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행복합니다. 지금까지 어렵게 여기까지 왔는데, 작년부터 조금씩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으니까요. 많이 힘들지만 됐다, 더 다른 꿈을 꿀 수 있겠다 싶어요.” 행복하다는 구하주(具河周·69) 뉴시니어라이프 회장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얼굴에서부터 그런 기쁨이 선명하게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니어 교육과 함께 패션과 관광을 잇는 새로운 사업 영역을 준비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구 회장의 남다른 보람과 성취를 만나본다.
글 김영순 기자 kys0701@etoday.co.kr 사진 오병돈 프리랜서(Studio Pic)
사회적기업인 뉴시니어라이프는 시니어들을 위하여 패션과 교육, 공연, 매니지먼트 등 종합적인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시니어 모델 교실, 시니어 패션쇼와 같은 프로그램과 함께 시니어 패션 제품, 시니어 교육 등등의 사업도 전개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시니어와 패션이라니? 일견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생각 자체가 편견이라는 것을 구하주 회장과 뉴시니어라이프는 증명해 보이고 있었다.
“제가 이 사업을 진행하면서 지금까지를 생각해 보면, 저도 사람들과 함께 똑같이 배우면서 해왔어요. 바른 자세, 바른 마음가짐을 제대로 지키면 인생이 잘 풀리게 된다는 것은 후반기 인생에서 더 중요한 철칙이에요. 바로 그걸 제가 회원들에게 가르쳤다기보다는 회원들과 함께하는 과정을 통해서 경험을 쌓고 배웠다고 생각합니다.”
구 회장은 서울 명동과 압구정동에서 꽤 잘 나가는 패션디자이너였다. 30년 동안 부티크를 운영하며 틈틈이 패션쇼 디렉터와 패션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던 그는 1999년에 실버산업과 노인심리를 공부하게 됐다. 졸업 후 ‘실버산업전문가포럼’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초대 회장을 맡았다. 2006년 킨텍스 국제실버박람회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시니어패션쇼를 공연한 후 참가했던 모델들에게 등 떠밀리다시피 해서 뉴시니어라이프를 설립하게 됐다.
60세 넘어서는 자신이 한 살이라는 생각으로 살아야
구 회장은 스스로 잘하는 게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자신이 갖고 있는 열정, 희망, 도전이 20년 전이나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사그라들지 않았다는 점을 꼽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아마도 그 원동력이 없었으면 ‘맨땅에 헤딩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사회적기업을 운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게 시니어 대상 교육이에요. 왜냐하면 본인이 50~60년 동안 자신의 인생을 살아왔고 경험했기에 스스로의 생각을 가지고 계시거든요. 그런데 제가 ‘바꿔야 한다’라고 말하면, 그게 쉽게 바뀌기가 어렵죠. 그래서 저는 60세가 넘었다면, 그때부터 한 살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기분으로 시작해야지 자신의 나이를 의식하면,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어요. 지금까지 내가 가지고 있었던 습관, 지식, 문화를 포기하고 새로 시작하고 하나하나 쌓는다고 생각하면 100% 성공해요. 과거에서 벗어나야 하죠.”
“걸음걸이만 봐도 그 삶과 인격이 보이는 걸요”
200여 명 정도 되는 뉴시니어라이프 회원 대부분은 60대 이상이다. 구 회장은 강의 형식이든 면담 형식이든 일주일 동안 이 모든 회원을 다 만난다고 말했다. 모든 회원들이 공부하는 과정을 쭉 지켜보면서 한 분 한 분을 마음속에 넣고자 한다. 어디를 조정하고 교육하고 도와줘야 하나를 생각하기 위해서다. 구 회장은 워킹에서부터 사람의 마음가짐과 생활태도를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워킹 교육을 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발견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걸음걸이가 정신과 육체를 컨트롤하기 때문이에요. 예를 들어 키가 많이 크신 분들은 키가 큰 게 콤플렉스예요. 그래서 자꾸 웅크리게 되고, 어디 가서도 다리를 쭉 못 펴게 되죠. 그러다 보니 걸을 때 이분들은 몸이 먼저 나가요. 몸이 먼저 나가니, 걸음이 균형을 잡아주려고 하면 O자 걸음이 되는 거죠. 그리고 그런 자신의 모습을 알게 되면 우울해지죠.”
신체가 불균형하게 됐을 때, 균형을 잡아주기 위해 그 불균형함을 따라가게 되다 보면 불균형한 모양으로 걷게 될 수밖에 없다. 구 회장은 그렇게 잘못된 걸음걸이에서부터 이유를 알 수 없는 디스크, 어깨 통증 등 질병이 파생된다고 보았다.
“우리 대부분은 살면서 내가 제대로 걷는지를 확인해 볼 수 있는 기회도 없고 시간도 없어요. 그러다가 나이가 들면 굳어지고 아픔이 시작돼요. 그러면 병원에 다니면서 검사하고 엑스레이 찍고 찜질방 가고…. 그런데 원인을 잘 모르죠. 나이가 들어 아프다는 건 체형 조건에 끌려 다녀서 나온 결과일 수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에게 병이 찾아오는 게 아니라, 우리가 병을 찾아간다고 표현할 수 있죠.”
나의 노화에 대한 패러다임을 바꿔라, 그래서 50~60세 사이에 자신을 변화시켜라. 그를 위해서 구 회장은 균형 잡힌 몸매와 걸음에 대한 문제를 심각하게 바라봐야 한다고 조언했다.
단호하게 목표를 향하는 시니어들은 너무나 많다
구 회장은 시니어가 대접받으려면 스스로가 정립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것은 조급함과 바쁨을 만들지 않는 생활 태도와 연결되어 있었다.
“어떤 분을 보면 하루에 열 가지 이상의 일을 하고 있어요. 왜 그렇게 하느냐, 시니어는 불안하기 때문이에요. 안 해도 불안, 해도 불안. 내가 아프지 않나? 아파서 죽는 거 아니려나? 그래서 병원 가서 이상 없다고 하면 그게 또 이상한 거예요. 나는 분명히 아파야 하는데. 그러면 다른 데 가서 또 검사하고. 나쁜 것에 집착해요. 그리고 남이 뭘 한다고 하면 따라 하려고 하고. 그러다 보니, 나의 것이 없어요.”
확실히 상당수의 시니어들은 자신의 몸이 주는 신호, 주변의 변화에 의해 정서적 혼란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 구 회장은 그런 혼란을 겪지 않기 위해서는 목표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정말 내가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선별을 하시라고 말씀드려요. 그래서 저희 교육에서는 내가 어떻게 새 인생을 건강하게 다시 살 수 있을 것인지에 집중합니다. 교육을 할 때는 회원들이 거울을 반드시 보게 해요. 안 보고 싶어도 자신을 보게 하는 거죠. 거울을 보면서 자신이 잘못된 부분을 알게 되면, 스스로 젊어지고 예뻐지고 싶게 돼요. 그리고 노력하죠. 저는 그 순간이 너무 기뻐요.”
구 회장은 어렵고 낯설어하던 회원의 변화야말로 자신의 가장 큰 기쁨이라고 밝혔다. 일회성 이벤트로 끝나는 시니어 프로그램들과는 달리, 뉴시니어라이프는 분명한 목표를 제공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패션쇼라는 행사, 그리고 더 나은 모델이 되고 싶다는 소망이 회원들을 변화시키는 힘이다.
“패션쇼를 할 때, 회원들을 무대에 세워놓으면 저는 굉장히 색다른 감정을 느껴요. 잘해서 그러는 게 아니에요. 많이 참여할 때는 80명을 쇼에 세울 때가 있거든요. 너무 기특한 거예요. 저분이 팔자로 걸었는데, 턴도 제대로 못했는데, 그 무대 위에서 그렇게 훌륭하게 변화하거나 잘하려고 애쓰는 걸 보면 안쓰럽고 너무 예쁜 거예요.”
광고시장에서 시니어 모델이 인적 자원으로 어필되는 이유
최근 광고 시장에서는 시니어 모델을 많이 기용하는 추세다. 구 회장은 우리나라 광고 시장에서 소비되는 시니어 모델들에게 너무 꾸밈이 많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구 회장은 모델들에게 욕심을 버려라, 예쁘게 멋있게 잘하려고 하다 보면 어색해진다고 교육한다. 나이가 들면 나이가 든 만큼 표정과 모습이 자연스러워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저는 우리나라 광고 시장에 불만이 많아요. 특히 보험회사 광고가 그렇죠. 거기 나오는 할머니들을 눈여겨보세요. 너무 불쌍하거나, 너무 인상이 안 좋거나. 정말 순수하고 인자하며 자연스러운 모델들이 많은데 왜 저런 사람들을 쓰는 걸까. 그 사람들이 생각하는 소비자들의 수준이 그 정도에 있는 걸까. 외국 광고들을 보면 자연스럽게 늙어가는 모델들이 나오거든요.”
수백 억 원으로도 못 받을 선물을 받으며 산다”
구 회장은 패션쇼를 1년에 20회가량 열고 있다. 너무 많지 않으냐고? 되레 많이 하면 할수록 좋다는 게 구 회장의 지론이다.
“대충이 아니라 제대로 된 쇼를 하고 싶어요. 시니어들에게 숨골을 틔워주는 일이니까요. 저는 사람이 죽을 때, 들이쉬는 숨을 못 쉬어서 죽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내쉬는 숨을 못 쉬어서 죽는다고 하더군요. 우리가 가슴에 쌓여 있는 숨을 살면서 몇 번이나 내쉰다고 생각하세요? 우리는 위축되고 참고 억압하며 살면서 숨이 계속 쌓이고 쌓여요. 그래서 마침내 그 쌓인 숨을 못 쉬어서 죽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쇼에 나오면 자신도 모르게 기가 생겨요. 메이크업, 예쁜 옷, 기가 막힌 음악, 나를 봐주는 관중…. 엔도르핀이 올라옵니다. 그러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쌓여 있는 숨을 토해내고, 한이 풀리게 되죠.”
시니어의 우울, 치매, 자살과 같은 어두운 미래를 없애는 풀이로서의 패션쇼. 그것은 구 회장 자신을 위한 힐링의 장이기도 하다. 그 순간이야말로 사회적기업이라는 열악한 상황을 이끌어가는 과정에서 겪는 말할 수 없는 어려움, 땀과 열정과 시간, 그 모든 것이 보상되는 순간이라는 것이다. 구 회장은 그 순간을 수백 억 원을 준다 해도 얻을 수 없는 감정이라고 표현했다.
“쇼에 더 많은 사람들이 왔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잘 안 오는 이유가 뭔지 아세요? 꼴 보기 싫어서 안 오는 거예요. 옛날에는 나보다 못났던 친구가 모델을 한다고 하니 심술이 나고. 와서 구경만 하는 것만으로도, 숨을 같이 쉬는 것만으로 달라질 거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내가 건강해지는구나’라는 느낌을 반드시 받게 될 거라고 생각해요.”
은퇴 후 늘어난 시간에 취미생활을 하면 상실감 해소와 부부 관계 개선에 좋다고들 하지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그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닌 일을 훌륭하게 해내고 있는 남편 조용경(趙庸耿·64), 아내 오선희(62·吳仙嬉) 부부는 야생화 사진과 새 사진을 찍으러 국내외 산과 강을 찾아다니며 더없이 풍요롭고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사진과 함께하는 은퇴 후 삶의 즐거움, 그리고 부부가 함께 누리는 행복의 비결을 살펴봤다.
글 김영순 기자 kys0701@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강원도 춘천에 있는 김유정문학관을 가기 전에 있는 삼포교차로에서 좌회전을 하자마자 산으로 둘러싸인 아담한 전원주택이 나타난다. 건설업계에서 30년 동안 활동했던 조용경 전 포스코엔지니어링 부회장과 아내 오선희 부부의 집이다.
“부부는 시소를 함께 타는 것이죠. 내가 올라가면 다음엔 아내를 띄워줘야 하잖아요. 내 과거를 버리고 나니 조금은 편해지더군요. 제가 내려놓는 훈련을 하는 동안 적응의 시간을 기다려주는 아내가 있어 고맙고 든든합니다.”
부부는 시소를 함께 타는 사이
새 전문 사진작가이기도 한 아내인 오선희씨처럼 사진으로 은퇴 후 새로운 삶을 유유자적 누리고 있는 조용경씨에게 요즘 삶의 에너지와 영감을 주는 것은 두 명의 손주들이다.
그는 라는 제목의 에세이를 블로그에 올리면서 손주들을 위해 할아버지의 추억을 기록하는 일도 하고 있다. 에세이는 세상 그 어떤 순간보다 행복한 찰나를 담아낸 가족사진, 손자 사진들과 글로 만들어져 큰 울림과 흐뭇함을 선사하고 있다.
조용경씨는 이를 손주에게 할아버지가 남겨주는 영원한 선물이라고 믿으며 훗날 가족 자료로 남기는 것을 지상 목표로 삼고 있다고 한다.
조용경, 오선희 부부는 손주들과 함께 자주 시간을 보내며 사회활동에 바쁜 부모들이 채워줄 수 없는 부분을 담당해왔다고 생각한다. 나이를 먹어가며 가족 내에서도, 사회에서도 새롭게 역할을 정립해야 하는 입장에 처하게 됐는데, 조부모로서의 활동이 삶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b>아내와 손잡고 산과 강을 휘젓고
조용경씨는 1993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에 머물 때 6개월 동안 사진 아카데미를 수강했다. 주로 실기 수업이었는데, 학교에서 20㎞ 정도 떨어진 베니스 비치에 가서 망원렌즈로 사람을 촬영하곤 했다고 한다. 마리화나를 피우는 사람들로 붐비는 곳이었는데 그때 촬영한 사진이 학교 캘린더에 실려 작품료로 25달러를 받게 됐다. 사진가로서 프로페셔널이 될 수도 있었던 인생의 한 분기점이었으리라.
그가 피사체 가운데서도 유독 야생화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꽃을 좋아하는 아내의 영향이 컸다. 어느 날, 아내가 가꾼 마당의 꽃들이 비로소 그의 눈에 들어왔다. 꽃에 사진기를 들이대며 촬영하던 그는 어느새 아내의 손을 잡고 꽃을 찾아 전국 곳곳을 다니기 시작했다.
“강원도 정선 석회암 지대의 동강할미꽃이나 바닷가 바위틈에 피는 해국에서 놀라운 아름다움을 발견했어요. 흙 한 줌 안 되는 곳에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올려 꽃을 피우는 동강할미꽃이나 절절 끓는 바위 위에서 염분과 비바람에 시달리며 꿋꿋하게 견디는 해국을 보면 감동스럽지요. 그 모습을 보면서 왜 나만 힘들다고 불평해 왔는지 싶더군요.”
꽃과 눈높이를 맞추자 지나온 세월이 보였다
그는 하기 싫은 작업을 억지로 하면 진정한 작가가 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이 원하는 걸 쫓는 우직함 역시 사진을 하는 작가가 갖춰야 할 덕목 중 하나라고 확신하게 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꽃을 찍기 위해 자신이 찍을 꽃에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주기로 했다.
“꽃을 제대로 찍으려고 꽃과 대화를 했어요. 눈높이를 맞췄죠. 그런데 이름도 모르는 야생화를 찍기 위해 이렇듯 공을 들이는데, 그간 내가 회사 직원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그만한 정성을 갖고 대했는지 반성이 되더군요. 사진을 하다가 사람 소중한 것을 배웠어요.”
새치름하게 고개를 떨구고 있는 오대산의 흰금강초롱꽃, 강원도 매봉산의 솔나리, 강원도 홍천의 깽깽이풀, 선운사의 꽃무릇, 한라산의 노란제비꽃, 태백산의 참기생꽃, 함백산의 투구꽃…. 우리나라 자연 곳곳에 숨어 있는 들꽃을 찾아내 가장 아름다운 자태를 포착해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한 꽃을 200장, 300장씩 찍어 그중 최고의 컷을 뽑아낸다. 그래서 좋은 작품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수많은 노력과 수고를 필요로 한다. 옆에서 아내인 오선희씨가 그의 말을 거들었다.
“꿈이 있다면 알래스카에 가서 흰 올빼미를 찍고 싶어요. 기다리고 기다리며 생명과 교감하는 수많은 작업을 통해 나를 찾는 시간을 갖게 됐어요. 찍으면 찍을수록 자아가 풍성해지는 느낌이 듭니다.”
흔히 ‘뱁새’로 불리는 붉은머리오목눈이. 나뭇잎 밑에 숨어 까만 눈동자를 빛내는 모습이 사랑스럽다. 덕소에서 촬영한 오색딱따구리의 색도 곱다. 오선희씨는 “돌아보지 않아 그렇지 우리 주변에 예쁜 새들이 많다”고 했다.
이 부부에게 시대가 변하고 나이를 먹는다는 건 크게 의미가 없었다. 사진 가방을 메고 들로 산으로 쏘다니는 그들은 오히려 상상력과 호기심이 나날이 커져만 간다고 했다.
야생화 사진에서 기다리는 삶을 배웠다
나이를 먹어 사진을 하니 좋은 점이 무엇일까? 그는 우선 주말마다 산으로 들로 헤매고 다니게 되니까 운동량이 적지 않아서 자연스럽게 운동이 된다는 점을 꼽았다.
“그리고 카메라를 메고 나가면 그 순간부터 세상의 모든 스트레스를 깡그리 잊게 된다는 점이 참 좋습니다. 무엇보다도 좋은 건 인내를 배우게 된다는 점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어느 정도는 다 ‘빨리빨리병’에 걸려 있는데, 야생화 사진은 기다릴 줄 모르는 사람은 절대로 좋은 작품을 만들 수가 없거든요. 저도 그전에는 성격이 꽤 급한 사람이었는데, 스스로 생각해도 사람이 참 많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사진에 빠져 주말이면 몇 박 며칠 집을 비우는 부부들이다. “그러다 보니 며느리들이 우리를 보려면 미리 전화하고 와야 해요. 우리가 너무 바쁘거든요. 다른 부모들은 자주 왕래 안 해서 걱정인데 우리는 그런 걱정 없어요” 하며 오선희씨가 말을 덧붙였다.
“아내와 함께하는 시간이 급격히 늘어났음에도 오히려 대화가 단절되는 경우가 있지요. 부부가 매일 비슷한 상황에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소재가 반복되거나 단답형으로 대답하게 되죠. 이렇게 은퇴 후 부부가 함께하는 시간은 늘었음에도 서로에게 집중하지 않으면, ‘침묵’으로 부부 사이의 골이 더 깊어질 수 있어요. 은퇴 후 더 이상 나눌 대화가 없는 무미건조한 부부가 되고 싶지 않다면 공동의 취미생활을 만들어 보는 것을 추천해봅니다.”
마지막까지 함께 하는 사람이 누군지 생각해보길
서로 많은 시간을 같이 다니다 보면 아무래도 대화의 기회도 많아지고, 더구나 같은 취미 활동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는 폭이 넓어지게 되기 마련이다.
“부부가 함께 운동을 즐기거나 동호회에 가입하고, 악기를 배우거나 동물을 키우고, 봉사활동에 참여하면 자연스럽게 공통의 대화 주제가 생겨 관계 개선에 도움이 되거든요. 부부 사이에서도 서로를 배려하고 예의를 지키려 노력한다면 대화의 질도 높아지고 더욱 가까워질 수 있어요. 하루에 한 번씩 ‘고맙다’거나 ‘미안하다’, ‘사랑한다’ 등의 마음속에 있는 말을 밖으로 꺼내 표현해 보세요. 마지막까지 함께하는 사람이 누군지 생각해보세요.”
말로 표현하지 않았을 때보다 속마음을 표현했을 때 부부의 관계가 더욱 가까워진다고 말하는 아내 오선희씨의 말 속에는 뼈가 숨어 있었다. 이들 부부에게도 늘 밝은 날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아내는 일생 동안 나의 허물과 부족함을 모두 받아주었다”라고 털어놓는 조용경씨의 말처럼 아내에게 남편은 서운함을 많이 안긴 사람이기도 했다.
부부는 2005년, 들꽃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들꽃마을(www.flover-vill.net)’에 가입한 다음 주말마다 들꽃을 찾아 전국의 산과 들을 다니기 시작했다. 일반 회원 2000명, 정회원 100명이 활동하고 있는 들꽃마을 회원들과 어울려 다녔다.
그 때문에 좋아하던 골프는 포기했다. “들꽃을 만나러 다니면서 생명의 존귀함에 대해 더욱 많이 생각하게 됐다”고 그는 말한다. 날이 맑은지 흐린지, 빛의 방향이 어디에서 오는지에 따라 카메라에 포착되는 들꽃의 모습은 달라진다.
그는 답답하고 서글퍼질 때 주말마다 들꽃 촬영을 나가면 그동안의 답답함과 아득함을 잊고 마음이 정화되는 것 같다고 말한다. 세상이 참 아름답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고. 평생을 홀로 있게 했던 아내와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진 것도 큰 보람이다. 현장에서는 각자 촬영에 몰두하느라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지만, 이심전심 통하는 게 많아졌다고 한다. 그동안 개인전도 했고, 매년 연말에는 사진으로 달력을 만들어서 지인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다.
“은퇴한 우리들에게 ‘행복한 삶’의 제1조건은 ‘아내와 함께 화목하게 사는 삶’이 아닐까 합니다. 욕심이 많아 크든 작든, 삶의 목표를 설정하고 사는 것이 좋습니다. 아무래도 생활이 더 활기차죠. 은퇴 후 부부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의 공통점은 나누고 나쁜 점은 모른 척 덮어주는 것입니다.”
공감하면 행복해져요
“행복해지는 법을 찾은 것은 어느 날 갑자기 눈뜨자마자 엄청난 용기가 솟아나서도 아니고 누군가가 알려줘서도 아니었어요. 처음엔 단순히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손대기 시작한 사진, 아내를 위해 카메라 들어주기, 사진 올리기, 동호회 사이트 회원들과 커뮤니티 등등 이런 ‘딴짓’ 속에서 행복의 단서가 보였어요. 내가 무얼 할 때 즐겁고, 무얼 잘할 수 있는지를 정확하게 알아내는 과정 속에서 말이죠.”
그는 아름다운 야생화를 찍을 때처럼 아내와 같은 생각, 감정을 가지고 계획을 세워보려고 노력한다. 함께 목적지, 가는 방법, 하고 싶은 일 등을 적으며 여행 준비를 하는 것도 좋다. 그리고 출사를 다녀온 후 찍은 사진을 정리하고 느낌을 적는다. 두 부부는 이런 활동을 같이 하면서 공감의 폭이 넓어지며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그 과정 속에는 서로를 아끼고 보듬으며 살아가는 부부의 진심이 오롯이 녹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터뷰 내내 좋은 사진이 주는 감동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게 해줄, 그리고 ‘좋은 작품을 나누니 행복하다’라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를 깨닫게 해주는 부부였다. 큰 욕심 없이 나누면서 살고 싶다는 부부의 살아가는 모습을 함께 하고 나니 마음 한쪽에 뜨거움이 느껴진다. 단풍이 물들어 가는 가을의 어느 날, 큰 수확을 얻고 돌아가는 기분이다.
지난해 9월 개봉된 영화 의 실제인물. 테너 배재철(裵宰徹·47). 목소리로 먹고사는 그가 목소리를 잃었던 이야기. 박수갈채와 그를 향해 치솟은 엄지손가락에 익숙했던 그가 갑상선암으로 좌절에 빠졌던 이야기. 그러나 다시 일어서는 이야기. 롤러코스터 같은 인생을 산 한 테너의 이야기다.
동양인 테너에게서는 거의 나오기 힘들다는 ‘리리코 스핀토’. 서정적인 느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소리에 힘이 있는 테너에게만 주어지는 찬사다. 거기에 ‘아시아 오페라 사상 최고의 테너’, ‘아시아 오페라 역사상 100년에 한 번 나올 만한 목소리’, 이런 수식어들은 모두 대한민국의 테너 배재철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배재철의 인생은 화려한 막이 오르는 듯했다. 동아콩쿠르 1위, 시미오니토 2위(1위가 없는 2위. 음악계에서는 종종 있는 일이다), 도밍고 오페아리타 특별상, 하오메 아라갈 1위, 프란체스카 화트르 1위 등을 휩쓸 때만 해도 말이다. 하지만 그에게 다가온 시련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최정상에서 목소리를 잃다
“우타에루? (노래할 수 있어?)”
성대성형복원술을 집도한 잇시키 노부히코(一色信彦) 박사가 수술대에 올랐던 배재철에게 이야기한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배재철은 조심스레 입을 열어 노래를 부른다. 갑상선암 수술 이후 영원히 잃어버릴 것 같았던 목소리를 찾는 순간 그의 입에서 나온 노래는 다름 아닌 찬송가였다. 삶에서 두 번째 태어난 목소리를 하느님께 먼저 들려드리고 사용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였다. 수술에 성공해 목소리를 찾았음에도 뭔가 분위기는 구슬펐다. 목소리에서는 착잡함을 지울 수 없었다. 일반 사람이라면 만세를 부르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겠지만, 더 이상 무대에 설 수 없다는 생각은 배재철을 괴롭게 했다.
“독일에서 갑상선암 수술을 받고 목소리를 아예 내지 못했을 때 정말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일본에서 갑상선암 수술로 잃어버린 오른쪽 성대를 세울 수 있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 기뻤죠. 마침 그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났는데, 수술을 집도한 박사님이 노래를 불러보라 하더라고요. 그때는 정말 착잡했습니다.”
목에 이상이 있다고 느낀 것은 사실 갑상선암 선고를 받기 약 1년 전부터였다. 스웨덴에서 오페라를 하고 있는데 유난히 소리 내는 것이 힘들고 목소리 피치가 떨어졌던 것. 극장 주치의에게 진료를 받았지만, 그는 환절기와 피로 누적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그러나 심상치 않음을 배재철은 감지하고 있었다. 성대 신경이 붙었다 떨어졌다 하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결국 1년 후, 그는 쓰러졌다. 청천벽력과 같은 갑상선암 판정이었다. 갑상선암은 암 중에서 완치율이 상당히 높은 암에 속하지만, 목을 쓰는 직업에 노래를 목숨처럼 생각했던 배재철에게는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막막했다.
“앞이 깜깜하더라고요. 어떤 병인지 제대로 몰랐을 뿐더러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거든요. 처음에는 ‘이 수술을 꼭 해야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당장 수술을 해야 할 상황이라고 하더군요. 보통은 사이즈가 작을 때 수술을 하는데, 저 같은 경우는 암덩어리가 육안으로 확인이 될 정도로 컸거든요.”
갑상선암 수술로 성대만 자른 것이 아니었다. 노래를 위해 호흡을 할 때 가장 많이 쓰는 횡격막도 일부를 제거했다. 말 그대로 어떻게 손 쓸 겨를이 없었다.
“노래밖에 모르고 살아왔는데 수술을 받고 나니 앞으로 뭐 먹고살아야 하나 현실적인 것부터 걱정이 되더라고요. 다른 일은 상상도 안 해 봤거든요. 신앙적 버팀목이 없었다면 견디기가 더욱 힘들었을 거예요.”
◇친구, 와지마 토타로
“와지마! 난 이제 노래를 할 수가 없어.”
“아니야. 너는 끝까지 나와 함께하는 아티스트야. 넌 분명 다시 노래를 할 수 있고, 무대 위에 설 수 있어!”
배재철은 성대 성형복원술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그러나 목소리를 되찾았다는 안도감은 노래를 더 이상 할 수 없을 것이라는 불안함과 좌절감에 압도됐다. 그런 착잡함을 안고 탄 비행기. 그것은 어쩌면 화려한 과거로 돌아가지 못하는 편도 티켓 같은 것일 수도 있었다. 그때 그의 옆을 굳건히 지켜준 이는 다름 아닌 매니저이자 음악 프로듀서인 일본인 친구 와지마 토타로( 輪嶋東太郞)였다.
“수술을 마치고 한국에 왔는데 와지마상이 한국에 따라왔더라고요. 계약서를 들고 말이죠. 수술을 하기 전으로 기량이 돌아가기 힘들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저도 처음에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확신을 심어주더라고요. 꼭 노래를 할 수 있고, 무대에 꼭 올라서 관객들에게 감동을 줄 것이라고요.”
주변 사람들은 이런 와지마 토타로를 ‘무모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하기 시작했다. ‘분명 배재철의 인생 스토리를 바탕으로 비즈니스를 하려고 하는 것’이라며 비아냥거리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도 했다. 하지만 배재철은 그의 진심을 알고 있었다. 굉장히 여리지만, 자신이 믿는 것에 대해 소신 있게 밀어붙이는 사람. 그게 바로 오랜 시간 인연을 맺으며 느낀 와지마였기 때문이다.
“저의 재기 스토리에서 이 친구를 빼놓고는 이야기를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잇시키 노부히코 박사도 이 친구가 직접 찾아서 수술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줬고, 일본 팬들과 돈을 모아 비싼 수술비도 마련해 주기도 했기 때문이죠.”
와지마가 배재철에게 준 신뢰는 갑상선암의 아픔을 좌절의 대상이 아닌, 극복의 대상으로 만들어줬다. 노래는 목숨과 같았기 때문에 노래를 못한다면 살아도 죽은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래서 좌절보다 극복의 길을 택한 것이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몰랐지만, 다시 무대에 오를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노래만을 하고 배우면서 소리를 만들어 내는 과정이 얼마나 힘든지 아는데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거든요.”
◇자신의 이야기, 영화
“제 인생 이야기가 영화로 만들어진다고 했을 때 처음에는 ‘정말인가?’라는 의구심과 함께 ‘영화로 만들면 어떨까’ 하는 호기심이 교차했어요. 극중 제 역할을 하는 유지태씨를 만난 것은 서로가 색다른 경험이었죠.”
지난해 9월 5일 개봉한 는 일본과 대만, 홍콩을 거쳐 지난 11월 5일에는 이스라엘까지 뻗어나갔다. 평도 상당히 좋다. 한 인물의 좌절 극복기라는 어떻게 보면 뻔한 설정이지만, 그 주인공이 성악가라는 특별함이 있었다. 그것도 목소리를 잃었던 최고의 성악가 말이다. 아마 대중의 호평도 이것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리라.
배재철은 극중 자신을 연기했던 배우 유지태에 대해 상당한 노력파라고 이야기한다. 성악가를 연기한다는 것이 단기간에 배운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몸을 써서 하는 연주에 감성을 녹여낸다는 것이 결코 쉬운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테너 연기를 위해 1년이라는 시간을 투자하여 배재철에게 레슨을 받았다. 본인이 노래에 대한 흥미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섬세한 연기, 감정의 몰입을 위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판단이 컸을 것이다.
“(유)지태씨가 배역에 상당한 욕심을 부리더라고요. 아마 쉽게 오지 않을 캐릭터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노래와 성악에 욕심을 많이 부리셨어요.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그 역할을 소화해 낼지 함께 고민을 많이 했었죠.”
◇암 극복 후, 세상이 넓어지다
“이제는 인생을 보는 관점이 넓어진 것 같아요. 예전에 유럽 무대는 치열한 경쟁 사회였기 때문에 커리어와 노래만 생각하고 앞만 보고 달렸거든요. 부득이하게 암 때문에 2년 정도 쉬면서 지나온 일, 현재의 일, 미래의 일을 생각할 수 있게 됐어요. 옆을 보게 된 것이죠.”
많은 것을 앗아갔다. 전성기 때의 성량과 음역대는 반으로 줄었다. 하지만 그것조차 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던 의사의 말을 생각해보면 나쁘지 않은 오늘을 살고 있는 테너 배재철이다. 그는 노래를 한다는 것은 ‘나를 살아 있게 하는 피’와 같다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그의 몸속의 피는 전성기 때처럼 아직 열정의 용광로다.
연주자의 삶, 지도자의 삶, 찬양하는 이로서의 삶. 아직도 해야 할 일은 무수히 많다. 그리고 잃어버린 것에 대한 부정보다는 긍정으로 더 나은 미래를 보는 그다.
“더딜 수는 있겠지만 충분히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해요. 예전에는 말도 못했는데, 지금은 노래도 할 수 있잖아요. 미리 포기한다는 것은 참 바보 같은 짓이라고 생각해요. 목소리를 잘 관리하고 다듬어서 노래를 할 수 없을 때까지 무대에 서려고 합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이 부부를 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깊다.
“죽기 전에 ‘베토벤의 심포니9’, ‘햄릿’과 ‘맥베스’, ‘라이더 스핀’ 등을 발레로 창작하고 싶어요.”
한 남자가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자, 아내의 목소리가 커진다.
“곧 은퇴하신다더니 또 만들어요? 은퇴 못하겠네. 하여튼 이게 문제야. 공연 하나 끝나면 그 다음 작품 이야기가 나온다니까. (웃음)”
못 말리는 부부다. 은퇴를 생각하고 있다면서도 작품에 대한 욕심을 이야기하는 남편과 그것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면서도 이해해 주는 아내다. 서로의 눈빛이 마주칠 때면 핑크빛 긴장감이 감돌다가도, 작품 이야기가 나오면 그 양상은 180도로 변하기도 한다.
묘한 케미스트리다. 집에서는 서로 안 볼 듯이 싸우다가도 일터로 돌아가면 서로 웃으며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민간 직업발레단인 서울발레시어터의 김인희 단장과 제임스 전 예술 감독 부부다.
1980년대 후반 김 단장은 유니버설 발레단에서 활동했고, 제임스 전은 그곳의 객원 무용수로 활약했다. 동남아 투어는 서로에 대해 더 잘 알게 된 계기가 됐다. 같은 호텔과 연습실에서 생활하며 취향이 비슷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자연스럽게 왕래가 많아지면서 사랑의 결실을 맺은 것은 1989년. 무용수로서 각자의 엘리트 코스를 밟아오던 그들은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을 한다. 그리고 예상했던 것 이상의 가시밭길을 걸어왔다. 하지만 그들은 우직하게 그것을 지켜냈다. 발레와 사랑이라는 두 개의 고리가 그들을 단단하게 연결시켰기 때문이다.
◇ 서울발레시어터를 낳은 지 20년
“아마 저희 부부 사이에 아이가 있었다면 지금의 서울발레시어터는 없었겠죠. 아이를 낳게 되면 여기에 쏟을 수 있는 열정을 분산해야 할 테니까요. 우리가 운영하는 곳이기 때문에 그럴 순 없었습니다.”
1990년대 초반 이들 부부는 중대한 기로에 서 있었다. ‘아이를 낳을 것인가. 새로운 민간 발레단체를 만들 것인가’하는 고민에 빠져있었던 것. 다른 부부들이었다면 둘 중 어느 하나도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적당하게 절충하며 인생을 꾸려나가면 될 일이니 말이다. 그러나 이들의 열정은 발레단과 아이에게 모두 양립할 수는 없었다. 한 곳에 집중을 하면 자연스럽게 다른 곳에 소홀해지기 마련인데, 이 부부는 그것을 용납하지 못했던 것. 이 부분에서는 둘의 이견이 없었다.
그래서 결단을 내렸다. 발레라는 공통분모는 이들의 선택을 더욱 과감하게 만들었다. 아이를 낳는 것 대신 발레시어터를 만들어 키우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자식처럼 삼아 살기로 결정했다. 이름은 서울발레시어터. 1995년생으로 올해 20세 성인이 됐다. 20년 동안 단장인 김인희는 발레시어터의 살림을, 상임안무가인 제임스 전은 예술적 책임을 도맡았다. 작은 민간 예술단체이다 보니 재정적으로 적잖게 어려움도 많았다. 예술단체에 대한 지원이 부족한 탓이었다. 그럼에도 20년 동안 굳건하게 서울발레시어터를 이끌어 올 수 있었던 것은 예술가·예술단체로서의 책임감과 직원들의 노력 덕분이었다.
“예술을 통해서 사회가 건강해지도록 하는 것이 예술단체의 책임이라는 생각도 있었지만, 직원들의 희생과 헌신이 없었다면 20년을 유지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 홈리스(Homeless)발레와 부부발레
“서울발레시어터를 만들 때 목표가 발레 대중화와 창작 발레 역수출이었어요. 그중에 전자는 발레 시장을 키우자는 뜻이 담겨있었죠. 그렇게 되려면 발레를 직접 체험하는 사람이 많아져야 했어요. 몸으로 그 희열을 느낀 사람이 우리의 미래 관객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랬다. 이들이 생각하는 발레는 귀족들의 전유물이 아닌 대중 모두가 향유할 수 있는 문화예술 그 자체였다. 서울발레시어터라는 테두리 안에서 ‘귀족의 예술’이라는 편견을 깨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2011년 빅이슈 잡지 판매원(홈리스가 판매하는 잡지)에게 발레를 가르치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발레라는 예술은 누구나 즐길 수 있다는 것을 알림과 동시에 이들의 자립을 돕기 위한 일환이었다.
제임스가 이들을 선택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뉴욕에서 살 때 홈리스에게서 많은 영감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각자의 사연이 있었다. 사람을 상대하면서 느끼는 환멸이나 트라우마가 있었던 것. 제임스는 이들을 관찰하면서 ‘Soloist’와 ‘꼬뮤니케’라는 작품을 만들어냈다. 그는 이 작품들을 홈리스 발레 프로젝트의 공연 무대에 올렸다. 이 공연은 홈리스들에게 자립심과 새로운 용기를 불어 넣어주기도 했지만, 제임스와 김 단장에게 더 큰 떨림과 영감으로 돌아왔다. 발레 대중화를 위해 무엇인가 더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홈리스 발레에서 자신감을 얻어 장애우 발레단, 과천 시민 발레단을 거쳐 부부 발레단까지 결성했습니다. 특히 3년 전부터 시작한 부부 발레단에 대한 반응은 뜨거웠어요.”
홈리스 발레에서 이어진 부부 발레 클래스는 제임스와 김씨 부부에게 새로운 보람을 안겨준 사건이었다. 특히 클래스를 수강하는 부부들이 변화하는 모습은 보람을 넘어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발레로 인해 8년 만에 처음으로 대화를 했다는 부부, 발레를 시작한 후 아내가 예뻐 보인다는 남편, 아들과 며느리의 공연을 보고 눈물을 글썽거리는 시어머니까지. 부부 발레는 분명 발레 대중화 그 이상의 뜨거움을 주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변화가 기가 막혔죠. 무뚝뚝했던 부부의 표정이 4~5주가 지나자 밝아지기 시작했어요. 발레를 하며 자연스럽게 스킨십이 되다 보니 자연스럽게 교감할 수 있었던 것이죠. 주말에 2시간인 이 수업으로 많은 가정이 변화를 했다고 생각하니 뿌듯합니다. 지금 2기를 지나 3기를 뽑고 있는데 이전 부부들은 자체적으로 홍보대사가 됐어요.”
◇ 발레를 창작한다는 것
10월에 열린 스위스 바젤발레단과의 합동공연은 서울발레시어터에게 큰 의미를 안겨줬다. 제임스 전이 만든 ‘보이스 인 더 윈드(Voice In The Wind)’와 ‘달빛 속에 나(Under The Moonlight)’가 끝나자 수많은 외국인 관객들에게서 박수갈채가 쏟아졌기 때문이다. 기본 고전 발레의 틀을 넘지 않으면서 한국인의 정서를 담은 공연에 외국인 관객들은 매료될 수밖에 없었다. 안무를 창작한다는 것은 그만한 고통이 수반됐기에 공연 후 제임스가 느끼는 자부심은 더욱 컸다.
“창작은 힘들지만 결과물이 나오면 성취감을 말로 표현할 수 없죠. 때문에 바젤발레단과의 공연이 끝났을 때는 힘들었던 것도 잊고 행복하더라고요.”
은퇴를 선언해 놓고도 작품 창작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 있을 것이다. 박수갈채와 희열. 그것은 일종의 마약과도 같아서 힘든 줄 알면서도 끊지 못하는 것이리라. 그렇게 20년간 만든 크고 작은 작품이 104개나 된다. 1년에 5개의 작품을 만든 셈이다. 제임스 전이 이렇게 쉼 없이 창작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끊임없이 사람을 만나고 소통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창작은 하루아침에 나오는 것이 아니에요. 새로운 만남과 소통을 이어가야 하는 것이죠. 저도 작품의 영감을 거기에서 받아요. 세상의 모든 것이 제 영감의 소재입니다.”
이렇게 뛰어난 작품을 선보이는데도 이 부부의 한숨은 멈추질 않는다. 발레라는 예술 문화를 향유하려는 이들이 아직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발레의 대중화에 고삐를 늦추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예술가로서 서울발레시어터를 일정 부분까지 끌어올렸지만, 후배들이 가야 할 예술계의 현실과 미래가 어두운 탓이다.
“제가 봐도 예술계의 앞날이 캄캄한데 자식 같은 후배들은 오죽하겠어요. 지금 시장도 좁고, 은퇴하는 사람들은 설 자리도 없는데 후배들에게는 그것을 물려주지 말아야죠. 발레 대중화가 돼야 후배들이 마음 놓고 공연하겠지요.”
김인희 단장과 제임스 전이 이끌어 온 20세의 서울발레시어터는 그야말로 헝그리 정신의 산물 이었다. 이제 그들의 열정은 후배들을 향해 있다. 40년 안무 인생의 종지부를 찍은 김 단장과 은퇴를 앞둔 제임스 전은 이제 무대가 아닌 곳에서 서울발레시어터의 살림을 책임 질 계획이다. 이들의 식지 않는 열정으로 서울발레시어터의 미래는 더욱 풍요롭다.
>>>김인희 단장…
모나코 왕립발레학교 유학, 유니버설발레단 단원 및 지도 위원을 거쳐 국립 발레단 수석무용수를 지냈다. 현재는 서울발레시어터 단장, (재)전문무용수지원센터, STP발레협동조합 초대 이사장을 맡고 있다. 한국발레협회 올해의 발레리나상(1983), 한국문화예술교육총연합회 문화예술공로상(2010), 한국발레협회 발레CEO상(2012)을 수상했다.
>>>제임스 전 예술 감독…
줄리어드 예술대학을 졸업한 뒤 모리스베자르 발레단 및 플로리다 발레단 무용수로 활동했다. 이어 유니버설발레단 및 국립발레단 무용수로 활약하기도 했다. 현재는 서울발레시어터 상임안무가 및 예술감독, 한국체육대학교 생활무용학과 교수,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을 맡고 있다. 는 무용월간지 「몸」지 주관, 무용예술상 올해의 안무가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 2004년에도 같은 곳에서 로 무용예술상 작품상을 받았다. 이듬해 도 서울무용제에서 안무상의 영예를 안았다.
김창렬(金昌烈·66) 한국자생식물원장은 식물에 관심이 많은 이들에게 유명인이다. 토종 야생식물을 재배해 국내에서 처음으로 사업화했고 토종식물만을 소재로 식물원을 설립해 강원도 평창군의 명소로 만들었다. 그런데 이 식물원이 3년째 문을 닫고 있다. 김 원장은 갑자기 전국일주 마라톤을 했다. 어떻게 된 사연일까. 그를 만나 얘기를 들어 봤다.글 유충현 기자 lamuziq@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참 열정적이고 고집스러운 식물원이 있다. 강원도 평창군 오대산국립공원 입구 산자락에 위치한 한국자생식물원이다. 1999년 6월 국내 1호 사립 식물원으로 문을 열었다. 이곳에는 우리나라에서만 자생하는 야생화와 들풀 약 수천 종이 테마, 계절별로 심겨 있다. 약 5만 평에 달하는 식물원 산책로에서 갖가지 한국 자생식물을 관람하다 보면 우리 식물에 대한 열정이 도처에 묻어난다. 이곳을 만든 김창렬 원장이 일궈온 삶도 식물원처럼 독특한 구석이 있다. 독재에 맞섰던 정치학도 청년은 문득 강원도 산골에 들어와 풀 농사를 지었다. 달리기도 시작했다. 화재로 식물원을 휴관해야 했던 2010년에는 마라톤으로 전국을 일주하기도 했다. 가을이 내리는 평창에서 그를 만나 그의 삶에 대해 들었다. 66세 김 원장의 ‘인생 마라톤’은 여전히 진행형이었다.
뜨거웠던 운동권 청년, 옥살이 후 농사를 택하다
한때는 그도 누구 못지않게 가슴 뜨거운 청춘을 보냈다. 1970년대 대학생활을 했던 그는 소위 ‘운동권’이었다. 어수선한 시국 속에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당해 3년간 감옥살이를 했다. 석방 이후 뚜렷한 길이 보이지 않았다. 회사를 몇 군데 두드려봤지만 꼬리표가 늘 발목을 잡았다.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풀 농사를 짓겠다”며 강원도행을 결심했다. 그는 충청도 출신이지만 고향으로 가고 싶지는 않았다. 새로운 곳에서의 새로운 도전이 필요했다.
김 원장은 “떠밀리거나 도망치듯 농사를 시작한 것이 아니라 내가 결심한 것”이라고 강조했다.“할아버지도 농부였고 아버지도 농부였다.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다들 그렇듯 자식은 농사꾼이 되지 않길 바라셨다. 내가 학교를 무사히 마치고 사회에 나왔다면 전혀 다른 길을 갔겠지. 하지만 이런저런 일을 겪으면서 결국 농사꾼이 되기로 했고, 이왕 농사를 한다면 배추, 무 같은 평범한 작물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하지 않는 것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했던 농사를 그분들과는 다르게 해보고 싶었다.
김 원장의 고민은 ‘돈 되는’ 농사였다. 마침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유치 분위기로 국토공원화 사업이 한창이던 때였다. 외래종 일색의 원예종 보급에 문제의식도 갖고 있었다. “외국 꽃을 들여와서 꾸며 두면 뭐하나. 한국에 오면 한국의 모습을 보러 오는 것 아니냐. 차제에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꽃과 나무 중에서 예쁘고 관광가치가 있는 식물을 대량으로 재배해보면 돈으로 좀 바꿔볼 수 있겠다 싶더라.” 응원해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결심을 밀어붙였다.
설악산 에델바이스로 시작한 소중한 추억
에델바이스(솜다리)의 꽃말은 ‘소중한 추억’이다. 김 원장에게 에델바이스는 특별히 더 소중한 추억이다. 1980년대 설악산에 가면 관광기념품으로 설악산에서 채취한 에델바이스를 액자에 넣어 팔았다. 마침 영화와 대중가요 등에 에델바이스가 소재로 쓰이면서 많은 사랑을 받던 때였다. 장사하는 이들은 설악산의 에델바이스를 캐서 팔고, 당국은 멸종위기종 식물의 훼손을 막으려 하는 숨바꼭질이 계속됐다.
김 원장은 “에델바이스를 사람들이 좋아하니까 산에서 캐오지 말고 대량으로 재배해보는 것은 어떨까 하면서 시작하게 됐다”고 말했다. 설악산 상인들에게 수요조사를 해봤더니 ‘가져올 수 있는 만큼 가져오면 다 사주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에델바이스 씨앗을 채취하느라 여러 번 죽을 고비도 넘겼지만 결과는 성공이었다. 연 20여만 개를 생산해 한 송이에 120원씩 팔았다. 이후 백리향, 구절초 등 다른 야생화까지 재배품종을 넓혔고 현재의 식물원도 일구게 됐다. 꽃말처럼 김 원장에게도 에델바이스가 ‘소중한 추억’이 된 셈이다.
“가장 뿌듯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돈하고 풀하고 바꾼 일이다. 우리나라에서 풀 농사도 하나의 비즈니스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내가 먼저 증명한 것이니까. 거창하게 말하면 고부가가치 농업분야를 새로 만들었다고 할까. 그리고 전국적으로 자생식물에 대한 관심이 일어날 수 있게 했다는 것. 한 분야를 먼저 갔다는 것. 이런 부분에서 지난 삶에 보람을 느낀다.”
불타버린 식물원, 문득 떠난 마라톤 전국일주
식물원이 화마를 입었던 2010년 한글날은 김 원장에게 떠올리기 싫은 날이다. 새벽에 일어나 보니 식물원 전시장 건물이 불에 타고 있었다. 목조로 만든 건물이라 화재에 취약했다. 바로 화재신고를 했지만 건물 전체가 순식간에 잿더미가 됐다. 겨울을 앞두고 있어 공사도 어려웠다. 식물원을 복원하고 보수하려면 긴 시간 문을 닫아야 했다.
망연자실하며 멍해진 머릿속에 문득 떠오른 것이 오래전부터 꿈꿔왔던 전국일주 마라톤이었다. 머릿속에 뭔가 새로운 생각을 채워 넣으려면 일단 머릿속을 비워야 했다. 그러기 위해 마라톤이 필요했다. 김 원장은 “강원도에 터를 잡은 후 매일 오대산을 달리며 생각을 정리해 왔다. 식물원 운영에 대한 좋은 아이디어와 용기가 떠오를 것 같았다”고 말했다.
42.195km 풀코스를 정식으로 완주한 경험도 어느덧 100회를 넘긴 때였다. 몸도 마음도 준비가 됐다. 강원도를 향하던 날처럼 뒤돌아 보지 않고 길을 떠났다.
장장 75일간 무려 1500km를 뛰었다. 식물원에서 출발해 동해안을 거쳐 남해안으로, 남해안에서 서해안으로, 중부와 임진각을 거쳐 다시 영동지역의 출발점까지 매일 평균 20km 이상을 달렸다. 한겨울의 추위, 눈보라와 싸우는 고단한 길이었다. 점점 피로가 누적됐다. 왜 뛰는 걸까. 그는 “오직 그만두지 않기 위해 뛰었다.” 당시 그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 했다.
새 도전, ‘식물원+숙박시설’ 복합 휴양시설 구상
마라톤 애호가들에게는 ‘상심의 언덕(heartbreak hill)’이라는 지명이 꽤 유명하다. 보스톤 마라톤 대회 구간의 결승점 전 10km지점에 있는 언덕코스를 일컫는 말이다. 현재 김 원장의 인생도 바로 이 구간을 지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자생식물원은 2013년부터 현재까지 휴관에 들어간 상태다. 김 원장은 “최근 몇 년간이 강원도를 처음 찾았던 때보다 어렵다”라고 했다.
자생식물원이 어려움을 겪기 시작한 시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식물원’이 대중적인 사랑을 받기 시작한 뒤부터다. 식물원이 가족들의 가벼운 나들이 장소로 각광을 받자 정부기관이나 지방자치단체가 여기저기서 많은 예산을 투입해 대형 식물원을 만들었다. 자생식물원의 관람객도 눈에 띄게 줄었다. 김 원장은 “인구에 비해 식물원이 너무 많아졌다. 몇 곳 없던 식물원이 지금은 전국에 200개가 넘는다. 적자운영을 하느니 새로운 변화를 구상해보자는 생각으로 식물원 문을 닫았다”고 말했다.
아직 뾰족한 답은 얻지 못했다. “전국일주 마라톤을 하면 뭔가 멋진 구상이 틀림없이 떠오를 줄 알았는데, 안 나오더라”. 김 원장이 머쓱한 너털웃음을 지었다. 덤덤한 말투였지만 깊은 고심이 묻어났다. 최근 그는 식물원 부지 일부에 숙박시설을 조성하는 방안을 구상하고 있다. 기자가 식물원을 찾았던 날에도 그는 숙박용 건물에 쓰일 외장재를 까다롭게 선별하고 있었다.
요즘 취미가 있는지 물었다. 김 원장는 “오로지 식물원”이라고 답했다. “초창기처럼 많은 사람들이 찾는 식물원을 만드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20대 정치학도처럼 빛나는 눈빛은 어느덧 고희(古稀)를 앞둔 그가 또 하나의 ‘에델바이스’를 찾길 기대하게 만들었다.
HE IS…
1949년생으로 고려대학교 생명과학대학원에서 공부했다. 1970년대 대통령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짧지 않은 기간 옥살이를 한 후 강원도 평창으로 가서 한국 고유 자생식물 재배를 시작했다. 국내 1호 사립식물원인 한국자생식물원을 만들었으며 사단법인 한국자생식물협회 회장, 계간 발행인, 서식지외보전기관협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 , 등이 있다.
“나의 실그림은 예술 혹은 창조 자체를 실행에 옮기는 나의 삶이자 나의 우주다.” 여기 자신의 혼을 온전히 실어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열어가고 있는 예술가가 있다. 예순 중반의 나이에 자수를 통한 ‘실그림’이라는 독보적인 영역을 개척하고 있는 손인숙(孫仁淑·64) 예원 실그림 문화재단 관장을 만났다.
글 김영순 기자 kys0701@etoday.co.kr 사진 전재현 사진 작가
손인숙 관장의 작품들은 한국과 프랑스 수교 130주년을 기념해 9월 18일부터 6개월 동안 프랑스 국립 기메박물관에 초청 전시돼 독특하고도 아름다운 한국의 멋을 서구의 예술 애호가들에게 펼쳐 보일 예정이다.
지금까지 작품 한 점 팔지 않고 이 같은 영광이 오기까지 그가 감내해야 했던 고통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삶과 예술혼이 하나로 어우러진 자기절제와 수행으로 작업정신을 펼쳐나간 실그림 거장. 예원(藝園)의 삶이 작품보다 더 감동적이다.
전통 자수의 현대적 계승을 통해 일가를 이룬 손인숙 관장과의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그의 손을 보게 됐다. 고사리 같은 손이다. 그러나 그 손이 만들어낸 예술 세계는 고되고 독보적인 영역에 있었다. 실그림이라는 그 예술 세계는 손 관장의 어머니 직계로 3대째 이르는 대를 잇는 길이기도 했다.
실그림 예술 세계의 알파이자 오메가, 어머니
“외할머니는 못 뵈었습니다. 저를 실제로 가르친 건 어머니였죠. 아버지는 제가 고등학교 1학년일 때 돌아가셨고…. 하지만 어머니는 교육자여서, 제 소질을 계발하기 위해 제가 학교를 갔다 오면 따로 숙제를 내주곤 했어요. 그림을 그리게 한 거죠.”
손 관장의 어머니는 초등학교 교사로 평생 교편을 잡았던 분이다. 자수 스승이었던 어머니는 손 관장의 유년 시절부터 함께 수를 놓았고 어떤 문양인지, 어떤 색을 고를 것인지 항상 옆에서 눈으로 가르쳐주었다. 매일 매일 틈 날 때마다 수를 놓으며 지냈던 일상의 잔잔한 시간들. 일상의 사색과 자수를 대하는 자세를 배우는 인고의 시간들이 그의 작품의 원천적 에너지인 동시에 자수와 자신이 일체가 되는 아우라로 계승됐다.
“나에게 자수란 어느 한 땀도 사색이 반영되지 않는 것이 없으며, 어느 한 땀도 내 몸속으로부터 나가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이렇듯 나의 자수에 대한 기본적 세계관은 어머니로부터 비롯됐고 주변 사물에 색과 힘을 불어넣어 줄 수 있는 자수에 대한 나의 항해 또한 어머니로부터 출발했습니다.”
손 관장의 어머니는 변화할 미래를 예견하기도 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일찍이 미래에는 문화전쟁이 온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혜안이 있으셨어요. 어머니 말을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이해합니다. 계속적으로 문화를 창조해야 생존할 수 있는 현재가 됐기 때문이죠. 그때 어머니는 저에게 한국의 문화를 세계 최고로 만들어라, 교수도 하지 말고 인간문화재도 하지 말고 일에 미쳐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 세계와 공유하라고 충고했습니다.”
한국과 프랑스 수교 130주년을 기념하는 예술가가 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서 자수를 전공하면서부터 꿈을 현실로 만드는 작업을 시작하게 됐고 자신감이 생겼어요. 그렇게 하다 보니 오늘이 왔습니다.”
오늘이 왔다는 것은 그가 갖게 될 영광에 대한 표현이었다. 올해한국과 프랑스의 수교 130주년이 된 걸 기념해 프랑스 국립 기메박물관에서 그의 250여 작품을 6개월 간 전시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전시회의 제목은 다.
“결국은 미쳐서 해야 하는 겁니다. 똑같은 걸 만드는 건 누구나 하기 때문이죠. 나만의 세계가 있어야 해요. 제가 여기까지 올 때는 고통을 즐겼다고 보면 돼요. 고통을 고통이라고 생각했다면 답이 없었을 겁니다.”
손 관장은 작품을 하면서 밖을 나가본 적이 없다고 밝혔다. 출입을 삼가고 작업에 몰입하면서 보낸 시간은 하루에 13시간. 기메박물관의 전시 허가가 난 다음에는 사람들을 만나야 했기 때문에 그게 불가능해졌다고 하니 박물관 전시라는 사건은 공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그를 만나고 싶었던 이들에게도 다행인 일이지 싶다. 내년까지 이어지는 전시가 프랑스에 이어 영국까지 추가 예약돼 있다.
세계 인류를 위한 문화를 공유한다
손 관장의 작품 세계는 실그림을 축으로 해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로 채워지고 있다. 불교미술, 인물화, 풍속화, 민화, 산수화, 서예, 한방문화, 추상화에 이르는 그 수는 어림잡아 20여 가지. 그중에 건축까지 들어 있다니 그가 추구하는 예술적 자유로움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그렇게 만들어지는 작품들 중에는 20년째 작업하고 있는 것들도 있다. 그야말로 예술가로서의 강렬한 자의식과 가치 부여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들이다. 그는 조각 장인·옻칠 장인·매듭 장인·배접 장인 등 각 분야 전통 장인과 30여 년 동안 한 팀처럼 작품을 함께 만들어왔다. 자수는 그가 하지만, 목공예와 결합하거나 노리개에 응용하는 등 퓨전 작업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그의 자수 작품은 목공예·목가구·보자기·장신구·함·병풍 등 21가지 장르를 넘나들고 있다.
“다시 태어나도 이 일을 할 거예요. 사실 이게 고통이지만….”
그렇게 고통스럽다면서 어째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대답 또한 너무도 예술가다웠다. ‘제가 못 다한 게 너무 많아서’라는 것이다.
“이걸 제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모두 다 한국 문화에 기여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세계 인류의 문화를 만든다는 차원에서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서 개인의 소유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생각은 또한 제 어머니의 철학이기도 해요.”
그는 아직도 깊이 못 들어간 장르가 있다고 아쉬워했다. 그래서 다시 태어나면 그 못 해 본 걸 완성해보고 싶다는 것이다.
전통에 도전, 전통 자수를 뛰어넘다
이렇듯 자유롭게 사고하고 도전하는 손 관장에게 전통이란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 것일까?
“전통은 나에게 무의식적인 소재의 바다였고 의식적으로 넘어야 할 산이었으며 긴 시간의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의 대상과도 같았습니다. 동시에 나를 있게 한 존재의 근원이기도 했죠.”
악귀를 물리치고 복을 불러오는 전통 자수 문양은 그 숫자의 한계가 있었으므로 그는 좀 더 다양한 문양을 새겨 넣기도 했다. 머릿속에 떠오른 복잡하고 섬세하며 화려한 감성은 바로 색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형태뿐 아니라 패턴의 느낌만으로도 다양함이 가능하다는 것이 그녀가 다다른 예술적 지점들 중 하나였다. 그러면서도 작품 표현에서 전통 복식, 목공예, 불화와 같이 종래에 있었던 수많은 전통 예술들이 그의 예술 세계 속에서 차용됐다.
“전통을 전통으로만 보면 오늘이 없어집니다. 전통에 도전해 자신만의 색을 마련할 수 있어야 예술이죠.”
그의 작품들 중에 가장 강렬하다는 평가를 받는 작품들은 풍경화와 추상화, 그리고 그 중간쯤에 위치한 순수 창작 실그림들이다. 특히 마치 캔버스에 그림을 그린 것 같은 추상 작품들은 그녀가 색을 다루고 형상을 파괴하면서 실의 질감을 파격적으로 과감히 살리고자 한 결과물일 것이다.
힘들다고만 생각하면 끝이 없어
손 관장은 작업을 하면서 가장 힘든 때를 작업하는 장인, 즉 파트너들과 호흡이 맞지 않을 때를 꼽았다. 그가 추구하는 방향으로 함께 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때. 이는 공동 작업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점이다. 그러나 손 관장은 ‘힘들다’는 감정에서 멈추지 않았다.
“저는 힘들다는 생각을 반대로 생각하는 습관이 있어요. 힘들다고만 하면 끝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 힘듦을 즐겨야 합니다. 과거에 물난리가 나서 작업장이 잠긴 적이 있었어요. 기가 막히잖아요? 하지만 그때 저는 손해를 손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 일을 마음에서 던져버렸죠. 오너인 제 입장에서 함께 일하는 그분들과 같이 힘들어 하면 안 되죠. 정말로 힘들면 그만두면 됩니다. 그리고 모든 일에 대해 토막을 잘게 끊어서 크게 붙인다는 생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과연 오너다운 말이랄까, 그는 자신을 오너로서 대함에 있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다양한 장르를 실험하느라 다양한 장인들과 함께 해야 하는 그의 작업 특성상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인터뷰 내내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감사를 표했다.
“제가 하는 작업은 저 혼자서 될 일이 아니에요. 그래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자꾸 감사해요. 가족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상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힘을 놓지 않고 살았다
“자수는 나입니다. 그리고 자수는 우주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나의 우주란 사실은 나의 일상이며 내 사고들의 집합체입니다. 이런 생각으로 자수를 시작했습니다.”
손 관장이 자신의 작품 세계의 시작을 설명하는 말에서, 예술가의 가족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예술계의 신화랄까, 예술가가 작품에 몰입해 완전히 빠지면 뒤에 남는 예술가의 가족들은 불행해진다는 이야기. 손 관장의 가족들은 그를, 쉬지 않고 만들고 있는 우주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남편은 내 예술을 기꺼이 이해해줘요. 그리고 엄마가 하는 일을 보는 딸 둘도 너무 착하고. 심지어 시댁에서도 제가 하는 일을 인정해주었죠.”
손 관장의 예술은 남편과 자식에 더해 친정과 시댁 모두가 인정하고 지원해줘 만들어질 수 있었다. 흔치 않은 집안이다. 그리고 그러한 환경이 만들어낼 수 있는 아름다움을 이제 세계가 인정하기 시작했다.
“저는 한 번도 일상적으로 작아 보이는 것들을 가볍게 본 일이 없다고 생각해요. 그 어떤 것이라도 눈에 들어오는 것들을 내 감성으로 사로잡는 일을 소홀히 한 적이 없었어요.”
그가 설명하는 일상적이고 작아 보이는 것들에 대한 감수성에는 ‘유혹이란 상대에 대한 배려로부터 나온다’는 걸 증명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런 충실함은 한눈에는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도 완성돼 있어야 한다는 그녀의 철학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손 관장에게 후계자에 대해 물어봤다. 그는 실그림이라는 영역은 후계자 양성이 어려운 분야라고 선선히 밝혔다.
“요즘은 둘째 딸이 내 작업을 도와주는 중입니다. 뭔가를 만드는 건 아니고 우선 제 일을 지원해주는 거죠. 4대째 예술가의 기질이요? 그건 두고봐야죠(웃음).”
그는 오전 3시부터 새벽을 열며 새벽빛을 고민하다가 상념에 한 땀을 시작하면서 일상적 우주를 어떻게 실그림으로 표현할 것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자문하고 있다. 한순간에 깨닫거나 진보하는 것이 없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실그림으로서의 예술에 대한 질문은 아직 시작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작품세계에 반해 예원 실그림 문화재단 이사장직을 흔쾌히 맡은 이기수 전 고려대 총장은 수서에 자수박물관을 짓는 데 힘껏 돕고 있다. 조만간 착공될 계획이란다.
손 관장이 사는 서울 강남구 개포동 경남아파트 1층의 60평쯤 되는 갤러리에는 그의 작품과 자수 관련 민속품이 빼곡하게 모여 있다. 2009년부터 이곳에는 수많은 사람이 찾아와 그의 작품을 감상하고 작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됐다. 해외에서 더 알아주는 팬클럽이 생길 정도다.
이제 우리나라 자수예술의 미를 한 단계 높이고 세계인이 모두 함께 느끼고 좋아할 수 있는 보편적인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킬 것이라는 그의 약속을 입증한 셈이다.
원로가수 명국환(82)의 명함은 상당히 단순하다. 한문으로 원로가수 明國煥이라고 쓰여 있고 그 밑에 덩그러니 전화번호가 적혀 있다. 뒷면에는 데뷔연도와 히트곡 4곡이 적혀 있는 것이 전부다. 그러나 무심함 속에 보이는 원로의 품격은 비로소 말을 해보니 알 수 있었다.
지난해 12월, ‘2014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시상식장에 눈썹이 짙은 노신사가 포토월 앞에 섰다. 기자들은 ‘누구지? 일단 찍고 보자’라며 연신 플래시를 터뜨린다. 허나 노신사가 말끔한 정장을 입고 포토월에 서 있으니 어떠한 상을 받는 수상자 정도로만 짐작할 뿐, 그가 누군지 정확하게 이름 석자를 알고 있는 이는 드물다.
무더위가 한창이던 여름 영등포 거리에서 그를 만났다. 수많은 인파 속에 뒤섞여 있었지만, 그를 알아보는 이는 여전히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힌 듯한 그의 이름은 명국환. 60년 전에는 한국 가요계를 주름 잡았던 가수, 지금은 원로라는 수식어가 붙은 가수다.데뷔연도는 1954년. 그가 데뷔했을 때 태어난 사람도 이미 환갑을 넘었다. 그 세월만큼이나 가수 명국환이라는 이름 앞에 붙는 단어는 고귀하다.
원로(元老). 한 가지 일에 오래 종사해 경험과 공로가 많은 사람이라는 뜻. 결국 명국환에게 원로라는 말이 붙은 이유는 그가 우리나라 대중가요에 기여한 바가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난해 참석한 ‘2014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에서 자리를 빛낸 이유도 이와 같다. 우리나라 대중문화 발전에 공로가 큰 점을 인정받아 보관문화훈장을 받기 위해서였다. 이제 그의 나이 여든 둘. 어쩌면 가수 인생의 종착역에 다다랐을지도 모르는 이때. 그는 가장 큰 보상을 받은 셈이다.
노신사 명국환이 인터뷰 도중 노래를 한다. 두 눈을 지긋하게 감고 부르는 그의 노래는 젊은 시절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구슬프고 애잔하다. 하지만 그 깊이는 황혼이 돼서야 더욱 은은한 빛을 발산하고 있다.
인생의 단맛 쓴맛을 다 본 여든 둘의 나이에도 자신은 아직도 ‘노래밖에 모르는 숙맥’이라고 표현하는 명국환. 나이 탓인지 사람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해 대답하는 목소리가 자주 커지지만 옛 시절의 기억들을 토해내는 목소리는 꽤나 또렷하다.
◇악극단원을 꿈꾸던 소년
소년 명국환의 꿈은 악극단원이 되는 것이었다. 악극단원이 돼 전국을 돌아다니며 마음껏 노래하는 것. 그에게 그 꿈은 최고의 낭만이자 로망이었다. 밤이면 동구밖으로 나가 노래를 부르던 소년. 고향 황해도 연백에서 그는 이미 귀여운 스타였다.
“노래 한곡 해 보거라”하는 어른들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구수하고 애달픈 노래 솜씨를 뽐낸다. 신청하는 노래 대부분 다 불렀을 정도로 음악을 사랑하던 소년 명국환이었다.하지만 그 시절은 목청 하나 믿고 돈을 번다는 것에 부정적인 시기였다. 그의 아버지 또한 그렇게 생각했다. ‘네가 노래를 잘 해봐야 얼마나 잘 하겠느냐’는 생각에 악극단원이 된다는 꿈을 포기하라며 소년 명국환에게 엄포를 놓기도 했다. 그야말로 부모님의 결사반대였던 것이다.
“제 성격이 온순해서 그렇지 않은데 그때는 아버지가 반대하시자 대들었어요. 나는 가수가 될 거라면서요. 간섭하면 반항을 하겠다고 역으로 아버지께 엄포를 놓기도 했지요.”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호소력이 있었다. 중학교 2학년 때는 지역 콩쿠르 대회에서 남인수의 ‘남아일생’을 불러 3등에 입선해 가수가 될 소질을 보이더니, 6·25전쟁이 끝난 직후 열린 전국 콩쿠르 대회에서 우승을 하며 가수의 꿈을 마침내 이룬다.
“전국 콩쿠르 대회에서 우승을 하고 나서 그 다음해에 정식적인 가수로 데뷔를 했죠. 그게 1954년입니다. 그때 생각했죠. 시대의 아픔을 노래하는 사람이 돼야겠다고 말이죠.”
◇없어서 못 팔았던 레코드
“6·25전쟁 이후 이북의 실향민을 달래는 노래인 ‘백마야 울지마라’가 엄청난 히트를 쳤어요. 여기에서 ‘백마’는 백의민족을 상징하는 것인데, 그것이 실향민들의 아픔을 잘 보듬어 줬던 것 같습니다.”
절절한 노랫말과 애절한 목소리가 어우러져 명작 한 곡이 탄생했다. ‘백마야 울지 마라’다. 이 노래가 전파를 타자 전국 팔도에 이 노래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레코드 상들은 이 레코드를 사기 위해 서울로 모여들었다. 레코드 가게 근처의 여관에서 발매 전날 밤을 새워 사가는 사람들도 있었으니 그 인기를 짐작할 만했다.
그가 백마야 울지 마라, 아리조나 카우보이, 방랑시인 김삿갓, 내 고향으로 마차는 간다 등을 잇따라 히트시키던 그 시기에 대중이 그의 노래를 들을 수 있는 수단은 레코드가 아니면 라디오뿐이었다. 그마저도 여건이 열악해 사전 녹음방송 같은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래서 라디오 생방송에 얽힌 재미있는 사연도 많다.
“1960년대 흑백TV의 시대가 도래하기 이전에는 라디오 전성 시대였죠. 그런데 오로지 생방송밖에 할 수 없었죠. 라디오에 출연하면 모든 장르의 노래를 총망라해서 불러야 했는데, 어떤 때는 음정과 가사를 모르는 노래도 불렀습니다. 라디오에도 방청객이 있던 그때에는 가사를 틀리면 그들에게 사과를 하고 다시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있네요.”
◇청춘의 삼색 깃발
“장미꽃이 피어나는 새파란 가슴 / 저 하늘에 펄럭이는 청춘의 삼색 깃발 / 달 실은 청노새야 달려가자 / 별 실은 청노새야 달려가자.”
명국환의 노래 ‘청춘의 삼색 깃발’의 가사 중 일부분이다. 그의 이 노래는 당시 우리 사회가 얼마나 폐쇄적이고 통제가 심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6·25전쟁 이후 남북이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절 이 노래는 사찰계(현 국정원)의 타깃이 되기 쉬운 먹잇감이었다.
작사가 손로원은 노랫말을 쓰면서 전후의 아픔을 딛고 더 좋은 미래를 향해 달려가자는 메시지를 담고자 했다. 그러나 그 가사가 발목을 잡았다. ‘장미꽃’과 ‘깃발’ 그리고 ‘달려가자’는 노랫말이 문제였다. 지금이야 장미의 색깔도 가지각색이지만 통상 ‘장미는 빨간색’이라는 통념이 있던 시절, 그것은 공산주의의 빨간색을 상징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깃발’ 또한 북을 상징하고 ‘청노새가 달려가자’는 것도 ‘북으로 당장 넘어가자’는 뜻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6·25전쟁 때 뿜었던 피가 채 마르지 않았던 그 시절 그 곡은 그렇게 해석됐다.
작사가 손로원과 명국환은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사상이 의심된다며 사찰계에 불려갔던 것도 수차례. 졸지에 ‘빨갱이’로 낙인 찍힐 판이었다.
“정말 당혹스러웠죠. 노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빨갱이’로 몰릴 판이었으니까요. 조사 과정에서 손로원 작사가는 전혀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변명을 강하게 했던 것으로 기억해요. 정말 아찔했던 순간이었죠.”
◇원로의 꿈
명국환은 여전히 현역이다. 그리고 왕성하다. 인터뷰가 끝난 다음 날에도 부산에 공연을 하러 갈 만큼 노래를 할 수 있는 곳이라면 전국 팔도를 누빈다. 하지만 이런 현재가 오기까지 오랜 기간의 정처 없는 휴식 기간이 있었다.
“1985년에 KBS에 ‘가요무대’가 생기고 나서 무대에 많이 섰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후배들이 자리를 채우면서 제가 설 자리는 점점 줄어들더라고요. 어쩔 수 없었죠. 그래서 원하지 않게 계속 쉴 수밖에 없었습니다. 참 미련하죠. 다른 일을 하면서 돈을 벌 생각을 했어야 하는데, 노래밖에 할 줄 아는 것이 없으니 다른 일을 못하겠더라고요. 정말 노래밖에 모르는 숙맥이었지 뭐.”
이제는 후배 가수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 그. 여든이 넘은 나이지만 품고 있는 꿈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꿈을 말해달라는 기자의 말에 머쓱해 하면서도 기다렸다는 듯 미소를 보이며 이야기한다.
“남들이 이 나이 들어서 이런 말을 하면 욕심이라고 해요. 앞으로 10년만 더 노래를 하고 싶어요. 사실 제 목소리가 살아 있으니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하지만 이 나이에 현역으로서 노래를 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정말 행운인 것 같아요. 아직도 공연장에 가면 한 차례 공연에 몇 백만원을 받으니 이만한 능력이 어디 있겠어요?”
1970년대부터 KBS 가요무대가 시작됐던 1985년까지 이렇다 할 소득이 없이, 노래만 불렀던 ‘숙맥 원로’ 명국환은 이제 옛 것을 그리워하는 오늘날 더욱 영롱한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빠빠라빠빠 빠빠빠 달려라 달려 로보트야. 날아라 날아라 태권브이’ 이제는 익숙한 이 멜로디. 1970년대 어린이들의 가슴에 승리의 브이를 그려 넣었다. 이제는 그 어린이들이 모두 성인이 돼 또 다른 어린이들의 아버지,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태권브이를 찾는다. 당시에는 우상, 이제는 추억이 돼 버린 태권브이. 그 역사적인 만화 뒤에는 감독 김청기(金靑基·74)가 있었다. 일흔을 넘긴 나이지만 아직까지 왕성하다. 그에게 욕심이 아닌 꿈 그리고 한국 만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내년이면 벌써 불혹이다. 사람이냐고? 그게… 사람은 아니고 키가 장장 56m에 달하는 로봇이다. 그러니까 올해 39세. 사람으로 따지면 아직 청춘 그 자체지만, 로봇들 사이에서는 원로 스타이자 대선배님인 ‘로보트 태권V’다.
지난 7월 24일은 태권브이의 39번째 생일이었다. 서울 피규어 뮤지엄W에서는 태권브이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자리를 마련했는데, 1층 전시장을 태권브이 캐릭터로 가득 채웠다. 그런데 점점 재미있는 상황이 벌어졌다. 태권브이가 처음 나왔을 1970년대에는 상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태권브이의 피규어와 영화 필름을 들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성인들(요즘은 ‘키덜트’라 부르는)도 보이고, 아들의 손을 잡고 온 40대 아버지의 모습도 보인다. 이들 모두 1970년대, 그 시절엔 태권브이에서 눈을 떼지 못했던 어린이들이었으리라. 이들은 한 사람을 기다리며 얼굴에 드러나는 기대감과 설렘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화백이오’라고 온 세상 사람들에게 표현을 하는 듯 베레모를 쓴 노신사가 등장하자 이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린다. 바로 ‘태권브이의 아버지’ 김청기 감독이다. 들뜬 것은 그들뿐만 아니었다. 김 감독도 들뜬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말 기분이 너무 좋아요. 이렇게 제 작품을 기억해주고 아직까지 찾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말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오니 제가 다시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 창작은 늙지 않는다
부천에 있는 작업실에서 만난 김 감독은 색다른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수묵화가 바로 그것. 그런데 특이한 것은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수묵화 사이로 태권브이가 의연하게 솟아 있는 점이다. 고전과 현대의 조화. 일흔 넷의 나이에도 트렌드에 뒤처지지 않는 감각은 바로 꾸준한 창작 활동에 있었다.
“창작을 하는 것은 유일하게 제가 젊다고 느끼게 해주는 순간이에요. 창작과 생각이라는 것은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더 좋은 창작물을 만들기 위해 노력합니다. 창작이란 경험과 실패를 딛고 일어나야 멋있고 참신한 것이 나오니 말입니다. 요즘은 상식을 뛰어넘는 엉뚱함이 있어야 합니다. 고정관념에 사로잡히면 절대로 눈에 띄지 않습니다.”
그래서일까. 만화 감독이라는 세계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한 노력은 끝이 없다. 트렌드와 시대 흐름을 분석하는 데 시간을 아끼지 않는다. TV와 드라마, 책 등을 꾸준히 보면서 ‘왜 인기가 많은지’ 또는 ‘어떤 매력으로 대중에게 다가가는지’에 대한 분석 말이다. 이 모든 것들이 대중의 요구를 파악해 그에 맞는 창작을 하는 밑거름이 되기 때문이다.
“수묵화도 새로운 창작을 하는 재미있는 일 중 하나예요. 하지만 제 꿈은 따로 있죠. 어린이뿐만 아니라 남녀노소가 모두 즐길 수 있는 실사애니메이션 합성 영화를 만드는 것이에요. 우리나라에서도 디즈니의 같은 영화를 만드는 것이 목표입니다.”
◇ 태권브이도 벌써 불혹이야
“저는 태권브이를 기획할 때 이렇게까지 재평가를 받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요. 재평가 받고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을 보면 항상 뿌듯합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잘 만들 걸 그랬네요.”
1960년 만화가로 입문한 김 감독. 1976년 ‘로보트 태권브이’가 탄생하기 전까지 그는 TV 광고나 프로그램 타이틀 로고를 그리곤 했다. 그러나 그가 꿨던 꿈은 그것이 아니었다. 장편 만화를 그리는 것. 이나 같은 일본 만화가 당시 어린이들을 사로잡던 시절. 대한민국 만화감독 김청기는 위기감과 절박함을 느꼈다. 일본의 문화에 우리나라 문화가 잠식될 수 있다는 우려에서였다.
그 시절 김 감독이 기획했던 태권브이는 그처럼 대한민국 만화 감독으로서의 자존심이 달린 문제였다. 그렇게 태어난 태권브이는 일본 만화에 빼앗겼던 대한민국 만화의 자존심을 회복하는 데 초석이 됐다. 이렇게 감독의 혼과 작가정신이 담긴 태권브이에 대한 반응이 움트기 시작하면서,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생겨났다. 밤낮없이 태권브이 작업에 몰두하던 시절이었다. 피로가 몰려와 실수로 주인공 훈이의 얼굴을 약간 찌그러지게 그린 것이다. 작은 선의 변화도 실제 만화에서는 윤곽선이 크게 보이기 때문에 꽤나 큰 실수였다. 그런데 이런 단순한 실수도 대중은 심오하게 해석했다.
“당시 피곤이 몰려와 실수를 한 것이었는데, 혹자는 ‘훈이의 얼굴이 찌그러진 것은 작가의 심오한 의도가 들어 있는 것’이라고 해석하려고 하더라고요. 이제야 고백합니다만 그것은 단순한 실수였습니다. 하하.”
◇ 1970년대와 현재
김 감독은 1970년도를 돌아보면 어찌 만화를 그렸나 싶다. 요즘은 케이블TV를 통해서 수많은 만화영화를 볼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TV조차 보급이 많이 안 됐던 시기 아닌가. 또, 그 당시 부모들의 인식은 ‘만화영화는 아이들 공부에 방해가 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만화가는 사회적으로 지탄의 대상이었다. 김 감독은 그때 회의감 때문에 펜을 놓고 싶었다고 술회했다. 하지만 40년이나 지난 지금. 그 어린이들이 한 아이의 부모님이 됐다. 김청기 만화를 향유했던 그들은 이제 아이들의 손을 잡고, 태권브이가 있는 곳을 향한다.
“그 당시 어린이들을 생각하면 참으로 불쌍해요. 이렇다 할 문화 콘텐츠가 전무했으니까요. 그런데 이제는 그 어린이들이 커서 태권브이를 보는 것을 넘어 캐릭터까지 구매를 하고 있어요. 정말 감회가 새롭습니다.”
◇ 멈추지 않는 도전, 그리고 로봇
김 감독은 자신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준비를 차근차근 해나가고 있다. 첨단 기술을 사용해 완성도 높은 실사애니메이션 합성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김 감독은 이런 영화를 만들기 위한 인프라가 부족했던 1980년대 실사애니메이션 합성 영화의 시초격인 를 제작한 경험이 있어 자신감도 넘친다. 아직 가제지만 제목도 정해놓았다. ‘RG로봇’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이 영화에 거는 기대가 상당하다. , 등 성인들도 좋아하는 일본 만화가 전 세계를 강타하는 요즘. 한국에서도 어린이에게만 국한된 영화가 아닌 성인도 좋아하는 만화 영화를 만들어 보겠다는 심산이다.
“사실 우리나라의 만화영화는 너무 어린이들에게 편중돼 있는 실정입니다. 이제는 그것을 넘어서야 합니다. 타깃을 조금 더 다양화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내년 여름 개봉을 목표로 ‘RG로봇’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저는 시나리오와 기획, 스토리보드 구성을 맡고 있죠.”
김 감독의 욕심은 끝이 없다. 그러나 만화에 대한 욕심이 열정으로 보이는 것은 김 감독의 깊은 고민이 그 꿈에 비치기 때문일 것이다.
빌 게이츠, 헨리 포드 등과 함께 미국 경제 잡지 포브스가 선정한 ‘미국을 만든 비즈니스 영웅 20인’에 오른 메리 케이 애시(Mary Kay Ash, 1918~2001). 아이 셋을 둔 40대 주부가 세계적인 코스메틱 브랜드 ‘메리케이’의 CEO가 됐다는 그녀의 성공담은 많은 여성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그런 그녀 못지않은 아름다운 성공을 일궈낸 이가 있다. 바로 한국의 메리 케이 애시, 메리케이코리아의 SNSD(Senior National Sales Director) 최정숙 씨다. 평범했던 삶의 궤도를 비범하게 변화시킨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수많은 비즈니스 우먼의 롤 모델이 된 최정숙 씨도 IMF 외환위기로 인생이 바뀐 사람 중 하나다. 둘째 아이 출산 직후, 잘나가던 남편의 사업이 IMF의 여파로 위기를 맞아 결국 살던 집도 팔아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녀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3개월 된 젖먹이를 두고 ‘메리케이코리아 뷰티컨설턴트’라는 이름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평범한 주부로만 살아온 아내가 화장품 세일즈를 시작한다고 하자 남편은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남편은 자신이 먼저 그 회사에 대해 알아보겠다며 밤을 새워가며 메리 케이 애시의 자서전과 관련된 책을 읽었고, 미국 본사 홈페이지까지 꼼꼼하게 살폈다. 그러고 나서 믿을 만한 회사라고 결론을 내린 그의 “당신은 잘 할 수 있을 거야”라는 한마디를 시작으로 2002년 1월 그녀의 새로운 여정이 펼쳐졌다.
장애의 문턱을 넘어 연봉 5억의 톱 세일즈 우먼으로
그의 말처럼 그녀는 정말 잘해냈다. 처음부터 일이 잘 풀렸던 것은 아니지만, 불굴의 의지와 노력으로 입사 4개월 만에 총 판매실적 1억 6000만원이라는 기록을 달성했다. 그 기록은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입사한 지 5년째 되던 2006년에는 아시아 8개국 전체 세일즈 퀸이 됨과 동시에 세일즈 디렉터의 최고 자리인 내셔널 세일즈 디렉터(NSD)의 자리에 올랐고, 현재 억대 연봉을 받으며 일하는 톱 세일즈 우먼이 됐다. 꿈같은 이야기지만, 정말 꿈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들이었다. 또, 꿈이 있었기에 노력을 멈추지 않을 수 있었다.
그녀에게는 남들보다 배로 노력해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언어 장애라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선천적으로 성대에 문제가 있어 정확하게 발음할 수 없었고, 어린 시절부터 네 번이나 큰 수술을 받았지만 목소리는 호전되지 않았다. 오히려 떨림판이 손상돼 발음이 새곤 했다. 자연스레 사람들과의 의사소통을 꺼리게 됐고, 벙어리라는 오해까지 받았다.
“하루는 아이를 업고 웅변학원에 갔어요. 강사가 저를 보고는 돈아까우니 그냥 가라고 하더라고요. 펑펑 울면서 나왔죠. 강사는 나를 포기했지만, 나는 나를 포기할 수 없었어요. 집으로 돌아와 혼자 목이 터져라 발성 연습을 했죠. 입속이 온통 수술 자국이라 말을 하는 것조차 힘들었지만 정말 피나는 노력을 했어요.”
지금도 약간 콧소리가 나고 발음이 완전하지는 않지만 어떤 이들은 그녀의 독특한 목소리가 매력 포인트라고 한다. 우렁차고 또박또박하지는 않아도 조곤조곤 나긋하게 이야기하는 목소리는 듣는 이의 귀와 마음을 깊게 사로잡고 있었다.
“인간은 타고난 환경에 안주하지 않고 이를 바꾸고 개선하는 존재라는 걸 잊으면 안 돼요. 새처럼 하늘을 날 수 없어서 비행기를 만든 것처럼 말예요. 저 역시 타고난 환경에 맞춰가며 살았다면 지금의 모습은 없었을 거예요. 제겐 언어 장애라는 시련이 있었지만, 저보다 더 나은 환경에서 시작하시는 분들이 대부분일 거예요. ‘내가 할 수 있으면, 당신은 더 잘할 수 있다’는 사실을 꼭 알려주고 싶어요.”
촛불처럼 따뜻하게 그리고 뜨겁게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온 어느 날, 집안이 온통 캄캄했다. 식탁 위에는 촛불이 켜져 있었고 남편과 아이들이 식탁에 둘러앉아 있었다. 아이들이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왜 촛불을 켰느냐고 남편에게 물었다.
“특별한 날에는 촛불을 켜는 거야. 생일처럼. 오늘은 우리에게 아주 특별한 날이야. 서로에게 사랑한다고 얘기하는 날이거든. 촛불을 켜놓고 말하면 더 근사하잖아. 아빠는 우리 가족을 사랑해. 식탁 위에 켜 놓은 촛불이 바람에 꺼질 듯해도 꺼지지 않는 이유가 뭔지 아니? 그건 생명력이 강하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너희는 걱정하지 마. 엄마와 아빠는 생명력이 강한 사람들이거든.”
알고 보니 전기료를 내지 못해 단전된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남편이 아이들에게 하는 말을 듣고 다시 한 번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녀의 심장이 다시 뜨거워졌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바깥에서 부는 바람은 유난히도 아프죠. 하지만 촛불처럼 따뜻하게 감싸주는 가족들의 힘이 저를 일으켜 줬어요.”
그녀가 일을 그만두어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딱 한 번 있었다. 하지만 다시 마음을 잡고 더 강력한 힘을 내는 계기가 되었다. 가족 때문이고, 가족 덕분이었다.
“유치원생 아들이 가끔 바지에 오줌을 싸길래 병원에 가서 상담했는데, 엄마의 사랑이 부족해서였다고 하더라고요. 가슴에서 피눈물이 났어요. 자책도 많이 했죠. 그래서 일을 그만두려 했는데 남편이 말렸어요. 자기가 아이들에게 더 많은 사랑을 주고 보살필 테니 지금까지 기울인 노력을 수포로 만들지 말라고 격려했죠. 지금의 모든 것들은 남편의 헌신적인 외조 없이는 불가능했을 거예요.”
아내를 위해 컴퓨터까지 배운 남편은 이제 사업계획서나 행사용 동영상 파일까지 제작할 정도로 실력이 수준급이라고 한다. 그녀에게 남편은 든든한 지원군이자, 멘토이자, 슈퍼바이저다.
“공병호(공병호경영연구소) 소장님과 한자리에서 강연한 적이 있었죠. 그때 소장님이 제 강연을 들으시고는 많은 여성에게 꿈과 용기를 심어줄 수 있는 책을 내보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하셨어요. 몇 개월간 미팅하고 힘을 주셨지만 끝내 용기가 나지 않아 포기하려 했어요. 그때 남편의 한마디가 제 심장에 꽂혔죠. ‘많은 사람의 꿈이 되고 싶다면서, 그녀들의 용기가 되고 싶다면서, 안 그래?’ 그때 깨달았어요. ‘그래, 내가 말만 하는 사람이 되면 안 되겠지. 믿음을 갖고 진솔하게 쓰면 많은 이들에게 힘이 되겠지’라고 용기를 내게 됐고, 공 소장님의 도움을 받아 라는 책을 낼 수 있게 됐죠.”
핑크 벤츠를 모는 여자, 그 후 10년
메리케이는 톱 세일즈우먼에게 핑크 캐딜락을 주는 기업으로 유명하다. 다만, 우리나라에서는 도로 사정 때문에 미국과는 달리 핑크 벤츠를 준다. 자동차 시상식은 미국 댈러스 본사에서 무려 40일간 4만여 명의 인원이 참석해 대규모로 진행된다. 최씨는 입사 3년 반 만에 최고 세일즈 디렉터 자리에 올라 댈러스 시상식 무대에 오르게 된 그날의 영광을 잊지 못한다.
“핑크 벤츠를 받는다는 것은 경제적 성취 이상의 의미가 있어요.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는 자부심, 그 과정에서 느꼈던 보람, 기쁨 등이 담겨 있죠. 핑크 벤츠를 받기 전까지는 리더로서의 도전의 시기였지만, 이제는 핑크 벤츠를 꿈으로 하는 많은 이들의 롤 모델 역할을 해나가야 하죠. 책임감도 필요하지만 사명감으로 해야 하는 일이 더 많아졌어요. 하지만 큰 부담은 없었어요. 이미 핑크 벤츠를 받고 난 이후의 계획까지 다 짜두었기 때문이죠.”
그녀는 5년 주기로 계획을 세운다. 현재도 2020년까지 짜놓은 계획에 맞추어 매일 작은 실천을 통해 목표를 이뤄내고 있다. 작은 것들을 실천하는 것이 곧 습관이며, 습관은 노력 없이는 가질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그녀다.
“나쁜 습관은 쉽게 얻어지지만 좋은 습관은 반드시 노력이라는 대가를 치러야만 얻을 수 있어요. 아침에 5분 일찍 일어나는 습관을 들이는 것조차 꽤 어려워요. 결국 습관이 부자를 만든다고 생각해요. 노력을 통해 실천하다 보면 그게 곧 습관이 되고, 작은 습관이 모여 눈덩이처럼 불어나 큰 차이를 만들게 되죠.”
처음 일을 시작하면서 세일즈 업계에서 내로라하는 사람들을 찾아다녔다. 화장품뿐만 아니라, 보험, 학습지, 전집도서 판매원까지 찾아가 그들의 성공 비결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성공 비결을 알아내기는 오히려 쉬웠다. 그들의 책을 읽거나 강연회에만 참석해도 알 수 있었다. 문제는 그 비결대로 실천하느냐였다.
그녀는 그들의 비법을 익히기 위해 조금 더 끈기 있게, 열기 있게, 독기 있게 노력해 나갔다. 그런 습관들을 자신에게 흠뻑 배게 하니, 비로소 그것들이 어우러져 그녀만의 독특한 무늬를 그려낼 수 있었다.
“첫 번째 핑크 벤츠를 받은 지도 10년이 지났어요. 그 이후에도 한 대를 더 받았고, 내년에도 한 대를 더 받을 예정이라 이제 세 대째네요. 단순히 핑크 벤츠를 받기 위해 일을 계속하는 건 아녜요. 제가 아닌 다른 핑크 벤츠의 주인공들이 탄생할 수 있도록 인재를 양성하는 게 원대한 목표죠. 아마 힘이 닿는 한 아흔살까지는 많은 여성들의 멘토로서 활동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세상에서 소외되고 아픈 이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하려고요. 저는 아이들에게도 재산보다는 내 정신을 물려주고 싶어요. 벌어둔 돈으로는 그동안 감사했던 사회에 보답할 계획이에요. 세상 가장 어두운 곳을 바라보고 그 어두운 곳에서 빛이 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인생 후반전 목표입니다.”
>>공병호 소장이 말하는 최정숙 SNSD의 성공 포인트
* 부분 발췌
첫째, 내면의 잠재능력을 직접 도전해서 찾아냈다.
주저하지 않고 미지의 세계로 과감하게 발을 디딘 그녀의 추진력이야말로 첫 번째 성공 포인트다.
둘째, 약점을 강점으로 승화해 냈다.
성공할 사람들은 약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녀는 성대 장애가 있었지만 이를 인정하고 좋은 인상을 만드는 데 주력해 약점 커버에 성공했다.
셋째, 비즈니스에도 상생과 공생의 철학이 필요하다.
리더라면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성공을 더불어 추구해야 한다. 그녀는 동료들의 성장을 지켜보는 데 큰 비중을 두고 기쁨과 보람을 느끼고 있다.
넷째, 성공의 비결은 남다른 노력이다.
그녀는 3일에 한 번씩 신발 굽을 바꿔야 할 정도로 하루 최소 20~30명을 만나고 다녔다. 고객을 만나러 갈 때도 시간이 아까워 막 뛰어다녔다. 짧은 시간 안에 뭔가 큰일을 해내기 위해 두 배 세 배 노력했다.
다섯째, 매일매일 승리할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했다.
진정한 성공이란 벽돌을 쌓아 올리듯 차곡차곡 이루어 가는 것이다. 성공을 원한다면 꾸준히 목적지를 향해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채워 가는 방법을 갖고 있어야 한다.
여섯째, 자신만의 독특함을 만들어 냈다.
타인의 경험과 지식을 한껏 배우되 자신만의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그녀는 그녀만의 이미지 관리법, 새로운 멤버들을 끌어오는 법, 제품을 설명하는 방법 등 비즈니스 활동에서 자신과 타인 사이에 차이점을 만들어냈다.
일곱째, 성취의 동기를 스스로 만들어갔다.
타인에게 무엇인가를 요청하는 사람은 늘 거절당할 수 있다고 각오해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세일즈맨은 이 한계선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그녀는 슬럼프가 올 때마다 서재에 들어가 위인전을 읽는다고 한다.
많은 강아지들 사이에서 빛나는 여배우가 있었다. 예쁜 옷을 입어 봤자 이내 강아지들 때문에 더러워진다. 제 돈을 주고 옷을 사본 지 10년이 넘는다는 여배우. 50여 마리의 강아지를 이해해 줄 수 있는 남자와 결혼하고 싶다는 여배우. 여배우 이용녀(李龍女·60)의 삶은 특별하다.
경기 하남시 초일동. 이용녀의 집 근처에 들어서자 주위와는 다른 아우라를 뿜는 집 한 채가 눈에 띈다. 굳이 스마트폰 지도를 뒤지지 않아도 동네에 울려 퍼지는 강아지 소리가 ‘배우 이용녀와 아이들’이 있는 공간임을 짐작케 했다. 아니나 다를까 문을 열자마자 50여 마리의 환영견파(?)가 기자를 격하게 맞이한다.
환영을 하는 것인지 경계를 하는 것인지 분간하기는 힘들었지만, 그 북적거림이 왠지 모르게 좋은 기운을 내뿜었다. 어떤 녀석은 앞다리로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적극적으로 환영하기도 하고, 어떤 녀석은 그녀를 해할까 끊임없이 냄새로 기자를 탐색한다. 쉽게 집 안으로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쉴 새 없이 장난을 거는 통에 좀처럼 진입하기 힘든 ‘용녀씨네’였다.
이들은 사람에게 한 번 버려졌다는 상처를 안고 있는 유기견이다. ‘친절한 용녀씨네’라는 팻말을 걸고 이들을 보호하고 있는 사람은 배우 이용녀. 스크린과 브라운관에서 종횡무진 활약하는 이 가녀린 여배우가 바로 50여 마리 유기견의 ‘어머니’다.
◇ 유기견을 위한 삶의 시작
“10년 전쯤이었어요. 길가에서 시추 한 마리가 눈이 터져서 낑낑대고 있는 거예요. 동네 꼬마들이 던진 돌에 맞은 거죠. 버려진 아이라는 것을 알고,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해 주었어요. 병원에 가니 의사 선생님이 그러더군요. 인터넷을 찾아보면 이런 녀석들이 수두룩하다고요.”
이용녀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집 앞마당에서 닭, 토끼, 강아지 등의 동물과 몸을 부비며 살아 왔던 터라 유기한다는 것을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녀에게 동물은 동시대를 함께 사는 같은 생명일 뿐이었다.
“인터넷을 뒤져보라”는 수의사의 한마디는 이용녀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그저 귀여운 것으로만 생각했던 강아지였지만, 그 귀여움 속에 감쳐진 이면에 참혹한 현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유기견의 실상이 참혹하더군요. 번식장에서 새끼만 낳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육되는 녀석이 많다는 것이 충격이었죠. 유기견 보호센터에서 1주일만 있으면 안락사된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자꾸 이놈들이 눈에 밟히더라고요.”
그때부터였다. 자신보다 유기견을 위한 공간이 더 커지기 시작한것이. 금호동에서 왕십리를 거쳐 하남시 풍산동에서 지금의 초일동까지 이사를 하면서 가장 크게 고려했던 입지 조건 역시 ‘강아지들이 자유롭게 뛰놀며 살 수 있나’였다. 그녀의 생활을 위한 공간이라곤 잠을 청할 수 있는 침실과 드레스 룸뿐. 그 외에 큰 거실과 마당은 모두 녀석들 차지다. 120마리였던 유기견들도 이제 절반이 줄어 50여 마리뿐이지만 시끌벅적한 것은 어쩔 수 없다.
기자도 그곳에서 유기견들과 몸을 부비다보니, 그들을 외면할 수 없는 이유를 조금은 이해할 것 같았다. 사람의 사랑을 갈구하는 눈빛과 꼬리의 활발한 움직임으로 펼치는 애교는 유기견에 대한 연민과 호감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이용녀도 그때 같은 마음이었을까.
“어린 시절부터 군인 아버지 덕분에 마당있는 집에서 남부럽지 않게 살았어요. 동물을 좋아하셔서 늘 마당에 닭, 토끼, 강아지들과 함께 살았죠. 그래서 동물과 친근한 건 사실이지만, 제가 동물을 너무 사랑해서 이렇게 생활하는 것은 아니에요. 이 시대를 사는 똑같은 생물로서의 미안함 때문이죠. 동물과 사람은 상하관계가 아니랍니다. 인간에게 버려진 동물에게 너무 미안해 몇 마리라도 좋은 사람에게 보내주기 위해 유기견을 보호 하고 있는 것입니다.”
◇ 개고기, 알고 드시는 건가요?
유독 그녀의 자동차가 눈에 띄었다. 여배우의 차라고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동차 이곳저곳에 덕지덕지 붙은 스티커가 정신없어 보일 정도였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귀여운 캐릭터의 강아지가 ‘나는 먹는 것이 아니에요’라고 말하고 있다. 작은 행동이지만 그렇게 그녀는 개고기를 먹지 말라는 소신을 생활 속에서 내비치고 있었다.
“개고기가 정말 사람에게 좋은 것일까요? 물론 고기는 단백질이 많아서 사람의 기력을 회복하는 데 좋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개고기에 쓰이는 개들이 몸에 좋을지는 의문입니다. 그 개들은 고기가 필요할 때 바로 죽여야 하기 때문에 평소보다 더 많은 항생제를 투여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높은 온도가 돼도 없어지지 않아 개고기를 먹을 때 결국 항생제도 같이 먹게 되는 것이죠.”
이 이야기를 꺼내는 그녀는 매우 조심스러웠다. 분명 “왜 개고기만 가지고 그러느냐”라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유기견 보호소나 개고기를 위한 사육장을 다니며 확신했다. 그 좁은 공간에서 평생을 살아 온 개들은 정신적으로 피폐할 수밖에 없고, 그것을 그대로 먹는 사람에게도 좋은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녀는 이런 점을 이야기하면서도, 먹겠다는 사람에게 윽박지르거나 비난하지는 않는다. 고기가 사람의 기력을 회복해주는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고있기 때문이다.
“저는 먹는 것은 반대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고기도 알고 먹어야 하지 않을까요? 건강한 환경에서 사육된 고기를 먹어야, 사람의 몸과 마음도 건강해지지 않겠어요?”
◇ 영화 와 영화배우 이용녀
극중에서 캐릭터가 쎈 역할을 많이 탓인지 그녀의 사생활에 대한 오해가 많다. ‘기가 셀 것이다’, ‘차가울 것이다’ 등의 이미지적 측면의 오해 말이다. 하지만 이런 오해는 그녀가 작품의 ‘신 스틸러’로서 확고한 자리매김을 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연극으로 다져진 탄탄한 연기력을 바탕으로 색깔이 뚜렷한 배우라는 뜻이니 말이다.
사실 그녀는 연극에 대한 애착이 매우 강하다. 연극계에 들어서자마자 세종문화회관, 예술의전당 등 큰 무대에 선 자신을 “참 운 좋은 배우”였다고 자평하기도 했다. 연극계에서의 폭 넓은 활약이 만족스러웠기 때문에 여기저기서 들어오는 영화에 대한 제의도 여러 차례 고사했다. 영화를 할 준비도 안 돼 있었고, 하고 싶다는 열정 또한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그녀가 영화를 해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왕가위 감독의 영화 를 본 이후였다.
“‘이런 영화도 있구나’라고 생각하며 본 영화였어요. 정말 충격적이었죠. 처절한 외로움 속에 살다가 벗어난 주인공들의 동질감과 소소한 행복을 배우들이 아무렇지 않게 표현하더라고요.”
이 영화를 본 후 불현듯 영화를 하고 싶다는 열정이 피어올랐다. 연극계에서 잔뼈가 굵었던 그녀도 영화를 해보겠다는 생각으로 오디션에 뛰어들었다. 박찬욱 감독의 였다. 영화 로 세계적 반열에 오른 박찬욱 감독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본 오디션에서 합격한 그녀는 명품 조연으로서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빛내고 있다.
이제 60세의 여배우는 새로운 도전을 꿈꾼다. 유기견 어머니라는 삶을 위해 배우 이용녀로서의 삶은 어느 정도 양보가 필요했다. 작품 선택과 역할 선택에서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유기견 어머니와 동시에 배우 이용녀이고 싶다.
“지금은 들어오는 작품이나 역할을 가릴 상황이 아니에요. 이 친구들과 함께 살려면 어떤 작품이라도 해야죠.같은 영화를 찍을 수 있다면 이보다 좋을 수는 없겠죠. 관객들에게 인생에 대해 편안하게 보여 줄 수 있고, 삶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습니다. 내면 연기를 통해 인물의 삶을 성찰할 수 있는 영화를 찍고 싶네요.”
△ ‘친절한 용녀씨네’ 강아지를 입양하고 싶다면
“이용녀 선생님에게서 2년 전 마르티즈를 입양 받았어요. 정말 까다롭게 입양을 해주시더라고요. 또 한 번 주인에게서 버려지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에서 그런 것이겠죠.” 인터뷰 날 방문했던 손님이 기자에게 귀띔을 해 주었다. 그녀는 분양을 해 줄 때에도 선택의 우선순위를 ‘책임을 끝까지 질 수 있느냐’하는 것에 둔다. 그래서 입양을 할 사람의 인적사항을 확실하게 따진다. 또한 이전에 강아지를 키운 경험이 얼마나 있는지 물어본 후, 한 달 간 입양할 사람에게 키우도록 한다. 이후 자격 여부를 엄격히 따져 분양을 한다.
입양을 하고 싶다면? Daum카페 ‘이웃들 시즌2 (이용녀와 함께 웃는 멍이와 냥이들)’을 검색하면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그녀가 직접 운영하는 카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