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난해엔가 가을에 갔던 연천은햇살이 바삭하고 고요했던 산하가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이번에 찾아간 봄날의 연천은 조금 달라진 기분이다. 충분히 봄날인데도 바람이 차서 자꾸만 옷깃을 여몄다. 더구나 휴전선과 가까운 최북단이라는 이유로 사진 한 장 담아보지 못한 채 느낌이 확연히 달랐던 봄바람을 맞으며 산을 내려왔다.
마침 전방 마을의 주민께서 안내해주신 덕에 고맙게도 최전방 마을을 잠시 돌아볼 수 있었다. 백학면이라는 연천의 최전방 마을은 아무리 둘러봐도 인적이 드물다. 마을 길 옆으로 자그마한 단층 지하에 백학역사박물관이라는 이름을 붙여놓은 게 보였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나 3.1 독립운동 시절에 몸과 마음을 바쳐 대항했던 이 지역 영웅들의 이야기를 모아놓은 그들만의 소중한 공간이었다. 알고 보면 우리 모두의 소중한 이야기다.
바로 맞은편 작은 광장에는 영웅정신계승마을이라는 탑이 우뚝하다. 그 옆으로 전장(戰場)에서 총을 잡는 대신 지게를 짊어진 민간인들의 활약을 새겨놓은 긴 설명이 있어서 꼼꼼히 읽어보았다.
호국보훈의 달, 최북단의 접경지역 연천을 가다
한국전쟁 당시 접전지역이 산악지형이었기 때문에 전투물품 운반에 어려움이 컸다. 이때 5시간씩 걸리는 험한 길을 민간인들이 45kg 정도의 포탄을 지게로 짊어지고 날라다준 덕분에 승리했다는 이야기가 있는 마을이었다.
지게부대로 연인원 30만 명이 투입되었다 하니 주민이라면 누구나 지게를 짊어지고 날마다 나선 셈이다. 군번도 계급장도 없는 애국자들이다. 지게 모양이 영어의 A와 비슷하다 하여 미군들은 A부대라고 불렀다고 한다. 내 나라를 지켜내겠다는 마음으로 탄약을 지어 나르는 이들을 보면서 유엔군들은 이들이 자신들의 생명줄이며 전투의 절반은 이들의 공이라고 극찬하기도 했다고 한다. 피복이나 총기도 지급되지 않았고 가파른 절벽을 걸어 다니느라 희생되신 분들도 적지 않았다 하니 마음이 못내 안타깝다.
다크 투어리즘의 증표, 레클리스 하사 이야기
또 한 가지 잊지 못할 이야기가 있다. 지게부대 이야기 옆으로 숨은 영웅 레클리스(Reckless) 하사와 한국전쟁 이야기가 그림으로 남아있다. 레클리스는 전쟁 당시 군인이 아니라 군마(軍馬)다. 한국전쟁이 치열하던 중에 포탄 운반용 말이 필요했다. 이때 미군들이 신설동 경마장에서 구입한 퇴역 경주마의 이름이 바로 ‘아침 해’였다. 미군들은 아침 해의 별명을 레클리스라고 지었다.
레클리스는 영리한 전투마로 미 해병들과 지내면서 우수한 전투병이 되어갔다. 포탄이 쏟아지는 전쟁통에 엄청난 양의 포탄을 짊어지고 옮기는 용기와 헌신은 전쟁 영웅이 따로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사람이 없을 때는 혼자서도 고지를 왕복했다고 한다. 병사들과도 친구처럼 지냈던 전우 레클리스는 정전협정 후 미국 버지니아 본부로 데려갔다. 그리고 미 역사상 처음으로 군마인 레클리스를 하사관으로 진급시켰고 성대한 전역식으로 예우를 다했다고 전한다.
레클리스는 해외 유명 언론에서도 특집기사로 다루었다. ‘라이프 매거진’ 특집에서는 ‘세계 100대 영웅’에 선정되었다. 한국에서도 2013년 우리의 전쟁영웅 레클리스의 실물 크기 동상을 세워 우리 곁에서 영원히 살게 했다. 이른바 연천 백학마을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의 증표, 한국전쟁의 영웅 레클리스 동상이 연천 고랑포구 역사공원에 북녘을 향해 우뚝 서 있다.
고랑포구는 1930년대에 최고의 무역항으로 번창했다. 한국전쟁 때는 최대 격전지이기도 했고 휴전 후에도 통일 한국을 위한 접경지역으로 꼽히는 곳이다. 고랑포구 역사공원 안으로 들어가면 전시실과 VR, AR 체험은 물론이고, 저잣거리와 카페테리아 등이 마련되어 있다. 교역이 왕성했던 고랑포구는 옛 명성과 달리 역사공원 앞으로 임진강변의 강물만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백학면에서 들러볼 곳이 또 하나 있다. DMZ백학문화활용소라는 갤러리는 연천만의 지역적 특색도 있지만 전시물도 특별하다. 현재는 정전 70주년을 맞아 ‘백학역사박물관 유물 다시 보기’ 전시를 진행 중이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치열했던 전쟁과 그 상흔을 더듬어볼 수 있는 기회다. 행사는 6월 30일까지다.
한탄강 주상절리 천혜의 지질 여행
연천은 한탄강을 중심으로 펼쳐진 주상절리를 빼놓을 수 없다. 이곳을 중심으로 세계지질공원 투어도 있고, 힐링을 겸한 트레킹 코스도 연결되어 있어서 많은 이들이 찾아드는 곳이다. 주상절리라는 특이한 지질 구조는 화산 지형인 제주도를 비롯해 우리나라에 여러 군데 분포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임진강과 한탄강이 만나는 곳에 형성된 수직의 주상절리는 병풍처럼 독특해서 관심 있는 사람들이 찾아드는 지질 명소다. 물결은 잔잔하고 봄볕은 화사한데 한두 명의 강태공이 낚싯줄을 던져놓고 하세월이다. 평화로운 풍경 속에 바람은 아직 차다.
주상절리 바로 위쪽으로 숭의전을 올라가 봐도 좋다. 홍살문 입구에서 찬 우물물 한 바가지 시원하게 들이켜고 숲길을 걸어 올라가면 조선시대에 고려의 태조, 현종, 문종, 원종과 공신들의 제사를 지냈던 고려의 종묘인 숭의전이다. 주변으로 수백 년 수령의 나무들이 에워싸고 있고 담장이나 기와에서 자라는 잡풀과 푸른 이끼가 세월을 말해준다.
한탄강 지질 명소 중에 연천 전곡리 유적은 이 땅에서 발견된 구석기 유적 중에서 가장 오래된 곳이다. 우연히 이곳을 발견하게 된 사연도 흥미롭다. 기록에 따르면 1977년 주한미군 그렉 보웬이 데이트를 하던 중 한국인 연인이 주워온 ‘이상한 돌’을 보고 전문가에게 조사를 요청해, 이곳이 중요한 유적지라는 사실이 밝혀졌다는 것이다. 그때의 돌이 30만 년 전의 돌로 추정되는 전기 구석기 유물인 전곡리 주먹도끼라고 한다. 이곳이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지정되면서 지질 명소를 보전하기 위한 노력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전곡선사박물관에는 그 옛날의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유물이 전시되어 있고,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도 만나볼 수 있다.
박물관 주변에는 유적공원이 형성돼 있는데,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당시를 상상해볼 만하다. 넓은 잔디광장에서 다양한 조형물을 보면서 까마득한 옛 시간을 생각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볼거리도 많고 공기도 맑아서 산책길이 더없이 즐겁다.
돌아가는 길에는 한탄강 인접 지류인 재인폭포(才人瀑布)를 들러봐야 하지 않을까. 몇 년 전만 해도 물길 아래로 내려가서 시원한 물줄기를 구경하거나 길 옆 절벽 위에 서서 카메라 셔터를 눌렀는데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주차장도 넓어졌고 넓은 캠핑장도 생겨났다. 전망대와 출렁다리가 이어졌으며, 데크를 따라 양옆으로 편리하게 내려갈 수 있다.
비가 많이 온 후에는 엄청난 수량이 쏟아지며 물소리가 귀를 때린다. 그렇지 않을 때도 직선의 길쭉한 물기둥이 소리를 내며 수직으로 떨어져 내린다. 폭포 이름이 재인인 것은 옛날에 줄타기를 잘하던 재인(才人)의 이름으로, 그에게는 예쁜 부인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고을 수령이 부인을 탐하여 재인에게 폭포에서 줄타기를 하게 한 후 줄을 끊어 죽게 한 것이다. 부인은 수령의 코를 물고 폭포에서 자결했다는 슬픈 전설이 전해진다.
연천은 경기도 최북단 접경지역이다. 길을 가다 보면 군부대가 심심찮게 보이기도 하지만 인구밀도가 낮아 사방으로 한적하고 여유롭다. 울창한 산림자원도 풍부하고, 호로고루성이나 당포성, 은대리성 등 옛 성곽이 보여주는 오랜 세월의 이야기도 품고 있는 고장이다. 천혜의 자연환경이 지금껏 그대로 보존되고 있는 것은 연천이어서 가능한 일이 아닐까 싶다.
작품 속 캐릭터를 보고 실제 배우의 성격을 오해할 때가 있다. 배우 최수린(49)은 악한 캐릭터를 주로 맡았던 터라 실제로도 까칠하거나 차가운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실제의 그는 작품 속 모습과, 머릿속 막연한 생각과는 180도 달랐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천성이 선한 사람이었다. 5월 봄날의 햇살을 꼭 닮은 그의 해맑음은 연기로는 나올 수 없는 본연의 것이다.
최수린은 과거 MBC ‘밥줘’, KBS 2TV ‘내사랑 금지옥엽’ 등에서 얄미운 캐릭터를 맡아 연기했고, 근래 작품에서는 주로 못된 시어머니 역할을 소화했다. 최근 작품인 KBS 2TV 일일드라마 ‘태풍의 신부’에서도 그는 비슷한 역할로 등장했다. 최수린은 사실 다양한 역할을 소화한 스펙트럼이 넓은 배우다. MBC 사극 ‘김수로’와 ‘마의’에서는 선한 캐릭터를 연기하기도 했다.
“악녀 연기, 시어머니 연기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저는 그냥 제게 들어온 캐릭터를 최선을 다해서 연기했을 뿐이고, 그 역할들이 연이어 나오거나 대중의 눈에 띄었던 것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지금까지 맡은 역할에 대한 후회나 아쉬움은 없어요. 다만, 늘 제 연기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편견 탈피한 여배우 행보
1995년 SBS 드라마 ‘까치네’로 데뷔한 최수린은 베테랑 배우다. 활동한 지 거의 30년 차가 되어가는 그는 지난해부터 부쩍 시청자의 눈길을 끌고 있다. 제2의 전성기라고 표현해도 무방할 정도다. KBS 2TV 주말드라마 ‘현재는 아름다워’에서 밉상 시누이로 시청자들에게 눈도장을 강렬하게 찍은 후, ‘태풍의 신부’로 기세를 이어갔다.
‘태풍의 신부’는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전성시대에 15%(닐슨코리아, 전국 기준) 내외의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인기를 끌었다. 최수린이 연기한 ‘태풍이 엄마’ 남인순은 미워할 수 없는 악녀였다. 자기 자식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엄마지만, 사랑스럽고 허당 매력이 넘치는 인물이다. 최수린은 스펙트럼 넓은 연기로 남인순을 표현했고, 시청자들에게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남인순을 연기하면서 정말 행복했어요. 배우가 여러 감정선을 보여주는 캐릭터를 만나기란 쉽지 않거든요. 여자로서 질투, 돈과 자식에 대한 집착과 사랑, 미래에 대한 두려움 등 인간이 가진 여러 가지 심리를 골고루 보여줄 수 있어서 좋았어요. 연기를 하면서 몰입도 많이 했고, 즐거웠습니다.”
최수린은 드라마가 방영되는 동안 연기 호평과 함께 ‘젊은 엄마’라는 평도 많이 들었다. 그는 어린 나이부터 ‘어머니’나 ‘시어머니’ 역할을 맡아왔다. 최수린은 “20대와 30대 때 나이에 맞는 젊은 역할을 연기하지 못했다. 30대 때는 이미 40대, 40대 때는 50대 역할을 연기했다”고 말했다.
배우 중에서는 나이대가 높은 캐릭터 또는 누군가의 엄마 역할을 기피하는 사람이 꽤 있다고 알려져 있다. 최수린은 이런 편견을 깨는 반전의 행보를 펼치는 셈이다. 여기에는 그만의 스토리가 있다. 최수린은 1994년 SBS 1기 공채 MC 출신으로 연예계에 발을 디뎠다. 그러다 배우로 전향했는데, 생각만큼 잘 풀리지 않았다. 그는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았고 연기 제안도 거의 없었다. 그게 많이 힘들었다”고 회상했다.
이후 30대가 되면서 최수린은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서른 살에 아들을 낳고 배우로 복귀한 그는 본격적으로 최선을 다해 일하겠다고 마음을 다졌다. 최수린은 “항상 일이 간절했다. 나이대가 안 맞는다는 이유로 연기를 못 한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내가 역할을 선택할 처지도 아니었고, 기회가 오면 놓치지 않았다”고 말했다.
“아이를 낳은 후 30대가 됐고, 젊은 역할을 맡기에는 애매한 상황이 됐어요. 그때 제가 살을 원 상태로 다 빼지 못해서 좀 통통했거든요. 아예 머리도 볶아버렸고, 실제보다 나이가 많은 역할을 맡게 됐죠. 그게 시작이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2009년에 ‘내사랑 금지옥엽’을 만났어요. 다른 제작진분들은 다 반대했는데, 작가님이 저를 추천했다고 하더라고요. 결국 좋은 결과가 나왔고, 저한테도 터닝포인트가 됐죠.”
그렇게 최수린은 실제보다 나이 많은 역할도, 악한 캐릭터도 마다하지 않았다. 항상 최선을 다했고, 죽기 살기로 연기했다. 일을 하면서, 작품이 쌓여가면서 점점 배우라는 직업에 대한 소명의식과 애정도 생겼다.
“예전에는 잘 몰랐는데 요즘 생각해보면 연기는 제가 좋아하는 일이고, 그래서 계속 하는 거예요. 저는 연기를 하면서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 무슨 역을 맡든지 그저 잘 해내고 싶었고, 잘한다는 칭찬의 말을 듣고 싶었어요. 그리고 그 드라마로 인해 다음 드라마가 이어서 들어오기를 바랐죠. 그래서 욕심을 과하게 부릴 때도 있었는데, 그러면 연기가 미워 보이더라고요. 배우는 연기할 때 완급 조절을 잘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명상 통해 온화함 찾아
배우가 되지 않았다면 그는 어떤 일을 했을까. 최수린은 “미술 쪽 일, 뭔가 만드는 일을 하지 않았을까”라는 예상치 못한 답변을 했다. 그리고 “워낙 그림 그리고 만드는 것을 좋아해서 미대 진학을 생각했다. 특히 자개장을 좋아해서 나전장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우리 전통문화예술을 잇는 전수자들이 계속해서 나왔으면 좋겠다”라고 설명을 이었다.
최수린의 이야기를 들으며 언제 진로를 바꾸게 됐는지 궁금했다. 그는 고등학교 3학년 때 처음으로 배우를 생각했다고 털어놓았다. 열 살 많은 친언니이자 배우인 유혜리의 영향도 조금은 있었다. 그러나 정작 유혜리는 동생의 내성적인 성격을 걱정하며 배우 활동을 반대했다고 한다.
“결국 고등학생 때 마음먹은 대로 배우를 하게 됐죠. 저도 처음에는 제 성격이 연예계 활동을 하기에는 맞지 않다고 느꼈어요. 연기를 하면서 내성적인 성격이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한 것 같아요. 저의 모든 것을 보여줘도 부끄럽지 않습니다. 내성적인 사람은 평소에 표현을 많이 하지 않지만 연기라는 기회를 통해서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잖아요. 그러다보니 이제는 내성적인 편은 아닌 것 같아요.(웃음) 연기를 하고 사람들을 많이 만나면서 성격이 중화됐고, 나를 표현하는 방법도 좀 능숙해진 것 같아요.”
얘기를 나누어 보니 최수린의 성격은 내성적이라기보다는 온화하다는 표현이 맞아 보인다. 그의 일상 또한 단조로우면서도 건강하다. “나이가 들수록 체력이 떨어지는 것을 체감한다”는 최수린은 건강관리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꾸준한 운동과 식단을 통해 몸 관리를 하고 있다. 요리를 좋아하는 터라 한식 위주로 건강하게 식사하는 편이다. 마음은 명상을 통해 다스리고 있다.
“만약 누가 저를 기분 나쁘게 하면, 저는 그 사람한테 뭐가 기분 나빴는지 다 말했어요. 그러면 상대방한테 상처를 주게 되니까 결국 제가 스트레스를 받더라고요. 그래서 올해부터는 ‘한마디 더 할 걸 하지 말자’라고 스스로 다짐했어요. 말을 줄인 후 스트레스를 덜 받고 있죠. 그리고 스트레스는 명상을 통해 풀어요. 명상을 한 지는 5년 정도 됐어요. 눈을 감고 내 마음에 있는 더 큰 세상을 보는 게 명상이에요. 저는 매일 하고 있는데,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리얼한 연기하는 배우 되고파
이처럼 평온한 일상과 달리 연기할 때는 많은 에너지를 써야 한다. 소리도 지르고, 울고, 누군가의 뺨을 때려야 할 때도 있다. 최수린은 역할에 워낙 몰입하는지라 감정 소모도 심한 편이라고. 그래서 그는 작품을 마칠 때마다 훌쩍 여행을 다녀온다. 자신이 연기한 캐릭터를 보내주고 온전한 나로 돌아오는 시간이다.
“이번에 ‘태풍의 신부’를 마치고는 헝가리, 체코, 벨기에, 프랑스 등 유럽 여행을 다녀왔어요. 저는 어딘가로 여행을 떠나면 오랜 시간 머무는 편이에요. 관광지도 너무 열심히 돌아다니지 않고 일상을 지켜요. 아침에 일어나서 명상하고 운동하고, 식사도 천천히 하고요. 여행을 통해 내 마음의 중심을 찾는다는 생각이 커요. 여행을 다녀오면 차분하게 마음 정리가 되고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좋더라고요.”
최수린은 꼭 여행이 아니더라도 일상에서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끼려고 한다. 친구나 가족과 대화할 때, 지나가는 행인의 모습 등에서 자연스럽게 발견되는 표정이나 감정이 있다. 그는 그것들을 연기에 투영하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최수린의 배우로서 목표는 ‘리얼(Real)한 연기를 할 수 있는 배우’가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슬플 때, 또 어떤 사람은 즐거운 순간에 기가 막힌 톤이 나오더라고요. 그 예상치 못했던 것들을 발견하는 게 너무 재밌어요. 또 저는 고향이 안성이거든요. 어렸을 때 들었던 사람들의 말투, 느꼈던 정서, 그런 것들을 잊지 않으려고 해요. 실생활에서 연기를 배우는 거죠. 배우는 사람에게 공감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 감정에 공감해야 자연스럽게 연기로 나오는 거죠.”
최수린의 지나온 삶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항상 배움의 자세를 잃지 않는 겸손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높이 평가하지 않으며 세상만사에서 깨달음을 얻는다. 120세 시대이니 앞으로 살아갈 날이 많이 남은 만큼, 최수린도 찬란한 미래를 설계해본다. 늘 발전하는 배우가 되고 싶고, 인간적으로는 버킷리스트를 이루며 가족과 행복하게 살고 싶단다.
“저는 하고 싶은 게 많아요. 스카이다이빙도 해보고 싶고, 어학 공부를 해서 새로운 언어를 마스터하고 싶기도 해요. 50대는 친구들끼리 여행을 많이 다닐 때라고 하던데, 이제 성인이 된 아들하고도 같이 여행을 다니고 싶어요. 함께 같은 걸 보고 느끼면서 배우는 부분이 많을 것 같아요. 꼭 여행이 아니더라도 아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겠다고 생각해요. 여러분도 하고 싶은 것을 하시면서 인생을 즐기면서 사세요.”
김두엽 할머니의 그림 생활은 여든셋의 어느 날, 달력 뒷장에 무심코 그린 사과 한 알에서 시작됐다. “아따, 엄마 솜씨가 보통이 아닌데!”라는 아들의 칭찬에 춤을 추듯 마음 가는 대로 그렸다. 무심한 남편과의 결혼 생활, 끝없이 이어지는 가난과 싸우며 고생스러운 젊은 시절을 보냈지만 ‘그마저도 추억’이라며 밑천 삼는다. 어느덧 아흔여섯의 화가가 된 그는 오늘도 작은 나무 책상에 앉아 모진 세월을 희망으로 바꾸고 있다.
전라남도 광양시 봉강면. 알록달록 물감 칠해진 시골집에는 늦깎이 예술가, 김두엽 할머니가 살고 있다. 그의 그림은 거실, 부엌, 안방 곳곳을 꿰찼다. 완벽한 직선은 아니지만 꼬불꼬불 섬세하게 이어진 선과 과감한 색 조합은 ‘사람 냄새’를 짙게 풍긴다. 여든셋에 그림을 시작해 올해로 14년 차 화가가 된 그는 현재까지 600여 점을 그려냈다. 그동안 수십 차례 전시회를 열었고, KBS 교양 프로그램 ‘인간극장’, 토크쇼 ‘황금연못’ 등 다양한 방송에 출연했다.
그림 그리기 딱 좋은 나이
김두엽 화가는 매일 아침 8시 반, 아침 식사를 한 뒤 어김없이 그림을 그린다. 한번 앉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영감은 지난날의 기억, 일상에서 본 풍경, 주변에서 들은 이야기 등에서 다양하게 얻는다. 그저 떠오르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손을 움직인다. 택배 일 나간 아들을 기다리며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끄적인 그림이 이토록 인생의 큰 줄기가 될 줄은 예상치 못했으리라.
“아들도 화가예요. 그림을 팔기 위해 그리지 말자는 신조를 지녔죠. 그래서 낮에는 택배 일을 하고, 퇴근하면 틈날 때마다 작업실에 있더라고요. 나는 혼자 있으니까 심심하지. 집에 굴러다니는 연필을 주워 가지고 달력 뒷장에 사과를 그렸어요. 아들이 집에 와서 ‘엄마, 이거 누가 그렸어?’ 그래요. 잘한다, 잘한다 해주니까 신이 났지요. ‘내가 진짜 잘 그리나?’ 싶었어요. 그러다가 읍내 나가서 스케치북을 두 개 사왔어요. 이것저것 그려서 벽에 붙여뒀는데 손님이 우리 집에 와서 보고는 잘 그렸다고 하셨어. 그때부터 기분이 좋아서 그리고 또 그리고 그랬지요.”
그가 창작 활동을 본격적으로 이어나간 데는 아들 정현영 화가의 도움이 컸다. 정현영 화가는 추계예술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한 뒤, 대한민국미술대전으로 등단해 다수의 개인전과 기획전에 참여했다. 중견 화가의 눈에도 처음 그려낸 어머니의 사과 그림은 놀랍도록 꼼꼼했다. 배우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계속 그리셨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어 색연필, 물감 등 다양한 색채 도구를 쥐여드렸다. 원색 위주의 과감한 색을 사용하지만 어색하지 않게 어우러졌다.
세월이라는 재료
김두엽 화가는 1928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학교는커녕 공부라는 게 뭔지도 몰랐다. 여성이라는 사실만으로 모든 상황에 제약이 존재하던 시절이었다. 꿈을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해방 다음 해인 1946년 귀국한 뒤 결혼해 아들, 딸을 낳아 길렀다. 너무 가난했던 탓에 그저 굶지 않고 사는 것, 내 가족이 평안한 것, 남편과 다정하게 지냈으면 좋겠다는 것이 꿈이라면 꿈이었다. 애정 없는 결혼 생활은 행복하지 않았고, 생계를 잇기 위한 노동은 계속됐다.
김 화가의 그림은 구김살 하나 없이 화사하고 또렷하다. 모진 시간이었지만 아팠던 과거를 오히려 사랑하고 마음에 품었기 때문일 테다. 시 ‘풀꽃’으로 유명한 나태주 시인은 김두엽 화가의 그림을 보고 영감을 받아 수십 편의 시를 썼고, ‘지금처럼 그렇게’라는 시화집을 펴내기도 했다. 두근거림이 있는 그림이라 이야기하면서 말이다.
“원하는 삶을 산 건 아니었어요. 꽃피는 봄날에 사랑하는 사람과 예쁜 원피스를 입고 나들이 가고, 어스름한 저녁 산책하다 들꽃 한 아름 받고 싶었네요. 지금이라도 내 바람을 그림으로 그려볼 수 있어 좋아요. 괴로웠던 기억도 저편으로 날아가거든.”
최근에는 함께 노년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시니어 컬러링북 시리즈’를 출간했다. 김 화가가 70대 중반부터 시작된 수전증을 그림으로 극복한 것처럼, 동년배들도 손의 감각을 되찾는 기쁨을 느꼈으면 해서다. “참 오래 살았어요. 앞날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말이 참이더라고. 나이 먹어서 그림을 매일 그릴 줄 누가 알았겠어. 기력이 없을 때도 있지만 붓을 잡고 있으면 힘이 좀 나는 것 같고 그래요. 느리더라도 천천히, 계속 그려봐야지. 여러분도 다들 힘냈으면 해요.”
삶의 허무를 피할 길이 있으랴. 유한한 시간 속에서 허둥대다 종착역에선 결국 땅에 묻혀 한 줌 거름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타성적으로 시간을 허비하는 건 바보짓의 최고봉일 테다. 서울에서 사회복지사로 일했던 전경(58, ‘583양조장’ 대표)은 타성에 젖어 시들어가는 자신의 내부를 거울처럼 들여다보고 귀농을 결행했다. 귀농으로 자신을 건져 올리고 싶어서였다. 밥은 무엇으로 벌고?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따개비처럼 지겹게 들러붙는 게 밥벌이 문제인데, 그는 이걸 술로 풀기로 했다.
전경에겐 술을 밤새도록 마시는 버릇이 있다. 가령 약간 요상한 주류협회가 있어 두주불사를 취미로 삼은 그의 공로를 인정, 금일봉이라도 화끈하게 보내준다면 얼마나 재미있으랴. 그러나 이런 식의 해프닝은 당최 벌어지지 않으며, 삶이란 그런 점에서도 무료하다. 여하튼 그는 술로 생계 문제를 풀기로 했다. 수제 맥주 양조장을 차린 것이다.
귀농 이전에 전경은 각지를 돌아다니며 몸과 마음을 둘 지역을 물색했다. 결국 이곳 전북 장수군 장계면의 오지마을을 찾아내고 쾌재를 불렀단다. 제2의 고향으로 삼기에 아무런 손색이 없는 환경이어서. 장수군은 무엇보다 산 좋고 물 좋은 걸로 한가락 하는 곳이니 말이다. 2016년에 귀농한 그는 한동안 귀농학교에 다니며 농촌과 농업의 물정부터 익혔다. 막연하나마 오래전부터 머릿속에 두었던 맥주 양조의 꿈을 현실로 구현하기 위한 기초 작업이었다.
일단 지역 여건은 수제 맥주를 만들기에 적격이라 봤다. 물은 맥주의 품질을 좌우하는 기본 요소의 하나. 그런데 이 마을의 물은 그지없이 맑디맑은 게 아닌가. 그러나 태생적 순결을 그대로 보유한 좋은 물로 좋은 맥주를 만들지라도 판매엔 그지없이 불리한 환경이다. 수제 맥주를 맛보기 위해 첩첩산중 오지까지 찾아올 사람이 대체 몇이나 되겠나? 보이느니 산이요, 들리느니 새소리뿐이다. 물방개처럼 나대는 차량으로 홍수를 이룬 도시와 영 달라 네 바퀴 달린 물건을 좀체 보기조차 어려운 산골이다.
그럼에도 맥주 판매는 물론 피자며 파스타 등을 파는 펍(Pup)까지 보태 사업에 열을 낸다. 아마도 그는 암암리에 돈키호테의 피 한 방울을 받았거나, 세상 어느 상점에서 사온 것인지 모를 모험심에 충만한 사람?
“이곳은 무슨 대단한 관광지가 인근에 형성되지도 않았고, 재미있는 이벤트가 펼쳐지는 지역도 아니다. 상식적으로 보자면 장사가 될 위치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여건의 단점을 장점으로 살릴 수 있다고 봤다. 온전한 자연 풍경이 있는 ‘깡촌’의 수제 맥주 양조장! 이게 콘셉트다. 국내 최고 오지에 있는 아주 작은 맥주 양조장이지만 기죽을 것 없다. 주말이면 손님들이 꽤 많이 찾아오니까.”
전경이 사업장으로 쓰는 건물은 제법 근사하다. 원래 마을의 구판장과 농산물 가공 공장 용도로 지어졌으나 10여 년간 빈 채로 방치된 걸 사들여 리뉴얼했다. 이런 종류의 농촌 건물 매입에는 장점이 있다고 한다. 자금이 덜 들고, 이미 인허가가 나 속임수에 당할 여지가 적다는 것. 그는 반년에 걸쳐 건물 청소를 한 뒤 내장과 외장 작업을 했다. 가급적 큰돈을 들이지 않고서. 건물의 절반은 양조 공장, 절반은 식당 공간이다.
수제 맥주와 인생은 닮았다
전경이 영업을 개시한 이래 전력을 다해온 건 당연하게도 수제 맥주의 품질 부문이다. 맥주는 발효 방식에 따라 라거(Lager)와 에일(Ale)로 나뉜다. 라거를 마시면 탄산 성분이 많아 시원한 맛을 내기 때문에 목으로 술을 털어 부은 뒤엔 캬! 소리가 난다. 대기업이 생산하는 카스나 하이트 등 대중에게 익숙한 기성 맥주들이 라거다. 에일은 수제 맥주의 다른 이름이다. 라거와 달리 향이 좋은 대신 좀 쓰고 묵직한 맛이 난다. 독창성과 장인정신으로 승부하는 게 수제 맥주의 특징이다. 전경이 생각하기에 라거 맥주가 온실에서 핀 꽃이라면, 수제 맥주는 야생화다.
“발효 기법을 수단으로 삼아 빚어내는 수제 맥주의 매력에는 인생과 비슷한 게 있다. 무엇인가 예측할 수 없는 변수에 따라 술맛이 달라지기 때문이지. 이건 공장에서 찍어내듯이 대량 생산되는 일반 맥주에서는 볼 수 없는 특징이다. 계절에 따라, 일기에 따라 전부 다 다른 맛이 나온다.”
수제 맥주 양조 경력이 6년이다. 이쯤이면 노련한 기술을 습득했겠다.
“짧은 경력에 불과하다. 나와 남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수제 맥주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고수하고 있을 뿐이다. 확실한 개성을 드러내는 나만의 인생맥주를 추구하지만 아직 멀었다.”
연주자는 연주를 하며 곧잘 몰아지경을 느낀다고 한다. 나만의 방식으로 맥주를 만들 때에도 희열이 있겠지?
“원하는 맛이 나올 때면 매우 기쁘다. 이럴 때를 나는 ‘별처럼 빛나는 순간’이라 부른다. 아하, 바로 이 맛이야! 그렇게 환호하며.”
소비자들의 반응은 어떤가?
“초기에 지역 사람들에게 맛을 보여줬더니 쓰다고 하더라. 좋은 향에 놀라는 사람들도 많았다. 수제 맥주를 처음 경험하는 이들은 대체로 강한 인상을 받는 것 같다. 기성 맥주와 달리 살균 처리와 필터링을 하지 않는 수제 맥주의 거칠면서 묵직한 맛에.”
영업이익에 만족하는가?
“처음부터 큰 기대는 하지 않고 시작했다. 지금은 전국 각지에서 손님들이 오지만 욕심을 부리진 않는다. 사실 많은 위험부담을 안고 출발했다. 그러나 다행히 첫해부터 적자를 보진 않았다. 현재까지 그저 현상 유지를 하는 수준인데, 이 정도로도 만족스럽다. 수익이야 대단한 게 아닐망정, 하고 싶었던 일을 하며 사는 것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겠나? 게다가 자연과 함께하는 삶이라 금상첨화다. 때로 내가 지금 매우 사치스러운 취미 생활을 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인생맥주 만드는 게 인생의 목표
지도를 펼치고 아직 가보지 않은 곳을 찾아 길을 나섰다가 드디어 하나의 신세계를 발견했나? 그는 만족스럽단다. 비즈니스의 성장과 확산보다 더 소중한 삶의 정서적 수준을 돋우었으니 불만이 없다는 얘기를 하고 있다. 어쩌면 그는 이미 인생의 아름다운 열매를 거둔 셈이다. 하지만 연극의 1막에서 총알을 장전했다면 3막쯤에선 총을 쏴야 한다. 이왕 사업을 시작했으니 손익분기점을 넘어 상승 그래프를 그린다고 해서 만족도가 낮아질 리 없다. 과욕과 과속은 부질없지만 지체와 안주도 따분하긴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사업의 유지만으로도 흐뭇하다는 그는 현실이 부과하는 족쇄를 모르는 자유로운 영혼일까?
소박한 생활에 자족하는 데에도 내공이 필요하다. 숨찬 질주의 의무를 면제받은 인생은 드문 법이고.
“사실 나 역시 정말 죽어라고 달려왔다. 무슨 힐링을 목적으로 대충 산 게 아니다. 귀농해서 먹고살기가 실로 만만한 일이 아니더라. 귀농 10년도 채우지 못한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게 낯간지럽지만, 치열하게 살지 않고서는 지속이 가능하지 않은 게 시골 생활이다. 난 귀농 6년 차에 이른 지금에서야 조금 자리매김했을 뿐이다. 남에게 손 벌리지 않고 살 수 있는 초석을 다진 것만 해도 어딘가? 따라서 만족하지 않을 수가 없다.”
채울 만큼 채우고도 더 채우고 싶은 게 인간의 속성인데?
“욕심을 내려놓을수록 좋은 삶에 가까워진다는 생각을 지니고 산다. 귀농 생활을 어느 정도 하고 보니 가급적 많이 내려놓는 게 이상적일 수 있다는 생각이 점점 깊어지더군. 세상사 뭐든 녹록지 않지만 충분히 내려놓을 경우엔 문제가 달라진다고 본다.”
어떤 것들을 내려놓아야 하나?
“귀농에 대한 지나친 기대, 요행을 바라는 마음, 정책지원금에 관한 욕심 등 내려놓을 게 한둘이 아니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어긋나기 쉬운 게 인생이지만 그마저 기꺼이 받아들이는 게 좋을 것 같다. 어긋나는 사이에 비로소 내려놓게 되는 것들도 있으니까.”
땀 흘린 만큼의 대가가 주어지지 않는 경우가 흔한 게 시골 생활이다. 그러나 모두가 성공한 귀농 모델이 되기 위해 내달린다. 그 과정에서 삶의 질은 점점 저하된다. 이게 귀농의 경우뿐이던가? 거의 모든 삶이 그렇다. 다들 혈관을 흐르는 아드레날린을 에너지 삼아 성난 말처럼 질주한다. 전경은 이러한 풍속에 제동이 걸려야 한다고 보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어느 딸기 농가에서 월평균 100만 원쯤의 순소득을 올린다 치자. 그쯤이면 시골에서 허리띠 졸라매고 소박하게 먹고살기에 크게 부족할 게 없다. 도시보다 한결 적은 지출로도 무난한 게 시골 생활이니까. 그러나 딸기 농가는 더 많이 벌기 위해 육체를 혹사시키며 사력을 다한다. 이렇게 되면 삶이 꼬인다. 만족은 점점 멀어지고, 몸은 물론 정신까지 피폐해질 수 있는 거다. 이런 삶이 과연 좋은 걸까? 그런 방식으로 행복을 붙잡을 수 있을까?”
당신은 어떨 때 행복을 느끼지?
“눈 뜬 아침부터 사방으로 들어오는 초록빛 자연을 바라볼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큰 행운인지 형언하기 어렵다. 살아 있음에 감사할 수밖에. 텃밭에서 딴 한 해의 첫 상추나 첫 고추를 먹을 때도 벅찬 행복감을 맛본다. 그 첫 상추나 고추가 주는 감동과 닮은 즐거움을 잘 만든 맥주를 통해 고객에게 선사하고 싶다는 게 나의 지향점이고.”
행복의 한 치 뒤에선 또다시 고난이 따라붙기 십상인 게 생활이다. 귀농 이후 가장 어려웠던 건 어떤 점인가?
“스트레스 관리 문제다. 밤새도록 술을 마셔 스트레스를 처리하는 스타일이지만 외로움에 사로잡히곤 한다. 사업이 부진했더라면 더 힘들었을 것이다. 그나마 기본은 하고 있어 다행으로 여긴다. 고민해봤자 안 될 것은 빨리 포기하는 편이기도 하다.”
귀농 실패 사례가 드물지 않다. 만약 벼랑에 몰린다면 어떤 방법으로 벗어나야 한다고 보나?
“만에 하나 내가 실패를 한다면 더 많이 내려놓는 걸로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 그런데 일에서 실패를 했다고 그게 정말 실패일까? 내가 내 삶을 주도적으로 살지 못하는 게 실패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내 경험으로 말하자면 더 내려놓을수록 더 편해지더라. 끝까지 내려놓을 수 없는 다만 한 가지는 맥주 만들기다. 공부를 더해 인생맥주를 만들어야겠다는 목표만큼은 포기할 수 없다는 거!(웃음)”
얘기는 결국 맥주로 돌아간다. 그러하니 술과 더불어 흐르는 나날이다. 이보다 더 즐거운 삶이 있겠나. 술이 있는 한 인생은 봄날이다.
전경이 주는 귀농 Tip
•철저한 귀농 준비는 기본 중의
기본이다. 준비가 부실한 귀농은 실패의 첩경이다.
•도시 생활에 쫓겨 허겁지겁 도망치다시피 내려오는 귀농은 극히 위험하다. 농사로 돈벌이를 한다는 게 만만치 않다는 걸 유념하자.
•과욕과 허영은 미리 다 내려놓고 귀농하자. 그래야 절박한 진정성으로 자신을 채울 수 있다.
•여유자금을 확보하라. 반드시 맞닥뜨리게 마련인 난관을 버틸 힘이 자금력에서 나오기도 하니까.
•부부가 함께 귀농해야 성공 확률이 높다.
•마을 원주민들에겐 붙임성을 발휘하되 처음부터 잘하기보다 끝까지 잘하는 게 중요하다. 그러면 텃세를 모르고 살 수 있다.
비목의 주인을 알아본 것일까?
참새는 벚나무에 앉아 묵념을 한다.
날갯짓에 떨어진
벚꽃잎 자리에 새 잎이 난다.
봄 햇살의 따사로움은
지난 봄날의 아픈 기억을
역사가 만들어낸 긴 상흔을
소리 없이 치유한다.
봄은 어김 없이 찾아왔다.
추운 겨울을 보내고 오는
그런 봄이어서 더욱 반갑다.
수덕사는 오래된 사찰이지만 종교와 상관없이 친숙함이 느껴진다. 낯선 느낌이 없다. 덕숭산 수덕사(德崇山 修德寺)라는 편액을 걸고 있는 일주문 주변을 둘러싼 고목들도 그저 오래 보아온 듯 덤덤하고 듬직하다. 경내가 시작되는 일주문을 넘어 유서 깊은 고찰의 기운을 받으며 고요히 걷는 맛 또한 편안하다. 이처럼 수덕사는 오래전 마을에 들어서는 듯한 기분이다.
어릴 적 가족들과 수덕사에 갔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아무리 떠올려봐도 내 기억 속의 수덕사는 지금처럼 큰 절은 아니었다. 어찌된 일인지 산속의 조그만 절로만 떠올려진다. 당시 절 마당에 들어서니 무슨 영화 촬영을 하고 있었고, 마침 내가 아는 배우도 있었다. 유난히 까만 눈과 얼굴이 어쩌면 저리도 하얗고 작은지 신기했다. 구경하다가 지나가는데 갑자기 영화 관계자인 듯한 분이 내게 와서 하는 말, 교복 입은 옆모습이 영화 속에 찍혔다는 것이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막 중학생이었던 나는 수덕사에 교복을 입고 갔다. 그리고 정작 영화 제목도 모른 채 거길 나왔지만, 수덕사는 내게 늘 그날의 풍경으로 기억되고 있다. 괜히 떠올렸나 보다. 열서너 살의 쪼끄만 아이, 와락 그립다.
수덕사는 백제 침류왕 2년에 창건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렇듯 경내에서 백제 시대의 유물들이 발견되기도 했고, 학계에서도 백제 후기에 창건되었으리라 추정한다. 또한 관세음보살의 화신인 덕숭 낭자와 수덕 도령의 설화도 전해온다. 그리하여 수덕 도령의 이름을 따서 수덕사라 하고, 낭자의 이름을 따 덕숭산이라 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수덕사의 주불전인 대웅전은 멀리서 봐도 목조 건축의 숨결이 느껴진다. 수덕사의 역사를 엿볼 수 있는 건물이다. 1937년 전면적으로 해체 수리할 때 발견된 기록으로 고려 후기 1308년에 건축되었음이 밝혀졌다. 정확한 이 기록은 우리나라 목조 건축물의 연대를 측정하는 기준이라고 한다. 수백 년을 그 자리에서 버틴 꿋꿋함을 한 번쯤 쓰다듬어본다.
전각이 중심인 법당 대웅전은 무엇보다 형태미가 뛰어나다고 평가받고 있다. 고려 시대 목조 건축의 전형이라는 평이다. 특히 단청이나 전체적인 색감을 보수하지 않은 모습이 세월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군더더기를 배제한 수더분하고 단정해 보이는 겉모습이다. 거대한 세월 속에서도 나뭇결과 창호지의 숨결이 전해지는 듯하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정면의 창문이 미닫이거나 여닫이가 아닌 들려 있는 듯한 모습으로 독특하고 멋스럽다. 국보 제49호다.
수덕사와 세 여성 이야기
대웅전 옆으로는 관음전이 있고, 일엽 스님이 입적한 환희대가 다보탑을 앞세우고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일엽 스님을 기리고자 세운 원통보전이 보인다. 1896년 평안남도에서 목사의 딸로 태어나 이화여전 졸업 후 일본 유학을 다녀온 일엽 스님은 당시 여성운동을 주도했던 인물로 언론인, 시인, 수필가, 승려로서 삶의 흔적을 남겼다. 이토록 당차고 자유분방한 삶을 살다가 1928년 입산하여 1933년 만공선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출가하여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일엽 스님이 수덕사의 견성암과 환희대에서 수도했던 사실은 지금껏 뭇사람들의 관심사이기도 하다. 또 한 여성은 나혜석. 사랑에 용감했고, 여성의 사회적 활동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던 당대 최고의 화가 다. 수덕사 입구에 있는 수덕여관에 머물며 작품 활동을 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한때 시인 묵객들이 드나들던 사랑방과 같았던 여관이다. 수덕여관은 고암 이응로 화백의 고택으로, 지금은 임시 휴관 중이다.
일엽 스님과 나혜석 화가의 사연 말고도 수덕사는 또 다른 여성의 이야기가 있다. 수덕사를 떠올리게 하는 유명한 옛 노래, ‘수덕사의 여승’. 원로가수 송춘희는 이 노래를 1966년에 불렀다. 수덕사라는 절 이름이 들어간 노래가 요즘 말로 대박을 치고 가수의 인생이 달라진 것이다. 송춘희는 현재 불자 가수 백련화라는 법명으로 팔십이 넘은 지금도 음성포교사로 나눔을 실천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인적 없는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흐느끼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속세에 두고 온 임 잊을 길 없어/ 법당에 촛불 켜고 홀로 울 적에/ 아 수덕사의 쇠북이 운다~♪
경내를 걷다 보면 곳곳에 경사가 있어서 간간이 오르내리게 된다. 수덕사는 산이나 땅의 언덕을 깎거나 다듬기보다 그 높이를 그대로 활용했다. 유난히 층층이 계단도 많아서 걷다가 때로 숨찰 때도 있지만, 주변의 산과 계곡물이 자연스럽고 사찰과 함께하는 이 모든 게 하나의 자연으로 다가온다.
입구의 일주문과 부도전을 지나면서 금강문과 사천왕문, 화려한 건물의 황하정류, 범종각과 범고각, 세월을 말해주는 소나무와 느티나무가 당당하다. 백현당 뒷길의 기도발이 잘 받는다는 관음바위에서 간절한 기도 한 번 하고, 대웅전 앞의 삼층석탑, 석등, 그 옆의 관음전, 환희대, 원통보전, 템플스테이, 1080 돌계단, 산 위로 올라가면 선객들이 줄을 잇는 정혜사 능인선원, 뚝 떨어진 견성암과 수많은 암자들… 일일이 다 말할 수 없이 많은 것들을 품은 제법 규모가 큰 사찰이다.
덕숭산의 정기를 이은 천년 고찰 수덕사, 내포 땅 가야산 남쪽의 덕숭산 중턱에 자리 잡고 무수한 이야기를 담은 절, 끊임없이 찾아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를 준다. 코로나19의 여파로 지금은 노래 가사처럼 인적이 드문 편이다. 차분하게 마음의 안식을 얻고 내려가다, 수덕사 주변의 산채나물과 더덕막걸리로 물씬한 계절의 내음을 느껴보는 것 또한 빠뜨릴 수 없다.
봄날 고택 나들이, 예산 추사고택
고택 툇마루에 앉아 봄볕을 쬐며 누리는 여유가 그리울 때다. 봄나들이를 고택으로 떠나는 것은 심신을 위한 선물이다. 어제의 시간 속에서 오늘의 내가 사색과 성찰을 얻을 수도 있다. 수덕사에서 조금만 달리면 조선 시대 대갓집 형태의 집이 나타난다. 선비의 고고함이 배어 있는 추사 김정희 선생 고택, 6칸 대청의 안채와 2칸의 안방과 건넌방, 부엌과 협문, 그리고 사랑채. 돌아보노라면 문설주와 기둥마다 추사의 글씨가 있고, 어디선가 묵향이 나고 추사의 기침 소리가 들릴 듯하다. 고택 왼쪽으로 천연기념물 백송과 함께 널찍한 잔디밭과 추사의 묘소가 시원하다. 그 옆에 자리한 추사기념관에서는 영상과 함께 추사의 업적과 정신을 엿볼 수 있다.
화려함이나 스피드를 내세우는 시대다. 아찔한 익스트림 체험이나 출렁다리를 건너는 짜릿함을 강조한다. 그런 가운데 하루쯤 숨 가쁘게 달려온 시간을 조절할 기회를 가져보면 어떨까. 슬로시티 예산 수덕사의 고적함에 이어 추사고택의 반질한 툇마루에 앉아 크게 호흡해본다.
예산 수덕사 & 추사 김정희 선생 고택
▶예산 수덕사
주소 충남 예산군 덕산면 수덕사안길 79(사천리 20)
041-330-7700
서울(남부 T)→예산터미널(07:20~19:05,
하루 4회, 2시간 10분 소요)
KTX(용산역)→천안아산역(05:20~20:30,
하루 13회, 37분 소요)
자동차 서울→서해안고속도로→대전당진 간
고속도로→예산·수덕사 IC→예산→국도 45호→
지방도 622호→수덕사
▶추사 김정희 선생 고택
주소 충남 예산군 신암면 추사고택로 261
041-339-8242 / 매일 09:00~18:00
날씨가 풀리기 시작하면서 앞다투어 봄꽃 개화 시기를 전하고 있다. 매화, 개나리, 진달래, 철쭉, 산수유, 수선화, 튤립... 그리고 벚꽃엔딩까지 친절한 안내가 줄을 잇는다. 그야말로 꽃철이다. 멀리 남녘 지방까지 가지 않아도 주변에서 만물이 생동하는 계절의 기운을 맞을 수 있는 곳, 날마다 꽃이 피어나고 있는 수도권 부천의 꽃 이야기다. (시절이 하 수상하니 사정에 따른 변동으로 꽃 축제와 입장 가능 여부를 미리 확인하는 것은 언제나 필수다.)
부천 원미산 진달래 꽃동산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이런 시 한 소절이 아니어도 봄을 떠올리면 먼저 생각나는 것이 진달래꽃이다. 부천 원미산(富川 遠美山)은 진달래 군락지로 유명하다. 봄이 되면 원미산을 뒤덮는 진달래가 온 산을 붉게 물들이고 만개한 꽃물결 속에 파묻혀 봄을 누리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초입에 세워진 김소월 님의 진달래꽃 시비(詩碑)를 지나 능선을 조금 오르다 보면 발아래로 저 멀리 부천 FC 스타디움이 보인다. 원미산 167m에 올라 정상의 원미정에서 내려다보는 부천 시가지와 종합운동장, 역동적인 축구장을 진달래 동산이 에워싸는 포인트에 서면 봄을 만끽하는 순간이 된다. 3월 중순경부터 약 한 달 남짓 만발한 진달래를 볼 수 있다.
♤가는 길: 지하철 7호선 부천 종합운동장 2번 출구로 나와서 500m 정도 거리에 있다. 참고로 1번 출구로 나와 직진하면 우측 놀이동산을 끼고 부천 순환 둘레길이 나온다. 계단을 따라 오르면 둘레길 걷기의 시작이 된다. 특히 1구간의 향토 유적 숲길은 운치 있다.
부천 자연생태공원 튤립 정원
사월과 오월 중순쯤까지 가장 화려한 색감으로 온 누리를 빛내주는 튤립을 볼 수 있는 곳, 부천 자연생태공원이다. 이곳은 부천식물원, 자연생태박물관, 부천 무릉도원 수목원, 농경유물전시관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 무엇보다도 테마 정원과 유아 숲 체험관, 힐링쉼터가 잘 조성되어 있어서 아이 어른 상관없이 다양한 볼거리가 가능한 문화휴식 공간이다. 코로나로 훌쩍 떠나지 못하는 수도권 시민들이 찾아드는 곳이기도 하다.
부천 무릉도원 수목원의 튤립은 고결하고 우아한 자태로 봄 햇살을 받으며 가장 강렬한 색감으로 최상의 멋을 보여준다. 놓치기 아까운 풍경이다. 튤립 꽃길을 걸으며 선명한 빨강, 노랑과 보라, 하양, 핑크 등의 화사한 꽃들을 들여다보는 행복은 오직 이때뿐이다. 이 무렵 담장 너머 목련은 이미 지는 중이고, 춘덕산에서는 부천을 상징하는 복사꽃 피는 마을답게 춘덕산 복사꽃 축제가 이어졌었다.
튤립 정원을 지나 나타나는 수목원은 편백 군락지 산책로와 연결되어 있어서 그야말로 힐링의 숲이다. 천천히 걷거나 곳곳의 벤치에 앉아 봄의 정취를 즐기기에 더없이 좋다. 주상절리를 연상케 하는 폭포, 생태연못 쪽으로 가면 수생식물들과 시원하게 내뿜는 분수의 물바람을 맛볼 수 있다. 나비정원, 풍차, 귀여운 토끼나 공작새의 미니 동물원은 튤립을 보러 왔다가 자연 속의 풍경에 푹 빠지는 시간이 된다. 출구로 나가면 주변에 맛집도 즐비하다.
♤경기도 부천시 길주로 660(춘의동)
7호선 까치울역 1번 출구에서 3분 정도 직진
내비게이션 명칭 검색 : 부천식물원 또는 자연생태박물관
☏부천 자연생태공원 공원 조성과(032-625-3502)로 연락
백만 송이 장미원의 화려한 봄날
해마다 오월이면 장미가 온 천지에 가득했던 부천 백만 송이 장미원, 올해도 여전히 피어나겠지만 문이 활짝 열리기를 기대해 본다. 혹시라도 아쉬움에 찾아가 장미원 둘레 담장 너머로 먼발치의 장미꽃들을 바라볼 만도 하다. 돌아보면서 군데군데 나타나는 장미 터널과 예쁜 포토존이 행복감을 주는 장미원이다.
부천 백만 송이 장미원은 부천시에서 1998년 150000여 그루의 장미나무를 심으면서 시작되었다. 장미 한 그루에서 7~10송이의 꽃이 피어나기에 백만 송이의 꽃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벚꽃이 눈부시게 피어나는 주변의 도당산이 에워싸고 장미를 비롯한 야생화 단지와 분수대, 체력장 등의 시설들이 갖추어진 장미꽃 테마공원이다. 오월과 칠월 사이에 절정을 이루는 백만 송이 장미를 풍성하게 볼 수 있다.
♤경기도 부천시 도당동 산 34
지하철 역곡역이나 까치울역에 내려 마을버스 013-3번
☏부천시청 공원관리과 공원관리 2팀(032-625-4854)
부천 상동호수공원의 꽃양귀비
계절별 꽃 경관을 즐길 수 있는 상동호수공원. 그중에서 5~6월이면 붉은 꽃양귀비가 피어나 짙은 아름다움 속에서 힐링의 시간을 준다. 부천시에서 면적이 가장 넓은 공원으로 호수 근처로 나무 데크 길이 길게 연결되어 있어서 바람 쐬며 걷는 맛이 최고다. 또한 체육 시설과 놀이시설, 휴식 공간이 두루 잘 갖추어져 있어서 산책길에 한나절쯤 편안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공원이다.
꽃양귀비 정원에 들면 화려하고 강렬한 색상의 붉은 양귀비와 함께 청보리가 자라나고 있다. 두 가지의 어울림을 조화롭게 사진으로 담을 수 있다. 혹시 코로나의 여파로 꽃밭 가까이 갈 수 없을 수도 있으니 촬영하려면 망원렌즈를 지참해야 한다. 멀리 꽃구경 가기 어렵다고 생각된다면 부천 상동호수공원은 수도권에서 쉽게 나설만한 곳이다.
♤지하철 7호선 삼산체육관역 1번, 5번 출구 역
경기 부천시 길주로 16 복사
부천 중앙공원 능소화 터널
한때는 능소화를 찾아서 저 아랫녘까지 가기도 했다. 이제는 길거리나 동네 주변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꽃이 되었다. 그 옛날 구중궁궐 속에서 다시 찾지 않는 임금이 하도 그리워 궁녀 소화는 날마다 임금의 발자국 소리에 오매불망 귀를 기울였다. 죽으면서도 담장 아래에 묻혀 님을 기다리겠다는 애절한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궁녀 소화, 님의 발소리를 들으려 귀를 활짝 열어놓은 듯 피어난다. 기다림의 세월이 능소화로 곱게 다시 피어났다는 전설의 꽃이다.
부천 중앙공원에 가면 능소화가 터널을 이루어 피어난다. 6월 말부터 7월 중하순까지 흐드러지게 만개했다가 툭툭 떨어지며 진다. 꽃이 지는 모습도 볼만해서 능소화 터널 아래 낙화가 뿌려져 있을 때 다시 가기도 한다. 더위와 비바람에도 흐트러진 남루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꽃잎 하나씩 날리며 지는 게 아니고 미련 없이 꽃 한 송이 통째로 떨어뜨리는 게 능소화의 마지막 모습이다.
♤경기 부천시 중동 1177(부천 시청 뒤편)
도시 인근에 꽃 피는 산과 맑은 냇물이 있으니 어련했으랴. 행락객들로 몹시 붐비는 곳이었다. 휴일이면 수만 명의 인파가 몰려들어 소풍을 즐겼다. 덩달아 주변 일대의 식당과 주점이 성황을 이루어 난장판처럼 어지러웠다. 경기도 안양시 삼성산 자락에 있었던 예전 안양유원지의 모습이 그랬다. 이 유원지는 결국 제풀에 지쳐 시들었다.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난개발이 극에 달한 데다 대홍수가 계곡을 휩쓸어서다. 이렇게 사필귀정처럼 붕괴한 유원지를 딛고 문화 공간의 신예로 데뷔한 게 안양예술공원이다. 안양시가 주관한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APAP, Anyang Public Art Project)의 트리엔날레를 기반으로 2005년에 첫발을 내딛은 것. 지금은 안양문화예술재단이 주도한다.
안양예술공원 일대엔 조각과 설치 미술, 디자인 작품 60여 점이 산재한다. 다시 말해 수많은 미술 작품으로 구성한 노천 미술관이다. 일명 ‘화이트 큐브’라 일컫는 기성 미술관들의 정형성에서 탈출, 거리와 산야로 원정을 나간 작품들의 집합장이다.
한편 이곳은 공공미술의 전당이다. 공공미술? 이건 재미있다. 소수 전문가 그룹이 마치 대중의 미의식을 대리하는 것처럼 독점적으로 예술을 향유하는 추세에 대한 비판적 시각에서 발생한 게 공공미술이다. 즉 미술관에 들어앉아 사람을 불러들이는 게 아니라 생활 속으로, 대중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간 미술이다. 작가의 주관적 세계관을 앞세우기보다 미술 행위를 펼치는 지역의 장소성, 역사성, 공공성을 중심에 두고 조형물을 생산, 제작 현장에 그대로 전시하는 장르이기도 하다.
안양예술공원 관람 기점은 ‘안양파빌리온’이다. 20세기 모더니즘 건축의 신사조를 주창한 알바루 시자(Alvero Siza, 포르투갈)의 작품이다. 이는 아시아에 최초로 등장한 시자의 생산물이다. 그의 건축은 논리와 합리, 그리고 개념을 근간으로 이루어지는 일반적 건축 경향과 달라 돌올하다. 추상적이고 실험적인 건축을 하니까. 빛과 재료의 물성을 중시하는 미니멀리스트 시자를 ‘건축의 시인’이라 추켜세워도 과하지 않은 게 그의 작품은 다분히 서정적이며, 지극히 관조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철저히 시각화된 여느 건축과 다르다. 간소하다 못해 금욕적이기까지 한 안양파빌리온의 건축적 성향을 보라. 튀지 않으며 모나지 않은 외관으로 주위의 경관과 조용히 조응하는 게 아닌가. 시자의 파빌리온이 어디 있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두리번거리며 찾아야 찾아지는 건 나직하고 수굿한 형상을 구현했기 때문이다.
파빌리온의 내부를 볼까. 외관의 단순성과 백색 색조가 고스란히 내부로 흘러들어 간명하고 유려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러나 단순하기만 하다면 무슨 재미? 곡면의 연쇄로 이루어진 벽면은 부드러운 리듬감으로 생동한다. 사각형과 원형, 유선형 등 다양한 형태의 창들도 흥미를 돋운다. 거대한 둥근 천장 모서리 틈새로 들이치는 자연광은 은은하게 굴절하며 공간에 빛과 그림자를 배급해 슬쩍 유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인공 조명보다 미묘하고 전위적인 저 빛살은 뭐랄까, 물이 흐르는 걸 바라볼 때처럼 상서로운 기분마저 야기한다. 태양이 쏴 보낸 광선으로 구조물에 자연을 입히는 방식은 시자의 오래된 건축적 관습이다. 빛의 유입과 변화에 관한 탐색과 성찰을 설계의 기저로 삼았다. 건축 행위를 통해 빛과 사물의 존재를 탐구한 철학자라 할 만하다. 이렇게 기똥차게 빼어난 고수의 작품을 눈요기할 수 있다는 건 흔한 행운이 아니다.
공공미술이 던지는 시대적 화두
이제 거리로 나서 냇물을 건너 산으로 들어간다. 지나치는 길목마다 작품이 있다. 거리의 미술품들은 세상에 만연한 획일성과 권태를 누그러뜨린다. 삶이 우리를 녹초로 만들지만 예술 한 자락 걸친 감성으로 에너지를 얻을 수 있지 않던가. 그래 미술품이 노상에 천변에 산야에 널려 있다는 건 황무지에 내리는 단비처럼 반갑다.
봄날의 산은 화사해 더 보태지 않아도 이미 낙원이다. 그럼에도 미술로 보탠 게 많으니 이 작품을 보고 나면 저 작품이 쓱 출연한다. 등산로를 따라 걷는 일 자체가 예술 향연에의 동참이다. 작품들 대부분은 까다롭지 않아 이해가 쉽다. 심지어 완구처럼 익살스런 소품들도 있으며, 걸터앉아 다리를 쉬게 만든 조형물들도 있다. 그렇다고 후루룩 건성으로 지나칠 일은 아니다. 이름난 국내외 작가들의 작품도 많으니까. 물론 작가의 이름을 보고 작품에 혹하는 건 우습지만, 농밀한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을 간과한다면 짜장면을 먹으러 갔다가 단무지만 질근거리다 나오는 것처럼 엉성하다.
저기 풀밭에 에페 하인(덴마크)의 ‘거울 미로’가 있다. 거울 기둥들로 원형의 미로를 만들었다. 미로란 기독교의 진리를 찾는 순례자의 유랑을 상징한다. 거울 기둥 100여 개는 불교에서 말하는 백팔번뇌의 표식이기도 하다. 기독교와 불교를 융합한 조각인 셈이다. 작가가 굳이 불교를 동원한 건 안양예술공원이 있는 삼성산이 불교의 발흥지였기 때문이다. 공공미술이 지향하는 방법의 하나는 현장의 역사성을 작품에 담는 것인데, ‘거울 미로’에서 그 전형을 볼 수 있다. 불교적 테마를 조형한 작품은 그밖에도 여러 점 더 있다. 인도네시아의 에코 프라워트는 자기 나라에서 가져온 수백 개의 대나무로 사원을 만들어 안양의 불교적 풍토를 기렸다.
공공미술은 지역의 풍속에도 지대한 관심을 표명한다. 중국 작가 왕두의 ‘신기루’는 그 본이다. 그는 이미 소실된 안양유원지 시절의 건물 형태를 대리석 조각으로 재현해 냇물에 담가두었다. 이건 공공미술의 본령이 지역의 사회사를 형상화하는 데에도 있음을 알게 한다. 공공미술은 현장의 환경 개선과 기능성 보강에도 신경을 쓴다. 작품이 통째 벤치가 되기도 하고, 어수선한 주차장을 설치 예술로 성형해 실용성과 미감을 동시에 구현한 작품도 있다. 공공미술은 이렇게 명멸하는 세사와 역사, 바람에 실려 사라진 시간들의 사연을 예술의 두레박으로 건져 올린다. 무섭게 변하는 세상과, 더 무섭게 악화되는 환경의 문제를 가급적 예리한 갈고리로 찍어내 시대의 화두로 던진다. 비교적 단순한 내러티브와 표현 방식을 구사하지만 의도가 선명해 허영이 없다.
안양예술공원 관람의 종장에선 김중업건축박물관이 덤으로 등장한다. 한국 현대 건축의 아버지라 할까. 김중업의 건축은 서구의 모더니즘을 고지식하게 차용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한국의 전통과 자연을 건축에 반영했으니까. 김중업의 설계로 지어진 옛날 공장 건물을 손질해 설립한 김중업박물관에서는 그의 설계 도면, 설계 수첩, 사진, 문학적 기록 등을 볼 수 있다. 김중업은 알바루 시자처럼 차라리 시인이었다. 그는 말했다. “건축은 노래해야 한다”고. “울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집이다”라고. 이런 시적 메시지, 들어본 적 있는가?
한결 가치 있는 생활에 대한 열망이 그의 귀촌을 부추겼다. 새 술을 새 부대에 담듯이, 인생을 한번 획기적으로 바꿔보자는 욕심으로 부푼 건 아니었다. ‘느림의 미학’ 같은 걸 추구하며 목가적인 전원생활을 즐기자는 쪽에 무게를 두지도 않았다. 그는 단지 귀촌을 통해 가급적 무엇에도 방해받지 않고 똑떨어지게 개인적인 용무를 보고 싶었다. 그 용무란 서점 일이었다.
시골에서 서점을? 지지구재재구 노래하는 새들이야 지천이지만 돌아다니는 사람이라야 마을 원주민 몇몇에 불과한 후미진 산골에서? 이건 무인도에서 혼자 ‘전국노래자랑’을 공연하는 것만큼이나 무모한 기획일 수 있다. 거북이를 끌고 산책하는 일처럼 요상한 이벤트이기도. 소비자들의 호응이 있고서야 생존이 가능한 게 서점 사업이지 않겠는가. 그러나 김미자(59, ‘그림책 꽃밭’ 사장)에겐 남다른 속대중이 있었다. 믿는 구석이 다 있었던 거다. 그 믿음이란 오직 자신의 경험과 능력에 대한 확신에서 온 것이었다. 인생의 모든 것을 가늠하는 내공까지는 아닐망정, 적어도 서점에 관한 한 일가견을 가지고 있었으니 한바탕 제대로 붙어볼만한 게임으로 여겼던 것 같다. 미리 말하자면 그의 산골 서점은 놀랍게도 탕탕 잘나간다.
“서울에서 20년 넘게 아동 그림책 관련 직업 활동을 했었다. 공공도서관과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책 읽어주는 일을 했으니까. 그림책 커뮤니티를 만들어 동네 엄마들과 함께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을 지속했으며, 그림책 카페를 7년간 운영한 경험도 있다. 머릿속에는 항상 시골 생각이 들어 있었다. 번잡한 서울을 벗어나 그림책과 시골살이를 아우를 수 있는 삶을 늘 꿈꾸었던 것이지.”
김미자가 남편과 함께 이 시골로 내려온 건 2017년. 아파트를 정리하고 남편의 퇴직금을 털어 자금을 마련하고서였다. 흔히들 귀촌지를 결정하느라 진을 뺀다. 첫 단추부터 똘똘하게 끼우기 위해 해부학 교실의 연구원처럼 면밀히 분석하고 평가해 장소를 결정한다. 그러나 그는 지루한 물색의 과정을 싹둑 잘라냈다. 숲이 있는 시골이면 어디든 무슨 상관이랴, 그리 여겼다. 경륜과 자신감을 완비했으니 어디에 갖다놓아도 승산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봤다. 리서치를 통해 몇 군데 시골 서점의 순항 분위기를 미리 눈치채기도 했다. 그는 지인이 소개한 경매 토지를 덜커덕 사들여 집을 지었다. 서점과 살림채, 그리고 북스테이 공간을 마련해 영업을 개시한 게 만 3년 전.
“처음 한동안은 손님이 오지 않았다. 날마다 매상과 마진을 계산하며 고민하는 일이 잦았다. 하지만 매우 빠른 속도로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덩달아 매출이 늘더라. 수익의 절반은 책 판매에서, 나머지 절반은 북스테이에서 발생한다. 이젠 단 한 사람의 손님도 없는 날은 없다. 덕분에 부부 둘이 먹고사는 데엔 아무런 불편이 없지. 이쯤이면 노후 생계 대책으로 충분하기에 안도감과 만족을 느낀다.”
단기간에 자리 잡다니. 이 서점은 어떤 힘과 매력을 지녔기에?
“가급적 질적 수준을 높게! 풍경은 예쁘게! 그런 모토를 정하고 충실하게 구현한 결과물이다. 예전에 일본의 숲속 도서관들을 답사한 적이 있는데 감흥이 컸다. 모델로 삼을 만했지. 아무리 외진 시골이라도 구색과 내용이 충실하면 사람들이 찾아온다는 걸 확인했던 셈이다.”
도시에도 특별히 공들인 서점들이 있지만 흔히 불황을 면제받지 못하고 있다. 이곳의 자연경관이 유력한 재료라 봐야 할까?
“아동 그림책에 주로 등장하는 내용이 자연과 생명에 관한 것이다. 시골 서점은 그 자연과 생명에 관한 아이들의 감수성을 일깨울 수 있는 환경 여건으로 한몫을 할 수 있다. 나는 그림책에 나오는 자연을 현장에서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자연과 함께 펄펄 뛰노는 아이들과 얘기하고 싶었다.”
숙박을 하거나 책을 구입하는 고객층은 어떤 이들인가?
“주 고객은 30~40대 부모와 아이들이다. 그림책 관련 각종 자격증에 관심을 가진 이들도 학습 차원에서 찾아오고, 시골 서점을 운영하고 싶어 하는 이들도 방문한다. 물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건 선생님 손에 이끌려 찾아오는 당진시 일대의 어린이집이나 초등학교 아동들이다.”
산골에서 소박하게 살기
다락을 구비한 책방 공간은 동화처럼 아기자기하되 품격을 돋워 꾸몄다. 아이들의 구미에 어울리게. 엄마들의 호감을 살 수 있게. 그림책 일색의 도서들은 모두 5000여 권. 서울에서 가지고 내려온 2000여 권과 새로 구입한 3000여 권을 합쳐 공간을 채웠다.
그림책을 좋아하던가? 게임에 사로잡힌 영혼들이 아닌가?
“아동들은 순식간에 알아차린다. 엄마가 왜 나를 책방에 데려왔나를. 그러고서 하는 말이 이렇다. 나, 책 안 봐! 오나가나 아이들은 휴대폰 게임에 몰입하는 거다.”
그럴 때면 어떤 처방을 사용하지?
“책이 싫으면 고양이하고 놀아! 마당에 나가 뛰어놀아! 그렇게 말해준다. 그러나 나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책 읽어주는 선생님’이다.”
엄마들은 책이 싫다는 아이들을 왜 굳이 이곳에 데려올까? 책을 강요하면 자칫 책을 더 징그럽게 여길 수도 있을 텐데.
“어떻게든 책을 접하게 하려는 선한 의도에 무슨 결함이 있겠나? 그러나 엄마들의 방법엔 문제가 있다. 책을 학습이나 훈육의 수단으로 활용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를 나는 늘 한다. 연령에 맞는 책을 놀이로 즐길 수 있도록 나직이 읽어주라고 권한다. 아이들에겐 가르침보다 위로가 필요하니까.”
마을 풍경을 볼까? 딱히 빼어나거나 미묘한 설렘을 자아내는 풍치는 아니다. 변방의 어디서나 흔히 만날 수 있는 농촌 마을이다. 야트막한 야산들이 강강술래를 하듯이 10여 가구로 이루어진 마을을 빙빙 감싸고돌아 푸근하다. 김미자는 이 평온한 풍경에 안심을 느끼는 것 같다. 쉽게 오를 수 있는 산과 숲이 있으니 불만이 있을 때면 애먼 남편에게 툴툴거리기보다 나무에게 하소연하는 것으로 해소하겠지. 그에겐 자연과 사계의 순환에 심취하는 버릇이 있다. 이는 자연과 동행하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사실 김미자의 귀촌은 자연에 가까이 가자는 목적에서 이루어지기도 했다. 산골에서 소박하게 살기. 그게 자신을 기쁘게 한다는 걸 깨달았던 모양이다.
자연이 좋다지만 날마다 산을 바라보다 보면 권태감이 밀려들기 십상이다. 거칠지만 생동하는 도시의 풍속도 매력적이지 않다고 말하긴 어렵다.
“권태를 느낄 겨를 없이 분주한 게 시골 생활이다. 하지만 문화적 충격과 자극이 하나도 없다는 건 큰 단점이지. 서울에서 벌어지는 공연이나 전시를 볼 수 없다는 건 너무도 아쉽다. 주변에 예술가라도 하나 산다면 해갈이 될 테지만.”
마을 원주민들의 삶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하나? 시골에도 지혜로운 이들이 있기 마련인데.
“시골 할머니들의 평온하고 깨끗한 삶의 태도에 느끼는 게 많다. 대체로 할머니들은 인간관계에서보다 땅에서 얻은 경험으로 인생을 사는 것 같더라. 그들은 아무리 노쇠했더라도 호미를 놓지 않는다. 죽기 직전까지 호미로 땅을 긁는다.”
도시의 노인들에게선 보기 어려운 야생의 에너지. 시골 노인들에겐 그런 육화된 근성이 있다.
“맞다. 처신에 깨끗하고 이치에 밝은 할머니들과 사귈 수 있다는 건 시골 생활이 주는 값진 행복의 하나다.”
먹고살 정도만 벌고, 삶은 놀이로
시골이라고 눈 밝고 경우에 환한 이들이 흔할 리 없다. 도시든 시골이든 ‘삐딱이’ 그룹이 있어 활약을 하는 게 아닌가. 김미자도 초기 한동안 유별난 이웃에게 좀 시달렸지만 적절히 타협하며 사는 게 상책이라는 생각으로 포용했다. 보다 덜 소중한 것에 보다 더 소중한 걸 훼손하고 싶진 않았던 것일 텐데, 그에게 ‘보다 더 소중한 것’은 소박한 삶의 지속이다. 물구나무 선 세상을 뒤집을 힘이야 없지만, 최소한 자신만큼은 악다구니와 돈과 허영에서 벗어나 살고 싶은 것이다. 귀촌으로 그게 가능할 거라는 예상은 딱 적중하진 않았다. 그러나 거둔 성과와 만족의 크기는 만만치 않다.
“내가 살고 싶은 방향이 뭐냐면, 월든 숲에 살았던 소로, 그리고 헨리 니어링 부부나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을 닮고 싶다는 것이다. 그런데 잘 안 되더라. 우선은 돈벌이를 하는 내가 돈에서 해방되기 어려웠다. 더 큰 문제는 도시 생활과 자본에 길들여진 남편과 공감대 형성이 어렵다는 점이었다.”
귀촌으로 부부가 함께 도시에서 한 걸음 물러난 것만도 어디인가?
“나는 오늘도 들에서 냉이를 캐왔다. 시골에 살며 산나물 채취로 식사를 한다는 것, 육식을 덜 하고, 덜 소비하고, 덜 욕심부린다는 것, 이건 뿌듯한 일이다.”
한때 암과 싸웠다지? 고통이 극심할 때면 어떤 생각을 하나?
“암! 무서웠다. 자주 권정생 선생을 생각하며 힘을 얻었다. 지극히 병약했지만 엄격한 절제로 삶을 완성한 선생은 내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다. 나 자신을 속이지 않을 수 있는 성찰의 습관도 그에게서 얻어왔다.”
심지어 가뭄에 타들어가는 벼를 바라보면서도 가여워 눈물을 흘렸던 권정생. 그는 성자가 아니었을까.
“평생 병고에 시달렸지만 강하고 꼿꼿한 분이었다. 한번은 외투를 사다드렸더니 고사하더라. 이미 있는 외투 하나로 충분하다며. 스콧 니어링도 소유에 무심해 옷 한 벌로 살았다. 그러니 어떻게 배우지 않을 수 있을까.”
터무니없는 무욕으로 살았던 고수들을 무슨 수로 따를까. 가질수록 더 가지고 싶은 게 인간이다. 당신은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나?
“돈은 먹고살 정도만 벌고, 삶을 놀이로 즐기는 게 답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나의 현실은 다르다. 일에 치여 산다. 속엔 답답한 게 많지만 장사하는 사람으로서 겉으로는 웃는다. 그러나 자연 속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주체적으로 하고 있다는 자긍심은 갖고 산다. 내가 생각하는 행복의 기준에 나를 맞춰 살고 있으니 크게 어긋난 건 아니다.”
인생을 깊이 읽고 있다는 안도감. ‘나’를 진정 즐겁게 할 수 있는 일 속에 산다는 확신. 귀촌의 나날을 선용하고 있다는 자부심. 속세에서 흔히 맛보기 어려운 감흥들로 김미자는 기쁜 것이다. 표정은 근엄하지만, 내부는 햇살로 밝아 바야흐로 인생의 봄날을 다시 만난 셈?
김미자 씨가 주는 귀농 Tip
시골에서 작은 서점을 하고 싶다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지만 함부로 덤벼들 일은 아니다. 책을 좋아하는 성향 하나만 믿고 뛰어드는 건 위험하다. 좋은 책을 고르는 능력, 인문학적 소양과 실력, 그리고 예술적 눈썰미를 미리 갖추는 게 중요하다. 본격적으로 사업에 나서기 전에 까먹어도 무방할 정도의 소자본으로 도시에 작은 북카페를 차려 경험을 쌓는 게 좋겠다. 장소 선정도 매우 중요하다. 가급적 자연환경이 뛰어난 곳을 찾자. 사람들이 많은 관광지나 명소 인근도 잘만 하면 유망하다.
선흘리 동백동산은 습지를 품었다. 비가 내려도 고이지 않고 그대로 땅속에 스며든 지하수 함량으로 사계절 보온·보습 효과가 높다. 제주에선 이런 독특한 숲 또는 지형을 곶자왈이라고 한다. 수풀을 의미하는 ‘곶’, 나무와 덩굴 따위가 마구 헝클어져서 수풀같이 어수선하게 된 곳이라는 ‘덤불’에 해당하는 ‘자왈’, 곶자왈이다. 생태계의 보고인 곶자왈 동백동산은 제주시 조천읍 선흘 1리에 있다.
겨울 동백의 계절이다. 그런데 이름부터 동백동산인 선흘마을에서는 동백꽃 보기가 쉽지 않다. 이곳이 보호림으로 지정되면서 모든 수목이 고스란히 쑥쑥 성장한다. 그에 비해 성장이 더딘 동백나무는 큰 나무들 틈에 가려서 햇빛을 보기 어려워 꽃 피울 여력이 없기 때문. 제주의 여느 동백꽃 군락지처럼 흐드러진 꽃동산은 아니지만 이곳 동백동산만의 태곳적 매력과 그윽한 은은함을 듬뿍 맛볼 수 있는 곳이다. 특히 제주 남쪽보다 꽃피는 시기가 늦어서 3~4월에도 드문드문 동백꽃을 볼 수 있다.
선흘리 마을길을 앞에 두고 있는 입구로 들어가면 널찍한 방문자 센터가 친절하다. 안내 내용을 훑어보면서 동백동산의 숲과 습지에 대한 사전 지식을 챙기고 시작할 수 있다. 약 1만 년 전 형성된 용암대지 위에 뿌리내린 숲, 곶자왈. 울퉁불퉁한 돌무더기 길에 낙엽이 수북수북하다. 덩굴식물이 뒤엉키고 촘촘한 나무들로 겨울 숲은 여전히 푸르다. 열대 북방한계 식물과 한대 남방한계 식물이 한 공간에 공존하는 독특한 식생의 숲이다. 숲길 군데군데 다양한 형태의 숯막터가 남아 마을 주민들의 살아온 생활상이 엿보인다.
밀림과도 같은 나무들 사이를 걷다 보면 적막함에 슬그머니 두렵기까지 하다. 푸른 이끼로 뒤덮인 암석 사이로 아름드리나무가 굵직한 뿌리를 드러냈다. 얽히고설키어 서로 손을 잡고 팔짱을 낀 듯 의지하며 살아가는 모습처럼 보인다. 척박한 땅에서도 자연의 숲은 이렇게 방법을 찾아간다. 맑은 새소리까지 들린다. 숲의 운치가 절정이다. 태곳적 제주의 풍경일까. 알 수 없는 신령스러움이 엄습하기도 한다. 원시림 속을 헤매는 듯하다. 제대로 된 제주의 곶자왈을 느끼게 해준다.
사실 이곳은 제주 역사의 아픈 과거가 담긴 곳이기도 하다. 제주 근대사의 뼈아픈 4.3사건 광풍이 몰아쳤던 도틀굴이 숲길에 있다. 당시 지역 주민들의 은신처였던 곳인데 발각되어 억울하게 현장에서 몰살되거나 모진 고문을 당한 피맺힌 역사의 현장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제주 동백은 4월이 더 붉다더라’라고도 말했다.
겨울이지만 사계절 피워내는 상록수림으로 숲은 울창하고 아늑하다. 걷다 보면 중간쯤에서 만나는 먼물깍.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의미의 ‘먼물’과 끄트머리라는 뜻의 ‘깍’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2011년 람사르 습지에 등재되어 보호받고 있는 먼물깍 습지다. 생활용수나 가축들이 먹었던 물로, 용암대지의 오목하게 함몰된 부분에 빗물이 채워져 만들어졌다. 사시사철 마르지 않는 먼물깍은 희귀 생물들의 서식지로도 생태적 가치가 크다. 동백동산 습지는 먼물깍을 중심으로 0.59㎢ 지역이 2010년에 환경부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되었다. 원시의 숨결 속에 비밀스럽게 자리 잡은 듯 먼물깍 주변은 온통 고요하다.
동백동산 숲길은 총 5.1km. 걷기에 따라 1시간 30분~2시간 30분 정도 소요되는 숲길이다. 동백동산의 나무는 그동안 이 터를 지켜온 선흘리 주민들의 집을 짓거나 생활 도구가 되어왔다. 습지에서 먹을 물을 긷고 일상을 해결하는 곳이었다. 그들의 소중한 삶의 터전이었던 생명의 못(池)이다. 이제는 이 모든 존재를 보존하기 위해 고민한다. 이곳에 가면 마을 공동체의 따뜻한 자연 지킴 모습을 보며 삼촌 해설사의 진솔한 해설을 들을 수도 있다.
흔히들 제주 하면 섬을 둘러싼 바다를 먼저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제주 본연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곳은 제주 땅에 자리 잡은 다양한 생태의 숲들이다. 제주의 숲은 이 터를 지켜온 현지 사람들에게 의미심장한 자부심이다. 그리고 여행자들에겐 치유라는 위로의 선물이 되어주는 곶자왈 숲이다. 사계절 울창한 숲 동백동산이 뿜어내는 청량한 생명력 또한 그렇다.
동백꽃 뚝뚝 떨어지는 겨울 동백숲으로
제주의 겨울 여행이라면 호사스러운 동백꽃 구경을 하고 볼 일이다. 제주 서귀포 위미리에 가면 동백꽃 명소가 몇 군데 있다. 위미리는 제주국제공항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정도 거리다. 동백꽃 성지라고도 할 수 있는 위미리 마을의 돌담길을 걷다 보면 머리 위로 동백꽃이 툭툭 떨어지는 것을 경험할 것이다. 바닥을 온통 붉게 물들인 듯 레드카펫을 이룬 동백꽃길도 쉽게 볼 수 있는 동네다. 제주에선 초겨울부터 초봄까지 붉은 동백을 푸지게 볼 수 있다.
SNS에서 제주 동백이라는 해시태그로 검색하면 여러 군데의 동백 군락지가 나온다. 그중 동백수목원은 붉은 애기동백이 솜사탕처럼 타원형으로 붉은 꽃을 피운 모습이 아름다워 겨울이면 포토 스폿으로도 인기 있다.
남원읍의 위미리 동백군락지는 백여 년 전만 해도 황무지 돌밭이었다. 열일곱 나이에 이 마을로 시집 온 고 현맹춘 할머니가 제주의 모진 해풍을 막아내기 위해 동백나무를 심으면서 현재의 위미리 동백군락지를 만들어냈다. 제주 고유의 토종 동백나무 숲과는 달리 부근의 동백수목원은 할머니의 증손자가 만들어낸 숲이다. 4대째 이어온 동백 사랑이다. 500여 그루의 애기동백을 심어 조성한 것으로 또 다른 제주 동백의 명소가 되고 있다.
애기동백과 토종 동백의 차이를 본다면, 토종 동백은 1월 엄동설한에 피어나 3월까지 피고 지고를 거듭하는 붉은 동백이다. 반면 애기동백은 11월부터 피우기 시작하는데 꽃 색감이 짙은 분홍빛이다. 뿐만 아니라 꽃 한 송이가 비장하게 통째로 툭 떨어지는 토종 동백에 비해 애기동백은 꽃잎을 분분히 흩날리며 떨어진다.
애기동백의 색감은 유난히 핑크빛이다. 러블리한 핑크빛 동백숲에서 웨딩 촬영을 하거나 연인들의 인생샷을 담기 위한 포즈를 곳곳에서 본다. 봄날처럼 온화한 기후 속에 행복 넘치는 공간이다. 판타지 동화 속에 나올 듯한 미로의 숲처럼 빽빽한 애기동백 숲을 누비다가 수목원 2층 전망대에 오르면 건너편에 펼쳐진 제주의 시원한 바다가 이국적이다.
붉은 애기동백이 올망졸망 피어 있는 동백숲. 꽃망울을 터뜨리는 11월 말부터 피기 시작해 지역에 따라 피고 지고를 달리하는 모습을 초봄까지 볼 수 있다. 겨우내 피어 있어 지긋하게 만날 수 있으니 제주의 겨울 여행 중 새하얀 눈 속에서 선홍의 동백꽃을 찾아가 봄 직하다. 이름부터 ‘겨울 동’(冬)에 ‘나무 이름 백’(柏)이다. 허나 꽃이 이미 속절없이 떨어졌으면 어떠랴. 동백꽃은 역시 낙화한 모습 아니던가. 풍성하게 만개했을 때의 멋과는 달리 선혈 낭자하게 뚝뚝 떨어져 있는 모습도 겨울 동백의 풍경이다.
제주 동백동산 & 제주 동백수목원
제주 동백동산
•주소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선흘리 산 12
•문의처 : 064-784-9445
•이용 시간 : 09:00~18:00
제주 동백수목원
•주소 :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리 929(주차장 931-1)
•문의처 : 064-764-4473
위미동백나무군락(기념물 제39호) : 위미리 904-1
11월 이후 겨울 시즌 동안만 영업. 유선 확인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