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hibition
◇장 줄리앙 : 그러면 거기
일정 2023년 1월 8일까지 장소 동대문디자인플라자뮤지엄
장 줄리앙(Jean Jullien)은 프랑스 출신의 그래픽 아티스트다. 영국 센트럴 세인트 마틴 예술학교와 영국 왕립 예술학교를 졸업했다. 그의 독창적이면서도 위트 넘치는 작품 스타일은 세계적인 브랜드들과의 협업을 통해 인기를 끌고 있다. ‘그러면 거기’는 장 줄리앙의 첫 번째 회고전이다. 장 줄리앙의 초기 작품부터 그가 새롭게 탐구해온 최신 작품들까지 총망라된다. 일러스트와 회화, 조각, 오브제, 미디어 아트까지 다양하게 변주된 1000여 점이 전시됐다. 특히 이번 전시를 통해 장 줄리앙의 스케치북 100권이 처음으로 공개된다. 장 줄리앙은 항상 스케치북을 갖고 다니면서 인상적인 순간을 즉흥적인 드로잉으로 기록한다. 그 기록들은 하나의 완성작을 탄생시키기 위한 영감의 원천이 된다. 100권의 스케치북은 그중 일부다.
전시장은 ‘100권의 스케치북’, ‘드로잉’, ‘모형에서 영상으로’, ‘가족’, ‘소셜 미디어’ 등 총 12개 테마로 구성됐다. 전시장 입구에는 작가가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기록한 거대한 스케치북이 펼쳐져 관람객을 맞는다.첫 회고전을 연 장 줄리앙은 “창의적인 삶이란 항상 새로운 마음가짐을 가지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마음속에 있는 열정이 어떻게 변화하고 작품으로 표현돼왔는지 그 과정을 이 전시에서 보여주고 싶다”고 소감을 전했다.
◇의친왕과 황실의 독립운동, 기록과 기억
일정 2023년 1월 20일까지 장소 경운박물관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 이강(1877∼1955)의 생애를 돌아보며 황실 독립운동을 재조명하는 전시다. 박물관에 있는 의친왕 관련 유물과 대한 황실 후손들이 소장하던 유물 및 개인 소장 유물을 총망라하는 국내 최초 의친왕 유물전이다. 전시는 의친왕의 왕자 시절부터 △의친왕 책봉 △미국 유학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 △해방 이후까지 전반적인 생애와 활동을 살펴본다. 특히 일제강점기 전후한 황실의 독립운동을 비롯해 의친왕과 함께한 애국지사의 발자취를 역사적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의친왕의 사진, 훈장, 기념장, 임명장, 의궤, 복식, 선언서, 의친왕 글씨 액자 및 족자, 사동궁 생활유물 등 120여 점이 공개됐다.
●Book
◇나이듦의 철학(제임스 힐먼·청미)
저자 제임스 힐먼은 저명한 융 심리학자다. 그는 책을 통해 나이 듦을 영예롭게 여기고, 그에 합당한 지성으로 창의적인 발상을 제시한다.
제임스 힐먼은 인생에서 가장 오해받는 두려운 시기, 즉 노년에 혁명적으로 새로운 시선을 던진다. 인간 수명의 연장을 문명이 쓸데없이 빚어낸 과오로 보는 유전적 결정론과 정반대 주장을 펼친다. 노년의 고역스러운 일들을 지성으로 파악 가능한 통찰로 보고, 나이 듦에 대한 관습적인 생각을 비틀었다.
제임스 힐먼은 나이 든 사람을 조상, 젊은이의 본보기, 사회의 문화적 기억 및 전통의 전달자로 본다. 저자는 “나이 듦은 ‘오래됨’의 문을 열고 노년은 그 문을 좀 더 활짝 열어젖힌다. 그게 나이 듦의 핵심일 것이다”라면서 “노인이 지혜를 짊어지고 있다는 말은 노인은 그 자신이 오래됐기 때문에 이 오래된 세상의 이치를 안다는 뜻이다. 노인과 세계는 동일한 존재 상태에 있다”고 말한다.
누구나 노년에 접어들지만 노년의 변화에 당황하거나 절망하기 마련이다. 나이 듦에 대해 저자는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며 나침반 역할을 해준다. 노년의 변화를 받아들이고 깊은 자기 이해를 하라고 말한다.
◇빅지니어스 : 천재들의 기상천외한 두뇌 대결(김은영·마음의숲)
양자역학에 관심이 많은 과학 칼럼니스트가 썼다. 아인슈타인, 뉴턴 등 천재들은 라이벌과 경쟁하며 현대문명에 발전을 가져왔다. 천재들의 싸움을 읽다 보면 과학 이론과 역사 상식도 알게 된다.
◇애도 클럽(타일러 페더·문학동네)
암으로 엄마를 떠나보낸 지 10년. 저자는 마침내 지난날의 상실을 마주하고 회고록을 썼다. 암 진단과 투병 과정, 장례식과 추모식, 그 후의 일상을 모두 담았다. 사랑하는 이를 잃고 슬픔을 홀로 끌어안은 모든 이에게 위로를 전한다.
◇나는 단단하게 살기로 했다(브래드 스털버그·부키)
성과 전문가인 저자는 남보다 앞서야 한다는 부담과 스트레스로 항상 불안하고 초조했다. 그는 동서양의 고대 철학, 과학과 심리학, 실패와 좌절을 극복하고 성장한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행복해지는 방법을 찾았고, 이를 소개한다.
●Stage
◇스위니토드
일정 12월 1일 ~ 2023년 3월 5일
장소 샤롯데씨어터
연출 에릭 셰퍼
출연 강필석, 신성록, 이규형, 전미도, 김지현, 린아 등
스릴러 걸작으로 꼽히는 뮤지컬 ‘스위니토드’가 3년 만에 돌아온다. 1979년 초연된 후 토니 상, 드라마 데스크 상, 로렌스 올리비에 상 등 해외 유수의 시상식에서 상을 휩쓸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극은 19세기 영국을 배경으로 한다. 이발사 벤저민 바커가 15년간의 억울한 옥살이를 마친 후, 자신을 불행으로 몰아넣은 터핀 판사와 부조리한 세상을 향해 치밀한 복수를 펼치는 내용이다.
‘스위니토드’는 파격적이고 독특한 스토리와 넘버로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이번 시즌에는 강필석, 신성록, 이규형, 전미도, 김지현, 린아 등 국내 최정상 뮤지컬 배우가 출연한다. 그 어느 때보다 긴장감 넘치는 무대가 기대된다.
◇미저리
일정 12월 24일 ~ 2023년 2월 5일
장소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연출 황인뢰
출연 김상중, 서지석, 길해연, 이일화, 고인배, 김재만
연극 ‘미저리’는 미국 대표 작가 스티븐 킹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1990년 동명의 영화가 흥행해 국내에도 스토리가 잘 알려져 있다. 베스트셀러 작가 폴 셸던을 향한 열성 팬 애니 윌크스의 광적인 집착을 그린 스릴러다. 주인공 폴 셸던 역은 초연부터 출연한 김상중이 맡으며, 서지석이 새롭게 합류했다. 애니 윌크스 역에는 김상중과 초연부터 환상의 호흡을 펼친 길해연이 돌아오고, 이일화가 새롭게 나선다. 보안관 버스터는 초연부터 이 역을 맡은 베테랑 배우 고인배와 오랜만에 연극 무대에 서는 김재만이 연기한다.
◇물랑루즈!
일정 12월 20일 ~ 2023년 3월 5일
장소 블루스퀘어 신한카드홀
연출 알렉스 팀버스
출연 홍광호, 이충주, 아이비, 김지우, 손준호, 이창용, 최호중 등
브로드웨이 뮤지컬 ‘물랑루즈!’는 CJ ENM이 글로벌 공동 프로듀싱한 작품이다. 제74회 토니어워즈에서 최우수 작품상 포함 10개 부문에서 수상했다. 1890년대 프랑스 파리의 클럽 ‘물랑루즈’ 최고의 스타 사틴과 젊은 작곡가 크리스티안의 사랑 이야기를 그린다. 이번 공연은 아시아 초연으로 오리지널 창작진 및 제작진이 직접 참여한다. 165명의 작곡가와 31명의 퍼블리셔가 창작한 70곡 넘는 노래를 들을 수 있다. 홍광호, 아이비, 김지우, 손준호 등 유명한 뮤지컬 배우들도 대거 출연한다.
●Exhibition
◇바티망
일정 12월 28일까지 장소 노들섬 노들서가
건물 외벽에 사람이 매달려 있는 듯한 착각을 안겨주는 설치 예술 ‘바티망’(Ba^timent)이 국내에 착륙했다. ‘바티망’은 프랑스어로 ‘건물’을 뜻하며, 현대 미술계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아르헨티나 출신 작가 레안드로 에를리치(Leandro Erlich, 1973)의 대표작이다.
‘바티망’의 구조는 실제 건물 모양의 파사드(건축물의 주된 출입구가 있는 정면부)와 거울로 이뤄졌다. 이에 관람객이 작품에 올라서면 마치 건물 외벽에 매달린 듯한 모습이 거울에 반영된다. 더불어 관람객은 바티망 위에서 창의적인 포즈를 취하며 작품을 즐길 수 있고, 그 자체가 작품이 되는 예술적인 경험에 빠져든다. ‘바티망’은 2004년 프랑스 파리에서 공개된 이후 18년간 런던, 베를린, 도쿄, 상하이 등 전 세계 대도시를 투어하며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다. 특히 2017년 도쿄와 2019년 베이징에서 진행된 투어에는 하루 평균 4500명 이상 방문하며 화제를 모은 바 있다. 올해는 한·아르헨티나 수교 60주년을 기념해 한국을 찾았다. 이번 전시에서는 ‘바티망’뿐 아니라 ‘잃어버린 정원’(Lost Garden, 2009), ‘교실’(Classroom, 2017), ‘세계의 지하철’(Global Express, 2011). ‘비행기’(El Avio′n, 2011), ‘야간 비행’(Night Flight, 2015) 등 일상적 소재를 매개로 신선한 공감각적 경험을 선사하는 작가의 다양한 설치·영상·사진 작품들도 함께 만날 수 있다.
◇에바 알머슨, Andando
일정 12월 4일까지 장소 전쟁기념관
‘행복을 그리는 화가’로 불리는 스페인 출신 에바 알머슨(Eva Armisen)의 국내 세 번째 전시다. 3년 만에 내한한 에바 알머슨은 “한국은 항상 두 팔 벌려 따뜻하게 환영해주는 특별한 나라”라며 각별한 애정을 드러냈다. 전시의 테마인 ‘Andando’(안단도)는 스페인어로 ‘계속 걷다’라는 뜻으로, 전시는 에바 알머슨의 일생을 회고한다. △삶을 그리다 △가족 사전, 일상의 특별함 △사랑 △자가격리자들의 초상화 △광장 △애니메이션 △자연 △삶 △연약함과 강인함 △축하 △영감 등 총 11개 공간으로 구성됐다. 드로잉, 유화, 대형 조형물, 조각 등 150여 점이 전시됐으며, 최초로 공개된 다수의 최신작을 만날 수 있다.
●Book
◇이기거나 혹은 즐기거나(플뢰르 펠르랭·김영사)
“당신은 한국인이라고 느낍니까, 프랑스인이라고 느낍니까?” 이 질문은 2013년 한국을 찾은 프랑스 장관 플뢰르 펠르랭(Fleur Pellerin)이 들은 말이다. 당시 플뢰르 펠르랭의 답은 ‘프랑스인’이었다. 생후 6개월 때 프랑스로 입양된 지 40년 만에 한국 땅을 밟은 그였기에 어쩌면 당연한 답이었다.
플뢰르 펠르랭은 프랑수아 올랑드 정부에서 중소기업·혁신·디지털경제 특임장관으로 발탁된 후 통상·관광·재외교민 담당 국무장관, 문화·커뮤니케이션부 장관을 지내고 퇴임했다. 이후 2016년 파리에서 코렐리아캐피탈을 세운 그는 벤처 투자자로 변신, 유럽 스타트 업계의 큰손으로 활약하고 있다.
한국에서 최초 출간되는 그의 첫 에세이 ‘이기거나 혹은 즐기거나’는 그가 프랑스에 ‘도착’한 날부터 정치인과 사업가로서의 최근 활동까지 담았다. 동시에 2013년 자신을 마치 ‘딸처럼’ 환영했던 한국인에게 그때는 말하지 못했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삶의 궤적을 진솔하게 털어놓았다. 이미경 CJ그룹 부회장은 “성별, 배경, 경계를 이탈해 눈부신 성취를 이어가는 펠르랭의 서사는 소통과 공감으로 감동을 전달하는 강력한 힘이 있다”면서 ‘이기거나 혹은 즐기거나’를 추천했다.
◇조선의 대기자, 연암(강석훈·니케북스)
저자는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읽고 연암을 기자의 원조라고 생각했다. ‘열하일기’에는 조선의 정치와 학문 풍토, 선비 사회의 문제점에 대한 직설적 비판과 질타가 포함돼 있다. 연암의 기자 정신은 현재의 기자들에게도 본보기가 된다.
◇전 세계 최초로, 향기를 마신다(김용식·모아북스)
‘마시는 향기’란 천연 재료에서 나온 천연 향기를 포집한 것으로, 우리 몸에 바르거나 마실 수 있는 물질이다. 한의학 박사인 저자는 상세한 연구 자료와 데이터를 바탕으로 ‘마시는 향기’가 건강을 유지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철학자 마을에 저녁이 내리는 소리(한창수·페이퍼로드)
소년 모모의 친근한 이웃들은 사실 인류의 문화를 풍요롭게 만든 위대한 철학자들이다. 모모는 일상 속에서 이웃들에게 인생과 세계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그들의 대화를 따라가다 보면 어렵게만 느꼈던 철학 사상을 쉽게 이해하게 된다.
●Stage
◇브로드웨이 42번가
일정 11월 5일 ~ 2023년 1월 15일
장소 예술의전당 CJ 토월극장
연출 오루피나
출연 송일국, 이종혁, 정영주, 배해선, 신영숙, 전수경, 홍지민, 오소연, 유낙원, 김동호 등
브로드웨이 쇼 뮤지컬의 대명사로 불리는 ‘브로드웨이 42번가’는 1930년대 뉴욕을 배경으로 뮤지컬 배우 지망생 페기와 연출가 줄리안, 한물간 프리마돈나 도로시를 둘러싼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국내에서는 1996년 한국 최초 정식 라이선스 뮤지컬로 무대에 올랐다.
이번 시즌은 한국 초연 26주년을 기념한 공연으로 화려한 캐스팅 라인업을 자랑한다. 브로드웨이 최고 연출가 줄리안 마쉬 역은 2016년 ‘브로드웨이 42번가’로 뮤지컬에 데뷔한 송일국, 다섯 시즌 연속 캐스팅된 이종혁이 연기한다. 한때 최고의 뮤지컬 스타였지만 지금은 그 명성을 잃어버린 프리마돈나 도로시 브록 역에는 정영주, 배해선이 캐스팅됐고 새로운 캐스트로 신영숙이 합류한다. 제작자 메기 존스 역은 ‘브로드웨이 42번가’ 초연 멤버이자 역대 최다 출연 타이틀을 기록하고 있는 전수경, 그리고 다방면에서 활동 중인 홍지민이 더블 캐스팅됐다.
◇드라큘라
일정 11월 15일 ~ 2023년 1월 15일
장소 서울 올림픽공원 우리금융아트홀
연출 노우성
출연 신성우, 안재욱, 정동하, 테이, 김진환, 유승우, 이병찬, 종형, 김법래, 이건명 등
3년 만에 돌아오는 ‘드라큘라’는 1995년 체코 프라하에서 초연된 이후 전 세계에서 5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유럽 뮤지컬의 대표작이다. 1998년 국내에서 초연된 이후, 드라큘라의 매혹적인 스토리에 몰입감을 높이는 무대 연출로 관객과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이번 ‘드라큘라’에서는 신성우, 안재욱, 정동하, 테이가 드라큘라 역을 맡아 무대에 오른다. 특히 초연부터 지금까지 드라큘라 역을 연기한 신성우는 관록의 카리스마를 보여줄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또한 아이콘 김진환, ‘슈퍼스타K’ 출신 유승우, ‘내일은 국민가수’ 이병찬, DMZ의 종형 등도 출연하며 화려한 라인업을 자랑한다.
◇에쿠우스
일정 11월 8일 ~ 2023년 1월 29일
장소 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
연출 이한승
출연 장두이, 최종환, 한윤춘, 김시유, 강은일, 백동현 등
1975년 국내 초연 이후 매 공연 센세이션을 일으킨 연극 ‘에쿠우스’가 3년 만에 관객과 만난다. 올해는 극단 실험극장의 창단 62주년을 기념하는 무대로 장두이, 최종환, 한윤춘, 김시유, 강은일, 백동현 등 공연계 중견 배우부터 신예 배우까지 색다른 조합의 라인업을 자랑한다.
에쿠우스(Equus)는 라틴어로 말(馬)을 뜻한다. 말 여섯 마리의 눈을 쇠꼬챙이로 찌른 소년 알런 스트랑과 그의 정신과 의사 마틴 다이사를 통해 인간의 원초적 욕망과 정상·비정상의 경계에 대한 근원적 고찰을 담아낸다.
본 기사에 소개된 공연을 관람하신 독자분의 생생한 후기를 기다립니다. 채택된 분께는 소정의 상품과 브라보 마이 라이프 잡지를 보내드립니다. shjlife@etoday.co.kr
경기도미술관은 매력적인 요소를 두루 갖췄다. 자유롭게 개방된 화랑유원지 내부에 위치해 우선 접근이 용이하다. 자작나무 군락 등으로 조경한 공원과 호수가 있어 전원의 맛을 풍기기도 한다. 웅장한 건축물 안팎에 구현한 디테일도 볼거리다. 경기도를 대표하는 미술관으로서 옹골진 게 많은 셈이다. 그러나 코로나 팬데믹으로 난항을 겪었다. ‘마스크프리 세상’이 머잖은 요즘은 상황이 밝아졌다. 강민지 큐레이터에 따르면, 최근 관람객이 눈에 띄게 늘었다고.
“그동안 어떻게 살았나 싶게, 흔히들 해방감을 느끼며 사적 활동을 늘리는 추세와 함께 미술관 방문자 수도 늘고 있다. 하지만 미술관을 애호하는 사람은 여전히 소수에 불과하다. 미술관이 있는 화랑유원지엔 새벽부터 밤까지 운동과 산책을 하는 시민들이 실로 많다. 하지만 정작 미술관에 입장하는 사람은 적다. 미술관 안과 밖의 온도차가 여실하다. 숙고할 대목이다.”
대중은 문턱 낮고, 즐겁고 편안하게 쉴 수 있는 미술관을 원하는데.
“더 친근하고 더 재미있는 미술관을 만들기 위한 콘텐츠 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전시회의 품질 향상은 물론 관객 참여 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개발한다. 이를테면 우리는 얼마 전 경기관광공사와 함께 미술관 앞마당에서 버스킹을 펼쳤다. 휴게 공간 강화도 필수다. 이제 미술관은 복합 휴식 공간으로 가야 한다.”
당신은 젊은 큐레이터다. 요즘 청년층이 미술관을 향유하는 경향은 어떻다고 보나?
“작품 감상보다 사진 찍기를 즐기는 것 같다. 그러나 문화와 역사를 알고, 풍류를 즐길 줄 아는 디지털 네이티브(Digital Native)도 많다. 예술에 호기심을 가진 이도 많다. 이들을 만족시킬 문화공간이 지방 곳곳에 산재하는 현상도 고무적이다. 상당히 긍정적인 징후가 읽힌다.”
전시실을 주로 2층에 배치했다. 반면 너른 1층 공간엔 작은 전시실 하나뿐이라 다소 썰렁하다.
“간척지에 조성한 미술관이라 습기를 면밀하게 고려해야 했다. 전시 작품이 높은 습도에 훼손될 우려가 있어 주 전시장들을 2층으로 올린 것이다. 수장고를 지하층이 아닌 1층에 마련한 이유 역시 습기를 배제하기 위해서였다. 약간 허전한 느낌을 주는 건 맞다. 그래서 1층 로비 바닥에 전시 작품을 깔기도 한다.”
기획전 기간을 길게 잡았더라. 가령 현재 진행 중인 ‘소장품으로 움직이기’전의 전시 기간은 자그마치 1년이나 된다. 안일한 방식은 아닐까?
“한두 달 전시를 하고 작품을 철거하는 방식엔 문제가 많다는 인식이 국내외에서 확산되고 있다. 단기간 전시에 따른 폐기물 발생, 인력 낭비, 비용 등에 문제적 시각을 갖게 된 것이다. 가급적 최대한 소모를 아끼자, 미술관끼리 소장품을 공유하자, 탄소 배출을 줄이자는 게 요즘 미술관들의 고민이며, 전시 기간 확대는 그 실천 대안의 하나다.”
큐레이터는 ‘미술관의 꽃’으로 불린다.
“개인적으로 말하자면 재미있는 직업이다. 전시회 소개 글을 통해 나름의 생각과 메시지를 타인에게 전할 수 있어서다. 하지만 일이 너무 많다. 글을 쓰다가도 중단하고 벽에 못을 박으러 달려가야 하는 식으로.(웃음)”
요새 큐레이터가 좋아하는 화가는 누구냐고 묻자, 독일 작가 팀 아이텔을 꼽는다. 에드워드 호퍼를 연상시키는 그의 등 돌린 인물 그림이 야기하는 울림이 깊어서라고.
해방 이후 오늘날까지 70여 년간 서울은 비약적인 경제 성장을 이루며 빠르게 도시화했다. 끊임없이 서울로 사람들이 몰려들자 서울은 주택 부족에 시달렸다. 주택난 해결을 위해, 또 더 쾌적한 주거 환경 조성을 위해 도시의 모습과 집은 바뀌어 갔다. 그 속에서 살아가는 서울 시민들의 생활 모습 역시 달라져 갔다.
서울역사박물관(관장 김용석)은 해방 이후부터 오늘날까지 서울에 지어졌던 다양한 집의 형태, 서울시민의 생활 변화를 들여다보는 전시 ‘서울살이와 집’을 마련했다. 오는 11월 4일(금)부터 내년 4월 2일(일)까지 서울생활사박물관 4층 기획전시실에서 개최된다.
이번 전시는 2021년 서울생활사조사연구 ‘서울시민의 주생활’의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기획됐다. 1부 ‘서울, 서울사람, 서울집’, 2부 ‘서울사람들은 어떤 집에서 어떻게 살아왔을까’, 3부 ‘서울사람들이 살고 싶은 집’ 등의 주제로 구성됐다.
1부 ‘서울, 서울사람, 서울집’에서는 서울 시역의 확장, 서울로 집중되는 인구로 복잡해진 서울의 모습과 부족해진 집을 짓기 위한 다양한 정책들, 생활의 변화를 야기한 제도와 가구 및 가전의 등장을 연표와 정보 그림(인포그래픽)을 통해 소개하고 있다.
2부 ‘서울사람들은 어떤 집에서 어떻게 살아왔을까’에서는 서울의 다양한 집들 중 대표적인 도시형 한옥, 재건주택, 2층 슬라브양옥, 아파트라는 4종류의 집을 소개했다. 각 집의 안과 밖의 모습, 그 안에서 살아가는 서울시민의 삶을 영화와 미술작품, 실제 크기로 재현된 연출 공간으로 체험할 수 있게 구성했다.
2부에서 활용한 영화는 박종호 감독의 ‘골목 안 풍경’(1962)로, 성북동의 어느 도시형 한옥과 그 안에서 이뤄지는 생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안암동 재건주택의 모습은 당시의 평면도를 바탕으로 실제 크기로 재현‧연출한 공간을 체험케 한다. 한형모 감독의 ‘돼지꿈’(1961)이라는 영화를 통해 비슷한 후생주택 생활의 모습을 들여다본다. 이후 1970년대에 많이 지어졌던 2층 슬라브양옥을 소개하는 곳에서는 안민정 작가의 ‘우리 집 세부도’(2015)라는 작품을 통해 그 시절 셋방살이의 모습을 느껴볼 수 있다.
또한 전시는 1970년대 중후반에 준공된 13평의 잠실시영아파트가 실제 크기로 구현돼 당시 공간을 재현 및 연출했다. 당시 잠실시영아파트에 살았던 서울시민의 이야기를 인터뷰 영상과 사진으로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3부 ‘서울사람들이 살고 싶은 집’에서는 기본적인 삶의 욕구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집을 원하던 사람들이 점차 집 자체의 재화적 가치에 집중하게 된 모습들을 광고 키워드의 변화로 살펴본다. 또한 코로나19 이후, 집 안에서 일어나는 생활상의 변화가 우리가 살고 싶어하는 집의 모습까지 바꾸고 있다는 점을 설문조사의 결과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김용석 서울역사박물관장은 “1950년대 말 그리고 1970년대 말의 어느 평범한 서울사람의 집이 재현된 공간에서, 그때 그 시절 방의 크기와 집 안의 모습을 통해 당시의 삶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라며 “가족들과 함께 조부모, 부모가 살았던 옛 집을 회상하며 시간 여행을 다녀오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전시는 무료로 관람할 수 있으며, 관람 시간은 평일 및 주말 모두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이다. 공휴일을 제외한 월요일은 휴관이다. 자세한 정보는 서울생활사박물관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hibition
◇비비안 마이어(VIVIAN MAIER) 사진전
일정 8월 4일 ~ 11월 13일 장소 그라운드시소 성수
사후 전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떨친 미국 뉴욕 출신 사진가 비비안 마이어(1926~2009)의 사진전이다. 지난해 9월 시작한 유럽 투어 이후 첫 아시아 투어다.
비비안 마이어가 직접 인화한 빈티지 작품과 미공개작을 포함한 사진 270여 점과 생전 사용했던 롤라이플렉스, 라이카 카메라 등을 볼 수 있다. 특히 마이어가 1959년 필리핀·홍콩·태국·말레이시아·싱가포르·인도 등을 여행하며 촬영한 사진들이 최초로 공개됐다.
비비안 마이어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며 여러 가정에서 보모로 일했다. 하루에 필름 한 통씩 50년간 많은 양의 작품을 남겼으나, 생전에 그녀의 사진이 공개된 적은 없었다. 마이어는 영화감독 존 말루프 덕분에 세상에 알려졌다. 말루프는 2007년 마이어의 사진 필름 뭉텅이를 경매장에서 헐값에 사들인 후 2년간 방치하다 사진 일부를 자신의 SNS에 올렸다. 네티즌은 그녀의 사진에 열광했다. 이후 마이어는 전시회·사진집을 통해 명성을 쌓았으며, 그녀의 이야기를 다룬 책과 영화가 나왔다. 마이어의 이야기는 영화 ‘캐롤’에 영감을 주기도 했다.
늘 카메라를 들고 다니면서 틈날 때마다 셔터를 누른 마이어는 ‘거리의 사진가’로 불린다. 그녀의 사진에는 위트, 사랑, 빈곤, 우울, 죽음의 이미지가 섞여 있고, 거리에서 만난 수많은 인물들의 다양한 표정이 살아 있다. 마이어는 ‘셀피(Selfie)의 원조’라는 별칭도 갖고 있다. 거리의 쇼윈도나 유리,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자주 찍었기 때문이다.
◇이승조 개인전 ‘LEE SEUNG JIO’
일정 9월 1일 ~ 10월 30일 장소 국제갤러리
‘파이프 화가’로 불리는 이승조(1941~1990)의 개인전이다. 국제갤러리에서는 한국의 기하학적 추상회화를 선도한 작가의 주요 작품 30여 점을 소개하며 그만의 굳건한 시각언어를 새롭게 조망한다.
1941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난 이승조는 가족과 함께 남하했고, 홍익대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그의 가장 대표적인 모티브는 ‘파이프’ 형상이다. 캔버스에 단순한 형태와 색조 변이로 시각적 일루전(환영)을 만들어내는데, 파이프가 연상된다. 작가의 회화는 현대 문명을 상징하는 동시에 평면성과 입체성, 추상과 구상을 넘나든다.
●Book
◇슬픔이 택배로 왔다(정호승·창비)
“50년 동안이나 이 험난한 세월을 시를 쓰면서 살아올 수 있었다는 사실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서정시인 정호승의 신작 시집 ‘슬픔이 택배로 왔다’가 출간됐다. ‘당신을 찾아서’ 이후 2년 만에 선보이는 열네 번째 시집으로, 올해 등단 5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라 더욱 뜻깊다.
이번 시집에는 ‘죽음’에 대한 정호승 시인의 사유가 유독 돋보인다. 시인은 죽음을 새로운 생명의 근원으로 생각한다. 시인은 시를 통해 “내가 땅에 떨어진다는 것은/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낙과(落果)’), “죽고 싶을 때가 가장 살고 싶을 때이므로/ 꽃이 질 때 나는 가장 아름답다”(‘매화불(梅花佛)’)라고 말한다.
또한 시인은 “사랑하기에는 너무 짧고/ 증오하기에는 너무 길다”(‘모닥불’)고 말하며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으로 ‘비움’을 제시한다. 시인은 “빈 의자는 비어 있기 때문에 의자”(‘빈 의자’)이고, “빈 물통은 물이 가득 차도 빈 물통”(‘빈 물통’)이며, “빈집은 빈집이므로 아름답다”(‘빈집’)라고 말한다. 담담한 어조로 적어 내려간 시인의 일화들 또한 감동적이다. 특히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는 눈물을 자아낸다. 임종을 지키지 못한 회한(‘어머니에 대한 후회’)과 나를 꾸짖을 어머니가 없다는 사실을 서럽게 깨닫는 장면(‘회초리꽃’)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스위스 안락사 현장에 다녀왔습니다(신아연·책과나무)
신아연 작가가 시한부 독자와 스위스까지 동행한 기록을 담은 철학 에세이다. 독자의 죽음을 배웅하고 돌아온 저자는 삶과 죽음에 대해 깊은 성찰의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안락사와 조력사 논쟁으로 뜨거운 우리 사회에 자신의 생각을 전한다.
◇지금 살아남은 승자의 이유(김영준·김영사)
신라면, 요플레, 에비앙 생수 등 일상에서 사랑받는 제품들은 치열한 경쟁의 생존자다. MBC 유튜브 채널의 인기 콘텐츠 ‘돈슐랭’의 진행자 김영준은 F&B 기업의 성공 사례를 통해 비즈니스 생태계에서 최상위 포식자가 되는 법을 밝힌다.
◇혼자서 종이우산을 쓰고 가다(에쿠니 가오리·소담출판사)
‘냉정과 열정 사이’의 저자 에쿠니 가오리의 신간 장편 소설이다. 섣달그믐 밤 노인 세 명은 함께 목숨을 끊는다. 이 죽음을 계기로 남겨진 자들의 일상도 새롭게 펼쳐진다. 특히 에쿠니 가오리 특유의 담담하고 섬세한 문체가 돋보인다.
●Stage
◇러브레터
일정 10월 6일 ~ 11월 13일
장소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연출 오경택
출연 오영수, 박정자, 배종옥, 장현성
‘러브레터’(LOVE LETTERS)는 두 주인공 멜리사와 앤디가 50여 년간 주고받은 편지를 읽는 독특한 형식의 작품이다. 특히 배우 오영수와 박정자, 배종옥과 장현성이 커플 호흡을 맞출 예정으로 기대를 모은다.
오영수와 박정자는 1971년 극단 자유에서 처음 만나 50년 이상 돈독한 우정을 이어온 연극계 동료다. 장현성과 배종옥은 꾸준히 연극무대를 병행해온 실력파 배우들로, ‘러브레터’를 통해 함께 무대에 서고 싶다는 소망을 이뤄냈다.
오영수와 장현성은 멜리사의 오랜 연인이자 친구이며 와스프(WAST, White Anglo-Saxon Protestant)라고 불리는 슈퍼 엘리트 ‘앤디’ 역을 맡아 연기한다. 박정자와 배종옥이 연기하는 ‘멜리사’는 적극적이고 솔직한 성격의 자유분방한 예술가다.
◇여신님이 보고 계셔
일정 11월 8일 ~ 2023년 2월 26일
장소 대학로 유니플렉스 1관
연출 박소영
출연 최호중, 김도빈, 성태준, 조성윤, 박정원, 김현진, 김리현, 김기택 등
뮤지컬 ‘여신님이 보고 계셔’가 10주년 기념 공연으로 관객을 찾는다. CJ 크리에이티브 마인드(Creative Minds)에 선정된 후 2013년 초연했다. 당시 객석점유율 95%를 기록하며 흥행에 성공했고, 같은 해 제19회 한국뮤지컬대상 극본상 등을 수상했다.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하며, 무인도에 표류된 남북한 병사들이 ‘여신님이 보고 계셔’ 작전을 펼치며 융화되어가는 이야기를 따뜻한 시선으로 그린 작품이다.
◇히스토리 보이즈
일정 10월 1일 ~ 11월 20일
장소 서울 두산아트센터 연강홀
연출 김태형
출연 오대석, 정상훈, 박은석, 김경수, 안재영, 이지현, 견민성 등
연극 ‘히스토리 보이즈’는 영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극작가 앨런 베넷의 대표작이다. 1980년대 영국 북부 지방의 한 공립 고등학교 대학입시 준비반 학생들과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국내에서는 2013년 초연 이후 꾸준히 무대에 오르고 있으며, 이번이 6번째 시즌 공연이다. 인생을 위한 공부를 추구하는 문학 교사 ‘헥터’ 역에는 2019년을 제외한 모든 시즌에서 열연한 오대석과 함께 정상훈이 새롭게 캐스팅됐다. 옥스퍼드 출신의 역사학 교사 ‘어원’ 역은 김경수·안재영과 재연부터 5시즌까지 ‘데이킨’ 역으로 참여했던 박은석이 출연한다.
마네의 인상주의나 피카소의 입체주의 그림을 처음 본 당대 사람들은 ‘예술이 아니다’, ‘낙서에 불과하다’라고 혹평했다. 시간이 흐른 뒤 대중은 그들을 ‘창시자’라 일컬었고, 작품들을 칭송하기에 이르렀다. 그렇듯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는 이들은 저마다 산통을 겪는다. 그리고 여기, 모바일 아트로 미술계에 한 획을 긋겠다는 남자가 있다. 국내 최초 모바일 아티스트 정병길(69) 씨다.
어떠한 창조적 본능이나 이끌림 같았다. 정병길 씨가 그림을 그린 까닭 말이다. 학창 시절 다른 숙제는 거들떠보지 않다가도 그림이나 공작(工作) 과제는 눈을 반짝이며 해냈다. 슥슥 휙휙 그렸다 하면 사생대회 1등은 떼놓은 당상. 뛰어난 실력에 담임선생님이 미대를 권유한 적도 있었다. 물론 뜻이 없진 않았지만, 당시엔 다른 꿈이 더 앞섰다. 우장춘 박사처럼 훌륭한 육종학자가 되어 농촌의 어려움을 타개하는 것. 그러나 이는 그야말로 꿈으로 끝나버렸다. 아버지의 지병으로 가세가 기운 탓이었다. 원하는 전공보다는 장학금을 주는 농협대학을 택했고, 곧장 밥벌이를 시작했다. 30여 년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화실까지 마련해가며 붓을 놓지 않았다. 그에게 그림이란 목표로 하는 꿈보다는 오래 지니고픈 로망이었기에 쉬이 접지 못했을 테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그도 여느 직장인처럼 인생 1막을 정리할 때가 다가왔다.
“농협 지점장까지 하다가 2010년에 은퇴했어요. 당시 금융업계에서는 그만두고도 2~3년 더 일할 자리를 마련해줬거든요. 앞으로 30~40년은 더 살 텐데, 당장 몇 년 가지고는 해결이 안 되겠더라고요. 눈 한번 질끈 감고 일자리를 사양했습니다. 프리랜서 작가로 그림을 그리고 글도 써볼 요량이었죠. 그런데 얼마 못 가서 이게 아니구나 싶더라고요. 저성장 양극화 시대에, 그것도 무명인이 문예활동으로 돈벌이를 할 수 있다고 여긴 게 큰 착오였죠.”
박수 받은 창직, 현실은 맨땅에 헤딩
정병길 씨는 그림뿐만 아니라 글재주도 남달랐다. 당초 그는 신문이나 잡지 등에 글을 투고해 원고료로 생활비를 충당할 계획이었다. 은퇴 후 1년 동안 칩거하며 쓴 글을 ‘내 아이 이웃과 함께 더 큰 세상으로’라는 책으로 내놓았다. 2년 뒤엔 두 번째 책 ‘이젠 아빠를 부탁해’를 펴냈다. 주변 반응은 나쁘지 않았지만, 업계에 큰 반향을 일으키진 못했다. 그나마 다행히 그림으로는 ‘상하이아트페어’, ‘대한민국미술대전’, ‘행주미술대전’ 등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고, 개인전도 열며 초석을 다져나갔다. 하지만 그 역시 취미를 넘어 직업으로 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돌파구가 필요했다.
“유명 작가가 아니니 결국 홍보 문제다 싶더군요. 신문 광고도 몇 번 냈는데, 비용이 많이 들었죠. SNS를 배워 직접 홍보하는 게 낫겠더라고요. 관련 강의를 듣다 만난 정은상 맥아더스쿨 교장이 모바일 미술 앱을 소개해줬습니다. 태블릿 PC에 떠듬떠듬 그려봤는데,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당시 강사에게 매주 새로운 그림을 그려 보여줬더니, 모바일 미술을 업(業)으로 삼아보면 어떻겠냐 하더라고요. 그게 창직의 신호탄이 된 셈이죠.”
‘모바일 미술’(아트)이란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PC 등의 모바일 기기에 내장된 그림 앱을 이용해 창작한 미술이나 예술을 말한다. 물감, 붓, 캔버스나 이젤 등이 필요 없고, 그 덕분에 별도로 화실을 마련하지 않아도 된다. 온라인이나 SNS상에 작품을 게시하거나, 출판물에 사용하기도 하고, 캔버스나 종이 등에 출력해 유화나 수채화처럼 전시할 수도 있다. 그런 모바일 미술이 정병길 씨에겐 꽤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내친김에 정보를 찾아보니 해외에서는 입소문을 탄 장르였지만, 한국에서는 거의 전무했다. “옳거니!” 창조적 본능이 되살아났고, 그렇게 개척자의 길이 눈앞에 펼쳐졌다.
“당시 모바일 미술을 가르치는 학원도, 선생님도 없었어요. 거의 독학으로 기법을 습득하고 펜업(삼성전자 그림 공유 서비스) 도움을 받았죠. 작품을 만들어 뭔가 할 수도 있지만, 일단은 이 분야를 알리는 쪽으로 초점을 맞췄어요. 시장이 커져야 한다고 생각했죠. 사람들의 반응을 보려고 SNS에 강좌 정보를 올렸더니 수요가 꽤 있더군요. ‘그러면 이 일을 직업으로 삼아도 되겠다’는 결론이 섰죠.”
그렇게 ‘모바일 아티스트’라는 직업을 탄생시켜 이를 개념화하고, 강좌와 전시를 통해 영역을 확장해나갔다. 시대가 발전하며 모바일 미술용 앱과 플랫폼이 더욱 다양해졌고, 관련 툴(Tool)이나 출력 기술이 정교해지며 이 분야는 상승세를 탔다. 혹자는 찰나의 아이디어가 운때 맞았다 여길지라도, 이는 나름의 안목을 갖고 꾸준히 노력했기에 얻은 선물과 같다. 그 성과로 미래창조과학부 주최 ‘시니어 IT 일자리 사례 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이라는 결실도 얻었다. 최근까지도 적지 않은 관심과 응원이 이어지고 있지만, 개척자의 길은 여전히 험난했다.
“맨땅에 헤딩하는 격이에요. 미술계는 기득권의 장벽이 높고 굳건하니까요. 그런데 과거 예술 분야 개척자들을 보면, 대부분 목숨 걸어가며 단초를 마련하잖아요. 저는 아직 모바일 미술 때문에 목숨까지 건 적은 없지만, 돈은 참 많이 까먹었습니다.(웃음) 노후에 도움 되려고 한 일인데 오히려 리스크가 될까봐 걱정할 때도 있었죠. 그런데 그 말이 와닿더라고요. ‘안전한 길은 위험하다.’ 아무것도 안 하면 안전하긴 해도 뭔가 즐거움이 없잖아요. 그거야말로 노후 리스크죠. 그래서 기왕 시작한 거 최대한 부딪혀보려 합니다.”
‘NFT, 줌’ 신기술과 만나는 모바일 아트
현재로서는 큰 수익을 기대하기보단 투자하며 판로를 개척하는 단계라 할 수 있다. 이는 단순히 개인적으로 돈을 벌고 못 벌고의 문제가 아니다. 장차 모바일 아티스트가 촉망받는 직업으로 나아가기 위한 중대 과제인 셈이다. 현재 작품을 판매하거나 저작권료로 얻는 소득은 높지 않다. 그보다는 학생이나 일반인을 대상으로 새로운 기술과 직업을 알리는 강의를 통한 수입이 주가 된다. 여타 예술처럼 경매에서 작품의 우수성을 평가받아 높은 금액이 책정된다면 가장 이상적인 구조일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아직은 생소한 분야인 데다, 작품의 고유성이 떨어진다는 인식 때문에 그 가치를 인정받기가 쉽지 않다. 가령 일반적인 경우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면 단 하나의 작품이 탄생하지만, 모바일 미술은 완성된 그림 파일을 종이나 다른 소재에 계속해서 찍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모바일 미술의 가치 평가는 어떤 기준으로 해야 할까?
“판화 역시 여러 장 찍어낼 수 있잖아요. 대신 한정된 수량을 제작하고, 찍는 순서대로 숫자 표기와 서명을 남기죠. 가령 판화 아래 1/10이라고 표기돼 있다면, 10개 찍은 작품 중 첫 번째 에디션이라는 뜻이에요. 그렇게 판화의 개념으로 가치를 판단하면 좋겠습니다. 또 실크스크린 판화는 판면의 구멍에 잉크를 넣어 찍는데, 이 기법으로 여러 작품을 만들 수 있죠. 같은 방법으로 모바일 미술은 완성된 작품이라도 툴을 이용해 색이나 요소를 수정하고 다양한 변화를 줄 수 있는데, 그 과정이 쉽다는 게 큰 장점입니다.”
그는 NFT(Non Fungible Token, 대체 불가능한 토큰)의 개념을 접목해도 좋다고 덧붙였다. 근래 디지털 수집품 거래가 활발해지며, 이러한 자산의 소유권을 증명하는 도구로 NFT가 사용되고 있다. 미술 시장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온라인 플랫폼을 활용하는 추세다. 모바일 미술 작품의 경우 파일 형태로 저장돼 NFT로의 변환이 용이하다. 정병길 씨 역시 이러한 장점을 살려 수익 창출 모델을 만들기 위해 신기술과 트렌드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그런 그가 최근에 집중한 아이템은 바로 ‘줌’(Zoom, 온라인 화상회의 플랫폼)이다. 주로 방과후교실이나 사회교육원 등에서 모바일 미술을 가르쳤는데, 코로나19로 모든 수업이 비대면으로 전환되며 줌을 활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민첩하게 태세 전환을 하고 기술을 익힌 그는 이제 줌에 관해서도 반전문가가 됐다. 최근 2년 사이 ‘줌을 알려줌’, ‘줌 활용을 알려줌’이라는 줌 활용서를 두 권이나 펴냈으니 말이다. 물론 줌 역시 모바일 미술과의 접점을 꾀하고 있는 그다.
“제 목적은 모바일 미술의 매력을 가능한 한 많은 사람에게 알리는 건데, 그동안 시공간의 제약이 많았거든요. 특히 섬이나 농어촌에 사시는 어르신처럼, 문화 수혜 격차를 겪는 지역민에게 줌으로 모바일 미술을 전파하려고 해요. 또 그런 분들도 모바일을 통해 미술 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줌 전시회도 활성화할 계획입니다. 꼭 전에 없던 무언가를 해야만 창의적인 건 아니에요. 이미 나와 있는 것들을 어떻게 융합하고 접목하느냐에 따라 창작과 창직이 가능하다고 봐요. 자신의 재능이나 관심 있는 분야를 신기술과 잘 연결 지으면 누구든 저처럼 새로운 직업을 만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꿈을 이루기에 너무 늦은 때란 없다
정병길 씨는 2020년 설립한 모바일아티스트협동조합을 통해 체계적으로 자신의 분야를 넓혀가고 있다. 전문인력 양성도 꾸준히 해나가고 있고, 장차 자격증 발급 절차 등도 논의해볼 방침이다. 그런 그가 모바일 아티스트로서 갖는 최종 목표는 분명했다. 바로 ‘모바일 아티스트가 가장 많은 나라 대한민국’을 이루는 것. 어쩌면 자칫 거대한 포부처럼 들리겠지만, 그는 결코 허황된 꿈이 아니라고 말한다.
“요즘 BTS(방탄소년단)를 비롯해 가수들의 한류 열풍이 대단하잖아요. 사실 우리나라처럼 동네마다 곳곳에 노래방이 즐비한 나라도 없을 거예요. 그렇게 일상에 스며든 예술이 결국 거대한 문화를 형성할 수 있었다고 봐요. 노래방에서 노래하듯 모바일을 통해 손쉽게 미술을 접한다면 언젠가는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흔히 말하는 우리 동네 가수처럼, 우리 모두 저마다 작은 예술가가 되는 거죠. 특히 나이가 들수록 가슴속 예술 감수성을 깨우고 자유롭게 표현해야 삶이 풍요로워져요. 많은 중장년이 모바일 아트에 관심을 갖고 함께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인터뷰 사진을 찍기 위해 엘리베이터로 이동하는 중에도 그의 손엔 태블릿 PC가 들려 있었다. 20초 남짓한 짤막한 순간에도 무언가를 스케치하기 위해서였다. 같은 시간을 무위(無爲)로 흘려보낸 기자가 이유를 묻자 그 또한 목표라 답한다. 어딜 가든 획 하나라도 긋고 오는 게 목표라고. 그 말을 들으니 수많은 획이 켜켜이 모여 언젠가 미술계에 큰 획을 긋게 될 정병길 씨의 모습이 더 선명히 그려졌다. 문제는 시간. 하지만 칠십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그는 조급함이 없었다. 무언가를 이루기에 아직 인생은 늦지 않았으니까.
“모지스 할머니로 잘 알려진 미국의 국민화가 애나 메리 로버트슨 모지스는 75세라는 늦은 나이에 처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그러곤 101세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내놓은 작품만 1600점이 넘는다고 해요. 그중 250점은 100세 이후에 그렸다고 하고요. 그분의 삶은 제게도 큰 영감과 희망을 줍니다. 제가 힘을 얻었던 모지스 할머니의 말을 독자분들께 공유하고 싶네요. 여러분, 인생에서 너무 늦은 때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