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나는 어느 노인에게 들었다. 적게 먹고 가느다란 똥을 눠라! 청명한 게송이다. 가급적 물욕을 자제해 가뿐하게 살라는 뉴스다. 너무 많은 걸 움켜쥐지 않고 사는 게 현명한 길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그러기 쉽던가. 욕망이라는 이름의 망나니는 주야로 날뛰어 기세를 돋운다. 돈으로 모든 행복을 살 수 있다고 달콤하게 속삭인다. 사실 돈의 위력은 막강하다. 돈을 사용해 얻을 수 있는 이익과 만족의 수효가 워낙 많다. 적당한 정도의 돈이 있고서야 안정된 삶이 가능한 것도 사실이다.
더 채우려고 젊어서도 일하고 늙어서도 일하는 사람들
그러나 돈으로 살 수 없는 가치도 많다. 정신, 마음, 사랑, 우정, 헌신, 자아실현 같은…. 자주 우리를 주눅 들게 하고 환장하게 만드는 돈의 횡포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돈이 모든 걸 해결해줄 거라는 오해를 교정하는 일이 필요하다. 아울러 돈이 부족할지라도 자족하며 살 수 있는 방식을 찾아야 한다. 귀촌은 그것의 한 대안일 수 있다. 덜 벌어 덜 쓰고도 기분 좋게 살아갈 여지가 많은 게 시골생활이기 때문이다.
물론 시골에서도 삶의 고역은 미행처럼 따라붙는다. 가난이 자심할 경우엔 더욱 그렇다. 도시에서건 시골에서건 지독한 궁핍은 으라차차 조속히 해치워놓고 볼 일이다. 배를 곯을 수는 없지 않은가. 기본적인 의식주 해결조차 등한시하면서 만족과 행복을 구가하는 건 염치없는 짓이다. 그런데 우리가 괴로워하는 가난은 대개 절대가난이 아니다. 공들여 밥벌이를 하면서도, 이미 적당히 가졌으면서도, 마치 사막에 쓰러져 물을 갈구하는 사람처럼 엄살을 떤다. 더 가지려 하고 더 모으려 하고 더 채우려 한다. 젊어서도 일하고 늙어서도 일한다. 병들어 죽어가면서도 돈을 벌기 위해 악착같이 일한다. 이게 다 욕망이라는 놈의 농간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채우고 또 채워도 허기지는 욕망의 뱃구레! 집요한 욕망의 간계에 걸려들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귀촌을 통해 한결 품질 좋은 삶을 누릴 수 있다. 뭐, 그런 내공의 소유자라면 도시에서도 끄떡없겠지만.
행복한 삶이란 무엇일까. 아마도 흔히들 내가 하고 싶은 걸 내가 하며 사는 걸 그 답으로 꼽을 것이다. 내가 진정 좋아하는 걸 내 멋대로 하며 신바람 나게 사는 인생. 그런 삶에 관한 소망엔 아무런 결함이 없다. 그러나 실천엔 아둔하거나 나약하다. 여건을 완비한 뒤에 나를 위한 인생을, 내가 원했던 일을, 그제야 비로소 신나게 즐기며 살아보겠다는 소심한 전략을 평생 지속하기 십상이다. 그 여건이라는 건 대개는 돈이다. 해서, 더 많은 돈을 모으기 위해 도시라는 사각 링에서 코피를 쏟아가며 복싱을 한다. 돈을 벌기 위해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은 인생을 스스로 탕진하는 꼴이다. 돈이 많아야 뭐든 누릴 수 있다는, 축재가 있고서야 행복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지속하는 사이에, 시간도 건강도 꿈도 손아귀에서 새나가는 모래처럼 흘러 덧없이 사라진다.
각설하고! 아무튼, 덜 벌어 덜 쓰고서도 기분 좋은 삶을 누릴 수도 있는 게 시골이다. 돈 들어가지 않는 행복과 해후할 수 있는 게 귀촌이다. 아마도 조물주께서 낮잠을 주무시다 깨어 대충 빚어놓은 게 인간이라는 작품일 텐데, 이 진기한 피조물이 돈의 노예로 살라 하명을 받은 게 아니라는 걸 입증해볼 만한 곳도 산골이다. 독특한 사례 하나를 볼까.
지금 뭐하는 거냐, 제대로 살아보자”
월 생활비 달랑 20여 만원을 쓰며 아내와 함께 시골에서 유쾌하게 살았던 사나이 S. 서울에서 직장을 다녔던 그는 어느 날 덜컥 느낀 바 있어 귀촌을 했다. 귀촌 첫해엔 빈집에 세 들어 살다가 재미가 붙자 손수 흙을 버무려 방 하나, 부엌 하나짜리 오두막을 지었다. 오두막 안엔 냉장고나 TV 따위를 두지 않았다. 아예 전기를 들이지 않고 촛불로 살았으나 나중엔 전기를 끌어다 전등을 썼다. 한 달 전기요금은 1000원 남짓. 검침원이 놀랐다지? “어라, 이거 계량기 고장 아녀?” 햐!
전자제품이 없으니 전기료 들어갈 일이 없었다. 대신에 연구를 해 요령을 터득했다. 일테면, 냉장고가 없으니 일단은 음식을 많이 만들지 않았고, 김칫독은 냇가에 묻어 냉장 효과를 거두었다. 그런 식으로 많은 실험을 해 불편을 해결해나갔다. 인디언처럼 말이다. S는 전기가 싫었다. 전기 없이 사는 게 지구라는 초록별을 지키는 길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부터였다. 그런 가상한 생각을 하게 된 계기는 서울에서의 어느 날, 석유문명의 위험을 다룬 다큐를 볼 때 찾아왔다. 머잖아 석유가 고갈되면 지구가 망할 것이라는 내용의 다큐. S는 쇼크를 먹고 곧바로 고민을 했다고 한다. 내가 지금 뭐하는 거냐, 제대로 살아보자, 어떻게든 전기에 의지하지 않고 제대로, 스스로 사는 인간이 돼보자, 고민의 결론은 그랬고, 그는 즉각 산골로 내려갔다. 원래 귀촌을 바랐던 아내와 함께 말이다. 1000원어치의 전력만 소비하는 오두막의 나날들은 만족스러웠다고 한다. 내가 지금 거창한 일을 하는 거 맞지? 그런 자부심으로.
그런데 밥은? 거의 맨손으로 귀촌한 그는 무엇으로 생계를 해결했을까? 농사를 지어 자급자족했다. 그렇게 살자는 애초의 계획을 잘 관철했다. 정 어려우면 잠시 도시에 나가 접시라도 닦으면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그 두둑한 배짱과 여유라니. S는 희희낙락, 날마다 노래하며 오두막살이를 즐겼다고 한다. 노래가 있는 인생은 그의 오래된 꿈이자 이상이었던 것. 산골에서 떠오른 생각들을 끼적여 자작곡들을 지었고, 우쿨렐레 줄을 팅팅 뜯으며 베짱이처럼 노래하며 살았다. 그렇게 3년여가 지나자 싫증이 일어 다시 어디론가 향했는데 그게 또 시골이었다. 이번엔 빈집을 빌려 들어앉은 S의 생활 방식은 이전과 별 다를 게 없었다. 자급자족을 도모하며 날마다 노래를 만들고 부르기를 거듭한 이 베짱이는 40대 중반이 돼 도시의 호명을 받고 정든 시골을 떠났다. 홀로 산골에서 부른 노래가 도시로 흘러가 애호가들이 생겨나서였다. ‘노래하는 음유시인’이라는 소리를 듣는 S는 현재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노래를 부른다.
S는 돈 없이 시골에 살며 하고 싶은 일을 다 하고 살았다. 행복하게 말이다. 그가 누린 귀촌생활상이 보편적인 건 아니다. 하지만 눈여겨볼 절경이 서려 있다. 돈에 구애받지 않고 만족할 만한 삶을 구가해온 사람의 지향과 방식이 완연하다. 돈의 추구보다는 내 삶의 방향에 대한 믿음과 실천이, 시골의 자연 속에서 배양된 낙천적 감성이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걸 알게 한다. 거의 모든 게 돈과 결부돼 돌아가는 대도시에서는 구현하기 어려운 삶의 방식이라는 걸 읽을 수도 있고.
좋은 옷을 아낀다고 장롱 속에 오래 넣어두면 체형의 변화로 몸에 맞지 않거나 유행이 변해 입을 수 없게 된다. 엔젠가는 옛날의 체형으로 돌아오겠지 또는 유행은 돌고 돈다니까 언젠가는 입을 수 있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는 언제나 실망으로 돌아온다. 적당하게 맞을 사람이 있거나 탐하는 사람이 있다면 주는 것이 상책이다. 3년 이상 입지 않은 옷이라면 버려야 한다고 정리 전문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옷만 그런 것이 아니다. 공산품인 가전제품도 오래 사용하지 않고 방치하면 쓸 수 없다. 비디오테이프나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가 그렇고 전축이나 라디오는 물론 TV까지 그렇다. 시골에 가면 몇 십 년 된 전기밥솥이나 라디오를 아직까지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매일 애지중지하며 분신처럼 닦고 조이고 기름 치고 아끼고 있다. 무엇보다 계속 사용했기 때문이다. 사용하면 쓸 수 있지만 처박아두면 녹슬고 고장이 나서 못쓰게 된다.
집도 그렇다. 시골에 번듯하던 집들이 사람이 살 때는 윤이 나서 반짝이지만 주인이 떠나고 빈집이 되면 급격하게 쇠락한다. 불을 때지 않는 빈집에 쥐들이 구멍을 내고 새들이 집을 짓고 온갖 해충들이 덤벼든다. 이들을 잡아먹으려는 뱀이나 너구리들도 들락거린다. 지붕이나 마당에도 잡초가 용트림을 한다. 흉물스럽게 곧 쓰러져가는 집도 한때는 아이들 웃음소리가 있었을 것이다.
운동화 같은 신발도 아낀다고 신발장에 몇 년을 묵혀두면 본드로 붙인 곳이 들떠서 못 신게 된다. 겉이 멀쩡해서 신고 다니다보면 발가락이 쑥 나오는 황당한 경험을 해 본다. 신발을 계속 신으면 신발 바닥이 다 떨어질 때까지 신을 수 있다. ‘아끼다가 DONG(?)된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다.
고장 난 것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고독사(孤獨死)가 많다고 한다. 고령사회인 일본에서 고독사한 사람들의 유품을 정리해주는 일본 최초의 유품정리기업 ‘키퍼스(Keepers)'가 있다. 이 회사의 대표이사인 요시다 타이치는 그의 저서 에서 ‘고독사의 현장에 가보면 집 안에 고장 난 채로 방치되어있는 전자제품이 너무나도 많다’ 라고 말했다. 저자는 이 책에서 고장 난 물건을 수리해서 소중하게 쓰는 사람이었다면 인간관계를 포함해 생활스타일도 많이 달랐을 것이고 고독사에 까지는 이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고장 난 것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정신적으로도 문제가 있다고 일본의 저명 정신과의사인 호사카 다카시는 말했다.
고독사 당하지 않고 건전하고 건강하게 살려면 인간관계도 연락하고 챙겨야 한다. 오랜 기간 무심코 찾지 않으면 친했던 사람사이도 영영 남남이 된다. 먼 훗날 그때 가서 연락하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거나 살아있어도 예전의 정감을 느낄 수가 없다. 적어도 1년에 한번 씩이라도 전화번호부를 펼쳐놓고 잊을 사람은 지우고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사람은 연락을 취해야 한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로 오래 지나면 기억이 희미하게 되어있다. ‘누구시더라?’라는 대답을 들을 때 참으로 쑥스럽다.
영원히 풀어지지 않을 것처럼 꽉 맨 운동화 끈도 세월이 지나면 저절로 풀어진다. 수시로 다시 고쳐 매야 한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일 년에 한번 만나 긴 이야기를 나누기 보다는 짧은 대화라도 한 달에 한 번씩 만나 나누는 것이 효과적이다. 세상만사 모두가 오래사용하지 않으면 잊혀지고 고장 나게 돼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끌어안고 감당 못해 쩔쩔매지 말고 버릴 것은 버리고 챙길 것은 챙겨야 정신건강에도 좋다. 있을 때 잘해 라는 말은 물건에게도 잘하고 사람에게도 잘하라는 말이다.
허비되기 쉬운 건 청춘만은 아니다. 황혼의 나날도 허비되기 쉽다. 손에 쥔 게 많고 사교를 다채롭게 누리더라도, 남몰래 허망하고 외로운 게 도시생활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머리에 들어온 지식, 가슴에 채워진 지혜의 수효가 많아지지만, 알고 보면 우리는 모두 은하계를 덧없이 떠도는 한 점 먼지이지 않던가. 그러나 살아 있는 동안 한 걸음 더 나아가야만 한다. 어둠 속을 부유하는 먼지의 신세를 면하기 위해, 저마다 나름의 별이 되기 위해, 타성에 젖은 삶을 바꾸는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스스로 자청한 귀촌이라는 점에서는 유쾌한 도발이거나 즐거운 실험이다. 정착에 성공한다면 주야간에 얻어 누릴 것이 많은, 자못 성대한 사업이 바로 귀촌이라는 논평도 널리 돌아다니는 게 사실이지 않던가. 서울에서 이름 난 회사의 간부로 근무했던 김창승(58)씨. 그는 오래도록 그저 평범하고 무난한 인생을 끌어왔더란다. 퇴근 뒤 주점에 들러 한잔 마시는 일이나, 휴일에 느긋하게 골프를 즐기는 정도를 여흥으로 알고 살았다. 뭐 하나에 빠지면 수면 밑바닥까지 함빡 빠져드는 버릇, 그게 특유의 개성이라면 개성이라지. 본인이 선택한 일을 숭상하는 사람임을 알 만하다. 그런데 아마도 김창승씨가 가장 애호하는 건 아내 김태영(57)씨라는 존재였던 모양이다. 아내는 귀촌의 깃발을 들고 앞장서 나섰으며, 그는 즉각 응했다는 게 아닌가. 그는 ‘충성!’을 속으로 외치며 대번에 아내의 뜻을 따랐던 것 같다. 이를 부부애의 한 절경이라 봐도 무리가 없을 터. 세상의 모든 아내들이 부러워할 정경이렷다. 동쪽으로 가자 하면 일쑤 당나귀처럼 어깃장을 부려 서쪽으로 냅다 뛰기도 하는 게 남편이라는 종족이니 말이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아내가 원하는 귀촌을 결행하기 위해 자신의 내부에 들어 있는 생각과 가치관 따위를 새삼스럽게 신중히 점검한 김창승씨는, 귀촌이라는 종목이 사실상 자신에게도 어울리는 탁월한 선택일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이후 매우 신속하게 일을 서둘렀다. 그는 곧장 회사에 사표를 냈다. 2014년 1월 엄동 철에 부부는 마침내 전남 구례군 토지면의 시골로 귀촌했다.
“아내의 고향이 구례입니다. 고향으로 돌아가 인생 후반을 맞이하고 싶다는 게 아내의 소망이었어요. 이 사람은 초등학교 교사인데, 고향의 작은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텃밭농사를 통해 순수한 먹거리를 거두어 먹고, 자연의 품안에서 평온한 생활을 하며 늙어가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던 거죠. 어릴 적의 추억이 서린 시골에 대한 향수가 소박하지만 절실한 꿈으로 부푼 것 같았어요. 가만히 생각해보자니 저에게도 신선한 전환일 수 있겠더라고요. 그래서 바로 일에 착수했습니다. 집안 어른들의 반대가 심했지만 밀어붙였어요. 어느덧 귀촌 3년의 세월이 흘렀는데요. 아내는 물론 저 역시 크게 만족하며 살아갑니다.”
김창승씨 내외가 깃들어 사는 집은 오래된 기와집. 마당엔 갖가지 나무와 화초들이 자라고, 온갖 작물들이 자라는 텃밭도 솔숲처럼 싱그럽다. 낡고 빛바랜 태로 세월의 풍상을 웅변하는 고가(古家)가 자아내는 푸근한 정감. 길차게 자란 채 집을 빙 에두른 대나무들이 뿜는 청신한 기운. 남도의 전형적 농가의 구색이며, 수더분해서 다분히 이상적인 조경이며, 꾸민 바 없이 자연스럽게 잘 꾸며진 미학의 공간이다. 아니, 이토록 고리타분한 집에서 살려고 시골을 내려왔소? 하고 딴죽을 걸 사람이 드물지 않겠지만, 인간이란 저마다 다양한 취향을 관철하며 즐기며 살아가게 돼 있는 동물. 김씨 내외는 이 옛집이 취향과 구미에 맞아 오직 만족스럽다는 거다. 집 뒤 저편으로는 지리산이 거인의 눈을 껌벅이고 있으며, 집의 전면으로는 수려한 섬진강이 요요히 남실거린다. 명당에 들어앉은 집이라 간주한 내외는 이 집을 아예 사서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으나 여의치 않았단다. 집주인이 집을 팔 의향이 눈곱만치도 없어서였다. 그래서 당분간 그냥 빌려 쓴다.
먹거리 정도는 자급하기로
귀촌이나 귀농을 하는 사람들이 맨 처음 해결할 문제는 단연 거처나 땅을 확보하는 일이다. 게다가 시골의 집값, 땅값은 늘 생각보다 비싸며, 매물 자체가 드물며, 뭘 모른 채 엄벙덤벙 순진하게 덤벼들었다가는 잔머리 굴리는 재주를 가진 이들의 농간에 깜박 속아 넘어갈 수도 있다.
“귀촌 시 가장 어려운 문제는 역시나 들어가 살 집을 장만하는 일입니다. 시골에 빈집은 드물지 않지만, 대부분의 집주인들이 절대 팔지 않겠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어요. 도시에 나가 사는 자제들이 언젠가는 들어와 살거나 별장 용도로 쓰겠다는 생각들이니까요. 그렇다면 현지의 사정도 파악할 겸 잠정적으로 세 들어 살 집을 마련하는 게 현명한 방법이지만, 딱히 임대할 만한 집도 드문 게 현실입니다. 저희도 상당한 공을 들이고서야 이 집을 빌릴 수 있었습니다. 우선은 부지런히 발품을 파는 수밖에 없지요.”
“집 지을 땅이나 농토를 구입하려고 10년을 돌아다녔다는 사람도 있습디다. 뜸들이다 늙어버리는 것이죠. 이상적인 터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도 과욕이지 않을까 싶어요.”
“자연 경관이 빼어난 땅을 덜컥 샀다가 낭패를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개발이나 건축을 할 수 없는 땅을 속아서 사는 케이스죠. 계절마다 땅 사정이 다르다는 점도 유념해야 해요. 여름엔 바람골이라 시원하겠다 싶어 사들였다가 겨울이 돼서야 유난한 얼음골이라는 걸 알고 낙심하는 수가 있으니까요. 땅이나 집의 거래 때 마을의 내부 가격과 부동산 업체에 내놓는 가격차가 크게는 두 배에 달한다는 점도 염두에 둬야 해요.”
“선생 내외는 혹한기 1월에 여길 들어왔어요. 춥고 외롭고 불안하진 않았나요?”
“고가의 보일러를 손보고, 벽지를 바르고, 그러곤 그냥 살았어요. 당시엔 TV도 없었어요. 온천지에 깜깜한 밤이 내리면 7시부터 잠을 잤죠. 그렇게 긴긴 겨울을 좀 스산하게 지냈으나, 어느덧 봄이 왔고요, 그 첫봄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몰라요. 이어 여름이, 가을이 오가고, 절기에 맞춰 농사가 시작되거나 마무리되고, 온갖 꽃들이 피고 지고, 참으로 감동적이었어요. 꿈꾸듯이 지낸 날들이었어요.”
“일은? 농사는? 그저 자연 풍경을 관람하며 지냈나요?”
“아내가 교직에 있고, 나름 물적 여력도 좀 있고 해서 황급히 돈벌이에 나서진 않아도 되는 여건이었어요. 그렇지만 이왕에 시골에 살게 됐으니 부부의 먹거리 정도는 자급을 하자, 뭐든 소소하게나마 농사도 지어보자는 생각으로 농토 400평을 샀습니다. 거기에 주로 콩을 심어 된장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귀촌과 귀농을 겸한 방식으로 살아온 셈이죠.”
도시라고 왜 매력 요소가 없을까마는, 한결 안전한 삶이 시골에서라고 거저 주어질 리가 있을까마는, 인구와 차량과 소음이 거품처럼 바글거리는 도회의 생활이란 시골에 비해 피로와 고독을 가중시키는 게 사실이다. 차갑고 쓸쓸한 인간관계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은 곳, 타산이 없는 동행을 만나기 어려운 장소가 도시이기도 하다. 그러나 경쟁과 긴장이 덜한 시골에서 권태를 피해 생기를 유지하고 행복을 구가한다는 게 용이한 일만도 아니다. 적막하거나 적적한 시골살이에 무기력하게 코 꿰게 된다면 그 역시 낭패가 아닐 수 없다. 김창승씨는 가급적 일을 만들어 거기에 온전히 투신하는 게 복된 삶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이즈음의 그는 거의 일벌레다.
“시골 인심은 정말 순후해”
“콩농사와 벼농사, 그리고 양봉도 합니다. 벌통 20개를 운영하고 있어요. 왜 양봉이냐? 지리산 지구인 이곳엔 산야초가 타지에 비해 두 배 정도 많아요. 벌들이 꿀을 물어올 꽃들이 지천이라는 얘기죠. 과수농사도 좀 합니다. 아내는 저보고 일을 벌이지 마라, 좀 편하게 살자, 그렇게 투정처럼 말하지만 일이 즐거우니 어떡하나요? 물론 농사로 아직 수입을 올리진 못하고 있어요. 경험을 축적하는 단계라는 거.”
“구례군 귀농귀촌협회장이기도 하죠? 귀농귀촌인들의 실태에 훤하겠어요. 그들은 어떤 문제에 가장 큰 애환을 느끼죠?”
“만족할 만한 소득을 올리기가 어렵다는 점이죠. 농사로 돈을 만지기란 실로 어려워요. 더구나 막연히 뭔가 잘되겠지 하고 무작정 들어온 경우는 실패하기 십상이에요. 시골에 내려와 살고자 한다면 미리 도시에서 한 가지쯤 기능을 익혀두는 게 현명하다고 봅니다. 목공, 배관, 전기기술, 중장비 또는 숲 해설사라거나, 유용하게 써먹을 기능 분야가 많으니까.”
“마을 주민들과 흐뭇한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어떤 처신이 필요할까요? 융화에 실패하고 패잔병처럼 철수하는 이들이 드물지 않아 묻는 질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대목이죠. 흠. 전통 농경사회의 특성이랄까, 시골 주민들은 ‘외지 것들’ 또는 ‘도회지 놈들’에게 일단 경계심을 품게 마련입니다. 개나 끌고 다니며 괜히 거들먹거리는 사람들, 온갖 참견을 하고, 육하원칙을 내세워 따지고 비판하는 부류들을 좋아할 리가 없죠. 제가 온몸으로 느낀 거지만, 시골 인심은 정말 순후해요. 주민들 속으로 겸손하게 들어가야 합니다. 돈 드는 일도 아녜요. 경로당에 수박 한 덩이 들고 가서 노인들과 어울리는 일은 사실 즐거운 일입니다. 마을 사람 하나와 싸움을 하면, 그건 결국 마을 전체에 싸움을 거는 일과 마찬가지라는 걸 알아야 해요. 존중하라! 그리 말하고 싶어요. 우리네 어버이들이 대부분 시골 출신 아니겠어요?”
자아도취엔 리스크가 많지만 겸허한 실천으로는 길이 열린다. 시골이라는 공동체에서 나를 낮추면 뜻밖에도 쏟아져 들어오는 것들이 많다. 우호적인 눈길, 미더운 관심, 끈끈한 유대감이 시골살이를 안정적인 쪽으로 데려다준다. 그렇다면 귀촌이란 수신(修身)이구나! 교만하거나 우매한 나를 독사의 눈으로 냉철하게 돌아봐 교정하는 교실에 들어선 것이라 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자신을 세우되 이웃을 품는 일, 끔찍한 아귀다툼의 세태에서 한발 떼어 자연과 인간에게 순하게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는 일, 이는 음풍농월만큼이나 발랄한 자아실현의 길이지 않겠는가.
“아침저녁으로 새롭게 변하는 자연 풍경들이 정신과 영혼을 정화해주는 것 같아요. 이건 도시에선 도저히 느낄 수 없는 행운이죠. 산과 들과 강, 하늘과 별과 숲을 바라보면 때로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오르기도 하고, 때로는 환희가 가득하기도 합니다. 마치 감동적인 영화를 보고 난 뒤에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할 때처럼…. 이런 경험을 반복하면서 내가 비로소 내 삶의 주인이 되었다는 주체의식과 생기를 깨달아요. 예전엔 아내가 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로운 섬처럼 저를 느끼곤 했으나, 이젠 온전한 기쁨을 느껴요. 뭔가 한층 높고 고결한 곳에 있다는 실감이랄까, 그걸로 만족스러운 겁니다.”
삶의 일상에 자연이 붙어 있을 경우, 행복의 빈도는 더 잦아진다. 강바람에 들이 일어서고 눕는 풍경을 바라보는 일, 나뭇가지 하나를 집 삼아 밤을 나는 박새를 바라보는 일, 별이 모이는 걸 바라보는 일, 이 모든 소소한 풍경들에서 내 심장의 볼륨이 높아지는 걸 깨달을 수 있는, 시골살이란 어쩌면 낙원으로의 입문이다. 낙원의 한 치 곁엔 늘 연옥이 있는 법이지만.
한낮에도 그저 적요한 읍내 도로변에 찻집이 있다. ‘카페, 버스정류장’이라는 간판을 달았다. ‘버스정류장’이란 떠나거나 돌아오는 장소. 잠시 머물러 낯선 곳으로 데려다줄 버스를 기다리거나, 마침내 귀환하는 정인을 포옹으로 맞이하는 곳. 일테면, 인생이라는 나그네길 막간에 배치된 대합실이다. 우리는 모두 세월의 잔등에 업히어 속절없이 갈피없이 흔들리며 먼 길을 가는 나그네가 아니던가. 저마다 여정을 손에 쥔 순례자이며 여행자! 상호에 서린 서정을 음미하며 찻집으로 들어선다.
‘카페, 버스정류장’ 주인 박계해(57)씨는 5년여 전까진 문경시 가은읍의 산골에서 귀농자로 살았다. 그보다 더 오래전엔 중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교직생활은 신바람 났었더란다. 그럼에도 교사직을 버리고 귀농을 한 건 그 어떤 틀에 사로잡혀 살기를 악어의 아가리에 머리를 집어넣는 일처럼 싫어하는 성향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 결정적인 이유는 남편이 어느 날 귀농을 선창하고 나선 데 있었다. 그녀는 고분고분 따랐으며, 남편보다 더 빠르게 시골생활에 적응했다지.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에 그렇게 시작된 시골 살림은 이후 10여 년간 계속됐으나 다시 행선지를 바꾸었다. 인생이라는 여행 혹은 순례에 무슨 고정된 목적지가 있을 것인가. 박계해씨는 우연히 상주시 함창읍의 거리를 걷다가 오래된 일본식 2층 고가에 필이 꽂혀 단박에 임대를 하고 찻집을 차렸다.
교사에서 농촌생활자로, 다시 소읍의 찻집 운영자로. 다채로운 편력을 하며 중년기 15년여의 세월을 흘러온 셈이다. 섭렵이 쏠쏠했으니 드라마도 푸짐하렷다. 행복과 불행이, 만족과 불안이, 빛과 그늘이 순리처럼 그녀의 시간을 곡예하며 통과했을 게다. 그렇다면 마땅히 자리에 모시어 경청하는 게 사리에 맞는 일. 운치도 정취도 남실거리는 찻집에 마주앉아 한 여자의 삶에 서성거리는 나름의 광량(光量)이라는 걸 느껴볼 수 있는 기회란 행운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귀농 10년의 얘기부터 들어볼까? 순식간에 학교에 사표를 내고 후다닥 귀농한 대목으로부터 얘기가 시작되었다.
“남편의 제안을 따라 귀농 교육을 받으며 곧바로 제 마음도 시골로 향했어요. 제 고향이 하동 악양의 시골인데요, 허물어져가는 돌담집에 대한 애호 같은, 농촌의 자연과 풍경에 매료되는 성향 덕분이었죠. 드디어 지인의 소개로 가은의 시골을 둘러보게 되었는데, 모든 게 맘에 들었어요. 빈집 하나를 사서 적당히 고쳐 시골 살림을 시작했어요. 도시 출신인 남편과 달리 저는 풀이나 피도 잘 뽑고, 매사 빠르게 적응했어요. 시골생활의 많은 점들이 좋았어요.”
“귀농의 초기 정착에 갖가지 애환을 겪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선생의 시골생활은 좀 달랐군요. 일테면, 어떤 점들이 만족스러웠죠?”
“무엇보다 도시에서와는 달리 자연이 주는 감흥들이 참 좋았어요. 하늘, 땅, 나무, 풀, 모든 자연 생태가 주는 힘이라는 것, 그게 좋았어요. 재래식 화장실을 쓰며 도시에서 좌변기를 쓸 때 느꼈던 죄의식을 갖지 않을 수 있다는 점도 만족스러웠어요. 이웃분들과의 소통은 늘 즐거웠어요. 제가 말이죠, 마을 부녀회장을 맡기도 했어요. 상(喪) 당한 집에서 이웃들과 둘러앉아 전을 지진 기억도 많아요. 학교생활의 경험을 살려 할머니들을 모신 학급을 운영하기도 했어요.”
귀농 경험, 책으로 펴내다
“처음 3년간은 아무런 불편 없이 살았어요. 교직 근속 20년을 채우기 직전에 사표를 써 연금 대상자가 되진 못했지만 퇴직 때 받은 돈이 있었기에 미리 걱정하거나 연연해하질 않았어요. 그런데 3년이 지나자 돈이 바닥나고 말았어요(웃음). 저나 남편이나 돈 문제엔 워낙 태평한 사람들이었어요. 저축이라는 걸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살았거든요.”
“돈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는 게 귀촌귀농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물질을 하느님으로 모시는 이 세속에선 환상에 불과할지도 모르죠.”
“저희 집 가훈을 들어보실래요? ‘내비도!’ 바로 그거였어요. 남편이나 저나 그냥 사는 스타일이었어요. 귀농해서 살며 생전 처음으로 돈의 위력을 실감했어요. 어느 정도 돈 문제에 덜미를 잡혔던 거죠. 마치 벌을 받는 것처럼(웃음).”
‘내비도!’ 내버려둬라, 저절로 흘러가련다. 렛 잇 비(let it be)! 근사한 푯대가 아닐 수 없다. 인간의 삶이란 낭만적 지향이건 급진적 가치이건, 물적 토대에 의해서만 실현 가능하다는 소식이 난무하지만, 그게 반드시 그러기만 하랴.
귀농이나 귀촌이란 소유를 헐겁게 하는 실천일 수도 있다. 소유하지 않음이 아니라 가급적 소유의 부피와 무게를 줄이는 지혜를 발휘할 절호의 찬스일 수도 있겠지. 박계해씨의 사고와 삶은 자유로운 지평을 향했던 것으로 보이며, 귀농의 나날들은 한동안 유쾌했던 것 같다. 그러나 통장 잔고가 바닥을 치면서 당장 활로를 찾아야 했다.
“더 이상 여유를 부릴 상황이 아니라서 일을 만들어 덤벼들었어요. 가은읍내에 점포를 얻어 옷을 팔았어요. 전에 천연염색과 바느질 공부를 해둔 게 있었는데, 그게 도움이 됐어요. 손수 염색한 옷가지들이 제법 팔려나갔으니까.”
“시골 옷가게 매상이라는 게 소소했을 테고, 남모르게 진땀 흘린 시절들이었겠어요.”
“당시 아들과 딸, 두 녀석이 학생이었는데 교육비 부담이 컸어요. 어떻게 이 상황을 헤쳐 나갈까, 늘 고심이 많았어요. 그러나 자존심이 상하거나 위축되진 않았어요. 이왕이면 일을 즐겁게 해나가야겠다는 생각으로 가게에 딸린 안방을 동네 사랑방처럼 활용해 아줌마들과 교류를 했어요. 제가 교직에 있을 때 교사 극단을 만들어 활동한 경험이 있는데요, 가은 시골의 초등학교 학부형들과 작당을 해 연극 캠프를 열기도 했습니다.”
고심이 많은 생활이었지만 여흥을 누리는 일에도 게으르지 않았던 셈이다. 취향과 재능을 죽이는 난감한 상황에서도 여하튼 들고 일어서는 게 낙관의 힘이렷다.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것처럼 즐거운 게 다시 있을까. 무슨 일이건 억지로는 하기 싫은 반면, 하고 싶은 일은 기어이 해내면서 살고 싶었어요. 그런데 사실 생활에 보탬이 되고자 벌인 일이기도 했어요. 연극 강사로 나서 수입을 얻었으니까. 주부강좌에 나가 천연염색을 강의하기도 했어요.”
“가은 시골에서의 귀농 경험을 담은 책, 를 출간했더군요.”
“촌에 살며 농사를 좀 했지만 사실 일머리가 서툴렀고 커다란 애착도 없었어요. 자연이 드러내는 사계의 민감한 변화를 만끽하는 일, 야산에 올라 산나물을 뜯는 일, 어른들과 어울리는 일은 참 좋았지만 그것만으로는 다 채워지지 않는 어떤 허기 같은 게 있었어요. 나, 이렇게 살다가 마는 거야? 아니지, 이건 아니지 하는 생각으로 귀농일기를 쓰기 시작했어요. 제가 버지니아 울프를 좋아하는데, 그가 말했어요. ‘기록하지 않은 일은 일어나지 않은 일과 마찬가지다’라고. 그 말에 자극을 받아 마을 얘기, 마을 사람들과의 관계, 좌충우돌한 경험담 등을 글로 썼던 겁니다. 책 출간 뒤엔 글쓰기 강사로 활동하기도 했어요.”
“비록 물적 애환이 자심했다지만 동분서주, 야무지게 자신을 건사한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말이죠, 귀농으로 맞닥뜨린 시련 중에 부부간 갈등이 깊어지는 경우가 드물지 않더군요. 선생의 그 열렬한 날들 중에 부군과의 관계는 어땠나요?”
“흠. 저희 부부는 이혼을 했어요. 제가 먼저 이혼을 원했고, 마침내 남편이 동의해줬어요. 저는 그를 존경하고 좋아하고 사랑했어요. 그러나 더 이상 발전이 없는 한계를 깨달았어요. 소통에 문제가 생겼어요. 각자의 길을 가는 게 옳다는 판단을 했죠.”
언젠가는 섬에서 살고 싶어
이혼을 금기시하는 묘한 모럴도 있지만, 결혼이 자연스럽듯이 이혼 역시 당연한 귀결로 찾아드는 수가 있다. 이혼이 상처가 되지는 않았다고, 차라리 좋은 경험이었다고, 박계해씨는 담담하게 토로하고 있다. 그녀는 이혼 절차를 완료하고 남편과 함께 법원을 나서던 날의 기억을 다음처럼 글로 썼다.
‘그는 내 어깨를 툭 치며 독립을 축하해! 라고 말했다. 그 순간 나는 이 대단한 남자와 결혼했던 것이 뿌듯해서 그에게 몸을 찰싹 붙이고 팔짱을 끼었다.’
박계해씨의 찻집 ‘카페, 버스정류장’은 귀농 이후 그녀의 삶을 새로운 쪽으로 데려다주었다. 인생엔 터닝 포인트라는 게 있는 법. 찻집 운영과 더불어 그녀의 나날은 바닷장어처럼 생동하는 것으로 보인다. 원로 시인 강은교 선생이 이 찻집을 다녀간 뒤 ‘카페 버스정류장’이라는 제목의 시를 발표하기도 했지만, 어지간히 지역의 명소로 부상해 일부러 찾아드는 이가 드물지 않다. 토속적 미감과 모던한 감각이 잘 버무려져 낭만적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 적막한 소읍의 찻집에선 차만 파는 게 아니다. 예술인들을 위한 전시장으로, 노래 공연장으로, 시낭송 공간으로 쓰이기도 하니까.
“귀농 이후 그 어느 시절보다도 편합니다. 일단은 규칙적인 소득이 발생하기에 안도할 수 있고, 다양한 개성의 사람들과 만나 삶을 얘기할 수 있다는 게 참 좋아요. 아이들도 잘 자라 아들놈은 부산에서 연극배우로 활동하고, 딸은 만화가로 일하고 있어요. 두 번째 책 을 펴낸 일도 즐거운 추억이 되었어요.”
“귀농으로 촉발된 인생의 색다른 여정이 어떤 안착에 이른 거예요?”
“꽤 안심을 느끼지만 이 찻집은 앞으로 5년 정도만 더 할 작정입니다. 경제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만 있다면 이곳을 지역 예술인들에게 내놓고 싶은 생각도 있어요. 저는 다시 어디론가 떠난다거나 환경을 바꿔야겠죠. 음, 요즘엔 시나리오를 쓸 궁리를 하고 있어요. 독립영화가 아닌 상업영화용 시나리오를요. ‘나의 경제’라는 제목의 책도 한 권 쓸 예정이에요.” “가령, 무인도에 혼자 살아야 할 경우 꼭 가져가고 싶은 한 권의 책이 있다면?”
“이상의 예요. 어, 그런데 제가 최종적으로 가서 살고 싶은 곳이 섬인데요?(웃음)”
“섬에서의 삶을 꿈꾸세요? 고독을 견딜 수 있겠어요?(웃음)”
“가급적 환경을 새롭게 바꿔 자신의 삶이 점점 나아지는 걸 느끼고 싶어요. 경험 세계를 넓혀 내적으로 성숙하는 기쁨을 맛보며 살고 싶다는 거!”
길은 다양하며, 모든 길마다 나그네의 경전이다. 삶의 문제를 여행으로 혹은 순례로 치환할 수만 있다면 귀농이건 섬이건 가슴 설레는 행로이지 않겠는가. 잠정적인 고난이야 해 뜨기 직전의 어둠이나 추위에 불과할 테고.
길은 다양하며, 모든 길마다 나그네의 경전이다. 삶의 문제를 여행으로 혹은 순례로 치환할 수만 있다면 귀농이건 섬이건 가슴 설레는 행로이지 않겠는가. 잠정적인 고난이야 해 뜨기 직전의 어둠이나 추위에 불과할 테고.
박원식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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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등의 저서가 있다.
농어촌 지역의 은행 지점들이 자꾸 없어지면서 지방 고령자들의 불편이 크다는 기사를 최근 접했다. 모바일이나 인터넷 뱅킹이 보편화된 세상이니 은행으로서는 적자 지점을 줄여가는 것이 당연하겠다. 그러나 통장을 가지고 직접 은행을 찾는 것이 몸에 밴 고령자들은 불안할 수밖에 없다. 물론 도시에 있는 은행도 없어져가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그래도 도시에는 여러 종류의 은행이 있고 또 조금만 움직이면 은행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세계 최고령 국가인 일본에는 ‘쇼핑난민’이라는 용어가 있다. 지방 마을에 있던 편의점이나 식료품 가게들이 장사가 안 되니까 자꾸 문을 닫는 바람에 사람들이 식료품을 포함해 생필품을 구하려면 차를 타고 멀리까지 가야 하는데 이들을 쇼핑난민이라고 부르는 것이란다. 그러나 거동이 불편하거나 운전이 어려운 고령자들은 이마저도 불가능하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택배가 활성화되긴 했지만 물건을 살 때는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만져봐야 잘못 사는 실수도 줄이고 쇼핑의 즐거움도 있는 것이다.
작금의 우리나라 농어촌 고령자들도 ‘쇼핑난민’에 속한다. 비단 은행 문제만이 아니다. 일본의 지방 고령자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이제 우리나라 고령자들도 고스란히 겪고 있다. 소득이 불안한 지방 고령자들은 소비를 거의 하지 않기 때문에 식료품이나 편의점들이 자꾸 없어지고 있다. 겨울에 비상식량을 준비해두지 않고 있다가 폭설이라도 내리면 굶어야 한다. 여름에 폭우로 길이 끊겨도 마찬가지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 중에 귀농·귀촌해서 전원주택 생활을 꿈꾸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퇴직하고 나서 전원에서 살고 싶어 한다. 평생 도시에서 일하며 쫒기듯 살았으니 그런 로망을 가질 만하다. 그러나 퇴직하고 나면 젊었을 때하고는 상황이 많이 다르다. 마음은 청춘이지만 몸은 그렇지 않다. 다른 환경에 적응하기 어려운 것이다. 최근에는 귀농·귀촌 생활을 접고 다시 도시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이 도시로 다시 돌아오는 가장 큰 이유는 원주민들과의 ‘관계’다. 농어촌 원주민들 중에는 의외로 배타적인 사람들이 많다. 도시에서 내려간 젊은 사람들은 특히 이런 배타성을 잘 견디지 못한다. 이러한 문제가 농어촌에서는 사람이 자꾸 줄어들고 생활 지원시설이 사라지는 결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요즘 지방에 가보면 빈집이 많다. 이제 농어촌 지역은 거대한 실버타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 도시재생 사업이 많이 추진되고 있다. 도시의 기능이 편중되고 불균형하게 개발된 것을 재편하고 낡은 시설들도 리모델링하는 것이 시급하다. 이와 더불어 지방 마을의 재생을 국가에서 관심 가져야 한다. 민간 시장에만 맡겨둬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지방을 계속 방치한다면 아마도 10년 내에 수많은 농어촌 마을이 사라질지도 모른다.
모처럼 일본 여행을 가게 되었다. 3박4일 간의 짧은 일정이다. 주변에 알리지 않고 떠나자니 갑자기 연락이 안 되면 불안해한다. 해외여행 시에는 스마트폰을 아예 꺼 놓는다. 시급을 요하는 일도 없으려니와 일단 출국하면 모든 것을 잊고 여행에 심취하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거노인이라 스마트폰이 꺼져 있으면 무슨 일이 생겼는지 불안할 것이다. 갑자기 심장 마비로 죽거나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일단 그룹 별로 여행 일정을 알린다. 자주 못 보는 가족 정도면 된다. 자주 보는 사람들에게는 한 사람만 대표로 알게 하면 된다. 일일이 모든 사람에게 알릴 필요는 없다. 연락이 안 되면 이리저리 알아 볼 것이다. 몇 사람 거치면 알게 된다.
해외여행을 간다고 하면 가장 부담이 되는 것이 귀국길에 면세품을 사오라고 부탁해 오는 것이다. 아는 처지에 거절할 수도 없고 여행 내내 스트레스로 남는다. 어지간한 것들은 국내에서 살 수도 있는데도 굳이 부탁해 온다. 물론 가격 차이는 좀 있다. 그렇다고 그 차액을 노리고 장사를 하자는 것도 아니다. 습관처럼 면세품을 사올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시계나 명품 가방처럼 고가품을 부탁하는 경우도 있다. 필자는 우선 항공사 마일리지가 60만 마일이 다 되도록 해외여행을 많이 다녔지만 단 한 번도 과세물품을 반입한 적이 없다. 간단한 배낭 하나 메고 다니며 거의 아무 것도 사오지 않는다. 이런 명품을 사달라고 하면 일단 왜 굳이 명품을 사야하는지부터 논쟁이 벌어진다. 시계란 시간만 잘 맞으면 되는 것이고 요즘은 스마트폰이 시계 기능이 있어 시계가 따로 필요하지 않다. 가방은 각자 취향이 달라 부탁하는 사람이 생각하던 상품과 다를 수도 있다. 상품 번호를 지정한다 해도 그런 숍에 들어가는 것부터 스트레스이다.
공공연히 선물을 바라는 경우도 있다. 요즘은 기내 물품 반입 규제가 엄격해져서 액체 물품이나 육가공 상품은 반입이 안 된다. 흔한 열쇠고리나 볼펜 등은 사다 줘 봐야 실용성도 없다. 아까운 외화만 낭비하고 오는 것이다.
해외여행을 다녀온다면 한 턱 내라는 정도는 애교이다. 해외여행이 쉽지 않았던 시절에나 하던 관습이다. 부러워하면서도 정작 여행지에 관한 얘기는 흥미도 없다. 비싼 해외여행 갈 돈이 있는 사람이니 지인들에게 돈이나 쓰라는 취지이다. 그러나 요즘은 어지간한 국내 여행보다 비용이 적게 드는 경우도 많다. 그래도 이 방법이 가장 실용적이다. 필자도 같이 끼어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외화를 쓰는 것도 아니고 국내 경제 활성화에도 도움을 준다.
며칠 간 집을 비우게 될 때 준비할 사항은 매일 끓여야 하는 찌개 등 음식물 처리가 있다. 미리 양을 조절하여 떠나는 날 다 먹고 깨끗이 하면 좋겠지만, 남으면 부득이 포장해서 냉동실에 넣어두어야 한다. 신문이 문 앞에 쌓이게 되면 빈집이라는 징표가 되므로 그전에는 도난을 염려하여 휴독 신청을 했었다. 그러나 이틀 분 정도의 신문은 그냥 쌓아두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여행간 것을 자연스럽게 이웃에 알리는 의미가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때는 마치 기적과도 같았다. 백인 청년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믿을 수 없었다. 좀 전까지 걷기 힘들었던 다리가 동양의 비술을 만나자 5분 만에 나아버렸다. 한의학과의 첫 만남이었다. 그 자리에서 그는 반드시 이 학문을 익히리라 마음먹었다. 하지만 주변의 만류가 심했다. 한의대에서 거절당하기도 했다.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고, 한의사 국가고시 사상 최초로 합격한 백인이 되었다. 자생한방병원 국제진료센터 라이문드 로이어(Raimund Royer·53) 센터장의 이야기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오병돈 프리랜서(Studio Pic) obdlife@gmail.com
푸른 눈의 한의사. 많은 언론에서 라이문드 로이어 원장을 지칭하는 수식어다. 이 수식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를 바라보는 한국 사회의 편견이 보인다. 한의사라는 단어보다는 푸른 눈에 방점이 찍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결국 외국인으로 바라보는 시선. 그 시선으로 인해 그는 역경도 겪었고 혜택도 받았다.
오스트리아인인 그가 처음 한국에 온 것은 1987년. 무역회사에 다니던 그는 동양의 아시아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나라를 찾았고, 그중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가 눈에 들어왔다고.
“당시 한국은 완전히 알려지지 않은 나라였어요. 1988년 서울올림픽 이전이었으니까 유럽에서 한국에 관한 정보는 전무했어요. 그렇게 무작정 서울에 도착했을 때 인상 깊었던 것은 젊은이들의 활기로 가득한 도시의 모습이었죠. 서울의 역동적인 모습은 알프스 산맥의 작은 동네 출신인 저를 사로잡았어요.”
한국에서 지내다 태권도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노란띠를 매고 한창 재미가 붙을 무렵 훈련 중 발목을 다치게 된다. 그리고 이때 한의학과 운명적으로 조우한다.
“발목이 다쳐서 갔는데 엉뚱한 부위에 침을 놓더라고요. 처음엔 당황해서 보디랭귀지를 섞어가며 항의했어요. 그런데 5분 만에 통증이 사라지면서 걸을 만해지더라고요. 마법 같았죠. 한의원 특유의 한약 냄새, 약장의 모습 등이 낯설고 신기했습니다. 한의학에 대한 호기심이 생기더라고요. 알아보니 영화에 등장하는 무술처럼 엄청난 스승을 만나야 하는 것도 아니고, 대학을 통해 체계화된 교육이 이뤄지고 있다는 점도 절 놀라게 했어요. 당장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러나 그의 뜻과는 달리 한의사가 되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주변의 만류도 컸다. 한국어뿐만 아니라 한자까지 알아야 하는데 가능하겠느냐는 의견이 많았다. 대학 쪽에서도 난색을 표했다. 유명 한의대에 입학 가능 여부를 문의했는데 거절한다는 회신이 왔다. 이미 한 차례 외국인이 도전했다가 중도 포기한 전력이 있기도 하고, 외국인이 제대로 된 수강이 가능하겠느냐는 의견이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의 표현(한국어로)대로 그는 ‘한 번 시작하면 끝장을 보는’ 사내였다.
한국어 실력을 갖춰야 한다고 해서 어학당을 다니며 한국어를 익혔다. 한문과 동양문화에 대한 이해도 필요하다고 해서 강릉대학교에서 동양철학을 배웠다. 그때 대관령 자락에 있는 빈집에서 장작불을 지펴 가마솥밥을 해먹고 다녀, 주변에서 미친놈 소리까지 들었다.
그 후 전국을 수소문한 끝에 자신을 받아주겠다는 대구한의대(당시 경산대학교)에 입학했다. 그렇게 원하던 한의대생이 됐지만 자격을 획득하기까지 또 다른 시련을 겪어야 했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1993년에 약사에게 한약 조제권을 주는 것을 놓고 한의대생들의 수업거부가 있었어요. 그때 다른 학생들의 뜻에 따랐기 때문에 수업을 제대로 못 받았죠. 어렵게 한의대생이 됐는데 말이죠. 그리고 1995년에 약학대학 안에 한약학과를 설치하는 문제 때문에 또다시 수업거부가 있었어요. 그때는 안 되겠다 싶어 강의를 꼭 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교수님들이 파업을 하시더라고요(웃음).” 정작 수업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고 한다. 한문이 낯선 것은 한국 학생들도 마찬가지였고, 전공 수업이 익숙해지면서 성적은 점점 향상되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서양인 최초 한의사라는 감격적인 타이틀을 따냈다. 아직까지도 서양인 한의사는 그가 유일하다.
한의사가 되고 난 후 그는 또 다른 목표를 세웠다. 그중 하나가 한의학의 세계화다. 자생한방병원에서 그에게 국제진료센터를 제안했을 때 어렵지 않게 수락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효과가 좋고, 체계적으로 발전해온 한의학이 아직 세계 속에 자리매김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 했다.
“제 고국에 인접한 독일의 경우 TCM(중의학) 관련 단체만 60개가 넘어요. 소속된 양의사들이 3만~5만 명 정도 돼요. 한국의 한의사보다 많은 셈이죠. 이들은 양의학의 테두리 안에서 침술과 같은 동양의학의 장점을 받아들이고자 노력하고 있어요. 하지만 한국에서는 아직 양의학과 한의학 사이의 벽이 너무 높아요. 왜 이렇게 싸우나 의문이 들 정도죠. 확실한 건 체계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면 분명 한의학은 세계적으로 인정받을 거예요. 특히 한약의 우수성은 중의학이 못 따라옵니다. 부작용 적고 효과 좋은 한약의 장점을 세계에 알리고 싶어요.”
한의학을 알리고 싶다는 그의 열망은 생각으로만 그치지 않았다. CNN 등 다양한 해외 매체와의 접촉을 통해 한의학의 장점을 알렸고, 국제학술대회 등 모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대한한의사협회에 소속돼 일하기도 했다.
의사로서의 그는 어떨까. 병원 관계자는 그를 찾는 환자들이 많아 실적만으로도 병원 내에서 상위권이라고 귀띔한다. 한국인들 사이에서도 용하다는 소문이 난 덕분이다.
“이젠 고향이에요.” 한국 생활이 어떠냐는 질문에 돌아온 그의 대답. 한국 생활 30년. 어지간한 젊은 청년들보다 한국 생활을 오래한 그다. 그럴 수밖에.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다시 그 의문이 머릿속에 맴돈다. ‘푸른 눈’에 가려 그의 진짜 모습을 보지 못한 것은 아닐까. 누구보다 한의학을 아끼고 사랑하며, 환자 걱정을 멈추지 않는 그. 이제 그를 바라볼 때 인종을 구분하는 수식어는 내려놓아도 될 것 같다. 그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멋진 韓醫師다.
여러분은 밤새 안녕하신지요?
오늘날 우후죽순 하늘로 뻗친 중계기가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 이동통신사 기지국 중계기 전자파가 사람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24시간, 365일 그 꿈을 펼치며 인체에 해로운 물질을 마구 뿜어낸다. 물질문명의 발달 아래,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전자파는 발암 물질의 무색무취 유해성으로 서서히 국민 건강에 위협을 주고 있어 각별한 이해가 절실히 필요하다.
흔히 사용하는 전자레인지도 전자파 노출로 위험하다고 한다. 단지 사용시간이 적고 옆으로 거리를 두고 피해 있으면 어느 정도는 안전하다고 한다. 그러나 중계기 전자파는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않을 때도 자신의 신체는 서서히 피폭되어 간다고 한다. 한국은 방방곡곡 어느 곳이나 LTE가 잘 터지고 전 세계적으로도 가장 잘 터지는 편이다. 그만큼 우리나라 사람들은 가장 많이 유해 파를 얻어 맞고 있으며, 강력한 중계기 전자파가 온 나라를 뒤덮어 온통 건강을 뒤흔들고 있다.
필자는 올해 1월, 아파트로 이사를 왔다. 1000여 세대의 대 단지 새 아파트이다. 개인의 사정에 의해 입주시기가 늦어져 6개월간 빈집으로 남겨놓았다. 아파트는 맨 꼭대기 층으로 마지막 한 세대가 남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요즈음은 층간 소음 등의 문제로 선호도가 높은 만큼 꼭대기 층이 인기도 높았다. 처음으로 22층에 살아보니 모든 것들은 대체로 만족스러웠다.
어느 날, 아파트 관리실에 볼일이 있어 들렀다. 아파트 주민이라는 어떤 부부가 와서 소동이 벌어졌다. 무슨 일인가 싶어 관심을 가졌다. 다름 아닌 다른 동, 맨 꼭대기에 사는 주민이었다. 그들은 아파트 지붕 위 옥상에 설치되어있는 중계기 안테나를 철거해 달라는 것이다. 그 부부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가며 전자파의 위험성을 강조하고 있었다. 가만히 듣고 보니 남의 일이 아니었다.
집으로 돌아와 인터넷을 켜고 이것저것을 눌러댔다. 중계기에 관한 정보를 알기 위해서다. 필자는 한국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모든 것들이 생소하기만 했다. 컴퓨터 안에는 실로 어마어마한 정보들이 가득했다. 서서히 죽어만 가는 암 환자들을 연상케 했다. 물질문명의 발달로 소리 없이 인간 생명은 무서운 위협을 느끼고 있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성큼 옥상에 올라가 보았다.
바로 필자의 아파트 지붕 위로도 2개의 통신사 기지국 안테나가 세 군데나 하늘로 뻗쳐있었다. 필자의 허락도 없이 아파트 전체를 거의 다 커버하고 있었다. 필자 침실 바로 위 천정 바닥에 잠자코 앉아 야무진 날개의 꿈을 활짝 펼치며 떡하고 설치되어 있다. 늦게 입주해 빈집이었던 필자의 집 지붕 위로 한 곳에 몰아 처박혀있었다. 그때부터 심각한 정신적 스트레스가 필자를 엄습해왔다. 신경이 예민한 탓이었는지 밤잠을 설치기 일수였다. 가족들도 뒤늦게 알고는 난리 법석이 났다.
전자파 피해라는 심각성 논란 속에, 이유 없는 잦은 두통이 찾아와 병원을 드나들었다. 관리실을 찾아가 옮겨달라며 하소연도 하고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나 이미 계약을 체결해 소정의 임대료를 받고 있는 아파트 관리실에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관할 시청에 전화를 해 문의를 했다. 이동통신사 기지국에 대한 설치 제한이 사실상 전무하다며 특별한 규제 조치가 없다고 했다. 참으로 공무원들이 무책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법이 있다면, 개인적으로 통신사를 상대로 소송을 하라는 것이다. 필자는 수차례에 걸쳐 양심적으로 옮겨줄 것을 부탁했지만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 결국 책임자를 찾아 나섰다. 소송을 하겠다고 엄포를 놓으며 강력하게 대응을 했다.
세차게 나가니 통신사가 조금씩 입장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SK, KT 두 통신사 5명의 직원이 친절하게 찾아와 합의를 요구해왔다. 위치를 조금만 바꿔서 옥탑 꼭대기로 옮기도록 해달라고 사정을 해왔다. 무조건 철거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다. 어쩔 수없이 조금 양보를 해서 결국 아파트 사이에 있는 옥탑으로 옮기게 됐다. 집안의 전자파 수치 점검도 친절하게 이루어졌다. 결국 6개월 만에 이루어진 거대한 통신사와의 정신적 싸움에서 이뤄낸 대단한 쾌거였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필자는 그 후로 병원 문을 덜 찾게 되었다. 그러나 싸워서 이겨야만 했던 욕심만을 탐하는 맹목적 영리 사회가 필자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처음부터 소수의 이익 추구와 악덕기업의 경쟁력으로 국민의 다수가 고통받는 세상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가장 좋은 방법은 모든 것 무시하고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사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현명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눈 뜬 장님의 세계는 건강하게 살아 남기가 힘든 현실이라는 것도 주목해야만 할 것이다.
현대인들은 바쁘다. 거실 베란다 문밖으로 쏟아져 내리는 빗방울만큼이나 정신없이 분주하다. 집을 지키는 주부도 낮 시간에는 얼굴 볼일이 거의 없다. 아파트 승강기에서도 이웃을 만나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다. 그들은 과연 무엇을 찾아 하루 속에 있는 것인지. 그 시간들은 행복할까?
필자의 지난날에도 아파트의 젊은 여자들은 정신없이 바빴다. 아침 일찍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면서부터 모임은 시작된다. 주로 저층에 사는 집으로 모이게 된다. 가벼운 커피 한 잔으로 시작된 아줌마들의 수다가 점심으로, 어느 때는 저녁의 외출까지 단체로 이어지며 하루를 온통 차지한다. 그때는 그나마 답답하게 갇혀있던 젊은 여자들의 화려한 외출이었다.
요즈음은 아파트 앞 상가마다 커피숍이 있다. 젊은 주부들의 아침 모임이 밖으로 이동을 했다. 개인의 프라이버시가 침해되지 않기 위해, 돈을 지불하며 밖에서 만나는 것이 편하다고 한다. 분위기도 그럴듯하고 커피 맛도 훨씬 더하기 때문이란다. 그만한 대가를 지불하는데 그것은 당연지사다. 보다 나은 환경 속에 모든 것들이 변해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세상 이치다.
어느 날, 택배아저씨가 현관문 벨을 울린다. 물론 도착함을 알리는 문자 메시지를 보내왔다. 현관문을 열어주니 아저씨가 말한다. 어떻게 낮 시간에 집에 있냐며 큰 눈을 뜨며 의아해서 물어온다. 필자가 마치 이상한 나라에 엘리스라도 되는 모양이다. 다른 집들은 거의 빈집이란다. 한국 사람들은 과연 무엇을 찾아 대낮에 어디로 가는 것인지 궁금해진다. 직장도 없는데 바쁘게만 돌아간다.
물론 직장생활을 하는 젊은이들은 안타깝기도 하다. 아침 새벽부터 일어나 어둠이 캄캄하게 깔려서 나 집으로 들어온다. 그러나 나이 먹은 시니어들도 바쁘기는 매 마찬가지이다. 하루 일과가 꽉 차있어 물레 방아처럼 돌아간다. 한편으로, 할 일없어 낮 시간에 TV 시청만 하는 것보다는 밖으로의 생활이 나을 수도 있다. 그러나 특별한 목적 없이 시간을 때우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 같다.
필자는 이제 나이를 먹은 탓인지 쓸데없이 밖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몸과 마음을 지치게 한다. 젊은 날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사람 만나기를 두려워한다. 아직은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다 포용할만한 능력이 없다. 하루를 그들과 함께하고 돌아오면 심신이 지쳐 쓰러진다. 더구나 세월 속에 단단해진 노인들은 대체로 주장이 강하고 대우받기 원하며 욕심이 많다. 필자는 감당하기 힘들어 조용히 기피한다.
오늘처럼 창밖으로 비가 오는 날이면 필자는 반드시 글을 써 내려간다. 자판을 두들기며 생각을 모으면 마음이 여유로워진다. 수고한다며 가져다주는 남편의 커피 한 잔은 더 없는 사랑의 표현이다. 빗소리와 함께 행복이 찾아오는 소리가 아침부터 귓가로 다가온다. 얼마나 평온하고 아름다운지 모른다. 그 마음에 소리는 끝내 고요한 평화가 되고 성숙한 인간미가 되어 가슴을 울려준다.
행복의 소리는 별것 아니다. 마음이 평안할 때 욕심을 내려놓으며 자신을 들을 수 있으면 그 느낌이 행복이고, 그것은 늘 우리 곁에 도사리고 있다. 다만 만들어 내고 느끼는 자의 몫이다. 시간을 찾아 분주하게 떠나는 모든 이웃사람들, 오늘도 빨리 빨 리를 외치는 그들에게 여유가 넘치는 하루가 되기를, 행복을 느낄 줄 아는 마음의 소유가 있으면 참으로 좋겠다.
창밖 넘어 쏟아지는 빗방울 소리가 필자의 마음속으로 가득 차온다. 아~~ 오늘도 행복하다.
어쩔 수 없이 마지막 이민 가방을 챙겼다. 큰딸이 학교에 휴학계를 제출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필자를 설득하기 위한 수단이었나 보다. 아이는 엄마가 하루라도 빨리 동생과 아빠 곁인 미국으로 가기를 원했고, 카이스트가 어떻게 들어간 학교인데 필자의 허락도 없이 일을 저질렀다. 드디어 왔다 갔다 이산가족 생활 3년 만에 한국의 모든 생활들을 말끔히 정리했다. 물론 큰딸은 여전히 한국에 돌아와 남은 학기를 마쳐야 했지만 이제는 어엿한 숙녀가 되어 큰 걱정을 할 필요는 없었다.
13시간의 지루한 비행시간이었다. 그러나 예전처럼 방학이 끝나면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부담이 없어 오히려 마음은 편안했다. 비행기 조그만 창문 아래로 두둥실 떠 있는 구름들이 어디론가 희망의 솜사탕 날개를 펴고 있는 것 같았다. 필자의 부푼 마음도 그 구름을 타고 조금씩 설레 이기 시작했다. 이제 또 새롭게 뿌리를 내리기 위해 내딛는 발걸음은 기대 반 두려움 반으로 막연한 환상이었다. 나름대로 각오는 했지만 그저 무덤덤하게 몸에 와 닿지는 않았다. 작은 아이와 남편은 미리 나와서 흥분된 모습으로 진한 포옹을 해주었다. 불과 6개월 만의 만남이었지만 작은 아이의 얼굴에는 엄마와 다시는 떨어지지 않아도 된다는 환희의 미소가 안정감을 말해주고 있었다.
제일 먼저 식구가 늘었으니 살 집부터 구했다. 같은 동네 씨미벨리에 거금 1250달러 월세인 투 베드 룸을 얻었다. 한국과는 전혀 다른 풍의 카펫이 깔린 아담한 아파트에 미국적 정서가 배어있는 화이어 플레이스(벽난로)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꾸미기를 좋아하는 필자는 시차 적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기저기 분위기 넘치고 아늑한 집으로 꾸며나갔다. 베란다 밖으로는 평화롭고 예쁜 동네가 나무도 제법 울창하게 우거져 있어 마치 영화 속의 전원도시 같았다.
새 식구가 된 큰딸과 필자는 이른 새벽부터 일어나 손을 잡고 동네 한 바퀴를 돌았다. 흥분과 함께 시차 적응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동네 여기저기에서 자동으로 돌아가는 스프링클러가 신선한 삶의 충격이었다. 아침 일찍부터 때에 맞춰 조용히 잔디밭 위로 자동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물먹은 파란 잔디가 고개를 살포시 들어 생동하는 생명의 꽃향기로 필자를 환영해 주는듯했다.
오후쯤 되어 큰딸과 함께 남편이 있는 곳으로 마중을 나가기로 했다. 언제나 남편은 아이보다 먼저 일을 끝내고 집에 돌아와 작은 아이를 기다렸었다. 그 이유는 빈집에 아이 혼자 들어오는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필자는 우선 챙겨온 국제 운전면허증으로 제법 용감하게 남편을 픽업하기 위해 신나게 달리고 있었다. 활짝 열린 창문으로 캘리포니아의 파란 하늘과 싱그러운 바람이 행복을 마구 실어다 주는 듯했다. 그때는 방문객도 임시 운전면허증으로 운전을 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때, 기쁜 감동도 지나치면 탈이라고 이게 웬일인가 일이 터졌다. 갑자기 머리 뒤로 삐웅삐웅 대며 뱅글뱅글 돌아가는 경찰차 한 대가 사이렌을 울리며 뒤쫓아 오고 있었다.
아뿔싸! 정신이 몽롱해지고 앞이 캄캄해졌다. 큰일 났구나라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스쳐가며 하얗게 몸이 오그라졌다. 미국은 한번 걸렸다 하면 몇 백 달러는 기본이라고 들은 기억이 있기에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일단은 길가로 차를 정지 시켰다. 키가 커다랗고 번쩍번쩍 장식을 단 우람하고 건장한 백인 경찰 한 명이 옆으로 다가왔다. 당황한 필자가 차에서 내리려고 하는 순간 큰 소리를 지르며 그대로 있으라고 했다. 겁에 질려 꼼짝없이 운전석 차 문을 닫고 그 자리에 앉아 두들기는 유리 창문을 밑으로 내렸다.
경관은 운전면허증을 요구했다. 처음 당하는 일이라 손이 어찌나 벌벌 떨리는지 큰딸이 옆에서 도와주었다. 다음으로 보험증을 보여 달라고 했다. 꼼짝 말라는 것 외에는 한국과 똑같았다. 경관은 어디를 가는 중이냐고 했고 옆에 있는 사람은 누구냐고 물었다. 그리고는 필자가 스톱 사인에 무조건 정차하지 않아 위법을 했다는 것이다. 미국은 특히 동네 길가뿐만 아니라 길바닥에 스톱 사인이 군데군데 있어서 속도를 높이 낼 수 없도록 되어있었다. 긴장한 탓인지 영어가 잘 들리지도 않았지만 무어라 답변을 해야했기에.더듬거리는 영어로 답하기 시작했다. 경찰은 “WHAT? WHAT?”하더니 무슨 말인지 영 알아듣지를 못하고 티켓을 끊어야만 한다고 했다.
그때, 갑자기 딸아이가 울기를 시작했다. 갑자기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는 더 큰소리로 엉엉 울어대는 것이었다. 필자도 깜짝 놀랐다. 아이는 지금 배가 몹시 아프다고 배를 움켜잡았고, 미국에 처음 와서 지리도 잘 모르고 빨리 병원에 가야 한다며 눈물을 펑펑 흘렸다. 경관이 이리저리 머리를 돌려가며 특유의 제스처를 쓰면서 당황하는 눈빛이었다. 그때다 싶어 필자도 합세를 해서 도와 달라고 온몸으로 사정을 했다. 여행객이라 돈도 없다며 불쌍한 척 애원을 하면서 시간을 끌었다. 경관은 여전히 갸우뚱거리더니 갑자기 얼굴빛이 달라지면서 아주 부드럽게 말을 돌리기 시작했다.
오히려 왜 그러느냐면서 그만 진정하라고 다독거렸다. 경관은 단순히 필자에게 경고를 하기 위한 것이었다며 애써서 친절을 베풀어 이것저것 설명과 함께 조심할 것을 당부했다. 그리고는 유유히 사라져갔다. 가난한 첫 이민 살림에 몇 백 달러가 순간에 눈앞에서 날아갈 뻔했다.
그뿐이랴 보험료 할증과 더불어 교통위반 교육까지 미국은 장난이 아니었다. 필자와 큰딸은 잠시 큰 숨을 고른 후에 박장 대소를 하며 손뼉을 쳐댔다. 어찌나 큰딸이 연기를 잘했던지 무어라 표현할 길이 없었지만 일단은 대단한 첫 번째 사건이었다. 시동을 걸고 두리번 거려 스톱 사인을 주시하면서 조심조심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열려 있는 차창 문을 타고 맑고 깨끗한 5월의 타국 땅 바람이 머리를 신나게 날려주었다. 무시무시한 미국 경찰관과 대면한 한판 승부였고, 어쩌면 비겁한 수단이었지만 무섭고 떨려왔던 한 건을 요행하게도 잘 해결했다. 그것은 남의 나라, 낯 선 땅에서 처음으로 맞이한 세찬 소나기였다. 기다리고 있는 남편을 만나기 위해 달려가는 10번 프리웨이(고속도로)에는 'LA의 파란 하늘'이 새롭게 시작하는 삶위로 푸른 희망을 쏟아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