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석한 사실 하나 귀띔하고 그의 귀농 이야기를 시작해야겠다. 귀농 7년 차. 농사도 살림도 어언 자리 잡힐 만한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문기운(60) 씨는 아직 가시밭길을 걷고 있다. 자나 깨나 진땀을 흘리는 것 같다. 화살을 쏘았으나 여태 과녁에 도달하지 못했으니. 속사정을 모르는 남들은 일쑤 ‘귀농우수사례’로 치지만, 사실은 실패 사례에 가깝다는 게 아닌가.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사이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세월이 줄레줄레 길어진다면? 안간힘을 다했으나 자꾸 스텝이 꼬인다면? 기세가 꺾일 수 있다. 심장을 쿵쾅거리게 했던 초심의 열정이 얼어붙을 수 있다. 그러나 문기운 씨는 고난을 차라리 디딤돌 삼아 맥락을 잡아간다. 심술궂은 운명아, 넌 그래라, 난 내 길 간다! 그런 태세로. 고난과 정면으로 독대해 희망의 불씨를 지속하는 일. 인생의 요점을, 그는 그리 생각하는 것 같다.
시골에서 누리는 ‘인생 2막’. 도시생활의 중압과 불쾌로부터 벗어나 경치 좋은 산골에서 한가하게 노니는 일은 얼마나 평화로운가. 오전엔 운동 삼아 약간의 노동을 하고, 오후엔 책을 읽는다. 밤이면 두릿두릿 돋아나는 별들과 교신하며 영속하는 가치를 생각한다. 이런 삶, 그 무엇보다 이상적이지 않을까. 그러나 문기운 씨는 그런 식의 삶에 들뜬 적이 없다. 그는 사업에서 명퇴를 했다. 그러나 사업적 욕망까지 명퇴하진 않았다. 그는 산촌을, 농촌을 매력적인 사업장으로 판단했다. 농업 경영인으로 도약해 생의 후반을 흥미진진하게 돋우겠다는 야심. 그게 귀농을 선동했다.
“흔히 은퇴 이후엔 격렬한 삶과 멀어집니다. 편안하고 여유로운 휴식을 추구하는 것이죠. 저는 생각이 달랐어요. 은퇴를 계기로 또 하나의 격렬한 삶 속으로 뛰어드는 게 인생을 낭비하지 않는 길이라 봤지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직업을 잡아 나를 새롭게 확장하고 싶다는 욕구가 강했어요. 그 방편으로 귀농을 택한 건, 농사가 지닌 사업적 가망성을 높게 평가했기 때문입니다.”
직격탄 맞은 조경수 사업
그는 KT 출신이다. 줄곧 KT에 근속하다 자회사를 창업, 6년간 대표이사로 일한 뒤 퇴직했다. 마음은 일찌감치 산골로 먼저 이주해 그를 열렬히 호명했던 모양이다. 퇴직을 한 바로 그날, 잽싸게 짐을 싸 귀농을 했다는 게 아닌가. 이전에 미리 사두었던 이곳 홍천의 산골짝 터전으로 부리나케 달려왔던 것. 매봉산 자락 해발 780m 고지에 있는 터전의 규모는 조경수 농장 2만 평을 포함, 총 4만 평. 광활한 터이니 광폭의 행보를 예감하며 기꺼웠을 게다. 새 삶의 기획자인 자기 자신에게 진정 새로운 삶을 선사할 기회가 도래했다는 확신으로 설레었을 테고.
“사실 귀농은 오래된 계획이었어요. 도시보다 시골이 좋았고, 농사가 제 적성에 부합한다고 봤으니까. 일테면, 제가 흙냄새 좋아하고, 몸 쓰기를 좋아해요. 게다가 땅이 지닌 생산성에 호감을 느껴 나름대로 농업 연구도 해왔죠. 그러하니 지당한 귀농이었다는 거.”
“부인께선 찬동했고?”
“찬동까지는 아니었지만 반대하지도 않았어요. 부부이니까 당연히 따라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도시생활에 지친 남편을 조용히 응원하는 마음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녹록지 않은 시골생활에 닻을 내리기까진 시간이 걸렸어요. 이모저모 버거운 경험을 하며 아내가 한동안 마음고생 좀 했습니다.”
“농사의 사업적 가망성에 착안한 건 어떤 근거에 의해서였죠?”
“조경수 농업이 매우 유망하다 봤던 겁니다. 제가 농장을 사들인 10여 년 전엔 나무시장이 생동했어요. 남북경협이 기폭제였죠. 산림 황폐화가 심각한 북한으로 막대한 물량의 나무들이 보내졌으니까. 당시 국내 과실수 묘목의 40%가 북한으로 넘어갈 정도였지요. 그 매우 긍정적인 상황에 착안하고 나무 농장을 사들였던 겁니다.”
“천안함 사건의 여파로 2010년, 남북경협이 중단됐어요. 상황이 돌변했겠군요. 호재가 사라지고 악재가 덮쳤으니.”
“예상하지 못한 일이 순간에 벌어진 거죠. 직격탄을 맞았다 할까, 국내 조경사업 자체가 냉각되면서 사양길로 접어들더라고요. 게다가 이 사업이 원래 건축 경기하고도 맞물려 있는데 건축 바람마저 가라앉아 불황을 면치 못하고 있어요.”
시퍼런 꿈과 야심이 실린 그의 ‘무네미농장’엔 주목과 소나무를 주종으로 한 조경수들 1만5000그루가 자라고 있다. 농장 사위엔 초목들이 비밀 회합을 하는 숲의 연쇄. 가을이 붓을 들어 서서히 주황을 칠할 테지. 그러나 10월 초의 숲은 여전히 초록을 토하는 재미에 심취해 있다. 저 기고만장한 풍경의 기세!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삶이 환하게 밝아질 것만 같은 낙토(樂土)라 말 못할 게 없는 가경이다. 그러나 문기운 씨는 풍경에 별 관심 없다. 오나가나 경치를 즐겨 일상에 흥을 부여하는 취향의 소유자가 아니거니와, 한가하게 자연에 눈 돌릴 때가 아니라 보는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사업상의 활로를 찾아야만 하는 현실이지 아니한가.
“자연도 일상이 되면 무료해집니다. 제가 좋아하는 건 자연보다는 노동이지요. 기질이나 체질이 그래요. 물론 노동 자체가 목적일 리는 없죠. 수단일 뿐이니까. 사실 귀농 준비부터 소홀했던 것 같아요. 따라서 뜻대로 사업이 진척되지 않았지만 이게 다 성과가 발생하기 직전의 과정이거니, 그런 생각으로 최선을 다합니다.”
새로 태어난 ‘무네미농장’
그는 어쩌다 귀농한 사람이 아니다. 과거를 답습하지 않는 새로운 삶을 농사로 구현하겠다는 또렷한 목적을 가지고 이 후미진 산속에 들어왔다. 모든 기량과 경험과 뚝심을 쏟아 농업 경영인으로 부상하겠다는 신념을 스스로 훼손하지 않기 위해 젖 먹던 힘까지 다 쏟아 붓고 있다. 조경수로 쓴맛을 봤지만 쓴맛 안엔 보약이 들어 있는 법. 그는 혼선의 경험을 토대로 새로운 콘셉트를 고안했다. 다목적 관광농원으로 사업을 확장해나간 것. 현재 그의 농원에선 다양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갖가지 나물을 재배해 가공 판매를 하며, 수영장이 있는 2층짜리 게스트하우스를 지어 휴양객들을 불러들인다. 농사 체험, 별보기 체험, 계곡 트레킹, 잔디밭 웨딩, 동아리 워크숍 등등 각종 프로그램과 시설물들을 구비해뒀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난항을 겪고 있다는 것! 그간의 총 투자비용이 30억 원 이상이란다.
“투자금은 자체 조달했어요. 가지고 있던 부동산과 동산을 정리해 확보한 자산이었죠. 만약에 자산이 부족했다면, 부채를 얻어 썼다면, 이미 망가졌겠죠.”
“귀농지의 특산 작물을 재배하는 게 귀농 성공의 한 가지 비결이라고들 합니다. 이 지역은 고랭지 배추의 주산지로 고소득을 올리는 농가가 많다고 알려졌고요. 배추 농사엔 관심 없었을까?”
“고랭지 채소 농사로 고소득이 가능한 건 분명합니다. 이 마을 배추 농가들이 보통 연평균 1억 원쯤의 매출에 순소득 5000만 원 정도를 기록하더군요. 홍천군 전체 농가 평균 매출 500만 원에 비하면 압도적인 금액이죠. 저는 조경수 외엔 아예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설령 배추 농사에 뛰어들었다 해도 실패했을 수 있죠.”
“왜죠? 불굴의 투지. 당신에게선 그런 게 엿보이는데.”
“직장생활만 했던 사람이잖아요. 내 안엔 뛰어난 적응력이 있다, 그런 착각 속에 귀농을 했어요. 알고 보면 등신이라는 거.(웃음) 고랭지 채소 농부들, 이분들 참 대단합니다. 고도의 집중력, 냉철한 상인정신, 생활상의 모든 움직임이 이윤과 관련돼 돌아가더라고요.”
그도 한동안 농사에 주력했다. 조경수 사업의 부진을 보완하기 위해 엄나무, 마가목, 오미자 등 가장 일손이 적게 드는 작물들을 재배했다. 그러나 이 역시 헛수고. 소득이 되질 않더라는 거다. 무엇보다 유통 루트를 발굴하기가 어려웠다지. 그렇게 농사에서 다시 빙벽을 만났던 그는 이후 관광농원 조성에 전력투구, 근래에 근사한 복합 농원 구축을 완료했다. 그러나 수익구조는 여전히 불안하다. 해서, 지금도 몇몇 나물류를 재배해 가공 판매한다. 이런 그가 농업을 바라보는 눈은 지극히 신중하다. 농사란 냉혈의 세계라는 인식에서겠지.
“귀농하려는 분에게, 부디 충분한 준비를 통해 농사 물정과 실력을 비축한 뒤 본격 농사에 뛰어들라고 조언하고 싶어요. 거주 지역 특산물을 작목으로 선택하는 건 그나마 현명한 선택이라 말하고 싶고요. 유통망 개척의 수고를 덜 수 있고, 재배 기법을 공유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가장 좋은 건 농사를 아예 짓지 않는 겁니다. 어려운 점이 한둘이 아니니까. 특히 자연주의 농법은 100% 망합니다. 그 위험한 모험을 하겠다는 사람을 보면 저는 뜯어말려야겠죠.”
“이 농원은 아름다운 자연에 둘러싸인 데다 멋진 시설물들이 즐비해 호감을 자아내요. 그러나 시련은 여전한 거예요? 문제가 어디에 있죠?”
“홍보도 아직 미흡하지만, 상당히 외진 산기슭이라 가볍게 접근하기 어렵다고들 느끼는 것 같아요. 강원도 오지 특유의 구불구불한 언덕길이 길게 이어지니까. 그러나 낙관합니다. 특유의 농업 비즈니스 모델로 부상할 거라는 믿음을 갖고 있어요.”
그래도 시퍼런 꿈 안고 달려가겠다
출구를 찾지 못해 헤매는 갈망과 갈증. 사람은 다들 그런 걸 속에 두고 산다. 하지만 선한 믿음이 있는 한, 게임은 차라리 스릴 있게 계속된다.
“사업 성취를 위해 몰두하다 보면 마음의 여유를 놓치기 쉽죠. 스트레스 해소는 어떻게 하죠?”
“오락 삼아 기타를 치지만 사실 정서적 만족감을 가질 수 없다는 게 불만이에요. 자연 속에 살지만 자연과 가까워지진 않더라고요. 바람이 나무숲을 흔들 때나 계절이 바뀔 때 잠시 잠깐 자연의 존재를 느끼는 정도에 불과해요.”
“귀농했으나 도시를 향한 심한 향수에 젖어 사는 이들도 있더군요. 도시의 휘황한 야경이나 파도 같은 인파 속에 있을 때 오히려 안정감을 가질 수 있는 게 사람이라는 사회적 동물이죠.”
“도시의 흥청거림, 텁텁한 공기, 생맥주집에서의 대화, 익명성이 주는 편안함, 이런 것들이 그리워질 때가 있습니다. 도대체 사람이 살 만한 곳은 도시일까, 자연일까? 이는 단정 짓기 어려운 문제예요.”
적막한 자연에 때로 외로운 심사를 느끼는 모양이다. 오랜 로망이었던 귀농을 위해 가차없는 질주로 산골에 들어왔지만, 만사가 술술 풀리기는커녕 착오와 장애로 점철된 시간들. 쓸쓸한 감회를 피할 수 있으랴. 인간관계의 헐거움과 얕음에서도 그는 시골생활의 애환을 느낀다.
“깊은 산골에 살다 보니 도시와 접촉하기 어렵고 읍 소재지조차 멀어 불편이 많더라고요. 무엇보다 교류할 만한 사람이 없다는 게 폐단이죠. 그저 마을 농부들과 농사 얘기를 나누는 정도니까. 의미 있는 소통에 관한 허기, 고립감, 공허감, 이런 게 달라붙는 겁니다.”
“다정한 벗 하나, 따뜻한 커피와 음악, 잘 익은 술 한 잔, 이런 게 곁에 있다면 안도할 만한 생활이겠죠. 특별한 이유 없는 행복감이 그런 것에서도 나오니까. 이건 너무 소박한가?”
“동호인들과 음악회도 열고, 저 나름대로 친선을 즐기는 면이 있긴 해요. 그러나 사실 여유시간이라는 게 없어요. 일이 워낙 많기도 하지만, 체질상 일을 안 하면 우울해지고 몸도 아프더라고요. 일종의 강박증도 있어요. 보람 있게 세상을 살아야 한다, 조금치의 시간 낭비도 없는 하루하루를 살아야 한다, 그런 거. 그렇게 살지 않으면 사업을 성공시킬 수 없다는 생각 하나에 집중하며 사는 겁니다. 너무 속물적인가요?(웃음)”
속물 플러스 미물. 인간 안에 그런 성분을 집어넣어 디자인한 조물주의 계략에 누가 삿대질할 수 있으랴.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사. 그러나 기어이 뜻을 이루려 발버둥치는 게 또한 인생사. 예외 없이 누구나 그렇듯, 그도 트랙 위에 선 경주마다. 앞으로 내달릴 수밖에 없는.
◇ 문기운 씨가 주는 귀농 Tip ◇
•경관만을 추구해 터를 구하지 마라. 나만의 왕국을 세울 듯이 외진 골짜기로 들어가 살다보면 외롭고 불편해진다. 그런 터는 농사에도 금물이다. 생산성이 낮은 비탈이기 십상이어서다. 약간 비싸더라도 반듯한 농지를 매입하자.
•강원도 고원지구로 귀농할 경우엔 고랭지 채소 농사가 유망하다. 제반 조건에 최적화된 작물이라 다른 농사보다 경제성이 높다. 그러나 투기성 다분한 재배 풍토를 유념해야 한다.
•허영과 허세에 찬 농사를 짓다가 파산하는 사례가 많다. 자신의 능력을 냉정하게 점검, 과욕 없는 규모를 설정하라. 천재지변이나 기상이변으로 흉작을 볼 수 있는 게 농사라는 인식도 철저해야 한다.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와 동대학원 졸업. 광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지리산 근처 산골이다. 높은 산봉우리들이 사방에 첩첩하다. 그렇지만 궁벽할 게 없다. 좌청룡 우백호로 어우러진 전면의 산세가 빼어나서다. 우람하면서도 부드럽다. 운무 한자락 눈썹처럼 걸려 그윽하다. 한유창(60) 씨가 이곳으로 귀촌한 건 산야초 때문이다. 지리산 권역에 자생하는 야생초에, 그는 깊은 신뢰를 품고 산다. 한때 그는 죽음과 맞닥뜨렸다. 말기 암 환자였으니까. 단 한 번 주어진 목숨. 그는 그 희귀하고도 소중한 걸 야생초로 살려냈다.
“이봐! 그대는 도적이야! 절이 들어설 자리를 훔친 게 아닌가!”
집터를 둘러본 해인사 노스님의 얘기가 그랬더란다. 명당을 선점했다는 뜻이다. 정작 한유창 씨는 굳이 명당을 찾은 바가 없었다. 풍수에 관심조차 없었던 것 같다. 정붙이면 그게 좋은 자리려니, 그뿐이었다. 그저 인근 부동산 중개업소를 통해 사들인 집터였다. 집이야 어떻든, 그는 겹겹이 늘어선 산야에 사는 자체로 귀촌의 목적을 이룬 걸로 친다. 지리산의 입김을 마시고 자라는 산야초들을 만날 수 있으니 말이다.
여기 남원시 인월면에 둥지를 튼 건 2015년. 그 이전엔 함양 산골에서 두 해를 살았다. 지리산 천왕봉 곁 산중턱에서였다. 산야에 삶을 두기로 작정하며 과욕은 이미 눌러놓았을 테지. 그래 그 첫 산중살림도 두루두루 원만했단다. 딱 하나, 겨울철 눈 내려 미끄러운 비탈길이 문제였다. 그래 이곳으로 옮겼다.
귀촌 이전엔 줄곧 서울에서 살았다. 뜻한 길로, 혹은 뜻밖의 길로 좌충우돌, 서울이라는 생존의 들판을 격렬하게 뛰었던 모양이다. 암 진단을 받은 건 마흔다섯 살 때였다지. 설마 중증이랴, 대수롭지 않은 복통이라 여기고 병원을 찾았다가 위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삶이란 예상보다 더 잔인한 것. 예고 없이 방문한 불행의 전령이 사람을 폭풍 속으로 내던진다.
“왜 이제야 왔냐, 이미 늦었다, 의사의 말이 그랬어요. 절망적인 진단이었죠. 이미 전이가 심해 수술도 의미 없다는 거예요. 남은 생존기간은 3개월 정도라며. 실감나지 않았어요. 마치 남의 일처럼. 병원을 나온 뒤에야 혼란이 엄습하더라고요. 이제 죽을 일만 남았구나, 죽기엔 너무 이르지 않은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나, 고통스러운 생각들이 밀려들었죠.”
죽음이 돌연 현관을 노크할 걸 예감이나 했겠는가. 보이는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로 떠나라는 이주 통고. 그 황당한 쓰나미를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의 고독이 극한에 달했겠지. 그러나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엔 생존본능이 있다. 어떻게든 살길을 찾게 마련이다. 살기 위해 해볼 건 다 해보는 게 본성이다. 그는 자연요법으로 자신의 몸을 구조하기로 했다.
“약초로 살길을 찾기로 했지요.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죽을 작정을 하고 산에 들어가 풀만 뜯어먹었더니 기적처럼 암이 사라졌다는 식의 소문들. 어떻게 그럴 수 있겠나 싶었지만, 절박한 상황에 몰리자 기대를 갖게 되더군요.”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잡게 마련이죠. 제 주변에도 병원에서 포기한 중병을 산골에 들어가 고친 사람들이 있어요. 야생초 섭취 외에 자연에서 얻은 마음의 안정도 효과적이었던 같아요.”
“한 줄기 희망, 거기에서 나오는 안간힘. 그마저 상실하면 이젠 죽음이겠죠. 산야초로 고칠 수도 있겠다는, 아니 반드시 좋은 끝을 보겠다는 신념을 품었어요.”
결국 산야초가 그를 살렸다. 약초 요법을 극진히 실천한 지 7개월 만에 암세포가 완전히 소멸했다는 병원 판정을 받은 게 아닌가. 의사가 두 손 든 말기 암을 기어이 물리쳤으니 놀랍다. 삶을 견딜 수 있는 건 이런 기적적 이변이 일어나기도 해서다.
몸소 거듭한 산야초 실험
뭐든 하나에 간절히 전념하면 통달한다. 아마추어에서 프로로 도약한다. 암이라는 사나운 놈을 밀쳐내느라 온갖 약초를 다루는 사이 그의 안목과 요령에 힘이 붙었다.
“‘동의보감’에 나오는 유명 약초만이 아니라 이름 없는 풀들조차 약리 작용을 합니다. 제가 실로 많은 무명초에게 신세를 졌어요. 자연스레 산야초의 고귀함에 외경을 갖게 되었고요. 그러면서 난치병으로 고생하는 환자들에게 이로울 약초를 찾아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어요.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도래했다! 속으로 그렇게 외치며.”
암을 완치한 그는 또 하나의 허준이 되겠다는 양 남모를 야심을 품고 약재 개발에 나섰던 것이다. 산야초의 치유력에 관한 확신. 그간의 공부와 체험을 살리면 충분히 독보적인 약재를 개발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 이 양자가 그를 추동했던 것 같다. 처음엔 고혈압, 당뇨, 탈모증 등에 탁월한 약초를 찾을 생각이었다. 그러다가 피부질환에 시달리는 환자들이 많다는 걸 알고 아토피를 정복할 산야초 발굴에 전념했다.
이후 결과물로 나온 게 ‘야초(野草)’다. ‘야초’를 사용해본 환자들은 열광한다. 치유 효과가 명백해서다. 중증 아토피에 시달리다 자살하는 환자마저 있다. 너무도 슬픈 질환이다. 그럼에도 특별한 약이 없다. 그 와중에 ‘야초’가 위력을 과시하며 등장한 것. 이 기발한 약재는 단숨에 얻어진 게 아니다. 자그마치 7년을 진력해 얻은 성과물이라는 게 아닌가. 그의 거처는 서울이었으나 산야초를 찾아 7년간 전국 오지 산야를 누볐던 거다. 실험에 실험을 거듭했고.
“피부질환의 고통은 일단 가려움증에서 옵니다. 가려움증을 잡아줄 풀부터 찾는 게 급선무였죠. 피부병에 좋다고 이미 알려진 산야초부터 갖가지 잡초까지, 하나하나 차례로 효험을 테스트했어요.”
“어떤 방식으로?”
“일테면, 제가 모기 소굴에 들어가 온몸을 모기에 뜯긴 뒤 채집한 산야초 즙을 발라보는 겁니다. 어느 풀이 가장 탁월한가, 그걸 찾아내기 위해 장기간 연속 실험을 해 드디어 한 가지 약초를 정립하게 되는 거죠. 그다음으로는 피부 염증을 해결할 풀을, 또 그다음엔 피부 재생에 뛰어난 풀을 찾았고요. 7년간의 이런 과정을 거쳐 다섯 가지 산야초를 최종 정선했어요. 그 다섯을 조합한 게 ‘야초’예요.”
“검증되지 않은 엉터리 약재를 파는 장사꾼이 수두룩해요. 당신의 ‘야초’도 의심을 사지 않았을까?”
“처음엔 코웃음들을 쳤어요. 이미 속아본 환자가 많으니까. 그러나 서서히 인정을 받게 되었지요. 무료로 ‘야초’를 공급받은 중증 환자들이 완치에 이르며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던 겁니다. 환자와 만나기 위해 현재 두 곳의 한의원 한의사들과 협업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치유 사례들은 투명하게 공개되고요.”
‘야초’를 개발하기까지 7년여 동안 그는 굶주렸다. 풀을 뜯어먹으며 배를 채웠단다. 생업이 없는 채로 미치광이처럼 야생초에 빠져 살았던 것. 이 우직하거나 용맹한 사내의 삶은 이제 완연히 변했다. ‘야초’의 성공이 물심양면의 안정을 가져온 거다. 산야를 연구실 삼아 심혈을 기울인 덕분이다. 그 집요한 노력의 결과물에 응분의 관심도 쇄도했다. 국내 유수의 모 제약사로부터 모종의 제안을 받았으며, 유럽이나 중국의 신약 기업들도 관심을 표명해왔다. 그러나 그는 거대 자본과 제휴할 생각이 없다. 언젠가는 악어 같은 자본력에 먹히기 십상이니까. 현재 강진군과 손잡고 대형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외국인 아토피 환자들을 유치할 세계적 수준의 아토피 치료 센터를 건립할 목적으로.
숙원은 아토피 치유센터 건립
한유창 씨의 집은 해발 470m 산기슭에 있다. 사람이 거주하기에 가장 이상적이라는 해발고도다. 모기가 없으며 열대야도 비켜간다. 그가 귀촌한 건 양질의 ‘야초’ 재료를 조달하고, 실험도 계속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암 재발을 예방하기 위한 요양 차원의 귀촌이기도 하니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도 있다. 일찍부터 자연 속에서 오순도순 살아가는 삶에 대한 선망이 웃자랐다는 게 아닌가. 정적인 성향의 아내 역시 산골을 동경했다지. 마침내 부부가 오순도순 살 수 있는 기반을 잡은 셈이다.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인상은 야무지지만 알고 보면 순진남인가? 그는 맹지를 속아 사는 식의 땅 사기를 세 번이나 당했다.
“군청에 가서 서류 몇 장 확인하면 속을 일이 없다는 걸 몰랐어요. 중개인 말만 믿었던 거죠. 이 집의 터 역시 문제가 많았어요. 묵혀둔 논을 산 건데, 집을 짓기 위해서는 복토 작업이 필요하더라고요. 엄청난 양의 흙을 사다 퍼붓고 성형 작업을 했지요. 땅값보다 훨씬 많은 자금이 들어갔어요.(웃음)”
너른 마당엔 뽐낸 게 없다. 울타리를 두르고 나무를 좀 심었을 뿐이다. 뒤뜰엔 연못을 파 잉어를 넣었다. 그러나 멋부린 태없이 농수용 웅덩이처럼 수수하다. 자연스레 뭐든 내버려두는 게 구미에 맞아서겠지. 그래도 집짓기엔 공을 들였다.
“단순하나 견고한 구조, 그게 좋아 노출 콘크리트 집을 지었습니다. 회색 외벽이 자연 경관을 해치지 않고 잘 어울릴 거라 봤고요. 설계부터 제 취향을 반영했지요. 계획한 건축 형태에 차질이 없도록 공사도 직영했어요.”
“산중의 외딴집이에요. 일부러 외진 곳을 찾았어요?”
“산야초와 동행하는 사람이니 산속에 살아야죠. 그 이유가 아니라도 외딴집의 장점이 많지요. 우선 원주민과의 갈등 소지가 적다는 게 이점입니다.”
“대부분의 귀촌인들이 원주민과의 관계 문제를 최대 이슈로 꼽죠.”
“불화를 야기하면 배겨날 수 없으니까요. 외딴집에 살 경우엔 주민 접촉 기회가 적어 홀가분한 편입니다. 물론 적당한 교류마저 회피할 일은 아니에요. 시골 사람들은 단순합니다. 쉽게 토라지기도 하지만 금방 정들 수도 있어요. 어쩌다 농사일을 잠깐만 거들어줘도 진심으로 고마워들 해요. 그 역시 귀촌생활의 재미로 삼아야죠.”
“자연을 벗삼아 재미와 평온을 맛보고 싶다는 것. 이는 귀촌인들이 공통으로 밝히는 귀촌 동기예요. 자연과의 만남을, 무심히 방치했던 자아를 돌볼 기회로 삼는 거죠. 삶의 본질적인 가치를 찾기도 하고요.”
“도시에서는 바쁜 일상에 쫓겨 자기변화를 꾀하기 어렵죠. 눈에 보이는 풍경들조차 늘 변화 없는 잿빛이고요. 그에 비해 귀촌생활은 신선합니다. 사계절 따라 확연하게 변모하는 자연이 긍정적 자극을 주니까요. 어딜 가거나 어딜 보거나 항상 변화하는 풍경들. 이런 환경에서 살다 보면 일상에 대한 만족도가 높아지죠. 그러면서 너그러워지고요.”
그는 성경 전체 필사를 세 번이나 했다. 좋은 삶에 대한 간절한 기구(祈求)를 담은 필사였겠지. 나긋하고 싹싹한 언사. 곧잘 번지는 미소. 사람을 대하는 그의 태도에 여유가 서려 있다. 서울에 살 땐 달랐다지.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면 때로 통제가 어려웠다. 술 체질이 아니라 들입다 마셔 풀 수도 없었다. 대신에 울화가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여과 없이 터뜨렸다. 그러나 암으로 고난을 경험한 데다 귀촌까지 한 뒤엔 변화가 왔다. 마음의 온도가 올라가면서, 세상과 사물을 바라보는 생각에도 따뜻한 기운이 채워졌다.
그는 아홉 마리의 개를 기른다. 두 마리는 데려온 유기견이다. 개가 많아 즐거움이 많지만 불편도 많다. 일테면 부부 여행조차 엄두내기 힘들다. 아내는 그게 억울하다. 제발 더 이상은 늘리지 마옵소서! 그렇게 자주 호소하는 것 같다. 아내의 환심을 사려면 오나가나 진돗개처럼 충성해야 한다. 하지만 개 문제에 관한 한 그는 양보할 생각이 거의 없다. 개 역시 사람과 하등 다를 바 없는 고귀한 생명체라는 인식에서다.
“원래 개를 무척 좋아했어요. 요즘은 애착이 더 커지는 것 같아요. 암 투병으로 생사 갈림길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느낄 겁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애틋함이 커지는 기분을. 제 경우엔 피부질환자들의 처절한 고통마저 일상으로 접하며 살지요. 연민의 감정이 커질 수밖에요. 과거엔 모든 걸 ‘나’ 중심으로 바라봤다면, 이젠 남을 중심에 둡니다.”
그의 숙원은 아토피 치유센터 건립을 차질 없이 진행하는 데에 있다. 머잖아 유기견들을 위한 대규모 치유 시설도 만들 계획이고.
◇ 한유창 씨가 주는 귀촌 Tip ◇
•맘에 드는 땅이라도, 자금력이 넘치더라도, 시세를 너무 상회하는 매물 구입을 자제하자. 두고두고 욕먹을 수 있어서다. 마을 땅값을 올려놓을 경우, 원주민들에게 피해가 돌아간다. 농부가 농지를 매입하고 싶어도 비싸져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집 지을 대지 크기는 300평 미만이 적당하다. 그 이상 되면 관리가 어렵다. 특히 풀이 문제다. 비 온 뒤에는 밀림처럼 풀밭이 우거진다.
•이왕 시골에 사는 김에 산야초에 관심을 가지라. 이름난 약초만을 찾을 거 없다. 그저 흔한 들풀들의 약성도 탁월하니까.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와 동대학원 졸업. 광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네덜란드-벨기에로 열흘간 여행 간다’고 하니 많은 사람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곳에서 그렇게 볼 게 많아?” 하면서. 결론부터 말하면, 미술 작품 순례만으로도 볼 것이 차고 넘쳐 시간이 부족할 정도다. 누가 여전히 같은 질문을 또 한다면 자신 있게 대답해줄 것이다. “네덜란드, 벨기에 미술관 어디까지 가봤니?”라고. 고흐, 렘브란트, 루벤스, 페르메이르, 마그리트 등 스탕달신드롬(뛰어난 예술작품을 접했을 때, 그 충격과 감흥으로 인해 일어나는 정신적·육체적 이상 반응)까진 아니어도 명작을 코앞에서 감상하면서 작가들의 삶의 편린도 함께 접할 수 있는 가슴 두근거리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대표 작가 Big3와 미술관을 소개한다.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17세기 네덜란드 황금기의 작품을 포함, 15~19세기 네덜란드 유명 화가 작품 5000점, 조각품 3000여 점이 연대별로 전시돼 있다. 반 고흐의 자화상, 얀 페르메이르의 ‘우유를 따르는 여인’, 17세기 네덜란드 상류층의 호화로운 생활상을 보여주는 가구 미니어처 ‘인형의 집’도 볼 만하다. ‘인형의 집’은 ‘집과 가구 모형을 실제와 똑같이 정교하게 만든 미니어처’다. 호화롭기 그지없는데 당대에는 서민 주택 한 채와 맞먹을 정도로 비싼 가격이었다고 한다.
렘브란트의 ‘야경’
뭐니 뭐니 해도 이 미술관의 대표작은 렘브란트의 ‘야경(夜警)’이다. 이곳에서 일부러 이 그림을 찾지 않아도 관람객이 제일 많이 모여 있는 곳을 따라가면 ‘야경’ 앞에 이른다.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2층 명예의 전당 전면에 떡하니 버티고 있다. 렘브란트의 인생처럼 팔자가 센 작품이다. 전시 중 황산 세례와 칼로 그어지는 등 두 차례 수난을 당했다. ‘야경’을 완성한 해에는 첫 번째 부인 사스키아와 사별을 했고, 이후 혼인빙자간음죄로 고소당하는 등 사회적 명성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파산 등 경제적 문제도 몰아닥친다. 또 고객들의 요구를 제대로 들어주지 않아 불만을 사면서 화가로서도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는 평이 있다.
‘렘브란트의 모든 것’
올해는 렘브란트 서거 350주년. 기념행사가 곳곳에서 열리고 있다. 6월까지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에서는 ‘렘브란트의 모든 것’ 전시회가, 7월부터 연말까지는 대표작 ‘야경’의 복원 과정을 보여주는 행사가 열린다. 우리가 갔을 때는 ‘렘브란트의 모든 것’ 전시회가 열리고 있어 22개의 작품, 60점의 드로잉, 300점의 판화를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었다. 렘브란트는 자화상도 40여 점 그렸는데 연대별로 주요 자화상을 한꺼번에 볼 수 있었던 게 큰 수확이었다. 자부심을 넘어 야망과 당당함을 보여주는 청년기 모습, 기름기와 욕망이 적당히 반죽된 중년기의 모습, 특히 쓸쓸한 눈빛을 한 노년기의 자화상에서는 ‘나 아직 살아 있어’ 하고 외치는 듯한 내면의 모습이 느껴졌다.
렘브란트 하우스
인간 렘브란트를 보다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는 곳. 성공의 상징이자 몰락의 원인이 된 호화저택이다. 암스테르담 중심가인 요덴브레이스트라트에 위치한다. 1639년부터 20년간 살면서 작업을 했던 지역이다. 그 시절의 살림, 미술 도구, 호사스런 수집품들(코뿔소 뼈 등)이 층별로 전시돼 있다. 예술가뿐만이 아니라 수집가, 사업가, 거장으로서의 면목도 감상할 수 있다.
반 고흐 미술관
본관 상설전시관과 신관 기획전시관 건물이 유리 현관으로 연결돼 있다. 유화 200여 점, 소묘 500여 점, 편지 700여 통과 함께 고흐가 수집한 우키요에(일본 판화)와 회화를 포함한 컬렉션이 전시돼 있다. 규모는 세계 최대. ‘꽃피는 아몬드 나무’, ‘감자 먹는 사람들’, ‘해바라기’, ‘자화상’, ‘노란 집’ 등 전시 작품들이 다 걸작이다. 이곳에서는 하이라이트 중심의 감상보다는 전시 동선을 따라 이동하면서 천천히 작품을 느끼는 게 좋다.
“열흘 내내 딱딱한 빵 조각을 유일한 음식으로 삼았지만, 이 그림 앞에 앉아 머물 수 있었기 때문에 인생의 10년은 행복할 것이다.”
고흐가 렘브란트의 작품 ‘유대인 신부’를 보고 외친 말이다.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옆 자신의 이름이 걸린 전용 미술관이 세계 명소가 된 것을 안다면 그는 무슨 말을 할까.
크뢸러 뮐러 미술관
고흐 미술관이 도심 속 미술관이라면, 이곳은 공원 속 미술관이다. 한적하기 때문에 여유롭게 감상을 즐길 수 있다. 뮐러의 부인 헬레나가 수집한 작품들을 기증받은 네덜란드 정부가 작품을 보관, 전시하기 위해 1938년 개관했다.
고흐의 유화 작품 90여 점, 드로잉 170점 등이 전시돼 있으며 규모는 세계에서 두 번째다. 이 미술관에서 가장 보고 싶었던 작품은 ‘밤의 카페테라스’.
“푸른 밤, 카페테라스의 커다란 가스등이 불을 밝히고 있어. 그 위로는 별이 빛나는 파란 하늘이 보여. 바로 이곳에서 밤을 그리는 것은 나를 매우 놀라게 하지. (중략) 특히 이 밤하늘에 별을 찍어 넣는 순간이 정말 즐거웠어.”
고흐가 프랑스 아를에 머무르던 시절, 이 작품을 그리며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이다.
밤하늘에 별을 하나씩 찍어가며 열정에 차 작업하는 고흐의 모습, 이 시절을 함께한 우체부 조제프 룰랭, 의사 가셰, 카페 마담 지누, 화가 고갱 등이 함께 어우러져 밤의 카페테라스에서 대화를 나누는 듯했다.
미술관이 위치한 호게 벨뤼베 공원은 네덜란드 최대 규모의 국립공원이다. 서울 여의도의 7배 면적인 70만 평 규모. 매표소에서 미술관까지는 2.4km나 되는데 자전거를 타고 가도 30여 분이나 걸린다. 매표소 입구에는 무료로 대여해주는 자전거가 진열돼 있다. 숲길의 나무와 반짝이는 나뭇잎 등이 고흐의 작품 ‘사이프러스 나무’의 풍경을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얀 페르메이르와 마우리츠호이스 미술관
마우리츠호이스라는 이름은 이 집의 첫 번째 소유주였던 요한 마우리츠에서 따왔다. ‘마우리츠의 집’이란 의미를 갖는다. 네덜란드의 16~17세기 작품 800여 점이 전시돼 있다. 렘브란트를 일약 유명 화가로 만들어준 ‘니콜라스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 파울루스 포테르의 ‘어린 황소’ 등이 하이라이트. 색깔이 다른 벽지로 전시장을 구분하고 창가엔 커튼도 달려 있어 얼핏 보면 가정집 같은 분위기다. 창 너머로는 호프페이베르 연못이 보인다. 백조들이 떼 지어 떠다니는 모습이 평화롭기 그지없다. 창가엔 의자도 있어 중간중간 쉴 수도 있다. 창밖의 호수 풍경, 전시장의 작품 중 어느 것부터 볼지는 관람객 마음에 달려 있다. 편안하고 폭 감겨오는 미술관을 고르라면 단연 이곳을 꼽고 싶다.
우리는 마우리츠호이스 미술관에 도착하자마자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보기 위해 직행했다.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에서 ‘우유를 따르는 여인’ 등의 작품을 감상했지만 이 작품과 비교할 수는 없었다. 원화를 보자마자 모두에게서 터져 나온 말은 “생각보다 작네?!”였다. 그림 크기는 44.5×39cm. 이러한 사이즈는 당시 네덜란드의 경제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7세기 네덜란드에서는 그림을 걸어놓지 않은 집이 없을 정도로 일반 시민의 미술품 수요가 컸다. 작품의 크기가 작은 이유는, 붙였다 떼었다 하기 편한 그림이 판매하기 쉬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이아몬드 링’ 베이커리와 페르메이르
페르메이르의 흔적은 헤이그 인근의 델프트 시에 많다. 그는 태어나고 자란 이 지역을 평생 벗어난 적이 없다고 한다. 그의 묘지도 이곳에 있다. 델프트 시에는 ‘다이아몬드 링’이라는 빵집이 있다. 1796년부터 운영해온 유서 깊은 점포다. 프랑스인 발타자르 드 몽코니가 일기에 기록해놓았다는, 빵집과 페르메이르의 인연 한 토막이 특별하게 들려온다. 몽코니가 명성을 듣고 페르메이르의 집을 방문했는데 작품이 한 점도 없었더란다. 근처 빵집 주인이 소장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가 보니 600길드를 주고 산 작품이 있었다. 또 페르메이르가 빚을 갚기 위해 담보로 제빵업자에게 그림을 줬다는 기록도 있다. 그 얘기를 듣고 ‘우유를 따르는 여인’을 보니 우유병 앞에 놓인 바구니 속 푸짐한 빵들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다이아몬드 링’에서 팔던 빵들과 닮아 있다. 시 광장 주변에서는 네덜란드의 전통 나막신 제작 과정을 보여준다. 델프트 거리에는 앤티크 숍이 많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에서 유명해진 푸른색 터번, 델프트 블루 타일, 클래식풍 스탠드에 이르기까지 제품이 다양하다. 심지어 한국 탈을 판매하는 곳도 있다.
◇ 오늘, 남편이 퇴직했습니다 (박경옥 저ㆍ나무옆의자)
대기업 임원으로 일했던 남편을 내조하며 25년간 전업주부로 살아온 저자의 인생2막을 그렸다. 그동안 은퇴자 입장에서 쓰인 책은 많았지만, 그런 남편을 맞이하는 아내의 입장을 대변하는 서적은 거의 볼 수 없었다. 이 책은 퇴직이 비단 당사자에게만 닥친 문제가 아닌 그를 둘러싼 아내, 자녀, 그리고 노부모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일이라는 점을 일깨운다. 때문에 저자는 가정을 위해 부부가 함께 경제 공동체로서 전심으로 노력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퇴직한 남편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법부터, 퇴직 이후 아내가 경제의 주체로 움직이는 법, 지혜롭게 살림을 줄여나가는 법 등 현실적인 솔루션을 내놓았다. 저자 부부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주변 퇴직 부부의 풍부한 사례를 덧붙이며 행복한 노후를 위한 실질적인 비법들을 제시한다. 책 말미에는 퇴직 후 재무상태와 자신을 깨닫고 돌아볼 수 있는 프로젝트표, 부부가 함께 쓰는 건강 점검표를 부록으로 제공한다.
◇ 루거 총을 든 할머니 (브누아 필리퐁 저ㆍ위즈덤하우스)
제2차 세계대전부터 현재까지, 자신을 성폭행하려던 군인과 가정폭력을 행사한 남편을 거침없이 총살한 102세 할머니의 자백을 그린 소설이다. 유머러스한 분위기 속 여성에 대한 억압과 횡포, 비하라는 주제를 날카롭게 드러낸다.
◇ 나는 내 나이가 참 좋다 (메리 마이퍼 저ㆍ티라미수 더북)
일흔이 된 임상심리학자가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여성의 노년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뤘다. 세월의 도도한 흐름 속 불가피하게 찾아오는 불행한 상황도 그동안의 연륜과 내적 성숙을 발휘하면 충분히 극복할 수 있으리라 조언한다.
◇ 전국 책방 여행기 (석류 저ㆍ동아시아)
서점에서 근무했던 저자는 일을 그만두고 전국 책방을 찾아 여행을 떠난다. 단순히 좋은 책방을 소개하는 가이드 역할에 그치지 않고 그곳에서 만난 책방지기의 일상과 진솔한 이야기를 인터뷰 형태로 보여준다.
◇ 잃었지만 잊지 않은 것들 (김선영 저ㆍ라이킷)
암 환자의 딸이었던 저자는 훗날 암을 치료하는 의사가 되어 어린 시절 떠나보낸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사유한다. 매일 누군가에게 시한부 삶을 선고하는 상황 속, 자신의 경험에 빗대어 어떻게 죽음을 인정하고 견뎌낼 것인지를 모색한다.
검단농협 오왕지점에 머물러 있으면 은행을 찾는 손님들 외에 기분 좋은 웃음을 머금은 채 2층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을 목격할 수 있다. 그들의 발길을 따라가면 빼어날 수(秀)에 많을 다(多), 집 원(院) 자가 새겨진 한자 팻말이 눈에 띈다. 여긴 대체 뭐하는 곳이지? 궁금증을 안은 채 철문을 여니 햇살에 부서지듯 와르르 환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어서 오세요, 수다원입니다.” 정체불명의 공간을 책임지는 나영자(66) 수다원 원장의 목소리가 낯선 이를 반긴다.
“이름을 짓는 데 신중했어요. 이 동네가 자연부락이 재개발되며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곳이라 원래 거주하던 사람들과 새로 유입된 사람들 사이 괴리감이 있거든요. 원래 거주하던 분들을 ‘토백이’, 새로 유입된 분들을 ‘아파트 사람들’이라 구분지어 부를 정도로 거리감이 확연했는데, 전 그게 참 안타깝더라고요. 다 한동네 사람들인데 서로 즐겁게 지낼 수 없을까 고민하던 차에 수다원이란 공간을 마련하게 된 거죠. 함께 모여 수다떨면서 융합하고, 정보도 교환하고, 감정을 나누면서 살아가는 공간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 이런 이름을 지었어요.”
나영자 원장이 수다원을 만들게 된 계기는 담백하고도 의미가 깊다. 이웃에 살면서도 어떤 사람들이 사는지 알려고 하지 않는 각박한 현대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는 ‘동네’의 가치를 실현하고 싶었던 것. 그렇기에 수다원의 활동은 거창하진 않아도 따스하고 잔정이 깊다. 바쁘게 살다 보면 잊고 지나치기 일쑤인 생일을 챙겨주고, 봄가을이면 그 옛날처럼 설렘을 안은 채 근교로 소풍을 떠나고, 때로는 곱디고운 꽃도 그려보고 사군자도 친다. 영화감상이나 네일아트, 도자기와 승마체험 등 한 달에 한 번씩 열리는 특강은 문화시설이 부족한 이 동네에서 큰 호응을 받는 프로그램. 새해를 맞으면 동네별로 재료를 준비해 큰 양푼 두어 개에 넣고 쓱쓱 비빈 비빔밥을 먹는 특별한 시무식을 열고, 연말이면 재능기부한 봉사자들에게 작은 선물을 증정하는 송년회를 열기도 한다.
단절된 동네의 융화를 위한 사랑방
한마디로 동네 사람들이 함께 모여 행복하게 융화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어떤 활동이든 제약이 없다. 재미난 건 나 원장이 ‘토백이’와 ‘아파트 사람들’ 중간에 위치한다는 것. 1980년대에 수다원 인근에 위치한 단봉초등학교에 재직한 적은 있지만 이 동네 아파트로 이사 온 것은 퇴직 직전이다. ‘토백이’ 중에는 재직 당시의 학부모들이 남아 있어 친근하고, 나 원장은 ‘아파트 사람들’에 속하기도 하니 중간자적 입장에서 이런 공간의 필요성을 가장 먼저 캐치할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가장 큰 목표는 남녀노소 다 같이 어울릴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드는 거예요. 가을부터는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꽃꽂이 강의를 열고, 젊은 엄마들의 기존 독서모임이 있는데 동화구연도 더할 생각이에요. 퇴직하신 어른들을 초빙해 초등학생들에게 천자문과 바둑, 장기 등을 가르칠 계획도 있고요. 중요한 건 실용성을 뛰어넘는 감정의 확산에 있어요. 시골 할머니들이 꽃꽂이 배운다고 플로리스트가 될 건 아니잖아요? 다만 꽃꽂이를 하고 그걸 집에서도 응용함으로써 평생 안 해본 경험을 하고, 그 경험과 감정을 가정에서도 공유한다는 게 중요한 거죠. 마찬가지로 아이들에게 천자문을 가르쳐 한자 몇 자 알게 하고, 바둑과 장기의 스킬을 늘려주는 게 아니라 그걸 매개체 삼아 인성 지도를 받게 해 사람 됨됨이가 되도록 하는 게 목적이에요.”
여성 회원이 많다 보니 남성들은 궁금해서 슬쩍 들렀다가도 쑥스러움에 발길을 돌리곤 한다. 수다원은 남성 회원 역시 두 팔 벌려 환영한다고.
수다원에 흔쾌히 공간을 빌려준 농협의 운영시간에 맞추다 보니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밖에 문을 열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초등학생들은 물론 더 많은 사람이 이곳을 이용할 수 있도록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 나영자 원장의 계획이다.
도서관도, 문화센터도 없는 문화 불모지에서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으로 다가가는 수다원은 2017년 5월 10일 개원 직후부터 빠르게 성장해왔다. 개원 당월에 봄소풍을 다녀온 이래 꾸준히 배우고 경험하는 프로그램이 많아졌고 최근에는 비영리단체로 등록까지 마쳤다. 그간 무료로 재능기부한 봉사자들이 단체 등록을 계기로 1365 자원봉사포털의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되어 기쁘다는 나 원장의 표정에서 뿌듯함이 여실히 묻어난다.
함께하며 행복을 추구하는 삶
공간을 만들고, 그 공간 안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프로그램을 꾸준히 기획하는 능력은 사실 쉽지 않다. 수다원을 이끄는 나영자 원장의 리더십은 그녀가 평생 쌓아온 시간에서 기인한다.
나 원장은 초등학교 교사가 되어 2015년 교감으로 퇴직할 때까지 오랜 시간 봉사활동을 하며 보냈다. 남편과는 주말마다 양로원에 가고, 세 자녀 또한 고아원으로 봉사를 보낸다. 모범공무원 선정, 신일스승상 선정, 녹조근정훈장 수여 같은 명예로운 수상은 봉사의 삶을 살면서 따라온 부상들. 퇴직하고 난 뒤에도 자신의 역량을 활용해 남을 돕는 삶을 살아왔다.
“정년 10년 전부터 퇴직 이후의 삶을 준비했던 것 같아요. 제가 아동미술을 전공한 데다 미술교사 동아리 활동도 했고 개인 작업을 거쳐 전시회도 몇 차례 하며 국전에도 입선한 경험이 있어서 그림을 가르치며 봉사하지 않을까 생각했죠. 그러다 이 동네 특유의 분위기에 안타까움을 느껴서 이런 공간을 만들게 된 거고요. 여기서도 다양한 미술활동 프로그램을 펼치고 있으니 더 외연이 넓어진 셈이네요.”
사람과 사람을 잇는 공간을 만드는 과정은 자연스럽게 행복 추구로 귀결된다. 그래서 의도치 않게 수다원은 치유의 공간이 되기도 한다. 수다원 회원 중에는 수십일 동안 집 안에 칩거해 있을 만큼 감정적으로 고립됐던 사람도 있고, 아픈 손자 때문에 홀로 마음앓이를 했던 사람도 있다. 전문가의 치료로도 꽤 긴 시간을 필요로 할 만큼 우울 증상이 깊었는데 수다원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사실 제가 상담사와 미술심리치료사 자격증도 있어요. 그런데 그분들에게 필요했던 사람은 자격증을 지닌 전문가보다는 눈을 맞추고 꾸준히 이야기를 들어주는 존재였다고 봐요. 요즘은 오전 9시 땡 하면 수다원 문을 열고 오실 만큼 열성적인 회원이 되셨죠. 그런데 그거 아세요? 사람들과의 교류 때문에 행복해지는 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퇴직하고 나서도 아침에 눈 뜨면 바로 이곳으로 오거든요. 사람들과 함께하니 외로울 일도 없고 하루하루가 행복해요.”
사비를 털어 수다원을 개원할 당시 ‘과연 사람들이 모일까?’ 했던 기우는 점점 사라졌다. 사람들이 행복해질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필요한 지원금을 확보하려 동분서주할 때도 초반에는 수다원의 존재를 몰라 애를 먹었지만 이제는 인근에서 모두 아는 단단한 존재가 되었다. 수다원이 위치한 인천 오류왕길동은 물론 검암지구, 멀리 김포에서도 수다원을 찾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다.
“진작 이런 곳을 알았으면 여기로 이사 올걸” 하며 아쉬워하는 사람이 많다는데, 그만큼 사람들 간 교류가 이뤄지는 공간이 적다는 방증이리라.
“이 공간의 장점 중 하나는 동네 사람들끼리 정보 교환이 활발하게 이루어진다는 거예요. 경험하고 배우는 것도 좋지만 한동네 사람들이 애들 데리고 가볼 만한 곳은 어디인지, 어느 곳에서 질 좋고 저렴한 물건을 살 수 있는지 실용적인 정보교환이 이뤄지니 건설적이죠. 이런 공간이 없었다고 생각해보세요. 마을회관에서 고스톱 치며 시간을 보내거나 몇몇이 몰려다니며 쇼핑이나 가십에 열중하게 되지 않겠어요?”
은퇴를 준비하는 이들에게 고하는 말
나영자 원장의 말에 따르면, 교직생활을 마치고 은퇴자의 삶을 사는 이들도 다른 은퇴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유형으로 나뉜다. 여러 명이 모여 등산이나 나들이 갔다가 술 한잔 걸치고 집에 들어가는, 흔히 남성들에게서 보이는 삶. 손자손녀들을 맡아 돌보거나 자식들 살림을 도와주는 삶. 이것저것 배우러 다니는 삶 등등. 그녀는 친정엄마가 아이를 맡아준 적도 있고, 자신이 직접 육아를 해보기도 했지만 길러보니 자식은 부모가 키울 때 더 보람차고 행복했다며, 자식들을 위해서라도 손자손녀를 돌보는 은퇴 후의 삶은 마다했다. 퇴직 후 남을 돕고 사는 삶을 살기로 했지만 수다원을 만들기 이전에도 서구역사문화연구회를 꾸려 회장을 맡는 등 봉사에 임하는 모습이 수동적이지 않다. 아니, 마치 개척자의 용기를 보는 것 같다.
“은퇴 후의 삶을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건 ‘내 것을 먼저 내어준다’는 마음가짐이에요. 봉사를 한다 해도, 퇴직 후 나만을 위해 준비된 자리가 기다리고 있지는 않아요. 돈이든, 시간이든, 열정이든 내 것을 먼저 내어놓는 것에 익숙해져야 해요. 저도 수다원을 만들었지만 수익이 난다거나 경제적인 이득을 보는 건 없어요. 감자철이면 감자를 한두 박스씩 사다가 쪄서 나누는 등 오히려 퍼다 나르는 게 많지요.(웃음)”
4년 전 퇴직해 성실히 은퇴자의 삶을 살아가는 만큼 나영자 원장의 조언은 디테일하다. 과거의 영화를 잊어야 하는 건 물론 앞으로 소속되어 살아갈 커뮤니티에 맞춰 말투와 행동거지, 옷차림도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가장 최악은 ‘내가 왕년에 이랬는데’ 하는 생각입니다. 학교에서 교장선생님이었다고 은퇴하고 나서도 교장선생님 대접받길 바라면 곤란하죠. 특히 전문직에 종사했던 분들이 은퇴 후 이사하거나 귀농귀촌한 동네에서 은연중 우월의식을 보이는 경우가 있어요. 거기다 초점을 맞춰, 편하게 말해도 될 이야기를 영어까지 섞어 말하면 고만고만한 동네에서 튀어 보일 수밖에 없죠. 손주들도 할머니가 자기들 수준에 맞춰 놀아줘야 좋아합니다. 은퇴 후에는 왕년의 허물을 벗어버리고 함께 살아갈 동지를 만들어야 해요. 누가 만들어주지 않는답니다.”
100세 시대인 만큼 예순여섯 살 나영자 원장은 아직 살아갈 날이 한참 남았다. 그녀가 꿈꾸는 성공한 삶, 더 많은 사람과 지혜와 사랑을 나누는 삶을 위해 내일도 나 원장은 더 많은 사람과 신명나게 수다를 떨고 웃을 예정이다. 나눌수록 행복하다는 믿음을 안고서.
69년 전통 ‘성일집’
옛 부산시청 뒷골목, 현존하는 곰장어 가게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성일집은 2대 주인장 최영순 씨와 그의 아들인 김성용 씨가 함께한다. 올해 68세인 최 씨는 여전히 하루 꼬박 4시간씩 곰장어 손질에 온 정성을 기울인다. 흔히 안주로 먹는 손가락 굵기의 곰장어를 생각하면 오산이다. 주먹으로 한껏 움켜쥐어야 할 정도로 두툼한 데다 길이로 치면 주인장의 팔보다 길쭉하다. 품질 좋은 국산 곰장어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주인장 역시 식재료만큼은 따라갈 곳이 없다며 자부심을 드러냈다.
“다른 집에서 곰장어를 먹던 손님들이 여기서 음식 나온 거 보면 놀라요. 대부분 가게는 저렴한 수입산이나 그보다 더 값이 떨어지는 냉동 곰장어를 쓰니까요. 수익만 보면 그편이 나을 수도 있죠. 그러나 이제는 돈보다 성일집의 전통과 내 명예를 위해 일하고 있어요. 이제 아들까지 이어가면 100년 역사인데, 그 정도 자신감은 물려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제는 돈을 좇지 않는다는 그녀이지만, 처음 시어머니에게 성일집을 물려받았을 때만 해도 생계가 녹록지 않았다. 6·25 전쟁 이후 어려운 살림에 8남매를 먹이기 위해 곰장어를 굽기 시작해 식당까지 차렸지만, 당시만 해도 그리 대중화된 음식은 아니었다. 그런 성일집을 일으켜 세운 데는 며느리 최영순 씨의 강인한 의지가 한몫했다.
“스무 살에 시집왔는데, 빚이 있어서 결혼식을 못 올렸어요. 시어머니께 ‘내가 열심히 일해서 10년 뒤에 식을 올리겠다’고 했죠. 정말 독하게 곰장어에 매진했어요. 덕분에 10년 만에 빚도 갚고 가게도 왕성해져서 결혼식도 올렸습니다. 곰장어로 자식들 잘 키우고 예쁜 손주들까지 봤으니 이만하면 성공한 인생이죠. 그뿐인가요. 이제는 남에게 안 빌리고, 내 것으로 남 줄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성일집의 자부심 또 하나. ‘화학조미료’를 넣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 23가지 한약재로 만든 육수가 양념의 감칠맛을 더한다. 이미 품질 좋은 곰장어에 한약재까지 고루 넣었으니, 그야말로 보양식이 따로 없다. 이만큼 정성을 다한 데에는 손주에 대한 사랑이 바탕이 됐다.
“곰장어가 영양가도 많고 고단백 식품이라 아이들 성장기에 참 좋거든요. 그런데 애들은 잘 안 먹더라고요. 손주에게 먹일 심산으로 최신 휴대폰을 사줄 테니 곰장어 20번만 먹자고 했죠. 그렇게 약속을 하고 어떻게 하면 더 건강하게 맛을 낼까 밤새 고민했어요. 한약재며 해초며 야채며 이것저것 넣어보다가 지금의 양념장이 완성됐습니다. 앞으로도 조미료는 넣지 않을 생각이에요. 아직 손주에게 네 번 더 먹여야 하고요.(웃음)”
부산1호선 남포역 10번 출구 도보 3분 거리
주소 부산시 중구 대교로 103
영업시간 매일 11:00~23:00
대표메뉴 곰장어 소금구이, 곰장어 양념구이
※본 기획 취재는 (사)한국잡지협회의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나이 들수록 향기 가득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들 한다. 그런데 그게 어찌 쉬운가. 늘 정갈한 모습이고 싶지만 아무 때나 흐르는 땀은 막을 수 없고 신경 써야 할 냄새도 많다. 내적 수양은 물론이고 건강도 챙기며 살아가는 아름다운 당신들에게 다소 짓궂은 질문을 던져봤다. 당신의 냄새,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도움말 콩세알튼튼 예방치과의원 이병진 원장
✽설문 대상: 50세 이상 시니어 110명(남자 51명, 여자 59명) 온·오프라인 조사
응답자 중 84.5%가 냄새에 대한 고민을 해본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반면 고민을 해본 적이 없다는 응답자는 15.5%로, 조사 대상자 10명 중 8명이 넘는 시니어가 냄새에 관한 고민을 해봤다고 답했다. 고민을 한다고 응답한 남녀 비율은 비슷했는데 여자가 좀 더 높게 나타났다.
어떤 냄새로 고민하냐는 질문에 51.8%가 입 냄새라고 답했다. 한 응답자는 “당뇨병으로 인해 입안이 말라서 침액에 부족할 때 가끔 입 냄새가 난다”며 구체적인 구취 원인도 알고 있었다. 시니어라면 남녀를 불문하고 고민하는 문제가 입 냄새였다. 그다음 고민은 땀 냄새였는데, 특히 6.4%의 응답자가 여름철 땀 때문에 나는 냄새를 걱정했다. 생리현상으로 발생하는 냄새는 14.5%로 3위에 올랐다. 발 냄새와 체취는 9.1%로 비율이 같았으며 나머지는 겨드랑이 냄새 6.4%, 머리 냄새 4.5% 순으로 응답했다. 기타 의견에는 악취와 락스 냄새 등 주변 환경에서 나는 냄새도 포함됐다.
응답자의 42.7%가 ‘남들에게 냄새 난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 있다’고 답했다. ‘누구에게 들었는가?’에 대한 질문에는 남자의 경우 과반수 이상(60%)이 ‘배우자’라고 답했고, 여자의 경우에는 ‘배우자’와 ‘자녀나 손주’라는 대답(각각 26.9%)이 가장 많았다. ‘동년배’라고 답한 비율은 남자 10%, 여자 15.4%로 남녀 간 큰 차이는 없었다. 반면 여자 응답자의 상당수가 대상으로 꼽은 ‘자녀나 손주’의 경우 남자 응답자는 한 명도 선택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극명한 차이를 보였다.
나이가 들면 입안에 충치나 잇몸질환이 많이 생기고 치료로 인한 보철물이나 틀니, 임플란트가 늘어나 음식물 찌꺼기나 세균막이 잘 제거되지 않아서 구취를 일으키곤 한다. 특히 고령자의 경우 침 분비가 줄어 입안이 마르게 되면 이러한 성분들이 농축되어 냄새가 더 심해진다. 입 냄새는 스스로 느끼기 힘들다. 자주 가까운 사람을 통해 확인해봐야 한다. -콩세알튼튼 예방치과의원 이병진 원장
남자의 경우 ‘자신에게서 나는 냄새’에 대해 ‘좋은 편’(14%)보다 ‘나쁜 편’(43.1%)이라고 대답한 응답자가 3배 이상 많았지만, 여자는 15%를 웃돌며 비등비등한 반응을 보였다. 아울러, 자신에게 나는 냄새가 ‘보통’이라고 판단하는 이는 남녀 모두 상당수를 차지했다.
전체 응답자가 꼽은 ‘체취의 원인’으로는 ‘청결문제’(40.9%)가 1순위였고, 건강문제(30.9%)와 노화(26.4%)가 뒤를 이었다. 물론 청결문제나 건강문제로도 좋지 않은 냄새가 나기도 하지만, 이러한 문제가 아니라면 시니어의 경우 ‘노화’가 원인일 수도 있겠다. 실제 40대 이후부터 체내에서 분비되는 ‘노넨알데하이드’(Nonenaldehyde)가 모공에 쌓이면서 노년기 체취가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자신에게서 나는 냄새를 어떻게 개선했는가’라는 물음에는 ‘잘 씻고 다닌다’(72.7%)라는 응답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앞서 ‘체취의 원인’에 대해 ‘청결문제’를 꼽은 이가 가장 많았던 것과 연관 지어볼 수 있겠다. 그밖에 향수를 뿌리거나(19.1%) 탈취 관련 제품이나 약품을 사용해(12.7%) 냄새를 개선해보려는 노력도 엿보였다. 개인적인 방법 외에 병원 치료를 받았다는(7.3%) 의견도 몇몇 있었다.
‘여름철 고민이 되는 냄새’에 대해 여자 응답자의 경우 ‘주방·화장실 등 집안 냄새’(29명), ‘음식물 냄새’(20명), ‘옷·침구 등 섬유냄새’(14명) 등 전반적으로 살림과 연관한 항목들을 꼽았다. 더불어 ‘땀 냄새’(25명)가 고민이 된다고 응답한 이가 상당수였는데, 남자 응답자의 경우도 19명이나 응답해 마찬가지로 고민이 적지 않음을 보여줬다.
나이 들면서 좋아진 냄새는 천연의 꽃 냄새가 54.5%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다. 이은정 심리상담사는 바쁘게 살던 시절을 지나 느리게 걸을 수 있는 시간을 살게 되면서 자연의 아름다움에 눈뜨게 됐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다음으로는 24.5%가 추억을 부르는 냄새를 꼽았다. 그 이유로 자신만의 기분 좋은 추억의 냄새가 있기 때문이라고 응답했다.
향기 나는 노년을 위한 노력으로는 67.3%가 ‘건강 챙기기’라고 응답했다. 그다음으로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가 45.5%를 차지했다. 이외 외형 관리와 행복한 삶을 위해 노력 한다고 응답한 비율이 각각 33.6%로 나와 육체와 정신 모두를 중요하게 생각함을 보여줬다.
별별 생각과 궁리를 다하고도 망설이게 되는 게 귀촌이나 귀농이다. 그러나 김석봉(62) 씨는 별생각 없이 시골엘 왔더란다. 무슨 성좌처럼 영롱한 오밤중의 현몽이 그를 이끈 건 아닐 것이다. 그는 매우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거니와, 자나 깨나 귀촌을 숙원으로 여긴 바가 없었으니 하필 후미진 산골로 데려가는 계시를 받았을 리 만무하다. 여하튼, 별 생각 없이 귀촌한 석봉 씨는 별 탈 없이 살아왔다. 별생각이 없었으니 별 볼일도 없었을 성싶지만, 사실은 별 볼일이 벌어졌다. 별별 일이 일어나며 삶이라는 숙제가 술술 풀려나갔다. 지금 석봉 씨는 별나게 즐겁게 산다.
“운명이라 해두죠! 하하하!”
귀촌 내력을 묻자 돌아오는 석봉 씨의 쾌활한 답이 그렇다. 운명이라는 게 인간에게 미리 주입돼 있다는 운명론을 단단히 믿어서 하는 말이 아닐 게다. 사람은 때로 참 알 수 없는 상황이나 추세를 운명에 빗대어 적당히 눙치곤 하지 않던가. 그러니까, 별생각 없이 우연찮게 ‘필’이 꽂혀, 또는 충동의 대리운전에 편승해 산골로 이주했다는 뜻으로 들으면 되겠지.
“어느 날, 친구 따라 지리산엘 놀러왔다가 빈집 하나를 보게 됐어요. 아, 마당에 들어서고 보니 너무도 좋더라고요. 2년째 비워둔 시골집이라 꼴이 말이 아니었으나 마음이 그지없이 편해지는 것이었어요. 마치 집이 저를 끌어들인 것 같은 기분이랄까. 그래서 운명적 만남인가보다, 그런 생각까지 했던 겁니다. 좋아, 이 집에서 살아보자! 그런 결심을 바로 하고 한 달 뒤 이사했습니다. 아내 역시 찬동했기에 걸릴 건 하나 없었어요.”
석봉 씨의 거처는 경남 함양군 마천면 산중턱에 있다. 집 앞으로 펼쳐지는 조망이 기차다. 지리산 최고봉인 천왕봉이 한눈에 쑤욱 들어온다. 거봉(巨峯)을 바라보노라면 뭔가 새삼 거한 꿈이나 참신한 결의가 부푸는 법. 그러나 석봉 씨는 일단 규격화된 도시, 각박한 일상에서 벗어났다는 그 자체로 이미 모든 꿈을 이룬 것과 같은 만족감을 느꼈던 것 모양이다. 귀촌을 계기로 이제 무엇을 새로 시작하겠다거나, 무엇을 하지 않겠다거나, 그런 생각조차 없었다지. 당장 집수리가 화급하기도 했다. 그는 이삿짐을 풀자마자 거처의 환경 보수에 나섰다.
사실 석봉 씨는 ‘환경’에 관한 한 선수다. 젊어 한때 교도관으로 근무했지만, 주로 환경운동가로 분주히 뛰어 중년기를 통과했다. 그의 오랜 거주지였던 진주시의 환경운동연합 상임의장을 맡는 등 열렬한 활보를 했다. 전국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로 지내기도 했다. 이런 그가 돌연 산골로 들어가 처음 한 일이 바로 낡고 헌 옛집의 환경 보수였다. 대대적인 개조가 아니었다. 쓸 만한 기본은 물론, 나무와 흙을 주재료로 지어진 산골집 특유의 소박하고 아담한 본색을 그대로 살린 단장이었다. 그 결과 이젠 시골에서도 흔히 보기 어려운 정갈한 재래식 가옥으로 변신했다. 그게 2007년의 일, 어언 12년이 흘렀다.
“하루아침에 느닷없는 이주를 하자 주변 사람들이 놀랐어요. 환경운동을 하던 사람이 별안간 지리산으로 사라졌다며, 별 쓸데없는 오해들을 하기도 했죠.(웃음) 저로서는 새로운 삶의 서막이었어요. 도시에서는 누리지 못한 자유로운 시간 속에서 감성이라는 걸 되찾을 계기였으니까. 환경운동, 그건 가치 있는 일이지만, 그 이면엔 부대끼고 시달릴 일이 많았습니다. 업무와 사람들에게 말이죠. 삭막한 감성, 그런 걸 느끼며 힘들었어요.”
“감성적인 일상이란 멋진 것이지만, 도시에서나 산골에서나 벌어야만 지속 가능한 생존 조건은 다르지 않겠죠. 생계엔 어떤 대책을 세우셨을까?”
“도시생활을 청산하자 4000만 원 정도가 총재산으로 남더라고. 그걸로 이 집을 샀어요. 은행 대출을 끼고서였죠. 한마디로 돈 없이 들어온 겁니다. 그런데도 걱정이 전혀 없었어요. 아이고, 돈은 물론 농사기술 없지, 무슨 자격증 하나 없지, 산골에서 뭘 해서 먹고사나, 어떻게 살아야 하나, 머리 싸매고 그런 걱정부터 했다면 여길 오지 못했을 겁니다.”
“좌우간 가서 부닥치고 보자! 그게 대책이었어요?”
“느낌이나 용기. 귀농귀촌엔 그런 게 가장 중요하다 생각해요. 그런 게 선행한다면 산골에서 무슨 일을 하든 굶지는 않을 테고요. 아내 역시 경제 문제로 불안해하지 않았어요. 제가 진주에서 환경운동을 하며 박봉으로 겨우 살았어요. 밤엔 아내와 함께 포장마차도 했습니다. 돈을 많이 벌기 위해 심하게 애쓰는 삶, 그건 별로 좋지 않다고 봅니다.”
인생에서 가장 평온한 시절 누려
석봉 씨는 세상과 담을 쌓고 지리산 고사리로 살려고 산에 들어온 게 아니다. 백수건달은 더구나 생리에 맞지 않다. 집을 고친 뒤 그는 슬슬 일을 찾았으니 이게 순행(順行)이다.
“현재 제가 1800평 규모의 밭농사를 하고 있습니다. 물론 제 땅은 아니고, 이웃들의 밭을 빌려 쓰죠. 초기엔 200평 정도를 빌려 농사를 지었어요. 농사로 거둔 생산물들로 한과나 김장김치를 만들어 팔기도 했지요. 농사 외 봄엔 산나물을, 여름엔 오디를, 가을엔 야생오미자를, 겨울엔 얼어붙은 채 나무에 매달린 모과를 따러 다니는 게 일이었고요. 그걸 또 가공해서 판매했고요.”
석봉 씨네 동네는 산촌 특유의 납작하고도 포근한 토담집들이 돌담길 따라 이어져 평화롭다. 초록 물감을 흩뿌리는 숲과 능선과 봉우리들이 마을을 휘감아 어디를 봐도 씽씽하다. 이 청명한 산촌에서 석봉 씨는 뜻밖에도 쓴맛을 경험했다. 마을 사업을 주도하다 도중하차한 것. 그는 원주민들의 동참 유도에 심혈을 기울였으나 한계에 봉착했던 것 같다.
“아쉽더라고요. 마을 공동사업이 차질 없이 진행됐더라면 참 자랑스러운 마을이 됐을 텐데 중도에 올 스톱됐으니…. 마을 사업 성사를 위해서는 때로 관과 맞붙어야 합니다. 그러나 연로하신 분 일색인 마을 주민들은 저항이라는 걸 모릅니다. 사업으로 마을 공동이익이 발생할 것을 알면서도 아예 자기 생각이나 주장 자체를 드러내질 않아요. 과거의 권력자였던 관리들을 아직도 두려워하는 거죠.”
“지리산 산간마을이라는 특성 때문이지 않을까요? 육이오를 처절하게 겪은 트라우마에서 기인하는 소극적 태도…. 빨치산 토벌대로 참전했던 저의 부친은 아직도 지리산 근처조차 가기를 싫어합니다.”
“바로 그겁니다. 낮엔 국방군이, 밤엔 빨치산이 마을을 쥐락펴락했던 세월을 살았으니 그 상처가 얼마나 깊을꼬. 손가락질 한 번에 죽고 사는 세상이었으니 말이죠. 충분히 이해할 만한 기질적 형성이라 봐요. 사실 주민들의 심성은 순박합니다. 작은 것이라도 남에게 신세를 지면 기어이 갚아요. 그게 그들의 오랜 삶의 관습이에요.”
구제받을 길 없는 중생마저 관음보살처럼 살뜰히 보살핀다는 지리산의 슬하라고 하지만, 삶은 이모저모 고역스러워 번뇌를 고이 털어버리긴 힘들 것이다. 그러나 석봉 씨에겐 시름이 없다. 그렇다는 건, 그렇게 보인다는 얘기다. 인생에서 가장 즐겁고 평온한 시절을 누린다는 게 아닌가. 상추씨처럼 흙에 살짝 묻혀 사는 그는, 가족과 함께 담백한 푸성귀 식사를 하는 즐거움을 나날의 꿈이 아롱진 수채화로 여기는 기색이다. 평소의 버릇인 따뜻한 시(詩) 쓰기로, 저 드높은 천왕봉이 소리소문없이 열강하는 겸양의 도리를 가다듬기도 하겠지.
민박 손님이 며느리 된 사연
고리키 왈, 일이 즐거우면 낙원이고, 일이 의무이면 지옥이라지? 석봉 씨는 일이 즐거워 낙원에 사나? 그렇다. 그는 일이 즐거워 견딜 수 없다는 투의 표정을 짓기를 삼가질 않는다. “제가 참으로 좋은 일을 선택했어요!” 그는 그리 당당하고 유쾌하게 토로한다. 대체 무슨 일을 선택했기에 그러나? 민박이다. 민박을 쳐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재미와 만족을 구가하게 되었다는 거다. 들어보자.
“저희 집이 자그만하지만, 본래 모습을 유지해 손질한 덕에 나름 시골집다운 토속적 운치를 되살린 것 같아요. 어느 날 하루를 묵어간 지인이 그러더라고. 저 사랑채가 너무도 근사하다, 시골집에 향수를 가진 이들이 환호할 것 같다, 민박을 한번 해보라! 그 귀띔에 민박을 시작했어요. 결과적으로 탁월한 선택이었죠.”
“살림에 크게 보탬이 됐다는 점에서?”
“물론 가계에 도움이 됐죠. 운이 좋았던 게 뭐냐면, 어느 날 우리 집 앞으로 별안간 ‘지리산둘레길’이 났다는 건데요, 이게 호재로 작용했어요. 상상하지 못한 행운이었죠. 별안간 손님들 발길이 잦아지기 시작했으니까. 그런데 민박을 하는 진정한 즐거움은 수익성에 있는 건 아닙니다.”
“사실 취향에 맞지 않을 경우, 민박도 고달프긴 마찬가지겠죠. 대체 진정한 즐거움이란 뭐죠?”
“제가 환경운동을 하던 도시에서의 나날들은 업무와 타인들, 이 양자 사이에서 냉정한 처신을 해야만 했어요. 감성이나 정감이 끼어들 틈새가 전혀 없는 건조한 관계의 연속이었어요. 그런데 민박 손님과의 관계는 전혀 달라요. 함께 식사를 하고, 술을 마시고, 온갖 하고 싶은 얘기들을 나누다 보면 ‘타인’이라는 감각이 사라집니다. 가족적인 유대감이 형성되는 거라. 그러다 보면 단골이 되고, 수시로 안부를 전하고, 진심을 나누게 되고, 그렇게 좋은 관계를 지속하게 되더라고요. 이게 제 즐거움과 만족의 원천입니다.”
쌍방향 여행이랄까. 손님은 석봉 씨의 내부로 여행을 하고, 석봉 씨는 손님의 생각 속으로 여행을 한다. 그는 이 공정하고도 허심탄회한 관계에 쾌재를 부른다. 도시에서 그가 자주 목말라했던 인간관계의 따뜻한 생태계를 민박으로 구현하는 기쁨을 누려서다. 그는 딱 부러지는 성격의 소유자로 보인다. 그런 그의 내면에 웅크린 의외의 사교적 성향이 푸드덕 날갯짓을 해 관계의 신세계로 인도했을 수도 있겠다.
민박이 불러들인 선연(善緣) 혹은 선물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석봉 씨는 민박 손님으로 가끔 찾아들던 한 아가씨에게 깊은 호감을 느꼈다. 참하고 곱살하기 이를 데 없어서. 그는 결국 이 젊은이를 며느리로 맞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제 아들놈이 현재 지리산 환경단체에서 활동가로 일합니다. 저 참신한 처녀를 이 녀석에게 소개했는데요, 처음엔 서로 심드렁하더니 어인 영문인지 기특하게도 결혼에 이르렀어요.(웃음) 현재 며느리는 우리 집 아래편에 아담한 카페를 차려 둘레길 탐방객들을 맞이합니다. 손녀도 이미 봤고요.”
“3대가 한동네에 사는 게 불편하진 않으세요? 젊은이들이란 때로 발칙한 도발을 하는 법인데 말이죠.”
“‘저는요, 시골이 너무도 좋아요!’ 며느리의 말이 그렇습니다. 불편도 단점도 전혀 없어요. 아이들에게 제가 가끔 잔소리는 하죠. 과욕을 부린다고 돈이 벌리는 거 아니다. 찡그리며 살아봤자 일이 풀리는 거 아니다. 이 애비가 그랬듯이 바르게, 옳게 살아다오. 나쁜 일을 보고서는 참지 마라. 그렇게.”
“그런데 말이죠. 농사하랴, 민박 손님들 맞이하랴, 선생의 일상이 너무 바쁜 거 아네요? 산중의 낙은 한가하게 노니는 데에도 있지 않나?”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즐기는 것에 무슨 결함이 있을까. 좋아하는 일에 시간을 쓰고, 사랑으로 사람을 만나는 것, 그게 자유롭게 사는 길이며 좋은 삶이라 생각합니다.”
석봉 씨의 집, 꽃그늘 나무그늘이 푸르다. 이 푸른 공기 속에서 별다른 불안이나 허기가 없이 산다면 인생도 소풍처럼 가뿐할 테지. 세상의 광기와 탐욕이 침범하지 못할 것이고.
한 무리의 민박 손님들이 들이닥친다. 오늘도 신났다, 석봉 씨.
김석봉 씨가 주는 귀촌 Tip
•귀촌 준비에 너무 강박감을 갖지 말자. 준비를 충실히 해도 실패할 수 있다. 미장이나 목공처럼 실용적인 기술을 미리 배워두는 건 현명하다. 돈벌이 목적의 귀농이라면 더욱더.
•농사에 미리 겁먹을 필요 없다. 수익은 열악하지만 내가 뜻한 대로의 영농을 할 경우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일테면, 기계나 비료를 쓰지 않는 줏대 있는 농법이 그렇다.
•가급적 마을 변두리에 거처를 마련하자. 원주민들과의 갈등 소지를 줄일 수 있으니까.
•민박을 할 경우엔 일단 돈벌이 목적보다 손님과의 소통을 중시하자. 열쇠만 건네면 그만인 펜션과 달리, 민박은 우정을 나눌 수 있다는 것, 그게 매력이며, 성공의 첩경이다.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와 동대학원 졸업. 광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향수(鄕愁)가 귀촌을 촉발했더란다. 영주시 이산면 산기슭에 사는 심원복(57) 씨의 얘기다. 어릴 때 경험한 시골 풍정이 일쑤 아릿한 그리움을 불러오더라는 거다. 일테면, 소 잔등에 쏟아지는 석양녘의 붉은 햇살처럼 목가적인 풍경들이. 배고프면 아무 집에나 들어가도 밥을 나눠주었던 도타운 인정이. 타향을 사는 자에게 향수란 근원을 향한 갈증 같은 것. 그렇다고 사무친 그리움은 아니라 굳이 억지로 누르며 살아온 것도 아니었다. 삶이란 어차피 부평초처럼 객지를 떠도는 일이지 않던가.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향수가 깊어졌던 모양.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들이 더 많아질 즈음, 심 씨는 서울생활을 후다닥 접었다.
“새가 제 둥지에 깃들여 살듯이!” 심원복 씨는 귀촌생활을 그리 비유한다. 도시에선 좀체 느끼기 어려웠던 안심과 평온을 비로소 누린다는 뜻일 테지. 물론 도시에서라고 불안이나 불만을 옆구리에 달고 살았던 건 아니었단다. 숨막힐 것 같은 일상의 수레바퀴 속에서 적당히 착실하고 조신하게, 적당히 눈치보고 적당히 머리 굴리고 적당히 처세하며 살아가는 게 우리네 소시민들의 절박하고도 쩨쩨한 현실. 그 역시 그렇게 지극히 평범하게 살아왔던 것 같다. 발칙한 일탈 따위는 그의 종목이 아니었으며, 과한 출세욕이나 물욕에 허덕이며 살지도 않았을 게다. 심 씨의 유순해 보이는 인상에 이미 쓰여 있다. 별다른 폭풍과 이변과 무용담이 없었을 얌전한 인생 드라마의 표징이라는 게.
심 씨가 아늑하게 옴팡진 여기 산기슭에 집을 짓고 귀촌한 건 10년 전. 땅은 이미 그전에 사두었다. 소백산으로 등산을 갔다가 무심코 들른 산촌에서 만난 싼 매물이었다. 길도 없는 농지 1200평을 우발적으로 사들였던 것. 오우, 나중 여기에 허름한 흙집이라도 하나 짓고 살면 되겠는걸! 그런 생각으로 말이다. 땅을 미리 잡아놓은 덕에 귀촌 행보는 빨랐다. 애초 생각했던 간소한 흙집 대신 번듯한 목조주택을 지었다. 바지런히 직장생활을 했기에, 좀 모아둔 게 있었기에, 귀촌해서 생활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여력은 됐다. 그렇게 사뿐한 산골살이를 시작했다.
“시골에 가서 무슨 획기적인 생활의 변화를 딱히 의도하거나 꿈꾸진 않았습니다. 번잡한 도시에서 벗어나서 마음 편하게 살면 그만이지 싶었거든요. 도시에서나 시골에서나 인생사 희로애락이야 뭐가 다르겠는가, 하는 생각으로 그냥 순순히 적응하며 살면 될 거라 봤지요. 흔히들 귀촌 초기의 갖가지 고생담을 토로하는 것 같은데 저희 부부에겐 그런 게 거의 없었어요.”
“낯설고 물설은 산골에 잠시 놀러온 것도 아니고, 아예 새 살림을 시작하는 상황이었는데 전혀 곡절이 없었던 거예요?”
“아마도 아내는 초기에 이모저모 고생이 좀 있었을 겁니다. 제가 직장을 정리하기까지 아내 먼저 이곳에 내려와 잠시 혼자 살았으니까. 보시다시피 저희 집이 마을과 떨어진 골짜기에 있는 외딴집이에요. 일단은 밤이 엄청 무서웠다 하더라고요. 근데, 외딴집의 장점도 많아요. 오붓하고 조용하고, 게다가 어느 정도 이웃들의 관심권 밖에 있으니까.”
“귀촌 정착은 의자를 만드는 일이나 뒷산 꼭대기에 오르는 일과 달리 만만치 않은 공력을 쏟아야만 할 겁니다. 그래서들 미리미리 준비를 철저히 하고 내려가라 하죠.”
“제가 보기보다는 꽤나 태평한 사람입니다. 매사 준비나 계획 같은 걸 하고 살질 않았어요. 직장에서 업무를 볼 땐 불도저처럼 밀어붙이기도 하고, 여차하면 호통도 내질렀지만 타고난 천성은 느긋하고 무계획적이에요. 귀촌 준비, 그런 거 전혀 없이 내려왔어요.”
“계획 대신 그때그때 상황에 적응하는 게 상책이라는? 흐르는 물처럼?”
“사전 귀촌 계획이 오히려 일을 어렵게 만들 수 있습니다. 제아무리 치밀한 계획을 세웠더라도 시골의 현실적 형편과 어긋나는 수가 많으니까. 제게 있었던 계획이라면 나를 내세우지 않겠다, ‘틀’ 안에 나를 가두지 않겠다 정도였죠. 이건 소극적인 태도로 보일 수 있지만 오히려 신속하고 효율적인 정착을 가능케 했습니다. 목에 힘을 빼고, 긴장할 것 없이, 예컨대 소풍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내려오는 게 더 지혜로울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잊을 수 없는 귀촌 첫날의 별빛
소풍처럼! 지독한 게 삶이라 하지만 지독하게 애만 쓰다가 허무맹랑한 파장을 보기 쉬운 게 또한 인생이다. 그러하니 억지로 애쓰지 말자, 귀촌에 너무 큰 기대를 걸지 말자, 김밥 싸 들고 소풍 가듯이 가볍게 운신하자, 심 씨의 내심엔 그런 게 있었던 모양이다. 그 외에 구체적인 구상이나 기어이 이루고 싶은 그 무슨 목표를 정하지 않은 채 산골살이를 시작했던 것 같다. 마치, 내가 과연 어떻게 살아가나 어디 두고보자, 하는 투로.
“산골 자연 경관이 너무도 마음에 들었어요. 그 한 가지만으로도 귀촌의 가치가 충분하다고 봅니다. 은퇴한 분들에게 어서들 내려오십쇼,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자신 있게 권장하는 이유 역시 거기에 있어요. 제가 낭만적인 사람이 전혀 아니지만 나무와 달, 별을 즐기게 되었는데요, 그 순수한 자연 풍경들이 마음을 하염없이 평온하게 만들기 때문이에요. 뭐니 뭐니 해도 마음 편히 사는 게 행복이지 않겠어요? 귀촌 첫날 밤, 침실 창밖 허공으로 쏟아지던 별빛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달도 별도 날마다 바라보다 보면 심드렁해지지 않던가요? 낭만주의자들의 음풍농월조차도 반복되면 싱거워지는 거라서.”
“초반엔 권태를 느낄 겨를이 없었어요. 딱히 할 일을 만들진 않았지만 텃밭 농사하랴, 산나물 뜯으러 다니랴, 산책하랴, 하루해가 어떻게 넘어가는지 모를 지경으로 아내와 함께 즐겼어요. 그런데 말이죠, 한두 해가 지나자 슬슬 심심해지더라고요. 친구들의 방문도 서서히 줄어들다 끊어지고, 시간이 무료해지고. 그래서 농사를 본격적으로 짓기 시작했죠.”
“어떤 작물들을?”
“1000평 농토에 고추, 생강, 도라지, 호박 등 이 마을에서 흔히들 하는 작물을 재배했어요. 인건비를 아끼려고 모든 일을 아내와 둘이서 해냈지요. 양봉도 해봤고, 된장을 만들어 팔기도 했고요. 한 해 2000만 원 정도의 매출을 올리기도 했지만, 어느 해엔 기상 악화로 망치기도 했어요. 농사란 정말 어려운 일이라는 걸 실감했습니다.”
심 씨의 집 풍경을 볼까? 포옹처럼 터를 에워싼 야산 중턱에 들어앉은 남향집이니 밝고 따사롭다. 집도 마당도 널찍하다. 꼬끼오! 닭장에선 수탉이 관악기처럼 목을 길게 빼고 청을 돋워 산중 적막을 비틀어댄다. 집 모서리엔 한때 꿀을 얻었던 폐 벌통 스무 개쯤이 쌓여 있다. 뒤뜰 장독대엔 후덕하게 생긴 항아리들이 즐비하다. 나무나 화초 가꾸기엔 별 취미가 없는지 이렇다 하게 공들여 운치 있게 꾸민 기색이 없다.
너른 발코니나 마당에 의자라거나 앉을 만한 자리 하나 마련해두지 않은 걸 보면 주로 서서 움직이는 분주한 일상을 보내는 모양이다. 집 둘레 곳곳에 널브러진 폐물들에서도 이 집에 사는 부부가 미화작업에 신경 쓸 겨를 없이 근로에 시간을 아껴 쓴다는 걸 짐작할 만하다.
마당 한편에 설치한 비닐하우스에선 심 씨의 아내가 쇠스랑으로 텃밭을 고르고 있다. 어디 딴 데 눈 한 번 돌리는 법 없이 열심히, 혹은 고독하게.
이분은 한때 병을 얻어 고생을 했다. 그게 귀촌을 서두른 요인이기도 했다지. 산골의 어디에 사람의 몸을 고치는 미약이 숨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귀촌을 통해 다 죽어가던 사람이 살아나기도 하는 걸 나는 간혹 봤다. 심 씨의 아내 역시 귀촌 이후 건강을 완연하게 회복했다는 게 아닌가.
“저희 부부는 외식을 안 합니다. 농약 친 식재료들로 만들어진 음식을 싫어해서죠. 직접 온갖 채소들을 깨끗하게 가꿔 찬을 만들어 먹기, 이 역시 산골에 사는 행복 중 하나입니다. 그게 건강비결이라고 봐요. 요양을 위해서라면 가급적 깊은 산골로 들어가는 게 좋을 겁니다. 농약을 엄청 뿌려대는 과수 단지나 유해 가스를 배출하는 축사 지구를 피해야 한다는 거죠. 그런 곳은 도시보다 공기의 질이 더 나쁠 수도 있으니까.”
“도시에서와 달리 거의 모든 시간을 함께 보내야 하는, 어쩌면 불운한 여건에 처한 부부 사이에 흐르는 공기의 질도 중요하겠죠? 귀촌한 부부들이 대화단절이라거나, 도시에서보다 갈등을 더 겪는 경우도 드물지 않더군요. 부인은 산골생활에 만족하시나요?”
“만족할 리가요. 여자에게 시골은 아무래도 불편이 많으니까요. 체념하고 사는 것 같아요. 부부싸움도 하지만 그때마다 화해를 하죠. 친구처럼 그냥 무덤덤하게 삽니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애쓴다고 좋아지는 것도 아니더라고. 뭐 그래도 밥은 얻어먹고 삽니다.(웃음) 다툼이 있더라도 그게 다 내 탓이거니, 그리 여기고요.”
“‘내 탓’이라는 건 뭐죠?”
“흠, 제 약점이랄까, 제가 느려터진 면이 있어요. 게으름과는 좀 다른 건데요, 옆에서 볼 땐 당치 않은 여유나 허세를 부린다고 느낄 수도 있겠죠. 그러나 어릴 때부터의 천성이라 어쩔 수 없더라고요. 좀 더 느린 숨결로 여유롭게 살자! 귀촌 때 그런 다짐도 했고요.”
“마을 이장을 맡으셨죠? 주민들의 신임을 얻지 않고선 그거 어려운 거 아녜요?”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했어요. 저를 내세우지 않고 배운다는 자세로 어울렸어요. 술자리도 함께하고 오락 화투도 같이 치며 섞여들었어요. 시골에선 사생활이라는 게 어렵습니다. 뭐든 묻거든요. 답을 안 해주면 오해를 살 수 있고요. 그런 풍토를 긍정하고 잘 적응해 주민들의 사랑을 받아야 정착할 수 있어요.”
마을에서 가장 바쁜 사람
사람의 마음은 새장에 달린 문과 같아서 활짝 열어젖힐 때 비상할 수 있다. 시골에 살며 아는 척, 잘난 척, 멋있는 척을 하다 보면 새장에 갇힌 신세를 자초할 수 있다. 그렇지만 자세를 낮춘 갸륵한 선의마저 곧이곧대로 믿어주질 않는 경우가 많은 게 세상이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 아파하는 게 인간이라는 종이다. 시골인들 혼선이 없으랴.
“험한 꼴을 당한 적은 없으셨고? 겉으로는 웃지만 속으로는 울고 싶은 상황이라든가.”
“텃세라는 건 주로 집성촌에서 벌어집니다. 60여 명의 각성바지들이 살아가는 이 마을 주민들은 다들 점잖아요. 귀촌하고서 집들이를 했는데 온 마을 사람들이 오셨더라고요. 이 마을에 이주한 최초의 외지인이라며 반겨줬어요. 그 분위기를 죽 유지한 셈이죠.”
이장 일을 보면서부터 심 씨의 양상이 급변했다. 마을에서 가장 바쁘고, 가장 유명하고, 가장 당당한 사람이 되었다. 굵직굵직한 마을 사업들을 펼쳐 성과를 거둬서다. 자칫 먹은 것 없이도 바가지로 욕먹을 수 있는 게 마을 사업 선도자다. 그는 공생 공영을 열심히 추구한 나머지 흠집 난 게 없는 것 같다. 남을 위하는 일이 곧 나를 위하는 길임을 아는 이의 활보라 할 수 있겠다.
“귀촌하려는 분들에게 꼭 귀띔하고 싶어요. 재능과 역량을 마을에 쏟는다면 반드시 좋은 기회를 포착할 수 있다는 걸. 요즘 정부나 지자체가 시행하는 마을지원사업의 규모나 종목이 점점 늘어나고 있음에 착안하시길 바랍니다. 마을의 공적 이익을 창출할 수 있으며 개인의 이익도 도모할 수 있으니까.”
심 씨는 고개를 뒤로 꺾으며 큰 소리로 자주 웃어젖혔다. 우스울 게 없는 대목에서도 마구 웃으니 난 그게 우스워 덩달아 웃길 거듭했다. 적극적인 사교의 기술일 테지. 몸에 밴 겸양의 꽃으로 터져나온 홍소(哄笑)일 수도.
심원복 씨가 주는 귀촌·귀농 준비 Tip
•최소한의 생활비(월 100만 원 정도)를 조달할 수 없는 재정 형편이라면 귀촌하지 않는 게 좋다. 비참해질 수 있으니까.
•농사로 돈을 모으기는 정말 어렵다. 노동 강도도 세다. 섣불리 농토에 투자하지 말자. 일단 맨몸으로 들어와 빈집과 묵은 전답을 빌려 수련기를 갖는 게 좋다.
•시골생활을 하다 보면 무료해진다. 변화가 없는 일상에 지칠 수 있다. 그럴 때 자연과의 교감이 필요하다. 산야에 관심을 가지다 보면 감성도 길러진다. 열렬한 취미 한두 가지를 가지고 내려온다면 한결 바람직하고.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와 동대학원 졸업. 광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주말 저녁, 나른하게 소파에 기대어 드라마를 보다가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속으로 생각했다. 지금 저 배우가 엄청 즐기고 있구나! 한참 나이 어린 배역에게 ‘아버지’나 ‘오빠’를 연발했다. 심심하면 욕설에 머리채를 끄잡는데 그렇게 통쾌할 수가 없었다.
“명희야, 원혁이 번호 땄어!”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106부작의 마지막 대사도 그녀 몫이었다. 지금까지 드라마 속에서 무던하게 녹아 있던 그녀. 이번만은 달랐다. 지난 3월 종영한 KBS2 주말드라마 ‘하나뿐인 내편’에서 귀여운(?) 치매 환자 박금병 역으로 사랑받은 배우 정재순(鄭在順·72)을 두고 하는 소리다.
계단을 걸어 내려오는 그녀를 마주보는 순간 멈칫했다. 연극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블랑쉬가 나른하면서도 우아하게 무대로 걸어오는 모습이 연상됐기 때문이다. 팔랑팔랑 손을 흔들면서 명희 뒤만 졸졸 쫓아다니던 박병금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사진 촬영을 하는 내내 정숙하고 단아한 모습을 잃지 않는 배우 정재순. 캐릭터 변신이라고 생각할 만큼 남다른 연기를 보여줬던 ‘하나뿐인 내편’이 그녀 인생에 있어 대단한 도전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맨 처음 배역과 관련해 얘기를 들었을 때 극중에서 치매가 그렇게 큰 소재는 아니었어요. 그냥 약간 병세가 있다 하는 정도였죠. 그동안 치매 앓는 역은 안 해봤는데 어떡하지? 그래도 이 나이 먹어서 한 번쯤 해보는 게 좋지 않을까? 모르겠다! 해보자! 그랬던 거죠.”
새 드라마를 시작하면 늘 하던 대로 마음먹었을 뿐인데 시청자의 반응은 예상외였다. 치매 증상이 심해져 극중 손주며느리 도란(유이 역)을 친구 ‘명희’로, 그의 아버지(최수종 역)를 ‘강기사 오빠’로 부르면 부를수록, 며느리(차화연 역)와 둘째 손주며느리(윤진이 역)에게 욕을 하면 할수록, 시청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제가 극중에서 욕할 때 사람들이 참 찰지다고 그러대요? 제가 나쁜 년, 첩년 하고 말할 때요. 저도 상상 못했고 작가님도 이렇게까지 생각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이야기 전개를 하다 보니 여건이 잘 맞아떨어진 거죠. 그런데 자꾸 촬영 분량이 많아지더라고요.(웃음)”
말 그대로 배우 정재순의 재발견이었다. 올해로 데뷔 51년 차. 지적이고 차가운 이미지로 언제나 그 자리에 서 있는 거목과도 같은 중견배우였다. 긴 세월 각인되어온 이미지를 깨고 새로운 캐릭터를 완성해냈으니 박금병이 더욱 사랑받았던 것은 아닐까. 정재순은 딴생각 안 하고 배역을 즐겼다고 했다.
“재미있었어요. 왜냐하면 치매 환자라는 배역 설정 때문에 오만 가지를 다 해봤거든요. 그동안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연기도 해보고요. 배우로서도 찾기 힘든 캐릭터였어요. 카타르시스도 느꼈고요. 특히 머리끄덩이를 있는 대로 낚아채잖아요.(웃음) 처음에는 굉장히 힘들었는데 하다 보니까 요령이 생기더군요. 치매 증세가 나올 때 특히 나쁜 사람들에게 바른 소리도 마음껏 하고 말이죠.”
극중 박금병의 인기는 인터넷을 치면 확인된다. 정재순의 이름을 검색창에 치면 드라마에서 착장한 귀걸이며 사용한 안경테, 옷 등의 브랜드를 알 수 있을 정도. 사람들이 주목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젊은 시절을 주로 기억하는 치매이다 보니 빨간 립스틱에 화려한 색감의 옷도 입고, 짧은 점퍼에 토끼 머리띠는 물론 시니어에게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미니크로스백도 수차례 바꿔 멨다. 70을 훌쩍 넘긴 나이에 후배 연기자들에게 애교 부리는 모습은 귀엽기까지 했다.
“도무지 모르겠어요. ‘하나뿐인 내편’에 출연하면서 귀엽다, 예쁘다는 말을 평생 들어도 차고 넘칠 만큼 들었어요. 귀엽대요. 제가요. 저는 원래 재미없는 사람인데요.(웃음) 배우는 정말 좋은 직업이에요. 순간순간 다른 인생을 살기 때문에 내 삶에도 도움이 되고요.”
그렇다고 그녀가 박금병 같은 강한 캐릭터 연기를 처음 해본 것은 아니다. KBS1 드라마 ‘하늘만큼 땅만큼’에서는 뽀글뽀글 파마머리를 한 새엄마 역할을 했고, SBS 드라마 ‘그래 그런거야’에서는 배우 송승환과 연상연하 부부로 연기한 적 있다. 스스로 놀랄 정도로 지금까지 맡았던 역할 중 박금병이 인기나 화제성에서 단연 으뜸이다. 그녀는 최근 드라마와 캐릭터의 인기에 힘입어 KBS2 예능 프로그램인 ‘해피투게더’에도 모습을 드러냈다.
“예능 프로그램에는 살면서 처음 나가봤어요. 우리 집안에 예능 PD가 있는데 출연 제의가 와도 안 나간다고 했거든요. 매니저 등쌀에 못 이겨 결국 나갔네요. 유재석 씨가 능력자더라고요. 나같이 재미없는 사람 앉혀놓고 잘 이끌더군요. 그날 ‘해피투게더’가 자체 최고 시청률을 찍었다 하더라고요.”
데뷔 51년 차, 나를 돌아보다
스타 탄생 비화에 종종 등장하는 스토리. 정재순도 친구 따라 탤런트 시험에 응시했다가 얼떨결에 연기자의 길로 들어섰다. 1968년 TBC
8기 공채 탤런트로 합격했지만 부모님의 반대가 심했다. 미술대학교 지원도 못하게 했는데 탤런트를 하겠다니, 부모님은 기가 찰 노릇이었다. 그런데 의외의 지원군이 정재순 옆에 있었다. “저는 그때 대학 재수를 하면서 군대 간 남자친구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반대가 심해서 집에서 쫓겨나기도 했는데 당시 남자친구였던 제 남편의 부모님이 제가 탤런트 된 걸 너무 좋아하셨어요. 밀어줬다기보다는 ‘괜찮다’ 이 정도요? 그때 시어머니께서 하셨던 말씀이 기억나요. ‘시댁에서 바람날 여자는 안방에 앉혀놔도 막을 수 없다.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힘과 용기를 내 방송사에 갔는데 세상에 아유…. 막상 닥쳐보니 제가 아무것도 모르고 끼도 없더라고요.”
간단히 말해 얼굴이 예뻐서 합격한 케이스였다.
“괜찮은 여자 탤런트가 들어왔다고 방송사에 소문은 났는데 연기를 시켜도 뭘 할 줄도 모르고 꿔다놓은 보릿자루였거든요. 야외 촬영은 너무 싫었어요. 스튜디오 촬영은 얼마든지 했고요. 사람들이 와서 지켜보고 있으면 불편하고 힘들었는데, 세월이 흐르다 보니까 박금병이 같은 역할도 하고. 약간 뻔뻔해졌다고나 할까?”
어찌어찌 하다 보니 세월이 그렇게 갔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그리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연기자는 생각도 안 해본 직업이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뭘 잘 모르고 시작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하는 것 같아요. 그냥 군대 간 남자친구를 기다리면서 방송사를 다니던 시절도 있었어요.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어느새 세월이 이렇게 흐른 거죠. 51년 동안 인정받을 만한 작품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 때는 너무 아쉬워요. 이번에 ‘하나뿐인 내편’은 기억에 남겠죠.”
기다림이 만들어 준 또 다른 이름 화가
남들이 기억하는 작품이 많은 것보다 오랜 시간 기복 없이 꾸준한 모습으로 시청자들을 만나온 것 자체가 더 대단한 결과가 아닐까?
“그렇죠. 감사한 일이죠. 그런데 연기자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요. 제가 선택하는 게 아니고 선택받는 직업이잖아요. 매년 꾸준하게 몇 작품씩 들어와야 하는데 들쭉날쭉했어요. 그래서 그 기다림의 시간을 채우기 위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죠.”
중고등학교 시절 그림대회에 나가 상도 많이 받아왔지만 부모님 반대로 포기해야만 했다. 결혼하고 나서도 그림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물감을 사 모으기도 했다.
“집에서 혼자 수채화를 그리다가 본격적으로 공부해볼 생각을 했어요. 처음에는 어린 시절의 은사를 찾아가서 배웠는데 체계적으로 공부해보라는 권유를 받았습니다. 책도 찾아보고 공부도 하면서 미술공모전이 있으면 열심히 작품을 냈습니다. 미술계 유명한 공모전에는 거의 다 출품했던 것 같아요. 1991년에 첫 개인전을 할 때까지 응모했죠.”
그녀의 첫 개인전은 당대 히트작이었던 MBC 주말연속극 ‘배반의 장미’의 촬영 장소로도 쓰였다.
“극중에서 제 배역은 속 썩이는 남편을 둔 재벌가 며느리였어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그림을 그리는 캐릭터였는데 ‘배반의 장미’를 집필하신 김수현 선생님이 제가 전부터 그림을 그린다는 걸 알고 계셨어요. 극이 끝날 때쯤, 전시회가 있다는 걸 아시고 전시회 신(scene)을 만들어주셨어요. 그 드라마에 나왔던 전시회 장면은 제 개인전 모습이었어요. 정말 감사했죠. 어느 연기자가 그런 배려를 받을 수 있겠어요.”
화가란 말이 어색하지 않을 만큼 어느새 그녀는 미술계에서도 인정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연기자로서의 삶과 화가로서의 삶은 그 성격이 판이했다.
“저는 연기와 그림을 병행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림은 혼자서 작업해도 되지만 드라마는 40~50명이 같이 어우러져서 일하잖아요. 1996년도에 네 번째 전시회를 할 때 ‘나는 누구인가, 나는 뭐하는 사람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어요. 그때 한꺼번에 세 작품을 소화하는 중에 전시 스케줄까지 잡혔었거든요. 그 뒤 5년간은 드라마에만 집중해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그리고 다시 개인전을 연건 12년 만이었죠.”
요즘은 그림 활동을 안 하다시피 하니 화가 정재순이라는 말이 참으로 어색하다. 그래도 마음이 힘들던 시절에 자신을 위로해줬던 것은 그림이었다고 말했다.
“우리 시니어도 시간이 많다고 무료하게 지낼 게 아니라 취미 활동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게 훨씬 좋을 것 같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자기를 위해서도 주변 사람을 위해서도 좋더라고요. 드라마를 하면서 힘든 게 얼마나 많았겠어요. 그래도 그 힘든 세월 동안 그림이 있었으니까 많이 위로를 받은 거죠. 그리고 또 드라마 열심히 해서 좋은 모습도 보여드리고 있잖아요. 저는 행복한 사람이에요.”
그림은 항상 마음 깊은 곳에 있지만 혼자 하는 작업이다 보니 자꾸 소홀해지는 것을 느낀다. 긴장감도 떨어지고 말이다.
“옛날같이 체력이 안 따라줘요. 예전에는 드라마와 그림을 같이 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쉽지 않아요. 저는 비구상화를 그려요. 마음이 캔버스에 드러나는 작업이기 때문에 어떤 것을 담아낼지 고민이 없으면 절대 그림을 그릴 수 없어요. 뭘 그릴까 계속해서 고민을 해도 작품이 나올까 말까예요. 누구도 함께할 수 없죠. 하지만 그림을 그리기 위해 고민하고 스트레스받는 건 굉장히 행복하고 자유스러운 거예요.”
박금병이 때문에 김장도 못했다
한참을 드라마와 그림에 대한 얘기를 하다가 여자로서의 삶에 대한 이야기로 슬쩍 흘러갔다. 아이를 키우고 살림을 하고 일을 하면서 최선을 다했다고 했다. 그런데 이번에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다고. 나긋하게 깔리던 목소리의 톤이 높아졌다.
“작년 말에 박금병이 역 하느라고 처음으로 김장을 못했어요. 살면서 거른 적이 없거든요. 매년 수산시장에서 젓갈이며 생선이며 사서 온 정성을 다해 담갔는데, 사이다처럼 톡 쏘는 맛이 별미인데 참 아쉽네. 이번에 대사도 많고 스케줄도 빡빡했거든요. 그런데 김장을 안 하니까 여기저기서 주셔서 김치가 되게 많아요. 그래도 박금병이도 잘되고 드라마도 잘돼서 좋습니다.”
인터뷰 초반에는 몰랐는데 살림이며 가정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그녀에게서 발랄한 목소리의 박금병이 느껴졌다. 이제 드라마도 끝났으니 다시 정재순으로 돌아올 시간. 가발을 벗고 단장을 했는데 영 어색하다며 머리를 매만진다.
“생각해보니 정식으로 할머니 역할을 한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엄마였다가 자연스럽게 할머니가 되는 역은 많았는데. 거기다가 치매 환자 연기까지 했잖아요.”
매일이 새로운 연기자
제대로 연기했다는 만족감을 준 배역을 묻자 주저 없이 “이거. 박금병!”이라고 대답하는 정재순.
“저는 연기자를 그냥 직업이라고 생각했어요. 연기자로서 다른 삶을 연기할 때 충실하게 살려내려고 노력했어요. 직업 정신으로요.(웃음) 부족함도 많고 잘 모르니까 새 작품에 들어갈 때마다 항상 새로웠던 거죠. 연기자로서의 욕심을 좀 부려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아쉬워요. 우선 성격 강한 박금병이랑 헤어졌으니 조금 쉬어야 할 것 같아요. 주어진 역할은 뭐든지 최선을 다하자는 게 제 원칙이니까 또 열심히 해야겠죠.”
앞으로 배우로서 바람이 있다면 카리스마 넘치는 회장 역할을 해보고 싶다고 했다.
“100세 시대잖아요. 시니어에게 희망을 주고 싶어요. 치매 연기 같은 거 말고. 힘과 용기와 아름다움과 즐거운 취미활동 같은 것들을 전달해줄 수 있는 그런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화가로서 시간이 허락되면 내년쯤 전시회를 가져볼까 해요. 전시회 열면 초대할게요.”
인터뷰를 마치고 정재순이 곧바로 향한 곳은 ‘하나뿐인 내편’의 종방연 현장이었다. 플래시 세례 속을 ‘강기사 오빠’인 최수종 팔짱을 끼고 걷는 정재순을 인터넷 뉴스로 접했다. 데뷔 51년 만에 인생 배역의 기쁨을 제대로 누리고 있는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도 영원할 수 있었던 그녀만의 힘, 주어진 일에 대한 감사와 사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