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의 들판에 가면 푸릇푸릇하게 돋아 나오는 봄나물들을 볼 수 있다. 그중에 이른 봄의 향취를 느낄 수 있는 쑥이 있다. 인적이 드문 산속이나 논둑과 밭고랑마다 솜털 보송보송한 어린 쑥이 고개를 내밀면 온 세상이 봄 천지다.
쑥은 어느 지역이나 상관없이 쑥쑥 잘 자라는 특성으로 자생력도 강하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어 온통 잿더미로 변한 마당에도 가장 먼저 파릇하게 고개를 내민 것이 쑥이었다고 한다. 그만큼 쑥은 강한 생명력을 가졌다.
단군 신화에도 등장하는 쑥은 우리에게 이미 친숙하다. 나쁜 액을 물리친다고 믿어져 왔고 우리 민족에게 오랫동안 쓰여 온 약재이기도 하다. 동의보감에 따르면 성질이 따뜻해서 장기 기능을 강화하는데 효과가 있다. 그뿐만 아니라 부인병에도 탁월한 효과가 있고 비타민 A와 C가 풍부해 노화방지와 원기 회복에 좋다. 특히 독특한 향이 어느 음식에나 잘 어우러진다. 그리고 절기상 입하에 먹는 음식으로 쑥을 이용한 요리가 많다.
나른한 봄날 쑥을 이용해서 간단히 제철 음식을 만들어 먹을 기회다. 영양은 물론이고 춘곤증을 날려버릴 수 있다. 멥쌀가루와 쑥만 있으면 언제라도 쑥향이 솔솔 나는 쫄깃한 쑥버무리가 간단히 만들어진다. 봄의 미각을 살려내기 좋은 소박한 떡 '쑥버무리'를 간단히 만들어 보자.
◇봄날의 건강 별미, 쑥버무리 만드는 방법
재료: 멥쌀가루 5컵, 물 약 50~60ml(쌀가루의 수분 함량에 따라 가감), 소금 1 작은술, 설탕 20g, 쑥 두어 줌. (취향에 따라 생밤, 대추, 콩 추가)
1. 넓은 볼에 멥쌀가루를 넣고, 준비된 물에 소금을 넣어 녹인다.
2. 멥쌀가루에 소금물을 조금씩 부어가며 비비면서 잘 섞는다.
3. 마지막으로 설탕을 넣고 살살 섞은 후 잘 씻어 준비한 쑥을 넣고 버무린다.
(이때 생밤이나 대추, 콩 등을 섞는다)
4. 찜기에 젖은 면포를 깔고 약간의 쌀가루를 얇게 깔고 버무린 것을 담아 올린다.
5. 뚜껑을 덮은 후 센 불에서 15~20분 정도 찐 후 불을 끈다. 불을 끈 채로 5분쯤 뜸을 들이면 쑥버무리 완성.
◇봄 쑥 보관법
-쑥 가루: 깨끗이 씻은 쑥을 바싹 잘 말려서 푸드프로세서에 곱게 갈아 병에 담아 보관한다. 쑥 가루는 식이섬유가 많고 저열량, 저지방으로 다이어트에 좋다. 특히 몸을 따뜻하게 하고 성인병에 좋으니 준비해 두면 요긴하다. 각종 요리나 베이킹에도 이용하면 좋다.
-요즘은 찻집에서 쑥 라테가 건강음료로 인기를 얻고 있다.
*냄비에 우유를 넣고 단맛을 위해 연유(설탕, 꿀 가능) 넣은 후 중불로 끓인다. 거품기로 기포를 내고 분량의 쑥 가루를 넣어 한 번 더 거품 올려 마무리. (또는 보틀에 모든 재료를 분량만큼 한꺼번에 모두 넣어 쉐킷 쉐킷, 간단 완성~)
-냉동 쑥: 봄에 나는 쑥을 오래 보관하면 사계절 먹는 방법이 여러 가지 있다. 깨끗이 씻어 데친 후 물가를 꼭 짜서 먹을 만큼씩 소분해서 냉동 보관해도 맛과 향이 유지된다. 이것으로 사시사철 어느 때라도 쑥을 이용한 요리를 만들어 먹을 수가 있다.
1년에 단 한 번 4월 즈음에 나는 자연의 선물 쑥이 주는 봄의 정취와 건강을 함께 챙겨볼 때다.
매일 오후 12시 20분이 되면 만나게 되는 반가운 목소리와 함께 시작되는 대한민국 대표 라디오 프로그램. 바로 ‘싱글벙글쇼’다. 국내 시사 풍자 라디오 쇼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싱글벙글쇼’의 안주인으로서 33년 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김혜영은 공동 진행자인 강석과 함께 오랜 세월 사람들이 듣고 싶은 얘기들을 들려주고 웃음과 위로를 전하며 변치 않는 사랑을 받고 있다. 격동의 시대 한복판을 살아오면서 치른 김혜영의 삶과 깨달음이 위기의 시대인 지금 어떻게 다가올 수 있을지, 그녀와의 반가운 인터뷰를 통해 탐색해봤다.
가히 역병의 시대다. 코로나19로 기존의 모든 것들이 흔들리는 세상이다. 일상에서는 언제 침입할지 모를 전염병이 걱정이고 경제 지표를 읽는 사람들은 세계적인 경기 위축 현상이 불러올 혼돈을 걱정한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있다. 1987년부터 지금까지 무려 33년 동안 ‘싱글벙글쇼’를 진행하고 있는 김혜영 또한 아랑곳하지 않고 항상 우리 곁에서 힘을 보태주는 그런 이들 중 한 명이다.
항상 우리 곁에 있는 사람
처음 인사는 흉흉한 상황인 만큼 코로나19 바이러스로부터의 안부를 먼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일은 하고 있는데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죠. 요즘 줌바 댄스에 재미 붙였는데.(웃음) 그래도 자기관리는 계속하고 있어요. 여의도공원과 여의도 아파트 광장을 수시로 걷고 PT도 계속 받아요. 최근에 춤추는 걸 한번 해보자 해서 줌바 댄스를 시작했는데요. 몸이 가벼워지더라고요. 그런데 어쨌든 상황이 이리 돼서….”
비록 안타까움이 묻어났지만 라디오에서 들을 수 있는 그 밝고 반가운 목소리 그대로였다.
김혜영은 무엇보다도 액티브하다. 자기 자신에 대한 열정이 있는 사람답게 많은 걸 배웠고 배우는 중이다.
“필라테스, 우쿨렐레와 캘리그래피도 배우거든요. 라디오 녹음하는 날에는 스튜디오까지 계단을 걸어 올라가고요. 나이가 들면 허벅지 근육으로 살아야 하니까요. 건강하게 늙고 싶은 마음이에요. 오늘도 중요하지만 다음 일도 대비해야 하는데, 저희 같은 방송인은 몸 자체가 상품이잖아요? 다른 무엇보다 건강해야겠다는 생각이 앞설 수밖에 없죠.”
그녀는 나이 들어 싫은 건 얼굴 주름뿐이고 나쁜 건 없다고 단언했다. 긍정의 에너지가 그녀 주위에 넘실거리고 있는 듯했다.
“마음의 여유, 경제적 여유, 아이들이 다 큰 것에 대한 여유가 있죠. 그리고 남편이 내게 시간을 주는 것도 고마워요. 그동안 열심히 살았으니 너의 시간을 충분히 가지라고 하거든요. 그래서 그냥 내가 건강하고 즐거우면 된다고 생각해요. 행복하냐고요? 그렇죠.”
남편과의 오래된 약속
그러고 보니 김혜영의 남편 얘기가 궁금했다. 김혜영이 유명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남편은 지금껏 미디어에 노출된 적이 없다.
“나로 인해서 TV와 잡지에 나가고 싶지 않다는 게 남편이 결혼 전 내걸었던 조건이었어요. 저는 십분 이해할 수 있어요. 그래서 실물은 공개 안 해요. 남편은 결혼을 하고 지금까지 마음의 변화가 없는 사람이에요. 변덕을 부리면 제가 부리지, 남편은 한결같아요. 그래서 아가씨들이 저 사는 모습 보면 결혼하고 싶다고 하더라고요.(웃음)”
아무래도 그녀의 남편은 대쪽 같은 남자인 듯싶다. 그러나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방송하는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쫑파티하고 밥 먹고 들어오는 것을 보곤 ‘너는 연예인이기 전에 가정주부니까 제 시간에 들어와야 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한 번 대판 싸우고 제가 깔끔하게 정리했죠.(웃음) 그다음부터는 그런 거에 대한 얘기가 없어요. 현재까지. 그리고 제가 문제를 일으킬 일을 안 하니까요.”
“사람이 너무 좋다”
김혜영은 요즘 동네 사람들과 다양한 취미활동과 함께 어른들을 모시는 사회공헌적 모임도 하고 있다. 1년에 한 번 5월에 소장품을 팔고 공연도 하는 등 행사를 크게 연다. 그녀 또한 나누는 일에 재미를 느끼게 된 걸까? 알고 보니 국제구호 NGO 단체인 월드채널에서 홍보대사로 일하며 10여 년 동안 매년 3000만 원씩 기부하고 있었다. 캄보디아에 자신의 이름으로 된 학교도 지었다니 그녀의 봉사활동 또한 묵직하고 오래된 셈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이를 먹을수록 관계맺기를 힘들어한다. 그런데 그녀는 나이 들어가며 그 관계망이 오히려 더 넓어지고 있는 셈이다. 그 비결이 궁금했다.
“저는 사람이 너무 좋아요. 그러니 말도 먼저 걸게 되죠. 그리고 방송인이 좋은 점은, 나는 상대를 몰라도 상대는 마음을 열어놓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다가가면 더 많이 마음을 열게 되는 거죠. 저는 사람을 만날 때 쭈뼛거리는 게 없어요. 그냥 편해요. 제가 그렇게 대하니 상대도 편해지는 거고요.”
어머니 덕분에 이룰 수 있었던 많은 것들
김혜영과 인터뷰를 하면 할수록 그녀가 뼛속 깊이 감사의 마음을 품고 살아간다는 인상을 받았다. 33년째 진행한 ‘싱글벙글쇼’에 대한 그녀의 생각 또한 그와 같았다.
많은 사람이 싱글벌글쇼를 푸근하게 들어줘서 종종 잊게 되지만, 사실 싱글벙글쇼는 시사 프로그램이다. 웃음을 밑바탕에 깐 시사 전달이 목적이다. 그러나 불편할 수도 있는 내용을 특유의 해학과 함께 시청자들에게 전하는 게 ‘싱글벙글쇼’의 강점이자 김혜영이 해내야 할 미션이기도 하다. 그 상황에서 그녀는 자신에게 맞춰주는 스태프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너무 편하죠. 나이가 들어 고마운 게 그들이 나에게 맞춰주는 거예요. 그래서 조금만 그들을 안아주면 잘 따라오더라고요. 좋은 MC는 먼저 상대를 인정해주고 장점을 부각해주는 능력이 필요한 법이니까요.”
김혜영은 싱글벙글쇼에서 다양한 연기를 펼쳐 보인다. 들어보면 자연스럽게 연기자로서의 능력이 높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는 자신의 그런 능력을 ‘어머니 덕분’이라고 돌렸다.
“삶이 힘드셨던 분이었어요. 6남매를 키워야 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어머니가 나로 인해 행복했으면 하는 마음에 ‘어떻게 하면 즐거워하실까’를 연구하곤 했어요. 그게 방송에 도움이 되었죠. 그리고 방송국에서 버는 돈을 어머니께 갖다 주는 게 제 기쁨이었죠.”
33년 동안 감사한 사람들
싱글벙글쇼는 원래는 강석이 하고 있었고 김혜영은 그의 상대역으로서 네 번째로 온 사람이었다. 그녀는 당시 서세원이 진행하던 ‘별이 빛나는 밤에’에 게스트로 출연하던 중이었는데, MBC 라디오국 김건영 부장이 그녀의 가치를 알아봐 ‘싱글벙글쇼’에 들어가게 됐다. 그 후로 33년 동안 같은 자리에 앉아 있게 될 줄 알았을까?
“김 부장님은 정년퇴직하셨죠. 생각해보니 저랑 같이 일한 사람들은 다 정년퇴직했어요. 양희은 언니도 저에게 ‘MBC 라디오국에서 제일 독한 년이 너야. 열두 번도 그만뒀을 텐데’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웃음)”
그래서 그런지 그녀가 이 봄날 저녁식사에 초대하고픈 중요한 사람도 바로 싱글벙글쇼 식구였다.
“싱글벙글쇼 대본을 25년간 쓴 작가가 있어요. 박경덕 작가라고, 제가 힘들 때마다 그 품에 안겨서 많이 울었어요. 항상 ‘김 여사 참아, 견뎌내’라고 말해주며 25년 동안 많이 들어주고 토닥여줬죠. 고맙고 아련해요. 그리고 15년 된 김성 작가, 애기작가로는 이자원 씨가 있어요. 내 얘기를 가장 많이 들어준 사람들이에요.”
아직도 소녀처럼
김혜영은 철저한 방송인이다. 결혼식 당일에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방송을 진행한 후 결혼식장에 갔을 정도다. 매일 라디오 방송을 하느라 해외여행 한 번 가본 적이 없다. 그래서 언제든 라디오를 그만두면 어떻게 할 것인가 계획을 짠 적이 있다고 한다.
“한 달간은 절에 들어가 있으려고요. 그리고 애틀랜타에 가서 3개월 지낼 거예요. 지인이 있어서 거길 기점으로 여행을 많이 다녀보고 싶어요. 제주에서도 1년 살고 싶어요. 제주도는 너무 매력적이거든요. 그래서 귤 따고 당근 뽑는 알바도 알아봤어요.”
제주도에서 지내게 되면 아르바이트 일당을 받아 샌드위치, 와인, 과일을 사고 아침 일찍 해변에 가서 해 떨어질 때까지 그 자리에 있다 올 거라고 한다. 그렇게 일당 번 걸 다 쓰면 또 일을 할 거라고 한다. 낭만적인 상상이다. 그러나 동시에 참 소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딸이 그러더라고요. 걸어가도 시원찮은데 어떤 사람이 산에서 막 뛰어다니는 걸 보면 엄마 같은 사람 저기 또 있다고 그래요.(웃음)”
그녀는 방송인이 안 되었다면 연기자가 되려고 더욱 노력했을 거라고 말한다. 사실 그녀의 연기 욕심을 증명하듯 그녀는 코미디언이면서도 드라마를 많이 한 편이다. 첫 정극 연기는 국민 드라마 ‘전원일기’에서 펼쳤다. 이후 ‘당신’이라는 드라마에도 출연했고, 신년 특집드라마 ‘우리들의 신부님’에서는 주인공 역을 맡기도 했다. 가장 유명한 작품은 ‘한지붕 세가족’. 평범한 부부의 아내 역할로 오랫동안 안방을 찾았다.
인생살이는 점수로 매겨지는 게 아니다
사람을 좋아하고 감사의 생활이 내재화된 사람, 그러나 그러한 외향적 성향은 많은 사람과 접촉하는 만큼 상처도 쉽게 받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어떻게 자신을 지켜내고, 나이가 들어서도 바뀌지 않는 긍정과 감사의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되었을까?
“다 받아들이고 다 인정해버리면 돼요. ‘누가 너보다 방송을 더 잘하네’ 하면 ‘오, 그래 잘하네’ 하고 인정해요. 그 순간부터 편해져요. 누가 나한테 뭐라고 해도 ‘그래, 그럴 수도 있어’ 하죠. 힘든데 그게 돼요. 그래서 엄마가 너무 고맙고 감사해요. 이렇게 긍정적인 성격을 물려주셨으니까요.”
나이가 더 들면 영화에 출연해 재밌는 아줌마 같은 감초 역할을 하고 싶다고 웃으며 말하는 김혜영은 어쩌면 삶에 노련해질 수 없는 사람이기에 그 젊음을 간직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그 생각은 틀렸다. 도리어 그녀는 자신의 강점인 긍정의 힘으로 삶을 수용하고 품에 안은 사람이다. 그래서 그녀의 마지막 말에는 오랜 시간 끝에 감사와 긍정을 내재화한 사람이 본 세상에 대한 통찰이 담겨 있었다.
“이기려고 하지 마세요. 상대를 이겨서 내가 더 잘났다고 여기는 건 자기 생각이지 사람들은 그렇게 보지 않아요. 인생살이는 점수로 매겨지는 게 아니니까요.”
바이러스성 호흡기 질환 ‘코로나 19’로 인해 집에서 옴짝달싹 못하고 있는 사이에도 봄은 변함없이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유리병 안에 갇힌 거처럼 봄의 향기를 못 맡고 있지만 자연이 아직 우리를 포기하지 않고 어김없이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할 뿐이다.
내게 봄은 꽃이 피는 과정을 통해 생명의 신비를 느끼게 하는 시간이기도 하지만, 봄꽃의 꽃망울이 터질 때 두근거리는 울림을 주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 설렘은 내 삶에 생기를 불어넣어주는 싱그러운 자극으로 나에게 에너지가 된다. 그래서 해마다 봄이 되면 나는 여기저기 많이 기웃거린다.
올해는 직접 봄을 찾아 나설 수 없는 상황이다. 아쉬운 대로 지난 시간 교감했던 봄을 기억과 되새김질을 통해 복원하는 시간을 가졌다. 여러 곳 중 유독 한 곳에 여러 차례 발길이 갔던 흔적이 눈에 띠었다. 경상남도 하동이다.
내 추억 속의 하동은 봄을 찾다 돌아오니 마당 건너편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봄이 보였던 곳이다. 그때부터 거의 해마다 봄이 올 즈음이면 그곳에 갔었다.
부담 없이 살짝 눈이 부시게 햇살에 반짝이는 강물, 깊고 높은 어둠의 고요 속에 수줍은 듯 빛나는 별천지, 바람에 실려와 코끝을 살살 간지럽히는 자연의 향기들이 봄을 말했다. 그렇게 따스하게 토닥여주는 자연이 좋았다.
더군다나 하동에는 소설 ‘토지’의 무대가 되는 평사리가 있다. 그곳은 나에게 사유와 성찰을 위한 최고의 보약이 되는 공간이다. 평사리 땅에 서면 인간의 삶과 인간의 삶이 엮이는 소리가 들리면서 내 마음을 챙길 수 있었다.
이미 드라마로도 여러 번 방송되어 잘 알려졌다시피 ‘토지’는 구한말부터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해방까지 우리 민족 고난의 역사를 최씨 일가 중심으로 이야기한 박경리의 장편대하소설이다. 무려 25년 동안의 집필 과정을 거쳐 전체 20권으로 완간됐다.
소설이 특히 나에게 줬던 커다란 울림은 인간의 본질적인 삶에 대한 방대한 이야기였다. 소설에는 700여 명에 이르는 다양한 모습의 인간에 관한 보편적 모습이 그려져 있다. 책을 읽을 때 소설 속 인물들의 삶과 상처, 아픔에 대해 상상해 보는 시간을 넉넉하게 가졌다. 그 시간을 통해서 내 삶의 온도와 빛깔과 향기도 바뀌었다. 내가 아닌 관점에서 현상과 감정을 보는 훈련이 되었고, 다른 사람의 아픔에 대해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 책을 다 읽고 난 후부터 봄철의 평사리에 가면 자연스럽게 자기성찰을 통해 내면의 에너지를 선물 받았다. 소설 ‘토지’는 봄비처럼 촉촉하게 가슴을 적시며 내 안의 빛과 소금이 되어준 작품이다.
평사리에는 2001년 드라마 세트장으로 사용한 최참판댁과 초가집들이 조성되어 있다.
지난 봄 그곳에 갔을 때 최 참판 댁 앞마당에 서서 멀리 보이는 섬진강을 보았다.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았다. 한 굽이 굽이져 흐르는 섬진강을 보니 강에 뛰어들어 자살한 봉순이의 일생이 떠올랐다. 장터를 가기 위해 강둑을 걸어가는 이용의 모습을, 해방 소식을 듣고 덩실덩실 춤을 추며 강둑을 걸어오는 장연학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사랑채를 끼고 돌아 집 뒤편으로 가면 한을 사랑으로 승화시킨 조병수의 아픔이 담겨 있는 대나무 숲이 있다. 그곳에서 그의 인생에 대해 느끼고, 이해하는 사유의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토지’는 사람들의 인생 모습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 그 메시지의 핵심은 역경을 극복한 사실로만 국한 시키지 않는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극한의 고통과 고독을 이겨내는 아름다운 삶의 가치에 대해서까지 확장시켜 말하고 있다.
그 양의 방대함만큼이나 인간과 삶을 이해할 수 있는 거의 모든 형태의 인생이야기가 담겨 있는 심연이다. 양에 눈길을 주지 말고, 용기 내어 읽어보길 권한다.
이제 봄이 살살 수를 놓고 있다. 이 봄기운으로 유리벽을 허물어 내고, 내 인생의 소중한 보물인 인연들과 함께 봄날의 설렘을 공감할 수 있는 시간이 어서 왔으면 좋겠다.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 확산이 계속 되고 있어서 다들 외출을 자제하고 집에서 보내는 시간들이 길어지고 있습니다. 시국이 시국인 만큼 코로나 감염 예방을 위해 나들이 보단 독서를 하며 봄을 맞이 해 보세요.
브라보에서 3월 신간을 소개합니다!
# 화전가 (배삼식 · 민음사)
배삼식의 신작 희곡이다. ‘화전가’는 봄놀이에 꽃잎 전을 부쳐 먹으며 부르던 노래다. 제목과 의미와 대비되는 암울한 전쟁의 시기를 배경으로, 서로에게 의지하며 모진 세월을 꿋꿋하게 살아낸 여인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 아름다운 딱따구리를 보았습니다 (미하우 스키빈스키 저 · 사계절)
아흔 살이 된 저자가 소년 시절 숙제로 썼던 일기에 아름다운 그림이 더해지며 한 권의 책이 완성됐다. 림 하나하나에 그날의 풍경과 상황, 소년의 천진난만한 추억이 깃들어 그림일기를 보는 듯 마음이 아련해진다.
# 조금 괴로운 당신에게 식물을 추천합니다 (임이랑 저 · 바다출판사)
식물애호가인 저자가 식물을 가꾸면서 삶을 더 풍부하게 이해하게 된 경험을 들려준다. 식물을 키우면서 시작된 고민이 다짐이 된 순간들도 담았다. 생명의 성장을 지켜보고, 지키는 과정에서 결심한 삶의 방향을 고백한다.
# 귀찮지만 행복해 볼까 (권남희 저 · 상상출판)
무라카미 하루키를 비롯한 유명 일본 작가들의 소설을 번역해온 저자가 이번엔 자신의 인생을 솔직담백하게 털어놨다. 아이를 키우며 가사를 병행했던 ‘번역하는 아줌마’의 삶을 재치 있게 드러내며 재미와 감동을 선사한다.
# 죽을 때까지 치매 없이 사는 법 (딘 세르자이 외 공저 · 부키)
신경학 전문가인 두 저자는 “치매는 유전과 노화의 결과가 아니다”라며 삶의 방식 개선으로 두뇌 건강을 지킬 수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치매 탈출 솔루션 ‘뉴로 플랜’을 통해 중장년기 젊은 뇌를 유지하는 방법을 안내한다.
# 우리가 몰랐던 바이러스 이야기 (대한바이러스학회 저 · 범문에듀케이션)
국내 바이러스학회 전문가 18인이 바이러스에 대한 흥미롭고 다채로운 이야기를 엮었다. 암을 일으키는 바이러스와 치료하는 바이러스, 영화 속 바이러스, 국내 최초 바이러스 등 다양한 내용을 알기 쉽게 풀어 설명한다.
3월 11일. 요일제로 마스크를 판매한다는 날의 이틀째다. 기자가 마스크 살 수 있는 날이다.
아침 9시부터 동네 약국에서 마스크 배급 판매를 한다는 얘기를 듣고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부랴부랴 달려갔다. 서둘러 도착한 시간은 8시 10분쯤. 벌써 18명쯤 내 앞에 있었다.
20번 안쪽에 서 있다는 게 다소 안심이 됐다. 불과 10여 분 만에 앞 보다 3배가 넘는 줄이 생겼다. 줄을 섰다가 부인과 교대하고 부랴부랴 출근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쩌다 나라가 이 꼴이 됐나?” 길게 늘어선 줄 옆을 지나가면서 한 노인이 불만을 털어놨다. 뒤늦게 온 사람 중에는 발길을 돌리는 사람이 점점 늘어났다.
줄 선 사람 중에는 목발을 짚은 사람, 거동 불편자, 팔순이 넘어 보이는 노인들도 있었다. 혹여 새치기라도 하는 게 아닌지 서로 감시의 눈초리를 감춘 채 앞뒤를 보고 있었다. 꽃샘추위 때문에 모두 두꺼운 점퍼를 입고 마스크를 한 채, 약국 문 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표정은 당연히 어둡고 칙칙할 수밖에.
드디어 9시, 약국 문이 열렸다. 서둘러 들어가려 하니 질서를 지키라며 한 사람이 서서 통제한다. 모두 신분증을 손에 들고 순서를 기다렸다. 마스크 2장을 받아들고 나오는 사람들의 표정엔 안도감이 보인다. 아직도 기다리는 사람들의 줄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구불구불 늘어져 있기에 상대적으로 편안해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내 돈 주고 사는 마스크인데, 이렇게 조마조마한 마음이 들기는.
‘마스크 대란’이 언제쯤이나 끝날까? 봄은 찬란한 햇빛을 내리며 다가오고 있는데, 자꾸만 움츠러드는 사람들의 모습 때문에 우리 서울이 마치 유령의 도시를 방불케 하고 있다. 사람들 모습에도 어서 봄날이 찾아왔으면!
먹고살 만한 일을, 그리고 한 잔의 커피와 낭만적인 음악을 즐길 여유만 있다면 여기에서 무엇을 더 바라랴. 마음이 지극히 평온할 땐 그런 가상한 생각이 찾아든다. 그러나 ‘평온’은 흔전만전하기는커녕 희귀종에 가깝다. 위태로운 곡예를 연상시키는 게 생활이지 않던가. 광장시장의 빈대떡처럼 수시로 뒤집어지는 게 일상이다. 이 난리법석을 피해 흔히 주점을 찾아 소주병을 쓰러뜨린다. 그게 용한 대책이 아님을 아는 사람들 중에 어떤 이들은 미술관으로 피난을 간다. ‘피난’이라 썼지만 정확하게는 충전을 위한 행차, 또는 옹골찬 감성여행이다.
미술관은 창고에서 태동했다. 과거 유럽의 왕족이나 귀족들은 진귀한 물건들을 수집해 창고에 쟁이길 즐겼다. 이 저장공간은 개인전시실로 진화했으며 뮤지엄(museum)이라 불렀다. 그러니까 왕궁이나 귀족의 저택 자체가 뮤지엄이었다. 이후 절대왕정의 붕괴와 산업혁명으로 상층부가 몰락하면서 뮤지엄은 시민사회의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했다. 근엄한 권위를 칭칭 두른 왕궁 루브르가 대중적인 뮤지엄으로 전환된 게 또렷한 사례다. 뮤지엄은 원래 박물관을 의미하는 단어였지만 미술관의 유전자도 뮤지엄에서 유래했다.
정신 일깨우는 감각의 제국
미술이 없는 세상을 상상해봤는가. 미술관이 없는 공공사회를 생각해봤는가. 그런 게 없더라도 지구는 돌고 인간의 삶은 무사히 흘러가겠지만, 미감을 누릴 성좌 하나가 사라진 허전함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미술관이란 우리의 둔한 정신을 일깨우는 ‘감각의 제국’이지 않던가.
삶은 일쑤 속되고 진부하지만, 미술관의 작품들은 사람의 감성을 슬쩍 흔들어 잠시나마 새로운 지평을 바라보게 한다. 그렇기에 카오스로 미만한 세상에서도 미술관을 찾는 발길은 더욱 늘고 있다.
미술작품이 봄날에 내리는 이슬비처럼 가슴을 촉촉이 적셔준다고 믿는 애호가들의 향유 욕구. 이에 부응한 미술관의 진화와 변신은 이미 하나의 추세가 됐다.
이제 미술관은 미술품을 소장하고서 그저 작품 감상의 기회만을 제공하는 공간이 아니다. 할 수 있는 건 다 하겠다는 듯 바지런히 새로운 콘텐츠를 개발하고 시스템을 보완하고 있으니 말이다. 야외공간을 확보하거나 다양한 부대시설을 만들어 복합문화공간의 기능은 물론, 자못 우아한 휴식공간의 역할까지 도맡고자 하는 것 같다. 듣자 하니 예전 미술관의 전시공간과 부대공간의 비율은 9대 1이었지만 요즘은 1대 2로 역전됐다는 게 아닌가. 도서관, 체험관, 교육장, 카페, 식당, 아트숍 등을 설치해 덩치를 키워나가고 있는 것이다. 미술관 건축 자체를 예술적으로 기발하게 디자인하고 있으며, 정원 조성에도 공을 들인다. 도시의 안통을 벗어나 자연 속으로 스며드는 미술관도 많다. 이른바 전원형 미술관이다. 자연이라는 모티브만큼 매력적인 호객 매체가 다시 있겠는가.
승효상 건축가가 설계
나는 지금 신라의 천년 고도 경주시 엑스포공원 안에 있는 솔거미술관에 와 있다. 경주시에 열린 첫 공립미술관이다. 한국화의 거장 소산(小山) 박대성 화백(76)이 평생토록 그린 작품 830점을 기증하면서 건립에 착수, 2015년에 개관했다.
기부문화의 토양이 척박한 한국 사회에서 소산의 화통한 쾌척은 의표를 찌른다. 어차피 작품들을 등에 짊어지고 내생으로 떠날 방법은 없는 법. 그간에 신세진 세상에게 돌려주는 게 순리라 여겼으리라.
솔거미술관은 전형적인 전원형 미술관이다. 야트막한 야산이 푸근하게 늘어뜨린 치맛자락을 거머쥔 미술관이다. 토함산 슬하의 막내둥이에 속할 야산의 이름은 대덕산. 1921년, 당시 남한 땅에 생존했던 마지막 호랑이가 이 산 갈피에서 사람들에게 잡혔다고 하니 애석하다. 그것이 생명이건 무생명이건, 세상에 존재했던 것들의 모든 ‘마지막’은 애잔한 기분을 일으킨다.
미술관 뒤편 산 아래엔 자그마한 자연호수 아평지(阿平池)가 있다. 옷을 훌훌 벗고 늘어선 호숫가의 겨울나무들이 물에 드리워진 제 그림자를 내려다보고 있다. 이 역시 그림이라 눈길이 한참 거기에 머문다.
초록빛 수면을 노니는 물오리들은 오늘도 기쁜가. 생동하는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이쯤이면 미술관에 입장하기 전에, 또는 미술관 관람을 마친 뒤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러라고 미술관을 산자락 호숫가에 들어앉힌 게 아니겠는가.
‘빈자의 미학’ 스민 건축
“어눌한 게 달변보다 낫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나를 광야로 추방해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비판자로 살겠다”고도 했다. 건축가 승효상이다. ‘빈자의 미학’으로 삶과 건축을 구현하는 사람으로 알려진 그는 인간을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존재로 봐 모두가 집다운 집에서 살 수 있기를 소망하는 것 같다. 집다운 집은 어떤 것인가. 그가 말하는 요점은 ‘가짐보다 쓰임을, 더함보다 나눔을, 채움보다 비움을 중시해 지은 집’을 짓고 사는 게 척박한 삶에서 벗어나는 길이라는 데 있다.
승효상의 설계로 지어진 솔거미술관을 보면 그의 건축적 지향이 실감으로 다가온다.
산자락 초목들을 곁에 둔 미술관의 외관은 들썩이는 구석 없이 수굿하다. 건축과 자연이 서로 눈짓을 하며 말없는 말을 두런거리나? 숲은 묵연하고 미술관은 겸손해 불화 없이 조응한다.
노출 콘크리트 공법으로 세운 벽과 벽 사이엔 나무쪽을 켜켜이 채워 콘크리트의 투박한 본성을 자연스럽게 누그러뜨렸다. 나무도 콘크리트도 나이를 먹어갈 것이다. 비와 바람과 햇볕에 마모되고, 색이 바래고, 티끌과 이끼가 틈서리마다 배어 세월이 흐를수록 음영이 짙어지겠지. 마침내 잘 늙은 집으로 변모할 게다. 깊은 운치를 풍기며 미술관의 역사를 웅변할 게다.
미술관 내부 역시 승효상의 철학을 느끼게 한다. 2층에서 1층으로 내려가는 회랑엔 계단과 함께 슬그머니 휘어지는 경사로를 조성해 물 흐름처럼 자연스러운 리듬을 부여했다. 미로에 들어선 것 같은 흥미마저 자아낸다. 계단을 이용하기 어려운 노년층 관람객을 위한 섬세한 배려일 수도 있겠다.
전시공간마다 적절히 배분된 자연광과 인공광. 싱그럽게 자란 대나무와 열린 허공으로 흐르는 구름이 보이는 중정(中庭). 차경(借景, 외부 자연풍경을 안으로 끌어들이기)을 위해 제3전시관의 벽을 뚫어낸 통유리 프레임의 이채. 전시작품이라는 주체를 효과적으로 북돋우는 객체들의 조합과 질서가 정교하다. 전시관의 천장이 매우 높은 건 미술관의 방장에 해당할 소산 선생의 어마어마한 대작들을 고려한 방책이다.
관람 인원 해마다 급증
경주의 핫 플레이스로 이미 두둥실 떠올랐다. 인기 작렬! 솔거미술관 말이다. 개관 5년 차 신생 미술관이지만 관람 인원이 해마다 급증했다. 어느 하루는 자그마치 2000여 명이 관람했단다. 서울에 있는 유명 미술관들이 긴장하는 분위기라니 통쾌하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솔거미술관의 매력은 산책을 즐길 수 있는 자연 경관과 동거하는 미덕, 그리고 유명 건축가가 설계한 건물이라는 강점에 있다. 그러나 진정한 매혹은 소산 선생의 작품이 뿜는 아우라. 전시관 벽에 걸린 선생의 수묵화 앞에 선 심취한 표정들을 보라. 거무튀튀한 건 먹빛이요, 허연 건 화선지 맨살이구나, 그저 그리 여겨 심드렁히 스쳐 지날 것만 같은 젊은 관람자들이 눈을 끔벅이며 골똘히 그림을 들여다본다. 와우! 그런 찬탄을 터뜨리며.
전시장에 가득한 소산의 수묵화들은 실로 압권이다. 자유자재한 작풍으로 먹의 향연을 펼쳤다. 바위를 후벼낼 듯 거침없는 운필로 산수를 그리고 화조(花鳥)를 찍어냈다. 10m 너비의 대작을 예사롭게 그려내는 괴력으로 예술혼을 불사르는 거장의 진면목을 알아보게 하는 작품들이다. 서양화에 밀려 푸대접을 받는 게 한국화다. 수묵화단의 체면이 이거 말이 아니다. 서양화의 진격에 맥을 놓고 있다. 이 와중에 소산이라는 거목이 떠억 버티어 현실을 일갈하고도 남을 수작들을 그려냈다.
미술관을 나서자 저녁 어스름이 내린다. 장쾌한 수묵 세례를 받아서겠지, 마음 기슭에 밝은 달덩이 하나 떠오르는 이 기분은.
솔거미술관 탄생시킨 소산 박대성 화백
“나에게 작업실은 유배지와 마찬가지요!”
소산 선생 말하길, 예닐곱 살 때부터 붓을 노리개 삼았더란다. 집안 제사 때면 펼쳐지는 사군자 병풍, 그걸 보고 그림이라는 걸 끼적이기 시작한 게 외골수 화업(畫業) 인생의 싹눈이었다. 마냥 붓질을 놀 만한 형편은 아니었다. 배를 곯지 않기 위해 들일을 해야 했으니까. 뒷산에 뛰어올라 땔감을 져 나르거나, 똥장군 짊어지는 일도 소싯적의 다반사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그는 일찌감치 양친을 잃었다. 한국전쟁이 터지기 직전 어머니는 병으로, 아버지는 끔찍한 변고로 타계했다. 산에서 내려온 빨치산들이 아버지를 반동 지주로 몰아 낫으로 살해했다니 참혹하다. 당시 겨우 네 살배기 어린애였던 그의 몸에도 낫날이 들어와 팔 하나를 앗아갔다. 현재 소산의 왼팔은 의수다.
어린아이 때부터 겪었을 시련과 캄캄한 고독을 짐작할 만하다. 그럼에도 붓을 내던지지 않았다. 외팔로 삶에 가담해 밥을 벌기엔 그나마 지필묵이 상책이라 본 친척 어른들의 독려 덕이기도 했다.
“몸에 핸디캡이 있으니 어느 한 가지 쉬운 게 없었지. 그러나 불편한 조건들이 결과적으로 내겐 복이었어요. 부족함과 불편함이 오히려 행운이었던 거요. 나를 무쇠처럼 담금질할 수 있었으니까.”
그의 예전 작업실엔 ‘불편당’이라는 당호가 붙어 있었다. 불편이 차라리 길이라는 걸,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가치들은 고통 속에서 태어난다는 걸, 불편을 통해야 자연의 이치를 깨달을 수 있다는 걸, 수묵으로 도달할 수 있는 정신의 높이도 불편과의 동행으로 얻을 수 있다는 걸 당호로 다짐했던 셈이다. 이 ‘불편의 사제’의 붓놀림은 성정처럼 쾌활해 일필휘지에 능란하다. 깊고 아득한 먹색이 내려앉으면 그윽한 산경이 화폭에 아롱진다. 분출하는 화산의 기세로 묵을 써 화선지를 한바탕 희롱하고 나면, 거기에 웅장한 대자연이 꿈틀거린다. 정밀한 필선의 운용에 물이 올라 극사실화로도 이미 극치에 이르렀다. 서예는 또 어떻고? 김생과 추사를 진즉에 섭렵한 소산의 서(書)는 빼어나, 듣느니 늘 명필 소리다. 이렇게 그의 예술 생태계는 다중변주로 비옥하다.
“동양의 필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얼마나 완벽한가. 소필, 중필, 대필로 구분되는 필(筆)을 좌우사방, 맘대로 돌려 그림을 그릴 수 있어요. 서양화 붓은 이게 안 되거든. 우리의 필은 자유로워 걸림이 없지. 대 그림자가 물에 스치듯 평화롭단 말여.”
830점의 작품을 기증한 이후 소산은 고향의 외진 산속으로 작업실을 옮겼다. 이전보다 작품량은 더 늘어났고, 대작을 그리는 습(習)도 깊어졌다.
“내게 작업실은 유배지와 마찬가지요. 산고(産苦)와 다르지 않은 창작 하나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외로움 속으로 나를 밀어 넣을 수밖에 없으니.”
“전에 이런 얘기를 했지요. 추사를 때려잡겠다!”
“하하핫! 선문(禪門)에 전해오길,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祖師)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 추사는 성인 반열에 오른 분인데 감히 넘볼 수 있을까. 그러나 추사는 했는데, 나는 못한다? 그럴 리가. 내가 필묵을 닦기를 추사 못지않을 만큼은 하고 있소.”
소산에게 추사는 서화의 이상적 아이콘을 상회하는 존재다. 그는 선지식으로서의 추사를 타넘고 싶은 것이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라는 유명한 시구(詩句)가 있듯, 엄동설한(嚴冬雪寒) 겨울을 물리고 봄을 불러온 건 8할이 바람입니다. 그리고 그 봄바람에 기대어 새록새록 피어나는 봄꽃의 8할은 바로 바람꽃입니다. 변산바람꽃, 너도바람꽃, 나도바람꽃, 홀아비바람꽃, 꿩의바람꽃, 회리바람꽃, 태백바람꽃, 만주바람꽃, 남바람꽃, 풍도바람꽃… 등등. 다양한 이름의 바람꽃들이 이르면 2월부터 늦게는 5월 말까지 봄바람 따라 바람처럼 피었다가 바람처럼 사라집니다.
얼음장처럼 꽁꽁 언 땅이 채 풀리기 전 갈잎을 비집고 올라오는 ‘바람꽃’들은 대개 콩나물 줄기처럼 가늘고 연약한 꽃대 끝에 작은 꽃을 한 송이씩 피웁니다. 대부분 키도 작고 흰색의 꽃송이가 단정한 게 이른바 ‘범생이’ 같은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 어디에나 돌연변이가 있듯, 문제아 또는 이단아처럼 삐뚤빼뚤 건들거리는 바람꽃이 있어 눈길을 끕니다. 특산식물인 변산바람꽃 등 친숙한 바람꽃에 비해 조금은 생소한 이름, 들바람꽃이 오늘의 주인공입니다.
머뭇거리는 겨울을 단호하게 내치는 햇살이 강렬하게 내리쬐는 봄날, 북한강 변의 야트막한 숲으로 한 발 두 발 내딛자 한 무리의 바람꽃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가관입니다. 고개를 처박은 놈, 하늘과 맞짱이라도 뜨겠다는 듯 곧추세운 놈, 외로 꼰 놈, 꽃잎을 활짝 펼친 놈, 아예 벌러덩 뒤로 젖힌 놈…. 제각각 난장 춤을 추고 있습니다. 야망(野望)이니 야욕(野慾)이니 ‘들’ 야(野) 자가 들어가는 단어들이 주는 느낌이 단번에 전해져 옵니다. 황량한 들판을 어슬렁거리는 사내들의 거친 야성이라고 할까. 키 10cm 안팎의 변산바람꽃이나 너도바람꽃 등 여타 바람꽃에 비해 15cm 정도로 다소 크다 보니, 줄기 끝에 달린 꽃의 무게를 주체하지 못해 봄바람에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는 꼴입니다. 얼레지가 봄 숲의 ‘바람 난 여인’이라면, 들바람꽃은 바람 부는 봄 하릴없이 빈둥대다 짝다리 짚고 건들대는 ‘숲의 건달’이라 불러도 과언이 아닐 듯싶습니다.
하지만 ‘바람꽃류’가 갖는 순백의 미는 들바람꽃 또한 예외는 아니어서, 흰색의 꽃잎은 아침 햇살이 그대로 투과할 만큼 투명하고 여립니다. 게다가 희게만 보이는 꽃잎의 연분홍 뒤태가 아는 이에게만 보이는데, 그야말로 “이렇게 예쁜 줄 예전엔 미처 몰랐습니다”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옵니다. 바람꽃류 가운데 가장 예쁘다는 남바람꽃의 미모에 절대 뒤지지 않는다는 말을 들을 만합니다. 이처럼 들바람꽃의 핑크빛 뒷모습은 황량한 들판을 홀로 누비는 ‘스라소니’와 같은 거칠고 투박한 이미지를 단숨에 날려 보냅니다.
Where is it?
국가생물종지식정보시스템은 “우리나라 강원도 이북에 분포한다”고 모호하게 설명하는데 실제로는 강원도는 물론, 비슷하거나 다소 낮은 위도의 경기도 산에도 자생한다. 화야산과 명지산 근처가 서울에서 가깝고 많이 알려진 자생지. 강원도 대암산은 몇 해 전 인제군의 생물자원조사 결과 국내 최대의 군락지로 밝혀졌다. 물론 대암산뿐 아니라 태백산과 가리왕산, 청태산, 소백산, 치악산 등 강원도의 높은 산 정상부에는 대개 들바람꽃이 자라는데, 다만 꽃 피는 시기가 4월에서 5월로 경기도 등지에 비해 한 달 가까이 늦다.
정유경(57)은 봄바람 같았다. 세월의 흔적이 슬쩍 묻은 눈매, 말랑말랑한 화법 그리고 인사를 건넨 이들에게 짓는 미소가 사랑스러웠다. 봄날의 따스한 온기가 전해졌다. 세월이 흐른 만큼 그녀도 많이 달라졌다. 하지만 젊은 시절의 꿈만큼은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시원시원한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 KBS ‘젊음의 행진’ 백댄서 팀이었던 짝궁들 출신 정유경은 1983년에 노래 ‘꿈’을 부르며 솔로 가수로 데뷔했다. 미국 국적을 가진 그녀는 큰 눈의 귀여운 외모와 성악과 출신답게 맑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가수 활동은 성공을 거뒀으나, 이내 비자 만료로 인해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로부터 30여 년이 흐른 지금, 그녀는 중년이 되어 다시 우리들 앞에 섰다. 가수와 먼 거리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가깝다고도 할 수 없는, 바로 연극배우로서 말이다. 제2의 인생을 촉망받는 연극배우로 맞이한 반가운 얼굴, 가수 정유경은 대학로 극단 거리에서 겨울 볕을 쬐고 있었다.
우연히 시작한 첫 연극, 배우로 마주하다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 오랫동안 잊혔던 정유경이 다시 대중 앞에 선 것은 2012년 SBS ‘K팝스타’에 그녀의 아들 맥케이 김이 나오면서부터였다. 맥케이 김은 당시 자작곡과 가창력으로 호평을 받으며 톱5에 올라갈 정도로 성공했다. 당연히 그의 어머니인 정유경에 대해서도 관심이 쏠렸고, 이후 그녀는 방송 출연과 패널 활동을 이어나갔다. 연극은 그 과정에서 우연처럼 다가왔다.
“연극하는 친구와 모임을 하면서 나도 하고 싶다고 말했는데 연락이 왔어요. ‘연극 캐스팅이 필요한데 오디션을 보지 않겠느냐’는 거예요. 무조건 보겠다 하고 갔더니 치매 할머니 역할이더군요.”
그녀가 지원한 연극은 ‘엄마의 레시피’. 대만을 배경으로 치매를 앓는 어머니와 싱가포르에서 일하는 딸, 그리고 미국에서 유학 중인 손녀가 만나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 연극으로 매년 대학로에 올라가는 인기 레퍼토리다. 그녀에게 있어선 첫 오디션이고 첫 소극장 공연이었다. 그런데 연기를 너무 잘했다. 오는 2월 17일부터 시작하는 새 연극 ‘5인실의 그녀’(가제) 극단 대표도 그 연기를 보고 바로 같이하자고 했다.
“저도 어리둥절할 정도로 많은 분에게 칭찬받았어요. 이게 첫 연극이라는 걸 믿지 않더군요. 연극은 물론 마음에 들었죠. 사실 제가 평소에 음식을 잘하는 편이어서 정서적으로도 닮아 있었던 거죠. 제가 나이가 들면 이러지 않을까 싶은 걸 연기해서 칭찬을 받은 셈이에요.”
천생 무대 체질, 무대가 너무 좋다
‘엄마의 레시피’ 제작자는 모든 게 처음인 정유경의 오디션을 볼 때, ‘대본을 하나도 안 떨고 읽더라. 이 사람은 연기가 되든 안 되든 무대에서 떨지는 않겠다’ 싶어 뽑았다고 한다. 제작자의 눈썰미처럼, 그녀에겐 배우로서의 자질이 이미 있었다. 무엇보다도 가수 출신인 그녀의 발성이 무척 좋고 톤과 발음이 명확하다는 걸 인터뷰 내내 느낄 수 있었다.
“가수 생활이 도움됐던 거 같아요. 사실 가수도 연기예요. 연기하면서 노래를 하는 거니까요.”
또 하나, 그녀는 무대공포증 따위는 없는 사람이다. 아니 되려 무대를 매우 사랑한다.
“어떤 무대든 올라가면 떠는 일이 없어요. 그냥 무대가 너무 좋아요. 가수 김장훈 씨가 한 말이 생각나요. 저랑 나이가 같다 보니까 응원 차 연극을 보러 왔는데, 자기가 집에 가서 생각을 했대요. ‘아니, 저 끼를 어떻게 숨기고 살았을까…’ 하고요.”
무대를 오래 떠나 있었어도 무대에 올라가면 다른 사람이 된다는 사람, 정유경 본인이 아닌 무대의 인물 그 자체가 된다는 사람이 그녀였다. 천생 무대 체질인 그녀는 ‘무대에서 죽고 싶은 마음’까지 든다고 했다.
“사실 제가 나이가 많잖아요. ‘너무 늦은 나이 아닌가?’ 싶어서 두렵기도 했죠. 그런데 연극을 하다 보니 그건 저만의 두려움이었어요. 실력만 있으면 나이는 상관없어요.”
정유경은 ‘다 때가 있고 기회가 있다’는 숙명론적인 말을 좋아한다. 그 기회가 왔을 때 주어진 자리에서 얼마만큼 열심히 하느냐, 그게 관건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모토는 하루하루를 열심히 사는 것이다. 계획 같은 건 세우지 않는다. 그저 주어진 일에 충실하고자 할 뿐이다.
“연극의 매력은 숨소리까지 표현할 수 있다는 거예요. 제가 다른 사람과 함께 숨 쉬는 것조차 연기가 되어야 해요. 그래야 관객이 호응하니까요. 그래서 1초도 허투루 할 수 없어요. 거기에 매력이 있죠.”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당당한 이혼
인터뷰를 진행하다 보니 중년의 베테랑과 얘기를 한다기보다는 막 사회에 나온 열정 넘치는 청년 신예의 목소리를 듣는 것 같았다. 물론 제2의 인생을 맞이한 사람을 만났을 때 으레 그런 패기를 경험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나 정유경의 에너지는 남달랐다. 자연스럽게 미국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해졌다.
“현지 아나운서를 했어요. 교회 성가대 지휘도 했고. 집에만 있진 않았죠. 그래서 사람들이 남편더러 ‘힘들겠어, 저런 여자를 와이프로 데리고 살려면. 아이고 끼가 보통이 아니야’라고 말하곤 했죠. 그런데 이혼했어요.”
인터뷰 중에 불쑥 나온 이혼 얘기. 너무 자연스럽게 나와서 순간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그녀의 자연스러움에는 당당한 이유가 있었다.
“아직 전 남편과는 친구예요. 가족들과도 계속 교류하고 있고요. 나쁘게 헤어진 게 아니고 남편 사업이 실패하고, 그리고 제가 예술적 끼가 많다 보니 그리 됐어요. 이혼하기 전에 아이들에게도 말했어요. 엄마는 아무래도 미국에서 행복하지 않으니 이혼해야겠다고요. 아이들이 상처를 안 받진 않았겠죠. 하지만 이해해줬어요.”
억지로 사는 부부들은 좀…
정유경의 지론은 ‘이혼하면서 서로 원수가 되는 건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부모가 헤어져도 아이들의 부모인 건 바뀌지 않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가 보는 한국 사회의 부부들은 이상하다.
“한국에서 제 나이 또래 부부들을 보면 ‘따로 또 같이’예요. 대화도 안 하고 방도 따로 쓰고…. 왜 그렇게 사냐고 물으면 ‘어쩌겠어, 자식 때문에…’라고 답해요. 참 안타깝지요. 그게 진정 가족일까요? 그렇게 살면서 부모들이 싸우면 아이들은 싸우는 게 당연한 줄 알게 돼요. 그럴 거면 차라리 쿨하게 이혼하고 서로 잘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자식들에게 정서적으로도 바람직하다 생각해요.”
틀린 부분이 없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졸혼이 수용되는 이유도, 어쩌면 이혼과는 다르면서도 같은 의미에서의 부부간 절충점을 찾은 결과 때문이 아닐까. 미국에서 남편과 친하게 지내니까 사람들이 다시 재결합하라고 하는데, ‘친한 것과 합치는 건 다른 것’이라며 딱 부러지게 선을 긋는 그녀의 당당함은 앞으로 우리 사회에서도 더 자주 만나게 될 모습이 아닐까 싶었다.
자연스러운 삶이야말로 행복
“나이 먹는 걸 인정하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아름다워요. 거기서 헤어나려고 할수록 추해지죠. 그 나이대로 그대로 가는 게 익어가는 거지. 설익은 과일을 억지로 익히면 맛이 없잖아요.”
자연스러움을 중시하는 정유경의 생각은 아이들에게도 그대로 옮겨졌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너는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야”라고 말한다. 하고 싶은 걸 하며 살기 때문이다.
“풋볼, 골프선수였던 아들은 노래를 하고 싶어서 지금 음악을 공부하고 있어요. 딸은 어릴 때부터 남 돕는 일을 좋아해서, 가난한 사람을 병원과 연결해 도와주는 소셜 워커로 일하고 있고요. 그래서 아이들이 가끔 ‘누가 하버드 갔대, 예일대 갔대’ 하면 ‘야, 공부 잘하는 사람만 있으면 세상 안 돌아가. 너처럼 음악하는 사람, 밥 잘하는 사람도 있어야 돌아가지’라고 말해줬어요.”
그녀는 “오늘 50점 받았으면 내일은 51점 받으면 된다. 내려가지만 않으면 된다”는 기준을 갖고 있었다. 그 기준으로 아이들을 믿었기에 그녀의 아이들도, 그녀 자신도 행복해진 것 아닐까. 그녀에게 살면서 제일 잘한 일이 무엇이냐고 묻자 나온 대답도 그 행복의 증거였다.
“이혼했지만 남편을 만나 아이들을 낳은 것, 그리고 마음 모질게 살지 않은 것이에요. 저는 받는 것보다는 주는 걸 좋아해요. 그리고 제가 그런 사람이란 걸 감사하게 생각하고요.”
이 세상에 하나뿐인 연기자 되고파
정유경의 삶의 틀을 마련해준 건 아버지였다. 그녀는 아버지 덕분에 자신이 바르게 자랄 수 있었다고 말한다.
“원래 제가 성악을 했잖아요. 그런데 가수를 한다고 하니 아버지께서 딱 한마디하시더라고요. ‘유경아, 가수를 하는 건 말리지 않겠지만 네 노래가 사람들 술안주가 되게 하진 말아라.’ 그걸 지키며 살았죠. 술 담배는 아예 안 했고 밤무대도 안 섰어요. 부끄럽지 않게 살았고 그게 제가 잘한 일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되고 싶었고 지금도 아이들이 자랑스러워하는 엄마가 되고 싶어요.”
그녀의 인생은 비교적 순탄한 편이었다. 물론 아무런 굴곡이 없었다는 건 아니다. 그러나 그녀는 응어리를 안고 추락하기보다는 되려 발판 삼아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법을 익혔다. 마지막으로 미래의 삶에 대해 묻자 그녀는 담담하게 답했다.
“물론 ‘어떻게 살아야지?’ 하는 고민은 있죠. 그런데 그런다고 당장 해결되는 건 아니잖아요? 스텝 바이 스텝, 한 걸음씩 가다 보면 해결되겠지 싶어요. 그렇게 신중하게 가다 보면 좋은 기운도 만나게 될 테고…. 그걸 믿고 가려고 해요.”
정유경이라는 사람 안에 숨어 있던 새로움을 찾았다. 착한 그녀가 사랑스럽다.
무슨 일을 하건, 그 분야의 최고가 돼라! 자주 듣는 얘기다. ‘최고’에겐 갈채가 쏟아진다. 다들 ‘최고’가 되기 위해 질주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영혼을 파는 결탁마저 불사한다. 삶의 눈먼 과속은 대개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욕망이라는 총구에서 발사된 열정의 탄환. 이 위험한 물질은 과녁을 맞히고도 좌절한다. ‘최고’가 되고서도 감옥에 끌려가는 사람조차 있지 않던가. 그런데 말이다. 자전거 세계여행가 차백성은 권장한다. “꿈을 좇아 최고가 돼라!”고. 그가 말하는 최고란 뭘까. 자전거 여행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어떤 것일까.
자전거로 세계 여행에 나서는 사람이 많다. 점점 늘고 있다. 주로 청년층이 즐긴다. 차백성도 청년이다. 그의 나이는 68세. 나이가 무슨 상관이랴. 애늙은이도 있지 않던가. 가슴에 시퍼런 청년이 살아 있으면 청년이다. 정열과 패기로, 차백성은 청년 열차에 올라탔다. 그는 프로다. ‘전업 자전거 세계여행가’로 통한다. 직업적으로 자전거 세계여행을 하는 사람은 아마도 그가 유일할 거다. 그의 여행엔 협찬이 붙는단다. 여행서 집필과 강의도 어언 직업화됐다.
자전거로 지구를 누비는 사람이라 근육질의 터프가이를 예상했다. 그러나 마주앉고 보니 아니다. 그저 평범한 외양이다. 맑은 표정으로 보자면 학자풍이다. 여기저기 관절이 결릴 시절이지만 몸짓이 곧고 민첩하다. 육체에도 정신에도 강골이 들어 있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인생의 황혼에 무슨 수로 청년의 새아침을 열었겠나. 그는 바야흐로 진정한 전성기를 맞이했다.
“요즘 최상의 행복을 느끼며 산다. 골든 에이지! 바로 지금이 그렇다. 나에겐 하루도 거르지 않는 세 가지 일과가 있다. 운동, 독서, 글쓰기가 그렇다. 이 셋은 새로운 여행에 나서기 위한 준비 작업이자 일상을 맘껏 즐기는 방식이다.”
나이 들며 사람들은 흔히 습관에 안주한다. 나이 타령이나 하며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낭비한다. 당신처럼 자전거로 세계여행을 즐긴다는 건 상상으로나 가능할 뿐이다.
“늙었다고 자조할수록 퇴보한다. 늙음 안에는 경륜이나 지혜 등 좋은 가치들이 들어 있지 않던가. 역사를 보더라도 60세 이후에 위업을 남긴 사람이 많지 않던가. 나는 늙음이라는 걸 경쟁력으로 생각하며 산다. 이 나이에도 자전거 여행을 계속하는 건, 그 경쟁력의 가치를 믿기 때문이다.”
자동차 여행은 어떤가? 굳이 자전거만을 수단으로 고수하는 이유는?”
“어릴 적에 ‘김찬삼의 세계여행’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특히나 그의 자전거 여행에 동경심을 품었다. 그때 꿈이 생긴 것이지. 나, 어른이 되면 자전거로 세계를 여행할래! 그랬던 소년기의 꿈을 뒤늦게 이룬 셈이다. 김찬삼 선생이야말로 내 인생의 위대한 멘토다.”
김찬삼(1926~2003)은 ‘여행의 신’으로 불렸다. 비(非)문명, 오지, 가난한 사람들을 만난다는 여행 원칙을 끝까지 관철한 인물이다.
“대학 교수였던 아버지의 이른 작고도 어린 나에게 특별한 영향을 미쳤다. 염세주의라는 게 생기기 시작했으니까. 선친은 우주처럼 큰 존재였다.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며 어린 내게 인생은 유한하다는 걸 일찍부터 경험하게 했다. 덕분에 좀 조숙하지 않았을까. 이미 발아한 여행에의 꿈이 아버지를 잃은 뒤로 한층 영글었던 것이다. 내게 꿈이라는 게 없었다면 평생을 방황으로 허비하고 말았겠지.”
날마다 100km씩 달렸다
삶이 부끄러운 건, 꿈을 잃었을 때다. 꿈의 관리에 능란하지 못한 채, 꿈을 배반하고 엉뚱한 행로를 헤맸다는 자각이 찾아들 때다. 차백성에게도 그 자각의 순간이 찾아왔더란다. 2000년, 그의 나이 49세 때였다. 참을 수 없는 삶의 진부함에 소스라쳤던 것 같다. 살아온 날들 전체에 회의를 느꼈다는 게 아닌가. 어라, 나 지금 뭐하는 짓이지? 나여! 이건 나의 삶이 아니지 않은가? 그렇게 자가 심문을 했던 모양이다. 대우건설 임원이었던 그는 마침내 사표를 던졌다. 그리고 수면 아래에 매장된 꿈을 두레박으로 길어 올렸다. 그렇게 자전거 세계여행의 시동이 걸렸다. 첫 여행은 미국 서부 해안 종주. 3000km에 달하는 대장정이었다.
“시애틀에서부터 샌디에이고까지, 태평양을 끼고 이어지는 ‘하이웨이 원’을 달렸다. 하루 평균 100km씩, 한 달에 걸쳐 완주했다. 무사히 여정을 마치고는 감개무량했지. 나도 드디어 자전거 여행가 대열에 올라섰다는 만족감이 컸다. 오래된 꿈을 비로소 이루기 시작했다는 쾌감은 더 컸다.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다.”
체력을 다져 떠났겠지? 하루 100km를 날마다 달렸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지경이다.
“물론 준비기간이 있었다. 미국 종주를 하기 이전에도 자전거를 자주 탔다. 나는 매번 엄청난 준비를 하고 떠난다. ‘고생한 그대여, 다 놓고 훌쩍 떠나라!’ 그런 식의 구호를 불신한다. 준비가 충실하지 않은 여행엔 폐단이 많아서다.”
숙식은 어떻게 해결했나?
“불가피한 경우엔 모텔에 투숙했지만, 거의 캠핑을 했다. 자전거엔 7개쯤의 가방을 매단다. 텐트와 취사도구까지 챙기다 보면 꽤 무거워진다. 30kg 이상 된다. 나의 모든 해외여행이 그런 식이다.”
하룻밤만으로도 온몸이 쑤시는 게 캠핑일 수 있다. 말 못할 불편이 많았겠다. 캠핑을 기본으로 하는 이유는?
“두 가지 이점 때문이다. 하나는 캠핑장을 통해 세계 각국의 여행자들과 한결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점. 또 하나는 경비 세이브! 불편? 별안간 설사 날 때가 가장 난감하다. 화장실을 찾기 어렵더라고.”
칼을 두 자루나 들고 덤비는 강도도 만나게 되는 게 자유여행이다. 사고는 겪지 않았나?
“내겐 완벽주의 성향이 있다. 미리 면밀히 예방하는 것이지. 유럽 여행의 경우엔 집시들을 특히 조심한다. 순식간에 자전거를 훔쳐가기 때문에 자전거를 항상 몸에 붙이고 다닌다. 캠핑할 때도 자전거를 분해해 텐트 안에서 끌어안고 잔다. 미국에선 송아지만 한 개가 공격을 해서 죽는 줄 알았다. 용케 모면했다. 미국 개들이 다들 훈련됐다는 게 퍼뜩 생각나 외쳤다. 싯 다운!(sit down) 그러자 대번에 주저앉던걸. 하하핫. 여행엔 기지가 필요하다.”
가벼운 사고는 여행의 풍미를 더해준다. 일테면, 길을 잃을 경우, 더 흥미진진해질 수 있는 게 아닌가. 길이란 결국 어디로든 이어지니까. 그러나 차백성에게 길을 잃는 식의 얼간이 짓은 용납되지 않는다. 사고율 제로! 노련한 여행자의 기록이 혁혁하다.
자전거는 인류가 발명한 가장 근사한 물건에 속한다. 자동차가 지구덩이를 까맣게 뒤덮은 이 시대까지 사멸하지 않은 그 생명력이라니. 이른바 적정기술의 산물이다. 이 주목할 만한 철 구조물에 인간의 숨결과 피를 부여하는 게 차백성이다. 페달을 밟는 그의 거친 숨결에 자전거도 격동하겠지. 그의 몸통에 흐르는 피가 핸들을 거쳐 바퀴까지 설레어 번질 테지. 사물과 인간의 동체대비, 그 사랑과 안심이 여행을 지속하게 할 것이다.
꿈 없는 욕망의 질주는 방황에 불과
그런데, 고독하지 않을까? 그는 늘 혼자 떠나고 혼자 돌아온다. 하루 종일 말 한마디 없이 페달만 밟는 날도 많다는 게 아닌가.
‘나 홀로 여행’을 수칙으로 삼은 사람에게선 독특한 취향 이상의 자기폐칩이랄까, 뭔가 집요한 나르시시즘이 느껴진다. 외바퀴 자전거처럼 고독하지 않을까? 고행을 자행하나?
“고독. 사실 그게 가장 힘겹다. 그러나 우리네 인생 자체가 고독과의 동행이지 아니한가? 당신 역시 곁에 와이프가 있더라도 외로울 게 아닌가? 고독이란 사귈 만한 벗일 뿐, 나쁜 게 아니다. 자전거 여행은 고독과 동행한다는 점에서 인생과 편차 없이 닮은 것 같다. 인생의 축소판이자, 인생을 관조하게 하는 전망대, 그게 자전거 세계여행이지. 그러고 보면 이건 구도 내지는 탐구여행이겠네.”
차백성은 책벌레에 가깝다. 여행 중에도 자주 책을 읽는다지. 그게 고독을 녹여 친구로 만드는 한 가지 방법인 모양이다. 여권처럼 항상 들고 다니는 책도 있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니코스 카잔차키스 애호가이기도 하다. 일부러 지중해 크레타 섬을 찾아 카잔차키스의 묘를 참배하기도 했다. “나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 이는 카잔차키스의 비명(碑銘)으로, 차백성의 가슴에도 화인(火印)처럼 새겨진 것 같다.
자전거는 느리다. 느려서 더 잘 보이고, 더 많이 보인다. 모든 지나갈 수밖에 없는 세상 풍경이 잽싼 발길을 멈추고 천천히 흘러간다. 풍경은 물론 삶의 풍속까지.
세계 각국을 섭렵하는 중에 본 최고의 비경은 어디였나?
“뉴질랜드 남섬 밀포드 사운드의 피오르드였다. 만년설 빙하가 흘러내려 형성된 협곡이다. 숨이 멎는 듯한 경이를 느꼈다. 그런데 비경보다 감동적인 건 사람이다. 내가 자전거를 타고 세계를 돌아다니는 것도, 사람의 비경을 만나기 위해서다.”
미움이 쌓이는 게 인간사이지만, 늘 그리운 건 사람이다. 봄날의 여행처럼 따뜻한 존재. 누구나 그런 사람을 기다린다.
“잊을 수 없는 일화가 있다. 한번은 인가 없는 오지의 어둠 속에서 곤경에 처했다가 어떤 남자의 도움을 받았다. 그는 진정 비범한 인간애로 나를 도왔다. 눈물겨워 감사의 뜻을 전할 수밖에. 그러자 그가 하는 말이 의표를 찔렀다. ‘나에게 고마워할 것 없다. 다음에 너도 남을 도우면 되지 않니?’ 그 한마디는, 이후 내 삶의 푯대가 되었지.”
부인에게 헌신적일 거 같다. 그런데 어쩌자고 20년째 ‘홀로 여행’만 하지?
“아내에겐 동의를 미리 구했다. 각자가 추구하는 삶 존중하기. 이는 현명한 부부애이지 않을까? 나는 오랫동안 꿈을 잃은 채 직장생활을 열심히 했으나 그건 일종의 방황이었다. 비관적으로 산 세월이었지. 쉰 살에 이르러서야 잠에서 깨어나 유예했던 꿈을 실현했다. 그러자 긍정적인 인간으로 변하더군.”
별 꿈 없는 보편적 인생도 얼마든지 어엿할 수 있다. 꿈으로 말하자면, 인생 자체가 한바탕의 꿈이지 않을까?
“꿈이 없는 건 강아지나 시체일 뿐이다. 모든 살아 있는 사람에겐 다 꿈이 있다. 잊었거나, 아직 발견하지 못했을 따름이겠지. 꿈을 찾아야 한다. 무슨 일이건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 가장 하고 싶은 일을 꿈으로 삼아 도전하라는 얘기다. 도전했다면 최고가 되어야겠지. 그게 가장 좋은 삶이 아니고 무엇이겠나.”
꿈 없는 욕망의 질주는 방황에 불과하다는 얘기이겠지. 꿈이라는 산소통이 빠져나간 삶은 자아를 질식시킨다는 얘기일 테고.
“자전거 여행의 꿈을 이루자 삶의 시공간이 확장되었다. 한결 농밀한 삶이 가능해졌지. 그게 왜냐면, 가령 한자리에서 90년을 산 사람의 삶과 90년을 여행하며 산 사람의 그것은, 질적으로 너무도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세상은, 비단 여행만이 아니라 뭐든 꿈을 좇아가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다.”
차백성은 자전거 세계여행만을 꿈으로 삼진 않았다. 글을 쓰고 싶다는 열망도 뿌리 깊은 것이었단다. 굴레를 벗어나고픈 그의 유목적 개성이 문예 욕망으로 번진 것 같다. 그리고 마침내 세 권의 여행기를 낸 작가로 변신했다. ‘아메리카 로드’, ‘재팬 로드’, ‘유럽 로드’. 셋 모두 인문학적 내공과 글맛으로 버무려진 가작이다. 이제 그는 글을 쓰지 않고서는 좀이 쑤셔 못 견딘다. 그보다 더 그를 달구는 건 물론 여행 충동이지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 마음만 동동 구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문을 두드려주세요. 이번 호에는 이빈섬 시인이 작고하신 아버지에게 편지를 써주셨습니다.
왜 그랬는지 알 수 없지만, 그날 나는 휴대폰을 붙들고 씨름하고 있었지요. 눈을 떼지 않고 바라보고 있었던 곳은, 분재목(盆栽木)을 경매하는 인터넷 사이트였습니다. 마음에 드는 매화나무 몇 개를 찾아 비딩(bidding)해놓고 수시로 응찰하는 경쟁자들과 가격 경합을 벌이고 있었죠. 저녁답부터 시작했는데 자정 무렵까지 계속됐습니다. 막판엔 응찰 속도도 빨라져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죠. 문득 엉덩이 쪽이 배겨서 자세를 바꿔 앉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전까지 끊임없이 들려오던 잔기침 소리가 멎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내가 앉아 있었던 곳은 병상 옆 의자였고, 어느새 아버지는 상체를 일으켜 앉아 계셨지요. 어둑한 자리에서 희끄무레한 벽을 응시한 채 나무토막처럼 움직임이 없었죠. “아버지, 잠이 깨셨어요?” 막, 잘생긴 매화나무 한 그루가 내 것이 되기 직전이었는지라, 건성으로 말을 건넸습니다. “그래.” 아버지는 나직이 대답했죠.
“혹시 화장실 가고 싶으셔요?” 링거 줄들이 어른거리는 쪽에서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아니다, 아니야.”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시는 그 얼굴을 흘깃 본 뒤, 내 눈은 급히 휴대폰 모니터로 향했고 나는 버들처럼 늘어지는 수양매화 한 그루를 낙찰받았습니다.
아버지와 대화를 나눈 건 그게 마지막이었습니다. 이튿날 아침 아내와 교대를 하고 집에서 쉬고 있다가 화장실을 다녀오던 아버지가 쓰러지셨다는 전화를 받았죠. 호흡곤란이 왔는데, 병원에서는 막힌 식도(食道)를 넓히려 넣은 스텐트(stent)가 뒤쪽 기도(氣道)를 압박해 숨 쉬는 통로가 좁아진 탓이라고 설명하더군요. 음식이 들어가는 길과 공기가 드나드는 길이 하나의 벽을 두고 그렇게 뚫려 있는 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투명 주머니와 연결된 비닐 줄들을 달고 의식도 없이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더군요. “너무 걱정 마십시오. 며칠 지나면 호전될 거예요. 그 뒤엔 다시 병실로 올라갈 수 있어요.”
그러나 며칠 뒤 의사도 당황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호흡기를 뗐는데 갑작스럽게 숨이 꺼져버리고 만 거죠. 인턴들이 미친 듯이 아버지의 가슴을 눌러댔지만 호흡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숨지다’라는 말이, 얼마나 사무치는 말인지, 그때 알게 되었습니다.
생전의 어머니(아버지에 이어 몇 달 뒤 어머니도 돌아가셨죠)는 아버지에게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지요. “아이고, 우리 영감. 작은아들 때문에 이때껏 사는 건 줄 아쇼.” 그때 어머니 눈앞엔 8년 전의 일이 스쳐지나갔을 겁니다. 아버지가 병원에서 식도암 판정을 받았다며, 서울의 큰 병원을 알아보라며 숨넘어갈 듯 내게 전화하신 어머니. ‘평생 웬수’라며 끌탕하던 평소와는 달리, 몹시 떨리는 음성이었죠. 그해 말 아동댁네(어머니의 택호(宅號)) 식구들이 동해안 포구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행여 아버지가 우리와 좋은 한때도 없이 훌쩍 가실까봐 걱정한 형의 제안으로 급조한 행사였지요. 그때까지도 아버지는 당신이 암인 걸 모르셨기에, 얘들이 갑자기 왜 이러나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온 가족이 모인 것이 그저 좋아서 연신 껄껄 웃으셨고… 아버지 웃음에 어머니는 슬쩍슬쩍 고개를 돌려 눈시울을 닦아내셨습니다. “천지를 모르는 영감 같으니라고…”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리시면서요.
당신도 모르는 이별여행을 하고 온 뒤, 놀랍게도 아버지의 식도암은 씻은 듯이 사라졌습니다. 최신 기술이 좋았나봅니다. 엑스레이 치료로 암종(癌腫)을 태워 없애는 데 성공한 것이죠. 서울에서 병원생활을 마치고 경주로 귀향한 아버지는 다시 게이트볼장으로 나가셨고, 날마다 막걸리에 불콰해진 얼굴로 귀가하시곤 했죠. 그렇게 6년 여 동안 평화로운 시절이 흘러갔습니다. 그 뒤의 상황은 떠올리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말을 하니 그만 떠오르고 마네요. 어느 날 아버지는 다시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식도가 막혀 일주일가량 음식을 삼킬 수 없었기 때문이죠. 서울역에서 뼈만 남은 손을 쥐었습니다. 마른 하회탈 같은 얼굴로 아버지는 웃고 있었지만, 둔한 내 마음에도 울컥하는 감정이 올라왔죠. 그날 저녁, 우리 집에서 아무리 씹고 꿀꺽여도 삼켜지지 않는 음식 한 숟가락을 식도 저 안쪽으로 밀어 넣기 위해 아파트 복도를 몇 차례나 왔다 갔다 하시던 모습이 선합니다. 아무리 몸을 흔들어도 내려가지 않는 음식을 끝내 뱉어내며 미안해하시던 그 얼굴. 옆에 앉은 자식은 아무 말도 건넬 수 없었습니다. 이후 실낱같은 희망과 대못 같은 절망이 교차한 뒤 경황도 없이 아버지를 보냈습니다.
그날 밤, 매화를 구하려 그토록 경매에 열중했던 내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다시 생각해봅니다. 고통을 겪고 있는 아버지를 외면하려, 꽃 피는 생명을 희구한 엉뚱한 입덧 같은 것이었을까요. 그때 사들인 매화는 그 겨울을 넘기고 해사한 흰 꽃을 피웠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슬픔이 얼마나 컸는지 모릅니다. 찬란한 봄날에 다시 돌아오지 못한 아버지는 영천 국립묘지의 작은 분(盆)에 든 채, 생전의 속 좋은 그 웃음을 흩고 계셨지요. 매화는 다시 피지만 사람은 다시 피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토록 아프게 깨달으라고…. 그날 나는 왜 실없는 해찰을 하며 어둠 속 아버지 얼굴을 한 번 더 살펴보지 못했을까요.
막 군대를 다녀온 막내아들이 어쩐지 버거운 느낌이 들 때, 내게 그토록 과묵하게 대했던 아버지 생각이 납니다. 며느리보다도 더 어색해했던 아들. 아버지와 나 사이에는 알 수 없는 무거운 공기가 있었습니다. 뭐랄까, 우리는 어느 날부터 서로의 마음을 불러낼 화제(話題)의 실마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이었죠. 오래전 아버지의 인생 실패를 굳이 꺼낼 생각은 없습니다. 그 때문에 늘그막에 어머니에게 죄지은 사람으로 사죄하듯 사신 것도 압니다. 먹고사는 일보다 고통스러웠던 건, 주변에서 우리를 바라보던 시선의 납덩이같은 무게였습니다.
얼마 전 벌초를 갔을 때, 주위를 떠나지 않던 호랑나비 한 마리를 생각합니다. 나비는 사람의 영혼을 품고 다닌다는 얘기를 들은 적 있습니다. 그날 어쩐지 아버지를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제 아버지는 이승의 모든 것 다 내려놓으셨을까요. 나비처럼 가벼이, 또 다른 시간의 허공을 나붓나붓 날고 계신 걸까요. 아닙니다. 아버진 아무래도 여기 계신 듯합니다. 내 안에 말입니다. 여기 내가 있다는 것. 이것이 나비보다 더한 아버지의 화현(化顯)이 아닐는지요. 내년 봄날 매화꽃 피는 날, 호랑나비로 다시 오셔도 좋습니다.
이빈섬 시인
1961년 경북 경주 태생, 본명은 이상국이며, ‘이빈섬’이라는 필명으로 등단했다. ‘조선일보’, ‘중앙일보’ 기자를 지낸 언론인이자 시인, 스토리텔러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 ‘옛사람들의 걷기’, ‘눈물이 빗물처럼’, ‘추사에 미치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