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무대에 선 배우 정동환(鄭東煥·69)을 만나면 단연 그 에너지에 압도될 것이다. 곧 칠순을 바라보는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쏟아내는 힘과 광기에 가까운 열연은 그가 어째서 최고의 배우 중 한 명인지 알 수 있게 해준다. 그의 인터뷰는 정동환을 최근 화제의 중심에 올려놨던 연극 이야기로 시작됐다. 1000페이지에 달하는 도스토옙스키의 방대한 원작을 국내 연극 사상 가장 긴 일곱 시간짜리 연극으로 만든 에서 그는 무려 4개의 배역을맡았다. 너무 길어서 1부와 2부로 나누고 중간에 인터미션까지 있는 이 상상하기 힘든 프로젝트가 그에게 남긴 것은 무엇일까?
“내가 아는 기존
연극은 두 시간짜리 압축판이었어요. 그런데 연출자인 나진환 교수가 이걸 일곱 시간짜리로 하자니까, 진짜 마음만 있는 건지 능력도 있는 건지 처음에는 의심도 했지. 요즘 그런 사람 많아요. 생각을 갖고 시작하는데, 하다 보면 자기도 이걸 왜 하는지 모르는 사람들. 만약 그러면 참 복잡해지는 거지. 말이 일곱 시간이지 공연을 일곱 시간을 한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니까.”
을 하기로 최종적으로 결정했을 때도 정동환의 고민은 여전했다. 막상 잘하지 못해서 ‘굳이 할 이유가 있었나?’ 하는 얘기를 듣게 된다면, 고생은 몇십 배 하고 듣는 게 비난이면 무슨 가치가 있나 걱정이 된 것이다.
“그런데 당장 나에게 떨어진 배역들을 보니 그런 한가한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싶었어요(웃음). 시간이 쏜살같이 막 지나가는데, 한 시간 지나가면 자지러질 것 같은. 재미있는 걸 느꼈어요.”
‘재미있다’는 그의 말 한마디에서, 그가 가진 연극의 혼이 훅 들어왔다.
아직도 재미있는 것을 찾는다
“연습 끝나고 집에 들어가면 열한 시쯤 되는데 ‘아니, 내일 아침까지 열 시간도 안 남았단 말야? 뭐부터 분석하고 뭐부터 외워야 하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지금은 웃으며 얘기하지만 정신적 압박에 하루가 가는 게 너무 아까워서 큰일 났네 했죠(웃음).”
자신의 모든 걸 던져야 하는 극한 상황. 바닥을 치고 거울을 보며 정동환은 자신과의 싸움을 해야 했다.
“치열하게 했죠. 그럴 수밖에 없었고. 충분한 여건을 갖추지 못한 상황에서 무조건 두 시간짜리 연극의 세 배 분량을 해야 한다고 했을 때 오는 문제가 있었어요. 그리고 배역이 네 개로 쪼개져 있으니 머리가 한쪽으로 안 가는 거예요. 지난번 공연에서는 클로디어스를 했는데, 그건 고통을 많이 겪어도 한 인물로서만 고통스러우면 되는 거니까 괜찮아요. 그런데 이건 한쪽에만 정을 줄 수도 없고, 시간을 줄 수조차 없어서 하나도 안 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새삼 칠순을 앞둔 연극인이 겪은 그 지독한 모험에 대한 경외감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상상을 초월하는 압박감 속에서, 연극 시작하기 전날 밤 기분이 어땠을지 궁금했다. 그는 사람 좋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때는 다 포기했지. 이젠 죽었다 하고 포기했어요.”
누군가는 해야 했던 일
정동환은 을 하면서 겪은 고통을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말해도 알아들을 사람도 없고 말한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고. 내 마음을 아무도 알 수 없었죠. 다만 ‘내가 조금 잘못하면 내 인생은 끝난다’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어요. 3m 탑 위에 올라가서 대사 한마디만 빠져도 전체가 어그러져서 아무것도 될 수 없다, 그럼 난 내려올 수밖에 없다. 네 시간을 했든 일곱 시간을 했든, 네 개의 역을 했든 일곱 개의 역을 했든, 아무런 의미가 없는, 어느 순간이 나를 추락시킬지 모른다. 그런 생각을 마지막 공연을 끝내고 내려올 때까지 했어요. 그런 절대고독 속에서 ‘그 무모한 짓을 왜 했어?’라고 누가 물어오면 ‘누군가는 해야 하는 거였으니까’라고 대답했을 거예요.”
‘누군가는 해야 했던 일’이라는 말은 연극인으로서의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그 말 한마디에 담긴 힘에 자신을 싣고 스스로 가시밭길을 걷는 배우다.
“저는 이 작품이 굉장히 좋았어요. 처음에는 많이 우려했죠. 그러다가 우려가 오히려 작품에 대한 확신으로 바뀌었고 보는 사람도 틀림없이 만족감을 느낄 거라고 생각했어요. 다행히 관객들도 제 가족들도 만족했고, 그 점에 대해선 안도합니다. 그래서 일곱 시간이 아니라 더 길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왜 왔는가, 뭐하러 왔는가, 무엇을 할 것인가, 어디로 갈 것인가”
정동환에게서는 연극인을 넘어서 연극 그 자체가 삶으로 체화된 듯한 인상이 느껴진다. 그러나 그런 그도 건강은 쉽지 않은 숙제였다.
“시골에서 살다가 서울로 오가게 된 것도 건강 때문이에요. 한때는 운전을 못할 정도로 공황장애가 심했어요. 몇 년 지나니 이제는 괜찮아요. 그런데 항상 걱정되죠. 나는 그 상태를 일종의 과부하 상태로 봐요. 자꾸 새롭게 뭔가를 벌이다 보니 내 능력이 한계를 보이는 거고 정신적으로 혼란이 오는 거겠다 싶었어요. 이제 좀 편하게 살아야 하는데 자꾸 어려운 일, 새로운 일을 찾아서 하니….”
“그럼 더 이상 도전도 하지 말아야겠다”고 기자가 말하자 그가 긍정했다. 그러나 이내 “그런데 그러면 재미가 없으니…”라고 한다.
보리는 올라올 때 밟아줘야 잘 크기 마련이다. 배우 정동환은 그런 보리밟기 같은 과정을 자신의 자아 본연에 심어놓고 있었다. 그는 자기 안에서 끓어오르는 예술가적 기질, 그 꿈틀거림을 현실과 주고받는 훈련에 철저한 배우다.
“인생을 사는 것도 연극하는 것과 같습니다. 연극은 등·퇴장이 가장 중요하거든요. 연극은 ‘왜 왔는가, 뭐하러 왔는가, 무엇을 할 것인가, 어디로 갈 것인가’로 온통 채워져 있어요. 인생도 마찬가지예요. ‘세상이 이러니까 이런 거지’가 아니라 ‘진짜 필요한 건가, 필요한 일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고 그에 따라 움직일 줄 아는 것. 그게 연극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고 내가 연극과 인생이 같이 가는 것이라고 여기는 이유예요. 새로운 세상이니까 더욱 숙고하면서 뭔가를 해야지, 그저 세상이 백세인생 시대이니까 그에 맞춰가는 건 아니죠.”
결국 다시 돌아오게 되는 길, 가족
그는 어렸을 때부터 연극을 즐겨 보러 다녔다고 한다. 물론 지금처럼 연극 공연이 많지는 않았다. 1년에 한두 편 정도 볼 수 있었던 시절이다. 그러다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1965년에 전국남녀연극경연대회에서 최우수 연기상을 받으면서 연극인의 길로 본격적으로 들어섰다. 햇수로 따지면 무려 52년이라는 시간이다. 그는 연극을 하지 않았다면 성직자의 길을 걸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어머니가 젊어서부터 종교에 심취해서, 어머니의 바람은 내가 성직자가 되는 거였죠. 나는 성직자에 뜻이 없었지만, 그래도 연극을 하지 않았다면 아마 신학교를 가지 않았을까 싶어요. 사실 지금 하는 일이 거기서 크게 벗어나는 일이 아니고.”
성직자와 연극인의 삶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그의 말은 연극에 대한 그의 태도가 얼마나 헌신적인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배우 정동환은 매번 작품 속에서 타인이 이해 못할 고독을 마주하며 살고 있지만, 그는 혼자 살아가는 게 아니다. 그에게 가족은 무엇보다 중요한 인생의 의미로 작용하고 있다.
“내가 아무리 일이 중요해도 결국은 가족에 맞춰서 사는 게 아닌가, 자연스럽게 맞춰지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라고는 하지만 결국 가족을 위한 어떤 것을 갖춰나가기 위한 거죠. 누구한테 ‘난 이래서 이래’라고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자연히 가족을 중심으로 가족을 위한 삶에서 벗어나지 않는 길을 걷고 있는 거죠.”
그에게 가족은 다시 돌아오는 길과 같았다. 그는 자신에게 가장 영향을 준 가족으로 어머니와 아내를 꼽았다.
“어머니는 어렵게 사셨어요. 저희가 3남 1녀
였는데, 어려운 환경에서도 자식 교육을 다 시키셨죠….”
그는 어머니 이야기를 하다가 잠시 침묵했다. 마치 절대고독 속에 들어간 사람처럼 보였다. 기자는 기다려야 했다.
딸의 삶을 바라보는 기준은 행복
화제를 돌려 그의 둘째 딸 정하늬도 그와 같은 연극인의 길을 걷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쉽지 않은 연극의 길을 걷는다는 것에, 그는 ‘좋다’고 말했다.
“딸이 어떤 연기자가 되길 원하는 것은 없어요. 나는 치열한 쪽을 택했지만 딸은 그런 생활에 익숙하지 않아요. 그게 틀렸다는 생각은 아니고, 내 세상하고 다른 세상에서 사는 사람은 그렇게 사는구나 싶어요.”
딸의 삶을 인정하는 아버지의 모습. 그러나 그저 방임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누구나 마찬가지인데, ‘난 이거밖에 안 돼’ 하며 포기하는 순간만 없으면 언제든 가능성이 있어요. 저는 고통스럽고 고뇌가 있는 길을 가야 그 뒤에 보이는 길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것을 피해 간다면 그 뒤에 오는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 거지. 그런데 그 어떤 것을 보지 않음으로써 만들어지는 삶에 만족한다면 그것도 좋다고 봐요. 그래서 내가 하는 일을 보면 딸도 알고 있겠지 하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이것은 연극인 선배로서의 질책이 아니라 인정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딸이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 주변에서 가장 행복한 삶을 살고 있지 않나. 틀림없이 그렇다고 보고 있어요. 만족은 자기마술이거든요.”
행복은 질이 아니라 양일 수도 있다. 순간순간에 느끼는 행복이 모아지면 그게 더 큰 의미와 행복이 될 수 있는 법이다. 정동환은 요즘 세상 사람들이 그 생각을 잃었다는 게 엄청난 안타까움이라고 말했다.
“지금이 행복이어야 하는데, 내일을 위해 지금을 희생해야 하고…. 이게 아닌데, 이게 잘못된 것인데 갈수록 심해지고 있죠.”
지금을 위해 견뎌온 삶
삶의 우여곡절을 지나, 정동환은 지금이 가장 평온한 시기로 보인다. 그에게 고통을 어떻게 견딜 수 있었는지 묻자 ‘지금 같은 때를 위해 견뎌온 것 같다’고 답했다.
“그때는 그런 생각을 못했지만, 어려운 길을 일부러 자초하고 가는 게 원동력이 되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 ‘굳이 그럴 필요가 있었냐’라고 얘기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나는 그게 필요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해요.”
마지막으로 계속 새로운 것을 찾는 그가 맞이할 미래를 물어봤다.
“별다른 것은 없어요. 연극하자는 제안이 아주 많아요. 그중에서 내가 해야 할 게 무엇인가 분명히 알고 그 작업을 하는 게 중요해졌죠. 결과보다는 작업을 하려는 목표 자체에 대한 가치에 비중을 두고 작업해야겠다고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할 필요가 있지요. 요즘에는 그런 생각이 더 들어요. 자신 있게 나가지 못하고 준비가 덜 된 사람이 뭘 하려고 시도하는 것 같은 느낌? 서커스를 하는 듯한 정신적인 위축이 들 때도 있고, 그러다 죽어버리면 마는 거지 싶기도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뇌하고 견디는 실체의 기쁨은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해요. 그래서 후배들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큰 의미는 아니더라도 ‘그런 사람이 있었어’라고 얘기되는 사람이 되면 고맙고 좋은 거지. 어렵더라도 조금 더 견뎌야 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실로 정동환다운 대답이고, 정말 말도 안 되는 대답이기도 했다. ‘그런 사람’이 정동환이다. 한 번 경험하면 누구도 잊기 힘들 ‘그런 사람’.
고광애(高光愛·80) 작가는 1958년 대학 시절 한국일보에 공채 1호 여기자로 입사하는 동시에 이화여대 18대 메이퀸으로 선발되며 그녀의 이름 석 자를 알렸다. 그로부터 1년 뒤, 회사를 그만둔 그녀는 영화평론가 임영의 아내로, 또 영화감독 임상수의 어머니로 불리며 살아왔다. 그렇게 자신의 명성은 잠시 내려놓고 평범한 주부로서의 삶을 살던 그녀가 50세가 되던 해, 우연히 읽게 된 폴 투르니에의 는 그녀의 인생에 회심의 일격을 가했다.
, , 등을 펴내고, 한때 적(籍)을 두었던 한국일보에 칼럼을 연재하는 등 노년 전문 저술가로 활발히 활동 중인 고광애 작가. 이제는 누구의 아내, 어머니라는 말보다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는 일이 더 많아진 그녀다. 그런 고 작가에게 중·장년 세대를 위한 추천 도서를 묻자, 아주 오래된 책 한 권을 소개하고 싶다고 말했다.
“한 40년 전에 나온 폴 투르니에의 책이에요. 나는 그때 당시 종로서적에서 나온 라는 제목의 낡은 책을 다시 읽고 있는데, 아마 지금은 찾기 어려울지 모르겠네요. 그러나 나의 제2인생을 만들어준 책이기 때문에 다른 이들에게도 권하고 싶어요.”
다행스럽게도 2년 전, 라는 제목으로 같은 내용의 책이 나왔다. 그녀는 빛바랜 자신의 책과 기자의 새 책을 번갈아 보며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같지만 서로 다른(?) 책을 읽은 두 사람이 동시에 궁금해한 단어가 있었으니, 바로 회심(回心)이었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가장 감명받은 게 바로 ‘회심’에 대한 내용이었어요. 그동안 냈던 모든 책의 기본은 이 회심에 기초해서 썼다고 볼 수 있죠. 워낙 오래전에 번안된 거라 최근에 나온 것에는 어떻게 표현됐을까 궁금했거든요. 그런데 역시나 회심이네요.”
회심의 순간, 모든 것을 내려놓다
회심에 대한 그녀의 이야기를 듣지 않을 수 없었다. 고 작가는 50세가 되던 해를 떠올렸다.
“결혼을 일찍 한 편인데, 50세가 되니 큰아들은 장가가고, 작은아들은 군대 가고, 딸은 프랑스로 유학가고, 한순간에 아이들이 다 떠나가버리더라고요. 그때 같이 살던 친정어머니가 ‘얘, 저 사람(고 작가의 남편) 밥은 내가 해줄게. 너는 프랑스에 가서 딸내미 밥해주고 있어라’ 그러시는 거예요. 순간 드는 생각이 ‘내가? 나도 엄마처럼 자식 옆에 붙어서?’였어요. 정신이 번쩍 들더라고요. 지금까지 자식만을 위해 살았지만, 이제부터는 자신만을 위해 살아보겠다고 다짐했죠.”
포부는 넘쳤지만 ‘그럼 이제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이 앞섰다. 요즘처럼 중·장년을 위한 교육센터나 프로그램이 없던 시절, 막연한 우려 속에 지내던 중 폴 투르니에의 책이 그녀의 손에 들렸다.
“책을 딱 읽는 순간, 그냥 탁 하고 꽂혔어요. 여기에 모든 해답이 있더라고요. 그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이 바로 회심이었어요. 노년이 되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마음을 한번 돌려보는 태세 전환이에요. 지금까지 살아오던 대로 살지 말고, 새로운 시선과 태도로 삶을 바꿔나가야 한다는 거죠. 그때 내 상황에서는 회심이 절실했어요.”
책에서는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게 간단한 일은 아니며, 타고난 성향에 따른 결정론을 깨뜨리기 위해서는 훌륭한 조언과 단호한 결심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그 이상이 있어야 한다’고 언급하며 내적인 변화를 일으킬 만한 사건, 즉 결정적인 전환점이 바로 회심이라 설명한다.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것은 어렵다. 더군다나 회심의 기회를 얻는 것 또한 쉽지 않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녀의 조언을 들어봤다.
“어느 날 갑자기 ‘회심해야지!’ 마음먹는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회심이라는 것, 그것이 내 인생에 필요하다는 것을 아는 게 우선이죠. 그러다 보면 언젠가 그런 시기가 찾아왔을 때 더 빠르게 마음을 전환할 수 있어요. 나 역시 회심을 몰랐다면 고독했던 그 시간을 인생 1막의 연장선에서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삶의 전환기를 겪으며 그녀가 시도한 것은 ‘명령권자의 위치에서 내려오기’였다.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지시하고 충고하던 타성을 모두 내려놓기로 한 것이다. 물론 그런 와중에도 노인으로서의 정서적 권위는 지키고자 했다.
“나이 들어 삶의 태도를 바꾸려면 젊은이들에게 충고를 강매하거나 존경심을 갈구하는 행위를 경계해야 해요. 평범한 주부인 나조차도 아이들에게 ‘그러는 거 아니야’라는 말이 입에 붙었더라고요. 그런 나를 자식들도 못마땅한 눈초리로 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죠. 오히려 모든 것을 내려놓고 권위를 내세우지 않으면 저들이 아쉬워 먼저 찾아오는 때가 있을 거예요. 그때야말로 우리네가 아껴두었던 그 무엇, 바로 정서적인 권위를 지닌 채 귀한 조언 몇 마디 건네는 거죠. 그렇게 했을 때 존경심은 자연히 스밀 수 있다고 생각해요.”
죽음도 예습하면 두렵지 않아
회심의 순간을 맞이한 후, 그녀는 노년에 대한 책들을 섭렵하며 틈틈이 글을 써내려갔다. 그런데 어느 날, 작은아들인 임상수 영화감독이 어머니가 쓴 글들을 발견하고는 책으로 내보는 건 어떠냐고 제안했다.
“이런저런 글을 메모지에 써놨는데 아들이 그걸 보더니 ‘어? 이거 재미있네? 책으로 냅시다!’ 그러는 거예요. 그때 처음 워드를 배워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꼬박 12년 만에 가 나왔어요. 그동안 두 아이 결혼 치르고, 산바라지하고, 손주도 키우고 하느라 온전히 글에만 매진할 수 없었죠. 그래도 책이 잘 팔려 12쇄까지 나왔는데, 이제는 너무 오래돼서 더는 인쇄하지 않기로 했어요.”
첫 책이 나온 지도 어언 20년이 지났다. 당시 62세였던 그녀는 스스로 자신이 죽는 나이를 77세라 언급했을 정도로 지금의 백세시대를 예측하지 못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다가오는 죽음을 맞이하는 그녀의 모습에는 변함이 없다.
“노년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책을 쓰다 보니, 결국 마지막에 죽음이 남더군요. 그때부터 죽음에 대한 책을 읽고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회’ 모임이나 ‘메멘토모리’라는 죽음독서회도 다니며 깊이 고민했어요. 그러다 보니 오히려 ‘노년 생활을 어떻게 할까?’라는 문제는 간단한데, 죽음은 거창하더라고요. 누구나 겪어본 적이 없고, 알지 못하는 것이니까요. 영원한 암호와도 같은 죽음을 예습해본다는 심정으로 여전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어려운 과목도 예습을 해가면 더 수월하듯이, 죽음이란 무엇이고 어떤 마음으로 처신해야 하는지를 미리 준비하고 있기에 두려움을 덜 수 있었다는 그녀다.
인생 삼모작, 또 다른 청춘을 꿈꾸다
여든의 나이에도 그녀는 스마트폰으로 스케줄을 관리한다. 손바닥만 한 화면 속 달력에는 하루하루 일정이 빼곡하게 차 있었다. 오롯이 자신을 위한 일들로 채워온 덕에 풍요로운 인생 이모작을 지낸 그녀는 요즘 인생 삼모작을 준비하고 있다.
“지금은 인생 이모작 끄트머리쯤 와 있는 것 같아요. 요즘 글을 쓰는 게 예전보다 버거울 때가 있어요. 이제 칼럼을 쓰는 일이나 모임에 나가는 활동을 그만두어야 할 때가 왔지 싶어요. 스스로 멈춰야 할 때를 알아야 지혜로운 노인이 아니겠어요? 괜히 부여잡고 젊은이들 곤란하게 하면 안 되죠. 이만큼 나이를 먹고 나니 혼자 영화를 보든 무엇을 하든 신경 쓰는 사람이 없어요. 눈치 볼 사람도 없고. 관심 밖 인물이 된 건데, 거기서 오는 자유도 대단해요. 차차 모든 것을 내려놓고 완전한 해방, 자유를 누릴 때 인생 삼모작이 시작됐다고 봐야죠. ‘노년기란 젊음의 청춘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세대에 맞는 청춘을 매번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라는 들뢰즈의 말처럼, 나 역시 새로운 청춘을 창조하는 중입니다.”
나 자신이 일흔 살 되고 보니/ 옛날부터 드문 나이라던 시구가 맞는 말임을 알겠구나// 자리에서 담소 나누는 이들은 모조리 새 얼굴/ 꿈속에서 단란하게 모인 이들만이 옛 벗일세// 요동의 학처럼 고향 찾아와 슬퍼할 것까지는 없어도/ 빠른 말처럼 달리도록 누가 세월을 재촉하나?// 남아 있는 몇 사람도 이제는 모이기 힘들어/ 새벽 별 드문드문 반짝이듯 흩어져 사누나/
는 제목의 이 시는 경현(警玄) 김효건(金孝建, 1584~1666))이 70세 넘어 쓴 작품인데 안대회 교수의 번역으로 옮겨 보았다. 그는 83세, 아내는 93세, 아들은 94세를 산 장수 가족이다. 지금도 드문데 당시로는 초장수다. 이 시에 드리운 쓸쓸한 분위기를 보면 장수가 그리 축복만은 아닌 것 같다.
이 시의 요체는 오래 살다 보니 주변에 이야기를 나눌 상대가 없어 외롭고 점점 더 견디기 힘들다는 것이다. 평균수명이 짧던 시절에 혼자 장수한다면 그랬을 것 같다. 그렇다면 백세시대인 지금은 어떨까? 같이 늙어가는 노인네들이 얼마간 있으니 덜 외로울 수도 있겠지만, 김효건의 시대에는 다수이던 가족이 지금은 줄었으니 피장파장이다. 게다가 경제력 없는 외로움은 더욱 힘들고 처량하다.
‘외로움’이 뭐 그리 좋은 것도 아닌데 요즘은 어느새 새로운 트렌드가 되었는지 너도나도 혼자 사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시대가 되었고 날이 갈수록 늘어만 간다. 1인 가구가 30%에 육박하고 대중매체에서는 ‘혼밥’이니 ‘혼술’이니 하는 예능 프로가 판치고 있다. 17세기 시인이 토로했던 외로움이 지금은 대중들이 소비하는 ‘정서 상품’으로 바뀌었다. 세상이 변해도 참 많이 변했다.
그렇지만 외로움에도 차이가 있다. 결혼 안 하고 혼자 사는 젊은이들의 ‘자발적 외로움’이 있다면, 늙어서 어쩔 수 없이 홀로 남겨진 ‘비자발적 외로움’도 있다. 같은 외로움이라도 비자발적 외로움이 훨씬 더 견디기 어려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니 나이를 먹어가며 걱정스럽기만 하다. 어찌 되었든 이 시대는 외로움에 익숙해져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환경이 된 듯하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홀로 있음이 모두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홀로 있는 상태가 ‘외로움’일 수도 있고 ‘고독’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의 저자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개념으로 보면 외로움(loneliness)은 누구를 만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고, 고독(solitude)은 자기 자신을 위해 투자하는 것이란다. 소로가 외딴 호숫가에 오두막을 짓고 혼자 3년을 산 것은 ‘고독’이었다.
현대인이 혼자 사는 것을 즐기면서도 ‘외로움’을 과거보다 더 못 견디는 것은 삶이 너무 분주해 진실로 ‘고독’해 보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 고독은 자신을 돌아보고, 주체적인 생각의 힘을 키우는 시간이다. 기나긴 노년이 될지도 모르니 그 외로움에 대비하기 위해 시니어 대열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라도 고독을 연습해 놓는 것이 필요하겠다. 자신의 내면을 확장하고 지혜롭게 세상을 살아가면 장수가 축복일 수도 있지 않을까?
김진 세계문학사 편집장
비로소 편안해졌다
20대, 30대의 소위 결혼 적령기를 지나 40대에 이르도록 나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결혼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받아야 했다. 혼자 산다는 이유만으로, 어느 자리에서나 ‘남자’와 ‘결혼’에 대한 질문을 받아야 했고, 나는 원하지 않는 대답을 강요받아야 했다.
“독신주의자는 아니지? 그래도 결혼은 할 거잖아.”
40대에는 심지어 내가 아무 남자라도 만나 결혼을 하지 않으면 큰일 날 것처럼, 결코 내가 원하지 않는 만남을 주선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술자리를 만들거나 모임을 만들어서 슬쩍 남자를 끼워 넣어서는 강제로 짝을 맞춰주는, 그들의 호의는 폭력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제발 나를 내버려 둬! 내가 원하는 때 원하는 사람과 할 테니까!’
이런 외침을 수도 없이 했다.
나는 물론 독신주의자가 아니다. 한 번도 연애를 해보지 않은 것도 아니다. 다만 결혼을 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혼자 사는 삶’에 대한 불안을 나 자신보다 더 크게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혼자 사는 사람들은 나와 같은 경우를 많이 겪었을 것이다. 하지만 50대가 되자 그런 일들도 거의 사라졌다. 50대쯤 되면 이젠 어떤 변화라든가 새로운 시작을 꾀할 때가 아니라는 것을 여실히 깨닫게 해준다. 비로소 편안해졌다.
마냥 자유롭다
퇴근 후 집에 돌아오면 먼저 음악을 틀고, 느긋하게 저녁 준비를 한다. 무엇을 먹을까 하는 고민은 않는다. 그때그때 마음에 달렸다. 어떤 날은 국수를 삶는다. 멸치육수를 내고, 호박과 양파 등을 볶고 달걀지단을 부쳐 고명을 만들어 근사하게 먹을 수도 있고, 그냥 삶은 국수에 간장을 휘휘 뿌리고 참기름 둘러 슥슥 비벼먹기도 한다. 어떤 날은 삼겹살을 굽는다. 그리고 어떤 날은 햇반을 돌려 김치 한 가지를 놓고 먹어도 된다. 나는 음식을 먹으면서 자유로움을 만끽한다. 아무렇게나 먹기도 하고, 성찬을 차려 먹기도 한다. 식구가 있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식구들의 취향도 생각해야 하고, 건강도 생각해야 하고, 예의를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저녁을 먹은 후에도 자유롭다. 무엇을 하든 내 맘 대로다. 멍하니 있어도 좋고, 책을 읽어도 좋고 영화를 봐도 좋다.
혼자 사는 것의 가장 좋은 점은 자유로움이다. 행동에 걸림이 없다. 내가 원하는 일만 할 수 있다. 얼마든지 게을러질 자유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게으름을 ‘불온’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게으름이야말로 최대의 자유이고 정신의 빈 공간이며 무엇이든 채울 수 있는 무한한 여백의 공간이기도 하다. 게으름은 혼자 있을 때만 완벽하게 가능하다. 단 한 사람만 있어도 게으름이 찾아오기란 쉽지 않다.
두려움이 찾아올 때면
우주의 물질이 가진 총 질량은 물질이 변화를 가져와도 변하지 않는다는 질량보존의 법칙이 있다. 흔히들 이를 빗대 인생에는 총량의 법칙이 있다고 한다. 삶을 살면서 겪어야 할 고통이나 기쁨, 즐거움, 외로움, 두려움 등등은 누구나 공평하게 주어지고, 그것은 인생 어느 때든 주어진 양만큼은 꼭 채운다는 것이다. 그저 재미있는 농담처럼 만들어진 이 말은 사실은 우리 삶의 본질을 꿰뚫고 있다. 이 총량의 법칙으로 헤아려보면 삶은 참 공평하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물질적으로 많이 가지거나 가지지 않거나, 혼자 살거나 가족과 살거나 총량의 법칙은 똑같이 적용된다는 것이다.
삶에 대한 두려움도 마찬가지이다. 누구나 삶에 대한 두려움이 존재할 것이다. 혼자 사는 나의 두려움은 지금보다 더 늙고 병들었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가 가장 큰 문제이다.
잠자리에 들 시간이면 문득문득 그런 고민에 가슴이 무거워질 때가 있다. 몇 년 전 한밤중에 갑자기 열이 나면서 몹시 아팠던 적이 있다. 그때 이러다가 혼자 죽겠구나, 싶었다. 그때부터 생긴 고민이다. 아플 때 옆에서 돌봐줄 사람이 없으면 자다가 죽을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죽음 앞에서 사람이 있든 없든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으로 두려움을 가라앉히곤 한다.
외롭지 말고 고독하라
“외롭지 않은가.”
혼자 사는 사람들이 흔히 듣는 질문이다. 물론 외롭다. 외로움은 인간의 본질적인 정서다. 오욕칠정처럼 밑바닥에 있는 감정이다. 외롭기 때문에 사람들은 타인과의 관계를 맺는다. 관계 속에서 소통을 해 외로움을 해소하고 위로를 받고자 한다. 하지만 타인과의 관계를 한다고 해서 외로움이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소통이 되지 않을 때 외로움은 괴로움으로 변질이 되고 만다. 부처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 아닐까.
이처럼 인간의 본질적인 감정인 외로움이 혼자 산다고 더하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때때로 나는 외로움보다는 고독하기를 즐긴다. 외로움은 타인을 통해 위로를 받아야 하지만, 고독은 스스로의 힘으로도 위로를 받는다. 고독은 내면의 공간을 확장시키는 힘이 있다. 고독할 때만이 내면 깊숙이 들여다보면서 성찰할 수 있다. 인간은 성찰을 통해 성숙해진다. 고독의 공간이 넓을수록 삶은 평화롭고 고요하고 아름다워진다.
최상의 노후는 미니멀리즘으로
백세시대라고들 한다. 나는 이 말에 대해 긍정적이지 않다. 산다는 것은 단순히 수명의 연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스스로 가치 있는 삶을 살아야 비로소 사는 것이다. 건강한 몸으로 사유와 성찰을 하며, 삶을 살지게 살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살진 삶을 위한 가장 큰 요건은 경제적 문제이다. 수명의 연장은 비용이 드는 일이다. 정년까지 근무해서 벌어놓은 돈은 한정되어 있고, 이에 반해 삶의 비용은 늘어날 것이다. 이런 생각 끝에 나는 차츰 삶의 규모를 줄이고 미니멀리즘을 실천하기로 했다. 일단 새로운 물건은 가급적이면 구입하지 않는다. 사실 물건을 소유하는 것만으로도 비용은 발생하기 마련이다.
갑자기 소유한 물건을 줄이려면 그것도 큰 비용이 든다. 지금부터 하나씩 줄여나가는 것이 좋다. 소유한 것들이 적으면 적을수록 정신의 여백은 넓어지고, 보다 풍요롭고 깊은 삶을 살아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인생후배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 노후준비는 빠를수록 좋다.
필자는 늙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필자가 젊은 시절 연세 드신 분들의 모임에 가보면 부담스럽고 어렵게 느껴져서
왠만 하면 가기가 싫었다.
무언가 칙칙한 느낌이랄까? 그런데 세월이 흐르다 보니 저도 그런 분위기를 만들고 있는 건 아닌지 가끔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아니 젊은이들이 볼때는
필자도 불편한 존재가 이미 되어있다는 것이다.
요즘 의학적으로 수명연장에 대한 연구가 많아져 얼마전 백세인생라는 노래가 유행하면서 이미 100세 시대는 당연하게 인지되고 있다.
살고 있는 동안 더 의학연구가 이어져서 120세까지 살아갈 준비를 해야 된다고 말이 돈다.
우리의 세대까지는 시간과 물질과 정성으로 부모를 봉양한 세대이지만,
막상 우리의 노후는 이제 우리세대 스스로 자신의 노후를 책임져야 하는
현실에 서 있다.
자녀가 곧 보험이라는 말도 옛말이 되었다.
큰아이가 막내학비를 해주면서 키우다 시피 하는 시대가 이미 아닌 것이다.
과거 봉지 쌀을 사먹고 연탄으로 난방과 식사준비를 하고 전화있는 집이 부의상징이 되던 그 오래전 시대에 비하면 지금 우리나라는 방방마다 tv가 있고 가족수만큼 휴대전화도 있는 아주 잘 사는 나라가 되었다.
환갑잔치 요즘 안한다. 이미 80세어르신들도 많기에 환갑나이는 청년이라고 하면서 아예 자녀들도 특별히 생각하지 않고 여느생일 때처럼 지낸다.
65세가 되면 전철무료로 탈수 있고 기초노령연금이 나오긴 하지만 그것으로 다
노후생활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노후에 왜이리 경조사문자와 카톡은 날아오는지 먹고 사는 것보다 사람노릇하고
살기가 더 비용이 많이 든다고 한다.
그래서 필자도 큰아들때는 알렸던 하객을 지난주 결혼시킬때는
100명이나 줄여서 초대했다. 시니어들의 부담을 드리기 위해 부르지
않은 것이다.
어떤시니어분이 빈봉투만 내고 식권타고 어울리고 간뒤에 보니 죄송합니다.
라는 멘트만 봉투속에 펼지로 있었다는 이야기가 시니어들사이에 돌정도이니
그 심각성을 알만하다.
많은 시니어분들이 그중에 남성어르신분들이 일하고 싶은 이유중에는
아내분인 할머니에게 뭔가 일하고 있는 모습과 매끼니 집에서 먹는 것이
미안해서이고 손자손녀에게 용돈도 주는 기쁨을 느끼고 싶어서라고 한다.
노후준비 하루라도 빨리하라고 인생후배님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어서 글을 쓴다.
드물디드문 ‘90대 철학 교수’이자 글로써 1960~1970년대 한국 사회를 흔들었던 김형석(金亨錫) 연세대 명예교수는 요즘 활발한 강연과 집필 활동을 통해 그야말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 최근에 100세를 바라보며 만든 책 (덴스토리 펴냄)를 출간한 김 교수는 오랜 세월 동안 겪은 다양한 경험과 깨달음에 대한 자신의 소회를 담담하게 펼쳐놨다. 결코 흔치 않은 100년 동안의 시간을 경험한 노교수의 삶과 지혜를 살펴보자.
한 시절 젊은이들은 1960년대 등과 같은 그의 수필을 읽으면서 밤을 지새웠다. 김 교수의 수필을 읽던 청년들이 어느덧 50, 60대가 됐지만 지금도 그는 왕성한 집필 활동을 하며 세상과 만나고 있다. 연세대 명예교수인 김형석 교수의 이야기다. 시대를 뛰어넘고 있는 김 교수는 최근 출판가에서 가장 ‘묵직한’ 저자다. 90살을 넘어 100살에 가까워진 김 교수지만 작년 한 해 동안 활발한 외부 활동으로 그 이름을 다시금 각인시키더니 와 의 두 저서가 베스트셀러에 오름으로써 스스로 현 시대가 요구하고 있는 작가임을 증명했다. 그런 그가 그동안 강연했던 내용을 묶어 사랑과 희망이 있는 이야기가 담긴 책 를 내놨다.
90대에 다시 맞이한 베스트셀러 작가로서의 즐거움
“를 작년에 내놨습니다. 그리고 과거에 내놨던 와 를 개정하여 다시 출간했죠. 는 워낙 오래된 책이라 처음에는 출간이 어렵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출판사 사장이 직접 찾아와서, 자기 할아버지가 그 책을 꺼내 주면서 꼭 내라고 했다는 거예요.”
김 교수는 사람들이 예수를 객관적으로 알아야 하는데, 교회가 감싸니 예수가 어떤 화두를 가진 사람인지 잘 알려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래서 예수가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찾아보자는 문제의식을 갖고 만든 책이 바로 다. 어떻게 보면 이 책은 시대를 앞선 책이기도 했다.
“과거에 책이 나왔을 때는 호응이 없었는데, 지금 읽히기 시작하니 교회 안 사람이나 밖에 있는 사람이나 호응이 있고 반응이 좋아요. 젊었을 때 써서 지금보다 문장도 좋고. 내가 봐도 훌륭해(웃음).”
김 교수는 백 살이 가까운 지금도 200자 원고지에 친필로 글을 쓴다. 타자기는 안 쓰고 스마트폰도 안 쓴다. 그는 지난 1년 반 동안 조금 무리했다고 말했다.
“이라는 계간지에 1년에 200자 원고지 400장을 쓰는 게 있어요. 그런데 3개월 후에 쓰는 걸 반복하는 것보다는 원고를 미리 써놓는 게 좋겠다 싶어 한꺼번에 쓴 거죠. 그게 좀 무리가 됐어요. 그래서 금년에는 안 써요(웃음). 할 때 하자 싶어서 한 일인데, 그렇게 무리했던 게 나은 거 같아요.”
가족이 떠나니 집이 비고 친구가 떠나니 세상이 비었다
“우리 어머니가 100세에 돌아가셨습니다. 죽음을 담담한 운명으로 받아들이셨어요. 그분은 더 오래 사는 게 걱정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직계 중에 먼저 돌아가신 사람이 없는데 자신이 그보다 늦게 갈까 봐 그랬던 거예요.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기 한 달쯤 전에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하면서 ‘내가 먼저 갈 것 같아서 다행이다. 그런데 나는 가면 되고, 네 처가 가게 되면 집이 빌 텐데 집이 비면 어떡하지?’라고 말씀하시데요. 어머니가 가시고 아내도 가고 그러니 정말 집이 빈 거예요. 외국 여행하고 돌아올 때 오고 싶지 않고 공항에 내려도 ‘빈 집에 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있고 아침에 잠에서 깨면 아무도 없다는 걸 알게 됐죠. 어머니와 아내가 집이었어요.”
를 보면 김 교수의 절친한 친구인 김태길 교수와 안병욱 교수의 이야기가 나온다. 무엇보다 그의 인생에서 소중한 인연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만난 두 친구, 서울대의 김태길 교수, 숭실대 안병욱 교수였다. ‘철학계의 삼총사’로 불렸던 이들은 반세기 동안 사랑이 있는 경쟁을 벌인 ‘축복받은 관계’였다. 도산 안창호 선생과 인촌 김성수 선생 다음으로 자신에게 가장 많은 가르침과 도움을 준 사람은 바로 이 두 친구였다고 그는 고백한다.
80대 중반쯤의 어느 날, 안 교수가 “더 늙기 전에 셋이서 1년에 네 번쯤 만나자”고 제안한다. 김태길 교수의 대답은 거절이었다. 이유는 “우리 셋이 다 80대 중반인데, 누군가 한 사람씩 먼저 떠나가야 할 테고, 그러면 다 보내고 남은 사람은 얼마나 힘들겠느냐”는 것이었다. 결국 이들은 멀리서 마음을 같이하면서 지냈고 김태길 교수는 2009년, 안병욱 교수는 2013년에 세상을 떠났다. 김 교수는 두 친구의 죽음을 겪으며 “집 식구가 떠나니까 집이 텅 빈 거 같은데 친구가 떠나니 세상이 빈 것 같다”고 말했다.
“어머니께서 떠나고 5년쯤 지나고 나니 친구들이 가기 시작하는데 둘이 비슷한 때 가더라고. 세상이 비는 거 같았어요. 남들은 잘 몰라요, 나는 그걸 왜 느끼느냐 하면 친구다운 친구를 가졌기 때문이었죠. 독일의 괴테가 임종할 때 의식이 흐려져서 환상 비슷한 걸 보게 되는데 바람에 종이가 날아가는 걸 보더니 저거 쉴러의 편지인데 날아가는 거 아니냐며 걱정했다고 해요, 야스퍼스는 막스 베버가 세상을 떠나자 한 1년 동안 아무것도 못했다고 하고.”
그는 자신도 ‘이젠 인생 마감을 어떻게 할까를 더 많이 생각한다’며 “죽음을 생각하지만 두렵지는 않다”고 말했다.
“뭔가 남길 수 있는 사람은 감사한 거죠. 내가 있어서 행복한 사람이 있었고, 내가 있어서 인생을 아름답게 산 사람도 있었고, 내가 있어서 즐거움과 고통을 함께 나눈 사람이 있었다면 그게 저한텐 남는 것이지요.”
행복은 인격에서부터 시작
나이 들어서 행복을 맛본다는 건 쉽지 않다. 김 교수는 나이 들어 경험할 수 있는 행복은 주어지는 게 아니라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 철학자 가운데 가장 원로 철학자가 아리스토텔레스거든요. 그가 윤리학을 가장 처음 쓴 사람인데 윤리학에서 하는 말이 ‘행복은 누구나 원한다. 그리고 인격이 최고의 행복이다’라는 말이에요. 내 인격이 행복을 만들어서 줄 수 있고 다른 사람이 행복을 내게 주고 행복이란 그렇게 나눠서 쌓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행복을 만드는 인격을 갖춰야 한다는 주장이죠. 윤리학자가 문제를 제기하고 결론을 내놓은 셈이에요. 그 말이 사실이라면 나이 들면서 행복도 커지는 거죠. 나이 들면서 행복해지는 게 인생인 겁니다.”
인격이 최고의 행복이라면, 그 인격이란 무엇일까? 김 교수는 철학자들이나 윤리학자들은 인격을 두 가지로 나눠서 본다고 설명했다.
“인격이란 나에게 있어서 성실하게 사는 것, 그리고 이웃에 대해선 사랑을 가지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성실과 사랑이에요. 성실한 사람은 항상 노력하고 성장하는 사람입니다. 성실한 사람은 자기를 알기 때문에 겸손합니다. 성실한 사람에게는 진실이 있고, 성실보다 더 귀한 인격은 자신에게 있어선 없다고 보는 사람입니다.”
문제의식을 가짐으로써 철학자가 된다
김 교수의 친구 안병욱 교수는 가장 성실하게 산 사람을 공자로 봤다고 한다. 공자는 성실했기 때문에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살았다는 것이다. 석가나 예수는 공자가 한계로 느낀 걸 종교로 해결하고자 했다. 그래서 예수는 성실에 경건이 더해진 철학을 만들었다는 게 김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성실만 갖고 있으면 종교로 가기 어렵다고 말했다.
“호수에 바람이 불거나 파도가 치면 달그림자가 안 뜹니다. 그런데 조용해지면 달그림자, 별 그림자를 볼 수 있죠. 경건하다는 건 이성이 작용을 멈췄을 때 모든 걸 받아들이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호수가 조용해졌을 때 별 그림자가 뜨는 것 같은 상태죠. 그때 종교가 오게 됩니다.”
김 교수는 철학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거듭 말했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철학이 있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일까?
“아마 이렇게 보면 좋을 거예요.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대구에서 중고등학교 교사로 있는 제자를 만난 적이 있어요. 그가 나 보고 4년 동안 대학을 다니고 공부도 열심히 했는데 학교에서 배운 건 다 잊어버렸다고 했습니다. 나도 그런 현상을 잘 알죠. 인상은 남아 있는데 기억을 못하는 것. 알지만 이상하죠? 난 대학 다닐 때 강의 들었던 것, 읽었던 책을 다 기억하는데. 나는 기억력이 좋은 게 아니라 문제의식이 있었던 겁니다. 강의 듣는 것, 책을 읽는 것 다 문제의식이 그릇이 되어 거기에 담았습니다. 그러니 잊을 수 없게 된 겁니다. 철학이 왜 필요한가에 대한 답이 여기에 있습니다. 일류 대학을 나와서도 문제의식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졸업하면 평범해집니다. 반면 일류 대학이 아니더라도 문제의식을 가지고 살면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즉 철학적 사유를 가진 사람이 지도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평생 동안, 나에게는 두 별이 있었다
김 교수의 아우라는 긍정적이다. 불안한 요인이 섞여 있지 않다. 아흔을 넘어 백세로 가는 이에게 그러한 긍정의 힘은 놀랍고 희귀한 사례다. 그에게도 하지 않으면 후회될 게 있을까?
“93세 때 밤에 자다가 ‘지금까지 살아온 동안을 정리하면 뭐가 될까?’ 싶었어요. 그래서 일어나서 메모를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잤어요. 메모는 세 문장이었습니다. ‘나에게는 두 별이 있었다. 진리를 찾아가는 그리움과 겨레를 위한 마음이었다. 그 짐은 무거웠으나 사랑이 있었기에 행복했다.’ 철학자로서의 나는 진리를 추구했고 사회적으로는 겨레들이 좀 더 잘 살았으면 좋겠다 싶었어요. 우리 시대는 일제강점기, 공산 치하를 겪어야 했으니. 못해서 아쉽겠다는 건 그 두 가지를 위해서 좀 더 일했으면 좋았겠다는 겁니다. 가끔씩 인터뷰를 하면 기자들이 ‘젊었을 때 낭만이 있었느냐, 연애는 했느냐, 연애 결혼했느냐 중매 결혼했느냐 같은 걸 묻는데 속으론 ‘그건 왜 물어봐. 관심 밖이야’라고 말하곤 해요(웃음).”
김 교수는 자신이 고마운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고 말했다. ‘나와 우리를 위해 마음 써줬는데 고마운 사람이다.’
“를 쓰고 나니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거 같아서 홀가분해요. 아쉽냐고요? 그런 건 생각 안 나요. 이 책 한 권만 쓰고 끝나는 게 아니라 또 쓸 거니까.”
지혜가 묻어나오는 그의 저서에는 ‘성실’을 표현해내는 인격이 반짝인다. 그래서 김 교수의 책은 그리울 수밖에 없다.
>> 김형석 교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민주화 운동기를 거쳤고, 도산 안창호 선생의 강연을 듣고 성장했으며 윤동주 시인과 같은 반에서 공부했다. 또 김수환 추기경은 후배로, 인촌 김성수 선생은 멘토로 많은 가르침을 준 사람이라고 고백했다. 60세에 뇌출혈로 쓰러져 20년간 투병 한 아내를 떠나보낸 후 연희동 주택에서 10여 년째 홀로 살고 있다. 4녀 2남의 자녀들에게도 “나를 위해 마음 쓰지 않도록 하고 싶었다”며 고독을 견디기 위해 글을 썼고, 책을 읽고, 강연을 하는 삶이 무르익어가고 있다.
이봉규 시사평론가
중년이 돼서도 예쁜 여자나 ‘쭉쭉빵빵’한 몸매의 여인들을 보면 눈이 자동으로 돌아간다. 좀 더 솔직하게 표현하면 품고 싶은 욕망을 느끼지만 어쩔 수 없이 눈요기만 한다. 수컷 본능이다. 암컷들은 수컷에 비해 소극적이기 때문에 멋진 남성을 대놓고 쳐다보지 못하고 드라마를 보면서 눈요기를 즐기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한다.
드라마 속 주인공과 비교하면 가끔은 신세가 한탄스럽기도 하다. 남자나 여자나 한탄하고 부러워하면서 늙는다. 포기하는 것에 익숙해져버린 우리네 인생이다. 죽기 직전이 되어야 “왜 그토록 많은 것을 포기하며 살았나?” 하고 피눈물을 흘린다. 중년의 나이에도 천년만년 살 것 같은 착각 속에서 인생을 허비한다. 어느새 중년이 되었듯이 불현듯 늙어버리고 한 줌의 재가 될 날도 우리를 호시탐탐 노리며 다가온다.
후회하지 않으려면 짜릿하게 살아야 한다. 가장 짜릿한 것은 역시 연애(戀愛)일 것이다. 사랑하는 마누라와 짜릿하게 연애하듯 살면 최상이다. 만약 그렇지 않고 마누라가 엄마처럼 느껴지거나 선생님처럼 또는 가정부처럼 느껴지면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짧은 인생 허송세월할 시간이 없다. 그럴 때는 이혼이 정답이다. 최소한 한 달에 한 번이라도 부부관계를 하지 않는다면 다른 이성을 찾아야 한다. 이혼을 하고 다른 이성을 찾든지, 아니면 부부가 합의하에 다른 이성과 교제를 하든지 적극적으로 행복 찾기에 나서야 한다. 아니면 부부가 서로 자위행위를 해주거나, 그 어떤 방법으로라도 서로를 위해 짜릿한 감정을 살릴 수 있는 특단의 돌파구를 찾아야만 한다.
참고로 필자는 요즘 정말 짜릿하게 살고 있다. 지난 3월 29일 일본 교토(京都)의 한인교회에서 하객이 단 한 명도 없는 단둘만의 멋진 결혼식을 올리고 짜릿한 재혼생활에 흠뻑 빠져 살고 있다. 매일 결혼식 사진을 보고 동영상을 관람하면서 마누라와 환하게 웃는다.
요즘은 회식도 줄이고 친구들과의 소주파티도 대폭 줄였다. 대신 마누라와 북한산 바로 밑 신혼집에서 거의 매일 저녁 단둘이 파티를 즐긴다. 달콤한 발라드나 재즈 음악을 틀어놓고 막걸리를 마시면서 블루스를 추고 난리다. 20년 전 이혼하고 숱한 연애를 했건만 지금처럼 행복하진 않았다. 지금이 인생 최고의 전성기다.
만약 하나님이 나에게 “언제로 돌아가고 싶니? 그때로 돌려 줄게!”라고 물으신다면 나는 주저 없이 “지금입니다. 이대로 건강만 허락해 주세요!”라고 간곡하게 요청드릴 것이다.
누구라도 필자와 같이 행복할 권리가 있다. 행복은 쟁취하는 것이지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지금 살고 있는 배우자와의 생활이 무미건조하다면 과감하게 다른 이성을 찾아야 한다. 얼마든지 이성으로부터 유혹을 당할 수 있다. 그 상대가 나에게도 끌린다면 못이기는 척하고 넘어가 주면 된다. 수동태가 될 가능성이 없으면 능동태로 적극적으로 이성을 유혹해서 행복 찾기에 나서야 한다.
부인과 남편이 따로따로 불행한 나날을 보내면서 세월만 낚고 있다면, 내 인생은 물론 포기한 것이지만, 배우자의 인생도 같이 망가뜨리고 있는 공범이다. 중년인 지금부터라도 서로 의기투합하면 윈-윈 게임을 할 수 있다. 그게 이혼일 수도 있고, 별거라는 형식으로 합의하에 서로 다른 이성과 짜릿한 연애를 하면서 가정을 지키는 것도 방법이다. 아니면 솔직하게 서로 털어놓고 짜릿한 만족을 위해 요구하고 조정해야 한다.
결혼 30년 차인 내 지인은 아내와 잠자리를 한 지가 10년도 넘었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술자리에서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그런데 몇 달 전 갑자기 신수가 훤해져서 나타났다. 마치 아우라를 드리운 스타와도 같았다. 이유인즉, 부인과 합의해서 서로 다른 이성을 찾아 연애를 하기로 의기투합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지금 15살이나 어린 젊은 애인과 너무나 짜릿한 연애를 하고 있다고 자랑을 늘어놓는다.
“부인은 어떠냐?”고 필자가 물어보니, “와이프도 초등학교 동기동창과 기분 좋은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고 솔직하게 말하는데 아무런 감정이 없어서 자기 자신도 놀랐다고 심경을 피력했다. 털끝만큼의 질투심도 남아 있지 않아서 놀랐다는 자가진단이다. 오히려 부부사이가 더 편해져서 진짜 친구(Best Friend) 같다고 너스레를 떤다. 그 전에는 부인과의 성생활이 전혀 없기에 본능적인 성욕의 해소를 위해 몰래 직업여성과 가끔 돈 주고 섹스를 하곤 했는데, 그럴 때면 어김없이 부인에 대한 죄책감이 들어서 찜찜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서로의 연애를 인정해주니까 부인에 대한 죄책감도 없고 오히려 신뢰감이 더 쌓였다고 한다.
부인도 스스럼없이 초등학교 동창과의 만남을 소상히 얘기하면서 남자의 심리에 대해 물어보곤 하는데 정말 재미있다고 털어놓는다. 극히 드문 케이스지만 중년에 짜릿한 행복을 쟁취한 경우다. 전통적인 도덕관에 비추어 본다면 당연히 옳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도덕관마저 시대에 따라 변하고 있다. 불과 백 년 전에는 행세깨나 한다는 남자들은 첩을 두고 살아도 사회적으로 아무 문제가 되질 않았다. 심지어 같은 집에서 본부인과 첩이 형님 동생하면서 의좋게 살기도 했다. 첩이 두세 명인 경우도 허다했다.
10년 이상 섹스 없이 서로 각방을 쓰면서 배우자 몰래 바람을 피우는 것보다는 배우자와 서로 합의하에 애인을 두는 편이 훨씬 도덕적으로 정당할 수 있다. 실비아 크리스텔(Sylvia Kristel)이 열연한 영화 에서 부부는 정말 사랑한다. 그 부부는 서로의 행복을 위해 다른 파트너와 잠자리를 적극 권장하기까지 한다. 심지어 그 장면을 보면서 음미하기도 한다. 영화 의 스토리는 에로티즘으로 한 발 더 나아갔지만, 아까 소개한 지인 부부의 경우는 앞으로 백세 시대의 행복을 위해서는 보편화될지도 모를 일이다.
필자는 이혼한 지 20년 만에 짜릿한 재혼생활을 하고 있고, 전 아내도 필자보다 먼저 좋은 사람을 만나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딸에게서 전해 듣고 있다. 만약 우리가 이혼하지 않고, 배우자 몰래 도둑연애나 하고 대충 성적 욕구를 해소하기에 급급하게 살고 있다면 얼마나 불행했을까 생각하면 끔찍하다.
자칭 대한민국 최고의 한량이라고 자부하는 필자가 독자들에게 강력하게 권하고 싶다. 지금 살고 있는 배우자와 짜릿하지 않다면 이혼이나 위에서 예로 들었던 케이스처럼 뭔가 특단의 조치를 강구해야 한다. 행복은 최고의 가치이고 쟁취해야만 한다. 눈치를 보다간 이 생명 다할 때 피눈물 흘리며 후회하게 될 것이다. 중년인 지금이 행복을 쟁취하기 위해 결심할 최고의 적기다.
>> 이봉규 시사평론가
조지워싱턴대 정치학 석사, 한국외대 정치학 박사, 한국외대 외래교수
김정숙 홍보컨설턴트
대학에 입학하던 해 아버지는 내게 나침반을 선물하셨다. 가죽 케이스에 들어 있었다. 그때는 나침반 선물의 의미를 잘 몰랐다. 나이 오십에 들어서고 나니 하고 싶었던 말씀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떨림을 멈춘 나침반은 아무 쓸모가 없다. 타오르는 불꽃은 항상 더 높이 오르려고 혀를 날름거리며 떤다. 사람이라면 심장의 떨림이 있으라는 무언의 메시지였다. 방향 없이 나아가지 말아야 한다는 압력이었다. 지금도 그 나침반은 떨림을 멈추지 않고 있다. 나침반 바늘은 떨면서 묻는다. “떨림 없는 시간을 살고 있지 않나”라고. 선택의 순간마다 아버지의 나침반이 있었다.
지금도 심장이 떨리는 일을 찾아 공부하고 사람들을 만난다. 작은 모임을 꾸리고 그 모임이 또 다른 모임을 만든다. 느슨하지만 가느다란 연대의 끈은 놓지 않고 있다. 학교를 마친 이후에도 공부를 멈춘 적이 없지만 학위는 없다. 끊임없이 글을 쓰지만 작가 명함은 없다. 자격증 따는 일과는 거리를 두고 살아온 듯하다. 학위를 바랐다면 대학원을 갔어야 했다. 작가 명함이 필요했다면 책을 냈어야 했다. 간절히 필요하지 않았다. 상황에 따라 필요한 공부를 했고, 매일 글을 읽고 쓰는 생활이 즐거웠을 뿐이다.
떨림은 희망이다. 사막을 40년 동안 헤매면서도 유대인들이 포기하지 않은 이유는 ‘가나안’이란 보이지 않는 희망 때문이었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더 귀하게 여긴다. 목적지까지 길이 얼마나 험한지 알고 간다면 금방 지쳐버리거나 중간에서 포기할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는 것이 힘이 더 세다.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는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하는가.
오십을 넘기면서 성한 데보다 상한 데가 많아서인지 상처에 와 닿는 소금기가 자주 느껴진다. 그럴 때면 눈에 보이지 않는 희망에 대해 생각한다. 희망을 희망하는 존재를 지켜주는 것은 서로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는 일이 아닌가 싶다. 인간은 사실 입장을 바꿔 생각하기 어려운 존재다. 생각도 존재가 만든 집이고 보면 더욱 그렇다.
아이들이 어릴 때 작은 케이크를 나눠 먹으라고 주면, 두 녀석은 서로 많이 먹겠다고 다툰다. 평소에도 다툼이 일상인 형제지만 먹는 것으로 다투는 것은 딱해 보였다. 솔로몬의 해결책을 고민했다. 아무리 어린애라도 둘 다 불만을 품을 수 없는 해결 방법이 필요했다.
“네가 형이니까, 케이크를 두 조각으로 나누렴. 그런 다음에는 동생인 네가 먼저 고르렴”
이렇게 하니, 형은 기를 쓰고 똑같은 크기로 케이크를 잘랐다. 형은 자를 권리, 동생은 고를 권리를 가졌으니 불만이 있을 수 없다. 혹 불만이 있다 해도 겉으로 드러낼 수가 없다. 입장 바꿔 생각하기가 어렵다 보니 제도적으로 만든 것이 민주주의의 핵심일 것이다. 내 맘대로 하고 싶은 욕구가 통제되기 시작하니, 이 또한 나이 듦이 주는 선물이다.
인도 힌두교에서는 50세가 넘은 남자는 임서기(林棲期)라 하여 가정을 떠나 숲 속에서 혼자 사는 관습이 있다고 한다. 동네 뒷산에 원두막을 치고 혼자 산다. 그동안 자신을 돌아볼 여유도 없이 바쁘게 살았으니 자신을 돌아보고 수행하라는 종교적 의미가 있다. 물론 사바나의 수사자처럼 자손번식의 임무가 끝난 늙은 남자는 가정에 짐이 된다는 현실적 의미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이는 평균수명 50세 사회에서 나온 종교적 관습이다. 백세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는 인생 후반전을 보다 넓고 큰 세상에서 설계하라는 유혹의 관습으로 읽힌다. 가장 강한 유혹은 자신을 돌아보고 싶은 유혹일 것이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 에서 무사회 수장인 궁보삼이 숨을 거두기 전 수제자에게 일러준 마지막 수는 노원괘인(老猿掛印)이었다. 궁씨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무술 64수 중 최고 단계인 노원괘인은 바로 ‘돌아보는 것’이었다. 돌이킬 수는 없지만 돌아볼 수는 있다. 되돌아갈 수는 없지만 뒤돌아볼 수는 있다. 이것은 시간에 갇힌 인간에게 주어진 마지막 한 수가 아닐까.
뒤돌아보니 눈앞의 숫자들과 코앞의 숙제에 발목 잡혀 허우적댔다. 절망하지 않으려고 희망하는 사람들을 보지 못했다. 아니 내 절망이 더 커 보였다. 주먹을 더 불끈 움켜쥐었다. 움켜쥔 주먹을 펼치면 가진 것이 다 쏟아질까봐 두려웠다. 이제는 크게 다치지 않을 낙법도 익혔고, 좀 다친다 해도 별것 아니라는 배포도 늘었다. 펼친 주먹은 새로운 것을 쥘 수 있는 기회라는 것도 알았다.
나침반의 바늘은 아직도 떨림을 멈추지 않고 있다. 떨림의 유혹이 멈추지 않는 한 인생 후반전은 더 넓은 세상에서 시작할 수 있다. 새로운 제2의 인생을 살라는 유혹이다. 떨리는 나침반의 바늘은 느슨한 관계를 확장하라고 한다.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놓지 말라고 한다. 그곳이 진북(眞北)이라고 알려준다.
후반전은 어릴 적에 던졌던 막막한 인생에 대한 질문의 답을 기록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건가.’ 이 질문의 답을 구해가는 여정, 또는 그 질문을 감당해가는 과정이 아닐까. 주먹을 펼쳐 아픈 이들도 감싸면서 나간다면 전반전보다 공은 강하게 골문으로 돌진할 것이다. 백세인생 후반전의 휘슬 소리가 들린다.
>> 김정숙 홍보컨설턴트
공공정책 컨설팅을 주로 하는 홍보컨설턴트이며 부천 놀라온 오케스트라 기획홍보이사
지난 5월 2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대방로 372 여의도복지관에 어린이부터 중장년층, 어르신까지 모든 세대가 함께할 수 있는 통합 복지시설이 완공돼 개관했다.
이 시설엔 중장년층의 제2인생을 지원하는 ‘영등포50플러스센터’(3, 4층), 어르신들의 활기차고 건강한 삶을 지원하는 ‘구립여의도어르신복지센터’(2층), 꿈을 키우며 사랑을 나누는 ‘둥근마음어린이집’이 입주해 있다. 특히, 다른 복지관과 차별화를 둔 시설은 ‘영등포50플러스센터 다. 이 센터는 인생 이모작을 창조하고, 지원하는 지역 기반 거점으로서의 ‘미션’을 가지며, 장년층의 삶의 모델을 선도하고자 하는 ‘비전’을 가지고 있다. '핵심가치’는 존중, 연계와 협력, 도전이다. 이를 바탕으로 설정한 ‘전략 방향’은 다음과 같다.
첫째, 당사자들이 계획하고 만들어갈 수 있도록 지원한다.
둘째, 배움, 일, 여가, 관계를 함께하는 일상 공간을 지원한다.
셋째, 지역, 마을 기반 활동 지원을 한다.
이 모든 총체적 운영은 학교법인 원광학원이 맡고 있다.
한국의 국민 평균 수명은 1950년대에는 52.4세, 1980년대에는 65.8세, 2015년에는 83.5세였다고 한다. 그리고 조만간 한국은 백세 시대를 맞이한다. 그러나 한국 은퇴 연령은 50대부터여서 과연 은퇴 후 50년을 위해 우리는 얼마나 준비하고 있는가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센터는 이 문제에 답을 주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이 센터는 50플러스세대(이미 은퇴했거나 은퇴를 앞둔 50~64세의 장년층)을 대상으로 성공적 인생 후반전을 건강하고 풍요롭게 지낼 수 있도록 지지하고 지원하는 허브 역할을 하는 곳이다. 즉 은퇴 이후를 준비할 수 있는 마지막 시기에 있는 장년층들이 제2의 인생을 위한 새로운 비전을 창조하고 이루어갈 수 있도록 인생 재설계, 일자리, 사회공헌, 여가 등을 종합적으로 지원하는 곳이다.
이상교 시인의 동시 ‘남긴 밥’을 읽어봅니다. ‘강아지가 먹고 남긴/밥은/참새가 와서/먹고,/참새가 먹고 남긴 밥은/쥐가 와서/먹고,/쥐가 먹고 남긴/밥은/개미가 물고 간다./쏠쏠쏠/물고 간다.’
따뜻하고 좋은 시입니다. 설마 강아지(개가 아닙니다)나 참새나 쥐가 다른 짐승과 곤충을 위해 일부러 밥을 남기기야 했겠습니까? 작고 여린 것들을 보는 시인의 눈이 그렇게 읽는 것이지요.
여기에서의 남김은 배려와 순환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개미가 먹다 남긴 밥을 먹는 생명체가 또 있습니다. 그런 생명체가 죽어 밥이 되면 그 밥은 다시 시에 나오는 것과 같은 과정을 거쳐 누군가의 양식이 될 것입니다.
옛사람들은 콩을 심을 때 한 구멍에 세 알씩 심었습니다. 벌레에게 한 알, 새에게 한 알, 우리 인간이 먹을 한 알입니다. 그런다고 벌레나 새가 기특하게 한 구멍에서 한 알씩만 먹고 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내 친구는 그런 의미와 생명에 대한 외경을 담아 ‘콩 세 알’, ‘三豆齋(삼두재)’ ‘세알콩깍지’라고 호를 지었습니다. 그의 호는 ‘콩밝(空朴)’으로 진화했습니다. 여기에도 배려의 남김이 있습니다.
‘섬진강 시인’ 김용택의 어머니는 마당에 뜨거운 물을 뿌릴 때 “눈 감아라, 눈 감아라” 그런답니다. 뜨거운 물이 스며들어 땅속의 벌레들에게 미치면 눈이 멀 수 있으니 눈을 감으라고 벌레들에게 일러준 것입니다. 미물들에 대한 배려입니다.
무언가를 남기는 행위는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위에서 말한 것들은 다 내가 아닌 남, 타자를 위한 남김입니다. 이와 달리 오로지 자신을 위한 남김이 있습니다. 남을 위한 남김이 결과적으로는 내가 남는 일이 될지 몰라도 인간은 기본적으로 남보다는 나 자신을 위한 남김을 지향하며 삽니다.
남긴다는 뜻의 대표적인 한자는 遺(유)입니다. 가랑비, 남기다, 남다, 끼치다, 전하다, 잃다, 버리다, 두다, 떨어뜨리다, 빠뜨리다, 쇠퇴하다, 이런 뜻의 한자입니다. 반대되는 한자로는 遣(견)을 들 수 있습니다. 보내다. 떠나보내다, 파견하다, 떨쳐버리다, 내쫓다, (시집을) 보내다, (아내를) 버리다, 이런 뜻의 한자입니다.
생김새도 비슷한 두 글자가 처음엔 완전히 반대말인 것 같더니 쓰임새가 커질수록 의미가 비슷해지는 게 재미있습니다. 남기는 것은 자신을 위해 뭔가를 간직하는 행위인 것 같지만 실은 버리는 것이라는 의미를 여기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虎死遺皮 人死遺名(호사유피 인사유명),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합니다. 그러니 바르게 살라는 뜻입니다. 遺를 留로 쓴 경우도 많지만, 남긴다는 뜻에서는 遺가 더 어울릴 것입니다. 流芳百世 遺臭萬年(유방백세 유취만년), 꽃다운 이름은 백세를 가지만 더러운 악취는 만년 동안 남는다는 말도 몸가짐 마음가짐을 바르게 해줍니다.
인간은 나이 들수록 죽음을 생각하고 자신의 죽음 이후에 대비하려 애쓰게 됩니다. 나는 이 세상에 어떤 이름으로 남을까, 자식들에게는 뭘 남겨주어야 할까, 이것은 전적으로 즐거운 일만은 아니며 근심이요 걱정인 경우가 오히려 더 많습니다.
자식들에게 재산을 안 주면 맞아 죽고, 덜 주면 볶여 죽고, 다 주면 굶어죽는다는데, 어떻게 하는 게 슬기로운 일일지 있는 사람들일수록 더 노후가 괴롭고 고달픕니다. 한국의 부모들은 새끼를 위해 제 살까지 먹이로 내주는 늙은 거미와 같은 삶을 살아왔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뜯어먹기 좋은 게 부모의 등골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자기 재산을 물려줄) 자식이 없는 사람은 하는 일이 헛되다.”[無孩兒浪營爲]고 합니다. 남김을 통한 명예의 보전과 존재증명의 중요성을 역설한 말일 것입니다. “자식에게 남겨주기에는 황금이 가득한 상자가 한 권의 경서만 못하다”고 책과 글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도 있습니다.
하지만 남김과 사후를 생각할 때 지금은 나의 모든 것이 다 짐이 되는 시대입니다. 많은 추억과 사연이 담긴 사진, 그 많은 인연과 손때가 묻은 책들은 내가 아끼는 소중한 물건이지만 자식들에게는 의미 없는 천덕꾸러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모든 걸 다 처분하고 가겠다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죽음에 관한 생각을 한 권의 훌륭한 책으로 엮어 낸 학자를 인터뷰하면서 “어떤 인간으로 남고 싶으냐?”고 물었을 때 그는 아무 흔적도 남기고 싶지 않다고 대답했습니다. 삶의 자취 자체를 무로 돌리고 싶다는 바람이 놀라웠습니다.
장자(莊子)는 제자들이 성대하게 장사를 지내려 하자 “땅 위에 있으면 매의 밥이 될 것이요, 땅 아래 있으면 개미와 지네의 밥이 되겠거늘 어찌 남의 밥을 빼앗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습니다. 구애받지 않고 살아온 사람답습니다. 중국 소설가 루쉰(魯迅)도 “장례식을 위해 누구한테고 한 푼이라도 받으면 안 된다. 서둘러 입관하여 파묻어 치워 버릴 것, 무엇이든 기념행사 비슷한 짓을 하면 안 된다. 나의 일을 잊고 자기 생활에 정신을 돌려라.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바보다”라는 유언을 했습니다.
이런 유언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결심을 하면 할 수 있는 정도의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죽고 난 뒤의 일을 알 게 뭐며 알아서 뭘 하자는 거겠습니까? 고교 교과서에서 배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에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네가 장차 볼 길 없는 사람들의 칭찬에 그렇게도 마음을 두는 것은 무슨 이유인고? 그것은 마치 너보다 앞서 이 세상에 났던 사람들의 칭찬을 구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어리석은 일이 아니냐?”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문장으로는 아름답고 거룩하지만 실제 삶은 비루하고 삶의 터는 진흙탕입니다. 미켈란젤로는 죽으면서 “나의 영혼은 신에게, 나의 육신은 땅에게 바치며 나의 유산은 내 혈연에게 남긴다”고 말했습니다. ‘르네상스의 거장’이 남긴 말치고는 실망스러울 정도입니다. 누군들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까? 미켈란젤로는 하나마나 한 말을 남기고 갔습니다.
인간은 결국 유언과 유서,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의미 있는 비명(碑銘)과 영향력이 긴 저작물로 남습니다. 이와 달리 순전히 재산으로 남는 인간의 삶은 금세 잊히고 자칫 갈등과 논란에 휩싸이기 쉽습니다.
죽기 전에 남기지 말고 다 쓰자, 사회에서 얻었으니 사회로 되돌려주자, 자식들에게 물려줘봤자 싸움만 날 수 있다, 이런 자세로 재물을 사용하고 소비하는 분들이 더러 있습니다. 하지만 다 써야 할 것은 재물이나 인간관계 등 자신의 소유물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나의 생각과 재능, 그리고 올바른 마음을 나 자신과 남들을 위해 남김없이 다 쓰는 것, 그리하여 꽃다운 이름을 남기는 것, 그게 바람직한 삶이 아니겠습니까?
나를 위한 남김과 남을 위한 남김의 조화를 지향하면서 그 방법을 찾아가는 게 삶의 후반에 가장 중요한 과제가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