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에서)
겨울나무 사이로 바람이 붑니다. 앙상한 겨울나무 사이로 찬바람이 붑니다. 지난여름과 가을 무성했던 숲에 대한 기억은 날로 희미해져 가는데, 꽃 피는 봄날은 아직 멀리 있습니다. 겨울의 끝자락이라고는 하지만 2월의 창밖은 여전히 황량합니다. 겨울, 날이 차진 뒤에야 비로소 소나무와 잣나무가 푸르다는 걸 알게 된다는, 그 유명한 세한도(歲寒圖)를 낳은 계절 겨울에 소나무와 잣나무 못지않게 존재감이 드러나는 식물이 있습니다. 바로 겨우살이입니다. ‘껍데기는 가라’는 시인의 외침에 호응하듯 무성하던 ‘나무껍데기’가, 이파리들이 우수수 지고 난 뒤에야 비로소 나무 꼭대기에 웅지를 튼 겨우살이가 겨우 눈에 들어옵니다. 물론 이때 보이는 것은 꽃이 아니라 늘 푸른 잎과 줄기, 그리고 연노랗거나 붉은 열매입니다. 이 시기 짙푸른 겨울 하늘을 배경으로 투명하게 빛나는 겨우살이 열매를, 흰 눈이 겨우살이 위에 가득 쌓인 멋진 장면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야생화 동호인들은 강추위를 무릅쓰고 겨울 산 오르기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정작 봄이 한창인 4월경 가지 끝에 노랗게 피는 겨우살이의 꽃은 크기가 자잘한 데다, 숙주인 큰 나무의 이파리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아 야생화를 사랑하는 이들에게조차 주목받지 못합니다.
다른 나무와 풀이 동면(冬眠)하는 겨울에도 푸르고 싱싱하게 살아 있다고 해서 겨울+살이, 겨우살이란 이름을 얻었습니다. 다른 나무에 기생해 겨우겨우 살아가는 나무란 뜻이기도 합니다. 스스로 광합성을 하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해 다른 나무에 뿌리를 박고 흡기(吸器)라는 기관을 통해 물이나 영양분을 빼앗아 생장하는 반기생식물. 땅까지는 뿌리를 내려보지 못하고 사시사철 공중에 뜬 채 살아가는 가련한 식물입니다. 하지만 한겨울 저 홀로 푸름을 자랑하는 특성으로 인해, 예로부터 동서양을 막론하고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는 등의 능력을 갖춘 영초(靈草)라 불리며 신비와 경외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겨우살이의 번식은 새를 통해 이뤄집니다. 먹이가 부족한 겨울철 높은 나뭇가지에 가득 달린 겨우살이의 열매는 새들에겐 최상의 먹잇감이 됩니다. 그런데 그 열매엔 끈적끈적한 점액이 가득 들어 있습니다. 새들은 열매를 먹을 때 부리에 달라붙는 점액을 한사코 다른 나무의 껍질에 비벼서 닦습니다. 이때 끈끈한 점액에 묻어 있던 씨앗이 나무껍질에 달라붙어 새로운 싹을 틔우게 되는 것이지요.
◇ Where is it?
국내에 자생하는 겨우살이는 모두 5종. 전국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겨우살이는 한겨울 참나무나 밤나무, 팽나무, 물오리나무 등의 앙상한 나뭇가지 위에 까치집 모양으로 등장한다. 겨우살이의 열매는 연노란색이다. 반면 붉은겨우살이는 이름 그대로 붉은색 열매가 돋보이는데, 눈 덮인 한라산을 비롯해 내장산, 덕유산 등을 찾아가야만 만날 수 있다. 상록수인 여느 겨우살이와 달리 꼬리겨우살이는 낙엽 활엽 관목으로 겨울이면 잎은 지고 샛노란 열매만 주렁주렁 달린다. 태백산과 구룡령, 소백산 등지에서만 만날 수 있는 희귀종이다. 가는 줄기가 모여 작은 선인장의 모양을 한 동백겨우살이는 숙주인 동백나무가 자생하는 남쪽 바닷가와 섬, 제주도에서 볼 수 있다. 참나무겨우살이는 참나무보다는 동백나무나 후박나무 등 제주도 서귀포 일대 상록수에 주로 기생한다.
바람길 매서운 제주도 서귀포의 고요한 마을 ‘대정’. 이곳의 또 다른 이름은 ‘모슬포’다. 고요하다 못해 적막하다. 바람이 너무 강해 ‘못살(사람이 살지 못할)포, 유배자들이 너무 많아 살 수 없어 ‘못살포’라고 불렀단다. 그렇다. 조용하기 그지없는 이곳은 과거 유배지의 땅이다. 176년 전,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1876∼1856) 또한 유배자의 신분으로 이 척박하고 만만치 않은 땅에 닿았다. 8년 3개월간 추사의 유배생활 흔적이 깃든 제주추사관, 여전히 바람이 세고 쓸쓸한 이곳에서 추사와 마주했다.
추사관(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은 조선 후기 대학자이자 서예가인 추사 김정희 선생의 예술과 학문세계 등의 업적을 기리는 곳이다. 2010년 5월 건립된 추사관은 헌종 8년(1842)부터 유배가 끝날 무렵까지 추사가 살았던 두 번째 적거지(適居地)와 그 앞에 세워진 전시실(지하 2층, 지상 1층)로 이뤄져 있다. 추사관의 전신은 1984년 세워진 추사유물전시관이다. 이 전시관이 2007년 10월 국가지정문화재(사적 제487호)로 승격되면서 격에 맞게 재정비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추사관 전시실에는 추사기념홀과 3개의 전시실, 교육실, 수장고 등이 있다. 또 부국문화재단, 추사동호회에서 기증한 ‘예산 김정희 종가 유물 일괄’과 추사 현판 글씨, 추사의 편지 그리고 지인의 편지 등이 전시되어 있다.
위리안치 유배 형벌에는 부처(付處·지역을 지정해 머물러 있게 하던 형벌)와 안치(安置·먼 곳에 보낸 뒤 주거를 제한하는 형벌)가 있었다. 추사가 받은 형벌은 위리안치(圍籬安置). 이는 죄인이 사는 집 담장을 탱자나무 등 가시나무로 둘러쳐 그곳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형벌이다. 그러나 유배 시절 추사는 제주목 왕래는 물론 한라산을 오르기도 했다. 형식적이기는 했지만 집 밖을 나갈 수 없다는 의미에서 무거운 상징이 있는 형벌이다. 다른 유배 형벌의 경우는 수발을 들어주는 가족 동반이 가능했지만 위리안치는 불가능했다.
유배 이유 제자였던 효명세자가 21세의 젊은 나이로 죽음(순조 30년·1830)을 맞은 것이 추사에게는 시련의 출발이었다. 지난 10월 막을 내린 KBS 월화드라마 에서 배우 박보검이 연기한 역할이 바로 효명세자다. 효명세자 사후에도 추사가 요직에 등용되며 헌종에게도 총애를 입자 안동 김씨 세력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추사가 윤상도 옥사(尹尙度 獄事)에 관여했다는 의혹을 제기한 안동 김씨 세력은 허위 주장과 거짓 증언으로 추사를 결국 제주로 유배 보내고 만다. 당시 추사 나이 55세였다. 추사는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법고창신(法古創新)하여 추사체(秋史體)를 완성했다.
적거지 추사관이 조성된 곳은 추사의 두 번째 적거지인 강도순(姜道淳)의 집이다.
추사는 제주 유배 시절 세 번에 걸쳐 적거지를 옮겼다고 한다. 헌종 6년(1840), 추사가 처음 제주에 들어와서 살았던 곳은 대정읍성 안동네 송계순(宋啓純)의 집으로 2년간 머물렀으며 위리안치를 할 수 있도록 가시울타리가 쳐져 있었다. 현재 추사의 유배지 주변에는 가시 굵은 탱자나무들이 있다.
세한도 제자 이상적(李尙迪·1804~1865)에게 그려준 세한도(歲寒圖·헌종10년(1844))다. 추사 유배 시절 역관을 지냈던 이상적은 평소 추사가 읽고 싶어 했던 책들을 구해 제주로 보냈다. 이상적은 역관 중 중국을 가장 많이 방문한 인물로 추사가 유배생활 중에도 중국의 정보와 자료를 활용해 연구를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줬다. 추사는 이상적의 정성에 고마워하며 소나무와 잣나무, 가옥 등 유배지 풍경을 그려 선물했다. 세한도는 1974년 국보 제180호로 지정됐으며 국립중앙박물관에 실제 세한도가 보관돼 있다. 추사관의 세한도는 당대 최고의 추사 연구자인 경성제대 교수 후지쓰카 지카시(藤塚·1879~1948)가 1939년 복제해 만든 100점 중 하나다.
제주 추사관 관람 정보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추사로 44 (전화 064-710-6801)
관람시간 09:00~18:00
관람요금 성인 500원 /
청소년·어린이 300원
바닷가로 떠나는 피서도 좋지만 모래알처럼 수많은 휴가객이 몰려 있을 백사장 광경을 떠올리면 어질어질해진다. 평온한 파라다이스를 원한다면 좀 더 여유롭고 편리한 호텔 수영장을 찾는 것도 방법이다. 시원한 물놀이와 함께 다양한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호텔 수영장을 소개한다.
◇ 서울신라호텔 ‘어번 아일랜드’
서울신라호텔 ‘어번 아일랜드(Urban Island)’에서는 수영과 태닝뿐만 아니라 자연과 더불어 편안한 휴식을 취할 수 있다. 숲과 남산으로 둘러싸인 어번 아일랜드는 해외 휴양지에서 볼 수 있는 럭셔리 카바나(cabana: 수영장 내에 있는 호텔 객실)를 운영한다. 이번 여름에 선보이는 ‘얼리 서머 에피소드 II’ 패키지를 이용하면 비즈니스 디럭스 객실 1박, 어번 아일랜드 2인 입장권, 고급 생맥주 2잔, 실내 피트니스 및 실내 수영장 이용 2인 등을 즐길 수 있다.
요금 33만원, 7월 15일까지, 문의 02-2230-3310, 서울시 중구 장충동2가 202
◇ 롯데호텔제주 ‘스파&가든 해온(海溫)’
따뜻한 바다[海溫]라는 뜻을 지닌 롯데호텔제주의 ‘스파&가든 해온’은 제주의 온화한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자쿠지(Jacuzzi:기포가 나오는 욕조 브랜드)에서 따뜻한 물놀이를 즐길 수 있다. 어린이용 수영장 근처에 식사 공간이 있어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보며 맛과 여유를 만끽할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요금 1회 15만원(5~10월), 문의 064-731-4296, 제주 서귀포시 중문관광로 72번길 35
◇ 반얀트리 클럽 앤 스파 서울 ‘오아시스’
반얀트리 클럽 회원과 호텔 객실 투숙객에게만 개방하는 야외수영장 ‘오아시스’는 이국적인 분위기가 매력적이다. 이번 여름에 출시한 ‘서머 인 오아시스 패키지’를 이용하면 오아시스 무료입장, 호텔 내 업장 할인 쿠폰북 제공과 더불어 다이닝 라운지 조식 뷔페, 실내 수영장 및 피트니스, 오아시스 아쿠아 바 칵테일 또는 청량음료를 즐길 수 있다(각 2인 제공).
반얀룸 1박 기준 54만원부터, 9월 9일까지, 문의 02-2250-8074, 서울시 중구 장충단로 60
◇ 롯데호텔서울 실내 수영장
바다와 요트를 모티브로 한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곳이다. 커다란 유리창을 통해 남산 일대 경치를 볼 수 있는데, 특히 해가 지고 난 뒤의 야경이 아름답다.
회원 및 호텔 투숙객 이용 가능, 문의 02-317-7313, 서울시 중구 을지로 30
◇ 파크하얏트서울 실내 수영장
수영장이 호텔 24층에 있어 시내 전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수영장은 가장자리가 보이지 않는 인피니티 풀 형식으로 제작돼 물이 도심 한가운데로 떨어지는 듯하다.
파크클럽 연간 회원, 호텔 투숙객, 스파 고객 이용 가능, 문의 02-2016-1176, 서울시 강남구 테헤란로 606
제주도에는 가끔 갔지만 한라산에 올라 백록담을 못보고 내려오기를 여러 번, 기어코 이번에는 백록담을 보고 오기로 하고 2박3일의 제주도 여행을 계획했다. 인생이라는 게 다 그렇 듯, 다람쥐 채바퀴 돌 듯 돌아가는 세상에 늘 퍽퍽하고 지루하기만 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고자 군 시절의 동기인 3부부가 의기 투합하여 꽃향기가 그윽한 5월의 어느 날 제주도로 떠났다. 2박3일 중, 한라산 등반은 두 번 쨋날로 정했다.
상판악에서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인 한라산 등반!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잠속으로 빠졌들었는데…. 또드락 뚝딱! 또드락 뚝딱… 고요한 아침공기를 깨고 거실 쪽에서 도마에 칼질하는 소리가 아련하게 귓전을 울렸다. 눈을 번쩍 떠보니 창문너머로 환하게 동이 터오고 아직은 어둠이 채 가시지도 않은 주방에서 식사준비를 하는 아낙들의 조용하면서도 부지런한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덕분에 아침식사는 걸쭉한 전복죽으로 영양을 보충하였는데, 각자가 한라산 등반을 대비하여 두세 그릇씩을 뚝딱 비워 든든하게 속을 채웠다.
해발 1950m의 한라산 정상까지 무사히 갈 수 있을는지 걱정은 태산이면서도 웬 먹을거리를 그리도 많이 준비하였는지? 돼지고기 수육에 홍어회와 양념장류, 각종 나물류, 그리고 금세 지은 밥을 바리바리 배낭에 넣고 그것도 모자라 막걸리에 물까지 챙겨 넣고 보니 배낭무게만 해도 어깨가 묵직하기 그지없었는데, 설상가상 무거운 카메라까지 목에 걸고 보니 아득하기만 했다. 하지만 우리가 누구랴! 한창 젊은 시절에는 웬만한 고지는 단숨에 뛰어오르던 역전의 용사들이 아니던가?
한라산 백록담까지 오르기 위해서 성판악코스를 택했는데 성판악코스는 편도 9.6km 이며 보통 걷는 시간만 4.5시간을 잡아 왕복 19.2km로 총 9시간을 걸어야만 하는 험난한 코스였다. 다행히 코스자체가 완만하다고 하여 한결 마음은 놓였지만 그래도 마음은 놓이지를 않았다. 그렇게 시작한 한라산 등반길, 다행히도 비가 그친 산길에는 시원한 나무그늘과 신선함이 묻어났고 싱그러운 숲속에서 산들산들 바람이 불어와 상쾌하게 발걸음을 시작하였다. 완만한 등산로라고 하지만 제주도 특유의 울퉁불퉁 돌계단으로 이어져 걷기가 만만하지가 않았다.
일행 중, 최 박사는 무릎이 좋지 않아 전 날부터 걱정을 했다. 한라산 등반을 하기 위해 두어 달 전부터 시간이 날 때마다 집근처 야트막한 산을 연습 삼아 오르곤 했다는데 딱 2시간만 걸으면 무릎에 신호가 와서 걱정이 태산이라고 했다. 그런데 막상 등반이 시작되자 제일 앞에서 씩씩하게 오르기 시작하였다. 이름 모를 산새들의 지저귐, 산비둘기 소리가 산중에 울려 퍼지고 가끔은 까마귀가 머리 위를 빙빙 돌면서 환영을 해주었는데, 일행과 뒤질세라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아낙들의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거친 숨소리를 내면서 제주도 특유의 돌계단을 오르다 보면 삼나무 숲이 나오는데 삼나무 숲을 지나니, 해발 1,140m에 위치한 속밭대피소가 나왔다. 세 부부가 조금씩 떨어져 오르고 있었으니 숨도 고를 겸 선두에서 오르던 팀이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일행들과 합류하기로 하였다.
1차 휴식! 달콤한 휴식이었다. 물도 마시고 간식도 먹으면서 재충전을 하였다.
진달래밭 대피소까지
속박대피소에서 1차 휴식을 취한 후 본격적인 오름이 시작되었다. 끝없이 이어진 돌계단과 중간 중간을 이어주는 데크… 그래도 싱그러운 숲내음과 선들 한 바람, 그리고 환영이라도 하 듯 울어주는 산새소리를 동무삼아 꾸역꾸역 오르고 있었다.
이 시기에 한라산에서는 무엇을 볼 수 있을까? 진달래를 볼 수 있다고 하는 소리를 반신반의 하면서 혹, 멋진 진달래꽃밭을 볼 수도 있겠다는 상상을 하기도 하였다.
육지에서는 이미 져버린 진달래꽃을 정말 볼 수 있을까? 강화도 고려산 진달래 능선에서 보았던 붉고 화려한 꽃잎을 상상하면서 오르다 보니 드디어 진달래 밭에 도착하게 되었다. 진달래 밭 대피소 앞에 배낭을 내려놓고 2차 휴식을 취했다.
데크에 다리를 쭉뻗고 털썩 주저앉아 초콜릿을 먹고 있는 최박사의 모습은 마치 몇날며칠 전투를 하다가 지쳐서 휴식을 취하는 곤궁한 병사의 그 모습이라면 과장일까? 물한모금 마시고 다시 기운을 내서 배낭을 짊어지고 올라선 길에서 저 멀리 옅은 구름에 둘러싸인 한라산의 모습이 드러났다. 아스라이 구름에 닿은 길에는 울긋불긋 등산객들이 행렬을 지어 올라가고 있었는데, 평일임에도 산을 찾는 이들이 이토록 많을 줄은 몰랐다.
어쩔 수 없는 60대의 시니어들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오르다가 잠시 뒤돌아보면 짙푸른 녹음이 길게 드리워진 산자락 밑, 서귀포시내가 한 눈에 들어오고 그 끝에는 일렁이는 검푸른 바다가 아찔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수령(壽齡)을 짐작할 수 없는 주목(朱木)이 등산로 양옆으로 이어져 있고 그 중에는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채 폐목(廢木)이 되어 고고하게 바람을 견디어 내는 주목도 있었다. 한라산 정상에 가까워오자 가파른 등산로는 테크로 계속 이어졌고 물밀 듯 불어오는 바람이 심상치 않았다. 아! 드디어 백록담이 지척에 보인다.
아! 한라산 백록담
부지런히 발품을 팔아 미리 백록담에 도착한 필자는 속속 도착하는 동료들을 촬영하기 위해 카메라를 들고 입구 쪽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곤한 몸을 이끌고 만면에 미소를 가득 띤 채 드디어 해냈다는 기쁨으로 두 손을 번쩍 치켜들고 마지막 계단에 올라서는 동료들을 일일이 환영하며 사진을 찍었다.
인증 샷을 위해 백록담 표지석 아래로 길게 줄이 이어졌는데, 어찌나 바람이 세게 불던지 황급히 배낭에서 바람막이 옷을 꺼내 입었다. 5월임에도 불구하고 변화무쌍한 날씨가 필자 일행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허둥지둥 인증 샷을 마치고 말로만 듣던 백록담을 보러 조금 위로 올라섰다. 초겨울의 싸늘한 바람이 천둥치듯 불어대는 가운데 백록담을 조망(眺望)할 수 있었으니 역시 변화무쌍한 한라산은 그 높이가 백두산 다음가는 산중의 산인가보다.
바로 밑 양지바른 테크에 배낭을 풀고 가져간 음식들을 꺼내놓으니 이보다 더한 진수성찬이 있으랴! 돼지고기 수육에 홍어, 그리고 막걸리를 곁들인 삼합이 갈증 나고 허기진 배를 채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올라오면서 고생담을 비롯한 온갖 이야기꽃을 피우며 맛있는 점심식사를 하던 중에 홀로 쓸쓸하게 앉아서 비스킷을 먹고 있는 외국인 청년을 보게 되었다.
세 남자들은 모두 그를 데려다가 음식을 좀 나누어먹이자고 의견을 모으니 마님들께서는 먹던 음식을 어떻게 권하느냐고 반대의 의사를 분명히 했지만 언어구사가 무난한 최용호박사가 다가가서 몇 마디 나누고는 그를 우리 자리로 데리고 왔다. 이번 여행을 계획하고 주도해 온 우리들의 캡틴 海松 김금섭 대장의 사위가 미국인이기도 하거니와 우리의 아이들도 미국의 콜로라도주 덴버에 살고 있기에 혹여 마음이 더 쓰였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자신의 이름을 ‘마이클’이라고 소개한 그 외국인은 아직도 결혼을 하지 않은 스페인 청년이었다. 이것저것 챙겨주니 먹기도 잘하였는데, 아마도 몹시 시장했던 모양이었다. 헌데 그 녀석, 막걸리는 물론 돼지고기 수육을 된장에 꾹 찍어 잘도 먹어댔다.
막걸리 한 잔 쭉 들이키던 마이클이 갑자기 다리에 쥐가 났다며 데크에 벌렁 나가 자빠졌는데, 어찌하랴! 모두가 달려들어 털이 북슬북슬한 그 녀석의 다리를 붙잡고 마구마구 주물러 주었더니 괜찮아 졌다고 하였다. 입식문화에 익숙한 그가 데크에 다리를 포개고 앉아서 음식을 먹다보니 쥐가 난 모양새다. 어쨌거나 밥과 반찬은 물론이고 이것저것 잘 먹으면서 여간 고마워하던 그가 기념사진을 찍겠다고 하면서 두 엄지손가락을 번쩍 치켜들었다.
그 친구를 데려다가 음식을 나누어 먹인 것은 어찌 보면 보잘 것 없는 작은 배려이지만 참 잘한 일인 듯싶었다.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으로 우리가 낮선 외국에 여행을 갔을 때를 생각하면서 작은 관심과 배려의 차원에서 나눔은 역시 모두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었다. 몇 번이고 고맙다고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는 그 스페인 청년을 보내고 나니 내려올 일이 꿈만같았다.
드디어 해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일 터, 육십 고개를 넘어 이제 내리막길에 가속을 붙일 시기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한라산 등반. 그 하산 길에서는 피로가 온 몸을 엄습했다. 아침 여덟시에 시작한 한라산 등반은 오후 6시 30분에 모든 동료들이 성판악 주차장으로 되돌아오므로 써 장장 10시간 30분의 고단한 여정이 끝났다. 고단한 가운데서도 모두가 해냈다는 뿌듯함이 마음을 가볍게 해주었다. 언제 또다시 이 곳을 찾을까마는 명산중의 명산 제주도 한라산을 당당하게 정복했다는 은근한 자부심이 샘솟았다. 거기에다가 날씨까지 좋아서 멋진 백록담을 볼 수 있었으니 얼마나 상쾌한지 모르겠다.
우리 인생에 있어 더 이상 젊은 시절은 돌아올 수 없으나 늘 긍정적인 사고로 생동감 넘치는 삶을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몇 년 전부터 휴가철이 되면 아내는 직장 동료나 친구들과 매년 해외여행을 떠났다. 그때마다 거의 일방적으로 필자에게 통보하곤 했다. ‘가도 되느냐?’가 아니라 ‘간다!’라고 했다. ‘가지 말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예약을 다 마쳐 놓은 상태에서 그냥 참고로 알고 있으라는 식이었다.
은근히 부화가 나 필자도 아내처럼 결행하고 싶은 마음도 생겼으나 불가능했다. 친구들이나 직장 동료들 중에 같이 휴가를 떠날 사람을 찾기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가 찾아낸 방법이 혼자 휴가를 떠나는 것이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진정한 휴가는 ‘아내와 같이 가지 않는 나만의 휴가’라고 으스대기도 한다. 이런 필자에게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거 아니냐고 하면서도 은근히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아내의 일방적 여행 통보를 걸고 넘어져서 몇 년 전부터 ‘나 홀로 휴가여행’을 즐기고 있다.
작년 휴가는 늦가을에 제주로 갔다. 서귀포시 어느 수도원에서 주관하는 명상과 걷기 프로그램에 등록했다. 매일 주는 대로 먹고 데려다 주는 곳에 내려서 하루 종일 걷고 다시 숙소에 오면 아무생각 없이 자면 되는 일정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서울에서는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아주 수동적이며 생각이 필요 없는, 그래서 일상을 보내면서 머리를 텅 비울 수 있는 며칠 동안의 시간이 기다려졌다.
필자와 같은 프로그램에 참여한 사람이 40여 명 정도 됐다. 부부가 같이 온 팀도 있었고 친구들과 함께 온 나이 지긋한 여성 시니어가 많았다. 혼자 온 사람은 필자가 유일한 것 같았다. 자녀와 엄마가 같이 온 세 팀이 있었는데 그 중에 두 팀은 초등학교 6학년 딸과 엄마 커플이었고, 한 팀은 10대 후반의 심신 장애가 있는 아들과 엄마였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여자아이들은 같은 학교 친구라고 했다. 아주 활발하고 귀여운 아이들이었다. 대체로 어른들이 참여하는 프로그램이라고 얘기했는데도 오고 싶다고 해서 양쪽 집 엄마들이 따라나선 여행이라고 했다. 어른들도 힘든 걷기코스를 날아다니듯이 뛰기도 하면서 잘 걸었다. 문제는 그 중 한 엄마였다. 사사건건 딸아이의 행동을 참견하고 잔소리를 했다. 심지어 밥 먹을 때 반찬 가리는 것까지 나무라곤 했다. 같은 상에서 밥을 먹던 필자가 불편함을 느낄 정도였다. 몇 번은 외진 곳에 데려가서 심하게 야단을 치기도 했다.
반면 장애를 가진 아이의 엄마는 늘 미소를 띠고 있었다. 용눈이 오름을 오르는 내내 아들 뒤를 따라가면서 멋진 경관 이야기를 나누었다. 곶자왈 원시림의 어둡고 미끄러운 돌길을 걸을 때는 아들이 위태위태하게 걷는 모습을 뒤에서 가슴 졸이며 조용히 따랐다. 김대건순례길에서는 뜨거운 가을 햇살에 땀 벅벅이 된 아들과 제주의 쪽빛 바다를 함께 바라보며 웃음꽃을 피웠다. 떨리는 손으로 밥과 반찬을 식판에 떠서 엄마가 기다리는 식탁으로 불안하게 걸어오는 아들을 그는 미소 띤 얼굴로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마지막 날 수도원 마당에선 모두 기념사진을 찍기 바빴다. 며칠 간 사이가 좋지 않던 그 모녀도 사진을 찍고 있었다. 딸에게 사진을 부탁한 엄마가 뒷걸음치다가 그만 벽돌에 걸려서 쿵 소리를 내면서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 얼굴이 벌겋게 돼서 일어선 엄마는 관객도 아랑곳하지 않고 벽돌이 뒤에 있다는 걸 알려주지 않은 딸을 심하게 나무랐다. 그때 딸아이의 말이 걸작이었다. “엄마는 내가 뒤로 넘어졌을 때 너는 눈도 없냐고 그랬잖아!”
아주 수동적이고 게으른 일상을 즐기려고 혼자 떠난 늦가을 휴가는 필자에게 자연과 타인을 조용히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을 선물로 주었다. 몇 개월이 흘렀지만 대나무 지팡이를 들고 곶자왈 어두운 원시림 미끄러운 돌길을 위태롭게 걷는 아들 뒤에서 조용히 따르던 그 어머니의 미소를 잊을 수가 없다. 비우려고 떠난 필자에게 진정 비우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준 아름다운 미소였다.
퇴직 후 양재천을 자주 걷는다. 아내와 함께 걷기도 하고 때로는 혼자서 걷기도 한다. 시간에 구속받지 않고 자유스럽게 산책할 수 있어 좋다. 양재천은 철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6월이면 화사하던 봄 꽃 들은 자취를 감추고 연초록 나뭇잎은 싱싱한 푸르름을 더해간다.
6월에는 우리 가족에게는 큰 행사가 두 개있다. 어머니의 기일이 있고 둘째 동생이 회갑을 맞이한다.
어머니는 당뇨와 암으로 16년 전 6월에 68세로 돌아가셨다. 요즘 같은 장수 시대에 칠십도 넘기지 못하신 어머님은 우리 가족에게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꽤 시간이 지났건만 우리 형제끼리 모여 술 한 잔 할 때면 막냇동생을 울리는 것은 간단하다. 동생이 취할 때쯤 어머니 이야기만 꺼내면 보고 싶다며 큰소리로 운다. 오십이 넘고 대기업의 임원으로 있건만.
세브란스 암센터, 원자력 병원 검진 결과 너무 늦었다는 결론이 내려져 항암치료를 포기하시고 어머님이 고향집으로 내려가시기로 결정하시던 그날 ‘그만 내려가자’ 고 아버님이 하시던 그 말씀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후 어머니는 5년을 더 사셨다. 고향집에서 고통의 나날이었지만 그래도 친구들과 함께 지내시면서 생을 마감하셨다.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 2년이 지나지 않아 아버님도 어머님 곁으로 가셨다.
이제 세월이 흘러 동생이 회갑을 맞이해 잔치를 한다고 한다.
호텔에서 가족들을 초대해서 음악회를 열 계획이다. 노래방 반주기에 맞춰 동생은 색소폰을 연주하고 우리 형제들은 부부 단위로 노래를 하기로 했다. 그래서 그날 부를 노래 곡목을 미리 제출하라고 한다. 색소폰 반주를 해주기 위해서다. 동생은 퇴직 후 색소폰을 배운다고 아파트에 방음시설을 갖추고 몇 년을 연습하더니 이제 프로가 되었다.
우리 부부는 그날 댄스를 하려고 한다. 지난해 내가 라틴 댄스 차차차를 배워 몇 달을 집에서 아내와 함께 연습한 적이 있어 이번에 그 실력을 뽐내보려 한다.
사실 나도 4년 전 회갑을 지냈지만 잔치를 하긴 쑥스러웠다. 그래서 아내와 유럽 여행을 하고 형제들과 간단히 식사를 했다. 팔순을 넘긴 삼촌도 계시는 데 거창하게 잔치를 한다는 것이 좀 어색했기 때문이다.
동생은 나와 성격이 달라 잔치를 제법 제대로 할 모양이다. 아무리 장수시대라 해도 회갑이란 인생에서 의미가 있는 날이긴 하다. 아이들은 다 자라 품을 떠나가고 직장에서 퇴직을 하고 제대로 홀가분하게 제2의 인생을 설계할 시점이다. 회갑을 지나니 인생이 뭔지 좀 알 것 같기도 하다. 시간이 소중하다는 것도 안다.
내 나이도 어느덧 60중반이 되어 며느리도 보고 손녀가 생겨 할아버지가 되었다. 인생은 다 때가 되어야 깨닫게 되나 보다. 손녀 아이가 자라는 것을 보면서 많은 것을 깨닫는다. 보자기에 싸여 태어나 업치고, 일어서고, 걷고, 말을 배우는 과정을 자세히 보면서 너무 신기하고 귀엽다. 아들과 딸을 다 키웠건만 그때는 어떻게 키웠는지 모르겠다. 생명의 신비와 핏줄에 대한 애정이 이렇게 소중하게 다가올지 몰랐다.
가끔 아들과 며느리, 딸 우리 가족이 다 모여 식사하는 날이 더없이 행복하다. 작은 일이지만 이러한 일상생활 속의 소박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음에 감사한다. 이것이 치열하게 살던 젊은 날과 달라진 점이다.
유월에는 아내와 제주도 서귀포 여행을 간다. 제주도를 몇 번 다녀오긴 했지만 이번 여행은 별다른 의미가 있다. 제주도 공무원 연금공단 강의가 있어 함께 가기로 한 것이다. 일과 여행을 동시에 하는 의미 있는 일이다. 내가 강사가 되어 내가 먼저 경험한 소중한 것들을 후배 시니어들과 나눌 수 있어 기쁘다.
직장생활의 오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새로운 인생 이 막을 준비하는 데 꾀 많은 시간이 걸렸다. 내려놓고 가벼이 해야 자유스러워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새로 준비하고 끊임없이 학습을 해야 한다는 사실도 알았다.
유월을 맞이하며 가족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는다.
글ㆍ사진 김인철
춘삼월 제주의 꽃시계는 벌써부터 봄입니다. 제주의 봄꽃을 대표하는 유채꽃은 이미 곳곳에 단지 형태로 피어 있고 동백과 매화, 벚나무가 꽃망울을 터트린 지 오래됐습니다. 산중에선 복수초와 변산바람꽃이 피고 지고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절정으로 치닫는 제주의 봄에 화룡점정을 하는 건 ‘맑고 깨끗한 향이 벼루에 떠돌고 편지지에 스밀 듯’ 그윽한 수선화 꽃입니다.
‘세한도’와 추사체라는 위대한 문화유산을 남긴 추사 김정희는 이미 160여 년 전 제주 유배 시절 “마을마다 동네마다 한 치, 한 자쯤의 땅에도 수선화가 없는 곳이 없다. (제주의) 수선화는 과연 천하의 큰 구경거리”라며 찬탄을 금치 못합니다. 그러면서 평생지기였던 벗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매화가 고상하다고는 하지만 뜰을 넘지 못하는데 “정월 그믐에서 2월 초 피기 시작한 수선화는 3월이 되면 산과 들, 밭두둑에 흰 구름이 깔린 듯, 흰 눈이 장대하게 쌓인 듯” 피어난다며 세세하게 설명합니다. 8년 3개월 동안 유배 생활을 한 서귀포시 대정 들녘의 수선화가 추사에겐 몇 안 되는 정신적 위안이었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이 고장 사람들은 이것이 귀한 줄을 몰라서 소와 말에게 먹이고 발로 밟아버리기도 합니다. 또 보리밭에 많이 나는 까닭에 마을의 장정이나 아이들이 호미로 캐어버리고는 하는데, 캐내도 다시 나기 때문에 마치 원수 보듯 합니다.” 이어지는 추사의 언급은 기록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일깨워줍니다. 지중해 연안이 원산지인 수선화가 이미 160여 년 전에 원예종이 아닌, 야생식물이자 자생식물로 제주도 전역에 뿌리내리고 있었음을 입증하는 귀중한 현장보고서라 할 수 있지요.
현재 제주도에는 두 종류의 수선화가 피고 있습니다. 꽃이 크고(몰) 속 꽃잎이 마늘(마농) 뿌리처럼 생겼다고 해서 제주도 방언인 ‘몰마농꽃(사진)’이라고 불리는 수선화가 그 하나입니다. 또 다른 수선화는 흰색 꽃받침 위에 황금색 부화관이 동그랗게 자리 잡은 게 마치 흰 쟁반(옥대)에 황금 술잔(금잔)이 앉은 것 같다고 해서 금잔옥대(金盞玉臺)라 불리는 것입니다. 추사는 “화품(花品)이 대단히 커서 한 가지가 많게는 10여 송이에 화피 갈래 조각이 8~9개에 이른다”는 설명과 함께 노란 부화관과 속 꽃잎이 여럿으로 갈라지는 그림을 남겨 당시 제주도에 자생하던 수선화가 몰마농꽃이었음을 분명하게 말해줍니다.
3월 제주의 봄 들녘을 거닐며 오래전부터 이 땅에 뿌리내린 야생 수선화의 향기도 맡아보고, 그윽한 향을 가슴 깊이 들이쉬며 간고한 유배 생활에도 불구하고 일생일대의 걸작을 남긴 추사의 발자취도 한번 되짚어보길 권합니다.
Where is it?
제주도 전역이 수선화 자생지라 할 만큼 어디서나 어렵지 않게 꽃 핀 것을 볼 수 있다. 바닷가는 물론 중산간에서도 만날 수 있다. 마을길이나 들과 밭, 돌 틈 등 어디에서나 자라는데, 최근에는 제주도를 대표하는 꽃으로 인식된 때문인지 사람의 손길이 미치는 화단에서도 금잔옥대(사진)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다만 추사가 제주도의 수선화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된 만큼 그의 유배지가 있는 서귀포시 대정 들녘을 찾는 발걸음이 많다. 특히 대정읍 안성리 추사 유배지에서부터 안덕면 사계리 대정향교까지 2Km 구간을 비롯해 산방산이 보이는 대정 들녘 일대에 피어있는 수선화가 각별한 사랑을 받고 있다. 추사가 바로 이곳을 거닐면서 일대에 펼쳐지는 풍경을 묘사하고 진한 수선화 향기를 글과 시로 남겼기 때문이다. 유배지 바로 옆에 세워진 추사기념관 내 추사 동상 앞에는 조화로 만든 수선화가 늘 놓여 있고, 적거지 주변 탱자나무 담장 아래에는 금잔옥대가 심어져 있다. 추사가 제자들을 가르쳤던 대정향교 안 곳곳에는 몰마농꽃이 한창 피어있다.
서울신문 기자로 29년 일했다. '김인철의 야생화 산책'(ickim.blog.seoul.co.kr) 블로그를 운영 중이다. '야생화 화첩기행'(푸른 행복) 저자.
제주는 2009년까지 취업, 대학진학 등의 이유로 인구유출 현상이 심각했었다고. 그런데 2010년부터 인구 증가세로 전환되었다. 2010년에는 순유입자 수가 437명, 2011년 2342명, 2012년 4873명, 2013년 7824명 등 가파른 속도로 늘고 있다. 2014년에도 역시 제주 유입 인구는 고공행진 중이다. 일례로 서귀포시에서 주최하는 귀농 귀촌 교육의 경우 단 2시간 만에 마감되는 기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결국 서귀포시에서는 이례적으로 주말반까지 만들었지만 수요에 비하면 부족한 반 편성이었다.
도대체 제주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제주의 매력과 신비가 갑자기 커진 이유가 무엇일까? 왜 우리는 벼락을 맞은 듯이 제주에 끌렸을까? 제주로 이주한 사람들은 각양각색의 사연을 갖고 있다. 이미 여러 권의 책으로 나오기도 했지만 아직도 그들의 사연은 우리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다. 제주도 안에서도 이런 현상에 대해 기대와 우려의 시선 두 가지를 갖고 있다. 100세 시대를 맞아 ‘인생 2모작’을 꿈꾸는 이들이 제주로 몰려들면서 제주도에 귀농 귀촌 바람이 부는 것은 제주도의 1차 산업 부흥을 의미한다. 농어촌 사회에서는 새로운 활력소로 작용하고 있고 도시 이주자들이 몰고 오는 문화 이민의 바람도 상당하다. 하지만 이들이 제주도에 뿌리를 못 내리면서 일어나는 갈등도 있고 은퇴자금을 앞세워서 부동산을 사는 바람에 제주도 땅 값이 들썩이는 역효과도 일으키고 있다.
#올레길 벤치에서 터져 나온 아내의 소원, “여보, 부탁이 있어.”
‘달파란’(게스트하우스 & 카페)은 서귀포시 남원읍 태위로에 있다. '파란달’보다 ‘달파란’이 느낌이 있지 않은가? 달파란 게스트하우스 주인장 김태환(52)씨는 전직 국어 교사다. 지금은 교사직을 명예퇴직하고 게스트하우스 주인장으로 제 2의 인생을 살고 있다. 달파란 게스트하우스는 2012년 12월에 오픈한 곳으로, 3층짜리 게스트하우스 과 별채 카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주인에게 게스트하우스 이름이 특이한 이유를 물었더니, “처음 위미리에 위치한 세천포구 바다를 봤을 때 그 느낌이 파란 달이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고 설명한다. 게스트하우스 이름도 시적이고 제주 정착기 역시 운명처럼 시적으로 시작된다.
“올레길 10코스를 걸으면서 송악산 중턱에 위치한 벤치에 앉아서 쉬고 있을 때였어요. 참 좋다는 느낌을 갖고 한참 앉아 있는데 갑자기 아내가 이렇게 말했어요.”
-여보, 내가 소원이 하나 있는데, 들어 줄래?
-뭔데?
-우리, 여기서 살면 안 될까? 제주에 살고 싶어
“그 순간 제 입에서 너무 쉽게 그래. 라는 대답이 나왔어요. 제가 살면서 몇 가지 잘한 일들이 있는데, 이 순간이 바로 그 잘한 일이에요.”
정말 지금의 생활에 만족한지 궁금했다. 물론 경제적인 여건도 궁금했고.
“처음엔 그저 먹고 사는 정도만 수입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시작했는데, 다행히 먹고 살면서 대학교 다니는 애들 등록금 댈 정도는 버는 것 같습니다. 제주에서 앞으로의 꿈이요? 시간이 지나면 규모를 줄여서 제 개성에 맞는 작은 식당을 운영하고 싶어요. 저만의 시간적 여유를 갖고 제가 하고 싶은 일을 더 많이 하면서 사는 게 제 꿈입니다.”
선량하게 웃는 주인 부부의 얼굴을 보면 ‘제주의 마법이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모든 걸 내려놓고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장사를 시작할 수 있는 용기. 제주에 살기 위해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심지어는 대학생 자녀들을 서울에 두고 새롭게 인생을 시작할 수 있는 그 것. 우리는 이것을 ‘제주홀릭’이라 부른다.
“지금도 저처럼 중년 분들이 많이 여행하러 내려와요. 우리 숙소에서 머물다 가는 분들 중에 진지하게 제주살이를 고민하는 분들도 많구요. 그분들에게 농담처럼 말해요. 올레길 자꾸 걷다 보면 저처럼 제주에 주저앉게 됩니다. 하구요.”
#가수 장필순이 추천한 그 곳의 그 남자, “대기업에 다닐 때보다 지금이 훨씬 행복합니다.”
‘요리하는 남자’는 애월읍 하귀리에 위치한 작은 요리 주점이다. 멋진 미소의 이영태(52) 씨는 ‘요리하는 남자’의 주인공이다. 생전 요리할 것처럼 생기지 않은 외모지만 의외로 요리하는 모습이 편안하게 잘 어울린다. 평소에도 요리하는 것을 좋아했다는 그는 현재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어서 참 행복하다고 했다. 평촌에 살다가 제주에 온 것은 2011년 2월. 대기업에 근무하면서 어느 순간부터는 한계를 느꼈다고 한다. 부장 직까지 하고 나면 그 이후엔 설 자리가 보이지 않는다는 거였다. 숨막히는 일상생활 속에서 탈출하기 위해 귀농을 꿈 꿨고 그렇게 귀농을 준비하고 있을 때, 한 친구가 말했단다.
“꼭 그렇게 깡촌으로 가야 해? 촌도 있고 도시 같은 분위기도 있는 제주는 어때?”
친구가 그냥 툭 던진 말이었는데 정말로 제주에 집을 구해서 내려오게 되었다. 늦둥이 딸이 중학교 입학할 때, 서둘러 떠나왔고 시내권 중학교보다는 시골지역에 위치한 학교로 보냈다. 딸은 제주 생활에 잘 적응했고 순박한 친구들과 좋은 선생님들을 만나면서 행복한 중학 생활을 했다. 그리고 그 딸은 올해 제주외고에 수석으로 입학했단다. 온 가족이 제주에서 새로운 인생을 맞이하고 있었다. 원래는 농사일을 해보려고 땅을 알아봤지만 희한하게도 지금의 가게 자리가 나왔을 때, 끌리듯이 그 날 계약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50년만에 처음으로 자신의 피 속에 요리에 대한 애정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보시다시피 작은 가게잖아요? 저 혼자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규모죠. 만약에 돈 벌려고 눈에 불을 켜고 장사를 했다면 지금처럼 즐겁게 살지는 못했을 거예요. 딱 지금이 좋아요.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요.” 그러면서 그는 어떤 요리를 파는지 상기된 표정으로 설명했다.
“초임 직장 시절에 일본에 파견근무를 나가서 5년 정도 있었는데, 그때 먹었었던 일본요리들을 제 손으로 만들어서 판매하곤 해요. 제가 맛있게 먹은 음식들은 흉내 내려고 노력하면 비슷한 맛이 나오더라구요.”
메뉴판에 있는 ‘간장새우’도 얼마 전 강남에 갔다가 맛있게 먹은 메뉴인데 제주에 내려오자마자 바
로 만들어 봤단다. 반응이 썩 괜찮다며 씩 웃는 모습이 참 해맑게 느껴졌다. 얼마 전, 모 잡지에서 가수 장필순씨가 자신이 자주 다니는 명소들을 하나씩 나열하면서 소개했는데 그곳에 요리하는 남자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 이야기를 물었더니 장필순씨가 처음 가게에 왔을 때는 장필순씨인지 몰랐다고 한다. 여러 명이 와서 음악 이야기를 하며 술을 마시고 갔는데 얼마 뒤에 한사람이 찾아와서
-장필순씨, 안 왔어요? 하고 물었단다.
-장필순씨가 여길 왜 와요? 하자 황당한 표정으로 쳐다보며
-지난번에 같이 왔잖아요. 했다는 거다.
그때부터 장필순씨는 후배들과 자주 이곳을 찾았고 4,5개월 전부터는 이효리씨 부부도 데리고 왔단다. 아마도 행복한 주인장 얼굴을 보면 기분이 좋아져서 술이 잘 들어가게 되는 것 아닐까?
‘달파란’의 주인장 김태환씨, ‘요리하는 남자’의 주인장 이영태씨 모두 공통점은 예전 직장보다 지금 제주에서 하는 일이 훨씬 만족스럽다는 거였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의 충고 또한 같다. 여행지에서 봤던 제주는 잊으라고. 바다를 감상하고 잔디를 다듬고 하는 로망은 일상생활이 되는 순간 또 하나의 삶이 된다고. 조선시대 윤선도의 는 실제 어부들의 삶과 비교하면 얼마나 황당한가? 실제 어부의 삶은 관념 속 어부의 삶과는 다르다. 한없이 한가롭고 유유자적할 수는 없다. 제주의 삶도 그렇다면 적절한 비유가 될까?
제주는 분명 대한민국이지만 "같은 나라 맞아?" 할 만큼 뭔가 다른 특별한 문화가 많이 있다. 아무래도 오랜 기간 독자적인 나라(탐라국)로 지내왔고 중앙정부 손길이 잘 닿지 못한 지역인데다가 섬 문화가 만들어낸 생태문화가 결합된 데 따른 것이다.
집을 수리하고 이사하는 구간 ‘신구간’
“언니, 신구간이 아니라서 집이 없다는 게 무슨 말이야?”
제주 이주를 준비하는 후배가 나에게 전화해서 물어본 말이다. ‘신구간’ 뿐 아니라 ‘연세’라는 개념도 처음 듣는 사람에게는 어리둥절한 말이다. 나 또한 탤런트 ‘신구’는 들어봤어도 ‘신구간’은 처음 들어본 말이었다. 또 ‘전세대란’이란 말은 제주에는 없다. 전세 자체가 거의 없으니까. 신구간은 대한(大寒) 후 5일에서 입춘(立春) 전 3일 사이에만 집을 수리하고 이사하는 구간이다. 약 7일 정도다. 땅에 내려와 있던 신들이 잠시 하늘나라에 올라가 있는 교체기간을 뜻하는 신구간. 이 기간에는 지상에 신이 없기 때문에 신이 두려워서 못했던 일들을 해도 아무런 탈이 없다고 믿었다.
천상천하를 관장하는 신들이 일 년에 한 번씩 모이기로 할 때 소별왕이 대한 후 닷새부터 입춘 전 사흘까지 약 일곱 날 동안이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한다. 이 시기는 농한기이고 1년이 시작되는 중요한 시기다. 제주 신화에는 이렇게 '신구간'의 유래가 소개되고 있다.
신구간이 되면 이사 관련 업계 뿐 아니라 인테리어, 가구, 가전 업계에서도 덩달아 매출이 오른다. 아마도 신구간 기간 세일을 하는 건 제주도에서만 벌어지는 일일 것 같다.
신구간에 이사를 한꺼번에 하다 보니까 제주도는 이 기간에 쓰레기와의 전쟁을 치르게 된다. 2014년 제주시의 경우 신구간 기간에 하루 쓰레기 발생량이 평소 526t보다 40t정도 더 증가했고 청소차 운행횟수를 하루 1.5회에서 3회로 늘렸다.
지금 세상이 어느 세상인데, 광대역 LTE급 세상에 이 무슨 근거 없는 풍속인가 싶지만, 제주의 기후와 문화를 이해하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신구간은 제주에서 일 년 중 일평균기온이 5도 밑으로 내려가는 거의 유일한 기간이다. 고온다습한 기후로 늘 세균 감염에 시달려야 했던 제주사람들에게 신구간은 질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유일한 기간이었다.
민간신앙-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에 영이 깃들어 있다
제주에는 1만8000여 신이 있고 400여개 신당이 남아 있어서 '신화의 섬'으로 불린다는 걸 들어 봤을 것이다. 어느 책에서 읽었는데 제주 사람들은 자신이 태어난 지역을 연고가 있는 '고향'이라 부르지 않고 내 탯줄이 있는 땅이란 뜻의 '본향'이라 부른다더라. 태어날 때부터 탯줄을 태우면서 기도를 했던 그 땅. 본향이다. 그래서 마을마다 본향당이 있다.
와흘 본향당에는 수령이 400년 넘은 폭낭(팽나무)이 있는데 입구에서부터 소름이 끼칠 정도로 강한 기운이 느껴진다. 나무 줄기마다 걸려있는 소지와 염색 천들. 나약한 인간들은 이렇게라도 신령스러운 나무에 기대어 위로받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내가 차 접촉 사고가 났을 때다. 직장 동료분 말씀이 ‘넋들이’러 가야 한다는 거였다. 제주에는 아직도 일상 생활에서 사고가 났을 때 넋들이는 풍습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한 마디로 놀란 넋(혼)을 달래주는 것이다. 이렇게 초월적 존재를 믿고 의지하려는 마음은 제주의 풍습 중 하나로 깊이 자리하고 있다.
방사탑은 도로 중간에도 있고 마을과 마을 경계선에도 있다. 탑을 쌓아 올릴 때는 밥주걱이나 무쇠솥을 넣기도 했는데 밥주걱은 밥을 긁듯이 외부의 재물을 모아 달라는 의미고 솥은 불에도 끄덕없이 이겨내니 솥처럼 마을의 재난을 막아 달라는 의미이다.
칠성신은 곡물을 수호하고 풍요를 가져다 주는 뱀신이다. 제주에서는 특히 뱀을 신으로 섬기는 모습이 강하게 나타나는데, 이는 제주에 워낙 뱀이 많기도 하거니와 식량이 부족한 섬에서 뱀은 쥐를 잡아주는 아주 유용한 동물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철저한 분가제도-안거리 밖거리
제주는 육지와 달리 예로부터 자식이 결혼하면 분가를 원칙으로 했다. 부모와 자식은 취사를 따로 할 뿐만 아니라 경지를 분할하여 독자적으로 생산했다. 말 그대로 한 집안에 살지만 독립된 생활을 했다.
제주도 주택은 ㄷ자 구조나 ㅁ자 구조로, 주 생활 공간을 안거리 밖거리 2채를 짓는다. 한 집이지만 2세대가 살 수 있도록 각 채에 부엌이 마련되어 있다.
재미있는 것은 2세대가 한 집에서 살 때 부모님이 작은 집(밖거리)을 쓰고 자식들 가족이 큰 집(안거리)을 사용한다. 식구들이 많은 집이 큰 집을 사용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육지의 시선으로 보면, 한 집에 살면서도 안거리 밖거리에서 각각 따로 밥을 해먹는 것이 야박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밭일과 물질로 바빴던 제주의 여성들은 같이 모여서 밥을 먹고 하는 것이 오히려 비능률적이었다. 각자 챙겨서 얼른 밥을 먹고 일하러 가는 것이 서로를 위해 좋은 일이었다. 80이 넘은 노모도 혼자 밥 지어서 혼자 밥 먹는 게 일상화되어 있다. 우리 동네 이장님댁 어멍(어머니)은 항상 이렇게 말씀하신다.
“어떵 안 햄져”(혼자 먹어도 괜찮다는 뜻이다)
“지금은 덜하지만 2010년까지 신구간 기간에 이사를 하려면 평소 요금의 2배에서 4배를 요구하기도 했죠. 그러다 보니 연세라는 임대 방식은 강화될 수밖에 없었죠. 어차피 다른 달에는 이사를 하려 해도 집을 구할 수가 없으니까요”(고진석 상무이사, 제주희망협동조합)
인간을 둘러싼 모든 것에 신이 깃들어 있다는 제주 사람들의 믿음은 여러 책자에서 확인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생태 중심적 사고이지 어리석은 생각이 아니다. 제주에 이주해 살면서 여러 번 느꼈는데, 여기 분들은 웬만하면 뱀도 죽이지 않고 거미도 죽이지 않으려 한다. 그냥 자연에 있는 것들은 자연 속에서 사람과 함께 살아가길 바란다. 해산물도 필요한 만큼만 채취했다고 한다. 절대 욕심내지 않고 자연과 함께 사는 삶. 그것이 제주인의 삶이다.
이런 분가제도는 부모자식 간에 독립적인 삶이 강조되어서 결혼한 자식들은 철저하게 자립을 해야 했고 부모 역시 완전히 몸져눕지 않는 이상 자식에게 의지하지 않았다. 또 분가제도로 인해 부부 간에도 어느 정도 독립된 경제활동이 이루어졌다. 그래서 여자들끼리 계가 따로 있고, 경조사에서도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가 각각 따로 겹부조를 하는 특이한 상조문화도 생겨났다. 예를 들어 상갓집에 갔을 때, 그 집 큰 아들과 큰 며느리를 알고 있으면 큰 아들과 큰 며느리에게 각각 부조를 해야 한다. 육지에서 온 사람들의 경우, 제주도 경조사 풍습이 낯설게 느껴지기 마련인데, 그 뿌리에는 제주의 분가제도가 있음을 알면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된다. 알고 보면 배울 점이 많은 합리적인 문화가 많다. 육지엔 없고 제주에만 있는, 독특한 것들이 아주 많다.
김선혜 객원기자
-서귀포산업과학고등학교 국어교사
-'랑이야 제주에서 학교가자'(대숲바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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