴 경험을 지닌 지식인에게 깊은 허무감을 안겼다. 이 시기의 베스트셀러에는 『머무르고 싶었던 순간들』(박계형), 『저 하늘에도 슬픔이』(이윤복), 『석녀』(정연희), 『조선총독부』(유주현), 『거대한 뿌리』(김수영), 『금강』(신동엽) , 『빙점』(미우라 아야코) 등이 있다.
◇ 1970년대 산업화
통기타와 청바지, 생맥주로 대표되는 ‘청년문화’가 등장한 1970년대는 『별들의 고향』(최인호), 『영자의 전성시대』(조선작), 『겨울 여자』(조해일) 등의 이른바 ‘호스티스 소설’들이 한 흐름을 이뤘다. 산업사회로 본격적으로 접어드는 시기에 여성의 상품화 현상을 ‘호스티스’라는 사회적 존재에 초점을 맞춰 다루고 있는 이 작품들은 고도성장의 이면에 숨은 우리 사회의 그늘을 제대로 보여주었다. 그늘은 또 있었다. 부랑노동자의 삶을 그린 황석영의 『객지』와 도시빈민의 삶을 그린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다. 이 시대의 주목할 베스트셀러로는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박완서), 『김약국의 딸들』(박경리), 『서울 1964년 겨울』(김승옥), 『데미안』(헤르만 헤세) 등이 있다.
◇ 1980년대 역사성
1980년대는 이념의 시대이자 불의 시대였다. 대학과 신문사에서 쫓겨난 지식인들이 출판계에 유입되어 변혁이론의 창출과 보급에 앞장섰다. 대표적인 성과로 강만길의 『한국근대사』와 『한국현대사』를 비롯한 근현대사 관련 서적을 꼽을 수 있다. 1980년대는 대하소설의 시대이자 시의 시대이기도 했다. 황석영의 『장길산』, 조정래의 『태백산맥』, 홍명희의 『임꺽정』, 박경리의 『토지』 등은 모두 대중에게 정치적 각성을 하게 만든 ‘역사교과서’였다. 1980년대 내내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이나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 등의 이념시나 민중시가 거대한 트렌드였지만 정작 불로 뜨거워진 대중의 몸을 식혀준 것은 쉽게 읽히는 서정시였다. 서정윤의 『홀로서기』, 도종환의 『접시꽃 당신』, 이해인의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 등의 시들은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대중에게 위안을 안겨주었다. 이밖에 이 시기를 상징하는 베스트셀러로는『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마광수),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바스콘셀로스), 『숲속의 방』(강석경), 『인간시장』(김홍신) 등이 있다.
◇ 1990년대 대중출판
현실사회주의가 붕괴된 직후 시작된 1990년대가 만들어낸 최고의 상품은 ‘개인’이었다. 1990년대 최초의 밀리언셀러인 『세계는 넓고 (내가) 할 일은 많다』(김우중)에서부터 1990년대 말의 서갑숙의 『나도 때론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까지 책 제목에 ‘나’는 넘쳤다. 세계화와 정보화가 동시에 진행되면서 『컴퓨터 길라잡이』(임채성 외), 『꼬리에 꼬리를 무는 영어』(한호림),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스티븐 코비) 등 개인의 성공 욕망을 자극하는 실용서나 자기계발서가 상한가를 치기 시작했다. 1990년대 초반의 출판시장을 휩쓴 『소설 동의보감』(이은성), 『소설 토정비결』(이재운), 『소설 목민심서』(황인경) 등의 역사인물소설 트로이카들도 사실상 자기계발서 역할을 했다.
세계화에 대한 반작용이었던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유홍준),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김진명), 『일본은 없다』(전여옥),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박영규) 등 민족주의를 자극하는 책들이 인기를 끌었으며,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박완서), 『물 위를 걷는 여자(신달자)』 ,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천년의 사랑』, 『모순』(양귀자),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공지영), 『혼자 눈뜨는 아침』(이경자) 등 사랑(결혼)과 일이 충돌하는 모습을 그린 소설들이 인기를 끌었다. 이 시대를 상징하는 베스트셀러로는 『퇴마록』(이우혁), 『드래곤 라자』(이영도), 『여보게 저승갈 때 뭘 가지고 가지』(석용산),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잭 캔필드 외), 『오체불만족』(오토다케 히로타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최영미) 등이 있다.
◇ 2000년대 글로벌 출판의 시대
2000년대는 절대 고독의 개인이 발견되는 여정이었다. 고학력 사회가 되었지만 고학력자일수록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기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비정규직 노동자가 양산되는 바람에 성공욕구만 넘쳐났다. 덕분에 베스트셀러의 산실은 자기계발서였다.『부자아빠 가난한 아빠』(로버트 기요사키 외),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스펜서 존슨), 『살아 있는 동안 꼭 해야 할 49가지』(탄 줘잉),『화』(틱낫한), 『설득의 심리학』(로버트 치알디니), 『아침형 인간』(사이쇼 히로시), 『마시멜로 이야기』(호아킴 데 포사다 외), 『배려』(한상복),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켄 플래차드 외), 『긍정의 힘』(조엘 오스틴), 『시크릿』(론다 번) 『이기는 습관』(전옥표)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2000년대 후반에 대중은‘성공’을 버리고 ‘행복’으로 말을 바꿔 탔다. 2000년대의 베스트셀러로는‘해리포터’ 시리즈(조앤 K. 롤링) ,『다빈치 코드』(댄 브라운), 『연금술사』(파울로 코엘료),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과 같은 블록버스터 소설, MBC 방영도서,‘Why’를 비롯한 스토리만화 등이 있다. 이 밖에 『엄마를 부탁해』(신경숙), 『국화꽃 향기』(김하인), 『가시고기』(조창인) 등과 같은 극도로 축소된 인간관계를 다룬 소설들과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류시화)도 있다.
◇ 2010년대 디지로그 출판의 시대
1998년의 국지적인 IMF 외환위기와 2008년의 ‘글로벌 금융위기’는 차원이 달랐다. 전 세계에 불어 닥친 광풍 앞에 개인은 오로지 스스로를 위로하며 대안적인 사람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2010년대 초반에는 ‘셀프힐링’의 책들만이 인기를 끌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김난도)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혜민) 등 멘토가 던져주는 ‘위로와 공감’의 어록집, 『정의란 무엇인가』(마이클 샌델),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장하준) 등 사회적 어젠다를 담은 책, 대안의 삶, 성찰, 관계나 소통 등을 다룬 책들이 인기를 끌었다. 이밖에 『해를 품은 달』(정은궐), 『미생』(윤태호) 등의 미디어셀러와 『서울 시』(하상욱) 등이 이 시대를 대표하는 베스트셀러다.
이 시대에 인기를 끄는 것은 위로와 공감의 어록, 관계와 소통을 다룬 책들이다. 이제 개인은 오로지 스스로를 위로하며 대안을 모색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일까.
한기호(韓淇皓)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
공주사범대학 국어교육학 학사, 2000년 제41회 한국백상출판문화상 기획부문 출판상, 학교도서관 저널 대표이사.
그때 1974년,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서울에 사는 이모가 졸업 겸 입학선물로 독일제 만년필 로텍스를 우편으로 보내왔다. 내 생애 처음으로 Made in Germany 제품을 손에 쥐었던 짜릿함이었다. 놀라운 사실은 그 만년필은 잉크통이 고무 튜브가 아니라 빙빙 돌려서 쓰는 나사식이라는 사실이었다. 파랑 잉크가 환히 들여다보이는 풍경은 가히 시골 소년에게 신세계의 발견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곧 아버지의 차지가 되었다.
글 소설가 김호경
일러스트 윤민철 작가
“중학교 1학년이 만년필을 쓰기에는 너무 어리다”는 이유에서였다. 아버지는 그 대신 ‘빠이롯트 파랑 잉크’ 한 병과 작은 조개가 박힌 ‘빨간 플라스틱 펜대’ 그리고 ‘10개들이 펜촉’을 사다주셨다. 그 필기구들을 책가방에 담아 학교에 가니 만년필이 없다 하여 꿀릴 일은 조금도 없었다. 한 반 60명의 아이들 중 빠이롯트 만년필을 가진 아이는 두세 명, 그보다 좋은 미제 파카 만년필을 가진 아이는 한두 명에 불과했다.
수업이 시작되면 초록색 걸상 위에 책을 펴고, 노트를 펴고, 오른쪽 위에 파란 잉크병을 놓고 그 옆에는 펜대를 놓았다.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면서 펜촉에 잉크를 찍어 필기를 했는데 문제는, 부산스러운 사내아이들인지라 잉크병을 쏟는 사단이 종종 생긴다는 것이었다. 아차, 하는 순간 잉크병이 쏟아지면 책상은 난장판이 되었는데, 가장 좋은 해결책은 선생님이 던져주는 백묵이었다. 쏟아진 잉크 위로 백묵을 굴리면 순식간에 잉크를 빨아들여 비록 책과 노트에 온통 얼룩이 남기는 해도 짝꿍이나 앞 친구의 교복에 잉크를 묻힐 일은 없었다.
중학교 2학년 때 용돈을 모으고 모아 중앙전파사(그때는 전파사에서도 만년필을 팔았다)에 가서 로텍스 만년필을 샀는데 800원이었다. 어렴풋한 기억으로 버스요금이 30원 하던 시절이었으나 800원짜리 만년필은 그다지 비싼 것이 아니었다. 국산 빠이롯트 만년필은 최소 2000원이었다.
한때 만년필은 필수품이었으나 이제 시대의 소명을 다한 물건이 되었다. 또 사용하는 주체와 용도도 달라졌다. 학생에서 어른으로 이동했고 ‘필기’에서 ‘부의 과시’로 변한 것이다. 1천만원이 넘는 만년필이 심심치 않게 팔린다는 뉴스를 들으면 그 옛날 펜촉에 잉크를 찍어 공부했던 60년대생의 가난한 자화상이 떠오른다. 그래도 그 시절이 더 아름답고 행복하지 않았던가?
김일은 아버지, 조용필은 형
아름다운 시절에 대해 논하자면 어느 세대가 가장 아름다웠는지 단순비교는 어렵다. 그러나 50년대생은 너무 고달프고, 70년대생은 격변이 사라진 세대였고, 80년대생은 오늘날 88만원 세대가 된 현실에 비추어보면 60년대생이 가장 아름답고, 가장 격동적이고, 추억이 많은 세대다. 하지만 추억이 많다 해서 어찌 암울함이 없었겠는가?
10집 건너 한 집의 담벼락에 ‘반공방첩(反共防諜)’이 붙어 있고, 10월 유신과 긴급조치가 사람들의 삶을 꽁꽁 얼어붙게 만들고, 국민교육헌장을 외우지 못하면 집에 가지 못하고, 오후 6시가 되면 국기하강식에 걸려 모든 동작을 멈추고 길에 허수아비마냥 우뚝 서서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는 태극기에 경의를 표해야 했던 시절이었다.
독재와 압제도 강했지만 일상에서의 흥분도 강했다. 1년에 두어 번 세계프로레슬링 경기가 열렸는데 전 국민을 흑백TV 앞에 불러모은 주인공은 그 위대한 김일이었다. 레슬링 경기는 이틀에 걸쳐 열렸는데 첫날은 B급 선수들이 싱글매치와 태그매치로 경기를 했다. 우리의 영웅 김일은 반드시 두 번째 날, 마지막 경기의 태그매치에 출전했다. 상대 선수는 대부분 일본, 아니면 미국에서 온 레슬러들이었다. 그들은 아주 흉측하고 반칙만 일삼는 괴기한 ‘놈’들뿐이었다. 복면을 쓰고, 알 수 없는 괴성을 내지르고, 심판을 패대기치고, 팬티 속에 흉기(주로 포크)를 감추는 아주 질이 나쁜 놈들이었다.
위기에 몰리면 심판이 안 보는 틈을 이용해 괴춤에서 포크를 꺼내 우리 선수를 마구 찔렀다. 국민의 분노가 극에 달할 무렵 김일이 등장한다. 그가 등장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국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이제 니들은 다 죽었어!”
그러나 적들은 여전히 악랄하다. 김일은 코브라 트위스트에 걸리고, 매트에 쓰러지고, 심지어 피를 흘리기도 한다. 모든 국민이 탄식을 내지를 때 김일은 불사조처럼 일어나 비장의 무기를 꺼낸다. 상대 선수의 머리를 잡고 한방, 꽝! 박치기를 날리는 것이다. 그 순간 온 나라가 환호성으로 끓어올랐다. 그 이후 2002월드컵이 열리기 전까지 그런 환호성은 우리나라엔 없었다.
그 통쾌함을 간직한 60년대생은 1979년 10·26 이후 길고긴 민주화 투쟁에 들어갔다. 민주화운동은 1950년대 생이 주축이 되어 시작했으나 그것의 열매를 맺게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세대는 60년대생이었다. 지금은 그 이름마저 희미하게 잊힌 박종철(1964년생) 고문치사 사건으로 6월 민주항쟁이 절정에 달했고 6·29선언을 이끌어냈다. 그리고 모든 것은 갑작스레 끝났다. 사실 60년대생의 역사적 소명은 1987년 6월 29일에 끝났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통쾌함과 더불어 즐거움도 많은 시절이었다. 매우 일요일 저녁 , , 으로 이어지는 골든 트리오 프로그램은 서민들에게 웃음과 격정을 안겨주었다. 1970년대 후반까지 학생들은 한 달에 한 번 단체영화 관람을 했다. 수요일 5교시 수업이 끝나면 운동장에 모여 학생주임 선생님의 훈시를 듣고 3열종대로 줄줄이 극장으로 향했는데 그마저도 없었다면 가난한 집 아이들은 1년 내내 영화 한 번 못 볼 처지였다. 50원을 내고 , , , , 등을 보았는데 가장 인기가 있었던 것은 이소룡 영화였다. 를 보고 온 다음 날이면 막대기 2개를 잘라 쌍절곤이랍시고 만들어서 어설픈 무술을 선보이는 아이들이 꼭 있었다.
1977년 이 대 히트를 치면서 국민가수로 등극한 조용필은 이후 연예인 전성시대를 열었다. 사상 최초로 제주도 사투리를 넣어 을 부른 혜은이는 최초의 여자 국민가수였는데 두 사람이 없었다면 우리나라 대중문화는 오늘날처럼 활짝 꽃을 피우지 못했을 것이며, 30년 후쯤 등장하는 아이돌 가수들도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 김추자, 이은하, 최백호, 정태춘·박은옥 등이 있었고 맹인가수 이용복도 잊을 수 없는 명가수다. 60년대 생이 가장 잊을 수 없는 가수는 를 부른 샌드페블즈, 를 부른 활주로, 어느 날 혜성처럼 나타나 전국을 열풍으로 몰아넣은 산울림이지 않을까?
‘교련’, 그리고 ‘약속다방’
까까머리 고등학생 시절은 흑 아니면 백이었다. 겨울에는 검정 교모에 검정 교복을 입고 검정 운동화를 신었으며, 여름에는 흰색 상의에 회색 바지를 입고 흰색 운동화를 신었다. 교련이 있어서 그나마 옷이 두 벌이었다. 1주일에 두 번 교련 수업을 받고 1년에 한 번 교련검열을 받았다. 대학 2학년까지 교련수업을 했는데 다행인 것은 군대를 3개월 면제해주었다는 점이었다. 그때는 군대가 30개월이었다.
대학생이 되면서는 다방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다방!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단어다. 그곳에는 모나리자를 닮은 후덕한 마담이 있었고 엉덩이를 촐싹거리며 테이블 사이를 누볐던 허벅지 굵은 레지가 있었다. 또 푹신한 안락의자가 있었고 음악이 있었고 뿌연 담배연기가 있었고 매캐한 유황냄새가 있었고 따뜻한 커피가 있었다. 그리고 우리들의 청춘이 고스란히 있었다. 우리는 다방에서 친구를 만났고, 미팅을 했고, 데이트를 했고, 역적모의를 했다.
모든 역사는 다방에서 시작돼 다방에서 끝났다. 테이블 위에 놓인 육각 성냥통에서 성냥을 꺼내 수수께끼를 풀다가 간혹 호기를 부려 레지에게 커피를 사주곤 했다.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마담은 우리가 감히 근접하지 못하는 어른이었다. 대한민국 모든 곳에 있었던 약속다방, 양지다방, 별다방, 난초다방, 호수다방, 궁전다방, 아리랑다방, 아네모네다방... 당신은 분명 이 다방 중 한 곳에서 시간을 때웠을 것이다.
이제 다방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우리세대가 잃어버린 것 중에서 가장 가슴아픈 것이 바로 다방이다. 잃어버린 것은 또 많다. 위문엽서, 채변검사, 도시락검사, 대중가요의 양대 산맥이었던 남진과 나훈아, 오라잇~ 소리를 경쾌하게 외쳤던 버스 안내양, 명랑노래로 전국을 석권했던 듀엣 콤비 서수남과 하청일, 아나운서의 대명사였던 후라이보이 곽규석, 원맨쇼의 왕 남보원과 백남봉, 전 세계 시청률 1위였던 , 20년 넘게 치열한 대결을 펼친 미원과 미풍, 자유를 구가했던 구수한 싱어송라이터 송창식, 유치찬란한 대중통속 잡지의 대명사 , 꿈과 희망을 키워주었던 소년잡지 , 느끼한 목소리로 레코드판을 돌렸던 유리상자 안의 그 남자 DJ(일명 판돌이), 독서의 갈증을 풀어준 마음의 양식 삼중당문고, 70년대 영화계를 이끈 미남과 추남 배우 알랭 들롱과 찰스 브론슨... 이 모든 것들이 시대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들 모두에게 진정으로 고마움을 표한다.
비록 ‘판타레이’ 일지언정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판타레이(panta rhei)’라고 말했다. “모든 것은 변한다”는 뜻이다. 2004년 정계 은퇴를 선언한 JP(김종필)는 김영삼(YS), 김대중(DJ)과 더불어 1980~2000년대를 지배한 이른바 3김 중 1명이었다. 386세대와 떼려야 뗄 수 없었던 JP는 정계를 은퇴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싫든 좋든 세상은 변한다.”
그 변화의 중심에 60년대생이 오롯이 있었다는 사실은 아름다운 영광이자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김호경(金虎卿) 작가
37살의 비교적 늦은 나이인 1997년 제21회 오늘의작가상에 장편 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경희대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장편 , , 여행에세이 , , 스크린셀러 , 등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