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열세 번째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의 산사 7곳’ 두 번째는 보은 법주사이다.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면에 위치한 법주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5교구 본사로 사적 제503호이며, 속리산 천황봉과 관음봉을 연결한 그 일대는 명승 제61호로 지정되었다.
속리산은 해발 1057m의 천황봉을 비롯해 9개의 봉우리가 있어 원래는 구봉산이라 불렀으나, 신라 때부터 속리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법주사는 553년(진흥왕 14) 의신(義信)이 인도에서 불경을 가져와 이곳 산세의 웅장함과 험준함을 보고 불도(佛道)를 펼 곳이라 생각하고, 큰 절을 세워 이름 붙였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의신 조사가 법주사를 창건하고 진표 율사가 7년을 머물면서 중건하였다고 하나 ‘삼국유사’ 4권 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楓岳鉢淵藪石記)에 전하는 바는 조금 다르다.
진표 율사가 금산사에서 나와 속리산에 들러 길상초가 난 곳을 표해 두고 바로 금강산에 가서 발연수사(鉢淵藪寺)를 창건하고 7년 동안 머물렀다. 그 후 진표 율사가 금산사와 부안 부사의방(不思議房)으로 돌아가서 머물 때 속리산에 살던 영심(永深), 융종(融宗), 불타(佛陀) 등이 와서 진표 율사에게서 법을 전수 받았다. 그때 진표 율사가 그들에게 "속리산에 가면 내가 길상초가 난 곳에 표시해 둔 곳이 있으니 그곳에 절을 세우고 이 교법(敎法)에 따라 인간 세상을 구제하고 후세에 유포하여라" 하였다.
이에 영심 스님 일행은 속리산으로 가서 길상초가 난 곳을 찾아 절을 짓고 길상사라고 칭하고 처음으로 점찰 법회를 열었다고 하니, 현재의 법주사는 진표 율사의 뜻에 따라 영심 스님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진표 율사가 세운 금산사와 이곳 법주사는 모두 미륵 신앙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데 석가모니불이 입멸한 후 56억 7000만 년이 지나 미륵이 오면 용화수(龍華樹) 나무 아래서 세 번에 걸친 설법(龍華三會)을 통하여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니 금산사가 제1도량, 법주사가 제2도량, 금강산 발연사가 제3도량으로 창건한 용화삼회(龍華三會) 설법도량인 것이다.
고려 문종의 아들 대각국사 의천의 동생 도생 승통(導生 僧統)이 절의 주지를 지냈으며 1363년(공민왕 12)에는 왕이 절에 들렸다가 양산 통도사에 칙사를 보내 부처님의 사리 1과를 법주사로 옮겨 봉인토록 하였으니 지금도 법주사 내에 모셔져 있다.
조선 세조 때에는 신미 대사가 주석하면서 크게 중창되어 이후 60여 동의 건물과 70여 개의 암자를 거느린 대찰(大刹)이었으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인해 거의 모든 건물이 불타버리고 말았다. 사명대사 유정 스님이 20년에 걸쳐 팔상전을 중건하였으며 벽암 각성 스님이 황폐화된 절을 중창하였고 그 뒤 수차례의 중건, 중수를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고려 인조 때까지도 절 이름을 속리사라고 불렀다는 점과 '동문선'에 속리사라는 제목의 시가 실린 점으로 미루어 아마도 절 이름이 길상사에서 속리사로, 그리고 다시 법주사로 바뀐 것이 아닌가 생각되지만 정확하게 규명되지는 않았다.
법주사가 보유한 문화유산으로는 쌍사자석등(국보 제5호)·팔상전(국보 제55호)·석련지(국보 제64호)·사천왕석등(보물 제15호)·마애여래의상(보물 제216호)·신법천문도병풍(보물 제848호)·대웅보전(보물 제915호)·원통보전(보물 제916호)·법주괘불탱화(보물 제1259호)·소조삼불좌상(보물 제1360호)·목조관음보살좌상(보물 제1361호)·철확(보물 제1413호)·복천암 수암화상탑(보물 제1416호)·희견보살상(보물 제1417호)·복천암학조등곡화상탑(보물 제1418호)·보은 법주사 동종(보물 제1858호) 등이 있으며, 주변에는 삼년산성(사적 제235호)·정이품송(천연기념물 제103호)·망개나무(천연기념물 제207호) 등이 있다.
속리산(俗離山) 법주사(法住寺)
속리산은 충청북도 보은군과 경상북도 상주시에 걸쳐있는 명산으로 예로부터 우리나라 8대 경승지로 전해지며 해발 1058m 천황봉을 중심으로 관음봉·비로봉·경업대·문장대·입석대 등 해발 1000m 내외의 산봉우리들이 있다. 그중 문장대는 속리산의 빼어난 경치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경승지로,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데 그 남쪽 수정봉 아래 좋은 자리에 법주사가 자리 잡고 있으며 속리산 일대는 1970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지금은 터널을 뚫어 보은에서 법주사까지 쉽게 갈 수 있지만 예전에는 꼬불꼬불 열두 굽이를 돌아 올라가는 말티재를 넘어야 했다. 이 고갯길은 고려 태조 왕건이 법주사에 행차할 때 닦은 길이라고 전해지며 조선 세조는 즉위하기 전 상환암에서 백일기도를 올렸으며, 즉위 후에는 복천암에서 사흘간 치병(治病) 기도를 올리기도 하였다.
고개를 올라서면 세조에게 벼슬을 제수받은 정이품송이 있고 이어 옛 사하촌(寺下村)이었을 산채백반 식당들이 빼곡한데, 그 이후 일주문까지는 길 양쪽으로 떡갈나무 숲이 아름다운 오리숲이 터널을 이루고 있다.
정이품송과 식당가를 지나 산사 7곳 중 가장 비싼 입장권(4000원)을 끊고 떡갈나무 우거진 맑은 계류(溪流)를 따라 오리 숲길을 걸어 들어가노라면 일주문이 나오는데 ‘호서제일가람(湖西弟一伽藍)’, 즉 호서(충청)지방 제일의 절집이라는 현판을 달았으며 그 아래 안쪽에는 ‘속리산대법주사(俗離山大法住寺)’라고 씌어 있어 대단한 자부심을 드러낸다.
오리 숲길을 산책하듯 걸어 일주문을 지나면 속리산사실기비(俗離山事實記碑)와 벽암대사비(碧巖大師碑)가 나오는데 역사적인 의미가 있으니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살펴보는 것이 좋다.
속리산사실기비는 1666년(현종 7)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우암 송시열이 짓고 동춘당 송준길이 썼는데 명산 속리산에 세조가 행차한 사실과 수정봉 위 거북바위를 당 태종이 자르게 했다는 이야기 등이 적혀 있다고 한다. 비각 속에 보호되고 있으며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67호이다.
벽암대사비(碧巖大師碑)는 법주사를 크게 중창한 조선중기 고승 벽암대사의 행적을 기록한 것이다. 1664년(현종 5)에 세워졌으며 비문은 정두경이 짓고 글씨는 선조의 손자 낭선군이 썼는데 커다란 암반 위에 홈을 파서 비석을 세웠다.
오리 숲길을 벗어나 계류에 걸쳐진 다리를 건너면 비로소 법주사 경내로 들어서는 사실상 첫 관문인 금강문이다. 마곡사가 해탈문이 첫 관문이듯 법주사는 금강문인데 그 안에 모셔진 분들은 문수, 보현보살과 금강역사로 똑같다.
다만 마곡사는 보현과 문수 모두 동자상을 모셨는데 법주사는 어린 동자상이 아닌 보살상을 모신 점과 해탈문이 아닌 금강문으로 부르는 점이 다르다. 금강문으로 들어서면 산중에 위치한 산사(山寺)지만 전체적으로 평지 지형에 크고 작은 당우(堂宇)들이 자리 잡고 있다.
금강문 오른쪽에 있는 쇠솥(鐵鑊, 보물 제1413호)은 신라 성덕왕 때 당시 승도(僧徒) 3000명을 먹일 쌀 40가마가 들어간다는 것인데, 반대편인 왼쪽 끝에는 우리나라 최대크기인 80가마가 들어가는 돌솥(석조(石槽),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0호)이 있어 대조적이다.
철당간 옆에 있는 석련지(石蓮池)는 원래 용화보전 앞에 희견보살상, 사천왕석등과 한 줄로 서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용화보전이 없어지면서 본래의 자리를 잃고 그 축(軸)을 벗어나 있는 것이라고 한다.
법주사의 중앙에는 팔상전(八相殿)이 있다. 우리나라 현존하는 유일한 목탑인 팔상전은 사찰 창건 당시 의신 조사가 초창했다고 전하나, 정유재란 때 불탄 후 사명대사와 벽암대사가 다시 복원하였다고 하며 지난 1968년에는 완전 해체, 수리하였다.
팔상전에서 대웅보전으로 이어지는 중간에 쌍사자 석등이 있다. 사자를 조각한 석조물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으며 매우 독특한 형태다. 디딤돌 위에 선 두 마리의 사자가 가슴을 맞대고 앞발과 주둥이로는 윗돌인 화사석을 받치고 있는 모습으로 사자의 갈기와 다리 근육 등이 매우 사실적인 통일신라 석등의 대표작이다.
법주사 금강문을 들어서서 오른쪽으로 철확(쇠솥)이 있고 왼쪽으로 철당간과 석련지, 돌확(석조)이 있다. 금강문 정면으로는 두 그루 나무가 버티고 선 사천왕문이며 팔상전을 지나면 쌍사자 석등이 있고 이어서 대웅보전이다. 마침내 부처님이 계신 곳이다.
법주사는 법상종 사찰이며 미륵신앙 도량이기에 대웅보전과 미륵전(용화전) 양대 불전이 핵심이다. 미륵전은 조선 말기 대원군 때 훼손되었기에 천년고찰 법주사의 주불전은 바로 이 대웅보전이며 금동미륵대불과 용화전을 근래에 다시 지어 팔상전 왼쪽에 우뚝 서 있다.
그런데 석가모니가 주불이라면 대웅보전이 맞겠으나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모셨다면 대적광전이나 대광명전으로 불러야 하는데 옛 기록에 대웅대광명전이 흥선대원군 시절 미륵장륙상을 헐어갈 무렵 대웅보전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또한 대웅보전에 오르는 중앙계단의 넓은 폭과 중앙의 답도(踏道)가 특이하며 좌우 소맷돌 위쪽에 새겨진 원숭이 석상도 눈길을 끈다.
이렇게 금강문을 들어서서 사천왕문, 팔상전을 지나 쌍사자 석등과 대웅보전까지 남북으로 이어지는 축선이 화엄 신앙축이라면 팔상전에서 왼쪽으로 사천왕 석등과 석연지, 희견보살상을 연결 후 용화보전으로 이어지는 축선이 미륵 신앙축이었는데, 용화보전과 장륙상이 없어지는 통에 이 축선은 없어지고 중간에 있었던 석연지와 쌍사자 석등이 흩어져버렸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전체적으로 배치와 조화가 무너지고 산만해 보인다. 게다가 최근에 과거 용화보전 자리에서 남쪽으로 자리를 옮겨 금동미륵대불과 용화전을 우뚝 세우니 법주사의 상징 팔상전이 눌려 보이는 점이 다소 아쉽다.
대웅보전 앞 오른쪽으로는 네모꼴 모양의 원통보전이 있는데 관세음보살을 모셔 관음전이라고도 부르는 곳이다. 창건 당시 의신조사에 의해 지어진 건물로 임진왜란 때 소실 된 후 1624년 벽암대사가 다시 복원하였으며 안에는 목조관음보살이 모셔져 있다.
원통보전 옆에는 희견보살상이 세워져 있는데 앞서 언급한 대로 옛 용화보전 앞에 있었으나 지금은 위치가 변경된 상태이다. 희견보살은 법화경의 소신(燒身)공양을 실천하는 모습을 세운 것인데 부처님께 최대의 공양을 올리기 위하여 1200년 동안 자신의 몸에 향과 기름을 바르고 먹고 마신 후 스스로 불을 붙여 1200년 동안 태워서 공양하였다는 것이다.
금동미륵대불은 원래 용화보전에 미륵장륙상을 봉안하였으나 정유재란 때 미륵장륙상이 사라지고 난 후 중건할 때 금동미륵장륙삼존상을 다시 모셨으나, 이도 대원군이 경복궁 중건 시 당백전 만들려 헐어갔고 용화보전도 무너져 초석만 남았다는 것이다.
1939년에 미륵불상 조성이 다시 시작되었으나 조각을 맡은 사람이 요절하는 바람에 중단되었다가 1963년 박정희 대통령의 희사로 재개되어 1964년 완공됐지만, 아쉽게도 시멘트로 만든 불상이었다. 1986년에 이를 헐고 25m 높이의 청동미륵상과 8m 높이의 기단부에 용화전 등을 준공한 것이 1990년이며 2002년에는 청동불에 개금불사를 완성하였다.
이렇게 해서 법주사 경내는 대략 돌아보았다. 물론 대웅보전 앞 왼쪽으로 사대부 솟을대문과 담장을 두른 선희궁 원당이 있는데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나중에 위패를 모셔가 조사당으로 쓰고 있다거나 금동미륵불 남쪽으로 통도사에서 모셔온 부처님 진신사리 1과를 모신 세존사리탑과 능인전 등이 있다.
또한 진영각, 삼성각, 명부전 및 선원을 포함한 스님들 요사채 등 당우들이 많지만 특별하게 눈길을 끄는 곳은 청동미륵대불 아래 바깥쪽으로 나가는 방향으로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거기 새겨진 마애여래의좌상이다.
한국의 대표 산사(山寺)로 세계유산에 등재된 속리산 법주사. 깊숙한 산속이지만 오붓한 평지에 자리 잡고 있으며 최근 세운 거대한 미륵불 외에는 옛 절집 모습 그대로 남아 천년고찰의 역사와 향기를 가득 품고 있는 호서제일 가람이다.
지난 6월 30일(현지시각), 바레인 수도 마나마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 제42차 회의에서 한국의 산사(山寺) 7곳이 세계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로써 한국은 열세 번째 유네스코 세계 유산을 갖게 되었으니 7곳 산사는 양산 통도사, 영주 부석사, 안동 봉정사, 보은 법주사, 공주 마곡사, 순천 선암사, 해남 대흥사다.
당초 통도사와 부석사, 법주사, 대흥사 등 4곳만 등재될 듯하였고, 봉정사, 마곡사, 선암사 등 3곳은 보류될 처지였으나 세계유산위원회의 21개 위원국이 만장일치로 한국이 신청한 7곳 모두를 받아들여 등재되었다. 문화강국 대한민국의 쾌거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등재된 7개 산사 외에도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대단한 절집들, 예컨대 송광사나 해인사, 화엄사, 직지사, 수덕사 등은 왜 누락되었는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그 과정을 살펴보았다.
세계유산 등재를 신청하기 위하여 전국의 절집들을 대상으로 전통사찰, 산지입지, 국가지정문화재 보유 여부 등을 1차 선별기준으로 적용하여보니 전통사찰법에 의거 인정된 곳이 952곳이었으며, 이중 산지입지 조건을 충족시킨 곳이 785곳, 여기에 국가지정문화재 보유 기준을 대입하니 63곳이 일차로 정리되었다고 한다.
여기에 7~9세기 창건 여부와 창건 시기를 증빙할 자료를 확인해본 결과 다음 25곳으로 압축되었으니 관룡사, 귀신사, 금산사, 기림사, 내소사, 대흥사, 마곡사, 무량사, 무위사, 범어사, 법주사, 봉암사, 봉정사, 부석사, 불영사, 쌍계사, 선암사, 선운사, 수덕사, 용문사, 운문사, 장곡사, 전등사, 직지사, 통도사 등이었다.
마지막으로 선원(禪院)의 운영과 원래 지형을 유지하는지 여부 등을 확인하니 최종적으로 위 7곳이 선정되어 등재 신청되었다고 한다.
그러면 쟁쟁한 사찰들이 누락된 이유는 무엇인가. 삼보사찰 중 승보사찰인 송광사의 경우, 9세기 무렵 길상사라는 암자로 시작하였으나 지금의 대찰은 12세기 후반 보조국사 지눌에 의한 것이다. 7~9세기 창건에 한참 늦었으며 삼보사찰 중 팔만대장경을 보유한 법보사찰 해인사의 경우 9세기 창건의 기록은 확인되었으나 이후 고려시대의 상황을 알 수 있는 자료가 전혀 없다. 팔만대장경은 조선시대에 해인사로 옮겨진 것이며 특히나 근래 사찰의 원형을 변형시킬 만큼 많은 공사가 있었음이 그 이유였다.
또한 화엄사의 경우 고려부터 조선 초기까지 사찰의 중수나 중창 자료가 불충분하며 직지사나 범어사, 선운사 등은 건물의 상당 부분이 변형되거나 원형 유지가 애매한 점 등이 그 이유였다. 여기서 최근 유서 깊은 절집들의 무분별한 중창불사나 대규모 확장 건설공사가 역사성이나 문화적 가치에 반하는 일임이 드러났으니 경각심을 가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제 열세 번째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의 산사 7곳을 하나씩 답사해보기로 한다.
태화산(泰華山) 마곡사(麻谷寺)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의 태화산 동쪽 산허리에 자리 잡은 마곡사는 대한불교 조계종의 제6교구 본사이다. 기록에 따르면 마곡사는 백제 무왕 41년(640)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며 고려 명종 때인 1172년 보조국사가 중수하고 범일대사가 재건하였다고 한다.
신라 보철화상 때 설법을 듣기 위해 계곡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형태가 삼밭의 삼대, 즉 마(麻)와 같다 해서 마곡사(麻谷寺)라 불렀다고 한다. 이후 도선국사가 다시 중수하고 각순대사가 보수한 것으로 전해진다. 조선 세조가 이 절에 들려 ‘만세에 망하지 않을 땅(萬世不忘之地)’이라 평가하고 영산전(靈山殿) 현판을 사액한 일도 있었다.
마곡사가 위치한 공주 유구 지역은 정감록 등 각종 비결서(秘訣書)에 전해오는 ‘십승지지(十勝之地)’에 해당되는 곳으로 그만큼 명당이라는 얘기이며, 춘마곡(春麻谷) 추갑사(秋甲寺)라고 하여 봄날 생기 움트는 나무와 봄꽃들이 아름다운 곳이라는 뜻이다.
마곡사에 아쉽게도 국보급 문화재는 없으나 5층 석탑(보물 제799호), 영산전(보물 제800호), 대웅보전(보물 제801호), 대광보전(보물 제802호)과 감지은니묘법연화경 제1권(보물 제269호)과 제6권(보물 제270호)이 있으며 범종과 청동향로 등 지방문화재와 세조가 타고 왔다가 두고 갔다는 연(輦)이 있어 오랜 전통과 유서 깊은 절임을 말해준다.
또한 마곡사는 김구 선생이 명성황후시해사건 때 일본군 장교를 살해 후 숨어들어 승려로 지내기도 했던 곳으로 해방 후 찾아와 심은 향나무가 지금도 자라고 있어 자주독립 정신의 표상이 되고 있는 곳이다. 불화(佛畵)를 그리는 화승(畵僧)들이 많이 활동하여 오늘날까지 화승들을 추모하는 다례제를 지내는 화소사찰(畵所寺刹)이다.
예전에 마곡사는 개울을 멀리 돌지 않고 허리를 뚝 잘라 옆구리로 진입하기도 하였으나 최근에는 진입로를 잘 정비하고 주차장을 갖추어 놓아 누구나 자연스럽게 입구로 들어와 해탈문과 사천왕문을 지나 다리를 건너 북원 마당으로 진입할 수 있게 됐다.
진입로 중간에 있는 일주문은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사실상 해탈문(충남문화재자료 제66호)이 마곡사의 첫 관문인 셈인데, 정면 3칸, 측면 2칸에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정면 중앙을 개방하여 통로로 사용하면서 양편에는 금강역사상(인왕상)과 문수 및 보현동자상을 봉헌하였다.
해탈문을 지나면 사천왕문(충남문화재자료 제62호)이 나오는데 사천왕은 고대 인도에서 숭상하던 신으로 불교에 귀의하여 부처님과 수미산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다. 마곡사 사천왕상은 조선 후기 소조불로 봉안되었으며 발밑에 악귀상이 다양하게 표현되어 눈길을 끈다.
이렇게 해탈문과 사천왕문을 지나 왼쪽의 영산전 영역은 나중에 보기로 하고 계류를 흐르는 다리를 건너니 마곡사의 중심영역인 오층석탑과 대광보전, 대웅보전이 나타난다.
오층석탑(보물 제799호) 꼭대기에는 보기 드물게 청동제 머리 장식을 얹었는데 고려 말 원나라의 영향을 많이 받아 그들의 라마탑을 본떠서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1층 남쪽에는 자물쇠 모양을 새겼으며, 2층에는 사방에 불상을 새겼고 지붕돌 네 귀퉁이마다 풍경을 달았으나, 지금은 모두 없어지고 5층 지붕돌에만 1개가 매달려 있다.
마곡사의 중심 법당인 대광보전(보물 제802호)은 진리를 상징하는 비로자나불이 서쪽에서 동쪽을 바라보며 모셔져 있는데 부석사 무량수전의 아미타불과 같은 형태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미타불은 서방극락세계의 주인으로 서쪽에 앉아계신다지만 비로자나불을 왜 서쪽에 앉혔는지는 알 수 없어 궁금하다.
대광보전 뒤에 솟아오른 2층 지붕은 대웅보전(보물 제801호)인데 안에는 석가모니와 서쪽에 아미타, 동쪽에 약사여래를 모셨는데 약사여래불이 약합을 들지 않고 아미타여래와 같은 수인을 하고 있다.
마곡사의 중심 영역 서쪽에는 백범 김구 선생이 머물다 간 백범당(白凡堂)이 있으며 그 옆으로는 1946년 이곳을 다시 찾은 김구 선생이 심은 향나무가 잘 자라고 있다. 마곡사 개울가에는 김구 선생이 삭발했던 삭발 바위가 있어 또 다른 명소가 되었다.
이렇듯 마곡사 이곳저곳을 둘러본 후에 돌아 나오는 길에 해탈문과 사천왕문 옆 영산전을 찾아본다. 영산전(보물 제800호)은 이 절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며 세조가 김시습을 만나러 찾아왔다가 못 만나자 현판 글씨를 써주었다고 한다.
세계유산으로 선정된 마곡사. 승가 공동체의 생활과 전통양식을 잘 보전하여 ‘한국의 산사’ 7곳에 포함되었고 불화를 그리는 유명 화승(畵僧)들의 맥을 이어가는 절집이다.
숲으로 가는 산언저리마다 눈부시다. 밭두렁에 애기똥풀 흐드러져 숫제 샛노란 화단이다. 다랑논 이고 있는 석축에 어린 그늘이 푸르도록 짙은 건, 5월 한낮의 봄 햇살이 밝아서다. 민들레는 수과(瘦果)를 매단 채, 건듯 부는 미풍에 갓털을 휘날린다. 진초록으로 이미 농익은 초목 잎사귀들. 산야에 뿌리박은 식물마다 의기양양하다. 길로 나다니는 사람만이 계절을 타 들썩인다.
개심사(開心寺) 일주문을 지나자, 일변 눈으로 가득 차오르는 소나무들. 고찰(古刹)치고 들머리 풍광 허술한 곳이 드물다. 개심사 숲길도 기중 반열에 든다. 솔숲에 불그레한 빛살이 어린다. 적송(赤松)들이어서다. 미끈한 붉은 살갗에 건강한 지체, 게다가 저마다 미묘하게 굽어 허리를 요리저리 비트니 수려하다 못해 관능적이다. 흐뭇하면 안고 싶고, 심취하면 안기고 싶어진다. 이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만은 아니다.
굽고 휜 소나무는 내심 안도할 게다. 쭉쭉 곧게 자란 나무들보다 더 온전하게 수명을 누릴 수 있으니까. 목수의 도끼날을 피할 수 있어서다. 목재로서는 별 쓸모가 없게 생긴 덕분이다. 목수의 눈엔 무용지물이지만 소나무 입장에선 천행이다. 그게 나무만의 일이랴. 우리네 인생사에도 자주 적용되는, 일종의 이치다.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속담에 실린 메시지를 생각해보라.
물매진 들머리 숲길, 그 이후로는 돌계단길이 가지런하다. 여기서도 소나무들의 전시회가 성황리에 펼쳐진다. 나무들의 청신한 향이 그윽하게 번진다. 개심사 전각들 지붕마다 초록이 서린다. 초록 숲 안의 산사여서다.
뜰에 걸린 연등들로 경내가 환하다. 그러고 보니 얼마 뒤면 석탄일이다. 숨 쉬지 않으면 살 수 없다. 꿈꾸지 않으면 오를 수 없다. 그리지 않으면 만날 수 없다. 연등공양이란 부처를 숨 쉬고 꿈꾸고 그리는 일이겠지. 나를 낮추고 나를 비우고, 그리해서 나를 찾아가는 기도일 게다.
천년도량의 위세에 걸맞게 개심사 전각들은 방정하거나 준수하다. 혹은 허심히 잘 늙은 고로(古老)처럼 고졸하다. 전각 속엔 나무가 박혀 있다. 휜 채로, 비틀어진 채로, 그러니까 굽은 원목 그대로를 베어 말려 기둥을 삼고 들보로 채택했다. 주야로 법당의 향훈을 취할 저 고색창연한 재목들. 남벌 탓에 곧은 목재를 구할 수 없어 굽은 나무를 그냥 그대로 썼을까? 쓸모없어 보였을 나무가 쓸모 있게 쓰였다. 거룩한 불상과 동거하며, 더 온전히 살아남았다. ‘곡즉전(曲則全)’이라, ‘굽어서(曲) 온전할(全) 수 있다’는 묘리를 전갈한 이는 노자였다.
개심사는 실로 수목의 향연장이다. 그 친숙한 명성으로 한 벼슬 걸친 거목들의 장원이다. 소나무, 느티나무, 팽나무, 모과나무, 배롱나무, 전나무, 서어나무, 왕벚나무…. 국내엔 이곳에만 있다는 청벚나무에선, 시나브로 봄이 가건만 여전히 끝물 꽃잎들 분분히 낙화한다.
개심사를 벗어나 다시 숲길을 오른다. 낙락장송 휘늘어진 숲 사이로 구불구불 길이 이어진다. 키 작은 관목들. 곧게 뻗어 하늘 한 자락 움켜쥐는 활엽 교목들. 온갖 나무들이 빼곡 들어차 기세를 돋운다.
인간의 도시는 삼엄한 사각의 링을 닮았다. 나무들은 코피를 쏟는 싸움을 하지 않는다. 경쟁을 능사로 삼는 대신, 상호 의존의 네트워크를 형성함으로써 생존을 도모한다. 바위 벼랑에 위태롭게 매달린 소나무만 해도 그렇다. 곰팡이와 공생해 균근(菌根)을 만들고, 그 균근에서 발달한 팡이실로 바위 틈새의 수분과 양분을 빨아들인다. 이렇게 소나무는 공생과 상생, 인류의 그 오래된 이상(理想)을 소리 소문 없이 오롯이 구가한다.
숲길에 하오의 놀빛이 어린다. 폐사지 보원사지에 간신히 남은 석탑에도 황혼녘 주황물이 흥건하다. 간절한 탑돌이를 하며 합장 비손했을 옛사람들, 지금은 천상의 어느 푸른 공간에 머무시나. 옛사람들에겐 나무도 석탑과 매한가지였다. 성황당 신목(神木)에 의지해 지상에서 이루지 못한 꿈과 희망을 천상에 탄원했다. 삶이, 영혼이, 견딜 수 없이 슬플 땐, 조용히 숲에 들어가 하늘을 우러렀다. 그래서 숲은 일쑤 정결한 지성소였다. 그들은 숲에서 방귀조차 뀌지 않았다.
>>>탐방 Tip
개심사와 보원사지를 잇는 숲길은, 충남 내포 지역을 광범위하게 포괄하는 ‘내포문화숲길’ 코스들 중에서도 백미로 꼽히는 구간이다. 개심사에서 보원사지까지는 약 2km 거리. 산마루를 넘자면 오르막과 내리막을 경유하지만 가파르지 않다. 보원사지에서 1.3km를 더 내려가면 ‘백제의 미소’로 유명한 서산 마애여래삼존상을 만날 수 있다.
정유년인 올해는 정유재란(1597.1~1598.12) 발발 420주년이다. 임진왜란으로부터는 427주년.
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지 지정이 해제된 탓이다. 근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그 중요성에 눈을 떠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치욕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모습이라도 남겨둬야 한다. 더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역사 현장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도 그 흔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에 게재하기로 한다.
임진·정유 국란의 왜군 출진기지는 규슈(九州) 서북 해안 나고야(名護屋) 성이다. 일본 중부의 중심도시 나고야(名古屋)와 구별하려고 히젠(肥前)이란 옛 지명을 붙여 ‘히젠 나고야’라 불리는 곳이다. 사가(佐賀) 현 가라쓰(唐津) 시에서 버스를 타고 해안선을 따라 40여 분 달리면 닿는 요부코(呼子) 포구 언덕 위에 있다.
굴곡이 심한 해안선 깊숙한 만(灣)에 얼마든지 배를 숨길 수 있고, 조선과의 거리가 제일 가까운 지리(地利)를 고루 갖추어 옛날부터 왜구의 소굴로 유명했던 곳이다.
26년 만에 다시 찾아본 나고야 성은 그때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흘러간 옛 노래 ‘황성옛터’를 연상시키는 무너진 성벽이 옛날 그대로였다. 일본이 군신으로 떠받드는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의 글씨로 ‘名護屋城址’라고 쓴 비석도 같은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헛꿈을 조롱한 쇼와(昭和) 시대 하이쿠 시인 아오키 겟토(靑木月斗)의 시비도 같은 자리에 있었다.
수십 년이 걸린 성터 발굴·복원사업이 끝났다지만 겉보기에 변한 것은 없었다. 주말 낮인데도 탐방객 발길이 뜸해 적막하기만 했다. 성터 입구에 자리 잡은 박물관과 그 앞에 조성된 상가만이 옛날에 없었던 건물이다.
도고 헤이하치로 글씨로 된 성적(城跡·성터) 비는 1930년, 겟토의 시비는 1940년에 세워졌다. 그러나 두 돌의 언어는 사뭇 다르다. 도고의 비에는 옛 성터라는 글자뿐이지만, 그것이 세워진 시대와 세운 자의 뜻에 히데요시의 대륙 정복 야망을 그리는 마음이 오롯이 드러나 보인다.
1930년이라면 일본의 만주 침략 야욕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대다. 내무성이 그 돌을 세우면서 러일전쟁 영웅에게 글씨를 부탁한 가슴 밑바닥에는 일본인들이 ‘역사상 최고의 영웅’으로 추앙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존숭하는 뜻이 꿈틀거렸으리라.
1940년에 세워진 겟토 시비는 히데요시의 망상을 비웃는 것 같다. “다이코가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지만 바다에는 안개만 자욱해.” ‘다이코(太閤)’란 천황을 대신해 나라를 다스리는 관백(關白) 자리를 아랫사람에게 물려주고 상왕처럼 물러앉은 이를 말한다. 히데요시는 조카(秀次·히데쓰구)에게 양위한 뒤에도 만사를 제멋대로 한 사람이다.
그런 권력자가 아무리 대륙 진출 야망으로 용을 써도 그 꿈은 안갯속에 가물가물하다는 뜻으로 읽히지 않는가. 실제로 성터에서 바라본 현해탄 바다에는 쓰시마의(對馬島) 모습조차 어렴풋했다.
26년 만의 탐방객을 놀라게 한 것은 성터에 우거진 고목나무 가지에 달려 있는 올레길 리본이었다. 처음 눈에 띈 것은 천수각 가는 길가 나뭇가지에 달린 것이었다. 반가워 카메라를 들이대니 일본인 탐방객이 “그게 무엇이기에 사진을 찍느냐”고 물었다. 한국 제주도 올레길 표시라는 말에 그들은 “천수대 터에도 많다”고 알려줬다. ‘제주 올레가 일본과 몽골에 수출되었다더니 여기까지 왔구나’ 싶어 너무 반가웠다.
그의 말이 맞았다. 금빛 찬란한 천수각이 있었다는 천수대 터에는 쇠막대기로 만들어 세운 올레 표지물도 있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가라쓰에서 규슈 서북단 히라도(平戶) 섬에 이르는 해안선 구간에 올레길이 조성되어 한국인 여행객에게 인기가 있다 한다. 나고야 성을 찾아가는 도로표지판마다 한글이 병기된 것도 그래서구나 싶었다. 7년 동안 나라를 풍전등화처럼 위태롭게 했던 왜란 출진기지가 평화의 길이 된 것을 400여 년 세월의 작용이라고만 보아 넘기기에는 좀 미진한 뒷맛이 남았다.
임진왜란 400주년 기획 시리즈 취재 차 나고야 성에 갔던 1991년에는 유적지 발굴사업이 한창이었다. 옛 성터를 정비해 관광자원으로 삼기 시작한 때여서 일본인 관광객 발길이 잦았다. 그 르포기사가 신문에 보도된 것을 계기로 국내에서도 차츰 관심을 갖는 사람이 늘어 규슈 관광의 인기 코스가 되었으니, 세월의 두께를 새삼 음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모습 그대로 두는 것이 역사의 참뜻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생각에서 무너진 성을 보존하기로 했습니다.” 그때 특파원을 안내해준 진제이(鎭西) 초(町·일본의 행정구역 단위) 직원은 복원사업이 현상을 그대로 두고 발굴만 하는 것이라 했다. 히데요시 이후 염전·반전사상의 결과로 폐허가 된 성을 그대로 두는 것도 역사의 뜻이라는 것이었다.
정작 옛 자취를 찾게 된 것은 나고야 성 주변에 촘촘히 자리 잡았던 130여 개 번국(藩國)의 진터다. 독재자 히데요시는 휘하 영주[大名]들에게 전쟁기간 중 출진 병사들을 거느리고 성 아래 대기하도록 요구했다. 출진 후의 병력보충 병참 등 임무를 강제했기 때문에 전국의 영주들은 수많은 예비 병력을 거느리고 눌러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진터들은 전후 폐허가 되었다가 사유지로 바뀌어 흔적마저 감추었다. 1970년대부터 시작된 복원사업의 큰 틀은 그 땅을 사들여 옛 모습의 윤곽을 복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박물관을 지어 전쟁의 배경과 경과, 그리고 양국 평화의 지향점을 모색하고 홍보하자는 것이었다.
나고야 성은 축성과 폐성이 모두 전광석화 같았다. 인구 20~30만 명의 거대한 병영도시 나고야 성은 번개같이 건설되어, 또 그렇게 해체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최고 권력자가 사라지고 세상이 바뀌면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건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그처럼 철저하게 무참하게 파괴된 일은 흔하지 않으리라.
일본 통일의 꿈을 이룬 히데요시는 조선과 명나라를 손아귀에 넣어 동아시아 패권을 잡겠다는 망상으로 1590년부터 대륙 침략을 꿈꾸기 시작한다. 중국은 물론 인도까지 영토를 넓혀 부하들에게 봉토를 나눠주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그 계획에 비판적이던 동생 히데나가(秀長)가 죽고, 천금보다 귀히 여기던 외아들 쓰루마쓰(鶴松)마저 잃어 심신이 극도로 피폐했던 1591년 8월, 그는 규슈 지방 영주들에게 ‘대륙 경영 사업’ 개시를 선언하고 적지에 출진기지를 건설하라고 명령한다.
당시 일본에 와 있던 포르투갈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의 에는 그때 일을 이렇게 묘사했다. “관백(히데요시)이 조선으로 가장 쉽게 건너갈 수 있는 항구가 어디인지를 묻자 가신들은 나고야로 불리는 아름다운 항구가 있는데, 수천 척의 선박이 안전하게 출입할 수 있는 곳이라고 대답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전국의 영주들을 나고야에 집결시키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각자의 부담으로 궁전과 해자와 저택으로 꾸려진 화려하고 넓은 성채들을 조속히 축조하되, 교토에 지은 것보다 뒤떨어지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문장에서 주목할 것은 교토에 뒤지지 않는 화려한 궁전과 성채를 영주들 각자의 부담으로 건설하라는 ‘후신(普請) 명령’이다. 후신이란 불교에서 민간에 널리 시주를 청해 불당이나 탑을 짓거나 수선하는 사업이란 뜻이지만, 절대 권력자가 영주들에게 갖가지 토목·건축사업을 시킨 일을 뜻했다. 나랏돈은 10원도 쓰지 않고 국책사업의 돈과 인력을 영주들에게 부담시켰으니, 아무리 봉건시대이라지만 어떻게 그런 횡포와 전제가 있었는지 흥미롭다.
프로이스는 영주들이 꼼짝 못하고 명령을 수행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다른 영주들에게 뒤지지 않으려는 경쟁심이었다. 작업 중 사소한 부주의를 저지르면 감독들에게 공개적으로 질책을 당하게 되고, 그것이 관백에게 무능력자로 낙인찍혀 추방당하거나 재산을 몰수당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축성 책임자는 히데요시의 오른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공사 책임자는 뒷날 이 지역 영주가 된 데라자와 히로타카(寺澤廣高)였다. 원래 있었던 가키조에(垣添) 성을 헐어 규모를 크게 확장하고, 사방 3km 이내에 130여 번국 영주들의 진영(陣營)을 건설하는 일본 역사상 초유의 대토목 공사였다. 성 공사는 착공 6개월 만에 완공되었고, 영주들의 진영이 완성되는 데는 8개월이 걸렸다니 얼마나 공사를 서둘렀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본성 공사는 규슈 지역 20여 명의 영주들이 비용과 공력을 분담했고, 나머지 공사는 각 영주들 책임 아래 시행되었다. 해발 89m 나지막한 구릉 꼭대기에 혼마루(本丸)를 짓고,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5층 규모의 천수각을 세웠다. 그 아래로 니노마루, 산노마루 등 부속시설과 병사를 배치하고, 주변에 견고한 석축을 쌓아올려 난공불락의 요새를 만들었다. 외성은 주변에 해자를 둘러 외적의 침입에 대비한 전형적인 왜성이었다. 성의 총면적 50만 평은 일본 최대의 오사카 성에 버금가는 규모였다.
성의 크기만 그런 게 아니었다. 그 시대 인구 30만을 가진 도시는 오사카 말고는 없었다. 성내에는 히데요시의 측실(廁室)을 위한 사찰과 다실, 전통 가무극 ‘노(能)’ 공연장까지 있었다. 그 시대에 그려진 병풍도에는 성내의 건물 약 70여 동, 그 아래 조카마치(城下町)의 일반 백성 주택과 점포 260여 동, 진영 시설 70여 동 등 400여 동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나고야는 외국인 왕래가 잦은 국제도시이기도 했다. 병풍도에는 명나라 사절단 40여 명과 포르투갈인 등 260여 명의 통행인이 그려져 있는데, 이 가운데는 조선에서 잡혀온 포로들을 사들여 해외로 팔아넘기는 노예 상인들도 있다.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온 정희득(鄭希得)은 실기(實記) 에 “나고야 거리에서 마주친 사람의 반 이상이 조선인”이라고 썼다. 그들 대다수가 붙잡혀간 사람들이었다.
통행인 가운데는 남자들 소매를 잡아끄는 유녀(遊女)의 모습도 보인다. 해안 거리에는 유곽과 술집이 줄지어 있고, 각 번의 진에서는 수많은 사졸이 할 일 없이 소일하고 있었다. 노예장사로 재미를 본 외국인들도 돈을 풀어 즐거움을 샀을 것이다.
발굴 작업 중 천수각 주변에서는 금박기와편이 많이 출토되었다. 벽면뿐 아니라 기와에도 금박을 입혀 금빛으로 번쩍이는 건물이었던 것이다. 이런 성의 건설과 전쟁 수행에 시달린 일본 민중의 고난이 기록으로 남았다. 병력 1만5000명을 할당받은 사쓰마(薩摩) 번(藩·제후가 통치하는 영지)의 경우 7000명이 넘는 아시가루(足輕·보병)와 6000명이 넘는 인부를 징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은 모두 농·어업에 종사하는 백성들이었다. 갖가지 무기와 장비, 병량과 말먹이, 군수품 및 병선 조달과 운용도 백성들 몫이었다.
백성들 고난은 그것으로도 모자랐다. 히데요시는 곧 조선으로 건너가겠다면서 중간에 머물 이키(壹岐) 섬과 쓰시마(對馬島)에도 성을 쌓고 궁을 지으라는 명령을 내려 부하들과 백성들을 괴롭혔다. 이키 섬에는 아직도 그때의 성터가 뚜렷이 남아 있다. 백성들의 피땀을 짜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을 ‘아방궁’을 지은 것이다.
침략군 출진은 1592년 3월이었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1번 대부터 하시바 히데카쓰(羽柴秀勝)의 9번 대까지 총출진 병력 15만8800명, 출진을 도운 예비부대와 병참요원 등을 합친 총인원은 30만5300명으로 기록돼 있다(역사군상 시리즈 ). 비탈진 구릉 도시에 인파가 북적거렸을 날에 비해 오늘의 정적(靜寂)과 정일(靜逸)은 너무 대조적이다.
히데요시는 침략군이 떠난 3월 26일 교토를 떠나 4월 25일 나고야에 착진(着陣), 1년을 머물며 전쟁을 지휘했다. 그 기간 협상 사절로 온 명나라 유격 심유경(沈維敬)을 접견하기도 하고, 여러 장수들이 조선에서 보내오는 보고서와 진귀한 전리품을 받아들고 천하를 얻은 듯 기고만장했다. 심유경의 거소는 명군 유격이 머물던 곳이라 ‘유게키마루(遊撃丸)’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런 영화의 무대였던 나고야 성은 전후 곧바로 참담하게 해체되었다. 히데요시가 죽고 가스미가세키 패권 전쟁에서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전투에 공을 세운 데라자와 히로타카에게 히젠 나고야 땅을 영지로 주었다. 성을 축조할 때 공사 총감독으로 기여하고 조선에 출병한 공로까지 인정한 것이다.
데라자와는 1602년 나고야 성을 허물고 가라쓰 해변에 자신의 성을 축조했다. 조선 침략의 상징물인 그 성을 허문 것은 일개 영주의 결정이 아니었다. 조선과의 무역 재개와 친선관계의 필요성을 절감했던 이에야스는 성을 허물어 전쟁에 반대했던 자신의 뜻을 널리 알릴 필요가 있었다. 전쟁 기간에 아버지와 남편을 잃었거나 오래 빼앗겼던 민중은 전쟁에 치를 떨었다. 7년 동안 헐벗고 굶주린 것이 모두 전쟁 탓이라 여겼던 민중의 염전사상(厭戰思想)은 하늘을 찔렀다. 반전사상과 염전사상은 지금 허물어진 성터 위에 아기 불상의 모습으로 남았다.
데라자와는 그렇게 허문 성석과 건물의 자재를 고스란히 자신의 성 쌓기에 사용했다. 마쓰우라(松浦) 강이 바다로 흘러드는 나지막한 구릉 위에 한껏 멋을 부려 쌓아올린 가라쓰 성은 멀리서 보면 학이 나래를 펴고 춤을 추는 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무학성(舞鶴城)이라 불린다.
그렇게 헐린 나고야 성은 얼마 후 일반 민중의 공격으로 또 한 번 상처를 입는다. 1637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기독교 탄압과 가혹한 조세가 원인이었던 시마바라(島原) 민란 때였다.
성터 입구 ‘나고야 성 박물관’ 현관 앞에는 제주도 돌하르방 부자가 서서 탐방객을 맞아준다. 일본인들은 이 낯선 ‘수문장’ 앞에서 반드시 발길을 멈추고, 더러는 기념사진을 찍기도 한다. 이 박물관의 성격이 ‘일본열도와 조선반도의 교류사’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출입문을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전시물이 한국 고미술의 상징인 반가사유상 복제품이다. 7세기 중국과 조선반도 문명의 영향을 받아 일본에 처음 율령 국가가 세워졌다는 설명문이 그 아래 붙어 있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이 거북선 모형이다. 실물보다 많이 축소된 것이지만 여수나 통영에서 본 것과 다르지 않다. 문을 들어서 처음 맞닥뜨리는 공간에 자리한 거북선 옆에는 당시의 일본 전함 아타케부네(安宅船) 모형과 두 나라 병기, 무복, 전황도 등이 전시되어 있다. 객관적인 시선으로 전쟁을 조명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성긴 마대로 캔버스를 만들고 물감을 뒷면에서 앞으로 밀어내어, 마대 올 사이로 자연스럽게 흐르게 한 뒤, 앞면에서 최소한의 붓질만으로 작품을 완성한다. 사용하는 물감도 회색이나 검정, 청회색 등 단색으로 단조로우나, 보는 이들에게 고요한 명상에 잠기게 한다.
화가 하종현(河鍾賢, 1935~)은 1960년대 우리나라 앵포르멜(informal, 비정형) 추상화에서 출발해 1974년부터 2009년까지 연작을 그렸고 2010년부터는 연작을 그리며 독창적인 창작 영역을 구축하고 있다. 홍익대학교 미대를 졸업한 후, 모교 회화과 교수로 40여 년간 재직했으며 2001~2006년 서울시립미술관 관장으로 있을 때는 미술 행정가로서 많은 공적을 남겼다.
1969년 ‘한국 화단에 새로운 조형 질서를 모색 창조하자’는 모토 아래 전위미술가 단체인 ‘한국아방가르드협회’(1974년 해체)를 결성한 이후 지속적으로 진보적이고 실험적인 작품세계를 펼쳐왔다. 35년간 꾸준히 작업해온 연작은 ‘전혀 의도되지 않은 우연한 순간의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물감을 성긴 마대 뒤에서 밀어냄으로써 하나의 물질이 자연스럽게 다른 물질의 틈 사이로 흘러나갈 때, 그리고 흘러나간 물질들의 언저리를 느긋이 눌러놓았을 때, 가능한 한 물질 자체가 물질 그 자체인 상태에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전부를 말해줄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캔버스 앞면에 물감을 바르고 칠하는 것이 회화라는 관념을 깨고 대항이라도 하듯, 기존의 관념을 뒤집는 반란(?)을 보여준 것이다.
물론 회화의 틀과 양상의 변화는 세계적인 흐름과 궤를 같이하는 게 문화의 보편적 추세다. 그러나 회화에 입문한 뒤 8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비정형의 추상화를 견지하는 것은 작가의 깊은 철학이 없고서는 안 될 일이다. 우리나라 현대 서양화의 선도자인 작가가 ‘비인기의, 그림이 잘 팔리지 않는 화가’라는 세간의 입방아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작품 속에 절제된 고요함과 자연스러움을 녹여낸 당당함이야말로 미술인들에게 존경을 받는 소이라고 생각한다.
4~5년 전부터 세계미술 시장에 모노크롬(mono chrome, 단색화)의 바람이 거세게 밀려오고 있다. 난해하고 현란하던 기존의 구상이나 추상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감상자, 즉 소비자의 욕구가 반영되고 있다는 증좌일 것이다. 하종현 작가의 연작은 캔버스 뒷면에서 밀어낸 물감을 나이프나 손을 이용해 최소한의 흔적만을 남겼는데 마치 담벼락에 진흙을 바르던 소박함이 연상되어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이 그림 은 10여 년 전에 인사동 화랑에서 4개월 할부로 구입한 작품이다. 큰 작품은 부담이 되어 이 소품을 수집했다. 조금 무리해서라도 30~40호의 대작을 구입했다면 4~5배의 수익을 가져다줬을 것이다. 그만큼 그림에 대한 투자는 어렵다. 그의 작품을 서재에 놓고 수시로 눈 맞추며 명상에 잠기곤 한다. 청회색 물감의 흘러내림도 유연하고, 붓으로 가다듬은 질박한 모양이 상형문자와도 같아서, 단조로움 속 정중동(靜中動)의 리듬이 활력을 주곤 한다.
“전혀 무관한 일상의 사물들을 모아본다. 현재와 과거를 결합시켰다. 낯설다. 동양과 서양의 이질적인 정서가 교차하면서 현실도 이상도 아닌 낯선 세계에서 현실의 주위를 맴돌고 있다.”
화가 한만영(韓萬榮, 1946~)이 자신의 작품세계에 대한 고백의 일단이다. 1970년대 말에는 정밀묘사 기법의 연작이 대표작이고, 1980년대 초에는 포스터나 인쇄물을 이용한 작품을 제작했다. 1984년부터는 옛 거장들의 작품을 차용해 일상의 오브제(objet, 물체·객체)와 복합적으로 재구성하는 연작을 발표하고 있다. 홍익대학교 미대를 졸업한 후 성신여자대학교에서 후학을 지도하다 정년퇴임 후 현재까지 어떤 무리에도 참여하지 않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예술을 창조하고 있다.
그가 선택하는 오브제는 불상, 막대자, 도로표지판, 깃털, 핀, 새, 석고상, 병마도용, 토우, 악기 등 무척 다양하다. 이런 다양한 오브제에 앵그르(Dominique Ingres, 1780~1867), 고갱(Paul Gauguin, 1848~1903), 피카소(Pablo Ruiz Picasso, 1881 ~1973), 정선(鄭歚, 1676~1759) 등 “동서양의 거장 화가들의 낯익은 작품의 이미지를 차용해 시간의 부딪침과 공간의 겹침을 시각화한 것이 한만영의 작품이다”라고 평론가는 말한다.
는 2009년 봄 인사동 ‘노화랑’에서 전시회 오픈 날에 200만원을 주고 구입한 작품이다. 화랑의 문턱을 낮추되 역량 있는 작가들의 밀도 높은 작품을 소개한 야심찬 기획전시는 1999년과 2000년에열렸다가 몇 해 쉬고 2006년부터 2017년까지 이어왔으나, 작품가의 상승 등 여러 요인으로 올해로 그친다는 서운한 소식이다. 해마다 5월이 되면 돈을 마련해 작품을 고르고, 아내와 밤늦도록 감상하던 작품이 어언 10여 점에 이르니, 5월의 향기로운 추억이 되었다.
그해 한만영 작가는 바이올린과 첼로를 핵심 오브제로 삼은 작품 10점을 내놓았는데, 나는 주저 없이 이 첼로 오브제의 작품을 선택했다. 첼로를 완벽한 비례로 축소한 오브제에는 중세 서양화가들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여러 이미지가 그려져 있다. 이 작품 속 첼로를 꺼내어 연주하면 그림의 주인공들이 튀어나올 것만 같다.
그림을 거실에 놓고,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714~1788)의 무반주 첼로 조곡 중에서도 내가 제일 즐기는 제5번 G장조의 선율을 이탈리아 첼리스트 ‘마이나르디(Enrico Mainardi, 1890~1976)’의 느린 연주로 듣는다. 중세 프랑스나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의 느릿한 춤곡이 바흐를 통해 되살아나고, 이미 40년 전에 작고한 마이나르디 연주가 음반을 통해 부활한다. 그리고 이렇듯 흘러간 시간을 휘어서 맞대어 붙이면, 역사의 뒤안길을 순례하는 기꺼운 상상에 잠기게 된다.
이재준(李載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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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경기 화성에 태어났고 아호 송유재(松由齋)로 미술품 수집가로 활동중이다. 중학교 3학년 ,을 읽고, 붉은 노을에 젖은 바닷가에서 스케치와 깊은 사색으로 화가의 꿈을 키웠다. 1990년부터 개인 미술관을 세울 꿈으로 미술품 천여 점을 수집해왔다.
우연히 ‘보보담’이란 잡지를 알게 되었다. 프로스펙스나 몽벨 등 아웃도어 브랜드를 운영하는 회사로 잘 알려진 LS네트웍스에서 발행하는 사외보로, 한국의 인문풍경과 정서를 담은 격조 높은 계간지라고 들었다. 원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무료로 보내준다는 말에 홈페이지에서 신청을 했더니 2017년 봄 호가 손 안에 들어왔다.
일반적인 사보와는 달리 매 호마다, 한 지역을 집중 탐구한 글과 사진으로 가득 채운다. 이번호는 경주 남산이었다. 제법 두툼한 책 안에는 경주 남산에 대한 글과 사진이 가득 들어있었다. 신라 천 년의 역사를 불교와 함께 했던 흔적이 경주 남산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경주엘 여러번 가보았고 제법 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아는 경주와는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책 속에는 110여 구가 넘는 석불상과 마애불이 있고, 탑을 세웠던 곳도 40군데가 넘게 남아있는 남산의 모습이 다양하게 소개 되었다. 아름다운 석양으로 물든 남산의 석탑 사진들도 참 좋았다.
특히나 남산 폐사지에 관한 글이 마음을 끌었다. 절은 오래전에 사라지고 터만 남은 폐사지에, 본래 입상이었으나 앞으로 꼬꾸라져 엎드린 자세로 파묻혀 있다가 발견된 마애불이나, 오랜 세월 속에 머리를 잃어버린 부처를 묘사한 부분이 상상력을 자극했다. 실제로 가보면 조각난 돌들이 아무렇게나 모여있는 황량한 폐사지겠지만, 그곳 풍경을 낭만적이고 철학적으로 그려놓은 글에 매혹되었다.
3000번도 넘게 남산에 올랐다는 김구석 씨는, 평생을 쏟아 부을 만큼 남산이 가진 매력이 무엇이냐고 묻는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누구나 행복하고 평안한 삶을 원합니다. 신라나 조선시대 사람들도 그러했죠. 선조들은 남산에 자신들의 마음을 담아 불상을 만들고, 절을 세우고, 돌탑을 쌓았어요. 이 땅을 살아간 선조들의 얼, 지혜와 소망이 모두 녹아 있는 곳이 남산입니다. 남산에선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시공을 넘어서는 인간의 간절한 바람들을 느끼고, 행복감이나 마음의 안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런 세상도 있구나!’ 하고 힘을 얻을 수도 있지요.”
이 책을 읽고 나니 경주 남산이 눈에 그려지는 듯 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 깊숙한 곳에 서려있는 천 년의 세월과 선조들의 마음이다. 시인이나 소설가 혹은 각 분야 전문가들의 공력과 애정이 느껴지는 글과 사진들을 마주하고 보니 공짜로 받아보기 미안할 정도다. 정성들여 만든 책인데 아무 댓가 없이 받았으니 정성껏 읽는 것 외에는 도리가 없다.
경주 남산의 깊은 매력을 소개한 ‘보보담’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멋진 잡지였다. 함께 걸으며 나누는 이아기란 뜻의 보보담은 내용도 진중하지만, LS그룹 총수인 구자열 회장이 편집주간을 맡고 있다는 점도 이색적이었다. 대학 다닐 때 매달 빼놓지 않고 ‘뿌리 깊은 나무’를 보았다는 그는 창간호부터 종간호까지 아이패드 안에 넣어두고 틈 날 때 마다 볼 정도로 애정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 잡지가 보여준 한국의 얼을 ‘보보담’으로 이어가고 싶은 그의 열정은 직접 쓴 편집노트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올해 5월은 공휴일과 주말이 겹쳐 징검다리 연휴를 즐길 수 있다. 특히 이번 석가탄신일(3일)은 어린이날과 가까워 손주와 함께 나들이 갈 곳을 찾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와우정사에 들러보고, 인근 용인농촌테마파크까지 즐겨보는 것 어떨까?
세계 각국의 불상 3000여 점을 만나다
경기도 용인시에 위치한 와우정사(臥牛精舍)는 도심에서 가깝고 산수가 아름다워 산책 삼아 거닐기에 안성맞춤이다. 입구로 들어서면 절을 지키고 있는 커다란 ‘불두(佛頭)’가 눈에 띈다. 그 아래에는 아담한 불상들이 줄지어 놓여 있다. 불두 바로 앞 연못에 석가모니의 은은한 미소가 비친다. 영어의 감탄사 ‘와우(wow)’를 연상하게 하는 독특한 명칭은 절이 있는 연화산이, 누운 소[臥牛]의 형상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또 누워 계신 부처님(와불, 臥佛)을 뜻하기도 한다. 열반전에 가면 한 팔을 괴고 누워 있는 석가모니상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와불상은 인도네시아에서 들여온 향나무를 다듬어 만들었는데, 길이 12m, 높이 3m인 세계 최대의 목불상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돼 있다고 한다.
사찰을 한 바퀴 돌아보는 데 1시간 남짓이면 충분하다. 와불이 봉안된 열반전을 비롯해, 1988년 서울올림픽 당시 타종한 12만 톤짜리 통일의 종, 한국·중국·인도·미얀마·스리랑카 등 아시아 각지에서 들여온 3000여 점의 불상 등을 만날 수 있다. 꼭대기에 있는 대각전의 불고행상(佛苦行像)은 석가모니가 고행 끝에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의 뼈만 앙상하게 남은 모습으로 있어 숙연함이 느껴진다. 대각전 아래 삼성각에서는 원뿔 모양의 돌탑 무더기가 보인다. 그 주변을 살펴보면 방문객들이 저마다의 소원을 빌며 쌓아 올린 작은 돌탑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 연화산 와우정사
위치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해곡동 산43
◇ 용인농촌 테마파크
사찰만 보고 가기 아쉽다면, 와우정사에서 차로 10분 이내로 갈 수 있는 ‘용인농촌테마파크’에 들러보자. 각양각색의 꽃들로 가득한 ‘들꽃광장’을 비롯해 철쭉이 흐드러진 ‘철쭉원’, 튤립으로 꾸며진 ‘꽃과 바람의 정원’ 등 꽃을 테마로 한 다양한 코스를 즐길 수 있다. 따스한 봄 햇살 아래 테마파크를 둘러싼 잣나무 산책로에서 삼림욕을 하고, 건강지압로를 거닐어보는 것도 좋겠다. 손주와 함께라면 나비, 풍뎅이 등 다양한 곤충류를 체험할 수 있는 ‘곤충전시관’이나, 토끼와 공작 등 동물들이 살고 있는 ‘관상동물농장’에 방문할 것을 추천한다(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농촌파크로 80-1).
한 도예가를 만나기가 그렇게 힘든 일이던가. 왜 꼭 그 예인(藝人)을 만나고자 했던가? 돌아보면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가슴 한구석 아릿함이 밀려온다. 청광 윤광조(晴光 尹光照· 1946~ ) 도예의 모든 과정을 함께 지켜보고 싶은 열망에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으로, 경북 안강의 자옥산 자락으로 몇 차례 도요지를 찾아갔으나 바람 같은 흔적을 놓치고 매번 조우조차 못했다.
‘예술인은 작품으로 말한다’고 하지만 작품이 탄생되는 순간을 생생히 보고 싶은 습벽(習癖) 때문에 여러 예술인들을 찾아다녀야 직성이 풀렸다. 특히 흙을 수비(水飛)하고 물레나 판으로 형태를 만들어 건조하고, 초벌구이와 그 위에 그림을 그리거나 깎아 내고, 유약을 바르고 마지막 가마에 불을 지펴 소성(燒成)하고 식혀서, 가마 문을 열어 완성품을 꺼내는 수 주일의 도예작업은 꼭 참관하고 싶었다.
고등학교 5년 선배라는 학연도 있었지만 1994년 호암미술관에서 ‘한국의 미, 그 현대적 변용’이라는 명제의 오수환(吳受桓·1946~ ), 황창배(黃昌培·1947~2001)와 함께 한 윤광조의 전시회에서 너무나 깊은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홍익대학교 공예과에서 도예를 전공하고, 처음에는 전통도자(청자, 백자)를 잇는 기물을 빚기도 했으나, 태토(胎土)의 거칠고 질박한 질료에 화장토(化粧土)를 입히고 대칼, 지푸라기 혹은 손가락으로 유희하듯 글자나 문양을 만드는 과정에 매료되어 오늘날까지 분청자기만을 고집스레 만들고 있다.
심산(深山)의 사찰을 다니며 불가(佛家)의 깊은 명상에서 비롯한 선(禪)의 경지에 이르고자, 끝없는 수양(修養)과 참배여정(參拜旅情)으로 수개월에서 1,2년간 도요지를 비우기 일쑤였다. 도자기에 대한 구상이 가슴 가득 차 올라와야 몇 점씩 빚어내곤 하였다. 작가의 군 시절 육군사관학교 박물관에서 본 옛 도자기에 매료돼, 국립중앙박물관장이던 혜곡 최순우(兮谷 崔淳雨·1916~1984)선생을 찾아가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1976년 첫 가마를 짓자 혜곡 선생은 젊고 창의력이 도저한 윤광조에게 당신의 스승이었던 미술사학자 우현 고유섭(又玄 高裕燮·1905~1944)의 아호이기도 한 급월(汲月)이란 아호를 내렸다. 그래서 윤광조의 도자 가마는 급월요(汲月窯), 급월당(汲月堂)이 되었다. 우현 선생은 원숭이의 우화(寓話)를 인용하여 급월을 설명하였다. ‘산중 원숭이가 깊은 밤 목이 말라 샘가에 오니 마침 달이 물에 비쳤다. 원숭이는 달을 건지려 계속 물을 떴으나 달은 여전히 물속에 잠겨 있었다. 학문을 연구하는 이치도 이와 같아서, 아무리 다해도 다하지 못하는 것이 학문이다.’ 그러므로 무슨 일에든지 끊임없는 열정을 바쳐야 한다는 감계(鑑戒)의 깊은 뜻이 서린 아호였다.
1986년부터는 쉽게 도자를 빚는 물레를 치우고, 판 작업과 흙 타래를 쌓아 올리는 자유롭고 정형이 없는 창작도예를 통해 그릇으로서 쓰임은 이어가되 무심히 손가락으로, 혹은 지푸라기나 못 끝으로 글을 써 넣거나 문양을 그렸다. 심경(心經), 율(律), 정(定), 관(觀), 월인천강(月印千江), 정토(淨土), 지월(池月) 등의 작품들은 작가의 깊은 선정(禪定)의 경지에서 빚은 격조 높은 예술품으로 그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독보적 분청자기의 세계를 나타냈다. 이 작품 ‘정(定)’은 직사각 육면체 통 위에 동그란 구멍을 두어 꽃을 꽂을 수도 있으며, 넓은 한쪽에는 한 그루 나무와 새의 형상을 손가락으로 그리고, 이면에는 달이 강에 비치는 월인천강(月印千江)을 나타낸 귀한 작품으로, 인사동 화랑 주인을 꽤 오래 졸라서 구입한 것이다.
올해 7~8월 ‘놀다 보니 벌써 일흔이네-遊戱三昧(유희삼매) 도반 윤광조. 오수환 전’에서 윤광조는 산동(山動), 혼돈(混沌), 심경(心經) 등 무위자연의 순수와 인간의 고뇌를 한 점 한 점 도자에 녹여내고 있다. “작업장에서 해가 질 때까지 하루 12시간 이상 작업한다. 죽을 때까지 흙과 불을 붙들고 예술적 삶을 이어가겠다.” 거칠되 따뜻한 두 손을 잡으니 “보잘 것 없는 선배를 깊게 생각해 주어서 고맙습니다.” 만날 때마다 겸손한 그의 인품에서 든든한 예(藝)의 거목을 본다.
내 향리(鄕里)인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에 이수종(李秀鍾 1948~ ) 도예가가 가마를 짓고 도자를 굽게 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소나무 숲이 우거져 고산자 김정호(古山子 金正浩·? ~1866)가 대동여지도를 만들려고 답사하면서 “그곳에 소나무가 많다”고 기록했다는 한촌(閑村)이다.
이수종은 중송리 언덕에 중송당(中松堂)이라 자호(自號)하고 특색 있는 분청자기를 빚었다. 그의 도자기는 산청의 흙이나 옹기토로 도판, 병, 사발, 불상 등을 자유롭게 만들고 화장토를 입힌 후 붓이나 손가락에 철화(鐵畵)안료를 찍어 대담하게 문양을 그리되 그 임리(淋)가 뚝뚝 흘러 그릇 바닥에 넘치기도 하였다. 그 역시 윤광조와 같은 홍익대에서 도예를 전공하였으며 분청자기에 매료되어 그것만을 구웠다. 초기에는 추상의 물상을 만들기도 했으나, 대학 강의 등을 물리고는 오직 분청자기만을 만들었다.
고향 시인 두 명과 동행했던 가을날 그는 맑은 미소로 우리를 맞이했다. 사진도 마음껏 찍게 하고 저간에 새로 시도한 백자 달항아리를 여러 점 안아 볼 수 있게 했다. 단아한 부인의 다과 접대를 받으며 그의 예술관을 경청하였다. “새벽이나 해 질 무렵, 솔숲을 지나 추수가 끝난 빈 들판을 걸으면서 엄숙한 자연의 숨소리를 듣는다. 그런 마음의 리듬을 작품에 이입하려 한다.”
일찍이 그가 만든 연적, 향꽂이, 찻사발, 약사여래불상을 수집하고 아껴왔는데, 이젠 고희(古稀)를 앞둔 그의 달항아리를 수집하러 중송당을 드나들 즐거움이 더 생겼다. 이 편병(扁甁)은 신세계백화점에서 토전 김익영(土田 金益寧·1935~ ) 등 빼어난 도예가 몇 명과 함께하는 전시회에서 아내와 함께 구입한 것이다. 철화의 그림 속 이삭이 끊긴 수숫대가 빈 밭에서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이 편병을 바라볼 때마다 낫으로 수수 이삭을 자르던 유년의 고향 밭이 떠오른다.
2010년 용인의 ‘지앤아트스페이스’에서 3개월간 열렸던 ‘이수종 청담에 뜬 달’이라는 대형 전시회는 이수종의 분청자기에서 백자의 달항아리까지 맥을 짚어 볼 수 있는 자리였다. “황량한 대지 위에 그늘을 드리우고 장소의 풍경마저 바꿔 버리는 오늘날의 거목이 되기까지 모진 세월을 어찌 필설로 다 할 수 있으랴.” 평자(評者)는 이어 “어느 누구보다 그의 작품들은 한결같이 원초적인 맛이 흘러 넘치고 살아 꿈틀거리며 또 그만큼 주위 공간과 사물들을 자연처럼 너그럽고 편안하게 감싸 안게 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언젠가는 이 두 도예가의 가마를 찾아가서, 물에 잠긴 달을 긷듯 노년의 열정을 불사르는 예술혼에 슬며시 젖어 볼 꿈을 꾼다.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 리뷰어.
한 도예가를 만나기가 그렇게 힘든 일이던가. 왜 꼭 그 예인(藝人)을 만나고자 했던가? 돌아보면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가슴 한구석 아릿함이 밀려온다. 청광 윤광조(晴光 尹光照· 1946~ ) 도예의 모든 과정을 함께 지켜보고 싶은 열망에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으로, 경북 안강의 자옥산 자락으로 몇 차례 도요지를 찾아갔으나 바람 같은 흔적을 놓치고 매번 조우조차 못했다.
‘예술인은 작품으로 말한다’고 하지만 작품이 탄생되는 순간을 생생히 보고 싶은 습벽(習癖) 때문에 여러 예술인들을 찾아다녀야 직성이 풀렸다. 특히 흙을 수비(水飛)하고 물레나 판으로 형태를 만들어 건조하고, 초벌구이와 그 위에 그림을 그리거나 깎아 내고, 유약을 바르고 마지막 가마에 불을 지펴 소성(燒成)하고 식혀서, 가마 문을 열어 완성품을 꺼내는 수 주일의 도예작업은 꼭 참관하고 싶었다.
고등학교 5년 선배라는 학연도 있었지만 1994년 호암미술관에서 ‘한국의 미, 그 현대적 변용’이라는 명제의 오수환(吳受桓·1946~ ), 황창배(黃昌培·1947~2001)와 함께 한 윤광조의 전시회에서 너무나 깊은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홍익대학교 공예과에서 도예를 전공하고, 처음에는 전통도자(청자, 백자)를 잇는 기물을 빚기도 했으나, 태토(胎土)의 거칠고 질박한 질료에 화장토(化粧土)를 입히고 대칼, 지푸라기 혹은 손가락으로 유희하듯 글자나 문양을 만드는 과정에 매료되어 오늘날까지 분청자기만을 고집스레 만들고 있다.
심산(深山)의 사찰을 다니며 불가(佛家)의 깊은 명상에서 비롯한 선(禪)의 경지에 이르고자, 끝없는 수양(修養)과 참배여정(參拜旅情)으로 수개월에서 1,2년간 도요지를 비우기 일쑤였다. 도자기에 대한 구상이 가슴 가득 차 올라와야 몇 점씩 빚어내곤 하였다. 작가의 군 시절 육군사관학교 박물관에서 본 옛 도자기에 매료돼, 국립중앙박물관장이던 혜곡 최순우(兮谷 崔淳雨·1916~1984)선생을 찾아가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1976년 첫 가마를 짓자 혜곡 선생은 젊고 창의력이 도저한 윤광조에게 당신의 스승이었던 미술사학자 우현 고유섭(又玄 高裕燮·1905~1944)의 아호이기도 한 급월(汲月)이란 아호를 내렸다. 그래서 윤광조의 도자 가마는 급월요(汲月窯), 급월당(汲月堂)이 되었다. 우현 선생은 원숭이의 우화(寓話)를 인용하여 급월을 설명하였다. ‘산중 원숭이가 깊은 밤 목이 말라 샘가에 오니 마침 달이 물에 비쳤다. 원숭이는 달을 건지려 계속 물을 떴으나 달은 여전히 물속에 잠겨 있었다. 학문을 연구하는 이치도 이와 같아서, 아무리 다해도 다하지 못하는 것이 학문이다.’ 그러므로 무슨 일에든지 끊임없는 열정을 바쳐야 한다는 감계(鑑戒)의 깊은 뜻이 서린 아호였다.
1986년부터는 쉽게 도자를 빚는 물레를 치우고, 판 작업과 흙 타래를 쌓아 올리는 자유롭고 정형이 없는 창작도예를 통해 그릇으로서 쓰임은 이어가되 무심히 손가락으로, 혹은 지푸라기나 못 끝으로 글을 써 넣거나 문양을 그렸다. 심경(心經), 율(律), 정(定), 관(觀), 월인천강(月印千江), 정토(淨土), 지월(池月) 등의 작품들은 작가의 깊은 선정(禪定)의 경지에서 빚은 격조 높은 예술품으로 그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독보적 분청자기의 세계를 나타냈다. 이 작품 ‘정(定)’은 직사각 육면체 통 위에 동그란 구멍을 두어 꽃을 꽂을 수도 있으며, 넓은 한쪽에는 한 그루 나무와 새의 형상을 손가락으로 그리고, 이면에는 달이 강에 비치는 월인천강(月印千江)을 나타낸 귀한 작품으로, 인사동 화랑 주인을 꽤 오래 졸라서 구입한 것이다.
올해 7~8월 ‘놀다 보니 벌써 일흔이네-遊戱三昧(유희삼매) 도반 윤광조. 오수환 전’에서 윤광조는 산동(山動), 혼돈(混沌), 심경(心經) 등 무위자연의 순수와 인간의 고뇌를 한 점 한 점 도자에 녹여내고 있다. “작업장에서 해가 질 때까지 하루 12시간 이상 작업한다. 죽을 때까지 흙과 불을 붙들고 예술적 삶을 이어가겠다.” 거칠되 따뜻한 두 손을 잡으니 “보잘 것 없는 선배를 깊게 생각해 주어서 고맙습니다.” 만날 때마다 겸손한 그의 인품에서 든든한 예(藝)의 거목을 본다.
내 향리(鄕里)인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에 이수종(李秀鍾 1948~ ) 도예가가 가마를 짓고 도자를 굽게 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소나무 숲이 우거져 고산자 김정호(古山子 金正浩·? ~1866)가 대동여지도를 만들려고 답사하면서 “그곳에 소나무가 많다”고 기록했다는 한촌(閑村)이다.
이수종은 중송리 언덕에 중송당(中松堂)이라 자호(自號)하고 특색 있는 분청자기를 빚었다. 그의 도자기는 산청의 흙이나 옹기토로 도판, 병, 사발, 불상 등을 자유롭게 만들고 화장토를 입힌 후 붓이나 손가락에 철화(鐵畵)안료를 찍어 대담하게 문양을 그리되 그 임리(淋)가 뚝뚝 흘러 그릇 바닥에 넘치기도 하였다. 그 역시 윤광조와 같은 홍익대에서 도예를 전공하였으며 분청자기에 매료되어 그것만을 구웠다. 초기에는 추상의 물상을 만들기도 했으나, 대학 강의 등을 물리고는 오직 분청자기만을 만들었다.
고향 시인 두 명과 동행했던 가을날 그는 맑은 미소로 우리를 맞이했다. 사진도 마음껏 찍게 하고 저간에 새로 시도한 백자 달항아리를 여러 점 안아 볼 수 있게 했다. 단아한 부인의 다과 접대를 받으며 그의 예술관을 경청하였다. “새벽이나 해 질 무렵, 솔숲을 지나 추수가 끝난 빈 들판을 걸으면서 엄숙한 자연의 숨소리를 듣는다. 그런 마음의 리듬을 작품에 이입하려 한다.”
일찍이 그가 만든 연적, 향꽂이, 찻사발, 약사여래불상을 수집하고 아껴왔는데, 이젠 고희(古稀)를 앞둔 그의 달항아리를 수집하러 중송당을 드나들 즐거움이 더 생겼다. 이 편병(扁甁)은 신세계백화점에서 토전 김익영(土田 金益寧·1935~ ) 등 빼어난 도예가 몇 명과 함께하는 전시회에서 아내와 함께 구입한 것이다. 철화의 그림 속 이삭이 끊긴 수숫대가 빈 밭에서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이 편병을 바라볼 때마다 낫으로 수수 이삭을 자르던 유년의 고향 밭이 떠오른다.
2010년 용인의 ‘지앤아트스페이스’에서 3개월간 열렸던 ‘이수종 청담에 뜬 달’이라는 대형 전시회는 이수종의 분청자기에서 백자의 달항아리까지 맥을 짚어 볼 수 있는 자리였다. “황량한 대지 위에 그늘을 드리우고 장소의 풍경마저 바꿔 버리는 오늘날의 거목이 되기까지 모진 세월을 어찌 필설로 다 할 수 있으랴.” 평자(評者)는 이어 “어느 누구보다 그의 작품들은 한결같이 원초적인 맛이 흘러 넘치고 살아 꿈틀거리며 또 그만큼 주위 공간과 사물들을 자연처럼 너그럽고 편안하게 감싸 안게 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언젠가는 이 두 도예가의 가마를 찾아가서, 물에 잠긴 달을 긷듯 노년의 열정을 불사르는 예술혼에 슬며시 젖어 볼 꿈을 꾼다.
>>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리뷰어
우리가 일본에 도착해서 전학서류를 전부 내서 학급배정을 받은 것은 3학기 때였다. 우리에게는 2학기 까지는 있었는데 3학기라니... 암튼 그렇다 하니 그대로 따르면 되는 일이라 특별히 힘든 일도 아니라 그러려니 했다.
큰 애는 4학년 2반이었고 작은 애는 2학년 1반이었다. 큰 애 담임은 부끄러움 반에 걱정 반으로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어 어쩔 줄 모르는 남자 총각 선생님이었다. 외국 학생이란 것에 언어도 전연 모른다는 사실에 근심스러운 표정이 역력했다. 작은 아이 담임은 당돌하고도 똑부러지게 뭔가를 바로바로 알아채는 여자 선생님이었다. 교장 선생님께 인사를 마치고 나오자 방과 후라, 비어 있는 교실에 우리를 데리고 가서 내일 가져올 물건과 학교에서 생활하면서의 필요한 준비물들을 여자 선생님께서 설명해 주었다. 4학년 담임은 한 곁에 앉아 수줍음으로 말은 한마디도 없이 여자선생님께서 설명하는 걸 듣고만 있었다.
일어는 모르지만 그 표정이나 비슷비슷한 발음으로 된 단어들이 귀에 그렇게 낯설지는 않았다. 물론 젊은 아가씨 통역 자를 데리고 갔었지만 내가 전부 알아듣고 대답을 잘하자 사무실에 가 봐야겠다며 도중에 가 버렸다. 참고서, 노트, 교과서, 급식에 사용할 손수건, 연필, 연필통, 가방, 지진훈련용 모자, 교모... 정말 열심히 설명해 줬다. 나는 알아들은 것들은 우리말로 잘 모르는 것들은 그대로 일본어 발음대로 적었다. 내 눈치가 좀 모르겠다고 느껴지면 다시 차근차근 설명해주는 여 선생님은 친절했고 정확해서 마음에 딱 들었는데, 계속 ‘말도 못하고 쓸 줄도 모르니 어떡하나? 아이 불상도 해라’ 만 중얼거리고 있는 4학년 담임은 내겐 큰 걱정이 되었다.
학교에서 나오면서 선생님께서 준비해 오라는 물건들을 하나씩 사기 시작했다. 급식용 손수건은 하루걸러 빨아 와야 하니까 한사람 앞에 세 개씩 만들어 오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사각 손수건 정 가운데에 고무줄을 달아 오라 했다. 왜 그러느냐 했더니 손목에 손수건 고무줄을 끼우고 식사를 하면서 흘리면 입을 닦기 편하게 이름을 꼭 새겨서 만들어 오라는 것이었다. 정말 요령 있게 정확한 일본인들의 습관이 이렇게 몸에 배는 구나 싶었다. 모든 물건에는 이름을 꼭 써야 한다고 당부를 했다. 설명하는 선생님의 표정과 얘기가 아주 알아듣기 쉬웠고 재미있었다. 교과서나 손수건, 고무, 노트, 준비... 같은 말들은 대강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것으로 어쩌면 금방 일본어는 배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면서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우리는 중간에 길을 잃어 헤매기도 했지만 둘째가 길을 찾아 모든 것들을 잘 사가지고 왔다. 외국에 가면 며칠을 집 주변을 길을 익혀야 하므로 걸을 수 있는 정도로 셋이 손잡고 돌아다닌다. 학교가 있는 방향은 가 본 적이 없어서 물건을 사느라 정신이 팔려 그만 가게만 돌아보면서 상가가 있는 길 끝까지 가버린 것이었다. 다 사고 집으로 가려 하자 여기가 어딜까? 가 된 것이었다. 자꾸만 같은 길을 몇 번을 돌았다. 긴장해서 한쪽으로만 가 보자고 정해서 걸어 내려갔다. 우리가 한 번 걸었던 곳이 드디어 나왔던 것이다. 꼬마가 내가 확인하고 올 테니 형이랑 엄마는 짐 들고 있으니까 여기서 기다리라고 의견을 내 놓는다. 알았다 하자 뛰어 갔는데 안 온다. 약간 걱정 하고 있을 때 ‘맞아~’ 하며 신이 나서 다시 뛰어 오는 걸 보고 안심했었다. 우리 맨션 옆이 동해대학이 있는데 밤에 보니 빨간 안테나가 세워져 있었다. 우리 집은 이제 절대로 못 찾는 일이란 없어진 거였다. 저녁을 먹고 각자 자기 가방을 챙기는데 나는 준비물들을 확인하며 도왔다. 내일 부터는 학교에 다닌다는 생각을 하며 80몀 정도의 아이들이 있는 콩나물 반이었는데 30명도 채 안 되는 교실에서 공부를 한다니... 아이들도 나도 약간 흥분되는 저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