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촌 생활이 삶의 의미를 더해주는 가치의 수단
농협대학에서 귀농·귀촌의 풍요로운 삶을 가꾸다
시니어들이 귀농·귀촌 대학을 찾는 이유는 농촌에 가면 웰빙을 추구하는 삶의 질 향상이 있을 거라는 기대 때문이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귀농·귀촌인의 정착 실태 장기추적 조사’에 따르면 귀농·귀촌 이유로 ‘조용한 전원생활을 위해서’가 31.4%로 가장 많았다. 다음으로 ‘도시생활에 회의를 느껴서’가 24.8%, ‘은퇴후 여가생활을 위해서’가 24.3%, ‘새 일자리나 농업·농촌 관련 사업을 위해’가 22.2% 등으로 조사됐다. 이 밖에 ‘농사일이 좋아서’, ‘자신과 가족의 건강 때문’, ‘생태·공동체 등의 가치 추구’가 각각 18.4%를 차지했다.
연령대가 높을수록 건강, 은퇴 후 여가, 전원생활을 위해 농촌을 찾는 것으로 분석됐다. 또한 고학력일수록 은퇴 후 여가나 전원생활을 위해 귀농을 선호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그러나 귀농·귀촌자가 농촌 정착과정 상에서 자금 문제, 영농기술문제, 농지구입의 문제, 생활여건의 불편, 토착주민과 갈등 등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는 귀농·귀촌자가 다시 도시로의 재이주 의향을 보이는 주 요인으로 작용한다.
경기농림진흥재단은 귀농·귀촌을 희망하는 도시민을 대상으로 현장 중심의 이론 및 실습형 교육을 제공함으로써 성공적인 농촌 정착에 도움을 주고자 2009년에 개설하여 2015년까지 총 3000여명을 교육했다.
특히 경기농림진흥재단에서 위탁받아 교육을 실시하고 있는 농협대학의 귀농·귀촌 대학은 지난해 까지 7기 회원을 모집해 높은 평가를 받았다.
매년 120명에서 140명 정도 귀농·귀촌을 꿈꾸는 시니어들이 7개월 동안 성공적인 귀농·귀촌 정착을 위한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다. 생산·가공·유통·마케팅 전반에 걸친 폭넓은 교육으로 본인에게 적합한 귀농 형태를 결정짓는 역량을 강화했다.
교육비는 200만원이 넘는 전체 교육비에서 자부담 일부(50만원)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경기농림진흥재단에서 지원했다. 오전에는 귀농 설계교육과 영농기술 기초학습이, 오후에는 농협대학 교내, 귀농·귀촌 대학 실습장에서 실습 및 현장 견학이 이어진다.
1인당 약 20여 평의 땅이 주어지는데 기초 교육이 끝나는 즉시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영농계획을 세우는 등 농촌 투어 등 다양한 경험과 실습이 이뤄진다.
경기농림진흥재단 귀농·귀촌 대학을 수료한 이석현(61)씨는 “농촌은 부부가 보다 심신의 여유를 갖고 살아갈 수 있는 곳이고 며느리, 아들 눈치 보지않고 좀 더 여유롭게 생활을 해 나갈 수 있는 곳”이라며 “내가 원하는 삶이 무엇인가 생각하며 영농 계획을 세웠고, 귀촌 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방향을 설정할 수 있는 큰 공부였던 것 같다”고 말했다.
공부하고 싶은 시니어들의 참교육場 '사이버대학'
본격적으로 고령화 사회에 접어들면서 갈수록 성공적인 제2의 인생을 살고자 하는 시니어 세대의 요구가 커지고 있다. 이에 따라 재교육 차원에서 사이버대학에 진학하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다. 30대 학생 비율이 점차 줄어드는 것과 비교해 40대와 50대의 진학이 꾸준히 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15년 사이버대의 나이별 대학생 추이를 살펴봐도 알 수 있다. 30대의 입학이 매년 2.5% 정도씩 줄어드는 반면, 40대와 50대 이상 등록은 1%씩 꾸준히 상승하고 있다. 50대 이상 입학은 전체 학생의 10.59%로 두 자릿수 평균율을 보였다.
사이버대학이란 정보통신기술, 멀티미디어 기술 및 관련 소프트웨어 등을 이용하여 형성된 가상의 공간(Cyber-Space) 안에서 교수자가 제공한 교육서비스를 학습자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학습하는 가상 학습 공간이다. 일정한 학점을 이수할 경우 학사학위 또는 전문학사학위를 수여할 수 있도록 고등교육법 제2조 제5호에 규정된 교육부 인가 대학이다. 사이버대학은 언제, 어디서나 학습할 수 있고 모든 수업과 시험이 온라인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직장을 다니면서도 학업을 병행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사이버대학은 매년 6월과 12월, 2차례에 걸쳐 신·편입생을 모집한다. 수능 입학을 거치지 않고 입학지원서와 함께 학업계획서와 인성검사를 통하여 지원할 수 있다.
학비는 학점당 6만~8만원 선이며 18학점 신청 시 학기당 100만~150만원 수준이다. 소득분위 기준으로 지급되는 한국장학재단(www.kosaf.go.kr)의 국가장학금 제도도 활용할 수 있다. 사이버대학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사이버대 종합정보사이트 CUinfo(www.cuinfo.net)를 참조하면 된다.
사이버대학은 2001년도에 총 9개 대학으로 시작했으며 현재 전국적으로 총 21개가 운영되고 있다. 10만명의 학생이 재학하고 있다.
시니어가 몰리는 사이버대학 인기학과 F4
미디어문예창작학과, 사회복지학과, 상담심리학과, 한국어문화학과는 학생의 1/4 정도가 50대 이상이다. 특히 미디어문예창작학과이 대한 60대 이상 시니어의 관심이 두드러진다.
미디어문예창작학과
미디어문예창작학과는 문예창작이론에 영상미디어를 접목한 학과다. 문학예술과 뉴-미디어에 대한 기본 소양을 배우고 폭넓은 시야와 깊이 있는 사유능력을 키워나가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더 나은 인간, 더 나은 세계’에 실천적 문학인을 양성하는 것이 미디어문예창작학과의 목표다. 미디어문예창작학과에는 60대 이상 시니어들의 지원이 이어지고 있다. 자신의 인생에서 경험한 것들을 글로 남기고 싶은 욕구가 많기 때문으로 보인다. 경희사이버대학교에만 개설된 학과다.
한국어문화학과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국어를 가르치는 교사를 양성하는 학과다. 어느 정도 배움이 있는 시니어들이 ‘교사’에 관심이 있고 또 외국인을 대상으로 봉사 차원에서도 활용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고려, 영남사이버대학교 등 9개 사이버대학에 개설돼 있다. 국어기본법에서 정한 한국어 교원 자격 요건에 맞춘 교육과정을 바탕으로 글로벌 환경, 다문화 시대에 필요한 국내외 현장의 요구에 부합되는 인재를 양성한다. 영역별 필수 과목을 이수하면 한국어 교원 2급 자격증을 준다.
사회복지학과
사회복지학은 현대화, 산업화, 도시화 등 사회변화에 따른 삶의 질 향상과 사회문제를 인식하고 이에 대한 실천적, 전문적 해결방안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가족과 아동, 여성, 노인, 장애인, 청소년 등 다양한 대상들과 지역사회가 겪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 사회복지적인 개입 방안을 학습하고 이를 현실 사회 속에 실천하는 것에 주력한다. 사회복지전공은 전반적인 사회복지이론 및 기술의 습득, 각 전문영역에서 활용할 수 있는 실무적 능력을 갖춘 복지전문가를 배양하는 데 교육의 목적을 두고 있다. 사회복지학과를 선호하는 시니어들은 자기 분야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어려운 이웃에게 도움을 주거나 사회에 이바지하고자 하는 의미에서 봉사하는 시니어들이 많이 찾는다.
상담심리학과
최근 사회가 급속도로 변화하고 있으며 사회의 각 분야에서 적응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사회의 변화 속에서 행복한 삶과 인간의 마음과 행동에 대한 이해, 인간의 성장과 발달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특히 상담심리학과의 경우 4년제 학위가 있는 시니어들이 선호한다. 이론과 실제가 균형 있게 조화를 이룬 전문적인 교육과정을 통해 다양한 정신건강과 상담 분야에 적용할 수 있는 실천적·통합적·전문적인 지식과 상담기술 등을 훈련하고 있다. 상담심리학과는 관련 자격증 취득에 필요한 교과목 운영은 물론, 기초단계의 상담심리 교육과정과 영역별 심화 및 응용 단계의 교육과정을 마련했다. 학생들은 졸업 후 다양한 휴먼서비스 영역에서 전문상담가로 활동할 수 있다.
100세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신중년들은 인생 2막 설계에 관한 관심이 높다. 그런 요구에 맞춰 각 대학은 발 빠르게 다양한 학습 프로그램을 개발해 새로운 삶을 꿈꾸는 신중년세대를 불러 모으고 있다. 전 국민의 고등교육화를 꿈꿨던 한국방송통신대학교는 프라임칼리지를 개설해 신중년들의 미래 인생설계에 적극적으로 앞장서고 있다. 젊은 은퇴로 고민에 빠진 신중년들에게 한국폴리텍대학은 펜 대신 드라이버와 망치를 손에 쥐어 주며 실전 학습을 가르치기에 나섰다. 인터넷 발달과 함께 방송대 대항마로 떠오른 사이버대학교는 이상 실현과 재교육을 토대로 시니어들의 배움 욕구를 충족시키는 중이다. 미래 설계가 아직 좀 미흡한 신중년들이 있다면 주목하라. 더욱 나은 제2의 인생으로 인도할지니.
국립한국방송통신대학교의
40·50세대를 위한 제2 인생설계·준비과정
원격대학의 원조, 국립 한국방송통신대학교(이하 방송대) 안에는 또 하나의 대학이 있다. 바로 프라임칼리지다. 1997년부터 운영돼 온 방송대의 평생교육원이 2012년 프라임칼리지로 개명한 것. 이름만 바뀐 것이 아니다. 기존 평생교육원의 틀을 깨고 전 세대를 아우를 만한 다양하고 특색 있는 학습 프로그램으로 무장했다.
프라임 칼리지는 평생학습시대, 국민의 생애주기와 학습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만들어진 맞춤형 교육프로그램이다.
특히 40·50대 신중년들을 위한 제2 인생 설계·준비과정 등을 시행하고 있다. 제2 인생 설계·준비과정은 중·장년층의 자립 의지에 힘을 실어주고, 더 나아가 사회공헌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유도해 꾸준히 수요가 늘고 있다. 2012년 제2 인생설계과정 32개 신규 교과목으로 총 2660명 수강에 이어, 2014년에는 총 1만284명이 프라임칼리지를 이용할 정도 관심이 뜨겁다.
프라임칼리지 교육과정은 제2 인생대학, 인문교양·시민문해, 귀농·귀촌, 창업, 사회적 경제, 국제개발협력 사회봉사, 전문자격, 명장교수, 평생교육 등 10가지 대분류 아래 각각에 부합한 과목을 배치했다. 영미영작 단편선, 문해 교육 이론 등은 물론, 집짓기, 창업, 다양한 국가의 어학학습 등 프라임칼리지가 아니면 찾아보기 힘든 과목들을 개설해 놓았다. 방송대 학생은 프라임칼리지에서 강의를 들으면 졸업학점으로 최대 12학점까지 인정받을 수 있어 굳이 다른 곳에서 배울 강좌가 아니라면 꼭 한번쯤 프라임칼리지 강의를 들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이 외에 20·30세대를 위한 선취업·후진학 학위과정과 재직자 기초과정도 주목받고 있다.
인터뷰Ⅰ 박찬영 블루베리-연금나무, 게으름의 농장 수강 (서울, 방송대 농학과 15학번, 54)
귀농·귀촌을 꿈꾸는 신중년들에게 좋은 길라잡이
귀농·귀촌을 준비하면서 인터넷 강좌를 기웃거리다 공부를 제대로 해보겠다는 마음에 작년 방송대 농학과에 입학했습니다. 전공 교수이신 문원 교수님이 블루베리에 관한 얘기를 많이 하셔서 조금 더 알려 달라고 했더니 프라임칼리지 강좌를 한번 들어보라고 권유하더군요. 사실 귀농·귀촌할 생각만 있었지 어디로 갈지 또 어떤 작물을 키울지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블루베리에 관한 관심이 한창일 때 들었던 프라임칼리지 강좌는 꽤 도움이 되더군요. 적어도 블루베리가 농사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이 접근하기 쉽고 수익성 좋은 작물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농업에 관련한 일을 알아 가는 데 조금씩 눈을 뜨고 있다고 생각해요.
프라임칼리지뿐만 아니라 학교 자체가 귀농·귀촌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주변에 농사짓는 사람도 없어요. 귀농·귀촌을 구체화하기 위해서 방송대에 들어왔습니다. 만약 프라임칼리지를 먼저 알았더라면 이쪽 강의를 먼저 들었겠죠. 프라임칼리지에 귀농·귀촌 프로그램이 많다는 것을 학교 입학하고 난 후에 알았거든요(웃음). 프라임칼리지도 새로운 인생 2막의 길을 찾는 방법의 하나입니다. 우선 농학과 공부에 집중한 뒤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프라임칼리지를 좀 더 이용할 계획입니다.
인터뷰Ⅱ 양봉선 제2 인생대학 마스터클래스- 마음 외 5과목 수강 (전주, 방송대 국문학과, 58)
프라임칼리지는 마력이다
동화를 쓰고 창작을 하면서 알고 싶은 것들이 많아져 방송대에 편입학해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몸에 고장이 단단히 왔다는 것을 알았어요. 동화 작가. 직장인, 주부, 엄마, 방송대 학생으로 숨 쉴 틈 없이 살아온 탓일까요. 1~2년 전 9개월 동안 병원과 집을 오가며 지냈어요. 그런데 병원을 오가다 우연히 프라임칼리지의 제2 인생설계 광고를 보게 됐어요. 홈페이지에 들어가 이곳저곳을 클릭해 보았는데 평소 관심 있던 과목들이 눈에 띄더라고요. 내 몸과 마음을 치유하고 다스리는 삶을 하고 싶었는데 그런 과목도 있고요. 두 과목만 수강할까 하다 프라임칼리지에서 수업을 들으면 방송대 학점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기에 욕심을 좀 더 냈죠(웃음). 강좌를 선택하다 보니 6개가 되더라고요. 제2 인생 설계과정에서 건강하고 행복한 중년의 삶, 마음과 몸을 다스리는 삶 등을 공부했습니다.
내 이름을 단 아동문학관을 짓는 게 꿈이라 ‘작은집-싸게 짓고 행복하게 살기’를 즐겁게 들었습니다. ‘안전, 웰빙, 스마트 여행을 위한 건강관리’ 강의에서는 전혀 모르고 있던 다른 나라 예절, 선물로 현지인들에게 주면 좋을 것 등을 배웠습니다. 듣다 보니 3개월 단위로 끊어지는 강좌를 6개월이나 들었더라고요. 지금도 듣고 싶은 과목은 한없이 많아요. 프라임칼리지 너무 좋습니다. 글을 쓰면서 부족했던 것들, 살면서 배우지 못한 처세술도 배울 수 있었어요. 고령화시대에 남다른 감각으로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공부하는 동안 행복했어요.
펜 놓고 손에 기름 묻히길 원하는 자
한국폴리텍대학으로 가라!
한국폴리텍대학(이하 폴리텍대학)은 말 그대로 실사구시(實事求是) 학문을 추구한다. 이곳에서는 언제 어디서든지 실질적으로 써먹을 수 있는 기술을 연마하고 학습한다. 1968년 국립중앙직업훈련원으로 시작해 2006년 24개의 기능대학과 19개의 직업전문학교가 합쳐져 지금의 폴리텍대학이 됐다. 폴리텍대학은 해마다 80% 이상의 높은 취업률을 보인다. 땀의 결실을 보게 해주는 알찬 대학으로 세대와 학벌 위주 사회에서도 주목받는 대학으로 성장했다. 국민 누구나 나이와 학력에 상관없이 입학할 수 있다. 학비 걱정 없이 기술을 배우고 취업의 기회를 얻을 수 있는 평생직업교육대학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특히 베이비부머를 대상으로 한 베이비부머 훈련교육이 시니어들의 재취업과 제2 인생 설계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한국폴리텍대학은 학사과정 외 시니어들을 위한 베이비부머 훈련교육을 2012년부터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베이비부머 훈련교육은 3개월 단기과정으로 만 45세 이상 만 62세 이하의 실업자, 전직 예정자, 영세자영업자를 대상으로 체계적인 기업 맞춤형 과정으로 진행된다. 장년층의 재취업을 돕는 이 과정은 올해 전국 31개 캠퍼스에서 실시할 계획이다.
2012년 333명의 수료자를 시작으로 지난해 1868명이 베이비부머 훈련교육을 수료했다. 놀라운 사실! 3개월 교육과정이 전액 무료로 이뤄지며 수료생에게는 별도의 지원금도 지급된다.
인터뷰 송재구 (청주, 베이비부머 전기제어과정 2015년 8월 수료, 59)
노래하는 만학도에게 새 삶을 준 베이비부머 훈련과정
지난해 8월 베이비부머 전기제어과정을 수료했습니다. 30년 이상 의류업과 요식업을 하면서 살았 습니다. 아이들 다 키우고 성장했을 무렵 늦바람이 불었는지 48세에 대학수학시험을 봐서 2013년 새내기 대학생이 됐습니다. 학업과 일을 병행하다 2014년 말에 음식점 문을 닫았어요. 예전부터 전기 관련된 공부를 해보고 싶었는데 충주지역 폴리텍대학 광고를 보고 베이비부머 훈련과정을 알게 돼 훈련과정에 들어왔습니다. 기초부터 전기 에너지, 설비, 이론 등 다 가르쳐주더라고요. 일단 배우고 있었던 것, 모르고 있었던 것을 배워서 자신감도 생기고 삶에 활력이 됐습니다. 과정 수료하고 바로 아파트의 시설관리기사로 취업했습니다. 아무래도 폴리텍대학에서 훈련과정을 수료한 것이 합격에 도움이 됐습니다. 내 나이에도 그런 훈련과정을 수료하고 이력서를 내니 업체에서도 좋아하더군요. 전기 설비에 관한 한 내 손으로 다 고치고 만질 수 있어서 좋습니다. 제 나이에 기술 없으면 딱히 취업할 곳이 없어요. 미래를 위해 정말 중요한 기회를 저는 얻은 거죠.
지금 학교를 나온 이후에도 전기기능사 시험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자격증은 꼭 하나 더 따고 싶어요. 앞으로 내가 행복하게 사는 것도 목표지만 나보다 힘들고 직업 없어 고생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살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경험과 노하우로 그분들을 도와가면서 사는 게 목표 중 하나죠. 건강이 허락하는 한 80세, 그 이후까지도 사회에서 일하는 열정적인 사람으로 살고 싶습니다.
윤병국 경희사이버대학교 관광레저경영학과 교수에게 ‘기억에 남는 여행’이 무엇이었느냐고 물어봤다. 여행전문가이자 칼럼니스트로 살아가는 그의 직업을 생각해봤을 때 쉬지 않고 들어봤던 질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학생들이 ‘부모님이 여행 가고 싶어 하시는데 어디가 좋을까요?’ 하고 물어볼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 저는 이렇게 대답해요. ‘그걸 왜 나한테 물어보냐? 같이 갈 사람한테 물어봐야지.’ 어디를 가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누구와 같이 가느냐가 중요하죠.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가면 어디인들 안 좋겠어요?”
짧고도 당연한 대답이었다. 그러나 그 말의 강렬함은 그 당연함을 잊고 살아왔다는 걸 스스로 느끼게 만든다. 여행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매일 날아드는 여행 상품이 그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정작 우리는 갈 장소의 신기함에만 목말라 있지 같이 갈 사람에 대한 마음과 태도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1년에 2회 이상 해외로 떠나는 시니어를 위한 여행의 실마리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반복되는 실수, 여행 상품을 확실히 파악하여 방지하라
“젊은 친구의 얘기예요. 그는 아들이었어요. 효도한다고 부모님을 사이판 여행을 보냈죠. 그런데 이 관광 상품이 사이판 자유여행 상품이었어요. 비행기 표와 호텔만 제공하고 나머지는 여행하는 본인들이 알아서 해양 스포츠라든가를 옵션으로 하는 거였죠. 젊은 사람들이 흔히 그렇게 하잖아요? 그런데 시니어들이 어떻게 제트스키를 타고 스쿠버를 타요. 그리고 그곳에서 아침 식사는 했는데 점심, 저녁은 굶어야 했대요. 돈이 있으니 시켜 먹으면 되는데 이분들이 시켜먹을 줄 몰랐기 때문이죠.”
이 문제의 시작은 아들이 그런 여행 상품인 줄 몰랐던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만약 알았다면, 자신이 여행을 선물로 주고 싶은 사람이 부모란 점을 조금만 더 신경 썼더라면 모든 여행의 과정이 포함되어 있고 2인에 맞는 패키지를 선택했을 것이다.
“잘 모르는 자식들은 나이가 칠십이 넘은 부모님을 유럽으로 보내요. 영국,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를 여행하는 7박 8일짜리가 가장 기본적인 코스거든요. 그런데 이 네 나라를 7박 8일로 지내려면 우선 비행기를 열두시간 타고 날아가서 내리자마자 자야 하고, 각 나라에 도착하자마자 투어를 해야 해서 매일 짐 싸서 이동해야 해요. 이건 젊은 사람들도 힘들어 합니다. 그런데 유럽이라고 마냥 좋다고 생각해서 부모님을 그런 여행에 보내서 고생을 시키기도 해요.”
그래서 윤 교수는 요즘은 쉽게 아무나 여행을 간다고 생각하지만, 가야 할 여행에 대해 사전에 분명히 알아야 한다고 충고한다.
“특히 중년들은 혼자 여행을 가기도 하죠. 같이 갈 사람이 없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나이를 먹으면 너그러워질 것 같지만 타인에게는 아주 까칠해져요. 과거에 70세인 할아버지와 80세인 할아버지가 함께 패키지 여행을 갔어요. 그래서 여행사에서 두 분을 같은 방에 넣었어요. 그 안에서 싸움이 났는데, 나이 어린 것이 어른 공경 못한다는 시비 때문이었죠. 그러니 시니어들의 여행은 정말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해야 좋습니다.”
목적의식이 뚜렷해야 만족스러운 여행이 된다
“나이 들어서의 여행은 목적이 뚜렷해야 해요. 어느 정도 품격이 있는 사람들은 젊었을 때 웬만한 여행은 다 다녀봤잖아요? 그러니 나이가 들면 목적이 분명해야 만족스러운 여행을 할 수 있어요.”
윤 교수는 1년에 100일 이상을 해외에서 체류한다. 그것은 방랑벽과는 정반대인, 뚜렷한 목적의식에서부터 나오는 행위다.
“미용사는 자신의 작품이 생각나면 직접 만들죠. 요리사도 마찬가지예요. 그렇다면 여행가인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영감을 줄 수 있을 것 같은 여행지가 있으면 가서 영감을 받아야죠. 마찬가지로 시니어들도 어느 정도 수준이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미국의 저명한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는 인간이 갖고 있는 욕구 중 최고의 욕구는 자아실현 욕구라고 주장했다. 나이를 먹고 경험도 할 만큼 한 시니어는 이미 자아실현 욕구 단계에 와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렇게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것이 옳다. ‘내가 어렸을 때 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안 해본 것은 무엇일까?’
“사진찍기를 좋아한다고 하면, 아프리카에 가서 지프를 타고 사진을 찍을 수도 있는 겁니다. 그래서 그게 불편하고 힘들어도 자신의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것이라면 반드시 하는 시니어들이 있어요. 그런 분들을 위한 여행 상품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봅니다.”
윤 교수는 자아실현을 위한 다양한 여행들을 소개했다. 그중 하나가 볼륜투어리즘(voluntourism)이라고도 불리는 봉사여행이다. 예를 들어 캄보디아를 가면 ‘원 딸라’를 달라고 매달리는 아이들을 흔히 볼 수 있다. 그 아이들에게 무작정 돈을 주는 게 아니라 아이들이 어떻게 해야 잘 살 수 있는가를 고민하여, 캄보디아 학교를 도와준다든지 학생 자매 결연을 하여 계속 후원해주는 식의 방법이 있을 수 있다. 자원봉사하는 곳으로 가서 4박 5일 휴가를 간다고 하면 이틀은 관광을 하고 이틀은 봉사를 진행하는 방식도 있다. 그 외에 장애인이나 다문화, 결손가정에게 제공되는 소셜투어리즘(Socialtourism)도 있다.
윤 교수가 강조하는 또 한 가지는 뉴투어리즘(New Tourism)이다. 기존에 못했던 걸 한다는 관점의 여행으로 아직 구체적인 개념은 안 잡힌 상태다.
“90년대 이후 우리 국민 중에서 새로운 계층이 태어났어요. 바로 특별함을 추구하는 자유여행객들입니다. 그들은 여유가 있고 새로운 인생을 갖고 싶어 하죠. 또한 자기만의 여행을 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교육적이고 개성을 추구하는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는 여행에 대한 수요가 늘어날 거라고 보고 있습니다.”
우아한 여행을 즐기고 싶다면 모험을 한다고 생각해야
윤 교수는 비행기는 비즈니스석을 타고 최고의 호텔에서 최고의 식사를 하는 게 우아한 여행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에게 우아한 여행은 좀 더 기술적인 감각을 갖춘 것이어야 한다.
“출장을 끝내고 난 후 바로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잠시 짬을 내서 그 지역을 잘 어필할 수 있는 것을 찾는 거죠. 그 지역 외에는 없는 것을 찾는 모험과 같은 겁니다. 그건 사람일 수도 있고 지역 자체일 수도 있고 음식일 수도 있고 관광지나 자연일 수 있죠. 그렇게 하면 항상 어디를 가면 새로운 게 있을 거 같고 새로운 사람이 있을 거 같으며 우연한 로맨스가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와 환상을 품을 수 있게 됩니다.”
여행이 주는 즐거움 중 기대와 환상은 뺄래야 뺄 수 없다. 그러한 기대와 환상은 스스로의 노력에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윤 교수는 말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정해진 공식에 따라 그대로 움직여야 하는 패키지 여행에 대한 그의 생각은 어떨지 궁금했다.
“상품을 강요하는 등의 패키지의 병폐가 많이 없어지긴 했죠. 그런데 이건 여행사가 너무 많아서 생존하기 위한 방법으로 강구된 것입니다. 그래서 패키지 여행의 병폐는 소비자 자신의 문제이기도 해요. 가격 중심의 저가 여행을 선택하다보니 어쩔 수 없이 설정되는 부분들이 있다는 거죠. 그런 류의 패키지 여행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여행을 스스로 하려고는 안 합니다. 그러다 보니 악순환이 반복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여행지 보는 눈을 바꿀 진짜배기 여행가가 절실하다
윤 교수가 여행 업계를 바라볼 때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여행작가들에 관한 문제다. TV에서 하는 여행 프로그램들을 보면 흔히 사진작가, 여행작가, 문화전문가들이 나와서 여행지를 소개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그들의 얘기를 보면 그저 현상에 대한 단순한 내용만 나온다는 것이 그의 비판이었다.
“그들은 으레 ‘좋다, 좋습니다, 이국적입니다’ 같은 말만 합니다. 아니, 시청자들이 그걸 듣고 싶은 게 아니잖아요? 이미 본 내용인데. 여행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작가가 써준 거라 해도 자신의 지식을 넣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를 않아서 그래요. 그 지역을 알리고 제대로 볼 수 있는 방법들을 일반인들에게 전달할 줄 알아야 하는데 그런 역할을 못하는 거죠. 그나마 나영석 PD가 우리나라 여행 문화를 획기적으로 바꾸고 있다고 봐요. 이미 를 통해 나이 먹은 사람들이 배낭여행을 못 한다는 인식을 바꿨잖아요? 젊은이들에게 아무것도 안 갖고 라오스로, 아이슬란드로 배낭여행을 떠나게 하고, 중년들은 남미로 보냈죠. 이런 고정관념을 깨는 사람들이 우리나라 여행문화를 바꾼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난립해 있는 시니어 중심의 여행 동호회와 모임을 건강하게 발전시키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런 역할이 필요하다고 충고했다.
“물론 원래는 여행사에서 해야 하지만, 여행사는 수익을 추구하기 때문에 어렵습니다. 일본 여행사에서는 ‘실버 구락부’를 만들어서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일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합니다. 그 안에서 자연스럽게 놀다가 끼리끼리 여행을 하고 싶어지면 여행사에 의뢰하게끔 만들어놨어요. 그렇게 자연스럽게 여행 모임이 만들어짐으로써 여행도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선순환이 이뤄지는 거죠.”
여행 소비자에게 조금씩 여행에 관한 모티브를 모아서 기회를 주고, 거기서부터 반응을 이끌어내어 진정한 여행을 추구하게끔 도와주는 것. 자연스럽고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 진정성(Authenticity)과 일탈(liminoid)이 담긴 여행을 어떻게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하나의 대답으로 다가왔다.
△ 윤병국 경희사이버대학교 관광레저경영학과 교수
경희사이버대학교 호텔관광대학원장·관광레저항공경영학과장. 경희대학교 지리학과 학부, 대학원 석사·이학박사 (관광지리·관광개발 전공). 경희대학교 사회교육원 여행작가 양성과정 주임교수. CBS 노컷뉴스 여행칼럼니스트.
그날 무너진 것은 국가시스템 전반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였다.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서 멀쩡하던 한강 다리가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릴 수 있다는 사실 앞에서 국민들은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성수대교 붕괴사고가 발생했던 10월을 맞아 21년 전 그날이 우리에게 남긴 의미를 되새겨 본다. 글 유충현 기자 lamuziq@etoday.co.kr
1994년 10월 21일.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아침이었다. 서울 전역에는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오전 7시 40분을 약간 지난 시각, 믿을 수 없는 참사가 발생했다. 서울 성동구와 강남구를 잇는 성수대교의 중간지점이 갑자기 푹 꺼지면서 한강으로 내려앉은 것. 다리를 지나던 여러 대의 차량도 함께 추락했다. 떨어져 내린 차량에는 등교 중인 학생과 출근 중인 직장인 등이 타고 있었다.
국민들은 귀를 의심했다. 남아 있는 자료화면 속 현장의 모습은 처참하다. 내려앉은 교량 위로 찌그러진 버스와 승용차가 널려 있는 모습이 그대로 전파를 탔다. 끊어진 부분에는 철근이 흉측한 모습으로 구부러져 보는 이들을 섬뜩하게 했다. 아비규환의 현장 위로 눈물처럼 가랑비가 계속 내렸다.
거짓말인 것만 같았던, 아니 거짓말이길 바랐던 뉴스
성수대교 붕괴사고는 2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광복 이후 가장 불행한 사고 중 하나로 국민들의 뇌리에 남아 있다. 대한민국 수도 서울 한복판에서,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다리가 갑자기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은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줬다. 한편으로는 ‘빨리빨리’로 상징되는 성장일변도 대한민국의 그늘진 이면을 들춰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당시 서울경찰청 상황실에서 근무했던 최준영 경찰청 사이버안전국 팀장은 “정말이지 처음에는 농담인 줄 알았다”고 회상했다. 무전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혼선이 생기는 경우가 많았던 때였다. 그는 ‘성수대교가 무너졌다’는 무전을 누군가의 장난으로 의심했다. 이런저런 사건사고를 실시간으로 접해왔지만 이번은 너무 현실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근의 다른 근무자를 통해 확인한 후에야 그는 심각한 사고가 발생했음을 실감했다고 했다.
총 6대의 차량과 49명의 탑승자가 추락했고, 이 중 32명이 사망했다. 24명은 16번 시내버스 승객이었다. 사망자 중에는 무학여자고등학교 학생 8명과 무학여자중학교 학생 1명, 서울교육대학교 여대생 1명이 포함돼 있었다. 하필이면 아침 등굣길에 사고가 발생하는 바람에 꽃다운 나이의 학생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점이 국민들의 안타까움을 더했다.
범인은 대한민국... 안전 불감증이 부른 최악의 참사
성수대교는 한강의 11번째 다리로 1979년 10월 개통됐다. 그 이전에 세워진 한강 다리와 달리 교량의 기능 외에 미적인 기준까지 고려한 첫 사례였다. 교량의 조형미를 높이려고 당시 국내에서는 파격적인 ‘트러스식 공법’으로 설계됐다. 시원한 경관, 입체교차로, 날렵한 곡선미는 당시 한강의 새로운 명소로 떠올랐다.
사람들은 개통된 지 15년밖에 되지 않은 성수대교가 당연히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성수대교를 시공한 동아건설에는 새로운 공법에 대한 충분한 기술력이 없었다. 완공기한을 맞추기 위해 무리하게 공사를 강행하는 과정에서 부실공사가 이뤄진 사실도 적발됐다.
붕괴 원인은 부실 용접과 설계였다. 교량 상판을 떠받치는 철제구조물의 연결이음새 용접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10㎜ 이상이어야 하는 용접두께도 8mm밖에 되지 않았다. 부식된 철제 구조물을 보수하지 않고 녹슨 부분만 페인트로 감추는 등 관리 부실도 드러났다. 안전에 대한 기업과 정부의 안일한 인식이 종합적으로 쌓여 빚어진 참사였다.
정부는 성수대교 안전에 무관심했다. 성수대교의 통행허용 한도는 32.4톤이었지만 40톤을 넘는 과적차량들이 제재조치 없이 지나다녔다. 1993년 동부간선도로 개통으로 교통량이 폭증했지만 서울시에서는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않았다. 성수대교 설계 당시의 하루 통행량은 8만 대 정도였지만, 붕괴 당시 하루 통행량은 그 두 배가 넘는 16만 대 이상이었다.
안전관리 국가적 전환 약속, 21년 지났지만
국민적 분노가 거세지자 이영덕 국무총리가 사임했고, 이원종 서울시장이 경질됐다. 사흘 뒤인 24일에는 김영삼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다. 지난해 세월호 참사 이후 이뤄진 조치와 비교해 보면 상대적으로 신속한 대응이었다. 국민적 정서를 감안해 교량 건설과 안전관리 관련자들에게는 무거운 처벌이 내려졌다.
정부는 건축물 안전에 대한 국가적 전환을 약속하고 여러 조치를 취했다. 한강 다리에 대한 일제점검을 실시해 당산철교, 광진교, 한남대교, 양화대교 등을 재시공하거나 전면보수했다. 제도적으로도 시설물안전 특별법이 제정됐고 부실공사에 대한 처벌이 강화됐다. 시설물 안전관리를 전담하는 한국시설안전공단이 만들어진 것도 이때였다.
하지만 불행히도 정부의 약속과 달리 우리 사회에서 대형 안전사고는 그 후로도 끊이지 않았다. 국민들의 경계심도 쉽게 희석됐다. 같은 달 충주호 유람선 화재가 발생했고, 이듬해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폭발 사고와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가 일어나 수많은 인명을 앗아갔다. 그 뒤로도 대구 지하철 참사, 경주 마우나리조트 붕괴사고, 세월호 침몰 사고 등 대형 안전사고가 이어졌다.
희미해지는 국민적 관심, 유족 아픔은 ‘진행형’
어느덧 21년이 지났다. 날벼락처럼 가족을 잃은 이들은 그날의 기억을 어떻게 품고 있을까. 몇몇 유족과 접촉했지만 이들은 사고와 관련한 인터뷰를 원치 않았다. 하나같이 돌아온 대답은 “그날 일을 떠올리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한 유족은 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는 당부와 함께 이같이 전했다. “달라진 게 있나요? 앞으로도 사고가 일어나겠죠. 그리고 호들갑을 떨고 잊힐 겁니다. 연결해서 보면 사고는 그냥 계속 진행 중인 거예요. 그래서 계속 분한 마음이 가시지 않아요.”
희생자의 유지를 이어 세상에 등불을 밝힌 이들도 있다. 사고로 숨진 여대생 이승영씨(당시 21세)의 가족들이 승영씨의 생전 소원을 이뤄주려고 희생자 보상금 전액(2억5000만원)을 들여 만든 ‘승영장학회’는 설립 이후 오늘날까지도 해마다 형편이 어려운 대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이 사업도 어려움을 겪게 됐다. 사업 초기에는 원금을 운용한 이자수익으로 장학금을 지급해 왔지만 금리가 낮아지면서 원금을 까먹기 시작한 것이다. 남서울교회 오성섭 집사(승영장학회 사무국장)는 “이대로라면 약 10~15년 정도 갈 수 있을 것”이라며 “장학회 출신을 주축으로 기금을 만들어보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추진되고 있지는 않다”고 말했다.
성수대교 북단 인근에는 붕괴사고 희생자 유족들이 만든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위령비 옆에는 희생자를 추모하고 유사한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안전관리에 대한 의식을 높이겠다는 취지의 글귀가 새겨져 있다. 기자가 위령비를 찾았던 날에도 21년 전 그날처럼 비가 내렸다. 그곳에서 위령비 부근을 오가는 시민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내가 2003년에 낸 에세이집 를 읽은 많은 독자들이 던지는 질문 가운데 하나. “어떻게 하면 그렇게 모여 살 수 있나요?” 많은 분들은 궁금증을 가집니다. 자녀 네 가족과 우리 내외가 한 지붕 아래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이 신기한가 봅니다. 호기심으로 묻는 분도 있고 부러워하면서 묻는 이도 있습니다. 성질 급한 분은 당장 그 비결을 알려 달라고도 합니다. 나는 이런 급한 질문을 받으면 좀 당황스럽습니다. 달리 당황스러운 것이 아니라 단시간에 단 몇 마디 말로 설명을 드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글 이근후(李根厚·이화여대 명예 교수)
요즈음 우리 사회는 핵가족도 모자라 일인 가정으로 살아가는 인구도 참 많아졌습니다. 교과서적인 가족의 개념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전통적인 사회학 교과서에 실린 가족의 개념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확대가족이란 개념이고 다른 하나는 핵가족이란 개념입니다.
확대가족은 농경사회에서 경험했던 가족구조입니다. 3대가 한 지붕 아래 모여 삽니다. 핵가족이란 산업사회를 겪으면서 생긴 가족형태입니다. 가족 이동이 손쉽도록 기능적인 가족이 부부와 미성년 자녀들로 구성하는 가족형태입니다.
13가족 함께 한 지붕아래 산다
시대가 변하면서 대부분의 가족들은 핵가족 형태를 취합니다. 자녀가 결혼하면 곧바로 분가하여 자신의 핵가족을 이룹니다. 그런데 요즈음 들어서는 이런 고전적인 가족 정의를 설명할 수 없는 가족형태들이 존재합니다.
이런 사회적 추세로 보아 우리 집은 13가족이 한 지붕아래 함께 산다고 하면 당연히 궁금증을 일으킬 것입니다. 요약해서 말씀 드리면 이렇습니다.
우리 부부는 2남2녀를 두었습니다. 그러니 모두 5가구 손자녀 합해 13명입니다. 함께 돈을 모아 빌라 형태의 집을 지었습니다. 내가 그렇게 하자고 한 일은 아닙니다. 자녀들이 모여 그런 발상을 해서 내가 동참한 것입니다. 하향식이 아니라 상향식입니다. 필요에 의해 모였습니다. 1년 여의 의논과 1년 여의 설계를 거쳐 함께 모여 삽니다. 필요에 의해 모였다는 말은 자녀들의 요구와 우리 부부의 사정이 맞았다는 말입니다.
당시 현실적인 요구는 자녀들이 모두 전세를 살고 있어서 자기 소유의 주택을 갖지 못했습니다. 손자녀들이 어렸는데 그 부모들은 모두 직장을 가진 터라 육아에 손이 모자랐습니다. 우리 부부는 은퇴를 하여 상대적으로 시간여유가 있었습니다.
필요에 의해 모인 확대가족
이런 상황에서 모였으니 우리 가족은 필요에 의해 모인 확대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다. 자녀들이 결혼하면서 신혼 6개월을 함께 보냈습니다. 그 이유는 처음부터 분가를 시키면 남남이 될 것 같아서 서로 양해를 하고 6개월의 소통기간에 합의했습니다. 새로 우리 집에 들어오는 며느리나 사위도 우리 부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 부부도 새로 들어오는 식구들의 진면목을 알아야 합니다. 결혼하기 이전 자라던 친가에서 하던 습관대로 행동할 것을 주문했습니다. 우리 부부도 새 식구가 들어오기 이전부터 하던 습관대로 했습니다. 서로 눈에 거슬리는 모습이더라도 그렇게 하자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서로가 서로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 6개월의 학습동거 끝에 분가시켰습니다.
6개월 학습동거 끝의 분가 이후
이런 사정을 거쳐 서로 분가하여 살았는데 아무리 필요에 의한 재집결이긴 하지만 의논해야 할 일들이 많았습니다. 필요에 의한 재집결의 아이디어는 큰며느리가 제안했습니다.
아들 부부가 의논하기를 우리 부부 중 누가 먼저 타계하게 되면 남은 부모를 모시기로 했답니다. 자녀가 넷인데 서로 역할을 나누어 모시면 어떨까라고 형제들 간에 의논을 했답니다. 그렇게 하자면 한 집에 살아야 하지 않을까란 생각으로 이어지고 그 아이디어를 내가 정년퇴임하는 시점을 맞추어 실행에 옮겼던 것입니다.
우리들은 자주 모여 어떻게 하면 필요성을 극대화하면서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을까 많이 의논했습니다. 부부간에 생각을 맞추어 살아가기도 힘든데 이런 대가족이 모여 살자면 의견이 다른 점도 많고 서로 부딪쳐 속상하는 일도 많을 텐데 어떻게 적응할까 많이 의논했습니다.
의논 끝에 찾아 낸 핵심적인 요체는 이렇습니다.
“우리들은 각 가정이 고유한 가치관과 종교관을 갖고 간섭 없이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서로 같음은 나누면서 즐기고 다름은 인정하고 존중합니다.”
서로 독립성을 유지하고 침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함께 모여 사는 동안 우리들은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이 노력을 하기 이전에 우리들이 깊이 생각한 하나는 가족 간의 거리입니다. 함께 한 지붕 아래 살고 있으니 물리적 공간과 거리는 매우 가깝습니다. 가까운 만큼 지켜야 할 약속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서로 간섭하지 않는다는 약속입니다.
정서적 거리도 중요합니다. 너무 가까워도 갈등으로 꼬이고 너무 멀어도 남남입니다. 얼마만한 정서적 거리가 필요할까요.
고슴도치를 생각했습니다. 서로 꽉 껴안으면 상처를 입습니다. 너무 먼 거리에서 바라만 보면 가족정서가 아닙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낱말이 정서적 안전거리 확보입니다. 이런 정서적 안전거리를 확보할 수 있는 기준은 결국 독립성의 유지와 간섭의 배제였습니다.
서로가 지향하는 삶의 가치 인정해
3세대 가운데 우리 부부가 그 약속을 지키기가 제일 힘들었습니다. 자녀가 아무리 나이를 먹고 성가하여 나름 가족을 형성했다고 해도 부모 눈엔 역시 어린아이로 보입니다. 이 위태한 아이(?)로 보는 시각은 머리로는 옳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정서적으로 느끼기에 부족했습니다. 하루아침에 습관이 변할 것은 아니지만 정말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간섭을 하지 않으면 자녀들도 어린이가 아닌 이상 그들이 습득한 방법으로 가족을 이끌어 갈 것입니다.
우리 부부는 늘 이런 문제로 의견이 엇갈릴 때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우리 부부의 노력은 점차 자리를 잡아 갔습니다. 걱정했던 것만큼 우리 부부의 손길이 없어도 잘 지냅니다. 되돌아 보면 기우입니다. 우리 부부의 간섭이 줄어들면 상대적으로 자녀들의 창의성이 넓어집니다.
자녀들도 제가끔 나름의 가치관을 가지고 그들이나 가족들의 인생을 행복하게 살고 싶을 것입니다. 크게 패가망신할 삶이 아니라면 어떤 간섭도 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꼭 부모가 살았던 방법이 전부는 아닐 것입니다.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상호의존적인 삶이 모델입니다. 집 구조상 함께 사는 공동주택이지만 법적으로 각기 소유로 등기되어 있으니 공동경비만 갹출해서 유지보수하면 될 일입니다. 그러니 독립이 보장된 셈입니다.
정서적으로는 서로가 지향하는 삶의 가치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으로 독립성을 유지하도록 노력을 했습니다. 이런 약속을 하고 산 지가 10년이 넘었습니다. 가장 혜택을 받은 층은 당연히 우리 부부입니다. 다음이 손자녀들입니다. 한창 일할 나이의 자녀들은 샌드위치 신세입니다. 위로 부모를 모시랴 아래로 자녀들을 키우랴 눈코 뜰 사이가 없습니다. 우리 부부가 아무리 자녀들의 독립성을 유지시키고 간섭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부모라는 이름의 무게 그 자체 때문에 불편감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
가족공동체 언제까지 유지해야 하나?
이제 손자녀들도 자라 우리 부부의 손길이 미치지 않아도 될 만큼 자랐습니다. 처음 모여 살기로 했을 때 이런 약속도 했습니다. 그러면 이런 형태의 가족 공동체를 언제까지 유지해 나갈 것인가.
손자녀들이 장성하여 결혼을 하게 되면 그때 의논해서 새로운 출발을 하자고. 10년이 지나 보니 그런 시기가 점점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 동안 사회도 많이 변했습니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자녀들이 집에서 꿈을 키우고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자라 사회의 일꾼으로 자랄 것을 소원합니다.” 이 약속은 다섯 가지 약속 가운데 마지막 약속입니다.
이제 손자녀들이 결혼을 하여 새로운 가정을 이룬다면 그들이 함께 살았던 가족공동체 경험을 살려 또 다른 창의적인 삶을 살기를 바란다는 뜻도 담겨 있습니다.
상호 존중하는 독립성과 정서적 안전거리 확보는 미래의 가족들에게도 가치 있는 기준이 될 것을 확신합니다.
이근후 명예교수는
1935년생인 이근후 교수는 이화여대 교수이자 정신과 전문의로 50년간 환자를 돌보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76세의 나이에 고려사이버대학 문화학과를 최고령으로 수석 졸업하면서 화제가 된 인물이다. 30년 넘게 네팔 의료봉사, 40년 넘게 광명보육원 아이들을 돌본 이유도 별 게 없다. 봉사를 하니까 인생이 더 즐거워졌다는 게 전부다. 그는 10년 전 왼쪽 눈의 시력을 완전히 잃고 현재 당뇨, 고혈압, 통풍, 허리 디스크 등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으로 살아가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퇴임 후 사단법인 가족아카데미아를 설립하여 청소년 성 상담, 부모 교육, 노년을 위한 생애 준비 교육 등의 활동을 펼치고 있다. 네 명의 손자 손녀가 그의 인생 후반부를 새롭게 쓰도록 해준다며 가족들의 인연이란 참으로 놀랍다는 걸 나이가 들어갈수록, 세월이 흐를수록 실감한다고 했다.
아직 그림의 떡이라 보는 실버타운(노인복지주택)은 고령화에 얼마나 대처하고 있는가? 극소수만이 누리는 실버타운은 여전히 높은 보증금과 매달 지불해야 할 사용료의 부담이 만만치 않은 상품이다. 월 200만원에서부터 400만원 이상 지출해야하는 실버타운은 어쩌면 더 안정적인 성장으로 가기 위한 일종의 성장통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저 분양형과 임대형 사이에 노인복지법을 교묘히 빠져 나가는 무책임한 논란으로 본다면 이번 기회에 실버타운사업 전반에 대한 제대로 된 재점검을 하지 않게 되면 자칫 한계에 부딪칠 위험성이 있다. 고령화로가는 성장통이냐 한계냐에 기로에 서 있는 한국적 실버타운이 황혼마을로 가기 위해 숨고르기가 시작됐다.
1990년대 중반부터 민간 자본에 의해 하나씩 생기기 시작한 실버타운(구체적 표현으로는 유료 노인복지주택)은 초창기에는 도심의 복잡함을 벗어난 전원형 실버타운이 다수를 차지했다. 시간이 흐르며 교통, 의료, 문화 시설 같은 도시 인프라를 누리고 싶어 하는 시니어들이 늘어남에 따라 현재는 전원형 실버타운보다는 도심형 실버타운이 트렌드다. 그러나 전국 노인복지주택 25개와 노인공동생활 125개를 포함한 노인주거복지시설은 20년이 되어도 논란은 끊이질 않았다.
실버타운은 사실상 시니어가 머무는 마지막 집이다. 실버타운에서 일반 집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버타운은 꼼꼼히 따져서 입소해야 한다.
실버타운에는 임대형과 분양형이 있다.
분양이나 임대계약서에는 반드시 입소조건, 입소비용(월 사용료)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어야 한다. 그동안 명확한 법적 근거 없이 행해졌던 분양형 실버타운에는 안전장치 없이 산 넘어 산인 격으로 총체적 문제 투성이가 되었던 것이다.
실버타운은 상당수가 고급형 실버타운임을 어필하려고 한다. 시니어 입장에서는 얼마 남지 않은 삶의 시간을 보다 풍요롭게 보내고 싶어서 자신의 재산 상당분을 실버타운에 투자하고자 하는 생각이 있을 테니, 실버타운 쪽에선 그에 걸맞는 서비스를 제공해주겠다는 콘셉트를 지향하는 건 당연한 얘기다. 그러나 제대로 준비가 갖춰지지 않은 채 양산된 실버타운의 문제점들이 무수히 보고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실버타운은 사회복지사업법 내 노인복지법 제31조, 시행규칙 14조에 따라 구분된 노인주거복지시설 중 양로시설과 노인복지주택에 속해 있지만 별도의 규정은 없다.
실버타운을 1980년대 요양원 수준의 제1세대 노인복지주택, 2000년대 초반에 등장한 제2세대 닭장식 노인 전용 아파트에 이어 제3세대형은 최첨단의 주거·의료·문화·휴식·레저 복합형 타운하우스로 구분하는 전문가들이 적지 않다.
실버타운이 일반화된 것도 아니고, 입주비용이나 생활비가 일반거주에 비해 효율적이거나 비용 절감적이라는 면에서 크게 인기를 끌고 있는 상황도 아니고, 선진 고령화 국가의 성공적인 모델들이 우리나라에 정착되지 않은 면도 있지만, 고령화의 급속한 진전이 되는 상황을 염두에 두고 예상해 보면, 어느 순간에는 갑자기 입주가 몰릴 가능성도 없지 않을까?
사이버대학의 실버산업 전공 교수는 “시니어는 여가, 건강관리, 안전 등이 주요 관심사인데 실버타운이 필요한 서비스를 모두 제공하는 추세다. 2026년경 노인 인구가 20%에 육박하는 초고령화 사회를 눈앞에 둔 우리나라도 실버타운 수요가 늘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실버타운 운영주체는 누구냐?
실버타운은 일단 노인복지시설이다. 노인복지시설이라 함은 당연히 운영주체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실버타운은 흔히 입주자에게 ‘분양되는’ 개념으로 운영된다. 아파트처럼 분양이 이뤄짐으로써 실버타운은 개별 소유권을 인정하는 공간이 되고, 그렇게 되면 시설주체가 무의미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건설회사는 실버타운을 짓고 입주자에게 분양을 한 다음 돈을 챙겨 운영에서는 손을 끊는 경우도 발생한다. 이러한 법적인 차원의 문제가 계속되자 노인복지법 개정안을 요청하고 있다.
건설사 입장에서도 실버타운은 이제 진입하기 어려운 영역이 됐다. 2010년에 도시·군계획시설의 결정·구조 및 설치기준에 관한 규칙 107조가 개정되면서 분양과 임대를 목적으로 하는 실버타운은 사회복지시설에서 제외됐다. 따라서 2010년 이후에 지어지는 실버타운에는 건설사들이 그 전까지 누렸던 전기세 감면, 취·등록세 면제 등의 혜택들이 사라졌으며 이로 인해 지난 3년여 동안 신규로 실버타운을 짓겠다는 건설사는 단 한 곳도 없는 상황이라고 한다.
기업이나 개인들도 실버타운에 주목하고 진입했다가 시기상조라 판단하고 한발 물러서 있는 상황이다.
국내 최초로 개방병동을 시행하고 한국정신치료학회를 설립하는 등 정신과 분야에 큰 족적을 남긴 이근후 이화여대 명예교수의 소탈하고 편안한 얼굴은 맘씨 넒은 이웃집 할아버지 같았다.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긴 후 ‘인생은 덤’이라는 생각으로 산다는 철학을 갖게 된 이 교수는 자기 삶의 능숙한 선장으로서의 노하우를 정리한 책 를 베스트셀러로 올려놨다. 서울 신영동 북한산 자락에 있는 ‘가족아카데미아’에서 이 교수를 만나 노년을 재미있게 보내는 지혜들을 들어봤다.
인터뷰 송광섭 편집장 정리 김영순 기자
노년은 누구에게나 온다.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할 삶의 한 과정이다. 그러나 자연스럽다고 생각해도, 나이가 드는 건 역시 슬픈일이다. 특히 나이듦을 슬프게 만드는 건 외로움이다. 이근후 이화여대 명예교수는 외로움에 대한 사전 대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나이가 들면 이타심을 뛰어 넘는 이기심이 있어야
“노년의 삶을 가장 어렵게 만드는 것이 외로움입니다. 외로움의 대비책은 바로 ‘적응’이죠. 살아남기 위한 욕구가 바로 적응입니다. 부모 자식 간에도 적응이 필요합니다. 가족이란 내가 편하고자 자식을 가르치고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서로 적응해 나가기 위한 몸부림, 즉 ‘합의된 언어’를 만들어서 살아가기 마련이거든요. 그러니 내가 얼마나 잘 살았는지 어떤 인생을 살고 있는지 궁금하면 내가 지금 ‘어떤 언어’를 쓰고 있는지 살펴 봐야 합니다.”
자신이 어떤 말을 사용하고 있는지 돌아보라는 이 교수의 충고는 다가오는 상황에 대해 보다 적극적으로 스스로가 임해야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를 뒷받침하듯, 이 교수는 “나이가 들면 내가 사람을 찾아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살다보면 아무도 나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 시기가 옵니다. 외로움을 없애는 가장 쉬운 방법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도 능력이에요.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터득하고 학습하고 실천하면서 길러집니다. 나이를 먹었다고 다른 사람에게 대접받고 그쪽에서 내게 먼저 다가오기를 바란다면 점점 더 외로워질 뿐입니다.”
그는 ‘자기를 위한 적극성’의 실천으로 이타심을 넘어선 이기심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나이 들수록 외롭지 않으려거든 온전한 자기사랑으로 출발해야 한다. 남의 보살핌 없이 자기 앞가림을 잘하기 위해서 이기심이 필요하다. 결국 남을 불편하게 하지 않는, 그럼으로써 나를 편하게 하는 동시에 나를 사랑하는 길임을…”
존경받으려 애쓰는 건 인위적이고 즐겁지 않은 일
타인에게 사랑받는다는 것은 존경받는 일과 흡사하다. 존경받기 위해서 시니어는 어떻게 해야 할까?
“존경받는 행동을 하면 존경받는 것이고 존경받을 짓을 하지 않았으면 못 받는 겁니다. 존경받자고 어찌 한다는 건 인위적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그리고 인위적인 건 즐겁지 않은 일입니다.”
이 교수는 젊은 후배들을 존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젊은이들은 계속 변화하고 있기에, 자신이 배우기 위해서라도 젊은이에게 자세를 낮춰야 한다는 것이다.
“‘요즘 얘들은…, 내가 젊었을 때는, 너도 늙어봐라, 언제까지 젊은 줄 아냐’ 이런 얘기나 하며 자기 경험과 기억만 옳다고 고집할 일이 아닙니다. 시대가 바뀌었음을 인정해야 해요. ‘젊은 세대가 내 선생이다’라 생각하면 존중하게 됩니다.”
이 교수는 자신이 현직에 있을 때는 제자들의 스승이었지만, 퇴임 후에는 “여러분들이 나의 스승이 되어 많은 정보를 주기 바란다”고 고마움을 전한 적이 있다고 한다. 사람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달라지고 변화한다. 그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자신의 ‘쓸모’를 발견할 줄 아는 것도 나이를 먹는 기술 중의 하나라는 게 이 교수의 지론이었다.
“젊은 세대에게 대접받으려 하기보다는 차라리 아부하는 게 좋습니다. 비굴해지라는 게 아닙니다. 젊은이들 관심사에 동참하고 공감하려 애쓰라는 것입니다.”
자식과 갈등이 없을 리 없어… 연습이 필요
이 교수의 집에는 3대 13명이 한지붕 아래에서 사는 걸로도 유명하다. 21세기에 극히 드문 이 크고 복잡한 대가족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공자가 말했습니다. ‘젊어서는 부모에게 의지하고 늙어서는 자식에게 의지하라.’ 모든 것을 자식에게 내맡기고 기대어 살라는 뜻이 아니라 자식에게 의지하라는 것은 자식을 존중하라는 뜻입니다. 자식이 부모에게서 독립하려고 애를 쓰듯이 부모도 어느 순간부터는 자식에게서 독립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해요. 그래서 우리 가족은 철칙이 있습니다. 상호 불간섭 주의와 독립성 보장입니다.”
노후를 힘들게 하는 원인 중 하나가 자식과의 보이지 않는 감정 싸움이다. 갈등이 없기를 바라는 것은 불가능 자체를 바라는 것이라는 게 이 교수의 생각이었다. 이 교수가 큰 며느리에게 강조한 게 바로 ‘거절하는 법’이었다고 한다. ‘노’라고 말해야 할 때는 솔직하게 ‘노’라고 말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싫어요”보다는 “안돼요”라는 말을 할 수 있도록 연습이 필요했다. 시부모와 며느리는 상하관계가 아니라 인간 대 인간으로 통해야 한다는 게 이 교수의 지론이었다. 그러나 누구나 거절은 불편하다. 그래서 연습이 필요하다는 것. 그는 따라서 효도가 아니라 '효부(孝父)-효모(孝母)'가 필요한 시대라고 말한다. 예전에는 자식 입장에서 부모에게 효도를 하는 것이 강조됐지만 지금은 거꾸로 부모가 자식을 공경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돼야 한다는 얘기다.
이 교수는 손주 녀석들에게는 이메일로 소통한다. 요즘 애들은 벅차다. 시대에 못 따라간다. 현실적인 정보를 알고 대한다면 가정안에서 조부모의 자리는 더욱 단단해진다는 것.
“손자 손녀와 어울리면 최신 문화와 사고방식을 접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어요. 내 어릴 적 생각과 행동 성장 과정, 에피소드, 추억거리, 아픔, 혼난 일 등을 상세히 적어서 메일을 보낸다. 그러다 보면 손주들의 의견과 생각들을 교류하게 되고 함께 마음을 읽어가는 과정에서 공감대가 생깁니다. 4명의 손주들이 답장을 써주면 원고료(?)를 지급해요. 1명당 무려 100만원 씩,,,,이런 나를 멋쟁이라고 외부에서는 보겠지만 나는 살아남기 위해 하는 것이죠.”(하하)
절박한 최선이 아닌 여유로운 차선을 선택하자
“저는 ‘최선’이라는 말이 싫습니다. 최선은 내가 가진 100을 다 쓰라는 겁니다. 그런데 차선이라 해서 적당히 하다가 내키는 대로 그만두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무엇이든 완벽에 매달리기 보다 잘하는 정도에서 즐기고 만족한다는 뜻입니다.”
이 교수는 50년간 환자를 돌보며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 와중에 30년 넘게 네팔에 의료봉사를 하고, 40년 동안이나 광명보육원 아이들을 돌보았다. 또한 76세의 나이에 사이버대학에서 늦깎이로 공부를 하여 문화학과를 최고령 수석으로 졸업해 세간의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 교수는 이렇게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늘 자신의 능력을 30% 가량 아껴 두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1등을 하기 위해 바닥까지 짜내다 보면 옆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풍경의 즐거움도 인생의 다른 가치도 놓치게 되죠. 최고가 되려는 노력을 조금 덜어 내어 여유를 갖고 살면 많은 것을 보고 느끼며 풍요롭게 즐길 수 있습니다. 그걸 잘 조율할 줄 아는 것이 진짜 어른입니다.”
최근 양평 세미원이나 시흥의 관곡지 등 수생식물을 이용한 공원들이 하나둘씩 생겨나고 연차·연잎밥 등 연을 이용한 가공품도 이전보다 접할 기회가 많아졌다 그럼에도 연은 여전히 특별하게 느껴지는 작목이다. 차기설 대표는 2004년 제부도 인근으로 귀농해 연꽃농장을 가꾸면서 연을 이용한 각종 가공품을 생산하고 있다.
◇귀농을 결심하다 = IMF 이후, 한창 사오정(사십오세가 정년)이니 오륙도(오십육세까지 직장에 있으면 도둑)니 하는 치열한 경쟁사회에 대한 자조적인 표현들이 회자되는 분위기 속에서, 차 대표는 처음 귀농을 생각하게 됐다. 2004년 초 귀농을 결심하게 되면서 그는 먼저 블루베리, 포도 등을 놓고 무엇을 재배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에 들어갔다.
블루베리는 가공이 쉽지 않은데다가 수확까지 3년이라는 시간을 기다려야 하기에 접근하기 조심스러웠다. 포도는 지역주민들이 선점하고 있는 작목인 만큼 재배하기는 수월할 지라도 주민들과 마찰을 일으킬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판단했다. 결정적으로 연을 재배하게 된 것은 우연히 연꽃농장을 방문했다가 농장주의 연에 대한 자랑을 접한 것이 계기가 됐다.
작목을 결정할 때에 그가 염두에 둔 기준은 재배하기 쉬운 작목을 한 가지만 재배한다는 것이었다. 농사경험이 전혀 없었던 그이기에, 일반 농업인과 같아질 수 있다는 생각은 애초부터 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농사에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1차 생산보다는 2차 가공으로 승부수를 던질 수 있는작목을 선택하고자 했다.
이런 그에게 연은 환경에 민감하지 않아 관리가 쉽고, 병충해도 거의없는 작목이기에 매우 적합한 작목이었다. 처음에 용도에맞는 종자를 잘 선택해 받으면 종자 값을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점도 매력적이었다. 또 전통적인 연잎차 가공방식이 다른 작물의 가공에 비해 간편하고 자본이 적게 소요되는 것도 큰 장점으로 다가왔다.
◇본격적인 귀농 준비 = 2004년 가을, 차 대표는 지인이 추천한 지역에 터를 잡았다. 제부도 초입(경기도 화성시 서신면)에 자리하고 있어 유동인구가 많은 것이 기회요인이 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연을 재배작목으로 결정하기는 했지만 문제는 당시 연에 대한 정보를 구하기가 어렵다는 점이었다.
중국판, 미국판 책자를 구해 독학으로 공부했다. 귀농교육이라는 것이 거의 없었을 때이기도 했지만, 교육을 받을 생각조차 못하고 홀로 관련 서적들에 의지해 연구와 실험을 거듭했다.
이때 유동인구가 많다는 지리적 특성을 십분 활용해 연을 심고 가꾸면서 가공을 준비하는 동시에 자기 화분을 함께 판매하는 전략을 선택했다. 수련을 심은 화분을 판매하기도 했다. 이것이 귀농초기 수입이 안정적이지 못한 시기를 버티게 해준 중요한 수입원이 됐다. 연 가공·판매로 경영이 어느 정도 안정화된 지금에도 화분을 찾는 사람들이 있어 계속 구비해 판매하고 있다.
◇연 가공에 도전하다 = 그가 처음 도전한 가공품목은 연잎차였다. 연잎차를 가공하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찾아가 차를 마셔
보고 어깨 너머로 가공기술을 배웠다. 기술을 배우면 실험적으로 가공해보고, 그 차를 인사동 찻집에 가져가 시음을 청했다.
처음 찻집 주인들의 반응은 냉랭했다. 자신이 가공한 차를 차로서 인정해주지 않는 모습을 대하자, 그는‘원가, 수익등을 생각하지 말고 우선 마실 수 있는 차를 만들어보자’라고 결심하고 차를 만들어 시음을 청하기를 반복했다. 이러한 꾸준한 노력으로 찻집주인들이 오히려 조금씩 가공 방법을 알려줬고 1년 반이라는 시간이 지나자 드디어‘얼마에 차를팔겠느냐?’라는 질문을 받았다. 감격적인 순간이었지만 그동안 판매 가격에 대해 특별히 고민해본적이 없었다. 별 계산 없이 입에서 나온 금액이 1만2000원이었다. 최초로 직접 가공한 연잎차를 판매하게 된 순간이었다.
연잎차를 만들고 나니, 자연스레 티백 가공으로 이어졌다. 다음으로는 연의 씨에 해당하는 연자를가공한 환을 만들었다. 연자가 몸에 좋은 성분을 많이 함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7~8월 한시적으로만 생산이 되는데다가 딱딱해서 먹기가 어렵기 때문에 환으로 만들어 파는 것이 좋겠다는 아이디어에 착안했다.
최근에 개발한 상품은 연잎영양밥이다. 개발 기간만 3년이 소요됐는데, 맛·포장단위·포장방법 등을 개발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시식과 실험 과정을 거쳤다. 작년부터 판매하기 시작한 연잎영양밥은 연중 생산이 가능하며, 기호식품인 차에 비해 단번에 소비가 이루어지는 특성으로 인해 여러 가공품 가운데서도 효자 상품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는 이처럼 1차 생산물이 아닌 가공품 생산에 주력하고 있으며, 60~70%를 온라인으로 판매한다. 나머지는 오프라인 방문객, 신세계백화점과 각종행사장 납품을 통해 소비되고 있다. 연차는 현재까지는 단골 고객들 위주로 판매되고 있어 연차의 맛과 효능을 알리고 소비층을 확대해나가는 것은 과제로 남아있다.
이렇게 끊임없이 연구·개발에 대한 열정을 늦추지 않는 차 대표는 이젠 연근발효효소 개발에 매진하고 있다. 논문 한 편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도전한 이 아이템으로 그는 농림축산식품부가 주최한 제9회 벤처농업창업경연대회에서 장려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수출을 위한 쉼없는 도전 = 차 대표는 귀농한 지 2년이 지난 2006년이 되어서야 처음 교육을 접했다. 친구의 소개로 시작하게 된 것이 화성시농업기술센터에서 주관한 화성시사이버농업인연구회 활동이었다. 이를 통해 교육이 농업 경영에 도움이 됨은 물론, 각기 다른 작목을 재배하는 동료 농업인들을 만나는 것이 큰 힘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후로도 각종 교육
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현재 그는 150시간 과정의 aT농수산마케팅대학에 다니고 있다. 아직 막연한 단계이기는 하지만 수출을 준비하고 있다. 경기 화성 지역에서 연을상업화하여 생산·가공 및 판매하고 있는 유일한 농가로서 자리를 지켜온 저력을 더 멀리 확장시키기 위해 차근차근 길을 닦고 있다.
◇예비 귀농인에 대한 조언 = 차 대표는 현재의 자리에 오기까지 가장 힘들었던것이 농업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는 것이었다고 한다. 주위에서는 자신을 농업인으로 바라보지만 스스로 농업인으로서 한없이 부족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농사 경험이 전무한 자신이 과연농업으로 성공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도 차 대표를 힘들게 한 요인이었다. 그러나 귀농 후 8년이지난 지금 오롯이 자리하고 있는 연꽃농장‘연애(蓮愛)’는 불안과 자성 가운데서 그가 스스로 갈고닦은 시간들이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줬다.
그는 귀농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환상을 버릴 것, 끊임없이 노력하고 도전할 것,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이웃을 많이 사귈 것 등을 주문했다. 농사 경험이 없는 사람이 성인이 되어 농사일을 시작해 안정적인 궤도에 진입하는 것이 결코 만만한 일이아니기 때문에 농업, 농촌생활에 대한 환상을 먼저 버려야 한다고 조언했다.
또한 그는 비록 귀농 초기교육은 받지 않았지만 각종 관련 국내외 서적, 보고서, 논문 등을 있는 대로 찾아 읽으며 연구했다. 수입원이 확보되지 않은 귀농 초기 시절을 지탱할수 있는 전략도 세웠다. 가공기술을 체화하기 위해 칠전팔기의 정신으로 기술도 갈고 닦았다. 끊임없이 노력하고 도전하는 자세가 어떠한 것인지를 그가 먼저 보여준 셈이다.
특히 그는 이웃들이 오가며 그가 농사짓는 방식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얘기할 때 ‘그럼 좀 가르쳐주세요.’하며 겸손한 자세로 배웠다. 농사일에서는 초보일 수밖에없는 자신을 인정한 것이다. 시골 사람들의 간섭 아닌 간섭을 ‘친절’로 봐야 한다고도 했다. 간혹귀농인들이 자신만의 방식을 고집하며 주민들과융화하지 못하여 정착에 실패하였다는 사례들을접하곤 하는데, 이처럼 이웃과 원만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귀농 정착의 전제 조건임을 다시금 확인하게 되는 대목이다.
마지막으로 그가 후배 귀농인들에게 당부한 것은귀농 이전에 가졌던 취미생활을 농업에 접목시키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첫째, 농사지으면서도 하고 싶은 일은 하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고, 둘째, 그것이 농업과 결합하여 시너지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홈페이지, 블로그, 트위터 등 각종 정보매체를 관리·활용하는 데에 열심이어서, 2011년 9월에는‘제3회경기도 농업인 정보화 경진대회’에서‘집나간 연-蓮’포스팅(http://blog.daum.net/inucom/12775950)으로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제는 농업인으로서의 정체성에 자부심을 가지고 오늘도 일보전진을 위해 쉼 없이 연구하고 도전하는 차 대표이기에, 그의 연애(蓮愛) 이야기가 향긋한 연잎 향기만큼이나 오래도록 지속되리라 기대한다.
“농촌은 생각보다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곳입니다.”
자신을 ‘농촌지도자’라고 소개하는 이상화(46·사진)씨의 말이다. 이씨는 지난해 12월 철원 농촌관광 활성화 공적을 인정받으며 ‘2013 한국농업기술보급대상’에서 영예의 대상을 수상했다.
20년 전 이상화씨는 철원의 농촌 지도직 공무원에 임용되며 농촌과 처음 인연을 맺었다. 그가 공무원으로 일하는 동안 철원은 도시로 떠나가는 사람들이 계속 늘었고 찾는 사람도 별로 없는 소위 낙후 지역이 됐다.
그는 “철원에 사업거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며 “이미 15개 정도의 농촌체험마을이 존재해 있었고 본인이 판단했을 때 그 시설 가치는 충분했다. 문제는 이 지역에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기차역이 없는 철원에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코레일과 연계해 인근 동두천, 청평, 가평역 등지에서 철원의 농촌체험마을까지 관광객을 수송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찾아오는 관광객들에 질 높은 농촌체험관광 서비스를 제공하고자 철원 내 관광사업 내실을 다지는 데도 열정을 쏟았다.
농촌의 특장점을 소개해 줄 수 있는 농촌체험관광 해설사를 전국 최초로 도입했다. 또 농촌의 역사, 문화, 기후, 농산물을 영어로 배우며 영어 공부와 농촌체험학습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촌(村)글리시 프로그램’도 개발했다.
이씨는 “철원을 살리기 위해서는 철원의 특성을 재치로 풀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며 “황금마차는 군사도시인 철원의 지역적 특색에 착안해 이동식 군대 매점(PX)과 농산물 장터를 결합한 형태의 시작한 관광사업이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이씨는 지역민과의 상생을 도모하는 실질적 방안 마련에도 적극 나섰다. 농촌 관광 활성화 사업의 목적이 결국 농업인들의 소득 향상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18명의 생활개선 회원으로 구성한 영농조합법인 파머스 마켓 황금마차 PX를 조성, 현지 농업인이 생산한 농산물을 직접 판매할 수 있도록 해 그들의 수익을 보장했다.
이씨는 현재 경희사이버대학교 호텔관광대학원 호텔외식 MBA과정을 밟고 있다. 그는 “사업이 잘 될수록 그 다음 단계를 생각해야 했다”면서 “이를 위해 보다 전문적인 지식과 새로운 분야에서의 식견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또 외식 공부가 철원의 농촌관광 활성화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해 외식학 관련 공부를 하기로 결심했다”고 설명했다.
이씨는 졸업논문을 위해 ‘철원 방문 농촌관광객에 대한 음식 선호도’에 대한 연구를 시작할 예정이다. 연구 결과를 토대로 철원 농특산물 판매를 활성화하는 것이 그의 목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