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묵호’를 읽고 막걸리를 안 마실 수 없다는 선배의 SNS 글을 보고, 기억 속 묵호를 떠올렸다. 묵호등대마을의 비좁고 가파른 골목 끝에서 마주했던 검푸른 바다, 슬레이트집 담벼락에 그려진 소박한 벽화들, 묵호등대 턱밑 민박집에서 창문으로 감상했던 묵호의 밤 풍경을. 유난히 묵호에 끌리는 건, 왜일까. 좋은 건 이유가 없다더니 묵호가 그렇다.
논골담길 코스
묵호역▶ 대우칼국수▶ 묵호등대마을과 묵호등대▶ 묵호자연산활어센터▶ 묵호항▶ 묵호역
묵호가 한때는 말이야
올 3월부터 KTX가 동해 묵호역과 동해역에 정차한다. 서울역에서 출발해 2시간 30분쯤 뒤면 동해에 닿는다. 문득 바다가 보고 싶을 때 훌쩍 다녀올 수 있게 됐다. 봄기운이 완연한 주말 아침, 묵호행 첫 열차를 탔다. 열차 타고 동해에 가는 것은 처음이다.
언제나처럼 동해 여행의 시작은 묵호등대마을. 묵호역에서 묵호등대마을까지는 걸어서 30분 정도 걸린다. 택시나 버스를 타고 가도 되지만, 굳이 걷는 이유는 칼칼한 장칼국수를 먹고 싶어서다. 묵호역에서 묵호항 쪽으로 5분쯤 걸어가면 한자리에서 60년 동안 장사한 장칼국수집이 나온다. 허름한 건물 2층에 자리했다. 백발의 노부부가 주인이고, 딸 내외가 연로한 부모를 돕고 있다.
장칼국수는 칼국수에 고추장을 풀어 얼큰하게 끓인 음식이다. 국물이 어죽처럼 걸쭉하다. 먹으면 속이 확 풀려 해장 칼국수라고 해도 될 것 같다. 주인장에게 맛 비결을 물으니 “멸치와 버섯으로 국물을 내는데, 고추장 맛이 가장 중요해요. 감자를 함께 넣고 끓여 구수하고요. 감자를 채 썰어 넣은 장칼국수는 흉내만 낸 거예요” 한다. 오래전 뱃사람들의 허기를 달래줬던 장칼국수가 요즘 사람들 입에도 맞는지, 오전 10시도 안 된 시간에 손님이 계속 들어온다.
장칼국수를 배불리 먹고, 묵호항과 활어센터를 지나 묵호등대마을로 향한다. 이 마을은 묵호등대가 세워진 산비탈에 형성돼 있다. 묵호항을 터전으로 살았던 이들의 거주지였다. 1936년 개항한 묵호항은 1940년대 국제무역항으로 성장해 1970년대까지 무연탄과 석탄, 수산물을 출하하는 항구로 전성기를 누렸다. 매일 밤 항구는 오징어잡이 배 불빛으로 대낮처럼 환했다고 한다. 길거리 개들도 만 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녔다는 우스갯소리도 전해온다.
묵호항에 일거리가 넘치자 전국에서 인부들이 몰려와 산비탈에 슬레이트집을 짓고 정착했다. 아랫마을에는 주로 뱃사람들이, 윗마을에는 명태 덕장 인부들이 살았다. 덕장 인부들은 묵호항에 들어온 명태를 지게에 올려 산꼭대기 덕장으로 날랐다. 여자들은 빨간 고무 대야에 생선을 가득 담아 머리에 이었다. 지게와 고무 대야에서 줄줄 흘러내린 물 때문에 흙길은 논길처럼 질척거렸다. 그래서 ‘논골’이라 불렸다. “마누라와 남편은 없어도 살지만 장화 없이는 못 산다”라는 말이 있을 만큼 이 마을 사람들에게 장화는 생필품이었다.
묵호등대마을의 추억을 만나다
불꽃처럼 호황을 누렸던 묵호항은 1980년대 동해항이 개항하면서 쇠락했다. 젊은이들은 새 일자리를 찾아 묵호를 떠났다. 묵호 인구가 절반 이상 줄었고 빈집도 늘었다. 현재 거주자들은 대부분 노인이다.
스러져가던 묵호등대마을에 제2의 전성기가 찾아왔다. 2010년 마을 골목길에 묵호 사람들의 삶 이야기를 담은 벽화가 그려지면서부터다. 회색빛 마을에 생기가 돌았다. 이 벽화 골목을 ‘논골담길’이라 이름 붙였다. 논골담길 벽화는 단순한 그림이 아니다. 묵호를 향한 애정을 꾹꾹 눌러 담은 절절한 연시이자 묵호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담은 추억의 사진첩이다. 비탈길을 오르며 묵호의 옛 사진첩을 넘겨본다. 고된 뱃일을 마친 일꾼들이 매일 들러 막걸리와 노가리 안주로 하루의 피로를 풀었던 대폿집, 묵호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오징어와 명태와 문어, 생필품이었던 장화, 코흘리개 아이들이 군침을 흘리며 넘겨다보았을 구멍가게, 명태 지게를 진 할아버지 그림에서 묵호의 청춘을 만난다.
벽화가 낡으면 새로 그린다. 그림이 바뀔 때마다 전망 좋은 언덕에는 카페와 게스트하우스, 펜션도 들어선다. 가끔 옛 그림과 누군가 담벼락에 써놓은 시가 그립다. “이제는 보라색 조가비랑 내 아버지 젊은 시절 팔뚝처럼 철철 힘이 넘치던 물고기랑 먹빛 눈물점이 슬펐던 목포집 주모랑…. 열이, 철이 내 친구들과 내 누이도 모두 떠나고 기억의 눅눅한 막국수 같은 호수만 남았네. 기억하리라! 정든 墨湖!” 이 시 때문에 묵호를 좋아하게 됐는지도 모른다.
논골담길은 비좁고 가파르다. 시멘트 바닥은 굴 껍데기처럼 거칠다. 대문 없는 슬레이트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대문은 없어도 마당에 오징어와 명태를 말리는 건조대 하나쯤은 두고 산다. 창호지를 바른 나무 창살문을 그대로 사용하는 집도 있다. 이 문을 열면 바로 바다와 마주한다. 묵호등대마을의 집들은 허름해도 전망만큼은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다.
전망 맛집 논골카페와 묵호태
논골담길 꼭대기에 있는 묵호등대의 전망대에 오르면 전경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다랭이논 같은 산비탈에 빨강, 파랑, 노랑 양철지붕들이 갯바위의 따개비처럼 모여 있다. 멀리로는 두타산과 청옥산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조선시대에 한양에서 파견된 부사가 이곳 바다 물빛이 검고, 물새도 검다면서 마을 이름을 묵호라 지었다고 한다. 깊고 깊은 바다는 정말 칠흑 같다.
묵호등대 아래, 깎아지른 비탈을 ‘바람의 언덕’이라 부른다. 마을에서 운영하는 카페와 전망 데크도 들어서 있다. 전망 데크에 서면 묵호항과 묵호등대마을 전경이 손금 보듯 훤히 보인다. 시야가 탁 트여 바다 한가운데에 서 있는 듯하다. 카페의 폴딩 도어를 모두 열어젖히면 바다가 와락 품에 달려드는 것 같다.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차를 마시고, 그리운 이에게 엽서를 썼다. 카페 앞 느린 우체통에 넣으면 1년 뒤에 전달된다.
카페 앞 동해 특산물을 파는 매장에도 들러 묵호태를 샀다. 묵호태는 묵호에서 만드는 먹태다. 바람의 언덕에서 바라보이는 해발 70~80m 높이의 묵호 덕장에서 생산한 것이다. 11월 말부터 이듬해 3월까지 서리와 눈, 비를 맞히지 않고 전통 해풍 건조 방식으로 말린 명태다. 20여 일 동안 해풍으로만 말리기 때문에 바싹 마른 황태와 달리 속살이 부드럽다. 그냥 먹어도 맛있다. 새우깡도 아닌데 자꾸 손이 간다.
묵호역으로 돌아오는 길에 활어센터와 묵호항을 다시 들렀다. 오전과 달리 손님들로 붐볐다. 이곳 활어센터는 자연산 수산물만 취급한다. 구입한 횟감은 활어판매센터에서 회로 썰어준다. 인근 식당에서 초장과 채소 등 재료값만 내면 바로 먹을 수 있다.
묵호항 부두에서 갈매기 떼가 요란하게 떠들기에 가보니, 아침에 조업 나간 배가 막 항구에 들어왔다. 뱃사람들이 생선이 가득 담긴 상자를 부두 바닥에 쌓아 놓으면, 상인들이 웅성거리며 상자 주변으로 하나둘 모인다. 곧 경매가 시작될 분위기다. 활기 띤 항구 풍경에 왠지 안도감이 든다. 시장과 항구는 시끌벅적해야 제맛 아닌가.
◇ 주변 명소 & 맛집 ◇
천곡황금박쥐동굴
국내에 하나뿐인, 도심에 있는 동굴이다. 4~5억 년 전에 생성된 석회암 동굴로 황금박쥐가 서식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총길이는 1400m, 관람 구역은 약 700m다. 베이컨, 오백나한상, 마리아상, 샹들리에 모양의 다양한 종유석을 볼 수 있다. 동굴 전시관에 황금박쥐를 테마로 한 동굴 탐험 VR 체험 시설을 갖췄다. 동해시 동굴로 50, 관람시간: 09:00~18:00, 관람료: 어른 4000원, 문의: 033-532-7303
무릉계곡
두타산과 청옥산 자락 골짜기의 계곡물이 무릉계곡 초입에 있는 반석 위로 힘차게 흘러내린다. 반석의 크기는 무려 4958m²(1500여 평)에 이른다. 반석에 빼곡히 새겨진 이름과 글귀들이 볼 만하다. 삼화사를 지나면 본격적인 숲길이 시작된다. 계곡 입구에서 쌍폭포와 용추폭포까지 가려면 한 시간 정도 걸린다. 가벼운 산책코스다. 좌우 두 개의 폭포가 하나의 소로 떨어지는 쌍폭포가 장관이다. 동해시 삼화로 584, 문의: 033-539-3700
장칼국수와 해산물 맛집
동해 원조 장칼국수집은 대우칼국수다. 인근 오뚜기칼국수도 유명하다. 묵호항 주변 동백식당의 해물탕과 해물찜, 부흥횟집의 물회, 물곰식당의 곰치국도 오래된 맛집 메뉴다. 까막바위 인근 어달리 회타운에서는 오부자횟집의 냄비물회, 동해바다곰치국의 생선구이가 맛있다.
그는 망가진 몸을 고치기 위해 귀농했다. 죽을 길에서 벗어나 살길을 찾기 위해 산골에 들어왔다. 그 외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봤다. 결과는? 놀랄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서리 맞은 호박잎처럼 시들어가던 그의 구슬픈 신체가 완연히 회생했으니. 산골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이 아름답고 기묘한 지구별과 이미 작별했을 거란다. 현명한 귀농이었다는 거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정도사’라 부른다. 이 사람, 정경교(62) 씨의 삶에는 색다른 게 있다. 누가 뭐래도 제멋대로 산다.
경교 씨는 오랫동안 대양을 누볐다. 바다에서 무슨 신기한 일이 일어나나 골똘히 연구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외항선 항해사. 이게 그의 직업이었다. 인생이 무엇이냐고 그에게 묻는다면 마냥 돌고 도는 일이라는 답이 나올지도 모른다. 배를 타고 지구를 36바퀴쯤 돌았다는 게 아닌가. 오만가지 경험을 했을 거다. 생사를 넘나들기를 밥 먹듯이 거듭했단다. 긴 항해 뒤 잠시 정박한 낯선 항구의 주점에서 이마에 총을 들이대는 건달들을 깡으로 해치우기도 했다. 그는 무술에 능란하다. 그러나 몸에 찾아온 병증은 무술로 때려눕힐 수 없다. 정 씨는 자신의 몸이 내지르는 화급한 비명을 듣고 배에서 내렸다.
“어느 날, 술 마시다 혼절했어요. 이러다가 바다 위에서 객사하겠구나, 두려운 생각이 엄습하더라고요. 온몸의 에너지가 모조리 고갈된 상태였던 겁니다. 한마디로 엉망진창이 됐다는 거. 외항선원 생활이라는 게 원래 건강을 망치기 쉽습니다. 밤낮이 따로 없는 고된 업무, 늘 부족한 잠, 무절제한 음주, 극도의 스트레스 등등이 겹치다 보면 한계 상황에 이르게 마련이거든요.”
“시골에서 살면 건강을 회복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은 어디서 온 거죠?”
“귀농을 해서 오가피 농사를 짓자! 그런 결심을 했어요. 여기엔 이유가 있어요. 제가 배를 타면서도 건강 복구를 위해 이 약 저 약, 몸에 좋다는 걸 다양하게 먹었는데요, 오가피 효력이 가장 좋았어요. 공기 좋고 물 좋고, 자연환경 살아 있고, 그런 깨끗한 산촌에서 스트레스 받지 않고 손수 오가피 농사를 지어 장복한다면 건강해지겠거니, 건강한 심신으로 나의 영원한 관심사이자 길동무인 무예 수련에 전념한다면 인생 자체가 달라지겠거니, 그런 확신과 구상이 있었던 겁니다.”
“계획대로 잘 흘러갔어요? 시련을 피할 수 없는 게 귀농인데. 심지어 고행길인데.”
“불광불급(不狂不及)이라, 뭘 하든 미쳐야 도달할 수 있다는 거! 제겐 스스로 선택한 일엔 완전히 미치는 버릇이 있어요. 귀농하자마자 모아뒀던 자금으로 집을 짓고 밭 200평을 사 오미자 농사를 시작했어요. 새벽마다 반드시 두어 시간 무술 수련을 했고요. 처자를 건사하기 위해 식당을 운영하기도 했어요.”
외항선 항해사가 배에서 내린 까닭
정 씨가 사는 마을은 진안군 덕태산 백운계곡 아래에 있다. 사시사철 등산객이 바글거리는 길목이다. 해서, 식당은 용케도 성황이었다지. 그러나 접었다. 돈벌이는 될망정 식당일에 발목 잡히기 싫어서였다. 때마침 이웃 마을에 빈집 매물이 나와 그걸 사들였다. 집이라 할 것도 없는 폐가였다. 풀덤불에 묻혀 쓰러져가는 방앗간이었으니까.
“건강이 빠른 속도로 좋아지자 본격적으로 무예 공부를 하고 싶더라고요. 그러기엔 방앗간 자리가 적격이라 본 겁니다. 골격만 남기고 거의 다 털어낸 뒤 다락방이 있는 2층집으로 싹 개축을 했어요. 폐자재나 피죽을 구해 직접 지었어요. 엉성한 집이지만 무려 3년간 혼자 뚝딱거려 완성했지요.”
“어디서든 다시 보기 어려울 재미있는 집이에요. ‘영웅문’이라 쓴 간판도 걸어두셨네?”
“소림사의 무예 영웅들을 기리며 지은 당호입니다. 하하핫! 이전에 살았던 식당집도 홍콩 영화 ‘동방불패’에 나오는 무사의 집을 본떠 지었어요. 무림 고수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동경. 어려서부터 제겐 그런 게 있었어요. 학창 시절부터 태권도, 합기도, 검도 등 다양한 무예를 섭렵했죠. 선원생활을 할 때도 틈틈이 중국의 전통무예를 부지런히 배우고 익혔습니다. 귀농 이후에는 드디어 본격 수련에 접어들었고요.”
“무술과 함께하는 삶의 꿈을 귀농으로 비로소 이룬 사람. 그게 정 선생이라는?”
“그렇죠. 비록 아직은 부족하지만 점점 심화되는 무술 수련을 통해 진정한 만족을 느낍니다. 어릴 적부터 제가 무협지를 끼고 살았어요. 흰 구름을 타고 날아다니는 도인을 꿈꾸었어요. 동심으로 자라난 몽상이었지만 무예와 함께하는 지금의 생활은 제게 너무도 이상적입니다. 인생을 제법 깊게 바라보는 안목과 에너지도 생겼어요. 삶에는 우리가 경험하거나 상상한 것보다 더 아름답고 더 신비하고 더 고귀한 경지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나 할까. 결국 무술 공부가 제게 신세계를 열어준 셈이죠.”
무술과 함께하는 귀농인의 삶
정 씨의 산방 ‘영웅문’은 무협영화 세트장을 닮았다. 오잉! 대번에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는 풍경이다. 집 안팎에 온갖 무술 도구와 특이한 장식물과 총천연색 휘장들이 어지러이 혼재해 있어서다. 내 취향대로 이왕이면 재미있게, 이왕이면 익살스럽게 살겠다는 의지가 읽히는 집이다. 인생이 어차피 쇼라면, 비극보다는 희극 쪽으로 생활을 몰아가겠다는 지향이 엿보인다.
이 집이 완성된 건 2008년. 이후 10여 년간 그는 농사와 무술 수련, 오직 이 둘을 전공 삼아 정진했다. 몰입하면 성취하는 법. 무술의 진도가 질주처럼 빨라지고, 부실했던 몸은 근육에 뒤덮이게 되었다. 그 옹골찬 몸으로 날고 솟으며 고도의 무술 품새를 수련해왔다. 시들어가던 건강을 복구하고, 단련된 몸을 깃털처럼 가볍게 만드는 일이 쉬울 리 있겠는가. 그는 어쩌면 독종이다. 들입다 공부만 파는 ‘범생이’를 닮았다. 또 어쩌면 수행자다. 그가 무술을 통해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건 정신의 산정(山頂)인 것 같다. 이미 ‘신세계’라 일컬을 만한 한 경지를 슬쩍 봤다고 말하는 게 아닌가.
“제가 한때 크리스천이었습니다만 영성이랄까, 영혼의 비밀이랄까, 그런 본질적인 차원을 실감으로 경험한 일이 좀 있었어요. 삶으로만 완료되지 않는 또 다른 세계, 그런 게 있다고 믿게 된 거죠. 그렇기에 더 충실하게 살아야겠다는 각성을 하게 됐고요. 무술 수련은 결국 도(道)를 찾는 공부이자 활인(活人)의 길입니다. 나 하나만 잘 살면 그만이라는 욕심에서 벗어나, 남들에게 이바지할 수 있는 길을 찾는 공부이기도 하고요.”
정 씨에겐 따르는 제자들이 있다. ‘영웅문’ 마당에서 자주 함께 수련을 한다. 지역 문화행사에 초대받아 무술 시연도 한다. 방송 출연도 잦았단다. 때로는 ‘오가피 명인’으로, 때로는 ‘산골에 사는 괴짜 도사’ 명색으로. 한 TV 방송에서는 괴력을 과시했다. 한겨울 계곡 암벽에 꽝꽝하게 뒤엉긴 얼음장을 이야압! 하는 외마디 기합 하나로 산산이 부서뜨린 것. 생생한 현장 영상이라 무슨 속임수를 썼을 여지는 없어 보인다. 범상치 않은 내공, 정 씨는 그 이색적인 기운이 자신의 내부에 축적되고 있다는 데에 스스로 놀란다. “어라, 이게 뭐지? 나 왜 이러지?” 그렇게 말이다. 아울러, 좋은 에너지를 얻었으니 좋은 쪽으로 승화시키자는 결론에 닿았다고 한다. 희한한 재주로 혹세무민하는 사이비 도사가 횡행하는 세상임을 잘 알기 때문이겠지.
‘태평농법’이 가능한 오가피 농사
무술이 정 씨의 정신적 동행이라면 오가피 농사는 단 하나뿐인 생계 수단이다. 유행가만 유행을 타지 않는다. 농작물도 유행을 탄다. 흥행에 롱런하는 작물은 없다. 오가피도 그중 하나. 이미 오래전부터 과잉 생산돼 흔히들 파내고 다른 작물로 전환했다. 실정이 그렇건만, 그는 그걸 왜 신주단지 모시듯 붙잡고 살지?
“일찍이 외항선을 탈 때부터 ‘필’이 꽂혀 귀농의 한 계기가 된 게 오가피입니다. 실제 농사를 지어 장복을 하면서부터는 더 신통방통했어요. 제 체질에 잘 맞는 탓일까, 건강에 이보다 더 좋은 약초는 없다고 부르짖고 싶은 심정이에요. ‘본초강목’엔 오가피가 금은보화보다 낫다고 기록됐더라고요.”
“제아무리 유망한 약초라 해도 농부가 생산을 해서 소득을 올리기까진 힘든 과정의 연속이지 않겠어요? 농사 초보자에겐 더욱 가시밭길이었을 테고.”
“영농 교육도 받았어요. 이웃 농부들에게도 배웠고요. 근데 오가피 농사가 원래 타 작물에 비해 수월합니다. 병충해에 워낙 강해 농약에 의지하지 않아도 되거든요. 이른바 ‘태평농법’이 가능한 작물이라는 거. 풀만 어느 정도 잡아주면 알아서 잘 성장합니다.”
“재배 규모는? 수익성은?”
“현재 2만 평 정도로 규모가 늘었어요. 산지를 사 농장으로 개간하길 거듭했어요. 다른 약초들도 재배하지만 주된 작물은 단연 오가피예요. 오가피 열매를 수확해 진액을 만들어 판매하는데 가공공장도 운영하고 있어요. 소득은 미흡한 수준입니다. 하지만 앞날의 전망은 긍정적이라는 거. 단기간에 떼돈을 벌어 생기는 폐단을 고려한다면, 한동안 좀 궁한 것도 나쁘지만은 않다 보고요.”
상처도 삶의 또 다른 이름
2만 평짜리 약초농장. 200평으로 시작한 농사가 크게 불었구나. 관에서 주관하는 영농지원사업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고 한다. 장기 저리 영농 자금을 효율적으로 운용하면 도시에서보다 빨리 일어설 수도 있다는 게 정 씨의 판단이다. 그렇더라도 어차피 빚. 뭔가에 적당히 쫓기는 게 없는 인생엔 스릴과 탄력이 없다. 그러나 굶주린 멧돼지처럼 꽁무니를 사납게 들이받는 부채에 허구한 날을 허덕일 경우엔 얘기가 달라진다. 마침내 벌렁 나자빠질 수도 있지 않겠는가. 나자빠지자고 참여한 게 인생은 아니겠고 말이다.
“모든 재능을 쏟아 농사를 지어야죠. 당장의 수익구조가 열악하더라도 집요한 공을 들여 미래의 희망이 보인다면 절반은 이미 성공한 거 아니겠어요? 그러자면 나만의 독창적인 농산물 생산에 심혈을 기울여야 해요. 저는 내심 최고의 오가피 생산 농민이라 자부합니다. 가령, 진액을 만들더라도 보통은 대여섯 시간을 달이지만 저는 이틀을 달여 진정한 농축액을 만들어요. 약효가 극대화되는 고품질 가공품을 생산하는 거죠. 이렇게 하면 가격이 좀 비싸더라도 단골이 붙게 마련이에요.”
“도시에서 유능하게 잘 살았다는 사람이 귀농을 해 오히려 뒤죽박죽이 되는 사례가 드물지 않더군요. 주변 귀농 농가들의 형편은 어때요?”
“농사란 몸을 최대치로 쓰는 직업이에요. 쉽지 않다는 거. 열심히 일했으나 건강부터 무너지는 경우가 있어요. 가장 불행한 케이스죠. 반면, 농사를 통해 심신이 함께 건강해지는 사람들도 있어요. 과욕을 버리고, 농사일도 일종의 정신수련이라 여기는 게 상책이라 봅니다.”
“정신수련은 고상한 가치를 지니지만 정작 실천을 결여한 채 거룩한 폼만 잡다 끝나기 십상이죠. 어차피 담금질의 연속인 인생 자체가 이미 두말할 것 없는 수련일 테고요. 새삼 정신수련이 왜 필요하죠?”
“제가 생각하는 좋은 인생은 육체적으로 건강하고 정신적으로 충만한 삶입니다. 그래서 무예에 정진해요. 농사일에도 전념하지만 무예 다음이에요. 무예야말로 진정한 수련이라 믿으니까. 생활에 수련이라는 정신활동이 가세할 경우엔 삶의 질이 달라져요. ‘빛의 세계’라 할 만한 영성까지 갈구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렇게 사는 게 내면에 얼룩진 상처를 줄이는 최상의 처방이겠죠.”
상처. 애초에 삶을 가진 모든 존재들은 상처를 피할 길이 없다. 상처란 삶의 다른 이름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그 무기징역처럼 지겨운 상처를 정 씨는 무술 수련으로 쓱싹 해치우는 것 같다. 그러고서도 여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가 있단다. 아내와의 이혼에서 얻은 번뇌가 그것.
“여자들에게 귀농생활은 너무도 힘들 수 있어요. 한평생 동고동락하자 했으나 견디질 못하더라고요. 아내가 떠난 뒤 제가 방황을 했다면 상처가 더 커졌겠죠. 그러나 보란 듯이 지금 잘 살고 있는 거 아니겠어요? 부끄러울 게 없는 겁니다. 하지만, 그놈의 상처라는 건 영 사라지질 않아요. 끙.”
이혼도 참신한 해방일 수 있는 걸 왜 그러시나? 난 그리 생각하지만, 그는 먹먹한 표정으로 포옥 한숨을 몰아쉰다.
◇ 정경교 씨가 주는 귀농 Tip ◇
•초기의 과도한 투자는 금물이다. 5년쯤 농사 경험을 쌓아 안목이 트일 때 본격 투자를 해도 늦지 않다.
•집부터 먼저 잘 지으려 노력하지 마라. 처음엔 세를 얻어 살거나 극히 간소한 건축을 하자. 그렇게 살다 보면 자신의 취향과 마을 실정에 어울리는 집이 어떤 형태일까를 저절로 깨닫게 되니까.
•독립적인 사생활이 보장되는 도시의 아파트 생활과 농촌 공동체의 관습은 완전히 다르다는 걸 투철히 인식하자. 잘난 척하거나 매사 앞에 나서다가는 소외된다.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와 동대학원 졸업. 광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별별 생각과 궁리를 다하고도 망설이게 되는 게 귀촌이나 귀농이다. 그러나 김석봉(62) 씨는 별생각 없이 시골엘 왔더란다. 무슨 성좌처럼 영롱한 오밤중의 현몽이 그를 이끈 건 아닐 것이다. 그는 매우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거니와, 자나 깨나 귀촌을 숙원으로 여긴 바가 없었으니 하필 후미진 산골로 데려가는 계시를 받았을 리 만무하다. 여하튼, 별 생각 없이 귀촌한 석봉 씨는 별 탈 없이 살아왔다. 별생각이 없었으니 별 볼일도 없었을 성싶지만, 사실은 별 볼일이 벌어졌다. 별별 일이 일어나며 삶이라는 숙제가 술술 풀려나갔다. 지금 석봉 씨는 별나게 즐겁게 산다.
“운명이라 해두죠! 하하하!”
귀촌 내력을 묻자 돌아오는 석봉 씨의 쾌활한 답이 그렇다. 운명이라는 게 인간에게 미리 주입돼 있다는 운명론을 단단히 믿어서 하는 말이 아닐 게다. 사람은 때로 참 알 수 없는 상황이나 추세를 운명에 빗대어 적당히 눙치곤 하지 않던가. 그러니까, 별생각 없이 우연찮게 ‘필’이 꽂혀, 또는 충동의 대리운전에 편승해 산골로 이주했다는 뜻으로 들으면 되겠지.
“어느 날, 친구 따라 지리산엘 놀러왔다가 빈집 하나를 보게 됐어요. 아, 마당에 들어서고 보니 너무도 좋더라고요. 2년째 비워둔 시골집이라 꼴이 말이 아니었으나 마음이 그지없이 편해지는 것이었어요. 마치 집이 저를 끌어들인 것 같은 기분이랄까. 그래서 운명적 만남인가보다, 그런 생각까지 했던 겁니다. 좋아, 이 집에서 살아보자! 그런 결심을 바로 하고 한 달 뒤 이사했습니다. 아내 역시 찬동했기에 걸릴 건 하나 없었어요.”
석봉 씨의 거처는 경남 함양군 마천면 산중턱에 있다. 집 앞으로 펼쳐지는 조망이 기차다. 지리산 최고봉인 천왕봉이 한눈에 쑤욱 들어온다. 거봉(巨峯)을 바라보노라면 뭔가 새삼 거한 꿈이나 참신한 결의가 부푸는 법. 그러나 석봉 씨는 일단 규격화된 도시, 각박한 일상에서 벗어났다는 그 자체로 이미 모든 꿈을 이룬 것과 같은 만족감을 느꼈던 것 모양이다. 귀촌을 계기로 이제 무엇을 새로 시작하겠다거나, 무엇을 하지 않겠다거나, 그런 생각조차 없었다지. 당장 집수리가 화급하기도 했다. 그는 이삿짐을 풀자마자 거처의 환경 보수에 나섰다.
사실 석봉 씨는 ‘환경’에 관한 한 선수다. 젊어 한때 교도관으로 근무했지만, 주로 환경운동가로 분주히 뛰어 중년기를 통과했다. 그의 오랜 거주지였던 진주시의 환경운동연합 상임의장을 맡는 등 열렬한 활보를 했다. 전국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로 지내기도 했다. 이런 그가 돌연 산골로 들어가 처음 한 일이 바로 낡고 헌 옛집의 환경 보수였다. 대대적인 개조가 아니었다. 쓸 만한 기본은 물론, 나무와 흙을 주재료로 지어진 산골집 특유의 소박하고 아담한 본색을 그대로 살린 단장이었다. 그 결과 이젠 시골에서도 흔히 보기 어려운 정갈한 재래식 가옥으로 변신했다. 그게 2007년의 일, 어언 12년이 흘렀다.
“하루아침에 느닷없는 이주를 하자 주변 사람들이 놀랐어요. 환경운동을 하던 사람이 별안간 지리산으로 사라졌다며, 별 쓸데없는 오해들을 하기도 했죠.(웃음) 저로서는 새로운 삶의 서막이었어요. 도시에서는 누리지 못한 자유로운 시간 속에서 감성이라는 걸 되찾을 계기였으니까. 환경운동, 그건 가치 있는 일이지만, 그 이면엔 부대끼고 시달릴 일이 많았습니다. 업무와 사람들에게 말이죠. 삭막한 감성, 그런 걸 느끼며 힘들었어요.”
“감성적인 일상이란 멋진 것이지만, 도시에서나 산골에서나 벌어야만 지속 가능한 생존 조건은 다르지 않겠죠. 생계엔 어떤 대책을 세우셨을까?”
“도시생활을 청산하자 4000만 원 정도가 총재산으로 남더라고. 그걸로 이 집을 샀어요. 은행 대출을 끼고서였죠. 한마디로 돈 없이 들어온 겁니다. 그런데도 걱정이 전혀 없었어요. 아이고, 돈은 물론 농사기술 없지, 무슨 자격증 하나 없지, 산골에서 뭘 해서 먹고사나, 어떻게 살아야 하나, 머리 싸매고 그런 걱정부터 했다면 여길 오지 못했을 겁니다.”
“좌우간 가서 부닥치고 보자! 그게 대책이었어요?”
“느낌이나 용기. 귀농귀촌엔 그런 게 가장 중요하다 생각해요. 그런 게 선행한다면 산골에서 무슨 일을 하든 굶지는 않을 테고요. 아내 역시 경제 문제로 불안해하지 않았어요. 제가 진주에서 환경운동을 하며 박봉으로 겨우 살았어요. 밤엔 아내와 함께 포장마차도 했습니다. 돈을 많이 벌기 위해 심하게 애쓰는 삶, 그건 별로 좋지 않다고 봅니다.”
인생에서 가장 평온한 시절 누려
석봉 씨는 세상과 담을 쌓고 지리산 고사리로 살려고 산에 들어온 게 아니다. 백수건달은 더구나 생리에 맞지 않다. 집을 고친 뒤 그는 슬슬 일을 찾았으니 이게 순행(順行)이다.
“현재 제가 1800평 규모의 밭농사를 하고 있습니다. 물론 제 땅은 아니고, 이웃들의 밭을 빌려 쓰죠. 초기엔 200평 정도를 빌려 농사를 지었어요. 농사로 거둔 생산물들로 한과나 김장김치를 만들어 팔기도 했지요. 농사 외 봄엔 산나물을, 여름엔 오디를, 가을엔 야생오미자를, 겨울엔 얼어붙은 채 나무에 매달린 모과를 따러 다니는 게 일이었고요. 그걸 또 가공해서 판매했고요.”
석봉 씨네 동네는 산촌 특유의 납작하고도 포근한 토담집들이 돌담길 따라 이어져 평화롭다. 초록 물감을 흩뿌리는 숲과 능선과 봉우리들이 마을을 휘감아 어디를 봐도 씽씽하다. 이 청명한 산촌에서 석봉 씨는 뜻밖에도 쓴맛을 경험했다. 마을 사업을 주도하다 도중하차한 것. 그는 원주민들의 동참 유도에 심혈을 기울였으나 한계에 봉착했던 것 같다.
“아쉽더라고요. 마을 공동사업이 차질 없이 진행됐더라면 참 자랑스러운 마을이 됐을 텐데 중도에 올 스톱됐으니…. 마을 사업 성사를 위해서는 때로 관과 맞붙어야 합니다. 그러나 연로하신 분 일색인 마을 주민들은 저항이라는 걸 모릅니다. 사업으로 마을 공동이익이 발생할 것을 알면서도 아예 자기 생각이나 주장 자체를 드러내질 않아요. 과거의 권력자였던 관리들을 아직도 두려워하는 거죠.”
“지리산 산간마을이라는 특성 때문이지 않을까요? 육이오를 처절하게 겪은 트라우마에서 기인하는 소극적 태도…. 빨치산 토벌대로 참전했던 저의 부친은 아직도 지리산 근처조차 가기를 싫어합니다.”
“바로 그겁니다. 낮엔 국방군이, 밤엔 빨치산이 마을을 쥐락펴락했던 세월을 살았으니 그 상처가 얼마나 깊을꼬. 손가락질 한 번에 죽고 사는 세상이었으니 말이죠. 충분히 이해할 만한 기질적 형성이라 봐요. 사실 주민들의 심성은 순박합니다. 작은 것이라도 남에게 신세를 지면 기어이 갚아요. 그게 그들의 오랜 삶의 관습이에요.”
구제받을 길 없는 중생마저 관음보살처럼 살뜰히 보살핀다는 지리산의 슬하라고 하지만, 삶은 이모저모 고역스러워 번뇌를 고이 털어버리긴 힘들 것이다. 그러나 석봉 씨에겐 시름이 없다. 그렇다는 건, 그렇게 보인다는 얘기다. 인생에서 가장 즐겁고 평온한 시절을 누린다는 게 아닌가. 상추씨처럼 흙에 살짝 묻혀 사는 그는, 가족과 함께 담백한 푸성귀 식사를 하는 즐거움을 나날의 꿈이 아롱진 수채화로 여기는 기색이다. 평소의 버릇인 따뜻한 시(詩) 쓰기로, 저 드높은 천왕봉이 소리소문없이 열강하는 겸양의 도리를 가다듬기도 하겠지.
민박 손님이 며느리 된 사연
고리키 왈, 일이 즐거우면 낙원이고, 일이 의무이면 지옥이라지? 석봉 씨는 일이 즐거워 낙원에 사나? 그렇다. 그는 일이 즐거워 견딜 수 없다는 투의 표정을 짓기를 삼가질 않는다. “제가 참으로 좋은 일을 선택했어요!” 그는 그리 당당하고 유쾌하게 토로한다. 대체 무슨 일을 선택했기에 그러나? 민박이다. 민박을 쳐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재미와 만족을 구가하게 되었다는 거다. 들어보자.
“저희 집이 자그만하지만, 본래 모습을 유지해 손질한 덕에 나름 시골집다운 토속적 운치를 되살린 것 같아요. 어느 날 하루를 묵어간 지인이 그러더라고. 저 사랑채가 너무도 근사하다, 시골집에 향수를 가진 이들이 환호할 것 같다, 민박을 한번 해보라! 그 귀띔에 민박을 시작했어요. 결과적으로 탁월한 선택이었죠.”
“살림에 크게 보탬이 됐다는 점에서?”
“물론 가계에 도움이 됐죠. 운이 좋았던 게 뭐냐면, 어느 날 우리 집 앞으로 별안간 ‘지리산둘레길’이 났다는 건데요, 이게 호재로 작용했어요. 상상하지 못한 행운이었죠. 별안간 손님들 발길이 잦아지기 시작했으니까. 그런데 민박을 하는 진정한 즐거움은 수익성에 있는 건 아닙니다.”
“사실 취향에 맞지 않을 경우, 민박도 고달프긴 마찬가지겠죠. 대체 진정한 즐거움이란 뭐죠?”
“제가 환경운동을 하던 도시에서의 나날들은 업무와 타인들, 이 양자 사이에서 냉정한 처신을 해야만 했어요. 감성이나 정감이 끼어들 틈새가 전혀 없는 건조한 관계의 연속이었어요. 그런데 민박 손님과의 관계는 전혀 달라요. 함께 식사를 하고, 술을 마시고, 온갖 하고 싶은 얘기들을 나누다 보면 ‘타인’이라는 감각이 사라집니다. 가족적인 유대감이 형성되는 거라. 그러다 보면 단골이 되고, 수시로 안부를 전하고, 진심을 나누게 되고, 그렇게 좋은 관계를 지속하게 되더라고요. 이게 제 즐거움과 만족의 원천입니다.”
쌍방향 여행이랄까. 손님은 석봉 씨의 내부로 여행을 하고, 석봉 씨는 손님의 생각 속으로 여행을 한다. 그는 이 공정하고도 허심탄회한 관계에 쾌재를 부른다. 도시에서 그가 자주 목말라했던 인간관계의 따뜻한 생태계를 민박으로 구현하는 기쁨을 누려서다. 그는 딱 부러지는 성격의 소유자로 보인다. 그런 그의 내면에 웅크린 의외의 사교적 성향이 푸드덕 날갯짓을 해 관계의 신세계로 인도했을 수도 있겠다.
민박이 불러들인 선연(善緣) 혹은 선물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석봉 씨는 민박 손님으로 가끔 찾아들던 한 아가씨에게 깊은 호감을 느꼈다. 참하고 곱살하기 이를 데 없어서. 그는 결국 이 젊은이를 며느리로 맞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제 아들놈이 현재 지리산 환경단체에서 활동가로 일합니다. 저 참신한 처녀를 이 녀석에게 소개했는데요, 처음엔 서로 심드렁하더니 어인 영문인지 기특하게도 결혼에 이르렀어요.(웃음) 현재 며느리는 우리 집 아래편에 아담한 카페를 차려 둘레길 탐방객들을 맞이합니다. 손녀도 이미 봤고요.”
“3대가 한동네에 사는 게 불편하진 않으세요? 젊은이들이란 때로 발칙한 도발을 하는 법인데 말이죠.”
“‘저는요, 시골이 너무도 좋아요!’ 며느리의 말이 그렇습니다. 불편도 단점도 전혀 없어요. 아이들에게 제가 가끔 잔소리는 하죠. 과욕을 부린다고 돈이 벌리는 거 아니다. 찡그리며 살아봤자 일이 풀리는 거 아니다. 이 애비가 그랬듯이 바르게, 옳게 살아다오. 나쁜 일을 보고서는 참지 마라. 그렇게.”
“그런데 말이죠. 농사하랴, 민박 손님들 맞이하랴, 선생의 일상이 너무 바쁜 거 아네요? 산중의 낙은 한가하게 노니는 데에도 있지 않나?”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즐기는 것에 무슨 결함이 있을까. 좋아하는 일에 시간을 쓰고, 사랑으로 사람을 만나는 것, 그게 자유롭게 사는 길이며 좋은 삶이라 생각합니다.”
석봉 씨의 집, 꽃그늘 나무그늘이 푸르다. 이 푸른 공기 속에서 별다른 불안이나 허기가 없이 산다면 인생도 소풍처럼 가뿐할 테지. 세상의 광기와 탐욕이 침범하지 못할 것이고.
한 무리의 민박 손님들이 들이닥친다. 오늘도 신났다, 석봉 씨.
김석봉 씨가 주는 귀촌 Tip
•귀촌 준비에 너무 강박감을 갖지 말자. 준비를 충실히 해도 실패할 수 있다. 미장이나 목공처럼 실용적인 기술을 미리 배워두는 건 현명하다. 돈벌이 목적의 귀농이라면 더욱더.
•농사에 미리 겁먹을 필요 없다. 수익은 열악하지만 내가 뜻한 대로의 영농을 할 경우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일테면, 기계나 비료를 쓰지 않는 줏대 있는 농법이 그렇다.
•가급적 마을 변두리에 거처를 마련하자. 원주민들과의 갈등 소지를 줄일 수 있으니까.
•민박을 할 경우엔 일단 돈벌이 목적보다 손님과의 소통을 중시하자. 열쇠만 건네면 그만인 펜션과 달리, 민박은 우정을 나눌 수 있다는 것, 그게 매력이며, 성공의 첩경이다.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와 동대학원 졸업. 광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향수(鄕愁)가 귀촌을 촉발했더란다. 영주시 이산면 산기슭에 사는 심원복(57) 씨의 얘기다. 어릴 때 경험한 시골 풍정이 일쑤 아릿한 그리움을 불러오더라는 거다. 일테면, 소 잔등에 쏟아지는 석양녘의 붉은 햇살처럼 목가적인 풍경들이. 배고프면 아무 집에나 들어가도 밥을 나눠주었던 도타운 인정이. 타향을 사는 자에게 향수란 근원을 향한 갈증 같은 것. 그렇다고 사무친 그리움은 아니라 굳이 억지로 누르며 살아온 것도 아니었다. 삶이란 어차피 부평초처럼 객지를 떠도는 일이지 않던가.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향수가 깊어졌던 모양.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들이 더 많아질 즈음, 심 씨는 서울생활을 후다닥 접었다.
“새가 제 둥지에 깃들여 살듯이!” 심원복 씨는 귀촌생활을 그리 비유한다. 도시에선 좀체 느끼기 어려웠던 안심과 평온을 비로소 누린다는 뜻일 테지. 물론 도시에서라고 불안이나 불만을 옆구리에 달고 살았던 건 아니었단다. 숨막힐 것 같은 일상의 수레바퀴 속에서 적당히 착실하고 조신하게, 적당히 눈치보고 적당히 머리 굴리고 적당히 처세하며 살아가는 게 우리네 소시민들의 절박하고도 쩨쩨한 현실. 그 역시 그렇게 지극히 평범하게 살아왔던 것 같다. 발칙한 일탈 따위는 그의 종목이 아니었으며, 과한 출세욕이나 물욕에 허덕이며 살지도 않았을 게다. 심 씨의 유순해 보이는 인상에 이미 쓰여 있다. 별다른 폭풍과 이변과 무용담이 없었을 얌전한 인생 드라마의 표징이라는 게.
심 씨가 아늑하게 옴팡진 여기 산기슭에 집을 짓고 귀촌한 건 10년 전. 땅은 이미 그전에 사두었다. 소백산으로 등산을 갔다가 무심코 들른 산촌에서 만난 싼 매물이었다. 길도 없는 농지 1200평을 우발적으로 사들였던 것. 오우, 나중 여기에 허름한 흙집이라도 하나 짓고 살면 되겠는걸! 그런 생각으로 말이다. 땅을 미리 잡아놓은 덕에 귀촌 행보는 빨랐다. 애초 생각했던 간소한 흙집 대신 번듯한 목조주택을 지었다. 바지런히 직장생활을 했기에, 좀 모아둔 게 있었기에, 귀촌해서 생활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여력은 됐다. 그렇게 사뿐한 산골살이를 시작했다.
“시골에 가서 무슨 획기적인 생활의 변화를 딱히 의도하거나 꿈꾸진 않았습니다. 번잡한 도시에서 벗어나서 마음 편하게 살면 그만이지 싶었거든요. 도시에서나 시골에서나 인생사 희로애락이야 뭐가 다르겠는가, 하는 생각으로 그냥 순순히 적응하며 살면 될 거라 봤지요. 흔히들 귀촌 초기의 갖가지 고생담을 토로하는 것 같은데 저희 부부에겐 그런 게 거의 없었어요.”
“낯설고 물설은 산골에 잠시 놀러온 것도 아니고, 아예 새 살림을 시작하는 상황이었는데 전혀 곡절이 없었던 거예요?”
“아마도 아내는 초기에 이모저모 고생이 좀 있었을 겁니다. 제가 직장을 정리하기까지 아내 먼저 이곳에 내려와 잠시 혼자 살았으니까. 보시다시피 저희 집이 마을과 떨어진 골짜기에 있는 외딴집이에요. 일단은 밤이 엄청 무서웠다 하더라고요. 근데, 외딴집의 장점도 많아요. 오붓하고 조용하고, 게다가 어느 정도 이웃들의 관심권 밖에 있으니까.”
“귀촌 정착은 의자를 만드는 일이나 뒷산 꼭대기에 오르는 일과 달리 만만치 않은 공력을 쏟아야만 할 겁니다. 그래서들 미리미리 준비를 철저히 하고 내려가라 하죠.”
“제가 보기보다는 꽤나 태평한 사람입니다. 매사 준비나 계획 같은 걸 하고 살질 않았어요. 직장에서 업무를 볼 땐 불도저처럼 밀어붙이기도 하고, 여차하면 호통도 내질렀지만 타고난 천성은 느긋하고 무계획적이에요. 귀촌 준비, 그런 거 전혀 없이 내려왔어요.”
“계획 대신 그때그때 상황에 적응하는 게 상책이라는? 흐르는 물처럼?”
“사전 귀촌 계획이 오히려 일을 어렵게 만들 수 있습니다. 제아무리 치밀한 계획을 세웠더라도 시골의 현실적 형편과 어긋나는 수가 많으니까. 제게 있었던 계획이라면 나를 내세우지 않겠다, ‘틀’ 안에 나를 가두지 않겠다 정도였죠. 이건 소극적인 태도로 보일 수 있지만 오히려 신속하고 효율적인 정착을 가능케 했습니다. 목에 힘을 빼고, 긴장할 것 없이, 예컨대 소풍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내려오는 게 더 지혜로울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잊을 수 없는 귀촌 첫날의 별빛
소풍처럼! 지독한 게 삶이라 하지만 지독하게 애만 쓰다가 허무맹랑한 파장을 보기 쉬운 게 또한 인생이다. 그러하니 억지로 애쓰지 말자, 귀촌에 너무 큰 기대를 걸지 말자, 김밥 싸 들고 소풍 가듯이 가볍게 운신하자, 심 씨의 내심엔 그런 게 있었던 모양이다. 그 외에 구체적인 구상이나 기어이 이루고 싶은 그 무슨 목표를 정하지 않은 채 산골살이를 시작했던 것 같다. 마치, 내가 과연 어떻게 살아가나 어디 두고보자, 하는 투로.
“산골 자연 경관이 너무도 마음에 들었어요. 그 한 가지만으로도 귀촌의 가치가 충분하다고 봅니다. 은퇴한 분들에게 어서들 내려오십쇼,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자신 있게 권장하는 이유 역시 거기에 있어요. 제가 낭만적인 사람이 전혀 아니지만 나무와 달, 별을 즐기게 되었는데요, 그 순수한 자연 풍경들이 마음을 하염없이 평온하게 만들기 때문이에요. 뭐니 뭐니 해도 마음 편히 사는 게 행복이지 않겠어요? 귀촌 첫날 밤, 침실 창밖 허공으로 쏟아지던 별빛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달도 별도 날마다 바라보다 보면 심드렁해지지 않던가요? 낭만주의자들의 음풍농월조차도 반복되면 싱거워지는 거라서.”
“초반엔 권태를 느낄 겨를이 없었어요. 딱히 할 일을 만들진 않았지만 텃밭 농사하랴, 산나물 뜯으러 다니랴, 산책하랴, 하루해가 어떻게 넘어가는지 모를 지경으로 아내와 함께 즐겼어요. 그런데 말이죠, 한두 해가 지나자 슬슬 심심해지더라고요. 친구들의 방문도 서서히 줄어들다 끊어지고, 시간이 무료해지고. 그래서 농사를 본격적으로 짓기 시작했죠.”
“어떤 작물들을?”
“1000평 농토에 고추, 생강, 도라지, 호박 등 이 마을에서 흔히들 하는 작물을 재배했어요. 인건비를 아끼려고 모든 일을 아내와 둘이서 해냈지요. 양봉도 해봤고, 된장을 만들어 팔기도 했고요. 한 해 2000만 원 정도의 매출을 올리기도 했지만, 어느 해엔 기상 악화로 망치기도 했어요. 농사란 정말 어려운 일이라는 걸 실감했습니다.”
심 씨의 집 풍경을 볼까? 포옹처럼 터를 에워싼 야산 중턱에 들어앉은 남향집이니 밝고 따사롭다. 집도 마당도 널찍하다. 꼬끼오! 닭장에선 수탉이 관악기처럼 목을 길게 빼고 청을 돋워 산중 적막을 비틀어댄다. 집 모서리엔 한때 꿀을 얻었던 폐 벌통 스무 개쯤이 쌓여 있다. 뒤뜰 장독대엔 후덕하게 생긴 항아리들이 즐비하다. 나무나 화초 가꾸기엔 별 취미가 없는지 이렇다 하게 공들여 운치 있게 꾸민 기색이 없다.
너른 발코니나 마당에 의자라거나 앉을 만한 자리 하나 마련해두지 않은 걸 보면 주로 서서 움직이는 분주한 일상을 보내는 모양이다. 집 둘레 곳곳에 널브러진 폐물들에서도 이 집에 사는 부부가 미화작업에 신경 쓸 겨를 없이 근로에 시간을 아껴 쓴다는 걸 짐작할 만하다.
마당 한편에 설치한 비닐하우스에선 심 씨의 아내가 쇠스랑으로 텃밭을 고르고 있다. 어디 딴 데 눈 한 번 돌리는 법 없이 열심히, 혹은 고독하게.
이분은 한때 병을 얻어 고생을 했다. 그게 귀촌을 서두른 요인이기도 했다지. 산골의 어디에 사람의 몸을 고치는 미약이 숨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귀촌을 통해 다 죽어가던 사람이 살아나기도 하는 걸 나는 간혹 봤다. 심 씨의 아내 역시 귀촌 이후 건강을 완연하게 회복했다는 게 아닌가.
“저희 부부는 외식을 안 합니다. 농약 친 식재료들로 만들어진 음식을 싫어해서죠. 직접 온갖 채소들을 깨끗하게 가꿔 찬을 만들어 먹기, 이 역시 산골에 사는 행복 중 하나입니다. 그게 건강비결이라고 봐요. 요양을 위해서라면 가급적 깊은 산골로 들어가는 게 좋을 겁니다. 농약을 엄청 뿌려대는 과수 단지나 유해 가스를 배출하는 축사 지구를 피해야 한다는 거죠. 그런 곳은 도시보다 공기의 질이 더 나쁠 수도 있으니까.”
“도시에서와 달리 거의 모든 시간을 함께 보내야 하는, 어쩌면 불운한 여건에 처한 부부 사이에 흐르는 공기의 질도 중요하겠죠? 귀촌한 부부들이 대화단절이라거나, 도시에서보다 갈등을 더 겪는 경우도 드물지 않더군요. 부인은 산골생활에 만족하시나요?”
“만족할 리가요. 여자에게 시골은 아무래도 불편이 많으니까요. 체념하고 사는 것 같아요. 부부싸움도 하지만 그때마다 화해를 하죠. 친구처럼 그냥 무덤덤하게 삽니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애쓴다고 좋아지는 것도 아니더라고. 뭐 그래도 밥은 얻어먹고 삽니다.(웃음) 다툼이 있더라도 그게 다 내 탓이거니, 그리 여기고요.”
“‘내 탓’이라는 건 뭐죠?”
“흠, 제 약점이랄까, 제가 느려터진 면이 있어요. 게으름과는 좀 다른 건데요, 옆에서 볼 땐 당치 않은 여유나 허세를 부린다고 느낄 수도 있겠죠. 그러나 어릴 때부터의 천성이라 어쩔 수 없더라고요. 좀 더 느린 숨결로 여유롭게 살자! 귀촌 때 그런 다짐도 했고요.”
“마을 이장을 맡으셨죠? 주민들의 신임을 얻지 않고선 그거 어려운 거 아녜요?”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했어요. 저를 내세우지 않고 배운다는 자세로 어울렸어요. 술자리도 함께하고 오락 화투도 같이 치며 섞여들었어요. 시골에선 사생활이라는 게 어렵습니다. 뭐든 묻거든요. 답을 안 해주면 오해를 살 수 있고요. 그런 풍토를 긍정하고 잘 적응해 주민들의 사랑을 받아야 정착할 수 있어요.”
마을에서 가장 바쁜 사람
사람의 마음은 새장에 달린 문과 같아서 활짝 열어젖힐 때 비상할 수 있다. 시골에 살며 아는 척, 잘난 척, 멋있는 척을 하다 보면 새장에 갇힌 신세를 자초할 수 있다. 그렇지만 자세를 낮춘 갸륵한 선의마저 곧이곧대로 믿어주질 않는 경우가 많은 게 세상이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 아파하는 게 인간이라는 종이다. 시골인들 혼선이 없으랴.
“험한 꼴을 당한 적은 없으셨고? 겉으로는 웃지만 속으로는 울고 싶은 상황이라든가.”
“텃세라는 건 주로 집성촌에서 벌어집니다. 60여 명의 각성바지들이 살아가는 이 마을 주민들은 다들 점잖아요. 귀촌하고서 집들이를 했는데 온 마을 사람들이 오셨더라고요. 이 마을에 이주한 최초의 외지인이라며 반겨줬어요. 그 분위기를 죽 유지한 셈이죠.”
이장 일을 보면서부터 심 씨의 양상이 급변했다. 마을에서 가장 바쁘고, 가장 유명하고, 가장 당당한 사람이 되었다. 굵직굵직한 마을 사업들을 펼쳐 성과를 거둬서다. 자칫 먹은 것 없이도 바가지로 욕먹을 수 있는 게 마을 사업 선도자다. 그는 공생 공영을 열심히 추구한 나머지 흠집 난 게 없는 것 같다. 남을 위하는 일이 곧 나를 위하는 길임을 아는 이의 활보라 할 수 있겠다.
“귀촌하려는 분들에게 꼭 귀띔하고 싶어요. 재능과 역량을 마을에 쏟는다면 반드시 좋은 기회를 포착할 수 있다는 걸. 요즘 정부나 지자체가 시행하는 마을지원사업의 규모나 종목이 점점 늘어나고 있음에 착안하시길 바랍니다. 마을의 공적 이익을 창출할 수 있으며 개인의 이익도 도모할 수 있으니까.”
심 씨는 고개를 뒤로 꺾으며 큰 소리로 자주 웃어젖혔다. 우스울 게 없는 대목에서도 마구 웃으니 난 그게 우스워 덩달아 웃길 거듭했다. 적극적인 사교의 기술일 테지. 몸에 밴 겸양의 꽃으로 터져나온 홍소(哄笑)일 수도.
심원복 씨가 주는 귀촌·귀농 준비 Tip
•최소한의 생활비(월 100만 원 정도)를 조달할 수 없는 재정 형편이라면 귀촌하지 않는 게 좋다. 비참해질 수 있으니까.
•농사로 돈을 모으기는 정말 어렵다. 노동 강도도 세다. 섣불리 농토에 투자하지 말자. 일단 맨몸으로 들어와 빈집과 묵은 전답을 빌려 수련기를 갖는 게 좋다.
•시골생활을 하다 보면 무료해진다. 변화가 없는 일상에 지칠 수 있다. 그럴 때 자연과의 교감이 필요하다. 산야에 관심을 가지다 보면 감성도 길러진다. 열렬한 취미 한두 가지를 가지고 내려온다면 한결 바람직하고.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와 동대학원 졸업. 광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자연을 벗 삼아 여유롭게 살아보고 싶은 생각으로 ‘전원주택’을 지어 시골로 떠났으나 적응을 못하고 1년도 채 못 되어 도시로 되돌아오는 사람이 많다. 주택의 규모가 너무 크고 비싸 팔리지 않을 경우에는 도시로 돌아오고 싶어도 불가능하다. 최근 잘 지어진 멋진 전원주택이 경매 물건으로 많이 나오는 것은 이러한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세컨드 하우스’다. 물론 이전에도 ‘세컨드 하우스’는 있었다. ‘별장’으로 불리던 집인데 오늘날의 ‘세컨드 하우스’ 개념은 좀 다르다. 별장은 고급스럽고 호화롭고 큰 주택이다. 그러나 세컨드 하우스는 자연을 만끽하고 싶을 때 내려가 지낼 수 있는 집이다. 물론 도시에 메인 하우스가 있어 언제든 되돌아갈 수 있다. ‘세컨드 하우스’의 조건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규모가 작아야 한다. “초가삼간이면 족하다”는 옛말이 있듯 방, 마루, 주방만 있으면 된다. 둘째, 도시에서 가까워야 한다. 문화시설과 편의시설을 이용하려면 지하철로 1시간 거리에 있는 게 좋다. 또 30분 거리에 미술관, 박물관, 문학관 중 하나가 있으면 금상첨화다. 이외 절, 교회, 성당 등의 종교 시설이 있고 전통시장도 열리는 지역이라면 더할 나위 없다.
칼럼니스트 조용헌 씨가 시골에 마련한 집에서 글을 쓴다는 신문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도 작은 규모의 시골집이 있어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내려가서 쉰다는 이야기를 책에서 읽었다. 홍만희 시인도 홍천에 있는 세컨드 하우스에서 시 낭송회를 연다. 이처럼 세컨드 하우스는 도시인들의 꿈이 되었다. 하지만 막상 작은 집이라도 마련하려면 쉽지 않다. 그래서 새로 생겨난 직업이 ‘시골 마을 빈집 디렉터’다.
‘시골 마을 빈집 디렉터’는 어떤 직업?
시골에는 버려지거나 아무도 살지 않는 빈집이 많다. 이런 집들 중에서 규모가 작은 집을 손질해 도시 사람들이 비교적 저렴한 비용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 ‘시골 마을 빈집 디렉터’다. 머리를 비운 채 아무 생각 없이 쉴 수 있는 공간,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공간, 글 쓰는 공간, 각종 모임을 할 수 있는 공간 등 사용자가 원하는 대로 다양한 공간을 디자인해준다. 기획은 물론 빈집을 손질하고, 집 소유자와 연결해주는 일까지 모두 총괄해서 진행한다. 부동산 중개 업무를 보는 사람들도 전원주택을 소개하지만 그들은 주로 규모가 큰 집들을 중개한다. ‘시골 마을 빈집 디렉터’와의 차이점이다.
시니어에게 ‘시골 마을 빈집 디렉터’는 아주 적합한 직업으로 보인다. 운동 삼아 다니면서 경제활동까지 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다. 나도 쉬엄쉬엄 다니면서 이런 일을 즐겁게 하고 싶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 직업에는 인턴 과정이 없다. 이 분야에도 인턴 활동을 하며 배울 수 있는 프로그램이 생겼으면 한다. 기회가 오면 꼭 도전해보고 싶다.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취득한 후 한 번도 사용하지 못한 분들에게도 은퇴 후 제2의 직업으로 ‘시골 마을 빈집 디렉터’를 권하고 싶다.
현재 한국 농업·농촌에 대해, 이동필(李桐弼·63) 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은 간단하게 ‘전환기’라고 명명했다. 자신의 고향이자 농업 현장인 경상북도 의성군에서 농부로 일하면서 느낀 솔직한 속내였다. 그러나 그는 전환기 속에서 맡은 바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결과에 책임을 지고자 한다. 장관 자리에서 물러난 후 스스로 돌아보는 ‘마음공부’ 뜨락에 씨앗을 뿌리고 일구는 데 모든 것을 바치고 있는 게 그 증거다. 농촌경제연구원에서 장관을 거쳐 귀향한 후 농부의 삶을 살아가는 그에게서 한국 농업과 농촌이 직면하게 된 현재와 미래의 활로에 대해 물어봤다.
경상북도 의성군은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마늘로 친숙한 도시다. 그리고 지난 2018 평창동계올림픽에서 특별하게 유명해진 지역이기도 하다. 전 국민의 관심을 모았던 컬링 종목의 스타들이 모두 의성 출신이라는 점 때문이다. 의성은 컬링 종목의 스타들을 꾸준히 배출하고 있다. 이제 대한민국 컬링의 수도라고 봐도 좋을 정도로 아낌없는 지원도 이루어지고 있다.
30년 뒤면 사라질 수도 있는 도시
그러나 이처럼 사람들에게 알려진 의성의 대외 이미지와는 달리, 이동필 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은 걱정이 많았다. 그는 인터뷰를 하던 중 서산대사의 시를 읊었다. ‘환향’이라는 제목의 시다.
삼십 년 만에 고향에 돌아오니
사람은 죽고 집은 부서지고
마을은 황폐화됐는데
청산은 말이 없고 봄 하늘은 지는데
어디서 두견새 우는 소리만
들리는구나
그야말로 막막하다.
“이게 내 심정이에요.”
그의 먹먹한 기분은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들 때문이었다. 그가 장관 퇴임 후 한 명의 농부가 되어 귀향한 의성군은 2016년 ‘중앙 이코노미스트’의 분석에 따르면, 30년 뒤 사라질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지역이었다. 그리고 그 자신도 그러한 현실을 체감하고 있었다.
“고령화, 양극화, 그리고 예전 같은 공동체가 스러지고 있다는 점이 문제죠. 연구소나 중앙부처에 있을 때는 망원경으로 세상을 봤지만 현장에서는 현미경 보듯 보이지요.”
장관, 농부가 되다
이 전 장관은 뼛속까지 농업인이다. 그의 경력을 보면 바로 드러나는 사실이다. 농촌지도자였던 아버지를 둔 그는 영남대학교 축산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와 미국 미주리주립대학교에서 농업경제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한국농촌경제연구원에서 30여 년 넘게 근무하면서 농촌의 현실과 문제를 연구하고 대안을 내놓는 일을 했으며 2013년에는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으로 입각해 역대 최장수인 3년 6개월의 시간을 지냈다. 그리고 2016년 9월 5일 퇴임한 다음 날 고향으로 돌아와 2500평(8264㎡)의 땅을 관리하는 농부가 되었다.
“요즘은 아침 다섯 시에 일어나 동물들 밥 먹이는 일로 하루를 시작해요. 온몸이 타박상과 상처투성이예요.(웃음) 며칠 전에는 경운기 사고가 나서 갈비뼈가 부러졌어요. 도처에 해야 할 일이죠. 옛날 방식으로 농사를 하면 힘만 들고 돈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실감했어요.”
귀향할 때 나름 세운 ‘일이삼사 원칙’이 있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 하루 두어 차례 텃밭을 돌보고, 삼시 세끼 어머니와 밥을 먹고, 사람들이 찾아오면 말동무가 된다’는 것이었다. 3년간 보리·콩·팥·참깨·마늘·양파·옥수수 등 온갖 농사를 다 지어봤다.
그 과정에서 사모님은 반대 안 했느냐고 묻자 퇴직한 그날 밤에 어찌 내려가느냐며 딱 하루 반대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후로는 함께 고생하면서 도와주고 있다 한다.
“가끔 외롭고 답답할 때가 있는데 아내가 그걸 풀어줘요. 신세를 많이 지고 있죠.”
남는 농산물을 판매하는 수고로움은 모두 아내 이정숙 여사가 맡아서 하고 있다. 노모를 돌보고 남편 수발하고 농사일까지 거들며 집안 곳곳을 돌보는 1인 다역을 하고 있는 만큼 이 전 장관은 이런 아내를 인생 최고의 반려자라고 손꼽았다.
고향에 돌아온 그는 먼저 오래된 집을 손보면서 마당에 5평(16.5㎡)짜리 사랑채를 지어 사원재(思源齋)라 이름 붙였다. 농사일하며 이곳에서 책을 읽고 손님을 맞는다. 사원재라는 말은 조상과 부모, 그간 살아오며 도움을 줬던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의리를 잊지 않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는 또 40년이 다 된 부친의 생가 마당 한가운데에 작은 정자를 세우고 애일당(愛日堂)이라 이름 지었다. 노모가 황반변성 때문에 눈이 불편하신데 남은 날 하루하루 즐겁게 사셨으면 좋겠다는 뜻을 새겨 넣었다. 이 또한 안빈낙도(安貧樂道)가 아니겠는지.
‘故鄕創生’에 몰두하다
하지만 눈앞의 일을 두고 보고만 있을 수는 없어 종일 흙에 파묻혀 있다 들어오면 너무나 피곤해 바로 쓰러져 자는 현실. 그는 자신의 현재를 춘추전국시대 제자백가 중 농가에 비유했다.
“이 사람들은 농사를 짓는 게 세상 근본 이치란 주장을 했어요. 그런 주장을 갖고 등나라를 갔죠. 그 나라 임금이 너희들의 주장은 뭐냐 물어보니 첫째는 근면 검소해야 한다, 둘째로는 왕과 왕비도 직접 농사를 지어야 한다고 대답했어요. 왕이 그 말을 듣고는 첫 번째는 공감할 수 있는데 두 번째는 못하겠다며 거절했죠.(웃음) 이 사람들은 농업인들과 함께 일만 열심히 하다 보니 자기 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지 못했어요. 당시 유가들은, 실천보다 말로 사는 사람들이니까 자신들의 주장을 다 책으로 만들었죠. 나도 이렇게 농사일만 하다가는 정작 농촌의 살길에 대해 글을 써보겠다는 생각은 시작도 하지 못하고 마는 게 아닌가 걱정돼요.(웃음) 이제 좀 바꿔야겠어요.”
그렇다고 그가 다시 정치의 세계로 돌아올 것이라는 얘기인가 하면, 전혀 아니다. 이번 지방선거 때도 얘기들이 있었지만 그는 손사래를 쳤다.
“밖에 나가면 말이 많아 거의 두문불출하고 있어요. 무슨 운동을 하거나 당을 같이 해보자며 찾아오는 이도 있지만, 차나 한잔 먹고 가라며 돌려보내요. 한 눈 팔지 않고 텃밭 일구며 스스로를 돌아보고 평생의 과업인 희망찬 농업, 활기찬 농촌을 만드는 생각을 하기에도 바쁩니다.”
그러고 보니 그의 집에는 신문도 TV도 없었고 라디오 하나만 틀어놓고 있었다. 외부 활동이라면 가끔씩 강의를 나가는 정도다. 요즘 그의 주된 관심사는 ‘지방소멸과 고향창생’, ‘청년창업과 귀농귀촌’ 그리고 ‘농협의 역할’ 등이다. ‘늙고 지친 고향을 어떻게 활성화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화두와 관련한 고민거리인 것이다.
극장 하나 없는 곳, 젊은이들에게 와서 살라 말할 수 있나
“지역발전이라 하면 흔히 돈 버는 얘기만 하는데, 그에 못지 않게 이웃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너그러운 마음과 역량을 갖춘 인재양성, 그리고 생활환경 및 복지 서비스의 질적 개선도 중요하다고 봐요. 의성만 해도 극장 하나 없어요. 그런데 말로만 여기 와서 살라고 권유할 순 없죠.”
사실 농업·농촌 발전을 위해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많은 예산과 인력을 동원해 노력을 하고 있으나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 전 장관은 지역활성화를 위해 일하는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중앙정부는 지방 분권과 지원체제 정비를 하고 지방에 도전할 기회를 준 후에 결과에 책임지도록 해야 해요. 지역의 특성과 농가를 유형별로 구분하여 맞춤형 정책을 추진하는 것이 자원의 효율성을 높이는 길이거든요. 또한 조건불리지역 직불제도를 개선하여 개발 여건이 불리한 지역에 대해 지원을 차등화할 필요가 있어요.”
그는 농어촌상생협력기금의 조속한 시행과 함께 고향기부금제를 도입할 것을 적극 주문했다.
“무역이득공유제의 대안으로 매년 1000억 원씩 10년간 모으는 농어촌상생협력기금을 조성하기로 했는데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있어요. 당시 한중 FTA 협약 비준을 전제로 여야가 합의한 약속입니다.”
아울러 지방의 역할을 강화하고 주민과 민간 부문의 참여를 촉진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특히 농촌에 젊은 사람들을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스마트팜이나 공동경영체 등을 통해 고부가가치 있는 농산물을 생산하고 가공, 유통, 체험관광 등과 결합한 6차산업으로 매력적인 일자리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도농교류를 하고 귀농·귀촌을 통해 외부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을 책임있게 추진하기 위해서는 지역 스스로 자기들의 문제와 가능성, 부존자원을 기초로 구체적인 목표를 세우고 전략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농가 유형별 육성정책 완성해야
이는 그가 장관 시절에 핵심적으로 추진한 과제 중에서 못 다 이룬 숙원과도 관계가 깊다.
“농정의 새 틀을 짜고 싶었어요. 농업·농촌을 둘러 싼 대내외 여건이 다 바뀌어버린 지금은 그 변화에 걸맞게 정책 프레임도 달라져야 한다고 봤죠. 그중 하나가 농업경영체를 등록하고 이에 기초하여 농가 유형별 육성정책을 추진하는 일이었어요.”
그는 경영주가 65세 미만이면서 소득이 연 5000만 원 이상인 농가는 규모 있는 농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장기저리 융자와 컨설팅, 경영안정대책 등 맞춤형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후계자가 없는 영세고령농가는 농업 경영에서 은퇴를 유도하여 사회안전망으로 커버하고, 나머지 중간 규모 농가는 가공, 유통, 관광 등을 결합한 6차산업화를 통해 추가적인 소득원을 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농가를 한데 묶어놓고 획일적인 정책을 추진하니 돈은 돈대로 쓰고 손에 잡히는 효과를 못 볼 수밖에요. 이웃인 성주는 참외 하나만 갖고도 잘살아요. 참외 주산지로서 품목이 특화되어 전후방 관련 산업이 발달하고 6차산업으로 수급까지 안정되니 가능한 거죠. 이처럼 지역 및 농가 유형별 육성정책을 완성해야 했는데, 끝장을 못 보고 나온 게 아쉬워요.”
지역의 농업·농촌 관련 사업이 중앙정부에 지나치게 의존하다 보니 천편일률적으로 획일화해 특성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도 같은 문제다. 농촌 중심 활성화 사업을 보면 지역 여건이나 부존자원에 대한 고려없이 주민 의사나 참여도 이뤄지지 않는 상태에서 건물이나 지어놓고 활용을 못해 심지어 전기세도 안 나온다는 얘기를 듣는다는 것이다.
“지역이라는 공간 정책 위에 산업 정책을, 그 위에 사람을 대상으로 한 복지정책이 이루어져야 시너지 효과를 얻을 수 있는데 제각기 따로 놀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 사후관리는 안 되고 지자체는 책임 안 지려 하고…. 지역이 정책을 좀 더 주도하고 책임지도록 추진체계를 보강해야 해요.”
어쩌면 농협이 대안이 될 수도
그는 1·2·3차산업을 융복합해 농가에 높은 부가가치를 제공하고 일자리를 창출하는 6차산업을 주창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가 이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아시아 몬순기후대의 영세소농이란 구조적 특징 때문이다. 여름에 고온다습한 기후 때문에 논농사에 특화하다 보니 계절별 유휴인력이 발생하게 되고, 유휴노동력을 생산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농외소득원을 개발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된 것이다. 농업생산이란 1차산업과 가공이란 2차산업, 그리고 유통 및 관광서비스 등의 3차산업을 결합한 6차산업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그렇지만 현실은 생각처럼 간단치 않았다. 그는 지난해 수확한 팥 서 말과 양파 100kg을 팔 곳이 없었던 것이다. “콩 750kg은 다행히 인근 농협에 판매하였으나 시중보다 낮은 가격으로 넘겼어요. 오죽하면 농민들이 농협에 바라는 소망이 수확한 농산물을 제값 받고 팔아달라는 것이겠어요. 농사짓는 것도 힘들지만 판매하는 것은 더 어렵습디다.”
정부는 농협 개혁을 통해 경제사업을 활성화하려고 애쓰고 있으나 아직도 체감하는 성과는 얻지 못하고, 대부분의 사업장들도 적자 신세를 면치 못하는 실정이다. 더구나 농업인의 고령화로 준조합원 수가 늘어나면서 신용사업에 매진하고 있는 상황이다.
“일본은 농협 회원 중 농사를 짓지 않는 준조합원이 정조합원보다 30% 정도 많고, 농협 계통 매장의 농산물 책임판매율이 50%밖에 안 된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농협이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2014년부터 개혁을 시작했어요. 그런데 우리나라 농협은 정조합원이 준조합원보다 훨씬 더 많은데도 농산물 책임판매율은 25%에 불과해 농민들로부터 돈장사만 한다고 비판받는 거예요.”
그는 오랜 연구생활과 장관으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가감 없이 농협 유통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아울러 고령화로 인한 지방소멸 시대에 있어서 주민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농협의 새로운 역할을 제시했다.
“농협이 지역 단위의 6차산업을 주도해야 한다고 봐요. 경제사업의 수지개선을 위해서는 경영 능력을 향상하고 규모화, 전문화해야 합니다. 인근 지역과 품목을 생산하는 농협과의 통합 또는 사업을 연계하거나 연합사업단을 운영할 수도 있겠지요.”
어째서 농협일까? 그는 지금처럼 개별 농가가 따로따로 로컬푸드니 직거래니 하는 식으로 장사를 하면 비용절감을 고사하고 소비자 신뢰를 얻기 어렵다고 보고 있다. 표준화, 규격화가 곤란하기 때문이다. 개별 농가가 하기 힘든 그 작업을 농협이 해줬으면 하는 의견이다.
“고령화 사회에서 농협은 농기계를 구비하고 영세농들의 영농을 대행할 수도 있습니다. 농촌지역의 교육, 의료, 복지 등 서비스 전달 체계로서 농협의 새로운 역할도 생각해볼 수 있겠죠. 그것이 농협이 살길이에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결국 농협이 대체 뭐하는 곳이냐는 정체성 논란이 심화될 겁니다. 농협이 당면한 현안을 극복하고 지속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주민들의 걱정을 덜어줄 수 있도록 스스로 혁신하고 노력해야 해요.”
귀농·귀촌, 국가 정책으로 시행해야
이 전 장관은 요즘 세상이 시끄럽다는데 다 잊고 산다고 했다. 해야 할 일이 많아서 그렇기도 하지만 깨끗한 자연환경 속에서 씨 뿌리고 가꾸는 즐거움이 여간 아니라고 한다. 농업과 농촌에서 미래의 꿈을 키우는 젊은이들은 물론 은퇴 후 여생을 편안하게 보내려는 사람들에게도 보람을 느끼는 새로운 삶이 가능함을 농촌이 가르쳐준다고 말했다. 지역의 균형발전은 물론 개개인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는 귀농·귀촌 정책은 어느 한 부처가 아니라 여러 부처가 협력해 국가 차원에서 종합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금의 농촌은 흡사 요양병원과 비슷해요. 우리 집 왼쪽으로 있는 집 세 채는 빈집이고, 오른쪽의 두 채는 독거노인이 살고 있어요. 소멸위험 지역에서 벗어나는 길은 외지 인구를 유입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러려면 이사비 몇 푼 보태주는 게 자랑이 아니라 이주자들이 필요한 것을 도와줘야죠. 여기서 태어나 20여 년 살았고, 지금 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저도 적응이 쉽지 않은데 낯설고 물선 객지로 이사와서 얼마나 답답한 게 많겠어요? 지역을 찾아 온 외지인을 축복으로 여기고 따스하게 배려하는 너그러운 이웃이 있어야 이곳에 눌러 살고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킨답니다.”
그는 귀농·귀촌 통계확립과 관련 정책의 정비, 농촌지역에 대해 1가구 2주택에 추가적인 감세를 포함한 제도정비등과 함께 주민들의 귀농·귀촌자들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제는 청복(淸福)을 위해 노력할 때
오로지 고향의 발전과 활기찬 농촌을 위한 생각에 둘러싸인 그에게서 못다한 책임감과 꺼지지 않은 열정이 보였다. 해야 할 일과 책임이 없다면 그렇게 힘들게 생활할 리가 없다. 그에게 견딤의 비법을 물었더니 정약용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다산 정약용은 복을 열복(熱福)과 청복(淸福)으로 나눴어요. 열복은 출세해 권세를 누리는 것이고, 청복은 청빈한 삶을 통해 욕심과 번뇌를 지움으로써 얻는 복이죠. 다산은 열복보다는 청복을 얻기가 훨씬 힘들다고 말했습니다. 제 인생을 돌아보면, 이미 열복은 과분하게 누린 셈이죠. 이제 마음을 내려놓고 이웃과 더불어 즐겁게 사는 복이 남았습니다.”
청복을 누려보겠다고 다짐했다는 말에서 그가 유독 마음가짐을 강조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더구나 그에게는 아직 풀어야 할 평생의 숙제, 희망찬 농업과 활기찬 농촌을 통해 국민이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보자는 도전이 있다. 도전은 사람에게 살아가야 할 이유를 만들어준다. 그래서 마음의 가치를 알게 된 그는 사람들에게 마음이 만들어내는 위대한 변화에 대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고향창생은 우리들 마음의 재생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내가 살아갈 지역의 미래를 위해, 무언가 하고 싶다는 주민들의 염원이 행동으로 나타날 때 활력은 다시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도시에 살다 농촌으로 삶터를 옮기는 것을 귀농 또는 귀촌이라고 한다. 농촌을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농사를 지으러 가는 것은 ‘귀농’이고, 고향을 찾아가는 것은 ‘귀촌’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요즘 시골을 찾는 사람들은 농사를 짓기 위해 가는 것보다 여유를 즐기기 위해 이동하는 경우가 더 많다. 또한 자신이 살던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터전을 찾아가는 사람이 늘었다. 전원생활이 목적인 사람들은 연고는 없지만 새로운 삶의 터를 마련하기 위해 시골을 찾는다.
1960~70년대 산업화의 바람이 불어왔을 때, 농촌에서 지내던 많은 사람이 도시의 새로운 일자리와 희망을 찾아 자신이 살던 곳을 버리고 아무 연고도 없는 도시로 떠났다. 이것을 ‘이농(離農)’이라 했다. 이농의 사전적 의미는 ‘농민이 다른 산업에 취업할 기회를 갖기 위해 농촌을 떠나 도시로 이동하는 현상’이다.
그렇다면 도시에 살던 사람들이 그곳에서 살기 싫어 떠나는 것, 즉 희망을 찾기 위해 터전을 새로 마련하는 것은 ‘이도(離都)’라 표현해야 맞다. 귀농이나 귀촌처럼 다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터전을 찾아 도시를 떠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도시에서 가까워 교통 여건이 좋고 경치가 빼어난 곳에는 ‘다시 돌아온 사람들’이 아니라 ‘이도’해온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 이들로 인해 마을이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강원도나 충청도처럼 수도권과 경계하는 지역을 둘러보면, 화전민이 살다 버리고 간 땅을 개발해 전원주택을 짓고 사는 사람이 많다. 도시생활로 넉넉해진 사람들은 먹고살기 힘들어 버리고 갔던 땅을 개발해 집을 짓고 여유롭게 살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들은 귀농·귀촌자가 아니라 새로운 삶과 희망을 찾아 농촌으로 오는 사람들, 즉 이도해온 사람들이다.
작고 소박해진 전원생활
이렇게 도시에서 살다 시골에서 살고 싶어 내려오는 사람들의 생각이나 움직임은 예전과 많이 다르다. 가장 대표적인 특징은 전원생활의 목표가 작고 소박해졌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첫째, 예전과 같이 별장형 전원주택을 짓는 대신 노후생활의 대안으로 귀농·귀촌을 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품도 많이 빠졌다. 평균수명 100세 시대가 되면서 노후를 어디서 무엇을 하며 보낼 것인가가 매우 중요해졌다. 또 어디서 사느냐에 따라 필요한 노후자금 규모도 달라진다. 노후생활비를 줄이려면 아무래도 도시보다는 시골에서의 삶이 유리하다. 하지만 경치나 감상하고 좋은 공기, 맑은 물이나 마시며 살겠다는 꿈은 없다. 폼 잡고 사는 게 답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현실적인 투자를 하게 되고 그 결과 화려한 정원이 있는 집이 아니라 작고 소박한 집을 찾게 되는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도시를 버리지 않는 귀농·귀촌자들이 늘었기 때문이다. 도시를 영원히 떠나 농촌에 정착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도시와 농촌을 오가며 이중생활을 계획하고 있는 것이다. 전원생활을 꿈꾸는 마음이 있어도 대다수 사람은 도시를 떠날 입장이 못 된다. 아직 현역으로 활동하거나 은퇴할 나이가 아니어서 가족의 반대가 만만찮기 때문이다. 시골에서 살 자신이 없고 두려운 사람도 있다. 그동안 살아왔던 도시를 떠나는 것이 이래저래 쉽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도시에서 절반 살고 시골에서 절반 사는 반쪽 전원생활을 계획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다 시골생활에 자신이 붙거나 기회가 만들어지면 그때 도시를 떠나도 늦지 않은 것이다. 최근 주말주택, 세컨드하우스가 유행처럼 번지는 이유다. 도시를 떠나지 않고 시골생활을 해보겠다는 계획을 세우다 보니 무리한 투자를 하지 않는다. 다랭이논 한 뙈기, 컨테이너 박스 하나로도 좋은 집과 정원이 될 수 있다.
수익형 전원생활
단순히 자연이나 즐기자는 목가적 귀농·귀촌도 많이 줄었다. 농촌으로 내려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른바 귀농·귀촌 창업이 그것이다. 앞으로 ‘수익형 전원생활’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많아질 것으로 전망되는 이유다. 생활비가 넉넉하다면 주말형 또는 별장형 구조의 집을 짓고 유유자적 사는 게 큰 부담이 되지 않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여전히 먹고사는 문제를 걱정해야 한다. 은퇴는 빨라지고 수명은 점점 늘고 있다. 직장에서 퇴직을 한 후에도 30년 이상을 더 살아야 하는데, 이 시간을 도시에서 보내든 시골에서 살든 수입이 있어야 한다. 은퇴자들의 가장 큰 화두다.
수익 없이 살 수 있는 은퇴자들은 별로 없다. 은퇴자가 늘고 귀촌자가 많아지면 수익형 전원주택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도 점점 늘어날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이미 펜션에서 증명됐다. 시골에서 살며 민박집을 운영해 수익을 내는 것이 펜션이다. 지금이야 시들해졌지만 불과 5년여 전만 해도 전원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펜션은 인기 창업 아이템이었다. 전원주택도 짓고 수익도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농장을 하든 펜션을 하든 전원카페를 운영하든 전원생활을 통해 수익을 낼 수 있어야 시골로 이주한 은퇴자들의 노후가 윤택해질 것이다. 이런 고민을 하는 시니어에게 최근 전원주택 시장에 나타난 수익 모델을 하나 추천할 수 있다. 바로 ‘임대형 전원주택’이다. 펜션처럼 단기 임대의 형태는 이미 큰 시장이 됐다. 하지만 월 단위나 연 단위로 임대하는 전원주택 시장은 아직 없다. 작업, 힐링, 요양을 위해 전원주택을 장기 임대하려는 수요가 점점 늘고 있지만 체계적이지 못하다. 개인들끼리 알음알음 전원주택 임대가 행해지고 있는데 도심의 원룸이나 아파트 임대와 비교해볼 때 수익률이 매우 높다. 특히 놀리는 땅이 있다면 시도해볼 만하다. 물론 토지부터 구입해야 한다면 투자비가 크겠지만 토지가 있다면 가볍게 접근해볼 수 있다.
‘시골 체질’인지 고민해볼 것
마음은 귀농·귀촌하고 싶은데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생각해야 할 것도 두려운 것도 많다. 하지만 마음이 있다면 지금이 바로 결정할 때다. 당장 실행해야 한다. 서둘다 금전적인 손해를 본다 해도 전원생활을 통해 얻는 것이 더 많다. 좋은 땅을 고를 수 있는 기회의 폭이 먼저 결정한 사람에게 더 넓다. 하루라도 일찍 시작하면 정착도 빠르다. 정원에 나무를 하나 심어도 시작이 빨랐으니 그만큼 더 자라 꽃도 빨리 보게 되고 텃밭의 작물도 먼저 여문다.
실제로 귀농·귀촌해서 사는 사람들 중 ‘더 빨리 오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사람이 많다. 어차피 시골에서 살 마음이 있다면 서두르는 게 좋다.
“산속에서 심심하게 사는 것은 아닐까? 자녀들 혹은 친구들이 자주 올까? 아프면 병원이 멀어 위험할 텐데, 시장 다니기도 힘들고, 교통도 불편하고, 뱀이나 벌레도 많고, 또 시골 사람들 텃세가 만만치 않다는데 왕따 당하면 어떻게 하지?”
이런 걱정들은 살다 보면 ‘괜한 걱정’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정작 걱정해야 할 것은 따로 있다. 바로 “내가 시골에서 살 수 있는 체질인가?”에 대한 판단이다. 이런 질문을 했을 때 “딱 내 체질이야!” 하는 답이 나와줘야 한다. ‘강남 스타일’이 시골에서 살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만약 마당의 풀을 뽑고 화단을 가꾸고 나무를 심고 집 고치는 일이 재미있다면 ‘시골 체질’이다. 당장 시골생활을 해도 문제없다. 그러나 별장 같은 집을 짓고 잔디 위에 파라솔 펼치고 친구들 불러 바비큐 파티나 하고 커피 마시는 상상이 좋으면 얼마 못 가 다시 도시로 올라와야 한다. 이런 사람은 ‘도시 체질’이다. 어떤 시골생활을 꿈꾸는지를 잘 고려해봐야 한다.
◆ 성공적인 시골 정착을 위한 8가지 단계 ◆
01 결심 | 귀농·귀촌을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결심이다. 농촌으로 이주해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농업에 종사하겠다는 생각으로 귀농을 준비한다면 더욱 신중해야 한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농촌과 농업에 대한 충분한 이해다. 도시 회피식, 목가적인 생각만으로 결정을 내린다면 위험하다. 스스로 농촌에서의 삶을 상상해보고 즐겁겠다는 생각이 들 때 옮겨도 후회하지 않는다. 단순하게 농촌을 동경하고 좋아하는 마음만 갖고 귀농·귀촌을 시작하면 실패할 확률이 높다.
02 가족 동의 | 귀농·귀촌해 사는 남자들이 이주할 때 가장 힘들었던 점은 아내 설득이다. 가족의 동의를 얻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가족들과 함께하는 귀농·귀촌이라야 성공할 수 있다. 특히 귀농은 배우자의 동의가 필수다. 정신적인 동료이고 노동력 도움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은퇴 후 귀촌하는 사람들은 터를 잡을 때도 자식들 잘 올 수 있는 곳, 집을 짓더라도 자식들이 편히 쉬다 갈 수 있도록 방을 만들고 집을 키운다. 그러나 이 경우 대부분 후회를 한다. 자녀들이 부모의 생각만큼 자주 찾아와주지 않기 때문에 계획은 엉망이 되어버리고 큰 방도 비게 된다. 이를 명심하고 계획을 세워야 한다.
03 자금 계획 | 빠듯한 예산으로 귀농·귀촌 계획을 세우면 실패하기 쉽다. 농업시설을 마련하고 기술을 익히는 과정에서 예상했던 비용을 훨씬 초과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때 자금이 모자라면 그동안 진행했던 것들마저 수포로 돌아갈 수 있다. 특히 땅을 사고 집을 짓는 과정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비용들이 발생한다. 토지 인허가 및 공사 과정에서 시행착오를 겪을 수도 있고 변수도 많다.
04 할 일 선택 | 귀농·귀촌한 후 할 일을 정하는 것은 진행 단계 전반에서 가장 중요하다. 귀촌일 경우에는 꼭 수익이 목적이 아니더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야 한다. 귀농자라면 어떤 작목을 선택할까를 정해야 한다. 작목은 가족의 노동력과 자본능력, 기술수준 등에 따라 결정한다. 어떤 농사를 짓느냐에 따라 준비해야 할 토지의 규모가 다르고 거기에 알맞은 농기계도 필요하다. 또 작목 종류에 따라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작목을 선택할 때는 지역별 특산품을 고려해보는 것도 좋다. 각 도의 농업기술원이나 시군 농업기술센터를 이용해보자. 작목을 선택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05 기술 습득 | 작목을 선택했다면 재배, 가공, 홍보 마케팅 등에 대한 기술과 노하우도 필요하다. 영농기술은 다양한 귀농 프로그램을 통해 교육받을 수 있고 선진 농가를 견학, 체험, 연수할 수도 있다. 농림수산식품부는 농어촌 지역에 정착한 귀농인에게 현재 재배 작목 등의 심층 연수 또는 이주 초기 관심 있는 분야의 작목 재배기술 등을 지원한다. 선도농업인(농업법인) 또는 성공 귀농인으로부터 도움을 받는 영농 분야 등에 대한 기술 습득, 정착 과정, 상담 멘토 등이 그것이다.
06 정착지 결정 | 정착지는 자신이 선호하는 지역이나 정해진 지역이 있다면 문제가 없다. 할 수 있는 일, 작목을 찾는 일은 그다음의 일이다. 하지만 정해진 지역이 없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선택한 후 정착지를 결정해야 한다. 귀촌이라면 선택의 폭이 넓겠지만 귀농의 경우 선택한 작목에 맞는 지역을 찾기가 쉽지 않다. 예를 들면 시설원예와 같은 일은 도시 근교가 적당할 것이다. 벼농사, 채소, 밭농사는 평야 지역이 유리하다. 과수, 약초, 축산을 한다면 당연히 준산간 지역을 선택해야 좋다. 정착하기 위해서는 생활할 주택의 인허가를 비롯해 교통 여건, 생활 여건, 이웃 등도 검토해야 한다.
07 농지 및 주택 마련 | 농지는 영농 형태에 따라 규모나 토질, 물 사용 여건 등을 고려해서 구입한다. 농업용으로 구입할 때는 ‘국토의 계획과 이용에 관한 법률’에서 정한 ‘농림지역’ 농지법 상의 ‘농업진흥지역’의 농지를 선택하는 것이 좋다. 만약 주택용, 펜션, 전원카페, 식당, 숙박시설 등 다른 용도로 사용할 때는 ‘국토의 계획과 이용에 관한 법률’에서 정한 ‘관리지역’이라야 한다.
주택을 마련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기존 주택을 구입 또는 여유자금이 부족하다면 임대를 고려한다. 땅을 사서 신축하거나 빈집을 수리해 사용할 수도 있다. 이때 과도한 욕심은 금물. 주택에 무리하게 투자해 후회하는 이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농촌의 빈집은 대체로 간단한 수리만 해서는 사용하기 어렵다. 예상보다 비용이 많이 들기도 하니 잘 점검해야 한다. 아울러 집이 들어서 있는 땅이 대지인지, 땅 주인과 집주인은 같은지 등도 꼼꼼히 확인해보자.
08 운영 및 생활 | 모든 준비를 끝내고 이주를 했다면 드디어 전원생활의 시작이다. 이때 여유자금을 충분히 갖고 있지 않다면 수익을 위한 경제활동이 필요하다. 하지만 당장 농사를 지어도 적게는 6개월에서부터 몇 년을 투자해야 돈을 벌 수 있다. 이런 이유로 귀농·귀촌에 성공하려면 기술, 여유자금,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농어촌 지역의 빈집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는 것은 고령화와 인구감소 등과 직결되어 있다. 농어촌 주택이 노후화 되면서 매매나 임대가 되지 않아 이로 인한 쓰레기 무단 방치, 화재, 범죄 등의 위험에 노출되어 농어촌 환경문제와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전국 빈집현황 중 농어촌 읍·면 지역의 빈집은 읍 지역 14만 1000호, 면 지역 27만 3000호 등 총 41만 4000호로 집계됐다. 한국국토정보공사는 ‘대한민국 2050년 미래 항해 보고서’에서 2050년 전국 빈집 수는 300만 호를 넘어설 것이고, 전체 10채 가운데 1채가 빈집이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 국회입법조사처 ‘빈집 현황과 정비를 위한 정책과제’ 보고서에 따르면 토지 이용 효율성 저해와 쓰레기 무단 투기 등 주변 생활환경 악화, 범죄·탈선을 유발하는 우범지대로 전락하게 될 가능성과 화재 위험성 등 때문에 빈집을 사회적인 문제로 꼽았다.
이렇게 관리의 부재로 생긴 문제가 커져가고 있어 정부나 지자체의 대책마련과 효과적 정책실행이 시급한 실정이다. 특히 빈집 문제가 심각한 곳으로 제주도를 꼽을 수 있는데, 2016년 기준 제주지역 빈집은 2만 1469호인데 2015년보다 16.2% 늘어났고 전체 주택의 10.4%에 해당한다. 제주특별자치도관광협회 통계에 따르면 연간 1500만 명으로 상징되는 관광객이 밀려들고 있고, 제주도는 관광사업을 바탕으로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제주에는 양질의 숙박시설이 부족하기에 좀 더 발전적이고 효율적인 관광휴양산업을 위해서는 확실한 솔루션이 필요한 시점에 직면하였다.
빈집 활용한 지역 경제 활성화
이러한 현실 속에서 빈집을 새로운 시장으로 개척해나가면서 부가가치와 일자리까지 창출하여 지역 경제 활성화에 기여하는 업체가 있어 화제다. 바로 한국형 주택공유 서비스를 제시한 협동조합덤하우스 이사장과 SU그룹㈜ 대표이사인 이태희 대표가 그 주인공이다.
이태희 대표는 2016년 8월에 제주시 일주동로에 협동조합 법인 덤하우스를 설립, 국내 최초로 빈집에 공유경제 체제를 도입하여 관광지 숙박난 문제를 해결하였고, 빈집과 청년일자리를 동시에 해결한 혁신적인 주택공유 서비스로 이용객들에게 엄청난 호응을 얻고 있다.
덤하우스는 집주인이 상시 관리할 수 없는 빈집을 상호 연결하여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으며, 덤하우스에서 빈집을 임차하거나 매입하여 리모델링 후 새로운 숙박공간으로 제공하는 방식이다. 덤하우스는 1998년도의 IMF 관리체제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일어난 실천운동, 이른바 ‘아나바다 운동’을 뛰어넘은 ‘온 국민 고쳐 쓰기 운동’을 전개하며 국민적인 관심을 받은 바 있는 이태희 대표가 2014년 특허출원한 브랜드다.
덤하우스는 이 대표가 전개한 ‘온 국민 고쳐 쓰기 운동’과 추구하는 가치가 일맥상통한 브랜드로서 지역 특성을 그대로 살려 빈집을 재발견하는 과정을 갖추면서 초가집, 판잣집 등의 우리 고유의 모습을 지키고 갖춘 이른바 ‘빈집을 재탄생시키는 구조’라 할 수 있다.
이태희 대표는 “초가뿐만 아니라 판잣집도 우리 고유 집인데 갈수록 사라져가고 있는 점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무조건 철거할 것이 아니라 살릴 수 있는 주택은 살려서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빈방’이 아니라 ‘빈집’의 재발견
자신의 주거지 일부를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는 숙박공유 서비스 에어비엔비는 숙박 제공자와 이용자의 사생활이 노출되는 구조이지만 덤하우스는 ‘빈방’이 아니라 ‘빈집’을 대여하여 무인시스템으로 출입이 자유롭고 프라이버시가 보장되며 사생활 침해를 받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덤하우스의 소유주는 토지와 건축물의 실 소유로 인한 부가가치를 얻을 수 있고, 내 땅과 내 집을 내 맘대로 사용할 수 있다. 이것은 덤하우스만의 특화된 면이라 할 수 있다.
이태희 대표는 “전국의 빈집을 지역별 특성을 살려 복원하고 각 지역을 찾는 다양한 방문객의 숙소뿐 아니라 체험공간으로 활용함으로써, 빈집으로 인한 사회적 문제가 해소가 되고, 빈집 소유주에게는 수익을 발생하게 한다. 더 나아가 지역경제의 활성화로 새로운 일자리 창출과 지역문화를 홍보하는 것이 협동조합덤하우스 설립 목적”이라고 밝혔다.
결국, 빈집 소유주에게 안정적인 임대수익을 보장하고, 운영자는 필요한 시설을 완비해 이곳을 찾는 이용객에게 합리적인 가격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여기서 더 나아가 유지 및 관리는 전문 업체가 맡고, 지역주민에게는 현장관리 일자리를 제공하기에 덤하우스는 지역경제발전에 큰 기여를 한다는 설명이다. 그 외에 청정의 땅 제주에서 동화 같은 집을 짓고 안정된 고수익을 창출할 수 있다는 덤하우스의 신축마을 사업규모는 현재 제주민속마을 총 13동, 제주민속마을풍차상가 총 6동, 신전과동화두모마을 총 8동, 풍차와동화 총 6동, 신전과동화금악마을 총 10동이 진행 중이다.
덤하우스는 집을 빌려주는 임차인 입장에서는 집이 관리 되어 좋고, 집을 빌리는 이용객 입장에서는 저렴한 가격에 집 전체를 빌릴 수 있어 일석이조(一石二鳥)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더군다나 숙박기간 내 1가구 1차량 무상지원과 커피·음료 무제한 무료제공은 물론 여러 가지 오락시설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이러한 덤하우스를 이용하여 혜택을 누리기 위해서는 게스트 또는 호스트 자격으로 협동조합에 가입하고 협동조합의 조합원이 되어야 한다. 일단 조합원이 되면 조합이 추진하는 모든 사업에 참여할 수 있으며 조합이 운영하는 시설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투명성 높이며 조합원의 안전장치 마련
이 대표는 “덤하우스의 사업방식은 사업지 활용 토지 확보가 완료되어 있기에 투자방식과 수익구조는 기존 모델과 근본적으로 다르고 메리트가 있다”고 전한다. 보통 부동산투자의 일환으로 집을 두 채 이상 보유하거나 수익형 부동산을 보유하게 되는 경우 실제 사용빈도는 낮고 수익 또한 운영사의 운영능력에 따라 천차만별이라 부도내고 방치되기가 다반사다. 무엇보다 공급과잉으로 언제 분양될지 알 수 없이 장기간 방치되어 있는 미분양주택은 사회적 문제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태희 대표는 “덤하우스로 활용하면 이렇게 불안하게 소유하고 있는 주택들도 수익형 주택으로 바꾸어 분양하는 데 탁월한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며 “세계 100여 개국의 수백 개 모델하우스 중 본인이 주택을 선정하고 토지와 건축물을 구입하면 연 숙박률 50%에도 10%의 수익을 얻는 덤하우스의 주인이 되는 구조”임을 강조했다.
협동조합덤하우스의 사업방식은 첫째, 협동조합 분양은 일반 분양보다 대략 20% 저렴하다. 조합이 시행사 업무를 맡기 때문에 토지매입에 대한 대출이자와 건설사 마진, 마케팅 비용과 같은 각종 부대비용을 줄일 수 있어 일반 분양보다 15~20% 정도 가격이 저렴하다. 둘째, 투명성을 높이며 조합원의 안전장치를 마련하고 있다. 지역주택조합 사업은 사업지로 활용할 토지 매입이 관건인데 이를 100% 확보하기가 쉽지 않은 단점이 있다. 하지만 “협동조합덤하우스는 이미 사업지로 활용할 토지를 사전에 확보했기에 사업에 지장이 있거나 추가로 비용이 발생하는 일이 없다”고 이 대표는 밝혔다. 마지막으로 덤하우스에 참여하려 해도 소유하고 있는 빈집이 없는 경우에는 덤하우스가 기획하고 설계, 시공하는 여러 테마하우스를 분양받아 덤하우스에 등록하는 방법이 있다.
SU그룹㈜ 부동산 주요사업인 11개 마을의 제주세계민속마을은 9만 5000㎡ 규모의 신축 덤하우스다. 상상과 고대의 세계마을이 조성된 1차 마을 사업으로, 파키스탄 레드씨 그룹에게 투자의향서를 발송하였고 결국 MOU를 체결, 진행하면서 마침내 2018년 4월 제주세계민속마을 건설공사 프로젝트에 2억 달러 계약을 성사시켰다고 한다. 또 중동국가의 요청으로 세계민속마을 2차 10개 마을의 사업을 추진하면서 사우디 3억 달러 세계마을 사업 투자유치를 목표로 매진하고 있다.
이 대표는 “제주시 구좌읍 행원리에 초가와 기와집이 혼재하는 마을을 완공하고, 한경면 두모리에는 신전과동화라는 동화 속 마을이 진행 중이며, 한림읍 금악리에는 풍차마을이 시작되었고 이후 콜로세움인제주, 피라마드마을, 기차마을, 만리장성, 아라비안나이트 등의 콘셉트도 추후 덤하우스로 등록될 예정이다”고 밝혔다.
아울러, 이태희 대표는 “올해 제주도에 ‘빈집 숙소’를 30호까지 늘리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궁극적으로는 제주도를 비롯해 전국적으로 덤하우스를 확대하여 조합원들이 전국 어느 지역을 가든 편리하게 해당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만들겠다”는 계획을 내비쳤다.
올해 제주도에 ‘빈집 숙소’를 30호까지 늘리는 목표
마을 특화사업을 구축하여 경제적 부가가치와 일자리 창출을 도모하고 이를 통해 지역경제 발전에 이바지하고자 하는 이태희 대표는 그 일환으로 지역별 청년이장제도를 도입해 청년들이 운영, 관리하는 덤하우스 설립을 지원하고, 지역특산품을 비롯한 다양한 관광상품을 개발하여 지역 경제 활성화에 이바지하는가 하면, 관광정보지 ‘하하코리아’의 지역별 신문 발행으로 정확한 지역 정보를 제공한다.
또 지자체로 하여금 덤하우스를 관리하는 청년들에게 기본급여로 청년실업수당을 지원받게 하는 것은 물론, 덤하우스의 운영으로 발생되는 수입은 조합의 배당금을 제외하고 청년들이 자체적으로 관리하도록 하는 등 지역발전을 위하여 다양한 방안을 계획 준비 중에 있다.
협동조합덤하우스 이태희 대표는 “공공의 이익과 협동조합 조합원의 권익을 위해 양심적인 삶을 살아왔고 한국형 공유경제의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데 앞장서고 있지만 정부나 지자체가 덤하우스 사업 이해부족에서 오는 편견과 배척을 통한 여러 가지 제도적 불리함이 무척 힘들다”며 “정부와 지자체의 인식 개선과 적절한 정책적 지원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한 사람의 손을 놔주는 것도, 매달리는 것도 사랑이다. 누군가는 극복한 사랑이 진짜 사랑이라고 말했다.
유디트 크빈테른(Judith Quintern·46), 그녀는 18년 전 독일에서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미지의 땅으로 가는 길이었다. 한 남자와 도저히 헤어질 수 없었던 한 여자는 그 사랑을 극복하기로 했다.
한순간 길을 잃는다 해도 괜찮았다. 그리고 강원도첩첩산중 외딴집에서 된장국을 끓이고 해당화에 빠져 사는 동안 알게 됐다.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함부로 외롭지 않을 자신만의 정원을 가꾸는 일임을….
‘유디트의 정원’이라 했다. 처음 그녀가 운영하는 카페 이름을 듣는 순간 타샤 튜더의 정원이 떠올랐다. “정원에 관해서라면 결코 겸손하고 싶지 않다”고 했던 여자. 문득 그 아름다운(?) 고집스러움이 그녀에게서도 느껴졌다. 그러지 않고서야 유배와 다를 바 없는 먼 이국땅에서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독일에서 정치 철학을 공부한 그녀가 남편 이희원(58) 씨를 따라 한국으로 온 것은 지난 2000년. 비행기를 타고 오는 동안 설렘보다는 두려움이 더 컸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와 같이 있게 되었다는 사실만 생각하려 애썼다.
“제 친구를 통해 남편을 알게 됐어요. 당시 독일에서 미학을 전공하고 있던 그는 매너가 좋고 친절한 사람이었어요. 생각하는 게 비슷해 자주 만나 대화를 나눴지요. 그러다 자연스럽게 연애를 하게 됐고요. 그런데 독일에서 둘만의 소풍을 다녀오던 어느 날 그가 갑자기 ‘우리 결혼할까?’ 하고 물었어요. 그 순간 딜레마에 빠져버리고 말았어요. 그가 박사학위를 딴 뒤에는 반드시 고향에 돌아가 연로하신 부모님과 같이 살고 싶다고 했거든요. 저랑 만나는 동안에도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말을 자주 했기 때문에 우리의 연애는 종종 무거웠어요. 며칠 생각할 시간을 달라 했어요. 그와 헤어지거나, 그를 따라 한국으로 가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죠. 어느 결정도 쉽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와 헤어지는 것은 상상만 해도 견디기 힘들더군요. 그날 이후 제가 그와 살고 싶어 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됐어요.”
병이 되어버린 그리움
남편 가족들은 그녀를 환영했다. 물론 유학까지 보낸 아들이 외국인과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섭섭하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말일 것이다. 10여 년 만에 유학을 끝낸 아들이 돌아와 결혼을 하면 며느리와 오순도순 지내볼까 기대를 했는데 말도 통하지 않는 독일 며느리라니…. 하지만 두 사람의 결혼에 대해 물었을 때 시아버지는 간결하게 한마디만 했다.
“나는 내 아들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그것으로 가족의 의견은 정리가 됐고, 두 사람의 결혼은 무리 없이 진행됐다. 시댁과 남편의 따뜻한 배려를 받으며 그녀도 한국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타국에서의 외로움은 어쩔 수 없었다. 콧마루가 시큰해지는 날이 많아졌다. 결국 그녀는 심한 우울증과 향수병을 앓기 시작했다. 처음엔 매력적으로 보이던 서울도 점점 싫어졌고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가는 것 같았다. 한국말을 못해 누구를 만나도 바보처럼 앉아 있어야만 했다. 어느새 모국어도 친구도 다 잃어버리고 스스로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남편에게는 말도 못하고 혼자 울면서 생각했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때로는 마음이 곤두박질치며 당장 독일로 돌아가고 싶었다.
“지금은 TV에 외국 사람들도 많이 출연하니까 분위기가 달라졌지만 제가 한국에 왔을 때만 해도 관광객 취급을 받았어요. 도시 사람들은 지금도 저를 만나면 ‘젓가락 사용 아주 잘하네요’ 같은 말들을 해요. 그런 대화는 하고 싶지 않거든요. 그들에게 저는 영원한 이방인인 거죠. 그게 힘들었어요.”
삼척에서 정이 들다
안산 한양대학교에서 독일어 강사로 7년 동안 일하면서도 외로움은 치유되지 않았다. 독일과는 분위기가 다른 교수 사회도 그녀를 힘들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은 강원도에 집을 마련하자고 했다. 그녀는 시부모님과 함께 갔던 시골을 떠올렸다. 한국에 와서 처음으로 마음을 환하게 열었던 곳. 바쁘게 돌아가는 도시에서 생활하느라 까맣게 잊고 있던 마을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독일을 그리워했던 그녀는 시골로 들어가면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게 영영 힘들어지는 건 아닐까 염려가 됐다. 불안했지만 도시의 일상에 잔뜩 지쳐 있던 터라 시골집을 구하러 가는 남편을 따라 나섰다. 그리고 해발 700m고지 삼척 산중에서 다 쓰러져가는 집 한 채를 발견했다.
“운이 좋았어요. 화전민이 살던 땅을 구하고 싶어 했는데 거의 1년 만에 하늘 바로 밑 햇살이 가득 쏟아지는 곳에서 우리가 그토록 원했던 땅을 발견했어요. 남편은 기분이 좋아 ‘와~ 진짜 화전민이 살던 곳이네’ 하고 소리쳤어요.”
화전민 가옥을 구입한 뒤 두 사람은 도시에서보다 일상이 더 바빠졌다. 전기도 끊기고 재래식 화장실밖에 없는, 잡풀과 거미줄이 가득해 쓰레기더미처럼 보이는 집을 치우다 보면 하루가 다 갔다. 지인들은 이런 집에서 불편해 어떻게 사냐며 집을 부수고 새 집을 지으라 조언했지만 부부는 옛집을 살려보고 싶었다. 특히 그녀는 구석구석 쓸고 닦고 광을 내면서 옛 사람들이 살던 모습을 상상하는 게 즐거웠다. 그녀에게는 그냥 빈집이 아니었다.
“독일 사람들은 오래된 집을 좋아해요. 콘크리트로 지은 집보다 훨씬 기품이 있거든요. 삼척에서 산 집이 100년도 더 된 집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묘한 기분이 들었어요. 그 집을 통해 한국이라는 나라를 속속들이 들여다봤어요. 박물관에서는 절대로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이었어요. 옛 사람의 손길과 마음까지 느꼈다고나 할까요. 집을 떠받들고 있는 나무 기둥과 격자형 문틀, 마루, 그리고 이 집에 살던 사람들이 매일 사용하며 손때를 묻혔을 바가지와 그릇들이 폐허 속에서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귀한 보석을 발견한 것처럼 기뻤어요.”
두 사람은 한동안 옛집을 복원하는 일에 빠져 지냈다. 몸은 고단했지만 재미있는 놀이에 중독된 것처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잡풀과 먼지 속에 묻혀 있던 가옥이 제 모습을 드러냈을 때 부부는 노다지를 찾아낸 양 행복해했다. 마음껏 늘어져 평화로운 시간을 만끽하기에 딱 좋은 집이었다. 8부 능선에 눈이 푹푹 내려 갇혀버리면 마치 세속으로부터 도망쳐 나온 사람들처럼 즐거워했다. 봄이 오면 그녀가 좋아하는 해당화를 잔뜩 심었다. 심심할 때는 트로트를 틀어놓고 따라 불렀다. 그새 두 마리의 고양이가 가족이 됐다. 배가 고프면 청국장을 끓이고 산에서 뜯은 나물을 무쳐 밥상을 차렸다. 그렇게 자연 속 맨발의 시간들과 서서히 정이 들었고 그녀는 독일을 떠난 뒤 찾은 ‘새 고향’에서 비로소 안식을 얻었다.
새로운 놀이터
최근 그녀는 또 다른 정원을 가꾸느라 분주하다. 바로 독일식 카페 ‘유디트의 정원’. 5년 전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도 그만두고 경포호 근처에 예쁜 카페를 하나 짓더니 벌써 4호점까지 열었다 한다. 느리게 사는 걸 좋아하는 분이 어쩌자고 일을 자꾸 벌이시냐 물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웃음) 이곳 강원도에 와서 친구들을 사귀었는데 의외로 유럽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래서 독일 소개도 하고 서로의 문화 차이에 대해 얘기를 나누면 좋겠다 싶었어요. 수다를 떨기에는 이런 공간이 좋잖아요. 또 독일이 그리울 때쯤 핑계를 대고 건너가 가구를 직접 고르는 일도 재미있고요. 그동안 들여온 물건들이 벌써 수백 점이나 돼요. 그러다 보니 자꾸 정원을 넓히게 되네요.”
그녀가 다시 그리는 그림이 어떤 모양새가 될지 슬쩍 궁금해진다. 한국에 와서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 비로소 알게 됐다는 그녀는 그것들에 더 집중하며 살고 싶다고 했다.
“산책, 독서, 자연, 고양이, 정원…. 제가 좋아하는 것들이에요. 산책할 때는 온몸의 감각기관을 열어놔야 해요. 그냥 걷는 건 의미 없어요. 저는 자연이 내는 소리에 귀 기울이고 계절의 변화를 예민하게 느끼고 싶어요. 내 마음에 얹힌 무거운 짐을 내려주고 평화를 찾도록 도와주기 때문이죠.”
이만하면 한국 사람 되려고 더 이상 노력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어떤 한국 사람보다 더 한국의 풍경과 음식을 사랑하고 좋아하게 됐으니까.
사랑을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를 유배한 곳에서 그녀는 이제 낙원을 찾은 것일까. 아마도 그런 것 같다.
백년 안짝에 이 세상을 지나가는 덧없는 나그네. 그게 인생길. 이제 남은 생을 들판에서 일하며 만족을 구가하리라, 하득용(52) 씨는 그런 생각으로 산골에 입문했다. 산촌 노장들이 보기엔 짠했던 모양이다. “멀쩡하게 서울에서 그냥 살지 어쩌자고 내려와 생고생이오?” 오나가나 듣는 소리가 늘 그 소리였단다. 그러나 하 씨의 귀엔 맺히는 게 없는 관전평에 불과했다. 귀농에 아무런 회의가 없기에. 자연스러운 귀결이기에.
어릴 적부터 하득용 씨에겐 우렁찬 꿈 하나가 있었다. 바로 농사였다. 농대에 진학한 것도 농사 실력을 쌓기 위해서였다. 쉰 줄에 접어든 그는 현재 오미자 농원의 쥔장. 말하자면 드디어 꿈을 이루었다. 그는 번쩍거리는 서울의 요지 강남에 살며 근사한 직장을 다녔었다. 그랬던 그의 귀농 뉴스를 접한 초등학교 동창들은 이구동성으로 합창했다지. “야야, 놀랍지 않다. 너는 일찍부터 늘 시골에 살겠다 하지 않았냐.” 그의 오래 숙성된 꿈을 훼방할 의사가 전혀 없었던 아내 역시 순순히 부응했다. 뱀이 바람처럼 스며들어 소파 위에서 똬리를 틀고 혀를 날름거리는 식의 불상사만 벌어지지 않는다면 기꺼이 동행하겠다고 장단을 맞췄다. 그는 내심 쾌재를 부르며 귀농을 실행했다.
농경은 인류를 만물의 영장으로 만들어준 혁명적 사건이었다. 대략 1만 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장수 산업이기도 하다. 하지만 오늘날 이 나라에서 농업이란 가장 못 믿을 직업으로 밀려나 있다. 무엇보다 허리 휠 신역이 자심한 반면 타산을 맞추기가 영 힘들다. 사정이 이러했지만 하 씨는 밀어붙였다. 자신의 삶의 방향에 관한 확신과 긍지에 찬 귀농임을 이미 알 만하지만, 나는 바보처럼 물었다. 농사의 그 무엇에 매력을 느꼈는가?
“제가 시골 태생입니다. 어린 눈에도 농사란 힘겨운 일로 보였어요. 그러나 꽃과 나무들 속에서 산다는 게 참 좋았어요. 시골의 목가적인 정경이랄까, 그런 게 천성에 잘 맞았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어렴풋하게나마 농부의 꿈이 발아했던 거죠. 중학생 때 치른 적성검사에선 농학 적성 비율이 98%로 나왔어요. 아, 농부가 나의 길이구나, 일찌감치 확신을 품기 시작했죠. 시골의 자연 풍경과 더불어 살 수 있는 농업이 내겐 가장 잘 어울린다는, 가장 좋은 삶일 거라는 끌림이 있었던 겁니다.”
“농부의 꿈을 품고 살았지만 정작 사회생활은 서울에서 했어요.”
“고등학교 졸업 뒤 의심의 여지없이 농대를 선택했고 일본 유학까지 계획했습니다. 그러나 일단 꿈을 접고 서울의 화학 회사에 취직하는 걸로 사회생활에 뛰어들었어요. 처자를 건사하고, 기반을 다져야 했으니까. 10년만 직장생활을 하고 시골로 내려갈 작정이었지만, 20년이 지나고서야 사직을 하고 귀농할 수 있었어요. 여건이 비로소 무르익었다는 판단으로.”
“처음엔 혼자 산골로 들어갔죠? 선발대로 뛰어들어 일단 물정을 익힌 거예요?”
“귀농교육도 받았고, 귀농박람회도 찾아다녔고, 사전에 서울에서 충분히 준비를 해뒀죠. 휴가를 얻어 전국을 돌며 마땅한 귀농지를 물색하기도 했어요. 지리산 자락 하동군 악양이 맘에 들었으나 땅값이 너무 비싸더라고요. ‘귀농의 압구정동’이라 하더군요. 포기했죠. 이후 문경 산북면의 시골 농토와 빈집을 임대해 농사를 짓는 걸로 귀농생활에 돌입했어요. 식구들은 서울에 두고 혼자서 말이죠.”
“차근차근 신중한 수련 과정을 밟으셨구나.”
“단신으로, 초심자로 농사를 한다는 게 예상보다 버거웠어요. 정말 고생했죠. 1식 1찬으로 끼니를 채우며 부지런히 배웠습니다. 살이 쭉쭉 빠지더라고요.(웃음) 그러나 꽤나 시골 물정을 터득할 수 있었죠. 1년쯤의 견습기를 지날 즈음, 마침 이화령 산중에 괜찮은 부지가 나와 매입을 하고 이주, 본격적인 귀농생활로 접어들었어요. 서울의 아파트를 팔고, 식구를 불러들이고, 집을 짓고, 묵정밭을 갈아 농장을 만들고, 그렇게 나름의 공을 들여 꾸려온 게 현재의 모습입니다.”
그의 ‘오래된 미래’는 시골
하 씨 부부가 이화령 기슭에 자리 잡은 건 2013년의 일. 터는 널따랗다. 5000평의 부지를 사들여 3000평을 오미자 농장으로 개발했다. 에너지 소모를 최소화할 수 있는 첨단 단열공법으로 지은 북유럽식 2층 페시브하우스도 큼직하고 준수하다. 자금력이 수반되지 않고선 엄두를 낼 수 없는 행보렷다.
늘그막까지 우리를 일쑤 끙끙거리게 만드는 것 중의 하나는 돈 문제다. 헐거운 소유로 오히려 진정한 만족을 누리는 도류(道流)도 없지 않지만, 일테면 시골살이에도 단골로 등장하는 난적이 물적 토대의 여하라는 문제이기 십상이다. 하 씨는 이 난적의 농간을 면제받은 것으로 보인다. 숙원의 해결 또는 삶의 질적 지향이라는 문제를 풀기 위해 그의 머리는 민첩하게 움직였으며, 준비는 충실했고, 실천은 적시에 행했다. 광란처럼 기똥차게 치솟은 강남의 아파트를 미련 없이 처분, 그의 ‘오래된 미래’인 시골에 무난한 터전을 장만한 행장은 슬기의 소산일지도. 이제 농사 얘기를 들어볼까. 오미자를 주 작목으로 선택한 이유는 뭘까?
“‘해당 지역의 특산물을 재배하라!’ 귀농교육을 받을 때 자주 들었던 얘기였어요. 합리적인 권장이죠. 이곳 문경의 특산물은 사과와 오미자입니다. 기술 숙달이 필요한 사과 재배는 초보 농부에겐 너무 힘들다 판단해 오미자를 택했어요.”
“약재를 전문으로 하는 어떤 노인께서 제게 권합디다. 구기자와 오미자를 장복하시오! 그 둘의 약성이 탁월하다는 얘기였죠.”
“이왕 농사를 할 바엔 가족들의 건강에도 도움이 되는 작물을 하자, 그렇다면 오미자가 적격이다, 그런 판단도 했습니다. 저나 아내나 서울에선 천식과 알레르기에 시달렸는데 그게 싹 사라졌어요. 맑은 공기, 깨끗한 지하수, 그리고 오미자 덕분이라 봅니다.”
“문경은 오미자 주산지로 널리 알려졌어요. 농가들의 경쟁이 치열하겠죠? 하 선생의 생산물은 어떤 특장이 있죠?”
“무농약 고품질 오미자를 생산하기 위해 나름 노력했습니다. 제대로 된 청정 농산물을 생산하는 게 농사꾼이 할 일이라는 생각을 고수해왔어요. 무엇보다 농약이나 화학비료를 덜 쓰는 게 요체라 봤고요. 과거의 농사엔 화학비료라는 게 쓰이질 않았어요. 자연과 절기에 순응하는 지혜를 필요로 했을 뿐이죠. 어떤 학자는, 철없는 사람들이 철없는 농산물을 먹어 오히려 심신의 건강을 해친다는 투의 말을 했는데, 경청할 만한 얘기이지 않겠어요?”
“요즘의 농작물은 파종 단계에서부터 농약을 투여하죠. 농약이 아니고서는 생육 자체가 어렵도록 농약 의존도가 심화됐어요. 무농약 농사를 실행할 경우엔 생산량도 매우 낮다죠? 결국은 채산성 악화로 이어지고 말이죠.”
“제가 오미자 농원 3000평을 운영하며 목표치로 잡은 게 연매출 5000만 원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턱없이 미달이에요. 농업 소득에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면 생계조차 위태로웠겠죠. 다행히 모아둔 게 좀 있어서 헤쳐 나가고 있어요. 향후 4년쯤 지나면 목표에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 봅니다만, 무농약 농사란 어떻게 보자면 무모하기 짝이 없는 짓이에요. 생산량은 관행농에 비해 3분의 1에 불과하지만 가격은 20% 정도를 더 받을 수 있을 뿐이니 사실상 암담한 상황이라는 거.(웃음)”
적막도 즐길 만한 대상
세상에 유쾌하기만 한 직업은 없다. 설사 안정적인 소득이 보장돼도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의 직업에 만족을 느끼지 못한다. 진정으로 내가 하고 싶었던 일에 나를 쏟아 부을 경우엔 문제가 달라진다. 꿈이 실린 직업은 고독한 인생을 보완해준다. 이상으로 삼은 일에의 몰두가 깊을수록 만족감이 커진다. 하 씨의 경우는? 그는 양양하다. 속사정까지야 깊숙이 들여다볼 길이 없지만 그늘이 없다. 말쑥한 언사로 귀농의 만족감을 표한다. 비록 아직은 형편이 열악하지만 성취감을 느낀다는 게 아닌가.
“아내와 함께 농장의 풀을 손수 뽑아야 하는 일부터 농사의 전 과정은 고됩니다. 일머리가 서툴러 고생도 많았고, 극심한 가뭄으로 한 해 농사에 완전히 실패하기도 했고, 애환이 많은 게 농사예요. 하지만 매번 성취감을 느끼게 하는 것도 농사더라고요. 풀을 뽑고 난 뒤 깨끗해진 농장을 바라볼 때, 하루하루가 다르게 잘 자라 오르는 오미자 덩굴을 바라볼 때, 붉게 물들어가는 열매를 바라볼 때, 그럴 때마다 무슨 대단한 일이라도 해낸 것처럼 성취감을 톡톡히 맛봐요.”
“예전엔 느끼지 못했던?”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는 주로 머리를 썼어요. 귀농 이후엔 달라졌어요. 몸을 덩달아 최대치로 쓰고 있어요. 그러자 머릿속에 가득했던 욕망이나 욕심이 줄어드는 반면, 몸으로 오감으로 느껴지는 성취감이 자주 찾아오더라고요. 좋다, 참 좋다! 속으로 그렇게 탄성을 내지르는 순간들이 많습니다. 다채로운 자연의 변화와 생동감이 주는 즐거움과 활력은 도시에서는 누릴 수 없는 최상의 가치예요.”
“이곳의 산세는 통쾌하고 수려해요. 하지만 적막강산이에요. 아무리 일에 바쁘다지만, 때로 권태롭진 않을까?”
“삶이란 즐기라고 부여된 것. 일의 노예로 산다면 인생이 지루하겠죠. 낮에는 일하고 해 저무는 하오엔 읍에 나가 테니스를 즐깁니다. 한국화도 배우고, 난타와 색소폰도 교습받아요. 적막? 그 역시 즐길 만한 대상이죠. 언젠가 아내와 둘이 ‘위대한 침묵’이라는 영화를 봤는데 참 좋았어요. 고요한 산중 생활에 깃드는 내적인 평화, 이 역시 귀농을 통해 받은 큰 선물이구나, 아내와 둘이 그런 얘길 나눈 적이 있습니다.”
하 씨의 농사 실적은 아직 시원치 않다. 애당초 귀농 목적을 돈벌이에 두지도 않았다. 가급적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개인적인 용무를 보고 싶었을 뿐이며, 용무란 농사 그 자체였으며, 마침내 농부로 변신, 결국은 해묵은 꿈을 이룬 셈이다. 그러자 또 하나의 세계가 조용하게 열렸다. 자연과 동행하는 삶의 길이 가지런히 펼쳐지고 있는 것. 이미 유년기에 시골에서 싹 텄을 자연에 관한 감수성이 귀농으로 되살아나 생태계를 존중하고 교감하는 버릇이 몸에 배기 시작한 것.
상쾌한 예화 하나를 볼까? 하 씨 부부는 어느 날 숲에서 꿩 둥지를 발견했다. 둥지 안에는 조르르 알들이 놓여 있었다. 알들의 일부는 깨져 있었다지. 뭔가가 둥지를 건드렸다는 증거였다. 일단 둥지가 노출되면 어미 새는 알들을 더 이상 돌보질 않는다. 그걸 알았던 부부는 읍내로 달려가 사온 부화기에 알들을 고이 길러 날려 보냈다.
“어느 날은 새 한 마리가 유리창에 부딪쳐 나동그라졌어요. 죽었는지 기절했는지 숨을 쉬지 않더라고요. 우리는 서둘러 인공호흡에 나섰어요. 저는 놈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줬고, 아내는 부리를 벌려 빨대를 꽂아 숨을 불어넣었어요. 앗, 그러자 살아나 후루룩 날아가는 게 아니겠어요?”
소소하면서도 짜릿한 감흥을 주는, 동화를 닮은 일화다. 보는 눈이 없더라도 그물에 걸린 어린 고기나 금지 어종을 풀어주는 어부라면, 그는 이미 자유로운 영혼이다. 새 한 마리의 목숨을 남의 일로 여기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는 이미 희귀하게도 잘 사는 사람이다. 나이 들어서도 우리의 이기심이 종종 놓치는 건 공생의 가치이지 않던가.
박원식 소설가 >>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