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초부터 걷기와 가까울 수밖에 없었다. ‘고비’라는 말과 맞닿아 있던 삶. 다양한 운동 방법이 세상에 넘쳐나지만 걷는 게 그에게는 최적, 최상, 최고의 선택이었을 게다. 극복을 위한 아주 원초적 접근 방법. 한 발짝 한 발짝 내디뎌 무조건 길을 나선다. 걷는다. 여행한다. 궁극의 선택 안에서 자유를 찾고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는 느낌은 어떤 것일까?
“내가 목소리만 좋았으면 배우가 됐을 거예요!(웃음)”
사진을 찍는 동안 오십 넘은 중년의 얼굴이 어린 소년처럼 한껏 생기가 넘친다. 모델로서 이런 포토제닉 또한 오랜만이다. 기본적으로 재밌고 대화하는 상대를 편하게 해준다. 자신에 대한 사랑까지 충만하다. 삶의 중요한 부분이라는 걷기에 여행 이야기가 더해지니 함께하는 시간이 즐겁다. 최근 ‘마흔 넘어 걷기 여행’이라는 책을 낸 걷기 여행 전문가(?)이자 강동경희대학교병원 한방신경정신과 김종우(金鍾佑·53) 교수를 만났다. 대한민국은 물론이고 세계의 걷기 성지까지 두루두루 섭렵했다.
“제 나름대로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걷기 여행에 관한 책을 쓰게 됐습니다. 제 삶의 철학 중 하나죠. 여행을 가더라도 좀 걷자! 대학생인 딸도 그렇고 저보다 어린 직장인, 병원 내 레지던트들이 들려주는 여행 이야기도 그렇고. 좀처럼 재미가 없어요. 안타까워요. 어디를 가도 장소를 점처럼 찍어서 가요. 마치 사진작가처럼, 먹는 것을 찾아 떠난 셰프처럼 그렇게요.”
선을 연결해 영토를 확장하듯 면을 만들고 입체적인 그림을 그려가는 게 걷기 여행이다. 돈도 적게 들고 좋은 것도 많이 볼 수 있다. 여행자 자신의 관심사를 명확히 알게 해주기 때문에 걷기 여행이 매력적이라고..
“걷기는 인간의 본능적 행동이자 의도하는 바를 이루게 하는 행위이죠. 여행은 반복된 일상에서 벗어나서 진짜 나를 찾아가는 작업이라고 정의하고 싶어요. 걷기와 여행이 결합하면 떠나는 순간부터 마칠 때까지 여정 속에 푹 빠져서 자기 자신을 찾고 새로운 많은 것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걷기에 의사의 해석이 더해지다
걷기 여행에 관해 이야기하기 전에 걷기가 뭔지 들어보기로 했다. 걷기에는 운동이라는 요소와 철학이라는 요소가 맞물려 있다고 김종우 교수는 말한다. 걷기를 통해 얻어지는 것이 육체적인 성취뿐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걸으면서 여행하고, 세상을 보고, 사람을 만나고, 문화를 가까이서 느낄 수 있다. 이 모든 것을 포함할 수 있는 단순하지만 놀라운 행위가 걷기다.
“한 일간지에서 걷기 두 시간 해봤자 운동 효과 제로라는 제목의 기사를 본 적이 있어요. 그래서 제가 요즘 쓰고 있는 문화일보 고정 칼럼에 ‘걷기는 굉장히 중요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숭고한 철학이 담긴 활동’이라는 글을 쓰기도 했습니다. 걷기를 그냥 운동이라고만 생각하면 그건 걷기가 아니죠.”
스트레스와 화병 전문가인 김종우 교수는 오랜 기간 한 월간지에서 주최하는 건강캠프 등에서 상담과 주치의를 맡아왔다. 한의학을 하다 보니 스트레스 치료의 가장 좋은 조건이 자연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고 했다.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사람들 대부분 활동량이 많이 떨어집니다. 가장 큰 해결책이 어떻게 하면 활동량을 늘리느냐 하는 점이죠. 그런 사람들에게 있어 자연만 한 좋은 환경은 없죠. 물론 자연에서 어떤 방법을 쓸 것인가도 중요하겠지만 조용히 걷고 사색하는 것만으로도 심적 치유를 느낄 수 있습니다.”
걷기 여행이 주는 매력을 말하다
치유 프로그램이나 트레킹 스태프로 참여할 때마다 하나의 주제를 선정해 참여자들과 토론을 하고 강의도 한다. 선정된 주제에 관련한 책들을 먼저 많이 읽어두고 그 느낌을 걸으면서 계속 확인하는 과정을 거친다고 했다.
“스태프로 참여할 때는 걷기와 관련해 훨씬 더 많은 철학적 의미를 부여하게 됩니다. 걷기 여행의 콘셉트을 제대로 가지고 가고 싶어서요.”
문득 걷기 여행을 예찬하는 김종우 교수가 이렇게 스스로 준비해 참가자들과 철학적 의미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 부담 되지 않는지 물었다. 예전부터 자신도 비슷한 방식으로 여행을 해왔기 때문에 괜찮다고 했다.
“그리고 나이 오십이 넘으면 내가 얻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얻은 것을 전해야죠. 선생의 즐거움은 가르침을 주는 것이잖아요. 가르침의 즐거움이 없으면 선생을 할 필요가 없죠.(웃음)”
김종우 교수는 일반인과 함께 참여하는 걷기 프로그램을 즐긴다. 아침 6시부터 밤 12시까지 걷고 명상하는 일을 반복하지만 행복한 시간이라고 했다.
“저는 정말 굉장한 스태프예요.(웃음) 아침 6시부터 명상이나 새벽 산책을 해요. 이때는 주로 육칠십대 분들이 참여합니다. 그리고 두 시간 걷죠. 아침식사를 하고 한나절을 걷고 점심을 먹고 또 걸어요. 저녁식사 후에는 허리나 무릎에 침을 놔줘요. 물집도 다 따주고요. 그러고 나서 오후 8시, 9시쯤 되면 밤 산책을 나가요. 그때는 사오십대가 많이 가세요. 대신 이 사람들은 다음 날 새벽에 절대 안 나와요. 저는 다시 아침 6시부터 밤 12시까지 걷죠. 풀타임으로요.(웃음)”
그렇다면 하루 중 가장 걷기 좋은 시간은 언제일까? 김종우 교수는 이른 아침 통이 트기 시작할 때를 꼽았다. 도시건 자연이건 가장 근본적인 원초적 에너지를 만날 수 있는 시간이 바로 새벽이라는 것이다.
“가장 큰 접점은 해 뜰 때거든요. 여명이 딱 깃들 때 도시와 자연은 정말 달라요. 자연은 특히 이탈리아의 돌로미티 같은 곳에 가면 지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요. 새벽에는 그 도시의 풋풋함이 느껴집니다. 자연의 기운을 그대로 내 몸에 받아들이는 것이 명상인데 새벽에는 장애 요소들이 없잖아요. 새벽 산책은 도시건 자연이건 각성, 깨달음을 느낄 수 있는 최적의 시간이에요. 만약 도시여행이라면 해가 뜨고 나서 호텔로 돌아가기 전에 카페에 들러 에스프레소와 크루아상 하나 딱 먹으면 최고죠. 그리고 새벽에 걸으면 두 배는 더 여행할 수 있고요.”
모두가 말린 히말라야에 오르다
걷기 프로그램 주치의로 활동하다 급기야 히말라야 트레킹에까지 참여하게 됐다. 히말라야는 김종우 교수가 가서는 안 될 장소였다.
“저는 세 살, 일곱 살 때 심장병으로 수술을 받았습니다. 중·고등학교 때는 뛰지를 못하니까 체육시간에 맨날 낙오됐어요. 30대 중반에 부정맥 증상이 나타나서 반복적으로 응급실에 갔었고 중환자실에도 들어갔다 왔고요. 그런 저에게 히말라야가 다가왔습니다. 무조건 간 거죠.”
이런 제안이 없으면 언제 또 히말라야에 가보나 생각했다. 심장병 주치의가 말렸지만, 비아그라를 처방받아 네팔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아무 생각 없이 말이다.
“도보 코스도 굉장히 좋았고 마지막에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모든 것이 너무 좋았어요. 1000m에서 2000m, 3000m 갈 때 힘들어지는데 산은 올라갈수록 에너지가 생겨요. 반복적인 리듬으로 계속 가다 보면 걷는 게 쉬워지거든요. 트레킹을 아주 재밌고 멋지게 다녀왔죠.”
웃으면서 얘기했지만 사지 보행을 하면서 힘들게 올라갔다는 고백(?)을 받아냈다. 그 후로 스페인 순례자의 길인 산티아고를 비롯해 이탈리아 아말피 해안도로와 터키의 리키안 웨이 등 세계 유수의 트레킹 코스를 다녀왔다. 그렇게 걸어 다니면서 꼭 지키는 법칙이 있는데 밤 12시에는 반드시 잔다는 것.
“일과를 마치고 나면 마을 사람들이 다니는 선술집에 가요. 맥주 한 병 혹은 와인 두 잔이 딱 적당하죠. 그리고 함께 걸었던 사람들과 여행 이야기를 해요. 사람들이 똑같은 길을 온종일 걸었다고 칩시다. 그럼 다 똑같은 거만 볼까요? 얘기를 하다 보면 훨씬 더 다양한 느낌이 와요. 그러고는 밤 12시에 취침에 들어가는 거죠.”
가족과 함께 나서는 길
꼭 프로그램을 통해 걷기 여행을 하는 것은 아니다. 어렸을 때부터 걷기 여행 조기교육을 받은 대학생인 아이들과 아내가 함께 할 때도 있다. 작년에는 호주의 그레이트 오션 워크를, 올해는 일본 순례자의 길인 오헨로에 다녀왔다.
“그레이트 오션 워크는 100km인데 3일 동안 60km를 걸었습니다. 어렸을 때도 아이들이 배낭 메고 10km, 20km 걸었거든요. 일본 시코쿠에 1400km의 오헨로 길이 있어요. 88개의 절을 지나는 순례길이죠. 한 번 갔을 때 다 걸으려면 45일은 걸립니다. 저는 직업도 있고 일을 하는 사람이니까 딱 10년 계획을 세웠어요. 1년에 일주일 정도 120km만 걷자. 아내하고 아이들 다 데리고 갔어요. 그런데 기특하게도 우리 애들은 걷자고 하면 걸어요.”
물론 가족들과 가면 타협점을 찾아야 한다. 계속 걷기보다는 도시 여행도 한다. 오헨로 길 여행 때는 이틀은 걷고 이틀 노는 방식으로 가족들과 시간을 보냈다. 다음 달에도 오헨로 길을 가는데 아내와 6일 내내 걷기로 했다.
“아내가 날 좋아하니까요.(웃음) 나 혼자 즐기는 게 억울해서 가는 거겠죠. 그런데 아내가 대단한 것이 10년 동안 그 길을 걸을 계획이라니까 일본어를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떠날 때마다 제안하겠지만 아마도 아내랑 함께 걷게 될 거 같아요.”
생사를 넘나드는 삶 속에서 얻은 깨달음
“언제 죽어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네 번의 전신마취를 했다. 그때 깨달았다. 수술대에 오르락내리락하면서 굴곡진 길 또한 쉼 없이 걸었다. 명상하고 마음을 다잡고 하는 건 벌써 오래전에 끝냈다는 김종우 교수.
“삶에 대해 골똘히 생각해봤자 달라지지 않아요. 문득 떠오르는 생각 속에서 ‘내가 이렇게 살아왔구나!’ 하고 한두 번 씩 깨달으면 됩니다. 내면의 뭘 찾겠다고 해봤자 다 내 삶이거든요.(웃음)”
올 초에도 몇 번이나 힘든 일들을 겪었다. 1월에 맹장염이 복막염으로 번졌다. 수술 도중에 담석이 발견됐지만 곧바로 제거하지 못하고 다음으로 미뤄야 했다. 심장이 약해 전신마취가 쉽지 않았던 것. 결국 일본 오헨로 길 여행을 다녀온 후에 담석 제거를 했다.
“간단한 수술이기는 한데 일본 트레킹 가서 아이들한테 그랬어요. 아빠는 언제 갈지 모른다고요. 너희들 대학교까지 보내고 잘 키워놨으니까 언제든 혼자 살 수 있겠다고 말했죠. 물론 술 먹으면서 잘 풀어서 대화했습니다. 우리가 걷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자연과 교감을 하는 것이죠. 건강한 삶을 추구하지만, 또 언제든지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니까요. 자연의 이치 같은.”
가보고 싶은 길이 있냐고 물었다. 어디를 가도 좋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학회 때문에 미국 미니애폴리스에 갔을 때도 3시간씩 걸었어요. 어디가 중요한 것이 아니죠. 걸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좋습니다. 적당한 장소에 에스프레소와 크루와상이 있으면 정말 끝내주겠죠.”
죽기 전에 해보고 싶은 일들의 목록을 일명 ‘버킷리스트(bucket list)ʼ라고 한다. 한 번쯤은 들어보고, 한 번쯤은 이뤄야겠다고 다짐하지만 실천으로 옮기기는 쉽지 않다. 버킷리스트를 어떻게 작성하는지, 또 어떤 방법으로 실행해야 할지 막막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민을 함께 나누고 해결하기 위해 매달 버킷리스트 항목 한 가지를 골라 실천 방법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그에 앞서 서베이를 통해 시니어가 이루고 싶은 버킷리스트를 여행, 취미, 관계·가족, 일·성취, 보람, 도전 등 총 7가지 주제로 나눠 알아봤다.
서베이 대상 브라보 동년기자단, 서울시50플러스 중부캠퍼스 수강생, 낭랑18세 시니어 치어리더팀 등 50세 이상 남녀 140명(50대 61명, 60대 53명, 70대 이상 26명)
서베이 방법 주제별 버킷리스트 예시 항목 15가지 중 선택(중복 선택 가능) 및 그 외 항목이 있는 경우 별도로 작성
◇브라보 버킷리스트 상위 20위 목록
7가지 주제 중 가장 인기가 높았던 것은 ‘여행’이다. 상당수 시니어가 ‘제주에서 한 달 살기’, ‘제주 올레길 투어’ 등 제주 여행과 관련한 버킷리스트를 희망하고 있었다. “쉽게 이룰 수 있으니까”, “외국어 부담 없이 여행하고 싶어서” 등이 대표적인 이유다.
그밖에 혼자 여행 떠나기(27), 시베리아 횡단열차 타기(25), 캠핑카/크루즈 여행하기(18), 해외에서 크리스마스 보내기(9) 등
운동이나 레포츠 등 몸을 쓰고 활동적인 취미보다는 배움, 글쓰기, 책 읽기, 전시회 관람 등 문화적, 정서적 활동을 원하는 이가 많았다. 아직 특별한 취미를 찾지 못해 ‘새로운 취미 갖기’(24)를 버킷리스트로 선택한 이도 적지 않았다.
그밖에 텃밭 가꾸기(21), 그림 관련 취미 갖기(19), 수영 배우기(16), 취미 동호회 가입(14), 수화 배우기(6) 등
가족을 향한 사랑을 느낄 수 있는 항목들이 상위권에 올랐다. 외국인 친구를 사귀거나 애인 같은 친구를 만드는 등 새로운 관계 확장에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휴대전화번호를 정리하거나 불편했던 관계를 해소하는 등 관계 정리에 관한 항목들도 눈에 띈다.
그밖에 외국인 친구 사귀기(21), 7명 용서하기(17), 휴대전화번호부 정리하기(15), 첫사랑에게 편지 쓰기(7) 등
제2직업을 향한 욕구와 더불어 전문 분야에 대한 완성도를 높이겠다는 포부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자기 이름으로 책을 펴내고, 강연, 전시회를 여는 등 그동안 쌓아온 경험과 연륜을 통해 새로운 일에 도전하려는 경향이다.
그밖에 귀농하기(15), 창업하기(12), 10년 후부터는 일 안 하고 놀기(8), 자격증 10개 따기(8) 등
버킷리스트 서베이 전체 항목 중에서 ‘재능기부’가 1위에 올랐다. 단순히 봉사활동에 참여하거나 기부를 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능력을 살린 사회적 활동에 관심을 두는 모습이다.
그밖에 장기기증 신청하기(16), 아프리카 봉사활동 가기(15), 봉사활동 1000시간 채우기(13), 유기견 돌보기(6) 등
건강하고 즐거운 일상을 추구하는 웰빙(well being)을 넘어 ‘어떻게 죽을 것인가’, ‘품위 있는 죽음을 맞이하는 방법’ 등 웰다잉(well dying)에 대한 욕구가 높아졌다. 유언장 작성 등 웰다잉 관련 항목이 상위권에 올랐다.
그밖에 드레스 입고 파티하기(17), 세컨드하우스 짓기(14), 레스토랑에서 고급 코스요리 먹기(13), 주식·펀드 투자하기(12)
아직 버킷리스트가 없는 이들이 가장 빠르게 실행하고 이룰 수 있는 항목 중 하나가 바로 ‘버킷리스트 만들기’다. 버킷리스트를 작성하는 순간 이미 한 가지 항목은 해낸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밖에 공모전 참가하기(14), 파격적으로 염색하기(13), 무인도에서 살아보기(7), 타투(문신) 해보기(6)
◇나만의 버킷리스트를 위한 7가지 방법
도움말 박창수 작가
하나, 원대한 목표를 먼저 정하라 ‘여행’이라는 주제를 가지고도 목표는 유럽 배낭여행부터 서울 나들이까지 천차만별이다. 그중에서도 돈이나 시간이 많이 드는 일을 먼저 정해두는 것이 좋다. 예를 들어 해외여행의 경우 오랜 시간 머물게 되면 그만큼의 비용과 체력이 뒷받침돼야 하는데, 이는 하루아침에 가능한 것이 아니다. 여행 자금을 위해 적금을 든다거나 평소 걷기운동을 해서 건강을 유지하는 등의 세부적인 목표들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또 귀농이나 창업 등 오래 준비해야 할 목록도 마찬가지다. 장기간 실천할 원대한 목표를 먼저 정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리스트를 차례로 적어나가자.
둘, 작은 목표는 매년 갱신하라 큰 목표가 담긴 버킷리스트와 작은 목표를 써놓은 버킷리스트를 따로 마련하고, 작은 목표 리스트는 매년 갱신한다. 원대한 목표만 적어놓고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면 의욕도 저하되고, 실천 의지도 약해진다. 한 해, 한 달 정도 투자해 부담 없이 이룰 수 있는 목표를 작성하자. 작은 목표들을 달성해나가며 얻은 자신감은 큰 목표를 이루는 데 긍정적 에너지로 작용한다.
셋, 유행에 편승하지 마라 버킷리스트는 내가 하고 싶었던 일들을 이뤄가는 데 의미가 있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이 너도나도 원하는 목표나 유행에 따라 버킷리스트를 꾸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자신이 정말 뭘 원하는지, 어떤 것을 해야 만족도가 높을지 등을 깊이 생각해보고 진정 나만을 위한 목록들을 채워가는 것이 중요하다.
넷, 남의 눈치 보지 마라 돈이 많이 든다거나 스스로 주책없어 보이는 행동이라 여기고 가족이나 친구들 눈치를 보면서 버킷리스트를 고민하는 이들이 있다. 또 나만을 위한 것이라고 해도 남에게 보였을 때 더 그럴싸하고 훌륭해 보이는 일들을 적곤 한다. 이른바 체면치레 때문에 시니어들의 버킷리스트를 보면 여행, 공부, 취미, 봉사 등에 국한된 경우가 많다. 물론 좋은 목표이지만, 그중에 한두 가지만이라도 나만의 개성과 욕망을 분출할 수 있는 것을 적어보면 어떨까?
다섯, 크게 쓰고 소문을 내라 자기 꿈을 소문내는 것은 용기가 없는 사람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혼자서 마음속에만 담아두고 차일피일 미루는 것보다는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기분 좋은 속박(?)을 느끼는 편이 낫다. 실행에 옮기지 않으면 안 되게끔 선언을 하거나 큰 종이에 적어 서재나 화장대 등에 붙여 자주 인식하는 것도 효과적이다. 타인은 물론 스스로와의 약속 이행에 대한 책임감이 더해진다.
여섯, 1+1을 생각하라 나를 위한 버킷리스트이지만, 그것이 사회나 어려운 이웃을 위해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금상첨화다. 예를 들어, ‘외국어 배우기’와 같은 단순한 목표를 뛰어넘어 ‘외국어를 배워 어려운 아이들에게 방과 후 재능기부하기’ 등 이웃과 사회에 보탬이 되는 방법까지 생각해본다면 더욱 뜻깊은 버킷리스트가 될 것이다.
일곱, 버킷리스트에는 점수가 없다 목표로 정한 버킷리스트를 꼭 다 이루지 못하더라도 상처받지 말자. 물론 그것을 이뤄내기 위해 노력을 했을 경우에 말이다. 버킷리스트는 숙제나 시험처럼 누군가에게 검사받고 평가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만족과 즐거움을 위해 시작한 일인 만큼 부담 갖거나 서두르지 말고 목표를 향해 천천히 다가가길 바란다. 무엇을 이뤘느냐보다, 꿈을 향해 도전하는 발걸음이 더 소중하고 아름답다.
※독자제보 브라보 버킷리스트 랭킹 20위 안에 해당하는 버킷리스트에 도전해 이뤄내신 분들을 찾습니다. 제보할 이야기가 있으신 분은 bravo@etoday.co.kr로 접수 부탁드립니다.
지하철을 탔다. 별로 붐비지는 않았지만, 슬쩍 둘러보니 빈자리는 없다.
필자는 지하철이나 버스 등 대중교통을 탔을 때 빈자리에 그리 연연해 하는 편은 아니다.
바로 필자 앞에 빈자리가 생기지 않는 한 서 있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가 나도 그쪽으로 가지 않는다. 안 우아해 보일 것 같아서다. 이번에도 빈자리가 없으니 서서 갈 요량을 하고 손잡이를 잡았다.
아, 창문으로 비치는 걸 보니 필자 뒷좌석의 사람이 내리고 있다.
너무 재빨리 가는 것도 우아하지 않을 것 같아 천천히 몸을 돌렸더니 두 빈자리 중 한쪽에 어떤 아주머니가 앉았는데 옆에 신문이 놓여 있었다.
필자는 내린 사람이 두고 간 것인 줄 알고 무심코 집어 들려고 했는데 앉은 아주머니가 자리 있어요! 하면서 어떤 다른 아주머니를 손짓해 부르고 있었다.
저쪽에 떨어져 있던 아주머니 한 분이 헐레벌떡 달려와 엉덩이를 디밀었다. 말로만 듣던 자리 잡아주기였다.
빈자리가 나면 멀리서도 핸드백을 휙 던져서 자리를 잡는다는 그런 얘기를 들은 적 있는데 이 아주머니들은 일행이니까 한편 당연한 행동일 것이다.
필자는 좀 창피했다. 하던 대로 바로 앞의 자리가 아니니 욕심내지 말 걸 하는 후회와 함께 멋쩍은 웃음을 띠고 그 앞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아주머니가 신발에 문제가 있었는지 몸을 구부리고 있었는데 필자 옆에 서 있던 남학생이 커다란 배낭을 선반에 올리려다 떨어뜨렸다.
얼핏 봐도 엄청 무거워 보이는 육중한 배낭이 수그리고 있던 아줌마 머리 위로 떨어졌다.
아이쿠~소리와 아, 죄송합니다. 라는 말이 들렸는데 필자는 속으로 휴, 저 자리에 앉지 않기를 잘했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었다. 욕심내서 앉았다면 저 큰 물체가 필자에게 떨어졌을 것이다.
아마 저쪽에서 달려와 자리를 차지한 아줌마를 필자는 좀 얄밉게 생각하고 있었나 보다.
흐흐~ 것 참 쌤통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필자 대신 그 남학생이 아줌마에게 복수해 주었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참 소심한 복수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나 자신이 너무나 우스워져서 큰소리로 하하하하 웃었다. 속으로.
여자들보다 많다. 전문 메이크업 아티스트도 입을 쫙! 하고 벌렸다. 집 안방을 빼곡하게 차지한 아이들(?)의 정체. 스튜디오 사무실 가장 좋은 곳에 자리 잡은 때깔 요망진 것들! 바로 형형색색 다양한 모습의 화장품이다. 그렇다면 주인은 여자? 아니 남자다. ‘댄서킴’으로 불리던 개그맨 김기수가 웃음보따리가 아닌 화장 도구를 들고 나와 대박을 터트렸다. 들어는 봤는가? 뷰티크리에이터 김기수! 어둠 속에서 ‘예뻐지고 싶다!’를 외치던 남자들이여, 이제 당당히 세상 밖으로 나와 김기수와 함께 꽃단장 한번 제대로 해보자.
화장하는 남자의 편견을 깨다
웃기는 일로 오랫동안 사람들 앞에 섰던 김기수. 그가 2016년 11월 말, 세련된 화장을 하고 나와 자신을 뷰티크리에이터라고 소개했다. 뷰티크리에이터란 소위 화장을 통해 ‘예뻐지는 방법’을 알려주는 사람. 그는 현재 동영상 사이트인 유튜브(youtube.com)와 포털사이트의 동영상 서비스를 통해 ‘꾸미고 가꿔 돋보이게 하는 방법’을 전파한다. 개인 채널과 SBS 모비딕의 ‘예쁘게 살래? 그냥 살래?’를 진행 중. 1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1억 뷰 돌파! 전 세계 1억 명 이상이 그의 동영상을 시청했다는 뜻이다. 이 여세를 몰아 작년 말 SBS 연애대상에서 모바일 아이콘 상과 한국분장예술인협회에서 주는 메이크업 어워드를 수상했다. 올 초 화장법 노하우를 담은 책 ‘예쁘게 살래? 그냥 살래?’를 출간했고 3월 말에는 자신의 이름을 전면에 내세운 화장 제품도 출시한다. 북유럽 국가인 노르웨이의 한 방송에서도 김기수를 찾아왔을 정도이니 인기는 상상 그 이상. 대세 중에서도 대세가 바로 맨즈(남자) 뷰티크리에이터 김기수다.
불모지를 앞서 걷는 펭귄의 길을 택하다
개그맨이 아닌 뷰티크리에이터로 전향을 하고 영상을 만들어 인터넷에 올리는 그 과정이 어찌 보면 홧김(?)으로 시작한 것이나 다름없다. 김기수는 무대 화장을 한 사진을 인터넷에 올렸다가 악성댓글에 시달렸다고. 특히 어머니를 욕하는 것은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중국에서 클럽 DJ로 활동하던 시절이었어요. 제가 트렌스젠더가 됐다는 소문이 빠르게 퍼졌어요. 트랜스젠더가 됐네, 돌려 깎기를 했네, 성괴(성형괴물)네. 일주일 동안 실시간 검색어 1위에서 제 이름이 내려오지 않는 거예요.”
김기수의 성 정체성에 대한 논란은 늘 있어왔지만 자신의 발언으로 성 소수자들이 눈총받을까 말을 아꼈단다.
“나는 그저 내 화장 실력으로 얼굴을 가꾸어서 무대에 올라간 건데 왜 중국 성괴 같다고 그러지? 제가 당시 칩거하고 힘들어하니까 지인과 팬들이 ‘오빠 화장하는 거 영상을 인터넷에 올려보세요’라고 하는 거예요. 저도 유튜버(동영상 사이트에 영상을 올리는 사람) 남성분들의 젠더리스 메이크업(성별을 구분하지 않는 화장)을 많이 눈여겨봤었어요. 그럼 나도 저렇게 해볼까 생각을 하게 된 거죠.”
컴퓨터를 잘 다루지도 못했지만 제대로 해볼 생각에 영상 편집을 배워나갔다. 한 달 동안 하루에 한 시간 자면서 영상을 올렸다. 첫 영상을 올리고 난 뒤 일주일 동안 댓글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사람들이 ‘저 정도의 화장 실력이라면 자랑할 만하네?’ 했고, 저를 싫어하던 사람들이 팬으로 돌아서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어요.”
김기수는 자신이 뷰티 채널을 시작하고 1년 사이 사회적으로 맨즈 뷰티에 관한 관심이 높아졌다고 말했다. 실제로 맨즈 뷰티 산업이 크게 성장하고 있고 화섹남(화장하는 섹시한 남자), 잘생쁨(잘생기고 예쁨)이라는 신조어도 김기수의 등장과 함께 생겨났다. 남성이 당당하게 멋져지고 예뻐지는 시대를 김기수가 열었다고 해도 실로 과언은 아니다. 그는 대열 앞에 서서 걸어가는 퍼스트 펭귄(First penguin)이 바로 자신이라 생각한다.
“누군가가 저에게 화장을 하지 말라 하면 지금 제 일을 그만두라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그리고 남자가 이렇게 화장을 하고 있는데 그 정도의 루머가 또 돌지 않는다면 나는 이일을 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에요. 관심이 있어 그렇게 말씀을 하시는구나. 물론 처음에는 분했어요. 활동을 접을 생각도 했고요. 무엇보다 지금은 저에게 많은 질문을 하십니다. 남자분들도 용기를 내서 화장법에 대해 묻고요. 그런 분들을 도와드리는 것이 제 일이죠.”
분장실 옆 아역 탤런트, 화장에 눈뜨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 언제부터 화장에 관심이 있었던 것일까? 뜬금없이 왜? 남자 개그맨이? 그리고 근육 팍팍 보이면서 클럽 DJ를 하는 남자가 언제부터 화장에 심취했을까?
“중학교 때부터 아역 탤런트를 했는데 그때 화장에 관심이 생겼어요. 야외 촬영 현장에서 평범한 중년의 엑스트라 두 분이 트레일러에 마련된 간이 분장실에 들어갔다 나오더니 아름다운 사람이 돼서 나오는 거예요. 너무 놀라웠어요. 쇼킹했어요. 그곳이 마치 마법 상자처럼 보였어요. 불꽃이 막 파파팍! 튀는 느낌?(웃음)”
촬영을 하지 않는 시간에는 계속 분장실을 드나들었다.
“그랬더니 분장사 누나가 저에게 선크림하고 크림을 주더라고요. 써보라면서요. 다음 날 그걸 바르고 현장에 나갔는데 감독님이 ‘야, 너 왜 이렇게 예뻐졌냐?’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서 대사 한마디 더 주시더라고요. 자신감이 붙었다고나 할까요? 그다음부터 선크림에 맞는 수분크림과 립스틱을 찾고 또 뭔가 발견하고. 코덕(화장품과 덕후의 합성어) 생활은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어린아이였음에도 주위의 시선 때문에 다락방에 숨어 화장을 했다. 그때만 해도 남자와 여자의 역할이 극명했다.
“지금도 남성이 화장하는 걸 이상하게 보는 면이 있지만 그때는 더 심했죠. 남자는 화장을 하면 안 된다 뭐 이런 거요. 저 어렸을 때는 크림 바르고 밖에 나가는 남자가 몇 안 됐어요. 저 혼자 그냥 다락방에서 뭐든 발라보고, 어울리는 색을 찾아보면서 저만의 재미에 푹 빠져버렸어요. 어떻게 그렇게 숨어서 했는지 나도 참 기특해.(웃음) 그렇게 30년 동안을 해왔고, 지금 빛을 발하고 있는 거죠.”
남자들이여! 당당히 화장대 앞에 서라!
김기수가 갑자기 목소리를 죽이며 기자에게 물었다.
“요즘 시니어 남성분들 등산 배낭에 뭐가 들어 있는 줄 아세요?”
바로 BB크림이랑 틴트란다. 모두가 그렇다는 뜻은 아니고 꽤 된다는 말. 그들은 곧바로 목적지로 직행하는 것이 아니다. 공중화장실에 들러 BB크림과 틴트를 바른 뒤 산행을 시작한다. 그것을 어떻게 알았냐 했더니 뷰티크리에이터로 일하다 보니 그런 얘기들이 너무나 잘 들려온다 했다. 김기수의 채널 구독자 중 BB크림 바르는 방법을 알려달라는 50대 중반의 남성도 있었다. 올리브영 맨즈뷰티 코너를 서성이는 시니어 남성에게 제품을 권해드리기도 했다.
“사실 남자들이 그루밍하는 것에 편견이 있으면서도 관심들은 다 가지고 계세요. 제가 예약하려던 눈썹 문신 전문점은 3개월 이후나 돼야 예약이 가능하다고 했어요. 80%가 남성 손님이고요. 성형외과 전문의와도 얘기한 적이 있는데 실 리프팅 하러 오시는 중년 남성들이 꽤 많다고 해요. 그렇게들 몰래몰래 자기 관리하면서 화장을 하는데 저는 왜 안 되는 거죠? 관심은 있으면서 대놓고 표현하지 못하는 거뿐이잖아요.”
요즘 김기수의 개인 채널에는 남성들을 위한 화장법을 모아 따로 분류해놓았다.
“3년 동안 취직 안 됐던 남성분이 제가 알려드린 화장을 한 뒤 면접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전해왔어요.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이에요. 붙었다고 하잖아요. 요즘은 자기관리 잘하는 남자가 칭송받는 시대예요. 깨끗한 인상 주는 게 나쁜 게 아니잖아요.”
제발 좀 꾸미고 멋져지고 싶은 남자들이 숨지 말고 나와서 당당해졌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백수가 과로사 했다는 말을 들으며 멋진 농담이라고 했는데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요즘은 든다. 직장에 나갈 때는 직장이란 조직이 개인의 역량보다 조직의 힘으로 움직이는 집단이었다. 정해진 회사의 작업스케줄 대로 업무에 종사하면 되었다. 지나고 보니 그때가 단순해서 좋았다. 출근하고 일상 업무보고 퇴근하면 끝이었다. 집안일이나 어느 모임에 참석을 하지 못해도 회사 출근하는 날이라고 하면 모든 것이 이해되고 용서되었다. 또박또박 급여도 나오고 건강검진까지 회사에서 알아서 다 해주니 별 신경 쓸 일이 없었다.
퇴직하고 집에 있으면 지금껏 가족부양에 고생했으니 휴식중이라고 말해야 옳지만 빈둥빈둥 놀고 있다고 말한다. 누가 오라고 부르는데 가지 않으면 노는 놈이 뭐가 바쁘다고 그 모양이냐며 핀잔부터 들어야 했다. 여기저기 불려 다니고 참가하다보면 백수가 과로사 했다는 말이 맞는구나하고 고개를 끄덕인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집에 놀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마음이 편할지 알았는데 딱히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안개처럼 늘 몸 주위를 감싼다. 밥을 먹을 때도 진짜 식충(食蟲)에 오물제조기로 변해가는 것이 아닌가! 겁이 덜컥 날 때가 있다. 집에 가만히 있으면 불안해서 집밖으로 탈출하고 싶다. 콧바람 쏘이러 외출한다는 말이 이해가 간다. 하다못해 은행에 가서 통장정리라도 하는 일거리를 만들어 집에서 나와야 뭔가 밥값 하는 것 같아 마음에 부담이 덜하다.
스스로 살이 있다는 행동을 하고 싶고 보이고 싶다. 배낭 속에 물통을 넣고 산에라도 올라가야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도서관에 가서 신문이라도 읽어야 시대에 뒤처진다는 강박관념에서 조금 진정된다. 한가로운 소설책보다는 생활 에세이 같은 글을 읽어야 ‘그렇지!’하는 공감과 마음속이 뿌듯해진다. 놀 수는 없다는 비장한 각오로 이곳저곳의 무료강좌에 눈독을 들이고 참가한다. 공짜커피라도 주는 곳은 고맙고 좋은 곳이다
한 번도 퇴직이나 은퇴자의 삶을 살아보지 않은 새파란 젊은 사람이 강사로 나와서 70세에 유엔군 사령관이 된 맥아더 장군 이야기를 들먹이며 막연하게 힘내라고 할 때는 ‘내가 맥아더냐?’하는 반발 질문을 하고 싶다. 한 번도 퇴직을 해본 경험이 없는 사람이 통계자료 몇 개 들고 나와 세상물정 다 아는 것처럼 말 할 때는 헛웃음이 절로 나온다.
삼십년 이상을 가족과 국가를 위해 일한 당신들 이제 몸과 마음의 휴식이 필요하다고 주위에서 격려를 받고 싶지만 국가도 사회도 가족도 퇴직자에게는 인사치례 말뿐이고 실질적인 배려나 관심이 없다. 일만하다 죽을 수 없고 지금껏 잘해왔다고 격려의 박수를 받고 싶다. 이제 숨차게 달려온 몸보다 마음 휴식이 필요한 때다. 어떤 사람이 어떨 때 마음 휴식이 필요한가를 도서관에 가서 이런저런 책을 뒤져 보았다. ‘마음휴식 자가진단 체크리스트’를 찾았다. 책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보편적인 것을 추려 적어본다.
1,매사에 자신감이 없고 아무것도 하기 싫다.
2,불면증에 시달리고 정신적으로 불안하다.
3,사람 만나는 게 두렵고 싫다.
4,휴가 때도 어디 가는 것보다 집에서 쉬고 싶다.
5,다 내 잘못 같은, 죄책감을 느낀다.
6,일하는 것에 보람보다 심적 부담과 긴장을 많이 느낀다.
7,맡은 일을 하는데 소극적이고 냉소적이다.
8,스트레스를 풀기위해 술, 담배를 즐긴다.
9,최근 짜증과 화가 늘었다.
10,세상이 원망스럽다.
11,미래를 생각하면 불안하고 암울하다.
12,나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진다.
이중에서 6개 이상 해당되면 절대적으로 마음의 휴식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딱히 퇴직자가 아니더라도 자신감이 떨어지는 사람은 일단 마음휴식을 고려해 보자. 넘어진 김에 쉬었다 간다고 100년을 사는 세상에 몇 년 쉰다고 크게 달라질 일도 없다. 길고 오랜 인생길에 쉬엄쉬엄 쉬었다 가자. 크게 숨 한번 들이마시고 하늘한번 바라보고 천천히 가고 싶다.
인생을 마라톤에 비유한다.
육상 중에서 가장 긴 거리를 달려야 하는 마라톤이 인생의 굽이굽이 한평생과 같다는 말로 이해한다. 인생에 있어서 초년, 중년, 말년이 있다면 마라톤에도 초반전 중반전을 거쳐 마지막 골인지점의 최후의 승부처가 있다. 초반이나 중반에 선두에 서지 못해도 힘을 비축하였다가 마지막 승부처에서 다른 선수를 따돌리고 먼저 들어오는 선수가 우승자다.
인생에 있어서도 노년의 삶이 행복해야 ‘세상구경 잘하고 돌아간다’라고 말할 자격이 된다. 부모 잘 만나 잘 먹고 잘살았거나 중년에 떵떵거리며 거들먹거려도 노년에 아무도 찾지 않는 지하 단칸방에서 독거노인으로 지내다 세상을 하직한다면 인생을 잘 살았다고 말하지 못한다.
마라톤은 긴 거리지만 결국은 속도경기다. 누가 전체의 거리를 빠른 시간에 주파했느냐가 관건이다. 마라톤에서 우승을 하려면 옆 사람과 이야기 하고 주로의 꽃구경을 하다가는 좋은 성적을 낼 수가 없다. 입에서 연신 거친 숨을 몰아쉬며 1초를 아껴야 한다. 사람도 살면서 뚜렷한 목적의식이 없이 어느 길을 가야할지 목표 없이 방황하거나 엉뚱한 샛길로 빠지거나 어두운 길로 들어서면 노년의 종착지 부근의 삶은 당연히 비극이 기다린다.
그러나 이제는 100세 시대다. 혼자 만 잘 달려 60세에 일등을 하고 은퇴를 해도 후반전의 40년이 남아있다. 애시 당초부터 죽자 살자 그렇게 빨리 달릴 필요가 없었다. 100년의 거리를 알아차리고 천천히 즐겁게 좌우를 살피고 남을 도와주며 달렸으면 더 여유로운 삶을 보낼 수 있었다. 이제는 100세 시대에 혼자 빨리만 달려서는 외로운 인생이 된다.
마라톤보다 더 먼 거리를 달리는 경기가 울트라 마라톤이다. 마라톤이 속도경기라면 울트라마라톤은 완주경기다. 오직 정해진 거리의 완주에 목적이 있으니 시합이나 경기라고 부르지도 못하고 올림픽 경기에도 없다. 우리나라 울트라 마라톤 중 최장의 거리는 전라남도 해남의 땅 끝 마을에서 최북단인 강원도 고성까지 무려 622km를 달리는 종단코스가 있고 강화도에서 강원도 강릉까지 308km를 주파해야하는 횡단코스도 있다. 하지만 하루에 끝을 볼 수 있는 100km 울트라 마라톤이 일반적이다.
속도경기가 아닌 완주경기인 만큼 마음의 여유가 있다. 옆에서 함께 달리는 사람이 경쟁자가 아니고 동반자다. 옆 사람이 지치거나 다리에 쥐가 나면 부축해주고 마사지도 해주며 함께 달린다. 긴 시간 달리면서 세상사는 이야기도 함께 나눈다. 주로에서 함께 밥도 먹는다. 마라톤경기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휴먼 스토리가 펼쳐진다.
필자는 마라톤 경기에 100여회 출전했다. 멀리 제주도 마라톤 대회도 갔다. 100km 울트라 마라톤을 세 번이나 달렸다. “혼자가면 빨리 가지만 함께 가면 멀리 간다.”는 말의 실천 장이 바로 울트라 마라톤이다. 울트라 마라톤은 선수보호를 위해 차량통행이 뜸한 한밤에 열린다. 별이 총총한 밤에 소수의 마라토너가 배낭에 음료수와 약간의 먹을거리를 짊어지고 느리게 달리는 모습을 보면 인간의 삶이 보인다.
소년출세가 인생에서 경계해야할 일인 것처럼 빠른 주법은 울트라마라톤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느리게 그러나 쉼 없이 달려야 한다. 빠른 속도보다는 방향이 우선이다. 방향이 맞으면 언젠가는 목적지에 도달한다. 100세 시대에 가야 할 방향이 정해지면 더불어 사는 이웃과 친척친지들과 호흡을 맞춰야 인생이 즐겁다, 서로 도와가며 달리는 울트라 마라톤이야 말로 100세 시대에 우리가 살아가야하는 삶의 방법이다. 혼자만 잘 먹고 잘 살겠다고 숨어서 소고기 구어 먹는다고 무슨 즐거움이 있겠는가! 함께 해야 행복이다.
서울의 동쪽에 있는 나지막한 산이며 서울둘레길의 제2코스(용마-아차산코스)의 일부분인 아차산(285m)이 있다. 등산하는 산이라고 말하기는 낮 간지럽지만 뒷동산 같은 평탄한 산길이여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든다. 한가한 토요일 오후 유튜브의 음악을 들으며 아차산에 올랐다.
아차산의 중턱쯤에 누군가 소나무위에 장갑을 벗어놓고 깜빡 잊고 그냥 가버렸다. 누가 봐도 탐이 날 분홍빛 예쁜 장갑 이다. 장갑주인이 잠시 쉬어간다고 배낭을 벗으면서 손에 낀 장갑이 불편하여 벗어서 나무위에 올려놓고 바위에 걸터앉아 쉬었을 성싶다.
일어나서 갈 때는 눈높이 보다 높은 나무위에 올려놓은 장갑이라 잘 보이지 않으면 깜박 잊어버리고 그냥 간다. 여러 사람이 단체로 산행을 오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를 듣다보면 정신이 없다. 더러는 빨리 가자고 독촉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깜박 잊어버린 모양이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장갑 주인이 몇 발작 걸어가다 ‘아차차 내 장갑’하고 돌아와서 가져 갈 것으로 기대했다. 남의 물건은 손대지 말고 그대로 두어야 주인이 찾아가기 쉽다. 선량한 마음에 주인을 찾아준다고 들고 내려오다가 관리사무소에 맡기다가는 장갑주인을 영영 못 찾을 수도 있다.
그런데 산행을 하고 두 시간이 지나 그 자리에 와보니 장갑은 아직도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장갑주인은 ‘에이 오늘 일진이 나빠 장갑을 두고 왔네! 지금 가봐야 누가 가져갔을 거야“ 라고 미리 예단하고 찾기를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아직도 장갑을 잊어버린 줄도 모르고 기분 좋게 하산해서 일행과 술판을 벌리고 있을 수도 있다.
주인을 기다리는 장갑이 애처로워 장갑에 주인의 전화번호나 무슨 연락처가 있으면 알려주려고 장갑을 이리저리 살펴봐도 아무런 표시가 없다. 아쉽지만 장갑주인 찾기를 포기하고 그냥 그 자리에 장갑을 두고 올 수 밖에 없었다. 다음날이라도 주인이 찾아가면 다행이지만 남의 손을 타면 영영 장갑과 주인은 이별이다. 남의 물건이라고 아무도 손을 대지 않으면 장갑은 그대로 비가 오면 비를 맞을 것이고 눈이 오면 눈을 맞고 밤이고 낮이고 오직 주인만을 기다릴 것이다.
유행가 가사처럼 ‘아직도 난 널 사랑하는데 넌 벌써 나를 잊어버렸나’ 하고 장갑이 말하는 것 같다. 문득 ‘미생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오마고 약속하고는 나타나지 않는 연인을 다리 밑에서 기다리다 홍수로 불어난 물에 떠내려갔다는 미생이란 사람이 있었다. 실제 이런 사람이 존재했는지는 모르지만 약속을 지키고 끝까지 기다린 믿음의 화신으로 미생을 추켜세우는 사람도 있고 미련바보같이 물이 불어나면 피해야지 목숨을 잃는 행동을 했다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다. 요즘의 미생이라면 핸드폰으로 왜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고 따졌을 것이다. 소나무 위의 장갑은 꼭 옛날의 미생처럼 죽어도 주인을 기다리는 모습을 하고 있다.
지하철에는 할아버지 택배 배달원이 있다. 배달하는 물건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체인으로 물건과 자신의 몸을 감아두는 것을 봤다. 나이가 들면 뭘 자주 잊어버리기도 하고 잃어버리기도 한다. 손에 들고 있다가 불편하다고 옆자리에 둔 것이 일어날 때는 깜박 잊어버리고 챙기지 못하고 그냥 나온다. 잃어버리지 않으려면 손에 뭘 들고 다니지 말고 주머니나 가방 속에 넣는 것이 좋다. 전철이나 시외버스의 선반 위 같이 보이지 않는 곳에 두는 것도 피해야 한다. 집에서 나올 때 가방이나 주머니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되새겨 보고 집을 나서는 습관을 들이고 있다.
58개띠들이 하면 유행이 된다. 폭발적인 우리 사회 인구증가의 한복판에 자리 잡은 58년생들은 사회 변화와 유행을 주도한, 지금으로 치면 ‘완판남’·‘완판녀’로 부를 수 있는 세대다. 그들의 문화적 파괴력은 굉장했다. 여러 분야 중 특히 여행과 관련한 58개띠들의 문화주도도 눈여겨볼 만하다. 빈궁에서 벗어나 경제성장의 혜택을 보기 시작한 이들은 다양한 여행을 경험해나갔다.
1978년. 58개띠들이 만 스무 살이 되던 해. 당시 8월 17일자 경향신문에는 재미있는 기사가 하나 실린다. ‘바캉스 파장 … ‘고요’ 되찾는 산하, 연인원 5천만 기록’이라는 제하의 기사는 당시 여름휴가를 위해 산과 계곡, 바다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몰렸는지를 증언한다. 재미있는 내용 중 하나는 작년 대비 피서객이 40% 늘었다는 대목이다. 예년보다 높은 기온이 가장 큰 이유였겠지만, 성인이 된 58개띠들이 피서객 증가에 한몫하지 않았을까.
당시에도 제주도는 관광지로 인기가 좋았다. 평소 600석 내외로 운영되던 서울-제주 간 항공편은 피서기간에는 1000석 이상으로 증편돼 관광객을 실어 날랐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탓인지 다음 해인 1979년, 철도청은 고급여행을 원하는 관광객을 위해 새마을호 객차 확충을 서둘러 진행했다.
물론 58개띠들이 여행 보따리를 맘껏 싸기 시작한 원인에 경제성장의 수혜도 빼놓을 수 없다. 1977년은 우리 경제의 상징적인 시기였다. 1인당 GDP가 처음으로 1000달러를 돌파해 1034달러를 기록했고, 수출 역시 최초로 100억 달러를 돌파했다. 배고픔은 점차 잊히고 있었다.
가장 원하는 신혼여행지는 ‘제주도’
그렇다면 58개띠들의 신혼여행은 어땠을까. 통계청이 2011년 발표한 ‘최근 30년간 초혼자료 분석’에 따르면, 1981년의 남성 초혼 연령은 26.4세, 여성은 23세로 나타났다. 이를 바탕으로 유추해보면 58개띠들의 결혼이 이뤄진 시기는 이들이 23세에서 26세를 지낸 1981년에서 1984년 사이라고 봐도 될 것 같다.
1982년 5월 27일자 동아일보에는 당시 젊은이들의 신혼여행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기사가 등장한다. 한국갤럽이 18세 이상의 남녀 1218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가장 많이 다녀온 신혼여행지는 부산(21.6%), 경주(12.6%) 순이었다. 아무래도 비용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제주도는 3위(12.2%)를 기록하는 데 그쳤다. 재미있는 것은 순위에 자리 잡고 있는 ‘서울’의 존재다. 당시 지방 거주민들에게 서울은 충분히 매력 있는 여행지였다. 신혼여행으로 서울을 선택한 이들은 5.4%나 됐다.
가고 싶은 신혼여행지로는 역시 제주도(46.5%)가 가장 많이 꼽혔고, 당시 왕래가 여의치 않았던 외국을 꼽은 이들도 13.1%나 됐다. 3위는 설악산(11.8%)이 꼽혔는데, 다녀온 여행지에서 7위에 불과했던 것에 비하면 높은 수치다. 설악산이 관광지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말. 1978년 진갑을 맞은 박정희 대통령이 선택한 관광지도 개발이 막 시작된 설악산이었다.
해외여행 자유화로 ‘천지개벽’
58개띠가 해외 땅을 밟은 것은 ‘여행’보다 ‘일’이었다. 물론 해외 출장이라고 쉬운 것은 아니었다. 1980년대 고위직 공무원이나 주요 기업의 임원이 해외 출장이라도 나가면 모두 기삿거리가 됐다. 그만큼 해외 방문은 쉽지 않았다. 출장이 목적이어도 회사의 매출 규모가 낮은 기업은 여권을 받기도 어려웠던 시절.
중동에서 일어난 건설 붐은 58개띠들의 해외 구경의 좋은 구실이 됐다. 굳이 따지자면 58년생은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말까지 일었던 중동 붐의 막차를 탄 세대다.
1985년 해외로 나간 한국인은 약 48만 명이었다. 일본과 미국을 방문한 이가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사우디아라비아가 많았다. 지금과는 판이하게 다른 결과다.
서울올림픽 개최 다음 해인 1989년이 되면서 전 국민 해외여행 자유화가 이뤄졌다. 1983년만 하더라도 50세 이상인 사람이 관광예치금을 200만 원 이상 맡겨야 관광여권을 받을 수 있었지만 매년 대상 연령이 낮아지다가 1989년에 완전 자유화가 이뤄졌다.
해외여행 자유화는 우리 사회의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1990년부터 신문 지면에는 ‘배낭여행족’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했고, 즐겨 찾는 신혼여행지는 제주도에서 태국이나 필리핀으로 바뀌었다.
세운상가 외제장사 아시나요?
해외여행 자유화 이전, 해외 출장 근로자들의 부업 중 하나는 바로 소니와 산요로 대표되는 일본 가전제품을 내다 파는 일이었다. 이들이 면세점 등에서 구매해 들여온 카메라, 오디오, 전기밥솥 등은 세운상가 상인들에게 늘 환영받았다.
그러다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가 이뤄지면서 소비자들이 해외에서 직접 물건을 사갖고 들여오는 문화가 확산됐다. 이런 문화의 아이콘으로 ‘코끼리 밥통’이 있다. 일본 조지루시 전기밥솥은 밥맛이 좋다고 입소문을 타면서 고소득층 사이에서 필수품 대접을 받았고, 점차 대중화되어갔다.
매일경제신문은 1992년 광복절 ‘일제선호 불치병인가’란 기사를 통해 당시 상황을 소개했다. 일본 버블경제의 거품이 꺼져가면서 가전제품 상점가가 몰려 있는 아키하바라역 인근 가게들은 불황을 겪고 있지만, 한국 관광객들이 너도나도 밥통 등 가전제품을 사주는 덕에 상권이 유지되고 있다고 기사는 전하고 있다. 최근 중국 관광객 유커들이 백화점에서 한국산 밥통을 사재기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당시 58개띠들의 나이는 34세였다. 김포공항 입국 수속 행렬에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지 않았을까.
당시 신문에 게재된 해외여행 광고를 보면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국가도 일본, 미국, 동남아로 지금과 차이가 나지 않았고, 도쿄 4일 여행상품이 70만 원 선, 필리핀 4일 여행 상품이 48만 원 선으로 가격도 비슷하다. 다만 다른 부분이 있다면 중국 관광의 유무다. 58개띠들이 중국 관광지를 방문할 수 있었던 것은 1994년 중국여행 전면자유화 이후부터다.
[추억 한토막] 대전역 가락국수 맞먹는 앵커리지공항 우동의 추억
경부선과 호남선이 지났던 대전역. 선로가 붐비고, 대기시간이 길었던 탓에 대전역 승강장의 가락국숫집은 승객들이 꼭 들러야 하는 명소가 됐다. 비행기 여행과 관련해서도 대전역 가락국수와 비슷한 추억의 공항이 있다. 다소 엉뚱하게도 미국 알라스카 앵커리지공항이 그곳이다.
대한항공이 1975년 서울-파리 여객노선을 개설한 것을 시작으로 미국과 유럽 노선이 늘기 시작하면서 앵커리지 공항은 상당수 여객기가 들러야 할 경유지였다. 당시 여객기들의 비행거리가 짧았고, 냉전으로 인해 소련 영공을 지날 수 없었기 때문에 필연적인 절차였다. 이런 사정은 일본도 마찬가지. 버블시대 해외 여행객이 폭발적으로 늘었던 일본의 항공사들도 이곳을 들러야 했다.
환승보다는 급유의 목적이 컸기 때문에 앵커리지에서 머무는 시간은 짧지 않았다. 때문에 당시 해외 출장이 잦았던 상사맨들이나 항공사 관계자들은 당시 앵커리지의 추억을 기억한다. 항공사 승무원으로 근무했던 안영희 동년기자는 “한 시간은 있어야 했는데 승객들이 딱히 할 만한 것이 많지 않았어요. 그래서 면세점들이 장사가 잘됐죠”라고 설명한다.
이 공항에서 인기가 가장 높았던 매장은 바로 ‘우동’. 해외 왕래가 잦았던 한국과 일본의 ‘밀리언 마일러’ 사이에선 반드시 거쳐야 할 일종의 성지였다. 일본의 몇몇 사이트에 남아 있는 기록의 편린을 맞춰보면, 앵커리지 우동은 주인이 두 번 바뀌었다고 전해진다. 첫 번째 주인은 미국계 일본인으로 육수 제작과 제면을 직접 하는 정통파여서, 본토 일본인들도 인정할 정도였다고. 가격은 10달러 내외로 비싼 편이었다. 지금도 일본에선 ‘앵커리지 우동’이란 단어는 여행지에서 만나는 수준 높은 우동집을 칭하는 대명사처럼 통용되고 있다.
장사가 잘되자 한 항공사 자회사가 주인을 밀어낸다. 일종의 젠트리피케이션. 물론 우동은 인스턴트로 바뀌었다. 냉전의 종말과 항공기 성능의 향상으로 앵커리지 경유 노선이 줄자 이 우동집은 한국인 사업가에게 넘어간다. 맛도 한국식으로 변했고, 단무지는 별매여서 원성을 사기도 했다.
대한항공에서 정년퇴직한 정용진 기장은 “당시 조종사들 사이에서 앵커리지공항의 우동은 자주 언급될 정도로 유명했어요. 우동과 함께 팔았던 연어 고기도 한국에선 구하기 힘든 물건이어서 인기가 많았죠”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가족·친구들과 어울려 ‘송년주’ 한잔 나누기 딱 좋은 시기다. 헌데 나에게 지난 여름부터 금주령이 내렸다. 송년은 커녕 친구들로부터 외면당할 처지에 이르렀다. 친구들과 가끔 소주잔을 기울이는 나에게 ‘송년금주’는 어려운 숙제가 되었다. 술 배운 후 처음 맞는 이 난국을 이겨내고 금주에 성공할 수 있을까, 금주 금단증상은 얼마나 심할까 생각이 깊어갔다.
담배를 끊으면서 금단증상으로 엄청 고생했던 기억이 머릿속을 스쳤다. 군대복무 시절 늦게 배운 담배가 제대 때는 골초가 되었다. 20여 년 전 어느 휴일, 친구와 등산을 마치고 ‘일요담배’를 맛있게 한대 피웠다. 헌데 월요일부터 생담배 타는 냄새 같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악취가 코에서 진동하였다. 금연경험자가 ‘금단증상의 한 형태 같다.’고 말하였다. 손 떨림·체중증가·우울 등은 종종 들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 겪는 일이었다. ‘담배를 한 대만 피워도 금단증상이 다시 처음처럼 강해진다.’고 하였다. 완전히 끊자 다행히 금단증상의 강도가 점점 낮아졌다. 10년 넘어 금연에 성공하였다.
금주를 시작한지 어느덧 몇 달 지났다. 군대생활 중에 발생한 발톱무좀을 치료하러 피부과 의원에 갔더니 “무좀약을 복용하는 동안에 술을 마셔서는 안 된다.”고 의사가 말하였다. 발톱이 제 기능을 못하면 ‘관절손상이 크다’고 경고하였다. 발의 관절을 보호하고 건강을 유지하려면 이 기회에 완치하여야 한다. 치료를 하면서 금주를 시작하였다. 아직까지는 금단증상이 없어서 다행이다. 송년모임이 매우 허전하게 느껴졌다. 술잔을 돌리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들이 정겹게 보였다.
왁자지껄 떠드는 친구들의 모습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나도 저랬을 텐데!’ 아름다운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학창시절 산행시작 때는 산에서 취사가 허용되었다. 석유버너에 불붙이는 방법을 익히고 코펠까지 준비한 다음에야 등산 패에 낄 수 있었던 옛이야기다. 몇 명이 어울려 각자 쌀·찌개거리·반찬을 가져와 합동취사를 하였다. 버너를 준비하여 밥을 짓고 찌개를 끓이는 담당을 하였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변치 않고 술을 준비하였다. 한겨울에는 눈을 걷어내고 고기를 구워서 소주 한잔으로 추위를 달랬다.
세월이 지나면서 산에서 취사가 금지되고 정상까지 오르는 본격산행이 시작되었다. 도시락을 푸짐하게 준비하여 산상 뷔페식을 즐겼다. 덩달아 산술의 참맛을 알기 시작하였다. 계곡이나 식당에서 마셨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한잔 술에 가슴이 탁 트이곤 하였다. 어려웠던 일을 다 잊을 수 있었다. 푸른 하늘로 날아오르고 구름 위를 거닐었다.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고 간이 부풀었다. 발아래에 세상이 조개껍질처럼 엎드렸다. 술을 즐기지 않는 친구도 한모금쯤 입에 댔다. 술 향기에 취하고 흥에 겨웠다.
여기까지는 즐거운 추억이다. 옛날에는 등산복에 배낭 메고 나서면 놀러가는 한량으로 보는 경향이 일부 있었다. 이제는 산행이 단순한 놀이가 아니고 건강을 다지는 필수 운동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지금도 하늘을 날 것 같은 마음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능선 어려운 길을 멀리하고, 쉬운 둘레길을 찾는 횟수가 많아졌다. 대여섯 시간 산행이 두세 시간으로 확 줄었다. 정상까지 오르지 않던 옛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친구들도 막걸리 한잔을 입에 댔다 떼기를 반복하였다.
사회은퇴 후 사회평생교육장, 재능기부 봉사장에서 새로운 친구를 많이 만났다. 그들과는 학창시절의 동창이나 사회생활에서 만났던 동료들과는 또 다른 정을 느끼고 있다. 세상풍진을 털어내고 고향 뒤안길에서 만난 어릴 적 동무 같다. 누구의 손이라도 덥석 붙잡고 싶은 그런 송년이다. 텁텁한 막걸리 한사발이면 딱 좋을 것 같다.
헌데 송년금주다.
한국 시니어블로거 협회에서 주관하는 토요3시간 걷기 행사가 남양주에 있는 수종사에서 있었다. 경의중앙선 열차를 타고 운길산역에서 내려 도보로 수종사까지 한 바퀴 도는 것이다. 필자는 며칠 동안 감기 기운으로 망설이던 끝에 전 날 저녁에 참석하기로 최종 마음을 정했다. 상봉역에서 만난 회원들이 경의중앙선 운길산역에서 내렸다. 미리 도착한 회원들까지 11명의 회원들이 합류하여 수종사를 향해서 걷기 시작하였다.
해발 610m 운길산 중턱에 자리 잡은 수종사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쳐지는 두물머리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천혜의 절경을 감상할 수 있는 사찰이다.
영하5도의 쌀쌀한 날씨에 살랑살랑 불어대는 산바람이 제법 매섭게 옷깃을 파고들었다. 운길산 역에서 수종사로 가는 길은 계곡의 등산로나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가파른 경사로를 힘들게 걸어서 올라가야 한다. 필자 일행은 처음에는 계곡의 산길을 따라 오르다가 중간에 가파른 시멘트 포장길로 들어섰다. 등산로와 산비탈 여기저기에는 적지 않은 눈이 쌓여있어 여간 미끄럽지가 않았다. 헐벗은 겨울 산 나뭇가지 사이로 옹알옹알 들려오는 새소리를 들으며 언덕길을 오르다 보니 어느새 땀이 차오른다.
이 길은 필자에게는 지울 수 없는 추억이 깃들어 있었다. 단풍이 곱게 물들던 10여 년 전의 어느 가을날, 지인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이 곳을 찾았다가 수종사 입구에서 운명처럼 만난 여인과 불타는 사랑에 빠졌던 필자의 지인이 문득 생각났기 때문이다. 추억을 꺼내 두런두런 음미를 하다 보니 어느덧 수종사 일주문이 눈에 들어올 때 쯤엔 등까지 땀으로 흠뻑 젖었다.
운길산 수종사는 대한불교조계종 봉선사의 말사로 창건연대의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세조와 관련된 일화가 있다. 부스럼을 앓던 세조가 오대산 상원사에서 문수보살을 만나 깨끗이 낫고 한강을 따라 환궁하는 길이었다. 양수리까지 오니 밤이 이슥해 쉬어 가는데 운길산에서 종소리가 들려왔다. 신하가 알아보니 천년 고찰 터 암굴 속에 십팔 나한상이 앉아 있고 천장에서는 물방울이 떨어지면서 종소리를 내는 것이라 했다. 세조는 이곳에 절을 복원해 수종사라 부르고 이 은행나무(500년)를 하사했다고 한다.
500년 수령 느티나무 두 그루의 환영을 받으며 경내로 들어서자 겨울 속에 빠진 사찰의 고즈넉함이 불쑥 다가왔다. 경내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나니 마당 앞에 아담하게 지어진 전각 다실, 삼정헌(三鼎軒)이 눈에 들어왔다. 필자 일행은 툇마루에 배낭을 벗어놓고 다실 안으로 들어갔다. 무료다실 삼정헌에서는 약수를 끓여 이곳을 찾는 중생들에게 차를 제공하고 있었다.
투명하고 탁 트인 통유리 밖으로 두물머리의 풍경을 감상하며 녹차 한 잔을 여유롭게 마실 수 있는 삼정헌은 수종사만의 아주 특별한 공간이다. 은은한 녹차향이 후각을 자극하고 정오를 갓 지난 말간 겨울 햇살이 섬섬옥수처럼 다실 안을 비추고 있었다. 가파른 경사로를 따라 경내까지 당도하느라 이미 땀으로 촉촉해진 몸이 한기(寒氣)가 엄습하기 이전에 이곳에 들어올 수 있어 참으로 다행이었다. 이 곳 삼정헌에서 보살님의 녹차 공양은 덤으로 맛볼 수 있는 행복이다. 시원한 전망과 유리창을 통해 쏟아지는 햇살은 마음에 찌든 때까지 말끔히 거두어간다. 잔잔한 음악을 들으면서 도란도란 둘러앉아 우려낸 녹차 한잔을 나누면서 얘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뻑뻑했던 피로는 가시고 젖어있던 속옷도 대충 말라가고 있었다. 운길산 수종사를 한번쯤 찾았던 사람들은 이런 맛에 잊지 않고 다시 이 사찰을 찾아오곤 하나보다. 따뜻한 다실 분위기에 공짜로 차까지 얻어마셨으니 어찌 고맙지 않을 손가? 나오는 길에 시주함에 소박한 정성을 담았다.
삼정헌에서 감미로운 시간을 보낸 필자 일행은 하산 길에 올랐다. 낮에 잠깐 녹았던 길이 저녁이 되면서 다시 살얼음이 살짝 얼어 무척이나 미끄러웠다. 내리막길에서 우려하던 일이 기어코 일어나고야 말았다. 2명의 대원이 급경사로에서 미끄러져 넘어지고 말았는데, 부축을 해서 일으켜 놓고는 하늘을 향해 네 팔 벌린 나무 같다고… 유쾌한 농담을 주고받았다.
몸과 마음이 한없이 움츠러드는 겨울, 12월의 첫 주말에 시니어 회원님들과 더불어 운길산 수종사를 찾아 활기차고 좋은 시간을 보냈다. 엄동설한 맹추위에 대항하여 가슴을 활짝 펴고 씩씩하게 걸었던 회원님들의 얼굴에서 자신감이 넘쳐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