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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인생을 대하는 신경림 시인의 해법 '자연스럽게, 그리고 평온하게 삶과 마주하자'
- “나는 평생 한 번도 갑의 위치에 서본 적이 없어요. 항상 을이었으니까. 그런데 을로 사니까 편안한 거 같습니다. 편하게 살 수 있는데도 굳이 갑이 왜 되냐는 생각이에요.” 아무 망설임 없이 스스로를 을이라 여긴다는 시인, 그러나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한국 시단의 거목. 바로 신경림(申庚林·81)시인이다. 그의 시를 ‘농무’로 처음 접해서였을까? 농부 같고 담백한 인상을 주는 그는 차분하고 소탈한 어조로 자신이 생각하는 삶과 생활, 세상에 대해 풀어냈다. 그가 말하는 꾸밈없는 삶이 주는 행복이란 무엇인지 들어본다. 올해로 등단한 지 60년. 1935년에 태어나 평생을 시인이자 평범한 이들의 벗으로 산 사람. 몇 남지 않은 이 사회의 진정한 원로라고 할 수 있는 신경림 시인을 만나는 데는 반 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기사에서 요란하게 부풀려지는 게 싫다는 거듭된 그의 고사 때문이었다. 마침내 만나게 된 그와 인터뷰를 하는 내내 그의 시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시인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살았을지를 물어봤다. 시인으로밖에 살 수 없었던 인생 “옛날에 몇 번 다른 것을 뭐 해볼 수 있을까 해서 여러 가지 시험해봤어요. 장사도 해보고 시험 공부도 해보고 직장 생활도 해보고. 그런데 내게 맞는 게 없었어. 잘하는 게 없었어요. 그래서 ‘내가 잘하는 건 시 쓰는 일이다’라고 다짐할 수 있었습니다.” 신 시인은 지금도 교사는 해보고 싶다고 말한다. 어렸을 때부터 교사라는 직업을 좋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제로도 학원 선생을 해본 적이 있다고 한다. 영문과 출신이었던 그는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쳤었다. “굉장히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수업이 한 시간이면 한 시간 오 분을 가르쳤으니까요. 그런데 그렇게 하니 내가 학생들에게 되게 인기가 없는 선생이었어요(웃음).” 신 시인은 자신에게 시인으로서의 재능이 있다는 걸 고등학교를 다닐 때 알았다고 한다. “고등학교 시절 선생님에게 칭찬받았을 때였습니다. 칭찬이라는 게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게 맞아요. 칭찬을 받으니까 ‘아, 정말 내가 능력이 있는가 보다’ 해서 자신이 생기고, 그러면서 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좋은 시의 조건으로 ‘남을 가르치려고 하지 않는 시와 교훈적이지 않은 시, 이데올로기에 엮이지 않는 시’를 꼽았다. 한마디로 ‘사람을 편하게 하는 시’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시각과는 다른 개성 있는 시, 남이 한 말을 따라하지 않는 시가 좋다고 봐요. 그러면서도 소통이 되는 시여야 하죠.” 타인과의 소통은 오랜 세월을 역사의 부침 속에서 살아온 신 시인의 지론이기도 했다. “생각이 다른 사람도 이해해주고 해야지 원수가 되면 안 돼요. 나는 나하고 생각이 다른 사람과 얘기하면 재밌거든요? 상대가 엉뚱한 얘기를 하면, ‘어, 내가 생각 못한 거다’ 싶어서 즐겁습니다. 그게 내가 발전할 수 있는 토대가 될 수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자기 생각만 고집하는 사람들은 발전 못해요.” 타인의 생각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일이다. “쉽지 않죠. 불편할 때도 많지. 그래도 어떨 때는 굉장히 재밌습니다. 우리 사회가 좀 더 좋아지려면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려는 노력, 생각이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려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나라가 시끄럽다는 건 나라가 발전했다는 증거 사실 문학은 요즘 과거에 비해 힘을 많이 잃었다. 본인도 문학을 추구하는 시인으로서 그런 세상의 변화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궁금했다. 그 물음에 대해 신 시인은 한 마디로 “걱정 안 한다”라고 대답했다. “유신을 겪으면서 문학계의 역할이 커졌습니다. 시대에 앞장 설 수 있는 게 문학밖에 없었기에 그랬어요. 그런데 독재 시절이 끝난 이후로 예술적 문화적으로도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아졌잖아요. 문학도 자기가 할 일을 옆으로 분산시켜야 해서, 준 거죠. 걱정할 게 없어요.” 그는 과거의 전근대적인 사회, 야만적인 사회에서의 문학의 역할은 컸지만 그 사회가 지나가면서 문학의 역할이 줄어든 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설명했다. “세상 돌아가는 걸 걱정하면 안 돼. 걱정해도 될 것도 아니니까, 그러니 문학은 우리 사회에 대해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우리나라만큼 민주화를 이룩한 나라가 어디 있어요? 민주주의가 제대로 되는 나라는 일본하고 한국밖에 없습니다. 경제 발전도 그렇고, 물론 한국 경제가 지금 위기에 처해 있지만 이만큼 온 나라는 없습니다.” 그는 자신이 학생 시절 절망적이었던 국민 정서에 대해서 얘기했다. “그때는 너무 가난해서 세계에서 꼴찌에서 몇 번째인 나라였어요. 그래서 ‘이런 한국은 폐기처분해야 된다’는 생각이 사람들에게 많았어요. 민주주의도 못하지, 부패와 독재는 엄청났지. 주민등록증을 하나 떼려고 해도 동사무소 사람에게 담배를 사줘야 했고, 선거 때 되면 자기 표가 자기 표가 아니었어요. ” 신 시인은 요즘 모 방송사 사장이 자기 딸과 해외에 나가서 공금으로 수백만 원짜리 식사와 숙박을 하며 논란이 된 사건을 보면서도, 그런 사건이 밝혀지는 것 자체가 얼마나 좋은 사회냐고 되물었다. “시끄러우니까 나라가 결딴날 것 같이 얘기하지만, 그렇게 시끄러운 게 나라가 발전한 겁니다. 옛날에는 더 시끄러웠어요.” 시의 영감은 생활 속에서 나온다 오랜 세월이 지나 고향엘 갔더니, 고향집 앞 느티나무가 옛날처럼 커져 있다. 내가 늙고 병들었구나 이내 깨달았지만, 내 눈이 이미 어두워지고 귀가 멀어진 것을, 나는 서러워하지 않았다. 다시 느티나무가 커진 눈에 세상이 너무 아름다웠다. 눈이 어두워지고 귀가 멀어져 오히려 세상의 모든 것이 더 아름다웠다. -신경림 시인의 ‘다시 느티나무가’ 중에서 신경림 시인의 시집 에 실린 시다. 나이가 들면서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잊었던 아름다움을 자연스럽게 재발견하게 되는 감성을 신 시인답게 소박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 시가 늙어감 자체에 대한 긍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신 시인은 굳이 잘 늙어가는 것에 대해 따로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그냥 사는 거지 뭘 정리를 하고 그래. 죽음이 예고를 해요? 그거 바보짓이에요. 그냥 자연스럽게 내버려두면 됩니다.” 혼자 사는 신 시인의 최근 생활은 등산, 여행, 그리고 영화 감상이다. 그는 요즘은 특히 영화를 많이 봤다며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를 ‘강추’했다. 잔잔하지만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문득 그 영화가 시인의 시 세계와 흡사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 시인은 자신이 임화, 백석, 오장환, 이용악의 시 세계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 모두가 생활 속에서 시상을 뽑아낸 시인들인 것처럼, 신 시인 또한 자신의 시의 영감이 모든 생활 자체에서 나온다고 밝혔다. 그렇지만 여행을 가서 시를 쓰는 것 외의 글은 쓰지 않는다고 한다. “옛날에는 여행을 갔다 오면 의무적으로 여행기를 썼어요. 그런데 몇 번 쓰니까 한 소리 또 하고 또 하고 하는 것 같아서, 에이…(쓰지 말자).” 아내와 극장에서 영화 한 편 못 본 남편 자신의 삶을 자신답게 산 신 시인이지만, 그렇기에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에게는 항상 지워지지 않는 미안함이 남아 있다. 그는 아내에게 가장 미안한 일로 영화관을 못 간 것을 떠올렸다. “아내와 함께 영화관을 갔는데, 그때는 영화 시작하기 전에 일어나서 애국가를 부르게 했어요. 그런데 같이 일어나서 애국가를 부르고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남자 배우가 여자 배우 끌어안고 키스하는 장면이 나오는 거야. 그걸 보고 내가 너무 화가 나서 ‘에이 나가자, 더러워서 영화 안 본다’ 하고 아내를 끌고나왔어요.” 1971년 3월 1일부터 정부는 ‘애국가의 올바른 보급과 존엄성, 애국심 고취를 위해’ 애국가를 극장에서 틀었다. 애국가가 나오면 극장에 온 사람들은 기립해야 했다. ‘조국에 대한 충성’이 끝나자마자 나오는 남녀의 흐트러진 애정 신이라니, 정서적인 괴리감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때는 그런 걸 겪기 싫어서 극장을 안 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신 시인도 그중 하나였던 셈이다. “그러니 아내가 너무 화가 난 거예요. ‘이 미친 놈이 남들 다 보고 앉았는데 혼자 잘난 체를 하네? 다시는 내가 같이 영화관 안 간다’ 그런 거죠. 그래서 내가 70년대, 80년대 영화는 하나도 안 봤어요. 그때만 해도 내가 성질이 더러웠지. 아내에게는 그게 가장 미안해요.” 그는 작년에 일본의 국민 시인 다니카와 슌타로(谷川俊太郞)와 이메일로 주고받은 글을 묶어 를 냈다. 그 전 해인 2014년에 낸 열한 번째 시집 은 10쇄를 찍었다. 새로운 책은 아직 계획에 없다고 한다. 즐겁게 생을 누리며 삶과 시가 함께하는 그의 작업을 보면 독자로서는 기다림이 필요할 듯하다. “부지런해야 하는데 좀 게을러요. 생각을 하면서도 방에 드러눕고만 있어. 머릿속에 그림을 다 그려놓은 다음엔 ‘에이 뭐 해봤자 마찬가진데’ 하며 귀찮아해서. 다행히 여행하는 건 열심히 하니까 다닐 수 있는 힘이 있을 때까지는 다니려고 해요.” 신 시인은 누워 있을 때가 가장 편하다고 한다. 아무리 누워 있어도 지루하지가 않다는 것이다. 주변의 누가 가장 편하냐는 물음에는 “혼자 있을 때가 가장 편하다”고 밝혔다. 그 말을 듣고 혼자서 하는 사색이라든지 무념무상이라든지 하는 멋진 말을 갖다 붙이려고 하자 그는 절레절레 손사래를 쳤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가만히 있는 거야.” 그의 대표 시인 ‘농무’를 보면 자연스럽게 시골 선비, 한량의 느낌을 받게 된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어떤 가감도 없이 삶의 자연스러움을 받아들이고 체화한 모습. 그것이야말로 평생 자신의 글과 삶을 일치시켰던 신 시인만의 아우라였다.
- 2016-03-21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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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세종기지 월동대장만 4차례, 극지 연구소 장순근 박사
- 20일 남짓한 여행. 사소한 계기였다. 스스로 계획한 여행도 아니었고, 남들 다 가는 흔한 장소도 아니었다. 운명의 사람을 만났다거나, 생사를 넘나드는 특별한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하지만 한 달도 안 되는 이 기간의 여행이 한 남자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그 장소가 바로 지구의 남쪽 끝, 인간의 발걸음을 쉽사리 허락하지 않는 남극대륙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인생이 바뀐 남자는 바로 극지연구소 장순근(蔣舜槿·70) 박사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남극점을 정복한 노르웨이의 로알 아문센 이후, 한국인 최초의 남극대륙 탐험가는 공식적으로 이병돈(李秉暾·1928~95) 박사가 꼽힌다. 그는 1963년 3월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아르헨티나의 에스페란사 남극기지에 상륙했다. 그런 그는 한국에 돌아와 남극 연구의 발판이 된 KIST 부설 해양개발연구소의 초대 소장을 맡게 된다. 바로 그 해양개발연구소가 해양연구소로 개편된 후 1985년 4월, 당시 연구소 책임자였던 허형택(許亨澤) 소장은 한국해양소년단연맹으로부터 연락을 받는다. 남극대륙의 최고봉 등정과 탐험에 나설 계획인데, 여기에 참여할 연구 인력을 보내달라는 요청이었다. 당시 한국해양소년단연맹은 정부의 든든한 후원 아래 청소년의 애국심 고취를 위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한 해 전인 1984년에는 파랑도(이어도)를 민간단체로는 최초로 탐사하기도 했다. 당시 이런 활동은 많은 호응을 불러일으켰고, 이에 자극을 받아 준비한 프로젝트가 높이 4897m로 남극대륙 최고봉인 빈슨 산괴(산맥 중에 있어서 큰 골짜기에 싸여 독립해 있는 부분) 등반과 남극 탐험이었다. 외무부의 이러한 요청에 총 17명으로 구성된 남극 탐험대에 참여한 두 명의 해양연구소 소속 연구원 중 한 명이 바로 장순근 박사였다. 해양연구소 입장에선 보르도 제1대학교 대학원 미고(微古)생물학 박사학위까지 취득한 후, 미국에서 연구를 마치고 귀국한 장순근 박사가 연구능력이나 언어능력에서 적임자로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해양연구소 입장에선 그 탐험에 참가하는 것이 예산 확보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더 컸던 것 같아요. 이때만 하더라도 남극탐험대 참가가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생각은 못했죠.” 당시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이 한국해양소년단연맹 윤석순(尹碩淳) 총재에게 “임자, 살아서 돌아와”라고 한 말은 한국의 남극 개척사에서 유명한 일화가 됐다. “현지에서 활동한 것은 약 20일 정도 됩니다. 남극에 도착하고 나서는 텐트 생활을 하며 본격적인 연구활동을 했죠. 일부는 중국과 칠레의 남극기지를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탐험대에는 MBC 기자 2명이 동행해 남극의 모습을 생생히 담아갔는데, 이 방송은 국가적으로 반향을 일으켜 한국 최초의 남극연구 기지인 세종기지 설립의 마중물이 됐다. 이때 동행한 MBC 김재철(金在哲) 기자는 훗날 MBC의 사장이 된다. 탐험대 활동 이후 남극에 대한 국가적 관심이 높아져, 1986년 11월 남극조약 가입이 이뤄지면서 기지 건설은 급물살을 타게 된다. 올해로 꼭 30년이 됐다. “남극에 가능한 한 빨리 기지를 지으라”는 전두환 대통령의 지시도 있었고, 그의 임기 또한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기지 건설에는 가속도가 붙었다. 처음엔 그저 귀한 경험 정도로 여겼던 장순근 박사와 남극과의 인연은 이를 통해 이어진다. 1987년 4월 장순근 박사는 기지 건설 후보지 답사단에 선발돼 세종기지가 세워진 킹조지 섬에 급파됐다. “칠레 기지에 머물면서 헬리콥터를 타고 주변을 관찰하고, 독립지역은 러시아의 설상차를 빌려 둘러봤죠. 1987년 남극의 여름에 맞춰 공사가 진행돼 1988년 2월 17일 준공식을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기지 건설단은 귀국하면서 기지 주변에 있던 높이 2m 정도의 삼각형 바위 하나를 우리나라로 갖고 돌아왔다. 후에 그 바위에는 ‘남극의 한국, 세계의 평화’라는 전두환 대통령의 휘호를 새겼는데, 현재 그 바위는 인천 송도의 극지연구소에 자리 잡고 있다. 그만큼 전두환 대통령은 남극과 인연이 많았다. 그가 후에 정리한 남극 월동기를 살펴보면 세종 기지가 설립된 1988년 7월 14일의 기록에 “연구소에서 보낸 물자가 칠레 기지에 도착했고, 함께 도착한 서울 소식에는 ‘5공 청산 청문회’라는 처음 들어보는 말도 나온다. 세상이 많이 바뀌나 보다”라고 적혀 있다. 남극기지의 준공이 가까워지면서, 누가 월동(越冬)대장을 맡을 것인가에 관심이 쏠렸다. 하지만 선정은 싱겁게 끝났다. 두 번의 남극 경험을 쌓은 장순근 박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남극에서의 월동은 우리가 생각하는 월동과 다르다. 보통은 ‘겨울을 지내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세종기지의 월동연구대는 기지에서 1년을 꼬박 보낸다. 이름에 월동이 붙는 이유는 남극에서 겨울을 넘긴다는 의미가 포함된 것으로, 그만큼 남극에서 월동은 위험하고, 어려운 과정이다. 반면에 여름에 한두 달 가서 연구하는 탐사단은 하계연구대라고 부른다. 악명 높은 남극의 겨울을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단원들을 이끌고, 기지의 신뢰성이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세종기지는 여름엔 영상까지 올라갈 정도로 남극에서는 따뜻한 곳에 속하지만, 한겨울에는 영하 26℃까지 떨어지고 이때의 체감온도는 영하 50℃에 육박한다. “월동대장의 주 업무는 활동 기간에 사고나 화재가 없도록 책임을 지는 일이었기 때문에 늘 입에 잔소리를 달고 살았던 기억이 납니다. 외출은 두 명 이상, 무전기는 필수지참 같은 이야기들이었죠. 외부활동이 있는 날에는 불안해서 책상에 앉아 있지도 못했죠.” 당시만 하더라도 인터넷은 상상도 못 했고, 가족 소식은 편지에 의존했다. 그래서 우편물을 배달해주는 칠레 공군의 헬리콥터를 대원들은 ‘까치’라고 불렀다. “1999년 2월에 인터넷이 설치되면서 기지 단원들의 생활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가장 큰 의식변화는 고립되어 있다는 기분이 사라졌다는 것이죠. 고국의 소식을 실시간으로 접하면서 문명 세계에서 떨어져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게 되었지만, 한편으론 남극만의 특별한 요소가 사라졌다는 기분이 들기도 했습니다. 최근에는 인공위성 수신 안테나가 설치돼 한국 방송 시청도 가능하고, 인천 지역번호를 가진 국내 전화도 설치됐습니다.” 아무도 도전하지 못했던 첫 월동. 어떻게 버텨낼 수 있었을까. 그 비결에 대한 질문에 그는 책임감이라고 대답했다. “부족한 것도 많고, 국내 소식도 들리지 않고, 칠레 TV는 재미도 없고, 음식도 맘에 들지 않으니 긴장상태가 흐르기도 했고, 서로를 위해 조심하려 노력했죠. 그래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책임감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나라를 대표한다는 자긍심, 각 분야의 전문가라는 자존심으로 버틸 수 있었죠.” 월동했던 당시엔 음식 때문에 많은 어려움도 있었다고 이야기했다. “한국에서 싣고 가는 짐을 줄이기 위해 쌀과 고기, 채소 등은 가장 가까운 도시인 칠레의 푼타 아레나스에서 사거든요. 김치는 중동 근로자들을 위해 고안된 푹 익힌 김치를 담은 통조림뿐이었어요. 쌀과 김치는 입맛에 맞지 않고, 장기 보관을 하다보니 냉동한 고기는 퍽퍽해졌고, 채소는 구경조차 하기 힘들었죠.” 그런 단원들의 희생과 노력으로 세종기지의 생활은 많이 개선되었고, 이제 채소는 기지에 채소 공장이 설립돼 몇 가지는 자체적으로 키워 조달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2009년 말에 쇄빙선 아라온호가 취항하면서 칠레 쌀과 해외에서 담근 김치와도 이별을 고했다. 이제는 경기미와 국산 김치가 보급된다. 그렇게 그는 초대 월동대장을 맡았고, 이어 4차, 8차, 14차 월동대장으로 활동했다. 여름에 방문한 22차례의 체류를 더하면 꼬박 7년간 남극에 있었던 셈이다. 한 번은 스페인 남극 연구대원들이 느닷없이 세종기지로 들이닥친 적이 있다. 1989년 1월 5일의 일이었다. 당시 시각은 자정을 갓 넘긴 무렵. 자고 있던 장 박사는 일정상 그 시간에 방문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을 맞이했다. 그 상황을 그는 “그런 곳이 남극입니다. 예의를 몰라서가 아니라 예의를 갖출 수 없는 곳이니까요”라고 설명했다. 물론 그 중책을 헤쳐나가는 과정에서 난관도 많았다. 첫 월동에서는 화재를 직접 진화해 큰불을 막기도 했고, 1991년 2월에는 칠레 기지에서 돌아오다 눈보라에 밀려 우루과이 기지로 피난하기도 했다. 또 아르헨티나 생물학자와 스키두(설상 스쿠터)에 올랐다가 그의 경고에 크레바스(빙하의 좁고 깊은 틈)를 간신히 피할 수 있었다. 14년 후 그 생물학자는 크레바스에 빠지는 사고를 당해 동사했다. 4번의 월동을 마치고 귀국한 이후에는 각종 교육기관이나 관련 단체를 순회하며 세종기지 단원의 활약상과 남극의 자연환경에 대한 홍보, 교육활동에 주력했다. 또한, 남극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세종기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저서 을 펴내는 등 저술활동에도 전념했다. 그가 펴낸 책은 번역서를 포함해 31권이나 된다. 그렇게 오랜 기간 가족의 볼멘소리에도 남극행에 주저함이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다른 젊은이들에게도 남극으로 도전을 추천할까? “대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입니다. 대자연에 대한 애정과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대한 열정이 있다면 젊은이들에게 남극은 멋진 장소입니다. 자연에 대한 사랑이 있다면 하루하루 변해가는 남극의 환경, 생물들의 모습은 기쁨의 연속이죠. 대신 찬란한 오로라나 거대한 빙하 등에 대한 막연한 환상은 버려야 합니다. 세종기지에선 오로라는 보이지도 않습니다.”
- 2016-03-08 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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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aA 디자인 뮤지엄 김명한 관장
- 가구 컬렉션계의 대부 혹은 가구 컬렉션계의 1세대. 모두 aA 디자인 뮤지엄 김명한 관장을 지칭하는 수식어다. 그의 컬렉션은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유명하다. 질과 양에서 모두 세계 수준으로 손꼽힐 정도다. 디자인 가구의 컬렉팅은 그에게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진다. 처음엔 단순한 취미로 시작했지만, 새로운 인생을 펼치는 도화선이 됐다. 그 노력의 집약체가 바로 aA 디자인 뮤지엄이다. 그 곳에서 김명한(金明漢·63) 관장을 만났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젊은이들이 흔히 말하는 ‘홍대’는 단순히 홍익대학교와 그 앞 거리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신촌과 함께 서울에서 가장 큰 소비의 축을 담당하고 있으면서, 디자인과 출판, 건축 등 다양한 창조물이 샘솟는 곳이다. 이제 지역적으로는 마포구 서교동과 동교동을 넘어 합정동, 창전동에 일부는 서대문구 연남동 일대까지로 그 의미가 확대되기도 한다. 수십 년 전 저잣거리를 축으로 확대된 ‘종로’가 있다면, 지금은 그 역할을 홍대가 해내고 있는 셈이다. 그 홍대의 랜드마크 중에는 aA 디자인 뮤지엄이 있다. 휴일에는 문을 닫고, 오후 5시 전에는 나가야 하는, 으레 생각하는 그런 박물관이 아니다.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밤늦도록 머물 수 있는, 디자인을 손에 쥐고 몸으로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 aA 디자인 뮤지엄이다. 문화를 주도했던 주인공들이 주변으로 밀려나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현상 속에서도 aA 디자인 뮤지엄은 젊은 디자이너들이 창작을 지속할 수 있는 공간과 영감의 공급처 역할을 하고 있다. 설립자 김 관장은 aA 디자인 뮤지엄의 의의를 이렇게 설명한다. “개인적으로 홍대에, 젊은이들에게 빚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들을 통해 돈을 벌고 일어설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그들이 디자인을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다들 콘텐츠가 중요하다고 이야기하지만, 사실 그것만큼 중요한 것은 그 콘텐츠를 담을 하드웨어예요. 어린 친구들은 그 하드웨어를 만들 여력이 없으니 그 부분만큼은 기성세대의 책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aA 디자인 뮤지엄은 권위나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젊은이들에게 열려 있는 공간이다. 인터뷰가 진행된 날에도 박물관 공간 한쪽에선 학생들의 전시 준비가 한창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그는 한국 디자이너들을 해외에 소개할 여러 가지 수단을 찾고 있고, aA 디자인 뮤지엄과 유사한 상설 전시공간을 유럽에 마련하는 것도 고민 중이라고 했다. 홍대를 지키는 기둥으로 마포 디자인·출판 진흥 지구협의회의 회장을 맡아 서울시와 함께 중소 출판인들의 인프라 개선을 위한 작업을 올해부터 본격 진행할 계획도 갖고 있다. 그의 가구 컬렉션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면 조금 많이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91년 유럽식 레스토랑 ‘아지오’를 열면서 그의 수집은 시작됐다. 그의 공간을 장식할 소품과 가구들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의 노력 때문이었는지 그가 손대는 레스토랑과 카페들은 연이어 성공했다. “운이 좋았던 시절이었어요. 젊고 순수했고 열정으로 가득한 시기였지요. 똥폼도 잡고 밤새 예술에 대해 이야기했던 시절이었습니다. 당시엔 정원이 있는 레스토랑에 대한 전문가도 없었고, 평론에도 자유로웠던 시절이어서 쉽게 일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마침 1980년대 후반부터 해외여행 자유화를 통해 외국을 경험한 젊은이들이 그 추억을 공유할 장소가 필요했고, 대표적 여행지인 유럽과 유사한 공간은 그들에게 어필하기에 충분했으니까요.” 그의 공간에 대한 감각과 욕심은 유년 시절의 경험과 맥락을 같이한다. 유복했던 어린 시절 그가 뛰어놀던 정원은 아버지의 정성으로 가득했고, 그가 자란 안동은 미적으로 뛰어난 한옥들이 즐비했기 때문이다. “어릴 때는 한국전쟁이 막 끝난 시기여서 주택문화라는 것은 찾아보기 어려웠던 시기입니다. 독서와 정원 가꾸는 것 말고는 취미가 없었던 아버님 덕분에 정서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죠. 디자인 역시 직접 경험하고 체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그의 배경은 ‘경험’을 중시하고, 나누고자 하는 계기가 된다. aA 디자인 뮤지엄이나 제주도에 세운 게스트 하우스 모두 이 맥락에서 출발했다. 수집이 본격화되면서 시작한 것은 공부다. “유럽의 각국을 다니면서 많이 배웠습니다. 주로 영국과 프랑스, 이탈리아의 경매소들을 많이 다녔죠. 그곳에서 물건을 감정하는 눈을 키우고, 거래 기관과의 신용을 쌓았습니다. 관련 전문서적도 갈 때마다 사들여서 매달 번역해서 읽었고요.” 20년 넘게 진행된 그의 컬렉션은 100여평의 창고 8개를 채울 정도가 됐다. 일본의 업계 관계자가 한국시장 진출을 꿈꾸다 그의 컬렉션을 보고 규모에 깜짝 놀라 포기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제 수집 스타일은 일본 사람들의 그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그들이 중요시하는 학술적 가치 말고도 조형적 가치나, 시대적 가치를 갖고 있는 것들도 모았으니까요. 전시만을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라이프 스타일에 맞춘 활용까지 생각하는 것이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죠. 덕분에 컬렉션의 형식이나 아이템들이 다양해졌습니다.” 물론 이런 과정 속에서도 그가 세운 원칙은 철저하게 지켰다. 김 관장 스스로가 정한 약속이다. “그동안 가구들을 수집하는 과정에서 지켜왔던 원칙이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쓸데없는 경쟁은 피하고, 갖고 있는 능력 안에서만 하자는 것이죠. 기본적으로 수집은 저에겐 사업의 대상이 아니라 취미의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에 절대 무리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수집은 3년 전 멈췄다. 그가 아지오나 다른 카페들에서 손을 뗐을 때와 마찬가지로 무 자르듯 그만뒀다. 관리에도 문제가 있었고, 다른 관심사들도 생겨났기 때문이다. 아지오를 그만둘 때도 주위에서 이런저런 만류가 있었지만, 단칼에 실행했던 그다. 지금은 무거운 짐을 벗어던진 것처럼 행복하다고 그는 이야기한다. 수집은 그의 인생 2막의 시작이었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다양하게 확대됐다. 그중 하나가 무크지 ‘캐비닛’과 ‘캐비닛 Jr.’의 출간이다. 캐비닛 창간호는 전 세계 디자이너 20명의 인터뷰를 실었는데, 출간되자마자 업계의 반향을 일으켰다. 외국 기사를 번역한 것이 아닌, 현지에 찾아가 그들과 직접 나눈 이야기와 촬영한 사진을 게재한 잡지는 이전에 없었기 때문이다. 궁금한 사람이 있으면 날아가서 만나봐야 직성이 풀리는 그의 성향이 반영됐다. 또 다른 사업은 그의 디자인 안목과 경험이 집약된 ‘aA 디자인 퍼니처’다. 2011년 론칭해 주목받았던 그의 가구 브랜드 aA 디자인 퍼니처는 최근 경기도 가평에 공방을 열고 새로운 도약을 준비 중이다. 그의 공방은 우리가 생각하는 ‘가구 공장’과는 차이가 크다. 공방이 곧 전시장이 될 수 있는 정갈한 작업환경과 디자이너들이 머물 수 있는 숙소까지 갖추고 있다. “내 직업에 대한 평가를 상대적 가치로 판단하려 들면 자식에게 내 일을 물려줄 생각을 못 하게 됩니다. 하지만 직업과 일터를 물려주겠다고 생각하면 공간이나 도구 등 모든 것이 달라지죠. 춥거나 덥거나 더럽지 않은, 직원들이 폼나게 일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고 싶었습니다. 위치가 가평인 건 혼자 떨어져 있는 것을 좋아하는 제 성격이 많이 표현된 것이죠.” 그는 이 공방을 통해 디자인 샘플이 탄생되면 소비자들을 고려한 가격을 정해 시장에 내놓을 생각이다. 최근 제주에 세운 게스트 하우스 ‘Jeju in aA’는 다시 한 번 그가 주목받는 계기가 됐다. 워낙 제주가 좋았던 그는 지인들과 편하게 지낼 수 있는 집이 하나 있었으면 했고, 수집한 가구들로 공간을 근사하게 꾸며놓고 보니 많은 사람과 그 경험을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그 목적에 맞게 비용도 저렴하게 책정했다. 주말 가격도 없고, 성수기 가격도 따로 없다. 1년 365일 같은 가격이다. 바가지 상혼이 가득했던 크리스마스나 연말에도 평소 가격을 유지했던 ‘아지오 아저씨’ 김 관장의 고집이다. “게스트 하우스를 사람들에게 개방하기로 결정하면서 이름을 지었는데, 두 채는 제주 방언으로 게으름뱅이를 뜻하는 ‘간세다리’와 영어로 빈둥거린다는 뜻의 ‘아이들(idle)’입니다. 다른 한 채는 제 손녀의 이름이자 순우리말로 바다를 뜻하는 ‘아라’고요. 이름처럼 젊은이들이 여유를 즐겼으면 하는 마음을 담았습니다.“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성산일출봉 근처에는 미술관을 세울 계획이다. 예기치 않게 제주 제2공항이 근처로 발표되는 바람에 오해도 받고, 계획에 차질이 생겼지만 할 수 있는 만큼 하려고 한다. 그는 두 번째 인생을 준비하는 또래의 중년들에게 미루지 말고 바로 실행할 것을 주문한다. “돈에 얽매이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돈은 절대 가치가 될 수 없어요. 대신 자신에 대한 가치, 신념이 있어야 해요. 저는 생일을 챙겨본 적이 없습니다. 매일을 태어난 날이라고 생각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농부가 농사를 하루라도 거르거나 미룰 수 없는 것처럼 인생도 똑같다고 봐요. 그렇게 인생을 준비해나가면 어떨까 싶습니다.”
- 2016-03-03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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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한류스타 ‘나’라고 전해라!
-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가수 이애란(예명·53)씨를 두고 하는 말이다. 작년 말, 전국을 ‘전해라’ 열풍에 빠트린 죄(?)를 물어 방송사와 광고계가 그에게 잇단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떴다’하는 순간 방송사 특집 프로그램, 휴먼다큐멘터리, 심지어 대한민국 최고의 예능 프로그램까지 접수했다. 25년 무명생활을 한방에 날려버린 ‘백세인생’ 이애란의 2016년 소망을 브라보가 만난 사람이 들어봤다. “요즘 들어서 인기를 조금씩 실감하고 있어요.” ‘백세인생’ 가수 이애란씨의 하루는 바쁘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무명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았다. 이제는 어딜 가나 말 그대로 스타급 대우다. SBS 아침방송 고정 리포터는 물론 인기 아이돌만 모신다는 MBC 설날 특집 ‘2016 아이돌스타 육상·풋살·양궁 선수권대회’에 초대돼 노래도 불렀다. 길거리, 식당 어디에서도 ‘어머, 이애란이야!’라는 소리를 수도 없이 듣는다. 인기를 얻기 전부터 존재했던 인터넷 팬카페는 매일 꾸준히 회원이 늘고 있다. 회원 수는 1월 현재 1428명이다. 그전에는 이에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많이 늘었어요. 한 분, 한 분 저와 노래를 알게 되고 좋아하시는 분들이 가입하세요. 요즘은 자주 들어가 보지 못해서 팬들에게 미안하죠.” 오로지 노래만 생각한 25년 세월 어렸을 때부터 가수의 꿈을 키워왔던 이애란. 20대가 되면서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다. 그러나 오래가지는 않았다. “1990년, KBS 일일드라마 주제가 공개 오디션이 있었어요. 거기서 저 포함해서 3명이 마지막 오디션을 봤는데 제가 낙점된 거죠. 그런데 어떤 상황인지 가수가 부른 노래는 나가지 않고 곡만 드라마에 사용하더군요. 정작 제 목소리는 전파를 타지 못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실망할 법도 한데 지금까지 노래를 부르는 것 외에 다른 일은 생각해본 적이 없다. 소소한 아르바이트도 노래가 아니면 안 했다. “그래도 노래할 곳은 꽤 있었어요. 풍물 장터 야시장이라고 겨울만 빼놓고 동네마다 많았어요. 서울에도 있었고요. 야시장에서 초대해주시면 가서 노래를 불렀죠.” 당시 야시장마다 기본적으로 노래 반주를 해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가수를 초대하면 그 사람 음정에 맞춰 연주해줬다. 뭐든지 생음악으로 불렀던 때다. 길고 긴 ‘백세인생’과의 인연 이애란이 노래 ‘백세인생’ 가락을 처음 접한 것은 1995년 한 국악학원에서다. 그때 녹음을 했지만 상업적인 목적은 아니었고 장구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는 정도였다. “장구가 배우고 싶어서 국악학원에 갔었어요. 그때 선생님이 장구랑 민요도 같이 가르치던 분이신데 선생님이 그 노래(지금의 백세인생)를 민요로 부르는 것을 귀동냥했어요. 저도 장구 치면서 흥얼거리곤 했어요. 한 달 넘도록 장구채 잡는 방법만 가르쳐서 그만뒀는데 노랫가락 하나는 익히고 나온 거죠.” 이애란은 이렇게 알게 된 노래를 1998년 경주세계문화엑스포 무대에서 관객들의 박수에 맞춰 불렀다. 반응이 상당히 좋았다. 그 모습을 보고 부산 시장거리에서 활동하던 품바 가수 명월이 알려달라기에 노래를 가르쳐줬다고. “그런데 품바라 그런지 왜곡이 많이 되더라고요. 시장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상황에 맞게 다 개사를 해버리잖아요. 2012년에 김종완 작곡가님을 만나 악보를 보고 알았죠. 우리가 왜곡해서 부르고 있었구나. 그 이후 가사 수정도 많이 하고 다시 처음부터 배운 거죠.” 힘든 시절 장구를 치면서 익혔던 노래가 인생을 바꿔주는 열쇠가 될 줄 누가 알았을까. 2012년 사촌 오빠의 소개로 첫인사를 나눴던 작곡가 김종완씨와의 인연도 기막히다. 알고 보니 그가 흥얼거렸던 ‘백세인생’의 원작자이자 데뷔곡이 될 뻔한 드라마 주제가 작사가였다. 현실은 영화만큼이나 극적이었다. 작곡가와 새롭게 노래 녹음을 하기 위해 5, 6개월여 피나는 연습을 했다. 새벽 2시건, 3시건 될 때까지 말이다. “2013년 드디어 노래 녹음을 했어요. 1995년 장구를 배울 때만 해도 ‘백세인생’의 원제목이 ‘저세상이 부르면 이렇게 답하리’ 였는데 2013년에는 ‘저세상이 부르면’으로 바꿨죠. 작년 2월 말 발표 때는 원래 100세까지만 있던 가사를 150세까지 늘려 다시 썼어요.” 제목도 ‘백세인생’으로 완전히 갈아 끼웠다. 고령화 사회, 장수사회로 접어들면서 생겨난 ‘백세인생’이란 말이 저승에서 오라는데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말하는 노래 가사와 잘 어울렸다. “제목 안에 가사 내용이 다 담겨 있는 거 같아요. ‘백세인생’에는 한 가지가 아니고 여러 가지가 감정이 있습니다. 나 대신 네가 좀 내 마음을 좀 전해줄래? 하는 것도 있고, 또 덩실덩실 리듬도 있고, 우리가 노래 가사처럼 정말로 150세까지 살 수 있다면 하는 욕심도 담긴 노래입니다.” 가장 많이 생각나는 사람은 아버지 인기몰이가 시작되고 하루하루가 바빠질수록 먼저 떠나신 부모님 생각이 부쩍 많이 난다. 다른 매체에도 소개됐지만, 작년에 이애란씨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이애란의 영원한 팬이자 버팀목이었던 아버지를 생각하니 목소리가 애잔하게 깔린다. “아버지는 이 노래를 처음부터 좋아하셨어요. 작년 2월에 음반이 ‘백세인생’으로 나왔다고 하니 제목이 좋다고도 하셨어요. 좋아하시기만 했지 제가 방송 활동하는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해 늘 가슴이 아파요. 그리고 빨리 못 보여드린 게 가슴에 한이 남았다고 할까요? 맺혔다고 할까요?” 아버지 살아계실 때는 가끔 아버지 팔을 베고 누워서 ‘백세인생’의 한 구절을 불러드리기도 했다. “90세에 저 세상에서 또 데리러 오거든……. 재촉말라 전해라.” 달리 아픈 곳이 없어서 100세까지는 사실 거라 생각했는데 갑작스럽게 운명하셨다. 지방행사 때문에 아버지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게 못내 죄스럽다. 노래하는 이애란에게 아버지는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도전이 아름다운 거지 후퇴는 하지 마라. 그리고 네가 후회할 일은 절대로 하지 마라” 라며 항상 응원을 해주던 한 사람이다. 젊은이들의 유희 ‘전해라~ 짤방’, 인생역전 견인차 이애란의 인기는 젊은이의 기발함이 빚어낸 결과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짤방이란 ‘잘림방지’의 준말로 내용에 상관없이 사진이나 동영상을 인터넷에 올리는 것을 말한다. “2014년 11월 말에 ‘백세인생’ 노래 영상을 만들어서 인터넷 동영상 사이트에 올렸습니다. 조회 수가 빠르게 올라가더라고요. 그런데 그걸 눈여겨봤던 최준원씨가 소속사에 얘기한 거죠. 제 영상으로 짤방이라는 걸 만들고 싶은데 만들어도 되느냐고요.” 최씨는 한국방송예술진흥원 학생이면서 이애란과 같은 소속사의 트로트 음악 작·편곡을 겸하고 있는 전문 작곡가다. 지금은 이애란씨와 이모, 조카 하는 사이라지만 짤방을 만들 당시에는 안면만 있는 정도였다고. 소속사에서도 최씨의 얘기를 들으니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 생각해 흔쾌히 승낙했다. 작년 7월, 인터넷에 첫 번째로 유포된 짤방은 ‘간다고 전해라, 못 간다고 전해라’였다. 이애란의 감정 실린 표정과 ‘전해라’라는 궁서체 자막은 묘하게 어울리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특이하고 재미있는 것에 관심 두는 젊은이들, 신선한 것을 찾아다니는 방송 작가, 기자들의 눈에 띄면서 마침내 세상 남녀노소에게 사랑받는 전해라~ ‘백세인생’이 됐다. 이애란의 인생은 이제부터 시작 결혼에 관해서 물어보려 하자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이애란씨. 살아생전 아버지도 묻지 않던 질문이다. 노래하다 보니까 결혼을 해야겠단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단다. 노래를 벗 삼아 버텨온 삶이다. 그래도 이상형은 있다. 자상하고 정말 착한 사람 만났으면 좋겠다. 사람은 다 착하지만, 자신을 아껴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고 한다. 2016년을 맞이하는 각오도 함께 물어봤다. “제 욕심이겠지만 트로트를 발판으로 한류 스타가 되고 싶어요. 바람이고 욕심이죠. 작년은 여러분들 사랑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2016년도에는 보답을 하는 한 해를 만들어야죠. 드라마에 출연하고 싶을 때도 있어요. 드라마에 노래교실이 나올 때도 있는데 초대해주시면 좋겠어요(웃음).” 한류스타를 예약해두고 있는 인기가수답게 이애란씨와의 인터뷰는 사실 쉽지 않았다. 그녀의 일정대로라면 아직도 만날 수 없는 상황. 이동하는 차 안에서, 식당에서, 걸어가면서 틈틈이 이애란씨와 인터뷰했다. 방송 촬영 모습도 지켜봤다. 힘들만도 한데 사진을 찍겠다고 길게 줄을 선 팬들 하나하나 웃으면서 사진을 찍어주고 악수를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마지막으로 독자에게도 한 말씀 부탁했다. “무조건 힘내시고 파이팅하라 전해라~!” 100세 인생은 60세부터 시작이기 때문에 꽃중년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고 60세는 너무 어리다는 것. 이애란의 인생도 이제부터 시작이니 모두 젊은 마음으로 100세 인생 살아가기 바란다고 전했다.
- 2016-02-18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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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착한 ‘치매 장모’와 사는 ‘이쁜 사위’
- 100세 시대, 치매는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불청객과도 같다. 이 달갑지 않은 손님을 맞았을 때는 누구나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절망에 빠지게 된다. 20여 년간 수많은 환자를 진료해온 킴스패밀리의원·한의원 김철수(金哲秀·62) 원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장모의 치매는 그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 김 원장은 “나는 치매랑 친구로 산다”고 말한다. 노년의 불청객인 치매를 가장 가까운 친구로 맞이할 수 있었던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2009년 어느 날 장모에게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휴대전화 너머 들려온 목소리는 장모가 아닌 한 남성이었다. “할머니께서 집을 못 찾으시네요.” 깜짝 놀란 김 원장은 곧장 서울아산병원으로 장모를 모시고 갔다. 검사 결과, 치매 초기라는 것. 자신이 의사이면서도 ‘노안을 너무 과하게 진단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할 정도로 장모의 치매를 바로 받아들이기는 힘들었다. “평소 단정하시고 영민하신 장모님이었기 때문에 더욱 갑작스럽게 느껴졌어요. 그래도 정도가 심하지 않아 약을 타서 드시게 하고 이전과 똑같은 일상을 지내시도록 했죠. 이후로는 아내가 1주일에 한 번씩 방문했고 저도 자주 인사드렸어요. 그렇게 한동안은 조금씩 불안해도 평범한 생활을 하실 수 있었죠.” 자존심과 자립심이 강했던 장모는 바쁜 자식들이 행여 마음이라도 쓸까 봐 스스로 조심하며 조용히 잘 지내셨다. 이러한 생활은 치매 진단 후 3년 정도까지 가능했다. 2012년 초봄, 장모의 증세가 심상치 않아졌음을 느꼈다. 매주 찾아뵀는데도 “왜 요즘은 얼굴을 안 보이느냐”며 역정을 내시는 모습은 낯설게만 보였다. 깔끔했던 집안 곳곳은 쓰레기가 쌓이기 시작했고, 정성스레 키운 화분들은 메말라갔다. 그의 입에서 짧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이제 올 것이 왔구나.” 아찔함에 몸서리칠 시간도 잠시, 집중적인 간병계획이 필요했다. 치매, 어린아이가 되어가는 병 치매 증상이 심해진 장모와 한집에서 지내면서 갈등은 하나둘씩 생겨났다. 집에 보내달라며 화를 내고, 불안해하는 장모를 위해 김 원장 부부는 자신들이 쓰던 안방을 내어 드렸다. 내 집으로 편하게 생각하시고 가족 구성원으로서 존재감을 확실히 느끼게 해드리기 위함이었다. 가족들은 조금씩은 불편했지만 그런 생활에 적응해야만 했다. 하지만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장모도 마찬가지였다. “온전한 어머니라도 갑자기 딸의 집에 와서 지내려면 불편할 것 아녜요. 그런데 늙고 치매에 걸린 장모님에게 갑작스러운 변화와 적응은 시련 그 자체였겠죠. 몇 가지 인지능력이 떨어졌을 뿐, 당신의 자존심이나 가치관 등은 정상이라 느끼기 때문에 가족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늘 미안해하셨어요. 그래서 설거지나 청소를 하시며 그런 마음을 덜어보려 하셨는데 그게 갈등의 불씨가 되어버렸죠.” 인지능력이 떨어진 장모가 설거지해놓은 그릇은 제대로 헹궈지지 않아 끈적거렸고, 음식물 쓰레기와 일반 쓰레기가 뒤섞여 집 안에는 하루살이가 날아다녔다. 집안일을 절대 하지 마시라 해도 소용이 없었다. 틈만 나면 설거지에 집착해 부엌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는 통에 아내의 언성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모녀의 마찰은 점점 거세졌고 급기야 장모가 울고불고하며 감정이 격해졌다. “치매 환자 입장에서는 자신은 정상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자신이 설거지를 해내지 못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거죠. 그런데 그런 행동을 했을 때 갈등이 생기니 서운한 마음이 생기고 감정 컨트롤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겁니다. 아내 입장에서는 어머니의 달라진 모습에 혼란을 느낄 수밖에요. 치매로 인해 벌어진 일들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정상이었던 과거 모습에 대한 기대 때문에 그런 변화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던 거죠.” 김 원장은 장모의 행동을 안타까워하면서도 속상해하는 아내를 보며, 치매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이해가 급선무라는 것을 느꼈다. 어린아이라면 실수를 하더라도 쉽게 이해할 일을 어른인 치매 환자에게는 너그럽지 못한 경우가 많다. 그는 치매 환자를 어린아이라고 생각하고, 그의 눈높이에서 상황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왜 이것도 못하지?’라고 생각할 게 아니라, ‘아! 이것도 할 수 있구나’라는 관점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정상적이었을 때의 모습을 기대하기보다는 치매 환자니까 제대로 기능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오히려 무언가를 해냈을 때 감탄하는 쪽으로 바꿔 나가야죠. 그렇게 되면 아이가 하나둘씩 해나갈 때의 기쁨처럼, 치매 환자가 스스로 행동하는 것 하나하나에 감사할 수 있어요. 그렇게 될 때 가족도, 환자도 편안해질 수 있고요.” 환자의 스트레스가 완화될 때까지 참아주고 기다려주면서 반복적으로 상황을 리마인드시키는 과정이 중요했다. 그런 우여곡절을 거쳐 설거지에 대한 집착이 줄어들면서, 빨래를 개거나 파를 다듬는 등 비교적 단순한 일을 하나둘씩 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일들은 치매환자로 하여금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줘 긍정적인 모습으로 변화하게끔 도움을 준다. 장모 덕분에 친해진 치매라는 친구 그 이름도 ‘굳세어라’ 장금순(85)인 장모는 평생을 굳세게, 활동적으로 살아오신 분이었다. 그런 장모가 꼼짝없이 집에서만 있게 됐으니, 오죽 답답했을까. 장모는 매일 안부 전화를 했던 아들에게 당신 집으로 보내달라며 떼를 쓰곤 하셨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자 아내는 어머니의 집을 처분해 단념시켜야겠다고 결심했다. 아들과 딸의 설득 끝에 어머니는 자신의 전부라 여겼던 집을 내려놓기로 했다. 마음은 먹었지만, 크나큰 아쉬움과 존재감 상실로 하염없이 울기도 하고, 실신까지 하며 힘겹게 집을 떠나보낼 수 있었다. “마음이 상하지 않으시도록 계속해서 설명하고 위로해 드렸죠. 하지만 이해를 못 하고 저에게 아내가 집을 팔아먹었다는 이야기를 하시는가 하면 심지어 집을 빼앗겼다고까지 생각하셨어요. 우리 부모세대는 특히 집에 대한 애착이 강한데, 의식이 멀쩡한 상태라면 모를까 치매로 판단력이 흐려진 뒤에는 집착만이 남을 수 밖에요. 그럴 때마다 우리 부부는 집을 팔고 난 돈을 넣어둔 통장을 펼쳐 보여드리며 이 돈으로 여생을 건강하게 사실 수 있도록 약속드린다고 거듭 말씀드렸어요. 한 달 정도 지나 안정을 찾으셨죠.” 현실적으로 치매 환자의 경우 집뿐만 아니라 독립적인 경제활동이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 탓에 김 원장의 아내는 일찍이 어머니의 도장, 통장, 보험, 부동산 서류 등을 공동 관리하기 시작했다. 상당히 민감한 문제라 공동 재산관리에 대해 운을 떼기는 쉽지 않았지만, 다행스럽게도 장모는 흔쾌히 승낙해주었다. 이러한 상황 등으로 자칫 오해로 번져 간 갈등이 생기기도 하지만, 김 원장의 가족은 치매 덕분에 가족애가 더 끈끈해진 계기가 됐다. “지방에서 사는 처남도 평소보다 자주 올라와 이전보다 가족끼리 대화하고 마주할 일이 많아졌어요. 특히 우리 부부가 장모님에게 하는 행동을 보고 두 아들이 어른을 대하고 효를 실천하는 방법을 간접적으로 깨닫게 됐죠. 아내와 저도 20~30년 후 우리의 모습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치매에 대한 경각심을 느끼고 인생을 더욱 신중하게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어요.” 애매한 치매 등급 테스트, 웃지도 울지도 못해 어쩌면 이들 가족이 치매를 안고도 행복할 수 있었던 것은 ‘장모의 예쁜 치매’ 덕분일지도 모르겠다. 흔히들 대소변을 못 가리거나 욕을 하고 호통을 치며 주변 사람들을 괴롭게 하는 것을 ‘미운 치매’, 인지기능은 떨어지더라도 전두엽의 손상이 적어 감정 조절이 잘 돼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경우를 ‘예쁜 치매’라고 이야기한다. 이는 평소 선하고 즐거운 생각을 많이 하는 긍정적 생활이 영향을 끼친다. 그렇기 때문에 치매 환자가 밝고 낙천적인 마음을 지닐 수 있도록 곁을 지키는 가족들의 따뜻한 배려와 사랑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치매 이후에도 늘 긍정적으로 무엇이든 하고자 했던 장모는 학교에 보내달라고 이야기했다. 아내는 건강보험센터에 의뢰하고, 요양원과 보호센터 등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치매 등급 테스트에서 너무나 정확하고 똑똑히 대답하신 탓에 등급이 애매하게 나와 시설에 보내드리긴 어려웠다. 어머니의 상태가 좋아 다행이지만, 원하는 바를 들어드리지 못해 속상했던 아내는 김 원장에게 “우리가 예쁜 치매 병원을 차리자”는 말까지 하게 됐다. “예쁜 치매 병원을 운영하는 것은 제 꿈이기도 해요. 아직은 여건상 당장 실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늘 마음에 간직하고 있죠. 저는 가정의학과 전문의로 의사생활을 시작했고, 아내의 제안으로 한의학 공부를 해서 한의사가 됐어요. 처음 가정의학과를 전공한 이유도 환자의 질병을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보기 위해서였거든요. 거기에 한의학도 전공하게 됐으니, 또 다른 시각을 가질 수 있게 됐죠. 양의학과 한의학의 융합을 통한 진료와 치료를 해왔고, 앞으로도 그런 관점에서 치매를 연구하려 해요. 무엇보다 치매 환자를 믿고 편하게 맡길 수 있는 병원을 만드는 게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시간이 흐른 뒤에야 담담히 조언하는 그이지만, 치매를 빠르게 인정하고 대처하는 것에는 묘안이 없다고 설명한다. 누구나 치매를 인정하긴 어렵고, 적응하는 데는 얼마간의 시간과 시행착오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치매 가족을 두고 의사로서 치매를 연구한 그의 온기 어린 조언이 치매를 겪게 될 이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
- 2016-02-15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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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한과문화박물관 김규흔 관장
- 10여년 전 여름, 한 사내가 한과 공장의 사무실 안에서 비닐 봉투에 든 상추 잎사귀 수십 개를 늘어놓고 살펴보고 있었다. 공장 인부들은 기이한 그의 행동이 이상스럽다고 생각했지만, 그 사내가 사장인 탓에 모두 바라만 볼 뿐이었다. 매번 그런 식이었다. 그의 열정은 남들과는 다른 결과를 불러왔고, 그래서 그는 한과에 미친 한과광인(韓菓狂人)으로 불리기도 했다. 나라에서는 그런 그를 명인(名人)으로 부르기도 했고, 한과명장(韓菓名匠)이란 칭호도 부여했다. 한과문화박물관 김규흔(金圭欣·60) 관장의 이야기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자취방 집주인의 강권에 나간 맞선자리. 찻집에서 만난 상대는 체구가 자그마한 아가씨였다. 그런 그녀가 신문지에 싼 무엇을 그에게 수줍게 내밀었다. 약과였다. 서울 월곡동에서 한과 공장을 하던 부모 몰래 싸온 것이었다. 처음부터 불타오른 사랑은 아니었지만, 만날 때마다 내미는 약과 뭉치는 두 사람이 부부의 연을 맺게 하는 용매 역할을 했다. 경상북도 영덕의, 한과가 귀했던 작은 바닷가 마을 출신의 청년 김규흔에게 약과는 무척 달콤한 것이었다. 매달 나오는 월급을 아끼려고 크림빵 하나에도 큰맘 먹어야 했던 그에게 그 약과는 강렬한 기억을 남겼다. 김규흔 관장은 어릴적 한과와의 추억을 이렇게 기억한다. “어릴 적 한과에 대한 기억은 많지 않습니다. 집안에 제사가 있거나 명절 때에만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어서, 시장통에서 산 약과나 넓적한 한과, 빨간 옥춘 사탕이 전부였죠. 때때로 배가 아플때 할머니께서 약이라며 과자를 물려 주셨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한과가 발효식품이라서 그 장점을 체득해서 아셨던 것 같아요.” 한과공장을 하던 처가의 존재는 자연스럽게 그의 운명 속에 한과가 등장하게 만들었다. “공장을 맡아 운영하던 처남이 군대를 가게 되자, 처가에서 도와달라는 요청이 왔죠. 그래서 다니던 제약 유통회사를 그만두고 공장에서 일을 해 보니, 한과가 사업성이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미친 듯이 다른 분야에서 일을 했던 제 눈에 한과 만드는 사람들은 너무 대충 일하는 것 같았어요. 제 계산으로는 검은깨를 하루에 2~3가마는 볶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막걸리 마시랴, 담배 태우느라 겨우 1가마만 볶는 식이었죠. 그런데도 대목을 지나면 다들 목돈을 만지던 시기였어요.” 그렇게 한과 시장에 눈을 떠가던 즈음, 처남이 제대해 그의 설 자리가 줄어들었다. 3년 정도의 시간이었지만, 셈이 밝았던 그에겐 충분한 준비시간이었다. 그래서 아내와 직원 한 명만을 데리고 월곡동에서 조금 떨어진 월계동에 공장을 차렸다. 성공한 회사를 보니 모두 궁(宮)이나 왕(王)자가 들어간다는 것에 착안에 회사 이름은 ‘신궁(新宮)’으로 지었다. 1981년의 일이다. “물론 쉽지 않았습니다. 가장 어려웠던 점은 거래처를 확보하는 일이었어요. 다들 큰 공장 눈밖에 날까봐 소규모 업체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죠. 오랫동안 어렵게 안면을 익히고, 신용을 쌓은 후에야 좌판 아래에 한 두 박스를 숨겨두고 몰래 팔아주는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초창기에는 중부시장 같은 큰 시장 대신 월계동, 이문동, 장위동, 석관동을 돌면서 구멍가게에 외상 거래를 했죠. 자전거에 박스를 싣고 직접 돌았습니다.” 그의 성공의 원동력에는 이런 성실함과 함께 남과 달라야 한다는 의식이 바탕에 깔려 있었다. “남들과 다르게 만들어야 팔릴 수 있다는 생각을 했죠. 시장을 휘어잡던 큰 회사들은 늘 만들던 대로 만들어도 쉽게 팔아치울 수 있었지만, 우리는 그럴 처지가 아니었으니까요. 보통은 국화 모양으로 만들던 것을 코스모스, 연꽃, 해바라기, 무궁화 무늬로 바꾸어 만들었습니다. 약과판(藥果板)의 도안부터 제작까지 제 손으로 직접 했습니다.” 제대로 된 디자인 교육과는 거리가 멀었던 청년사업가였지만, 그에게는 사방 천지가 교실이고 교과서였다. 외화와 함께 외국 문물이 폭발적으로 밀려들어오던 시절, 거리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낮에는 배달하는 자전거에서, 늦은 밤 귀가길 버스 차창 너머로 만나는 세상은 한과 생각으로 가득찬 그에게 다양한 도형과 화려한 색상의 영감을 불어넣었다. 이런 노력이라도 알아본 것일까. 하늘이 도와줬다. 1984년 한과시장의 대목인 추석을 앞두고 마포구 망원동에 물난리가 났다. 그 주변에 밀집돼 있던 한과들이 한강물에 쓸려 내려가 버리자, 시장에 물량이 동이 났다. 덕분에 한과 시장 큰손들에게 외면받던 신궁전통한과가 날개돋힌 듯 팔려나갔고, 그의 창의적인 아이디어들도 주목받기 시작했다. “상인들로부터 인정받기 시작하면서 가장 신경썼던 것은 신용이었습니다. 매년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 내는 것 역시 일종의 신용이었죠. 상인들이 신제품을 기대하도록 만들고, 거래처들이 다른 상인들과의 경쟁에서 이겨낼 수 있는 무기를 쥐어주려 노력했습니다.”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의 흔적은 그가 2008년 건립한 한과문화박물관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나무로 직접 만들던 약과틀을 주조방식을 활용해 금속으로 대체하고, 대량 생산을 위해 원형 틀을 만들었던 기록들은 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한과문화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것들은 한과의 역사이자 그의 역사인 셈이다. 앞서 언급한 ‘상추 실험’도 답습을 거부하고 변화를 추구하는 그의 성향을 잘 나타내는 일화 중 하나다. “보통 한과 공장들은 여름에 문을 닫았어요. 1년 매출의 90퍼센트 정도는 설과 추석에 모두 팔려나가기도 하고, 매출이 적은 여름에 한과를 만들어봤자 상해서 돌아오는 것들을 반품받기 바빴으니 아예 생산 자체를 거절한 것이죠. 거래처용으로 돌리는 스티커에 여름에는 만들지 않는다는 문구를 박아 넣었을 정도였습니다. 저는 여름에도 한과를 만들고 유통시키고 싶어, 포장부터 바꿔야겠다는 생각에 다양한 포장지를 놓고 가장 빨리 시드는 상추로 실험을 했던 것이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핵심은 ‘산소투과율’에 있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제대로 알았지만, 모든 공장들이 사용하는 포장재질은 한과를 쉽게 상하게 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먼저 발견했다. 그리고 유통기간 6개월이라는 혁신적인 한과를 시장에 내놓았다. 이후에는 한국식품연구원에 연구비를 지원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쌀겨에서 추출한 ‘감마오리자놀’을 한과에 첨가해 기름의 산화를 막고, 신선도를 유지하는 기술을 특허로 인정받기도 했다. 신궁전통한과가 궤도에 오르면서 그가 찾은 곳은 대학이었다. 1995년 경희대학교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을 시작으로 11개 대학원을 쉬지 않고 다녔다. “대학원서 유통의 변화와 혁신을 미리 체험한 것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전통시장이 쇠락하고, 편의점이나 백화점, 대형마트 중심의 유통체계가 도입될 것이라는 것을 배워 대비할 수 있었죠. 늘 우리 것을 따라한 미투상품(모방한 유사제품)으로 괴롭히던 한과공장 사장이 자기네 제품을 유통시켜 달라고 제게 사정할 때 통쾌하기도 하면서, 믿음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2013년에는 대학 학부에 대한 미련 때문에 신흥대학 호텔조리학과에 입학해 작년 2월 졸업했다. 아들보다도 어린 학생들과 나란히 앉아 수업을 들었다. 웬만한 교수보다도 많은 나이에 사회적으로 알려진 터라 손가락질이 무서워 대충대충 할 수 없었다. 이 과정은 한과의 세계화를 위한 과학적 지식과 계량화 등의 바탕이 됐다. 김규흔 관장의 한과에 대한 사랑의 집약체는 역시 한과문화박물관이다. 포천 산정호수 인근에 지어진 이 박물관을 한 번 둘러보면 그의 한과에 대한 철학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박물관에 체험을 위한 공간이 많은 것이 인상적이라 하니 반색하며 설명한다. “맞습니다. 경험을 통해 아이들이 한과를 체득하기를 기대했습니다. 어릴적 입맛이 평생을 간다고 믿기 때문에, 아이들이 한과를 외면하면 시장 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때문에 단순히 과거의 유물을 전시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직접 만들어 볼 수도 있고, 맛볼 수도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박물관을 바탕으로 한과 전문가 교육과정을 만들어 인력 배출에도 앞장섰다. 한과 만드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시장이 커지고, 활성화된다는 생각에서다. “태권도가 세계적 스포츠가 된 것도 결국 태권도 선수들이 세계 각지에서 교육을 통해 그 정신을 보급했기 때문이죠. 한과도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한과 전문가가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7년 동안 300명의 전문가를 배출했습니다. 또 박물관 주변에 군부대가 많아 간부 가족을 대상으로 한과 교육을 진행했는데, 한미연합사령부로 전출 간 장교를 통해 미군 가족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까지 진행한 적도 있습니다. 사람을 통해 세계로 퍼져나갈 수 있다는 생각이 맞아 떨어진 셈입니다.” 그가 한과를 만들어 오며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일도 2000년 서울에서 열린 ASEM(아시아-유럽 정상회의)에서 세계 정상들에게 그의 한과를 맛보게 한 것이다. 이런 세계화의 끝에는 한과의 유네스코(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있다. 한과를 단순한 음식으로만 봐서는 안 된다는 그의 뜻이 담겨 있다. “한과는 우리 민족의 얼이 담겨 있는 음식입니다. 차례와 제사, 명절 때마다, 우리네 희로애락(喜怒哀樂)과 늘 함께하면서 우리 문화를 고스란히 담고 있기 때문이죠. 조선시대에는 한과의 종류가 254종이나 됐습니다. 그중 지금 저희가 재현하는 것이 160가지 정도 되고요. 이런 풍성한 문화를 세계적으로 알리기 위해서는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필수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를 위해 작년 한과협회를 사단법인으로 설립했고, 올해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해 나갈 계획입니다.” 김 관장의 말을 듣다보니 멋진 외국 호텔의 디저트로, 세계 과자들이 모여든다는 일본의 답례품(미야게, みやげ) 시장에서 우리의 한과가 자리 잡을 날이 머지않았음을 기대하게 된다.
- 2016-02-05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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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잠, 물, 음식, 운동 네 가지에 주의하라
- 1987년에 대학을 졸업한 이후 군 시절부터한의사 생활을 했으니 어느덧 30년을 바라본다. 이재동(李栽東·54) 경희대학교 한방병원 침구과 교수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수많은 환자를 보면서 인체의 생체리듬과 자연치유력의 중요성을 절실하게 깨달았다고 말한다. 건강을 지키기 위해 헛발질을 줄일 수 있는 한방의 철학은 음양의 균형을 맞추는 방법에서부터 시작한다. 새해의 시작, 생활 속에서 스스로를 건강하게 만들 수 있는 한방의학의 비결을 알아보자. 글 김영순 기자 kys0701@etoday.co.kr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시니어들의 새해 건강을 위한 한방학적 고찰에 관해 물었더니 의 기본 정신에 대한 설명으로 얘기를 시작했다. “한의학 서적이란 게 수천 권이 있어요. 그런데 중국에서 한의학 하는 사람이나 대체의학에 관심 있는 사람들 모두가 에 열광합니다. 에는 몸이 건강하면 병은 스스로 치유된다는 정신이 있어요. 그래서 몸이 건강해지기 위한 양생법을 추구하죠. 양생이라면 도 닦는 사람이나 하는 걸로 생각하는데, 저는 이걸 임상에서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의 기본 정신은 사람의 몸이 하나의 소우주라는 것에 기초한다. 따라서 자연의 이치에 잘 따르고 순응하면 몸이 건강해진다고 설명한다. “만물이 소생하고 형성되는 이치들을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가 갑니다. 예를 들어 하늘의 태양이 지구를 비추잖아요. 햇빛은 양기죠. 그렇게 양기가 비추면 지구의 음기인 물이 위로 올라가서 비가 되어 내려오잖아요. 태양의 불과 지구의 물의 조화인 겁니다. 이 순환 속에서 생물들이 자라나는 거예요. 그것을 음양이라고 합니다.” 사람의 몸은 우주, 음양의 조화가 중요 이 교수는 우리 몸을 잘 들여다보면 바로 심장이 태양의 불과 같은 역할을 하는 반면 비뇨생식기는 물의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 그 원리를 알고서 자기 몸이 조화를 이루게끔 노력해야 건강해진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수승(水昇), 물은 올라가고 화강(火降), 화는 내려가는 수승화강(水昇火降)만 잘되면 우리 몸이 스스로 정상적으로 기능하는데, 현대인들은 삶 자체가 수승화강을 깨뜨리게 되어 있어요.” 이 교수는 어두워지면 자고 해가 뜨면 일어나는 게 자연에 순응하는 법인데 현대인들은 밤낮이 바뀌어 있다는 걸 지적했다. 현대의학적으로도 호르몬 생성에 중요한 시간이 밤 10시부터 아침 5시라고 한다. 건강하고 싶다면 그 시간을 필수 수면시간으로 잡아야 한다. 그러나 밤 10시에 맞춰서 잠을 자는 현대인이 과연 얼마나 될까? “호르몬은 물입니다. 밤에 잠을 자야 음의 기운을 몸에 저장할 수가 있어요. 밤에 잠을 안 자면 그 음의 기운을 소모하게 되고 물이 말라서 음양의 균형이 깨져요. 물이 올라와서 불을 꺼줘야 하는데, 불을 못 꺼주니 기운이 위로 뜹니다. 그러면서 나타나는 현상이 머리에서 생기게 돼요. 현대인들은 분노조절장애가 많이 있죠. 몸이 안정되고 불을 꺼주는 에너지가 있어야 하는데 밤에 잠을 못 자는 상황에서 스마트폰, 컴퓨터, TV에서 나오는 전자파가 우리 몸의 진액을 말리는 거예요. 충혈도 그렇고 뒷골이 당기고 얼굴에 상열감이 있고 고혈압이 발생하는 등의 현상들이 다 거기서부터 오는 겁니다.” 점차 말라가는 우리 몸의 음기를 유지해야 이 교수는 나이가 들어서 만들어지는 체형을 보면 대부분이 가분수라는 점을 지적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체는 가늘고 위는 비대한 체형이 된다. 이는 사람이 나이가 들면서 몸에 물이 부족해지면서 생기는 현상이다. “왜냐하면 자꾸 진액을 말렸기 때문에, 기운이 위로 올라가서 그렇게 되는 거예요. 팔은 굵어지고 어깨는 두꺼워지고. 살면서 그런 원리에 대한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인간은 지혜가 있으니 원리를 알면 건강하게 살 수 있어요.” 이 교수는 생활과 노력으로 음양의 균형이 깨지는 걸 보완하거나 개선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바로 실천할 수 있는 방법으로, 그는 식생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사람들이 흔히 자신의 키와 체중에 대해 얘기를 하지, 체지방을 구분해서 얘기를 안 해요. 우리 몸의 지방이라는 것은 일종의 독소죠. 독소가 꽉 차 있으면 기가 위로 올라가지 못해요. 에너지가 올라오는 길이 경락입니다. 지방이 몸에 쌓이게 되면 그 길에 문제가 생겨요. 그러니 음양의 조화를 위해 지방을 빼야 합니다.” 탄수화물 대신 단백질 이 교수는 지방을 돈으로 비유한다. 예를 들어 키와 근육의 양을 봤을 때 필요한 지방을 남겨놓고 넘치는 분량이 12㎏이라면 그 사람은 은행에 12억 원을 넣어놓은 것과 같다는 것이다. 평소에 ‘현금’을 많이 보충했기 때문에 그렇게 자산이 쌓였다고 표현하는 이 교수는 그 ‘현금’의 정체가 바로 ‘탄수화물’이라고 밝혔다. “현금인 탄수화물을 줄여야 합니다. 그럼 탄수화물 대신에 뭘 먹어야 할까요. 노후에 하는 대표적인 경제적 대비로 건물을 만드는 게 있죠? 그러한 부동산이 바로 단백질입니다. 나이가 들면 단백질을 주로 먹어야 해요. 그래서 저는 나이 쉰 살만 넘어가면 무조건 탄수화물을 줄이고 단백질을 먹으라고 해요. 왜냐하면 쉰 살까지는 현금, 그러니까 탄수화물을 너무 많이 공급하기 때문이에요.” 물론 은행에 매월 500만 원씩 넣다가 차단하면, 금융적으로 대처하는 데 혼선이 생길 수 있다. 이걸 몸의 관점으로 봤을 때, 탄수화물을 끊고 단백질 섭취에 전념하면 당장은 현기증, 어지럼증 등의 신호가 올 수 있다. 이 교수는 그러니 우선은 급하지 않게 조금씩 탄수화물을 끊고 단백질을 섭취하는 게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더구나 단백질에도 일정 분량의 탄수화물이 있기 때문에 단백질만 먹어도 몸에 쟁여둔 탄수화물에 비춰보면 필요한 탄수화물의 유지에 큰 문제가 없으리라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지방 분해를 위해 활용하는 약도 같은 구조를 갖고 있다. 그는 약을 심부름꾼이라고 불렀다. 심부름꾼은 은행에서 돈을 효율적으로 찾아오는 역할, 즉 지방대사를 높이는 역할을 하게끔 설계된 것이다. 지방이 만병의 근원이 되어가고 있다 이 교수는 배에 지방이 쌓인다는 것은 종합적인 문제의 원인일 수 있다고 말했다. 우선 척추를 받쳐주는 힘이 약해질 수 있다. 지방이 빠져야 근육이 들어갈 수 있는 자리가 생기는데 그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피가 탁해지고 녹슬어 중풍, 심장병 등의 위험도 높아진다. 우리 몸의 모든 조직은 깨끗한 피가 혈관을 돌면서 영양을 공급해주고 더러운 요소들은 운반해 소변으로 걸러준다. 그런데 지방이 있으면 그 피가 탁해진다. 그렇게 되면 면역 기제들이 자기 피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하다고 여겨 공격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자가면역질환이다. “건강해지려면 가장 기본적인 것에 대해 변화를 줄 생각을 해야 합니다. 무릎이 아프다고 무조건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으면서 연골을 제거하는 그런 식의 해결은 일시적으로는 도움이 되겠지만 결국 시장논리에 의해 움직이는 치료라고 봐요.” 과거엔 발암의 첫 번째 원인이 흡연이었다. 최근 그걸 뒤집은 게 비만이라고 한다. 지방이 껴 있으면 순환이 안 되고 순환이 안 되면 혈액이 탁해지는데, 혈액이 탁해지면 의혈이라는 암세포의 식량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음양의 조화를 통한 건강, 생활속에서 만들어야 이 교수는 음양의 기운을 다스려 건강해질 수 있는 방법을 다음 네 가지로 정리했다. 첫 번째는 충분한 잠이다. “현대인들은 밤 10시가 어렵다면 최소한 11시에는 자야 합니다. 그렇게 습관을 바꿔 문제를 예방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해요. 그리고 커피와 녹차를 자제해야 합니다. 잠을 심하게 못 자는 사람은 아침 10시 이후에는 아예 커피와 녹차를 마시지 말아야 해요.” 두 번째는 되도록 많은 물을 섭취하는 것이다. “물은 사라진 음기를 보완할 수 있는 음의 에너지입니다. 물은 하루에 2ℓ를 마시는 게 좋습니다. 물을 마실 때는 입을 적시듯 마셔야 해요. 사람들이 물을 못 먹는 이유가 대부분 흡수가 안 돼서입니다. 입에 적시듯 먹으면 괜찮아요. 우리 몸은 70%가 수분으로 이뤄진 일종의 물통입니다. 물통을 깨끗하게 유지하는 방법은 깨끗한 물을 넣어주는 것이죠.” 세 번째는 음식을 구분해 먹는 것이다. “예순 살이 넘어가면 탄수화물을 최소화해야 합니다. 과일도 간식으로라도 먹는 게 아닙니다. 과일도 탄수화물 덩어리거든요. 절제해야 해요.” 네 번째는 생활 속에서 할 수 있는 운동이다. “나이 오십이 넘어가면 상체 운동은 손가락 움직이는 것도 안 하는 게 좋아요. 대신 무조건 하체 운동을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계단 오르기 같은 생활 속의 운동으로 하는 게 좋습니다. 걷기는 하체 운동이 아니라 유산소 운동이에요. 하체 근력 운동을 하면 유산소 운동은 저절로 따라옵니다. 그래서 저는 계단을 만나면 정말 반갑고 고마워요.” 이 교수는 얼핏 보기에는 각기 다른 것처럼 보이는 질환들이 실은 하나의 원인으로 이어졌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병에 맞춰 각각 해당되는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는 건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반복적인 시술만 받는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 보다 근본적으로 자신을 치유하자는 이 교수의 제안이 살갑게 다가올 수밖에 없는 이유다.
- 2016-01-21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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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정퇴자, 조퇴자, 졸퇴자가 말하는 독서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이야기'
-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나 그에 대한 생각들을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신중년 우리들의 생각도 좋지만 젊은 사람들은 현재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할 때가 있다. 여기 세 사람이 있다. 젊은 사람들과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토론을 한다. 그들이 은퇴와 퇴직 이후 얻은 삶의 즐거움은 여기에 있다. 그들은 이 내용들을 이란 책에 담았다. 정퇴자(정년퇴직), 조퇴자(조기 퇴직), 졸퇴자(졸지에 퇴직) 세 명이 모였다. 인터뷰를 하기 위해 모인 그들은 어김없이 전날 토론한 책 이야기로 말문을 연다. “어제는 동화책을 읽고 토론을 했는데 새롭더라고요.” 책을 읽고, 쓰고, 말하는 것을 배우기 위해 문을 두드린 곳은 숭례문 옆 ‘숭례문학당’. 책을 내보고 싶다는 꿈을 좇아 모인 것이 이렇게 인생을 바꿔놓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기업연수원에서 기업교육을 담당하다 조기 퇴직하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경희대에서 경영학을 가르쳤던 최병일(崔炳一)씨. 그도 책을 내는 것이 꿈이었다. 하지만 글쓰기의 기초가 전혀 안 된 자신을 발견하곤 한겨레문화센터의 글쓰기 과정에 등록한다. 거기에서 배운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낀 그가 소개를 받은 곳은 바로 숭례문학당. 즐거운 인생의 시작이었다. 수산회사, 무역회사, 교육회사 등 중소기업에서 다양한 경력을 쌓았지만, 부도를 맞은 회사와 함께 파산한 윤석윤(尹錫潤)씨. 졸지에 퇴직자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거기에서 무너지지 않고, 교육회사의 경험을 바탕으로 강사 활동을 하던 그였다. 동경하던 것은 책을 쓰는 것도 아닌 글쓰기. 그가 찾은 곳도 한겨레문화센터였다. 그곳에서 인연을 맺은 최씨가 비슷한 꿈을 가지고 있던 윤석윤씨에게 숭례문학당을 추천한다. 최씨가 2011년 초 그곳에 들어간 지 한 달 뒤였다. 책을 읽고, 서평을 쓰고, 토론을 하는 것은 사실 그들에게는 생소한 방식이었다. 생소함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 방식에 순응하고 따라가는 것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방식은 그들의 삶을 바꿔놓았다.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뽐내 남들에게 생각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의 차이를 이해하는 방식에 매료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윤석윤씨는 결심했다. 이곳에서 2년만 공부에 투자해보겠다고. 그리고 5년이 지난 현재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젊은 시절보다 더 다양한 영역에서 그들은 빛나고 있다. 국책연구기관과 민간연구기관에서 32년간 연구원 생활을 했던 윤영선(尹永善)씨. 사실 그가 숭례문학당과 인연을 맺은 것은 두 명에 비하면 가장 최근이다. 2014년 12월 31일 정년퇴직을 한 뒤, 지난해 1월 이곳에서 공부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가 이곳을 찾은 이유도 두 명과 다르지 않다. 책을 내보고 싶다는 것. 단지 그 꿈을 위한 열정이 발을 이끌었다. 두 명보다는 시작이 늦은 탓에 그들보다는 아직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서서히 활동이 늘어나고 있다. 그런 외부활동보다 더욱 자신의 변화를 감지하고 있는 것은 내면의 변화다. 자신감은 말로 할 수도 없고, 사람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생겼다. 몇 십 년간 사회생활을 하며 굳어진 습관들이 서서히 변화하고 있는 것. 이들은 모두 신중년들 또한 똑같이 변화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책을 읽으면 말이다. 그러나 눈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읽고, 발로 뛰었을 때 비로소 변화를 얻을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시대의 변화에 맞춰 자신도 변화하는 것. 그리고 열린 사람이 되는 것. 그것들이 바로 행복하게 사는 방법이라고 그들은 당당하게 이야기한다. 독서를 하고, 토론을 해야 하는 이유 세 명 모두 숭례문학당에 대해 하는 공통적인 말이 있다. 이곳은 토론을 할 때 정답도 없고, 정답을 찾으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것. 그저 자신이 책을 읽고 느낀 것에 대한 생각을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곳이라고 말이다. 윤석윤씨는 이곳에서 토론을 할 때 ‘나이와 계급장을 모두 떼는’ 대화의 장이자 아고라라고 얘기할 정도다. 그래서인지 이들은 유독 ‘경청’하려 한다. 20~30대의 사람들과 생각을 이야기하면서,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상대방을 납득시키려고 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와 살아온 환경과 배경이 달라 생각이 다를 뿐, 틀린 것은 없다고 생각하게 됐기 때문이다. 그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던 근저에는 ‘인문학’이 있었다. 숭례문학당에서는 대부분 인문학 책을 읽고, 서평을 쓰고 토론을 한다. “인문학은 역사, 철학, 문학이 있죠. 여기에서 많은 문학책을 읽고 공부하니, 세상을 사는 다양한 사람을 이해하려면 문학책을 읽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기상천외한 캐릭터를 간접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죠.”(최병일) 토론의 매력은 소통과 대화다. 그리고 그 속에 배려가 존재한다. 토론은 2시간. 각 10분의 발언권이 주어진다. 꽤 긴 시간 같지만, 막상 토론에 들어가면 토론자들이 느끼는 시간은 10초와 같다고 한다. 그만큼 이곳은 지혜의 나눔에 목마르다. 그리고 치열하다. “나눔이 없는 독서는 무엇인가 부족하더라고요. 독서토론은 제 생각을 나눠주고, 남의 지혜를 얻을 수 있으니 더욱 좋은 셈이지요. 또 나이가 많거나, 지위가 높다고 발언권이 더 주어지는 것이 아니니 정말 평등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경청하면서, 제 생각의 깊이가 그보다 깊지 않다고 생각하니 한없이 겸손해지고, 공부에 더욱 매진하게 됩니다.”(윤석윤) 이들은 독서토론이 신중년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는 이유를 계속해서 토해냈다. 특히 젊은 사람들과 토론하면서 그들에게서 인정받을 때의 희열은 퇴직 이후 떨어졌던 자존감을 회복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2030세대에게 인정을 받고, 책 친구와 말 친구가 생겼다는 것. 그것은 60년 이상 살면서 굳어진 생각의 패러다임을 깨버릴 수 있는 힘이었다. “저도 처음에는 어색했어요. 토론을 한다는 게 부담스러웠거든요. 상대방의 반응에도 민감했고 말이에요. 나이 먹고 젊은이들 사이에서 실수하는 것 아닐까 생각도 했죠. 그런데 여기서는 평가라는 게 없더라고요. 그저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뿐. 자연스럽게 저도 젊은 친구들의 생각을 수용하게 됐습니다. 어쩔 땐 젊은 친구들이 그래요. ‘선생님, 이번 토론 꼭 나오셔야 된다’고 말입니다. 재미있어요. 그들과 친구가 된 것이.”(윤석윤) “다른 것은 다 제쳐두고, 행복해요. 행복해졌어요.”(윤석윤) “은퇴 후 소속감이 없고, 고독감이 와서 두려웠어요. 지금은 그런 것을 느낄 틈이 없습니다. 삶의 자신감도 생겼어요. 밤을 새워가면서 책 읽는 것이 매우 즐거워요. 마음에서 오는 자긍심 때문인 것 같아요. 제 인생의 최고의 시기가 온 것 같습니다.”(윤영선) “예전에는 일이 없으면 초조했는데, 지금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요. 제가 하고 있는 일과 일 사이의 공백기는 책으로 채우면 되니까요.”(최병일) 독서 공부가 인생을 바꿨다 이제 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타인에게 독서와 토론의 즐거움을 전한다. 독서토론 강의를 나가기도 하고, 토론 진행자를 양성하는 과정을 열기도 했다. 경희대학교에서 경영학을 가르쳤던 최씨는 과목과 강의 방식을 180도로 바꿨다. 경영학에서 독서토론, 생각과 표현이라는 과목으로 말이다. 재미있는 것은 최씨 수업에 대한 학생들의 평가도 확실하게 바뀌었다는 것이다. 학생들이 자유롭게 토론하도록 분위기를 조성하고, 피드백 정도만 하는데도 학생들의 반응이 뜨거운 것. 이러한 반응에 용기를 얻어 생산성본부, 학교 도서관 등의 초청 강의도 줄을 잇고 있다. “2015년은 태어나서 가장 많이 강의를 한 해예요. 특히 기업에서 강연을 하고 느낀 점은 신중년들이 변화에 대해 갈증을 느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책을 권하고, 숭례문학당을 소개했더니 회사 다니는 것도 즐겁고, 책에 지출하는 비용도 늘어났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삶이 조금 더 윤택하게 변했다며 고맙다고 했습니다. 제가 겪었던 것을 똑같이 상대방이 느끼니 이보다 좋은 게 있겠어요?”(최병일)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한다. 은퇴 후 인생에서 미래가 보이기 시작했다고 말이다. 공부를 하는 은퇴자에게는 정년이 없다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부족함을 느끼게 되고, 그 부족함을 채워줄 책은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강의와 토론을 하면서 느낀 젊은이들은 신중년의 지혜를 얻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게 맞물려 그들을 찾는 사람이 늘고 있다.
- 2016-01-20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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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재미 플로럴 아티스트 클레어 원 강, 플라워아트 손끝으로 완성하다
- 꽃과 더불어 사는 삶은 아름답다. 꽃은 피고 지고 나면 그뿐인 듯하다. 그런데 그 꽃은 씨앗을 남기고, 씨앗은 다시 꽃을 피운다. 미국서 활동하고 있는 클레어 원 강(Claire Won Kang AIFD, 한국명 이원영)은 금세 시드는 꽃의 아름다움을 시간의 굴레에서 끌어낸 플로럴 아티스트(Floral Artist)다. 그는 꽃이 가장 아름답게 핀 순간을 영원히 간직할 수 있도록 꽃과 소품을 재창조한 콜라주로 플라워아트의 새 장르를 열었다. 남진우 뉴욕 주재기자 namjin@etoday.co.kr 세계 최고의 ‘필라델피아 국제플라워쇼’에서 ‘대상(Best in Show)’을 여러 차례 수상한 강 작가는 일생의 역작인 화집 를 출간, 플라워아트에 새 이정표를 세웠다. “꽃 앞에서는 인종 간의 차이도, 빈부의 차이도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플라워아트를 전수하고 보다 많은 사람들이 플라워아트를 즐길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힘을 쏟을 생각입니다.” 클레어 원 강은 1968년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미국 펜실베이니아미술아카데미(Pennsylvania Academy of Fine Art)에서 공부할 때까지만 해도 플라워디자인과는 별 인연이 없었다. 강 작가는 당시 펜실베이니아대학의 장학생이었던 강성권 박사(현 IBM 중앙연구소 연구과학자)와의 신혼생활 중에도 미술공부를 계속하며 필라델피아의 갤러리에 전시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남편의 이직으로 뉴저지로 이사를 했다. 그곳에서 남편 직장 동료 부인의 소개로 플라워 숍에 발을 들여놓았는데, 이것이 플라워아트와의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클린턴, 록펠러 등 유명 가문이 단골고객 “플라워디자인에 대해 잘 알지 못했지만 해볼 만한 일이니 한번 해보자는 심정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는 미술로 다져진 기초 위에 뛰어난 손재주가 더해지면서 플로리스트로서의 면모를 빠르게 갖추어 갔다. 1984년은 특별한 한 해였다. 뉴욕의 부촌인 웨스트체스터 카운티의 채퍼쿼(chappaqua)에 아름다운 집을 마련했고 뛰어난 디자이너만 채용하는 그 지역 플라워 숍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쉴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빴지만 즐거웠습니다. 꽃에 완전히 빠졌던 거죠.” 플라워아트의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기 시작한 것이다. “고객과 교감을 하다 보면 고객에게 어울리는 꽃과 디자인이 순간적으로 떠올려지기도 했고, 꽃들을 바라보면 그 꽃이 말하는 듯한 무아의 경지를 느끼기도 했습니다.” 그의 신들린 듯한 플라워아트가 입소문으로 퍼지면서 클린턴, 록펠러 등 유명 가문들이 하나둘 단골고객이 되었다. 또 웨딩드레스로 유명한 ‘베라왕’ 매장의 화훼 디자인을 전담하기도 했다. 티파니, 블루밍데일, 노드스트롬 등 미국의 화려한 매장도 활동무대였다. 현대미술관(MOMA)을 자주 들러 다른 예술과 컬래버레이션 모방하지 않고 자신의 세계를 지키면서 꾸준히 노력하면 창의성과 자기만의 브랜드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그의 믿음이다. “창의성을 유지하려면 돈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고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맨해튼의 현대미술관(MOMA)을 자주 들러 다른 예술작품을 꾸준히 접한 것이 디자인 감각을 키우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클레어 원 강은 2001년 미국플라워디자이너협회(AIFD)의 시카고전국대회에서 꽃 콜라주 페인팅을 성공적으로 소개하여 플라워아트의 새로운 장르를 열었다. 2008년 이화여대 총동창회 창립 100주년 기념 플라워 쇼에서는 100개의 호접란이 단단한 그물을 뚫고 사이사이로 피어나는 디자인으로 ‘진선미 정신’을 표현하여 기념행사의 대미를 장식했다. 그는 미국, 영국 등지의 수많은 플라워 쇼에 초대되었다. 2014년 필라델피아 뮤지엄에서 열린 ‘조선왕조대전’에 전시된 ‘무신년진찬도’를 주제로 한 작품 ‘글로벌 댄스(Global Dance)’는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태극과 오륜을 바탕으로 남북통일의 염원을 담은 이 작품으로 그는 지난해 3월 세계 최대 규모, 최고 전통의 실내 플라워아트 경연장인 ‘필라델피아 국제플라워쇼’에서 대상을 수상해 더 뜻이 깊었다.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처럼 죽음을 애도한 꽃장식 작품 클레어 원 강은 수많은 초대전에 참여하고 큰 상도 많이 받았지만 정작 가슴에 가장 깊이 남아 있는 작품은 죽음을 애도한 꽃장식이었다. 친구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에 큰 충격을 받고 작업한 장례식장의 플라워아트는 오 헨리의 를 연상케 했다. “남편 친구가 평소에 좋아했던 보석 색깔의 꽃으로 꾸민 장례식에 참석한 조문객들은 망자가 천국으로 가는 듯한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습니다.” 플로리스트에게는 최고의 찬사였다. “그 사람을 알고 그 사람에 맞는 디자인을 했을 때 가장 아름답고 큰 감동을 준다”는 강 작가는 “아름다운 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조그만 국화와 카네이션도 제자리에 꽂히면 아름답고, 잎의 앞면보다 뒷면이 더 어울릴 때가 있다는 것이다. 클레어 원 강의 삶은 자연과 예술에 교육이 어우러진 여정이었다. 1991년부터 20여 년간 뉴욕식물원(New York Botanical Garden)에서 플라워아트에 대해 강의해 2000명이 넘는 후배를 배출했다. 2005년에는 재직 교사 200명 가운데 학생들이 꼽은 최고의 강사로 선정돼 ‘올해의 우수 교사상’을 받기도 했다. 미국 전역의 가든클럽과 특별강좌에 초빙되어 꽃과 인생을 강의했다. “이파리가 너무 무성하면 꽃이 피지 않는다. 중앙에 먼저 핀 꽃을 잘라내야 주변 꽃들이 잘 자라난다”는 강 작가는 “혼자만 잘 자라면 주변 꽃들이 피지 못해 조화로울 수 없으며, 꽃 자체로는 완벽한 아름다움을 가질 수 없다”고도 했다. 꽃을 통해 인생을 배우는 것이 강의의 궁극적인 목표였다. 화보집 발간하라는 어머니의 소원 지난해 5월 숙명여고 졸업 50주년 기념행사 참석차 귀국한 강 작가를 어머님이 기다리고 계셨다. 구순을 훌쩍 넘기신 어머니는 정신적 지주이자 스승이었다. 항상 건강하시고 그 자리에 계실 줄 알았다. 갑작스런 수술과 별세는 강 작가에게 큰 충격이었지만 어머니는 평소 소망을 이룬 것이었다. 자녀들에게 불편을 주지 않고 주무시는 듯 세상을 떠날 수 있기를, 미국의 딸이 마지막 순간을 함께하면서 장례 꽃장식을 해주기를 간절히 빈 기도가 이루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못다 이룬 어머니의 소원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강 작가가 40여 년간 디자인한 작품을 집대성하여 최고의 화집을 발간하라는 어머니의 소망이자 명령이었다. 필라델피아 국제플라워쇼에서 대상을 탄 작품을 비롯하여, 가장 기억에 남았던 작품을 선별해 재현하고 보관해 놓은 콜라주 작품을 하나하나 담았다. “올 6월 말 덴버에서 있었던 미국플라워디자이너협회 창립 50주년 기념총회에 이 화집을 출품할 수 있었던 것은 기적이었고, 이는 어머니가 하늘나라에서 저를 도와주신 것입니다.” 강 작가는 “어머니와의 약속을 이제야 지켰네요. 어머니와 나의 평생의 소망이었던 화집 가 세상의 빛을 보게 됐습니다”면서 울먹였다. ‘일체(Oneness)’는 모두가 어우러져 하나 됨을 뜻한다. 여러 부분이 서로 보완하고 협력하여 아름다운 전체를 만드는 것이다. 원네스(WONNESS)는 조화와 일체를 이루는 클레어 원 강의 예술세계다. 화려한 꽃과 눈에 잘 띄지 않는 수수한 꽃의 조화다. 절대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제자리에 맞는 아름다움이다. 강 작가는 화집을 발간하면서 아무런 연관성이 없어 보였던 인생의 순간들이 어느 시점에서는 모두 연결된 것을 깨달았다. 어머니, 가족, 동료, 친구, 후배, 제자, 이웃 등 이 모두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던 일이란 것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한글과 영문으로 제작된 화집 는 이제 클레어 원 강의 화신이 되어 하버드대학, 옥스퍼드대학, 스미소니언 등 각지의 도서관에서 플라워아트를 전파하고 있다. 꽃 이야기로 마음을 치유하게 하다 강 작가의 목소리는 30~40대다. 타고난 맑은 목소리로 강의를 계속할 작정이다. 뉴욕식물원과 가든클럽에서 요청하는 강의를 힘닿는 데까지 맡을 생각이다. 봉사활동도 그의 일상생활이 되었다. 미국 내 한인 여성을 중심으로 구성된 ‘세계아동기금(Global Children Foundation)’에서 활동을 하고 있다. 기증 받거나 구입한 상품을 바자회를 통해 미국과 한국에서 판매하여 수익금 100%를 세계 각지의 굶주린 어린이를 위해 지원하고 있다. “젊을 때는 나, 내 자식, 내 작품 위주였는데, 이제는 남을 돕는 일이 훨씬 즐겁게 느껴집니다.” 강 작가는 죄수나 소외된 사람에게는 꽃 이야기로 마음을 치유하고, 직업이 없는 사람에게 꽃꽂이 기술을 전수해 일자리를 찾는 데 도움을 줄 작정이다. 왕성한 활동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몸 관리가 필수다. “화집을 만드느라 중단한 인도 요가인 비크람(Bikram)을 다시 시작할 계획입니다.” 강 작가는 5년 전 무릎이 수술을 받아야 할 정도로 아팠으나 비크람을 통해 극복했다. 정신적 스트레스는 사랑하는 손녀를 보면 저절로 낫는단다. “나이가 드는 것이 좋습니다. 그간 보지 못했던 것이 보이기 시작했고 마음이 더 즐거워지는 느낌입니다.” 그는 미국의 주류사회에서 활동을 했지만, 요즘 들어서는 한인 모임에도 많이 참여하고 있다.
- 2016-01-05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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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사람] 새로운 삶 노래하는 ‘청춘합창단’
- 약간의 침묵이 흐른다. 갑작스레 지휘자의 손끝이 하늘을 향한다. 그러자 실내의 모든 눈동자가 그 끝을 좇는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일시에 숨과 함께 소리를 내뱉는다. 소리는 크지도 작지도 않게, 속도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아야 한다. 그 사이에 그들의 시선은 정면의 손끝과 청중 사이를 쉴 새 없이 오갔다. 소리와 시선 사이엔 날카로운 긴장감만이 맴돌았다. 직접 목격한 청춘합창단의 공연은 예상 이상으로 진지했다. 글·사진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평균 나이 65세’, ‘KBS ’, ‘유엔본부에서의 공연’. 이는 모두 청춘합창단을 수식하는 말들이다. 청춘합창단은 2011년 7월 3일부터 10월 9일까지 방영된 KBS 2TV의 간판 예능프로그램 해피선데이의 을 통해 조직된 시니어 합창단이다. 합창단에는 당시 나이 84세부터 52세까지 대학 교수, 양봉업자 등 다양한 나이와 배경의 중년들이 75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모였다. 은 이 프로그램을 진행하기 1년 전 유사한 형태인 ‘남격합창단’을 방영하면서 엄청난 대중의 인기를 얻었기 때문에, 청춘합창단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청춘합창단은 방영이 거듭될수록 단원들의 인간적인 모습과 황혼의 나이에도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는 장면들로 시청자들의 큰 사랑을 얻었다. 프로그램 종영 후 청춘합창단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히는 듯했지만, 최근 다시 한 번 세간의 큰 주목을 받았다. 이들이 지난 6월 15일 미국 뉴욕에 위치한 유엔본부에서의 역사적인 공연을 치렀기 때문이다. 청춘합창단의 공연은 유엔에서 제정한 ‘세계 노인 학대 인식 제고의 날’(6월 15일)을 기념해 열렸다. 이 공연에서 청춘합창단은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아리랑’ 등 12곡을 불렀다. 특히 청춘합창단은 공연 이틀 전 생일(6월 13일)이었던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을 위해 생일 축하 노래를 깜짝 선곡하기도 했는데, 공연을 위해 스위스 제네바에서 한달음에 달려온 반 총장은 무척 기뻐했다고. 이 공연을 위해 청춘합창단은 ‘마이 웨이(My Way)’와 ‘유 레이즈 미 업(You Raise Me Up)’과 같은 팝송 레퍼토리를 일부러 준비했고, 한국어 노래들은 자막을 준비하는 등의 정성을 기울였다. 지난 7월 KBS 인간극장을 통해 소개된 유엔 공연 도전기의 주인공이었던 김삼순 단원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청춘합창단에서의 활동이 제 인생을 모두 바꿔 놓았죠. 그전까지는 딸들을 위한 인생을 살았다면 지금은 온전히 제 인생을 사는 느낌입니다. 청춘합창단 이후 완전히 달라졌다는 소리를 많이 듣습니다. 아마 모두들 마찬가지일 겁니다.” 2011년 방송 종영 후 청춘합창단은 본격적인 합창단으로서의 활동을 위해 변신을 꾀했다. 강동구립여성합창단의 김상경 지휘자를 영입해 지금까지 연습과 공연을 함께하고 있다. 앰배서더 호텔의 권대욱 사장이 단장을 맡아 역사적인 유엔 공연의 일등 공신 역할을 했고, 방송을 통해 간과 신장을 이식 받은 사연이 소개됐던 이만덕 단원은 총무를 맡아 합창단의 모든 살림을 도맡았다. 당시 이만덕 총무는 수술 직후여서 몸과 연결된 의료기기를 휴대하고 오디션에 나서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다행히 지금은 완치돼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청춘합창단이 방송에서 마지막 도전으로 참가해 은상을 수상했던 2011년 국민 합창대축제 대회에서 솔로 파트를 맡아 전 국민을 감동시켰던 최고령의 노강진 단원은 현재 뇌졸중으로 쓰러져 입원 중이다. 그 밖의 개인 사정으로 활동을 못하게 된 단원들의 빈자리는 엄격한 오디션을 통해 채워졌다. 현재 원년 멤버는 약 절반 정도가 남은 상태. 지금은 KBS 오케스트라 하피스트 출신으로 관심을 모았던 배용자 단원이 최고령 왕언니 역할을 맡고 있다. 유엔본부에서의 공연 탓인지 청춘합창단을 찾는 이들의 요청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 이제는 한 달에 두세 차례 공연이 몇 달 전부터 예약될 정도다. 정부부처부터 지자체에 이르기까지 찾는 곳도 다양하다. 왕언니 배용자 단원은 “이제는 무대를 앞두고 심하게 긴장되지 않을 정도로 활동이 익숙해졌습니다”라며 “동료 단원들과 신 나게 무대를 즐기는 것이 행복합니다”라고 말했다. 워낙 많은 인원이 모이는 탓에 연습장소 마련도 쉽지 않았다. 결국 과천시민회관에 어렵게 터를 잡고 매주 화요일 연습 중에 있다. 힘들게 자리를 잡은 만큼 연습에는 열정적이다. 김상경 지휘자도 연습과정에서 자발적인 연습을 강조했다. “청춘합창단은 다른 합창단과는 다르게 상대의 실수나 단점을 지적해서는 안됩니다. 특성상 서로를 존중하는 것이 중요하고, 대신 다른 단원에게 뒤처지지 않도록 스스로가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현재 청춘합창단은 내년 5월 6일에 있을 정기연주회를 준비하고 있다. 통일기금 모금 형식으로 진행되는 이 공연을 위해 새로운 레퍼토리 연습에 한창이고, 새로운 단원도 모집 중이다. 권대욱 단장은 “중년들은 남은 인생 시간을 보내는 데 몰두하기 쉬운데, 그래선 안 됩니다. 살아가는 이유를 스스로 만들고, 청춘합창단의 단원들처럼 가슴 뛰는 일을 찾아 행동에 옮기셨으면 합니다”라고 조언했다.
- 2015-12-29 17: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