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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롱과 차별을 먹고 자란 '로트렉' 편견을 깨부수다
- 모든 예술가는 '돌+아이'여야 작품이 나온다고 믿는 사람 중의 하나다. 그렇지 않고서야 평범하고 멀쩡한 정신으로 어떻게 그 위대한 예술작품들을 창조할 수 있단 말인가? 위대한 ‘돌+아이’ 중의 하나인 툴루즈 로트렉 전시회를 보러 갔다. 한국에서는 처음 열린다는 로트렉 작품 전시회. 물랑 루즈의 작은 거인이라는 타이틀로 열리는 로트렉 전은 예술의 전당에서 오는 5월 3일까지 열린다. 최근 미술계에 정착된 도슨트 해설도 풍성하다. 특히 젊은 관객들을 몰고 다녀 도슨트계의 아이돌로 불리는 정우철 도슨트의 해설 시간대에 맞춰 입장을 기다리는 관객이 있을 정도이니 한 번쯤 경험해보는 것도 좋다. 작품 감상을 훨씬 풍성하게 할 수 있어 강추!. 전시회를 알차게 보려면 도슨트 해설 시간 전에 넉넉하게 도착해 미리 작품을 한번 훓어 본다. 도슨트 해설시 기본 작품에 대한 이해가 필수이기 때문이다. 정우철 도슨트의 설득력 있는 목소리로 1시간 정도 로트렉의 삶에 대한 스케치를 곁들인 작품 세계에 대한 해설을 듣고 나면 눈에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한눈에 들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래서 사람은 한 가지라도 더 배워야 하는 것이다. 프랑스 파리 물랑 루즈의 빨간 풍차를 그린 화가, 난쟁이, 알코올 중독자, 매춘굴에서 살다시피 했던 성 도착자, 로트렉을 떠올릴 때 따라붙는 이미지들이다. 하지만 로트렉은 파리 최고의 귀족 가문 자제로 태어났다. 한데 이 가문은 재산을 타인에게 나눠주기 싫은 탐욕적인 가문이었다. 재산을 지키기 위해 사촌 간의 결혼으로 가문의 계승자를 돌려막았다. 계속된 근친결혼으로 인해 유전적으로 뼈가 부서지는 병이 대를 걸러 나타났고 하필이면 로트렉의 아버지 대를 건너 이 병이 로트렉에게 나타나게 된 것이다. 불운의 귀족 로트렉은 14세 되던 해 넘어지면서 허벅지의 뼈가 부러지게 되고 이후 로트렉은 하반신 성장이 멈춰버렸다. 하반신 성장이 멈춘 채 상반신만 성장하는 난쟁이로 어른이 된 로트렉은 백작인 아버지처럼 승마나 사냥 등을 하지 못하고 대신 어머니의 지원으로 그림을 배우기 위해 화실에서 종일 그림을 그리며 아버지의 냉대와 멸시를 이겨내야 했다. 아들로 인정받지 못한 로트렉은 죽을 때까지 아버지의 천박한 귀족성에 치를 떨기도 했다는데 그가 그린 삽화 중 샌드위치를 게걸스럽게 먹는 귀족은 그의 아버지를 빗대 그린 것이라고 한다. 말풍선으로 “천박해, 너무 천박해” 까지 그려 넣은 로트렉은 아버지의 차별과 냉대, 멸시를 받으며 그림에 대한 집착을 키워낸 예술가다. 이에 반해 한없이 너그럽고 죄책감을 가진 채, 평생 로트렉을 보살피며 그의 마지막 죽음까지 지켜줬던 어머니는 로트렉에게는 인자한 성모 마리아 그 자체였다. ‘천박한 아버지와 성스러운 어머니’ 이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부모에 대한 천착을 넘어 로트렉이 다음으로 천착한 것은 파리 몽마르트르 아랫마을의 유곽을 이룬 매춘부들이었다. 로트렉은 아예 이곳에 방을 얻어 자유스럽게 그들과 교류하며 귀족의 눈에 보기엔 뒤틀렸지만, 사실은 생존의 삶 그 자체인 삶의 한 단면을 생생하게 그리고 기록했다. 그의 대표작 대부분은 물랑 루즈에서 춤을 추는 무희거나 노래를 부르는 가수, 생계를 위해 몸을 파는 매춘부 등을 그린 작품들이다. 현대 회화의 대가인 피카소가 존경했던 화가, 로트렉 피카소는 그의 작품 ‘푸른 방’에서 로트렉에 대한 존경의 오마주로 ‘푸른 방’ 작품 속 공간인 벽면에 로트렉의 작품인 메이밀튼 포스터를 그려 넣기도 했다. 로트렉이 없었다면 앤디 워홀도 없었을 것이라는 후대 예술가들의 평이 아니더라도 19세기 후반인 로트렉의 활동시대가 무색할 만큼 현대의 팝 아트 같다. 지금 2000년대의 작품이라고 해도 전혀 올드 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전문가 설명에 의하면 그림 전체를 꽉 채우기보다 사물의 특성을 극대화해 캐치하는 로트렉 특유의 기법 때문이라고 한다. 로트렉의 이 기법은 현대 회화에 가장 크게 미친 영향이라고 하니 조롱과 멸시, 냉대에도 굴복하지 않고 나만의 세계를 이룬 로트렉의 정신세계는 현대인 모두가 배워야 하지 않을까? 포스터와 삽화 등의 일러스트전이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처음으로 열린 로트렉 전시회를 통해 현대 포스터, 그래픽의 아버지라 불리는 로트렉의 작품 세계를 돌아보며 나 스스로 나를 지키고 뭔가를 이뤄내는 일에 대한 자기 단련은 어디까지 계속돼야 하는지 화두를 자신에게 던져본다. 예술의 전당에서 5월 3일까지 전시가 계속되며 도슨트 가이드를 통해 관람해볼 것을 강력 추천한다(별도 요금 없음).
- 2020-04-29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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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등 해법 가르쳐준 영화 '두 교황'
- 넷플릭스가 제작한 영화라 상영하는 극장이 적어서 미뤄두었던 숙제를 설 연휴 중에 대한극장을 찾아가 해결했다. '두 교황'. 영화가 소개되던 초기부터 보고 싶었던 영화다. 교황이 임기 중에 은퇴한 초유의 사건을 영화화한 것이라 필시 무슨 곡절이 있으리라 짐작했다. 무엇보다도 주연 배우가 연기의 신이라는 ‘안소니 홉킨스’ 아닌가.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두 사람의 대화로만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이상하리만치 지루하지 않다. 아니, 오히려 약간의 긴장감이 두 시간을 지배한다. 그것은 어쩌면 극단적으로 다른 성향의 두 사람이 감정을 절제하면서도 자신의 신념을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방식 때문일 것이다. 13억 신자들을 둔 종교 지도자로서의 품격을 새삼스럽게 경험할 수 있었다. 영화는 교황과 한 예수회 소속 추기경이 교황의 여름주택 정원을 거닐면서 시작된다. 아르헨티나에서 온 호르헤 베르골리오 추기경(조나단 프라이스)은 교황청의 보수적 도그마에 회의를 느껴 당시 교황이던 베네딕토 16세(안소니 홉킨스)를 직접 찾아와 은퇴하려는 뜻을 전하고 사직서 서류에 교황의 서명을 받으려 한다. 그러나 무슨 이유인지 교황은 한사코 서명을 거부한다. 당시 교황청 고위직 신부들의 성추행 추문으로 교황은 코너에 몰려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추기경의 사임은 자칫 교황에 대한 불신임으로 비칠 우려가 있었다. 그와 함께 교황은 이미 마음속으로 교황청의 쇄신을 위해 자신의 은퇴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기도 했다. 그런 배경이 서명을 거부한 이유였다. 대화가 진행되면서 교황은 보수적이며 내성적인 자신과 달리 교황 선출 당시 2위를 했던 적극적이며 진보적 성향의 호르헤 추기경에게 끌린다. 그들의 대화는 어느새 교리 논쟁을 넘어서 일상생활과 취미의 영역으로 확장된다. 스웨덴 팝그룹 아바(ABBA)가 등장하고 비틀스가 언급된다. 교황은 피아노를 치는 음악가 지망생이었다. 둘은 어린 시절 성직을 택하던 고뇌의 순간에 관해 얘기를 나눈다. 호르헤 추기경은 약혼자를 버리고 예수회 신부로 입교하고, 살벌하던 군부 통치하에서 친하던 신부들을 배반했다는 가책에 시달린다. 유머를 모르는 독일 출신의 교황은 어느새 탱고를 좋아하는 추기경을 이해하게 된다. 맛없는 독일 음식을 혼자 먹던 그가 추기경과 함께 길거리 피자를 즐기기도 한다. 추기경도 교황의 인간적 고뇌를 알게 되고 그의 은퇴 계획을 받아들인다. 1년 뒤 교황 은퇴가 공식화되고 새 교황 선출을 위한 콘클라베에서 호르헤 베르골리오 추기경이 압도적 표차로 선출된다. 교회의 역사가 바뀐 것이다. 이 영화는 종교 영화라는 외피를 쓰고 있으나 내면은 휴먼드라마라고도 할 수 있다. 영화 마지막에 두 교황이 와인과 독일 맥주를 마시며 2014년 월드컵을 시청하는 장면은 귀엽기까지 하다. 한편 영화에서 나오는 프란치스코 현 교황의 말은 오늘날 우리 상황을 일깨우는 죽비와도 같다. “장벽이 아닌 다리를 지어라.”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면 모두의 잘못이다.”. 이 영화는 흑백논리, 진영논리가 판을 치는 현실 속에서 서로 다른 견해 차이를 어떻게 접근해 풀어가는지 실증적인 방식으로 일깨운다. 아울러 신념이 달라도 시대의 소명을 알아 흔쾌히 자리를 양보하는 아름다운 뒷모습도 보여준다. 그러나 이 모든 감동은 오로지 안소니 홉킨스와 조나단 프라이스라는 명배우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들이 ‘골든 글로브’에 노미네이트(후보로 지명)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 2020-01-31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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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드뉴스] ‘인류 원리’에 접목해 읽어볼 추천 도서
- ‘인류 원리’에 접목해 읽어볼 추천 도서 - By 김한승 교수 ◇ 초협력자 (마틴 노왁 외 공저) 이기심과 이타심, 배신과 협력 등이 난무한 세상에서, 이기심을 벗어나 협력할 수 있는 삶을 탐구한다. 저자는 지구상 그 어떤 종보다도 협력의 힘을 가장 잘 활용하는 존재로 인간을 꼽으며, 초협력자라는 새로운 개념을 펼친다. ◇ 우주의 끝에서 철학하기 (마크 롤랜즈 저) SF영화 12편을 가지고 철학적 주제와 쟁점을 다룬다. 저자는 역대 철학자들의 주장을 가장 설득력 있게 옹호하는 이들이 바로 SF영화의 감독과 배우들이라 주장하며, 심오한 철학적 사유를 드러냈다. ◇ 최무영 교수의 물리학 강의 (최무영 저) 자연과학을 전공하지 않은 이들도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과학입문서다. 더불어 고전역학, 양자역학, 상대성이론뿐만 아니라 21세기 최신 주제인 엔트로피, 우주 탄생과 진화 등 물리학의 전반을 폭넓게 다뤘다. ◇ 죽음이란 무엇인가 (셸리 케이건 저) 20년 가까이 예일대학교의 최고 명강의로 알려졌던 셸리 케이건 교수의 ‘죽음(death)’을 책으로 엮었다. 고대에서 현대까지 방대한 철학사를 다루면서도 난해한 철학 용어를 거의 배제해 ‘대중철학 강의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찬사를 받았다.
- 2019-11-13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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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꼰대’가 되지 않는 법
-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이 지나고 나면 인터넷에는 많은 후일담이 쏟아진다. 주로 젊은 자녀나 며느리들의 얘기다. 할 말들이 그렇게 없는지 매번 자신들같은 ‘약자’들이 듣기 싫어하는 얘기들 뿐이라는 불평이다. “취직은 했느냐”, “결혼은 언제 하느냐“, ”애는 언제 가질 거냐“. 안부를 묻는 것이며 근황에 대한 관심을 표시하는 것일 뿐인데 그게 무슨 문제냐고 항변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런 무심한 질문들이 듣는 이에겐 지겹고도 치명적인 돌멩이가 될 수도 있다는 게 문제다. 그 말이 상대방에게 상처를 준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얼마 전 서울대 김영민 교수가 쓴 재미있는 칼럼이 생각난다. 아마도 이런 세대 갈등을 보다 못해 쓴 글일텐데 미소를 짓게 하는 칼럼이었다. 친척이 명절을 핑계로 집요하게 당신의 인생을 캐물어 오면 그들이 평소에 직면하지 않았을 근본적 질문을 던지는 게 좋다고 조언해준다. 삼촌이 “너 언제 취직할 거니?” 하고 물어오면 “뭐, 언제 하겠죠.”라고 얼버무리지 말고 “삼촌이란 무엇인가”라고 대답하라. “추석에 그런 것도 못 물어보니?” 하거든 “추석이란 무엇인가”라고 대답하라는 내용이었다. 부분만 인용하여 재미가 덜하지만, 당시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높았던 칼럼이었다. 인간의 정체성에 관한 성찰이 부족하여 상대방이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지 생각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모르는 게으른 이들에게 재치 있는 일침을 가하는 글이었다. 세상이 바뀌었는지도 모르면서 과거의 사유 구조에 머물러 있다면 어느새 자기도 모른 채 ‘꼰대’가 되어버리는 세상이다. 그렇다면 기성세대가 새롭게 성찰해야 할 ‘꼰대’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요즘 젊은이들 간에 유행하는 ‘꼰대 육하원칙’이란 것이 있다. WHO(내가 누군지 알아), WHAT(뭘 안다고), WHERE(어딜 감히), WHEN(내가 왕년에), HOW(어떻게 나에게), WHY(내게 그걸 왜)이란다. 말하자면 권위주의적 태도로 자신의 기득권을 사수하면서도 어렵고 힘든 일에는 나서지 않고 젊은이들에게 미루는 어른들쯤 될 것같다. 수백 년이 지나도 사회변화가 없던 과거 농경시대라면 어른이 폼을 잡을 수도 있었겠지만, 빛의 속도로 변하는 과학기술의 발달로 어른들의 기술과 지식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오히려 새로운 기술과 정보의 습득은 젊은이들을 따라갈 수 없다. 그러니 젊은이들의 항변이 더 설득력 있는 시대가 됐다. 그들과 대화할 기회가 오거든 가르치려 들지 말라. 거꾸로 진지하게 그들에게 묻자. “젊음이란 무엇인가?”라고.
- 2019-10-04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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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관계는 말투에서 시작된다
- 나이 들면서 느끼는 것 중 하나가 ‘말 많은 사람이 싫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상대를 피곤하게 만든다. 짜증을 유발하기도 한다. 정보를 받아들이는 뇌 용량이 점점 줄어들어서 그런 모양이다. 어떤 술자리에서 한 사람이 명리학과 사주를 공부했다면서 자기 지식을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간단하게 했으면 분위기에 도움이 되었을 텐데 시종일관 그런 얘기를 하니 사람들이 지루해하며 하나둘씩 빠져나갔다. 그 사람은 한 사람 한 사람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간이 안 좋다”, “말년 재물운이 없다”, “자식복이 없다”는 식으로 풀이를 해줬다. 호칭은 깍듯이 하며 예의는 지키는데 더 이상 앉아 있을 수 없어 그만 일어나자고 했다. 끝나고 한잔 더 하자는 것을 뿌리치느라 힘들었다. 그 사람의 말투도 그렇다. 마치 점쟁이나 예언가라도 되는 양 사람을 평가하면서 좋은 얘기도 아니고 나쁜 얘기를 하는데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 사람 말과 맞아떨어지는 내용이 있으면 호기심이라도 생길 텐데 전혀 맞지 않았다. 말투는 상당히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고 있던 터에 서점에서 ‘모든 관계는 말투에서 시작된다’라는 제목의 책이 눈에 들어왔다. 김범준이라는 현역 직장인이 쓴 책인데 내용이 유익했다. 이미 10만 부 이상 팔렸다고 한다. 저자는 말이 설득력을 갖기 위해서는 3가지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지위가 필요하거나, 사람됨이 좋아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기 자신을 지키는 말투를 사용하라고 했다. 월급을 주는 회사의 사장이거나 경찰공무원처럼 사법권을 가진 사람은 지위가 위력을 발휘한다. 사람됨이 좋은 사람은 지위, 인격, 외모 등 보통 사람은 갖기 힘든 요소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말투는 다듬기 나름이란다. 맞는 말을 해도, 듣는 사람이 동의할 만한 제대로 된 말투를 사용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했다. 탈무드에는 유대인들이 사람을 평가하는 3가지 기준으로, 돈을 어떻게 쓰고, 술을 어떻게 마시고, 화가 나는 일을 어떻게 참는지를 본다고 했다. 화가 나는 일에 반응하는 말투에 따라 상대방과의 관계가 결정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분노를 삭이며 침착하게 대응하면 일단 그 자리는 평화롭게 끝난다. 그러나 이런 사람이 사실은 더 무섭다. 참지 못하면 분노를 폭발해 속은 후련할지 모르나 폭력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다. 메라비언의 법칙은 대화를 할 때 시각과 청각 이미지가 중요하다는 커뮤니케이션 이론인데, 사람들과 소통할 때 말이 차지하는 비중은 7%, 목소리는 38%, 신체 및 생리적 표현이 차지하는 비율은 55%로 본다. 내가 만난 명리학자라는 사람의 경우 내용도 신뢰가 가지 않았고, 사람을 빤히 보고 평가하는 표현 방식도 불편했다. 목소리라도 좋으면 나았을 텐데 점쟁이나 예언가처럼 말하는 말투가 싫었다. 술이 오르고 나니 목소리 톤이 올라가 찢어지는 소리처럼 들려 더 이상 듣고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 2019-02-18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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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잇값을 해야 나이대접받는다
- 경로석에서 나이 드신 분들이 서로 옥신각신하는 볼꼴 사나운 광경을 심심찮게 목격한다. 내가 나이를 더 먹었으니 경로석에 앉을 우선권이 있다는 논리가 싸움의 시작이다. 경로석은 정확히 말하면 노약자석이다. 임신을 한 아녀자나 나이는 젊지만 병으로 거동이 불편한 사람도 앉을 권한이 있다. 경로석이 아니고 노약자석인데도 더러는 경로석으로만 알고 있다. 우리사회는 대화나 논쟁을 하다가 이론적으로 수세에 몰리면 ‘너 몇 살이야.’ 한술 더 떠서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 어따 대고 두 눈 부릅뜨고 대들어.’ 라고 한다. 심한 말로는 너는 애비 어미도 없냐!’ 까지 나간다. 원래 언쟁의 본질은 사라지고 나이타령으로 넘어가면 아주 강한 심장을 가진 젊은이가 아니면 피하게 된다. 주위 많은 사람들이 우선은 보이지 않는 나이라는 벼슬을 인정하고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젊은이에게 눈총을 쏴대기 때문이다. 원래 동물의 세계는 나이가 아니고 힘이 지배한다. 늙은 수사자는 새로운 젊은 사자를 힘으로 제압하지 못하면 대장이라는 자리에서 내려온다. 힘이 벼슬이지 오래 살아 늙었다는 것이 동물의 세계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사람만이 부모를 공경하고 웃어른을 배려하는 것이 미덕이라는 교육을 받아왔기 때문에 나이가 통한다. 증자가 말하길 ‘朝廷莫如爵 조정막여작, 鄕黨莫如齒 향당막여치,輔世長民莫如德, 보세장민막여덕’ 이라고 했다. 이 말은 ‘조정에는 벼슬만한 것이 없고 시골 마을에서는 나이만한 것이 없고 세상을 돕고 백성을 잘 살게 하는 데는 덕(德)만한 것이 없다’라는 말이다. 나이도 벼슬처럼 인정받는 근거다. 수평적 평등사회가 아닌 나이를 매개로 하는 수직적 상하구조를 만드는데 나이가 힘을 발휘하였다. 우리는 처음 만나 통성명을 하고 나이를 물어 ‘그럼 선배님으로 모시겠습니다’하면 위계질서가 만들어진다. 삼강오륜에 장유유서(長幼有序)가 있는데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차례와 서열이 있다는 말이다. 이런 서열이 빨리 정해지면 오히려 펀하다.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은데 옥신각신 할 때 제일 연장자가 ‘그럼 이렇게 하지!’하고 정해주면 승복하는 근거로 아주 편하다. 자랄 때 형제간에 싸움을 하면 부모는 힘이 약한 동생 편을 드는데 이것이 잘못이란다. 형이 부모의 위력에 눌려 잠시 승복하는 것이지 속마음으로는 불만을 품고 승복하지 않는다. 부모가 없을 때 동생을 때린다. 형에게 우선권을 주어야 가정의 위계질서가 선다. 먹을 때도 형이 먼저고 좋은 것도 형이 먼저라는 것을 심어주면 자연히 형제간 분쟁은 없어지고 동생은 자신이 후순위라는 권력을 인정하고 기다린다. 대접을 받는 형은 승자의 아량으로 자기 먹을 것을 동생에게 스스로 양보하는 미덕을 보인다. 이것은 아직 미 성숙된 아이 때의 질서법이다. 이제는 민주주의 시대다. 모두가 성인이 되면 수직문화에서 수평문화로 바뀌어야 한다. 손자뻘 같은 놈을 교육측면에서 한 대 때리기라도 하면 폭행범인으로 바로 입건이 되는 세상이다. 나이라는 벼슬은 없어졌으니 덕으로 더 젊은 사람을 대해야 한다. 어느 모임에서도 저 사람은 나이가 많으니 우리의 리더인 회장으로 뽑아야 한다는 말은 점점 설득력이 없어져 가고 있다. 나잇값을 해야 나이대접을 받는 세상이다.
- 2018-08-16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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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 미래가 아닌 지금, 여기가 중요해요”
- 50여 년 전 가족을 따라 우연히 전라도 나주에 왔다가 한국 학자로 살게 된 베르너 사세(Werner Sasse·78) 전 한양대학교 석좌교수. 월인천강지곡, 농가월령가, 동국세시기 등은 그의 이름에 따라붙는 한국 고대 언어 연구를 위한 목록들이다. 서독인 최초로 한국학 박사학위를 받고 독일에서 한국학과를 개설해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정년퇴직 후에는 아예 한국으로 들어와 전라도에 둥지를 틀었다. 2010년에는 세계적인 전위무용가 홍신자 씨와 황혼 재혼을 하면서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모두 운명에 이끌리듯 일어난 일들이다. 왜 하필 한국이었을까. 그는 스스로에 대해 “전생에 한국 사람이었는데 현생에 독일로 유배된 것 같다”고 설명한다. 전생의 육체가 기억해놓은 장면들이 있다면 현생에서 이끌림으로 다가왔으리라. 한옥과 한복을 좋아하고 남도의 홍어와 젓갈의 깊은 맛까지 알아버린 푸른 눈의 남자. 이렇게라도 주석을 달아야, 독일에 있을 때도 매일 아침 한국 신문을 꼬박꼬박 챙겨봤다는 그를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가 한국에 첫발을 디딘 것은 1966년. 독일의 원조로 전남 나주에 비료공장이 만들어졌을 때다. 당시 독일 기술자였던 장인이 “한국에 기술학교를 지으려고 하는데 좀 도와 달라”고 해서 들어왔다가 이 나라에 푹 빠져버리고 말았다. 25세였던 독일 청년의 눈에 비친 한국인들은 가난했지만 일 열심히 하고, 정 넘치고, 잘 놀고, 흥도 많은 사람들이었다. 4년간 전라도와 서울에서 살다가 독일로 돌아간 뒤에도 그는 잠자는 숲속의 공주 같은 나라가 여전히 궁금했다. 결국 다니던 직장까지 그만두고 30세의 나이에 다시 학교로 들어가 서독인 최초로 한국학 박사학위를 받고 독일 보훔대학교와 함부르크대학교에 한국학과를 개설, 학생들을 가르쳤다. 정년퇴직 후에는 한국에 들어와 한양대학교 문화인류학과 석좌교수로 지냈다. 50여 년 한국 문화를 연구하며 보낸 그는, 이제 자신의 고향은 독일이 아니라 전라도라고 말한다. 다시 찾은 사랑, 그리고 황혼 재혼 태풍 쁘라삐룬이 올라오던 날, 그가 사는 전남 담양으로 출발했다. 비가 사납게 몰아치는 길이었다.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20여 킬로미터쯤 더 가서야 그의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중간중간 비에 젖은 나리꽃이 마중하듯 반갑게 피어 있었지만 80이 가까운 두 사람이 살기에는 위태로워 보이는 산속이었다. 갑자기 몸이라도 아프면 어쩌려고 이렇게 깊은 곳에서 사시느냐 했다. 그러자 홍안의 미소년 같은 얼굴로 그가 되물었다. “그런 걸 왜 미리 걱정해요? 시니어의 관심은 오로지 건강밖에 없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루는 친구랑 산에 올라갔는데 다음 날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전화를 했더라고요. ‘아이고 나 힘들어 죽겠어. 나이를 너무 많이 먹었나봐. 온몸이 다 아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바보야, 나도 아파. 그런데 그건 나이 때문이 아니고 우리가 연습 없이 산에 올라가서 아픈 거야. 젊은 사람도 연습 없이 산에 오르면 힘들어’ 하고 말해줬어요. 제가 보기엔 나이가 아니라 엄살이 문제예요. 감기라도 걸리면 이 산속에서 어떻게 하냐고요? 일주일만 버텨보셔요. 저절로 치유됩니다.” 그는 먼 미래의 일을 걱정하며 사는 한국 사람들이 이해 안 될 때가 있다고 했다. 급속한 경제발전을 겪으면서 생겨난 불안감이 아닌가 하는 진단도 내린다. 자신은 ‘지금, 여기’ 일만 생각해도 하루가 너무 바쁘다 했다. 그가 살아온 시간들을 요약해보니 그렇다. 누가 뭐라 하든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하며 살았다. 젊은 시절에는 낯선 나라에 매료돼 고려방언이니 가사문학이니 한국인들도 쉽지 않은 공부에 골몰하더니, 70세에는 뒤늦은 재혼으로 지인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남들은 졸혼이니, 휴혼이니 하면서 무거운 결혼생활 끝내고 혼자 한번 살아보리라 희망할 때 그는 한 여자와 새살림을 차린 것이다. 배우자는 자유롭고 파격적인 춤을 추며 살아온 전위무용가 홍신자 씨. 그래서 그의 결혼은 더욱 화제가 됐다. “그녀가 그렇게 유명한 사람인지 몰랐어요. 지인 전시회 때 처음 보고 몇 차례 우연히 더 만나게 됐는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끌렸습니다. 그래서 같이 살아보자 했지요. 우리가 결혼한다고 했을 때 ‘아니, 그 나이에 결혼을?’ 하며 의아해하는 사람도 있었을 테지요. 그런데 사랑하는 데 정년이 있나요? 그런 생각에 얽매여 주저할 시간에 더 열심히 사랑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고 보니 홍 선생과 같이 산 지 벌써 8년이나 됐네요. 그녀와 저는 생각하는 게 비슷해서 충돌하는 일이 없어요. 각자 하는 일도 있어 존중해주고 도와줄 일 있으면 힘을 보태면서 재밌게 살고 있습니다. 젊을 때 결혼했다면 이런저런 욕심이 생겨 이거 하면 안 되고 저거 하라며 상대에게 잔소릴 해댔겠죠. 나이가 드니 상대가 그렇게 할 수도 있지, 좋아하면 그럴 수도 있지 하면서 이해하게 되더군요. 집안일도 남녀 구별 안 해요. 누구든 해야 할 상황이 되면 밥도 하고 설거지도 합니다. 자유롭게요.” 사람들은 더러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지나친 관심과 간섭 속에 상대를 가두곤 한다. 삶의 상상력을 펼쳐야 할 때는 이런 욕구들에 맥없이 멱살 잡혀 있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베르너 사세는 관계 속에서 서로 다른 점들은 스트레스가 아닌 영감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순간 새로움, 즉 영감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이 들어 결혼할 때 제일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해학’이라 덧붙인다. 깊은 산속 빗소리와 함께 들은 최고의 문장이었다. 민낯이 예쁜 나라, 한국 “가끔 한국의 어떤 음식이 맛있냐, 한국의 무엇에 매력을 느꼈냐는 질문을 받습니다. 답이 하나일 수 없어요.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다르니까요. 술을 예로 들면, 한국 음식과 곁들일 때는 맥주보다 막걸리가 좋지요. 육체노동을 할 때도 물론 막걸리가 어울리고요. 그러나 목이 마를 때는 맥주가 맛있고, 특별히 분위기를 내야 하는 날은 와인이 낫지요. 한국 음식, 한국의 매력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랑 먹고 누구랑 함께 있느냐에 따라 그 맛과 매력이 다 다르지 않겠어요?” 그는 전통 문화란 힘들게 보존해야 할 무엇이 아니라 자주 사용하고 즐겨야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옛것을 시대에 맞게 자기 것으로 만들어 활용하는 데서 진정한 전통의 힘이 발휘된다는 것이다. “제가 개량한복 입고 독일 가면 사람들이 어디서 이렇게 디자인이 예쁜 옷 샀냐고 묻습니다. 저는 양복보다 한복이 훨씬 편해서 즐겨 입어요. 그런데 한국인들은 정작 한복을 잘 입지 않잖아요. 그러면서 외국에 나가서는 아름다운 옷이라고 소개합니다. 이건 앞뒤가 좀 안 맞는 행동으로 보여요. 불편해서 입지 않는다는 이유를 대는데 설득력도 없어 보이고요. 그렇다면 늘 입고 다니는 양복은 과연 편해서 입는 걸까요?” 저서 ‘민낯이 예쁜 코리안’에서도 그는 한국인의 역사관을 냉정한 시각으로 언급했다. “한국 사람들은 ‘오천년 역사’, ‘세계 제일’이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다닙니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오천년이면 신석기시대입니다. 한국 역사가 시작되기 이전이죠. 외국인들에게 이런 역사관 공감될까요? 저는 오히려 신뢰를 떨어뜨린다고 봐요.” 가차 없는 논리의 학자다운 지적이다. 고유 문화에만 집착해 사실을 회피하는 자세는 건강한 역사의식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가 보기에는 화장하지 않은 민낯의 한국이 더 아름답다. 그걸 봐버린 죄(?)로 한국인 못지않은 긍지로 이 땅의 문화를 연구하며 반평생을 보내지 않았겠는가. 그는 요즘 수묵화에 빠져 있다. 한국을 소개할 책 번역도 틈틈이 하고 있지만 붓을 들고 있는 시간이 더 많다. 얼마 전에는 광주에서 전시회를 가졌고 서울에서의 전시도 준비 중이다. “수묵화는 20년 전부터 그렸어요. 한지를 알게 된 뒤부터죠. 서양화는 머릿속으로 상상한 대로 그림이 나오지만 동양화는 달라요. 내 의지가 아닌, 붓이 그리는 대로 따라가게 돼요. 동양화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붓과, 나와, 한지의 대화예요.” 이제 풍류의 멋까지 섭렵해보겠다는 태세다. 전력을 다해, 더러는 문득 생각난 듯 ‘지금, 여기’의 삶을 살며.
- 2018-08-10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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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니어 호텔리어 급부상…경험 바탕으로 인생 담은 서비스 덕분
- 호텔리어는 호텔에서 근무하며 투숙객에게 서비스하는 사람을 통칭하는 용어다. 보통은 프런트 데스크 앞에 양복을 빼입고 선 멋진 매니저를 상상하지만, 호텔리어 업무는 다양하다. 최근 업계에서 시니어를 호텔리어로 활용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지자체도 앞다퉈 나서고 있고, 관련 기업에서는 자체 교육 프로그램까지 개발할 정도다. 무슨 이유일까? 최근 시니어 호텔리어가 은퇴 후 삶을 위한 직종으로 관심을 얻고 있다. 호텔리어 혹은 호텔 종사원이 시니어에게 적합한 직종이라는 의견이 등장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지난 2013년 서울시복지재단의 ‘고령자 고용 확산을 위한 서울시 어르신 적합 직종 연구’에도 호텔리어가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그런데 이제야 주목받는 이유는 뭘까? 그 해답은 수요에 있다. 연구가 발표됐던 2013년 서울시 호텔 업체 수는 191곳에 불과했지만, 2017년에는 399곳으로 109%나 늘었다. 규모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기본적인 호텔 운영을 위한 최소 인원을 고려하면 증가한 인력 수요는 무시하지 못할 규모다. 경험 많은 시니어, 호텔 근무에 딱 전문가들이 시니어의 호텔 근무가 적합하다고 평가하는 이유는 ‘연륜’으로 축약할 수 있다. 서울시복지재단은 연구 결과에서 “많은 사람과 접해야 하므로 무엇보다 친절하고 예의 바르며, 원만한 대인관계, 단정한 외모, 설득력 등을 갖춰야 한다”면서 “대부분 전혀 모르는 대상과의 대화이므로 조리 있는 언변, 상황에 맞는 임기응변이 필요하고 외국인과의 접촉도 많으므로 일정 수준의 외국어 회화 능력도 요구된다”고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현장 관계자들도 의견은 비슷하다. 서울 강남의 한 호텔 관계자는 “다양한 일들이 벌어지는 호텔 특성상 시니어의 사회 경험은 고객에 대한 응대나 상황에 대한 임기응변에 도움이 된다”고 평가하면서 “시니어는 쉽게 직장에서 이탈하지 않는 특징이 있어 호텔 운영 면에서 볼 때 장점이 많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호텔 근무가 시니어에게 만만하지는 않다. 호텔리어 업무를 세부적으로 들여다보면 접객에서, 조리, 행정, 마케팅, 주차관리까지 다양한데 그중 시니어가 일할 수 있는 영역은 룸메이드나 하우스키핑으로 불리는 청소 관련 직종으로 제한적이다. 관련 교육에 여성 시니어가 몰리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룸메이드는 투숙객이 떠나고 난 후인 체크아웃 시간부터 그날의 다른 고객이 들어오는 체크인 시간 사이에 방을 치우고 단장하는 일이 주 업무다. 이때 일회용품이나 침구도 교체하는데, 쉬운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 호텔 위치나 규모에 따른 투숙객 연령과 성향에 따라 청소의 난이도는 천차만별이라고 근무자들은 전한다. 취객이 머물렀던 방이나 젊은 남녀가 숙박했던 방은 난이도가 높은 방으로 꼽힌다. 치우기 어려운 흔적을 남기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근무자들은 이런 방을 ‘더티방’이라 부른다. 기본적으로 룸메이드 업무에는 매일 일정한 시간에 기본적으로 정리해야 하는 방의 개수가 정해져 있다. 이를 시간 내에 해내기 위해선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그래서 시니어 호텔리어를 고용 중인 호텔들은 룸메이드를 2인 1조로 운영하는 경우가 많다. 젊은 사람들에 비해 체력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시간에 쫓기는 이유 중에는 급여도 있다. 룸메이드는 보통 시급이나 청소를 마친 룸당 단가로 급여를 계산하는데, 추가 근무를 통해 좀 더 많은 수익을 올리려면 할당받은 방의 청소를 빨리 끝내야 하는 속사정이 있다. 숙박객 현황에 따라 추가적인 청소가 필요한 방이 없을 수도 있기 때문에 직원들 사이에 경쟁이 붙는다. 고되지만 급여 만족도는 높은 편 그렇다고 서두르다가 침구 정돈이 불완전하거나 머리카락 하나라도 발견되면 고객불만으로 이어질 수 있어 늘 긴장해야 한다고 시니어 근무자들은 말한다. 호텔에서 고객불만 사항은 이유를 불문하고 엄격하게 관리된다. 매트리스 구석 손이 닿지 않는 곳까지 꼼꼼히 살펴야 한다고 교육을 받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래도 규모가 큰 호텔은 여러모로 사정이 좋은 편이지만 호텔 규모가 작을수록 업무 환경은 열악하다. 업계 관계자는 “호텔이 규모가 작으면 룸메이드부터 발레파킹까지 일인다역을 강요받는 경우도 많다”고 설명한다. 아울러 “2교대로 운영되는 곳도 적지 않고 심할 경우 일주일에 퇴근을 두 번만 하고 내내 호텔에 머물러야 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일을 통해 손에 쥘 수 있는 급여는 최저임금보다 약간 높은 수준. 그러나 요령이 붙어 추가 근무를 많이 할 수 있다면 다른 직종에 비해 높은 수익을 유지할 수 있다고 근무자들은 말한다. 일은 고되지만 그만두지 못하는 이유다. 그렇다면 시니어 호텔리어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부터 알아봐야 할까? 가장 먼저 가까운 지자체에서 관련 사업을 진행 중인지 확인하는 것이 좋다. 대표적인 곳은 바로 부산시. 부산시 장노년일자리지원센터에서는 2011년부터 시니어 호텔리어 인턴십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시니어의 고용을 꺼리는 호텔에 3개월간 60세 이상 시니어 인턴을 고용해보도록 유도하고, 그 기간의 급여 일부를 지자체에서 부담하는 방식이다. 초창기에는 토요코인호텔, 해운대그랜드호텔 등 일부 호텔만 참여했는데 꾸준한 사업 진행을 통해 시니어 호텔리어에 대한 호텔 측의 인식이 개선되면서 참여 호텔이 증가하고 있다. 이를 통해 배출되는 시니어 호텔리어는 연평균 50명 정도다. 관광수요 많은 지자체, 배출에 앞장 관광과 숙박 수요가 많은 제주특별자치도도 최근 시니어 호텔리어 배출을 위해 나섰다. 느영나영복지공동체와 함께 6월부터 시니어 호텔리어 양성을 위한 직무 교육과 현장실습 교육 등을 진행하고 있다. 숙박 O2O(online to offline) 기업인 야놀자도 대표적인 시니어 호텔리어 양성기관 중 하나. 야놀자는 자체 평생교육원을 통해 지난해부터 시니어 호텔리어 교육 과정을 진행하고 있다. 만 60세 이상 시니어를 대상으로 보름간의 교육 후 자사 서비스와 연계된 호텔을 중심으로 취업까지 알선한다. 지난해 3차례 진행된 교육 수료생의 70% 이상이 취업에 성공했고, 올해 진행된 1, 2차 교육에서 배출된 인원 역시 대부분 호텔에 취업했다. 야놀자가 교육에 나서게 된 계기는 제휴 호텔들로부터 “쓸 만한 사람이 없다”란 하소연을 들으면서부터다. 제대로 교육해 좋은 인력을 공급해보자고 시작한 것이 이제는 업계 대표 교육기관이 됐다. 교육은 취업이 연계되어 있는 만큼 철저하게 실무 위주로 진행된다. 현업에 있는 강사진들이 호텔 프런트 업무에서부터 객실 체크인·아웃, 예약접수, 베드메이킹, 하우스키핑 등 호텔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한 교육을 받는다. 강사들은 대부분 업계에서 20년 이상 근무한 베테랑들로 이뤄졌다. 시니어 호텔리어 교육 프로그램은 멀티태스킹을 중심으로 다양한 상황에서 대응이 가능하도록 교육하는 것이 특징이다. 야놀자 관계자는 “시니어는 일정 시간만 일하는 파트타임 형태의 근무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어 고용구조의 유연함을 원하는 호텔 상황과 맞아떨어져 적합하다”고 설명하면서 “현장에서 수료생들의 맹활약으로 야놀자 출신은 믿어도 된다는 분위기가 형성됐다”고 말했다.
- 2018-08-10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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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무엇보다도 영원한 ‘가수’ 송창식의 삶의 법칙
- 미사리 카페 ‘쏭아’에서의 밤 11시, 전설적인 포크 가수이자 대한민국 가수 송창식은 막 공연을 끝내고 인터뷰를 진행하기 위해 남양주 작업실로 이동했다. 새벽 5시에 잠들어 오후 2시에 깨는 생활을 수십 년째 하고 있는 그에게 있어 이 늦은 시간은 보통 사람들로 치면 저녁식사 시간쯤 된다. 국내에 단 두 대 있다는 1억 원짜리 스튜디오 모니터 스피커, 1982년에 만들어진 아다마스 기타 등등 송창식의 주변을 장식하고 있는 수십 년 묵은 것들과 함께, 그리고 그 특유의 사람 좋은 웃음소리와 함께 그의 노래와 인생에 대한 인터뷰를 시작했다. “저에게 트윈폴리오는 없었던 역사예요.” 충격적으로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대 최고의 인기 듀오였으며 자신이 소속해 있었던 트윈폴리오를 부정하는 송창식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그의 담담한 목소리만큼이나 그가 트윈폴리오를 부정하는 이유에는 단단한 논리가 있었다. 트윈폴리오로의 복귀, 불편했다 기인, 괴짜, 천재, 도사 등등 그를 가리키는 과장된 별명은 많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자극적인 별명들이 무색할 정도로 철두철미한 음악인이다. 사실 송창식은 한창 쎄시봉 열풍이 일었을 때 언론에서 곧잘 언급이 되었지만 뭔가 겉도는 느낌이 있었다. 음악인 송창식의 입장에서 볼 때, 쎄시봉으로 인한 복고 열풍 속에서 트윈폴리오가 다시 세상에 불려나오는 것은 이상하고 거부감이 드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 상황을 “사기 치는 것 같았다”고 표현했다. 과격한 표현일지도 모르겠지만, ‘가수’ 송창식에게 그 말은 더없이 솔직한 심경의 토로이기도 했다. 어째서 그런 결론에 도달한 것일까? 그 결론을 이해하려면 그의 노래와 삶을 들여봐야 한다. 아랑곳하지 않고 제 갈길 가는 사람 1947년생 송창식은 지난해 6월 목 수술을 했다. 지금은 목소리의 폼은 회복됐지만 음정 등 컨트롤이 좀 덜 되는 단계다. 그의 말에 따르면 연습을 해도 일이 년 이상은 지속해야 다시 예전의 컨디션으로 돌아가는 게 가능하단다. “연습을 안 하면 음정이 안 돼요. 노래는 계속 연습해야 역량이 쌓이죠. 지금 성대의 새순이 올라왔으니, 이제 노래하는 성대로 만들어야 해요.” 대한민국 영원한 가객이라고도 불리는 그가 하는 말은 갓 가요계에 데뷔한 연습생들의 마음가짐과 비슷했다. 말하자면 그는 철저한 현역 프로 음악인으로서 안주를 거부하고 있었다. “저도 처음에는 가수로서의 목적이 다른 사람들과 비슷했어요. 노래 잘하고 싶었고 인기가수가 되고 싶었고 돈도 잘 벌고 싶었고.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그런 욕구로부터 떠난 지 오래됐죠. 송창식은 거기 있는 거 같지 않다는 인식은 그 때문일 거예요. 노래에 대한 가치관이 다르니까.” 그렇다면 송창식에게 노래란 무엇일까. 그는 한마디로 ‘공부거리’라 표현했다. 그리고 공부거리이기 때문에 계속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할 게 계속 생기니까요. 언제까지 할지는 모르겠지만 죽을 때까지 해도 다했다고 보긴 어려울 거예요.” 노래는 평생의 공부거리 그에게도 소위 최고의 인기가수였던 시절이 있었다. 어떤 이의 기준으로는 ‘그 정도면 다 이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성공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송창식에게 인기는 큰 의미가 없다. 인기는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기는 내 일이 아니에요. 사람들 것이지. 사람들이 최고 인기가수를 만드는 거지, 가수가 잘나서 최고 인기가수가 되나. 나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것뿐이죠. 인기는 계속 내려가요. 그리고 인기는 공부가 안 돼요. 공부는 습득해야 가능한 일인데 인기를 공부해서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그게 사람인가?(웃음)” 그가 스튜디오에서 녹음용으로 쓰는 1억 원짜리 모니터 스피커를 갖고 있는 이유도 ‘공부’ 때문이다. 과거에 그는 자신의 앨범을 녹음할 때 당연히 엔지니어들에게 맡겼는데, 어느 때부턴가 그들을 믿을 수 없게 됐다. 그래서 아예 오디오 엔지니어링을 공부해서 1979년부터는 자신의 앨범을 직접 레코딩했다. 카페 ‘쏭아’에서 노래를 하는 이유 또한 그의 목적인 ‘공부’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연을 매일 할 수 있는 곳은 카페밖에 없어요. 그게 공부예요. 어떤 때는 열렬하게 반응하고 어떤 때는 취한 사람들이 떠들고 말도 걸고. 보통 콘서트장에서 하는 노래와는 너무 다른, 다양성이 있는 환경에서 연주 경험을 쌓는 게 가능하죠. 그래서 다른 어떤 곳보다 카페가 좋아요.” 인터뷰가 있던 날, 그는 목이 안 좋다고 하면서도 열한 곡이나 불렀다. 그래서 오늘은 무슨 공부를 한 거냐고 묻자 ‘컨디션이 안 좋은 상황에서 억지로 어떻게든 끝내 해내는 공부’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개량 한복 입고 새벽 1시에 껄껄 웃는 송창식은 일반적이지 않은 인물이긴 하다. 인기는 내 일이 아니라 사람들의 일 그렇다면 그는 요즘 가수들을 어떻게 바라볼까. 궁금했다. “노래에는 기본기가 있어야 해요. 복싱으로 치면 샌드백 치고 로드워크 하고 줄넘기 하는 것과 같죠. 그다음에 링 위에 올라가 스파링을 하죠. 기본기를 안 하고 스파링만 해도 권투는 할 수 있어요.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챔피언이 되기 어려워요. 그처럼 옛날에는 기초 없이 노래해도 부른 노래가 유행가가 돼서 가수로 성공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가요계를 바라볼 때 늘 그 점에 대한 아쉬움이 있었죠.” 그는 기본기와 연습이 가져다주는 위대한 결과를 철저하게 믿고 스스로 실행하는 사람이다. “노래와 연습량은 완전히 정비례해요. 그러니까 천재적인 음악가다, 이런 표현은 인정하기 어려워요. 우리가 알기에 최고의 음악 천재는 베토벤인데 이 사람이 정말 둔재였거든요. 아버지가 때려가면서 연습을 시켰기에 세계의 악성(樂聖)이 될 수 있었던 거죠. 모든 것은 몸으로 하는 거예요. 제가 바둑을 3단쯤 두는데, 바둑을 하면서 느낀 게 머리도 몸이라는 거였어요.(웃음) 매일 놓는 사람과 안 놓는 사람은 천양지차. 부단하게 연습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연습량이 많으면 확실히 노래를 잘할 수 있어요. 연습 없이 재주만 있으면 언젠가는 고꾸라지죠.” 트윈폴리오가 ‘지워진 역사’가 된 이유 그는 요즘 가수들은 기초가 잘되어 있다고 평했다. 그런 면에서는 옛날 가수들보다 확실히 낫다고 말했다. 그런데 문제는 기초만 잘되어 있지 옛날 가수들처럼 대중과 스킨십하며 치열하게 파고들며 돌파하려는 자세가 없다고 했다. “나는 요즘 가수들이 하는 방법이 좋아요. 그런데 끝까지 가야만 대중과 호흡할 수 있는데 중간에 멈추는 것 같아요. 일장일단이 있는 거지. 그게 좀 아깝죠. 그런데 그건 더, 나중 후배들이 하게 되겠죠. 그 친구들은 지금 가수들과 경쟁해서 이겨야 하니까. 한 이삼십 년 후에는 대형 가수들이 나올 수 있겠죠.” 이제 그가 트윈폴리오로서의 역사를 부정하는 이유를 납득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예술의 발전을 믿으며 매일 공부하며 사는 그에게 있어 트윈폴리오로서의 복귀는 자신의 삶을 후퇴시키는 일과도 같았다. 그래서 트윈폴리오로서 사람들에게 불려 나올 때면 환호 속에서도 그의 마음은 계속 불편했다. “트윈폴리오가 일흔 살이 됐으면 발전한 흔적이 있어야지 전혀 없었으니까. 옛날 추억에 기대서 돈이나 벌려는 것 같았으니까. 가수 송창식은 계속 앞으로 나아갔는데 트윈폴리오는 계속 뒷걸음치는 것 같았으니까요.” 첫 번째는 안 하지만 두 번째도 안 한다 송창식은 자라섬 포크 페스티벌 무대에도 선다. 파트너는 국내 최고의 기타리스트인 함춘호다. “나는 첫 번째는 안 하는데 두 번째도 안 해요.(웃음) 그 사람과 경쟁이 안 된다면 그 사람이 하지 않는 걸 추구해서 내 것으로 만들지. 그래서 함춘호와 함께 기타를 치는 게 맞는 거예요.” 악기는 시작이 언제냐에 따라서 되는 게 있고 안 되는 게 있다고 한다. 20대부터 기타를 치는 사람은 10대부터 기타를 친 사람이 갖는 테크닉은 절대 안 생긴다는 것이다. 10대 때 기타를 치면서 잡히는 손가락 모양과 뼈가 자라면서 생기는 특별한 테크닉은 나이 먹으면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타를 스무 살 이후에 친 송창식은 일찌감치 기타를 친 사람들과는 결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딴 걸로 메꿔야죠, 나는 오랫동안 음악을 해서 훨씬 폭이 넓기 때문에 내가 잘할 수 있는 것들을 선택할 수가 있죠.” 함춘호와의 협연에서 그가 세컨드 기타를 맡게 된 것도 그 때문이다. 자신이 잘할 수 있고 공연을 더 멋지게 만들 수 있는 역할을 선택한 것이다. ‘첫 번째는 안 하는데 두 번째도 안 한다’는 그의 말은 가요계에서 그가 어째서 독보적인 위치에 올랐는지 설명해주는 절묘한 묘사이기도 했다. 어쩌면 그가 자신만의 자리를 갖게 된 것은 그런 허허실실로 균형 감각을 처음부터 갖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송창식처럼 사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 따라서 송창식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집요하게 구분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 점에서 그는 불가의 구도자 같은 인상에 묵직한 도인의 아우라를 갖게 된 것이리라. 다소 왜곡되는 게 있다 해도 크게 개의치 않고 자신이 믿는 길을 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내가 어쩌면 오해 속에서 사는 건지도 모른다, 실제로는 그게 아닌데 좋다고 여기는 건 아닌가 의심할 때가 있긴 해요. 그런데 원래 성격이 그냥 넘어가는 성격이라서요. 빠릿빠릿하지 않고 게으르고.(웃음)” 송창식을 멘토로 여기고 그의 삶을 따라가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에 대해서 그는 분명하게 말한다. “내가 가진 가치를 실제로 느낀다면 모를까, 내 방식이 정석이 되긴 어려워요. 단지 ‘저 사람이 하는 저 방식도 괜찮지’ 정도로 인식될 순 있어요. 사람들에겐 내가 멘토가 되는 건 불편하다는 것을 분명히 하죠. ‘나는 이걸 자연스럽게 갖게 돼서 여기까지 온 것이지 너희들은 나를 멘토로 삼으면 너무 힘들다. 그러니 그렇게 하지 말라’고요. 노래를 잘하는 건 어렵지 않아요. 하지만 나처럼 사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거든요.” 돈이 없으면 안 쓰면 된다 송창식처럼 사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이것은 자부심이라기보다는 그가 자신의 삶을 가만히 반추하면서 나온 솔직한 결론이다. 우선 그가 가진 인내의 기준은 보통 사람들과는 많이 다르다. 그는 어렸을 때 너무나 가난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가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심지어 거지조차도 못 되었다. 그는 거지 굴에 갔다가 매를 맞고 쫓겨났던 기억을 떠올렸다. 거지도 자신들끼리 뭉쳐서 만든 사회가 있었는데, 자신은 거기에도 못 끼었다는 것이다. “견딘 게 많았어요. 너무 춥고 배고팠으니까. 그런데 그걸 언급할 수 없는 게, 견딘다는 인식 자체가 없었으니까요. 추우니까 ‘아, 추워. 배고파’ 했던 적은 있었지만 ‘죽겠네, 이 상황에서 벗어났으면…’ 하는 마음은 없었어요. 그냥 습관적으로 견뎠죠. 그래서 나에게 견딘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가 없어요. 희열도 없죠. 견딘 게 아니니까. 그냥 인생 살면서 넘어간 거니까.” 그는 돈에 집착해본 적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의 생각에 돈은 없으면 안 쓰면 되는 일이다. “그게 안 된다는 게 웃겨요. 난 돈이 없어서 서울예고를 중퇴했는데 이렇게 살고 있잖아요.” 음악을 하지 않았다면 스님이 됐을 것 송창식이 노래를 하지 않았다면 무엇을 했을까? 새벽 2시가 다 되도록 음악 얘기만 한 터라 쉽게 상상하기 어려웠다. 당사자의 도움을 받아보기로 했다. “노래를 하지 않았으면 아마 중이 됐을 거예요. 남 도움 없이 혼자 공부하는 일이니까요.” 송창식을 스님이라고 가정할 때 납득이 잘 안 되는 사람은 그리 없을 것이다. 그는 즐거운 상상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스님은 사회 속에 있죠. 울타리 속 계급이 있어요. 그래서 나는 아마 종단에서 빠져 나오지 않았을까.(웃음)” 송창식이 세상에서 이것만큼은 절대로 안 한다는 게 있다. 종교 교주다. 누구보다도 교주에 잘 어울릴 것 같은 사람이 그런 말을 하니 또 캐묻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왜냐하면 제일 높은 거니까요. 제일 높은 건 제일 나쁜 거예요.” 너무 단순한 대답인데도 설득력이 있었다. “어렸을 때는 클래식 쪽에 야망이 있었죠. 그러나 고등학교를 중퇴하며 그 야망이 꺾였죠. 당시엔 죽고 싶었어요. 하지만 그때의 내가 있으니 지금의 내가 있다고 봐요. 필연적인 거였던 셈이죠. 그래서 지금은 새옹지마보다, 더 나아가서 ‘나쁜 건 다 좋은 거다, 좋은 건 다 나쁜 거다’라고 생각해요.(웃음)” 나쁜 것은 좋고 더 좋은 것은 더 나쁘다. 송창식이 사는 법을 우직하게 정의하는 그 문장은 삶에 대한 끝없는 긍정이 있기에 가능하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절대로 상하지 않는 금강(金剛) 송창식이 갖고 있는 삶에 대한 긍정과 자신감, 그 힘의 원천은 삶과 사람에 대한 확신으로부터 비롯되고 있었다. “자신감은 원래 사람들이 갖고 태어나는 거예요. 그리고 자신감은 절대 상할 수 없어요. 동네 깡패들에게 무릎 꿇고 살려달라고 빌지언정 자신감은 안 상하는 거예요. 상황이 그렇게 만들어놓은 거니까요. 그때 자신감이 상했다면 자신감이 없는 거예요. 그런 걸 불교에서는 금강이라고 해요. 금강은 절대로 안 상합니다. 그것을 갖고 있으면 세상 살면서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어쩌면 금강에 대한 얘기야말로 송창식이 말하는 삶에 대한 답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문답 후에 남는 것은 사람 좋은 웃음이었다. 즐겁고도 평온한 웃음. 그리고 송창식은 그 웃음에 정말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내가 죽어도 사람들에게 기억이 안 됐으면 좋겠어요. 죽을 때 내가 냈던 노래판들 다 가져가면 좋겠어요. 그것들이 정말 가치가 있는 거라면 다음 세대의 누군가가 또 나와 같은 걸 할 테니까요. 그런데 이미 남겼으니 어쩌겠어.(웃음)” “그거면 된 거지” 하며 그가 너울거리듯 웃으면 기자도 따라 웃을 수밖에 없다. 수요일, 토요일, 일요일 해가 진 후 미사리 쏭아에 가면 그의 노래를 들을 수 있다. 단 한 사람의 손님도 소홀히 하지않고 진지하게, 천진난만한 얼굴을 하고 애간장 태우는 목소리로 부숴버릴 듯 노래한다. 또 가 보고 싶다.
- 2018-06-11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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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르고뉴, 와인에서 찾은 인생’, 사랑도 와인처럼 시간이 필요해
- 가끔 내리는 비가 성급하게 여름으로 치달으려는 대지를 달래주는 덕에 봄 날씨가 겨우 연명하고 있다. 화사한 꽃이 만발한 따뜻한 봄날에 걸맞은 싱그러운 영화 한 편이 도착했다. 프랑스 영화 ‘부르고뉴, 와인에서 찾은 인생’이다. 원제는 ‘Back to Burgundy’로 그저 와인의 명산지인 부르고뉴로 돌아왔다는 말인데 영화 수입사가 설명적인 제목을 덧붙이는 바람에 멋이 사라졌다. 역시 문화 장사꾼인 프랑스인답게 자신들의 장기인 와인과 아름다운 자연을 버무려 멋진 안구 정화 장면을 선사한다. 스토리도 일과 사랑 그리고 가족애를 결합해 매우 건전하다. 요즘 소재결핍에 시달려 만화에 의지하는 할리우드 영화들에 지친 전통적인 영화팬들에겐 이런 진부한 듯 보이는 소재가 오히려 신선한 감동을 준다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프랑스 영화다운 자부심일 터이다. 자줏빛을 띤 붉은색을 뜻하는 영어 ‘버건디(burgundy)’는 부르고뉴 지역에서 나는 와인을 통칭하는데 이 지역은 가족 경영을 중심으로 하는 와이너리로 유명하다. 그중 한 와이너리를 경영하는 자상하지만 고집스러운 아버지 밑에 삼 남매가 등장한다. 큰아들 장(피오 마르마이)은 10년 전 세계 일주를 핑계로 집을 나갔다. 둘째인 딸 줄리엣(아나 지라르도)은 어쩔 수 없이 가업을 잇고 있고 막내 제레미(프랑수아 시빌)는 결혼 후 처가 월드에 시달린다. 이들을 다시 한자리에 모은 건 아버지의 죽음이다. 세 남매는 그사이 폭등한 땅값으로 엄청난 상속세가 나오는 데 반해 정작 와이너리의 수익성은 1% 내외로 쪼그라들어 있는 현실과 마주한다. 서로 다른 기억으로 상처를 간직한 세 남매는 눈앞에 마주한 현실적인 문제를 풀어나가기 위해 뜻을 모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선택은 그들 자신의 힘으로 최고의 와인 만들기에 도전하는 것이다. 사실 이런 종류의 스토리는 흔하다. 흔한 소재를 특별하게 살리는 힘은 디테일에 있다. 이 영화는 7년의 제작 기간과 1년의 촬영 기간을 거쳐 완성되었다. 그만큼 프랑스 시골 마을의 사계가 충실하게 담겨 있다. 영화는 인간관계와 와인의 숙성과정을 병행시키며 사랑과 갈등을 밀도 있게 그린다. 이런 사실성이 설득력을 만들어 영화에 몰입하게 한다. 이 영화에서 와인은 인생의 은유이다. 땅을 팔 것인가 말 것인가 옥신각신하면서도 세 남매는 누가 서툴게 잔가지를 쳐내는 꼴을 못 본다. 인간의 DNA는 이처럼 무섭다. 그저 포도알을 터뜨려 만든 술인데도 와인마다 향이 다르다. 셋은 같으면서도 다르다. 그러나 숙성이 오랠수록 향이 진하듯 그들도 서로의 다름을 사랑으로 성숙시킨다. 장의 혼잣말이 깊은 여운을 남긴다. “와인처럼 사랑도 시간이 필요하더라. 시간이 흐른다고 상하는 건 아니었어.” 우리말에 ‘삭다’와 ‘썩다’가 있다. 두 단어는 같은 뿌리이면서 반대의 의미를 지닌다. 와인은 오랜 시간 두어도 썩지 않고 삭아 뛰어난 향과 맛을 만든다. 사랑도 썩지 않고 곰삭아 아름다운 관계를 만들려면 발효라는 과정이 필요하다. 발효가 일어나려면 긍정적인 시선과 따뜻한 마음이 필수적이다. 와인에서 배운 사랑이다. 아니나 다를까. 시사회로 본 지 며칠이 지났는데 관객들 반응이 대단하다. 어벤저스 류에 지친 관객들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와인의 얼룩은 천연섬유에 묻었을 때 유난히 지워지지 않는다고 한다. 인생의 의미를 찾아가는 이들의 가족애가 가슴에 오래 남을 듯하다.
- 2018-05-21 15:52