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3월 하순의 어느 날, 아내와 함께 전남 구례군 산동면의 산수유 축제현장을 거니는 도중 아내가 불쑥 얘기했습니다.
“나무들은 매년 봄이면 다시 꽃을 피우는데, 사람은 한번 늙으면 그만이라는 게 참 허무하네요. 우리도 이 산수유 꽃처럼 다시 새봄을 맞을 수 있다면 좋겠네…”
저는 이렇게 대꾸했습니다.
“나무는 매년 꽃을 피워서 되살아나지만, 우리에게는 손자들이 있잖소. 그 녀석들이야 말로 우리 인생의 새봄 아닐까요.”
아내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더군요.
지난 호(號)에서 은퇴한 남자의 행복한 노후를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배우자와의 관계’에 대해 얘기했습니다만, 오늘은 그에 못지않게 소중한 손주들과의 좋은 관계, 그리고 그 관계의 키(key)를 쥐고 있는 며느리와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제가 여기서 손주들과의 관계만을 애기하는 건 제게 외손주가 없기 때문일 뿐이지, 외손주들과의 관계가 친손주만큼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는 절대 아닙니다.
친외손 가릴 것 없이 하나같이 귀하고 사랑스러운 존재라는 것은 “외손자들의 육아에 가담한 것은 오직 ‘내리사랑’이라고밖에는 일컬을 수 없는, 나도 모르게 내 안에 웅크리고 있었던, 제어 불능의 끌림 때문이었다고 해야 옳겠다” 는 정석희 님의 증언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정석희 저 - )
이처럼 내 핏줄에 끌리는 것은 본능이니까요.
그는 외손자를 키우며 쓴 책의 말미에서 “내 인생이 다 저물기 전에 이처럼 아이들의 시작과 내 삶의 끄트머리가 겹쳐질 기회가 주어졌으니, 이것이 축복이 아니면 무엇이랴. (중략) 아이들의 존재란, 경험한 적 없으나 응당 그럴 것이라 상상되는 마약처럼 황홀하고 중독성이 강했다. 나의 노년에서 가장 행복하고 충일했던 시기를 손자 녀석들과 함께 보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지난 6년 가까운 세월에 걸쳐 두 손자를 키워 온, 아니 그 녀석들이 커가는 걸 옆에서 지켜본 저의 생각도 정석희 님의 고백과 꼭같습니다. 저는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전형적인 ‘손자 바보’입니다. 그걸 부인하기보다는 저는 자랑스럽게 내세우고 다닙니다. 어찌 보면 구제불능인 사람이지요.
저는 두 손자가 태어난 이후로 가능하면 많은 시간을 손자들과 보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제 취미를 살려서 두 손자가 자라나는 과정을 사진으로 담고, 거기에 제 나름의 설명과 소회를 담아 ‘바보 할배의 육아일기’라는 제목으로 블로그에 올리는 걸 낙으로 삼고 있습니다.
언젠가 동창 모임에서 한 친구가 “야! 뭐 때문에 그런 일에 아까운 시간을 다 보내나? 그래 봐야 손자들이 크고 나면 할아버지가 잘 해준 것 기억도 못한다”라고 타박을 하더군요. “그거야 자네 생각일 뿐이고…”라며 웃고 말았습니다.
두어 달 후 저녁 자리에서 바로 그 친구가 “나는 밥 후딱 먹고 먼저 갈 거다. 오늘 손자가 집에 오는 날이거든…”
“손자가 얼마 만에 오는데?” 하고 물으니 “한 달에 한 번 정도…”하고 말끝을 흐리더군요. 두어 달 전 그 친구의 타박이 저에 대한 부러움의 표현이었다는 걸 그때서야 알아차렸습니다.
세 손주들을 적어도 일주일에 한 차례 이상, 어떨 때는 녀석들이 집에 가지 않으려 해서 일주일 이상 함께 자고, 먹고, 뒹굴기도 하는 제 입장에서 한 달에 한 번 만나는 손자를 보려고 달려가는 그 친구의 모습이 안쓰럽기까지 했다니까요.
요즘은 남자고 여자고 할 것 없이 50~60대가 한자리에 모이면 저마다 손주들 사진 꺼내놓고 자랑하기가 바쁘다고 합니다. 동창 모임 같은 데서는 손자 얘기하고 싶은 사람은 미리 만원씩을 내놓고 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지요.
뿐만 아니라, 손주가 있는 친구들은 예외 없이 지갑 속이나, 휴대폰에 손주들 사진으로 가득합니다. 실버 라이프에 있어서 손주들의 중요성을 입증해주는 사례들입니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어쩌다 한 번 손주들을 보면서, 사진으로나마 애끓는 그리움을 달랠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내 피를 받아 세상에 나온 손주들을 매일 보고 싶은 실버들에게는 그러지 못한다는 사실은 일종의 고통이기도 합니다.
손주들을 자주 볼 수 없다는 사실은, 손주들이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친밀감을 느끼지 못해서이거나, 아니면 며느리들이 손주를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자주 보내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손주들을 자주 보고 싶다면 무엇보다도 할아버지, 할머니와 손주들과의 관계, 그리고 손주들의 엄마, 즉 며느리와의 관계를 보다 친밀한 방향으로 개선해나가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손주들과 친밀한 관계로 발전할 수 있을까요… 물론 돈으로 손주들의 환심을 살 수도 있습니다만, 그건 그때뿐입니다. 정말 손주들과 좋은 사이가 되고 싶다면 무엇보다 시간과 마음을 투자하십시오. 즉, 할아버지가 먼저 동심으로 돌아가서 손주들과 눈높이를 맞추는 진정한 친구가 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저는 손주들이 집에 오면 그때부터 녀석들과 친구가 되어 놉니다. 놀이터로 가 같이 미끄럼도 타고, 같이 달리기도 하며, 모래판에서 씨름도 합니다. 키즈 클럽에 가면 함께 작은 공이 가득한 풀에서 넘어지기도 하고, 좁은 미로 속을 같이 기어 다니기도 합니다.
아이들은 어릴수록 같이 노는 친구를 필요로 하고, 좋아하기 마련입니다.
며느리는 자신과 불편한 관계에 있는 시댁, 혹은 시부모와 자신의 아이들이 가까워지는 것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며느리와 사이가 썩 편하지 않은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당연히 손자와 가까워지기가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결혼 전에 심하게 반대를 했다거나, 예단 등의 문제로 며느리에게 격하게 스트레스를 준 원죄가 있다면 ‘구원의 문턱’을 넘기가 쉽지 않습니다.
며느리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그리고 손주를 맡겨도 좋겠다는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먼저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어른들 스스로가 자신이 어른으로서 예우 받아야 한다는 권위의식을 내려놓는 일입니다. 쓸데없는 권위의식을 버리지 못하고 며느리에게 어른 대접을 받으려 하거나, 한 술 더 떠서 며느리가 자란 환경을 은연중 무시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노후의 행복 한 가지는 포기하는 것이 나을 것 같기도 합니다. 일체의 권위를 다 내려놓고, 따뜻하게 감싸 안아주는 사랑으로 먼저 다가갈 때, 며느리도 그에 상응하는 반응을 보여주게 될 것입니다.
또 하나, 며느리에게 시댁에 올 때 느끼게 되는 부담감을 덜어 주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제 경우는 아이들이 집에 오는 날은 기본적으로 외식을 하되, 메뉴는 반드시 며느리가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도록 합니다. 그게 저녁시간이면 아들, 며느리와 함께 폭탄주 한두 잔을 곁들이기도 하지요. 시아버지가 ‘말아주는’ 폭탄주 한두 잔이면, 웬만큼 두터운 장벽도 다 허물어지게 마련입니다.
이렇게 하면 며느리가 시댁에 와도 밥 짓고, 청소하고, 설거지하는 기본적인 부담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거기에 자신이 좋아하는 외식을 하게 되니 손해 볼 게 없는 장사가 되는 것이지요. 여유가 있어서 아이들이 돌아갈 때 신사임당 초상화 몇 장 찔러 줄 수 있으면 금상첨화겠지요.
손주들과 노는 시간에 간혹 역사상의 위인 전기와 같은 교훈이 되는 이야기들을 재미있게 들려주는 할아버지가 된다면 더욱 좋습니다. 손주들이 바른 인성을 가진 사람으로 자라게 하는 데는 할아버지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사실을 명심합니다.
결론적으로, 손주들은 인생의 끄트머리에서 얻은 가장 큰 축복입니다. 그리고 그 손주들이 할아버지를 좋아하고 자주 찾아와 준다면 그건 인생 최고의 훈장이기도 합니다.
이런 축복, 이런 훈장과 거리를 두고 살아야 하는 인생이라면 다른 어떤 것으로 노년의 무료함과 공허함을 메울 수 있겠습니까.
>> 조용경(趙庸耿)
경상북도 문경에서 태어났다. 경기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법대를 졸업해서 한국은행을 거쳐 포항제철(현 포스코)에서 故 박태준 회장의 비서부장과 홍보부장과 회장 보좌역으로 일했다. 포스코건설 인천 송도신도시사업본부장과 지난 2009년부터 2012년 3월까지 포스코엔지니어링(전 대우엔지니어링) 대표이사 부회장을 지냈다. 현재 포스코엔지니어링 상임고문, 한국트라이애슬론연맹 부회장, (사)글로벌인재경영원 이사장을 맡고 있다.
올해는 원숭이해인 병신년(丙申年)이다. 영리한 동물의 상징인 원숭이의 해를 맞아 포부와 각오가 남다른 스타들이 있다.
“드라마뿐만 아니라 예능 프로그램도 하니 젊은 친구들이 좋아해 기분이 좋아요. 드라마든 예능 프로그램이든 행복하게 작업을 할 생각입니다. 나이 들수록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백일섭), “올해는 더 열심히 활동해야지요. 후배나 선배 연기자들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유동근), “늘 그런 것처럼 영화나 연극을 즐겁게 작업하려고 합니다. 관객의 과분한 사랑에 정말 감사해요.”(오달수), “올해는 영화를 열심히 하고 싶어요. 지난해 드라마 로 너무 많은 사랑을 받았어요. 대중의 사랑에 보답하는 길은 정말 진정성 있는 연기를 보여주는 것밖에 없는 것 같아요. 올해도 진정성 있는 연기를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김태희), “수많은 팬의 사랑이 있어 정말 행복해요. 올해도 팬들의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좋은 노래와 함께 행복 바이러스를 전해주고 싶어요.”(하니)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원숭이띠 스타라는 점이다. 백일섭(72), 유동근(60), 오달수(48), 김태희(36), 하니(24)는 태어난 해는 다르지만, 원숭이띠 연예인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해를 맞아 더 열심히 활동하겠다는 남다른 각오를 밝혔다.
72세의 나이에도 여전한 현역으로 활동하는 1944년생 스타로는 늘 연극무대를 통해 관객과 소통하는 손숙을 비롯해 원로 스크린 스타 윤정희, 연극과 드라마를 오가며 맹활약하는 윤소정, 영원한 청춘스타 이정길, 구수한 연기를 선보이는 백일섭, 선 굵은 남성적 연기로 눈길을 끄는 임동진, 코믹한 연기로 늘 웃음을 주는 남포동 등이 있다.
72세의 물리적 나이도 이들의 연기 열정을 막지 못한다. 1970년에 만들어진 극단 산울림의 창단 멤버인 손숙은 지난해 임영웅 연출의 1인극 를 통해 관객들과 만나는 등 꾸준하게 연극무대에 서고 있다. tvN 를 통해 예능 프로그램까지 활동영역을 넓힌 백일섭은 시청자들에게 웃음을 선사하고 있다. 1963년 연극 으로 데뷔한 이정길은 등 수많은 멜로 드라마에서 주연을 독식한 청춘스타로, 특히 여성 시청자에게 사랑을 받았다. 이정길은 요즘 방송되는 MBC 주말극 등 드라마에서 맹활약 중이다. 이정길은 “나이가 들면서 연기의 참맛을 알게 되고 연기자로서 책임감도 느낀다. 연기자는 작품을 통해 대중과 소통하기에 올해는 많은 드라마에 출연하겠다”고 새해 각오를 밝혔다.
올해 환갑인 신중년 연예인의 활동도 왕성하다. 유동근, 혜은이, 이경진, 유지인, 김지숙, 김영란, 이주호 등이 1956년생 원숭이띠 연예인들이다. 유동근은 묵직하면서도 감동을 주는 연기로 2014년 KBS 연기대상 트로피를 거머쥐었을 뿐만 아니라 영화와 드라마에서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당신은 모르실 거야 ’ ‘제3 한강교’ ‘감수광’ 등 1980년대 수많은 히트곡을 불렀던 혜은이는 여전히 전국을 누비며 노래로 대중과 만나고 있다. 1970~1990년대 멜로 드라마의 여자 주연 자리를 독식하며 수많은 남성 시청자의 이상형으로 꼽혔던 이경진은 KBS 일일극 등을 통해 시청자와 만나고 있다. 여전히 드라마에서 주·조연으로 활동하고 있다. 국민가요로 자리 잡은 ‘사랑으로’부터 ‘내 마음의 보석상자’ ‘어서 말을 해’ 까지 1980년대 주옥같은 노래를 작사, 작곡한 싱어송라이터 이주호는 방송과 콘서트 무대에서 신중년 관객들에게 음악을 통해 추억을 선물하고 있다. 장미희, 정윤희와 함께 1970~1980년대 트로이카 영화배우로 명성을 날렸던 유지인 역시 토크쇼 프로그램과 드라마를 통해 시청자와 소통하고 있다.
이경진은 “과거 같으면 60세는 연예인 은퇴 나이다. 하지만 100세 시대인 요즘은 한창 활동할 나이다. 여전히 멜로 주인공을 맡고 싶다. 올해는 기회가 된다면 중년의 사랑을 다룬 멜로 드라마에서 열정적인 사랑을 하는 주인공 역할을 연기하고 싶다”고 새해의 바람을 피력했다
영화, 방송, 음악 등 대중문화 각 분야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면서도 가장 왕성한 활동을 하는 스타들이 바로 48세 원숭이띠 연예인들이다. 김윤석, 신승훈, 김승진, 오달수, 채시라, 이승연, 최수지, 김건모, 정찬우, 박신양, 이성민, 박상면, 성지루 등이 바로 1968년생 원숭이띠 스타들이다.
충무로에서 가장 흥행 파워가 센 스타는 오달수다. 오달수는 2015년 10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에 비중 있는 조연으로 출연한 것을 비롯해 1000만 영화 7편에 출연하는 전인미답의 흥행기록을 세웠다. 2002년 로 영화에 데뷔한 이후 2015년까지 오달수의 출연 영화 관객은 1억500만 명에 육박한다. 그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독보적인 관객 기록 1위다. 영화 편당 가장 최고액의 출연료를 받는 스타도 원숭이띠 영화배우다. 바로 김윤석이다. 김윤석은 등 흥행에 성공한 영화에서 주연을 맡아 개성 강한 연기를 선보였다. 김윤석은 송강호 등과 함께 영화 편당 6억~7억 원의 출연료를 받는 영화 최고 스타로 군림하고 있다.
가요계의 40대 톱스타 신승훈과 김건모 역시 대표적인 원숭이띠 스타다. 발라드 황제 신승훈은 2006년 10집 를 발표한 이후 9년 만에 지난해 정규앨범 11집을 발표하는 등 최근 들어 왕성한 활동을 펼친다.
신승훈은 1990년 1집 데뷔 앨범 판매량이 158만 장을 기록한 것을 시작으로 5집 이 247만 장 팔리는 등 7장 연속 밀리언셀러를 기록할 정도로 강력한 팬덤과 문화상품 소비창출력을 갖고 있는 스타다.
독특한 음색과 풍부한 성량, 모든 음악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소화하는 빼어난 가창력으로 스타덤에 오른 가수 김건모 역시 1992년 1집 앨범 를 발표한 이후 2011년 13집 앨범 까지 13장의 정규앨범을 냈고, 1995년 발표한 3집 판매량은 280만 장에 달했다. 김건모는 지난해 에 출연해 1990년대 복고바람을 일으키는 등 20~30대 가수들보다 더 왕성하게 무대와 방송 활동을 하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지난해 기막힌 연기 변신으로 찬사를 받았던 드라마 의 주연 채시라, 개그 공연의 미다스로 평가받는 정찬우, 감초 연기의 대가 박상면, 성지루 등이 대중문화계에서 강력한 존재감을 드러내며 활동하는 48세 원숭이띠 스타들이다.
채시라는 “지난 1984년 CF로 데뷔했으니 병신년인 올해로 33년째 연기자로 일하고 있다. 언제 이렇게 세월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작품을 할 때마다 어렵지만, 보람은 크다. 올해도 좋은 작품으로 시청자들을 만나고 싶다”고 새해 각오를 드러냈다.
1980년생 36세 스타들의 면면은 화려하기 그지없다. 대한민국 최고 미인이라고 찬사를 받는 김태희부터 김소연, 이정현, 김준현, 조승우, 공효진, 장윤정, 조정석, 이동건, 이요원, 류승범, 박시은, 손태영, 손호영, 신봉선, 이진, 옥주현, 유상무, 유세윤, 윤민수, 전진, 장윤주에 이르기까지 영화, 드라마, 예능, 뮤지컬, 모델 등 대중문화 각 분야에서 스타로 군림하는 연예인들이 36세 원숭이띠다. CF와 드라마에서 최고의 스타로 대접받는 김태희, 영화와 드라마에서 빼어난 연기력으로 찬사를 받는 공효진, 뮤지컬에서 최고의 흥행파워를 자랑하는 조승우와 옥주현, 예능계를 주름잡고 있는 김준현, 유세윤, 신봉선, 트로트의 신세대 여제 장윤정 등이 원숭이띠로 올해 활약이 기대되는 연예인들이다.
2015년 영화 로 36회 청룡영화상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이정현은 “올해가 원숭이해인 만큼 더 노력해 대중에게 더 인정받는 가수로, 연기자로 한 단계 도약하고 싶다. 관심 있게 지켜봐주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1992년 원숭이띠 연예인으로는 드라마 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펼친 고아성, 인기 걸그룹 걸스데이의 유라, EXID의 하니, 원더걸스 멤버로 활동하다 연기자로 전업한 소희 등이 있다.
뮤지컬의 원작 웹툰 의 제목을 보면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 가 떠오른다. 웹툰 작가 강도하는 “소설과는 무관한 내용”이라며 “이야기와 동물 의인화 설정을 마치고 고양이가 들어간 제목이 잘 떠오르지 않던 찰나, 욕실에 있는 갸스비(GATSBY) 스킨로션이 눈에 띄었다. 즉흥적으로 G를 C로 바꾸면 재밌겠다는 생각에 타이틀을 정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야기는 다르지만, 소설과 웹툰만큼 많은 이의 기억에 남을 뮤지컬이 되길 바란다는 배우 이병준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Interveiw. 의 부르독 배우 이병준
극중 배역 ‘부르독’은 어떤 인물인지
성경에 나오는 고린도전서의 말씀처럼 오래 참고, 시기하지 않고, 자랑하지도 교만하지도 않으며, 모든 걸 감싸주는 것이 참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르독은 페르수와의 만남을 통해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랑에서 진실한 사랑으로 가고자 노력하는 인물입니다. 극의 전반부에서 부르독은 전처에 대한 미련을 간직한 채 사랑이 없는 부부 관계 속에서 상대방에 대한 의심을 품습니다. 중반부터는 페르수를 알아가면서 사랑은 결국 자기중심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아끼고 이해하며 모든 걸 감싸주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갑니다. 그는 진정한 사랑이란 서로의 마음이 일치해야 함을 깨닫고 집착보다는 상대를 존중하는 모습으로 변화합니다. ‘사랑에 대한 질문과 답을 찾아가는 중년 남자 부르독!’ 이런 인물이 아닐까요?
‘부르독’을 연기하면서 가장 고민한 부분
순수한 사랑, 욕망에 얽힌 사랑, 이기적인 사랑, 무조건적인 사랑 등 수많은 사랑 중 어떤 것이 부르독과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는지 그 연결고리를 찾는 것이 첫 과제였습니다. 연습이 진행되면서 조금씩 그 답을 찾을 수 있었고, 답은 의외로 쉬운 곳에서 나왔습니다. 정답은 ‘진실’이었죠. 진정한 사랑의 가치를 알게 해주는 것은 그 무엇도 아닌 진실입니다. 답을 찾고부터는 진실하게 연기하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임을 염두에 두고 작품에 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부르독의 사랑이며, 처음부터 끝까지 무대에서 고민하고 또 고민해야 할 부분입니다.
부르독과 닮은 점, 차이점
부르독과 이병준의 삶에서 닮은 점은 극의 중반부와 종반부에 나타나는 사랑에 대한 개념이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저 역시 사랑은 이해와 존중이 우선이라고 생각하며, 지금까지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물론 사랑 그 자체는 당연한 거고요. 차이점은 결혼은 두 번이 아니라는 거죠.
기억에 남는 대사
2막에 나오는 “그 아기 내 아이로 키우겠소, 당신이 낳은 자식이면 내 자식이나 마찬가지요. 피한방울 섞이지 않아도 내겐 중요하지 않아”라는 대사와 그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부르독이 가장 고민하고 가장 아파하면서 내린 결정이기에 진정성이 보이는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함께한 후배 연기자들과의 호흡
후배들의 열정에 먼저 박수를 보냅니다. 짝짝짝! 많은 배우들과 작업해봤지만, 이번에 함께한 배우들은 작품에 대한 애정이 정말 남달랐습니다. 명칭만 후배이지 제가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작품에 임하는 자세부터 열정까지 서로를 아끼고 배려하는 모습은 호흡과도 일치하겠죠. 정말 좋았습니다.
관람 후 얻어갈 수 있는 메시지
사랑입니다. 아마 이 작품을 보고 나갈 때, 사랑하는 사람끼리 왔다면 손을 꼭 잡고 나갈 겁니다. 공연 중에는 서로의 어깨를 살포시 붙일 겁니다. 아프지만, 예쁜 게 사랑이니까요. 크리스마스나 연말에 관람하게 될 관객들은 2015년의 그날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배우 이병준
뮤지컬 , 연극 , 영화 ,
드라마 등 출연
△공연 소개
만화가 강도하가 인터넷 포털사이트 다음에 웹툰으로 연재한 를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뮤지컬 는 원작의 주요 골격과 설정만을 남겨 두고 새로운 이야기를 펼친다는 의미에서 ‘리부트’라는 말을 사용했다. 뮤지컬에는 캣츠비, 하운두, 페르수, 선 등 4명의 청춘과 부르독, 몽부인 등 중년 남녀가 등장해 뜨겁고도 아픈 사랑을 노래한다.
공연 뮤지컬 장소 대학로 유니플렉스 1관 일정 ~ 2016년 1월 31일
연출 변정주 출연 이병준, 정동화, 강기둥, 손동운, 이규형, 김영철 등
원효 이래 1300년에 걸친 한국 철학사를 강의를 하듯 현대적 언어로 쉽게 풀어낸 . 저자 전호근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역사적 인물 35명의 삶의 철학을 비롯해 성리학과 양명학, 서학과 동학 등 대립하는 철학의 주요 개념과 차이까지 설명한다. 아울러 유학, 불교, 도교, 동학, 마르크스주의 철학, 기독교 사상의 개념을 검토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국 철학의 전체상을 그리고 있다.
Intervew>>
언제부터 계획하고 어떠한 과정을 거쳐 완성하게 됐나요? 또, 두세 권으로 나누어 낼 수도 있었을 텐데, 총 800페이지가 넘는 한 권의 책에 담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저는 대학에 있지만 시민강좌를 자주 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한국철학이라는 주제는 그다지 인기 있는 주제가 아니었습니다. 2012년에 동대문정보화도서관에서 한국철학을 주제로 40회 강의를 진행했는데, 100명 가까운 분들이 오셔서 많이 놀랐습니다. 그때 메멘토 출판사 대표가 제 강의를 모두 듣고 녹음한 내용을 풀어서 책으로 펴내자고 제안해서 그것을 토대로 집필한 겁니다. 896쪽 분량이니 조금 두꺼운 편이지만, 여러 권으로 나누는 것보다는 한 권으로 엮는 것이 단숨에 읽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서양 철학서가 익숙한 현대인들에게 가 주는 의미는 남다를 것 같습니다.
한국철학을 정리하면 한마디로 ‘통합과 포용의 역사’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때문에 한국철학사를 읽으면 현대 한국인들이 마주한 온갖 어려움을 지혜롭게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지눌의 글을 읽으면 내 마음속에 있는 미움을 어떻게 다스릴 수 있는지 알게 됩니다. 그로 인해 미운 사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박지원의 글을 읽으면 부자간의 사랑이나 형제간의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지 피부로 느낄 수 있습니다. 혹 가족 간의 다툼을 경험해 본 분이 계신다면 이 책을 읽고 미움을 사랑으로 바꾸는 오래된 지혜를 얻으시기 바랍니다.
원효와 의상, 균여와 의천, 정몽주와 정도전, 박지원과 정약용 등 우리 철학사의 라이벌로 거론되는 인물들의 사유를 비교할 수 있는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현대인들에게 가장 화두가 되고, 사고를 할 만한 두 인물로는 누구를 꼽을 수 있을까요?
어려운 질문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꼽으라면 박지원과 정약용을 비교하면서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박지원과 정약용의 경쟁은 지금도 진행 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글쓰기와 삶의 태도, 정치적 입장 등 여러 면에서 대조적이지만 두 철학자 모두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생각 거리를 던져줍니다.
18장 조식의 이야기에 ‘100권의 책을 한 번씩 읽는 것보다, 한 권의 책을 100번씩 읽는 것이 나은 것 같다’고 나옵니다. 그동안 가장 많이 읽었던 책과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어떤 분야에서 전문적인 지식을 쌓으려면 많은 책을 읽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전공이 아닌 경우에는 한두 권이라 하더라도 즐겨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는 , , 를 가장 자주 읽었습니다. 는 일상의 가치가 얼마나 중요한지 일깨워주기 때문에 늘 곁에 둡니다. 를 읽으면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또, 는 철학우화집인데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재미있습니다.
양도 많고 조금은 어려울 수 있을 텐데요. 일반 독자들을 위한 독서 방법을 추천한다면?
이 책은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강의하듯 풀어냈기 때문에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습니다. 양도 한국철학의 장구한 역사에 비하면 오히려 짧다고 해야 할 겁니다. 그리고 연대기 중심의 기술이 아니기 때문에 읽을 때 굳이 앞에서부터 읽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때그때 마음 내키는 대로 펼쳐서 읽으시기 바랍니다.
영향을 받은 인물이 있다면 누구인지.
저는 철학이 삶에 봉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 같은 철학 전공자는 철학에 봉사해야겠지만, 결과물은 시민들의 삶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은 아무래도 정약용의 영향인 것 같습니다. 정약용은 18년간의 유배가 말해주듯 세상에서 완전히 버림받은 지식인이었지만 한 번도 세상을 잊은 적이 없었던, 지식인의 책임이 무엇인지 몸소 보여준 학자이니까요.
△저자 전호근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 , , , 등을 펴냄.
홍역과 태풍으로 두 아들을 잃은 큰댁 최막이는 대를 잇기 위해 작은댁 김춘희를 집안에 들이게 된다. 본처와 후처, 이보다 더 얄궂은 인연이 또 있을까? 그러나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이제는 마지막을 함께할 유일한 동반자가 된 두 사람. 영화 는 모녀처럼 자매처럼 때론 친구처럼 지내온 두 할머니의 아름다운 동행을 그린 영화다.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가 영화로 탄생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또, 제작 과정의 어려움은 없었는지요.
영화를 연출한 박혁지 감독은 2009년에 모 방송사의 휴먼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서 만난 두 할머니가 가슴 속에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친해지려야 친해질 수 없는 두 여자가, 남편이 죽었는데도 왜 굳이 한 지붕 아래 같이 살고 있을까?” 그래서 2011년 겨울 두 할머니를 다시 찾아뵙고 촬영을 시작했습니다. 사실 외딴 시골에 사는 어르신들의 일상은 지극히 평범하고, 두 분 모두 연로하셔서 촬영 기간의 대부분은 ‘기다림’의 시간이었죠. 그날그날 두 할머니의 일정을 파악하고 머릿속으로 시나리오를 쓰고 직관적인 판단을 믿으면서 촬영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꼬박 2년 만에 촬영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이하 )와 두 작품의 프로듀서로서 두 영화를 비교한다면?
의 부부와 의 두 할머니는 사뭇 다른 관계입니다. 의 부부는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76년을 함께 했지만, 의 두 여자는 한 남자의 두 아내로 46년을 함께 살았죠. 절대로 사랑할 수 없는 사이입니다. 하지만 두 작품 모두 ‘관계’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누구나 어떤 ‘관계’ 속에서 살고 있죠. ‘가족, 친구, 동료, 이웃 등, 나는 이들과 어떻게 살고 있는가?’라는 메시지를 던집니다.
김춘희, 최막이 할머니의 삶을 지켜보면서 깨달은 인생의 교훈이 있다면?
시대가 그러하여 맺어진 두 여자의 얄궂은 인연은 대단히 일방적이고 심지어 폭력적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두 여자는 서로의 부족한 점을 채우며 서로를 오롯이 지켜냈죠.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대답을 춘희, 막이 할머니는 두 분이 함께한 시간으로 대신 말하고 있습니다.
노년의 삶을 주제로 한 영화가 세대를 초월하는 사랑을 받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노인은 모두 ‘선생(先生)님’입니다. 우리보다 먼저 살아온 분들이죠. 험난한 질곡의 역사를 거쳐 온 이 땅의 ‘선생님’들의 삶에는 우리가 갖지 못한 인생에 대한 혜안이 있습니다. 하루하루 팍팍하기만 한 이 시대에는 찾아보기 힘든 순수함과 맑은 정신을 발견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었던 까닭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중년 관객들이 보면 더 감동하게 될까요?
본처와 후처에 대한 영화이지만, 등장인물의 대부분이 시골에 홀로 사는 평범한 할머니들입니다. 그래서 특히 시골에서 나서 자란 대부분의 중년 관객들은 고향과 부모님에 대한 진한 향수와 추억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불과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춘희, 막이 할머니들처럼 본처와 후처가 함께 사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죠. 가족이나 이웃에 이런 기억을 가진 분들이라면, 오히려 이 영화가 불편하지 않고 훨씬 더 감동적으로 다가갈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분들도 부부가 함께 또는 자녀들과 함께한다면 두 할머니의 인생을 통해서 큰 선물을 받을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 한경수 프로듀서
아거스필름 대표, 한국독립PD협회 글로벌전략위원장
다큐멘터리 영화 , , 프로듀서
“손녀 일링(당시 7세)에게는 대학 졸업 시까지의 학자금으로 내 주식의 배당금에서 1만 달러를 준다. 아들 일선은 대학까지 졸업시켰으니 앞으로 자립해서 살아가거라. 딸 재라에게는 유한중·공고 안의 (내) 묘소와 주변 땅 5000평을 물려준다. 아내 호미리는 딸 재라가 노후를 잘 돌봐주기를 바란다. 내 소유 주식 14만 941주는 전부 ‘한국 사회 및 교육원조 신탁기금’에 기증한다."
1971년 봄에 별세한 유한양행의 창업주 유일한(柳一韓·1895 ~1971) 선생이 남긴 유언장의 일부이다. 유일한은 9세 때 미국으로 가서 고학으로 대학을 졸업한 후 식품회사를 세워 크게 성공했다. 1926년 31세의 나이로 한국으로 돌아와 안정적인 교수직을 마다하고 가난과 병으로 신음하는 동포들에게 좋은 일자리와 약을 제공하는 것이 더 급하다면서 유한양행을 설립했다.
이런 유일한을 우리들 대부분은 청빈한 기업가로만 알고 있지만 온몸을 던져 독립운동에 헌신한 분이기도 하다. 독립운동가 박용만이 미국 네브라스카주에 세운 ‘한인소년병학교’를 다닌 이후 투철한 애국심과 민족 사랑으로 일생을 살았다. 일제의 압박이 거세진 1930년대 후반에는 미국에 거주하면서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산하 한인국방경위대 ‘맹호군(猛虎軍)’의 창설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특히 1941년 일본의 진주만 폭격으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미군 전략정보처(OSS)의 한국 담당 고문으로 활약했다. 1945년에는 재미한인들을 훈련시켜 국내에 침투시키는 ‘냅코 계획(Napko Project)’의 행동대원으로 직접 참여했다. 기업 경영은 물론 필요하다면 조국과 동포를 위해 온몬을 던지려 했던 유일한의 애국심과 충정, 그의 노블리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는 영원할 것이다. 정부는 뒤늦게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유일한 외에도 우리는 예부터 내려오는 부자들의 훌륭한 전통과 아름다운 선행을 많이 알고 있다. 10대 300여년을 이어온 경주 최부자댁, 정직과 신의로 돈을 벌어 가난을 구제한 거상(巨商) 김상옥, 조선의 첫 여성 CEO 겸 자선가 김만덕, 일제강점기 시절 평양의 고결한 여성부자 백선행 등이다.
“저한테는 기부가 자손들에게 물려줄 유산입니다.” ‘아너 소사이어티(Honor Society)’의 1호 회원인 남한봉 유닉스코리아 회장의 말이다. 아너 소사이어티는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1억 원 이상 고액기부자들을 가리키는 일종의 ‘명예의 전당’이다. 2007년 12월 남 회장이 첫 번째 회원으로 가입한 이후 2010년대 들어 매년 2배씩 늘어나면서 회원 수가 839명(2015년 6월 현재)에 달하고 있다. 기업인이 427명으로 절반을 넘고 전문직 86명(10.3%), 자영업자 48명(5.7%)의 순이고 기업체 임원과 공무원, 스포츠인, 방송·연예인도 찾아볼 수 있다. 돈 많은 부자만 있는 것도 아니다.
2014년 11월 627번째 회원으로 가입한 김방락 선생(68)을 만나보자. 특전사 부사관을 거쳐 군무원으로 30년 넘게 근무하다가 은퇴한 후 10년 남짓 한 대학의 경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지금도 그다지 넉넉하지는 않지만 어려웠던 때를 생각하면서 경비생활 10여 년 동안 번 돈을 모두 기부하기로 한 것이다. 공무원 연금(200만원)과 베트남 참전수당(22만원)으로 생활비를 하고 경비원 월급 120만원은 모두 기부하는 셈이다. 휴가라고는 군무원 때 30년 재직 기념으로 5일을 다녀온 게 전부란다. 제주도도 못 가봤고 외국은 베트남 파병 때 간 것밖에 없다.
외국으로 눈을 돌려보자. 미국의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는 ‘부자로 죽지 않기 위해’라는 소신대로 은퇴 후 여생을 기부 등 사회헌신으로 살다가 미국 부자의 롤 모델이 되었다. 이 같은 전통을 이어받아 부자 서열 1, 2위를 다투는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와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은 기부금액에서도 수위를 다투고 있다.
뿐만 아니라 페이스북의 창업자 마크 주커버그가 수조원대의 기부를 하는 등 떠오르는 신흥부자들도 기부대열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다. 최근에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알 왈리드 빈 탈랄 왕자가 320억 달러(36조원)에 달하는 개인 재산 전부를 기부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럼 열심히 벌어서 사회에 기부하고 환원하는 것만이 최선이고 잘 하는 일일까? 아니다. 사람마다 생각과 철학이 다르다는 점에서 일률적인 잣대를 들이댈 수는 없다. 기부와 마찬가지로 상속 또한 인간으로서 당연히 가지는 삶의 동기이자 보람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가난한 가운데서 열심히 일해 번 돈을 자손들에게 물려줌으로써 그들이 나와는 달리 좀 더 윤택하고 안정된 삶을 살았으면 하는 부모로서의 바람을 누가 탓할 수 있을까?
다만 남과 더불어 사는 세상에서 나보다 못한 사람들을 돌아보자고 권할 수는 있을 것이다. 배고프고 아픈 사람들을 돌아보다 보면 더 많은 좋은 일들이 생겨날 것이고 거기서 남다른 보람과 성취감을 얻는 부자들이 많아질수록 따뜻하면서도 살기 좋은 세상으로 바뀌어갈 것이다. 따라서 기부 또는 봉사를 강권하기보다는 더 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동참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소득 및 재산수준이 높아질수록 고민에 빠지게 된다. 가진 돈, 늘어나는 돈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돈의 관리(how to manage)는 크게 3 How, 즉 ‘어떻게 투자할 것인가(how to portfolio), 어떻게 쓸 것인가(how to use), 어떻게 물려줄 것인가(how to pass down)’로 나눌 수 있다. 이 세 가지를 강조하는 것은 이 중 어느 하나라도 소홀히 할 경우 우리의 삶이 ‘유종의 미(有終之美)’를 거두기 어렵기 때문이다.
은퇴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죽지 않는 사람도 없다. ‘다 쓰고 죽어라(Die Broke)’의 저자 스테판 폴란이 주장한 바와 같이 영원히 살 것처럼 돈에 연연하지만 말고 나와 내 가족은 물론 한 걸음 더 나가 사회와 국가의 삶의 수준과 의미를 향상시키는 일에 돈을 쓸 줄 알아야 한다. 아닌 말로 일본사람들처럼 돈을 움켜쥐고만 있으면 나와 내 가족을 넘어 그 사회와 경제도 병들고 불행해질 뿐이다. 투자도 하고 그러면서 손해도 보고 이익도 보고 쓸 건 쓰고 물려줄 건 물려줄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돈으로부터 해방되면서 진정한 삶의 재미와 행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필자는 다시 한 번 ‘공자도 부러워할 5자’를 외치고 싶다. 5자가 그대를 자유롭게 하리니~. “놀자, 쓰자, 주자(베풀자), 웃자, 걷자.”
글 최성환 한화생명 은퇴연구소장·고려대 국제대학원 겸임교수
서울 강남구 삼성동 오후 2시. 약속시간을 부득이하게 미뤄야겠다고 알려왔다. 겨우 10분 늦는다는 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색을 표하는 이만의 전 장관은 근처 회의에 참석했다가 점심도 못 먹고 걸어오느라 늦은 것이었다. 그는 공공연하게 ‘BMW(Bus&Bicycle, Metro, Walk) 예찬론자’라고 말한다. 장관 재임 시절에도 전용차량 ‘에쿠스’를 반납하고 ‘아반떼 하이브리드’를 타고 다닌 것으로도 유명하다. 물질적 가치보다 사람을 아끼고 환경을 사랑해야 한다는 그다. 높은 직함을 갖고 있다고 해도 더욱 더 겸손해야 한다는 그다. 그런 그를 만든 어머니 이야기가 몹시도 궁금해졌다.
글 박근빈 기자 ray@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6살 꼬마 이만의의 집에 인민군들이 몰려왔다. “이승만을 내놔라.” 이승만이 그려진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한다. 돈이 없었기 때문에 기르던 소를 가지고 가버렸다. 앞산과 뒷산에서는 총소리가 들려왔다. 지독히도 무서웠던 기억, 어머니의 품속에서 6·25전쟁을 견뎠다. 어머니는 굳세게 하루하루를 이겨냈다. 그렇게 전쟁은 끝났지만 삶은 녹록지 않았다. 보릿고개가 찾아왔다. 그는 어린 시절 기억에 각인된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렸다.
“전남 담양 산골마을에서 살았는데, 다들 먹고사는 게 힘든 시절이었죠. 너무 먹을 게 없으니까 어머니는 들풀을 베어다 국을 끓였고 밀개떡을 해서 먹였죠. 그렇게 못 먹고 살다 보니까 위장도 약해졌죠. 어느 날 체했는데, 당시만 해도 근처에 병원이 없어 체를 내리는 곳에 가야 했어요. 어머니는 고무신이 벗겨지는데도 산을 뛰어넘어 가며 그곳에 도착했죠. 당시만 해도 별거 아닌 일로 죽어나가는 아이들이 많았어요. 어머니는 저를 살리려고 치열하게 사셨던 거죠.”
팔자 센 어머니의 인생
“실은 제가 넷째인데 장남이 됐어요. 어머니는 저 위로 세 아들을 어린 나이에 하늘로 보냈죠. 어머니는 팔자 센 여자의 인상을 줄까 봐 신경을 무척 쓰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넷째 녀석까지 잃어서는 안 된다고 다짐하셨다는 걸 어릴 때부터 알게 됐죠.”
어머니는 평생 많은 것을 잃고 살았다. 뱀띠 어머니는 범띠 아버지를 만나 무엇이건 재빠르게 완벽히 해내야 하는 긴장감으로 마음의 여유를 누리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아무리 좋은 일이 생겨도 살포시 웃으시고는 금방 무뚝뚝한 모습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런 어머니의 모습에서 무엇보다 강한 모성애를 느끼곤 했다.
담배를 많이 피우는 아버지가 싫어서 항상 어머니와 함께 안방에서 잠자는 아들을 살피느라 수면조차 부족했던 어머니는 이른 새벽녘, 동네 우물에서 그날의 ‘첫 물’을 길러오셨다. 부엌에 마련된 정화수 종지에 그 물을 채워 천지신명께 기도를 올렸다. 달 밝은 밤에는 앞마당 한가운데에 물동이를 놓고 절을 하며 가족의 평안을 기원했다. 초등학생 이만의의 눈에 어머니의 기도는 사랑, 그 자체였다.
중·고등학교는 광주에 있는 가난한 이모님 댁에서 머물며 다녔다. 한 달에 두 번쯤 집에 가면 어머니는 무거운 곡식자루를 머리에 이고 시오리길을 걸어 큰 길이 나오면 지나가는 트럭을 세워 태워주셨다.
“그때부터 ‘어머니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게 뭘까’ 고민했죠. 열심히 이 악물고 공부하며 최대한 검약하게 지내는 것뿐이라고 생각했어요. 차마 참고서 사게 돈 달라는 말을 못해 교과서로 고 2까지 견뎠던 것은 홀로서기에 방부제 같은 효과를 냈죠.”
어머니의 고생이 가중된 것은 아버지께서 50대 후반에 도랑을 건너다 대퇴골 골절상을 입었는데, 그때 온전히 회복되지 않아 목발을 짚으신 이후였다. 거의 모든 일들을 홀로 해치우셔야 했다. 그야말로 과로에 지쳤을 텐데도 자식들 앞에서는 힘들다고 내색 한 번 안 하셨다.
“표현은 하지 않으셨지만 얼마나 힘드셨겠습니까. 그래서였을까. 60대에 접어들면서 담배와 커피를 즐기셨어요. 전 아버지의 끽연에 반감을 가졌던 아들이었지만, 어머니의 담배에는 의미가 자연스럽게 부여되더라고요. 쓰레기 소각장에서 전기를 뽑아내고 분출하는 배기가스라고나 할까. 그렇게 힘에 부친 삶을 담배 연기에 실어 내보내셨던 거라고 느껴졌어요.”
심은 만큼만 거두고 불쌍한 사람 편에 서라
어느 날 청년 이만의는 시골 친구들이 화투 치는 데 구경 갔다가 집으로 불려가서 혼이 났다. 그때 어머니는 “농민들처럼 씨를 뿌리고 수확하는 게 훌륭한 사람이다. 심은 만큼만 거두어라”라고 강조하셨다. 노력 없이 좋은 결실을 원하는 것은 허황된 생각이라는 것을 마음속 깊이 새겨두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 말이 지금의 이만의를 만든 중요한 지침이 됐다.
“돈 앞에서 굴복하지 않는 자세를 길렀던 것 같습니다. 내 힘으로 심어서 그만큼만 거두는 것이 올바른 행동이죠. 명예나 지위를 통해 좋은 것을 원하거나 탐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던 건 어머니의 꾸지람 덕분입니다.”
어머니는 아들이 행정고시에 합격하고 내부무 공무원으로 발령받았을 때도 평생 공직자로 가져야 할 자세를 강조했었다. “펜대를 굴려먹고 살아도, 항상 불쌍한 사람들의 편에 서라.” 당시 시골에서는 공무원들이 시골 사람들을 상대로 지도 단속을 했는데, 같은 내용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처리하곤 했다. 친절하고 따듯한 사람, 오만하고 강압적인 사람 등 구분이 명확했다. 어머니는 이만의가 앞만 보고 출세 가도를 달리는 공직자보다는 따듯한 사람으로 살아 나가길 누구보다 간절히 원했다.
“내 어머니는 평생 시골에서 사셨고 배움도 짧은 여인이셨죠. 하지만 몸소 가르쳐 주신 중요한 덕목은 잊힐 수가 없고 평생 가는 겁니다. 저는 어머니의 사랑으로 자라났고, 어머니의 투박한 한마디에 교훈을 얻고 마음을 다잡고 살아가게 된 거죠.”
시장(市長) 어머니의 소박한 장례식장
어느덧 이만의의 직함은 시장으로 바뀐다. 전라남도 여천시 시장, 목포시 시장을 지내고 제주도 부시장, 광주시 부시장을 거쳤다. 그리고 국방대학교에 들어가 국장급 공무원 연수교육을 받고 있었다. 그때 어머니가 79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시장 출신 공무원의 모친상이었다.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았고, 조용히 장례를 치렀다. 화환은 1개밖에 안 들어왔다.
“잘했다고 생각하셨을 겁니다. 그것이 어머니의 뜻이었고, 그래서 소박하지만 정성껏 모셨죠. 조문객을 많이 받아서 체면을 살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습니다. 허세를 경계하라는 어머니의 말씀대로 그렇게 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머니의 소박함은 삶의 궤적과 동일했다. 아들이 잘돼서 잘난 척한다는 소리를 들을까 봐 환갑이나 칠순잔치도 마다했던 사람이다.
“제가 장관이 된 모습을 어머니가 못 보시고 돌아가신 것에 대해서 한편으로 아쉬운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물론 장관이 됐어도 ‘애썼다’라는 말과 엷은 미소로 화답하셨겠지만 그래도 말입니다. 고생하신 만큼 오래 사셨으면 좋았을 것을. 한평생 가난에 찌들면서도 모정의 도를 실천하신 어머니의 생각과 말씀은 여전히 제게 존재하고 있으니, 어머니는 오늘도 제 곁에 여전히 살아계신 거라고 믿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어머니
이만의 전 환경부 장관, 현 로하스코리아포럼 이사장은 오늘날 어머니가 사라지고 있다고 안타까운 마음을 내비쳤다.
개인이든, 국가든 행복해지려면 어머니라는 존재가 전제돼야 하는데 이혼율 증가 등으로 인해 그 가치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얼마 전 예비군 총기사고 문제가 생긴 것도 결손 가정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걱정은 더 많아졌다.
“어머니라는 존재의 위대함이 사라지게 되면, 가정의 문제로 시작해 여러 사회적 문제로 번지게 되죠. 결국은 국가적 문제로 자리 잡게 되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아이들이 건강한 사회에 나와서 행복한 꿈을 그리며 ‘오늘’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머니라는 이름이 무엇보다 강조돼야 한다는 겁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절실히 필요한 것은 어머니의 소중함을 되찾는 것 아닐까요?”
그녀에게 인터뷰 요청을 하자 어머니 생각을 하며 3일 동안 고심하며 쓴 A4용지 4장 분량의 원고를 보내왔다. 어머니에 대한 내용이었다. 영락없는 조선시대 어머니의 모습이다. 한 남자를 위해 헌신하는 아내, 시부모님께 효도하는 며느리, 그리고 자애로운 어머니. 그래서 안영의 어머니는 신사임당을 닮았다. 이 글은 안 씨가 보낸 글을 바탕으로 했는데, 기자와의 인터뷰도 더해졌다.
그녀는 지금도 또렷이 기억했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던 날 밤, 어머니의 숨소리가 더 거칠어진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아침이 되자 철없는 그녀와 자매들은 동구 밖으로 은행을 주우러 갔다. 동구 밖 여러 그루의 은행나무에선 비바람 부는 날이면 은행이 후드득 떨어져 온 동네 사람들이 은행을 줍겠다고 모여들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모두 나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은행을 줍고 있었다. 그 속에 섞여 언니들과 신나게 주운 은행을 한 소쿠리에 채워 돌아오니, 어머니는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곧 사랑채에 계시던 할아버지도 모셔오고, 온 가족이 어머니 주위에 둘러앉았다. 숨이 가빠 어쩔 줄 모르던 어머니는 막내인 그녀와 눈을 맞추며 안쓰러워 하셨다. 그렇게 어머니와 작별을 했다. 전쟁 통에 아버지를 보낸 지 5년 만에 어머니는 아버지를 따라가셨다. 그때 그녀의 나이 16세, 여고 1학년이었다.
◇“모두들 어머니를 보살이라고 불렀어요.”
“한학자였던 할아버지에겐 방문객이 정말 많았어요. 그때마다 모든 상차림은 어머니가 맡았죠. 손님뿐만이 아니었어요. 서울에 있을 때도 늘 고향 친척이 함께 묵었고 광주, 전주에 있을 때도 사촌 형제들이 함께 와서 학교를 다녔으니 언제나 대가족이었죠. 어떤 경우에도 자기를 희생하며 모든 사람에게 친절을 베푼 어머니를 친척들은 ‘보살’이라고 불렀어요.”
어머니의 음식 솜씨와 바느질 솜씨 그리고 바른 품행은 시부모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녀의 시부모(안씨의 조부모)는 존중과 사랑으로 며느리를 지극히 아꼈다. 시아버지는 훗날 며느리의 병상이 깊어지자 온갖 한약을 지어다 손수 약탕관에 달이며 정성을 다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런 사랑을 받는 것도 당연한 것이 안씨가 기억하는 어머니는 집에 오는 손님을 잘 대접해야 한다며 예절을 가르치고 바삐 움직이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시부모의 입장에서는 흐뭇한 미소가 일어나는 건은 당연지사였다.
그러나 안씨의 기억 속에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가부장적인 남편이었다. 막내인 안씨를 끔찍하게 귀여워했지만, 어머니를 생각하면 아버지가 밉다는 안씨다. 아버지는 해방 후 군정 당시 중앙청 인사행정처 총무과장, 전라남도 도청 지방 행정 인사처장, 전주 도청 상공 국장, 초대 전주시장 등을 해 전근을 수도 없이 했다. 때문에 공직자들은 물론 이름 있는 예술인들, 안씨 종친들까지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손님들이 오시면 어머니가 음식을 하셨어요. 손님들은 이 산골 벽지에 어찌 이토록 격식 있는 음식이 나오느냐고 놀란 적도 많아요. 큰 손님이 올 때면 아버지는 기생들도 데려다 가야금을 켜게 하셨는데, 어머니는 그때마다 불평 한마디 없이 온갖 음식을 만들어 밥상을 차리셨어요. 어머니의 그 인내와 음식 솜씨는 제가 평생 살아도 따라가지 못하겠더라고요.”
◇6·25, 아버지를 잃고
할아버지는 꿈자리가 사납다고 했다. 공산군이 집을 차지하고 피난 간 아버지가 어디 숨었냐며 안씨 자매의 목에 칼을 들이밀고 얼마 후의 일이다. 그 고약한 꿈자리가 맞는지 확인하기 하기 위해 칠순이 넘은 할아버지는 괴나리봇짐을 등에 지고 50리를 걸었다. 한달음에 달려간 피난처에 아버지는 보이지 않고 동행했던 오빠가 어제 저녁 아버지가 붙잡혀 갔다면서 벌벌 떨고 있더란다. 마침 동네 아주머니로부터 산을 넘어오다가 시체를 여러 구 봤다는 제보를 받고 할아버지는 오빠를 데리고 산자락을 뒤졌다. 아버지의 몸은 차가웠다. 7월 25일, 전쟁이 난 지 꼭 한 달 만에 아버지는 그렇게 공산군에게 총살당했다.
“할아버지는 오빠와 둘이 아버지의 피 묻은 옷을 그대로 산자락에 묻었다고 해요. 그 사실을 어머니에게만 알리고, 어머니는 오랫동안 감추셨어요. 우리들이 놀랄까 봐 울지도 못하고 슬픔을 삼키셨겠죠. 그때 제 나이 11살, 초등학교 5학년이었어요.”
맥아더 장군이 인천 상륙 작전에 성공했다. 방마다 들어와 있던 공산당 무리도 나갔다. 정부는 동사무소 단위로 공안 위원을 뽑아 공산군 색출에 나섰다. 안씨의 오빠는 공안위원으로 뽑혀 공산군에게 복수할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생각은 달랐다. 복수의 칼날이 시퍼렇게 서 있기는커녕 회의에 참석하는 아들에게 말조심하라고 신신당부했다. 도량이 넓은 어머니였다.
“동네 사람들이 공산군과 합세해 우리에게 모질게 굴었지만 복수는 절대로 안 된다고 하셨어요. 혹여 오빠 말 한마디로 양민증을 못 얻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말이죠. 당시에는 위원 중 한 사람만 거부해도 양민증을 받을 수 없었는데, 그 양민증이 없으면 아무데도 못 가거든요.”
◇신앙과 가족 그리고 문학
“사춘기 소녀 시절 부모가 안 계신다는 상실감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웠어요. 할아버지께서는 걱정이 되셨는지 편지로 항상 ‘바르게 크거라’라고 말씀해 주시곤 했죠. 그래서 매일 어머니께 보내는 편지 형식의 일기를 쓰면서 고독을 달랬어요. 그리고 부모님 이름에 누가 될까 더 열심히 공부하고 더 바르게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어머니의 빈자리를 채워 준 것은 문학과 가족, 그리고 신앙이었다. 여고 시절 성당에서 울려오는 종소리에 이끌려 들어간 성당 안. 그 성당 한가운데 맨발로 팔 벌려 서 있는 성모상에서 버선발로 달려와 그녀를 반겨주는 어머니의 모습을 봤다고 했다.
“그 이후에 대학을 졸업하고 천주교에 입교해 하느님을 아버지로, 성모님을 어머니로 모시고 의지하며 마음의 안정을 얻었어요.”
때로는 헛헛한 마음을 채워주지 못할 때 신앙의 힘으로 버텨낸 그녀였다. 그녀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어머니지만,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할아버지라고 했다. 그녀의 소녀 시절 인성 교육에 올바른 길잡이가 돼 주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부모 없이 커가는 손녀에게 펜을 들어 편지를 썼다. 어머니의 베푸는 삶과 할아버지의 극진한 사랑은 그녀가 문학소녀로 바르게 성장하는 초석이 됐다.
“제가 25세 때 황순원 선생님께서 등단 추천을 할지 말지 고민을 하셨어요. 그러시더니 집에 가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봐야겠다고 하시더군요. 정말로 저희 할아버지가 계신 광양 집에 오시더니 할아버지의 선비 정신에 매료되셨는지 흔쾌히 추천을 해주시더라고요.”
그 계기로 문학계에 등단한 지 올해로 50년, 천주교에 입교한 지도 50년이다. 등단 이후 수많은 수필과 소설 등의 글을 써 왔다. 특히, 그녀의 장편소설 에는 어린 시절 어머니의 모습이 담겨져있다. 신사임당을 닮은 어머니 말이다. 효도만 잘 가르쳐도 더불어 잘 사는 사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녀다. 그런 확신을 펼쳐 보고자 효도로 극진한 신사임당 가정을 택했다고 한다.
‘날아가던 새 한 마리/내게 말했습니다/꽃이 있고 나비가 있고/마음속에 사랑이 있는 곳/여기가 바로 천국이군요/놓치지 마세요!’ 이해인 수녀의 시 ‘어느 날의 일기’의 한 구절이다. 그렇다. 마음속에 사랑이 있다면 언제나 봄이고, 천국이다.
봄처럼 따뜻한 사랑을 노래하다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모든 순간이 곧 행복한 봄’이라 말하는 이해인 수녀가 지난 삶이 켜켜이 녹아든 110편의 시를 통해 우리를 봄처럼 따뜻한 사랑으로 껴안는다. 시인은 이라는 시집의 제목처럼 따스한 봄 인사를 건네고, 파도가 되어 상처 입은 이를 위해 대신 울어준다.
총 5장으로 구성된 시집의 1~3장(1장: 꽃씨를 닮은 마침표처럼, 2장: 파도의 말, 3장: 마음이 마음에게)은 대개 시인이 중년에 썼던 시로 이루어져 있다. 4장: ‘아픈 날의 일기’는 시인이 2008년 이후 암 투병을 하며 겪었던 시간들을 담아냈다. 삶과 죽음에 대한 단상, 환자로서의 고통과 외로움을 솔직하게 그려낸 시들이 읽는 내내 자신의 일처럼 생생하게 다가온다. 끝으로 5장: ‘별을 따르는 길’은 인생에 대한 성찰과 깨달음을 노래한 시들로, 중년과 노년의 작품들이 고루 어우러져 있다.
중년에서 시작해 노년의 고백까지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읽힐 수 있도록 구성한 시집은 노년의 깊이 있는 시적 사색을 느끼게 한다.
일본의 대표 작가 무라카미 류가 그려낸 4050세대의 절망과 다섯 가지 희망 이야기
열 살 아이부터 60대까지 세대별로 정의내린 사랑이라는 단어 그리고 따뜻하고 진솔한 아날로그 사랑
행복과 사랑, 삶과 죽음 등 11가지 주제에 대한 법정과 최인호의 4시간에 걸친 산방 대담
사진 제공: 예스24
최신원(崔信源·62) SKC 그룹 회장은 글로벌 경제 위기가 지속되는 와중에도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정신을 꾸준하게 실천하는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는 2000년대 초반에는 ‘을지로 최신원’이라는 이름으로 기부 활동을 펼쳤으며 사랑의 열매에서 운영하는 고액기부자 모임인 아너소사이어티 회원이기도 하다. 그가 속해 있는 경기사회복지공동모금회는 그가 낸 기부금으로 ‘Choi´s happy fund’를 조성하여 저소득 가정에게 연탄을 배달했고 세월호 피해 지원 사업을 전개했으며, 세계화에 따라 부각 중인 사회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다문화가정, 북한이탈주민을 위한 다양한 지원사업을 진행할 예정이다. 노인이 되길 거부하는 어른, 최신원 SKC 회장의 철학에서 발견해 본다.
글 김영순 기자 kys0701@etoday.co.kr 사진 이태인기자 teinny@etoday.co.kr
2014년 12월 3일, 인터뷰 및 사진 촬영을 위해 SK텔레시스에서 만난 최신원 회장에게선 특유의 소탈함과 다정다감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봉사해야 한다’고 말하는 최 회장에게 기부에 대한 남다른 이유가 있는지를 물어 봤을 때 나온 대답에서, 그 자연스러움의 이유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저의 기부와 나눔 습관은 언제나 말했듯이 저의 부모님과 조부모님에게서 자연스레 배워 온 것으로 저희 집안은 나눔과 기부의 DNA가 가족력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삶의 덕목이 사회적 가치 향해야
자신의 행동을 ‘태생적’인 것이라고 밝히는 최 회장은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대표 기업인으로서 삶의 덕목이 사회적 가치에 닿아 있음을 밝혔다. 그는 사람에 대한 애정과 관심, 그리고 책임감과 그를 바탕으로 한 나눔 정신이 반드시 갖춰야 할 덕목이라고 말한다.
“기업이라는 곳도 사람들이 모여서 일하는 곳이고, 그곳에서 얻어진 자원을 나누는 대상도 사람입니다. 물론 나눔의 대상이 자연과 환경, 동물과 식물이 될 수도 있지만, 여전히 그것도 사람과 연관이 있습니다. 더불어 애정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남녀노소, 연령과 성별, 장애와 비장애, 인종과 피부색에 관계없이 사람을 존중하는 정신과 삶의 태도야말로 우리가 인간으로서 지닐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이며 추구해야 하는 삶의 덕목이 아닌가 싶습니다.”
최 회장은 또한 사람들의 사회에 대한 관심과 참여가 삶의 덕목으로서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며 그렇기에 늘 우리 사회의 그늘진 곳과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낮은 곳에 대한 관심과 지원이 결과를 이루었을 때 오히려 우리 자신들의 삶을 더욱 윤택하게 해 주는 좋은 영향이 된다고 생각하구요.”
받는 이의 입장을 고민하는 기부자의 진정성
최 회장은 수년째 회사 임직원들과 함께 기업의 손길이 거의 닿지 않는 여주나 파주 등으로 김장이나 연탄 배달 봉사를 하고 있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임직원들과 함께 활동을 시작하고 종료하는데 그래서 직원들이 본의 아니게 힘들어 할 때도 있다고 한다. 이는 달리 말하자면 그가 ‘요식행위’로서의 기부를 분명히 거부한다는 뜻도 된다.
“제가 이번에 여주에서 연탄 배달 봉사를 하면서 허물어져 가는 집안 내부, 쓰레기가 나뒹구는 마당 등 연탄 지원 외에도 우리가 나눔을 실천하고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이 너무나도 많다는 사실을 새삼 다시 깨닫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내년부터는 연탄 나르기와 더불어 수혜 가정들의 주거 환경 개선활동도 함께 진행할 예정입니다. 사실 김장 담그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경기가 어렵다는 이유로 기업들이 단순히 단가를 낮춰 양을 많이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국내산 좋은 재료들로 만들어진 김장을 나누는 것이 진짜 필요한 것이라는 생각에 가격이 많이 올라가도 수량을 오히려 매년 늘리며 활동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 가족들이 먹을 음식이란 생각을 가지고 재료 나눔을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의 말에서는 그저 돈이나 물건만을 주는 게 아니라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깊이 고민하는 기부자로서의 진정성이 느껴졌다. 작더라도 그 안에 얼마만큼 사랑과 정성이 깃들어 있는가가 중요하듯 작은 일을 큰 사랑으로 하는 것이 중요한 법이라는 걸 최 회장은 실천해 보이고 있었다.
나눔을 통해 미래 공동체 지도자로 거듭날 베이비붐 세대
“인간은 모두 태어날 때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양손엔 아무것도 쥐지 않고 두 주먹만을 쥐고 태어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그 주먹 속에 많은 것을 담으려 하고 또 마치 죽을 때 가지고 갈 수 있을 것처럼 물질적인 것들을 따라가곤 합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우리의 마지막 순간에 우리의 몸 외에 그 무엇 하나 가져갈 수 없지 않나요? 그래서 저는 우리가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없듯이 동시에 우리 주변의 것들은 항상 나눠지기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최 회장은 기부가 자신에게 있어 큰 의미의 취미라고 설명했다. 나눔과 봉사는 그에게 언제나 소중한 스승이 되어 왔고 자신을 나태하지 않도록 도와주었으며, 생각의 결핍증에 걸리지 않게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주변인들과의 나눔은 자신에게 행복 그 자체라는 최 회장은 그러한 자신의 경험에 근거하여 베이비붐 세대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의견을 내놓았다.
나눔과 봉사는 많은 가치를 일깨워 줘
베이비붐 세대에 대한 최 회장의 고언은 베이비붐 세대가 노인으로 머무르지 말고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그렇다면 최 회장에게 ‘자신이 진짜 어른이 되었구나’라고 느낀 순간은 언제였을까?
“해병대를 제대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 집안에 우환이 생겼었습니다. 집안의 모든 사람들이 슬픔과 비탄에 잠겨 있었고 그때 제가 했던 생각은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내 주변 사람들을 내가 보살펴야 한다는 것 이다. 이유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감정적으로 닥친 시련 앞에 지지 않으려는 저의 근성과 동시에 주변인들을 따뜻이 감싸줘야 한다는 책임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을까요.”
최 회장에게 자신의 어른다움의 발견은 책임감에 대한 각성과 함께 찾아온 것이다. 그리고 그 책임감은 사회적 의미로도 확대됐다.
“제게 어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질 줄 알고 주변 사람들을 보살필 수 있는 정신적 성숙을 의미했던 것 같습니다. 나눔과 봉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나눔과 봉사는 우리가 사회 속에 속해 있는 사람으로서 세금을 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반드시 실행해야 할 책임이고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최 회장은 매일 나눔과 봉사를 실천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삶의 큰 의미이며 행복이라고 말했다. 그에게 나눔과 봉사는 단순히 개인적 차원의 만족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었다.
“나눔과 봉사가 있는 제 인생 설계 속에는 그것을 통해 얻은 사람들과의 인연, 가족들을 향한 사랑, 그리고 한 그룹의 맏이로서의 리더십의 중요성이 함께 내포되어 있습니다. 제게 나눔과 봉사는 많은 것들의 소중함을 일깨워 준 매개체인 동시에 제가 삶을 마무리하는 순간까지 더욱 크고 넓게 그려 나가야 하는 그림입니다.”
스스로 얻은 용기가 삶의 희망이 되는 법
“사람들이 시련을 겪고 있을 때 종종 현인들이 그들에게 해 주는 조언으로는 ‘작은 일이라도 남을 행복하게 하라’, ‘남을 위한 일을 찾아서 하라’고 할 때가 많습니다. 왜 지금 당장 내가 힘이 들고 괴로운데 남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라고 할까요? 그것은 나눔과 봉사를 한 후 정작 그 보답을 받는 사람은 남이 아닌 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들 자신들에게 행복과 알 수 없는 기분 좋음을 선사해 주는 것이 바로 남을 위한 나눔과 봉사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최 회장은 그간 경기모금회와 선경최종건장학재단 등을 통해 재정적인 지원을 하는 것 못지않게, 자신의 경험을 나누는 일에 노력해 왔다. 그는 자신이 경험한 과정을 솔직하게 얘기하고, 그 과정에서 얻게 된 깨달음을 나눔으로써 젊은 학생들과 패기만만한 청년들이 자신의 삶을 더 진지하게 돌아보고, 그를 통해 자신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 나가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소망을 피력했다.
최 회장의 삶 또한 모든 시대의 수많은 젊은이들처럼 젊은 시절의 상처가 있었다. 그는 본래 남들 앞에서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소심한 성격이었다고 고백했다. 또한 아버지와 형을 먼저 떠나보내면서 일찍이 SKC그룹이라는 큰 나무를 책임져야 했던 데서 오는 중압감이 어땠을지 상상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런 제가 지금 이 자리에서 나눔을 이야기하고 한 그룹의 최고 경영자로서 여러분과 대화할 수 있는 것은 끊임없이 나누고 봉사하는 제 자신으로부터 용기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나눔과 기부는 더 이상 특권층만의 소유적인 행위가 아닌 우리 모두가 쉽게 실천할 수 있고 가장 빨리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