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방송 종료되었지만 '간이역'이란 프로그램이 있었다. 자그마한 소도심을 지나는 기차역의 아련함이 누구에게나 마음속의 추억처럼 자리하고 있기 마련이다. 그런 간이역이 사라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 프로그램의 기획의도였다고 한다. 이제 간이역은 시간 속의 이야기가 켜켜이 스민 폐역이 되어 아날로그 감성을 소환한다. 오랜 시간 기차가 달리지 않아 녹슨 철길은 때론 사색의 장소가 되기도 하고 잔잔한 풍경 속에서 인생 샷을 담아내는 곳이 되었다.
남원의 구 서도역은 전라선 기차역이었다. 1934년에 역무원 배치를 시작해서 남원시 사매면 서도리로 역사(驛舍)를 신축 이전했던 서도역이 차츰 간이역으로 격하되었다가 폐역이 된 것은 10여 년 전 일이다. 그 세월의 이야기를 간직한 자리에 봄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 그리고 겨울이 흐르고 있는 중이다.
1930년대의 풍경을 그대로 간직한 채 구 서도역 목조건물의 간이역은 여전히 아름답다. 그래서인지 근래 들어 영화 동주, 미스터 선샤인, 해어화 등의 드라마와 영화의 촬영지로, 뮤직비디오 촬영과 유명 모델들의 화보 촬영으로 부쩍 재조명받고 있는 곳이다. 사실 서도역은 그 이전에 최명희의 소설 '혼불'이 시작되는 장면으로 더 알려져 있었다. 일제 강점기부터 지금까지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둔 채 그 자리를 지킨 덕에 문학적 공간이 되기도 하고 시대적 묘사에 무리 없이 잘 어울린다.
남원의 숨은 보석 10선 서도역이라는 하트 표지판을 지나 역 내부로 들어가 본다. 역 대합실에는 그 시절 삶의 애환을 함께 했던 기차역의 이야기를 필름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미스터 선샤인의 유진 초이 복장과 촬영장의 이야기를 펼쳐놓았다. 들여다보면서 드라마와 영화의 추억이 스멀스멀할 것이다. 대합실 밖으로 나가면 역시 드라마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고애신과 행랑아범, 함안댁이 걸어 나오고 철로 목조 위에 앉은 구동매가 아기씨와 나누던 대화, 이렇게 다시 뵙습니다. 아기씨. 이 새벽 기차역에서... 절에 다녀오는 길이네. 그들의 당당하거나 애잔했던 눈빛. 이곳이었구나... 드라마의 힘은 아주 세다.
그 옆 서도역 역사관의 옛 책을 한번 뒤적이고 풍금도 눌러보고 나오니 젊은 커플들의 사진 촬영이 한창이다. 그들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방향을 돌렸다. 서도역이 소설 혼불의 첫 배경이다 보니 작품 속의 내용을 표현한 정크 아트 길이 이어져 있었다. 덕분에 잠깐 작품 속의 몇 줄씩을 읽어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기차가 다니지 않아서 마음 놓고 이리저리 다닐 수 있어서 좋다. 오래전 기차가 멈춘 녹슨 기찻길은 직선과 곡선과 원형의 철길이 독특한 곳이다. 메타세쿼이아와 등나무의 짧은 터널 옆에는 흰색으로 잘 단장된 역무원 관사가 있다. 그 옆의 역장 관사는 영화 동주의 하숙집으로 촬영되었다고 한다. 이곳은 1930년대의 고풍스러운 모습을 그대로 살려 다다미가 깔린 일본식 가옥으로 영화 촬영은 물론이고 체험학습도 하는 곳이다.
요즘 들어 옛 모습에 손을 대어 때 빼고 광낸 모습으로 변신시키는 생경함에 종종 놀랄 때가 있다. 적어도 구 서도역의 겉모습은 약 90년 전 모습을 살려둔 듯해서 정겹다. 서도역은 전라선이 신설되어 이전할 때 철거계획이었다고 한다. 이때 남원시에서 서도역을 매입하고 보수하여 지금의 고즈넉한 아날로그 감성의 문화공원이 된 것이다. 옛 추억을 되새기게 하는 철도 관련 근대문화유산으로서의 몫 역시 크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기차역, 고요한 이른 아침 운해가 몽글몽글하면 간이역과 더 잘 어울린다. 철길을 둘러싸고 있는 나이 많은 고목은 전라선 완공 당시 심었던 벚나무들이다. 눈부신 봄날의 서도역이 미리 그려진다. 바삐 걷다가 잠깐 다리를 쉬는 곳처럼 구 서도역은 남도 여행길에 빠뜨리면 서운할 그런 곳이다.
☞Info 구 서도역
♤주소: 전북 남원시 사매면 서도길 32. 구 서도역영상촬영장.
♤문의처: ☎063-620-6165
♤교통: 남원역에서 523 버스가 하루 4회 운행. 대중교통 접근 불편. 택시나 자동차 이용이 편리하다.
♤휴무일 없이 연중무휴 방문 가능. 주변 1.4km 거리에 혼불문학관이 있다.
-최명희 작가의 숨결을 담다. 혼불 문학관
구 서도역에서 남쪽으로 자동차를 달리면 5분 거리에 혼불 문학관이 있다. '그다지 쾌청한 날은 아니었다'라고 시작되는 대하소설 ‘혼불’의 첫머리와는 달리 하늘은 푸르고 문학관은 평온하다. 일제 강점기인 1930년~1940년대 몰락해 가는 남원의 양반가 종부 3대(代)와 그들의 땅을 부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그린 최명희의 소설 '혼불'. 그 소설의 배경이 되는 전라북도 남원시 사매면 서도리 노봉마을에 문학관이 자리했다.
돌계단을 오르면 널찍한 잔디마당이 방문객들에게 쉼을 안긴다. 문학관 내부에는 작가의 생전의 모습이 군데군데서 맞는다. 작가의 집필실로 재현된 방에는 유품으로 작품 일지와 만년필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다. 펼쳐진 육필원고를 들여다보노라니 작가의 숨결이 느껴지면서 숙연해진다. 실내를 빙 돌다 보면 소설 속의 장면들을 디테일한 사진이나 모형으로 전시된 작품 속으로 한 걸음 들여놓게 한다. 그리고 작가와 친분이 있는 주변 사람들과 주고받았던 편지도 어느덧 누렇게 색이 바래가는 채로 보여주고 있다.
방송작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글에는 작가의 면밀한 내면이 스친다.
"너는 노트북 컴퓨터를 배워 이제 글씨는 안 쓰겠는데...... 나는 경향신문에 만년필을 쓰는 기쁨, 이라는 글을 썼단다. 나는 참 더딘 사람이다. 지난번에 말한 책도 이제야 부치고 내 살아온 생에 대한 자각도 이제 생기니 장자의 말이 절감이 된다. 行年 五十而知 四十九非. 나이 오십에 이르러서야 마흔아홉 가지가 그릇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혹은 안다, 는 이 한 절, 요즘은 이 말을 정말 깊이 생각해, 나의 非들. 얼음장처럼 가슴이 서늘해지지. 하지만 오십에 새 눈(芽)이 트이지 않았다면 어찌 四十九非를 말할 수 있으며 새 눈(眼)이 뜨이지 않았다면 제 그릇됨을 볼 수 있으랴... 그 芽와 眼이 새 희망을 준다."
약 6,000평의 문학관 건너편의 꽃심관이라는 한옥 쉼터에는 사랑실과 누마루가 있다. 건물 모퉁이의 정자에 올라 혼불문학관을 바라보며 소설 속 삶의 한 자락을 느껴볼 만하다. 살아생전 우리말을 사랑하던 작가 최명희 작가의 혼불. 작품의 어휘 하나하나 직접 취재하고 토속어를 찾아서 우리 문화의 정신을 문학 속에서 형상화했다고 한다. 혼불 속의 청호저수지 주변으로 울타리처럼 둘러있는 솟대들은 길게 목을 빼고 노봉마을을 건너다보는 듯하다.
사람들의 발길이 끊겼던 기억 속의 간이역을 찾아 사람들이 온다. 작가의 숨결이 담겨있는 문학관에 들어 이 땅에 서린 삶의 한 자락을 가슴에 품는다. 전라도 남원고을에 가면 이렇게 쉬엄쉬엄 산책하듯 둘러볼 곳들이 기다리고 있다.
☞Info 혼불문학관
♤주소: 전라북도 남원시 사매면 노봉안길 52.(입장료 무료)
♤문의처 :☎ 063-620-5744~46
♤운영시간 평일 : 09:00~18:00(매년 1월1일, 매주 월요일 휴관) 하절기(7월~8월) 09:00~18:00 동절기(11월 ~ 2월) 09:00~17:00
코로나19의 여파로 많은 것이 멈췄다. 코로나19는 주야간보호센터, 치매안심쉼터 등 치매 환자를 위한 관련 기관에도 타격을 줬다. 대면 관리가 축소되면서 치매 어르신의 돌봄에 사각지대가 생겼다. 다행히 멈추지 않은 것도 있다. 치매 극복을 위한 노력이다. 최근 지자체와 사회적 기업 등 다양한 곳에서 비대면 문화와 공존할 수 있는 돌봄 방식, 학습지가 개발돼 교육 현장에서 활용되고 있다. 최근 공개된 치매 극복을 위한 다양한 방안 중, 호평받고 있는 치매 학습지 세 가지를 소개한다.
필사하고 글 지으면서 ‘오늘도 공부’
‘오늘도 공부’는 치매 예방에 도움 주는 일일 학습지다. 치매를 예방하고 싶은 어르신이나 치매의 전 단계 증상으로 알려진 경도인지장애 어르신을 대상으로 한다. 매달 한 권씩 제공하는 학습지 안에는 하루에 10~15분 정도 투자하면 풀 수 있는 언어 및 인지활동지가 수록돼있다. 제주시 건입동에서 6개월간 진행한 ‘노인 인지-정서 효과성 검증’ 프로젝트로 경도인지장애 어르신의 인지능력이 유지되는 결과를 얻기도 했다.
오늘도 공부는 어르신들이 매일 필사할 수 있는 글귀를 제공하는 것이 특징이다. 평일에는 필사할 수 있는 ‘날마다 따라 쓰기’, 주말에는 ‘주말 백일장’으로 어르신들의 예전 기억을 되살려 언어로 구성하게끔 유도한다. 한 어르신은 주말 백일장 코너에 “학습지로 카카오톡에 글을 써서 보내는 것도 배우고 큐알코드로 노래도 배웠다. 이제는 욕심이 생겨서 손주한테 유튜브도 가르쳐달라고 한다”고 적기도 했다.
학습지를 제작한 사회적기업 ㈜꿈틀은 현재 건강보험공단 대전·충남지부와 성동구립 사근동노인복지센터에서 시범 사업을 운영하고 있다. 노원구 ‘데일리 홈런’, 은평구 ‘노노(老老)케어’ 등의 프로그램을 통해 각 지자체에 거주하는 어르신들에게 학습지를 제공하고 있다. 유장효 꿈틀 이사는 “시범사업 운영 중인 지역 외에도 주야간보호센터에 관리 교사를 파견해 어르신들의 학습지 활용도를 높여 인지능력 저하를 막는 방안을 고민 중이다”고 말했다.
추억 속 노래 들으며 ‘쿵짝쿵짝 뮤직북’ 풀어
광진구 치매안심센터에서는 지난 8월부터 ‘쿵짝쿵짝 뮤직북’(이하 뮤직북) 학습지를 활용하고 있다. 노래를 활용한 인지학습지인 뮤직북에는 주5일, 4주간 사용할 수 있게 20곡의 가사와 문제들이 담겨있다. 노래는 고향역, 노란샤쓰 사나이, 봄날은 간다 등 어르신에게 익숙한 곡들이다. 어르신들은 학습지의 QR 코드를 활용해 노래를 듣고, 해당 노래에 대한 문제를 푼다.
뮤직북에는 치매 어르신뿐만 아니라 보호자도 함께 풀 수 있는 난이도의 문제가 수록돼있다. 센터에서는 주 연령대가 60, 70대인 보호자가 원할 때도 학습지를 제공한다. 그 덕에 조금 어렵다는 치매 어르신부터 비교적 쉽다는 보호자 분까지, 난이도에 대한 평가는 사용자에 따라 제각각이다. 그러나 ‘재밌다’는 사용 후기만큼은 치매 유무를 막론하고 들려온다고. 광진구치매안심센터 음악치료사는 “이번 뮤직북은 이벤트의 일환으로 제작한 것으로, 기존에 센터에서 활용하던 가정 인지학습지와는 별개”라며 “내년에도 만들게 된다면 단권으로 제작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센터는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센터 방문이 어려워 우편으로 학습지를 전달하고 있다. 음악 청취에 필요한 인터넷 활용이 어렵거나, 활용 방식 자체를 어려워하는 홀몸 노인에게는 직접 댁으로 찾아가 학습지와 함께 음악이 수록된 라디오를 한 달 정도 대여해드리기도 한다. 음악치료사는 “뮤직북은 어르신들이 많이들 좋아하시는 음악을 매개로 인지능력을 자극하기 위해 만든 교재”라며 “교재 제작을 위한 연구 과정에서 다른 지자체 치매안심센터 소속 여러 음악치료사들과 많은 소통을 거쳤기 때문에 다른 지자체에서도 음악을 매개로 하는 교구가 나올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매주 새로운 문제로 치매 관리하는 ‘치매안심 실버펜’
강북구 치매안심센터는 지난해부터 기억키움쉼터를 이용하지 못하는 어르신에게 ‘치매안심 실버펜’(이하 실버펜)을 제공하고 있다. 틀린 그림 찾기, 글자 기억하기, 더하기 빼기 같은 간단한 산수 문제 등 기억력이나 지남력, 집중력 등을 자극할 수 있는 문제들이 실려있다. 매주 다른 내용과 문제들로 구성된 실버펜은 주 1회 어르신 댁 우편함에 배송된다.
예방보다 치료 성격을 띠는 실버펜은 경증 치매를 앓는 어르신의 인지기능 현상 유지가 목적이다. 강북구 치매안심센터 기억키움쉼터 김준호 작업치료사는 “어르신들의 연령대나 보호자의 유무, 교육수준이 학습지 효과에 적잖은 영향을 미친다”라며 “경증에서 중증으로 치매가 심화되고 있거나 글자를 읽는 데에 어려움을 느끼는 분들은 조금 어려워하신다”고 말했다.
현재는 기억키움쉼터로 어르신들의 직접 방문이 어려워 쉼터 직원들이 전화로 어르신들의 활용 정도를 직접 확인하고 있다. 김 작업치료사는 “다 푼 학습지를 수거해 어르신의 상태를 파악하는 지표로도 사용한다”며 “어르신들이 처음에는 학습지 자체를 낯설어하시는 경향이 있었는데 지금은 재밌어하신다”고 전했다. 실버펜은 거리두기가 대폭 완화되는 ‘위드코로나’(단계적 일상 회복)가 오더라도 쉼터 신규 등록자나 대면 프로그램 신청 대기자에게 제공하는 등 비대면 관리방식으로 활용될 예정이다.
한국화가 김병종(69)은 남원시에 그림 400여 점을 기증해 미술관을 출범시켰다. 어떤 뜻이 있었을까?
“내 고향 남원은 소리의 성지이자 문예적으로도 명성을 날린 고장이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문화예술의 빛이 퇴색했다. 작은 미술관 하나쯤 필요하다는 생각이었고, 일조하고 싶었다. 그림에 재능 있는 학생들에게 미술관이 멘토 역할을 할 수 있길 바라는 마음도 컸다. 여건이 좋으면 남원에서도 피카소 같은 화가가 나올 수 있는 거다.”
김병종은 전통 수묵의 기법과 정신에 서양의 미학을 수용한 회화로 할 말 다하는 작가다. 추상과 구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개방적인 작풍이 거둔 성과 역시 돌올하다. 무엇보다 그는 안주하지 않는 정신을 창작의 무기로 삼았다. 작품 경향의 변주가 잦은 걸 보면 그걸 알 수 있다. ‘바보 예수’ 연작에서 ‘생명의 노래’로, ‘송화분분’(松花紛紛)으로, ‘풍죽’(風竹)으로, 그의 테마는 일정한 주기를 가지고 변전했다.
“요즘 미술계엔 단일한 주제나 소재를 지속해야 살아남는다는 불문율이 있다. 여기엔 미술 시장의 자본 논리가 가장 큰 배경으로 작용한다. 하나를 평생 파는 화가의 작품이어야 컬렉션의 투자 가치가 높아지는 것이다. 이건 기이한 풍조다. 작가는 창조적 자기파괴를 하는 존재여야 한다. 피카소는 아홉 번이나 경향을 바꾸었다. 괜히 피카소가 아니다.”
‘바보 예수’ 이후 선생의 그림은 하나같이 밝고 따뜻하다. 삶에 붙게 마련인 고독이나 고통의 기미가 없다. 천성이 낙천적인가?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가족의 생계를 도맡다시피 하셨지만 푸념이나 원망이 전혀 없었던 어머니의 긍정적인 눈길, 낙천적인 DNA를 물려받은 것 같다.”
작품의 테마와 소재가 주로 자연이다.
“고향의 산천이 창작의 모태이지. 만산홍엽, 강물, 들판, 보랏빛 자운영 등 가난했지만 풍성한 자연 안에서 행복했던 유소년기의 체험이 기억의 창고 안에 가득하다. 그걸 하나하나 꺼내 풀어놓은 게 작품이다.”
송홧가루의 노란 미립자를 형상화한 ‘송화분분’에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세상의 저 너머까지 보이는 것 같아 아득하고 아찔하다.
“어릴 적 봄날, 노란 뭉게구름처럼 바람에 실려가는 송홧가루에서 받은 감동을 되살린 작품으로 생명의 섭리를 그렸다. 이어령 선생께선 ‘송화분분’에 대해 ‘생명의 바깥에서 생명을 그리던 김병종이 마침내 생명의 안에서 생명을 그렸다’고 과분한 평을 하시더라. 난 여전히 미흡한 작가인데….”
피부처럼 정착한 겸양이 느껴진다. 그림엔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가 자욱하다. 다독의 힘이 반영됐다. 김병종은 빼어난 에세이스트이기도 하다. 매달 보름은 그림을, 보름은 글을 쓴단다. 이런 그에게 눈총을 쏘는 이들이 많다.
“은사님조차 왜 잡문으로 어지럽히느냐 질책하셨다.(웃음) 완전한 성공을 위해 그림만 하라는 식의 조언과 비난을 자주 들었다. 그러나 그리기만 하면 지적 공허감이 생긴다. 글을 읽고 써야 가슴에 차오르는 게 있다. 글은 내게 그림을 퍼내게 하는 수원지다.”
그에게 글과 그림은 한 몸이다. 글 쓰는 본새로 굶주린 듯 그리는 것!
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될 당신의 중년 사랑을 보듬는다.
“사랑은 언제 멈출 거나?”
“볶은 콩에 싹이 나면.”
어느 드라마 속 두 여인의 대사다. 40년 전 풋사랑을 우연히 마주치면서 시작된 가슴앓이, 어쩌다 보니 그도 혼자, 나도 혼자, 그렇다고 선뜻 그를 따라나설 수도 없는 현실의 굴레에서 걷잡을 수 없는 추억의 급물살을 맞는 주인공. 가까운 친구에게 자신의 속앓이를 털어놓는 그 소용돌이에 내가 똑같이 말려들 줄이야.
사는 동안 맞닥뜨리지 말아야 할 세 가지가 있는데, 옛사랑의 현재 모습이 그 하나란다. 나머지는 작가의 맨얼굴, 요리사의 손톱 밑이라나. 그런데 어쩌랴. 봐선 안 될 40년 전 옛사랑이 내 앞에 나타났으니.
내가 그를 다시 만난 건 드라마에서처럼 우연이 아니라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남편이 간암으로 세상을 떠난 지 1년째 되던 해. 우울과 무기력으로 잿빛 세상을 버티고 견뎌내던 어느 봄날, 고향 친구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의례적인 안부에도 지쳐 있을 나에 대한 친구의 배려였을까? 거두절미하고 전화기 너머에서 대뜸 그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ㅁㅁ 씨 기억나? 한번 만나볼래? 큰 의미는 둘 거 없고 잠깐 활기나 얻으라고. 너 혼자 됐다고 하니까 한번 보고 싶은가 봐. 네 남편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그 사람으로선 네가 첫사랑 아니니.”
그의 이름을 되뇌는 순간, 나와 세상 사이의 가림막이 거둬지고 무채색 캔버스에 채색 물감이 번져갔다. 멈췄던 삶의 시간이 다시 흐를 수만 있다면….
그는 남편의 대학 선배이자 나를 사이에 둔 사랑의 라이벌이었다. 그와 남편의 성향은 동과 서, 남과 북만큼 달랐다. 남편이 내향적이라면 그는 외향적이었고, 남편은 선비 기질인 반면 그는 기골이 장대하고 남자다웠다. 학자 타입의 남편은 섬세함에 더해 자상한 면이 있었지만, 그는 대범하고 호방했으나 예민한 감수성이나 예리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40년 만의 해후임에도 남편과 세밀히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전부터 그의 기질과 성격을 알았던 것은 아니다. 남편과 살면서 가슴속에 아련히 그를 품고 있었던 것도 물론 아니다. 단지 그와 만난 3개월 동안에 파악한 것이니 걷잡을 수 없이 그에게 빨려 들어가는 내 마음의 반영이리라.
“ㅇㅇ이,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은 정말 몰랐어. 스무 살 고운 모습 그대로네. 그때 내가 너에게 청혼도 못 해보고 네가 내 후배와 결혼한 후 한 5년을 방황했지. 이러다 폐인 되겠다 싶어서 적당한 여자를 만나 뒤늦게 결혼을 했고. 물론 좋은 여자야, 무척 헌신적이고. 하지만 내 마음속에서 네 자리를 단 하루도 더듬지 않은 날이 없었어. 꿈에서라도 한번 같이 살아보고 싶었지.”
“호호. 오빠, 농담 말아요. 지금 내 나이가 60이 가까워오는데 스무 살 때 모습이 그대로 있다니. 그때 청혼하지 왜 안 했어요? 그랬다면 다시 생각해봤을 텐데.”
“장난스레 말하지 마. 그때 네 남편이 군에 있었잖아. 그 사이 너와 가까워질 수도 있었지만 그건 공정한 행동이 아니지. 더구나 내가 3년이나 선배인데 요즘 젊은애들 말로 후배와 썸을 타고 있는 여자에게 대놓고 구애하는 건 안 될 일이지. 그 친구가 제대한 후 너에게 결정하도록 하려고 했는데, 내가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너와 그 친구가 많이 가까워져 있더군.”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마음이 활짝 열렸다. 남편과 나에 대한 배려심, 속 깊은 정의감 등이 그를 믿음직하고 매력적으로 느끼게 했다. 무엇보다 그는 ‘살아 있는’ 사람이다. 마주 보며 대화할 수 있고 원하면 만질 수도 있다. 남편이 떠난 이후 가장 힘들었던 건 아무리 그 사랑이 컸다 해도 오감에 잡히는 한 조각의 그 무엇이 더는 없다는 것이었기에.
늦은 봄, 고즈넉한 교외의 일식 레스토랑에서 그는 머뭇대며 조심스레 내게 물었다. 세 번째 만남이었다.
“ㅇㅇ아, 손 한번 잡아봐도 될까?”
나는 대답 대신 그에게 살며시 손을 내밀었다. 그의 두툼한 손이 내 손등 위에 살포시 놓였다. 따스하고 든든했다. 잠시 후 그의 손이 내 얼굴 언저리로 다가왔다. 그와 나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와 동시에 허공에서 주춤대는 그의 손을 가만히 잡아 다시 나의 손등 위에 얹어놓았다. 그에게 내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아 시선을 내리깔았지만 가슴은 한껏 부풀어 올랐다. 계절의 봄은 저물고 있는데 내 인생의 봄은 이렇게 다시금 찾아드는 걸까.
“꿈에서라도, 그도 아니면 다음 생에서라도 부부로 만나 한번 살아보고 싶었어. 그런 너의 손을 잡아보는 데만 40년이 걸렸구나. 지금이라도 부부처럼 여행도 가고, 애들처럼 놀이공원도 가고, 손 붙잡고 맛있는 집 찾아 전국을 돌면서 걱정 없이 웃고 즐기며 젊은 한때로 돌아가고 싶다.”
남자는 시각에 약하고 여자는 청각에 약하다고 했던가. ‘꿈에서라도 살아보고 싶었다’란 그의 말이 귓바퀴를 로맨틱하게 간지럽혔다. 황홀했다. 남편과 사별 후 바람 빠진 풍선처럼 기죽고 초라해진 내면에 자존감의 바람이 차올랐다. 허방을 딛고 있던 공허함이 메워지며, 구겨진 자존심이 펴지고, 우울증의 얼룩이 씻겨나갔다.
나는 그의 첫사랑이자 짝사랑이며, 단 하나의 옛사랑이 아닌가! 허름한 중년 남녀가 남루한 외로움 때문에 그렇고 그렇게 만난 게 아니다. 환상이어도 좋았다. 설혹 착각이었다 해도, 허영이면 또 어떠랴.
하나로 흐르고 있는 그와 나의 시간도 물이 수소와 산소로 나뉘듯이 언젠가는 다시 분리될 것이다. 그가 나에게 가진 감정이 사랑이라 해도 결국 그는 가정으로 돌아갈 거라는 통속적인 결말을 나 또한 예상해야 할 테지. 복잡한 심사는 그뿐만이 아니다. 그를 향한 내 마음이 깊어갈수록 내 사랑의 방에는 아직 남편이 살고 있다는 것을 언뜻언뜻 확인한다. 내게 사랑의 방은 하나뿐일까. 그 방에 남편이 기거하고 있는 한 그를 온전히 들여놓을 수는 없는 것일까….
인생 이모작에 성공하고 트로트 가수를 목표로 인생 삼모작을 준비했던 이금수(63) 씨가 마침내 꿈을 이루었다. 고등학교 수학교사, EBS 수학 영역 스타 강사, EBS 입시 프로그램 방송 진행자, 서울진학지도협의회, 서울시교육청 대학지도단을 거쳐 은퇴 후 대진대학교의 입학사정관까지, 교육 분야에서 줄곧 일해온 이금수 씨의 트로트 가수 데뷔 스토리를 들어본다.
인생,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여~
이모작도 버거워하는 중장년들에게 한줄기 빛과 같은 희망을 주는 사나이 이금수 씨가 인생 삼모작 주인공으로, 마침내 꿈꿨던 가수로 데뷔했다. 이금수 씨의 데뷔 앨범은 최근 트로트 가수 강진의 ‘막걸리 한잔’으로 주가를 올리는 류선우 씨가 작곡과 작사를 맡고, 트로트 업계에서 고급스런 편곡으로 소문이 자자한 장승연 씨가 편곡자로 나섰다. 아내 주현선 씨와 ‘금실은실’이라는 혼성듀오로 2곡을 녹음했고, 부부가 각각 2곡씩 녹음해 총 6곡이 수록돼 있다.
지난해부터 이금수 씨는 1년 가까이 쉬지 않고 트레이닝을 받으며 트로트 창법을 익히고 연마했다. 워낙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하고 남들에게 노래 잘한다는 소리를 많이 들어왔던 터라 ‘자신감’ 하나만 믿고 여기까지 내달렸단다.
이금수 씨의 솔로곡인 ‘중년고백’은 노래를 부르는 가수의 중후한 이미지를 잘 살렸다는 평이다. 아내 주현선 씨의 솔로곡 ‘우야꼬’는 어쩌면 가수로서 단점이 될 수 있는 경상도 사투리를 그대로 가사로 풀어내 오히려 매력 포인트로 활용한 것이 특징이다.
함께 부른 ‘꽃노래’는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부부의 마음을 그대로 담은 듯한 노래라 중년부부들로부터 큰 공감을 얻고 있다. 이금수 씨 부부는 처음 이 노래를 연습할 때부터 애착이 많이 갔던 곡이라 기대가 각별하다고. 트로트 업계에서 실력자로 통하는 작곡·작사가와 편곡자가 힘을 합쳐서인지 트로트의 구성진 가락에 세련된 사운드가 입혀져 감성을 건드리는 게 일품이다.
TV만 켜면 채널마다 트로트 프로그램이 쏟아지는 요즘, 목소리만 꺾어대는 기교형 가수보다 진심을 담아 정감 넘치고 사람 냄새 나는 곡으로 승부를 던지는 신참내기 가수에게 기대가 모이는 것은 당연하다. 8개월의 보이스 트레이닝 끝에 지난해 연말부터 녹음에 돌입, 올 초 앨범을 발표했다. 특히 이번 트로트 가수로 도전하면서 트레이닝과 앨범 녹음 기간 아내와 줄곧 함께해 부부 사이가 신혼 때보다 더 각별해졌다고 이금수 씨가 환한 웃음을 짓는다.
그렇다면 이금수 씨는 젊은 시절부터 가수가 꿈이었을까? 본인에게 가수의 꿈이 있다는 것은 언제 알았을까? 술을 좋아하는 편이어서 친구, 동료들과 술 한잔에 얼큰해지면 노래를 하고 싶어 꼭 마이크를 잡았단다. 주현선 씨도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해 아이들이 어렸을 땐 잠을 재워놓고 같이 노래방에 가서 노래를 부르고 온 적도 많다.
“지금 생각하니 아이들에게 미안하네요. 그래도 아내는 그렇게라도 노래를 부르면서 육아 스트레스를 견디지 않았을까요? 올해가 결혼 37주년이니 37년 이상 노래를 불렀습니다. 특히 고등학교에서 수학 교사를 할 당시에는 축구, 테니스 등 운동을 마치고도 동료들과 함께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췄네요. 송창식의 ‘고래사냥’을 부르면서 말이죠.”
그는 동료들이 “노래 잘한다”며 치켜세울 때는 기분이 우쭐해서 술값도 많이 계산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EBS에서 강의를 하고 있어 수입이 짭짤하니 술값을 내라는 칭찬 아니었을까? 갑자기 합리적인 의심(?)도 든다며 너털웃음을 짓는다.
하지만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틀리지 않는 것이, 그런 이야기를 자꾸 들으니 노래가 더 좋아지고 일하면서도 쉬지 않게 노래를 흥얼거리는, 말 그대로 생활 속에 노래가 꼭 박혀버렸다. 이렇게 시작된 노래 사랑은 개포동성당에서 성가대 활동을 하면서 절정을 이루었다. 노래를 좋아하는 신도들끼리 모여 합창을 연습하며 세속의 노래인 ’마법의 성‘을 부르는데 너무 멋있어서 마치 천사들이 하늘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 같은 환희의 순간을 맛봤다.
“한번은 성가대 연습을 마치고 성가대 단원끼리 동네 맥줏집에서 한잔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을 정도로 동요를 조그맣게 불렀는데, 호프집 손님들이 맥주를 보내면서 노래를 좀 더 크게 계속 불러달라고 조르기도 했어요. 화음이 정말 훌륭하다고 격려해주면서요.”
37년 결혼 생활을 맞춰온 팀워크로 혼성듀오도 완벽 깔맞춤
인생 이모작에 성공적으로 안착하여 하루하루 심적인 안정을 찾아갈 때쯤이었다. 대진대학교에서 입학사정관 실장을 하면서 인생 삼모작을 생각하게 되었고, 부부가 함께 노년을 행복하게 지낼 수 있는 것을 제일 중요한 기준으로 삼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다가 부부가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하니 가수에 도전해보면 어떨까 의견을 나누게 됐고, 뜻을 합하게 됐다.
마침 EBS에서 오랜 기간 함께 일했던 지인과 만난 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고, 그러자 지인은 자신의 아우가 작곡가라며 소개를 해주었다. 그 아우가 바로 ‘막걸리 한잔’의 작곡·작사가인 류선우 씨였다. 류선우 씨의 테스트를 거쳐 1년 가까운 훈련 기간을 마치고 마침내 신곡 ‘꽃노래’와 ‘중년고백’, ‘우야꼬’로 결실을 맺게 된 것.
처음 테스트를 받으러 간 날이 2020년 4월 19일. 그 전 3개월 정도는 실용음악학원에서 매주 1회씩 원장님에게 지도를 받았다. 류선우 작곡가는 부부의 노래를 처음 듣고 나서, 이금수 씨는 노래를 자주 불러서 익숙하게 느껴지는데, 주현선 씨는 목소리가 노래와 겉도는 등 익숙함이 상대적으로 부족하지만 목소리 자체는 깔끔해서 집중적으로 훈련하면 톤이 좋아질 것 같다며 격려를 해주었다.
이금수 씨는 목소리가 탁성이라 앨범 전체를 솔로로 하는 것이 걱정이었고, 주현선 씨는 노래에 익숙하지 않아 역시 솔로를 하기에 부담이 있었는데,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가 혼성듀오를 결성해 가수로 데뷔하자고 의기투합했다. 하긴 37년을 혼성듀오로 살아왔던 부부인 만큼 그 어느 팀보다 팀워크만은 탁월하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하지만 트로트 가수를 준비하는 과정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인생 이모작이야 30년 넘게 몸담았던 같은 교육 분야로 이동한 것이니 이질감도 없고 그런대로 적응할 수 있었지만, 인생 삼모작으로 목표한 트로트 가수는 완전히 트랙을 달리하는 분야이니 사실 막막함이 더 컸다고.
앨범이 나오기까지 부부는 매일 2시간 정도 수락산 아랫자락에서 노래 연습을 했고 싸우기도 많이 싸웠다. 그래도 힘든 시간을 이겨내고 앨범 발매 가수로서 무대에 서서, 부부가 함께 눈을 맞춰가며 노래 한 곡을 부를 때 느껴지는 성취감이 엄청나다고 한다.
야외무대에 서며 관객과 호흡해
지난 4월 26일 부부는 엠스타 TV가 천안 ‘화수목 정원’에서 진행한 ‘유예진의 히트가요쇼’ 녹화에 참가하는 기회를 얻었다. 야외에서 진행하는 녹화 무대에 서니, 앨범을 발매한 가수로 확실한 대접을 받는 것 같아 뿌듯하기 그지없었다. 이를 계기로 ‘금실은실’ 듀오는 무대에서 불러주기만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아예 무대를 직접 만들자는 마음으로 유튜브를 통해 라이브 콘서트를 진행하게 됐다.
유튜브 채널이 열리자 많은 분들이 실시간으로 댓글을 남기며 부부 가수와 소통을 했다. 진행자까지 투입된 유튜브 미니 콘서트 무대에 오르니, 비록 방송 프로그램은 아니었지만 나만의 콘서트를 연 듯한 가슴 꽉 찬 시간이었다.
“시작은 미미하나 끝은 창대하리라”는 성경 구절처럼 ‘금실은실’ 부부 가수의 첫 유튜브 콘서트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실시간 조회수는 1000회를 넘었고 ‘좋아요’는 60개를 넘는 등 부부 가수의 첫 콘서트라고는 믿기지 않는 훌륭한 성적이었다.
6월에도 역시 야외 녹화 일정은 물론 유튜브를 통한 2차 라이브 콘서트 계획이 잡혔다며 “부부 가수 ‘금실은실’로 조금씩 알려지면 애초 계획대로 지역 봉사활동을 많이 다니고 싶다”는 작은 소망을 내비쳤다.
트로트 맛깔나게 부르는 설운도 닮고 싶어
신참내기 트로트 가수로서 롤 모델은 마음속의 영원한 스타, 설운도란다. ‘58년 개띠’로 나이는 똑같지만 가수로 정점에 오른 후에도 꾸준히 노래 연습을 하며 곡을 쓰는 모습에서 배울 점이 정말 많다고 느꼈다.
“부러운 것 하나는, 설운도 씨는 가사를 직접 쓰다 보니 자신만의 감성을 듣는 이에게 호소력 있게 전달하는 것 같다”며, “아무래도 노래를 배워서 부르다 보면 기교에만 신경을 쓰게 되는데 설운도 씨의 노래를 듣고 가사 전달력이 어떤 것인지 경험하게 됐다며 여전히 배울 것이 많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 요즘도 보컬 트레이닝을 꾸준히 받는데, 이 훈련을 통해 가사를 분석하는 것은 물론 마디마디 창법과 트로트 가수들의 전매특허라 할 밀당 기술 등을 꾸준히 연습해 몸에 착 배도록 하는 것이 목표라고 한다. 요즘 배우는 노래는 ‘사랑반 눈물반’, ‘처녀뱃사공’ 등인데 나만의 노래가 됐다 싶을 때 녹음해서 유튜브에 올릴 생각이다.
트로트 부부 가수 데뷔하니 주위 사람들 반응 뜨거워
“트로트를 한 것이 돈을 벌려고, 유명해지고 싶어서 시작한 게 아니잖아요. 이렇게 하고 싶고 되고 싶은 게 있어서 늦은 나이에도 목표를 세우고 정진해서 꿈을 이루며 살 수 있다는 것을 후배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는 세월에 순응하며 사는 것도 좋지만, 적어도 인생의 다음을 걱정하려면 2~3년 고심하며 탄탄히 준비하고 미리 계획한 후 출발해야 한다고 말한다. 인생 이모작과 삼모작의 목표가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아마 실패하기 십상일 것이다. 단지 자신의 재능을 조금 더 사용해 여가생활에 보태고 이웃에 봉사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 자체로 훌륭하다고 말이다.
그래도 질투와 시기 어린 시선보다 격려와 따뜻한 말 한마디로 힘을 주는 분들이 훨씬 많아 힘이 됐다는 그는, ‘금실은실’의 첫 유튜브 라이브 미니 콘서트 날 주위 분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크게 고무됐다. 그가 SNS 활동을 열심히 하는 ‘6070중년쉼터’ 밴드의 선배들과 동년배, 후배들이 접속을 독려하며 응원해준 것에 크게 감동한 것이다. 이들의 격려와 응원을 장착하고 신인 가수의 패기를 얹어 야외무대와 유튜브 미니 콘서트를 멋지게 소화해, 지상파 방송 프로그램에서 먼저 섭외 전화를 받는 가수가 되겠다는 각오다.
함께 취미를 공유하고 꿈을 나누며 이루어나가는 부부의 모습은 주위에 귀감이 된다. 결국 인생이란 바로 내 옆의 가장 가까운 가족과 소통하며 건강한 가족과 이웃, 사회를 만들어나가고 꿈을 이루기 위해 한걸음 한걸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닐까?
“걱정만 하다 문턱을 넘어보지도 못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걱정만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부딪혀보지도 않았는데 무슨 일이 일어나겠어요. 문턱을 넘을까 말까 걱정만 하면서 시간 낭비하지 말고, 하고 싶은 일을 찾아 하루하루 손에 익히고 몸에 체화하는 것. 그렇게 매진하며 살다 인생 마지막에 내가 나를 인정하고 엄지를 치켜세워줄 수 있어야죠.”
100세를 상수(上壽)라 부른다. 하늘이 내려준 나이라는 뜻이다. 이처럼 100세는 하늘이 내려준 선물인지도 모른다. 백세 시대에 접어들면서 건강과 장수에 관한 관심이 늘어나는 가운데, 송촌(松村) 김형석(102) 교수의 주치의이자 한의사인 박진호(54) 남산당한의원 원장과 김형석 교수를 만나 행복한 장수 비결에 관해 얘기를 나눴다.
송촌의 삶을 가까이에서 접했던 박진호 원장은 그의 삶을 바탕으로 행복한 장수의 비결을 담은 책 ‘김형석 교수의 백세 건강’을 최근에 출간했다. 이 책이 세상의 빛을 보기까지 4년의 세월이 걸렸다고 하는데, 그는 어떤 동기로 이 책을 집필한 것일까?
“건강 비법을 알려주는 책은 시중에 많습니다. 앞으로도 많이 나올 것입니다. 다만 제시한 방법이 맞는지 확인하기 어렵고, 대부분 ‘내 생각에는 이렇게 해야 건강하다’는 것이죠. 저는 좀 더 구체적으로 접근하고 싶었고, 마침 교수님의 주치의로서 살펴본 삶을 바탕으로 건강과 장수에 관한 얘기를 해보고 싶었습니다. 말하자면 주치의로서 의무라고 할까요? 원래는 교수님께 논문으로 보여드렸는데 더 많은 이들이 읽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권하셔서 이번에 책으로 출간했습니다.”
한의사로서 다룰 수 있는 다양한 주제 중 건강과 장수를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대학교에서 ‘건강식품학’ 강의를 맡으면서 올바른 건강에 관해 관심을 가졌습니다. 예를 들어 흔히 한약을 보약이라고 생각하지만, 한약도 일종의 약입니다. 약효가 있다는 것은 반대로 생각하면 독이 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잘 쓰면 약이 되지만, 잘못 쓰면 독이 될 수도 있죠. 이처럼 한의사로서 학생들에게 건강에 관한 올바른 접근과 정확한 정보를 알려주고 싶었던 마음이 시간이 지나 이렇게 결실을 본 것 같습니다.”
더불어 사는 행복
진료실에서 숱한 환자를 만나면서 장수하는 분들을 유심히 살펴봤을 것 같은데, 한의사로서 바라본 장수하는 분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무엇일까? 그는 “나이는 마음의 상태다”라고 답하며 이렇게 말했다.
“진료를 하면 60세의 노인도 보지만, 80세의 청년도 만납니다. 몸은 나이를 먹어 늙더라도 우리의 마음은 청년일 수 있습니다. ‘연로한 견공에게 새로운 기술을 가르치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새로운 기술을 배우고 익힌다면 늙지 않을 수도 있죠. 모든 건 마음먹기에 달려 있습니다. ‘건강해서 행복한가, 행복해서 건강한가?’ 하는 것은 동전의 양면처럼 늘 함께하는 것이죠. 행복은 나눌수록 커지는 것이라 다른 이와 나눌수록 더 건강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송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건강과 나이에 대해 특별하게 신경 쓰지 않았다. 김형석 교수는 “그저 마주한 오늘을 성실하게 살아갈 뿐”이라고 말하며 이렇게 덧붙였다.
“보통 건강과 장수에 관심이 많아서 내게 비결을 물어본다. 하지만 특별한 비결은 없다. 허약한 체질이라 어릴 때부터 매우 아팠다. 그래서 건강을 위해 노력은 했지만, 건강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지는 않았다. 살면서 나이를 의식할수록 더 늙는 것 같아 굳이 나이에 연연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긴 코스를 뛰는 마라토너는 뛰면서 분과 초를 계산하지 않는다. 한 걸음 한 걸음 뛸 뿐이다. 나 역시도 살아가는 동안 모든 하루를 최선을 다하며 즐겁게 살았다.”
실제로 김형석 교수는 남들에게 베푸는 행복을 삶을 살아가는 데 중요한 덕목으로 꼽았다. 줄수록 더 커지는 사랑처럼 나누는 삶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오롯이 나를 위해서만 살면 욕심만 생긴다. 욕심은 가지기 위한 마음인데, 결국엔 잃는 것이 더 많더라. 대신 더불어 살려고 할 때 지혜가 생기고,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남들에게 베풀려고 할 때 더 큰 행복이 생기더라. 남에게 주는 행복의 가치, 그것은 말로 설명하기 참 어렵다. 다만 그것을 실천해본 사람은 그 가치를 알게 될 것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피는 행복
더불어 사는 행복, 그것이 김형석 교수의 장수 비결 중 하나였다. 그렇다면 이렇게 행복한 장수를 꿈꾸는 시니어가 갖추어야 할 자세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박진호 원장은 꽃에 비유했다.
“젊은 시절엔 앞만 보고 목표를 향해서 뛰었다면 이제는 한 걸음 쉬면서 여유를 찾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주위의 시선에 휘둘려 살았던 이전의 삶을 내려놓고,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가지면 좋을 것 같습니다. 화창한 봄날에 핀 꽃을 생각해보세요.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핀 꽃도 충분히 아름답지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늘 참사랑을 실천하려고 했던 송촌 선생님처럼 말이죠. 꽃은 피우는 것 자체만으로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도 똑같습니다. 자신의 소중함을 느낄 때 ‘행복’이란 꽃을 활짝 피울 수 있습니다. 그런 삶에 자연스레 장수가 따라오지 않을까요?”
김형석 교수는 인터뷰 내내 웃음을 잃지 않았다. 단단한 사유와 더불어 풀어내는 이야기마다 늘 소박한 유머를 곁들이고, 인자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평온한 마음과 긍정적인 사고를 느낄 수 있었다. 사실 이런 태도가 행복한 장수 비결인지도 모른다. 주치의이자 인생의 제자로서 그의 사유와 철학을 세심하게 연구하며 기록하고 있는 박진호 원장도 마찬가지였다.
앞으로도 박진호 원장은 김형석 교수의 삶을 바탕으로 건강과 장수에 대한 연구를 진행할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그는 다음 책 출간을 위해 한의원을 운영하는 충남 예산에서 토요일마다 서울로 올라와 송촌을 만나고 있었다. 피곤할 법도 한데, 매주 송촌과 만나는 시간이 더할 나위 없이 귀하고 재밌는 순간이라 피곤함을 느낄 새가 없다고 한다. 그만큼 이 일을 즐기고 있었다. 사시사철 푸른 주목을 빗대 ‘生千年 死千年’이라 부른다. 살아서 천년, 죽어서도 천년을 산다는 말이다. 사람으로 말하자면 자신만의 기개를 늘 유지한다는 뜻이다. 두 분이 품은 긍정의 힘으로 빚어지는 결과물이 주목처럼 오랫동안 남아서 세상을 비추는 거울이 되기를 응원하며 마친다.
엄마의 손맛을 물려받은 딸은 어느덧 엄마가 됐다. 세월이 흘러 그의 딸 또한 한 아이의 엄마가 되어 손맛을 이어간다. 엄마가 딸에게, 딸이 엄마에게 전하는 특별한 레시피. 하숙정, 이종임, 박보경 3대를 거쳐온 요리 명가의 건강 요리법을 소개한다.
나들이 떠나기 좋은 5월, 손주에게 특별한 추억을 선물하고 싶다면 봄소풍 도시락을 직접 만들어보는 건 어떨까? 편식하는 아이도 알록달록한 도시락과 주먹밥을 보면 군침이 절로 돌 것이다. 특히 컬리플라워로 만든 주먹밥은 보는 즐거움과 동시에 건강도 챙길 수 있다. 컬리플라워에는 하루 비타민C 권장량의 77%가 들어 있을 뿐 아니라 식이섬유가 풍부해 다이어트식으로도 애용된다. 여기에 제철 바지락을 활용한 뜨끈한 수제비와 쫄깃한 오징어꼬치도 곁들이면 금상첨화. 어른 아이 모두의 입맛에 맞춘 메뉴로 온 가족의 사랑을 듬뿍 차지해보자!
쌈밥도시락
쌈밥 재료 쇠고기 200g, 양파 1/2개, 대파 1/2대, 상추 12장, 밥 200g, 양념쌈장 약간
불고기양념 배즙 2큰술, 간장·다진 마늘·참기름 1/2큰술씩, 다진 파 1큰술, 설탕·깨소금 1작은술씩, 후추 약간
주먹밥 재료 밥 200g, 불고기 100g, 통깨·참기름·김 약간씩
닭봉조림 닭봉 1팩(11개), 식용유·아몬드슬라이스 1큰술씩
조림장 물 1/2컵, 간장 2큰술, 식초·쌀조청·꿀·다진 파 1큰술씩, 다진 마늘 1작은술
1 불고기용 쇠고기에 양파채, 어슷하게 썬 대파를 넣고 불고기양념으로 볶는다.
2 상추에 밥, 불고기, 양념쌈장을 얹는다.
3 밥에 잘게 썬 불고기를 넣고 통깨, 참기름으로 양념해 주먹밥을 만든 다음 김 띠를 두른다.
4 밑간한 닭을 팬에 3~4분 굽고 조림장에 조린 다음 아몬드슬라이스를 뿌린다.
레인보주먹밥
재료 밥 3컵, 달걀 1개, 비타민 40g, 당근·컬리플라워 20g씩, 간 쇠고기 80g, 식용유 약간, 김가루 2큰술
밥양념 소금·통깨·참기름 1작은술씩
나물양념 소금·깨소금·참기름 약간씩
고기양념 간장 2작은술, 설탕·청주·다진 마늘·깨소금·참기름 1작은술씩
1 밥을 지어 따뜻할 때 밥양념을 넣고 밑간한다.
2 달걀을 완숙으로 삶아 흰자는 다지고, 노른자는 체에 내려 가루를 만든다.
3 데친 비타민은 물기를 짠 후 곱게 다져 나물양념으로 밑간한다.
4 다진 당근, 컬리플라워, 쇠고기는 고기양념으로 밑간해 식용유를 넣고 각각 볶는다.
5 밥을 등분해 김가루 등 각 재료에 섞어 주먹밥 틀에 반쯤 채운 다음 고기를 넣고 밥을 채워 주먹밥을 만든다.
바지락수제비
재료 바지락 1봉, 소금 적당량, 물 6컵, 멸치해물팩 2개, 애호박 50g, 감자 80g, 양파 1/4개, 느타리버섯 20g, 실파 2뿌리, 홍고추·풋고추 1/2개씩, 수제비 100g, 다진 마늘·국간장 1큰술씩
양념장 양조간장 2큰술, 조선간장·다진 파 1큰술씩, 고춧가루·다진 마늘·참기름 1작은술씩, 다진 풋고추 1개 분량, 깨소금 2작은술
1 바지락은 소금에 바락바락 비벼 씻은 후 소금물에 담가 해감한다.
2 냄비에 물과 멸치해물팩을 넣고 20분 정도 끓인 후 팩은 건져낸다.
3 호박, 감자, 양파는 납작납작 썰고, 버섯은 찢어놓고, 실파는 5cm 길이로 썰고, 고추는 어슷하게 썰어 씨를 털어놓는다.
4 2의 육수에 채소를 넣고 끓인 후 수제비를 넣어 다시 끓인다. 바지락을 넣고 조가비가 벌어지면 마늘, 실파, 고추를 넣고 간을 맞춘 뒤 양념장을 곁들인다.
오징어과일꼬치구이
재료 통오징어 2마리, 옥수수·생파인애플 링 1개씩, 애호박 1/6개, 레몬 1/2개, 방울토마토 4개, 식용유 약간
양념 레몬즙 1/2큰술, 올리브오일 1큰술, 소금 1/2작은술, 후추·파슬리찹 약간씩
허니마요소스 마요네즈 4큰술, 씨겨자 2큰술, 꿀 1큰술, 양조간장 1작은술
1 분량대로 섞어 양념을 만든다.
2 오징어는 배를 가르지 않고 껍질을 벗긴 뒤 2cm 너비 링으로 썰어 양념으로 밑간한다.
3 옥수수, 파인애플, 애호박, 레몬은 한입 크기로 썰고, 방울토마토는 꼭지를 딴다.
4 분량의 재료를 섞어 허니마요소스를 만든다.
5 대나무 꼬치에 재료를 골고루 꿰고 그릴에 기름을 둘러 앞뒤를 뒤집어가며 중불에서 타지 않게 굽는다.
6 오징어과일꼬치구이에 허니마요소스를 곁들여 찍어 먹는다.
요리 및 레시피 제공 이종임(Scook청담 요리학원 원장), 박보경(아이미각연구소 소장) 푸드스타일리스트 박정윤 콘셉터 픽푸 곽영신 장소 Scook청담 요리학원
언더그라운드 가수, ‘천둥 호랑이’가 되어 돌아온 권인하. 올해 나이 예순두 살. 그러나 나이가 무색하게 29만4000여 명의 유튜브 독자를 보유한 그는 여전한 현역으로서 젊은 세대의 열광을 받으며 인생 2막을 일구고 있다. 1980년대를 주름잡았던 그가 40여 년이 지나 어떻게 다시 전성기를 열게 되었을까? 천둥 호랑이가 말하는 음악, 소통, 그리고 도전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지금 가수 권인하가 두 번째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있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동안 잊힌 가수였던 그의 봄날은 유튜브 덕분에 찾아왔다. 그가 놀라운 것은 1980년대에 주로 활약한 과거 세대의 가수면서도 유튜브라는 새로운 포맷에 최적화된 가수로 다시금 성공했다는 점이다. 그 성공의 계기는 젊은 세대와의 적극적인 소통 덕분이었다.
우연처럼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다
권인하는 본인이 반드시 성공하겠다는 목적으로 유튜브를 전략적으로 운용하지 않았다. 유튜브의 성공 사례 중 상당수가 그렇듯, 그는 우연과 기회가 겹쳤을 때 본인이 갖고 있던 본연의 실력을 적중시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그 시작은 2015년 ‘복면가왕’에 출연했을 때부터다. ‘이 나이에 해도 되는 건가?’라며 긴가민가했던 출연 제의를 매니저가 적극적으로 권유해 나가게 되었고, 결과는 성공이었다.
“원래 ‘천둥 호랑이’ 채널은 내가 부른 노래들을 모아놓는 데이터베이스로 쓸 예정이었어요. 그런데 ‘복면가왕’에 출연한 후 이슈가 되어 EBS ‘공감’에도 초대되었죠. 거기서 태연의 ‘만약에’를 불렀는데 본방에는 못 나갔지만 EBS에서 그걸 유튜브 채널에 따로 올렸어요. 그랬더니 화제가 되었고 순식간에 100만 뷰를 넘더군요. 그걸 본 아들이 본격적으로 유튜브를 통해 노래를 부르라고 권유했습니다.”
유튜브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그는 태연, 엠씨더맥스, 노라조, 에일리, 아이유 등 후배 가수들의 노래를 적극적으로 리메이크하여 자기 식으로 해석했다. 1980년대 실력파 언더그라운드 가수였던 그가 까마득한 후배들의 노래를 부르는 것 자체도 신선했지만, 더 신선했던 것은 이미 장년의 나이가 된 그가 구사하는 생생한 창법이었다. 다양한 음역대를 오가지만 특히 고음을 원키로 힘 있게 확 질러버리는 그의 ‘천둥 호랑이 창법’에 ‘진짜 가수’를 찾던 젊은 세대는 열광했다.
권인하의 법칙은 연습과 소통
권인하가 나이를 먹어서도 여전히 전성기 시절과 다름없는 압도적 성량과 테크닉을 유지하는 비법은 연습이다. 그는 요즘 매일 기본 3시간, 때로는 10시간씩 노래 연습을 한다. 새로운 세대와 호흡하게 되니 가수로서의 삶의 방식도 달라졌다.
“젊어서는 연습 안 하고 대충 불러도 ‘이 정도면 됐지’ 하며 교만했죠. 하지만 유튜브를 하면서 진심으로 열심히 만들어 부른 노래에 대중이 열광하는 걸 보고 절대로 대충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그는 밴드 후배들과 소주 한잔하면서 서운한 게 있으면 망설이지 말고 말하라고 했다. 후배가 자신이 느낀 점을 얘기하면, 깨끗하게 인정하고 사과한 다음 고친다. 당연히 처음에는 힘든 일이다. 하지만 후배로서나 그 자신으로서나 이러한 소통을 통해 더욱 개선된 미래를 만들 수 있다는 점을 그는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한 태도는 자신의 노래를 듣는 이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끊임없는 피드백을 통해 듣는 이들이 원하는 포인트를 계속 반영하며 진화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필수입니다. 또한 유튜브를 활용하면서 이제는 하나하나 다 기록으로 남기에 허투루 할 수가 없게 됐어요. 권인하라는 아티스트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졌기 때문에 그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계속 최고의 정신과 자기관리로 임할 수밖에 없습니다.”
댓글로 만들어진 놀이 공간에서 노닐다
권인하가 자신을 찾는 젊은 세대와 소통하는 방법도 적극 그 자체다. 다양한 SNS 활용. 유튜브, 팬카페, 인스타그램 등을 활용하면서 댓글이나 쪽지에 일일이 답장은 못 하지만 최대한 확인하려고 노력하고 피드백을 최대한 수용하려고 한다. 그것을 위해 그가 중시하는 것은 댓글이다.
“비결은 구독자들이 달아주는 재미있는 댓글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젊은 세대는 좋은 콘텐츠가 있으면 그에 대해 댓글로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하면서 놀이터처럼 소비하죠. 그런 재미있는 댓글들이 달리기 시작하면 콘텐츠 자체에 새로운 활력이 생깁니다. 단순히 노래하는 콘텐츠가 아니라 놀이 공간으로 변모하게 되는 겁니다. 결론적으로 구독자들이 달아준 재미있는 댓글 덕분에 콘텐츠가 계속 생명력을 얻고 재확산될 수 있다고 봅니다.”
2021년 3월 중순 현재 권인하 유튜브 채널의 구독자 수는 29만4000명, 곧 30만 명을 돌파할 기세다. 그 구독자들의 연령대는 대부분 20~30대라고 한다. 옛날이라면 환갑잔치를 열었을 가수라고는 믿기 어려운 팬층의 구성이다. 그걸 가능케 한 것이 바로 권인하의 소통 능력 아닐까.
현재 권인하의 모습은 최신 매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멀티테이너적 인상을 준다. 또 그것이 인기의 비결이기도 하다. 새로운 물결에 올라타는 그의 모습은 그의 삶을 이해하면 어느 정도 이해 가능하다.
권인하가 요즘 보여주는 천생 가수로서의 모습만 기억하는 이라면 낯설 수도 있겠지만, 그는 과거에 한때 키보디스트이자 작사·작곡까지 하는 싱어송라이터이기도 했다. 군대를 갔다 온 그는 1980년대 최고의 작곡가였던 이영훈과 고등학교 동창 한 명과 함께 셋이서 팀을 준비했고, 그때 이영훈의 곡을 보고 자극을 받아 작곡에 뛰어들었다. 그렇게 처음 만든 곡을 이광조가 불렀을 정도로 그의 작곡가로서의 능력은 일찌감치 인정받았다.
권인하는 또한 사업가 경험도 갖고 있다. 신촌뮤직을 운영하며 박효신을 발굴하기도 했다. 1990년대 초반부터는 록 가수로서는 드물게 공중파 방송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음악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다양한 방송 활동을 했다. 심지어 배우로서의 경험도 있다. 1992년에 방영된 MBC 미니 시리즈 ‘창밖에는 태양이 빛났다’에서는 주연, 2001년 MBC드라마 ‘가을에 만난 남자’에서는 조연으로 나왔다.
카멜레온처럼 자신의 역할을 바꿔가며 다양한 일을 한 그지만, 뼈아픈 실패 또한 그를 따라다니기도 했다. 음반 시장이 음원 위주로 재편되면서 기존 중견가수들에게는 혹독한 시절이 시작되었다. 권인하 또한 이에 대처하기 위해 미사리 카페를 운영하고 골프 사업도 하는 등 다양한 사업을 시도했다. 그러나 아내가 “당신은 가만히 있는 게 돈”이라고 말할 정도로 사업은 실패를 거듭했다.
내가 도움이 되는 선배였다니 다행
성공과 사회적 인정, 그리고 실패들. 이쯤 되면 권인하가 가진 경험의 자산치가 보통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인플루언서로 변화할 수 있었던 비결도 다양한 경험에서 비롯된 본능적 감각이 일조했다고도 볼 수 있다. 이러한 지치지 않는 발전의 동력은 ‘어른’의 정의에 대한 그의 생각에서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나도 어른이 됐나 싶을 때가 있지만, 누군가의 본보기가 되고 롤모델이 되는 거라고 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어른됨이겠죠.”
그는 요즘 자신의 가장 큰 기쁨으로 ‘내 노래를 기다리는 호랭이들이 생겼다는 것’, 그리고 ‘기존 팬뿐 아니라 젊은 층에서 호응해주고 그들과 소통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을 꼽는다. 얼마 전 화제 속에 끝난 프로그램 ‘싱어게인’이 발굴한 스타 정홍일은 권인하의 ‘나의 꿈을 찾아서’를 인생곡으로 꼽았다. 1992년 앨범의 동명 타이틀곡이기도 한 이 노래의 가사는 지금은 힘들더라도 언젠가 찾아올 희망을 위해 꿈을 찾아 나아간다는 내용이다. 이 가사가 정홍일이 보여준 삶의 궤적과도 일치하기에, 더욱 살갑게 다가왔을 것이다.
“‘다행이다. 내가 저런 친구들에게 도움이 되는 선배였다니’라는 생각이 들었죠. 이미 너무 잘하는 친구이기 때문에 잘됐으면 좋겠어요. 함께 재미있는 그림을 만들 수 있으면 좋겠고요.”
자신만의 개성이 담긴 노래가 필요한 시대
권인하는 ‘싱어게인’ 같은 오디션 프로의 매력은 참가자들의 순수한 열망과 간절함에 있다고 생각한다. ‘진짜 간절함’은 못 이긴다는 걸 느꼈다는 것이다. 따라서 노래 한 곡을 부를 때 진짜 진심을 담아낼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요즘 후배들은 보컬로서의 기술적인 측면은 전체적으로 상향 평준화됐습니다. 그러나 소리를 내는 방식이 다 비슷하기 때문에 음색이나 아티스트의 개성 자체가 차별화되지는 않는다고 보여요. 기술적으로는 다들 너무 잘하기 때문에 좀 더 자신만의 색깔과 개성을 음악에 담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청자들이 가수의 진심에 반응해야 감동은 오는 법. 노래에 대한 진심과 개성에 대한 권인하의 충고가 과거 송창식이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던 내용과도 일치하는 걸 보면, 어떤 경지에 도달한 거장급 가수들이 후배 가수에 대해 갖는 생각에는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는 모양이다.
“항상 즐거운 인생이지만 아직 못 다 이룬 꿈이 있기에 정진 중입니다. 이미 케이팝이 빌보드 차트를 점령하기 시작했잖아요? 우리 노래가 세계적 퀄리티라는 반증이죠. 10년 이내에 우리 세대의 음악도 훌륭한 수준을 유지하면서 트렌디하게 만들어낼 수 있다면, 세계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소망이 있습니다.”
권인하는 무엇보다도 자신이 안주하지 않고 계속 도전해서 시대에 맞게 진화한 아티스트로 기억되길 원한다. 요즘 시대에 예순두 살은 무언가를 하기에 시간이 넉넉한 나이임을 생각하면, 아직 그가 해야 할 일은 많이 남은 셈이다.
“나이가 들어도 계속 자신의 기술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우리 나이의 일반 개원한 의사들은 절대 쉬지 않아요. 여전히 현장 진료를 하고 신기술을 배우죠. 그걸 안 하면 환자들과 교류가 안 되니까요. 그래서 의사 친구들과 한잔할 때면 ‘그런 거 할 수 있는 게 어디냐, 못 하면 도태되는 거다’라고 말해주죠.”
멋있게 늙는 첫 번째 자질은 도전
권인하는 뒷전으로 빠지는 사람은 거기서 멈추는 것이라고 말한다. 의지를 갖고 접목시킬 게 무엇이 있을까 끝없이 시도하는 것이야말로 멋있게 늙어갈 수 있는 첫 번째 자질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 또한 멈추지 않기 위해 요즘도 1년에 싱글을 두 곡씩 꾸준히 발표하고 있다.
“생각만 하는 게 아니라 시도해야 결과가 나옵니다. 따라서 뭐든 하는 게 필요해요. 그 자체가 우리 나이에는 큰 용기를 주고 자존감을 높이는 일이 아닐까요. ‘아, 할 수 있구나, 되네’ 하는 경험을 가지면 미래에 도전할 수 있게 되니까요.”
그는 자신이 한 말의 증인이기도 하다. ‘할 수 있구나, 되네’를 실현시켜 미래를 꿈꾸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가 만들어갈 인생 2막의 열정적 행보와 소통의 미래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진다.
엄마의 손맛을 물려받은 딸은 어느덧 엄마가 됐다. 세월이 흘러 그의 딸 또한 한 아이의 엄마가 되어 손맛을 이어간다. 엄마가 딸에게, 딸이 엄마에게 전하는 특별한 레시피. 하숙정, 이종임, 박보경 3대를 거쳐온 요리 명가의 건강 요리법을 소개한다.
춘곤증의 계절, 봄이 왔다. 나른한 봄날, 피로를 자주 느끼거나 꾸벅꾸벅 잠이 온다면 제철 밥상 한 끼로 산뜻하게 기분 전환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달래와 돌나물을 비롯한 봄나물은 부족한 비타민과 무기질을 보충하고 신진대사를 원활하게 해 축 처진 입맛을 돋운다. 주꾸미도 우리 몸의 피로해소제 역할을 하는 타우린 성분이 함유돼 있어 춘곤증이 몰려오는 봄철에 먹기 알맞다. 또 두뇌 발달에 효과적인 DHA가 풍부해 기억력 감퇴와 치매 예방에도 좋다. 봄나물과 주꾸미 두 가지 재료만으로 밥부터 찌개, 샐러드, 파스타까지 다양하게 즐겨보자.
감자냉이솥밥과 달래양념장
재료(2인분) 쌀 1컵, 냉이 40g, 백만송이버섯 150g, 감자(소) 2개, 물 1컵
달래양념장 달래 40g, 풋고추·홍고추 1/2개씩, 양파(소) 1/4개, 견과류(호두) 1큰술, 맛간장 1/2컵, 통깨 1큰술, 참기름 1큰술
1 쌀은 불리고, 냉이는 손질해 2cm 길이로 썬다.
2 백만송이버섯은 가닥가닥 떼어놓고, 감자는 깍둑썰기한다.
3 냄비에 분량의 쌀과 감자, 물을 넣고 끓이다 보글보글 끓기 시작하면 불을 줄여 냉이와 백만송이버섯을 넣고 밥을 지은 후 불을 끄고 10분 정도 뜸을 들인다.
4 달래는 손질해 1cm 길이로 썰고 풋·홍고추, 양파, 견과류는 다진다.
5 분량의 재료를 섞은 뒤 달래양념장을 만들어 곁들인다.
브라타치즈 돌나물샐러드
재료(2인분) 돌나물 80g, 오색방울토마토 6개, 샤인머스캣 6개, 딸기 3알, 브라타치즈 1개, 슬라이스아몬드 2큰술
유자발사믹드레싱 다진 양파 2큰술, 올리브오일 3큰술, 발사믹식초 2큰술, 유자청 2큰술, 소금 1/2작은술, 후추 약간
1 돌나물은 먹기 좋은 크기로 손질한다.
2 방울토마토와 샤인머스캣은 반으로 자르고, 딸기는 크기에 따라 등분한다.
3 볼에 분량의 드레싱 재료를 넣고 잘 섞어 유자발사믹드레싱을 만든다.
4 접시에 돌나물과 브라타치즈, 과일을 골고루 담는다.
5 마지막으로 아몬드를 뿌린 후 유자발사믹드레싱을 곁들여 완성한다.
[Tip] 브라타치즈는 샐러드 외에도 프렌치토스트나 크로플(크루아상+와플) 등에 곁들여 먹어도 좋다. 용도에 따라 브라타치즈보다 크기가 작은 브라티나치즈를 사용해도 된다.
주꾸미냉이 간장파스타
재료(1인분) 주꾸미(소) 3마리, 소금 적당량, 링귀네 100g, 면수 1/4컵, 냉이 30g, 파 1/3대, 마늘 3개, 올리브오일 1큰술, 페페론치노 2개, 청주 1/4컵, 맛간장 1큰술, 그라나파다노치즈·후추·허브 약간씩
1 주꾸미는 손질하고 깨끗이 씻어 준비한다.
2 끓는 물에 소금 1큰술과 링귀네를 넣고 8분간 삶아 건진 다음 면수를 준비한다.
3 냉이는 깨끗이 손질해 끓는 물에 소금을 넣어 살짝 데치고, 파는 송송 썰고, 마늘은 편으로 썬다.
4 팬에 올리브오일을 두르고 파·마늘·페페론치노를 넣어 볶은 뒤, 주꾸미와 청주를 넣어 익힌다.
5 4에 면수와 파스타를 넣은 후 맛간장과 소금으로 간을 맞춘다.
6 접시에 파스타를 담고 그라나파다노치즈와 후추를 뿌린 다음 허브를 곁들인다.
주꾸미냉이 된장찌개
재료(3인분) 주꾸미 3마리, 밀가루·소금 적당량씩, 냉이 30g, 두부 100g, 감자 1개, 양파 1/2개, 애호박 1/4개, 생표고버섯 2장, 물 6컵, 해물다시팩 1개, 집된장 3큰술, 다진 마늘 1큰술, 고춧가루 1작은술, 대파 1/3대, 청양고추 1개, 홍고추 1/2개
1 주꾸미는 내장을 제거하고 밀가루와 소금으로 주물러 씻어놓는다.
2 냉이는 다듬어 씻은 뒤 먹기 좋게 자르고, 두부·버섯·채소도 먹기 좋게 썬다.
3 냄비에 물을 붓고 해물다시팩을 넣어 5분간 담갔다가 한소끔 끓인 후 중불에서 15분 정도 끓인 다음 팩을 건져낸다.
4 3에 된장을 체에 걸러 잘 풀어준 후 감자·표고버섯·양파·애호박을 넣어 5분간 끓이고 뚝배기에 붓는다.
5 4에 다진 마늘·고춧가루·냉이·두부를 넣고 한소끔 끓이다 주꾸미와 어슷하게 썬 대파·청양고추·홍고추를 넣고 다시 끓인다.
요리 및 레시피 제공 이종임 Scook청담 요리학원 원장, 박보경 아이미각연구소 소장 푸드스타일리스트 박정윤 콘셉터 픽푸, 곽영신 장소 Scook청담 요리학원
오늘은 개구리가 겨울잠에서 깨어나는 경칩이다. 새 학기 들뜬 맘으로 교정을 거닐던 기억이 떠올라서일까, 수줍게 피어나는 봄꽃이 그 시절 풋풋한 감성을 닮아서일까. 만물이 푸릇하게 싹을 틔우고, 매서운 찬바람이 기분 좋은 봄바람으로 변해갈 때면 아득한 첫사랑을 떠올리는 이들이 많다. 이맘때쯤 들리기 시작하는 ‘벚꽃엔딩’은 옛 사랑의 기억을 더욱 부풀린다. 이번 주 브라보 안방극장에서는 이유 없이 추억을 꺼내 보고 싶은 봄날, 199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첫사랑 영화 세 편을 소개한다. 소개하는 작품들은 모두 넷플릭스에서 만나볼 수 있다.
1. 건축학개론 (Architecture 101, 2012)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유명한 속설이 있다. 난생처음으로 사랑에 빠진 상대와 한평생 함께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세월이 흘러 첫사랑과 재회해 다시 사랑에 빠지게 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영화 ‘건축학개론’은 ‘승민’(엄태웅·이제훈)의 첫사랑 ‘서연’(한가인·수지)이 15년 만에 나타나 집을 지어달라는 부탁을 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얼떨결에 서연과 집을 짓게 된 승민은 그녀를 만난 뒤 잊고 지내던 기억이 떠오르고, 옛 감정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낀다. 199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는 전람회 ‘기억의 습작’을 비롯해 당시 유행하던 가요와 삐삐, 복고풍 패션 등 다양한 장치로 그 시절의 정서를 섬세하게 표현해 중장년층의 공감을 이끈다. 또 과거와 현재를 교차해 보여주면서도 20대의 풋풋한 감정과 30대의 담백한 사랑을 매끄럽게 연결해 작품의 몰입도를 높인다. 특히 이어폰을 나눠 끼고 CD플레이어를 통해 노래를 듣는 장면은 첫사랑 영화사의 명장면으로 꼽힌다. 배우 조정석의 인생 캐릭터를 만들어준 ‘납득이’의 능청스러운 연기도 작품의 매력 포인트 중 하나다.
2. 귀를 기울이면 (Whisper Of The Heart, 1995)
‘지브리 스튜디오 애니메이션 ’하면 떠오르는 작품들이 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하울의 움직이는 성’, ‘이웃집 토토로’ 등이다. 그러나 세 영화가 탄생하기도 전, 1995년에 제작된 숨겨진 명작이 있다. 지브리 최초 청춘 로맨스 영화 ‘귀를 기울이면’은 문학소녀 ‘시즈쿠’(혼나 요코)가 도서관에서 빌린 책마다 ‘세이지’(타카하시 잇세이)라는 이름이 적힌 것을 발견하고, 같은 취향을 가진 소년에게 호기심을 가지며 생겨나는 일을 그린다. 그러다 우연히 골동품 가게에서 세이지를 만난 시즈쿠는 소년이 바이올린 장인을 꿈꾼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세이지에 자극을 받아 자신만의 소설을 써보겠다는 목표를 세운다. 영화는 기존 지브리 작품과 달리 판타지적인 설정도 없고 주인공이 비범한 일에 휘말리지도 않지만, 특유의 명랑하고 동화적인 연출로 두 청춘남녀의 성장 이야기를 특별하게 만든다. ‘건축학개론’이 아련한 20대의 기억을 불러일으킨다면, ‘귀를 기울이면’은 순수하고 발랄한 10대 시절의 향수를 자극한다. 그 어느 옛날, 희미하지만 잊을 수 없는 유년기의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3. 나의 소녀시대 (Our Times, 2015)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청설’, ‘말할 수 없는 비밀’ 등 수많은 청춘 로맨스 영화를 흥행시킨 대만은 첫사랑 영화의 성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없던 첫사랑도 생길 것만 같은 대만의 청량하고 싱그러운 분위기는 그 자체로 낭만적이다. 그중에서도 ‘나의 소녀시대’는 첫사랑의 로망을 듬뿍 담아낸 작품이다. 영화는 1994년, 유덕화의 광팬인 소녀 ‘린전신’(송운화)과 학교를 주름잡는 불량소년 ‘쉬타이위’(왕대륙)가 서로의 첫사랑을 이어주기 위해 함께 시간을 보내다 서서히 가까워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영화 속에는 첫사랑 영화의 클리셰라고 할 법한 모든 장치들이 들어있다. 만날 때마다 으르렁거리던 두 사람은 어느 날 서로의 진심 어린 모습에 낯선 감정을 느끼고, 꾸미는 것에 소질이 없던 여주인공은 꽃단장을 시작하고, 사고만 치고 다니던 남주인공은 여주인공을 위해 개과천선하려 노력한다. 다음 장면이 예상되어 다소 진부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점차 그 유치한 매력에 푹 빠져 끝내 포털 사이트에 주인공의 이름을 검색해보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