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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생각 없었던 귀촌이 별나게 즐겁습니다”
- 별별 생각과 궁리를 다하고도 망설이게 되는 게 귀촌이나 귀농이다. 그러나 김석봉(62) 씨는 별생각 없이 시골엘 왔더란다. 무슨 성좌처럼 영롱한 오밤중의 현몽이 그를 이끈 건 아닐 것이다. 그는 매우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거니와, 자나 깨나 귀촌을 숙원으로 여긴 바가 없었으니 하필 후미진 산골로 데려가는 계시를 받았을 리 만무하다. 여하튼, 별 생각 없이 귀촌한 석봉 씨는 별 탈 없이 살아왔다. 별생각이 없었으니 별 볼일도 없었을 성싶지만, 사실은 별 볼일이 벌어졌다. 별별 일이 일어나며 삶이라는 숙제가 술술 풀려나갔다. 지금 석봉 씨는 별나게 즐겁게 산다. “운명이라 해두죠! 하하하!” 귀촌 내력을 묻자 돌아오는 석봉 씨의 쾌활한 답이 그렇다. 운명이라는 게 인간에게 미리 주입돼 있다는 운명론을 단단히 믿어서 하는 말이 아닐 게다. 사람은 때로 참 알 수 없는 상황이나 추세를 운명에 빗대어 적당히 눙치곤 하지 않던가. 그러니까, 별생각 없이 우연찮게 ‘필’이 꽂혀, 또는 충동의 대리운전에 편승해 산골로 이주했다는 뜻으로 들으면 되겠지. “어느 날, 친구 따라 지리산엘 놀러왔다가 빈집 하나를 보게 됐어요. 아, 마당에 들어서고 보니 너무도 좋더라고요. 2년째 비워둔 시골집이라 꼴이 말이 아니었으나 마음이 그지없이 편해지는 것이었어요. 마치 집이 저를 끌어들인 것 같은 기분이랄까. 그래서 운명적 만남인가보다, 그런 생각까지 했던 겁니다. 좋아, 이 집에서 살아보자! 그런 결심을 바로 하고 한 달 뒤 이사했습니다. 아내 역시 찬동했기에 걸릴 건 하나 없었어요.” 석봉 씨의 거처는 경남 함양군 마천면 산중턱에 있다. 집 앞으로 펼쳐지는 조망이 기차다. 지리산 최고봉인 천왕봉이 한눈에 쑤욱 들어온다. 거봉(巨峯)을 바라보노라면 뭔가 새삼 거한 꿈이나 참신한 결의가 부푸는 법. 그러나 석봉 씨는 일단 규격화된 도시, 각박한 일상에서 벗어났다는 그 자체로 이미 모든 꿈을 이룬 것과 같은 만족감을 느꼈던 것 모양이다. 귀촌을 계기로 이제 무엇을 새로 시작하겠다거나, 무엇을 하지 않겠다거나, 그런 생각조차 없었다지. 당장 집수리가 화급하기도 했다. 그는 이삿짐을 풀자마자 거처의 환경 보수에 나섰다. 사실 석봉 씨는 ‘환경’에 관한 한 선수다. 젊어 한때 교도관으로 근무했지만, 주로 환경운동가로 분주히 뛰어 중년기를 통과했다. 그의 오랜 거주지였던 진주시의 환경운동연합 상임의장을 맡는 등 열렬한 활보를 했다. 전국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로 지내기도 했다. 이런 그가 돌연 산골로 들어가 처음 한 일이 바로 낡고 헌 옛집의 환경 보수였다. 대대적인 개조가 아니었다. 쓸 만한 기본은 물론, 나무와 흙을 주재료로 지어진 산골집 특유의 소박하고 아담한 본색을 그대로 살린 단장이었다. 그 결과 이젠 시골에서도 흔히 보기 어려운 정갈한 재래식 가옥으로 변신했다. 그게 2007년의 일, 어언 12년이 흘렀다. “하루아침에 느닷없는 이주를 하자 주변 사람들이 놀랐어요. 환경운동을 하던 사람이 별안간 지리산으로 사라졌다며, 별 쓸데없는 오해들을 하기도 했죠.(웃음) 저로서는 새로운 삶의 서막이었어요. 도시에서는 누리지 못한 자유로운 시간 속에서 감성이라는 걸 되찾을 계기였으니까. 환경운동, 그건 가치 있는 일이지만, 그 이면엔 부대끼고 시달릴 일이 많았습니다. 업무와 사람들에게 말이죠. 삭막한 감성, 그런 걸 느끼며 힘들었어요.” “감성적인 일상이란 멋진 것이지만, 도시에서나 산골에서나 벌어야만 지속 가능한 생존 조건은 다르지 않겠죠. 생계엔 어떤 대책을 세우셨을까?” “도시생활을 청산하자 4000만 원 정도가 총재산으로 남더라고. 그걸로 이 집을 샀어요. 은행 대출을 끼고서였죠. 한마디로 돈 없이 들어온 겁니다. 그런데도 걱정이 전혀 없었어요. 아이고, 돈은 물론 농사기술 없지, 무슨 자격증 하나 없지, 산골에서 뭘 해서 먹고사나, 어떻게 살아야 하나, 머리 싸매고 그런 걱정부터 했다면 여길 오지 못했을 겁니다.” “좌우간 가서 부닥치고 보자! 그게 대책이었어요?” “느낌이나 용기. 귀농귀촌엔 그런 게 가장 중요하다 생각해요. 그런 게 선행한다면 산골에서 무슨 일을 하든 굶지는 않을 테고요. 아내 역시 경제 문제로 불안해하지 않았어요. 제가 진주에서 환경운동을 하며 박봉으로 겨우 살았어요. 밤엔 아내와 함께 포장마차도 했습니다. 돈을 많이 벌기 위해 심하게 애쓰는 삶, 그건 별로 좋지 않다고 봅니다.” 인생에서 가장 평온한 시절 누려 석봉 씨는 세상과 담을 쌓고 지리산 고사리로 살려고 산에 들어온 게 아니다. 백수건달은 더구나 생리에 맞지 않다. 집을 고친 뒤 그는 슬슬 일을 찾았으니 이게 순행(順行)이다. “현재 제가 1800평 규모의 밭농사를 하고 있습니다. 물론 제 땅은 아니고, 이웃들의 밭을 빌려 쓰죠. 초기엔 200평 정도를 빌려 농사를 지었어요. 농사로 거둔 생산물들로 한과나 김장김치를 만들어 팔기도 했지요. 농사 외 봄엔 산나물을, 여름엔 오디를, 가을엔 야생오미자를, 겨울엔 얼어붙은 채 나무에 매달린 모과를 따러 다니는 게 일이었고요. 그걸 또 가공해서 판매했고요.” 석봉 씨네 동네는 산촌 특유의 납작하고도 포근한 토담집들이 돌담길 따라 이어져 평화롭다. 초록 물감을 흩뿌리는 숲과 능선과 봉우리들이 마을을 휘감아 어디를 봐도 씽씽하다. 이 청명한 산촌에서 석봉 씨는 뜻밖에도 쓴맛을 경험했다. 마을 사업을 주도하다 도중하차한 것. 그는 원주민들의 동참 유도에 심혈을 기울였으나 한계에 봉착했던 것 같다. “아쉽더라고요. 마을 공동사업이 차질 없이 진행됐더라면 참 자랑스러운 마을이 됐을 텐데 중도에 올 스톱됐으니…. 마을 사업 성사를 위해서는 때로 관과 맞붙어야 합니다. 그러나 연로하신 분 일색인 마을 주민들은 저항이라는 걸 모릅니다. 사업으로 마을 공동이익이 발생할 것을 알면서도 아예 자기 생각이나 주장 자체를 드러내질 않아요. 과거의 권력자였던 관리들을 아직도 두려워하는 거죠.” “지리산 산간마을이라는 특성 때문이지 않을까요? 육이오를 처절하게 겪은 트라우마에서 기인하는 소극적 태도…. 빨치산 토벌대로 참전했던 저의 부친은 아직도 지리산 근처조차 가기를 싫어합니다.” “바로 그겁니다. 낮엔 국방군이, 밤엔 빨치산이 마을을 쥐락펴락했던 세월을 살았으니 그 상처가 얼마나 깊을꼬. 손가락질 한 번에 죽고 사는 세상이었으니 말이죠. 충분히 이해할 만한 기질적 형성이라 봐요. 사실 주민들의 심성은 순박합니다. 작은 것이라도 남에게 신세를 지면 기어이 갚아요. 그게 그들의 오랜 삶의 관습이에요.” 구제받을 길 없는 중생마저 관음보살처럼 살뜰히 보살핀다는 지리산의 슬하라고 하지만, 삶은 이모저모 고역스러워 번뇌를 고이 털어버리긴 힘들 것이다. 그러나 석봉 씨에겐 시름이 없다. 그렇다는 건, 그렇게 보인다는 얘기다. 인생에서 가장 즐겁고 평온한 시절을 누린다는 게 아닌가. 상추씨처럼 흙에 살짝 묻혀 사는 그는, 가족과 함께 담백한 푸성귀 식사를 하는 즐거움을 나날의 꿈이 아롱진 수채화로 여기는 기색이다. 평소의 버릇인 따뜻한 시(詩) 쓰기로, 저 드높은 천왕봉이 소리소문없이 열강하는 겸양의 도리를 가다듬기도 하겠지. 민박 손님이 며느리 된 사연 고리키 왈, 일이 즐거우면 낙원이고, 일이 의무이면 지옥이라지? 석봉 씨는 일이 즐거워 낙원에 사나? 그렇다. 그는 일이 즐거워 견딜 수 없다는 투의 표정을 짓기를 삼가질 않는다. “제가 참으로 좋은 일을 선택했어요!” 그는 그리 당당하고 유쾌하게 토로한다. 대체 무슨 일을 선택했기에 그러나? 민박이다. 민박을 쳐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재미와 만족을 구가하게 되었다는 거다. 들어보자. “저희 집이 자그만하지만, 본래 모습을 유지해 손질한 덕에 나름 시골집다운 토속적 운치를 되살린 것 같아요. 어느 날 하루를 묵어간 지인이 그러더라고. 저 사랑채가 너무도 근사하다, 시골집에 향수를 가진 이들이 환호할 것 같다, 민박을 한번 해보라! 그 귀띔에 민박을 시작했어요. 결과적으로 탁월한 선택이었죠.” “살림에 크게 보탬이 됐다는 점에서?” “물론 가계에 도움이 됐죠. 운이 좋았던 게 뭐냐면, 어느 날 우리 집 앞으로 별안간 ‘지리산둘레길’이 났다는 건데요, 이게 호재로 작용했어요. 상상하지 못한 행운이었죠. 별안간 손님들 발길이 잦아지기 시작했으니까. 그런데 민박을 하는 진정한 즐거움은 수익성에 있는 건 아닙니다.” “사실 취향에 맞지 않을 경우, 민박도 고달프긴 마찬가지겠죠. 대체 진정한 즐거움이란 뭐죠?” “제가 환경운동을 하던 도시에서의 나날들은 업무와 타인들, 이 양자 사이에서 냉정한 처신을 해야만 했어요. 감성이나 정감이 끼어들 틈새가 전혀 없는 건조한 관계의 연속이었어요. 그런데 민박 손님과의 관계는 전혀 달라요. 함께 식사를 하고, 술을 마시고, 온갖 하고 싶은 얘기들을 나누다 보면 ‘타인’이라는 감각이 사라집니다. 가족적인 유대감이 형성되는 거라. 그러다 보면 단골이 되고, 수시로 안부를 전하고, 진심을 나누게 되고, 그렇게 좋은 관계를 지속하게 되더라고요. 이게 제 즐거움과 만족의 원천입니다.” 쌍방향 여행이랄까. 손님은 석봉 씨의 내부로 여행을 하고, 석봉 씨는 손님의 생각 속으로 여행을 한다. 그는 이 공정하고도 허심탄회한 관계에 쾌재를 부른다. 도시에서 그가 자주 목말라했던 인간관계의 따뜻한 생태계를 민박으로 구현하는 기쁨을 누려서다. 그는 딱 부러지는 성격의 소유자로 보인다. 그런 그의 내면에 웅크린 의외의 사교적 성향이 푸드덕 날갯짓을 해 관계의 신세계로 인도했을 수도 있겠다. 민박이 불러들인 선연(善緣) 혹은 선물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석봉 씨는 민박 손님으로 가끔 찾아들던 한 아가씨에게 깊은 호감을 느꼈다. 참하고 곱살하기 이를 데 없어서. 그는 결국 이 젊은이를 며느리로 맞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제 아들놈이 현재 지리산 환경단체에서 활동가로 일합니다. 저 참신한 처녀를 이 녀석에게 소개했는데요, 처음엔 서로 심드렁하더니 어인 영문인지 기특하게도 결혼에 이르렀어요.(웃음) 현재 며느리는 우리 집 아래편에 아담한 카페를 차려 둘레길 탐방객들을 맞이합니다. 손녀도 이미 봤고요.” “3대가 한동네에 사는 게 불편하진 않으세요? 젊은이들이란 때로 발칙한 도발을 하는 법인데 말이죠.” “‘저는요, 시골이 너무도 좋아요!’ 며느리의 말이 그렇습니다. 불편도 단점도 전혀 없어요. 아이들에게 제가 가끔 잔소리는 하죠. 과욕을 부린다고 돈이 벌리는 거 아니다. 찡그리며 살아봤자 일이 풀리는 거 아니다. 이 애비가 그랬듯이 바르게, 옳게 살아다오. 나쁜 일을 보고서는 참지 마라. 그렇게.” “그런데 말이죠. 농사하랴, 민박 손님들 맞이하랴, 선생의 일상이 너무 바쁜 거 아네요? 산중의 낙은 한가하게 노니는 데에도 있지 않나?”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즐기는 것에 무슨 결함이 있을까. 좋아하는 일에 시간을 쓰고, 사랑으로 사람을 만나는 것, 그게 자유롭게 사는 길이며 좋은 삶이라 생각합니다.” 석봉 씨의 집, 꽃그늘 나무그늘이 푸르다. 이 푸른 공기 속에서 별다른 불안이나 허기가 없이 산다면 인생도 소풍처럼 가뿐할 테지. 세상의 광기와 탐욕이 침범하지 못할 것이고. 한 무리의 민박 손님들이 들이닥친다. 오늘도 신났다, 석봉 씨. 김석봉 씨가 주는 귀촌 Tip •귀촌 준비에 너무 강박감을 갖지 말자. 준비를 충실히 해도 실패할 수 있다. 미장이나 목공처럼 실용적인 기술을 미리 배워두는 건 현명하다. 돈벌이 목적의 귀농이라면 더욱더. •농사에 미리 겁먹을 필요 없다. 수익은 열악하지만 내가 뜻한 대로의 영농을 할 경우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일테면, 기계나 비료를 쓰지 않는 줏대 있는 농법이 그렇다. •가급적 마을 변두리에 거처를 마련하자. 원주민들과의 갈등 소지를 줄일 수 있으니까. •민박을 할 경우엔 일단 돈벌이 목적보다 손님과의 소통을 중시하자. 열쇠만 건네면 그만인 펜션과 달리, 민박은 우정을 나눌 수 있다는 것, 그게 매력이며, 성공의 첩경이다.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와 동대학원 졸업. 광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 2019-07-04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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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 운세] 2019년 1월 운세
- 쥐띠 아끼던 사람에게 서운함이 커질 듯. 자녀가 독립적으로 하려는 일 마음으로 밀어주세요. 부모에게 의지하지만 정신적으로만 의지할 듯. 주어지는 일 재미가 없어서 하고 싶지 않을 수 있고 성과도 조금 적은 듯. 상업자는 손님 뜸해짐. 이전에 앓았던 병의 재발 조심. 완치 판정을 받았다 해도 다시 한 번 살펴볼 것. 묶인 돈 풀리지 않으나 기본적인 금전과 유흥비로 써도 될 약간의 돈도 유입될 듯하다. 소띠 과거의 안 좋은 습관 또는 나쁜 영향을 주는 사람을 끊으려 결심하고 노력하게 됨. 자녀와의 소통은 잘 안 되지만 일터에 있는 젊은이와는 소통이 잘됨. 그러나 너무 많은 일의 비밀 또는 비결을 부하에게 알려주지 말고, 신입인 경우에는 실수 없이 일하도록 잘 챙겨줄 것. 새로운 일은 자금 확보 충분히 된 후 추진 요망. 여자 투자자로부터의 계약을 기다린다면 약속을 구체적으로 받아놓아야 할 것이다. 건강은 악습관 근절 결심해 차차 호전되나 금단 증세에 의한 고통 있을 수. 범띠 뜻밖의 위치로 발탁되거나 좋은 제안 받으나 소통 부재로 잠깐 어려움 겪음. 짝사랑, 서로 어긋난 사랑으로 고민도 생김. 친구나 대인관계에서 오래 고민해온 일 당분간은 해결 잘 안 되니 주변 조언 들을 것. 자녀 출산 또는 자녀에게 경사가 있겠다. 동업, 투자자와 사인 맞지 않으니 함께 일하는 사람과 손발 잘 맞출 것. 병이 있으나 긴장감으로 드러나지 않고 눌려있는 상태. 금전 유입과 지출이 급속하다. 토끼띠 상대가 원하기도 하고 서로의 앞날을 위해 정리해야 할 사람이 있음. 대인관계에서 옥신각신 의견 분분해서 조금은 속 시끄러운 달이 될 수 있으나 더 발전된 관계를 위한 갈등이므로 점차 좋은 방향으로 해결됨. 딸의 눈치를 보거나 딸 혹은 손녀, 며느리 바보 소리를 듣는다. 일은 열심히 하는 만큼 잘 풀리고 재미있다. 미용, 항공, 패션 분야 매우 좋음. 나름 건강관리 잘 하고 있고 면역력도 좋으나 기침 조심하고 마스크 착용 권함. 금전관리 매우 잘하고 있다. 용띠 일보다 인간관계에 더 치중할 수 있게다. 애정이 있는 대상과의 관계에서 관찰하며 지켜봄.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워서 그럴 수도 있지만 아직 명확한 미래 설계가 없어서 지켜보고만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거짓으로 다가와 금전을 요구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으니 조심할 것. 자녀에게 집착할 수 있다. 관심은 갖되 존중해줄 것. 좋지 못한 습관을 체크해보는 정도로만 할 것. 일은 즐겁고 재미있게 하는 편. 관절 염증 주의. 온천욕 도움될 듯. 금전 보통. 뱀띠 주변의 충고를 잘 들으면 해결되는 일이 많다. 하던 일 잘 풀리지 않아 접을 수도 있음. 쏙 빠진 상대 있으나 내 일에 도움은 안 됨. 사람 때문에 일을 못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친구의 진정어린 충고에는 귀 기울일 것. 자녀를 지나치게 간섭하면 거부당할 수 있다. 자녀 스스로 열심히 할 수 있도록 뒤만 받쳐주는 것이 좋음. 간혹 발생했던 증세가 다시 나타날 수도 있다. 주변인 병, 사망 또는 주변과의 단절로 우울증 올 수 있으니 주의 요망. 갑자기 수입이 줄 수 있고 무언가를 정리할 수도 있음. 말띠 상대 또는 본인 중 남자 쪽이 잠수 이별 감행해 연락 두절될 수 있음. 친구관계도 조금 소원해짐. 친구에게 너무 안 맞는 주장을 할 수 있다. 남자 말띠의 경우 자녀에게 보수적 잣대를 대지 말 것. 자녀는 이미 성장했음. 무언가 일을 시작하려 하나 성과가 나기까지 시간이 제법 걸림. 직장, 사업장에서 나를 지켜보는 이 있으니 참고할 것. 휴식이 필요. 갑작스레 큰 돈, 공돈, 용돈, 보너스 등이 따름. 양띠 연말에 무리할 수 있고 인간관계가 조금 어려워질 수 있다. 친구, 자녀, 아끼던 사람과 서먹해지고, 연인, 부부 사이는 데면데면해진다. 일만큼은 재미있게 한다. 함께 일하는 동료로 인한 즐거움이 따름. 갑자기 건강검진 권유받을 수 있으니 의사가 권유하면 꼭 검진할 것. 칼에 베는 상처 등을 주의. 도구 가지고 하시는 일을 특히 조심하라는 뜻. 금전은 큰 재미나 변화 없어 보임. 원숭이 어린 자녀 또는 철없는 자녀와의 작은 말다툼이 빈번할 수 있으나, 이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계기가 됨. 현실은 힘들어도 사랑하는 이와의 관계는 잘 지켜냄. 겉으로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아 대인관계도 무리 없고, 주변인들이 볼 때 별일 없이 잘 지내는 것으로 보임. 일이 맞지 않는 것 같아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불쑥불쑥 올라온다. 돈을 벌기 위한 여러 가지 궁리를 해보는데 새롭게 배워 해보는 일은 대부분 잘하게 될 듯. 닭띠 주변인과의 관계는 좋으나 애정 관계에 답답함 있다. 효자, 효녀의 효도로 삶의 잔잔한 즐거움 있음. 업무에서는 베테랑이지만 일이 살짝 싫증날 수 있다. 연말 이후의 지치는 마음 때문일 수도 있겠고 체력이 딸려서일 수도 있으니 체력 보강에 힘쓸 것. 베테랑이라도 에너지 떨어지면 일이 힘들어진다. 어깨관절, 고관절 등의 염증 주의. 거두어들일 돈 많음. 일해 두고 수금만 하면 되는 곳도 제법 됨. 개띠 무언가를 정리함. 회사 그만두거나 직원 감축, 감봉 등 정리 정돈하면서 더 나은 모습으로 바꾸려 함. 사랑했던 이와의 관계 단절 예상. 여자의 이별 선언으로 인한 헤어짐이 우려됨. 대인관계가 나무랄 데 없이 좋은 건 개띠 품성 덕. 자녀에게 관심을 갖되 부모의 존재를 인식시킬 것. 신장, 방광, 간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피로 주의. 금전운은 다소 막힌다. 돼지띠 건강이 악화돼 최소한의 일만 신경 쓰다 보니 친구들을 챙기지 못해 구설에 오른다. 오해 있을 수 있으나 신경 쓸 여력 없음. 건강과 주변 평판이 지금 시이소 관계. 건강을 우선하라. 참된 인간관계라면 한 사람으로도 행복하다. 사랑받는 느낌이 참 좋다. 간혹 짝사랑일 수도. 자녀를 인정해주고 부모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줄 필요 있겠다. 일은 여성의 도움이 필요. 어느 정도 쓸 만큼 금전운이 따른다. 타로마스터 유나김(維那金 명리연구원 '유나와 12달 이야기' 원장)은 타로 칼럼니스트이자 문화체육관광부가 인정한 동양역리문화협회 부산시지부 학술위원을 지낸 부산의 현업 역술인이다. 최근 유튜브를 통해 별자리별 운세를 제공하고 있으며 실시간 무료타로상담 생방송을 진행하고 있다. 유튜브채널 Yu-na Kim(유튜브 검색창에 '유나김타로')
- 2018-12-28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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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체 발광 소녀 감성, 전성기를 맞이하다-박애란 동년기자
- 작년 초, 2기 동년기자 발단식에 범상치 않은 여인이 나타났다. 망사와 레이스로 된 코사지를 머리에 올려 쓰고, 화려하게 빛나는 공단 드레스를 입고 나타난 박애란 동년기자였다. 상냥한 어투로 자신을 핑크레이디라고 소개하던 그녀는 어느새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 없어서는 안 되는 대표 인물로 자리매김하는 중. 최근에는 ‘브라보 마이 라이프’ 영상 제작에도 참여하며 그 누구보다 활발히 동년기자 활동을 넓혀가고 있는 그녀다. 잘 영근 숙녀의 삶 속에는 어떤 우여곡절이 숨어 있을까? 동년기자 리포터 가능할까요? 박애란 동년기자에게 자주 가는 장소가 어디냐고 물으니 서울 강남에 있는 서초문화원이라고 했다. 현재 이곳에서 모델워킹 수업과 시창작 수업을 듣고 있다고. 대부분 시간을 주로 강남 일대에서 보내는데 1분 1초도 아깝지 않게 살뜰히 모아 사용하고 있다. “2012년부터 다니기 시작했어요. 평택에서 컴퓨터 선생님으로 교사생활 33년 하고 나서 서울로 이사왔습니다. 이곳에서 수필창작, 영어회화, 시낭송, 왈츠를 등록해 열심히 다녔어요. 패션학원도 등록해서 다녔어요.” 어렸을 때 꿈 중 하나가 교사였는데 이것은 벌써 이뤘고, 다른 하나는 패션디자이너라고 했다. 교사직을 맡고 있을 때도 꿈을 이루기 위해 평택과 서울을 오가며 패션 특강을 들었다고. 한국폴리텍대학교에서 패션디자인 야간과정을 6개월 정도 밟기도 했다. 순간마다 패션의 길로 접어들까 고민한 적도 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대신 패션 공부했던 경험을 실생활에서 활용하고 있다. 박애란 동년기자가 입고 두르고 가지고 다니는 것 대부분이 스스로 리폼한 제품이다. “어렸을 때 바느질을 좋아했어요. 내 옷은 내가 리폼하고요. 이 가방도 다섯 번도 넘게 끈 부분을 갈았어요. 레이스를 손바느질로 덧대고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나만의 명품가방을 만든 거지요.” 퇴직하고 난 이후에 더욱더 열심히 사는 박애란 동년기자다. “생각을 바꿔야 해요. 퇴직 전은 전반생, 그 후는 여생이 아니라 후반생. 전반생은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살았다면 후반생에는 의무감에서 벗어나도 괜찮아요.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살면 돼요. 그래서 후반생은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며 사는 거죠. 내가 또 몸치이기는 한데 왈츠도 배우고 탱고 동호회도 나가고 있어요. 발레도 하고요. 이 나이에 몸이 잘 늘어나겠어요? 왜 내가 내 돈 들이면서 이 고생하나 하다가도 우아한 발레 음악 들으면 엄청 행복해집니다.(웃음)” 인터뷰 바로 전날에는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서 제작하는 영상 프로그램 촬영을 다른 동년기자들과 마친 상태였다. 이후 의학 관련 영상에서는 리포터로도 활약했다. 검증된 끼와 재능으로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간판 리포터(?)로 벌써부터 점쳐졌던 인물이 박애란 동년기자였다. “아무래도 시작이다 보니 어떤 사명감 같은 것이 생기더라고요. 안 그래도 ‘브라보 마이 라이프’도 영상을 시도할 만한데?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마침 시작하더라고요. 동년기자들이 대단한 내공을 가진 시니어잖아요. 내 생각이 그대로 옮겨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 대한 애정은 이뿐만이 아니다.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품격 있는 시니어라면 반드시 봐야 하는 잡지가 ‘브라보 마이 라이프’!”라며 홍보 멘트를 꼭 날린다. 우리 잡지에 처음 자신의 기사가 실렸을 때는 너무 좋아서 기절할 것 같았다고 회상했다. 생각해보니 당시 기자 앞에서도 본인 기사가 실린 잡지를 열어보고는 방방 뛰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웃는 얼굴에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슬프고 착한 아이, 애란을 만나다 “내 패션이 다른 사람들하고 다르지? 왜 이런지 물어봐주실래요?” 한껏 하늘을 날 것처럼 깃털 같은 얘기를 이어가다가 갑자기 기자에게 질문했다. 별 얘기 아니려니 하고 원하는 질문을 던졌다. 뜻밖의 소재로 이야기가 바뀌었다. “옷을 이렇게 입게 된 건 언니 때문이었어요. 어린 시절 아빠가 언니만 사랑해줬어요. 언니가 아버지를 닮았거든요. 한번은 언니랑 싸우는데 아빠가 싸우지 말라고 우리를 다그치다 저랑 언니를 톱자루로 엉덩이를 한 대씩 때렸어요. 정말 너무너무 아팠어. 그때 든 생각은 ‘언니도 아프게 때렸을까?’ 였어요. 나도 사랑받고 싶었어요.” 이때의 기억은 말 그대로 트라우마(외상후스트레스장애)로 남아 있었다. 똑같이 때렸을 거란 기자의 말에 “아니, 아닌 거 같아요”라고 맞받아쳤다. “어느 날 언니가 책을 산다며 아버지한테 용돈을 달라고 했어요. 저한테도 ‘돈이 필요하지 않냐?’고 아버지가 물었어요. 그런데 저는 ‘됐어요. 그동안 제가 모아놓은 돈으로 사면 돼요’라고 했어요. 누가 착한 아이야?” 이 말에 기자는 “아버지가 속으로 많이 상처를 받았을 거 같다”고 답했다. 이에 박애란 동년기자는 그게 왜 상처냐고 되물었다. 아이 입장에서는 ‘돈 잘 모은 행동’을 칭찬받고 싶었겠지만, 아버지 입장에서 ‘용돈을 주겠다’는 말이 일종의 사과였고 화해의 사인이지 않았을까. 박애란 동년기자의 말에 따르면, 아버지는 혀를 끌끌 차며 “너는 도대체 애다운 맛이 없다”며 나무랐다. 화해의 손을 놓아버린 고집 세고 질 줄 모르는 애어른으로 아버지는 받아들였을 수도 있다. 그때 박애란 동년기자가 아버지한테 “저도 책이 사고 싶어요, 돈 주세요”라고 했으면 어땠을까. 아버지는 분명 화해를 표했던 것이라고 꼭 박애란 동년기자에게 얘기하고 싶다. 어린 시절 언니를 편애하던 아버지 이야기가 끝나고 나니 초등학교 시절 너무 예뻐서 한 치도 따라잡을 수 없었던 두 친구 이야기로 흘렀다. 외모 콤플렉스에 관한 이야기였다. 선생님께 예쁘게 보이기 위해 길에서 주웠던 군번줄을 목걸이처럼 목에 걸고 학교에 갔던 웃지 못할 이야기도 들려줬다. 아버지에게 거부당한 사랑은 선생님에 대한 과도한 기대와 사랑으로 표출됐다. 이쁨받기 위해 고운 옷을 골라 입었고, 모자 쓰기를 좋아했다. 말을 하는 내내 박애란 동년기자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아직도 그렇게 서러운 걸까. 밝은 웃음 뒤에 철저하게 감추고 있었던 상처받은 어린 박애란이 바로 눈 앞에서 울고 있었다. 그나마 박애란 동년기자 인생에서 다행인 것은 어린 시절의 아픔을 서둔야학에서 대신 치유받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서둔야학은 박애란 동년기자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들어간 야학으로 서울대학교 농대 재학생들이 주축이던 곳이다. 작년 말에는 서둔야학당터에서 ‘서둔야학 홈커밍데이’ 행사를 열었는데 본지가 찾아가 탐방 취재를 하기도 했다. 선생님 모두 착한 아이로서 박애란 동년기자를 인정해주었고 예뻐해줬다. 훗날 박애란 동년기자의 교사 꿈을 이루게 해준 놀라운 곳도 바로 서둔야학이다. 박애란 동년기자가 울컥할 때 주문처럼 되뇌는 마법과도 같은 말이 있다. “울면 안 돼, 짜장면은 돼!” 세상의 모든 낭만적이고, 슬프고,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순간에 박애란 동년기자는 이렇게 말한다고 했다. 아픔을 덮어주는 이불과도 같은 말. 이제는 좀 따뜻한 마음으로 사그라지고 아물고 용서할 수는 없을까. 백설공주처럼 예쁘게 안녕 “큰일날 뻔했어. 이 좋은 세상 못 보고 이생을 하직할 뻔했잖아.(웃음)” 상황 불문 눈물, 콧물 짜며 소녀감성 폭발하는 박애란 동년기자. 세상을 비관하고 꽃다운 나이에 자살을 시도했던 일화도 꽤 오랜 시간 털어났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야학에서 공부를 하고 나니 막상 갈 곳이 없었다. 결국 선택한 곳은 대한방직이었다. “나는 책을 좋아하고 책에 빠져 있는데 현실은 공장이잖아요. 숨이 턱턱 막혔어요. 내 방에 공주들 사진을 붙여놓으면 아버지는 그런 것을 벽에 붙이면 귀신 나온다며 떼어버리라고 그러셨고요.” 이러다 평생 여공으로 살 것 같았다. 그러느니 죽자. 수면제가 가장 깨끗하게 죽을 수 있는 방법이라는 말을 듣고 수면제를 사다 모았다. 사랑으로 감싸준 서둔야학 선생님들에게 선물하기 위해 헝겊으로 꽃을 만들었다. 죽음 초읽기에 들어갔다. “1968년도 5월 15일에 야학당에 가서 스승의 날 꽃이라며 선생님들 가슴에 달아드렸어요. 정말 눈물을 꾹 참고요. 내 나이 열여덟 살이었어요.” 죽을 때 죽더라도 예쁘게 죽겠다는 생각에 하늘색 브라우스에 스커트를 입고 꽃이 달린 모자를 쓰고 입 안에 수면제를 털어넣었다. 천운이었을까, 일어나보니 하늘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막 우시더라고요. 그래도 아버지가 고와보이지 않았어요. 제가 초등학교 때 맞았던 사건 이후로 아버지한테 사랑받기를 포기했어요. 무엇보다 아버지는 가족들 앞에 무력했습니다. 그땐 절망이었습니다.” 기운을 차리고 야학당으로 가서 그곳에 계신 대학생 선생님들에게 자신의 자살소동과 관련한 얘기를 했다고. “그때 번뜩 정신을 차렸어요. 선생님이 제 얘기를 듣고 놀라기도 했어요. 선생님 하시는 말씀이 ‘누가 너 죽은 모습을 보고 아! 아름답다’ 하겠냐고. 백설공주를 본 왕자는 아름답다고 외쳤는데. 암튼 그때 제 생각에 꽃이 달린 모자를 쓰고 죽으려 했던 것이 너무 낭만적이었던 것이죠. 그런데 반전은 죽었으면 큰일날 뻔했어. 지금 사는 게 너무 재밌거든. 요즘 생각하면 죽기 정말 아까워요.” 여직공, 여교사 되다 “되게 힘들게 살긴 했네요. 고비, 고비. 길고긴 고비. 내가 산전, 수전, 지하전, 공중전까지 다 겪은 사람이에요. 처음에는 수원에서 딸기를 땄어요. 그다음에 버스회사 사환을 했어. 방직공장에 들어갔어요.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에 일반직으로 이십대 때 근무했어요. 그다음에는 타자학원 강사로도 일했고요. 그리고 결국 스물아홉 살에 중등교사자격시험에 합격했어요. 이후에 공립학교 임용고시에 붙어서 선생님으로 33년 살았잖아요. 교사자격증을 손에 쥐었을 때 눈물이 강물이 되도록 울었어요. 시험에 합격하고 나서 말씀드렸는데 엄마가 너무 좋아하시는 거예요.” 서울대학교 농대에서 일할 당시 선생님이 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농대 학장은 유독 박애란 동년기자에게 “우리 여 선생님 오셨네”라고 하셨다. “일반직 여직원이 80명이 넘는데 저한테만요. 내가 주장하고 싶은 건 꿈은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제가 학교와 선생님을 좋아했어요. 제게 학교로 가는 길을 만들어준 것이라고 생각해요.” 트라우마를 조금씩 치유하고 어릴 적 자신과 타협하며 매일 조금씩 나아가며 살아가는 박애란 동년기자는 화려하게 보이는 일은 물론이고 매일 공부하며 사는 하루가 행복하다고 했다. 현재는 문화원에서 다양한 공부를 하는 것 이외에도 방송통신대학교에서 미디어영상학과를 전공하고 있다. 지금까지 농학과, 국어국문학과, 가정학과와 문화교양학과에 이어 미디어영상학과까지 5번째 입학이다. “우리 집 TV는 방송대 채널에 고정돼 있어요. 예능프로그램은 볼 생각해본 적 없고 클래식 음악 채널이나 다큐채널을 틀어놓아요. 지금이 내 인생의 황금기인 거 같아요.” 압구정 날라리는 폼생폼사? 인터뷰도 하기 전에 이런 제목이 어떨까 하고 물어온 박애란 동년기자. 저 느낌이 본인 캐릭터라고 밝게 웃는다. 글쎄 눈물의 근원과 굴곡진 인생 얘기를 듣고 나니 그녀가 가볍게 폼생폼사로 살아간다는 느낌은 없다. 오히려 마감할 뻔했던 삶을 치유하고 보듬으며 매일을 기똥차게 열심히 사는 시니어, 내면에서 흐르는 진정한 멋을 가진 여인으로 느껴졌다. 앞으로 더 깊고 고운 아름다움으로 ‘브라보 마이 라이프’를 빛내는 동년기자로 함께해 주시길 부탁드린다. 브라보 3기 동년기자 릴레이 인터뷰를 본지 에디터가 진행합니다.
- 2018-09-11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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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님아! 옆방으로 가지 마오
- 남편은 열이 많다. 그래서 더운 걸 못 참는다. 반면 나와 딸들은 추위를 싫어한다. 남편은 비 오는 날을 좋아하고 나머지 식구들은 맑은 날을 선호한다. 이렇게 다르다 보니 집 안에서 늘 신경전이 벌어진다. 미세먼지가 많은 봄날에 딸들이 모든 문을 봉쇄하면 남편은 몰래 안방에 들어가 창문을 열고 혼자 앉아 있거나, 요즘같이 날씨가 선선해지는 가을의 문턱에선 창문 여닫기 숨바꼭질이 벌어진다. 처음에는 우리 집만 그러는 줄 알았더니 친구들도 다 그렇단다. 겉으로 말을 안 했을 뿐이지 모두 비슷한 어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대부분 남자는 체질적으로 양에 속하고 여자들은 압도적으로 음 체질이 많아서 그럴 거라고 어렴풋이 짐작한다. 그러나 그저 그러려니 하면서 적응하며 다들 살아간다. 주변에 그런 이유로 분가한 경우를 보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최근 신문 기사를 보니 이게 작은 문제가 아니었다. 미국에선 이 문제가 남녀 차별이라는 관점으로 접근하며 대대적으로 문제 삼을 기세이다. 말하자면 남녀가 함께 근무하는 사무실 온도가 대부분 남성 위주로 설정되어 여성들이 추위에 떨고 있다는 것이다. 과학자들에 의하면 약 22도가 알맞고 여성들은 약 24도 정도가 최적온도라는 것이니 그럴 만도 하다. 페미니즘이라는 도도한 시대의 흐름이 여성해방과 미투운동을 거쳐 이제 사무실 내 온도로까지 번지는 듯해 무섭고도 재미있다. 하긴 따지고 보면 충분히 문제 삼을 만하다는 느낌이다. 남녀 간의 생리적인 차이도 존중받아야 진정한 남녀평등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한편으론 이렇게 가다간 남녀가 갈수록 멀어져 이젠 공간까지 나누어 아예 서로 보지 않는 지경에 이르지 않을지 걱정도 된다. 그러고 보니 옛 조상들의 삶이 이해가 된다. 과거 있는 집들은 대개 안채와 사랑채가 분리되어 있어서 부부가 독립적인 삶을 영위했다. 어쩌면 두 방은 서로 온도도 달랐으리라. 단지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라도 부부가 한 방에서 생활할 때 생기는 여러 가지 남녀 간의 갈등을 미리 방지하는 기능은 했을 것이다. 그래서 부부가 서로 생활 속의 갈등으로 헤어졌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지 않은가. 사실 요즘도 실내 온도뿐 아니라 생활 습관의 차이로 각방을 쓰는 부부가 늘고 있단다. 어쩌면 이 갈고, 코 골고, 방귀 뀌고, 트림하는 배우자를 보며 얼마 남지 않은 사랑이 달아나는 것보다는 잠시 헤어져 있는 것이 그나마 사라져 가는 애정을 보존하는 지혜로운 방법일는지 모른다. 마치 시끄러운 스마트폰을 잠시 꺼 두고 마음의 평정을 찾듯이 말이다. 그러나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니 그래도 부부는 한방을 써야 하는 건 아닌지? 옆방으로 옮긴 남편이 언젠가 문밖으로 옮길지 어찌 아는가. 누구처럼 졸혼이니 뭐니 하는 핑계를 대면서 말이다. 방 안 온도를 조금 양보하는 대신 이불을 각자 달리 덮으면 되고 코를 좀 골면 거꾸로 누워 자면 되지 않을까? 남녀평등은 싸워서 얻는 게 아니라 사랑으로 극복하는 것이다. 아아, 님아! 부디 옆방으로 가지 마오.
- 2018-09-10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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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르고뉴, 와인에서 찾은 인생’, 사랑도 와인처럼 시간이 필요해
- 가끔 내리는 비가 성급하게 여름으로 치달으려는 대지를 달래주는 덕에 봄 날씨가 겨우 연명하고 있다. 화사한 꽃이 만발한 따뜻한 봄날에 걸맞은 싱그러운 영화 한 편이 도착했다. 프랑스 영화 ‘부르고뉴, 와인에서 찾은 인생’이다. 원제는 ‘Back to Burgundy’로 그저 와인의 명산지인 부르고뉴로 돌아왔다는 말인데 영화 수입사가 설명적인 제목을 덧붙이는 바람에 멋이 사라졌다. 역시 문화 장사꾼인 프랑스인답게 자신들의 장기인 와인과 아름다운 자연을 버무려 멋진 안구 정화 장면을 선사한다. 스토리도 일과 사랑 그리고 가족애를 결합해 매우 건전하다. 요즘 소재결핍에 시달려 만화에 의지하는 할리우드 영화들에 지친 전통적인 영화팬들에겐 이런 진부한 듯 보이는 소재가 오히려 신선한 감동을 준다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프랑스 영화다운 자부심일 터이다. 자줏빛을 띤 붉은색을 뜻하는 영어 ‘버건디(burgundy)’는 부르고뉴 지역에서 나는 와인을 통칭하는데 이 지역은 가족 경영을 중심으로 하는 와이너리로 유명하다. 그중 한 와이너리를 경영하는 자상하지만 고집스러운 아버지 밑에 삼 남매가 등장한다. 큰아들 장(피오 마르마이)은 10년 전 세계 일주를 핑계로 집을 나갔다. 둘째인 딸 줄리엣(아나 지라르도)은 어쩔 수 없이 가업을 잇고 있고 막내 제레미(프랑수아 시빌)는 결혼 후 처가 월드에 시달린다. 이들을 다시 한자리에 모은 건 아버지의 죽음이다. 세 남매는 그사이 폭등한 땅값으로 엄청난 상속세가 나오는 데 반해 정작 와이너리의 수익성은 1% 내외로 쪼그라들어 있는 현실과 마주한다. 서로 다른 기억으로 상처를 간직한 세 남매는 눈앞에 마주한 현실적인 문제를 풀어나가기 위해 뜻을 모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선택은 그들 자신의 힘으로 최고의 와인 만들기에 도전하는 것이다. 사실 이런 종류의 스토리는 흔하다. 흔한 소재를 특별하게 살리는 힘은 디테일에 있다. 이 영화는 7년의 제작 기간과 1년의 촬영 기간을 거쳐 완성되었다. 그만큼 프랑스 시골 마을의 사계가 충실하게 담겨 있다. 영화는 인간관계와 와인의 숙성과정을 병행시키며 사랑과 갈등을 밀도 있게 그린다. 이런 사실성이 설득력을 만들어 영화에 몰입하게 한다. 이 영화에서 와인은 인생의 은유이다. 땅을 팔 것인가 말 것인가 옥신각신하면서도 세 남매는 누가 서툴게 잔가지를 쳐내는 꼴을 못 본다. 인간의 DNA는 이처럼 무섭다. 그저 포도알을 터뜨려 만든 술인데도 와인마다 향이 다르다. 셋은 같으면서도 다르다. 그러나 숙성이 오랠수록 향이 진하듯 그들도 서로의 다름을 사랑으로 성숙시킨다. 장의 혼잣말이 깊은 여운을 남긴다. “와인처럼 사랑도 시간이 필요하더라. 시간이 흐른다고 상하는 건 아니었어.” 우리말에 ‘삭다’와 ‘썩다’가 있다. 두 단어는 같은 뿌리이면서 반대의 의미를 지닌다. 와인은 오랜 시간 두어도 썩지 않고 삭아 뛰어난 향과 맛을 만든다. 사랑도 썩지 않고 곰삭아 아름다운 관계를 만들려면 발효라는 과정이 필요하다. 발효가 일어나려면 긍정적인 시선과 따뜻한 마음이 필수적이다. 와인에서 배운 사랑이다. 아니나 다를까. 시사회로 본 지 며칠이 지났는데 관객들 반응이 대단하다. 어벤저스 류에 지친 관객들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와인의 얼룩은 천연섬유에 묻었을 때 유난히 지워지지 않는다고 한다. 인생의 의미를 찾아가는 이들의 가족애가 가슴에 오래 남을 듯하다.
- 2018-05-21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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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원한 스승들, 이화의 이름으로 살아온 제자들을 다시 만나다
- 봄비에 적신 웃음이 꽃잎처럼 퍼지는 것 같았다. 200여 명의 사람들이 모인 지난 5월 12일 오후 5시, 서울 중구 정동에 소재한 이화여자고등학교 유관순기념관이 그러했다. 그 안에는 기쁨, 반가움, 감격과 같은 밝은 감정들이 발랄하게 소용돌이쳤다. 1988년에 이화여고를 졸업한 88졸업생들은 준비된 이름표를 가슴에 달고 마치 어제도 본 듯한 환한 표정으로 반갑게 악수를 했다. 그리고 그 순간 저마다 30년 전 여고생으로 돌아갔다. 어언 30여 년 만에 다시 만난 이들은 추억을 더듬으며 각자의 살아온 이야기들을 나누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은사들이 한 사람 한 사람 등장할 때마다 설레는 마음이 담긴 뜨거운 박수와 환호성으로 반겼다. 웃음과 추억과 설렘이 어우러졌던 시간 이날 열린 이화여고 졸업 30주년 재상봉 기념식에는 88년 졸업 동창과 은사 등 200여 명이 참여해 총동창회와 모교의 발전에 기여하는 화합의 장을 만들었다. 또 이화라는 이름 안에서 특별한 시절을 누렸던 88한 배꽃들이 당시 담임과 학과목을 담당했던 스승 40여 명을 초대해 이벤트를 열고 선물과 함께 식사를 대접했다. 1986년 국제적 대행사였던 아시안게임을 치르고 1987년에는 민주항쟁이라는 격렬한 변혁의 과정을 겪고 대한민국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된 88년 졸업생들. 그들은 폭발적인 경제성장 속에서 소비문화의 정점이 된 1990년대에 20대 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사방에서 ‘나라가 망한다’는 말이 들려오던 IMF 금융위기 속에서 30대를 맞이해야 했다. 그야말로 격동의 세대였다. 그렇게 쌓인 세월 속 할 얘기들이 어찌 한두 보따리만 될까. “지나온 30년, 새로운 30년 가즈아!” 88졸업생 대표 고혜정 씨의 힘찬 목소리는 지난 세월 동안 짊어지고 왔던 어둠들을 날려 보내는 주문과도 같았다. 김혜정 현 이화여고 교장의 환영사로 시작된 1부 행사는 이자형 이화여고 총동창회장의 축하, 이화교회 이종용 목사의 축도로 이어졌다. 88졸업생 고혜정 대표가 장학기금과 동창기금, 학교발전기금을 각각 전달했다. “창립 132주년을 맞은 이화여자고등학교의 졸업 30주년 재상봉 기념식은 수십 년 동안 계속되어온 이화여자고등학교의 오래된 전통입니다. 올해 30주년 재상봉 행사에서 88년도에 졸업한 학생들이 첫 만남을 갖게 됐습니다. 추억과 옛 감정을 잘 나눌 수 있을까 걱정이었는데 정성껏 준비하고 모두 기쁜 마음으로 함께해서 너무 보기 좋습니다.” 30주년 재상봉 기념식에서 졸업생으로 참여한 이자형 총동창회장(1966년 졸업)의 목소리에는 뿌듯함이 담겨 있었다. 1부 행사가 은사들이 제자들에게 보내는 덕담이었다면 2부는 다시 학생으로 돌아간 50세 제자들이 스승에게 바치는 재롱잔치(?)였다. 올해 여든다섯 살을 맞이한 최종옥 전 교장의 격려로 시작된 2부에서는 88졸업생이 준비한 축하 영상, 플라멩코 댄스, 찬양 댄스, 오보에 연주, 동문 합창 등 다채로운 축하 공연으로 영원한 스승들에게 많은 웃음을 선사했다. 6개월 전부터 이 행사를 자체적으로 기획한 88졸업생들은 현수막부터 초대장, 은사님 선물꾸러미, 테이블 꽃꽂이, 꽃 코사지, 배너, 영상, PPT, 포토월, 크고 작은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각자가 가진 모든 재능들을 한데 모아 행사를 성황리에 끝마쳤다. 누가 스승이고 누가 제자? 이날 행사는 함께한 모두가 교정 곳곳에 묻어둔 아름다운 학창 시절의 추억을 소환하는 동시에 은사들과의 재상봉 기쁨으로 충만한 시간이었다. 학생으로 돌아간 88졸업생들은 이화라는 큰 그늘 속에서 살아온 30년을 지나 이제 어느덧 허리는 구부정해지고 흰머리를 날리게 된 은사들을 보면서 추억과 감사함에 뭉클함을 느꼈다. 사회를 본 88졸업생 정성진 씨는 “건강하시고 정정하신 은사님들의 모습에 얼핏 보면 누가 스승이고 누가 제자인지 구분이 잘 안 됩니다”라고 말하며 “저도 선생님처럼 가슴에 열정을 품고 남은 인생 활기 있게 살아가겠습니다” 하고 다짐했다. 88졸업생 한귀영 씨는 “나이 든 선생님들 모습을 보니 안쓰러움과 연대감이 함께 느껴진다”고 말했다. “이젠 선생님들과 맥주 한잔 하면서 ‘그 시절’을 회상하고 친구처럼 수다 떨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의 담임을 맡을 때 20대였던 선생님들도 여럿이었죠. 돌이켜보면, 20대에 우리들을 만나 선생님들도 많이 긴장되고 두려웠을 것 같다는 생각이 이제야 들었습니다.” 운영진으로 활동한 88졸업생은 “제 인생이 이화 덕분에 참 많이 빛났던 것 같아요. 너무 많이 웃고 떠들며 힐링하는 시간이 됐습니다. 이런 기회를 준 동창회와 모교 동문에게 너무너무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지방에서 올라온 88졸업생 역시 “그동안 앞에서, 뒤에서 애써준 친구들 덕분에 너무 좋은 추억을 만들게 됐다”며 “88졸업생들이 너무 자랑스럽다.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한 미안함과 고마움을 어떻게 전할 수 있을지…”라고 말하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30년의 세월을 보내고 맞이하는 새로운 인생 감동한 것은 88졸업생 동문뿐만이 아니었다. 여전히 교편을 잡고 있는 스승 한소연 선생님은 “정성을 다해 준비한 행사에 감사했어요. 이화의 정신은 여러분들의 사랑으로 이어집니다. 과분한 대접에 미안하고 앞으로 남은 시간 가르치는 일에 좀 더 마음을 쏟겠다고 다짐했어요”라고 말했다. 그녀는 “88한 배꽃들의 오늘 만남이 삶에 큰 활력이 되기를 바라며 50세에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하며 영원한 스승의 마음으로 제자들을 토닥거리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다른 은사들도 홈커밍데이를 잘 치른 88졸업생에게 ‘모교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으로 탄탄한 결속력을 보였다’며 한마디씩 치하했다. 지난해부터 88졸업생 대표로 뛰어다녔던 고혜정 씨는 “행사를 기획하고 준비해준 친구들에게 고맙습니다. 모교 사랑과 은사님에 대한 깊은 애정을 느끼는 행사였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이화라는 이름보다 더 큰 버팀목이 있을까 싶어요”라고 말했다. 이어 이번 30주년 재상봉을 시작으로 40주년, 50주년, 60주년까지 함께하겠다고 밝혔다. “30년의 세월이란, 한 세대를 매듭짓고 새로운 인생을 다시 시작하도록 해주는 대단히 중요한 시간입니다.” 김성수 선생님은 사은회를 본 후 이렇게 말했다. 그의 말에는 제자들을 바라보는 스승으로서의 대견함과 소회, 그리고 함께 나이 들어가는 삶의 동지로서의 감격이 담겨 있었다. “지금까지 사느라 얼마나 많은 열정과 아픔과 정진의 인고가 있었겠는가? 자네들, 스스로의 힘으로 한 세대를 사느라 얼마나 애를 많이 쓰셨는가? 은사로서, 자랑스럽고 대견해서 가슴 벅찬 박수를 보내네.”
- 2018-05-15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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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생 진향이와 시인 백석의 사랑 이야기
- 지난 가을에 도시여행 해설가과정 교육을 받았는데, 그 교육에서 필자가 우리 조를 대표해서 해설을 맡게 되었다. 평소에 성북동에 대해, 아름다운 마을이라는 생각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던 터라, 성북동을 해설하기로 정하고 답사를 갔다. 평소에 아담하고 아름답다고 입소문난 길상사엘 갔다. 경내를 둘러보다가 ‘길상화 보살’의 사당과 공덕비 앞에서 그만, 넋을 잃고 답사온 목적도 잊은 채,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그만 꽂혀버린 것이다. 필자가 필이 꽂힌 것은 한편의 시가 적힌 ‘시비(詩碑)’였다. 시비에는 기생 진향이와 시인 백석의 사랑 이야기가 새겨져 있었다. 필자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열정적인 뜨거운 사랑이나, 순애보적인 아름다운 사랑한번 변변히 해 본적이 없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사랑이야기만 들으면 정신을 못 차리고 푸욱 빠져 버리곤 한다. 필자가 푹 빠져버린 기생 진향이는 누구인가? 그는 1916년에 ‘김영한’이라는 이름의 한 여인으로 태어났다. 김영한은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16살에 '진향'이라는 이름으로 기생에 입문했다. 진향이 21살때 25살의 백석이라는 남자를 만나 사랑을 하게 된다. 그때 백석이 처음으로쓴 詩가 《나와 나타샤와 힌당나귀 》인데, 이 시에서의 나타샤는 백석이 사랑한 기생 진향이다. 25살 젊은 청년 백석의, 진향을 사랑하는 애절한 마음이 담겼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날인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이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힌당나귀 타고 산곬로 가쟈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곬로가 마가리에 살쟈 눈은 푹푹 날이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리 없다 언제벌서 내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곬로 가는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눈은 푹푹 날이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힌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 응앙 울을 것이다 -1937년, 백석이 겨울에 쓴 최초의 원문- ✻ 마가리: 오두막집 출출이: 뱁새 고조곤히: 소리없이, 고요히 아들이 기생과 사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백석의 부모가 다른 여자와 결혼을 시켰다. 백석은 진향에게 만주로 가서 둘이 함께 살자고 했지만, 진향이 이를 거절한다. 백석은 홀로 만주로 떠났다. 그런데 6.25전쟁으로 인하여 남과 북이 갈라지는 바람에 두 사람은 다시는 만나볼 수 없게 된다. 그 후, 진향은 37살에 중앙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2년 뒤, 성북동 산골짜기에 땅을 사들여 ‘대원각’이라는 요정을 지어 경영하기 시작했다. 기생이란 옷을 벗고, 비로소 자신의 이름을 되찾아 ‘경영주 김영한’으로 새 삶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요정 대원각을 운영하던 김영한은 1987년, 법정스님의 저서 ‘무소유’를 읽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 그는 법정스님을 찾아가 자신의 재산을 기부하여 많은 사람들을 위해 절을 짓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법정스님은 그 청을 사양하였다. 김영한은 근 10년 가까이 법정스님을 찾아와 간곡히 부탁했고, 이에 법정스님이 그 청을 받아들여 요정 대원각이 사찰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1995년 ‘대법사’로 등록했다가 2년 후, 지금의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로 이름을 바꾸어 재등록하였다. 법정스님은 길상사의 창건 법회에서, 불문에 귀의한 김영한에게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을 주었다. 기부할 당시의 대원각 재산은 싯가가 천억 원에 달했는데, 기자와 인터뷰를 할 때 "그 많은 재산을 모두 다 기부하는 것이 아깝지 않느냐"고 기자가 물었다. 이에 김영한은 "천 억은 백석 그 사람의 시 한 줄만도 못하다"고 대답했다. 그는 평생, 백석의 생일엔 식사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만큼 백석을 그리워했다. 1996년, 백석이 북한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3년 뒤 1999년 11월, 김영한은 자신의 유해를 눈이 오는 날, 길상사 경내에 뿌려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김영한은 떠나고 없지만, 길상사 경내의 길상헌 뒤쪽 작은 언덕에는 김영한의 사당과 함께, 그의 공덕비와 백석의 詩碑가 세워졌다. 사랑의 꽃씨 한 알 가슴에 품고, 일생을 ‘그리움’으로 고이고이 키워낸 꽃 한 송이 길상화(법명). 사람들이 천하게 여기던 기생이었지만, 자신의 삶을 사랑으로 숭고하게 승화시킨 참으로 아름다운 여인이다. 그가 기생 진향이에서 길상화 보살이 되기까지엔, 백석을 향한 그리움이 ‘삶의 원동력’이 되지 않았을까?
- 2018-03-13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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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에 대하여
- 서정주시인은 말했다. 자신을 키워준 것은 8할이 바람이라고. 나를 키워준 것은 8할이 그리움이었다. 열네살 여름. 태양이 이글대는 아스팔트 포도 위에 부서지던 것은 “레이 찰스”의 ‘I can't stop loving you’였고 내 가슴 또한 부서지고 있었다. 사랑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 단테가 베아뜨리체를 피렌체의 한 다리 위에서 만난 것은 그의 나이 아홉 살 때였다. 그 후 단테는 평생 동안 그녀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게 되는데 그의 작품 ‘신곡’은 이런 배경에서 탄생됐다. 야학교의 B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내 나이 열네 살 때였고 이후 그것은 지워버릴 수 없는 화인이 되어 버렸다. 세월이 갈수록 숨이 막히도록 좋아할 수 있는 분은 이 세상에 오직 한 분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때 이후로 어떤 사람도 내 마음을 그 선생님 같이 뿌리째 흔들어놓지는 못했다. 그것은 하얀 도화지 위에 뿌려진 첫 번 째 물감이므로. 나보다 일곱 살이 위인 B선생님은 전체적으로 약간 마르신듯한 호리호리한 체격에 눈매가 깊숙했으며 얼굴형은 군살이 붙지 않고 단아한 모습이어서 마치 그리이스 조각 같은 분이었다. 또한 키가 크신 B선생님은 걸음걸이가 ‘사뿐사뿐’하셨다. 장로님의 맏 아드님이며 독실한 크리스챤인 선생님은 어느 모로나 깍듯한 모범생의 면모를 보이셔서 나쁜 행동 옳지 않은 말은 전혀 하지 않으실 분 같았다. 아니 나쁜 면으로는 아예 생각조차 하지 못하실 분 같았다. 한마디로 그 당시 내 눈에 비친 그분은 완벽한 이상형의 남성상이었다. 우리에게 ‘모짜르트의 자장가’를 가르쳐 주시던 선생님의 진지한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우리가 잘못하면 몇 번이라도 되풀이해서 자상하게 가르쳐 주시던 선생님의 열성. 그것은 제자들에 대한 깊은 애정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리라. 음악을 깊이 사랑하셨으며 노래를 썩 잘 부르셨던 선생님이 좋아하시던 노래는 ‘고향의 폐가’ ‘너와 나의 시간’ 등이다. 우리에게 과학을 가르쳐 주셨던 B선생님이 방학숙제로 모터 만들기를 내주셨을 때, 다른 애들은 만들 엄두도 못 내었지만 나는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하여 재료를 수집하였기에 무사히 모터를 만들 수 있었고 그것을 보신 B선생님의 칭찬을 들으니 그동안 만드느라고 힘들었던 기억은 말끔히 사라지고 가슴이 금 새 기쁨으로 가득해졌었다. 서둔교회를 다니던 B선생님이 그곳에서 성가대를 지휘하실 때 뵙게 되면 너무도 멋지게 보여서 마치 ‘꿈속의 왕자님’ 같았다. 그 진지한 눈빛에, 날렵한 몸짓이라니. 그렇지만 다른 애들은 춤을 추는 것 같다고 ‘킥킥’댔고 나는 그 애들이 너무도 미웠다. 그 애들 중에는 내 초등학교 때부터의 단짝 친구 정재화도 있었는데 그때만큼은 그 애마저도 미웠다 어느 해 방학동안에는 내가 버릇없이 엽서에다 소식을 담아드렸는데(졸필이라서 편지지에 많은 글씨를 쓰기는 너무 부담스러워서) 선생님은 곧바로 답장을 편지로 해 주셨다. 그때 선생님은 ‘고사리 같은 너의 손으로 쓴 편지 잘 받아 보았다’라고 쓰셨는데 의아스러운 것은 아무리 내 손을 앞으로 제쳐보고 뒤로 뒤집어봐도 고사리 같이 작은 손은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엽서를 사용했는데 선생님은 편지로 보내 주신 것이 못내 죄스러우면서도 선생님의 성실성에 머리가 조아려졌다. 이 일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덕목 중 성실성에 후한 점수를 매기는 내게 선생님이 결정적으로 좋아지는 계기가 됐다. 그냥 흠모하였다. 멀리서라도 그분의 모습만 뵙게 되면 반가움에 가슴이 뛰고 너무 좋아서 숨이 막혀왔다. 친구들은 그 선생님이 오신다는 거를 내 모습을 보고 알았다. 친구들과 놀던 중에도 B선생님 모습만 보였다하면 아무 말도 못하고 얼굴이 빨개졌기에. 내 초등학교 동기동창생의 언니가 그 선생님과 데이트 중이라는 말을 듣고는 성실하고도 선한 그 언니가 이유도 없이 미웠다. 선생님이 배구를 하려고 상의를 벗어서 내게 맡기셨을 때는 어찌나 소중하던지 조심스럽게 안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구겨지면 안 되니까. B선생님이 야학교를 떠나실 때는 내 가슴이 온통 ‘휑’하니 뚫려 버린 듯한 허전함과 세상을 모두 잃어버린 듯한 망실감에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깊은 슬픔에 빠져버렸다. 나의 기쁜 맘 그대에게 바치려 하는 이 한 노래를 들으소서 그대를 위해 지은 노래 ............................ 쇼팽의 연습곡에 가사를 붙인 '이별의 노래’인데 B선생님이 우리들에게 마지막으로 가르쳐주고 떠나신 곡이다. 내 나이 16세때 일이었고 그후 십여년이 넘어서도 나는 어디서라도 그 연습곡만 들으면 눈물을 흘리곤 했다. 이별의 상처가 쉽게 아물지 않았던 것이다. 야학을 졸업한지 2, 3년의 세월이 지난 후였다. 그날 버스에서 B선생님을 뵌 나는 얼마나 반가웠는지 몰랐다. 선생님은 ROTC마크가 새겨진 서울대학교 교복차림이었다. 너무 좋아서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던 나는 선생님께 조용히 다가가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선생님 저…… 할 말이 있는 데요’ 사무치게 그리웠던 선생님의 깊숙한 눈이 나를 응시하며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목소리는 이렇게 물으셨다 ‘그래....... 뭔데?’ 그리고는 나를 따라 내리셨다. 비가 온 뒤의 연습림은 온통 청신한 초록빛이었다. 갈참나무의 여린 새순은 연초록으로 빛났고 오솔길의 기다란 풀잎에는 물방울이 ‘또르르’ 굴러 내리고 있었다. 흰 구름이 이따금씩 흐르고 있는 파아란 하늘을 쳐다보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궁금해 하시는 선생님 안색을 살피다 나는 어렵게 어렵게 말을 꺼냈다. ‘선생님 저…’ ‘있잖아요 ………’ ‘저기요……만 몇 번 하다가 그만 꿈이 깨어버렸다. '선생님을 좋아하고 있어요’ 꼭 한마디 하고 싶었는데 끝내는 그걸 못 해보고 꿈에서 깬 나는 가슴을 주먹으로 치며 스스로를 질책했다. ‘이 바보야 생시에 고백을 못하면 꿈에서라도 해야지’ 세익스피어가 말했다. ‘짝사랑처럼 고독한 것은 없다’고 모파상의 단편 ‘사과나무 아래서’와 ‘의자 고치는 여인’에 나오는 가련한 두 여주인공들을 나와 동일시하여 자신이 너무 비참한 신분임을 뼈저리게 느끼곤 했다. 사랑이란 익모초 달인 물을 삼키는 것이다. 그리움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물같이 까딱도 하지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추억 잊어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걸어보던 날이 하루 이틀 사흘 여름 가고 가을 가고 조개 줍는 해녀의 무리 사라진 겨울 이 바다에 …………… 청마 유치환시인의 ‘그리움’과 시인 조병화님의 ‘추억’을 몇 번이고 되뇌이며 아픈 가슴을 홀로 달래었다. 좁디좁은 야학교운동장을 천천히 몇 바퀴씩 거닐며. 또 유치환님의 '바위’를 좋아한 이유는 ‘차라리 애증의 갈등을 느낄 수 없는 바위가 되었으면'하는 내 심정을 너무도 잘 표현했기 때문이다. 어느 해 크리스마스를 앞두고서였다. 선생님께 무언가 마음의 선물을 꼭 드리고 싶었던 나는 며칠간을 골똘히 생각해 본 결과 일기장이 가장 적당할 것 같았다. 있는 돈을 다 긁어모아 봤다. 시내의 큰 문방구점을 몇 곳을 전전하여 간신히 마음에 드는 것을 살 수 있었다. 일기장 뒷장에다 ‘난이 드리옵니다’ 라는 짤막한 글을 적는 데도 워낙 졸필이기에 연습장에다 몇 십번을 연습해서야 겨우 적을 수가 있었다. 포장지도 제일 예쁜 것으로 골라서 포장을 했으며 리본으로 꽃모양을 만들어서 붙인 후 서둔 교회에서 성가대를 지휘하고 계신 선생님을 찾아갔다. 교회의 뾰족탑도 전나무 위에도 온통 은세계였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캐롤 송을 열심히 지도하고 계신 선생님의 모습을 뵌 나는 눈이 20cm이상 쌓여 있는 교회 창문 밖에서 언 발을 구르며 무려 2시간 이상을 기다렸다. 나의 뜻밖의 등장에 의아해 하시는 선생님께 ‘선생님 이거요’ 모기소리로 말하며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내밀었다. 순간 깊숙한 눈매에 진지한 표정의 선생님은 다소 당황해 하시다가는 '고맙다' 웃으며 받으셨다. 다시 한번 내게 따뜻한 미소를 보낸 후 발길을 돌리시던 선생님이었다. 춥고 힘든 줄도 모르고 기다리던 그 시간이 행복했고 선물을 전해 드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 가슴은 온통 기쁨으로 출렁거렸으며 발이 땅에 닿나 싶었다. 엄마의 결혼생활을 어려서부터 쭉 지켜봤던 나는 근본적으로 결혼에 대해서 회의감 내지는 환멸감을 가지고 있었다. B선생님을 남몰래 혼자 애 태우며 10년 이상의 세월을 외곬수로 흠모했으면서도 내 스스로가 ‘결혼’이라는 단어와는 결부시키는 것조차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런다는 것 자체가 불결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내가 스물두세살 때 선생님이 결혼하신다는 소식을 듣고는 너무 가슴이 아팠던 나는 결혼식장에는 차마 가 보지도 못하고서 뜨거운 눈물을 ‘펑펑’ 쏟았다. 눈물이 강물이 되도록 울고 또 울었다. 장선생님이나 진선생님 등 다른 선생님들의 결혼식에는 다 참석을 해서 축하를 해 드렸으면서. ‘선생님, 난이 여기 있는데 어디로 가시옵니까’ 그날 일기장에는 이렇게 쓰여졌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라면 어느 누구의 것인들 소중하지 않으랴. 누가 감히 걸인부부의 사랑이, 사랑을 위하여 왕관을 포기한 윈저공의 사랑보다 못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모든 거짓 없는 사랑은 위대하다. 내 짝사랑이 운명적으로 비극인 것은, 나는 그분을 결혼 대상자로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처음서부터 끝까지 단지 동경의 대상이었고, 언제나 먼 하늘의 별님이었다. 그러면서도 그 분이 막상 다른 여자와 결혼했을 때는 천지가 무너진 듯한 절망감으로 목을 놓아 울었으니 이 무슨 모순된 행동이었던가. 그분을 연모하던 내가 무엇보다도 괴로웠던 것은 그분이 내 진심을 하찮게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었다. 내 순정은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소중하고 고결한 것인데도 도덕적으로 전혀 흠이 없는 그분은 선생님으로서의 가슴은 따뜻했지만 여자인 나를 대하는 눈길은 차갑기만 했기에 나는 늘 거기에 상처를 받고는 못 견디게 괴로워했다. 나 스스로에게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보며 스칼렛이 자기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모든 허물을 사랑으로 감싸주는 레트한테는 북풍 같이 차갑고 상처만 주면서 이미 다른 여자의 남편인 애쉴리만 생각하는 것을 너무도 안타까워했다는 점이다. ‘저 여자는 왜 저렇게도 멍청한가’ 그러한 내가 현실 속에서는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이미 결혼을 해 버린 B선생님만을 가슴에 담아 두고 연모하느라고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하나 하나 내게서 떠나 보냈다는 사실이다. 야학 시절 친구들은 개성이 너무 강하고 고집불통이며 지독한 외곬수인 나를 스칼렛이라고 했었다. 스칼렛과 성격상 이미지가 흡사하다고. B선생님은 나의 애쉴리였다.
- 2017-12-28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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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둔야학 홈커밍데이 “사랑이 넘치던 교실을 기억합니다”
- 수십 년 전 그들은 알았을까? 호롱불 밑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공부했던 행동이 어떤 파장을 불러일으킬지 말이다. 교육의 손길이 닿지 않는 아이들을 매일 밤 가르치고 보듬었더니 사회의 귀한 일꾼으로 자라났다. 20대 초반 야학 선생님의 노력은 교육을 넘어선 사랑, 그 자체였다. 이와 더불어 스승을 향한 야학생들의 고마움으로 기억되는 서둔야학. 서둔야학 홈커밍데이 현장에 찾아갔다. 짝사랑하던 선생님을 다시 만나니 새록새록 옛 추억이 떠오르는 것만 같다. 서둔야학, 서울대 농대생의 열정으로 기억돼 ‘야학’이 뭔지 모르는 젊은이도 꽤 될 것이다. 집안 사정이 어려워 학교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던 시절, 뜻있는 사람들이 모여 농촌을 비롯해 어려운 지역의 배우고자 하는 이들을 가르치던 곳이 야학(夜學)이다. 서둔야학도 당연히 비슷한 맥락에서 시작됐다. 일제강점기이던 1926년, 우리 문화를 말살하려는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대한민국의 역사와 문화를 가르치고 국어를 지켜내고자 생겨났다. 수원 서둔리에 설립된 서둔야학은 야학 선생님과 야학생 1000여 명을 배출해냈다. 이곳에서의 배움을 계기로 더 높은 실력을 쌓아 업적을 남긴 이들도 여럿이라고. 1980년 당시 정권의 민주화운동 탄압으로 말미암아 폐교를 결정하면서 공식적인 서둔야학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1983년 잠시나마 야학으로서 기운을 내는가 싶더니 금새 사그라졌다. 1990년에는 야학 선생님과 졸업생들로 구성된 서둔야학회를 조직하고 소식지 발간과 모임을 진행하고 있다. 홈커밍데이 행사도 명맥이 멈췄다 2011년부터 다시 시작했다. 이제는 좀 더 정기적인 모임으로 발전시킬 계획이다. 야학당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서울 관악캠퍼스로 옮기기 전 서울대학교 농업대학교가 있던 자리는 현재 ‘경기 청년문화 창작소’라는 명칭으로 바뀌어 문화 시설로 탈바꿈했다.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는 놀이 공간, 문화 한마당, 다양한 문화 지식들을 향유하고 체험할 수 있다. 오래전 서울대 농대의 원예학관으로 쓰였기에 옛 강의실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이곳이 바로 서둔야학당으로 가기 전 모임 장소. 하나둘 서둔야학을 빛냈던 선생님들과 학생들이 모여들고 들어설 때마다 반가운 눈빛으로 서로를 맞이한다. 모두의 얼굴에 만발하는 웃음이 영락없는 야학 시절 모습 그대로다. 그 사이 많이 변했는지 이름을 알고 나서야 ‘그때 그 선생님이지, 그 학생이지’ 하며 기억을 되살려내는 모습이 정겹다. 황건식 서둔야학회 회장이자 전 서둔야학 교장은 인사말을 통해 간단하게나마 서둔야학이 걸어온 길에 대해 입을 열었다. “1963년, 제가 서둔야학에 들어왔을 때는 초등학교 교육을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문맹자 교육을 많이 했습니다. 해방 후 교육을 못 받아 글 모르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1965년에는 중등 과정을 상설했습니다. 서둔야학의 순수한 마음이 정치적 물결에 희생된 것이 사실이죠. 군부독재세력에 대한 저항정신을 가졌던 것은 분명하죠. 젊은 청년들이었으니까요.” 야학 선생님과 학생들의 소개가 끝난 후 초대가수 3대 뚜아에무아인 김은영씨와 함께 추억의 노래를 듣고 함께 부르는 시간을 가졌다. 야학당 시절, 밤 10시쯤 수업을 마치면 선생님들이 목장길과 나무숲을 지나 매일 집을 바래다줬다고. 그때마다 한국의 가곡이며 미국 민요며 노래를 부르며 길을 걷곤 했다. 동년기자 박애란씨도 이에 대한 그리움이 넘쳐났다. “우리들이 야학에서 공부한 것은 공부보다 사랑과 관심이었어요. 부모들은 생존에 허덕이고 있었죠. 아이들한테 사랑? 관심? 이런 것은 사전에 나오는 것이었죠. 야학에서 선생님들이 항상 정성을 다해 가르치고 사랑해주셨어요. 그리고 집으로 갈 때는 노래를 부르면서 집으로 데려다주셨어요. 위험하다고요. 그땐 몰랐는데 나중에 ‘금발의 제니’, ‘매기의 추억’이라든가 이런 음악이 나오면 어김없이 눈물이 나요.” 서둔야학교의 홈커밍데이 가을 소풍처럼 나무 밭에 모여앉아 도시락을 까먹은 후, 서둔야학교로 향했다. 1950년대 서울대학교 주위 교회나 기관의 건물에서 야학교를 열다가 1965년 야학 선생님들이 돈을 모아 교내 연습림 근처에 대지를 매입해 스스로 건물을 지었다. 당시 뜻이 있던 교수에게 지원을 받고 일일주점으로 맥주를 팔아 돈을 모았다고 했다. 서울대학교 농대가 관악캠퍼스로 넘어가면서 인적이 드물어진 서둔야학당 앞에는 ‘서둔야학 유적지’라고 쓰인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잠겨 있던 문이 열리는 순간 옛 야학당 학생들의 책 읽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몇 해 전, 황건식 회장이 사비를 들여 야학당을 복원한 덕분에 비교적 깨끗한 모습으로 야학당 사람들을 맞이했다. 비록 풀이 높이 자라고 사람이 찾아왔던 흔적은 없지만 말이다.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 천장을 바라보니 상량문이 시절을 기억해내듯 적혀 있었다. 학교 구석구석을 둘러보고 교가도 같이 불러보며 뜻깊은 시간을 보냈다. 황건식 회장님에 이어 내년부터 서둔야학회 회장을 맡게 되는 김기옥씨는 서둔야학당에 대해 “우리가 정규 교과과정에 의해서 제대로 가르쳤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인성교육 차원에서 사랑으로 학생들을 가르쳤기에 졸업생들이 잊지 못하는 것 같다”, “이곳을 나온 모두가 건전한 사회인으로 살고 있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 2017-12-06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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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조형 예술품 ‘세계평화의 문’
- 어느 날 저녁, 독일 친구와 자동차로 송파 지역 올림픽대로를 따라 이동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와~우, 와~우” 하며 감탄사를 연발하더니 자동차 속도를 줄이라고 했다. 주변엔 빌딩도 없고 캄캄하기만 했다. 친구는 자동차 앞쪽을 손으로 가리키며 다시금 탄성을 질렀다. 그곳엔 대형 조각 예술품이 마치 깊은 산 한가운데서 환하게 조명을 받은 듯 우뚝 서 있었다. 바로 올림픽공원 입구에 세워진 ‘세계평화의 문(World Peace Gate)’이었다. 1970년대에 해외 생활을 하다 귀국해 ‘삼일빌딩’을 처음 봤을 때의 일이다. 어느 건축가의 작품인지 궁금해 알아보니 건축가 김중업(金重業, 1922~1988)의 것이었다. 일반적 범주를 훨씬 뛰어넘는 특이한 모양의 주한 프랑스 대사관을 설계한 바로 그분. 그런데 그 명성에 비해 ‘프랑스 대사관’에 대한 대중적 평판은 마치 상여(喪輿)를 연상케 한다는 이유로 꽤 부정적이었다. 그래서 필자는 더욱더 선생의 작품세계에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 국내 건축가 1세대에 속하는 선생은 1941년 일본 요코하마공고(橫浜高工) 건축과를 졸업한 후, 1949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조교수로 후학을 양성하다 1952년 프랑스 파리로 옮겨 1956년까지 세계적인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 1887~1965) 연구소에서 일했다. 귀국한 뒤에는 홍익대학교에서 교수생활을 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대학교, 로드아일랜드 건축대학에서 교직을 맡으며 왕성한 건축가로서의 길을 걸었다. 선생의 경력에서 눈여겨볼 것은 바로 ‘르 코르뷔지에’다. 프랑스가 사랑하고, 존경하고, 자랑하는 르 코르뷔지에는 세계적인 건축가로, 그의 손길이 닿은 건축물은 훗날 거의 예외 없이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될 정도였다. 그중 하나가 도쿄의 우에노(上野) 국립서양미술관 건물이다. 그러나 ‘르 코르뷔지에’ 하면 떠오르는 작품은 1955년에 지어 세상을 놀라게 한 프랑스 동부의 롱샹(Ronchamp) 성당이다. 대형 조각 예술품과도 같은 성당 건물은 주한 프랑스 대사관의 밑그림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김중업 선생의 작품에서 스승의 손길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아울러 삼일로 빌딩은 르 코르뷔지에가 건축가로 함께 참여한 뉴욕의 유엔본부 빌딩과 유전인자를 공유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제자 김중업과 스승 르 코르뷔지에의 아름다운 연결 고리라고나 할까. 1986년 아시아 올림픽 대회 개최 즈음에 세워진 ‘세계평화의 문’은 선생의 마지막 작품이다. 동양적이면서도 서양적이고, 서양적이면서도 동양적인 정취가 뿜어 나온다. 세계 평화를 기원하는 ‘門’으로서 자격을 갖추었다고 보고도 남음이 있다. 그렇다. ‘세계평화의 문’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그 예술성과 과감한 크기에서 발산하는 독보적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이런 예술작품이 우리 생활 공간에 있다는 사실이 필자는 자랑스럽고 한편으론 행복하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이 이 작품을 사랑해주길 간절한 마음으로 소망한다. 우리가 귀하게 여기고 사랑해야, 세계인의 사랑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성낙(李成洛) 현대미술관회 前 회장 - 독일 뮌헨의대 졸업(1966), 연세대 의대 피부과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가천의과대학교 총장, 가천의과학대학교 명예총장(현), 한국의약평론가회 前 회장, 간송미술재단 이사.
- 2017-11-16 09: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