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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명철의 스포츠 인물 열전]‘녹색 테이블 여왕’ 이에리사
- 박세리가 1998년 ‘맨발 투혼’을 발휘한 US 여자 오픈 우승을 비롯해 4승을 올리는 장면을 TV로 보고 골퍼의 꿈을 키운 박세리 키즈들은 2016년 현재 미국 여자 프로골프투어를 휩쓸고 있다. 오는 8월 리우데자네이루 대회에서 112년 만에 올림픽 무대로 돌아오는 골프 종목에서는 세계 랭킹 15위 안에 드는 선수는 한 나라에서 최다 4명까지 출전할 수 있다. 한국은 이변이 없는 한 여자부 4명의 출전이 확실시되고 있고 유력한 금메달 후보국이다. 박세리가 일궈 놓은 성과다. 2010년 밴쿠버 동계 올림픽 피겨스케이팅 여자 싱글 금메달리스트 김연아의 뒤를 잇는 김연아 키즈들은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에서는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겠지만 현재 초등학교 5, 6학년들인 임은수(12, 서울 응봉초) 김예림(12, 군포 양정초) 유영(11, 과천 문원초) 등은 올림픽 메달리스트로 성장할 가능성이 꽤 크다. 이들은 대체로 김연아의 초등학교 시절 기술 수준에 올라 있고 2022년 베이징 동계 올림픽에서 기량을 꽃피울 나이가 된다. 최근에는 이세돌과 인공지능 알파고의 대결로 이세돌 키즈들이 나올 터전이 마련됐다. 그런데 40여년 전에도 ○○○ 키즈가 있었다. 이제 그 ○○○을 찾아서 시간 여행을 떠나 보자. ‘이에리사 키즈’ 붐 1973년 한국 스포츠를 화려하게 장식한 건 여자 탁구였다. 1967년 여자 농구에 이어 한국은 여성을 앞세워 세계 무대에 다시 한 번 ‘스포츠 코리아’를 알렸다. 1973년 제 32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는 4월 5일부터 15일까지 유고슬라비아 사라예보에서 60개국이 출전한 가운데 열렸다. 한국은 김창원 대한탁구협회 회장을 단장으로 총감독 이경호, 남자 코치 김창제, 여자 코치 천영석으로 코칭스태프를 구성했다. 남자 선수로는 홍종현 최승국 김은태 강문수 이상국이, 여자 선수로는 정현숙 이에리사 박미라 나인숙 김순옥이 출전했다. 여자 단체전은 예선 리그를 펼친 뒤 예선 A, B조를 통과한 4개국이 예선 전적을 안고 돌려 붙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B조에 속한 한국은 이에리사와 정현숙을 단식, 이에리사와 박미라를 복식에 기용하는 전략으로 스웨덴, 유고슬라비아, 서독을 잇따라 3-0으로 완파한 뒤 중국과 피할 수 없는 일전을 벌이게 됐다. 한국은 1, 2번 단식에서 이에리사와 정현숙이 중국의 정후아잉과 후유란을 각각 2-1로 꺾으며 기선을 제압했다. 한국은 3번 복식에서 이에리사-박미라 조가 중국의 정후아잉-장리 조에게 0-2로 졌으나 4번 단식에서 이에리사가 이 대회 단식 챔피언인 후유란을 2-0(21-15 21-18)으로 눌러 우승으로 가는 최대 고비를 넘었다. 결승 리그에서 한국은 헝가리와 일본을 각각 3-1로 물리치고 예선 리그를 포함해 8전 전승으로 세계 여자 탁구 정상에 올랐다. 1956년 제23회 도쿄대회에 처음 출전한 이후 17년 만에 거둔 값진 성과였다. 이 대회에서 한국은 여자 단체전 우승 외에 여자 단식에서 박미라가 3위를 차지했다. 여자 탁구가 중국을 누르고 세계 정상에 올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전국 방방곡곡 탁구장은 탁구를 치려는 청소년들로 넘쳐 났다. 글쓴이가 살던 서울 변두리 동네에는 1980년대까지만 해도 가장 목이 좋은 네거리 빌딩 2층에 탁구장이 있었다. 20여년 전까지만 해도 서울 시내 한복판 광화문에 ‘고려탁구장’이 있었는데 점심 시간에는 가볍게 땀을 흘리려는 직장인들로 빈 탁구대가 없었다.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여자 단체전 우승의 주역 ‘이에리사 키즈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에리사가 처음 라켓을 손에 잡은 건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3남 5녀 가운데 일곱째인 이에리사는 일찌감치 뛰어난 탁구 실력을 보였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전국선수권대회 초등부 우승을 차지하더니 충남 홍성여중 1학년 때 참가한 전국종별대회에서도 눈에 띄는 플레이를 펼쳤다. 서울 문영여중 손병수 코치는 이에리사를 눈여겨보고 서울로 전학을 권유했다. 아버지 이승규 씨는 딸의 서울행을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곧 허락했다. 이에리사는 중학교 3학년 때인 1969년, 언니와 오빠가 있는 서울로 전학해 본격적으로 탁구를 시작했다. 언니가 싸다 준 점심, 저녁 도시락을 먹으면서 수업이 끝난 뒤 하루 6시간 강훈련을 한 번도 거르지 않았다. 그해 5월 이에리사는 전국학생종별대회 개인전 우승을 거머쥐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이 그해 11월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제23회 전국남녀종합선수권대회에서 일어났다. 이에리사는 학생부에서 일찌감치 우승하더니 일반부에서도 연승 행진을 이어 갔다. 결승 상대는 베테랑 김인옥(한일은행)이었다. 두 선수는 경기 내내 접전을 펼쳤다. 이에리사는 1-1로 맞선 3세트에서 21-19로 이겨 세트 스코어 2-1로 승리했다. 15세 소녀가 자신보다 7, 8세 많은 선배들을 모두 누르고 종합선수권을 차지하자 탁구계는 발칵 뒤집혔다. 학생부에서 우승한 뒤 바로 다음 날 일반부에서 우승했으니 더욱 그럴 만했다. 탁구 올드 팬들은 기억하겠지만 이에리사의 플레이 스타일은 남자 선수로 보면 한참 후배인 김택수와 비슷했다. 여자 선수라고는 믿기 어려운 강력한 드라이브를 구사했다. 지금이야 드라이브가 일반적이지만 당시 여자 선수가 힘 있는 드라이브를 구사하는 경우는 보기 힘들었다. 이에리사는 드라이브를 앞세운 공격적인 탁구로 국내 무대를 휩쓸었다. 국내 선수권자가 된 이듬해인 1970년 국내 대회 7관왕에 오른 데 이어 국제 무대에서도 맹활약했다. 제10회 아시아탁구선수권대회 주니어부 단식 우승을 차지했고 단체전 우승을 이끌었다. 어느새 이에리사는 한국 여자 탁구의 미래를 상징하게 됐다. 그리고 불과 3년 뒤 이에리사는 한국 여자 탁구를 세계 정상에 올려놓았다. 그의 나이 19세 때였다. 어린 나이에 정상에 오른 뒤 쉽게 무너지는 선수들이 종종 있다. 그러나 이에리사는 세계선수권대회 단체전에서 우승한 뒤에도 국내 최강자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국내 최고 권위의 탁구 대회인 종합선수권대회에서 7연속 우승했다. 이에리사의 7연속 우승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국가대표선수로도 꾸준히 활약했다. 1975년 캘커타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해 단체전 준우승을 이끌었고 1976년에는 서독오픈에서 개인전 우승을 차지했다. 탁구인 이에리사가 위대한 까닭은 1973년 대회 이후 한국 선수가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기까지 14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1987년 제39회 뉴델리 대회에서 양영자-현정화 조가 여자 복식 정상에 오르면서 한국 여자 탁구의 세계선수권대회 금메달 흐름이 이어졌다. 1991년 일본 지바에서 열린 제4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남북 단일팀 ‘코리아’가 여자 단체전에서 우승하기까지는 18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이에리사는 남북 여자 탁구 선수들 모두에게 '우리도 세계 정상에 설 수 있다‘는 희망을 밝힌 대선배였다. 2003년 용인대학교 교수로 임용된 것을 시작으로 2005년 여성 스포츠인으로는 처음으로 태릉선수촌장을 맡았고 2014년에는 역시 한국 여성 체육인으로는 처음으로 아시아경기대회(인천) 선수촌장을 지냈다. 이에리사는 제19대 국회의원까지, 여성 체육인으로서 최초 기록을 여럿 갖고 있다. 탁구, 전국민이 열광한 생활스포츠 탁구만큼 국민들에게 친근한 스포츠가 있을까. 1973년 여자 단체전에서 세계 정상에 오르며 전국적으로 탁구 열풍이 일더니 1986년 서울 아시아경기대회에서는 탁구로 온 나라가 들썩거렸다. 너도나도 탁구장으로 가거나 틈만 나면 드라이브를 하는 폼을 잡기도 했다. 서울 아시아경기대회가 초반의 열기를 뿜고 있던 1986년 9월 24일 서울대 체육관에서는 한국과 중국의 탁구 남자 단체전 결승이 벌어졌다. 한국은 첫 두 단식에서 안재형(뒷날 중국 탁구 선수 자오즈민과 한중 수교 전에 결혼)과 김완이 천신화와 후이준을 나란히 2-0으로 꺾고 앞서 나가기 시작하더니 내처 4-1까지 리드를 이어 갔다. 그러나 6번 단식부터 내리 3게임을 내줘 게임 스코어 4-4로 역전 위기에 몰렸다. 9번 단식에서 후이준과 맞선 안재형은 첫 세트를 듀스 접전 끝에 25-23으로 딴 뒤 세트스코어 2-1로 이겼다. 한국은 4시간 30분이 넘는 대혈투 끝에 세계 최강 중국을 무너뜨렸다. 중국은 1985년 현재 세계선수권대회 남자 단체전에서 3연속 우승을 포함해 통산 10번의 우승을 기록하고 있었다. 여자 단체전에서는 중국을 꺾었지만 남자 단체전에서 중국을 물리치리라고 내다본 이는 거의 없었다. 서울대 체육관은 열광의 도가니였고 숨 막히는 접전 끝에 세계 최강 중국을 꺾는 장면을 TV로 지켜본 국민들은 환호 또 환호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탁구는 세계선수권대회를 연 지 62년 만에 정식 종목으로 채택됐다. 서울 올림픽 여자 복식에서 양영자-현정화 조는 중국의 자오즈민-천징 조를 2-1로 꺾고 올림픽 여자 복식 초대 챔피언이 됐다. 남자 단식에서는 유남규가 김기택을 3-1로 따돌리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다시 한 번 전국적으로 탁구 열풍이 불었다. >>>글 신명철 편집위원, 전 편집국장 smc6404@naver.com
- 2016-06-09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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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뉴욕은] 올해로 30회 ‘헌츠먼 세계 시니어 경기대회’ 준비 한창
- 한때 올림픽 선수가 되고 싶었던 신중년들이 그런 기분을 만끽할 수 있는 경기대회가 미국에서 열린다. 눈요기만 하는 관광보다는 세계 각지에서 온 선수들과 경기를 하면서 우정을 나누고 풍물도 즐기고 싶은 신중년이라면 참가해 볼만한 대회다. 올해로 30회째를 맞이하는 ‘헌츠먼 세계 시니어 경기대회(The Huntsman World Senior Games)’. 미국 서부 유타주 세인트조지(St. George)에서 열리는 이 대회는 시니어 올림픽으로 자리를 잡았다. ‘더 높이, 더 멀리, 더 빨리’보다는 ‘더 건강하게, 더 즐겁게, 더 친밀하게’를 지향하는 것이 올림픽과 다른 점이다. 물론 참가 자격 제한이 있다. 50세 이상이라야 참가가 가능하다. 그 대신 예선전은 없다. 자신의 수준에 맞는 경기에 참가하고 경기하다 보면 메달을 딸 수도 있다. 못 따면 또 어떤가? 연금을 받는 것도 아니니. 올림픽은 참가하는 데 의의가 있지 않은가? 선수로 뛰지 않고 그냥 응원단이나 관람객으로 참가해도 선수와 같은 대접을 받을 수 있다. 딕시주립대학의 한센스타디움에서 개최되는 개막식은 올림픽을 방불케 한다. 세계 20여개 국가와 미국 50개 주에서 온 선수들이 출신 국가와 지역의 특색을 살린 복장과 깃발을 들고 입장을 하면 세인트조지 시민들은 관중석에서 환영의 함성을 지른다. 성화 봉송과 점화, 선수 선서와 매스게임, 그리고 불꽃놀이로 이어지는 화려한 개막식의 분위기에 젖다보면 국가대표선수가 된 느낌이 들게 된다. 부부가 손잡고 함께 개막식에 참석하는 장면은 생각만 해도 흐뭇해진다. 개막식에 이은 연주회에서는 축제 분위기를 더욱 만끽할 수 있다. 지난해 실내 경기장에서 열린 브리티시 인베이션 트리뷰트 밴드와 더 몽키스 밴드의 공연은 압권이었다. 각국의 선수들과 동반자들은 가슴 깊숙이 숨겨 두었던 열정을 마음껏 분출하면서 몸을 흔들고 괴성을 질렀다. 경기 후 열리는 디너와 댄스파티도 잊을 수 없는 행사다. 각국 선수들과 어울려 춤을 추다보면 새로운 추억과 로맨스가 마음깊이 남게 된다. 10월 3일부터 15일까지 2주간 열리는 올해 경기는 모두 29개 종목. 대부분 연령대별(5세 간격)로 나뉘어 경기가 치러진다. 축구, 소프트볼, 배구 등 3개 종목은 팀경기로, 볼링 등 나머지 26개 종목은 개인경기로 진행된다. 팀경기는 팀원을 구성해 함께 등록해야 한다. 개인경기는 개별 등록 후 같이 뛰고 싶은 선수를 등록 리스트에서 선택할 수도 있다. 일정만 맞으면 여러 종목 참가도 가능하다. 한 번 등록한 선수의 번호는 바뀌지 않고 매년 같은 번호가 부여된다. 그래서 다음해 같이 경기를 하고 싶은 선수가 있으면 지정하기도 편리하다. 골프는 사교 경기와 메달 경기 두 그룹으로 나누어져 있어 자신의 수준에 맞는 경기를 택할 수 있다. 메달 경기도 36홀의 연령대별 경기와 18홀의 핸디캡 경기로 나누어 치러진다. 특히 준프로급이 참여하는 연령대별 경기는 내년에 미국에서 열리는 내셔널시니어골프대회 예선전을 겸하고 있어 좋은 성적을 거두면 내셔널골프대회 출전자격도 덤으로 얻을 수도 있다. 유타주 세인트조지시는 선브룩나 딕시 레드힐스와 같은 유명 골프장이 주변에 즐비해 세계의 골프 마니아들이 연중 몰려드는 골프 휴양지다. 건조한 사막성 기후에 붉은 바위산을 끼고 양탄자 같은 잔디가 펼치진 링크코스는 골퍼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도전적인 신중년들은 철인 3종 경기와 산악자전거 경기에서 세계의 베테랑 철인들과 한판 승부를 겨뤄 볼만하다. 강렬한 햇살을 받으며 선인장밖에 없는 황무지에서 진행되는 사이클링, 도로 달리기와 경보는 요즘 붐이 일고 있는 운동. 동우회의 회원들이 함께 참가하면 좋은 추억을 만들 수 있다. 4년마다 열리는 올림픽과는 달리 헌츠먼 시니어대회는 매년 열려 미국, 캐나다는 물론 세계 각지 스포츠 동우회의 연례 모임 장소로도 활용하고 있다. 네바다주 카슨시의 브렌다 블랙햄 여사는 35년 전 고등학교 배구팀 코치로 활약했다. 전국 대회를 휩쓸었던 추억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동고동락했던 학생 선수들이 이제는 의사, 변호사, 교육자 등으로 미국 각지에서 맹활약을 하고 있으나 다 같이 한번 모이기가 쉽지 않았다. 학생들이 지천명(50세)의 나이를 넘긴 2014년, 이 대회에 배구팀으로 함께 참가하면서 소망했던 재회가 이루어졌다. 손발 한 번 맞추어볼 겨를도 없이 바로 경기에 참가했지만 그저 즐거웠고 경기를 거듭할수록 옛날 팀워크가 되살아나면서 더 즐거웠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 10월의 대회기간에도 바쁜 일을 접어놓고 모두 모여 경기를 하면서 재회의 기쁨을 나눌 계획이다. 독일 배구팀은 지난해 금메달의 한을 10년 만에 풀었다. 2006년부터 참가한 독일팀은 2013년에는 세계시니어배구챔피언십을 겸한 이 대회에서 캐나다 팀에 석패해 은메달에 그쳤다. 2년간 실력을 더 갈고 닦아 지난해 우승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올해 있을 독일과 캐나다 팀 간의 리턴매치는 벌써부터 관심을 끌고 있다. 심금을 울리는 러브스토리도 빠질 수 없다. 서울올림픽 때의 안재형과 자오즈민의 열애에 견줄만한 전설 같은 이야기도 전해진다. 전역 군인인 미국의 댄 크레이번스와 러시아의 마리나 안드리바는 2004년 탁구 경기에 출전했다가 사랑에 빠져 결혼을 했고 이제는 복식조로 함께 참가하고 있다. 신중년과 꽃중년이 뒤늦게 소울 메이트로 만나 적대적인 양국의 탁구계를 잇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해피엔딩 스토리다. 중국 청소년들의 자원봉사활동도 화제다. 2010년 미국의 시니어배구팀이 중국 순회 경기를 갔을 때 친절하게 봉사한 중국 청소년들과 인연이 되어 그 후 해마다 중국 청소년 10여명이 이 대회 때 미국에 와서 한 달여간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제법 치열한 경쟁을 통해 선발된 중국 청소년들은 현지 자원봉사를 통해 영어는 물론 국제 매너와 봉사정신을 익히게 된다. 헌츠먼 대회는 각계의 봉사자와 후원이 뒷받침되면서 참가 선수만 1만명이 훌쩍 넘는 국제대회로 성장했지만 출범은 단순했다. 1987년 존 모건 주니어 부부가 ‘운동과 체력단련이 일상이 되면 신중년의 황금기가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각지의 시니어가 함께 하는 대회를 구상하게 됐다. 여기에 홀인원을 5차례나 기록한 만능 스포츠맨이자 건강과학박사인 스티븐 워너 하이너 교수가 가세하고 세인트조지시도 적극 지원에 나서면서 대회를 출범시켰다. 출범 2년 뒤 헌츠먼코퍼레이션의 존 헌츠먼 회장과 부인이 본격적으로 후원하면서 세계적인 대회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이 대회가 성황을 이루는 데는 1시간 이내의 거리에 자이언캐년 국립공원이 있고 브라이스캐니언, 그랜드캐니언, 라스베이거스, 솔트레이크시티 등 많은 관광 자원과 부대시설이 뒷받침하고 있는 점을 빼놓을 수 없다. 문화 행사와 박물관 투어 등 다양한 볼거리와 먹거리가 있고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한 무료 건강검진을 실시하는 등 세심한 서비스도 참가율을 높이는 요인이다. 모건 회장은 메시지를 통해 “봉사자, 후원자, 참가자 및 임직원의 헌신과 노력으로 대회가 놀랍게 발전했다”며 “30주년을 기념해 성대하게 진행될 올 대회에 세계의 신중년들이 적극 동참하여 건강을 증진하고 우정도 돈독히 하자”고 역설했다.
- 2016-05-02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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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조동성 안중근 의사 기념관장의 멈추지 않는 미래 탐색기
- 조동성 안중근의사기념관장은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로 무려 35년 반을 재직한 대한민국 경영학계의 대표 학자다. 디자인 경영 개념을 제시하여 경영학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왔던 그는 2011년 남산에 위치한 안중근의사기념관 관장으로 취임했다. 교수로서의 성공적인 생활에 이어 새로운 삶에 도전하고 있는 조동성(趙東成·67) 관장의 목소리를 통해 ‘인생 본고사에’ 도전하는 의미를 짚어봤다. 조동성 안중근의사기념관장은 인터뷰 내내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 아마도 입가에 가시지 않는 웃음기가 그런 역할을 했을 것이다. 몇 년 전 서울대학교에 있는 그의 집무실에서 봤을 때와는 또 다른 젊음이 새삼 느껴졌다. 그는 안중근 의사를 ‘로맨티스트’라고 표현했다. 원칙에 살고 원칙에 죽었던 이였기 때문이다. 그는 아직도 안중근 의사에 대해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다며 안중근 의사 기념사업에 대한 의욕을 보였다. 아직 안중근 의사에 대해 모르는 점 많아 “대략 1년에 10만 명 정도 기념관을 찾고 있어요. 저는 경영학을 한 사람이다 보니 마케팅을 해야겠다 싶었습니다. 좌상이 아니라 보부상이 되자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안중근 의사 기념관 홍보대사란 직함을 만들었습니다. 500여 명을 홍보대사로 양성 및 위임하여 전국의 각 초중고에 가서 강연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카데미를 만들어 교육을 진행하고 있어요.” 안중근아카데미는 지난 5년 동안 1년에 두 기수씩 진행됐다. 50대, 60대로 학교 교사, 대학 교수로 은퇴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안중근 의사 기념관은 국민의 혈세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돈을 벌 수 있으면 자체 수입을 만들어서 정부 지원을 되도록 안 받는 쪽으로 가자는 생각이 있어요. 혈세는 받을 만큼만 받자는 거죠. 마침 여기가 위치가 좋아요. 서울역이나 남대문에서 5분 거리입니다. 직장인들도 많이 다니구요. 그래서 찻집을 하나 운영하기로 했습니다. 돈도 벌고 사람도 오게끔 하려는 생각이에요.” 조 관장은 그에 더해 ‘의류 사업’(?) 진출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캐릭터가 미키마우스입니다. 그 다음이 체 게바라라고 해요. 체 게바라는 티셔츠로 그렇게 유명해질 수 있었죠. 안중근 의사도 그렇게 해보고자 합니다. 돈을 버는 것과 함께 사회적 역할도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나는 찔레이자 장미다 조 관장은 2014년 2월 서울대학교에서의 35년 6개월이라는 시간을 마치게 됐다. 그가 그토록 오랫동안 서울대학교에서 교수로 일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 덕분이었다. “어머니에게 서울대에서 일을 시작한다고 알려드린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그날 저에게 ‘무릎 꿇고 앉아라. 나하고 약속을 하자’라고 말씀을 하시더군요. 어머니는 저에게 ‘정년 퇴임할 때까지 서울대를 떠날 생각을 하지 말아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가 1978년이었죠. 그리고 부지불식간에 그렇게 살게 됐어요. 사실 학교를 떠날 몇 번의 기회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어머니의 말씀이 저를 붙잡았죠.” 대한민국 최고의 지성이 모이는 곳에서 보낸,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다. 그렇게 한 우물을 팠을 때 얻는 것과 잃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봤다. “한 우물을 파야 물이 나옵니다. 그래서 저는 가능성이 확실하게 있다고 생각이 들면 성공할 때까지 파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조 관장의 저서 중에는 라는 공저가 있다. 그렇다면 그는 장미의 삶이었을까 아니면 찔레의 삶이었을까? “장미는 축적하는 삶입니다. 반면 찔레는 처음부터 가진 걸 즐기는 삶이죠. 큰 조직의 일원으로 자신이 드러나지 않는 삶은 장미입니다. 군대나 대기업이 대표적인 장미의 삶이죠. 장미는 자기 삶이 없고 50, 60대가 되면 힘들어집니다. 그에 비하면 교수는 찔레의 삶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찔레도 한 길만 계속 파다 보면 장미처럼 돼요. 그러니까 제 삶은 장미와 찔레로 굳이 구분 짓는다기보다는 일정한 궤적으로서의 삶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서울대라는 조직은 조직 구성원이 갖고 있는 능력을 확장해줄 수 있는 곳이라는 특성이 있음을 잊지 않았다. 같은 말이라도 서울대 교수가 말한다고 하면 좀 더 믿음이 갈 수밖에 없는 게 한국의 현실이다. 그는 그 현실에 혜택을 받으면 받았지 자신이 희생된 것 같지는 않다고 말했다. 교수 생활의 마지막 봉사 조 관장은 서울대 교수 생활의 마지막 해에 경영학 교수로서 사회에 어떤 봉사를 할까를 고민했다. 그리고 고민 끝에 서울대가 아닌 대학교 학생들에게 특강을 하는 게 자신이 할 수 있는 확실한 봉사라고 판단했다. “제가 지도한 학생들이 전국 70여 개 대학에 교수로 있어요. 그들에게 이메일을 보냈습니다. 두 시간 정도 특강 시간을 주면 내가 가서 특강을 진행하겠다, 향토음식을 사주면 맛있게 먹고 돌아오겠다라고(웃음).” 그렇게 15개 대학이 정해졌고 한 주에 한 번씩 특강을 나갔다. 2013년 9월부터 12월까지 2학기 내내 가졌던 강의 봉사 속에서 그는 많은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 “강의를 똑같이 하려다가 학생들에게 질문을 받아서 그중에서 괜찮은 걸 골라 강의하자고 했어요. 질문들 중에 가장 많이 나온 게 두 개였어요. 첫 번째는 ‘좋아하는 걸 할까요, 잘하는 걸 할까요’였습니다.” 그는 그 문제에 대해 아무리 고민해도 답이 없었다고 술회했다. 그런데 두 번째로 많이 나온 질문에 대해 답하다 보니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오더란다. “두 번째로 많이 나온 질문은 ‘꿈’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꿈에 대한 질문은 즉답을 하는 순간 질문의 함정에 걸리는 거예요. 묻는 이가 스스로 선택하여 말할 수 있게끔 만들어야 합니다.” 그가 본 꿈을 대하는 학생들의 유형은 다음 네 가지였다. 1.확실하게 꿈이 있고 그 꿈이 절대 안 변하는 사람 2.확실하게 꿈이 있는데 확실하게 바뀌는 꿈 3.꿈을 가지고 있느냐고 하면 적당히 내 꿈을 말하지만. 자신이 없고 확신이 없는 것. 4.아예 깨끗하게 꿈이 없는 것. 내 꿈이 아니라 가문의 영광, 부모의 꿈 등등. “1, 2는 그 사람의 꿈이 확실한 겁니다. 반면 3, 4는 꿈이 없거나 모르는 거죠. 되레 3, 4의 유형은 크게 부담이 없어요. 이들은 잘하는 걸 계속하면 됩니다. 그러나 1, 2는 자신만의 가치관이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좋아하는 걸 하라고 해야겠죠.” 자신의 첫 번째 스승, 아버지 조 관장은 자신의 삶이 평탄하기만 했던 것 같지는 않다고 밝혔다. 연구 결과가 안 나오거나 친구 관계가 틀어지거나 하는 소소하지만 심각한 일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것들에 대해서 연연하지 않는 품성이 그러한 갈등이 큰 상처가 되는 걸 막았다. 그의 그런 기질은 아버지로부터 배운 면이 있었다. “선친께서는 교수를 하다가 정부에서 일하게 됐습니다. 그러다가 국회의원에도 출마하셨죠. 그러나 당선은 되지 않으셨습니다. 그때가 제가 막 대학생이 됐을 때였죠. 낙선한 그날 아버지께 깎은 사과를 드리기 위해 방에 들어갔는데 아버지께서는 거기서 책을 쌓아놓고 글을 쓰고 계시더군요. 뭐하시냐고 여쭤봤어요. 책들은 러시아로 된 책들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나라가 남북 분단이 되어 있고 통일이 가장 큰 과제인데 소련의 도움 없이 통일될 것 같지가 않다. 옛날에 러시아에 대해 배운 걸 정리해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이 패배한 선거날에 말이죠. 그런 분이셨습니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는 게 아버지의 철학이었습니다.” 미래를 생각하는 습관을 갖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아버지 덕분이었다는 그는 그런 습관 덕분에 서울대 교수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쉬지 않고 일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이제 비로소 인생 본고사를 시작한 셈 조 관장은 교수직 퇴임 이후의 가장 큰 변화로 중압감에서 벗어난 걸 들었다. 서울대학교라는 이름의 무게에서 그도 자유롭지는 못했던 것이다. “부지불식간에 누가 나를 어떻게 보는지 신경 쓰게 되더군요. 교수 사회에서도 최고여야 하고 표정, 행동, 매너 등등을 고민하게 돼요. 제 한마디가 서울대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면 더 그렇죠. 그런데 학교에서 월급 받을 때와 달리 지금은 명예교수니까. 명예교수는 한 푼도 안 받거든요(웃음).” 그는 인생 후반전이라는 말은 자신에게는 맞지 않는다고 밝혔다. “저는 제가 후반전이라는 생각이 안 들어요. 제가 고3일 때, 모의고사를 열 번 보고 본고사를 봤어요. 그래서 40대, 50대일 때는 모의고사를 7번 본 거 같았죠. 두세 번 더 보면 이제 진짜 인생의 본고사를 보게 될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시간이 흐르면서 8번째, 9번째 모의고사를 봤고. 지금에 와선 모의고사는 다 봤고 이제야 본고사를 볼 시간이라는 생각이에요. 그래서 은퇴 후 인생이란 표현이 저에게는 좀 맞지 않는 것 같아요.” 스승이 많으면 행복한 삶이라고 하던가. 그는 자신에게 인생의 가르침을 준 사람들을 하나하나 꼽았다. “첫 번째, 두 번째가 아버지와 어머니입니다 세 번째 분이 중학교 때 교장 선생님이에요. 그분께서는 ‘올림픽 기록은 지키라고 있는 게 아니라 깨라고 있는 거다. 역사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깨기 위해서 하는 거다. 하루하루를 과거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과거를 깨고 새롭게 나아가기 위해 살아라’라고 말씀하셨죠. 그 말씀이 지금도 생각나요. 그리고 서강대 경제학과를 맡고 계셨던 김덕중 교수님입니다. 그분께서 1975년께 제가 하버드대학을 마치고 막 귀국했을 때 말씀하셨죠. ‘하버드를 나왔으니 기고만장할 때다. 사회에서도 인정해줄 거다. 그거 딱 5년 간다. 하버드라는 이름이 깨질 때를 위해 지금 준비하고 능력을 쌓아라’라고요. 정신이 번쩍 들었죠.” 누구라도 세상에 도움이 될 능력을 갖고 있다 조 관장이 접한 경험, 그리고 그가 만난 스승들은 그에게 미래를 놓지 않는 힘을 갖게 만들었다. 그는 그러한 힘을 바탕으로, 지금까지 접근하지 못했던 분야로 들어가는 중이었다. 그는 최근 ‘사람의 능력을 발견하는 작업’에 관해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 특히 자폐증인 사람들의 능력을 발굴하는 연구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한다. “군대 시절, 고문관인 친구가 한 명 있었습니다.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는 친구였죠. 그런데 그 친구가 어느 날 풀피리를 불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 소리에 모든 사람이 감동을 받았고, 저 또한 마찬가지였죠. 이 세상에 불필요한 사람은 없다는 걸 느끼게 된 순간이었습니다.” 군대 시절의 기억은 그에게 사람에 대한 관점을 바꾸게끔 만들었다. 그의 이 새로운 작업은 무엇보다도 그의 가족 중 한사람이 자폐증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요즘은 자폐증 부모들이 어떻게 자녀들의 능력을 찾아냈는가를 연구하고 있는 중입니다. 생각해보면 풀피리를 불었던 그 친구를 접한 경험에서 갖게 된 자세 같기도 해요. 누구에게라도 능력은 있다, 그러니 그걸 찾아내게 돕자는 겁니다.” 끊임없이 미래를 갈구하는 이가 이제 타인의 미래를 찾아주기 위해 새로운 미래를 개척하려 한다. 실로 아름다운 나비효과 아닌가. 이제 인생 본고사를 치르려 한다는 조 관장의 말이 실제적으로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 2016-04-19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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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명철의 스포츠 인물 열전] 한국 농구 ‘슈터의 전설’ 신동파
- 믿기 어려운 일이겠지만 글쓴이는 초등학교 시절, 두 가지 결심을 했다. 하나는 스포츠 기자가 되는 것, 다른 하나는 특정 대학교에 가는 것이었다. 10살을 갓 넘긴 어린아이가 이런 결심을 하게 된 데에는 물론 그럴만한 까닭이 있었다. 1960년대 중반, 시골 중에 서도 시골인 강원도 신철원군 갈말면 지포리에 있는 신철원초등학교에 다니던 아이는 라디오 중계로 1964년 도쿄 올림픽 복싱 경기 정신조와 사쿠라이(뒷날 스포츠 기자가 된 뒤 당시 자료를 살펴보고 사쿠라이 다카오라는 ‘풀 네임’을 확인했다)의 밴텀급 결승전, 그리고 1964년과 1965년 캐시어스 클레이(뒷날 무하마드 알리로 개명)와 소니 리스턴의 프로 복싱 세계 헤비급 타이틀매치 등을 들었다. 박정희장군배 동남아여자농구대회는 해마다 단골로 듣는 대회였다. 그 무렵 일본의 릿쿄대학교와 야하다제철, 미국의 빅토리농구단 등이 한국에 와 친선경기를 가졌는데 특정 대학교는 연전연승이었다. 일본팀들을 물리칠 때 시골 아이의 가슴은 벅차 올랐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신동파(申東坡)라는 이름을 확실하게 기억하게 됐고 10여년 뒤 특정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 봄에 열린 농구 OB전에서 신동파가 뛰는 경기를 라디오 중계가 아닌, 실제 경기로 보게 된다. 일본팀은 물론 국내 실업팀들을 손쉽게 물리친, 특정 대학교는 연세대이며 당시 멤버는 김영일 방열 김인건 하의건 신동파 등이었다. 1990년대 중반 ‘오빠 부대’를 몰고 다니면서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서장훈 이상민 우지원 문경은 김훈이 2세대 ‘독수리 오형제’라면 이들은 1세대 ‘독수리 오형제’라고 할 수 있고 중심 인물이 신동파였다. 1974년 테헤란 대회 때 중국이 아시안게임에 데뷔하기 전까지 아시아 남자 농구의 절대 강자는 필리핀이었다. 1951년 제1회 뉴델리 대회부터 1962년 자카르타 대회까지 아시안게임에서 4연속 금메달을 차지했고, 1960년 마닐라에서 제1회 대회를 연 아시아남자농구선수권대회에서는 1973년 마닐라 대회까지 7차례 대회에서 4차례나 정상에 올랐다. 이 사이 아시안게임에서는 1966년 방콕 대회에서 이스라엘에,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는 1969년 방콕 대회에서 한국에 밀려 우승하지 못했다. 이스라엘은 1980년대 초반 아시아 지역 스포츠 단체인 AGF(아시아경기연맹)가 쿠웨이트 등 서아시아 나라들이 주도한 OCA(아시아올림픽평의회)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밀려나 이제는 EOC(유럽올림픽위원회)와 UEFA(유럽축구연맹)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아시아 최강의 실력을 자랑하던 필리핀이었기에 1967년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제4회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도 홈 코트의 한국을 83-80으로 꺾는 등 9전 전승으로 우승했다. 절대 강자 필리핀이 1969년 방콕에서 열린 제5회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한국에 86-95로 지고, 일본에도 77-78로 져 3위에 그친 건 필리핀인들에게는 충격이었다. 동아시아의 중국과 서아시아의 이란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최근 아시아 남자 농구 판도에서 그나마 명함을 내밀고 있는 1950~60년대 강자는 필리핀뿐이다. 필리핀은 2013년 마닐라 대회와 2015년 중국 창사(長沙) 대회에서 잇따라 준우승했다. 한국은 두 대회에서 3위와 6위에 머물렀다. 한국은 2002년 부산 대회와 2014년 인천 대회 우승, 2010년 광저우(廣州) 대회 준우승 등 아시안게임에서는 나름대로 선전하고 있다.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의 경우 중국은 아시아 챔피언 자격으로 출전하고 2015년 아시아선수권대회 2위 필리핀은 6월에 열리는 세계 예선에 참가한다. 20세기 초반 미국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필리핀이 농구에서 아시아 절대 강자로 군림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런 필리핀이 1969년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한국에 진 건 충격을 넘어 ‘사건’이었다. 1969년 11월 29일 밤 TV 앞에 모여 있던 필리핀 농구 팬들은 던지는 대로 쏙쏙 들어가는 한국의 한 슈터를 보며 벌린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일부 매체에는 한국-필리핀의 이 경기가 결승전으로 소개돼 있는데 이 대회는 9개 나라가 돌려 붙기를 했기 때문에 결승전이 없고 대회 마지막 날 7승의 한국과 6승1패의 필리핀이 맞붙은 경기여서 결승전이나 다름없었다. 장년 팬들은 아마도 이날 신동파의 슛이 100%의 성공률을 보인 것으로 기억할지 모르겠다. 개인 득점 50점, 한국이 기록한 95점의 절반 이상이 신동파의 손에서 만들어졌다. 신동파는 슛 거리가 꽤 길었기 때문에 그때 3점슛 제도가 있었다면 그의 득점은 70점대 이상이었을 것이고 한국의 팀 득점은 세 자릿수였을 수 있다. 이 경기가 결정적인 계기가 돼 신동파는 1970년대 필리핀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필리핀에서는 어떤 일이 잘되면 ‘sindongpa’, 잘 안되면 ‘no sindongpa’란 말이 있었다는 전설 같은 얘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신동파의 신들린 듯한 슛을 막기 위해 악착같이 수비하던 필리핀 선수 3명이 5반칙으로 물러났다. 경기 막판에는 포워드인 신동파를 센터가 수비하는 진기한 장면이 펼쳐지기도 했다. 골 밑에 있어야 할 센터가 외곽으로 나오니 한국의 공격은 그만큼 수월해질 수밖에. 1960년대 초반 장충체육관을 지을 때 기술 지원을 했을 정도로 당시에는 필리핀이 한국보다 경제 등 모든 면에서 앞서 있었다. 한국은 이 경기를 라디오로 중계했지만 필리핀에서는 TV로 생중계됐다. 대회가 끝난 뒤 필리핀에서는 한국-필리핀 경기가 수십 번이나 재방송됐고 신동파는 필리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스타가 됐다. 신동파의 이름을 상호로 내건 가게들이 줄을 지어 생겼다는, 조금 믿기 어려운 일들이 실제로 벌어졌다. 1970년대 필리핀에서 세계적인 스포츠 스타들의 인기를 조사한 적이 있는데 신동파는 1972년 뮌헨 올림픽 수영 7관왕 마크 스피츠와 프로 복싱 헤비급 세계 챔피언 조지 포먼 등에 압도적인 차이로 1위를 차지했다. 신동파의 소속 팀인 기업은행은 1970년부터 그가 은퇴할 때까지 해마다 필리핀 초청 대회에 출전했다. 그는 8차례의 경기에서 경기당 평균 40점이 넘게 넣었고 최고 54점까지 기록했다. 필리핀 관중은 자국 선수의 파울로 신동파가 쓰러지면 필리핀 벤치를 향해 종이 뭉치와 부채 등을 던졌다. 필리핀에서 신동파의 인기는 절대적이었고 지금까지도 변함없다. 신동파가 PBA(필리핀농구리그) 챔피언 결정전을 관전하러 가면 하프타임에 장내 아나운서가 “우리의 전설이 왔다”라고 소개하고 1만 여 관중은 기립 박수를 친다고 한다. 신동파는 이후 한국 남자 농구 역사에 새로운 일들을 계속 남기게 된다. 한국은 1970년 5월 유고슬라비아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 아시아 챔피언 자격으로 출전해 13개국 가운데 11위를 기록했다. 2016년 현재 한국이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거둔 최고 성적이다. 한국보다 키가 훨씬 큰 캐나다를 조별 리그에서 97-88로 잡았고 순위 결정전에서는 호주를 92-79로 꺾는 등 대회 전체 성적이 4승4패였다. 준우승국인 브라질과 조별 리그에서 겨뤄 77-82로 선전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대회 부문별 기록을 보면 눈길을 사로잡는 대목이 있다. 득점자 순위다. 신동파는 8경기에서 평균 32.6점을 넣어 파나마의 데이비스 페랄타(20.0점), 체코슬로바키아의 지리 지데크(19.3점) 등을 압도적인 차이로 제치고 득점왕에 올랐다. 이 대회에서 슈팅 성공률이 80.4%였다. 이 정도 성공률이면 ‘던지는 대로 들어간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같은 해 12월 방콕에서 벌어진 아시안게임에서 한국은 신동파를 앞세워 조별 리그에서 필리핀을 77-75로 다시 한 번 잡았다. 결승 리그에서 필리핀에 65-70으로 졌으나 전 대회 우승국인 이스라엘을 81-67로 제치고 축구와 함께 동반 금메달을 획득하는 ‘역사’를 완성했다. 이 대회에서 한국과 1승1패를 기록한 필리핀은 자유중국(오늘날의 대만)에 64-75로 지는 등 2승3패로 부진해 5위에 그쳤다. 신동파는 김영기로부터 시작해 이충희 문경은 등으로 이어지는 한국 남자 농구 슈터 계보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도 ‘독수리 5형제’가 있었다? 제국주의 일본이 대한제국을 병탄한 뒤 한반도에서 체육활동은 일정한 한계 안에서 이뤄졌다. 조선총독부는 우리 민족에게 인기가 많은 축구의 대회 개최를 통제하려 하기도 했고 제 2차 세계대전이 본격화된 1940년대 초반에는 조선체육회를 일본인들의 단체인 조선체육협회에 흡수 통합해 스포츠 주권마저 빼앗았다. 또 하나 일제는 조선인 선수들의 국제 대회 출전을 최대한 억제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의 경우 마라톤의 손기정과 남승룡은 워낙 선발전 성적이 좋아 뽑지 않을 수 없었지만 축구의 경우 경성축구단이 1935년 6월 열린 베를린 올림픽 파견 선수 선발전을 겸한 제1회 전일본축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데 이어 그해 10월 벌어진 제8회 메이지신궁경기대회(우리나라의 전국체육대회쯤 되는 대회) 축구 종목 일반부에서도 정상에 올랐지만 정작 올림픽 대표팀에는 한반도에서 김용식 선생, 단 한 명만 뽑았다. 단체 경기의 경우 우승팀을 중심으로 다른 팀의 우수 선수를 보강하는 것이 기본인데도 이런 원칙은 철저히 무시됐다. 김용식 선생은 베를린 올림픽에서 3-2로 이긴 스웨덴과의 1회전, 0-8로 크게 진 이탈리아와의 8강전 등 일본이 치른 두 차례 경기에 모두 선발로 출전, 풀타임을 뛰었다. 일본 축구 관계자들도 김용식 선생의 실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농구는 좀 달랐다. 베를린 올림픽 대표 최종 선발전에서 우승한 연희전문학교(오늘날의 연세대학교)에서 이성구와 장이진, 염은현 등 3명을 선발했다. 농구 엔트리 12명 중 4분의 1이 조선인이었다. 베를린 올림픽 이후 1938년 1월 열린 전일본종합농구선수권대회 결승에서는 보성전문학교(오늘날의 고려대학교)가 연희전문을 43-41로 누르고 우승했다. 일본 농구 관계자들에게는 속이 쓰린 일이었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보성전문은 그해 9월 일본 국내 사정으로 일정을 앞당겨 치른 1939년 대회 결승에서 교토제대를 연장 접전 끝에 64-50으로 누르고 2연속 우승한 데 이어 1940년 1월 대회에서 도쿄 문리대에 58-37 대승을 거두고 전일본종합선수권대회 3연속 우승의 위업을 이뤘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든 종목은 마라톤과 축구만이 아니었다. 농구도 있었다. >>>글 신명철 편집위원, 전 편집국장 smc6404@naver.com
- 2016-04-19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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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명철의 스포츠 인물 열전] 한국의 거목 김응룡 감독
- 1960년대 서울운동장(뒷날 동대문운동장) 야구장에 드나들던 중·장년 야구 팬들은 3루수와 유격수 등 내야수들의 송구를 코끼리가 비스킷을 넙죽넙죽 받아 먹듯 하던 한일은행(우리은행 전신) 1루수를 생생히 기억할 것이다. 그때도 몸무게가 ‘0.1t’을 넘었던, 덩치 큰 이 선수가 뒷날 한국 프로 야구에서 당분간 깨지기 힘든 ‘한국시리즈 V10’을 거두는 지도자가 되리라고 내다본 야구 팬은 그리 많지 않을 듯하다. 김응룡(金應龍)은 20세기 초 이 땅에 야구가 들어온 이후 배출된 수많은 야구인 가운데 가장 명예로운 이력을 지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마추어 때는 선수로서 아시아선수권대회 정상에 올랐고 지도자로는 세계 규모 대회에서 한국을 처음으로 정상에 올려놓았다. 1960년대에 벌어진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는 한국이 출전하는, 타이틀이 걸린 유일한 국제 대회였기에 스포츠 팬들에게는 지난해 11월 한국이 초대 챔피언이 된 프리미어 12나 2006년 4강, 2009년 준우승에 빛나는 월드베이스볼클래식, 그리고 올림픽(2000년 시드니 대회 동메달, 2008년 베이징 대회 금메달)에 못지않은 관심을 모았다. 프로에서는 해태 타이거즈(9차례)와 삼성 라이온즈(1차례) 사령탑을 맡아 한국시리즈 10차례 우승의 놀라운 기록을 세웠으며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 프로와 아마추어 혼성 대표팀을 이끌고 출전해 동메달을 차지했다. 그라운드에서 물러난 뒤 경기인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프로 야구단 사장에 올랐다. 야구인 김응룡은 지난날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나오기 힘든 영광스러운 길을 걸었다. 김응룡은 1939년 음력 3월 1일 평안남도 평원군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대부분의 프로필에는 1941년 9월 15일로 돼 있다. 지난해 음력 3월 1일은 양력 4월 19일, 일요일이었다. 평생 야구에 파묻혀 살아온 그는 자신의 생일조차 챙겨 본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런데 지난해 생일은 달랐다. 감격할 만한 일이 있었다. 생일 하루 뒤인 4월 20일 낮 12시께, 서울 강남의 한 식당에 선동열 전 KIA 타이거즈 감독을 비롯한 ‘해태 왕조’의 주역들이 스승인 김응룡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조촐한 자리를 마련했다. 그 자리에는 김응룡을 행정적으로 보좌해 V9 신화를 이룬 이상국 전 해태 단장(전 KBO 사무총장)도 함께했다. 자리는 시종일관 화기애애했다. 선동열 등 제자들에겐 ‘영원한 우리들의 감독’일 수밖에 없는 스승 김응룡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가시지 않았다. 김응룡은 이 자리에서 “이런 생일 자리를 한 번도 가진 적이 없다. 해마다 (4월이면) 시즌에 들어가 있어 (생일이) 며칠 지난 뒤 집으로 가 식구들과 늦은 생일 밥상을 받은 게 고작이었다”면서 제자들의 성의에 거듭 고마워했다. 김응룡은 초등학교 3학년 때 발발한 한국전쟁 여파로 아버지 손에 끌려 남쪽으로 왔다. 북한에 있을 때는 축구를 했다. 실업 야구 시절 이후 그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축구 선수’ 김응룡은 왠지 어색하다. 부산 개성중학교에서도 축구를 했으나 야구부 주장이 “넌 이제부터 야구 선수다”라는 한마디에 졸지에 야구인의 길을 걷게 됐다. 반세기 전 그때도 야구 도시였던 부산에서는 이런 일이 흔히 있었다. 부산상고를 졸업한 뒤 그 무렵 사실상 프로인 실업 야구 강호 농업은행(오늘날의 농협) 야구단 입단이 불발된 건 김응룡의 야구 인생에 거의 유일한 좌절이었다. 이후 한국운수 야구단에 연습생으로 입단했고 한일은행에서 선수 생활의 절정기를 이뤘다. 호적상으로 22세 때인 1963년, 김응룡은 야구 팬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그해 9월 한국은 서울운동장에서 제 5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를 개최했다. 한국은 이 대회에서 재일동포 출신 투수 신용균의 활약에 힘입어 일본을 1차 리그에서 5-2, 2차 리그에서 3-0으로 꺾는 등 1, 2차 리그 합계 5승1패로 1954년 대회 창설 이후 처음으로 우승했다. 신용균 외에 역시 재일동포인 서정리와 배수찬, ‘아시아의 철인’으로 불린 박현식, 박영길, 최관수, 김청옥, 성기영, 박정일, 하일 등 이 대회 우승 멤버는 야구 올드 팬들의 기억에 아직도 생생할 것이다. 마운드에 신용균이 있었다면 타격에서는 김응룡이 발군이었다. 김응룡은 23타수 9안타, 타율 3할9푼1리로 타격상을 받았고 사실상의 결승전이었던 2차 리그 마지막 경기인 일본 전에서 1회 선제 타점과 8회 승리에 쐐기를 박는 2점 홈런 등 혼자서 모든 점수를 뽑았다. 2000년대 ‘국민 타자’가 이승엽이면 1960년대 ‘국민 타자’는 김응룡이었다. 1960년 효창운동장에서 열린 제 2회 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에 이어 국내에서 벌어진 아시아 지역 구기 종목 선수권대회에서 거둔 두 번째 우승에 온 나라는 기쁨에 들썩였다. 이 대회 우승과 함께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특별 지시로 1966년 9월 서울운동장 야구장에 야간 경기를 할 수 있는 조명 시설이 설치됐다. 1966년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한일은행 선수 겸 코치로 그라운드를 누비던 김응룡은 1977년 국가 대표팀 감독에 선임된 첫 번째 국제 대회에서 지도자로서 ‘대박’을 터뜨렸다. 거의 모든 야구 팬들이 알고 있는 슈퍼월드컵 우승이다. 한국 야구가 세계 규모 대회에서 처음으로 정상에 오른 이 대회에 김응룡은 코칭스태프로 유백만(한국화장품 감독)과 이재환(연세대학교 감독)을 거느리고 출전했다. 유남호(아마추어 롯데 자이언츠) 이선희 이해창(이상 육군) 최동원 김봉연(이상 연세대) 임호균(동아대) 심재원(한국화장품) 김재박(영남대) 배대웅(기업은행) 윤동균(기업은행) 장효조 김시진(이상 한양대/ 이상 당시 소속팀) 등 신세대 야구 팬들에게도 그리 낯설지 않은 선수들이 주전이었다. 제 3회 슈퍼월드컵 세계야구대회는 1977년 11월 니카라과에서 열렸다. 한국은 9개국이 출전한 대회 예선 리그에서 숙적 일본에 0-1로 졌으나 개최국 니카라과를 8-1로 크게 물리치는 등 5승3패를 기록해 8전 전승의 미국에 이어 2위로 6개국이 겨루는 결승 리그에 올랐다. 한국은 결승 리그 첫 경기에서 미국에 0-2로 졌으나 니카라과를 13-3, 7회 콜드게임으로 물리친 데 이어 콜롬비아를 4-1로 제치고 상승세를 타더니 푸에르토리코와 연장 12회까지 가는 접전 끝에 4-2로 이겨 3승1패로 최소한 3위를 확보했다. 한국은 5차전에서 일본과 다시 만나 이선희가 완투하며 3-2로 승리해 미국과 4승1패로 공동 1위가 됐다. 왼손잡이 이선희의 이 대회 호투는 이후 각종 국제 대회에서 일본이 한국의 왼손잡이 투수만 만나면 고전하는 시발점이 됐다. 애초 대회 규정은 승률로 순위를 가리게 돼 있었다. 규정에 따르면 한국과 미국의 공동 우승이었다. 그러나 대회 주최 측이 갑자기 우승 결정전을 갖는다고 발표해 한국과 미국은 이 대회에서만 3번째 경기를 갖게 됐다. 한국은 예선 리그에서는 미국에 4-5로 졌다. 미국은 대학 선발팀이었다. 한국은 프로가 출범하기 전이었으니 두 나라 아마추어 야구 최고 선수들이 기량을 겨룬 것이다. 한국은 2-3으로 뒤진 6회 초 김봉연의 솔로 홈런으로 3-3 동점을 만든 데 이어 2사 2, 3루에서 이해창이 2타점 중전 결승타를 터뜨려 5-4로 이겼다. 12월 2일 귀국한 선수단은 김포국제공항에서 서울시청 앞까지 카퍼레이드를 펼치며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지도자 김응룡의 금의환향이었다. 그리고 1983년, 1년 여의 미국 야구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해태 지휘봉을 잡은 김응룡은 그해 곧바로 한국시리즈 정상에 오르면서 화려한 프로 시대의 막을 열었다. 선수 김응룡이 마지막으로 출전한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는 1971년 제 9회 대회였다. 한국은 1963년 제 5회 대회에 이어 이 대회에서 두 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이제는 흔적조차 찾기 어려운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이 대회는 야구 올드 팬들에게는 ‘애국 판정’으로 특별히 기억된다. 호주가 처음으로 참가한 이 대회 1차 리그에서 한국은 고전을 거듭했다. 첫 경기에서는 필리핀을 2-0으로 잡았으나 자유중국(오늘날의 대만)과 0-0으로 비긴 데 이어 일본에 2-3으로 역전패했다. 이어 호주에도 4-5로 져 1승1무2패로 5개국 가운데 4위로 처졌다. 일본은 4전 전승으로 1차 리그 1위에 올랐다. 이 와중에 김영조 감독이 저조한 성적에 충격을 받고 입원하고 김영덕 코치가 감독 대행을 맡는 일이 벌어졌다. 한국은 2차 리그 첫 경기에서 필리핀을 5-1로 완파한 데 이어 자유중국을 9-1로 크게 이겼다. 한국은 순항하고 있었지만 2차 리그는 이변의 연속이었다. 일본은 첫 경기에서 필리핀을 7-2로 꺾었지만 이후 호주에 0-2, 자유중국에 2-3으로 연패했다. 주심으로 들어간 ‘빨간 장갑의 사나이’ 김동엽 등 한국 심판들의 스트라이크, 볼 판정에 일본 선수단이 아시아야구연맹에 항의하는 소동이 벌어지는 가운데 한국은 호주를 4-0으로 눌러 4승1무2패를 기록하며 5승2패의 일본에 반 경기 차로 따라붙었다. 한국은 대회 마지막 날 일본을 8-3으로 대파하고 우승했다. 한국 심판들의 ‘애국 판정’ 논란이 있었지만 극적인 역전 우승에 야구 팬은 물론 많은 국민들이 열광했다. 이 대회에서 김응룡은 30타수 9안타(0.300)로 타율 5위에 올랐다. >>>글 신명철 편집위원, 전 편집국장 smc6404@naver.com
- 2016-03-22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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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토리가 있는 여행
- 굽이굽이 꺾인 골목길을 따라 무너져 내린 성곽 끝자락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일행의 시선을 붙든 건 음습한 기운 속에서 마지막 숨을 토해내는 작고 허름한 벽돌집. 그렇게 한 세기 이상을 숨죽여 지내온 과거의 시간은 세월의 모진 풍파를 피해 몸을 잔뜩 웅크린 채 그 흔적이나마 보전을 허락받을 수 있었다. 잊혀진 역사를 더듬어 떠나는 여정, 촌철살인의 역사학자 전우용 교수가 동반자로 나섰다. 글 임도현 프리랜서 여행 기자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흔히 서울 앞에 ‘역사도시’라는 수식어가 붙습니다. 말로는 동의하지만 왠지 마음 한구석에선 납득이 가지 않는데요. 여러분은 수긍하십니까?” 전우용 교수가 던진 화두에 강의실에 모인 사람들의 표정이 아리송해지기 시작한다. 조선 600년 역사와 더불어 고려, 삼국도 모자라 상고시대를 거슬러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민족의 후예들에게 서울이 역사도시로서의 면모가 부족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그것도 조선왕조의 상징인 경희궁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정동 경향신문사 사옥에서 말이다. “옆 동네 사람들이 재산권을 지키기 위해 문화재를 파괴한다면 여러분은 분명 그들을 비난할 겁니다. 하지만 우리 동네에 유적이 발견되고 그것으로 인해 개발이 지연되어 집값이 떨어진다면 여러분들 역시 문화재 파괴범이 될 수밖에 없을 거예요. 그동안 우리는 서울을 허물기에만 바빴습니다.” 서촌 성벽 귀퉁이에서 만난 백범 서대문에서 서소문 사이 도성을 기대고 남북으로 길게 형성된 마을의 이름은 서촌(西村). 현재 옥인동 일대를 일컬어 서촌이라 부르지만 전우용 교수는 “엄밀히 말해 그곳은 하급관리들이 모여 살았던 향촌(鄕村)”이었다고 정정한다. 역사를 조목조목 꿰뚫고 있는 전우용 교수로부터 그동안 몰랐던 이야기를 듣기 위해 20여 명의 본지 독자들이 모였다. 브라보마이라이프가 매월 진행하는 ‘BRAVO TOUR’여행 그 첫 번째로 서울 역사기행을 택했고 2016년을 이틀 앞둔 지난해 12월 30일, 그와 함께 생생한 역사의 현장을 더듬어 보기로 했다. “서울의 성곽 주변 서북촌 일대엔 문화재가 많아 전쟁 당시 폭격을 피할 수 있었고 청와대가 들어선 뒤에는 엄격한 개발제한을 받아야 했습니다. 덕분에 대부분의 한옥이 파괴된 와중에도 이곳만큼은 일제시대 당시 지은 근대 한옥을 비롯해 옛 건물을 보존할 수 있었죠.” 물론 거주민들의 상실감은 무척 컸을 것이다. 고층빌딩이 올라가고 아파트 투기가 서울 온 장안을 떠들썩하게 했던 시대에 서촌 일대는 개발에서 제외된 열외자들이 촘촘하게 은거하는 도심 속 버려진 유물로서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 일행의 발길이 처음 닿은 경교장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경교장(京橋莊)의 원래 이름은 일본식 한자인 죽첨장(竹添莊)입니다. 일제시대에 금광으로 부호가 된 최창학이 일본이 패망한 뒤 친일 행적을 만회해보겠다며 임시정부 요인들에게 당시 초현대식 저택인 이 집을 헌납했어요. 김구 선생은 바로 아래 흐르는 만초천에 놓인 다리인 경교를 따 이 집의 이름을 바꾸게 되었고, 그 후 경교장은 전쟁을 거치면서 대부분 파괴되었고 몇 해 전에서야 당시 이곳에 출입했던 사람들의 기억을 되살려 복원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경교장에는 안두희의 흉탄에 저격당했던 순간 백범 선생이 입었던 선혈 낭자한 옷가지가 벽에 걸려 있다. 일제 패망과 함께 보란 듯이 환향하여 민족반역자들을 단죄하고 대한민국 정부수반으로 추대 받았어야 마땅한 그를 서촌의 그늘진 성벽 귀퉁이에서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일행은 안타까운 탄식만을 남겨둔 채 다시금 길을 나선다. 악덕 장사꾼 쁘레샹 집터에선 씁쓸함이 경교장을 시작으로 한양도성을 따라 오르는 길, 학자의 입에선 숱한 역사의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반쯤 폐허의 모습으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간신히 철거를 모면한 유한양행 터를 지나 기초가 통째로 뽑혀진 채 속살을 그대로 드러낸 프랑스 영사 안토니 쁘레샹(Paul A. Plaisan)의 집터 앞에서 일행은 100년 전 옛날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1901년 조선에 온 쁘레샹은 서울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상품이 땔감이란 것을 알아차리곤 사업에 뛰어듭니다. 땔감을 잔뜩 지고 무악재를 넘어오는 나무꾼들에게 쁘레샹은 커피를 한 잔씩 대접하는 로비를 펼치는데요. 달콤한 커피 맛에 단단히 중독된 나무꾼들이 하나둘씩 쁘레샹과 거래를 트면서 쁘레샹은 장안의 유통채널을 모조리 접수하게 되죠. 조선 최초의 땔감 브로커가 탄생한 배경입니다.” 쁘레샹의 영악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내친김에 이름을 ‘부가 들어오는 상서로움’ 이라는 뜻의 부래상(富來祥)으로 개명한 후 본격적인 재산 불리기에 나섰다. “쁘레샹은 이후 부래상 상회를 열어 화란국 명예영사라는 번쩍번쩍한 금박 간판을 내걸고 장사를 시작합니다. 만주사변을 계기로 모든 물품이 수입 금지된 틈을 타 값싼 국산 화장품을 대량으로 구입해 포장지를 뜯고 프랑스 라벨을 붙여 귀부인들을 상대로 폭리를 취하게 되죠. 하지만 곧 철창신세를 지고 맙니다.” 훗날 쁘레샹은 땔감 브로커와 짝퉁 사건을 계기로 역사가들로부터 두 번이나 ‘조선 최초’라는 수식어를 부여받는 영광(?)을 누린다. 그런 쁘레샹의 흔적도 이제는 뿌리가 뽑혀나간 부래상 상회와 함께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았으니 조만간 역사의 흔적을 간직한 서촌 전체가 돈의문 뉴타운 개발로 언제 갈아엎어질지 모를 일이다. 성벽아래 곳곳엔 외국인들 양옥 흔적 “재미있는 것은 성곽주변에 유독 외국인들이 집을 많이 짓고 살았다는 점이에요. 죽은 사람이 산다는 이유로 사찰 외에 산에다 집을 짓지 않았던 풍습과 더불어 왕궁보다 높은 곳에 건물을 지을 수 없다는 세속적인 제약에 따라 우리 조상들은 절대로 높은 곳에 집을 짓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석조건축 위주인 서양에선 높은 언덕이나 성곽에 기대어 집 짓는 것을 선호했기 때문에 지금도 성곽 곳곳에 외인들의 흔적이 남아 있어요.” 조선 최초의 교회인 정동교회는 성벽에 기대어 첨탑을 세웠고, 정동교회를 지은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는 아예 성벽을 자기 집 울타리로 이용하는 배짱을 보였다. 도성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이유로 나무로 만든 사대부집 한옥들이 예외 없이 소실된 반면, 도성을 끼고 벽돌로 쌓은 외인들의 집은 오늘날에도 건재하다. 홍난파 가옥 역시 그러한 운을 타고났다. “이 집은 독일 영사관으로 사용되어 오다가 홍난파 선생이 돌아가시기 직전 5년 동안 기거하신 곳입니다. 만약 이곳이 강남이나 광화문에 있었다면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을 거예요. 성벽 밑 후미진 곳에 있어서 그나마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이죠.” 홍난파 가옥을 지키는 안내자의 설명에 일행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이곳저곳을 둘러본다. 홍난파 선생이 사용했던 침대에선 창밖으로 인왕산이 훤히 보인다고 하니, 선생께선 아마도 창밖에서 들어오는 햇살에 잠을 깨어 악상을 떠올리며 하루를 시작했을 것이다. 서촌의 좁은 골목길을 수백 번도 넘게 올랐을 전우용 교수가 걸음을 재촉하더니 붉은색 벽돌로 지은 2층 양옥집 앞에서 멈추었다. 3·1운동을 외국에 타전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고 있는 UPI 특파원인 앨버트 타일러가 기거했던 딜쿠샤다. “일본과 미국이 전쟁을 벌이면서 앨버트 테일러는 미국의 스파이로 몰려 강제로 추방됩니다. 일본인 손으로 넘어간 딜쿠샤는 해방과 함께 적산가옥을 차지하려는 치열한 싸움에 휘말려 불법으로 점거당한 채 지금도 17세대가 거주하는 무허가 주택 신세로 전락해있습니다.” 내력을 알 길이 없어 한 세기 동안이나 방치됐던 딜쿠샤는 2006년 앨버트의 아들인 브루스가 한국을 방문하면서 숨겨진 이야기들이 낱낱이 밝혀지게 된다. 지난해 늦게나마 서울시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고 기획재정부 소유로 법적 절차를 온전히 마쳤음에도 딜쿠샤는 여전히 버려진 유물 그 이상의 대우를 받지 못하는 처지다. 파워블로거 김민영씨도 안타까워하기는 마찬가지다. “불법으로 점거된 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우리가 많이 안다고는 하지만 실상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아요. 당장 돌아가서 딜쿠샤에 대해 더욱 공부해야겠어요.” 누군가에 의해 자물쇠로 겹겹이 둘러쳐진 딜쿠샤를 뒤로 하고 일행은 종착지인 경희궁을 향해 무겁게 발길을 돌린다.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를 의식해 복원을 마친 경희궁 근처의 성벽은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고 불편하다. 육중한 중장비를 동원해 네모반듯하게 쌓아 올린 성벽이 전우용 교수의 눈에도 탐탁지 않아 보인다. 문화재, 방치와 보존 사이에서 길을 잃어 “18킬로미터에 이르는 한양 도성길을 모두 중장비로 신속하게 복원했습니다. 문화재라 함은 사람 손을 통해 창조되어야 마땅할 텐데 이런 식으로 유네스코에 등재한들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어요. 과거 서울올림픽을 개최했을 때 개최 조건이 서울시가 운영하는 미술관을 보유하는 것이었습니다. 경희궁 앞에 부랴부랴 시립미술관을 짓고 역사박물관을 세운 것도 그런 맥락으로 볼 수 있죠. 오늘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2016년에도 건승하길 빌겠습니다.” 결론은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갔다. 무엇이든 허물기 바빴던 과거, 그리고 허문 것을 재빨리 일으켜 세우려는 현재의 어리석음이 반복되면서 서울은 종잡을 수 없는 의문의 도시가 되고 말았다. ‘버려짐’과 ‘방치’가 곧 ‘보존’이요 ‘문화재’라는 아이러니한 등식 앞에 역사도시의 면모가 견고한 시멘트바닥에 눌려 신음하고 있다. 늦었지만 해답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본디 역사란 시작하고 흘러야 하는 법, 더 이상 허물지 않고 그저 가만히 내버려두는 것이 역사도시를 감상하는 현명한 방법이 아니던가.
- 2016-03-03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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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 투어] 스토리가 있는 여행 브라보 투어
- 굽이굽이 꺾인 골목길을 따라 무너져 내린 성곽 끝자락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일행의 시선을 붙든 건 음습한 기운 속에서 마지막 숨을 토해내는 작고 허름한 벽돌집. 그렇게 한 세기 이상을 숨죽여 지내온 과거의 시간은 세월의 모진 풍파를 피해 몸을 잔뜩 웅크린 채 그 흔적이나마 보전을 허락받을 수 있었다. 잊혀진 역사를 더듬어 떠나는 여정, 촌철살인의 역사학자 전우용 교수가 동반자로 나섰다. “흔히 서울 앞에 ‘역사도시’라는 수식어가 붙습니다. 말로는 동의하지만 왠지 마음 한구석에선 납득이 가지 않는데요. 여러분은 수긍하십니까?” 전우용 교수가 던진 화두에 강의실에 모인 사람들의 표정이 아리송해지기 시작한다. 조선 600년 역사와 더불어 고려, 삼국도 모자라 상고시대를 거슬러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민족의 후예들에게 서울이 역사도시로서의 면모가 부족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그것도 조선왕조의 상징인 경희궁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정동 경향신문사 사옥에서 말이다. “옆 동네 사람들이 재산권을 지키기 위해 문화재를 파괴한다면 여러분은 분명 그들을 비난할 겁니다. 하지만 우리 동네에 유적이 발견되고 그것으로 인해 개발이 지연되어 집값이 떨어진다면 여러분들 역시 문화재 파괴범이 될 수밖에 없을 거예요. 그동안 우리는 서울을 허물기에만 바빴습니다.” 서촌 성벽 귀퉁이에서 만난 백범 서대문에서 서소문 사이 도성을 기대고 남북으로 길게 형성된 마을의 이름은 서촌(西村). 현재 옥인동 일대를 일컬어 서촌이라 부르지만 전우용 교수는 “엄밀히 말해 그곳은 하급관리들이 모여 살았던 향촌(鄕村)”이었다고 정정한다. 역사를 조목조목 꿰뚫고 있는 전우용 교수로부터 그동안 몰랐던 이야기를 듣기 위해 20여 명의 본지 독자들이 모였다. 브라보마이라이프가 매월 진행하는 ‘BRAVO TOUR’여행 그 첫 번째로 서울 역사기행을 택했고 2016년을 이틀 앞둔 지난해 12월 30일, 그와 함께 생생한 역사의 현장을 더듬어 보기로 했다. “서울의 성곽 주변 서북촌 일대엔 문화재가 많아 전쟁 당시 폭격을 피할 수 있었고 청와대가 들어선 뒤에는 엄격한 개발제한을 받아야 했습니다. 덕분에 대부분의 한옥이 파괴된 와중에도 이곳만큼은 일제시대 당시 지은 근대 한옥을 비롯해 옛 건물을 보존할 수 있었죠.” 물론 거주민들의 상실감은 무척 컸을 것이다. 고층빌딩이 올라가고 아파트 투기가 서울 온 장안을 떠들썩하게 했던 시대에 서촌 일대는 개발에서 제외된 열외자들이 촘촘하게 은거하는 도심 속 버려진 유물로서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 일행의 발길이 처음 닿은 경교장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경교장(京橋莊)의 원래 이름은 일본식 한자인 죽첨장(竹添莊)입니다. 일제시대에 금광으로 부호가 된 최창학이 일본이 패망한 뒤 친일 행적을 만회해보겠다며 임시정부 요인들에게 당시 초현대식 저택인 이 집을 헌납했어요. 김구 선생은 바로 아래 흐르는 만초천에 놓인 다리인 경교를 따 이 집의 이름을 바꾸게 되었고, 그 후 경교장은 전쟁을 거치면서 대부분 파괴되었고 몇 해 전에서야 당시 이곳에 출입했던 사람들의 기억을 되살려 복원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경교장에는 안두희의 흉탄에 저격당했던 순간 백범 선생이 입었던 선혈 낭자한 옷가지가 벽에 걸려 있다. 일제 패망과 함께 보란 듯이 환향하여 민족반역자들을 단죄하고 대한민국 정부수반으로 추대 받았어야 마땅한 그를 서촌의 그늘진 성벽 귀퉁이에서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일행은 안타까운 탄식만을 남겨둔 채 다시금 길을 나선다. 악덕 장사꾼 쁘레샹 집터에선 씁쓸함이 경교장을 시작으로 한양도성을 따라 오르는 길, 학자의 입에선 숱한 역사의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반쯤 폐허의 모습으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간신히 철거를 모면한 유한양행 터를 지나 기초가 통째로 뽑혀진 채 속살을 그대로 드러낸 프랑스 영사 안토니 쁘레샹(Paul A. Plaisan)의 집터 앞에서 일행은 100년 전 옛날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1901년 조선에 온 쁘레샹은 서울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상품이 땔감이란 것을 알아차리곤 사업에 뛰어듭니다. 땔감을 잔뜩 지고 무악재를 넘어오는 나무꾼들에게 쁘레샹은 커피를 한 잔씩 대접하는 로비를 펼치는데요. 달콤한 커피 맛에 단단히 중독된 나무꾼들이 하나둘씩 쁘레샹과 거래를 트면서 쁘레샹은 장안의 유통채널을 모조리 접수하게 되죠. 조선 최초의 땔감 브로커가 탄생한 배경입니다.” 쁘레샹의 영악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내친김에 이름을 ‘부가 들어오는 상서로움’ 이라는 뜻의 부래상(富來祥)으로 개명한 후 본격적인 재산 불리기에 나섰다. “쁘레샹은 이후 부래상 상회를 열어 화란국 명예영사라는 번쩍번쩍한 금박 간판을 내걸고 장사를 시작합니다. 만주사변을 계기로 모든 물품이 수입 금지된 틈을 타 값싼 국산 화장품을 대량으로 구입해 포장지를 뜯고 프랑스 라벨을 붙여 귀부인들을 상대로 폭리를 취하게 되죠. 하지만 곧 철창신세를 지고 맙니다.” 훗날 쁘레샹은 땔감 브로커와 짝퉁 사건을 계기로 역사가들로부터 두 번이나 ‘조선 최초’라는 수식어를 부여받는 영광(?)을 누린다. 그런 쁘레샹의 흔적도 이제는 뿌리가 뽑혀나간 부래상 상회와 함께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았으니 조만간 역사의 흔적을 간직한 서촌 전체가 돈의문 뉴타운 개발로 언제 갈아엎어질지 모를 일이다. 성벽아래 곳곳엔 외국인들 양옥 흔적 “재미있는 것은 성곽주변에 유독 외국인들이 집을 많이 짓고 살았다는 점이에요. 죽은 사람이 산다는 이유로 사찰 외에 산에다 집을 짓지 않았던 풍습과 더불어 왕궁보다 높은 곳에 건물을 지을 수 없다는 세속적인 제약에 따라 우리 조상들은 절대로 높은 곳에 집을 짓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석조건축 위주인 서양에선 높은 언덕이나 성곽에 기대어 집 짓는 것을 선호했기 때문에 지금도 성곽 곳곳에 외인들의 흔적이 남아 있어요.” 조선 최초의 교회인 정동교회는 성벽에 기대어 첨탑을 세웠고, 정동교회를 지은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는 아예 성벽을 자기 집 울타리로 이용하는 배짱을 보였다. 도성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이유로 나무로 만든 사대부집 한옥들이 예외 없이 소실된 반면, 도성을 끼고 벽돌로 쌓은 외인들의 집은 오늘날에도 건재하다. 홍난파 가옥 역시 그러한 운을 타고났다. “이 집은 독일 영사관으로 사용되어 오다가 홍난파 선생이 돌아가시기 직전 5년 동안 기거하신 곳입니다. 만약 이곳이 강남이나 광화문에 있었다면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을 거예요. 성벽 밑 후미진 곳에 있어서 그나마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이죠.” 홍난파 가옥을 지키는 안내자의 설명에 일행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이곳저곳을 둘러본다. 홍난파 선생이 사용했던 침대에선 창밖으로 인왕산이 훤히 보인다고 하니, 선생께선 아마도 창밖에서 들어오는 햇살에 잠을 깨어 악상을 떠올리며 하루를 시작했을 것이다. 서촌의 좁은 골목길을 수백 번도 넘게 올랐을 전우용 교수가 걸음을 재촉하더니 붉은색 벽돌로 지은 2층 양옥집 앞에서 멈추었다. 3·1운동을 외국에 타전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고 있는 UPI 특파원인 앨버트 타일러가 기거했던 딜쿠샤다. “일본과 미국이 전쟁을 벌이면서 앨버트 테일러는 미국의 스파이로 몰려 강제로 추방됩니다. 일본인 손으로 넘어간 딜쿠샤는 해방과 함께 적산가옥을 차지하려는 치열한 싸움에 휘말려 불법으로 점거당한 채 지금도 17세대가 거주하는 무허가 주택 신세로 전락해있습니다.” 내력을 알 길이 없어 한 세기 동안이나 방치됐던 딜쿠샤는 2006년 앨버트의 아들인 브루스가 한국을 방문하면서 숨겨진 이야기들이 낱낱이 밝혀지게 된다. 지난해 늦게나마 서울시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고 기획재정부 소유로 법적 절차를 온전히 마쳤음에도 딜쿠샤는 여전히 버려진 유물 그 이상의 대우를 받지 못하는 처지다. 파워블로거 김민영씨도 안타까워하기는 마찬가지다. “불법으로 점거된 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우리가 많이 안다고는 하지만 실상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아요. 당장 돌아가서 딜쿠샤에 대해 더욱 공부해야겠어요.” 누군가에 의해 자물쇠로 겹겹이 둘러쳐진 딜쿠샤를 뒤로 하고 일행은 종착지인 경희궁을 향해 무겁게 발길을 돌린다.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를 의식해 복원을 마친 경희궁 근처의 성벽은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고 불편하다. 육중한 중장비를 동원해 네모반듯하게 쌓아 올린 성벽이 전우용 교수의 눈에도 탐탁지 않아 보인다. 문화재, 방치와 보존 사이에서 길을 잃어 “18킬로미터에 이르는 한양 도성길을 모두 중장비로 신속하게 복원했습니다. 문화재라 함은 사람 손을 통해 창조되어야 마땅할 텐데 이런 식으로 유네스코에 등재한들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어요. 과거 서울올림픽을 개최했을 때 개최 조건이 서울시가 운영하는 미술관을 보유하는 것이었습니다. 경희궁 앞에 부랴부랴 시립미술관을 짓고 역사박물관을 세운 것도 그런 맥락으로 볼 수 있죠. 오늘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2016년에도 건승하길 빌겠습니다.” 결론은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갔다. 무엇이든 허물기 바빴던 과거, 그리고 허문 것을 재빨리 일으켜 세우려는 현재의 어리석음이 반복되면서 서울은 종잡을 수 없는 의문의 도시가 되고 말았다. ‘버려짐’과 ‘방치’가 곧 ‘보존’이요 ‘문화재’라는 아이러니한 등식 앞에 역사도시의 면모가 견고한 시멘트바닥에 눌려 신음하고 있다. 늦었지만 해답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본디 역사란 시작하고 흘러야 하는 법, 더 이상 허물지 않고 그저 가만히 내버려두는 것이 역사도시를 감상하는 현명한 방법이 아니던가. 글 임도현 프리랜서 여행 기자
- 2016-02-12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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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명철의 스포츠 인물 열전] 한국농구의 살아 있는 전설, 김영기(金英基)
- 중·장년 스포츠 팬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쳐 스포츠의 매력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 또는 할아버지 손에 이끌려 동대문운동장(축구장·야구장·테니스장·수영장)이나 효창운동장 그리고 리모델링을 하기 전 장충체육관 등에 가면서 스포츠의 세계로 들어섰을 수도 있고 국제대회에 출전한 우리나라 선수들의 활약상을 라디오 중계방송을 통해 듣게 되면서 스포츠의 매력에 끌렸을 수도 있을 것이다. 또는 다니는 학교에 운동부가 있어 응원에 동원되면서 자신도 모르게 스포츠에 익숙해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글쓴이는 두 번째 사례에 든다. 1960년대 중반, 강원도 신철원군 갈말면 지포리에 있는 신철원국민학교에 다니던 아이는 라디오 중계로 1964년 도쿄 올림픽 복싱 정신조와 사쿠라이(뒷날 스포츠 기자가 된 뒤 당시 자료를 살펴보고 사쿠라이 다카오라는 ‘풀 네임’을 확인했다)의 밴텀급 결승전 경기, 그리고 1964년과 1965년 캐시어스 클레이(뒷날 무하마드 알리로 개명)와 소니 리스턴의 프로복싱 세계 헤비급 타이틀매치 등을 들었다. 그 아이는 물론 글쓴이다. 그런데 중학교 때 이 아이는 이번 호의 주인공인 김영기(金英基) 때문에 또 다른 스포츠의 매력에 빠졌다. 현직 프로농구연맹(KBL) 총재인 김영기는 배재고~고려대를 거쳐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국가대표를 지냈다. 김 총재는 화려한 드리블로 대표되는 뛰어난 개인기로 농구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김 총재는 1965년 은퇴한 뒤 직장 생활 틈틈이 박정희장군배 동남아시아여자농구대회, 미국프로농구(NBA) 등 각종 경기의 해설을 맡아 선수 시절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다. 밀워키 벅스와 같은 NBA 구단 이름이나 오스카 로버트슨, 빌 러셀 등 1960년대 NBA 스타플레이어의 이름을 김 총재의 해설로 알게 됐다. 김 총재는 각종 기록을 근거로 특정 팀 간 승패는 물론 예상 스코어까지 내놓아 농구 팬들의 관심을 끌었다. 요즘 같으면 스포츠 통계 회사에서 컴퓨터로 할 일을 거의 반세기 전에 수작업으로 한 것이다. 특히 1967년 서울에서 열린 제4회 아시아남자농구선수권대회 때는 이 같은 예상이 족집게처럼 들어맞아 농구 팬들의 탄성을 자아냈다. 김 총재의 해설은 그의 선수 시절 경기력만큼이나 뛰어났다. 어린 시절 기억을 떠올리면서 이 일화를 스포츠 기자가 된 뒤 김 총재에게 이야기했더니 김 총재는 “우연히 맞혔을 뿐”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이제는 폐간된, 2000년대 초반 스포츠 팬들에게 인기를 끌었던 ‘스포츠 2.0’은 배재고등학교 시절 김영기를 “179㎝의 키, 가냘픈 체구였지만 리드미컬한 드리블, 요즘 더블 클러치라고 하는 이중 모션과 아마도 한국 농구 사상 처음일, 한 손 슛을 던지는 선수”라고 설명했다. 한국 남자 농구는 1948년 런던 올림픽에 이어 1956년 멜버른 올림픽에 출전했다. 이 대회에 1936년생인 약관의 김영기가 출전했다. 한국 농구의 경기력이 세계 수준에 크게 못 미쳐 출전 15개 나라 가운데 14위에 그쳤지만 우승국 미국의 빌 러셀 같은 뛰어난 선수들의 플레이와 선진적인 전술을 본 것은 뒷날 지도자 김영기에게 큰 공부가 됐다. 김영기는 1964년 도쿄 대회에 두 번째로 올림픽에 출전했다. 당시로는 노장인, 우리나라 나이 29세 때였다. 1960년대 후반, 지도자와 선수로 힘을 모아 한국 남자 농구의 1차 전성기를 이끌게 되는 신동파가 20세로 대표팀의 막내였다. 이 대회에서도 한국은 세계의 벽을 실감했다. 출전 16개국 가운데 꼴찌에 그쳤다. 개최국 일본은 10위에 올랐다. 이 무렵 한국 남자 농구는 1962년 자카르타 아시아경기대회에서 필리핀과 일본에 이어 3위를 하는 등 아시아권에서도 3위 안팎의 실력이었다. 농구인 김영기의 진가는 은퇴 이후 더 빛났다. 김영기는 33세 때인 1969년 11월, 방콕에서 열린 제5회 아시아남자농구선수권대회 국가대표팀 코칭스태프에 합류했다. 보직은 코치였으나 실질적인 사령탑이었고 대표 선수들 가운데 김영일, 김인건, 신동파 등은 선수 생활을 함께한 직계 후배들이었다. 9개 나라가 출전한 이 대회에서 한국은 개최국 태국에만 93-92로 아슬아슬하게 이겼을 뿐 일본과 자유중국(오늘날의 대만) 등을 가볍게 물리친 뒤 실질적 결승전인 필리핀과의 마지막 경기에서 95-86으로 이겨 대회 사상 첫 우승의 기쁨을 누렸다. 필리핀과의 경기에서 신동파가 기록한 50점은 신세대 농구 팬들에게도 화젯거리가 되고 있다. 김영기는 신동파를 슈터로 활용하면서도 그에게만 의존하지 않는 공격 전술과 다양한 수비 전술로 한국 남자 농구를 아시아 정상에 올려놓았다. 그 무렵 다른 종목들도 그랬지만 아시아 정상에 오른 대표팀은 김포국제공항에서 서울시청까지 카퍼레이드를 벌이는 등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1년여 뒤인 1970년 12월, 역시 방콕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경기대회에서 김영기가 이끄는 남자 농구 대표팀은 조별 리그에서 이란을 110-77, 홍콩을 116-51로 연파한 데 이어 필리핀을 79-77로 따돌리고 조 1위로 6개국이 겨루는 결승 리그에 올랐다. 한국은 결승 리그에서 필리핀에 65-70으로 잡혔으나 강호 이스라엘을 81-67로 물리쳐 물고 물리는 혼전 속에 금메달의 영광을 안았다. 서울에서 열기로 돼 있다가 재정 문제로 반납한 이 대회에서는 농구와 축구가 동반 우승하는 쾌거를 이뤄 온 나라가 열광의 도가니가 됐다. 두 대회 사이에 한국 농구사에 오래도록 남을 또 하나의 기록이 수립됐다. 한국은 1970년 5월 유고슬라비아에서 열린 제6회 세계남자농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해 11위를 기록했는데 이 성적은 2015년 현재 최고 순위다. 이 세 차례 대회에 출전한 한국 남자 농구 대표팀의 지휘관이 김영기다. 김영기는 농구인의 범주에만 머물지 않았다. 1982년 대한체육회 이사와 대한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 1983년 대한체육회 부회장을 지내며 체육 행정가로서 활동했고 40대 후반의 나이였던 1984년에는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한국 선수단 총감독을 맡았다. 이 대회에서 고려대학교 후배인 조승연 감독이 이끄는 여자 농구가 중국을 제치고 은메달을 차지했다. 1985년부터 12년 동안 대한농구협회 부회장으로 활동한 김영기는 1997년 KBL 전무이사를 맡아 프로농구 출범에 큰 힘을 보탰다. 이후 KBL 부총재를 거쳐 2002년 11월 KBL 제3대 총재로 추대돼 1년 5개월 동안 프로농구를 이끌었다. 2003년 12월 국내 프로농구 사상 첫 몰수 경기 파문으로 2003~2004년 시즌 뒤인 2004년 4월 사퇴해 10년간 일선에서 물러나 있었으나 지난해 5월 제8대 KBL 총재로 선임되면서 일선으로 돌아왔다. 이는 오랜 기간 농구계 원로로서 쌓아온 신망의 결과다. 그의 또 다른 이력이 있다. 기업은행 지점장과 신용보증기금 전무이사, 신보투자 사장 등 금융인으로서의 경력이다. 선수 시절 그는 미국의 유명 스포츠 전문지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를 탐독했다. 요즘 스포츠계의 화두인 ‘공부하는 운동선수, 운동하는 학생’의 본보기다. 농구에도 ‘거스 히딩크’가 있었다 농구 올드 팬 가운데 남자 농구 대표팀이 서울 용산에 있는 미 제8군 체육관에서 미군과 친선경기를 하는 장면을 TV로 본 적이 있는 이들이 꽤 있을 것이다. 1964년 도쿄 올림픽 참패 이후 한국 남자 농구에 축구의 거스 히딩크 같은 인물이 나타났다. 1965년 국가대표팀 코치를 맡은 미 제8군 소속 찰스 마콘 소위다. 미 제8군 사령부가 대한농구협회에 코치로 추천한 마콘 소위는 미국 대학 농구의 명문 데이비슨 칼리지의 주전 가드 출신이었다. 데이비슨 칼리지는 1964~1965년 시즌을 앞두고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가 전미 대학 랭킹 1위로 꼽을 만큼 1960년대에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농구 본고장의 명문대 출신인 젊은 장교는 열과 성을 다해 한국 남자 농구 대표 선수들의 훈련을 도왔다. 마콘 소위가 1967년 임기를 마치고 한국을 떠나자 그의 자리를 제프 거스플 중위가 이어받았다. 거스플 중위는 페어레이디킨슨대학교에서 선수 생활을 한 농구인이었다. 이들의 노력과 함께 미 제8군은 1968년 1월 남자 농구 대표팀의 미국, 캐나다 원정을 지원했다. 이인표, 신동파, 김무현, 김인건, 유희형, 박한, 최종규, 신현수, 곽현채, 김정훈은 미군이 제공한 군용기를 타고 미국으로 가 본고장 농구를 익혔다. 북미 원정에 코치로 참가한 거스플 중위는 이후 1968년 멕시코 올림픽에 한국 선수단의 일원으로 참가한 뒤 미국으로 돌아갔다. 마콘 소위와 거스플 중위가 떠난 이후 한국은 1969년 방콕에서 열린 제5회 아시아남자농구선수권대회에서 드디어 처음으로 정상에 올랐다. >>>글 신명철 편집위원, 전 편집국장 smc6404@naver.com
- 2016-01-28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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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때 그뉴스 그사람] 1982년 1월 5일, ‘밤[夜]’이 열리는 날
- 1970년대를 살았던 국민이라면 밤 12시에 울리는 사이렌 소리를 기억한다. 24년 전인 1982년 1월 5일, 광복 후 줄곧 갇혀 있었던 대한민국의 밤이 세상에 풀려났다. 밤 12시~새벽 4시의 야간 통행금지(통금)가 해제된 날이다. 전국 도시의 거리에 사람이 오가게 된 것도, 새벽까지 마셔야 직성이 풀리는 한국인의 술자리 습관도 모두 이때 시작됐다. 글 유충현 기자 lamuziq@etoday.co.kr “네온불이 쓸쓸하게 꺼져가는 삼거리 / 이별 앞에 너와 나는 / 한없이 울었다 / 추억만 남겨놓은 젊은 날의 불장난 / 원점으로 돌아가는 0시처럼” 가수 배호의 노래 ‘0시의 이별’ 가사다. 통금과 함께 불 꺼지는 거리 풍경과 이별할 수밖에 없는 연인들의 안타까운 심정이 나타난다. ‘0시의 이별’에는 금지곡 딱지가 붙었다. 남녀가 0시에 헤어진다면 통행금지 위반인데 가사가 통금위반을 부추긴다는 이유였다고 한다. 밤과 낮의 구분 없이 거의 모든 생활이 가능한 오늘날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이야기지만, 광복 후 37년간 한국인들은 자정부터 새벽 4시까지 집 바깥을 돌아다닐 수 없었다. 미군정 시절 북한의 간첩을 경계한다는 목적으로 도입됐지만, 이후 정부는 ‘범죄예방’ 등의 명목으로 통행금지 조치를 존속시켰다. 전쟁이나 재해 재난이 아닌 상황의 평시통금은 세계적으로도 사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때 그 밤문화…11시 30분 되면 귀가전쟁 시작 자정이 되면 ‘애~앵~’ 사이렌 소리가 울려 펴지고 서대문 로터리에는 철제 바리케이드가 설치됐다. 2인1조로 이뤄진 야경꾼들은 나무로 만든 딱따기를 치며 “통금!” 이라고 길게 소리친다. 단속은 엄혹했다. 김근석 전 경정(1970~80년대 서울 종로구 필동파출소에서 순경으로 근무)은 “귀가전쟁이 시작되면 번화가 입구쪽 차선이 사람으로 빽빽했다. 택시를 잡기 위해 합승은 기본이었고 ‘따블’이나 ‘따따블’ 요금을 부르는 게 일상적이었다”고 회상했다. 국민들의 밤문화는 완전히 달랐다. 혹시라도 통금에 걸리면 보통 곤욕이 아니었다. 일단 파출소에 잡혀갔다가 즉결심판에 넘겨져 벌금을 물었다. 예전 회사들은 별도의 숙직실을 두고 있었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대의 유물이다. 술꾼들은 10시30분 정도가 되면 슬슬 자리에서 일어날 준비를 하거나 술집 문을 닫고 밤새 마시는 선택을 해야 했다. 반대로 통행금지가 오히려 외박의 빌미가 되기도 했다. 일부러 애인과 술을 마시다가 깜빡한 척하고 통금을 넘겨버리는 수법은 당시 젊은 남녀들에게 흔했다. 덕분에 여인숙이나 여관 같은 서민형 숙박업이 높은 수익을 올리던 시기이기도 했다. 남자들은 굳이 섬에 가서 배를 놓친다든가, 두메산골에서 술이 떡이 되어 운전 못 한다고 버티는 등의 영웅담(?)도 심심찮게 회자됐다. 국가는 아주 가끔씩 통행금지를 풀어줬다. 1년에 단 두 번 통행금지가 해제된 날이 있었는데, 크리스마스와 12월31일이었다. 사람들은 이때에만 해방감을 만끽하기 위해 거리로 쏟아져 나왔는데, 이 때문에 젊은이들에게 크리스마스는 성스러운 휴일이 아니라 ‘해방의 날’이었다. 서울 명동과 충무로, 종로 일대가 젊은이들의 해방구였다. 대한민국 밤의 족쇄를 풀어준 88올림픽 유치 대한민국의 밤에 채워진 족쇄를 풀어준 것은 다름아닌 1988년 서울올림픽이었다. 1981년 9월 독일(당시 서독)의 바덴바덴에서 전해진 올림픽 개최지 선정 소식은 한국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통행금지가 있는 상태에서 올림픽을 치를 수는 없었다. 사회에 팽배한 민주화 요구도 어떤 형태로든 숨통을 터 줘야 했다. 1981년 11월 19일 전국경제인연합회관 19층 중국음식점에서 여야 중진 국회의원들의 회동이 있었다. 권정달 민정당 사무총장은 이날 갑자기 통금해제안을 꺼냈다. 이견이 나오지 않아 4분 만에 논의가 끝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두환 당시 대통령은 가급적 이른 시일 안에 통금을 해제하겠다고 밝혔다. 1982년 1월 5일 새벽 4시를 기해 50개시 139개군 지역의 야간 통행금지 조치가 해제됐다. 나라를 되찾은 뒤 처음으로 밤이 국민들에게 돌아왔다. 시민들은 잠을 잊은 채 37년 만에 되찾은 자유를 환호하며 거리를 활보했다. 적지 않은 인원이 새벽 1시에 길거리로 나와 만세를 불렀을 정도였다고 한다. 밤을 되찾은 시민들은 한풀이라도 하듯 거리로 쏟아져 나와 새벽 서울시청 시계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심야극장도 이 시절 생겨났다. 통금이 해제된 지 꼭 한 달 뒤인 2월6일 첫 심야 상영영화인 이 개봉했다. 개봉 첫날 밀려드는 인파에 극장 유리창이 깨졌다는 보도기록물은 처음 맛보는 자유를 만끽하고자 했던 당시의 분위기를 설명해 준다. 심야영화의 흥행몰이는 을 필두로 , 등으로 이어지는 에로영화 전성기를 만들기도 했다. 술문화도 변했다.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는 룸살롱, 단란주점 등 새벽까지 이어지는 한국의 밤문화도 이때 시작됐다고 한다. 이전에는 최대한 급하게 마시던 국민들이 새벽까지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통금 이후 급등한 민간소비, 오일쇼크 극복 원동력 1982년의 통금해제는 국민의식이 자유로워지고 성숙해진 계기로 평가된다. 통금이 해제되면서 범죄율이 높아질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으나 큰 혼란은 없었다. 자정부터 새벽 4시까지 ‘돌려받은 4시간의 자유’는 37년간 계속되어온 억압을 빠르게 지워갔다. 버스와 지하철은 자정 이후까지 연장 운행됐고 택시 영업도 밤새 계속됐다. 철야 영업 간판을 내건 가게들도 속속 등장했다. 통제에 익숙하던 사회에 자율적 질서가 자리를 잡아갔다. 기대 이상의 경제적 효과도 뒤따랐다. 서비스 부문의 고용이 늘고 얼어붙은 기업 마인드와 소비심리가 살아났다. 비행기의 이착륙 시간도 구속에서 풀려나 바이어와 관광객의 입국도 늘었다. 1980년 마이너스 0.2%를 기록한 민간소비 증가율이 1982년 6.9%, 1983년 9.0%로 높아졌다. 우리 경제는 1982년 7.2%, 1983년 10.7%라는 고성장을 기록하며 2차 오일 쇼크 등으로 인한 국제적 경제 침체에서 빠르게 벗어날 수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야간 통행금지 해제 무렵부터 디스코텍과 카바레, 룸살롱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서고 대형 폭력조직이 생겨났으며 퇴폐향락문화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는 주장도 있다. 에너지 사용량이 증가하였고, 유흥업소의 영업시간 연장으로 향락적인 사회 환경이 조성되었으며, 유흥비를 마련하기 위한 청소년 범죄가 발생하여 사회적인 문제로 지적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간 통행금지 해제는 국민의 기본권과 자율성 회복의 상징적인 조치였다.
- 2016-01-05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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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명철의 스포츠 인물 열전] ‘최고의 스트라이커’ 이회택
- 스포츠 올드 팬들에게 우리나라 축구 선수 계보를 살펴보라고 하면 차범근과 함께 빠뜨리지 않고 등장할 인물이 있다. 스포츠 올드 팬들이 거의 공통적으로 이야기할 한국 축구 선수 계보는 일제 강점기 유일하게 올림픽(1936년 베를린 대회)에 출전한 김용식을 첫머리로 ‘아시아의 황금 다리’ 최정민에 이어 이번 호의 주인공인 이회택(李會澤)을 거쳐 차범근 그리고 신세대 팬들에게 익숙한 홍명보, 박지성, 손흥민 등으로 이어질 것이다. 이회택은 1960~1970년대 한국 축구가 세계무대를 향해 나아가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번번이 좌절했던, 가슴 아픈 시대를 대표한다. 월드컵은 물론 올림픽에도 출전하지 못했고 직계 후배인 차범근처럼 국외 리그에도 진출하지 못했다. 한국 축구 암흑기에 활동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의 모든 올드 팬은 그의 이름 석 자를 한국 축구와 함께 떠올린다. 그리고 생각한다. “이회택이 10년만 늦게 태어났더라면, 아니 요즘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물론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1960년대 중반 이후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축구 팬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다시피 한 이회택. 한국 축구 2세대 스트라이커인 이회택은 요즘 기준으로 보면 큰 체격이 아니다. 1972년 6월 펠레가 이끄는 브라질의 명문 클럽 산투스가 내한해 한국 대표팀과 친선경기를 가진 뒤 찍은 사진을 보면 이회택은 대표적인 단신 공격수인 김진국(프로필 165㎝)과 키가 거의 같다. 이 경기에서 산투스가 3-2로 이겼는데 펠레의 통산 1204번째 골이 나왔고 한국은 이회택과 국가 대표가 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차범근이 골을 넣었다. 한국 축구 스타 계보를 잇는 이회택과 차범근은 이 경기 직전인 그해 5월 방콕에서 열린 제 5회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을 준우승으로 이끌었다. 4-1로 이긴 이 대회 예선 B조 크메르(오늘날의 캄보디아)와의 경기에서 이회택과 차범근은 나란히 한 골씩을 기록했다. 그때 기준으로 베테랑인 이회택(26세)과 차범근(19세)의 신구 조화는 축구 팬들의 기대를 한껏 모았다. 동북고 3학년인 1965년 청소년 대표팀에 뽑힌 이회택은 그해 4월 도쿄에서 열린 제 7회 아시아청소년선수권대회에 출전했다. 그러나 한국은 요즘의 시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성적인 예선 1승 3패, 조 꼴찌로 탈락했다. 태국에 0-1, 버마(오늘날의 미얀마)에 0-2, 말레이시아에 0-1로 지고 인도에만 4-1로 이겼다. 국내에서는 초고교급 실력을 자랑하던 이회택은 이듬해인 1966년 제 5회 방콕 아시아경기대회에 대비한 국가 대표팀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그해에 대한축구협회는 대표팀 선발 문제를 놓고 크게 분란이 일었다. 그 무렵 종종 있는 일이었다. 동남아시아 지역 친선 대회인 메르데카배대회에서 4위, 방콕 아시아경기대회에서 예선 탈락의 쓴잔을 마셨다. 방콕 대회에서는 태국에 0-3, 버마에 0-1로 졌으니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 예선에 대비해 세대교체를 하고 꾸린 대표팀이라고 해도 협회는 할 말이 없게 됐고 이회택은 활약할 기회조차 잡지 못했다. 이제 문제의 멕시코시티 올림픽 아시아 지역 예선이다. 이 예선은 1967년 9월, 일본 스포츠의 심장으로 불리는 요요기 국립경기장(1964년 도쿄 올림픽 주 경기장)에서 벌어졌다. 한국은 이회택을 비롯해 골키퍼 이세연과 수비수 김호, 김정남, 김정석, 공격수 정병탁, 김창일 등 패기만만한 멤버들이 1948년 런던 대회 이후 20년 만의 올림픽 출전에 도전장을 던졌다. 한국은 자유중국(오늘날의 대만)을 4-2, 레바논을 2-0, 월남을 3-0으로 물리치고 같은 3승의 일본과 맞붙었다. 사실상의 결승이었다. 일진일퇴의 숨 막히는 접전 끝에 두 나라는 3-3으로 승패를 가리지 못했다. 이 경기에서 이회택은 0-2로 뒤진 후반 3분, 1-2로 따라붙는 추격 골을 넣었고 가마모토 구니시게(釜本邦茂)는 전반 13분과 후반 21분 각각 선제골과 3-2로 달아나는 골을 기록했다. 1946년생인 이회택과 1944년생인 가마모토의 축구 인생이 이 경기에서 갈렸다. 한국은 필리핀, 일본은 월남과 경기를 남겨 놓고 있는 가운데 한국은 골득실차에서 +7로 +21의 일본에 크게 뒤져 있었다. 일본이 필리핀을 15-0이라는 기록적인 스코어로 이겼기 때문이다. 15골 이상으로 이겨야 한다는 부담 속에 한국은 필리핀을 5-0으로 이긴 반면 일본은 월남을 1-0으로 누르고 본선 티켓을 손에 넣었다. 1969년 10월 서울에서 열린 1970년 멕시코 월드컵 아시아-오세아니아 예선에서 이회택은 가마모토 구니시게와 다시 한 번 겨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가마모토 구니시게는 부상 때문에 출전하지 않았고 한국은 1승 2무 1패로 2승 2무의 호주에 밀려 탈락했다. 이회택은 A매치 32골의 기록을 남기고 그라운드를 떠났다. 1960~70년대 한국 축구의 전반적인 경기력이 조금만 더 높았다면 그의 이력은 올림픽과 월드컵 출전 등으로 더욱 화려했을지 모른다. ◇ 신금단 부녀 상봉에 이은 이회택 부자 상봉 이회택은 할머니의 보살핌을 받고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한국전쟁의 와중에 의용군이 돼 북한으로 갔고 어머니는 재가했기 때문이다. 부모의 정을 모르고 자란 그에게 축구는 최고의 친구였고 부자 상봉의 큰 선물까지 안겼다. 이회택은 1989년 10월 싱가포르에서 열린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아시아 지역 최종 예선에서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이탈리아전 1-0 결승 골의 주인공인 북한 박두익 감독으로부터 네살 때 헤어진 아버지의 생존 소식을 확인했다. 이회택은 이 예선을 3승 2무로 통과해 한국의 세 번째 월드컵 출전을 이끌며 지도자로서도 축구사에 한 획을 그었다. 이듬해인 1990년 열린 ‘남북통일축구경기‘에 이회택은 남측 선수단 고문 자격으로 방북해 10월 10일 평양에서 꿈에도 그리던 아버지 이용진씨와 감격적인 상봉을 했다. 1964년 도쿄 올림픽 때 신금준-금단(1960년대 초반 육상 400m·800m 세계 기록 보유자) 부녀 상봉, 1990년 2월 삿포로 동계 아시아경기대회 때 한필성-필화(1964년 인스브루크 동계 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3000m 은메달리스트) 남매 상봉에 이은 스포츠계 남북 핏줄의 만남이었다. >>>글 신명철 편집위원, 전 편집국장 smc6404@naver.com
- 2015-12-22 1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