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라! 나 어느새 이렇게 나이 들었어? 이젠 시간이 얼마 안 남았도다!’ 우리는 흔히 그렇게 영탄한다. 손가락 사이로 모래처럼 흘러 흩어진 세월을 아쉬워한다. 그러고서도 정작 무한정한 시간을 움켜쥔 것처럼 하루하루를 허비한다. 시간이야말로 고귀한 재산이라는 걸 까먹는다. 이 양반을 보시라. 시간 누수 없이 은퇴 이후를 산다.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시간을 야무지게 쓴다. 귀촌이 그걸 가능케 했다. 삼십육계 뺑소니를 치는 시간에 아랑곳없이, 한결 만족할 만한 시골살이를 누리고 있으니.
영월미디어기자박물관 고명진(69) 관장. 그는 사진기자 출신이다. 이곳 영월의 시골로 귀촌한 건 8년 전. 애초엔 단양에 발을 들였었다. 농사를 짓고 자연사진이나 찍으며 한가하게 살자는 생각이었다지. 그러나 여의치 않아 길을 바꿨다. 스치듯 잠깐 단양에 머물다 영월로 이주, 계획에 없었던 미디어기자박물관이라는 색다른 박물관을 만들었다.
귀촌은 왜 했을까? 이보다 더 좋은 건 다시없다고 널리 소문난 ‘지존’, 바로 돈 때문이었단다. 서울에서 잘나가던 사진기자였던 그는 60줄에 접어든 자신의 정경을 바라보며 윽! 하고 놀랐던 것 같다. 가진 게 아무것도 없어서였다. 정신만 빼고는 없는 게 없는 서울, 재화를 중심에 두고 강호의 협객들이 밤낮없이 각축하는 서울. 이 격렬하고도 머리 아픈 도시에서 무사히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럴싸한 재산이나 노후자금이라는 게 필요하다. 그에겐 그런 게 전혀 없었다. 은퇴한 그가 굴릴 수 있는 자금이라야 연금으로 나오는 월 108만 원이 전부였다지.
“제가 재혼으로 맞이한 아내와 함께 귀촌을 했어요. 전처와는 사별을 했는데, 암 투병을 오래하다 떠났지요. 긴 투병 와중에 전 재산이 날아갑디다. 남은 건 연금뿐. 그 소소한 돈, 월 108만 원으로 서울에서 버틸 자신이 도대체 서질 않더라고. 그럼 어쩌나? 고민 좀 하다가 돈 덜 드는 시골로 내려가자, 귀촌해서 그저 밥 먹는 정도에 만족하며 자연사진이나 찍자, 그런 결론을 내렸어요.”
가진 것 없이도 깡이나 무욕으로 버티며 사는 귀재가 전혀 없지는 않겠지만, 우리네 필부에겐 어림없다. 쥔 게 없는 사람에게 서울은 무정하고 비정하고 매정하다. 삶도 사회도 역사도 일쑤 진흙탕처럼 뒤엉킨 모순과 부조리를 축으로 윤회한다는 걸 고 관장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일 게다. 한평생 사진기자로 살며 이 요상한 세상의 명암과 요철을 깊숙이 들여다봤을 테니까. 남모를 소명감도 가슴에 품었을 테지. 정세의 격랑 속에서 그가 포착했던 ‘기록사진’들은 시대의 증빙으로 남아 있다. 6·10민주항쟁 때 한국일보 기자였던 그가 찍은 ‘최루탄을 쏘지 마라!’라는 타이틀의 사진은 사람들의 심장을 흔들었다. 미국 AP통신사는 이 통절한 컷을 ‘20세기 최고 사진 100선’에 선정했고.
돈 한 푼 안 들인 ‘사진박물관’
나는 찍는다, 고로 존재한다! 아마도 고 관장의 슬로건은 그런 것이었을 터. 결국 천분이자 천직이었던 사진과의 인연은 은퇴 뒤에도 이어져 사진박물관을 꾸리게 되었다. 박물관엔 그가 현역 때 썼거나 기증받은 온갖 사진 장비와 희귀한 자료가 잔뜩 전시돼 있다. 원래 사진박물관을 차릴 생각 같은 건 하지도 않았다지. 귀촌을 했으니 뭔가 사진과 관련한 일로 여생을 보내야겠는데 그게 뭐지? 그렇게 다분히 막연한 궁리를 하던 차에 그의 명민한 아내가 쓰윽 귀띔을 하더란다. 오우, 저 빈 건물에 사진박물관을 만들어보소서!
“영월엔 다양한 사립 박물관들이 있어요. 근데 말이죠, 동네 구경삼아 돌아다니다 우연히 빈 박물관 하나를 보게 됐어요. 원래 폐교였던 건물에 설립한 책박물관이 있었는데 그게 폐관됐던 거라. 그걸 본 집식구가 대뜸 아이디어를 낸 거죠.”
“그 즉시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한 거예요?”
“아내의 반짝이는 권유를 듣고 바로 착수했어요. 마치 귀신에 홀린 기분으로. 군청으로 달려가 기자박물관을 만들고 싶다는 뜻을 밝히자 제안서를 제출하라 합디다. 그렇게 본격적으로 일이 시작됐고, 결국엔 성사가 됐어요. 순항을 거듭했다 할까, 매우 좋은 조건으로 협약한 뒤 무난한 운영을 해왔어요.”
“매우 좋은 조건이란?”
“군에서 건물을 통째로 무상임대해줬거든요. 살림할 사택까지 포함해서 말이죠. 학예사도 배치해줬고. 아무튼, 자리 잡기까지 부지런히 공을 들였어요. 명심한 게 뭐냐면, 박물관이되 원래 이 터가 학교자리였다는 걸 잊지 말자는 거였어요. 시골에서 학교란 마을 문화공동체의 중심이니까. 해서, 박물관을 거점으로 많은 마을 사업을 전개했어요. 음악회 같은 문화행사도 적극 유치해 주민들과 함께 즐겼고.”
“관의 지원 승인 자체가 쉽지도 않지만, 사업 진행 과정에도 괴로운 일들이 많다고들 해요. 오라 가라, 이래라저래라, 요구가 많아서. 그래서 어떤 이들은 절대 관공서와 손잡지 말고 독립적으로 일을 추진하라 합니다.”
“우여곡절을 피할 길은 없죠. 그러나 저처럼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내 돈 한 푼 안 들이고 일을 벌일 수 있다는 건 절호의 기회이지 않겠어요? 그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건, 문화사업이나 마을사업을 열렬히 하되 절대 돈벌이 목적으로는 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에요. 그건 실패의 첩경이니까. 반드시 욕먹고 망가지니까. 나랏돈을 공정하게 집행하는 게 상책이지만, 그보다 더 좋은 건 무슨 예산 집행의 결재 라인엔 아예 서질 않는 게 좋아요. 그저 밥 먹을 정도의 형편만 만들어지면 이게 복이거니, 하고 만족해야 하는 겁니다.”
흔히들 관청을 공감의 파트너라기보다 요령으로 구워삶을 대상으로 여긴다. 슬기와 소신에 찬 처세가 아니고선 기분 좋게 넘기 어려운 철벽일 수 있다. 고 관장은 아마도 민첩한 머리와 저돌적인 근성의 소유자. 설령 굶어죽는 한이 있더라도 단돈 1원도 부당하게 취하지 않겠다는 결기 역시 그의 것. 진정 그렇다면, 이 난잡한 세속에서 사례가 드물 이 인물은 이미 청정(淸正)거사. 어쩌면 그는 자신이 가진 가장 긍정적인 자질과 양심과 패기를 전량 두레박으로 퍼 올려 귀촌의 나날들에다 쏟아 붓고 있는 중일지도 모르겠다.
생판 모를 타관에 내려왔으나, 고 관장은 내 집 마당인 양 양양히 활개 쳤던 것 같다. 많은 일들을 펼치거나 만들거나 띄워 올려 흐뭇한 성과를 거두었다. 어떤 일들? 그는 영월에 오자마자 마을들을 돌아다니며 주민들 가족사진을 찍어주었다. 결혼식이나 고희연을 찾아다니며 셔터를 눌렀다. 마을 농산물 마케팅 사진도 척척 찍었다. 물론 무료봉사로. 사회적 협동조합 ‘영월 라디오스타 박물관’도 만들었다. 요즘은 귀농·귀촌 교육장에 가서 강의도 한다. 은퇴 귀촌을 바라는 이들에게 득이 될 얘길 들어볼까?
“요즘은 서울에 사는 사람들이 불쌍하다는 느낌이 듭디다. 특히 우리 또래들, 너무 일찍 퇴사하고서 삶의 낙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 오늘은 지하철 몇 호선을 탈까, 겨우 그런 생각이나 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더 그래요. 섣불리 사업에 뛰어들었다가 처갓집 돈까지 까먹는 경우도 많은 것 같은데, 그러지들 말고 귀촌이건 귀어이건 귀산을 하시라 권하고 싶어요. 잴 것 없이, 따질 것 없이 과감하게.”
“흔히들 도시 탈출을 꿈꾸지만 도시생활의 관성에서 쉽게 벗어나질 못하죠. 게다가 실패하거나 괴로워질 가능성이 있는 게 귀촌·귀농이라는 소식도 자주 들려오니 두려워질 수밖에.”
“시골에서 불편한 건 딱 한 가지예요. 의료시설이 열악하다는 거. 그 외엔 도시보다 나쁠 게 없다는 거. 뭐가 문제될꼬. 게다가 시골엔 할 일이 참 많아요. 캐리어와 재능을 가진 도시인들이 시골에 내려와 피폐해진 시골문화를 북돋울 수 있는 기회도 많아요.”
“원주민들과의 융화 문제도 난제라고들 하죠. 뭐 도시에서라고 심통 사나운 삐딱이들이 없으랴마는.”
“아, 텃세 문제엔 귀촌자의 잘못이 더 많아요. 시골의 독특한 문화와 풍습을 재까닥 인정해버리지 못한 잘못!”
“숲속의 자연 생태에도 폭력이 있고 상극이 있죠.”
“단적으로 말해볼까요? 마을에 정말 고약한 사람이 하나 있다 가정합시다. 그럼 그 인간이 죽으면 조용할까? 아니죠. 비슷한 사람이 또 나타납니다. 그게 시골문화예요. 제가 이곳에서 근본을 지키며 살고 있지만 다들 저를 좋아하는 건 아녜요. 열 중 셋은 딴죽을 걸어요. 그게 이상할 게 없는 현상이라 보면 끝! 귀촌자들이 몰려들어야 합니다. 그들의 선의가 시골문화를 더 따뜻하게 만들 수 있으니까.”
부디 좋아하는 일을 즐기시라
시골에도 우뚝한 철부(哲夫)가 있다. 보수적이고 토속적인 마을의 불문율을 존중하며 맘 통하는 토박이들과 어울리는 건 쓸쓸한 일상을 보완해준다. 귀촌인들과의 친선도모도 촌 생활의 불편과 권태를 면제해준다. 고 관장은 귀촌 직후 영월군 농업기술센터 희망농업대학에 입학함으로써 유치원 과정에 입문했다. 이게 무슨 얘기? 귀촌·귀농 초기엔 유치원생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이후 초등 6년까지를 마쳐야만 비로소 시골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고 관장의 논평이 그렇다. 귀촌 8년째인 이즈음에서야 그는 비로소 안전한 정착에 이르렀다는 거다.
“바람직한 건 농업대학에 들어가는 겁니다. 시골을 사는 방법을 배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귀촌인 그룹을 형성할 수 있으니까. 저의 농업대학 동기 34명 중에 90%가 귀촌·귀농을 한 사람들이에요. 이들이 현재 영월군의 문화를 이끌고 있어요. 다들 한가락씩 했던 사람들이지만, 대부분 도시에서 사업하다 망해 시골로 내려들 왔어요. 실패 경험, 그 자체가 큰 배움이겠지. 인생을 크게 배운 사람은 좋은 노후를 누릴 수 있을 것이고.”
그의 눈은 영리한 노루처럼 반짝인다. 목청은 탕탕 우렁차 시원한 맛을 준다. 그의 뇌에 세팅된 최상의 가치는 ‘생동하는 노년’에 있지 않나 싶다. 시간을 허투루 쓸 수 있는 나이는 이미 오래전에 지났으니 이제 성난 수말처럼 내달리자는 것. 그런 그가 늘 홍보하는 소리가 있다.
“사람이여, 부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죽는 날까지 즐기시라!”
그거야말로 신바람 나는 인생이며, 그렇게 사는 표본이 바로 자신이라는 투로 의기양양하다. 그렇다고 고난이 없었으랴. 황소의 뿔을 잡아 패대기치는 것과 같은 분투가 없었으랴. 비바람이야 피할 길 없더라도 내 방향대로, 내 지향대로 살고 있다는 긍지의 표명. 그의 언동엔 그런 게 비친다.
“6학년 5반쯤 되면 남은 인생을 덤으로 여기는 게 현명하다는 생각이에요. 과욕 부릴 때가 아니라는 거. 생활비 크게 들 것 없는 시골에 내려와, 그저 먹고 잘 수 있는 여건 정도만 만들고, 내가 진정 좋아하는 일,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에 몰두한다면 그보다 나은 삶이 다시 있을까? 돈벌이는 아예 남의 일로 치부해버리고, 돈을 벌 경우엔 번 만큼의 가치 있는 일을 당당하게 해내고, 일로써 마을 공동체에 이바지하는, 그렇게 일과 놀이가 함께 붙은 삶이라면, 늘 타인을 고려하는 인생이라면 아무런 결함이 없을 거 아니겠어요?”
나만 좋으면 무슨 소용? 그는 그리 외치고 싶은 게다. 이웃에게 귀 기울이기, 선의의 관심 갖기, 그런 걸 박애(博愛)라 하나? 이 문제에 관해서는 부처님도 예수님도 공자 할배님도 뜻이 같을 게다.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데, 그가 한마디한다.
“인생관을 들어보려오? ‘오늘 이 순간을 재미있게 살자!’ 그런데 요샌 바뀌었구만. ‘마누라를 위해 살자!’로. 하하핫!”
고명진 관장이 들려주는 귀촌준비 Tip
•귀촌해서 돈 벌 생각하지 말자. 도시의 비즈니스 마인드와 시골의 그것은 사뭇 다르다. 특히 돈벌이를 위한 시니어 귀농은 100% 실패한다. 저비용 고효율의 시골생활을 모색하자.
•자신이 평생 해왔던 일과 기능을 썩히지 말자. 일테면, 전기기술자였다면 마을을 돌며 고장 난 가전제품을 수리해주면 된다. 봉사란 행복의 원천이지 않던가.
•마을일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자. 비판을 하더라도 참여하고서 비판하자. 그런 태도가 마을의 건강한 토양을 만든다.
•인터넷은 시골생활의 외로움을 덜어주고, 무한한 정보를 제공한다. 인터넷을 모르면 귀촌하지 말라. 페이스북으로 온 세계와 소통하는 세상이지 않은가.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와 동대학원 졸업. 광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우스갯소리로 들릴 수도 있지만 자식은 두 종류로 나뉜다 한다. 은혜를 갚으러 온 자식, 빚 받으러 온 자식이란다. 전자의 자식을 둔 부모는 행복하겠지만 후자의 자식을 둔 사람은 삶이 고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식에 대한 지나친 애착으로 노후 준비가 뒷전인 사람이 많다. 자녀 학자금 대느라 허리가 휜 뒤에도 결혼 자금 마련으로 모아둔 돈까지 탈탈 턴다. 결혼 비용도 만만치 않지만 신혼살림 집 마련이 가장 큰 부담이다. 결혼 적령기에 이른 자식이 스스로 집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아서다. 베이비붐 세대들은 대부분 신혼 시절을 단칸방으로 시작했다. 규모도 형편이 나아지는 대로 조금씩 늘렸다. 요즘 자식들 상황과는 전혀 달랐다. 지금은 단칸방 월세를 살 형편이면 아예 결혼을 포기한다. 다들 번듯한 가구를 들여놓을 수 있는 규모의 아파트를 원한다.
한 소설가는 자식을 “빚 받으러 온 사람”이라고 표현하며 ‘빨대’에 비유했다. 대학을 졸업시켜도 취업이 잘되지 않아 자녀 취업을 위한 자금까지도 고민해야 하는 현실을 살고 있다. 서울대학교 노화고령사회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은퇴 후 가장 큰 고민은 자녀 학자금과 결혼 자금이다.
2년 전 나는 전업주부 30년 경력자로서 사회에 첫발을 딛고 이것저것 무섭게 흡입하던 초년병, 즉 사회생활 인턴이었다. 요즘은 집밥활동가들이 있어 주부 경력도 쓰임새가 많지만 여전히 경력단절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이전의 내 경력이 무엇이었든 환대받을 만한 특출한 경력이 아니라면 주부 30년 경력은 대부분 쓸모없었다.
이력서를 쓰다 보니 불만이 생겼다. 주부로서 아이를 잘 키우는 게 결국 애국하는 길이라고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지만, 주부야말로 온갖 재능을 필요로 하는 직업 아닌가. 아이들을 보살피고, 진로를 찾아주고,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사람으로 성장시켜 내보내니 각종 컨설턴트의 일과 다를 것이 없다. 다양한 능력을 요구하는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전문가인 것이다.
다행히 요즘은 경력을 물으면 “집에서 살림만 했어요”라고 말하며 주눅이 들던 사람들도 ‘집밥활동가’라는 멋진 이름으로 곳곳에서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사실 나는 이들처럼 집밥 전문가는 아니다. 시어머니가 늘 해주셔서 김치도 제대로 못 담근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넙죽 받아만 먹던 전통 장이 떨어졌을 무렵 배우게 된 ‘장 담그기’가 인연이 되어 ‘집밥활동가’를 알게 되었고 코디네이터로서 수익이 생긴 나의 첫 사회생활이 되었다. 계기는 전혀 엉뚱한 곳에서 시작되었다.
“언니 장 담그기 수료했지? 요즘 일하는 거 있어요?”
“아니 왜?”
“아, 그럼 됐네. 그분에게 언니 연락처 전해줄게. 그쪽에서 연락할 거고 언니가 해본 일이라 잘할 수 있을 거야.”
후배의 전화 한 통으로 영문도 모른 채 ‘서울시장독대아카데미’ 팀에 합류했다. ‘서울시장독대아카데미’는 서울시 주관으로 24개구 주민들에게 전통 장과 바른 먹거리에 대한 중요성을 전문 강사를 통해 알려주는 프로그램이었다.
서울시 지역구를 인접한 구끼리 서부, 남부 등으로 묶어 진행했는데 실무진이 대개 집밥활동가나 장 담그기 장인들이었다. 공석이 된 서부의 종로구 담당 코디네이터가 내 역할이었다. 일반 코디네이터 역할은 대충 알고 있었지만 장독대아카데미라니 생소했다. 잘할 수 있을지 걱정도 되었다.
부랴부랴 내가 담당해야 할 정확한 역할을 알아봤다. 우선 날짜를 정하고 종로구에서 수강생 40명 이상을 수용할 만한 강의실을 찾아야 했다. 연고도 없는 종로구에서 장소 섭외라니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수강생 모집을 위한 웹자보 만들기도 할 일이었다. 강사는 서울시에서 검증한 전문가들이 있었지만 다른 곳과 중복되지 않도록 스케줄을 짜야 했다. 그밖에 강의가 원활히 진행되도록 사전 체크까지 그야말로 다재다능한 능력을 필요로 했다.
예상대로 40명 이상이 강의를 들을 수 있는 큰 공간은 부족했다. 가까스로 서울시 종로구에 위치한 ‘서울시50플러스도심센터’에서 알맞은 강의실을 구할 수 있었다. 신청할 때만 하더라도 유료였는데 서울시에서 공문을 보내준 덕분에 무료로 사용할 수 있었다.
강의실이 정해지자 이번엔 일정에 맞게 강사를 섭외해야 했는데 팀장이 해결해줬다. 강사가 정해진 뒤에는 우왕좌왕하며 이전에 있던 자료를 참고해 웹자보를 만들고 홍보를 시작했다. 그동안 전혀 해보지 않은 일들이었다. 요령이 없으니 생각만큼 성과가 나지 않았다. 40명 인원을 다 채우지 못한 채 강의 첫날이 됐다. 사전 체크를 해야 했으므로 한 시간가량 먼저 도착해 수강생들이 지하에 있는 강의실을 잘 찾아오도록 입구부터 포스터를 붙이고 팀장과 함께 현수막도 걸었다.
강의는 4주 동안 8회에 걸쳐 이어졌다. 강사는 매번 바뀌었는데 하나같이 유익한 내용의 강의를 해줬다. 마지막 수업에서는 팥장 만들기 체험이 있었다. 실습 후에는 자신이 만든 것을 가지고 갔다. 수강생들도 그랬겠지만 수십 년 주부로 살았던 나도 많은 정보를 얻은 시간이었다.
모든 일정이 끝난 날 팀장은 수고했다며 서부 지역을 담당한 코디네이터들에게 맛있는 밥을 사주었다. 이렇게 나의 좌충우돌 첫 코디네이터 활동이 끝났다. 올해는 종로구를 맡을 예정이다. 한 번 해본 경험으로 이번엔 마음이 느긋하다. 수강생을 모으는 방법도 알았다. 아무리 낮선 일들이 생긴다 한들 어떤가. 어차피 다가오는 시간 앞에서는 누구나 인턴일 수밖에 없다. 살아보지 않은 인생은 다 처음이다. 내민 손을 맞잡을 용기만 있으면 된다.
나이가 들어도 여배우는 여배우다. 자신감 가득한 눈빛과 표정은 기본, 자기관리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대사 연습은 또 얼마나 많이 했을까. 대본에 빼곡하게 적어놓은 메모를 보니 지금까지 어느 정도 노력을 기울였을지 짐작이 간다. 배우들의 평균 나이가 70대인 ‘느티나무 은빛극단’을 만났다. 설렘과 벅찬 감동. 무대는 그들에게 언제나 꿈이다.
구로구를 대표하는 시니어 극단
구로문화재단 아트벨리 지하 소강당, 매주 화요일은 정기적으로 구로 시니어 연극 동아리 ‘느티나무 은빛극단’이 모이는 날이다. 지금까지 함께 작품을 해온 세월도 11년째. 2007년 구로문화재단이 설립되고 1년 뒤 시니어 연극 동아리가 생겨난 것이 느티나무 은빛극단의 시초다. 시니어 세대를 위한 프로그램도 있으면 좋겠다는 재단의 뜻이 컸다. 마침 설립 당시 구로구민회관에서는 서울시와 서울문화재단이 주관하는 시니어 교육 프로그램 ‘꿈꾸는 청춘예술대학’이 운영되고 있었다고. 그곳에서 교육받던 시니어를 대상으로 단원을 모집해 창단 당시 20여 명으로 시작했다. 지금은 작년 입단한 신입 배우 우성연(66) 씨를 포함해 현재 13명이 정식 단원으로 활동한다.
배우들의 평균 나이가 70대라지만 시민극단 사이에서는 꽤 유명하다. 2018년 제1회 영동생활시민연극제 초청 공연과 함께 성미산동네연극축제, 서울시민연극제에서 2016년과 2017년 각각 무대에 올린 ‘어미’와 ‘우당탕탕, 이사 왔어요!’로 2회 연속 시상대에 오른 바 있다. 느티나무 은빛극단이 아마추어 연극계에서 나름의 성과를 내는 데에는 구로문화재단의 뒷받침이 있다. 단원의 능력 향상을 위해 연극에 필요한 전문 강사를 초빙해주고, 연극 연습이 있는 날이면 언제든지 쓸 수 있도록 소강당도 빌려준다.
육십 넘어 찾은 재능
느티나무 은빛극단 단원들이 자랑하는 것 중 하나는 바로 출석률. 정기적인 만남은 당연하고 연극 공연을 앞두고 거의 매일 일정이 잡혀도 밤이고 낮이고 제시간에 맞춰 연습 장소에 전원이 모인다. 이유는 단 하나, 무대에 서는 것이 너무 행복하기 때문이란다. 초등학교 학예회 때 연극을 해본 경험이 있다는 신정례(73) 씨는 느티나무 은빛극단에서 연극을 하면서 우울증이 싹 나았다며 밝게 웃었다. 구로구 토박이이자 극단 최고 연장자인 안영분(81) 씨는 어릴 적 못다 이룬 꿈을 이뤘다고 했다.
“구로구청 뒤가 제가 태어난 곳입니다. 세 자매 중 막낸데 언니들이 마차 4개를 붙여놓고 학예회를 하는 것처럼 공터에서 뭔가를 하는 거예요. 언니들이 노래를 부르면 저는 그 옆에서 엉덩이를 막 흔들고 춤을 췄습니다. 공부는 잘 못해도 남들 앞에 서서 하는 건 잘했어요. 동네 아이들한테 무용도 가르치고 나름 공연도 했고요. 중학교 때는 청춘극단 단원이었던 동네 오빠를 따라다녔어요. 당시 유명했던 영화 ‘별들의 고향’을 연극으로 만들어 지금 고려대학교 구로병원 자리에 있었던 제5보충대에서 공연도 했습니다. 그때 제 나이가 15세였는데 아버지가 그만두라고 해서 배우의 꿈을 포기했습니다.”
부모님이 원하는 대로 얌전하게 지내다가 스무 살에 결혼해서 살던 그녀가 바깥 활동을 시작한 건 환갑이 넘어서였다.
“처음에는 구로구민회관에서 노래를 배웠고요. 그 인연으로 연극까지 하게 됐어요. 1년에 한 작품씩은 꼭 하니까 너무 좋아요. 그래서 늙지 않나봐요.(웃음)”
창단 멤버인 이필연 씨는 구내 복지관에서 연극을 하다가 창단 소식을 듣고 입단해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다. 이곳에서 활동하며 배우로서의 재능을 새롭게 발견한 이도 있다. 2012년에 입단한 강정자(75) 씨는 지금까지 연극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다.
“생각도 못했는데 우연히 알게 되었고 용기를 냈습니다. 와서 보니까 이렇게 좋은 인연들도 만나고 행복하더라고요. 제가 참 내성적인데 몰랐던 재능을 발견했어요. 대사 외우는 게 치매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아요. 가족들도 좋아합니다.”
양양례(72) 씨도 이렇게 뒤늦은 나이에 연극을 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안 해봤다고 말한다.
“안영분 씨가 어느 날 같이 가자고 했어요. 한 번도 연극을 해본 경험이 없다 했더니 공부하면 다 할 수 있다 하더라고요. 그렇게 인연이 된 지가 벌써 10년입니다. 살면서 슬프고 힘든 시간도 있었는데 연극 때문에 잘 넘길 수 있었습니다. 여기 오면 마냥 즐거워요.”
서막동(78) 씨는 식당 운영을 잠시 쉬고 있을 때 느티나무 은빛극단 공연을 보러 왔다가 배우가 됐다. 벌써 11년 차 베테랑이다.
“경남 하동 화개장터 쪽이 제 고향인데 연극을 한 번이라도 봤겠어요? 처음에는 떨렸는데 지금은 괜찮아요. 다른 복지관에서도 연극을 합니다. 가끔 연기 잘한다는 소리도 들어요.”
다양한 사연이 연극으로 모여들다
이곳에서 배운 실력을 봉사활동에 연계하는 단원도 있다. 성모병원 과 마포요양원 등에서 봉사를 해온 임절자(77) 씨다.
“봉사활동한 지는 21년 됐어요. 처음 배울 때는 인형극을 했는데 어르신들이 좋아하시더라고요. 어떤 날은 연극하듯 어르신들과 얘기해요. 우리 아이들이 그러더군요. 엄마는 정말 열정적으로 산다고요. 연극은 인생 같아요. 굴곡지고 희로애락도 있잖아요.”
젊은 시절 교편을 잡았다는 안옥희(73) 씨는 직장에 다니는 막내딸의 육아를 책임져줄 생각에 한국방송통신대학 교육학과에 편입한 것이 계기가 돼 연극을 하게 됐다.
“손주 육아와 함께 공부하며 사람들을 만나다 여기까지 오게 됐네요. 그동안 극단 작품 ‘산불’과 ‘어미’에도 출연했습니다. 제가 원래 남자 전문 배우인데 요즘은 연출도 겸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느티나무 은빛극단에는 남자 배우가 없다. 주로 안옥희, 안영분 씨가 남자 역을 맡는다. 한봉애(66) 씨와 임절자 씨도 남자 역으로 무대에 선 적이 있다고. 처음에는 남자 배우도 있었지만 남자 단원의 출석률이 점점 떨어져 여배우 극단이 됐다.
극훈도 있다. “우아하고, 멋있고, 겸손하자”이다. 죽을 때까지 멋진 모습으로 무대에 설 것이라는 느티나무 은빛극단. 2월까지는 휴식시간을 갖고 3~4월 중으로 올해 무대에 올릴 작품을 고를 예정이다. 느티나무 은빛극단을 기억하시라. 한 명, 한 명 연륜에서 우러나온 귀한 열정을 조명 불빛 아래서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mini interview◆
‘여성 리더십’으로 우아하게 극단을 이끌다, 느티나무 은빛극단 대표 이정란
목소리에서 강한 힘이 느껴지는 느티나무 은빛극단의 이정란(78) 대표는 소녀 시절부터 품어왔던 꿈 이야기부터 꺼냈다.
“어려서부터 무용을 했죠. 굉장히 잘했어요. 배우도 해볼까 생각해본 적 있는데 집안 반대로 못했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공무원 생활을 하다 결혼을 했다. 남편은 살림하면서 아이 잘 키우는 아내를 원했다. 아이들 다 키우고 맞이한 여유로운 시니어의 삶. 부부가 함께 노후를 잘 보내는가 싶었는데 남편이 10여 년 전 세상과 이별을 고했다.
“우리 집 양반 돌아가시고 나서 활동하기 시작했어요. 지역 신문을 들춰보다가 인형극 학교가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제가 첫 번째 등록자였어요. 그때부터 연극하고 인연이 됐습니다.”
구로문화재단이 시니어 연극 동아리를 만들어보자며 이정란 대표에게 제안을 했다.
“재단에서 시니어 극단을 만들자고 했을 때 너무 좋았어요. 제가 하고 싶어 했던 거였거든요. 여기저기 다니며 새로 생길 극단을 홍보했어요.”
느티나무 은빛극단을 알릴 수 있는 곳은 다 찾아다녔고 관심 있는 이들과 얼굴을 맞대면서 열정을 불태웠다.
“정말 열심히 했어요. 나이 들면 다들 한 고집하잖아요. 지금까지 모르던 사람들이 연극을 통해 만났으니 무조건 감싸고 서로를 보듬자고 생각했어요. 공연 연습을 할 때 혹시 따라오지 못하는 분에게는 따로 시간을 내서 함께 공부도 하고요.”
극단을 이끌던 지난 11년 동안 지각, 결석, 조퇴를 한 번도 안 해봤다는 이정란 대표. 독하고 무섭다는 말을 들을 때도 있다.
“우리 극단 단원은 한 번 나가면 다시 못 들어와요. 나간 사람들이 다시 들어오고 싶다고 해도 냉정하게 잘랐어요. 너무한가요?(웃음)”
대본 외울 때가 제일 즐겁다는 이정란 대표. 대사를 다 외우고 난 다음에는 단원들이 따라올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지금은 다들 너무 잘하셔서 보람을 느껴요. 강사들도 다 딸 같은 사람들이지만 깍듯하게 대우합니다. 단원들 출석률은 칭찬받을 만큼 좋고요. 참 2011년도에 극단 이름을 공모했는데 제가 응모한 아이디어가 채택됐어요. 느티나무는 구로를 상징하고 은빛은 시니어를 의미합니다.”
이 대표는 최근 또 새로운 도전을 했다. 바로 복화술이다.
“연극과 구연동화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배우는 겁니다. 나는 나이 먹어서 못한다는 소리를 안 해요. 자존심 상해서요. 우리 며느리가 그러더라고요. 내가 롤 모델이라고. 나처럼 늙고 싶대요. 항상 도전하는 정신으로요. 연기는 ‘80세까지만 하자!’ 했는데 벌써 팔십이 다 되어가네요. 대본 외울 수 있을 때까지는 무대에 설 겁니다.”
※ 라이프@이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소개하고 싶은 동창회, 동호회 등이 있다면 bravo@etoday.co.kr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겨울 살림 준비의 첫 번째는 난방이다. 우리 조상들도 온돌만으로는 부족해 화로를 이용했다. 자다가 화로를 걷어차서 가끔씩 사고도 일어났다. 나무를 땔감으로 사용하던 시절을 벗어나면서 연탄이 겨울철 난방의 주인공이 되었다. 벌거숭이산을 푸르게 만든 공신은 석탄이었다. 하지만 다 타고 난 연탄재 처리가 문제로 떠올랐고 연탄가스로 해마다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연탄가스배출기를 개발해 연통 끝에 달았다. 강제로 연탄가스를 뽑아내도록 해서 효과를 톡톡히 봤지만 정전이 되면 가스배출기가 오히려 연통을 막아 피해를 더 키웠다. 학교에서는 갈탄난로가 인기였다. 그 난로 위에 도시락을 탑처럼 쌓아서 데워 먹던 학창 시절은 나이 든 사람들에게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경제성장의 혜택으로 삶이 윤택해지면서 전기와 가스를 이용한 난방도 점차 늘어났다. 전기는 그 특성상 장점이 아주 많은 연료임에 틀림없다. 첫째, 연료창고가 필요하지 않아 보관이나 운반 걱정이 없고 연탄처럼 재를 남기지도 않아 청소할 일도 없다. 둘째, 켜고 끄는 것이 간단하고 온도조절도 쉽다. 타이머를 이용하면 잊고 있어도 자동으로 켜고 끄는 것이 가능하다. 셋째, 청정에너지라서 깨끗하고 연기도 없다. 산소가 없어도 발열이 가능해 밀폐된 바닥에도 전기히터 시설이 가능하다. 넷째, 안전장치를 달아 난방기구가 넘어지면 자동으로 꺼지거나 차단기가 작동해 누전이나 합선사고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것들에는 장단점이 있다. 전기의 단점은 첫째, 형식승인도 안 받고 조잡하게 만든 불량제품이 있다. 일반인이 가려내기가 쉽지 않다. 값이 싸다고 덜컥 구매해 사용하면 안전장치가 미흡해 화재를 일으킬 위험성이 있다. 안전인증제품인지 확인하고 구매해야 한다. 둘째, 전기난방기구 주위에 옷이나 유류 등 인화성 물질이 있으면 화재로 이어질 수 있다. 셋째, 사용 방법을 잘 모르면 위험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온도를 너무 높이면 화상 위험이 있고 너무 약하게 하면 난방 효과가 떨어진다. 넷째, 하나의 콘센트에 문어발식으로 여러 개의 전열기구 코드를 꽂아 사용하면 전원이 차단되는 불편을 겪거나 콘센트나 배선이 발열되어 합선사고가 일어날 수 있다.
소방청의 2018년도 화재통계에 따르면, 전기장판이나 전기히터 등 전열기구가 원인이 되어 205건의 화재가 발생했다. 이 중 58건은 사용자 부주의로 일어났다. 사람과 기계가 잘 조합이 돼야 백퍼센트 안전보장이 가능하다. 자동차가 아무리 잘 정비되어 있다 해도 운전자가 조심하지 않으면 사고가 일어나듯 기구를 사용하는 사람이 사용법을 제대로 몰라도 문제가 발생한다. 전기기구는 반드시 안전제품을 사용해야 한다. 형식승인이 난 제품인지 확인하고 구입해야 한다. 사용설명서도 잘 읽어야 한다. 외출할 때 기구를 끄고 나가는 것은 안전의 기본이다.
저마다 살아온 인생 속에서 ‘고수’라 불릴 만한 영역은 존재한다. 스스로 고수라 자부할 만한 재능이 있다면 좀 더 생산적인 활동을 해보면 어떨까. 재야에 숨은 고수들을 널리 알리고, 고수들의 손길이 필요한 소비자를 매칭해주는 O2O플랫폼 ‘숨고’를 소개한다.
도움말 숨고(soomgo)
최근 ‘재능거래’, ‘재능마켓’ 등으로 불리며 전문가와 소비자를 연결하는 플랫폼이 늘어났다. ‘숨은 고수’를 뜻하는 ‘숨고’는 이러한 전문가들을 ‘고수’라 칭하며 900여 분야의 매칭 서비스를 제공한다. 900가지라는 숫자에 놀라겠지만, ‘반려견 산책’, ‘주례’, ‘게임레슨’ 등 그만큼 소소한 영역까지 폭넓게 아우르기에 가능한 일이다.
중장년 고수들 환영합니다!
은퇴 후 경제활동을 위해 그동안의 경력이나 경험을 살려 새로운 일을 시작한다. 이때 회사에 입사하지 않고 개인사업자나 프리랜서 등으로 활동하기엔 어려움이 따른다. 고객유치를 위한 홍보비용이나 중개수수료 부담이 적지 않기 때문. ‘숨고’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수에게 수수료 차감 없는 수입을 보장한다. 게다가 온라인과 앱을 통해 자신의 재능을 홍보하면서 소비자와 커뮤니케이션까지 가능해 부담 없이 효율적으로 활동할 수 있다. 고수들을 선정하는 기준도 따로 정해진 것은 없다. 타 플랫폼과 다르게 소비자에게 고수들에 대한 선택과 평가를 맡기는 시스템. 덕분에 누구나 자기 노력에 따라 공정한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소비자들이 선호하는 고수는 사회 경험이 풍부하고 오랜 경력을 지닌 중장년층. 각종 외국어 과외, 번역, 인테리어, 청소, 컨설팅, 출판 등 대부분 주요 서비스에서 시니어 고수가 주목받고 있다. ‘숨고’ 박성현 마케팅 담당자는 “카카오톡이나 유튜브 정도 사용하는 시니어라면 충분히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서비스다. 특히 은퇴 후 경제적 부담 때문에 마음속으로만 고민했던 일에 도전하거나 창업 전 소규모 비즈니스를 시험해보기에 적합하다”고 설명했다.
고수들의 공통점 ‘경험×노력’
‘숨고’를 통해 고수로 활약하는 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주거 청소의 고수 김해수(60) 씨. 과거 30여 년 동안 인테리어 관련 중소·중견 기업의 관리직으로 일한 경험과 유난히 꼼꼼한 성격 덕분에 퇴직 후 제2직업으로 ‘주거 청소’ 분야로 전향할 수 있었다. 청소라면 누구보다 자신 있었지만, 내 집 아닌 고객의 집을 청소해 만족감을 주는 건 또 다른 얘기였다. 즉, 고수라 자부했어도 타인에게까지 인정을 받기란 쉽지 않은 일. 김 씨는 “청소는 손기술이 전부라 생각하지만, 공부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관련 분야 다른 고수들의 기술을 관찰하거나 새로 나온 세제나 약품 등을 조사하고, 자신만의 청소법을 연구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면서 앞으로는 주거 공간 외에 빌딩이나 공장 등으로 영역을 넓혀 진정한 ‘청소 고수’로 거듭나겠다는 포부를 다졌다.
오랜 세월 주부생활로 갈고닦은 살림 노하우를 살려 ‘정리수납’ 고수로 활동 중인 류현숙(57) 씨. 주거 청소와 더불어 중장년 여성들의 참여가 많은 분야다. 류 씨 역시 평범한 주부였지만, 건강만 유지된다면 노후 자금 마련도 가능하리라는 생각에 ‘숨고’에 자신의 재능을 알렸다. 정리수납 전문 자격증도 취득한 그는 “자격증보다 중요한 건 경험치”라며 “정리수납 서비스를 대행하는 업체를 통해 활동하기도 하지만, 이러한 플랫폼을 통해 프리랜서로서 개인 수익을 올릴 수 있는 것이 매력”이라고 덧붙였다. 아울러 “정리수납 일은 거의 하루 종일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데, 어린 자녀를 둔 사람은 힘들 수 있다. 자녀가 독립한 중장년 주부들이 도전하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LG전자 연수원장과 LG플레이 총무팀장 등을 지내며 인사 관리와 교육 관련 일을 해온 권규청(58) 씨는 직장에서의 이력을 바탕으로 ‘취업 컨설팅’ 분야의 고수가 됐다. 취업난을 겪는 청년 세대에게 자신의 경험을 통해 도움을 주고 싶었고, 전문성을 더하기 위해 심리 상담이나 멘탈코칭 등 관련 공부를 해나갔다. 그는 “취업 컨설팅 관련해서는 젊은 코치들도 많지만 조직생활 경험이 적어 부서별, 업무별로 어떤 역량이 필요한지 자세히 모르는 경우가 많다”며 “취업자들도 사회생활 노하우가 풍부한 시니어 고수들을 선호한다”고 말했다.
‘숨고’ 담당자는 “청년 고수들과 비교해 오랜 경력을 자랑하고 자신만의 노하우를 잘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중장년 고수를 신뢰하는 편”이라며 “꼭 직장 경험이 아니더라도 오랜 취미나 특기를 살려 고수로서 제2의 커리어를 찾길 바란다”고 시니어 고수들의 활약을 독려했다. 숨겨두기 아까운 재능이 있다면, ‘숨고’의 고수가 되어 필요한 이들에게 한 수 발휘해보는 것 어떨까?
국민배우 김수미(70)를 모르는 대중이 있을까? 그러나 우리에게 익숙한 그 이름이 예명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지킬 수(守), 아름다울 미(美). 사람의 도리를 지키고 늙을 때까지 아름답게 살자는 결심으로 직접 지은 이름이란다(본명은 영옥). 그 이름에 반하지 않는 삶을 살아왔노라 자부하는 김수미는 최근 ‘한국의 맛을 지키는[守味]’ 문화 전도사 역할까지 해내고 있다. “전 세계에 한국 음식을 알리고 싶다”는 그녀의 원대한 포부는 40여 년 전 어머니를 향한 짙은 그리움에서 시작됐다.
‘2018 제8회 대한민국 한류대상’ 시상식. ‘수미네 반찬’(tvN)을 통해 우리네 어머니의 손맛을 전수 중인 김수미는 한식 문화를 대중에게 널리 알린 공을 인정받아 ‘특별 공로대상’을 수상했다. 방송을 본 이들이라면 알겠지만 ‘수미네 반찬’은 근래 넘쳐나는 먹방, 쿡방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모던한 아일랜드 주방이 아닌 툇마루와 가마솥이 돋보이는 세트장은 김수미가 어린 시절 살던 시골집을 재현한 것. 게다가 제자로 등장하는 베테랑 셰프들이 눈대중 손대중으로 요리하는 그녀의 레시피를 허둥지둥 따라하는 묘한 광경이 펼쳐진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색다른 재미를 주고, 그 근저에 깔린 ‘엄마의 마음’은 가슴 찡한 감동을 선사하며 남녀노소 불문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이렇게까지 반응이 좋을 줄 예상 못했어요. ‘아, 진정성을 갖고 하는 건 역시 되는구나’ 싶더라고요. 몇 스푼, 몇 그램 정확한 것보다도 집에서 하는 방식 그대로 보여주려 해요. 워낙 거침없이 해대니까 카메라가 앵글을 못 잡아 당황할 때가 많지.(웃음) 처음엔 장동민 씨가 ‘선생님 레시피가 있으시냐?’라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너희 할머니, 어머니는 저울질해가며 음식하셨니? 요리자격증 있어서 자식들 밥해줬니?’라고 했죠. 그냥 엄마가 딸한테 음식 가르치듯 알려주고 싶었어요. 싱거우면 소금 넣고, 짜면 물 붓고 하면 되지. 경험이 쌓이면 손맛은 다 생기게 돼 있어요.”
‘깍두기에 쪽파를 많이 넣으면 김치가 금세 물러진다’, ‘아귀찜할 때 아귀는 사나흘 꾸덕꾸덕 말린 것을 써야 한다’ 등 김수미는 자신이 툭툭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가 수십 년 시행착오를 통해 얻은 음식의 지혜라고 말했다. 또 글로 써서 남기는 레시피보다는 어머니들의 기(氣)와 영혼을 물려주고 싶은 게 그녀의 오랜 바람이자 목표다.
엄니, 왜 그 맛이 안 날까요?
베테랑 셰프들도 인정하는 김수미의 수준급 요리 실력은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그러나 정작 어머니에게 직접 요리를 배워본 적은 한 번도 없단다. 그 옛날 어머니가 해주셨던 음식들을 떠올리며 최대한 그 맛에 가까워지려 하다 보니 솜씨가 좋아졌다고.
“열일곱 어린 나이에 엄마가 돌아가신 탓에 요리는 못 배웠죠. 아마 내가 마흔까지 살아계셨다면 음식 안 했을지 몰라요. 할 필요가 없었겠지. 근데 결혼하고 임신을 했는데 엄마가 해준 풀치조림이 생각나는 거야. 그거 한 입만 먹으면 입덧이 싹 가실 것 같은데, 다시는 먹을 수가 없잖아요. 그 뒤로 엄마가 보고 싶을 때면 기억을 더듬어 음식을 해보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수백 번 만들었던 엄마의 풀치조림. 그때마다 그립고 그리운 우리 엄니….”
음식을 하면 할수록 손맛도 늘고, 허기도 채울 수 있었지만, 그리움은 더욱 짙어졌다. 아무리 해도 전에 먹던 그 맛이 나지 않으니 헛헛할 수밖에 없다고.
“요즘처럼 추울 때 엄마는 김치콩나물밥을 해주시곤 했죠. 가난한 살림에 푸성귀도 없으니 엄마 나름 궁여지책으로 내놓은 한 끼였을 거예요. 지금은 그 소박한 김치콩나물밥에 소고기까지 넣어 먹는 호사를 누리는데도 엄마가 해주시던 것만 못하네요. 가마솥에 지은 김치콩나물밥에 엄니표 양념간장 쓱쓱 비벼 먹던 그 추운 겨울날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김수미는 줄곧 자신의 음식은 ‘엄마를 향한 그리움과 사랑’이라 표현했다. 때문에 편의점 도시락으로 식사를 하는 젊은이나 인스턴트로 아이들 끼니를 해결하는 주부들이 늘어나는 현실에 안타까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냉동, 반조리 식품 먹고 자란 아이가 성인이 됐을 때, 어떤 음식으로 엄마를 추억할까 싶어요. 두부 한 모를 썰더라도 엄마의 손길이 닿으면 그 음식에 온기가 더해지고 영혼이 담기는 거거든요. 그렇게 정성스러운 음식을 먹으면 마음이 온순해지고, 순간 행복을 느낄 수 있죠. 나이 먹어서도 마찬가지예요. 난 예전에 행복은 어디 다락이나 보자기에 싸서 놓은 줄로만 알았어요. 근데 그렇지 않더라고요. 좋은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에 숟가락 푹 담그면서 밥 먹는 거. 가족과 함께하는 저녁이 있는 삶. 그게 바로 행복이지.”
“훌륭한 음식은 영혼을 감동시킨다”고 말하는 김수미에게 ‘소울푸드(soul food)’는 무엇인지 물었다. 단박에 ‘된장찌개’라고 대답한다. 구십까지 살아도 된장찌개와 총각김치만 있으면 다른 반찬 필요 없다는 그녀. 본인 입맛은 소탈하지만, 맛있는 반찬 소개하려 아낌없이 재료를 쓴 것이 뜻하지 않게 오해를 사기도 했다.
“방송 1회 때 고사리보리굴비조림을 했어요. 당시 재료비로 따지면 제주산 고사리라 5만 원은 넘게 줘야 사고, 보리굴비도 10만 원은 했을 거예요. 그걸 보고 한 시청자가 댓글을 달았더라고요. ‘김수미 씨는 돈 잘 버니까 비싼 재료도 막 쓰는 거 아니냐’라고요. 생각해보니까 누가 집에서 한 끼 반찬에 15만 원씩 주고 먹겠나 싶은 거죠. 그 댓글이 참 귀하게 다가왔어요. 그래서 요즘엔 진미채, 감자볶음처럼 1만 원 안에서 해결할 수 있는 반찬으로 준비해요. 앞으로도 ‘수미네 반찬’에서는 비싼 재료 안 쓸 생각입니다.”
끝이 아닌 마지막 인사
‘그리운 것은 말하지 않겠다’, ‘나는 가끔 도망가 버리고 싶다’, ‘미안하다 사랑해서’, ‘그해 봄 나는 중이 되고 싶었다’, ‘너를 보면 살고 싶다’. 제목만 봐도 글쓴이의 심정을 알 것 같은 이 책들의 저자는 바로 김수미. 국문학도를 꿈꿨지만 대학 진학을 못한 아쉬움을 독서와 글쓰기로 달래며 살았다. 에세이와 소설, 레시피북까지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며 그동안 내놓은 책만 10여 권. 그리고 최근 마지막 에세이 ‘안녕히 계세요’를 집필 중이라는 소식이 들려왔다. ‘마지막’이라니. 그 의미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칠십이 넘었는데 내일 당장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요. 내가 워낙 준비성이 철저하거든. 준비할 수 있을 때 준비하자, 주변 분들에게 여유 있게 인사 남기고 가자는 마음으로 ‘안녕히 계세요’를 쓰기 시작했죠. 마지막 에세이라고 했지만, 책 내고 한 5년, 10년 더 살면 어때요. 그럼 더 좋은 거지. 걱정 마세요 여러분, 저 당장 안 죽어요!(웃음)”
이번 책에는 어린 시절부터 살면서 겪은 충격적인 사건들까지 모두 담아낼 계획이란다. 그렇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난 뒤의 삶은 어떻게 그리고 있을까?
“조용필 노래 ‘킬리만자로의 표범’의 ‘내가 산 흔적일랑 남겨둬야지’ 이 가사가 참 좋아요. 내가 위대한 사람 같으면 괜찮은데, 나는 너무 하찮기 때문에 꼭 흔적을 남기고 싶어요. 시골에서 올라와 이만큼 고생했는데, 그 흔적조차 안 남기면 내 한이 풀릴 것 같지 않아. 그래서 자꾸 뭐든 흔적을 남기려 해요. 앞으로는 그 흔적 중 하나가 ‘수미네 반찬’이 되지 않을까요? 이 프로그램은 애당초 계약 조건을 ‘선생님(김수미) 건강이 허락하는 한’ 이렇게 해서 사인했어요. 내가 죽기 전까지 ‘수미네 반찬’은 계속할 거예요.”
2018년이 저물어가는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뜨거운 화두 중 하나는 전방위적인 국방 개혁이다. 북한과의 관계가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국면으로 들어서고 있는 현재, 군대의 활용 또한 과거와는 다른 의미를 가져야 한다. 그 속에서 국가보훈산업 또한 어떤 모습이 될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국가보훈과 사회발전을 위한 남다른 사명감으로 1994년 ㈜상훈유통을 창업한 후 24년 동안 지속성장을 실현하며 선진유통 전문기업으로 발전시킨 이현옥 회장이 올해 팔순을 맞았다. 지난 20여 년에 걸친 보훈산업의 산증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그를 만나 기업의 성공 스토리와 경영 철학에 대한 소신을 들어봤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단어는 ‘창업’일 것이다.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 러시가 걷잡을 수 없이 가속화되고, 일자리 부족으로 인한 청년층의 취업 실패가 누적되면서 모든 세대가 너도나도 창업에 뛰어들고 있다. 그러나 창업 후 3년 이상 존속하는 기업의 수는 매우 적다. 또한 현상 유지 수준을 넘어 지속성장을 이루는 기업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이러한 현실에서 1994년 상훈유통을 창업해 고용 창출과 국가 세수 증대에 기여하며 24년 동안 꾸준한 성장을 실현한 이현옥 회장은 자신의 업에 대한 남다른 자부심이 있었다. 일제강점기인 1939년에 태어나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기를 보내고 인생 말년에 이르러 거대한 전환기의 기업 오너로서 사회적 역할을 다하고 있는 그는 창업을 생각하는 많은 이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무모한 도전, 과감한 결단
“창업하기 전까지 한국보훈복지의료공단에서 20여 년간 재직하며 국가 유공자들에 대한 지원 사업을 추진했는데, 정부의 보훈복지 예산과 사회적 관심 부족 등으로 애로사항이 많았습니다. 특히 다수의 국가 유공자가 정부 복지지원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 현실이 늘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이분들을 위해 개인적으로라도 무언가 도움을 드릴 만한 일을 할 수 없을까 고민하던 중 마침 기회가 주어져 KT&G 연관 사업을 시작하게 된 겁니다.”
이 회장은 사업 초기에는 자본이 부족해 살고 있던 아파트까지 처분했다고 한다. 무모한 도전이라고 모두가 말렸다. 그러나 이 회장은 보훈공단에서 관련 사업을 추진하며 쌓은 경험과 노하우, 신뢰기반 등을 감안할 때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만에 하나 실패할지라도 국가와 사회를 위한 뜻 있는 결단이었던 만큼 큰 후회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것이 현재의 강소기업 상훈유통이라는 보답으로 드러난 셈이다.
20여 년간 보훈단체에서 공직생활을 한 이 회장은 상훈유통을 세울 때 국가보훈이라는 분명한 목표를 정하고 일을 진행했다. 상훈유통은 SOFA (Status of Forces Agreement) 면세품 양도 양수 사업, 한국인삼공사 정관장 홍삼 제품 및 홍삼 음료 판매 사업 등을 갖고 있으며 상훈영농조합법인을 운영하는 기업이다.
전문가를 넘어 멀티 플레이어가 되라
이 회장은 창업에 뛰어드는 사람들에게 ‘멀티 플레이어’가 되라고 조언한다. 전문가 역량만으로는 기업을 이끌기에 부족하다는 것이다.
“기업이란 본질적으로 수익 창출을 위한 조직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아마도 수익을 창출하는 일, 즉 돈을 버는 일일 것입니다. 경영자는 이 어려운 일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내야만 하는 사람입니다. 일반 직장인이라면 자신이 맡은 일 한 가지만 잘해도 조직에서 인정받고 성공할 수 있지만 기업을 이끄는 경영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남다른 비즈니스 감각과 리더십, 통찰력, 판단력을 지녀야 함은 물론 생산, 영업, 관리, 고객업무 등 기업 활동의 전 분야를 폭넓게 알고 이끌어갈 수 있는 역량을 갖추지 못하면 성공을 거두기 어렵습니다.”
그는 기업이 발전할 수 있는 비결이란 “결국 고객이 필요로 하는 좋은 제품을 편리한 시스템을 통해 적정 가격에 공급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신뢰’라는 가치덕목 또한 강조했다. 기업이 고객들에게 우수한 제품과 서비스를 지속적, 안정적으로 공급할 것이라는 신뢰감을 심어줘야 한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기본 중의 기본에 대한 이야기들이지만 이 기본을 지키는 게 어려운 세상이다. 특히 보훈산업이라는 보수적인 분야에서 이러한 기본 가치들은 다른 산업보다 더 강조되고 지켜져야 한다.
돌발적인 외부 위기를 이겨내는 맷집
물론 상훈유통을 경영하면서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관리 가능한 내부 요인보다는 갑작스럽게 치고 들어오는 치명적인 외부 요인이 기업의 미래를 위태롭게 만든다. 현재 세계 경제는 미국과 중국이 벌이는 무역전쟁의 장기화로 그야말로 시계 제로의 상황에 놓여 있다. 이러한 돌발 상황을 견뎌낼 수 있는 맷집이야말로 기업의 역량을 종합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이 아닐까. 이 회장이 그 어려운 길을 돌파한 것 또한 군인 정신을 연상하게 하는 맷집이었다. 베트남전에서 하사로 참전했던 그의 경력도 무관치 않아 보였다.
“창업 후 1990년대 말 외환위기와 2000년대 후반 글로벌 금융위기, 그리고 관련 정책과 제도 등의 변화로 몇 차례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기업이 외부 환경 변화로 어려움을 겪을 때 이를 어떠한 노력과 방법을 통해 타개, 극복하느냐가 가장 중요한 관건입니다. 제 경우에는 그때마다 고객과 직원들, 평소 성원해주신 주변 분들을 생각하며 이들에게만큼은 절대 실망을 주면 안 된다는 일념으로, 그리고 이분들의 기대와 성원에 반드시 보답해야 한다는 각오로 어려움을 참고 이겨냈습니다.”
군 관련 사업을 하는 만큼 정치적 부침에 따른 위기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몇 해 전에는 비즈니스와 관련해 모 기관에서 불거진 사건 때문에 자택 압수수색을 받기도 했다. 갑자기 들이닥친 조사관들 때문에 가족들이 놀랐음은 당연했다. 그러나 놀란 것은 조사관들 또한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집안 살림이 너무 검소했고 조사를 거듭해도 문제가 발견되지 않아서 조사관들이 오히려 당황했던 것이다.
기업은 내 것이 아니라 사회의 것
온갖 어려움들을 견뎌내며 아직 현역으로 상훈유통을 진두지휘하는 이 회장은 무조건 기업 규모를 크게 키우는 일은 지양한다고 밝혔다. 이는 미래 상훈유통의 청사진이기도 하다.
“대기업이기보다는 오히려 강소기업, 또는 내실 있는 중견기업이 더 좋은 점이 많습니다. 특히 저는 상훈유통이 일본이나 유럽 기업들처럼 후세에까지 기업의 전통과 문화가 길이 이어지는 장인기업, 장수기업이 되길 원합니다. 그래서 무리한 욕심을 경계, 절제하면서 내실경영, 안정경영 위주의 경영전략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 회장이 바라는 상훈유통의 미래는 내실과 안정 기반을 갖춘 수성(守成)의 역사다. 사업 프로세스의 지속적 혁신, 전문 인재의 양성, 시장 및 고객다각화 등 가진 것을 전제로 차분하게 길을 만들어가고자 하는 그의 생각은 사회를 향한 기여로도 이어지고 있다.
나눔을 통해 더불어 느끼는 행복
상훈유통의 시작이 국가 유공자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세워진 만큼, 이 회장은 그동안 사회공헌 활동에 적극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미 120억 원이 넘는 금액을 사회에 내놓은 이 회장은 자신의 막대한 기부활동에 대해 분명한 논리를 밝혔다.
“혹자는 기업의 사회적 기여 역할에 대해 ‘결과적 기여’, 즉 기업이 지속적인 사업으로 고용과 세수 증대 등에 기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에 더해 ‘의도적 기여’ 역시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결과적 기여만으로는 그 파급 효과가 느리고 수혜 범위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회장은 사회 각계에 대한 자신의 꾸준한 기부는 특별히 좋은 일을 한다기보다는 사회 구성원으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의무라 생각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기업은 개인의 소유가 아닙니다. 기업이 추구해 달성하는 수익은 결국 사회로부터 창출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나눔과 상생의 철학으로 사업 수익의 일정 부분을 사회로 환원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다만, 이를 어떤 방식으로 어느 분야에 환원할 것인가는 기업인들 각자가 판단할 몫입니다. 제 경우에는 주로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한 국가 유공자분들께 도움을 드리는 것이 의미 있다고 생각하고 이 분야의 지원활동을 꾸준히 실천해왔습니다.”
인재 놓치지 말 것
그는 팔순의 나이이지만 회사의 미래를 위한 성장동력을 여전히 고민하고 있다. 최근 이 회장이 신경 쓰고 있는 부분은 사내 인재 양성이다. 이를 위해 상훈유통은 ‘공익 가치를 창출하는 선진유통 전문기업’이라는 비전을 정립했다. 회사의 미래를 이끌어갈 차세대 인재는 이 비전에 기준해 선정되고 육성될 예정이다. 또한 미래 인재의 육성과 함께 회사 초창기에 입사해 아직까지 근무하는 장기근속 직원들에 대한 감사도 잊지 않았다.
평소 충효사상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 회장은 가족애와 효의 모범을 보인직원들에게 특별휴가와 가족여행 전액을 지원하는 등 효 사상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또 신의를 중시해 한 번 인연을 맺은 사람과는 끝까지 교류를 이어간다. 일자리가 없는 사람에게는 알맞은 직장을 소개해주고, 결혼을 못한 사람에게 중매를 서고, 고충이 많은 사람 이야기에 귀를 내어주는 등 굳이 부탁하지 않아도 선뜻 나서서 기어이 해줘야만 마음이 편안해진다. 천성적으로 정이 참 많은 사람이다.
주변에서는 이 회장이 아무도 모르게 사람들을 도와주고 한결같은 자세로 보훈정신을 되새기고 받들어온 CEO라고 입을 모은다.
팔순의 나이에도 검은 머리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는 이 회장은 칠순에 골프를 시작할 정도로 그야말로 만년 청춘이다.
“바빠봐, 바쁘다 보면 늙을 시간도 없어요. 가는데 순서없고 빈손으로 다 가는거지. 일을 계속해야 늙지 않아요.”
지칠 줄 모르는 그의 올곧은 마인드가 우리 독자들에도 훈훈한 미담이 되길 바라면서 어려운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이 회장께 올해가 가기 전에 뜨끈한 생태찌개 한 그릇 대접하고 싶다.
어디로 귀촌할까, 오랜 궁리 없이 지리산을 대번에 꾹 점찍었다. 지리산이 좋아 지리산 자락에 자리를 잡았단다. 젊은 시절에 수시로 오르내렸던 산이다. 귀촌 행보는 수학처럼 치밀하고 탑을 쌓듯 공들여 더뎠으나, 마음은 설레어 일찌감치 지리산으로 흘러갔던가보다. 지금, 정부흥(67) 씨의 산중 살림은 순조로워 잡티나 잡념이 없다. 인생의 절정에 도달했다는 게 아닌가.
처음엔 미친 짓이라는 소리를 흔히 들었다지. 정부흥 씨는 임야 1만8000평을 사들여 일을 개시했다. 이 거창한 행세에 쓴소리들이 난무했던 모양이다. 외지고 으슥하고 가파른 산 덩어리여서다. 긴 고행이 빤히 보여서다. 그러나 기꺼이 자청한 고행은 고행이 아니라 순행(順行)이다. 절박한 눈으로 뒤를 돌아본 정 씨는 도시에서의 지난 생이 오히려 고행에 가까웠음을 알아차렸던 것 같다. 어라? 나를 목줄 채워 끌고 다닌 도시를 벗어나겠다는 데 왜들 난리람! 아마도 그쯤의 생각과 각오가 머릿속을 굴렀을 게다.
정 씨는 전남대학교 자원공학과를 나온 공학 박사다. 대전 대덕연구단지에 있는 한국지질자원연구원에서 책임연구원으로 일하다 2012년에 퇴직했다. 임야는 은퇴 이전에 이미 사뒀다. 수시로 터를 드나들며 정을 붙였다. 귀촌 마스터플랜을 근사하게 준비하고서 임야에 길을 닦고, 기반공사를 하고, 임시 거처를 지었다. 퇴직 후에는 완전한 이주를 하고 본집을 거하게 지었다. 크고 너른, 반듯하고 웅장한 그의 거처는 이제 숲속 대궐에 가깝다. 부부 단둘이 살기엔 너무 방대한 규모로 보이지만 정 씨의 꿈과 이상이 실린 공간이다. 그의 수완과 통과 너름새가 비치는 구색이다.
터에 들어선 품목들이 크고 많으니 해온 일, 헤쳐나온 시련이 산더미였을 것이다. 신역도 신산(辛酸)도 자심했을 테지. 그러나 그는 일에 신명을 냈더란다. 오지게 터진 일복에 심취할 절호의 찬스를 만났다는 투로. 그렇다면 그는 근력 짱짱한 장한(壯漢)? 실은 정반대다. 지병을 달고 살아왔으니 말이다. 50대 후반쯤 당뇨병 여파로 들이친 풍을 맞아 반신마비에 빠졌고, 강철 같은 의지로 마비에서 탈출했으나 여전한 당뇨는 신중히 관리하며 지내왔다. 지리산으로 가자, 그게 살길이다! 그는 그렇게 부르짖으며 산중으로 귀촌했다. 몸이 망가졌으니 흐느껴 나온 생각들이 많았을 게다. 마음의 비장한 물결에 젖어 한탄을 거두고 속으로 다진 것도 많았을 테지. 그럴 즈음 지리산이 그를 호명했고, 그는 득달같이 응했던 모양이다. 이 불운하고도 야무진 사람의 눈은 단춧구멍처럼 간신히 째졌을 뿐이지만, 얼굴엔 자주 홍소(哄笑)가 출렁거린다.
“직장생활이라는 게 스트레스 많은 정신노동의 연속이었어요. 그러다 보니 두주불사가 잦았어요. 결국 몸을 망쳐 당뇨와 뇌졸중이 겹치는 지경까지 갔던 겁니다. 인생을 통틀어 가장 극심한 시련이었죠. 5년여에 걸친 재활치료로 다행히 반신불수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이대로 계속 도시에서 살다간 죽을 수도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어요. 귀촌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어요.”
“귀촌이, 산골생활이 건강을 호전시킨 셈인가요? 귀촌을 통해 중병을 고쳤다는 사람이 많더라고요.”
“두 가지 요인에 힘입어 건강을 도모할 수 있었어요. 하나는 아내의 헌신적인 조력입니다. 까다로운 식이요법을 아내 덕분에 철저하게 행해왔으니까. 생명의 은인이랄까, 그런 아내에게 제가 꼼짝을 못합니다.(웃음) 또 하나의 요인은 귀촌을 해서 만난 좋은 자연환경이에요. 숲길을 날마다 걸었어요. 배수진을 치고, 즉 목숨을 걸고, 운동 아니면 죽음이다, 라는 각오로 줄기차게 걸었죠. 요즘도 마찬가지예요. 아직 당뇨병이 있지만 내 몸 안에 들어온 평생 친구라 생각하며 관리하는 중이에요.”
“이 너른 터전과 다수의 건조물, 숲과 텃밭, 이런 것들을 어떻게 능히 짓고 가꾸고 관리해왔죠? 온전치 않은 건강으로 말이죠.”
“젊음과 자금력, 이 둘의 추진력이었어요.”
“인생의 하오에 젊음이라니요?”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이 산골에 들어온 초기엔 엄청 젊었던 것 같아요. 하늘을 잡고 도리뱅뱅이질을 쳤죠. 무모하긴 했어요. 그거 아세요? 저희 같은 연구원들의 특질이 뭐냐면, 항상 도전한다는 거.”
끊이지 않았던 사건 사고
그가 도전한 종목은 여럿이다. 귀촌의 성공 모델을 본때 있게 실현하겠다는 것, 몸을 아끼기보다 닳도록 써 건강을 살리겠다는 것, 자연과 호형호제하며 마음의 평화를 누리겠다는 것, 오누이처럼 부부가 다정하게 잘 늙어 여생을 동행하겠다는 것. 가련하고 허무한 게 인생사이지만 선한 지향이 뚜렷한 사람의 발길엔 정채(精彩)가 서린다. 안간힘을 다하면 갈 것은 가고 올 것은 온다. 그는 열렬한 활보로 귀촌의 나날들에 생기를 부여했다.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지 않으면 미칠 수 없다. 정 씨는 거의 미친 듯이 일에 몰두해왔다. 울울한 숲을 파헤치는 토목공사를 주도했다. 귀촌을 위해 미리 배워둔 목공기술을 맘껏 발휘할 수 있는 목공실을 만들어 수많은 목재를 손수 자르고 깎고 다듬었다. 3차원 건축설계 소프트웨어를 활용, 60평과 40평짜리 두 채의 집 설계도 직접 해치웠다. 건축 공사도 업자에게 도급을 주지 않고 직영했다. 이 많은 일들을 해내는 중에 사고도 많았다지. 요상하게 줄줄이 이어진 사건기록을 들어보시라.
“귀촌 초기, 사건 사고들이 끊이질 않았어요. 한번은 석축을 쌓다가 바윗돌에 깔렸는데, 발목뼈가 여러 조각으로 부서집디다. 덕분에 반년 동안 깁스를 했고, 1년 반 정도 재활치료를 받았죠. 포클레인 작업 중 전복사고를 당해 부상을 입기도 했어요. 예초기로 풀을 베다 벌집을 건드려 벌떼의 집중 공격을 당하기도 했고. 그때마다 응급실에 실려가 누울 수밖에 없었고요. 하하핫! 아내에게도 역시 사고가 많았어요. 집사람이 소형 덤프트럭을 몰아요. 어느 날 언덕에서 트럭이 뒤집혀 굴렀어요. 해충과 독충에게 시달리는 건 소소한 일상이었죠. 아내는 독사에게도 물렸어요. 응급실에 달려가 해독주사를 맞고 위험을 면했죠.”
“아이쿠, 괜히 산골에 왔어, 돌아가야겠어, 그런 회의는 없었나요?”
“모든 사고들이 알고 보면 다 인재(人災)였어요. 숙달 과정으로, 필수적인 시행착오로 여겼어요. 요령과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기회였기에 나쁜 것만도 아니었어요. 회의나 후회는 조금치도 없었고요. 산골살이는 오래 묵은 꿈이었으니까.”
“대부분의 아내들은 귀촌에 흥미를 못 느껴요. 고생길이 훤히 보여서죠. 잘난 당신이나 혼자 내려가소서! 그런 소리 나오기 십상이죠.”
“산골생활에서 피할 수 없는 외로움을 즐길 수 있는 정서가 기본적으로 필요하겠죠. 조용한 자연 속에서 과연 즐겁게 살아갈 소양이 있는가를 따져보는 게 중요하다는 거. 저나 아내는 그런 면에서 시골과 적성이 맞았어요. 그러나 아내가 귀촌을 선뜻 동의하진 않았어요. 지역 선정에 반영할 네 가지 조건을 겁디다.”
“어떤?”
“대학병원 수준의 병원이 15분 안짝 거리에 있는 곳, 평소 늘 해왔던 요가를 계속할 수 있는 요가원이 있는 곳, 수필가로서 독서를 좋아하는 아내가 쉽게 찾아갈 도서관이 있는 곳, 항상 온천욕을 할 수 있는 곳. 이렇게 네 가지였어요. 이곳 구례군은 갖가지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습니다. 아내의 요구조건을 충분히 충족할 수 있는 지역이죠.
저절로 생긴 수입
마당에 서서 바라보는 경관이 후련하고 수려하다. 노고단을 중심으로 어깨를 겯고 일렁이는 능선 마루로 파란 하늘 자락이 겹쳐진다. 빼어난 뷰! 동향으로 앉은 집이니 새벽이면 침실 창으로 햇살이 두근대며 들이칠 게다. 집 뒤 숲엔 편백나무 수림이 조성돼 있고, 숲 사이로는 구불구불 휘어지는 산책로와 정자를 꾸며뒀다. 뭐 하나 빈틈도 결함도 없어 보이는 입지이자 장원(莊園)이자 저택이다. 이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정 씨는 서울에 있었던 아파트 두 채를 처분했다.
이제는 수고롭게 돈 버는 일은 작별이야. 부부는 그렇게 합의하고 내려왔다. 그러나 돈이 저절로 들어오는 일이 생겼다. 뜻밖의 수익이란다.
“저희 임야 안에 고로쇠나무들이 다수 있어요. 봄철이면 수액을 받는데, 이걸 사겠다는 사람이 많아 약간의 노동이 필요한 채취 작업을 해 연간 1000만 원쯤 수익을 올립니다. 비워두었던 아래채 2층집에서도 수입이 발생할 걸 미처 몰랐어요. 1층은 월세를 주고, 2층은 민박 손님을 받았더니 해마다 1000만 원 정도의 돈이 들어오더라고요. 가끔 귀촌인 상대의 목공 강의를 통해서도 약간의 강사료가 들어옵니다. 이렇게 모아지는 자금은 해외여행 경비로 씁니다.”
이래저래 이젠 순풍에 미끄러지는 돛배처럼 순항이다. 지루하진 않을까? 그렇잖아도 함께 오래 살아온 부부가 새삼 24시간을 늘 같이 지내야만 한다는 건 끔찍한 일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귀차니즘’이 풍선처럼 부푸는 건 아닐까?
“제가 집사람에게 독불장군이라는 소리를 듣고 살아요. 간간이 마찰이 없을 리 없죠. 대판 다투고 난 뒤 아내가 잠시 가출을 하기도 했어요.(웃음) 그런 일을 겪으면서 나름의 독립적인 생활방식을 찾게 됐어요. 오전엔 같이 텃밭이나 마당에서 일하고, 오후에는 함께 산책을 하지만 저녁식사 후엔 각자의 공간으로 들어가 각자의 일을 합니다. 아내는 1층에서, 저는 2층에서.”
“귀촌인들은 흔히 조언해요. 가급적 집을 작게 지어라! 작은 집이라야 유지 관리가 쉽다는 얘기죠. 선생께서 집을 크게 지은 이유는 뭐죠?”
“내 손으로 한 번은 집다운 집을 제대로 짓고 싶다는 열망이 강했어요. 자손들이 찾아오면 맘껏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도 싶었고. 하지만 바람직한 집은 아니라는 생각이 뒤늦게 들곤 해요. 우리 둘 가운데 하나만 남을 날이 머잖아 찾아올 텐데, 그땐 혼자서 이 너른 집과 터를 어떻게 간수할꼬, 그런 염려도 생기고.”
“산골살이의 즐거움은 어디에 있죠?”
“계절마다 달마다 날마다 다변하는 자연을 느끼며 배우며 사는 즐거움이 으뜸입니다. 몸이 녹아나는 혹독한 노동의 날들도 즐거웠어요. 건강을 유지할 에너지를 얻었으니까. 뭔가 떳떳하다는, 죄짓지 않고 산다는 기분 역시 노동을 통해 실감했어요. 노동에 휴식을 가미한 생활방식을 취하면서는 만족감이 더 커지기 시작했어요. 드디어 인생의 정점에 올라섰다는 행복감이 커요. 그러나 모자란 사람일 뿐이죠. 자연은 저토록 온전한데 나는 틀려먹었구나! 그런 생각을 자주 합니다. 불가(佛家)에서 가르치는 ‘공(空)’을 마음속으로 늘 되뇌이고…. 한 마리 배추벌레와 내가 다르지 않다는 걸 또한 기억하려 하고….”
세상의 탐욕과 광기가 침범 못할 이 고요한 산중. 몸 낮춰 마음을 평온으로 채운다면 고요마저 열락(悅樂)이겠지.
정부흥 씨가 주는 귀촌 Tip
•사전에 시골생활을 체험하자. 한두 달로는 부족하다. 최소한 1년 정도는 월세 집이라도 얻어 살며 물정을 파악하는 게 좋다.
•집을 지을 경우 사전에 집짓기 교육을 받아두는 게 좋다. 건축은 업자에게 맡기지 말고 직영을 하자. 건축비를 크게 절감할 수 있다. 대신 고생을 각오해야 한다.
•귀촌생활에 텃밭은 필수다. 그래야 적당한 노동의 즐거움을 누리고, 깨끗한 먹거리를 얻을 수 있다.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난 요즘 활동도 안 하는데… 왜 저를 인터뷰를 하시나요?” 50대 후반이라고는 도저히 믿기 힘든 외모와 수줍은 표정 그리고 말투. 그녀의 글과 방송에서의 모습을 보고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막상 만나보니 상상을 초월했다. 4차원적이지만 차분하고 내공이 느껴졌다. 밝고 예쁜 표정 뒤에는 그녀만의 강한 카리스마도 엿보였다. 그러면서 연약해서 바람만 불면 무너질 것도 같다. 아니다! 어지간한 바람으로는 상대가 안 될 것 같다. 너무나도 약해 보여서 그녀를 보호해주려다가도 한량 이봉규마저 그녀에게 고민을 털어놓고 싶었다.
서정희의 크고 맑은 눈은 세상의 어둠을 다 품을 것같이 해탈한 느낌을 준다. 마치 이 세상은 시시해서 저 별에서 온 여인 같다. 한마디로 정리할 수 없고 종잡을 수도 없는 묘한 마력의 여인이다. 어두운 시절을 겪고 난 뒤에 오는 작은 평화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건지, 원래 욕심이 없고 세상을 아름답게만 보는 천성 때문에 그런 느낌을 주는 건지 알 수는 없다. 자신도 지난 과거를 회상해보면 ‘고립무원’이 떠오른단다. 어린 나이에 세상 밖에서 남들과 같이 살았더라면 오늘 서정희의 마력은 발견되기 어려웠을 것 같다. 그녀의 엄청난 재능이 발견되거나 개발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녀는 고립무원의 골방에서 시간을 보내고 몰입할 것을 찾기 위해 기도하면서 혼자서 뭐든 해야만 했다. 살림을 하고, 글을 쓰고, 그림도 그리고, 기도하고, 묵상하고, 찬양하고, 꽃꽂이도 하고, 바느질도 하고, 음악을 듣고, 책을 읽으면서 혼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없으니까 어떻게 보면 고립무원의 시간들이 오늘의 서정희의 마력과 내공을 만들어준 듯하다. 이렇듯 서정희는 뒤늦게 세상을 사는 법을 배웠고 지금도 배우고 있는 중이다. “사랑은 다시 못할 것 같다”는 그녀의 한탄스런 말에 이봉규가 “충분하다. 나도 몇 년 전에 늦게 재혼해 너무 행복하게 살고 있다. 당신도 그럴 자격이 충분하다”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전했다.
그녀, 이제 자유를 알았다
서세원과는 그 후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고 서로 연락도 안 한다고 한다. 그는 딸과도 만난 적이 없다. 아이들도 엄마가 혼자 살기를 원했다. “애들은 내 편이다. 서세원 씨도 잘 살면 좋겠다. 지금은 불편한 마음도 없다.” 그녀는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알았다. 자신을 알아가는 게 신기하고 감사하다며 “지금 너무 행복하다!”는 말을 연발한다. “모든 시간을 나만을 위해 쓸 수 있어서 좋다. 내 삶을 추적해보면 지금까지 나를 위해 살아본 적이 없다. 이혼을 하고서야 비로소 내게 충실한 삶을 살고 있다”면서 “그동안 순응하며 순종적인 삶을 살아왔는데… 그게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본분이라고 생각했는데…”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은 전혀 어둡지 않았다. 전부 극복한 편안한 얼굴이다.
“지금은 내가 중심이다. 스스로 대견하고 기특하다. 여자이고 왜소해서 내 안에 강함이 있다는 것을 몰랐는데 요즘에야 느낀다.”
서정희의 충만한 표정은 오라(Aura)가 되어 그녀를 감싼다. 그래서일까? 글 쓰는 솜씨도 대단하다.
나는 ‘필’이 중요하다
느닷없이 그녀에게 ‘이봉규tv’(유튜브 방송)에서 영상 에세이를 해보자고 제안했다. 원래 내성적이라 혼자 조용히 있을 때 행복해하는 일상을 영상으로 표현하면 멋진 작품이 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다. 사람들이 요즘 이구동성으로 “느리게 살자!” 하면서도 바쁘게 난리치며 산다. 서정희는 진정으로 느리게 살고 있다. 그 모습을 이봉규가 영상에 담고 싶은 거다.
서정희는 “낮 12시 이후에는 아무것도 안 하면서 느리게 살고 있다”고 고백했다. 낮 12시까지 새벽기도, 글쓰기, 인테리어, 도면 그리기 등 시간을 쪼개 할 일을 전부 끝내고 오후에는 철저하게 느림의 삶을 실천한다.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는 핸드폰에 메모해놨다가 새벽기도 갔다 와서 정리하며 글을 쓴다.
“사람들이 외적인 것만 보려 한다. 나는 내적인 것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기에 글쓰기를 좋아한다. 내 감정을 글로 표현하고 싶다. 책을 낼 때는 원고 수정 없이 나만의 문체로 남기고 싶다.”
이렇게 말하는 걸 보면 고집도 있다. 서정희는 필(feel)을 중요시한다. 그녀는 최근 인테리어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베토벤은 곡을 쓸 때 많은 것을 버리면서 시작했다. 나도 글을 쓸 때나 인테리어를 할 때 내 안에 저장해놓은 것들을 버리면서 시작한다”는 그녀의 말은 자신감에서 나오는 것 같다. 평소 음악과 책을 가까이 하고 사물과 건축물을 탐미하고 그런 것들을 많이 담아놓았기에 가능한 일이다.
“오랫동안 나만의 성안에 있었다. 세상의 고정관념이 불편했다. 나만의 스타일대로 옷을 입고, 생각하고, 활동하면 사람들이 내게 개량한복을 입으라고 요구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면서 다소 흥분하며 이야기를 이어간다. “예를 들어 내가 발레를 하면 ‘그 나이에 무슨 발레?’ 하면서 시비를 걸어온다”고 억울해한다. 그녀는 남들 시선은 의식하지 않고 살려고 노력한다.
나만의 감정, 글로 표현하고 싶다
혼자 살아가는 게 편해졌다. 자신이 남들과 다른 점도 발견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비로소 어른이 된 기분이다. 첩첩 갇혀 있던 소녀가 이제 어른이 되어 자유를 찾은 것이다. 상당히 철학적이고 내공이 깊어 보이는 그녀는 어릴 적부터 글쓰기를 좋아해 영화 노트가 따로 있다. 영화를 보고 줄거리, 평점, 배우 호감도뿐만 아니라 “두 번 봐야 한다. 세 번은 봐야 한다” 등 서정희식으로 메모를 한다. ‘요리 노트’도 있다. 어린아이 같은 표현을 할 때가 많다. 즉석에서 표현하는 어린아이같이 그 즉시 떠오르는 표현들을 간직하려 글로 남긴다.
“어설프지만 내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한다”고 겸손하게 말하지만 그녀의 글은 훌륭하다. 아이처럼 하고 싶은 것도 많다. 성악도 배우고 있다. 이봉규가 놀라서 “성악도 배워요?”라는 질문에 “꼭 자질이 있는 사람만 배워야 하나요?”라고 묻는다. 그러면서 자기는 좋아하면 뭐든지 한단다. 서정희의 자기 탐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고민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4차원적 마력의 소유자 서정희를 한 차원 낮은 이봉규가 어찌 이해할 수 있을까? 이봉규 특유의 짓궂은 질문에 “혼자 있는 게 주님의 뜻인가보다 하고 혼자 살기에 주력하고 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남자라고는 애들 아빠밖에 없었다”고 믿기 힘든 고백을 한다.
“이처럼 아름다운 여인이? 말도 안 돼!”라고 따지고 싶었지만 참았다. 서정희는 양면성이 있다. 이슬만 먹을 것 같은데 뭐든지 잘 먹는다. “평생 다이어트를 해본 적이 없다. 이렇게 말하면 욕먹을 것 같다”고 깔깔대며 웃는다.
털털하게 아무거나 잘 먹고 한 번 먹으면 거하게 먹는 스타일이라니 점점 종잡을 수가 없다. 조용한 스타일 같은데 수다스럽게 재잘재잘 말도 잘한다. 뜬금없이 이 주제 저 주제로 갈아타기도 한다. 그런 점은 내 아내와 비슷하다. 나는 소프라노인 아내에게 서정희를 무료로 레슨해 달라고 즉석에서 요청했다.
서정희는 관심 없는 것은 아예 무시하고 좋아하는 것만 하며 산다. 세상을 대하는 체감온도는 낮다. 누구나 재미있어 하는 것보다는 남들이 별로 관심 없어 하는 것들을 좋아할 때가 많다. 예를 들면 사람들과 같이 영화를 보면 그녀 혼자 울곤 한다. 그러면 같이 영화를 본 사람들은 “도대체 어느 장면에서 울음이 나왔나?” 하며 의아해한다고. 그녀는 자신의 감정이 독특하고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요즘 많이 느끼고 있다고 말한다. “훗날 내 가족만이라도 소녀 엄마로 기억하고 내 캐릭터대로 인정해주면 좋겠다”는 그녀의 말이 진한 여운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