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들의 ‘손주 사랑’은 세계 공용어다. 영화 의 할머니는
“이 나이에 기다리는 것은 손주와 죽음이다”라는 대사를 내뱉는다.
또 “난 죽으면 손주의 애완 고양이로 태어날 거야”라는 대사도 나온다.
이 영화 말고도 손주를 통해 ‘웬수’가 된 아들과 화해하는 장면은 부지기수다.
올 여름, 빈센트 반 고흐가 희망과 꿈을 갖고 떠난 ‘아를’로 손주와 함께 떠나보자.
손주와 ‘론’ 강변을 걸으며 ‘별 헤는 밤’의 그림 이야기를 꽃피우면서
그곳에 추억을 남겨놓자.
손주의 여행 경험은 향후 엄청난 학습효과를 갖게 될 것이다.
수많은 예술가가 사랑한 남부 프랑스
프랑스 남부지역의 프로방스는 세계 여행자들의 로망이다. 특히 프로방스는 많은 시인, 화가, 영화 예술가가 사랑한 도시다. 프로방스의 매력에 빠진 예술가들은 평생 그곳을 그리워하면서 소설, 시, 그림 등으로 남겼다. 엑상프로방스(Aix-en-Provence)가 고향인 폴 세잔, 코트다쥐르의 생폴 드 방스(Saint-Paul de Vence)는 샤갈, 피카소도 좋아했고 6개월간 안티베(Antibes)에 머물기도 했다. 르누아르가 노년을 보냈던 르누아르의 집, 레 콜레트(Renoir’s House, Les Collettes)는 카뉴 쉬르 메르(Cagnes Sur Mer)에 있다. 모딜리아니는 니스를 무척 사랑했다.
또 주옥같이 아름다운 소설인 , 의 저자인 알퐁스 도데(Alphonse Daudet, 1840~1897)는 아를과 가까운 님(Nimes)에서 태어났다. 그는 고향을 일찍 떠나 파리에 살면서도 프로방스에 대한 애정을 평생 안고 살았다. 그의 작품 속에는 고향 프로방스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프랑스의 극작가 겸 영화제작자 겸 영화감독인 마르셀 파뇰(Marcel Pagnol)의 작품에도 어김없이 프로방스가 등장한다. , 등 영화 속에 프로방스가 담겨 있다. 독일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 (Rainer Maria Rilke)는 “가장 아름다운 곳은 프로방스였다. 당신도 언젠가 꼭 한번 그리로 가봐야 한다”라는 편지를 썼고 그는 마지막 거처를 프로방스에 마련할 수 있기를 염원하면서 죽었다.
특히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는 프로방스의 아를(Arles)에 많은 이야깃거리를 남겼다. 그래서 아를은 ‘고흐의 마을’로 불린다. 많은 관광객이 아를로 몰려 드는 이유는 고흐를 만나기 위함이다.
로마 유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2000년 古都
아를은 테제베 고속열차가 멈추지 않는 작은 역이다. 역에서 1km 떨어져 있는 마을로 들어서면서 놀라게 되는 것은 부서진 로마의 유적 때문이다. 고흐의 그림 스타일을 아는 사람들은 이 생경한 문화 유적에 놀랄 수밖에 없다. 그때도 분명히 이 자리에 있었을 문화 유적이지만 그의 작품 속에는 건축물을 찾을 수는 없다. 그저 투우 장면을 그린 그림이 있을 뿐이다.
아를은 2000년의 역사를 지닌 고도(古都)다. 그리스의 식민지였다가 시저(Julius Caesar)에 의해 로마령이 되었다. 긴 세월동안 사람들의 발자국으로 반질거리고, 울퉁불퉁한 조약돌로 된 골목길과 부서진 성벽 등이 온 마을을 장식하고 있다. 마을 제일 높은 곳에는 거대한 원형 경기장인 아레나(Arenes)와 기둥만 남아 있는 원형 극장이 있다. 아레나에서는 매년 투우 축제(4, 9월)가 열린다. 또 이 마을은 초기 기독교 시기의 중요한 거점도시였다.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가는 순례자의 길을 시작하는 곳 중 하나로 중세 건축물인 생 트로핌(Saint-Trophime) 대성당이 남아 있다. 11세기에 창건된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에서는 ‘최후의 심판’ 장면을 새겨 놓은 부조와 조각을 볼 수 있다. 구시가지 한가운데 자리한 리퍼블릭 광장에 삼색기가 휘날리는 아를시청사가 있다. 그 앞에는 아를에서 제일 높은 시계탑과 2000년 전 로마 황제가 이집트에서 가져왔다는 오벨리스크(obelisk)가 솟아 있다. 이 도시의 로마 유적지는 198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아를 골목에서 고흐의 작품 현장 찾아내기
오래된 가옥과 골목을 헤집다 보면 포룸 광장에서 ‘고흐 카페’를 만나게 된다. 고흐가 즐겨 썼던 노란색으로 칠한 카페는 ‘고흐’란 화가의 이름을 파는 상술을 펼치고 있다. 그가 그린 ‘밤의 카페 테라스(The Night Cafe in Arles)’ 그림을 안내대처럼 세워 놓았다. 유독 그 카페만 관광객들로 북적댄다. 카페 주변에는 피카소, 장 콕토 등이 자주 묵었던 낡은 호텔이 있다.
고흐는 이 카페 근처에 일명 ‘노란집’을 얻어 놓고 이곳을 매일 밤 찾았다. 카페에 앉아 늘 ‘녹색요정 압생트’를 마시면서 얘기를 나누고 그림을 그렸다. 고흐는 친구 고갱이 오길 기다리면서, ‘아를의 여인-지누부인’(1888년)을 그렸다. ‘아를의 여인’이라는 제목은 고흐 이전에 알퐁스 도데가 첫 단편집에 쓴 ‘아를의 여인(L' Arlesienne, 1872년 작)’이 있다. 이 작품을 다시 각색해 3막 5장의 희곡을 발표했는데 당대 잘 나가던 프랑스의 작곡가 조르주 비제(Georges Bizet, 1838~1875)가 극장 상연에 쓰일 부수음악 27곡(관현악곡)을 작곡하기도 했다. 같은 제목의 글, 그림, 음악이 만들어진 곳이 아를이다.
또 에스파스 반 고흐(Espace Van Gogh)에는 ‘아를 병원의 정원’이라는 그림이 있다. 고흐가 1888년 12월, 자신의 귀를 자르는 발작 이후 머물기를 반복했던 병원으로 현재는 문화센터로 바뀌었다.
어둠이 내릴 무렵엔 론 강으로 가서 ‘론 강의 별이 빛나는 밤’을 그려보자. 고흐가 생레미 드프로방스의 한 요양원으로 옮겨진 후에 그린 그림으로, 아름다웠던 아를의 기억을 되살렸을 것이다. 지금 고흐 그림처럼 아름답지 않은 론강의 어둠 속 끝에서 희미하게 불빛이 새어난다. 그 외에도 ‘열두송이의 해바라기’와 ‘아를의 다리(도개교로 링클루아 다리)’ 등도 모두 아를에서 그렸다.
현재 아를에는 ‘반 고흐 파운데이션’이 있다. 하지만 기대는 말아야 한다. 고흐의 작품은 거의 볼 수가 없고 밀짚모자를 쓴 자화상과 어릴 적 고흐와 동생 테오의 사진 등 몇 점만 볼 수 있다. 고흐의 고국인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고흐 박물관’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하다.
예술촌을 꿈꾸던 화가는 고갱을 만나 미쳐 버리고
고흐는 1888년 2월, 아를에 예술촌을 만들겠다는 부푼 꿈을 꾸고 이곳에 방을 얻는다. 파리에서 뜻이 잘 통했던 고갱이 오기를 기다렸고 오기 전까지 방을 꾸미고 마음이 들뜬 채로 지냈다. 하지만 같이 살면서 극단적인 성격 차이로 싸우게 된다. 결정적으로 화를 돋구게 된 것은 고갱이 그린 자화상이었다. 고흐와 고갱은 서로 자화상을 그리기로 했는데 고갱이 그린 그림 속에는 고흐는 없고 고갱이 앉아 있었다. 그림 속 고갱의 콧수염은 고흐의 붉은 콧수염이었다. 고흐와 고갱은 크게 싸웠고 분에 겨운 고흐는 집으로 돌아가 한쪽 귀를 잘라 버린다. 자른 귀를 싸들고 술집 여자에게 갖다 주었고 그녀가 경찰에 신고를 해서 시립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고흐가 꿈꿨던 예술촌의 꿈은 그렇게 두 달 만에 끝났다. 고흐의 발작은 더 심해져 근처 생레미 정신병원(1889년 5월)에 입원하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발작이 없을 때면 그 동안의 공백을 메우기라도 하려는 듯 마구 그려댔다. 병원에서 약 15개월간 머물면서 187점에 이르는 그림을 남겼다. 분명히, 고흐가 아를을 사랑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가 아를을 얼마나 좋아했는지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도 나타난다. “예전에는 이런 행운을 누려 본 적이 없다. 하늘은 믿을 수 없을 만큼 파랗고 태양은 유황빛으로 반짝인다. 천상에서나 볼 수 있을 듯한 푸른색과 노란색의 조합은 얼마나 부드럽고 매혹적인지…”라고 보냈다.
고흐는 1890년 봄, 파리 근교의 오베르 쉬르 우아즈(Auvers sur Oise)에서 자살한다. 고흐는 테오의 가족이 찾아온 이후 밀밭에 가서 총을 쏘고 집으로 겨우 기어 들어와 이틀 만에 동생 테오가 지켜보는 가운데 죽었다. 테오가 형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이 무엇이었을까? 테오는 “조카도 생기고 가정을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더는 형의 생활비를 대어 줄 수 없다”고 했다. 그동안 고흐는 그림들을 테오에게 보냈고 그 대신 생활비를 받았다. 살아생전 단 한 점밖에 못 판, 생활 능력 없는 그가 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었을까? 사랑을 주고 싶지만 줄 사람도 없고 정신병을 앓고 있는, 희망없는 삶.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죽음’ 밖에 없었을 수도 있다. 고흐 나이 37세였다. 오베르에 머문 지 두 달 되던 때였다. 이후 동생 테오도 6개월 뒤 매독에 걸려 죽는다. 두 사람의 묘지는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집 앞에 있다.
고흐의 삶은 그 어느 창작자가 일부러 만들어 내기도 어려울 만큼 드라마틱하다. 여행을 떠나기 전, 고흐에 대한 영화나 책 등을 미리 보고 가는 것도 도움이 된다.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열연한 영화 과 BBC 다큐인 폴 고갱의 이라는 작품을 추천한다. 아를에서의 고흐와 고갱의 생전의 삶을 알기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 이신화 여행작가
이립(而立)에 여행작가로 시작해 어언 지천명(知天命)에 다다랐다.
그동안 ‘걸어서 상쾌한 사계절 트레킹’, ‘대한민국 100배 즐기기’, ‘on the camino’ 등
여행서 총 14권을 출간했다. ‘인생이 짧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여 2014년 홀로 197일간 30개국의 유럽 배낭 여행을 했다. ‘살아 있을 때 떠나자’가 삶의 모토다.
임이시어! 홍 경호! 홍 요셉! 형제님 이시어
오늘 이 화창한 초여름에, 따뜻한 체온을 함께 나눌 수 없는 먼 길로 영영 긴 작별을 해야만 하는 섭섭한 안타까움이, 쓰나미 해일처럼 우리 가슴 속을 덮어 옵니다.
그리 크지 않은 체구셨지만, 뿜어져 나오는 정기는 누구도 당할 수 없을 정도의 강인함과 올곧은 모습은, 주위 세상을 이끌어 가기에도 충분하시었고, 매사에 정도를 택하시어 빈틈없는 이승의 행로를 거룩하게 마무리하셨습니다.
허스키한 음성에 호탕한 웃음소리는 지금도 귓가에 생생합니다. 둘러앉아 식사할 땐 음식을 그리 맛있게 드셨습니다. 밥억고 담소하며, 함께 즐겼던 시간이 서글프게 마음에 쌓여갑니다.
혈기 왕성한 젊은 청춘 시절엔 직업군인 가난을 달고 사셨습니다. 누구나 그즈음엔 어렵고 힘든 시절이었겠지만 남다른 학구열과 집중력을 발휘해 병사에서 영관장교까지 진급하신 자수성가, 대기만성의 표본이셨습니다.
설악산 뒤편의 깊숙한 골짜기 속에서 30kg 모래 배낭을 메고 산악구보할 땐 전투복 등판에 배어나온 검붉은 핏자국을 개울가에서 같이 앉아 빨아 말리기도 하셨습니다. 한여름 한국전쟁 기념일 전후로 하는 혹서기 천리행군과, 12월 크리스마스를 앞에 두고 강행했던 혹한기 천리행군 때는 잰걸음으로 항상 선두에 나서 팀원을 이끄셨습니다. 고공낙하 훈련 시에는 팀원들의 무사 귀대를 기원하며 부인과 함께 성당에 나가서 기도를 드리기도 하셨습니다. 당시 팀원들은 전우애를 알기 전에 이런 훈훈한 인간애를 함께하셨습니다.
주도면밀한 전략과 반복적인 철저한 훈련으로, 맡겨지는 임무수행에서도 탁월한 평가를 받았습니다.
짧게나마 같이했던 힘겹고 즐거웠던 시간, 이제 우리 가슴속 깊이 묻어두고, 끼리끼리 모여 옛일을 얘기할 때마다 한 장씩, 한 켜씩 꺼내 들춰보게 될 것입니다.
전역 후엔 인생의 선배로서뿐만 아니라 혈육으로 맺어진 친형제처럼, 계절마다 만나서 회포도 풀고 정도 쌓으며 이승에서의 여정을 함께했습니다. 퇴촌 산자락에 수십 개의 벌통을 줄 세워 앉혀 놓고 자나 깨나 그물망을 덮어쓰고 따가운 벌침에 쏘여가며, 향긋한 꿀맛을 주위의 이웃들에게 나눠주기도 하셨습니다. 꿀맛보다 더 달콤한 인간의 정을 함께하셨음에 보내 드리는 우리 가슴이 더욱 메워 옵니다.
남들보다 더 투철한 사명감과 국가관을 갖고 조국의 국방에 30여 년 젊음을 받치는 동안, 부인께서는 묵묵히 다정한 손길과, 따뜻한 미소로 서방님의 손발이 되어 빛나지 않는 아름다운 내조자로의 역할을 충분히 다하셨습지다. 가시는 임의 너무도 잘 어울리는 반쪽이셨습니다.
그 어떤 서방님이고 그 어떤 아버지셨는데, 이렇게 먼저 떠나보내야 하시다니…. 서글프고 안타까운 마음을 누가 신 알아줄 수 있겠으며, 어느 누가 보듬어 줄 수 있단 말입니까. 이제 젊고 건실한 두 아들과 함께 못다 이루신 임의 뜻을 받들어 기도드리며, 임이 떠나가신 커다란 공간을 메워 나가셔야 합니다. 속상하고, 처절하고, 불쌍하고, 안타까워 눈앞이 캄캄하시겠지만 앞으로는 저희가 함께할 것입니다. 조금만 힘을 더 내시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함께하는 지금 같은 친근한 모습을, 오늘 먼저 가시는 임은 기대하고 계실 겁니다.
평상시 혈육의 정을 나누시었던 일가친척분들 모두, 하느님의 자식인 성당의 형제ㆍ재매님들 모두, 그리고 임의 떠나시는 먼 길을 배웅하기 위하여 모여 있는 우리 모두가 두 손 모아 빕니다.
하늘나라 주님의 품에 따뜻하게 안기시어, 연년세세 평안하시고 편하신 곳에서 영면하시길 비옵니다.
삼가임의 명복을 빕니다.
흡혈귀로 알려진 드라큘라는 실존 인물이다. 동유럽의 루마니아 중부 아르제슈주 쿠르데아르제슈 시에는 드라큘라 성으로 알려진 ‘브란(Bran) 성’이 있다. 루마니아 여행자들은 ‘브란성’을 빼놓지 않고 찾는다. 루마니아 당국에서도 이미 소설, 영화, 뮤지컬 등으로 전 세계에 알려진 ‘드라큘라’를 이용해 관광객들을 유치하고 있다. 드라큘라는 루마니아에서는 역사에 기록된 공인 영웅이다. 그 영웅은 어떻게 흡혈귀로 변신했을까?
동화 속에 나옴직한 멋진 고성, ‘브란 성’
여느 관광지가 그렇듯이 브란성 입구에는 드라큘라와 관련된 기념품 상점이 줄지어 있고 여행객들로 북적댄다. 매표소를 지나 조금만 걸어 올라가면 가파른 언덕 위에 서 있는 고성을 만난다. 계단 초입에 감시탑이 있고 안쪽으로 들어가서 내부를 관람하게 되어 있다. 뾰족한 성 탑과 지중해풍의 지붕 벽돌이 에워싸고 있는 멋진 성이다. 건물은 시대가 흐르면서 새로운 건축양식이 추가되어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등 다양한 양식이 결합되어 있다.
실내는 좁은 계단을 따라 층별로 전시관이 이어진다. 사람들이 사는 듯 물건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고 드라큘라 사진 대신, 어여쁜 왕비, 공주 사진이 눈길을 잡아끈다. 쇠창살, 철도끼 등 중세시대 고문기구 등도 있지만 몸서리쳐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박물관에 진열된 물건일 뿐이다. 드라큘라라는 선입견을 갖고 ‘으스스’할 준비를 하고 성을 방문하지만 실제로는 동화 속에 나옴직한 멋진 고성이다.
그렇다면 이 성은 실제로 드라큘라와 연관이 있을까? 브란성은 독일 기사단의 요새(1212년)로 만들어졌다. 15~16세기에는 트란실바니아와 왈라키아 공국을 잇는 연결지 역할을 하면서 오스만 투르크로부터 헝가리 왕국을 지키는 관문이 되었다. 그 무렵 드라큘라가 이 성에 잠시 머문 것(1450년대)은 사실이지만 그의 삶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은 아니다.
이후 이 성은 루마니아 공국들의 통일에 기여한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리 드 여왕에게 헌정(1920년)되었고, 낭만적인 여름 궁전으로 바뀌었다. 여왕이 죽은 후 일레아나 공주가 성을 물려받았으나 루마니아가 공산권이 되면서 후손들은 성 소유권을 박탈(1948년) 당했다. 그 이후 브란성은 방치돼 파손됐다. 루마니아 정부가 1956년 국가 문화재로 지정, 개보수를 거침에 따라 중세역사미술박물관으로 재탄생했다. 2006년 합스부르크 왕가의 후손이 성의 소유권을 되찾았다. 그 후손은 지금 오스트리아에 거주하고 있는데 후손들은 흡혈귀 성이라는 좋지 않은 이미지에 기분이 나쁘다고 한다.
드라큘라 백작이 흡혈귀가 된 속사정
그렇다면 루마니아의 실존 인물이자 역사에 기록될 정도로 유명한 영웅이었던 드라큘라가 왜 흡혈귀가 되었을까? 드라큘라가 흡혈귀가 된 것은 아일랜드의 소설가 브램 스토커(Bram Stoker 1847~1912)가 쓴 소설 때문이다. 스토커는 ‘드라큘라의 삶’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괴기소설을 썼고 크게 명성을 떨쳤다.
우리는 역사를 똑바로 들여다봐야 할 이유가 있다. 드라큘라의 일대기를 들여다보자. 드라큘라(1431~1476)의 아버지는 신성 로마 제국의 드래곤 기사단 소속인 왈라키아 공 블라드 드라큘(Vlad Dracul) 2세다. 아버지가 용의 기사단의 단원이었기에 사용된 문장(紋章)이 ‘드라큘’이다. 루마니아어인 드라쿨(Drakulić)은 용(또는 악마)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어머니는 몰다비아 공국의 공녀 크네아지아다.
드라큘라는 트란실바니아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시기쇼아라(Sighişoara)에서 태어났다. 현재 그곳에는 생가가 변형된 채로 남아 있다. 드라큘라가 태어난 시기쇼아라는 그 당시 루마니아인이 아닌 게르만족 후손인 색슨족이 장악하고 있었다. 12세기에 이곳으로 이주한 색슨족은 철옹성 같은 성벽을 쌓고 상권을 장악했다. 루마니아 현지민들은 들어가 살 수 없었지만 당시 드라큘라의 아버지는 이들과 무역 협정을 맺고 도시 내부에 살 수 있었다. 형제는 형(미르체아), 본인(블라드), 남동생(라두) 3남이었다.
드라큘라는 어릴적(11살 경) 오스만 제국에 동생(4살)과 함께 볼모로 보내졌다. 드라큘라는 오스만 제국의 황태자인 메흐메트(훗날 메흐메트 2세가 된다)와 그의 아버지 무라드 2세에게 잔혹한 일을 많이 당했다. 그는 오스만 제국을 탈출해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아버지는 다른 종족에 의해 암살(1447년, 드라큘라 16살 경)되었고 형은 뜨거운 인두에 눈을 잃고 생매장을 당하는 끔찍한 일을 겪었다. 드라큘라는 살아남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왈라키아 공국의 영주가 된다. 아버지 블라드 드라큘이라는 이름을 물려받았고 왈라키아 타르고비스테(Targoviste)를 수도로 삼는다.
포로들을 꼬챙이에 꽂아 죽여
하지만 사회는 불안정했고 영주 자리는 늘 위태로웠다. 툭하면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켜 공작을 죽여 버리는 하극상은 끊이질 않았다. 드라큘라는 왕궁을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고 나서 ‘피의 숙청’을 시작했다. 정적인 보야르(boyar, 당시 최상층의 귀족) 계급을 제거하는 게 우선이었다. 부활절 날(1457년), 그들을 왕궁으로 초대, “지난 50년간 몇 명의 군주를 모셨냐‘고 질문했지만 너무 많이 갈아치워 그들의 답변을 못하자 전부 다 죽였다. 대략 500명 정도가 말뚝에 박혀 처형되었다. 그의 처형 방법이 하도 잔혹해 체페시(Ţepeş, 가시, 또는 꼬챙이)라는 호칭을 얻게 되었다.
이후 그들을 다른 방법으로 이용했다. 브란성 근처 산정에 포에나리 요새를 축조할 때 보야르 계급에서 살아남은 귀족들을 인부로 이용했다. 이 포에나리 요새는 아주 중요한 전략적 거점이었다. 이어 드라큘라는 색슨족에게 전면전을 통보한다. 이 길을 상업로로 이용하려면 자신의 지시에 따르라고 명한다. 하지만 색슨족은 자신들의 이권을 위해 블라드의 정적들을 지원했다. 드라큘라는 군대를 이끌고 색슨족의 거점도시였던 브라쇼브(Brasov)로 진격했다. 수천 명을 포로로 잡았다. 그 많은 포로들을 다 꼬챙이에 꽂아 죽였고 그대로 방치했다. 드라큘라가 그곳에서 식사를 해야 할 정도로 너무 많은 숫자였다.
드라큘라의 피의 장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호시탐탐 서방으로 진출을 꾀하고 있는 오스만 제국과도 전쟁을 결심한다. 오스만제국의 사절단이 왔을 때, 터번을 벗지 않자 군주에 대한 모욕으로 여겨 그 자리에서 터번 쓴 머리에 못을 박아 죽였다. 1461년, 오스만과 왈라카이는 전면 전쟁에 들어갔다. 이듬해(1462년)에 2000명이 넘는 포로를 잡았다. 그 포로들 전부 코를 잘라버렸다.
그러자 투르크의 술탄 메흐메트 2세는 3배 이상의 군대를 끌고 쳐들어 왔고 드라큘라는 사력을 다해 싸웠으나 전세는 몰리기 시작한다. 포에나리 성으로 숨어 들어갔으나 장기적인 전투에서는 별다른 대책이 없었다. 부인은 성벽에서 떨어져 자살했고 수많은 수하 장군들을 잃었다. 드라큘라는 편자(말발굽형의 쇠붙이)를 역 방향으로 이용해 겨우 탈출한다. 하지만 오스만 군과 맞서 싸우다 술탄의 친위부대 예니체리들의 총칼에 무릎을 꿇고 목이 잘렸다. 향년 45세. 서기 1476년의 일이었다.
루마니아의 주요한 여행지들
유럽 발칸 반도에서도 동유럽 쪽에 위치한 루마니아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낯선 여행지다. 루마니아는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의 독재를 반대하는 1989년 시민혁명을 통해 자유를 얻었다. 공산국가라는 이미지가 많이 남아 있지만 실제로 수도 부쿠레슈티(Bucureşti)는 기대 이상으로 볼거리가 많다. ‘루마니아의 작은 파리’라 칭하던 개선문, 세계에서 가장 큰 건물 중 하나로 알려진 국회의사당(1984년) 등 공산당 정권이 만든 유명 건축물들. 그것 말고도 도심 속에 남아 있는 옛 모습은 여행객들을 충분히 매료시킨다.
또 ‘시나이아(Sinaia)’, 브라쇼브와 시기쇼아라를 구경하는 재미를 놓치면 안 될 것이다. 시나이아는 ‘카르파티아(Carpathian)의 진주’라 불린다. 왕가의 여름 별궁인 펠레쉬(Peles, 루마니아 국보 1호), 펠리쇼르 성이 인기다.
또 시기쇼아라에는 드라큘라가 태어나 4살까지 살았던 생가가 있다. 그것 뿐 아니라 이 도시의 랜드마크 역할을 하는 시계탑 등, 올드 타운은 마치 중세를 옮겨 놓은 듯하다. 이 도시의 역사지구는 1999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 지역으로 지정되었다. 좀더 사실적으로 알고 싶다면 다큐멘터리 를 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Travel Tip!
항공편 직항은 아직 없다. 터키 이스탄불에서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공항으로 이동하면 된다. 또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등 유럽 각지를 경유해 가는 방법이 있다. 그 외에 카타르항공을 이용해 도하를 거쳐 부쿠레슈티로 갈 수 있다. 도하까지 약 10시간, 부쿠레슈티까지 약 5시간 걸린다.
현지교통 수도 부큐레슈티에서는 지하철을 이용하면 편리하다. 그 외 시외 이동은 열차, 버스 등으로 원하는 곳으로 이동하면 된다. 브란성을 가려면 부큐레슈티에서 열차를 이용해 브라쇼브로 가야 한다. 브라쇼브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12, 16번 버스를 타고 Stadionul Tineretului에서 하차 후 브란성 가는 버스(40분 소요)를 타면 된다. 시기쇼아라는 브라쇼브에서 버스나 열차로 2시간 정도 소요된다.
시차 한국보다 7시간 늦다
음식정보 음식이 제법 맛이 좋다. 루마니아식 족발인 치올란(Ciolan)이 있다. 그 외 옥수수를 재료로 이용한 음식, 다진 돼지고기를 포도잎으로 싼 사르말레 등이 있다. 루마니아 전통 도넛인 파파나스(Papanas)도 있다. 특히 부큐레슈티에서는 전통 깊은 건축물에서 음식을 즐길 수 있다. 구시가지 왕궁 옆에 있는 마눅 여인숙(hanul lui manuc, 1808년)은 200년 전통을 자랑한다. 또 1879년에 오픈한 카루 쿠 베레(Caru cu Bere)는 시내에서 가장 오래된 맥주홀이다. 원래는 왕족의 만찬장소였던 이곳은 차우셰스쿠의 큰아들이 자주 파티를 열던 곳이란다. 현재도 레스토랑으로 이용하고 있으며 매우 흥미롭다.
루마니아 문화 루마니아 민속 예술, 전통음악과 춤, 목공예, 도자기 공예, 건축, 뜨개질, 자수, 보석가공 등 여러 문화유산들이 발전을 거듭하면서도 그 원형을 잃어버리지는 않았다.
예술뿐 아니라 과학과 학문에 있어서도 루마니아는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는다. 스포츠 중에서는 체조를 빼놓을 수 없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 당시 15세의 나이로 참가해 체조 요정이라는 별명을 얻은 나디아 코마네치(Nadia Comaneci)가 아직도 유명하다. 루마니아가 체조에 강한 이유는 신 식초 성분이 많은 음식을 즐기는 그들의 식생활도 한몫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미인들이 아주 많다.
화폐정보 레이(LEI)를 쓴다. 1유로가 4.4레이 정도다. 환전할 필요 없이 ATM기를 이용하면 된다.
주류 정보 포도주(VIN), 추이카(TUICA)라는 특유의 과실 증류주가 유명한데 자두가 좋다. 포도주는 아주 저렴한 가격과 뛰어난 품질로 이미 서구에서 크게 사랑받고 있다. 루마니아 포도주 박람회(VIN-EXPO)가 열린다. 그 외 보드카, 위스키, 럼, 다양한 맥주 등이 생산되고 있다. 포도주는 겨울철에는 데워 먹는 특징이 있다. ‘뜨거운 포도주(Vin fiert)’는 겨울 추위나 감기 등을 이기기 위한 민간요법이다.
숙박 정보 가격이 비싸지 않고 시설이 좋은 편이다. 유명한 숙박 사이트를 이용하면 된다.
시니어 포인트 수도는 걸어서 다니거나 지하철을 이용하는 데 크게 불편하지 않다. 그러나 도시 간 이동은 시설이 열악한 편이다. 서두르지 말고, 관광도시마다 1~2일 정도 지내면서 천천히 여행을 즐기는 것이 키 포인트다. 물가가 싼 편이라서 원하는 음식과 술은 멋진 레스토랑을 골라 먹도록 하자. 싼값에 기념품을 사오는 것도 방법이다. 관광지는 생각보다 눈요기를 할 곳들이 아주 많다.
>> 이신화 여행작가
이립(而立)에 여행작가로 시작해 어언 지천명(知天命)에 다다랐다.
그동안 ‘걸어서 상쾌한 사계절 트레킹’, ‘대한민국 100배 즐기기’, ‘on the camino’ 등
여행서 총 14권을 출간했다. ‘인생이 짧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여 지난해 홀로 197일간 30개국의 유럽 배낭 여행을 했다. ‘살아 있을 때 떠나자’가 삶의 모토다.
필자는 해외여행이 자유화하기 이전에 젊은 시절을 보냈고 치열하게 먹고 사는 것만도 버거워 여행은 오직 꿈으로 고이고이 접어 품고, 여유 생기면, 시간 나면 하면서 미루고 또 미루며 살아왔다. 이제 막상 약간의 여유가 생기고 고이 접어 두었던 여행의 꿈을 펼치려 하니 두렵고 훌쩍 떠난다는 것이 만만치가 않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시니어들이 단체 패키지 여행상품을 이용하여 잘 짜인 일정대로 가이드를 따라다니거나, 가족 중 젊은이에게 여행의 처음과 끝 모든 걸 다 맡기고 편하게 따라만 다니기만 하는 여행을 하게 된다.
그러나 영어도 못하고, 길눈까지 어둡고, 겁 많고 소심한 성격까지 혼자 여행하기엔 최악의 조건인 필자는 손안에 세상 스마트폰 안에 여행 관련 앱 들을 다운 받아 따로 모으며 배짱 좋게 10일간의 발칸 지역 자유여행을 결행하였다.
제일 먼저 여러 블로그와 배낭여행 카페 등에서 여행에 정보를 구하여 그 내용을 폰에 바로바로 저장하고, 일정이 정해진 대로 항공권 가격 비교 앱을 통하여 원하는 날짜의 항공권을 예약하는 거부터 여행은 시작된다.
그 다음 숙소 예약하기. 나는 여행할 때 고급스런 호텔에 묵기 보다는 레지던스 나 게스트하우스에서 머물며 다른 여행객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그 나라 시장이나 마트에서 구입한 재료로 음식도 해서 때론 나눠 먹기도 하는 것을 좋아한다.
요즘 TV 광고에도 많이 나오는 호텔 부킹 앱을 이용해 이런 취향을 조건에 다 넣어서 레지던스 위주로 예약을 해 두었다.
이 탁월한 선택으로 발칸지역의 시골 가정집 같은 레지던스에 묵으며 친절한 주인이 직접 구운 쿠키와 케이크도 얻어먹고 와인도 함께 마시며 따뜻하고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아침 저녁으로는 유럽의 시골 마을의 뜰과 마을을 산책하면서 늘 꿈꿔왔던 내 스타일을 제대로 취향 저격한 여행의 추억을 만들 수 있었다.
이런 모든 여행 이야기를 실시간으로 카톡으로 걱정하는 가족에게 안부도 전하고, 사진과 화상 통화로 여행을 생중계 하며 다녔고 저녁에 숙소에서 하루 일정을 마치고는 그날의 여행 이야기를 정리하여 SNS 올림으로서 친구들과 여행의 느낌을 공유하고 여행 기록도 남기며 하루하루를 마감하였다.
자유여행을 꺼리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인 언어, 영어 문제일 것이다. 이 문제도 번역 앱을 잘 이용하면 외국인 친구와 유창하게 영어로 소통할 정도는 아니더라도 다니는데 불편함이 없고 급하면 번역된 내용의 핸드폰을 상대에게 보여 주면 상대도 이 스마트한 소통방법에 즐겁게 응대해 준다.
외국에서 한국말로 길 안내를 받는 것을 상상해 보라. 구글의 지도 앱을 다운 받아서 여행 떠나기 전 미리 주요 도시 볼거리 장소와 예약된 숙소를 즐겨 찾기로 지정해 두고, 네비게이션 기능을 작동시키면 오른쪽으로 가시오, 왼쪽으로 가시오. 하는 지시를 한국말로 받으면서 길을 찾을 때의 기분이란 신기하기도 하고 신통하기도 하면서 이 편해진 여행 환경에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스마트폰 하나에 유용한 앱 들만 잘 다운 받아서 활용해도 특별히 문제없이 가이드의 도움 없이도 자유롭게 내가 원하는 스타일로 나만의 자유로운 해외여행도 거뜬히 다녀올 수 있을 것이다. 자~ 내 손안에 가이드를 믿고 첫 발의 두려움을 버리고 스마트하게 자유롭게 한 발 내딛어 보자.
경남 양산시쯤에서 허기진 배를 채우고 다시 오늘의 목적지인 창원시 수산대교를 향해 힘차게 페달을 밟았는데 밀양시를 지나면서 긴급 상황이 발생하고 말았다. 라이딩 중에 한 대원의 자전거 체인이 끊어졌는데 선두를 이끌던 필자는 배낭에 넣어 두었던 전화벨 소리를 듣지 못한 채, 또 한 명의 대원을 뒤에 달고 밀양시 삼랑진읍까지 달리고 말았다. 미안했다. 필자가 왔던 길을 되돌아오면서 허비한 시간 때문에 예정된 3박 4일 안에 모든 일정을 소화할 수 없게 됐다.
결국 밀양시 근처에서 라이딩을 끝내고 궁리 끝에 장비를 차에 싣고 첫날밤에 묵었던 산수정으로 철수했다. 첫날 산수정을 떠나면서 기회가 되면 다음에 꼭 다시 한 번 더 들르겠노라고 인사했으나 불과 이틀 만에 다시 그 집을 찾게 될 줄은 누구도 몰랐으리라. 걸걸한 여주인도 흔한 인사말 정도로 생각했을 터인데 실제 약속이 지켜지자 반가운 마음에서인지 늦은 저녁 시간임에도 정성을 다해 상차림을 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밤 10시가 다 돼 도착해서 허기진 배를 채우고 술과 노래방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특별히 기분이 좋으셨던 여사장님의 깜짝 등장으로 분위기는 한껏 고조됐고 노랫소리는 자정을 훌쩍 넘겨 새벽 3시까지 낙동강 강가에 울려 퍼졌다.
광란의 밤이 지나고 산새들이 지절대는 아침이 밝았다. 날이 밝자 어둠 속에 잠겼던 강물이 모습을 드러내면서 평화롭게 흐르고 있었다. 영풍교(경북 문경시-예천군) 밑 출렁이는 강물 위에도 고운 햇살이 내려앉았다. 4일 중에 이날이 가장 날씨가 쾌청하면서 미세먼지도 별로 없어 자전거 타기 딱 좋은 날이었다. 아쉬운 마음에 서울을 향해 2~3시간 라이딩하기로 하고 차에서 자전거를 다시 내렸다. 그동안 뻐근했던 다리도 풀리고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없던 힘도 불끈 솟았다. 강둑을 지나고 농로를 따라 한참을 달리자 드디어 상주시를 벗어나 문경새재길로 접어들었다.
문경세재길에 접어든 뒤에도 힘찬 라이딩을 계속했고, 이윽고 새재길 옆 주평마을로 들어섰다. 시계를 보니 당시 시각은 낮 12시 30분. 이날은 마침 어버이날이어서 늦어도 저녁은 서울에 올라가 가족들과 함께하기로 했기 때문에 더 가는 건 무리라 여겨 여기서 모든 일정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문경새재를 눈앞에 두고 강가 옆 마을 입구 팔각정에 앉아 시원한 강바람을 안주 삼아 막걸리 한 잔으로 3박 4일간의 피로를 털어내면서 모든 일정을 끝냈다.
필자는 살아가면서 늘 새로운 도전에 목말라 했다. 자전거 라이딩도 시작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자전거 라이딩에 대한 도전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물론 지금보다 훨씬 업그레이드된 형태로!
낙동강 700리 길 자전거 라이딩을 무사히 마칠 수 있게 해준 필자의 건강과 비록 이제는 주인을 닮아 낡아가고 있지만 이 길 위에서 한 번도 말썽을 부리지 않고 보필해 주었던 필자의 애마, 자전거에도 한없는 애정과 감사의 뜻을 표한다. 또한 어려웠던 시간을 서로 격려하고 의지하며 보냈던 SD21 동료들에게도 감사드리고 모두에게 사랑의 하트를 뿅 보낸다.
스마트폰만 잘 다뤄도 IT 도사란 소리를 듣는다. 스마트폰에 다양한 IT 기능이 탑재돼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는 굳이 디지털 카메라를 따로 가지고 다닌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스마트폰에 카메라 기능이 있는데 왜 불편하게 디지털카메라를 가지고 다니느냐고 묻는다. 물론 그렇게도 해봤다. 하지만 일단 시력이 약해지다 보니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린다는 것이 불편했다. 이미 갤러리에 너무 많은 사진이 들어가 있어 정작 필요할 때 사진을 꺼내 보려면 불편하기 했다. 그래서 스마트폰은 되도록 전화나 문자 주고받는 기능으로만 활용하고 다른 기능은 역시 다른 IT 전문 기기를 그냥 쓴다.
새로운 약속을 잡게 되면 스마트폰에 익숙한 사람들은 스마트폰 일정표에 기재한다. 반면 필자는 배낭 속에 따로 갖고 다니는 탁상용 캘린더에 꺼내 적는다. 스마트폰의 글자는 너무 작아 잘 안 보이고 일부러 일정표를 보지 않으면 까먹기 때문이다. 한눈에 보이는 아날로그 방식의 탁상용 캘린더가 필자에 더 익숙하다.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카페에 글을 올리는 것도 그렇다. 책상에 앉아 데스크톱 PC로 글을 써야 편하지 잘 보이지도 않는 스마트폰 자판을 보며 굵은 손가락으로 고생하기 싫은 것이다.
블로그 활동도 그렇다. 2009년 유어스테이지라는 포털사이트에서 블로거를 모집했었다. 이미 블로거 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모집한 것인데 문외한인 필자도 응시했다. 그때만 해도 솔직히 블로그라는 것을 몰랐다. 필자 블로그도 없었고 어떻게 만드는지도 몰랐다. 다만 블로그가 뭔지는 모르지만, 글 쓰는 거라면 이미 다른 카페에 써놓은 글이 많으니 블로그를 만들게 되면 글을 꾸준히 써서 올리겠다고 했다. 그런데 다행히 합격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글을 올리기 시작해서 6년 6개월 만에 누적 방문객 300만 명을 기록했다. 올린 글이 4000개 정도 된다. 하루에 1,500명 내지 2,000명이 들어온다. 딸도 블로그를 가지고 있는데 하루에 200명 정도 들어온다며 자랑했었다. 필자는 방문객이 집계되고 있는지조차 몰랐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도 된다고 이제는 아들딸도 블로그에 관한 한 필자를 무시하지 못 한다. 자신감이 솟은 필자는 블로거들을 모아 한국시니어블로거협회를 만들어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필자 블로그가 2002년 한국블로그산업협회에서 주관하는 대한민국 100대 블로그에도 선정됐다. 이때 가장 친하게 지내는 초등학교 동창생들에게 추천 투표를 부탁했었다. 블로그라는 말 자체를 처음 듣는다며 미안하지만 도와주기 어렵다는 반응이었다. 또래들이 같이 공유하지 않는 IT 분야는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은 IT 관련해 모르는 것이 있으면 필자가 많이 안다며 물어오는데 여전히 아는 것은 알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 친구 중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파는 회사를 운영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친구가 IT 쪽에 박식할 것으로 알고 여러 가지 물어 보지만 그도 역시 아는 것만 알고 의외로 쉬운 것은 모르는 것을 보고 놀 란 적이 있다.
알고 나면 별것도 아닌 게 IT의 세계이다. 그런데 좀 모른다고 철저히 무시당한다. 필자 또래 사람들은 특히 그런 대우를 많이 받는다. 스마트폰 가게에 들러 이것저것 물어보면 “어르신은 가르쳐 드려도 이해가 안 될 테니 집에 가서 자녀들에게 도움을 받으라”고 충고한다. 그러나 집에 가서 자녀들에게 부탁하면 차분히 가르쳐주기보다 자기들 방식으로 빠른 손놀림으로 조작한다. 몇 번이나 천천히 해달라고 해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천천히 가르쳐 줘도 머리에 안 들어올 판에 그렇게 하면 알아볼 수가 없는 것이다.
되도록 어릴 때부터 IT 기기를 다루게 해야 교육에 좋다고 한다. 그러나 어느 집은 자녀들에게 아예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는 스마트폰은 안 사준다는 집도 있다. TV를 일부러 안 사는 집도 많다. 돈이 없어서가 아닌 것이다. IT의 폐해도 있기 때문이다.
세계적 경영컨설팅 업체 ‘머서’가 2016년 2월 발표한 도시별 ‘삶의 질’에서 오스트리아 빈(Wien)이 지난해에 이어 1위를 차지했다. 스위스 취리히, 뉴질랜드 오클랜드, 독일 뮌헨, 캐나다 밴쿠버가 2∼5위를 차지했고 서울은 73위였다.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는 합스부르크 왕족들이 여전히 살아 있다. 이 도시에 가면 허리 잘록한 드레스를 입고 모차르트 음악에 맞춰 매일 무도회에서 춤을 추고, 마차를 탄 귀족이 되어 사랑을 만들어 갈 것 같다.
누구나 왕족, 귀족이 되는 도시
합스부르크 왕조를 모르면 빈을 여행할 수 없다. 합스부르크 왕조의 정궁인 호프부르크(Hofburg)는 물론이고 도시 곳곳 웅장하고 화려한 왕가 건축물들이 즐비하다. 그 골목 사이로 영화 속에서 보았던 마차가 ‘따각따각’ 말굽 소리를 내며 다닌다. 골목을 걷고 있으면 가발과 옛 복장을 차려입고 티켓을 파는 사람들이 무수히 다가온다. 100년도 넘는 연륜을 자랑하는 카페에서는 모차르트의 선율을 들으며 왕족, 귀족들처럼 토르테와 멜랑쥐를 우아하게 마신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오스트리아뿐만 아니라 신성로마제국을 통치했던 가문이다. 루돌프 1세(1273년 즉위)를 시작으로 카를 1세(1918년 사퇴)에 이르기까지 무려 645년 동안 유럽의 절반을 지배했던 왕조다. 합스부르크 왕가도 우리나라 조선의 600년 역사처럼 긴 시간동안 사건, 사고가 무수히 많았다. 특히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 1717~1780)부터 그의 자식, 손자에 이르기까지 드라마틱한 이야깃거리가 아주 많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비극(?) 스토리들
국내서도 뮤지컬로 무대에 올랐던 황태자 루돌프(Rudolf Franz Karl Joseph, 1858~1889) 이야기를 이해하면 오스트리아 빈 여행이 수월해진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황태자 루돌프의 할머니이다. 그녀는 카를 6세(Kaiser Karl VI)의 장녀로 왕가의 규정을 깨고 학교에서 만난, 잘생긴 유학생 프란츠 슈테판 로트링겐(1708~1765)과 결혼했다. 그녀는 남편을 왕(프란츠1세)으로 내세우고 섭정을 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능력이 탁월해 전쟁 등, 많은 것에서 업적을 이뤘고 16명(5남 11녀)의 자식을 두었다. 연애결혼을 해서인지 다행히 합스부르크의 ‘근친혼의 저주’ 인 ‘주걱 턱’은 없었다.
남편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아들 프란츠 요제프(1830~1916)가 18세에 왕위를 계승한다. 프란츠 요제프는 독일인 시시 공주(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 1837~1898)와 연애 결혼한다. 프란츠 요제프의 장남이 바로 루돌프다. 루돌프는 어린 시절 늘 부모의 애정결핍에 시달렸다. 아버지는 새벽부터 일어나 공무를 처리하기 바빴다. 하루 10시간 집무는 기본이었다. 엄마는 일 년 중 대부분 여행을 떠나 있어 얼굴 보기도 힘들었다. 할머니 손에서 길러진 그는 어릴 적부터 군대식으로 엄격하게 교육받았다. 게다가 원치 않은 결혼을 하게 된다. 루돌프는 벨기에 레오폴드 2세의 딸인 스테파니(Stephanie, 1864~1945)와 정략결혼을 했다. 당시 루돌프는 22세였고 스테파니는 16세였다. 결혼 2년 후, 스테파니는 딸 엘리자베트 마리를 낳았지만 사랑없는 결혼은 결코 행복할 수 없었다. 이들은 끝내 별거를 하게 된다. 이 무렵, 30세의 루돌프는 17세밖에 안 된, 어린 마리아 폰 베체라를 소개받아 사랑에 빠진다. 이 사건으로 황태자 자격도 박탈 당하게 된다.
1889년 1월 말, 루돌프는 연인과 함께 황실 사냥용 별장 마이얼링(Mayerling)에서 동반자살한다. 이후 합스부르크 왕가는 서서히 무너지게 된다. 요제프 부인 시시 황후는 스위스 여행 중에 총에 맞아 비명횡사했다. 거기에 합스부르크의 마지막 황태자인 조카 프란츠 페르디난트(1863~1914)는 아내와 함께 사라예보의 육군 훈련에 참관 차 갔다가 총격을 받아 죽었다. 또 남동생이었던 막시밀리아노 1세(1832~1867)는 멕시코 제국의 황제로 갔다가 총살형 당했다. 요제프는 68년 동안이나 재위를 했으나 오히려 그 때문에 ‘볼 꼴 못 볼 꼴’ 다 본 비극의 황제였다.
호프부르크 왕궁과 쇤브룬 궁전
빈에는 호프부르크 왕궁과 쇤브룬 궁전(Schoenbrunn)이 있다. 호프부르크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웅장하고 드넓은 겨울 궁전이었다. 왕궁은 크게 16~18세기에 지어진 구 왕궁과 19~20세기에 지어진 신 왕궁으로 나누어진다.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와 엘리자베트 황후가 사용하던 방은 공개된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살던 레오폴트 관은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기 때문에 관람이 제한된다.
쇤브룬 궁전에는 여성적인 로코코 양식으로 꾸며진 각종 용도의 1441개 방이 있다. 이 가운데 40개만 공개하고 있다. 6세 때 모차르트가 연주하고 마리 앙투와네트에게 구혼했다는 ‘거울의 방’과 마리아 테레지아의 비밀 만찬실인 ‘중국식 작은 방’ 등이 있다. 마리 앙투와네트는 프랑스 왕가로 시집(15세)가기 전까지 이 궁전에서 지냈다. 그 외에도 여러 명화를 감상할 수 있다. 특히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의 놀라울 정도로 아름답고 섬세한 그림을 볼 수 있다. 이 궁전은 1996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의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구스타프 클림트와 벨베데레 궁전
빈 시내에서 멀지 않은 남서쪽에 1721년에 지어진 벨베데르(Belvedere) 궁전이 있다. 호프부르크나 쇤브룬 궁전에 비해 크기는 작고, 정원도 아담하다. 이 왕궁의 주인은 오스만 투르크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오이겐 왕자였다. 오이겐 공이 사망한 후 합스부르크 왕가는 이곳에 미술품을 수집 보관해 두었다. 그후 사라예보에서 암살당한 페르디난트 황태자가 1914년까지 이곳에서 거주했다. 특히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을 비롯해 중세시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회화들을 소장하고 있다. 현재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궁전에는 구스타프 클림트, 에곤 쉴레, 오스카 코코슈카의 작품들이 걸려 있으며 클림트의 명작 ‘키스(1907~1908년 작품)’도 이곳에 보관되어 있다. 오스트리아의 많은 샵에서는 클림트의 그림을 활용해 기념품을 만들어 판매하고 있다. 클림트를 알려면 BBC가 제작한 나 존 말코비치가 주연한 영화 를 보면 된다. 그 외 클림트 명화의 실존 인물을 다룬 영화 도 있다. 빈의 제체시온(Secession)에서는 클림트가 만든 ‘베토벤 프리즈(the Beethoven Frieze)’가 볼거리다.
창의성 넘치는 훈데르트바서의 쿤스트 하우스
빈의 건축물 중 눈에 띄는 것은 프리덴스라이히 훈데르트바서(Friedensreich Hundertwasser)의 작품들이다. 그의 건축물 중 여행자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주택가 사이에 자리한 훈데르트바서 하우스(Hundertwasser Haus)다. 자연 친화적이고 창의성이 넘치는 그의 건축 기법은 차라리 경이롭다. 이 밖에도 훈데르트 바서의 미술품 등을 전시하고 있는 쿤스트하우스 빈(KunstHaus Wien)에서도 참신하고 자유로운 그의 작품세계를 엿볼 수 있다. 또 훈데르트바서의 손길이 닿은 쓰레기 소각장도 관광명소가 됐다. 프라터 공원 가는 길목에서 볼 수 있다.
진귀한 작품들의 寶庫 ‘빈 미술사 박물관’
오스트리아 빈 미술사 박물관은 빈 여행의 백미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 마드리드의 프라도 박물관과 함께 유럽 3대 미술관으로 꼽힌다. 이 미술관은 합스부르크 가의 방대한 수집품을 소장하고 있다. 16세기 이후 합스부르크 왕가와 17세기 중엽 레오폴트 빌헬름이 수집한 방대한 소장품을 모체로 세계 미술사 전반에 걸친 진귀한 작품들이 있다. 티치아노, 틴토레토와 같은 16세기 베네치아 화파와, 루벤스, 반 다이크와 같은 플랑드르의 대가, 그리고 라파엘로, 벨라스케스, 뒤러, 브뤼헐로 이어지는 거장들을 만날 수 있다. 사진 촬영이 가능한 곳으로 무작정 많은 작품을 찍는 것이 좋다.
의 촬영지인 프라터 공원
영화 애호가들은 달달한 로맨스 영화 의 촬영지를 방문할 목적으로 빈을 찾는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은 같은 배우(에단 호크, 줄리 델피)를 출연시켜 비포 시리즈 영화를 완성해 냈다. 영화 속 두 여인이 밤을 새웠던 곳이 프라터 공원(Prater Park)이다. 이 공원은 1560년 막시밀리안 2세가 합스부르크 왕가의 오락장으로 개장했으며 1766년부터 일반에게 개방했다. 실제로 영화 속에 등장하는 대관람차(61m) 등의 놀이기구가 있다.
그 외에도 빈에는 성 슈테판 대성당 그라벤(게른트너) 거리, 시청사, 빈 대학 보티프 교회, 카를플라츠 역사, 앙커 시계, 암 슈타인 호프 교회 등 볼거리가 많고 모차르트, 베토벤, 요한 슈트라우스, 요제프 라너 등의 음악가는 물론 프로이트 등 무수한 인물의 흔적을 찾아낼 수 있다.
-----------------
Travel Tip!
항공편 대한항공이 인천에서 오스트리아 빈까지 일주일에 3번(수, 금, 일) 운항한다. 오스트리아 빈까지는 10시간 30분~11시간이 소요된다.
시차 한국보다 8시간 늦다.
음식정보 수육 같은 타펠슈피츠, 돈가스나 비프가스와 거의 비슷한 슈니첼이 빈의 대표 요리. 그리스 거리(플라이슈마르크트)의 그리헨바이슬(griechenbeisl, 1447년에 개업)은 모차르트, 베토벤, 마크 트웨인, 채플린 등 유명인들이 찾은 곳이다. 또 카페 문화가 발달되어 있다. 란트만(landtman), 젠트랄(gentral), 임페리얼 호텔(imperial), 자허 호텔, 할카(halka)가 유명하다. 데멜(Demel)은 초컬릿이 아주 맛있다. 워크 앤 모어(Wok & More, 칼스플라츠 지하철역 근처)에서는 아시아 음식을 뷔페로 즐길 수 있다.
주류 정보 와인마을로 유명한 그린칭(Grinzing)이 있다. 호이리거 와인(heuriger Wein)의 본 고장이다.
숙박 정보 최고급 호텔부터 아파트먼트 호텔, 게스트하우스, 유스호스텔 등 다양한 숙박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배낭여행자들이 많이 찾는 저렴한 유스호스텔도 많다.
교통 패스 빈 카드(Die Wien-Karte)로 3일 동안 버스, 지하철, 트램 등 교통수단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또한 유람선, 음악회, 쇼핑, 카페, 레스토랑 등에서 여러 가지 할인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단기 체류라도 여러 명소를 돌아보고 싶은 여행자에게 제격이다.
축제 빈은 음악의 도시답게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신년 음악회와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무도회 등이 열린다. 빈 축제는 매년 5월 중순~6월 중순에 열리며 7월 중순~9월 중순에는 뮤직 페스티벌이 펼쳐진다.
시니어 포인트 빈은 동유럽 국가들 중에서도 시니어 층이 여행하기에 편의 시설이 잘 갖춰져 있다. 몸이 불편해도 별로 어렵지 않다. 호프부르크나 쇤브룬 궁전에선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 이신화 여행작가
이립(而立)에 여행작가로 시작해 어언 지천명(知天命)에 다다랐다.
그동안 ‘걸어서 상쾌한 사계절 트레킹’, ‘대한민국 100배 즐기기’, ‘on the camino’ 등
여행서 총 14권을 출간했다. ‘인생이 짧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여 지난해 홀로 197일간 30개국의 유럽 배낭 여행을 했다. ‘살아 있을 때 떠나자’가 삶의 모토다.
7년에 걸쳐 200여 일 동안 15개 나라, 111개 도시를 여행한 부녀의 이야기를 담은 . 아빠와 딸은 낯선 여행지에서 동고동락하며 그동안 알지 못했던 서로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소소하고 꾸밈없는 그들의 여행기 속에는 진한 가족의 사랑이 담겨 있다. 여행이후 가장 든든한 동지가 생겼다고 말하는 부녀, 이규선ㆍ슬기씨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딸ㆍ아빠와 함께 여행을 떠나게 된 계기
(아빠) 딸이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으로 “아빠, 배낭여행 가려고 하는데 어디가 좋을까?”라고 물었다. 나는 무심히 “인도가 좋다던데”라고 했는데, 옆에서 들은 아내가 “인도 위험하지 않을까? 당신도 같이 갔다 오지”라고 해서 둘의 여행이 시작됐다. 처음 특별한 목표는 없었다. 단지 딸의 보호자로 다녀오자는 정말 가벼운 마음으로 떠났다.
(딸) 방학 마다 홀로 장기 여행을 다녔다. 인도로 여행지가 선정되자 엄마는 걱정이 되었는지 아빠와 함께 가는 건 어떠냐고 물어보셨고, 은퇴 후의 아빠가 조금은 심심해 보여서 아빠에게 여행을 같이 가자고 제안했다.
여행을 하며 힘들었던 점
(아빠) 멋모르고 따라나선 여행이라 특별히 준비단계에서 힘든 점은 없었다. 배낭을 꾸리는데 정말 신기하고 신이 났다. 그러나 인도는 여행초보가 감당하기에는 처음 며칠간은 거의 공포수준이었다. 또한 품안의 자식인 줄로만 알았던 딸이 “이거는 이렇게 해라, 이거는 하지 마라”라는 등 잔소리로 배신(?)을 때리는 바람에 놀라움과 함께 섧기도 했다. 그때만큼 한국에 있는 아내가 보고픈 적은 없었다. 처음엔 여행 끝나고 집에 가서 복수(?)를 단단히 하리라 하고 그냥 참았는데 나중에는 방어 차원에서 가끔 대들기도 했다.
(딸) 배낭여행을 처음 떠나는 아빠를 친구와 함께 간다고 착각(?)하고 비행기표 구입 30분, 배낭 꾸리기 한 시간, 그리고 여행 책 한 권을 사서 가방에 넣고는 여행 준비를 끝냈다. 초반에는 하루에 열 번, 아니 그 이상을 싸웠다. 한 번은 길거리에서 소리를 지르고 우는 사태도 벌어졌지만, 믿을 사람은 그 넓은 곳에 아빠와 나뿐이었다. 긴급한 상황에 서로 의지하느라 자연스럽게 동지애로 똘똘 뭉쳐졌다. 싸우는 건 어쩔 수 없다. 싸우면서 친해졌다.
여행을 하며 서로에게서 발견한 점
(아빠) 딸에 대해 누구보다 많이 안다고 자신했다. 그러나 집 밖에서 본 딸의 모습은 거의 문화적 충격 그 자체였다. 얘가 언제 이렇게 커 버렸지, 이런 면도 있었구나, 저런 강단도 있었네, 나의 유전자에 저런 면도 있다니 무척 신기하기도 했다. 훌쩍 커 버린 모습에 대견하면서도 언제까지 품 안의 자식이 아니라는 생각에 슬프기도 했다.
(딸) 내가 아는 아빠는 ‘아빠와 가장’이라는 책임의 가방을 메고 있는 남자였다. 하지만 여행을 하면서 아빠는 내게 ‘이규선’이라는 한 사람으로 다가왔다. ‘이규선’은 꿈과 희망, 열정으로 가득 찬 멋진 남자이자, 내가 아끼는 한 사람이다.
다시 여행하고 싶은 곳
(아빠) 인도다. 처음은 늘 아쉬움과 그리움이 배가된다. 그땐 너무 몰랐기에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다시 간다면, 보이고 느껴지는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싶다. 피하지 않고 정말 즐기고 싶다. 물론 그때도 딸이 옆에 있다면 좋겠다. 더 많은 이야기보따리를 풀어헤치고, 슬기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다.
(딸) 아빠와 함께 한 처음 여행지, 인도다. 아빠와 늘 이야기 한다. 다음에 가면 카메라 하나만 메고 가보자고. 바닥에 깔린 똥도 신나게 즈려 밟아보자고.
여행 후 서로에게 생긴 변화, 달라진 점이 있다면?
(아빠) 여행을 갔다 온 후 아빠와 딸이라는 수직적 관계에서 이젠 거의 동지애를 느끼는 친구가 되었다. 대화거리도 풍부해졌고, 딸이 무엇을 하던 “자신의 의지대로 올바른 길로 가고 있구나”라는 보다 확실한 믿음도 가지게 되었다.
(딸) 내가 무엇을 하든 믿어줄 든든한 동지가 생겼다.
딸/아빠와 여행을 계획하는 이들에게
(아빠) 시간은 흐르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무조건 떠나라고 말하고 싶다. 자신의 분신인 자식과의 여행은 부모를 행복한 추억 부자로 만들어 줄 것이다.
(딸)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아끼는 사람과 친해질 기회다. 가능하면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 많은 곳으로 떠나자. 우리에겐 인도의 열차가,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히말라야 산장이 그런 곳이었다.
부녀가 함께 계획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아빠) 첫 번째 책은 딸아이의 생일에 맞춰서 냈는데, 두 번째는 나의 생일이 있는 올해 6월에 나올 예정이다. 언제가 될지 알 수 없지만 슬기의 “아빠 여행 같이 갈래?”라는 말이 떨어지면 “내 새끼에게 여행이 필요한 무언가가 생겼구나”라고 단박 눈치채고 “콜”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딸) 6월에는 엄마와 배낭여행을 떠난다. 가능하다면 그다음 여행은 엄마·아빠와 함께 떠나고 싶다. 두 분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의 모습을 사진과 글로 담고 싶다.
>>>>>>>>>>>>>>>>>>>>>>>>>>>>>>>>
아빠 이규선 30년간 다닌 은행에서 퇴직 후, 시골에서 자연인으로 살고 있는 ‘딸 바보’.
딸 이슬기 삼성맨을 그만두고, 놀이·공연·강연을 기획하는 액션건축가로 활동하는 ‘추억 부자’.
친구들과 오르는 경기 동두천 마차산은 온통 연두색 파스텔화다. 정상에서 태풍급 폭우를 맞으면서도 누구 하나 힘들어하지 않았다. 나무 향기 가득하고 쏟아지는 빗줄기가 미세먼지까지 말끔히 씻어낸 쾌적한 ‘전원’이기 때문이다.
시니어는 은퇴 후 편리한 도시를 떠나 전원생활을 꿈꾸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전원에서 살다가 짧게는 수 개월, 길게는 몇 년 사이에 도회지로 되돌아온 이웃을 종종 보았다. “어릴 적 추억 속의 전원과 현실의 그것은 전혀 다르고 고독감, 교통 여건과 편의·의료 시설 부족이 큰 문제”라고 역 귀향 사연을 말했다.
장래를 생각해 전원에 투자했다가 큰 손해를 보고 철수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 시니어는 이러한 함정에 빠져들지 않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도시에서 전원처럼 쾌적하게 생활할 방법을 찾자.
첫째, 복잡한 문제를 안고 있는 ‘소유’보다 편리한 ‘이용’이 대안이다. 사실 시니어가 부동산에 장기 투자할 이유가 별로 없다. 투자비용, 관리비, 제세 공과금 등 ‘소유비용’이면, 마음에 드는 전원을 찾아 즐기거나 장거리 여행을 할 수 있는 여유도 생긴다.
서해안 명승지에 전세 들어, 바다낚시와 조개잡이로 얼굴을 검게 그을리면서 은퇴생활을 즐기고 있는 친구가 있다. 2년 계약이 끝나면 다음에는 깊은 산골로 갈 예정이라고 자랑했다. 일부 명승지에서는 월 단위 임대사업도 최근에 유행하고 있다. 동호인끼리 한 주일씩 교대로 사용하기도 한다.
둘째, 멀리 다니기 어려우면 도시에서 전원생활을 즐기자. 관악에서 정들어 산 지 어언 30여 년이 넘었다. 이웃과 인사를 나누고 사는 고향처럼 느껴지는 아담한 ‘전원마을‘ 이다. 집 앞과 뒤, 옆으로 초·중·고등학교가 연이어 있다. 아이들은 전학 한 번 안 하고 학교를 마쳤다.
울창한 숲 덕분에 여름철에는 에어컨이 필요 없을 정도로 시원하다. 계곡 물놀이장은 어른·아이들 천국이 된다. 서울·관악산 둘레길이 잘 꾸며져 누구나 산책하기도 좋다. 아침마다 경쾌한 음악소리에 맞춰 체육공원에서 열심히 운동할 수도 있다.
이보다 더 쾌적한 전원이 어디에 있겠는가? 매주 배낭 메고 친구들과 찾는 북한·도봉·청계산은 우리 차지다. 전원생활! 바로 내 앞에 있다.
크로아티아 흐바르(Hvar)는 유명 여행전문잡지에 ‘세계에서 아름다운 섬’으로 자주 손꼽힐 이유가 충분하다.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가 자주 찾았던 곳이란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유명인과 일반인의 여행 시각이 뭐가 다를까? 그저 살아생전 찾아가봐야 할 섬이 흐바르다.
이 섬의 아름다움은 그 어떠한 미사여구로도 표현해 낼 수 없다.
진한 라벤더 향기 머금은 스타리 그라드의 골목길
스플리트에서 배를 타고 2시간 거리. 여객선은 2008년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흐바르 스타리 그라드(Stari Grad) 섬으로 다가선다.
한눈에도 볼 수 있는 작은 섬이 눈 앞으로 스르르 다가선다. 선착장에 멈춘 거대한 배에서 우르르 사람들이 내린다.
하선한 관광객과 다시 배를 타고 이 섬을 나가려는 인파로 복잡한 선착장 주변에 라벤더 향기를 가득 담은 난전 두어 개가 펼쳐져 있다. 라벤더의 강한 향기가 코 끝을 ‘훅’ 자극한다. 즉석에서 갈아주는 주스 파는 곳으로 다가간다. 햇살 좋은 섬에서 자란 과일 주스는 맛이 참 좋다. 피자 한쪽을 사서 미처 먹지 못한 ‘아점’도 먹는다. 그러는 사이 북적대던 사람들은 섬 어디론가 흩어져 갔다. 돌아갈 배편을 미리 구입하고 천천히 섬 안으로 발을 옮긴다.
해안 길(riva)을 피해 일부러 민가가 있는 계단으로 올라선다. 해묵은 느낌이 가득한 골목길엔 치즈 빛 담 벽과 반질반질한 돌이 이어진다. 골목은 고요하고 평화롭다. 좁은 골목길에서 앙증맞은 숍, 여행사, 호스텔 등의 간판들을 만난다.
강한 향내를 풍기며 유혹하는 라벤더 가게는 그냥 지나칠 수 없다. 가게는 가슴골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금발 생머리의 날씬한 판매원을 닮은 듯 예쁘고 현혹적이다. 라벤더 오일, 건제품들은 예뻐서 꼭 사가고 싶은 마음을 불러 일으킨다. 흐바르에 라벤더 가게가 많은 것은 이유가 있다. 이 섬은 ‘라벤더 섬’으로 불릴 만큼 라벤더 재배가 성행한다. 5월이면 온 섬은 라벤더 꽃과 향이 코끝을 간지를 것이다.
수녀가 만드는 알로에 레이스와 하니발 루치치 동상
골목길에서 11세기 베네딕트회 수도원(Benedictine Monastery)을 만난다. 그저 유럽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수도원이다. 무심하게 지나칠 수 있지만 이 수도원은 ‘알로에 레이스(Aloe Lacemaking Skill)’를 만드는 곳으로 유명하다. 알로에 화분 하나가 놓여 있고 건물에는 레이스 그림을 새긴 팻말이 있다. 유럽 마을마다 흔히 볼 수 있는 레이스 공예지만 흐바르는 색다르다.
크로아티아에는 3가지 서로 다른 레이스 공예 전통이 전해지고 있다. 아드리아해 연안의 파그(Pag) 마을에서 전하는 ‘니들포인트 레이스 공예(Needle Point Lacemaking Skill)’, 크로아티아 북부의 레포글라바(Lepoglava)에 전하는 ‘보빈 레이스 공예(Bobbin Lacemaking Skill)’, 그리고 달마티아(Dalamatia) 연안의 흐바르 섬에서 전승되는 ‘알로에 레이스 공예(Aloe Lacemaking Skill)’다.
‘알로에 레이스’는 흐바르에 거주하는 베네딕트회 수도원의 수녀들만 만든다. 생 알로에 잎의 심에서 나오는 얇은 흰색 실을 이용해 보드지 뒤에서 망이나 다른 패턴을 짠다. 이렇게 완성된 레이스 작품은 흐바르 지방을 상징한다.
이 수도원 앞에는 르네상스기의 위대한 작가인 하니발 루치치(Hanibal Lucic)의 동상이 있다. 15~16세기 크로아티아의 대표적 작가인 하니발 루치치(1485~1553)는 ‘로비냐’ 라는 서사시를 썼다.
멀지 않은 곳에 르네상스의 시인 페타르 헤크토로비치(Petar Hektorovi?, 1487~1572)의 요새와 트브르달리(Tvrdalj) 성의 안내 팻말이 붙어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유명한 시인이었던 그는 이곳에서 나고 죽었다. 그는 어부의 노래를 수집했고, 기행담 등을 친구와 서신으로 대화를 즐겼다. 그가 기록한 해상 및 동물원 용어들은 크로아티아어 표준 언어에 통합되었다. 요새와 성은 직접 설계했는데 현재는 숙소로 이용되고 있다.
스타리 그라드 랜드마크 스테판 광장엔 그리스 흔적이
골목을 비껴나면 흐바르 타운의 중심지인 넓은 스테판 광장이 얼굴을 내민다. ‘U’자 모양의 항구가 있는 이 광장에는 성 스테판(St. Stephen's) 대성당이 있고 1612년에 지어진 유럽 최초의 시민극장 등 유적지가 몰려 있다. 한눈에 봐도 스타리 그라드의 중심지임을 알 수 있다. 오래된 건물들에선 어김없이 레스토랑, 와인바 등이 성업 중이다. 이 광장은 흐바르에 그리스인들이 가장 먼저 정착한 곳으로 아드리아 해안 달마티아 지방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스타리 그라드에 처음 사람이 정착한 때는 그리스 시대다. 그리스가 아드리아해까지 영역을 확장한 시기는 고대 시칠리아 시라쿠사(Siracusa)의 독재자 디오니시우스(Dionysius) 1세(재위 BC 405~BC 367)때부터다. 그는 384년, 일리리아인의 도움으로 비스(Vis) 섬을 정복해 첫 번째 식민지를 세웠다. 10년 뒤, 디오니시우스와 동맹을 맺은 에게해의 파로스 섬 거주민들이 섬을 정복해 식민 도시를 건설했다. 현재 남은 요새, 고대 석담, 건물 골조, 돌로 만든 작은 대피소 등이 그리스 시대의 흔적들이다. 또한 고대 그리스의 토지 구획 체계인 ‘코라(chora)’는 24세기 동안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러다 BC 4세기 중반, 시라쿠사 제국이 몰락했고 BC 5~BC 6세기 경 일리리아인의 독립 공국이 되었다. 일리리아인들은 요새를 재사용하고, 여기에 새로운 요새를 구축하면서 번성했다. 데메트리우스(Demetrius)가 왕이 되어 통치하면서 권력을 확장했다. 하지만 로마인들에 의해 식민지화한다. 그때 파리아(Pharia, Faria)라는 새 이름이 붙여졌고, 아우구스투스(Augustus)와 티베리우스(Tiberius) 통치 기간에는 자치도시(municipium)의 지위를 획득했다. 몇몇 로마식 무덤이 만들어지고, 물탱크가 축조되기도 했다. 파리아는 그리스 시대보다는 좀 더 작은 경계로 다시 요새화했다. 이후 12세기에는 기독교 주교의 관할권 아래 있었고, 13세기 중반부터는 베네치아인들에게 정복 당해 1797년까지 정치적인 통제를 당했다. 베네치아 왕국 시대(14~16세기) 때 교통, 군사상 요지로서 번영했다. 15세기부터 교역 중심지 항구로서의 부흥기를 맞이했는데, 당시의 지역명은 캄포 산 스테파니(Campo San Stephani)였다.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던 19세기 말, 포도나무 뿌리를 썩게 만드는 필록세라(phylloxera) 병이 돌면서 이 섬의 경제는 흔들거렸다. 많은 농부들이 농지를 포기했고 20세기에는 이 섬을 떠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포도를 경작하던 남부 마을들은 부분적으로 사라지고, 토지와 도로 대장 체계도 관리 부족으로 명맥만 유지했다. 제2차 세계대전(1939~1945) 이후에는 새로운 위협에 맞닥뜨렸다. 집단농장과 농업의 기계화가 그 원인. 그래도 지금은 다시 관광객들이 늘어나고 조금씩 떠난 농부들이 돌아오고 있다고 한다.
흐바르 요새는 천국의 자리
흐바르 스타리 그라드의 백미는 흐바르 요새에 올라서서 내려다보는 전망이다. 스페인 요새, 베네치아 요새(Spanjola Fortica, Spanol Fortress)라고 불린다. 스테판 광장에서 북쪽의 산 언덕으로 오르면 된다. 오르는 길목의 모습은 타운과 엇비슷한 골목이다. 돌길을 따라 이어진 주변 화단에는 알로에와 사보텐 선인장이 질긴 생명력을 보여준다.
10여분 걸음 끝에 만나는 요새는 중세 때, 오스만 투르크 족으로부터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요새 안 박물관에는 부서진 유적들이 있지만 딱히 볼만한 것은 없다. 대신 앞이 환하게 트인 성벽에서 바라보는 발밑 풍경에 넋이 빠진다. 이렇게 아름다운 풍치를 누군들 반하지 않겠는가? 흐바르 타운과 쪽빛 바다와 점점이 떠 있는 섬들을 조망하면서 위치를 가늠해 본다. 흐바르 해협을 사이에 두고 브라치(Bra?)섬과, 비스(Vis) 해협을 사이에 두고 비스와, 코르출라(Kor?ula) 해협을 사이에 두고 코르출라와, 네레트바(Neretva) 해협을 사이에 두고 펠제샤츠(Pelje?ac)섬과 마주 보고 있다. 풍광만으로 흐바르 사랑이 가슴 속 깊숙히 채워지는 곳. 더 이상 말이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오를 때 무겁던 발걸음은 몇십 배 가벼워져 하산한다. 다시 선착장을 기점으로 반대편으로 걸어간다. 물 속까지 들여다보이는, 맑은 쪽빛 바다에는 물놀이 즐기는 사람들의 즐거운 비명이 울려퍼진다. 생선 굽는 냄새에 코끝을 킁킁대며 굴 전문 식당, 와인숍을 한가하게 기웃거리다가 만난 프란체스코(Franciscan) 수도원. 15세기에 코르출라 출신의 유명 석공 가문이 건설했다고 한다. 바다를 정원 삼은 작은 수도원에는 사이프러스 나무가 포인트를 주고 있다. 수도원 내부는 박물관으로 이용되는데, 특히 마테오 이그놀리의 ‘최후의 만찬’ 등이 눈여겨 볼 그림들이다. 겨우 하루였지만 흐바르의 눈 시리게 아름다운 풍광과 코끝을 파고드는 라벤더 향기는 아직도 가슴 속에 선연하게 박혀 있다.
TRAVEL TIP!
항공편 크로아티아로 바로 가는 직항 편은 없다. 일단 유럽의 주요 도시로 이동한 후 그곳에서 크로아티아로 이동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독일 뮌헨, 오스트리아 잘츠부르그, 헝가리 부다페스트, 슬로베니아 루블라냐,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등의 국제선을 이용해 자그레브 공항으로 갈 수 있다. 근교 도시에서는 버스나 열차를 이용하면 된다. 필자는 슬로베니아에서 열차로 이동했다.
배편 스플리트에서 페리를 이용하면 된다. 페리는 스플리트 항구, 타운 버스 터미널 맞은편에서 일반 페리가 매일 3회 출발한다. 쾌속선은 1시간 5분 정도 소요되지만 보편적으로 2시간 정도 예상하면 된다. 단 시기에 따라서 페리 스케줄이 다를 수 있다. 정확한 스케줄은 홈페이지를 통해 확인하는 게 좋다. 날씨에 따라 출발이 결정되므로 여유있게 여행 일정을 잡는 것이 좋다.
여행시기 라벤더가 피어나는 5월과 6월 가장 아름답고 한가롭다. 여름 피서철에는 사람이 많아져서 배편, 숙박 이용하기가 불편해진다.
와인 크로아티아의 2대 와인 생산지로도 유명하다. 남쪽은 적포도주, 스타리 그라드와 젤사 사이 중앙 평원은 백포도주 산지다.
먹거리 해물 스파게티와 신선한 새우요리, 그릴에 구운 생선구이 등 바닷가라서 해산물 요리를 먹을 수 있는 곳이 많다. 바닷가 옆이나 스테판 광장 쪽에 식당이 많으며 아시안 음식점도 있다. 또 골목 속에 박혀 있는, 작은 레스토랑이나 선술집(konoer)들도 많다.
특산물 흐바르는 라벤더의 섬이다. 난전은 물론 골목에 가게들이 있다.
화폐 쿠나(HRK) 전압 220V, 50Hz(공통)
크로아티아 추천 여행 코스 수도 자그레브를 시작해서 플리트비체-시베니크-자다르-트로기르-스플리트-흐바르-두브로브니크 순으로 여행을 즐기면 된다.
여행 유의점 크로아티아는 한국인이 가보고 싶은 여행지 1위란다. 현지에서도 한국인을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크로아티아 일부에서는 인상을 찌푸리게 하는 경우가 제법 많다. 짐 값은 당연히 받고 택시기사의 바가지 상흔도 아주 흔하다. 국내 여행사 상품이 여러 군데 나와 있으니 패키지를 이용해도 좋을 듯하다.
>> 이신화 여행작가
이립(而立)에 여행작가로 시작해 어언 지천명(知天命)에 다다랐다.
그동안 ‘걸어서 상쾌한 사계절 트레킹’, ‘대한민국 100배 즐기기’, ‘on the camino’ 등
여행서 총 14권을 출간했다. ‘인생이 짧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여 지난해 홀로 197일간 30개국의 유럽 배낭 여행을 했다. ‘살아 있을 때 떠나자’가 삶의 모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