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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짓하는 가을 산! 안전이 우선!
- 우리나라 등산 인구가 200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산을 찾는 인구는 늘었지만 산행 시 안전의식은 그다지 높지 않다. 지난 3일 50대 중반의 현직 부장검사가 도봉산 암벽에서 하강하다 로프가 풀려 추락한 뒤 병원으로 옮겼지만 결국 사망했다. 이 사고로 로프를 제대로 매주지 않은 40대 등반가가 과실치사 혐의로 경찰에 입건됐다. 안전이 최우선 언젠가 10월 단풍철에 동료 7명과 함께 설악산에 갔다가 일행 중 한 명이 사고를 당해 함께 간 사람들 모두 같이 고생한 적이 있다. 백담사에서 봉정암을 거쳐 대청봉, 소청봉을 지나서 조금 쉬고 있을 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리 무리 중 나이가 가장 많은 사람이 조그만 바위 위에서 사진을 찍다가 젖은 돌에 미끄러져 넘어졌는데 한쪽 다리 정강이뼈가 부러졌다. 119에 신고를 했지만 “비가 오고 안개가 끼어 구조헬기가 뜰 수 없다며 대피소 부근까지는 어떻게든 내려와야 한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나무 두 개를 베어 로프로 얼기설기 묶고 재킷 몇 장을 깔아 들것을 만들어 다친 사람을 눕힌 다음 네 사람이 한쪽씩 잡았다. 나머지 두 사람은 배낭을 나누어 짊어졌다. 환자를 들고 비탈진 산길을 내려오는데 들것이 수평을 이루지 않으면 환자가 죽는다고 통증을 호소했다. 앞에 사람들은 높이 들고 뒤에서는 낮게 내려 수평을 맞추면서 어렵게 하산했다. 희운각 대피소에서 대기하고 있던 구조대원의 도움으로 응급조치를 받은 동료는 구급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갔다. 큰 수술을 받고 병원에 두 달 정도 입원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서울시에서 2017년 발표한 바에 의하면 3년간 등반사고를 당해 구조한 사람 3627명 중 28.3%인 1,028명이 9월에서 11월에 구조되었다. 특히 구조된 10명 중 5명, 즉 50%는 51세~70세인 장·노년층이었다. 이는 가을철에 산을 찾는 사람들이 다른 계절보다 많고 사고도 자주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나이 든 사람들이 사고에 더 취약하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자료이다. 발에 잘 맞은 등산화를 골라야 필자의 경험에 따르면 산행 시 발에 잘 맞는 등산화를 골라야 한다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발이 편해야 한다. 그래야 장시간을 걷더라도 발이 아프지 않고 피로를 덜 느낀다. 그리고 어느 계절이든 산에서는 자신의 체력이나 경험만을 믿고 자만하지 말아야 한다. 욕심부려 산행목표를 자신의 체력이나 능력 보다 맞지 않게 먼 거리 혹은 너무 높은 곳에 가지 말아야 하고 시간을 여유 있게 가져야 한다. 무리한 산행을 줄여 사고를 피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몸을 움직일 때는 한눈팔지 말아야 한다. 산에는 돌부리, 나뭇가지나 등걸, 구덩이, 낭떠러지 등 사고를 유발하는 위험요소가 널려 있다. 이동 중에 지나치게 두리번거리는 것은 삼가야 한다. 산을 좋아하는 시니어라면 등산할 때 반드시 실천해야 할 안전수칙을 숙지해야 한다. 자신의 여건에 맞게 무리하지 않는 범위 내의 산행한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고 즐기는 시간을 누리고 삶의 활력을 찾아 심신의 건강을 지켜나가기를 권유한다.
- 2018-10-12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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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의 아그네스’ 닥터 리빙스턴 役 배우 오지혜
- 처음에는 “무슨 추모공연이냐” 반문하며 차갑게 돌아섰다. 공간예술을 하던 이를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추모한다는 말인가. 의미 없다며 외면하려던 찰나 불현듯 생각났다. “선배님이 이 연극에서 연기 참 잘했지.” 좋은 작품을 한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평소 성격답게 세상과 쿨(?)하게 안녕하고 떠난 그녀를 대신해 무대에 오르기로 했다. 조명이 켜진다.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나긋하게 깔리던 닥터 리빙스턴 역의 윤소정, 아니 배우 오지혜(吳芝惠·50)가 빛을 따라 걸어간다. “안녕, 무대에 계신 엄마.” 왜 우리 엄마를 추모하시려는 거죠? 10월 5일 동양예술극장에서 막이 오르는 연극 ‘신의 아그네스’의 닥터 리빙스턴 역에 배우 오지혜가 낙점됐다. 작년 6월 향년 72세 나이로 작고한 윤소정 배우 추모 헌정공연의 의미가 있는 이번 공연에서 27년 차 중견배우인 오지혜가 윤소정의 역할을 맡았다. 자신의 또 다른 직업을 ‘엄마아빠 딸’이라고 우스갯소리로 말하는 배우 오지혜. 우리나라 대표 배우 오현경과 윤소정의 딸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했던 영화감독 윤봉춘의 외손녀, 1960~70년대 한국 영화 중흥기를 이끌었던 시나리오 작가 윤삼륙의 외조카로 3대째 가업을 잇고 있다. “조금 의아했어요. 나야 엄마를 누군가가 기억해주는 것이 고맙기는 한데 왜죠? 하루 정도의 추모제는 이해하겠는데 추모공연이라잖아요. 좀 미적거렸더니 이번 ‘신의 아그네스’를 기획하신 신연욱 대표님이 제가 안 해도 작품을 무대에 올리겠다 하더라고요.” 작년 6월 갑작스레 패혈증 증세를 보이다 일주일 만에 세상을 떠난 배우 윤소정. 오지혜의 말을 빌리면, 영화 필름 빨리 돌리기하듯 허망하게 세상과 이별을 고했다. 생사라는 것이 인간의 의지로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지만 예쁘고 멋진, 아름다운 모습만을 남기고 떠난 배우가 오지혜의 어머니 윤소정이다. 그런데 이건 좀 아니었다. ‘故 윤소정 선생 추모 헌정공연’이라는 부제가 붙었는데 배우인 딸이 출연을 안 한다? 게다가 닥터 리빙스턴 역할을 하기에 그녀 나이가 적역이었다. “머리에 그림을 좀 그려봤어요. 제가 공연 보러 갈 거 아니에요. ‘잘 봤어요, 수고하세요’ 하고 자리 뜨는 모습? 이건 좀 아니지? 딱히 바쁜 일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하기로 했죠. 결론을 말하면 우리 연극인들이 윤소정 선배님을 그리워하며 ‘그 사람이 참 잘했었던 작품이지’라고 하면서 좋은 작품을 하나 올린다! 그게 이번 공연의 주제랄까요?(웃음)” 닥터 리빙스턴을 연기하면서 애써 윤소정을 소환해낼 생각은 없다. 무엇보다 현재 입장에서 닥터 리빙스턴을 읽어보니 너무나 자신에게 잘 어울리는 배역이었다. “엄마가 리빙스턴 역할을 워낙 잘해서 그렇지 이미지는 제가 더 맞아요. 내가 더 박사스러워. 그리고 여기 캐릭터 딱 나예요. 옳은 거, 그른 거 엄청 막 따지고 드는 게 말이죠. 작품 연습을 하다가 연출가가 저한테 하는 말이 ‘딱히 연기하실 거 없이 무대에 오르시면 되겠네요’ 그러더라고요.” 그래도 문득 자신의 입을 통해 엄마 윤소정의 목소리가 언뜻 나온다고 했다. “공연의 해석이 예전과 다르긴 해도 어떤 면에서는 조금씩 겹쳐지는 부분이 있을 거예요. 제가 비극 연기할 때 엄마의 모습이 보인다는 얘기를 듣곤 했거든요. 실제로 연습할 때 엄마 연기했던 것이 생각나잖아요. 살짝 소름이 돋았어요.” 아그네스를 꿈꾸던 소녀, 성장통을 겪다 “‘신의 아그네스’를 처음 접한 게 중학교 2학년 때였어요.” 1983년 ‘신의 아그네스’ 초연 당시 오지혜가 살던 아파트 지하 마을회관에서 공연 연습을 했다. 학교 갔다 집에 오면 연습실로 가서 책상 밑에 쭈그리고 앉아 배우들이 연기하는 모습을 구경했다. “아그네스를 연기하던 (윤)석화 언니가 그때 스물일곱 살이었어요. 아그네스가 최면에 걸려서 아이 낳는 장면이 있어요. 어린 나이에 너무 민망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고요. 그러면서 아그네스 역할이 내심 좋았어요.” ‘신의 아그네스’는 어린 오지혜에게 꿈의 무대였다. 중앙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졸업 당시 연기로 주목받았기 때문에 내심 아그네스 역할을 기대했다. 그런데 대학 동기인 신애라가 아그네스 역을 맡았다. 마음속에 상처가 났다. “안 예쁜 여배우 설움을 평생 받아서.(웃음) 제가 데뷔했을 때 엄마가 세상물정 모른다면서 여배우는 향후 100년은 무조건 예뻐야 한다고 하셨어요. 병원에 갔더니 당시 턱 성형비가 400만 원이었어요. 엄마한테 원판 불변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면서 대신 그 돈 주시면 유럽여행 다녀오겠다고 했어요. ‘지혜 씨 연기는 잘하는데, 좀…’ 이런 얘기를 제가 살면서 얼마나 많이 들었겠어요? 한참 후 나이 좀 먹어서 고현정 씨 컴백 드라마였던 ‘봄날’(SBS)에서 재즈 가수로 나왔어요. 별로 연락도 없던 언니가 전화를 하더니 ‘텔레비전에 사람 얼굴이 나오니까 너무 좋더라(웃음)’ 하는 거예요. 나이 육십 된 여배우도 얼굴에 손대잖아요. 죽어라고 버텼더니 이제는 선생님 소리 들으면서 늙어가는 것 같아요. 어영부영하다 보니 벌써 오십이 넘었네. 아그네스는 아니지만 리빙스턴 역도 하고 말이죠.” 미안하단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신의 아그네스’는 아기를 낳은 뒤 잔인하게 살해한 20대 초반의 수녀 아그네스, 그녀의 정신분석을 위해 수녀원으로 온 닥터 리빙스턴과 원장 수녀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연극이다. 1979년 미국의 존 피엘마이어가 쓴 이 작품은 종교적 관점의 기적과 구원에 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다. 이번 공연에서는 기적이라는 주제를 현 사회와 좀 더 연결시켜 바라보고자 했다. “제가 먼저 발제했지만 연출가도 공감했던 부분이에요. 이 시대의 기적은 학대받던 아이가 세상으로 나와서 상처를 치유하고, 정상적인 관계를 맺고 스스로 행복을 찾아가는 사람으로 커가는 거라고 봐요. 국가와 사회, 가정과 학교가, 시스템이 상처받은 아이를 구원하는 게 기적인 거죠.” 어른들로부터 제대로 된 도움 한 번 받지 못하고 해맑은 얼굴만 남기고 세상을 떠난 아이들이 결국 우리 시대가 낳은 아그네스라고 했다. 초기 연극이 양심과 신, 신앙, 기적에 관한 이야기라면 2018년에 보여주고자 하는 아그네스에는 아동학대와 기성 간의 부조화, 아이들을 구하지 못한 죄스러움을 담았다. “세월호 사고가 났을 때 많이 힘들었습니다. 연극배우로서도 회의가 왔고요. 시인인 제 친구는 몇날 며칠 고민해 시를 들고 광장에 나가 자신의 시를 시민들에게 읽어주더라고요. 위안을 주는 예술. 그런데 저는 몇날 며칠 대사를 외우고 무대에 서왔지만 사회적인 역할과 동떨어져 있었어요. 배 안에 타고 있던 아이들이 내 딸보다 한두 살 많았어요. 유가족이 거의 다 제 또래였기 때문에, 안 그래도 배우들은 남의 감정에 빨리 이입이 되는 편이잖아요. 죽을 것 같았어요. 언젠가 미안함을 전하고 싶었는데 마침 ‘신의 아그네스’가 저한테 온 거죠.” 열심히 안 뛰면 내 것은 없다 ‘신의 아그네스’ 연습으로 한창 바쁜 요즘. 오지혜만의 닥터 리빙스턴을 만들어가고 무르익은 연기자로서 도리를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라다니는 것이 하나 있다. 소위 부모님의 후광을 받고 태어난 사람으로만 보는 날선 시선이다. 나이 먹을 만큼 먹었고 이제 그만할 때쯤 됐는데 유독 오지혜에게만은 가혹해 보인다. “엄마를 추모하기 위해서 이번 연극을 하는 거잖아요. 누군가 저에게 ‘역할을 유산으로 받았네?’ 하더군요. 데뷔하고 지금까지 들어온 얘기지만요. 아! 내가 정말 무지하게 열심히 안 하면 안 되겠구나. 인생을 몰라서 너무 아이 같다는 생각이 콤플렉스였어요. 그래서 20대 때 배낭 메고 미친 듯이 여행 다녔어요. 큰 자산이었죠. 정말 최고의 선생은 여행이에요. 나중에 여행 책도 써볼까 해요.” 천생 배우인 부모님 밑에서 자란 것 때문에 받은 편견 외에 남들에게 모나게 보인 이유가 있다. 때때로 회자된 오지혜의 소신발언이 문제됐다. 그녀는 이 시대의 약자를 위해 사회 참여를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하다고 느꼈다. 지난 몇 년간 그녀의 사이다 발언에 미디어들이 예민하게 반응하던 때가 있었다. 아버지 오현경은 앞에는 나서지 말라고 했다. 어머니 윤소정은 달랐다. “어렸을 때도 아빠는 혹시 데모하면 저더러 뒤에 서라고 하셨어요. 엄마는 ‘우리 아버지 故 윤봉춘 감독님께서 말씀하시길 예술가로서 동시대 사람들에게 동시대의 문제를 제시하고 슬픔을 공유시키지 않는 것은 예술가가 아니라고 했다. 지혜 이야기가 맞다’ 하셨어요. 외국은 연예인이나 사회 지도층이 나서서 행동하면 지지하고 응원하는데 우리는 그렇지 않더라고요.” 그녀는 지난 두 정권에서 블랙리스트 문건에 이름이 올랐다. 꽤 오래 라디오 DJ를 했는데 하루아침에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제가 말하는 게 불편하다고 개편도 아닌데 잘렸어요. 처음에는 그런가보다 했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어요. 심한데? 장난이 아닌데? 할 정도로요.” 10년을 블랙리스트에 오른 연예인으로 낙인 찍혀 있다 보니 덕분에 책에 파묻혀 사는 시간이 많았다. 매일이 여행이고 산책이었다. SNS에 글을 쓰고 일상을 정리하는 시간을 지속했다. 이 세상에 없는 엄마에게 “우리 엄마 정말 열심히 일했어요. 제가 그렇게 묶여 있는 동안 저도 도와주셨어요. 여섯 살 때부터 무대에 섰는데 끝까지 한 번도 쉰 적 없이 말이죠. 평생 소녀 가장으로 살았던 게 지겨웠나봐요. 뭐가 급한지 제 책 나오는 거도 못 보고 가버리셨네요. 엄마가 책을 정말 기다렸어요. 원래 계획대로라면 5월에 나오는 거였는데 늦어졌어요.” 장례를 치르고 난 두 달 후 “딸? 책 언제 나와?” 하고 엄마가 그렇게 기다리던 에세이 ‘날씨맑음-오늘도 여행 같은 하루’가 출판됐다. 지금까지 SNS에 적었던 글들을 모아 만든 책. 책 표지를 열고 본문을 채 읽기도 전에 ‘이제는 이 세상에 없는 엄마에게’라는 문구 때문에 눈물부터 쏟아냈다. 어디 나가서 쥐어박히고 다니는 딸이었지만 엄마한테는 크나큰 자랑이었다. “훗날 글 쓰고 살고 싶은데 어쩌다 수필집이 나왔어요. 다음에는 소설도 쓰고 싶고 아직 아무한테도 안 보여줬는데 단편소설도 쓰고 있어요.” 인터뷰를 마치면서 어머니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된 소감을 물었다. “엄마는 ‘이런 감정으로 대사를 쳤구나’ 혹은 ‘나랑 해석이 다르네’ 하는 부분도 있어요. 연기에 맞고 틀린 건 없잖아요. 보면서 엄마의 해석이 또는 제 해석이 마음에 드는 사람들이 있는 거겠죠. 참 의미 있고 재미있어요. 특히 부모와 같은 직업인에 무대 위에 서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감정이잖아요. 이런 자산을 가지고 태어난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신께 감사드립니다.”
- 2018-09-25 0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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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명인간 증후군
- 정식 용어는 아니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투명인간처럼 행동하는 것을 자주 본다. 거리를 걸어가는데 맞은편에서 오는 사람이 이쪽에서 걸어가는 사람과 부딪칠 정도로 직진해 온다.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지면 어느 한쪽이 비켜 갈 태도를 보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다. 결국, 약한 사람이 비켜 간다. 앞에서 오는 사람이 덩치가 큰 경우는 위협적이기도 하다. 걸을 때 좌우로 기우뚱거리면서 오는 사람은 그 사람이 어느 쪽으로 가려는지 분간하기도 어렵다. 자신만 직진하려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경우이다. 길을 걸어가는데 갑자기 서거나 뒤 돌아서는 경우도 그렇다, 뒤에서 오던 사람은 관성이 생겨서 그대로 직진하려다가 충돌하게 된다. 자신이 마치 투명인간이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차도에서 자동차가 그러다가는 추돌 사고가 일어난다. 그런 경우는 ‘안전거리 미확보’라며 뒤 차가 책임질 일이지만, 인도에서는 그렇지 않다. 전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끝 지점에 도달했는데 앞사람이 걸어가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는 경우도 많다. 그러면 뒷사람은 밀치고 가거나 부딪쳐야 한다. 전철을 가까스로 탔을 때 입구에 서버리는 사람도 있다. 내릴 때도 마찬가지이다. 뒷사람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어서 그렇다고 본다. 비 오는 날 우산 때문에 생기는 투명인간 증후군도 있다. 우산을 펴는데 우산이 펴지면 어느 정도의 공간을 차지하게 되는 것을 고려하지 않고 일단 펴고 보는 것이다. 우산이 탄성으로 펴지는 과정에서 지나가던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 젖은 우산은 물기가 다른 사람에게 닿는 일도 있다. 우산을 접고 걸어갈 때도 우산을 앞뒤로 내저으며 걸어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계단을 올라갈 때 그러면 뾰족한 우산 꼭지로 뒤따라 올라가는 사람의 얼굴에 상해를 입힐 수도 있는 일이다. 전철에서 서 있는 사람이 우산을 들고 있으면 흔들릴 때마다 위협을 느낀다. 배낭의 위험도는 이미 홍보가 되어 있다. 본인은 편하지만, 남들은 경계의 대상이다. 배낭을 메고 있다가 갑자기 돌아서면서 다른 사람의 머리를 치거나 배낭의 플라스틱 고리나 지퍼 손잡이가 다른 사람의 피부를 손상할 수 있는 것이다. 밀도가 높은 곳에서는 공간이 없으므로 조심해야 한다. 화장실에서 일을 보고 세면대에서 손을 씻고 나오는 사람 중에는 물기를 바닥에 내젓는 사람이 많다. 막 들어오다가 그 물기가 자신의 팔이나 손에 뿌려지면 기분 좋을 사람은 없다. 바깥으로 밀어서 여는 문을 사용할 때도 문을 갑자기 밀치고 나가면 마침 그때 밖에 있던 사람에게 어떤 피해가 가는지 생각하지 않는다. 안 보이기 때문에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가정하에 조심스럽게 문을 밀치고 나가야 한다. 음식점에서 식사를 마치고 뜨거운 커피 한잔 뽑아 화장실도 가려다가 그런 사고를 당한 경우를 몇 번 보았다. 사람은 움직이는 유기물이다. 그러므로 진로에 방해가 되거나 충돌할 경우 상처를 입을 수도 있다.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있다면 자신이 투명인간처럼 행동하지 않는다. 배낭의 경우처럼 다른 경우에도 이런 점을 홍보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무례하다기보다는 모르고 있거나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없어서 그런 것이라고 본다.
- 2018-08-20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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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까운 공원에서 운동을
- 올해 55세의 처가 친척 조카인 P는 등산을 갔다가 심장에 고통을 느꼈다. 함께 간 일행이 119에 급히 연락해서 헬기가 왔지만, 병원에 도착하기 전에 숨을 거뒀다. 심장마비인데 시간이 많이 지체된 까닭이다. 방송에 소개된 80대의 현직 사장님이 있었다. 쉼 없이 운동을 해서 무척 건강한 분이었다. 이 분이 산에 오를 때 배낭 속에 꼭 명함을 챙기는 것이 리포터의 눈에 들어왔다. 산에서 거래처 손님을 만날 일도 없을 텐데 명함을 챙기는 이유를 물어봤다. 대답은 간단했다. 혹 쓰러지면 누군가 발견하고 연락을 해달라는 의미로 연락처 전화번호를 꼭 챙긴다고 했다. 녹지공간과 우울증이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서울대학교의과대학 예방의학과 교수팀에서 지역사회건강조사에 참여한 20세 이상 성인 23만 명을 대상으로 분석했다. 그 결과 1인당 녹지공간이 적을수록 우울증과 자살률이 높아진다고 밝혔다. 1인당 녹지공간이 가장 적은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은 가장 많은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보다 우울증을 경험할 위험과 자살을 시도할 확률이 1.27배나 높았다. 녹지공간을 찾기 위해서 운동이라는 건강을 위해서라도 밖으로 나가야 한다. 지난해 비타민 D 결핍으로 병원을 찾은 환자가 1만 6천 명으로 4년 새 9배로 늘었다. 이 중 50세 이상 중장년층이 절반을 넘어 섰다는 것은 경종을 울리는 통계다. 햇볕은 면역력을 높여주고 비타민D를 만들고 행복감과 안정감을 가져다주는 신경 전달 물질이자 숙면 물질로 불리는 세로토닌의 생성을 돕는다는 것을 알려진 과학이다. 하루 햇볕은 최소 15분 이상은 받아야 한다. 햇볕을 받으며 푸른 나무 사이로 씩씩하게 걷는 것이 좋다. 햇볕만 받으며 걷기와 같은 유산소 운동만으로는 부족하다. 팔굽혀펴기나 무거운 것을 들어 올리는 근력운동도 해야 한다. 근력운동을 꺼리면 팔다리 가늘어지고 배만 불룩 나오는 'ET'형이 된다. 이런 여러 가지 문제점을 해결해주는 것이 집 가까운데 있는 공원이다. 첫째로 공원은 여러 사람이 찾기 때문에 혹 모를 위험에 주위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병원을 급히 갈 일이 생겨도 병원과 가깝고 교통편이 좋다. 둘째로 근력을 키울 수 있는 다양한 운동기구가 많다. 셋째로 나무들이 많고 산책로가 잘 정비되어있다. 오래 걷고 싶으면 공원을 여러 바퀴 돌면 된다. 넷째로 의자 등 쉼터가 잘 정비 되어있다. 정신건강을 위해 적절한 자리의 의자에 앉아 음악을 들어도 되고 책을 읽어도 좋다. 마음 맞는 사람과 장시간 대화도 가능하다. 다섯째 공원관리인이 있어 깨끗하고 화장실 등 부대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다. 금연, 금주 지역으로 쾌적하다. 장거리 등산을 하고 들뜬 기분에 하산주(下山酒)라는 이름으로 부어라 마셔라 하다 보면 등산 효과가 반감되는 일이 많다. 오고 가고 시간도 많이 허비한다. 동네 부근의 공원은 그럴 일이 없다. 공원의 크기나 규모에 따라 다르지만, 배드민턴장이나 에어로빅 시설도 갖춘 곳이 많다. 가끔은 여행 삼아 먼 거리를 가는 것도 좋지만 평소 운동은 공원을 잘 이용하면 좋다.
- 2018-08-14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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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민과 함께할 멋진 미래, 김밥 안에 있다! -김밥셰프 김락훈
- 소풍 때만 되면 새벽같이 일어나 엄마와 함께 김밥을 말았다. 김밥 가게가 생겼을 때 ‘과연 이게 팔려?’라고 생각했다. 요즘은 소풍날 아침이면 너도나도 김밥집으로 향한다. 흔하디흔한, 빠르고 간편한 먹거리 김밥. 일상 속에서 쉽게 집어 들던 김밥에 형형색색 특별함을 더해 세계 속에 화려한 모습으로 선보인 이가 있다. 바로 ‘김밥 셰프’로 불리는 김락훈(金樂勳·48) 셰프다. 김밥을 지구촌에 전하다 보니 요즘은 모든 재료의 중심이 되는 우리 농민과 함께 나아가는 일에도 깊은 관심을 갖게 됐다. 김밥 세계화를 넘어 근원적인 문제에 접근하며 소통의 물꼬를 트고 있다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한국을 대표하는 요리를 꿈꾸는 김밥 김락훈 셰프를 만난 곳은 서울 종로구 청와대사랑채 한식홍보관. 미국에서 세미나를 마치고 난 뒤 중국 상하이를 거쳐 전날 밤 한국에 도착했다고 했다. 현재 그는 청와대사랑채 한식홍보관 대표로서 한국 문화와 요리를 알리는 일을 담당하고 있다. “오래전에 이미 약속된 시간이었어요. 대림중학교 다문화 학생들과 함께 불고기를 만들고 그것을 넣어 김밥을 만들었습니다. 원래는 외국 관광객 체험 프로그램인데 오늘은 특별한 날이에요. 한국 교육제도 아래에서 공부하는 아이들을 위해 예외 규정을 준 거죠.” 생소한 한국음식을 체험하는 아이들과 어울리며 흥미롭게 시간을 이끌어가는 김락훈 셰프. 1시간여 진행된 요리교실은 자신들이 만든 김밥을 맛있게 먹는 것으로 끝이 났다. 김밥 세프라는 말이 일단은 생소하다. 전자공학과 출신으로 유럽 배낭여행을 갔다가 초밥의 매력에 푹 빠져 결국에는 다다른 곳이 김밥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왜 그는 김밥 셰프를 자처했을까? 김밥에서 가능성을 보다 “저는 혼자서도 잘 놀아요. 내 만족을 위해 살아왔고 사람들의 평가를 크게 받아본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내 잔재주를 적용시키기에는 너무나 좋은 콘텐츠가 김밥이더라고요. 누구 하나 접근하는 사람도 없었어요. 예쁘게만 잘 만들어서 사람들한테 보이면 되는 거고 완성도는 시간이 가면서 축적되는 거고요. 완벽할 수는 없지만 사람들이 내가 하는 작업에 대해 물어보면 받아칠 수 있는 수준은 되려고 노력했습니다. 일식이면 일식, 멕시칸이면 멕시칸대로 김밥 한 개를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은 생긴 거예요. 멕시칸 푸드로 김밥을 만든다고 하면 사람들이 아는 범위와 한계 내에서 그들의 관심을 긁어줄 수 있을 만한, 그 정도 지식만 쌓으면 되는 거잖아요.” 김밥 셰프로서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수준을 위해 공부하다 보니 국내외에서 딴 자격증만 해도 20여 개나 된다. 네덜란드 룩셈부르크세계요리월드컵에서 개인전, 단체전 동메달을 목에 걸기도 했다. 갖춰야 한다고 생각하는 기본 수준이 어느 정도이기에 이토록 끊임없이 매달리는 것일까. “저는 세계 1호 김밥 셰프예요. 저도 저지만 김밥을 의인화해서 셰프란 말을 붙인 거라고 보면 이해가 쉬울까요? 저는 레시피를 만들고 요리하는 세프와는 조금 거리가 있습니다. 시스템을 만들거나 조직하는 사람이라고 저를 설명하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가령 시니어의 신규 직업층을 만들고 싶어요. 한식의 새로운 분야로 발돋움할 수 있는 하나의 성장 자료가 될 수 있도록 말입니다.” 김밥, 세계 속에서 ‘바람’나다 나라 밖에서 한국 김밥을 널리 알리고, 안으로는 농민들과 어떻게 하면 신나고 재미있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게 됐다는 김락훈 셰프. 우연한 기회에 세계 무대에까지 김밤 셰프로서 얼굴을 알리게 됐다. “스스로 더 성장이 필요할 때라고 생각했는데 한국 문화를 알려야 하는 중요한 국제 행사에 저를 불러주시더라고요. 물론 김밥 셰프는 저 하나였고 김밥이라면 잘할 자신이 있었죠. 다만 그때의 저는 아직 그런 중요한 자리에 서기에는 검증이 되지 않은 패였습니다. ‘내가 잘못하면 큰일 나겠구나. 정말 잘해야겠다’ 생각했습니다.” 대한민국을 대표한 공식 행사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스페인국제관광박람회(FITUR)였다. 규모 면에서 세계 최고를 자랑했다. 물론 그 이전에도 다양한 국내외 행사에 참여했지만 뭔지 모를 책임감이 밀려왔다. “그때 결정했죠. 외국 행사에 집중하자. 처음 나간 박람회였는데 규모가 대단했다는 것을 3년 동안 국제박람회를 다니면서 알았죠. 처음에는 비교 대상이 없어서 몰랐고요. 우리나라 김으로 제대로 된 김밥을 만들어 선보였습니다. 그리고 행사에 참여할 때마다 저도 점점 성장했습니다.” 김락훈 셰프가 만드는 김밥은 일반 김밥이 아니다. 다양한 무늬가 돌돌 말린 김과 밥 사이에 표현되며 배색 또한 예술이다. 일명 ‘파티 김밥’. 곰돌이 모양, 꽃 모양 등이 동그란 김밥 안에 담겨 있다. 길게 김을 이어 붙여 행사장에 모인 사람들과 김밥을 말기도 했다. 함께 화합해 만드는 의미와 재미도 있고 잘라 먹어보니 맛도 있는 김밥에 세계 각지에서 모인 관람객들이 흥분했다. “사람들이 어마어마하게 모였습니다. 그 후에 독일 베를린 국제관광박람회(IBT), 한불수교 130주년, 영국 런던 국제관광박람회(WTM) 등 대한민국 정부를 대표하는 자리에 참석해 ‘김밥 쇼’를 했습니다. 다행히도 가는 곳마다 성황이었어요. 실패한 적이 없습니다.” 작년 한 해는 평창동계올림픽 성공 유치를 위한 한국 문화 홍보대사 자격으로 전 세계를 누볐다. 안 가본 나라가 없을 정도였다. 셰프로서는 유일하게 김락훈 셰프가 평창동계올림픽 성화 봉송에 참여했다. “솔직히 성화 봉송은 하고 싶었어요. 인생에서 의미 있는 한 페이지잖아요.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최초에 도전하려고 합니다. 미국 선생님들에게도 김밥과 관련한 강의를 해주고 왔습니다. 미국에는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비빔밥집이 아주 많아요. 그런데 미국 선생님들에게 비빔밥이 아닌 김밥으로 한국 음식 관련 강의를 해온 지가 벌써 4년이나 됩니다. 미국 교육국에 정식으로 등록한 한국 요리 체험 교육도 바로 김밥입니다. 그 전에도 누군가 한국 음식을 가르쳤겠지만 미국 공식 기록에는 음식 체험으로 배운 한국의 첫 요리가 ‘김밥’이 됐다는 의미입니다.” 흠 잡히지 않고 경계를 넘나들다 놀라운 점은 우리나라 한식 분야에도 명망 있고 이름 있는 요리사가 있을 텐데 김락훈 셰프가 그들을 대신해 국가를 대표하고 신나는 한판을 벌였다는 사실이다. 누구의 제자 혹은 정통성을 따져 묻기 좋아하는 한국 사회. 궁중 요리도 전통 한식도 아닌 김밥으로 세계 속에 한국 음식을 알리고 다닌 셈이다. 시기나 질투를 받지는 않았을까? “저는 계파 같은 거 없잖아요. ‘넌 누구니? 쟤는 뭐야?’ 한마디로 이런 거였죠. 김밥 셰프라고는 저밖에 없고 이래라저래라 하기도 뭣하고 말입니다. 그렇게 살펴만 봤는데 제가 자리를 지켜냈잖아요. 수면 아래에서 쭉 보고 있다가 지금은 응원도 해주시고, 잘하고 있다고도 말씀해주십니다. 한 3년 전부터인 거 같은데 이쪽 업계 분들은 처음에 제가 이러다가 말겠거니 생각했답니다. 지금은 절대 포기하지 말라는 말씀도 해주십니다.” 사실 잘나간다는 말을 듣고 있을 때 자칫 큰 코를 다칠 뻔도 했다. 하나밖에 없는 김밥 셰프이니 김밥 체인 사업을 해보자는 제안도 있었다. 구체적인 가능성도 열려 있었지만 서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멈췄다. 주위 사람들도 말렸다. 섣불리 결정을 내렸다가는 낭패 볼 것이 뻔했다. 그 또한 제대로 준비가 안 됐기 때문이다. “잘 보고 길을 걸어온 걸까요? 원맨쇼만 하면서 온 건 아닌지. 망가지면 한순간에 무너지고 나쁜 평가를 받게 될 거 아니에요. 그래서 사업적으로는 절대 서두르지 않는 편입니다.” 팜파티로 농촌과 도시 유통망을 좁히다 김락훈 셰프는 김밥 안에 들어가는 식재료에 관심을 갖고 전국의 농작물과 농민을 연계하는 일을 벌이고 있다. 한국벤처농업대학교에서 교수직을 맡고 있는 이유도 농민들과의 교류 목적 때문이다. “김밥 안에 들어가는 식재료를 다양화하려면 현실적으로 농민과의 접점이 필요하잖아요. 식재료는 농민을 빼고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김밥이든 건강한 음식을 대접하는 한식집이든 농촌에서 식탁까지 안전한 먹거리가 유통될 수 있는 매개체를 만들려고 합니다. 그 운동의 일환이 제가 4년 동안 우리 농민들과 함께하고 있는 ‘팜파티’인 것이죠. 여기에 참여하는 농민들은 팜파티 셰프가 되는 것이고요.” 지금까지 국내외 박람회와 각종 행사, 파티를 하면서 쌓아온 모든 노력을 농민의 자립과 건전한 먹거리 유통망을 다지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김락훈 셰프의 계획이자 바람이다. 올해는 외국 활동을 멈추고 한국에 머물면서 농민들과 함께할 사업과 관련해 진지하게 구상 해볼 생각이다. “요리를 통해 농업을 논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농민들이 믿고 따를 수 있는 매개체도 필요하고요. 말하자면 한국벤처농업대학교 같은 그림도 필요하고, 요리를 할 줄 하는 사람도 필요하고, 판로도 필요하죠. 김밥은 제 스타일로 콘텐츠를 만들어놓았기 때문에 따라만 와주셨으면 합니다.” 자신을 농민 삐끼(?)라고 불러도 좋단다. 생산자로서 농민이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장을 열어주고 싶다고 했다. 7cm 내외 동그란 김밥 안에서 마치 우주를 발견한 사람처럼 농민 이야기에 신이 난 김락훈 셰프다. “흔들리지 않는 사람들과 같이 일을 벌이고 한식 세계화를 위해 뛰고 싶어요. 지금 저와 함께하는 농민, 그분들이면 됩니다.”
- 2018-07-30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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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 아내가 무릎 연골을 다쳐 병원에 함께 가는 중이었다. 자동차 라디오에서 청취자의 사연을 소개하는 코너가 흘러나왔다. 그 내용은 필자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이야기는 이렇다. 등산 중 중간중간 쉬는 시간에 배낭 속 사과를 꺼내 먹고 싶었으나 정상에 올라 먹는 즐거움을 얻기 위해 참았다. 정상에 올라 기쁜 마음으로 사과를 꺼내는 순간 절벽으로 떨어져 결국 먹지 못했다. 그 당시엔 실망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 사과는 애초에 자기의 것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먹고 싶을 때 먹었어야 했는데 나중을 위해 아껴두었다니' 하면서 우리의 삶에서도 미래를 위해 지금의 삶을 억제하며 사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았다는 것이다. 필자 역시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지금까지 일과 더불어 생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았다. 아내는 봉사활동과 다른 일을 하느라 자신의 몸을 돌보는 것을 소홀히 했고 필자도 퇴직 전보다 퇴직 후에 많아진 약속으로 인해 가족에게 신경을 쓰지 못했다. 좋은 일이 있을 때 착용하기 위해 아껴두었던 머플러, 퇴직 후 전원생활을 하면서 농사지을 귀한 씨앗 등 미래를 위해 잘 보관하고 있었지만 정작 그 시간이 오기 전에 사랑하는 사람이 내 곁에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지나간 시간은 다시 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간을 허비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열심히 살아간다. 잠시 일을 미루고 내가 꼭해야 할 일을 생각해보자. 그리고 바로 실천해보자. 업무에 얽매인 삶이 아니라 나를 위한 일을 해보자. 아내의 무릎치료가 끝나면 즐거운 데이트를 하고 싶다. 설령 아내가 거절한다 할지라도. 부부가 함께하는 시간을 가지고 싶다. 더는 건강이 허락하지 않기 전에 말이다.
- 2018-07-16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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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을 돌고 돌아 소설가 되다, 한보영 MBC 전 복싱 해설위원
- 만나고 보니 꽤나 독특한 삶이다. 마치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듯 시간은 하염없이 흘렀다. 완벽하게 전문적이고 색다른 인생담. 전생과 현생을 말하는 듯 세대를 넘나드는 사건 전개. “내가 무슨 인터뷰할 게 있어”로 시작했지만 누구보다 특별하고 치열한 역사 드라마를 고스란히 감상한 느낌이랄까? ‘선데이서울’ 전 방송사 출입기자이자 MBC 전 복싱 해설위원, 등단 1년 차 신인 소설가 한보영(韓寶榮·82) 작가를 만났다. 대한민국 1960~70년대를 주름잡았던 별들의 야사와 링 위의 전쟁이 정신없이 쏟아져 내렸다. 한보영 작가를 만난 곳은 서울시 중구 서울신문 사옥 내 한 커피숍. 세련된 모습으로 단장한 서울 중심부이지만 옛 시절부터 발을 디뎌온 기자 선배의 눈에만 보이는 아지트가 숨어 있다고 했다. “한국체육언론인회가 이 근방에 있어요. 체육기자 출신 모임은 여기에서 하거든. 전 직장인 서울신문 사우회도 여기에 있고, 자주 가는 기원도 이곳이니까 벗어나지 못해요. 아무래도 내가 가는 단골집도 많고요. 교통편도 좋고 나는 광화문이 편해요.” 한보영 작가는 매일 아침 일찍 배낭 하나 메고 되도록 빨리 집을 나선다. “생활에도 리듬이 있고 재미가 있어야 하는데 밋밋한 건 딱 질색이거든. 그러니 집에만 있을 수가 없는 거예요.” 시간을 벌어 글을 쓰고 오랜 지인들 만나 얘기하고 또 짬을 내서 글을 쓴다. 한보영 작가는 작년 4월 손자와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단편소설 ‘너와 나의 끈’으로 월간 문예지 ‘조선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이후 꾸준하게 단편소설을 문예지에 게재하면서 소설가로서 새로운 삶을 그려가는 중이다. “열심히 쓰고 있어요. 작년에 4편을 발표했습니다. 제가 등단했던 ‘조선문학’ 6월호에 작품 하나가 나왔고. 7월은 한국소설가협회에서 나오는 월간지 ‘한국소설’에 신작이 나옵니다. 올해 말까지 한 5개 정도 쓰고 내년 초에 지금까지 썼던 단편소설을 묶어서 단행본으로 내려고 해요.” 하루도 거르지 않고 틈틈이 글을 쓰고 있는 신참내기 소설가. 참 안타까운 현실은 이렇게 정성들여 월간 문예지에 게재를 해도 원고료 주는 곳이 많지 않다. 돈을 염두에 두고 이 일을 했다간 한 글자도 못 쓸 것이 빤하니 금전적 보상은 단념하고 작품활동에만 전념한다고 했다. “나이가 들어가지고 호흡을 고르면서 써야 돼, 쉬엄쉬엄. 그 대신 뭐 시간이 꼭 정해진 건 아니지만 조금씩 쓰다가 나중에 싹 지워버리고 다시 쓰고 그럽니다. 예전에 한 번은 컴퓨터 조작을 잘못해서 다 없어지는 바람에 처음부터 새로 썼다고. 얼마 전에 발표를 했는데 디테일한 점은 좀 모자라는 대신 구성은 오히려 마음에 들더라고요.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겪는 거죠. 글은 쓸 때마다 기분이 제일 중요합니다.” 뭐든 마음에 들면 들이대! 전라북도 남원 출신으로 전주에서 고교 시절을 보낸 한보영 작가는 배구선수로 활약했다. 문제는 한보영 작가가 운동에만 몰두하는 성격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관심 분야가 생기면 일단 발부터 담가보기를 반복했다. “배구부에 있을 때 트럼펫에 관심이 생겨서 밴드부에 들어갔더니 한 선생님이 ‘운동하는 애가 왜 여기에 있냐’며 저를 쫓아냈습니다. 문예부에도 들어갔었어요. 글재주가 있었으니까요. 교지 만들 때 일조했습니다. 대부분 운동부라고 하면 수업시간에 안 들어가잖아요. 저도 그랬어요. 중학교 3학년 때 교실에 거의 들어가지 않았어요. 운동만 해서 그런지 어느 순간 배구가 싫었습니다.” 배구도 곧잘 해 서울 소재 대학에서 배구선수로 스카우트 제의가 있었으나 거절하고 입시 준비를 하지 않았다. 그러다 ‘내가 대학교를 안 가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입학한 곳이 바로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였다. “글을 제대로 써봐야겠다는 생각에 들어갔습니다. 김동리 선생과 서정주 선생이 저희 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어요.” 한보영 작가는 특히 김동리 교수와 가깝게 지냈는데 하루는 자신이 쓴 습작을 봐주십사 부탁했다. ‘선데이서울’ 기자도 MBC 복싱 해설위원도 아닌 어린 나이에 소설가로 데뷔할 절호의 기회였을지도 모를 중요한 순간이었다. “한창때 실존주의 이론에 빠져 있었어요. 젊은 패기에 선생님이 해주는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때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김동리 선생이 저와 별 상의 없이 습작에 관한 심사평을 ‘현대문학’에 내신 거예요. 문장과 구성은 다 좋은데 주제와 내용이 마음에 안 드신다고 하셨더라고요. 시골 동네에서 벌어지는 근친상간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김동리 선생 취향과 너무나 동떨어졌던 것이죠. 화가 나서 찾아갔더니 본인과 주제가 잘 맞지 않으니 다른 소설가를 소개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바로 그 말에 충격받아서 두 번 다시는 소설 안 쓰겠다고 하고 집어치워버렸습니다. 그때는 어깨에 왜 그렇게 힘이 많이 들어갔는지.(웃음)” 당시에 만약 김동리 선생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더라면 한보영 작가의 삶은 어떻게 전개가 됐을까? 대작을 쓰는 작가로 거듭났을까? 소설에 대한 희망을 접고 선택한 한보영 작가의 첫 번째 직업은 선생님이었다. 경기도 포천의 한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하지만 1년 만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눈앞에 펼쳐진 자연이 사무치도록 좋았지만 몇 개월 지나자 공포감이 엄습했다. 눈이 내렸다 하면 허리까지 차올랐다. 월급은 보리와 쌀 반 가마니. 그나마 현찰로 지급되는 돈은 학교운영회에서 거친 회비를 조금 얻어 쓰는 정도였다. 하숙할 곳도 마땅치 않았다. 힘든 시간을 좀 이겨내나 싶었을 때 영국 민요 ‘오 데니 보이’를 여학생들에게 가르치다 교장에게 발각됐다. 노래 속에 사랑 얘기가 들어 있다는 게 화근이었다. 왈가왈부하다 결국 사표를 내고 서울로 올라왔다. 방송사 출입기자로 방송가를 누비다 “나는 잡지 출신이야. 신문사 출신이라는 말 잘 안 해.” ‘선데이서울’이 ‘서울신문’에서 나오는 주간지였고, 복싱 해설위원으로 모습을 바꿀 때도 ‘서울신문’에 적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인터넷으로 인물검색을 하면 전 신문인으로 뜬다. 하지만 한보영 작가는 우리나라 초창기 잡지를 꿰고 있는 잡지사 기자 출신이 맞다. 초등학교 교사직을 내려놓고 들어간 곳이 월간 ‘여성계’였다. 피란 시절 대구에서 창간했던 월간 ‘여성계’를 시작으로 ‘교육평론’이라는 잡지사에서도 일했다. 책이 나오는 달만 월급이 나오는 상황인지라 돈도 없고, 잘 챙겨먹지 못해 급기야 위장병을 달고 살았다. “김동리 선생이랑 싸우고 소설도 안 써지니까 위장병에 걸렸던 것 같아요.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밖에서 밥을 사 먹다 보니 나아질 기색이 없었어요. 결국 위장병이 있는 상태로 군대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규칙적인 생활을 하니 몸이 좋아지더라고요. 건강을 되찾고 난 다음 군에 있는 동안 프리랜서로 글을 꽤 썼습니다. 다른 월급쟁이들보다 낫다 싶을 정도였죠.” 제대 후에는 당시 인기 잡지였던 ‘아리랑’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방송사 출입 기자로서의 발판을 마련했다. 요즘으로 말하면 연예부나 문화부 기자로 방송사에 드나드는 기자를 말한다. 예전에는 방송사마다 탤런트와 개그맨, 성우를 매년 정기적으로 뽑았다. 특히 탤런트의 경우 소속 방송사의 드라마와 프로그램에만 등장할 수 있었다. 방송사 소속 아나운서와 같다고 보면 된다. 심은하, 장동건을 보려면 MBC를 찾아가야 했던 시절이 있다. 방송사 출입기자는 연기자와의 끈끈한 인맥과 유대감은 물론이고 방송사 관계자와의 관계도 신경 써야 하는 힘든 분야 중 하나였다. “‘아리랑’은 글씨를 세로가 아닌 가로로 표기한 최초의 잡지였습니다. 연예인 주변 이야기, 스포츠, 만화 등 다양한 콘텐츠를 담아낸 세련된 책이었죠. ‘아리랑’에 있을 때 배우 신성일과도 친해졌습니다. 그때는 방송사 소속 탤런트들이 조금 딱했습니다. 기획사를 차리는 게 꿈이었는데 잡지 사업에 발을 들이고 말았습니다. 뜻대로 안됐죠.” ‘아리랑’에 있는 동안 음악 전문지를 만들어볼 생각에 ‘청춘’이라는 소규모 잡지를 인수했다. 젊은 세대를 위한 음악 잡지로 만들려고 했는데 1970년대 초 유신시대가 도래해 뜻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두 달여 공을 들였지만 사회 상황과 잡지 성향이 맞지 않아 사업을 접어야만 했다. 큰 손해를 봤지만 되돌릴 수 없었다. “남들처럼 술 먹고 울분을 토하고 그런 성격이 또 제가 못됩니다. 극장에 가서 가만히 앉아 있었어요. 그렇게 실업자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산업경제신문’에서 연예부 기자로 오란 연락을 받았습니다. 물불 가릴 것이 없었어요. 사업이 제대로 되지 않아 퇴직금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나왔거든요. 그곳에 있다가 서울시청에 납품하는 ‘주간 시민’으로 옮겼고 그다음이 ‘서울신문’ 대표 매거진인 ‘선데이서울’이었죠.” 한보영 작가가 방송사 출입기자로서 활약하고 성과를 낸 매체는 ‘선데이서울’이다. 본격적인 방송계 출입기자 삶을 산 시간이 이때였다고도 자평했다. “기자는 많은데 방송사를 제대로 찾아다니는 기자가 의외로 적었습니다. ‘선데이서울’에 있을 때는 정말 탤런트, 연예인들 일에 제가 많이 좌지우지했던 것 같습니다.” 이름만 대면 쉽게 알 만한 연예인 사생활에 대해서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과거 연예사를 들춰내는 종합편성채널 TV 프로그램 출연이 잦았다. 한 여성 탤런트는 한보영 작가에게 전화를 걸어서 “선생님, 그런 방송에 안 나왔으면 좋겠어요”라면서 넌지시 말을 건네기도 했단다. “요새는 방송 출연 제의가 들어오면 저보다 순발력 있는 다른 사람을 구해보라며 거절해요. 누구 부탁 때문이 아니고, 그게 좀 더 방송이 살 것 같아서죠.” 복싱 해설위원으로 다른 삶을 살다 방송국 출입기자로서 일간지, 주간지, 월간지 등을 두루 섭렵하며 승승장구하던 그가 어쩌다 돌연 스포츠 분야로 눈을 돌려 복싱 해설위원으로도 이름을 알리게 됐을까. “1972년 3월 ‘선데이서울’에 방송사 출입기자로 들어가 오랜 시간 연예계 기사를 썼습니다. ‘서울신문’에서 ‘주간스포츠’를 창간해 왔다 갔다 하면서 복싱 관련 기사를 쓰다가 1980년대 초에 ‘주간스포츠’로 완전히 옮겨가 복싱 담당기자가 됐습니다. 당시 복싱 인기가 정말 대단했어요. 그런데 복싱 담당기자가 자꾸 나가버리니까 하루는 국장이 불러서 복싱을 맡으라니 어쩌겠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영화배우와 탤런트를 위한 기획사를 차리는 것과 방송 극본을 쓰는 것이 나름의 목표였다. 스포츠 분야로 가라는 말에 회사를 관둬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지만 국장의 선택에 따르기로 했다. “어차피 같은 회사니까 복싱 담당을 하다가 연예부 쪽에서 일하라 하면 그쪽으로 가서 취재했죠. 나중에는 스포츠 쪽에 남기로 했습니다. MBC와 해설위원 이야기도 된 상태였고요.” 한국 복싱 전성기, 최고의 명승부에는 늘 MBC 복싱 해설위원으로 활약하던 한보영 작가의 예리한 분석이 뒤따랐다. 방송사 출입기자에서 복싱 담당기자, 이를 바탕으로 복싱 해설위원으로 살아온 삶. 기간이 좀 길어서 그렇지 듣고 보니 납득이 가는 인과관계가 있다. 새로운 격변이 아닌 삶에 순응하고 적극적으로 따른 결과였다. “나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뭐든지 억지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니까,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대로 조금은 그렇게 순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의 최전성기 복싱 해설을 했다는 것도 행복한 일입니다. 남들 은퇴하는 55세에 종이매체와 이별하고 MBC와 해설위원으로 정식 계약을 맺었습니다. 70에는 고희기념 출판기념회를 열었고요.” 복싱의 인기가 사그라지면서 방송 기회도 점점 줄어들었다. 2003년 MBC와계약을 만료하고 MBC스포츠로 옮겨 2007년까지 간간이 복싱 해설을 했다. “그런데 지금도 저는 복싱 해설을 합니다. 어디서 하는 줄 아세요? 유튜브에서요. 오픈게임부터 끝까지 제가 도맡아서 합니다. 훨씬 힘든 대신 신바람은 납니다. 복싱 해설도 내 인생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일부분이고 제가 좋아하는 일이죠. 1년 차 소설가이면서 현역 복싱 해설위원 입니다.” 한참 복싱과 관련한 얘기를 하다가 현실로 돌아오듯 소설 이야기로 돌아온다. 최근 집필한 ‘친부(親父)의 꿈’은 어디엔가 살아 있을 전설의 파이터 김득구 아들을 상상하며 썼다고 했다. “김득구 아들이 지금 살아 있으면 34세쯤 됐을 거예요. 그런데 왜 복싱에 데뷔하느냐면 말이지….” 이야기 보따리가 온몸 구석구석 한아름이다. 한 번도 멈추지 않고 3시간 꼬박 앉아서 참 많은 얘기를 끄집어낸다. 아무리 봐도 적당한 시기에 자기 진로를 잘 선택했다. 지금이 딱 소설 쓰기 좋은 나이라고나 할까? 대학 시절 김동리 선생과의 일화는 새삼 한보영 작가 인생의 중대한 복선이 된 것만 같다. 그 후 방송계와 복싱계를 누비며 쌓아놓은 기억은 소설가 한보영에게 좋은 자양분이 됐기 때문이다. 돌고 돌아 원래 바라던 제자리로 돌아오고야 말았다. 오늘도 어딘가에서 커피 한 잔 시켜놓고 상념에 잠겨 있을 한보영 작가에게 한마디 건네고 싶다. 언제나 브라보 유어 라이프.
- 2018-07-02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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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그패커(Begpacker)’구걸하는 여행자
- 시내 중심가 중앙로역에서 전철을 타려고 계단을 내려가는 중이었다. 오후 4시가 넘었고 날씨는 무더웠다. 무심히 내려가는데 계단 중간지점에 할머니가 백 원짜리 동전 두 개가 담긴 빨간 플라스틱바구니를 앞에 놓고 구걸하고 있다. 고개 숙인 채 챙이 넓은 썬 캡을 쓰고 있다. 웅크리고 앉은 모습이 마치 작은 돌하르방 같다. 내 앞에 가던 아이가 자기 주머니에서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 할머니 바구니에 넣었다. 지폐가 바구니에 담기자 할머니는 얼른 천원을 집어 자기 주머니에 넣었다. 천원이 사라진 바구니는 도로 백 원짜리 동전 두 개로 남았다. 천원을 놓고 내려가던 아이의 걸음이 멈칫하더니 되돌아 올라온다. 아이는 그 바구니에 천원을 또 넣었다. 이제 중학생이 된 것 같은, 하얀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남자아이는 앳된 십대다. 자기가 건넨 천원이 너무 적다고 생각한 걸까. 번잡한 계단한쪽에 쪼그리고 앉아 오가는 이의 발걸음을 보고 있을 그 할머니가 안쓰러웠을까. 나이로 보자면 아이는 구걸할머니의 손자뻘 정도가 될 것 같다. 아이는 나와 엇갈린 방향으로 전철 타는 곳으로 걸어 내려갔다. 행색이 초라한 할머니에게 아이는 2천원을 기부했다. 할머니에게 그 돈은 먹고 살아야 하는 절실한 돈이 될 수 있다. 얼마 전 뉴스에서 ‘베그패커(Begpacker)'가 우리나라를 겨냥해서 들어온다는 기사를 보았다. 베그패커는 구걸하다의 베그(beg)와 배낭여행객을 뜻하는 백패커(backpacker)의 합성어이다. 여행을 위해 구걸하는 사람들을 베그패커라고 부른다. 생계 때문에 구걸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들은 구걸하면서 ’프리허그‘를 제공하거나 자기들이 직접 만든 팔찌, 사진 등 물건들을 팔기도 하면서 여행비를 마련한다. 여행을 위해 구걸하는 건 우리 정서에는 왠지 낯선 모습이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70년대 전후에도 동네에서 구걸하는 사람이 종종 눈에 띄었다. 때로는 밥 때가 되기를 기다려 찾아오는 걸인도 있었다. 이웃들은 걸인을 딱하게 여겨 아무런 댓가 없이 밥을 주기도 하고, 형편이 되면 돈으로 적선을 했다. 여행지에서 경비를 마련해가며 여행하는 사람들은 ‘배낭족’이다. 그들은 낭만주의자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런데 베그패커들은 한국인의 거절하지 못하는 심성과 백인들에게 우호적인 면을 이용하며 한국 사람들을 만만하게 본다고 한다. 낭만을 즐기는 배낭족이라기보다는 낭만을 빙자한 얌체족에 가까운 것이다. 하루 수익이 꽤 되는데 얼마나 되는지 묻는 기자의 질문에 그것은 비밀이란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서울 강남이나 홍대, 신촌, 종로 등에서 주로 활동하는 베그패커들. 북미나 유럽등지에서 온 그들은 ‘당신은 나를 도울 수 있습니다’라는 글을 바닥에 써 붙여 정에 약한 사람들의 동정을 구걸한다. 그렇게 모은 돈은 주로 유흥비에 탕진한다니 그들은 다른 나라에서 이미 강제퇴거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베그패커와 같이 구걸하는 형태도 다양해지는 현실이다. 지하도 계단에서 구걸하는 할머니에게 두 번이나 돈을 건넨 어린학생은 아마도 ‘굶주린 이웃’에게 주저 없이 자신의 것을 내주었을 것이다. 아이는 자신의 할머니를 떠올렸을지 모른다. 여행을 위해 돈을 벌려는 배낭족에게 조건 없이 도움을 주려는 순수한 동정이 베그패커로 얼룩이 묻지 않도록 잘 살펴볼 일이다.
- 2018-06-08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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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보여행의 동반자 ‘배낭’ 어떻게 꾸려야 할까?
- 초보 도보여행자들이 겪는 시행착오 중 하나. 바로 배낭 짐 싸기다. 장거리 코스 생각에 이것저것 필요한 것들을 마구 넣게 되는데, 이는 발걸음을 무겁게 하는 독이 되고 만다. 오랜 기간 몸에서 떼지 않고 걸어야 하기 때문에 배낭은 소중한 동반자와 마찬가지다. 어떤 동반자, 즉 어떻게 배낭을 꾸리느냐에 따라 도보여행의 질이 달라진다. 배낭을 고르는 방법부터 짐 꾸리기에 유용한 정보까지 담아봤다. 사진 제공 및 도움말 트래블메이트 ◇ 초보 여행자를 위한 배낭 고르는 방법 1 가벼운 것이 좋다 배낭이 가벼울수록 여행은 즐거워진다. 배낭의 절대무게를 고려해 쓸데없는 짐은 덜고, 좌우 무게를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 여행이 길수록 배낭의 무게는 체력을 갉아먹는 ‘짐’이 된다는 것을 명심하자. 작은 무게라도 가능한 한 줄여야 한다. Tip 짐 꾸릴 때 가벼운 것은 아래로, 무거운 것은 위로! 2 안전은 필수 초보 여행자를 노리는 ‘보이지 않는 손’을 조심하자. 이들은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배낭을 공격하고, 때로는 대담하게 배낭 지퍼에 손을 댄다. 반드시 배낭의 모든 출입구를 봉인해야 한다. Tip 배낭을 살 때 자물쇠를 걸 수 있는 고리가 있는지, 또 튼튼한지 살필 것. 3 짐 꾸리기가 쉬워야 한다 초보 여행자의 아침은 늘 부산스럽다. 배낭에 쑤셔 넣은 옷가지와 세면도구를 찾고, 이동을 위해 짐을 꾸리느라 정신이 없다. Tip 배낭의 주 출입구가 넓게 벌어지면서, 하단 지퍼와 위아래 분리막이 있어 분리수납이 가능해야 짐을 싸고 푸는 시간이 줄어든다. 내용물을 넣어도 변형이 없도록 등판에 지지프레임이 있는 것으로 고르자. 4 내 몸에 딱 맞는 걸 골라라 배낭을 착용했을 때 불편하거나 무겁게 느껴지는 이유는 어깨, 등판, 허리벨트가 몸과 밀착되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좋은 배낭은 내 몸에 딱 맞는 배낭이다. Tip 배낭을 사고 나서 한번 짐을 꾸려 직접 메어보는 게 좋다. 빈 배낭을 멜 때와 내용물이 들어갔을 때의 착용감은 천지 차이다. 5 지퍼가 튼튼해야 한다 예쁜 디자인, 유명 브랜드 다 좋지만 여행 중 배낭이 망가지면 낭패다! Tip 배낭 고를 때 꼭 살펴야 할 것은 지퍼, 특히 맞물리는 이빨 부분이 튼튼한지, 봉제는 꼼꼼한지, 어깨끈과 몸체 연결은 견고한지 등을 챙겨야 한다. 눈으로 보고, 직접 당겨도 보자. 6 여행 기간보다는 짐의 양을 고려하라 기간이 길다고 꼭 짐이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계절에 따른 옷의 부피나 세탁 편의성 등이 영향을 미친다. 무엇보다 불필요한 것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 Tip 현지에서 구할 수 있는데도 굳이 가져가는 물건은 없는지 살필 것. ◇ 장기 도보여행, 배낭 짐 꾸리기 비법 돌돌 말아 구김 없이 가벼운 수납 팩을 활용해 옷은 최대한 부피를 줄여서 넣자. 티셔츠나 팬츠는 여러 장을 겹쳐 말아 넣으면 구김이 덜 가고 부피도 줄어든다. 구겨지기 쉬운 셔츠나 재킷 등은 가방 맨 위에 넣자. 가벼운 짐은 아래에, 무거운 짐은 위에 여행 짐은 무게에 따라 수납하는 것이 좋은데, 가벼운 짐은 아래에, 무거운 짐은 위에 넣으면 가방을 들었을 때 안정감이 있고 좋다. 구석구석 빈틈엔 작은 소품 수납하기 옷을 넣고 남는 공간에 속옷 같은 작은 옷을 채우고, 선글라스나 카메라 등 충격에 약한 물건은 그 사이사이 남는 공간에 넣는다. 모자나 신발 안쪽에 양말, 화장품, 상비약 등을 비닐 팩에 싸서 넣으면 공간도 절약하고 모양 변형도 막을 수 있다. 용도별 지퍼백으로 냄새 없이 깔끔하게 파우치나 지퍼백은 넉넉히 챙기자. 화장품, 세면도구, 액세서리 등 작은 물품들을 용도별로 지퍼백에 담으면 뒤섞이지 않고, 찾을 때도 편리하다. 또 빨랫감이나 젖은 옷들은 오염될 수 있으므로 지퍼백에 담아서 넣는다. 냄새 걱정도 없고, 다른 짐들이 젖지 않아 좋다. 배낭여행 전용 제품 활용하기 장거리 도보여행을 하려면 옷뿐만 아니라 수건, 세면도구, 화장품, 비상식량 등도 챙겨야 한다. 이때 가정에서 쓰는 제품을 그대로 가져가는 것보다는 부피가 작고 가벼우면서 실용적인 배낭여행 전용 제품들로 채우는 것이 더 유용하다. # 도보여행 # 배낭싸기 #도보배낭
- 2018-06-04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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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행’ 떠나는 시니어, 건강에서 교육까지 네 마리 토끼 잡는다
- 여행하기 좋은 계절이다. 국민 두 명 중 한 명은 해외여행을 떠난다. 그만큼 여행에 대한 관심은 높아졌고 일상의 일부분으로 자리 잡았다. 요즘 TV를 틀면 나오는 여행 프로그램이 부쩍 늘어난 것도 이런 흐름을 보여준다. 단체여행에서 배낭여행, 저가여행, 테마여행까지 내용도 다양해졌다. 시니어의 은퇴 후 버킷리스트에도 여행은 항상 우선순위다. 최근에는 액티브 시니어를 중심으로 배낭여행이나 장기여행이 붐을 이루고 있다. 여행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시니어의 최근 여행 트렌드를 볼 수 있다. 70대 배우들이 함께 떠난 ‘꽃보다 할배’는 배낭여행에 대한 관심을 높였다. 또 ‘윤식당’은 해외에서 살아보는 여행을 꿈꾸게 했다. 이처럼 단순 관광을 넘어 배우고 체험하는 여행에 관심이 높아졌다. 교육과 여행의 꿈을 동시에 만족시켜주는 ‘교육 여행’ 시니어 맞춤형 여행의 대표적인 트렌드는 ‘교육 여행’이다. 시니어의 지적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교육여행 프로그램으로는 ‘로드 스칼라(Road Scholar)’가 대표적이다. 로드 스칼라는 ‘길 위의 학자’라는 뜻으로 1975년 설립된 미국의 비영리 단체다. 150개국에서 5500개의 프로그램을 제공하며 매해 10만 명 이상이 참가한다. 이 단체는 시니어를 대상으로 평생교육과 여행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다. 탐험하고 모험하며 세상이 하나의 큰 교실이 되는 셈이다. 프로그램은 관심사나 지역 등을 기준으로 선택하면 된다. 관심사 종류는 트레킹부터 사진, 오페라, 조류 관찰, 국립공원 탐방 등 무궁무진하다. 뒤늦게 외국어를 배우려는 시니어도 많다. 노후의 여가시간이 어학을 배우는 데 최적의 조건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해외에서 장기간 살면서 어학연수를 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있다. 이 프로그램은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등지에서 약 한 달에서 한 달 반 정도 머물면서 언어와 문화를 배우게 해준다. 예를 들면 스페인 세비야에서 스페인어를 배우며 건축, 요리 등을 체험하는 식이다. 머무는 동안 도움이 필요하면 로드 스칼라의 지원도 받을 수 있다. 최근에는 손주와 함께 떠나는 세대 간 여행도 인기다. 자연이나 도시 관광뿐만 아니라 손주와 서핑을 배우거나 영화제작도 경험하는 이색 프로그램들이 있다. 주목할 것은 시니어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프로그램별로 활동단계(activity level)와 야외활동단계(outdoor level)가 세분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건강 상태와 여행 취향에 따라서 단계를 선택하면 된다. 프로그램별로 일정, 비용, 건강, 취향의 단계가 있어 개인 상태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게 장점이다. 혼자 떠나도 외롭지 않은 ‘혼행’ 상품 두 번째 트렌드는 ‘혼행(혼자 여행)’이다. 혼행도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오로지 나 자신에 집중해서 언제든 원하는 대로 여행을 할 수 있다. 또 평소 가족과 여행 다닐 때와 달리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일본의 대표적인 여행사인 ‘클럽 투어리즘(Club Tourism)’은 나홀로 여행객들을 위해 세심한 배려가 돋보이는 맞춤상품을 선보이고 있다. 고객은 주로 50~70대. 대략 남성이 30%, 여성이 70% 비중을 차지한다. 친구, 가족과 함께 여행하려는 사람의 신청은 받지 않는다. 고객 간에 버스 좌석이나 방을 정하는 일도 일절 허용하지 않는다. 참가자가 모두 혼자 오기 때문에 다른 사람 눈치를 볼 일도 없고 외롭지 않다. 하루 여행부터 해외여행까지 가능하며 60대, 70대 등 연령대별 상품도 있다. 또 여성 한정 여행도 가능하다. 온천, 꽃놀이, 미술관 투어, 크루즈 여행까지 프로그램도 다양하다. 특히 혼자 떠나는 호화 상품의 경우 1인이 2석을 이용하는 버스를 이용할 수 있고, 호텔에서는 1인 1실로 숙박한다. 나홀로 여행객들을 위한 상품은 소규모로 참석 인원을 제한하며, 출발지에서 도착지까지 안내원이 동행하기 때문에 위험할 일도 없다. 세 번째 트렌드는 ‘케어(care) 여행’이다. 시니어는 나이가 들면서 무릎이 안 좋아져 오래 걷기도 힘들고, 건강 문제로 여행을 가고 싶어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다른 사람들과 걷는 속도를 맞춰야 하고, 계단을 오르내려야 한다면 부담이 되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신체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고령자와 장애인을 위한 ‘배리어 프리(barrier free)’ 여행이 인기다.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활성화가 안 됐지만 점차 늘어나는 추세다. 일본의 클럽 투어리즘은 ‘지팡이와 휠체어로 즐기는 여행’을 주제로 고령자들도 여행을 할 수 있는 상품을 판매하고 있다. 자체적으로 ‘유니버셜디자인센터’를 만들어 여행할 때 느끼는 불편한 점도 연구한다. 또한 70세 이상을 위한 ‘편안한 여행’ 상품들은 하루 평균 적게는 한 곳, 많게는 세 곳 정도 투어를 해 일정이 비교적 여유롭다. 숙소에 일찍 도착하고, 아침에도 느지막하게 출발해 여유롭다. 이동 중에도 한 시간 반마다 휴식을 취한다. 장시간 걷지 않으며 버스 참가 인원도 제한한다. 첨단기술로 각광받는 ‘스마트 여행’ 마지막 트렌드는 정보통신기술(ICT)을 활용한 ‘스마트(smart) 여행’이다. 첨단기술의 발전은 여행과도 밀접하다. 과거에는 책이나 지도 한 장에 의지해 여행을 갔다. 하지만 최근엔 스마트폰의 지도를 활용해 관광지를 찾아다닌다. 앱을 이용한 외국어 번역도 필수다. 일명 ‘스마트 관광’이라 부르는 스마트 여행은 ICT 기술을 활용해 빅데이터를 구축한 뒤 실시간 맞춤형 정보를 제공한다. 영국 런던박물관이 2010년 만든 ‘스트리트 뮤지엄(Street Museum)’ 앱은 증강현실을 이용해 과거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다. 증강현실은 현실의 배경에 가상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기술이다. 만약 내가 런던의 특정 장소에서 이 앱의 3D 뷰를 선택하면, 현재 위치의 과거 이미지를 볼 수 있다. 또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은 증강현실 기술로 도자기나 조각의 숨겨진 뒷면까지 3D 입체영상으로 보여준다. 고령화로 액티브 시니어는 계속 늘어날 것이다. 여행 업계는 시니어에 주목하고 있다. 길어진 노년기에 여행을 갈 수 있는 기회도 많아졌다. 여행이 삶에 가져다주는 활력은 노후를 보내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앞으로 시니어를 대상으로 한 맞춤형 여행이 더 많아진다면 여행의 질도 높아질 것이다. 이나영 시니어 전문 칼럼니스트 한국외국어대학교 졸업. 차의과학대학교에서 고령친화산업학을 전공했다. 한화그룹과 신한은행에서 근무했다. 현재 경향신문에서 고령사회 담당 객원기자로 활동 중이며, ‘이나영의 고령사회 리포트’를 연재하고 있다.
- 2018-04-25 16: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